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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살인의 추억…추적은 끝나지 않았다”/에세이 출간한 ‘화성사건’ 수사관 하승균 경정

    영화 ‘살인의 추억’에 나오는 형사의 실제 주인공인 현직 경찰관이 ‘화성은 끝나지 않았다’는 자전 에세이를 출간했다. 주인공은 경기지방경찰청 형사과 강력계장 하승균(57) 경정으로 화성사건 초기부터 마지막까지 현장을 지휘한 베테랑 수사관이다. 화성 연쇄살인사건은 지난 86년 9월15일부터 91년 4월3일까지 경기도 화성 일대에서 부녀자 10명이 연쇄적으로 성폭행 당한 뒤 살해된 사건으로 ‘세계 100대 살인사건’의 하나로 기록되기도 했다. 268쪽 분량의 책은 ‘아직 추적은 끝나지 않았다’는 프롤로그에 이어 ‘악마의 출현(1차 사건)’,‘깨어진 신혼의 꿈(3차 사건)’,‘악마의 초상화(7차 사건)’,‘마지막 희생자(9차 사건)’ 등 13장에 걸쳐 사건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 한편 ‘화성 연쇄살인사건’ 중 7차 사건의 공소시효가 지난 6일로 만료돼 수사가 종결됐다. 화성경찰서 ‘화성 연쇄 살인사건 수사본부’는 8일 “88년 9월7일 발생한 7차 사건의 살인혐의 공소시효(15년)가 지남에 따라 화성사건은 9차 사건(90년 11월15일 발생)과 10차사건만 공소시효가 남게 됐다.”고 밝혔다. 7차 사건은 88년 9월7일 오후 9시30분쯤 당시 화성군 팔탄면 한 마을의 농수로에서 마을 주민 안모(52)씨가 성폭행 당한 뒤 숨진 채 발견된 사건으로 10건의 연쇄살인사건 중 유일하게 목격자가 확보됐었다. 경찰은 목격자들의 진술을 바탕으로 ‘스포츠형 머리에 신장 165∼170㎝,오똑한 코에 날카로운 눈매의 24∼27세가량 남자’를 현상수배하고 20만장의 전단을 전국에 배포한 바 있다. 수원 김병철기자 kbchul@
  • [사설] ‘이승만 책임’인 4·3사건

    정부 ‘제주 4·3사건 진상규명위원회’는 이 사건의 최종 책임자로 이승만 전 대통령을 지목했다.아울러 미군정과 주한미군사고문단도 책임이 있음을 분명히 했다.주요기관의 관련문서 폐기와 군 지휘관의 증언 거부,미국 비밀문서 입수 실패 등으로 아직 전모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이만큼이라도 밝혀진 것은 다행한 일이다.이제 남은 과제는 2000년 1월 공포된 ‘4·3사건 특별법’ 정신에 따라 억울하게 숨진 수많은 양민들과 유족들의 명예회복이다.아울러 미군의 잘못도 밝혀진 만큼 정부 차원에서 미국정부에 정식으로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 명예회복을 위해서는 우선 당시 대통령의 강압진압 지시에 따른 양민살상이니만큼 정부의 공식사과가 선행돼야 마땅하다.그리고 정식 재판절차도 밟지 않고 구금·처형된 민간인과 그 유족들에 대한 사과와 합당한 보상이 따라야 할 것이다.정부 기록보존소 자료에 따르면 군사재판에 의해 2530명,일반재판으로 1306명 등 모두 3836명이 재판을 통해 희생된 것으로 되어있다.그러나 이들은 제대로 된 재판 절차도 거치지 않고 주먹구구식 판결을 받아 제주와 대전,전주,목포,부산 등지의 형무소에 분산 수감된 뒤 전쟁이 일어나면서 그대로 처형된 것으로 밝혀졌다.더구나 그 유골은 지금까지 방치되어 있다고 한다.이들 유골의 수습작업도 서둘러야 하겠다.2008년까지 993억원을 들여 조성키로 한 평화공원 사업도 차질없이 진행돼야 함은 물론이다. 최고 3만명의 희생자를 낸 민족사의 불행한 사건을 통해 우리는 ‘민주발전과 민족화합’이 얼마나 소중한지 절감하고 있다.마무리 단계에 접어든 이 사건의 교훈을 우리 모두는 깊이 새겨야 하겠다.
  • 진상조사 보고서 내용 / “제주 4·3사건 인명피해 3만명”

    ‘제주 4·3사건 진상규명위원회’가 발간한 ‘4·3 진상조사 보고서’는 이 사건을 한국전쟁 다음으로 인명피해가 극심했던 비극적인 사건으로 규정했다.보고서는 사건으로 2만 5000∼3만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했으며,진압과정에서 무고한 주민들이 희생됐기 때문에 희생자의 명예회복과 추모사업을 적극 추진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특히 집단 인명피해는 이승만 당시 대통령에게 최종 책임이 있고,미 군정도 책임을 피할 수 없다는 내용이 포함돼 관심을 모았다.다음은 보고서 내용 요약. ●경찰의 발포사건으로 촉발 4·3사건은 광복 이후 급격한 인구 증가와 실직,생필품 부족,콜레라 발생,흉년 등의 악재 속에 47년 3·1절 발포사건이 도화선이었다.3·1절 발포 사건은 경찰이 시위군중에게 발포해 6명 사망,8명 중상의 피해를 입혔고,희생자 대부분이 구경하던 일반 주민이었다. 이에 남로당 제주도당은 조직적 반경(反警) 활동과 ‘3·10총파업’을 벌였다.총파업은 관공서·민간기업 등 제주도내 전 직장 95% 이상이 참여한 한국 최초의 민·관 합동 총파업이었다.4·3사건 직전까지 1년 동안 2500명이 구금됐고,3건의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했다.결국 1948년 4월3일 오전 2시 350명의 무장대가 12개 지서와 우익단체들을 공격하면서 무장봉기가 시작됐다. ●인명피해 2만 5000∼3만명 위원회에 신고된 희생자 수는 1만 4028명이지만 미신고·미확인 희생자가 많을 것으로 추정돼 정확한 규모파악은 어렵다.위원회는 당시의 인구 변동 통계 등을 감안,인명피해를 2만 5000명∼3만명으로 추정했다. 위원회는 “1950년 4월 김용하 제주지사가 밝힌 피해자 2만 7719명 등을 감안한 숫자지만 향후 더욱 정밀한 검증작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이 사건으로 전사한 군인은 180명,경찰은 140명 안팎으로 추정됐다. ●대량 희생의 최종 책임은 ‘이승만’ 48년 10월부터 49년 3월까지 6개월 동안 전체 희생자의 80%가량의 희생자가 나왔다.이 기간에 작전을 지휘한 9연대장과 2연대장에게 1차 책임이 있는 것으로 지적됐다.그러나 이 전 대통령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1949년 1월 국무회의에서 “미국측에서 한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많은 동정을 표하나 제주사건 등의 여파를 완전히 발근색원(拔根塞源)해야 미국의 원조는 적극화할 것”이라며 “지방 토색 및 반도 및 절도 등 악당을 가혹한 방법으로 탄압해 법의 존엄성을 표시할 것이 요청된다.”고 강경작전을 지시했다. ●미 군정 개입도 밝혀져 사건은 미 군정 아래에서 시작됐으며,미군 대령이 제주지구 사령관 자격으로 직접 진압작전을 지휘했다.미군은 대한민국 수립 이후에도 한·미간의 군사협정에 의해 한국군 작전통제권을 계속 보유했고,제주 진압작전에 무기와 정찰기 등을 지원했다. 중산간마을을 초토화한 9연대의 작전을 ‘성공한 작전’으로 높이 평가했다.군사고문단장 로버츠 준장이 송요찬 연대장의 활동상을 널리 알리도록 한국 정부에 요청한 기록도 있다. ●미완의 진상규명 다각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건의 전체 모습이 드러났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 위원회의 평가다.경찰 등 주요기관의 관련문서 폐기와 군 지휘관의 증언거부,미국 비밀문서 입수 실패 등이 아쉬움으로 남는다는 게 위원회의 지적이다.보고서는 “국가 공권력에 의해 피해를 입은 희생자와 그 유족을 위로하고 적절한 명예회복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조현석기자 hyun68@
  • “4·3사건 이승만前대통령에 책임”진상규명위 최종보고서

    ‘제주 4·3사건 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高建 국무총리)는 6일 이 사건과 관련,이승만(李承晩·사진) 전 대통령을 집단 인명피해의 최종 책임자로 규정한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를 발간,배포했다. 보고서는 지난 2000년 1월 관련 특별법이 제정된 뒤 지난 3월29일까지 진상규명위의 활동 결과를 집대성한 것으로 사건배경과 피해상황 등 580여쪽에 달한다. ▶관련기사 11면 보고서는 “1948년 10월부터 다음해 3월까지 6개월 동안 전체 희생의 80% 이상이 발생했다.”면서 “집단 인명피해의 지휘체계를 볼 때 이 기간 작전지휘를 맡은 9연대장과 2연대장에게 1차 책임이 있지만 최종 책임은 강경작전을 지시한 이 전 대통령에게 있다.”고 밝혔다. 보고서는 이 전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하고,1949년 1월 국무회의에서 ‘제주도,전남사건의 여파를 완전히 발근 색원해야 미국의 원조는 적극화할 것이며,지방 토색(討索) 반도 및 절도 등 악당을 가혹한 방법으로 탄압하여 법의 존엄을 표시할 것이 요청된다.’는 발언을 했다고 기술했다.4·3사건의 발발 원인에 대해서는 “남로당 제주도당이 47년 3·1절 발포사건을 계기로 조성된 제주사회의 긴장상황을 5·10 단독선거 반대투쟁에 접목시켜 지서 등을 습격한 것이 4·3무장봉기의 시발”이라고 설명했다.보고서는 또 “4·3 사건은 미군정 하에서 시작됐으며 미군 대령이 제주지구사령관으로 직접 진압작전을 지휘했다.”며 미군정도 이 사건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고 지적했다.4·3사건의 사망·실종 등 희생자와 관련해서는 “위원회에 신고된 희생자수는 1만 4028명이나,여러 자료와 인구변동 통계 등을 감안해 잠정적으로 인명피해를 2만 5000∼3만명으로 추정했다.”며 희생자에 대한 명예회복과 추모사업이 적극 추진돼야 한다고 밝혔다. 조현석기자 hyun68@
  • 韓國戰 정전 50년 양민학살 재조명

    한국전쟁이 끝난지 50년이 지났는데도 몸서리쳐지는 아픔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당시의 양민학살 현장에서 최근 유골이 잇따라 발굴되면서 유가족들을 중심으로 학살사건의 진상규명과 피해보상,명예회복 요구가 거세게 일고 있다. ■경남 산청 외공리사건 경남 산청군 시천면 외공리 소정골에서는 3년 전부터 매년 4월5일 위령제가 열린다. 소정골에서 양민들이 학살됐다는 소문은 2000년 5월 14일 사실로 확인됐다.진주와 산청지역 시민·사회단체들이 앞장서 현장에서 250여구의 유골과 유품을 발굴했다. ●통비(通匪)로 몰린 마을주민 떼죽음 당시 발굴작업을 지켜본 참석자들은 설마하다 쏟아져 나오는 유골을 보며 치를 떨었다.굴삭기가 땅을 1m쯤 파내려가자 희생자들의 유골이 무더기로 발견됐다.어린이와 부녀자들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골도 다수 있었다.발굴단은 당초 6기의 무덤을 모두 발굴키로 했으나 1기에서 엄청난 유골이 나오자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발굴된 유골만 수습해 합장하고 작업을 중단했다. 발굴작업을 주도했던 ‘지리산 외공리 민간인학살 진상규명대책위원회’ 김영이 사무국장은 “뒤엉켜 있는 유골을 보면서 할 말을 잃었다.”면서 “예상보다 훨씬 많은 유골이 나와 작업을 중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한국전 당시 거창·함양에서 양민들이 빨치산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학살당한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낮에는 태극기를 게양하고,밤에는 인공기를 꽂는 상황이었지만 국군들은 양민들을 통비(通匪)로 몰아 무차별 처형했다.당시 열한살이었던 강복석(63·진주시 상봉서동)씨도 “학살현장에서 2시간 정도 총소리가 들렸고,골짜기에서 나온 군인들이 삽과 곡괭이를 강물에 씻는 것을 보았다.”고 증언했다.이곳에서의 학살은 사건발생 10년만에 신문보도로 드러났지만 이듬해 일어난 5·16쿠데타로 다시 어둠속에 묻혔다. ●유골 쏟아져 작업중단 외공리 대책위는 누가 무엇 때문에 죽었는지를 밝히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지난 3월 개혁당 김원웅 의원을 통해 국회에 청원도 했다.외공리 대책위 서봉석 실행위원장은 “민간인에 대한 집단학살은 반인륜적인범죄”라며 “한국전이 끝난지 50년이 넘었지만 아직까지 진상규명이 안됐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산청 이정규 기자 jeong@ ■경북 경산 코발트광산사건 경북 경산시 평산동 폐(廢)코발트광산 인근 대원골에서 최근 한국전쟁 직후 학살된 것으로 추정되는 민간인의 두개골·치아 등 25점의 유골과 신발밑창 등 다량의 유류품이 발견됐다.2000년 3월 폐쇄된 코발트광산 입구 및 갱도 속에서 한국전쟁 당시 처형된 희생자들의 유골이 무더기로 발견된 데 이은 것이다. ●70년대 초 정부가 갱도 입구 폐쇄 경산 폐 코발트광산 학살사건의 희생자는 3500여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이들 대부분은 대구형무소 수감자와 국민보도연맹원들인 것으로 알려졌다.이 사건이 터진 것은 50년 8월 중순쯤.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재소자와 보도연맹원들이 북측에 가담할 것이라는 판단 아래 전국적으로 대량 학살이 저질러질 때였다. 학살은 군경이 이들을 폐광산 위 수직갱도 주변으로 끌고가 총살하거나 산 채로 수직갱에 밀어 넣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고알려졌다. 이 동네에서 평생을 살아온 김모(73)씨는 “사건 후 폐광산 주변 계곡에서 흘러 나온 물이 온통 핏빛으로 물들고 악취도 심해 농사를 짓지 못할 지경이었다.”며 “그러다 70년대 초에 와서 정부가 갱입구를 시멘트나 흙,철망으로 막아 버렸다.”고 증언했다. 이 사건은 95년 평산동청년회 등이 중장비를 동원,광산 입구를 파내면서 세상에 알려졌다.그러나 이후 5년여간 방치돼오다 ‘경산시민모임 민간인학살대책위(위원장 장명수·47)’가 구성되면서 본격 진상조사에 들어갔다. ●2000년 첫 확인… 본격 진상조사 경산시의회도 지난해 말 ‘경산 민간인학살 특별위원회’를 구성,학살현장 확인 등 조사활동을 벌인 뒤 관련 특별법 제정을 정부에 건의했다.유족과 시민모임대책위는 2000년부터 매년 7월에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경산유족회 이태준(66·민간인 희생자 전국유족회 상임대표) 공동대표는 “군경에 의해 억울하게 죽어간 희생자들에 대한 명예회복과 보상문제를 제쳐 두고라도 50여년간 구천을 헤메고 있을 원혼을 달래려면 정부 차원의인도적인 진상규명과 유골 수습이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경산 김상화기자 shkim@ ■대전 산내사건 대전 ‘산내학살사건’의 희생자는 7000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대전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제주 4·3사건 관련자 300명,여순반란 및 보도연맹사건 관련자 3000여명에다 민간인들도 상당수 희생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건이 터진 것은 1950년 7월 초에서 중순 사이.북한 인민군이 내려오고 있다는 말에 군경이 대전 동구 산내동(당시 충남 대덕군 산내면 골령골) 계곡에 이들을 모아놓고 2차례에 걸쳐 대대적인 학살을 저질렀다. 첫번째 학살은 7월4일부터 6일까지 사흘 동안 이뤄졌다.대전형무소 수감자 3000여명을 트럭으로 이곳에 실어온 뒤 총살했다.2차 학살은 17일 같은 곳에서 있었다.이 때 여성 등 민간인들도 상당수 포함됐다. ●美국립문서보관소 관련자료 나와 지난해 4월 발굴된 영국 데일리 워커지 앨런 위닝턴 기자의 증언록 ‘나는 한국에서 진실을 보았다.’는 “학살 직후 현장엔 6개 구덩이에 7000여명이 묻혀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그는 “인민군이 금강을 돌파하자 이날 새벽 남아 있던 대전형무소와 인근 교도소 정치범 등을 트럭 1대에 100명씩 모두 37대에 태워 옮긴 뒤 학살했다.”고 덧붙였다. 이 사건은 대전참여자치시민연대의 관심으로 바깥에 알려졌다.충북 영동 노근리 학살사건으로 군경에 의한 학살사건이 공론화되자 이 단체는 99년 10월 ‘산내학살사건 민간조사단’을 구성하고 진상조사에 나섰다.같은 해 12월에는 이 사건과 관련된 증거가 나왔다.미국 국립문서보관소의 비밀문서가 해제된 뒤 탐라대 이도영 교수가 아버지를 잃은 4·3사건 관련자료를 뒤지다 이를 발견한 것이다. ●“최고 상층부서 지시” 기록 비밀문서에는 “사흘간 대전형무소 수감자 1800명이 산내에서 학살됐다.”며 “이는 최고 상층부의 지시로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고 적혀 있다.그러나 위닝턴 기자는 증언록에서 “미군의 지시로 일어난 학살사건 중 하나다.”고 밝혀 누구의 지시로 학살사건이 이뤄졌는지는 아직도 불투명하다. 유가족과 대전참여연대는 2000년부터 매년 7월8일 희생자들의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대전 이천열기자 sky@ ■특별법청원 박재욱의원 제주 4·3사건의 진상조사와 명예회복이 추진되면서 다른 지역에서 발생한 한국전쟁 전후의 양민학살 사건에 대한 국회 차원의 관심도 탄력을 받고 있다.개혁당 김원웅 의원 등이 발의한 법률안 2건이 계류돼 있고,경북 경산 등 전국적으로 15곳에 이르는 사건의 특별법 제정 청원이 24건이나 된다. 지난 해와 올해 두 차례 입법청원을 낸 한나라당 박재욱(사진·경북 경산·청도) 의원과의 일문일답. 청원서를 내게 된 배경은. -경산에 코발트 광산이 있었는데 6·25 직후에 3500명 가량이 갱도에서 처형됐다.규모로는 전국에서 제일 클 것이다.3∼4년 전부터 유족과 지역주민들의 제기로 진상조사가 이뤄지기 시작해 경산시의회 등에서 청원이 올라왔다. 요구사항은 무엇인가. -진상조사와 명예회복이다.피해보상까지 해주면 좋지만 현재로선 기념식과 위령탑 건립을 바라고 있다. 사실 이념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기가 쉽지 않았을텐데. -당시에는 법도 없었고 재판절차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에 양민이 상당수 무고하게 희생됐을 것으로 본다. 최근 예결위에서도 정부의 지원을 요구했는데. -행정자치부는 당시 사정을 알 수 있는 서류나 증거물이 미비하다며 국회나 기타 신뢰성 있는 조사기관이 진상조사를 실시하면 정부 차원에서 적극 협조하겠다는 답변을 보내왔다. 가장 큰 걸림돌은 무엇인가. -아무래도 예산 문제다.조사가 시작되면 아마 전국적으로 피해 신고가 봇물처럼 올라올 것이다.일개 부처에서 손댈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대통령의 의지가 중요하다. 국회 차원의 조사 활동은. -곧 시작할 것이다.공청회도 해야 한다. 박정경기자 olive@
  • 韓國戰정전 50년 양민학살 재조명

    수많은 양민학살 사건 가운데 제주 4·3사건과 거창 양민학살사건에 대해서만 정부가 조치를 취하자 여기저기서 형평성 문제를 들면서 억울한 원혼을 달래야 한다고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전국의 대표적 양민학살 현장을 다시 돌아보고,특별법 제정과 관련한 청원을 낸 국회의원과 정부의 입장을 알아본다. ■고양 금정굴사건 경기도 고양시 금정굴 학살사건의 유족들은 지난달 1일부터 여의도 한나라당 당사 앞에서 특별법의 조속한 제정을 요구하는 농성을 계속하고 있다. ●9·28수복직후 부역혐의자 연행 지난달 30일 농성장에 나온 희생자 유족회 서병규(68) 회장은 15살 어린 나이에 아버지와 두 형을 금정굴에서 잃었다고 했다.서씨는 “정부와 정치권은 금정굴 학살 진상조사를 더 이상 미뤄선 안된다.”고 말했다. 1995년 9월 유족들은 자비와 시민단체가 모은 1300만원으로 금정굴 유해 발굴작업을 폈다.당시 발굴된 유골은 모두 153인으로 추정됐다.그중엔 여성 10여명과 어린이 유골도 1구 발굴됐다.금정굴 학살은 50년 9·28 수복 직후부터 그해 11월 초까지 부역자를 색출한다며 경찰과 우익단체가 혐의자를 대거 연행,경찰서 창고에 가뒀다가 살해한 사건이다. 경기도의회는 99년 진상조사특위를 구성,금정굴 사건이 학살이라는 잠정 결론을 내렸다.경기도는 이에 따라 고양시에 유골의 추가 발굴과 위령사업을 추진하도록 통보했다. ●지하 15m 금광서 400여명 처형 고양시의회는 그러나 ‘금정굴위령사업촉구결의안’을 부결시켰다.유족들과 고양시민회 등이 결성한 ‘금정굴 사건 공동대책위원회’는 시의회의 공식 사과와 우익단체에 대한 조사를 요구하며 분노했다.유족들은 “희생자들은 반공과 국가안보라는 이념의 제물로 희생된 양민”이라며 “억울하게 죽은 영혼들의 한을 반드시 풀어줘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금정굴 사건 공대위 이춘열 집행위원장은 “금정굴 희생자와 함께 연행된 사람들 가운데 부역혐의가 짙다고 판단된 사람들은 당시 서울로 송치됐고 아이로니컬하게도 대부분 목숨을 건졌다.”며 희생자들이 억울하게 처형됐다는 주장을 뒷받침했다. 금정굴 현장은 1995년 1차 발굴후현재 방수포로 덮여 있다.금정굴은 일제 때 금을 캐기 위해 뚫었던 수직굴로,유골이 발굴된 곳은 지하 15m 지점이다.유족들과 증언자들은 당시 금정굴로 끌려간 이들이 400여명에 이른다며 추가 발굴도 요구하고 있다. 입구엔 장승 조형물이 세워졌고 철제 안내문과 안내판이 서 있다.유족들은 인근 창고를 사무실로 쓰면서 현장을 지키고 있다. 고양 한만교기자 mghann@ ■나주 세지면 동창교사건 전남 나주시 세지면의 일명 ‘동창교 양민학살 사건’(51년 1월20일) 희생자는 136명.면 소재지인 오봉·벽산리 300여가구 주민 가운데 어린이와 노약자를 뺀 젊은이들이 ‘빨갱이’라는 누명을 쓰고 살육전에 희생됐다. 이들은 대낮에 “동창교 아래에서 강연이 있다.”며 위협하는 국군 제11사단 20연대 2대대 5중대 소속 군인들의 총칼 아래 억울하게 죽어갔다.군인들은 함평에서 영암 쪽으로 가는 길에 있는 국사봉의 빨치산을 토벌하러 가던 길이었다.(육군 전투상보 기록) ●주민 5열로 세운뒤 총난사 “지금도 그 때만 생각하면 몸이 떨린다.”는 조기영(73·세지면 벽산1구)씨는 당시 22살 청년으로 현장에 끌려갔다가 ‘경찰가족’이라고 거짓말해 사지(死地)를 벗어났다.현재 세지우체국 담벼락에 몸을 숨긴 그는 “군인들이 동창다리 밑으로 주민들을 5열횡대로 세운 뒤 다리 위에서 M1소총과 기관총으로 난사한 뒤 인근 논과 밭,산에서 일하던 주민들까지 잡아죽였다.”고 증언했다.이어 “당시 세지초등학교 박모 교사의 부인을 총으로 쏜 군인들이 등에 업혀 울던 세살바기마저 사살했다.”고 몸서리쳤다. 이후 47년간 숨죽이며 살던 세지면 주민(37명)들은 1998년 7월,‘세지 동창양민학살사건 진상조사 추진위원회(위원장 이상계·46·나주시의원)’를 출범시켰다.이어 유족회를 만들고 2000년부터 해마다 합동위령제(음력 12월12일)를 지내고 있다.내년에는 위령탑을 세울 계획이다. ●“주검 일일이 확인사살” 이상계 추진위원장은 “군인들은 총을 쏘기 전 주민 5명을 가려내 소를 잡아 먹고 일일이 주검을 들춰가며 확인사살까지 자행할 정도로 인간 이하의 행동을 했다.”는 증언 녹취록을 공개했다. 이 추진위원장은 “한국전쟁의 동일선상에서 자행된 함평 양민학살 사건은 60년 6월 국회에서 특별위원회를 구성해 진상조사가 이뤄졌으나,동일부대의 만행으로 저질러진 동창 양민학살사건은 조사마저 안돼 형평성에도 어긋난다.”고 강조했다. 나주 남기창기자 kcnam@ ■전주형무소 사건 한국전쟁 발발 직후 전북 전주시 전주형무소에서 복역 중이던 좌익 정치·사상범 1400여명이 군경에 의해 학살됐다는 증언과 자료가 나와 한국사에 또 하나의 비극적인 사건으로 떠오르고 있다. ●당시 형무관 “4차례 자행” 증언 당시 전주형무소 형무관이었던 이순기(78·전주시 완산구 효자동)씨는 “50년 6월 26일부터 전주가 인민군에게 점령당한 7월 20일까지 4차례에 걸쳐 좌익 사상범들이 퇴각하는 군경에 의해 집단 살해됐다.”고 증언했다.전쟁이 터진 다음 날인 26일 상부로부터 좌익 사상범에 대한 ‘예비검속령’이 떨어졌고,이날 저녁부터 3년 이상 장기복역한 사상범이 끌려나가기 시작했다는 것. 그해 7월 4일 이씨는 사상범 40명이 5명씩 끈으로 묶여 실려가는트럭에 동승했다.전주농고 동문 쪽 야산에서 군인들이 미리 파놓은 구덩이 앞에 죄수들을 나란히 세우고 기관총으로 쏘아 살해했다고 증언했다.이씨는 “사상범들은 현재 전북대가 있는 건지산,농협전북본부와 완주군청이 있는 자리,진안으로 나가는 소리개재 등으로 끌려가 살해되고 그 자리에 묻혔다.”고 말했다.특히 전주시 완산구 효자동 황방산에 묻힌 시신들은 막판에 재판도 받지 않고 끌려가 죽은 사람들이라고 밝혔다.이들은 좌익계통 사람들과 접촉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있던 억울한 사람들이었다. ●“좌익 접촉” 이유 재판없이 처형 “7월 16일 전주를 떠났다가 10월 13일 다시 돌아와 보니 전주교도소 주변에서 인민군과 함께 철수하던 좌익들이 우익인사 400명을 죽여 시신들이 수습되고 있었습니다.” 한편 진보잡지인 ‘월간 말’은 5월호에 한국전쟁 당시 전주형무소 집단학살 사건의 처형장으로 지목됐던 전주 황방산 부근을 발굴한 결과 수많은 유골을 찾아냈다며 이를 다룬 미국 정부문서보존소 사진을 공개했다. 전주 임송학기자 shlim@ ■정부 대책 없나 정부는 다수의 양민학살 사건에 대해 정부 차원의 추가 대책을 마련하기는 어렵다는 입장이다. ●양민학살 관련 정부지원 현황 대규모 민간인 희생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작업은 행정자치부 산하 ‘4·3사건 지원단’과 ‘거창사건 지원단’에서 맡고 있다.4·3사건이 한국전쟁 이전에 불거졌다는 점을 고려하면,전쟁 당시의 민간인 희생과 관련된 정부지원단은 거창사건이 유일하다.지원단의 업무는 해당사건의 진상규명과 피해자 명예회복,묘역조성사업 등이다.피해보상 문제는 제외됐다. 거창사건 지원단의 경우 1996년 ‘거창사건 등 관련자 명예회복 특별조치법’이 제정됨에 따라 구성됐다.지원단은 그동안 거창사건과 관련된 피해접수자 557명 가운데 548명,산청·함양사건 피해접수자 399명 중 386명에 대해 각각 명예회복을 마쳤다.현재는 묘역조성사업을 추진 중이다. 4·3사건 지원단은 99년 제정된 특별법에 따라 구성돼 그동안 1만 4028명의 피해신고를 받았다.이 가운데 2778명을 희생자로 결정했으며,오는 2004년 말까지 모든 접수자에 대한 결정을 마친다는 계획이다. ●다른 피해자들과 형평성 문제 정부는 진상규명과 피해보상의 어려움,전쟁 당시 다른 피해자들과의 형평성 문제 등이 얽혀 마땅한 해결책을 제시할 수 없어 난감한 입장이다. 거창사건의 경우 당시 이루어졌던 군사재판을 근거로 진상규명 등을 했지만,양민학살사건 대부분은 관련 기록이 전무한 실정이다.따라서 진상규명작업이 유가족들의 진술에 의존할 수밖에 없어 객관성 확보가 어렵다는 것이다. 100만∼200만명으로 추정되는 전쟁 당시 민간인 희생자들의 형평성 문제 등을 고려,희생자 1인당 1억원씩 보상한다해도 최소 100조원이 필요해 국가재정에서 충당이 불가능하다.게다가 양민학살사건은 군의 작전과정에서 발생했기 때문에 정확한 진상조사를 위해서는 국방부가 나서야 하지만,양민학살 인정은 군의 명예 실추와 직결된다는 부담도 있다. 정부 관계자는 “유가족들의 억울함을 이해하지만,정부가 대책 마련에 앞장 서기도 어려운 입장”이라면서 “국회 차원의 정치적인 판단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장세훈기자 shjang@
  • [발언대] ‘여순사건’도 진상규명 명예회복해야

    이달 초 ‘제주 4·3사건’55주년기념행사 장면을 TV 화면에서 보고 깜짝 놀랐다.‘4·3사건’에 대해서는 이미 정부차원에서 진상 규명이 일부 이루어지고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가 설치돼 가동한 모양인데,어찌 동일선상에서 일어난 ‘여순사건’에 대해서는 아무런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느냐는 생각 때문이었다. 세상이 다 아다시피 ‘여순사건’은 ‘제주 4·3사건’을 진압하고자 제주도로 파견될 예정이던 여수 주둔 국군 14연대가 반란을 일으킨 사건이다.따라서 이는 어디까지나 ‘4·3사건’의 연장선상에서 일어난 것인 만큼 떼려야 뗄 수 없는 연관관계가 있는 것이다. 아울러 두 사건은 전개 과정이나 주민피해 등에서 그 성격이 비슷한 점이 대단히 많다.건국 초기에 좌익분자들이 무장봉기를 한 점에서 그렇고 무고한 주민들이 엄청나게 희생되었으며 사망한 이는 물론 그 유족·후손이 ‘빨갱이’라는 오명을 쓰고 오랫동안 우리사회에서 큰 피해를 입어온 점이 그러하다. ‘4·3사건’에서와 마찬가지로 ‘여순사건’에서도 진압군이 무고한 양민을학살한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반란군이 지리산으로 퇴각한 뒤 여수에 ‘쳐들어온’ 진압군은 전 시민을 학교 같은 공공건물에 잡아다 놓고,가담자를 가려낸다는 핑계로 무고한 시민들을 찍어내 마구잡이로 처형했다.그야말로 동족상잔의 수라장이었다. 그해 10월2일 계엄령이 선포되자 14연대를 연상케 한다고 해서 전국적으로 각 건물에서 4호실을 없애라고 불호령을 내릴 정도였다.아울러 토벌작전에 지장이 있다고 3개월 동안 여수∼서울간 열차를 없애버리고 전주∼서울간만 오가게 함으로써 국민 경제활동에 일대 불편을 초래하기도 했다.또 이승만의 독재에 날개를 달아줬고 국가보안법을 산출시켜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후퇴시킨 역사적인 비극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해 ‘여순사건’은 건국 초기 나라의 근간을 뒤흔든 큰 사건이었다.정부가 ‘제주 4·3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희생자의 명예를 회복하는 데 노력하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하지만 역사적으로 동일선상에서 일어난 ‘여순사건’에 대해서도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를 같이 만들어 역사의 진실을 규명해 주기 바란다.그 길만이 당시 억울하게 숨져간 많은 무고한 시민들의 원혼을 위로하는 한편 그 멍에를 지고 살아온 유족들의 명예를 되살려 주는 방법이 될 것이다. 김 계 유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 4·3사건 위령제 고건총리등 참석

    제 55주년 제주4·3사건 희생자 범도민위령제가 3일 오전 11시 제주시 봉개동 4·3평화공원 조성 예정지에서 우근민 제주지사와 유가족 등 6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봉행됐다. 이번 위령제에는 처음으로 각료급 정부대표로 고건 국무총리와 김두관 행정자치부장관이 참석했다.이는 정부가 4·3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를 통해 ‘국가공권력에 의한 대규모 인권 유린행위’로 성격을 규정한 데 따른 조치다.이밖에 권영길 민주노동당 대표,김원웅 개혁당 대표,민주당 정동영·추미애 의원,한나라당 이부영 의원,제주 출신 현경대·양정규·고진부 의원,강만길 교수 등 4·3중앙위원,박원순 4·3진상보고서작성기획단장 등도 참석했다. 위령제 봉행위원장인 우근민 지사는 정부에 대해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 건의된 ▲정부의 사과 ▲4·3추모기념일 지정 7개항을 조기에 이행해줄 것을 요청했다. 제주 김영주기자 chejukyj@
  • 뉴스플러스 / 盧 “4·3사건 입장표명 내년에”

    노무현 대통령은 제주 4·3 사건에 대한 담화문 발표 등 입장표명은 내년의 추모식으로 늦추기로 했다. 노 대통령은 31일 수석·보좌관회의에서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가 6개월의 시한을 붙여 진상보고서를 채택했다는 보고를 받고,이같이 결정했다.
  • 4·3사건, 55년만에 성격 규정“남로당 봉기 진압과정 제주주민 무고한 희생”

    ‘제주 4·3사건은 무장봉기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제주 주민들이 무고하게 희생된 사건’이라는 4·3사건에 대한 정부차원의 성격 규정이 사건발생 55년 만에 이뤄졌다. 정부는 29일 고건 국무총리 주재로 제주 4·3사건 진상규명위원회 전체회의를 열어 이같은 내용의 ‘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를 채택했다.위원회는 보고서에서 “제주 4·3사건은 단독정부 수립 반대와 연계된 남로당 제주도당의 무장봉기가 있었고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무고하게 주민들이 희생되었다.”고 규정했다.하지만 김점곤 경희대 교수는 위원직 사퇴의사를 밝힌 뒤 회의에 불참했다.또 한광덕 전 국방대학원장과 이황우 동국대 교수는 “군경의 과잉진압이 너무 부각되고 있다.”며 서명을 거부,이번 보고서는 만장일치의 합의를 이끄는 데 실패했다.이에 위원회는 6개월 뒤인 9월28일까지 신빙성 있는 자료·증언이 추가로 나올 경우 심의를 거쳐 보고서를 수정할 수 있도록 했다. 다음은 총 577쪽에 이르는 보고서의 요지이다. ●제주 4·3사건의 성격 미군정 아래 발생한4·3사건은 한국현대사에서 인명피해가 극심했던 비극적인 사건이다.47년 3·1절 발포사건을 계기로 제주사회에 긴장상황이 조성되고,남로당 제주도당이 이런 긴장상황을 5·10단독선거 반대투쟁에 접목시켜 지서 등을 습격한 것이 4·3무장봉기의 시발이다.48년 11월부터 9연대에 의해 중산간마을을 초토화시킨 강경진압작전은 가장 비극적인 사태를 초래했다.진압작전으로 중산간마을 95% 이상이 불타 없어졌고 많은 인명이 희생됐다.대표적인 주민집단 총살사건인 ‘북촌사건’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한 마을 주민 400명가량이 2연대 군인들에 의해 총살당했다. ●피해자의 규모 신고된 희생자 수는 1만 4028명이다.그러나 이 숫자를 4·3사건 전체 희생자 수로 판단할 수 없다.여러 자료 등을 감안해 잠정적으로 인명피해를 2만 5000∼3만명으로 추정했다.연좌제에 의한 피해도 극심했다. ●대정부 건의 위원회 산하 4·3진상보고서 기획단은 별도로 ▲제주도민,4·3피해자들에게 사과 ▲4·3추모 기념일 제정 ▲추모공원조성 ▲유가족들에게 실질적인 생계비지원 등 7개항의 ‘대정부 건의안’을 작성,제출했다. 최광숙기자 bori@
  • [사설] 4·3사건 명예롭게 매듭을

    국무총리가 위원장인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가 정부의 공식 보고서 채택을 앞두고 사건의 성격 규정과 관련,내부갈등을 빚고 있는 것은 유감이다.일부 위원은 보고서가 이 사건의 원인보다는 군경의 과잉진압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아예 위원직에서 사퇴할 뜻도 밝혔다고 한다.우리는 50년이 지나도록 해결되지 않은 채 미뤄져온 이 사건이 마지막 단계에서 지엽적인 문제로 난항을 거듭하는 모습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이는 사건의 진상 규명과 희생자들의 명예회복을 위해 제정된 4·3특별법 정신에도 어긋난다.화해와 상생의 법 정신에 따라 모든 문제가 명예롭게 매듭지어지기를 촉구한다. 정부 보고서에는 당연히 일부 위원들이 제기하고 있는 사건의 원인 부분에 대한 명확한 기술도 포함되어야 한다.좌익 세력에 의한 공공기관 습격으로 일어난 사건이라는 사실은 명백하기 때문이다.특별법은 4·3사건을 1947년 3월1일을 기점으로 하여,1948년 4월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좌익과 연관이 없는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정의하고 있다.이는 관련 여러 단체의 진상 조사 결과를 토대로 한 만큼 별다른 이견이 있을 수 없다.문제는 1993년 제주도 의회에 특별위원회가 설치될 때까지 공식적인 논의조차 못하며 오늘에 이르는 동안 실추됐던 희생자와 유족들의 명예회복이다. 마침 노무현 대통령이 정부 차원의 공식 사과를 검토하고 있다고 하니 다행이다.그동안의 조사결과 이승만 당시 대통령의 강압진압 지시와 미군 고문관의 총살현장 입회가 밝혀졌다.과거 정부의 잘못을 현 정부가 사과하는 것은 역사 바로 세우기 차원에서도 당연하다고 본다.
  • 이 사람/ 제주 4·3희생자 유족회 이성찬 회장

    ‘4·3’이 새롭게 다가오고 있다.일반적으로 ‘4·3’은 남조선노동당(남로당) 제주지구 소속 한라산무장대가 미 군정 하의 경찰을 향해 본격 공격을 개시한 1948년 4월3일을 일컫는다.이후 제주도 전역이 전란의 공포에 휩싸이게 되고,1954년 9월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되기까지 6년 6개월동안 군·경과 ‘산(山)사람’들로 인해 수많은 제주도민이 희생된다.지난 2000년 1월12일 공포된 4·3특별법에 의해 공식 신고된 희생자수만 사망 1만 715명,행방불명 3171명,후유장애 142명 등 1만 4028명.신고 이전에 죽은 사람과 미신고자까지 포함하면 당시 제주도 인구의 10%인 2만 6000명 정도가 희생됐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4·3이후 산사람과 죽은 사람에게 가해졌던 ‘연좌제’라는 형벌 아닌 형벌이었다.이제 정부 등 각계의 노력으로 4·3이 제자리를 찾으려 하고 있다.사건이냐,폭동이냐,항쟁이냐에 대한 답과 함께 산사람들에 대한 폭도·무장대·공비·해방군·유격대 등의 표현이 정리되려는 즈음이다. 이런 상황에서 55주기 4·3위령제를 앞둔 이성찬(59) 제주도 4·3희생자유족회장을 비롯한 유족들은 새로운 감회로 올 4·3을 기다리고 있다. 4년여에 걸친 각고 끝에 4·3에 대한 진상이 곧 정부 차원에서 규명되고 희생자 유가족과 제주도민들의 숙원이던 4·3평화공원도 삽질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게다가 정부가 4·3사건에 대해 공식 사과하려는 기류도 흘러나오고 있다.그렇게 바라던 4·3특별법이 제정된 지도 3년이 지났다.이 회장의 얼굴도 종전에 비해 평안을 찾은 듯하다.머리숱이 많이 빠졌을 뿐이다. 유족회장으로서 4·3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학자가 아니라 정확히 정의하기는 무리지만 느끼고 경험하고 살펴본 바에 의하면 암울한 시대에 국가폭력에 의해 수많은 제주도민이 죽어간 ‘민간인 학살사건’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의 말은 과거 교과서에 실린 내용과는 다른,자칫 ‘좌익적’이라는 오해를 살 만도 하다.그러나 그것은 기우(杞優)이고,‘화해’와 ‘상생’을 힘주는 데서 가장 일반적으로 바라보는 4·3임을 깨닫게 된다. “4·3의 해법은 ‘화해’‘상생’이 답입니다.4·3특별법이 제정된 취지도 역시 지난 세기에 자행됐던 불행한 역사를 청산하고 새로운 세기에는 화해와 상생의 시대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 아닙니까.당시 돌아가신 분들은 이념 때문이거나 누구에게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니라 시대의 희생자일 뿐입니다.서로 위무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갖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고 그것이 바로 4·3을 해결하는 방법이라고 봅니다.” 그의 해법대로 4·3문제가 진행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이 회장의 마음이 편치는 않다.“대립각은 언제나 있을 수 있지요.지금도 4·3을 왜곡하는 사람들과 과거 문제를 들춰내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는 단체나 소수 사람들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습니다.4·3유족회장으로 간곡히 호소합니다.이제 과거의 불행한 역사를 청산해 가신 임들의 넋을 달래고 희망의 불빛을 밝혔으면 합니다.” 이 회장의 고향은 제주시 오라동,사건 당시는 제주읍 오라마을이다.오라마을은 1948년 5월1일 ‘오라동 방화사건’으로도 유명하다.그에게도 ‘상처’가 없을 리 만무했다. “아버님은 1949년 토벌대의 공격이 너무 무서워 산으로 피신했는데 이후 살려준다는 말을 믿고 마을 주민들과 함께 귀순했으나 경찰은 다른 일행들과 제주읍 동부두 주정공장에 감금해 버렸습니다.얼마 지나지 않아 대전형무소로 이감됐고 6·25가 터지자 대전시 동구 낭월동 골령골에서 학살됐지요.” 어느새 눈가에 이슬이 맺힌다.“어머니는 생활고에 시달리다 일본으로 건너가 개가했고…,당시 5살이던 저와 동생은 할아버지와 할머니 슬하에서 ‘폭도자식’이라는 질시와 냉대를 받으며 어렵게 살아왔습니다….” 한참 뜸을 들인 뒤 기자가 보상문제로 말머리를 돌렸다.“지금 보상을 논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4·3 해결과정에 찬물을 끼얹을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다만 국가 공권력에 의한 잘못이었다고 밝혀진다면 향후 논의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고맙게도 지금 공동체적 보상 형태로 국가가 4·3평화공원을 조성할 계획인 만큼 오는 4월3일 착공할 평화공원 조성 예산을 정부가 적극 지원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신중하지만 할 말을 멈추지는 않는다. “4·3이 발발한 지 어언 반세기가 훌쩍 넘었습니다.지금까지 제대로 평가되지 못했던 이 사건의 진상이 하루속히 정확히 드러나 당시 희생된 원혼들과 유족들의 피맺힌 한을 풀어 주었으면 하는 게 유족회장으로서의 바람입니다.난항을 겪고 있는 수형인들에 대한 희생자 결정도 4·3특별법 정신에 걸맞게 처리돼 4·3중앙위원회가 4·3의 실상을 가감없이 의결해 주기를 바랍니다.욕심이라면 노무현 대통령이 오는 4·3 위령제 때 참석해 주셨으면 하는 것입니다.아마 오실 것으로 믿습니다.” 글·사진 제주 김영주기자 chejukyj@
  • 뉴스플러스/ 정부 4·3사건 사과 방침

    노무현 대통령은 제주 4·3사건 55주년인 내달 3일 이 사건의 희생자에 대해 정부차원의 사과나 유감을 공식 표명하는 방안을 검토중이다.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노 대통령이 4·3사건에 대해 정부 차원의 공식입장을 밝히기로 방침을 정하고 입장표명 수위와 방법 등에 대해 의견을 듣고 있다.”고 말했다.
  • [사설] ‘4·3 명예회복’ 이제 부터다

    제주 4·3사건 희생자 가운데 1715명이 국무총리 주재의 4·3사건 진상규명 중앙위원회에서 희생자로 공식 결정된 것은 때 늦은 감이 있으나 환영할 일이다.지난 반세기 동안 한을 안고 살아온 제주도민과 4·3유족들의 명예를 회복하고,이 문제를 국민의 인권신장차원에서 해결하려는 관계 기관의 의지를 확인할 수 있어 더욱 반갑다.그런 의미에서 이번 결정은 시작에 불과하며 이번 심사에서 제외된 수형자와 후유장애자 및 여러가지 사정으로 신고하지 않고 있는 피해자들에 대한 구제활동도 화해와 상생의 원칙에 바탕을 둔 4·3 특별법 정신에 따라 적극적으로 펼쳐야 할 것이다. 이 사건은 해방 이후 혼란기에 일어난 한국 현대사의 최대 비극이다.1947년 3·1절 행사를 기점으로 그 이듬해 4월3일 좌익 무장대에 의한 소요사태와 그 이후 1954년 9월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시위와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희생자를 낸 사태가 바로 4·3사건이다.기관에 따라 최대 8만명이 희생됐다는 통계도 있으나 제주도의회가 신고접수 등을 통해 파악한 희생자는 1만 5000여명이다.이 가운데는 시위에 직접 가담한 사람도 있지만 이와 무관한 양민들도 많아 아직까지 제주도민들의 가슴에 한으로 맺혀있다.그 응어리를 풀기 위한 물꼬를 정부가 이번에 처음으로 텄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먼저 해야 할 일은 이번에 심사대상에서 제외된 수형자들에 대한 희생자 인정이다.이들은 당시 실체도 불분명한 재판부에 의해 자신의 형량조차 모른채 형무소로 끌려간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진상규명이 엄정하게 진행돼야 함은 물론이다.후유장애자에 대한 철저한 치료와 희생자로 결정하는 일도 시급하다.다소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해방공간에서 빚어진 민족의 비극적인 사건으로 희생된 사람들의 명예와 인권회복이 그 무엇보다 앞서야 한다.
  • ‘4·3희생’ 1715명 첫 결정, 정부차원 명예회복…개별보상은 않기로

    제주 4·3사건 희생자 가운데 1715명이 ‘4·3 특별법’에 의해 처음으로 ‘희생자’로 공식 결정됐다. 지난 2000년 1월 ‘4·3특별법’이 공포된 이래 2년 10개월만에 이뤄진 이번 결정은 4·3사건 관련 희생자와 유족들에 대한 정부차원의 명예회복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정부는 20일 중앙청사에서 김석수(金碩洙) 국무총리 주재로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 제5차 회의를 갖고 이같이 결정했다. 이날 회의에는 1801명에 대한 희생자 결정안이 상정됐으나 86명은 이미 국가유공자예우법에 따라 별도로 명예회복이 이뤄졌기 때문에 ‘이중 명예회복’ 논란이 제기돼 4·3사건 희생자 결정이 유보됐다. 이번에 결정된 희생자 1715명은 남자 1300명,여자 415명이며,희생 유형별로는 사망 1473명,행방불명 242명이다.특히 사건 당시 10세 이하 희생자 104명도 포함됐다. 정부는 이번에 결정된 희생자 1715명에 대해서는 개별보상은 하지 않는 대신 포괄적 보상차원에서 제주도에 12만평 부지의 4·3 평화공원을 조성,희생자들의 넋을위로하는 한편 생존 후유장애자 142명에 대해서는 치료비 지원혜택을 부여할 계획이다. 정부는 앞으로 분기별 1회씩 회의를 개최,오는 2004년 말까지 희생자 심의대상자에 대한 심사를 완료할 계획이다. 또한 이와 별도로 내년 2월까지 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 작성을 완료한다는 목표아래 현재 국내는 물론 미국·일본·러시아 등 해외에서 발굴한 자료 1만 576건의 분석작업을 벌이고 있다. 한편 희생자 선정과 관련,보수진영 인사들은 무장유격대와 협력해 진압 군경 및 가족을 살해하거나,경찰관서를 비롯한 공공시설과 경찰가옥에 대해 방화한 사람 등은 명예회복 대상에 포함하지 말아야 한다고 반발한 바 있다. ‘정부 4·3사건 처리지원단’ 김한욱(金漢昱) 단장은 이에 대해 “남로당 핵심간부나 수괴급 인사,살인이나 방화에 적극 가담한 사람들은 희생자 선정에서 제외했다.”면서 “이번에 선정된 1715명은 심사소위에서 9차례에 걸쳐 진행된 개별 심사를 모두 통과했다.”고 말했다. 최광숙기자 bori@
  • 4·3 희생자 인정 의미/ ‘폭도’ 몰려 고통… 유족 명예회복

    해방 이후 건국 과정의 혼란기에 빚어진 한국 현대사 최대 비극 중 하나인 제주 4·3 당시 희생된 도민 중 1715명이 20일 사상 처음으로 국가 차원에서 ‘희생자’로 공식 결정된 것은 ‘역사적 사건’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날 결정은 상당수 억울하게 폭도로 규정돼 반세기동안 한을 안고 살아온 4·3 희생자의 유족과 제주도민의 명예 회복은 물론 국민 화합과 인권 신장을 통해 민주 발전사에 한 획을 그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다만 제주4·3 당시 군법회의에서 재판을 받아 수형인으로 분류된 도민들에 대해 4·3중앙위 심사소위가 심의를 보류해 전체회의에 심사대상으로 올리지 못했고,후유장애자로 신고된 142명에 대해 심사를 신속하게 진행하지 못해 지난해 5월 희생자 신고 이후 법적 지원 등을 받지 못한 채 7명이 사망한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제주도 4·3사건희생자유족회와 제주4·3진상규명·명예회복범국민위원회 등 4·3 관련 6개 단체는 이날 논평을 통해 “우리는 오늘 첫 결정이 국가폭력에 의해 피해를 본 4·3희생자와 유족에 대한 정부의 공식적인 첫 명예회복이라는 점에서 의미를 부여하고 환영한다.”고 밝혔다.이어 “다만 4·3 당시 실체없는 재판을 받아 형무소 생활을 하다 돌아가신 수형인과 고령의 후유장애자들이 희생자 결정 대상에 오르지 못한 데 대해 아쉬움이 크다.”고 덧붙였다. 4·3사건 희생자 신고를 지난 2000년 6월부터 2001년 5월까지 접수한 결과 사망자 1만 715명,행불자 3171명,후유장애자 142명 등 총 1만 4028명이 신고했다.그러나 여러가지 사정으로 신고를 기피하거나 내용을 잘 몰라 신고를 못한 도민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 4·3사건의 피해규모를 짐작케 한다. 이제 미신고자에 대해서도 4·3특별법 취지를 잘 설명하고 추가 신고기간을 설정해 구원하는 장치를 마련하는 등 특별법 정신에 맞게 제주도민의 맺힌 한을 풀어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4·3 관련 단체의 주장이다. 제주 김영주기자 chejukyj@ ▶ 진상규명 일지 ■ 제주도 ◆ 99.8.11 제주4·3사건 위령사업 범도민추진위원회 설치 및 운영 조례 제정 공포 ◆ 〃 10.18 ‘4·3문제해결 제주도의 근접 방향’ 도민 공청회 개최 ◆ 〃 12.7 제주4·3사건 희생자 위령사업 범도민추진위 구성(100명) ◆ 2000.3.14 제주4·3 평화공원 부지 매입 ◆ 〃 4.3 새로 마련된 부지에서 제52주년 4·3위령제 봉행 ◆ 〃 9.7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실무위원회 발족 ◆ 2001.4.10 제주4·3 평화공원 조성계획 완료 ◆ 〃 7.23 제주4·3사건 신고 희생자 사실조사 ■ 중앙 부처 및 국회 ◆ 99.4.13 여·야 총무회담에서 국회 4·3특위 구성 합의 ◆ 〃 4·3 특별법 국회 본회의 통과 ◆ 2000.1.12 4.3특별법 공포 ◆ 〃 8.28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 발족
  • 대마도서 4·3 수장위령제 봉행

    제주4·3유족회(회장 이성찬) 등 제주4·3관련 단체는 26일 일본 나가사키현(長崎縣) 쓰시마섬(對馬島)에서 4·3사건과 관련해 수장된 희생자들의 넋을 달래는 ‘제주4·3 수장 위령제’를 봉행한다. 이성찬 회장을 비롯,김영훈 제주도의회 의장,강원철 도의회 4·3특위 위원장,임기옥 도의회 4·3특위 위원,김창후 4·3연구소 부소장 등 30여명은 위령제에 참석하기 위해 25일 오전 일본으로 떠났다. 이들은 위령제를 전후해 당시 쓰시마지역 신문 기자들과 시신 인양자들을 만나 증언을 듣는 한편 조선 역사관 조난비 등을 견학하고 일본 해상보안청과 군청,경찰 등을 방문,관련 자료를 수집해 자료집을 발간할 예정이다. 제주도민 수장 사건은 지난 50년 당시 예비검속을 전후해 4·3과 관련됐다는 이유로 군·경에 끌려간 도민들이 제주항 앞바다 등에 수장,학살된 사건으로,4·3관련 단체들은 이들의 사체 가운데 상당수가 대마도로 표류해 간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제주 김영주기자 chejukyj@
  • [시.도지사 당선자에 듣는다] 우근민 제주지사

    “제주도정을 민선 2기의 연장선에서 안정적으로 추진할 수 있게 돼 무엇보다도 기쁩니다.” 6·13지방선거에서 재선된 우근민(禹瑾敏·60·민주) 제주도지사 당선자는 17일 “이번에 도민들이 보내준 성원은 제주국제자유도시사업과 4·3문제 등 당면 현안들을 잘 치르고 이루라는 채찍질로 알고 ‘21세기 강한 제주 건설’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우 당선자는 “3기 도정 제1목표는 역시 국제자유도시 개발사업이 될 것”이라면서 “민선 2기가 제주국제자유도시 창업기라면 3기는 국제자유도시특별법에 근거한 투자와 민·외자 유치가 가시화될 기반 조성기인 셈이어서 실질적으로 투자가 이뤄지도록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이 사람 저 사람을 만날 각오”라고 말했다. 그는 또 “국제자유도시 투자유치기획단 운영과 민자유치 인센티브제 도입작업은 바로 손댈 작정”이라면서 “도민의견을 수렴,지속적으로 제도를 개선하는 작업,역기능 저감대책과 도민주체 개발사업에 대한 우대제도를 마련하는 일 그리고 자유도시로의 선점효과를 살려 각종제도와 정부투자를 조기에 집행,시행할 수 있도록 서두르는 일도 소홀히 하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올해부터 2011년까지 국비 7조 2507억원,지방비 4조 503억원,공사·공단 지원금 4588억원,민자 18조 2227억원 등 총 29조 9825억원이 투입되는 국제자유도시 종합계획이 추진되고 마무리되는 동안 ‘2만달러 소득시대 개막,일자리 9만명 창출’이라는 공약도 반드시 실현하겠다고 약속했다. 공약 실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우 당선자는 기다렸다는 듯 “약속한 대로 농민들의 부채 경감을 위해 5%인 농업정책자금 이자는 오는 7월1일부터 당장 4%로 내리겠다.”고 서두를 꺼냈다. 이어 “9.5%짜리 상호금융자금 이자는 국제자유도시 수익금과 출연금 등으로 2000억원을 조성,4% 수준으로 재융자해 가급적 빨리 전환할 수 있도록 하겠고,사업성은 있으나 담보물건이 없는 사람들에게 무담보로 대출이 이뤄지도록 신용보증재단 설립작업도 서두를 생각”이라고 밝혔다. 이밖에 임기내에 여성 정무부지사를 임명하겠다는 약속이나 스포츠산업 육성 차원에서 매년 축구 꿈나무 20명씩을 1년 코스로 브라질에 유학시키는 일,이번이 마지막 출마라는 공언도 반드시 지키겠다고 덧붙였다. 4·3문제와 관련해서는 “제주도가 진정한 ‘평화의 섬’이 되려면 화해와 상생,해원의 정신에 입각해 4·3에 대한 여러 조치가 이뤄져야 한다.”면서 “4·3희생자 선정 문제는 진상보고서 작성이 완료된 후 새롭게 논의돼야 하며,명예회복과 4·3평화공원 조성사업이 끝나면 정부는 제주도민들에게 4·3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해야 할것”이라고 주문하기도 했다. 친화력과 포용력이 장점이자 강점인 우 당선자는 도지사 집무실에서의 성희롱 논란과 민주당 열세 등 여러 악재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재선고지에 올랐다. 특히 ‘박빙’‘접전’‘백중’이라는 시중여론을 비웃기라도 하듯 모든 지역에서 우위에 섰고,2위와의 차를 1만 5000여표나 벌리는 등 ‘완승’을 이룩했다. 그러나 그의 도정수행을 가로막을 ‘난관’은 도처에 도사리고 있다. 우 당선자는 “이번 선거과정에서 지지자간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도민사회가 크게분열된 점이 가장 가슴 아프다.”면서 “도민 대통합을 이루고 봉합과 치유를 위한 대책의 하나로 상대후보의 정책을 면밀히 검토해 지역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것들은 전격 수용할 생각”이라고 말했다.하지만 “이렇게 한다고 과연 선거후유증이 제대로 치유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걱정도 했다. 도의회 의원들도 한나라당이 우위를 차지했다.민주당 소속인 우 지사로서는 버거운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이다.그러나 그는 “의회를 존중하고 배려하면서 동반자 의식을 갖고 문제점에 대한 합의를 도출해 낸다면 집행부와 의회 사이도 매끄러워질것”이라고 의회와의 관계를 낙관했다. 우 당선자는 기초단체와의 관계에 대해 “시·군간 인사교류와 정책공조도 더욱 강화해 나가겠다.”면서 “시장·군수 당선자들이 공약으로 내건 여러 정책들도 원만히 실천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을 방침”이라고 약속했다. 글·사진 제주 김영주기자 chejukyj@
  • 선택 6.13/ 제주지사 후보 정책 집중비교

    제주도지사 선거는 제주에 지역색이 없다는 특성으로 인해 대통령 선거의 향배를 가늠할 수 있다는 점에서 언제나 주목받는다.역대 대선 결과,제주에서의 승리가 곧 당선으로 이어졌던 등식이 이를 증명한다.게다가 이번 선거는 영원한 맞수인 한나라당 신구범(愼久範)후보와 민주당 우근민(禹瑾敏)후보간 ‘용호상박’의 대결이어서 전국적인 관심을 끌고 있다.신 후보는 ‘자존과 번영의 제주경영시대’를,우 후보는 ‘강한 제주,당당한 제주인’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걸었다. ●국제자유도시= 신 후보는 현재의 국제자유도시 특별법을 고쳐 제주도가 경제권을가져야 한다는 게 지론이다.현재의 특별법으로는 제주도지사의 역할이 제한될 수밖에 없어 제주의 핵심 역량을 활용해 국제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제주개발센터 운용 권한도 제주도가 쥐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우 후보는 현행 특별법에 ‘도민주체 개발사업 우대제도’가 마련돼 있고,도지사에게 개발사업 인·허가권을 주고 있으며,7대 프로젝트 시행에 따라 지역도 균형적으로 개발될 수 있다는견해다.제주개발센터 역시 외자유치 창구로 적극 활용될 것이며,면세점 등의 수익은 전액 제주도에 재투자될 것이라고 강조한다. ●감귤= 신 후보는 온주밀감 재배지 2만 4000㏊에 대해 매년 10∼20%씩 품종을 갱신하여 자동적으로 생산량이 조절되도록 하며,100억원으로 육종재단을 만들어 신품종 개발사업 등을 펼치겠다고 밝혔다.또 부적지(不適地)감귤원 1800㏊는 연차적으로 녹차 재배지로 전환하고,생산된 감귤은 3.75㎏당 농가 수취가격이 2000원 이상 보장되도록 하며,비상품 감귤은 농가 자체적으로 유기질 비료로 만들어 쓰도록 재료와 시설비 등을 지원하겠다고 공약했다. 우 후보는 재배면적을 2005년 2만 4000㏊,2010년 2만 2000㏊로 줄여 연간 적정 생산량인 55만t이 유지되도록 하고,감귤 휴식년제에 참여한 농가에 대한 인센티브를 확대하겠다는 계획이다.또 저온저장 시설을 200곳으로 늘리고,내년까지 3만t 처리능력의 제2감귤 가공공장을 서부지역에 건설해 주스·캔디·초콜릿·술 등 감귤을 원료로 한 2차 가공품 생산을 다양화하겠다고 다짐했다. ●관광= 신 후보는 서귀포시 중문관광단지 동부지역에 건립중인 컨벤션센터와 제주월드컵경기장 사이를 면세지역으로 지정,월드컵경기장에서 연간 2∼4회 정도 ‘세계 면세명품 엑스포’를 열어 관광수입을 증대시키겠다는 복안이다.또 강력한 관광인프라 제공을 위해 제주관광공사를 만들어 미국의 월트디즈니사나 워너브러더스사 등과 접촉해 테마파크가 제주에 진출할 수 있도록 하겠으며,안정·기술·수익·편익성 등에 장애가 많은 지역항공사를 설립하기보다는 일본이나 타이완 등지의 동북아 주요 항공사와 전략적으로 제휴해 제주로의 접근 수단을 확대하겠다고 역설했다. 우 후보는 제주 관광지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 국제회의 도시로 지정되도록 하고,국제화 장학재단을 통해 국제회의 전문인력과 회의산업 전문업체를 육성하겠다는 포부다.중국 상하이에 제주홍보관을 개설하고,중국 관광객 유치 전문여행사를 육성하며,한·중·일 크루즈 관광사업도 추진할 계획을 갖고 있다.특히 관광진흥 추진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제주도 관광진흥원을 설립하고종합관광회관도 건립할 예정이다. ●4·3사건= 신 후보는 4·3신고자 중 무장반란 수괴급과 남로당 핵심간부는 희생자로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그러나 헌법과 국법질서,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해치지 않는 범위 안에서 희생자 폭을 넓게 잡는 것이 상생과 도민 화합 등을 위해 바람직하다고 보고 있다. 우 후보도 비슷한 의견이다.그러나 우 후보는 수괴급이라고 인정할 만한 확실한 증인이나 증거가 있어야 하며,그러지 못할 때는 희생자에 포함시킬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또 정부 차원의 희생자 명예회복 조치 후에는 정부의 사과가 뒤따라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이밖에 12만평 규모의 4·3평화공원 1차사업을 내년까지 마치고,4·3평화상을 제정할 방침이다. ●청·장년 고용창출= 신 후보는 국제컨벤션센터·제주교역·풍력발전·삼다수·관광복권사업 등을 5대 도민기업으로 육성,주식회사로 전환해 1조 5000억원 규모의 제주 토착자본을 조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2006년까지 전략기획 등 ‘고급 일자리 400명,중간 일자리 2200명,보통 일자리 7000명’등 1만명의 일자리를 창출하겠다고 약속했다. 우 후보는 이에 대해 구조조정과 공기업 민영화 추세에 맞지 않는다고 반박하고있다.특히 풍력발전사업 등은 환경친화적이고 상징적 시설인데도 이 사업을 통해 돈을 벌겠다는 엉뚱한 주장을 펴고 있다며,생명공학산업 등을 육성해 2011년까지 9만명의 일자리를 새로 만들겠다고 밝혔다. ●종합= 두 후보의 정책기조는 비슷하나 실행방법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공약 중에는 달콤하지만 이해하기 힘든 ‘무지갯빛 청사진’들도 눈에 띈다.‘경제특별자치구 추진’,‘도민자금 1조 5000억 조성’,‘9만명 일자리 창출’등이 그것이다.지난 도지사 선거나 총선 때의 재탕분도 더러 있고,중앙정부의 예산지원이 없으면 이루기 힘든 정책도 많다.문제는 누가 실현 가능한 공약을 많이 내걸었는가 하는 점이다. 제주 김영주기자 chejukyj@ ●신두원 사라봉 ~ 별도봉간 케이블카 설치 신두완(申斗完·민국) 후보는 무보수 지사로 봉급과 판공비 전액을 어려운 이웃을 위해 쓰겠으며,지사의 공관을 도민 자활복지 후생관으로 활용하겠다고 밝혔다.이외에 한라산 중턱에 고품질 약초재배단지 조성,비양도에 카지노장 설치,제주시사라봉∼별도봉간 케이블카 설치 등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인물평 신구범 후보의 카리스마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다.그것이 때로는 독선과 독단으로 비쳐지기도 한다.그러나 본인은 “추진력을 독단으로 오해한다.”며 “누구보다도 가슴이 따뜻한 남자”라고 주장한다.농수산부 축산분야에서 기획통으로 인정받은 ‘축산 맨’이다. 우근민 후보는 친화력이 강점이다.어느 계층이든 가리지 않고 ‘어머님’,‘아버님’이고 ‘누님’,‘형님’,‘동생’이다.그러다 보니 자연 ‘스킨십’이 과장돼 성희롱 공방과 같은 일도 벌어졌다.자타가 인정하는 마당발로 총무처에서 잔뼈가 굵은 인사통이다. 신두완 후보는 평생을 야당만 하면서 살았다.윤보선 전 대통령 1주기 추도식때 전두환 전 대통령을 혼낸 일은 유명하다.국회의원 도전 4차례,도지사 도전 1차례등의 기록도 제주에서는 진기록이다.돈 안쓰는 선거를 다짐,부인을 선거사무장으로 임명했다.
  • ‘4·3 희생자’ 결정 첫 심사

    제주 4·3사건 희생자 결정을 위한 첫 심사가 열렸다. 제주도에 따르면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위원장 이한동 국무총리) 산하 제주4·3사건희생자 심사소위원회(위원장 박재승)는 10일 서울에서 회의를 열어 4·3진상규명 실무위원회(위원장 우근민 제주지사)가 심의를 요청한 4·3희생자 488명에 대한 심사를 벌였다. 4·3위원회는 다음달 중 4·3희생자 결정을 위한 첫 회의를 시작으로 심사소위가 상정한 심사결과를 최종 심의하는 등 오는 2004년 8월까지 신고자 1만 4028명에 대한 심사결정을 마무리지을 방침이다. 제주 김영주기자 chejuky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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