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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파된 빨치산부대(새로쓰는 한국현대사:28)

    ◎3개단 수천명 북한조종따라 게릴라전/경찰·관공서 무차별 습격·방화… 살인까지 대한민국은 건국 초기부터 남북 공산당의 도전을 받았다.그것은 가히 야누스적인 것이었다.공산당은 몇개의 다른 얼굴을 하고 혁명전략을 다양하게 구사했다.그 양상은 합법 공개적 정치공세와 민족통일을 명분으로 내세운 통일전선공작,무력투쟁 등으로 표출되었다.특히 북한 노동당의 프롤레타리아 혁명노선과 남로당의 좌경모험주의적 지도노선이 맞물린 유격투쟁은 역사의 범죄로 기록될 수 있다. ○북한노동당 직접 개입 우리는 유격전이 전면화한 1949년 이른 시기에 우선 주목할 필요가 있다.그 이전 대한민국 태동기나 정부수립 직후의 유격전을 남로당이 거의 주도했던 것과 달리 북한의 노동당이 직접 개입했기 때문이다.49년 2월 북한 노동당은 남한에서 전면적 유격전을 펴 나간다는 방침을 굳혔다.유격전의 배경에는 계급투쟁이라는 공산주의 기초이론이 깔려 있었다.그리고 남조선 해방의 여건을 부추긴다는 측면에서 유격전을 서둘렀다. 이같은 결정에 따라 북한노동당 연락부와 남로당 재북 지도부 및 서울 현지지도부는 당 조직력을 풀가동시켰다.먼저 남한의 산악지대를 대상으로 5개 유격전구를 설정했다.그 유격전구는 ▲지리산지구 ▲태백산지구 ▲오대산지구 ▲월아·속리산지구 ▲제주도지구였다.유격전의 전력은 북한에서 직접 조직하여 침투시킨 부대와 남한의 지하당 당원들로 조직된 부대들로 충원되었다.이들 유격부대는 19 48년 2·7폭동을 계기로 조직한 무장소조 야산대와는 성격이 사뭇 다른 본격적 빨치산이라 할 수 있다. 북한 노동당 지도부는 이미 1948년말께 3천5백여명의 남로당원들을 월북시켰다.유격전에 필요한 군사교육 훈련을 위해서였는데,이들은 강동학원에 들어갔다.강동학원은 남로당 간부들의 정치·군사교육을 위해 1947년 8월말 평남 강동군 대성면 대성탄광 시설물에 설립되었다.설립당시 학원장은 김책이었으나,얼마후에 박병율로 교체되었다.이밖에 함북 회령군관학교에서도 유격전에 필요한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유격훈련 시켜 남파 1949년 3월 남북 노동당 연합정치국은 유격투쟁개시신호를 올렸다.「남조선에서 유격투쟁을 조직 전개한데 대하여」라는 성명이 그것이다.그리하여 남로당 주도의 김지희부대가 남아있던 지리산에 지휘간부가 파견되었다.이어 이현상을 비롯한 선발대 5명이 38선을 넘어 서울로 숨어들었다.서울에서 김삼룡을 접촉한 선발대는 남한 정세와 유격전에 관한 의견을 교환하고 전주를 거쳐 지리산에 입산했다.이현상이 출발한지 20여일 정도 뒤에 정두한·전병권이 지휘하는 간부부대가 부안해안에 상륙,지리산으로 들어갔다. 그러니까 남로당 계열의 지리산 김지희 부대는 북로당 중심의 빨치산 부대로 개편된 것이다.그 유격대가 바로 이현상을 사령관으로 한 제2병단이다.지리산 부대는 한국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활동했다.19 49년 6월초에는 김달삼을 사령관,남도부를 부사령관으로 한 제3병단이 오대산 지구에 침투했다.강동학원 출신 6백여명이 제3병단의 주병력이었다.이가운데 3백명은 남도부의 지휘로 가야산에 입산할 계획이었으나 끝내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제1병단은 8월6일 태백산·소백산 지구에 침투해 들어왔다.이호제 부대로도 불린 제1병단은 인민유격대 총사령부격으로 남파되었지만,국군 토벌대에 의해 전멸하고 말았다.이 토벌작전에서 사령관 이호제와 정치위원 박치우가 사살되었다.참모장이었던 서철이 겨우 살아서 월북했다.이런 와중에 강철(본명·박민학)이 지휘하는 3백명의 유격대가 월악·속리산 지구에 닿았다. 산악지대에 침투한 인민유격대의 공격은 이른바 9월 대공세를 정점으로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다.경찰서와 지서,각종 관공서에 대한 습격과 방화는 물론 살인까지 서슴지 않았다.특히 전남북과 경남북,강원도에서 기승을 더 부렸다.그러나 한국군과 경찰의 강력한 토벌작전에 직면했다.경북 북부와 강원도의 인민유격대의 타격은 치명적이었다.그 결과 이현상 부대를 제외하고 유격전구 설정은 실패하고 말았다.그래서 지리산 유격전구는 남한 유격투쟁의 총본산이 되었다. ○경남북·강원도 더 기승 1949년 10월 북로당 빨치산 출신들에 의해 남한에서의 유격전은 국부전략으로 바뀌었다.일정지역에서 유격거점을 만들어 빨치산과 정규군이 합친다는 것이 국부전략이다.그 거점으로 ▲옹진반도 ▲강원도의 태백·소백·일원산 지역 ▲지리산과 백운산 지역을 활용했다.이에따라 1950년 3월 김무현,김상호,윤상철을 사령관으로 한 3개 빨치산 부대 1천여명의 병력이 남으로 다시 내려왔다.그러나 남하도중 국군토벌대를 만나 거의 북으로 달아났다. 이들 빨치산부대는 현지 지하단 조직과 연계하지 않고는 활동이 불가능했다.그래서 남로당에 잔존한 지하당원들이 가담했다.대한민국 수립 이전부터 무장투쟁을 담당했던 야산대도 뒷받침되었다.또 19 48년 10월 여수반란사건과 같은해 11월부터 3차례에 걸쳐 일어난 대구반란사건,1950년 4월의 제주 4·3사건에 연루되어 입산한 사람들도 유격대에 편성되었다는 사실도 간과할 수 없다. 미국 캘리포니아대 교수를 역임한 바 있는 R A 스칼라피노 교수는 이정식과 함께 쓴 저서 「한국의 공산주의」에서 당시 남한의 공산당원을 4만명으로 추산했다.그러나 이 숫자는 무의미한 것으로 보았다.이보다 더많은 국민이 공산당 동조자나 지지자이고 또는 회유되거나 협박에 의해 공산당 지령을 수행한 것으로 기술했다.남파된 빨치산은 바로 이러한 기운이 가시지 않은 신생 대한민국의 토양위에 얼마만큼 기생했던 것이다. 그러면 공산주의 핵심세력은 접어두더라도 동조자들은 누구인가.말할 나위도 없이 로맨틱한 공산주의 환상에 빠져든 사람들이다.「개인은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다」는 환상에…. ○남로당 지하당원 가당 건국이후 19 49년부터 전면 유격전 양상을 띠고 활동한 빨치산은 평양의 노동당이 조종했다.이른바 「혁명적 민주기지」를 후방에 건설한다는 전략적 의도를 깔았던 것이다.북한의 정규무력과 협동·배합한 가운데 지속적으로 빨치산 부대를 남파했다.특히 19 50년에 남으로 내려보낸 빨치산 존재를 간파했더라면 한국전쟁의 징조를 일찍 읽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평양 「투사신문」/북,50년 「5·30총선」 방해 극렬 선동/「선거관계자 숫청·후보자 처단」 등 내용/북 선전지… 빨치산아파트에 비밀 배포 북한이 대규모로 남파한 유격부대들이 신생 대한민국을 고립 약화시킨다는 전략 아래 19 50년 5·30총선거를 5·10총선거 못지 않게 방해한 사실이 드러났다.이는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이 미공문서 보존기록관리국(NARA)에서 발굴한 자료를 통해 입증한 것으로 선거방해수법이 아주 악랄했다. 이 자료는 소련파 한인 2세로 보이는 한효(주필)의 명의로 평양시 민본리 15에서 제작한 「투사신문」 19 50년 6월7일자.36×27㎝크기로 4면을 발행했다.그러니까 5·30총선이 실시된 직후에 배포한 이 선전지는 거의 선거 방해공작 실상을 기사형식으로 다루었다.「제2의 망국선거 파정투쟁에서 빨치산은 이렇게 싸웠다」는 제목을 뽑고 각 지역 선거방해 소식을 싣고있다.이밖에 대한민국 정부와 공무원을 공격하고 물가가 비싸다는 내용의 기사도 보인다. 그리고 「제2 망국선거는 매국노들의 폭압하에 허위날조 되었다」는 제목의 장문을 싣기위해 아래쪽 4단을 할애했다.또 「빨치산 실화」를 실었는 데,그 제목은 「산나물 팔러온 소녀」.당시 신문편집 스타일을 지키면서 활판 인쇄물로 제작했다.이 선전지는 강동학원 등의 빨치산 양성기관과 대남사업 담당요원에 배포한 데 이어 비밀루트를 통해 남한 전역의 빨치산 아지트에 보내졌다.
  • 미군정의 공과(새로 쓰는 한국현대사:24)

    ◎자국입장 살리며 한국군정 수립에 큰 기여/기득권층 흡수… 일제잔재 청산의 걸림돌로 미군정은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이 공식출범하는 것으로 사실상 막을 내렸다.1945년 9월9일 미군정이 시작된지 3년여만에 군정이 종식된 것이다.미군정은 이보다 앞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이승만으로부터 경찰과 해안경비대,국경수비대의 지휘권을 포함한 주한미군사령관이 행사하고 있는 모든 직무에 대한 이양요청을 받았다.주한미군사령관은 8월11일 이에 동의하고 이양절차를 신속히 밟기 시작했다. ○좌우익대립 평정 공헌 그러나 미군의 완전철수는 다음해인 1949년 6월29일에 이루어졌다.5백명의 군사고문단을 남겼으나 한국은 미국의 태평양방위선 밖으로 밀려나 있었다.이렇듯 한국은 미국의 영향권으로부터 멀어졌지만 미군정 3년여는 이 땅에 많은 것을 남겨 놓았다.그렇다면 해방공간에서의 미군정의 공과는 무엇일까.이 물음에 대한 해답은 한국현대사,이른바 해방정국사를 푸는 중요한 키 노트가 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문제이기도 하다. 그평가는 시각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다만 자국의 입장을 최대한 살리는 범위에서 한국의 민주정부 수립을 추진한 미군정은 결국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단독정부를 수립시켰다는 잠정적 결론을 도출해내기에는 별 무리가 없다.이 대목은 매우 중요한 것인데 미군정은 이승만을 전면에 부상시킬 의도를 처음부터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그래서 5·10선거 직전까지도 김규식에 기대를 걸었다.그리고 실제 국회의원 선거(서울 동대문 갑구)에서 이승만을 낙선시키려는 공작도 했다. 어떻든 미군정은 이승만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김규식이 정계은퇴 의사를 분명히 하는 바람에 싫든 좋든 간에 이승만의 등장을 방관할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이승만과 경선하기 위해 밀었던 전 미군정 경무국장 최능진의 입후보 등록을 취소시켰다.이에따라 5·10선거에서 국회의원에 당선한 이승만은 확고한 정치적 발판을 굳히고 국회의 간접선거를 통해 대통령이 되었다. 이승만이 등장한 마당에서 미국이 그를 굳이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동서대립의 이데올로기 갈등 속에서 그만한 인물을 찾기도 실상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그런 의미에서 미군정이 좌우익 대립을 어느 정도 평정한 것은 군정의 공헌쪽에다 비중을 실을 수 있을 것이다.이렇듯 혼미한 해방공간에서 45년 12월 경찰이 창설된데 이어 46년 1월에는 국방경비대가 창군되었다.미군정의 병력과 경찰력의 확보는 정치세력,특히 좌익의 극단적 움직임과 연관성을 갖는다. ○한민당계 인사 큰 혜택 군에는 광복군 출신을 비롯,일본군 및 만주군 출신들이 포진했다.이 가운데 일본군 출신들이 두각을 드러내 군의 주도적 위치를 차지해버렸다.경찰의 경우도 조선총독부 시절의 인물들이 그대로 끼어들었다.이는 미군정이 일제치하의 경찰을 좌익색출에 적극 활용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실제로 경찰은 1946년 9월 총파업과 10월폭동,3·1절 좌우충돌,3월 총파업,4·3사태를 진압하는데 공헌했다.또 일본군 출신을 주축으로 한 군 역시 46∼50년까지 발생한 반란사건 진압과 토벌의 주력이 되었다. 미군정은 정부수립까지 가는 험난한 길을 걷는데 일제시대 기득권층을 그대로 흡수한 측면이 없지 않다.이는 정부수립 후 일제잔재를 청산하는 과정에서 걸림돌로 작용했다.해방 원년 일본인 관리들이 물러난 자리에 7만5천여명의 한국인을 앉혔다.그 과정에 미군정의 인사정책이 그대로 반영되어 영어에 능통한 한국인과 일제하의 관료를 우대했는데,한민당계의 인사들이 큰 혜택을 입었다.미군정이 좌우합작을 지원할 무렵에는 안재홍과 같은 인물이 남조선과도정부 민정장관으로 임명되었으나 한민당계에 밀렸다는 것이다. 미군정은 일본이 침략정책을 강화하기 위해 만든 모든 악법을 19 45년 10월9일 법령11호에 따라 폐기해버렸다.여기에는 정치범처벌법,예방검속법,치안유지법,출판법,정치범보호관찰령,경찰의 사법권 등이 포함되었다.미군정은 이 악법들의 폐지 이유를 「한국인들에게 정의의 정치와 법률상의 균등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미군정은 소련의 한반도 적화정책의 징후가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많은 자유를 안겨주었다.초기에는 공산주의 활동을 용인한 것은 물론 출판언론의 자유도 열어주었다. 패전국 일본이 남겨놓은 재산은 기업의 경우 전체의 90%,토지는 전 국토의 12·5%나 되었다.이 재산은 일제가 36년 동안 착취한 것이어서 국민들의 관심도 컸다.이른바 적산으로 분류한 이들 재산을 법령 제33호에 따라 우선 군정청 소유로 했다.적산을 한국인들에게 매각하지 않겠다는 조항도 명문화했는데,이는 뒷날 한국에 세워질 정부에 맡긴다는 방침이었다.특히 토지의 경우는 여론조사에 붙였다.그러나 대다수의 의견이 정부수립 이후의 처리를 희망했다. 토지(농지)문제는 특히 북한으로부터 공격적 선전자료가 되었다.북한은 소련의 조정에 의해 1946년 초 토지개혁을 단행한 터여서 미군정을 호되게 비판했다.하지만 미군정은 적산을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더불어 재정재산협정에 따라 한국에 넘겨주었다.미군정은 다만 농민을 보호하기 위해 농지 소작인이 수확량의 3분의 2를 차지하도록 규정하는 법령 제9호를 해방 원년에 제정했을 뿐이다.특히 미국의 입장은 재산처분에 관한 한 무리수는 두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미군정은 행정권의 민정이양을 위해 남조선과도정부를잠정적으로 만들었다.1946년 3월 법령 제64호를 적용하여 군정청기구의 국을 부로 바꾸고 군정체계를 확립했다.각 부처장으로 한국인을 채용하여 한미 양부처장제를 실시한 것도 이무렵이다.이해 9월 군정장관 A L 러치는 특별발표에서 행정권 이양의사를 밝혔다.이로 인해 미국인들은 고문자격으로 부결권만 행사하는 가운데 두 나라 국어를 사용한 종래의 모든 문서가 한국어로 단일화되었다. ○적산 한국정부에 이양 남조선과도정부가 한국의 정부수립을 대처한 미군정의 조치였다면 1946년 12월에 개원한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은 민주주의 예행이라 할 수 있다.입법의원은 김규식을 의장으로 한 관선 45명,민선 45명으로 구성되었다.민선의원의 경우 인구비례에 따라 각 도에 정원을 배정했다.이 민선의원들은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선거를 통해 선출되었다.그래서 입법의원은 국민대표기구이자 입법기구로서 초보적이나마 현대적 의회였다. 이 과도입법의원은 미군정의 좌우합작운동을 수용한 측면이 있다.다시 말하면 미군정은 좌우합작운동을 초기부터 지원하는 대신 이를 과도입법의원과 연결시켰던 것이다.어떻든 입법의원은 입법기구로서 남조선과도정부 및 그로부터 분리 독립한 법원과 더불어 3권분립 관계를 이루어냈다.이것이 바로 대한민국의 기틀이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웨드마이어중장 연설」 벽보/트루먼의 특사 “공가주의 투쟁 자제” 역설/“권리쟁탈의 욕망 제일 큰 문제” 지적/「조선의 인권·재산권 보장」 방침 천명 1947년8월 미군정 당시 한국을 방문했던 미 대통령(H S 트루먼)의 특사 A C 웨드마이어 중장(1897∼1990년)의 연설요지를 실은 벽보가 발견되었다.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이 서울 중랑구 중화2동 김보영씨(67)로부터 제공받은 이 벽보는 한국에 대한 당시 미국 정책의 흐름을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끌었다. 벽보는 서두에 「현 세계의 여러가지 문제중에 권리쟁탈의 욕망이 제일 큰 문제」라고 지적하고 있다.이는 아마도 동서냉전체제 아래서의 갈등을 비유한 것으로 풀이된다.그가 1947년 8월26일 김포공항을 통해 입국,10여일 한국에 머물렀다는 사실을 고려하면이 벽보는 9월쯤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그가 한국에 머물 무렵은 제2차 미소공동위가 교착상태에 빠진 가운데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이 선동하는 군중대회가 열을 올리고 있을 때였다. 이어 그는 「이러한 욕망을 없애려는 것이 우리의 목표」라고 밝히면서 「이 욕망을 군사적이 아니고 화가나 문학가의 붓으로,또 바이올리니스트의 활로 없애면 얼마나 아름답겠느냐」고 아주 낭만적인 표현을 썼다.그리고 「욕망을 없애거나 줄이면 더 좋은 목적을 쉽게 실현할 수 있다」는 간접적인 말로 공산주의 투쟁의 자제를 당부했다. 이 벽보에는 「조선이 완전 자유독립국가를 만들도록 인권과 재산권 보장,자유기업을 장려하겠다」는 내용도 들어있다.그의 재산권보장 발언은 미군정이 토지개혁을 장차 수립될 한국정부에 넘겨주겠다는 확고한 방침으로 나타났다.패전 일본으로부터 환수한 적산도 처분하지 않고 뒷날 한국정부에 이양한 것도 이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웨드마이어 장군의 조선여행중의 연설」요지를 전제로 한 이 벽보의 크기는 가로 28.5㎝,세로 50.5㎝.그는 한국을 방문한뒤 냉혹한 판단으로 일관한 「웨드마이어 보고서」를 썼다.오하마 태생의 육군중장이었던 그의 보고서는 미국 대한정책의 골격이 되었다.
  • 광양시/여야 문중대결에 무소속 낀 3색전(기초장 격전지)

    전남에서 민주당의 아성을 뚫고 민자당이 승리를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지역이다.제철공화국(유권자 1만1천7백37명)·컨테이너 부두건설 등 상대적으로 혜택을 받은 태인·황금동을 비롯한 신시가지 6개동 유권자(제철포함 3만6천5백67명)들 덕택에 전남도 의원 72명 중 유일하게 민자당이 이 곳에서 한 석을 건졌다. 민자당은 김보현 전 농림수산부 장관과 같은 집안인 김영일씨(51·전 농수산부 사무관)를 후보로 내세웠다. 순천고와 한양대를 나와 농림수산부에서 18년을 근무한 농어촌 전문가다. 광양지구당 부위원장,이 지역 순천중·고 동문회 부회장,미래연구소 이사 등 직·간접으로 인연을 맺은 6개 단체를 바탕으로 표밭을 일구고 있다. 안정과 균형이 조화된 도·농간 발전을 위해 2차 산업의 부가가치를 농촌으로 되돌린다는 공약으로 최근 민주당의 공천 과정에서 빚어진 내분과 돈봉투 사건 등을 꼬집으며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민주당의 후보는 김 전 장관의 친동생으로 공직 30여년의 행정관료인 김옥현씨(61·전 정책보좌관)다.여·야의 문중대결인 셈이다. 고려대를 졸업,고흥·화순·나주의 군수와 도 농어촌개발국장 등을 거쳤다. 오는 2010년 10선석 완공으로 전국 1위로 발돋움할 컨테이너 부두의 조기 완공 및 제철 관련 2차 산업을 유치,산업도시의 면모를 갖춘다는 청사진을 내걸었다. 무소속 박양표씨(56·전 광양읍장)는 다압·진상면 등 7개 읍·면에서 9년,8년6개월 동안 광양읍장을 지내며 맺은 인맥을 바탕으로 승리를 장담하고 있다.광양읍에서 태어나 순천고를 나온 토박이로 신시가지 출신인 양 당 후보가 가문대결을 벌이는 점을 이용,소외감을 느끼는 광양읍 유권자(4만6천4백89명)들의 자존심을 부추기며 어부지리를 노리고 있다. ◎고흥군/민주·무소속 접전속 맹추격 인구 13만으로 도내에서 군세가 가장 크다.전체 유권자(8만2천4백3명)의 절반을 차지하는 대표적 성씨인 신·송·유씨 문중에서 무소속과 민주당으로 출사표를 던져,정책보다는 종중의 대결로 치달을 전망이다. 민주당 후보로 유력시되던 신강식씨(53·도의원)가 의외로 밀려난 뒤 무소속 출마를 선언,민주당 유상철씨(60·정책보좌관)와의 2파전으로 압축된 상태.뒤늦게 민자당 김원석씨(61·전 마포경찰서장)가 추격하고 있다. 민자당의 김씨는 영남면이 고향으로 점암동·남양국교를 거쳐 조대부중·고와 조대 법정대를 졸업,지난 60년 국무원 사무처 공채1기(4급)로 공직에 발을 디딘 뒤 치안본부 종합상황실장·전북도경 경비과장과 이리·용인·마포서장(89년) 등을 거쳤다. 저서인 「복종과 거역」에서 명령을 따라야 하는 경찰관임에도 부당함에 항거했던 「용기」를 강조하며 참된 일꾼을 가려줄 것을 호소하고 있다. 민주당의 유씨는 전남대 법대와 서울대 행정대학원을 마치고 지난 61년 문교부에서 공직을 시작,농수산부와 산림청을 거쳤다.77년 전남 민방위국장을 맡은 뒤 고흥군수와 여천시장 등 30여년의 행정경험을 쌓았다. 조직과 능력을 겸비한 인물이 고향발전의 적격자라며 전통적으로 야당세가 강한 당조직과 고흥 유씨의 몰표를 기대하고 있다. 무소속의 신씨는 고흥 동국교·서중·광주고와 건대 법경대를 마치고 고향에 정착,연간 15억원대의 소득원인 축산업을 일으킨 경력으로,고향을 지킨 사람이 제대로 일할 수 있다고 내세우고 있다. 가문표 외에 신형식 전 건설부장관(작고)의 친동생이라는 사실과 청년회장·새마을금고 이사·민주지구당 부위원장을 거쳐 후반기 도의회 운영위원장 등 탄탄한 지역기반이 최대 강점이다.
  • 정원식 민자당 서울시장 후보/관훈클럽 특별회견 일문일답

    ◎나는 분별있는 “NO”를 할수있는 사람/서민촌서 오래살아 「민원」 해소책 터득/전교조에 강경대응… 우리교육 구했다 민자당의 정원식 서울시장후보는 24일 관훈클럽초청 특별회견에서 구상하고 있는 서울시정의 방향을 자신감 있게 펼쳐 보였다.다음은 일문일답 요지다. ­총리를 지내놓고 민선서울시장까지 하려는 것은 욕심이 아닌가. ▲김영삼 대통령의 간곡한 권유를 받고 며칠을 고민한 끝에 생애 마지막 봉사를 하겠다고 결심하게 됐다. ­민자당으로는 정후보가 승산 없는 카드라는 시각도 있는데. ▲서울은 야성이 강하지만 지난 광역선거때는 여당이 압승했다.서울시민은 현명하게 판단하는 자질을 갖고 있다. ­김대통령의 신임을 받은 배경은. ▲지난 2년반동안 개인적인 관계를 지속,독대기회가 많았다.27년동안 화곡동 서민주택단지에 살며 느낀 교통·환경문제를 대통령에게 개진해왔다.여기에 깊은 인상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문교장관 재직 때 1천5백여명의 교사가 교단을 떠났는데. ▲당시 교원노조에 가입한 1만5천명의 교사 가운데상당수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을 했다.여러 차례 설득 끝에 1만3천5백여명은 탈퇴했지만 1천4백60여명이 조직에 얽매여 나오지 못했다.이후 복직을 위해 애썼다.전교조문제는 어느 면에서 교육을 구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당시 대응방안에 후회는 없다.다만 제자와 후배를 교단에서 떠나보내면서 인간적 고뇌가 있었다. ­91년 외대사건은 광역의회선거를 위해 자청한 것이라는데. ▲국회에서 일부 야당의원이 그같은 이야기를 했다.그러나 평생 살아온 내 삶을 이해한다면 그렇게 책략을 부릴 사람으로 보지는 않을 것이다. ­92년 평양에 갔을 때 술에 취하는 바람에 훈령조작이 가능했다던데. ▲당시는 정말 정신을 바짝 차리고 회담에 임해도 평양측에 이용당하지 않을까 할 만큼 긴장을 풀 수 없는 상황이었다.술에 취하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었다. ­교육학자로서 「교육시장」을 선언할 뜻은. ▲교육은 외형적·제도적·내재적 측면에서 바라보아야 한다.그러나 우리는 제도만 바꾸면 해결된다고 생각한다.무엇보다도 교육재정이 중요하다.앞으로GNP의 5%이상을 교육에 투자해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또 내재적 문제는 해방직후 중학생대상의 엘리트교육을 지금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는 데 있다.현재 중학생의 30%는 교과내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교육학자로서 책임이 있지 않나. ▲그렇다.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실업고의 비율을 높여야 한다.우리는 인문계가 68%에 달한다.평준화 이후 돈안드는 인문계 고등학교만 늘리다 보니 이런 결과를 초래했다. ­자녀에게 과외를 시킨 적이 있나.과외비는 얼마나 썼나. ▲딸만 넷을 두고 있다.셋째딸이 음악을 하기 때문에 첼로 레슨을 시키는데 적지않은 돈이 들었다.그러나 다른 과외는 시키지 않았다. ­교수시절 학점이 짜 인기가 없었다는데 서울시민의 인기를 얻을 수 있는가. ▲30년동안 교수생활을 하며 원칙을 고수,학점이 짰다.그러나 강의가 불충실하다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예산및 인허가권등의 권한이 구청장에게 있는 데 공약을 남발하는 것이 아닌가. ▲물·쓰레기·도로·교량건설문제등어느 하나 다른 기관과 연결되지 않은 것이 없다.서울시장에게는 이런 것을 조정해주는 역할이 필요하다. ­서울시 부채가 4조3백억원인데 해결책은. ▲부채의 85%가 지하철에서 온 것이다.지하철 자체에서 이를 갚는 노력을 해야 하며 자동차주행세 신설등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승용차 10부제 연장에 대한 견해는.남산 제모습 찾기 차원에서 하얏트호텔을 철거하는 방안에 대해서는. ▲10부제 연장은 장기적인 차원에서 검토해야 할 문제다.남산 외인아파트 철거 때 1천8백억원이 들어갔는데 그런 일을 해야 하는지 의문이다. ­딸만 넷을 둔 것은 남아선호사상 때문이 아닌가.여성교육투자에 대한 견해는. ▲나는 둘로 그치려 했다.부모님의 기대로 한번만 더,한번만 더 하다가 넷이 됐다.(웃음)그러나 딸들은 모두 자식이 하나인데 다 아들이다.세상은 참 공평하다고 생각했다.여성이 전문직에 진출하려면 탁아문제가 해결돼야 한다.따라서 산후휴가제가 아니라 산후휴직제가 제도화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문교부장관과 총리 재임시절 「노」라고 말한적이 있는가. ▲「노」라고 한 적도 적지 않다.나는 사사건건 「노」라고 하는 사람이 아니라 분별있는 「노」를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정원식·조순 후보 관훈토론 평가/시정진단·처방에 비슷한 인식/논리정연… 능란한 말솜씨 발휘/정/어눌한 언변… 차가움 다소완화/조/10부제 연장 지금은 확답 유보/정/“필요하다면 계속해야” 긍정적/조/주행세 지방세 전환 재정확보/정/담배세·종토세 세목조정 주장/조/탁명환씨사건 생겨 교회 옮겨/정/이념문제 연루 간접으로 시인/조 『마음 편하게 살 수 있는 서울』(정원식 후보),『깨끗한 서울,포청천 시장』(조순 후보). 민자·민주 양당의 서울시장 후보들이 23∼24일 이틀동안 관훈토론회에서 내세운 슬로건이다.두 후보들은 앞으로 서울시정을 이끌어 나가기 위한 포부와 개인신상문제 등을 놓고 때로는 껄끄럽기도 한 패널리스트들의 질문공세에 소신으로 맞섰다. 민자당의 정 후보는 논리정연하고 때로는 지나칠 정도로 능란한 말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했고,민주당의 조 후보는 조금은어눌한 언변으로 차가운 인상을 다소 누그러뜨렸다는게 TV 녹화중계로 두 후보를 대한 유권자들의 대체적 평가다. 67세 동갑인 때문인지 두 후보는 여야라는 입지 차이를 뛰어넘어 서울시의 문제점에 대한 진단과 처방에서는 비슷한 인식을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 후보는 공약으로 ▲교통난 해소 ▲주택난 해소 ▲환경개선 ▲민생치안 확립 ▲안전사고 예방 등 5대 과제를 제시했다.조후보는 ▲교통난 해소 ▲안전대책 마련 ▲부정 척결 등 3대 과제를 해결하겠다고 선언했다.두 후보는 이밖에 노인·여성·교육문제 등 짚고 넘어갈 것은 빠뜨리지 않았다. 구체적 사안에 들어가서는 두 사람이 다소 입장차이를 보였다. 교통난 해소방안 가운데 10부제 연장문제를 놓고 정후보는 『지금 답변하기 어렵다』고 확답을 유보했고,조후보는 『필요하다면 계속 해야』라는 조심스런 입장을 피력했다.서울시청 이전계획에 대해 정후보는 『시민 합의만 되면 지금도 괜찮다』고 했고,조후보는 『민선시장에게 넘겨야 할 것』이라는 반응을 보였다.서울시의 재정확보 방안으로 정후보는 자동차 주행세를 지방세로 전환할 것을 제시했고,조후보는 담배소비세와 종합토지세의 세목 조정을 제시했다. 두 후보를 곤혹스럽게 만든 것은 「전력」과 관련한 집요한 질문공세였다. 정후보는 문교부장관 재직시 전교조 해직사태에 대해 『체제수호 차원에서 불가피한 조치였다』라고 해명했다.한국외국어대 밀가루 세례사건이 당시 광역선거 분위기를 반전시키려는 여권의 의도적 전술이 아니었느냐는 시각에는 『순수한 마음에서 마지막 강연을 한 것』이라고 고개를 저었다. 탁명환씨 사건으로 대성교회를 떠나 김영삼대통령이 장로로 있는 서울 충현교회로 옮긴 데 대해 『불미스러운 사건이 생겨 충현교회 목사로 있는 가까운 친구의 권유를 받아서』라고 교회를 옮긴 이유를 설명했다. 한편 민주당의 조후보는 육사교수로 재직할 때 이념문제로 재판을 받은 전력이 제기되자 『재판에서 무죄선고를 받은뒤 6년동안 근무했다』며 그 문제 거론이 음해라고 강조했다.또 경기중 재학시 「독서회」사건이란 이념관련 사건으로 졸업을 하지못한게 사실이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에선 『그 당시에는 그런 학생이 굉장히 많았고 후에 올바른 교육을 받고 훌륭한 국민이 되지 않았느냐』고 답해 그의 음해 주장에도 불구하고 질문을 간접시인하는 결과가 되기도 했다.
  • 김 교육장관의 일그러진 사관(사설)

    김영삼 대통령이 김숙희 교육부장관의 6·25및 월남참전관련 발언에 대한 책임을 물어 전격해임한 것은 당연한 조치다.우리는 김씨의 발언이 국무위원으로서 뿐아니라 국민으로서도 용납될 수 없다고 진노한 대통령과 똑같이 충격과 분노를 금할 수 없다.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인하는 일체의 언동에 대한 엄중한 경고이며 올바른 민족사관정립의 확고한 의지천명이자 강력한 촉구로 받아들여진다. 김씨의 문제발언은 『6·25는 명분이 약한 동족상잔이었고 월남전은 용병으로 참전해 명분이 약했다』는 내용으로 전해진다.6·25가 북한공산집단의 남침에 대항하여 자유민주주의체제와 국가적 정통성을 수호하기 위해 국군과 16개국 연합군이 피를 흘린 전쟁임은 국민학생조차 알고 있는 역사다.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월남전참전을 용병이라고 한다면 참전 16개국도 용병이라는 논리와 다를 바 없다.김씨의 발언은 역사와 정통성을 부인하고 국제관계마저 무의미화하는 망언이다.우리의 선열과 국군,그리고 참전용사들의 희생을 모독하는 좌파사관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우리는 김씨가 국가적 정통성을 부인하는 좌파적 사관을 갖고 있으면서 교육을 담당하는 부서의 장을 맡음으로써 국민과 대통령을 속인 기만행위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정부에 좌파적 사관을 가진 인사가 아직도 있다면 차제에 스스로 물러나야 할 것이다. 우리는 사관의 왜곡을 기도하는 좌파세력의 준동을 막고 올바른 민족사관의 정립을 위한 체제의 점검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작년에 중·고교 국사교과서시안에 「제주도 4·3사건」을 「4·3항쟁」으로,대구폭동사건을 10월항쟁으로 기술하여 말썽이 된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니다.좌파의 소위 진보사관은 학계와 운동권·정치권에까지 확산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어제 민주당이 6·25왜곡에 대한 견해는 제쳐둔채 대구참사와 연결지은 것은 유감이다.정치권이 정쟁에서 벗어나 민족사관의 재정립에 협력하는 자세를 보이기를 기대한다.
  • 남한 공산당 막바지 투쟁(새로 쓰는 한국현대사:18)

    ◎「국대안반대투쟁」선동… 미군정 곤경에/UN임시위 입국에 다급… 「2·7폭동」결행/경찰서 공격·수송기관 파업… 빨치산운동 계기로 □특별취재반 ▲황규호(문화부부국장급) ▲이용원( 〃 기자) ▲김성호( 〃 〃) ▲김경운(조사부 〃) 해방공간에서 남한의 공산주의자들은 해가 바뀔 때마다 그 얼굴을 달리했다.이는 공산주의 운동의 강력한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는데 해를 거듭할수록 투쟁은 극렬쪽으로 치달았다. 1947년의 공산당 투쟁은 남로당이 전해 가을에 주도한 국대안반대투쟁이 계속되는 가운데 3·22총파업과 7·27투쟁으로 이어졌다.이 일련의 사건들은 모두 박헌영이 이끄는 남한 공산주의자들이 몰락이냐 재기냐의 기로에서서 선택한 사건들이라 할 수 있다.다시 말하면 전해의 투쟁전략,신전술에 따른 9월파업과 10월 폭동에서 잃어버린 입지를 생존차원에서 만회하려는 궁여지책이었던 것이다.어떻든 그 결과는 남로당,즉 남한 공산당의 붕괴를 자초했다. ○전국적 동맹휴학 지시 우리는 여기서 47년부터 유혈 폭력화되기 시작한 남한 공산주의자들의 일련의 조직적 투쟁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그 하나가 미군정 법령 102호로 발효된 「국립서울대학교 창설에 관한 법령」이 도화선을 이룬 국대안반대투쟁이다.이 사건은 조선공산당의 조종을 받은 학원내 세포들이 전국적인 동맹휴학을 선동한 46년 9월에 일어났다.미군정이 국립 서울대학교을 창설하면서 미군정법령 102호를 통해 직접적인 학원 간섭의도를 보였다는 이유로 서울대 상대 공대 사범대 학생들이 동맹휴학에 들어간 것이 시발이 되었다.이어 9월5일 서울대 이공학부 교직원 38명이 총사직을 결의했고 1947년으로 접어들면서 반대투쟁을 본격화함으로써 군정을 곤경에 빠뜨렸다. 이 국대안은 일부 여론에서도 반대입장을 밝혔지만 이처럼 전국적인 규모로 확산된 것은 조선공산당의 역할이 컸다.그리고 그 배후에는 소련이 버티고 있었다.당시 북한에 주둔했던 소련군 사령부 교육담당관 니콜라이 그즈노프 소좌가 남로당 위원장에게 내린 지령이 바로 그 사실을 입증한다.그 내용은 『소련의 입장을 유리하게 하기 위해 남조선 인민들은 남로당의 계획밑에서 광범한 혁명을 일으킬 임무가 있다.남조선에 있는 모든 학교에서는 광범위하고도 조직적이며 맹렬한 투쟁을 일으키는데 있어 제 1차로 동맹휴학을 합법적으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276명 피검… 지방당 타격 「국립서울대학교 창설에 관한 법령」발표는 1차 미·소 공위 결렬후 미군정의 정책에 정면 반대하는 소위 신전술을 폈던 조선공산당에게 호기로 작용했다.그래서 좌익학생단체인 민주학생연맹(민학련)과 학원내 당 세포를 통해 국대안 반대투쟁을 대대적으로 벌일 것을 지시했던 것이다. 1947년에 접어들면서 미·소 공위재개 분위기가 무르익었다.남로당은 공위에서 소련의 입장을 우위에 두기 위해 당세확장에 나서는 한편 정치투쟁을 보다 강화했다.미군정도 이에맞서 2월 한달동안 좌익계 인사들을 대대적으로 검거하자 남로당은 3월10일 전평과 지방당을 조직적으로 가동시켰다.이것이 바로 3월 22일 서울 부산 광주 인천 부평 대구 등 주요도시와 공업지대에서 24시간 파업에 들어간 3·22총파업이다. 남로당은파업을 통해 노동자 권리보장과 박헌영 체포령 취소,구속 전평간부 즉시 석방,좌익신문 정간 취소 등을 구호로 내걸었다.이 파업으로 2백 76명이 피검되는 등 남로당은 지방당 조직이 큰 피해를 입었다.설상가상으로 우익으로부터도 종전보다 더 심한 공격을 받는다.남로당으로서는 이 3·22파업의 후유증 청산이 절실했다.그래서 남로당은 후유증 청산과 5월21일 재개된 미소공위에서 유리한 입지확보를 노려 당원 5배가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였다. 그러나 공위가 다시 교착상태에 빠지자 공위의 성공을 확신했던 남로당은 당황한 나머지 공위 진전을 위한 군중동원을 기도하기에 이른다.이는 7월27일 전국에서 열린 「미소공위경축 임시정부 수립촉진 인민대회」로 나타났다.전국적으로 열린 인민대회에서는 모두 남로당의 지시에 따라 결정서를 채택했는데 미소공위에 직접 전달되었다.이 결정서는 반탁진영 때문에 공위가 난관에 봉착했다는 것과 실력으로 우익 테러를 분쇄할 것이라는 내용이 들어있다.또 미소공위 협의 대상에서 민전이 가장 적합한 단체라고 강조한 결의서는 임시정부 수립에서 반탁진영을 제외시킬 것과 국호는 인민공화국으로 해야한다는 주장을 담았다. 당시 소련대표 스티코프는 이에 보조를 맞춰 8월 1일 덕수궁 석조전 회의실에서 부랴부랴 기자회견을 가졌다.그는 이 회견에서 『공위의 급속추진을 고대하고 있는 조선인민들의 간절한 요청을 달성하기 위해 공위 본회의에서 반탁투쟁위원회에 가입한 소수정당 및 단체문제로 업무의 지연을 일으킬수 없으므로 1백47개 정당,단체에 대한 개별 조사를 시작할 것을 제의했다』고 밝혔다.이 개별조사 대상 정당 및 단체문제는 미소공위 결렬의 주요인으로 작용했다.남로당의 7·27투쟁은 일사분란한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공산당은 아무런 수확을 거두지 못했다. ○남로당의 몸부림 무위로 미소공위가 결렬되고 한국문제가 유엔에 이관돼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1948년 1월8일 서울에 들어오면서 남로당은 다급해졌다.남한만의 단독선거는 곧 남로당 거점 상실을 의미한 상황에서 극렬 저지투쟁은 최선책일 수 밖에 없었다.2월7일 민전과 전평을 내세워 전국에 걸쳐 조직적인 폭동 파업을 결행한 것도 이 때문이다.미국 버클리대 교수를 역임한 R A 스칼라피노는 자신의 저서 「한국공산주의 운동사」에서 이렇게 전한다.『엄청난 폭력을 수반한 파업이 일어나자 수송기관들은 태업에 들어갔고 숱한 경찰서가 공격을 받았다.정부관리들이나 보수파의 지도자 가운데 5명이 죽고 13명이 부상,납치됐다.파업 참가자 가운데 28명이 죽고 10명이 부상당했으며 1천4백89명이 체포됐다』. 미군정의 마지막해 1948년의 2·7폭동은 남로당이 무장투쟁 전술을 도입한 계기가 됐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2·7폭동은 각 지방에 「야산대」라는 무장게릴라 조직(빨치산)을 만들어낸 계기가 됐던 것이다.거의 전쟁이나 다름없었던 제주도 4·3사태도 그 흐름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평가될 수 있다.그러나 남로당의 저지투쟁은 무위로 끝났고 마침내 제주도르 제외한 남한 전역에서 5·10선거가 치러졌다. ◎서울신문 특별취재반 CIC문서 발굴/“하지가 박헌영에 도망칠 시간 주었다”/“체포땐 미소공위 재개에 걸림돌”판단/46년 10월 월북… 남로당 「10월 폭동」지령 해방정국에서 남한 공산주의 운동을 주도한 박헌영은 미군정 입장에서는 매우 불편한 존재였다.그래서 체포령을 내렸지만 실제 붙잡지 않고 쫓아버렸다.이는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이 미국립공문서 보존관리국(NARA)에서 찾은 주한미군사령부 방첩대(CIC)문서를 통해 밝혀냈다. 이 문서는 1946년 11월 12일 한미공동소요대책위원회 13차회의에서 보고된 「박헌영의 구속영장에 관한 장택상의 진술」.의장(김규식을 지칭)이 박헌영을 체포하는데 경찰이 실패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대해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이 답변한 형식으로 되어 있다.장택상은 여기서 박의 체포명령은 결코 못 받았다고 전제하면서 얼마후 CIC의 니스트 대령으로부터 찾아보라는 말은 들었다고 답변하고 있다. 그러나 하지 장군으로부터 니스트 대령의 하는 일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명령이 있었다는 사실을 증언한 장택상은 하지 장군이 박에게 도망칠 수 있는 시간을 일부러 벌어 준 것으로 보았다.따라서 박이 체포령을 피해 도망갔는데 이 대목은 하지장군과 러치 장군,맥그린 대령 등이 증명할 수 있다고 장택상은 덧붙였다. 미군정 최고책임자 하지가 박헌영 체포를 지연시킨 까닭은 아마도 소련을 의식한 배려로 풀이될 수 있다.박헌영의 체포는 자칫 미소공위 재개에 걸림돌이 될지도 모른다는 판단과 함께 박이 숨어버린다면 공산당이 무력화될 수 있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어떻든 박헌영은 그해 10월초 체포령을 피해 북으로 넘어갔다.그동안의 증언을 종합하면 박은 38선이 가까운 해주에서 남한공산당을 조종한 것으로 알려졌다.그러나 소위 국대안반대투쟁과 10월 폭동을 해주에서 지령함으로써 하지가 노린 공산당 무력화 노력은 실패했던 것이다.
  • 어음부도율 4월들어 진정세/서울 0.11%

    ◎3월은 「덕산」 여파 82년이후 최고 13년 만에 최고치로 치솟았던 어음부도율이 진정세로 돌아섰다. 3일 한국은행에 따르면 올 들어 서울지역의 어음부도율은 1월 0.09%,2월 0.14%,3월 0.15%로 지난 82년 이철희·장영자 어음 사기사건 이후 최고치로 치솟았다가 4월에는 0.11%로 전달보다 0.04%포인트 떨어졌다.부도업체 수도 3백25개,4백62개,5백28개에서 4백46개로 줄었다. 부도업체 수에서 전국의 40% 이상,부도액에서 전국의 60% 이상을 차지하는 서울지역의 어음부도율이 이처럼 진정세로 돌아섬에 따라 지난 3월 13년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던 전국의 어음부도율도 4월에는 내림세로 돌아설 것으로 예상된다. 3월의 전국 어음부도율은 덕산그룹 부도(2천6백93억원)의 여파로 전달보다 0.01%포인트가 오른 0.23%로 82년 5월 이·장 사건 때의 0.29% 이후 최고치였다.그러나 덕산관련 부도액을 빼면 부도율은 0.18%이다. 한편 올 1·4분기 중 3천81개 업체가 부도로 쓰러진 반면 4천3백59개 업체가 새로 설립돼,신설 법인수가 부도업체 수보다 1.4배 많았다.
  • 광주비엔날레/한국 근대화가의 대작 한눈에

    ◎9월20일부터 두달간 중외공원 문화벨트서 특별전/김환기·박수근·이쾌대 등의 60점 모아/격동기의 서구예술 주체적 수용 조명/「시상경력」조양규 그림·천재 김관호의 3점 첫 공개 구한말 개화기부터 일제시대까지 한국미술의 여명기를 화려하게 장식했던 대표적 근대화가들의 예술세계를 재조명하는 대대적인 전시회가 처음으로 마련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 오는 9월20일부터 11월20일까지 광주 중외공원 문화벨트 일원에서 열리는 광주비엔날레의 특별전으로 마련된 「한국근대미술 속의 한국성」이 화제의 전시회.천부적 재질과 선각자적인 삶으로 미술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화가 17명의 작품 60여점을 통해 물밀듯 밀려오는 서구사조와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그들이 어떻게 시대상황을 수용하고 한국성을 지켜나갔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이번 전시회의 취지다. 이 시대 작가들의 작품은 일제시대와 6·25라는 엄청난 재난을 겪으면서 상당부분 파괴되거나 유실됐고,험난한 격동의 역사 속에서 사상적 이유 때문에 평가가 유보된 것도 많아이같은 전시회를 마련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었다.그러나 지난 88년 10월 납·월북 화가들의 복권을 계기로 근대미술사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고 연구가 활발해져 역사의 그늘에 가려있던 이 시대 화가들에 대한 자료가 속속 발굴되면서 재조명작업이 가능하게 된 것. 이번에 소개되는 화가는 한국미술의 여명기에 서양회화를 도입한 김환기(1913∼1974),오지호(1905∼1982),나혜석(1896∼1946),박수근(1914∼1965),이중섭(1916∼19 56),이인성(1912∼1950),이쾌대(1913∼1970) 등.또 외래문화에 맞서 우리 전통회화의 맥을 이어온 구한말 초상화가 채용신(1850∼1941),산수화가 변관식(1899∼1976)과 채색한국화 개척자 박생광(1904∼1985),한국화에 현대적 기법을 가미해 독창적 화풍을 일군 이응노 화백(1904∼1989) 등의 작품들이 소개된다.특히 이번 전시회에서는 기록으로만 전해져오던 서양화가 김관호(1890∼?)와 조양규(1928∼?) 등 두 천재화가의 작품이 최초로 공개돼 관심을 모은다. 평양 태생으로 도쿄미술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김관호는 서양화의 본격적인 도입기였던 1910년대 가장 두각을 나타냈던 화가였다.도쿄미술학교를 수석졸업(1916년)했고 졸업작품 「해질녘」으로 같은 해 10월 일본 문부성이 주최하는 문전에서 특선을 차지하는 등 그의 활약은 「사건」으로 받아들여질 정도로 눈부셨다.그러나 지금까지 알려진 그의 작품은 도쿄미술대학에 소장된 「해질녘」과 「자화상」 단 2점이 전부였다.그러다 이번 전시회의 큐레이터인 평론가 윤범모 교수(경원대)에 의해 도쿄미술대 동창생인 한 일본인이 그의 작품 3점을 소장하고 있음이 확인됐고 이번에 국내에 선보이게 됐다. 조양규는 사상경력 때문에 일본으로 건너가 전후 50년대 일본화단을 주름잡았던 한국인 화가.제주4·3사건에 연루돼 48년 밀항했던 그는 60년 행방불명되기 전까지 인간소외를 강렬한 필치로 묘사한 작품들을 발표,우리 근대미술사에서 최초의 리얼리즘 작가로 꼽힌다.
  • 제주사태 다룬 대하소설 「한라산」 집필/현길언씨(인터뷰)

    ◎“소년기에 겪은 「4·3사태」 아직도 생생” 『제가 국민학교 2학년인 아홉살 때 제주 4·3사태가 터졌습니다.그후 수없이 이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오면서 제 소년기의 체험은 선명하게 되살아났고,급기야 4·3사태는 과거가 아닌 현재진행형으로 항상 곁에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 현대사의 비극인 제주도 4·3사태를 다룬 대하소설 「한라산」을 집필하고 있는 중견작가 현길언(55·한양대 국문과 교수)씨.4·3사태를 앞뒤로 한 현대사의 격동기를 담은 「한라산」은 모두 5부 9권으로 제주 4·3사태 50주년이 되는 98년 완간될 대작인데 그 1부(1권),2부(2권)가 최근 문학과 지성사에서 출간됐다. 현씨의 고향은 남제주군 남원읍 수망리.당시 1백10여 가구 중 절반 가량이 초토화됐을 정도로 4·3피해의 한복판에 있었다.그런 만큼 작가 자신도 『그 악몽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고 토로한다.하지만 이 작품은 그같은 개인체험을 날것인 채로 전달하기보다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객관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는 점에 진정한 미덕이 있다. 「한라산」은 4·3사태가 발생하기 전 일제말기 상황에서부터 출발한다.1부 「배반의 땅」에서는 2차대전이 끝나기 전 일본이 제주도를 본토사수의 교두보로 설정하고 7만명의 대병력을 섬에 배치하던 시기를,2부 「성조기시대」에서는 미군정 실시 후 47년 소위 「제주 3·1사건」 때까지를 시대배경으로 제주사람들의 일그러진 삶의 흔적을 더듬는다.4·3사태의 전사적인 성격을 띤 이 부분에서 현씨는 사태의 발생원인을 추적하는데 힘을 쏟는다. 『제주섬은 이미 2차대전 끝무렵부터 미군의 일본본토 공략기지로 설정됐고 일본 또한 본토사수를 위한 전략요충지로 여겼기 때문에 양국간 대규모 무력충돌은 어느 정도 예상된 일이라고 할 수 있어요』 요컨대 4·3의 비극은 미·일 등 외세의 대립에서부터 원초적으로 그 씨가 뿌려졌다는 게 작가의 기본시각이다. 그는 이어 제주도가 갖는 주변부적 성격도 4·3사태의 한 원인이 됐다고 진단한다.중심부 정세에 어두운 변두리 지역 이상주의자나 모험주의자들의 명분론은 이념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을 이념의 추종자처럼 만들어버렸으며,사태의 진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중심부세력의 오판은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는 것. 현씨는 『나머지 3·4·5부의 집필을 통해 아직도 아물지 않는 4·3의 상흔을 달래고 「한라산」을 4·3문학의 완결편으로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 불가리아 대통령/「반김일성」 북 유학생 도왔다

    ◎첼리프와 북한인사이 얽힌 비화/62년 북한학생 4명 도피주선/평양소환 저지… 함께 민주운동 국빈으로 우리나라에 온 젤류 젤레프 불가리아 대통령이 북한 망명유학생들의 정신적 지주였고 아직도 이들과 호형호제하는 사이인 것으로 확인돼 화제다.특히 망명유학생들의 대표격인 최동성씨(56·함북 길주군 동해면)는 이번 젤레프대통령의 방한에 「친구」로 공식수행원에 포함됐다. 최씨가 젤레프대통령과 인연을 맺은 것은 56년 10월 소피아대 화학부 유학시절.최씨는 소피아대학의 외국유학생 어학능력 향상을 위한 프로그램에 따라 철학부 3년생이던 젤레프등 불가리아 학생 3명과 6달동안 기숙사의 같은 방을 사용하도록 배정됐다.그뒤 10년동안 최씨는 후일 공산주의 비판으로까지 연결되는 젤레프의 개혁주의에 영향을 받게된다.이 영향으로 최씨는 62년 5월 흐루시초프 소련공산당 서기장의 스탈린비판에 따른 비판사상의 유입을 저지하기 위해 북한당국이 유학생들을 일제히 귀국하도록 했을때 다른 유학생 3명과 함께 「반김일성선언문」을 작성,소련정부등에 우송하고 불가리아에 정치적 망명을 요청했다. ○북과 단교까지 검토 「반김일성 선언문」을 제일 먼저 보여준 사람도 젤레프대통령.최씨등은 망명신청후 젤레프의 하숙집등을 전전하며 도피생활을 하다 그해 8월 소련의 조정에 따라 불가리아 체류를 허락받게 됐다.그러나 이들의 체류허가도 잠시,북한은 8월말 이들을 체포하기 위해 2명의 공작원을 평양에서 파견,소피아 시내 영화관 앞에서 뭇매를 때리고 북한대사관 지하실로 끌고 갔다.약50일동안의 구금을 거쳐 북한대사관은 그해 10월 19일 최씨 등을 아에로플로트편으로 평양으로 압송하기 위해 공항으로 데리고 나가지만 불가리아당국의 연락을 받은 젤레프등 불가리아 교우들의 「저항」에 부딪혀 최씨등을 풀어주어야 했다.북한과 불가리아 정부가 상대방 대사를 축출하며 단교까지 검토했던 유명한 사건이다. 젤레프는 박사학위 논문에서 레닌을 부정적으로 묘사,65년 공산당에서 축출되면서 민주투사의 길을 걸었다.89년에는 재야 17개 단체로 구성된 민주세력 연합 의장으로 피선되고,92년에는57%의 지지를 받아 임기 5년의 대통령이 됐다.젤레프의 민주화 역정을 최씨등이 지원했음은 물론이다. ○4명 국적취득 허용 이는 대통령에 당선된 젤레프가 당선후 첫 사업으로 국적이 없던 이들 4인의 국적취득을 허용,최씨등 2명은 불가리아 국적,나머지는 한국국적을 취득토록 한데서도 읽혀진다.그때 젤레프대통령은 최씨에게 『한반도통일을 위해 노력하는 한국인은 4천3백만명이나 있지만 이를 제대로 이해하는 불가리아인은 없다』면서 불가리아 국적을 가질 것을 권유했다고 한다.최씨는 현재 스타라자고라의 화학비료공장에 근무하고 있다.
  • 4·3은 말한다­3/제민일보 4·3취재반(화제의 책)

    ◎미군정의 주민토벌작전 자료·증언 통해 밝혀 한국현대사의 비극이면서 아직 그 실상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제주 4·3사건」의 진실을 파고드는 역사실록 셋째권이다.지난해 나온 1권이 해방에서 「4·3」에 이르는 배경,2권이 「4·3」의 발생과 「5·10 단선 거부」를 다룬데 이어 3권에서는 경비대의 토벌작전이 강력하게 전개된 반면 무장대 공세는 비교적 약한 시기인 19 48년 5월12일부터 10월19일까지의 과정을 소개했다. 미군정은 현지주둔 경비대 연대장을 강경파로 교체하고 미군 대령을 최고 사령관으로 파견하는 한편 군경 병력을 대폭 늘린다.이와 함께 미군 방첩대(CIC)는 「해안선에서 5㎞이상 떨어진 지역을 적지로 간주해 거주자를 토벌하는」 초토화작전을 구상한다.대량 인명살상이 예비된 것이다.취재반은 이같은 내용을 각종 자료와 증언을 통해 밝혀냈다. 부록으로 ▲4·19직후 실시된 국회의 4·3조사활동자료 ▲당시 국회조사단에 접수된 희생자 1천9백17명의 명단 ▲소련에서 발행한 관련 저술들을 실었다. 이 시리즈는 지난 93년한국기자상을 받았으며 현재 2권까지 일본에서 번역출간됐다. 전예원 8천원.
  • 부천도세 사건/최고 15년 구형

    【인천=김학준 기자】 부천시 세금횡령사건으로 기소된 19명의 피고인에게 징역 15∼1년이 구형됐다. 인천지검 특수부 이재원 검사는 14일 하오2시 인천지법 103호 법정에서 제2형사부(재판장 이성용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부천세금비리사건 결심공판에서 3억6천만원의 세금을 횡령한 혐의로 기소된 임동규(37·전 소사구 세무과 기능직)피고인에게 징역 15년,세무과직원과 짜고 4천3백만원을 횡령한 한상설(38·전 법무사사무소직원)피고인 등 3명에게 징역 5년을 각각 구형했다.
  • 깨끗한 사회구현(민주화에서 세계화로:7)

    ◎성역없는 사정… 「부패고리」 지속적 절단/동화은·슬롯머신비리 의원·고검장 구속/「율곡사업」 “메스”… 전총장포함 「별」 42개 “추락”/인천 「도세」 충격… 중하위직과 토착비호세력 발본 역점 슬롯머신수사가 막바지에 달한 93년5월 김영삼 대통령이 여성계지도자들을 위해 마련한 오찬석상의 분위기는 여느때와 달랐다. 특히 여성유권자에게는 부드러운 이미지의 대명사로 통하던 김 대통령이 『나는 어떤 특정사안 하나하나에 대해 얘기하지는 않지만 부정부패척결에는 성역이 있을 수 없다는 원칙을 감사원장과 법무부장관에게 특별지시했다.골수에 맺혀 있는 「한국병」 즉 부정부패를 척결하지 않고서는 「신한국」이 결코 이뤄질 수 없다』고 역설하자 좌중은 매우 숙연해졌다. ○한점 의혹도 없게 김 대통령은 같은 날 교정대상 수상자 접견자리에 배석한 김두희 당시 법무부장관에게도 『한점의 의혹도 남지 않도록 파헤치라』고 재차 지시했다. 대통령의 이같은 지시는 슬롯머신사건 및 동화은행 비자금수사와 관련,검찰내부에 비호세력이있어 수사가 축소·은폐되고 있다는 여론이 비등하고 있는 상황에서 나온 것이어서 관심을 증폭시켰다.그동안 사정의 최고기관임을 자임해온 검찰로서는 청천벽력이었다. 이 지시가 검찰내 비호세력 수사의 「전환점」이 돼 이건개전대전고검장의 구속 등 「성역 없는 사정」으로 이어졌다. 서울지검의 한 간부는 당시 긴박한 상황에 대해 『되돌아보고 싶지 않은 과거다.다만 이 사건을 계기로 검찰이 깊은 반성과 함께 환골탈태해야 한다는 위기의식을 느낀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평소 정부정책에 대해 후한 점수를 주지 않기로 이름난 대한변협도 『군과 검찰 같은 권력집단의 「구각」을 깨는 일은 김 대통령만이 가능했다』고 평가한다. 고위공직자의 재산공개 역시 사정의 고삐를 죄는 데 불을 댕겼다.이 과정에서 사법부와 검찰의 수장격인 김덕주 전대법원장과 박종철 전검찰총장이 전격사퇴하기에 이르렀다. 법원의 한 고위관계자는 『공직자 재산공개는 깨끗한 정부를 구현하기 위한 제1보였다』고 말했다. 문민정부의 위력을 실감케 한 이들 사건은 공직사회의 「코페르니쿠스적 의식전환」을 요구한 셈이다. 또한 과거 군사정권의 총애를 받으며 성역중의 성역으로 꼽히던 군부도 사정의 도마위에 올라 국민의 「심판」을 달게 받았다. 군전력증강사업과 관련된 율곡비리사건으로 70여명에 이르는 군관계자가 군복을 벗었다.특히 해군과 공군의 진급인사와 관련된 상납비리는 군의 감춰진 치부를 만천하에 드러내면서 「별값」을 땅에 떨어뜨렸다. 이상훈·이종구 전국방장관과 김종호·김철우 전해군참모총장,정용후·한주석 전공군참모총장,조기엽 전해병대사령관 등 군 최고수뇌부의 양어깨를 장식하던 42개의 별이 이틀에 한개꼴로 떨어졌다. 조직폭력배의 서식처가 돼온 슬롯머신업소에 대한 수사도 궤도를 되찾아 슬롯머신업계의 「대부」 정덕진씨 형제 뒤에 숨어 있던 박철언 전의원,이전대 전고검장,엄삼탁 전안기부기조실장,천기호 전치안감 등 「비호세력」이 철퇴를 맞았다. ○제2사정 신호탄 그러나 지난해 9월 터져나온 인천북구청 세무비리사건은 그동안의 사정결과에 대해 다소 자만에 빠진 정부당국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이에 따라 사정의 무게축도 고위공직자 중심에서 중하위직으로 바뀌었다. 국민과 직접 접촉하는 중하위직 공직자의 고질적·구조적 부정부패가 아직도 고개를 숙이지 않고 있음이 증명되면서 「제2사정」의 신호탄이 오른 것이다. 정부의 강력한 사정으로 93년부터 2년동안 모두 8천2백5명의 부정부패사범이 적발돼 이 가운데 3천5백79명이 구속됐다.구속된 공무원만도 9백28명에 이르렀다. 93년2월 문민정부 출범 이후 「깨끗한 정부」를 표방해온 우리나라와 얼마전까지 「마니 풀리테(깨끗한 손)」로 전세계의 주목을 받던 이탈리아를 비교해보자. 김 대통령은 여전히 사정의 고삐를 죄고 있는데 반해 「마니 풀리테」를 시작한 줄리오 안드레오티 전총리을 비롯,부패척결을 집권공약으로 내세워 총리직에 오른 베룰루스코니 전총리 등 전직총리 3명이 거꾸로 사정의 대상이 돼 법정에 섰다.국민적 영웅으로 부상하던 사정의 견인차 피에트로 검사도 정치권의 외압에 의해 현직에서 물러났다. ○3천5백명 구속 지속적인 개혁을 위한 사정작업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탈리아의 사정활동이 주춤거리고 있는 것은 지도층의 도덕성 결핍과 부정부패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최고통치권자의 흠집 없는 도덕성과 강력한 부정부패척결의지가 여전히 개혁의 구심력이 되고 있다. 김영진 대검수사기획관은 『문민정부 출범 이후 고위층·사회지도층에 대한 사정작업이 성과를 얻은 틈을 타 지방토착세력을 중심으로 하는 중하위직 비리가 고개를 들고 있다』면서 『국민의 세금으로 봉급을 받는 국민의 공복임을 망각한 이 일부 중하위직 공직자의 구시대적 부정부패의식을 뿌리뽑는 데 올 한해 검찰의 모든 수사력을 집중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세계화에로의 길을 가로막는 부패세력에 대한 「제2의 사정전쟁」은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주요 사정 수사 일지 93.5 상지학원비리 김문기 전의원 구속 93·4∼9 동화은행비자금 안영모 전동화은행장 〃 김종인 전의원 〃 이용만 전재무장관(해외도피중) 93·4∼5 군인사비리 김종호 전해참총장구속 조기엽 전해병대사령관〃 정용후 전공참총장〃 93·5 슬롯머신비리 정덕진 구속 이건개 전고검장〃 93·6∼94·11 포항제철관련 황경로 전포철회장 등 4명구속 박태준 전포철회장(불구속기소) 93·7 율곡사업비리 이종구 전국방장관 구속 이상훈 〃 한주석 전공참총장 〃 김철우 전해참총장 〃 김종휘 전외교안보수석(해외도피중) 93·11 한화그룹외화유출 김승연 회장구속 94·1 상무대공사대금횡령 조기현청우종합건설대표등 2명 구속 94·3 농협비리 한호선 회장 구속 94·3 상문고비리 상춘식 상문고교장 구속 박병용 전국립교육평가원장 〃 94·4 대전엑스포수뢰 이정재 등 12명 구속 94·8 한전사장수뢰 안병화 전사장 구속 94·10∼11 인천북구청,부천세무비리 65명 구속 94·12도로공사비리 전병식 전사장 구속
  • 22개 전구청 도세 특감/서울시/강남·노원서 9억횡령 확인따라

    ◎등록세 70% 수기고지서 통용/징세자료 전산입력후 대조방침/강남구청장 직위해체 서울지검 특수3부(이정수 부장검사)는 29일 서울 강남구 개포동 K모 법무사사무소 사무장 김종량씨(49)와 전 강남구청 세무1과 왕약성(45·현 강동구청 세무1계장)씨가 짜고 등록세 및 교육세 9억4천3백60만원을 횡령한 사실을 밝혀내고 김씨를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법 위반(횡령)혐의로,왕씨를 횡령및 뇌물수수혐의로 각각 구속했다. 검찰은 또 김씨로부터 담당공무원을 소개시켜 달라는 부탁을 받고 왕씨에게 1천만원을 전달한 강남구청 위생과 이문기씨(40·7급)를 뇌물공여혐의로 구속했다. 김씨는 지난 4월21일 납세자 황모씨(서울 강남구 개포동)로부터 의뢰받은 등록세 및 교육세 8백82만원중 8만8천2백원만 납부하고 나머지 8백73만여원을 가로챈 것을 비롯,92년 10월부터 지금까지 강남 및 노원구청 관내에서 주민 2백13명이 납부 의뢰한 세금 9억4천여만원을 횡령한 혐의다. 검찰수사 결과 김씨는 시중 금융기관에 등록세 등 세금을 납부하면서 세액의 1% 또는 10%만기재한 영수증 5장을 제출,이중 등기소 제출용 2장과 납세자 보관용 1장의 납세액 부분을 특수지우개로 완전히 삭제한 뒤 실제 납세액을 다시 적어넣는 수법을 써온 것으로 드러났다. 한편 왕씨는 김씨의 세금 횡령을 묵인해주는 대가로 횡령한 세금 가운데 3억여원을 상납받은 것으로 밝혀졌다. ◎공무원 등 셋 구속 서울시는 29일 검찰 수사결과 강남·노원구청에서도 등록세 횡령사실이 드러나자 다른 구청에서도 이같은 사례가 있을 것으로 보고 22개 전구청에 대한 지방세 특별감사에 들어갔다. 이는 시가 92년부터 13개 지방세부과 및 징수를 OCR 고지서를 통해 전산처리하고 있으나 등록세는 총 건수의 70%,액수로는 40%가량이 수기고지서를 통해 납부되고 있기 때문이다. 시는 이에따라 본청 감사요원 80명을 투입,전산화 이전인 지난 90년부터 현재까지 징수한 등록세 등 지방세에 대한 과세·징수 및 수납자료를 전산 입력한 후 전산자료를 상호 대조할 계획이다. 시는 이번 감사에서 비위사실이 적발되는 대로 검찰에 고발하는 한편 관련자들을 중징계키로 했다. 시는 이같은 감사확대와 관련,30일 상오 9시 본청국장,22개 구청장 등이 참석하는 긴급간부회의를 가질 계획이다. 한편 시는 이날 강남구청 직원이 법무사사무소 직원과 공모,등록세를 횡령한 사실이 드러남에 따라 이번 사건의 책임을 물어 이광우 강남구청장을 직위해제했다. 시는 또 같은 수법의 횡령사건이 발생한 노원구청의 경우,법무사직원이 구청직원과 공모한 사실이 드러나면 이기재 노원구청장도 징계키로 했다.
  • 다시 새겨보는 갑술년의 정관가 어록

    ◎복지부동… 세감… ’94풍미한 말… 말… 말…/김 대통령 “필사즉생 각오로 개혁추진”/연이은 대형사고에 「사화총리」 생기고/개방압력·UR파고에 「신토불이」 대응 94년 한해는 숨가쁘게 진행된 국내외의 변화 만큼이나 숱한 말의 성찬이 베풀어졌다.김영삼대통령이 아시아·태평양 3개국 순방을 마치면서 밝힌 「세계화」구상은 새로운 국정목표로 주목되고 있다.유난히 사건 사고가 많았던 올해는 공무원의 「복지불동」이 도마에 올랐고 이어 「복지안동」(땅에 엎드려 눈치만 살핀다),「신토불이」(땅과 똑같이 움직이지 않는다)라는 시리즈도 등장했다.또 「사고 공화국」이라는 오명과 함께 「사과 총리」「사과 정권」이라는 유행어도 생겼으며 전국적으로 확산된 세무비리사건은 「세도」라는 신조어를 낳았다.유난히도 다사다난 했던 올 한해를 정·관가의 어록으로 되돌아본다. ○…김영삼대통령은 지난달 아시아·태평양 3개국 순방을 마친 뒤 귀국인사에서 『이시간부터 우리가 뛰어야 할 목표는 미래와 세계』라고 선언했다.이어 후속조치로 정부조직개편이 이루어졌고 정·관가는 세계화의 무드로 변모했다.김대통령은 통치권자로서 개혁의 지속을 유난히도 강조했다.김대통령은 올해가 개의 해임을 강조하면서 『개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 사랑을 받지만 또 한편으로는 달리는 기차를 보고도 짖는다.그러나 개가 짖는다고 뒤를 돌아볼 여유가 없다』(1·3신년하례),『변화와 개혁을 거부하는 집단에는 멸망의 길 밖에 없으며 개혁하지 않는 개인이나 집단은 불행의 길을 걸을수 밖에 없다』(4·17 신한국인과 오찬),『나는 「필사즉생 필생즉사」의 각오로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4·28 현충사 다례행제)고 심경을 밝혔다. 김대통령은 외교에 대해서도 『일거리가 들어오길 기다리는 창구형외교나 공관을 지키는 문지기형 외교가 돼서는 안된다』(2·3 미주 아주지역 공관장과 만찬),『1백년전 제1의 개국과정에서 범한 과오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 국제화를 통해 제2의 개국을 능동적으로 실천해야 한다』(2·25 취임1주년 회견)고 말했다. 김대통령은 대형사고가 발생하자 『한강대교 부실문제가 거론될 때 철저히 점검하라고 지시해 점검이 다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런 사고가 발생하다니…』(10·21 성수대교 붕괴사고소식을 접하고)라고 안타까워 했다.김대통령은 세무비리사건이 터지자 『9년전부터 못된 짓을 해오다가 새정부가 들어서자 엎드려 있더니 다시 그런짓을 했다.로마제국은 외침이 아니라 내부 부패로 망했다』(9·14)면서 엄단을 지시하기도 했다. 김대통령은 취임 2년째를 맞아 자신의 인기도가 떨어진데 대해 『지지율이 90%를 넘을 때는 너무 높아서 어지럽고 스트레스를 받았다.민주국가에서는 반대도 있을 것이니 이제야 정상으로 돌아온 것이다』(2·25 취임 1주년회견)라고 여유를 보였다.김일성사망소식을 듣고는 『보름후면 남북정상이 한자리에 모여 민족의 장래를 위해 허심탄회하게 논의하기로 했는데 이 소식을 접하면서 아쉽게 생각한다』(7·9)고 말했다.정경유착에 대해서는 『경제외적인 이유로 기업이 고통받는 일도 없을 것이며 정치적 배려로 특혜받는 예도 없을 것이다』(6·22 건설진흥촉진대회)라면서「윗물맑기」 의지를 과시하기도 했다. ○…정가에서도 말의 잔치는 여전했다.황락주국회의장은 『일하는 국회가 되기 위해서는 국회를 항상 열수 있도록 해야 한다.여당이건 야당이건 국가적 중요사건이 있을 때 소집을 요구하면 즉각 열릴 수 있게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3·23 국회제도개선위원회 회의)고 강조했으나 올 정기국회는 야당의 장기간 등원거부로 진통을 겪어야만 했다. 민자당의 김종필대표는 자신의 위상과 관련한 발언을 자주해 눈길을 끌었다.김대표는 『태양이 떠있을 땐 촛불의 존재는 미미하지만 어둠이 짙어져 밤이 되면 촛불의 빛은 더 밝게 온 세상을 비춘다』(1·15 중앙상무위 신년하례식)고 자신을 촛불에 비유했다.또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사불상」(사불상)이 당안에 있다』고 당내의 비판세력을 겨냥하기도 했다. 민주당의 이기택대표는 『북한핵문제 해결등을 위해 도움이 된다면 언제라도 김일성주석과 만날수 있다』(1·12 신년기자회견)고 기세를 올렸으나 정부에서 허가가 나지 않아 좌절됐다.이대표는또 정부의 개혁의지 퇴조를 지적하면서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국내외적 위기의 본질은 국가경영능력의 부재와 대통령의 독단적인 통치행태에서 비롯된 것이다』(4·6 기자회견),『과거 6공정권은 「물정권」이라고 했으나 현정권은 대통령·총리·장관을 합해 1년동안 10번 이상 사과를 한 「사과정권」이라 한다』(4·9 UR 비준저지대회 연설)고 목소리를 한껏 높였다. 김대중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이사장도 정치재개와 관련한 발언들로 주목됐다.김이사장은 『정치를 안하겠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만약 정치를 다시 한다 해도 민주당이나 계파를 업고 정치를 하지는 않을 것이며 그럴 처지도 못된다』(5·4 대전일보와 인터뷰)고 말했고 그뒤에도 『정치를 안한다는 결심에는 변함이 없다』고 누차 강조하기도 했다. 신민당의 김동길공동대표는 『나는 한글전용자라서 그런게 없다』(10·11 KBS프로에 출연)고 말해 양순직씨에게 「당권을 주겠다」고 써준 합의각서를 부인했으나 과학수사연구소의 감정결과가 진본으로 드러나 창피를 당하기도 했다.또박찬종전공동대표는 『나는 누구보다 개인적 인기가 높으므로 제3의 정파나 무소속 후보로 출마해도 (서울시장에) 당선 가능성이 가장 높다』(8·31일 기자회견)고 말했다. 여야대변인들의 설전도 치열했다.박범진 민자당대변인은 민주당 이기택대표의 장외투쟁에 대해 『지역구도 없는 사람이 전국민을 상대로 무엇을 하겠다는 거냐』(11·15)라고 비판했고 박지원 민주당대변인은 김종필대표의 통일발언을 비꼬아 『교육적으로나 통일을 위해서도 불필요한 언사만 일삼는 그분에게 우리는 바늘과 실을 보낼 것을 검토중』(8·31)이라고 말했다. ○…관가에서는 사건·사고와 관련한 발언들이 많았다.성수대교 붕괴사고로 취임한 최병렬서울시장은 『접시를 닦다 깨뜨리는 공무원이 뒷짐을 지고 있는 공무원보다 낫다』고 공무원의 복지부동을 질책했다. 총리권한 문제로 사임한 이회창전국무총리는 『안보정책조정회의에 회부,조정된 안건은 관계장관이 사전에 총리의 승인을 받아 시행하라』(4·21 총리실 간부회의)고 말했고 이어 취임한 이영덕전국무총리는 『국무총리는 대통령의 명을 받아 각 부처를 통괄하도록 돼있다』(4·30 취임기자회견)고 총리의 역할을 규정하기도 했다.
  • 부천 도세주범 2명 자수/박정환·임동규씨 구속

    ◎모두 11억원 횡령 확인/임씨 “상급자에 50% 상납했다”/박씨 “법무사·세무직원과 합작” 【인천=조명환·김학준·조덕현기자】 부천시 세금횡령사건을 수사중인 인천지검은 8일 이 사건의 주범으로 수배를 받아온 박정환씨(37·부천시 세정과 기능직)와 임동규씨(37·소사구 세무과 기능직)가 자수해옴에 따라 이들을 업무상횡령혐의로 긴급구속했다. 검찰은 이들을 상대로 개인별 횡령금액과 고위층에 대한 상납,고위층의 비호및 묵인여부등에 대해 철야조사를 벌였다. 박씨와 임씨는 지난 90년5월부터 올 9월까지 농협 부천시청출장소등 은행수납인을 위조해 가짜영수증을 만드는 수법으로 취득세와 등록세등을 각각 7억4천1백여만원과 3억8천5백여만원 횡령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같은 횡령액은 당초 감사원이 발표한 액수인 4억2천만원과 1억7천만원의 2배에 가까운 것으로 검찰의 조사가 진행되면 이들의 횡령액이 더 늘어날 것으로 여겨진다. 또 박정환씨는 지난 90년 농협 부천시청출장소 명의의 가짜직인 2개를 만들어 법무사직원 황희경씨(37·수배중)가 납부대행을 받은 등록세영수증에 가짜직인을 찍어주고 원미구청 세무과 직원 이병훈씨(32·기능직10급·구속)를 시켜 가짜영수증을 영수증철에 끼워넣게 하는 방법으로 세금을 가로채 셋이서 4대3대3의 비율로 나눠가진 것으로 드러났다.
  • 회색문명(외언내언)

    인류의 시멘트 사용 역사는 오래다.고대이집트 왕묘들에서도 쉽게 시멘트를 찾을 수 있다.하지만 그들은 콘크리트 구조물을 세우지는 않았다.시멘트는 단지 석재를 쌓은뒤 마무리 재료로만 썼다.건축재로서 시멘트란 원래 접착제용인 것이다. 시멘트가 물과 반응하여 굳어지는 현상에 착안하여 오늘에 쓰는 시멘트를 만든것은 18 24년 영국의 벽돌공 아스프딘이다.그는 석회석과 점토를 혼합해 불에 구웠다.이 모양과 빛깔이 포틀랜드섬 천연석과 비슷해 「포틀랜드 시멘트」라고 불렀다.그래서 시멘트의 바른 표기는 「포틀랜드 시멘트」다. 현대문명을 시멘트 빛깔의 회색문명이라고 표현한 것은 20세기 중반.세계의 모든 도시들이 시멘트로 빌딩짓기에 열성적으로 나섰기 때문이다.철근을 묶어주는 시멘트 콘크리트는 50년간 굳고 그다음 50년간 부서져 나간다.1백년간의 건물수명은 보장해 준다고 할수 있다.타 자재에 비해 값도 싸다.현대건축이 애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우리도 빠르게 회색문명국 대열에 나섰다.1991년에 1인당 시멘트소비량 세계 제1위국이 됐다.이해 수입량까지 합쳐 4천3백60만t을 썼다.1인당 1천13㎏.이는 1천㎏을 돌파한 세계최초의 기록이기도 했다.2백만호 건설사업이 얼마나 대단한 일이었던가는 이것만으로도 알수 있다. 그러나 이 기록경신은 부실의 기록도 동반하고 있었다.콘크리트 적정강도는 1백78.5㎏/㎤.하지만 91년 6월 수사대상이 됐던 레미콘사건은 불과 86.4㎏밖에 안 된다는 것이었다.여기에 염분조차 세척하지 않은 바다모래와 자갈이 배합됐다.콘크리트 1백년수명을 부실로는 몇년까지 줄일 수 있는가를 앞으로 실증해주는 실체가 될 것이다. 30층이 넘는 초고층 아파트에는 철골구조로 시공을 해야하고 콘크리트 강도도 3백㎏이 넘어야 한다.우리에겐 KS규격에도 3백㎏까지만 정해져 있다.이를 넘을 경우 품질관리를 할 기준마저 없는 셈이다.잘 지어도 회색문명인데 부실로 지은 것은 아마도 흑색문명이라 불리게 될지도 모르겠다.
  • 「12·12사태」「5·16군사정변」/중고교과서 현대사 용어 확정

    ◎「4월혁명」·「대구폭동사건」도/국사편찬위,교육부시안 수용 최근 검찰이 「군사반란」으로 규정했던 12·12사건은 오는 96학년도부터 사용될 중·고교 국사교과서에서 교육부시안대로 「12·12사태」로 기술된다. 또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은 당초 통상거부에서 「대서양 통상,통교거부」로 구체화되고 대구폭동사건과 여수·순천반란사건은 제주도 4·3사건처럼 발생일자를 명시,「대구10·1폭동사건」 「여수 순천 10·20사건」으로 표기될 전망이다. 국사편찬위원회(위원장 이원순)는 11일 교육부의 국사교과서 시안에 대해 심의를 벌여 4·19의거를 「4월혁명」,5·16군사혁명을 「5·16군사정변」등으로 서술하게 하는등 교육부안을 대부분 그대로 수용했다. 이에따라 교육부는 이같은 심의결과를 토대로 빠르면 이달중으로 국사교과서시안을 수정,최종 확정한 뒤 새교과서 집필을 위한 준거자료로 활용하기로 했다. 새 국사교과서 상권은 96년 3월부터,하권은 97년 3월부터 배포된다. 국사편찬위에 따르면 최근 검찰의 성격규정으로 가장 관심이 모아졌던 12·12사건은 여전히 논쟁거리인데다 학문적인 연구성과등도 미약해 의미를 부여하기 어렵다고 보고 교육부 시안대로 「12·12사태」로 기술하도록 했다. 대구폭동사건과 여수·순천반란사건는 제주도 4·3사건처럼 지명과 일자를 명시하기로 표기방식을 통일,「대구 10·1 폭동사건」 「여수 순천 10·20사건」으로 표기토록 했으며 8·15광복,6·25전쟁,10·26사태,5·18 광주민주화운동,6월민주항쟁등은 교육부안대로 통과시켰다. 특히 4·19의거는 비록 미완의 혁명이었지만 자유민주주의 수호에 가치관를 두고있다는 세계사적 관점에서 「4월혁명」으로 기술토록 하고 5·16군사혁명은 다수설을 존중,「5·16 군사정변」으로,동학혁명도 「동학농민운동」으로 서술토록 했다.
  • 경수로건설 기술진·물자 “대이동”/경수로 지원과 경협의 함수

    ◎경협·개방 자연스런 유도 계기로 대북한 경수로지원을 위한 국제간의 논의가 활발해져 빠르면 이달말쯤 지원기구인 코리아에너지기구(KEDO)의 구성,운영방안등이 확정될 것으로 보인다. 한·미·일 3국간의 「경수로회의」가 20일쯤 열리면 대체적인 KEDO의 윤곽이 드러날 전망이다. 이런 가운데 대북한 경수로지원 성사여부가 향후 정부차원의 남북경협에 디딤돌역할을 할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이와 관련,외무부의 한 관계자는 『경수로지원 사업을 남북경협진척의 가늠자로까지 파악하고 있다』고 말했다.통일원과 외무부 일각에서는 북한핵문제 해결책으로 나온 경수로지원문제를 「범민족공동사업」의 일환으로 추진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정부가 이번 북·미간의 핵타결을 계기로 실질적인 남북경협에 기대를 걸어온 것은 확실하다.「한국형」경수로를 제공하면 우리의 주도로 북한의 개방을 유도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즉,경수로를 제공하려면 우리의 인적·물적자원이 북한에 들어가야 하고 이 과정에서 남북화해는 물론 실질적인 경협의 토대가 마련되지 않겠느냐고 은근히 기대해온 것이다. 실제로 경수로지원을 위해서는 우리 기술진이 북한을 방문,경수로지형과 안전성을 분석하는등 타당성조사가 사전에 이뤄져야 한다.또 기술진만도 연2천여명이 건설현장에 참여하고 공사가 완료된 뒤에도 사후관리,안전점검요원이 상주해야 할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지금까지 3차례 가진 정부부처간 경수로지원대책협의회에서는 조만간 한·미 공동으로 사전답사팀을 구성,파북하는데 따른 기술적인 검토를 끝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협의회에서는 또 KEDO지원에는 「현금」보다 설비·인력 등 「실물」지원방침을 굳혀 대북지원에 따른 효과를 극대화한다는 전략이다. 정부의 이같은 기대와는 달리 일각에서는 경수로지원 자체는 제네바합의 이후 북한의 대남태도에서 보듯 남북대화,경협과는 연계되기 힘들 것이란 지적도 나오고 있다.이렇게 분석하는 사람들은 경수로지원계약은 「미국이 KEDO를 대표해 체결한다」는 합의문을 꼽는다.애초부터 이 부분은 북한이 한국을 배제시키기 위한「함정」이란 것이다.또 북한의 「핵이행시간표」가 제대로 이행돼 경수로건설이 착공되더라도 과연 북한이 한국의 주도적인 「기술인력」을 쉽게 받아들이겠느냐는 것이다.설사 기술진이 입북하더라도 「한국」의 인력이 아닌 KEDO기술진이 들어가는 것이며 건설인력의 대부분도 북한자체에서 동원될 가능성이 크다고 이들은 보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앞으로의 「경수로협상」에서 KEDO에서의 대표권을 미국과 나눠 계약대표권은 합의문대로 미국이,운영대표권은 한국이 갖는 「공동대표제」의 추진을 강력히 관철시켜나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남북경협 일지◁ △84·9·8=북한적십자사 수재물자제공 제의따라 물자인수 △84·11·15=제1차 남북경제회담,쌍방교역품목제시 △88·7·7=노태우대통령,남북관계 특별선언(교역문호개방 천명) △88·10·7=정부,간접교역 중심으로 한 남북경제교류 허용 발표 △89·1=정주영 현대그룹회장 방북,금강산 공동개발 등 경협사업발표 △89·2=효성물산,남북직항로(남포∼인천)로 북한산 무연탄 도입△89·7=코오롱상사,북한 대성은행과 처음으로 신용장개설(북한이 최초로 공식 인정한 남북거래) △90·8·1=남북교류협력법 제정및 교류협력기금설치 △90·9=삼성물산,북한산 명태 3천t반입 △91·1=한국산 원산지표시상품 북한에 첫 반출 △91·4=코오롱상사,평양에 양말합작공장 설립(최초의 남북합작사업) △91·7=남한쌀 5천t(6만5천5백가마)북한과 첫 직교역 △92·1·8=코오롱상사,북한산 가방을 임가공 형식으로 첫 도입 △92·1·16=김우중 대우그룹회장 방북,남포공단건설 합의 △92·7·19∼25=북한 김달현 부총리일행,남한방문해 산업시찰 △92·10·6∼9=남포공단조사단 방북 △92·10·14=「남한조선노동당」간첩사건으로 정부,대북경협 당분간 중단키로 △92·10·19=통일원,북한산 한약재 반입신청 승인 △92·12·7=김달현 북한부총리,삼성·럭금·대우에 북한의 4차 7개년 계획에 공식 참여 요청 △93·1·7=쌀이외의 농수산물 남북교역 첫 성사 △93·6·5=정부,미원그룹에 대북 무환거래 첫 승인 △93·6·10=정부·민자당,남북경협 9대과제 선정(직교역확대 교통통신망연결 등) △93·8·28=한국플라스틱조합,북한 신덕샘물 도입계약 △94·3=한국특수선,중국연변항운공사와 공동으로 부산∼청진 직항로 첫 취항 △94·4·19=삼선해운,부산∼청진 정기직항로 취항 △94·6·2=정부,「유엔서 대북제재땐 임가공무역 중단」발표따라 기업들 대북투자계획 전면 유보 △94·6·18=김일성주석 남북정상회담제의및 김영삼 대통령 수락 △94·7·9=김일성 사망으로 정상회담 무기연기
  • 「총장연행」 한남동공관서 “재현 검증”/「1년5개월 수사」 뒷얘기

    ◎국감 회의록·월간지 기사 샅샅이 뒤져 참조/검사 사건 시·분·초까지 정확히 꿰뚫어 “깜짝” ○…지난해 9월 서울지검 공안1부장으로 있을 당시 12·12 고소·고발에 대한 1차 고소인조사를 직접 담당했던 조차장검사는 울산지청장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지난달 1차장으로 복귀,12·12사건의 최종수사결과를 발표하게돼 12·12와는 묘한 인연. 그는 이번 검찰수사와 관련,『검찰로서는 한점 후회나 아쉬움이 없다』면서 『일부 비난의 소리는 결국 후세의 사가가 검찰의 판단을 정당화해 줄 것으로 믿는다』고 자신감을 표명. ○…이 사건 수사를 전담해온 서울지검 공안1부는 지난해 5월12일 전두환·노태우 두전직 대통령에 대한 고발장이 접수된 이래 『1년5개월 동안 노재현 당시 국방부장관을 비롯,참고인으로 90명을 조사,더이상 만날 사람이 없을 정도로 다 조사했다』며 공안검사들의 「끈기」를 은근히 자랑. 특히 용산구 한남동 육군 참모총장 공관의 현장확인과 함께 실제 상황을 재현하는 조사까지 벌였으며 국회 광주특위 회의록,12·12사건 국정감사 회의록,박정희대통령 시해사건및 정승화 총장의 내란방조사건 조사·재판 기록등은 물론 월간지의 기사까지 샅샅이 뒤졌다고 전언. ○…검찰은 이번 사건의 발표문에 고소인측도 생각하지 못한 사실까지도 들어있다며 수사의 공정성을 자신하는 눈치. 검찰은 정승화전총장을 연행하러 갔던 우경윤대령의 피격과 관련,『12·12는 정전총장을 연행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우발적 충돌』이라는 전두환 전대통령측의 주장에 대해 『먼저 총을 쏜 것은 정총장측이 아닌 보안사측』이라고 일축. 검찰측은 피격된 우대령의 부상정도를 검안한 기록은 물론 탄알에 대한 검사와 당시 상황을 재현해 이같은 사실을 규명해 냈다고 귀띔. ○…이번 사건의 주임검사인 장윤석 서울지검 공안1부장은 사건 당시의 상황을 시·분·초까지 거의 정확하게 꿰고 있어 김도언 검찰총장과 송종의 대검차장,안강민 대검공안부장등 검찰수뇌부는 물론 수사에 함께 참여했던 서울지검 공안1부 소속 후배검사들도 장부장의 기억력과 꼼꼼함에 혀를 내두르기도. 검찰내 일꾼으로 특히 기획력이 탁월하다는 평을 듣고 있는 장부장은 이번 사건을 훌륭히 마무리지었다는 평까지 얻어 앞으로 승승장구가 예상. ○…정승화 전총장등 고소인들은 검찰의 기소유예방침에 강한 불만을 내보이면서도 『항고를 하더라도 사실상 효과에 대해서는 자신할 수 없다』,『검찰이 진실을 밝히는데 애를 많이 썼다』고 말하는등 한편으로는 검찰수사결과를 어느정도 인정하는 분위기. 정 전총장은 『검찰이 「정치적 입김」을 받았다고 생각하느냐』는 취재진들의 질문에는 민감한 사안이라고 생각해서인지 『당연히 기소됐어야 하는데…』라며 여운. 특히 12·12의 성격을 「쿠데타적 사건」으로 규정짓고 「평가는 역사에 맡기자」는 지난해 5월의 청와대 발표와 연관지어 취재진들이 「정치적 입김」에 대해 재차 질문을 던지자 정 전총장은 『청와대의 발표내용을 몰라 답변을 못하겠다』는 식으로 응수. ○…다른 고소인들보다 회견장에 1시간정도 늦게 도착한 장태완 전수도경비사령관은 『군사반란을 막지못한 책임과 국민들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지난 15년동안 하루도 편하게 살지 못했다』며 그동안의 고충을 토로한 뒤 『검찰의 이번 수사는 객관적으로 볼때 엄정하게 이뤄졌다고 보며 수사결과도 역사적 기록으로 남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평가를 내려 주목. 장 전사령관은 그러나 『탈영장교는 중형으로 처벌하면서도 군사반란을 일으킨 당사자들은 기소조차 하지 않으면 앞으로 군사반란을 꾀하거나 군기를 흩뜨리는 군인들을 어떻게 다스릴 수 있겠느냐』고 뼈있는 한마디. 그는 다만 『국가존립 차원에서 법이 모든 사람에게 공평무사하게 적용될 수 있도록 항고등 모든 방법을 동원할 것』이라고 역설. ○「12·12」 고소·고발사건 일지 ▲93·7·19=정승화씨등 22명,전두환·노태우전대통령등 신군부측 핵심인사 38명을 군형법상 반란및 형법상의 내란혐의 등으로 대검에 고소.서울지검 공안1부에 배당 ▲〃 8·16=정 전육참총장 소환,조사 ▲〃 11·8=당시 3군사령관 이건영씨에 대한 조사를 끝으로 22명의 고소인 조사 마무리 ▲〃 12·11=당시 수경사 작전참모였던 박동원씨(예비역 소장)를 참고인 자격으로 소환,조사하는 등 3월중순까지 1백여명의 참고인 조사 ▲94·3·23=정승화씨를 연행한 당시 보안사 인사처장 허삼수씨 소환,조사.7월말까지 유학성·차규헌·황영시·박희도·최세창·박준병·장세동·김진영·이학봉씨등 피고소인 35명(71방위사단장 백운택씨는 사망으로 제외)소환,조사 ▲〃 8·12=피고소인인 전·노 두 전직대통령과 최규하전대통령(참고인 자격)에게 서면질의서 보냄.박희도·최세창씨 등 8명은 장태완·김진기씨 등 고소인 2명을 내란 및 반란혐의로 맞고소 ▲〃 9·3=노 전대통령,『12·12사태는 박정희대통령 시해사건수사 과정에서 빚어진 우발적 충돌일뿐 계획된 쿠데타가 아니다』는 취지의 답변서 제출 ▲〃 9·15=전 전대통령,노 전대통령과 같은 취지의 답변서 제출 ▲〃 9·27=최 전대통령이 참고인 조사에 불응하겠다고 검찰에 통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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