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4·3사건
    2026-08-15
    검색기록 지우기
  • 구의원
    2026-08-15
    검색기록 지우기
  • 2026-08-15
    검색기록 지우기
  • 폭동
    2026-08-15
    검색기록 지우기
  • 동생
    2026-08-15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705
  • “이승만 집권 때도 독립운동가 수감했다”

    “이승만 집권 때도 독립운동가 수감했다”

    서울 통일로 ‘서대문형무소’는 1905년 을사늑약 때일제가 만든 경성감옥이었고 1912년 서대문형무소로 이름이 바뀌었다.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은 이 형무소의 신세를 졌다. 해방 이후 독립운동가들이 다 떠난 서대문형무소에는 누가 수감됐을까? 왜 곧바로 일제의 악행을 고발하는 역사박물관으로 직행하지 못했을까? 김삼웅(69) 전 독립기념관장은 4일 오후 2시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독립관 무궁화홀에서 열리는 ‘이승만 집권기의 서대문형무소’란 학술대회에서 ‘1948~1959년 서대문형무소’란 제1주제 논문을 통해 서대문형무소 수감자들의 변천사를 밝혔다. 김 전 관장은 “1948~1959년 12년은 이승만의 1인 통치와 자유당의 전횡기였다.”면서 “1949년 1월 반민특위의 검거활동으로 서대문형무소가 악질적 친일파인 소설가 이광수, 일제경찰관 노덕술 등 친일파로 가득했지만, 겨우 1개월 만인 그해 2월 15일 이승만이 반민특위 활동을 비난하고 반민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하는 등으로 서대문형무소가 다시 독립운동가들로 가득 차게 됐다.”고 탄식했다. 소설가 이광수는 수감 20일 만에 보석으로 풀려났고, 노덕술은 이승만 대통령이 “경찰의 기술자이며 경험자이므로 그를 제거하고는 국가의 치안을 유지하기 어렵다.”면서 석방을 요청하던 중 그해 6월 6일 반민특위가 와해되자 풀려났다. 1949년 6월 ‘국회프락치사건’이 발생했다. 신의주 등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김약수 의원과 반민법 제정에 남다른 열정을 보인 노일환·서용길 의원 등 13명의 의원이 체포됐다. 김 전 관장은 “헌병사령부 산하에 특별수사본부를 설치하고 이들을 심하게 고문해 ‘자백’을 받아 냈다.”면서 “당시 헌병대에는 친일경찰 김정채, 윤우경, 최운하, 김호익 등이 핵심이었다.”고 말했다. 노일환은 재판 과정에서 “남로당 가입 사실과 남로당 지시에 따라 움직였다는 자백이 고문을 못 이긴 허위 자백”이었다고 진술했다. 즉 반민특위 활동이 와해된 후 서대문형무소에는 일제강점기와 비슷하게 독립운동가들이 가득해졌다는 것이다. 1947~1954년 제주 4·3사건으로 2530여명이 일반재판 및 군정재판, 군법회의 등을 통해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 중 16~30세 여자 수감자 70여명이 서대문형무소로 이송됐다. 제주도에는 형무소가 없어서 전국 각지 형무소에 분산·수감된 탓이다. 김 전 관장은 “일제강점기에 총독부가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수감하기 위해 특별히 여사(女舍)를 지어서 관리했기 때문”이라면서 “6·25전쟁으로 이 중 일부는 인민군에 편입되거나 여맹에 들어갔고, 또 일부는 잡혀서 총살됐다.”고 설명했다. 6·25전쟁 직후부터 3개월 동안 서대문형무소는 북한군이 사용했다. 반공·친미 인사라고 추정되는 사람들을 투옥하고, 후퇴할 때는 대량 학살하거나, 북으로 끌고 갔다. 1950년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한 이승만 정부는 서울시민 중 북한군에게 협조한 부역자들을 색출해 서대문형무소에 가두기 시작했다. 당시 서울시민은 대략 145만명이었고, 이 중 40만명만이 피란을 떠났다. 김 전 관장은 “서울시민은 안심하라는 라디오방송을 거듭하다가 한강다리를 폭파시켜 피난도 못하게 해 놓고는 잔류한 서울시민을 부역자로 모는 것은, 임진왜란 때 한성을 떠난 선조나 병자호란 때 인질로 잡혀 갔던 처자를 ‘환향녀’라며 비난했던 인조와 다를 바가 없다.”고 비판했다. 실제 사형에 처해진 사람은 다소 줄었지만, 당시 부역자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자는 867명에 이르렀다. ‘종로의 협객’ 김두한은 1947년 4월을 시작으로 1954년 5월, 1965년, 1966년 ‘국회오물투척사건’ 등으로 4차례 수감됐다.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4·3사건 희생자·유족 추가신고 하세요

    정부가 제주4·3사건 희생자 및 유족에 대한 추가 신고를 오는 11월부터 내년 2월까지 받는다. 민주통합당 강창일 의원(제주시갑)은 지난 19일 제주4·3희생자유족회, 제주4·3사건실무위원회 관계자 등과 함께 맹형규 행정안전부 장관을 만나 이 같은 정부의 입장을 확인했다고 20일 밝혔다. 맹 장관은 이 자리에서 “희생자 및 유족 추가 신고 요청에 대해 국무총리실이 18일 승인함에 따라 11월부터 내년 2월까지 3개월간 추가 신고를 받을 예정”이라고 답했다. 맹 장관은 11월부터 추가 신고를 받는 이유는 그에 따른 법적 절차를 거쳐야 하고, 사전 홍보를 통해 많은 유족의 신고를 독려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유족회와 제주도, 제주도의회 등은 4·3사건 희생자 및 유족에 대한 추가 신고, 4·3문제 해결을 위한 정부 차원의 예산 지원 확대, 국가기념일 지정 등을 정부에 줄곧 요구해 왔다.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위원장 국무총리)’가 지난해 1월까지 신고를 받아 결정한 4·3사건 관련 희생자(행방불명자 포함)는 1만 4033명, 유족은 3만 1253명이다. 정부는 이후 추가 신고를 받지 않았다. 제주 황경근기자 kkhwang@seoul.co.kr
  • “세계 사람들과 5·18 정신 나누고 싶어”

    “세계 사람들과 5·18 정신 나누고 싶어”

    “5·18민주화운동의 가치와 정신을 세계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요.” 17일 5·18기념재단 직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호주 출신의 애덤 브레슬리(39)는 “5·18민주화운동은 한국 민주주의의 시작이자 인권과 평화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이런 소중한 가치를 세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다.”며 환하게 웃었다. 그는 이날 5·18민주화운동 32돌을 기념해 아시아민주화운동연대(SDMA) 주최로 열린 ‘아시아 민주화운동 워크숍’을 돕느라 눈코 뜰 새가 없었다. 세계인권도시 포럼, 5·18아카데미 국제연수 등의 참여자 초청과 해외 교육 프로그램 공문 작성 등 기념재단이 펼치는 각종 국제협력사업을 전담한다. 때로는 영어권 방문객 안내, 지역 어린이를 위한 영어 강의 등 허드렛일까지 도맡는다. “광주 생활이 너무 즐겁다.”는 그가 이곳을 처음 방문한 것은 5·18민주화운동 30주년인 2010년 8월 기념재단이 주최한 아시아인권학교에 학생으로 참가하면서다. 그는 당시 5·18묘지와 비무장지대(DMZ), 제주 4·3사건 현장 등 ‘대량 학살’이 자행된 한국 역사의 흔적을 둘러봤다. 때마침 기념재단이 지난해 3월 국제 인턴 채용 공고를 냈고 광주 방문을 인연으로 응모해 직원으로 최종 선발됐다. 그는 “민주, 인권, 평화를 지향하는 5·18정신의 나눔과 공유를 통해 1980년 당시 광주의 상황과 비슷한 아시아 여러 나라의 인권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국제적 연대가 필요함을 느꼈다.”며 “이를 위해 작은 힘이나마 보태겠다.”고 다짐했다. 1995년 호주 멜대학 영문학과·사회학과를 졸업한 뒤 모나시대학 홀로코스트 및 제노사이드 학사·석사과정을 거쳤다. 그는 “정의와 평화가 넘치고 전쟁과 테러가 없는 평온한 세상을 만드는 게 꿈”이라며 “5·18민주화운동이 이런 세상을 이끄는 이정표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광주 최치봉기자 cbchoi@seoul.co.kr
  • 김황식 총리 ‘제주 4·3사건’ 위령제 참석

    김황식 총리 ‘제주 4·3사건’ 위령제 참석

    ‘제주 4·3사건’ 희생자 위령제에 정부와 정치인들이 대거 참석했다. 3일 제주시 봉개동 4·3평화기념관 대강당에서 열린 64주년 위령제에는 김황식 국무총리를 비롯해 여야 국회의원, 유족과 도민 등 5000여명이 참가했다. 김 총리는 추도사에서 “4·3사건의 역사는 우리가 함께 풀어 나가야 할 과제로서 제주의 역사적 슬픔을 함께한다.”고 밝혔다. 이어 “유가족과 제주도민 여러분은 4·3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이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그동안의 갈등과 대립을 관용과 화합으로 승화시키고 미래를 향한 더 큰 발전의 디딤돌 역할을 했다.”고 치하했다. 김 총리는 추모사업과 관련, “정부는 앞으로도 4·3 사건으로 희생되신 분들을 기리고 유가족을 위로하는 일에 정성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따라 평화공원은 ‘교육센터’, ‘고난 극복 전시관’, ‘4·3평화의 종’이 세워져 평화와 인권을 위한 살아있는 교육장으로 활용된다. 이석우 선임기자 jun88@seoul.co.kr
  • 與 박상일·이영조 공천 전격 취소… 강남벨트 새판 짠다

    與 박상일·이영조 공천 전격 취소… 강남벨트 새판 짠다

    새누리당이 14일 서울 강남갑과 강남을에 각각 공천된 박상일·이영조 후보의 공천을 전격 취소했다. 총선을 불과 27일 앞두고 강남벨트에서도 상징적인 두 곳의 후보를 동시 교체하는 파격을 단행한 것이다. 새누리당 정홍원 공천심사위원장은 이날 오후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공천 심사 과정에서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점이 언론 보도로 논란이 됐다.”면서 “공천위는 두 후보 공천을 취소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정 위원장은 “공천위는 깊이 있는 토의 결과 해석에 따라서는 국민의 마음을 아프게 할 부분이 있다는 판단에 이르러 유감의 뜻을 표한다.”면서 “두 분과 관련된 논란의 진위와 상관없이 마음의 상처를 입은 분들께 죄송한 마음을 표한다.”고 말했다. 정 위원장은 두 지역에 대해 “새 후보를 찾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중도 유권자 확보 급선무 판단 새누리당이 두 후보를 공천 5일 만에 전격 교체하기로 한 것은 그만큼 중도진영 유권자 확보가 급선무라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편향적 역사관 논란을 빚고 있는 두 후보를 계속 끌어안고 가다 결국 서울의 다른 선거구를 넘어 전국적인 판세에까지 부정적 영향을 미치게 하기보다는 초반에 ‘부실 공천’이라는 비난을 무릅쓰고라도 화근을 잘라 내는 게 중요하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그러나 텃밭인 강남벨트에서 새누리당이 헛발질을 함에 따라 쇄신 공천의 빛은 퇴색이 불가피해 보인다. 특히 새누리당의 극심한 인물난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례로도 기록될 전망이다. 무엇보다 이영조 후보의 경우 당초 대구 달서갑에 공천을 신청했다가 강남을로 ‘재배치’됐다는 점에서 공천위의 무원칙한 ‘돌려막기’가 빚은 결과라는 비판을 듣고 있다. 한국벤처기업협회 부회장 출신의 박 후보는 지난해 8월 펴낸 저서 ‘내가 산다는 것은’에서 독립군을 ‘소규모 테러단체 수준’으로 비하해 논란을 빚어 왔다. 바른사회시민회의 공동대표인 이 후보는 2010년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위원장 시절 발표한 논문에서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제주 4·3사건을 각각 ‘민중봉기’(popular revolt), ‘공산주의자 주도 폭동’(communist-led rebellion)으로 표현,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한 폭동’처럼 규정했다는 비판을 받아 왔다. ●“무원칙한 돌려막기” 비난도 두 후보를 둘러싼 파문이 확산되자 새누리당 비상대책위는 김종인·이상돈 비대위원과 쇄신파 의원들을 중심으로 이들을 교체할 것을 요구했다. 실제로 이날 오후에는 김종인, 조현정, 이준석 비대위원 등이 서울시내 한 호텔에서 회동을 갖고 ‘자진사퇴 요구 성명’을 발표하기로 하는 등 긴박하게 움직였다. 이 자리에서 비대위원들은 “새누리당의 정강정책이나 미래와 맞지 않는 공천”이라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박 후보는 공천 취소 직후 보도자료를 내고 “책의 일부 내용만 발췌돼 저의 충정이 올바로 전달되지 못했다.”며 당의 결정을 수용했다. 한편 정홍원 공천위원장은 모 언론사 기자가 경북 경주에 공천된 손동진 전 동국대 경주캠퍼스 총장으로부터 돈을 받은 혐의로 구속된 데 대해서도 “(이 사안도) 조사하고 있다.”고 말해 추가 공천 취소 가능성을 내비쳤다. 이재연·송수연·이성원기자 oscal@seoul.co.kr
  • “경주 손동진·강남을 이영조 재심의… 공천 취소 검토”

    “경주 손동진·강남을 이영조 재심의… 공천 취소 검토”

    새누리당 4·11 총선 경북 경주 후보로 전략공천된 손동진 전 동국대 경주캠퍼스 총장이 후보직 박탈 위기에 놓였다. 공천이 확정된 뒤 재심의돼 탈락하는 첫 사례가 될지 주목된다.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회 관계자는 13일 “공천위원회에서 손 후보를 재논의하기로 했고 국민배심원단에서도 통과되기 어려울 것”이라고 밝혔다. 손 후보는 지역 언론인들에게 금품을 제공한 혐의를 받고 있고 해당 언론인은 긴급체포됐다. 32명으로 구성된 국민배심원단에서 과반수가 전략공천 후보자에 대해 부적격 의견을 제시하면 비대위에서 재의를 요구할 수 있게 된다. 다만 손 후보는 지난 11일과 12일 잇따라 서울과 경주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언론보도를 보고 알았다.”면서 혐의를 부인했다. 비대위는 또 서울 강남을에 전략공천된 이영조 바른사회시민회의 공동대표에 대해 재의를 요구하기로 했다. 공천위원회가 이를 받아들일 경우 이 후보는 공천을 박탈당한다. 논란은 이 후보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장 시절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제주 4·3사건에 대해 썼던 표현을 두고 관련단체에서 공천 철회를 요구하면서 불거졌다. 관련단체들은 이 후보가 광주민주화운동과 4·3사건을 각각 ‘반란’, ‘폭동’으로 규정했다며 항의했다. 비대위에서는 뉴라이트 출신인 이 후보의 역사관과 정체성이 자칫 전체 선거 민심에 영향을 줄까 우려하는 분위기다. 특히 불모지 호남과 최근 해군기지 건설로 더욱 악화된 제주 민심을 한꺼번에 잃을 수 있다는 판단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김종인 비대위원은 13일 “광주에만 국한된 게 아니라 수도권의 선거과정을 봤을 때 이념에 집착하는 논쟁을 벌일 수 있는 소지를 만드는 게 과연 현명한 것인가 공천위가 판단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지적하면서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고심하리라 본다.”고 말했다. 이준석 비대위원은 이 후보를 “새누리당의 쇄신 의지와 정체성에 어긋난다.”고 평했다. 이상돈 비대위원도 “공직후보자로서 그런 판단을 갖고 있다는 것은 논란이 될 수 있다.”면서 “특히 호남 정서와 최근 제주 해군기지 문제에 더욱 악영향을 줄 수 있다.”고 우려했다. 비대위는 당초 15일로 예정된 국민배심원단의 의견을 고려한 뒤 이 후보의 거취에 대해 판단하려고 했으나 여론이 급속히 악화되자 급히 뜻을 모았다. 다만 현재까지 공천위에서는 신중한 입장을 보이고 있지만 비대위는 계속해서 문제를 제기해 공천위를 압박하겠다는 방침이다. 한편 이들 외에도 도덕성 논란에 휩싸인 일부 후보들의 공천이 위태로울 전망이다. 2006년 이른바 ‘수해골프’로 물의를 빚었던 홍문종(경기 의정부을)·이재영(평택을) 후보의 후보자격을 두고도 당 안팎에서 논란이 일고 있다. 허백윤기자 baikyoon@seoul.co.kr
  • 제주 ‘이승만 前대통령 별장’ 지방비 투입 논란

    제주 ‘이승만 前대통령 별장’ 지방비 투입 논란

    붕괴 위기를 맞은 지 한참인 이승만 전 대통령의 제주별장 보수 계획이 제주도의회에서 제동을 거는 바람에 논란을 빚고 있다. 제주시는 올해 2억 4600만원(국비와 지방비 각 50%)을 투입해 등록문화재 제113호인 이 전 대통령의 별장 ‘귀빈사’를 보수하려고 했으나 지방비를 확보하지 못해 차질을 우려하고 있다고 2일 밝혔다. 이는 제주도의회에서 이 전 대통령이 제주 4·3사건에 책임을 져야 한다며 이를 보수하기 위해 지방비를 투입하는 데 대해 4·3사건 유족들로서는 수용하지 못할 일이라며 삭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는 4·3사건 희생자 유족들은 물론 관련 단체 등을 만나 귀빈사의 독특한 건축 양식을 설명하는 등 추경예산을 확보해 별장 보수사업을 계속 추진한다는 방침을 고수하고 있다. ●市 “이승만 추앙 목적 아니다” 귀빈사는 지난해 구조안전진단 결과 D등급을 받아 보수·보강작업을 더 이상 늦출 수 없는 처지에 놓였다. 시는 4·3사건 유족들을 설득할 경우 이 전 대통령 기념관이 아닌 단순한 별장 건축물만 보수하는 사업에는 크게 반대하지 않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일각 “반성의 장으로 활용을” 양동윤 ‘제주4·3도민연대’ 공동대표는 “이 전 대통령에게 분명히 4·3사건 책임을 물어야 하지만 그 자체도 역사다.”라며 “이 전 대통령의 책임과 4·3사건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부담되지 않는 범위에서 보수해 다크 투어리즘(휴양과 관광을 위한 일반 여행과 달리 재난 현장과 비극적인 역사의 장소를 돌아보며 반성하고 교훈을 얻는 여행) 등에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제주시는 지난해 20억원을 투입하는 종합정비계획을 마련해 귀빈사를 중심으로 이 전 대통령 기념관 등을 조성할 계획이었지만 4·3사건 유족과 단체들의 반발에 부딪히자 별장 건축물만 정비하는 것으로 수정했다. ●국가원수 사용 근대문화유산 제주시 구좌읍 송당리 민오름 인근에 자리한 이승만 전 대통령 제주별장은 1957년 미군의 지원으로 건축된 소규모 벽돌조 건물이다. 대지 660㎡에 건물면적 234㎡의 1층 건물 한 채다. 당시 미국식 전원형 단독주택 형식으로 지어져 이국적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 이 전 대통령 부부가 1957년과 1959년 두 차례 머물렀다. 국가원수가 사용한 근대문화유산이라는 점에서 2004년 9월 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현재 별장 건물 안에는 전용 침실을 비롯해 응접실, 주방, 벽난로, 욕실, 수세식화장실, 원형식탁, 화장대 등이 녹슨 채로 남아 있다. 제주 황경근기자 kkhwang@seoul.co.kr
  • 고교 역사교과서에도 ‘자유 민주주의’ 쓴다

    중학교 역사 교과서 집필 기준 마련 당시 논란이 됐던 ‘자유민주주의’ 용어가 개정 고교 역사교과서에도 그대로 쓰인다. 또 ‘자유민주적 기본질서’, ‘장기집권 등에 따른 독재화’라는 표현도 모두 포함된다. 교육과학기술부는 30일 지난 2009년 개정 교육과정에 따른 ‘교과교육과정 적용을 위한 고등학교 역사교과서 집필 기준’을 마련해 확정·발표했다. 11월에 나온 중학교 국어·도덕·경제·역사 교과서에 이어 고등학교 역사교과서 집필 기준을 추가로 최종 결정한 것이다. 새 고교 역사교과서는 2014년부터 사용된다. 확정안에 따르면 개정 한국사 교과서에는 ▲자유민주주의 ▲한반도 유일한 합법정부 ▲장기집권 등에 따른 독재화 등은 중학교 집필 기준과 동일한 원칙에 따라 서술된다. 중학교 교과서에서 집필 기준에 빠져 논란이 됐던 ▲5·18 민주화운동 ▲6월 민주항쟁 등 민주화운동 ▲제주 4·3사건 ▲친일파 청산 노력 등 관련 내용도 모두 명시됐다. ‘일본군 위안부’ 용어도 기술된다. 일제강점기에 태평양전쟁에 징용·징병 및 ‘일본군 위안부’ 등 강제 동원과 물적 수탈을 강행했다는 내용도 서술된다. 시안에는 이런 용어가 빠진 채 “태평양전쟁기에는 강제 동원과 물적 수탈을 집중적으로 강행했고…”라고만 돼 있었다. 이후 일본군 위안부 등이 빠진 것이 논란이 되자 집필 기준은 “태평양전쟁기에는 징용, 징병 및 일본군 위안부 등 강제 동원과 물적 수탈을 집중적으로 강행했고…”로 바뀌었다. 교과부는 지난 8월 국사편찬위원회에 역사교과서 집필 기준을 의뢰해 개발했다. 국사편찬위원회는 공동연구진을 구성하고, 공청회 등을 통해 학계 의견을 반영하는 등의 절차를 거쳐 21일 역사교과서 집필 기준안을 교과부에 제출했다. 교과부는 26일 역사교육과정개발추진위원회와 교과용도서운영심의회 등의 심의 및 자문을 거쳐 고교 역사교과서 집필 기준을 확정했다. 교과부 관계자는 “개발된 집필 기준을 통해 학생들에게 우리 역사에 대한 자긍심과 올바른 역사관을 고취할 수 있는 교과서를 개발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자유민주주의 등의 용어가 중학교 역사 교과서에 이어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그대로 사용되면서 역사학계의 반발은 계속되고 있다. 한국역사연구회, 역사교육연구회, 한국근현대사학회는 이날 공동 성명을 내고 “역사 교과서의 내용은 물론 절차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면서 교과부에 역사교육과정 시행을 중지할 것을 요구했다. 김효섭기자 newworld@seoul.co.kr
  • ‘5·18’ 고교 역사교과서 집필기준에 명시

    5·18 민주화운동과 6월 민주항쟁, 제주 4·3사건, 친일파 청산 노력 등이 고등학교 역사교과서 집필기준 시안에 명시됐다. 이들 내용은 최근 확정된 중학교 역사교과서 집필기준에서는 빠져 논란이 됐었다. 국사편찬위원회 산하 역사교과서 집필기준개발 공동연구진은 16일 경기 과천시 국사편찬위원회 대강당에서 공청회를 열고 ‘2009년 개정 교육과정에 따른 고등학교 역사교과서 집필기준’ 시안을 발표했다. 교과서 집필기준은 교과서 저자들이 집필할 때 반드시 따라야 하는 기준 규정이다. 고교 역사교과서 집필기준 시안은 “4·19 혁명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의 발전과정을 정치변동과 4·19 혁명, 5·18 민주화운동, 6월 민주항쟁 등 민주화 운동, 헌법상의 체제 변화와 그 특징 등 중요한 흐름을 중심으로 설명한다.”고 명시했으며 “정부 수립 전후 단독정부 수립을 둘러싼 갈등으로 나타난 제주 4·3사건, 친일파 청산 노력 등을 기술하도록 유의한다.”고 정하고 있다. 집필기준 개발 공동연구진 중 한국사 부문을 담당한 손승철 강원대 교수는 “중학교 역사교과서 집필기준에 (5·18 민주화운동 등을)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아 논란이 됐는데 역사적 사실인 만큼 4·3사건부터 대표적인 사건을 모두 나열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날 공청회에서도 ‘자유민주주의’ 등의 용어를 둘러싸고 보수·진보진영 학자들 간에 날선 공방이 계속됐다. 한국역사연구회 회장인 이인재 연세대 교수는 미리 배포한 공청회 질의서에서 “이태진 국사편찬위원장이 역사 교육과정 개발 당시 민주주의를 자유민주주의로 수정하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대한민국 역대 헌법 어디에도 자유민주주의라는 단어가 사용된 예가 없음은 이 위원장도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 이 교수는 “5·18 민주화운동이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것이었느냐.”라고 반문하면서 “집필기준 시안이 과연 학문적인 검토를 통해 만들어졌는지 의심스럽다.”고 지적했다. 김효섭기자 newworld@seoul.co.kr
  • ‘집필기준’엔 빠진 ‘5·18 - 친일파 청산’ 의무화

    교육과학기술부 직속기관이자 교과서 검정심사기관인 국사편찬위원회(국편)는 17일 제주 4·3사건, 친일파 청산 노력, 4·19 혁명, 5·16 군사정변, 5·18 민주화운동, 6월 민주항쟁 등 주요 역사적 사건들을 2013년부터 사용될 중학교 역사교과서에 수록하도록 규정한 세부 검정 기준을 확정했다. 국편은 이날 중학교 역사교과서에 대한 세부 검정 기준을 마련해 교과부와 협의를 거쳐 확정, 발표했다. 국편은 “최근의 역사교과서 집필기준 논란과 관련해 사회적 갈등이 확산되고 있는 점을 고려해 중학교 역사교과서 세부 검정 기준을 조속히 마련했다.”고 설명했다. 국편은 ‘역사교과서 집필기준을 준수하였는가’라는 심사 항목에서는 “‘국가적·사회적으로 인정된 주요 역사적 사실(제주 4·3사건, 친일파 청산 노력, 4·19 혁명, 5·16 군사정변, 5·18 민주화운동, 6월 민주항쟁 등)은 충실히 반영하여야 함’이라고 명시함으로써 역사교과서에 반드시 포함되도록 했다.”고 강조했다. 앞서 교과부는 지난 8일 발표한 중학교 역사교과서 집필기준에서 5·18 민주화운동, 과거 독재와 민주화 관련 내용, 친일파 청산 노력 등이 빠졌다는 지적이 나오면서 교과서 수록 여부를 둘러싼 논란이 일었다. 관련 지역 및 단체의 반발도 거셌다. 교과부가 처음으로 세부 검정 기준까지 공개하면서 논란을 잠재우려고 했지만 혼란은 계속될 전망이다. 검정 기준보다 상위 개념이라고 할 수 있는 집필 기준에는 해당 내용이 없기 때문이다. 최근 교과부 설명회에서도 한 출판사 관계자는 “교과부가 교육과정이나 집필 기준을 따르라고 하는데 집필 기준 등에는 이에 대한 언급이 없어 혼란스럽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인재(연세대 교수) 한국역사연구회장은 “집필 기준이 사실상 검열 기준이 되고 있다.”면서 “결국 집필 기준을 고쳐 재고시하는 것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김효섭기자 newworld@seoul.co.kr
  • “5·18, 6월 항쟁, 친일파 청산 등 주요 사건 누락땐 검정통과 안돼”

    “5·18, 6월 항쟁, 친일파 청산 등 주요 사건 누락땐 검정통과 안돼”

    교육과학기술부와 국사편찬위원회(국편),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14일 서울 서초동 서울교대 에듀웰센터에서 중학 교과서 집필기준 설명회를 가졌다. 출판사 편집자와 교과서 집필자 등 70여명이 참석했다. 설명회에서는 2009 개정 교육과정에 따라 새로 기술될 국어·도덕·역사·경제 등 4개 교과서의 집필기준을 설명하고 집필기준 작성원칙, 집필 시 유의사항 등이 제시됐다. 역사교과서 집필기준을 설명한 박홍갑 국편 편사부장은 “사회·국가적으로 인정된 4·19혁명, 5·18민주화운동, 6월 민주항쟁, 제주 4·3사건, 5·16 군사정변, 친일파 청산 등 주요 사건은 충실히 서술해야 하며, 관련 내용이 빠지면 검정 통과가 어려울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 부장은 “친일파 청산 부분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과정과 의의를 서술한다’는 집필기준에 근거해 기술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김관복 교과부 학교지원국장은 “역사 교과의 경우 구체적 사건명이 거론되지 않아도 정부 수립과 민주화 운동 등을 서술하게 되어 있는 만큼 각 사건 내용을 충실히 반영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집필자들은 혼란스러워했다. 정현성 교학사 편집자는 “정부에서는 5·18민주화운동 등을 넣으라고 하지만 교육과정이나 집필기준이 담긴 문서에 이런 내용이 없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박영미 천재교육 편집자는 “내용 요소를 20% 줄이라는데 교육과정과 집필기준에 없는 내용을 넣으면 검정에서 문제가 되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권현택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원은 “2007 교육과정처럼 자유민주주의 대신 민주주의로 기술하면 안 되는 것이냐.”고 묻기도 했다. 이에 대해 박 편사부장은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는 집필기준대로 표현해야 한다.”고 밝혔다. 논란도 많았다. 강운태 광주시장과 김영진(민주) 의원, 장휘국 광주시교육감, 김준태 5·18재단 이사장 등은 5·18민주화운동이 역사교과서 집필기준에서 빠진 것과 관련, 이날 김황식 국무총리와 이주호 교육과학기술부장관을 잇달아 만나 새 집필기준에 대해 강하게 항의했다. 김 총리와 이 장관은 “역사교과서 집필기준에 ‘대강화(大綱化)의 원칙’을 적용, 압축적으로 기술하느라 구체적인 사건이 빠졌지만 집필과정에서 반영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답변했다. 하지만 이 장관은 4·19혁명과 5·18민주화운동 등을 포함하도록 집필기준을 수정하자는 요구에는 “시간이 부족하다.”며 거부했다. 이런 가운데 민족문제연구소와 전국교직원노동조합, 학술단체협의회 등 422개 시민사회단체는 이날 ‘친일·독재 미화와 교과서 개악을 저지하는 역사정의실천연대’를 결성, “교과서 개악을 막기 위한 입법청원 운동과 이 장관 퇴진운동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교과부는 내년 4월 교과서 검정 신청을 받을 계획이며 8월쯤 검정에 합격한 교과서가 결정될 전망이다. 검정을 통과하면 2013년부터 중학교 수업에 사용된다. 김효섭기자 newworld@seoul.co.kr
  • 좌·우파 ‘10년 충돌’… 교과서 개정 때마다 논란 왜

    역사 교과서를 둘러싼 논쟁이 다시 벌어졌다. ‘민주주의’와 ‘자유민주주의’냐는 표현을 놓고 여야가 충돌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10년 넘게 계속되고 있는 ‘역사 교과서 전쟁’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지난 10년간 교과서가 바뀔 때마다 정권의 ‘이념적 성향’에 맞는 내용을 넣기 위해 각자 목소리를 높이며 충돌했다. 문제는 해당 교과서로 공부해야만 하는 학생들이 항상 이 ‘교과서 전쟁’의 피해자가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1차 근현대사 교과서 전쟁은 2002년 7월에 있었다. 7차 교육과정에 따라 도입된 고등학생용 근현대사 검정 결과가 문제였다. 교육인적자원부(현 교육과학기술부)는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의 검정을 통과한 금성출판사, 대한교과서, 두산, 중앙교육진흥연구소의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4종의 검정 결과를 발표했다. 이들 교과서가 김영삼 정부는 비리와 대형사고로 얼룩진 정권으로, 김대중 정부는 개혁과 남북화해에 앞장선 정권으로 기술했다면서 편향 시비를 낳았다. 논란이 이어지면서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검정위원이 모두 사퇴했고 결국 한 달여 만에 교육부는 ‘객관적 기술’이라며 수정방향을 발표했다. 이듬해 초에는 교육부가 수정된 근현대사 교과서 4종을 일선 학교에 배포했다.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4종의 근현대사 교과서 검정교과서였다는 것이다. 정부에서 만드는 국정교과서와 달리 검정교과서는 당초부터 다양한 시각과 내용을 담기 위해 만들어졌다. 다만 일방적인 주장이나 학생들에게 잘못된 내용을 전달하는 것을 막기 위해 검정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출판사와 저자의 자율적인 판단과 결정에 따라 교과서가 나오고 이를 검정해 통과했다면 일선 학교장이 해당 교과서의 채택 여부를 결정해야 했다. 하지만 검정교과서에 대한 논란으로 정부가 일방적으로 수정을 지시하고 다시 이를 배포하는 등 마치 국정교과서와 같은 방식으로 대응했고 이는 다시 근현대사 교과서의 정치적 논쟁의 빌미가 됐다. 때문에 2002년 이후에 김대중, 노무현 정부 내내 야당인 한나라당에서는 “근현대사 교과서가 반미·친북·반재벌 내용을 담고 있다.”고 공격했고 정부는 “친북, 좌파가 아니다.”라며 반격했다. 이 같은 논란에서 2005년 편향 교과서를 비판하겠다는 ‘교과서포럼’이 만들어졌고 2008년에는 ‘대안 교과서 한국 근현대사’를 출간하기도 했다. 편향 논란을 극복하겠다는 대안 교과서는 하지만 일제시대에 대한 긍정적 기술과 여순사건과 제주 4·3사건을 ‘좌파세력의 반란’으로 규정하는 등 또 다른 편향성 시비를 불러 왔을 뿐이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직후 2차 교과서 전쟁이 일어났다. 2008년 3월 대한상공회의소는 초·중·고 사회, 역사 교과서에 대해 337건의 오류를 지적하면서 시정을 건의했다. 교과서 시정 요구도 봇물 터지듯 밀려들었는데 같은 해 9월까지 19곳의 정부 부처와 기관에서 교과서 내용의 수정을 요구했다. 역사교과서와 관련해 시정을 요구한 곳은 상의, 국방부, 통일부 등 3곳이었다. 통일부는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을 ‘화해·협력정책’으로 바꿔 달라고 요구했고 국방부는 “이승만 정부는 독재정권을 유지했다.”는 표현을 “이승만 정부는 공산주의 확산을 막는 데 최선을 다했다.”고 수정해 줄 것을 요구했다. 이 같은 요구에 화답해 김도연 당시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은 그해 5월 외부 강연에서 “초·중·고 교과서가 좌편향되어 있다.”고 지적했고 교과부는 교과서 수정 검토에 착수했다. 이에 화답하듯 9월 보수성향인 당시 전국시·도교육감 협의회는 “이념 편향 교과서를 채택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이에 대해 전국 역사교사모임과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은 시·도교육감협의회 선언에 대한 반박 성명을 내놨다. 이명박 대통령도 10월 재향군인회 회장단 간담회에서 “교과서의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밝혀 논란에 동참했다. 이후 10월 국사편찬위원회는 근현대사 교과서 수정 가이드라인을 발표했고 교과부는 이 가이드라인을 토대로 만든 근현대사 교과서 수정권고안을 발표했다. 결국 최근의 ‘민주주의·자유민주주의 논쟁’은 이 2008년 교과서 전쟁의 연장선상인 셈이다. 교과서 전쟁의 피해자는 학생들이다. 교과서에 담기는 내용은 논란이 없을 정도로 학술적 검증이 마무리된 것들이 실려야 한다. 적어도 학술적으로 논쟁이 될 정도로 결론이 나지 않은 내용이라면 적어도 학생들이 배우는 교과서에 실려서는 안 된다. 또 검정교과서의 경우 다양한 시각과 내용을 담자는 검정교과서의 취지를 살려야 한다. 다양한 시각에 따라 교과서를 만들고 투명하게 임명된 검정위원들이 이를 검정하면 되는 것이다. 검정교과서의 선택은 학교장이나 교과목 협의회, 학교운영위원회 등 수요자들이 선택하게 하면 된다. 일선 고교의 한 역사교사는 “교과서 전쟁의 근원적인 문제는 정치적인 시각에서 교과서를 재단하려 했다는 점”이라며 “정권에 따라 달라지는 편향된 내용에 혼란스러워하는 것은 학생들”이라고 지적했다. 김효섭기자 newworld@seoul.co.kr
  • 집필기준, 2006년 처음 도입… 꾸준히 ‘우파 시각’ 반영

    집필기준, 2006년 처음 도입… 꾸준히 ‘우파 시각’ 반영

    역사교과서 저자들이 교과서 내용을 기술할 때 반드시 따라야 하는 ‘역사교과서 집필 기준’이 있다. 집필 기준을 따르지 않으면 검정 심사를 통과하지 못한다. 역사적 사실 선택이나 해석에 있어 집필자의 과도한 편향성을 막기 위해 2006년 도입된 ‘2007 개정 교육과정’ 때 처음 마련됐다. 집필 기준은 개정 교육과정을 구체화한 것이다. 때문에 지난달 고시된 역사 교과서 내 민주주의라는 용어를 자유민주주의로 일괄 변경하는 내용의 ‘2009 개정 역사 교육과정’은 집필 기준에 반영되고, 이는 다시 역사교과서를 통해 구체화된다. 역사교과서 집필 기준을 보면 이른바 ‘우파의 시각’이 꾸준히 반영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대표적인 항목으로 대한민국 정부 수립, 6·25 전쟁, 경제개발과 자본주의 발달 등을 꼽을 수 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경우 2009년 역사교과서 집필 기준에는 “1948년 8월 15일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는 대한제국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계승한 정통성 있는 국가임을 설명한다.”는 내용이 보강됐다. 6·25 전쟁과 관련한 내용은 ‘6·25 전쟁이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됐다는 사실을 명확히 서술’하도록 했다. 2000년 국사교육 준거안에는 “북한이 6·25 전쟁을 일으킨 과정을 설명한다.”고 되어 있었다. 또 2000년 준거안에 들어 있던 “제주도 4·3사건 및 여수·순천 10·19사건에 대해 설명한다.”는 부분은 빠졌다. 이승만 정부에 대해서도 반민법·농지개혁법 제정 등 주요 정책과 성격을 설명한다는 2000년 국사교육 준거안은 “대한민국은 농지개혁을 추진하고 친일파 청산에 노력했음을 서술한다.”는 내용으로 바뀌었다. 또 2000년에는 경제성장과 사회화, 도시화의 급속한 진전에 따른 사회문제의 실상을 서술한다고 되어 있던 것이 2009년 역사교과서 집필 기준에서는 “대한민국이 성취한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이 상관관계가 있음도 서술한다.”는 내용으로 바뀌었다. 2013년부터 적용될 역사교과서 집필 기준은 10월에 마련된다. 최근 개정 역사교육과정에 ‘민주주의’라는 용어를 ‘자유민주주의’로 일괄 변경하면서 논란이 되고 있다. 논란이 커지면서 용어 변경을 주도한 한국현대사학회는 용어 변경에 반대하는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와 다음 달 공동 학술대회를 열기로 합의했다. 역사교과서 집필 기준이 확정되기 전에 학술적인 논란을 걸러 내자는 것이다. 김효섭기자 newworld@seoul.co.kr
  • [사설] 공권력 투입이 선전포고라는 야당대표

    제주 해군기지 건설은 참여정부 시절인 2007년 결정돼 주민 여론조사와 공청회, 환경영향평가 등을 거친 합법적인 국책사업이다. 토지보상 절차도 마쳤다. 지난주에는 기지 건설 공사를 방해해선 안 된다는 법원의 결정까지 나왔다. 그럼에도 반대투쟁은 사그라지기는커녕 ‘시위 전세기’까지 등장시키며 기세를 올리고 있다. 마침내 경찰이 어제 제주 강정마을에 공권력을 투입해 농성현장을 봉쇄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경찰이 시위대에 억류되는 무법상황은 더 이상 용납돼선 안 된다. 법원이 공사방해금지 가처분 결정을 내린 현실에서도 국가적 사업을 막무가내로 막아서는 이들에 대한 단호한 대응이 필요하다. 그런 만큼 엄정한 공권력 행사는 불가피하다. ‘법’만을 내세워 밀어붙이는 것이 물론 능사는 아니다. 대화 노력은 계속돼야 한다. 엊그제 국방·국토해양부 장관이 합동담화문에서 밝혔듯 해군기지 사업을 원만하게 추진해 제주도민과 국가의 이익이 함께 증진되는 길을 찾는 것이 최선이다. 그러나 제주 강정마을 공권력 투입과 관련된 민주당 손학규 대표의 어제 발언은 매우 실망스럽다. 손 대표는 “4·3사건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제주도민에 대한 선전포고”라며 정부는 국회를 무시하는 태도를 중지하고 평화적인 해법을 마련해야 한다고 했다. 수년을 끌어온 제주 해군기지의 진행 일지라도 제대로 훑어보고 하는 말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수권을 꿈꾸는 제1야당의 대표라면 그에 걸맞은 말의 무게를 지녀야 한다. 그러잖아도 육지경찰에 의해 ‘4·3 공포’가 재연되고 있다며 신경을 한껏 곤두세우고 있는 제주도민을 향해 ‘선전포고’ 운운하다니 무책임도 이런 무책임이 없다. 손 대표는 정부가 국회를 무시한다고 했다. 요즘 동료의원 감싸기로 여론의 몰매를 맞고 있는 국회다. ‘신성한’ 국회가 존중돼야 하듯 법원의 결정도, 공권력의 권위도 마땅히 존중받아야 한다. 책임 있는 공당의 지도자라면 말 한마디도 신중해야 한다. 지금 필요한 건 자극적인 ‘선동’ 구호가 아니라 제주도민과 국가의 미래를 아울러 살피는 성숙한 해법이다. 손 대표가 먼저 제대로 된 ‘평화적’ 방책을 한번 내놓아 보기 바란다.
  • 시한부 인생 작가의 화해와 이별 연습

    죽음은 관념이 아니다. 실제다. 덜 여문 생각 혹은 막연한 두려움이 죽음을 관념 속에 머물게 할 뿐이다. 구체적인 삶 속에서 죽음의 시원(始源)을 좇는 것도, 공포스럽기만 한 죽음을 극복하거나 남은 이들을 치유하는 것도 모두 잔인할 만큼 지극히 현실 속의 일이다. 현길언(71)의 소설집 ‘유리벽’(문학과지성 펴냄)에 실린 여섯 편의 단편과 한 편의 중편은 한결같이 삶이 어떤 식으로든 결국 대면해야 할 죽음과의 관계, 죽음과의 공존법을 그려 내고 있다. 현길언은 자신의 삶 속에서 점점 횟수가 잦아지고 다양해지는 죽음의 형태들을 하나씩 꺼내 확인한다. 그리고 그냥 그곳에 머물지 않고 화해하고 치유를 권한다. 회사에서 소모품처럼 이용되다 배신당하고, 가장 가깝게 믿었던 이들에게조차 진심의 위로를 받지 못한 이에게 산에 올라가 줄에 목을 거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은 없었다(‘유리벽’). 6개월 시한부 삶을 선고받은 노정객은 울분과 절망에 가득 찼지만 결국 자신은 물론 주변 이들과 화해하고 이별 연습을 한다(‘고향에서 보낸 마지막 며칠’). 어린 소년 현길언이 고향 제주 4·3 현장에서 목도하거나 전해 들은 숱한 죽음들은 아예 직접적으로 서술된다(‘죽음에 대한 몇 개의 삽화’). 여기에 한국전쟁 때 자행된 양민학살에 대한 작품(‘짧은 혀 긴 혀’)은 사관(史官)으로서의 소설가 역할을 상기시킨다. 노()작가는 그렇다고 부러 과장하거나 흥분하지 않는다. 죽음의 사례를 하나씩 끄집어내지만 이를 담담히 풀어내며 죽음의 의미를 스스로 물을 뿐이다. 그리고 평생에 걸쳐 종교(기독교)를 삶과 문학의 한 축으로 삼아 온 작가답게, 성찰의 언어와 화해의 문장 속에서 치유와 화해의 방법을 넌지시 건넬 뿐이다. 현길언은 ‘작가의 말’을 통해 “몇몇 작품은 오래전에 발표했던 것들인데 최근에 대폭 수정한 것들”이라면서 “작품을 추릴 때는 생각하지도 못했는데 모아 놓고 보니 모두 죽음이나 떠남을 얘기하고 있어 나 자신도 놀랐다.”고 말했다. “십수 년 전 발표 당시부터 요즘에 이르기까지 이런 문제가 내 관심의 한복판에 있음을 알게 됐다.”고도 했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제주-웃뜨르, 설움에서 희망의 상징으로 서다

    제주-웃뜨르, 설움에서 희망의 상징으로 서다

    ‘웃뜨르’는 위쪽 들녘이라는 뜻의 제주도 방언이다. 외지인에게는 그저 수많은 제주도 방언 중 하나일 뿐이겠지만 제주도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다.아니 그럴 수 없다. 웃뜨르, 설움에서 희망의 상징으로 서다 ‘웃뜨르’는 위쪽 들녘이라는 뜻의 제주도 방언이다. 외지인에게는 그저 수많은 제주도 방언 중 하나일 뿐이겠지만 제주도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다.아니 그럴 수 없다. 그들에게 위쪽은 변방이었고 오지였고 척박한 터전이었다. 그래서 서러웠고 외로웠고 고됐다. 단순한 뜻풀이로는 이해할 수 없는 그들만의 정서가 짙게 밴 이유다. 그 웃뜨르가 탈바꿈했다. 설움의 상징에서 이제는 제주농촌의 여유로움, 쾌적함, 아늑함을 대변한다. 그야말로 제주식 ‘농촌 어메니티(Amenity)’운동의 성공작이다. 그래서 웃뜨르 마을 여행은 제주 중산간 농촌마을의 희망과 만나러 가는 길이다. 글 김선주 기자 사진 전병대 기자 1 청수 곶자왈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 임안순 웃뜨르 마을 추진위원장 2 곶자왈 승마학교는 기존 승마장과는 차별화된 프로그램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3 곶자왈 지표면의 모습. 화산암 위의 이끼류와 양치식물이 이색적인 풍광을 자아낸다 변방의 윗 들녘, 웃뜨르 마을로 탈바꿈 웃뜨르는 원래 해발고도 100~400m 사이의 제주도 중산간 지역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평지도 고지도 아닌 중간 고도의 산간마을 모두가 웃뜨르인 셈인데, 이런 포괄적인 개념이 보다 구체화되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08년 농촌마을종합개발사업 대상지역으로 ‘웃뜨르 권역’이 선정되면서부터다. 웃뜨르 권역은 제주시 한경면의 청수, 낙천, 산양, 저지 4개 마을로 이뤄졌다. 제주도 서부 웃뜨르 지역의 전형적인 특징이 고스란한 마을들이다. 웃뜨르라는 공동의 브랜드 아래 제주 중산간 농촌마을의 매력 알리기에 본격적으로 나선 것이다. 이를 계기로 웃뜨르 역시 자연스레 이곳 4개 마을을 지칭하는 쪽으로 가닥이 잡혀 가고 있다. “불과 30~40년 전만 해도 웃뜨르라는 말 자체에 폄훼와 비하의 의미가 담겨 있었어요. 심지어는 웃뜨르꺼뜰(웃뜨르 것들)이라며 웃뜨르에 사는 사람들을 멸시하기도 했지요.” -임안순 웃뜨르권역 추진위원장 물이 귀한 제주도였던지라 애초부터 용천수가 나오는 해안가 마을을 중심으로 삶의 터전이 형성됐다. 그곳에 편입되지 못한 삶들은 중산간(웃뜨르) 지대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변방 또는 외지로 밀려난 삶은 척박하고 고될 수밖에 없었다. 제주 4·3사건 때 산도 평야도 아닌, 그래서 피아좌우 구분이 애매했던 웃뜨르 사람들이 겪었던 고초는 서러움의 극치였다. ‘웃뜨르꺼뜰’이라고 웃뜨르의 삶을 비하한 것도 그때였다고 한다. 웃뜨르를 전면에 내세워 농촌의 새로운 희망을 모색하겠다는 계획에 동네 어르신들이 탐탁치 못한 반응을 보였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들 기억 속 웃뜨르는 절망에 더 가까이 있었던 탓이다. 제주 중산간 마을의 정취를 그대로 새삼스럽지만 그것은 기우였다. 웃뜨르 권역 농촌개발사업은 2012년까지 계속되는 현재진행형 사업이다. 하지만 성적표는 이미 눈부시다. 웃뜨르 마을의 심장인 ‘웃뜨르 빛 센터’가 들어섰고 ‘곶자왈 승마학교’도 새로 문을 열었다. 청수, 낙천, 산양, 저지 4개 마을은 4촌4색의 테마 마을로 다시 태어났고, 저마다의 매력으로 웃뜨르 마을을 빛내고 있다. 거기에 웃뜨르만의 생태와 자연, 역사, 정서를 살린 각종 체험거리와 이야기가 더해졌다. 원래의 것이 새것을 받들고, 새것으로 원래의 것이 더욱 도드라지는 선순환이 생겼다. 급기야 2010년에는 전국의 농촌개발사업권역 중 최우수 권역으로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설움의 웃뜨르가 농촌 희망 찾기의 대명사로 거듭났다고 해도 무색하지 않은 이유다. 1 낙천 의자마을의 가족여행객 2 의자 테마공원 입구의 거대한 의자 3 낙천마을의 9개 물웅덩이 중 일부. 낚시 체험도 할 수 있다 4 제주 느낌 물씬한 돌하르방 5 키다리 의자 4촌4색 웃뜨르 마을을 거닐다 곶자왈 숲길에서 평온을 느끼다 왜 임안순 웃뜨르권역 추진위원장이 가장 먼저, 그것도 신이 난 채 청수 곶자왈을 안내했는지는 금세 이해할 수 있었다. 곶자왈만의 자연이 그만큼 색달랐고 감흥이 남달랐기 때문이다. 곶자왈은 쉽게 말하면 화산암 지대 숲이다. 화산암들이 지반을 이루고 그 지반 위에 곶자왈만의 생태가 독특한 풍광을 자아낸다. 구멍이 숭숭 뚫린 화산암인지라 아무리 많은 비가 쏟아져도 고이지 않고 지하로 스며들며, 겨울에도 구멍을 타고 지하의 온기가 올라와 사시사철 푸르다고 한다. 바위를 덮은 이끼류와 고사리 같은 양치식물이 지표면을 장식하고, 그 위로 명가시나무, 개가시나무(환경부 멸종위기종 지정) 같은 이색 수종이 신비한 자태로 여기저기로 줄기를 뻗고 있다. 제주도에는 너댓 개의 곶자왈이 있는데, 이곳 청수 곶자왈도 그 전형적인 모습을 간직한 것으로 유명하다. 웃뜨르 마을을 넘어 ‘제주도의 허파’로 불리는 까닭이다. 숲의 울창함을 용케도 뚫은 5월 초입의 햇살이 이곳저곳에서 반짝거렸고, 산새의 지저귐은 반주처럼 화음을 맞췄다. 그 숲길을 걷노라니 몸이 먼저 오랜동안 잊혀졌던 ‘평온’의 기억을 되살려냈다. 평온하고 평온하고 또 평온했다. 청수 곶자왈 수목의 수령은 기껏해야 30~40년 정도여서 갸름하고 얄팍하다. 숯을 만들어 생계를 유지해야 했던 웃뜨르의 척박한 삶 때문에 잘려 나가고 불타 버렸던 탓이라고 한다. 이 또한 웃뜨르만의 곡절이요 질곡이니 오히려 곶자왈의 원형과 어우려져 곶자왈 탐방의 정서적 만족감을 키운다. 청수 곶자왈은 말을 타고도 만끽할 수 있다. 곶자왈 승마학교가 인접해 있는데, 이곳에서는 기존의 관광객용 승마장과는 차별화된 승마 프로그램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승마의 이론교육에서부터 실기까지 ‘체계’를 갖춰 진행하는 것이다. 그래서 승마학교에는 어엿한 자태로 승마를 즐기는 꼬마 기수들도 많다. 승마학교에서 기본기를 다진 뒤에야 곶자왈 승마탐방에 나설 수 있는데, 속성으로는 아무래도 무리지 싶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천 개의 의자와 천 개의 수다가 재잘대는 마을 웃뜨르 마을이 시행착오를 겪지 않은 것은 아니다. 낙천 마을만 봐도 그 흔적이 엿보인다. 옛날 이곳은 풀무업이 번성했다고 하는데, 그 점에 착안해 풀무 체험을 주력 테마로 삼아 마을의 거듭나기를 시도한 적이 있다. 그러나 사실상 실패였다. 풀무 체험시설을 짓고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했지만 체험비로 운영비용을 온전히 충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1,000개의 의자다. 올레꾼, 여행객, 동네주민 할 것 없이 의자에 잠시 앉아 쉬어가라는 의미에서였다. 볼 것, 즐길 것 없던 이 마을에 1,000개의 의자가 만들어졌고, 각각의 의자마다 네티즌들이 붙인 제각각의 이름이 붙여졌다. ‘이쁜 내가 참는다’ ‘건들지마’ 등등등. 그래서 이야기가 다양해졌고 낙천마을은 의자 마을로 거듭났다. 1,000개의 의자가 반기고 1,000개의 수다가 재잘대는 마을이다. 의자들은 의자 테마공원 뿐만 아니라 마을 곳곳에 앉아 있는데, 그 의자에 앉아 낙천리의 9개 샘을 감상하거나 낚시체험을 할 수도 있다. 낙천 마을은 ‘아홉 굿 마을’로도 불리는데 마을에 9개의 고만고만한 물웅덩이가 있기 때문이다. 보리밭, 감귤농장을 지나고 지나서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면 그중 일부 웅덩이를 만날 수 있다. 현재도 농업용수 공급원으로, 또 관광객들의 낚시체험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웃뜨르의 여운, 다시 찾아야 하는 이유 미완의 여운이 오히려 더 아름답다는 점을 인정하면 이번 웃뜨르 마을 여행도 여운을 남긴 아름다운 것이었다. 4개 마을 중 산양 마을과 저지 마을은 미처 들르지 못했기 때문. 그 아쉬움은 다시 웃뜨르 마을을 찾아야 할 명백한 이유가 됐다. 산양 마을은 옹기 마을로, 저지 마을은 저지오름 트레킹과 저지예술인 마을의 예술적 향취로 유명하다. 거기에 각 마을의 테마에 맞춘 다채로운 체험거리들과 관광지들이 즐비하니 다시 찾아도 여행의 여백은 여전히 존재할 게 분명하다. Travie info. 웃뜨르 빛 센터 웃뜨르 마을의 전반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정보센터 역할을 한다. 청수승마체험학교와 함께 들어서 있으며 숙박도 가능하다. 최대수용인원은 60명. 5인실 2실, 6인실 4실, 8인실 2실을 갖췄다. 다목적 회의실도 2개 갖추고 있어 별도 행사도 가능하다. 제주국제공항에서 평화로를 이용해 자동차로 40분 정도 소요된다. 문의 064-772-5505 www.utturu.com 체험비 지원 받으세요! 제주도 농업기술원 서부농업기술센터는 제주 농촌체험관광 활성화를 위해 주요 농촌 체험 패키지상품에 대해 1인당 체험재료비 2만5,000원(체험비의 50%)을 지원한다. 지원기간은 7월21일부터 8월20일까지이며, 단체별 20명 이상 선착순 500명을 대상으로 한다. 신청은 6월17일까지. 문의 064-760-7931~2 웃뜨르 자유여행상품 나왔어요! 자유여행상품을 통해 웃뜨르 마을을 여행할 수도 있다. 제주도관광협회는 웃뜨르 마을 여행활성화를 위해 렌터카와 주요 체험거리들을 엮은 자유여행상품을 출시했다. www.hijeju.or.kr 요영 찰렸수다(이렇게 차렸습니다) 웃뜨르 마을 내에는 10여 개의 식당이 영업을 하고 있다. 그중 청수 마을 주변의 추천할 만한 식당으로는 풀내음식당(서귀포시 대정읍 무릉리 소재, 064-792-4525)과 명리동식당(제주시 한경면 저지리 소재, 064-772-5571)을 꼽을 수 있다. 풀내음식당은 제주흑돼지 오겹살 구이가 으뜸이고, 식당 규모 또한 커서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 있다. 명리동식당은 앙증맞고 시골 정취 물씬한 외관이 정겹다. 짜투리 돼지고기 연탄불 구이와 김치전골 등을 맛볼 수 있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위 기사는 기사콘텐츠 교류 제휴매체인 여행신문의 기사입니다. 이 기사에 관한 모든 법적인 권한과 책임은 여행신문에 있습니다.
  • [김문이 만난사람] 6·25전쟁 당시 1사단장 백선엽 장군

    [김문이 만난사람] 6·25전쟁 당시 1사단장 백선엽 장군

    톨스토이가 쓴 명작 ‘전쟁과 평화’를 잠시 기억해본다. 마지막 부분이다. 주인공 안드레이 청년이 죽어가면서 ‘시베리아의 하늘도 파랗구나’라고 읊었다. 평화로운 파란 하늘을 진작 봤으면 전쟁을 할 일도 없을 텐데 죽어갈 때 누워서 하늘을 보니 ‘왜 피 흘리면서 전쟁을 했을까’라는 물음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6·25전쟁은 왜 했을까. 평화를 위해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했고, 세월이 지난 지금도 눈물겹도록 아프게 하는 역사를 왜 만들어야 했을까. 참으로 비통하고 영원히 기억을 할 수밖에 없는 우리 민족의 큰 상처이기에 해마다 6월이면 다시 한번 되새기게 한다. 1950년 6월 25일 아침 7시였다. 젊은 장교의 일성은 이랬다. “사단장 각하, 전방에서 적이 전면적으로 침공해 왔습니다. 개성이 대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개성은 벌써 점령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서울과 개성 등 전방을 지키는 보병 제1사단 작전참모 김덕준 소령의 숨가쁜 목소리를 들은 것은 당시 백선엽 1사단장이다. 우리 역사에서 민족의 비극인 6·25전쟁을 알리는 제1보였다. 백선엽 장군은 시흥에 있던 육군보병학교에서 10일 전부터 3개월 과정의 고급간부교육을 받고 있던 중 급거 귀대하여 1사단을 지휘했다. 이후 낙동강까지 후퇴한 1사단은 한국군 부대 중에서 유일하게 미1군단에 배속돼 지원 나온 미군 2개 연대와 함께 경북 칠곡의 다부동 전투를 치렀다. 전투 중 한국군 병력의 후퇴와 무단이탈이 심해지자 함께 다부동을 지키던 미군 27연대장 마이켈리스(Michaelis) 대령이 “전선 좌측의 한국군 부대가 무단 이탈하고 있다.”며 다급하게 전황을 알려왔다. 백선엽 장군은 후퇴하는 국군을 막으며 “나라가 망하기 직전이다. 저 사람들(미군)이 싸우고 있는데 우리가 이럴 순 없다. 내가 앞장설 테니 나를 따르라. 내가 후퇴하면 나를 쏴도 좋다.”며 싸울 것을 호소했다. 이후 1사단은 평양 입성을 가장 먼저 했다. 백선엽 장군은 최근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라는 제목으로 6·25 전쟁 당시 1128일의 기억을 책으로 펴냈다. 6·25전쟁 얘기만 나오면 누구보다 또렷이 기억하는 살아 있는 역사로 여긴다. 6·25전쟁 61주년을 앞두고 지난 20일 서울 용산의 전쟁기념관에서 백선엽 장군을 만났다. 6월이어서 그런지 강의를 해 달라는 손님들이 분주히 드나들었다. 약속 시간보다 20분 뒤에야 자리에 마주 앉았다. 1920년생이면 우리 나이로 92살. 그런데도 전쟁의 기억은 분명했다.. 차 한 잔을 마시더니 백 장군이 “고향이 어디요.”라고 물었다. 제주도라고 답을 드렸다. 그러자마자 나오는 얘기는 이러했다. “제주도 무척 많이 갔지. 6·25때 모슬포에 보충대가 있었어. 16주 동안 교육을 시키고 전쟁터에 보냈거든, 그래 육군 제1 훈련소야. 20살 전후의 청년들 10만명 정도가 훈련을 받았어, 내 동생(백인엽 장군)이 훈련소장도 했고. 태풍도 많이 왔어. 미군부대에서 지원 받은 천막을 치고 훈련했지. 하루에 상륙함정(LST) 두 척이 오고 가면서 훈련병들을 실어 날랐어. 그 병사들이 전쟁터에 많이 죽었어.” 백 장군의 눈이 잠시 감긴다. 그들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당시 전쟁상황에서 지금의 5~6주 교육보다 더 긴 16주 교육을 했던 이유에 대해 물었다 . “미군의 2차대전 방식을 그대로 따랐거든. 미군은 100개 사단이 있었는데 대부분 16주 동안 훈련을 받고 전쟁터에 보내졌어. 2차대전때…. 제주도 훈련소는 일제때 썼던 비행장이야, 그러니까 일본군들이 중국의 난징(南京) 폭격을 위한 중간 기지였지. 훈련소에는 미군 고문관들이 많았어.” 백 장군은 왜 제주에 자주 갔을까. “내가 육군참모총장을 했었거든. 훈련소에 물이 부족했어. 그걸 해결하기 위해 LST나 미군 비행기를 이용해서 여러 번 갔어. 아마 수십 차례 될걸. 또 동생이 1년동안 훈련소장으로 있었거든. 장도영 장군도 훈련소장을 했었지.” 백 장군은 잠시 4·3사건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1948년 4월 3일이야. 내가 부산 3여단 참모장을 했어. 제주 관할이니까 부대 시찰차 갔었지. 그때는 제주읍이야. 4월3일 아침에 비행기를 타려고 하는데 김익열 연대장이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가 왔어. 김달삼(金達三)이 이끄는 폭도들이 제주지역 11군데 지서를 습격했다고 말야.” 잠시 관련 자료을 들여다본다. 김달삼은 사회주의 혁명가로 제주 4·3 사건을 주도한 남조선로동당원이다. 그의 본명은 이승진이며, 고향은 대구. 일본에서 중학교와 대학을 나왔다. 1945년 1월 일본에서 강문석의 딸 강영애와 결혼했으며 김달삼이란 이름은 원래 강문석이 쓰던 가명이다. 1946년 말 제주도 대정중학교 사회과 교사로 재직하면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르쳤다. 그는 교사로 재직 중에 남로당 대정면 조직부장을 맡았으며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책이자 군사부 책임자가 됐다. 화제를 다시 돌려 6·25 전쟁때 제1보를 보고한 김덕준 소령에 대해 물었다. “그날 아침 7시였어. 지금도 그 목소리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지. 전화를 받는 순간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 북한이 탱크와 전투기를 갖고 있는거 알았거든. 전쟁을 대비해야 한다는 것도 수차례 얘기했고…” 백 장군은 이 대목에서 “이승만 대통령도 미군에게 북한의 남침 예상을 얘기했고 나도 미군 고문단과 만날 때마다 전투기와 탱크, 대포를 달라고 수차례 말했다.”고 술회했다. “우리야 그때 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지. 미군에게 그렇게 여러번 얘기해도 귀담아 듣지 않았어. 희생을 줄일 수도 있었는데 말야. 북한군은, 나중에 노획문서를 보니 깨소금까지 준비할 정도로 매우 치밀하게 전쟁을 계획했어.” 백 장군이 얘기하는 모습을 보면서 북한군이 왜 6월 25일을 택했는지 알 수 있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북한군은 남한에서 먹을 것이 많은 계절인 6월부터 9월까지를 정했지. 3개월이면 부산까지 싹 쓸어버릴 작정이었어. 이 시기는 들판에 가면 먹을 것들이 많거든. 전쟁에서 먹거리는 매우 중요해. 북한은 추수때까지 전쟁을 끝낼 계획을 짰어.” 그렇다면 우리 군사들은 무엇을 먹고 싸웠을까. “낙동강까지 후퇴하면서 농협창고에서 쌀을 얻었고 밭에 가면 파와 배추가 있었지. 그걸 먹었어. 또 우리 선량한 아주머니들, 국민들이 갖다주는 음식도 먹었어. 아주 훌륭한 분들이야. 다부동 전투에서 이길 수 있었던 것도 우리 주민들이 갖다주는 음식이 있었기 때문이지.”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고 북진할 때는 어땠을까. “김일성 군대는 낙동강에서 완전히 녹았어. 북진을 하면서는 시장에서 먹을 것을 사 왔고 군에서 나오는 건빵을 먹었지. 고지 전투에서는 배가 고파 이탈하는 군인들도 더러 있었어. 북진할 때는 하복을 입었는데 나중에 동복으로 갈아 입었고…. 북한 주민들이 우리를 보더니 많이 환영했어. 먹을 것도 주고….” 백 장군은 평북 운산까지 진격했다가 중공군과 맞닥뜨린다. “중공군은 장개석 군대 출신들의 최정예 부대야. 일본군과 10년을 싸운 군사들이었지. 전쟁경험이 아주 많아. 그런 군사 100만명이 압록강을 넘어와 매복을 하고 있었으니 우리 군이 당할 수밖에 없지. 그래도 우리 1사단을 덜 당했어. 운산 일대에 중공군 30만명이 매복하고 있다는 것을 하루 전에 알 수 있었지. 하루 밤새 싸우다가 도저히 안 되더라구. 결국 후퇴하고 말았지만….” 그러면서 백 장군은 북한군의 변화상에 대해 여러 번 강조했다. “남북한은 여전히 휴전 상태이며 두 세대가 지나는 동안 북한은 핵무기와 장거리 미사일, 120만명의 지상군과 20만명의 특공대를 갖고 있다.”면서 “지난 61년 동안 북한은 청와대도 습격하고 천안함을 폭침하고 연평도를 포격하는 등 별 장난을 다했다.”고 말했다. “우리 젊은이들이 경계를 잘해야 돼. 대부분 고등학교 이상 출신들이 군대를 가잖아. 자원이 아주 훌륭해요” 백 장군은 군사영어학교 출신이다. 전체 110명이었는데 지금 만나는 동기들은 겨우 15명 내외에 불과하다. 건강이 어떠냐고 했다. “아픈 데 없어. 병원도 안 가. 동기들과 만나 옛날 얘기하는 재미로 살고 있어.” 맥아더 장군이 얘기했다. ‘노병은 죽지 않고 다만 사라질 뿐이다’. 백 장군은 “너무 오래 살았어.”하면서 껄껄 웃는다. 편집위원 km@seoul.co.kr >> 백선엽 그는 누구인가 1920년 평안북도 강서군 덕흥리에서 태어났다. 1940년 3월 평양 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교사로 재직하다가 만주 봉천(奉天) 군관학교에 진학하면서 군인의 길을 걸었다. 1942년 12월 제9기로 졸업하고 견습군관을 거쳐 1943년 4월 만주군 소위로 임관했다. 해방 직후에는 잠시 조만식 선생의 비서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1945년 2월 월남했다. 이후 1945년 12월 군사영어학교 1기생으로 입학했고, 1946년 2월에 임관했다. 그해 1월 창설된 국방경비대에서 제5연대장을 맡았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국방경비대가 정식으로 국군으로 재편되면서 제5연대장과 육본 정보국장을 거쳐 1950년 4월에 개성을 관할하는 국군 1 보병사단 사단장(당시 계급 대령)으로 부임했다. 1951년 겨울에는 지리산의 빨치산 소탕을 위한 ‘백(白) 야전사령부’를 구성했으며 이 사령부를 모태로 이듬해 4월에는 한국군 최초로 근대화된 2군단을 창설했다. 1952년 7월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된 후 군 훈련체계의 개혁, 보급체계 개편, 상이군인들에 대한 복지 향상 등에 힘썼다. 이때 10개 상비사단 창설(11~20사단), 10개 예비사단 창설 등을 추진했다. 퇴역 후에는 외교관 생활을 한 뒤 교통부 장관을 지냈다. 대한민국 최초의 원수계급에 해당하는 예우를 받고 있다.
  • 백선엽 “깨소금까지 준비한 북한군 6월 25일 도발한 것은”

    백선엽 “깨소금까지 준비한 북한군 6월 25일 도발한 것은”

    지금도 눈물겹도록 아프게 하는 역사를 왜 만들어야 했을까. 참으로 비통하고 영원히 기억을 할 수밖에 없는 우리 민족의 큰 상처이기에 해마다 6월이면 다시 한번 되새기게 한다. 1950년 6월 25일 아침 7시였다. 젊은 장교의 일성은 이랬다. “사단장 각하, 전방에서 적이 전면적으로 침공해 왔습니다. 개성이 대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개성은 벌써 점령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서울과 개성 등 전방를 지키는 보병 제1사단 작전참모 김덕준 소령의 숨가쁜 목소리를 들은 것은 당시 백선엽 1사단장이다. 우리 역사에서 민족의 비극인 6·25전쟁을 알리는 제1보였다. 백선엽 장군은 시흥에 있던 육군보병학교에서 10일 전부터 3개월 과정의 고급간부교육을 받고 있던 중 급거 귀대하여 1사단을 지휘했다. 이후 낙동강까지 후퇴한 1사단은 한국군 부대 중에서 유일하게 미1군단에 배속돼 지원 나온 미군 2개 연대와 함께 경북 칠곡의 다부동 전투를 치렀다. 전투 중 한국군 병력의 후퇴와 무단이탈이 심해지자 함께 다부동을 지키던 미군 27연대장 마이켈리스(Michaelis) 대령이 “전선 좌측의 한국군 부대가 무단 이탈하고 있다.”며 다급하게 전황을 알려왔다. 백선엽 장군은 후퇴하는 국군을 막으며 “나라가 망하기 직전이다. 저 사람들(미군)이 싸우고 있는데 우리가 이럴 순 없다. 내가 앞장설 테니 나를 따르라. 내가 후퇴하면 나를 쏴도 좋다.”며 싸울 것을 호소했다. 이후 1사단은 평양 입성을 가장 먼저 했다. 백선엽 장군은 최근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라는 제목으로 6·25 전쟁 당시 1128일의 기억을 책으로 펴냈다. 6·25전쟁 얘기만 나오면 누구보다 또렷이 기억하는 살아 있는 역사로 여긴다. 6·25전쟁 61주년을 앞두고 지난 20일 서울 용산의 전쟁기념관에서 백선엽 장군을 만났다. 6월이어서 그런지 강의를 해 달라는 손님들이 분주히 드나들었다. 약속 시간보다 20분 뒤에야 자리에 마주 앉았다. 1920년생이면 우리 나이로 92살. 그런데도 전쟁의 기억은 분명했다.. 차 한 잔을 마시더니 백 장군이 “고향이 어디요.”라고 물었다. 제주도라고 답을 드렸다. 그러자마자 나오는 얘기는 이러했다. “제주도 무척 많이 갔지. 6·25때 모슬포에 보충대가 있었어. 16주 동안 교육을 시키고 전쟁터에 보냈거든, 그래 육군 제1 훈련소야. 20살 전후의 청년들 10만명 정도가 훈련을 받았어, 내 동생(백인엽 장군)이 훈련소장도 했고. 태풍도 많이 왔어. 미군부대에서 지원 받은 천막을 치고 훈련했지. 하루에 상륙함정(LST) 두 척이 오고 가면서 훈련병들을 실어 날랐어. 그 병사들이 전쟁터에 많이 죽었어.” 백 장군의 눈이 잠시 감긴다. 그들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당시 전쟁상황에서 지금의 5~6주 교육보다 더 긴 16주 교육을 했던 이유에 대해 물었다 . “미군의 2차대전 방식을 그대로 따랐거든. 미군은 100개 사단이 있었는데 대부분 16주 동안 훈련을 받고 전쟁터에 보내졌어. 2차대전때?. 제주도 훈련소는 일제때 썼던 비행장이야, 그러니까 일본군들이 중국의 난징(南京) 폭격을 위한 중간 기지였지. 훈련소에는 미군 고문관들이 많았어.” 백 장군은 왜 제주에 자주 갔을까. “내가 육군참모총장을 했었거든. 훈련소에 물이 부족했어. 그걸 해결하기 위해 LST나 미군 비행기를 이용해서 여러 번 갔어. 아마 수십 차례 될 걸. 또 동생이 1년동안 훈련소장으로 있었거든. 장도영 장군도 훈련소장을 했었지.” 백 장군은 잠시 4·3사건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1948년 4월 3일이야. 내가 부산 3여단 참모장을 했어. 제주 관할이니까 부대 시찰차 갔었지. 그때는 제주읍이야. 4월3일 아침에 비행기를 타려고 하는데 김익열 연대장이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가 왔어. 김달삼(金達三)이 이끄는 폭도들이 제주지역 11군데 지서를 습격했다고 말야.” 잠시 관련 자료을 들여다본다. 김달삼은 사회주의 혁명가로 제주 4·3 사건을 주도한 남조선로동당원이다. 그의 본명은 이승진이며, 고향은 대구. 일본에서 중학교와 대학을 나왔다. 1945년 1월 일본에서 강문석의 딸 강영애와 결혼했으며 김달삼이란 이름은 원래 강문석이 쓰던 가명이다. 1946년 말 제주도 대정중학교 사회과 교사로 재직하면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르쳤다. 그는 교사로 재직 중에 남로당 대정면 조직부장을 맡았으며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책이자 군사부 책임자가 됐다. 화제를 다시 돌려 6·25 전쟁때 제1보를 보고한 김덕준 소령에 대해 물었다. “그날 아침 7시였어. 지금도 그 목소리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지. 전화를 받는 순간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 북한이 탱크와 전투기를 갖고 있는거 알았거든. 전쟁을 대비해야 한다는 것도 수차례 얘기했고?” 백 장군은 이 대목에서 “이승만 대통령도 미군에게 북한의 남침 예상을 얘기했고 나도 미군 고문단과 만날 때마다 전투기와 탱크, 대포를 달라고 수차례 말했다.”고 술회했다. “우리야 그때 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지. 미군에게 그렇게 여러번 얘기해도 귀담아 듣지 않았어. 희생을 줄일 수도 있었는데 말야. 북한군은, 나중에 노획문서를 보니 깨소금까지 준비할 정도로 매우 치밀하게 전쟁을 계획했어.” 백 장군이 얘기하는 모습을 보면서 북한군이 왜 6월 25일을 택했는지 알 수 있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북한군은 남한에서 먹을 것이 많은 계절인 6월부터 9월까지를 정했지. 3개월이면 부산까지 싹 쓸어버릴 작정이었어. 이 시기는 들판에 가면 먹을 것들이 많거든. 전쟁에서 먹거리는 매우 중요해. 북한은 추수때까지 전쟁을 끝낼 계획을 짰어.” 그렇다면 우리 군사들은 무엇을 먹고 싸웠을까. “낙동강까지 후퇴하면서 농협창고에서 쌀을 얻었고 밭에 가면 파와 배추가 있었지. 그걸 먹었어. 또 우리 선량한 아주머니들, 국민들이 갖다주는 음식도 먹었어. 아주 훌륭한 분들이야. 다부동 전투에서 이길 수 있었던 것도 우리 주민들이 갖다주는 음식이 있었기 때문이지.”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고 북진할 때는 어땠을까. “김일성 군대는 낙동강에서 완전히 녹았어. 북진을 하면서는 시장에서 먹을 것을 사 왔고 군에서 나오는 건빵을 먹었지. 고지 전투에서는 배가 고파 이탈하는 군인들도 더러 있었어. 북진할 때는 하복을 입었는데 나중에 동복으로 갈아 입었고?. 북한 주민들이 우리를 보더니 많이 환영했어. 먹을 것도 주고?.” 백 장군은 평북 운산까지 진격했다가 중공군과 맞닥뜨린다. “중공군은 장개석 군대 출신들의 최정예 부대야. 일본군과 10년을 싸운 군사들이었지. 전쟁경험이 아주 많아. 그런 군사 100만명이 압록강을 넘어와 매복을 하고 있었으니 우리 군이 당할 수밖에 없지. 그래도 우리 1사단을 덜 당했어. 운산 일대에 중공군 30만명이 매복하고 있다는 것을 하루 전에 알 수 있었지. 하루 밤새 싸우다가 도저히 안 되더라구. 결국 후퇴하고 말았지만?.” 그러면서 백 장군은 북한군의 변화상에 대해 여러 번 강조했다. “남북한은 여전히 휴전 상태이며 두 세대가 지나는 동안 북한은 핵무기와 장거리 미사일, 120만명의 지상군과 20만명의 특공대를 갖고 있다.”면서 “지난 61년 동안 북한은 청와대도 습격하고 천안함을 폭침하고 연평도를 포격하는 별 장난을 다했다.”고 말했다. “우리 젊은이들이 경계를 잘해야 돼. 대부분 고등학교 이상 출신들이 군대를 가잖아. 자원이 아주 훌륭해요” 백 장군은 군사영어학교 출신이다. 전체 110명이었는데 지금 만나는 동기들은 겨우 15명 내외에 불과하다. 건강이 어떠냐고 했다. “아픈 데 없어. 병원도 안 가. 동기들과 만나 옛날 얘기하는 재미로 살고 있어.” 맥아더 장군이 얘기했다. ‘노병은 죽지 않고 다만 사라질 뿐이다’. 백 장군은 “너무 오래 살았어.”하면서 껄껄 웃는다. 편집위원 km@seoul.co.kr
  • “가장 멋진 제주 올레 구경오세요”

    “가장 멋진 제주 올레 구경오세요”

    제주시 도심인 동문로터리에서 시작해 사라봉, 화북 포구 등을 거쳐 조천읍 만세동산에 이르는 제주올레 18코스가 개설된다. (사)제주올레는 오는 23일 오전 10시 동문로터리 산지천 마당에서 18코스 개설식을 열고, 걷기행사를 진행한다고 11일 밝혔다. 이 코스는 산지천 마당∼김만덕 객주터∼여객터미널공원∼사라봉 정상∼곤을동 마을 터∼화북(별도)포구∼별도연대∼벌낭포구∼삼양검은모래해변∼원당봉 입구∼불탑사∼신촌 가는 옛길∼시비(詩碑) 코지∼신촌포구∼대섬∼연북정∼만세동산에 이르는 구간이다. 총 길이는 18.8㎞로 걸어서 6∼7시간이 걸린다. 사라봉과 별도봉은 그리 높지 않은 오름이지만 제주시내와 바다, 한라산을 한눈에 조망할수 있다. 곤을동 마을 터는 제주 4·3사건 당시 마을 전체가 불타 없어진 곳으로 당시의 비극을 되새기게 하고 시비코지에서 닭모루로 이어지는 바닷길은 탁 트인 풍경이 눈을 즐겁게 한다. 제주올레 서명숙 이사장은 “많은 올레꾼들이 18코스가 개장하기를 손꼽아 기다려 온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이 길은 제주시 권역에서 가장 아름다운 올레로 손꼽을 수 있다.”고 말했다. 제주 황경근기자 kkhwang@seoul.co.kr
  • 한라산 둘레길 걸어볼까

    한라산 둘레길 걸어볼까

    제주 올레길에 이어 한라산 둘레길이 29일 첫선을 보인다. 제주도는 지난해 전체 길이 80㎞의 ‘한라산 둘레길’ 조성 사업에 들어가 1단계로 서귀포자연휴양림에서 동쪽 방향으로 시오름·돈내코계곡까지 이르는 9㎞의 ‘한라산 둘레길’ 조성 사업을 마무리, 29일 개장한다고 6일 밝혔다. 전체 구간은 제주시 절물자연휴양림∼사려니 숲길∼수악교∼돈내코 상류∼시오름∼서귀포자연휴양림∼거린사슴∼노루오름∼1100도로∼제1산록도로∼한라생태숲∼절물자연휴양림까지 한라산을 중심으로 제주를 한 바퀴 도는 코스다. 한라산 해발 600∼800m의 국유림에 있는 둘레길은 일제가 한라산의 울창한 산림과 표고버섯을 수탈하려고 만든 병참로(일명 하치마키 도로)를 활용해 조성했다. 이 일대에는 잣성(조선시대 한라산 중산간 목초지에 만들어진 목장 경계용 돌담)과 제주4·3사건 당시 군경 토벌대와 무장대가 주둔했던 흔적이 남아 있다. 특히 500여m에 이르는 울창한 편백나무 국유림이 장관을 이뤄 산림욕을 즐길 수도 있다. 둘레길은 너비를 최대 2m로 제한하고, 인공자재의 사용을 억제해 자연지형과 생태환경을 최대한 살렸다. 산림청은 올해 추가로 5㎞를 조성하는 등 2014년까지 모두 30억원을 들여 한라산 둘레길 조성 사업을 마무리한다. 20㎞는 임도이고, 나머지 60㎞는 숲길이다. 글 사진 제주 황경근기자 kkhwang@seoul.co.kr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