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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야 부산시장 후보 비교

    ◎국민회의 河一民 후보/市 현안해결 최적임자 강조 【부산=金政韓 기자】 국민회의 河一民 후보는 18일에야 후보공천이 확정되는 등 다른 후보보다 출발이 다소 늦었다.지난 30년 동안 교직에 몸담아온 그는 정치적인 지명도와 인지도에서 다른 후보에 비해 상대적으로 크게 뒤진다.河 후보도 이점을 잘 알고 있다.이를 극복하기 위해 자신이 4·19 세대의 순수성을 간직한 학자라는 이미지를 적극 부각시키고 있다.시정경험이 전혀 없는 것도 약점이다.부산은 여권의 프리미엄을 크게 기대하기가 힘든만큼 힘겨운 싸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는 30년의 강단경험을 살려 논리정연한 화술과 전문교수단,현장전문가 등으로 구성된 정책보좌팀의 뒷받침을 십분 활용해 TV토론에서 기선을 제압한다는 전략을 세워놓고 있다.또 경제전문가,시 재정전문가,해외유치자문단,지역상공인 등으로 구성된 ‘부산경제구조대 119’를 가동,득표력을 높인다는 복안을 갖고 있다.그는 부산시민에게 희망을 되찾아주는게 시장의 역할이라고 강조하고 있다.‘희망의 시장론’을 내세우는 한편 최대한 여당의 지원을 받아 부산 현안을 해결할 수 있는 여당 후보라는 점을 펴고 있다. ◎한나라당 安相英 후보/市長경험 앞세워 표밭 공략 부산은 한나라당의 텃밭이다.한나라당 安相英 후보는 이 점에서 우선 유리한 고지를 점령했다고 볼 수 있다.安 후보는 각종 여론조사에서 다른 후보보다 당선 가능성이 훨씬 높게 나타났다. 더욱이 후보경선에서 진 文正秀 부산시장이 불출마를 공식 선언하고 당원으로서 최대한 돕겠다는 입장을 밝히자 천군만마를 얻은 듯 매우 고무돼 있다. 장점은 풍부한 행정경험.88년 5월 부산시장으로 부임한 安 후보는 2년 7개월간 재임하며 인공섬 건설,2000년대 부산발전구상이라는 장기계획을 수립했다. 지금도 이 장기계획의 틀속에서 개발방향이 수립되고 있다.때문에 그는 기획력과 미래를 바라보는 도시 경영능력이 뛰어났다는 평을 받고 있다.그러나 주위에서는 강력한 추진력만큼 권위적이면서 독선적이라는 지적도 있다. 安 후보는 도시경영행정전문가,2000년대 시장,토박이 시장 등을 내세워 유권자들을 파고 든다는 전략이다.부산시장 재직 때 추진한 인공섬 건립 문제와 출생지 문제가 상대방 후보들로부터 공격의 대상이 되고 있다. ◎무소속 金杞載 후보/행정전문가 장점 부각 총력 무소속 金杞載 후보는 부산시장에 출마하기 위해 서둘러 국회의원 직을 사퇴하고 출마채비를 차렸었다.그는 의원직을 사퇴한 뒤 만나는 사람들에게 ‘자신은 정치인이 아니라 행정가’라는 점을 강조해 왔다.행정에 대한 애착은 그 누구보다 대단하다. 金 후보는 부산과는 그다지 연고가 없다.굳이 찾는다면 행정고시에 합격한 뒤 부산시 새마을계장으로 잠깐 재직한 것과 민선시장 선거를 앞둔 94년 부산시장을 8개월 동안 역임한게 전부다.그 뒤 총무처장관을 거쳐 지난 15대총선 때 신한국당의 공천을 받아 해운대 기장 을에 출마,당선돼 부산과 다시 인연을 맺었다. 국회의원 출마 등으로 유권자들로부터 꽤 높은 인지도와 지명도를 얻었다.그는 23년 동안 행정경험 순발력 기획력 대인관계 등 행정전문가로서 자질을 고루 갖추는데 노력을 기울여 왔다. 네덜란드와 미국 등에 유학,국제적인 감각을 갖춘 것도 그만의 장점이다. 최근 부산의 각계 유력인사 수십명이 자발적으로 선거대책위원에 나서 힘이 되고 있다.그는 IMF가 민선시장 출마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말한다. □여·야 부산시장 후보 비교 ◇국민회의 河一民 후보 나이:58 출생지:경남 하동 학력:경남고,서울대 문리대 주요경력:부마항쟁기념시업회대표(89년)·부산대교수회장(91년)·사월혁명 연구소장(91년)·전국 국공립대학교 교수회장(92년)·부산대민족문제연구소장(93년)·서울대 철학과 박사(95년) 가족:부인 周貞何(56)씨와 2남1녀 별칭:한국의 헤겔 재산:2억9천만원 병역:육군 하사 제대 ◇한나라당 安相英 후보 나이:60 출생지:부산시 부전동 학력:부산고,서울대 공대 주요경력:서울시 건설국(63년)·서울시 종합건설본부장(84년)·한양대 행정대학원(85년)·부산시장(88년)·해운항만청장(90년)·민자당 국책자문위원회 경제분과위원(93년)·부산매일신문사장(96년) 가족:부인 金埰貞(59)씨와 1남1녀 별칭:불도저 재산:28억3천1백만원 병역:육군 예비역(의가사제대) ◇무소속 金杞載 후보 나이:52 출생지:경남 하동 학력:진주사범,고대 상대 주요경력:행정고시 11회(72년)·네덜란드 델프트공대(75년)·미 하버드대 행정대학원 석사(81년)·내무부 차관보(94년)·부산시장(94년)·한나라당 대표최고위원 비서실장(96년) 가족:부인 金明淑씨와 1남1녀 별칭:새벽시장 재산:10억2천만원 병역:육군병장 제대
  • 국민의 정부 첫 5·18 의미­5·18 光州민중항쟁 18주년

    ◎“아시아민주화운동 도화선” 재평가/亞 인권선언대회 주체 계기/기념식 국제행사로 발돋움 “5·18은 아직도 광주에 갇혀 있는가” 국민의 정부 출범후 처음 맞는 5·18의 화두(話頭)는 이렇게 시작되고 있다.지난해부터 5월18일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되는 등 여러 여건은 4·19에 맞먹는 민중항쟁으로 자리매김 되고 있다.그럼에도 광주·전남을 제외하고는 어디서도 기념행사 조차 외면당하고 있는 현실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5·18 민중항쟁 제18주년 기념행사위원회(위원장 李基洪)’는 올해 행사의 목표를 ‘5·18정신의 전국화·세계화추진,그리고 광주와 5·18의 향후 방향성 제시’로 세웠다.5·18을 시공(時空)이라는 씨줄과 날줄로 엮어 전국적,나아가 세계 인류 모두에게 제대로 인식되도록 하자는 것이다. 이번 5·18이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은 50년만에 정권이 교체되었다는 사실이다.또 유엔 세계인권선언 채택 50주년이라는 의미도 있다.광주에서는 15일부터 17일까지 ‘아시아인권헌장’선언대회가 열리고 있다.아시아지역 2백여개의 비정부민간조직의 쟁쟁한 인권운동가들이 모여 21세기를 맞아 아시아민중이 인간다운 삶을 유지하기 위해 추구해야할 기초적인 권리를 담은 헌장을 채택하는 행사다. 이같은 노력을 통해 5·18은 아시아 민주화의 도화선이 된 국제적 민중운동으로 자리매김될 수 있다.광주의 울타리를 넘어 우리 국민 전체의 역사로 기록됨은 물론이다. 이를 위해 시간의 관점에서 5·18의 근·현대사적 위상 재고찰이 필요하다.5·18 묘역에 설치된 체험공간 일곱마당 부조물은 ‘임진왜란 의병­동학혁명­광주학생운동­3·1운동­4·19의거­5·18광주민중항쟁­통일’로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일곱마당에는 빠졌지만 4·3제주항쟁도 같은 맥락에서 부각되어야 한다는게 5·18연구학자들의 주장이다. 공간적으로는 다른 나라 민중항쟁과의 비교 검토가 요구된다.중국의 천안문사태,대만의 2·28사태 및 고웅사태 등이 비교대상이 될 수 있다.일부 학자들은 버마 8888항쟁,태국 5·18 항쟁과 최근 인도네시아의 반(反)수하르토봉기 등 80년대 후반 이후 아시아권의민중항쟁들을 ‘민주화 갈망’이라는측면에서 같이 묶어보려는 노력을 진행중이다. 결국 5·18이 역사에서 제 위치를 차지하려면 명확한 진상규명이 전제되어야 한다.발포명령자,사망자 숫자 등이 확실히 규명되어야 한다.집단암매장 여부,행방불명자 추적,헬기기총소사 등의 참혹행위 여부도 밝혀져야할 대목이다. ◎광주 민중항쟁 일지 ▲80.5.17=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 ▲5.18=전남대생 600여명 학교정문 앞 계엄군과 첫 충돌.광주민주화운동 발발 ▲5.27=신군부 광주민주화운동 진압 ▲9.1=전두환 11대 대통령 취임 ▲9.17=김대중 내란음모죄 1심 사형선고 ▲10.25=계엄군법회의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 175명 선고공판사형5명,무기7명 등) ▲12.9=광주 미문화원 방화 ▲81.4.3=실형 관련자 특사,감형 실시 ▲82.3.18=부산 미문화원 방화 ▲84.11.18=민정당사 점거 시위 ▲85.5.23=서울 미문화원 점거 ▲6.7=국방부‘광주사태 전모’발표.사망자 191명(민간인 164,군인 23,경찰 4명) ▲86.11.1=광주 직할시 승격 ▲88.4.26=13대 국회의원 총선에서 민정당 완패.국회사상 최초의 여소야대 정국 형성 ▲88.11.18∼89.2.24=국회 광주 특위 및 청문회 가동 ▲89.3.10=노태우­김대중 회담,상무대 공원화등 일부 치유책 합의 ▲91.5.11=광주민주화운동 관련 보상 지급 완료 ▲93.5.13=김영삼 대통령 광주문제 관련 담화 발표 ▲94.5.13=정동년 5·18 광주항쟁 연합 상임회장,두 전직 대통령 및 군지휘관 35명을 내란 목적 살인 등 혐의로 고발 ▲95.7.14=5·18 관련자 처벌을 위한 공동대책 위원회 구성 ▲7.18=검찰 5·18 관련자들에 대한 공소권 포기 발표 ▲7.19=5·18 유족 부상자 등 150여명 명동성당 농성 ▲11.25=5·18 특별법 제정 ▲96.1.23=두 전직대통령 등 5·18 관련자 8명 내란혐의 기소 ▲97.4.17=대법원 전두환 무기,노태우 17년형 확정 ▲5.9=국무회의 5·18 국가기념일 제정 ▲12.22=두 전직대통령을 포함한 5.18 관련자 사면,복권
  • 망월동 르포­5·18 光州민중항쟁 18주년

    ◎차분한 추모행렬 “恨 잊을수 있나요”/망월동에만 플래카드 걸려/금남로선 지하철공사 소음 광주는 조용했다.50년만의 정권교체,金大中 대통령의 집권후 첫 5·18을 맞은 광주의 모습은 다른 지역 사람들의 예상과 달랐다.망월동 묘역을 빼고는 5·18 관련 플래카드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5·18 18주년을 앞두고 하루 수천명의 추모 인파가 줄을 잇는 망월동 신·구묘역.그곳에서 만난 郭성환씨(45·자영업).“그동안 5·18만 되면 광주가시끄러웠던 것은 과거 정권탓이지요.가장 큰 피해자인 金大中 대통령이 취임했으니 시끄러울 이유가 있나요” 계엄군과 시민·학생 사이에 유혈공방이 벌어졌던 금남로,전남도청,전남대 교정도 5·18의 긴장된 느낌은 없었다.금남로에는 지하철공사가 한창이었다.전남대 등 광주지역 5개 대학 총학생회장단과 조선대 교수협의회는 5·18 기간중 폭력화할 수 있는 한총련 집회를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18년전의 피맺힌 한이 어찌 쉽게 잊혀질까.전주에서 교회 신자들과 함께 처음 망월동 참배를 왔다는 金희선씨(여·43)는 묘비를 살피며 눈시울을 붉혔다.‘어머니,조국이 나를 부릅니다.민주 정의 자유를 위해 앞서 갑니다’,‘여보,당신은 천사였오,천국에서 다시 만납시다’­애끓는 묘비명들에는 아직도 못다한 사연들이 절절이 배어있다.金씨는 “어린 생명까지 이토록 잔인하게 죽이다니…”라며 말을 잇지못했다. ‘5·18 연구소’ 朴秉基 상임연구원은 ‘광주의 차분함’은 ‘망각’이 아니라고 풀이했다.한 단계 승화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그는 “이제는 5·18이 지닌 보편적 가치,즉 민주주의·인류애를 실증적 연구를 통해 확산시키는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5·18의 전국화’를 바라는 광주시민의 염원이 담긴 것이 바로 망월동 구묘역의 돌탑과 신묘역의 헌수탑.전국 각지의 참배객이 작은 돌 하나씩 들고와 쌓은 탑이 이제 1m 높이에 이르렀다.묘역 헌수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명단도 빠르게 늘어가고 있다. 5·18 묘역 입구 표지석은 광주시민들이 정부에 가진 바램을 대변한다.길이 6.8m,높이 4m,무게 33t의 화강암으로 우리나라에서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5·18 묘지’라고 씌여진 표지석의 왼쪽 부분은 비어있다.‘국립’이라는 명칭을 써넣기 위함이다.5·18기념행사위 李基洪 위원장은 “묘역의 국립묘지 승격,5·18정신의 교과서 수록,국가차원의 전국적 기념식 거행 등이 뒤따라야 한다”고 촉구했다.올해 5·18 기념사업은 사상 처음으로 통합추진되고 있다.기념재단이 주축이 된 행사위원회를 만들었다.차분하고 내실있는 행사추진이 가능한 연유다. ◎곳곳에 남겨진 상흔/1천여명 부상·고무 후유증 시달려/金來香양 18년째 ‘휠체어 신세’… 올 대입 도전 “약사가 돼 나처럼 고통받는 사람을 돕고 싶습니다.” 5·18 당시 두차례 척추 관통상을 입고 휠체어에 18년째 몸을 의지하고 있는 金來香양(22)은 영문도 모른채 불구자로 운명지어체적 진실이 하루빨리 밝혀지기를 기대하고 있다. ◎문학속의 5·18/대하소설 봄날 “절규가 희망으로”/대부분 詩로 분노 표출… 제도 폭력 허위 고발 광주민주화항쟁은 여전히 진실규명이 미흡한채 세월과 함께 과거의 바다로 흘러가고 있다.문학속에서도 광주의비극은 제대로 조명되지 못해왔다.그러나 임철우씨의 장편소설 ‘봄날’에서 마침내 ‘광주의 진실’이 총체적으로 형상화되어 한국인의 보편적 역사 흐름의 한 장으로 기록되고 있다. ‘봄날’은 왜곡된 정치형태 탓에 ‘광주정서’라는 감정적 모습으로 호도된 광주항쟁을 정면으로 다룬 최초의 장편소설이다.임철우(한신대교수)씨는 당시 전남대 휴학생으로 역사의 현장에 있었다.대하소설 봄날이 지난 2월,5권으로 완성되기 전에도 광주항쟁을 다룬 작품은 많이 발표됐다.상징과 은유라는 특성을 갖고 있는 시는 정치적 금기의 상징이었던 광주를 다루는데 소설보다 자유로웠다.광주항쟁의 상흔이 그대로 남아있던 80년 6월 김준태의 장시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가 발표됐다.그후 광주 비극에 분노하는 시가 쏟아져나왔다.광주의 5월을 다룬 첫 소설로는 윤정모씨의 단편 ‘밤길’이 85년 발표됐다.그 2년후 ‘80년 5월 광주항쟁 소설집’이라는 부제가 붙은 ‘일어서는 땅’이 출간됐다.그러나 이러한 작품들은 사태의 본질에 제대로 접근하지못하고 역사적 진실을 우회하는 형식을 취하는 한계성을 드러냈다.판도라의 상자격이었던 광주 진상에 대한 통제 때문이었다.‘봄날’은 그러나 참담한 살육의 현장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며 광주항쟁 열흘동안의 처절하고 비극적인 모습을 장대한 한편의 드라마로 만들었다.시민들의 항쟁을 체계적으로 논리화하는 등장인물 윤상현은 현실에서 패배하지만 “그것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라고 말한다.대학생으로 나오는 명기도 “인간과 삶을 향한 소망을 배워가리라” 다짐한다.그래서 이 소설은 ‘눈부시게 맑은,늦은 봄날의 아침’으로 끝난다.작가가 고발하고자 하는 권력에 의해 조작된 제도적 폭력이 사라지고 의식의 허위성이 제거된다면 광주의 5월은 찬란한 ‘봄날’로 빛날 것이다. ◎宋基淑 5·18 연구소장/“진실 밝히고 올바른 평가 내려야”/발포명령자 규명­군기록 보존 중요 광주문제라면 말도 꺼내기 힘들었던 5공시절부터 5·18이 제대로 평가받는데 앞장섰던 宋基淑 전남대 교수(5·18 연구소장)는 “이제 가장 중요한 것은 진실을 밝히고,그 진실을 바탕으로 5·18을 정치사회적으로 올바르게 평가하는 것”이라며 ‘5·18의 학문적 객관화’를 강조했다. ­5·18 18돌을 맞는 의미는. ▲지금까지는 정부주도의 배상논의가 주를 이뤘습니다.또 기념사업,망월동 묘역 단장도 기대만큼 이뤄졌다고 봅니다.5·18을 역사의 생생한 기록으로 남기려면 관련 자료를 챙겨 정리하는게 중요합니다.진실의 핵심은 발포명령자를 가리는 것인데 아직 전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80년 당시 군기록중 소멸시킨 부분이 많을 것입니다.현재 있는 것이라도 솔직히 공개하고,군사비밀로 분류되어 있다면 존재만이라도 확인해 두었다가 10∼20년뒤라도 공개해야 할겁니다. ­5·18의 전국화,세계화가 시급하다는 지적입니다. ▲그렇습니다.5·18은 광주만의 문제가 아닙니다.때문에 5·18을 4·19,제주 4·3항쟁 등 국내의 다른 민중항쟁뿐 아니라 중국의 천안문사태,대만의 고웅사태 등과 비교연구하는게 필요합니다.나아가 아르헨티나 칠레 엘살바도르 니카라과 등 중남미국가들과의 비교도 필요하다고 봅니다.일부 남미국가들이 민중혁명에 실패,군사정권이 재등장하는 과정을 반추해보면 잘못된 역사의 반복을 막는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金大中 대통령정부에 바라는 것은. ▲金대통령에게는 큰 부담을 주지않으려는게 이곳(광주·전남)의 정서인것 같습니다.金泳三 전 대통령때는 큰 소리쳤었는데….(웃음)사회단체들에서는 5·18 묘역의 국립묘지 지정,5·18관련 교과서 내용 재정리를 요구하고 있고,앞으로 정부도 이것들을 추진하리라 생각합니다. ◎5·18 광주민중항쟁 이란 5·18 광주민중항쟁은 1979년 유신독재를 자행해온 박정희 대통령의 시해로 초래된 권력공백기에 불법적으로 집권을 꾀하려는 신군부세력을 거부하며 민주화를 요구,1980년 5월18일부터 27일까지 계속된 광주시민들의 봉기를 가리킨다.현재 정부에서는 ‘광주민주화운동’을 공식용어로 사용하고 있으나 5·18단체들을 비롯한 다수 학자들은 시민·학생들의 자발적 미주화 투쟁을 부각시키는 뜻에서 ‘5·18 광주민중항쟁’으로 부록 있다. □특별취재반 ▲특집기획팀=羅潤道 부장(반장),李昌淳·李穆熙 차장,金聖昊·任昌龍 기자 ▲전국팀=金守煥·崔治峰 기자
  • 1960년대 문학연구/민족문학사연구소 지음(화제의 책)

    ◎격변의 상처 보듬은 60년대 문학 전쟁의 내면적 상처를 개인적인 시각에서 극복하고자 했던 것이 1950년대 문학이라면 1960년대 문학은 이런 상처를 딛고 민중적 삶의 실체를 보고자했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1970년대의 민중적 리얼리즘이 가능했던 것도 사실은 4·19와 5·16의 정치적 격변을 한몸에 껴안아야 했던 1960년대 문학의 공로인 것이다.이 책은 60년대 문학을 주제론과 작가론으로 나눠 접근한다.개별적인 논문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60년대 문학을 통사적으로 재구성해 볼 수 있다.원광대 하정일 교수는 60년대 문학을 ‘주체성의 복원과 성찰의 서사’라는 관점에서 다룬다.50년대 문학에서는 현실이 언제나 인간과의 교섭을 허락하지 않는 절대적 타자로 등장한다.반면에 60년대 문학은 ‘성찰’이라는 형식으로 현실과의 상호작용을 모색한다.이러한 변화는 인간을 주체로 설정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주체의 복원 나아가 서사성의 회복이야말로 60년대 문학의 진정한 새로움이라는 게 하교수의 지적이다.문학평론가 최현식씨의 ‘데포르마시옹의 시학과 현실대응 방식’도 주목되는 글.우리는 1960년대 문학,특히 모더니즘의 새로운 점을 말할 때 작가들의 미학적 자의식의 변화를 이야기한다.‘감수성의 혁명’(유종호)이라든지 ‘자아의 인식수단’(김병익)으로서의 문학의 기능에 대한 이해라든지 하는 설명들은 모두 이 범주에 든다.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전세대와 구별되는 이같은 미학적 변별점들은 세계상실의식과 허무주의가 60년대 작가들의 문학적 전의식(前意識)을 이룬다는 전제를 승인한 뒤에 이뤄진다는 점이다.다시 말해 이런 것들이 왜 전쟁의 상처에 직접적으로 노출됐던 1950년대가 아닌 1960대 문학에서 더욱 문제시되느냐 하는 것이다.깊은샘 1만7천원.
  • 與 “이대론 안돼…” 정계개편 ‘기름 붓기’

    ◎한나라 강경 대응이 조기개편론 불댕겨/수도권 20명 타깃… 대연정 6·4 이후로 정계재편 불가피론이 여권의 대세로 굳어지는 인상이다.정계개편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여권 수뇌부의 목소리에 거침이 없다.야당의원 영입에 조심스러워하던 당직자들조차 “이대론 안되겠다”는 말을 서슴치 않는다. 국민회의 趙世衡 총재대행은 18일 ‘4·19혁명 국가조찬기도회’에서 정계개편론에 불을 지폈다.“지방선거에서 국민이 어느당을 선택하느냐를 보여줌으로써 간접압박을 통해 정계개편을 이뤄야 한다”는 요지였다. 韓和甲 총무대행도 이날 이미 불붙은 정계개편론에 기름을 부었다.국민회의­자민련 합동의총에서 “결단을 내려 현 정치구도를 반드시 바꿔야 한다”는 직접화법이었다. 이는 일차적으로 야당측의 비타협적 행태에 대한 조건반사일 수도 있다.韓총무대행은 “‘이왕 망했으니 같이 망하자’는 태도로 나오고 있다”며 한나라당의 협상자세에 우려를 표시했다. 통합선거법에 대한 총무간 합의가 한나라당 의총에서 간단히 뒤집히는 상황에 대한 실망감이었다.장외투쟁에다 지방선거 거부시사 등 한나라당의 ‘고삐풀린’태도가 조기 정기개편론에 불을 댕기고 있는 셈이다. 金大中 대통령도 최근 한나라당의 원내 과반수도 과거 정권에 의한 ‘인위적 정계개편’의 결과라는 점을 상기시켰다.한 지방지와의 회견에서였다.인위적 정계재편을 않겠다는 취지였지만 결과적으로 국민회의측 정계개편의 명분을 강화시킨 측면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여권이 당장 대대적 정계개편에 들어갈 같지는 않다.다수당직자들도 여전히 ‘인위적 정계개편은 없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국민회의측은 그 동안 자민련이 취하고 있던 ‘이삭줍기’식 정개재편에 부정적이었다.그러나 국민회의도 대연정은 지방선거 이후로 미룬 채 한나라당 의원 개별 영입에 적극성을 띠고 있다.수도권을 주 타깃으로 접촉대상 의원은 20여명선이라는 전문이다. 이는 하반기 원구성전에 한나라당의 과반수 의석을 깨려는 복안과 무관치 않다.그렇지 않으면 새정부의 각종 개혁드라이브가 계속 발목이 잡힐 수 밖에 없다는 판단인 듯하다.
  • ‘4·19’ 38돌/예년과 다른 모습 ‘눈길’

    ◎JP 기념식 첫 참석… 金 대통령은 참배만 ‘4·19혁명’ 38주년을 맞아 金大中 대통령과 金鍾泌 총리서리는 혁명 당시 역사적 위치는 달랐지만,나름의 의미를 되새겼다.현정부의 방향과 4·19정신을 접목시키기에 주저하지 않았다.관례에 따라 金대통령은 묘역을 참배했고,金총리서리는 기념식에 참석했다. ○…이날 金대통령은 혁명정신과 의미에 대해 각별한 의미를 부여했다.金대통령은 이날 金重權 비서실장과 文喜相 정무,金泰東 경제,林東源 외교안보,朴智元 공보수석와 4·19 국립묘지를 참배,헌화·분향했으나 기념식에는 金총리서리가 참석토록 했다. 金대통령은 그러나 전날 상오 여의도 63빌딩에서 열린 국가조찬기도회 및 초청강연회에 기념메시지를 보내 “4·19 혁명정신을 이어 감으로써 민주와 정의가 강같이 흐르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다짐,4·19 혁명정신을 기렸다.金대통령은 金비서실장을 보내 대신 낭독한 메시지를 통해 “특히 현 정부는 민주와 자유를 국정의 근간으로 한다는 점에서 4·19 혁명의 숭고한 이념을 계승한 진정한 의미의국민의 정부라고 감히 자부한다”고 ‘국민의 정부’의 기본정신을 천명했다.金대통령은 이 연장선에서 현 위기를 “경제발전이라는 명분 아래 민주주의를 거부하고 소홀히 해 온 부끄러운 과거의 당연한 과실”이라고 규정했다. ○…金총리서리는 이날 처음으로 4·19혁명 기념식에 참석했다.지난 87년 신민주공화당 창당이후 당 총재 또는 대표 자격으로 묘역 참배는 해왔지만 기념식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5·16 주체세력인 金총리서리는 기념사에서 “4·19혁명은 우리 역사에 어느날 갑자기 터져나온 돌출적 항쟁이 결코 아니었다”며 “민족의 자유·민권의식이 그 기반이었으며,진정한 자유시민국가 건설을 위한 민족적 이상이그 지표였다”고 평가했다.金총리서리는 기념식을 마치고 서울보훈병원을 찾아 4·19 부상자들을 위로했다.
  • 4·19혁명 기념관 6월 서울에 건립/종로구 평동에 7층으로

    4·19혁명을 기념하는 ‘4·19혁명 기념관’이 오는 6월 문을연다. 4·19혁명 희생자유족회(회장 尹在洛)와 4·19부상자회(회장 金漢席)는 17일 “4·19를 모르는 세대에게 혁명의 의의를 알리고 세계혁명사에서 4·19가 갖는 의의를 상기시키기 위해 기념관을 건립하게 됐다”고 밝혔다. 서울 종로구 평동 166 적십자병원앞 부지에 건립중인 기념관은 대지 568평에 지상 7층 지하 2층 연건평 2천274평 규모로 4·19 관련 도서를 포함,2만5천여권의 장서를 갖추게 된다.
  • 32개 안건 처리 2시간 20분 토론/국무회의 26일

    ◎김 대통령 “예산 8조 확보 실업대책 만전” 26일 열린 국무회의는 파격의 연속이었다.첫째는 대통령이 청와대나 세종로청사가 아닌 과천청사에서 이례적으로 국무회의를 주재한 것이고,두번째는 金大中 대통령이 회의를 주재하다 金鍾泌 국무총리서리에게 사회봉을 넘겨준 뒤에도 회의에 계속 참석했다는 것이다.또 상오 9시30분 시작한 회의는 32건의 안건을 처리하느라 2시간 20분이나 걸렸다. ○…회의는 전반부의 실업문제 해결을 위한 종합대책 논의와,후반부의 경제개혁법안 후속법령 처리로 나눠 진행됐다.金대통령은 “예산안 통과로 8조원에 가까운 돈을 실업대책에 쓸 수 있게 돼 어느정도 자신을 갖게 됐다”며 부처별 세부방안 제시를 요구. 金成勳 농림장관은 서울역 등 지하철역에서 노숙자가 급증하고 있다며 대책의 필요성을 제기했으며 申樂均 문화관광장관은 종교계 등에 노숙자대책의 협조를 요청할 계획이라고 보고. 尹厚淨 여성특위원장은 여성의 우선해고로 인한 여성들의 어려움을 지적했으며 李起浩 노동장관은 “실직자 가운데 3분의1이 여성들”이라며 철저한 감독을 다짐. ○…金대통령은 상오 10시쯤 실업대책 논의를 마친뒤 金총리서리에게 직접 사회봉을 건네주면서 “공부하는 셈 치고 옆에서 앉아 있겠다”며 회의에 계속 참석. 田允喆 공정거래위원장은 ‘주식회사 외부감사에 관한 법률시행령 개정안’이 상정되자 “결합재무제표 작성에 예외조항을 두면 부실기업들이 대상에서 빠져나갈 우려가 있으므로 투명성 확보를 위해 예외를 두면 안된다”고 이의를 제기.金대통령은 “기업의 투명성을 최대한 확보한다는 목표로 논의해줄 것”을 당부했으며 金총리서리는 이를 다음 국무회의에서 처리하기로 결론. ▷의결안건◁ △한국은행법 시행령 △금융감독기구설치법〃 △정부인사발령안(2건) △99년 예산편성지침안 △98년 일반회계예비비지출안 △97년 재산형성저축장려금기금 결산보고서 △97년 농어촌목돈마련저축 장려기금〃 △97년 국민투자기금〃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기념행사계획안 △4·19혁명〃 △상호신용금고법 시행령 개정안 △증권투자신탁업법〃 △선물거래법〃 △소득세법〃 △종합금융회사법〃 △외국환관리법〃 △공인회계사법〃 △신용협동조합법〃 △보험업법〃 △금융산업구조개선법〃 △장기신용은행법〃 △신탁업법〃 △한국컨테이너부두공단법〃 △독점규제·공정거래법〃 △공사채등록법 시행령정비규정안 △담보부사채신탁법 시행령안 △통계위원회규정 개정안 △법무부 직제개정안 △금융감독위 공무원정원 규정안
  • 대학가 헌혈운동/崔弘運 논설위원(외언내언)

    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는 헌혈(虧血)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피를 팔아 생계를 이으려는 실업자나 막노동꾼의 매혈(賣血)이 대부분이었다.당시 380㎖의 피를 팔면 1천3백원을 받을 수 있었고 피를 뽑은 뒤 주는 빵으로 허기를 달래기도 했다.나이(16세 이상,65세 미만)와 체중(남 50㎏,여 45㎏ 이상)을 제한했기 때문에 주머니에 몰래 돌을 넣거나 나이를 속이고 피를 판 사람들의 눈물겨운 사연도 많았다.특히 명절을 앞두고 고향 갈 여비를 마련하려는 사람들로 혈액원마다 장사진(長蛇陣)을 이뤄 특이한 풍속도가 되기도 했다.생명을 구하는 피가 턱없이 부족하던 시절의 이야기다. 그렇게 저조하던 헌혈인구가 대한적십자사의 끈질긴 노력으로 지난 80년 처음으로 전체 국민의 1%를 간신히 넘긴 뒤 지난 95년에는 2백만7천명으로 4.5%에 이르렀다.헌혈 선진국인 스위스(9.7%)나 프랑스(6.9%),일본(6.6%)에는 못 미치지만 미국(5.4%)과 영국(5.2%)은 곧 앞지를 수 있는 수준까지 이르렀다.그렇게 되기까지는 철도역이나 도심 광장,버스터미널 등 사람 많이 모이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가 헌혈의 중요성을 일깨운 헌혈권장요원들의 공이 크다.이들은 박봉에도 ‘드라큘라’ ‘흡혈귀’ ‘인간거머리’라는 불쾌한 소리를 들으면서 행인들을 끌었다. 헌혈의 역사는 2차 세계대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전쟁터마다 신음하는 부상병들에게 전우(戰友)들은 기꺼이 팔을 걷어붙여 많은 생명을 구했던 것이다.이를 체계적인 사업으로 승화시킨 것이 1948년 8월 제20차 세계적십자사 국제회의다.이 회의에서 각국 적십자사가 혈액사업을 적극 전개하도록 권장하는 결의안이 채택됐다.이에 따라 우리나라도 1958년 2월 대한적십자사에서 국립혈액원을 인수,공식 혈액사업이 시작됐으나 실적은 저조했다.최초의 본격적인 헌혈운동은 1960년 4·19학생혁명 때 실시돼 큰 성과를 거뒀다. 새 봄 대학가에 경제살리기 헌혈운동의 물결이 넘치고 있다고 한다.전남지역 대학가에서 시작된 것이 서울로 북상(北上)해 25일부터 동국대,숭실대,연세대에서 잇따라 전개되고 있다는 것이다.혈장 수입에 지출되는 외화를 절약해 경제살리기에 기여하자는 젊은 학생들의 뜻이 갸륵하다.
  • 선거제도:하(대한민국 50년:11)

    ◎67년 총선 131개 선거구 중 86곳 무효 소송/71년 대선선 지역감정 촉발 박 후보,94만표차 DJ눌러/80년 대선 ‘체육관통대선거’ 1표 기원 100% 찬성 기록도 그릇된 선거의 과정과 결과는 민주주의의 역사를 후퇴시키기도 제자리 걸음으로 남아있게도 한다. 60년 3·15 부정선거의 과정은 4·19혁명이라는 결과를 낳았다.또 4·19가 낳은 제2공화국은 허약한 권력기반으로 인해 5·16군사쿠데타를 낳았다.5·16은 유신체제를 낳았고 유신은 체육관 선거라는 기형적 선거제도를 잉태했다.유신은 필연적인 결과로 5·17이라는 사생아를 낳았다.87년 국민들의 욕구 분출로 대통령 직선제라는 정상적인 선거형태가 이루어지기까지는 30년가까운 세월이 흘렀다.이어 97년 대선까지 또 10년의 세월이 흘러 마침내 여야 정권교체,후유증없는 공명선거라는 민주발전의 결과를 얻게됐다.한번 잘못끼워진 단추를 바로잡는데 역사는 자그만치 40년 가까운 세월을 요구했다. ○‘한지붕 두가족’ 민주당 분당 60년 4·19혁명후 7월 29일,민의원과 참의원 선거가 실시됐다.이어8월 12일,민·참의원 합동 간접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구파인 윤보선이 당선됐다.그러나 8월 17일 민의원 본회의에서 구파인 김도연 국무총리인준동의안이 부결됐다.이틀뒤인 19일에야 신파인 장면 국무총리인준동의안이 가까스로 가결됐다.내각제의 제2공화국이 탄생되는 순간이었다.그러나 구파 대통령과 신파 총리의 갈등은 앞으로의 정국불안을 예고하는 신호탄이었다.‘한지붕 두가족’의 민주당은 끝내 민주당과 신민당으로 갈라섰고 몰락의길을 걷게 된다.당시 곽상훈 민의원의장이 당적을 떠나며 한 고별사는 다가올 상황을 극명하게 내다보고 있다.“민주당의 신·구파 지도자들은 파벌의성쇄에 앞서 당과 국가의 영고에 책임을 져야 한다.민족의 영웅이 될 수도있고 민족의 죄인도 될 수 있다.제1공화국은 이승만의 아집으로 망했다.제2공화국은 당신들의 아집과 파쟁으로 나라가 멸망할 수도 있고,당신들의 아량과협조로 욱일승천할 수도 있다”” 새벽 총소리와 함께 시작된 5·16은 왜곡된 선거문화의 새로운 시작이었다.이후 92년 대선 이전까지 정치권은선거가 끝날때마다 부정선거와 지역감정이라는 후유증에 시달렸다. 67년 5월3일 실시한 제6대 대통령 선거 결과 박정희 대통령이 신민당의 윤보선 후보를 1백16만여표차로 누르고 당선됐다.선거 결과에 대해 신민당은 관권,금권,투·개표 부정 등 사상 유례없는 부정선거 때문이었다고 주장했다.신민당은 이어 6월8일 실시된 7대 국회의원선거도 계획적 전면부정선거라고 주장하며 무려 8개월동안 선거무효 투쟁을 벌였다.전국 131지역구 가운데 당선 및 선거무효 소송이 제기된 지역은 3분의 2에 달하는 86개 지역에 달했다. 70년 40대 기수론과 함께 신민당 대통령후보로 부상한 김대중은 여세를 몰아 공화당의 박정희 대통령을 압박했다.3선개헌으로 권력연장의 토대를 마련한 박대통령은 71년 4월 27일 실시된 제7대 대통령선거에서 김대중 후보를 94만여표차로 눌렀다.7대 대선은 전형적인 조직 대 바람의 선거였다.안보논쟁이 가열되고 선거 열기가 달아오르면서 영남과 호남사이의 지역감정이 선거이슈로 떠오르기 시작했다.여당의 지역감정 촉발에 김후보도대구 유세에서 “대중이가 대통령 자격은 있으나 전라도 출신이라서 못찍겠다면 그런 표는 안 받아도 좋다.63년 선거에서 박대통령은 전라도 지지표로 당선됐다“고 열변을 토하기도 했다.이후 김대중 후보는 73년 동경 납치에서부터 80년 내란 음모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미국으로 망명하는 등 엄청난 정치적 박해를 받게된다. 3선개헌을 하면서까지 힘겹게 권력을 연장한 박대통령은 드디어 72년 10월17일,그나마 유지되고 있던 헌정의 초시계를 원점으로 되돌리고 만다.이른바‘10월 유신’.비상계엄하에 국회는 해산되고 정치활동이 중지되는 헌정중단의 사태가 빚어졌다. ○85년 총선 신민당 돌풍 유신헌법에 따라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가 그해 12월15일 실시됐다.통대의원 후보자 선정은 해당지역의 경찰서장과 시장 군수,정보책임자 등으로 구성된 지역협의회의 자료를 토대로 관계당국이 결정했다. 72년 12월 23일 장충체육관.통대의원 2천359명 중 단 2표의 무효표를 제외한 전원이 박정희 대통령을 8대 대통령으로 선출했다.이후 통대의원들은 9대 박정희,10대 최규하,11대 전두환 등 세번이나 체육관 대통령 선출 거수기 노릇을 해야했다.79년 10월 26일.유신의 심장은 내부의 총격으로 무너졌다.이어 80년 ‘서울의 봄’은 신군부의 5·17확대 계엄과 함께 얼음장 밑으로 사라졌다.그해 8월 27일 통대의원들은 총투표자 2천525명 가운데 2천524명이 단독 후보인 전두환에게 찬성표를 던졌다.그나마 한명은 반대가 아닌 기권이었다.100% 찬성은 공산국가에서나 벌어지는 투표행태만은 아니었다는 기록을 남기게 됐다. 내연하던 민주화 바람은 85년 2월 12일 제12대 총선에서 ‘신민당 돌풍’으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창당한지 불과 한달도 안된 김영삼과 김대중 공동지분의 신민당이 지역구 50석을 얻었고 전국구까지 합치면 67석의 제1야당으로 부상했다.다음날 조간신문들은 ‘신당태풍’‘신당바람’이라는 제목으로 머릿기사를 장식했다.민정당은 놀랐고 신민당은 환호했으며 여당의 1중대 2중대로 불리우던 민한당과 국민당은 침통했다.워싱턴타임즈,뉴욕타임즈,르몽드 등 외신들은‘신민당의 부상은한국민들의 민주화 열망을 대변한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이런면에서 ‘2·12총선’은 억눌려 있던 국민들이 깨어나고 있음을 보여주었고 또 ‘체육관 대통령’ 선출제도의 변화를 감지케하는 전환점이었다.멈춰버린 역사의 시계바늘이 제자리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한 순간이었다.이 역사의 시계바늘은 드디어 87년 정권이 국민에게 항복한 6·29선언으로 직선제대통령선거가 부활됐다.87년,92년 대선을 거쳐 우리 선거사는 97년에 이르러서야 여야정권교체라는 최초의 경험을 갖게된다. ◎선거관리 산증인 김유영 선관위 사무총장/“97년에 와서야 선거의식 성숙”/집권자의 확고한 공명의지가 관건 남조선 과도정부의 군정장관이었던 윌리엄 에프 딘 소장은 1948년 3월3일자 행정명령으로 ‘국회선거위원회’를 설치하고 위원 15명을 임명했다.이승복,백인제,이갑성 등이 15인 위원이었다.이어 치러진 5·10 총선이 대한민국최초의 선거였고 선거관리 역사의 시작이었다. 제2공화국은 헌법상 독립기관인 중앙선거위원회 필요성을 제기했다.이에따라 60년 6월17일 개별법률로서 선거위원회법이 공포됐고 헌법상 독립기관인 중앙선거위원회가 설치됐다.63년 1월 16일 선거위원회법은 선거관리위원회법으로 대체됐고 닷새후인 21일 역사적인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창설됐다.초대 위원장에는 사광욱대법관이 취임했다. 63년 창설때부터 지금까지 선거관리의 현장을 한번도 떠난적이 없는 김유영 중앙선관위사무총장은 현대 선거관리사와 개인사의 궤적을 같이한다.김총장은 “정부여당에 의한 조직적인 3·15 부정선거는 결과적으로 4·19와 5·16으로 이어져 역사의 흐름을 바꿔놓았다”고 선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김총장은 “3·15 이후 60년대 선거는 조직적인 정부의 부정선거는 없었지만 탈법·관권·금권선거가 부정적인 선거풍토로 자리잡았다”면서 “당시는 여야 야나 가릴것 없이 선거법이 있어도 교통법규 정도로 여기는 경시풍조가 만연했다”고 당시의 선거풍토를 회고했다. 김총장은 88년 치러진 여소야대 4당체제하에서의 동해 국회의원보궐선거가 선거문화 발전의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고 보고있다. 그는 “선거 사상 최초로 4당 국회의원후보와 사무장 전원이 고발되고 후보매수로 한 정당의 사무총장이 구속된 혼탁상은 선거풍토 개선의 계기를 제공했다”고 말했다.이후제정된 통합선거법에 따라 치러진 97년 12월 19일 대선은 선거사상 유례없는 공명선거로 평가했다.김총장은 “92년과 97년 대선을 제외하고는 한번도 부정선거 시비가 없었던 적은 없었다”면서 “97년 대선은 정당과 후보자가 결과를 깨끗이 승복했고 국민들도 자유스런 분위기에서 자신들의 의사를 표현했다“”고 말했다.김총장은 “국민들의 선거의식은 이제 성숙단계에 접어들었다”면서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집권자의 확고한 공명선거의 의지”라고 강조했다.
  • 선거제도:상(대한민국 50년:10)

    ◎5·10 첫 총선 ‘애국심 투표율’ 95.5%/56년 3대 정·부통령선거 자유당서 불법 자행/60년 3·15땐 온갖 부정 총동원… 4·10혁명 유발 민주주의 발전은 선거의 성숙도와 정비례한다.헌정 초기에 성숙되지 못한 권력은 독재의 풍토를 조성했다.이는 급기야 부정선거를 초래했고 결과로 4·19혁명을 불러왔다.5·16군사 쿠데타와 유신헌법에 따른 기형적인 선거제도를 거쳐 드디어 97년에 이르러서야 여야 정권교체라는 최초의 민주적 선거혁명을 경험하게 됐다. 1947년 11월 14일.유엔총회에서는 ‘유엔 감시하에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하고 그 국회가 정부를 수립케 하기 위해 유엔임시한국위원단을 파견한다’는 미국의 제안이 43대 0,기권 6으로 가결됐다.그러나 파견된 유엔한국위원단은 북한에 주둔한 소련 점령군의 방해로 남북 총선을 실시할 수 없음을 유엔에 보고했다.유엔은 1948년 2월6일,가능한 지역내의 선거 실시 권한을 한국위원단에 부여했고 이에 따라 역사적인 제헌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게 됐다. ○26개 정당·단체서 1명씩 드디어 1948년 5월 10일.남북분단과 내전을 우려하는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총선이 실시됐다.당시 언론에는 ‘애국의 단심을 결집한 감격의 투표’ 등의 제목으로 분위기를 전했다. 이날 투표에는 7백84만871명의 유권자 가운데 7백48만7천649명이 참여해 95.5%라는 놀라운 투표율을 기록했다.첫 총선에는 무소속 417명을 비롯해 이승만의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등 48개 정당 및 사회단체에서 모두 948명의 후보가 등록,평균 4.4대 1의 경쟁률을 나타냈다.이 가운데 단 한명의 입후보자를 가진 정당 단체도 무려 26개나 됐다. 유엔임시한국위원단은 이날 선거에 대해 “완전히 만족하지는 않으나 한국의 통일과 주권을 향한 일보의 진전이 될 것이며 투표과정도 대체로 원활히 진행됐다”고 유엔에 보고했다.미군정청의 하지 중장도 “한국의 자유선거는 민주주의의 승리”라고 평가했다. 이같은 평가에도 불구하고 대구 광주 보성 화순 등 각지역에서는 좌익 등 남한 단독선거를 반대하는 세력들에 의해 통신망 파괴와 경찰서 습격,선거공무원 피살 등소란사태가 빚어졌다.당시 선거를 전후한 폭동 및 폭행사건 등은 총 1천47건으로 집계됐다. 선거 결과 정원 200명중 4·3민중항쟁으로 제주도 2개구가 제외되어 198명이 당선됐으며 북한을 위해 100석은 유보시켰다.정당별 분포에서는 무소속이 85석을 차지했으며 다음으로 이승만의 대한독립촉성회가 55석을 얻었다.김성수의 한국민주당이 29석,대동청년단 12석,조선민족청년단 6석,대한독립촉성농민총연맹 2석,대한노동총연맹 1석을 차지했다.김구의 한독당후보들은 무소속으로 출마해 30석을 얻었다. 초대 국회는 제헌헌법을 제정한뒤인 1948년 7월20일 상오 10시 신익희 국회부의장의 사회로 초대 대통령선거를 국회의원들의 간접선거로 실시했다.이승만 180표,김구 13표,안재홍 2표,무효 1표로 이승만을 초대 대통령에 선출했다.이어 부통령 선거에서는 이시영이 당선됐다. 38선에서 소규모 충돌사건이 자주 일어나고 5월 위기설이 정국을 불안케하는 가운데 1950년 5월30일,제2대 총선이 실시됐다.제2대 총선은 대한민국 정부 주관으로 실시한 첫 선거였다.6·25 한국전쟁의 와중에서도 선거는 실시됐다.야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끝내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발췌개헌안의 통과로 1952년 8월5일 제2대 대통령 및 부통령 선거가 실시돼 대통령에는 자유당의 이승만,부통령에는 무소속의 함태영이 당선됐다.직선제 대통령 선거는 이승만에게 독재의 길을 열어 주었다.이 선거에서 이승만정권은 야당에게 선거운동을 할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 선거 준비기간을 17일로 단축시켰다.당시 선거법은 선거일 40일전에 선거일자를 공고하도록 돼 있었으나 52년의 선거만은 예외규정을 두었다. ○유권자보다 많은 표도 1956년 5월 15일 치러진 제3대 대통령과 부통령 선거는 자유당에 의한 갖가지 관권선거와 부정선거가 자행됐다.선거 10일전 신익희 후보의 급작스런 사망으로 대통령에는 이승만 후보가 당선됐지만 부통령에는 자유당의 이기붕 후보를 누르고 민주당의 장면 후보가 당선됐다.이는 자유당 정권의 실정에 대해 제한적이나마 국민들의 심판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대중 민주주의의 발전으로 평가된다.‘못 살겠다 갈아보자’는 간결하면서도 핵심을 담은 민주당의 구호는 자유당 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정서를 대변했다. 1960년 3월 15일 실시된 제4대 정·부통령 선거는 자유당의 집권 연장이냐,최초의 여야 정권교체냐 하는 갈림길이었다.이미 대통령선거에 앞서 58년 5월2일 실시된 총선에서는 정통야당 민주당의 승리로 끝났다. 대선에 앞서 1월 29일 민주당 대통령후보인 조병옥 박사가 신병 치료차 미국으로 떠나자 이승만 정부는 7월까지 여유가 있던 선거일자를 3월15일로 앞당겨 실시한다고 공고했다.조박사에게 선거운동 기간의 여유를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그러나 미국의 월터리드병원에 입원중이던 조박사는 2월15일 심장병으로 사망했고 야당에서 대통령후보를 내지못함에 따라 선거전은 부통령선거전 양상으로 변했다. 자유당은 이대통령이 후계자로 지목한 이기붕을,민주당은 장면을 각각 부통령후보로 내세웠다.선거전이 불꽃을 튀기는 가운데 이미 4·19의 전조들이 곳곳에서 불거져 나왔다.일요일인 2월 28일 대구 수성천변에서 열린 민주당의 정견발표회에학생들이 집결할 것을 우려해 당국은 학생들의 일요등교를 강행했다.이에 반발한 3백여명의 경북고 학생들은 학교를 뛰쳐나와 경북도청앞에서 시위를 벌여 주동학생 30여명이 구속됐다.3월5일과 14일에는 서울과 마산 등에서 소규모 학생시위가 잇따랐다. 3월15일.투표개시전에 4할의 무더기 투표가 나오는가 하면 투표함 검사를 거부하고 집단 대리투표를 하는 등 민주주의의 초석인 자유선거와 비밀선거는 완전히 파괴된 가운데 투표가 실시됐다.개표과정에서도 올빼미표가 등장했다.민주당의 투개표참관 포기로 투표와 개표를 마음대로 조작한 자유당은 이승만과 이기붕의 득표를 지나치게 많이 발표해 총유권자수를 초과하는 지역도 있었다.대구의 한 선거구에서는 이기붕이 5천표,장면이 32표로 발표된 곳도 있었다.이날 밤 자유당은 긴급 간부회의를 열어 이승만은 80%,이기붕은 70∼75% 정도로 지지율을 조정하도록 지시하기도 했다. 선거 결과를 믿는 국민들은 아무도 없었다.민심은 자유당을 떠났다.부정선거를 통해 국민들의 기본권을 유린당한 이승만정권은 결국 4·19학생의거로 역사의 뒷전으로 사라지는 종말을 맞았다. ◎여,50년 2대총선 야 중진 ‘좌경용공’ 조작/미 대사관 비밀 주간전문 ‘조인트위커’서 확인 선거에 있어서 상대를 음해하는 흑색선전은 우리의 선거사와 역사를 같이한다.최초의 총선에서 부터 가장 최근인 97년 12월 대선에까지 흑색선전은 여지없이 등장했다.주요선거때마다 ‘용공’문제가 이슈화됐으며 지난 대선때는 ‘북풍’문제로 까지 이어졌다.그러나 시민의식이 성숙되어가면서 흑색선전은 효과가 급격히 떨어지고 있다.이는 우리 선거문화 발전의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주한 미대사관은 한국정부의 주도아래 처음으로 1950년 5월30일 치러진 제2대 총선에서 “윤치영 이범석 임영신 등 대한국민당 지도부가 야당인 민국당 중진들을 ‘좌경용공세력’으로 조작하여 결정적인 타격을 입혔다”고 본국에 보고하고 있다. 주요현안에 대한 사건보고와 논평을 담은 미대사관의 비밀 주간전문 조인트 위커(JOINT WEEKA)에는 “총선을 앞두고 한국정부와 정당들은 갈수록 공익과 신문 등에 신경을 쓰고 있다”면서 “상대당을 누르기 위한 루머도 난무하고 있다”고 당시 상황을 묘사했다. 미 대사관측은 “특히 민국당은 각 선거구에서 후보당 일백만원까지 지원해주었다.48년 선거때와 달리 민국당은 각 선거구마다 한 후보씩만을 지원하기로 계획하고 있다”고 보고했다.또 “대한국민당은 혼란을 야기하고 민국당을 누르기 위해 지역구마다 한사람의 후보를 지원하는데 덧붙여 70명정도의 ‘새도우’후보(비밀공천자)들을 지원한다는 소문을 냈다.따라서 적은 수의 후보를 미는 정당은 갈수록 줄어들었다”고 보고하고 있다.돈선거와 함께 상대당을 혼란시키고 같은 정당내에서도 서로를 의심케하기 위한 흑색선전이 동원됐다는 얘기다. 보고전문은 관권선거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경찰은 48년때와 마찬가지로 선거가 자유롭고 비밀리 진행될 것이라는 기대에도 불구하고,선거결과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라고 부정적인 견해를 나타냈다.
  • 국무회의(대한민국 50년:6)

    ◎48년 첫각의 단기냐 서기냐 갑론을박/50년대 미 기록 “이승만 독주로 요식행위에 불과”/5·16후 한동안 일요일 빼곤 매일 열어… 시국 반영 정부가 정식으로 수립되기 꼭 열흘전인 1948년 8월5일 중앙청 2층 이시영 부통령실. 이범석 전 민족청년단장을 비롯해 장택상 윤치영 김도연 이인 조봉암 유진오씨 등 당시의 ‘거물’들이 한사람씩 들어섰다.이승만 박사가 7월20일 간접선거에서 180표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된뒤 지명한 국무총리와 장관들이었다.신임각료들이 인사를 나누는 사이 이대통령이 들어섰다.장관들은 예를 갖춘뒤 회의에 들어갔다.특유의 떨리는 목소리로 이대통령이 주재한 사상 첫 국무회의였다. 회의를 하는 동안 이대통령과 각료들은 약간 흥분해 있었다.일제 때의 독립운동,미군정하의 일들이 주마등같이 스쳐갔다. ○초대 11부3처장관 출범 국무회의는 정부가 수립됐다는 감격의 상징이었다.흥분을 삭이고 국무위원들이 다룬 의제는 구미지역에 특사파견문제.신생국가에다 남북으로 분단된 상황에서 외국의 국가승인을 위한 외교가 절실했던 탓이다.미국과 구라파지역에 특사로는 조병옥 박사와 김활란 여사가 임명됐다.특히 조박사의 임무는 미국의 주한 미군철수계획을 저지하는데 모아졌다.조박사의 노력에도 미국 설득이 여의치 않자 이대통령은 장면 박사를 초대 주미대사로 파견했다. 초대 11부 4처의 장관을 맡은 국무위원들은 각 정파의 분배를 고려한 연립내각으로 이뤄졌다.이대통령의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 소속은 윤치영 내무·전진한 사회·이청천 무임소장관 뿐이었고 김도연 재무장관은 김성수씨의 한국민주당,임영신 상공은 여성국민당수,김병연 총무처장관은 조선민주당 소속이었다.그외에 장택상 외무장관은 전수도 경찰청장,이인 법무장관은 전검찰청장,민희식 교통장관은 전군정청 운수부장,조봉암 농림 구영숙 보건장관은 무소속이었다.대학별로도 철저한 균분이 이뤄졌다.안호상 문교(서울대교수),유진오 법제처(고려대교수),이순택 기획처(연세대교수),정인보 고시위원장(국학대학장) 등이었다. 연립내각 구성은 국무총리 인준과정에서의 진통때문이다.이대통령은 7월27일 정부 공보 1호로 초당적이고 이북을 대표할 이윤영 조선민주당부위원장을 총리로 임명하는 추천서를 국회에 제출했다.반대세력인 국회의 한국민주당·대한독립촉성농민총연맹은 토의조차 거치지 않고 부결시켜 버렸다.대통령의 직무에 대한 국회의 첫 비토였던 셈이다.한민당은 김성수씨를 국무총리에 임명해줄 것을 기대했으나 이대통령은 이범석 민청단장을 총리로 지명했다.이초대총리는 한민당이 반대했으나 가까스로 인준됐다.국회는 그러나 민희식 유진오씨 등의 신임각료에 대해 친일논쟁을 제기하는 동시에 대통령에게 숙청을 건의해 최초 국무위원들은 첫걸음부터 삐꺽였다. 이대통령은 이런 논란끝에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국내외에 선포했으며 미군정은 이날 자정을 기해 군정해제를 선포했다.해가 바뀐 49년의 첫국무회의는 1월3일 월요일 하오 3시30분 부통령실에서 열렸다.이대통령은 간단히 개회만 하고 국무총리와 내무장관이 사회봉을 이어받았다.법원조직법·검찰청법·변호사법 등 3건을 심의했고 이총리는 당시 주한 중국대사가 찾아와 한국을 정식 국가로 승인한다고 통보했음을 알렸다.당시로서는 정부의 체계를 세우고 외국으로부터 한반도에서 유일한 합법국가 승인이 국정의 최우선 과제였던 것이다. 미국인들이 남기고 있는 50년대 국무회의에 대한 평가는 ‘요식행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이대통령의 독주아래 힘 한번 쓰지 못하는 허수아비 회의라는 얘기다.사실 이대통령 때 뿐 아니라 대통령제하의 국무회의는 의례통과일 수 밖에 없었다. ○고 총리 ‘각의 활성화’ 마련 국무회의 의장인 대통령이 회의를 주재하는 경우는 외국순방후의 설명,97년 국제통화기금(IMF) 차관도입 동의안 같은 주요사안을 심의할 때 뿐이다.의사봉은 대부분 부의장인 국무총리 몫이 됐다.전두환 대통령 당시에는 직접 국무회의를 주재하는 경우도 있었다.서슬 퍼런 전대통령 앞에서 국무위원들은 절절 매야 했다.행여 전대통령이 질문을 하면 법안 내용을 숙지하지 못한 장관들은 혼쭐이 났다.결국 국무회의 개최장소는 청와대를 떠나 정부세종로청사 19층으로 되돌아 왔다.국무회의는 헌법(88조,89조)상 국정의최고심의기구이지만 실제 운영은 법령안·조약안을 심의,의결하는데 그친다.법안심의도 이미 차관회의를 거쳐 상정됐기 때문에 토론도 거의 없다.고건 총리가 지난해 3월 부임하자 ‘국무회의 운영 활성화 방안’을 마련한 사실도 국무회의의 무기력함을 반영하는 대목이다. 역대 총리는 이범석 초대에서부터 고건 총리까지 모두 30명.여기다 국회 인준을 받지 못했던 10명의 총리서리까지 합치면 모두 40명이었지만 총리에 따라 국무회의의 분위기는 조금씩 바뀌었다.군·학자·법관·행정관료 등 출신 배경에 따라 국무회의 진행방식도 달라졌다.딱딱한 분위기가 연출됐는가 하면 매끄럽게 회의가 진행되기도 했다. ○혼란기때 가치 빛나 국정의 최고심의기구인 국무회의는 혼란기에 더욱 그 가치가 빛났다.4·19의거,5·16혁명,80년 신군부의 등장….합법성을 가지려면 국무회의는 필수불가결한 절차였다.60년 4월19일 상오 9시 중앙청 3층 국무회의실.이대통령과 허정 외무·권승열 법무장관이 불참한 가운데 열린 회의에서는 학생데모대 사태가 보고됐다.경비계엄선포·비상계엄선포 등의 안건도 의결됐다.하루만인 4월20일 또다시 국무회의가 열려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을 반영했다.데모사건 피살자의 장례비를 한사람당 50만환씩 지급하기로 하는 안건이 처리됐다. 5·16 혁명이 일어난뒤 국무회의는 며칠동안 열리지 못했다.23일 하오 5시 국무회의에서는 ‘군사혁명에 따른 정치·도의적 책임을 지고 총사퇴할 것’을 의결했다.총리가 배석자를 나가달라고 주문하면 국무위원 총사퇴 결의를 하는 것이 관례로 굳어져 있다.국무회의는 대외관계를 중단하지 않도록하고,성행하던 유언비어 단절을 위해 노력하기로 의견을 모았다.국무회의는 혁명이후 당분간 일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열려 국정을 다뤘다. ◎초대 문교부장관 안호상옹/“이 대통령 개별 설득 단기 채택”/“한글전용법 제정 제의했으나 모든 장관 반대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초대 문교부장관을 맡아 50년까지 3년간 장관직을 역임한 ‘한뫼’ 안호상옹(96). 안전장관은 대한민국 정부의 기초를 세운 초대내각 11부4처의 국무위원 가운데 한사람으로 국무회의 운영에 관한 남다른 애착을 갖고 있다.당시 안전장관이 제안한 제도·법 등이 국무회의에서 통과돼 아직도 우리 사회를 떠받치는 기둥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안장관은 “첫번째 국무회의로 기억하는데 국가 연호에 대한 갑론을박이 치열했어요.갑자을축의 육갑파도 있었고,서기연호를 쓰자는 사람도 있었죠.또 임시정부수립연도부터 쓰자는 이들까지 있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안전장관은 국무회의가 끝난뒤 이승만 대통령을 따로 찾아가 단기사용을 설득하고 개천절을 국경일로 하자고 제안했으며 이대통령이 이를 모두 받아들여 다음 국무회의에서 결정됐다.그러나 단기사용은 5·16 이후 서기로 바뀌었다. 또 한문세대가 지배적이었던 그 당시 안전장관이 발의한 한글전용문제도 국무회의의 큰 관심거리였다.이 문제로 회의에서는 장관들간에 고성이 오가기도 했다. “국무회의에서 내가 한글전용법을 제정하자고 했더니 모든 장관이 반대했어요.특히 나하고 가까운 사이였던 임영신 상공부장관이 공격을 심하게 하는 바람에 서로 ‘무식쟁이’라는 얘기까지 나왔죠.침묵만 지키고 있던 이대통령이 안되겠던지 ‘과하니 그만하시오’라면서 중단시켰어요”. 이처럼 하나의 안건을 놓고 격렬하게 논쟁을 벌이기도 했으나 당시 장관들은 나라를 새로 세운다는 생각으로 서로를 많이 도와주었다고 한다. 안전장관은 또 “그때는 가난했던 시절이라 그런지 각료들도 돈이나 권력에 크게 연연하지 않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초대내각에서 제일 먼저 사임한 민희식 교통부 장관은 철도사고에 책임을 지고 40일만에 물러났으며 전진한 사회부 장관은 공무원노동조합을 금지한데 대해 화를 내고 그만두었다.또 무임소장관이던 이청천씨는 “싹을 보니 틀렸다”는 말만 남기고 각의에서 물러났다.이 모두가 내각 6개월만에 일어난 일이라고 안전장관은 전했다. □특별취재반 이경형 부국장겸 정치부장 이용원 문화부 차장 김경홍 정치부 차장 최병렬 문화부 차장급 김종면 문화부 기자 박정현 정치부 기자 서창희 정치부 기자 강선임 DB부 기자
  • 얼룩진 헌정(대한민국 50년:4)

    ◎52년 첫 개헌… 87년까지 9차례 뜯어 고쳐/이승만 이어 박정희도 종신집권 노려 헌법손질/69년 3선 개헌­72년 유신 선포… 대통령 간선 고착/전두환 쿠데타 집권… 87년 6월 항쟁 직선제 확립 이승만은 1954년 2차개헌으로 종신집권에의 길을 텄다.그러나 이는 몰락을 재촉했다.1960년 4·19혁명은 마침내 이정권의 무한권력 추구를 좌절시켰고 6월15일 3차 개헌을 가져왔다.큰 골격은 대통령중심제에서 의원내각제로의 전환이다.그리고 헌법재판소를 설치하고 법률유보조항을 손질하는 등 이승만 정권의 폐해를 정리하는데 촛점을 맞췄다.그러나 내각제 도입으로 3·5부정선거범 등에 대한 처벌근거인 정·부통령선거법이 소멸되자 혁명 주체세력들은 거세게 반발했다.학생들의 의사당 난입 등 사태는 겉잡을 수 없이 확산됐다.집권민주당은 11월29일 이승만 정권하의 반민주행위 처벌을 위한 소급입법 근거규정을 헌법 부칙에 설치하는 4차개헌을 단행했다. 헌법의 수난은 갈수록 심화됐다.1961년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5·16 군사쿠데타는 헌정파괴라는 극단적사태를 몰고왔다.국회는 즉각 해산됐다.이듬해 12월16일엔 사상 처음으로 국민투표에 의한 5차 개헌이 단행했다.이 개헌안은 인권규정을 보강하고 미국식 사법심사제도를 도입하는 등 외견상으로는 3권분립을 강화하는 것이었다.그러나 핵심 골자는 부통령제 폐지와 정당설립 규제 등으로 대통령에게 권한을 몰아주었다. ○6차 3선개헌 날치기 처리 박정희는 5차개헌으로 부활된 새 대통령에 취임했지만 중임제한 규정에 부닥치자 전에 이승만이 걸었던 전철을 답습했다.영구집권의 획책한 것이다.중임제한 폐지 개헌안이 야당의 거센 반대에 부디ㅊ치자 1969년 10월21일 새벽 국회 제3별관에서 야당의원들을 따돌린채 여당과 일부 무소속 의원들만으로 개헌안을 날치기 처리했다.3선개헌으로 불리는 6차개헌이 그것이다. 개헌뒤 실시된 1971년 선거에서 박정희는 대통령 3선에 성공했다.그러나 온갖 수단방법을 다 동원했음에도 박정희 634만표,김대중 539만표로 나타난 개표결과는 영구집권에 대한 위기감을 증폭시켰다.그래서 영구집권을 확실하게 제도화하는 장치를 마련했다.이것이 바로 헌정 수난의 절정판인 이른바 유신헌법이다. 유신은 1972년 7월17일에 선포됐다.이날은 아침나절 약간 흐렸으나 낮부터는 전국적으로 맑았다.시민들의 생활은 평온했으며 각 관청들만 막바지에이른 국정감사로 다소 부산했다.이날 상오까지만 해도 국체변혁의 징후는 나타나지 않았다.그러나 물밑에서는 이를 위한 시나리오가 극비리에 착착 진행됐다.상오9시 국무총리 김종필은 우시로쿠(후궁호랑) 주한일본대사와 만나 약 20분간 요담한데 이어 10시 15분부터는 필립 하비브 미국대사와 40분간 요담을 가졌다. 유신을 통보한 자리였지만 누구도 이를 눈치채지 못했다.그러나 하오가 되면서 여기저기서 이상징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서울 소공세무서에 대한 국정감사를 행하던 재무위에서는 “야당이 이런 식으로 나오면 국회가 해산될지 모른다”는 협박투의 발언이 여당의원 입에서 튀어나왔다. 이날 상오 청와대 대통령집무실에서는 박정희 주재로 마지막 리허설이 진행되고 있었다.박정희는 둘러앉은 보좌관과 비서관들을 응시하다가 서랍에서 서류뭉치를 꺼냈다.“모두 한번씩 읽어보고 각자의 의견을 말해보시오” ‘하오7시를 기해 전국에 비상계엄 선포,헌법 정지,국회 해산,정당 및 정치활동 중지,개헌,….’달리 의견이 있을수 없었다.너무도 엄청난 일에 모두 할말을 잃었다.이어 외무장관 김용식은 하오5시 주한외교사절 23명을 불러 유신단행을 설명했다. 계엄선포 H아워를 1시간 앞둔 하오6시 청와대에서는 영문도 모른채 소집돼온 국무위원들이 비상계엄령을 의결했고 같은 시간 시내 전역의 주요 공공건물에는 계엄군이 포진하기 시작했다.중대뉴스가 예고된 하오7시,라디오에서는 헌법의 효력을 2개월간 중지시키겠다는 박정희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유신이 일단 선포되자 개헌작업은 미리 짜인 각본에 맞춰 일사천리로 진행됐다.작업은 신직수 법무·이경호 보사·서일교 총무처장관과 유민상 법제처장,헌법학자 한태연·갈봉근 교수로 구성된 법무부 헌법심의회에서 맡았다.하지만 실상은 청와대와 중앙정보부 팀으로 구성된 일명 ‘기획소위’가 건네준 골자를조문화하는 것에 불과했다.이때 심의회의 역할이 어땠는지는 “이 헌법의 기본골격은 이미 고위층에서 만든 것이므로 골격 자체에는 일체 손을댈 수 없습니다”고 한 신직수의 발언이 입증하고 있다. 개헌안은 유신선포 25일만인 11월21일 국민투표로 확정됐다.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의 대통령 간선과 대통령의 긴급조치권,국회해산권,국회의원 3분의1과 대법원장 등 전법관 임명권 보유 등 사실상 대통령 1인의 무한권력 창출이었다. 박정희에게 유신헌법은 종신집권을 담보해주는 안전판이었다.그러나 결과적으로 보자면 종말로 향하는 단초이기도 했다.국내 상황은 팽팽한 긴장으로 치달았고 최대우방 미국과도 갈등이 깊어갔다. ○80년 8차개헌 간선제 유지 서울신문이 최근 입수한 미국 국무부의 ‘한미관계의 조사’라는 보고서는 당시 한미관계가 급속하게 악화돼 갔음을 보여준다.유신 직후인 73년 미연방수사국(FBI)의 정보를 토대로 국무부가 작성한 이 문건에서 이미 미국이 경제원조 중단과 미군철수 등으로 박정희 정권에 대해 압박을 가하고 있었음이 확인됐다. 결국 안팎으로 시련을 겪던 유신은 끝내는 1979년 박정희의 피살과 함께 또한번의 헌정중단 및 개헌을 초래했다.공백상태의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 등 정치군인들은 민심을 얻기 위해 1980년 10월27일 복지규정 보강 등으로 위장한 8차 개헌을 실시하지만 권력획득의 핵심인 대통령 간접선거는 그대로 유지했다.전두환 군사정권은 강압적 통치로 일관하다 직선제 개헌 요구로 상징되는 전국민적 저항에 굴복하고 말았다.그래서 87년 6월29일 개헌을 수용하기에 이른다.이 9차 개헌의 결과물이 현행 헌법이다. 헌정 50년을 맞는 올해는 그 50년 역사상 처음으로 여야가 정권을 인수인계하는 뜻깊은 해다.하지만 헌법은 또다시 개정의 고비를 맞고 있다.내각제 공약을 내건 국민회의와 자민련의 연합정권이 탄생하기 때문이다. ◎미,73년부터 “유신철회” 압박/본사특별취재반,미 하원보고서 입수 확인/“주한미국 철수” 일방선언­‘코리아게이트’ 돌출 유신이 절정을 이뤘던 1970년대 중반 한국과 미국의 관계는 악화일로로 치달았다.지미 카터 미국대통령은 급기야 1977년 3월9일 주한 미지상군의 철수를 일방선언했고 6월에는 미중앙정보국(CIA)의 청와대 도청사건이 불거졌다.한국내 반미감정이 고조되고 한국정부의 항의가 거세자 미국은 박동선 사건으로도 불리기도 했던 코리아게이트를 돌출시켜 한국정부를 더욱 옥죄었다. 모두가 박정희 정권의 유신 철회를 겨냥한 미국정부의 압박전술이었다.그런데 미국은 이처럼 유신에 대해 명백하게 거부태도를 보이기 훨씬 전부터 유신의 몰락을 예견한 교포들의 지적들을 주목했으며 박정희 정권에 대한 압박수단도 강구했었음이 최근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이 입수한 문건에서 확인됐다. 이 문건은 미 하원 국제관계위원회가 1978년 작성한 ‘한미관계의 조사’(Investigation of Korean­American Relations)라는 보고서에 포함된 것으로 1973년 9월 미연방수사국(FBI)의 정보보고를 토대로 하고 있다. 문건은 김대중 등 미국내에서 반한운동을 벌이고 있는 한국인과 교포들의 증언을 인용한 것이다.문건은 “남한은 박정희 정권의 독재성으로 인해 아시아권에서 점차고립되는 상황이고 대미관계에서도 원조와 군사지원을 둘러싸고 문제가 커지고 있다”는 내용을 담았다.문건은 이어 “한국인들은 만약 미국이 일본과의 공조아래 경제원조 및 권사지원 철회로 압력을 가할 경우 박정희 정권은 급격히 붕괴할 것으로 믿고 있다”는 사실도 지적했다. 이 문건이 작성된 직후부터 미국내에서 한국 중앙정보부의 활동에 대한 FBI의 사찰이 강화됐다.이와 더불어 한미 정부간에 인권침해와 내정간섭을 놓고 갈등이 첨예하게 전개됐던 사실에 비추어 이 보고서는 미국정부의 정책결정에 큰 작용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특별취재반 황규호 문화부 부국장급 이용원 문화부 차장 최병열 문화부 차장급 김종면 문화부 기자 박정현 문화부 기자 서정아 문화부 기자 강선임 DB부 기자
  • 새 발굴 자료와 증언으로 다시쓰는 현대사(대한민국 50년:1)

    ◎바람속에 밝힌 등불/1948년 8월15일 감격의 새아침 열리다/유엔 총선감시단 평양행 좌절되고/좌·우 이념대립속 ‘5·10선거’ 실시/해방 3년만에 반공정권 탄생/미 군정 정책 혼선으로 우익진영은 분열되고 북은 빨치산까지 양성/정부 권력구조 싸고 이승만·한민당 또 갈등/끝내 ‘대통령중심제’로 올해 1998년은 대한민국 정부를 선포한지 50주년이 되는 매우 뜻 깊은 해다.그 반세기는 우리가 현실적으로 살아오면서 겪은 파란만장한 당대사다.그럼에도 비민주적 요소가 다분했던 여러 공화국의 정치상황 때문에 가려진 부분을 다 들추어내지는 못했다.또 전통주의의 수정주의에 입각한 학계의 양극화 현상은 현대사가 더러 왜곡 기술되는 오류도 드러냈다.그래서 서울신문은 새로 발굴한 자료와 생존자의 증언으로 엮은 주간기획물 ‘대한민국 50년’을 연재키로 했다.이 시리즈는 우선 대한민국 50년 역사속의 진실을 객관적으로 밝히는데 초점을 맞추었다.이는 지나간 역사를 통해 다가오는 21세기 미래사를 발전적으로 이끄는 작업의 하나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1948년 새해가 밝았다.세밑 그믐날 잔뜩 찌푸렸던 하늘도 활짝 개었다.수은주는 영하 11도7분까지 내려가 기온은 쌀쌀했지만,날씨만큼은 쾌청했다. 우리 민족에게 새해 원단은 늘 각별한 것이었다.해방을 맞고나서 세번째 돌아온 새해는 더욱 그러했다. 전해인 1947년 11월14일 유엔 총회가 한국독립을 위한 계획안을 채택해 두었던 터라 고무적일 수 밖에 없었다.유엔총회의 한국독립 계획안은 1948년 3월31일까지 남북한 전역에서 총선거를 실시,국회 및 정부를 조직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은 1947년 봄부터 한국문제의 유엔 이관을 구상했다.미국의 대외정책문서(FRUS)에 나타난 이같은 구상은 남한의 단독정부수립을 추진할 수도 있다는 각오를 시사하는 것이었다.미·소의 이해가 엇갈리는 상황에서 한반도문제를 합의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기도 했다.소련은 한반도문제의 유엔 이관을 처음부터 반대하고 나섰다.그 대신 1948년초까지 남북한 주둔 미·소병력을 동시에 철수,한국인들 스스로가 외부개입 없이 정부를 수립하자는 제의를 내놓았다. 소련의 제의는 명분상 설득력을 가진 것처럼 보였다.그러나 당시 남북한 현실을 비교하면 남한쪽에는 위험한 것이었다.북한에는 이미 소련의 지원에 따라 사실상의 정부로 보아도 무방할 인민위원회가 구성되어 있었다.이와는 달리 남한에는 권한과 지지기반이 취약한 남조선 과도정부가 있기는 했다.그러나 미군정의 일관된 정책이 없었기 때문에 우익 민족진영은 분열된 상태였고,북한의 조정을 받는 강한 공산세력이 여전히 존재했다. 그래서 1948년 새해 첫날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큰 사건 하나를 딛고 넘어갔다.이날 경무부장 조병옥은 이른바 ‘인민해방군’사건을 서둘러 발표했다.그런 어수선한 판에 1월4일에는 38선을 경비하는 북한 보안대원들로부터 황해도 연백경찰서 장곡지서가 습격되었다.그리고 15일에는 개성경찰서 여현지서가 피습되는 가운데 남로당 출신으로 이루어진 야산대라는 이름의 빨치산이 전국에서 설쳤다.이들 야산대는 소규모 빨치산에 불과했다.그러나 북한은 대규모 게릴라전을 위해 이 해에 평남 강동학원을 차렸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어떻든 유엔 감시아래 한반도 전역에서 총선거를 실시키로 한 유엔의 계획은 착착 진행되었다.이에따라 총선을 감시할 유엔한국임시위원단(유엔한위·UNTCOK)이 1월8일 김포비행장을 거쳐 서울로 들어왔다.서울에서는 영등포공업지대 근로자들이 임금인상과 고용직 근로자들의 복직을 요구하는 파업에 들어간 날이었지만,시민들의 환영은 대단했다.이날 KPS메논 인도 대표와 오스트레일리아·시리아 등 3개국 대표가 먼저 도착한데 이어 캐나다·프랑스·필리핀·엘살바도르 대표가 29일까지 서울에 왔다.유엔한위 1진이 서울에 도착한 다음날 유엔한위가 북한에 한 발도 못 들여놓을 것이라는 김일성 발언이 나왔다.그 때만해도 의례히 해보는 상투어 정도로 여겼다.그런데 미군정연락장교편에 평양으로 보낸 유엔한위의 입북신청은 소련군사령 참모장에 의해 거절되었던 것이다. 소련의 거부로 남북한 동시 총선거를 재검토할 수 밖에 없었다.유엔한위는 남한에서만이라도 단독선거를 실시하는 문제를 놓고 미군정과남한 정치지도자들이 참여한 가운데 연속회담을 열었다.우파에서는 남한 단독선거를 환영했으나 우익중에서 김구의 한국독립당은 반대했다.그리고 김규식을 주축으로 한 중도파도 통일을 가로막을 수도 있다는 이유로 반대입장에 섰다.좌익도 물론 반대했다. 유엔한위는 남한 단독선거가 유엔 결의와 부합되는지를 놓고 고심했다.그러다 이 문제를 유엔 소총회에 넘겼다.소총회는 2월19일 유엔한위의 접촉이 가능한 지역(남한)에서만이라 우선 총선을 실시하자는 미국의 안을 받아들였다.투표결과는 미국 입장에 대한 찬성 31,반대 2,기권 11로 나타났다.유엔 소총회가 남한 단독선거쪽으로 손을 들어주자 유엔한위는 곧 바로선거준비에 들어갔다.그리고 정치권에서도 이승만 중심의 우익진영이 발빠른 움직임을 보였다. 미군정은 우익진영과 협조하여 선거준비에 들어가는 한편 3월17일에는 국회의원 선거법을 제정발표했다.전통적인 민주선거원리에 입각한 이 선거법은 21살 이상의 남녀 모두를 유권자로 규정했다.이 선거법에 나타난 특이한 점은 일제에 빌붙어살았던 부일협력자의 선거권 및 피선거권 박탈이다.새 정부의 민족정통성 확립을 위한 것이었는데,일제 청산은 뒷날 이승만정권에 의해 퇴색되었다.선거일은 처음 5월9일로 정했으나 일요일 투표를 반대하는 기독교인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다음날인 10일로 바꾸었다. 단독선거를 반대하면서 남북협상에 운명을 걸고 평양으로 떠났던 김구와 김규식이 5월5일 서울로 돌아왔다.5·10선거를 방해하려는 북한 의도에 말려들었을 뿐 남북협상에서 얻은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5·10선거 역시 예상했던 대로 평온하지 못한 분위기속에 진행되었다. 총선거에는 대한독립촉성회,한민당,대동청년단 말고도 45개 군소정당이 나왔다.특히 무소속이 많아 전체 당선자 198명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85명이 무소속이었다.이어 대한독립촉성회가 55명,한민당이 29명,대동청년단이 12명,다른 군소정당과 사회단체가 19명의 국회의원을 냈다.이들이 바로 제헌의원인데,국회는 5월31일에 개원되었다.이날 국회는 이승만을 의장에,신익희와 김동원을 부의장에 선출했다. 제헌국회는 7월17일에 열렸다.이날 국회는 이승만의 주장대로 대통령중심제를 권력구조로한 헌법을 통과시켰다.그리고 7월20일에는 헌법에 따라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이시영을 부통령으로 선출했다.7월24일 대통령으로 취임한 이승만은 헌법 골격을 가지고 갈등을 빚었던 한민당과 또 격돌을 벌였다.이승만은 귀국 이후부터 자신을 추종하면서 대통령으로까지 밀어준 한민당을 각료 선임에서 소외시켰던 것이다.그래서 민국당에 이어 민주당으로 개편한 한민당의 뿌리는 1960년 4·19혁명기까지 이승만과 영원한 정적이 되었다. 대한민국정부 수립 선포식은 8월15일 상오10시쯤 중앙청 광장에서 베풀었다.미군사령관 J R 하지 중장은 미군정 폐지를 공식 선언했다.해방을 맞은지 꼭 3년만에 독립정부가 출범한 것이다. 극심한 혼란속에 이상주의적 민족주의자들과 군정의 갈등,공산주의 세력들과의 이데올로기 대립을 극복하고 어렵사리 태어났다.그러나 제1공화국이라고도 말하는 내정체제하의 반공정권은 그 장래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그로부터 50년,꼭 반세기를 맞은오늘 험란한 민주화의 길을 걸어온 야당지도자가 헌정사상 처음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새 정부가 막 돛을 올릴 참이다.돌이켜 보면 대한민국이 걸어온 반세기의 역사는 파란만장했다.그 역사속에는 비민주적 요소가 다분한 여러 단계의 공화국이 기록되었다. □특별취재반 황규호 문화부 부국장급 이용원 문화부 차장 최병열 문화부 차장급 김종면 문화부 기자 박정현 정치부 기자 서창아 정치부 기자 강선임 DB부 기자
  • 꺼질듯 다시 타올랐던 ‘민주화 불꽃’(하의도에서 북악까지:상)

    ◎망명·투옥 등 역경의 세월/‘40대 기수론’ 정계 새바람/71년대선 95만표차 석패/신군부에 사형언도 받아/3당합당에 92년 또 패배/‘적과의 동침’ 4수끝 집권 후광 김대중.그의 삶은 꺼질듯 하면서도 이내 다시 타오르는 촛불이자,얼은 눈밭에서도 꽃망울을 터뜨리는 인동초이기도 했다. 그의 40년 정치역정은 영과 욕,환희와 좌절이 교차한 한편의 드라마다.특히 유신의 장막이 드리워진 72년부터 6·29선언이 있은 87년까지는 납치와 망명·투옥·연금으로 점철된 가시밭 길의 연속이었다. 그의 민주화에 대한 헌신과 그에 뒤따른 인고의 세월은 11차례나 노벨평화상 후보에 오르는 것으로 국제사회에서 먼저 인정 받았고,이제 당당히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국민적인 평가를 받은 셈이다. 정치가로서 김대중의 이력은 해방 직후 몽양 여운형이 주도한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하는 것으로 시작된다.그는 당초 좌우익이 망라됐던 건준의 주도권이 다툼끝에 좌익으로 넘어가자 탈퇴한다.그러나 평생 ‘색깔론’의 꼬리표가 따라붙는 뼈아픈 경력이 됐다.그가 본격적으로 정치에 눈을 돌린 것은 해운업으로 여유가 생긴 54년이다.정치지망생 김대중은 목포에서 민의원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이어 59년 강원도 인제 보궐선거와 60년 5대 민의원 선거에서도 거푸 쓴잔을 마셨다.그는 4.19혁명으로 다시 치러진 61년 5월 인제보선에서 처음 당선됐다.그러나 금배지는 커녕 사흘만에 5·16쿠데타가 나는 바람에 의원선서도 하지 못하고 의원직을 상실하고 만다.그는 군정 기간 동안 모두 3차례나 투옥되는 등 야당정치인으로 본격적인 고난을 겪기 시작했다.그러나 장면박사를 만나면서 민주당 신파의 맥을 잇는 계기가 된다. 그는 63년 6대 총선에서 훗날 정치적 고향이 된 목포에서 다시 출마해 당선되면서 부터 발군의 지략과 달변으로 각광을 받게 된다.6대 국회 초반 6개월동안 13차례나 본회의 발언을 했고,차관도입과 세제특혜·경제개발계획의 문제점 등을 날카롭게 추궁,야당의 경제통으로 명성을 날렸다. 67년 7대 총선에서 다시 당선된 그는 68년 5월 평생의 정치적 동지이자 라이벌이 된 김영삼과의 첫번째 대결인 원내총무경선에서 패한다.그러나 71년대선을 앞둔 신민당 대선후보 지명경선에서 2차투표 끝에 결국 김영삼을 꺾는 대역전을 엮어냈다.이때 김영삼·이철승과 함께 내걸었던 기치가 바로‘40대 기수론’이다. 김대중 후보는 71년 대통령선거에서 바람을 일으켰으나 공화당 박정희 후보에게 95만표차로 석패하고 만다.‘투표에서 이기고,개표에서 진’ 이 선거는 그러나 혼쭐이 난 박정권이 그에 대한 탄압을 본격화하는 직접적인 계기가된다.이때부터 5년반 동안의 투옥과 3년여의 망명,6년반의 가택연금으로 대표되는 그의 험난한 정치인생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특히 71년말 교통사고로 위장한 살해기도를 간신히 모면했으나,그 후유증으로 오른쪽 다리에 장애를 입었다.도쿄에 체류하던 73년 여름에는 중앙정보부원들에 의해 납치되어 수장당할 위기에 빠지기도 했다. 그는 가택연금중이던 1979년 10·26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되면서 사면복권되어 정치일선에 복귀했지만 ‘5·17’을 주도한 전두환의 신군부에 의해 내란음모죄로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언도받는다.그는 국제여론과 미국정부의 압력에 힘입어 사형에서 무기,무기에서 20년형으로 감형되어 82년말 죽음의 그림자에서 또 한번 벗어나지만 그 ‘대가’로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야 했다.그는 그곳에서 2년2개월동안 망명 아닌 망명 생활을 했다. 그는 미국에 있는 동안에도 고국의 민주화운동에 힘을 바쳐 국내에 있던 김영삼과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를 결성한다.또 85년 2.12총선을 앞두고 전격 귀국,신민당의 압승을 끌어내는 견인차가 됐다.그의 계속된 민주화운동은 87년 6월항쟁을 촉발시켰고,마침내 직선제 개헌을 쟁취하는 밑거름이 됐다. 그는 87년 대선을 앞두고 김영삼과 함께 이민우의 신민당을 깨고 나와 통일민주당을 창당했다.그러나 김영삼과의 후보단일화에 실패하자 평민당을 창당해 출마하게 된다.그러나 결과는 노태우·김영삼 후보에 이어 3등이었다.대권 재수가 실패로 돌아간 것이다. 평민당은 88년 4.26총선에서 ‘황색돌풍’에 힘입어 원내 제1야당으로 부상한다.그가 정치적으로 재기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된 셈이다.하지만 90년 전격적인 3당 합당으로 입지가 다시 좁아진 결과 92년 14대 대선에 김영삼 후보에게 패해 세번째 도전 역시 실패로 돌아갔다. ‘오늘로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고,평범한 시민이 되겠다’는 유명한 정계은퇴 선언은 이때 나온 것이다.그는 이후 영국으로 건너가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연구활동에 정진하다 93년 7월 귀국했다.그는 이후 순수한 연구단체를 표방한 ‘아·태평화재단’을 설립하는 등 정치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는 모습을 보여주려 애썼다. 그는 95년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에서 조순 서울시장 후보의 연설원으로 정치일선에 재등장하면서 7월18일 정계복귀를 선언한다.9월5일에는 이기택 총재의 민주당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새정치국민회를 창당,제1야당 총재로 정계전면에 공식으로 복귀했다. 그러나 96년 4·11총선에서 전국구 14번의 배수진을 치고 내각제 개헌저지선인 100석 확보에 총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79석을 얻는데 그쳤다.‘야권분열의 책임자’라는 비난이 거세게 몰아닥쳤다. 40년 정치역정에서 최대 정적의 한사람이자 이념적 좌표가 다른 김종필이 동지가 된 것은 이때 부터다.그는 15대 국회개원과 함께 김종필이 이끄는 자민련과 공조체제를 구축하여 ‘DJ(김대중) 불가론’으로 대표되는 당내 이상기류를 잠재웠다.15대 대통령선거전이 본격화되자 김종필과는 혈맹의 관계로 발전한다.김대중을 두당의 대통령 단일후보로 하는 이른바 DJP연합이 그것이다. 김대중은 1997년 12월18일 제15대 대통령선거에서 결국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꺾었다. □김대중 당선자 연보 ▲생년월일=25년 12월3일 ▲출생지=전남 신안군 하의면 ▲44년=목포상업학교 졸업 ▲48∼50년=목포일보 사장 ▲51년=흥국해운 사장,해상방위대 전남지구 부단장 ▲60년=민주당 대변인 ▲61년=5대 민의원 보궐선거 당선(강원·인제) ▲62년=이희호 여사와 결혼 ▲63년=6대의원(목포) ▲65년=민중당 대변인 ▲68년=신민당 정책위의장 ▲71년=7대 대선출마 ▲76∼78년=3·1민주구국선언사건 등 주도 및 투옥. ▲80년=사면복권(2월),5·18 내란음모 사형언도(9월) ▲81년=무기 감형,미국 망명 ▲85년=민추협 공동의장 ▲87년=평민당 창당,13대 대선출마 ▲91년=신민당 창당 ▲92년=14대 대선출마 및 정계은퇴 ▲93년=영국 출국 ▲94년=아태재단 설립 ▲95년=국민회의 창당 ▲97년=15대 대선출마 및 당선
  • 정국 어디로 갈까(DJ­도전 21세기:1)

    ◎여소야대·내각제 정계개편 예고/한나라,낙선책임·당권 공방 가능성/‘경제살리기 화두’ 국론통합 기회로 김대중시대가 열렸다.그의 대통령 당선은 한국정치사의 새지평을 여는 것을 의미한다.실로 50년만에 여야간 수평적 정권교체다. ○사상 첫 여야 정권교체 해방 이후 여야간 평화적 정권교체는 사실상 초유의 일이다.물론 4·19이후 민주당이 정권을 잡은 전례가 있다.하지만 당시는 혁명적 상황에서 직선제가 아닌 내각제를 통해서였다. 세계적 석학인 사뮤엘 헌팅턴 교수는 “여당이 야당이 되고,다시 그 야당이 여당이 된 뒤에야 진정한 민주화가 된다”고 갈파했다.여야가 한차레씩 뒤바뀌어야 극한투쟁 등이 없어져 정국안정이 가능하다는 뜻이다.때문에 이번대선 결과는 완전한 선진민주주의로 가는 첫 걸음일 수 있다. 특히 호남출신 대통령이 탄생,‘비영남출신 대통령시대’가 개막됐다.지난 61년 5·16을 통해 박정희 전 대통령이 권력을 잡은 이후 37년만이다. 이로써 한국사회의 멍에였던 ‘호남의 한’이 씻겨질 기회를 얻었다.나아가 우리정치에 드리워진 그늘인 지역감정이 걷히는 계기를 맞을 수도 있게 됐다. 그러나 선거혁명의 전도가 장미빛만은 아니다.그 자체가 사상 초유인 만큼 얼마간의 불안요인을 안고 있다.동서로 첨예하게 갈린 지역주의적 투표행태에서 보듯 새 정권에게 국민통합이라는 벅찬 과제를 남겼다. ○내년 지방선거가 변수 우선 소수여당으로서 정국안정이 급선무다.국민회의-자민련 의석을 합쳐도 122석으로,전체의석의 41%에 불과한 탓이다.따라서 거야로 전락한 한나라당의 협조가 불가피하다. 그러나 이회창 후보의 패배로 한나라당은 당장 책임 공방과 당권경쟁등 내분에 휩싸일 공산이 커졌다.이 와중에 새정권과의 국정 동반자관계로 큰 정치를 선택할 여력이 있을지 미지수다. 이인제 후보의 국민신당도 마찬가지다.조직과 자금의 열세속에서 그런대로 선전했지만 내년 지방자치선거에서의 약진에 당의 명운을 거는 형편이다.때문에 한나라당과 예의 선명성 경쟁을 벌일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새정권은 국민회의·자민련의 연합정권의 성격을 띤다.선거전 김후보와 자민련 김종필 명예총재간 이른바 DJP합의의 따른 결과다. ○정쟁 재발땐 여론 의지 하지만 그 자체가 정국불안의 불씨가 될 소지도 없지 않다.단기적으론 50대 50지분의 내각구성 약속 이행 과정에서 양측간 갈등이 예견된다. 장기적으로는 99년 말까지 하기로한 양측간 내각제 합의도 정국을 뒤흔들 휴화산이다.국민회의·자민련 의석으론 개헌선(200석)에 턱없이 밑돈다. 의석분포상 한나라당·국민신당등 다른 당의 내각제 동조세력이 가세하지 않으면 개헌자체가 불가능하다.이 과정에서 무리한 정계개편 추진이나 내각제 포기 모두 정국을 소용돌이치게 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 더욱이 새 당선자가 당장 짊어져야할 짐도 간단치 않다.IMF에 넘겨준 ‘경제주권’의 회복과 ‘실업대란’의 예방 등 경제살리기가 초미의 과제다.붕괴위기의 북한체제와의 관계개선으로 평화통일의 길을 터야하는 책무도 있다. 그러나 위기는 곧 기회일 수 있다.경제부도사태 등 위기상황을 정국안정을 위한 국민적 공감대 형성으로 반전시킬수도 있다는 것이다. 국민적 과제인 경제난 극복을 위해서는 정부·여당의 힘만으론 불가능하다.따라서 이같은 여론이 새 당선자에겐 큰 힘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어차피 소수여당의 당선자로선 국민에게 직접 호소하는 정치를 펼 수 밖에 없을 듯하다.
  •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 저 ‘분단과 한국사회’

    ◎민족분단이 한반도에 미친 영향/4·19혁명 10월유신 교원노조운동 등 실어/천민자본주의·지배이데올로기 문제 분석 “한국 자본주의 혹은 한국사회의 역사구조적인 기초는 한국전쟁과 민족의 분단입니다.식민지 경험이나 조선시대의 사회 문화 등도 오늘의 한국사회를 만들어낸 기초가 되었지만 한국전쟁과 분단이야말로 오늘의 한국 정치 사회 경제 문화에 가장 심대한 영향을 미친 외적 조건이자 변수라고 할 수 있어요”김동춘 성공회대 교수(39·사회학)가 한국전쟁과 분단을 중심에 놓고 한국문제를 분석한 논문집 “분단과 한국사회 역사비평사”를 펴냈다. 이 책은 “산업화,자본주의,민주화,시장.계급 등 근대사회 일반에 나타나는 보편적 개념들은 수없이 논의되어 왔지만 분단과 민족문제는 상대적으로 소홀히 해왔다”는 문제의식 아래 김교수가 지난 10년동안 쓴 논문들을 묶은 것.분단에 따른 사회현상을 분석하는데 초점을 맞춘 “분단과 한국사회” “한국전쟁과 지배이데올로기의 변화” “한국 자본주의의 성격과 지배질서” “사상범 통제의 한국적 특성” “남북한 이질화의 사회학적 고찰” 등의 논문과 독재에 대한 저항운동을 다룬 논문인 “4.19혁명의 재조명” 민족민주운동으로서의 4.19 시기 학생운동 “왜 60,70년대 민주화운동은 10월유신을 저지하지 못했는가”교사집단의 계급적 성격과 한국 교원노조운동 등 모두편의 글이 실렸다. 김교수는 1987년 이후 한국 사회는 영국의 사회학자 라쉬와 어리가 지적한 것처럼 세계시장의 성장과 자본의 국적성 희석화,화이트칼라와 서비스 계급의 비중강화 등을 특징으로 하면서도 자본주의적 사회관계는 의연히 지속되고 있다고 진단한다.그런 관점에서 한국사회는 “탈조직화된 자본주의 징후를 지니고 있다는 것.그는 또한 1980년대 한국사회를 이른바 시장권위주의 내지 시장기제적 억압체제로 개념화하는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다.이같은 입론은 자유경쟁자본주의에서 제국주의,복지국가로 연결되는유럽자본주의의 역사적 발전과정에 뿌리를 둔 “시장”과 “국가”의 개념을 한국사회에 무매개적으로 적용할 우려가 있다는 지적이다. 한편 김교수는이 책에서 소유권 절대주의 등한국의 천민자본주의와 지배이데올로기의 부정적 양상을 꼼꼼히 살피고 있어 주목된다.해방전의 친일파와 해방후의 친미세력으로 이루어진 지배집단은 기득권 유지를 위해 안보국가 군사주의 성장주의 등의 이데올로기를 창출했으며,이는 노동자 시민사회 등 피지배계급에 대한 무시로 이어졌다는게 김교수의 견해.때문에 ”일반적인 삶의 조건은 황폐해질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김교수는 우리 학계는 이같은 문제점들을 방치한 채 서구이론에만 매달려 “무엇이 문제이고 무엇을 해결해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 이회창 후보 선출­인맥과 조직

    ◎정·관·학·언론계 브레인 두루 포진/공직·KS 8인방­이흥규·황영하씨 등 레이스 전부터 활동/국회·위원장그룹­김윤환 고문·강재섭 의원 등이 주축 이뤄/공보팀·청하회­이세중 전 변협회장·고흥길 특보 등 활약 이회창 후보는 ‘인복’을 타고 났다.그만큼 그의 주변에는 유능하고 다양한 인재들이 포진해있다.‘이회창사단’은 이후보가 경기고(49회)와 서울법대(11회),사법고시(8회),대법관,중앙선관위장,감사원장,국무총리,당 대표를 거치면서 다진 인맥과 조직이 주축을 이룬다.이들은 이번 경선과정에서 이회창후보 경선대책위라는 울타리 속에서 각자의 역할을 수행했다. 이후보가 공직시절 인연을 맺은 측근인사 그룹은 이흥주 전 국무총리 비서실장,황영하 전 총무처장관,안동일 변호사,유경현 전 평통사무총장,방석현 서울대 교수가 핵심멤버다.이들을 포함해 황우여 의원과 진경탁 특보,진영 변호사 등 ‘8인방’은 대선캠프가 차려지기 전부터 이대표의 종로구 수송동 이마빌딩 변호사 사무실에 모여 주례회의를 가졌다. ‘이회창사단’의 살림을 책임진 황 전 장관은 이후보가 문민정부 초기 감사원장에 발탁되었을때 감사원 사무총장으로 함께 근무했다.4·19혁명 참여자들의 모임인 ‘4월회’ 결성을 주도한 안변호사는 지난 90년 경기고 출신 법조인 모임인 ‘경기법조회’의 초대 총무를 맡아 이후보를 고문으로 추대했다.조직 실무를 담당한 유 전 총장은 10대부터 전남 순천에서 내리 3선을 했으며 6공초기 민정당 대변인을 지냈다.이가운데 황 전 장관과 안변호사,유 전 총장은 박찬종 후보와 경기고 54회 동기로 ‘경기고­서울법대(KS)라인’의 핵이다.경선대책위의 홍보­기획업무를 담당한 이 전 실장은 71년 국무총리실에서 공무원생활을 시작,24년간 국무총리실에서 근무한 관료출신으로 삼성전자 고문을 지냈다. 정책팀은 ‘KS라인’인 진영 변호사가 이끌었다.진변호사는 지난 95년 30,40대 변호사들로 ‘경쟁력 강화를 위한 변호사 모임’의 창립 인사다.박세훈·한종기 박사가 경제­정치분야를 나눠 맡았고 연설문은 김동선 전 시사저널 편집장과 파리 10대학에서 경제학 박사를 얻은 ‘21세기 교육문화연구소’ 허경회 소장 등이 주로 작성했다. 지난해 7월19일 구성된 ‘국회의원 이회창후원회’도 주요 인맥이다.최초 발기인 18명 가운데 전직 장·차관 출신만도 9명이다.후원회장인 정재석 전 경제부총리를 비롯,김두희 전 법무장관,윤동윤 전 체신장관,김시중 전 과기처장관,황영하 전 총무처장관,이충길 전 보훈처장,황길수 전 법제처장,유경현 전 평통사무총장,이흥주 전 총리비서실장 등이 그들이다. 그러나 경선과정의 ‘주역’들은 역시 150명에 육박하는 원내외 위원장들이다.특히 김윤환 고문과 강재섭 의원은 ‘TK(대구경북지역)’의 판세를 이후보쪽으로 기울게 함으로써 대세몰이를 도운 주요 공신으로 꼽힌다. 선대위 상황실장이었던 윤원중 의원도 특유의 상황판단 능력을 발휘했다. 특히 이후보의 원내 인맥들은 조만간 단행될 당직개편에서 전면에 나설수 있을지 관심사다.그러나 지금으로서는 연말 대선을 앞둔 이후보가 당내 화합 차원에서 다른 후보측 인사들을 대거 중용할 가능성이 높다. 공보팀은 주로 기자 출신들이 맡았다.중앙일보 편집국장 출신 고흥길특보를 중심으로 연합통신과 세계일보 출신인 구범회 윤창중씨 등이 선대위 부대변인으로 활약했다.전 한겨레신문 정치부 차장인 이병효 보좌관은 의원회관을 중심으로 지지운동을 벌였고 당료출신의 장다사로씨는 이대표의 ‘그림자’ 역할을 수행했다. 경기고 동기 23명이 만든 청하회도 후원그룹이다.오성환 전 대법관·이세중 전 대한변협회장·배도 효성그룹고문 등이 대표적 인사들이다.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는 사람들(새미준)’은 이후보를 지지하는 자발적 시민단체로 꼽히고 있다.
  • 6·29 10돌에 돌아본 민주화역정/김학준 인천대총장(특별기고)

    우리는 어제 6·29 10주년을 맞이했다.온 국민을 환호하게 만들었고 국제사회에서도 기대를 불러 일으켰던 그 감격스런 민주화조처 8개항의 실현이 약속됐던 때로부터 어언 10년이 흐른 것이다. 선언자 노태우 당시 민정당 대통령후보의 표현 그대로 그것은 국민에 대한 항복이었다.권위주의체제의 종식과 민주정치의 부활을 외치는 대다수 국민들의 전국적 절규가 마침내 6월 항쟁의 형태로 폭발했을 때,집권세력의 제2인자였던 그는 더 이상 저항하는 무모함을 버리고 그것을 「대통령 직선제 수용」을 비롯한 8개항으로 압축해 즉각적 실현을 다짐함으로써 탈권위주의체제로의 전환을 예고했던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6·29선언은 국민의 승리였다고 하겠다.60년의 4월혁명에 이은 두번째 민주혁명이 국민의 힘을 통해 시작됐던 것이다. ○개헌 통해 기틀 마련 돌이켜 생각하면,4월혁명은 그 꽃이 활짝 피기에 앞서 61년에 5·16 군사쿠데타를 만남으로써 일단 좌절됐다.그뒤 72년의 유신쿠데타,79년과 80년의 신군부쿠데타는 그리하여 권위주의체제를 지속시켰고 강화시킴으로써 4월혁명의 정신은 실종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것은 27년만에 다시 점화됐다.마치 4월혁명이 김주렬군의 죽음으로 촉발됐듯,6월항쟁은 박종철군과 이한열군의 죽음으로 촉발됐으며,그들의 민주주의를 위한 순사위에서 마침내 6·29 민주화선언의 나무가 자라게 된 것이다. 6·29 민주화선언은 우선 자유화의 단계를 밟았다.권위주의체제 아래 취해졌던 부당한 반민주적 법률들과 제도들이 고쳐지기 시작했으며 그것들에 의해 부당하게 구속됐던 사람들이 풀려났다. 그 조처들 가운데 가장 중요했던 조처는 개헌이었다.여야합의에 따라 새로운 민주헌법이 마련된 것으로,이 헌법은 오늘날까지 한 글자도 고쳐지지 않은채 효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 개헌은 자유화의 다음 단계로서의 민주화의 개시 단계를 알리는 신호였다.이 개헌에 따라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제도들이 마련될 수 있었다.3권분립의 확립,헌법재판소의 신설,언론자유의 보장,복수정당제도의 보장 등이 그 대표적 보기들이다.그리하여 그뒤 우리는 제도적 민주주의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정·경·사 수준 높여야 민주화 개시 단계의 다음 단계는 민주화의 실천 단계이다.이 단계에서는 민주주의가 제도화의 수준을 뛰어넘어 실질화돼야 한다.그래서 이 단계를 실질적 민주주의 단계라고 부른다. 4·19 혁명이,그리고 6월 항쟁이 요구한 민주화는 오늘 현재 민주화의 개시 단계와 민주화의 실천 단계 사이에 와 있다.달리 표현해,제도적 민주주의의 단계와 실질적 민주주의 단계 사이에 와 있는 것이다. 공정하게 말해,제도적 민주화는 비교적 착실하게 진행되어 왔다.제도적으로 여전히 미비한 부분이 없지 않으며 그래서 그 미비한 부분의 개선을 위해 더욱 노력해야겠으나 그래도 이 방면에서의 진전은 꽤 높은 수준에 와 있는 셈이다. 그러나 실질적 민주화의 수준은 높지 않다.우선 정치문화와 행정문화는 여전히 권위주의체제의 낡은 관습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하다.이어 경제 부문과 사회 부문에서도 민주화는 실질적으로 선진국의 수준에 이르고 있지 못하다. 이 실질적 민주화의 단계를 우리는 이번 15대 대통령 선거를계기로 크게 진전시켜야 한다.깨끗한 선거의 전통을 확립하는 것이 그 목표들 가운데 하나이다.그리하여 새정부가 들어서는 것을 계기로 재벌의 국민화,부의 보다 더 고른 분배,그리고 지역간 갈등의 완화 등을 통해 경제적 및 사회적 부문에서의 실질적 민주화를 진전시킴으로써 민주화의 실천 단계를 성공적으로 마쳐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될 때,우리는 민주화의 세번째 단계인 민주주의의 확립 단계로 접어들게 된다.그리고 그때 비로소 우리는 선진국의 반열에 올라서게 되며 동시에 평화통일의 과업을 주도하게 된다. 6·29 선언은 이렇게 볼 때 현재 진행형이다.우리 모두 새로운 감회로 민주화의 진전을 위해 더욱 노력할 것을 다짐하자.
  • 김정일 「3대헌장」 절대지침으로/경찰이 밝힌 한총련의 용공활동

    ◎얼굴없는 핵심지도부가 배후 조정/3단계 투쟁과정 설정 총궐기획책 한총련의 용공성은 올들어 더욱 노골화됐다.김정일이 신년사에서 발표한 「조국통일 3대헌장」을 절대 지침으로 수용,친북 폭력노선을 걸어왔다.연말의 대통령 선거를 겨냥,올해를 「정권을 타도할 혁명 공세기」로 삼기도 했다. 경찰이 11일 발표한 한총련 핵심간부들에 대한 수사결과에 따르면 한총련은 올해의 투쟁목표를 「파멸위기에 몰린 현정권의 임기전 타도와 민주정부 수립」에 두고 3단계 투쟁과정을 설정했다.구체적인 방법으로는 6·10 민주항쟁과 같은 이른바 「전민항쟁」을 채택,「총궐기」를 선동해왔다. 1단계인 「준비기」에는 3월말 동맹휴업을 시작으로 「민중대회」(4.19)와 「남북 해외 반미 공동투쟁」(4.28)을 거쳐 노동절(5.1)로 이어지는 「계단식 연속 총궐기 대회」로 투쟁의 주도권을 장악하겠다는 계획이었다. 7월5일까지의 2단계 「분출기」에는 5월항쟁 계승주간(5.15∼22)과 민중연대 투쟁주간(6.2∼10),제2차 민중 대회(6.10)를 중심으로 현정권에 결정적타격을 가해 「제2의 6월 항쟁」을 일으키려 했다. 이어 「평화월간」(6.26∼7.27)과 「범민족대회」(8.13∼15) 등을 통해 8월15일까지 계속되는 3단계인 「범민족 대항쟁기」에서는 북한과의 연대를 통해 현정권을 「매장」하려 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한총련이 절대 지침으로 채택한 김정일의 「조국통일 3대 헌장」은 ▲자주·평화·민족대단결 원칙 ▲고려민주 연방공화국 창립 방안 ▲전민족대단결 10대 강령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같은 친북·용공 성향의 실질적 조정자는 중앙집행위원회와 정책위원회,조국통일위원회 등의 핵심기구에 포진한 89·90 학번 출신 졸업생이나 제적·휴학생 30여명이다.「직업활동가」로 불리는 이들의 신분은 철저하게 베일에 가려져 있다.관계당국도 전남대 출신 89학번 최치수(가명)가 이들 가운데 한 명이라는 사실만을 파악하고 있을 뿐이다.이들이 당국의 감시를 피해 「지하」로 파고들면서 한총련의 노선과 활동도 더욱 용공적으로 변질됐다는 것이 경찰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중집위는 한총련의 정책과 노선을연구·수립하고 집행하는 최고 정책결정 및 집행 기구이다.한총련 의장을 비롯,정책위원장,조통위 정책실장,학자추 정책실장,조직위원장,연대사업위원장,집행위원장,투쟁국장,교육선전국장,문화국장 등 12명으로 구성돼 있다. 이들은 국가보안법 위반 전력자이거나 대학재학 시 총학생회나 지역총학생회연합의 임명직 간부를 지낸 경력을 갖추어야 하는 등 엄격한 자격심사를 거쳐 선발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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