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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대표가 말하는 高大정치

    민주당 정세균 대표의 ‘고려대 자부심’은 대단하다. 그가 지난해 펴낸 자서전 ‘정치 에너지’를 보면 힘든 가정 형편 때문에 고등학교를 3번이나 옮긴 끝에 고대 법학과(71학번)에 들어갔던 추억이나, 교내 운동권 친구들에 대한 미안함, 총학생회장이 되는 과정 등이 자랑스럽게 펼쳐진다. 드러내 놓고 고대 출신임을 자랑하지는 않지만 편한 술자리에서 종종 아들과 딸이 모두 연세대를 졸업한 것을 못내 아쉬워하기도 한다. 이명박 대통령과 웃는 낯으로 악수하는 사진이 보도되면 호사가들이 “고대 선배라서 깍듯이 모시는 것 아니냐.”고 농담을 던지기도 한다. 그런 정 대표에게 ‘고대 요직 독식’ 논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고려대 총장을 지낸 어윤대 국가브랜드위원장이 KB금융지주 회장에 오르면서 독식 논란은 정부, 공기업을 넘어 민간 금융기관으로까지 옮겨갔다. 정 대표는 “난 ‘민족고대’ 출신”이라며 말을 아꼈다. 다만 “탕평인사는 누구에게나 중요하고, 지연·학연을 넘어 이뤄져야 한다.”면서 “내가 하면 괜찮고, 남이 하면 안 된다는 식은 곤란하다.”고 말했다. 고대 출신 정치인이 많지 않으냐는 질문에 정 대표는 “지금은 고대 출신 국회의원이나 지역위원장이 별로 없다.”며 손사래를 쳤다. 다만 “과거 남성 중심의 대학 문화, 강력한 데모 등 학교 특유의 분위기가 학생들의 ‘야성’을 키운 것 같다.”면서 “과거에는 이른바 ‘고대 기질’이 정치하는 데 적합했는지 모르겠지만 시대가 바뀐 요즘은 별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고대가 자신을 정치로 이끈 하나의 계기가 됐음도 부인하지 않았다. 정 대표는 “4·19 혁명의 주역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했고, 학생들이 정치에 관심이 많아 나 같은 ‘촌놈’이 꿈을 키우기에 좋은 학교였다.”고 말했다. 이창구기자 window2@seoul.co.kr
  • [도시와 길] (16) 부산 광복로

    [도시와 길] (16) 부산 광복로

    서울에 종로가 있다면 부산엔 광복로가 있다. 부산 중구 광복로는 규모와 길이 등에선 비교 대상이 아니지만 원도심에 있고 역사성을 담고 있어 ‘부산의 종로’로 통한다. 부산 토박이인 윤재웅(54) 씨는 “광복로는 어릴 적 부모님 손잡고 옛 고려당에서 빵을 먹고 부산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미화당백화점에서 쇼핑하던 추억이 고스란히 담긴 곳”이라고 기억을 되살렸다. ●광복로는 역사의 거리 광복로는 옛 부산시청 쪽에서 국제시장 입구에 이르는 너비 15~16m, 길이 1㎞인 그리 길지 않은 도로다. 하지만 부산의 근·현대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곳이다. 일제 강점기 때 광복동 일대는 일본인의 주거지였고, 광복로는 일본인들의 상업 중심지였다. 도로 양쪽으로 요리집과 극장, 백화점, 서양식 건물 등이 들어서면서 번창했다. 당시 광복로는 벤텐조(辨天町) 거리라 불렸다. 벤텐조는 일인들의 수호신으로 용두산 신사에 모셔둔 변재천사(辯才天社)에서 따왔다. 1945년 이후 조국의 광복을 기리는 뜻에서 이름이 광복로로 바뀌었다. ‘광복(光復). 빛을 회복한다.’라는 은유적인 표현과 함께 독립이라는 뜻을 넘어 다시 주권을 회복하다라는 역사성을 담고 있다. 해방의 물결과 함께 만들어진 광복로는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부산 최고의 거리로 명성을 날렸다. 정부를 비롯한 공공기관, 회사, 학교 등이 전쟁을 피해 부산으로 옮겨 왔으며 피난민들도 부산으로 몰려들었다. 자연스레 대한민국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가 됐으며, 문인과 예술가 등이 이곳 다방에 문화의 꽃을 피웠다. 당시 ‘밀다원’ 다방은 소설가 김동리의 대표적인 소설 가운데 하나인 밀다원시대의 배경이 됐다. 소설가 이호철은 금강다방에서 황순원 선생에게 작품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문화의 르네상스 시기였으며 이는 1970년대까지 이어졌다. 이제는 사라진 전원, 르네상스, 무아, 백조 사계 필하모니 등의 고전 음악감상실은 산업화시대 부산 젊은이들을 위한 문화공간 역할을 담당했다. 또한 4·19혁명 때에는 이승만 정권의 상징으로 이곳에 있던 자유당 당사가 시위 군중에 점거되는 등 수난을 당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광복로 일대가 ‘데모의 거리’로 불리기도 했다. 당시 시위대에 점령당한 자유당 당사는 현재 한 유명 의류업체의 상가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수년 전 증·개축을 거치면서 본래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어 아쉬움을 주고 있다. 광복동 일대는 외환위기 이전 옛 미화당 백화점(현 ABC 마트)과 용두산 공원을 중심으로 부산지역 최대 관광명소였다. 또 황금상권의 명성이 자자했다. 그러나 외환위기와 함께 1998년 부산시청이 연산동으로 옮겨 가면서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부활하는 광복로 이 일대는 지난해 말 롯데백화점 광복점이 문을 열고 광복로 일원에 대한 시범 가로조성사업이 완료되면서 활기를 되찾고 있다. 특히 옛 부산시청 자리에 100층이 넘는 초고층 건물인 롯데타운 건립 공사가 진행 중이어서 기대가 더욱 크다. 지난 20일 찾아간 광복로는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다. 광복로 입구 초입인 옛 부산시청 쪽에 들어서자 귀에 익은 팝송이 흘러나와 5월 한낮의 따스함과 여유로움을 안겨줬다. 또 보행자 편의를 위해 차도와 인도 높이를 같게 하고 곳곳에 쉼터와 조형물, 화단 등이 조성돼 있어 발걸음을 가볍게 했다. 일방통행인 기존 2차선의 도로가 1차선으로 줄어든 대신 보도 폭은 3.6m로 늘어났다. 한때 부산의 패션 1번 거리였음을 알려주듯 지금도 의류와 캐주얼 매장 등 로드숍이 길 양측으로 죽 늘어서 있어 전성기 못지않은 모습을 보여줬다. 맞춤양복의 대명사인 ‘국정사’와 귀금속 판매점인 ‘명보사’는 여전히 자리를 지키며 광복로의 부활을 반기는 듯했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면서 중·장년층에게는 어릴적 향수를, 젊은이에게는 역사성을 되새기게 하는 곳이다. 작년 1월부터 매주 일요일 오후 2시부터 9시까지 차 없는 거리를 시행하고 있어 시민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시민 임정규씨는 “광복로가 예전과 달리 차분하면서도 세련돼진 것 같다.”며 “보행자들을 위한 인도가 넓어져 걷기가 참 편하다.”고 말했다. 무질서한 간판과, 좁은 차도를 꽉 메운 차들이 내뿜는 매연, 마구잡이 불법주차로 걷기조차 힘들었던 몇 년 전에 비하면 한층 업그레이드됐다. 이 같은 광복로가 지난 2004년 ‘광복로의 봄봄봄’ 프로젝트가 추진되면서 오늘날의 멋진 거리로 재탄생하게 된 것이다. 거리가 깨끗해지고 밝아지면서 광복로를 찾는 이도 많이 늘어났다. 최근 하루 유동인구는 80여만 명으로 1980~90년 전성기 시절 100만여 명에는 못 미치지만 외환위기 때의 50여만 명에 비하면 크게 늘었다. 광복로 문화 포럼 김태곤 사무국장은 “최근 20~30여개의 점포가 개장하는 등 상권이 조금씩 되살아나고 있다.”고 말했다. 글 사진 부산 김정한기자 jhkim@seoul.co.kr
  • [서울광장] 서울대 82학번 vs 고려대 61학번/곽태헌 논설위원

    [서울광장] 서울대 82학번 vs 고려대 61학번/곽태헌 논설위원

    고려대에서는 61학번(1961년 입학)이 가장 센 학번으로 꼽힌다. 이승만 대통령이 물러난 4·19 혁명과 관련이 있다. 이승만 정부는 1960년 3월15일 대통령·부통령을 뽑는 선거에서 유례 없는 부정선거를 했다. 전국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특히 경남 마산에서는 경찰의 발포로 8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4월11일 마산 중앙부두에서 고교생인 김주열군의 시신이 떠올랐다. 이를 본 시민 수만명이 시위에 또 나섰다. 고려대생 3000여명은 18일 안암동 본교 교문을 나서 국회의사당(현 서울시 의회)까지 시위를 했다. 유진오 총장의 설득으로 국회의사당을 빠져나온 학생들을 정치깡패들이 폭행했다. 서울에서의 첫 유혈기록이다. 이튿날 학생과 시민들의 대규모 시위로 이어진 배경이다. 고려대는 매년 4·18을 기념한다. 4·19 혁명 당시 고교 3학년 중 4·18 때문에 고려대를 선택한 경우도 있었다. 정치인을 꿈꿨던 학생들이 고려대를 선택한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였다. 그래서인지 고려대 61학번 중 국회의원 출신은 20명 정도 된다. 특정대학, 단일학번으로는 기록이라고 한다. 현 18대에는 민주당 김충조 의원이 유일하지만 14대에는 이명박 김덕규 김충조 남궁진 의원 등 10명이나 됐다. 이 역시 기록으로 알려져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고향인 경북 포항에서 어려운 가정형편 탓에 야간 상고를 졸업한 뒤 서울에서 1년을 일하며 지냈다. 이 대통령이 고려대에 들어간 것은 정치적인 이유는 아니었다. 서울대는 모든 학번들이 세지만 82학번이 가장 강할 것 같다. 82학번이 센 이유는 대학 입시제도 때문이다. 전두환 정부는 갑자기 81학번 때 졸업정원제를 도입했다. 본고사는 없애고 내신은 강제로 도입하도록 했다. 대학원서는 무한정 쓸 수 있지만 면접 당일에는 한 곳만 선택하도록 했다. 서울대를 비롯해 주요 대학의 상당수 계열(학과)에서 대규모 미달 사태가 빚어진 이유다. 그래서 정부는 82학번 때에는 2개 대학만 원서를 쓸 수 있도록 제한하는 대신 대학마다 1지망(70%), 2지망(30%)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이 제도로 서울대가 우수학생을 거의 싹쓸이했다. 서울대 82학번 출신 현역 국회의원은 나경원 원희룡 이혜훈 조해진 의원 등 9명이다. 민주당 김민석 최고위원이 15대에 금배지를 달면서 서울대 82학번 국회진출 테이프를 끊었다. 고려대 61학번과 서울대 82학번은 나이 차이 때문에 맞대결할 기회는 거의 없었다. 2002년 지방선거 당시 여당인 민주당 김민석 후보와 야당인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가 서울시장에서 정면대결한 게 유일한 게 아닐 듯싶다. 당시 38세의 김 후보가 당선됐더라면 물론 이 대통령은 지금 청와대에 있을 수 없다. 김 후보가 당선됐더라면 대통령 유력후보로 성장했을 가능성이 높다. 3명의 서울대 82학번이 6·2 지방선거에서 광역단체장에 도전했으나 예선을 통과하지 못했다. 한나라당 나경원 원희룡 의원은 서울시장 경선을, 민주당 김민석 최고위원은 부산시장 경선을 각각 뚫지 못했다. 서울대 82학번은 이번 지방선거에서 화려한 데뷔를 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실망하기는 이르다. 젊기 때문에 기회가 많다. 각 분야에 포진한 막강한 동기생들도 힘이 될 수 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신임총리는 40대다. 1971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야당인 신민당에서는 김영삼 김대중 의원과 이철승 전의원이 40대 기수론을 주창, 세대교체가 이뤄지기도 했다. 차기(2012년)나 차차기(2017년) 대선에서 세대교체 분위기가 무르익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서울대 82학번을 포함한 소위 386세대(1960년대생)가 정계의 주류로 부상할 시기는 점점 다가오고 있다. 젊음과 참신함은 장점이 될 수도 있지만 경박하지 않아야 한다. 또 구상유취(口尙乳臭)하다는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신뢰와 실력을 갖춰야 한다. 젊다는 사실만으로는 세대교체를 추진할 명분도 없고 성공할 수도 없다. 콘텐츠가 없는 젊음만으로는 이룰 게 없다. tiger@seoul.co.kr
  • 18일 5·18 30주년 기념식

    5·18민주화운동 30주년 기념식이 18일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 5·18묘지에서 국가보훈처 주관으로 열린다. 기념식에는 정운찬 국무총리 등 정부 요인과 각 정당 대표, 5월단체 회원과 유가족, 시민 등 2000여명이 참석한다. 행사는 국민의례, 헌화·분향, 추모의 나비 날리기 순으로 30여분간 진행된다. 기념일을 하루 앞둔 17일 광주 금남로와 옛 전남도청 앞 등지에서 수천명이 모인 가운데 전야제가 열렸다. 전야제는 ‘저항과 공동체’란 주제의 거리 퍼포먼스인 ‘시민난장’을 시작으로 막이 올랐다. 대학생·주민 등으로 구성된 거리 퍼레이드단은 동학혁명, 항일운동, 4·19혁명, 5·18민주화운동, 대동세상 등 다섯 가지 주제를 표현하며 거리 행진을 펼쳤다. 또 오후 8시쯤부터 옛 도청 앞에서 ‘빛-이어지다’란 주제로 열린 본행사는 합창단 518명의 노래와 유명 연예인들의 공연 등이 이어지면서 절정을 이뤘다. 광주 최치봉기자 cbchoi@seoul.co.kr
  • 국내 最古 사보 발견

    국내 最古 사보 발견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전에 발간된 것으로 추정되는 기업의 사보(社報)가 발견됐다. 대한통운은 최근 회사 창립 80주년을 맞아 사사(社史) 편찬작업을 하던 중 대한통운의 전신인 조선운송주식회사가 1939년 4월에 발간한 사보 ‘조운(朝運·왼쪽)’ 여섯 권을 발견했다고 10일 밝혔다. 1940년 간행된 ‘조선운송 10년사’에는 사보 ‘조운’의 창간연도가 1937년 2월이며 1800부가 발행됐다고 쓰여있지만, ‘조운’의 실물이 발견되기는 처음이며 현존하는 사보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기도 하다고 대한통운 측은 설명했다. ‘조운’에는 해운, 트럭운송 등 사업관련 지식 소개부터 재테크, 시사상식, 사원이 쓴 수필이나 여행기 등이 담겨있다. 특히 매 호마다 여성의 복장과 화장, 여성교육과 각오, 수기 등이 실려 있어 여성의 사회활동이 막 시작되던 당시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1949년 봄호는 복간본으로 4·19 혁명 직후 과도정부 내각수반을 지냈던 허정 당시 교통부장관이 축사를 썼고, 한국 출판 삽화가 1세대로 불리는 이우경 선생이 삽화를 그리기도 했다. 대한통운 관계자는 “기업 사보의 시작이 1950년대 후반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이번 발견으로 역사가 20여년 정도 앞당겨질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대한통운은 현재 격월로 사보 ‘대한통운’(오른쪽)을 발행하고 있으며, 2008년 ‘대한민국 커뮤니케이션대상’ 사보 부문에서 최고상인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을 받았다. 윤설영기자 snow0@seoul.co.kr
  • [열린세상] 권력구조를 바꾸는 개헌의 어려움/이준한 인천대 정치외교학 교수

    [열린세상] 권력구조를 바꾸는 개헌의 어려움/이준한 인천대 정치외교학 교수

    권력구조를 바꾸는 개헌과 관련하여 재미난 사실이 하나 있다. 지구상에서 한국이 거의 유일무이한 사례라는 것이다. 1948년 제헌을 앞두고 불과 며칠 만에 비교적 순수한 의원내각제에서 대통령제가 가미된 이원집정제로 바뀌었다. 물론 초대 대통령이 강력한 카리스마를 행사하면서 대통령제적인 현상이 많이 나타났지만 헌법에는 총리 등 의원내각제의 요소가 대다수 남아 있었으니 이원집정제가 아니라 뭐라 하겠나. 또다시 한국의 권력구조는 1960년 4·19혁명 이후 의원내각제로 바뀌었지만 다음해 5·16 쿠데타로 막을 내렸다. 그 뒤 대통령제와 의원내각제 요소가 혼재된 이원집정제적 권력구조가 부활하여 현재까지 연명하고 있다. 그간 한국의 대통령이 헌법의 규정보다 더 많은 권력을 제왕적으로 행사해 왔으니 한국의 권력구조가 대통령제로 알려졌다. 그러니 권력분립형 대통령제 또는 이원집정제로 개헌하자는 주장은 현행 헌법구조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한 국가에서 권력구조를 바꾸는 개헌은 전 세계적으로 매우 드문 편에 속한다. 한국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몇 번씩이나 바꾸고 그에 모자라 다시 또 바꾸자고 하니 매우 희귀한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사실 따지고 보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지구상에서 권력구조를 실질적으로 바꾼 국가는 8개밖에 없다. 과거 내전에 찌든 나이지리아와 시에라리온이 의원내각제와 대통령제를 번갈아 실시한 적이 있다. 그리고 스리랑카, 수리남, 프랑스, 파키스탄은 의원내각제와 이원집정제를 각각 경험했다. 또한 브라질은 1961년부터 약 1년 동안 이원집정제를 실시했다가 대통령제로 다시 돌아갔다. 한편 아르메니아는 1990년대 중반에 대통령제를 이원집정제로 바꾸었다. 여기에서 눈여겨 볼 것은 이들 국가들이 대체로 이원집정제를 매개로 해서 권력구조를 바꾸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이다. 의원내각제에서 대통령제 또는 대통령제에서 의원내각제로 곧바로 바뀐 사례는 나이지리아와 시에라리온밖에 없다. 이에 비하여 다른 모든 외국 사례에서는 이원집정제와 의원내각제가 교대를 했거나 이원집정제와 대통령제가 교대를 했다. 한국도 이원집정제에서 의원내각제로 갔다가 다시 이원집정제로 돌아온 것이다. 이러다 보니 한국에서 또다시 권력구조 개편을 위한 개헌이 이루어진다면 논리적으로 보았을 때는 대통령제이건 의원내각제이건 다 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한국적 맥락에서 가장 적합한 제도를 찾아야 한다는, 단순하지만 매우 어려운 과제를 안고 있다. 권력구조를 바꾸는 개헌과 관련하여 한 가지 더 재미있는 사례는 타이완의 2005년 개헌이다. 타이완의 유명한 정치학자인 추윤한에 의하면 타이완은 한국이나 프랑스의 이원집정제 대신 순수한 형태의 대통령제 도입을 추진해 왔다. 그 대신 타이완은 대통령 소속정당과 의회의 다수당이 서로 다른 분점정부의 출현과 그에 따른 정국의 고착이라는 문제를 완화시키기 위하여 주로 선거제도의 변화에 집중했다. 다시 말하자면 타이완은 권력구조의 변화보다는 선거주기의 동시화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이에 따라 2005년 타이완은 대통령의 4년 임기에 맞춰 의회 임기도 과거 3년에서 4년으로 늘렸다. 이와 동시에 의회의 규모를 과거 225명에서 113명으로 과감하게 줄였다. 임기를 길게 만들어 주면서 의원의 밥그릇을 절반가량 줄이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을 성사시킨 것이다. 2012년 즈음에 한국의 헌법이나 선거제도가 어떠한 모습으로 변해 있을까 생각하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한가하지 않고 문제는 심각하다. 3권의 분립이 더욱 뚜렷하게 보장되는 순수한 형태의 대통령제를 선호하는 국민적 여론이 넓게 퍼진 상태에서 정치권은 어떻게 합의를 이끌 것인가. 의회의 임기를 조정해 가면서까지 선거의 동시화를 추진한 타이완의 사례는 한국에 어떠한 교훈을 줄 것인가. 장기 공전과 극한 대치를 거듭한 제18대 국회가 과연 해묵은 개헌의 과제를 풀어낼 수 있을까.
  • 詩語로 만난 미완의 혁명가들

    詩語로 만난 미완의 혁명가들

    대륙의 언어는 잊힌 지 오래다. 북방에 휘몰아치던 눈보라는 반도까지 건너오기에 힘이 부쳤다. 20세기 초 망명과 미완의 혁명, 좌절 등을 겪은 거친 사내들의 흔적은 역사책 속에서만 희미하게 전승될 뿐이다. 분단된 반도의 일상에 갇힌 시인(詩人)들의 시어(詩語)는 더 이상 역사를 기억할 필요도, 웅혼한 뜻을 노래할 필요도 없게 됐다. 정철훈(51)의 애씀이 두드러지거나 외로워 보이는 이유다. 그는 네번째 시집 ‘뻬쩨르부르그로 가는 마지막 열차’(창비 펴냄)에서 끊임없이 대륙의 언어와 사유를 동원해 그곳에 살았던 이들이 미완(未完)으로 남겨놓은 것들을 복원시키려 한다. ‘만주에서 개장수, 블라지보스똑에서 항만노동자였던 강자들/ 그때는 우리의 시대라고 부르던 시대’(‘나의 시대’ 부분)라며 건설과 창조를 위해 원시의 노력을 기울였던 사람과 그러한 시대가 있었음을 기억해낸다. 표제작 ‘뻬쩨르부르그로 가는 마지막 열차’에서 레닌을 비롯해 이동휘, 홍범도, 박진순, 김아파나시, 홍도, 김규식, 여운형 등 미완의 혁명가들을 나열하며 쓸쓸히 추억하는 것은 그 시대가 저물었음에 대한 적막한 고백이다. 또한 이들의 노력이 눈에 드러나는 성공과 승리만을 위한 몸부림이 아님을 스스로 알고 있다. 함께 사고하는 이들이 한 무리를 이루지 않는 한, 그 무리가 불온스러운 파괴·건설·창조의 시대를 향해 함께 달려가지 않는 한 대륙의 기개가 반도에 스며들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럼에도 대륙에 대한 꿈을 멈출 수는 없다. ‘은유적 반성’과도 같은 시편에서 자랑스럽고도 참혹한 현대사의 지점들인 4·19, 5·18의 숱한 죽음들을 ‘삼만년 오만년 전에 죽은 내 얼굴’로 기꺼이 지금, 여기의 문제로 끄집어내는 명백한 이유이기도 하다. 1997년 등단한 정철훈은 소설가이면서, 기자(국민일보)이면서, 시인이다. ‘고적한 설거지’, ‘문상’ 등 일상 속의 성찰을 담은 시편과 어우러진 정서가 시집 전체에서 약간 들쑥날쑥한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박형규목사, 엄혹했던 시절을 증언하다

    그를 빼고 한국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논하기는 불가능하다. 굵직하고 자잘한 역사의 조각들마다 그의 이름과 발자취가 아로새겨져 있다. 2002년 출범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초대 이사장에 그가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평범한 목회자에서 ‘민주화운동의 대부’로 거듭난 박형규 남북평화재단 이사장이 자신의 87년간의 성상을 반추하는 회고록을 남겼다. ‘나의 믿음은 길 위에 있다’(신홍범 정리, 창비 펴냄)는 회고록이지만 어느 신앙인 개인의 회한, 기록만이 아니라 민주화운동과 인권운동의 역사책으로도 손색이 없다. “본래 유약한 체질로 태어나고 매사에 약간 소극적이던” 그를 역사의 무대 전면으로 끌어들인 것은 1960년 4·19혁명이었다. 소외된 삶이나 역사, 정치 등에 대한 별 의식이 없던 평범한 목사 박형규는 그날 마침 경무대(지금의 청와대) 근처 궁정동에서 결혼식 주례를 마치고 나온다. 순간, 총성이 울려 퍼지고 피를 흘리며 들것에 실려 가는 학생들의 모습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그에게 ‘엉터리 목사’가 아닌 ‘진짜 목사’로 살겠다는 의지를 다지게 한다. 이후 그의 활약은 눈부시다. 1973년 ‘남산 부활절 연합예배 사건’으로 ‘내란예비음모죄’로 투옥됐다. 박정희 정권의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플래카드와 전단을 배포하기로 했지만 실패한 것이다. 2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유신체제가 막을 내린 뒤 들어선 전두환 정권 역시 박 목사가 눈엣가시와 같았다. 조직폭력배 등을 동원해 ‘서울제일교회’를 와해시키려 했지만 박 목사는 6년간 이어온 ‘노상 예배’로 맞섰고, 이는 오히려 그의 비폭력 민주화운동의 의지와 명성을 국제적으로까지 알리는 계기가 된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독재 권력 역시 항복을 선언한다. 이렇게 군부독재와 맞서 싸우는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 그는 여섯 차례나 감방을 오갔다. 올해 미수(88세)의 고령임에도 통일과 평화의 가치를 받들며 남북평화재단 이사장으로 일하고 있다. 오는 6일 서울 명동 한국YWCA에서 박 목사의 회고록 출판기념회가 열린다. 2만원.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돌아온 孫, 중재자 변신

    돌아온 孫, 중재자 변신

    손학규(얼굴) 민주당 전 대표가 교착상태에 빠져 있는 야권 경기도지사 후보 단일화의 중재자로 나섰다. 손 전 대표는 22일 여의도에서 국민참여당 유시민 후보와 민주당 김진표 후보를 잇따라 만났다. 연쇄 대담은 손 후보가 자청한 것이다. 정가에서는 손 전 대표가 뜨거운 쟁점의 중재자를 자처한 것을 놓고, 사실상 정계 복귀의 신호탄으로 해석했다. 정치권은 특히 경기도지사 출신으로 경기도 표심에 상당한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는 손 전 대표가 야 4당과 4개 시민사회단체가 5개월 동안 협상을 벌였음에도 끝내 무산된 후보 단일화 논의를 다시 시도한 것에 주목하고 있다. 당 차원의 협상이 결렬돼 상호 비방전을 벌이고 있는 상황에서 손 전 대표가 후보 대 후보 차원의 단일화 물꼬를 튼다면 정치적 위상이 크게 올라갈 수 있다. 우선 김진표 후보는 전적으로 손 전 대표의 도움을 받으며 선거운동을 하고 있고, 유시민 후보 역시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당시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손 전 대표에 호감을 갖게된 것으로 알려진다. 손 전 대표와 유 후보는 두 시간 동안 배석자 없이 대화를 나눴다. 손 전 대표 측은 “후보단일화의 필요성에 공감했고, 단일화 성사를 위해 노력을 다 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손 대표는 단일화 협상에서 겪은 유 후보의 고충을 주로 들었다. 김 후보와의 면담에서도 비슷한 얘기가 오갔다. 손 전 대표 측근인 민주당 조대현 부대변인은 “이날 회동은 당이 아닌 개인 차원에서 이뤄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앞서 손 전 대표는 4·19혁명 50주년인 지난 19일 홈페이지에서 당시 난항을 겪고 있던 야권 연대 협상에 대해 “국민과 국가를 위해 필요하다면 나 역시 몸을 사리지 않겠다.”고 직접 나설 가능성을 시사했다. 이창구기자 window2@seoul.co.kr
  • [모닝 브리핑] 李대통령 “지역주의·포퓰리즘 경계해야”

    이명박 대통령은 19일 “(우리는) 분열을 조장하는 지역주의와 인기에 영합한 포퓰리즘의 정치에 기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다시 한번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국립 4·19민주묘지에서 열린 제50주년 4·19혁명 기념식에 참석, “오늘날 우리 정치는 좁고 추상화된 이념에 사로잡혀 서민의 절박한 삶과 국가의 어려운 현실을 외면하는 것은 아닌지 거듭 생각해 본다.”면서 이같이 밝혔다. 이 대통령은 “4·19혁명은 순수했기에 더욱 위대했다. 고되고 힘들어도 바른 길을 가는 것만이 국민이 부여한 책임을 다하는 길이며, 반대를 위한 반대에 치우치지 말고 중도실용의 정치가 중심에 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성수기자 sskim@seoul.co.kr
  • [4·19혁명 50주년] 김주열열사 추모·재조명 열기

    [4·19혁명 50주년] 김주열열사 추모·재조명 열기

    4·19 혁명에 불을 지핀 김주열 열사를 추모하고 재조명하는 활동이 활발하다. 김 열사의 희생이 오늘날 이 땅에 민주주의 꽃을 활짝 피게 한 밑거름이 됐다는 새로운 평가가 이뤄지고 있다. 혁명 이후 군부 집권으로 고향인 전북 남원시 금지면 옹정리 묘역에 자리한 비석에조차 ‘열사(烈士)’라는 두 글자를 새길 수 없었다. 혁명 반세기를 맞은 19일, 누나 김경자(69)씨를 비롯한 유족 등이 참석한 가운데 남원시와 남원김주열열사추모사업회 주관으로 열리는 새 묘비석 제막식에서, 떠돌던 ‘열사’ 두 글자를 넣고 ‘민주화에 기여했다.’는 내용도 추가한다. 김 열사는 마산상고 입학을 앞둔 1960년 마산에서 3·15부정선거 규탄시위에 참여했다가 행방불명됐다. 경찰은 단순 행불로 처리했으나 27일 뒤인 4월11일 눈에 최루탄이 박힌 시신 상태로 마산 앞바다에 떠올랐다. 그의 죽음은 마산 시민들을 움직여 4·11 마산민주항쟁으로 번졌고, 결국 전국 항쟁의 불을 지펴 4·19 혁명으로 이어졌다. 당황한 경찰은 주검을 마산도립병원에 안치했다가 4월13일 밤 몰래 고향 남원으로 빼돌려 인양된 상태 그대로 선산에 안장했다. 숭고한 희생을 널리 알리기는커녕 장례식도 치르지 못했다. 가족들은 경찰이 무서워 입을 다문 채 모진 세월을 살아와야 했고, 민주항쟁의 진원지인 마산을 찾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 국가나 사회도 그의 희생을 기리는 사업을 적극 나서지 않고 뒷전으로 미뤘다. 그의 희생은 그러나 결코 헛되이 버릴 수 없었다. 해가 갈수록 보석처럼 빛났다. 크고 작은 민주항쟁을 치르면서 정통성과 역사성을 따지다 보니 김 열사의 희생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를 깨닫게 됐다. 이 땅의 학생들이 민주화 운동에 나설 때마다 늘 그의 희생정신을 앞세웠다. 1960~70년대 학생운동부터 1980년대 광주 민주화운동, 개헌운동 등으로 이어진 민주화 운동의 정신적 뿌리로 자리를 잡았다. 지난 11일 치러진 범국민 장례식에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함세웅 이사장은 “50년 전 바다에서 참혹한 주검으로 떠오른 김주열 청년은 새롭게 부상한 선구자로 우리 앞에 다가왔으며 김 열사의 희생을 통해 이룩한 4·19 혁명으로 한국 민주주의의 꽃이 활짝 피었다.”고 추모했다. 4·11 50주년 행사준비위는 국민들의 머릿속에서 희미해져 가는 자랑스러운 민주역사를 되새기고 민주열사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김 열사의 범국민장을 추진하게 됐다고 밝혔다. 4·11 민주항쟁은 한 청년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됐지만, 4·11이 없었다면 4·19 혁명도 없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김 열사의 죽음은 이 땅의 민주주의 초석임이 분명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마산 강원식기자 kws@seoul.co.kr
  • [4·19혁명 50주년] 두 세대가 보는 4·19

    [4·19혁명 50주년] 두 세대가 보는 4·19

    <신세대가 보는 4·19> -직장인 박양일씨(26세)- 근현대사 제대로 안배워 말하기 조심스러워 내 또래가 그러하듯 4·19혁명에 대해 안다고 말하기가 조심스럽다. 민주주의, 자유, 저항 이런 단어들이 막연하게 떠오르지만 구체적으로 말하려면 막막하다. 고등학교 때 근현대사를 제대로 배운 기억이 없다. 국사 시간에 들어보긴 했지만 대부분 구체적으로 가르쳐주지 않는다. 대학을 다니다 ‘장준하기념사업회’가 주관하는 동북아역사장정을 다녀오면서 4·19혁명에 관심을 갖게 됐다. 해마다 4월이면 신문, 텔레비전 방송을 보면서 알게 되는 것이 책으로 접하는 것보다 더 현실감 있게 와 닿았다. 1960년 4·19 혁명이 일어나기 전에 발생한 사건들도 그러면서 알게 됐다. 요즘 세대는 의식도 없고 실천력이 떨어진다고 한다. 민주화와 함께 태어난 세대라 대부분 정치·사회 제도 등에 큰 불편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일 거다. 4·19혁명이 민주주의의 도화선이 됐고, 그로 인해 조금이나마 민주화된 세상에서 살 수 있음이 고맙게 느껴진다. 이민영기자 min@seoul.co.kr -김호빈 강원대 2학년(20세)- 독재정권 항거 희생정신 잊혀져가 안타까워 솔직히 4·19혁명을 잘 몰라 포털사이트에서 찾아봤다. 1960년 3월15일의 부정선거가 발단이 돼 일어난 혁명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일로 나보다도 어린 학생들이 거리로 뛰쳐 나갔고 이에 시민들도 합류했다는 사실도 알게됐다. 나는 일단 4·19 혁명이 학생들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큰 의미를 두고 있다. 50년 전인 1960년 4월19일, 그 시절 학생들은 아무런 대가도 없이 독재정권에 맞서 싸웠다. 그 후로 5·18민주화운동, 6월 민주항쟁 등에도 기꺼이 거리고 나섰다. 지금의 자유나 편리한 사회제도 등은 50년 전 수많은 학생 및 시민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누릴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지금 우리가 누리는 것들을 당연하게 여기며 ‘의무가 아닌 권리니까 하지 않아도 되겠지.’라는 생각으로 선조들의 희생을 어쩌면 헛되게 하고 있다. 4·19는 대학생 사이에서 점차 잊혀지고 있다. 안타까운 현실이다. 김양진기자 ky0295@seoul.co.kr <4·19세대의 메시지> -신복룡 건국대 석좌교수(68세)- 민족 등 서사적 고민에 괴로워할 줄 알아야 독재 정권 물러나라고 외치던 학생들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고 경무대 앞에 낭자하던 선혈의 모습이 선연한데 벌써 50년의 세월이 지났다니 세월의 빠름이 무상하다. 국민적 애도의 기간에 기념일을 맞고 보니 마음이 더욱 스산하다. 4·19혁명은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는가? 역사에 수많은 혁명이 있었지만, 4·19혁명이야말로 주역들이 권력을 탐내지 않은 유일한 혁명이었다. 프랑스 혁명가 조르주 당통의 고백에 따르면, ‘혁명은 어차피 혁명가를 타도한다.’고 하는데, 4·19혁명은 혁명에 성공한 주역이 본연의 자세로 돌아간 ‘무욕의 혁명’ 그 자체였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 이 시대의 젊은이들은 4·19혁명에서 무엇을 배워야 하나? 요즘 젊은이들이 사랑·취업·돈·학점 등 서정적 자아에 몰두하는 엄지족이라고 불리울지 모르지만, 그들도 가끔은 50년 전의 선배들이 그랬던 것처럼 민족·역사·정의와 같은 서사적 고민에 괴로워 할 줄 알아야 한다. 백민경기자 white@seoul.co.kr -노정선 YMCA 통일위원장(65세)- 부정·부패에 저항하는 또다른 혁명 이뤄내야 아침 수업시간에 유리창이 두 장 깨졌다. ‘누군가 엄청나게 멀리 던지기를 잘하는구나.’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유리창을 깨고 들어온 것은 돌이 아니라 총알이었다. 당시 경무대(청와대)와 2㎞ 정도 떨어져 있던 우리 학교에 유탄이 날아온 것이었다. 경무대 앞길에서 경기고등학교 학생 둘이 경찰사격으로 사망했다. 오늘의 청년들도 정의와 통일 앞에 용감하다. 그러나 선배들은 피를 부르는 상황에서도 민주주의를 이루려고 노력했다. 통일을 외쳤다. 나는 지금 청년들이 정의를 실천하고, 민주를 위해 부정·부패에 저항하길 바란다. 일본이 독도를 자기 땅이라고 하고, 남북이 서로 적대적인 이 현실을 바꿔 놓아야 한다. 남북 경제 통일을 이뤄내고, 민족이 단결해 외부의 책략으로 대리전쟁을 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 4·19정신 그대로 이어 받아 부패하고 부정한 것에 저항하는 또 다른 혁명을 이뤄내야 민족이 살아 남게 될 것이다. 백민경기자 white@seoul.co.kr
  • [4·19혁명 50주년] “시위때 경찰이 쏜 총 피해 치마 뒤집어쓰고 엎드려…”

    [4·19혁명 50주년] “시위때 경찰이 쏜 총 피해 치마 뒤집어쓰고 엎드려…”

    “총칼의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감행해야 할 이 항쟁은 우리 후손에 민주주의를 말살하려는 광적인 장기집권이 가져다 준 부정과 부패의 무서운 해독을 오염시키지 않으려 함에 있다.” ●플래카드 들고 맨앞줄에 서서 시위 1960년 4월19일 오전 서울 흑석동 중앙대 캠퍼스. 굳게 닫힌 교문이 열리자 스크럼을 짠 학생 수천명이 일제히 거리로 달려 나갔다. 순식간에 흑석동 고개를 넘어 한강대교 저지선을 뚫고, 삼각지와 서울역을 지나 시청 앞으로 진격했다. 그런데 전속력으로 시위대의 뒤를 쫓는 한 무리의 여학생들이 있었다. 강의실에서 학생들의 모습을 지켜보다 급히 뒤따라 나온 문리과대 여학생들이었다. 행렬을 놓치지 않으려 버스까지 갈아타며 걸음을 재촉한 이들은 서울역에 와서야 시위대와 합류해 함께 경무대(현재 청와대)로 향했다. 당시 국어국문학과 2학년으로 여학생들을 이끌고 나왔던 홍관옥(70·여·종교교육학) 박사는 18일 “전날 4·18 고려대생 피습사건을 듣고 굉장히 자극을 받았다. 이런 불의는 피할 수 없는 일, 두려워할 수 없단 생각이 들어 부모님이 말리는 데도 시위대를 따라 나섰다.”고 회고했다. 경무대 앞에서 군의 발포로 부상자가 속출하자 시위대는 내무부 앞에 다시 집결했다. 홍 박사를 비롯, 여나믄명에 불과한 여학생들이 맨 앞줄에 서서 플래카드를 들었다. 평화 연좌시위가 이어지는가 하더니 곧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총을 쏘기 시작했다. 홍 박사는 치마를 뒤집어 쓰고 납작 엎드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고개를 들고 자리를 피하려는 순간 누군가 머리채를 움켜 쥐고 개머리판으로 온몸을 사정없이 때렸다. 지프차에 실려 중부경찰서 지하실로 끌려가 이틀 동안 취조를 당했다. 경찰은 “잘못했다고 사과하겠느냐, 아니면 이름에 빨간줄이 가겠느냐.”고 윽박질렀다. “또 맞을까봐 너무 무서웠어요. 하지만 나라와 민족을 위해 그런 건데, 잘못한 게 없는데…. 맞더라도 비겁할 순 없잖아요.” 잘못을 빌지 않겠다고 버티던 홍 박사는 때마침 학생들을 구하기 위해 경찰서를 찾은 교수들 덕분에 집에 올 수 있었다. 홍 박사는 공로를 인정받아 건국포장을 받았지만, 4·19 혁명에 참여한 여성들에 대한 평가는 적극적으로 이뤄지지 않았다. 현재까지 생존해 국내에 거주하고 있는 4·19 혁명 공로자 152명 가운데 여성은 홍 박사를 포함해 5명뿐이다. 곧 5·16 쿠데타가 일어나 4·19 혁명에 대한 평가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데다 가부장적인 사회 분위기도 한몫을 했다. ●“맞을까 무서웠지만 끝까지 버텨” 하지만 홍 박사는 ‘서현무’라는 이름 석자를 똑똑히 기억했다. 함께 플래카드를 들었다가 경찰에게 폭행당하고 실신해 사지가 들려 내동댕이쳐졌던 이 법대 여학생은 후유증으로 끝내 숨을 거두고 국립 4·19 민주묘지에서 영면에 들었다. 또 다른 여학생은 머리를 심하게 얻어 맞고 실명 직전까지 돼 1년이 넘도록 햇빛을 보지 못했다. 홍 박사는 4·19혁명을 민족적·총체적 권리의 행사라고 정의했다. 그는 “민주주의를 이루려는 것은 인간의 욕망이자 본능적인 소망”이라면서 “우리는 그저 속에서 터져나오는, 인간 본연의 자세를 찾고 싶은 것이었다.”고 힘주어 말했다. 하지만 대한민국 민주화의 기틀을 마련한 4·19세대로서 지켜보는 현 시국은 아쉬운 점이 많다. 그는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것은 좋았지만, 아직 민주주의 자체를 누리지는 못하는 것 같다.”고 걱정했다. 유지혜기자 wisepen@seoul.co.kr
  • [4·19혁명 50주년] 주역들 지금은 뭐하나

    4·19혁명을 이끈 역사의 주역들은 지금 어디서 무슨 일을 하고 있나. 반세기라는 물리적 시간이 흐른 만큼 백발이 성성한 70대 노인이 되어 상당수가 정치·산업 일선 현장에서는 물러나 있다. 4·19 주역 가운데에는 정치권에 진출했던 사람들이 유독 많았지만 지금은 찾아보기 힘들다. 한때 30명 가까이 국회에 등원했지만 18대 현역 의원 중에는 한나라당 이경재 의원이 유일하게 남아 있다. 이 의원은 18일 “4·19 혁명의 주역들이 산업화 현장에서 역할을 하면서 민주화는 물론 산업사회로의 발전에도 지대한 공헌을 했다.”면서 “그러나 우리나라가 앞으로 선진 민주 사회로 가기 위해서는 법 질서의 확립, 전(全) 국민의 행복 추구권 확보, 통일의 완성 등 여러 가지 과제가 아직 남아 있다.”고 밝혔다. 4·19 혁명 당시 서울대 문리대 사회학과 1학년에 재학 중이던 이 의원은 현재 4·19혁명 50주년기념사업회장을 맡고 있다. 그는 광화문에 기념 조형물 건립, 4월19일의 공휴일 지정 등 다양한 4·19 관련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1993년 김영삼 정부가 처음 4·19를 ‘의거’에서 ‘혁명’으로 인정하고 수유리 묘지를 국립 4·19민주묘지로 격상시킬 때 청와대 대변인을 맡기도 했다. 당시 서울대 정치학과 1학년이던 김경재 전 민주당 의원은 최근 창당한 평화민주당의 전남지사 후보로 출마했다. 이 의원이 김 전 대통령의 대변인이었다면 김 전 의원은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 쪽 사람으로 분류된다. 당시 고려대 정경대 학생회장이던 이세기 전 의원은 서울에서 4선 의원을 지낸 뒤 지금은 한·중친선협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당시 고려대 3학년에 재학 중이었던 이재환 전 의원은 원자력문화재단 이사장으로 있다. 정치권의 4·19 세대는 1980년대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정치권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가 2000년 16대 총선에서부터 본격적으로 퇴조에 접어들었다. 민주당 대표를 지낸 이기택 수석부의장은 16대 총선에서 패배한 후 정치적 영향력이 약해졌다. 한나라당 김중위 전 의원은 낙선한 뒤 17대 총선 때 공천에서 떨어지는 아픔을 겪었다. 당시 서울대 총학생회장이던 이우재 전 열린우리당 의원은 2004년 17대 총선 출마 때 당내 경선에서 패배한 뒤 한국마사회장을 끝으로 정치권을 떠났다. 중앙대 학생회 간부였던 민주당 유용태 전 의원도 17대 총선에서 서울 동작을에서 낙선한 뒤 정치 일선에서 멀어졌다. 중동고 3학년 신분으로 고교생 시위를 주도했던 설송웅 전 열린우리당 의원도 17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영광의 역사만큼 오욕도 적지 않다. 서울대 정치학과 학생회장으로 선언문을 낭독했던 윤식 전 의원은 10대 유정회 국회의원을 지내며 변절 논란에 휘말렸다. 각각 연세대와 동아대 재학 당시 시위에 참여했던 김원기·박관용 전 국회의장은 입법부 수장까지 지냈지만 지난해 ‘박연차 게이트’에 휘말리는 시련을 겪었다. 김 전 의장은 지금도 민주당 상임고문으로 활동중이다. 경제계에서는 롯데관광개발 김기병 회장과 경동제약 유덕희 회장이 현역으로 뛰고 있는 ‘4·19 세대’로 꼽힌다. 김 회장은 한국외대 3학년 학도호국단 부위원장으로 있었고, 유 회장은 성균관대 학생운영위원장으로 시위에 참여했다. 김 회장은 이태섭 전 과학기술처 장관과 함께 4·19혁명기념사업회 공동조직위원장을 맡고 있다. 주현진기자 jhj@seoul.co.kr
  • [4·19혁명 50주년] “4·19는 한국적 근대민주주의가 제 모습 드러낸 것”

    [4·19혁명 50주년] “4·19는 한국적 근대민주주의가 제 모습 드러낸 것”

    4·19혁명이 ‘한국적 근대 민주주의의 원(原)체험’이라는 주장이 잇따라 나오고 있다. 곧이어 일어난 박정희의 5·16 쿠데타로 인해 ‘미완(未完)의 혁명’으로 평가받던 것과 다소 다른 맥락이다. 이승만 정권을 끝장내고도 박정희 군사정권을 불러들인 게 혁명의 한계와 미숙함을 드러내는 것만은 아니라는 얘기다. 18일 학계에 따르면 한국적 근대를 논하는 데 있어 가장 큰 장애물은 서양의 부르주아 계급처럼 근대를 추동할 수 있는 세력이 우리에게도 있었느냐는 점이다. 식민사학 타파를 내건 국사학계는 조선후기에서 답을 찾으려 들었다. 조선 후기에 이미 상공업과 화폐와 시장이 발달했다는, 자본주의 맹아론이다. 그러나 성리학적 세계관이 지배하던 조선에서 서양식 근대의 뿌리를 찾으려는 시도는 열등감으로 인한 작위적 해석이라는 반론이 쏟아졌다. 최근 국사학계가 한걸음 뒤로 물러나 찾은 인물은 고종이었다. 이 역시 쉽지 않다. 왕실 주도의, 위로부터의 근대화라는 점을 부각하려했지만, 결과적으로 나라를 빼앗겼다는 점 때문에 ‘역사에 가정은 없다.’는 반론에 막혀서다. 최근 몇 년간 논란이 됐던 식민지 근대화론은 일제를 근대세력으로 본다. 아무리 미워도 근대적 제도와 체험은 일제강점기 때부터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 역시 일본이 원한 것은 우리의 근대화가 아니라 일본의 팽창이었다는 점에서 많은 반론을 낳았다. 역사를 연속적으로 본다는 대목은 매력적이나 때로는 몰이해 때문에, 때로는 스스로 드러낸 과도한 정치적 편향 때문에 아직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4·19혁명 때 비로소 ‘국민 만들기(Nation-Building)’가 이뤄지면서 근대적 시민으로 세례받았다는 주장은 이런 맥락에서 관심을 끈다. 지난 14일 4·19혁명기념사업회 주최로 열린 국제학술대회에서 고트프리트 칼 킨더만 독일 뮌헨대 명예교수는 전통적 유교개념을 토대로 한 이승만 체제를 무너뜨리는 혁명을 학생들이 주도한 것에 대해 “미국식 민주주의 원칙과 자유세계의 역사를 배웠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일제와 이승만정권이 형식적으로 근대나 민주주의를 도입했지만, 내용적으로 근대와 민주주의가 제 모습을 드러낸 것은 4·19 아니냐는 얘기다. 지난 15일 한국정치외교사학회 주최로 열린 학술대회에서 김태일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가 ▲산업화로 인한 인구집중 ▲분단·전쟁으로 피난민의 도시유입 ▲매스컴과 근대교육의 보급으로 시민의식이 성장한 것 등을 혁명의 뼈대로 지목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는 박정희 정권마저 4·19혁명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지난 16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주최한 학술대회에서 홍성대 고려대 사회학과 박사과정 수료자는 “4·19기념탑이 박정희에 의해 세워진 것은 쿠데타를 정당화하고 혁명의 열기에 정치적 화상을 입지 않기 위한 포섭의 전략”이라고 규정했다. 민정이양 이후 대통령 취임식에서 “4·19의 혁명이념을 계승한다.”고 연설한 것도 마찬가지다. 이런 주장들은 근대성의 관점에서 4·19혁명을 재조명한 책 ‘4·19와 모더니티’(문학과지성사 펴냄)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소설 ‘광장’의 작가 최인훈은 프랑스혁명 뒤 나폴레옹 황제가 등장했다는 점을 들어 4·19혁명 뒤 5·16쿠데타가 있었다 해도 혁명 정신 자체는 유산으로 남았다는 점을 환기시켰다. 최장집 고려대 정치학 교수 역시 해방 직후에는 민주주의 가치를 잘 몰랐기 때문에 4·19혁명에서 민족자주·인민주권·민족자립경제 등 ‘최대정의적(maximalist) 민주주의’가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고 평가했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사설] 4·19 50돌 성숙한 민주주의를 생각할 때

    4·19혁명 50주년인 오늘 우리 국민의 민주주의 역량을 새삼 생각해 보게 된다. 자유당 정부의 부정선거에 학생들이 혁명의 불을 지피고 교수와 국민들이 동참해 불길을 키우자 이승만 정권은 무릎을 꿇었다. 그 과정에서 사망자 186명, 부상자 6000여명이 나온 피의 혁명이다. 민주·민족통일이라는 목표를 이루려했던 4·19혁명은 5·16군사정변으로 미완의 혁명이 되고 말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4·19 정신은 1970~80년대 민주화운동의 정신적 밑거름이 됐고 87년 6월 항쟁을 통해 마침내 민주화의 꽃을 피웠다. 이후 다섯 차례 민주적 절차에 의해 정권이 바뀌면서 절차적 민주주의는 성숙해졌다. 4·19혁명에 대해 국제사회도 “세계대전 후에 출현한 신생 민주국가들이 겪는 어려움에 새로운 활기를 불러일으켰다.”며 세계 민주 혁명의 기폭제로 평가했다. 우리 국민의 민주 역량에 대한 자부심을 갖게 한다. 실제로 독재정권의 각종 부정과 비리에 반대해 일어난 4·19혁명은 자유와 민주, 정의라는 가치를 확산시켜 민주화뿐 아니라 투명한 시장경제를 통한 산업화의 원동력이 되었다. 민주화와 산업화를 동시에 성공시키는 원천이 된 것이다. 하지만 민족통일이라는 4·19혁명의 궁극적 목표는 아직도 이뤄지지 않은 채 진행형이다. 4·19혁명으로 우리는 제도적인 민주화는 상당 정도 정착시켰다. 그러나 아직 갈 길은 멀다. 생활의 민주주의와 참여 민주주의를 정착시켜야 한다. 정치권은 몸싸움과 정쟁을 지양하고 성숙한 민주주의를 생각해야 할 때다. 우리 사회는 지금 세대와 지역 통합이라는 절실한 과제를 안고 있다. 독재에 피로 맞선 민주정신을 계승해 통일된 민주국가를 세워야 한다. 오늘 4·19혁명 50주년을 맞아 우리사회는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을 아우르는 국민 대통합을 이루어내야 한다. 그것이 민주화를 위해 피흘린 영령들의 희생을 헛되지 않게 하는 길이다.
  • 강북구, 4·19 50주년 음악회

    4·19 혁명 50주년을 맞아 서울 강북구 국립 4·19 민주묘지에서 뜻깊은 음악회가 열린다. 강북구는 19일 국립 4·19 민주묘지 정의의 불꽃 광장에서 제14회 소귀골 음악회를 개최한다고 16일 밝혔다. 천안함 침몰 사고에 따른 전국민적 애도 분위기에 동참하기 위해 올해에는 매년 2부 행사로 진행하던 대중 가수 공연 행사를 취소하고 추모와 화합의 음악회로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열린다. 이번 음악회에는 4·19 희생 영령을 추모하고 복을 비는 비나리 공연과 도살풀이춤을 시작으로 성신윈드오케스트라의 ‘African Symphony’,‘Jungle Fantasy’ 와 김범진 성신여대교수의 ‘산아’ ‘오 솔레미오’로 흥을 돋운다. 또한 강북구립실버합창단이 ‘바우고개’, ‘강건너 봄이 오듯’을, 강북구립여성합창단이 ‘사랑의 나무’, ‘꽃 구름 속에’ 등 가곡을 선사하며 4·19 혁명을 기리는 추모시도 낭송된다. 강동삼기자 kangtong@seoul.co.kr
  • 4·19혁명 유공자 272명 건국포장

    국가보훈처는 4·19혁명 50주년을 맞아 당시 주도적 역할을 한 공로자 등 272명에게 건국포장을 수여한다고 16일 밝혔다. 수훈자 가운데 생존자는 210명, 사망자는 62명, 여성은 11명이다. 이 가운데 77명은 보훈처의 전문사료 발굴·분석단이 4·19혁명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사실이 인정된 서울과 지방의 주요 고등학교와 대학 등을 직접 방문해 찾아냈다. 1960년 4월 25일 대학교수단 시위에 참여한 서울대 이희승·김증한·정범모 교수, 성균관대 변희용·임창순 교수, 건국대 한태수 교수, 고려대 정재각 교수 등이 포함됐다. 포상은 19일 국립 4·19 민주묘지에서 열리는 제50주년 4·19혁명 중앙기념식과 지방자치단체가 주관하는 기념식장 등에서 이뤄진다. 해외 거주자는 재외공관을 통해 전달된다. 포상자 가운데 주요 인사로는 박관용 전 국회의장, 김우석 전 건설교통부장관, 김유진·박희부·유인학 전 국회의원, 문정수 전 부산시장, 이청수 전 KBS 해설위원장, 고(故) 서석재 전 총무처장관 등이 있다. 오이석기자 hot@seoul.co.kr
  • 4·19 50주년… 민주화운동 학술대회 풍성

    2010년은 4·19혁명 50주년이자 광주항쟁 30주년이 되는 해다. 이를 기념해 그간 쌓아온 민주화운동을 재조명하는 학술대회가 잇따라 열린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는 마산, 대전, 대구 등을 거쳐 9월 광주에서 마무리하는 방식으로 전국을 순회하는 ‘4월혁명 50주년 학술토론회’를 연다고 13일 밝혔다. 4월에는 마산을 시작으로 지역별 민주화 운동에 대한 논의를 펼친다. 이어 6월에는 제주, 9월에는 부산과 광주에서 민주화운동의 현재적 의미를 따져본다. 특히 9월 서울에서 열리는 ‘4월혁명 국제콘퍼런스’에는 일본, 인도 등 해외연구자들도 참가해 아시아 민주화운동과 4·19혁명의 뜻을 살펴본다. 국제학술대회도 마련했다. 6월25일 독일 베를린자유대 한국학연구소와 함께 베를린에서 ‘민주화 이후 한국시민사회의 도전과 과제’라는 주제로 개최할 예정이다. 여성학회는 오는 17일 성신여대에서 ‘4·19혁명과 여성’을 주제로, 한국사회경제학회는 7월2일 부경대에서 ‘신자유주의 이후의 한국경제와 민주주의’, 한국역사연구회는 7월9일 서울역사박물관에서 ‘한국 민주화운동의 논리와 지향성의 재평가’, 한국영화연구회는 8월27일 성균관대에서 ‘민주주의와 영화’, 한국정치연구회는 9월4일 서강대에서 ‘한국민주화 50년의 재평가’, 비판사회학회는 10월24일 서울대에서 ‘민주화운동과 사회운동의 한국적 이론화’를 주제로 각각 학술행사를 연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도시와 길] 서울 미아리고갯길

    [도시와 길] 서울 미아리고갯길

    “미아리 눈물 고개~ 님이 떠난 이별 고개~ 화약연기 앞을 가려 눈 못 뜨고 헤매일 때…” 미아리 하면 떠오르는 것은 바로 ‘단장의 미아리고개’란 옛노래다. 첫 음절만 들어도 노래에 한(恨)이 가득 서려 있다. 철사로 손을 묶이고 맨발로 다리를 절면서 뒤를 자꾸만 돌아보며 북쪽으로 끌려가는 남편과 십년이 가도 백년이 가도 살아서 돌아오기만을 바라는 부인의 애틋한 마음이 절절하게 묻어 있다. 이 노랫말을 지은 반야월(93)선생은 실제로 피란 중 맏딸이 공포에 질려 숨져 고갯길에 자신의 손으로 묻을 수밖에 없었던 슬픈 사연이 있다고 한다. 미아리고개는 성북구 동선동과 돈암동 사이에 있는 고개로 되넘이고개(되너미고개)라고도 불렸다. 병자호란 때 오랑캐, 즉 ‘되놈’이 한양을 침범할 때 고개를 넘었기 때문에 되너미고개라고 불렀다고 한다. 남쪽인 돈암동에서 길음동을 지나 의정부 방면으로 가는 길목에 이 고개가 마지막 고개여서 되너미고개라고 했다는 설도 있고, 미아7동에 있는 불당골 자리에 있던 ‘미아사’라는 절 이름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등 유래가 분분하다. ●한국전쟁 땐 최후의 방어지 역할 미아리고개는 한국전쟁 당시 서울 북쪽의 유일한 외곽도로였기 때문에 최후의 방어지로 치열한 교전이 벌어진 곳이다. 경사가 어찌나 가파르던지 길음시장과 부근 주거지역보다 도로의 높이가 높아 4·19혁명 때에는 미아로 옆 길가로 버스가 굴러떨어지는 사고도 있었다 한다. 미아로는 돈암동로터리를 기점으로 돈암동, 길음동을 동북방향으로 뻗어 미아삼거리까지 폭 25m, 길이 1.5㎞에 달한다. 도성의 북쪽 방향에 위치해 의정부, 포천, 철원 등지에서 서울로 입성하는 유일한 관문이자 교통의 요충지 역할을 한 탓에 교통정체와 사고가 잦았다. 1964~1966년 대대적인 도로확장공사로 미아로 도로의 폭은 8m에서 구간에 따라 23~35m의 4차선도로로 확장되었다. 경사도 10도나 낮아졌다. 그러나 대대적인 확장공사에도 불구하고 미아로의 교통정체는 계속됐다. 결국 2007년 4월 603억여원(보상비 78.6% 차지)을 들여 성북우체국에서 창문여고에 이르는 구간을 폭 35m, 왕복 7~8차선으로 확장하는 공사에 들어가 1년 10개월만인 지난해 2월 개통해 숨통이 트였다. ●시각장애인들의 점성촌 고갯길이 시작되는 태극당 빵집 맞은편에 점성촌이 들어선 것도 미아로 확장공사를 벌이며 경사를 완만하게 만들기 위해 옹벽을 세우면서부터다. 남북 방향으로 옹벽을 만들면서 동서로 횡단하는 길을 그 밑으로 뚫어 자연스레 굴다리가 생겨났다. 중구에서 이주해온 시각장애 역술인들이 옹벽과 굴다리를 의지하며 하나 둘 점판을 깔면서 터를 잡았다. 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100여곳이 성업하면서 외국인들도 찾는 관광코스가 될 정도였으나, 지금은 간신히 10여곳만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미아리고개에 점집이 번성하게 된 이유는 고개 너머에 조성된 한국인 전용묘지 덕분이라고 한다. 예로부터 영혼은 북으로 드나든다고 믿었는데, 미아리고개가 바로 영혼이 다니는 길목이었던 셈이다. ●‘미아리 텍사스촌’도 사라지고… 단장의 미아리고개와 더불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미아리 텍사스촌’이다. 이곳은 고갯길을 넘자마자 시작된다. 예전에 월곡동은 미아로를 중심으로 길음동과 마주하고 있는 곳으로 미아시장이 형성되어 길음동 사람들이 자주 왕래했다. 지대가 모래땅이어서 물이 잘 나와 콩나물공장들이 즐비했다. 일제 강점기부터 해방 이후까지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있었지만 1960년 이후 염색공장, 피혁공장들이 들어서면서 쇠락했다. 이 지역이 성매매 집결지로 유명해진 것은 1968년 ‘종삼(종로3가 사창가)소탕작전’이 실시된 이후 포주와 성매매 여성들이 미아시장 근처 월곡동 88일대에 터를 잡으면서부터이다. 구 관계자는 “미아리 텍사스라는 지명이 어떻게 유래되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성매매 집결지 안에 있는 술집이 서부영화에 등장하는 술집의 모습과 흡사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유력하다.”고 했다. 그는 “서부영화 속에 등장하는 술집이 1층은 술 마시며 포커를 치고 2층에서 잠을 자는 장면이 많이 나오는 탓에 붙여졌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창 호황을 누릴 적엔 400군데서 1000명이 넘는 여성들이 일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황량할 정도로 을씨년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다. 흉물스럽게 남겨진 몇몇 건물의 먼지 쌓인 유리문과 너덜너덜해진 커튼, 굳게 잠긴 오래된 문에선 호시절이 언제였는지 가늠하기조차 힘들다. 이들이 이른바 ‘9·23 사태’라고 부르는 2004년 9월 성매매특별법 실시 이후 여성들이 하나둘 떠났기 때문이다. ●39층 주상복합 아파트로 탈바꿈 성매매 집결지라는 오명을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더욱 반가운 것은 이곳이 신월곡 1·2·3구역으로 나뉘어 2003년 미아균형발전촉진지구로 지정된 것. 구 관계자는 “올해 토지보상문제가 해결되면 내년 5월쯤에는 본격적인 공사에 착수하지 않겠느냐.”면서 “그래도 여전히 골목 업소들에선 간간이 영업을 하는 것으로 안다.”고 귀띔했다. 특히 이 일대는 39층 높이의 주상복합 아파트 등 랜드마크 건물들이 들어설 예정이어서 강북의 새로운 중심지로 부상하고 있다. 실제 이 길을 지나가다 보면 곳곳에 초고층 빌딩과 아파트가 잔뜩 들어서고 있다. 얼핏 보아도 금세 대기업이 참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뉴타운사업과 관계자는 “성매매집결지에 달라붙은 미아시장 역시 역사 속으로 사라져 내년 6월이면 지하 6층, 지상 23층 198가구 규모의 주상복합 아파트로 재탄생한다.”면서“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옛 추억이 서린 곳이 하나 둘 사라지는 것이 한편으론 안타깝지만 주민들 대부분은 윤락가 동네라는 어두운 이미지를 벗을 수 있어 반기고 있다.”고 말했다. 글ㆍ사진 강동삼기자 kangtong@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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