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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체사상 교과서에 안싣기로/역사용어 개편

    ◎「대구항쟁」 철회,「대구사건」으로/여순반란사건→여순사건/「6·25」「4·3」은 원래대로/5·16혁명→5·16쿠데타 지난달 18일 발표된 국사교과서의 근·현대사 용어개편 준거안 가운데 물의를 빚은 「대구항쟁」이 「대구사건」으로 바뀌고 김일성주체사상을 싣기로 했던 방침이 백지화된다. 특히 교육부는 내달에 준거안이 제출되는대로 문제가 된 내용을 심의하기 위해 준거안을 특별히 1종교과서편찬심의위원회에 넘겨 정밀검토할 방침이다.22일 교육부에 따르면 오는 96년도부터 중·고교에서 사용될 국사교과서의 준거안을 마련중인 연구위원회(위원장 이존희서울시립대교수)는 지난 21일 서울대에서 모임을 갖고 준거안 발표이후 쟁점이 돼온 일부 근·현대사 역사용어및 내용을 이같이 바꾸기로 의견을 모았다. 한 참석자는 『이번 준거안에서는 「대구항쟁」으로 표기하자고 제기된 「대구폭동」(현행교과서)을 「대구사건」이나 「대구사태」로 하고 「여수·순천반란사건」(현행교과서)은 「여수·순천사건」으로 하되 내용상 사건의 성격을 서술하기로 했다』고 전했다. 또 당초 북한역사와 관련, 김일성주체사상을 싣기로 한 준거안을 철회키로 했다. 이 관계자는 이밖에 제주도 「4·3사건」은 현행대로 표기하고 「6·25전쟁」도 준거안의 「한국전쟁」으로 표기하자는 주장과 달리 그대로 쓰기로 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현행 「4·19의거」는 준거안을 따라 관련법이 올 정기국회를 통과할 경우 「4·19혁명」또는 「4월혁명」으로 고치고 「5·16군사혁명」은 「쿠데타」나 「군사정변」으로 고치자는데 의견이 모아졌다. 그러나 「12·12」와 「10·26」은 현행대로 내용을 서술하면서 「사태」라는 용어를 쓰기로 했다. 한편 이같은 근·현대사 용어의 의견조정외에도 고려시대의 향·소·부곡을 천민계층이 아니라 양인(양인)계급의 집단거주지로 정정키로 했다. 이같은 의견조정과 심의절차에 따라 당초 오는 6월말까지 확정키로 한 국사교과서의 개편안 마련은 2개월정도 늦어질 것으로 보인다.
  • 「4·19」 34돌… 기념행사 다채

    ◎수유리묘역 각계인사 5천여명 참배/대학별로 마라톤·자전거달리기 대회 4·19혁명 34주년인 19일 서울 수유리 4·19묘역에는 참배객이 종일 줄을 이었으며 마라톤대회와 기념공연등 혁명을 기리는 행사가 다채롭게 펼쳐졌다. ○…이날 서울 도봉구 수유동 4·19묘역에는 유족과 시민,여야 정치인,학생등 참배객 5천여명의 행렬이 아침 일찍부터 이어졌다. 특히 올해부터 4·19의거가 혁명으로 역사의 재조명을 받게 됨에 따라 예년과는 달리 학생,재야단체는 물론 여야정치인들이 각종 행사에 대거 참석해 민주화를 위해 희생된 영령들의 넋을 기렸다. ○…김영삼대통령은 이날 상오 7시쯤 박관용비서실장등을 대동하고 4·19묘역을 참배,희생자기념탑에 헌화하고 희생자들의 영령을 위로했다. 또 민자당 김종필대표를 비롯한 당직자 3백여명이 상오7시30분쯤 묘역을 찾아와 참배했고 이에앞서 민주당 이기택대표 등 당직자 2백90여명도 헌화·참배했다. 이어 상오8시쯤 국민당 김동길대표등 당직자 40여명이 다녀갔으며 상오 11시40분쯤에는 김대중 아시아·태평양 평화재단 이사장이 묘역을 참배했다. ○…서울대·성균관대·경희대 등 18개 대학생 7천여명은 이날 하오 대학별로 교내에서 기념식을 가진뒤 마라톤·행진·자전거달리기 등의 행사를 가졌다. 서울대학생 2천여명은 이날 하오 신림동과 봉천동을 거쳐 학교로 돌아오는 10㎞단축마라톤대회를 가졌고 외국어대학생 1천여명은 4·19묘역을 왕복하는 자전거달리기 대회를 열었다.
  • 오늘 「4·19」 34주년/수유리묘역 성역화 1단계 매듭

    「4·19 의거」34주년 기념식이 19일 상오 10시 서울 세종문화회관 소강당에서 이회창국무총리를 비롯한 3부요인등 5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다. 정부는 행사명칭은 최근 국가보훈처가 「4·19혁명」으로 고치기로 한 법률안이 아직 통과되지 않았기 때문에 「4·19의거」로 쓰기로 했다고 밝혔다. ◎오늘 일반에 공개 서울 도봉구 수유리 4·19묘역 확장사업이 부분완공돼 19일 일반에게 공개된다. 이번에 새로 선보이는 4·19묘역은 전체면적이 기존 1만7백52평에서 4만1천1백10평으로 크게 늘어났고 유영봉안소가 1백평규모의 목조건물로 새로 지어져 묘역 중앙에 자리잡았다.
  • 「혁명」으로 완성되는 4·19(사설)

    오늘로 「4·19」가 34돌을 맞는다.그러나 오늘의 의미는 단순하게 햇수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올해부터 「4·19」가 공식적으로 「혁명」으로 개칭된다.이른바 「미완의 혁명」에서 완성의 단계로 승화되는 첫 계기를 맞게 되었음을 뜻한다. 4·19혁명은 1인당 GNP가 79달러 수준에서 모든 선거는 불정으로 치러지고 그에 항거하는 세력은 총검의 위협을 받아야 하는 상황에서 일어난 항쟁이었다.1인 장기독재의 정체된 사회에서 온국민이 암울의 좌절속에 있는데도 여전히 끊이지 않고 자행되는 부정선거를 보고 학생들이 분연히 일어나 피로써 항거하여 성공시킨 거사였다. 대중이 나서서 정권을 붕괴시킨 정통적 의미의 혁명은 우리나라에서 이것이 처음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날의 의미가 오랫동안 평가절하되어온 「역사적 오류」를 바로잡는 노력이 오늘에야 가능하게 되었다.그같은 지난날이 유감스러운 일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역사의 피치못할 현실이었다면 오늘 4·19를 「혁명」으로 완성시키는 문민정부의 역할은 역사의 당위라 할수 있다. 정의로운 사회는 그 자체가 국민의 기본권이고 복지의 기초이다.선거의 공명성과 민주화의 실현을 위해 피흘려 성공시킨 「4·19정신」은 사회정의를 국민의 기본권실현으로 설정한 문민정부가 맥을 이어갈 우리의 값진 유산이다.「4·19혁명」은 대중이 참여하여 일으키고 성공시킨 우리나라 최초의 혁명이므로 어느 한 정치적 진영만이 전유할 수 있는 편협한 가치가 아니다.더구나 이 혁명을 정쟁적 「적통 시비」를 위해 점유하려는 옹색한 갈등은 이제 불식돼야 한다.그것은 우리의 위대한 4·19정신을 감가시키는 결과밖에 부르지 않는다는것을 알아야 할것이다. 중요한 것은 위대한 4·19정신을 어떻게 잘 계승하여 민족의 정신적 자산으로 개화하게 하느냐에 있다.2백에 가까운 꽃다운 젊음이 희생되었고 수천에 이르는 부상자를 냈으며 끝내 그 아픔에서 몸을 일으키지 못해 평생을 병상에 있거나 불구의 생을 영위하고 있는 그 적지않은 희생에 보답하는 길도 그것이다.부당한 평가절하를 바로잡아 재평가하는 작업이 먼저 서둘러져야 한다.그러기 위해 문민정부의 출범과 함께 이미 진행되고있는 분야도 적지않다.묘역이 확장 성역화되고 유영봉안소가 재건되며 도서관의 확대 이전도 실현된다.그와함께 법률도 개정되어 역사의 뒷전에 머물던 「4·19」는 떳떳이 역사의 전면에 나서서 3·1독립운동과 한 반열에 드는 민족정신의 수원이 될 것이다. 4·19정신의 궁극적인 완성인 민족의 통일이 이뤄지기까지 이 4·19정신의 본령에 합당한 정진이 이어지는 일이 국민적 결의로 다져지기를 이 아침에 기대한다.
  • 「4월 하늘…」「허재비 놀이」/4·19 소재 연극 봄무대 달군다

    ◎4월…/9억원 투입… 격렬시위의 현장 재현/허재비…/4월 주역들 허수아비로 부활시켜 4·19혁명의 의미를 오늘에 되새기는 연극 두편이 신춘무대를 성대하게 장식한다. 4·19상이자회와 4·19유족회,사단법인 4·19회등이 공동주최하는 뮤지컬「4월 하늘 어디에」와 이윤택씨가 이끄는 우리극연구소의 「허재비놀이」가 그것.특히 이들 작품은 독재정권하에서 제대로된 평가마저 유보당해야했던 4·19혁명이 문민정부 출범후 새로운 역사적 조명을 받고있는 시점에서 공연된다는 점에서 관심을 모은다. 오는 19일부터 23일까지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무대에 오르게될 뮤지컬「4월…」은 4·19혁명의 정신을 되살리고 서울정도 6백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무대.이승만대통령과 이기붕부통령의 당선을 위해 자유당 당원들이 필승을 다짐하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해,4·19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사퇴를 발표하고,이기붕일가가 이강석에 의해 집단자살하는 것으로 극은 막을 내린다.부잣집 아들인 대학생 준호(김선동반)와 홀어머니 밑에서 힘들게 공부하는 그의 여자친구 성희(윤영아반)가 이 역사의 현장으로 관객을 끌고가는 매개자 역할을 한다.9억원의 제작비가 투입된 만큼 우리무대에선 좀처럼 볼수없는 대형장면이 계속 이어지는 것도 이번 공연의 특징.실전을 방불케하는 학생들의 격렬한 시위장면을 그대로 재현,장엄한 볼거리를 제공한다.국내 최대의 30인조 팝오케스트라가 협연하며 주제가인 「4월 하늘 어디에」,여주인공 성희의 노래인 「참았던 노래」등 모두 40여편의 곡들이 2시간50분동안 극을 이끈다.탤런트 김진해·정진씨가 각각 이승만·이기붕으로 출연하며 중견연출가 이형권씨가 구성·연출을 맡은 것을 비롯,임태성(작곡)·서병구씨(안무)등 호화스태프들이 대거 참여한다. 우리극연구소가 「해외극의 한국적 수용」이란 과제를 설정하고 그 첫 소화작품으로 선보이는 「허재비놀이」가 5월5∼29일 서울 동숭아트센터 소극장무대서 공연된다.「허재비놀이」는 지난해 타계한 폴란드의 극작가 타데우스 칸토르의 「죽음의 교실」을 젊은 작가 이해제씨가 각색한 것.「죽음의 교실」은 인간적인 삶과 평등,자유등 인류보편의 가치가 권력에 의해 유린되는 과정을 신랄하게 비판한 작품이다.국내 초연작으로 실험성이 강한 「허재비놀이」는 주인공이 자신이 다니던 학교교실을 방문,격동의 한국현대사를 회상하는 독특한 형식으로 꾸며진다.4·19당시 죽어간 지식인들을 허재비(허수아비의 방언)로 부활시켜 오늘날 지식인의 고뇌를 되짚어보게 하며 「60년 4월」이 우리 현대사에서 어떻게 진화·발전해나갔는가에 초점을 맞춘다는 방침.특히 이번 공연에서는 뮤지컬「4월 하늘 어디에」의 바탕을 이루는 「혁명적 낭만주의」와는 대조적으로 4월의 주역을 자처하는 이들에게서 그 4월의 정신이 어떻게 변질되어가는가의 과정을 생생하게 묘사할 예정이어서 한층 시사적인 무대가 될것으로 보인다.우리극연구소가 공개모집한 연극배우 재훈련과정 수강생 60여명이 연기자로 참여한다.
  • 호남지역 개발자금/내년부터 예산편성/민자정책위의장

    민자당의 이세기정책위의장은 15일 『호남개발을 뒷받침하기 위해 구체적인 종합대책을 정부와 함께 마련할 것이며 우선 95년도 예산편성에서부터 이를 적극 반영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이의장은 이날 4·19 혁명동지회 광주·전라지부 주최로 광주 무등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4·19혁명 기념세미나에 참석,이같이 밝히고 『이를 위한 방안의 하나로 투자자유지역 설치에 관한 특별조치법안등을 검토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의장은 『광주 광양항 목포항을 3개축으로 한 호남의 종합개발계획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고 지적하고 『특히 광양항을 21세기의 국제적인 중추기지로 발전시키고 이를 목포 군산 장항 인천을 잇는 L자형 서해안고속도로를 통해 내륙과 연계시켜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 마산의거 승화(외언내언)

    역사적 의미가 담긴 행사를 치르면서 꼭 기억해야 하는 날을 잡는 택일의 뜻이 되살아나는 오늘이다. 4·19혁명의 도화선이 됐던 마산 3·15의거 34주년 기념행사가 마산종합실내체육관에서 치러지던 15일 상오 김영삼대통령은 청와대에서 3개 정치개혁법안에 서명함으로써 시대를 가르는 법의 발효를 선언했다. 공직선거및 선거부정방지법등 개혁법안의 이날 서명은 34년전 마산에서 불을 당긴 3·15의거의 의미를 더욱 강렬하고 생생하게 조명한다.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맨몸의 항거를 통해 나라의 민주화를 외쳤던 바로 그날 이뤄진 선거혁명등을 내용으로 담고있는 정치개혁법안의 서명은 그래서 더 큰 감회를 느끼게 한다. 3·15마산의거를 기리는 후대의 택일이 보편적 가치의 극대화를 실현시키는 좋은 사례로 남을만 하다. 깨끗한 선거,투명한 정치를 이룩할 완벽한 장치가 마산의거가 일어난지 34년이 지난후에야 틀을 갖추게 됐다는 사실은 그동안 우리가 겪은 정치적 혼란의 정도를 측정케 한다.오늘에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김대통령 자신도 지난 4대국회의원선거당시 부산에서 출마,투표함 바꿔치기에 의한 환표사건으로 낙선했던 피해자의 한 사람.그러기에 의거의 날을 바로 서명일로 맞춘 것은 부정이란 이름의 선거를 영원히 이땅에서 몰아내겠다는 결의의 또다른 표현으로 이해된다.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총리와 당대표등 당정 고위인사들을 참석시킨 가운데 법률안 공개서명식을 사상 처음으로 가졌다는 사실의 의미는 단순한 상징성에 머물지 않는다.정치개혁법안의 여야합의,그리고 만장일치의 통과는 깨끗한 선거를 바라는 국민적 염원의 응집을 증거한다. 이날 서명식에서 김대통령은 투명한 정치를 실현하는 길이야말로 국민적 민주화투쟁의 효시라 할 마산의거를 참답게 승화시키는 길임을 거듭 다짐하고 있다.부정선거 규탄에 무차별 발포로 시작된 마산의거의 정신이 비로소 꽃을 피운 뜻깊은 날이다.
  • 4·19용어 바꾼다/「의거」서 「혁명」으로

    정부는 역사적 의미가 재평가된 4·19에 대해 용어를 종전의 「의거」에서 「혁명」으로 바꾸기로 했다. 14일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새 정부출범이후 공청회등에서 4·19의 역사적 의미가 재평가됨에 따라 현행 국가유공자 예우등에 관한 법률과 국가유공자등 단체설립에 관한 법률에 표시돼 있는 「4·19의거」를 「4·19혁명」으로 고치기로 하고 관계부처와의 협의를 거쳐 올 9월 정기국회에 개정안을 상정키로 했다.
  • 「5·16혁명」과 「5·16쿠데타」 사이는(박갑천 칼럼)

    친국하는 세조를 쳐다보며 박팽년은 입을 연다. 『나으리가 주신 녹은 하나도 먹지않고 창고에…』 『이놈,네가 충청관찰사로 있으면서 장계를 올릴 때는 칭신했거늘 이제 와서…』 『나는 칭신한 일이 없소』 그때 올린 장계를 찾아보니 「신」자가 아니라「거」자였다.그것도 우롱당한 셈인데 더구나 용상의 세조에게 「나으리」라 불렀으니 울화는 꼭두까지 치민다.그래서 화형이 가해진다.「나으리」라는 호칭은 세조를 임금으로 인정하지 않고 수양대군으로 생각한다는 뜻이다.부름에는 그렇게 가치기준 평가의 빛깔이 서린다. 모국어랑을 담아 더 유명해진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의 무대를 놓고 보자.그건 부제 그대로 「한 알자스 어린이의 이야기」이다.여기서의 「알자스」는 작가가 프랑스 사람이었기에 붙은 이름이다.알자스 로렌은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 소유권분쟁이 있던 곳이므로 독일이름도 있다.엘자스 로트링겐이다.그러니까 반대되는 상황에서 독일작가가 이 글을 썼다면 「한 엘자스 어린이의 이야기」로 되었을 것이다.1940∼1944년까지도 독일령이었으니 프랑스령인 지금도 독일사람들은 엘자스 로트링겐이란 이름을 입에 올린다.그럴때 정신적으로는 「내것」이라는 뜻이 함축된다. 앞서 말한대로 상감(마마)과 수양대군의 차이가 엄청나듯이 단종과 노산군의 차이도 하늘과 땅이다.「수호지」에서 요부 반금련이 호랑이 때려잡은 시동생 무송을 유혹하려면서 하는 호칭도 그것이다.술을 권하면서 도련님 도련님하던 반금련이 어느 순간 「여보」라면서 아양을 떤다.그건 시동생으로 보지 않는다는 뜻이다.이젠 「설」로 쇠게 되어있는 음력 정월 초하루를 굳이 「구정」이라고 부르는 데에서도 설로 인정 못하겠다고 하는 의지를 읽는 듯하다. 새로 개편되는 중고교 국사교과서의 현대사 부분에서 일부 용어가 바뀔 것으로 전해진다.공청회를 거쳐서 최종 확정된다는 것이지만 예컨대 여순반란사건→여순사건,4·19의거→4·19혁명,5·18민주화운동→광주항쟁,5·16혁명→5·16쿠데타,12·12사태→12·12쿠데타…등이다.「여순반란사건」이란 표현에 대해서는 그쪽 지방 주민들이 나서서 개칭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역사는 「동학란」이라는 부름에서부터 「동학(농민)혁명(전쟁)」으로 진전되어 온다.그 진전된 역사가 「혁명」을 「쿠데타」로 이름붙이고 있지않은가.충신과 역적 사이를 느끼게 한다.
  • “「4·19」 교과서 기술 시정해야”/세종회관서 「재평가」 공청회

    ◎후진성 극복·질서회복의 전환점으로 인식/독재항거한 시민의식 기릴 제도·법 마련을 우리나라 민주헌정사에 큰 변혁을 가져 온 4·19혁명의 개념을 역사적 측면에서 새로 정립하고 각계의 의견을 수렴하기 위한 공청회가 한국민족운동사연구회 주최로 1일 하오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열렸다. 「4·19혁명의 역사적 개념 재정립에 따른 국가정책방향」이란 주제로 열린 이날 공청회에서 성신여대 이현희교수가 「4·19 혁명론」,동국대 한상범교수가 「한국사에서 4·19혁명의 위치와 국가정책 방향」이란 제목의 주제발표를 했다. 이날 공청회에서는 유준기 총신대교수,김운태 전서울대교수,강경근 숭실대교수,강삼재의원(민자),김원웅의원(민주),정종문 동아일보논설위원등이 참가해 『4·19혁명의 가치와 의미가 위대한 것으로 재인식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주제발표 요지는 다음과 같다. ◇4·19혁명론=4·19혁명은 우리 역사에서 볼 때 예외적이고 돌출적인 항쟁이 아니다.근대 민족항쟁사의 전통에서 그 맥락을 믿을 수 있으며 거기서 발전되어온자유·정의·진리를 정립하기 위한 민중의식의 성장에 의한 것이다. 결국 4·19혁명은 부정선거와 부패·무능한 독재적 집권층의 폭력에 항거한 민주주의의 쟁취항쟁이었다.최악의 사태에 맞서 민족주의적 의식구조를 지닌 학생들에 의한 파괴된 현대민족사의 복원을 위한 승리였다.4·19는 후진성 극복과 질서회복의 전환점이 되기도 했으며 역사적 의미는 사회정의구현과 민중이익을 대변하는 범시민자치적 구국운동이란 점에서 찾아야한다. ◇한국사에서 4·19혁명의 위치와 국가 정책방향=영국의 명예혁명은 정권을 교체시킨 원동력이 상층지배신분 일부였지만 4·19혁명은 일반시민을 바탕으로 하는 대중운동이며 반민주적 강권지배에 대해 더 이상 좌시하고만 있을 수 없다는 시민운동이었다. 4·19의 정신과 그 지향점인 민족·민주의 구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우선 반민족·반민주 악법과 제도 및 유습을 개폐하고 정비해야 한다.다음에 교과서에서 민족사에 대한 서술이 바로 되지 못한 점을 바로잡고 특히 3·1운동,4·19혁명 등 우리 민족운동의 정통성과 미래에 관계되는 중요사건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해치는 잘못된 기술은 반드시 다시 써져야 한다. 초·중·고 교과서에서 「4·19」 또는 「4·19의거」라고 서술한 것은 「4·19혁명」으로 고쳐져야 마땅하다.아울러 법령정비나 장기간의 국가정책의 구상과 실현을 위한 제도장치가 마련되어야 하며 그에 따른 준비작업이 보다 구체적으로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 외풍 거세 9명중 5명 “도중하차”/역대 대법원장 뒷얘기

    ◎5·6대 민복기씨 10년2개월로 최장수/7대 이영섭씨 「오욕의 나날」 퇴임사 유명 23일 12대 대법원장으로 지명된 윤 관대법관에 앞서 모두 9명이 대법원장자리를 거쳐갔다. 그러나 초대 가인 김병로대법원장등 4명만이 임기를 제대로 채웠을 뿐 절반이 넘는 5명은 정치상황과 맞물려 도중하차하는 불운을 겪여야 했다. 3권분립이 무색하리만큼 격변의 외풍에 밀려 중도에 교체되는 수난을 당한 것이다. 임기를 마친 대법원장은 초대 가인을 비롯 3·4대 조진만,5·6대 민복기,8대 유태흥씨등 4명.2대 조용순,7대 이영섭,9대 김용철,11대 김덕주씨등 4명은 임기도중 물러났고 10대 이일규씨는 임기중 연령정년(70세)을 맞아 2년5개월만에 퇴임했다. 법조인의 사표로 추앙받고 있는 가인 김병로초대대법원장은 9년3개월동안 사법부를 이끌며 사법부의 기초를 다지고 소신으로 사법권을 수호, 우리나라 사법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 3·4대 조진만씨는 박정희대통령도 존경을 했던 인물로 7년3개월동안 재임하면서 사법부의 내실을 다지고 사법부 근대화에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5·6대 민복기씨는 박대통령이 사법부에 압력을 가하기 시작한 「1차 사법파동」과 유신·긴급조치 발동등 암울한 시대상황속에서도 10년2개월을 재임,최장수를 기록했으나 5공출범과 함께 취임한 8대 유태흥씨는 임기는 채웠지만 정권에 예속된 모습으로 일관,헌정사상 처음으로 국회에서 탄핵소추가 발의되는 불명예를 겪기도 했다. 그러나 자유당정권 말기에 취임한 2대 조용순씨는 4·19혁명을 맞아 23개월만에 물러나 역대 대법원장 가운데 최단임을 기록했고 7대 이영섭씨도 80년 신군부의 등장으로 25개월만에 하차했다.이씨는 짧은 재임기간을 「회한과 오욕의 나날」로 표현한 유명한 퇴임사를 남기기도 했다. 9대 김용철씨는 88년 6월 민주화 열기속에 터진 대법원장의 퇴진과 사법부 개혁을 촉구한 법관들의 성명파동으로 물러났으며 11대 김덕주씨는 재산공개 파동에 휘말려 도중하차하고 말았다. 특히 6공출범과 함께 대법원장으로 내정됐던 정기승씨는 여소야대 정국아래 사상 처음으로 국회동의안이 부결되는 우여곡절을 겪고 재야로 돌아간 불우한 인물로 남아있다.
  • 6·10민주화항쟁/문민정부 모태로 재평가

    ◎청와대·민자당의 재조명 방향/4·19와 비견… 「6·29미화」에 가려 뜻 희석/민의폭발 의미살려 행사 민간에 맡겨 「6·10」이냐,「6·29」냐. 새 정부의 출범기조를 6·10으로 보느냐,6·29로 하느냐는 큰 차이점이 있다.새 정권을 6공 정부와 차별화하는 논리적 출발점이기도 하다. 6공 정부는 6·29선언이 민주화의 시작이라고 부각시켜왔다.혹자는 지난해 12·18대통령선거에서의 민의의 선택,9·18중립내각출범에서 새 정부의 연원을 찾기도 한다. 심지어 3당통합이 「김영삼정권」탄생의 모태였다는 강변도 있다. 새 정부지도자들은 「6·10민주화항쟁」이야말로 문민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고 주저없이 말한다.6·10이 있었기에 6·29가 생겨났고 그에 따라 문민정부도 탄생했다는 논지이다.이러한 입장에서 보면 6·29는 6·10의 종속변수이지 결코 독립적이 아니라는 것이다.6·29는 6·10항쟁에 굴복,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던 현상이라고 파악한다. 6·29를 칭송하는 것은 위로부터의 일방적 개혁을 선호하는 보수적 사고를 깔고 있다.범국민적 항쟁에 밀려 단행됐음에도,마치 지도자의 결단인양 미화됐다.때문에 전두환·노태우 전대통령측간에 6·29주체 시비까지 이는 사태도 발생했다. 이에 대해 6·10은 아래로부터의 개혁이다.87년 당시 4반세기동안 지속되어온 군사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응어리진 감정이 일거에 폭발한 것이었다.재야나 학생 뿐만 아니라 제도정치권,지식인과 전문직업종사자들까지 가세한 항쟁이었다.근대 정치사에서 「3·1」운동,「4·19혁명」과 비견될만한 것이었다. 6·10이 6·29에 비해 논리적 우월성을 가졌다는데 모두들 견해를 같이 한다.새 정부가 「4·19」「5·16」「5·18」「12·12」등 일련의 역사재평가작업에 6·10을 포함시켜 적극 홍보에 나선다 해도 문제될 것은 없다. 그러나 정부는 6·10에 관한한 차분해지기로 방침을 정했다.6·10의 진정한 의미는 국민이 스스로 독재에 항거했다는 점이다.6·29와 같이 정권에 의해 무리하게 미화될 경우 오히려 의미가 반감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정부가 나서 요란을 떨지않아도 6·10과 6·29에 대한자리매김이 자연스레 되리라는 자신감도 깔려있다. 정부가 준비하고 있는 6·10관련 행사는 아주 단촐하다. 김영삼대통령이 10일 낮 6·10당시 함께 최루가스를 마시고 「닭장차」에 실려갔던 민주동지들을 초청,오찬을 함께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김덕용정무1장관,최형우의원등 정치권 인사와 박형규목사등 6·10당시 「국민운동본부」관계자들이 참석대상이 될 것으로 알려진다. 청와대와 민자당대변인은 논평을 통해 6·10의 의미에 대해 평가를 할 예정이다.그외에 공식 기념식개최라든가 기념일 제정등은 전혀 검토되지도 않고 있다. 정부는 민간단체의 6·10기념행사도 유의깊게 지켜는 보되 간여는 않기로 했다.예산지원은 물론 당정 고위인사의 행사참석도 자제한다는 방침이다.정부가 끼어들 경우 「관변행사」로 오인받을 소지가 있는 것을 원천적으로 봉쇄하자는 생각이 깔려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새 정부 핵심인사들은 자신들이 나서지않아도 국민들이,나아가 역사가 6·10을 재조명하고 「YS정권」이 6·10에서 출발한 정통민주정부였다고 평가하리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
  • 학사경찰 17대1 경쟁/24주 교육후 경장으로 임용

    ◎33년만에 특채부활 지난 60년 4·19혁명 직후 한차례 실시된뒤 중단됐다가 33년만에 부활된 학사경찰 특채모집에 많은 지원자가 몰렸다. 경찰은 우선 올해 정보 및 수사(조사업무) 전문요원으로 각각 95명씩 1백90명을 선발키로 하고 지난달 15일부터 29일까지 응시원서를 접수한 결과 모두 3천3백23명이 지원,17·5대1의 높은 경쟁률을 보였다고 밝혔다. 경찰은 이날부터 시작되는 신체검사·필기시험·적성검사·면접시험의 4단계 전형을 거쳐 최종 합격자를 가려낸 뒤 내달 10일 그 명단을 발표할 예정이다. 이들 최종합격자는 8월2일부터 내년 1월14일까지 24주간 중앙경찰학교에서 소정의 기초교육을 받은 뒤 경장으로 임용된다. 지난 60년 처음 시행될 당시 학사경찰에게는 경장보다 한단계 높은 경사 계급을 부여했었다. 경찰청 관계자는 『이번에 선발되는 학사경찰은 소정의 교육과정을 수료한 뒤 앞으로 3년간 서울·부산 등 6대 도시의 경찰서에서 정보 또는 수사과 조사요원으로 사복근무를 하게 된다』고 밝히고 『앞으로 고급인력이 필요한 정보·수사·컴퓨터 등 특정분야의 인력충원에 이 제도를 적극 활용,정식 경찰채용제도로 정착시켜 나갈 방침』이라고 덧붙였다.
  • “도도한 개혁강물 누구도 못막는다”/김영삼대통령 100일 어록

    ◎기업이든 누구에게서든 돈을 받지 않겠다/부패척결·경제회생·기강확립은 삼위일체 역사적인 문민정부가 출범한 2월25일.취임석상에 선 김영삼대통령이 국민을 향해 던진 첫마디는 미래에 대한 장미빛 청사진이 아니었다. 『신한국의 창조에는 인내와 시간이 필요합니다.눈물과 땀이 필요합니다.고통이 따릅니다.우리 다 함께 고통을 분담합시다』 냉엄한 현실인식에 근거,김대통령은 취임이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부정부패의 척결과 경제회생,국가기강확립을 일관되게 천명해왔다. 제74주년 3·1절 기념식에서 김대통령은 「신한국은 도의국가」라고 규정하고 『겨레를 불행에 빠뜨린 가장 무서운 적은 언제나 내부에 있다』고 지적했다. 김대통령은 재산공개의 파문이 확산되며 새로 임명된 공직자들과 관련해 이런저런 얘기들이 나오자 3월6일 국무회의에서 『그것은 공인이 처신과 주변정리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일깨워주는 것이며 국민 모두의 도덕적 수준이 이쯤에 와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틀뒤 언론사 사장단 초청 오찬간담회에서 김대통령은 『개혁을 해나가는데는 역풍도 있고 저항도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그러나 개혁을 향한 전진은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조직적인 개혁방해세력에 대해 강력한 경고를 보내는 것으로 개혁에 대한 의지를 재확인했다. 4월9일 열린 민자당의 제3차 상무위원회에서 당총재인 김대통령은 사정이 일시적인 바람으로만 지나가길 고대하는듯한 소속의원들에게 『재산공개와 관련해서 진정으로 참회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고 도덕적 불감증을 질타했다.『우리는 진정으로 뉘우치는 눈물속에서 국민의 신뢰를 받는 국민의 정당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대통령의 질타는 이어지고…. 김대통령은 4월13일 민자당에서 개혁을 진두지휘하던 최형우사무총장의 아들이 대입부정과 관련된 사실이 드러나자 『우째 그런일이…』라고 안타까워하기도 했으며 그러나 최총장을 경질,성역없는 사정의 원칙을 재확인했다. 김대통령은 사정이 경제를 위축시킨다는 주장에 대해 「부정부패 척결이 경제를 위축한다는 것은 보수기득권 세력의 자기방어논리」라고일축했다.그의 논리는 『부정부패를 몰아내고 경제를 살리고 나라의 기강을 세우는 일은 따로따로가 아니며 삼위일체이며 하나』로 연결됐다. 김대통령은 5월17일 열린 신경제 1백일 계획 중간점검회의에서 『우리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눈물과 땀을 흘려야 한다』고 말하고 『눈물은 과거를 반성하는 참회를 말하고 땀은 미래를 만들기 위한 혼신의 노력을 뜻한다』고 정의했다. 김대통령이 지향하는 개혁의 목표는 무엇인가.『우리가 개혁을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품위있는 삶을 지향하기 위한 것이며 우리가 최종적으로 지향하는 신한국은 바로 문화대국』(서편제 관람이후).3월4일 김대통령은 출입기자 간담회에서 『앞으로 5년동안 기업이든 어떤 사람한테든 돈을 받지 않겠다』고정경유착의 단절을 선언했다.『그대신 정치자금으로 내던 돈을 기술개발과 근로자복지에 쓰라』고 김대통령은 경제5단체장과의 간담회에서 당부했다. 김대통령은 3월22일 열린 신경제 1백일보고회에서는 『고통분담을 위해 공무원의 봉급을 동결한 것은 참으로 큰 죄를 짓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 안타까운 심정을 나타냈다. 지난달 6일 중소기업구조개선대회.『경쟁력을 갖출 중소기업만을 지원해야 할 것』이라고 말하고 「정부는 스스로 돕는 중소기업을 돕는다」는 새로운 기업지원원칙을 제시한다.김대통령은 지난달 29일 열린 기업인과의 75분간에 걸친 「칼국수대화」에서 『지금이 경제회생의 마지막 기회』라고 말했다.그러면서 『열심히 잘해달라』는 따뜻한 당부로 기업인들의 투자의욕을 고취하기도 했다. 김대통령은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처음 4·19묘지를 방문,지나간 역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틀을 제공했다.김대통령은 이자리에서 『4·19혁명의 목표와 정신은 새정부가 계승하여 완성시킬 것』이라고 강조하고 『도도히 흐르기 시작한 개혁의 강물은 어느누구도 막을 수 없는 역사의 대세』라고 결론지었다. 김대통령은 12·12사태의 성격을 둘러싼 성격논쟁이 일자 이경재공보수석을 통해 『12·12는 하극상에 의한 군사쿠데타적 사건』이라고 명확하게 규정하고 『현재 진행중인 개혁작업이 바로 이러한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는 작업』이라고 천명하기도 했다. 5·18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서는 특별담화를 통해 『오늘의 정부는 광주민주화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는 정부』이며 『문민정부의 출범과 개혁은 광주민주화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실현해나가는 과정』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4월23일 가진 미CNN­TV와의 회견.『역사상 가장 정직한 대통령으로 기억되길 바라며 조국이 어려울 때 살려낸 대통령으로 평가되길 원한다』김대통령이 되고자하는 「대통령상」이다.
  • JP 뭔가 작심했나/5·16옹호·지구당위장 사퇴에 추측 무성

    ◎청와대선 전혀 다른 정서의 발언에 당혹감/일부선 “무력한 2인자 탈피 승부수” 풀이도 민자당의 김종필대표가 요즘 심상치않다. 5·18과 12·12에 대한 역사적 재조명까지 이뤄지며 김영삼정부가 개혁의 고삐를 한껏 당기고있는 이때 김대표는 16일 청와대 정서와 어긋나는 발언을 했다.여기에다 김대표는 소중히 여길 수밖에 없는 지구당위원장자리까지 내놓았다. 김대표는 16일 5·16민족상수상식에서 원고에 없던 역사의 「기승전결론」을 펴며 5·16을 정당화했다.5·16이 오늘의 토양을 만들었다는 주장아래 박정희대통령(기) 전두환·노태우대통령(승) 김영삼대통령(전) 통일대통령(결)의 논리를 전개한 것이다.민주당은 이에대해 김대통령의 개혁정부도 결국 과거 군사정권에서 잉태된 정권이라는 뜻으로 해석하고 김대통령의 해명을 요구했다.김대통령이 아직 역사의 「결」국면에 이르지 못했다는 대목도 미묘한 해석이 가능하다. 이는 4·19의거를 「혁명」으로 그 의미를 새롭게 투영하고 12·12를 「하극상에 의한 쿠데타적 사건」이라고 규정한김영삼정부의 시각과는 궤를 달리한다.청와대측은 논평을 자제하고 관망자세다.그러나 지난번 황인성총리의 12·12합법화발언에 이어 또다시 김대표의 탐탁지않은 발언이 터져나온 배경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물론 김영삼정부가 5·16에 관해 직접적으로 평가한 발언은 아직 없다. 하지만 4·19혁명으로 등장한 문민정부를 일순간에 무너뜨린 5·16에 대한 김대통령의 생각은 미뤄 짐작할수 있다.김대통령은 당선직후 기자간담회에서 『과거정권에 정통성이 없다는 점에서 새정부를 2공으로 불러야 한다는 의견도 있더라』고 밝힌바 있다.군정인 3·5·6공을 모두 부정하고 싶다는 속마음이 드러난 것에 다름 아니다.야당측도 황총리와 김대표의 잇따른 발언파문을 「수구세력의 집단반발」로 규정하는등 강경공세를 취하고 있다. 김대표는 이처럼 발언파문이 확대일로를 걷자 17일 확대당직자회의에서 『역사진행에 대한 개인적인 사관일 뿐』이라고 해명했다.『현시대가 김대통령중심의 변화와 개혁에 따라 발전적으로 열어가는 시대임을 강조한 것』이라는 설명도덧붙였다. 그러나 그의 해명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는 결코 아니다.특히 민주계인사들은 『시대정신을 망각한 언행』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결국 청와대의 생각을 모를리 없는 김대표가 지금 시점에서 왜 그같은 발언을 했느냐로 초점이 모아진다.정가에서는 우선 김대표 발언을 지구당위원장 사퇴와 맞물려 상당한 복선이 깔린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이른바 중대결심설 내지는 배수진설이다.한 의원은 김대표가 이날 발언에 앞서 전날 대구에서 5·16의 성격규정을 요구한 보도진의 질문에 「내일와서 보라」고 미리 예고했던 점등을 들어 『JP가 모종의 중대결심을 굳혀가고있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김대표가 지금까지 개혁의 삭풍이 불때마다 무저항 또는 순응자세로 일관해 왔다는 점에서 이번에는 뭔가 작심한게 아니겠느냐는 해석이다.특히 김대표가 이달초 지구당위원장직 사퇴의사를 김대통령에게 전달한 것도 자신의 위상을 새삼 확인하려는 일종의 배수진이라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김대표는 5·16발언을 계기로 과거단절작업의 한계점을제시하고 이를 넘어서면 결연히 행동하겠다는 것을 예고한 것이라는 추측마저 낳고 있다.결국 그가 「무력한 2인자」에서 탈피하려는 승부수를 던진 것으로 봐야한다는 풀이다.이와함께 지금도 개혁정국의 「변방인」에 머물러 있는 다수의 민정·공화계인사들에 대한 적극적인 몸짓으로도 볼수있다는 것이다.세결집을 통한 위상강화를 겨냥했다는 해석이다.이와관련,자신을 기승전결론의 결에 해당하는 인물로 상정한 것 아니냐는 일부시각도 있으나 측근들은 펄쩍 뛰고 있다. 앞서 논의와는 다소 강도가 처지지만 김대표의 심기불편설도 제기된다.김명윤상임고문이 명주·양양지역 공천을 받아 김고문이 결국 당대표를 맡을 것이라는 추측이 당내에 나돌면서 김대표는 심기가 불편해졌고 이에따라 자신과 김고문중 양자택일하라는 무언의 요구가 일련의 발언파문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지구당포기도 같은 맥락이다.불안한 당내 역학구조상 미리 승부수를 띄우지 않고서는 장래가 보장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에서 지구당을 내놓았다는 해석이 설득력있게 들린다.여하튼 김대표는 앞으로 자신의 발언을 어떤 형식으로 조율할지에 따라 정계은퇴냐 아니면 여권내 확실한 입지확보냐의 기로에 설 것으로 관측된다.그리고 여전히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않고 있는 청와대측이 어떻게 대처해 나갈지도 관심거리다.항간에 나도는 김고문으로의 대표교체를 정말 실천에 옮길지도 두고볼 일이다.
  • 올 4·19시위 “전무”/경찰청

    경찰청은 21일 4·19혁명 33주년 기념일이었던 지난 19일 과격시위나 반정부시위가 단 한건도 발생하지 않았다고 발표했다. 경찰청은 지난 19일 전국 36개 대학에서 기념집회가 열렸으나 과거에는 이날이 되면 연례행사처럼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곤 했던 서울 수유리의 4·19묘지를 비롯,전국 어느 곳에서도 과격시위나 가두시위가 발생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4·19기념일중 반정부집회시위가 가장 극심했던 지난 90년에는 1백91개 대학에서 7만1천7백여명이 반정부집회에 참가했고 23개지역에서 격렬한 가두시위가 벌어져 1만6천개의 화염병이 투척됐었다.또 90년이후 3년동안 평균 1백50개 대학에서 6만5천여명이 시위에 참가,1만2천개의 화염병을 투척한 것으로 나타났다.
  • 4·19주역들 정치권 실세로 부상/33돌 계기로 본 그때 그사람들

    ◎박관용실장·최형우의원 여 핵심에/4·18결의문 읽은 이기택 야 대표로 정치인들이 학창시절을 회고하면서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경력이 있다.「4·19세대」와 「6·3세대」가 바로 그것이다. 4·19세대는 지난 60년 4·19혁명을 주도했던 57∼60학번사이의 대학생출신으로 지금은 50대중반의 연령층이다.이들보다 3∼4년 늦게 한일국교정상화반대데모에 적극 가담했던 50세전후의 인사들을 「6·3세대」로 불린다. 혁명이나 학생운동을 이끌며 정치지향성을 보였던 이들중 다수가 정계에 진출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4·19」혹은 「6·3세대」중 일부는 3·5공의 군사정부에 참여하기도 했지만 이들이 풍기는 이미지는 「개혁적」인 동시에 「반체제적」이었다. 김영삼정부출범후 이들 세대는 정치의 중심으로 대두하기 시작했다.4·19의 재평가라는 김대통령의 시대인식과 과감한 개혁추진이 그러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과거 야당에 몸담았던 최형우의원,박실용 청와대비서실장(4·19세대)김덕용정무1장관(6·3세대)등이 문민정부시작과 함께 여권의 핵심실세로 자리잡았다.민주당의 이기택대표·이부영최고위원,신정당의 박찬종대표등 야권 차기대권주자들도 4·19나 6·3학생운동을 거쳤다. 19일은 4·19혁명 33주년 기념일이다.그 당시 학생혁명을 주도했던 대학은 고려대였다.고대학생들은 60년4월18일 혁명의 신호탄을 쏘아올린 대대적 시위를 벌였다.이 시위의 선언문작성자가 이재환의원(민자)이며 이세기의원(민자)이 정경대학생위원장으로 선언문을 낭독했다.이기택 민주당대표(당시 상대학생위원장)는 이승만정권을 타도하자는 결의문으로 사자후를 토했다. 신경식 민자당총재비서실장도 당시 영문과 4학년으로 시위에 앞장섰고 김중위·문정수의원등 민자당 중진 상당수가 4·19의 주역이었다.야당의원을 지낸 정재원·강경식씨도 고대출신 4·19세대이다. 서울대에서는 이수정전문화부장관이 선언문을 초안했고 같이 문구를 다듬었던 윤식씨는 유정회의원을 지낸뒤 현재 미하와이에 체류하고 있다.선언문을 복사·배포하는 일을 맡았던 황선필씨는 5공정부에서 청와대대변인,문화방송사장을 역임했다. 민자당의 박범진·강우혁,민주당의 박실의원과 이장춘 전오스트리아대사도 서울대시위를 주도했다.그러나 서울대 출신 4·19세대들중 문리대 학생회장을 지냈던 안병병씨를 비롯,이영일·염길정·정남씨 등은 구민정당의원을 지냈으나 3당통합후 공천탈락·선거패배로 「쓸쓸한」시절을 보내고 있어 눈길을 끈다.특히 학보사기자였다가 나중에 총학생회장까지 오른 이대섭씨는 과기처·정무장관과 3선의원을 역임하다 수서사건에 연루,옥고를 치른 끝에 칩거하고 있다. 연세대의 경우 유영철 당시 학생위원장이 3공에서 4·19유공포장을 거부하고 경제계에 진출,동아건설사장에 재직하고 있다.정계에서는 김봉조의원이 민자당내 민주계 핵심으로 등장하고 있으며 정창화 전국회농림수산위원장도 연대 학생시위의 주도자였다. 새정부출범이후 「정치명문대」로 떠오른 동국대 4·19시위는 민자당의 김영구총무와 최형우의원,야당의원을 지낸 고 장충준씨 등이 이끌었다.최의원은 민자당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강력한 실세로 떠오르다 아들의 부정입학의혹으로 주춤하고 있으며 장전의원은 지난해 여름 교통사고로 타계했다. 전통적 야도 부산에서는 김대통령의 측근중의 측근인 박관용비서실장과 서석재 전의원이 동아대학생으로 4·19시위에 가담했다.서전의원은 동아대 총학생회장이었다. 당시 김정수 부산대 약대학생위원장과 허재홍 수산대학생위원장도 지금은 어엿한 집권여당의 4선·2선의원으로 각각 자리잡고 있다. 경북대 총학생회장으로 4·19이후 수습을 주도했던 인사가 이치호 민자당 당무위원이고 유인학·신기하의원(민주)등은 전남대에서 총학생회·법대학생회를 이끌며 반독재투쟁을 벌였었다.
  • 여야,4·19성명 발표

    여야는 19일 「4·19」 33주년을 맞아 각각 다음과 같이 성명을 발표했다. ▲이순재 민자당부대변인=우리당은 민주제단에 바쳐진 4·19영령들의 고귀한 희생정신이 헛되지않도록 민주화의 큰 물결로 부정과 부조리를 하나하나 씻어내고 정의가 흘러넘치도록 법과 제도를 개혁해나갈 것이다. ▲박지원 민주당대변인=4·19혁명은 당시 위정자들의 법과 제도를 무시한 초법적인 권위에 대한 국민적 저항이었음을 기억할 때 법과 제도의 뒷받침없는 개혁은 언제든지 문민독재,민주독재로 변질될수 있다.
  • 선관위의 올해 10대과제와 공명대책(국정탐방)

    ◎능동·전향적 기구로/“보선과열 차단”… 초동활동 강화/공공단체·노조 등 선거관리 첫 지원/통일대비 북한선거제도 능동 연구 중앙선관위가 바빠졌다.오는 23일의 보궐선거 탓만은 아니다. 과거처럼 선거때만 잠시 활동했다가 동면에 들어가는 한시적인 기구라는 부끄러운 이미지를 벗고 상시활동에 여념이 없는 것이다. ○주위 비난도 사라져 때문에 「선거때만 아니면 놀고 먹는 곳」이라는 주위의 비난도 이제는 사라졌다. 30살을 맞은 선관위의 위상이 높아지고 있다는 징후는 곳곳에서 실감할 수 있다. 경기도 선관위는 광명시 국회의원 보궐선거를 한달남짓 앞두고 금품 향응제공 등 불법사전선거운동의 혐의가 있는 차모씨(52)등 10여명을 수원지검에 고발했다. 불법타락선거운동에 대해서는 더이상 과열되기전에 초동단계부터 강력히 차단하겠다는 의지에서다. 선관위는 올해 「돈 안드는 선거」「깨끗한 선거」풍토를 이 땅에 뿌리내리려는 의욕에 넘쳐있다. 선관위가 올해 추진하고 있는 10대 과제는 이런 의미에서 예년에 비해 능동적이고 전향적이다. 대통령선거와 국회의원선거‘지방자치관련 선거 등 분리돼있는 각종 선거법을 하나로 묶는 통합선거법제정이 그렇고 통일에 대비한 선거제도 마련을 위한 북한선거제도 연구가 또한 그렇다. 정부나 정당이 추진하는 정당법 및 정치자금에 관한 법률 개정에 대해서도 비록 고유업무는 아니지만 효율을 높이기 위해 자체에 의견을 낼 계획이다. 특히 공공단체나 노동조합·학교·사회단체 등 선거를 치르는 모든 단체를 대상으로 선거지원 활동을 처음으로 벌이는 것도 눈에 띈다. 각급 학교의 교과서 개편시에 선거관련부분을 강화해 어린 학생들에게 공명선거에 대한 바른 인식을 심어주는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선거교육을 추진하고 있다. 이밖에 공공단체의 선거를 위탁받아 관리하고 선거정치관련 순화용어집 발간「선거연수원 실시」투개표 관리사무의 실질적 개선등을 계획하고 있다. ○높아진 위상을 실감 선관위는 창설이래 끊임없이 공정성 시비에 휘말려 왔다. 지난 61년 발족이후 6차례의 대통령 선거를 비롯해 각종 선거를 24번이나 치렀지만 불법타락선거를 감시하는 파수꾼 역할에는 미흡했다는 비난을 받아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지난해 대선이후의 선관위는 확실하게 달라지고 있다. 지난해 12월 대선후보들이 승패에 관계없이 윤관위원장에게 전화를 걸어 처음으로 노고를 치하한 것만 보더라도 높아진 위상을 실감할 수 있다. 이에 앞서 있은 국회의 선관위법 개정에서는 선관위 사무총장의 직급을 차관급에서 장관급으로 격상시켰다. 선관위는 스스로의 활동상을 「태동기」「발전기」「성숙기」로 구분짓고 있다. 지난 61년 발족 첫해부터 지난 80년까지인 「태동기」는 단순화된 계도활동에 국한됐고 81년부터 90년까지의 「발전기」에는 선거계도의 기법이 본격 개발된 시기였다. 90년부터의 성숙기는 선거관리 기능을 실질적으로 강화하고 선거개혁을 이뤄내는 역사적 전환기인데 이의 시발은 89년 12월의 동해시 재선거때부터이다. 동해시 재선거 이전까지의 선관위는 투개표 관리에만 주력해 왔을뿐 불법 타락선거운동의 억제나 단속은 사법기관의 소관사항으로 미루고 묵인·방치해온게 사실이다. 선관위는 당시 후보자 전원 고발이라는 마지막 수단을 동원한 것을 시작으로 91년 기초·광역 지방의회 선거와 92년 총선·대선을 거치는 동안 변신을 거듭해 왔다. ○직원 1천8백여명 불과 2년전인 91년 1월 선관위가 자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선관위가 「행정부의 부속기관」이라는 응답자가 16%에 이르러 국민들의 시선이 그리 곱지 않았던 사실을 뒷받침했다. 그러나 지난해 대통령선거가 끝난 시점에 한국선거연구회가 실시한 국민면접조사 결과 79.1%가 선관위의 선거감시활동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나타냈다. 중앙선관위는 현재 윤관위원장을 필두로 1실 4국 4담당관 8과로 구성돼 있고 직원은 모두 1천8백42명,그리고 산하에 각 3백8개 시·도·군·구 위원회를 둔 방대하고도 중요한 조직으로 발전했다. 지난 89년이후 열악한 근무환경속에서 선거감시 활동을 펴다 순직한 선관위 직원들은 모두 7명. 더 이상 「놀고 먹는 곳」이 아닌 선관위의 현재 모습이다. ◎역대 위원장 뒷얘기/초대 고 사광욱씨 헌법기관 위상세운“대쪽”/현감사원장 이회창씨는 최단명 용퇴기록 역대 중앙선관위 위원장가운데는 대법원장을 지낸 경우가 없다. 운이나 능력탓이 아니라 정치적 외풍에 항상 시달려 왔기 때문이다. 대법관이나 대법원 판사 출신이 맡아온 중앙선관위 위원장을 두고 「잘해야 본전」이라는 인식이 팽배해 있어온게 지금까지의 현실이다. 그러나 서슬 시퍼런 독재정권하에서도 「대쪽」같은 업무처리로 공명선거를 정착시키는데 앞장서온 위원장도 많다. 선관위는 지난 63년 출범 첫해부터 5년간 재직한 사광욱씨(작고)를 시작으로 9대인 지금의 윤관위원장으로 이어지고 있다. 사위원장은 갓 태어난 선관위가 명실공히 헌법기관으로서의 위상을 세울 수 있도록 권력에 굴하지 않은 숱한 일화를 많이 남긴 인물. 그는 64년 당시 박정희대통령의 각 부처 연두순시때 『헌법기관인 선관위를 행정부의 장인 대통령이 어떻게 순시할 수 있느냐』며 정면으로 거부한 장본인이다. 또 67년 국회의원 선거때는 대통령의 선거지원 유세를 놓고 법률적인 논쟁이 벌어지자 『대통령은 공무원의 신분이므로 선거지원 활동을 할 수 없다』고 유권해석을 내렸다. 당시 박대통령이 선관위 위원장에게 압력을 가해 유권해석을 번복시키고 선거법시행령을 개정,대통령의 선거지원활동을 가능하게 하자 『소신에는 변함이 없다』고 맞서기도 했다. 사위원장의 뒤를 이은 주재황씨는 2,3,4대 위원장으로 무려 13년 2개월간을 재직해 최장수기록을 남겼다. 그는 대통령선거 1회,국회의원 선거 4회,3선개헌,5공 헌법개정 국민투표 등 모두 12차례의 각종 선거를 대과없이 마무리했으나 정치환경 등으로 독립기관으로서의 노력은 다소 미흡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제5대 위원장을 지낸 김중서씨는 재임기간중 단 한번의 선거도 치르지 않은 유일한 기록을 남겼다. 강우영6대 위원장은 신당돌풍이 몰아쳤던 2·12총선 당시 정치규제로 묶여 있던 김영삼·김대중 양 김씨의 이름을 야당 후보들의 벽보문안에서 삭제토록 지침을 시달한 사건으로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6·29이후 민주화과정에서 대통령선거와 총선을 치러낸 윤일영 7대 위원장은 선관위 창설이후 처음으로 불법 벽보와 현수막을 철거하는 등 물리력을 동원하는 단호함을 보여주기도 했다. 새 정부의 감사원장으로 추상같은 사정의지를 천명하고 있는 이회창 8대위원장은 1년 3개월의 가장 짧은 재임기간과 스스로 사퇴한 유일한 인물이라는 두가지 기록을 남겼다. 그는 당시 노태우대통령이 유권자들에게 민정당의 나웅배후보를 지지해달라는 서한을 발송한데 대해 위법소지가 있다는 유권해석을 내려 불법선거 감시에 성역이 없음을 보여줬다. 동해·영등포 을 재선거때 불법타락 선거의 도의적 책임을 지고 물러난 그는 89년 당시 선관위원장의 국회출석 답변을 잘못된 관행이라고 지적,91년부터 사무총장이 국회 상임위 출석답변을 맡도록 하기도 했다. ◎“각종 선거법 통합 추진”/각급 교과서에 「공명」교육내용도 보강/김봉규 선관위사무총장(인터뷰) 『지난해 12월 실시한 대통령선거를 계기로 공명선거가 정착되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올해로 창설 30주년의 청년기를 맞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김봉호사무총장은 앞으로 정책경쟁 중심의 선거풍토가 자리잡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창설때부터 이곳에 몸담아온 김총장은 지난해 차관급이던 직책이 국무위원급으로 격상된 것을 두고 선관위의 위상이 그만큼 높아진 탓이라고 말했다. ­창설 30주년을 맞은 소감은. ▲태동기부터 일해온 저로서는 누구보다 감회가 큽니다.무엇보다 지난 대선이후 공명선거가 뿌리내리고 있다는 인식을 국민들에게 심어주고 있는게 더없이 값진 성과라고 생각합니다. ­선관위를 헌법상 독립기관으로 설치하는 것은 외국에서도 예가 드문데 그 배경은. ▲광복이후 3·15부정선거로 4·19혁명이 일어날때까지 자행된 선거양태로 보아 일반 행정기관이 공정성을 갖고 선거를 관리하는 것은 어렵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공명선거를 제도적으로 보장하기 위해 행정부로부터 독립된 별도의 선거관리기관을 두게 된 것입니다. 그전에는 내무부 산하에 선거위원회라는 기구가 있었으나 4·19혁명을 계기로 헌법상 독립기구로 됐다가 5·16혁명으로 해체된뒤 3공화국이 출범한 지난 63년 현재의 모습으로 태어났지요. ­30년동안 선관위가 걸어온 발자취는. ▲3·15부정선거로 인해 헌정이 중단되는 극심한 혼란을 겪은 국민들은 선관위에 대한 기대가 컸지만 지금까지도 공명선거가 완전히 정착되지 않은데 대해 국민들에게 죄송할 따름입니다. 선관위는 지난 87년 13대 대통령선거때만 하더라도 투개표 관리등 행정사무에만 주력했을뿐 불법타락 선거운동의 단속을 사법기관에 미뤄 왔습니다. 87년 대선,88년 총선,89년 동해 재선거를 거치면서 공명선거 분위기의 유도와 국민들의 의식개혁운동의 전개,단속활동의 강화 등을 통해 새로운 선거문화 창조에 중추적 역할을 다하고 있습니다. ­올해는 특히 획기적인 계획이 많다는데. ▲먼저 선거마다 단행법으로 돼있는 선거법 체계를 한데 묶는 선거법 통합작업을 추진할 계획입니다. 또한 각종 기관‘단체가 선거관리를 의뢰해올 경우 위탁 선거준비를 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선거에 관한 의식개혁이지요.선관위는 이를 위해 초·중·고교의 교과과정에 공명선거에 관한 내용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공명선거 구현은 국민적 염원이자 시대사명인 만큼 모든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
  • 여권안정 위한 「카드­타이밍」 선택/국회요직 서둘러 발표한 배경

    ◎특정지역·계파의 소외감 불식에 배려/3공이후 첫 민간출신 국무위장 눈길/재산공개파문 관련 “더이상의 조치없다” 함축 김영삼대통령이 1일 국회의장에 이만섭의원을 지명한 것은 재산공개파문으로 어수선한 민자당과 국회를 조기 안정시키겠다는 의지를 표출한 것이라 이해된다. 「이만섭국회의장」카드는 재산공개에서 비롯된 민정계 및 대구·경북세력의 좌절과 불만을 해소시키면서 「김영삼정치」의 개혁성도 충족시키는 절묘한 선택이다. 민자당내에서는 재산공개파문을 거치면서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공식징계를 받은 의원들이 모두 당내 민정계로 나타나면서 다수세력인 민정계의 위축을 가져왔다.김윤환·이한동의원등 민정계 중진들은 저자세로 일관했다. 나아가 박준규·김재순씨등 전·현직 국회의장들이 부동산투기의 구설수에 올라 사실상 정계에서 매장됐다.원로그룹들도 「된 서리」를 당한 셈이다. 특히 박국회의장과 유학성전의원,이원조·금진호의원등 5·6공을 거치면서 권력의 핵심에 있었던 대구·경북(T·K)세력의 대표주자들이의원직을 떠나거나 공개경고를 당했다. 대선때 「김영삼대통령」을 만드는데 절대적 공헌을 한 TK세력이 1차적 징계대상이 됐다고 볼수 있다.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재산공개결과는 민정계및 TK세약화,민주계를 중심으로한 신정부실세들의 입지강화로 귀결되었다. 김대통령으로 볼때 집권초기부터 이러한 구획이 뚜렷이 지워지는 것을 바람직하지 않게 여길수 있다.실제 민정·공화계 일각에서는 재산공개파문처리방향에 대한 불만의 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터져나오는 상황이다. 정동호의원의 경우가 민정계 불만세력의 심리를 일부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정의원은 여론의 엄청난 비난에도 불구,끝내 의원직 사퇴나 자진탈당을 거부해 제명조치를 당했다. 여론반응이나 새정부의 카리스마에 눌려 공개적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으나 민정·공화계 일각에서 정의원과 유사한 생각을 가진 인사가 없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이의장내정자의 선택은 이러한 불만을 잠재우는데 도움이 된다. 이의원은 국민당총재를 지낸 6선의 원로이다.박준규·김재순씨가 떠난 자리를 메울 자격을 갖춘 인사라는데 이의가 없다. 이의원은 또 출신 지역이 대구이다.새정부출범이후 꾸준히 제기되어온 TK소외에 대한 불만을 잠재우기에도 이의원의 의장발탁은 적절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나아가 이의원은 언론인 출신으로 구공화당에서 정치를 시작했다.비록 3당합당이전의 민정당에 몸담은 적은 없지만 구여권의 뿌리를 깊게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의원의 경력은 민정·공화계의 불만을 누그러뜨리는데 상당한 역할을 하리라 기대된다.민자당에 입당한 이후 「김영삼대통령후보」만들기에 적극적이었다는 점,5공때 야당인 국민당을 이끌었고 개혁이미지도 갖췄다는 사실등은 민주계에게도 호의적 조건으로 투영되고 있다. 당초 김종필대표나 민주계인 황락주부의장을 의장으로 추대하려던 민주계 실세들이 「이만섭의장」을 전격 결정한 것도 더이상 이 문제를 늦추다가는 당의 중심축이 흔들릴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김종필국회의장설」이 실현될 가능성이 높아지면 민정·공화계의 불만이 고조되고 정동호의원제명처리를 위한 의총이나 당무회의결과까지 불투명해질수 있었다. 김대통령은 이에 따라 당초 생각했던 국회의장 내정시기를 성큼 앞당겨 이의원을 지명한 것으로 관측된다. 황명수의원을 국방위원장에 기용한 것도 나름의 배경이 있다.가장 눈에 띄는 것은 황의원이 민간인 출신이라는 점이다.5·16혁명이래 국회 국방위원장은 계속 군출신이 맡아 왔다.부동산투기물의로 의원직을 사퇴했던 유학성 전의원도 역시 장성출신이었다.황의원이 국방위원장으로 선출된다면 4·19혁명 직후의 5대국회(60년)에서 이철승 전신민당대표가 국방위원장을 지낸 이래 실로 33년만에 문민국방위원장이 탄생하는 셈이다.이는 정부직뿐아니라 국회에서도 「군냄새」를 없애겠다는 김대통령의 생각이 강력히 반영된 것이라는 관측이다.때문에 15대총선공천에서 군출신 인사들의 대거 탈락이 예고되고 있으며 문민국방위원장에 이어 문민국방장관출현도 예상된다. 김대통령이 임시국회소집이 20일 이상 남은 상황에서 국회의장및 국방위원장 내정자를 조기 발표한 것은 재산공개파문과 관련해 더 이상 가시적 조치는 없음을 내포하고 있다. 박준규국회의장,유학성전국방위원장에 이어 몇몇 상임위원장이나 당직자가 교체되리라는 일부의 전망을 뒤엎고 「김종필대표­이만섭국회의장」포석으로 정국을 정상궤도에 올려 놓겠다는 생각이라 볼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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