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4·19혁명
    2026-06-13
    검색기록 지우기
  • 마사지
    2026-06-13
    검색기록 지우기
  • 향응
    2026-06-13
    검색기록 지우기
  • 집무실
    2026-06-13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853
  • 기록으로 본 광복 50년전

    ◎총독부 작성 서울전도 등 희귀자료 “눈길”/명성황후 시해·고종 독살기도사건 판결문 선보여/4·19혁명 당시 계엄선포­공민권 제한기록 첫 공개 총무처 정부기록보존소(소장 이수기)가 광복 50주년을 맞아 오는 10일부터 12월10일까지 3개월간 계속되는 「기록으로 본 광복 50년」전에서 공개하는 각종 자료들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국권회복운동 판결문 영인집◁ 1895년 8월20일 일어난 명성황후시해사건,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1898년 일어난 고종 독살기도사건,갑오개혁정부 붕괴 이후 일본으로 망명한 유길준이 주도한 혁명정부 기도사건,한용운의 임제종 창립을 통한 일본 조동종 반대운동,양기탁이 주도한 국채보상운동,이동령 안명근 김구등이 주도한 서간도 독립군기지 건설운동등에 관한 자료가 들어 있다.지금까지 국내에 알려진 판결문은 19 06년 통감부 설치 이후 의병판결문과 일제시기의 판결문등이 대부분이다. ▲명성황후 시해사건 관련자 판결문=18 95년 11월13일 고등재판소에서 작성된 것으로 주모자는 군부협판(지금의 차관급에해당)인 이주회이며 직접 시해한 인물은 일본인에게 고용되어 있었던 박선으로 되어 있다. ▲서간도 독립군기지 건설사건 판결문=19 07년 이후 양기탁 이동령 김구등이 신민회를 결성,가족을 이끌고 서간도로 이주할 대상자를 모집하기 위해 도 단위 책임자를 전국적으로 임명하는등 비밀리에 전개된 운동이지만 매우 광범위하게 추진되었음이 새로 밝혀졌다. ▷조선총독부 작성 서울 전도◁ 이 지도는 1915년에 측도해 6년 뒤인 1921년 다시 수정 측도하고 이듬해인 1922년 7월 조선총독부 육지측량부가 축척 1만분의 1로 제작한 지도다.뒷면에는 붉은 글씨로 「용산군용지일반도」라고 부기되어 있다. 조선조 당시 도성의 성저 10리까지의 지경을 제작한 듯 오늘날의 서울시 일대를 지도 한장으로 축소해 치밀하게 작성했다. 부착물로 여의도도가 인쇄물이 아닌 채색도면으로 되어 있는데 이 지도가 여기에 부착된 것은 당시 여의도가 군용지로 활용되고 있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밤섬의 위치와 도로를 나타내고 이 지역이 일본인의 개인 소유지로 되어 있음도알 수 있다. ▷일제의 조선군사령부 배치도◁ 일제가 우리나라를 식민지화하고 대륙 침략의 전초기지 내지 병참기지화하기 위해 전국 요소요소에 군사시설을 갖추어 나가면서 작성한 것이다.당시 용산 일대는 일본군 주둔지 내지 병참기지화한 데 따른 각종 시설이 있었기 때문에 기밀문서로 분류되었던 지도다. 이에따라 총독부에서 「육군성 관리 국유재산에 관한 건」이라는 문서를 생산했는데 이 문서 가운데는 1931년 4월10일 조선총독부 관리대상 재산을 군부측이 사용하고 있는 「조선총독부 소관 토지건물차입조서」가 들어 있다.이 조서에 따르면 당시 조선주둔 일본군 헌병대사령부및 각 지방별 수비대와 부속 숙영지,연병장,수도급수시설지등과 도별 군부대의 작전범위는 다음과 같다. ○군부대 작전범위 기록 ▲제52연대=경기 일원 ▲제1연대=경북 일원 ▲제29연대=황해도 일원 ▲제3여단=황해도 일원 ▲제14연대=경기·경북 ▲제60연대=충남 일원 ▲제50연대=서울·강원·충북·경북·경기·함남 ▲제51연대=서울·충북 ▲제47연대=강원·경기·경북▷미곡·면화공출문서·징용자명부 정부기록보존소◁ 부산지소에서 발견된 1930년대말 전시상황에서 조선총독부의 군단위 일선기관이 작성한 문서들이다. 경기도 부천군이 1936년 작성한 「소사농업창고 관련서류」 「부천군관내도」등에는 부천군의 산업별 인구,경작면적,품목별 수확량 등이 거의 완벽하게 파악되어 있다. 「징용자명부」에는 태평양전쟁때 일본으로 징용당한 전국의 약 40만명의 명단과 인적 사항이 적혀 있다. ▷수양동우회 판결문◁ 일제의 집요한 강요로 민족운동가로서의 지조를 끝까지 지키지 못한 이광수를 비롯한 41명의 항일활동이 수록되어 있다.이 판결문에는 이광수 주요한등이 안창호의 권유로 흥사단에 가입한 이래 흥사단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수양동우회사건이 일어난 1938년까지 「통속교육보급회」를 조직하는등 각종 민족운동을 줄기차게 전개했음이 기록되어 있다.수양동우회는 안창호의 지시로 이광수가 서울 서대문에 있는 자택에서 1922년 결성했는데 1926년 김성수 최린등 민족운동지도자들을 대거 영입해 발전시킨 민족주의계열의 대표적인 운동단체다.그동안 학계에서는 겉으로 드러난 활동만을 가지고 개량주의 단체로 평가해 왔지만 이 판결문은 수양동우회의 활동방식을 당국을 속이기 위한 교묘한 술책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보고 있다. ▷정부수립 직후 국무회의록◁ 1949년 2월4일 금요일 하오 2시 개최된 제16회 국무회의는 중앙청의 부통령실에서 16명의 국무위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대통령의 사회로 개회되었다.이 회의의 의사록 가운데 「반민족특별위원회법 제5조 해당자 조사보고에 관한 건」에는 이승만대통령이 「반민법 제5조 해당자를 비밀히 조사해 선처하라」고 내무부장관에게 친전으로 직접 지시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반민법 제5조는 총독부 고위관료및 경찰관을 지낸 자는 공직에 임명될 수 없다는 규정이다.이 때문에 이 기록은 공식 문서를 통해 이승만대통령이 총독부 관료를 조사는 하되 선처해 그대로 임용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4·19혁명시 비상계엄 및 공민권제한 심사기록◁ 이번에 4·19관련 정부문서가 처음 공개되었다.첫째는 1960년 4월 19일 1시를 기해 내려진 「비상계엄의 건」 원본문서이다.이 문서는 대통령과 국무위원인 내무부장관 홍진기,국방부장관 김정렬등 10명이 함께 서명한 것으로 계엄선포의 목적을 「교란된 질서를 회복하고 공공의 안녕을 유지하기 위함」이라고 밝히고 있다.4월 19일 하오 1시부터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대전에 실시하며 계엄사령관은 육군중장 송요찬으로 임명하였다. 둘째는 1960년 4월 25일 상오 5시부터 사태의 호전에 따라 비상계엄을 경비계엄으로 바꾼다는 「계엄종류 변경의 건」이다.그런데 대상지역은 부산 대구 광주 대전지역에 한하며 서울은 제외되어 있다. 셋째는 4·19혁명 후 각 시도별로 구성된 반민주행위자 공민권제한대상자 심사위원회가 작성한 「반민주행위자 공민권제한 심사기록」을 공개했다.이 문서는 4·19혁명 후 반민주행위자 공민권제한법을 발표하여 3·15부정선거 관련자들을 처벌하기 위해서 작성된 것이다.이 문서에는 3·15부정선거를 모의하거나 주도적으로 참여한 자유당 정권 말기의 부패한 정치인 관료 재계인사 종교인사 학계인사들이 총망라되어 있다.이 문서들의 공개로 이승만정권에 대한 역사적 재조명작업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경제개발 5개년계획 관계철및 포항제철 관련문서◁ 우리나라 경제개발계획안은 19 59년 3월 당시 부흥부 산하에 있던 산업개발위원회에서 작성된 경제개발3개년계획안(1961∼1963)이 정부가 마련한 최초의 것이다.그러다가 5·16군사정변이 일어난 직후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1962∼1966)을 수립하고 사회·경제적 악순환을 시정하고 자립경제의 달성을 위한 기반을 구축하기 위해 19 62년 1월 6일자 국가재건최고회의 재경제 10호로 공표되었다.여기에는 5개년 계획수립의 의의,목표와 기본방침,전반적 내용,부문별 내용,수행에 따른 제정책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에 대한 역사적인 육필원고 담화문이 내각수반 송요찬의 명의로 수록되어 있다. 아울러 육군대장 박정희의 명의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정 승인하고 이를 집행하는데 따른 제반조치사항을 지시한 일자 역시 공표일과 동일함으로써 추진의 신속성을보여주고 있다. 이 문서는 3급 비밀로 분류되어 오다가 1963년 2월2일 「경제 402호」에 의거해 일반문서로 재분류되었다.
  • 제헌절 47주년 기념식/황의장,내각제 개헌론 비판

    국회는 17일 제47주년 제헌절을 맞아 황락주 국회의장,윤관 대법원장,이홍구 국무총리등 3부요인과 김용준 헌법재판소장,여야 각당대표,현역의원,제헌의원 등 7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국회의사당 3층 로텐더홀에서 기념식을 가졌다. 황의장은 경축사를 통해 『지난 40여년동안 9차례 헌법이 개정됐으나 4·19혁명과 6월 민주화운동에 힘입은 두차례 말고는 모두 집권자의 권력 강화와 집권연장을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면서 『이로 인해 우리 사회에는 헌법을 특정집단이나 정파의 이익을 위해 언제든지 고칠수 있는 대상으로 가볍게 인식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정치권 일각에서 제기하고 있는 내각제 개헌론을 비판했다. 황의장은 이어 『현행 헌법은 기나긴 권위주의 시절을 청산하고 민주화에 대한 온 국민의 염원을 담아 마련된 헌법인 만큼 온 국민이 헌법정신을 되새기며 새로운 각오와 결의를 다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회는 기념식을 마친 뒤 광복 50주년기념 의정사진전시회 개막식도 가졌다.
  • 「새로쓰는 한국현대사」 속의 두거인 재조명

    ◎이승만·김구의 우정과 갈등/황해도출신 한살산… 상해 임정활동 공통점/해방후 우남은 「군정」·백범은 「협상」을 추구 조선왕조 끝시기로부터 오늘날 남북대립시기에 이르기까지 많은 정치지도자들이 배출됐다.그 가운데 우남 이승만과 백범 김구는 앞자리를 차지하는 인물이다. 우남은 18 75년에,백범은 18 76년에 태어났다.모두 황해도 출신으로 사실상 동년배지만 백범은 우남을 평생동안 형님으로 모셨다.어려서 한학을 공부한 우남은 성장하면서 서양문물에 눈을 떠 미국 조지워싱턴대학,하버드대학,프린스턴대학 등에서 국제정치와 국제법을 전공했다.그리고 일찍 기독교 정신문화를 받아 들였다.이와는 달리 토착적 성장의 길을 걸은 백범은 서당 글공부가 교육의 전부였다.또 토착종교 동학에 가담해 왜병과 싸우는 등 민족적 정열을 불살랐다. 두사람은 1919년 3·1운동 직후 시차를 두고 상해 임시정부를 통해 연결고리를 맺는다.우남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으로,백범은 마지막 주석으로 선출되어 독립운동 일선에 나섰던 것이다.그러나우남과 백범은 임정과의 연결에서 질적 차이를 드러냈다.백범은 임정을 떠나지 않은 채 그 간판을 해방의 시점까지 지킨데 비해 우남은 미국을 무대로 외교 선전 측면의 독립운동을 벌였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그들은 해방된 조국에 환국해서는 독립정부 수립운동에 앞장 섰다.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한반도 문제에 관한 미·소·영·중 4개국 외무장관 합의 의정서」가 발표되었을 때는 손을 맞잡고 싸웠다.그러나 두 지도자 사이에는 차츰 노선의 차이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했다.우남은 강력한 반소·반공론에 입각해 남한의 단선·단정노선을 제기하고 나섰다.이 노선에 반대한 백범은 이데올로기보다 민족을 앞세웠다. 1947년에 공식화된 미국과 소련 사이의 냉전은 미국으로 하여금 우남이 주장해온 단선·단정론을 지지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그리하여 미국의 주도아래 국제연합은 19 48년 5월10일 남한에서 총선거를 실시해 대한민국을 건국시키는 일을 서두르게 됐다.남한의 단선·단정은 분단체제의 고착은 물론 동족상잔의 비극을 불러 일으키게될 것이라고 비판한 백범은 남북협상을 추진했다.백범은 김규식과 함께 1948년 평양 남북정치지도자 연석회의에 참석한다.그러나 북한은 곧 세워질 공산정권의 합법성을 쌓는데 두 애국지도자의 충정을 이용했을 뿐이다. 5·10총선거에 따라 대한민국 제헌국회가 성립됐다. 국회의장에 선출된 우남은 헌법에 의해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초대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5·10총선을 거부했던 백범은 자신이 이끌던 한국독립당을 중심으로 통일운동을 벌였다. 백범의 통일운동은 고귀했으나 외로웠다.결국 1949년 6월26일 육군대위 안두희의 흉탄에 쓰러지고 말았다.통일된 독립국가 수립을 꿈꾸던 그의 숭고한 사상은 오늘날 까지도 우리의 지표가 되고 있다. 우남은 건국 초기에 험난한 길을 걸었다.특히 1950년6월25일 북한의 전면 남침을 맞아 미국과 국제연합 지원아래 싸워서 국가를 수호했다.대한민국의 건국과 수호는 확실히 그의 큰 업적이라 할 수 있다.그러나 사사오입개헌과 1960년 3·15부정선거는 그에게 오명을 안겨 주었다.그는 전 국민을 분노시킨 4·19혁명에 의해 하야할 수 밖에 없었다. 돌이켜 종합해 생각해 보건대 백범 두분 모두 우리 배달겨레에게 소중하게 기억된다. 우남은 건국과 국가수호라는 업적을 남겼으며 백범은 분단상황에서 민족의 통일을 잊지 않게 하는 정신적 자산을 남겼다.두분은 훌륭한 저술가이기도 했다. 우남의 「독립정신」과 「일본내막기」는 그의 뛰어난 국제정치 안목을 보여 주고 백범의 「백범일지」는 그가 민족의 자유와 자존을 얼마나 존중했는지 말해 준다.
  • 민주 핵심 6인에 듣는 「신당 입장」

    ◎KT와는 더이상 못한다­권노갑/정권교체위해 신당 필요­임채정/와해 안되게 최선 다할것­정대철/전당대회서 당문제 해결­문희상/지역당 전락막게 신중을­이철/지역할거만 부추겨… 불가­노무현 아태재단이사장의 신당구상이 윤곽을 드러내면서 민주당 의원들이 신당참여와 잔류의 선택을 강요받고 있다.60여명에 이르는 의원들이 신당에 참여하리라는 분석속에 이기택 총재계를 비롯한 30여명의 의원들이 추이를 관망하고 있다.그러나 이들도 김이사장이 신당의 구상을 밝히게 될 오는 18일쯤이면 상당수 신당을 택하리라는 전망이 우세하다.신당에 대한 의견을 「적극참여파」와 「비판적 참여파」,「관망파」,「잔류파」로 나눠 듣는다. ▷적극참여파◁ ▲권노갑 부총재=더 이상 이기택총재와는 당을 같이 할 수 없다는 게 김이사장을 비롯한 대다수 소속의원들의 생각이다.김이사장은 그동안 이총재에게 당의 화합과 단결을 위해 수없이 양보를 거듭해 왔으며 마지막 순간까지도 이총재와의 동행을 원했다.이를 이총재 스스로가 거부한 것이다.민주당의 틀속에서는 앞으로도 이런 갈등과 반목이 되풀이될 뿐이다.이런 정당으로는 정권교체를 바라는 국민들의 여망을 수용할 수가 없다.따라서 신당을 통해 범야권세력을 결집,새로운 수권정당의 틀을 하루속히 갖추는 길만이 국민여망에 부응하는 길이다. ▲임채정 의원=지난달 30일 동교동 김이사장의 자택에서 신당창당을 건의했다.각 계파가 철저히 나눠먹기식 운영을 하고 있는 민주당의 현체제로는 수권정당의 기틀을 갖출 수 없다.지방선거를 통해 전기가 마련된 만큼 정권교체의 숙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새로운 정권교체세력의 결집이 중요하며 신당이 불가피하다. 신당은 단순히 이기택 총재를 거세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김이사장의 대권을 위한 사당이라는 비난도 잘못된 것이며 지역당화할 것이라는 우려도 기우다.현정권의 비민주적 정국운영을 반대하는 모든 인사는 신당에 참여할 수 있다.신당 역시 이들 인사를 적극 영입할 것이다. ▷비판적참여파◁ ▲정대철 고문=동교동계에서 신당창당안이 나왔을 때 반대했다.정도가 아니라는 게 내 생각이다.비록지금의 민주당이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민주당은 지역할거구도를 깨기 위한 정신으로 통합된 정당이다.민주당의 문제는 민주당 내에서 해결하는 것이 순리다.이총재의 당운영 방식은 물론 잘못됐으며 이에 대해 심판이 따라야 한다.그러나 이는 전당대회를 통해 해결하면 된다.이를 위해 김이사장과 이총재를 만나 당을 깨지 않는 방안을 도출해 내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서로 제갈길을 가게 된다면 신당에 참여,수권정당의 기틀을 다지는 데 합심하겠다.김이사장과 개인적으로 특별한 관계에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와해된 민주당은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문희상 의원=신당은 안된다.내가 (신당에)가고 안가고가 문제가 아니다.이 당이 어떻게 만들어진 당인가.이총재가 그동안 해 온 잘못은 당안팎에서 누구나 알고 있다.전당대회를 통해 이를 심판하면 된다.김이사장이 총재를 맡겠다고 하면 이 당에서 맡으면 된다.왜 우회하려 하나.역사를 보더라도 4·19혁명으로 집권한 민주당이 결국 신·구파로 갈려 갈등을 되풀이하다가 5·16을 맞지 않았는가.지방선거에서 승리를 거둔 지금일수록 선거결과에 겸허해야 한다.국민들이 당을 깨라고 민주당을 찍은게 아니다.승리에 도취해 오만해지면 국민이 욕한다.내 정치인생이야 어차피 「김대중 사람」으로 돼 있으니 신당을 쫓을 수 밖에는 없다.다만 정권교체를 눈앞에 두고 이런 위기를 맞게 돼 안타까운 심정이다. ▷관망파◁ ▲이철 의원=(동교동측으로부터)아직까지 어떤 얘기도 들은 바 없다.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신문에 보도된 내용이 전부다.때문에 (신당에 대해)무엇이라고 얘기할 단계가 아니다.신문을 보고 거취를 결정할 수는 없지 않은가. 다만 내 자신에게 이로운 길보다는 옳은 길을 택할 것이다.창당이 불변의 방침이라면 멀지않아 (동교동측으로부터)설명이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김이사장의 진의를 파악하는 시간이 필요하다.그러나 당장은 민주당의 통합정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민주당은 영호남의 지역적 한계를 극복하자고 만든 당이다.이를 깨고 다시 지역당화할 우려가 높은 길을택한다면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 ▷잔류파◁ ▲노무현 부총재=지역할거구도를 부추기는 신당창당은 어떤 명분으로도 옳지 않으며 정치적으로 성공할 가능성이 매우 낮다.어떤 경우에도 참여하지 않겠다.다만 이총재와 앞으로 계속 당을 해나갈 것이냐의 문제는 좀더 시간이 필요하다. 역대정권에서 소외되어 온 호남인들의 처지와 심경을 충분히 이해하지만 역사발전을 포기하는 지역정당화를 통해서는 호남의 소외를 해결할 수 없다.김이사장은 신당을 만들어 정계에 복귀하느니 민주당을 그대로 두고 전당대회를 통해 나서는 것이 떳떳할 것이다.지금 사태의 추이를 관망하는 의원들이 많은 모양인데 정치지도자로서 이런 역사적 전환점에 서서 책무를 다하겠다면 눈치살피고 줄서는 행태는 버려야 한다.
  • 교육개혁 발자취/50년새 6차례… 「입시」만 11회 “손질”

    ◎정권 바뀔때마다 손대 수험생들 혼란 초래/「새안」 여론수렴 1백여회… 15개월만에 “햇빚” ▲세계 최고의 입시지옥 ▲한해 사교육비 17조원 ▲토플점수 세계 25위 ▲고교학력 세계 최하위 ▲공교육비 선진국의 3분의 1 ▲대학교수 한 사람앞 대학생수 일본의 3.5배­우리나라 교육의 현주소다. 이 지표에서 보듯 우리교육의 세계 석차는 「꼴찌」에 가깝다. 정부의 교육개혁은 이같은 우리교육의 낙후성을 더 이상 방관할 수 없다는 절박감에서 출발했다. 교실에서 분필로 가르치는 암기식 교육으로는 미래의 첨단 정보사회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다는 판단 또한 교육개혁의 절실함을 더해 주었다. ○…교육개혁은 사실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입시제도를 중심으로 개혁안을 만들었다.그러나 추진력의 부족과 이해집단의 반발,국민의 인식부족으로 언제고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오히려 혼란만 초래했을 뿐이다.시행착오를 거듭하며 11차례나 바뀐 입시제도는 수험생을 혼란스럽게 한 교육행정의 대표적인 잘못된 사례였다. ○…해방 이후 굵직굵직한 교육개혁 조치만 6차례가 단행됐다. 미군정기와 제1공화국에서 이루어진 최초의 개혁조치는 6­3­3­4제의 단선형 학제 채택과 의무교육 실시가 핵심이었다.한자와 왜색문화 일소를 기치로 내걸었던 당시의 개혁은 미국식 교육의 도입과 교육재건이라는 특징을 지녔었다. 60년 4·19혁명으로 탄생한 제2공화국이 학원혼란 수습이란 차원에서 단행한 개혁은 교육행정의 분권화를 내세웠지만 61년 5·16군사혁명후 혁명정부의 개혁안에 밀려 흐지부지됐고 혁명정부는 반공과 국방교육의 강화,정신혁명을 근간으로 하는 인간개조,생산과 기술교육의 진작 등을 내걸어 군·학 연계에 의한 개혁이라는 특징을 보였다. 제3공화국에서 유신정권으로 이어지는 시기에는 경제발전에 따른 인력양성과 학생운동의 통제수단으로 개혁이 필요했다.중학교 무시험제 도입,고교평준화제 실시,교수 재임용제·학도호국단 창설 등의 조치가 이뤄졌다. 제5공화국도 집권 초기인 80년7월30일 대학본고사 폐지를 주내용으로 하는 대학입시 개혁안을 발표했다.졸업정원제실시,대학입학인원 확대,과외금지 등을 주내용으로 한 당시의 개혁은 국민의 지지기반을 넓히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88년 제6공화국은 독학사제도 도입과 함께 대학입시제도를 수능·내신·본고사로 치르는 개혁안을 내놓았다 ○…문민정부가 들어선 뒤 김영삼 대통령의 선거공약에 따라 93년8월10일 교육개혁위원회 규정이 대통령령으로 공포되고 대통령의 직속 자문기구로 교육개혁위원회가 발족됐다. 이 규정에 따라 교육개혁위는 지난해 2월 위원장에 대우재단 이석희 이사장,부위원장에 서강대 김윤태 교수를 선임하고 위원 23명도 위촉,교육개혁 작업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이어 3월에는 전문위원 10명을 위촉했고 국무총리행정조정실장을 위원장으로 실무협력위원회가 구성됐다. 교육개혁위는 위원회의 구성을 마친 뒤 곧바로 국민여론 수렴 작업에 들어가 그동안 공청회 3회,정책협의 29회,교육현장 방문 80여회,국민제안 접수 4백40여건등 활동을 벌였으며 외국실태도 3차례나 조사했다.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교개위는 2백여차례의 소위원회,14번의전체회의를 통해 교육개혁안을 논의했다.교개위는 그러나 지난해 6월 대학입시 본고사를 95년부터 폐지하자는 건의안을 냈다가 하루만에 철회하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그 뒤 지난해 9월 ▲교육재정 확충 ▲대학교육 개혁 ▲사학의 자율과 책임 제고를 우선 추진 3대 과제로 삼고 교육개혁 11대 과제를 마련해 대통령에게 보고했다.교개위는 이 방안을 토대로 최종 개혁안의 입안에 나서 9대 과제를 교육개혁안으로 확정,발표하게 된 것이다. ○…교육개혁안을 마련하는데 핵심역할을 한 사람은 이명현 상임위원(53)이다.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브라운대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이 위원은 한국외국어대 교수를 거쳐 서울대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이위원과 함께 새 입시제도를 마련하는데 중심적인 활동을 한 곽병선 전문위원(54)은 미국 마켓대 철학박사 출신으로 한국교육개발원 교육공학연구본부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 다시 기린 「그날의 뜻」/정부주관 첫 4·19 기념식

    ◎이 총리 등 천2백명 참석 4·19혁명 제35주년인 19일 서울 강북구 수유동 4·19국립묘지에서 정부주관으로 첫 혁명기념식이 열린 것을 비롯,전국 곳곳에서 마라톤대회 등 각종 기념행사가 열렸다. 특히 올해 처음으로 국립묘지로 승격,성역화된 4·19묘역에는 유가족과 학생·정당대표·관련단체회원 등이 이른 아침부터 줄지어 찾아와 희생자의 숭고한 뜻을 기리는 한편,시민민주혁명으로 재평가된 4·19정신의 계승을 다짐했다. 국가보훈처는 이날 상오 10시 4·19국립묘지에서 이홍구 국무총리와 4·19혁명관련단체회원 등 1천2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4·19혁명기념식을 가졌다. 이날 행사는 4·19가 지난해 「의거」에서 「혁명」으로 35년만에 재평가된데 따라 처음으로 대대적으로 거행됐다.
  • 서울대 총장·총학생회 회장/4·19기념탑 공동헌화/11년만에 처음

    서울대 이수성 총장을 비롯한 보직교수들과 김태식 총학생회장(23·공법학과)등 학생대표들은 4·19혁명 35주년인 19일 상오 10시 「서울대 4월 학생혁명 기념탑」에 함께 헌화하기로 했다. 서울대총장이 학생대표와 함께 4·19탑에 헌화하는 것은 84년 학생회가 부활된 뒤 이번이 처음이다.
  • 4·19정신의 참다운 계승(사설)

    수유리 4·19묘역의 성역화사업이 마무리되고 국립묘지로 승격된 가운데 4·19혁명 35돌을 맞는다.이러한 현창사업은 4·19의 역사적 자리매김이란 점에서 잘한 일이며 국민의 오랜 바람을 실현시켜준 쾌거라 하겠다.그동안 허술하게 방치됐던 묘역이 말끔히 단장되어 시민혁명의 성지로서,민주주의의 교육장으로서 등장하게 된 것은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다. 4·19는 뒤이어 일어난 5·16 쿠데타에 의해 부정되고 정당성이 훼손되었으며 그이후 군사정권과 권위주의정부에 의해 평가절하되고 폄하되기도 했다.그러나 김영삼대통령의 문민정부에 의해 4·19의 정통성계승이 주창되었고 「의거」에서 「혁명」이란 명칭도 되찾게 됐다.지난 1월 법개정으로 「4·19혁명」이란 공식명칭을 얻게 된 것은 굴절된 역사의 복원이란 큰 뜻을 지닌다. 4·19혁명은 학생들의 주도로 시민의 동조아래 부정과 불의에 항거하여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현대사의 큰 분수령이다.3·1독립운동과 더불어 우리민족사에 빛나는 불멸의 항쟁이다.우리국민이 살아 있음을 세계에 알렸을 뿐아니라 세계학생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무엇보다도 4·19는 60년대초 잠자던 시민의식을 각성시켜 이후 한국을 민주화의 대도로 진입시키는 전환점이 됐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일부에서는 4·19를 「미완의 혁명」이라고도 한다. 혁명후 권력을 인수할 조직적인 주체가 없었기 때문이다.그러나 이 「미완의 혁명」은 문민정부에 의해 그 정통성이 계승되고 완성돼 가고 있는 중이다. 4·19정신의 계승은 바로 자유민주주의를 정착시키고 부정부패를 이땅에서 영원히 추방하는 일이 아니겠는가.이 일을 위해 오늘의 우리 정부는 혼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온국민의 동참이 있어야 할 것이다.우리는 당시 민주제단에 피를 뿌려 산화한 희생자와 부상자들의 숭고한 정신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 최형우 의원 「4·19정신과 문민정부 새 과업」 강연

    ◎「생활의 질」 향상에 정치초점 맞춰야/국민욕구 제대로 못읽으면 정치 설자리 없어 민자당의 최형우의원은 18일 「4·19혁명 부상자회」주최 조찬모임(조선호텔)에서 「4·19혁명정신과 문민정부의 새 과업」을 주제로 특별강연을 했다. 그는 강연에서 4·19의 민주혁명 정신을 개혁과 세계화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이를 미래지향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개인적 구상을 밝혔다.강연 요지는 다음과 같다. 35년전 그날 부정선거에 항거해 일어난 4·19 민주혁명의 큰 목표는 자유와 민주주의,정의사회 구현,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번영이었다. 문민정부는 4·19 혁명정신과 이를 지지하는 국민들이 만든 것이다.이제 역사를 뒤로 돌려서는 안된다.창의가 발휘되고 자유가 물결치는 사회야말로 진정 귀중한 것이다. 문민정부는 출범후 2년동안 공직자의 재산공개를 통해 만성적 부정부패의 소지를 없앴다.금융실명제로 정경유착의 질긴 고리를 끊고 토지실명제로 불로소득과 투기를 근절시켰다.군내부의 사조직을 해체,헌정사를 왜곡시켜온 군의 정치개입을 원천봉쇄하고 통합선거법 제정으로 깨끗한 선거의 기틀을 마련했다. 개혁의 총론은 대체로 마무리 되어가고 있다.총론적 개혁이 위로부터의 것이었다면 이제부터 시작되는 각론은 아래로부터 국민의 동참속에 추진돼야 한다. 세계화는 특정집단에게 불이익을 주는 개혁이 아니라 법과 제도와 관행을 세계 일류수준으로 끌어올리자는 2단계 개혁을 말한다.이를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무엇보다 기술축적과 과학기술 혁명이 중요하다.기술혁명 없이는 무한경쟁에서 이길 수 없다. 둘째 정보화혁명이다.산업화는 늦었으나 정보화는 앞서 나가야 한다.이에 집약적 투자가 절실히 요청된다. 셋째 세계적 수준의 사회간접자본이 확충돼야 한다.우리의 관문인 부산항이 적체가 심해 배가 기항조차 못하고 있다.옛 정권들이 사회간접자본 투자를소홀히 해 막대한 물류비용은 우리의 경쟁력을 흔들고 있다.이제라도 시급히 세계적 수준의 사회간접자본을 확충하지 않고는 살아 남을 수 없다. 우리는 이를 통해 기필코 선진 10대 강국안에 진입해야 한다.이것만이 조국의 번영을외친 4·19혁명 정신에 보답하는 길이다. 앞으로 국민들의 생활의 질에 대한 욕구는 폭발적으로 증폭돼 갈 것이다. 일본의 지자제 선거결과를 언론은 돈 안드는 선거시대에 정치권 불신이 빚어낸 무소속의 대거등장으로만 보도하고 있다.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국민생활의 질 향상」 욕구를 적절하게 반영하지 못하는 정치는 앞으로 설 자리가 없음을 알린 점이다. 일본은 배타적이며 폐쇄적 경제구조로 말미암아 국가경제의 성공을 국민생활의 질적 향상으로 연결시키지 못하고 있다.외국상품을 배제하는 폐쇄적 국내시장은 소비자로 하여금 턱없이 비싼 가격을 지불하게 하고 국민생활의 질은 1류가 아니라 2류가 되고 있다. 이번 선거결과는 이런 문제에 대한 국민의 불만을 읽지 못하고 정당간 이합집산이나 파벌정치·정경유착의 고인 물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정치권에 대한 경종인 것이다.우리에게도 생활의 질은 앞으로 가장 중요한 과제로 부각될 것이다. 앞으로의 정치는 선진국 진입이라는 과제와 국민생활의 질 향상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어떻게 잡느냐에 초점을 맞춰나가야 할 것이다.
  • 오늘 4·19혁명 35돌/수유리국립묘지 시민 참배 줄이어

    ◎고대생 등 7천명 기념 마라톤 대회 4·19혁명 35돌을 하루 앞둔 18일 서울 강북구 수유동 4·19 국립묘지에는 대학생과 시민들의 기념 마라톤과 참배행진이 줄을 이었다. 고려대학생 5천여명은 이날 하오 학교 운동장에서 4·19 국립묘지까지 행진한 뒤 묘역에 참배했다. 이에 앞서 이 학교 학생 2백여명은 학교 4·18기념비에 헌화하고 학교에서 4·19 국립묘지까지 왕복 16㎞구간에 걸친 마라톤 대회를 가졌다. 광운대학생 3백여명도 낮 12시쯤 학교에서 4·19기념식을 갖고 4·19국립묘지까지 걸어가 참배했다. 숭실대와 산업대,한신대 대학원생 등 1천여명도 기념마라톤과 함께 4·19묘지에 참배하고 4·19의 의의를 되새겼다. 4·19혁명 희생자 유족회는 이날 하오 6시쯤 4·19국립묘지 유영봉안소에서 추모제를 열고 영정들에게 헌화했다.
  • 지방선거「정치투쟁장화」에 “경종”/김대통령 지방순시서 남긴 메시지

    ◎“일꾼 뽑는 깨끗한 선거 실현”강조/행정공백 불용… 소신껏 업무 추진 독려 지난 1월24일부터 시작된 김영삼 대통령의 연두 지방순시가 17일 서울시를 마지막으로 3개월여만에 끝났다.청와대 관계자들은 『김대통령이 이번 순시를 통해 국민들에게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다』며 『6월 지방선거가 결코 국가발전에 역행하는 방향으로 작용하도록 좌시하지 않겠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라고 설명했다. 한 관계자는 지방선거와 관련된 김 대통령의 의지를 세 방향으로 설명했다.행정공백 최소화,깨끗한 선거풍토 확립,정치인 아닌 「일꾼」을 뽑는 선거이다.김 대통령의 직선적 성격을 고려할 때 이 가운데 잘못되는 게 있다면 어떤 「특단의 조치」가 내려질지 쉽게 짐작하기 어렵다.청와대의 관련 비서실에 긴장감마저 돌 정도다. ○…행정공백의 최소화는 선거가 치러지기까지의 과정에서 이루어져야 할 사안이다. 일부 공직자들이 출마를 위해 잇따라 사퇴함으로써 공직사회가 동요하는 게 사실이다.일각에서는 유력한 당선후보에게 줄을 대는데 바빠민원업무를 게을리 하는 상황도 벌어지고 있다.김 대통령은 선거와 관계 없이 공직자들이 소신있게 업무를 추진하도록 당부했다.야당측이 대통령의 지방순시를 「선거지원활동」이라고 주장했을 때 전혀 개의치 않고 일정대로 순시를 끝낸 것도 행정부의 일관성 있는 업무수행과 연관이 있다. 이와 관련,청와대와 총리실 감사원 등은 공무원들이 선거를 틈타 기강해이 혹은 「복지부동」에 빠지지 않도록 감사의 고삐를 바짝 죈다는 방침이다. 김 대통령의 언급은 선거가 끝난 뒤 직선단체장에 의해 빚어질 수 있는 부작용까지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해석이다.타락선거로 당선된 인사는 취임 뒤에도 불법을 저지를게 분명하므로 그대로 방치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굳다.『모든 선거를 다시 치르더라도 부정은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는 김 대통령의 경고를 「엄포」로만 볼 수는 없다. ○…김 대통령은 이날 서울시청에서 지방순시를 마무리하면서도 이 문제에 대해 강도 높게 언급했다. 김 대통령은 『민주주의의 본산인 영국의 지자제는 간선제이며 임기가 1년인런던시장은 당적을 가져서는 안될 뿐 아니라 시의원들에 의해 뽑힌다』고 지적하면서 『지자제는 결코 정치투쟁의 무대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역설했다.또 『영국의 메이저총리는 선거는 4년에 한번(국회의원선거)으로 족하고 그 이상은 국력의 낭비이며 특히 직선제를 하면 무분별한 공약남발로 사회불신만 가중시키는 폐단이 있다고 말하더라』고 소개했다. 김 대통령은 『우리도 이번 지자제 선거에 있어 이런 것들(공약남발)이 우려되고 있다』면서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앞으로 고쳐갈 것은 과감하게 고쳐 나가겠다』고 밝혔다.이어 『우리는 마치 지자제가 전부인 양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과거 민주당 정권 때 지자제를 하다가 5·16쿠데타로 중단된 일이 있다』고 말해 지자제 자체보다 실천과정이 중요함을 강조했다. ◎「4·19묘역」35년만에 제 위상 갖추다/김 대통령 「성역화 사업」추진 안팎/취임이후 역사 재평가 작업 결실/「5·16」 「12·12」쇠락… 역사인식 바꿔 김영삼 대통령이 4·19혁명 35주년을 이틀 앞두고 17일 수유리 4·19묘역을참배했다.김 대통령은 취임 직후 현직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4·19묘역을 찾은 이래 해마다 이곳을 방문했다.이번이 세번째이니 방문 자체는 새로울 게 없다.그러나 이날 참배의 의미는 각별하게 받아들여진다.김 대통령의 지시로 성역화 사업이 마무리된 뒤 첫 방문인 탓이다. 김 대통령의 문민정부가 이전과 구별되는 잣대 중의 하나로 역사의 재평가를 들 수 있다.「3·1운동」 「임시정부」 「4·19」 「5·18」 등 민중민주운동 성격의 사건이나 단체가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5·16」이나 「12·12」는 쇠락하고 있다. 김대통령은 자신이 설정한 역사 인식이 후대에도 이어지길 바라고 있다고 청와대 관계자는 설명했다.역사의 재평가 작업을 구호가 아니고 실질적으로 추진하려 한다는 것이다.순국선열 유해봉환,중경 임시정부 청사의 복원이 그러한 맥락에서 이뤄지고 있다.4·19묘역 성역화도 물론 같은 의미를 지닌다.김 대통령의 4·19에 대한 애착은 사건을 직접 겪었기에 더욱 애틋할 수 있다. 김 대통령은 지난 93년 4·19묘역을 성역화하도록 지시하면서 『4·19는 30여년의 굴절된 역사를 거쳐 문민정부 출현으로 비로소 미완성에서 완성의 길로 나아가게 됐다』고 강조했었다. 김 대통령은 이날 묘소를 찾은 자리에서 비슷한 감회를 피력했다.새로 단장된 묘소주변을 둘러본 뒤 『시민들이 이곳을 즐겨 찾는 가운데 독재와 불의에 항거하는 민주주의 정신을 배우는 산 교육장이 될 수 있도록 정성껏 가꾸어 주기 바란다』고 최병렬 서울시장에게 지시했다.이어 4·19 당시 아들을 잃은 김월선씨(81)가 연신 눈물을 닦으면서 『묘역을 단장해 주어 고맙다』고 인사하자 『해마다 이곳에서 만나니 반갑다』고 답례했다. 김 대통령은 묘역을 일일이 둘러본 뒤 30년생 주목 한그루를 기념식수했다.이 주목이 지켜보는 한 4·19에 대한 평가가 다시 바뀌지 않기를 바랐을 것이다.
  • 지하철건설 탄력예산 요구/최 서울시장(국무회의:28일)

    ◎빌딩 가스사고 막게 안전점검 철저/이 총리 28일 국무회의는 별다른 토의없이 17개 안건만을 심의하고 끝났다.최인기 농림수산부장관의 저수지청소 추진결과와 주돈식 문화체육부장관의 국악기 개량사업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최병렬 서울시장은 이날 회의에서 통과된 내년도 예산편성지침과 관련,『지하철건설때문에 서울시가 지고 있는 5조원의 빚이 오는 97년에는 7조원으로 늘어나 해외에서 현금차관을 들여와 일부를 갚으려고해도 시설재의 도입만 허용하고 있는 법률때문에 불가능하다』고 고충을 토로. 최시장은 『따라서 앞으로 지방자치선거에서 당선된 서울시장은 엄청난 빚더미를 짊어지게 된다』고 지적하고 『이같은 현실을 선거에서 이슈로 부각시켜야 한다』고 주장. 최시장은 또 『앞으로도 계속 지하철을 건설해야 하는데 이대로 가면 97년에는 신규사업을 시행할 수 없다』면서 탄력적인 예산편성을 요구. ○…최 시장은 예산의 운용에 대해서도 『일본의 중앙정부와 지방정부는 세금을 되도록 아끼기 위해 부서진 집을 새로 짓는 돈을무상으로 지원하지 않고 은행이 장기저리로 빌려주도록 하고 있다』고 소개하며 이같은 사례를 본받아야 한다고 강조. ○…홍재형 경제부총리는 가뭄지역에 대한 예산이 제대로 지원되지 않고 있다는 김용태 내무부장관의 지적에 대해 『관정을 개발해도 경제성이 없는 곳이 많기 때문에 저수지에 물을 채울 수 있는 곳을 파는데 먼저 자금을 지원하고 있다』고 설명. ○…주 문화체육부장관은 가야금의 현을 12개에서 22개로 늘리는등의 국악기 개량사업에 관해 『우리 전통악기는 오랫동안 개량이 되지 않아 현대음악을 연주할 수 없다』고 개량사업에 착수한 배경을 설명하고 『28일 개량악기 시연회에서는 「오 나의 태양」등 외국곡이 연주된다』고 소개. ○…이홍구 국무총리는 『일본의 독가스사건으로 국민들이 불안을 느끼고 있는 가운데 우리나라의 대형 빌딩에서도 가스가 새는 사고와 화재가 발생하고 산사태등 안전사고가 일어나 걱정』이라고 말하고 『이같은 사고들은 대형 참사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므로 관련부처는 철저한 점검과 단속을 실시하고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도 안전관리가 생활화될 수 있도록 교육에도 힘써 달라』고 당부. ▲외자도입법 시행령(개) ▲지적법 시행령(개) ▲기업활동 규제완화에 관한 특별조치법 시행령(개) ▲전기통신기본법 시행령(개) ▲전기통신사업법 시행령(개) ▲국민연금법 시행령(개) ▲독점규제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 시행령(개) ▲하도급거래 공정화에 관한 법률 시행령(개) ▲94 회계연도 국민투자기금 결산보고서안 ▲96년도 예산안 편성지침안 ▲94년도 공무원연금기금 운용상황보고안 ▲영예수여안(다목적연구용 원자로건설 유공자등) ▲영예수여안(외국대통령) ▲영예수여안(군사외교활동 유공자) ▲정부인사발령안 ▲제76주년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기념행사 계획안 ▲제35주년 4·19혁명 기념행사 기본계획안
  • 마산 3·16의거 35돌/마라톤·「해원상생굿」 등 한달간 기념행사

    1960년의 부정선거에 항거,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마산 3·15의거 35주년 기념행사가 15일의 기념식을 시작으로 내달6일까지 계속된다. 이날 상오 경남 마산 실내체육관에서 3·15의거 기념사업회(회장 강주성) 주최로 열린 기념식전에는 3·15의거 희생자가족과 시민 등 1천5백여명이 참석,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는 마산시 민정신을 길이 이어갈 것을 다짐했다. 올해의 3·15의거 기념행사는 오는 26일 단축마라톤대회가 열리고,내달 1일 김주열군의 시신이 발견됐던 서성동 구황매립지에서 「해원상생굿」이 펼쳐지는 등 내달16일까지 각종 미술·문화행사 드어이 계속된다.
  • 한국의 발전이끈 50인

    1945년 광복 이후 지금까지 50년 동안 어떤 사람들이 우리나라를 이끌어 왔는가.서울신문이 광복 50년을 이끌어온 각계인사 50인을 선정,소개한다.북한사람과 외국국적을 가진 사람은 선정대상에서 제외했다. ▷이승만◁ 1875.3.26∼1965.7.19.황해도 평산출신.배재학당졸업·미국 프린스턴대학 철학박사·초대∼3대 대통령,독립협회등의 간부로 개화운동.일제때 상해임시정부 대통령을 역임하는등 광복때까지 해외에서 독립운동.해방직후 미국에서 귀국해 민주진영 최고지도자로서 건국준비에 매진.48년 제헌의회의 국회의장에 이어 초대 대통령에 당선.장기집권을 위해 불법적 개헌을 감행한끝에 60년 4·19혁명으로 하야 한뒤 하와이로 망명했다. ▷김구◁ 1876.8.29∼1949.6.26.황해도 해주출신.대한민국 임시정부 경무국장 국무령 주석·한국독립당 집행위원·민주의원 총리·국민의회 부주석.일제때 신민회 황해도총감을 시작으로 평생을 독립운동에 몸바친 민족주의자.한인애국단을 조직해 이봉창의사 등으로 하여금 일본왕등에게 폭탄을 던지게 했다.임시정부 주석으로 광복군을 창설했으며 해방뒤 남북분단을 막기 위해 평양을 방문하기도 했다. ▷김병로◁ 1887∼1964.전남순창출신.1913년 일본메이지대졸업.일제시절 경성법전·보성전문교수 거쳐 변호사로 활약하면서 광주학생운동,6·10만세운동,원산파업사건 등 민족운동관련사건 무료변론.항일단체인 신간회중앙집행위원장역임.46년 남조선과도정부사법부장을 맡았고 건국후 초대·2대 대법원장을 거치며 우리나라의 사법제도의 기틀을 다졌다. ▷조병옥◁ 1894.3.21∼1960.2.15.충남 천안출신·미국 콜럼비아대 대학원 수료·1929년 광주학생사건으로 3년 복역·조선일보 전무·37년 수양동우회사건으로 복역.해방뒤 우익의 한국민주당을 창당하고 미군정아래서 경무부장을 역임했으나 이승만정권의 독주에 반발,52년 반독재구국선언을 주도.54년 보수야당을 묶은 민주당을 창당,60년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입후보했으나 신병으로 선거 한달전에 미국육군병원에서 사망했다. ▷신익희◁ 1894.6.9∼1956.5.5.경기도 광주출신.한성공립외국어학교졸·1919년 상해 망명·임정 내무총장·법무총장·48년 초대 국회의원·국회의장·대한국민당 위원장을 역임.54년 자유당정권이 4사5입 개헌등 횡포를 부리자 야당세력을 묶어 민주당을 창당.56년 대통령선거에 출마,한강 백사장유세에 수십만 인파를 모으는등 지지를 받았으나 이틀뒤 전주유세장으로 가던 야간열차에서 사망했다. ▷최현배◁ 1894.10.19∼1970.3.23.호 외솔.경남 울산출신.일신학교·한성고등학교·일본 히로시마고등사범·경도제국대학졸업.연희전문 교수·문교부 편수국장·한글학회 이사장·학술원 회원역임.국어학 연구·국어정책의 수립·국어운동 추진에 공헌.「우리말본」으로 20세기 전반의 문법연구를 집대성.한글전용을 주창해 각종 교과서에 한글 가로쓰기 체제를 확립했다. ▷백낙준◁ 1895∼1985.평북 정주출신.22년 미국 파크대졸.27년 연희전문교수.46∼60년 연세대총장을 역임한 것을 비롯,대한소년단총재·문교부장관·국사편찬위원·국토통일자문회의장·외솔회이사장과 학술원 명예회원 역임.교육자로서 후진 양성에 헌신하면서 한국기독교 발전을 위해 「한국개신교사」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 ▷유일한◁ 1895∼1971.평양출신.19년 미미시건대 졸업.26년 제약회사인 유한양행 창설.42년 미육군성고문.44년 로스앤젤레스·뉴욕한미상공회의소회장을 역임.해방 이후에는 대한상공회의소회장을 맡아 우리나라의 산업부흥에 기여했다.또 전재산을 털어 한국고등기술학교를 설립한데 이어 유한학원을 설립,기업이윤을 사회에 환원하는 본보기가 됐다. ▷윤보선◁ 1897.8.26∼1990.7.18.충남 아산출신.영국 에딘버러대 졸업.대한임시의정원 의원·대한적십자사 총재·제4대 대통령·신민당 총재.이승만대통령 시절 비서실장·서울시장과 상공장관을 지냈으며 「4·19」로 60년 대통령에 취임.그러나 1년만에 「5·16」에 성공한 박정희에 의해 하야당했다.3대국회 이후 야당에 몸담으며 반독재·반군정투쟁을 벌였다. ▷최규남◁ 1898.1.26∼1992.4.27.황해 개성출신.연희전문 수물과·미웨슬리안대·미시건대학원졸.서울대교수·서울대총장·문교부장관·민의원·학술원회원 등 역임.국내 물리학계의태두이자 교육행정가로 큰 업적을 남김.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미시건대학에서 물리학 박사학위 취득.서구의 신물리학을 국내에 도입,한국 물리학계의 초석을 다졌고 원자력발전과 과학기술교육의 기초를 다졌다. ▷우장춘◁ 1898.4.8∼1959.8.10.일본 도쿄태생.동경제대 농학과졸(1919).세계적인 육종학자로 채소종자의 육종합성에 성공하고 씨없는 수박을 개발하는 등 해방후 국내 농업발전에 기여.대학졸업후 일본 농림성 농사시험장에서 18년간 근무하면서 육종학연구.36년 종의 합성설로 동경제대에서 박사학위 취득.50년 정부 초청으로 귀국.농업연구소장·학술원회원 등을 역임했다. ▷장면◁ 1899.8.28∼1966.5.14.인천출신.미국 맨해튼 가톨릭대 졸.제헌의원·초대 주미대사·60년 부통령입후보 낙선·60년 4·19로 제2공화국 국무총리·60년 당시 민주당 신파의 영수로 이승만정권의 부정선거결과로 촉발된 「4·19」로 총리에 취임.그러나 구파출신 윤보선대통령과 권력암투를 벌인데다가 불안정한 정치로 5·16정권에 쫓겨났다. ▷김활란◁ 1899∼1970.인천출신.이화여전·미웨슬리언대학졸.25년 이화여전교수로 임용돼 해방직후부터 61년까지 이화여대총장을 역임.대학을 운영하면서도 한국여자기독교청년회 연합회재단이사장·공보처장·대한적십자사부총재 등을 역임하며 우리나라 개화기와 해방이후 신여성 교육에 헌신하고 기독교를 통한 사회운동에 일생을 바쳤다. ▷함석헌◁ 1901.3.13∼1989.2.4.평북 용천출신.동경고등사범졸.28∼38년 오산학교교사.74년 민주회복국민회의 대표위원.교육자·종교인·언론인등으로 활발하게 사회참여를 하며 성서와 노장철학을 바탕으로 비폭력 저항운동을 편 사상가.자유당 및 군사정권시대에는 반독재자유민권투쟁에 앞장.「뜻으로 본 한국역사」등 저서와 「씨알의 소리」등을 발간했고 민권운동에도 헌신했다. ▷한경직◁ 1902.12.29.평남 평원출신.숭실대·미국 프린스턴대졸.영락교회 목사·숭실대학장·기독교1백주년 기념사업협의회총재·대한예수교 잘로회 총회장 역임.종교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템플턴상 수상.한국 개신교 부흥에 불을 당긴 성직자.평생을 자신의 이름으로 된 집이나 저금통장 하나없이 청빈한 삶으로 일관하면서 세계적인 기독교 지도자로 활동해왔다. ▷이상백◁ 1904∼1966.서울출신.일본 와세다대학 사회철학과 졸업.서울 대학교 문과대교수(47).한국사회학회장(57).국제올림픽위원회(IOC)위원.서울신문사 체육공로상 수상.일제시대에 일본 농구협회를 창립하고 제11회 올림픽 때는 일본선수단 총무로 참가.광복직후 조선체육동지회를 결성해 대한체육회 발족에 디딤돌을 놓았으며 64년 대한올림픽 위원회 위원장을 거쳐 64년 한국의 제2대 IOC위원으로 한국체육의 근대화를 이루었다. ▷유진산◁ 1905.10.18∼1974.4.28.충남금산 출신.보성고보졸.일본와세다대학 정경학부중퇴.만주에서 중경임정 연락원활동.46년 대한청년단 창립·자유당정권의 사사오입개헌파동뒤 민주당 창당에 참여.신파로 출발했으나 뒤에 구파로 변신,민주당 원내총무를 거쳐 분당뒤 신민당 간사장·대표위원을 지내는등 정통야당의 맥을 이었다.너무 타협적이라는 비판도 있었으나 현실을 감안한 정치력의 달인이었다는 평가가 높다. ▷이병철◁ 1910.2.12∼1987.11.19.경남 의령출신.중동 중학 4년 수료.일본 와세다 대학 정경과 2년 수료.38년 삼성상회 서립.삼성물산·제일제당·제일모직 설립.61년 한국경제인협회(전경련 전신)초대 회장.삼성그룹의 창업주로 해방 이후 궁핍했던 시절 소비재산업 중심으로 한국 경제를 일으킨 경제계의 선구자다. ▷이범석◁ 1900.10.20∼1972.5.11.서울 출신.운남육군강무학교기병과졸.만주 청산리전투사령관·한국광복군참모장·초대국무총리·주중국대사·원외자유당부당수·내무부장관·참의원·국민의당 최고위원.항일독립투사로서 해방이후에도 활발한 정치활동을 했다.초대 국무총리로서 국방부장관을 겸임하면서 건국과 건군에 큰공.52년에는 이승만대통령의 「러닝 메이트」로 부통령에 입후보하기도 했다. ▷윤석중◁ 1911.5.25∼.서울 출신.일본 상지대졸.새싹회 회장·난파기념사업회 이사장·한국문인협회 아동문학분과위원장·방송윤리위원회 회장·한국방송협회 회장 역임.예술원회원.일제하 소학교시절 일본말 노래가 싫어 우리말 동요에관심을 가진후 평생을 어린이 운동에 몸바친 아동문학가.「초생달」「굴렁쇠」「바람과 연」등 20여권의 동요·동시·동화집을 냈다. ▷성철스님◁ 1912.4.10∼1993.11.4.속명 이영주.경남 산청출신.진주중학 졸업.35년 지리산 대원사에서 수행.68년 해인사 초대방장,81년 조계종 종정 취임.수행의 깊이와 경전의 섭렵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경지로 한국 불교계의 정신적 사표가 됨.16년간의 생식과 8년간의 눕지않는 수행자세,「중답게 산다」는 생활철학등으로 원효 이래 한국불교의 최대 거목이라고 칭송받고 있다. ▷김용기◁ 1912∼1988.경기도 양주출신.농촌계몽등을 통한 민족운동을 위해 40년 양주군에 봉안이상촌 건립.52년 광주군에 가나안 농장을 설립한데 이어 62년 가나안농군학교 설립.73년 강원도 원성군에 신림 가나안 농군학교설립,82년 가나안 농군사관학교설립 등을 통해 농촌의 젊은 일꾼을 양성하고 농촌발전에 큰 업적을 세웠다. ▷김동리◁ 1913.11.24∼.경북 경주출신.경신중 중퇴.청년문학가협회회장·예술원회장·한국문인협회 이사장·서라벌예술대학장·국정자문위원 역임.예술원회원.35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화랑의 후예」당선으로 등단.단편소설「무녀도」「바위」「황토기」「밀다원시대」「등신불」과 장편 「사반의 십자가」「을화」등 발표.신·인간·자연을 주제로 삼아 특유의 순수문학 세계를 가꾸어 온 한국문단의 대부(대부)이다. ▷김기창◁ 1914.2.18∼.호 운보·서울출신.1930년 승동보통학교 졸업 및 김은호 문하입문.31∼36년 선전 연입선.37∼40년 선전 연4회 특선.69년 국전 심사위원 부위원장.71년 3·1문화상.예술원 회원.근대 한국화의 추상화작업 선도,전통수묵산수를 뛰어 넘어 특유의 바보산수와 청록산수로 한국화의 새로운 미술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서정주◁ 1915.5.18∼.호 미당.전북 고창 출신.고창 고보 중퇴·중앙불교전문학교 명예졸업.동아일보 사회부장·문교부 예술과 초대과장·한국문학가협회 시분과위원장·동국대 부교수 역임.대한민국 예술원 회원.「귀촉도」「신라초」등 시집 14권,「서정주 문학전집」「서정주 시선집」등에 시8백수 수록.「동천」을 비롯,수많은 절창을 통해 민족어를 연마하고 민족심성을 계발한 한국 서정시의 대가이다. ▷정주영◁ 1915.11.25∼.강원도 통천 출신.송전소전학교 졸업.현대그룹 회장·명예회장·대한체육회장·전국경제인연합회장·명예회장·국회의원·국민당 대표.47년 맨손으로 출발,기발한 아이디어와 불도저같은 추진력으로 현대를 국내 최대의 기업군으로 키운 「현대신화」의 주역.92년 국민당을 창당,대통령선거에 나섰다 실패하고 그룹경영에서도 손을 뗐다. ▷장기영◁ 1916.5.2∼1977.4.11.서울출신.선린상고졸.한국은행 부총재·한국일보 사장·IOC위원·한국일보 회장·부총리겸 경제기획원장관·남북조절위원회 위원장대리·국회의원.금융계 언론계 정계등 여러방면에서 활약,「불도저」로 불리기도 했다.54년 한국일보를 창간했으며 초창기 한국체육을 궤도에 올려 놓았다.경제기획원장관으로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세워 고도 경제성장의 기반을 구축했다. ▷박정희◁ 1917.11.14∼1979.10.26.경북 구미 출신.대구사범·육사졸.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제5∼9대 대통령.61년 「5·16쿠데타」를 일으켜 제2공화국을 종식시키고 군사통치.64년 공화당 후보로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72년 10월 유신을 거쳐 79년 10·26으로 유명을 달리하기까지 18년동안 장기집권.몇차례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한국경제의 기적」을 창출하고 자주국방의 기틀을 마련했다. ▷정일권◁ 1917.11.21∼1994.1.18.연해주 추풍출신.만주국 군관학교·일본 육사졸업.육군총참모장겸 육해공군 총사령관·육군대장·육군참모총장·국무총리·국회의장·해방직후 국방경비대 창설에 참여.경비대가 국군으로 개편된 뒤에는 군요직을 두루 역임했다.박정희대통령 시절 국무총리·국회의장으로 장기재직하면서 영향력을 발휘했으나 「얼굴마담」이라는 비난도 받았다. ▷김소희◁ 1917.12.1∼.본명 김순옥.전북고창출신.전남여고보 2년 수료.송만갑 정정렬 신호렬로부터 창악 가야금 서예 배움.한국국악협회 이사장 역임.중요무형문화재 판소리 예능보유자.감성에만 치우치지 않는 품위있는 소리로 판소리의 격을 끌어올렸다고 평가받는 살아있는 최고의 명창.전통 국악의 맥을 오늘에 잇고 많은 해외공연으로 전통예술이 국제적으로평가받는데도 기여했다. ▷김승호◁ 1918.7.13∼1968.12.1.서울출신.보성고등보통학교졸.39년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로 영화배우 생활 시작.59년 서울시 문화상 수상.63년 제10회 아시아영화제 남우주연상 수상.「시집가는 날」「박서방」「역마」「혈맥」등 2백50여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중년의 서민적 아버지상을 탁월하게 연기,한국영화 붐을 조성하는데 공헌했다. ▷장준하◁ 1918.8.27∼1975.8.17.평북 의주출신.44년 학도병으로 끌려갔다가 중국에서 탈영한뒤 광복군에 가담.45년 김구 비서로 귀국.53년 「사상계」창간.67년 국가원수모독죄로 투옥.제7대 국회의원에 옥중당선.독재정권에 대한 비판적 논조의 「사상계」가 폐간된 뒤 75년 등산중 의문의 실족사.62년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막사이사이상(언론부문)을 받았다. ▷김수환◁ 1922.5.8∼.대구출신.일본 상지대 철학과·성신대학 신학부졸.51년 천주교 신부서품,69년 47세로 최연소 추기경에 서임.아시아주교회의 상임위원장·서강대 재단이사장 역임.천주교 서울대교구장·70년대 유신독재체제하에서는 민주화와 인권운동,80년대에는 인간성회복과 제도의 민주화를 외치면서 양심의 대변자 역할을 맡아 명동성당을 「한국민주화의 성지」로 만듦.천주교는 물론 한국사회의 정신적 지도자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조남철◁ 1923.11.30∼.전북 부안출신.국수 9연패·패왕 4연패·최고위 7연패등 50∼60년대 각종 기전 석권.83년 9단·37년 도일,바둑수업을 받은 뒤 43년 귀국해 걸음마단계의 현대바둑 보급에 힘쓴 한국바둑의 선구자.84년 일본 대창상,89년 은관문화훈장수상.현재 한국기원 명예이사장으로 후진을 양성하고 있다. ▷남덕우◁ 1924.10.10∼.경기 광주출신.국민대 정치학과.미국 오클라호마 주립대(경제학박사)졸.서강대 교수·재무장관·부총리겸 경제기획원 장관·국무총리·무역협회 회장.69년부터 10년간 경제각료로 일하며 부가가치세를 신설하는 등 경제개발정책의 기틀을 다짐.71년의 외환위기와 74년의 오일쇼크를 극복,연10%의 고도성장을 이룬 주역이다. ▷김대중◁ 1925.12.3∼.전남 신안출신.목포상고졸업.6선 의원.신민당 대통령후보.80년 내란혐의로 사형선고.87·92년 야당 대통령후보.아시아 태평양평화재단 이사장.70년대와 80년대 20년동안 낙선과 투옥을 거듭한 강력한 반정부운동 지도자.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으며 92년 대통령선거에서 패한뒤 정계를 은퇴.아태재단을 통해 평화·통일을 연구하며 「야당의 후견인」역할을 하고 있다. ▷김종필◁ 1926.1·7∼.충남 부여출신.육사 졸.초대 중앙정보부장·6대 국회의원·공화당 의장·국무총리·공화당 총재·민자당 대표최고위원.「5·16」의 막후 실력자로 중앙정보부및 공화당의 산파역할과 한·일 회담의 주역을 맡았다.박정희의 장기집권을 위한 3선개헌에 반대해 공직을 사퇴하고 외유에 나서면서 「자의반·타의반」이란 말을 남겼으며 반대세력에 밀려 실각도 했지만 결국 박정희의 18년 장기집권을 도왔다. ▷김준◁ 1926.4.25∼.전남 영광출신.49년 서울대농대졸.전남대 농대교수를 역임,62년 재건국민운동 경북지부장,64년 농협대교수 등을 맡으며 새마을 운동의 선구자로 활약.입법회의의원·새마을운동중앙본부회장·명예회장 등을 역임.건국이래 최대의 국민운동을 이끌며 「잘살아 보자」는 기치아래 피폐된 농촌 부흥과 사회발전에 기여했다. ▷박경리◁ 1926.10.28∼.경남 충무출신.진주고등여학교 졸.56년 현대문학에 단편 「흑흑백백」이 추천완료돼 등단.작품집 「불신시대」「환상의 시기」,장편 「시장과 전장」「김약국의 딸들」등.69년 「현대문학」에 연재하기 시작한 5부16권의 대하소설 「토지」를 26년만인 지난해 완결.치열한 작가정신으로 격동기 우리민족의 삶을 다양한 인물묘사와 섬세한 필치로 표현한 이 작품으로 한국문학사에 한 획을 그었다. ▷박태준◁ 1927.9.29∼.경남 양산 출신.일본 와세다대.육사졸.최고회의 비서실장.대한중석 사장.포항제철 사장·회장·명예회장.민정당 대표위원.민자당 최고위원.황량한 모래벌판이었던 포항에 세계 2위의 조강능력을 지닌 포항제철을 건설한 「포철 신화」의 주인공으로 「철의 사나이」로 불린다.민자당의 민정계 관리자로 정계에 나섰다가 실패,포철에서도 손을 뗐다. ▷김영삼◁ 1927.12.20∼.경남 거제출신.서울대 철학과 졸.3대 국회의원에 당선된뒤 9선·신민당 원내총무·신민당 총재·제14대 대통령.최연소·최다선 의원이며 최연소 제1야당 총재.93년 31년만의 문민 출신 대통령으로 취임.한때 「40대 기수론」을 들고 나와 정계에 파문을 일으켰고 84년 전두환대통령시절 4주일동안 민주화를 요구하며 단식투쟁.대통령취임후 특유의 결단력과 정면돌파로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 ▷전두환◁ 1931.1.18∼.경남 합천출신.육사졸.예비역 육군대장.국보위상임위원장.제12대 대통령.79년 국군 보안사령관으로 「12·12 사태」를 주도.박정희대통령 서거이후 공백상태이던 권력의 중심부를 장악.80년 「5·18」로 권력의 정상으로 등장한 뒤 그해말 대통령에 취임.재임 7년동안 엄격한 물가관리로 경제안정성장 주도.1인당 국민소득 2배이상 상승.평화적 정권교체 실현. ▷김운용◁ 1931.3.19∼.서울출신.미국 텍사스웨스턴대·연세대 정치외교과 졸.미국 메리빌대 법학박사.주미대사관 참사관(63),IOC부위원장·대한올림픽위원회 위원장·세계태권도연맹 총재·국제경기연맹 총연합회 회장.국제 스포츠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세계 스포츠계의 제2인자.태권도를 2000년 시드니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채택되도록 막후 조정해 한국 스포츠의 이미지를 세계 정상으로 끌어올렸다.현 사마란치 IOC 위원장의 유력한 후임후보로 꼽히고 있다. ▷노태우◁ 1932.12.4∼.대구출신.육사졸.예비역육군대장.제13대 대통령.「12·12」를 주도.권력핵심부에 진입.제5공화국 때 체육·내무부장관 역임.87년 「6·29선언」으로 민주화의 물줄기를 텄고 그해말 제13대 대통령으로 당선.88년 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렀고 「북방외교」로 공산권국가들과 국교수립.지방자치제 일부 실현.90년 여소야대 국면에서 3당통합으로 안정기반 구축. ▷임권택◁ 1936.5.2∼.전남 장성출신.광주 숭일고 중퇴.61년 「두만강아 잘 있거라」로 영화감독 데뷔.「만다라」「씨받이」「길소뜸」등 90여편 연출.89년 대한민국 문화훈장 보관장.93년 「서편제」로 제1회 상해국제영화제 최우수감독상.94년 「태백산맥」을 베를린 영화제 본선에 진출시킴.우리영화의 세계화와 한국영화 중흥에 크게 공헌했다. ▷김우중◁ 1936.12.19∼.서울출신.연세대졸.축구협회 회장·한국기원총재·대우그룹 회장·전경련 부회장.샐러리맨(한성실업)에서 연간 매출 35조원의 재벌 총수로 성장.기업인의 노벨상인 국제 기업인상(84년)수상.발로 뛰는 비즈니스로 아프리카등 수출 사각지대를 개척.기업 인수와 부실기업 재건의 명수로 알려져 있다. ▷김지하◁ 1941.2.4∼.전남 목포출신.서울대졸.64년 「서울대한일굴욕회담반대투쟁위원회」일원으로 학생운동에 참여.6·3사태 관련 첫구속자가 됨.이후 80년대 초반까지 정치적 억압과 사회적 질곡에 맞서 「오적」「타는 목마름으로」등 문제 시를 잇따라 발표하며 투사 시인으로 활동.최근엔 생명의 본질에 대한 통찰과 함께 생명왜곡 현상을 염려하며 「생명사상」에 몰두하고 있다. ▷이미자◁ 1941.10.30∼.서울출신.문성여고졸.67년 무궁화훈장 받음.대중가수로는 최초로 세종문화회관 공연.59년 데뷔이래 1천6백여곡을 부르고 이 가운데 4백여곡을 히트시켜 「엘레지의 여왕」으로불림.왜색시비에도 불구하고 60년대부터 30년 가까이 대중의 정서를 트로트 노래로 대변하며 한국 가요계를 대표해 왔다. ▷김수현◁ 1943.3.10∼.본명 김순옥.충북 청주출신.고려대 국문과졸.한국방송작가협회 이사장(87년∼).67년 라디오 드라마 「저 눈밭에 사슴이」로 데뷔한 이후 「새엄마」「사랑과 야망」「배반의 장미」「사랑이 뭐길래」「작별」등 수많은 TV드라마 집필.솔직담백한 표현과 인간심리를 꿰뚫는 듯한 대사처리로 안방극장을 휘어잡은 「언어의 마술사」이자 대중문화시대의 선두주자였다. ▷황영조◁ 1970.3.22∼.강원도 삼척출신.삼척 근덕중·강릉 명륜고·고려대.91유니버시아드(쉐필드).92바르셀로나 올림픽대회.94히로시마 아시안게임 마라톤 1위.한국 마라톤을 세계 정상으로 끌어올린 주인공.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씨의 우승 이후 56년만인 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우리 국민들에게 큰 자긍심을 심어주고 마라톤 재건의 계기를 만들었다.
  • 「12·12」장외투쟁 3주 “마감”/민주 서울역 대회 이모저모

    ◎대전·부천보다 청중적어 “실망” 표정 민주당은 10일 서울역 광장에서 「12·12」관련 장외집회를 갖고 사건관련자의 기소를 거듭 촉구했다. 대전과 부천을 거쳐 장외투쟁의 무대를 서울로 옮긴 민주당은 이번 대회를 끝으로 사실상 지난 3주동안의 장외투쟁을 마감했다. 민주당은 이번 대회의 성공을 통해 「12·12투쟁」의 성과를 부각시킨다는 계획이었으나 청중수가 앞서 두차례의 장외집회 때 보다도 적은 1만여명에 그쳐 실망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이처럼 청중수가 적었던 것은 무엇보다 광장이 협소한 탓도 있지만 「12·12」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도 그만큼 줄었기 때문 아니냐하는 관측이 우세하다. 한편 이날 행사 때문에 2백여대를 수용하는 광장 주차장이 상오부터 폐쇄돼 역을 이용하는 많은 시민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하오 2시부터 시작된 집회에는 민주당에서 이기택대표와 조세형 최고위원,재야에서 윤정석 김희선 천영세씨등이 연사로 나서 「12·12 군사반란자」들의 기소를 촉구. 첫 연사로 나선 조세형 최고위원은 『「12·12」와 「5·18」은 전두환·노태우 일당의 계획된 반란극』이라면서 『끝까지 이들을 응징하자』고 주장. 조최고위원은 『김영삼대통령이 세계화를 외치는 것은 왜곡된 과거를 덮어두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고 『아프리카의 추장처럼 한마디 하면 모두가 따를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역사를 바로잡는 국내화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열변. 이어 이기택대표는 『반민특위를 해체한 이승만정권이 10년 뒤 4·19혁명으로 국민의 응징을 받았듯이 김영삼대통령도 군사반란자들을 기소하지 않으면 멀지 않아 「제2의 4·19」로 응징받을 것』이라고 주장. 이대표는 『이제 김대통령이 결단을 내릴 시간은 이틀 밖에 남지 않았다』면서 『끝내 결단을 내리지 않는다면 더 이상 존재할 가치가 없는 정권으로 규정될 것』이라고 목청. 이대표는 이어 국회에 계류돼 있는 세계무역기구(WTO)가입비준동의안 처리와 관련해 민주당의 4개조건을 수용할 것을 촉구한 뒤 『김영삼정권이 이것마저 강행처리 한다면 매국노정권이라는 지탄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편 이날 행사에는 최근 「12·12투쟁노선」과 전당대회 조기개최 문제등을 놓고 이대표와 갈등을 빚고 있는 권로갑최고위원등 동교동계 의원들이 대거 참석,단합을 과시해 눈길. ◎서울역대회 민자당의 반응/“긁어 부스럼 될라” 무관심 작전/이틀뒤면 공소시효 만료… 대응 자제 민자당은 10일 민주당의 서울역 집회를 애써 외면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청중이 얼마나 모였는지에 조차 관심을 나타내지 않았다.박범진대변인이 상오에 짤막한 성명만을 냈을 뿐이다.상오의 고위당직자회의에서나,하오에 김종필대표가 청와대 주례당무보고를 마친 뒤 다시 소집한 고위당직자회의에서도 이 문제가 논의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같은 「방관적」 자세는 크게 두가지 의미를 품고 있다.첫째는 민주당이 한달 넘도록 고리를 걸고 있는 「12·12」 논쟁에 더 이상 말려들 필요가 없다는 판단이다.이틀 뒤면 이 사건이 일어난 지 15년이 돼 공소시효가 만료되기 때문에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 까닭이 없다는 것이다.둘째,이제 「12·12」 문제에대한 국민들의 관심도 식었다고 여기고 있다.「세계화」라는 대명제를 놓고 과거사에 얽매인다는 것 자체가 국민들을 식상하게 만들 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지난번 대전·부천집회 때와는 달리 「장외집회」가 이 시점에서 타당한지를 짚어 보는 정도로 가볍게 대응했다.박대변인은 이날 성명에서 『민주당이 나머지 정기국회 일정에 성실한 자세를 보이지 않고 다시 장외투쟁에 나서는 것은 국민에 대한 책무를 포기한 행위』라고 비난하는 선에서 그쳤다.또 『더욱이 집회장소는 시민의 광장이자 심각한 교통체증 유발지역으로 국민들에게 공감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지적하고 『민주당은 당내에서 조차 지지를 받지 못하는 장외투쟁을 중지해야 할 것』이라고 촉구했다.그는 하오에도 『민주당은 좋은 보약도 재탕하면 약효가 떨어지는 법이라는 진리를 깨달아야 할 것』이라고 「12·12」 문제가 「관심권 밖」의 사안임을 강조했다. 서청원 정무 제1장관은 『한강다리로 교통이 막히고 있는데 서울시민들의 불편만 더욱 심해지지 않겠느냐』고 「집회장소」를 문제 삼았다.문정수 사무총장은 집회가 열리기에 앞서 『서울역에는 1만명도 모이지 못할 것』이라고 코웃음 쳤다. 서울집회치고는 민주당의 기대에 못미친 집회 분위기 등으로 미루어 민자당은 이날 집회가 사실상 마지막 장외투쟁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민주당의 이기택대표가 공소시효 만료 다음날인 13일 기자회견을 갖고 소신을 다시 한번 밝히는 정도로 「12·12」를 둘러싼 공방이 마무리되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다.따라서 민주당이 정기국회 폐회를 앞두고 최대현안인 세계무역기구(WTO)가입 비준동의안과 정부조직법개정안의 처리를 놓고 막바지 공세에 총력을 기울일 것이라는 판단 아래 그 대책에 골몰하고 있다.
  • 중국등서 귀화 독립유공자·유족/정착·보상금 지급키로

    ◎당정,관련법 제정 정부와 민자당은 26일 중국등에서 귀화하는 독립유공자와 그 유족에 대해 정착금이나 보상금 지급에서 특례를 인정하는 내용등을 골자로 하는 순국선열·애국지사 예우에 관한 법률안을 제정,올 정기국회에서 처리하기로 했다. 당정은 이날 서울 여의도 민자당사에서 보훈관련 당정회의를 갖고 이같이 결정했다. 당정은 또 4·19가 「의거」에서 「혁명」으로 공식평가됨에 따라 국가유공자 예우등에 관한 법률과 국가유공자등 단체설립에 관한 법률등을 개정,「4·19의거」란 표현을 「4·19혁명」으로 바꾸었다.
  • 대전고/수업전 “국기에 대한 경례”(태극기를 사랑합시다:2)

    ◎애국가도 제창,나라사랑 새롭게/수업분위기 개선… 비행학생 줄어 전국에서 수업시작전 국기에 대한 경례와 애국가 부르기 운동의 효시가 된 대전고등학교. 전교생 1천8백명의 하루 일과는 태극기에 대한 경례와 애국가로 시작해 교가로 끝난다. 첫 수업을 시작하기 직전인 상오 7시58분 교실마다 일제히 태극기를 향해 애국가를 부르고 일과를 끝내기 바로전인 하오 5시10분 어김없이 교가를 부른 뒤 흩어진다. 「애국가와 태극기를 통해 국가와 민족에 대한 긍지를 심고 사랑을 다지자」는 이 학교 「태극기사랑운동」의 실제 모습이다. 대전고가 이같은 태극기사랑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한 것은 지난 5월26일부터. 물질문명 사회에서 갈수록 흐려져가는 애국·애족정신과 학생들의 단결심을 고취시킬 수 있는 손쉬운 방법이 무엇일까를 궁리하던 끝에 윤석병교장(64)과 교사들이 이같은 방법에 착안,학생들과 함께 매일 일과시작전 교내방송을 통해 흘러나오는 반주에 맞춰 애국가를 부르기 시작했고 곧이어 정규수업을 마치기전에는 교가를 불렀다. 이러다보니 애국심과 함께 애교심도 자연스레 일깨우는 운동으로 번졌다. 대전고는 이뿐만 아니라 윤리시간등도 적극 활용,태극기의 유래와 의미·제작방법등을 유인물에 담아 학생들의 태극기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다. 윤교장은 『이 운동의 궁극적인 목적은 애국·애족정신을 북돋워주기 위한 것인데 시행한지 불과 몇달만에 예상외의 성과가 나타나 애국심과 애교심이 부쩍 강해졌다』고 자평했다. 처음에는 애국가와 교가를 부르는 것이 어색해 따라부르지 않는 학생들도 많았고 심지어 뒷자리에서 키득거리는 학생들마저 있었다. 그러나 3개월이 지난 지금은 교실이나 복도·운동장등 교내 어느곳에서나 애국가반주가 흘러나오면 경건하게 따라부르는 것은 물론 교사들도 미처 예상치 못했던 나머지 성과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6월중순에는 4·19혁명 당시 숨진 이 학교 출신 학생들의 넋을 달래기 위해 만들어진 교내 현정탑(현정탑)에 윤교장이 국화 2송이를 헌화했더니 다음날 학생들이 헌화한 꽃들이 탑주위에 수북이 쌓여 교사들은 전에 볼 수 없던 학생들의 행동에 크게 놀랐다고 한다. 또 최근 대통령배농구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것은 전례없이 높아진 애교심 덕분이라는 분석도 나왔다. 3학년 이성규군(18)은 『바쁜 수험생활속에서 잊기 쉬운 애국·애족·애교심을 다시금 일깨우는 계기가 됐다』며 『특히 아침에 하루를 경건하게 시작함으로써 수업분위기와 수업능률이 훨씬 좋아졌다』고 말했다. 또 송윤현교사(50)도 『전체적으로 수업분위기가 차분해져 교사들이 학생지도하기가 쉬워졌고 술·담배·폭력등 비행을 일삼는 학생의 수도 크게 줄었다』고 말했다. 현재 대전고의 이 운동은 대전중학교등 인근학교로 급속히 파급되고 있으며 각급 학교로부터 구체적인 시행방법등에 대한 문의가 쇄도하고 있다.
  • 광복 49돌/해묵은 이념갈등 종식을 모색한다/정담

    ◎“「자유민주」 건국이념 통일로 승화돼야”/미군정·독재정권 친일파 수용이 갈등의 불씨/자유민주=보수·민족주의=진보 「기형적 틀」 형성/남북 이념적인 통합기회 없이 분단/6·25 겪으며 반공·반미로 첨예 대립/탈냉전시대 사상논쟁 재연은 역사의 아이러니 올해로 광복 49주년을 맞았다.그러나 반세기가 지나도록 자유민주주의라는 건국이념을 다시 논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지금의 우리 현실이다.김일성사후 주사파문제가 예년에 없이 심각하게 부각되고 사회 일각에서는 우리 정부의 정통성마저 부인하며 해묵은 사상논쟁이 재연되고 있다.새로운 남북관계와 통일정책수립을 앞두고 진덕규(이화여대),이택휘(서울교대·한국독립운동사 연구소장),이현희교수(성신여대)가 우리의 건국이념을 재조명해보고 현재에 갖는 의미,구현방법등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이택휘교수=광복 당시 남북한은 모두 통합된 민족국가를 세우는 것이 최대의 목표였고 국민적 합의도 얻고 있었습니다.그러나 광복과 함께 남한은 미국의 자유민주주의를,북한은 구소련의 사회주의를 수용해 이념적으로 통합될 기회를 갖지 못하고 분단이 고착됐습니다.광복전부터 내재해 있던 이념갈등은 그후 심화됐고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현희교수=건국이념의 배경을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내부적으로는 민족광복세력의 왕조체제청산과 미국과 소련등 외세에 의한 영향등을 우선 꼽을 수 있습니다.임시정부가 중심이 됐던 군주제청산은 민주체제로의 자주적인 노력으로 임시헌장에 절대 자주독립과 자유민주주의,나아가 전통사상인 홍익인간과 이화세계,삼균주의정신을 담고 있습니다.그러나 광복후 남북의 이데올로기 갈등으로 건국이념은 올바로 설정되지 못했습니다. ▲진덕규교수=국민적 열망이었던 자주독립정신을 문서에 담은 것이 건국 초기의 헌법입니다.여기에는 의회정치와 개혁적인 경제정책,근대적인 시민사회와 선진문화 도입등을 분야별로 담고 있습니다.그러나 이같은 헌법정신,즉 건국이념은 이데올로기와 남북갈등으로 인해 반공으로 치우치게 됐고 결국 이데올로기의 경화는 삼균주의와 같은 임시정부의 이념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습니다. ▲이택=그렇습니다.항일운동은 여러 갈래로 나눠 진행됐지만 군주정치로 돌아가서는 안된다는 이념적인 틀에는 모두 합의하고 있었죠.그러나 45년이후 남북간에 타율적으로 생겨난 이념갈등은 6·25전쟁으로 이어졌습니다.전쟁을 겪으면서 남한은 자유민주주의의 제1 요소로 반공을 부각시켰고 북한은 반미를 들고 나와 첨예하게 대립합니다.이같은 갈등은 60년대 국제적인 해빙무드와는 상관없이 계속되다 80년대 들면서 서서히 해소됐습니다.45년 당시와 마찬가지로 국제적인 역학변화가 이번에도 남북에 영향을 줘 급기야 남한에 사상논쟁을 재연시켰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현=광복직후 서구의 특정 이념을 초월해 통합된 민족국가를 수립해야 한다는 데 국민적 합의가 모아졌다는 사실을 살펴봤습니다. 하나의 민족국가를 세우겠다는 국민들의 열망은 그러나 좌우대립으로 멀어져갔고 그 과정에서 남한이 48년 먼저 선거에 의한 단독정부를 수립하게 됩니다.사회 일각에는 이같은 남한의 단독정부수립을 분단고착과 연결지어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이 있습니다.북한의 주장처럼 단정의 책임이 전적으로 남한에 있는지,또 단정수립이 정말 불가피했는지 등을 짚어봤으면 합니다. ▲진=단독정부수립을 남한의 이승만정권이 혼자서 주도했다고 보는 것은 정확한 역사인식이 아니라고 봅니다.왜냐하면 북한에는 이미 46년 실질적으로 정부가 세워진 것과 다름없을만큼 조직이 정비돼 있었고 남쪽마저 공산정권으로 만들려는 시도가 진행중이었습니다.그래서 남쪽에서는 북쪽에 대응해 단독정부를 수립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위기감과 절박감이 팽배했습니다. 게다가 미소공동위원회가 실패로 끝나 미국은 결국 유엔에 남북한 정부수립문제를 위임했고 총선이 가능했던 남한에서만 선거가 치러진 겁니다.다시말해 처음부터 단독정부를 수립해 분단을 획책한 것이 아니라 당시 주변상황이 남한 단독정부수립으로 이어지게 한 거지요.때문에 이승만정권이 단정수립으로 분단을 노렸다는 것은 지나치게 자의적인 해석이며 역사에 대한 몰이해·반이해에서 비롯된 것으로 봅니다. ○무정부상태 계속 ▲이현=저 역시 단정수립에 한반도의 분단을 고착시킬 의도가 있었다고 보지 않습니다.45년부터 48년까지 남로당은 대구폭동,여순반란사건,4·3제주사건등 전국적인 교란작전으로 정국을 무정부상태로 만들었습니다.당시 이승만박사는 「선 정부수립 후 통일」이 불가피 하다고 봤고 김구선생이 이끄는 한독당과 접촉을 합니다.한독당은 그러나 남한단독정부수립은 한반도의 영구분단을 가져온다며 반대하며 좌우연립정권 수립을 주장합니다.이박사는 공산세력을 절대로 끌여들여서는 안된다는 단호한 입장이었기 때문에 한독당이 불참한 가운데 불가피하게 단독정부를 수립하게 됩니다. ○단정수립 불가피 ▲이택=단정수립이 과연 불가피했느냐 하는 문제는 현대 정치사의 주요 논쟁의 대상입니다.앞에서도 언급됐지만 북한은 46년에 이미 정부조직을 거의 완료해 놓고 남쪽에도 공산정권수립 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 입증된 사실입니다.사료들을 종합해보면 단정수립의 책임은 상당 부분 북한 특히 소련에 있다고 봐야합니다.그러나 남한도책임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이박사와 민족세력등이 보다 적극적으로 미군정을 설득하고 단정수립을 지연시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는 점이 아쉽습니다. ▲이현=좌우합작을 시도했지만 역부족이었고 무정부상태에 가까운 치안상태와 내외의 역작용을 고려할 때 단정수립은 불가피했다고 정리를 해도 무리는 없겠군요.그렇다면 화제를 최근의 사상논쟁으로 돌려 그 원인과 자유민주주의를 내세운 건국이념이 현재에 갖는 의미는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진=건국이념의 현재의 의미를 논하기전에 먼저 현실인식과 당위성에 대해 말하고 싶습니다.단정이 수립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 까에 대한 가정은 얼마든지 해볼 수 있습니다.그러나 중요한 것은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현실인식이 선행돼야 한다는 겁니다.대한민국은 선거를 통해 수립된 합법적인 정부였지만 상해 임정세력들이 제헌의회에 불참하는 등 불완전한 부분도 있습니다.그러나 그후 5·30선거에는 임정세력들도 참여했고 특히 조소앙선생이 최다득표를 얻어 국민적합의가 생겨납니다.강조하고 싶은 것은 6·25전쟁은 자유민주주의의 건국이념을 변하게 했던 사건이 되었습니다.즉 공산주의와의 대결에 초점이 맞춰지면서 건국이념으로 서의 자유민주주의를 반공으로 몰아가는 냉전적 대결성을 가열시키고 말았습니다. ▲이택=그렇습니다.이쯤에서 왜 이념적 갈등 또는 논쟁이 아직까지 정리되지 않고 있는지 그 이유를 정리해볼 필요가 있습니다.가장 큰 이유는 미군정이 군정의 편의를 위해 친일인사를 수용한 겁니다.자유민주주의를 주장하면서 막상 항일민족운동을 했던 사람들은 철저하게 배제됐습니다.이런 모순된 상황은 결국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회의를 싹틔웠고 「자유민주주의=보수,민족주의=진보」라는 기형적인 이념적 틀을 만들었습니다. 이념적 왜곡은 70년대를 거치면서 더욱 커졌고 지금에 이릅니다.최근의 사상논쟁의 중요배경 역시 미군정과 그후 독재정권이 친일파를 정리하지 않고 그대로 수용했다는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진=친일파처리문제가 이승만 정권에 대한 정통성시비를 일으키는 면이 있습니다.대한민국에는 48년부터 50년대 초까지 정부·경찰·학교·법조계등 국가의 중간관료급에 친일파가 다소 남아있었지만 각료의 차관급이상에는 친일파가 비교적 적지않았습니다.그러나 50년대 중반기 이후 중요정책의 결정에 참여했던 고위직에도 친일파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이는 당시 이승만정권이 국가의 1차적인 대결세력를 공산주의자들로,이들과 대립하면서 승리하기 위해 힘의 응집이 필요했기 때문에 일어났던 현상으로 여겨집니다. ○김일성 집권수단 ▲이현=최근 주사파 학생들은 남북한의 친일파숙청과정을 비교하면서 남한 정권의 정통성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북한이 광복이후 인민위원회의 주요간부급에 친일파 또는 친일한 혐의가 있는 사람을 모두 배제한 것은 사실입니다.그러나 북한은 친일파의 숙청을 그 자체보다는 김일성 반대세력을 제거,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이행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이택=친일세력들은 6·25전쟁과 5·16혁명을 거쳐 80년대까지 모든 분야에서 충원됐고 이는 이념의 혼란을 가져온 주요 원인입니다.과거 독립운동가들의 후손은 30∼40년씩 방치해둬 어렵게 사는 반면 친일세력은 득세하는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이 된 겁니다.진보적 성향의 사람들은 이를 비판했습니다.소위 자유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과 친일세력이 대부분 일치하자 「이게 아니구나」하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늘어났고 자연히 북쪽으로 시선을 돌리게 됐다고 봅니다.대안마련이 제대로 안된 상태에서 북쪽의 이념은 그래도 어느정도 정리된 것처럼 비친 것이 우리사회의 이념적 혼란을 가중시키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진=한국전쟁이후 3·15부정선거까지만 돌이켜 보아도 자유민주주의 정치질서와 속성이 얼마나 유린되었는 지를 알 수 있습니다.4·19혁명은 자유민주주의로 되돌아가서 이를 확립해 보려는 열망의 표출입니다.그러나 곧 박정희정권의 조국근대화 기치에 눌려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국민적 열망도 빗나갔지만 6월 항쟁을 계기로 다시 국민과 정부는 대한민국의 건국이념으로의 올바른 자리매김을 시도하게 되었습니다. ○사회적 정의실현 ▲진=먼저 건국이념인 자유민주주의의 본질과 민족국가의 개념을 짚어봐야 합니다.민족국가수립의 적시성과 국민적 욕구와 합의가 확보되어 있었는지도 함께 살펴보아야 합니다.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와 사회주의 체제에서 말하는 민족주의의 개념에는 큰 차이가 있다는 점입니다.원래 민족주의는 계급을 초월한 개념입니다.그러나 사회주이는 이를 전략적·수단적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택=민주주의는 통합된 민족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방법일 수 있습니다.민주주의의 운영원리는 구성원들 사이에 도덕성과 사회적 정의를 과감하게 실현하기 위해 개혁을 지향하는 겁니다.정부가 먼저 주사파등을 수용,보다 과감하게 개혁을 추진해야 합니다. ▲이현=반대세력은 용인하되 자유민주주의에 역행하는 불순한 사상 제거를 전제로 한 건국이념을 정립해야 합니다.광복이전의 공산활동은 항일운동의 방편으로 행해졌기 때문에 8·15이후와는 구분돼야 합니다.따라서 대단합 차원에서 8·15이전에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공산활동을 한 사람도 독립운동자로포상하는 방안은 검토해볼 만 하다고 생각합니다.단군의 후손으로 「하나였다」는 주체적인 입장에서 45년 또는 48년이 아닌 임정의 임시헌법이 만들어진 1919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우리의 자유민주주의 경험을 토대로 한 건국이념으로 통일을 지향해야 합니다.
  • 남북정상회담 추진 경과/81년1월 전전대통령 첫 공식제의

    ◎김대통령,93년 2월 취임사서 표명/김일성,90년 방북대표에 처음 언급 남북한정상회담이 우리측에 의해 공식제의된 것은 81년1월 당시 전두환대통령에 의해서다.그러나 그에 앞서서도 막후에서 정상회담을 실현시키려는 노력은 있었다. 이승만대통령이 이끌던 자유당정권은 「북진통일」이 국시였다.남북정상회담은 상상조차 못하는 분위기일 수밖에 없었다.60년 4·19혁명이 일어나자 남북대화의 기운이 일었지만 정상회담 개최논의로까지는 이어지지 못했다. 이어 등장한 박정희대통령의 「5·16정부」는 처음 반공을 강력히 내세우다 보니 정상회담추진이 어려웠다.72년에 들어서야 남북조절위가 열렸고 서울과 평양을 오가는 특사 사이에 남북정상회담논의가 비공개로 있은 것으로 알려진다.박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에 대해 공개적인 운을 뗀 것은 집권말기인 79년1월이었다.그는 연두회견에서 『남북한당국이 어떤 시기·장소·수준이든 조건없이 만나자』고 제안했다.남북정상회담까지를 염두에 둔 것이긴 했지만 직접표현에는 신중을 기했다. 전두환대통령은 80년 정권을 잡자마자 정상회담개최에 집념을 보이기 시작했다.81년1월 국정연설에서 「남북한당국 최고책임자 상호방문」을 제안,공식적으로는 처음으로 남북정상회담의사를 밝혔다.전대통령은 거의 매년 8·15 경축사등을 통해 북한이 회담에 응할 것을 촉구했다. 북방외교를 가장 큰 목표로 내건 노태우대통령은 전대통령보다 남북정상회담에 더 열심이었다.노대통령은 88년8월 광복절 경축사에서 공식적으로는 처음으로 「남북정상회담」이라는 용어를 쓰며 김일성주석과 만날 뜻을 피력했다.또 88년10월 유엔연설에서는 남북정상회담이 열릴 때 의제까지도 소상히 밝혔다. 김영삼대통령은 최초의 「문민정부」답게 남북정상회담에 접근하고 있다.김대통령은 지난해 2월 취임사에서부터 『어떤 이념이나 사상도 민족보다 더 큰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한다』는 획기적 전제아래 정상회담을 제안했다.올해 들어서도 취임 1주년회견에서 남북한정상회담의 조기개최의지를 천명했다. 「5공」과 「6공」정부는 남북정상회담을 정통성 확보의 가장 효율적 수단으로생각한 듯 비밀협상을 통해 회담을 성사시키려고 노력한 흔적을 남기고 있다.「5공」 때는 장세동안기부장,「6공」 때는 박철언청와대특보가 나서 북한의 고위당국자와 해외에서의 만남 혹은 상호방문등으로 깊숙한 논의를 진전시킨 것으로 전해진다.북한에 대한 대대적 경협이 정상회담개최의 대가로 제시되었다.그러나 이러한 당시 정부의 노력은 북한측의 기만적 태도로 번번이 무산되곤 했다. 북한은 해방직후부터 최고당국자의 만남을 거론해왔다.하지만 그것은 모든 정당·사회단체대표들의 회담으로 우리 내부를 교란시키려는 통일전선전략의 일환이었다.김일성은 신년사를 통해 가끔 정상회담의사를 비췄으나 무게가 실리지 않은 듯했다.지난 90년에는 평양을 방문한 남북고위급회담 우리 대표에게 정상회담의사를 밝혀 기대를 부풀게 했으나 역시 구두선으로 끝났다. □남북한 정상회담 관련 일지 ▲81년1월12일=전두환대통령,남북한당국 최고책임자 상호방문제의(국정연설) ▲81년6월5일=전대통령,남북한당국최고책임자간 직접회담제의(평통정책자문회의 개회사) ▲81년7월1일=북한금일성주석,우리측 제의 거부 ▲88년2월25일=노태우대통령,김일성과 대화용의 표명(대통령취임사) ▲88년8월15일=노대통령,김일성과 회담제의(8·15경축사) ▲88년10월18일=노대통령,평양방문 회담용의표명(유엔총회연설) ▲93년2월25일=김영삼대통령,김일성과 회담용의표명(대통령취임사) ▲93년5월25일=북한 강성산총리,특사교환통한 정상회담논의제의(대남전통문) ▲94년2월25일=김대통령,핵문제관계없이 남북정상회담 추진의사천명(취임1주년회견) ▲94년6월16∼17일=김일성,남북정상회담 수락의사표명 ▲94년6월18일=김대통령,김일성주석 제의 즉각수락
  • 삼성승용차와 부산민심/정종석 경제부차장(오늘의 눈)

    부산사람들의 성격은 대체로 괄괄하다.무뚝뚝하면서도 불같은 면도 있다. 유신말기 부마항쟁의 불길을 댕긴 것도 이 지역 사람들이다.그 이전의 4·19혁명이나 6·10항쟁 전후의 격변기에도 부산은 항상 진원지가 됐었다.그만큼 다혈질이고,뭔가 못마땅한 일에는 참지 못하는 성향이다. 이런 부산사람들이 요즘 꾹 참는 문제가 있다.바로 삼성승용차의 부산진출 문제이다.정부는 삼성승용차의 부산진출 사업계획이 산업정책이나 업종전문화 취지에 비춰 바람직하지 못하다며 제동을 걸 움직임이다.여기에 부산사람들은 벙어리 냉가슴을 앓는다.자기주장을 너무 강하게 하면 부산이 낳은 김영삼대통령이 정치적인 타격을 입을 우려가 있고,가만 있자니 부산경제의 회생기미가 아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지난 주말 경제총수인 정재석 부총리가 부산에서 가진 상공인들과의 대화는 단순히 간담회가 아니라,삼성승용차의 진출허용 문제를 놓고 담판을 벌인,흡사 청문회같은 「험악한」 분위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부산사람들은 지난 73년 유신 이후 자기들이 정치적 이유로 고도성장의 혜택을 받지 못한 것으로 여긴다.기계공업의 꽃인 승용차산업이 부산에 진출하면 침체된 지역경제가 기지개를 켜게 될 것이다.부산에는 정치적 사연과 경제적 사활이 얽힌 심각한 현안이다. 이같은 시점에서 정부총리가 부산에서 부산경제 활성화를 위한 종합대책을 만들겠다고 밝힌 것은 정치적 성격이 짙은 답변이다.비록 삼성승용차에 대한 확실한 언질은 없었지만 부산경제에의 특별배려 방침을 밝혔기 때문이다.부산출신 대통령이 하기 힘든 일을,호남출신 부총리가 총대를 멘 셈이다.이같은 방안이 발표되자 부산사람들은 『정부총리에게 명예시민증을 만들어 주자』는 등 칭송이 대단하다고 한다. 그러나 「부산 특별대우」는 자칫 다른 지역과의 형평성 시비를 낳기 쉽다는 점이다.어떻게 하는 것이 경제정책에 정치논리를 배제하고,객관성을 확보하며,부산도 만족시킬 수 있는 솔로몬의 지혜인지를 좀 더 냉철하게 생각해 봤으면 싶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