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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장 행정] 역사의 현장 내 퇴폐업소, 이게 말이 됩니까

    [현장 행정] 역사의 현장 내 퇴폐업소, 이게 말이 됩니까

    “강북구는 헌법에 담긴 3·1운동과 4·19혁명의 정신이 살아 있는 근현대사 도시입니다.” 박겸수 강북구청장은 2일 수유동에 내년 3월 완공 예정인 근현대사 기념관에서 청소년들이 우리 역사를 한번에 체화할 수 있다고 밝혔다. 국정교과서든 검정교과서든 교과서만으로 역사를 배우는 것은 한계가 있다는 생각에 강북구를 살아 있는 근현대사 역사교과서로 만드는 것이 그의 구상이다. 종로나 중구는 고궁 등 왕의 문화밖에 접할 수 없다면 강북구에서는 민중이 일군 민주주의의 역사를 배울 수 있다고 강조했다. 강북구에는 동학운동을 이끌고 3·1운동을 구상했던 손병희 선생이 지은 봉황각과 국립 4·19 민주묘지가 있다. 박 청장은 헌법에서 천명한 역사적 정신이 오롯이 살아숨쉬는 강북구에서 동학운동부터 4·19혁명까지 한꺼번에 배울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한국을 제대로 보려면 강북구로 와야 한다는 것이다. 근현대사 기념관과 함께 청소년의 역사 교육을 위해 문화해설사도 교육 중이다. 근현대사 기념관 인근에 가족야영장도 조성하여 역사와 자연을 한꺼번에 익히고 즐길 수 있게 된다. 박 청장의 청소년 교육환경에 대한 깊은 관심은 유례없는 학교 주변 청소년 유해업소 단속으로 이어졌다. 단독주택이 70% 이상일 정도로 좁은 골목이 계획 없이 발달한 강북구에는 여자중학교 앞에 ‘물망초’ ‘물안개’ 등 붉은 등을 켜고 영업하는 불법 찻집이 많다. 2013년 115곳이 지난해 170곳으로 불어났고 결국 경찰, 교육청과 함께 합동단속에 나섰다. 단속 5개월 만에 30개 업소가 문을 닫았다. 건물주도 일일이 만나서 설득해 99명이 불법 찻집과는 임대계약을 맺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 불법 업소는 식당으로 신고한 뒤 퇴폐 주점으로 불법 영업을 하는데 붉은 등을 켜고 야한 복장을 한 여성들이 취객을 꾄다. 일단 손님이 들어오면 셔터를 내리는 바람에 꼼짝없이 바가지를 쓸 수밖에 없는 구조다. 파리가 들어오면 잎을 오므리는 파리지옥 같은 불법 업소를 박 청장은 임기 내에 없애도록 하겠다고 단언했다. 구청, 경찰, 교육청이 함께 한 불법 업소 단속은 박근혜 대통령이 강조한 ‘칸막이 없는 행정’의 대표 사례라고 강조했다. 박 청장은 “옛날 같았으면 불법 업소 업주들이 생존권을 보장하라며 빨간 띠를 두르고 구청에 몰려와 항의했겠지만, 지금은 구청에서 일자리 알선을 해줄 뿐 아니라 기초생활수급권과 같은 복지 혜택을 제공하는 등 오히려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는 계기를 주고 있다”고 덧붙였다. 윤창수 기자 geo@seoul.co.kr
  • 적과 싸우다…일과 싸우다…시대 변해도 계속되는 ‘숭고한 희생’

    적과 싸우다…일과 싸우다…시대 변해도 계속되는 ‘숭고한 희생’

    2013년 3월 1일 밤 11시 24분. 인천 강화경찰서 내가파출소 소속 정옥성 경위는 외포선착장에서 바다 쪽을 향해 달려가는 남자를 전력을 다해 뒤쫓았다. 그는 자살을 하려는 사람이었다. 정 경위는 물가에서도 발을 멈추지 않았다. 거친 물살에 발이 묶여 앞으로 넘어지며 풍덩 빠졌지만 자꾸만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남자에게 손을 뻗으며 한 발, 한 발 따라 들어갔다. 잠시 후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밤바다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시커멓게 출렁였다. 정 경위는 그렇게 밤바다의 별이 됐다. 시민의 안전을 보호하기 위해 밤낮 없이 일하다 목숨을 잃는 경찰관이 매년 수십명씩 나온다. 서울신문은 경찰 창설 70주년을 맞아 경찰청으로부터 순직 경찰관 1만 3542명의 사망 경위가 담겨 있는 명단을 23일 입수, 분석했다. 70년간 순직한 경찰관들의 이야기는 광복 이후 대한민국 역사의 굴곡을 보여 준다. ●광복 후 극심한 좌우 대립… 1562명 잠들다 광복 직후인 1945년 9월부터 6·25전쟁 직전까지 경찰 순직자는 1562명이었다. 이들 중 90% 이상이 ‘폭도’, ‘반도’, ‘좌익 불순세력’, ‘공비’와의 교전이나 작전 중 사고로 숨졌다. 미국과 소련이 남과 북을 나눠 점령했던 시기, 북쪽에서 들어온 무장공비와의 잦은 교전 탓이었다. 1946년 10월 1~3일 대구, 경북 영천시, 칠곡군 등에서 44명이 순직한 것으로 기록됐다. 당시 대구에서는 10·1사건이 일어났다. 진실화해위원회에 따르면 10·1사건은 미 군정의 친일관리 임용과 강압적인 식량 공출 정책에 반발한 민간인과 일부 좌익 세력이 경찰, 행정 당국과 충돌한 사건이었다. 1948년 제주에서는 4월 3일 5명, 4월 12일 1명, 5월 13일 8명, 5월 22일 4명, 6월 16일 2명의 경찰관이 공비와 교전하다 사망했다. 이들은 ‘제주 4·3사건’의 초기 경찰 사망자들이다. 제주 3·1절 기념집회에서 경찰의 발포로 6명이 숨지고 민심이 들끓자 남로당은 투쟁위원회를 만들어 경찰을 공격했다. 미 군정은 제주도민 토벌 작전에 나섰고, 이로 인해 2만 5000~3만명으로 추정되는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4·3사건 당시 진압을 위해 출동하라는 이승만 정부의 명령을 일부 부사관이 거부하면서 1948년 10월 19일 ‘여수·순천 사건’이 일어났다. 20~24일 전남 여수, 순천, 고흥, 장흥 등지에서 270명의 경찰이 숨진 것으로 기록됐다. 반란은 10여일 만에 진압됐지만 이후에도 계속된 교전으로 이 지역에서 수백명의 순직자가 더 나왔다. ●6·25전쟁 발발부터 휴전까지 8823명 순직 1950년 6월 25일부터 휴전협정일인 1953년 7월 27일까지 8823명의 순직자가 명단에 올랐다. 경찰은 이들이 모두 전사한 것으로 보고 있다. 단일 전투로 가장 많은 경찰 희생자를 낸 것은 1950년 7월 19일부터 치러진 강경 전투였다. 83명의 경찰관이 목숨을 잃었다. 휴전협정 뒤에도 전사자는 속출했다. 휴전 직후부터 1955년까지 469명 중 60.3%에 해당하는 283명이 크고 작은 교전 중에 숨졌다. ●1962년 간첩 수색하던 25명 한꺼번에 숨져 1960년 4월 19~20일에는 6명의 경찰관이 4·19혁명 현장에서 진압 중 숨진 것으로 집계됐다. 간첩을 체포하거나 수색하는 과정에서 습격을 받거나 폭발물이 터져 목숨을 잃은 경우도 있었다. 특히 1962년 4월 1일에는 울산에서 간첩 수색을 위해 출동하던 경찰관 25명이 자동차 사고로 한꺼번에 사망했다. 1963년 6월 25일엔 장승포에서 산사태가 일어나 주민 61명이 사망했다. 이때 18명의 경찰관이 주민 대피를 돕다 숨진 것으로 기록돼 있다. ●3명의 목숨 앗아 간 김신조·실미도 사건 1966년부터 1975년 사이 순직자 중 주목되는 사람은 ‘1968년 1월 21일 무장공비 검거 작전 중 적탄에 전사’라고 기록된 최규식 서울 종로경찰서장과 1971년 8월 23, 24일에 인천에서 각각 순직한 두 명의 순경이다. 1968년 1월 21일 게릴라전 특수훈련을 받은 김신조 등 북한 124군부대 무장간첩 31명이 당시 서울 세검동 자하문초소까지 진입해 경찰과 교전을 했다. 현장을 지휘하던 최 서장이 전사하고 경찰 2명이 중상을 입었다. 그 뒤 우리 군은 124군부대와 똑같은 규모로 북파 부대를 창설했다. 인천 중구의 무인도인 실미도에서 실전과 똑같은 훈련을 받은 북파 부대원들은 1971년 8월 23일 기간병들을 살해하고 서울로 향했다. 인천의 경찰관 두 명이 이 과정에서 희생됐다. ●광주민주화운동 진압하다 스러진 순경 4명 1979년 10·26사건으로 박정희 시대가 막을 내렸지만 전두환, 노태우 등 신군부가 집권하면서 민주화운동이 곳곳에서 나타났다. 1980년 5월 18일 시작된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191명이 숨지고 852명이 부상한 것으로 발표됐다. 이 기간 중 전남 함평경찰서 소속 순경 4명이 사망했다. 순직자 명단엔 ‘80년 5월 20일 데모 진압 중 자동차에 밀려 사망’이라고 적혀 있다. 1989년 5월 3일에는 ‘동의대 사건’이 일어났다. 시위대로 위장한 사복경찰 5명이 학생들에게 발각돼 도서관에 감금됐다. 경찰은 도서관에 진입했고 학생들과 충돌하는 과정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경찰 4명이 사망했다. 공식 서류에는 ‘동의대 학생들에게 납치된 전경 5명의 구출 작전을 벌이던 중 학생들이 석유 등을 뿌리고 화염병을 투척, 화재로 인한 화상 및 질식하여 사망’이라고 나와 있다. ●시간 지날수록 경찰 ‘과로사’ 점점 늘어 전쟁과 휴전 직후엔 교전으로 인한 전사자가 많았지만 이후 과로로 순직하는 경찰이 크게 늘었다. 시기별 순직자의 사망 경위 중 과로·졸도 사망은 전쟁 직후에는 15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1956~1965년엔 전체 사망자의 28.9%로 급증했다. 1966~1975년에는 42.3%로 껑충 뛰었다. 1976~1985년 37.1%, 1986~1995년 40.1%에 이어 1996~2005년에는 과로 순직이 58.4%로 급등했다. 최근 10년간은 경찰 149명이 순직한 가운데 53.7%인 80명이 과로사한 것으로 집계됐다. 과로로 숨진 경찰관들의 사망 경위를 살펴보면 밤새 당직을 서거나 잠복근무를 한 뒤 충분히 쉬지 못하고 다음날 다시 근무에 투입된 경우가 많았다. 1998년 말엔 탈옥수 신창원 검거를 위한 특별근무 등으로 업무가 과중돼 간경변이 재발한 순직자가 있었다. 2000년엔 전년도 ‘인천 호프집 화재 사건’ 뒤 유해업소 특별단속으로 피로가 누적된 상태에서 철야 근무를 계속한 경찰관이 가슴 통증을 호소하다 숨지기도 했다. 2010년엔 천안함 사건으로 인한 을호 비상근무 등으로 적절한 휴식을 취하지 못한 이송범 광주지방경찰청장 등 2명의 경찰관이 쓰러져 숨졌다. 김민석 기자 shiho@seoul.co.kr
  • “민주주의 자부심 4·19, 기록유산 돼야”

    “민주주의 자부심 4·19, 기록유산 돼야”

    “1960년 4·19혁명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이룬 자부심인데 외국에서는 잘 알 수 없었고, 국내에서는 점점 잊히고 있습니다.” 박겸수(56) 서울 강북구청장은 22일 4·19혁명 학술자료집 ‘4월 혁명과 한국의 민주주의’ 발간회를 갖고, 4·19혁명 기록물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추진한다고 밝혔다. 강북구는 지난달 4·19혁명 기념사업 추진위원회와 함께 문화재청에 등재신청서를 제출했다. 등재대상 기념물은 4·19혁명에 대한 기록과 문건, 영상을 포함한 사진, 녹음 등의 자료로 모두 1469건이다. 문화재청은 문화재위원회의 심사를 거쳐 내년 3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위원회에 등재를 신청할 예정이다. 국립 4·19 민주묘지가 자리 잡은 강북구는 3년째 4·19 관련 3개 단체와 함께 4·19혁명 국민문화제를 여는 등 4·19의 의미를 후세에 전하고자 애쓰고 있다. 이날 발간된 학술자료집은 4·19에 직접 참여한 유세희(75) 한양대 명예교수 등 5명의 교수가 집필에 참여했다. 학술자료집은 특히 영문판으로도 500부 발간돼 하버드대, 스탠퍼드대 등 해외 주요 200여개 대학에 배포된다. 집필진 가운데 한 명인 정해구(60) 성공회대 교수는 “해외에서 한국 민주화 운동에 대한 자료가 없어 연구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영문판이 발간돼 의미가 깊다”며 “광주 민주화운동은 이미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만큼 4·19혁명과 6월 항쟁도 한국 민주주의를 낳은 시민혁명으로 유네스코 유산에 올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올해 4·19혁명 국민문화제는 4만여명의 시민이 참여했으며 록 페스티벌, 전국대학생 토론대회 등을 열어 젊은 세대들에게도 4·19의 의미를 전달했다. 대학생 토론대회에서 우승한 이화여대 이진수(25)씨도 이날 발간회에 참석해 “4·19는 교과서에 몇 줄로밖에 설명되지 않아 공교육만으로 미래세대에 의미를 전달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박 구청장은 “3·1운동이란 우리의 역사를 외국에 알렸다면 신탁통치와 분단, 6·25전쟁의 비극은 없었을 것”이라며 “이번 4·19 학술자료집의 영문판 발간으로 우리가 독재에 항거할 수 있는 민족이란 시각을 해외에 심어줄 수 있게 됐다”고 강조했다. 자료집 제작에 참여한 조대엽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국가와 정부는 뭐하고 지방자치단체가 학술자료집을 출간하는가. 이번 자료집 출간은 진화하는 지자체와 정체된 중앙정부의 수준 차이를 보여준다”고 진단했다. 4·19는 1960년 3월 15일 대통령선거의 부당함에 항의해 학생이 주도하고 시민이 참여한 혁명이다. 윤창수 기자 geo@seoul.co.kr
  • 北 비판 늘리고 박정희 功過 재조명… 좌편향 손보는 ‘우향우’

    北 비판 늘리고 박정희 功過 재조명… 좌편향 손보는 ‘우향우’

    “북한에 대해서는 독재라는 말이 2차례 나오는데 남한에 대해서는 24차례나 나온다. 남한과 북한의 분량 차이를 고려해도 국민 정서상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다.” 김재춘 교육부 차관이 지난 12일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역사 교과서 발행체제 개선 방안’ 브리핑에서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전환의 배경으로 들었던 특정 교과서의 ‘좌편향’에 대한 예시다. 야권과 학계 및 시민사회단체가 국정화 전환 자체에 격렬하게 반발하는 상황에서 내년 말 모습을 드러낼 국정교과서가 이념 편향성 논란에서 자유로울 리 없다. 교육부가 명명한 대로 진보와 보수 모두 수긍할 수 있는 ‘올바른 역사 교과서’를 만들려면 논쟁이 되는 부분들에 대해 이념과 세대를 아우르는 큰 틀의 소통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교육부는 “역사 교과서 검정제는 국민을 통합하고 건전한 국가관과 균형 있는 역사 인식을 기르는 데 이바지하지 못한 채 지속적인 이념 논쟁과 편향성 논란을 일으켜 왔다”고 국정화 전환의 당위성을 강조했다. 교육부가 검정체제의 한국사 교과서에서 문제로 꼽았던 부분은 대부분 진보와 보수의 대립이 첨예하게 전개되는 근현대사 부분이다. 교육부가 검정교과서를 분석한 비공개 자료인 ‘고교 한국사 교과서 분석’을 보면 ▲해방 후 남북한의 토지개혁 ▲6·25전쟁 ▲대한민국의 정통성(건국) ▲이승만에 대한 평가 ▲5·16군사정변 ▲박정희의 공과 ▲10월 유신 등 18개 주제에서 문제점이 있다고 돼 있다. 2013년 교학사 교과서 파문이 났을 때 교육부가 다른 7종의 교과서에 대해 집중적으로 수정을 지시했던 부분들이기도 하다. 바꿔 말하면 국정교과서가 출간됐을 때 진보 진영에서 해당 부분의 서술을 놓고 반발할 가능성이 높은 대목이기도 하다. 양정현 한국역사교육학회장(부산대 교수)은 “새 국정교과서의 필진이 구성되지 않고 내용 역시 나오지 않은 상태이지만 국정화를 추진해 온 교육부와 새누리당의 그간 움직임으로 미뤄 볼 때 근현대사 부분은 현재 박근혜 정부가 원하는 식으로 기술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우선 국정교과서에서는 북한에 대한 비판의 강도가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검정교과서 가운데 금성출판사의 서술인 ‘임시인민위원회는 일본인과 친일파 소유지, 지주 소유 토지 등을 몰수해 농민에게 무상으로 나눠 주는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방식으로 토지개혁을 실시했다’(373쪽)는 대목은 사라질 것으로 보인다. 교육부는 2013년 금성출판사 측에 ‘분배된 토지에 대해서는 매매와 소작, 저당이 금지됐다는 점을 기술하라’고 수정명령을 내린 바 있다. 6·25전쟁 부분에는 북한의 기습 남침을 직접적으로 보여 주는 자료들이 대거 들어갈 수 있다. 미래엔 교과서에는 ‘동기로 본다면 인민공화국이나 대한민국이나 조금도 다를 바 없을 것이다’(317쪽)라고 기술돼 있다. 교육부는 이런 부분에 대해 ‘6·25전쟁의 책임이 남북 모두에 있다고 오해할 소지가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에 대해서는 ‘정찰명령 제1호’나 ‘전투명령 제1호’ 등 북한의 기습 남침을 보여 줄 수 있는 자료들을 수록하라고 지시했다.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관련해선 ‘건국일’을 두고 의견 충돌이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 보수 진영에서는 “대한민국 건국은 이승만 정부가 수립된 1948년”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진보 진영은 “대한민국 건국은 임시정부가 수립된 1919년”이라는 입장이다. 교육부는 이번 국정화와 별도로 앞서 개정된 2015 교육과정에서 기존의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라는 용어를 ‘대한민국 수립’으로 바꿨다. 교육부 관계자는 “북한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으로 쓰는데 우리는 ‘정부 수립’이라고 쓰며 스스로 격하한다는 지적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속인 정진후 정의당 의원은 이에 대해 “국가기록원도 1948년을 ‘대한민국 정부 수립’으로 쓰고 있다”고 지적한다. 조한경 전국역사교사모임 회장은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일이라고 주장하는 뉴라이트 계열의 입장을 반영한 것”이라고 말했다. 교육부가 현재 검정교과서의 문제로 든 18개 주제 가운데 4개 주제는 박정희 정부에 대한 것이다. 국정교과서에서는 박정희 정부의 공적은 부각시키고 잘못은 줄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5·16군사정변’에 대해 비상교육과 미래엔, 천재교육 등에서는 “군사정권으로 인해 민주화를 지향한 4·19혁명 정신이 사실상 부정됐다”고 문제 제기를 한 바 있다. 교육부는 박정희 시대 경제성장과 관련해 ‘외자 도입을 통한 경제개발과 수출 주도형 성장 정책 역시 성과가 컸던 만큼 부작용도 많았다’, ‘1997년 외환위기가 일어나는 원인 중 하나’(금성출판사) 등으로 서술한 부분에 대해서도 문제를 지적한 바 있다. 교육부는 ‘인과관계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이 부분에 대한 삭제를 집필진에 지시했다. 반면 새마을운동의 경우 보수 성향의 교학사 교과서는 ‘세계사에서 유례없는 농촌 발전운동’이라고 했는데 교육부는 이러한 문제 제기에 대해 “허용될 수 있는 수준에서의 관점의 차이”라고 했다. 이준식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은 “새 국정교과서가 스스로를 비하하는 ‘자학사관’의 문제점을 들어 지나치게 밝은 부분만 쓰려고 한다면 결과적으로 현 정권에 유리한 내용만 쓰게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박정희의 5·16정변이 쿠데타라는 역사적인 사실과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민주주의가 억압됐다는 점 등을 수록하지 않고서는 결코 공정한 교과서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베트남 파병에 대해서는 교학사를 제외한 7종의 교과서가 그로 인한 후유증을 서술한 점이 논란이 됐다. 교육부는 “천재교육, 두산동아는 ‘베트남 민간인 학살’을 직접 언급했는데 이러한 표현은 전쟁의 불가피성과 교과서임을 감안할 때 과도한 표현으로 부적절하다”는 입장이다. ‘학살’이라는 표현은 의도성, 무모함, 잔혹함 등을 내포한 것으로 자칫 국군 명예를 훼손시킬 수 있다고도 했다. 이에 따라 국정교과서에서는 베트남 파병의 당위성과 효과 등에 국한돼 기술될 가능성이 높다. 조성을 한국사학사학회장(아주대 사학과 교수)은 “교육부가 검정교과서에 대해 비판하는 부분은 뉴라이트에서 만든 자료들과 유사한 측면이 많다”며 “논란이 되는 부분에 대해 교육부가 직접 나서서 학술적 근거가 타당한지 각계각층의 이야기를 듣는 작업을 선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이성원 기자 lsw1469@seoul.co.kr
  • 北 비판 늘리고 박정희 功過 재조명…좌편향 손보는 ‘우향우’

    北 비판 늘리고 박정희 功過 재조명…좌편향 손보는 ‘우향우’

    “북한에 대해서는 독재라는 말이 2차례 나오는데 남한에 대해서는 24차례나 나온다. 남한과 북한의 분량 차이를 고려해도 국민 정서상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다.” 김재춘 교육부 차관이 지난 12일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역사 교과서 발행체제 개선 방안’ 브리핑에서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전환의 배경으로 들었던 특정 교과서의 ‘좌편향’에 대한 예시다. 야권과 학계 및 시민사회단체가 국정화 전환 자체에 격렬하게 반발하는 상황에서 내년 말 모습을 드러낼 국정교과서가 이념 편향성 논란에서 자유로울 리 없다. 교육부가 명명한 대로 진보와 보수 모두 수긍할 수 있는 ‘올바른 역사 교과서’를 만들려면 논쟁이 되는 부분들에 대해 이념과 세대를 아우르는 큰 틀의 소통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교육부는 “역사 교과서 검정제는 국민을 통합하고 건전한 국가관과 균형 있는 역사 인식을 기르는 데 이바지하지 못한 채 지속적인 이념 논쟁과 편향성 논란을 일으켜 왔다”고 국정화 전환의 당위성을 강조했다.  교육부가 검정체제의 한국사 교과서에서 문제로 꼽았던 부분은 대부분 진보와 보수의 대립이 첨예하게 전개되는 근현대사 부분이다. 교육부가 검정교과서를 분석한 비공개 자료인 ‘고교 한국사 교과서 분석’을 보면 ▲해방 후 남북한의 토지개혁 ▲6·25전쟁 ▲대한민국의 정통성(건국) ▲이승만에 대한 평가 ▲5·16군사정변 ▲박정희의 공과 ▲10월 유신 등 18개 주제에서 문제점이 있다고 돼 있다. 2013년 교학사 교과서 파문이 났을 때 교육부가 다른 7종의 교과서에 대해 집중적으로 수정을 지시했던 부분들이기도 하다. 바꿔 말하면 국정교과서가 출간됐을 때 진보 진영에서 해당 부분의 서술을 놓고 반발할 가능성이 높은 대목이기도 하다. 양정현 한국역사교육학회장(부산대 교수)은 “새 국정교과서의 필진이 구성되지 않고 내용 역시 나오지 않은 상태이지만, 국정화를 추진해 온 교육부와 새누리당의 그간 움직임으로 미뤄 볼 때 근현대사 부분은 현재 박근혜 정부가 원하는 식으로 기술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우선 국정교과서에서는 북한에 대한 비판의 강도가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검정교과서 가운데 금성출판사의 서술인 ‘임시인민위원회는 일본인과 친일파 소유지, 지주 소유 토지 등을 몰수해 농민에게 무상으로 나눠 주는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방식으로 토지개혁을 실시했다(373쪽)’는 대목은 사라질 것으로 보인다. 교육부는 2013년 금성출판사 측에 ‘분배된 토지에 대해서는 매매와 소작, 저당이 금지됐다는 점을 기술하라’고 수정명령을 내린 바 있다.  6·25전쟁 부분에는 북한의 기습 남침을 직접적으로 보여 주는 자료들이 대거 들어갈 수 있다. 미래엔 교과서에는 ‘동기로 본다면 인민공화국이나 대한민국이나 조금도 다를 바 없을 것이다’(317쪽)라고 기술돼 있다. 교육부는 이런 부분에 대해 ‘6·25전쟁의 책임이 남북 모두에 있다고 오해할 소지가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에 대해서는 ‘정찰명령 제1호’나 ‘전투명령 제1호’ 등 북한의 기습 남침을 보여 줄 수 있는 자료들을 수록하라고 지시했다.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관련해선 ‘건국일’을 두고 의견 충돌이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 보수 진영에서는 “대한민국 건국은 이승만 정부가 수립된 1948년”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진보 진영은 “대한민국 건국은 임시정부가 수립된 1919년”이라는 입장이다. 교육부는 이번 국정화와 별도로 앞서 개정된 2015 교육과정에서 기존의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라는 용어를 ‘대한민국 수립’으로 바꿨다. 교육부 관계자는 “북한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으로 쓰는데 우리는 ‘정부 수립’이라고 쓰며 스스로 격하한다는 지적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속인 정진후 정의당 의원은 이에 대해 “국가기록원도 1948년을 ‘대한민국 정부 수립’으로 쓰고 있다”고 지적한다. 조한경 전국역사교사모임 회장은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일이라고 주장하는 뉴라이트 계열의 입장을 반영한 것”이라고 말했다. 교육부가 현재 검정교과서의 문제로 든 18개 주제 가운데 4개 주제는 박정희 정부에 대한 것이다. 국정교과서에서는 박정희 정부의 공적은 부각시키고 잘못은 줄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5·16군사정변’에 대해 비상교육과 미래엔, 천재교육 등에서는 “군사정권으로 인해 민주화를 지향한 4·19혁명 정신이 사실상 부정됐다”고 문제 제기를 한 바 있다.  교육부는 박정희 시대 경제성장과 관련해 ‘외자 도입을 통한 경제개발과 수출 주도형 성장 정책 역시 성과가 컸던 만큼 부작용도 많았다’ ‘1997년 외환위기가 일어나는 원인 중 하나’(금성출판사) 등으로 서술한 부분에 대해서도 문제를 지적한 바 있다. 교육부는 ‘인과관계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이 부분에 대한 삭제를 집필진에 지시했다. 반면 새마을운동의 경우 보수 성향의 교학사 교과서는 ‘세계사에서 유례없는 농촌 발전운동’이라고 했는데 교육부는 이러한 문제 제기에 대해 “허용될 수 있는 수준에서의 관점의 차이”라고 했다.  이준식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은 “새 국정교과서가 스스로를 비하하는 ‘자학사관’의 문제점을 들어 지나치게 밝은 부분만 쓰려고 한다면 결과적으로 현 정권에 유리한 내용만 쓰게 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는 “박정희의 5·16정변이 쿠데타라는 역사적인 사실과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민주주의가 억압됐다는 점 등을 수록하지 않고서는 결코 공정한 교과서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베트남 파병에 대해서는 교학사를 제외한 7종의 교과서가 그로 인한 후유증을 서술한 점이 논란이 됐다. 교육부는 “천재교육, 두산동아는 ‘베트남 민간인 학살’을 직접 언급했는데 이러한 표현은 전쟁의 불가피성과 교과서임을 감안할 때 과도한 표현으로 부적절하다”는 입장이다. ‘학살’이라는 표현은 의도성, 무모함, 잔혹함 등을 내포한 것으로 자칫 국군 명예를 훼손시킬 수 있다고도 했다. 이에 따라 국정교과서에서는 베트남 파병의 당위성과 효과 등에 국한돼 기술될 가능성이 높다.  조성을 한국사학사학회장(아주대 사학과 교수)은 “교육부가 검정교과서에 대해 비판하는 부분은 뉴라이트에서 만든 자료들과 유사한 측면이 많다”며 “논란이 되는 부분에 대해 교육부가 직접 나서서 학술적 근거가 타당한지 각계각층의 이야기를 듣는 작업을 선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이성원 기자 lsw1469@seoul.co.kr
  • ‘日 강제동원 기록’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되나

    ‘日 강제동원 기록’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되나

    일제강점기에 강제 동원돼 피해를 당한 내용을 기록한 자료들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가 추진된다. 국무총리 소속 ‘대일항쟁기 강제 동원 피해 조사와 국외 강제 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가 2004년 이후 활동하며 수집, 작성해 온 강제 동원 관련 피해 기록물 33만 6797건이 지난달 마감된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신청 공모에 접수됐다. 관련 기록물은 강제 동원 희생자의 기록은 물론 일제의 식민지와 점령지 전반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기록물은 피해 조사서 22만 7141건, 지원금 지급 심사서 10만 5431건, 구술 자료 2525건, 사진 자료 1226건 등이다. 문화재위원회는 다음달 말까지 일제 강제 동원 피해 기록, 4·19혁명 관련 기록물 등 12건 중 심사를 통해 유네스코에 최종 등재 신청할 후보 2개를 선정한다. 최종 후보는 내년 3월 31일까지 유네스코에 제출되며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IAC) 등재심사소위원회의 사전 심사와 IAC의 최종 심사를 거쳐 2017년 6~7월 유네스코 사무총장의 승인으로 등재가 결정된다. 정부 관계자는 “심사의 공정성 및 형평성을 위해 12건이 접수됐다는 사실 외에 특정 기록물의 접수 여부, 향후 전망 등을 공식적으로 밝힐 수는 없다”고 말했다. 국내 심사의 형평성을 기하고, 등재 신청이 결정되기 전부터 일본을 불필요하게 자극하지 않는 등 외교적 파장을 줄이겠다는 의도로 해석된다. 하지만 지난 7월 하시마섬(군함도) 탄광 등 강제 동원돼 노역한 일제 산업시설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데 대한 대응 필요성에 대해서는 공감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제강점하 사할린 강제 동원 억류 희생자 한국유족회’ 등에서는 10만명 이상의 서명을 받았고 조만간 종교계와 학계, 시민사회 등에서 ‘세계기록유산 등재 추진운동본부’를 꾸려 토론회 및 서명운동에 나설 계획이다. 일제 강제 동원 피해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면 5·18민주화운동 기록물(2011년)과 새마을운동 기록물(2013년)에 이어 한국 근현대사와 관련한 세 번째 등재 사례가 된다. 박록삼 기자 youngtan@seoul.co.kr
  • 일제 잔재 벗은 국세청 별관터 시민 품으로

    일제 잔재 벗은 국세청 별관터 시민 품으로

    서울시가 광복 70주년을 맞아 일제 잔재 청산에 나섰다. 20일 시는 일제강점기의 상징물 중 하나였던 국세청 별관 자리에 조성한 시민광장을 일반에 공개했다. 일본은 1937년 덕수궁을 축소해 국세청 별관 자리에 조선 총독부 체신국 청사를 지었다. 시는 지난 4월부터 국세청 별관을 철거해 광장 조성에 착수했다. 국세청 별관이 철거되면서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대성당의 모습이 드러났다. 시민광장에 서면 덕수궁과 서울도서관 등 세종대로 일대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수직적 권위의 공간을 시민 중심의 수평적 공간으로 바꿨다는 설명이다. 서해성 예술총감독은 이날 “서울 시민광장 왼편의 덕수궁에서 대한제국의 역사를, 오른편 시의회 건물에서 4·19혁명의 격동을, 가운데 자리한 서울주교좌대성당에서 6월 민주항쟁의 치열함을 느낄 수 있다”고 설명하고서 “이 일대가 또 하나의 역사문화 공간으로 자리잡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시는 철거된 국세청 별관 터의 지하부에 덕수궁 지하보도와 연결되는 시민문화 공간도 조성할 계획이다. 이를 위한 설계공모를 진행 중이다. 아울러 22일에는 남산 북쪽 기슭(예장동 2-1)에 있는 조선통감부 관저 터에 새로운 표석을 세운다. 하야시 곤스케의 동상 판석 3점을 활용해 만든 ‘거꾸로 세운 동상’이다. 하야시 곤스케는 1904년 한일의정서와 한일협약, 1905년 을사늑약 체결에 앞장서며 남작 작위를 받았다. 광복 이후 곤스케의 동상은 파괴됐고 통감관저도 철거됐다. 2006년 남산 기슭에서 ‘남작 하야시 곤스케 군상’이라고 쓰인 동상 판석이 발견돼 관저 터의 위치가 확인됐다. 서 감독은 “동상 잔해를 모아 거꾸로 세워 만들 것”이라면서 “치욕을 잊지 않기 위한 ‘불망(不忘)의 거울’을 의미한다”고 전했다. 최지숙 기자 truth173@seoul.co.kr
  • 악화된 민생경제 내수 살려 돌파 ‘포석’

    악화된 민생경제 내수 살려 돌파 ‘포석’

    청와대와 정부가 오는 14일을 임시공휴일로 지정한 데에는 직장인 휴가가 집중되는 이달 초순의 지역 관광 수요와 내수경제 활성화 분위기를 더 이어가려는 뜻이 담겼다. 박근혜 정부 출범 후 지난해에는 세월호 참사, 올해는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 등 잇단 민생경제 악재로 국민적 피로감을 느낄 뿐만 아니라 소비 증진이 국가 경제에 도움되기를 희망해서다. 중국인 등 외국 관광객 유치도 주요 이유다. 14일 전국 고속도로와 민자 고속도로의 통행료가 면제되면 한국도로공사는 124억원, 민자 법인은 36억원의 손실이 발생하지만, 민자 법인에 대해선 손실 보전을 추진하고 있다. 또 코레일의 ‘내일로’ 2종 상품의 경우 7일권 6만 2700원, 5일권 5만 6500원 티켓의 반값에 ITX-청춘, 새마을·무궁화 열차 등을 무제한으로 이용할 수 있다. 4대 고궁(경복궁·창덕궁·창경궁·덕수궁)과 종묘·조선왕릉 등 15개 시설, 국립 자연휴양림 41곳, 국립현대미술관 등도 14~16일에 무료로 개방한다. 본래 관광 비수기에 진행하던 코리아 그랜드 세일도 14일부터로 앞당겨져 더 많은 할인 혜택 등을 누릴 수 있게 됐다. 아울러 광복절을 전후해 서울·부산·대전 등 전국 7개 권역에서 특별 공연과 불꽃놀이, 한류 콘서트 등을 만끽할 수 있다. 정부는 역대 56차례에 걸쳐 임시공휴일을 지정했고, 이번의 경우 2006년 5월 31일 지방선거일 이후 9년 2개월 만이다. 앞서 박정희 정부는 1962년 4·19혁명 기념일을 최초의 임시공휴일로 지정했고, 1969년 7월 21일 미국의 우주선 아폴로 11호 달착륙 기념일도 휴일이었다. 1988년 9월 17일 서울올림픽 개막일과 2002년 한·일 월드컵 폐막일 다음날인 7월 1일도 임시공휴일이었다. 한편 정부는 이날 국무회의에서 관광산업 규제를 개선하기 위해 관광호텔이나 국제회의 시설의 부대시설에 카지노를 설치하는 경우 허가 요건 가운데 하나인 전년도 외래 관광객 유치 실적 요건도 폐지했다. 김경운 전문기자 kkwoon@seoul.co.kr
  • 수험생 7만 7000여명 몰린 서울시 공무원 시험 분석

    수험생 7만 7000여명 몰린 서울시 공무원 시험 분석

    지난 13일 치러진 서울시 공무원 공개경쟁채용시험은 7만 7000여명의 수험생이 몰려 치열한 경쟁을 보였다. 필수과목 가운데 영어가 다소 높은 난도로 출제된 데다 선택과목은 행정학을 제외한 행정법과 사회 문제가 어렵게 나왔다. 이에 영어 점수와 함께 어떤 선택과목에 응시했는지에 따라 수험생의 희비가 갈릴 것으로 전망된다. 서울신문은 공단기 학원 강사들의 도움을 받아 과목별 출제 경향을 분석했다. 필수과목인 국어는 선택지의 개수가 5개에서 4개로 줄었다는 점 말고는 예년 시험과 유형 및 문항 배치 등이 매우 유사했다. 이선재 강사는 “‘지식형 문제의 강세’라는 서울시 공무원시험의 전형적인 특성이 반영된 시험”이라고 분석했다. 분야별로 살펴보면 문법은 음운 변화 과정, 형태론적 특성 등이 출제됐고 맞춤법, 띄어쓰기 등 평이한 수준의 문제가 나왔다. 독해의 경우 문항 수가 기존 1문항에서 3문항으로 늘어났지만 문제 난도가 낮아 풀이에 어려움은 없었다고 분석된다. 지난해에 이어 어휘·한자 분야에서는 전체 문항의 25%인 5문항이 출제됐다. 특히 한자 성어 문제는 국가직 시험과는 달리 독음을 붙이지 않은 채 출제돼 수험생이 당황스러웠을 것으로 보인다. 현대문학과 고전문학은 지난해에 비해 문항 수가 줄어든 데다 시조가 출제되면서 체감 난도는 낮아진 것으로 분석된다. 이 강사는 “문학 문제 가운데 서울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을 묻는 현대문학 문제는 굉장히 까다로웠다”며 “문학작품에 대한 다양한 배경지식을 묻는 문제는 경찰직 등 다른 공무원시험에도 등장하기 때문에 대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영어는 예년보다 까다로운 문제가 나온 데다 유형별로 난도 격차가 심해 수험생의 체감 난도는 더 높았을 것으로 전망된다. 분야별로 살펴보면 문법은 문장구조를 결정하는 요소가 아닌 관사, 명사의 단수형 등 지엽적인 문제가 등장했다. 기존에 출제됐던 영작 문제와 문장 전체가 맞는지를 가려내는 유형의 문제는 나오지 않았고, 밑줄형이나 빈칸형만 출제됐다. 어휘의 경우 대화 지문에서 특정 단어의 쓰임이 제대로 됐는지를 묻는 유형이 등장했고 밑줄 친 부분의 단어뿐 아니라 선택지의 단어가 어렵게 출제됐다. 특히 공항에서 전자레인지를 짐으로 가져가는 상황 등 생소하거나 다소 억지스러운 상황, ‘carousel’(수화물 컨베이어 벨트) 등 평소 익혀두지 않았던 단어가 출제됐다. 독해는 추상적인 소재나 고도의 논리를 요구하는 지문이 일부 출제된 데다 함정에 빠지기 쉬운 오답이 제시된 문제가 많았다. 조은정 강사는 “B형의 17, 19번은 수험생이 풀기에 굉장히 까다로운 문제였다”면서 “서울시 시험은 다른 공무원시험에 비해 독해 지문이 짧지만 어려운 단어와 추상적인 내용 등이 자주 등장한다는 점이 이번에도 유지됐다”고 말했다. 한국사는 3·15부정선거, 4·19혁명 등 근현대사의 출제 비중이 높았지만 난도는 평이한 수준이었다. 강민성 강사는 “무조건적이고 단순한 암기가 아니라 이해를 기반으로 한 암기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던 시험”이라고 분석했다. 또 단답형 문제가 줄어든 대신 자료 제시형 문제는 17문항이나 출제됐다. 특히 장수왕 재위 당시 상황, 대동법, 갑신정변, 좌우합작운동 문제는 주어진 자료를 명확하게 파악하지 못하면 해결하기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지난 4월 출제된 국가직 9급 시험 문제와 비교해 보면 1~2문항 정도 더 어렵게 출제된 것으로 분석됐다. ‘선택과목 빅 3’라 불리는 사회, 행정학, 행정법 가운데 행정학을 제외한 2과목은 까다롭게 출제된 것으로 분석됐다. 특히 사회는 경제 분야에서 평소 6문항보다 2문항이나 많은 8문항이 출제됐고 표와 그래프 유형의 통계 문제가 10문항 나왔다. 중상급 난도의 문제가 절반 이상 나오면서 사회를 선택한 수험생 사이에는 문제 풀이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는 불평까지 나오고 있다. 위종욱 강사는 “법과 정치 6문항, 사회문화 6문항에 비해 경제 분야의 출제 비중이 높았다”며 “법과 정치, 사회문화에서는 자주 출제되는 개념이 나왔지만 표와 그래프 유형의 통계 문제가 다수 출제돼 풀이에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행정법 역시 2013년, 2014년과 비교했을 때 난도가 상당히 높아진 것으로 분석된다. 전효진 강사는 “기출 지문을 그대로 쓰기보다는 변형했다”며 “기출문제만 학습한 수험생은 어려움을 느꼈겠지만 기본서에 충실했던 수험생에게는 대체적으로 쉬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행정법과 사회에 비해 평이한 난도였던 행정학은 대부분의 문제가 빈출 이론과 기존 기출문제에서 나왔다. 김중규 강사는 “행정학의 범위를 크게 벗어난 문제는 없었으며 난도가 높은 문제는 출제되지 않았다”면서 “지방자치에서 나왔던 3문제도 체감 난도는 낮았다”고 분석했다. 홍인기 기자 ikik@seoul.co.kr
  • [커버스토리] 萬人之上 오른 총리, 一人之下에서 463일

    [커버스토리] 萬人之上 오른 총리, 一人之下에서 463일

    이완구 국무총리가 사의를 표명한 뒤 새로운 총리 후보자가 누가 될 것인지 관심이 쏠린다. 하지만 현 정부 들어 총리 후보자가 잇따라 낙마한 데서 보듯 혹독한 여론 검증과 인사청문회 절차가 버티고 있어 새 총리를 임명하는 게 만만치 않아 보인다. ‘권한 없는 넘버2’의 한계를 벗어나 도덕적 권위와 통합의 리더십을 가진 책임총리의 위상과 역할을 기대하는 목소리도 높다. 1948년 정부수립 이래 명암과 영욕이 교차한 ‘대한민국 총리’를 되돌아본다. ●첫 후보자 이윤영, 네 번 지명받고도 한번 못해봐 대한민국 국무총리는 첫 시작부터 순탄치 않은 자리였다. 1948년 당시 이윤영 총리 지명자는 이런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평북 영변군 출신 개신교 목사이자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고초를 당했던 이윤영은 해방 이후 고당 조만식과 함께 활동하다 월남한 뒤 제헌의회 의원이 됐다. 1948년 이승만 대통령이 첫 총리 지명자로 이윤영을 지명했지만 다수당이던 한국민주당의 반대로 인준표결에서 부결됐다. 결국 이 대통령은 광복군 참모장을 지냈던 이범석을 총리로 지명해 국회인준을 받았다. 당초 대한민국 제헌헌법 초안은 의원내각제를 모델로 했고 이에 따르면 대통령은 상징적인 국가원수에 그쳤다. 하지만 이 대통령이 대통령중심제를 고수하면서 결국 의원내각제 기반 위에 대통령중심제를 덧붙이는 식으로 절충이 됐다. 한민당은 이에 협조하는 대신 한민당 지도자인 김성수를 총리로 지명하라고 요구했지만, 성사되지 않았다. 이윤영은 1950년 4월 다시 총리 후보자로 지명됐지만 국회표결에서 찬성 68표, 반대 83표로 부결됐다. 1952년 4월에도 장면 총리가 사퇴하자 국무총리 서리로 임명됐지만 이번에도 역시 국회에서 부결됐다. 그해 10월 장택상 총리가 사임하자 이 대통령은 4번째로 이윤영을 총리에 지명하지만 또다시 국회의 벽에 막혔다. 결과적으로 이윤영은 총리에 4번 지명받고도 한번도 국무총리가 되지 못한 유례없는 기록을 갖게 됐다. 제2공화국이 의원내각제를 채택하는 개헌을 하면서 국무총리는 사실상 국가원수가 됐지만 5·16쿠데타 이후 다시 임명직 국무총리가 등장하면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국무총리는 법적으로는 권한이 막중하지만 실제로는 인사권 자체가 전적으로 대통령 소관이어서 실권을 가질 수 없는 게 현실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책임총리제를 강조하며 이해찬 전 총리에게 상당한 권한을 주려고 노력한 바 있지만, 전반적으로 대한민국에서 총리는 ‘방탄총리’, ‘실권 없는 2인자’라는 논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1대 이범석 나치 연구자… ‘친일 전력’ 총리 3명 이윤영 총리안의 부결로 대한민국 초대 총리는 한평생을 독립운동에 바쳤던 이범석이 맡게 됐다. 15세에 중국으로 망명해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홍범도 장군이 주도한 청산리전투에 참여했고 임시정부 한국광복군 참모장과 제2지대장 등을 지냈다. 그는 나치를 연구하고 히틀러 사망을 안타까워하는 등 나치를 추종했다는 논란에도 휩싸였다. 역대 총리 가운데 3명은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친일파에 포함돼 있다. 정일권·김정렬 두 총리는 일본군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군 소속 장교로 복무했다. 김정렬 총리는 태평양 전쟁에 조종수로 참전했고, 장면 총리는 종교계 총동원을 논의하는 시국간담회에 천주교 대표로 참석하기도 했다. ●43대 중 재임은 4명… 실제 총리 수 39명 이완구 총리는 43대 총리이지만 이범석 초대 국무총리가 취임한 뒤 현재까지 국무총리로 일했던 사람은 모두 39명이다. 이 가운데 4명이 총리를 두 번 맡았다. 장면은 1950년부터 1952년까지 총리를 지냈지만 이승만 대통령과 갈등 끝에 사임했다. 4·19혁명 뒤에는 내각책임제 정부수반인 총리에 선출됐지만 이번에는 5·16쿠데타가 일어나면서 총리에서 물러났다. 이 밖에 백두진은 이승만·박정희 정부, 김종필은 박정희·김대중 정부, 고건은 김영삼·노무현 정부에서 총리로 일했다. 이완구 총리는 63일 만의 사의표명을 기준으로 하면 총리로서 가장 단명한 총리라는 불명예스러운 기록을 남기게 됐다. 이 총리를 포함해 역대 총리의 평균 재임기간은 463.5일로, 1년 3개월 남짓이다. 6대 허정 총리는 외무장관으로 재임하던 도중 4·19혁명이 일어나고 대통령이 사임하는 등의 혼란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임시로 맡은 총리였다. 22대 노재봉 총리는 1991년 1월에 취임한 뒤 명지대 1학년이던 강경대씨가 시위 도중 경찰에게 구타당해 숨지면서 발생한 대규모 시위를 수습하는 차원에서 4개월 만에 경질됐다. 총리로서 재직일수가 가장 긴 총리는 9대 정일권 총리이며, 김종필 총리가 두 번째다. 정일권 총리는 재임기간이 1964년부터 1970년까지 6년으로 한국의 현실에서는 이례적으로 ‘장수 총리’ 기록을 세웠다. 김종필 총리는 1971년부터 1975년까지, 이어 1998년부터 2000년까지 총리를 지냈지만 정일권 총리가 세운 기록을 깨지는 못했다. 민주화 이후 가장 오랫동안 재임한 사람은 김황식 총리다. 그는 2010년부터 2013년까지 약 2년 5개월간 재직했다. ●역대 총리 평균 연령 61.5세… 최고령은 74세 역대 총리 39명의 취임 당시 평균 연령은 61.5세다. 연령별로 보면 70대에 총리가 된 사람이 7명이다. 취임 당시 가장 고령이었던 총리는 24대 현승종 총리와 32대 박태준 총리로, 두 사람 모두 74세에 총리가 됐다. 19대 김정렬 총리와 39대 한승수 총리는 73세였고 34대 김석수 총리는 71세였다. 8대 최두선 총리와 42대 정홍원 총리는 70세였다. 반면 4대 백두진 총리와 11대 김종필 총리는 취임 당시 46세, 9대 정일권 총리는 47세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총리가 됐다. 고향으로 살펴보면 이북 출신이 꽤 많다는 점이 눈에 띈다. 황해도 4명, 평남 5명, 평북 2명, 함남 1명으로 모두 12명이다. 노태우 정부 당시에는 강영훈(평북 창성), 정원식(황해 재령), 현승종(평남 개천) 등 총리 5명 중 3명이 이북 출신이었다. 단일 지역으로는 서울이 7명으로 가장 많다. 충남과 경남이 5명씩이고 경기와 전북이 4명을 배출했다. 정일권 총리는 러시아 우수리스크에서 태어나 유일한 재외동포 출신 총리로 기록됐다. 이 밖에 37대 한명숙 총리부터 38대 한덕수 총리, 39대 한승수 총리까지 세 번 연속 청주 한(韓)씨에서 총리를 배출한 것도 특이한 기록이다. 강국진 기자 betulo@seoul.co.kr
  • 이완구 총리 곤혹스러운 4·19

    이완구 총리 곤혹스러운 4·19

    이완구 국무총리가 곤혹스러운 4·19혁명 기념일을 보냈다. ‘성완종 리스트’에 연루돼 검찰 수사 대상에 오른 데다 야당은 물론 여당 안팎에서도 이 총리의 사퇴가 불가피하다는 얘기가 끊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 총리는 19일 오전 서울 강북구 국립4·19민주묘지에서 국가보훈처 주관으로 열린 제55주년 4·19혁명 기념식에 참석해 “4월 정신을 온전히 받들기 위해 공공, 노동, 금융, 교육 등 4대 구조 개혁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경제 재도약의 토대를 구축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또 “4·19혁명의 정신을 받드는 또 하나의 길은 평화통일의 길을 여는 것”이라며 “국가 품격을 드높이고 세계 속에 당당한 선진사회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사퇴 압박에 대한 입장을 묻는 취재진에겐 “대통령이 안 계시지만 국정이 흔들림 없이 가야 한다. 국정 수행을 차질 없이 하겠다”고 답했다. 해임 건의안에 대한 질문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날 행사는 대통령의 남미 순방 출국 후 이 총리의 첫 외부 일정이다. 기념 축사는 평범하고 간결했다. 이 총리는 평소와 다르게 시종 굳은 표정이었고, 축사 첫 문장을 읽어 내려갈 땐 목이 잠기기도 했다. 행사장에는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와 유승민 원내대표, 새정치민주연합 소속 이석현 국회부의장 등이 참석했다. 이 총리는 행사장에 도착해 김 대표와 악수를 나눴다.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입을 굳게 다문 채 서로 눈만 바라봤다. 이 총리가 성완종 파문 이후 김 대표를 만난 것은 처음이다. 행사 후에 두 사람이 단독 회동할지 관심이 쏠렸지만 회동은 이뤄지지 않았다. 이 부의장이 이 총리와 악수하며 “대통령에게 업무 보고를 하느냐”고 묻자 이 총리는 “(이병기 청와대) 비서실장이 하고 있다”고 짧게 답했다. 이 총리는 전날에 이어 이날 행사 후에도 종로구 삼청동 총리 공관에 머물며 외출을 삼갔다. 김경운 전문기자 kkwoon@seoul.co.kr
  • 민주투사로 불리는 내 제자여…

    민주투사로 불리는 내 제자여…

    4·19혁명 55주년인 19일 서울 강북구 우이동 국립 4·19 민주묘지에서 우산을 든 박승건씨가 혁명 때 희생된 제자 박건정씨의 묘비를 쓰다듬고 있다. 손형준 기자 boltagoo@seoul.co.kr
  • [현장 행정] 55년 전 민주화 염원 강북서 다시 꽃핀다

    [현장 행정] 55년 전 민주화 염원 강북서 다시 꽃핀다

    “대한민국 민주 발전을 이룬 4·19혁명의 가치를 제대로 알리기 위해 유네스코 등재를 추진합니다.” 박겸수 강북구청장은 13일 서울시청 기자실에서 브리핑을 갖고 오는 18·19일에 4·19혁명 국민문화제를 연다고 밝혔다. 그는 “4·19혁명이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발전하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에 비해 그 의미가 제대로 널리 알려지지 못하고 있다”면서 “문화제를 통해 역사를 바로 보고 그날을 경험하며 최대한 많은 이가 공감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4·19혁명은 1960년 자유당 정권이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해 개표를 조작하자 부정선거 무효와 재선거를 주장하며 학생들이 중심이 돼 일으킨 혁명이다. 이로 인해 12년 이승만 정권이 막을 내렸다. 2013년부터 개최한 문화제는 올해 학술토론회가 강화된 것이 특징이다. 오는 18일 오후 3시 수유동 한신대 신학대학원에서 ‘4·19혁명과 세계사적 의의’라는 주제로 열리며 이동희 한국학연구원 교수의 진행으로 정해구 성공회대 교수, 오제연 규장각 선임 연구원, 연규홍 한신대 신학대학원장 등이 참여한다. 또 구는 학술자료집을 영어로 발간해 세계의 주요 대학과 도서관에 보급하고,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할 계획이다. 축제의 중심은 18일 오후 7시 강북구청 사거리에서 열리는 전야제다. 희생영령을 위한 진혼무 공연, 시낭송 등과 함께 윤도현밴드, 양희은, 장미여관, 로맨틱펀치, 트랜스픽션 등이 출연하는 록 페스티벌이 2시간 동안 펼쳐진다. 메인 행사장이 설치되는 강북구청 사거리에서 광산사거리까지 600m 구간은 18일 오전 1시부터 19일 오전 3시까지 차량 운행이 전면 통제된다. 이 외 18일에는 헌혈릴레이, 태극기 아트페스티벌, 4·19 영상물 상영 및 전시, 현장 참배, 1960년대 거리재현 퍼레이드, 풍물패 공연 등이 열린다. 또 19일에는 산악인 엄홍길 대장과 함께하는 순례길 트레킹, 4·19 전국 대학생 토론대회, 4·19 희생영령 추모 소귀골 음악회 등이 이어진다. 박 구청장은 “국민문화제를 통해 4·19혁명을 잊고 있었던 기성세대와 사건 자체가 생소한 젊은 세대에 그 역사적 가치와 의미가 충분히 전달되기를 바란다”며 “1960년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타올랐던 뜨거운 열정과 함성을 직접 체험하고 느낄 수 있는 문화제에 많은 참여를 부탁한다”고 말했다. 이경주 기자 kdlrudwn@seoul.co.kr
  • ‘4·19혁명 기록물’ 세계기록유산 등재 추진

    올해로 55주년을 맞은 4·19 혁명 관련 기록물들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가 본격 추진된다. ‘4·19 혁명 유엔·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및 기념사업 추진위원회’(위원장 김영진 전 농림부 장관)는 다음달 6일 국회에서 세계기록유산 등재 추진을 위한 정책토론회를 열고, 문화재청을 상대로 올해 세계기록유산 후보로 올려 줄 것을 공식요청키로 했다고 29일 밝혔다. 위원회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2010년 펴낸 ‘4월혁명 사료 총집’의 사상자 기록과 정부·정당·국회 기록, 각종 선언·성명 등 기록물의 원본을 중심으로 당시 현장사진, 관계자들의 구술 채록 자료 등을 세계기록유산 등재 후보로 올릴 방침이다. 또 세계사 속 4·19 혁명의 의미와 국제 학생운동에 미친 영향 등에 대한 학술 연구용역도 조만간 마무리하기로 했다. 위원회에는 황우여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과 장상 전 총리 등이 이사로 참여하고 있다. 4·19 혁명은 1960년 이승만 정권의 3·15 부정선거에 항의해 전국 대학생들이 주축이 돼 일으킨 반독재 저항 운동이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심사는 2년 단위로 이뤄진다. 문화재청은 오는 7~8월 등재 후보를 공모해 2건을 선정한 뒤 유네스코에 공식 등재를 신청하고, 유네스코는 전 세계의 후보들을 상대로 심사를 벌여 2017년 5~6월 등재 여부를 발표한다.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4·19 전국 학생 그림·글짓기 대회 새달 우이동 국립 민주묘지서 개최

    강북구는 4·19혁명 55주년을 맞이해 우이동 국립4·19민주묘지에서 다음달 11일 ‘전국 학생 그림 그리기, 글짓기 대회’를 연다고 24일 밝혔다. 구는 4·19혁명의 참된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2013년부터 ‘4·19혁명 국민문화제’를 개최하고 있다. 구는 다음달 11일과 18일, 19일 등 3일간 ‘피어나라 4·19의 열정으로, 물들여라 대한민국의 희망으로’를 주제로 국민문화제를 개최한다. 그림·글짓기 대회는 이 국민문화제의 첫 프로그램이다. 참여를 원하면 오는 31일까지 홈페이지(419festival.org)로 신청하면 된다. 그림 부문은 전국 초등학생 419명(저학년 209명, 고학년 210명)이 참여해 나라 사랑을 주제로 작품을 그리고, 중학생 300명이 참여하는 글짓기 부문은 4·19혁명을 주제로 200자 원고지 10장 내외의 산문을 제출하면 된다. 저학년 그림부문, 고학년 그림부문, 중학생 글짓기 등 3개 부문에서 국가보훈처장상, 서울특별시장상, 강북구청장상 등을 상금과 함께 준다. 그림은 대회 당일 현장에서 심사해 시상하고, 글짓기 부문은 다음달 27일 수상자를 발표한다. 또 다음달 18일부터 희생 영령들을 추모하는 진혼무, 록 페스티벌이 함께하는 전야제, 전국대학생 토론대회, 학술토론회, 헌혈릴레이, 1960년대 거리 재현, 4·19 전시 등을 진행한다. 이경주 기자 kdlrudwn@seoul.co.kr
  • “가난한 조국에 다 바치고 싶었다”

    “가난한 조국에 다 바치고 싶었다”

    재무부 장관과 초대 수출입은행장을 지낸 송인상 한국능률협회(KMA) 명예회장이 22일 별세했다. 그는 이승만 정부의 마지막 각료 12명 가운데 생존한 마지막 인물이었다. 101세. “가난한 조국에 다 바치고 싶었다”고 자신의 삶을 요약한 고인은 1950년대 이승만 전 대통령 밑에서 한국의 경제정책과 행정제도의 초석을 마련한 ‘건국 1세대’로 꼽힌다. 선린상업학교와 경성고등상업학교(서울대 상대 전신)를 졸업한 그는 조선식산은행(산업은행)에 입사했고 1949년 재무부 이재국장을 맡아 경제관료로 변신했다. 1957년 부흥부(경제기획원의 전신) 장관, 1959년 재무부 장관을 맡아 ‘경제개발 3개년 계획’을 추진했고 70년대에는 외교관으로 활약했다. 4·19혁명으로 1960∼63년에는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1974년 회갑의 나이에 유럽공동체(EC) 대사로 임명된 고인은 유럽 수출을 3억 달러에서 10억 달러로 늘려 ‘기적의 대사’로 불렸다. 당시 그는 부임 인사차 청와대를 찾았을 때 박정희 대통령이 “수출을 10억 달러대로 올려놔 달라”고 해 식은땀이 흘렀다고 술회했다. 고인은 이 공을 인정받아 1976년 초대 수출입은행장에 임명됐다. 이후 동양나이론 회장,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 태평양경제협의회 한국위원장 등 기업인, 경제단체 수장으로 재계를 이끌었다. 그는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고 이병철 삼성그룹 선대회장, 고 조홍제 효성그룹 선대회장 등과 친분이 두터웠으며 고 남덕우 전 국무총리, 고 유창순 전 총리, 고 홍진기 전 법무부 장관 등 정관계 인사와도 우정을 나눈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12년 발간된 고인의 평전 ‘어둠 속에서도 한걸음을’에 따르면 남 전 총리는 그를 ‘이 나라 근대사 최후의 증인’이라고 묘사했다. 고인은 정재계 인사들과의 화려한 혼맥으로도 유명하다. 슬하에는 동진(사업가)씨 등 1남 4녀를 뒀다. 상공부 장관을 지낸 이봉서 단암산업 회장, 고 신명수 전 신동방 회장,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 주관엽(사업가)씨가 사위다. 신 회장의 장녀 신정화씨는 노태우 전 대통령의 아들 노재헌씨와 결혼했으나 2013년 이혼했다. 빈소는 서울 서대문구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 특1호실. 발인은 25일 오전 6시 30분이고 장지는 대전현충원이다. 02-2227-7550. 명희진 기자 mhj46@seoul.co.kr
  • 어르신들 가슴 속 묻어둔 이야기 ‘세상 밖으로’

    “해방 이후 태어나서 6·25전쟁을 겪었고, 4·19혁명과 5·16쿠데타의 정치 격변기를 통해 급속한 경제발전과 민주화를 이룬 나라를 보았다. 나는 그 시대를 겪으며 살았다.” 1946년 함경남도 정평군에서 태어난 이근철 할아버지는 1948년 어머니의 손을 잡고 월남했다. 이 할아버지는 동년배들이 그랬던 것처럼 피란 생활을 겪어야 했고, 산업화 시기에는 수출 역군으로 일해야 했다. 그 시대엔 누구나 그랬다. 그래서 그의 머리에는 지난 60년간 보통 사람들이 기억하는 전쟁과 경제성장, 민주화에 대한 기억이 오롯이 남아 있다. 1944년 전북 남원에서 출생한 황오주 할아버지는 2004년 공직 생활을 끝내고 수년간 할 일을 찾아다녔다. 그는 “인생 이모작으로 이곳저곳을 기웃거려 본들 소용없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사는 법”이라며 결국 2009년 학교보안관 일을 시작했다. 평생 공무원으로 지내 온 그에게 학교보안관은 또 다른 세계였다. 그는 “엄마 닭만 졸졸 따라다니는 병아리처럼 솜털이 보송보송한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만큼 행복한 일이 있을까”라고 말했다. 1939년 경남 남해에서 태어나 42년간 교편을 잡아 온 심진용 할아버지가 수십년간 써 내려온 일기에는 삶의 고민과 함께 가장으로서의 무게,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 등이 깊이 있게 담겨 있다. 심 할아버지의 아들은 부친의 인생을 “5남매의 아버지로서 젊은 날의 열정이 저당 잡힌 고난”이라고 표현했다. 어른들이 입버릇처럼 하는 “내가 살아온 인생을 말하면 책 한 권으로도 모자라”라는 이야기가 현실이 됐다. 서울 관악구는 12일 구청 강당에서 ‘어르신 자서전 출간지원 사업’을 통해 자서전을 낸 노인들의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흔히 어른들의 삶이야 비슷비슷한 게 아니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유종필 관악구청장의 생각은 달랐다. 유 구청장은 “굴곡진 우리 현대사를 살아온 이들의 삶은 그 자체가 현대사의 기록”이라면서 “평범한 사람도 자신만의 이야기가 있어 누구나 자서전을 남길 수 있다”고 설명했다. 반응은 뜨겁다. 올해도 10명의 노인이 자서전을 썼다. 구는 자서전을 출간하는 노인 1인당 250만원을 지원한다. 이번에 출간하는 책은 ▲최창락 ‘나의 뿌리와 삶의 흔적’ ▲심진용 ‘심해가 살아온 길’ ▲전태권 ‘노송처럼 늙고 싶다’ ▲김태곤 ‘가난은 내 삶의 지름길’ ▲송태선 ‘아, 어머니’ ▲황오주 ‘어린이에게 길을 묻다’ ▲문금선 ‘들꽃 향기 같은 소중한 순간들’ ▲이근철 ‘금진강의 꿈’ ▲김애숙 ‘기억속 풍경’ ▲임동길 ‘Soli Deo Gloria’ 등 10권이다. 김동현 기자 moses@seoul.co.kr
  •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20) 서울학(하)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20) 서울학(하)

    ●서울에서 일어나는 모든 도시현상 연구 서울학은 “서울이라는 공간에서 일어나는 인간의 활동과 그 활동에서 파생되는 모든 도시현상 및 도시 관련 문제들을 학문적으로 규명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서울을 보다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도시로 만들도록 서울에 대해 연구하는 학제적인(Interdisciplinary) 성격을 가진 학문(최근희 서울시립대 교수)”이라고 정의해 볼 수 있다. 서울은 너무나 거대하고 과밀하며 복합적이지만 축적된 학문적 기초자료는 턱없이 부족하다. 학문적 적확성이나 방법론적인 정교성에 매달려 답을 구하려면 한계에 부딪힌다. 우리가 입에 달고 사는 ‘서울’이라는 지명을 보자. 서울이라는 지명이 언제, 어떤 연유로 생성됐는지 알기조차 어렵다. 서울이라는 말이 역사나 기록에 거의 등장하지 않으므로 사람들이 실생활 속에서 얼마나, 어떻게 사용했는지 파악하는 게 지극히 어렵다는 뜻이다. 서울이라는 지명이 한자 표기가 안 되므로 기록에 남아 있지 않은 탓이다. 서울이라는 땅 이름 대신에 수도(首都)를 뜻하는 한성, 한양, 경성, 경도, 경조, 경, 수부, 수선, 도성, 도부, 도읍, 황성, 황도, 왕도, 한도 같은 한자 수도 개념어 10여 가지가 두루 쓰였다. 최근 서울과 수도의 개념에 관한 다양한 연구가 선보이고 있으나 서울이라는 지명의 용례를 다룬 연구는 여전히 드문 것도 자료 부족에 기인한다. 서울지역은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기원전 18년 온조가 위례(현재의 송파구와 강동구 일대)에 도읍을 정하면서 역사의 전면부에는 한강 이북보다 한강 이남이 먼저 등장했다. 371년 백제 근초고왕 때는 한산(漢山)이라고 호칭했는데 한강(漢江), 북한산(北漢山), 남한산(南漢山)이라는 지명의 생성과 연관성이 깊은 것으로 보인다. 475년 고구려 장수왕 때는 남평양(南平壤)이었으며, 6세기 신라 진흥왕(540~576) 때는 북한산주(北漢山州)였다. 통일신라 시대인 757년 경덕왕 때 한양군(漢陽郡)을 두었고 고려 들어 양주(楊州)와 남경, 한양부 등을 오락가락하다가 조선 들어 한성부(漢城府)로 확실하게 자리 잡았다. 서울이라는 말의 어원은 여럿 있지만 신라의 수도 서라벌을 어원으로 보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서울이란 수도를 뜻하는 보통명사이지 땅 이름을 뜻하는 고유명사가 아니다.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가 펴낸 ‘서울행정사’에 따르면 신라의 경주, 백제의 소부리(부여), 고려의 송악(개성), 후고구려의 철원 등 일국의 수도 명칭 모두가 서라벌(새벌)에서 나왔다. 수도가 서라벌이고, 서라벌이 서울인 것이다. 서울이라는 지명은 일제강점기 한성부가 경성부(京城府)로 강제 격하, 개칭됐다가 광복과 함께 갑자기 새로운 수도의 이름으로 떠올랐다. 해방 후 각계 인사 70명으로 구성된 경성부 고문회의는 “‘한성시’라고 쓰고 ‘서울시’라고 읽는다”는 어정쩡한 절충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이를 탐탁지 않게 여긴 미 군정청은 1946년 9월18일 군정법령으로 ‘서울특별시’라는 대한민국 유일 한글 지명을 확정했다. 미 군정은 경성이라는 일제의 잔재도 청산하고, 한성부 혹은 한양이라는 왕조 복고도 거부하는 이중 효과를 거뒀다. 무엇보다 ‘SEOUL’이라는 알파벳 명칭이 그들의 입맛에 맞았을 법하다. 정부 수립 이후 논란이 일었다. 1955년 9월 16일 이승만 대통령이 서울 명칭 개정을 제안하는 담화를 발표하면서 불붙었다. 명칭 개정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 서울이란 수도를 나타내는 보통명사이지 땅 이름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는 아니라는 것, 둘째 서울이 땅 이름이 된 경위는 외국인의 잘못된 이해를 바탕으로 붙여졌으므로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조선의 수도가 어디인지를 물은 프랑스 신부의 질문에 사람들이 ‘서울’이라고 답하자 이를 프랑스 사람이 소리 낼 수 있는 음을 취해서 써넣은 것이 ‘소울’ 또는 ‘솔’ 등으로 잘못 알려졌다는 논리였다. 이때부터 서울의 명칭 개정을 놓고 격렬한 찬반 논쟁이 일었다. ‘해방 직후 수도 명칭의 결정과 1950년대 개정 논의’라는 김제정(서울시립대)의 논문에 따르면 최남선, 이병도, 최현배, 김윤경, 이희승 등 당대 최고의 지성들이 신문지상 등을 통해 논쟁에 가세했고 찬반 논리를 제공했다. 대개 한양, 한성 등 복고풍이 지배적이었으며 큰 벌판을 뜻하는 우리말 지명 ‘한벌’도 대안으로 제시됐다. 급기야 국무위원과 정부위원 등으로 ‘수도명칭 제정연구위원회’가 구성됐고 서울시를 중심으로 수도 명칭 개명에 관한 현상 모집 광고가 신문지상에 게재됐다. ①우남 ②한양 ③한경(韓京) ④한성 등 4가지 명칭을 놓고 여론조사를 한 결과 우남시가 1423표를 얻었다. 한양 1117표, 한경 631표, 한성 353표를 각각 받았다. 초대 대통령이자 이른바 국부(國父)인 이승만 대통령의 이름이나 아호를 딴 ‘이승만시’ 혹은 ‘우남시’로 하자는 추종자들의 속 보이는 명칭 개정 작업은 격렬한 반대 여론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이 대통령은 1957년 1월 19일 다시 담화를 내고 “내가 대통령으로 앉아서 서울의 이름을 내 별호로 짓는 것을 원치 않는다”며 우남시 안을 철회했다. 이후 4·19혁명이 일어나 이 대통령이 하야하면서 서울의 명칭 개정 문제는 흐지부지됐다. 서울이라는 명칭이 우리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미 군정청 관리들에 의해 ‘선물’처럼 주어진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또 정부 수립 이후 제기된 개칭 추진에서 최고 권력자의 추종세력에 의해 섣불리 추진됐다가 유야무야된 과정도 개운치 않다. 그러나 이후 서울올림픽과 월드컵 개최 등으로 서울이라는 수도명은 ‘코리아’라는 국명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우리나라 최고의 빅 브랜드가 됐다. 고유명사를 보통명사화한 선례이자 돌이킬 수 없는 압도적인 우리의 수도명이자 지명이 됐다. ●대한민국의‘ 종주도시’이자 ‘의사이상향’ 14세기 이슬람의 역사학자이자 최고의 사상가인 이븐할둔(Ibn Khaldun)은 “새 왕조가 새 수도를 정하고, 옛 수도의 지배권을 장악하는 즉시 주민을 새 수도로 이주시켜야 불만 세력을 없애고 백성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으며, 통치권의 초점인 수도는 마땅히 왕국의 중앙에 위치해야 한다”고 갈파했다. 조선의 수도 한성부는 1394년 제국(帝國)지향적 수도인 송악에서 남하해 한반도의 심장부인 한양에서 인구 10만명의 계획도시로 출발했다. 620년이 흐른 지금 면적은 30배, 인구는 100배 이상 급속 팽창했다. 서울은 우리나라 인구 5000만명이 지향하고, 수도권을 포함한 2500만명이 생활하는 대한민국의 종주도시(宗主都市)이자 의사이상향(擬似理想鄕)이 되었다. 왜 이렇게 서울로 몰려든 것일까. 서울학의 연구과제 중 사회학, 도시사회학, 도시행정학의 초점은 인구 집중 및 확장과 관련된 문제에 맞춰진다. 서울로의 인구 집중이 이 모든 현상의 방아쇠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서울은 전제군주의 통치 공간이었고, 권력의 핵이기에 기회와 경쟁을 제공했다. 돈을 벌거나, 출세를 원하거나, 학업을 하려거나, 일을 구하려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밀려들었다. 서울의 도시성을 설명할 때 가장 먼저 논의되는 것이 인구문제다. 역사적으로 조선 한성부의 인구는 17세기 후반 이미 30만명에 달해 당대 세계 최대급의 인구밀도를 자랑했다. 출산율, 사망률 등 자연적인 요인에 의해 인구 증감이 좌우되는 향촌과 달리 인구 이동이라는 사회적인 요인의 영향력이 높다는 점이 최근 연구의 성과다. 인구 상황과 호구를 분석한 고동환은 ‘조선후기 인구 추세와 도시문제 발생’이라는 논문에서 서울인구를 1669년 22만명, 1720년대 25만명, 1770년대 30만명, 1820년대 35만명, 1870년1900년 33만 명으로 추정했다. 조성윤은 ‘조선후기 서울의 인구 증가와 공간구조의 변화’라는 논문에서 1663년 한성부 북부의 호적과 한말의 신(新)호적을 바탕으로 조선후기 서울 주민의 신분 구성을 분석한 결과 전국의 농촌으로부터 흘러 들어오는 전입인구가 서울의 하층민으로 정착한 때문이라고 보았다. 증보문헌비고와 조선왕조실록 등을 통해 살펴보면 조선초기 10만명이던 인구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양난 이후 4만명까지 떨어졌다가 17세기 후반 현종 때 18만명까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이후 구한말까지 200년 이상 18만명에서 20만명 사이를 오갔다. 이러한 인구의 증가는 도성 내 상업 발달이 주원인이었다. 18세기 서울은 16~17세기의 위기를 벗어나면서 성 밖 경강(뚝섬~양화나루까지의 한강구간) 일대에 상업이 크게 발달했다. 전국에서 상인자본의 집적도가 가장 높고, 노동력을 제공하는 사람들이 몰리면서 경강 일대에 상업촌락이 생겨났다. 이때부터 서울은 중세 정치·행정 중심도시에서 근대적 상업도시로 옷을 갈아입었다. 서울의 도시발달은 17세기 양난으로 폐허가 된 도시를 재건하는 시기를 거쳐 인구의 증가와 상업의 발달로 사대문 밖으로 공간적 확산이 이뤄지고 신분제의 붕괴 조짐을 나타냈다. 도성 내 인구의 증가는 주택 부족을 일으켰으며 이러한 현상은 도성 밖으로 거주공간이 확장되는 원인이 됐다. 15세기까지 사대문 밖 10리(성저십리)의 민가숫자는 모두 1719호로 한양 인구의 9%에 불과했지만 18세기 전반 한성부의 5부(동-서-남-북-중부) 중 경강에 가까운 서부(용산)와 남부(마포)를 중심으로 촌락이 속속 들어서면서 행정구역의 확대 개편이 촉발된 것이다. 서울은 사대문을 벗어나 한강이라는 새로운 축을 중심으로 확대됐으며 서울 구심점의 한강 이남 이전은 시간문제였다. 선임기자 joo@seoul.co.kr
  • [지금&여기] 데모스테스의 재판/강병철 정치부 기자

    [지금&여기] 데모스테스의 재판/강병철 정치부 기자

    극작가 이근삼의 1964년 작품 ‘데모스테스의 재판’은 도무지 결론이 나지 않는 저세상의 어느 재판에 대한 이야기다. 생전에 ‘까뚜리왕국’ 경비원이었던 데모스테스는 폭동을 막던 중 왕궁에 침입한 시민 한 명을 죽인다. 이후 폭동은 성공한 혁명이 되고 그 결과 ‘뚜방뚜왕국’이 들어서면서 데모스테스는 반동으로 몰려 사형을 당한다. 죽은 데모스테스는 다시 사후세계의 재판정에 서고 이 재판은 무려 5000년 동안 5만 3221회나 이어지는데도 그의 유무죄는 가려지지 않는다. 이 재판이 끝나지 않는 이유는 그의 살인에 대한 평가가 계속 뒤바뀌기 때문이다. 차례로 저세상으로 오는 새로운 증인들은 데모스테스의 살인을 저마다 다르게 평가한다. 결국 그는 까뚜리왕국이 5000년 역사 속에서 24번 역적집단으로 몰리고 19번 위대한 왕국이라고 규정되는 동안 반동과 애국자라는 양극단의 평가를 번갈아 받는다. 4·19혁명과 5·16쿠데타가 차례로 일어난 때를 즈음해 이런 비정상적인 극중 상황을 그려낸 작가의 주제의식이 뭔지는 비교적 분명하다. 그건 자고 나면 애국과 반동이 뒤바뀌는 현실에 우리가 과연 정의에 대한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느냐는 회의감이었을 것이다. 당시 무수한 데모스테스들은 반동으로 몰려 이 나라에서 사라졌지만 기나긴 역사의 호흡에서 볼 때 그건 무구한 진실성을 담보하기는 힘든 판결이었다.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 해산 선고를 바라보며 50년 전 이 작품을 떠올린 건 2014년 헌재가 일종의 데모스테스의 재판을 너무 서둘러 끝낸 게 아닐까 하는 찝찝함 때문이다. 물론 작품 속 재판정처럼 헌재가 무한정 선고를 미룰 수는 없다. 하지만 이른바 통합진보당 ‘주도세력’의 내란음모 혐의에 대한 1·2심 판단이 엇갈린 상황에서 헌재는 왜 고작 다음 달인 대법원의 판단조차 기다릴 수 없었을까. 더욱이 정치적 논란이 분명히 예상되는 때에 헌재는 오히려 논란을 더 증폭시키고 스스로의 신뢰도를 떨어뜨리는 식으로 재판을 마무리했다. ‘데모스테스의 재판’이 발표됐던 시대에 벌어진 상당수 정치적 재판은 최근에 와서 그 결과가 뒤집히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2014년 헌재의 선고가 다시 그 같은 길을 가리라고는 당연히 믿지 않는다. 대신 선고와 별개로 해산된 통합진보당과 해산을 선고한 헌재 그리고 해산을 청구한 현 정권에 대한 평가는 분명 언젠가 바뀔 것이다. 앞으로 몇 번이나 까뚜리왕국과 뚜방뚜왕국이 뒤바뀔지는 모를 일이니까. bckang@seoul.co.kr
  • [김종면 칼럼] 근현대사는 죄가 없다

    [김종면 칼럼] 근현대사는 죄가 없다

    19세기 독일 역사가 레오폴트 랑케가 ‘사실로서의 역사’를 주창했다면 20세기 영국 역사가 에드워드 카는 ‘이야기로서의 역사’를 강조했다. 역사의 본질은 어디에 있는가. 랑케의 ‘객관’에서 찾아야 할까 카의 ‘주관’에서 찾아야 할까. 랑케의 가르침대로 역사가가 사실만 기술할 뿐 평가를 내리지 않는다면 그 공허함은 무엇으로 메우나. 카의 말대로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요, 해석되어 서술되는 것이라면 그로 말미암은 소잡함은 어찌 해야 하나. 어느 쪽이든 일면의 진실이 있으니 객관과 주관의 진지한 대화를 통해 역사의 길을 찾는 게 현명할 듯하다. 그런데 우리 현실은 특히 근현대사의 경우 해석을 배제하고 사실만을 기록하는 것도 쉽지 않다. 역사교과서 기술조차 정치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문제로 시끄러운 판에 교육부는 또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에서 근현대사 부분을 대폭 축소하기로 해 논란을 자초하고 있다. 학생들이 공부하는 역사교과서를 놓고 허구한 날 싸움이니 역사 자체가 해악일 지경이다. 현재 5대5로 돼 있는 전근대사와 근현대사의 비율을 알려진 바와 같이 7대3으로 바꿀 수 있을지는 두고 봐야 한다. 딱한 것은 근현대사 비중을 줄여야 한다며 들이대는 논리가 공소하기 짝이 없다는 점이다. ‘반만년 역사’ 가운데 150년에 불과한 근현대사 비중이 한국사 교과서의 절반을 차지하는 것은 무리라는 지적만 해도 그렇다. 전근대든 근현대든 세월의 길이가 문제가 아니다. 19세기 후반 개항 이후 우리의 의식과 삶의 조건을 송두리째 바꾼 큰 사건만 해도 일일이 열거하기 어렵다. 일제강점과 해방, 6·25전쟁, 4·19혁명, 5·16쿠데타, 산업화와 민주화 그 격동의 시대를 어떻게 기원전 고조선이나 4세기 삼국시대의 고릿적 얘기와 같은 무게로 다룰 수 있단 말인가. 근현대사를 강화하는 것은 세계적인 추세다. 중국은 1990년대 초 ‘전일제 중고교 역사 교과요강’을 발표한 뒤 지금까지 근현대사를 필수과목으로 지정해 오고 있다. 일본 또한 일본사와 세계사를 통합한 근현대사 과목을 신설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거꾸로 가고 있다. 한국 근현대사 연구의 권위자인 브루스 커밍스는 이명박 정부 시절 “한국 정부는 ‘모래에 머리를 파묻은 타조’처럼 불편한 과거사에 대해 무작정 귀를 막으려 하고 있다. 이는 ‘국가적 자긍심’을 명분으로 역사 왜곡을 일삼는 일본 우익들의 행태와 다를 것이 없다”고 쓴소리를 한 적이 있다. 새겨들을 만하다. 아름다운 화음뿐 아니라 귀에 거슬리는 불협화음도 받아들일 수 있는 날카로운 감수성이 있어야 새로운 음의 창조도 가능하다. 아무리 드러내고 싶지 않은 남루한 과거일지라도 기억의 전수 자체를 꺼려서는 안 된다. 이념논란의 소지를 줄이기 위해 근현대사 비중을 줄인다거나 이념논쟁을 촉발시킬 근현대사는 후대에 평가해 가르쳐야 한다는 식의 정치적 접근은 설득력을 갖기 어렵다. 미래세대에게 보편적 시민정신과 역사의식을 키워주기 위해서는 근현대사 교육을 오히려 강화할 필요가 있다. 이념적으로 크게 논란이 되는 대목이 있다면 더욱 더 적극적인 담론투쟁을 통해 역사의 정의를 바로 세워나가야 마땅하다. 근현대사 비중을 축소하기에 앞서 그동안 우리 근현대사 교육이 자존에 근거한 자기인식적 자국사 교육이 아니라 타자에 의한 분열과 내부의 갈등만 도드라지게 만든 자기학대적 교육은 아니었는지 반성부터 먼저 해야 한다. 10만명의 나치부역자들에게 유죄를 선고한 프랑스는 역사교과서에 부역자 숙청 사진을 싣는다. 그들에게도 부역자 숙청 문제는 여전히 미완의 아픈 역사로 남아 있지만 국가 차원에서 ‘공식 기억’으로 갈무리해 후대에 전하고 있는 것이다. 단지 이념 논쟁을 빌미로 근현대사 서술을 줄이고 역사교육을 위축시킨다면 문명국으로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역사를 주머니 속 공기돌쯤으로 여기고 갖고 놀려고 하는 세력이 문제지 파란곡절의 우리 근현대사가 무슨 죄인가.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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