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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리스 200년래 최악의 강진

    [아테네 외신종합] 그리스 수도 아테네 북부지역에서 7일 리히터 규모 5.9의 200년래 최악의 강진이 발생,적어도 49명이 숨지고 650여명이 부상을 입었으며,28개 지역에서 건물 100여채가 붕괴됐다고 그리스 보건당국이 8일 밝혔다.그러나 수백명이 무너진 건물 잔해속에 갇힌 것으로 알려져 사망자 수는 계속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이번 지진은 아테네 북쪽 20㎞ 떨어진 메디니 지역을 진앙지로 7일 오후 2시56분(한국시간 오후 8시56분)쯤 약 10초동안 발생했으며,20여차례의 여진이 잇따라 시민들이 거리로 뛰쳐 나오는 바람에 일대 소동을 빚었다.특히 진앙지와 가까워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아테네 북부 타토이 지역에서는 벽돌공장이 무너지면서 근로자 70명이 파묻혔다고 소방관들이 전했다. 그리스 지진은 지난달 17일 리히터 규모 7.4의 강진으로 1만5,000명 이상의목숨을 앗아간 터키 이즈밋지역의 대지진 후 불과 3주만에 발생했다. 그리스와 터키 등이 속한 지중해 동부지역이 매우 불안정한 단층구조를 갖고 있어세계에서 지진활동이 가장 왕성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지난 64년 이후 그리스에서 발생한 지진만도 무려 2만차례를 넘는다. 이처럼 지진이 잦은 이유는 그리스가 유라시아판(板)과 아프리카판,아라비아판이 서로 교차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탓이다.3개의 거대한 판구조가끊임없이 서로를 남북으로 밀고 있어 이들 사이에 낀 그리스의 지각을 압박함으로써 크고 작은 지진이 빈발하고 있다는 분석이다.이같은 판운동은 터키의 북아나톨리아 및 동아니톨리아 단층에서 수없이 일어났는데,39년 이후 800㎞에 이르는 북아나톨리아 단층을 따라 리히터 규모 6.7 이상의 강진이 11차례나 발생했다.
  • 인구감소 영월 ‘속앓이’

    강원 영월군이 속앓이를 하고 있다.주민 수의 마지노선 5만명선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주민 수가 5만명 이하로 떨어지면 상급행정기관의 각종 보조금이 감소하고행정조직마저 축소되는 등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1일 영월군에 따르면 한때 증가세를 보이며 지난해말 5만275명이던 주민 수가 올초부터 다시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해 지난달 27일 39년만에 최저인 4만9,996명을 기록했다. 영월군 관계자는 “인구증가 방법을 다양하게 추진하고 있으나 한계가 있다”며 “주거환경 개선과 주민 소득향상 방안 등 근본적인 인구유입 방안을모색중”이라고 말했다. 영월 조한종기자 hancho@
  • ‘1세대 교원노조’ 명예회복 나선다

    4·19 혁명 직후 결성됐다가 5·16 군사정권에 의해 강제 해산됐던 ‘한국교원노조총연합회’(대한매일 4월13일자 6면 보도)가 39년만에 명예회복에 나선다. ‘4.19 교원노조’의 위원장이었던 강기철(姜基哲·74)씨와 초등교원노조총무였던 김남식(金南植·80)씨는 3일 서울 서초동 법조타운의 강신옥(姜信玉)변호사 사무실을 찾았다.5·16 쿠데타를 일으킨 군사정권이 교사 1,500여명을 용공분자로 몰아 구속하고,복역을 마친 조합 간부들을 보안처분 대상자로 묶어 공민권을 박탈했던 잘못된 역사를 바로 잡기 위해서다. 강씨 등은 4·19 교원노조에 대한 재심을 청구하는 것을 시작으로 당시 노조원들에게 적용됐던 특수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법 6조의 위헌 여부를 묻는헌법소원과 사회안전법에 의한 보안처분 원인 무효소송을 이달 안에 제기할예정이다.강씨는 자신의 전향서를 허위로 작성한 공무원을 상대로 명예훼손소송도 준비중이다. 강씨는 “교원노조는 4월 혁명 때 목숨을 바친 제자들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겠다는 교사들의 열망에서 태동,당시 전국 초·중등·대학 전체 교원의 절반인 4만여명이 가입한 노조였다”고 회고했다.당시 한양대 등에서 문화사 강사로 재직했던 강씨는 7년 동안 복역하고 출소한 뒤에도 15년 동안 보안관찰을 받았다. 이종락기자 jrlee@
  • 「오늘 ‘4·19’ 39돌」4·19세대-대학생 좌담

    4·19는 민주와 자유를 열망하는 지식인과 민중들의 힘이 폭발적으로 분출된 혁명이었다.하지만 39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4·19는 ‘미완(未完)의 혁명’으로 남아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정치·사회·문화적 갈등구조와 맞물려4·19정신이 우리 사회에 제대로 구현되지 못해 왔다는 것이다.4·19세대인이영일(李榮一) 국민회의 의원과 한영우(韓永愚) 서울대 인문대학장,고려대대학원 이준복(李準馥·신방과 석사 과정)씨와 연세대 손수진(孫秀眞·여·신방과 4년)씨의 좌담을 통해 4·19의 의미를 되새기고 4·19정신의 완성을위한 과제와 방안을 짚어본다. 이영일 4·19가 우리 정치사에 준 교훈은 4·19를 계기로 주권재민(主權在民)의식이 국민의 가슴 속에 자리잡았다는 사실입니다.또 우리가 미래에 구현해야 할 비전을 민주주의 형태로 완성했다는 것입니다.4·19가 ‘미완의혁명’이라고 불리는 것은 1년 만에 군사정권에 의해 붕괴됐기 때문입니다.4·19 이후 25년 동안 개발독재를 거치면서 4·19는 맥을 추지 못했습니다.국민이 국회의원을 바꿀 힘은 가지게 됐지만 정권을 바꿀 만한 힘은 갖지 못했습니다.그러다가 97년 12월18일 비로소 국민의 손에 의해 정권까지 바꾸게됐습니다.국민의 정부 탄생으로 비로소 4·19의 이념이 구현된 것이지요.그래서 4·19의 지향성이 국민의 정부에서 꽃피웠다고 봅니다. 손수진 ‘4.19세대는 없다’는 주장이 있습니다.4·19세대는 사회적으로영향력 있는 위치를 점하면서도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에는 지지를 보내지 않았습니다.그래서 4·19세대가 변절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영일 4·19때 반독재투쟁에 앞장섰다는 사실만으로 평생 투사로 살다 죽으라는 논리는 맞지 않습니다.백이(白夷) 숙제(叔齊)처럼 살 수는 없는 것이지요.물론 4.19때 불의에 저항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비판받아 마땅합니다.4·19가 민족 대 반민족의 투쟁이라면 불타협의 투쟁을 계속해야 하겠지요.4·19세대에 대한 평가는 당시 어떤 위치에 있었느냐를 기준으로 이루어져야합니다.4.19때의 활약상을 소개하겠습니다.나는 당시 서울대 문리대 수학과에 다니던 김치호라는 친구와함께 남산합창단 단원이었습니다.종로 5가에서 곤봉을 맞고 서울대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문리대 앞 쌍과부집에서 우동을한 그릇 먹은 뒤 그 친구에게 시위하러 다시 같이 가자고 했습니다.그랬더니 그 친구는 도서관에 가방을 가지러 간다고 하면서 경무대로 달려가 죽음을택했습니다.해마다 4·19묘소에 가면 그 친구의 묘에 꼭 들립니다. 한영우 나는 당시 서울대 사학과 4학년으로 후배들을 인솔해 시위를 했습니다.태평로에 있는 옛 국회의사당 앞에서 시위를 할 때 외칠 구호가 없어옆에 있는 조선일보사에서 몇사람이 구수회의를 해 즉석에서 구호를 만든 일이 있습니다. 4·19는 준비된 혁명이 아닙니다.그래서 ‘미완의 혁명’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프랑스혁명은 계몽사상가들이 이념적 토대를 제공했고 지지세력도 있어 폭발적 힘을 발휘했습니다.하지만 4·19는 혁명 뒤에 이념이 만들어져 왔습니다.당시에는 합의된 이념이 없었습니다.막연한 애국심을 가지고 시작된뒤 나중에 학문적이고 이론적으로 다듬어지기 시작했습니다.그리고 그 과정에서 여당,야당,재야,혁신에 이르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분화됐습니다.군사정권에 협조한 사람도 있고,군사정권에 대항해 옥살이를 한 사람도 있습니다. 4·19는 작게 보면 3·15 부정선거에 대한 저항이 도화선이 됐습니다.그러나 거시적으로 보면 선비들이 개혁의 선두에 나섰던 역사의 전통이 반복된사건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영일 우리는 1인당 국민소득 1만달러시대에 살고 있습니다.4·19때 87달러에 비하면 엄청난 차이가 있지요.시민·사회단체,정당,이익집단,언론 등많은 집단이 더 이상 학생들의 신세를 지지 않고도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을가능하게 하고 있습니다.학생은 이제 국민의 울분을 대변하는 유일한 집단이 아닙니다.21세기는 정보화시대입니다.정보화에 관한 지식이 가장 중요한 재산입니다.후배 대학생들에게 경쟁력을 갖춘 신지식인으로서 각자 맡은 바 소임을 다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라고 당부하고 싶습니다. 한영우 4·19때 군이 중립을 지켰던 것은 연구 대상입니다.논문에 따르면부정선거와 발포책임자인 최인규 내무부장관 등이 김정렬 국방부 장관에게협력을 요청해 계엄을 선포했는데 국방부 자체가 협력을 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이승만(李承晩)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한 것은 미국이었습니다.미국이하야를 요구한 것은 이승만이 서구식 민주주의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승만정권은 한반도를 민주주의 진열장으로 만들려는 미국의 의도에 맞지않았습니다.더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한·미·일 연합방위체제를 구축하려는 구상에 맞지 않았습니다.이승만은 강력한 반일(反日)주의자였기 때문에일본과 손을 잡기를 꺼렸습니다. 이준복 현재 전체 대학사회에는 다양성이 이데올로기로 자리잡고 있습니다.학생운동에 대한 관심과 사회문제에 대한 참여도가 과거에 비해 현저하게떨어집니다.이같은 변화는 93년 들어,특히 93학번부터 뚜렷합니다.90·91·92학번은 87년 6월항쟁의 경험이 있는 87·88학번이 군 복무 뒤 복학했을 때학교를 같이 다녀 80년대 학번들의 영향력 속에서 80년대의 정서를 지니고있습니다.그러나 93학번부터는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합니다.이는 고교생 때부터 약자를 배려하는 의식이 없기 때문입니다.정의감은 정권을 가진 사람에게 억압당하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고민입니다.그런데 이른바 ‘왕따’문화가 약자에 대한 배려를 없앴습니다.또 자기 자식만 생각하는 부모세대들의그릇된 생각과 모 재벌의 광고처럼 1등만 강조하는 분위기가 약자에 대한 배려를 약화시켰습니다.지금의 대학사회는 4·19와 70·80년대의 정신을 구현하려는 노력이 부족합니다. 손수진 4·19가 ‘미완의 혁명’이라는 의견에 동의합니다.혁명은 진보세력이 혁명을 통해 모든 문제를 해결해야 비로소 혁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4·19는 완성된 혁명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지식인은 자기 만족에 빠져 자기들만의 우리에 갇혀 있었으며,민주화와 자립경제를 시급하게 수립해야 한다는 문제를 인식했으면 민중과 함께 제목소리를 낼 수 있는 세력을 형성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한영우 4·19를 완전 성공으로도,완전 실패로도 보지 않습니다.상당한 성공을 거두었지만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다는 뜻입니다.4·19는 미성숙 상태에서 일어났으며 지금도 풀어가는 과정입니다.4·19에 0점을 주는 것은 너무지나칩니다.역사는 단번에 100점으로 갈 수 없습니다.현재는 100점으로 가고 있는데 60∼70점에 도달한 상태입니다.지나치게 허무주의적으로 보면 도그마(dogma)에 빠지게 됩니다.도그마에 빠지면 현실에 입각한 생존논리를 주체적으로 만들지 못하고 외래논리를 도식적으로 적용하는 일이 반복됩니다. 이준복 해방 뒤 우리는 친일파와 변절자에 대한 청산 과정을 거치지 못했습니다.좌·우 이념대립이 반공주의로 나타나면서 청산의 문제가 흐지부지됐습니다.4·19 뒤 부정부패와 비리 청산이 다시 문제로 떠올랐지만 장면(張勉) 정부에서 청산이 되지 않았으며,군사정권이 들어선 뒤에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청산의 문제는 지금까지 남아 있습니다. 손수진 저는 4·19가 부패로 점철된 이승만정권을 물러나게 하고 사회운동이 조직화하는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합니다.한 교수께서는 4·19등 우리나라의 중요한 사건에서 지식인의 노력이 컸는데 지금의 지식인과 학생 역할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한영우 4·19를 바탕으로 1년 앞으로 닥친 21세기의 우리 모습을 그려 나가야 합니다.앞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개방적 민족주의입니다.우리 정서에 맞는 민주주의를 해야 합니다.신자유주의 경쟁원리도 적당한 수준에서 받아들여야 하지만 민족주의를 도외시해서는 안됩니다. 이준복 언론은 학생운동의 이념성을 걱정합니다.그러나 그 이념성은 4·19를 촉발한 정의감과 다르지 않습니다.다만 이념이 더 선명해졌을 뿐입니다. 저는 학생운동의 이념이 불순하다고 보지 않습니다. 손수진 학생운동은 군사정권을 거치면서 폐쇄적인 면을 띠고 있습니다.운동은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합니다.학생운동이 대학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설득력을 잃어가는 이념을 고집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한영우 21세기가 문화의 세기라는 말에 동의합니다.21세기에는 사회과학적 이념보다 전통문화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일이 중요합니다.자애(自愛)의식을 기른 뒤 세계와 협력해야 합니다.그리고 전통문화를 정치·경제·사회 등모든 분야를이끄는 견인차로 승화시켜야 합니다.20세기 우리 전통문화를 무너뜨렸던 서양문명과 전통문화를 용해시켜 새 문명을 탄생시켜야 합니다. 이준복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사상적 스펙트럼이 보다 다양화돼야 합니다. 우리 사회에는 “나는 사회주의자”라고 공공연히 언급할 수 있는 분위기가조성돼 있지 못합니다.하지만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을 포괄하지 못하면 4·19는 영원히 진행형으로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손수진 자라나는 세대들이 통일 후 ‘우리 민족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생각하면 회의가 듭니다.교육을 통해 인도주의와 민족 동질성을 가르치고,통일이 앞으로 실현해야 할 미완의 과제라는 의식을 갖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리 조현석 김미경기자 hyun68@
  • [정직한 역사 되찾기](32)춘원 이광수

    시인이자 영문학자였던 송욱(宋稶) 전 서울대 교수(80년 작고)는 생전에 ‘사상계’에 기고한 ‘한국 지식인의 역사적 현실’이란 글에서 춘원 이광수의 편린 하나를 남긴 바 있다.문학소년이던 중학생 시절 그는 친구와 함께당대의 대문호이자 우상이었던 춘원 이광수를 만나볼 요량으로 춘원의 부인(허영숙)이 경영하던 산부인과병원으로 찾아갔다.간호사의 안내로 병원의 긴복도를 지나 온돌방에 다다르자 춘원이 그들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들은황송해하며 춘원에게 큰 절을 올리고 일어설 무렵 라디오에서 일본어 방송이 흘러나왔다.그러자 춘원이 “이 방송은 이세대신궁(伊勢大神宮)에서 올리는 ○○제(祭)의 실황 중계방송이죠”라며 자못 경건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춘원은 일본군국주의 종교의식에 방송을 통해서 참가하고 있는 것이었다.의외의 장면을 목도하고 춘원에 대해 실망을 느낀 두 사람은 이내 그와 작별하였다.두 사람의 등 뒤에 대고 춘원은 “이제부터는 작품을 일어로도 쓸 수 있고 우리말로도 쓸 수 있어야죠”라고 권했다.이후로 그는 춘원의 글을 많이읽지 않았다고 적었다.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1892∼1950,창씨명 香山光郞).역사속에서 우리는 그를 어찌 볼 것인가?그의 당대에서부터 사후 반세기가 된 지금까지도 그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려 왔다.문학적 업적을 강조한 ‘대문호’라는 평가가 있는 반면 민족반역자 ‘친일파’라는 평가도 있다. 지난 92년 그의 탄생 100주기를 맞아 유족·추종자들이 기념행사를 하면서작성한 한 자료에 의하면,그를 연구한 석·박사 학위논문이 40여편이나 됐다.그런데 그 논문의 주제는 전부 문학분야였다.그의 일제하 친일행적을 연구한 논문은 단 한 편도 없었다.이래놓고 그의 진면목을 탐구했다고 할 수는없다. 이처럼 그에 대한 그동안의 연구는 생애 전반을 아우르기 보다는 문학분야만을 지나치게 강조한 면이 없지 않다.그에 대한 평가가 균형을 잃은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춘원처럼 ‘시대의 인물’로 활동한 자는 그가 활동할 당시의 시대상황과 당시 민중들이 그를 어떤 인물로 인식했느냐 하는 점을 중시해야 한다.춘원이 문인인것은 분명하다.그러나 일제강점기 조선민중의 눈에 비친 그의 모습은 ‘2·8독립선언’의 작성자이자 샹하이 시절 임정 기관지 ‘독립신문’을 만든 ‘민족지사’로서의 면모가 더 강했다고 할 수 있다. 춘원의 변절에 대해 민중들이 안타까와 하고 분노해 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춘원을 문인으로만 평가하는 것은 마치 박정희(朴正熙) 전대통령을 군인,만해 한용운(韓龍雲)선생을 스님으로만 평가하는 것과 다름 없다.춘원에대한 평가는 이래서 시각교정이 선행돼야 한다고 본다. 그렇다면 ‘민족지사’의 거울에 비춰본 춘원은 어떤 모습인가.한마디로 형체를 알아보기도 어려울 정도로 일그러진 모습이다.그의 일생을 통해 정신사를 관통하고 있는 ‘친일’의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가 보자. 춘원은 1892년 평안남도 정주에서 과거에 실패한 후 술로 세월을 보내던 이종원(李種元)의 장남으로 태어났다.아명은 보경(寶鏡).5세 때 한글과 천자문을 깨우치고 8세 때 동양고전을 두루 섭렵할 정도로 총명한 그였지만 10세때 콜레라에 걸린 양친이 사망, 천애 고아가 되었다. 그러던중 14세 때 천도교 유학생으로 일본 메이지(明治)학원에 입학하면서처음 신세계를 접하게 됐다.아직 인격적으로 미성숙한데다 별다른 학문적 기초나 바탕이 없는 상황에서 그는 제국주의라는 물결이 넘실대는 일본이라는거대한 ‘바다’에 내던져지게 됐다.그의 비극은 바로 이같은 상황에서 주체의식을 키우지 못한데서 비롯한 것인지도 모른다. 한편 도일 초기부터 문학에 심취한 그는 메이지학원 동창회보 ‘백금학보’(1909.12.15,제19호)에 일본어로 된 단편소설 ‘사랑인가’(원제 ‘愛か’)를 발표하였다.조선인 소년이 일본인 소년을 신격화하여 연모하는,일종의 동성애를 내용으로 하는 이 소설은 내용보다는 발표시점이 문제다.그가 이 소설을 탈고한 날짜(1909.11.18)는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이토(伊藤博文)를 처단한지 23일째 되는 날이었다.동양천지를 뒤흔드는 의거가 조선인 손에서 일어난 그 무렵 그는 하숙방에서 일본어로 소설을 쓰고 있었다. 1917년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무정(無情)’을 발표한 후 ‘전조선여성의 연인’ 소리를 듣던 그는 본처와 이혼한 후 허영숙(許英肅)과 애정의 도피행각을 벌였으며 1919년 2월 도쿄 유학중 ‘2·8독립선언’을 작성,일약 민족지사의 반열에 이름이 오르내렸다. 그러나 그가 작성한 ‘선언’을 자세히 뜯어보면 “…합병 이래 일본의 조선통치정책을 보건대 합병시의 선언에 반(反)하여 오족(吾族)의 행복과 이익을 무시하고…오족에게 참정권,집회·결사의 자유,언론·출판의 자유를 불허하며…”라며 일제가 ‘합병’당시에 한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고 문제삼고있는데 이는 강도가 한 약속을 믿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해 그는 상하이 임시정부로 건너가 2년 남짓 활동하다가 애인 허영숙의권유로 ‘독립신문’ 편집을 그만두고 사랑을 찾아 조선으로 돌아왔다.월탄박종화(朴鍾和)는 그의 ‘일기’에서 춘원의 귀순(歸順)은 총독부의 신변보장을 조건으로 허영숙이 설득한 결과이며 이 일로 허영숙의 첫 애인 진학문(秦學文)은 홧김(?)에 일본여자와 결혼해버렸다고 쓴 바 있다. 귀국(1921.3)도중 춘원은 선양(瀋陽)에서 체포돼서울로 호송됐으나 별다른 조사나 재판 없이 곧 석방되었고 두달 뒤 5월에는 허영숙과 결혼하였다.다시 9월에는 사이토(齋藤實)총독을 면담하는 등 그는 그때부터 이미 당국의비호를 받고 있었다.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이듬해 5월 그는 잡지 ‘개벽’에 일제의 반독립 논리를 민족논리로 위장한 ‘민족개조론’을 발표하였다. 그의 동아일보 입사는 그 이듬해 23년이었는데 여기서 그는 월 300엔이라는 당시로선 파격적인 보수를 받았다.24년 그는 동아일보에 다시 ‘민족적 경륜’이라는 대일 타협노선의 논설을 발표,어용적 민족개량·자치노선으로 기울기 시작했다.위의 두 글에서 그는 조선이 쇠퇴한 이유는 민족성이 타락했기 때문이라며 민족성 개조를 주장하였는데 이는 제국주의 국가들이 자기민족의 우수성을 강조하면서 약소국의 침략·지배를 정당화한 것을 배낀 것이었다. 중일전쟁 발발 1개월전인 37년 6월 그는 소위 ‘수양동우회사건’으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으나 이내 병보석으로 풀려났다.이 단체 역시 발족 당시부터 총독부와 사전협의하에 조직된 단체이고 보면 독립운동단체라고 할 것도 없다.경기도 경찰부장 지바(千葉)는 “민족본능인지하수(독립사상)가 지표(地表)로 분출했을 때는 극격히 막지말고,버려두지도 말고,자연의 유력(流力)을 이용해서 바다로 흘러가도록 ‘도랑을 설치’하라”고 하였다.친일파연구가 고 임종국(林鍾國)은 “이 ‘도랑’이 바로‘민족개조론’이요,수양동우회요,‘민족적 경륜’이었다”고 분석했다. 한편 중일전쟁 이후 춘원은 전시협력을 위주로 보다 행동적인 친일대열에가담하게 된다.39년 중국에 출정한 일본군 위문단(북지황군위문작가단)결성식의 사회를 맡은 것이 그 신호탄이었다.이해 10월 결성된 조선문인협회 결성식에서 그는 회장에 추대되었다. 이듬해 2월 11일 ‘창씨개명령’이 선포되자 그는 그 다음날로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라는 모범적인(?) 창씨개명을 내놓으면서 일반인들의 동참을 호소하였다.그리고는 외쳤다.“…나는 지금에 와서 이런 신념을 가진다.즉 조선인은 전연 조선인인 것을 잊어야 한다고.아주 피와 살과 뼈가 일본인이 되어버려야 한다고.이 속에 진정으로 조선인의 영생의 길이 있다고…”.(‘매일신보’,1940.9.4) 심지어는 “조선놈의 이마빡을 바늘로 찔러서 일본인 피가 나올만큼 조선인은 일본인 정신을 가져야 한다”고. 이런 그를 두고 단국대 김원모(金源模)교수는 “민족을 보전하기 위해 표면적으로 친일을 했을 뿐,그의 심저(心底)에는 독립정신이 살아 있었다”고 변호하고 있는데 공감하기 힘들다. 해방직후 춘원은 향리에 칩거하며 ‘나의 고백’ ‘돌베개’ 등을 쓴 바 있다.그는 인조(仁祖)가 병자호란 때 끌려갔다가 돌아온 조선여인들을 홍제원(弘濟院)에서 목욕시킨 후 정조문제를 거론치 못하도록 한 예를 들어 친일파문제도 이처럼 처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반민특위에 체포돼 마포형무소에수감돼 있던 그는 재산보전을 위해 허영숙과 위장이혼하는 교활함까지 드러냈다.일관된 친일과 타협으로 일제강점기를 산 춘원.그는 공사를 막론하고역사와 민족 앞에 단 한번도 진실한 적이 없다.
  • 공무원연금 실태·개선책

    공무원 연금과 관련된 각종 루머가 공직사회를 흔들고 있다.金杞載행정자치부장관이 31일 이같은 루머를 부인하고 공무원의 기득권을 최대한 보장할 것이라고 서둘러 진화에 나선 것도 이 때문이다. 공무원연금에 구멍이 생기된 된 가장 큰 이유는 ‘저(低)부담,고(高)급여체계’라는 구조적인 문제에 있다. 개인이 내는 비용부담률은 7.5%로 낮은 수준인 반면,퇴직 때 받아가는 연금급여는 최종 보수월액 기준으로 계산하는 기형적인 구조로 돼 있어 연금수급자가 늘수록 적자폭이 커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실제로 82년에 3,742명이던 연금수급자가 98년말에 8만9,322명으로 증가했다.이에 따라 98년말 기금잔액은 97년의 6조2,000여억원에서 4조7,000여억원으로 뚝 떨어졌다. 반면 비용부담률은 도입기인 60년의 2.3%에서 39년이 지난 올 1월에서야 7. 5%로 상향조정됐다. 정부가 연금수급자가 늘 것에 대비해 연금기금 적립을 충실히 해오지 않은것도 큰 요인이다. 정부의 연금비용 부담은 11%로 민간기업의 12.8% 이상이나 22.5%인 일본 등외국의 실제비용부담률에 훨씬 못미친다. 정부는 이에 따라 우선 올해 퇴직자에게 지급해야 할 8조원 가운데 부족분3조1,000억원은 보유기금에서 충당하되 최악의 경우 추가경정 예산에 반영한다는 계획도 세웠다.이어 내년부터는 현행 공무원연금법을 개정해 안정적인운용을 도모할 방침이다. 정부가 검토중인 방안으로는 연금 산정의 기준변경,정부 부담비율 및 연금지급률 재조정,지급시기 재조정,민간기업에 취업한 퇴직자들에 대한 감액지급 등으로 전해지고 있다. 연금산정 기준의 경우 국민연금과 비교해 불합리하다는 지적이 많아 개선이 확실시되고 있다.최종 보수월액을 최근 5년간의 평균보수로 조정하는 등 여러가지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물론 이렇게 바꾼다 하더라도 새로운 연금법 적용시점은 시행일을 기준으로 그 이전은 종전의 급여율을 적용하고 이후부터는 새로운 급여율을 적용하는 등 기존 공무원들의 기득권을 해치지 않는 방안을 모색한다는 방침이다. 한편 이와 별도로 내년부터는 지난 95년 연금법 개정으로 정부가 투자하거나 예산지원을 한 기관에 재취업하는 퇴직공무원은 재취업기간에 한 푼의 연금도 받지 못하게 된다. 朴賢甲
  • [정직한 역사 되찾기] 친일의 군상(30)

    ◆前한성은행장 韓相龍2,3년전 평소 알고 지내는 고서점에서 일제말기에 출간된‘창남수장(暢楠壽章)’이라는 문집 한 권을 구입한 적이 있다. 문집 이름에 ‘수(壽)’자가 들어간 것은 흔히 문집 주인공의 환갑잔치를 기념하여 만든 것이 보통이다. 일제 당시 환갑잔치에 문집까지 낼 정도라면 고관대작이나 후학이 많은 거유(巨儒) 정도에게나 있을 법한 일이다. 이 문집 역시 그런 정도로 생각하고 첫 장을 넘겨 보니 당시 미나미(南次郞)총독의 축하 휘호가 나타나더니 뒤 이어 일본인 육군대장의 글씨와 궁내부대신을 지낸 민병석(閔丙奭)의 서문이 곁들여져 있었다. 다시 축하시 모음란에는 당대의 명사들이자 유명한 친일파들이 대거 운집해있었다.황족 친일파인 윤덕영(尹德榮)·좌옹 윤치호(尹致昊)·후작 이항구(李恒九·李完用 아들)·중추원 참의 김사연(金思演)·은행가 민규식(閔奎植)등등. 이런 수준의 인물들이 문집 주인공의 환갑잔치를 위해 시를 보낼 정도였다면 그의 수준·성향도 짐작이 간다.알고 보니 문집의 주인공은 일제당시 경제계의 대표적인 친일파였던 한상룡(韓相龍·1880∼?)이었다. 한때 ‘조선 금융계의 황제’로 불렸던 한상룡은 1880년 규장각 부제학 출신 한관수(韓觀洙)의 3남으로 태어났다.17세때 관립외국어학교 입학을 계기로 신학문에 눈뜬 그는 미국유학을 위해 일본으로 밀항을 하였으나 외숙 이윤용(李允用)의 주선으로 대신 사립 성성(成城)학교에 입학(1899년)하면서군인의 길을 택하였다. 이듬해 그는 한국정부의 관비유학생으로 선발되었으나 장티프스로 학업을중단하고 1901년 귀국하였다.귀국후 그는 사립 중교의숙(中橋義塾)의 영어교사로 일하다가 이 해 경부철도 기공식에서 고종의 종형인 이재완(李載完)의영어통역을 담당한 것이 인연이 돼 공직(평식원 총무과장)의 길로 들어섰다. 그러나 그의 공직생활은 그리 길지 않았다.그는 자신을 둘러싼 ‘좋은 여건’을 배경으로 야심을 키워가고 있었다.당시로선 근대문물에 대한 견문과 영어·일어 구사능력을 갖춘 인재였던데다 그의 뒤에는 당대 제일의 권력자인두 외숙(이윤용·이완용 형제)이 받쳐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1903년 12월 그는 한성은행(漢城銀行) 총무 취임을 계기로 금융계와 인연을 맺게 된다.‘한일병합’ 직후인 1910년 9월 이 은행의 전무취체역으로 취임한 그는 일제당국에 로비를 하여 당시 조선인 합방공로자에게 지급한 은사공채(恩賜公債)를 흡수,자본금을 300만원으로 10배나 증자하면서 비약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한성은행이 조선 귀족들의 은행이라는 소문은 여기서 비롯된 것이며 3·1의거 당시 민중들의 표적이 된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이 무렵 그는 40여년 동안 일본 제일은행의 최고책임자로서 일본 재계의 거두로 군림해온 시부자와(澁澤榮一)를 우상으로 숭배하고 있었다. 그는 정치에서는 이토(伊藤博文),경제에서는 시부자와,건설에서는 통감부시절 재정고문을 지낸 메가타(目賀田種太郞)를 ‘조선에서 영원히 기억해야할 3대 은인’이라고 하면서,특히 시부자와에 대해서는 ‘일본은 물론 동양에서 공전 절후의 위인’이라고 극찬하였다.그는 시부자와의 좌우명 ‘일생일업(一生一業)’을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기까지 했다.그가 대부분의 친일파들 처럼 정계로 나아가지 않고 실업계로 진출한 것은 시부자와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일제가 매국에 가담한 친일파들에게 준 공채를 토대로 발전을 도모한 한성은행은 1923년 그가 두취(頭取,현 은행장)로 취임한 직후부터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관동대지진의 여파에 이어 영업부진·경영악화가 계속됐다.이듬해 총독부는 이 은행을 정리대상으로 지목하였으며 28년 마침내 조선식산은행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나의 한성은행인가,한성은행의 나인가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밀접한 관계’에 있었으며 ‘한성은행에서 나고,자라고 그로써 거기에서 죽는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애착을 가졌던 한성은행을 잃게 되자 그는 병석에 눕고 말았다.식민지 예속자본의 말로는 바로 이런 것이었다. 이밖에도 그는 한성은행 재직시절 금융계 내에서의 지위를 이용하여 조선내 각종 기업·회사 설립에 중개자로 참여하였는데 실권은 전혀 가지지 못한채 명목상의 감투만 여럿 쓰고 있었다.이런 그를 두고 정신문화연구원 김경일 교수는 “‘한상룡의 경력은 반도 재계사의 축도(縮圖)’라는 표현처럼그는 제국주의 권력과 식민지 예속경제 사이에서 일종의 브로커 역할을 했던 정상배”였다고 평가했다.금융계에 평생을 바치고자 했던 그의 포부는 한성은행의 경영권 양도와 뒤이어 신탁회사 운영에서 배제되면서 날개를 접고 말았다. 한편 그의 친일이 겉으로 표면화되기 시작한 것은 그가 한성은행에서 물러나 사회활동을 본격 시작하면서 부터라고 할 수 있다.우선 그는 조선에 업적(?)을 남긴 주요 일본인들의 동상·기념비 건립을 시작으로 친일대열에 본격 합류하였다. 첫 사업은 통감부시절 재정고문을 지낸 메가타의 동상을 제작,1929년 10월파고다공원(현 탑골공원)에서 제막식을 가졌으며,이 해 12월에는 이토(伊藤博文)기념회의 조선측 발기인 총대를 맡기도 했다.33년 2월에는 평소 자신이 숭배해온 시부자와의 기념비 건립을 추진,12월 장충단에서 제막식을 가졌는데 이는 전적으로 한상룡의 발의와 주동에 의한 것이었다. 또 35년 5월에는 ‘조선개화의 은인이자 일한합병의 공로자’인 데라우치(寺內正毅)의 동상건설회 발기인 및 실행위원으로 참여하여 총독부 청사내홀 우측에 그의 동상을 건립하였으며,이듬해 2월 소위 ‘2·26사건’으로 사이토(齋藤實) 전조선총독이 사망하자 부민관에서 추도회를 개최하고 39년 4월 그의 동상을 총독부 청사내 홀 좌측에 건립하였다.이밖에도 그는 러일전쟁 당시 한국주재 일본공사 하야시(林權助),정무총감 출신의 시모오카(下岡忠治) 등의 동상건립에 참여하면서 식민통치자들의 업적 찬양에 열을 올렸다. 한편 한상룡이 군국주의 일제통치하에서 40여년간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보다 군부와 밀월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이다.한성은행에서 물러난 후 그는 군부관련 분야에서 두드러진 활약상을 보였다.31년 일제의 만주침략 이후 조선내 각지를 돌면서 강연·담화 등을 통해 그는 일제의 침략전쟁을 옹호하였다. 또 33년 4월 경성국방의회에 발기인으로 참가한 것을 비롯해 조선국방의회연합회 설립준비위원 및 감사(34.4),조선국방비행기헌납회 고문(34.12),해군협회 조선본부 창립위원(35.4)등을 맡아 활동하였다.37년7월 중일전쟁 발발 직전에는 관동군사령부 사무촉탁(칙임관 대우,근무기간 37.7.1∼40.7.1)으로 임명돼 군사령부를 방문,조선실업구락부 및 자신의 명의로 국방헌금을 하였다. 당시 그는 후방 전쟁지원단체인 경기도군사후원연맹 부회장이자 경성군사후원연맹 고문으로 있으면서 ‘애국금차회’ 창립을 주도,조선여성들에게 전쟁물자로 노리개 금붙이마저 내놓으라고 강요하였다.41년 태평양전쟁 개전으로일제의 인력·물자동원이 거세지자 그는 이 역시 전면에 나서서 협력하였다. 특히 43년 징병제가 실시되자 그는 ‘훌륭한 군인이 되자’라는 글에서 “반도에 불타는 애국심과 적성(赤誠)으로 말미암아 드디어 약진 반도의 통치사상에 획기적인 징병제도가 실시되었다”며 조선청년들을 침략전쟁의 ‘총알받이’로 내모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27년 중추원 참의(칙임관 대우)에 첫 임명된 이래 해방 때까지 그는 만18년 4개월동안 줄곧 중추원의 참의·고문을 지냈다.해방 1년전인 44년 4월 그는 윤치호·박중양(朴重陽·중추원 참의)·이진호(李軫鎬·총독부학무국장)·이기용(李琦鎔·황족·백작) 등과 함께 일본 귀족원 의원에 선임됐는데 마지막까지 일제에 협력한 결과이자 끝까지 일제에 끌려다닌 형상이라고도 할 수있겠다. 그는 한성은행 경영권 양도를 비롯해 일제로부터 수 차례에 걸쳐 의도적 배제를 당했지만 그 때마다 변신과 일관된 친일노선으로 버텨냈다.한마디로 일제하 그의 생존논리는 철저한 예속과 굴종이었다.그를 ‘친일 예속 자본가의 전형’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해방후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鄭雲鉉 jwh59@
  • [‘부실重病’ 농·수·축협 해부](4)개혁안 문제점·과제

    이번 협동조합 개혁안은 여러 모로 파격적인 게 사실이다.농·축협의 전면통폐합과 일선 단위조합의 과감한 정리 등이 후한 점수를 받는다.그러나 당초 정부가 보인 개혁의지에 비추어 실제 개혁방안이 기대에 못미친다는 견해도 적지 않다.정부 개혁안의 문제점 등을 살펴본다. ▒문제점은 없나 신용사업과 경제사업의 분리를 둘러싼 논란이 가장 많다.이번에도 ‘협동조합은행’ 설립을 통한 신용사업의 완전한 분리는 개혁안에서 배제됐다.그럴 경우 거액의 사업자금을 제대로 조달하기 어려워 경제사업이 아예 주저앉을 수도 있다는 게 농림부 논리다. 그러나 실상을 따져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경제사업 부문이 신용부문으로부터 자금을 조달할 때 전혀 혜택을 입지 않기 때문이다.일반 대출금과똑같은 이율과 조건이 적용돼 다른 은행에서 빌리는 것과 차이가 없다. 지난해의 경우 연 13.75%의 이자가 적용돼 경제사업 이익금 중 1,300억여원이 이자로 빠져나갔다.농림부가 완전한 ‘신·경분리’를 외면한 것은 “각종 정책자금 조달의 창구역할을 해 온농협이라는 ‘돈주머니’를 내놓기 싫은 탓”이라는 해석이 많다. 단위조합장 선출을 간선제로 돌린 것과 선거인단에 의한 중앙회장 선출제등에 대해서도 부작용이 우려된다.단위조합장 선출의 경우 일선 조합원들의참여가 원천적으로 막히는 등 민주화 추세에 역행한다는 지적이다.1,200여조합장에서 200여명의 선거인단 투표로 바뀌는 중앙회장 선거는 로비대상이그만큼 줄어들어 금권선거로 변질될 가능성이 크다.정부가 개입할 수 있는소지도 다분히 있다. 한두봉 고려대 교수는 “선거방식을 바꾸기보다는 철저한 감시장치를 두는등의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개혁안에 담긴 일선 단위조합의 대폭 정리도 실효성이 의문시된다.그러나단위조합 정리는 정부의 의지만으로는 이룰 수 없다.지역 이기주의와 이권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조합장의 반발 등이 불보듯 뻔하다.더욱이 50% 이상 조합원들의 찬성을 얻어야 한다.농림부도 이를 감안한 듯 따로 시한을 정하지않고 ‘최단 기간안에’라며 얼버무리고 있다.장밋빛 청사진만 제시할 게 아니라 실천가능한 현실적 대안 마련이 시급하다. ▒남은 과제는 이번 개혁안은 협동조합 개혁의 큰 틀을 마련했을 뿐 확정된것은 아니다.지난 8일 발족된 ‘협동조합개혁추진단’은 앞으로 세부 통합방안과 각종 법률적 문제 등 전반적인 사항을 검토하게 된다.이르면 이달중에법률 개정안 등을 마련,공청회를 거친 뒤 올 상반기 중에 법제화한다는 게정부 방침이다.이 과정에서 당사자인 조합의 의견도 중요하지만 각 농민단체와 학계 등의 폭넓은 여론을 수렴해 개혁안에 반영하는 등의 절차가 필수적이다.정부 안만 고집할 경우 39년만에 찾아온 협동조합 개혁은 다시 ‘미완의 개혁’으로 끝날 공산이 높기 때문이다.
  • 백범선생 부인 崔遵禮여사…死後 75년만에 남편곁으로

    백범 金九선생 부부가 한 자리에 묻힌다.백범서거 50년,백범이 부인과 사별한지 75년만이다. 백범의 아들 金信씨(77)는 4일 “오는 4월 12일 어머님 묘소를 천장(遷葬)하여 효창공원의 아버님과 합장(合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동안 백범의 가족중에서 부인 崔遵禮여사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이는 崔여사가 35세의 나이로 일찍 타계한데다 백범에 가려 거의 조명을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1889년생인 崔여사는 1904년 백범과 결혼한 후 남편을 따라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남편과 임시정부를 도왔다.평소 폐가 좋지않았던 崔여사는 1922년 둘째아들 신(信)을 낳고 나서 산후조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 원인이 돼 2년 뒤인 24년 상하이에서 타계했다.崔여사의 묘소는 임정 간부들의 주선으로 상하이 공동묘지에 마련됐다가 해방후 1948년 둘째아들 신이 정릉(貞陵)으로 이장했으며,82년 다시 남양주 진건면 소재 현재의 묘소로 재이장했다.현재 이곳에는 崔여사를 포함해 백범의 모친이자 金信씨의 조모인 郭樂園여사(39년 작고)와 백범의 장남 仁(45년 작고)도 함께 묻혀 있다. 金씨가 이번에 모친의 묘소를 이장키로 한 것은 조모 郭여사와 형님 仁의묘소를 대전 국립묘지로 이장키로 결정했기 때문이다.일찍 모친을 여의고 조모 품에서 자란 金씨는 조모 郭여사에 대한 정이 남달랐다.金씨는 “현재 조모님의 묘소 인근에 주택들이 들어선데다 후대로 가면서 묘소관리가 소홀해질 것 같아 조모님 묘소를 국립묘지로 옮기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郭여사와 金仁씨는 90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아 국립묘지 안장이 가능하다.이 경우 현재의 묘소에는 모친 혼자만이 남게 돼 金씨는 모친을 부친과합장키로 한 것이다.
  • 교원 3만4,000명 조기퇴직

    ◎내년 62세·2000년 61세·2001년 60세로 정년 단축/52∼57세 명퇴 원할땐 65세 기준 퇴직금 지급/교직 공백 교장·교사초빙제 활용 최소화 방침 교육부는 16일 최근 논란을 빚어온 교육공무원의 정년을 99년에 62세로 단축한 뒤 매년 1년씩 줄이는 방법으로 2001년까지 60세로 낮추기로 최종 확정했다.이에 따른 명예퇴직은 내년 8월부터 시행된다.李海瓚 교육부장관은 이날 기자간담회를 통해 “당정협의에서 교원정년단축안에 대한 정부안을 최종 확정했다”면서 “이번 정기국회에 ‘교육공무원법’ 개정안을 제출해 내년 1월1일부터 시행키로 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2001년까지 3년 동안 교단을 떠나는 숫자는 내년 8월 1만2,647명(33년 9월∼37년 8월생),2000년 8월 7,345명(37년 9월∼39년 8월생),2001년 8월 8,922명(39년 9월∼41년 8월생) 등 모두 2만8,914명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여기에 사립학교 교원수 5,829명을 포함하면 3만4,743명이다. 교육부는 이와 함께 정년에 해당되지 않더라도 올해 만 52∼57세의 교원들이 명예퇴직을 원할 경우 종전의 정년(65세)을 적용해 명예퇴직금을 지급하기로 했다.정년 외 퇴직대상자는 3년 동안 4,500∼5,000여명에 이를 것으로 교육부는 예상하고 있다. 명예퇴직에 따른 수당지급은 1∼5년은 잔여기간 월봉급액의 50%이며 5∼10년의 경우 5년까지는 월봉급액의 50%,나머지 기간은 봉급액의 25%를 받게 된다.10년이 넘는 사람은 잔여기간이 10년인 사람과 같은 금액을 지급받게 된다.한편 교육부는 교원 정년단축으로 생기는 공백은 교장·교사초빙제 등을 통해 최소화하기로 했다.
  • 친일의 군상/前 이화여대 총장 金活蘭(정직한 역사 되찾기)

    “아세아 10억 민중의 운명을 결정할 중대한 결전이 바야흐로 최고조에 달한 이 때 어찌 여성인들 잠잣코 구경만 할 수가 잇겟습니까.이 날을 위한 마음의 준비는 이미 벌서부터 되여 잇섯습니다.내지(일본)학도들과 함께 전문대학 법문계(문과) 반도(조선)학도들은 우렁찬 진군을 이르키어 특별지원병으로서 오는 1월20일에는 영예의 입영을 하게 되엿습니다.이번 반도학도들에게 열려진 군문으로 향한 광명의 길은 응당 우리 이화전문학교 생도들도 함께 거러가야될 길이지만 오직 여성이라는 한가지 리유 때문에 참렬을 못하는 것입니다.…아프로는 결전하의 국가목적에 쪼차 한사람이라도 더만히 우수한 지도원을 양성하기에 전력을 다할 각오가 잇슬 뿐입니다.” 金活蘭(1899∼1970)이 1943년 12월25일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每日新報)’에 기고한 ‘男子에게 지지안케­皇國女性으로서의 使命을 完遂’라는 제목의 기고문 중 한 대목이다. ◎이대 키운 공 크지만 ‘여성계 상징’으론 논란 여지/3·1운동 당시 한때 지하 독립운동 조직과 연계/1936년 이화학당 부교장 시절부터 변절 첫 걸음/동포청년 전쟁에 내몰고도 사과 한마디 없어/“비상시국에 있어 기독교 여자청년들도 내선일체의 깃발 아래로 모여 시국을 재인식하는 동시에 황국신민으로서 앞날을…” 일제하 지식인이 신문에 쓴 친일성향의 글 한 두편을 통해 그의 삶 전체를 평가받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거대한 감옥’또는 ‘노예선’으로 불리는 일제 식민지시대에 쓴 글이라면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그러나 여기에는 몇가지 조건이 있다.우선 생명에 위협이 있었느냐,그리고 나중에 자신의 행적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성했느냐 하는 점 등이다. 모든 지식인들에게 지조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치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몇몇 의사·열사가 이에 속할 뿐이다.그러나 지식인이라면 자신의 과오에 대한 반성이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그러나 거의 모든 친일 지식인들은 자신의 친일행위를 반성하지 않았다.친일 지식인들이 더 비난받는 이유중의 하나는 이 때문이다. 일제시대 여성 지식인이었으며 최근 그의 이름을 딴 상(賞)제정 문제로논란이 되고 있는 김활란은 역사 앞에서 용서받을 수 있을까?답은 긍정적이지 않은 것 같다.이유는 그가 지식인으로서의 사회적 책무를 다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따라서 그의 이름을 딴 상 제정은 지식인 사회에서 여러 논란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흔히 김활란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수식어 가운데 하나는 ‘여성박사 제1호’다.그는 학사·석사·박사를 따기까지 세 차례에 걸쳐 5년간 미국유학을 했다.귀국해서는 미국인 선교사 아펜절러(당시 이화여전 교장)의 뒤를 이어 1939년 이화여전 교장에 취임했다.굳이 나눈다면 그는 친미(親美)인사로 분류되는 사람이다.그런 그가 ‘대동아전쟁’이 터지자 친일,반미(反美)인사로 돌변하였다. ○전쟁 터지자 반미로 돌변 “저 흑노(黑奴)해방의 싸움을 성전(聖戰)이라 했고 십자군의 싸움도 성전이라고 했다.…제일선 장병과 보조를 같이 하여 도의를 무시한 물질제일주의의 서양문명을 박차버리고 동아(東亞)의 천지로부터 미영(美英)을 격퇴하여 버리자”.김활란은 조선임전보국단 주최 ‘결전부인대회’결성식(1941.12.27,부민관 대강당)에서 ‘여성의 무장’이란 주제로 미영 타도를 외쳤다. 그러나 해방이 되자 일제하 대부분의 친미·기독교계 인사들(白樂濬·申興雨 등)이 그러했듯이 그 역시 다시 친미인사로 변신했다.그는 미군정 시절 초대 이화여대 총장에 취임했고 이승만정권 하에서 한미(韓美)재단 이사 등을 지냈다. 3·1만세의거 당시 김활란은 이화학당 대학과를 마치고 모교의 교사로 재직하고 있었다.그 무렵 지하독립운동 조직과 연결돼 활동하고 있었다.‘7인의 전도대(傳道隊)’를 만들어 기독교 포교활동을 하기도 했는데 이는 단순한 전도활동 수준을 넘는,일종의 민족운동이었다.20년대 후반 좌우 민족진영의 통합으로 신간회(新幹會)가 결성되자 뒤이어 27년 4월 여성계 민족단체로 근우회(槿友會)가 결성되었다.그는 근우회 창립멤버로 참여하여 활동하다가 이듬해 돌연 활동을 중단하고 미국유학을 떠났다. 31년말 그는 미국 컬럼비아대학교에서 농촌교육 관련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고 이듬해 귀국했다.귀국후 문맹퇴치·봉건잔재 타파 등을 내걸고농촌운동에 주력하였는데 이는 미국유학을 한 인텔리 여성의 소박한 조국에 대한 헌신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일제 침략전쟁 미화·선전 그의 친일행보는 36년 이화학당 부교장으로 있던 시절 첫걸음을 내딛는다. 그해 말 총독부 사회교육과 주최 ‘가정의 개선과 부인교화운동의 촉진’을 위한 사회교화간담회에 참석하였다.37년 1월 그는 총독부 학무국의 알선으로 ‘조선부인문제연구회’를 결성하였고 7월 들어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애국금채회(愛國金釵會)’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이 단체는 한일병합후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은 자들의 부인들이 주동이 돼 전쟁물자로 바칠 금비녀·가락지를 모으기 위해 결성한 친일 여성단체였다.이후 여러 친일단체에서 그의 이름이 등장한다.방송선전협의회,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임전대책협의회,조선교화단체연합회,조선임전보국단,조선언론보국회 등등. 그의 활동중에서 대표적인 것은 기독교 활동이다.38년 6월 조선YWCA의 회장으로 있던 그는 “비상시국에 있어 기독교 여자청년들도 내선일체의 깃발아래로 모여 시국을 재인식하는 동시에 황국신민으로서 앞날을 자기(自期)하는 의미에서…”(매일신보,38년 6월9일)라며 일본YWCA에 가맹을 발표하였다.당시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하다가 학교가 폐교를 당하고 구속자·순교자가 잇따르던 때였다. 39년 4월 이화여전 교장에 취임한 이후 그의 친일행각은 본격화되었다.물론 그 배경에는 학교를 지키기 위한 목적도 없지는 않았다.그러나 김해 김씨인 그의 문중이 본관을 따라 ‘김해(金海)’로 창씨를 한 것과는 달리 그는 독자적으로 ‘천성활란(天城活蘭·아마기 가쓰란)’으로 창씨개명하였다.‘어차피 창씨를 해야한다면 정말 (일본식으로)창씨를 해서 자신의 독립된 일가를 세울 생각’이었다.(金貞玉의 저서 ‘이모님 金活蘭’중에서) ○순풍에 돛단 배처럼 살아 ‘대동아전쟁’ 개전(41.12.8) 이후부터는 강연·방송은 물론 가두로 나서서 일제의 침략정책을 미화,선전하였다.특히 여성들을 대상으로 ‘어머니나 딸·동생으로서’ 징병·징용·학병 등 인력동원에 대한 이해와 협력을 촉구했다. 43년8월1일 조선인에 대한 ‘징병제’가 실시되자 그는 “황국신민의 무쌍(無雙)한 영광인 징병제는 드디어 우리에게도 실시되었다.…일시동인(一視同仁)의 황공하옵신 성지(聖旨)에 다시금 감사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다. …나라를 위하여 불덩이 같이 끓는 피와 몸을 통털어 바쳐 성은(聖恩)에 보답할 수 있는 문이 활짝 열렸으며 반도 남아의 의기를 뵈일 기회는 드디어 왔다.이 얼마나 기쁜 일이며 수 천년 역사 이래 모처럼 보는 거룩한 감격…”(‘매일신보’1943년 8월7일)이라고 썼다. 그는 해방직전 심한 눈병으로 고생하고 있던 자신을 문병차 찾아온 조카(金貞玉 전 이대교수)에게 “남의 소중한 아들들을 전쟁터에 내보내라고 연설을 하고다닌 죄값”이라고 술회한 적이 있다.(김정옥의 앞의 책 중에서) 당시 여기자 崔銀喜는 그를 두고 ‘모질고 악착한 역경을 맛보지 않고 순풍에 돛단 배처럼 산 행운아’라고 평했다.식민지 시대와 격동기를 산 지식인의 일생이 대체로 고뇌와 아픔으로 점철됐겠지만 그는 상류층의 한 층을 이루는 생애로 일관하였다. 그가 60년 가까이 이화인(梨花人)으로 살면서 일제하와 건국기에 학교를 지키고 가꾼 공로는 인정할만 하다.그러나 그를 여성교육계,나아가 한국여성계의 상징으로 내세우기에는 그의 일생 가운데 ‘흠결’은 큰 편이다.이대 하나를 지키기 위해서라고 보기에는 그의 친일활동이 적극적이었다.이대측의 ‘김활란상’ 제정 추진은 그의 업적을 기리기 보다는 그의 떳떳하지 못한 삶이 비판의 도마에 오르는 또 하나의 계기를 마련하고 있다. ◎김활란 연보 1899년 인천 출생 1914년 이화학당 대학과 졸업 1918년 이화여전 교수·부교장 1928년 ‘근우회’ 발기인으로 참여 1931년 미국 컴럼비아대 철학박사(‘여성박사 1호’) 1937년∼45년 애국금차회·임전대책협의회·조선언론보국회 등 친일 단체 간부로 활동 1939년∼70년 이화여전 교장·이화여대 총장·이화학당 이사장 1948년∼65년 한국대표로 유엔총회 6회 참석 1950년 공보처장 1952년 ‘코리아타임스’ 사장 1954년∼61년 국제기독교선교위원회 부위 원장 1955년 대한적십자사 부총재 1959년 한국여성단체협의회 회장 1963년 대한민국장·막사이사이상·다락방상 수상 1965년 대한민국 순회대사 1970년 별세,망우리 금란동산에 묻힘.대한민국 1등수교훈 장추서 1996년 추모문집 발간,그의 친일 논쟁을 계기로 ‘인터넷 반민특위’이 등장 1998년 이대측의 ‘김활란상’ 제정 계획 발표로 찬반논란
  • 親日의 군상:10/前 홍익대 총장 李恒寧씨(정직한 역사 되찾기)

    ◎“부일의 과오 민족앞에 눈물로 참회”/1939년 ‘고교’ 합격… 일제말 하동·창녕군수 4년 역임/군청 직원들 앞세워 죽창으로 농민 위협하며 쌀 공출/해방 후 35년간 교육계서 근신… 기회있을 때마다 사죄 “일제말 27세의 젊은 나이로 하동(河東)군수를 지내면서 저 자신의 출세와 보신(保身)에 눈이 어두워 (군민들을) 죽창(竹槍)으로 위협까지 했던 저를 너그럽고 따뜻하게 맞아주신 하동 군민들에게 진심으로 사죄(謝罪)드립니다” ‘참회’는 아름답다.진솔한 참회는 숭고하기조차 하다.왜냐하면 보통사람들로서는 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일제하에서 고관대작을 지냈거나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한,소위 ‘친일파’로 불리는 사람 중에서도 더러는 자신의 친일전력을 참회한 바 있다.민족대표 33인중 1인으로 나중에 변절한 崔麟은 반민특위 재판에서 법정을 온통 울음바다로 만들었다.“민족의 이름으로 이 최린을 광화문 네거리에서 처단해 주십시오”.그의 진실한 참회 한 마디가 사람들을 울린 것이다.파인 金東煥은 반민족행위를 뉘우치며 반민특위에 자수하였고,玄錫虎(일제때 충남 광공부장,2공화국에서 국방장관 지냄,88년 작고)는 회고록 ‘한 삶의 고백’을 통해 자신의 친일행적을 고백한 바 있다.친일행적을 한번만이 아니라 여러 차례 공개적으로 참회·사죄한 인사도 있다.홍익대 총장을 지낸 李恒寧(84·학술원 회원)씨가 그 주인공이다.그는 다소 껄끄러운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기자의 인터뷰 요청을 의외로 단번에 허락했다.가을빛이 완연한 정릉 자택으로 그를 찾아가 두어 시간 얘기를 나눴다. ­하동군민들에게 사죄한 것은 언제,어디서 하신 말씀입니까? ▲91년 7월10일 바르게살기운동 하동군협의회 초청 강연회에서 인사말로 한 것인데 여러 신문에 보도가 됐더군요. ­주최측에서 그런 얘기를 해달라고 주문을 하던가요? ▲아닙니다.제 스스로 한 얘깁니다.그 자리에 서니까 50년전의 일이 생각도 나고 군민들을 직접 뵈니까 저 자신도 모르게 그런 얘기가 저절로 나옵디다. ­처음 주최측으로부터 강연요청을 받고서 어떤 감회가 있었습니까? ▲‘하동’이라고 하니까 저로서는 감회가없을 수야 없지요.거기서 군수를 지냈으니까요.해방후에도 더러 하동을 지나친 적이 있었습니다만 ‘죄의식’때문에 (군민들을) 찾아볼 용기가 없었습니다. ○일제 앞잡이로 군민 괴롭혀 ­‘죄’라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말씀하십니까? ▲일제말기 하동·창녕군수로 재직하면서 일제의 앞잡이가 돼 군민들을 괴롭힌 행위를 말합니다. 李씨는 1934년 경성(京城)제국대학(서울대학교의 전신)에 입학한 후 예과 3년,본과 3년의 6년 과정을 마치고 40년 졸업했다.본과 3학년 때인 39년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에 합격한 李씨는 대학 졸업후 1년간 시보(試補)생활을 거쳐 1941년 6월 하동 군수로 첫 발령을 받았다.1년 뒤인 42년 7월 그는 창녕(昌寧)군수로 전보돼 그곳에서 3년간 근무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군수는 어떤 경로로 됐습니까? ▲당시 대학을 나와도 마땅한 취직자리도 없고 해서 재학중에 고시(考試)공부를 해서 (군수가)됐습니다. ­당시 고시공부는 주로 직장을 얻기 위한 방편이었습니까? ▲그런 면도 있지만 입신출세를 위해서 한 경우도 많았습니다. ­시보 생활은 어디서 했습니까? ▲조선총독부 학무국에서 했습니다.국회 부의장을 지낸 尹吉重씨가 저와는 고시 동기생인데 尹씨는 총독부 농림국에서 시보생활을 했습니다. ­군수의 대우는 어땠습니까? ▲당시로선 비교적 많은 봉급을 받았습니다.일제말기에는 일본인에게만 주던 가봉(加俸)을 조선인들에게도 지급해 봉급차이도 없어졌습니다. ­하동군수 시절 식량공출(供出)문제로 고생을 하신 것 같은데… ▲제가 군수로 부임한 이듬해인 1942년부터 ‘공출제도’가 시행됐습니다.그런데 하동에선 생산량보다 할당량이 많아서 무리가 있었습니다. ○1942년부터 공출제 시행 ­공출미 할당은 어디서,누가 결정하였습니까? ▲당시 경상남도 산업부장으로 있던 金大羽씨가 군수회의를 소집한 후 각 군수에게 강제로 할당해 주었습니다. ­하동군에 할당된 공출량은 얼마나 됐습니까? ▲군 양곡담당 기수(技手)에게 물어보니 재고가 6,000석이라고 하더군요.그 내용을 金大羽씨에게 보고했더니 ‘기수 말은 못 믿겠다’며 재고량의 무려 5배인 3만석을 할당하더군요. ­최종 공출량은 얼마나 됐습니까? ▲할당량의 1할 정도인 3,000석 가량을 공출했습니다. ­다른 군의 사정은 어땠습니까? ▲대개 할당량의 절반 정도는 달성했었습니다.그 때 제가 있던 하동군이 꼴찌를 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죽창’ 얘기는 왜 나온 겁니까? ▲당시 군민들이 집안 곳곳에 쌀을 감추어 두니까 군청직원들이 죽창을 들고 다니며 창고나 벽 같은 쌀을 숨겨둘만한 곳을 쿡쿡 찔러본 것을 두고 한 얘깁니다. ­죽창으로 사람을 해친 사례도 있습니까? ▲그런 적은 없습니다.그러나 ‘공출독려반’들이 죽창을 들고다니니까 군민들에게 위협은 됐을 겁니다. ­하동군수에서 1년만에 창녕군수로 자리를 옮기셨는데 승진은 아니지요? ▲예,군세(郡勢)로 보면 오히려 좌천인 셈이지요.부진한 공출성적이 문제가 됐을 것으로 봅니다. ­본인의 ‘친일’은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말합니까? ▲식량공출이나 노무자 징용,학병권유,징병제 독려 등에 대한 방침이 도의 군수회의에서 결정이 되면 군수는 다시 면장회의를 소집하여 그 내용을 하달,독려했습니다.결국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한 셈이지요. ­그같은 일은 당시 군수의 기본적인 직무가 아닙니까? ▲그야 물론이지요.그러나 그같은 직무를 수행하는 군수자리를 직업으로 택했다는 자체가 ‘친일’입니다. ○고등관리 이상 관리는 친일파 ­항간에는 일제말기에 군수 노릇 몇 년 한 사람을 ‘친일파’로 보는 것은 지나치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도덕적 평가 이전에 지식인의 민족의식 문제라고 봅니다.아무 생각없이 상부기관의 결정사항을 집행한 것도 그렇지만 더러는 출세목적으로 부풀려 집행한 사례도 있었습니다.당시 군수는 일선 행정기관의 실질적 책임자로 지금보다 훨씬 권한과 재량이 많았습니다.어려운 시험을 거쳐 자발적으로 그런 자리에 앉았다면 이는 재임기간이 문제가 아니라고 봅니다.적어도 고등관 이상의 관리는 친일파로 볼 수 있습니다. ­일본인 관리들과의 차별대우는 어땠습니까? ▲고급관리는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일제말기에는 임금차이도 거의 없었습니다.총독부 내에 ‘계림구락부’라는 고등문관시험 출신 고등관들의 모임이 있었는데 저도 시보 시절에 참여한 적이 있습니다. 해방후 그는 45년 10월까지 창녕군수로 계속 근무하다가 미 군정청으로부터 경남도청 사회과장으로 발령을 받고는 한 달만에 사표를 썼다.이유는 자신은 일제때 관리를 지낸 몸이라는 것.이후 그가 자리를 옮긴 곳은 부산 동래구 범어사 입구 청룡초등학교였다.“해방후 민족앞에 속죄해야겠다는 생각에 승려가 되려했습니다.그러나 이미 딸린 아이가 다섯이나 돼 혼자 이 문제를 결정할 수가 없었습니다.그래서 낮에는 교사로 근무하면서 밤에는 범어사 河東山 스님 밑에서 수행생활을 했습니다”.지난 81년 홍익대 총장을 그만둘때까지 그는 35년간 교육계에만 몸담았었다.그 나름의 ‘근신’이었다. 60년대초 그는 수필과 신문에 연재한 자전적 소설을 통해 자신의 친일행적을 참회했었다.또 80년 봄에는 조선일보에 ‘나를 손가락질 해다오’라는 글을 발표,지식인 사회에 파문을 던졌다.거듭된 ‘참회’를 두고 일각에서는 ‘상습적 양심선언가’라고 비아냥거렸다.그러나그의 ‘참회’는 앞뒤,체면안가리고 솔직하다.사실왜곡이나 자신을 미화한 구석도 없다. “사죄를 하고나니 마음이 이렇게 후련할 수가 없습니다”. 인터뷰 내내 그는 밝은 모습이었다.묻는 말에 뭘 대답해야 할지 망설이는 법도 없었다.그의 얼굴 가득히 ‘뉘우친 자’의 평화감과 여유가 넘쳐 흘렀다. ◎日帝下 군수는 어떤 자리였나/군행정 최고 실권 가진 실력자/고등 문관시험 합격자 임용/1년간 시보 거쳐 군수부인/면장·군청직원 인사권 가져/초임은 초등교사의 약 3배 일제하 공직자 관등(官等)은 네 종류였다.최상급은 일황이 ‘친히’ 임명하는 친임관(親任官)으로 조선내에서는 조선총독·정무총감 두 사람뿐.그 다음이 칙임관(勅任官)·주임관(奏任官)·판임관(判任官)순.주임관 이상을 고등관(高等官)으로 쳤는데 현 사무관(5급) 이상에 해당하는 직위다. 군수는 판임관에서 승진하거나 고등문관시험 행정과(현 행정고시)합격자가 임용됐다.고문(高文)출신자의 경우 1년간 시보 시절에는 판임관 6급(군청 과장급)대우를 받다가 군수로 정식 임용되면 주임관 7등급 대우를 받았다.초임 연봉은 1940년 7월1일 기준 1,650원.(당시 초등학교 교사 초봉은 월 45원) 군수는 면장 이하 군청직원에 대한 인사권을 가진 군행정의 최고책임자로 ‘영감(令監)님’으로 불렸고 부인은 ‘마님’소리를 들었다.‘각하(閣下)’라는 용어는 도지사급의 칙임관들에게 붙였다. 李恒寧씨는 “사법과 출신의 법관들은 판결문 작성 등 잡무가 많았으나 군수는 도장찍는 일 밖에 없어 편했다”고 회고했다.
  • 親日의 군상:9/시인 金東煥(정직한 역사 되찾기)

    ◎名詩 남긴 민족 시인 끝내 변절의 길로/“聖戰 나가 죽는것이 충성의 길” 전국 돌며 강연회/‘삼천리’ 등 각종 친일매체에 논설·평론 게재 앞장/1941년 임전대책 협의회 결성 주도… ‘황민화’ 실천/해방후 반민특위에 자수/6·25때 납북후 행방불명/3男 부친 행적 대신 사죄 “아하,無事히 건넜을까/이 한밤에 男便은/豆滿江을 탈없이 건넜을까?//저리 국경 강안을 경비하는/외투 쓴 검은 巡査가/왔다- 갔다-/오르명 내리명 분주히 하는데/발각도 안되고 무사히 건넜을까”//소곰실이 密輸出馬車를 띄워놓고/밤새가며 속태이는 젊은 아낙네/물레 젓던 손도 脈이 풀려서/파!하고 붓는 漁油등잔만 바라본다,/北國의 겨울밤은 차차 깊어가는데.(‘국경의 밤’ 제1부 첫머리에서) 새벽마다/고요히 꿈길을 밟고와서/머리마테 찬물을 솨- 퍼붓고는/그만 가슴을 드듸면서 멀니 사라지는 北靑물장수.//물에 저즌 꿈이/北靑물장수를 부르면/그는 삐걱삐걱 소리를 치며/온 자최도 업시 다시 사라진다.//날마다 아츰마다 기대려지는/北靑물장수.(‘北靑물장수’ 전문)‘시인은 가도 시는 영원한가?’ 낯익은 두 편의 시를 보면서 우리는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진 한 시인을 그리워하게 된다.파인(巴人) 金東煥(1901∼?,창씨명 白山靑樹).바로 그다.흔히 그를 ‘북국(北國)의 시인’이라고도 부르는 것은 그가 함경북도 경성(鏡城)출신인데다 북방지역의 정서를 담은 시를 여럿 쓴 때문이다. ○한때 민족시인으로 각광 위에 첫번째 소개한 ‘국경의 밤’은 우리 국문학사에서 ‘최초의 장편 서사시’로 평가받고 있다.당시 북방지역 조선인들의 애환을 담은 이 시는 작품 저변에 흐르는 민족적인 색채로도 특별한 평가를 받고 있다.두번째 시 ‘북청(北靑)물장수’는 ‘북청’이란 지명을 유명하게 만들었다.당시 경성(京城·현 서울)에는 물장수를 하면서 아들이나 동생의 학비를 대는 북청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얘기다.문단생활 초창기 토속적인 정서로 식민지하 조선인들의 삶과 애환을 노래한 ‘민족시인’ 김동환.일제말기 그의 변절은 이래서 더욱 안타까운 것이다. 김동환의 첫 출발은 신문기자였다.서울 중동중학교를 마치고 1921년 일본 동양(東洋)대학에 입학한 그는 23년 9월1일 도쿄 일대를 강타한 ‘관동(關東)대지진’이 나자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하였다.그는 1924년 고향 경성에서 발행되던 ‘북선일일신문(北鮮日日新聞)’기자로 입사,사회에 첫 발을 내디뎠다.이 신문은 일본인이 발행하던 지방신문으로 일문판(日文版)과 조선문판을 발행하고 있었는데 그는 여기서 조선문판 기자로 있었다. 입사 한 달만에 그는 동아일보로 일자리를 옮겼는데 여기서도 1년을 채우지 못했다.당시 좌익기자들이 주도하던 파업에 참여했다가 결국은 그도 사표를 내고 동아일보를 떠나야만 했다.이후 시대일보·중외일보를 거쳐 27년 5월 조선일보에 자리를 잡았다.그의 5년 남짓한 신문기자 생활은 조선일보에서 막을 내렸다. 그는 신문기자보다는 시인·문필가로 더 유명하다.그의 문단활동은 신문기자 생활보다도 앞선다.24년 5월 梁柱東의 추천으로 ‘금성(金星)’지에 ‘적성(赤星)을 손가락질 하며’를 발표하면서 그는 문단에 데뷔하였다.대표작중의 하나인 ‘북청물장수’는 그가 동아일보 입사 1주일만(24년 10월13일)에 동아일보 지면에 발표한 것이다.첫 시집 ‘국경의 밤’은 이듬해 3월 한성도서(漢城圖書)에서 출간됐다.2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그의 시작활동은 40년대 초반까지 계속됐다. 신문기자,시인에 이어 그를 상징하는 또 하나는 잡지 ‘삼천리(三千里)’발행인(사장).‘삼천리’는 1929년 6월에 창간하여 42년 1월까지 통권 152호를 발행한 월간 종합잡지.(42년 5월1일자부터 ‘대동아(大東亞)’로 바뀜) ○中日전쟁 계기 친일 선회 ‘삼천리’ 창간배경에는 재미있는 일화 한토막이 있다.원래 그는 자본가는 아니었다.그가 이 잡지를 창간한 밑천은 ‘촌지’였다.당시 그는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차장)로 총독부를 출입하고 있었다.그해 가을 조선총독부는 경복궁에서 ‘조선박람회’를 개최하면서 출입기자들에게 300원씩(액수에 대해선 일부 주장이 엇갈림) ‘촌지’를 돌렸는데 당시 쌀 한가마 13원 하던 시절이니 꽤 큰 돈이었다.대부분의 기자들은 ‘공돈’이라며 옷을 사 입거나 유흥비로 날렸으나 그는 이 돈을 ‘사업자금’으로 활용한 셈. 초창기 ‘삼천리’는 우리 국토를 상징하는 제호(題號)만큼이나 민족적인 색채가 강한 잡지였다.당대의 거물 문사·논객들이 단골필자로 참여하여 조선의 역사·문화와 당대의 시대상을 주요 테마로 다루곤 했다.‘삼천리’는 당시 민간신문사들이 발행하던 종합잡지 ‘신동아’‘조광(朝光)’ 등과 어깨를 겨룰만큼 인기있는 잡지였다. 3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그는 잡지 발행 이외에도 신문과 다른 잡지 기고를 통해 왕성한 문필활동을 했다.그러나 그에게도 이른바 ‘시국(時局)’의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다.37년 7월 중일전쟁 발발을 분수령으로 일제의 ‘황국신민화 정책’이 전개되자 여타 문사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이 친일대열에 합류하게 된다. “시국은 점점 긴장하여 가고 장기전(長期戰)의 체제는 점점 굳어가고,그리하여 국민총동원의 추(秋) 다다랐도다.우리는 일체의 힘을 합하여,‘전쟁에 이깁시다.국책(國策)의 선(線)에 연(沿)하여 일체의 동작을 합시다’…” ○학병 참가 촉구 詩 발표 38년 5월 ‘삼천리’ 창간 10주년호 ‘편집후기’에서 그는 자신의 향후 친일노선을 공개적으로 천명하였다.같은 호 기명칼럼 ‘시평(時評)’(‘권문세가의 반성을 촉(促)함’)에서 그는 “…이제 제국은 아세아의 번영과 행복을 위하여 대지(對支)응징의 전쟁을 기(起)하고 있다.…자식과 조카(侄)를 단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군문(軍門)에 보내야할 것”이라며 지원병으로 나갈것을 독려하였다.그가 친일로 전향한 배경에는 ‘삼천리’의 재정난이 한 요인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이보다는 기득권 유지와 ‘대세순응주의’가 주된 요인이었다고 보여진다. 그의 친일시는 이듬해부터 노골적으로 시작된다.지원병을 찬양한 ‘1천병사(兵士)의 삼(森)’에서는 ‘저마다 폐하의 무궁한 성대(聖代)를 노래부르는 젊은 건아’로,‘고란사에서’라는 시에서는 ‘대화(大和)의 처녀가 사라져 가버린 뜰에 나홀로 서성거리며 어조영(御造營)의 망치소리에 천년 역사를 회상’하며 부여신궁(扶餘神宮) 근로봉사의 감격을 읊었다.(두 편 모두 ‘삼천리’39년12월호) 조선인 학병 동원이 시작되자 그는 ‘매일신보’에 ‘권군취천명(勸君就天命)’(43년 11월6일)이라는 시를 통해 ‘번듯하게 사는 길이란­ 제 목숨 나라에 바쳐,…군국(軍國)에 바칠 때일세 ’라며 ‘성전(聖戰)’에 나서라고 촉구하였다.이 밖에도 그는 각종 친일매체에 다수의 친일논설·평론 등을 남겼다. ○각종 단체서 背族행위 그의 대표적인 친일행적은 그가 주동이 돼 41년 8월25일 ‘임전대책협의회’를 발족시킨 일이다.이 단체는 임전(臨戰)체제하에서 자발적으로 황민화운동을 실천하기 위해 조선내 친일인사를 총망라하여 구성한 단체로 발족 1개월 후인 9월에는 尹致昊 중심의 친일단체인 흥아보국단 준비위원회와 통합,‘조선임전보국단’으로 재출발하였다.그는 이 단체의 핵심요원인 상무이사로 활동하였다.이 밖에도 그는 조선문인협회 발기인,조선문인보국회 상임이사,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위원,대화동맹 위원 등을 지내면서 일제말기 친일대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해방후 그는 자신의 친일행각을 뉘우치며 반민특위에 자수하였다.반민재판에서 공민권 정지 5년을선고받은 그는 6·25때 납북됐다.94년 그의 3남 英植(65)은 부친의 전기를 펴내면서 부친의 친일행적에 대해 대신 사죄한 바 있다. “문인이 지켜야 할 절개에 두 가지가 있다.…믿던 부류의 사람까지 이(利)에 팔리고 지위에 움직임을 받아서 부끄러운 처신을 취한다면 대중이 그를 버릴 것이요,예술은 그를 타기(唾棄)할 것이다…”.아직 민족혼이 살아 숨쉬던 시절 그가 쓴 이 한 구절이 가슴을 치는 것은 왜일까. ◎金東煥­崔貞熙 ‘사랑의 행로’ ‘같이한 친일’/유부남­미망인의 동거/7년 산뒤 딸 둘 낳아/崔貞熙 일제말 친일 전향 巴人 金東煥과 여류소설가 崔貞熙(90년 작고)의 ‘불륜’은 한국문단에서 잘 알려진 이야기다.두 사람 모두 문인이자 일제말기 친일행적도 똑같이 남겼다. ‘시대일보’ 기자 시절인 1926년 원산(元山) 출신 신여성 申元惠(93년 작고)와 결혼한 파인은 이 사이에서 3남1녀를 두었다. 파인이 崔貞熙를 처음 만난 것은 1931년 초가을.중앙보육학교장 朴熙道(33인중 1인으로 나중에 친일로 변절함)의 취직부탁을 가지고 삼천리사를 찾아 온 崔貞熙를 파인은 당일로 ‘부인(婦人)기자’(여기자)로 채용하였다.당시 崔貞熙는 결혼한 몸이었다. 두 사람이 동거를 시작한 것은 43년초.이무렵 崔貞熙는 남편과 사별한 상태였다.두 사람은 50년 파인이 납북될 때까지 7년간 동거하면서 두 딸을 낳았다.崔貞熙는 생전에 전 남편과의 사이에 태어난 아들을 파인의 호적에 올렸다가 申元惠측으로부터 피소된 적도 있다. 34년 ‘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사건’으로 9개월간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던 崔貞熙.그러나 그 역시 결전부인대강연회(41년 12월27일)에 연사로 참여하는 등 일제말기 친일로 전향하였다.대표적 친일작품으로는 소설 ‘장미의 집’(‘대동아’42년 7월호),‘야국초(野菊抄)’(‘국민문학’42년 11월호),수필 ‘동아(東亞)의 새아침’(‘매일신보’42년 2월21일) 등이 있다.
  • 39년생 공무원 ‘조마조마’/慶北道 사무관들 퇴출대상 확대 주장

    ◎구조조정 갈등 증폭 李義根 지사 고심 경북도가 구조조정을 둘러싸고 심각한 내부 갈등을 빚고 있다. 10일 도 관계자에 따르면 도는 현재 38년생 18명을 퇴출시키기로 내부 방침을 세우고 조정작업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사무관급 이하 직원들은 기구축소로 서기관급 이상 자리 14개,사무관급 26개 등 모두 40개 자리가 없어져 퇴출 연령을 39년 6월생까지 조정해야 한다는 주장한다. 38년생(서기관 13명,사무관 5명)만으로 선을 그을 경우 현재 서기관 6명,사무관 5명이 결원인 점을 감안하더라도 11명의 사무관이 대기해야 한다는 계산이다. 39년 6월생(서기관 5명,사무관 5명)까지 물러나면 대기 사무관은 오직 1명만 남게 된다. 이들은 특히 서울 대전 전북 충남 등은 모두 40년생까지 퇴출시키기로 결 정했다는 점을 근거로 들고 있다. 부산 대구 경남 충북 등도 39년생까지를 대상자로 정했고 전남 제주 등도 39년 또는 40년생까지 거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에 대해 39년 6월생들은 터무니 없는 발상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다년간 행정경험을 가진 고령자를 마녀사냥식으로 일률적 선을 그어 나가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일축하고 있다. 이같은 갈등이 계속되면서 사무관 이하 직원들은 고위층의 결단만 기다린 채 사실상 일손을 놓고 있다. 퇴출대상에 거론되는 인사들도 도정에 전념할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다. 구조조정 결과에 따라 행정자치부가 특별교부세 등을 차등 지급한다는 점을 굳이 들지 않더라도 李義根 지사의 결단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 향토축제 나눔의 마당으로/沈雨晟 공주민속극박물관장(서울광장)

    고장마다 펼치고 있는 이른바 향토축제가 해마다 불어나고 있다. 1년에 300여가지의 축제가 전국에서 열리고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역사성 있는 민속제의 성격을 띤 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새롭게 꾸며진 ‘문화제’ 또는 ‘예술제’라는 것이 주종을 이룬다. 하긴 우리 민족은 자고로 축제를 생활속에 심어온 남다른 데가 있는가 싶다. 상고시기 축제에 관한 최초의 기록으로는 중국의 옛 문헌 ‘삼국지·위지동이전’(三國志·魏志東夷傳)을 꼽는데 “…부여에서는 은력(殷曆) 정월에 하늘굿을 올리며 온 나라 사람들이 며칠을 먹고,마시고,노래하고,춤춘다…”했다. 이 밖의 자료를 종합해 보면 대개 정월,5월,10월 등의 일정한 때에 제사를 곁들인 공동체의 잔치를 펼치고 있다. 한 해의 시작인 정월,씨뿌리기를 끝낸 5월,추수를 마친 10월의 축제는 모두가 일의 시작과 마무리에 있으니 단순히 먹고 놀아난 것이 아님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더 큰 수확을 염원하고,다지고,구가하는 가운데 내일의 평안함과 태평까지를 기리는 삶의 일정표였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저 먹고,마시고 깨부수는 난장판으로 아는 풍조로 해서 본디의 축제정신이 왜곡되고 있다. 한편 축제 가운데는 국가적 규모의 큰 것이 있어 향토축제와 대비하기도 하지만 그러한 것은 점점 나라가 주관하는 특별한,또는 연례적 기념일로 분류하는 것이 세계적 추세다. 그렇다면 그저 지방에서 열리는 것이라면 향토축제일까. 그렇지 않다. 한 지역의 유서깊은 전통문화에 뿌리를 둔 향토성에 기초한 것이어야 하는데 요즘의 실상은 분별이 없다. 물론 향토성이 있는 축제만이 축제라는 주장은 아니다. 예컨대 ‘강변 팝송잔치’는 ‘○○예술축제’로 부르는 것이 걸맞다는 의견이다. 또 한가지 흉금없이 논의되어야 할 일이 있다.향토축제의 본보기로 대접받고 있는 ‘신라문화제’와 ‘백제문화제’를 보자. 다분히 회고취향에 따라 열심히 옛 모습을 재현하려는 데까지는 그래도 좋다. 각기 제 나라 임금과 장수를 추모하고 숭앙하는 의식도 있음직하다. 그런데 이 모든 행사의 저변에 신라와 백제의 옛과 오늘이 서로 대결·질시하고 있으니 참으로 무서운 일이다. 신라문화제와 백제문화제,나아가서 고구려문화제는 3국의 분열상을 재현·음미하자는 것이 아니다. 독창적이면서 다양한 문화를 확인하는 가운데 그의 총합체인 찬란한 민족문화를 더욱 뼈대있게 하려는 ‘울력 정신’이 발양되는 것이어야 한다. 오늘의 고질적 병폐인 동·서 갈등의 뿌리는 신라와 백제의 이질성에서 온것이 아니라,해당시기 일부 봉건적 지배층과 외세의 합작으로 비롯된 것임을 우리네 민초들은 이미 알고 있다. 전통시대 신라와 백제의 마을과 마을에서 벌였던 축제의 정신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한마디로 ‘나’가 아닌 ‘우리’로 통하는 공동체 의식이었다. 그래서 3국은 결국 하나가 되어 고려·조선으로 이어졌는데 다시금 외세의 농간으로 원통하게도 분단의 시대를 살고 있다. 이 분단시대의 신라문화제와 백제문화제는 어떠해야 할 것인가. 올해로 39년째 맞는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가 이제는 ‘경연’이란 두 글자를 떼어 버리고 ‘우리민속큰잔치’로 거듭나야 하듯이 식민시대 유물인 관료적인 권위의식과 말초신경적 시샘을 훌훌 털어버리고 통일지향적 넉넉함이 의젓이 되살아나는 따사로운 나눔의 마당이어야 할 것이다.
  • 충남/沈 지사 “개혁하겠다”(2期 지자체 인사태풍:13)

    ◎컴퓨터·외국어 무장 소장파 약진 예고/39년생 퇴출 예상… 월내 인사 마무리/大局大課 지향… 국제통상과 신설/부시장·부군수 대대적 순환 근무 충남도의 인사는 조직개편이 이달 중 마무리되는 대로 단행된다. 沈大平 지사는 임명직 시절을 포함해 만 5년9개월간 재직해 간부들의 업무능력을 소상히 파악하고 있다. 따라서 사람의 배치에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는 상태다. 沈지사는 민선 2기의 도정기조(基調)를 IMF경제난 극복과 ‘변화와 개혁속의 경쟁력 확보’에 맞추고 있어 인사에서도 소용돌이가 불가피한 실정이다. 沈지사는 먼저 일할 수 있는 조직을 만든 뒤 사람의 배치는 능력위주로 하고 권한을 대폭 위임해 책임행정을 구현하도록 할 방침이라고 여러차례 강조했다. 이에 근거해 도청직원들은 실력있는 소장인사의 ‘일대 약진’을 예상하고 있다. 특히 沈지사가 컴퓨터와 어학 등 기본 실력과 국제감각,균형감각을 강조한 점은 향후 인사의 방향을 시사한다. 충남도의 조직개편 방향은 11개 국실을 8개 국으로 줄이고 46개 과를 38개과로 정리하는 선으로 가닥을 잡고 있다. 3,300명인 직원 가운데 300∼400명을 감축해야 하는 점도 조직개편 작업의 어려움으로 작용하고 있다. 대략 정책실을 기확관리실과 통합하고,생활복지국과 보건환경국을 ‘복지환경국’으로 묶는 한편 지원부서인 내무국을 폐지해 문화체육국과 함께 ‘자치문화관광국’으로 확대 개편하는 방안이 흘러나오고 있다. 민방위 재난관리국 업무는 소방본부에 맡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는 대국대과(大局大課)주의를 지향해 행정의 능률을 높이고 경제·문화 등 도민들의 실생활과 관련된 분야를 강화하기 위한 포석이다. 또 통상기능을 강화하기 위해 과 단위의 ‘국제통상과’도 신설된다. 또 보좌관 또는 특보(特補)를 신설하는 방안도 거의 확정된 단계다. 이에 따라 金壽鎭 행정,柳喆熙 정무부지사 체제의 구축에 이은 국실장급 인사도 초읽기에 들어간 느낌이다. 특히 39년생과 40년생으로 유동적인 ‘퇴출기준’이 어느 쪽으로 가느냐에 따라 인사의 폭도 크게 달라질 것으로 여겨진다. ‘도정의 설계사’인 기획관리실장에는 沈지사의 정책브레인 역할을 하고 있는 李明洙 정책실장(행시 22회)과 朴商敦 도의회 사무처장,兪德濬 내무국장 등이 경합하고 있다. 여기서 발탁되지 않는 인사는 자치문화관광국 등 실세부서에 기용돼 민선2기 새 도정의 전위역을 맡게 될 전망이다. 신설될 ‘경제통상국’에는 沈지사의 의중이 아직 오리무중(五里霧中)이나 朴漢圭 지역경제국장(기술고시 16회)이 적임자로 거론되고 있다. 다만 서기관이라는 점이 약점이라면 약점이다. 국장급과 부시장·부군수의 전보와 관련해서는 대폭적인 순환근무가 이뤄질 전망이다. 이 경우 39년생인 金興泰 천안시 부시장 등 ‘고령자’들이 최대변수로 작용할 전망이다. 金부시장과 동년배인 申瑞均 서산시 부시장과 38년생인 李鍾珪 공주시 부시장과 金在高 연기군 부군수 등 7∼8명의 이름도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조직개편 등 다른 요인과 관련된 盧奎來 계룡출장소장과 趙春子 생활복지국장,徐明植 농정국장 등의 거취도 주목된다. 상당수는 퇴직하거나 정책보좌관 등 한직으로 밀려날 운명이다. 기술직에서는李建福 건설교통국장의 거취에 따라 金洸培 종합건설 사업소장의 영전이 예상된다. 과장급은 白南勳 자치행정과장의 승진이 0순위로 거론되고 있는 가운데 전보의 폭도 결코 작지 않을 전망이다. 명칭의 변경 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조직 개편폭이 클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조직의 안정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어 경우에 따라서는 소폭에 그칠 가능성도 없지 않다. 한가지 주목되는 점은 ‘체전준비팀’등 프로젝트팀장의 요직발탁 가능성이다. 이들은 사무관급이지만 ‘태스크 포스’를 비교적 잘 이끌어 주무계장 등으로 전진배치될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있다.
  • 대구시(2期 지자체 인사태풍:10)

    ◎파격발탁·구조조정 기대 반 우려 반/3국5과 폐지 부구청장 물갈이/지하철公 사장에 이사관 기용 촉각 구조조정을 앞둔 대구시는 기대와 우려의 분위기가 교차한다. 文熹甲 시장이 능력위주의 파격적인 발탁인사를 예고한 데다 행자부의 지침보다 더욱 강도높게 구조조정을 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탓이다. 현행 13개 실·국 49개과 가운데 민방위국,감사실,건설주택국 등 3개국 5과가 줄어든다. 또 건설안전본부와 종합건설본부도 통폐합된다. 李鎭茂 정무부시장은 유임이 확정됐고,朴炳鍊 행정부시장도 유임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朴부시장은 지역연고 배제원칙이 변수이지만 일처리를 잘하는데다 文시장의 신임이 두텁다. 경제통인 李부시장은 지난 3년간 文시장의 지역경제 활성화 의지를 살려외자 3억달러를 유치하는 등 깔끔하게 일처리를 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국장급 인사는 오는 10월말 임기 만료되는 대구지하철공사 사장자리가 변수이다. 전문경영인 공채 가능성도 없지 않으나 지하철공사의 특수성을 감안하면 이사관급 이상 공직자가발탁될 것이라는 관측이 유력하다. 또 인구 50만을 넘어선 달서구 부구청장 직급이 이사관으로 상향 조정됨에 따라 이사관 승진인사가 예상돼 간부들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曺璂鉉 상수도사업본부장 蘇一琫 시의회 사무처장 李賢姬 내무국장 李載龍 달서구부구청장 등이 승진 후보군으로 꼽힌다. 국장들은 부구청장으로 나가거나 서로 자리바꿈을 해 대규모 인사이동이 예상된다. 부구청장 등 일부 39년생 부이사관의 용퇴가 조심스레 점쳐지고 있는데다 한 곳에서 3년이 넘은 부구청장,국장들도 수두룩하기 때문이다. 시 본청의 비고시출신 2∼3명이 부구청장으로 나갈 것이라는 관측이 유력하다. 이렇게 되면 시 본청 국장급은 행정고시 출신이 전면에 등장,주요보직을 차지할 전망이다. 文永秀 경제국장(21회) 李眞根 기획관(21회) 林炳憲 문화체육국장(23회) 金淵水 특수기획단장(23회) 柳漢國 공보관(24회)등이 여기에 속한다. 文시장의 여성공무원 기용 폭에도 관심에 쏠린다. 전국의 광역자치단체 가운데 유일한 여성 내무국장인 李賢姬 국장과 金基元대구여성회관장 申鉉子 동부여성회관장 등이 주목을 받고 있다. 비서실장은 文시장의 정치적인 대리인 역할을 수행하는 인물이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까닭에 정치권과 관계를 맺고 있는 외부인사 영입이 확실시된다. 과장급에서는 고시 출신인 裵珖植 경제정책과장(26회) 李晋勳 국제협력과장(22회) 權赫道 자치행정과장(25회)의 발탁 여부가 관심거리로 떠오른다. 또 오는 10월 임기가 끝나는 지하철공사 기술이사와 총무이사에 공무원 출신을 임명할 지,시설관리공단 임원진을 모두 바꿀 지에도 간부들은 촉각을 곤두세운다. 文시장은 최근 간부회의에서 “지난 3년간 꾸중하면서 일을 시켰으나 지금은 꾸중이 필요없게 됐다. 구조조정으로 바로 처리하겠다”고 말했다. 이미 알만큼 알고 있으니 곧바로 책임을 묻겠다는 얘기다. 文시장의 발언이 알려지자 시청사는 불볕더위 속에서도 때아닌 찬 바람이 일고 있다. 구조조정 과정에서 ‘물’먹는 공무원들이 적지 않게 나올 것으로 보인다.
  • 충북/승진은 ‘가뭄’ 전보는 ‘홍수’(2期 지자체 인사태풍:8)

    ◎중하위직 위주 대대적 물갈이 예고/지방조직 개편·증평출장소 존폐 최대의 변수로/징계·능력미달자 퇴출 1순위 ‘증평’ 半이상 감원 李元鐘 충북도지사가 지난 1일 취임하자 인사를 언제 어느 규모로 단행할지에 커다란 관심이 쏠리고 있다. 우선 간부들은 인물 난으로 폭이 비교적 좁지만 중 하위직들은 대대적인 물갈이 인사가 이루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韓大洙 행정부지사는 이미 유임으로 결정됐고 정무부지사에는 趙永昌 기획관리실장을 내정됐다. 기획관리실장에는 羅基正 청주시장과 吳制世 청주시부시장의 기용이 검토된다. 이처럼 고위 간부는 틀이 대부분 짜여졌다.그러나 중하위직 인사는 지방조직 개편과 맞물려 규모가 클 전망이다. 간부들과 관련된 조직개편 방향을 보면 도본청의 3개 국이 없어질 것으로 보인다. 사회복지국·문화관광국·민방위국이 거론된다. 충북개발사업소 등도 없어진다. 따라서 국장 3자리를 포함,서기관 이상급 4∼5자리가 없어지는 것이 확실시된다. 여기에 지난 1일 공로연수를 떠난 黃屋 건설교통국장의 자리와 조만간 용퇴할 것으로 보이는 38,39년생 3∼4명의 자리를 감안하면 더이상 퇴출은 없을 전망이다. 지사 비서실장으로 발탁된 韓哲煥 전 진천부군수의 후임에는 金洪基 기획관의 기용이 점쳐지며 정년퇴임한 朴南奎 전 청원부군수의 후임은 군 자체 승진으로 채워질 가능성이 높다. 서기관급이 거의 승진하지 못하면서 사무관이 서기관으로 승진하는 일도 거의 없을 전망이다. 전보 인사는 고위직과 달리 대대적으로 이뤄질 전망이다. 한편 오는 8월말로 예정된 조직개편에서 정원의 11.8%쯤이 보직을 잃을 것으로 보인다. 숫자로는 도본청과 사업소의 2,550명을 포함해 모두 1만2,300여명에 이른다. 이들 대상자는 2000년 정년을 맞는 사람,부패 등으로 징계를 받은 사람,품행과 언행이 문제가 되는 사람들이다. 업무 수행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경우도 포함된다. 이를위해 근무평정 결과를 집중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자치단체간 인사교류는 이번에는 실현이 어려울 전망이다. 도는 도대로 시군은 시 군대로 자체 퇴출이 강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증평출장소의 폐지 문제가 이번 조직개편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자치단체 승격을 전제로 설치됐던 증평출장소가 폐지될 경우 230명의 소속 공무원 중 괴산군에 귀속될 100여명과 대신 설치될 증평개발 지원사업소 요원 50여명을 제외하고 나머지 인원을 도가 수용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또 출장소를 그대로 남겨둔다 해도 현 인원의 절반 이상은 감축이 불가피하다.
  • 경남(2期 지자체 인사태풍:2)

    ◎규모 크지만 ‘잔치’는 없다/기구 대폭 축소… 과·계장 승진 좁은문/시·군도 기구 축소/김 지사 행마에 어려움/명단 발표 10일께/정무부지사 이덕영씨 행시출신 초강세/도 핵심라인 장악할듯 金爀珪 경남지사는 최근 사석에서 “인사만 생각하면 골치가 아프다”고 어려움을 토로한 적이 있다. 벌이고 있는 대형 사업들의 성공적인 수행을 위해서는 능력위주의 인사가 돼야 하지만 조직의 사기를 생각하면 연공서열도 무시할 수 없어 고민인 것이다. 도는 이번 기구개편에서 3국 5과를 축소한다.부이사관 3개와 서기관자리 5개가 줄어드는 것이다.여기에 시·군의 국장자리도 1∼2개씩 줄어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다. 외자유치를 위해 유럽을 순방하고 있는 金지사가 귀국하면 7일 취임식을 마치고,2∼3일간 손질을 거쳐 모습을 드러내겠지만 유럽 방문에 앞서 확정한 것으로 알려진 부지사와 기획실장 인사에 나타난 지사의 의지와 기구개편 내용,그리고 공로연수 등으로 공석이 되는 자리를 눈여겨 보면 인사의 밑그림은 대강 그릴 수 있다. 우선 인사의 규모는 대폭이지만 승진은 그리 많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공로연수 대상이 당초 38년생 6명에서 39년생 4명이 추가됐지만,3국 5과가 축소돼 과·계장급의 승진은 치열한 경쟁이 예상된다. 이번 인사의 첫 단추인 부지사 인사에 대해서는 이런 저런 말들이 많았으나 權炅錫 행정부지사는 유임된다.부산고 출신으로 육사를 나온 權부지사는 꼼꼼하게 챙기는 타입이다.지사가 외자유치를 위해 해외에 나가 있어도 차질없이 안살림을 꾸려갈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평가다. 그러나 지난 3년간 金지사와 함께 해외시장을 누볐던 金勳 정무부지사는 물러 난다.金정무부지사는 공석인 경남무역 사장자리가 배려됐으나 본인은 이를 완강히 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후임에는 李德英 문화관광국장(행시 17회)이 기용된다.고시출신으로 정년을 7년이나 남긴 李국장의 정무부지사 기용은 파격적이다. 李국장은 그동안 도가 역점적으로 추진해온 각종 사업을 직접 기획,저돌적으로 밀어부쳐 金지사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처음 정무부지사 제안을 받고 완강히 거부하다 지사의 설득으로 최근 이를 수락한 것으로 전해졌다.정무부지사 이 취임식은 도지사 취임식 하루전인 오는 6일 예정돼 있다. 기획실장에는 權郁 내무국장(행시 21회)의 승진으로 굳어졌다. 합천에서 태어나 부산대를 나온 權국장은 金지사와 같은 고향,같은 대학 출신으로 2년여를 지근거리에서 모신 최측근이다.기획실장 자리를 놓고 경쟁관계였던 고시 선배인 李국장의 정무부지사 기용으로 쉽게 자리를 차지했다. 국장급은 부이사관 자리 3개가 비게 된다.우선 내무국장에는 金雄悅 환경보건국장(행시 16회)이 옮겨 앉는 것이 확실하다.이 경우 대형사업추진 전담기구 팀장인 정무부지사,예산을 쥐게된 기획실장,인사를 관장하는 내무국장,여기에 유임되는 朴完洙 경제통상국장(행시 23회)과 尹英 행정과장(행시 26회)등 고시출신들이 가세,‘인너서클’을 형성,도정을 주도할 것으로 예상된다. 문화관광국장에는 행자부소속 부이사관과 서기관 2∼3명이 거명되고 있으나 하마평은 없다. 교육원장에는 부이사관급 부시장이 입성할 가능성이 크고 나머지 국장들은유임되는 것으로 가닥이 잡혔다.鄭昌植 수산국장과 具龍好 민방위국장은 기구폐지로 용퇴해야 될 처지다. 이번 인사에서 가장 주목받는 자리는 건설도시국장.5년이상 장기집권(?)하고 있는 李在燮 국장이 과연 자리를 비킬지 여부. 후진을 위해 옮겨야 한다는 말들이 많지만 본인은 지사의 뜻에 일임하겠다는 의사다.자리가 비게 되면 후임에는 梁光雄 개발공사사장이 0순위다. 嚴正仁 비서실장이 그동안 고생한 보상으로 승진,창원 부시장으로 나가는 것이 확실시 된다.과묵하고 합리적인 사고를 갖고 있는 嚴실장은 시장들이 서로 요청할 정도로 인기가 높다.기구개편에 따라 자리가 없어지는 吳敬三 감사실장도 부이사관으로 승진,부시장으로 나갈 것이 확실시 된다. 鄭永錫 의회사무처장도 이번 기회에 자리를 옮기고,孔昌錫 김해부시장,韓昌一 거제부시장,河三錫 양산부시장 등은 도청으로 전입돼 능력과 격에 맞는 자리를 차지할 것으로 점쳐진다.金泰塋 기획관과 吳元碩 공보관,愼熙範 총무과장 등도 고생한 댓가로 부단체장에 기용될 것이 유력하고,자리에여유가 생기면 고참과장 1∼2명 정도가 합류될 것이라는 분석이다. 서기관들이 빠져나간 자리는 지난 88년 사무관으로 승진된 고참중에서 올라오지만 朴在賢 기획계장(행시 32회)는 0순위고 나머지 1∼2자리를 놓고 치열한 경합이 예상된다.국이 폐지된 수산직의 사기진작을 위해 서기관자리 1개를 늘린다.崔辰洙 통영수산국장을 본청 과장으로 부르고,고참계장 2명을 승진시켜 불만을 달랠 것으로 보인다.
  • 건국이후 인구변화(대한민국 50년:19)

    ◎49년 첫조사 20,188,641명… 96년엔 갑절로/55년 간이조사 전에는 추계… 정확성 의문/6·25전쟁기간 150만명 희생… 사망률 4%/60년대부터 공업·도시화 영향 대규모 이동 대한민국 정부 수립후 최초의 인구조사는 49년 5월1일에 실시된 ‘대한민국 제1회 인구조사’였다.이 때 인구는 2천18만8천641명으로 파악됐다. 한국전쟁 중인 50년과 51년에는 보건사회부의 발표가 남아있다.50년 2천35만6천명,51년 2천44만1천명이었다.그런데 이 인구조사 발표는 실제 조사를 한 것이 아니라 49년의 조사를 토대로 각도 도지사의 보고에 의한 추계였다. 52년과 53년에는 내무부의 추계가 남아있다.52년 2천52만6천명과 53년 2천1백54만6천248명이었다.53년의 인구가 전년도보다 1백만명 이상 급증한 것은 배급을 늘리기 위한 유령인구 때문으로 추측된다.54년 보건사회부의 인구통계는 2천1백91만3천명이었지만 이도 실제조사가 아니라 전년도에 기준한 추계이다.결국 정부가 발표한 50년부터 54년 사이의 인구 수는 정확하지 못하다. 55년 제1회 간이 총인구조사가 실시됐는데 상주인구가 2천20만2천256명이었다.이는 현역 군인과 형무소 수형자 등을 뺀 숫자이다.한국전쟁 시기의 인구 증가율은 1.1%였다.그러나 한국전쟁후 베이비 붐이 일어 55년 이후 66년까지 인구 증가율은 2.8%를 기록했다.그러다가 산아제한 정책이 실시된 66년부터 85년까지는 1.7%로 떨어졌다. ○증가율 2.8% ‘베이비 붐’ 정부 수립후 인구의 변동은 경제문제와 가장 밀접한 상관관계를 갖는다.1인당 국민소득은 44.5달러에 불과했다.따라서 국민총생산의 5분의 1에 달하는 미국으로부터의 원조액 1억7천9백59만3천달러는 기아를 막기 위한 것으로도 부족했다.한국전쟁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인구에 비해 보잘 것 없는 생산시설은 ‘저고용­저소득­저고용’의 악순환 고리를 이어갔다.폭발적인 인구문제의 해결은 60년대 경제개발을 통한 지속적 성장 밖에 해답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한국전쟁의 인적 피해로 인한 가장 직접적이고 충격적 결과는 무엇보다도 특이한 인구구조를 형성시켰다는 점이다.우선 한국전쟁은 일시적 사망률의 상승과 출생률의 저하를 초래했다.한국전쟁으로 인한 인명 손실 중 사망자는 약 1백만∼1백50만명으로 추정되며 이로 인한 인구의 사망률은 1천명당 36∼47명,즉 4% 안팎으로서 평소 한국인의 사망률인 평균 2%의 2배나 됐다.이같은 현상은 60년과 66년의 인구 센서스에서 각각 30∼49세 및 35∼49세의 연령층에서 과부가 많은 것으로 조사된 것과 상통하는 것이다.반면 전쟁기간 동안의 0∼9세의 영아 및 아동의 사망자 가운데는 남아보다 여아가 더 많았다.이것은 새로 태어난 신생아들과 아이들의 경우 전통적 남아 선호사상으로 인해 남아를 되도록 보살핀 때문으로 사회학자들은 보고 있다. ○45만∼72만명 월남 추정 전쟁기간 중의 출생률은 극도로 저하돼 같은 기간의 높은 사망률과 더불어 인구의 절대 감소현상을 초래했다.이때의 출생률은 평상시보다 1%나 낮아졌으나 인구 증가율이 당시에는 1년에 1천명당 23명으로 늘어났었던 데 비해 전쟁기간 중이었던 49∼55년 사이에는 연평균 1천명당 11명 정도 밖에 늘어나지 않았다. 전쟁으로 인한 인구변동의 또다른 충격은 인구의 대규모 이동현상이다.한국전쟁 기간 동안의 월남인구의 추정치는 45만∼72만명에 이르고 있다.반면 남한에서 북한으로 강제로 납치되거나 그 밖의 이유로 넘어간 이들의 수도 대략 30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한편 우리나라에서 대규모 인구이동이 시작된 것은 60년대부터인데 60년대 이후의 인구이동은 물론 공업화의 영향을 받은 도시화의 결과였다. 61년 이후 인구 분포에 있어 가장 큰 변화를 경험한 지역은 수도 서울이었다.서울은 정부수립 직후인 49년에는 전인구의 7.1%를 차지했고 11개 시·도 중 인구 수로 따져 9위에 지나지 않았으나 75년에는 이미 전인구의 20%에 해당하는 6백90여만명의 인구를 갖게 됐다.또 오늘날에는 전인구의 22%가 넘는 1천여만명의 인구를 갖게 됐다. ○86년 도시인구가 65% 그러나 서울과 부산,그리고 경기도를 제외한 모든 도는 전국 인구에 대한 구성비에 있어 감소 추세를 보였다.인구이동을 도시와 농촌으로 구분하면 도시인구의 비율은 55년 25%에 불과했던 것이 80년에는 57%,86년에는 65%에 달해 도시인구가 급증했음을 알 수 있다.그러나 70년 이후 서울로의 인구집중은 어느 정도 둔화되는 추세를 보이기 시작했고 농촌인구가 서울 이외의 다른 도시로 이동하기 시작했다.특히 마산 울산 포항 등의 새로운 공업도시와 수도권의 성남 안양 수원 등에는 우리나라 전도시의 평균 인구증가율보다 높은 증가율을 보였다. 정부수립후 49년 첫 인구조사에서 남한의 인구는 2천18만8천여명이었으나 96년 조사된 인구는 4천6백43만4천여명으로 50년동안 두배로 불어났다. ◎日 전쟁 동원 인구 해방후 엄천난 逆유입/日帝와 美 군정 시기의 인구/도시주변 戰災民으로 반공체제 정착 큰 역할/46년 1,936만명 조사/이듬해 국민등록 실시 한국은 일제 식민통치 기간 동안 특히 37년 이후의 전시 총동원체제 아래서 대규모의 인구이동을 경험했다.가혹한 수탈로 인해 농촌을 떠나 일본과 만주 등으로 이주했다.또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지는 전시체제 기간동안 이른바 노무 동원 또는 강제 징용 등에 의해 북한의 광공업지역과 일본으로 동원됐다.39년에서 해방 전까지의 기간에 국내외에 걸쳐 전시체제와 관련한 유동인구는 약 7백만명으로 45년 현재 국내 총인구 수의 약 30%에 달한다는 사실은 인구이동 규모의 방대함을 말해 준다. 일제 말기의 인구이동 현상은 해방직후에는 역으로 대규모의 인구유입 즉 귀환을 초래했다.여기에다 남북 분단의 체제대립적 성격을 반영하는 이른바 월남민들이 발생했다.해방 직후 남한사회는 단기간 안에 엄청난 인구유입을 경험했다. 이는 해방정국을 이해하는 데 몇 가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첫째는 유입인구가 자신의 성장지역인 농촌사회에 안정적으로 정착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도시지역의 경제활동 인구로 흡수되지도 못하면서 상당수가 도시 주변에 전재민(戰災民)으로 퇴적된 것으로 보인다.이는 해방정국의 사회적 불안정성과 긴장을 높이는 주요한 변수가 됐다. 둘째는 유입인구가 계급적 성격과 사회적 경험 등에 따라 비교적 뚜렷한 정치적 지향성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에 해방정국의 정치적 격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해방 직후 월남민들이 우익세력의 선봉대였으며 남한사회가 반공체제로 귀착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점은 역사가들이 입증하고 있다. 해방 후 최초의 인구조사는 미군정청에 의해 46년 8월25일 실시되었다.소련군이 진주한 북한은 제외됐다.이 통계는 44년 조선총독부의 국세(國勢)조사 인구에 미군측이 파악한 식량배급 인원과 외부로부터의 유입인구를 고려해 작성됐다.이 때 조사된 남한 인구는 총 1천9백36만9천270명이었다.따라서 이 통계는 실제 인구수를 넘는 것으로 평가된다.미군정청은 이어 47년 국민등록을 실시했다.등록 인구는 총 1천9백88만6천234명.다음해 다시 실시한 국민등록에서는 2천2만7천393명의 인구가 등록됐다.미군정청이 실시한 국민등록은 의식주 및 생활 필수품의 확보와 배급계획의 수행,앞으로의 선거 등을 대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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