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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 오늘 개막

    ◎지구촌 107국 1만여 출판사 참가/한국 38년만에 대규모 국가관 설치 세계 최대규모의 도서전인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이 7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개막된다.12일까지 계속되는 이번 도서전에는 107개국 1만여개 출판사가 참가한다.6만여평의 전시장에는 36만9,000여종의 책과 CD롬 등이 선보인다. 우리나라는 이번 도서전에서 참가 38년만에 처음으로 대규모 국가관을 설치,출판문화대국으로서의 면모를 과시하게 된다.우선 외형에서 지난해까지만 해도 ‘가로 4m,세로 8m’ 크기로 베트남 등 동남아국가에 비해서도 규모가 적어 세계 7대 출판대국의 이름이 무색했으나 이번에는 정부에서 8,500만원을 지원한데 힘입어 ‘가로 8m,세로 18m’의 한국관을 만들었다. 한국관에는 고려원과 문학동네,시공사,푸른숲,해냄,현암사 등 17개 출판사의 1,175종,1,572권의 도서가 전시된다.금성출판사는 별도의 아동관에 책을 전시한다.특히 영어,독일어,불어,스웨덴어 등으로 번역된 우리 문학작품 88종도 소개된다. 대한출판협회 정종진 사무국장은 “종전에는언어의 한계로 한국출판사들은 사진이나 그림이 많은 책을 전시하는데 그쳤으나 이번에는 모든 책에 대한 영문초록을 만들어 저작권 계약에도 힘쓰고 있다”고 말했다. 올해로 50주년을 맞이하는 이 도서전은 출판의 ‘자유정신’과 ‘문화진흥’에 중요한 디딤돌이 될 것으로 보인다.전시회 이외에 국제출판협회(IPA)분과회의와 국제저작권전문가회의,국제유통전문가회의,국제전자출판연구소 세미나 등도 다채롭게 열려 21세기 출판문화 발전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모색한다. 또한 출판올림픽으로 불리는 IPA총회의 차차기 개최국 결정은 중요한 관심사가 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독일과 함께 유치신청을 했지만 그 가능성은 높지 않다.독일이 2004년 IPA총회에 강한 의욕을 보이는 데다 이번 IPA국제위원회 개최국이기 때문이다. 1564년 시작된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은 2차대전이 터지면서 일시 중단됐가 1949년 재개됐다.한국은 지난 61년부터 매년 참가해 왔다.
  • 밀레니엄버그 해결 ‘절약형’ 나왔다/국내 업체 시판나서

    ◎마지막 연도 두 자리만 인식/타제품보다 시간·비용 절약 컴퓨터상 ‘밀레니엄 버그(2000년 문제)’를 풀 새로운 프로그램이 국내의 한 업체에 들어왔다. 국내 건축사무소를 겸하고 있는 GDS사가 최근 미국 ‘데이터 인테그리티(Data Integrity)’사로부터 판권을 얻어 국내 시판에 들어간 ‘밀레니엄 솔루션’과 ‘크로스 체크’는 문제해결 방식이 간편해 튼 관심을 끌고 있다.이 제품들은 다른 제품들이 연도를 3,4 자리 수로 변경하는 것과 달리,마지막 두자리 수 만 가지고 인식토록 만들어졌다. 예컨대 1938년에 출생한 사람의 나이를 계산하면 종래의 컴퓨터상 2000년에 -38세가 된다.여기에 밀레니엄 솔루션의 날짜 수정 프로그램이 작동,-38에 50을 더하고 여기에 또 50을 더한다.그러면 정확한 나이인 62가 된다.따라서 기존 데이터베이스와 데이터 구조를 수정하지 않고도 사용이 가능,시간 단축은 물론 비용절감 효과가 나타난다. 이 방식은 현재 시티은행 등 미국의 여러 기업과 정부기관에서 사용하고 있다.
  • 親日의 군상:8/월북무용가 崔承喜(정직한 역사 되찾기)

    ◎日帝에 국방헌금 내고 ‘舞踊報國’ 맹세/15세때 日 유학… 귀국후 세계순회공연하며 대활약/1942년 6개월간 만주 돌며 130여회 日軍 위문공연/해방후 前歷 비난 피해 남편과 월북… 北韓정권 참여 □엇갈리는 親日 평가 “예술위해 불가피” “자의적 친일 활동” 근대 이후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예술가 중에서 ‘스타중의 스타’는 누구일까? 1930년대 당시 전세계를 무대로 활동한 무용가 崔承喜도 그중의 한사람이다. 崔承喜는 세계적인 무용가라는 찬사를 받은 ‘전설적 예술가’였다. 바로 그 崔承喜가 최근 우리사회에서 ‘부활’하고 있다. 지난 6월 북한국적의 재일교포 무용수 白香珠씨가 내한공연을 통해 崔承喜의 춤사위를 완벽에 가깝게 복원한데 이어 한달 뒤인 7월에는 그의 이름이 국내 한 일간지에 대서특필되었다. 崔承喜(1911∼?). 언제적 이름인가. 그의 이름 앞에 ‘월북무용가’란 수식어가 필요할만큼 우리 귀에 낯선 이름 崔承喜. 해방후 남편을 따라 월북,북한정권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그는 반세기 가까이 우리 기억에서 잊혀져 왔다.그가 ‘최모(某)’에서 ‘崔承喜’라는 이름 석자를 되찾은 것도 90년대 들어서다. 암울한 일제하 미국과 유럽·중남미 등 전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며 식민지 조선의 자존심을 세워주었던 ‘조선의 꽃’ 崔承喜. 그러나 그는 남한에서는 ‘월북예술가’라는 이유로,북한에서는 ‘반(反)혁명분자’로 낙인찍혀 남북한 모두에서 외면당해 왔다. 격동의 우리 현대사가 지하창고에 가둬 뒀던 한 천재 예술가를 ‘역사의 양지녘’으로 이끌어내 보자. 崔承喜는 한일병합 이듬해인 1911년 서울 종로에서 양반집 4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26년 숙명여고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그는 당초 도쿄음악학교에 진학할 작정이었으나 연령미달로 입학이 좌절되고 말았다. 그러던중 큰 오빠 崔承一의 권유로 당시 일본 최고의 무용수 이시이 바쿠(石井漠)의 공연을 관람한 것이 계기가 돼 그의 문하에 입문했다. 해방후 그에게 쏟아진 ‘친일파’라는 비난은 그의 출생시점과 그가 일본으로 무용공부를 떠나면서부터 예고된 것인지도 모른다. 열여섯살 때 일본으로 건너가 3년간이시이 문하에서 무용공부를 한 崔承喜는 29년 귀국,서울 적선동에 ‘최승희무용연구소’를 차렸다. 이듬해 2월 그는 경성(京城)공회당에서 제1회 신작발표회를 가졌는데 첫 공연 치고는 성공작이었다. 이 때 공연한 한국무용 ‘영산춤’ 등은 한국인이 춘 최초의 독자적 춤공연이었다는 점에서 우리 무용사에 한 획을 그은 일로 기록되고 있다. 이듬해인 1931년 그는 프롤레타리아 문학운동가이자 당시 와세다대학 재학생이던 安漠(본명 安弼承)과 결혼,인생의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최승희연구가 鄭昞浩(중앙대·무용과) 명예교수는 그들의 결혼배경을 두고 “崔承喜는 공연기획 분야에서 천재적인 安漠의 능력을,安漠은 崔承喜의 인기를 사회주의 건설에 이용하기 위해서였다”고 분석했다. 해방후 崔承喜의 월북은 그의 남편 安漠의 권유가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安漠은 북한정권에서 평양음악학교장·문화선전부 부부장(차관)을 지냈으나 58년 숙청의 비운을 맞았다. 한편 崔承喜는 33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이시이 문하로 들어갔다. 남편 安漠이 ‘조선독립음모사건’으로 구속되자 정치적 압박과 경제적 곤란까지 겹쳐 더이상 국내에서는 활동이 곤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두번째 일본행은 의외로 행운이 기다리고 있었다. 도쿄로 돌아온지 두 달만에 그는 한 잡지사 주최 여류무용대회에서 ‘신인 스타’로 떠올랐다. 그 때 그가 춘 춤은 ‘에하라 노아라’라는 전통 조선무용으로 술에 취한 자기 아버지의 굿거리 춤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었다. 1934년 도쿄에서 개최된 그의 제1회 신작발표회를 통해 그는 명실공히 ‘톱스타’로 자리를 굳혔다. 일본의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가와바다 야스나리(川端康成)는 “崔여사가 추는 조선무용을 보면 일본의 서양무용가들에게 민족의 전통에 뿌리박으라는 강력한 가르침을 볼 수 있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조선인 최초의 무용가’라는 점이 의외로 일본사회를 강타하여 그에게 광고모델 요청이 쇄도했다. 하늘을 찌를듯한 그의 인기는 부와 명예를 동시에 안겨주었다. 여세를 몰아 그는 마침내 해외공연을 추진하였다. 중일전쟁 발발 이듬해인 38년 2월 그는미국 샌프란시스코 공연을 시작으로 해외공연길에 올랐다. 이듬해에는 프랑스 파리 공연에 이어 스위스·이탈리아·독일·네덜란드 등 유럽공연을 마쳤다. 이무렵 제2차 세계대전 발발로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40년 브라질 공연을 시작으로 우루과이·아르헨티나·페루·칠레·멕시코 등 중남미지역 공연을 성황리에 마쳤다. 40년말 2년여 해외공연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오자 일제 당국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인기를 군국주의 전쟁에 활용할 속셈이었다. 결국 그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친일대열에 들어서게 된다. 도쿄에 도착하자마자 崔承喜 부부는 궁성(宮城),메이지신궁(神宮),야스쿠니신사(神社)을 참배하고는 ‘무용보국(報國)’을 맹세하였다.(‘報知新聞’40년 12월7일) 며칠 뒤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는 “구미(歐美)공연 때 마음이 든든한 것은 위대한 일본의 국력 덕분이었는데 새삼 조국에 감사하는 마음을 강하게 가졌다”며 친일성향을 드러냈다. 그의 친일과 관련,빼놓을 수 없는 일화 한토막.아사히신문 41년 2월5일자에는 ‘일독(日獨)헌금 교환,독일인 기사와 崔承喜씨’라는 기사가 실려 있다. 내용인즉 일본회사에 근무하던 한 독일인 기사가 귀국하면서 여비의 일부를 국방헌금으로 써달라고 이 신문사에 기탁한 일이 있은 후 이번에는 유럽공연을 다녀온 崔承喜가 두 차례의 독일공연에서 생긴 수입금을 독일육군병원에 헌금하려고 가져왔다는 것. 이 무렵 崔承喜는 일본을 ‘조국’이라고 불렀다. 또 춤을 통해서도 그의 친일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일본춤의 비중이 점차 증가한데다 춤동작에서도 일본 전통춤인 ‘노(能)’가 차츰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가 공연 수익금의 일부,혹은 전부를 국방헌금으로 바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 부터다. 그는 수 차례에 걸쳐 일본군부와 조선군사령부 등에 국방헌금을 바쳤다. 41년말 ‘대동아전쟁’(소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일제는 예술가들까지도 전선(戰線)으로 내몰았다. 그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42년 2월초 그는 일본군 위문공연차 만주·중국으로 향했다. 8월까지 6개월 동안에 무려 130여 차례의 위문공연을 하였는데 당시 그의신분은 일본 육해공군 촉탁이었다. 해방때까지 그의 일본군 위문공연은 계속됐다.그는 상하이 주둔 한 일본군 부대에서 위문공연을 하다가 일본패망 소식을 접했다. 해방이 되자 그에게는 중국 현지에서부터 ‘친일파’란 비난이 쏟아졌다. 이듬해 5월 귀국해 보니 사정은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친일전력(前歷) 때문에 그는 남한 땅에서는 설 땅이 없었다. 결국 그는 귀국한지 두 달도 채 안돼 남편을 따라 월북하였다. 격동기를 살아오면서 공과(功過)가 교차된 崔承喜의 일생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여기에는 변호와 비판이 엇갈리기 마련이다. 무용학자 鄭昞浩 교수는 崔承喜의 친일행적 자체는 인정하면서도 “그는 예술을 위해 친일을 했을 뿐”이라며 그가 한국무용사에 남긴 업적에 무게를 실어준다. 반면 金鍾旭(서지연구가·60)씨는 “崔承喜는 도일 직후부터 본명 대신 일본식 이름(崔承子,사이쇼코)으로 활동한 열성 친일파”라며 그의 친일성 자체에 초점을 맞춘다. 전성기 시절 ‘반도의 무희(舞姬)’‘민족의 꽃’으로 불리며 조선인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던 崔承喜. 식민지시대와 분단기를 거치면서 그에게 씌워진 ‘친일(親日),친공(親共)’의 굴레가 ‘역사의 화해’를 볼 날은 과연 언제일까. ◎崔承喜의 知人들/동서양 명사들과 골고루 교분/美 소설가 존 스타인벡/영화배우 찰리 채플린/로버트 테일러·게리 쿠퍼/화가 피카소·시인 장콕토/周恩來 등과도 친교 전성기 당시 崔承喜는 ‘톱스타’답게 각국의 최정상급 명사·예술인들과 교류를 맺고 있었다. 우선 일본 체류시절 그를 후원해준 사람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소설가 가와바다 야스나리(川端康成)와 민예가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등 당대 일본 최고의 지성인들이었다. 그와 교류한 서양인으로는 미국공연 시절 사귄 지휘자 스토코프스키,소설가 존 스타인백·루이스 레에나·존 그로프,영화배우 찰리 채플린·로버트 테일러·게리 쿠퍼 등이 있다. 유럽에서는 화가 피카소를 비롯하여 시인 장 콕토,소설가 로맹 롤랑·미셀 지몽,영화배우 샬 보아에이 등이 그와 친교를 맺고 있었다. 또 중국인으로는 周恩來 총리,무용가 梅蘭芳 등이그의 후원자이자 벗이었다. 국내에서는 呂運亨·宋鎭禹 등 민족진영 인사와 남편의 동지이기도 한 朴英熙·韓雪野 등 카프계열 작가들이 그와 친분관계를 맺고 있었다. 파리공연 때 그는 피카소로부터 그림 한 점을 선사받은 적이 있다. 시가로 수억대를 호가하는 이 그림의 행방을 두고 安씨집안(시댁)과 崔씨집안(친정)간에 한 때 불화가 있었던 적도 있다.
  • 공무원 연금제 거품 안빼면 大亂 온다

    ◎수술대 오른 연금제도 긴급점검/수령 연금·금액 기준 후해 수지불균형 초래/2002년 3조원 적자 예상… 제도존립 위기/‘낮은 부담·높은 연금’의 기형구조 타파 시급 공무원연금제도가 시행 38년 만에 처음으로 수술대에 올랐다. 연금제도의 문제는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그동안은 갹출금을 올리는 등 몇 차례의 단기처방에 그쳤다. 연금제도는 누구도 손을 대지 못한 ‘성역’이었다. 제도를 고쳐야 할 당사자도 공무원이었던 탓이다. 그동안에도 연금제도를 고치려는 시도는 있었지만 무산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국제통화기금(IMF)체제를 맞으며 상황은 크게 달라졌다. 자의반,타의반 제도를 수정을 할 수밖에 없는 시점이다. 연금제도의 현황과 문제점,개선방향,외국의 사례 등을 알아본다. ▷현황◁ 어떤 50대 변호사는 20여년간의 판사생활을 마치고 한달에 200여만원의 연금을 받는다. 그는 고소득 변호사여서 연금이 그다지 필요없지만 “주는 것이니 받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지난해 퇴직자는 6만6,424명.이 가운데 60대 이상이 76%로 가장 많았고 50대가 19%였다. 그러나 40대가 2,274명이었고 30대 연금생활자도 7명이나 됐다. 활동이 왕성한 나이를 감안하면 또다른 직업을 갖고 있으면서 연금을 받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노후에 소득이 없을 때를 대비한다는 연금의 기본취지와는 거리가 멀다. 기능직으로 32년 동안 근무하던 공무원이 어느날 국회의원 보좌관으로 1년을 근무한 뒤 퇴직했다. 그는 32년 동안은 기능직의 갹출금을 냈는데도 연금은 4급으로 받아가고 있다. 공무원의 최종 보수월액을 기준으로 연금이 지급되기 때문이다. 이런 허점들이 공무원연금제도를 갉아먹고 있는 것이다. ▷문제점◁ ◇연금 수령 연령=공무원 연금제도는 원래 60세가 넘어야 연금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지난 62년 연금법을 개정하면서 30,40대 연금 수령자가 나오기 시작했다. 공직사회에 들어온 군 출신 인사들을 위한 것이었다. 30,40대 연금 수령자의 제도상 허점을 수정하려고 정부는 지난 95년 연금법을 개정했다. 96년 1월1일부터 공직생활을 시작한 사람에게는 ‘60세부터 지급한다는 것이다. 한국개발연구원(KDI) 文亨杓 박사는 “이런 단편적인 개선책 때문에 96년 이후 공직에 들어온 공무원들이 퇴직할 무렵에는 엄청난 반발에 부닥칠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30,40대에 연금을 받을 수 있는 나라는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미국은 30년 이상 재직했을 경우 55세,20년 이상 재직했을 때에는 60세,5년 이상 재직자는 62세부터 연금을 받도록 하고 있다. 프랑스는 15년 이상 근무했을 때에는 60세부터 연금을 지급하도록 하고 있다. ◇수지 불균형=우리의 공무원 연금제도는 수익 따로,지출 따로의 구조다. 공무원은 매달 급여의 6.5%를 내고 국가가 6.5%를 낸다. 내년부터는 7.5%로 늘어나게 된다. 하지만 공무원의 연금은 퇴직하기 직전의 최종 보수월액(기본급·상여금·정근수당·장기근속수당의 합계)을 기준으로 지급된다. 20년 이상 근무한 사람은 최종 보수월액의 50%,33년 이상 근무한 퇴직자는 76%를 받는다. 재직때의 최종 보수월액으로 연금을 지급하는 나라는 우리나라뿐이다. 다른 나라는 재직시의 평균임금을 기준으로 삼고 있다. 지급률도 우리나라가 많다. 미국의 경우 20년 이상 근무하면 36.25%,33년 이상 근무하면 62.25%의 연금을 지급한다. 프랑스는 20년 이상 40%,33년 이상 66%다. 이런 까닭에 연금은 인플레될 수밖에 없다. 공무원연금제도는 적립식이 아니다. 후배 공무원들이 갹출한 돈으로 선배 공무원들의 연금을 지급하는 형식을 택하고 있다. 수입과는 무관하게 연금이 지급되는 수급 불균형이다. 제도 초기에는 문제가 없었으나 퇴직하는 공무원 숫자가 많아지면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 93년 처음으로 적자가 발생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재정상황=올 상반기에 퇴직한 공무원만 해도 2만1,807명에 이른다. 지난해 상반기보다 3,000명이 늘었다. 올 상반기에 지출한 연금은 모두 1조4,252억원. 지난해 같은기간에 비해 3,585억원이 늘었다. 하반기 퇴직자까지 합하면 3조원이 소요될 것으로 추정된다. 지난해 2조1,151억원보다 1조원 정도가 많은 것이다. 내년에는 9,000억원 가까이 적자가 예상되고 2000년에는 1조1,000억원,2001년에는 2조3,000억원,2002년에는 3조원 가까운 적자가 예상된다. 교원들의 퇴직 연금은 포함되지 않은 것이어서 ‘연금 대란’의 위기는 불보듯 뻔하다. ▷개선방향◁ 행정자치부가 퇴직자 급증이라는 ‘비상사태’를 맞아 일단 국고에 지원을 요청했고,공공기금관리법을 개정하기로 한 것도 장기적으로는 국고지원의 길을 열어 놓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실제로 미국 일본 프랑스 등도 국가에서 상당부분을 보전해 주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부정적이다. KDI의 文박사는 국고에서 보전해 주다가는 국가 재정이 거덜날 판이고 사회보장이 잘된 선진국도 국고에서 지원하는 연금제도를 근본적으로 수정하고 있는 추세라고 지적했다. 제도적·재정적인 문제 해결의 기본원칙은 ‘낮은 부담,높은 연금’에서 ‘적정 부담,적정 연금’으로 바뀌어야 한다. 다시 말해 퇴직을 앞둔 공무원과 후배공무원,국가 3자간의 ‘양보’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후배 공무원들이 모든 부담을 떠안으려면 부담률을 30%까지 높여야 한다고 지적한다. 현직 공무원들은 갹출금을 현재 6.5%에서 15%로 올려야 한다는 계산이다. 이렇게까지 인상할 수는 없으나 적정수준으로 올리는 일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퇴직 공무원의 입장에서 보면 연금을 받는 나이를 제한하고 기간도 제한하도록 제도적인 개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최종 월급을 기준으로 지급하는 불합리한 문제점도 개선돼야 할 사항으로 지적된다. 유족연금 부가금 같은 제도를 폐지하자는 주장도 나온다. 내년부터 실시될 연봉제와 피크 임금제 등은 연금제도 개선의 최대 변수로 꼽힌다. 퇴직 직전의 월급이 반드시 ‘재직 때의 최고 월급’이 아니기 때문이다. ◎공무원 연금 얼마나 받나/6급 32호봉 월급의 95% 143만원 받아/현직과 비슷… 노후생활 보장 취지 무색 공무원에게도 퇴직금제도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얘기하는 사람도 있다. 일반 기업체는 사용주가 전액을 부담하는 퇴직금제도가 있는데 왜 공무원은 자신들이 일부분을 갹출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다. 물론 연금을 일시금으로 받을 수는 있지만 나누어 받는 대신 한꺼번에 받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같은 불만에 대해 전문가들은 “공무원들의 연금은 결코 적지 않다”고 지적한다. 예를 들어 33년간 재직한 6급 32호봉 공무원이 퇴직했다고 치자. 그가 받는 보수월액은 189만원. 여기서 각종 세금을 공제하고 나면 151만원을 받는다. 이 공무원이 퇴직하면 한달에 받는 연금은 143만원이다. 월 급여의 95%에 해당된다. 역시 33년을 근무한 4급 28호봉의 공무원이 한달에 받는 보수월액은 231만원. 세금을 공제하고 나면 179만원을 받는데 연금은 175만원을 받는다. 2급 24호봉의 공무원은 한달 274만원의 월급에서 세금을 제하고 나면 205만원을 받는다. 그가 받는 연금은 208만원으로 공무원 재직때보다 많다. 노후 생활을 보장해야할 연금이 오히려 현직 활동때와 비슷하게 받는 ‘모순’이라는 지적들이다. ◎연금수령 어떤 방식이 유리할까/시중금리 낮을땐 연금수령 훨씬 유리/IMF 고금리 바람에 일시금 선택 늘어 퇴직을 앞둔 공무원들에게는 연금 관리가 고민이다. 퇴직금 형식으로 한꺼번에 목돈으로받을 것인지,매달 생활비같은 연금으로 받을지에 밤잠을 설친다. 여기서 중요한 감안 요인은 금리와 자신이 얼마나 더 살 것인지로 모아진다. IMF 이전에만 해도 연금수혜자의 55%는 연금을,45%는 일시금을 선택했으나 고금리일 때는 연금 45%,일시금 55%로 역전되기도 했다. 세금을 공제한 시중 금리가 10%보다 높을 때에는 연금이 낫고,그보다 낮을 때에는 연금이 좋다. 연금을 7년동안 받으면 일시 퇴직금의 규모와 같아진다. 이런 산술적 계산에도 불구하고 공무원연금공단 관계자들은 “일시 퇴직금보다 연금 형식이 훨씬 유리하다”고 말한다. 일시 퇴직금으로 받아간 사람의 경우 3년을 못 넘긴다는 얘기다. 자식이 손 벌리면 주지 않을 수 없고 사기당할 가능성도 크다는 이유에서다. 실제로 어떤 퇴직공무원은 일시금으로 수령했다가 다시 연금 수령으로 바꿀 수 없겠느냐고 문의해 오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이 경우 수령방식의 변경은 불가능하다.
  • 朴 법무­샤네 국제사면委 사무총장/‘韓國 인권상황’ 설전

    ◎샤네­“장기수·준법서약 유감”/박 법무­“양심자유 침해 아니다” 朴相千 법무부 장관은 10일 하오 집무실에서 피에르 샤네 국제사면위원회(AI·앰네스티 인터내셔널) 사무총장과 만나 국가보안법 개정 등 국내 인권문제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 다음은 朴장관과 샤네 총장의 대화내용 요지이다. ▲샤네 총장=아직도 (한국에) 장기수가 남아 있는데 대해 유감이다.준법서약서는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 아닌가. △朴장관=법 준수를 약속할 수 있는가를 묻는 ‘준법서약제’는 사상이나 신념과는 무관한 것으로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 아니다. 장기수는 17명으로 대부분 남파간첩이다.우용각씨(69)가 38년으로 가장 오래 복역중이다.70세가 넘는 고령 장기수는 없다. ▲샤네 총장=국가보안법의 남용으로 구속된 사람들이 많다.국가보안법을 개정할 용의는 없는가. △朴장관=국가보안법은 북에 동조해 한국의 민주주의 체제를 전복하려는 것을 막기 위해 존재한다.완전 폐지는 무장을 해제하라는 것과 같다. 현행 국가보안법은 헌법재판소의위헌결정에 따라 과거의 독소조항을 많이 정리했지만 아직도 일부 모호한 규정이 남아 있다.언젠가는 모호한 내용을 정리해야 할 것이다.하지만 IMF 상황에서는 경제회복 문제가 보다 시급하다. 지금 국가보안법 개정을 논의하는 것은 갈등만 일으킨다. 법무부는 현재 과도적인 조치로서 국가보안법의 남용을 막기 위해 법규정을 엄격히 해석하고 적용하도록 감독하고 있다. ▲샤네 총장=한국정부가 추진중인 ‘국민인권위원회’의 설립에 민간단체 및 AI의 의견을 반영해주기 바란다. △朴장관=물론 참고할 것이다.오는 10월중 인권법을 국회에 제출,세계인권선언 50주년 기념일인 12월10일 공포할 계획이다. 대통령이 직접 공포할 예정이다.앞으로 인권문제는 정부기관이 아닌 독립된 법인인 ‘인권위원회’가 감시하게 된다. ▲샤네 총장=외국인 근로자들에 대한 강제출국,근로조건의 열악 등 인권침해가 많다.한국은 지금까지 한 사람의 난민도 인정하지 않고 있다. △朴장관=외국인 근로자들에 대한 부당노동행위 등에 대해서는 검찰권을 행사,시정해나가고있다.인권법에서는 외국인도 내국인과 동일하게 보호받도록 규정할 방침이다.
  • 親日의 군상:5/시인 朱耀翰(정직한 역사 되찾기)

    ◎臨政 독립신문 편집국장서 ‘皇國臣民’ 변신/대표적 친일 행적­일 건국이념 八紘一宇서 따온 ‘松村紘一’로 개명.각종 잡지에 친일시 발표·친일단체 간부 역임.“천황 위해 목숨 바쳐라” 전국 순회 강연회 개최/해방후의 족적­전경련 부회장.국회의원 재선.부흥·상공장관.사망후 국민훈장 “아아 날이 저문다.西便하늘에,외로운 江물 우에,스러져가는 분홍빗 놀………아아 해가 저물면 해가 저물면,날마다 살구나무 그늘에 혼자우는 밤이 또 오것마는,오늘은 四月이라 파일날 큰 길을 물밀어 가는 사람소리는 듯기만 하여도 흥셩시러운 거슬 웨 나만 혼자 가슴속에 눈물을 참을 수 업는고?……”(‘창조’ 창간호,1919년 2월) 4월 초파일 저녁 대동강변에서 벌어진 불놀이 장면을 보고 죽은 애인을 그리는 애상조의 이 시는 송아(頌兒) 朱耀翰(1900∼1979년)의 대표작 ‘불놀이’다.이 시는 종래 우리 시의 기본형식을 거부하고 상징적인 수법과 대담성 때문에 흔히 우리 문학사에서 ‘최초의 자유시’로 불려왔다.특히 일제하 우리민족의 아픔과 시대상황을 민족정서로 표현했다 하여 오랫동안 사랑을 받아 왔다.우리 역사앞에 처음 등장한 ‘시인 주요한’의 첫출발은 이처럼 좋았다. 주요한은 20세기가 시작된 1900년 10월 평양 목사집안의 8남매중 장남으로 태어났다.1912년 숭덕소학교를 마치고 아버지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갔다.그는 메이지(明治)학원에서 중등과정 5년을 마치고 도쿄 제1고등학교에 진학했다.문학에 심취해 있던 그는 이 무렵 도쿄유학생이자 같은 문학청년 金東仁을 만나 우리나라 최초의 순수문예 동인지 ‘창조(創造)’를 탄생시킨다.‘3·1만세의거’가 터지기 꼭 한 달 전의 일이다.그의 대표작 ‘불놀이’도 바로 여기서 선을 보였다. ‘창조’ 2집이 나올 무렵 고국에서 ‘3·1만세의거’가 일어나자 그는 서둘러 짐을 싸서 귀국했다.그러나 그의 부친은 다시 도쿄로 돌아갈 것을 강권하였다.동생 耀燮(작가·72년 작고)이 몰래 삐라를 복사하여 돌리다가 체포되자 장남인 그에게까지 화가 미칠 것을 우려하였다.결국 도쿄로 되돌아온 그는 한동안 방황하다가 한인(韓人)YMCA 총무 崔承萬을 만나 상하이(上海)로 가라는 권고를 받는다.시인이자 애국청년으로 보낸 그의 상하이시절 9년은 이렇게 시작됐다. 상하이는 그를 반겼다.당시 임시정부에서는 기관지 ‘독립신문(獨立新聞)’ 발간을 준비중이었는데 문사(文士)가 필요했었다.‘독립신문’은 그 해 8월21일 창간호를 냈다.춘원 李光洙가 사장겸 주필이었다.그는 춘원 밑에서 편집국장겸 기자로 있었다.상하이 임정에서 처음 만난 두 사람은 오랜 시절 동지로 지내는데 나중에 ‘동우회(同友會)사건’으로 변절,친일의 길로 들어서면서도 행동일치를 보이게 된다.상하이시절 그는 자신이 기자로 있던 ‘독립신문’에 ‘송아지’라는 필명으로 ‘조국(祖國)’등 수 편의 애국시를 발표하기도 했는데 ‘송아’라는 그의 아호는 필명 ‘송아지’에서 따온 것이다. 1927년 그는 9년간의 상하이생활을 청산하고 돌연 서울로 돌아왔다.귀국동기는 분명치 않다.다만 그는 귀국후 곧바로 ‘동아일보’에 둥지를 틀었다. 입사 2년만에 편집국장이 된 그는 그 해 광주학생의거 관련 민중대회 발기인으로 참여한 것이 말썽이 돼 일제로부터 곤욕을 치렀다.33년 조선일보로 자리를 옮겼으나 사주(社主)와의 갈등 끝에 李光洙에게 편집국장 자리를 물려주고는 얼마 뒤 퇴사하였다.그 해 그는 화신(和信) 사장 朴興植의 권유로 ‘화신산업’에 입사,언론인에서 회사 중역으로 일대 변신을 꾀한다. 그는 이 무렵 李光洙와 함께 도산 安昌浩가 1913년 미국에서 설립한 ‘흥사단(興士團)’의 국내단체인 ‘수양동우회’(1929년 11월 ‘동우회’로 개칭함)의 핵심간부(이사장)로 활약하고 있었다.이 단체는 친목단체로 위장한 민족단체였는데 당시로선 합법단체였다.회원들은 교육자·목사·변호사·의사 등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이 주류였다.중일전쟁(中日戰爭)을 앞두고 이 단체가 일제의 표적으로 떠올랐다. 중일전쟁 발발(1937.7.7) 1개월전 일제는 동우회 해산명령과 함께 동우회원 일제검거에 나섰다.이는 민족주의 계열 인사에 대대적인 검거작전의 신호탄이었다.뒤이어 흥업구락부사건,천도교인사 탄압,조선어학회사건 등이 뒤따랐다.이 때 검거된 동우회 회원은 150여명.4년여에 걸친 재판기간 동안에 2명은 옥사하였고 그를 포함해 ‘화수분’의 작가 田榮澤,작곡가 玄濟明·洪蘭坡 등 18명이 ‘전향서’발표와 함께 친일단체인 대동민우회 가입을 선언하였다(1938년 6월29일). 경기도경찰부가 작성한 비밀문건(特秘제2494호,38년 11월5일)에 따르면,李光洙·朱耀翰 등 보석출소자 28명은 11월 3일 서울시내 효자동 소재 李光洙의 집에 모여 사상전향에 관한 회의를 열고는 충성서약의 표시로 11월 말까지 동우회 입회금 300원(현재 약000)을 포함,총 2,888원을 국방헌금으로 바치기로 결의하였다.헌금 전달자는 朱耀翰으로 결정되었다.상하이 임정에서 ‘독립신문’을 만들고 애국시를 쓰던 그는 어느새 이렇게 변해 있었다. 주요한의 친일성을 엿볼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중의 하나는 마쓰무라 고이치(松村紘一)라는 그의 유별난 창씨명이다.이름에 해당하는 ‘紘一’은 일본의 건국이념인 ‘팔굉일우(八紘一宇)’에서 따온 듯한데 실지로 그는 ‘팔굉일우’라는 시도 썼다.(‘삼천리’41.1) 철저한 일본정신으로 무장한 그는 친일잡지 ‘삼천리’(40년 12월호)에 ‘동양해방(東洋解放)’ 기고를 시작으로 이후 각종 매체에 다수의 친일시·논설을 발표하였다.또 조선문인협회·문인보국회·조선임전보국단·언론보국회·대의당·대화당 등 대표적 친일단체에서 간부로도 활동하였다.그의 대표적인 친일문장 몇을 만나보자. ‘대동아전쟁’ 개전(1941년 12월8일) 직후인 41년 12월 14일 조선임전보국단 주최 ‘미영(美英)타도대강연회’에서 그는 ‘루즈벨트여 답하라’라는 제목으로 강연하면서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과 영국의 처칠 총리를 ‘위대한 어릿광대’라고 지칭하고는 “반도의 2,400만은 혼연일체가 되어 대동아 성전(聖戰)의 용사 되기를 맹세하고 있다”고 포효했다.‘조선임전(朝鮮臨戰)’(‘신시대’,41년9월)이라는 글에서는 “지금 시국이 요구하는 것은 행동이요,희생이요,무조건의 헌신”으로 “동아의 성전이 조선에 구하는 것은 땀과 피와 살과 생명”이라며 “오직 우리는 (천황이)부르실 때 바칠 뿐”이라고 했다. 일제의 징병제 실시를 맞아서는 “오늘에야 우리를/부르시는 높은 뜻을/서로 전해 말하며/눈물 흘리는 것을…”(‘오늘에야’제1절)이라며 감격해 했다.또 조선인 지원병으로서 최초의 전사자 李仁錫군의 죽음을 두고는 “보아라,너들의 피가/내 핏줄을 통해/여기 뿜는다.2,300만의/뜨거운 피가/1억의 피로/한덩어리가 되는/처음의 피가/지금 내 핏줄에서/콸콸 솟는다…”(‘첫피’제3연,‘신시대’41년 3월)고 했다. ‘동의어(同意語)’라는 시에서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사는 것은 아니다…폐하를 위해 살고 또,죽는 것만이 즉 사는 것이다”라고 했다.이쯤되면 그를 조선사람으로 보기 힘들다.이 시들은 대부분 일본어로 번역돼 ‘손에 손을’이라는 그의 시집에 실렸는데 그는 이 시집출간으로 제4회 조선문예상 문학상을 수상했다.해방때까지 친일행각은 계속됐다. 해방후 반민특위에 불구속,기소됐다가 풀려난 후 그는 대한상공회의소 특별위원,대한무역협회장,국회의원(재선)을 거쳐 4·19후 張勉 정권에서 부흥·상공장관을,다시 5·16후에는 경제과학심의회 위원,대한일보 사장,대한해운공사 사장 등을 지냈다. 1979년 그가 사망하자 정부는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주었다.지난 93년엔 서울의 한복판 세종로공원에 그의 시비가 세워졌다. 시비 뒷면 약력란에는 37년 수양동우회사건으로 체포된 이후 해방때까지의 친일경력에 대해서는 단 한줄도 언급이 없다.그에 대한 서훈과 시비건립이 과연 적절한 것이었는지는 다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八紘一宇’ 무슨 뜻인가/‘온세계를 병합해 한집으로 한다’/일본서기서 인용… 1940년 처음 사용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따르면 일본의 제1대 천황인 신무천황(神武天皇)이 야마토(大和)에 도읍을 정하면서 ‘육합(六合)을 겸(兼)하여 도(都)를 개(開)하고 팔굉(八紘)을 병(倂)하여 우(宇)로 한다’(6대양 8대주를 병합하여 한 집으로 한다는 뜻임)는 내용의 조칙(詔勅)을 내렸는데 여기서 생겨난 말이 ‘팔굉위우(八紘爲宇)’다. 1940년 8월 제2차 고노에(近衛)내각이 기본국책 요강에서 대동아 신질서 건설을 위해 ‘황국(皇國)의 국시(國是)는 팔굉(八紘)을 일우(一宇)로 하는건국정신에 근거한다’고 밝혔는데 이 때 ‘팔굉일우’라는 용어가 처음 공식적으로 사용됐다.그 후 이 용어는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건설’의 기치를 내건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 본토와 일제의 식민지국가에서 광범하게 사용되었으나 패망이후 지금은 거의 사어(死語)가 됐다. □주요한 연보 ▲1900년 평양 출생 ▲1918년 도쿄제일고교 입학 ▲1919년 상해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 편집국장 ▲1921년 상하이 호강대 화학과 입학 ▲1929년 동아일보 편집국장 ▲1933년 조선일보 편집국장,화신산업 입사 ▲1937년 ‘동우회사건’으로 체포 ▲1938년 보석출소후 친일로 전향,해방때까지 각종 친일단체에서 활동함. ▲1949년 반민특위에 불구속,기소 ▲1951년 조선민주당 사무국장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당선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당선 상공·부흥부 장관 ▲1964년 경제과학심의회 위원 ▲1968년 대한해운공사 사장,대한 일보 회장 ▲1975년 능률협회 회장 ▲1977년 전경련 부회장 ▲1979년 숙환으로 사망
  • 7월 수출·수입 동반 급감/韓銀 발표 국제수지 동향

    ◎13년·38년만에 최대폭/올 경상흑자 254억달러 7월중 수출과 수입이 각각 13년,38년만에 최대 폭으로 줄었다. 한국은행이 28일 발표한 ‘7월중 국제수지동향’에 따르면 수출(통관기준)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3.9% 준 101억6,610만달러를 기록,85년 1월 이후 가장 큰 폭으로 떨어졌다.수입은 43.9% 감소한 70억9,530만달러로 수출입통계가 정비된 60년 이후 최대 폭으로 떨어졌다. 수출보다 수입이 더 크게 줄어드는 등의 이유로 경상수지는 36억6,960만달러의 흑자를 기록,지난해 11월부터 9개월째 흑자기조가 이어졌다.올들어 7월까지의 경상수지 흑자 규모는 254억7,000만달러로 잠정 집계됐다.
  • 39년생 공무원 ‘조마조마’/慶北道 사무관들 퇴출대상 확대 주장

    ◎구조조정 갈등 증폭 李義根 지사 고심 경북도가 구조조정을 둘러싸고 심각한 내부 갈등을 빚고 있다. 10일 도 관계자에 따르면 도는 현재 38년생 18명을 퇴출시키기로 내부 방침을 세우고 조정작업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사무관급 이하 직원들은 기구축소로 서기관급 이상 자리 14개,사무관급 26개 등 모두 40개 자리가 없어져 퇴출 연령을 39년 6월생까지 조정해야 한다는 주장한다. 38년생(서기관 13명,사무관 5명)만으로 선을 그을 경우 현재 서기관 6명,사무관 5명이 결원인 점을 감안하더라도 11명의 사무관이 대기해야 한다는 계산이다. 39년 6월생(서기관 5명,사무관 5명)까지 물러나면 대기 사무관은 오직 1명만 남게 된다. 이들은 특히 서울 대전 전북 충남 등은 모두 40년생까지 퇴출시키기로 결 정했다는 점을 근거로 들고 있다. 부산 대구 경남 충북 등도 39년생까지를 대상자로 정했고 전남 제주 등도 39년 또는 40년생까지 거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에 대해 39년 6월생들은 터무니 없는 발상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다년간 행정경험을 가진 고령자를 마녀사냥식으로 일률적 선을 그어 나가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일축하고 있다. 이같은 갈등이 계속되면서 사무관 이하 직원들은 고위층의 결단만 기다린 채 사실상 일손을 놓고 있다. 퇴출대상에 거론되는 인사들도 도정에 전념할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다. 구조조정 결과에 따라 행정자치부가 특별교부세 등을 차등 지급한다는 점을 굳이 들지 않더라도 李義根 지사의 결단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 中,양쯔강 제방폭파 고심

    ◎1938년 둑 고의 폭파때 인명피해 80만명/실행여부­피해 최소화 시기·지점 선택 골몰 양쯔(揚子)강의 범람 위기를 맞고 있는 중국 정부는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인위적인 ‘제방 폭파’여부를 놓고 고심하고 있다. 양쯔강의 제방이 지금의 대홍수를 견딜 수 있을 지 여부,만약 감당하지 못해 제방이 붕괴된다면 어디쯤이 무너져야 피해가 최소화 될 지를 가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 제방이 자연적으로 붕괴되든 인공적으로 파괴하든 피해는 모두 엄청날 수밖에 없다. 지난 31년 대홍수가 났을 때 제방이 물살을 견뎌내지 못하고 붕괴되면서 14만여명의 인명피해를 냈다. 이재민이 3,000만명에 이르렀다. 75년 허난(河南)성의 댐 붕괴사고도 악몽처럼 중국을 괴롭힌다. 7만5,000여명이 한 순간에 목숨을 잃었다. 그렇다고 제방을 의도적으로 폭파한다 해도 인적,물적 피해는 만만치 않다. 38년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 군대가 일본군의 침공을 막기 위해 고의적으로 허난성 화위앤(華源)강의 제방을 무너뜨려 무려 80만여명의 인명 피해를 냈다. 장소나 때를 잘못 선택했다가는 자칫 피해가 더 클 수도 있다. 중국 사상 최악의 이번 양쯔강 홍수로 중·하류에서는 모두 2,400여곳의 제방이 붕괴될 위기를 맞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 정부로서는 어느쪽을 선택하든 결과는 부정적이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
  • 충남/沈 지사 “개혁하겠다”(2期 지자체 인사태풍:13)

    ◎컴퓨터·외국어 무장 소장파 약진 예고/39년생 퇴출 예상… 월내 인사 마무리/大局大課 지향… 국제통상과 신설/부시장·부군수 대대적 순환 근무 충남도의 인사는 조직개편이 이달 중 마무리되는 대로 단행된다. 沈大平 지사는 임명직 시절을 포함해 만 5년9개월간 재직해 간부들의 업무능력을 소상히 파악하고 있다. 따라서 사람의 배치에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는 상태다. 沈지사는 민선 2기의 도정기조(基調)를 IMF경제난 극복과 ‘변화와 개혁속의 경쟁력 확보’에 맞추고 있어 인사에서도 소용돌이가 불가피한 실정이다. 沈지사는 먼저 일할 수 있는 조직을 만든 뒤 사람의 배치는 능력위주로 하고 권한을 대폭 위임해 책임행정을 구현하도록 할 방침이라고 여러차례 강조했다. 이에 근거해 도청직원들은 실력있는 소장인사의 ‘일대 약진’을 예상하고 있다. 특히 沈지사가 컴퓨터와 어학 등 기본 실력과 국제감각,균형감각을 강조한 점은 향후 인사의 방향을 시사한다. 충남도의 조직개편 방향은 11개 국실을 8개 국으로 줄이고 46개 과를 38개과로 정리하는 선으로 가닥을 잡고 있다. 3,300명인 직원 가운데 300∼400명을 감축해야 하는 점도 조직개편 작업의 어려움으로 작용하고 있다. 대략 정책실을 기확관리실과 통합하고,생활복지국과 보건환경국을 ‘복지환경국’으로 묶는 한편 지원부서인 내무국을 폐지해 문화체육국과 함께 ‘자치문화관광국’으로 확대 개편하는 방안이 흘러나오고 있다. 민방위 재난관리국 업무는 소방본부에 맡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는 대국대과(大局大課)주의를 지향해 행정의 능률을 높이고 경제·문화 등 도민들의 실생활과 관련된 분야를 강화하기 위한 포석이다. 또 통상기능을 강화하기 위해 과 단위의 ‘국제통상과’도 신설된다. 또 보좌관 또는 특보(特補)를 신설하는 방안도 거의 확정된 단계다. 이에 따라 金壽鎭 행정,柳喆熙 정무부지사 체제의 구축에 이은 국실장급 인사도 초읽기에 들어간 느낌이다. 특히 39년생과 40년생으로 유동적인 ‘퇴출기준’이 어느 쪽으로 가느냐에 따라 인사의 폭도 크게 달라질 것으로 여겨진다. ‘도정의 설계사’인 기획관리실장에는 沈지사의 정책브레인 역할을 하고 있는 李明洙 정책실장(행시 22회)과 朴商敦 도의회 사무처장,兪德濬 내무국장 등이 경합하고 있다. 여기서 발탁되지 않는 인사는 자치문화관광국 등 실세부서에 기용돼 민선2기 새 도정의 전위역을 맡게 될 전망이다. 신설될 ‘경제통상국’에는 沈지사의 의중이 아직 오리무중(五里霧中)이나 朴漢圭 지역경제국장(기술고시 16회)이 적임자로 거론되고 있다. 다만 서기관이라는 점이 약점이라면 약점이다. 국장급과 부시장·부군수의 전보와 관련해서는 대폭적인 순환근무가 이뤄질 전망이다. 이 경우 39년생인 金興泰 천안시 부시장 등 ‘고령자’들이 최대변수로 작용할 전망이다. 金부시장과 동년배인 申瑞均 서산시 부시장과 38년생인 李鍾珪 공주시 부시장과 金在高 연기군 부군수 등 7∼8명의 이름도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조직개편 등 다른 요인과 관련된 盧奎來 계룡출장소장과 趙春子 생활복지국장,徐明植 농정국장 등의 거취도 주목된다. 상당수는 퇴직하거나 정책보좌관 등 한직으로 밀려날 운명이다. 기술직에서는李建福 건설교통국장의 거취에 따라 金洸培 종합건설 사업소장의 영전이 예상된다. 과장급은 白南勳 자치행정과장의 승진이 0순위로 거론되고 있는 가운데 전보의 폭도 결코 작지 않을 전망이다. 명칭의 변경 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조직 개편폭이 클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조직의 안정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어 경우에 따라서는 소폭에 그칠 가능성도 없지 않다. 한가지 주목되는 점은 ‘체전준비팀’등 프로젝트팀장의 요직발탁 가능성이다. 이들은 사무관급이지만 ‘태스크 포스’를 비교적 잘 이끌어 주무계장 등으로 전진배치될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있다.
  • 경남(2期 지자체 인사태풍:2)

    ◎규모 크지만 ‘잔치’는 없다/기구 대폭 축소… 과·계장 승진 좁은문/시·군도 기구 축소/김 지사 행마에 어려움/명단 발표 10일께/정무부지사 이덕영씨 행시출신 초강세/도 핵심라인 장악할듯 金爀珪 경남지사는 최근 사석에서 “인사만 생각하면 골치가 아프다”고 어려움을 토로한 적이 있다. 벌이고 있는 대형 사업들의 성공적인 수행을 위해서는 능력위주의 인사가 돼야 하지만 조직의 사기를 생각하면 연공서열도 무시할 수 없어 고민인 것이다. 도는 이번 기구개편에서 3국 5과를 축소한다.부이사관 3개와 서기관자리 5개가 줄어드는 것이다.여기에 시·군의 국장자리도 1∼2개씩 줄어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다. 외자유치를 위해 유럽을 순방하고 있는 金지사가 귀국하면 7일 취임식을 마치고,2∼3일간 손질을 거쳐 모습을 드러내겠지만 유럽 방문에 앞서 확정한 것으로 알려진 부지사와 기획실장 인사에 나타난 지사의 의지와 기구개편 내용,그리고 공로연수 등으로 공석이 되는 자리를 눈여겨 보면 인사의 밑그림은 대강 그릴 수 있다. 우선 인사의 규모는 대폭이지만 승진은 그리 많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공로연수 대상이 당초 38년생 6명에서 39년생 4명이 추가됐지만,3국 5과가 축소돼 과·계장급의 승진은 치열한 경쟁이 예상된다. 이번 인사의 첫 단추인 부지사 인사에 대해서는 이런 저런 말들이 많았으나 權炅錫 행정부지사는 유임된다.부산고 출신으로 육사를 나온 權부지사는 꼼꼼하게 챙기는 타입이다.지사가 외자유치를 위해 해외에 나가 있어도 차질없이 안살림을 꾸려갈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평가다. 그러나 지난 3년간 金지사와 함께 해외시장을 누볐던 金勳 정무부지사는 물러 난다.金정무부지사는 공석인 경남무역 사장자리가 배려됐으나 본인은 이를 완강히 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후임에는 李德英 문화관광국장(행시 17회)이 기용된다.고시출신으로 정년을 7년이나 남긴 李국장의 정무부지사 기용은 파격적이다. 李국장은 그동안 도가 역점적으로 추진해온 각종 사업을 직접 기획,저돌적으로 밀어부쳐 金지사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처음 정무부지사 제안을 받고 완강히 거부하다 지사의 설득으로 최근 이를 수락한 것으로 전해졌다.정무부지사 이 취임식은 도지사 취임식 하루전인 오는 6일 예정돼 있다. 기획실장에는 權郁 내무국장(행시 21회)의 승진으로 굳어졌다. 합천에서 태어나 부산대를 나온 權국장은 金지사와 같은 고향,같은 대학 출신으로 2년여를 지근거리에서 모신 최측근이다.기획실장 자리를 놓고 경쟁관계였던 고시 선배인 李국장의 정무부지사 기용으로 쉽게 자리를 차지했다. 국장급은 부이사관 자리 3개가 비게 된다.우선 내무국장에는 金雄悅 환경보건국장(행시 16회)이 옮겨 앉는 것이 확실하다.이 경우 대형사업추진 전담기구 팀장인 정무부지사,예산을 쥐게된 기획실장,인사를 관장하는 내무국장,여기에 유임되는 朴完洙 경제통상국장(행시 23회)과 尹英 행정과장(행시 26회)등 고시출신들이 가세,‘인너서클’을 형성,도정을 주도할 것으로 예상된다. 문화관광국장에는 행자부소속 부이사관과 서기관 2∼3명이 거명되고 있으나 하마평은 없다. 교육원장에는 부이사관급 부시장이 입성할 가능성이 크고 나머지 국장들은유임되는 것으로 가닥이 잡혔다.鄭昌植 수산국장과 具龍好 민방위국장은 기구폐지로 용퇴해야 될 처지다. 이번 인사에서 가장 주목받는 자리는 건설도시국장.5년이상 장기집권(?)하고 있는 李在燮 국장이 과연 자리를 비킬지 여부. 후진을 위해 옮겨야 한다는 말들이 많지만 본인은 지사의 뜻에 일임하겠다는 의사다.자리가 비게 되면 후임에는 梁光雄 개발공사사장이 0순위다. 嚴正仁 비서실장이 그동안 고생한 보상으로 승진,창원 부시장으로 나가는 것이 확실시 된다.과묵하고 합리적인 사고를 갖고 있는 嚴실장은 시장들이 서로 요청할 정도로 인기가 높다.기구개편에 따라 자리가 없어지는 吳敬三 감사실장도 부이사관으로 승진,부시장으로 나갈 것이 확실시 된다. 鄭永錫 의회사무처장도 이번 기회에 자리를 옮기고,孔昌錫 김해부시장,韓昌一 거제부시장,河三錫 양산부시장 등은 도청으로 전입돼 능력과 격에 맞는 자리를 차지할 것으로 점쳐진다.金泰塋 기획관과 吳元碩 공보관,愼熙範 총무과장 등도 고생한 댓가로 부단체장에 기용될 것이 유력하고,자리에여유가 생기면 고참과장 1∼2명 정도가 합류될 것이라는 분석이다. 서기관들이 빠져나간 자리는 지난 88년 사무관으로 승진된 고참중에서 올라오지만 朴在賢 기획계장(행시 32회)는 0순위고 나머지 1∼2자리를 놓고 치열한 경합이 예상된다.국이 폐지된 수산직의 사기진작을 위해 서기관자리 1개를 늘린다.崔辰洙 통영수산국장을 본청 과장으로 부르고,고참계장 2명을 승진시켜 불만을 달랠 것으로 보인다.
  • ‘미인’ 신중현:상(금지문화 금지인생 이제야 말한다:2)

    ◎“어느새 耳順… 난 美人을 사랑할뿐”/50곡 금지 탄압 분명… 대마초는 그저 핑계/대통령찬가 작곡 주문 거부한게 빌미인듯/反戰·사랑메시지 우리가락 접목이 내꿈 1975년 12월 겨울 바람이 매섭던 어느 날,서울 서대문 구치소의 차가운 골방 구석에 낯익은 30대 인기 가수가 쭈그리고 앉아 한 숨을 내쉬고 있었다.대마초 사건에 연루된 록 가수 신중현(申重鉉·당시 37세)씨 였다.작곡관계로 만났던 히피족이 선물로 준 마리화나를 피운 것이 꼬투리가 돼 인기 절정에서 한 순간에 죄수로 추락한 몸.자신의 앞날이며 문화 예술계에 떨어질 불벼락이 모두 걱정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60∼70년대 신들린 사람처럼 무대를 오가며 팬들의 혼을 빼앗았던 한국 록의 대부 신중현.그는 트로트,포크송,록으로 대별되던 대중음악 세계를 송두리째 흔들어 ‘이단아’로 눈총을 받았다.젊은이들의 음악세계를 주도했던 장본인 이던 그의 운명을 갑자기 바꾸어 놓은 것은 무엇일까.흔히 알려진 대로 대마초 때문일까.아니다.‘대마초 가수’로 낙인 찍힌지 23년이 지난 지금 그가 털어놓는 이야기는 다르다. 인기 절정이던 72년 가을 어느날,서울 신촌 집으로 운명의 전화가 걸려왔다.느낌이 좋지 않은 벨 소리였다.수화기를 들자 청와대라고 칭한 30대 남자가 박정희 대통령 찬가를 만들어달라는 주문을 해왔다.그는 “정치에 개입하고 싶지 않다.서민의 한 사람으로 내 길을 가고 싶다”는 말로 거부의사를 밝혔다.5분뒤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이번엔 당시 공화당의 유력 인사였다.역시 같은 주문이었다.“독재정권도 싫은데 그런 것까지 주문하려 드느냐”며 강도높게 반발하고는 전화를 끊었다.앞으로 자신의 음악인생에 드리워질 어두운 그림자는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신씨가 대마초를 알게 된 것은 60년대말 록 음악을 하던 히피족들과 어울리면서부터.음악인으로서 당시 세계적으로 유행하던 록에 당연히 관심이 쏠렸고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한국에 들어와 있던 히피들과 친분을 다지게 됐다.그중에서도 ‘환각음악’이라는 것에 빠졌고 함께 어울리던 히피들의 생활을 도와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남겨진게 바로 대마초(마리화나)다. “작업을 하다가 틈틈이 피웠는데 한번씩 피우면 1주일간 머리가 멍한 상태로 곡을 못 쓸 정도가 됐어요.그러다 보니 자연 끊게 됐지요”. 그때만해도 일반인들은 마리화나 등 환각제가 무엇인지도 모를때 였다.소문을 들은 음악인들이 “집에 마리화나가 있느냐”고 물어오면 법 위반이나 위험성도 모른채 “우리 집에 산더미처럼 많다”며 나눠줄 정도였다.대마초를 피운 유명 음악인들이 하나 둘씩 묶여 들어가고 추궁 끝에 시발점인 신씨에게 화가 미쳐왔다.보건사회부와 검찰 합동수사반에 덜미가 잡혔고 남대문옆 건물 지하로 끌려가 이틀 동안 감금된채 혹독한 취조를 당했다. “구타에 물고문까지….견딜 수가 없더군요.사실대로 불었지만 막무가내였어요.취조의 목적이 엉뚱한데 있다는 것을 직감으로 알겠더군요” 신씨의 구속사실이 언론보도를 통해 알려졌고 연행 이틀째 새벽에 검사가 취조실로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국가 방침이니까 들어가 있으라”는 말을 전했다.정신병동에 1주일 입원해 있은 후 서대문 구치소에 수감,노래와 인생이 모두 묶이는 신세가 됐다.박대통령이 담당 검사 어깨를 두드리면서 격려했다는 소문을 후에 들었다고 한다. 신씨는 당시 정황을 볼때 박정희 정권이 저지른 문화탄압의 첫 표적이 자신과 자신의 노래였음을 확신한다고 말한다.“60년대말부터 월남전에서 사람들이 많이 죽어갔습니다.세계적으로 반전(反戰)무드가 강했고 록 음악은 평화와 사랑의 메시지를 강하게 담아 전했지요.그같은 록을 따랐던 제 노래가 금지될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당시 히트했던 ‘미인’이나 ‘봄비’‘미련’‘저 여인’‘생각해’‘그 누가 있었나봐’ 등이 모두 현대감각을 살려 사랑을 표현한 노래들인데 모두 금지곡이라니요.평소 잘 알고 지내던 평론가들이 앞장서서 내 노래에 칼질을 해대더군요” 4년전에 피운 대마초를 핑계 삼아 75년 족쇄를 채웠고 87년 완전 해금될때까지 50곡이 금지곡으로 묶였다.“제가 구속된뒤 가요뿐 아니라 문학 등 문화예술 각 장르에서 구속과 금지의 회오리가 거세게 일었지요.당시 대중음악으로 세인들의 주목을 받았던 저를 희생양으로 삼은것은 어쩌면 당연한 선택이었는지도 모릅니다.대마초가 핑계로 작용했구요” 그저 음악이 좋아 혼자 기타를 배웠고 우리 것이 우러나는 음악 만들기에만 몰두했다는 신씨.지금 돌이켜 보면 당시의 대마초 사건이 우습기만 하다.대마초가 무언지도 모르고 피워대던 일이며 대마초 가수란 오명을 낳은 시대적 상황들….그 모든 것들이 이제는 기억 속에만 있다.그러나 어쩔수 없이 치러야만 했던 과정 치고는 그 댓가가 너무 컸다는 것이다. ◎사연들/골목길에 울려퍼진 ‘한번하고 두번하고’ 독재연장 삐꼰다나?/단순한 리듬에 쉬운 가사/改詞曲으로 인기 ‘눈엣가시’/혐오감·폭력성 씌워 금지 ‘한번 보고 두번 보고/자꾸만 보고 싶네/아름다운 그 모습을/자꾸만 보고 싶네/그 누구나 한번 보면/자꾸만 보고 있네/그 누구의 애인인가/정말로 궁금하네/모두 다 사랑하네/나도 사랑해/나도 몰래 그 여인을/자꾸만 보고 있네/그 모두 넋을 잃고/자꾸만 보고 있네”(미인). 1974년 발표,레코드 1백만장이 팔려나갈 정도로 크게 성공을 거둔 노래다.그러나 첫 구절 일부가 ‘한번 하고 두번 하고 자꾸만 하고 싶네’로 바뀌어 당시 독재정권의 정권연장을 빗댄 노래로 대학가에서 번져나가자 금지곡이 됐다.동네 꼬마들의 입에까지 자주 오르내리게 된 대표적 금지곡이다. 신씨의 노래는 우리 가락조의 록이 주조를 이루는 가운데 평이한 가사와 리듬이 특징이다.대부분 누구나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는 분위기의 가사들을 담고 있다.그래서 그런지 그의 노래들은 대학가와 노동현장에서 흔히 개사(改詞)곡으로 애용되곤 했다.‘미인’은 그 대표적인 예.원 노래의 가사 자체는 문제가 없으나 개사곡이 널리 퍼지자 사회적으로 미치는 영향이 크다며 금지곡 딱지를 붙이게 된 것이다.이후 신씨가 만든 노래는 가사가 조금만 자극적이어도 ‘혐오감을 준다’‘폭력적이다’‘너무 슬프다’ 등등의 금지사유가 여지없이 따라 붙었다. “형광등이 비추는/천장을 보면서/눈을 떴다가 감았다/밤을 새우네/그 여자는 지금쯤/무얼하고 있을까/이리둥굴 저리둥굴/혼자 생각하네”(긴긴 밤)“저 여인은 왜 홀로 앉아 있나/저 여인은 무엇을 생각하나/그 옛날에 그 사람을/잊지 못하고 있나봐/그 여인∼아름다워”(저 여인)“웃으면 웃었지/울으면 울었지/왔으면 왔지/갔으면 갔지/나는 몰라/알게 뭐야/그 누가 웃으랬나/그 누가 울으랬나/그 누가 오랬나/그 누가 가랬나/아 그렇게 하면 어떻게/그렇게 노래 부르면/애인이 싫어하잖아(나는 몰라). □그의 길 ▲38년 서울 출생. ▲41년 만주 신경으로 이주. ▲45년 해방 맞아 귀국. ▲57년 서라벌고 2년 중퇴. ▲62년 한국 최초의 그룹 사운드 ‘애드4’ 결성. ▲75년 대마초 사건으로 구속.‘미인’‘거짓말이야’‘그사람 아니야’‘바람’ 등 무더기 금지곡 판정. ▲79년 부분(활동)해금. ▲87년 전면(금지곡)해금 ▲89년 서울 송파구 가락동 작업실 ‘우드스탁’ 입주. ▲92년 15분짜리 대작 ‘너와 나의 노래’ 작곡. ▲94년 실험적인 앨범 ‘무위자연’ 출반. ▲98년 음악인생 결산 대규모 록 콘서트 IMF로 무산. ▲현재 수원여대 출강.
  • “OPEC 붕괴위기 직면”/야마니 前 사우디석유상

    ◎하락 방치땐 산유 통제불능 【함부르크 DPA 연합】 세계석유수출국기구(OPEC)가 붕괴위기에 직면해 있다고아흐메드 사키 야마니 전(前)사우디아라비아 석유장관이 6일자 독일 시사주간지 데어 슈피겔과의 회견에서 경고했다. 야마니 전장관은 38년전 결성된 석유 카르텔 OPEC가 죽음에 이르렀으며 석유가격이 지금처럼 계속 하락한다면 최후의 일격만 남아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OPEC는 지난 1985∼1986년 석유가격 대폭 하락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그때부터 OPEC 비회원국들이 석유생산을 늘리는 등 세계 시장이 통제불능의 상태로 빠졌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주 OPEC의 감산 결정은 2%에 지나지 않는 소폭이었으며 최소한 3∼4배 감축됐어야 한다고 말했다.
  • ‘사회적 합의로 위기극복’ 7국사례

    ◎멕시코­국민협정 도출… 2년만에 IMF 탈출/스웨덴­임금인산폭 등 조정… 실업 1∼2% 유지/호주­물가·임금 안정 3차례협약 경기 회복 주요 선진국들이 사회적 합의를 통해 경제위기를 극복한 사례를 소개한다. ▷스웨덴◁ 20년대에 지속된 극심한 노사분규에 대한 염증과 노사문제는 대화로 해결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38년 경영자협회와 노총이 자율적으로 노사협조체제를 구축한다는 내용의 ‘기본협약’을 체결했다. 국가경쟁력 제고를 위해 임금상승율 등에 합의함으로써 서구에서는 드물게 1∼2%의낮은 실업율을 유지하고 있다. ▷오스트리아◁ 신탁통치에서 벗어난지 2년만인 57년 노총과 노동회의소,상공회의소,농업회의소,정부대표 등 4자대표로 구성된 임금물가 관리위원회가 구성돼 이념이나 계층간·정파간 대립보다 임금 물가 등 주요 경제현안을 먼저 해결하기로 합의,지속적인 경제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다. ▷네덜란드◁ 노·사·정·공익대표들은 50년 사회경제협의회를 법적 기구로출범시켰다. 82년에는 경제불황을 타개하기 위해 고용확대·임금안정 등을 내용으로 하는 사회협약을 체결하는 등 경기회복에 크게 기여했다. 각 부처 장관은 주요현안에 대해 협의회의 자문을 구해야 하고 협의회는 별도로 정부에 건의안을 낼 수 있다. ▷호주◁ 호주노조협의회(ACTU)는 83년 자유당 정부가 인플레와 실업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년간 임금동결 조치를 취하자 야당인 노동당에 사회협약체결을 제안했다. 이후 노동당이 집권하면서 최초의 사회적 합의를 도출했다. 수상,주지사,주요 각료,ACTU집행부,경영자단체임원,중견정치인,경제계 지도급인사 등이 참여한 사회적 합의를 83년,85년,92년 체결하여 물가및 임금안정으로 노동비용 하락을 유도했다. ▷이탈리아◁ 77년 임금안정과 노사관계제도 개선에 관한 노사 2자협약을 체결한데 이어 83년과 93년에도 두차례 협약을 체결해 물가및 임금불안을 해소했다. ▷스페인◁ 79년 중앙노사단체(UGT와 CECO)는 중앙협약을 체결했으며 80∼83년 사이에는 3개항의 기본협약을 체결했다. 81∼84년에는 노·사·정이 사회경제협약을 체결,고용·임금·물가안정에 기여했다. ▷멕시코◁ 멕시코는 95년 IMF 금융지원 이전에도 노·사·정·농 대표들이 87년,88년,92년 세차례에 걸쳐 경제안정을 위한 사회협약을,92년 5월에는 경제성장을 위한 사회협약을 체결했다. IMF 이후에는 95년 10월 경제회복을 위한 국민협정,96년 10월 경제성장을 위한 동맹 등 사회적 합의를 도출했다. 그결과 2년만에 IMF체제에서 벗어나게 됐다. 이밖에 독일과 일본도 노·사·정대표들이 참여하는 비공식 사회적 합의를 통해 경제위기를 극복했다.
  • 뉴딜정책 기수 프랭클린 루즈벨트:하(미국의 대통령 문화:5)

    ◎2차대전 적극 개입… 1천만 실업자 구제/전후 평화 정착 기대속 4선 당선 영광/대통령 문화 요람 도서관 시스템 도입/부인 일리노어 적극적 사회 활동/헌신·박애정신 국민 마음속 각인/동상 선 세계 최초 퍼스트 레이디 【워싱턴〓나윤도 특파원】 대공황의 질곡에서 미 국민을 구출할 희망의 상징으로 32대 대통령에 취임한 프랭클린 루즈벨트(애칭 FDR)는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강력한 뉴딜정책을 추진했다.테네시강 개발사업,국가부흥청 설립,농업조정법 제정,사회보장제도 도입,노동조합 활성화 등 100일 입법을 통한 새행정부의 의욕적인 정책추진은 무기력과 절망에 빠졌던 국민들에게 ‘할 수 있다’는 신념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뉴딜정책 평가를 위한 국민투표의 성격을 띤 1936년 대통령선거에서 FDR은 선거인단수 523대 8의 미 역사상 최대의 표차로 재선고지에 오를 수 있었다.그러나 활기찬 뉴딜정책의 추진에도 불구하고 대공황으로부터의 탈출은 요원했다.36년 다소 회복되는 듯 하던 경기는 37년 중반부터 다시 불경기로 돌아섰으며 38년에는 최악의 상태로 떨어져 실업자가 전체 노동력의 5분의 1인 1천만명에 달할 정도였다. 당초부터 실험적 성격이 강했던 뉴딜정책의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했다.사방에서 FDR에 대한 비난의 소리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그러나 그는 천운을 타고난 듯,뜻하지 않은 방향에서의 해결책이 마련됐다. FDR의 대통령 취임과 같은 해인 33년 독일의 권력을 장악한 아돌프 히틀러가 국제연맹을 탈퇴,인접국들에게 과거 독일영토의 반환을 요구하며 전쟁준비에 광분하면서 유럽에는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마침내 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2차대전이 시작되었다. 미국은 마침내 전쟁에 개입하게 되었고,이로 인해 군수산업이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루면서 미국의 경제상황은 대공황에서 탈피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전후 세계 최대의 경제대국으로 전환시키는 계기가 되었다.전쟁이 미국을 구했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전쟁이 악화일로를 치닫고 있던 40년,미 대통령선거의 최대쟁점은 참전문제였다.초기 FDR은 재선한 대통령으로서 명예로운퇴진을 생각하고 있었으나 전쟁에 직면한 위기상황에서 민주당은 전폭적으로 그를 또 다시 대통령 후보로 선출했다.그는 참전반대 의사를 명확히 했으나 미국이 전쟁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막강한 군대가 필요함을 역설했다.미 국민은 그를 미 역사상 최초의 3선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전쟁 초기 FDR은 곤경에 처한 영국을 도우려 했지만 고립주의자들로 가득찬 미 의회의 거부로 소규모 제한적인 원조밖에는 할 수 없었다.그러나 그는 “미국은 민주주의의 거대한 무기고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며 의회와 국민을 설득,마침내 ‘무기대여법’을 통과시켜 본격적인 지원에 나설 수 있었다.39년 10월 알버트 아인슈타인의 핵폭탄에 관한 서신에 접한 FDR이 즉시 비밀계획팀을 만들어 연구에 착수,마침내 원자탄을 만들어내게 한 것도 이같은 그의 의지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던 중 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공격은 미국의 본격적인 참전 계기가 됐다.참전은 모든 미국 경제를 전시경제로 돌아서게 했고 미 전역의 공장들로부터 막대한 양의 군수물자들이 쏟아져 나왔다.1천만에 달하던 실업자가 방위산업 증강에 따른 구인수요와 군입대로 사라지게 됐다.또한 FDR의 활발한 전시외교는 그를 자연스레 국제지도자로 부상시켰다. 44년 11월,아이젠하워 장군 지휘하에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성공시킨 연합군이 최후의 승리를 위해 독일로 진격하고 있을 때 미국은 다음 대통령선거를 치렀는데,FDR은 공화당의 토머스 듀이를 물리치고 4선 대통령에 당선됐다.전쟁의 마무리 뿐 아니라 전후평화에 있어서도 미 국민은 그의 영도력에 큰기대를 걸었던 것이었다.그러나 격무에 시달리던 그는 취임 3개월도 못된 4월12일 조지아주 웜스프링 휴양지에서 뇌출혈로 숨졌다.그의 나이 63세. 라이딩스의 대통령 순위에 따르면 FDR은 지도력과 정치력에서 각각 1위,업적 및 위기관리와 용인술에서는 각각 2위,성격 및 집중도에서는 15위를 기록해 전체 순위에서는 링컨에 이어 2위로 나타나 있다. 당시 육군참모총장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과의 일화는 그의 지도력 및 용인술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첫대통령 취임 직후 FDR의 군예산 대폭 삭감계획에 불만을 품은 맥아더 육군참모총장이 조지 던 전쟁장관과 함께 백악관을 방문했다.대통령과 부딪히는 것을 꺼리고 있던 던 장관을 제치고 맥아더가 국가안보의 중요성을 강조하자 FDR은 빈정거리는 투로 평화시에 많은 군대를 유지할 필요가 있느냐고 답했다.두사람 사이에는 다소 설전이 오갔다. 마침내 맥아더가 자제력을 잃고 “만일 다음 전쟁에서 미국이 져 미국 병사들이 적의 군화발에 짓밟힌다면 그들은 맥아더가 아닌 루즈벨트를 원망할 것입니다”라고 대들었다.그러자 FDR 역시 화를 버럭내며 “당신이 대통령 앞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라며 고함을 질렀다.잠시 침묵이 흘렀다.맥아더의 생명은 끝난 것과 다름 없었다.군통수권자에 대한 모욕은 군법회의 감이었다.그는 사과를 한 후 총장직 사의를 표하고 뒤돌아 나왔다. 맥아더가 막 집무실 문을 나서려는 순간 뒤에서 대통령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다.“더글라스,어리석은 짓 말게.여기 당신의 목과 예산안을 함께 가져 가게” FDR의 정치생애에서 가장 주목을 받아야할 사람은 부인일리노어 여사라는데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는다.그녀는 남편의 투병중 세심한 간호는 물론 그가 주민들로부터 잊혀지지 않도록 정치활동을 대신,남편의 정치적 재기를 가능케 했다.또 퍼스트 레디가 된 후에도 신문에 ‘마이 데이’라는 칼럼을 정기적으로 썼으며 적극적인 사회활동으로 현대적 퍼스트 레디상을 정립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FDR이 죽은후 그녀는 남편 생가의 옆동네인 바킬의 고향집에서 17년을 더 살았으며 트루만 대통령의 요청으로 6년간 유엔총회 미국대표단장을 역임하는 등 공직생활을 하기도 했다.62년 78세로 생을 마감한 그녀는 국민들 마음에 헌신적이고도 박애적인 영원한 퍼스트 레디로 깊이 각인됐으며 지난 여름에는 워싱턴에 동상이 선 첫 퍼스트 레디가 됐다. FDR의 업적 가운데 주목받는 것으로는 대통령도서관 시스템의 도입이 있다.역사기록의 중요성과 대통령직 수행 자체가 국민의 위임에 의한 것임을 자각했던 그는 1기 임기가 끝났을 때 자신의 모든 자료들과 하이드파크의 생가를 국가에 기증,대통령도서관을 만들어 국민들이 언제라도 편하게 접할 수 있게 했다.현재 미국내 존재하는 대통령도서관은 모두 11개로 국립문서보관소(National Archives)의 관할 아래 제31대 후버 대통령부터 41대 부시 대통령까지 주로 생가에 건립돼 있으며 미 대통령문화의 요람이 되고 있다. ◎수잔 쿠퍼 미 국립문서보관소 대통령도서관 담당/“대통령직 관련 자료 보존·열람 FDR 투철한 역사의식서 시작” 미 국립문서보관소의 수잔 쿠퍼 대통령도서관 담당관은 “미 현대사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대통령직 수행과 관련된 자료들을 한데 모아 보존하고 열람시키는 전통을 수립한 것은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투철한 역사의식에 의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대통령도서관의 설립 동기는. ▲1939년 두번째 임기중이던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이 하이드파크의 생가일부와 소장하고 있던 모든 자료들을 연방정부에 기증하고 그 관리를 의뢰하면서부터 시작됐다.도서관 건물은 이듬해인 40년 후원회에서 건립후 국가에 헌납했다.1955년 ‘대통령도서관법’이 제정돼 도서관의 건립은 대통령후원회 등 개인이 맡고 관리만 국립문서보관소에서 하도록 돼 있다. ­이전에는 대통령문서가 어떻게 보존돼 왔나. ▲대통령마다 의회도서관 또는 출신대학,거주지 도서관 등에 기증하거나 혹은 후손에 남기는 등 가지각색이었다.그래서 팔려나간 경우도 있고,훼손·분실되는 일도 많았으며 여러군데 흩어져 있는 경우도 많았다. ­현재 대통령도서관 현황은. ▲최근 텍사스 A&M유니버시티 내에 개관한 부시도서관을 포함 모두 11개이다.루즈벨트에 이어 트루만(미주리 인디펜던스),후버(아이오와 웨스트브렌치),아이젠하워(캔자스 애빌린),케네디(매사추세츠 보스톤),존슨(텍사스 오스틴),포드(미시간 앤아버),카터(조지아 애틀란타),레이건(캘리포니아 시미 밸리)도서관 등이 있다.워터게이트로 물러난 닉슨의 도서관은 캘리포니아 요루바린다에 있으나 의회명령으로 방대한 양의 워터게이트사건 관련 문서들은 아직 국립문서보관소의 닉슨자료실에 보관돼 있다. ­대통령 도서관에 전시되는 자료들의 내용은. ▲대통령이나 비서진에 의해 공식적으로 만들어진문서,국내외로부터 받은 문서 및 서신,취임전후의 자료,사진·필름 등 각종 오디오 비디오 자료,유품 등 개인소장물품과 공식선물 등이다.
  • 북,이산가족문제 정치흥정 중지를/이인화 함남 도민회장(특별기고)

    38년전 ‘희망을 싣고 청진으로’ 가는 북송선을 타고 니가타항을 떠났던 일본인 처 고향방문단 일행이 일본에 도착하던 지난 11월8일 저녁 도쿄 나리타공항은 온통 흥분과 설렘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러나 일본인 처들의 첫마디는 기다리던 사람들의 두근거리는 가슴에 찬물을 끼얹고 말았다.고행길에 오르기 전 북한당국으로부터 사전교육을 받았기 때문인지 일본에 도착한 할머니들은 고령의 나이와 쇠약한 기운에도 불구하고 김정일과 북한을 찬양하는 똑같은 말을 되풀이했기 때문이다. 극히 제한된 인원에게만 허용된 북한의 이번 일본인처 방일조치가 북한의 주장대로‘온갖 정치적 권리와 물질적 혜택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의 마지막 소원을 실현하기 위한 인도적인 것’이 아니라 체제를 선전하고 더많은 식량을 얻어내며 수교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정치적 의도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확인시켜 주는 순간이었다. 이번 북송 일본인 처들의 고향방문 성사과정을 멀리서 지켜 보면서지난 85년 1천만 이산가족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던 ‘남북한 이산가족 고향방문단’의 상호 방문을 떠올렸다. 이산가족들의 바람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우리 적십자사는 일본인 처들의 고향방문이 시작된 날 남북한이 합의하는 한반도내 어느 곳에든 이산가족 면회소를 설치하자고 북한측에 제의하였는데 북한은 아직 아무런 반응이 없다. 뒤돌아보면 우리 1천만 이산가족들은 숱한 기대와 실망을 겪으면서 살아왔다.1971년 이후 20년이 넘도록 적십자회담(본회담 10회,예비·실무회담 60여회)은 계속되었으나 1985년 단 한차례의 이산가족 고향방문단 교환만을 성사시켰을뿐 교착과 중단을 거듭해왔기 때문이다. 특히 91년 말에 남북기본합의서가 채택되고 남과 북이 흩어진 이산가족들의 자유로운 왕래와 자유의사에 의한 재결합을 실현한다(18조)고 약속했을때 이산가족은 물론 온 국민이 통일에 대한 벅찬 희망으로 환호했다. 이어 개최된 제7차 남북고위급회담(92년 5월)에서 이산가족 노부모 방문단교환에 합의,실현가능성을 더욱 높게 하였으나 북한측이 아무런 전제조건을 달지 않겠다던 당초의 합의를 무시하고 ‘이인모송환’등 정치적 문제를 조건으로 내세우는 바람에 모처럼 합의된 이산가족 상호방문이 무산되고 말았다. 이산가족 문제는 끊어진 핏줄을 잇고 잊혀진 혈육의 정을 되찾아준다는 순수한 인도적 차원에서 접근해야지 어떠한 정치적 흥정이나 거래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된다. 이런 점에서 정치·경제적 실익을 챙기기 위해 일본인 처들의 고향방문은 허용하면서 같은 민족인 우리의 이산가족문제 해결은 외면하고 있는 북한의 이중적이고 비인도적인 행위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남북으로 갈라진지 반세기가 지나도록 서로의 생사조차 확인하지 못하고있는 우리의 이산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북한의 전향적인 태도변화가 있어야 한다.먼저 남북 쌍방이 문서로 합의한 내용에 대해 약속을 지키려는 성의있는 자세를 보여야 하고 인도적 문제를 정치·경제적 실리챙기기와 체제선전에 이용하려는 구태에서 과감히 탈피해야 한다. 북한은 한적이 제의한 이산 가족 면회소 설치 제의에 무조건 응함으로써 이러한 우리의 인도적 노력에 화답하는 태도를 보여야 할 것이다.이를 기울여주기를 기대한다.
  • 38년만에 첫 걸음 성과/북송 일인처 고향방문 결산

    ◎“방문 반대”여론 들끓어 논란/향후 자유왕래 밑거름 기대 일본인 처 고향방문단 1진이 14일 6박7일 동안의 고향방문을 모두 마치고 일본을 떠났다.북송 시작 38년 만에 처음 이뤄진 이번 방문은 숱한 화제와 다양한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역사와 정치에 희롱당하고 고난의 인생을 걸어온 그녀들에게 이번 기회는 처음이자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고향방문 길이었다.일행중에는 시간이 아깝다면서 잠도 자지 않고 동창생을 만나고 친척과 이야기한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아버지가 외동딸을 만나주지 않아 눈물을 머금고 떠난 여성도 있다. 말을 잇지 못하며 기뻐하는 동생이 있었는가 하면 ‘조선’에 친척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길 꺼려 일본 이름을 감추게 하거나 멀리 떨어진 호텔에서 만나주는데 그친 경우도 있다. 이름 공개 거부에서 나아가 ‘제발로 걸어간 사람을 왜 국민세금을 들여가면서 방문하도록 하느냐’,‘이미 끝난 유산 상속 문제를 거론하면 어떻게 하나’라는 말들도 속삭여졌다.중국에 남겨진 일본인 잔류고아 귀국사업시에는 전혀 나오지않던 말들이다.심지어 한 정치단체가 일본인 처 숙소로 몰려와 ‘일본인 처의 일시귀국을 허용하지 말라’고 외치는 장면도 있었다. 일본인 처들은 입국 기자회견에서 ‘장군님(김정일)의 고마움이 새삼 떠오른다.장군님의 배려로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말해 듣는 이들을 안타깝게 하기도 했다.귀국 기자회견에서 ‘장군님’ 운운하는 발언이 한번에 그친 것이 그나마 발전이라면 발전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엄선돼 보내어진,끝나면 돌아가야 할 그녀들이 자유롭게 말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처음부터 무리였을지 모른다. 일본인 처 고향방문의 기대치를 어디에 두어야 할까.처음부터 귀환 거부자가 나오고 북한체제 비판 발언이 쏟아지길 기대할 것인가. 일본인 처는 물론 북송동포 더 나아가 북한 주민의 자유왕래를 향한 ‘천리길의 첫걸음’으로 기대치를 조정한다면 일본의 민족차별적 분위기와 일본인 처들의 언동 등에 엄밀한 잣대로 시와 비를 가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따뜻하게 맞고 보내고 고향방문이 이어져 나가도록 돕는 노력이 우선 필요할 것이다.과거 남북한간 이산가족 접촉시에도 대상자는 선발됐었고,북한의 한 이산가족은 ‘살아서 천국’이라고 말해 실소를 자아냈지만 역시 이산가족의 재회,자유왕래는 우리의 최우선 과제로 남아 있다.
  • “차별유감” 일 태도에 분노/북송 일인처 고향방문1진 이일회견

    ◎“조선인과 결혼한 것이 무슨 죄냐/고향방문 기뻤지만 냉대 분하다” “가족·동창생·친척들이 따뜻하게 맞아줘 즐겁게 보냈습니다.인생에 남는 추억이 될 것입니다” “좀 더 빨리 왔었으면 좋았을텐데…” 일본인 처 고향방문단 제1진은 13일 이일을 앞두고 가진 기자회견에서 차례차례 이같이 감격을 털어놓았다. 첫 북송선이 일본항을 떠난지 38년만에 처음으로 고향땅을 밟았던 일본인 처 고향방문단 1진의 기자회견에서는 또 양측 적십자사에 대해 감사의 뜻을 표하는 한편 ‘김정일 장군님이 계시고…’ 운운하는 발언도 나왔다. 입국시 기자회견처럼 ‘공식화된 회견’이 되는듯 싶었던 기자회견은 그러나 곧 감격과 함께 이들의 분노가 터져 나오면서 분위기가 일변했다. 기자회견에 나선 김례숙(일본명 미공개)씨는 “일본에 가면 정말 기쁠줄 알았다.하지만 여기에 오니 일본 이름을 공개하지 말도록 한다거나 만나지 않겠다는 사람들이 있었다.조선인과 결혼한 것이 무슨 죄나 되는 것 같은 인상이었다.기쁜 마음보다 분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분노를 토해냈다.발언 도중 분하다는 부분은 일본말이 생각나지 않는지 우리말로 ‘분하다’고 말했다.이어 정산숙(일본명 다카기 쓰네코·59)씨도 “유감스럽다.민족 차별감정이 남아 있어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고 거들었다.기자회견에 임한 ‘일본인’ 4명이 모두 일본의 반응에 대해 실망감을 숨기지 않았다. 이번 고향방문을 앞두고 일본측은 친척들이 만날 것인지 만나지 않을 것인지를 조사한다고 시간을 끌었고 이름을 감추기도 했다.일본에 사는 친척들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한다는 명목이었다.또 제발로 걸어간 자들을 왜 국민세금을 들여 고향을 방문하도록 하느냐는 말들도 속삭여졌다. 일본인 처들이 짧은 기간 머물었지만 그 밑에는 서로 말하지 않았던 ‘차별’의 감정이 어른거리고 있음을 숨길수 없었다. ‘일본인’들의 일본에 대한 분노에 대해 일본은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앞으로 2차·3차로 이어지는 고향방문에는 영향을 주지 않을까.감격·감사·분노의 감정이 뒤엉킨 기자회견장을 뒤로 하면서 복잡한 생각이 들었다.
  • 북송 일인처 우타 할머니 고향방문 동행기

    ◎“38년만의 성묘길 가슴 벅차다”/동생들과 눈물의 포옹… “어서 집으로 가자” 일본 고향방문 3일째를 맞는 북한거주 일본인처 고향방문단 제1진 15명은 10일 일제히 고향을 찾았다.37∼38년 만의 고향 나들이 길을 벅찬 감격 속에 맞는 이들의 모습을 전하기 위해 일행 중 친지들로부터 가장 환영을 받고 있는 우타 도요코(우전풍자·김초미·62) 할머니의 고향 나가노 방문길을 동행 취재했다. 나가노행 신간선 플랫폼에 상오 8시쯤 우타 도요코 할머니가 일본 적십자사 간부와 함께 들어섰다. “우선 성묘를 하고 싶다.형제와 동급생들을 만나 옛이야기를 마음껏 하고 싶다.가슴이 벅차다”고 감상을 말한다.38년만에 보는 도쿄가 무척 많이 변했다면서 기차에 오른 우타 할머니는 인고의 세월을 이겨낸 강인함은 속으로 갈무리한 채 작은 몸을 의자에 의지하고 잔잔한 미소를 띄며 차창 밖을 바라본다. 북으로 떠나던 50년대 말 6시간이나 걸리던 도쿄­나가노간 여로가 이제는 1시간40분.하지만 우타 할머니는 ‘달려라 달려라 빨리 달려라.내 고향 나가노로’라고 되뇌이고 있는듯 보인다. 38년전 그녀는 성악을 가르쳐 주던 30세 연상의 재일동포 남성을 따라 북으로 갔다.‘차별도 없고 국가가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해준다’는 말에 남편과 함께 건너간 것이다. 집안에서는 맹렬히 반대했다.아버지는 딸이 기어코 북으로 가자 돌아갈 때까지 딸의 이야기를 단 한번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고 한다. 입북 5년만에 남편이 죽고 지금은 아들 가족과 함께 살면서 ‘혁명사적 안내원’으로 일하고 있는 그녀는 고향과 가족 친구들에 대해 많은 이야기들을 깔끔한 일본어로 이야기하더니 가슴에 달고 있는 김일성 뱃지에 대해 물어보자 “주석님은 돌아가셨지만 마음속에 높이 받들고자 달고 있다”고 북한식 우리말로 말한다.일본어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만추의 들판을 계속 응시하던 그녀는 나가노에서 둘째 동생 구니히코(방언·52)를 만나자 ‘아’라는 탄성과 함께 격하게 껴안는다. 구니히코씨는 “집사람은 만나는 것을 반대했지만 장남과 의논하고 이해를 얻어 누나를 만나러 오기로 어제 결심했다”고 말한다. 역을 빠져 나와 첫째 동생 가족이 열렬한 환영을 준비하고 있는 옛집을 향하는 우타 할머니의 뒷모습을 보면서 한 일본 언론인은 “제발로 걸어간 일본인 처들의 고향방문을 위해 왜 세금을 써야 하는지 문제를 제기하는 국민들도 꽤 있다”고 말한다.할머니들의 고향방문은 그렇게 시작했다.
  • ‘38년만의 귀향’취재진만 북적/북송 일인처 1진 고향방문 안팎

    ◎일행 15명중 3명 가족만 공항에 나와/“고향 오니 장군님 고마움 절실” 입모아 북한에 거주하고 있는 일본인 처 고향방문단 제1진 15명이 8일 밤 북경을 거쳐 도쿄에 도착했다.재일동포를 실은 북송선이 일본 니가타항을 떠난지 38년만에 처음으로 고향땅을 밟는 이들 일본인 처들은 처음에는 긴장된 표정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다소 여유를 찾는 모습이었다. ○…이들을 실은 북경발 NH 906편이 하오 7시25분 착륙,활주로 저 편으로부터 동체를 드러내며 서서히 탑승구쪽으로 다가서자 170여명의 취재진과 경찰,일본적십자사 직원들의 표정에는 긴장이 흘렀다. 15분쯤 지나 최고령자인 니시모토 하루코(84·이춘희) 할머니가 여승무원의 부축을 받으면서 선두에 서서 서서히 걸어나오면서 탑승구 주위에는 탄식과 플래시,다음 취재 장소를 점하기 위해 뛰기 시작하는 취재진의 발걸음으로 긴장이 폭발. 할머니들도 딱딱한 표정이었지만 ‘기분은 어떻습니까’,‘피곤하지 않습니까’라는 질문에 조금씩 표정이 풀어졌다.니시모토 할머니는 우리말로 ‘네,좋아요’,‘조금(피곤해요)’이라면서 미소를 짓기도.그녀는 관계자가 휠체어에 앉히려 하자 ‘걸어가도 됩니다’라면서 사양했으나 기어코 앉혀지기도. ○…방문단 15명 가운데 공항에 가족들이 출영나온 것은 3명 뿐.그나마 한 가족은 일본인 처의 시동생 가족(재일동포)이었다. 리미형(일본이름 비공개·57) 할머니는 출구에서 시동생 가족(재일동포)과 뜨겁게 얼싸안으면서 감격을 나누었다.리할머니는 눈시울을 붉히면서 ‘아리가토(고맙다)’를 연발. 우타 도요코(우전풍자·61·김초미) 할머니의 동생은 북새통에 밀려나 못만나다가 숙소를 떠나는 버스가 출발하기 직전 서로 발견. 감정을 꼭 누르고 있던 우타 할머니는 동생을 차창 너머로 발견하자 저절로 눈물이 솟기도.이들 남매는 이틀뒤 고향에서 만나기로 기약하면서 서로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일행 15명 가운데 김광옥,신정호,리미형,신숙영 등 네 할머니들은 공항 VIP룸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다. 할머니들은 오래만에 고향 땅을 밟은데 대해 “감격스럽다”고 기쁨을 감추지 않으면서도 “장군님(김정일 총비서)에 대해 조선(북한)에 있을 때보다 더 고마움을 느낀다”고 말하기도. 이들의 가슴에는 모두 김일성 뱃지로 보이는 뱃지를 달고 있었는데 4명의 뱃지가 모두 다 종류가 달랐다. ○…고향땅에서 하룻밤을 지낸 할머니들은 이날 7명의 가족이 면회를 신청해 숙소 등지에서 재회가 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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