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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연따라 연예 반세기(演藝 半世紀)…그시절 그노래(4)

    사연따라 연예 반세기(演藝 半世紀)…그시절 그노래(4)

    31년도의「삼천리(三千里)」가 지적했듯이 윤심덕(尹心悳)은 관부(關釜) 연락선의 갑판 위에 신발을 벗어 놓은채 현해탄(玄海灘) 투신이 아닌「이탈리아」행을 한 것일까? 그가 1897년생이니까 올해 나이 76살. 설혹 정사설(情死說)이 사실이 아니라 해도 이제 고인이 됐을 가능성이 많다. 어쨌든 그녀는『사(死)의 찬미(讚美)』가「히트」함으로써 본의 아니게(?) 대중 가요계의 첫「달러·복스」역을 했다. 물론 돈을 번 것은 가수가 아니고「레코드」사다. 일부 부유층의 장식품 정도로 희귀했던 축음기가『사(死)의 찬미(讚美)』이후 무섭게 보급되었다.「소리판(레코드)」의 위력이 처음으로 방방곡곡에 과시된 것이다.  그 때의 취입료는 한판 1곡에 2백원, 7곡이면 1천4백원이다. 1천4백원이면 10여간자리 기와집을 살 수 있는 돈이었다. 부호의 아들이면서 집 한채 없이 셋방을 전전하던 김우진(金祐鎭)과 그의 애인 윤심덕(尹心悳). 윤심덕(尹心悳)은 취입료로 받은 1천4백원의 거금을 마지막 사랑의 향연에 아낌없이 던져버린 것일까? 그리고「돈도 명예도 사랑도 다 싫다」면서 세상을 떠난 것일까?   사실 윤심덕(尹心悳)이 창가조의 가요를 부른 건 위대한 성악가의 꿈을 지녔던 그녀로서는 마지막 자포자기 같은 거였다. 그 때 대중가요 가수에 대한 사회의 인식이 그러했다.  창기(唱妓)들까지도『광대는 안한다』고 했다. 신극 무대의 막간 가수를「스카우트」하려고 창기(唱妓)한테 여가수가 되기를 권유했을 때 한 기생은『비록 팔자가 기구해서 이 짓을 하고 있지만 어찌 광대노릇까지 하겠느냐』고 한마디로 거절했다는 일화도 있다.  가수가 하나의 직업인으로 독립할 수 있는가도 문제였다.  여가수의 선구자가 단연 기생이라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다. 양가집 규수가 가수가 된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손쉬운 게 기생이었다.  1920년~30년대는 가위 기생의 전성시대였다. 서울에만도 조선권번(朝鮮卷番), 한성권번(漢城卷番) 등 많은 권번에 2천여명의 기생이 집결하고 있었다. 가무의 본고장이 바로 기생방이고 기생의 노래가 바로 대중가요「신민요」였다. 이래서「레코드」사는 우선 손쉬운 기생들 가운데서 가수를 찾았던 것이다.  기생 출신의 가수로 이름을 날린 건 선우일선(鮮于一扇), 왕수복(王壽福), 이은파(李銀波), 이화자(李花子), 김복희(金福姬), 김운선(金雲仙), 손금홍(孫錦紅).  특히 평양명기 선우일선(鮮于一扇)과 경기도 부평(富平) 태생의 이화자(李花子)의 인기는 대단했다.  선우일선(鮮于一扇)은『꽃을 잡고』『능수버들』(모두 金敎聲 작곡), 그리고 형석기(刑奭基) 작곡의『조선팔경』을 「히트」시켰다.  <에, 금강산 일만이천 봉마다 기암이요. 한라산 높아 높아, 속세를 떠났구나. 에헤야 좋구나 좋다, 지화자 좋구나 좋다. 명승의 이 강산아 자랑로구나>  선우일선(鮮于一扇)의 이『조선팔경(朝鮮八景)』은 지금까지도 애창되고 있으니까 반세기를 내려오는 고전급 유행가라 할까? 아름다운 조국에의 찬가이자 그 때의 망국한(亡國恨)을 달랜 구성진 노래다.  또 한사람 인기 기생가수에 왕수복(王壽福)이 있다. 왕(王)도 선우일선(鮮于一扇)과 마찬가지로 평양기생이었다. 선우일선(鮮于一扇)은 목소리가 곱고 절대적이었지만 얌전하고 수동적이어서 끝내 기생의 자리를 빠져나오지 못했다.  왕수복(王壽福)은 달랐다. 그는 야심이 있고 활동적이었다. 수완이 좋아서 부호, 한량들은 마음대로 움직였다.『능수버들』(金敎聲 작곡)이「히트」하자 그는 당시의 재벌 박(朴)모씨를 움직여 동경(東京) 유학까지도 할 수 있었다.  비슷한 경우가 손금홍(孫錦紅)이다.  그는「포리돌·레코드」에서『무정(無情)』(全壽麟 작사·작곡)을 취입,「히트」시켜 명성을 날렸다.『오락가락 무심타, 쓸쓸한 세상. 누굴 믿고 산단 말이오, 누굴 믿고 살아요』라는 짤막한 가사. 기생들의 외로운 신세를 한탄하는 이 노래는 당시 장안기생의 주제가쯤 되었다.  그런데 이 노래의「히트」이면엔 재미있는「에피소드」가 있다. 당시 화신(和信) 자리에 있던 한창(韓昌)「빌딩」의 주인 한(韓)모씨가 이『무정(無情)』의「레코드」가 나오는대로 매점(買占)했다는 것. 수천장씩 나오는대로 한(韓)씨는 사들여 창고에 넣고「레코드」사는 좋아라고 자꾸 찍어내어 결국 한 사람 상대의「베스트·셀러」가 된 셈이다.  어리석은 장사 속셈이었다는 설도 있고 한(韓)씨가 손금홍(孫錦紅)을 밀어주는 방편이었다는 분석도 있다. 어쨌든 그 인연으로 손(孫)은 한(韓)씨의 애인이 됐다.  그러나 기생 출신 가수로 노래, 염문 양면에서 가장 화창하게 이름을 날린 게 이화자(李花子)다.  이화자(李花子)는 19살 되던 해 부평(富平)의 어느 술집에서 작곡가 가수 겸 배우였던 김용환(金龍煥)에게 발탁되었다. OK「레코드」에서 첫 취입을 한 것이『어머님 전상서』. 가냘픈 목소리, 색정적인 용모의 이화자(李花子)는 이 노래 하나로 하루 아침에 가요계의 여왕이 됐다. 그리고 이어서 나온『꼴망태 목동』『화유춘몽(花柳春夢)』『초립동(草笠童)』등이 그의 인기를 계속 굳혀주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기적(妓籍)을 버리지 않았다. 그를 만나려고 한량들은 은쟁반에 돈을 수북이 담아 명함과 함께 바쳐야 했다.  그때 돈이면 큰 돈인 2백원은 바쳐야 간신히 며칠 뒤에 한자리에 앉는 영광을 차지했다는 것.  인기에 못지않게 염문도 많았다. 가요계에「데뷔」할 무렵에는 김용환(金龍煥)과 염문을 날렸고 그 뒤엔 모 부호의 애첩이 되었다. 그러면서 남인수(南仁樹) 김해송(金海松)과 사랑놀이를 계속했다. 김해송(金海松)은 이난영(李蘭影)의 전 남편. 인기와 돈과 사랑을 마음껏 누린 이화자(李花子)는 뒤에 술과 아편에 빠져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해방 다음 해인 46년 가을 그는 아무도 돌봐 주는 사람없이 혼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노래들은 뒤에 황금심(黃琴心)의 목소리로「리바이벌」이 되었지만 이화자(李花子)의 이름은 거의 잊혀져 가고 있다.<조관희(趙觀熙) 기자> [선데이서울 73년 1월28일 제6권 30호 통권 제224호] ●이 기사는 ‘공전의 히트’를 친 연예주간지 ‘선데이서울’에 38년전 실렸던 기사 내용입니다. 당시 사회상을 지금과 비교하면서 보시면 더욱 재미있습니다.
  • 미아삼거리 역세권 상업지역 확대

    미아삼거리 역세권 상업지역 확대

    강북구 도봉로 52(미아동 71-1) 일대가 38년 만에 상업지역으로 탈바꿈된다. 17일 구에 따르면 미아균형발전촉진지구 내 강북6구역의 지역용도를 준주거지역에서 일반상업지역으로 변경하는 도시관리계획과 도시환경정비사업을 위한 사업시행인가를 고시했다. 강북6구역 2577㎡ 중 83.4%인 2146.6㎡가 대상이다. 특히 준주거지역에서 일반상업지역으로의 용도 변경은 현재 지하철 수유역 일대가 1974년 일반상업지역으로 바뀐 이후 처음이다. 강북구 개청 이래 최초로 상업지역을 확대한 것이다. 구의 상업지역은 전체 면적 23.58㎢의 1.4%인 0.32㎢에 그치고 있는 실정이다. 이 일대에는 지하 5층, 지상 17층(최고 높이 75.4m) 규모의 판매·업무·교육시설이 포함된 복합건물이 들어선다. 지하 2층부터 지상 2층까지 판매시설, 지상 1~3층에는 업무시설, 지상 10~13층엔 교육연구시설 및 학원이 마련된다. 또 빌딩 주변엔 보행로를 조성하고 공개공지와 소공원을 꾸며, 주민들에게 만남과 휴식의 장소로 제공하며 열린 공간에서는 다양한 공연과 이벤트를 열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강북6구역은 롯데백화점 미아점과 지하철 4호선 미아삼거리역에 인접해 미아균형발전촉진지구의 중심지역이지만 건물이 낡아 개발의 필요성이 제기돼 왔다. 이번 사업시행인가 고시에 따라 내년 상반기 착공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박겸수 구청장은 “이 일대는 도봉·노원구, 경기 의정부·포천시에 사는사람들이 서울 시내로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교통요충지”라며 “이곳에 복합 문화쇼핑몰이 들어서면 굳이 도심으로 가지 않아도 문화, 관광, 쇼핑을 즐길 수 있어 자족거점도시로 발돋움할 것”이라고 반겼다. 이어 “미아삼거리역 일대가 중심지로 우뚝 서면 자연적으로 미아·수유역 등 역세권 개발도 촉진돼 동북권 중심지역으로 도약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특히 그는 “미아삼거리역 일대 미아균형발전촉진지구는 인근 길음·미아·장위 재정비촉진지구와 북서울 꿈의 숲이 어우러진 270만㎡ 규모의 동북권 최대 규모의 신도시로 재탄생한다.”며 “이번 강북6구역의 랜드마크 빌딩 건설이 미아균형촉진지구 개발의 촉매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강동삼기자 kangtong@seoul.co.kr
  • 보따리 하나 들고 증발한 임희춘(林喜春)

     여름은 코미디언 수난시대? 구봉서(具鳳書)가 신병으로 방송의 펑크를 내는가 하면 이번엔 임희춘(林喜春)이 증발(?) 소동. 보따리 하나를 싸들고 나갔다는 그가 4일간(21일 현재) 무소식. 방송을 펑크 내면서까지 그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임희춘(林喜春)이 증발(?)한 사실은 18일 MBC-TV『웃으면 복이 와요』녹화 때 알려졌다. 구봉서(具鳳書)·서영춘(徐永春)·이기동(李起東) 등과 함께 이 프로에 주연하고 있는 그는 어찌된 노릇인지 녹화시간이 지나도 나타나지를 않았다.  초조해진 담당 PD가 집에 전화를 해 보니『방송국에 나간다며 집을 나섰는데 어디를 갔는지 모르겠다』는 부인의 대답. 그러면서 그 날 아침에 임희춘(林喜春)과 말다툼을 벌였다고 귀띔.  그를 찾다 못한 담당자는 할 수 없이 그를 빼놓은 채 녹화를 했다. 임희춘(林喜春)이『웃으면 복이 와요』에 출연해 온 이래 펑크를 낸 것은 처음이다.  『웃으면-』에 이어서 또 다른 프로도 말썽이었다.  그는『웃으면-』외에『우리 집이 최고야』에도 아버지 역으로 빼놓을 수 없는 큰 역할.  이 프로의 녹화를 앞두고 20일 출연진들은 연습을 해야 했다. 그런데 여전히 임희춘(林喜春)이 나타나지 않아 담당 PD 유길촌(柳吉村)씨는 당황.  18일에 집을 나간 사람이 나흘째 행방이 묘연해지자 동료 코미디언들은 물론 그가 출연하는 프로의 담당 PD·AD까지 동원되어 그가 있을 만한 곳은 전부 뒤져 보았으나 허탕이었다.  훌쩍한 키에 외모에서 풍기는 인상 그대로 순동이 코미디언인 그는 외박이라고는 모르는 착실파로 소문나 있다.  평소에 외박을 할만한 바람기가 있는 사람이면 모르나 원채 착실한 사람이 행방을 감추었다는 점에 동료들은 더욱 걱정을 하며 그를 찾기에 열을 올렸다는 것.  그의 관계프로 담당 PD들의 말에 따르면 그가 가출소동을 벌인 것은 부인과의 입씨름이 불씨인 것 같다고.  이에 대해 그의 부인은 PD들의 얘기와는 달리 싸운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실은 말하기 곤란한 문제가 있어서 싸웠다고 핑계를 댄 것이지 정말 싸우지는 않았어요』  -곤란한 얘기란 것이 혹시 여자 관계인지?  『그건 아녜요』  무엇인지 모르나 애써 숨기려다 털어 놓는 말인즉『10원을 써도 벌벌 떨던 사람이 최근에 친구들과 어울려 카지노에 빠진 것 같다』는 얘기.  『나중에 알았지만 집에 두었던 예금통장이 없어졌잖아요. 카지노로 예금통장을 축낸 것을 내가 알면 필경 싸움이 날 것 같아 아마 축난 돈을 메우기 위해 들어오지 않은 것 같아요』 <걸(杰)> [선데이서울 73년 7월29일 제6권 30호 통권 제250호] ●이 기사는 ‘공전의 히트’를 친 연예주간지 ‘선데이서울’에 38년전 실렸던 기사 내용입니다. 당시 사회상을 지금과 비교하면서 보시면 더욱 재미있습니다.
  • 사연따라 연예 반세기(演藝 半世紀)…그시절 그노래(2)

    사연따라 연예 반세기(演藝 半世紀)…그시절 그노래(2)

     토월회(土月會)가 연극공연 막간에『아리랑』을 불렀고 그것이 무대에 올려진 최초의 대중가요라는 일반의 인식에 대하여 당시 토월회(土月會)의「멤버」였던 金八峰(김팔봉·金基鎭)씨는 사실과 다르다고 밝혀 말했다.  즉 토월회(土月會)가 막간 가수를 등장시킨 건 휠씬 뒤의 일,『아리랑』을 부른 게 아니라『아리랑 고개』라는 연극을 26년도 찬영회(贊映會)가 공연했다는 것.   『토월회(土月會)』의 두번째 공연(23년 9월) 때에「톨스토이」의『부활(復活)』,「마이아·펠스타」의『알트·하이델베르크』,「스트린드베르히」의『채귀(債鬼)』그리고 제1회때 상연했던『오로라』를 공연했다. 이 때 막간에 조택원(趙澤元)씨가 나와서 무용을 했다.  그러니까 노래가 아니고 막간 시간에 춤을 보여 준 것이다. 조(趙)씨는 토월회(土月會)「멤버」가 아니었고 특별 초대되어 찬조 출연으로 그 화려한 무용을 구경시켜 준 것이다.  그런데 막간에 노래를 안 불렀지만 극중에서는 독창 합창이 나왔다. 당시 주축「멤버」였던 박진(朴珍)씨는『「부활」연극을 하면서 무대 뒤에서「카추샤의 노래」를 합창했다』고 말한다.  이『카추샤의 노래』가 또한 전국에 크게 유행했다. 뒷골목 개구장이들까지도『카추샤 내 사랑아 이별하기 서러워-』하고 노란 목청으로 뽑아 넘길 정도였다 한다.  『학도가』『희망가』도 일본「멜러디」라는 주장의 근거도 퍽 뚜렷하다.  비슷한 경우가『이수일(李秀一)과 심순애(沈順愛)』다.  「대동강변 부벽루 산보하는, 이수일과 심순애 양인이로다, 악수논정(握手論情) 하는 것도 오늘 뿐이요, 보보행진(步步行進)하는 것도 오늘 뿐이라/수일이가 학교를 마칠 때까지 어찌하여 심순애야 못참겠더냐, 남편의 부족함이 있는 연고냐, 불연이면 금전에 탐이 나더냐/낭군의 부족함은 없지요마는 당신을 외국 유학시키려고, 부모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서 김중배의 가정으로 시집을 가오」  이 노래는 임성구(林聖九)의 극단「혁신단(革新團)」이 상연한『장한몽(長恨夢)』의 주제가다. 그러나 그 원작은 일본 명치(명치)시대의 소설가「오자끼」(尾崎紅葉) 의 소설『곤지끼야샤』(金色夜又)다.  1913년 5월13일부터 매일신보(每日新報)에 번안 연재됨으로써 우리나라에 소개됐다. 나중에 각색해서『장한몽(長恨夢)』으로 극화(劇化), 영화화(映畵化)한 것이다.  이 노래 속의『대동강변 부벽루』는 일본의 온천 겸 휴지인「아다미」(熱海·열해)를 한국으로 옮겨온 것이고 주인공인 이수일(李秀一)과 심순애(沈順愛)는「강이찌」(貫一) 와「오미야」를 한국인으로 바꿔 놓은 것(朴容九·박용구씨 말)이다.  어쨌든 이『장한몽(長恨夢)』은 연극도「히트」하고 노래도 못지 않게 대유행했다. 3·1운동 이후 10년 가까이 이「장한몽(長恨夢」은 유랑극단의 인기「프로」로서 산간벽지까지 파고 들었다.  그러나 대중 가요가 보다 활발하게 피어난 것은 축음기가 등장하면서부터다. 한국에「레코드」가 등장한 것은 언제일까?  1913년 8월27일자「매일신보(每日新報)」에는 다음과 같은 광고가 나와 있다.  광고  ○ 새 소리판 왔오 소리넣은 사람 송만갑(宋萬甲) 김연옥(金蓮玉) 박춘재(朴春載) 조목단(趙牧丹) 단, 양 우쪽판 즉 두장분 한장에 금(金)2환.  ○ 유성기 한틀에 15환 이상 20년 사용하는 보험증서를 부여함 경성(京城) 본정오정목(本町五丁目) 일본(日本) 축음기상회(畜音機商會).  이 광고로 미루어 보아서 1913년엔 이미「레코드」가 우리나라에 들어왔다.「토머스·에디슨」이 원통형 음반에 의한 축음기를 발명한 게 1877년, 그로부터 36년만에 한국에도 이 음성을 보존, 전파시킬 수 있는 현실적인 이기(利器)가 들어온 것이다.  그 때는 축음기를 유성기(留聲機),「레코드」를 소리판이라고 했다.  1면에 1곡을 수록하는 SP반인 것은 물론이다.  「레코드」제작은 일본에서 해 왔다. 일본은 1909년부터「레코드」제작을 했고 1년 뒤엔 일본(日本) 축음기상회가 독점기업으로서 발족했다.  이 일본(日本) 축음기가 3년 뒤엔 식민지인 우리나라에 상륙해서 상품시장을 만들었다. 한국은 해방될 때까지「레코드」제작을 못하고 일본 상품의 시장 구실만 해 왔다.  한국인이 처음 취입한 음반은 찬송가, 판소리, 단가, 경기잡가 등 이었고 위 광고에 보이듯 명창들이 일본에 건너가 취입을 했다.  그러나 한국에 들어온 유성기가 제철을 만난 건 윤심덕(尹心悳)의『사(死)의 찬미(讚美)』가「히트」하면서부터다.1927년에 일본서 취입한 이 노래는 그의 애틋한 정사 사건이 매체가 되어 방방곡곡에「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팔린「레코드」가 수십만장이나 되고 사실상 한국에 상륙한 일본 「레코드」자본의 기반을 굳혀 주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먼저「레코드」제작에 참여한 사람은 종로2가「파고다」공원 맞은 편에「조선축음기 상회」를 차린 이기세(李基世)씨다.  일본 축음기상회의 경성(京城)지점장을 하면서 이(李)씨는 이동백(李東伯), 이화중선(李花中仙), 송만갑(宋萬甲)씨 등 당대 명창을 일본에 보내어 취입을 시켰다.  그 때 유행 가수로는 강홍식(姜弘植), 채규엽(蔡奎燁), 김용환(金龍煥) 등이 있었다. 남자가수는 있지만 여자가수가 없었다. 유행가 취입할 여가수를 물색하던 이기세(李基世)씨는 어느 날 매일신보(每日新報)의 기자 이서구(李瑞求)씨한테 이 문제를 상의했다. 그 때 이서구(李瑞求)씨는 운심덕(尹心悳)을 추천했고 그를 설득시켜 일본에 보내는 책임을 맡았다. 당대의「소프라노」가수 윤심덕(尹心悳)은 당초「레코드」취입을 거절해 왔으나 이 때만은 순순히 음악 신화와 같은 화제를 만들게 된 것이다.<조관희(趙觀熙) 기자> [선데이서울 73년 1월14일 제6권 2호 통권 제222호] ●이 기사는 ‘공전의 히트’를 친 연예주간지 ‘선데이서울’에 38년전 실렸던 기사 내용입니다. 당시 사회상을 지금과 비교하면서 보시면 더욱 재미있습니다.
  • 봉소아(bonsoir) 마담(2)=「쉘부루」의 정 마담

    봉소아(bonsoir) 마담(2)=「쉘부루」의 정 마담

     술집마담에 대한 개념도 많이 바뀌었다. 돈 잘 쓰고, 사치하고, 남자교제 많은 여자라는 식의 개념으로 술집마담을 쳐다보던 때는 이미 옛날 일이다. 성실한 직업인으로서의 평범한 사회의 한개 구성 인자가 되려고 노력하는 여성들, 그 정도로 풀이해 두는 게 아마 옳을 것 같다.  「쉘부루」주인 정(鄭)마담 이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많아도 전위미술을 하던 해프닝의 기수 정(鄭)이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다.  홍익(弘益)대학 서양화과를 나온 정(鄭) 마담은 68년부터 이른바 환경예술이라는 것을 내세우고 10여명의 동인들과 함께 해프닝의 실태를 보여 줬을 때 세상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랐었다.  미술 전문가들은 정통 예술에 대한 반역이라 해서 놀랐고, 일반 시민들은 젊은 여자가 많은 사람 앞에서 전신을 노출시킨 그 대담성에 놀랐었다.  그러나 젊은 미술학도라는 긍지 속에 살아온 정(鄭) 마담은 세상 사람들의 어떠한 빈축이나 저항에도 주저없이 그 일을 계속했다.  그 해 여름에는 한강 백사장에서 많은 구경꾼이 모인 가운데「한강변(漢江邊)의 타살」이라는 이름의 본격적인 해프닝을 벌였고「쉘부루」를 경영하게 된 것은 외국 유학의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때문이었다고 한다.  「쉘부루」- 프랑스 어느 지방의 마을 이름이라는데, 우리나라에 알려지는『쉘부루 우산』이라는 영화가 상영된 뒤부터인 듯.  작년 여름까지만 해도 탁구장으로 사용되던 2층 홀을 뜯어서 칵테일 하우스로 개조했다.  입구에 들어서면서부터 이상야릇한 색체와 구도를 한 그림이 눈에 띈다.  정(鄭) 마담이 학교 다닐 때 그린 현대 무슨 파의 그림이라든가 하는 알쏭달쏭한 그림이다.  벽마다 사진도 많다.「찰즈·브론슨」도 있고「알랑·들롱」도 있고「마릴린·몬로」도 있다.  현대 무슨 파의 그림과 어떻게 조화를 시켜야 할는 지는 모르겠지만 밋밋한 바람 벽보다는 사진이 걸려 있는 편이 낫겠다고 해야 할까.  전위미술을 했다는 주인 마담의 체취를 구태여 찾자면 실내를 장식한 새장 모양의 쇠창살에서 찾아볼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손가락 굵기만한 쇠창살이 테이블마다 듬성듬성 가려져 있다.  『술집이라고 하면 대개 어두침침한 것을 연상하는데, 저는 그게 싫었어요. 흰 빛을 강조한 선으로 방의 분위기를 밝게 하고 ,테이블마다의 프라이 버시를 최대한으로 보호해 보려고 했어요』  그대로 미술 강좌다, 하기는 그럴싸하다. 친구와 친척들의 도움으로 7,8백만원을 마련해서 처음「쉘부루」를 시작했을 때는 1년이면 빚도 갚고 유학 자금도 마련해서 계획대로 프랑스 유학을 떠날 수 있을 줄 알았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문을 열고 보니 모든 것이 예상과는 달랐다.『손님들은 비교적 모두 점잖은 분들 뿐이에요.그러나 처음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돈 잘 버는 직업은 못되는 것 같아요』  아직도 갚아야 할 빚이 많이 남아 있다.  1년의 당초 계획은 2년으로 늘어날 것 같다는 얘기다.  그래도 30평 남짓한 홀 안에는 테이블마다 손님이 가득하다.  손님들은 역시 화가가 가장 많고 작가, 교수들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러니까「쉘부루」의 마담 정(鄭)씨는 자연히 손님들과의 대담역을 맡게 된다.  수수한 바지에 짤막한 T샤쓰, 손으로 대강 다듬은 지바고 스타일 머리, 어느 모로 보나 정(鄭) 마담은 마담같지 않은 마담이다.  『제발 마담이라고 그러지 마세요. 그냥 미스 정(鄭)이라고 하면 되지 않아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손님이나 종업원들은 여전히 그를 정(鄭) 마담이라고 부르고 있다.  정(鄭) 마담이 스스로 마담이 아니기를 원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늦어도 내년 가을이면 마담업을 폐업하고 다시 본연의 미술학도로 돌아간다』는 계획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그는 자기를 프로페셔널 마담으로 보지 말아 달라는 것이다. 그는 그러한 계획과 고집을 실현시키기 위해 지금도 매일 미술공부를 하고 있다고 한다.  영업 시간이 끝나는 밤 11시 30분경 그녀는 주점의 뒷일을 종업원들에게 맡기고 퇴계로에 있는 그의 아틀리에로 향한다.  새벽 2시 또는 3시까지 그는 혼자서 미술 공부를 계속한다.  『전혀 안하면 손과 마음이 모두 굳어 버릴 것 같아서요』  그래서 잠은 기껏 많이 자야 매일 다섯시간 정도밖에 못 잔다고 한다. 이침 9시면 다시「쉘부루」에 출근해야 하니까.  『아직은 쇼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한 전위미술, 해프닝의 예술적 승화를 위해서 나는 결혼도 포기할 생각이에요』, 단호하다.  양장점과 미장원과 살롱이 촘촘히 들어선 명동(明洞) 한복판「쉘부루」에서는 오늘도 전위미술을 중심한 화제와 웃음과 칵테일이 쉴새 없이 오가고 있다.<재(宰)> [선데이서울 73년 7월29일 제6권 30호 통권 제250호] ●이 기사는 ‘공전의 히트’를 친 연예주간지 ‘선데이서울’에 38년전 실렸던 기사 내용입니다. 당시 사회상을 지금과 비교하면서 보시면 더욱 재미있습니다.
  • 이런일 저런일=딜럭스판 살롱 차린 재일교포

     「마찌이」란 일본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재일교포 거물급 실업가 정건영(鄭建永)씨가 지난 12일 도꾜 한복판에 TSK·CCC 살롱이란 딜럭스판 유흥 오락센터를 차렸다.  도꾜의 외교가(外交街)인「로꾸본기」(六本木) 한 가운데 자리잡은 TSK 살롱은 번영을 자랑하는 도꾜시내에서도 최고급의 시설과 규모를 간추렸다 해서 도꾜 최대의 화제가 되고 있다. 12일 오프닝 파티는 하루 종일 계속되었는데 정식으로 초대받은 손님만 무려 1만명. NHK 등 도꾜의 각 TV들이 매일 TSK 살롱을 소개하는 등 극성이다.  12일 하루 종일 계속된 오프닝 파티에는 유화열(柳和烈·올림포스 호텔 회장)씨 등 본국 인사들도 초청되었는데 정(鄭)씨는 앞으로 TSK 살롱의 지점을 파리 등 세계의 이름난 유흥관광지에 세울 계획이라고.<창(昌)> [선데이서울 73년 7월29일 제6권 30호 통권 제250호] ●이 기사는 ‘공전의 히트’를 친 연예주간지 ‘선데이서울’에 38년전 실렸던 기사 내용입니다. 당시 사회상을 지금과 비교하면서 보시면 더욱 재미있습니다.
  • 행복한 주부가 되는 첫걸음···이상적인 혼기(婚期)

    행복한 주부가 되는 첫걸음···이상적인 혼기(婚期)

     결혼 적령기는 국가와 민족 문명의 정도에 따라서 달라지게 된다.  원시인이나 원시문명인 채로 있는 현대의 남양군도의 민족들은 결혼 적령기가 훨씬 앞당겨져서 심지어는 소년기만 벗어나면 곧 결혼을 한다.  그런가 하면 풍족한 생활을 즐기는 미국에서는 틴에이저들의 결혼이 유행하는 반면 한국의 남녀들은 20살이 지난 뒤에야 혼인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30살이 지난 여성은 노화 현상이 급히 나타나고 35살을 경계로 서서히 갱년기에 접어들면서 임신능력을 잃어간다.  때문에 여성들의 늦은 결혼이 신체적 정신적으로 불리한 영향을 미칠 것은 자명하다.  나이가 많으면 불임의 위험이 커질뿐 아니라 임신을 하더라도 태아의 발육이 나빠지고 산도(産道)의 탄력성이 감퇴되기 때문에 사산(死産)의 위험이 증가한다.  저능아도 만혼의 어머니에게서 많이 태어난다는 통계가 나와 있다. 따라서 25살까지는 결혼하는 것이 안전하다.  또 여성이 섹스를 오랫동안 억제하면 공격적인 성격이 되거나 히스테리를 유발시키는 등 정신적 부작용을 일으키기도 한다.  결혼을 성공적으로 이끌려면 신체에 따른 정신적인 성숙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정신적 성숙은 다음의 다섯가지 사실을 점검할 수 있다.  첫째, 한 여성으로서 충분히 성숙한 마음으로 이성을 맞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돼 있을 때.  둘째, 결혼에 대한 비합리적 공포나 환상적 기대, 자기 중심적인 해석을 하는 대신 결혼이란 엄숙한 사실을 이해하고 이에 대한 의무를 질 수 있는 상태가 됐을 때.  세째(셋째), 남성과의 사랑을 주고 받을 수 있는 마음의 상태와 기교가 갖춰졌을 때.  네째(넷째), 부모와 형제를 포함한 모든 친척들에 대한 강한 애정적 집착이나 결혼 대상자 이외의 교제하는 남성들과의 관계에 대해 체념할 수 있는 마음의 상태가 됐을 때.  다섯째, 결혼할 상대방과의 일정 기간의 교제를 통한 정신적 교류가 충분히 돼 있을 때.  몽상적인 행복을 결혼에 기대하는 여성은 성격이 이기적이거나 의존적이기 때문에 결혼생활을 파탄으로 이끌기 쉽다.  결혼하려는 남성의 셩격이나 학력 직업 인생관을 충분히 파악하고 특히 자신과의 관계에서 일치되는 점과 견해의 차이를 살피고 둘 사이에 갈등이 생겼을 때 극복할 수 있는 지혜를 길러야 한다.  ◇ 도움말= 백상창(白尙昌·서울가정법원 조정위원) 박사 [선데이서울 73년 7월29일 제6권 30호 통권 제250호] ●이 기사는 ‘공전의 히트’를 친 연예주간지 ‘선데이서울’에 38년전 실렸던 기사 내용입니다. 당시 사회상을 지금과 비교하면서 보시면 더욱 재미있습니다.
  • 순결을 주장하는 18살 처제와 형부

    순결을 주장하는 18살 처제와 형부

     어머니는 작은딸을 덮친 사위를「미성년자 간음」으로 고소했다. 응징을 하겠다고 서슬이 퍼렇다. 그러나 피해자인 딸은 사실을 극구 부인. 설상가상으로 공소시효도 이미 소멸됐다. 어린 처녀의 순결을 둘러싼 한 가정의 불협화음을 들어보면-.  사건의 발단은 두 딸을 가진 부모가 사위를 잘못 얻은 데서 비롯됐다.  고소한 백광자(白光子·가명·46) 여인은 슬하에 3남매를 두고 있었다. 맏이가 딸 김옥희(金玉姬·가명·26), 둘째가 아들 동복(東福·가명·23), 그리고 막내딸이 문제의 차희(次姬·18)양.  첫번째 결혼에 실패한 맏딸 옥희(玉姬)양이 다른 남자를 사귀게 됐다.  Y회사 직원 전일권(全一權·가명·30)씨를 우연히 알게 되어 사랑을 속삭이기 시작한 것.  둘은 몇차례 데이트를 한 뒤 바로 동거생활에 들어갔다. 기회를 보아 정식 결혼(식)을 올리기로 하고 여자의 집에서 먹고 자기로 했다.  그렇게 살기를 4년, 별로 다툼없이 화목하게 살았다. 다른 여자를 넘보는 따위의 탈선도 없었고 미더운 남편으로서 이 집안의 대우를 받았다. 그런데 이쯤 해서 전(全)씨는 차츰 빗나가기 시작했다는 것.  아내의 목걸이 팔뚝시계를 팔아 먹고 심지어 장모의 주머니까지 털었으며 하겠다던 결혼식은 차일피일 미루기만 하고, 하는 소행이 날로 위태로와(위태로워) 갔다는 것이 백(白)여인 측의 주장.  71년 9월20일 밤이었다. 밤 12시가 가까와(가까워) 돌아온 전(全)씨는 처남과 처제가 자고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전(全)씨는 밤늦게 귀가하는 날이면 아내의 짜증이 듣기 싫어 처제의 방에서 자기 일쑤였다.  동거생활을 한 4년 동안에 그러한 날이 30여차례나 되었다. 다음 날 날이 밝았다. 다른 때 같으면 일찍 잠에서 깬 전(全)씨가 아내의 방으로 어슬렁 기어 들어왔을 시간이었다. 아침 8시가 되어도 남편이 나타나지 않자 야릇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동생이 자는 방문을 살며시 열고 들여다 보았다.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 벌어지고 있었다. 함께 자던 남자 동생은 간 곳이 없고, 전(全)씨는 동생의 이불 속에 들어가 있었다. 그녀는 뛰어들어 덮고 있는 이불을 낚아챘다.  이불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동생은 이불을 결사적으로 잡고 있었다. 그때 차희(次姬)양의 나이는 16살이었다.  격분한 언니는 기어이 이불을 젖히고 알몸뚱이에 가까운 두 사람의 잠자리를 목격했다.  『개만도 못한 것들···』언니는 치솟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매질을 하고 다그쳤으나 차희(次姬)양은『아무 일도 없었다』고 주장했다. 남편 또한 같은 주장이었다.  어머니도 이 사실을 알았으나 엄한 아버지에게는 비밀로 했다. 그러나 김(金) 여인은 전(全)씨와 더 이상 동거생활을 계속할 수 없었다.  동네가 창피해서 크게 떠들지도 못한 김(金)여인은 병석에 눕게 되었다. 1년동안 병원엘 다니면서 치료를 했다. 전(全)씨는 치료비를 벌어오겠다며 집을 나간 뒤 이내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전(全)씨는 또 다른 여자와 어울리고 있었다. 수소문 끝에 이 사실을 확인한 모녀는 치를 떨었다.  그래서 참다 못한 백(白) 여인은 전(全)씨를 차희(次姬)의 친권자로서「미성년자 간음」으로- 그리고 김(金)여인은「혼인빙자 간음」으로 지난 6월18일 드디어 두개의 죄목을 들어 동시에 고소장을 냈다. 검찰에서 차희(次姬)양과 전(全)씨는『그런 사실이 없다』고 부인했다.  고소인인 언니는『네가 그 사내에게 미친 게 아니냐』며 바른대로 대답해 달라고 애원했다. 아무리 가족들이 타이르고 매어달려도(매달려도) 소용이 없었다. 그뿐만이(그뿐이) 아니다. 사건을 수사한 결과 두 사건(고소) 모두가 공소권이 없는 것이었다.  고소인들은 억울하다고 울고 있다. 아무리 울어도 법으로써는 어쩔 수 없이 끝난 사건이다.  현행 형법은 이같은 친고죄에 있어서「혼인빙자 간음」(2년 이하의 징역)은 고소인(본인)이 사실을 안 날부터 6개월 이내에 고소하지 않으면 공소권이 소멸한다.「미성년자 간음」(5년 이하의 징역)의 경우는 고소할 수 있는 사람이 본인 또는 친권자이다. 그런데 본인은 행위 당시에 이미 사실을 알았던 것이기 때문에 행위 일부터 6개월 안에 고소를 하지 않으면 할 수 없다.  또 친권자가 딸의 의사에 관계없이 고소를 할 수 있으나 이 경우에도 딸이 간음을 당한 것을 안 날부터 6개월 이내에 고소를 해야 한다. 그러나 아직도 이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차희(次姬)양의 아버지가 그의 이름으로 다시 고소를 한다면 고소가 성립된다는 이야기.  어린 차희(次姬)양은 과연 순결을 지켰을까. 아니면 왜 형부편을 들었을까. 공소시효에 걸려 법도 심판을 내리지 못한 사건의 진상은 밝혀질 것인지-.  <찬(燦)> [선데이서울 73년 7월29일 제6권 30호 통권 제250호] ●이 기사는 ‘공전의 히트’를 친 연예주간지 ‘선데이서울’에 38년전 실렸던 기사 내용입니다. 당시 사회상을 지금과 비교하면서 보시면 더욱 재미있습니다.
  • 해수욕장에 살롱 차린 탤런트 150명

     MBC 탤런트 1백50명이 물장사에 나섰다. 전북 변산해수욕장에 콜라·코피 전문의「엠비시 살롱」을 내고 탤런트들이 마담 겸 레지 겸 주방장으로 활약하는 것. 여름 휴가를 해수욕장에서 일하며 보내는 MBC 탤런트들의 바캉스「바자·세일」작전 만세.  전북 부안군내 변산 해수욕장. 아직은 본격적인 피서 인파가 몰리지 않아 비교적 한적한 변산이 19일부터 갑자기 흥청대기 시작했다. MBC 탤런트 20여명이 찾아와 천막을 치고 의자를 내고 하여 단 2시간만에 훌륭한 살롱이 선 때문. 이날 저녁에는 MBC 살롱이란 플래카드가 쳐지고 MBC 탤런트들이 레지로 활약하는 가운데 물장사가 시작됐다.  1백만원 벌기 목표로 낸 변산 MBC 살롱의 메뉴는 코피·주스·콜라·핫도그·화장품·과자 등. 바닷가의 미니 백화점인 셈이다. MBC 살롱 마담 격인 탤런트 박규채(朴圭彩). MBC 탤런트실 실장직을 맡고 있는 박규채는 바로 이 매머드 바캉스 작전을 꾸미고 지휘하는 등 맨발로 뛰어 다닌 야전군 사령관 격.  『어차피 여름휴가는 가야 하는 것이고 기왕 쉬는 바에야 의미있는 일을 해보자는데 착안을 했어어요. 한달동안 난생 처음 물장사를 해 볼 참인데 이 이익금은 새마을 기금으로 기부할 작정입니다.』  1백50명의 대식구를 거느린 MBC 탤런트실은 여느 TV국과 달리 이런 외도(?)를 유난히 많이 해 온 셈.  72년에 전국 방방곡곡을 찾아 새마을 위문 공연을 가졌고 거의 정기적으로 지방 도시를 찾아 시민위안의 밤을 갖기도. 자매 결연한 1사단 위문 공연도 자주 하고 25·26일에는 서울 미아동 대지극장에서 새마을 기금 모으기 쇼에도 나섰다. 28일에는 부안군민 위안의 밤을 열기도. 변산의 MBC 살롱 경영도 말하자면 이런 일련의 사회참여 사업의 하나인 것이다.  『탤런트에 대한 일반의 인식을 새로이 하고 싶습니다. 고작 브라운관 속에서만의 탤런트라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직접 시민 농민 군인들을 찾아 함께 노래하고 호흡하는 가운데 탤런트란 이런 사람들이다 하는 것을 피부로 느끼게 해 주고 싶어요. 함께 새마을 기금도 모을 수 있으니 더욱 좋고요.』  사실상 박규채는 TV 출연보다 이런 외도에 더 힘을 쏟고 있는 형편. 다행히 MBC 전속 탤런트들은 다른 TV국보다 선·후배 의식이 깍듯할뿐 아니라 연대 의식이 강해 의외로 아런 일에 손발이 척척 맞아 들어가고 있다.  MBC 탤런트의 바캉스 대작전은 MBC뿐만 아니라 1사단·부안군·낙희화학·해태제과·한국화장품·변산 애향회 등의 합작품. 자매결연 사이인 1사단이 텐트 침구 일체를 대여해 주는가 하면 부안군에서는 전기·수도·전화 일체를 가설. 각 메이커는 무료로 상품을 내놓았고 애향회는 살롱 주위의 경비를 맡기로 했다. 거창한 바캉스,「바자 세일 작전」에 나서면서도 사실상 MBC 탤런트들의 투자액은 전무. 맨손으로 뛰어서 훌륭한 살롱을 마련해 낸 셈이다.  MBC 살롱 경영은 4박5일 단위로 전속 탤런트 전원이 동원되어 꾸려질 예정. 최불암(崔佛岩)·김민정(金珉廷)·송재호(宋在鎬)·김관수 등 MBC의 톱 탤런트들이 교대로「바자·세일」에 나서게 된다.  그러나 실장 주방장이며 레지 역할은 주로 신인 탤런트들이 맡고 톱 탤런트들은 판매 촉진책으로 얼굴 마담역을 맡을 예정.  MBC 살롱에 가면 톱 탤런트를 만날 수 있다는 소문을 내어 손님을 이끄는 작전을 쓰는 셈. 그러고 보면 탤런트들은 무료로 바닷가에서 휴가를 보낼 수 있어 좋고 매상은 매상대로 오를 것이니 그야말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격.  구태여「바자·세일」장소를 변산으로 한 것은 경치가 좋은 데다 다른 해수욕장에 비해 비교적 조용한 곳이기 때문. 더우기(더욱이) 마침 변산 근처가 고향인 탤런트가 많아 음양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28일 변산 해수욕장에서 벌일 부안군민 위안의 밤은 전주(全州)문화방송과의 합작품.  MBC 살롱에서 메뉴의 가격은 콜라 90원, 코피 50원.  변산 해수욕장 종래의 물가와는 엄청나게 차이가 날 정도의 싼 겨격이다. 다른 해수욕장도 마찬가지지만 변산도 해수욕객이 많고 적음에 따라 물가가 오르락 내리락하기 때문.  한창 때는 콜라 1병에 1백50원에도 동이 나는가 하면 2백원 짜리 여관방이 8천원까지 뛴다는 희한한 곳. 이것은 한창 때면 10만원의 인파가 몰리기 때문에 빚어지는 과열 현상. MBC 살롱은 한달 내내 이 가격을 그대로 고수하여 물가 안정(?)의 몫도 차지하리라고. 변산 애향회에서 살롱 주변 경비를 맡았다는 것은 이러한 MBC 살롱의 바자 세일에 불만을 품은 일부 악덕 상인들이 혹 횡포를 부지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미리 대비한 것.  8월 하순까지 미련될 이익금은 부안군내 모범 새마을 부락에 보낸다. 판매 촉진을 위해 가장 많은 액수를 판 탤런트에게는 푸짐한 상품을 줄 시상 제도까지 마련해 놓고 있다. 가장 극성으로 바자 세일즈를 해낼 탤런트는 과연 누구일지···.  <변산(邊山)에서 신모수(申模秀)기자> [선데이서울 73년 7월29일 제6권 30호 통권 제250호] ●이 기사는 ‘공전의 히트’를 친 연예주간지 ‘선데이서울’에 38년전 실렸던 기사 내용입니다. 당시 사회상을 지금과 비교하면서 보시면 더욱 재미있습니다.
  • “남이 가지 않는 길… 전통문화 잇는 자부심 느껴요”

    “남이 가지 않는 길… 전통문화 잇는 자부심 느껴요”

    “우리 것을 천대하고 전통문화를 등한시하는 세태가 안타까워요. 남이 가지 않는 길을 걷지만 한국 고유의 문화를 이어 간다는 자부심을 느껴요.” 제9회 대한민국문화미술대전에서 ‘선의 예술’이란 작품으로 대상을 받은 임재운(60) 화백이 25일 생소한 작품활동을 하면서 겪은 맘고생을 우회적으로 표현했다. 서울 강북구 미아삼거리역 인근의 곰팡내 나는 지하 작업실에서 그를 만나 38년 동안 오롯이 한 장르만 고집하며 작품 활동에 매달려온 인생을 들어 봤다. “선의 예술이란 작품은 나전칠기 공예, 목공예, 수공예 등 여러 전통공예에 들어가는 스케치를 떠올리면 쉽죠. 송곳 같은 펜촉에 특수잉크를 묻혀 트레싱지(기름종이)에 그리는 그림을 연상하면 됩니다.” 그의 대상 작품은 3개월의 산통 끝에 탄생했다. 그의 작품에는 민화가 그러듯 보고 있으면 편하다. 까치와 공작, 소나무, 거북, 시냇물, 산 등 산수화에 나오는 모든 것들을 품고 있다. “우연히 러시아 국립예술대학 총장을 알게 돼 화실을 보여 준 적이 있어요. 작품들을 보고 깜짝 놀라더라고요. 이런 한국적인 정서를 담은 작품은 처음 본다며 샘플을 가져가더니 1998년 러시아 국립미술박물관에 초대를 했어요. 한국에서조차도 무명 화가인 내게 이런 엄청난 제의를 할 줄은 꿈에도 몰랐죠.” 임 화백은 이후 네 차례나 러시아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한국적인 것이 최고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서구 문물에 밀려 이젠 누구도 걷지 않으려 하는 길을 꿋꿋하게 걸어온 인생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사실 그는 공모전에 작품을 출품하면서도 남모를 고생을 했다. 특수용지인 트레싱지에 그림을 그리는 탓에 작품 사진을 찍어도 흐릿하게 작품이 나와 카탈로그에 실을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액자화하기도 힘들었다. 공모의 꿈은 남의 얘기였다.지성이면 감천. 서울 시내를 돌아다니며 수소문한 끝에 스캔 작품을 통해 제대로 된 카탈로그를 만들 수 있게 됐다. 작품 장르도 생소했다. 민화 같은 선(線) 그림을 출품한 건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게다가 그는 학연, 지연, 혈연도 없었다. 4년간 홍익대 미술교육원에서 동양화를 배운 게 전부다. 하지만 심사위원들이 모두 그에게 손을 들어 줬다. 전통문화를 이어 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수상 자격이 된 셈이다. “돈은 안 되고 고된 작업이라 누가 선뜻 배우려고도 않고…. 제자를 키우고 싶어도 통로가 없어요.” 임 화백의 날숨이 절박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글 사진 강동삼기자 kangtong@seoul.co.kr
  • 스타의 비밀=안방극장의 민비(閔妃) 김영애 양

    스타의 비밀=안방극장의 민비(閔妃) 김영애 양

    남달리 작고 오목조목한 얼굴, TV 드라머(드라마)『민비』의 히로인 김영애양(23). 얼마 전엔 영화『검개구리 만세』에서 주연하여 배우 겸 탤런트 스타로서의 인기도를 높이고 있다. 그녀와의 61문 61답. 1) 신장은-160cm. 2) 몸무게 및 사이즈 47kg에 34-23-35. 3) 출생지 부산시 영도구 영선동. 4) 성격-차분하면서도 내성적. 5)출연 작품-오직『민비』뿐입니다. 6) 어려서 민비에 대한 이미지는-고약한 여자. 7) 민비를 맡고 나서 그녀에 대한 느낌-본래가 악인이 없듯 그녀도 원천적인 악인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오히려 그녀의 처지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지요. 8) 자신의 성격과 용모로 보아 민비역에 무리는 아닌지-성격은 별로 걸맞지 않지만 차가운 용모가 민비를 그리는데 조금은 맞아 떨어지는 것 같아요. 9) 몸이 좀 약해 보이는데-얼굴이 작아 그렇게 약해 보일뿐 오히려 건강한 편이니 안심하세요. 10) 자신의 매력 포인트-코, 남들도 조각가가 빚어 놓은 듯 귀엽다고 칭찬해요. 11) 남자에 대한 호기심은 언제부터-여고 2년이던 19살때. 12) 그 대상은-영어선생이었어요. 13) 호기심을 갖게 하는 남자의 타이프는-나를 전혀 관심 밖에 두는 듯 거들떠 보지도 않는 남자. 14) 보이 프렌드는-약간명. 15) 처음 데이트는 몇살때 누구와-19살때 이름은 노 코멘트. 27살 난 미남 청년이었지요. 16) 그 후에도 만났는지-꼭 두번. 17) 데이트 코스는-두번 다 해운대. 18) 요즘 특별히 사귀고 있는 남자는- 전혀 없읍(습)니다. 19) 출신 학교는-부산여상(68년도 졸업) 20) 제일 좋아했던 과목은-국어·역사 21) 싫어했던 과목은-수학 22) 즐겨 읽는 책은-「앙드레·지드」의『좁은 문』23) 처음 본 영화는-「헤일리·밀즈」가 1인2역으로 나온『헤어질 때와 만났을 때』. 24) 감명 깊었던 영화는-「오드리·헵번」「그레고리·펙」의『로미의 휴일』. 25) 가장 좋아하는 스타는-「카트리느·드뇌브」26) 존경하는 인물은-고(故)「존· F·케네디」. 27) 좋아하는 가수는-「톱·존즈」. 28) 실연 당해 본 일 있는지-있다. 29) 몇 살때 상대는 누구였는지- 21살때 첫 사랑이었어요. 상대 이름은 곤란. 30)유혹은 자주 있는 편인지-가끔. 31) 유혹의 손을 뻗치는 남자는 주로 어떤 층인지-색안경을 쓰고 보는 청년들. 32) 요즘 결혼을 종용하는 남자는 있는지-네···.(있다는 대답) 33) 무엇하는 사람인가-「노·코멘트」34) 그 남자와 결혼할 생각인가-결혼할 생각 없어요. 35) 잘 먹는 음식은-냉면. 36) 의상은 몇벌-60여벌 정도. 37) 그 중 가장 값비싼 것은-4만원짜리 여름 윈피스. 38) 즐겨입는 차림은-바지에 T샤쓰(셔츠) 차림. 39) 하루 화장 시간은-평소에는 전혀 하지 않고 TV 녹화있는 날만 30분씩. 40) 치한에게 쫓겨 봉변당한 일은-꼭 한번 얻어 맞기까지 했어요. 41) 어떻게 회피했는지-소리소리 지르고 줄행랑쳤지요 뭐···. 42) 결혼은 언제쯤- 한 3년 후쯤. 43)특별한 이유라도-특별한 이유는 없고 직아(아직의 오타) 가정을 원만히 꾸려나갈 자신이 없어요. 44) 배우자의 타이프는-같은 직업이 아닌 과묵한 성품의 남자. 45) 연령 차이는-5~10년쯤 웃(윗)사람. 46) 탤런트 생활은 언제까지-결혼 후라도 남자만 이해해 준다면 끝까지 해볼 생각이에요. 47) 연극을 해 본 경험은-『카라마조프의 형제들』『학마을 사람들』의 두편을 했어요. 48) 담배와 술 실력은- 담배는 전혀 못하고 술은 맥주 한컵 정도(5백cc) 49) 잊을 수 없는 일은-아버지에게 매 맞고 가출하던 일. 50) 어디 갔었는지-친구의 집. 51) 가출한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그저 묘한 반항심 였을 뿐이지요. 52) 며칠이나 가출했는지-꼭 3일. 53) 요즘 속상하는 일은 결혼하자는 그 청년 때문에 약간 골치예요. 54) 월 수입은-약 7만원 정도. 55) 팬은 주로 어떤 층이고 팬레터는-학생과 나이 지긋한 분들. 56) 하루 받는 팬 레터는-평균 10여통. 57) 다음 출연 작품은-아직 미정. 58) 그 많은 대사를 외는 비결은-글을 외기보다는 상황 판단에 주력하면 돼요. 59) 바캉스 계획은- 설악산과 동해안 바닷가로 가볼까 해요. 60) 가족 관계는-3남1녀 중 장녀 61) 현주소-중구 산림동 162 (27-5191 교환 1061) <열(悅)> [선데이서울 73년 7월22일 제6권 29호 통권 제249호] ●이 기사는 ‘공전의 히트’를 친 연예주간지 ‘선데이서울’에 38년전 실렸던 기사 내용입니다. 당시 사회상을 지금과 비교하면서 보시면 더욱 재미있습니다.
  • ‘124억 복권기부’ 할머니, 당첨 1년만에 사망

    1120만 달러(한화 124억원)의 복권당첨 행운을 자신이 아닌 이웃을 위해 온전히 바쳤던 70대 캐나다 여성이 최근 사망해 안타까움을 주고 있다. 캐나다 CBS에 따르면 노바스코샤 주에 사는 바이올렛 라지(79) 할머니가 난소암으로 지난 18일(현지시간) 세상을 등졌다. 라지 할머니는 지난해 7월 복권에 당첨된 뒤 4개월 만에 대부분의 금액을 자선단체, 교회, 병원 등에 기부해 감동을 준 바 있다. 복권당첨 당시 난소암 말기 항암치료 중이었던 라지 할머니는 “원래 내 돈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쉬움도 전혀 없다.”면서 “이 돈이 도움이 절실한 이웃들에 전해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큰 행복”이라며 초연한 자세를 잃지 않았다. 할머니와 38년간 해로한 남편 알렌 역시 기부의 뜻을 같이 한 것으로 전해졌다. 위급한 상황을 대비해 당첨금의 약 2%만 남긴 채 모든 돈을 이웃에 전달하면서도 부부는 “여행을 가거나 좋은 물건을 사는 것보다 행복을 나누는 게 훨씬 더 기쁘다.”고 소감을 전한 바 있다. 서울신문 나우뉴스 강경윤기자 newsluv@seoul.co.kr  
  • 가수로 성공한 동두천 혼혈소녀, 38년만에 ‘미군 오빠’ 만났다

    가수로 성공한 동두천 혼혈소녀, 38년만에 ‘미군 오빠’ 만났다

     가수 인순이(54)가 어렵던 어린시절 자신을 도와줬던 당시 주한미군 병사 로널드 루이스(58)씨를 극적으로 재회했다.  미국 매체 ‘델라웨어 온라인’은 지난 16일(현지 시각) 미국에서 순회 공연 중인 인순이가 델라웨어주 윌밍턴에 살고 있는 루이스씨를 38년 만에 만났다고 보도했다.  인순이는 루이스씨를 보자 마자 끌어안으며 울음을 터뜨렸다. 인순이는 “다시 만난 게 꿈만 같다.”고 했다. 루이스씨도 눈물을 쏟았다. 인순이는 이 자리에서 이웃 주민의 제안으로 즉석에서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불렀고, 루이스씨의 가족들을 감동시켰다.  두 사람이 만난 것은 40년 전인 1972년 동두천. 루이스씨가 19세, 인순이는 15세였다. 루이스씨는 “인순이는 혼혈아라는 이유로 따돌림을 당해 늘 집 밖에 혼자 앉아 있곤 했다.”고 회상했다. 그는 “다른 동료들과 함께 옷도 주는 등 어떻게든 돕고 싶었다.”고 말했다. 인순이는 루이스씨를 오빠로 여기며 따랐다고 한다.  루이스씨는 1년 뒤인 1973년 미국으로 돌아갔고, 연락이 뚝 끊겼다. 그러다가 최근 한 주한미군 장군의 도움과 페이스북 덕분에 연락이 닿았다.  인순이는 이 자리에서 루이스씨에게 물결을 헤치고 나가는 일곱 마리 오리 조각을 선물했다. 조각에는 ‘당신없이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Without You, I am Nothing)’. 루이스씨는 인순이의 어린 시절을 담은 사진첩을 돌려줬다. 이 사진첩은 인순이가 1973년 한국을 떠나던 루이스씨에게 주면서 다시 만날 때가 돌려받기로 약속했다.  인순이는 이날 루이스씨의 집에서 1시간 정도 머물며 38년간 쌓인 이야기를 나눴다. 루이스씨는 17일 뉴저지주 시코커스에서 열린 인순이의 콘서트에도 참석해 공연을 지켜봤다  인터넷서울신문 event@seoul.co.kr
  • “큰오빠 같은 그의 눈빛 잊은 적 없어요”

    “큰오빠 같은 루이스의 눈빛은 잊은 적이 없어요.” 혼혈이라는 이유로 학교에서조차 쫓겨났던 15살 소녀 김인순은 1972년 어느 날 네 살 많은 미군 로널드 루이스를 만났다. 늘 혼자였던 소녀가 안쓰러웠던 그는 다른 미군들과 옷도 사주고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줬다. 38년이 흐른 지금 이 소녀는 ‘인순이’라는 이름의 대한민국 대표 가수가 됐지만 자신을 친동생처럼 대해 줬던 루이스를 잊은 적이 없다. 루이스도 마찬가지였다. 재회의 희망을 포기한 이들에게 미국 장성과 소셜네트워크사이트 페이스북의 도움으로 기적이 일어났다고 AP통신이 17일(현지시간) 보도했다. 공연차 미국을 방문한 인순이는 16일 델라웨어주 노스웰밍턴에 사는 루이스를 보자마자 눈물을 터뜨렸다. ‘당신 없이는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Without You, I’m Nothing)라는 문구가 새겨진 동상과 꽃을 선물한 인순이는 앨범을 받고 또다시 글썽였다. ‘나중에 만날 때 돌려 달라.’고 건넸던 어린 시절 자신의 사진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자리에서 인순이는 한 주민의 요청으로 즉석에서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불렀고 지켜보던 모든 이들이 눈물을 흘렸다고 통신은 전했다. 나길회기자 kkirina@seoul.co.kr
  • [사일사]인순이, 동네 미군 오빠와 38년만에 만나…

    [사일사]인순이, 동네 미군 오빠와 38년만에 만나…

     “큰오빠 같은 루이스의 눈빛은 잊은 적이 없어요.”  혼혈이라는 이유로 학교에서조차 쫓겨났던 15살 소녀 김인순은 1972년 어느 날 네 살 많은 미군 로널드 루이스를 만났다. 늘 혼자였던 소녀가 안쓰러웠던 그는 다른 미군들과 옷도 사주고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줬다.  38년이 흐른 지금 이 소녀는 ‘인순이’라는 이름의 대한민국 대표 가수가 됐지만 자신을 친동생처럼 대해 줬던 루이스를 잊은 적이 없다. 루이스도 마찬가지였다. 재회의 희망을 포기한 이들에게 미국 장성과 소셜네트워크사이트 페이스북의 도움으로 기적이 일어났다고 AP통신이 17일(현지시간) 보도했다.  공연차 미국을 방문한 인순이는 16일 델라웨어주 노스웰밍턴에 사는 루이스를 보자마자 눈물을 터뜨렸다. ‘당신 없이는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Without You, I’m Nothing)라는 문구가 새겨진 동상과 꽃을 선물한 인순이는 앨범을 받고 또다시 글썽였다. ‘나중에 만날 때 돌려 달라.’고 건넸던 어린 시절 자신의 사진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자리에서 인순이는 한 주민의 요청으로 즉석에서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불렀고 지켜보던 모든 이들이 눈물을 흘렸다고 통신은 전했다. 나길회기자 kkirina@seoul.co.kr
  • 즉석 애인 죽일뻔한 보트놀이 청년

    즉석 애인 죽일뻔한 보트놀이 청년

     서울특별시 경찰국(현 서울특별시 지방경찰청)은 여름철을 맞아 뚝섬유원지 등 한강 전역 물놀이의 위험을 막기 위해 지난 6월25일부터 한강여름경찰서를 뚝섬에 설치하고 그 밑에 뚝섬직할파출소와 광나루파출소를 따로 두었다. 동부경찰서 보안과장인 문동주(文東柱) 경정이 서장이고 휘하에 38명의 경찰과 민간 구조대원 50여명이 있다. 민간 구조대원은 물론 이곳에 파견된 경찰은 모두가 수영, 수상 구조작업의 명수들. 수중 탐색작업을 벌이느라 에어 크론을 등에 멘 이들의 민첩한 움직임은 마치 물개를 연상케 한다.  이들의 임무는 위험 지역의 경비와 인명 구조.  출입금지 지역에서 놀아나는 술취한 사람을 안전한 곳으로 업어 나르는 일, 물에 빠진 사람의 구조는 물론 유흥객의 풍기 단속, 또는 깊숙히 가라 앉은 사체를 인양하기 위한 수중 탐색 등 하나같이 고된 일들.  여름 한철이긴 하지만 인파가 하루 평균 20만명이 밀리는 이곳의 경찰 업무는 한 사람 앞에 3천명을 담당하는 벅찬 것. 물이 있고 사람이 있는 동안은 일정한 취침 시간도 없는 불침범이다. 그런데도 지난 해에 26명의 인명이 앗겼고 올 들어 벌써 18명이 이곳에서 목숨을 잃었다. 익사 직전에 여름 경찰에 의해 목숨을 건진 사람은 올해만도 죽은 사람의 1백곱에 가까운 1천5백여명. 여름 한철 업무를 맡는 이들이 체험한 이야기를 들어보면 한강은 결코 즐겁고 상쾌한 곳만은 아닌 듯.   제1화=동승(同乘)처녀 물에 빠뜨려 놓고 “구해 주려 했다” 시치미 뗀 사나이  D=만일 아가씨가 죽었더라면 살인죄가 적용될 수도 있었던 사건이 있었어요.  E=아가씨와 보트놀이 하던 남자가 자신의 사랑을 아가씨가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행패부린 박(朴)모씨(34·서울 서대문구 남가좌동) 이야기군.  D=인파가 20만이 밀린 지난 일요일에 있었던 일이지요. 박(朴)은 뚝섬유원지에서 혼자 놀러온 김(金)모양(24)을 꾀어 보트놀이를 했어요.  A=아가씨 헌팅에 재주깨나 있고 돈푼이나 있는 사내였던 모양이지.  D=천만에, 나중에 드러났지만 빈 털터리에 직업도 없는 건달이었어요. 주머니에는 딱 5백원이 있었다는 이것이 그 엉큼한 사업 자금이 된 거지요.  A=아무리 즉석(현지) 조달이라고는 하지만 지독한 얌체로군요.  D=아뭏든(아무튼) 보트를 빌어(빌려) 가지고 흥겹게 노를 저으며 수심이 5m가 넘는 강심에 이르렀을 때였어요. 30분 가량 한 보트 속에서 놀았으니까 웬만큼 무드가 익었든지 사내의 수작이 시작됐어요. E=수영복을 벗기려고 덤벼들었다더군.  D=아니야. 처음에는 함께 물에 들어가 수영을 하자고 꾀었었지. 그러다가 말을 듣지 않으니까 엉뚱한 수작을 부린 거예요.  A=둘 다 수영복 차림이었다던데 물에 들어가는 것을 거절했을까.  D=김(金)양은 한치도 헤엄을 못 치는 맥주병이었거든요. 게다가 처녀인 김(金)양은 수작이 너무 당돌한 박(朴)이 무서워졌다는 거죠. 약 20분을 그렇게 실랑이하다가 끝내 거절을 당하자 기어이 물 속에 끌어들일 속셈으로 보트를 뒤엎고 말았어요.  A=잘못되어 둘 다 죽었더라면 정사했다고 소문날 뻔했군.  D=박(朴)은 수영의 명수였어요. 1km쯤은 단숨에 헤엄칠 수 있는 정도의 실력이었으니까요. 보트가 엎어지는 순간 때마침 그 옆을 순찰하던 우리 경비정이 김(金)양을 건져 내자 『내가 건져 주려고 했는데』라며 뒤따라 오더군요. 즉결에 넘겼는데 29일쯤 구류 처분을 받고 지금쯤은 영창에 있을 거예요.  제2화=물먹은 소녀 구하고 “소녀와 키스했다” 추문 뿌린 구조원  E=키스 소문에 홍당무가 되었던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가 있어요. 지난 10일 저녁 때쯤 직원들이 모두 현장 경비를 나가고 혼자 사무실을 지키고 있을 때 였어요. 한 민간인이 물에 빠져 혼수상태인 최(崔)모양(16·성수동2가)을 업고 들어왔더군요. 워낙 물을 많이 마셔서 위급한 상태였어요.  C=질식한 지 얼마나 되었었는데?  E=약 15분쯤 되었던 모양이에요. 몸이 서서히 굳어지고 있었으니까요. 하는 수없이 혼자서 물을 토해 내게 하고 인공호흡을 시도했어요. 10여분을 계속 했어요. 회복이 되지 않더군요. 비상 수단으로 코와 입을 빨았지요.  C=무언가 잘못된 게 있었던 모양이군.  E=말도 말아요. 배속 물을 토했으나 기관지가 막혀 있었어요. 결국 3컵 가까이 되는 그 물을 제가 입으로 빨아 마신 거예요.  C=『소녀와 키스했다』는 추문은 그래서 생긴 것이었군요.    제3화=5대 독자 잃고 경찰 나무란 시민의 행패  자신의 부주의로 죽은 자식을 경찰의 잘못 때문인 것처럼 행패를 부리는 엉뚱한 시민들도 가끔 나타나서 골치를 썩입니다. 이것도 지난 일요일에 있었던 일인데 죽은 5대 독자를 살려 놓으라고 생때를 쓰는 시민이 있었어요.  C=어린이들끼리 물놀이 나왔다가 물에 빠져 죽은 김(金)군(6·성수동) 이야기군. 아무리 생업에 바쁜 사람이지만 지독하게 뻔뻔스런 친구더군.  B=2살 위인 누나와 무릎에 닿는 물가에서 놀다가 김(金)군이 깊게 파인 웅덩이에 빠졌던 거예요. 신고를 받고 달려갔을 때에는 이미 물 속에 깊이 가라앉아 보이지를 안했어요. 날이 저물도록 그 주변 물 속을 뒤졌으나 나타나지 않았는데 다음 날 새벽에 1km 하류에서 인양했어요.  C=아버지가 나타난 것은 그 뒤였(었)어요. 변사 처리도 끝나지도 않은 아들의 시체를 미친 듯이 자전거에 싣고 달아나려고 하더군요. 내가 덤벼 들어『아직 못가져 간다』고 만류했더니『너희들이 경비를 잘못했기 때문에 죽었으니 살려 놓으라』고 억지를 쓰더군요. 딱한 일이에요.  <정리 배기찬(裵基燦) 기자> [선데이서울 73년 7월22일 제6권 29호 통권 제249호] ●이 기사는 ‘공전의 히트’를 친 연예주간지 ‘선데이서울’에 38년전 실렸던 기사 내용입니다. 당시 사회상을 지금과 비교하면서 보시면 더욱 재미있습니다.
  • [테마로 보노 공직사회] 퇴직 공무원 3인의 인생2막 “난, 이렇게 휴먼캐피털 됐어요”

    [테마로 보노 공직사회] 퇴직 공무원 3인의 인생2막 “난, 이렇게 휴먼캐피털 됐어요”

    “5~6살짜리 어린아이들도 1년만 열심히 가르치면 한자능력검정시험 8급에 거뜬히 붙습니다. 얼마나 쏠쏠한 재미인지 몰라요.” 전직 국어 교사였던 정광조(67)씨는 동네인 경기 고양시 삼송동 노인정에서 1주일에 1시간씩 유치원생들에게 한문과 생활예절을 가르친다. 2006년 은퇴한 후 벌써 3년째다. 매주 수요일엔 초등학교 1~2학년이 대상이다. 공무원연금공단과 퇴직교원단체가 병행 지원하는 저소득층 자녀 학습지원 프로그램이다. 이와 별도로 1주일에 2번씩 서울 청운양로원에서 한글과 한문, 교양강의를 나간다. 이렇게 교사 경험을 활용해 봉사 겸 소일거리를 하면서 공무원연금공단에서 활동비조로 매달 10만원씩 받는다. 정씨는 “일을 그만두고 마냥 노는 게 아니라 맹자의 삼락(三)처럼 삶의 의미와 즐거움을 찾을 수 있어 뿌듯하다.”고 말했다. 법원 공무원 출신인 류인형(64)씨는 2007년 퇴직한 뒤 개인 법무사 사무실을 냈다. 지난해 공무원연금관리공단 대전지부에서 ‘퇴직 공무원들을 위해 법무 상담 좀 해 달라.’는 추천을 받고선 흔쾌히 승낙했다. 한 달에 1~2번 대전지부 사무실로 직접 발걸음을 하거나 전화상담도 받는다. 부동산 등기부터 상속, 경매 등 물어오는 분야도 다양하다. 류씨는 “내가 아는 한도껏 도와주면 다음 상담 때 또 오는 사람들도 많다. 무료 법률상담을 해 주는 기관은 꽤 있지만 퇴직 공무원이 상담자로 나서는 곳은 별로 없다.”면서 “내 전문경험을 활용해 다른 이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게 사회적인 자존감을 높여준다.”고 전했다. 2005년 춘천 우체국에서 3급으로 퇴임한 박상운(63)씨는 5년째 춘천 호스피스 시설인 기쁨의 집에서 사무국장으로 일하고 있다. 말기 암 환자들이 모인 이곳에서 그는 우편 업무와 전혀 관련없는 봉사를 제2의 인생으로 택했다. 20대 때 십이지장궤양으로 죽을 고비를 넘긴 일을 계기로 긴 시간 찬찬히 ‘퇴직 이후’를 준비했다. 박씨는 “공무원 생활 38년이 나와 가족, 나라를 위해 일한 시간이라면 은퇴 후는 내 곁의 어렵고 소외된 이들을 위한 시간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일하는 시간은 정규직과 비슷하지만 차량운행비 같은 실비만 받는다. 38년간 공직에서 봉사한 덕분에 받는 200만원대 후반의 연금이 든든한 후원자다. 공직에서 물러난 이후 사회참여를 설계할 때 가장 중요한 점은 무었일까. 3명 모두 “공무원 때와는 어떻게 다르게 가치 있게 살지 미리부터 모색해 봐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적어도 퇴직 5년 전부터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연금 이외 경제적인 부족분은 어떻게 메울지 꼼꼼히 계획을 세우라는 것이다. 반면 퇴직을 2~3년 앞둔 50대 초반 실장급 공무원은 “우리 세대는 은퇴 이후를 그다지 심각하게 고민하진 않았다. 전관예우에 기대 쉽게 재취업할 수 있었던 측면도 크다.”고 전한다. 그러나 호시절은 가고 앞으로 전관예우 관행이 엄격히 다뤄질 만큼 본격적인 고민이 시작될 시점이다. 이재연기자 oscal@seoul.co.kr
  • 봉소아(bonsoir) 마담(1)…「집시」의 김영희(金英姬·가명) 마담

    봉소아(bonsoir) 마담(1)…「집시」의 김영희(金英姬·가명) 마담

     「로코코」「갈릴레오」등「스탠드 바」시대가 가고「발렌타인」「가스라이트」등 「살롱」시대가 다시 한발 물러서듯 마담들의 얼굴도 많이 바뀌었다. 이른바「칵테일 하우스」또는「스카치 코너」가 판을 치는 서울거리, 그만큼 새 얼굴들이 서울 밤을 빛내고 있다. 새술 새부대에 새마담의 얼굴을 찾아가 보자.  한국은행 뒤 조폐공사 골목을 따라 조선호텔 앞으로 빠지느라면 중간 지점쯤에「집시」라는 간판이 눈에 띈다.  20단이 채 못되는 지하에로의 계단을 밟아 내려가면 온통 백색의 벽과 천장이 우선 산뜻하다.  바닥에는 붉은 주단-. 아직 때가 배지 않아 한결 더 정갈하고 호화롭다.  작년 12월 1일 문을 열었다니까 이제 겨우 8개월째.「집시」의 주인은 김영희(金英姬·가명·28).  눈매가 아름답고, 입가에 맴도는 미소가 좀체로 사라질 줄 모른다. 누가 보아도 90점 이상을 거뜬히 줄 수 있는 수준급 미인임에 틀림없다.  『경험도 없이 시작했는데, 아직은 자신이 없어요』  커다란 에머럴드 반지가 반짝이는 손가락으로 흰 이(齒)를 살짝 가린다.  고향은 충남(忠南) 부여(扶餘). 그러나 학교를 모두 서울에서 나왔기 때문에 고향의 추억은 남은 것보다 잊은 것이 더 많다고.  『여자란 으례(으레) 그렇지 않아요, 좀 이해해 주세요』  아름답든 아름답지 못하든 여자의 과거는 밝히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 아니냐는 얘기다.  그러나 김(金) 마담은 그 상식을 어기고 스스로 자기의 과거를 털어 놓았다.  잔잔하게 흘러나오는「스메타나」의「몰다우」강이 그의 마음을 움직인 때문이었을까, 어쨌든 김(金)마담은 쟁쟁한 사업가의 1남3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나 대학을 음악과 3학년까지 다녔던 자기의 지난 날을 차근차근히 얘기했다.  『학교 다닐 때는 팝송을 좋아했어요. 그래서 방송국에 나가 한때는 노래를 부른 적도 있어요』  모 라디오와 TV 방송국에서 잠시나마 연예활동을 했지만 그것은 수입 때문이 아니고 순수한 자기의 취미 때문이었다는 것.  김(金) 마담은 잠시 말을 멈추고 망설인다. 무엇 때문일까. 말 못할 과거의 어떤 대목이 부딪친 때문인가.  그 예측은 맞았다.  『대학교 3학년 될 때 결혼을 했어요. 그래서 학교를 그만 두고 들어앉았어요···』  다시 말이 중단됐다. 음악도 동시에 멈추어졌다. 마담이라기에는 너무도 앳된 얼굴에 수줍음이 가득한 마담 초년병-.  『이혼을 했어요. 5년만이었어요』  역시 그랬었다.  미모-결혼-파탄-술집 마담. 그런 공식이 김(金) 마담에게도 적용되고 말았던 것이다.  결혼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영업에 조금이라도 지장이 있지 않았겠느냐는 물음에는 오히려 담담하다.  『여자 나이 스물여덟에 아직 결혼을 안했었다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아요. 이 기회에 툭 털어놓는 게 차라리 나을 것 같아요』  그래서 지금은 한강에 있는「리버뷰」맨션에서 5살짜리 아들과 3살짜리 딸 남매를 데리고 세식구가 살고 있다고 한다. 자식들의 나이는 어리지만 가장(家長)의 어깨는 역시 무겁다.  이혼한 뒤 1년 동안 마음의 갈피를 못잡던 스스로의 처지를 생각하며 유람과 낭만의 상징인「짚시」라는 간판을 달았을 때 그는 비로소 정착자의 안도감같은 것을 느꼈다고 한다.  실내장치는 모두 김(金)마담이 직접 했다. 4인용 테이블 6개, 6·7명용 별실이 3개, 카운터에는 둥근 의자가 10개, 벽에는「실비아」인가 하는 프랑스 샹송 가수의 사진과 이른바 예술사진이라는 어느 누드 모델의 멋진 폼이 도사리고 있다.  『손님들은 대개 먼 곳에서 오는 분들이 많아요』  먼 곳이란 서울 중구 소공동(小公洞) 이외의 지역을 말한다.  무역회사 증권회사 은행 등 각종 기업체 사무실이 즐비하게 들어선 소공동(小公洞), 그 한복판에 자리잡은 스카치 코너「집시」에는 웬일인지 소공동(小公洞) 손님보다는 다른 곳 손님들이 많이 온다는 것.  아침 9시에 문을 열면 우선 찾아드는 것은 코피 손님들, 이 때는 소공동(小公洞) 손님들이 대부분 자리를 메운다.  11시부터 3시까지는 경양식 시간.  젊은 아베크족들이 시원한 에어컨디션 바람과 라틴 뮤직을 찾아 몰려든다.   저녁 6시부터「집시」는 본격적인 자기 기능을 나타내는 게 된다.  김(金)마담의 지휘로 움직이는 종업원은 남자 6명, 여자 5명, 여자는 모두가 웨이트리스, 일반 살롱의 호스테스와는 그 기능이 조금 다르다.  『그렇지만 서비스만은 아주 친절해요』  역시 장사 때문인가. 김(金) 마담은 자기 집 웨이트리스들의 미모와 재치와 친절을 무척 내세우고 있다.  술값은 보통 3백원에서 5백원정도(스카치 1잔).물론 나폴레옹 꼬냑 같은 것은 1잔에 1천3백원까지 받기도 한다.  『대개는 스카치 3,4잔 마시고 가요』  1인당 1천5백원에서 2천원 정도 마시고 자리를 뜨는 손님이 대부분. 그러나 개중에는 처음부터 병으로 시켜 놓고 3,4만원의 매상을 올려 주는 손님도 있다고.  「집시」에서의 김(金) 마담의 역할은 다양하다. 주방 감독에서 술값 계산, 주문과 안내, 그리고 서비스, 그 가운데 주 업무는 역시 서비스다.  주인 마담이자 유일한 호스테스이기도 한 그는 싫고 좋은 감정을 덮어둔채 어느 손님 테이블에든 한번씩은 가서 인사를 드려야 하기 때문.  여러 층의 손님들에게 한결 같이 웃음으로 대해야 하는「집시」의 얼굴 김(金) 마담은 여전히 입가의 미소를 지우지 않고 소공동(小公洞) 의 한 모퉁이를 지키고 있다.  <宰> [선데이서울 73년 7월22일 제6권 29호 통권 제249호] ●이 기사는 ‘공전의 히트’를 친 연예주간지 ‘선데이서울’에 38년전 실렸던 기사 내용입니다. 당시 사회상을 지금과 비교하면서 보시면 더욱 재미있습니다.
  • [씨줄날줄] 스포츠 G7/곽태헌 논설위원

    잘 알려진 바대로 G7은 서방 선진 7개국의 모임이다. 회원국은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이탈리아, 캐나다. G7은 매년 정상회의와 재무장관 회의를 갖고 세계의 주요 경제현안을 논의한다. 요즘 중국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미국과 중국이 G2로 불리지만, 중요한 경제현안은 G7에서 대부분 결정된다고 봐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1차 오일쇼크 이후인 1974년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당시 서독), 일본 등 5개국 고위 경제관료들이 세계경제를 자연스럽게 논의하면서 G5로 불렸다. 이듬해 이탈리아가 포함되면서 G6로, 그 다음 해에는 캐나다가 추가되면서 G7이 됐다. 1997년 서방이 아닌 러시아가 포함되면서 G8이 출범했지만, 러시아는 재무장관 회의 멤버는 아니다. 1997년의 아시아 외환위기를 계기로 선진국과 신흥국 간의 긴밀한 공조를 위해 G20(G7+한국 등 13개국) 재무장관 회의가 시작됐고, 2008년 선진국에서 터진 금융위기 공조를 위해 G20 정상회의로 격상됐다. 우리나라는 아직 선진국은 아니지만 지난해 국내총생산(GDP) 규모는 세계 15위, 수출과 수입을 합한 무역규모는 8915억 달러로 세계 9위다. 올해 무역규모는 1조 달러를 돌파할 게 확실시된다. 남북분단 직후인 1946년 무역규모는 5000만 달러를 겨우 넘었다. 경제발전 과정에서 부작용도 있었지만, 분단과 6·25전쟁을 딛고 이렇게 압축성장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 경제발전 속도를 훨씬 더 뛰어넘는 게 스포츠분야다. 하계올림픽의 경우 주최국의 프리미엄이 있었던 1988년 서울올림픽(4위)은 논외로 하더라도,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7위, 2004년 아테네올림픽에서 9위,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7위에 올랐다. 동계올림픽 성적도 좋다. 2006년 토리노올림픽에서 7위, 2010년 밴쿠버올림픽에서 5위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올림픽에서는 이미 톱10, 톱5에 진입했다. 2018년 동계올림픽을 평창에서 개최하는 데 성공하면서 하계·동계올림픽, 월드컵, 세계육상선수권 등 4개 대회를 모두 유치해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여섯 번째 나라가 됐다.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일본, 러시아도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 러시아를 제외한 서방 선진국만으로는 ‘스포츠 G5’가 된 셈이다. 더구나 프랑스는 103년, 일본은 38년에 걸쳐 개최한 4개 대회를 30년 만에 ‘압축’한 것은 전무후무(前無後無)한 기록이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룬 데 이어 스포츠분야에서도 전설을 이어가고 있는 자랑스러운 코리아. 참 대단한 나라다. 곽태헌 논설위원 tiger@seoul.co.kr
  • 이조(李朝) 명창(名唱) 무덤에서 판소리 들린다고

    이조(李朝) 명창(名唱) 무덤에서 판소리 들린다고

     명창의 무덤에 뚫린 구멍에서 판소리가 흘러 나온다는 얘기. 이조 정조(正祖) 때 8명창의 제1인자로 명성을 날렸던 권삼득(權三得)의 무덤의 위치가 최근에 밝혀졌다는데 복중(伏中)에 보내는 믿거나 말거나의 기괴한 소문.    이조 영조(英祖)·정조(正祖) 때에 걸쳐 드날리던 명창으로 권삼득(權三得)이란 분이 있었다. 당시 8대 명창의 한 사람. 이 분의 출생지며 무덤이 전혀 불명이었으나 최근 안동(安東) 권(權)씨의 족보에 의해 그의 무덤의 위치가 밝혀졌다. 무덤의 소재지는 전북(全北) 완주(完州)군 용진(龍進)면 구억(九億)리. 전주(全州)시내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40여분쯤 가면 있다.  그건 그렇고, 얘기는 3년전 어느 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구억(九億)마을 주민들 가운데 김(金)모씨라는 호사가 한사람이 마을 뒷동산에 올라갔다가 잡초가 무성한 어느 무덤의 봉분 옆에 어른 머리가 하나 들어갈만큼의 커다란 구멍이 뚫려있는 것을 보았다.  들여다본즉 컴컴해서 기분 나쁘게 생각되어 졌다. 그는『몹쓸 친구들 같으니』하며 무덤의 후손들을 나무랐다. 벌초(伐草) 한번 제대로 한 적이 없고 게다가 구멍까지 뚫려있다니···.  마을로 내려간 그는 삽을 가지고 다시 올라가 근처의 흙을 퍼다가 구멍을 메우기 시작했다. 구멍의 깊이가 어지간한 듯했다.  30분 동안 낑낑거리며 흙을 퍼넣은 그는 날이 어두워져 마을로 내려갔다. 며칠 뒤 우연히 근처에 다시 간 김(金)씨는 놀랐다. 구멍이 다시 뚫려있지 않은가? 다시 들여다 봤지만 3~4바지게 분량의 흙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구멍은 여전했다. 여우 등 짐승의 소행이겠지 생각한 그는 그 구멍을 다시 메웠다. 구멍은 어렵잖게 메워졌다. 이튿날 무덤에 올라온 김(金)씨는 또한번 놀랐다.  분명히 어제 자신이 메운 문제의 구멍이 또다시 뚫려 있는 것이다. 짐승의 짓이라고만 여기기엔 미심쩍어진 김(金)씨는 비로소 혼비백산, 정신없이 뛰어 마을로 되돌아 왔다.  소문이 삽시간에 퍼졌다. 마을 사람들이 떼지어 올라가 문제의 구멍을 메워 버렸지만 어김없이 이튿날 또 구멍은 말짱히 뚫려 있었다. 미신에 약한 마을 사람들은 그 뒤부터 귀신이 나오는 구멍이라 해서 다시는 그곳에 가지 않았다. 사건은 일단 그것으로 끝났다.  얼마전 정태용씨(全北 金堤군 金溝면 金溝중학교 음악교사) 는 우연히 안동(安東) 권(權)씨의 족보를 입수, 우리나라 국악사에서 불멸의 존재로 추앙받는 명창 권삼득(權三得)에 관한 자료를 발견했다. 족보에 의하면 권(權)씨 집안은 근엄한 유가(儒家)로서 완주(完州)군 용진(龍進)면 구억(九億)리에서 대대로 살았는데 묘가 그의 부모의 묘 밑에 있다는 것.  조사 결과 이 마을에 권이동씨(64)란 후손이 살았던 적이 있었으며, 바로 구멍난 묘가 명창의 묘라는 것이 밝혀졌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전북대(全北大)교수 홍모씨와 판소리 연구가 이동백씨가 현지를 답사했다.  무덤을 답사한 두 학자는 더욱 크게 놀라운 일을 당했다. 구멍을 들여다 보다가 구멍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게 된 것이다. 두 학자는 그게 판소리 비슷했다고 말한다.  『저도 그 얘기를 들었지요. 무덤의 구멍에서 창(唱)이 흘러 나온다고 그러더군요. 홍(洪)선생이 현지에 갔었다는데 퍽 재미있는 전설이라 생각합니다.』  국악협회 상임고문 유기용(劉起龍·63)씨의 말.  유(劉)씨에 의하면 권삼득(權三得)은「덜렁재」의 창시자. 덜렁재란 판소리에서「덜렁덜렁 뽐내는」부문의 넘겨 감치며 특유하게 덜렁덜렁 하는 자태를 말하는데, 특히 흥부가 중의「제비창(唱)」에서 놀부가 부자다운, 덜렁덜렁하는 자태로 제비를 잡으러 가는 부분을 말한다.  판소리에서「덜렁재」의 창시자인 권삼득(權三得)은 그러니까 판소리 가운데 하나의 독립된 부문을 처음으로 창안한 국악 사상 국보적 인물. 족보에 의하면 영조(英祖) 47년(1771년)에 태어난 그는 헌종(憲宗) 7년(1841년)에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고 자방 관아에서 보이는 과거 향시(鄕試)에 합격, 그 때문에 권생원(權生員)이라는 별칭으로 붙여지기도 했다.  목소리가 우렁차고 맑아 어려서부터 창(唱)을 배웠기 때문에 양반 집안 체통을 더럽혔다고 쫓겨났다. 각지를 돌아다니며 멋들어진 창(唱)과 낭만을 만끽하던 권삼득(權三得)은 만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1841년 죽었다. 이상이 족보에서 밝혀진 권삼득(權三得)에 관한 자료의 전부. 사실 이 정도의 자료도 한국 국악 사상 매우 중요한 새로운 자료이다.  어쨌든 아무리 명창이라고 하지만 죽어서 무덤에 묻혀서까지 창(唱)을 하는 건 상상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더구나 1백32년이 지난 지금은 뼈만 남아 있을 그 무덤.  잡초가 무성한 무덤의 구멍은 분명히 기자에 의해서도 확인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누구도 무덤에 오르려고 하질 않았다.  혹시 공기의 작용에 의해서 무덤의 구멍을 휘돌아 나오는 바람 소리가 그렇게 들렸던 것이 아닐까 하고 귀를 기울여 봤지만 구멍의 생김새로 보아 그럴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였다.  무덤은 말짱한데 구멍만 덩그렇게 뚫려 창(唱)이 들린다는 건 납득이 안 가는 노릇이었다. 메워도 다시 구멍이 뚫리는 건 짐승의 짓이라고 하더라도 창(唱)이 들린다니 죽은 권삼득(權三得)의 영혼이 지하에서 덜렁덜렁 제비창(唱)이라도 하고 있단 말인가? 이슥한 새벽녘.  메워도 메워도 메이지 않는다는 신기한 구멍. 구멍으로부터 절창(絶唱)이 터져 나온다고 생각해 보라. 땀이 싹 가실 일이다.<植> [선데이서울 73년 7월22일 제6권 29호 통권 제249호] ●이 기사는 ‘공전의 히트’를 친 연예주간지 ‘선데이서울’에 38년전 실렸던 기사 내용입니다. 당시 사회상을 지금과 비교하면서 보시면 더욱 재미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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