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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오늘 5·18 38주년, 진상 규명은 멈출 수 없다

    오늘은 5·18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난 지 38년이 되는 날이다. 짧지 않은 시간이다. 하지만 야만의 정권이 입힌 상처는 아물 줄 모르고, 상상조차 하기 싫은 만행의 실체까지 새롭게 드러나고 있다. 누군가는 38년 전 광주 어딘가에서 사라진 피붙이를 지금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데, 어떤 사람은 여전히 5·18을 폄훼·왜곡하면서 피해자들의 상처를 헤집는다. 38주년 기념일을 맞아 5·18 진상 규명의 불가피성과 시급성이 더욱 두드러지는 이유다. 진상 규명의 핵심은 최초 발포 명령자를 밝히는 일이다. 계엄군이 시위대를 향해 총을 발사하면서 시민군이 저항하기 시작했고, 군인들은 야만적인 학살을 자행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국회와 수사기관 등이 조사를 벌였지만 전두환 전 대통령을 비롯한 피조사자들은 모두 발포 명령 사실을 부인했다. 전 전 대통령은 최근 회고록을 통해 ‘북한군 개입’이나 ‘헬기 사격’ 논란 등을 언급하면서 반격하는 모양까지 취하고 있다. 계엄군에 의한 성폭력 의혹 진상도 꼭 밝혀야 한다. 여고생이 집단 성폭행을 당한 충격으로 병을 앓다가 승려가 되고, 음대생이 교생실습 현장에서 계엄사 수사관에게 붙들려 가 고문을 받고 성폭행을 당했다는 충격적인 증언이 잇달아 나오고 있다. 이들뿐일까. 극소수의 성범죄 피해자들만이 스스로 피해 사실을 밝힌다는 점을 고려하면 광주 고립 상황에서 적지 않은 여성들이 성폭력을 당했을 가능성이 있다. 시위 진압 군인들이 마치 전쟁에서 점령군이 된 듯 여고생과 여대생의 성을 유린했다는 게 차마 믿기지를 않는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당시 자행된 성범죄의 실상을 낱낱이 파헤쳐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 5·18 때 광주에서 사라진 이들의 행방도 꼭 규명돼야 한다. 상당수의 시민들이 군인들에 의해 끌려갔지만 행방이 묘연하고 시신도 찾지 못했다. 목격자는 없지만 시내에서 다니다가 엉뚱하게 끌려간 사람도 적지 않다고 한다. 현재 광주시가 인정한 5·18 행방불명자는 82명이다. 이 중 6명은 5·18 묘역의 무명 묘를 이장하는 과정에서 신원이 확인됐지만 76명은 시신도 찾지 못했다. 행불자로 신청했지만 공식 인정받지 못한 사람도 240여명에 이른다고 한다. 새 정부 출범 후 암매장 추정지 발굴 작업이 몇 차례 있었지만 성과는 부진하다. 가해자들의 증거 훼손과 개발 등에 의해 발굴 작업이 갈수록 어렵다고 한다. 암매장에 가담했던 군인들의 양심고백이 절실하다. 우린 앞으로 해마다 5·18 기념일을 맞아야 한다. 언제까지 지금처럼 진상 규명이나 책임자 처벌, 피해자 명예회복 같은 해묵은 의제에 매달릴 수는 없다. 문재인 정부는 지난 37년 동안 풀지 못한 이 과제들을 임기 내에 꼭 해결해야 한다. 50주년, 60주년 기념일엔 우리 후손들이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민주화를 이루고자 했던 그들의 고귀한 뜻을 기리는 행사로 치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 행불자의 가족·푸른 눈의 목격자… ‘오월 광주’를 말하다

    행불자의 가족·푸른 눈의 목격자… ‘오월 광주’를 말하다

    유족 등 5000여명 기념식 참석 가두방송한 전옥주씨 상황 재연 영화 ‘택시운전사’ 김사복씨 아들 獨기자 힌츠페터 부인과 만남도 공연·세미나 등 다양한 행사 열려제38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이 18일 오전 10시 국립 5·18민주묘지에서 ‘오월광주, 정의를 세우다’를 주제로 열린다. 기념식에는 정부 주요 인사와 5·18단체·유족·시민 등 5000여명이 참석한다. 행사는 추모공연과 헌화분향, 경과보고, 기념사, 기념공연,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의 순으로 50분간 진행된다. 추모 공연에는 5·18 당시 가두방송을 했던 전옥주(68·본명 전춘심)씨가 출연해 당시 상황을 재연한다. 또 1980년 5월 18일 광주 서구 양동에서 행방불명된 이창현(당시 8세)군과 38년간 그 아들을 찾아다닌 아버지 이귀복(82)씨의 사연이 대형 스크린을 통해 ‘시네라마’ 형식으로 소개된다. 이씨는 아들의 흔적을 찾아 곳곳을 누빈 경험을 통해 행불자의 아픔을 호소한다.올해 기념식에는 ‘푸른 눈의 목격자’로 알려진 독일기자 고 위르겐 힌츠페터의 부인 에델트라우트 브람슈테트, 헬기 사격을 증언한 고 찰스 베츠 헌틀리 목사의 부인 마사 헌틀리, 고 아널드 피터슨 목사의 부인 바버라 피터슨, ‘2018 광주인권상’ 수상자인 스리랑카 출신 난다나 마나퉁가 신부 등도 참석한다. 마사 헌틀리는 기념식에서 남편과 대한민국 국민에게 감사와 추모의 메시지 등을 전할 계획이다. 또 에델트라우트 브람슈테트와 영화 ‘택시운전사’의 실제 주인공 고 김사복씨의 아들 김승필씨의 만남도 이뤄진다. 올해 묘역 참배에는 구두닦이로 생계를 이어 가다 금남로에서 계엄군에 구타당해 숨진 김경철씨의 어머니 임근단씨, 시민군 대변인이었던 윤상원 열사의 아버지 윤석동씨, 전남대 총학생회장 출신으로 장기간 단식 투쟁하다 사망한 박관현 열사의 누나 박행순씨 등이 참여한다. 5·18 38주년을 하루 앞둔 17일 금남로 등지에서는 전야제와 오월풍물굿, 민주대행진 등 각종 공연·전시가 이어지면서 추모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이날 오후 7~10시 동구 금남로 특설무대에서는 ‘보아라 오월의 진실, 불어라 평화의 바람’을 주제로 전야제가 3부로 나뉘어 진행됐다. 1부에서는 ‘민주의 문’ 통과를 재현하는 퍼포먼스를 시작으로 시민 배우와 전문배우 200여명이 참여, 1980년 5월 당시 10일간의 항쟁을 재연했다. 또 죽은 자와 산 자를 매개하는 내용의 ‘망월의 춤’도 펼쳐졌다. 2부에서는 헬기 사격이 확인된 전일빌딩을 매개로 종이가 대량 살포되고, 오월 어머니의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합창이 금남로에 울려 퍼졌다. 마지막 3부에서는 최근 열린 남북 정상회담과 평창동계올림픽 남북 단일팀의 영상을 감상하고 광주 지역 가수들이 평화를 주제로 한 공연을 펼쳤다. 앞서 이날 오전에는 5·18민주묘지에서 유족회가 주관한 추모제가 열렸고, 전남도 등 전국 지자체에서도 학술세미나, 음악회·전시회 등 5·18을 기념하는 다양한 행사가 줄을 이었다. 5·18민주묘지에도 전국 각지의 학생 등 단체 추모객의 발길이 이어지면서 지난 1일부터 17일까지 총 10만여명이 다녀간 것으로 집계됐다. 또 이날 미국인 목사 찰스 베츠 헌틀리의 유해가 “광주에 묻히고 싶다”는 그의 유언에 따라 광주 남구 양림선교동산묘원에 안장됐다. 고인은 5·18 당시 광주기독병원 원목으로 재직하며 계엄군의 만행과 참혹하게 살해당한 희생자 시신 등을 사진으로 기록, 해외 언론에 알렸다. 광주 최치봉 기자 cbchoi@seoul.co.kr
  • [손성진 칼럼] 5·18 상처, 아직 아물지 않았다

    [손성진 칼럼] 5·18 상처, 아직 아물지 않았다

    “여학생을 어떻게 했다더라.” “여성의 가슴을 어떻게 했다더라.” 5·18이 있었던 38년 전에는 기자가 아니었다. 대학 신입생, 어린 학생이었다. 시위대를 따라다니면서 이런 소문을 여러 번 들었다. 5월 15일 밤 서울역의 대학 연합 시위 현장에 있었다. 최루탄에 쫓겨 골목 안 작은 식당으로 피신했다. 학생들의 뜻에 동조하지 않는 시민도 없지 않았다. 식당의 중년 신사는 “데모를 왜 하느냐”고 우리를 나무랐다. 흉흉한 소문은 유언비어라고 ‘어린 학생들’을 몰아세웠다. 유언비어 날조는 계엄령 위반이라고 했다. 눈으로 보지 못한 학생들은 제대로 반박하지 못했다. 이틀 후, 오늘과 같은 날짜인 17일 밤 12시에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됐다. 18일 새벽 공수부대가 대학 캠퍼스 안으로 진입했다. 공수부대는 학교 기숙사로도 들이닥쳤다. 잠에 빠진 학생들을 모두 깨워 운동장에 모이라고 했다. 대검으로 굵은 아카시아 나뭇가지를 잘라 마구 폭행했다. 이유 불문이었다. 대학생이라는 이유 하나였다. 그러면서 유언비어를 왜 퍼뜨리느냐고 따지기도 했다. 심하게 다친 학생도 있었다. 군부독재의 폭력성을 눈으로 확인했다. 이후 새내기 대학생들은 더는 ‘어린 학생들’이 아니었다. 이런 정도의 폭력이야 5·18의 잔혹한 진압에 비해서는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38년이 흐르는 동안 5·18의 감춰진 크고 작은 진실은 한 꺼풀씩 벗겨졌다. 기숙사 운동장의 폭력보다 더 큰 폭력이 지금껏 드러나지 않은 것도 많다. 특히 성폭력이 그렇다. 피해 여성들은 스스로 쉬쉬하고 살았다. 부끄럽다는 생각이 앞서 용기를 내지 못했다. ‘5·18 진상규명특별법’을 제정해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이 있었지만 성폭력은 사실상 소외됐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도 그런 과정을 겪었다. 폭로는 고사하고 주변의 시선이 두려워 끌려간 사실도 숨기고 살아야 했다. 광복이 되었지만 할머니들이 세상 밖으로 나오는 데 50년이 걸렸다. 고 안점순 할머니도 그중의 한 사람이다. 성노예 피해를 당하고도 수치심 때문에 떳떳하게 밝힐 수 없었다. 어렵사리 위안부 피해자로 등록할 때도 가명을 썼다. 대인기피증도 앓았다. 안 할머니가 실명을 되찾고 위안부 피해 문제 해결을 위한 활동에 나서기까지 10년이 걸렸다. 38년 동안 가슴앓이를 했던 5·18 성폭력 피해자들에게 전기가 마련됐다. ‘미투 운동’이다. 계엄군에게 집단 성폭행을 당한 10대 여고생은 충격을 이기지 못해 병을 앓다가 여승이 됐다는 증언이 나왔다. 5·18 당시 대학 4학년이었던 김선옥(60)씨도 용기를 내는 데 38년이 걸렸다. 그는 체포돼 고문을 받고 석방되기 전날 수사관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했다. “여학생을 어떻게 했다더라”라는 미확인 소문이 사실로 드러난 순간들이다. 유언비어가 다 유언비어는 아니었다. 국가 권력에 짓밟혀 숨죽이고 살았던 피해자들의 상처는 아직도 곪은 상태다. 이 시점에서 국가가 할 일은 가해자들을 찾아내 법적 처벌을 받게 하는 것이다. 가해자를 처벌하는 것만이 평생 아물지 않는 상처를 갖고 산 그들의 아픈 마음을 조금이나마 치유해 주는 길이다. 아르헨티나도 ‘더러운 전쟁’(Dirty War·1976~1983)으로 불리는 군부의 공포정치를 겪었다. 군부는 여성에 대한 성폭행을 자행했다. 아르헨티나는 이후 성폭행을 국가 폭력으로 규정하고 인권유린 행위를 대대적으로 수사했다. 공소시효 문제가 걸린다. 해결할 방법은 특별법 제정이나 개정이다. 사망, 상해, 실종 등만 다루는 ‘5·18 진상규명특별법’ 대상에 성폭력도 넣어서 처벌 근거를 마련해야 한다. 독일은 1946년 나치범죄에 대해 공소시효를 중단하고 나중에는 폐지했다. 프랑스는 나치협력자를 처벌하고자 1964년 공소시효가 적용되지 않는 ‘반인륜적 범죄’라는 새 개념을 도입했다. 지금까지 드러난 ‘5·18 성폭력’은 빙산의 일각일 수 있다. 피해자들은 용기를 내야 하고 국가는 할 수 있는 만큼 그들을 보호하고 대응책을 제시해야 한다. 국가로서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 신군부 만행 빠진 ‘5·18 영상’ 정부 기록용?

    지난 9일 5·18민주화운동기록관을 통해 38년 만에 처음 공개된 5·18영상 기록물은 누가 찍었을까. 이 영상은 당시 상황을 엿볼 수 있는 각종 장면들이 있어 사료 가치가 높다는 평이다. 특히 5월 30일 촬영된 망월동 ‘광주시공원묘지’의 사망자 매장 장면은 유일한 동영상 자료로 꼽힌다. 영상에는 화면을 가득 채운 70여명의 사람들. 트럭이 실어 나르는 관을 내리고 삽으로 구덩이를 파는 남성들. 풀어헤친 머리에 하얀 소복을 입고 넋이 나간 표정으로 관을 내려다보는 젊은 여인. 영정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꼬마의 모습. 이 영상물은 1980년 5월 20일부터 6월 1일까지 금남로 주변, 병원의 부상자 치료, 도청 진압 후 정리 모습 등을 담은 16㎜ 흑백 필름(72분 분량)이다. 도청 진압이 끝난 5월 27일 이후에는 활기를 띠는 광주의 모습이 이어진다. 경계 근무를 서는 군인들 사이로 출근하는 도청 직원들이 보이고, 도심 곳곳에서 방역과 청소 등이 이뤄진다. 6월 1일 도로정비가 이뤄지는 모습, 정상화된 초등학교에서 어린이들이 활짝 웃으며 인터뷰하는 것을 끝으로 영상은 마무리됐다. 그러나 영상에는 계엄군의 발포, 시민 구타 장면 등 신군부의 만행 등 핵심 내용은 빠져 있다. 누가 어떤 용도로 촬영했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5·18기록관은 “공공기관 등에서 기록 목적으로 촬영한 게 아니겠느냐”고 추측했다. 도청 진압 후 주영복 국방부 장관이 헬기를 타고 전남도청을 찾는 상황, 소준열 장군(당시 광주전남북계엄사령관), 장형태 전남도지사 등의 바로 옆에 붙어 영상을 촬영한 부분이 이런 추측에 힘을 보탠다. 5·18기록관은 최근 익명의 수집가로부터 이 영상물을 구매했다. 이 수집가는 입수 경로에 대해 함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중앙 일간지 기자로 활동했던 A씨는 “당시 도지사 활동을 기록하는 영상물 촬영 전담 직원들이 있었다”며 “그들이 5·18 수습 상황 등을 촬영했을 것 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나의갑 5·18기록관장은 “이 영상이 5·18 진실규명을 위한 내용을 담지는 않았지만 항쟁의 사실적인 모습을 보여 주는 만큼 역사적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광주 최치봉 기자 cbchoi@seoul.co.kr
  • 38년 만에… 어제인 듯 증언한 ‘광주의 아픔’

    38년 만에… 어제인 듯 증언한 ‘광주의 아픔’

    그동안 개인이 소장하고 있던 5·18 관련 영상물이 38년 만에 처음으로 공개됐다.5·18민주화운동기록관은 9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5월 단체와 시민 등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최근 입수한 ‘5·18 영상기록물 상영회’를 가졌다. 이 영상은 1980년 5월 20일부터 6월 1일까지 국군통합병원과 적십자병원 환자 치료 상황, 전남도청 기자회견 등 광주 일대와 근교를 촬영한 영상기록물이다. 모두 16㎜ 네거티브(음화) 필름 형태 총 3권(롤)으로 상영시간은 72분이다. ‘광주 Part1’에는 5월 20일부터 27일까지의 기록이 담겼다. 금남로 시위대와 계엄군의 대치 상황, 적십자병원의 영안실, 시민 헌혈, 트럭·버스를 타고 다니는 시민, 도청 앞 궐기대회, 도지사 기자단 브리핑과 수습위원회 면담 모습, 전남도청 상공 촬영, 무기 회수 장면 등이다. ‘광주 Part2’에는 5월 28일부터 6월 1일까지 도청 현관 앞 회수된 무기들, 거리 청소, 도로와 기관 앞에서 경계 중인 계엄군, 헬기를 타고 도청을 방문한 소준열(당시 전남북 계엄분소장), 망월동 안장과 오열하는 유가족 모습 등도 보인다. 마지막 ‘광주 Part3’는 5월 28일부터 6월 1일까지 항쟁 이후 정리상황을 보여 주고 있다. 주로 송정리역, 화순 시외버스 정류장, 수창초등학교 주변과 거리의 사람들 모습이다. 5·18기록관은 최근 익명의 수집가로부터 5·18 영상기록물을 소장하고 있다는 제보를 받고 지난 3월 이를 구입했다. 5·18기록관 관계자는 “이번에 공개한 영상물은 1980년 당시 광주시민들의 항쟁과 수습 상황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크다”고 말했다. 광주 최치봉 기자 cbchoi@seoul.co.kr
  • 38년 만에 처음으로 공개된 5·18민주화운동 미공개 영상

    38년 만에 처음으로 공개된 5·18민주화운동 미공개 영상

    그동안 미공개됐던 5·18 관련 영상물이 38년 만에 공개됐다. 5·18민주화운동기록관은 9일 오후 광주 동구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5·18 3개 단체장과 회원, 시민단체, 시민 등 200여 명이 참석해 ‘5·18민주화운동 미공개 영상기록물 상영회’를 개최했다. 이날 행사에서는 그동안 공개되지 않은 5·18 영상물이 38년 만에 최초로 공개됐다. 이 영상은 1980년 5월 20일부터 6월 1일까지 국군통합병원과 적십자병원 환자 치료 상황, 전남도청 기자회견 등 광주 일대와 근교를 촬영한 영상기록물이다.모두 16㎜ 네거티브(음화) 필름 형태 총 3권(롤)으로 상영시간은 72분이다. 5·18기록관은 공개 상영회에 참석하지 못한 일반시민을 위해 오는 10일부터 30일까지 광주 동구 금남로 5·18기록관 3D 영상실(3층)에서 영상물을 공개 상영한다. 구체적인 상영시간은 5·18기록관 공식 사이트에 공지할 예정이다. 또 오는 11일부터 한국영상자료원 서울 마포구 상암동 본원과 경기 파주 분원 영상도서관에서 멀티미디어 서비스로 무료 열람할 수 있다. 김형우 기자 hwkim@seoul.co.kr
  • 트럭에 빼곡히 실려오는 관…38년 만에 세상에 공개된 ‘5·18 참상’

    트럭에 빼곡히 실려오는 관…38년 만에 세상에 공개된 ‘5·18 참상’

    5·18 항쟁의 참상을 고스란히 담은 미공개 영상물이 38년 만에 공개됐다. 5·18민주화운동기록관은 9일 오후 광주 동구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5·18 3개 단체장과 회원, 시민단체, 시민 등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5·18 민주화운동 미공개 영상기록물 상영회’를 개최했다. 영상은 1980년 5월 20일부터 6월 1일까지 국군통합병원과 적십자병원 환자 치료 상황, 시민군과 계엄군 대치상황 등 광주 일대와 근교를 촬영한 모습이 담겼다. 태극기에 덮인 희생자들의 시신, 망월동으로 옮겨진 희생자 관이 즐비하게 줄지어 선 장면, 관을 붙들고 오열하는 유족 모습 등 시신·관 나열 부분도 여러 컷 담겨 그날의 참상을 여실히 보여줬다. 한편 기록관은 공개 상영회에 참석하지 못한 일반시민을 위해 10일부터 30일까지 광주 동구 금남로 5·18기록관 3D 영상실(3층)에서 공개 상영할 예정이다. 또한 한국영상자료원 서울 마포구 상암동 본원과 경기 파주 분원 영상도서관에서도 11일부터 멀티미디어 서비스로 영상 열람기회를 제공한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미공개 5·18 관련 영상물, 38년 만에 일반에 첫 공개

    미공개 5·18 관련 영상물, 38년 만에 일반에 첫 공개

    9일 미공개 5·18 관련 영상물이 38년 만에 처음으로 대중에 공개됐다. 첫 영상은 1980년 5월 21일 낮 광주 금남로. M16 소총을 등 뒤로 가로질러 맨 공수여단 계엄군 병력과 주먹을 하늘로 내뻗는 군중이 대치한다. 계엄군과 군중 사이에서는 확성기를 손에 쥔 여성이 애절한 몸짓으로 시민을 향해 외친다. 이 여성은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배우 이요원이 열연한 ‘신애’의 실존인물 전옥주씨다. 차창이 산산이 부서진 택시들이 바리케이드처럼 방치된 도로를 따라 무장한 계엄군 병력이 대열을 맞춰 이동한다. 적십자병원, 전남대병원, 광주기독병원으로 옮겨간 흑백 영상은 참혹하게 훼손돼 태극기에 덮인 주검들을 비춘다. 이날 5·18민주화운동기록관이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극장에서 상영한 5·18 최초공개 영상은 ‘택시운전사’와 ‘화려한 휴가’를 통해 은막에 올랐던 장면들을 연상케 했다. 직접 마주했던 그 날, 영화를 통해 간접적으로 경험했던 장면이 펼쳐진 72분 동안 객석을 가득 채운 250여명 관객 사이에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1980년 5월 계엄군의 잔학한 폭력에 학생시위가 시민항쟁으로 치달은 20일부터 시내버스와 택시가 시민을 태우고 다시 거리를 달리는 30일까지 광주 상황이 흑백 영상으로 부활했다. 음성은 녹음되지 않았지만, 항쟁에 나선 군중의 함성과 주검을 붙들고 오열하는 유가족의 통곡이 화면을 뚫고 나와 극장 안을 메아리치는 듯했다. 고립된 도시에서 주먹밥과 음식을 나누고 헌혈에 참여하는 시민들도 흑백 영상을 통해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광주로 모여든 외신기자와 통역사 등 진실을 기록하고 노력했던 이방인의 모습까지 담담하게 담아냈다. 사진으로만 접했던 5월 30일 망월동 묘지 상황도 살아 움직이는 영상으로 펼쳐졌다. 카메라는 도로정비용 트럭 짐칸에 실려 온 관들, 상복을 입은 아이,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주저앉은 상복 차림의 여성을 따라가자 객석 곳곳에서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나의갑 5·18기록관장은 이날 상영에 앞서 “이 영상에 굳이 제목을 붙이자면 ‘슬프거나 씩씩하거나’로 짓고 싶다”라며 “광주는 참혹하고 외로웠지만, 피를 나누고 주먹밥을 나눴기에 씩씩했을 것이다. 광주가 자랑스럽다”라고 말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시위대와 계엄군 대치·적십자병원 영안실…38년 만에 세상 빛 보는 ‘미공개 5·18’

    시위대와 계엄군이 금남로에서 대치하는 장면 등 미공개된 1980년 5·18민주화운동 영상물이 38년 만에 처음 세상 밖으로 나온다. 또 5·18을 전후해 주한 미국 대사관과 미국 정부 간에 오갔던 군사·외교 기밀문서에 대한 분석 작업이 진행돼 그동안 미진했던 5·18의 진상 규명에 보탬이 될 것으로 보인다. 5·18민주화운동기록관은 9일 오후 2시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극장에서 미공개 영상기록물 상영회를 연다고 7일 밝혔다. 이 영상물은 1980년 5월 20일~6월 1일 국군통합병원과 적십자병원 환자 치료 상황, 전남도청 기자회견 등 광주 시내와 근교를 촬영한 것이다. 시위대와 계엄군의 대치, 적십자병원의 영안실, 시민 궐기대회, 도지사 기자단 브리핑과 수습위원회 면담, 망월동 안장, 5·18이 끝난 27일 이후 광주의 주요 기관과 시민 모습 등이 담겼다. 또 시민 헌혈, 전남도청 상공 촬영 장면, 무기 회수, 도청 주변을 정리하는 계엄군 등 사료적 가치가 큰 장면들이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영상기록물은 16㎜ 흑백 필름 총 3권(롤)으로 상영시간은 72분이다. 그러나 무성이라 소리는 들을 수 없다. 5·18기록관은 지난해 12월 익명의 수집가로부터 5·18 영상기록물을 소장하고 있다는 제보를 받고 확인 작업 끝에 지난 3월 구입했다. 5·18기록관은 5·18 전후 미국 군사·외교 기밀문서 번역본 분석에도 나선다. 5·18 관련 미국 정부 비밀해제 59개 문서이다. 번역본에는 1980년 5·18 당시 신군부와 미국의 관계 등이 담겨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이 5·18 전후 전두환씨의 입지를 인정하게 된 배경과 집단발포 배후 등이 구체적으로 밝혀질지 관심을 끌고 있다. 이 번역본은 1979~1980년 미국 국무부와 주한 미국 대사관 사이에 오간 전문, 체로키 문서, 미국 국방부·중앙정보국(CIA) 기밀문서 등 총 3530쪽 분량으로 팀 셔록 미국 기자가 지난해 1월19일 광주시에 기증한 것이다. 번역은 군 기록물 관리·분석 전문가가 맡았다. 광주 최치봉 기자 cbchoi@seoul.co.kr
  • 미공개 5·18 영상 일반에 공개.... 사료적 가치 매우 커

    미공개 5·18 영상 일반에 공개.... 사료적 가치 매우 커

    공개되지 않았던 5·18 영상물이 38년 만에 일반에 공개된다.5·18기록관은 아시아문화원(ACI)과 공동주최로 오는 9일 오후 2시 광주시에 위치한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극장3에서 미공개 영상기록물 상영회를 연다고 7일 밝혔다. 영상은 1980년 5월 20일부터 6월 1일까지 국군통합병원과 적십자병원 환자 치료 상황, 전남도청 기자회견 등 광주 일대와 근교를 촬영한 영상기록물이다. 시위대와 계엄군의 대치, 적십자병원의 영안실, 시민 궐기대회, 도지사 기자단 브리핑과 수습위원회 면담, 망월동 안장, 27일 이후 광주의 주요 기관과 시민의 모습 등이 담겼다. 또 금남로 시위대와 계엄군의 대치상황, 시민 헌혈, 트럭·버스를 타고 다니는 시민, 기자단 헬기 탑승, 도청 상공 촬영 장면, 광주 외곽과 시민, 무기 회수, 도청 주변 정리하는 계엄군 등 사료적 가치가 큰 장면들이 많다. 영상기록물은 16㎜ 흑백 필름 총 3권(롤)으로 상영시간은 72분이다. 안타깝게도 무성으로 소리는 들을 수 없다. 5·18 관련 영상기록물이 많지 않은 실정에서 이번 영상기록물 수집은 1980년 광주의 상황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높다. 5·18기록관은 지난해 12월 익명의 수집가로부터 5·18 영상기록물을 소장하고 있다는 제보를 받고 확인 작업에 들어갔다. 수집가는 영상기록물의 수집경로에 대해서는 함구했으나 수집경로에 문제가 없다는 점을 확인했다. 이어 영상기록물의 상태와 내용을 점검한 이후 올해 3월 기록물을 구입했다. 5·18기록관은 한국영상자료원과 업무협약(MOU)을 체결, 음화필름(네거티브필름)을 현상하고 한 달간 디지털 작업을 거쳐 이번에 공개한다. 5·18기록관 관계자는 “미공개 영상기록물을 발굴·수집했다는 역사적 의미뿐만 아니라 홍보·교육용으로도 사용할 수 있는 활용가치가 높다”며 “1980년 5월 20일부터 6월 1일까지 5·18과 광주의 상황을 확인할 수 있는 영상자료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문화마당] 슈퍼맨보다 스파이더맨/김홍민 북스피어 대표

    [문화마당] 슈퍼맨보다 스파이더맨/김홍민 북스피어 대표

    조지프 퓰리처(퓰리처상을 만든 언론인)는 자신이 발행한 신문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하던 조지 럭스의 만화 ‘옐로 키드’를 언론 재벌인 윌리엄 허스트의 신문에 빼앗기자 다른 작가를 기용해 ‘옐로 키드’의 연재를 이어 간다. 같은 제목의 만화가 두 개의 신문에서 동시에 연재된 것이다. ‘옐로 저널리즘’의 효시가 된 촌극이 말해 주듯 일간지에 인쇄된 만화의 영향력은 대중들이 ‘만화를 보기 위해 신문을 구독한다’는 말이 나올 만큼 막강했다. 다만 “상업주의의 도구로서 출발했기에 창작자들이 발전의 방향을 결정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미국에서의) 만화는 주류 예술의 언저리에도 끼지 못했다”고 김기홍 교수는 ‘만화로 보는 미국’에 적고 있다. 만화가 독립적인 매체로서 자리매김한 것은 DC 코믹스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디텍티브 코믹스’ 앞으로 ‘빨간 팬티를 입은 히어로’가 도착하면서부터다. 때는 1938년, 대공항으로 무너진 경제를 살리기 위해 뉴딜 정책이 실시된 이후 미국인들은 가혹한 생활고를 견디며 고투하는 중이었다. 거기에 파렴치한 범죄자와 탐욕스러운 자본가를 ‘정의의 이름으로’ 단죄하는 슈퍼맨이 나타났으니 대중들의 환호가 어느 정도였을지 짐작이 간다. 새로운 시대의 영웅을 만나기 위해 독자들은 기꺼이 지갑을 열어젖혔다. 이에 힘입어 어둠의 기사로 불리는 배트맨, 우주 경찰 그린랜턴, 아마존 부족의 여왕이었던 원더우먼이 차례로 등장한다. 하지만 미국 내 청소년 범죄의 증가가 만화 때문이라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대대적인 검열이 시작됐고 만화산업은 몰락의 길을 걷는다. 이때 구원투수로 등장한 회사가 마블이었다. 그동안 2인자로 시류에 편승해 온 마블은 ‘저스티스 리그’(슈퍼맨, 배트맨, 그린 랜턴, 원더우먼 등이 힘을 합쳐 싸우는 슈퍼 히어로 팀)에 버금가는 떼거리 슈퍼 영웅들의 집합체 ‘판타스틱 4’를 창설한다. 이어서 감마선에 노출되는 바람에 화가 나면 괴력의 녹색 거인으로 변신하는 헐크, 방사능 거미에 물려 초인적인 힘을 갖게 된 스파이더맨, 방탕한 재벌 2세로 살다가 자신이 개발한 무기가 어떻게 쓰이는지 목도한 후 개과천선한 아이언맨이 등장하며 마블은 전성시대를 맞이할 수 있었다. DC의 캐릭터가 힘을 잃어 간 그 시기에 마블의 캐릭터가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까닭은 전자가 말 그대로 슈퍼 히어로였던 데 반해 후자는 안티 히어로(영화나 소설에서 비영웅적이고 나약하고 소외된 인물로 그려지는 주인공)였기 때문이다. 즉 무결점의 전지전능하고 바른생활 사나이였던 슈퍼맨보다 악당들과 싸울 때 이외에는 어딘가 모자라 보이고 교우관계에도 꽤나 문제가 있었던 스파이더맨 쪽이 관객들의 지지를 받은 것이다. 최근 ‘어벤져스: 인피니트 워’의 개봉을 맞이하여 케이블 채널에서 날이면 날마다 틀어 주는 마블 영화들을 주야장천 관람하다가 문득 생각했다. 다들 남 잘난 꼴 보기 싫어하는 소셜 미디어 채널에서야말로 ‘나는 정의롭다’, ‘정의의 이름으로 진실을 요구한다’는 식의 DC 캐릭터적 허세 마인드보다는 ‘나에게는 뭔가 문제(geek)가 있어’, ‘나는 정말 소심(nerd)하구나’라는 식의 마블 캐릭터적 겸손 마인드를 갖는 것이 세계 평화에 일말의 힘이나마 보태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바야흐로 세계 평화에 동참하기 좋을 때 아닌가.
  • 5·18 가두방송 차명숙씨 잔혹했던 고문 폭로 회견

    5·18 가두방송 차명숙씨 잔혹했던 고문 폭로 회견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만행을 알리는 가두방송에 나섰던 차명숙씨(58·여·경북 안동 거주)가 38년만에 군부의 잔혹했던 고문과 협박행위 등을 폭로했다.차씨는 30일 오전 광주시의회 브리핑룸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5·18 이후 겪었던 계엄군의 고문을 알리고 고문에 참여했던 당사자들을 고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는 이 자리에서 당시 강요된 ‘수사기록’도 공개했다. 그는 1980년 5월 계엄군의 집단발포 이후(23일 추정)에 시내 병원에서 부상자를 돌보다가 기관원들에게 붙잡혀 505 보안대 지하실로 끌려갔다.이후 상무대와 광주 광산경찰서, 광주교도소 등지를 오가며 수사를 받는 과정은 ‘지옥’이었다. 수사관들은 무릎을 꿇게하고 군화발로 짓밟고 몽둥이로 두들겨 팼다. 살이 터져 흘린 피로 하얀 속옷이 까만 잉크색으로 변할 정도였다.배후를 대라는 이유였다.사실상 간첩혐의를 뒤집어 씌우는 과정이었다.광주교도소에서 지내던 1980년 10월 2일~31일 한달간은 징벌방에서 폭 10㎝, 두께 3㎝의 혁띠와 25㎝의 쇠줄에 묶여 있는 가죽수갑이 채워졌다. 양쪽 손에 수갑을 찬 채 먹고 자고 볼일까지 해결해야하는 등 짐승만도 못한 상태로 지내야 했다. 그는 당시 계엄법위반,공갈 등 10여개의 각종 혐의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으나 이듬해인 1981년 12월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당시 만 19세로 학원생이었던 그는 5월19일 광주시민들이 계엄군에 의해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자진해서 가두 방송에 참여했다. 차씨는 방송차에 올라타 확성기를 쥐고 ‘당신의 아들 딸이 죽어가고 있는데 이불 속에서 잠이 오느냐’라며 시민들의 각성과 참여를 촉구했다. 계엄당국은 이후 그를 붙잡아 간첩혐의를 씌우려고 폭행과 고문, 회유에 나섰다. 그의 수감 기록에 따르면 차씨가 ‘정부가 이렇게 해가지고는 절대로 통일이 될 수 없다’ ‘5·18때 전두환 첩자, 방첩대 첩자, 경찰관 첩자들이 우리 사이에 끼어 간첩이 있는 것처럼 연극을 하며 독침사건을 벌렸다’ 등의 불온적인 언사를 했다고 적혔다. 이 때문에 ‘불온분자’로 전락해 옥고를 치러야 했던 차씨는 출소 이후 오히려 지역사회에서 ‘간첩’내지는 ‘부역자’로 내몰려 광주를 떠나야 했다. 이후 서울과 경북 안동 등지에서 살다가 38년만에 기자회견을 자청하고 나섰다. 차씨는 “새로 꾸려질 5·18진상조사위가 당시 자행된 고문수사와 잔혹행위 등을 밝혀내 관련자를 처벌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이밖에 광주교도소는 지금이라도 가혹행위에 대해 사죄할 것, 5·18기념재단은 80년의 상처를 드러내지 못하고 이국땅에 외롭게 사는 여성 피해자를 찾아내 그들의 증언을 듣고 역사적 진실로 기록할 것 등을 촉구했다. 광주 최치봉 기자 cbchoi@seoul.co.kr
  • [프리미어리그] 영국 매료시킨 ‘이집트 왕자님’

    [프리미어리그] 영국 매료시킨 ‘이집트 왕자님’

    시즌 46경기 41골 9도움 ‘펄펄’ ‘이집트 왕자님’이 프리미어리그(EPL)를 호령했다.모하메드 살라(25·리버풀)가 22일(현지시간) 영국 런던에서 열린 잉글랜드 프로축구선수협회(PFA) ‘올해의 선수상’ 시상식에서 이집트 출신으로 처음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 2014년 조제 모리뉴 첼시 감독의 눈에 띄어 처음 EPL 무대를 밟았으나 그다지 활약하지 못하고 이듬해 이탈리아 세리에A로 임대됐다가 지난해 7월 리버풀 유니폼으로 갈아입어 이적 첫 시즌 펄펄 날고 있다. 동료 선수들의 투표로 뽑는 PFA 올해의 선수는 발롱도르 등과 차별화된다. 리버풀로 옮기자마자 자선병원 건립 기금을 쾌척하는 등 조국 동포들에게 늘 뭔가를 돌려주려 하고, 고국 대표팀을 38년 만에 월드컵 본선에 올려놔 ‘왕자님’으로 통하는 그는 “열심히 했는데 상을 받아 기쁘다”고 말했다. 리그 31골로 EPL 정규리그 38라운드 기준 1995~96시즌 앨런 시어러, 2007~08시즌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2013~14시즌 루이스 수아레스와 최다 타이 기록이다. 시즌 남은 세 경기에서 네 골만 더해도 정규리그 42라운드였던 1993~94시즌 앤디 콜의 34골 기록도 넘을 수 있다. 시즌을 통틀어서는 46경기에서 41골을 넣었다. 도움도 9개나 작성해 단일 시즌 40 공격 포인트를 채운 다섯 번째 선수로 이름을 올렸다. 올해 선수상 투표에서는 이번 시즌 우승을 확정한 맨체스터 시티의 미드필더 케빈 더브라위너(8골 15도움·벨기에)가 2위, 살라와 득점왕 경쟁을 벌이는 해리 케인(26골 2도움·토트넘·잉글랜드)이 3위를 차지했다. 임병선 선임기자 bsnim@seoul.co.kr
  • [이덕일의 새롭게 보는 역사] 광복 후 유명 역사학자들 월북·납북… 남한은 식민사학자들 장악

    [이덕일의 새롭게 보는 역사] 광복 후 유명 역사학자들 월북·납북… 남한은 식민사학자들 장악

    북한의 역사학은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먼저 아래 글을 보자.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을 완전한 식민지로 만들기에 성공하자 그들의 소위 역사학자들은 조선역사에 대해서 이상한 관심을 보였다… 그들이 입증한 사실의 가장 중요한 것이란 과연 어떠한 것들인가? 첫째 서기전 1세기부터 4세기까지 약 500년 동안 오늘의 평양을 중심으로 한(漢)나라 식민지인 낙랑군이 설치되었다는 것이요, 둘째 신라·백제와 함께 남조선을 분거하고 있던 가라가 본래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것이요….” ‘조선’만 ‘한국’으로 바꾸면 아직도 한국 사학계가 일제 식민사학을 추종한다고 비판하기 위해 엊그제 쓴 글 같다. 그러나 이 글은 ‘임꺽정’(林巨正)의 저자인 벽초 홍명희의 아들 홍기문이 1949년에 쓴 ‘조선의 고고학에 대한 일제 어용학설의 검토(상·하)’라는 글의 일부다. 윗글은 일제의 식민사학이 두 축으로 되어 있다고 분석한 글이다. 하나는 낙랑군이 서기전 108년부터 서기 313년까지 500여 년간 평양에 있었다는 ‘낙랑=평양설’이고, 다른 하나는 가야가 임나라고 주장하는 ‘가야=임나설’이다.홍명희는 1948년 4월 백범 김구와 함께 ‘전조선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남북협상)’ 참석차 방북했다가 내려오지 않은 독립운동가이자 국어학자였다. 아들 홍기문도 훈민정음과 향가 및 이두(吏讀) 등에 정통한 국어학자였는데, 홍씨 부자는 국어뿐만 아니라 국사에도 해박했다. 정상적인 학자들이라면 국어와 국사는 떨어질 수 없다.●北은 ‘낙랑=평양설’ 1949년 이미 비판 홍기문이 1949년에 이미 ‘낙랑=평양설’을 비판한 것은 남한 학계에서 ‘낙랑=평양설’이 100년 전에 논증이 끝난 ‘정설’이라고 우기는 것과 잘 대비된다. 더구나 이때는 김일성 일가 중심의 주체사관이 등장하기도 전이었다. 그런데 이런 글들이 그냥 나온 것은 아니었다. 북한이 역사학을 남북한 체제 경쟁의 주요한 요소로 설정한 데서 나온 글들이기 때문이다.1945년 10월 10~13일 평양에서 조선공산당 ‘이북 5도당 책임자 및 열성자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에서 김일성은 박헌영이 당수인 조선공산당에서 북한 지역을 떼어 독립하겠다는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설치를 주장했다. 오기섭, 정달현 등 국내파 공산주의자들이 ‘한 나라에는 하나의 공산당만 존재한다’는 코민테른(제3국제 공산당)의 ‘1국1당주의 원칙’에 위배된다고 반대했지만 소련 군정이 지지하는 김일성의 주장이 관철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같은 해 10월 23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이 설치되었다. 이 대회에서 북한을 먼저 사회주의 체제로 만들고 이를 기반으로 남한까지 사회주의화하겠다는 이른바 ‘민주기지론’을 채택한 것은 ‘북조선분국’ 설치와 맥을 같이하는 것이었다. 북한에 먼저 사회주의 체제를 수립하고 남한과 체제 경쟁에 나서 통일하겠다는 의미였다. 북한은 이때 역사학을 체제 경쟁의 중요한 요소로 여겼다. ●南선 식민사관을 정설 인정 비난 자초 1946년 7월 31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김일성은 남한에 파견원을 보내 유수한 역사학자들을 초청했다. 박시형·김석형·전석담 같은 마르크시스트 역사학자들이 김일성의 초청에 응해 월북했다. 이외에 경성대학 법문학부 교수였던 역사학자 백남운도 1947년 5월 여운형 등과 근로인민당을 결성해 부위원장을 역임하다가 월북했다. 식민사관에 비판적인 남한의 역사학자 중에서는 국학대학 학장 정인보와 안재홍 등 소수만 남게 되었다. 그나마 이들도 6·25전쟁 때 모두 납북되고 말았다. 그 결과 남한에는 조선사편수회 출신의 이병도·신석호 등만 남아서 역사학계를 완전히 장악했다. 이들이 북한의 학자들처럼 조선총독부에서 만든 역사학에 의문을 품고 광복된 조국에 맞는 새로운 역사학 연구 기풍을 일으켰다면 지금 남한의 역사학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북한이 남한을 식민지 등으로 폄하하는 논리가 궁색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병도·신석호 등은 조선총독부에서 조작한 역사학을 하나뿐인 ‘정설’로 승격시키고 이를 비판하는 모든 학설을 이단으로 몰아 강단과 국사관련 국가기관에서 내쫓았다. 그 결과 조선총독부가 왜곡한 ‘낙랑군=평양설’이 이미 100년 전에 확립된 ‘정설’이라는 망발이 지금까지 횡행하면서 남한 사학계는 여전히 조선총독부를 추종한다는 비난을 자초하게 된 것이다. ●패수, 신채호 “요령성에” 이병도 “청천강” 북한은 1947년 2월 17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내에 ‘조선력사편찬위원회’(이하 위원회)를 설립했다. 위원회는 “가장 과학적이고 선진적인 사상에 의거해서 조선민족의 장구한 역사를 고대부터 오늘날까지 옳게 표현”하겠다는 목표를 내세웠다. ‘고대부터 오늘날까지’라는 연속성은 역사학의 가장 기초이다. 그러나 남한은 이른바 전공이란 칸막이로 역사학과 다른 학문을 단절시키고, 역사학 내에서도 각각의 전공으로 서로 단절시켜서 ‘전공이 아니라서…’를 입에 달고 사는 분절적 역사학자들만 양산했다. 위원회의 위원장에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서 공산주의 활동을 전개하다가 투옥되었던 이청원이 맡았다. 이청원은 최익한의 사위였는데, 최익한은 조선 말기 영남 유림의 거두이자 파리장서 사건으로 투옥되었던 곽종석의 제자이자 사회주의자였고 1938년부터 ‘동아일보’에 ‘여유당전서를 독(讀)함’을 연재했던 다산 정약용 전문가였다. 위원회는 1948년 10월 2일 관할 기관을 교육성으로 이관했는데, 위원장은 교육상(敎育相: 교육부 장관) 백남운이 겸임했다. 위원회에는 백남운·박시형·김석형·김광진 등의 역사학자와 도유호 같은 고고학자뿐만 아니라 홍명희·한설야·리기영 등의 문학가들과 최창익 등의 정치가들도 참여했다. 그야말로 범국가적인 위원회였다. 이 위원회의 기관지가 앞의 홍기문의 글을 실은 ‘력사제문제’(歷史諸問題)였다. ‘력사제문제’는 1948년부터 1950년 6·25전쟁 직전까지 만 2년이란 짧은 기간에 18집이나 간행되었다. 고대사에 관한 여러 논문이 실렸는데, 그중 하나가 정세호가 1950년 ‘력사제문제’ 16호에 실은 ‘고조선의 위치에 대한 일고찰’이고, 또 하나가 17호에 실은 정현의 ‘한사군고’(漢四郡考)다. 정세호와 정현의 논리는 조금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고조선의 서쪽 강역이 지금의 북경 부근까지 이르렀다가 연(燕)나라 장수 진개(秦開)에게 1000~2000리의 땅을 빼앗긴 이후 지금의 대릉하와 요하 사이까지 밀렸다고 보고 있다. 한사군도 당연히 한반도 북부가 아니라 요동 지역에 있었다고 보았다. 남한에서 고조선의 강역을 평안남도에 국한했던 것에 비교하면 큰 차이였다. 이런 역사인식은 다분히 단재 신채호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고조선과 중국의 경계였던 패수(浿水)의 위치에 대해서 일제강점기 식민사학자들은 압록강(쓰다 소키치)·청천강(이병도)·대동강(이나바 이와기치) 등 한반도 내의 강으로 비정했지만 정세호와 정현은 지금의 요하(遼河) 부근으로 비정했다. 그것도 연나라 장수 진개에게 1000~2000여리의 땅을 빼앗겨 축소된 이후의 패수가 그렇다는 것이었다. 신채호는 패수의 위치를 지금의 요령성 해성(海城)시로 비정했는데, 정현은 ‘한사군고’에서 “(신채호는) 패수를 지금 해성현에 있는 헌우락(軒芋樂)이라고 했는데, 참으로 탁월한 고찰 방법이다”고 높였다. ●신채호를 北 “탁월한 고찰” 南 “또라이” 패수의 위치에 대해서는 나중에 설명할 기회가 있겠지만 남한에서는 지지난 정권에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학진흥사업단장으로 연간 300억원대의 예산을 주무르던 한 역사학자가 공개 학술대회 석상에서 “단재 신채호는 세 자로 말하면 또라이, 네 자로 말하면 정신병자”라고 폄하했다. 신채호의 학설을 ‘참으로 탁월한 고찰’이라고 보는 북한학계와 ‘또라이, 정신병자’로 보는 남한학계 사이의 괴리는 클 수밖에 없다. 더구나 북한 학계는 1960년대 초반까지 고조선의 중심지와 낙랑군의 위치를 고대 요동으로 보는 리지린 등의 문헌사학자들과 평양으로 보는 도유호 등의 고고학자들 사이에 치열한 논쟁을 거치며 학설을 정리해 나갔다. 일체의 논쟁을 봉쇄하고 ‘낙랑군=평양설’이 ‘정설’이라는 따위의 비학문적 논리로 문제제기 자체를 막았던 남한 역사학의 행보와는 달랐다.(계속) 中 국공 내전 때 학자 쟁탈전…대만, 지식인들 학문 기반으로 대륙과 겨뤄 중국의 국공 내전 때 국민, 공산 양당은 문화재 쟁탈전만 전개한 것이 아니라 역사학자 쟁탈전도 전개했다. 1948년 12월 북경에서 이륙한 국민당 비행기에는 북경대 총장을 역임한 호적(胡適)과 청화대 역사학과 교수 진인각(陳寅恪) 등이 타고 있었다. 유수한 학자들을 대만으로 이송하는 ‘학자 이송’의 서막이었다. 그러나 비행기가 남경에 기착하자 진인각은 대륙을 선택해 내렸고, 호적은 대만으로 갔다. 다수의 학자가 대륙을 선택했지만 북경대 총장대리를 역임했던 부사년(傅斯年)도 대만을 선택했다. 부사년, 호적 등은 국립 대만대와 중앙연구원(中央研究院) 등을 세계적인 연구기관으로 성장시켰다. 현 중화민국(대만)이 그 협소한 영토에도 대륙과 정신적으로 당당히 겨룰 수 있는 원천이 대만을 선택한 지식인들이 만든 학문에 있었다.
  • 만델라 前부인·인권운동가 ‘흑인 마마’ 위니 만델라 별세

    만델라 前부인·인권운동가 ‘흑인 마마’ 위니 만델라 별세

    남아프리카공화국 민주화의 상징인 고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의 전 부인이자 정치적 동지인 위니 마디키젤라 만델라가 2일(현지시간) 숙환으로 별세했다. 81세. AFP통신은 이날 위니가 남아공 요하네스버그의 한 병원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눈을 감았다고 전했다. 위니는 지병으로 이 병원에 오랫동안 입원해 있었다. 그는 만델라 전 대통령의 두 번째 부인으로, 1958년부터 38년간 결혼 생활을 이어 갔다. 결혼한 지 5년 만에 만델라 전 대통령이 수감되면서 27년 동안 두 딸을 홀로 키우며 옥바라지를 했다. 아프리카민족회의(ANC)의 당원으로서 남편을 대신해 ‘아파르트헤이트’(흑인 차별 정책)에 맞서 싸워 흑인들로부터 ‘마마’(엄마)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2011년 남아공판 노벨평화상인 ‘우분투상’을 받았다. 하지만 오명도 만만치 않다. 위니는 ‘비폭력운동’을 지향하던 만델라 전 대통령과 달리 타협 없는 급진주의적 성향을 보였다. 그는 자신의 경호대로 활동했던 만델라연합축구클럽(MFC)이 1988년 경찰 정보원이라는 의심을 받은 14세 소년을 살해하는 데 관여한 혐의를 받았다. 1994년 만델라가 대통령이 되자 그는 예술문화교육기술 차관에 임명됐지만 이듬해 명령불복종을 이유로 해임됐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이덕일의 새롭게 보는 역사] 淸, 국경 획정에 조선 대표 배제해 역관이 참석… 백두산에 정계비

    [이덕일의 새롭게 보는 역사] 淸, 국경 획정에 조선 대표 배제해 역관이 참석… 백두산에 정계비

    300여년 전인 숙종 38년(1712) 조선과 청 사이에 국경 분쟁이 발생했다. 압록강변 위원군에서 조선인과 청인 사이에 살인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청나라 건륭제(乾隆帝)는 오라총관(烏喇總管) 목극등(穆克登)을 보내 두 나라의 경계를 확정 짓게 했다. 숙종은 조상들의 산소 이장 문제로 원주에 가 있던 박권(朴權·1658~1715)을 접반사(接伴使)로 삼아 함경감사 이선부(李善溥)와 함께 국경을 획정하게 했다. 그러나 박권, 이선부 등은 목극등이 늙었다면서 따라오지 말라고 하자 주저앉았고 중인 역관 김경문(金慶門) 등만 따라갔다. 조선의 공식대표 없이 역관만 참석해 세운 것이 ‘백두산정계비’(이하 정계비)다.사헌부 장령 구만리(具萬里)가 “경계를 정하는 막중한 일”을 소홀히 했다면서 박권, 이선부의 파직을 요청한 것은 당연했다. 정계비는 “서쪽은 압록이 되고, 동쪽은 토문(土門)이 되니 강이 나뉘는 고개 위(分水嶺上)의 돌에 새겨 기록한다”는 내용인데, 토문이 어느 강인가를 두고 지금껏 논쟁 중이다. 중국의 주장대로 토문이 두만강이면 간도땅이 중국령이 되는 반면, 한국의 오랜 주장대로 토문강이 만주를 흐르는 송화강 지류라면 간도가 한국령이 되기 때문이다. ●경기도 교육청 자료집 사건 2012년 6월 경기도교육청 소속 교사 17명이 ‘동북아 평화를 꿈꾸다’라는 자료집(이하 ‘자료집’)을 발간했다. 그러자 같은 해 9월 6일 동북아역사재단이 ‘경기도 교육청 발간 자료집 검토 내용 송부’라는 공문을 교육부에 보냈다. 공문으로 보냈다는 것은 동북아역사재단(이하 동북아재단)의 공식 견해라는 뜻이다. 재단은 “(‘자료집’의) 고조선과 간도문제에 대한 서술 내용 중 일방적 주장이나 사실적 오류가 상당수 발견돼 이에 대한 보완 또는 수정이 필요하다고 사료된다”고 주장했다. ‘자료집’의 어떤 내용이 ‘사실적 오류’라는 것일까? “(‘자료집’은) 백두산정계비의 토문강을 중국 측에서는 두만강으로, 조선 측에서는 송화강의 지류로 인식했다고 서술하고 있음. 그러나 백두산정계비 건립 당시 청 측과 조선 측 모두 토문강과 두만강이 같은 강이라고 인식하였으며, 토문강과 두만강이 다른 강이라는 인식은 18세기 후반에 제기됨. 따라서 백두산정계비의 토문강이 송화강이라는 인식에 근거하여 한·중 영토 문제를 제기하는 ‘자료집’의 간도문제 서술은 전반적으로 수정될 필요가 있음.” (동북아역사재단, ‘동북아 평화를 꿈꾸다’에 대한 분석)‘자료집’에서 토문강이 만주를 흐르는 송화강의 지류라고 말했는데, 두만강이 맞다는 것이다. 흡사 중국 동북공정 소조에서 보낸 항의문 같지만 중요한 것은 동북아재단이 중국의 항의를 받고 보낸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보낸 공문이라는 점이다. 그럼 비를 세울 당시 청나라와 조선이 모두 토문강을 두만강으로 인식했다는 동북아재단의 주장은 사실일까? ●왜 백두산에 정계비를 세웠나? 정계비 건립 소식이 전해지자 조선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비판론이 고조됐다. 조선과 명 사이에 맺은 공식 국경선, 즉 윤관이 ‘고려지경’(高麗之境)이라는 비석을 세운 두만강 북쪽 700리 공험진 선춘령에 세웠어야지 왜 백두산에 세웠느냐는 비판이다. 정계비를 세울 때 생존했던 성호 이익(李瀷·1681~1763)은 ‘윤관비’(尹瓘碑)에서 ‘목극등이 와서 정계비를 정할 때 왜 서희가 소손녕에게 윤관의 비를 가지고 따진 것처럼 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고 비판했다. 역사학자였던 순암 안정복(安鼎福·1712~1791)은 ‘이가환에게 보낸 편지’에서, 정계비는 “분계강(分界江)을 한계로 삼아서…두 나라의 국경을 삼았습니다…그 강은 두만강 북쪽 300여리에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두만강 북쪽 300리만 국경으로 삼아 그 북쪽 400리 땅을 버렸다는 비판이다. 규장각 검서관이었던 성해응(成海應·1760~1849)은 ‘목극등 정계비 발(跋)’에서 “토문강은 두만강이 아니다. 강 북쪽의 여러 강을 왕왕 토문이라고 부른다”고 말했다. 토문과 두만이 다르다는 것이다. 성해응은 또, ‘공험진 변(辨)’에서 “‘금사’(金史) 및 청나라 사람들이 그린 지도를 보니 두만강 북쪽과 수빈강(현 수분하) 남쪽을 토문강이라고 통칭했다”고 말했다. ‘조선왕조실록’은 태조 때부터 줄곧 두만강으로만 표기하다가 숙종 18년(1692)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찬선 이현일(李玄逸)의 상소문에 토문(土門)이 처음 등장하는데, 두만과 토문을 달리 표기하고 있다. 순조 8년(1808)에 편찬한 ‘만기요람’(萬機要覽)은 ‘백두산정계’조에서 “‘여지도’(輿地圖)에 분계강(分界江)이 토문강의 북쪽에 있다 했으니 정계비는 당연히 여기에 세웠어야 한다. 또 비문에 이미 동쪽은 토문강이 된다고 했으면 토문강의 발원지에 세워야 했다.”라고 비판했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백두산정계비를 두만강 북쪽 700리 선춘령에 세우지 않은 것을 비판하고 토문강은 두만강 북쪽이라고 생각했다. ●간도는 무조건 중국 것이라는 재단 어느 나라 국가기관인지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동북아재단의 주장은 이뿐만이 아니다. “(‘자료집’은) 간도협약이 사실상 무효이고 간도는 한국의 영토임을 증명하기 위해 백두산정계비를 국제법상 유효한 국경조약으로 서술하고 있음. 그러나 백두산정계비가 건립된 시기는 국제법적 인식이 등장하기 이전이기 때문에 국제법적 기준을 바로 적용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함.” (동북아역사재단, ‘동북아 평화를 꿈꾸다’에 대한 분석) 일제가 청과 맺은 간도협약과 조선이 청과 맺은 백두산정계비 중 간도협약만 국제법상 유효라는 주장이다. 일제는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은 후 간도파출소를 설치해 간도를 관할하다가 1909년 9월 남만주 철도 부설권과 무순(撫順)탄광 채굴권을 얻는 대가로 간도협약을 맺어 간도를 청나라에 넘겨줬다. 청나라가 철도부설권 등을 주고 간도영유권을 샀다는 것은 청나라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제가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한 후 맺은 불법조약이니 당연히 무효다. 그런데도 동북아재단은 거꾸로 정계비는 무효이고 간도협약이 국제법상 유효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송화강의 여러 지류를 서쪽에서 동쪽으로 일도백하, 이도백하… 식으로 분류하는데, 오도백하가 토문강이다. 이 사실은 일제 간도파출소에서 작성한 지도에서도 명백하다. 그러나 동북아재단은 일제가 청과 맺은 간도협약만 국제법적으로 유효하다고 주장하는 데 대한민국 국민들의 피 같은 세금을 쓴다. ●대한제국에서 파견한 북간도관리사 고종 20년(1883) 서북경략사(西北經略使) 어윤중(魚允中)은 함경도 종성 사람 김우식(金禹軾)과 백두산정계비를 조사하고 청나라 돈화(敦化)현에 ‘토문강과 분계강 이남 강토에 대한 옛 지도 모사본과 새 지도’ 등을 보내면서 간도가 누구 소유인지 공동조사하자고 요청했다. 청나라는 꼬리를 내리고 회피했다. 토문강이 송화강의 지류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고종 22년(1885)에는 외교를 총괄하는 독판교섭통상사무(督辦交涉通商事務) 김윤식(金允植)이 청나라 총리 원세개(袁世凱)에게 공문서를 보내, ‘토문강은 두만강 이북의 강’이라고 주장했다. 이때는 청나라가 대원군을 납치해 간 임오군란(1882) 이후로서 청나라의 위세가 하늘을 찌를 때였는데도 이런 주장을 한 것은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뜻이다. 광무(光武) 7년(1903·고종 40)에는 의정부 참정 김규홍(金奎弘)이 고종에게 ‘백두산정계비’를 세운 이후 “토문강 이남 구역은 우리나라 경계로 확정됐다”면서 간도시찰관 이범윤(李範允)을 북간도 관리에 임명하자고 주청했다. 대한제국은 이범윤을 북간도 관리(管理)로 임명해 간도에 상주시켰고, 간도 백성들은 대한제국에 세금을 납부했다. 그로부터 6년 후인 1909년에 일제가 간도협약으로 몰래 팔아먹은 것이다. 남북이 분단된 지금 중국에 간도를 돌려달라고 공식 제기할 상황은 아니지만 간도에 대한 역사주권만은 확고하게 정립해서 미래에 대비해야 한다. 설립 이후 지금까지 늘 중국과 일본의 입장만 대변해 온 동북아역사재단을 국민들의 상식적인 역사관에 맞게 처리하는 일이 그 첫 단추가 될 것이다.
  • [생각나눔] 시민 부담 덜어주기 ‘눈 가리고 아웅’

    [생각나눔] 시민 부담 덜어주기 ‘눈 가리고 아웅’

    요금은 줄고 기간은 20년 더 늘어 정부 1조원대 재정 부담 사라져 “초과 수입 통행료 인하에 활용”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 북부 민자구간(일산~퇴계원 간 36.3㎞) 통행료가 오는 29일부터 최대 33% 내린다. 26일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승용차의 경우 4800원에서 3200원으로 1600원 내리고 대형화물차는 6700원에서 4600원으로 2100원 부담을 던다. 2006년 6월 개통한 지 12년 만이며, 2015년 12월 통행료 인하를 요구하는 경기북부 주민 216만명의 서명부가 국토부에 접수된 지 2년 3개월여 만이다. 국토부는 이번 결정으로 승용차를 이용해 이 구간을 매일 왕복 운행하는 경우 연간 75만원(연간 근무일 수 235일 기준)의 통행료를 절감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 변경안을 분석해 보면 통행료 인하로 ‘가장 큰 이익을 거둔 측은 정부이며, 시민은 손해’로 나온다. 통행료를 낮추는 대신 징수기간을 30년에서 50년으로 20년 연장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는 현재 징수기간이 18년 남았다. 매일 이 구간을 9600원(편도 4800원)씩 내고 18년간 왕복 운행한다고 단순 가정하면 총통행료는 6307만원이다. 할인요금 6400원(편도 3200원)을 내고 38년간 왕복 운행할 경우 총통행료는 8876만원이다. 인하 후 요금이 오히려 2569만원 더 많다. 이번 변경안이 ‘후손들에게 부담을 떠넘기는 방식’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반면 정부는 운영업체와 실시협약을 변경해 막대한 재정을 절감하게 됐다. 우선 통행료 수입이 추정치의 90%에 미달하면 그 차액을 매년 보전해 주던 최소운영수입보장(MRG) 규정이 없어져 앞으로 860억원을 부담하지 않아도 된다. 운영업체가 통행료를 올리지 않는 대가로 지원하는 1조 3320억원도 아끼게 됐다. 연리 2.74%의 투자수익을 보장받는 민간투자업체도 징수 기간 연장으로 매년 631억원씩 모두 1조 2620억원을 안정적으로 받게 됐다. 김형오 대한민국옴부즈맨총연맹 상임대표는 “이번 통행료 조정은 정부 이익을 극대화하면서 기존 투자자 이익을 늘려 주고 시민 부담은 오히려 키우는 방식”이라며 “시민에 대한 눈속임”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국토부 관계자는 “20년 추가 연장 기간 통행료가 낮아지는 등의 이유로 차량 통행이 늘어남에 따라 예상 운영 수입이 4조 9649억원이 될 것”이라며 “보장 기준액(4조 4348억원)을 초과해 돌려받는 약 5300억원을 통행료 인하에 활용할 것”이라고 해명했다. 한상봉 기자 hsb@seoul.co.kr
  • 文 “개헌발의권 행사는 국민과의 약속”

    文 “개헌발의권 행사는 국민과의 약속”

    UAE서 국회 송부·공고 재가 여야 3당 오늘 개헌 협상 착수문재인 대통령은 “이번 지방선거 때 동시투표로 개헌을 하겠다고 국민과 약속했고, 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 헌법이 대통령에게 부여한 개헌 발의권을 행사한다”고 26일 밝혔다. 대통령의 개헌안 발의는 1980년 5공화국 헌법개정안 이후 38년 만이다. 문 대통령은 1972년 유신헌법을 발의한 박정희 전 대통령과 전두환 전 대통령에 이어 세 번째로 개헌안을 발의한 대통령이 됐다. ‘대통령 개헌안’은 늦어도 5월 24일에는 국회 본회의에서 의결해야 한다. 아랍에미리트(UAE)를 공식방문 중인 문 대통령은 바라카 원전 1호기 완공식 참석에 앞서 오전 8시 35분(한국시간 오후 1시 35분) 숙소인 에미리트팰리스에서 이낙연 국무총리가 주재한 국무회의를 통과한 개헌안의 국회 송부와 공고를 전자결재로 재가했다. 문 대통령은 특히 “개헌으로 저에게 돌아오는 이익은 아무것도 없다”며 “제가 당당하게 개헌을 발의할 수 있는 이유”라고 강조했다. 문 대통령은 김의겸 대변인이 대독한 입장문에서 ‘야당의 강한 반대를 무릅쓰고 헌법 개정안을 발의하는 4가지 이유’도 밝혔다. ▲촛불광장 민심의 헌법적 구현 ▲6월 지방선거 동시투표 개헌으로 많은 국민의 국민투표 참여, 세금 절감 ▲ 대선과 지방선거 시기를 일치시켜 국력·비용 낭비 방지 ▲국민을 위한 개헌 등이다. 문 대통령은 “헌법은 한 나라의 얼굴이며, 헌법 주인은 국민이고, 개헌을 최종적으로 완성하는 권리도 국민에게 있다”고 강조한 뒤 국회에 협조를 당부했다. 한편 정세균 국회의장과 여야 3당 원내대표는 이날 정례회동에서 ▲권력구조 ▲선거제도 ▲권력기관 개혁 ▲투표시기 등 4가지 의제를 놓고 27일부터 개헌 협상에 들어가기로 했다. 4월 임시국회에서 문 대통령의 개헌 관련 국회연설도 합의했다. 아부다비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서울 안석 기자 sartori@seoul.co.kr
  • 문재인 대통령 “국민과의 약속 지키기 위해 개헌안 발의”

    문재인 대통령 “국민과의 약속 지키기 위해 개헌안 발의”

    문재인 대통령은 26일 야당의 강한 반대를 무릅쓰고 헌법개정안을 발의하는 것은 지난 대선 때 국민들과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함이며 이로 인해 자신에게 돌아오는 정치적 이익은 아무것도 없음을 분명히 밝혔다. 아랍에미리트(UAE)를 공식 방문 중인 문 대통령은 이날 바라카 원전 1호기 완공식에 참석하기에 앞서 오전 8시 35분(현지시간) 숙소에서 국무회의를 통과한 개헌안의 국회 송부와 공고를 전자결재로 재가했다.대통령의 개헌안 발의는 1980년 간선제 5공화국 헌법 개정안 발의 이후 38년 만이다. 문 대통령은 박정희·전두환 전 대통령에 이어 역대 세번째로 개헌안을 발의한 대통령이 됐다. 문 대통령은 이날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이 대독한 입장문을 통해 개헌안 발의를 하게 된 이유로 네 가지를 들었다. 문 대통령은 첫 번째 이유로 “개헌은 헌법파괴와 국정농단에 맞서 나라다운 나라를 외쳤던 촛불광장의 민심을 헌법적으로 구현하는 일”이라며 “지난 대선 때 모든 정당, 모든 후보들이 지방선거 동시투표 개헌을 약속한 이유”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1년이 넘도록 국회의 개헌 발의는 아무런 진척이 없었다. 문 대통령은 “지금 대통령이 개헌을 발의하지 않으면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기 어렵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두 번째 이유는 “6월 지방선거 동시투표 개헌은 많은 국민이 국민투표에 참여할 수 있는 다시 찾아오기 힘든 기회이며, 국민 세금을 아끼는 길”이라고 밝혔다. 문 대통령은 “민생과 외교, 안보 등 풀어가야 할 국정현안이 산적해 있는데 계속 개헌을 붙들고 있을 수는 없다. 모든 것을 합의할 수 없다면, 합의할 수 있는 것만이라도 헌법을 개정하여 국민과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세 번째 이유는 이번 지방선거 때 개헌하면, 다음부터는 대선과 지방선거의 시기를 일치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문 대통령은 “전국 선거의 횟수도 줄여 국력과 비용의 낭비를 막을 수 있는 두 번 다시 없을 절호의 기회”라고 설명했다. 네 번째 이유는 “대통령을 위한 개헌이 아니라 국민을 위한 개헌이기 때문”이라고 거듭 말했다. 문 대통령은 “개헌에 의해 저에게 돌아오는 이익은 아무 것도 없으며, 오히려 대통령의 권한을 국민과 지방과 국회에 내어놓을 뿐이다. 제게는 부담만 생길 뿐이지만 더 나은 헌법, 더 나은 민주주의, 더 나은 정치를 위해 개헌을 추진하는 것”이라며 “제가 당당하게 개헌을 발의할 수 있는 이유”라고 강조했다. 개헌 최종적으로 완성할 권리, 국민에 있어 문 대통령은 “헌법은 한 나라의 얼굴이다. 그 나라 국민의 삶과 생각이 담긴 그릇”이라며 “국가의 책임과 역할, 국민의 권리에 대한 생각도 30년 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기본권, 국민주권, 지방분권의 강화는 국민들의 강력한 요구이며 변화된 국민들의 삶과 생각이다. 헌법의 주인은 국민이며 개헌을 최종적으로 완성하는 권리도 국민에게 있다. 제가 오늘 발의한 헌법개정안도 개헌이 완성되는 과정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삶과 국가의 미래를 위해 개헌 과정에 끊임없는 관심을 가져주시리라 믿는다. 국회도 국민들께서 투표를 통해 새로운 헌법을 품에 안으실 수 있게 마지막 노력을 기울여주시길 바란다”고 국민과 국회가 협조해 줄 것을 당부했다. 정부는 이에 앞서 한국 시간으로 이날 오전 10시 이낙연 국무총리 주재로 국무회의를 열어 전문(前文)과 11개장 137조 및 부칙으로 구성된 대통령 개헌안을 의결했다. 개헌안은 대통령 4년 1차 연임제와 수도조항 명시, 지방분권 지향 등을 골자로 하고 있다. 김유민 기자 planet@seoul.co.kr
  • 개헌안 국무회의 의결···대통령 전자결재 거쳐 발의 예정

    개헌안 국무회의 의결···대통령 전자결재 거쳐 발의 예정

    문재인 대통령이 발의할 정부 개헌안이 26일 오전 국무회의에서 의결됐다. 의결된 정부 개헌안이 문 대통령의 결재를 거쳐 국회로 송부되고 관보에 게재되면 발의 절차가 마무리된다. 대통령의 개헌안 발의는 1980년 전두환 전 대통령이 비상계엄하에 간선제 5공화국 헌법 개정안을 발의한 이후 38년 만이다.정부 개헌안 의결은 청와대가 지난 20∼22일 사흘에 걸친 대국민 설명에 이어 22일 전문을 공개한 지 나흘 만에 이뤄졌다. 정부 개헌안은 국회의 60일 이내 심의 절차를 거치고 공고가 이뤄지면 6월 13일 지방선거와 동시에 국민투표가 실시된다. 하지만 개헌 저지선을 확보한 자유한국당의 강력한 반대로 인해 현재로써는 국회 재적 의원 3분의 2 이상 찬성이라는 국민투표의 전제 조건을 충족할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다. 정부는 이날 오전 10시 정부서울청사에서 이낙연 국무총리 주재로 국무회의를 열어 전문(前文)과 11개장 137조 및 부칙으로 구성된 대통령 개헌안을 의결했다. 아랍에미리트(UAE)를 순방 중인 문 대통령은 의결된 정부 개헌안을 보고받은 뒤 오후 전자결재를 통해 국회 송부와 함께 개헌안의 공고를 승인할 예정이다. 정부 개헌안이 관보에 게재되면 법적인 의미의 개헌안 공고가 시작되고 발의 절차도 완료된다. 국회는 개헌안을 송부받은 날로부터 60일 이내에 의결해야 한다는 개헌 절차에 따라 오는 5월 24일까지 국민투표 상정 여부를 결론 내야 한다. 청와대는 6월 지방선거와 동시 개헌투표를 성사시키려 불가피하게 대통령이 개헌안을 발의하는 강수를 뒀지만,여야가 지방선거 동시 국민투표를 전제로 국회 개헌안을 5월 초까지 합의한다면 정부 개헌안을 철회할 수도 있다는 입장이다. 이를 위해 문 대통령은 4월 임시국회 회기에 국회연설을 포함해 여야 지도부 회동,국회의장 및 헌법개정특위 면담 등 대(對)국회 설득작업을 강화할 방침이다. 대통령 4년 1차 연임제를 핵심으로 하는 정부 개헌안은 대통령의 특별사면권 통제,감사원의 독립기구화,헌법재판소장 임명권 삭제 등 대통령 권한을 상당 부분 분산·축소했다.반면 국무총리의 책임성과 자율성을 강화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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