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36년 만
    2026-08-20
    검색기록 지우기
  • 동시
    2026-08-20
    검색기록 지우기
  • 매출
    2026-08-20
    검색기록 지우기
  • 국보
    2026-08-20
    검색기록 지우기
  • 법무부
    2026-08-20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1,912
  • 「근대법원 1백년사」 나온다/대법원,95년 발간 목표로 준비

    ◎1895년 한성재판소 설치이후/사법·재판제도 변천 시대별로 점검/「사법부파동」 유발한 판결문등도 수록 우리나라 법원의 근대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책이 엮어지고 있다. 대법원은 1일 법원사편찬실무자회의(간사 윤재윤 서울고법판사)를 열고 우리나라에 근대적 의미의 사법제도가 도입된 1895년이후의 법원 역사를 총괄한 「법원 백년사」(가제)를 오는 95년에 발간하기로 했다. 대법원은 이를 위해 다음주 안으로 대법원규칙을 새로 마련,김성일 법원행정처차장을 위원장으로 학계·법조계인사를 초빙해 「법원사편찬위원회」를 발족시켜 본격적인 편찬작업에 들어갈 예정이다. 이 「백년사」에서는 구한말인 1895년 을미개혁으로 공포된 재판소구성법에 따라 탄생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재판기관인 한성재판소 시절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의 사법제도와 재판제도의 변천과정을 시대별로 총정리하게 된다. 「백년사」는 특히 시대사 뿐만아니라 각급 법원의 연혁과 「사법부 파동」「법관 서명사건」「박인수사건」등 사회적 파문을 일으켰던 굵직한 사건들에 대한 각종 자료 및 명판결문등도 수록해 사서로서만 아니라 법원자료집으로서도 활용할 수 있게 엮어진다. 대법원이 「백년사」발간을 추진하기로 한 것은 그동안 각급법원별로 변천사등을 정리한 책자등이 몇차례 발간되기는 했으나 우리의 사법제도를 포함한 전반적인 법원사를 정리한 책이 없다는 지적에 따른 것이다. 대법원은 이에따라 지난89년부터 각급 법원에 실무자를 지정,기초적인 자료를 수집하고 대학등에 자문을 구하는 등 준비작업을 계속해 왔다. 처음에는 각급 법원의 연혁과 해방이후의 법원역사만을 실으려 했으나 오는 95년이면 우리나라에 근대적 사법제도가 도입된지 꼭 1백년이 되는 점을 감안,일제치하의 36년이 아무리 질곡과 암흑에 짓눌렸었다 하더라도 그 또한 우리 역사라는 인식아래 이를 모두 포함시켜 「백년사」를 꾸미기로 뜻을 모았다. 대법원은 「편찬위원회」가 발족되는대로 그동안 수집한 각종 자료등을 정리한 뒤 집필위원을 선정,「백년사」의 집필을 위촉할 예정이다. 법원 관계자는 『백년사의 발간은 그동안 한번도 체계적으로 정리되지 않은 근대이후 우리 법원의 역사를 완비한다는데 의미가 이다』고 밝히고 『특히 단순한 홍보책자가 되지 않기 위해 원고의 집필을 가급적 법원인사가 아닌 학자등 외부인사에게 의뢰,엄정하고 객관적인 입장에서 가감없이 정리하도록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 규장각 자료서 드러난 일제의 날조 파장/긴급좌담

    ◎“을사조약등 무효” 대일 공식통보를/5년간의 의병희생등 추가배상 마땅/두나라 교과서등 역사기술 새로해야/학계도 일자료 의존 탈피,원전연구 나설때 ▷참석자◁ 윤병석 인하대교수·역사학 신용하 서울대교수·사회학 백충현 서울대교수·법학 일본은 일제의 한국 침략이 이른바 「을사보호조약」 「정미7조약」등 두 나라사이의 국제조약에 의해 합법적으로 이루어졌다고 주장해 왔다.우리 국민역시 일제의 역사왜곡에 의해 대한제국이 무력하게 국권을 내어 준것으로 잘못 알아왔다.그러나 서울대 규장각 소장자료 정리·분석과정에서 을사조약을 비롯,대한제국말기의 각종 조약과 칙령 등이 황제의 승인없이 일제에 의해 날조된 것(서울신문 12일자 보도)으로 밝혀짐에 따라 원인무효의 조약에 의한 일제36년의 청산문제가 다시 제기되고 있다.역사적 사실의 재정립 및 대일피해보상 등 한·일간의 새로운 현안들을 짚어보는 전문가 좌담과 조약체결과정에대한 박성수교수의 글을 싣는다. ○“체결”로 거짓 발표 ▲신용하교수=일제가 지난 1905년 조선에 강요한 을사조약과 1907년의 정미7조약등 각종 조약과 식민지법령이 당시 조선황제인 고종의 인준을 받지못했을 뿐만 아니라 상당수가 일제에 의해 황제의 서명이 위조된 것이라는 서울대 규장각의 발표는 국민들에게 상당히 충격적인 일이었을 겁니다.먼저 제가 1905년 을사조약체결과정과 이를 둘러싼 조선조정의 대응등 역사적인 배경을 살펴보는 것으로 오늘 대담을 시작하겠습니다.일제는 1905년 러·일전쟁에 승리한 뒤 조선의 국권을 빼앗기 위해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려고 모든 수단을 동원했습니다.일제는 을사조약을 만들어 일본 헌병대를 동원해 대신들을 위협하고 강제로 체결하려다 고종의 완강한 거부로 고종의 인허·수결·옥새·날인 어느 것도 받지 못해 조약체결에는 실패했는데도 불구하고 일제는 조약이 체결된 것처럼 거짓으로 발표해버렸습니다.당시 대한제국은 전제군주국가로서 모든 외국과의 조약과 칙령에는 황제의 친필서명과 옥새의 압인이 필수요건이었으므로 을사조약은 무효인 것이지요.이 과정에서 당시 참정대신 한규설은 조약체결에 반대해 헌병들에게 멱살이 잡힌채 밖으로 끌려나갔고 민영기 이하영등도 이를 막아보려 했습니다.이밖의 국내상황은 어떠했습니까? ▲윤병석교수=당시에는 국내의 친일파들 말고도 미국·영국·독일등 제국열강들 조차도 일제의 불법을 자국의 이익에 따라 묵인한 상태여서 일제의 조선침략은 계획대로 진행됐죠.이는 바로 우리가 역사에서 얻어야 할 교훈인데 지금도 달라진 것은 크게 없습니다.물론 일부에서는 1세기전에 국가간 조약을 체결하면서 지금처럼 철저하게 법적절차를 거치고 그에 대한 인식이 있었겠느냐고 의문을 가질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예를들어 「양국간의 통상을 시작한다」는 내용을 담은 1876년의 강화도조약만해도 조약체결 당사자들의 서명은 물론 이들의 도장 왼쪽에 양국통치권자의 서명·날인이 돼있습니다.하물며 한나라의 국권을 좌우할 수 있는 중요한 조약에 통치권자의 서명·날인이 없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신=이들 조약들이 법적효력이 없다는 것이 확인됐는데 그럼 무엇이 달라지고 지금 우리가 취할수 있는 대응책은 어떤 것들이 있겠습니까? ▲백충현교수=을사조약이 형식적인 요건을 갖추지 못하고 공표됐다는 것은 학계내부에서는 알려져있었지만 우리의 원본으로 공식확인된 것은 상당히 의미있는 일입니다.그리고 정미7조약과 같은해 12월에 반포된 48개의 칙령등에 순종의 수결이 위조됐다는 사실은 이번에 처음 발견된 것이라는 것도 분명히 해야합니다.외교권박탈과 통감부설치에 의한 조선지배등을 규정한 을사조약이 무효이므로 이후 일본이 외국과 체결한 간도협약(1909년)이나 내치를 위해 반포했던 일체의 식민지법도 모두 무효가 됩니다.여기에서 지난 65년 체결된 한일기본협정에서 일본측이 취했던 입장을 짚고넘어가야 합니다.일본측은 1910년 한일합방을 합의했던 것자체가 무효가 아니라 당시 조선황제의 동의를 얻어 제정·반포된 법에 근거해 합법적이라고 주장해왔습니다. ○전세계에 알려야 그러나 을사조약자체가 무효라는 것이 판명된 이상 물적배상의 차원을 떠나 사실은 사실대로 기록되어야하며 이는 역사의 잘못된 반복을 막으며 장래한일양국관계의 정상화에도 기여할 것입니다. ▲신=저도 백교수님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저는 이밖에도 선언적인 의미에 그칠지는 몰라도 을사조약이 체결도 안된 것으로 무효라는 사실을 전세계에 알려야 한다고 봅니다.또 이사실을 사후에라도 언제든지 확인할 수 있도록 우리 정부가 공식문서로 작성해 일본정부에 전달해야 합니다.한일교과서의 내용도 「일제는 1905년 을사조약을 강제체결하였다」는 서술을 「일제는 1905년 소위「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려다가 실패하자 체결되지도 않은 조약을 체결된 것처럼 제멋대로 거짓 반포하였다」로 고쳐써야 할 것입니다.또한 지난65년 한일기본조약체결때 1910∼1945년에 대한 배상만을 논의했는데 1905∼1910년사이 일제침략에 무참하게 학살된 수만명의 의병들의 희생에 대해서도 추가로 배상을 요구해야 합니다. ▲윤=저는 신선생님의 제안에 몇가지를 덧붙이고자 합니다.이번 기회에 일제침략의 악랄함과 간교함,기만적인 부분들을 국민들에게 제대로 알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그리고 일부에서는현재의 한일관계가 수교이후 가장 불편하다는 점을 들어 감정적인 대응을 경계해야 한다고도 하지만 그것은 어느 한시점에 근거한 단견입니다.국제관계란 때로는 소원해질수도 있고 가까워질수도 있는거니까요.일본이 과거에 저지른 만행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오히려 양국 모두에 도움이 되며 아직까지도 계속 거론되는 친일잔재 역시 하루빨리 완전청산돼야합니다. ○주권지켜낼 정도 ▲백=규장각 자료분석작업에 직접 관여하면서 저를 포함해 학계가 반성해야한다고 절실히 느꼈습니다.우리는 여러이유로 자료들이 제대로 보관돼있지 않아 일본자료를 그대로 인용하는 풍토가 만연돼있습니다.그렇기 때문에 사실을 왜곡하고 굴절된 시각으로 바라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이번경우도 규장각에 소장돼있던 자료를 정리하다 우연히 발굴된 겁니다.우리 학계는 이제 간접자료가 아닌 원본에 근거한,원칙에 충실한 연구자세를 지향해야하며 우리의 문헌을 창고에 방치하지 말고 근본적인 자료에 눈을 돌리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신=마지막으로이번에 새롭게 밝혀진 역사사실이 우리사회에 던진 충격에서 벗어나 잘못 알려져온 역사는 바로잡고 이로인해 손상당한 우리 민족정기를 바로세우며 또한 일본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더불어 최근 일본에 치우쳐있는 국민들의 무비판적인 관심을 한번 거르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또 우리민족이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상처를 치유하고 민족적 자긍심을 갖도록 역사사실을 알려 최근 물밀듯 상륙하고 있는 일본의 경제·문화침략에 제대로 대응할 수 있는 판단력을 지니도록 해야하는데 이는 바로 우리의 주권과 문화적인 자주성을 지켜나가는 정도이기 때문입니다. ○고종,“순할지언정 인허 못한다”/을사조약 이등협박에 끝까지 불응/박성수 정문연교수·역사학(특별기고)/이완용등 오적변절… 대신회의서 “가” 결정/황제,“적자 모두 일어나라” 국민항쟁 촉구 1905년의 을사조약이 조약당사국의 최고통수권자인 대한제국 광무황제(고종은 일제의 명명)의 비준없이 체결되고 1907년의 정미조약도 융희황제(순종)의 위조된 수결로 체결된 사실이밝혀져서 이 시기의 모든 법령은 물론 1910년의 소위 합병조약(경술조약)까지도 무효임이 밝혀져 이 시기에 관한 기존의 역사 기술에 근본적인 재검토가 요구되고 있다. 1905년 11월17일 광무황제의 재가 없이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된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진 일이다.국권탈취의 원흉 이등박문이 서울역에 도착한 것은 1905년 11월9일 하오.이튿날 낮12시 덕수궁의 황제를 알현,소위 일본천황의 친서를 전달하면서 1차로 협박하고 2차 알현을 요구하였으나 황제가 거절,15일에 가서야 2차 협박에 성공했다. 그러나 얻어낸 결과는 죽는 한이 있어도 인허할 수 없다는 대답이었다. ▲이등=만약 폐하가 이 조약을 거절하면 중대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황제=이 조약은 국가중대사이므로 짐이 단독으로 결정할 수 없다.국민의 의사를 물어 봐야 한다. ▲이등=국민의 의사 운운하심은 국민을 선동하여 일본에 반항하려는 것이 아닙니까? ▲황제=이 조약을 인허하는 것은 망국이나 같은 것이니 짐이 종사에 순할지언정 절대로 인허할 수 없다. 죽으면 죽었지 이 조약은 받아 들일 수 없다는 황제의 태도는 그 뒤에도 변함이 없었다.5월17일 이등박문이 불법으로 소집,주재한 대신회의에서 이완용등 오적이 변절하여 「가」라고 대답했을 때 황제는 그들의 배신행위를 「천재의 유한」이라 개탄하면서 『짐의 적자는 모두 일어나 이 슬픔을 함께 하라』고 말했으며 피를 토하여 통곡하였다.황제의 뜻이 이러하였으므로 을사조약에 수결했을 리 만무하다.따라서 이 조약은 원천적으로 무효일 뿐 아니라 일제는 이 조약 자체를 위배하고 있다.즉 한국의 외교권만을 침탈하기로 되어 있는 조문을 무시하고 한국의 모든 내정권을 유린하고 있다.이것도 명백한 불법이다. 광무황제는 이보다 먼저 1904년 러 일전쟁 발발 직전에 국외중립을 선언한 바 있으나 이것도 일제가 불법적으로 묵살하였다.1907년 해아특사를 파견하여 만국평화회의에 친서를 전달하게 되는데 그 요지가 을사조약의 무효선언이었다. 『짐은 최근 한국과 일본간에 체결된 소위 보호조약은 무력협박과 감금속에서 강요된 것이므로 무효를 선언한다.짐은 이조약을 절대 승인한 바 없으며 장차도 그럴 의사가 없다』 헐버트에게 보낸 전신에서 황제는 이렇게 명언하고 있다.이 사건으로 황제는 강제 퇴위 당하나 그 때도 퇴위아닌 황제대리를 선언하였다.그러나 일제는 또다시 이를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양위를 발표하였다.그리고 한국군 해산을 골자로 하는 정미조약을 체결했다.이것마저도 융희황제의 재가없이 강행하였다면 당연히 무효이다. 이등의 주구였던 이완용의 매국내각을 인정할 수 없듯이 1904년 러일전쟁 발발이후 1910년 경술조약까지의 모든 법령,안중근의사에 대한 사형판결까지도 모두 원천적으로 무효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그런 전제하에서 한일 두나라 교과서는 물론 모든 역사기술을 재검토하여 새로이 집필되어야 할 것이다.특히 일본은 1931년 이후 소위 15년간의 침략통치에 대해서만 책임을 지고 그 이전의 한국침략을 합법적이었다고 보는 어처구니 없는 역사관을 버리고 솔직하고 겸허하게 진실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 아르헨:2/나윤도특파원 현지 리포트(중남미를 다시본다:6)

    ◎“개발정책에 환경보존 최우선 고려”/기초과학 선진수준… 잠재력 “무한”/올 공업생산증가 27%로 고속성장 「7월9일대로」,「5월광장」,「2월3일역」,「2월6일공원」­. 라플라타강의 황토물이 넘실대는 팜파대지 가장자리에 드넓게 펼쳐진 부에노스아이레스 시가지의 이들 가로명은 혁명과 반혁명이 점철된 아르헨티나근세사의 혹독한 시련을 잘말해주고 있다. 브라질이 흑백의 혼합사회를 이루고 있는 것과는 달리 3백여년전 비옥한 신대륙을 찾아 혼미의 유럽을 떠나 이민온 아르헨티나인 조상들은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남미의 「파리」라 불리울만큼 아름답게 꾸미면서 유러피안으로서의 긍지 아래 이 나라를 백인국가로 건설해왔다. 한반도의 12배가 넘는 광대한 국토를 지닌 농목축국가로 풍부한 자원,국민의 높은 교육수준등 무한한 잠재력을 포용한 아르헨티나는 1950년대 후반부터는 중공업 육성정책으로 중남미국가들중 가장 앞선 공업국으로의 지위 또한 누려왔다. 그러나 페론정권의 등장 이후 30년 가까이 지속된 혁명과 반혁명의 연속선상에서아르헨티나는 경제침체의 늪에서 헤어날수 없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카를로스 메넴대통령의 강력한 개혁정책이 국민들의 엄청난 인내를 요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적 지지를 얻고 있는것은 바로 정부와 국민 사이에 「아르헨티나의 자존심 회복」이라는 점에서 컨센서스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가지 개혁정책중 메넴정권이 현재 가장 주력하고 있는 분야는 과학기술분야.메넴대통령은 취임직후 모든 개발계획은 환경보존과 병행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대통령직속기구로 과학기술위원회를 설립,아르헨티나의 모든 개발및 기술 도입문제등을 관장토록 했다. 이 과학기술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아르헨의 과학입국을 위한 총사령탑인 라울 마테라 과학기술처장관(70)은 『아르헨의 장래는 과학기술의 발달에 달려있기 때문에 정부개발정책의 우선순위가 두어지고 있는것은 당연하다』고 말하고 『특히 앞으로의 과학기술은 환경에의 고려없이는 무의미하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기술개발을 지구환경보존 차원과 연계시켜 해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 위원회에는 국립자연과학아카데미를 비롯 부에노스과학아카데미·의학아카데미·농업아카데미·기술아카데미등 국립연구기관들이 자문단으로 가입돼 있고 기상·해양·생물·환경등 각분야의 최고석학들로 구성된 개인자문단도 있다.또 분야별 특성에 따라 전국에 6개의 지역센터를 설치,운영하고 있으며 중앙에 데이터뱅크까지 설치해놓고 있다. 메넴대통령의 측근으로 저명한 의학박사인 마테라장관은 『우리의 기술개발 목표는 마침 오는 6월 개최될 환경서밋과도 연관되는것으로 제조업뿐 아니라 기존의 농목축업분야에 있어서도 환경보존을 우선하는 방향에서 발전을 도모해나갈것』이라고 밝히고 『특히 미국과의 긴밀한 협조를 통해 「지구환경변화」(GlobalChange)에 대처해 나갈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는 즉 지난 90년 조지 부시미대통령에 의해 발표된 환경보존과 외채문제를 연계시킨다는 「뉴 이니셔티브」계획에 적극 찬동을 의미하는 것으로 외채문제의 해결에 의한 경제개혁의 순조로운 진행이라는 정책목표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마테라장관은 특히 과학기술발전에 있어 한국과의 협조를 강조,지난 2월달에는 「한국­아르헨 긴밀화세미나」를 한국대사관과 공동주관으로 개최한바 있으며 『과학기술분야에 있어 한국과의 실질적인 협력이 필요한 만큼 빠른 한­아르헨 과학기술협정체결을 희망한다』고 밝혔다. 이같은 과학기술의 발전노력과 함께 최근 들어 급증하기 시작한 외국투자도 석유화학분야를 필두로 자동차및 부품·화학및 의약·금속 철강등에 집중되고 있어 아르헨의 공업국으로의 부상 역시 가까운 시일내에 가능할 것으로 전망된다.이는 지난해 연평균 14·9%를 보였던 공업생산량 증가율이 금년들어서는 26·5%를 상회하는 높은 증가율이 예상돼고 있는데서도 나타나고 있다. 한편 엔리케 델라 토레 경제부투자국장(45)은 해외투자와 관련,『89년 메넴정부 출범이후 투자관련법을 개정,외국자본도 국내자본과 동일한 대우를 받게 됐으며 양국투자보장협정,다국투자보장기구 가입등으로 이중삼중 보장이 되고 있다』면서 『수산업·전자·조선·철강등 분야에서 한국과 같은 선진기술의 아르헨투자가 바람직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아르헨 과학기술처의 한 관리는 『아르헨은 1947년과 84년에 노벨의학상,70년에는 화학상수상자가 나올 정도로 기초과학분야가 발전돼 있고 36년과 80년의 노벨평화상수상자도 아르헨사람이었다』고 자랑스럽게 말하면서 『한국에는 어떤 분야의 노벨상 수상자가 있느냐』고 물었다. ◎미의 환경·외채 연계정책 호응/“한국과 컴퓨터등 실질협력 기대”/라울 마테라 과기처장관(인터뷰) ­메넴대통령의 신정부가 추진해온 과학기술정책의 기조는. 『새로운 아르헨티나의 건설을 위해서는 독자적이고 혁신적인 스스로의 과학기술개발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판단에서 대통령직속기구로 과학기술위원회를 만들고 최우선적으로 환경보존과 연계된 기술개발에 노력중이다』 ­개발과 환경보존이 첨예한 대립을 보이고 있는데 아르헨의 입장은. 『아르헨의 입장에서도 이제 환경문제가 남의 얘기가 아닌 상황이 됐다.이미 오존층파괴및 수질오염이 심해 최대의 농업지대인 팜파에 뜨거운 바람이 불고 있으며 이를 방치한다면 머지않아 사막화의 위험까지 있다.아르헨은 개발도상국은 아니다.이 문제는 선진국들의 입장에 동조할 것이다』 ­오는 6월 브라질에서 개최될 지구서밋에 임하는 전략은. 『지난 4월초 아르헨 마르델플라타에서 지구서밋에 임하는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입장정리를 위한 워크숍을 가졌으나 각국의 입장이 맞서 결론에 도달하지 못했다.아르헨은 부시미대통령의 「뉴 이니셔티브」에 협조,외채탕감과 연계된 환경정책을 펼 계획이다』 ­한국과 아르헨의 과학기술 협력방안은. 『선진국들은 선진기술보다는 낙후된것,이전가능한것만 주려고 하기 때문에 한국과는 실질적인 협력이 가능하리라고 본다.협력관계 수립을 위해서는 서로 알아야 하는데 지난번 양국간 세미나는 많은 도움이 됐다.다음단계로 전문가의 방문을 통해 상호보완적인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나서 과학기술협정을 체결해야할 것이다.아르헨의 바이오테크놀로지와 한국의 컴퓨터 기술등은 좋은 상호보완의 한 예가 될것이다』
  • 한글 어휘·문장론 펴낸 이오덕씨(저자와의 대화)

    ◎“잘못 쓰여지는 우리말 바로 잡아야지요”/논문·감상문등 우리식으로 쓰는법 제시/「혈의 누」등 근대소설의 표현오류도 지적 이오덕씨는 『학자·언론인·소설가 같은 지식인들이 글을 함부로 씀으로써 우리 글을 망치고 있다』고 개판하며 『말하듯이 쓰는 글이 가장 좋은 글』이라고 말한다.왼쪽은 이씨가 쓴 3권의 책들. 분명 학술서인데 하나도 어렵지 않다.평소에 주고받는 말과 조금도 다름없는 우리 글로 책을 썼기 때문이다.어떻든 엄연한 한글 어휘론,문장론이다.모든 학자들이 이렇게 쉽게 학술서를 쓴다면 우리나라 학문 발전의 속도가 몇배 더할 것이라고 기대해도 좋겠다는 느낌마저 갖는다. 최근 70살을 바라보는 할아버지 한 분이 우리 글을 바로 쓰자는 내용의 책을 3권이나 펴냈다.40여년 동안 시골 국민학교 어린이들과 생활하며 우리 글 바로쓰기 운동을 펼쳐온 이오덕씨(68)가 그 사람으로 이번에 낸 책은 「우리글 바로쓰기」1,2권과 「우리 문장 쓰기」들이다. 이 책들이 모두 외래어에 찌든 우리 글을 바로 쓰자는 취지에서 만들어진것이지만 특히 「우리글…」은 여러가지 글에 나타나는 개개의 잘못된 낱말을 주로 다루고 있는데 비해 「우리 문장쓰기」는 감상문,논문,서사문 등 각종 글을 우리 식으로 쓰는 방법을 다루고 있다. 『우리는 많은 학술서나 논문 심지어 신문기사,소설에 이르기까지 표현상의 어색함 때문에 잘 이해가 되지 않았던 기억을 갖고 있습니다.특히 그 가운데 일본식 관형격조사 「의」와 중국글자말의 토로 중요한 뼈대를 이루는 「­적」의 폐해는 정도를 넘어선 것입니다』 「나뭇잎 배」를 일본인들은 「나무의 잎의 배」로 쓰고 있지만 우리가 그렇게 쓴다면 무슨 말인지 선뜻 머리에 들어오지 않을 것인데도 우리 주변의 많은 글이 그런 표현을 서슴치 않고 있다는 지적이다. 『말은 생활 변화에 보조를 맞춰 발전해야 합니다.생활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일시적인 문화충격때문에 말이 덩달아 변화한 것은 그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근현대에 일본어와 영어 따위의 외래어가 우리 글에 미친 폐해를 뿌리뽑아야 한다는 당위성을 이렇게 말한다.이씨는 섣부른 외래문화의 흡수,소화,발전을 경계한다.36년 동안 이어졌던 일제시대를 비롯,우리나라가 근현대에 걸쳐 많은 외침을 당해 우리 말과 글이 인위적으로 변화를 겪었으나 이것이 우리의 뿌리를 바꿔놓지는 못했다는 말이다.학자들과 문필가,언론인들이 앞장 서서 외래문화를 받아들이는데 앞장섰으나 우리 말은 여전히 농촌에 그대로 살아 남았다는 설명이다.우리 말이 생활속에 그대로 살아남아 있는데 글만 따로 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못박는다. 이씨는 우리의 글을 잘못된 방향으로 가게 한데 가장 큰 책임을 져야할 사람은 소설가라고 지목한다.소설이야말로 살아있는 말을 써야 하는 글이기 때문이라는 것. 이씨는 「우리글 바로쓰기」2에서 우리말로 쓴 맨처음의 소설인 허균의 「홍길동전」에서 시작하여 이인직의 신소설 「혈의 누」,「귀의 성」를 거쳐 1920년대 전영택의 「화수분」,그리고 30년대 이효석,김유정,채만식같은 이들의 소설을 새김질했다.이 소설들 대부분은 일본의 관형격조사 「의」 또는 영어문법의 과거완료형인 「­었었다」따위를 잘못 쓴 곳이 작품마다 10∼30여 군데에서 발견됐다.이씨의 따가운 질책의 눈길을 벗어난 소설가는 김유정으로 그가 쓴 「산골나그네」「금 따는 뽕밭」「봄 봄」「따라지」들은 외국말글의 해독을 가장 적게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씨는 지난 44년 이후 주로 농촌지역의 국민학교에 근무하면서 글쓰기를 통한 교육을 연구·실천해 왔으며 그 노력을 인정받아 한길사가 제정한 제3회 「단재상」을 수상했다.
  • 「4월의 문화인물」에 우장춘박사

    ◎세계적 육종학자로 다윈진화론 일부 수정/「씨없는 수박」은 유명… 각종 기념행사 펼쳐 문화부는 과학의 달인 4월의 문화인물로 세계적인 육종학자 우장춘박사(1898∼1959)를 선정,농림수산부,과학기술처와 공동으로 사업을 벌인다. 기념사업은 ▲강연회(4월8일 하오4시 국립중앙박물관 사회교육관·우장춘박사의 업적­김태욱 원우회고문,21일 하오2시 국립중앙과학관 강당 우장춘박사의 학문세계 및 그의 응용­ 강혁 유전공학 연구소박사,24일 원예시험장 남부지장 원예산업 발전에 끼친 우장춘 박사의 업적­원우회 남부지회) ▲세미나(4월5일 하오2시 유전공학 연구소·작물의 육종과 생명공학­박효근 서울농대교수 등) ▲심포지엄(4월30일 농촌진흥청 강당 ·UR대응 작물육종의 현재와 미래­이수성 중앙대 교수등) ▲우장춘박사 생애 수록 비디오테이프 보급등이 있다. 우박사는 구한말 개화파의 정객으로 망명한 아버지 우범선과 일본인어머니 사카이나카(주정 중)사이에서 1898면 4월8일 도쿄에서 태어났다.수구당이 일본에 파견한 자객 고영근에 의해다섯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가난으로 고아원에 맡겨지는 어려운 유년을 보냈다.조선인이라는 멸시속에서도 어머니가 들려준,짓밟히면서도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민들레의 교훈은 평생 좌우명이 됐다.식민지인이라는 이유로 동경제국대학 공과 진학을 포기하고 1916년 농학실과에 입학,각고의 노력끝에 졸업했다.이후 일본농림성 농사시험장,용정 연구농장장으로 연구에 전념,36년 「종의 합성에 관한 연구」로 농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육종학의 세계적 권위자가 되었다. 특히 홑페츄니아를 겹꽃으로 만들어 이름을 떨쳤으며,나팔꽃의 변이·유채꽃의 종의 합성을 통해 그 유명한 다윈의 진화론을 일부 수정하는 등 빛나는 업적을 남겼다.37년 일본 농림성이 그를 중국에 신설하는 면화시험장장으로 승진 발령하면서 창씨개명과 일본국적 취득을 조건으로 내걸었을 때,사표를 내고 자영농장에서 연구했다.해방과 더불어 귀국을 결심했으나 일본 정부는 허가를 내주지 않자 국내의 「우장춘박사 환국추진위원회」의 도움을 얻어 강제 송환형식으로 50년 3월 가족들을일본에 둔 채 혼자 귀국했다. 우박사는 10년간 우리토양과 기후에 맞는 벼와 배추 양파등 각종 채소 종자개량에 몰두,국산 우량종자가 그가 책임자로 있던 부산 원예시험장에서 속속 개발되었다. 노모의 장례식 때 들어온 조의금으로 부산 원예시험장 내에 우물을 파 자류천이라 이름짓고 이 물을 원예재배 용수로 사용했으며,지금도 우박사의 유적지로 보존되고 있다. 우박사는 「채소의 우량종자 생산」「벼의 연2회 수확」등 뛰어난 업적을 남긴채 59년8월10일 만61세를 일기로 생애를 마쳤다. 죽기 사흘 전 병상에서 작곡가 안익태에 이어 건국이래 두번째로 문화포장을 받았으며 유해는 농촌진흥청 뒷산인 수원 서둔동 여기산 기슭에 안장됐다.
  • 플라톤과 정약용/이동하 문학평론가·서울시립대교수(굄돌)

    플라톤은 기원전 347년에 죽은 사람이다.그러니까 그가 죽은 후 지금까지 무려 2천3백년 이상의 세월이 흐른셈이다.그리고 그는 그리스의 아테네 사람이다.아테네는 서울에서 비행기로 아무리 빨리 가도 열 몇 시간이 걸리는 먼 곳에 있다. 그런 플라톤에 비하면 정약용은 오늘의 우리에게 참으로 가까운 사람이다.그는 18 36년에 죽었으니까,그가 죽은 후 지금까지 흐른 시간이란 기껏해야 1백56년에 불과하다.그리고 그는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났으며 거기서 세상을 떠난 사람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우리는 플라톤에 대해서보다는 정약용에 대해서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어야만 자연스러울 것 같다.그런데 우리들 가운데 상당수는 전혀 그렇지가 못한 게 사실이다.나 자신만 하더라도,명색이 국문학을 가르치는 사람이면서,플라톤의 문학관에 대해서는 아주 소상하게 알고 있는 반면,정약용의 문학관에 대해서는 조금밖에 아는 것이 없다. 플라톤은 문학에 관하여 전문적인 논의를 자세하게 펼쳤는데,정약용은 그러지 않았기 때문인가? 아니다.정약용이 문학에관과하여 전문적인 논의를 자세하게 펼치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플라톤도 그 점에선 마찬가지였다. 플라론의 문학론은 수준높은 것인데,정약용의 문학론은 시시한 것이어서 이런 현상이 나타난 것인가? 그것도 아니다.플라론문학론의 수준은 아무리 좋게 봐도 별로 신통한 것이 못된다.그리고 정약용의 문학론이 결코 시시한 것이 아님은 전문가들의 논문에 단편적으로 인용된 그의 글 및 대목만 보아도 금방 확인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얘기를 종합해 보면,국문학자로서 내가 가진 지식의 구조가 크게 잘못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그러나 그게 어디 나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인가? 우리들 가운데 상당수가 그렇지 않은가?
  • 문학작품 영상화작업 활발(문학)

    ◎작년 개봉 방화 90여편중 40여편이 소설원작/인기소설은 흥행성공에도 큰몫/“영상매체에 굴복” “도약의 전기” 논란/표현방법 차이로 원작자·감독 불화도 문학작품의 영상화작업이 활발하다. 지난해 국내에서 개봉된 90여편의 방화 가운데 「은마는 오지 않는다」(안정효 원작),「경마장 가는 길」(하일지 원작)등 40여편이 소설을 영화화한 것으로 문학작품이 영화의 젖줄이 돼 가고 있다.외국의 경우 소설의 영화화 비율이 15∼30%정도인데 비해 한국은 50%에 육박,영화의 소설의존 현상이 두드러진다.방송드라마의 경우에도 「여명의 눈동자」(김성종 원작),「동의보감」(이은성 원작)등 미니시리즈를 비롯,지난해 TV문예극장,MBC베스트극장이 새로 신설됨으로써 원작소설의 수요가 급격히 늘고 있다.이같은 증가세는 영상시대가 급속히 진전되고 있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더욱이 「경마장 가는 길」의 경우 20여만명의 관객을 동원,불황 영화계에 활력을 주고 있어 앞으로 소설이 영화의 기본 소재를 제공할 뿐 아니라인기소설의 경우 흥행의 담보역할까지 해낼 것으로 기대된다. 그러나 소설의 영화화는 두 매체간의 본질적인 표현방법의 차이,감독의 해석권 때문에 종종 원작자와 감독간의 불화거리가 되기도 했다.즉 원작소설과 영상작품과의 거리는 지속적인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는데 소설의 영상화작업이 늘어나면서 최근 국내작가들의 영화에 대한 인식이 많은 변화를 보여주고 있어 주목된다. 자신의 작품을 영상작품의 원작으로 기꺼이 내주었던 많은 작가들은 설사 영상작품이 못마땅하게 만들어졌더라도 직접적인 불만을 표하는 경우가 드물고 인쇄매체와 영상매체간의 차이를 인정한다.특히 시간상의 이유와 영상매체에의 무지 등을 이유로 제작에 관여하는 작가는 극히 적으며 내심으로는 원작에의 충실을 바라면서도 이미 그것이 불가능한 것으로 체념하고 있다.이는 영상매체가 성장과정에서 상당부분을 문학에 의존했었다는 역사적 사실이나 지난 36년 영화화된 「무정」을 두고 원작자 이광수와 영화감독 박기채가 벌였던 논쟁으로부터 최근 「가자 장미여관으로」를 두고 원작자 마광수씨와 제작진간에 있었던 해프닝에 이르기까지의 문인과 영화인간의 반목을 무색케 하는 것으로 활자매체와 영상매체간의 미묘한 알력의 완화를 상징하는 것이다. 자신의 소설 대부분이 영화화 되었던 소설가 이문렬씨는 『영화는 내것이 아니니만큼 대범하게 생각한다』고 말해 영화의 원작수용에 대한 불만을 시사했다. 이씨는 방송극화된 「황제를 위하여」가 『우스꽝스럽게 만들어졌다』,「영웅시대」가 『괜찮았지만 배역에 문제가 있었다』고 말했다.그러나 원작이 연기,감독의 해석,기계 등으로 함께 구성되는 영화의 4분의 1의 몫이라고 전제한 이씨는 자신은 최초의 아이디어 제공자일 뿐으로 영상화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는다고 밝혔다.실제로 그는 자신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의 절반도 못봤을 정도라고 덧붙였다.이씨는 원작과 영화와의 거리를 만드는 요인으로 벗기기 등의 충무로 영화계의 관습,예술적 안목이 그리 높지 못한 제작자,활자매체와 영상매체간의 표현방법의 차이를 들었다. 지난 1월 소설 「하얀 전쟁」을 영화화하는 베트남 촬영현장에 다녀왔던 소설가 안정효씨는 『원작은 소설이고 영화는 영화다』라며 자신의 베트남 동행은 전쟁당시의 사정이나 현실적인 세부사항을 조언하기 위한 것이었지 원작자로서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음을 밝혔다. 영화 「경마장 가는 길」의 시나리오작업 등 영화제작 현장에 활발히 참여했던 소설가 하일지씨도 촬영현장에서 자신이 했던 연기의 방향이나 분위기 지도가 조언이었을 뿐이라며 감독의 고유한 영역을 존중하는 태도를 보였다. 이밖에 「분례기」의 방영웅씨,「우리는 중산층」의 박영한씨,「유년의 뜰」의 오정희씨 등은 자신의 작품을 영상화한 방송드라마에 만족을 표시한 반면,「검은 양복」의 채희문씨,「만취당기」의 김문수씨는 불만족을 각각 나타냈는데 불만족한 경우라도 두 매체간의 본질적인 표현요소의 차이에 따른 원작의 변용수용은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이같은 현상을 두고 영상시대에 영상매체의 위력에 문학이 굴복한 것이라는 성급한 추측이 나오는가 하면 원작소설의 영화화가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는 전기로서 문인과 영화인간의 공감대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소설원작과 영화의 분명한 차이에 대해 『소설원작을 영화화하는 작업이 원작을 그대로 영상에 베껴내는 작업이 아닌 만큼 소설을 영상이라는 언어로 표현하는 작업은 이미 원작소설과 무관하다』고 영화평론가 김은주씨는 말했다.김씨는 또 『원작소설을 각색하여 영화화한 것이라도 원작소설과 영화는 서로 어떤 구속도 받지 않는 완전히 독립적인 작품으로 이해돼야 한다』(「문학정신」3월호)고 강조했다.
  • 일제 징용·배상 학술토론 잇따라

    ◎반민족문제연·36년사연 주최 심포지엄 종군위안부문제와 관련된 일본정부의 사과와 배상,북한과 일본의 수교협상에서 현실적으로 가장 큰 쟁점으로 배상문제가 부각되는등 남북관계의 진전과 국제질서의 변화속에서 식민지배의 청산문제가 새로운 현안으로 등장하고 있다. 3·1절 73주년을 맞아 반민족문제연구소(소장 김봉우)는 「식민지배 청산문제의 민족사적 이해」라는 주제로 지난 27일 흥사단강당에서 기념학술심포지엄을 열고 우리민족의 미래와 관련,식민지배청산의 중요성과 역사성에 대한 열띤 논의를 벌였다. 고려대 강만길교수는 「일제침략전쟁의 성격과 그 피해」라는 발제문을 통해 『민족분단 자체가 바로 식민지배의 미청산이므로 식민지배의 청산은 민족의 주체적 평화적 재통일에서 이루어질 수 밖에 없다』고 전제하고『때문에 현시점에서 식민지배 청산문제를 재조명해보는 것은 민족재통일의 방향을 설정하는데 불가결한 밑거름』이라고 주장했다. 강교수는 식민지배의 피해를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의 발전기회를 박탈하고 경제적으로는 민족자본의 축적에 의한 자율적인 산업혁명의 기회의 박탈,문화적으로는 민족성과 주체성·자존심을 훼손당한 점 등으로 정리했다. 한편 격월간지 「순국」 1·2월호는 「다시 보는 한·일간 전후배상」이라는 특집을 싣고 식민지배문제의 처리와 최근 진행되고 있는 북한과 일본의 수교협상에 대해 다루고 있다. 윤해동씨(역사문제연구소 상임연구원)는 「한일간 식민지 지배문제 처리의 현황과 과제」라는 기고문에서 강제연행자문제를 포함,한일간의 전후처리문제가 미흡하게 처리된 원인은 한국이 전승국으로 대우받지 못한 것과 60년대 한일간의 교섭과정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윤씨는 한일합병조약을 무효화시키고 일본의 사과와 배상을 받아낼 수 있게 지난 65년 체결된 한일기본조약을 개정하고 북한·일본의 수교조약도 위와 같은 논리로 관철될 수 있도록 정부차원의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식민지배청산의 과제라고 주장한다. 이와함께 일제36년사연구소(소장 서남현스님)는 29일 서울에서 한·일 학자들이 모여 해방 47년만에 처음으로 일제하에 강제연행됐던 징용·징병·군속·정신대등 강제연행문제를 다루는 「조선인 강제연행에 관한 국제심포지엄­북해도지역을 중심으로」를 열어 진상규명과 역사속에서의 올바른 자리매김을 놓고 활발한 논의를 벌였다.
  • 「일제 강제징용」 첫 국제심포지엄

    ◎한·일 학자 참석… 내일 르네상스호텔서/진상규명·사망자유골 수습문제등 논의 조선인 강제연행에 관한 국제심포지엄이 한국·일본학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해방된지 47년만에 서울에서 처음 열린다. 오는 29일 하오1시 서울 라마다 르네상스호텔에서 열리는 이 심포지엄을 일제 36년사 연구소(소장 서남현스님)와 대한불교조계종 재일총본산 고려사가 마련한 것으로 일본인 학자 20여명과 국내학자,역사연구단체 및 유족단체 등이 참가한다. 태평양전쟁 당시 강제로 동원됐던 한국인 종군위안부 문제와 이에 대한 일본정부의 배상여부가 한국과 일본 양국간의 현안문제로 부각되고 있고 북한·일본의 수교협상에서 일제 36년 과거사에 대한 배상문제가 걸려 있는 상황에서 열리는 이번 국제심포지엄은 학계는 물론 일반의 주목을 끝다. 이번 심포지엄은 아직까지 청산되지 않은 6백만 조선인 강제연행에 대한 진상규명과 지금도 일본열도 전역에 방치돼 있는 30만 징용사망자 유골수습 문제를 비롯,재일교포문제,사할린문제 등에 대한 민족적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 마련됐다. 특히 북해도 지역을 중심으로 집중적인 발표와 토론을 하게 된다. 국제심포지엄에 참석하는 일본인 학자들은 북해도 지역연구자로 백호인강(미운시 백년사 편집위원)이 「북해도에서의 조선인노동자 강제연행의 개황」이라는 주제로 발표하며 시원 박(북해학원대학 경제학부 조교수)이 「탄광노동사 연구속에서의 조선인 탄광노동문제 연구의 현황」을,전평선언(공지민중사 강좌사무국장)이 「민족의 진정한 화해를 바라며 주국내 우용댐 공사의 조사와 추모활동으로부터」를 각각 발표한다. 한편 국내학자로는 서울대 안병직교수(경제학)가 「다시 생각해보는 조선인 강제연행의 문제」라는 제목으로 기조강연을 하고 정진성(KDI부설 국민경제교육연구소 책임연구원) 강창일(배재대 전임강사) 정진성(덕성여대 사회학과 부교수)씨 등이 토론자로 참석한다.
  • “정신대문제는 한국 책임”일,역공세

    ◎「문예춘추」지 「정신대대담」서 억지/65년 「일·한조약」으로 일 책임 끝나/「한강의 기적」도 일 지원덕택 “강변” 「사죄하는 만큼 악화되는 일한관계」일본의 대표적인 종합월간지 문예춘추 3월호에 실린 종군위안부문제에 대한 대담기사의 제목이다.다나카(전중)다쿠쇼쿠(탁식)대교수와 사토(좌등)월간「현대코리아」지주간은 이 기사에서 종군위안부문제는 한국이 일본에 「응석」을 부리는 구조를 조장하고 있다고 주장,일본의 과거 침략사에 대한 반성보다는 오히려 한국을 비판하고 있다.지난주에 발매된 월간지 제군3월호도 종군위안부문제와 관련,한국을 비판하는 기사를 게재했다.일부 일본 지식인들의 역사인식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문예춘추의 대담기사를 요약한다. 지난 1월 미야자와(궁택)총리의 방한때 양국정상회담에서도 종군위안부문제등 「과거문제」가 주요 의제였다는 것은 한심한 일이다.냉전후의 일한관계는 매번 한국의 사죄요구와 일본의 사죄 반복으로 일본인들의 반한·혐한감정만 증폭시키고 있다.일한간에는 진정한 의미의 외교관계가 없다. 양국간의 보상문제는 지난 65년 일한기본조약으로 모두 끝났다.한국인들이 요구하는 보상의 법적근거는 무엇인가.일본은 유상무상의 정부차관 5억달러,민간차관 3억달러등 8억달러를 한국측에 제공,36년간 식민지지배에 대한 역사적 책임을 다했다. 박정희대통령은 75년까지 일본이 제공한 총23억달러의 차관을 유효적절히 사용,「한강의 기적」을 이룩했다.일본은 이미 과거에 대한 보상을 끝마쳤기 때문에 종군위안부들에 대한 보상도 한국정부가 하여야하며 피해자들에게 어떻게 분배할 것이냐는 한국의 주권에 속하는 것이다. 한국은 보상문제가 끝났음에도 일본에 보상하라고 한다.자신들이 맺은 조약을 간단히 무시하는 것이다.한국인들의 이같은 의식때문에 일본에 대한 한국의 「응석」구조가 생겨났다.박대통령시대에는 한국의 긍지가 있었다.박대통령은 한국을 훌륭한 나라로 만들려는 열의가 있었다.그러나 전대통령과 노대통령에게는 과거와 같은 비전이나 열의가 느껴지지 않는다. 한국은 입으로는 반일을 외치면서도 중요한 것은 일본에 의존하려는 경향이 있다.한국은 과거문제 뿐만아니라 현재의 문제인 무역불균형·기술이전 등에서도 요구만 한다.무역적자는 원료와 부품을 일본으로부터 수입,상품화시켜 수출하는 한국의 경제구조때문인데도 일본 탓으로 돌린다.더욱이 일본기업이 막대한 자금을 들여 개발한 첨단기술을 일본정부가 마음대로 넘겨줄수 있다고 보는 한국인들의 의식구조가 문제다.한국은 땀을 흘려 기술을 개발하고 일본에서 팔리는 상품을 만들어야 한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재벌총수는 정당을 만드는 등 정치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한국에는 일본기업이 진출할 매력이 없어졌다.
  • 외언내언

    마라톤 경기가 시작된 것은 1백년이 채 못된다.유래는 기원전 4백90년,그리스의 마라톤고전장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마라톤 경기는 1896년 제1회 아테네올림픽에서 치러진 것이 처음.이 대회를 앞두고 프랑스의 언어학자 M 브레알이 근대올림픽의 창시자 쿠베르탱에게 마라톤 경기를 제안했었다.이때의 거리는 36.750㎞.마라톤 고전장에서 아테네 스타디움까지의 코스였다.◆오늘의 마라톤 공식거리 42.195㎞는 1921년 국제 육상경기연맹에 의해 확정됐다.이 거리는 우리 이수로 1백5이가 조금 넘는다.마라톤은 이 머나먼 길을 혼자서 쉬지 않고 뛰어야 하는 가장 고독하고 힘든 경기.옛날에는 「어떻게하면 완주할 수 있을까」가 걱정이었지만 지금은 「얼마나 빨리 달리느냐」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이른바 「마라톤의 스피드화」.◆지금까지의 세계 최고기록은 88년 4월17일 에티오피아의 딘사모가 작성한 2시간6분50초.그러나 한국 마라톤은 며칠전까지만 해도 2시간11분대에 머물고 있었다.한국은 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손기정이 세계에서 처음으로 30분벽을깨뜨리고 우승한뒤 한때 마라톤 강국으로 떠 올랐으나 60년대이후 주춤거리더니 마라톤 후진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그런데 23살의 신인 마라토너 황영조가 지난 2일 한국선수로는 처음으로 「마의 10분벽」을 돌파했다.이날 일본 별부∼대분간 코스에서 2시간8분47초의 경이적인 기록을 수립한 것.우승을 놓친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한국마라톤이 10분대에 들어선이후 26년만의 쾌거.종전 한국 최고기록을 단숨에 2분15초나 단축했다.◆황영조의 이날 기록은 90∼91시즌 세계역대 5위안에 드는 것으로 바르셀로나올림픽 제패도 노려볼만하다.폐 활량이 크고 지구력과 스피드가 뛰어나 앞으로도 자신의 기록을 단축할 수 있는 바탕을 지니고 있다.황영조의 위업을 계기로 한국 마라톤이 옛영광을 되찾았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 “아시아의 맹주로”(진주만 50돌:하)

    ◎「신대동아 공영권」 야망 “꿈틀”/폭탄 대신 상품·자본… 무차별 경제공습/아주국들 “일 침략 잊지말자” 잇단 집회 일본의 진주만기습 50주년을 맞아 당사자인 일본과 미국은 서로 다른 입장이긴 하지만 이 사건을 교훈으로 삼자는 각종 행사들로 요란하다. 당시 패전국이었던 일본은 세계최대의 경제대국으로 부상,정치대국으로까지의 꿈을 펼치고 있고 승전국이었던 미국은 재정적자의 늪에서 허덕이며 세계지도국의 위치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전전긍긍하는 처지가 됐다. 그러나 막상 양국 이익대결의 전장으로 가장 많은 피해를 입었던 아시아각국의 입장에서 이날을 맞는 느낌은 착잡하기만 하다.특히 36년간 일제의 지배를 받았던 한국은 물론 일본군의 군화발에 짓밟혔던 중국·대만·말레이시아·필리핀·싱가포르·홍콩등 동남아국가들은 초대경제력을 지닌 일본이 군국주의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닌가하는 우려를 떨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 아시아국가들에서는 진주만기습 50주년을 계기로 이 사건이 더이상 일본과 미국의 문제로 국한돼서는 안된다는 여론이 활발히 제기되고 있다.이 사건은 결국 일본이 한반도와 중국에 제한돼 있던 전선을 동아시아전체로 확전을 개시한 이른바 대동아공영권 전략의 신호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일·미관계에만 초점이 주어져 상대적으로 본질문제인 일본의 아시아침략은 축소 왜곡돼 왔다는 것이다. 당시 한반도와 만주를 점령,식민지화 하고 중국침략전쟁을 수행하고 있던 일본은 41년 12월 8일(한국시간)새벽 진주만공습 1시간전에 이미 홍콩의 카이탁공항 폭격을 시발로 홍콩침공에 들어갔고 또 진주만공습 20분후에는 말레이반도 동안의 코타바루 상륙과 함께 싱가포르를 공습,본격적인 동남아침공을 개시했다.당시 인구80만중 불과 수개월 사이에 항일화교용의자라는 이유로 5만명이 학살됐던 싱가포르는 8일 대대적인 「함락50주년기념식」을 열어 일본침략의 교훈을 재확인하고 확고한 국민의식을 고양토록할 계획이다.또한 4년 가까운 일본의 점령하에서 아사자까지 속출할 정도로 극도의 식량부족과 헌병대의 탄압에 시달렸던 홍콩주민들은 최근 「홍콩보상협회」를 설립,『홍콩침략50주년을 맞아 일본정부는 후안무치한 사기행위에 대한 책임을 지라』는 비난과 함께 당시 일본군이 물자조달을 위해 홍콩에서 발행했던 군표에 대한 보상을 재차 강조하고 나섰다. 그러나 이같은 사실들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이 이날을 일본과 미국만의 날로 몰고 가려는데 아시아국가들의 불만이 있는 것이다.더욱이 일본인들은 아시아국가들에 대한 식민지배와 침공에 대한 한마디 사과가 없는 것은 물론이고 진주만기습에 대해서도 『덫은 미국이 놓고 걸려든 것은 일본』이라며 쉽사리 과오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또 태평양전쟁은 아시아인들의 서구식민지배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전쟁이었다는 궤변을 서슴지 않고 있다. 그러나 아시아국가들의 일본에 대한 불만과 증오에 관계없이 일본은 이미 아시아국가들에 깊숙히 침투해 있음을 부인할수 없다.군화발과 폭격기 대신 무차별한 일본상품과 자본·기술의 공격은 대부분의 국가를 「일본」앞에 무기력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세계 총GNP의 17%를 차지하고 있는 일본의 금년도 무역흑자는 8백50억달러를 넘을 것으로 전망되고 있으며 사상최초의 5년 연속호황이라는 최고의 호경기를 맞고 있다.또 소련의 붕괴로 세계의 질서구축을 정치와 경제의 두기둥으로 미국과 함께 나누어 지게된 일본의 입장에서 21세기를 향한 신아시아주의 즉 「신대동아공영권」구축의 필요성은 그 어느때보다도 높아졌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최근 EC(유럽공동체)가 EFTA(구주자유무역연합)와 통합,유럽19개국이 참여하는 세계최대의 경제공동체인 EEA(구주경제지역)로 재편되고 또 미국이 캐나다 멕시코와 함께 그에 버금가는 북미경제권을 구축하자 일본은 아시아경제권을 하나로 묶는 이 신대동아공영권을 형성하려는 의도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이미 아시아대륙이 ▲NICS(신흥공업국)4국 ▲ASEAN(동남아국가연합)제국 ▲중·소등 사회주의 지역등 3개의 광역경제권으로 각각 일본과 연계돼 있기 때문에 이들을 일본을 중심으로 하나로 묶는데는 그리 어렵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아시아 광역경제권이 대일의존도가 높은 종속적인 구조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한국을 비롯한 신흥공업국들은 물론 아세안 제국도 대일무역에서 엄청난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다. 결국 일본은 50년전 무력에 의한 아시아공격과는 달리 자본과 기술로 아시아를 종속적 경제권으로 만드는데 성공한 것이다. 진주만기습 50주년을 맞아 아시아국가들은 이를 계기로 보다 철저하게 50년전 일본의 아시아침략이 규명되고 그에 대한 일본의 반성과 책임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이다.그러지 않고는 제2의 진주만기습 가능성이 상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 외언내언

    모세가 이집트에서 학대받던 이스라엘의 유태민족을 구출해 인도한 곳이 구약 성서의 복받은 곳 「젖과 꿀이 흐르는 땅」가나안이다.동서양과 아프리카를 잇는 교통의 요지.지중해성 기후의 혜택으로 과일과 곡식이 풍성하던 곳.레바논과 시리아 요르단 이집트로 둘러싸인 2만6천㎦의 면적.우리의 경기·강원도를 합친 넓이.오늘의 이스라엘이 위치한 팔레스타인 땅이다.◆젖과 꿀의 축복받은 이 땅이 유혈의 저주를 받기 시작한 것은 역사에서 사라졌던 유태민족의 이스라엘이 건국된 48년이후.그때까지 영국위임통치하에 있던 이곳의 인구는 88%가 이슬람과 기독교의 아랍인이었으며 유태인은 12%에 불과했다.◆48년까지 5백여년동안 이슬람지배하의 그곳에 살아오던 4백70만 아랍계 팔레스타인인들은 갑자기 등장한 유태국가의 박해로 하루 아침에 이산과 유랑의 신세로 전락했던 것.요르단 1백13만,요르단강 서안 96만,가자지구 55만,레바논 39만,쿠웨이트 32만,시리아 25만등으로 흩어져 살고 있으며 이스라엘에 남아 있는 것이 60만.◆팔레스타인인들의 입장에서생각하면 통분할 일이 아닐 수 없다.일제36년을 생각하면 팔레스타인인들의 고통과 분노가 어떤 것일지 쉽게 이해가 간다.폭력의 테러에 호소하고 이웃 아랍세계의 도움을 받았지만 세계의 경제권을 장악한 유태인들 및 미·서구의 비호를 받는 이스라엘의 적수는 될수가 없었던 것.◆아랍­이스라엘의 화해를 위한 중동평화회담이 스페인의 마드리드에서 열리고 있다.하나 팔레스타인이 「가나안」땅을 다시 차지하기는 어려울 듯.이스라엘은 골란고원,요르단강 서안,가자지구등 2천3백㎦ 점령지의 반환도 거부하고 있다.팔레스타인인들도 많이 지친 듯.미국은 이스라엘 점령지 요르단강서안 및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국가와 요르단을 합친 요르단·팔레스타인국가연합도 모색 중이라는 보도.이번에는 정말 「가나안의 평화」가 달성될까.
  • 작가 외길… 대중성·작품성 조화 추구

    ◎타계한 정비석씨의 생애와 문학세계/세태 변화 리얼하게 묘사… “이야기꾼”/서울신문 연재 「자유부인」,장안 화제로/“문학은 재미·진실 담아야” 평생 지론 실천 19일 80세로 타계한 소설가 정비석씨(본명 정서죽)는 평생을 글쓰기에 몸바친 문단의 거목. 그는 순수·통속으로 확연히 갈라진 이분법적인 문단풍토에서 대부분의 작가들이 대중작가라는 오명을 두려워 해 주저하고 있던 부분에 용기있게 뛰어들어 우리 소설의 새 지평을 개척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그는 「성황당」「제신제」등 토속적 삶을 예술성 짙게 표현한 작품에서부터 「자유부인」「노변정담」등 세태를 묘파한 작품들,「연산군」「민비」「명기열전」등의 역사 대하소설에 이르기까지 각기 성격을 달리하는 분야에서 수많은 명편들을 남겼다.또한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까지 실렸던 금강산 기행문 「산정무한」처럼 뛰어난 수필을 쓰기도 했다. 특히 그를 기억되게 하는 것은 세상의 명리를 좇지 않는 그의 후덕한 인품과 문학의 길을 외곬으로 지켜온 치열한 작가정신.그는 문단의인기작가 또는 원로작가로서 어울리는 많은 공직을 마다하고 오직 작품 창작에만 몰두하여 왔다.『작가란 마지막 순간까지 글을 써야지요』라며 7순이 넘기까지 펜을 놓지 않았던 그의 자세는 지금도 수많은 후배작가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1911년 평북 의주 태생으로 일본대학 문과를 중퇴한 정씨는 36년에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졸곡제」,3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성황당」이 당선되면서부터 소설가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초기 작품들에서 밀도있고 예술성 짙은 본격문학을 지향했던 그는 해방후부터 대중적인 통속성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는데 이는 「문학은 문학성과 대중성을 조화해야 한다」는 그의 문학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제게 있어 문학이란 진실을 담는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대중문학은 문학도 아니라는 편벽된 논의는 하루속히 불식되어야 할 것입니다』 평소의 지론처럼 그는 직접 작품으로써 대중과 엘리트문학인 사이의 벽깨기를 실천했다. 그가 54년 서울신문에 연재한 장편소설 「자유부인」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6·25후 미국 문화의 유입으로 인한 사회적 퇴폐풍조를 배경으로 가정을 뛰쳐 나온 대학교수의 부인이 남편의 제자와 일으키는 「춤바람」을 다룬 이 작품은 발표당시 『낙양의 지가』를 올리고 정씨를 일약 베스트셀러작가로 부상시켰다.또한 이 작품은 당시 서울대 법대 황산덕교수,홍순엽변호사,그리고 작가인 정씨 사이에 이른바 「자유부인 논쟁」을 불러 일으켰었는데 격렬한 논쟁을 벌였던 황교수와 정씨가 이젠 모두 고인이 되고 말았다. 「자유부인」의 대중적 성공은 단순히 애정이나 통속성에 머물지 않고 해방 후 서구 자유주의 물결로 조성된 사치와 허영의 풍속도를 묘파한 세태 풍자에 있었다는 것이 문단의 평가다. 그는 또 73세 때인 84년에 「소설 손자병법」을 발간,국내 출판사상 첫 1백만부 판매 기록을 세우는 대중적 성공을 다시 한번 거두었다.그의 「소설손자병법」은 책으로선 국내에선 처음으로 TV에 광고되는 기록도 세웠으며 이후 우후죽순으로 쏟아져 나온 고전의 현대적 국역물의 효시가 됐다.문단 일각에선 그의 대중적 성공을 그의작품을 평가하는 증표로 삼기 전에 바른 삶과 지혜를 제시하는 방편으로서의 고전 새로 읽히기의 의미,견실한 전업작가로서의 정씨의 삶에 대해 보다 공정한 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견해도 나오고 있다. 평소 그와 절친한 교유를 가졌던 시인 구상씨는 정씨를 『붓 하나로 일생을 산 결곡한 분이었다』며 『신문소설의 대가로 시대 풍조를 예민하게 묘파한 작가였다』고 회고한다.
  • 전 김일성 통역관겸 고위외교관/고영환은 말한다:4

    ◎“일본이 무릎 꿇었다” 주민에 선전/대일 수교 추진의 뒤안/배상금에 눈독… 일본과에 인재 모아/“중·소는 말뿐” 경제원조 더 기대 안해 북한의 외교전문가들은 일본이 한반도의 통일을 원치 않으며 대북수교도 이같은 입장에 따라 남북간 세력균형을 도모하기 위해 추진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이들은 일본이 「북조선의 힘이 약해지고 남조선의 힘이 올라가니까」 자신들의 경제력에 상응하는 정치력을 갖출 때까지,다시 말해 경제적 지위에 맞는 국제적인 힘을 갖출 때까지 「남조선은 기다려라」는 심정으로 북조선에 돈을 줘서 남북이 비슷해지도록 한 다음 남에는 북카드,북에는 남카드를 이용하겠다는 계산을 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때문에 북한이 「꿩잡는게 매」라는 생각으로 50억달러로 기대되는 배상금을 겨냥,대일수교에 임하고 있지만 「어느 놈」이 주든 간에 힘이 세진 다음에는 일본도,남조선도 때려잡을 수 있다는 신념에는 변함이 없다. 물론 북한이 대일수교를 추진하게 된데는 잘 알려진대로 「이대로는 더 이상 버틸 수없다」는 경제적 위기감이 최고 지도층 사이에서도 공감됐기 때문이다. 북한은 이미 80년대말부터 소련에 대해서는 더 이상 경제원조를 기대할 수 없으며 중국도 「말은 잘하지만」 무역관계에서는 「에누리가 없는」 철저한 실리주의를 추구하고 있어 큰 도움이 안된다고 생각해 왔다. 김일성부자와 김영남외교부장·연형묵정무원총리·김용순당국제부장등이 모여서 대일수교를 추진키로 합의보았는데 이들은 「정말 아무것도 없는」북한경제가 적어도 몇년간 만이라도 「발등의 불」을 끄기 위해서는 일본이 줄 배상금밖에 없다」는 현실을 인정한 것.북한은 주민들의 「밥그릇의 고봉만 높여주면」 20∼30년간은 버틸 수 있는 체제이다.그런데 기본적인 이러한 욕구마저도 충족시킬 수 없기 때문에 대일수교에 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북한이 미국및 남조선과 함께 최대 적대국가의 하나로 지난 80여년간 교육해왔던 일본과의 수교를 추진하면서 대주민설득용으로 내세운 명분은 다음과 같다. 즉,『위대한 김일성수령님의 명성앞에 일본이 지난 36년 뿐아니라 전후 45년동안의 죄과에 대해 먼저 무릎을 꿇고 사죄해왔다.또 일본을 이토록 유도한 것은 김정일지도자동지의 탁월한 영도력이었다』는 것.이 논리는 지난해 당에서 외교부에 전달된 「외교관을 위한 강연교본」에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일본이 소련에 북방4개도서를 빼앗겼다면 우리(북한)는 미국에 국토의 절반을 떼였다.땅을 남에게 떼인 사람들의 심정은 우리나 일본이나 같다.일본의 입장을 지지한다』 지난해 9월 연풍호반의 김일성별장에서 있은 단독회담에서 노정치가 김일성이 북방영토회복문제에 대한 북한의 입장을 물은 가네마루 신(김환신)전일본부총리에게 밝힌 대답이다. 김일성이 이같은 노회한 정치적 화술앞에 가네마루 신은 세번이나 무릎을 꿇고 감사의 뜻을 표했다.이로써 1차단체회담시의 냉랭한 분위기는 일신돼 북한 노동당과 일본의 자민·사회당 대표들은 빠른 시일내에 양국간 국교를 정상화하기로 원칙적 합의를 도출할 수 있었다. 북한은 대일수교의 원칙이 결정된 지난해 10월 외교부의 일부 조직을 개편했다.이전까지라틴아메리카국및 동남아국에 별개 과도 없이 소속됐던 미국과 일본담당부서를 하나의 국,다시 말해 미·일국으로 신설,조직한 것.이에따라 일본과의 직원이 2명에서 15명으로 늘었으며 미국과에는 8명의 외교관이 배치됐다.특히 일본과에는 『금싸라기같은 인재를 골라들이라』는 김영남 외교부장의 특별지시로 유능한 인재들이 선발됐다. 당초 북한은 적어도 올 8∼9월까지는 수교교섭이 매듭지어지지 않겠느냐고 쉽게 생각했다.수교원칙에 합의한 가네마루 신이 일본내각을 움직이는 거물실세이며 일본 사회당도 「북조선판」이 아니냐는 것이 그 판단 근거였다.그러면서 「빌어먹을」핵사찰문제가 끼어들어 현재와같이 지지부진한 국면을 맞게 됐으나 그래도 92년 상반기중에는 수교가 이뤄지지 않겠느냐고 생각하고 있다. 북한은 수교회담시 일본에 제시한 문건에서 배상청구액을 모두 1백억달러로 명시하고 있는데 전액을 받겠다는 것보다 『협상을 하다보면 적어도 50억달러는 받을 수 있지 않겠느냐』기대하고 있다.여기에 덧붙여 민간차관이 들어오면 침몰직전의 북한경제가 당장은 한 숨돌릴수 있으리라 믿고 있다. 최근 일·북간에 북송 일본인처들의 고향(일본)방문문제가 하나의 쟁점이 되고 있으나 이 문제는 쉽게 해결되기 어려울 것이다.6천여명에 달하는 그들이 일본에 가서 「입을 트면」(북한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면)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이다.아마 양국간에 이 문제에 관해 정치적인 타결책이 모색될 것이다. 한편 최근 북한사회에는 대일수교움직임과 관련,일본풍이 불고있다.내년 상반기중 국교가 수립되리라는 관측아래 기술전문가들및 대학교원,학생들 사이에 너도 나도 일본어를 배우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일본어가 러시아어·영어등을 제치고 제1외국어로 인기를 끌고 있는 것.
  • 외언내언

    고르바초프 소련대통령이 추구하는 페레스트로이카의 이상은 북구식 복지사회주의의 건설에 있는것으로 알려져 있다.소련 쿠데타 저지후 사회주의 완전포기의 대세에 밀리면서도 『스웨덴에서 배우고 싶다』며 사회주의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 하던 그가 인상적이기도 했다.북구식 복지사회주의는 그가 아니더라도 많은 세계사람들의 오랜 선망의 대상이었다.◆가난한 사람이 없고 소득수준의 격차가 적은 사회.요람에서 무덤까지를 국가와 사회가 책임지는 이상사회가 북구사회주의의 목표다.북구는 그목표에 가장 가까이 가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대표적인 나라가 스웨덴.한데 정작 그 스웨덴사람들은 실망하고 변화를 바라기 시작했다는 소식.◆15일 총선에서 집권사회민주노동당의 패배가 확실하다는 것.스웨덴의 사민당은 36년의 한때를 제외하곤 32년부터 60여년을 장기집권하면서 세계제일의 복지국가를 건설한 민주사회주의 정당으로 유명하다.최근의 여론조사에선 사민당과 좌익당(옛공산당)의 지지율이 35.9%.감세와 철저한 자유시장경제를 강조하는우익의 부르주아4개 당 지지율은 49.5%.◆연이은 제로내지 마이너스 성장과 실업률의 배증등 경제부진이 직접적인 이유.하지만 최대의 원인은 고복지·고부담사회민주주의정책의 한계노출.근로소득의 60%를 세금으로내도 부족한 복지부담의 한없는 증가.높은 세금을 피하기 위한 기업들의 해외투자 도피사태.일하는 자보다 놀고 먹는자가 많아진 사회분위기.국민들은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다는 것.◆분배에는 강하나 생산에는 약한것이 사회주의의 최대 약점.소련공산당의 붕괴나 스웨덴사민당 퇴조도 바로 그 약점때문 아닌가.스웨덴의 복지사회주의도 60년만의 한계인데 소공산당의 붕괴가 70년만의 일이고 보면 그 세월이 사회주의실험의 한계인가.북구도 한계라면 고르비도 서구자본주의 말고는 갈길이 막연하다.고르비같은 이상도 없이 끝나버린 공산주의의 고수만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앞날이 걱정이다.
  • “문화 상품 남북교류 길 터”/북한 「리조실록」 반입의 의의

    ◎54년부터 북 학자 70여명이 번역 「리조실록」의 반입계약체결은 분단이후 문화산품의 첫번째 공식교류라는데 우선 큰 의미가 있으며 또한 그 동안 제한을 받아온 북한책이나 자료의 출판 및 일반공개가 보다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전기가 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특히 정부가 지난 1월29일 「리조실록」의 반입을 허가하면서 밝혔듯이 이념성이 개입될 여지가 적은 북한의 역사·자연과학·기술 등 순수학술서적의 반입이 이를 계기로 더욱 활발하게 추진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정부의 「특수자료취급지침」등 관계법규가 이같은 상황에 따라 적절히 개정되지 않는 한 교류의 범위는 여전히 한정될 수밖에 없다는 견해도 있다. 「리조실록」은 「조선왕조실록」을 국역한 것으로 지난 54년부터 70여명의 학자가 번역에 착수,90년말까지 36년만에 완역됐다.이 과정에서 번역에 참가한 많은 학자가 과중한 작업으로 큰 병을 얻고 결국 이로 인해 일찍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이 「리조실록」을 번역하는데 사용한 원본 「조선왕조실록」은 과거 창경궁장서각에 보관돼 있던 적상산본.6·25직후인 50년9월에 북한측이 가져간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왕조 태조로부터 철종때까지 25대 4백72년간의 역사적 사실을 연·월·일순에 의해 편년체로 기술한 사서.총 1천8백93권에 8백88책이나 되는 방대한 기록이다.
  • “찬탈과 숙청” 소 권력투쟁 74년

    ◎정권이양때 「인민의 뜻」 배제/개혁·보수파가 번갈아 집권 고르바초프 소련대통령이 재임중 쿠데타에 의해 실각됨으로써 1917년 볼셰비키혁명이래 소련권력의 정상을 차지해온 7명의 정치지도자 가운데 흐루시초프에 이어 두번째로 자연사가 아닌 이유로 도중하차한 지도자가 됐다. 지난 여섯차례의 정권이양과정을 보면 예측불허의 피비린내나는 싸움을 통해 후계자가 결정돼왔으며 후계자가 집권한 후에도 실질적인 전권을 장악하기까지는 짧게는 1∼2년,길게는 10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던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이같은 후계자 선정에 있어서의 진통은 전임자의 정책을 계승하는 측보다는 반대하고 공격하는 측의 입장이 우월한 양상을 보여 집권자의 변화에 따라 개혁과 보수의 성향이 번갈아 나타나는 양상을 보여왔다. 공산혁명후 소련의 첫지도자인 레닌은 10월혁명후 사회주의연립정부를 구성하자는 사회혁명당등 온건사회주의 정파들의 주장을 배격하고 볼셰비키 단독정부를 수립,자신이 총리가 되고 트로츠키를 외무장관에 임명했다.그러나 이어서실시된 제헌의회 선거에서 볼셰비키는 25%의 지지밖에 얻지못해 소수정부를 유지해오다 이듬해인 18년 국회를 해산하고 볼셰비키를 전러시아공산당으로 개칭,1당독재체제를 확립했다.동시에 자신이 국가수반격인 인민위원회의 의장직을 차지,반대파들을 숙청해가며 24년 사망할때까지 절대적인 지도자로 군림했다.레닌은 1차대전이 끝난후 식량부족과 경제침체가 극에 달하자 21년 개인기업허용및 농만들의 자유로운 식량처분권등을 인정하는 신경제정책(NEF)을 실시했다. 그러나 레닌이 죽자 트로츠키의 2인자 부상 예상을 뒤엎고 스탈린·지노비에프·카메네프의 3두체제가 등장했다.당시 스탈린은 실권없는 당서기장으로 이론이나 실제활동에서 두드러지지 못한 인물이었으나 코민테른 책임자 지노비에프와 공산당 정치국원 카메네프를 재빨리 포섭,레닌의 신경제정책 지지를 표방한 부하린등 우파를 제거했다.그 다음에는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를 이간질시키는 각개격파전술을 구사,레닌 사후 5년만인 1929년말 명실공히 당과 소연방의 최고지도자로 실권을 장악했다. 스탈린은 공업화와 농업집단화를 강제적으로 추진시키는 무자비한 경제정책을 추진했으며 반대자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감행했다.36년에는 공산당을 모든 공공조직과 국가조직의 핵심으로 규정한 새헌법을 발포,39년부터 52년까지 당대회를 한번도 열지 않은채 철권통치를 해왔다. 53년 30년 가까이 독재체제를 구축해온 스탈린이 죽자 당내에는 유력한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에 집단지도체제가 불가피해 당시 총리 말렌코프·KGB의장 베리아·외무장관 몰로토프·정치국원 흐루시초프의 4두체제가 수립됐다.원래 스탈린 사망 다음날인 3월6일 당중앙위원회와 정부및 최고회의 합동회의에서 말렌코프를 당간부회 의장·당제1서기·총리등 3개요직에 앉힘으로써 말렌코프체제가 수립되는 듯했으나 4인의 암투가 본격적으로 전개돼 불과 8일만에 당중앙위 총회에서 당 제1서기직을 흐루시초프에게 넘기도록 결정,말렌코프의 권력은 줄어들었으며 이어서 베리야가 KGB를 이용,권력장악을 시도한다는 이유로 숙청됐다. 이후 2년동안 권력투쟁을 벌인뒤 55년 말렌코프를 총리직에서 제거함으로 흐루시초프는 전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흐루시초프는 이른바 「해빙」이라는 신정책을 시도했으며 반스탈린정책을 추진,고르바초프등 당시 젊은 당료들을 고무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64년 10월 쿠바위기와 중소이념논쟁 격화등으로 인한 당내불만의 고조로 그가 휴양차 모스크바를 비운 사이 그의 추종자들인 브레즈네프·수슬로프·포드고르니·코시긴등에 의해 추방당했다. 이어서 등장한 것은 총리 코시긴·당제1서기 브레즈네프·최고회의 간부회의의장 포드고르니등에 의한 이른바 트로이카체제(3두체제)였다. 브레즈네프는 이 체제내에서 옛질서의 회복을 강력히 추진하는 반흐루시초프정책을 밀고나가 2년후 서기장에 올랐으나 코시긴총리가 죽고 새헌법이 통과된 77년에야 전권을 장악할수 있었다. 82년11월 브레즈네프의 갑작스런 죽음이후 정치국원 체르넨코와 경쟁을 벌이던 안드로포프 연방최고회의의장은 이틀만에 당서기장에 올랐으며 그는 불과 7개월만에 국가원수격인 연방최고회의간부회의의장에 선출됨으로써 전권을 장악할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15개월만에 사망했고 72세의 고령인 체르넨코가 불과 4일만에 후계자로 결정됐다.그 과정에서 고르바초프·로마노프·알리예프등 소장파들의 강한 도전이 있었으나 일종의 과도체제라는 묵계하에 체르넨코가 지명될수 있었다.그는 브레즈네프의 후광을 받으며 성장해왔기 때문에 강력한 보수체제로의 회귀를 꾀했으나 불과 13개월만에 병사,최단명 지도자를 기록했다. 85년3월 체르넨코가 죽자 고르바초프가 후임 서기장에 선출됐으며 그는 1년동안 최고의 정적인 로마노프·빅토르 그리신등을 축출하고 전권을 장악,다음해 3월 개최된 제27차당대회에서 소련의 대변혁을 가져온 페레스트로이카정책을 발표했다. 그는 이어서 90년 3월에는 헌법을 개정,대통령에 취임했으나 군내부의 보수파와 옐친등 급진개혁파등의 도전을 끊임없이 받아왔다. 이같은 소련의 권력이양과정을 볼때 이번 쿠데타로 누가 권좌에 오르든 상당기간 또 한차례의 권력투쟁은 불가피할것으로 보인다.
  • 독립기념관 방문 일 의원 표정

    ◎“일제 36년 침탈 부끄러울뿐”/생체실험 「마루타」 앞선 말 못잇고/「역사의 진실」 깨우쳐 한·일 새 관계의 책임절감 방한중인 일본 사회당의원등 일행 13명이 17일 충남 천안군에 있는 독립기념관을 방문,자신들의 선조가 저지른 역사의 죄악상을 「목격」하고 『참회와 부끄러움 뿐』이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북한만을 한반도의 공식국가로 인정해오던 일본 제1야당인 사회당이 한국정부를 인정한뒤 한반도에 대한 정치적인 입장을 현실화한 상황에서 가진 이번 방문은 그들에게 한일관계의 새로운 개안을 가져다주는 듯했다. 내한한 사회당 의원은 모두 11명이었으나 이가라시 코조(오십강광삼)의원등 3명은 다른 일정때문에 동행하지 못하고 센고꾸 요시토(선곡유인),이토 히데코(이동수자)의원등 나머지 8명의 의원과 비서관 5명등 모두 13명일 독립기념관을 찾았다. 2시간동안 독립기념관을 둘러본 이들은 한 목소리로 지나간 한일 양국의 과거사를 통탄하며 선조들의 잘못에 대해 「석고대죄」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들은 일제의 가혹한 식민지배정책을 그대로 재현해 만들어 놓은 「일제침략관」에서 고문과 학대를 받으며 숨져간 수많은 한국민의 모습을 보고 몸서리쳤으며 생체실험에 동원됐던 한국인 「마루타」들의 사진앞에서 고개를 숙이며 참회했다. 『우리 선조가 36년의 침탈기간동안 얼마만큼 끔찍한 일을 저질렀는지 그 실상을 정확히 목격했다』고 방문소감을 밝힌 센고쿠 요시토(선곡유인)의원은 일본이 한국에 대해 행한 참혹한 행위가 상상을 초월했는지 『뼈저리게 가슴아프다』는 말 이외에는 더이상 말을 못했다. 사회당의원 일행의 단장이기도 한 그는 『일본교과서에서는 전혀 언급도 되지 않았던 역사의 진실을 여기서 알게 됐다』며 부끄러워 했다. 지난 64년부터 89년까지 25년동안 NHK­TV 정치부기자를 역임했던 이케다 모토히사(지전원구)의원은 『과거 일본이 한국에 대해 저지른 만행은 그 어떤 사과로도 충분치 않다』면서 『일본이 한국에 대해 갚아야 할 빚은 국가대 국가간의 배상만으로 결코 해결될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현재 일본 사회당은 사할린거주 한국인들과원폭피해자들에게 개인적 배상을 제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노대통령이 지난해 일본을 방문했을때 일왕이 「통석의 염」이란 표현으로 미흡한 대한사과를 한데 대해 못마땅해 하는 그는 『한국에 대한 과거사 사과는 단계적으로 조금씩 하기보다는 화끈하게 매듭짓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 인권문제에 관심이 많은 사회당 강제연행문제특별위원회 부위원장 쓰쓰이 노부다카(통정신육)의원은 『한일간의 과거사 문제가 우선 백일하에 공개되고 해결돼야 양국관계가 원만해 질것』이라며 『일본이 아시아에서 공존하기 위해선 한국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지역 국가들에도 대동아전쟁 당시 일본이 자행했던 만행들에 대해 사과해야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아시아 주변국들이 일본의 재무장과 군국주의부활을 우려하고 있기 때문에 아시아의 장래를 주변국들과 상의해 처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3·1운동관」과 「독립전쟁관」에서 독립선언서와 피에 젖은 태극기를 둘러보며 한국인의 독립정신과 불굴의 민족정기를 체험한일사회당 의원들은 자신들이 앞으로의 한일관계에 막중한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몸소 체득했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독립기념관 방문을 마친뒤 센고쿠의원은 『새로운 한일관계는 이 자리에서 벌써 시작됐다』고 말한뒤 『한국인의 저력은 독립의지 뿐만아니라 예술적 능력에서도 드러난다』면서 독립기념관에 존치하고 있는 모든 조형물까지 극찬했다.
  • 일인들의 「일제만행」 규탄/오승호 사회1부기자(현장)

    ◎“징용·피폭자 보상하라” 소리 높여 「일본정부는 침략전쟁의 희생자에 대한 전후 보상을 실시하라」 광복절 46주년인 15일 낮 서울 종로2가 파고다공원 손병희선생동상앞. 섭씨 30도를 훨씬 웃도는 한여름 뙤약볕아래 일본인 20여명이 플래카드를 내걸고 머리숙여 「태평양전쟁 한국인 희생자에 대한 추도식」을 가졌다. 「천주교 오사카교구 평화순례단」등 2개 단체의 일원으로 교사와 신부,회사원등으로 구성된 이들은 스스로 일본인이면서도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제국의 만행을 규탄,반성하기 위해 광복절날 이곳을 찾았다고 했다. 『36년동안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한 모든 한국인 희생자들에게 마음으로 깊이 사죄드리며 애도의 뜻을 표합니다』 묵념에 이어 차분하게 성명서를 발표하던 이들은 『일본정부는 원폭피해자와 강제징용된 사람,신사참배를 거부하다 희생당한 사람들에 대한 보상을 성실히 이행해야 한다』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다소 격앙된 어조를 보이기도 했다. 천주교 신부인 나카무라씨(49·중촌도생)는 『지난 10일 입국한 뒤 부산·대구·경주 등 전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원폭피해자들과 만나 체험담을 들었다』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는 동안 한국인들의 넓은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고 고마워 하기까지 했다. 이날 30여분만에 행사를 끝낸 일본인들은 『일본정부가 하루빨리 한국인 원폭피해자 등에 대한 보상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면서 『이같은 문제를 시급히 해결하는 것이 양국 사이에 오랫동안 지속돼온 우호관계를 변함없이 이어나가는 길』이라고 입을 모았다. 이날 일본인들이 이례적으로 이같은 행사를 갖는 동안 우리나라 관련단체는 물론 삼삼오오 가족단위의 시민들도 선열들이 독립만세를 목놓아 외쳤던 이 공원을 찾아 그 넋을 기렸다. 반면 공원밖 도심 몇곳에서는 재야운동권의 이른바 「범민족대회」와 관련,학생들의 부질없는 화염병 시위가 벌어져 보는 이들을 안타깝게 했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