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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인도 국민도 변해야 산다(최택만 경제평론)

    우루과이 라운드 (UR)협상타결로 21세기를 향한 세계경제질서가 태동했다.역사적인 UR협상타결로 인해 종전의 상품에 국한했던 GATT(관세무역일반협정)의 자유무역주의가 서비스부문까지 확대됨으로써 본격적인 자유무역시대가 개막되고 있는 것이다.신GATT체제의 출범은 전세계 1백16개 국가가 무역거래에서 보다 공정하고 자유로운 경쟁시대에 돌입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이른바 지구촌경제(글로벌경제)내지는 국경없는 경제시대가 열렸다. 글로벌경제의 개막은 이번이 세계역사상 3번째이다.제 1차 글로벌경제는 19세기 후반에서 1913년까지 영국의 주도아래 진행되었다.당시 영국은 국민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무역비중이 24%에 달했고 무역흑자는 국민총생산의 4%를 유지했다.노동력의 이동도 무려 1천만명에 이르렀다.영국은 이같은 압도적인 경제력을 배경으로 자유무역주의의 리더로서 역할을 수행했고 이로써 영국에 의한 평화시대(Pax Britanica)를 연바 있다.그러나 1930년대 후반부터 이 나라경제가 쇠퇴하면서 글로벌경제도 후퇴하고 말았다. 제 2차 글로벌경제는 2차대전이후 미국의 주도아래 시작되었다.미국은 자유무역주의를 기본이념으로 하는 GATT를 출범시켰고 이 체제를 이용하여 유럽부흥계획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세계무역은 확대일로를 거듭했다.GATT가 출범할 당시 불과 8백80억달러에 불과했던 세계무역 총액이 지난 91년 3조4천5백억달러로 36년동안 무려 39배가 증가했다.제 2의 글로벌경제가 기울기 시작한 것은 70년대 들어서이다.무역적자 누증으로 미국이 주도하는 경제시대 (Pax Americana)가 기울면서부터이다.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타결은 제 3차 글로벌경제시대의 탄생으로 생각된다.전세계가 주도하는 경제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고 있다고 하겠다.이번 협상에는 전세계 1백16개 국가가 참여했고 자유무역대상에 상품뿐아니고 서비스를 포함시키고 있기 때문이다.제 1차 글로벌경제시대에는 토지·노동·자본등이 중요한 생산요소였고 2차 글로벌경제시대는 3대생산요소중 자본비중이 더 중요시되었다. 제 3차 글로벌경제시대는 자본의 중요성보다는 매니지먼트가 더욱 중요한 역할을 할것으로 보인다.UR타결이후 서비스무역의 자유화는 생산요소의 개념을 과거 토지·노동·자본 등 물적요소개념에서 서비스를 중심으로 한 인적요소로 전환하는 계기를 만들고 있다.쉽게 말해서 인간의 능력과 정보가 경제를 좌우하게 될 것이다. UR협상타결로 글로벌경제가 21세기의 국제경제질서가 될 것이 분명하다.UR는 「국경없는 무역」만이 아니고 「국경없는 경제」 시대를 개막시킨 것이다.최근 국내에서 거론되고 있는 국제화·세계화는 글로벌경제라는 이름으로 이미 19세기에 탄생되었고 20세기에 들어서는 청년기를 맞았으며 21세기에는 성숙기로 들어 설 것으로 전망된다. 이같이 급변하고 있는 국제환경속에서 우리의 위상은 어떤가.아직도 『문을 꼭닫고 지내자』는 조선시대 말기의 「쇄국론」이 상존하고 있는 것 같다.전세계를 하나의 경제권으로 하는 글로벌경제,국경없는 경제가 진행되고 있는 시점에서 우리만 유독 세계속에서 고립하여 폐쇄적인 국가를 영위할 수 있는가. 1960년이후 진행되고 있는 정보화는 지구촌 어느 한쪽에서 일어난 조그마한 일을 수초만에 다른 한쪽에 전달하고 있다 이런 시대에 우리만 귀를 막고 살 수가 없다.우리 국민 모두가 변해야 산다.변하면 살고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변신즉생 불변즉멸)는 격언을 되새겨야 할 시점에 있다.우리국민 모두가 「넓은 세계,밝은 미래」를 향해 사고와 인식,그리고 자세를 바꾸지 않으면 안된다. 국민 모두가 글로벌경제가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정부공직자·정치인·사회지도층인사·기업인·근로자 등 모든 국민이 「국경없는 경제」를 전제로 하여 글로벌화 내지는 국제화에 걸림돌이 되는 각종 요소들을 과감하게 제거해야 할 것이다.공직자는 누구보다도 먼저 국제적 시각과 사고를 갖고 각종 규제를 과감하게 철폐하여 국내기업의 국제경쟁력을 키워주어야 할 것이다. 정치인은 모든 국정현안을 지역적·정파적 관점이 아닌 국가적·국제적 관점에서 분석,국가경쟁력을 배양하는데 힘을 기울였으면 한다.사회지도층 인사를 비롯한 각계 각층의 국민들은 집단의 이익보다는 국익을 생각하여집단행동을 최대한 자제하는 자세가 요구된다.특히 기업인들은 글로벌경제시대 우리의 경쟁대상자는 결코 국내에 있지 않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기업의 국제경쟁력을 향상시키는데 분발했으면 한다.경제의 글로벌화시대 우리의 생존전략은 집단이나 정파간 대립과 갈등이 아니라 국민역량을 국가발전을 위해 집결하고 총동원하는 것이다.범국민적·국가적인 「위대한 각성」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는 역사적인 시점이다.
  • 남 67.66세/여 75.67세/평균수명 20년간 8세 늘어

    ◎최장수 일보다 남8세 낮아/91년 생명표/남편사별 여인 12년 더 살아 91년 현재 우리나라 사람들의 평균 수명은 71.57세이며 성별로는 남자가 67.66세,여자가 75.67세로 여자의 평균수명이 8세 정도 높다.또 우리나라 40대 남자는 국제적 평균치에 비춰볼 때 다른 연령층보다 사망률이 높지만 앞으로 더 살 것으로 기대되는 기간(기대 여명)은 30.94년으로 지난 83년 조사 때의 28.36년보다는 2.58년이 늘어났다. 26일 통계청이 발표한 「91년 생명표」에 따르면 91년 현재 우리나라 사람들의 평균 수명은 71.57세로 지난 50년대 말의 52.39세,70년의 63.15세,83년의 67.94세에 비해 높아졌다. 이는 다른 개발도상국에 비해서는 길지만 미국등 선진국과 대만에 비해서는 짧은 편이다.세계 최장수국인 일본에 비해서는 남자 8.45세,여자 6.44세가 각각 낮은 수준이다. 결혼 적령기의 남자 30세,여자 25세의 기대여명이 39.93년,52.25년으로 각각 나타났다.이들 두 남녀가 결혼할 경우 여자가 혼자서 사는 기간이 평균 12년 정도가 되는 셈이다. 연령별 사망률 추이를 보면 영·유아(0∼4세)의 경우 인구 1천명당 남자 1.02명,여자 0.88명으로 지난 83,89년에 비해 각 연령층 가운데 가장 많이 감소,생활 및 의료수준이 나아지고 있음을 반영했다.남자의 경우 15세 미만의 낮은 연령층에서는 유엔 모델 생명표보다 낮지만 그 이후의 연령층부터는 우리나라 사망률이 연령이 올라갈수록 점차 높아져 40대에서 가장 큰 차이를 보이다가 50대부터 차이가 줄어들고 있다. 평균 수명이 높아짐에 따라 91년에 태어난 출생아중 60세까지 살아남을 확률(생잔률)이 남자의 경우 75.27%,여자는 88.6%이며 80세까지는 남자가 23.49%,여자가 47.63%로 나타났다.예컨대 남녀 각각 1만명이 출생했다고 할 때 80세까지 살아남을 숫자는 남자가 2천3백49명,여자가 4천7백63명인 셈이다.또 연령이 40세인 남자가 80세까지 살아남을 확률은 25.19%,여자가 49.48%이다.40세의 남자중 4명중 1명,여자는 2명중 1명이 각각 80세까지 살아남는다는 것을 말한다.통계청 조휘갑 통계조사국장은 『60세 이상 남녀의 평균 기대여명이 15년 이상이라는 사실은대체로 60세 안팎인 우리나라 기업체의 정년이 늘어날 필요가 있는 현실을 반영한다』며 「노인대책」의 시급성을 강조했다.
  • ’93「책의해」/지구촌가족 베스트셀러/7개국서 애독된 양서와 내용

    문화체육부가 정한 「책의 해」가 어느덧 저물어간다.그러나 올해 책판매량은 「책의 해」답지 않게 오히려 예년보다 줄어들었다는 통계가 나와 우리를 우울하게 하고 있다.그러면 「책의 해」를 맞은 우리나라 외에 지구촌 가족들은 올 한해 어떤 책을 즐겨 읽고 감동을 받았을까. 우리나라를 포함,세계 7개국의 93 베스트셀러를 소개한다. ▷일본◁ ◎오자와 이치로작·일본개조계획/전환기 일본의 개혁방향 제시 일본의 올해 대표적인 베스트셀러는 「일본개조계획」이다.저자는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일본의 뉴리더 오자와 이치로(소택일낭)신생당 대표간사. 「일본개조계획」은 정치서적은 잘 팔리지 않는다는 일본 출판계의 정설을 보기 좋게 깨면서 출판계의 신화를 만들어 가고 있다.지난 5월20일 발행된 이후 줄곧 베스트셀러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 책의 지금까지 판매량은 70여만부.매달 10만부 이상이 팔린 셈이다.이책을 발행한 일본의 대표적인 출판사 고단샤(강담사)의 한 관계자는 앞으로도 한동안 베스트셀러 자리를 고수할 것으로 낙관하고 있다. 「일본개조계획」은 책의 제목이 시사하는 것처럼 전환기에 처한 일본을 어떻게 바꿔 나갈 것인가 하는 개혁의 지침서라 할 수 있다.저자는 서문에서 각계 전문가들의 협력으로 2년간의 준비를 거쳐 발간된 이 책이 혼돈의 정치상황에 새 바람을 불어넣는 개혁의 지침서가 되기를 바란다고 쓰고 있다. 다나카 가쿠에이(전중각영)전일본총리의 「일본개조론」을 연상케 하는 「일본개조계획」은 제1부 정치개혁,제2부 보통국가론,제3부 5가지의 자유 등으로 구성돼 있다.오자와는 제1부에서 경직된 자민당체제로는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대응할 수 없다며 지도력있는 정치개혁을 통한 국가기동력 강화를 강조하고 있다. 보통국가론은 평화헌법의 굴레에서 벗어나 군사력도 자유로이 보유할 수 있는 「보통 국가」를 지향하는 것으로 군사·안보면에서도 경제력에 어울리는 국제적 역할을 해야 한다는 일본의 야심을 담고 있다. ▷한국◁ ◎유홍준 작·나의 문화유산답사기/“우리 역사유물” 애정담긴 기행 유홍준씨(44·미술평론가·영남대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창작과 비평사간)는 올해 국내 독서계의 대표적인 베스트셀러이다. 이 책은 나오자 마자 「유홍준 신드롬」이라는 현상을 불러일으켰다.이 책에 언급된 곳,예를 들면 월출산이랄지 다산초당 봉암사 소쇄원 선운사같은 곳에는 이 책의 지은이가 느꼈던 생각을 더듬어보려는 사람들로 어느때보다도 붐볐다.또 과거부터 계속되어 왔지만 소수의 사람들만의 전유물이었던 각 단체의 문화유적답사 프로그램에도 많은 사람들이 몰렸다.한편으로는 이 책과 비슷한 체계의 역사문물기행이 서점가에 쏟아져 나와 「나의 문화유산…」붐에 불을 지르는 역할을 했다. 이 책이 나온 시기는 새정부가 출범한 직후.따라서 이 책이 지니는 의미는 단순한 독서계의 한 경향만으로 보기는 어렵다. 멀지않은 과거만 해도 우리사회에는 어느 자리에 가든 대화에 끼어들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읽어야 하는 책들이 있었다.우리 정치사를 몰고간 불과 몇년전의 일들,그러나 그 당시에는 누구도 말할수 없는 일들이 「비화」라는 제목을 달고 쏟아져 나왔던 것이 그 것이다. 「나의 문화유산…」은 바로 그 대체세력인 셈이다.독서경향이 정치에서 문화로 바뀐 것이다.따라서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것은 문민정부의 출범이 몰고 온 국민들의 의식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독일◁ ◎귄터 오거작·정장을 한 실패자들/“독경제난 원인은 기업인 무능” 현재 독일에서 가장 인기있는 베스트셀러로는 문학부분에서 「기록들」(Die Akte·그리샴저),전문서적부문에선 「정장을 한 실패자들­석연치 않은 독일의 경영자들」(Nieten In Nnadelstreifen·귄터 오거저),문고판으로는 「삶에 쓸모있는 것들」(FitFursLeben)을 들 수 있다.판매부수로만 따지면 값이 싼 문고판이 아무래도 가장 많이 팔리고 있다.그러나 베스트셀러가 그 시대의 사회상을 반영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현재 독일이 처한 경제곤경을 해부한 「정장을…」이 요즘 독일사회의 분위기를 잘 대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에서 저자 오거는 독일경영자들은 현재 독일경제곤경의 책임을 정치인,노조지도자,기업종사원 등에게 돌리려 하지만 진짜 책임은 독일경영자들의 실패에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지난 80년대에는 경제호황으로 독일의 경영자들의 실패가 문제되지 않았지만 경기가 침체된 지금 이들의 실패가 드러나게 됐다고 말하고 지금 이기적이고 비협조적이며 기회주의·관료주의적인 독일경영자들의 잘못을 고치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하면서 전문지식을 갖추고도 책임을 골고루 분산시킬줄 알며 경영윤리를 갖춘 새로운 경영자상을 제시하고 있다. ▷프랑스◁ ◎에리크 오르세나작·큰사랑/조국·대통령에 대한 애정의 글 프랑스의 베스트셀러들은 순위도 자주 바뀌고 책 한가지가 리스트에 그리 오래 머무르지 않는 편이다. 최근 소설부문에서는 에리크 오르세나의 「큰 사랑」(쇠이유 출판사)이 1위이며 9주째 목록에 올라 있다.오르세나는 공쿠르상 수상경력이 있고 3년동안 미테랑 대통령의 연설문 작성자로 일하기도 한 작가다.그의 다섯번째 소설 「큰 사랑」은 가브리엘이라는 사람을 주인공으로 하여 작가의 일상적인 체험을수필처럼 담담하게 쓴 것이다.남녀간의 단순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프랑스에 대한 사랑,삶에 대한 사랑,대통령및 그 주변 인물들에 대한 사랑을 그리고 있다. 현재 상위권에 들어 있지는 않지만 영화선전에 힘입어 번역서인 「쥬라기 공원」이 소설부문에서 14주째 줄기차게 버티고 있다.영화때문에 원작소설이 덕을 본 경우로는 올해 상반기의 「소년왕」을 꼽을 수 있다. 비소설 부문에서 주목되는 것은 18주째 리스트에 올라 있는 「짖을 자유를 대변해 개가 대통령께 보내는 공개서한」(알뱅 미셸 출판사)이다.저자는 언론인인 장 몽탈도.올해 5월 권총자살한 피에르 베레고부아 전총리의 장례때 미테랑 대통령이 전총리의 죽음을 검사와 기자들 탓으로돌리고 그들을 「개」라고 부르며 비난했다.이에 분개하여 쓴 책으로서 정치인의 부정을 캐는 것은 검사와 기자들의 당연한 직무라고 옹호하고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대통령의 견해에 문제가 있음을 신랄하게 지적하고 있다.정치인의 교활함과 부정직함을 고발하는 책이기도 하다. ▷중국◁ ◎고평요작·페도/서안예술인의 타락과정 묘사 1993년 7월24일,평소 좀도둑이 많기로 소문난 중국의 고도 서안의 주민들도 이날부터 며칠간은 「도둑없는 밤」을 보냈다.도둑들까지도 이날 새로 출판된 「폐도」(폐허된 도시)라는 소설을 읽느라 「밤일」을 쉬었기 때문이다. 소설 「폐도」는 서안출신 작가인 고평요가 서안을 무대로 요즘의 시장경제 분위기에 맞게 쓴 작품으로 남녀노소,농공학상을 불문하고 널리 공감을 불러 일으켜 개혁개방이후 중국의 보기드문 대히트작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 소설이 불과 1∼2개월만에 약 1백만부나 팔리면서 이른바 「폐도」선풍을 일으키자 당국에서는 조용히 재판발행을 금지시켰다.책내용이 문화인들의 현실상황을 너무 참담하게 그렸다는 이유에서였다. 작가는 서안이 과거 장안이라는 이름으로 2천년동안이나 중국 여러 왕조의 도읍지였을 정도로 번창했었으나 이제는 폐허된 도시가 돼가고 있는 현실을 무대로 이곳 4명의 문학예술가들이 돈과 여자와 도박,그리고 사회 가치관의 급변때문에 몰락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그런데 성묘사방법이 너무 적나라해서 현대판 금병매 또는 황색소설라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그 예술적 가치는 홍루몽과 비교될 정도로 높이 평가되기도 한다. 이 책이 나오기까지의 뒷얘기들을 엮은 「고평요와 폐도」「폐도의 수수께기」등 관련서적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는 사실이다.그래서 「폐도」가 발행중지된 이후 요즘은 이들 평론집들만이 책방에 나도는 기이한 현상마저 보이고 있다. ▷러시아◁ ◎에드와르드 라진스키작·니콜라이 2세 삶과 죽음/러시아제국 마지막 황제 일생 러시아에는 베스트셀러라는 개념이 아직 없다.베스트셀러를 선정하는 기관도 없고 잘 팔릴만한 책을 골라 집중투자하는 상업적인 출판사도 물론 없다.그러나 출판전문가들이 추천하는 「좋은 책」은 있다.일간지,출판전문잡지의 출판담당기자들이 이구동성으로 금년도 러시아의 「가장 좋은 책」으로 추천한 책이 바로 에드와르드 라진스키의 「니콜라이2세황제의 삶과 죽음」이다. 러시아 바그리우스사가 금년초 모스크바에서 발행한이책은 이미 4판을 찍었고 구소련 전역에서 1백만부 이상이 팔렸으니 베스트셀러로서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외국에서는 16개국에서 이미 발행됐다. 1917년 볼셰비키혁명 당시 시베리아의 피란지에서 볼셰비키주의자들에게 전가족이 몰살당한 러시아제국 마지막 황제의 일생을 다룬 이책이 인기를 얻는 것은 러시아인들이 갖는 일종의 귀소본능으로 설명될 수도 있다.필자는 니콜라이황제가 죽기 전 36년동안 쓴 일기를 찾아내 이를 하나하나 소개한다.따라서 이 책은 황제 자신이 쓴 황제 이야기인 셈이다. 아울러 베일에 싸였던 황제일가의 최후에 얽힌 이야기가 황제처형에 가담했던 볼셰비키들의 증언을 통해 공개되고 있다.이념에 도취된 혁명군들이 아무런 죄의식없이 황제일가 6명을 차례로 살해하는 장면을 통해 필자는 이데올로기의 위험성을 부각시킨다.필자는 전러시아역사를 통해 황제가 없었던 시절이 없다고 단언한다.『니콜라이가 죽은 뒤에는 스탈린이 황제였다.공산주의가 무너진 지금 또 어떤 황제가 나타날 것인지 우리 모두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필자는 경고한다. ▷미국◁ ◎데보라 테넨작·당신은 도무지 이해못해 미국의 베스트셀러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소설부문과 비소설부문으로 나뉘어 매주 발표되고 있다.한가지 다른 것은 미국서는 정장본과 간이본으로 다시 분류되는 점이다. 정장본에서 소설부문,비소설부문과 간이본에서 소설부문,비소설부문으로 나눠통상 각 부문 15∼20개의 책이름이발표된다.뉴욕 타임스지의 경우는 전국적으로 3천50개의 서점,슈퍼마켓처럼 서점은 아니라도 책을 소매하는 전국 3만8천개 점포에 책을 공급하는 도매상을 대상으로 베스트셀러를 조사하고 있다. 그래서 수많은 책들이 베스트셀러 명단에 오르내리게 되는데 그중에서도 91년 초판이 나온 이래 줄곧 2년이상 뉴욕 타임스지 베스트셀러 명단에 오르고 있는 책이 있다.벌써 1백만부를 넘어선 베스트셀러중의 베스트셀러가 「당신은 도무지 이해를 못해」(You Just Don’t Understand)라는 책이다. 조지타운대 언어학교수인 데보라 테넨박사가 쓴 이책은 남녀간 대화의 벽,특히 부부간대화에 얼마나 큰 장벽이있는가를 분석하고 해결책을 자문해주고 있다.저자는 남자와 여자는 태어날 때부터 전혀 다른 대화의 스타일을 갖고 태어난다고 주장한다.따라서 우선은 서로가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자기의사를 상대에게 어떻게하면 보다 잘 전달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연구를 필자는 권유하고 있다. 말의 구조와 남녀간의 인간관계를 과학적 관찰과 특별한 센스로 분석한 이책은 수많은 가정의 이혼을 사전에 막아주었다는 평가까지 받고 있다.
  • 일본을 극복하자/선우찬호·특허 전문 미국변호사(굄돌)

    최근 일본의 호소카와 총리가 한국을 방문하였다.개혁의 상징인 문민정부의 김영삼대통령과 변화하는 새로운 일본을 대변하는 호소카와 총리의 모습이 좋은 조화를 이루었다.두 지도자는 과거에 집착하기 보다는 미래 지향적인 차원에서 두 나라의 관계를 재정립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정작 양국 국민은 미래의 설계보다 호소카와 총리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진사」에 더욱 관심을 둔 느낌이다.한국 정권이 바뀔때마다 일본은 여러가지 복잡한 문구를 써 가며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과」를 해 왔다.그러나 어떤 표현도 36년간 나라를 빼앗긴 우리의 한을 풀어줄 수는 없었다.이제는 더 이상 사과를 요구,기대할 필요가 없다. 국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일본을 극복해야 한다.일본을 미워한다고 일본을 극복하는 것은 아니다.우리와 일본과의 상대적인 위치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국가 간에는 영원한 적도,친구도 없다.이해를 통하여 서로간의 관계를 정립할 뿐이다. 일본은 우리보다 한참 앞서 있다.1919년 한일합병때보다도 더 앞서 있다.일본의 국민 총생산량은 우리의 거의 10배이다.장기적인 기술투자,근면한 국민성,깨끗한 사회질서로 세계 제일의 국제경쟁력을 보유하고 있다.이미 국민소득이 선진국중 최고인데도 그들은 아직도 우리보다 더 열심히 일하고 검소하게 살고 있다. 반면 우리 경제는 상당 부분 일본에 의존해 있다.반도체부터 가전제품까지 일본 기술의 테두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주요 수출 제품에도 일본 부품이 상당수 내장돼 있어 우리의 수출이 증가하면 할수록 일본과의 통상 적자는 더욱 악화된다.내년만 해도 일본과의 통상 적자가 거의 95억 달러나 예상되고 있다. 일본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선 일본과 대등한 입장이 되어야 한다.그러기 위해 「와신상담」의 자세로서 일본을 배우고 그들의 협조를 유도하기 위한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한국에 대한 투자 조건을 향상시키는 것 외에도 기술에 대한 과감한 투자를 통하여 그들에게 받기만 할 것이 아니라 줄 수도 있어야 한다.깨끗하게 개혁된 밝은 정치,사회,성숙된 우리의 문화예술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이 우리에 대한 문화민족으로서의 존경심을 가지게 해야 한다.그리고 과거에 대한 사과를 요구하기에 앞서 용서의 아량을 보여줄때 우리는 일본을 극복하고 다시는 수치스러웠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을 것이다.
  • 도약하는 중국의 첨단과학기술/전일동 연대 물리학과교수(해시계)

    지난10월18일부터 20일까지 일본 오사카에서 입자가속기와 그 응용에 관한 제15차 일·중 심포지엄이 열렸다.일본과 중국의 두 나라간에 서로 협력을 모색하는 이 회의에 이번에 처음으로 한국과 인도 학자도 비회원자격으로 초청되었다.암치료용 소형 가속기는 아시아 각국의 병원에 설치되어 있을 터이지만 연구용으로 자체 개발한 나라는 동양에서는 일본·중국 그리고 인도 뿐이다.현재 우리나라에서는 포항공대에 방사광 가속기가 건설중이며 대만은 작년에 방사광 가속기를 완성하여 지금 가동준비에 들어갔다.인도는 미국에서 설계도를 입수,19 78년 자체적으로 제작하여 지금 캘커타 소재 가속기 센터에서 가동중에 있고 그 이외에 외국으로부터 도입된 가속기가 몇 대 연구에 이용되고 있다.일본에서는 이미 50대가 넘었으며 19 38년에 처음으로 사이클로트론을 제작하였다.미국에서 19 36년에 발명된지 단 2년 밖에 안된 시기에 자체 개발하였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입자가속기는 첨단 과학기술의 집약된 장치인 만큼 고가품이다.우리나라의 인구가 일본에약 3분의1,GNP는 약 4분의 1,국가예산은 약 1백분의 1이란 사실을 고려할 때 우리나라에 연구용 입자가속기가 최소한 5대는 있어야 한다.문외한은 입자가속기 한대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목적에 따라 가속기는 그 구조가 달라진다.일본이 50대 이상 갖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고 오늘날의 일본기술이 이러한 첨단과학기술의 개발과 과감한 투자에 의해 이루어진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한편으로 중국은 개방정책을 펴면서 첨단과학기술에 특별히 신경을 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이번 심포지엄에 25명의 가속기 전문가가 참석했는데 몇 년전에 본 중국과학자들보다 훨씬 세련된 옷차림과 매너로 행동하는 그들을 보고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그 뿐만 아니라 첨단과학기술에 대한 관심도 대단하다.연구소 견학때 보인 그들의 진지한 태도는 하나라도 새로운 기술을 눈으로 확인하며 자기들의 기술과 비교 검토하여 새로운 도약을 시도해 보겠다는 의욕에 차 있었다.비교적 젊은 학자들도 많이 참가한 사실은 중국정부가 첨단과학기술에 상당히 투자하며 과학기술자의 대우를 개선하는 정책을 펴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우리나라에서는 너무나 제한이 많아서 학자가 국외에서 학술활동하기가 힘들게 되어 있다.예를들면 학술대회에 참석하여 연구결과 발표를 하기위해 정부로부터 지원받을 수 있는 액수는 고작 1천달러밖에 안된다.이것으로는 여비에도 부족하며 결국은 부족한 여비와 체재비는 개인적으로 부담할 수밖에 없다.급속도로 그러나 착실하게 첨단과학기술을 발전시키고 있는 중국과 인도의 모습을 볼때 우리는 위협을 느끼지 아니할 수 없다.형식적으로 겉도는 과학정책을 썼다가는 21세기에는 아시아에서 가장 낙후된 나라로 전락할 것이다.
  • 동학혁명 100주년을 맞으며/임운길 천도교 선도사(굄돌)

    동학혁명은 1894년 조선조 말기에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대규모 민중혁명으로서 한마디로 반봉건,반침략,민주화의 거대한 횃불이었고 근대사에 있어서 큰 변혁과 발전을 가져온 민족적 최대의 혁명이라고 할수 있다. 일본군의 개입으로 수십만의 희생을 내고 좌절되었지만 이로 말미암아 근대화가 시작되었고 그 위대한 정신은 면면히 흘러서 10년후 갑진개화혁신운동을 일으켰고 다시 기미 3·1독립운동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었으며 앞으로 남북통일,세계평화의 정신적 지주가 될 것이다. 동학혁명은 봉건체제의 종식을 고하게 하고 동양근대사에 획기적인 전환을 가져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동학혁명은 우리 민주의 혈맥속에 약동하는 민족의 얼을 되살아나게 하였고 민족 자주정신을 일깨운 민주정기의 분출이었다. 우리 민족역사에 있어서 동학혁명이 없었더라면 근대사전환기에 우리민족 스스로가 주체적으로 한것이 없는,국제열강에 의해 강제적으로 변화된 굴욕적인 역사가 되었을 것이다. 다행하게도 동학혁명이 있었기때문에 생명이 약동하는 산역사를 이어받게 되었고 떳떳한 민족이 되었다고 본다. 만약 그때 동학혁명이 완성되었더라면 대세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왜정 36년의 고통은 없었을 것이며 민족의 분단과 동족상쟁의 비극이 없었을 것이며 우리는 이미 선진국이 되어 세계사를 주도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그러나 또 한편 동학혁명은 그때 미완성으로 그쳤지만 더욱 위대한 혁명정신으로 승화되어 영원히 민족과 인류의 정신을 쇄신하는 원동력이 되리라 믿어진다. 프랑스인들은 프랑스 혁명 100주년을 기해 에펠탑을 세워 국민정신을 튼튼히 다지고 세계에 국위를 선양한바 있다.우리는 동학혁명 100주년을 뜻있게 맞아야 할 것이다. 동학혁명 100주년을 기해 수십만 순국순도선열의 위대한 정신을 기리면서 온 국민의 올바른 이해와 참여가 있기를 바라며 민족정기 회복과 남북통일,세계평화의 길이 활짝 열리기를 염원한다.
  • 인천 맥아더동상 옮긴다/자유공원 명물… 제막 36년만에

    ◎송도 상륙작전기념관으로 이전/지금 자리엔 김구선생 동상 건립 맥아더장군 동상이 인천 자유공원에서 사라진다.노장군의 동상은 없어지는게 아니라 다만 자리를 옮길뿐이다. 인천시는 2일 맥아더동상이 자유공원에 있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는 여론에 따라 인천상륙작전을 기념하는 각종 유적 및 유물이 전시돼 있는 송도의 상륙작전기념관으로 옮기기로 했다. 시는 또 맥아더동상 자리에는 민족정기를 살린다는 취지에서 김구선생의 동상을 세우기로 했으며 자유공원의 명칭도 동상이 세워지기 전에 사용하던 만국공원으로 환원할 방침이다. 인천시민들은 그동안 맥아더장군이 우리 현대사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임에는 틀림없으나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공원에 외국인의 동상을 세운 것은 정서에 맞지 않는다며 이전을 요구해 왔었다. 시 관계자는 『지난 57년 동상이 건립될 때에는 기념관이 없어 인천의 유일한 공원이자 상륙지인 월미도 앞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자유공원에 설치한 것 같다』고 말했다.
  • 미국/「우리별2호」계기로 살펴본 현장(세계의 우주로켓발사기지:1)

    ◎케이프카내베랄 등 모두 4곳 운영/케이프카내베랄은 우주정복 본산/50년 첫 성공후 36년간 373기 발사/반덴버그기지 탄도미사일­왈롭스 소형상업로켓 전용 엑스포 개막에 맞춰 한국과학기술원 인공위성연구센터(소장 최순달)가 제작한 우리국적의 두번째 인공위성 우리별2호가 9월25일 상오10시27분 남미 가이아나 쿠루에서 우주로 발사된다.이에 맞춰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은 지구촌의 중요한 우주발사장을 소개하는 특집을 연세대 최규홍교수(천문대기과학과)의 글로 꾸민다.인간의 미래의 활동공간인 우주를 개척하기 위한 전진기지를 소개하는 이 시리즈는 5회에 걸쳐 연재된다. ○플로리다 남쪽 위치 1960년대이후 지구촌 사람들의 우주정복의 꿈을 실고 수많은 비행체들이 우주에 파견되고 있다.한국도 지난해 「우리별1호」 우주급파에 이어 올해 두번째 우주비행체를 지구밖으로 송출한다. 비행체를 지구밖으로 떠나보내는 곳인 발사장은 전세계적으로 극히 제한되어 있고 모든 시설들이 장막에 가려져 있다. 우주정복의 야심을 불태우고 잇는 주요지구촌 우주발사장은 미국내 4곳을 비롯해 구소련 3,중국 4,유럽 4,일본 2,인도 2곳등 22곳에 이른다.미국은 동부우주미사일센터로 유명한 케이프카내베랄공군기지(CCAFS),서부우주미사일센터인 반덴버그공군기지(VAFB),미항공우주국 왈롭스발사장(WFF),화이트센터발사장(WSTF)등이 있다. 이 가운데 케이프카내베랄공군기지는 서경 80도41분,북위 28도37분으로 미국의 플로리다반도의 남단에 위치하고 있다.총면적은 4백4㎦이며 미항공우주국(NASA)이 관리운영하고 있다. 1950년7월24일 A-4WAC 코포랄 로켓을 첫 시험발사한 이래 86년까지 모두 3백73기의 인공위성 로켓을 발사한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케이프카내베랄공군기지에서 우주로 출발한 주요로켓은 우주왕복선인 스페이스 셔틀,델타,타이탄 Ⅲ·Ⅳ와 각종 미사일들이다.여기서는 중거리탄도미사일과 대륙간탄도미사일의 발사가 계속되고 있다.상업용으로 활용되고 있는 이곳에서는 콜롬비아호·챌린저호·애틀랜티스호등 미국국적 우주왕복선의 우주비행이 빈번히 이루어지며 96년까지 발사될 우주행 스케줄이 꽉 짜여져 있다. ○케네디센터서 개명 케이프카내베랄공군기지의 인공위성발사는 1957년12월6일 시작된다.이보다 약 두달전 구소련이 스푸트니크1호와 2호를 연달아 발사했다.미국은 밴가드(원래 「선구자」란 뜻을 지니고 있음)를 채 발사하기도 전 이야기다.당황한 미국은 로켓발사를 서둘러 생중계하려던 참이었다.전미국의 시청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케이프카내베랄 18번발사대에서 우주출발을 기다리던 밴가드를 실은 바이킹 로켓은 추진력을 잃고 힘없이 쓰러져 발사대 옆에서 폭발하는 불행한 사건이 발생했다.선구자의 역할을 다하지 못한 밴가드의 추락은 미국의 자존심을 여지없이 곤두박질치게 만들었다.밴가드계획은 미해군에서 주도했었다. 실망한 미국 수뇌부는 폰 브라운박사팀이 진두지휘하고 있던 미육군의 위성발사계획을 실행케 하였다.그리하여 1958년1월31일 케이프카내베랄공군기지 26번발사대에서 주피터 로켓으로 발사된 엑스플로러1호가 미국 최초의 인공위성이 되었다. 구소련이 57년 발사한 2개의 스푸트니크위성의 무게는 각각83㎏과 5백8.3㎏이었고 불발로 끝나버린 미국의 밴가드위성은 1.5㎏,엑스플로러위성은 14㎏으로 도무지 게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이때까지만해도 미국은 구소련에 비해 열세였다.미국의 우주전진기지인 케이프카내베랄은 유명세만큼 탈도 많은 곳이다.원래는 미국 공군 로켓발사장으로서 1949년10월이래 합동 장거리발사시험장의 제1작전지부라고 불렀다.1950년5월 합동이라는 글자가 빠졌다.1955년12월까지는 케이프카내베랄 보조공군기지라 불렀다.그뒤 케이프카내베랄 미사일시험지소가 되었다.그리고 1964년1월 이 지소와 미항공우주국 메리트섬 시설(1962년7월 설립)과 통합해 존 F 케네디우주센터라고 명명했다.그리고 이 부근의 전지역을 고 케네디대통령을 기념하기 위해 「케이프 케네디」라고 개명했다. 그런데 지명변경을 놓고 지방유지들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쳐 1974년 케이프카내베랄로 바꾸는 등 작명이 수도 없이 진행된 곳이다. NASA와 미국 국방성의 로켓을 주로 발사하는 케이프카내베랄공군기지는 미국 최대의 우주발사장이다.바다에 인접해 있는 이곳에서는 모두 우주행 화물(인공위성등)과 버스(로켓)를 동쪽으로 발사하며 발사방위각은 북쪽에서 동쪽으로 잰 각으로서 35도와 1백20도 사이다.케이프카내베랄우주센터의 최북단 발사방위각은 뉴펀들랜드의 남동부 때문에 제한되고 최남단 발사방위각은 바하마섬을 피하기 위해서다. 지구의 자전방향은 모든 로켓의 발사능력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케이프카내베랄공군기지는 동쪽으로 발사할 때는 지구의 자전방향과 같기 때문에 지구자전이 끌어다주는 초속 4백60m의 힘을 공짜로 얻는 셈이어서 그만큼 연료를 아낄 수 있다.이것이 아마 케이프카내베랄의 최대의 매력포인트일 것이다.참고로 말하자면 우주행 인공위성이 낙하하지 않고 지구주위를 안전하게 돌다가 목표지점으로 가려면 초속 7.9㎞속도는 내야 한다. ○정찰위성 90% 맡아 ▷반덴버그공군기지◁ 미국 서부우주발사장의 대명사격으로서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와 샌프란시스코의 중간지점인 산타이네스강에 1958년10월4일 설립되었다. 서경 1백20도45분,북위 34도40분에 위치한 이 발사장은 중거리탄도미사일·대륙간탄도미사일·극궤도위성 발사에 그만이다.위치가 남북방향으로 회전하는 인공위성발사장으로서는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그러나 지구자전속도를 얻지 못해 연료소비량이 큰 것이 흠이라면 흠이다.이 발사장의 총면적은 3백3㎦. 이곳의 발사방향은 남방으로서,북쪽으로 1백40∼2백1도 사이에서만 가능하다.미공군과 NASA가 공동관리운영하고 있다.현재 여기서 우주로 쏘아올린 인공위성 로켓 양은 4백70기. 여기에서는 미국 최초의 정찰위성 디스커버리호의 발사를 계기로 미국 정찰위성의 90%이상을 발사하는 수훈을 세웠다.기상위성 NOAA와 원격자원탐사위성 LANDSAT도 극궤도위성이므로 이 기지를 사용한 것은 당연하다. 반덴버그공군기지는 위성을 1백58도와 2백1도 사이로 발사,위치에 따라 발사방향을 제한하는 이유는 로켓을 발사한 뒤 분리되는 1단계와 2단계추진체가 육지에 낙하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즉 남동방향으로는 멕시코의 일부지역이 걸리고 남서방향으로는 하와이군도가 낙하구역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이 기지는 우주왕복선 전용발사장으로 건설되었지만 1988년부터 일체 동결돼 사용하지 않고 있다. ○면적 26.6㎢ 소규모 ▷왈롭스발사장◁ 서경 75도29분,북위 37도50분대로서 델라웨어주 남쪽,버지니아주 동쪽의 대서양연안에 위치하고 케이프카내베랄 위에 자리잡고 있다. 총면적은 26.6㎦.주발사방향은 동향이다. 미항공우주국이 운영관리하는 이 발사장은 1945년 문을 연이래 고공관측용 로켓을 발사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위성궤도진입용 로켓은 1960년12월4일 발사한 스카우트가 최초이며 소형로켓 전용발사장이다.민간 소형로켓 발사에 주로 많이 이용된다. 왈롭스발사장 3번발사대에서 우주로 진출한 스카우트 로켓은 모두 고체연료를 사용한 4단계 소형로켓으로 2백70㎏의 위성을 지구의 저궤도에 올릴 수 있으며 발사비용은 약1천만달러를 호가하고 있다. 스카우트는 우주발사체중에서 가장 작은 것으로서 높이 23m밖에 안되며 구조가 간단하고 값이 싸 미국뿐만 아니라 영국·이탈리아·프랑스·독일등에서 우주연구에 많이 이용되고 있다.이 로켓은 개량을 거듭해 초기작품과 비교해 운송해야 될 화물량을 6배,부피를 12배까지 늘리는 데 성공했다.한편 이동식발사대에서도 얼마든지 우주진출을 시도할 수 있어 인기가 높다.바다위에 가설된 플랫폼위에서도 발사대를 고정시키고 우주행 발사를 할 수 있다.
  • 유난히 뜻깊은 올 광복절/「8·15」48주년을 맞으며

    ◎구총독부 철거 순국선열들도 반길것 오랫동안 새삼스럽지 않던 일이 어느 날 새삼스러워질 때가 있다.내일 맞이하는 8·15가 바로 우리들에게 새삼스러워지는 날이다.1945년이후 근 5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러간 오늘에 이르기까지 올해만치 이날의 의미와 뜻이 새삼스럽게 되새겨지는 날도 별반 없었다는 느낌이 강하다.우리민족에게는 그때마다 새삼스러워야 할 오늘의 의미와 뜻이 국민들의 가슴에 뜨겁게 와닿지 못했던 것은 여러갈래의 해석이 있을 수 있다. 8·15의 의미가 우리들 국민정서를 송두리째 사로잡지 못한 가장 큰 이유중의 하나는 해방당시 들어선 정부가 일제의 잔재를 청산시킬 아무런 의지도 갖고 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후 48년이란 세월이 흘러간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청산의 의지는 별달리 피부에 와닿았던 적이 없었다는 데 있다. 그 청산이란 반드시 피비린내나는 숙청과 보복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일제의 관청에서 관리로 녹을 먹던 사람이 해방된 조국 정부의 요직에 그대로 들어가 앉아 나라의 살림을 도맡아 처리하였고 일제가 쓰던 건물에 그대로 들어앉아 공무를 보았으니 의자나 책상 역시 그대로 물려받은 것이었다. 독립투사의 후손들은 달동네의 사글세방에서 끼니를 굶으며 병고의 시달림을 받고 있는데 일제에 부역하거나 거기에 빌붙어 호사를 누린 사람들의 후손은 각계각층의 요직에 앉아 권세를 누려왔다.누구도 그런 사람들의 구차스러움과 야비함을 꾸짖지 않았다.심지어는 그런 사람들이 순국선열들의 영령들을 애도하는 행렬의 앞줄에 서서 분향까지 하는 웃지 못할 사태까지도 우리는 여러번 목도해왔다. 아픔도 역사라는 어눌한 궤변과 건축사적 사료가 된다는 이유 때문에 일제의 총독부건물에 나라의 중앙관청이 들어서고 총독의 살림집에 대통령이 또한 살림집을 차려왔다. 이러한 모든 청산의욕의 뜨뜻미지근함은 해마다 맞이하는 8·15의 의미와 뜻을 퇴색시켜온 것을 결코 부인할 수 없다.이웃나라 땅에서 올바른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던 선열들의 뼈가 얼마전 환국하여 그분들이 몽매에도 그리던 고국의 땅에 다시 묻히게 되었다. 해방당시 지체없이 결행되어야 할 일이 해방 48년이란 장구한 세월이 흘러간 지금에서야 그 뜻을 받들게 되었다는 것은 부끄럽고 가슴아픈 일이다.그 분향소에만은 일제에 녹을 먹었던 사람들이 출입하지 말았으면 했는데 처음부터 지켜보지 못했으니 그 또한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때늦은 감은 없지 않으나 중국땅에 묻혀 있던 선열들의 영령을 모셔오는 일도 일제의 청산이며 총독부건물과 그 총독의 집이었던 청와대의 구본관을 철거하는 것도 일제청산의 길이다.대청기둥뿌리밑에 숨어 있는 개미집을 발견하여 헐어낸 속시원한 오늘의 8·15로 기억되기 충분하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우리는 매우 착잡하다.조선시대부터 우리의 선조들에게 총칼을 들이대고 위협과 약탈을 일삼다가 결국은 일제치하 36년이란 치욕스러운 역사를 우리에게 안겨준 일제.그들의 만행이 아직도 우리들의 뇌리에 역력하건만 그들은 망한 적이 없다. 지지리도 못난 꼴을 보이고 망조가 들었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드는 것이다.사람이 짓는 선악의 업보에 따라 과보가 주어진다는 인과응보란 말 어디를 뒤져보아도 일본이란 나라에 망조가 든 징조는 보이지 않는다.일본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점이 이 시점에서 우리를 당혹스럽게,그리고 착잡하게 만든다. 해방된 지 48년.이젠 경제만이 나라가 살아나갈 일이란 것은 삼척동자도 알고 있는 일이 되었다.경제논리만이 오늘의 세계를 지배하고 있고,이런 논리는 장차도 좀처럼 뒤바꿔질 것 같지가 않다. 우리에게 남아 있는 일제의 잔재를 철저하게 청산하되 오늘날 일본이 가지고 있는 경제적 모습을 주의깊게 바라보면서 우리가 섭취해야할 것이 무엇인가를 새삼스럽게 살펴보아야 할 처지에 우리는 놓여 있다.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런 심정적 갈등을 하루 빨리 해소시키기 위해서도 우리들 주변에 버젓이 산재한 일제의 잔재부터 청산하는 일이 시급하다.
  • 이­유엔갈등…평화군 지휘체계“흔들”/소말리아 과잉군사작전 파문확산

    ◎이 사령관 소환 요구에 “주권침해” 반발/전투력 우선 미 태도에 거부감… 내분 심화 소말리아 파견 이탈리아군 사령관의 소환문제를 놓고 유엔과 이탈리아가 티격태격하고 있다. 현재 이탈리아는 유엔의 소환주장을 일축하고 이번 주말 특사를 유엔에 파견,외교문제화하려 하고 있으며 유럽공동체 안보회의를 소집해 적절한 대응책을 준비중에 있다. 반면 유엔측과 유엔군을 실질적으로 손아귀에 넣고 있는 미국은 영국 등 우방의 지지를 업고 이탈리아군사령관에 대한 소환을 계속 주장,소말리아 군벌에 대한 공격을 더욱 강화하고 있다. 외교가에서는 외교력보다는 전투력에 의존하고 있는 미국의 입장에 반발하는 나라들이 늘고 있어 이번 갈등이 조기에 매듭지어지지 않을 경우 23개국,2만여명의 소말리아파견 유엔 평화유지군의 지휘체계가 붕괴되지 않을까 크게 우려하고 있다. 이탈리아는 15일 파비오 파브리 국방장관과 챔피 총리까지 나서 지휘통제불가를 이유로 브루노 로이 이탈리아군사령관을 소환하라는 코피 아난 평화유지군 담당 유엔사무차장의 발언에 대해 『이탈리아 파견군에 대한 명령은 본국의 주권에 속하는 문제』라며 불복의사를 밝혔다. 소말리아 주둔 2만여명의 평화유지군(미군4천,이탈리아 2천6백명)을 실제 지휘하고 있는 미국과 이탈리아와의 갈등의 빌미는 지난 12일 유엔군의 모가디슈대공습.민간인만 54명이 숨진 것으로 밝혀진 당시 공습에 대해 이탈리아의 로이 사령관은 『비인도적이었다』는 한마디로 미국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로이장군은 이어 『이런 식이라면 군대를 모가디슈 북쪽으로 이동시키겠다』고 했고 이에 반발한 미국은 코피 아난 유엔사무차장을 통해 로이장군의 소환압력을 가했던 것이다. 이탈리아와 유엔은 이전에도 소말리아내 군벌에 대한 무장해제문제를 놓고 방법에 이견을 보였으며 이때마다 이탈리아측은 『미국이 유엔을 군사적 충돌로만 몰아가고 있다』며 비난해왔다. 사실 이탈리아가 「인도주의」운운하며 유엔의 슈퍼파워에 도전한 것은 이탈리아를 떼어놓고는 소말리아 역사를 생각할 수 없는 「연고」가 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는 1889년 에티오피아정복을 위해 인도양 이웃 소말리아에 보호령을 처음 구축했으며 1921년까지 소말리아 북부지역을 놓고 영국과 다퉈오다 23년 파시스트정권이 들어서면서 영국보호령 일부까지 흡수했다. 이후 36년엔 아예 식민지화,2차세계대전과 유엔의 신탁통치 기간이 끝난 1960까지 영국·프랑스와 각축을 벌이며 실질적으로 소말리아를 지배해왔던 것. 이번 사령관 소환문제를 놓고 프랑스가 미국의 입장을 지지한 것도 당시 영토확장과정중 이탈리아에 밀려 소외된 프랑스(소말리아북부 지부티는 프랑스령)의 심리가 작용한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이번 이탈리아가 든 「반기」뒤에는 이같은 이탈리아인의 친소말리아 정서가 개재돼 있으며 이로 인한 정책의 이니셔티브를 놓고 충돌한 것이 아니냐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 “일,정신대 철저 규명을/배상은 원치 않는다”

    ◎김 대통령,일 외상 접견/“사실관계 가능한한 조속 공개” 일 외상 김영삼대통령은 30일 상오 청와대에서 무토 카분(무등가문) 일본외무장관을 접견,종군위안부 문제등 양국간 현안에 관해 의견을 교환했다. 김대통령은 이자리에서 『종군위안부에 대한 배상을 원치 않는다』는 점을 재확인하고 『그러나 역사의 진실은 밝혀져야하며 일본이 이를 정직하게 밝힘으로써만이 양국 국민간의 믿음이 회복되고,일본의 도덕성이 회복될 수 있다』고 밝혔다고 이경재청와대대변인이 전했다. 김대통령은 『우리가 이문제에 대한 진실규명을 요구하는 것은 양국간의 미래지향적 발전과 동북아 및 세계평화를 향한 긴밀한 협조를 위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이에대해 무토장관은 『종군위안부 문제만이 아니라 지난 36년간 한국국민에게 입힌 피해에 대해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하고 『특히 종군위안부문제는 가능한 빨리,성심성의껏 사실관계를 공개하고 이를 반성·사과하는 입장을 밝히겠다』고 말했다.
  • 대한매일신보에서 서울신문까지(겨레의 맥박으로 89년:16)

    ◎혁신창간의 주역들/“새 민족신문” 애국지사 총결집/「민족대표 33인」중 오세창 등 3명 참여/편집진인선도 “독립완성” 부합 인물로/이관구주필 주도… 몽양도 “각당 함께 혁신” 축하 8·15해방의 감격이 채 가시지 않은 1945년 11월22일 우리민족을 대변할 진실된 언론기관으로 재출발하게 된 서울신문은 당시 우후죽순격으로 생겨나던 군소신문들과는 그 출발점에서부터 근본적으로 달랐다. 인쇄시설등 시설면에서의 완벽한 구비는 물론이거니와 1904년 항일민족지 대한매일신보로 창간되어 구한말 격동의 6년간과 또 일제하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로의 36년간등 모두 42년동안 중단없이 역사 기록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해왔기 때문에 서울신문이 국내외적으로 가장 큰 주목을 받는 것은 당연했다. 특히 당시 좌·우익 대립상황 속에서의 위상설정을 비롯,앞으로 서울신문을 이끌고 나갈 경영진과 편집진의 구성문제등은 단순한 일개 신문창간의 차원이 아니라 미군정당국의 향후 언론정책의 방향을 가늠케하는 중요한 의미를 띠고 있었다. ○하지중장이주문 미군정청으로부터 매일신보를 새로운 신문으로 창간토록 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던 사람은 성재 이관구와 안당 하경덕 이었다.해방 2개월 후인 10월중순쯤 하지중장은 조선일보 정경부장과 조선중앙일보 주필등을 거치며 언론계 중진으로 활약했던 이관구에게 매일신보를 인수,위창 오세창을 사장에 추대하고 새로운 신문을 창간해 줄것을 요청했다.또 한편으로는 당시 하버드대 출신 철학박사로 연전교수로 있던 하경덕을 매일신보의 자산을 인수,관리하는 재산관리인으로 위촉했다. ○김동준 재정담당 대임을 맡은 이들에게 놓여진 선결과제는 신문창간에 필요한 재원확보와 대내외적으로 수긍할수 있는 권위있고 양심적인 인사들로 경영및 편집진을 구성하는 문제였다.이들 문제는 그리 어렵지 않게 해결돼 나갔다.오세창선생의 서도 제자인 김무삼이 청년실업가 김동준을 이들에게 소개해왔던것.김동준은 광산업등으로 많은 재산을 모은 사람으로 해방과 건국 과정에서 언론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고 때마침 원주의 토지를 매각한 충분한 현금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창간 자본금을 쾌척할 준비가 돼있었다. 이같이 재원문제가 해결되자 간부진 인선 역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초대사장에 민족대표 33인의 한분으로 지조높은 항일민족주의자로 추앙받던 오세창선생을 추대하는 것에는 이의가 있을수 없었다.이어서 역시 33인중의 한분인 권동진과 벽초 홍명희 두사람을 상징적인 고문으로 추대,진용을 더욱 강화시켰다. 창간의 실질주역이자 미군정과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하경덕은 부사장,자본투자자 김동준은 전무에,그리고 신문경영에 오랜 경험을 갖고 있던 이원혁과 조중환이 상무에 각각 인선됐다.해방직후 「매일신보 자치위」를 결성,6백여사원들과 함께 자체적으로 신문을 발행하며 외부로부터의 매일신보 접수기도를 막아냈던 문화부기자 윤희순은 출판국장겸 상임감사에 선임됐다.이렇게 짜여진 초창기 경영진은 다음과 같다. ▲사장=오세창 ▲고문=권동진 홍명희 ▲부사장=하경덕 ▲전무=김동준▲상무=이원혁 조중환 ▲취체역=김무삼 ▲상임감사역=윤희순 ○편집국에 10개부 당시 81세의고령인 오세창선생은 처음에는 사장취임을 고사했다.그러나 그가 자세를 바꿔 사장취임을 결심하게 된것은 해방후 혼란상을 보이고 있던 언론계 현실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자신의 여생을 진정한 민족 언론기관 수립에 바쳐야겠다는 생각 뿐이었던 그는 서울신문 창간이 순조롭게 진행,자리가 잡히게 되면 물러서겠다는 마음가짐을 갖고 있었으며 실제로 창간 4개월만에 하경덕부사장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떠났다. 한편 편집진용은 주필로 선임된 이관구의 주도로 짜여졌다.그는 창간사설에서 「해방후 민주주의적 질서수립과 독립완성」이라고 스스로 설정한 과제에 부합할 인물들을 물색했다.편집국장에는 대산 홍기문을 내정했다. 1903년 충북 괴산에서 벽초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일찍이 일본으로 유학가 일본대학 문학부와 조도전대학 대학원을 졸업했다.귀국후 중동학교 교사로 있다가 부친의 권유로 조선일보 학예부장으로 언론계에 입문한 그는 논설위원도 겸임하며 문필을 날렸으며 문자보급 캠페인등 계몽사업에 주력했다.창간 편집진용은 다음과 같다. ▲편집국장=홍기문 ▲편집부=서강백(부장)허현 ▲정치부=박승원(부장)김영상 ▲경제부=주련(부장) ▲사회부=최금동(부장)고흥상 양형진 이봉구 인주현 여상현 한규호 윤일모 서병곤 오쾌일 유종대 ▲문화부=홍기무(부장) 조경희 노천명 이시우 이석희 ▲체육부=이용일 이유형 ▲특집부=김명수(부장) ▲사진부=조대식(부장)이병은 권태완 ▲교정부=최일준(부장) ▲조사부=한길수(부장) 이들 편집국의 창간진용은 이주필이 창간사설에서 밝힌 「일당일파에 기울어지지않는 공정하고 또 적확한 보도」를 위해 당시 혼란의 극치에 달했던 정치적 사회적 상황하에서 민족언론으로서의 흔들리지 않는 자세를 취해나갔다.또한 이주필의 「은같은 말은 김같은 실천이 뒤따라야 한다」는 가르침은 당시 기자들에게 철저한 기자정신으로의 무장과 발로 뛰어 확인하는 책임정신을 가르친 것으로 지금까지도 전해져오고 있다. ○벽초3부자 참여 이들 창간진용 가운데 문화부장 홍기무는 편집국장 홍기삼의 친동생으로 벽초3부자가 서울신문 창간에 함께 참여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벽초는 자식 사랑이 남달라 자식들이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아버지와 대화할수 있게 했으며 당시의 분위기로는 상상도 못할 부자상초(맞담배)를 허용,세간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자식들의 부친에 대한 효도 또한 지극해 홍기문은 월북한 부친을 따라 월북하기도 했다.벽초는 1948년 4월 과도입법의원 신분으로 평양의 남북연석회의 남한대표로 참석했다가 그대로 눌러 앉았으며 홍기삼은 같은해 11월 조선일보 전무로 있다가 아버지를 찾아 월북했다. 새로운 각오와 불타는 사명감에서 출발된 서울신문을 보는 외부의 기대도 컸다.당시 미군정장관 아놀드는 『나는 서울신문이 조선의 한 독립신문으로 호평받을 것을 확신한다』고 축하인사를 보내왔다.또 여운형은 『덕망 높은 신간부를 맞이하여 제호까지 고쳐 명실이 함께 혁신한 자태로 출발한다는 것은 우리 조선의 앞날을 위해 가장 경축할 일』이라고 치하했다.
  • 대한매일신보에서 서울신문까지(겨레의 맥박으로 89년:15)

    ◎광복과 함께 새출발/오욕의 역사 청산… 공공지로 재탄생/「서울신문」으로 제호바꿔 11월22일 창간/지령 13738호… 대한매일신보정통성 계승/사장 오세창·주필 이관영 등 새 진용 포진 군국주의 일제의 패망은 한국언론계에 일대 혁명을 불러일으켰다.제도적 탄압장치였던 출판법등 언론계 악법이 미군정에 의해 폐기된데 이어 허가제였던 신문 출판물이 등록제로 바뀌어 갖가지 출판물과 신문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간부진 사표 수리 일제치하 36년동안 총독부의 기관지 역할을 하던 매일신보(이하 매신)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어닥쳤다.오욕으로 얼룩진 지난날의 역사를 청산하고 「해방조선의 대변기관」으로서의 「서울신문」으로 거듭나기위해 대대적인 개편수술을 받게된 것이다.개편작업은 1945년9월8일 한반도 진주후 이남지역에 대해 군정을 실시하던 미군정청이 해방전 영업국장이던 이상철 임시관리인으로 임명(10월2일),매신의 간부중 일부를 개편토록하는 조치로부터 시작됐다.매신처리 실무를 위임받은 그는 10월9일 매신중역회의를 열었다.이 회의에서 사의를 표명한바 있는 사장 이성근과 상무 정인익의 사표를 정식 수리하는 한편 10월25일 신문사의 명칭변경이며 새중역진 선임문제등 주요사항을 토의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매신의 자치위원회는 신문사의 처리문제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자치위원회란 9월23일부터 경영간부가 없는 상태에서 매신의 운영을 장악,신문을 만들어온 편집국과 공무국등 사원 6백명이 결성한 단체였다.위원장은 문화부기자 윤희순으로 적지않은 발언권을 행사했다.자치위는 10월23일자 지면에 「매신은 어디로」라는 성명을 통해 이 신문은 『특정 정당의 기관지나 개인의 소유가 절대로 될수는 없고 공정한 민중의 기관으로 개편되어야 한다』는 요지의 견해를 피력했다.이는 자치위가 『불편부당 엄정중립의 보도기관으로 새롭게 발족할것』을 앞서 선언했던것과 일관된 논리였다. 자치위의 이러한 반응속에 주총은 예정대로 10월25일 개최됐다.주총에서 사장에 오세창이 추대됐고 부사장은 이상협,전무취체역 김형원,상무 이상철,주필겸 편집국장 이선근등 간부진용이 결정됐다.그러나 자치위의 강력한 반대의사에 부딪혔다. 주총의 결정이 자치위와 사전협의를 거치지 않았다는것이 표면적 주장이었으나 실상은 간부진용에 우익인사들이 너무 많은데 불만을 품은 때문이었다. 양측의 막후교섭이 시도됐으나 타협점을 찾기는 어려웠다.이에따라 개편실무를 맡았던 이들은 모두 사퇴하게 됐고 매신은 표류할수밖에 없었다. 매신이 자치위와 개편실무자 사이에 이처럼 표류하고 있을 무렵 매신의 처리문제는 국내 각정당과 사회단체는 물론 언론계 전체의 집중적인 이목을 끌기도 했다.단순한 호기심의 시선이 아니라 차제에 완벽한 인쇄시설을 갖춘 이 신문사를 접수하려는 직·간접의 암중모색이 여러차례 시도된것이다.천도교세력을 뒤에 업은 공진항이 10월초 매신접수를 시도한데 이어 동아와 조선 양지가 매신인수를 한차례씩 꾀한바 있다. ○개편안 싸고 대립 이러한 상황속에 놓이게된 매신에 대해 그동안 관망상태에 있던 미군정청은 새로운 갈래의 매신개편작업의 필요성을 느껴 본격적인 중재를 결심하게 된다.11월10일재산조사를 이유로 매신에 대해 정간명령을 내렸다.그리고 이관구에게 「공정한 언론을 펴는 참다운 신문」을 만들도록 부탁하기에 이른다. 매신에 대한 정간명령은 자치위에게 여간 큰 충격이 아니었다.그래서 정간되던날 자치위는 「3천만 민중의 정당한 공기로서의 신문이 새롭게 출현해야 한다」는 종래의 입장을 재확인한채 일단 한발 물러서게 됐다.증폭된 갈등속에 난항을 거듭하던 매신의 개편작업은 이로써 순조롭게 진행하게 됐다. 매신개편의 대권을 위임받은 이관구는 내외에서 모두 수긍할수있는 인사들로 경영 편집진용을 구성하는등 본격적인 작업에 착수했다.우선 사장에 위창 오세창을 추대했다.근대 신문계의 선구자이자 3·1민족대표 33인중 하나인 지조높은 항일민족주의자로서 그의사회적 덕망과 이미지는 새롭게 선보일 서울신문에 걸맞는 인물이었다. 위창과 함께 역시 민족대표 33인중 한분인 권동진과 당시 문단의 원로 홍명희를 상징적인 고문의 위치에 영입함으로써 그 진용을 더욱 강화시켰다.이관구와 함께 매신개편작업에 참여한 하경덕이 부사장에 내정됐다.그는 저명한 교육자요 사회학자로서의 깨끗한 이미지와 함께 탄력있는 자유주의 신념의 소유자였다.중후하고 사려깊은 논조를 감당해 나갈 주필에는 이관구가 선임됐다.일제하 독립운동사에서 귀중하게 평가받고있는 민족주의자와 좌파계열의 연합체인 신간회에 참여한바있어 좌우 어느 편에서도 무난히 받아들여질수 있는 인물이었다.특히 해방전 동아와 조선에서 항일언론의 선봉에 섰던 논객으로서의 경력은 금상첨화였다. 당시 최고의 언론인들을 각부 데스크에 앉히고 이를 지휘할 편집국장에는 어문학계의 권위자인 홍기문이 내정됐다. 그리고 신문경영에 오랜 경험을 가진 원로 이원혁과 조중환이 상무에 실업가 김동준이 전무에 내정,안정된 신문운영을 기할수 있는 진용이 구성됐다. 제호는 이관구의 제의를 간부진이 숙의끝에 받아들여 「서울신문」으로 확정했다.제호의 글씨는 서예가이자 취체역인 김무삼이 썼다. 그리고 매신으로부터의 인수재산 확인도 마무리지어졌다. 우선 자치위산하에 있던 사원 6백명의 인원을 고스란히 흡수하기로 했다.인수받은 재산과 시설은 현 프레스센터 자리에 있던 연건평 1천8백30여평 규모의 4층 콘크리트 건물인 구사옥과 그 부속건물을 비롯,부산등 지방에 산재해 있던 당시 35만3천원 상당의 부동산과 독일제 알버트윤전기 4대등 최우수 인쇄설비 일체,지사 지국의 배급망까지를 포함하는 것이었다.이 규모는 신문사로서 해방전후 유일무이한 것이었다. 전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를 개편,서울신문으로 거듭나기 위한 이 모든 준비작업은 11월21일 하오2시 5층 옥상에서 오세창초대사장의 취임식을 가짐으로써 매듭을 지었다.그리고 이튿날인 22일 독립한 이 민족의 진실된 언론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자임하면서 서울신문이 마침내 그 첫지면을 이땅에 드러냈다.발행일자는 1945년11월23일이었다. 당시 사회적 관심의 열도를 반영하듯 미군정장관 아놀드를 비롯,조선인민당위원장 여운형,국민당당수 안재홍,한국민주당수석총무 송진우등의 인사들이 언론정세관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최대의 경의와 기대를 보내오는 가운데 혁신된 속간호를 내놓게 된것이다. 『「서울신문」으로 「매신」이 경생』이라는 5단 크기의 컷(1면 중앙)과 함께 속간 첫호의 모습을 선뵌 서울신문의 이날짜 지령은 제13738호로 기록돼 있다. 이는 대한매일신보­매일신보­매일신보 지령을 그대로 계승한것으로서 서울신문의 계보가 어디에서부터 출발했는가를 한눈에 보여주는 것이었다.
  • 대한매일신보에서 서울신문까지(겨레의 맥박으로 본 89년:14)

    ◎「매신」의 8차례 부록 발간/충무공 등 소개… 암흑기 민족의식 고취/광개토대왕의 기개·정몽주충절 상세히/이퇴계·정약용·김정희 등 석학·명필 망라 한일합방 이후 일제가 총독부 기관지로 새로 창간한 경성일보(일문판)에 흡수되어 국문판 자매지 성격으로 명맥을 유지해오던 매일신보는 1938년 4월16일 경영체제의 독립이라는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이는 1936년 중일전쟁을 시발로 내선일체를 더욱 강조해가던 일제가 한국인들의 민심계도를 위해 보다 강력한 한글신문의 필요를 느꼈기 때문 이었다. 이에따라 사장 최린,부사장 이상협등 새경영진이 선임되고 편집국장에 김형원 논설부장 유광렬등이 새로 임명되었다.이들은 제호부터 신자를 신으로 고쳐,매일신보로 바꾸고 경영독립을 기념으로 대대적인 지면혁신및 기념사업을 추진하게 되었다. 당시 매일신보의 지면혁신 내용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부록판 발행.독립경영 2개월후인 6월30일자에 첫번째호를 발간했다.「역대명가유필진적」이라는 제목하에 한국의 역사적 인물들에 대한 필적을 소개한 이 부록판은 비록 이듬해 1월31일까지 매월 말일자로 여덟번 발간된후 중단됐으나 36년8월 동아의 일장기말소사건 이후 언론탄압이 극에 달했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으로 볼때 획기적인 것이었다. ○당시론 획기적 기획 그 내용을 면밀히 살펴보면 이 부록판은 표면적으로는 선현들의 「글씨」소개를 내세우고 있지만 이를 통해 한국 역사인물과 역대왕조의 소개등이 자연스레 이뤄졌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일제하에서 역사를 빼앗긴채 「일본신민」으로 살고 있던 한국인들에게 높은 기상을 자랑하던 고구려와 광개토대왕을 알리고 고려말 충신들을 소개했다.또 이순신장군의 대첩,충절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았던 조선조 유명한 선비들에 대해 소개했다.이는 민족의식을 일깨우고 민족문화의 중요성과 그 보존을 강조한 것이 틀림없다. 이 부록판 발간에 대해 매일신보는 첫호가 나가기 전날인 1938년 6월29일자 1면에 사고를 내고 『본사경영독립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조선서도의 금자탑인 역대명가의 유필진적을 애독자 제위에게 무료증정하게 되었다』고 대대적으로 알렸다.또 소개되는 작품들에 대해서는 『본사가 그동안 막대한 노력과 시일을 들여 수집망라한 것으로 글씨 한개마다 전문 사학가의 해설을 곁들였음』을 밝혔다.인쇄및 장정에 대해서는 『본사 특선의 고급당지에 석판이도쇄로 미려정교하게 인쇄,병풍을 만들어 영구히 보존할수 있도록 고급전아하게 만들었다』고 설명했다.사고는 또 이 부록판 발간을 『조선신문 초유의 희생적 사업』이라고 정의하고 『반드시 독자제위의 열광적 환영이 있을 것으로 믿고 있다』고 자신했다. 38년 6월30일자로 발간된 첫번째 부록판은 황해도 해주군 광조사지의 진철대사보월승공탑비등 고려전기의 탑비 6편을 수록했다.해설의 예를 보면 진철대사비의 경우 고려 태조 20년에 세운 것으로 작자는 최언위 필자는 이환상으로 구양순체임을 밝히고 있다. 7월31자로 발간된 두번째 부록판은 고려때 최고의 왕사였던 석탄연의 문수원비를 비롯,오늘날 지극히 귀한 것으로 알려진 이규보의 유묵과 안향 정몽주 문공유등 고려시대 석학들의 필적을 실었다.특히 포은 정몽주는고려말 절개를 지킨 굴지의 학자이자 정치가로 기술했다. 특히 세번째 부록판(8월31일자)은 광개토대왕비등 만주 안동성 집안현 일대에 있는 고구려시대의 비문들로 꾸며졌다.특히 광개토대왕비에 관해서는 『동양인이 쓰고 세운 비석 가운데 최고 최대의 비석』이라는 설명과 함께 자세하게 대왕의 업적을 소개했다.『고구려의 19대왕으로 아버지는 고국원왕,아들은 장수왕이며 18세에 즉위했다.왕은 천자영매하고 용병의 귀신이었으며 공격하면 반드시 점령하고 싸우면 반드시 이겼다.64개의 성과 1천4백개소의 촌락을 공략하여 국경을 넓혔다.이르되 호태왕이라 한다.…』 ○신라때 비석도 게재 네번째 부록판(9월30일자)은 함경남도 함흥군 하기천면소재 황초령 진흥왕순수비와 낭공대사탑비,신행선사비등 주로 신라시대 인물들의 탑비를 싣고 있다.진흥왕순수비는 한반도내 광개토대왕비에 버금가는 최고,신라 제일의 비로 소개했다. 다섯번째 부록판(10월31일자)은 박연 성삼문 서거정 김시습 안평대군 정란종 최흥효등 조선 전기 각분야에서 특출난 인물들을 소개했다.박연은 세종때 처음으로 아악을 연구 시행한 음악가로 이조판서와 대제악을 역임했으며 성삼문은 조선의 세종과 문종 그리고 단종 세임금을 섬겼으나 세조를 거부한 사육신의 한사람으로 세종대왕을 도와 훈민정음 창제에 공이 크다고 설명했다.또 김시습은 단종폐위사건에 반발하여 일평생 방랑생활을 했던 신동으로 일시적으로 금오산에 우거,금오신화를 남겼고 이율곡이 그를 백세지사로 극찬하였음을 소개했다. 여섯번째 부록판(11월30일자)은 일제가 가장 주목하는 인물인 이순신을 비롯,이황 양사언 한석봉 김구 등 조선중기 대가들의 유필을 수록했다.특히 임진왜란때 일제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던 이순신장군에 대해서는 그의 난중일기 일부를 소개하며 거북선 건조,옥포 당포 한산도 해전에서의 대첩등 큰 전공을 세운 내용들을 상세히 기록했다. 일곱번째 부록판(12월31일)은 허목 이광사 이숙 윤순거 송준길등 조선 중기 석학들에 대한 필적과 업적을 소개했다. 마지막회가된 39년 1월31일자 부록판은 김정희 조광진 정약용 이삼만 권돈인강세황등 조선말기의 명필 석학들의 글씨를 두루 실었다.특히 초서 해서 전서 예서에 통달,조선 최고의 명필인 추사 김정희를 자세히 소개했으며 남쪽의 김정희에 필적할만한 북쪽의 명필로 조광진을 내세웠다.또한 다산 정약용에 대해서는 뛰어난 학문과 저작을 칭송하고 그의 형 정약전 정약종과 함께 이들 형제의 천주교 귀의와 순교내용을 상세히 기술했다. ○「매신」 실체규명 계기 이같이 한국의 대표적 역사인물들을 두루 소개한 매일신보 부록판은 39년 1월 별다른 설명없이 중단되었다.그러나 이 부록판은 민족자각의 의도성 여부를 떠나 결과적으로 한국인들에게 잃어버렸던 역사를 되살리게 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따라서 이같은 매일신보의 새로운 측면은 그동안 친일 반민족 신문으로만 평가되어 한국언론사연구에서 제외되다시피 했던 매일신보의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역할을 규명할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 서예가 김기승씨(이세기의 인물탐구:21)

    ◎“힘차고 남성적인 운필” 원곡체 창안/한자명체 두루 통달… 독창적 변형경지 도달/고 최현배박사도 “한글 본연성품 표출” 칭송/성경구절 작품화 유명… 도산선생 묘비문 등 명필남겨 글씨를 이루기전 작업대앞에 선 원곡 김기승씨의 모습은 신을 향한 기도처럼 절실하고 경건하다. 눈부신 백지위에 붓길이 닿는순간 율동처럼 이어지는 묵향,어느때는 일필휘지,어느 때는 점 하나에도 혼신을 다해 멈출듯 흐느끼는 ▦황은 그 자체가 이미 통신의 경지다. 마치 자신의 손이 아니라 신에 의해 움직이는것처럼 힘차게 그어내린 획마다에선 맑고도 밝은 상서로운 향기를 뿜어낸다.그리고 그 몇순간의 긴장은 폭풍전야의 정적인듯 은은히 주위를 압도한다. 원곡의 문향실은 그가 38년간 머물렀던 종로구 적선동에서 이곳 워커힐 아파트로 옮긴지 올해로 만 10년이된다. 요즘도 여전히 새벽 4시에 일어나 기독교 방송을 들으면서 하루일과를 시작하고 근처 아차산에 올랐다가 내려와서 바로 작업에 임한다. 그리고 하루 2시간에서 3시간,전날 독서로 구상해두었던명언·명구를 마음속에 새겨 우러나오는 진한감동을 작품속에 담아낸다. 그는 글씨를 이루는데 있어 아름다움은 언제나 「선」이어야함을 전제하고 있다.이른바 선하지 않은 것은 미가 될 수 없다는 논리다.기술이 피부라면 인격은 근골이다.티없이 청정한 피와 살과 뼈대가 합일될때만 비로소 미의 영혼이 글씨와 글속에 첩식된다는 것이다.순수한 서체에서의 체삽이나 시속기는 천착스러움의 극치다.글이 뜻하는 바를 거르거나 꾸미지 않고 있는 그대로 나타내기 위해선 심혼의 혈서로 성자에 임해야 한다고 말한다. ○글씨 내재의미 중시 「초학자시 불가진형세 선상자성의 재필전」­글씨는 처음 대할때 그 형세를 알수없으니 먼저 글씨가 이루어짐을 생각하면 뜻은 쓰기전에 있게 된다,즉 원곡은 서의 진수는 글씨의 모양에 두기보다 그 내부에 내재된 뜻을 소중하게 여기는 투철한 작가정신으로 일관되어 있다. 해서·행서·초서·전서·예서등 한자체에 두루 통달하여 일가를 이룬동안에도 그는 한때 중국말로 된 성경을 국전에 출품한 적이 있었다.막상 이를 내놓았으나 알아보는 사람이 별로 없어 그때부터 그만의 독특한 원곡체를 창안,한문각체의 독창적 변형을 한글에 적용시킨 이 서체는 한자와의 대련 작품을 쓸때도 조화와 균형을 깨지않는것이 특징이다. 옛날 궁중에서 궁녀들이 소설을 베낄때 사용한 궁체가 부드러운 반흘림의 반행초의 실용글씨라면 원곡체는 한문보다 힘차고 남성적인 운필,구슬을 꿴듯한 우아미보다 먹물이 뚝뚝 듣는 힘의 분출이 돋보이는 서체다. 한글학자 고 최현배박사는 원곡의 한글체를 보고 『산같이 망막하고 강같이 줄기차다.우리의 한글이 제본연의 성품으로 온전히 나타났다』고 칭송해 마지않았다. 그러나 그의 독창성이 지나쳐 그 자신이 스스로 「전위예술」이라 일컬었던 「묵영기법」은 서예계에 열띤 논쟁을 불러일으키며 큰 화제를 뿌리기도 했다. 묵영기법이란 청묵의 번짐을 사용하거나 먹물의 농담으로 거듭써서 시각효과를 앞세운 일종의 회화적 서예 회화인 셈이었다. 서예계는 『전위예술,즉 묵영은 서예에서는 있을수 없다』고 발칵 뒤집혔고 심지어는 『전통을모르고 전통을 소화할 수 없기 때문에 나타난 예술』로 혹평되기도 했다. ○「묵영기법」 논쟁불러 이때도 젊은감각과 시대에 부응하는 예술을 지향해온 원곡으로서는 전통예술을 지키기 위해선 고루하게 전통만을 고집하기 보다 오히려 여러각도의 실험과 시도를 언해 새로운 조형언어를 발굴,전통의 소중함은 물론 각자의 개성과 특성을 살려나가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평생동안 그가 써온 작품은 개인전때마다 40점에서 60점씩 32회.독실한 크리스천인 그는 평소에 아끼는 성경구절들은 그때마다 아름다운 작품으로 담아내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육당 최남선의 「삼·일독립선언문」을 비롯,제갈량의 「전후출사표」는 3천자이상,아가서8장 4천여자,무위자연의 노자 「도덕경」5천여언,특히 굴원의 「이소경」의 경우는 사적고증,한자구성·암기 등으로 6개월준비,집묵만도 10일이상 걸린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오랜 연륜과 우수사려가 없는 마음가짐으로 인해 그의 글씨에는 향기는 물론 불가사의한 힘이 담겨 있다. 올해나이 84세.그러나 그 음성과 행동에서 연노의 기색은 찾아볼수 없다. 또 서예계 최고 원로의 권위의식 같은것도 없다.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든 격의없이 친절하고 편안하게 대한다. 1909년 충남 부여군 홍산면 조현리에서 김정현씨와 김취옥여사의 2남중 차남으로 출생.5세때부터 조부인 동효공이 설립한 한문서당 삼언재에서 글씨와 천자문을 배웠고 홍산소년백일장에 나가 한시짓기 장원,11세때 보통학교 2학년에 들어가면서 신교육을 받게됐으나 공주고보 2학년때 일인체조교사를 배척하는 맹휴의 주동자로 지목되는 바람에 서울 휘문고보로 전학,그후 만주로 건너가 봉천 문회고급중학과 상해중국공학대학 경제과에 다녔다. 상해유학시절 흥사단 원동위원부에 입단하여 도산 안창호선생을 모신 독립운동에 가담,국내신문의 주요기사를 발췌정리하여 국내정세를 보고하거나 흥사단 행사때마다 글씨를 잘 쓴다고 해서 식순을 쓰는 일 등을 맡아보기도 했다. ○흥사단서 독립운동 그때부터 대학에서 공부한 경제학보다 글씨 쓰는 일에 심취하여 졸업후 고향에 돌아오자 고장의 명필인 산정 신익선선생에게 본격적으로 글씨를 배웠다. 하루종일 쓴 글씨가 집안마당에 흰눈처럼 수북히 쌓였던 기억은 지금도 그에게 불길같은 작업의지를 당겨준다고 한다. 그후 다시 서울로 올라와 소전 손재형선생에게 사사.『재주는 있으나 헛 공부했다』는 혹독한 질책을 받으면서 그는 구양순 안진경 왕희지의 법첩으로 겨울밤이 지새도록 수련을 쌓아갔다. 봉천 문회고급중학교때 남경서 신학대학을 나온 백영엽목사의 영향을 받아 크리스천이 된 그는 조국에 돌아가면 목사가 되려했으나 글자 한자한자의 그 묘한 성자에 빠져 글씨쓰는 일을 평생의 직업으로 삼게 되었다.그대신 하나님의 말씀을 글씨로 전한다는 의도에서 성경구절을 작품에 담게 되었고 성경구절을 쓴 작품만도 6백여점에 이른다. 새문안교회에 다닌지 45년,출중한 건강을 타고난 그는 담배나 커피·술은 입게 대지 않는다. 산부인과 의사인 부인 차인실씨(82)와는 1939년에 결혼,외아들인 명호씨(53·미앨라배마에서 병원)와 4녀가 있다. 원곡은 주변을 조금씩 정리해 본다는 뜻에서 지난83년 그가 아끼던 자작품 2백87점을 골라 국립현대미술관에 보내던날,아들 딸을 결혼시켜 내보낼때보다 더 가슴저미는 허망함과 섭섭함에 그날밤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고 말한적이 있다. 지난 90년에는 그가 한평생동안 소장해왔던 추사 김정희의 「고시행서」위창 오세창·김구선생의 글씨,청전 이상범과 절친했던 운보 김기창,청계 정종여의 금물로 그린 「독수리」등 30억 상당의 골동서화를 아들의 모교인 연대박물관에 기증. 1958년 제1회 개인전을 필두로 신세계미술관이 주관하는 개인전이 끝나면 부인과 자녀들이 권유하는대로 이대와 고려대 중앙대등 각 대학에 작품을 나누어 보낸다. ○33회째 개인전 준비 그가 제정한 원곡서예상은 올해 16회째,오는 10월25일부터 제33회 원곡서예개인전을 역시 신세계미술관에서 갖게된다. 도산 안창호선생의 묘비문을 비롯,수백여개의 비문과 동상문 현판글씨 시비등 전국 방방곡곡에 그의 글씨가 산재해 있으나 단 한글자도 그는 허트로 내놓는 일은 없다. 그의 마음가짐은 「논어」에 나오는­ 「불지명이면 무이위군자야요 불지례면 무이립야요 불지언이면 무이지인야라(천명을 알지못하면 군자가 될수 없고 예를 모르면 세상에 나서 행세할수 없고 말의 옳고 그름을 알지 못하면 사람을 알지 못한다)」를 실천하며 앞만보고 살아왔다.분한이 있으면 향기로운 글,빛을 발하는 글에 이를수 없기 때문이다. 노자 「도덕경」에 나오는 「대덕약곡」(큰덕은 골짜기 같아야 한다)」에서 따온 그의 아호인 원곡처럼 그래서 나를 낮추고 남을 섬기고 마음을 텅비운 맑고 깊은 골짜기,세상의 크고 작은 모든 일을 포용하면서 묵묵하게 자신의 일에 정진하는 예인의 자세를 지킬 뿐이다. □연보 ▲1909년 충남 부여 홍산출생 ▲1927년 만주 봉천 문회고급중학졸업 ▲28년 흥사단 원동위원부입단 안창호 김구 이동령선생이 이끄는 한국독립당입당 ▲1932년 중국 상해 중국 공학대학부 경제과 졸업 ▲1936년 소전 손재형선생사사 ▲1939년 조선서도 진흥회 주최 전국서도전 입선 ▲1942년 중국 상해서 전중국서화전 입선 ▲1946년 전국 서화전 이등상 ▲1949년 제1회국전 서예부 특선(문교부장관상) ▲53∼55년 국전 제2·3·4회 특선 ▲〃 대성 서예학원 설립 ▲〃 서울대·숙대·상명여대 출강(15년간) ▲56∼58년 국전 제5·6·7회 추천작가(출품) ▲58년 제1회 원곡 서예전 ▲59·60년 〃 제8·9회 초대작가(출품) ▲61∼82년 국전 제10∼30회 국전심사위원·운영위원 ▲59∼89년 원곡서예전 제2회∼29회 개최 ▲1976년 미국·유럽 미술여행 ▲78년 제1회 원곡서예상 제정 ▲79년 동아일보 주최 원곡서예 회고전 ▲79년 북유럽및 캐나다 미술여행 ▲〃 제1회 원곡 미술상 제정 시상 ▲79∼92년 제2∼15회 원곡서예상 시상 ▲83년 국립현대미술관에 자작 대표작(2백87점 기증) ▲84년 주일 한국 대사관 한국문화원 초대 서예전 ▲87년 봄베이·카이로등 유럽지역 여행 ▲기독교 미술인 협최 회장역임 고왕경·김강경·경천애인·시편23편·이소경·삼일독립선언문·애경·전후출사표·1오일삼성오신·불원천불우인·묵시록등 1천여점 은관문화훈장 한국서예사 원곡서문집
  • 대한매일신보에서 서울신문까지(겨레의 맥박으로 89년:11)

    ◎오욕의 역사/“내선일체” 표방… 일제지배 합리화/항일독립군을 비적단·불영단으로 비방/언론탄압 항의하자 “민중현혹” 일방매도/경성일보에 경영 예속… 1938년 「신보」로 개제 일제의 손아귀로 팔려 넘어간 대한매일신보는 독립된 한국을 상징하는 「대한」이라는 제호의 두글자는 이내 잘려버렸다.합방 이튿날인 1910년8월30일 매일신보로 개제됐던 것이다.그리고 총독부의 기관지로 전락하는 운명을 맞았다.이른바 「일선융화와 세도인심의 감화유도」를 앞세운 일제의 선전대변 기관지의 길을 걸어야했다. ○한글판 발행 중단 그러나 지령은 대한매일신보룰 그대로 계승했다.국한문판은 제1642호,한글판은 제939호부터 발행되었다.매일신보는 총독부 기관지가 되는 동시에 9월1일에는 대한제국정부의 기관지격이던 한양신문까지 합병했다.국한문판과 한글판 두가지 신문을 발행하는 유일한 신문으로 남게 된 매일신보는 1912년 3월1일 한글판 신문을 폐지하고 대신 국한문판 제3면을 한글전용으로 제작했다.이에따라 1907년 5월23일 대한매일신보란 제호로 창간에 가서 매일신보로 이어져온 한글판은 5년만에 사라져 버렸다.결국 국한문판만 존속할 수 있었다. 그나마 매일신보는 경영측면에서 독립된 기구로서의 성격을 잃고 만다.왜냐하면 일제가 창간한 총독부 기관지 경성일보에 흡수통합 되었기 때문이다.경성일보의 한 부서의 위치에 불과한 매일신보는 말하자면 경성일보에 예속되어 자매지 성격으로 발행된 셈이다. 이렇듯 초기에 예속기를 거친 매일신보는 1920년에 가서 편집국으로 승격된다. 그러나 매일신보의 「신」자가 「신」자로 바뀐 「매일신보」는 경성일보에서 분리,독립된 신문으로서 모습을 갖추게 되는데 그 시기는 1938년 4월16일이다. 그러나 매신이 경일에서 독립되기는 했으나 경일은 매신의 주식 45%를 소유한 대주주로 남는다.여기에 총독부의 소유 주식을 포함하면 매신의 경일예속은 종전과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논조 또한 변함없이 총독부의 입장을 대변하고 일제의 한반도 통치를 합리화 하는데 급급한 것이었다. 매일신(신)보는 일제의 입장에서 「시정의 부연철저,민의의창달,문화의 향상」등의 원칙에 따라 편집되었고 편집방향은 한 마디로 「내선일체」라 요약할 수 있다.이를 위해서 총독정치의 선전과 홍보를 중심으로 제작했으나 식민정책의 모순을 은폐·호도하기 위해 민간지의 논조를 반박하거나 비난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3·1운동의 불길이 아직 가시기도 전인 1919년 3월6일 「민주자결주의의 오해」라는 사설로 이른바 「각지의 소요사건」을 비방하고 이튿날에야 처음으로 이를 「소요사건」으로 보도한 일도 그 실례가 될 것이다.3월8일 「소위 독립운동」이라는 사설로 민족적인 독립운동을 비웃었던 예는 매신의 편집방향이 어떠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매신은 합방이래 1919년까지 국문신문으로는 줄곧 독점적 위치에 서 있었다.그러다 3·1민족봉기를 계기로 일제는 그간의 무단장치에서 문화정치를 표방하고 나섰다.그 시기에 나온 신문이 조선일보·동아일보·시대일보등 몇몇 언론이다. 일제는 1920년 민간지의 발행을 허가한데 이어 같은 해 9월 몇몇 잡지를 허가했다.그러나 일제는 바로 폭압적인 언론탄압정책으로 돌아섰다.11월20일 월간 「신천지」를 필두로 하여 22일에는 「신생치」에 대해서 대대적인 수사를 벌여 관련자들이 여러명 구속 또는 기소되는 필화를 입어야했다.일제가 문화정치를 표방하는 것과 거의 동시에 휘두른 본격적인 사법권의 발동이었다. ○독립운동 비아냥 이와같은 강경탄압에 대해 언론계와 한국인 변호사들은 언론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 공동의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결의문을 채택한 이들은 일제의 언론탄압정책을 맹렬히 규탄하고 나섰다.그러나 매신은 이러한 민족진영의 움직임에 대해 「불온당으로 인□,필화사건에 관한 언론계및 재야법조유지의 결의를 견하고」라는 사설을 통해 일제의 언론탄압을 옹호하고 민족진영을 비난했다. 매신의 이러한 식민주의적 왜곡 논리는 식민통치의 선전에서 민족동화는 물론 사회·경제·문화·교육 그리고 풍습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적용됐다.우선 식민지 정책통치의 선전에서는 주로 일본제국주의의 한국침략을 합리화하고 통치의 모순을 은폐하는 것이 주조를 이루는 가운데 식민통치의 성공을 미화시키는데 열을 올렸다.또 식민지 지배질서를 확립하고자 식민지 권력의 정점인 총독의 선전에 주력하면서 식민지 권력에의 복종과 충성을 강요하기에 이른다.민족동화의 논리는 민족말살을 위한 것으로 한국과 일본을 순치의 관계로 설정하고 「병합」은 침략에 의한 지배가 아니고 과거 신라의 한반도 통일 내지는 일본내 분국의 통일과정과 같은 현상이라면서 침략사실을 완전하게 은폐,호도했다.그리고 동화의 선결과제로는 일본어 교육을 강조하고 일본어를 익히게 되면 10∼20년이면 완전한 동화가 이루어져 황국식민화된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광의의 애국심」내지는 「광의적 단합」을 강조하기도 했다.이는 일본왕에 대한 충성논리로 직결되는 것이었다. 사회분야에서는 식민지 통치의 기반을 구축하기 위한 식민지 사회의 재편에 역점을 두었다.식민지 사회의 재편은 수작자를 매개로 식민지 사회의 재편을 종용하는 것이었다.아울러 각계각층에 경고사설을 통해 식민지 통치의 사회적 책임과 의무를 거듭 강조했다. 경제분야에서는 식민지 경제수탈을 위한 산업의 개량과 일본경제체제로의 예속화에 중점을 두는 논조를 폈다.특히 농업의 발달을 위해서는 농사개량과 토지개량이 기반되어야 한다는 논리에서 개량사업을 강조했다.한편 식민지 수탈의 기초작업인 토지조사사업을 소위 「근대화」라는 논리로 위장하면서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한국의 경제제도가 확립되었다고 선전했다. 문화면의 경우는 한국의 자주성과 전통적 문화를 단절시키기 위한 문화말살로 일관했다.무엇보다도 종교에 대한 탄압이 심했는데 그중에서도 유교와 기독교에 대한 통제가 집중되었다.이는 식민통치에 대한 이들 종교계의 거센 저항과 맥락을 같이 하는 것이었다.때문에 매일신보는 종교와 국체의 일치를 주장하면서 식민지 통치에 위배되는 종교활동을 철저하게 배척한 것이다. 교육부문에서도 식민통치를 위한 논리는 예외가 아니어서 학교와 사회,가정에 이르기까지 「황국신민화」를 위한 식민지교육을 강조하면서 보통교육과 실업교육을 역설했다.한국인에게는 고등교육이 필요치않고 식민지통치에 필요한 정도의 보통교육과 실업교육만이 필요하다는 것이 그 논리의 요지였다.매신은 이처럼 정치·사회·경제·문화등 각 방면에 이르기까지 일제의 식민통치를 정당화하고 또 이를 선전하는데 앞장서는 불행한 세월을 맞아야했다. 매일신(신)보가 36년동안 수행했던 역할을 요약하면 곡필로 일관되었다.온갖 압력수단을 동원해 일제가 빼앗은 「대한매일신보」는 「대한」이라는 두 글자가 잘려나가면서 오욕의 수렁텅이로 빠져들어 갔던 것이다.국권도 오간데가 없었고,그 서릿발같던 「대한매일신보」의 기상도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동사 연구」(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지음)
  • 1만여시민 올라“문민 야호”/개방 첫휴일 인왕산·청와대 앞길 표정

    ◎가족·연인 삼삼오오 기념촬영/폐쇄전 추억 회상속 새시대 실감 문민정부 출범과 함께 청와대앞길과 인왕산이 열린이후 첫 휴일을 맞은 28일 인왕산 등산로와 주변도로 곳곳에는 1만여명의 가족·연인들이 산책을 나와 다시보는 서울 전경을 즐겼다. 다소 쌀쌀한 날씨에 하오들어 눈발이 날리는 가운데서도 등산객들은 집에서 마련해온 김밥등을 들며 해발 3백38m 인왕산(인왕산) 정상에서 발밑에 훤히 내려다보이는 청와대 전관(전관)과 마주 보이는 북악산을 가리키며 25년만에 다시 찾은 「금단의 땅」을 축복하는 얘기꽃을 피웠다. 또 바리케이드가 철거된 진입로 주변에는 사복차림의 경비군인들이 차량통제 대신 주·정차 유도와 길안내로 바쁜 시간을 보냈다. ▷인왕산◁ 만수천등 일부 약수터를 제외하고는 등산이 금지됐던 인왕산 등산로는 정상에 있는 「매바위」와 「범바위」등 소문난 바위들마다 등산객들의 발길이 붐볐으며 꼬마를 무동태운 젊은부부,카메라를 목에 걸고 다정히 손잡은 연인등으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48년 광복을 맞아 친구들과 함께 이곳에 와 일제치하 36년간의 설움을 쏟아냈다는 노재유씨(65·경기도 고양시 현천동 42의1)는 『청년시절 이곳에 다닐때는 계곡마다 물이 흐르고 봄이면 개나리가 만발했었다』면서 『이제 시민들과 외국관광객들이 이곳에 올라 인왕산 호랑이 전설을 얘기하며 자하문과 청와대 경치를 즐길수 있게돼 기쁘다』고 말했다. 또 대학시절 「법대산악회」회장으로 동료학생들과 함께 인왕산 바위절벽을 오르며 등산의 기본을 익혔다는 김철환씨(58·회사중역·서울 서초구 서초동)는 『오랜만에 옛 친구를 다시 찾는 것 같아 감개가 무량하다』며 부인(56)의 손을 맞잡고 산행을 즐겼다. ▷청와대 주변도로◁ 청와대 앞길과 서쪽 효자로·동쪽 팔달로 등에는 화물차량을 제외한 모든 차량 진입이 허용된 가운데 바리케이드가 치워지고 교통표지판이 새로 설치돼 청와대를 좀더 가까이에서 구경하러 나온 노인들과 주부·어린이들로 붐볐으며 시민들이 세워놓은 나들이 차량들로 장사진을 이뤘다. 시민들은 이날 청와대 건물을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하는가 하면출입통제의 계기가 됐던 68년 1·21사태등 청와대의 역사를 화제로 삼으며 「가까운 이웃」이 된 청와대 주변에서 휴일나들이를 즐겼다.
  • 새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29)

    ◎소년시절:10/화성의숙 전학 전후/“당시 만주에 공산주의 팸플릿” 필자 「평가」에/“소학교때 「레닌일생기」 읽었다” 92년판 날조/학업 비정상적… 면학문제 언급없어 김일성의 유소년 시절에 대한 우상화의 하나는 그가 어릴 때부터 얼마나 총명하고 공부를 잘했는가를 과장하는데 있었다.그런데 무송소학교 시절부터는 이 방향을 계급적 관점으로 더 강화한다.예를 들어 회고록에서 전기작가는 김일성으로 하여금 『나는 무송에 있을 적에도 「레닌의 일생기」나 「사회주의 대의」와 같은 책을 몇권 읽었다』라고 말하게 하고 있다. ○계급적관점 강화 그런데 우리는 이와같은 주장은 1992년에 출판된 「세기와 더불어」이전에는 그 어떤 김일성 전기에도 실린 적이 없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전기작가들은 도대체 무엇을 보고 이런 조작을 했을 것이겠는가. 필자는 85년에 일본에서 「김일성평전」을 출판하고 87년에 이것을 한국에서 번역출판하였다.이 책에서 필자는 김일성이 소년시절에 마르크스 레닌주의 서적을 읽었다는 엉터리 주장을 철저히 비판한 일이 있었다.일례로 여기에 그 문장의 일절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당시 공산주의문헌은 많지 않았다.1924년에 일본 경찰이 동남만에서 입수한 「불온문서」에는 공산주의 자체를 정면으로 해설한 책은 거의 없었다.1925년에는 이 간도에서 대량으로 공산주의 관계문헌이 압수되었는데… 이들은 모두 선전팸플릿이나 신문이었다.…공산주의를 선전하는 얄팍한 팸플릿으로는 레닌의 이름을 붙인 전기·역사·공산청년회역사·공산역사 등이 있었고 그 외에 「공산독본」「노서아 노동역사」「사회주의대의」「공산당의 선언」등이 있었다.이 팸플릿류는 모두가 소련에서 발행되었고 간도지방에서조차 1∼2점씩밖에 압수되지 않았다』 이것은 일본에서 필자가 「외무성경찰사」란 극비문서를 찾아내어 그 기록을 그대로 옮긴 것인데 여기에는 「레닌의 이름을 붙인 전기」「사회주의 대의」란 어구가 보인다.북한의 전기작가들은 필자가 낸 평전의 이 일절을 표절하여 김일성이 무송에서 「레닌의 일생기」「사회주의 대의」를 「읽었다」는 새로운 날조를 하게 된 것이다. ○얄팍한 선전신문 김일성은 이 시기 학교생활이 비정상적이었다.그 때문인지 종래의 전기에서는 면학문제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고 있었는데 「좌익서적 읽기」신화의 날조에는 엉뚱하게도 필자가 자료를 제공해 준 것으로 되었다. 다음부터는 무송소학교를 중퇴한 후의 일로 넘어가겠다. 1926년 2월14일 동아일보는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실었다. 「이 달에 정의부 중앙의회에서 금년 4월1일부터 군인을 모집하기 위하여 정의부 군인이 될만한 청년을 모집할 위원을 선정하여 만주 각 현에 파견하리라는데 일본과 중국경찰의 주목을 피하기 위하여 중학생을 모집하는 형식으로 할 것이라 하였다」 이 기사는 화성의숙이 창설되는 움직임을 암시하고 있는 점에서 주목된다.여기에는 이때 정의부에서 각 현에 파견될 위원의 명단도 실려 있다. 따라서 그 위원중 누군가가 김형직의 가정에 와서 3∼4월에 김일성을 화성의숙에 입학시킬 것을 상의한 것도 추측이 가능하다.그러나 박만포선생의 의견에 의하면 김일성은 3월이나 4월에는 입학하지 않았었다.필자는 4월 입학설이었으나 이러한 6월 전학설도 앞으로는 고려해 나갈 것이다. 일본 영사관에 계출된 기록에 의하면 화성의숙은 화어연구학교로 수업연한이 1년6개월이며 교원이 2명,생도가 30명으로 26년 3월에 설립 인가가 난 것으로 되어있다. 26년도는 1학년생만이 입학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의부의 진짜 목적은 이 학교를 교포 자제에게 중국말이나 가르쳐주는 정착준비 학교가 아니라 항일군인을 양성하는 군관학교로 경영하는 것이었다.숙장이 최동오,재무가 강제하로 정의부는 유하현 삼원포에 교과서를 찍는 인쇄소까지 마련하여 학업을 보장하였다. 이번 회고록에서는 화성의숙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화성의숙은 독립군의 간부를 키워낼 목적으로 1925년 초에 세운 정의부 소속의 2년제 군사정치학교였다.화성의숙의 입학대상은 정의부산하 중대들에서 선발된 현역군인들이었다.우에서 입학생수를 쪼개어 내려보내면 중대별로 우수한 청년들을 뽑아 보내는데 2년동안의 학습과정을 마치면 성적에 따라 새 직급을 주어 출신 중대에 되돌려 보내었다.독립군 밖에서도 개별인사들의 소개로 입학하는 청년들이 더러 있었지만 그런 경우는 드물었다」 ○설립연도 등 조작 여기서는 화성의숙이 26년에 설립된 것을 25년으로,1년 반인 수업기한을 2년으로 바가지씌운 일이 눈에 띈다.화성의숙은 25년에 설립될 계획이었지만 26년으로 지연되었다.그리고 일제의 탄압에 의하여 그 명칭도 26년 8월 경에는 화림학교로,28년 6월경에는 화흥학교로 바뀌어졌다. 그러나 여기서는 김일성이 자기 스스로 화성의숙 전학은 특수한 케이스였다고 인정하고 있는 점이 더 중요하다.그의 전학은 역시 비정상적이었다. ①「세기와 더불어 1」156면 ②평전127∼128면 ③일제침략하 한국36년사(8)72∼73면 ④평전 73면 ⑤「세기와 더불어1」136면 ⑥평전 74면
  • 새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26)

    ◎소년시절:7/전기마다 다른 무송학교 학력/58년 역사서엔 전학아닌 입학 위장/중퇴사실 감추고 “우등졸업생” 선전/재학땐 토호아들과 절친하게 지내 김일성이 1925년 4∼5월에 간 무송현성에는 당시 중국 소학교가 있었다.그런데 이 학교에 관한 전기의 기술은 아래와 같이 앞뒤가 맞지 않는다. ◎학교 이름과 김일성이 들어간 시일 ㉠1924년에 무송제1우급소학교에 입학했다.(1958년의 역사서) ㉡25년 봄에 무송현립제1양급학교에 다녔다.(83년의 김일성연표) ㉢25년 봄에 무송제1소학교에 들어갔다.(83년의 「조선을 알아야 한다」156면) 85년에 김일성평전을 냈을 때 필자는 「조선을 알아야 한다」는 입수하지 못하고 있었다.그러나 필자는 이 점에 대해서 「우급소학교」란 1938년 이후에,그리고 「양급소학교」란 36년 전후에 각각 괴뢰 만주국에서 4년제 초급과 2년제 고급을 병설한 소학교를 호칭한 것이었다고 밝히고,김일성이 들어간 25년에는 그저 「무송제1소학교」로만 불렸다고 하였다. 이번 회고록에는 「무송 제1소학교」로 되어 있다.②수업기간 ㉠25년 봄부터 26년 초봄까지 다녔다.(83년의 김일성연표) ㉡「26년 초봄 무송 제1소학교를 최우등의 성적으로 졸업했다」.(「조선을 알아야 한다」164면) 당시 중국에서는 소학교는 8월20일부터 1월31일까지 제1학기,2월4일부터 6월30일까지가 제2학기였다.따라서 25년 봄 같으면 그는 고급소학교에 입학한 것이 아니라 1학년 제2학기 도중에 전학한 것으로 된다.또 26년의 초봄이라면 3월쯤이다.김일성은 「최우등의 성적으로 졸업」한 것이 아니라 고급소학교 2학년 제2학기 초에 중도 퇴학하였다. ①,②를 보면 김일성은 1년도 못되는 기간을 무송제1고급소학교에 다녔는데 입학도 졸업도 하지않았다.그래서인지 이 학교는 한 때 그에 대하여 별로 큰 대접을 하지 않았다. 「그이께서 학교교장의 안내로 한 책상에 다가 가시었을 때였다.위대한 수령님과 함께 책상에 앉게 된 중국인 학생이 일어나 그에게서 들고 계신 책가방을 받아놓으며 반갑게 인사를 하였다.그가 바로 장울화동지였다」 이것은 1985년에 나온 「장을화동지는 나와생사고락을 같이 한 옛 전우입니다」라는 글인데 김일성의 회상을 전기작가가 대필로 써준 것이다.그런데 문제는 학교 교장이 그를 교실의 책상머리까지 안내했다는 말에 있다. 1959년 김일성은 해방전에 자기가 한 항일투쟁의 「전적지」를 답사하는 대표단을 만주에 보냈다.그러나 무송도 들렀던 답사단은 무송소학교 기사는 쓰지 않았다.이때 답사단을 영접한 무송소학교 선생은 마청산이었는데 그가 답사단을 소학교에 안내하지 않고 그들을 김형직이 살았다는 소남문가의 집에 안내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답사단은 그가 여기서 「김일성원수는 바로 저 창가에 책상을 놓고 공부하셨습니다」라고 말했다고 쓰고 있다. 25년 김일성을 교실 책상머리까지 안내했다는 무송소학교 교장은 59년,김일성이 직접 보낸 대표단을 푸대접하여 학교 문전에도 안내하지 않았다.그 까닭은 1학년 1학기 도중에 전학하고 2학년 2학기 도중에 중도퇴학한 김일성에 관한 자료란 이 학교에 없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런 일은 있었지만 중국인 장울화(통명 장아청)와김일성이 친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대표단은 25년 당시에 소학교에서 장울화의 선생을 했다는 연동지와도 만났다.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다. 「장울화가… 지주의 아들로서 그렇게까지 훌륭하게 싸울 수 있은 것은 오로지 김일성 원수의 영향과 지도에 의한 것이었지요」 여기서도 문제는 연동지가 자신과 장울화의 관계가 사제간이었다는 것은 밝히면서 자신과 김일성이 사제간이었던가 어떤가에 대해서 입을 다물고 있는 점이 있다.그러나 하여간 김일성과 장울화가 사이가 좋았다는 것은 알 수가 있다. 「세기와 더불어」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며칠 후 나는 무송 제1소학교에 편입하였다.이 학교에서 나와 제일 친한 학생은 장울화라는 중국소년이었다.그는 무송에서 두번째인가 세번째로 손꼽히는 부자집 아들이었다. 장울화네 집에는 가병만 해도 수십명이나 있었다.무송현 동강에 있는 인삼포는 거의가 장울화네 것이었다.장울화네는 해마다 가을이면 인삼을 캐 말이나 노새에 싣고 다른 지방에 가져다 팔았다.그 집에서 인삼을 팔러 갈 때에는 가병들이 10리씩이나 늘어서고 하였다.장울화의 아버지는 이름있는 부자였지만 제국주의를 미워하고 자기 조국을 사랑하는 양심적인 인간이었다.장울화 역시 그랬다」 한약방의 주인인 김형직과 인삼포 소유자인 무송의 토호 장만정은 친했다. 그 아들들인 김일성과 장울화도 막역한 사이였던 것이다. ①평전 68∼70면 ②1985년 5월13일자「노동신문」 ③「항일무장투쟁 전적지를 찾아서」 1960년 당간 11면 ④상동서 17면 ⑤「세기와 더불어」 1백20면
  • 소설가 최인훈씨(이세기의 인물탐구:10)

    ◎「자신의 언어」에 충실한 “지적성직자”/현실묘사보다 관념성 짙은 작품활동 주력/화제작 「광역」발표로 “전후최고작가” 명성도/다방면에 해박한 지식·분석정신… 주관 강한 성품 『흰 바다새들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는다.마스트에도 그 언저리 바다에도.아마,마카오에서 다른데로 가버린 모양이다』 소설 「광장」은 이렇게 끝나고 있다.추악한 밤의 광장인 남쪽이나 밀실은 없고 광장만 허용되는 북의 기계적 체제등 모든 것에 염증과 환멸을 느낀 주인공이 어딘가 먼곳,아득한 이상의 나라인 제3국으로 가는 선상에서 실종되자 독자는 그의 실종은 현실로부터의 도피은둔인가,영원한 죽음인가,그렇다면 희망과 기대없는 암담한 절망이란 말인가라는 질문과 함께 이 소설에 비상한 관심을 모았었다. 곧 이 소설은 센세이셔널한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분단이후 최초로 남북을 동시에 작품의 무대로 삼았다는 점과 분열된 이데올로기의 비극이 첨예하게 묘사됐다는 이유외에도 불꽃튀기는 눈부신 지적 문체와 지성미 넘치는 철학적 사고,극명한 체제분석등은 60년당시 정치상황의 독자들에겐 싱그러운 통쾌한 충격일수밖에 없었다. 최인훈은 문단데뷔 1년만에 일약 유명작가로 부상되었고 많은 평자들은 다각도로 그를 조명하기에 앞을 다투었다. 문단과 젊은 문학도들은 당연히 이 당돌한 신인작가가 누구인가에 주목했다.그러나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최인훈은 그자리에서 한발자국도 전진하거나 물러서지 않은,자신의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 적당한 범주속에서 언제나 담담하고 온화하게 미소짓고 있을 뿐이다. ○견고한 자기세계 구축 좀더 확실하게 말하자면 그 자신이 자신을 감추거나 도사린 것이 아니라 제3자가 그의 실체를 공략할 수 없게끔 이미 탄탄하고 견고한 지식의 성속에 군림하고 있었다는 편이 옳다. 그와 친한 친구들­이라기보다 그를 가까이 하려고 접근했던 이들은 그의 문학과 철학 역사와 생태학 진화론에 이르는 해박한 지식과 지적직관,철저하게 파고드는 분석정신에 삼투된 나머지 오히려 그를 난삽한 존재로 규정짓고는 일찌감치 그에대한 현혹을 포기했던 것 같다. 예를들어 그는 아무나를 만나서 선뜻선뜻 대화에 응하거나 문학지등이 내건 잡다한 기획에 뛰어들어 그때마다 지면을 장식하는데 도움을 주는 필자는 아니다. 그가 나설 자리 나서지않을 자리를 또박또박 구두점을 찍어 그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하는지 타당성 여부를 명료하게 따지고 타진한다.그래서 편집자측도 그에게 맞는 마땅한 기획이 아니라면 처음부터 그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게되었고 그역시 『부덕한 사람이 실수를 피할수 있는 길은 일을 저지르지 않는 것이 최상』임을 전제,상대방이 빠져나갈수 있는 탈출구를 터주고 있다. 만사에 긍·부정을 분명히 하면서 이렇게 적당한 변명을 달아주는 것만봐도 지금까지의 주변의 평가대로 그의 행동과 말에는 막무가내의 기미는 없어보인다. 그러나 아무리 「작가라는 작위」가 갖는 위치가 「막대한 부채를 인수한 상속자」라 현지라도 체면상 마지못해 얼굴을 내밀거나 체면상 글 한줄 써야 하는 허례와 허식,의례적 형식들을 외면하기 위해서,그러니까 그 자신을 보호하려는 걸맞는 이유를 장치하고 있었는지도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공식석상에 나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누가 오라하지도 않고 갈만한 일도 없었다는 논리는 성립된다.따라서 사교적인 모임이나 장소에서는 객관적으로 건너다보아도 그의 존재는 어울려보이지 않는다. 그의 소설의 네 귀가 딱딱 들어맞아 빈틈이나 허술함을 찾아볼수 없듯이 그의 평상시의 모습,작가로서의 모습도 여전히 그의 작품의 연장선상에 놓여있다. 그의 걸음걸이에서도 성격이 나타난다.그는 손끝까지 똑바로 편채 걷는다.호들갑스럽게 놀라고 감탄하고 감동하지 않는다.침착하게 아주 천천히 반응하기 때문에 그와 사무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은 곤혹스러운 노릇이다. 자연스러운 자리가 아닌 이상 상대방이 아무리 떠들어도,그래서 의도적으로 작가의 어떤 면을 꿰뚫어보고 그 대답을 얻고자 하는 방법일 때는 그 질문이 명료해질 때까지 그는 조용히 입을 다물어버린다.그리고 산만함중에도 상대방의 의중이 진지하고 진실하다고 여겨지면 비로소 한마디의 압축된 대답으로 노냐 예스냐로 반응한다. 그는 말을 절제하되될수 있는한 명증한 말만을 고르고 있다. ○침착하고 조용한 성격 그의 소설은 흔히 「관념소설」또는 「환상소설」,작가로서의 그는 이상주의자이며 비현실적이라고도 말한다. 혹자들은 그의 소설에는 「생동하는 인물」보다 「지적괴뢰」들이 넘쳐있으며 「쉽게 쓸것도 어렵게 쓰고」그래서 그는 「관념보다는 현실을 그리는게 목적인 소설가로서의 임무를 우선적으로 충족시키지 못한다」고 비꼬기도 한다. 이른바 카뮈나 사르트르보다는 로맹롤랑이나 레마르크처럼 삶의 향훈이 물씬 풍기는 눈물과 한숨과 인생역정과 사랑의 애증을 그리라는 뜻이다. 그러나 그는 「현실은 관념에 우선한다」는 논리에 반대되는 변명을 늘어놓기보다 「관념」은 예술적으로 소설적으로 또는 철학적으로도 「현실에 우선할 수 있는 소설적 기법」임을 그의 여러소설에서 단정적으로 설명해주고 있다. 「고귀한 자가 나락으로 떨어져가는 비극적 상황」만이 독자의 연민과 동정을 불러일으킬지도 모른다는 정답은 「두 점 사이의 최단거리는 직선」이라는 유클리드의 공식만큼이나 자명하고 단순할뿐 「고귀한 자」는 「한사람의 남자」이거나 「귀족」이거나 「영웅」이전에 그가 처하고 있는 사회적·철학적·도덕적 차원에서 「고뇌하는 현대인」「방황하는 지식인」일수도 있음을 그는 대표작 「광장」과 「가면고」「회색인」「웃음소리」등에서 증명해보이고 있다. 평소의 그는 그의 소설속의 주인공들처럼 24시간 책읽기에 빠져있고 혼자 앉아있기를 좋아하며 남들과의 케상공론보다 아들 윤F(20)에게 「영산회상곡」이나 베토벤을 신청해 듣는 것이 행복하다. 바둑을 둘줄도 모르고 스포츠도 모른다.다른 취미나 오락이 있을리 없다.요즘은 긴 방학을 맞아 갈현동 2층서재에서 오랜만에 신작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동안은 실은 소설에 손댈 경황도 심적 여유도 없었다.34세에 뒤늦게 결혼해서 낳은 아들 윤F가 중2때 간염백신주사를 맞는 과정에서 보균자로 나타나는 바람에 그는 아들을 살려야 한다는 부모로서의 일념과 기원으로 좋은 의사,좋은 병원을 찾아 뛰어다녀야만 했다. 학업을 중단한채 누워서 책과 음악으로 소일하는 아이를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은 천둥처럼 무너져 내렸으리라. 문학이 예술이라면 그중에서도 가장 가혹하고 잔인한 예술일 것이다.아들의 아픔을 보면서 이를 체험으로 끄집어내고 휘두를만큼 그는 잔혹하지 못하다. 그것이 작가로서 위대한 것이라면 그는 「사양하고 싶은 위대함」이라고 외면해 버린다.2년전 윤구는 회복하여 검정고시합격으로 지난해 대학에 갔다.딸아이 윤경이도 올해 이대 영문과에 입학,모처럼 가정에 안락이 찾아들어 그는 작품구상을 할수 있게 된 것이다. 그는 무슨일에든 까탈을 부리거나 까다롭게 군 적은 없다.남들이 지레짐작하는 것이라면 그로서도 속수무책일수밖에 없다.그는 다만 글을 쓰는 일에서는 한순간도 긴장을 풀지않아 쓰지않을때도 언제나 내면에서 쓰고있었다고 말한다.그러나 「광장」이후 사람들은 그를 향해 작품을 쓰느니 못쓰느니 끝없는 소요로 들끓었다. 그가 「광장」을 쓴것은 24세때다.이후 이 소설은 대학생과 문학도들의 필독서에다 지난 32년간 해마다 1만부이상,지난해엔 2만부,지난해초엔 국제펜클럽 한국본부가 노벨문학상 후보작으로 추천하기도 했다. 단일작품으로는 평자들의 가장 많은 논란을 받았고 「전후 최대의 작가」로 찬사되기도 했다. ○24세때 「광장」 발표 그는 함남 회령출신으로 6·25때 가족이 모두 월남,피란지 부산에서 16세때 장편소설 「두만강」을 쓰기 시작해서 이 소설은 70년 문학과 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서울대 법대에 다니면서 아무런 목적없이 법과를 택한 자책감에 학문에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해 결국 출석미달로 4학년에서 1학기를 남기고 대학을 중퇴했다. 그의 웃음은 순백하다.그의 심성은 천진무구한 소년과도 같고 그의 행동은 순리를 좇아 자연스럽기만 하다.그는 집에서는 두남매와 소탈하고 사랑스러운 아내(원영희씨)와의 단란한 가정의 가장이고 그리고 이 시대의 대표적 작가의 한사람이다. 평론가 김현은 그의 향기높은 지적 탐구로서의 문학에 대해 롤랑 바르트와 줄리앙 방데의 말을 빌려 이렇게 평한 적이 있다.「그는 독자의 평균에 부합하려고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언어에 성실하게 맞부딪치려고 글을 쓰고 있다.그의 정신의 질서는 혼란된 세계를 조리있게 파악하려는 의지이며 논리에 따라 부당하게 기울어지지 않는 천칭,그는 바로 지적 성직자」라고. 그리고 평론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의 임무가 무엇이든 성직자에겐 모자를 벗는 것이 예의」라고 정중하게 경의를 표하고 있다. □연보 ▲1936년4월 함북 회령서 목재상인 부친 최국성씨와 김경숙여사의 4남2녀중 장남 ▲47년 함남 원산으로 이사,회령국민교에 이어 원산중­원산고2까지 ▲50년 6·25로 가족 전원 월남,부산 정착 ▲57년 서울대 법대 4년때 출석미달로 중퇴 ▲58년 군입대,통역장교로 근무 ▲59년 「GREY 구락부 전말기」「라울전」이 안수길씨 추천으로 「자유문학」지 통해 문단 데뷔 ▲60년 문제의 작품 「광장」을 「새벽」(10월호)에 발표 ▲61년 단행본 「광장」(정향사)출간 ▲67년 「총독의 소리 1·2」연작 발표에 이어 단편집 「총독의 소리」(홍익출판사)출간 ▲70년 평론집 「문학을 찾아서」(현암사)출간,희곡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극단 자유극장공연),11월17일 신문회관에서 이헌구씨 주례로 원영희씨와 결혼 ▲71년 창작집 「서유기」(을유문화사)출간 ▲72년 창작집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삼성출판사)출간 ▲73년 장편 「태풍」(중앙일보)연재 ▲73년8월∼76년5월 미국체류,미아이오와대 세계작가 프로그램(IWP)초청,「광장」(일어판),수필가 김소운씨 역으로 일본 동수사출간 ▲76년 「옛날옛적에 훠어이 훠이」(극단 산하 초연) ▲77년 「봄이오면 산에들에」(극단 동랑레파토리 공연) ▲78년 「둥둥 낙랑둥」(국립극단 97회 정기공연) ▲79년 미뉴욕주 브록포드대 초청,「옛날옛적에 훠어이 훠이」공연참가,「최인훈전집」(문학과 지성사)완간(전 12권) ▲80년 소설집 「왕자와 탈」(문장사),「하늘의 다리」(고려원)출간 ▲81년 소설집 「느릅나무가 있는 풍경」(민음사)출간 ▲82년 희곡집 「한스와 그레텔」(문학예술사)출간 ▲87년 미 뉴욕 「범아시아 레파토리」극단 10주년기념공연,「옛날옛적에 훠어이 훠이」공연 참관 ▲89년 창작선집 「달과 소년병」(세계사),산문집 「길에 관한명상」(청하),창작선집 「웃음소리」(책세상)출간 ▲92년 국제펜클럽 한국본부가 소설 「광장」을 노벨문학상 후보로 추천 ▲77∼현재 서울예전 교수 그외 대표작 「구운몽」「회색인」「가면고」「크리스마스캐럴」「두만강」「우상의 집」과 수필집 「유토피아의 꿈」외 동인 문학상,한국연극영화예술상(옛날옛적에 훠어이 훠이),중앙문화대상 예술부문 장려상,서울극평가 그룹상(달아 달아 밝은 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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