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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하소설 「토지」 26년만에 탈고,박경리씨의 요즈음(인터뷰)

    ◎“인류차원서 「일본론」 꼭 써 볼래요”/“뜰안의 채소 돌보다가도 문득 글 쓸 생각”/사위 김지하 등 후배문인들 새달 기념잔치 마련 지난 69년 현대문학에 연재하기 시작,26년간에 걸친 대장정끝에 지난달 중순 대하소설 「토지」를 탈고한 박경리씨(68).탈고후 찾아오는 사람도 많고 문단에서는 갖가지 기념행사를 준비하는등 분주한 모습을 보이지만 정작 박씨 자신은 덤덤한 표정이다. 탈고는 했지만 뜰 안에 심어놓은 배추며 나물등을 손 보다가도 문득 문득 「원고」를 써야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곤 한다며 웃는다.집안에 심어놓은 농작물이며 채소등을 챙기다보면 주업이 농사이고 글쓰기는 부업이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고도 한다. 지난 80년이후 줄곧 「토지」를 써온 은둔의 땅 원주시 단구동 자택에서 기자를 맞은 박씨는 다소 지친듯한 얼굴이지만 그러나 아직도 무언가를 해야한다는 강한 작가 의지를 내비쳤다. 『어떤 이는 절보고 은둔작가라고 하지만 작가에게 은둔이란 말이 어울리나요.창작에 관한한 작가는 철저하게 혼자일 수 밖에 없지 않습니까.이 집에 오게 된 것도 글을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정형편상 와야만 했기 때문에 온 것이고요』 14년전 원주 집에 처음 올때만 하더라도 주변에 집도 별로 들어서지 않아 외졌는데 이젠 아파트도 들어섰고 제법 도시 냄새가 나 세월이 제법 흘러갔다고 잠시 회상에 젖어들기도 한다. 원고지 4만장에 등장인물만도 4백여명.웬만한 작가라면 감히 엄두도 못낼 역작임에도 박씨는 「토지」에 대해 결코 구태의연한 토를 달지 않는다. 『단편소설 한 편을 쓰는데도 숱한 고비가 있게 마련인데 어찌 어려움이 없었겠어요.사위(김지하시인)투옥무렵 가장 인간적인 갈등을 느꼈다고 할 수 있는데 작품속에 그런 고민들이 녹아들었다고도 할 수 있지요』 작품을 쓰는 동안 고비와 갈등의 연속이었던만큼 지난 26년간의 질곡이 새삼스럽지도 않을 뿐더러 따라서 허탈감같은 것은 전혀 느끼지도 못한다고 했다. 며칠전 이화여대에서 명예문학박사학위를 받은 직후 한 대학원 졸업생이 『성경보다도 선생님의 토지에 더 의존해 살아간다』는 말을 듣고 왈칵 눈물을쏟았다는 박씨.그는 지난 세월을 그렇게 자신에 충실하며 작품에 몰두해왔다. 56년 현대문학에 단편 「흑흑백백」이 추천 완료돼 문단에 등단한후 「불신시대」「환상의 시기」「시장과 전장」「김약국의 딸들」등 굵직굵직한 작품을 쓰기도 했지만 현대문학에 「토지」를 연재하면서부터는 이 작품에만 몰두해왔다. 『이정도면 됐지,무얼 또 씁니까.이젠 좀 쉬고 싶어요』 「토지」를 끝내놓고 여행도 좀 하고 싶었지만 엄두가 나지 않아 선뜻 나설 수가 없단다.그럼에도 평소 생각해온 「일본론」만은 꼭 써내야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일제 36년간은 우리민족이 일본의 절대적인 영향권아래 갇혀있었던 암흑의 시기지요.20세에 해방을 맞았어요.감수성 예민한 나이에 겪었던 그 답답한 시절은 저로서는 도저히 그냥 넘길 수 없는 체험으로 남아있지요』 『일본의 정치 문화 분석없이 「토지」는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박씨는 그러나 「토지」가 일제의 실상을 드러내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허구이기에 일본이 저지른 역사적 행위를 정면적으로 들춰낸 「일본론」으로 볼 수는 없다고 말한다. 『민족주의자 입장에서 일본을 매도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새삼스럽게 일본을 고발하자는 것도 아니고 단지 「인류」라는 차원에서 일본의 존재를 짚어보고 싶을 따름입니다.언제가 될진 모르지만…』 「토지」가 구한말부터 해방까지 험한 역사를 살아낸 민중들의 이야기라고 할때 그것은 틀림없이 「한」을 다룬 「한」의 역사다. 『우리민족의 한은 미래에의 의지와 희망의 역동성을 담고있다』는 말 그대로 박씨는 「토지」에서 어둠과 퇴락에서 건져낸 민중의 한을 희망과 의지로 승화시키는 미학을 보여주고 있다. 이루 다 헤아리기도 힘들 정도로 숱하게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가 다 주인공이고 삶의 철학을 확고하게 갖춘 역사의 증인들인 셈이다. 수많은 등장 인물들의 개성을 일관성있게 묘사할 수 있었던 비결을 묻는 질문에 그는 거리낌없이 말한다. 『작품을 쓸때 구성을 미리 해놓고 시작해본 적이 없어요.구성을 전제로 써나갈때 박제화된 인간밖에 그릴 수 없고 살아있는 인물을 기대할 수 없게 되지요.토지의 인물들은 물론 체험을 통해 만들어낸 가상인물이지만 제가 겪었던 생생한 기억속의 역사 인물들이라서 굳이 메모나 구상이 없어도 자연스럽게 그려나갈 수 있었지요』 흔히 「토지」가 한이 주조를 이루는 작품이라는 평을 듣는데 대해서는 『반드시 한의 소설만은 아닙니다.처음 작품을 시작했을때와 지금의 시점에서 토지라는 개념을 비교해보면 놀랄 정도로 엄청난 변화를 느끼게 돼요』 자연이 인간을 다스리던 시기엔 인간도 토지에 수동적으로 의지해 살 수밖에 없었던 반면 차츰 사유재산 개념이 생겨나면서부터 인간이 토지를 다스리고 물욕이 성하게 됐다는 설명이다. 박씨는 따라서 토지속에 등장하는 동학과 코뮤니즘의 논쟁을 이렇게 마무리짓는다. 『코뮤니즘이란 통계로 설명하는 사상으로 정신이 빠져있지요.반면 동학은 물질적인 계산에 치우치지 않는 인간의 정신을 중시한 훌륭한 사상입니다.』 요즘 우리 사회에 다발하는 각종 문제가 물질에 편중돼있어 마치 마차가 내리막길을 달리는 위기감으로 비쳐지며 이는 곧 생명의 위기로 받아들여야한다는 박씨.모든 현상이 양면성을 갖고있는만큼 보이는 부분보다는 보이지않는 부분을 보려고 노력해야하며 인류를 위기에서 건져내기 위해서는 모든 생명의 삶을 절실히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오는 10월 9일 박씨 집에선 「토지」완간을 기념하는 잔치가 사위 김지하시인등 문인들의 주최로 마련될 예정이다.평소 성격상 잔치를 바라지도 않을 터이지만 『후배 문인들의 성화에 못이겨 침묵을 지키기로 했다』는 박씨도 그날의 잔치가 싫지만은 않은 표정이다.
  • 「르네상스」(외언내언)

    고전음악감상실 「르네상스」.지금은 사라진지 오래됐지만 40대이상의 장년들에게는 아련한 추억을 일깨워주는 명소였다. 60년대초 서울 종로1가 영안빌딩4층 르네상스에 들어서면 흐릿한 조명속에 클래식음악의 선율이 감미롭게 흐르고 안락한 소파에는 눈을 지그시 감은 감상객들이 삼매경에 도취한 광경을 볼 수 있었다.음악인들은 물론이고 문화예술인들,대학생들이 즐겨찾던 음악의 메카이자 문화예술의 사랑방이었다. 아직 무명이었던 작곡가 윤이상씨가 이곳에서 작품발표회를 가졌고 김만복,임원식씨 등이 악보를 갖고와 지휘연습을 하기도 했다.그런가 하면 대학생들의 데이트장소로도 인기가 높았다.70년대까지 고전음악을 제대로 들을수 있는 유일한 장소가 르네상스였으니까. 르네상스가 문을 연것은 대구피란시절인 51년.음악애호가였던 박용찬씨가 8천여장의 음반을 두대의 트럭에 싣고 피란감으로써 시작되었다.전화에 시달리던 문화인들에게 르네상스는 오아시스같은 존재였다.환도후 54년 인사동에서 문을 열었다가 59년 종로1가로 이사하면서 전성기를 맞게 된다.60∼70년대에 걸쳐 르네상스는 황금기를 맞지만 80년대들어 팝뮤직의 성행과 오디오의 보급에 밀려 사양길을 걷게 된다. 적자의 누적으로 87년 르네상스는 마침내 문을 닫았지만 문을 닫는다는 기사가 보도되자 전국에서 「르네상스를 지켜달라」는 격려전화와 편지가 쇄도,화제가 되기도 했다.젊은날의 꿈과 낭만이 배어있던 추억의 공간을 오래오래 보존하고 싶은 마음때문이었으리라. 어쨌든 르네상스는 36년이란 긴 세월동안 음악감상실로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았다.설립자인 박씨는 문을 닫으면서 그가 평생수집했던 귀중한 음반 1만1천여장을 포함,오디오기재와 희귀자료등을 모두 문예진흥원에 기증했다.소년시절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가 되기를 꿈꾸었던 음악애호가 박용찬씨.그가 우리 음악계에 큰 업적을 남기고 타계했다.
  • 8·15의 망언(외언내언)

    일본의 일부각료와 지식인들은 걸핏하면 태평양전쟁과 관련,망언을 늘어 놓는다.74년 구보다(구보전)망언을 시작으로 그 수를 헤아릴수 없을 정도.그렇게 해서 우리국민의 심기를 뒤틀리게 해놓는다.그들은 이러한 망언을 통해 복고적인 군국주의와 우익적인 국수주의를 지향하는 일본국민의 정서에 영합하고 또 그것을 고취한다. 얼마전의 하타정권때 나가노(중야)법상은 「종군위안부를 공창」이라고 망발하는가 하면 「태평양전쟁은 침략전쟁이 아니라 대동아공영권의 해방을 위한」것이라고 강변했다.아직도 관련 피해자들이 통한의 아픔을 되씹고 있는 터에 이 무슨 적반하장의 궤변인가.이 망언으로 나가노법상이 해임된 것은 지난 5월.그러나 제2의 나가노는 얼마든지 있다.식민지통치가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지역국가에 시혜를 주었다는 망언은 역사를 모독하는 행위이다. 한일정상회담에서나 일국왕의 사과발언에서는 「유감」 「사과」「통석의 염」이란 모호한 수사를 동원하고는 있다.그러나 그것은 극우성향의 각료나 지식인들에 의해 얼마안가 훼손당하고 만다. 이번에는 무라야마(촌산)내각의 사쿠라이(앵정)환경청장관이 또 예의 망언을 터뜨렸다.『전쟁결과 아시아국가들이 독립을 얻었으며 문자해독률도 높아졌고 경제부흥도 이루었다』고. 36년이란 오랜 기간동안의 폭압과 무단정치,비참한 경제적 수탈과 착취,이땅의 젊은이들을 징병과 징용으로 사지에 몰아갔으며 나이어린 소녀들까지 정신대란 이름의 군위안부로 끌어갔던 천인공노할 일제의 만행을 무슨 입으로 변명할 것인가. 또 광복절을 맞는다.49주년.반세기가 흘렀지만 징병·징용·위안부등 당사자에 대한 보상은 여전히 미결의 장으로 남아 있고 강제이주된 사할린동포들의 송환문제도 외면되고 있다.당연히 떠맡아야할 책임은 회피하고 망언이나 쏟아놓는 일본의 지도자들때문에 한국인의 혐일감정은 더욱 심화되는 것같다.
  • 경희궁/광해군때 왕기 누르려 창건/궁궐:끝(서울 6백년만상:47)

    ◎완공 3년뒤 인조반정 일어나 “예언 적중”/영조때 경덕궁 개칭… 일제때 완전 파괴 옛 서울고 자리에 위치한 경희궁은 지금 옛것과 새로운 것이 공존하는 시민공원으로 거듭나기가 한창이다.계속되는 폭염에도 불구하고 궁궐복원사업과 서울시립박물관 건립공사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그러니까 옛 경희궁자리에 있던 서울고가 이사가고 난뒤 지난 88년부터 시작된 1단계공사가 마무리 단계가 접어들어 숭정전·숭정전회랑이 우아한 옛모습을 드러냈으며 오는 96년 완공을 목표로 자정전·태령전·흥정당 복원작업이 시작된다. 일제의 민족혼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철저히 파괴된 조선조 5대궁궐의 하나인 경희궁의 창건은 풍수지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광해군 9년(1617년).장안에 『새문동에 왕기가 서린다』는 소문이 돌았다.당시 새문동에는 광해군의 동생 정원군이 살아 정원군이 곧 새 임금이 될 것이라는 얘기가 삽시간에 퍼졌다.. 광해군은 『새문동의 왕기를 누르기위해 그곳에 궁궐을 지으면 된다』는 술사 김일룡의 그럴듯한 설명에 솔깃해 당시로서는 거의 불필요한 궁궐창건을 서둘렀다.광해군은 창건에 앞서 궁의 이름을 경덕궁으로 한뒤 민가를 헐어내고 경기·충청·전라도등에서 자재를 모아 공사에 들어가 광해군 12년에 7만여평의 부지위에 1만5천칸의 궁궐을 완성했다.무리한 역사로 백성들의 원성을 샀던 광해군은 경희궁(당시는 경덕궁)이 완공된지 3년만에 인조반정으로 물러나고 정원군의 장남(인조)이 왕위를 계승,「새문동 왕기설」은 우연찮게 적중했다. 서울시에 따르면 궁궐의 규모는 현재의 고려병원­기상대­사직동·내수동­구세군회관을 잇는 7만여평의 지역에 정문인 흥화문과 숭정전·자정전·위선당·황학전등 99칸의 전각이 들어섰다.궁궐배치는 옛 서울고 운동장 새문안교회쪽 모퉁이에 정문인 흥화문,흥화문에서 정전인 숭정전까지의 길은 현재의 신문로를 따라 나있었다.현재 고려병원쪽에 복원한 흥화문은 원래 구세군회관쪽에 있었으나 이곳이 도로에 가까운데다 일제가 학교운동장을 만들면서 궁궐터를 파헤쳐 서울시가 원형대로 복원하기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경희궁은 인조를 첫 주인으로 받아들인뒤 철종까지 10명의 왕이 이곳을 집무실로 사용했다.영조 36년(1760년)에 이르러 경덕궁이 정원군의 시호 경덕과 음이 같다고 해 현재의 이름인 경희궁으로 바뀌었다. 융희3년(1909년)일제는 경희궁에 손을 대기 시작,궁의 서쪽 대부분을 헐어 일제 통감부 중학으로 이용했다.이때 서쪽은 높이고 운동장쪽은 파헤쳐져 궁궐의 옛 모습은 찾아볼 수 없게 됐다.1915년 학교이름이 경성중학교로 바뀌면서 숭정당·흥화문등 몇개 남은 전각들도 일반인들에게 매각됐다. 궁터도 일반에게 분할매각돼 4만여평만 남게됐다.숭정전과 하상전은 조계사로,흥정전은 일본인절 광운사로,흥화문은 이등박문의 사당인 박문사로 팔려가는등 철저하게 훼손됐다.이후 숭정전은 동국대로 옮겨져 정각원으로 쓰이고 있으며 흥화문은 경희궁으로 되돌아왔다. 경희궁터는 지난 74년 현대그룹에 팔리는 운명을 겪기도했으나 80년 서울고가 강남으로 이사한뒤 서울시가 빗발치는 여론에 밀려 시유지인 성동구 구의동택지와 교환,88년 시립미술관을 개관하면서 시민공원으로 되돌아 왔다.
  • 한·일·조총련 고교생 3각 토론/새달7·8일 개최…분단·통일 논의

    한국의 고교생들과 재일 조총련계 고교생들이 서로 만나 한반도분단 및 통일문제를 토론할 예정이어서 관심을 끌고 있다. 한국고교생들과 조총련계 고교생들의 이번 만남은 일본학생들의 제안으로 이뤄진 것이라고 일본남부의 한 고교교사인 가미오카 교헤이씨는 밝혔다. 일본고교생들이 이번에 한국 및 조총련계 학생을 함께 초청한 것은 3자간의 과거 및 장래관계를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고 싶어서라는게 관계자들의 설명. 다음달 7∼8일 이틀간 예정으로 시코쿠 고치현의 나카무라시에서 열리는 한국·조총련계·일본고교생의 이번 3각토론회 프로그램 중에는 한국과 조총련계 학생들만의 토론시간도 따로 편성돼 있다. 가미오카교사는 이번 토론회가 민감한 정치적 사안들에 대한 학생들의 솔직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이번 고교생 3각 토론회가 특히 관심을 끄는 것은 이번 모임이 김일성 사후에 이뤄지기 때문이다. 일본고교생과 조총련계 고교생들은 일제의 한반도 침략사 등을 연구하기 위해 10년전에 처음토론회를 가진 후 기회있을 때마다 만나 일제의 조선인 강제징용실상 등 관심사에 관해 격의없이 토론을 하곤 했는데 이번에는 한국고교생들도 참가,한층 유익한 토론의 장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번 토론회에서 주로 다뤄질 주제는 「가깝고도 먼」 관계로 지칭되는 한일 양국의 현안문제와 한반도분단의 원인,36년 일제 식민통치의 유산,일본군의 잔학성,정신대문제 등이다.
  • 삼원평원과 고구려 땅/최두삼 북경특파원(오늘의 눈)

    가도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허허벌판 삼강평원에 한국인의 숨결이 스며들기 시작했다.한중합작으로 3년여의 준비끝에 드디어 흑용강성 삼강평원 두흥지주 1억평에 대한 농업개발 기공식이 현지에서 5일 성대하게 치러진 것이다. 기공식 참석자들에게 배포된 설명서가 요란하다.『역사적으로 우리 민족의 발원지이자 고구려 융성의 현지이며…영웅 안중근의사가 애국의 혼으로 거사를 이룩하신 하얼빈에서 멀지 않은 이곳…』 이 농업개발 사업을 주도해온 한국의 대륙 연구소(회장 장덕진)측은 『삼강평원 농장 개발은 우리 민족의 숙원인 만주 진출의 꿈을 이룩하는 역사적인 과업』이라고 강조한다.그래서 이곳 농장 이름도 장차 「안중근 농장」으로 명명할 것이며 자라나는 한국 청소년들에게 조상들의 넋과 지혜를 배우게 하기 위해 「청소년 수련도장」까지 건립한다는 것이다. 장덕진회장이 필생의 사업으로 추진해온 이 개발 사업은 백번 찬양해도 부족하다.한국인이 중국 땅까지 찾아와 서울 전체 면적보다 더 넓은 땅을 차지해 먼 장래의 식량 문제까지대비한다는 것은 상상만 해도 신나는 일이다. 다만 한번 더 되짚어 생각해 볼 일은 이곳 삼강평원이 남의 나라 땅이라는 사실이다.과거 우리 조상들이 살긴 했으나 현재는 엄연히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토다.남의 나라에 들어왔을 땐 그 나라 사람들의 심정도 어느 정도 헤아려 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간단히 말해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 보자.서울이나 경기도 어느 지역에 중국인이 찾아와 『여기는 원나라 때 우리 선조들이 1백년간이나 지배했던 곳이니 언젠가는 중국 땅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하자.또 부산 일대에 일본인이 찾아와 『여기는 우리 국력이 융성했던 몇 십년 전만해도 일본 땅이었고 우리 부모 형제들이 36년간이나 땀 흘려 가꿔온 땅』이라며 되찾고 싶다는 내색이라도 비쳤다고 하자.모르면 몰라도 그들은 한국인들의 몽둥이 세례 때문에 한국 땅에서 단 하루도 버텨 내지 못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중국땅에 와서까지 『우리 조상의 숨결…』등의 얘기로 중국인들의 심사를 뒤틀리게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그동안 중국에 체재하면서 다음과 같은 불평을 너무 자주 들어왔기에 하는 말이다. 『한국인들은 요즘 고구려 옛 땅을 되찾겠다고 야단들이데요.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얘기지요』
  • 세계적명문 디자인학교(이탈리아 중소기업탐방:8)

    ◎패션쇼용 아닌 실용디자인 교육/현장실습 위주… 예술가 보다 일꾼을 양성/전문학교 모두 20여개… 패션·가구 디자이너 연2만명 배출 『스타일을 정하는 게 디자인의 전부는 아닙니다.제품을 통해 기업과 소비자의 간격을 좁히는 것이 디자인의 궁극적 목표입니다』 세계적 패션 디자인 학교인 밀라노 「말랑고니」의 교장 루이사 빌라니씨는 디자이너와 소비자의 생각이 달라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소비자가 바라는 것을 기업에 전달,상품화하는 게 디자이너의 「임무」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사회현상,문화 및 예술의 흐름,역사 등에 늘 관심을 가져야한다고 말했다.일반인이 이해하지 못하는 전위적인 디자인은 진정한 의미의 「디자인」이 아니라는 얘기이다. 말랑고니는 3년과정의 디자인 전문학교이다.지난 36년 양복점을 운영하던 말랑고니씨가 우수한 재단사를 기르기 위해 설립한 뒤 50년부터 디자인 과정을 포함시켰다.이 학교는 처음부터 시장을 겨냥,실습 위주로 가르친다.실습 대 이론의 비율은 7대3 정도이다. 그나마 디자인 관련 기법을빼고는 예술사,복장사,문화사,서양사 등 역사 과정이 이론의 대부분을 차지한다.디자인을 하려면 반드시 배워야 할 기본 과목이라는 것이다.총 학생수는 1천여명이고 교사는 80여명이다.교사의 절반은 기업체나 유명 디자인 회사에서 직접 일하는 전문가들이다. ○학생작품이 상품 패션 업체에서 디자이너로 일하며 일주일에 세번씩 학생들을 가르치는 알베르토씨는 『현실 감각이 중요하다.학교라는 테두리에 갇혀서는 배우는 효과가 없다.일선에서 일하는 전문가들과 기업,소비자와 끊임없는 교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수업하는 모습을 보면 이같은 목표가 더욱 확실하다. 교사는 주제를 준다.학생들은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자기의 생각을 도면 위에 옮긴다.디자인이 끝나면 교사와 개별적인 대화를 갖는다.점수를 매기거나 평가하는 대신 유행의 흐름에 맞는지,실용성이 있는지 등을 서로 얘기한다.단순히 기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상품성을 가르친다. 3년째 접어들면 「마르조토」「미소니」「닐센」 등 세계적 디자인 회사에서 현장 경험을 쌓는다.루이사 교장은 『기업은 이론가를 원하지 않는다.직업 학교는 「일꾼」을 배출하는 곳이다.업계의 흐름을 피부로 느끼지 못하면 교육은 가치가 없다』고 말했다. 개인 양장점을 운영하다 이 학교에 입학한 35세의 루제로 데보리니씨는 『학교같은 느낌이 들지 않는다.이 곳 학생들의 작품은 그대로 상품으로 만들어도 손색이 없다』고 밝혔다.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1년 과정에 다니는 한국인 이영숙양은 『교사 1명이 7∼8명의 학생을 담당한다.색채학,마케팅,사회여성학 등 디자인과 관련된 과목을 반드시 이수해야야 한다.한국에서 배우던 것과는 전혀 딴 판』이라고 설명했다. 이탈리아에 이같은 사립 디자인 전문 학교는 20여개가 있다.정부가 운영하는 디자인 학교는 5개로 그래픽,패션,세라믹,가구 등 업종별로 특화돼 있다.고등학교를 마쳐야만 입학할 수 있으며 1,2,4년제 3가지 과정이 있다.일반 직업학교의 디자인 과정을 포함하면 매년 2만명의 디자이너가 배출된다.우리나라의 경우 한해 배출하는 섬유관련 전공자는 모두 6천명 안팎이며 이 중 디자인 과정만 전문적으로 배운 사람은 10분의1도 안되는 실정이다.당연히 디자인부문이 뒤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탈리아에는 디자인 전문 고등학교도 있다.주립이나 시립이 보통이며 패션,가구 업종을 중심으로 재단,자봉,염색,조각 등 전공이 구체적으로 나누어져 있다.일찌감치 진로를 결정해 주기 위한 것이다. ○전문고등학교도 밀라노에서 북쪽으로 40㎞ 떨어진 리소네의 「입시아」는 가구 디자인 고등학교이다.3년,5년 등 2개과정이 있으며 4년째부터 디자인을 집중적으로 배운다.그러나 절대 스타일에 치중하지는 않는다. 메로니 교장의 얘기다.『가구를 디자인하기 위해서는 나무의 특성부터 알아야 한다.나무마다의 탄성,강도,균열 등을 알아야 하중에도 견디고 휘어지지 않는 가구를 디자인할 수 있다.내구성을 높이기 위해 염색 과정도 알아야 하고 나무의 색깔도 연구해야 한다』말랑고니처럼 업체에서 직접 일하기도 하고 교사들도 가구 회사의 디자이너,장인들로 구성돼 있다.1천명의 학생에 교사가 1백10명으로 학생 9명에 교사 1명꼴이다. 올해 19살인베로니카 아로시오양은 『무대 장치 디자이너가 되는 게 꿈이다.가구업과는 다르지만 나무를 다루는 건 마찬가지이다』고 말했다.단순히 가구의 형태를 그리는 수업만 받았다면 전혀 생각지 못할 꿈이다. 지난 85년 피렌체시와 이탈리아 산업연합회가 공동으로 세운 패션 디자인 전문학교인 「폴리모다」도 다양성과 실습 이론을 철저히 지킨다.밀라노에 빼앗긴 「패션의 본고장」이란 명성을 되찾기 위해 설립됐다.특히 미국의 패션 디자인 학교 「FIT」와 교환 수업을 할 만큼 엄청난 노력을 기울인다. 세계적 디자이너 베르사체 밑에서 일하고 있는 한국인 디자이너 한기욱씨(35)는 『이탈리아의 디자이너들은 개성이 강하다.자기만의 색깔을 고집한다.그러나 늘 소비자의 욕구가 밑바탕에 깔려있다.한국에서처럼 디자이너와 소비자,기업이 별개로 움직이는 법은 없다.소비자가 구경만 하는 모델은 절대 디자인하지 않는다』고 전했다.
  • “흑백화합 새출발” 15만명 참석 축복/남아공 만델라대통령 취임

    【프리토리아 외신 종합】 흑인인권운동의 기수 넬슨 만델라 남아프리카민족회의(ANC)의장이 10일 하오(이하 현지시간) 남아공 최초의 민선대통령으로 공식취임했다. 만델라대통령은 취임식을 가진 뒤 곧바로 집무에 들어가 3백42년간에 걸친 소수백인통치와 46년간 유지돼온 인종차별정책을 청산하고 본격적인 다인종민주주의의 실험에 들어갔다. 만델라대통령은 이날 낮12시17분쯤 행정수도인 프리토리아의 정부청사 유니온빌딩에서 각국 정상들을 비롯한 수천명의 귀빈과 수만명의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마이클 코베트대법원장앞에서 역사적인 취임선서를 했다. 만델라대통령은 이에 앞서 9일 개원한 남아공 최초의 전인종의회에서 만장일치로 대통령에 선출된 바 있다. 만델라는 이날 취임선서를 통해 『본인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직무에 충실하며,공화국에 해가 되는 모든 것에 반대하며,모든 이를 공평하게 대우하며,국가와 모든 국민들의 번영을 위해 헌신할 것을 엄숙히 맹세한다』고 밝혔다. 이날 취임식에는 피델 카스트로 쿠바대통령,앨 고어 미국부통령,야세르 아라파크 팔레스타인해방기구의장,에제르 바이즈만 이스라엘대통령등 각국 정상들과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정책)의 종식을 축하하는 수만명의 남아공시민들이 참석했다. ◎“가난과 핍박 해방” 취임사서 약속/선서식 성경,영·아어로 특별주문/고어·아라파트·카스트로등 명사 축하사절로/만델라 대통령 취임식 표정 넬슨 만델라 아프리카민족회의(ANC)의장이 10일 남아공 최초의 흑인대통령으로 취임함으로써 갈등과 대립을 넘어 화합과 단결을 뿌리내리려는 민주 남아공의 대장정이 시작됐다.이날 만델라의 취임식에는 세계각국의 지도자들이 대거 몰려들어 새로 출범하는 남아공의 앞날에 진심어린 축복을 기꺼이 보냈다.그러나 행사장 주변에는 종족소요등을 우려해 경찰병력이 삼엄한 경비에 들어가는 등 곳곳에 무장병력이 눈에 띄곤 했다. ○…정부청사인 유니온빌딩 대강당에서 진행된 남아공 대통령취임행사에는 앨 고어 미부통령과 힐러리 클린턴 미대통령부인을 비롯,카스트로 쿠바국가평의회의장,이스라엘의 에제르 바이즈만 대통령,아라파트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장등 외국사절들이 대거 참석.행사준비위측은 이날 『국내외 귀빈등 모두 15만명이 취임식에 참석했다』고 밝혔다. ○“민주주의 교훈” ○…앨 고어 미부통령은 『만델라의 취임은 미국과 새롭고 긴밀한 관계를 열고 이웃 아프리카 지역국들과 세계 여러 나라들에 민주주의의 교훈을 전파하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라고 강조. ○“평화­화합 기원”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의장은 초록색 군복 차림에 대규모 사절단을 거느리고 입국해 이채.카스트로는 『역사적인 일이다.참석케 돼 매우 기쁘며 만델라 대통령의 전도에 평화와 화합,단결이 있기를 바란다』고 기원. ○…이번 만델라의 취임 선서식에서는 과거와는 달리 특별히 새롭게 마련된 성경이 사용됐다.1천1백92쪽에 달하는 이 성경은 남아공 성경협회가 마련한 것으로 영어와 아프리칸어로 적혀 있으며 갈색 송아지 가죽으로 된 끈을 달고 테두리에 금박을 입혔다고. ○「유니온」서 거행 ○…대통령 취임식이 열린 유니온빌딩은 식민지로부터 하나의 독립국가로의 탄생을 나타내는「상징」이 됐다고.황토색 사석을 재료로 81년전 지어진 이 건물은 구대영제국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물중의 하나로 남아공의 첫 탄생을 기념한 이래 지난 반세기동안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정책)를 실시한 백인정부가 들어서 있었기 때문. ○중국·애 수교제의 ○…중국과 이집트는 이번 취임식 참석을 이용해 쌍방간의 외교관계수립에 비중을 두는 느낌.강택민중국 국가주석은 이날 양국간의 관계수립을 제안,외교관계 수립에 기민성을 발휘.현재 대만과 수교하고 있는 남아공은 중국과의 수교를 위해선 먼저 대만과 단교를 해야할 처지에 있다. 이집트도 만델라대통령 취임식 당일인 10일 남아공과 대사급 외교관계를 재개할 계획.이집트는 지난 89년 남아공에 민주화가 싹트기 시작하면서부터 관계정상화를 모색해왔는데 남아공에서 아파르트헤이트가 완전 철폐되기를 기다려 외교관계를 재개한다는 방침을 취해왔다. ○축하메시지 쇄도 ○…세계 각국에서 만델라대통령의 취임에 대한 축하메시지가 쇄도하는 가운데 탄자니아는 국민들이 취임식에 참석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 10일을 임시 공휴일로 지정. ○“긴밀한 협력 다짐” ○…만델라대통령과 데 클레르크부통령은 각국 지도자들이 모인 가운데 서로 상대방의 지도력을 칭찬.클레르크는 『우리는 단결된 정부에서 긴밀히 협력해 나갈 것』이라면서 만델라 당선자에 대한 경의를 표시.클레르크는 이어 지금까지의 정치행로에 후회는 없다면서 『새 남아공은 각각의 면에서 빛나는 다이아몬드와 같이 하나의 별이 될 것이다』고 역설. ◎클레르크 부통령/만델라 해금… 흑인단체 인정/백인설득… 전인종 총선 결행 넬슨 만델라가 흑인해방운동의 투사였다면 프레데릭 데 클레르크 전남아공 대통령(58)은 흑인들에게 제도적으로 해방의 길을 열어준 「아프리카의 링컨」이라고 할 수 있다. 데 클레르크는 1936년 요하네스버그의 캘빈파 기독교집안에서 태어났다.그의 집안은 정치명문가로서 증조부와 아버지가 상원의원을 지냈고 삼촌이 총리를 역임했다.36세때인 72년 요하네스버그 남부 베리니깅주에서 국민당후보로 출마,의회선거에서 당선한 이래 체신·노동·교육부장관등을 지냈으며 85년 백인의회의 각료평의회의장을 거쳐 89년2월 국민당 당수에 오른뒤 같은해 9월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그는 취임즉시 각종 악법을 철폐해나갔다.또한 무장투쟁을 외치는 흑인들을 협상테이블로 끌어내기 위해 90년2월 만델라를 전격 석방하고 모든 흑인정치단체들을 합법화했다. ◎만델라전부인 위니/다혈질 강경파… 국모칭송/테러 연루 “흠”… 92년 이혼 10일 남아공 최초의 민선대통령으로 취임한 넬슨 만델라 아프리카민족회의(ANC)의장의 전부인 위니 만델라(59)는 남편못지않은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아왔다. 1935년 트란스케이에서 태어난 위니는 요하네스버그에서 사회사업공부를 하던중 16살 연상의 만델라를 만나 58년 결혼했다.결혼 4년뒤 흑인인권을 위해 투쟁하던 남편이 체포돼 종신형을 선고받자 위니는 ANC내 강경파를 이끌며 비타협적 노선을 견지,「남아공의 국모」로 까지 추앙받았다. 그러나 지난 91년 흑인어린이 4명의 납치 살해를 방조한 협의로 유죄판결을받았으며 92년 만델라와 이혼했다. 지난해 12월 ANC여성연맹위원장에 압도적 지지로 당선,재기에 성공한 위니는 이번 선거에서 전국을 돌며 남편의 지지를 호소했다.그 결과 ANC전국구 31번으로 의원자리는 확보됐다.
  • 팔 자치협정 역사적 서명/27년 군정종식… 팔인에 자유 돌려줬다

    ◎이군 21일내 철수… 수감자 수백명 석방 【카이로 외신 종합】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장과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는 4일 카이로에서 이스라엘 점령 요르단강 서안의 예리코지역과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 자치를 출범시키는 역사적인 협정에 서명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다시 자유를 돌려주는 첫번째 조치가 된 이 협정으로 이스라엘 점령 가자지구와 예리코 지역에서 지난 67년 중동전 이후 27년간 계속된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군정은 부분적으로나마 막을 내리고 제한된 범위에서 팔레스타인 자치시대가 열리게 됐다. 지난 6개월여의 끈질긴 협상 끝에 이날 협정이 조인됨에 따라 이스라엘군은 자치지역에서 철군에 들어가며 PLO가 임명한 약 9천명의 팔레스타인 경찰이 치안을 맡는다. 이스라엘군은 가자지구등의 팔레스타인 자치이행 협정에 따라 가자지구내 군사기지로 부터 장비를 철수하는등 군병력 재배치작업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고 현지 목격자들이 전했다. 이스라엘은 PLO와 자치이행협정 체결 21일내에 가자지구 등 팔레스타인자치지역내 군사기지로 부터 철수,이들 기지를 팔레스타인 경찰에 인도하도록 돼 있다. 【예루살렘 로이터 연합】 이스라엘은 4일 카이로에서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와의 점령지 자치이행협정이 체결된데 이어 수백명의 팔레스타인인 수감자들을 석방하기 시작했다. 이스라엘 군 소식통들은 팔레스타인 수감자들을 실은 7대의 버스가 네게브 사막지대에 위치한 케치오트 교도소를 출발,가자지구내 각자의 가정으로 귀환길에 올랐다고 전했다. ◎해설/중동평화 “첫발 내딛었다”/36년 끈 분쟁 일단락… 인접국에 영향/회교 과격파·유태정착민 반발 암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가 4일 마침내 팔레스타인 자치이행협정에 조인함에 따라 세계의 화약고 중동이 평화를 맞이하기 위한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갔다. 이는 지난해 9월 전세계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와 야세르 아라파트 PLO의장이 백악관에서 평화협정에 서명하고 악수를 나눈지 8개월만에 이루어진 것이다. 평화협정이후 양세력간에 진행된자치이행협상은 이스라엘 점령지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에서의 실질적인 자치시기에 대한 이견,지난해 12월 13일로 예정된 이스라엘군 철수시한 준수 실패 등의 난관에 부닥쳤으며 급기야는 2월 25일 헤브론 회교사원 학살사건으로 팔인 수십명이 사망하는 사태가 발생하자 협상이 한달간 중단되기도 했다. 이번 협정은 지난달말 파리에서 이­PLO가 경제협정에 조인한 이후부터 협상이 진전돼 자치협정조인과 동시에 이스라엘군이 철수한다는 원칙에 동의함으로써 이루어졌다. 이로써 지난 47년 유엔이 예루살렘을 국제도시로 한뒤 유태국과 아랍국을 동시에 세우는 분할계획을 지지한데 대해 아랍국과 팔레스타인이 반대하면서 일어난 48년 중동전쟁이후 46년간 끌어온 이­팔간 분쟁이 종결을 보일 전망이다. 그러나 지상과제인 자치를 앞두고 팔레스타인에는 자치협정의 이행과 하나의 독립국가로서 모습을 갖추기 위해서는 해결해야 할 과제가 더 많이 남아 있다. 자치협정 가운데 우선 이스라엘군이 5일부터 철수를 시작해 2∼3주안에 종결하기로 돼있지만 돌발적인 사건으로 철수가 지연될 경우 자치분위기가 크게 악화될 수 있다. 또 자치협정 이후 회교근본주의자등 평화 반대파와 유태 정착민등의 저항 등이 예상되는 난관이고 팔레스타인이 독립국가다운 사회·경제적 정책수립능력을 발휘할 수 있느냐도 의문이다. 이를테면 오는 7월 자치지역을 감독할 통치위원회 구성을 위해 선거를 실시할 예정이나 회교급진주의자등은 통치위 선거에 불참을 주장하고 있다.또 자치가 실시된 이후 2년이내에 팔인들의 국가설립요구,예루살렘의 지위,유대 정착민의 미래등에 대한 협상을 시작해야 한다고 협정에 명시돼 있으나 이 협상이 어떤 이유로든 늦춰질 경우 반대파들의 입지가 더욱 커져 팔인간의 분쟁으로 확산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또한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지구가 지금까지 경제력과 노동시장을 이스라엘 경제에 완전히 의존해온데다 실업률이 40%에 이르고 있어 허약한 경제구조를 탄탄히 하지 않으면 팔레스타인의 자치 지속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 우체국 3천여곳…우편물 연30억통/한국우정1백10년…이렇게 변했다

    ◎우편번호 세분화… 분류작업 자동화/팩시밀리 이용 「전자우편함」도 운영/1884년 우편총국설치… 우표 5종발행으로 출발 도포에 긴 담뱃대를 물고 삼각모자를 쓴 사람.바로 우리나라에서 근대우편이 시작된 1884년 초창기 우편배달부의 모습이다.전자우편시대를 살고 있는 지금으로선 상상하기 힘든 차림새이다.이렇게 시작된 우리의 우정사는 올해로 꼭 1백10년째를 맞는다. 1884년4월22일(체신의 날로 지정됨) 고종의 칙명에 따라 설치한 우정총국은 그해 11월18일 처음으로 5종의 우표를 발행하면서 우편업무를 시작했다.그러나 우정국개설을 계기로 일어난 갑신정변이 실패,18일만에 업무를 중단하고 10년후인 1895년부터 본격 재개됐다.그후 1900년에 국제기구 가운데 처음으로 만국우편연합(UPU)에 가입했으나 일제통치로 36년간 암흑기를 거쳤다. 45년 해방당시에는 6백46개 우체국에 지나지 않았다.국가 공공기관이 전열을 가다듬으면서 「1면1국」정책을 강력히 추진하고 61년부터는 사설 우체국인 별정국 설치를 허용함으로써 66년에 1천7백28국으로늘어났다.83년에는 편리한 우편이용을 위해 우편취급소제도를 시행,현재 전국 우체국수는 3천3백10곳에 이르고 있다. 우체국 1곳당 관할 면적은 61년 1백23㎦에서 30㎦로 개선됐고 관할인구도 3만2천명에서 1만3천명으로 줄어들었다. 우편물소통은 해방당시 연간 6천7백만통이던 것이 61년에는 1억5천만통,81년에는 10억7천만통으로 급증했고 현재는 30억통에 달한다.국제우편물은 46년 68만통(발송 18만,도착 50만통)에서 지금은 발송 2천9백만통,도착 6천만통으로 증가했다. 우편물 송달체계도 엄청나게 변했다.70년7월1일부터 시행된 5자리 우편번호제는 우편물 배달기간을 2∼3일 단축했다.운송편의 위주였던 이 우편번호제는 88년 이용자 편의 중심으로 개편,6자리 번호체계로 바뀌었다. 우편배달은 79년부터 오토바이 3백대가 도입돼 한결 빨라졌고 현재는 오토바이 8천대,우편물 운송차 8백14대가 기동력을 발휘하고 있다.특히 승합차를 대형소포 전용배달에 투입,급한 우편물은 하루만에 처리되는 운송체계를 갖췄다. 우편물 분류작업도 기계화돼 우편종사자들의 바쁜 일손을 덜어주고 있다.90년7월1일 서울용산에 건설한 서울우편집중국에서는 하루에 2백50만통을 컴퓨터로 자동분류하고 있다.체신부는 분류의 효율성을 더 높이기 위해 95년 서울 자양동에 하루 3백50만통을 처리하는 서울제2우편집중국을 짓고 2003년까지는 이같은 수준의 우편집중국 30곳을 전국에 건설,기계화를 확대할 계획이다. 시설 못지않게 우편서비스도 무척 좋아졌다.우체국에서는 현재 지역특산물 생산자와 소비자를 직접 연결해주는 우편주문판매제도,긴급한 서류를 신속배달하는 국내특급우편,민원서류 발급을 대행하는 민원우편제도,지역간 또는 나라간 팩시밀리로 우편을 발송하는 전자우편제도 등을 시행하고 있다. 우정분야의 국제적 위상도 몰라보게 달라졌다.89년 제20차 UPU총회(미국 워싱턴)에서 집행이사국으로 선출됐고 오는 8월에는 21차 총회를 서울로 유치,94필라코리아(세계우표전시회)를 겸한 국제행사를 치르게됨으로써 우리의 선진우정을 과시하고 있다.
  • 인도차이나의 젖줄 메콩강/변화의 물결 “넘실”(현장/세계경제)

    ◎새달 태∼라오스 첫 교량 개통 “신호탄”/인접 6개국 교류­경협의 새장 열어/10년간 50억불 들여 국제도로망 확충에 큰 기대 「피의 강」,「전쟁의 강」으로 연상되던 메콩강이 21세기 「약속의 강」으로 그 모습을 바꾸고 있다.메콩강은 티베트에서 발원,중국·미얀마·라오스·태국·캄보디아·베트남등 6개국에 걸쳐 흐르는 길이 4천여㎞의 인도차이나의 젖줄이다. 오는 4월 이 강을 가로지르는 최초의 국제교량이 개통됨으로써 그동안 이 지역 국가간 발전의 장애물로 여겨져왔던 메콩강이 교류와 협력의 연결통로로 그 역할을 바꾸게 됐다. 메콩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태국 북동부의 농카이와 라오스 수도 브엥트얀을 잇는 전장 1천74m의 「미타파프(우호)」교는 양국간 교역로 마련이라는 단순한 차원을 넘어 메콩강 유역국가들의 새로운 경제협력의 장을 연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더 크다. 그동안 메콩강을 사이에 둔 각국간에는 철도연결은 물론 강을 가로지르는 국제교량 하나도 없이 산간도로와 소형 페리가 유일한 교통수단 이었다.따라서우기에는 연결통로가 끊기는등 불규칙적인 양상을 보여 교역이 어려웠다. 이같은 상황에서 최근 이 지역에서 일고 있는 교역증진 필요성은 지난 57년 태국·라오스·베트남·캄보디아 4개국으로 설립된후 전쟁과 내전등으로 말미암아 이렇다 할 활동이 없던 「메콩위원회」의 재가동을 부추기고 있다.이 위원회는 지난해 2월 설립 36년만에 개발협력 재개협정을 체결하고 공동자원조사,수력발전소건설,관개프로젝트등을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남부메콩국가들의 협력관계는 자국화폐인 바트경제권의 확대를 꾀하는 태국과 인도차이나의 맹주를 꿈꾸는 베트남 사이의 주도권 싸움으로 이렇다 할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 한편 이와는 반대로 메콩강 북부의 중국·미얀마·태국·라오스등 4개국은 이른바 「성장의 사각형지대」로 활발한 협력관계를 보이고 있다.가장 적극적인 국가는 중국의 운남성정부.최근 급성장한 광동성 해안도시들의 텃세도 텃세려니와 유일한 수송로인 철도마저 용량이 작고 멀기때문에 운남성의 풍부한 광물들을 비롯,산업생산품들이제때 수출되지 못해왔다.따라서 메콩강을 통한 대량수송망의 확보는 운남성뿐 아니라 귀주성·사천성등 인근 내륙성들의 한결같은 바람이 돼 왔다. 이 지역의 관광산업 잠재력에 눈독을 들이고 있는 태국의 관심도 지대하다.운남성 남부 경홍에 있는 시프송파나는 태국문화의 원류로 수많은 태국인들이 방문하고 싶어하는 곳.태국의 노던스타등 몇몇 관광회사는 이미 성도인 곤명과 경홍등지에 상당량의 호텔을 잡아놓고 메콩보트관광을 추진하고 있다.주요 코스는 태국의 치앙콩에서 북쪽으로 경홍에 이르는 북부루트와 역시 치앙콩에서 라오스의 루앙프라방까지 연결되는 남부루트 두가지. 물론 이같은 보트관광은 인근 미얀마와 라오스의 허가를 얻어야 하지만 현재와 같은 국제적 분위기에서는 낙관론이 앞서고 있다.이들은 또 관광객 수송을 위한 태국의 치앙라이와 경홍,또 치앙마이와 곤명을 연결하는 항공로 신설도 계획하고 있다. 이들 개발계획 가운데 가장 활기를 띠고 있는것은 북부 메콩순환도로.치앙라이­루앙남타(라오스)­경홍­켕퉁(미얀마)을 잇는 이 순환도로는 기존의 도로시설을 확장,보수하고 부분적으로 미개통 부분만 신설하면 개통이 가능하기 때문에 당장 실현될수 있다. 이밖에 ▲방콕­프놈펜­호치민시를 연결하는 남부고속도로 ▲베트남 다낭­라오스 중부­태국 북부에 이르는 인도차이나 동서하이웨이등도 중점적으로 검토되고 있다.아시아개발은행(ADB)은 이들 시급한 도로망의 개설을 위해 향후 10년간 50억달러 이상의 자본이 투입돼야 할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현재 공식적인 이 지역 국경무역규모는 10억달러.음성적인 밀수거래까지 합치면 엄청나게 불어난다.대부분의 국가들은 메콩강을 둘러싼 교통망 확충으로 중국의 값싼제품과 노동력의 유입에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지역경제활성화를 위한 교통망 확충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이 지역은 중국 내륙지방의 대외통로로서 또 풍부한 천연자원을 이용한 동남아 신흥공업지역으로 21세기 국제경제무대에 새롭게 등장하리라는 예측을 낳게 하고 있다.
  • 수도권인구 2천만명 돌파

    ◎작년말 현재 2천8만명/전인구의 44.6% 차지/서울은 1천92만… 1년새 4만 감소 서울의 93년 12월31일 현재 주민등록상 인구(외국인 포함)는 1천92만5천4백64명으로 집계됐다고 17일 서울시가 공식 발표했다.이는 92년의 1천96만9천8백62명 보다 4만4천3백98명이 감소한 것으로 서울인구가 줄어든 것은 지난 56년 이후 36년만에 처음이다. 인구 증감내역을 보면 자연증가율이 0.95%로 10만4천2백14명이 새로 출생한 반면 사회증가율은 마이너스 1.35%(14만8천6백12명)로 나타나 분당·일산·평촌등 신도시로의 이주가 감소현상의 주원인으로 분석됐다. 가구수는 핵가족화 추세로 92년보다 1·4%(4만7천3백59가구)가 늘어난 3백38만3천1백69가구로 집계됐다.성별인구는 남자가 전년도 대비 2만2천1백56명이 줄어든 5백47만7천8백45명,여자가 2만3천5백75명이 감소한 5백41만1천6백54명으로 각각 나타났다. 한편 서울·인천·경기등 수도권 인구수는 2천8만5천4백68명으로 92년말의 1천9백66만1백7명보다 42만5천3백61명이 증가했다.이같은 수도권인구는 전국 총인구4천5백7만7천4백87명의 절반에 가까운 44.6%나 되는 것이다.
  • 농협선거때마다 뇌물 “먹이사슬”

    ◎비리실태/임명직 지회장 돈받아 대의원 매수/인사청탁 싸고 고질적인 “뒷거래”/납품관련 업자·중개상과 결탁 검찰이 4일 농협중앙회의 인사청탁·납품비리등에 대한 전면수사에 나섬으로써 그동안 소문으로만 나돌던 고질적·관행적 비리의 베일이 벗겨지게 됐다. 검찰은 지난해 농협이 해외 농산물을 싼값에 들여와 비싼 마진을 붙여 국내에 유통시켜 왔다는 첩보에 따라 이에 대한 수사를 진행하던중 ▲비자금조성 ▲인사비리 ▲납품비리등 농협중앙회의 얽히고 설킨 구조적인 비리혐의를 포착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이에따라 은밀한 내사를 진행한 끝에 한호선중앙회장등 농협수뇌부의 변칙비자금조성사실을 밝혀내고 수사에 착수한 것으로 전해졌다.오는 24일 열리는 중앙회장선거에 한회장이 단독출마,당선이 확실시되자 반대세력등이 투서등을 통해 평소 독선적이고 권위적인 행동에 대한 각종 비리를 제보한 것도 도움이 됐다는 후문이다. 그러나 검찰관계자는 『이번 수사는 고소·고발이나 진정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동안 내사해온 첩보에 의한 인지사건』임을 주장하고 있다.수사책임자인 김태정중수부장도 『농민의 돈으로 운영되는 농협이 농촌발전을 위한 업무외에 인사와 유통,납품등의 과정에서 고질적이고 광범위하게 비리를 저질러 왔다』면서 농협비리가 전반적이고 고질적인 비리임을 거듭 강조하고 있는 점도 주목할만하다. 검찰의 이번 수사는 한회장이 소지한 2개의 예금통장에 대한 압수수색과정에서 비자금조성 사실이 드러나 급진전됐다. 이에따라 한회장이외에 농협중앙회재정담당간부 2∼3명과 중앙회부장급인 도지회장 15명가운데 3∼4명등 최소한 6명은 사법처리될 것으로 보인다. 현재까지 밝혀진 검찰의 수사대상은 ▲도지회장등 임명직 간부들에 대한 뇌물수수등 인사비리 ▲농산물유통과정에서의 중앙회 담당자와 중간 도매상과의 결탁 또는 부당거래행위 ▲농협납품과정에서의 담당자와 업자간의 결탁비리등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검찰의 주수사대상이 될 것으로 보이는 인사비리의 경우 비자금조성과 뗄래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88년부터 2년동안 마지막 선출직 회장직을 지낸데 이어 90년 초대 선출직 회장으로 임기 4년을 채우는등 장기집권해온 한회장으로서는 3번째 회장유임을 앞두고 시·군단위조합장이 맡는 대의원표를 매수하기 위해 쓰일 비자금조성이 불가피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임명직인 지회장등으로부터 뇌물을 받아 이를 현재 진행중인 단위조합장선거에 뿌릴 수 밖에 없는 먹이사슬이 형성됐다는 것이 검찰의 견해이다. ◎한호선회장은 누구인가/농협내 무소불위 권력행사/과시욕 지나쳐 “농민대통령” 행세/말단 서기서 27년만에 직선회장 농협의 납품및 인사등 구조적인 비리와 관련,4일 검찰에 소환 요구를 받은 한호선농협중앙회장(58)은 스스로를 「농민 대통령」으로 부를만큼 농협내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러 왔다. 농협의 말단서기로 출발해 27년만인 89년 관선 농협회장직에 오른 한회장은 90년 단위농협 조합장들이 회장을 직접 선출하는 직선제로 바뀌면서 초대 민선회장직에 뽑혔다. 현재 한회장은 초대 직선제 회장으로 관선을 포함,내리 두번째 회장직을 5년간 맡아오고 있다. 한회장은 추진력이 강해 한번 일을 추진하면 끝까지 밀어붙이는 성격으로 관선에서 직선으로 회장선출 방식이 바뀐 이후 회장선거에서 대의원을 매수해 표를 끌어모았다는 세간의 의혹을 받아왔다.이 과정에서 관선 회장과 직선회장 재임때 비자금을 조성,선거때 뿌렸다는 의혹이 제기됐으나 당시 소문만 무성히 나돌았을뿐 확인되지는 않았다. 검찰이 한회장을 소환한 것은 이같은 풍문에 대해 끈질긴 내사를 벌여 업무상횡령및 뇌물수수혐의를 잡은데 따른 것이다. 36년 강원도 원주출신으로 원주농고를 거쳐 고려대 행정학과를 졸업한 한회장은 대학재학시절 학생회장도 역임했고 변호사를 지망했으나 졸업후 농협직원공채(1기)에 응시,62년 3월 농협에 첫발을 들여놓았다. 서울의 중앙회로 배치되려고 경합을 벌였던 다른 대졸 농협합격자들과는 달리 한회장은 지방을 자원,양구군 조합의 말단서기로 출발했다.당시 양구지역에서 『한호선이가 국회의원에 나오려고 한다』는 소리를 들었던 한회장은 「의욕적인」 사업이 번번이 실패했는데도 농협사상 최연소 과장(지도과장)에 발탁되는등 초고속 승진을 거듭해 3공화국시절에는 새마을담당관으로 청와대에 파견되는 행운을 누리기도 했다. 한회장은 「직선」의 프리미엄을 업고 전국의 농협조직을 강력히 장악,카리스마적인 권력을 행사해왔다. 더욱이 한회장은 향후 5∼6년간 그를 누를만한 라이벌이 없을 정도로 자신의 「아성」을 위협하는 2인자를 철저히 배격,정교한 권력관리를 해왔다는 비판을 받아왔다.새정부 출범을 전후해 전국 농촌을 돌아다니며 「농민대통령」을 내세우던 한회장은 1기 내각의 농림수산부장관 물망에도 올랐으나 「과시욕」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 1백년 올림픽사상 최연소 「금」/13세소녀로 기네스북에 올라

    ◎철옷입고 4만㎞ 강훈끝 “영광” 【릴레함메르=정태화·서병기특파원】릴 레함메르 하늘에 자랑스런 태극기를 휘날리고 애국가를 울려 퍼지게 한 한국쇼트트랙 낭자군의 막내 김윤미(정신여중 1년)가 올림픽 1백년사상 최연소 여자 금메달리스트로 기네스북에 오른다. 23일 새벽 릴레함메르의 하마르원형경기장에서 열린 쇼트트랙 여자 3천m계주에서 한국여자팀이 금메달을 따내는데 견인차 역할을 한 김윤미는 1980년 12월1일생으로 정확하게 13살 84일의 나이다. 김윤미는 지금까지 최연소 기록인 36년 베를린올림픽 스프링보드 다이빙 금메달리스트 미국의 메저리 게스트링(당시 13살 2백68일)보다 1백84일이 어려 금메달과 함께 기네스북에 오르는 영광을 안게 됐다. 이날 결승에 나선 김윤미는 어린나이에도 불구하고 강호 캐나다와 중국선수들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 기량을 선보이며 스포트라이트를 한몸에 받았다. 모두 27바퀴를 도는 이 경기에서 13바퀴를 남기고 캐나다와 중국이 치열한 각축을 벌이는 사이 한국팀은 3위로 처졌다. 16바퀴째에서 캐나다선수가 갑자기 넘어졌고 중국의 독주에는 가속이 붙었다. 힘겹게 뒤를 쫓던 한국팀의 배턴이 원혜경에서 김윤미로 넘겨졌고 이를 악물고 뒤따라 가던 김윤미는 4바퀴를 남기고 중국선수의 안쪽을 당차게 파고 들어 처음으로 선두를 잡았다. 그것으로 한국의 금메달이 결정됐다. 김윤미로부터 터치를 받은 전리경과 마지막 주자 김소희(정화여고2)는 여유있게 골인점을 통과할 수 있었다. 이 순간을 위해 김윤미를 비롯한 10대 여자대표선수들은 그동안 전명규코치가 고안해낸 「철조끼훈련」과 혹독한 웨이트트레이닝을 견뎌왔다. 체력이 월등한 서구선수들을 이기기 위해서는 어린 선수들에게 가혹하긴 하지만 이런 방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는게 전코치의 설명이다. 언니들이 7.5㎏의 무거운 철조끼를 걸친 대신 3㎏의 비교적 가벼운 철옷을 입은 햇병아리 김윤미는 이번 대회를 대비해 모두 4만㎞이상의 얼음판을 묵묵히 달리고 또 달렸다. 또 코치조차 안쓰러울정도의 무거운 기구를 들어올려야하는 역기훈련때는 남모르게 많은 눈물도 흘렸다. 서울 신천국 1학년때부터 쇼트트랙을 시작,6년만에 한국빙상계의 기린아로 떠오른 김윤미는 1m55㎝ 42㎏의 가녀린 몸매지만 순발력과 지구력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 재외문화재 반환돼야 한다/황규호 문화부 부국장급(오늘의 눈)

    우리의 문화재가 해외에 많이 나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그러려니는 했지만 문화체육부가 최근 파악한 해외소재 문화재 실태(서울신문 2월14일자 2면보도)는 충격을 안겨준다.자그마치 6만4천8백여점이 귀환의 기약도 없는 타국살이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 우리의 귀중한 문화유산이 이른바 해외유출문화재라는 미명을 쓰고 남의 나라 박물관이나 개인 수장고 속 깊이 갇혀있다.모두가 정중한 예우를 받고 자연스럽게 건너간 것이 아니다.대부분 정당한 절차가 무시된 채 해외로 흘러들어갔다.다시 말하면 눈을 부라린 강자의 약탈문화재가 상당량을 차지하기 때문에 곱게 가져간 물건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일찍이 식민지를 거느리고 열강의 위세를 떨쳤던 국가들은 피지배민족의 문화유산을 약탈하는데 서슴지 않았다.문화재 약탈은 가히 폭력적이었다 할 수 있다.남의 민족의 거대한 석조신전까지 자국의 박물관으로 옮겨 복원해 놓았을 정도니까….그러고 보면 자그마한 유물들을 약탈한 것은 문제가 아니었을 것이다.일본 도쿄국립박물관 역시 예외가 될 수 없다.이 박물관은 현재 우리 문화재 4천여점을 소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래서 해외소재 문화재 이야기만 나오면 우리는 우선 일본을 주목하게 된다.무력으로 한반도를 강점,36년동안 잔혹통치를 해온 일본이야 말로 한국문화재 최다보유국이다.이번 문체부 실태파악에서도 일단 2만9천6백여점을 보유한 것으로 조사되었다.그러나 실제는 그 보다 훨씬 많은 5만여점을 상회한다는 것이 학계의 추정이다. 문체부는 이번 실태조사 수치를 근거로 약탈문화재와 비약탈문화재를 분류할 계획이라고 한다.분류 결과가 나오면 그 실상이 밝혀지겠지만,일본쪽으로 많은 문화재가 약탈되었다.1910년대 경주군청에 근무한 주임서기 기무라(목촌정웅)의 상부 보고문서는 이같은 정황을 잘 전해주고 있다.「석굴암 이감불이 일본으로 들어갔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그럼에도 일본은 한일협정에 따른 「문화재반환과 문화협력에 대한 합의사항」가운데 문화재부문에는 열의를 보이지 않는다.우리가 청구한 문화재의 44%를 겨우 돌려주었을 뿐이다.그나마 권고사항으로 명문화 한 개인소장품 반환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강제 반출된 문화재를 불법으로 보는 유네스코의 협약이 있기는 하나 일본은 물론 프랑스와 영국도 미가입국으로 남아 있다. 이제라도 약탈국은 제국주의적 패권의식에서 벗어나야 한다.그리고 「본래의 자리에 있을 때 정당한 평가를 받을 수 있다」는 문화재 존재개념을 인식해주기 바란다.
  • 다리:중/한강철교/강남·북 연결 최초의 교량(서울6백년만상:11)

    ◎경인선 부설위해 1900년 준공/17년뒤 한강대교 등장… 현재 22개로 1900년 7월 5일­ 이날은 서울과 한강의 역사에 굵은 획을 그은 날로 기록돼있다.한강철교가 개통됨으로써 한강의 다리시대가 열린 날이다. 그전까지 선왕의 능을 참배하거나 온천 나들이에 나섰던 국왕은 임시 배다리(주교)를 이용해 한강을 건넜다.1년에 몇차례씩이던 국왕의 행차는 큰 배 70여척을 가로로 이어 묶은뒤 널빤지를 깔아 5∼6필의 말을 일렬횡대로 세워 강을 건너곤 했었다.배를 징발해 묶는데 한달,그리고 푸는데 한달이 걸려 당시 한강변 백성들의 민원이 대단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다리는 「제3한강교」(한남대교)와 「비내리는 영동교」등 유행가에도 심심찮게 등장할만큼 서울시민과 불가분의 관계가 됐다. 현재 한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는 모두 22개.이중 중부고속도로상의 강동대교와 행주대교는 행정구역상 경기도에 위치하지만 이용객의 대부분은 역시 서울사람들이다.지금 서강대교가 공사중이고 지하철 7호선이 지날 청담대교와 가양대교,경기도의 팔당대교와 김포대교,신행주대교를 포함하면 한강다리는 멀지않아 25개에 이르게 된다. 최초의 한강다리인 한강철교는 1896년 미국인 모스가 경인철도부설권을 따낸뒤 4년만에 완공했다. 수송량이 늘어나면서 한강철교에 이어 1911년에 상류쪽에,1944년엔 하류쪽에 나란히 두개의 철교가 추가로 건설됐고 현재 경인전철복복선화를 위해 철도청에서 상류에 두번째 다리로 또하나의 다리를 놓고 있어 곧 네쌍둥이다리로 등장하게 됐다. 노량진∼용산사이에 건설된 한강대교는 1917년 수심이 깊은 노량진∼중지도간은 한껏 멋을 부린 최초의 아치교로,중지도∼용산구간엔 가교를 놓았다.당시의 공사비가 84만3천원.한강철교 건설때 쓰다남은 자재를 이용해 건설된 탓에 26년 을축대홍수때 가교부분이 떠내려가 36년 4차선다리를 다시 놓았다.늘어나는 교통량 때문에 81년에 똑 같은 다리를 놓아 쌍둥이가 됐다.이 공사때 기초공사 터파기 과정에 일본도가 모래흙속에서 여러자루가 나와 첫 인도교 건설당시 한국 노무자들이 얼마나 일제에 혹사당했는지를 증언하기도 했다.한강대교는 6·25때 한강철교,광진교와 함께 국군의 「작전상 폭파」로 한꺼번에 끊기는 비운을 맞았다.이 때문에 피란길이 막힌 많은 시민들에게 적치하에서의 한과 비극을 떠안기기도 했다. 이 다리는 이름도 많아 사람과 우마차를 위해 놓았다하여 「인도교」라 불렸고 「제2한강교」인 양화대교가 생기면서 「제1한강교」라 불리기도 했으며 요즘은 자살극을 벌이는 사람이 많아 「자살교」로 알려지기도 했다.지난해에만 30여건의 아치위의 자살소동이 벌어졌다.서울시는 시위꾼이 아치꼭대기에 올라가지 못하도록 하단부분에 높이 1m안팎의 방책을 설치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으나 자칫 다리경관을 해칠까 고심중이다. 지금은 존재가치를 잃고 있는 광진교도 36년에 건설이후 75년 천호대교가 놓여지기전까지는 동부지역의 유일한 통로였다.비록 편도 1차선이지만 광나루에서 물놀이를 하던 서울 토박이들은 그다리의 모습을 잊지 못하고 있다.교각 보강공사와 통행제한조치등 곡절끝에 이제는 한강인도교의 최초 모습과 비슷한 원래의 모양대로 95년 6월까지 복원하기로결정돼 현재 공사가 진행중이다. 양화대교와 한남대교가 처음엔 제2,제3한강대교로 이름지어진 것은 한강다리가 본격적으로 건설될 조짐이었다.65년 상판을 제외하고는 우리 기술 장비 자재로 처음 건설된 양화대교는 시민들이 공사비를 보태기 위해 절미운동까지 벌였다.다리위에 식단을 마련해 개통식을 가졌고 다리의 개통은 장안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한남대교는 일일생활권이란 말을 낳은 경부고속도로와,마포대교(개통당시 서울대교)는 여의도개발과 함께 건설돼 한강의 기적의 출발선이었다. 이때까지 한강다리의 대부분이 대일청구권자금으로 건설되거나 다리를 일본에서 사실상 수입,조립에 그쳤으나 포항제철이 가동되고 보릿고개를 넘기면서 아름다운 다리에도 눈뜨게 된다.
  • 일본에 감춰둔 한국문화재 많다

    ◎국제교류재단,「일본소장 한국문화재 1」 도록펴내 실상 밝혀/도쿄 등 세 박물관에만 3천6백점 소장/재일 한국유물목록서 1천점이상 빠져 일본에 건너간 우리나라 문화재 상당량이 아직도 공개되지않은채 박물관 수장고 속에 깊숙이 비장되어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이는 지난 91년과 지난해등 2차례에 걸쳐 일본지역 3개 박물관을 대상으로 한국유물 소장실태 조사에 나섰던 한국국제교류재단(이사장 손주환)이 24일 그 일부로 문화재도록을 펴냄으로써 밝혀지기 시작했다. 국제교류재단이 조사대상으로 삼았던 박물관은 도쿄국립박물관을 비롯,일본민예관·오사카동양도자미술관등 3개소다.예용해문화위원을 단장으로 김광언교수(인하대·민속학) 윤용이교수(원광대·도자미술사) 유홍준교수(영남대·미술사)등 문화재 전문가 4명이 조사에 참여했다.이들의 조사에 따르면 도쿄국립박물관에는 2천여점,민예관에 1천5백여점,오사카동양도자미술관에 1백여점 등 모두 3천6백여점의 우리 문화재가 소장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가운데 특히 오사카동양도자박물관에소장된 1백여점의 도자기는 거의 국내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명물중의 명물들이다.거의가 국보급에 해당하는 이들 유물은 일본이 자랑하는 한국문화재들이다.지난92년11월 고려청자를 비롯,조선분청과 사기등을 포함한 일부 유물을 보여주는 명품전을 개최,세계 도자기 애호가들로부터 극찬을 받은바 있다. 또 도쿄국립박물관에는 일제시대 대구를 중심으로 한국문화재를 전문으로 수집했던 오쿠라(소창무지조)의 컬렉션 1천여점이 들어있다.이 가운데는 가야와 신라의 고분유물과 금동제장신구·무구류·토기등이 포함되어있다.이밖에 고려청자·조선 분청사기와 백자등의 도자명물도 컬렉션 가운데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도쿄국립박물관측은 오쿠라컬렉션 1천점 말고 나머지 한국유물 1천점에 대한 공개는 꺼린 것으로 전해졌다.그러나 조사단은 다른 경로를 통해 소장품리스트를 입수,도쿄박물관 소장 한국 문화재의 실상을 벗기게 됐다는 것이다.여기에 포함된 유물은 한·일회담 당시 일본이 제시한 한국문화재목록에도 들어있지 않아 외교적인 쟁점이 될 소지도 안고 있다. 한국국제교류재단은 이들 문화재 가운데 일본 민예관 소장품으로 구체적인 사진자료가 입수된 3백16점의 사진을 모아 「일본소장 한국 문화재1­일본 민예관편」을 발간했다. 이 도록에는 야나기 무네요시(유종열·1889∼1961년)가 19 36년에 개관한 일본민예관 소장 우리 문화재 가운데 회화 53점,도자기 1백40점,목공예 56점,주전자·맷방석·비 등 기타 67점의 사진과 일본민예관 소장 한국문화재 1천5백점의 목록이 수록돼 있다. 우리 문화재를 직접 대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안고 그림으로나마 다시 우리의 것을 보게 되었다.
  • 문화의 결손/이종철 국립민속박물관장(굄돌)

    그간 우리 문화는 중국 중원문화의 변화에 따라 완만한 변동을 겪어왔다.20세기초 36년동안 일본제국주의의 교육과 문화폭압에 신음하고,19 50년이후 40년간 뿌리없는 미국,서구,일본문화의 마약밀매 같은 침투로 보편성을 가진 고유문화가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 결손가정의 아이가 문제아가 되듯 바람직한 전통문화가 결손된 국민이 모여사는 사회의 미래는 밝지않다.허약한 차용문화의 바탕위에서는 외형과 체제에있어 어느 단계까지 들어서면 그 이상의 도약이나 자기발전이 단계에 접어 들 수 없다. 최근의 몇가지 사례를 든다면 서구문화가 가져다 준 오만한 이기적 독선주의와 인류사상 유례없는 식민정치하에서 지도층의 살아남기 위한 사상적 타락,계층·지역·세대간의 무피판적 갈등,규범이 무너진 핵가족화로 인한 사회통제 상실,정통성에 문제가 있던 정권의 도덕적 상처로 인하여 한국사회의 어느부문은 발전없는 성장이란 퇴행적 변동만을 겪어 왔다. 이제 우리는 근대화라는 합리주의적 사고와 함께 감성이 있는 철학적 삶의 추구,물질의 과학화와함께 정신의 이상화,종교화를 통하여 이 사회를 부패시키고 있는 윤리의 복원,편협한 이기주의,한탕주의,탈법주의를 과감히 떨쳐내야 한다. 더욱이 UR가 체결되어 그 위력이 발휘되면 126만가구 570만 농민이 사는 농촌이 무너져 주인이 없는 텅빈 농가가 생기고 농업이 파괴될 수 있다.따라서 농자천하지대본에 뿌리를 둔 농어민의 공동체 문화인 민속문화가 붕괴되는 위기를 맞게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문민시대를 자부하는 현 정부는 풀뿌리 문화의 근착을 위한 정책과 제도의 손질에 혁신적 발상을 서둘러야 한다.이는 바로 문화와 교육 그리고 이를 수용할 성숙된 도덕적인 사회가 뒷받침해야 한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정보이며 미래를 펴나갈 나침판이다.국가를 펴나갈 문화정책과 정보가 연구되어 축적되지 않고는 물질 만능을 이겨낼 문화의 미래가 창출될 수 없다. 민속문화는 우리의 피요 살,혼이었다.육체적,정신적 힘의 원천이었고 민족의 샘이었다.외래문화앞에 혼비백산된 국민,민족에게 문화의 샘이 말라버린다면 100년후 국가공동체는 지탱하기가 어렵다.
  • 메이데이 부활(외언내언)

    마르크스가 지상에 내려와 TV출연을 요청했다.방송국측은 내키진 않았으나 딱 한마디만 하겠다는 간청이어서 허락했다.카메라를 향한 그는 이렇게 말했다.『만국의 노동자여 나를 용서해 다오』한때 모스크바서 유행하던 해학이다.『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던 그의 공산당선언을 비꼬는 익살인 것이다. 그 만국의 노동자 단결의 기념일이 5월1일 메이데이 노동절이다.세계노동자가 단결하고 상부상조하는 공동의 목표를 추구하는 것이 나쁠 것은 없을 것이다.중세유럽의 봄축제이던 메이데이를 1886년 노동절로 처음 축하하기 시작한것은 미국이었다.그것이 사회주의 행사로 변질된 것은 옛공산권이 정치선동·선전수단으로 악용했기 때문이다. 결국 서방세계는 5월1일을 피해 별도로 근로자의 날을 정하게 되었다.미국은 9월 첫째 월요일을,일본은 11월 23일,그리고 우리는 한국노총창설기념일인 3월10일을 근로자의 날로 기념했으나 5월1일 메이데이를 고집하던 일부 노조들의 호응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도 이젠 지나간 냉전시대의 유물.공산권이붕괴된 지금 메이데이가 갖던 사회주의적 정치선동 선전의 목적 또한 의미를 상실한 지 오래다.5월이라는 좋은 계절의 봄 축제로 되돌아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순리일지 모른다.36년만의 메이데이를 부활시킨 김영삼대통령의 결정도 그런 순리를 따른 것일 게다. 특히 금년엔 국제화·개방화라는 거센 파고의 악조건속에 신한국건설을 위한 제2 한국경제도약의 문을 기어이 열어야 한다.경쟁력제고의 성패가 관건이다.여기에 노·사대결의 상황은 어떤 이유에서건 절대 금물이다. 메이데이 노동절 부활의 보다 깊은 참뜻이 어디에 있는지 우리는 진지하게 헤아려야 할 것이다.「만국의 노동자」가 아니라 「한국의 노·사여 단결하라」는 대통령의 간곡한 당부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 육사 이원록(다시 새기는 그 충절/이달의 독립운동가)

    ◎일제하 17차례 옥고치른 저항시인/의열단 가입,조선은행 폭탄투척 등 주동/32세에 첫시 발표… 민족의식 고취 앞장/첫 수감번호 64를 호로… 40세 옥사 「어데다 무릎을 꾸려야 하나.한발 재겨 디딜 곳 조차 없다」(절정에서) 육사 이원록선생은 절정·광야등 저항시를 통해 민족혼을 일깨운 민족시인이자 항일독립운동가이다. 최초 일제에 체포됐을 당시 수감번호 64의 음을 따 아호를 지음으로써 나라 잃은 슬픔을 가슴에 간직한채 민족의식을 일깨우는데 일생을 바쳤다. 육사는 1904년4월4일 5형제중 2남으로 태어나 41세인 1944년1월16일 북경감옥에서 순국할 때까지 무려 17차례에 걸쳐 옥고를 치렀다. 진성 이씨로 퇴계 이황선생의 14대손인 육사는 경북 안동군 도산면 원촌리 881에서 아버지 이가호씨와 어머니 허길씨 사이에서 태어나 어려서는 한학을 배웠다. 그는 1921년 18세때 경북 영천의 안일양씨와 결혼,영천의 백학서원에서 공부하다 신학문을 배워야 한다는 생각에 2년뒤 일본으로 건너 갔으며 도쿄 소재 대학에 다니다 중퇴하고 1925년 귀국했다. 선생은 이어 형 원기,동생 원유씨와 함께 항일 무장투쟁 결사인 의열단에 가입했다. 의열단은 1927년10월 조선은행 대구지점장 앞으로 벌꿀을 위장한 폭탄 상자를 보내 일경 5명에게 부상을 입히는 사건을 일으켰다. 선생은 이 사건 발생 직후 형제와 함께 일경에 주동자로 지목돼 체포돼 쇠꼬챙이로 지지기,대꼬챙이로 손가락 사이 훑기,거꾸로 매달아 코에 고춧가루 붓기등 이루 말할 수 없는 혹독한 고문을 겪은 뒤 대구지방법원에 기소됐으며 수감번호는 64였다. 2년4개월 동안 옥살이를 한 선생은 출옥후 의열단원 윤세주씨가 운영하고 있던 중외일보 기자로 일하며 청년지도에 힘을 쏟았다. 그러던중 1929년11월3일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선생은 또 다시 예비검속되는 등 고초를 겪었으며 1931년1월21일 동생과 대구경찰서에 구속되기에 이르렀다. 그 당시는 대구에서 반제 배일 격문이 시내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었으며 선생은 격문 작성자 또는 비밀결사 혐의를 받은 것이다. 선생은 3개월만에 출소하자 중국 북경으로 탈출,심양에서 김두봉의열단장을 만나 독립운동 방법을 논의하고 귀국했다. 육사는 1932년6월 북경으로 가 중국의 대문호 노신과 교유,나중에 노신의 「고향」을 번역하기도 했다. 선생은 북경에서 본격적으로 무장항일운동에 뛰어 들기로 하고 중국 국민정부 군사위원회에서 운영하는 간부훈련반에 입학했다. 이 훈련반은 김두봉단장이 황포군관학교 재학 당시 장개석총통에게 부탁해 한국청년의 군간부 양성을 목적으로 남경에 설립된 군관학교이다. 선생은 이 학교 정치조에 소속돼 6개월 동안 비밀통신·선전방법·폭동공작·폭파방법등 게릴라훈련을 받고 1933년5월15일 귀국했다. 선생은 차기 교육대상자 모집,국내 민족의식 환기,혁명사상 조성과 국내정세 파악등의 비밀 임무를 띠고 상해·안동·신의주를 거쳐 입국한 것이다. 선생은 이 임무를 비밀리에 수행하던중 1934년5월22일 서울에서 경기경찰에 피체돼 한달만에 기소유예조치로 석방됐으나 이미 건강이 매우 상한 상황이었다. 선생은 그래서 당시 진로를 놓고 크게 인간적 고뇌와 갈등에 휩싸이게 됐다. 과연 의열단밀명을 계속 수행할 것인가 아니면 광복을 위한 투쟁대열에서 벗어나 은둔할 것인가. 선생은 결국 직접적인 무장투쟁은 적절치 못하다고 판단,글과 시를 통해 민족의식을 깨우쳐 주고 일제에 대한 저항정신을 북돋는다는 새로운 항일의 길에 나서기로 결심했다. 이같이 결정한 선생은 바로 북경으로 가 문인으로서 새 출발을 시작했다. 이후 선생은 정치·사회분야에서 폭넓은 작품활동을 전개,1935년 개벽지에 「위기에 임한 중국 정국의 전망」,「중국 청방비사 소고」등을 발표했다. 다음해인 36년에는 처음으로 「한개의 별을 노래하자」는 시를 발표,시인으로 등장했다. 또 해조사·노정기·질투의 반군성·무희의 봄을 믿아서등 산문을 내기도 했으며 꾸준히 평론과 수필을 발표했다. 이어 1939년에는 절정·남한산성·청포도등 주옥같은 시를 썼으며 영화에 대한 문화적 촉망,시나리오 문학의 특징등의 영화 예술부문의 평론을 문장 냉광등 잡지에 선보였다. 1941년 선생은 건강이 극도로 악화됐으나 파초·독백·자야곡등의 시를 지었으며 연인기·산사기·중국현대시의 일단면등 수필도 짬짬이 썼다. 1942년에는 사실상 유고인 광야를 발표했다. 그러던 선생은 귀국한지 두달만인 1943년7월 갑자기 서울동대문경찰서에 연행돼 북경으로 이송됐다. 그가 무슨 영문으로 체포됐는지 조차 몰랐던 가족들은 돌연 1944년1월6일 「북경감옥에서 사망했으니 유해를 찾아가라」는 통보를 받고 깜짝놀라 북경으로 달려갔다. 북경주재 일제영사관은 선생의 유해를 화장하고 남은 유골을 담은 조그만 상자를 내줄 뿐이었다. 선생은 병마와 싸우며 죽는 순간까지도 많은 작품을 써내 이 민족에게 빛을 던져준 민족시인이었다. 정부는 선생의 공적을 기려 77년 건국훈장 애국장을,83년 문화훈장 금관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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