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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W포토] 김동완 입소에 몰려든 팬과 취재진들

    [NOW포토] 김동완 입소에 몰려든 팬과 취재진들

    그룹 신화의 멤버 김동완이 17일 오후 1시 충남 공주에 위치한 32사단 신병 교육대로 입소했다. 최근 싱글앨범 ‘약속’으로 활동하던 김동완은 32사단 신병교육대에서 4주간의 기초군사훈련을 마친 뒤 공익근무요원으로 대체 복무한다. 서울신문NTN(공주) 조민우 기자 blue@seoulntn.co.kr@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신화 김동완, 오늘 군입소 ‘에릭 이어 2번째’

    신화 김동완, 오늘 군입소 ‘에릭 이어 2번째’

    가수 김동완(29)이 에릭에 이어 신화에서 두 번째로 오늘 (17일) 입소 한다. 김동완은 17일 오후 1시 충남 공주에 위치한 32사단 신병훈련소로 입소해 4주간의 기초군사훈련을 받는다. 기초훈련이 끝난 김동완은 서울 서대문구청에서 공익근무요원으로 근무할 예정이다. 지난 10월 9일 입소했던 에릭(본명 문정혁·29)에 이어 김동완은 신화 중 두 번째로 군에 입소하는 멤버가 됐다. 현재 에릭은 4주간 군사훈련을 마치고 11월 6일 퇴소해 현재 서울메트로에서 근무 중이다. 김동완은 입소 2주 전 마지막 앨범인 ‘약속’을 발매하고 지난 9일 SBS 창사특집 ‘사랑나눔 콘서트’를 끝으로 방송 활동을 마무리 짓는 등 마지막까지 가수 활동에 전념하는 모습을 보였다. 총 4곡이 수록된 마지막 앨범 ‘약속’에서 김동완은 팬들에게 2년 후 다시 만나겠다는 약속으로 작별 인사 형식의 내레이션을 담기도 했다. 내레이션에서 “지난 10년간 함께 해온 모든 분들과 잠시 이별의 시간을 갖게 돼 너무 미안하며 감사하다.”며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건넸다. 한편 1998년 신화 1집 앨범 ‘해결사’로 데뷔해 연기자, 라디오 DJ로 활동영역을 넓혀 왔던 김동완은 최근 솔로 가수로 홀로서며 총 4장의 앨범을 발표, 역량을 인정받았다. 또한 지난 9월 20일에는 생애 첫 단독 콘서트를 마치며 입대 전 솔로가수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하기도 했다. 그룹 신화는 지난달 9일 에릭의 군입대를 필두로 김동완, 내년 전진과 이민우의 군입대가 예정돼 있어 당분간 긴 휴식기를 갖게 될 전망이다. 서울신문NTN 최정주 기자 joojoo@seoulntn.co.kr@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NOW포토] 김동완 ‘조국의 부름’을 받고

    [NOW포토] 김동완 ‘조국의 부름’을 받고

    그룹 신화의 멤버 김동완이 17일 오후 1시 충남 공주에 위치한 32사단 신병 교육대로 입소했다. 최근 싱글앨범 ‘약속’으로 활동하던 김동완은 32사단 신병교육대에서 4주간의 기초군사훈련을 마친 뒤 공익근무요원으로 대체 복무한다. 서울신문NTN(공주) 조민우 기자 blue@seoulntn.co.kr@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NOW포토] 김동완 “입대 명 받았습니다”

    [NOW포토] 김동완 “입대 명 받았습니다”

    그룹 신화의 멤버 김동완이 17일 오후 1시 충남 공주에 위치한 32사단 신병 교육대로 입소했다. 최근 싱글앨범 ‘약속’으로 활동하던 김동완은 32사단 신병교육대에서 4주간의 기초군사훈련을 마친 뒤 공익근무요원으로 대체 복무한다. 서울신문NTN(공주) 조민우 기자 blue@seoulntn.co.kr@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NOW포토] 김동완 ‘짧은 머리’가 더 어울려

    [NOW포토] 김동완 ‘짧은 머리’가 더 어울려

    그룹 신화의 멤버 김동완이 17일 오후 1시 충남 공주에 위치한 32사단 신병 교육대로 입소했다. 최근 싱글앨범 ‘약속’으로 활동하던 김동완은 32사단 신병교육대에서 4주간의 기초군사훈련을 마친 뒤 공익근무요원으로 대체 복무한다. 서울신문NTN(공주) 조민우 기자 blue@seoulntn.co.kr@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김동완 일문일답 “충성! 늦은만큼 열심히”

    김동완 일문일답 “충성! 늦은만큼 열심히”

    가수 김동완(29)이 에릭에 이어 신화에서 두번째로 입소했다. 검은 잠바에 청바지의 수수한 차림으로 훈련소에 도착한 김동완은 도착하자 마자 “충성” 인사를 건네며 자신을 배웅 온 200여명의 팬들과 50여명의 취재진에게 앞에 서 입소 전 소감을 밝혔다. 17일 오후 1시 충남 공주에 위치한 32사단 신병훈련소로 입소해 4주간의 기초군사훈련을 받게 되는 김동완은 입소 전 짧게 자른 머리를 매만지며 비교적 담담하고 환한 표정으로 취재진의 질문에 답했다. 다음은 입소 전 김동완과 가진 일문일답 - 지금 심정이 어떤가? 좋습니다. - 표정이 밝다. 어제 꿈을 꿨는가? 꿈은 안꿨습니다. - 직접 배웅 온 팬들에게 한마디 한다면? 감사합니다. 4주동안 훈련 잘 받고 오겠습니다. 다들 기다릴 거라고 생각합니다. - 신화 멤버들이 입소 전에 뭐라고 했는가? 오늘 아침에 에릭한테 전화가 왔습니다. 에릭이 로션을 챙겨가라고 하더군요. - (에릭이 로션은 챙겨주지 않고) 말 뿐이였는가? 말이라도 어딥니까? 고맙죠.(웃음) - 마지막 앨범 ‘약속’을 발매하고 가는데 아쉬움은 없는가? 워낙 늦게 가는 거라 열심히 하겠다는 생각 뿐입니다. - 군대를 다녀온 후 미래의 김동완의 모습을 그려봤는가? 신화 10집 발매 후 다시 신화로 돌아와서 팬들 앞에 서고 싶습니다. - 마지막으로 팬들에게 인사를 남긴다면? 늦게 가는 군대지만 열심히 하고 돌아오겠습니다. 에릭과 제가 입소했지만 신화 및 나머지 멤버들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 부탁드립니다. 한편 4주간의 기초훈련을 마친 이후 김동완은 서울 서대문구청에서 공익근무요원으로 근무할 예정이다. 이로써 김동완은 지난 10월 9일 입소했던 에릭(본명 문정혁·29)에 이어 두 번째로 군에 입소하는 멤버가 됐다. 현재 에릭은 4주간 군사훈련을 마치고 11월 6일 퇴소해 현재 서울메트로에서 근무 중이다. 한편 그룹 신화는 지난달 9일 에릭의 군입대를 필두로 오늘(17일) 김동완, 내년에는 전진과 이민우의 군입대가 예정돼 있어 당분간 긴 휴식기를 갖게 될 전망이다. 서울신문NTN(공주) 최정주 기자 joojoo@seoulntn.co.kr / 사진 = 조민우 기자@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군입대 앞둔 김동완, 9일 막방 무대 “안녕”

    군입대 앞둔 김동완, 9일 막방 무대 “안녕”

    오는 17일 군입대를 앞두고 있는 가수 김동완(30)이 9일 콘서트 방송 무대를 마지막으로 약 2년여 동안 팬들에게 이별을 고한다. 김동완은 오는 9일 SBS 창사특집으로 마련된 ‘사랑나눔 콘서트’를 끝으로 입대 전 마지막 앨범인 ‘약속’의 방송 활동을 마무리한다. 김동완의 소속사 h2 엔터테인먼트는 “마지막 앨범 ‘약속’을 발매했던 김동완이 9일 짧은 방송 활동을 마무리짓게 됐다.”며 “김동완은 이날 무대에서 윤하와 호흡을 맞춘 듀엣곡 ‘약속’의 하모니를 들려줄 예정”이라고 밝혔다. 소속사 측은 “마지막 방송 무대인만큼 공연을 마친 후 팬들과의 특별한 만남도 예정돼 있다.”며 “김동완은 자신의 마지막 모습을 함께 하려 찾아와준 팬들과 뜻 깊은 만남을 마련하려 한다.”고 전했다. 김동완의 입대 전 마지막 앨범 ‘약속’은 김동완과 팬들의 2년 후 약속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총 4곡이 수록된 이번 앨범은 “17일 입대 직전까지 가수로서 최선을 다해 활동하고 싶다.”는 김동완의 의사를 소속사 측이 적극 반영해 준 앨범으로 입대를 앞둔 김동완이 팬들에게 남기고 싶은 감사의 메세지를 내레이션 형식으로 담아내기도 했다. 김동완은 앨범 속 작별인사에서 “지난 10년간 함께 해온 모든 분들과 잠시 이별의 시간을 갖게 돼 너무 미안하며 감사하다.”며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건넸다. 한편 1998년 신화 1집 앨범 ‘해결사’로 데뷔해 연기자, 라디오 DJ로 활동영역을 넓혀 왔던 김동완은 최근 솔로 가수로 홀로서며 총 4장의 앨범을 발표, 역량을 인정받았다. 또한 지난 9월 20일에는 생애 첫 단독 콘서트를 마치며 입대 전 솔로가수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하기도 했다. 9일 TV에 입대 전 가수 활동의 마지막 모습을 비친 김동완은 신화의 멤버 에릭에 이어 오는 17일 충남 공주 32사단으로 입대한다. 그룹 신화는 지난달 9일 에릭의 군입대를 필두로 김동완, 내년 전진과 이민우의 군입대가 예정돼 있어 당분간 긴 휴식기를 갖게 될 전망이다. 서울신문NTN 최정주 기자 joojoo@Seoulntn.co.kr@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김동완, 군입대 2주전 마지막 앨범 발매

    김동완, 군입대 2주전 마지막 앨범 발매

    오는 17일 군입대를 앞두고 있는 가수 김동완이 마지막 앨범을 발표한다. 김동완은 4일 팬들을 향한 심경을 솔직하게 담은 앨범 ‘약속’을 발매한다. 애절하고 슬픈 발라드 곡 ’약속’은 김동완과 윤하가 듀엣 호흡을 맞춘 곡이다. 김동완의 소속사 h2 엔터테인먼트 측은 “입대 전 마지막 앨범 ‘약속’은 신화에서 솔로 가수로 정신없이 달려오며 팬들에게 느꼈던 고마움과 감사함, 데뷔 10년차 자신이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며 남기고 싶은 진심어린 메세지를 고스란히 담았다.”고 밝혔다. ’약속’ 앨범은 총 4곡이 수록돼 있으며 첫 트랙은 김동완이 팬들에게 전하고픈 작별인사를 내레이션 형식으로 담아냈다. 김동완은 이 내레이션 내용에서 “지난 10년간 함께 해온 모든 분들과 잠시 이별의 시간을 갖게돼 너무 미안하며 감사하다.”는 마음을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1998년 신화 1집 앨범 ‘해결사’로 데뷔한 김동완은 아이돌 가수에서 시작해 서른의 나이로 오는 17일 충남 공주 32사단으로 입대한다. 연기자, 라디오 DJ로 활동영역을 넓혔던 김동완은 솔로 가수로 홀로서기를 시도하며 총 4장의 앨범을 발표하고 지난 9월 20일에는 생애 첫 단독 콘서트를 성황리에 마치며 입대 전 솔로가수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했다. 소속사 측은 “이번 앨범 ‘약속’은 김동완과 팬들의 2년 후 약속이란 의미를 담고 있으며 김동완은 입대 전까지 약 2주가 되지 않는 짧은 기간이지만 최선을 다해 활동할 것”이라고 전했다. 한편 신화는 지난달 9일 에릭의 군입대를 필두로 올해 김동완, 내년 전진과 이민우의 군입대가 예정돼 있어 당분간 긴 휴식기를 갖게 될 전망이다. 1988년 데뷔해 데뷔 10주년을 맞은 그룹 신화는 올해 상반기 스폐셜 앨범이 10만장을 돌파하며 최장수 그룹으로서 저력을 과시했던 바 있다. 사진 = 한윤종 기자, h2 엔터테인먼트 서울신문NTN 최정주 기자 joojoo@seoulntn.co.kr@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김동완 ‘11월 17일’ 군입대 “저도 갑니다”

    김동완 ‘11월 17일’ 군입대 “저도 갑니다”

    가수 김동완의 입대 날짜가 확정됐다. 김동완은 에릭에 이어 11월 17일 충남 공주훈련소에 입소한다. 이후 4주간의 기초 군사 훈련을 받은 뒤 공익근무요원으로 군복무할 예정이다. 김동완 소속사 관계자는 “11월 17일 32사단 공주 훈련소로 입소한다.” 며 “현재 마지막 앨범 준비로 녹음이 한창”이라고 밝혔다. 이어 “군입대 전 마지막 앨범은 싱글 형식의 음반으로 11월 초에 발매될 예정”이라며 “군 입대 시기가 얼마 남지 않았지만 마지막까지 팬들에게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일 계획”이라고 전했다. 지난해 7월 첫 앨범의 타이틀곡 ‘손수건’으로 신화에서 솔로 가수로 나선 김동완은 최근까지 솔로 2집 ‘비밀’, ‘남자의 사랑’등으로 활발한 활동을 이어왔다. 또한 지난 달 20일에는 생애 첫 단독 콘서트를 성황리에 마치며 입대 전 솔로가수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했다. 한편 신화는 지난 9일 에릭의 군입대를 필두로 올해 김동완, 내년 전진과 이민우의 군입대가 예정돼 있어 당분간 긴 휴식기를 갖게 될 전망이다. 1988년 데뷔해 데뷔 10주년을 맞은 그룹 신화는 올해 상반기 스폐셜 앨범이 10만장을 돌파하며 최장수 그룹으로서 저력을 과시했던 바 있다. 서울신문NTN 최정주 기자 joojoo@seoulntn.co.kr@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청장 차관급 11명 프로필

    ●남일호 감사원 사무총장 ‘안동 양반’으로 불릴 만큼 원만한 대인관계로 감사원 안팎에서 평이 좋다.‘대학수학능력시험 관리실태’, 황우석사건 관련 ‘국가연구개발 지원관리 실태’ 등 주요 감사를 총지휘, 일찌감치 사무총장감이라는 말을 들었다. ▲55세·경북 안동 ▲안동고, 고려대 법대 ▲행시 23회 ▲감사원 총무과장 ▲사회복지감사국장 ▲기획홍보관리실장 ▲감사교육원장 ●박종달 병무청장 친화력이 뛰어나다는 평이다. 육군 내 인사 전문가로 통한다. 인사사령관 시절인 2007년 사령부 내에 ‘유가족 찾기 특별팀’을 설치, 변사(變死) 등으로 처리됐다가 재심의를 통해 전사·순직으로 인정된 국군장병의 유가족 찾기 운동을 벌였다. ▲59세·경남 창녕 ▲육사 29기 ▲3군사령부 인사처장 ▲50사단장 ▲3군사령부 참모장 ▲3사관학교장 ▲수도군단장 ▲육군 인사사령관 ●양치규 방위사업청장 치밀하고 꼼꼼한 성격이다. 육군 중령 시절부터 무기체계 분야의 실무를 쌓았으며 장군 진급 뒤에는 국방부의 통신 감청용 정찰기 도입사업인 백두사업과 한국형 헬기(KHP)사업 등 사업을 도맡았다. ▲58세·제주 ▲제주일고, 육사 29기 ▲국방부 백두사업단장 ▲육본 무기체계사업단장 ▲32사단장 ▲육본 기획관리참모부장 ▲방사청 KHP사업단 체계관리부장 ●최성룡 소방방재청장 소방직 출신으로는 처음 청장에 임명됐다.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시장으로 재직할 때 서울시 소방방재본부장을 맡아 안정된 업무 수행으로 신임을 얻은 것으로 알려졌다. 성격은 온화하면서도 꼼꼼하며, 독실한 기독교 신자다. ▲58세·전남 영암 ▲나주종합고, 방송통신대학 행정학과 ▲전남 소방본부장 ▲행정자치부 방호과장 ▲중앙소방학교장 ▲서울시 소방방재본부장 ▲대불대 소방학과 교수 ●이건무 문화재청장 외모에서 풍기는 분위기처럼 조용하고 꼼꼼한 성격의 선비풍 학자. 청동기시대를 전공한 고고학자로, 평생을 박물관에 봉직한 ‘박물관맨’이다. 국립중앙박물관장 시절 경복궁의 박물관을 용산으로 이전하는 데 힘썼다. ▲61세·서울 ▲삼선고, 서울대 고고인류학과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실장 ▲국립광주박물관장 ▲국립중앙박물관장 ▲용인대 문화재보존학과 교수 ▲문화재위원 ●이수화 농진청장 미국 미주리주립대에서 경제학 석·박사 학위를 받고 ‘금융정책의 효과측정연구’,‘피셔가설과 불확실성의 영향분석’ 등을 펴낸 농업경제전문가. 2004년 8월 산림청 차장에 취임, 3년6개월 이상 장수하면서 산림법 체계를 새로 정비했다. ▲53세·경북 청도 ▲경북고·성균관대 행정학과 ▲행정고시 19회 ▲농림수산부 식량정책과장, 농업정책과장 ▲주미대사관 농무관·참사관 ▲식량생산국장 ▲산림청 차장 ●윤여표 식약청장 국내 독성학 분야 권위자로 지난해 국립독성과학원장 후보로 유력하게 거론되기도 했다. 의약품·식품 분야 전문지식을 두루 갖췄으며, 약대 6년제 개편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52세·대전 ▲대전고, 서울대 약학박사 ▲충북대 약대 교수 ▲충북대 약품자원개발연구소 소장 ▲대한약학회 부회장 ▲한국식품위생안전성학회 부회장 ▲한국환경독성학회 이사 ▲식품의약품안전청 자문위원 ●정옥자 국사편찬위원장 정조, 성리학, 송시열, 진경산수화 등을 주된 연구분야로 삼아온 조선후기사 전문 역사학자.1980년대에는 독재 정권에 저항한 학생들을 보살펴 ‘운동권의 어머니’로 불렸다.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서울대 규장각 관장을 지냈다. ▲66세·강원 춘천 ▲동덕여고, 서울대 국사학과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규장각 관장,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문화분과위원 ●정장식 중앙공무원교육원장 관선·민선시장을 여러 차례 역임하는 등 행정 경험이 풍부한 정통 엘리트 내무관료 출신이다.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업무 처리가 돋보인다는 평가다. 성격은 유순하고 합리적인 편이다. ▲58세·경북 포항 ▲경북대사대부고, 서울대 경제학과 ▲행정고시 12회 ▲청와대 행정비서관 ▲내무부 지방자치기획단장 ▲경북 포항시장 ▲대구대 무역학과 객원교수 ●강병규 소청심사위원회 위원장 지방업무에 밝은 정통 내무관료 출신이다. 친화력이 뛰어나 폭넓은 인간관계가 가장 큰 장점으로 꼽힌다. 또 유연한 상황 대처로 주변 사람들에게 편안함과 신뢰감을 준다는 평가를 받는다. ▲54세·경북 의성 ▲경기고, 고려대 법학과 ▲행시 21회 ▲내무부 공기업과장 ▲소청심사위원회 위원 ▲대구시 행정부시장 ▲행정자치부 정책홍보관리실장·지방행정본부장 ●최광식 국립중앙박물관장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는 데 앞장선 역사학자.‘고대국가 제사’가 전공이지만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대책위원회’를 결성해 고구려사에 대한 관심을 높였다. ▲55세·서울 ▲중앙고, 고려대 사학과 ▲고려대 한국사학과 교수 ▲하와이대학 한국학센터 객원연구원 ▲고구려연구재단 상임이사 ▲한국고대사학회장 ▲고려대박물관장 ▲문화재위원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안어벙’으로 유명한 개그맨 안상태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안어벙’으로 유명한 개그맨 안상태

    “아무나 박수 칠 때 떠나나.” 20대의 한 젊은이가 있다. 원래는 대학을 진학해 여름방학때 시골집 대청마루에 드러누워 수박을 실컷 먹는 것이 유일한 꿈이었다. 또 회사 다니다가 아이 낳고 그렇게 사는 게 인생이라고 생각했다. 업보일까. 일찍부터 노숙자같은 생활, 단칸 월셋방과 고시원 전전, 시골카페 DJ생활 등 춥고 배고픔의 연속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문득 깨달았다. 슬픔으로 가득찬 이 세상을 통째로 웃겨보자고. 친구들과 거리공연에 나섰다. 서울역, 지하철, 대학로, 거리식당 등 닥치는 대로 찾아가 “지금부터 여러분들을 웃겨드리겠습니다.”며 ‘철판 깔고’ 사람들 앞에 섰다. 고진감래(苦盡甘來), 드디어 공중파 방송에 뜨면서 박수갈채를 받기 시작했다. 꿈에서나 생각했던, 그건 분명 인기와 사랑의 보증수표였다. 하지만 돌연 방송중단을 선언, 미련과 욕심을 아낌없이 버렸다.“박수 칠 때 떠나라.”는 말을 남기고. 인기 개그맨 안어벙(28·본명 안상태).2004년 혜성처럼 나타나 ‘빠∼져 봅시다.’‘마데 홈쇼핑’ 등의 유행어를 뿌려대며 유명 포털사이트 검색어 1위를 차지하는 등 인기절정을 달렸다.‘잘 나가던’ 그는 지난 6월26일 마지막 방송을 마치고 매몰차게 방송계를 떠났다. 특히 젊은층은 물론 40∼50대의 장년층 팬들도 많았기에 아쉬움도 컸다. 지난주 서울 종로구 동숭동 탑아트홀.‘안어벙의 깜짝 콘서트’(7월7일∼9월26일)가 열리고 있었다. 출연진은 ‘안상태와 실미도 개그군단’, 모두 15명. 무명시절 고생했던 개그팀 ‘오장육부’의 김대범 황현희도 함께 출연했다.200석 규모의 소극장은 꽉 찼다. 공연이 시작되자 안어벙은 ‘마데홈쇼핑’을 비롯, 랩과 춤 그리고 즉흥 퍼포먼스를 섞어가며 관객을 압도했다. 이튿날 서울 여의도 한 카페에서 안어벙을 만났다. 어벙한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아주 진지하고 열심히 살아가는 한 청년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먼저 방송계를 떠난 이유를 물었다.“좀더 멋진 모습으로, 기발한 아이디어로 팬들과 만나기 위해서”라고 운을 뗐다. 이어 “여태것 물흐르듯 살아왔다. 가는 길을 열심히 갈 뿐이다.(방송에)있어도 문제, 나가도 문제라는 생각도 했다. 우선 연기쪽으로 방향을 잡고 있다.”고 덧붙였다. 현재 공연 중인 대학로 개그콘서트에 대해 “하루에 2∼3시간 자면서 두달간 연습했다. 팀원들과 마찰도 많았고, 주위의 걱정도 있었지만 후회없이 행복하게 무대에 올렸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돈벌이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수입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살면서 늘 감사하고 또 (자신의)이름을 걸고 공연을 한다.”는 말로 대신했다. 아울러 항상 호응해주는 관객이 있기에 행복하고 또 많은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여자 친구가 있느냐고 하자 잠시 망설이더니 “무명시절, 길거리 공연때에는 눈물도 설움도 참 많았다.”면서 그때 여자친구한테 많이 차이기도 했다며 쓴 웃음을 짓는다. “얼마전 대학로 공연장에 당시 만났던 여자 친구가 찾아왔더군요. 맨앞좌석에 앉아 제 공연을 다 보고나서 만나달라며 안가고 기다리더군요. 할 수 없이 잠시 갔더니 악수를 청하며 ‘이젠 미워하지 않을 거지.’라고 하더군요. 당시엔 뒤도 안돌아 보더니…” 안어벙의 눈물겨운 개그는 2002년 늦가을 서울 응암동 달동네에서 30만원짜리 월셋방에 살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동료 3명과 합숙하며 더욱 뻔뻔해지기 위해 ‘오장육부’라는 이름으로 길거리 공연에 나섰다. 서울역 앞부터 대학로까지 낮이고 밤이고 가리지 않았다. 백화점, 경찰서, 지하철 안 등 닥치는 대로 개그 퍼포먼스를 벌였다. 노숙자들과도 자주 접했다. 이때 안어벙은 중요한 아이디어를 생각해냈다. 노숙자의 시선에 얻어진, 초점을 잃은 듯한 바보같은 느낌, 덜 미친사람 등을 떠올렸다. 영구나 맹구는 확실한 바보지만 중간형태, 즉 “어벙하게 가자.”고 정했다. 이무렵 안어벙은 개그맨 모집을 보고 여기저기 이력서를 내밀었으나 ‘엿장사 주제에’라는 말과 함께 문전박대를 당하기 일쑤였다. 게다가 열심히 머리를 짜내 만들었던 개그 아이템이 아무런 동의도 없이 모방송국 개그프로에 등장하는 것을 보고 적지 않은 배신감을 느꼈다.2003년 2월 대학로의 한 고시원으로 방을 옮겨 심기일전을 다졌다. 오장육부팀은 “개그맨이 안되면 함께 죽자.”며 손가락으로 혈서까지 썼다. 대학로의 소극장을 전전했다. 라면으로 점심을 떼우고 오후 1시부터 밤 10시까지 미친 듯이 공연을 했다. 주위에서는 안어벙을 가리켜 ‘인간 영사기’라고 했다. 이때 받은 한달 개런티는 30만원. 고시원 월세 25만원을 내고 남은 5만원으로 겨우 입에 풀칠을 했다. 나중에 월급이 50만원으로 오르자 안어벙은 그날로 은행으로 달려가 매달 10만원씩 붓는 적금통장을 만들었다. 나중에는 주택부금 통장으로 전환했다. 그러던 2004년 4월 오장육부팀은 KBS 개그맨 공채 19기에 응시, 당당히 합격했다. 이날 너무 감격스러워 모처럼 점심밥을 배가 터지도록 실컷 먹고는 다들 남산에 올라갔다.“우리를 배반한 자들은 절대 잘 될 수 없다. 하지만 다 잊자, 앞으로 긍정적으로 살아가자.”고 굳은 결의를 했다. 이날 안어벙의 고향인 충남 아산시 인주면 밀두리 마을입구에는 ‘축 합격, 개그맨 안상태 탄생’이라는 현수막이 크게 내걸렸다. 그해 안어벙이 KBS개그맨 신인상과 개그코너상을 연이어 수상했을 때에도 그랬다. 안어벙은 평범한 농촌의 종가에서 1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릴 때 아버지는 동네에서 직원 5명 정도의 조그만한 방직공장을 운영했다. 어머니도 여기에 하루종일 매달렸다. 때문에 안어벙은 할머니한테 귀여움을 받으며 자랐다. 고등학교는 서울에서 독서실 등에서 혼자 자취하며 다녔다. 대학은 취직이 잘된다는 전자공학과를 택했다. 이때만 해도 개그맨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성격도 너무 소심하고 조용했다. 다른 사람들과 얘기하는 것조차 좋아하지 않았고 부끄러움도 많았다. 그러던 어느날 “인생을 이렇게 살면 안 된다. 성격을 바꿔보자.”는 고민에 빠졌다. 대학 1학년때 하루는 학과대표와 얘기하던 중 문득 “상태야, 내일 MT가는데 진행을 맡아볼래”라고 제의했다. 안어벙은 아무생각없이 “그래”라고 대답했다. 막상 그러고나니 걱정이 태산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거울 앞에서 “철판을 깔아야 한다.”고 다짐하면서 ‘또라이’처럼 소리를 지르며 온갖 표정연습을 했다. 이튿날 MT진행은 무난했다. 끝나고 나서 과대표의 “수고했다.”는 말에 기분이 너무 좋아 용기를 내 유머책 등을 뒤지기 시작했다. 대학 2학년때 논산훈련소에 입소한 그는 휴식시간마다 자청해서 앞에 나와 훈련병들을 웃기기 시작했다. 이때 얻은 별명이 ‘느끼가이’.32사단 배치를 받은 뒤에는 보초를 설 때마다 혼자 중얼거리며 음악DJ 연습을 했다. 군생활을 회고하면서 하마터면 대형사고를 칠 뻔했다고 고백했다. 상급자한테 워낙 매를 많이 맞아 몇번이고 죽이려고 했지만 실행직전 꾹꾹 참았다는 것. 이때마다 돌아서서 노래 ‘오버 더 레인보(Over The Rainbow)’를 혼자 부르며 마음을 달랬다. 제대하던 날 천안역에 내리자 비가 쏟아졌다. 비를 쫄딱 맞으며 이벤트 카페를 찾아다녔다.DJ를 하기 위해서였다. 결국 4개월여 동안 카페 DJ를 하다가 다시 서울로 올라와 길거리 공연 등에 나서면서 개그맨의 길을 걷게 됐다. “개그란 진지하고 페이소스가 있어야 합니다. 어떤 한 계층만이 아닌 어린이에서부터 어른까지 다 공감을 얻어야 하지요. 어릴 때 할아버지의 모습, 살아오면서 많은 고생을 했던 경험이 저에겐 소중한 자산이지요.” 안어벙은 그림과 시(詩)에도 많은 끼가 있다.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영화 ‘야수와 미녀’에도 출연했듯이 아마 그쪽으로 갈 수도 있다.”면서 “한결같은 사람, 살아가면서 인간적인 사람, 뒷모습이 멋진 사람이고 싶다.”고 말했다. 부모한테 용돈을 드리냐고 하자 머리를 끄덕이며 “얼마전에는 건강검진을 시켜드렸다.”며 웃었다. ■ 그가 걸어온 길 ▲1978년 충남 아산 출생 ▲96년 신림고등학교 졸업 ▲97년 단국대 전자공학과 입학 ▲98년 육군 입대,2001년 만기 제대 ▲2001∼03년 대학로 마로니에공원, 지하철 등 거리공연 ▲03년 단국대 졸업 ▲03∼04년 3월 대학로 공연 ▲04년 4월 KBS개그맨 공채 19기 ▲04년 KBS 개그콘서트 ‘A-YO’‘춤추는 대수사선’‘X-FAIL’ ‘깜빡홈쇼핑’ ‘TV는 사랑을 싣고’‘해피선데이’‘비타민’‘해피투게더’ ‘스펀지’‘폭소클럽-록키루키’ 등 오락프로 다수 출연, 영화 ‘안녕, 형아’ 카메오 출연 ▲04년 KBS 연예대상 코미디 부문신인상, 최우수 개그 코너상 수상 ▲05년 영화 ‘야수와 미녀’ ‘작업의 정석’ 출연 ▲05년 6월 ‘KBS 개그콘서트-깜빡 홈쇼핑’ 마지막 방송출연 ▲05년 7월 대학로 탑아트홀 ‘안어벙의 깜짝 콘서트’ 공연 km@seoul.co.kr
  • [방현석교수의 테마로 읽는 호찌민] ③ 호찌민의 친구들

    [방현석교수의 테마로 읽는 호찌민] ③ 호찌민의 친구들

    1931년, 호찌민은 영국 식민지였던 홍콩에서 체포됐다. 베트남의 빈 지방법원이 궐석재판으로 호찌민에게 이미 사형을 선고했기에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영국 식민지 당국이 그를 프랑스에 넘기지 않고 추방조치만 취해도 호찌민은 대기 중인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총독부로 넘어가게 되어 있었다. 일단 인도차이나 총독부 손에 넘어가면 살아남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이때 호찌민에게 행운의 밧줄을 던진 사람은 영국인 변호사 프랭크 로스비였다. 변론을 맡은 그는 호찌민을 빅토리아 감옥에서 빼내 보원로드 병원으로 옮겼다. 호찌민이 병원에서 결핵으로 사망했다는 소문을 퍼뜨린 다음, 영국 식민지 당국과 협상을 통해 호찌민이 싱가포르로 빠져나갈 수 있도록 수완을 발휘한 것도 로스비였다. 그러나 싱가포르에 도착한 호찌민은 세관 관리들에 의해 체포되어 곧바로 홍콩으로 되돌려 보내졌다. 프랑스의 정보망을 따돌리고 호찌민을 탈출시키기 위해 이번에는 로스비의 부인까지 나섰다. 그녀는 친구인 라벤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홍콩 부총독의 부인으로 시인이기도 했던 라벤스는 지적이고 당당하며, 예의바른 식민지 청년에게 깊은 호감을 느꼈다. 호찌민이 영국 당국자의 호위를 받으며 몰래 상하이로 빠져나갈 수 있었던 것은 로스비와 라벤스 덕분이었다. 이것은 대단한 행운이었다. 그러나 우연한 행운이 아니었다. 호찌민은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강한 매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적들조차도 그를 직접 겪었던 사람은 거의 예외 없이 그의 옹호자가 되었다.1945년 베트민의 근거지 떤자오에서 호찌민과 함께 지냈던 미국 공군 필런 중위는 훗날 호찌민을 아주 ‘온화하고 착한’ 사람이었다고 회고했다. 비슷한 시기에 프랑스군 정보관으로 인도차이나에서 일했던 장 라쿠튀는 ‘이 시대의 혁명가로서 이 정도 강한 인내로, 감히 힘의 질서에 도전할 수 있었던 사람이 달리 있었느냐.’고 되물었다. 1955년부터 1963년까지 호찌민을 수행하며 기록영화를 찍었던 안선(An Son) 감독은 1957년 호찌민의 해외순방 시절을 잊지 못한다.11개국을 연쇄방문 중이던 호찌민이 어느 날 아침 수행하고 있던 일행들에게 어려운 일이 없느냐고 물었다. 모두 없다고 대답했는데 26세로 막내였던 안선이 당돌하게 손을 들었다. “아저씨가 너무 빨리 걸어서 찍기가 너무 힘듭니다.” 호찌민은 유난히 걸음이 빨랐다. 더구나 안선은 좋은 그림을 얻기 위해 덩치가 큰 외국 기자들과 몸싸움을 벌이며 뛰어야 했다. “신문 기자들은 수첩 하나, 사진 기자들은 사진기 한 대만 들고 다니지만 전 카메라에 녹음기, 배터리까지 하면 10㎏을 넘게 메고 뛰어야 합니다.” 다른 수행원들이 모두 나무라는 눈길로 안선을 흘겨보고 호찌민의 눈치를 살폈다. 안선도 아차 싶었는데 정작 호찌민은 환하게 웃으며 알았다고 했다. 그날 호찌민은 자주 안선의 위치를 확인하고 걸음을 늦추어 주었다. 그래도 쉬지 않고 매일 밤 11시까지 계속되는 일정은 안선을 녹초로 만들었다. “침대에 눕자마자 잠이 들었죠. 그런데 잠결에 누군가 이불을 덮어주는 것이 느껴지는 거예요. 잠결에 얼핏 눈을 뜬 저는 깜짝 놀랐어요.” 벌떡 일어나려는 안선의 어깨를 호찌민은 지그시 눌렀다. 그리고는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려 덮어주고는 가만히 손을 흔들며 방을 나갔다. “정작 나는 그리고 나서 한숨도 자지 못했어요. 나는 일행 중에서 가장 어린, 아무 배경도 없는 촬영기사, 그것도 남부에서 올라온 사람일 뿐이었어요. 밤새 생각해보았는데 친아버지도 내게 그래 준 적이 없었어요.” 안선이 결혼해 아이를 얻은 다음이었다. 라오스국왕이 베트남을 방문해서 환영 연회가 열렸다. 연회가 끝난 다음 촬영장비를 챙기고 있는데 배웅을 나갔던 호찌민이 되돌아왔다. 그리고는 테이블 위에 남아 있던 사탕을 집어서 그의 주머니에 슬그머니 넣어주었다. 안선이 돌아보자 호찌민은 빙긋이 웃었다. “‘깜 험’ 가져다 줘.” 호찌민은 안선의 3살 난 딸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 지도자가 호 아저씨였어요. 아저씨 가까이 있었던 사람들 누구나 이런 비슷한 기억을 가지고 있어요. 내가 죽기 전에는 내 심장 속에서 아저씨를 빼낼 수 없을 거예요.” 올해 일흔 넷의 백발 노인이 되었는데도 호찌민을 회상하는 안선의 상기된 얼굴은 소년처럼 해맑았다. 호찌민 주변의 인물들을 만나면서 가장 의외였던 것은 혁명 운동의 전 기간을 통해서 호찌민이 다수파였던 적이 별로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인맥과 세력을 형성해서 정치를 했던 지도자가 아니었다. 권력을 앞세워 인맥을 구축하고 명분을 내세워 다수파가 되려고 하지 않은 드문 정치가가 호찌민이었다. 그렇다고 호찌민이 카리스마가 없는 지도자는 아니었다. 그 반대였다. 그는 아주 강력한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가진 지도자였고, 그의 곁에 포진한 매우 충성스럽고 유능한 인물들에 의해 ‘부드러운 카리스마’가 훼손되지 않고 지켜질 수 있었다. 호찌민의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호위하며 베트남을 이끌어온 사람들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셋 있다. 쯩 찐과 팜 반 동, 보 응우옌 잡이 그들이다. 쯩 찐은 1941년 호찌민이 베트남에 돌아와 주재한 제8차 당 전체회의에서 총서기장을 맡은 인물이다. 호찌민은 그 자리를 맡아달라는 요청을 정중하게 사양하고 쯩 진에게 그 자리가 돌아가도록 했다.1920년대에 혁명청년회에 가담해 일찍 감옥생활을 한 그는 사교적이지 않았지만 원칙에 아주 충실한 사람이었다. 팜 반 동은 행정과 재정에 관한 능력이 탁월한 인물로 호찌민이 주석과 겸직하던 총리 자리를 넘겨주었다. 그는 베트남 정부를 수립하고 체계를 잡아가는 데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특히 그의 ‘청렴’은 호찌민 정권의 위신을 높이고 대중의 신뢰를 얻는 데 기여했다. 보 응우옌 잡은 호찌민의 진영의 가장 출중한 군사 전략가였다.1944년 12월22일,34명의 대원으로 ‘베트남해방무장선전대’를 창설한 그는 1975년 사이공 함락작전을 성공시킬 때까지 무려 30년간의 저항 전쟁을 총지휘했다. 이 세 사람과 호찌민의 관계를 베트남 사람들은 ‘한 다리로 서 있는 학의 세 발가락’이라고 불렀다. 학이 베트남이라면 그 학을 받치고 선 한 다리는 호찌민이다. 그리고 그 다리를 견고하게 지탱하고 있는 세 발가락이 쯩 찐과 팜 반 동, 보 응우옌 잡이다. 그 중에서도 보 응우옌 잡은 호찌민의 가장 충실한 동지이자 제자였다.1940년 신혼이었던 잡은 호찌민의 호출을 받고 아내와 태어난 지 몇 달 되지 않은 첫 딸을 남겨두고 중국으로 갔다. 그가 떠난 다음 아내 우옌 티 꽝 따이는 프랑스 당국에 체포되어 고문을 받다가 죽었다. 아내의 언니인, 우옌 티 민 카이도 사이공의 군사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총살형을 당했다. 잡의 아버지도 훼에서 프랑스군에 체포되어 이빨이 다 뽑히는 고문을 당한 끝에 죽었다. 호찌민은 악명 높은 꼰다오 감옥에서 갓 출감한 팜 반 동과 함께 쿤밍으로 온 잡에게 옌안으로 가서 군사과학을 공부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여행허가증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했다.1940년 6월22일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하자 호찌민은 두 사람에게 베트남으로 돌아갈 것을 명령했다. “우리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고국으로 돌아가서 이 상황을 이용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군사학을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베트남으로 돌아와 무장투쟁의 책임자가 된 잡의 활약은 눈부신 것이었다.34명의 대원으로 베트남해방무장선전대를 창설한 그는 이틀만에 프랑스군 초소를 공격하여 완승을 거두었다. 그 공격을 통해 무장선전대는 프랑스군의 무기로 무장하고 다음 공격에 나서, 다시 승리를 거두었다. 잡은 군대를 눈덩이처럼 불리며 북부 국경지대에 해방구를 확보해나갔다. 프랑스를 내쫓고 베트남을 삼킨 일본이 연합군에게 항복을 선언한 이튿날인 1945년 8월16일, 잡은 5000명으로 늘어난 해방군을 이끌고 하노이를 향해 진격했다. 하노이를 접수하고 1954년 디엔비엔푸에서 프랑스를 궤멸시키면서 잡은 세계적인 전략가로 명성을 얻었다. 군사전문가도 아닌, 일개 역사교사 출신에 불과한 잡에게 군대를 맡긴 이유를 묻는 외국기자들에게 호찌민은 대답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졸업장이나 증명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실재일 뿐이다.” 그래도 군단급 병력도 없는데 대장 계급은 지나치지 않으냐는 질문에 대해서도 호찌민은 명쾌하게 대답했다. “우리 베트남에서는 소장과 싸워 이기면 소장을 주고, 중장과 싸워 이기면 중장을 준다. 웨스트모어랜드 장군도 대장 아니었나. 이긴 잡도 당연히 대장이다.” 잡이 진정한 호찌민의 제자라는 사실은 디엔비엔푸 전투의 승리에서가 아니라 전술 변경 과정에서 확인됐다. 잡이 디엔비엔푸 전선에 간 것은 전투개시가 임박해서였다. 전선을 직접 확인한 잡은 ‘조기공격, 신속승리’ 전술이 중대한 오류임을 금방 발견했다. 프랑스군의 화력, 장비가 베트남을 압도하고 있었고, 포병과 공군까지 확보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격개시는 기정사실이 되어 있었고, 병사들은 결사항전의 결의로 불타고 있었다. 작전을 연기할 경우 최고조로 끌어올려 놓은 병사들의 사기가 땅바닥으로 떨어질 수 있었고 또 우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잡은 중국 군사고문이 지지하는 ‘조기공격, 신속승리’ 전술을 ‘완벽한 준비, 완전한 승리’ 전술로 바꾸자고 제안했다. 반발이 없을 수 없었다. 잡은 사령관이었지만 무조건 명령하지 않고 토론에 붙였다. 토론에서는 언제나 선명한 명분이 힘을 발휘한다. 잡은 인내심을 가지고 반대의견을 설득하고 공격을 연기했다. 그런 다음 병력을 대거 충원하고, 야포를 맨손으로 산꼭대기까지 끌어올렸다. 이 ‘조기공격, 신속승리’ 작전수립에 참여했던 32사단장 레쫑똔은 만약 그 때 잡이 와서 전술 변경을 결단하지 않았으면 베트남은 결코 프랑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라고 고백했다. 전선의 정치위원이던 팜 응옥 목의 의견도 다르지 않았다. “잡이 일단 멈추고 준비하자고 말했을 때 나는 옷을 벗어던지고 싶을 만큼 속으로 기뻤다.‘조기공격, 신속승리’ 전술에 따르면 자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겁쟁이로 평가받을까봐 입을 열지 못했다. 아무도 하지 못하는 말을 잡이 했다.” 보 응우옌 잡은 디엔비엔푸의 전술 변경이 자신의 ‘지휘인생’에서 가장 힘든 순간이었다고 최근에야 밝혔다. 명분 때문에 진실을 외면하고, 개인의 영예를 위해 인민을 희생시키지 않는 호찌민의 노선을 그는 언제나 견지했다. 호찌민이 운명한 다음 살아있는 지도자들 중에서 베트남인의 가장 큰 존경을 받는 그는 지난 4월30일에 열린 승전30주년 기념행사에서도 직접 연설을 하고, 전쟁 희생자들을 챙겼다. 그러나 그는 한 번도 자신의 스승이자 동지인 호찌민을 가리려고 하지 않았다.1975년 4월30일, 사이공의 대통령궁을 접수하고 가장 먼저 잠든 호찌민에게 찾아가 그 사실을 보고했던 잡. 자신의 공적에 대한 질문을 받은 그의 대답은 올해도 변함이 없다. “나는 호 아저씨의 노선과 방침을 직접 적용하고 실행해온 지휘관이었을 뿐이다.” 1983년 그가 ‘국가출산계획위원회’ 위원장에 내정됐을 때 거절할 것으로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다. 일본과 프랑스, 미국, 중국과 싸워 베트남을 지킨 전쟁영웅에게 그 자리는 모욕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태연히 자신에게 부여된 임무를 받아들였고, 지금도 그것에 대해 말이 없다. 베트남이 지금까지 권력의 암투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은 잡과 같은 호찌민의 사람들이 호찌민 정신을 자신의 삶으로서 지켜내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방현석 교수 bang80@jowoo.co.kr ●자료 사진을 협조해주신 주한베트남대사관과 베트남통신사(VNA) 관계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특히 애써주신 베트남통신사 부 주이 흥 서울지국장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 육군, 3만여명 투입 복구지원

    육군은 최근의 기습 폭설로 인한 피해 복구작업을 돕기 위해 연인원 3만여명의 장병을 현장에 투입,대민 지원활동에 나섰다고 7일 밝혔다. 육군은 육군본부를 비롯해 12개 부대에 재해대책본부를 설치,피해상황을 접수했으며,경부·호남 고속도로 등에 제설기와 헬기를 투입해 제설 및 구호활동을 펼쳤다.또 농가의 비닐하우스와 축사 붕괴 사고가 잇따르자 해당지역에 32사단 장병과 논산 육군훈련소 소속 장병 등을 긴급배치해 복구작업을 도왔다. 조승진기자 redtrain@˝
  • 국방부 신지식인 3명 선정

    국방부는 20일 28년간의 군복무 중 모두 921건의 아이디어를 내 국방예산 절감에 기여한 육군 3군사령부 소속 홍재석(洪載錫·50)원사를 신지식으로 선정했다. ‘에디슨’으로 통하는 홍 원사는 73년 입대 후 지금까지월 평균 2.7건의 아이디어를 창안,절감된 국방예산만도 283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발명특허 26건,실용신안 특허 101건,의장특허 63건을 기록하며 그동안 군 내외에서 모두 123차례나 표창을 받았다.특히국제발명품 전시회에 국가대표로 출전,미국(88년)·독일(92년)·스위스(94년)대회에서 입상하기도 했다. 충북 진천 출신으로 장호원고를 졸업했다. 홍 원사 외에 인터넷을 모병업무에 활용한 공군 중앙전산소 소속 조영호(趙永鎬·25)대위와 원격조정으로 기동하는 무인장갑차를 개발한 육군 32사단 대대장 유형근(兪炯根·42)중령도 이날 신지식인으로 선정됐다. 강동형기자 yunbin@
  • 軍전투장비 만드는 육군 대대장

    육군 대대장이 민간 과학기술을 창의적으로 적용,각종 무인 전투장비를 개발했다. 6일 육군에 따르면 제32사단 유형근(40·육사 40기) 중령은 미래형 정보·과학전에 대비하기 위해 창의적 노력을 기울인 결과 무인 장갑차와 무인 지뢰제거장비,무인 매복감시장비,무인 사격장비 등을 잇따라 개발하는데 성공했다. 유 중령과 부대는 장비개발과 아이디어를 제공한 공로를 인정받아 국방부장관 부대표창 및 개인표창을 받은데 이어 유중령은 올 전반기 ‘육군 신지식인’으로 선정됐다. 유 중령은 당초 자신의 부대가 위치한 해안지역의 취약성을 보완하기 위해 무인 매복감시장비 개발에 골몰한 끝에 정훈교육용 VTR카메라를 이용한 야간감시 보조장치를 만들어 ‘사단 창의력 경진대회’에 출품했다.심사요원들은 발전 가능성을 높이 평가,최우수작으로 선정했고 그후 성능개선을 통해 실용성을 높였다.감시카메라,전송장치,모니터로 구성된이 무인 감시장비는 현재 32사단 전체에 5대가 배치돼 실전에 활용되고 있다. 유 중령은 이어 무인 감시장비에 잡힌 적을곧바로 사격할수 있는 무인 사격장치,원격 조종장치에 의한 무인 장갑차를 잇따라 개발했다.나아가 무인 장갑차에 지뢰제거 로봇팔을달아 무인 지뢰제거 장비로 활용하고,대침투 작전시 적을 추적할 수 있는 무인 감시비행선도 고안해냈다. 박찬구기자 ckpark@
  • 국정원 1차장 최명주

    정부는 9일 차관급인 국정원 1차장에 최명주(崔命柱)국장,기조실장에 장종수(張悰洙)국장을 승진 임명했다. 또 지난 2일 국정원 산하 기구로 신설된 안전대책통제본부장에 권진호(權鎭鎬)전 국정원 1차장을 임명했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이번 국정원 인사는 전문성과 개혁성,내부 발탁을 원칙으로 했다”면서“특히 안전대책통제본부는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예상되는 테러 위협 등에대비하고 범정부적인 안전대책 수립을 위해 행자부,국방부,경찰청 등 유관 기관 합동으로 업무를 수행할 것”이라고설명했다. ■최명주 1차장 △전남 나주(55) △전주고, 공사 △영국옥스퍼드·케임브리지대 석사 △76년 중앙정보부 입사 ■장종수 기조실장 △강원 고성(56) △휘문고,연대 법학과 △71년 중앙정보부 입사 △부산지부장 △총무관리국장 ■권진호 본부장 △충남 금산(60) △용산고,육사 △연세대 석사 △육군 32사단장 △국군정보사령관 △국정원 1차장오풍연기자
  • 국가정보원 1·2차장-기획조정실장 교체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4일 국가정보원 1·2차장과 기획조정실장을 모두교체,해외담당인 1차장에 권진호(權鎭鎬)국제문제조사연구소장,국내담당인 2차장에 엄익준(嚴翼駿)전안기부3차장을 임명했다. 김대통령은 또 기획조정실장에는 최규백(崔奎伯) 국가정보원 대공정책실장을 승진,발령했다고 박준영(朴晙瑩)청와대대변인이 발표했다. 박대변인은 “이번 인사는 전문성과 국정원 조직의 활성화를 위한 것”이라고 배경을 설명했다. 국정원은 다음주초 본부 1,2급과 지부장 등 고위 간부직에 대해서도 대대적인 인사를 단행할 예정이다. ◇최 신임 기획조정실장 약력 ▲광주·57 ▲국립체신학교·건국대 행정대학원졸 ▲국가정보원 대공정책실장양승현기자 yangbak@- 權鎭鎬1차장 프로필 차분한 학자 스타일로 “어떤 경우에도 부하 군기를잡는 일이 없다”는 게 주위의 평.수준급의 영어와 불어 실력을 갖춘 정보통.천용택(千容宅)국정원장과는 육사 후배라는 것 외에는 특별한 인연은 없다. 부인 이화용(李和鎔·57)씨와 2남2녀. ▲충남 금산·58 ▲용산고·육사 19기 ▲32사단장 ▲국군정보사령관 ▲중장 예편(95년) ▲세종연구소 연구원 겸 육사 교환교수- 嚴翼駿2차장 프로필 66년 중앙정보부에 첫발을 내디딘후 대공분야를 섭렵한 정통 정보맨.90년대초 남북고위급회담 상황실장으로 활약,치밀한 판단력을 인정받았다.94년 남북정상회담 예비접촉에 전념하느라 딸 결혼식에 불참한 일화도 있다. 98년초 조직개편 바람에 휘말려 면직됐었다.부인 임미자(林美子·57)씨와 1남1녀.▲전북 전주·56 ▲고려대 정외과 ▲안기부장 제3특보 ▲안기부3차장
  • 南쪽 햇볕정책 차단 노린듯/무장간첩 시신 발견­왜 침투했나

    ◎北 강경파 입지강화 노려 의도적 도발 가능성/“金正日 주석취임 앞둔 충성경쟁 산물” 시각도 정부 당국자들은 북한이 지난 달 22일 속초 앞바다에 잠수정을 침투시킨지 불과 20일만에 또다시 무장간첩을 침투시킨 것은 북한 내부의 강·온파의 갈등 때문으로 보고 있다. 우리 정부의 햇볕론 등 대북정책에 불만을 품거나 위기감을 느낀 강경파들이 입지 강화를 위해 의도적으로 긴장국면을 조성하려 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지난번 강릉 잠수정 사건이 일어난 직후 해외에 거주하는 일부 북한인들은 못마땅하다는 반응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그룹 鄭周永 명예회장의 방북으로 남북관계가 풀려나가고 북한의 대외 이미지가 개선돼 가는 상황에서 이해할 수 없다는 불만을 토로했다는 전문이다. 북한내 강·온파의 대립 가능성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주석직 취임을 앞둔 金正日에 대한 ‘충성경쟁’의 산물일 수도 있다. 지난 9일 안보관계장관회의에서 안기부는 “북한이 오는 26일 최고인민회의 10기 대의원선거와 金正日의 주석취임 등을 앞두고 충성경쟁 차원의 도발을 감행할 수도 있다”고 전망했었다. 하지만 통상적인 대남 침투공작의 하나일 것이라는 견해도 적지 않다. 북한 군부의 존재 이유는 전쟁준비와 대남 도발에 있기 때문에 이같은 방식의 도발은 언제라도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측이 잠수정 사건 때 사망한 승조원 전원을 조건 없이 돌려보내는 등 유화전략을 펼쳤음에도 북한 군부의 기본노선은 강경쪽에 치우쳐 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이번에 발견된 무장간첩은 지난 번 잠수정 사건과는 상관이 없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일각에서는 잠수정을 타고 육지에 상륙했던 일당이 아니냐고 의혹을 제기하지만 여러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새로 침투하려다 사망한 무장간첩이 틀림 없다고 군 관계자들은 강조하고 있다. 우선 시신의 부패상태가 1∼2일밖에 안됐고 메모리식 무전기, 수중송수신기 등 휴대 장비들이 잠수정 사건의 유류품과는 다르다는 점이 이같은 추정을 뒷받침한다는 설명이다. 특히 시신에서 가까운 지점에서 침투용 수중추진기가 발견됨 점으로 미루어 잠수정이 아닌 공작모선이나 상어급 잠수함에 의해 이동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덧붙였다. □무장간첩 침투 일지 △90년 2월 하순=강화도 하일리에 6명 1차 침투 △〃 10월 하순=〃 2차 침투 △91년 10월 하순=〃 3차 침투 △92년 2월10일=육군 1사단 백학산 동북방 2.5㎞ 지점에 3명 침투 △〃 4월14일=판문점 공동 경비구역(JSA) 241 전방초소에 3명 침투 △〃 5월21일=3사단 180GP 남방에서 3명 사살 △〃 11월3일=1사단 235GP 전방에 3명 침투 △93년 9월4일=5사단 비무장지대(DMZ)에 3명 침투 △〃 10월4일=강원 주문진 동남방 3㎞ 지점에 간첩 시체 1구 발견 △〃 11월30일=강화 교동도 빈장포 해안에 3명 침투 △94년 3월6일=1사단 장단반도 임진강변에 3명 침투 △〃 7월=강원 양양에 잠수정 이용 침투,장비 매몰 뒤 복귀(金동식 진술) △95년 10월17일=임진강 1사단으로 3명 침투,1명 사살 △〃 10월24일=32사단 부여 정각사 지역에서 1명 사살,1명 생포 △96년 9월18일=강원 강릉 강동면 해상에 26명이 탄 북한 상어급 무장 잠수함 침투,23명 자살 및 사살,1명 생포,2명 도주 △98년 6월22일=강원 속초 앞바다에서 침투 잠수정 그물 걸려 나포,9명 전원 사망
  • 北 무장침투 일지

    △90년 2월 하순=강화도 하일리에 고정간첩 金낙중 등 6명 1차 침투. △90년 10월 하순=〃 2차 침투. △91년 10월 하순=〃 3차 침투. △92년 2월10일=육군1사단 백학산 동북방 2.5㎞ 지점에 3명 침투. △92년 4월14일=〃 판문점 공동 경비구역(JSA) 241전방초소에 3명 침투. △92년 5월21일=3사단 180GP 남방 800m 지점에서 3명 사살. △92년 11월3일=1사단 235GP 전방 700m 지점에 3명 침투. △93년 9월4일=5사단 비무장지대(DMZ)내에 3명 침투. △93년 10월4일=강원 주문진 동남방 3㎞ 지점에 간첩 시체 1구 발견(잠수정 이용 침투중 익사) △93년 11월30일=강화 교동도 빈장포 해안에 3명 침투. △94년 3월6일=1사단 장단반도 임진강변에 3명 침투. △94년 7월=강원 양양에 잠수정 이용 침투,장비 매몰 뒤 복귀(金동식 진술) △95년 10월17일=1사단 임진강으로 무장공비 3명 침투,1명 사살. △95년 10월24일=32사단 부여 정각사지역에서 공비 1명 사살,1명 생포. △96년 9월19일=강원 강릉시 강동면 해상에 26명이 탄 북한 상어급 무장잠수함 침투,23명 자살 및 사살,1명 생포,1명 도주.
  • 훈련중 수류탄 폭발 교관·신병 함께 숨져/4명 중경상

    21일 하오 2시15분쯤 충남 공주시 반포면 국곡리 32사단 신병 교육대에서 수류탄 투척 훈련 중 수류탄이 터져 교관 朴承園 중위(24)와 훈련병 金有新(20)이 숨지고 劉景鎬 중위(25·학군 34기) 등 4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사고는 金훈련병이 수류탄을 던지기 위해 안전핀을 뽑았으나 곧바로 던지지 못하고 놓치면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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