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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형직 우상화(신고/김일성자서전연구:7)

    ◎새 전기 「세기와 더불어」 허동찬씨의 분석/“105인 사건의 일원” 선각자로 미화/신민회와 조선국민회 고의적 “혼합”/“안창호 등 독립지사 지도했다” 강변 북한에서 진행되는 역사날조는 다른 인물이 아니라 김일성 자신이 「솔선수범」한다.우리는 이 점에 날카로운 비판정신을 가져야 한다. 김일성은 자기의 부친 김형직을 「민족주의운동을 공산주의운동에로 방향전환시키는 투쟁」을 한 인물로 둔갑시켰는데 이것 뿐 아니라 「3·1운동 이전의 모든 민족주의운동을 지도한 최고의 지도자」로 만드는데도 온갖 힘을 다하였다. 그는 1983년 6월30일부터 3일간 페루·아메리카인민혁명동맹대표단과 만나서 담화를 한 일이 있었다.그런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실려 있는 것이다. 『나의 아버지는 우리나라 반일민족해방운동의 선구자의 한사람이었습니다. 1917년 가을에 유명한 「105인사건」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우리나라에서 민족해방투쟁을 하던 사람들이 1백5명이나 한꺼번에 일제경찰에 체포된 사건이었습니다.일제경찰에 체포된 사람들의 대부분은 조선국민회의 성원들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반일민족해방운동에서 파벌싸움을 하여서는 나라의 독립을 이룩할 수 없으며 오직 인민대중을 묶어 세워가지고 그들의 힘에 의지하여 싸워야 나라의 독립을 이룩할 수 있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김일성은 지금 김형직이 「인민대중을 묶어 세우라」 「무산민중을 조직해라」라고 주장했다고 하고 있다.그러나 필자가 전에 언급한 1919년 10월의 대한국민회 규칙초안을 보면 그 회원의 항목에는 「단지 여자는 중등교육 또는 5연이상 종교의 교습이 있음을 요함」이라는 조목이 있다. 식민지시대 여성에게 중등교육 수료자격을 요구할 정도의 고급한 인텔리집단이 국민회였다.그러한 국민회에 있는 김형직을 김일성은 「무산민중」을 조선국민회에 묶어세우는 「선각자」로 선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심각한 것은 김형직이 「105인사건」의 한사람이었다는 주장이다. 105인사건이란 1917년이 아니라 1911∼12년에 일어났고 조선국민회가 아니라 신민회의 회원들이 일제에 체포된 사건이다. 1910년 평북 선천에서 안명근이 사내(데라우치)총독을 암살하는 의거를 계획하다가 발각되자 일제경찰은 이것을 계기로 애국자들을 체포할 계획을 세웠다.일제는 신민회가 총독 암살을 준비하고 있다는 구실을 내세워 당시의 혁혁한 지사들인 유동설·윤치호·양기탁·이승훈·이동휘등 6백여명을 검거하였다. 총독부의 명석(아카시)경무총감이 그들을 고문하여 그중 1백5인을 기소,투옥하였다.이 사건으로 신민회는 큰 타격을 입고 해체되었다. 신민회란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후인 1906년 외국에서 귀국한 안창호가 결성한 비밀결사였다.김일성은 이 신민회를 고의적으로 조선국민회와 혼합시키고는 「조선국민회의 조직자」 김형직을 이 105인사건으로 「체포투옥」하게 하고있는 것이다. 김일성은 이 조작으로 안창호등 기라성 같은 독립운동가들을 전부 김형직이 지도하였다는 신화를 만들었다.이것은 식민지시대의 신민회·국민회를 통틀어 민족주의자로서는 김형직이 제일이라는 우상화작업인 것이다. 그러나 김형직은 민족주의자이기는 하였지만 별로 두드러진 업적은 없는 인물이다.그 예로 북한이 김형직의 최대업적으로 선전하는 관전현홍통구(홍통구)회의를 들어보자. 이 회의에 대한 북한의 주장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 회의가 주로 조선국민회(대한국민회)의 회원이 참가하여 이룩됐다는 점이다. 3·1운동이 일어나자 식민지 조선에서 도만한 애국지사와 열혈청년들 5백60여명은 1919년 음력 3월15일 만주 유하현 삼원포 서구 대화사에서 회집하여 대한독립단을 형성하였다. 이 독립단에 입단한 지방조직의 하나로 평양숭실학교에 근거를 둔 국민회 인사들이 있었다.그 중심인물은 오능조,고진한,황보덕삼,허영진 등이었는데 이 중 황보덕삼과 허영진은 1919년 12월에 평양에서 체포되었다. 그런데 기독교장로파의 조사(목사,장로 다음가는 성직)였던 오능조(당시 31세)는 체포를 면하게 되어 만주로 달려가 관전현 홍통구의 대한독립청년단 안병찬 아래에서 서기를 하고 있다가 1920년 5월에 안병찬과 같이 체포되었다. 이 대한독립청년단에는 회고록에 나오는 오동진도 생계부장으로 있었다. 따라서 만약 홍통구회의가 있었고 그것이 국민회 성원이 주로 참가한 것이었더라면 적어도 평양의 오능조가 홍통구에 가 거기에서 대한독립단이나 대한독립청년단의 인사를 알게 된 이후라야 가능하다. 오능조는 1919년 12월이후에 홍통구로 갔다.북한에서는 「홍통구회의」가 1919년 8월에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현실적으로는 1920년 전반기라야 그러한 「회의」의 개최가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관전현 홍통구회의」라는 회의는 문헌기록에는 보이지 않아 객관적으로는 누가 참가했는지도 알 수가 없다.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전혀 없었다고 보기도 어렵다.만주의 관전현지방은 주로 평안도의 독립지사들이 모이고 있었으므로 독립단이나 청년단에 망라된 인물의 연줄을 타서 평양의 국민회원들이 거기에 갔을 가능성도 없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1919년 음력 3월에 조직된 대한독립단의 성원은 의병령수,유림수뇌,보약사대표,향약계대표,농무계대표,포수단대표들이었다.또 대한독립청년단의 총재 안병찬도,서기 오능조도 좌익계 인물은 아니었다. 따라서 이런 지방에 가령 김형직이 갔다 하더라도 오능조 등이 주최하는 비좌익계모임에 1920년 전반기에 참가해서 돌아올 수 밖에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민족주의운동을 공산주의운동으로 방향전환」시키는 말을 김형직이 할 여건도 없었다. 관전현 홍통구회의 개최라는 김형직의 「업적」은 물론 회의개최 당일 그가 냈다는 방향전환방침도 역사적현실과는 전혀 맞지 않는 허황한 창작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①「주체사상을 구현하기 위한 조선인민의 투쟁에 대하여」김일성저작선집9 1987년 당간 149면 ②현대사총평25 544면 ③대한계년사 732면 ④대한독립사 김승학편 1965년 한국독립사편찬위원회편 325면 ⑤현대사총평28 15면 ⑥한국독립사 334면 ⑦같은책 325면
  • 새 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김일성자서전연구:6)

    ◎“김형직이 반일·공산운동 접목” 주장/“감옥에서 선진사상 배웠다” 날조/대한국민회를 적색단체로 기술 김일성을 본격적으로 우상화하기 시작한 1968년의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에서 저자 백봉은 조선국민회를 김형직이 창시한 것처럼 왜곡하였다. 그러나 백봉은 적어도 김형직이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는 것과 그가 3·1운동이 있은 1919년 이전에 조선국민회로부터 멀어졌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 ○3·1운동 이전 멀어져 그러나 김일성의 유일독재가 한층더 악화되어 그의 「주체사상」이 마르크스·레닌주의와 근본이 다른 것으로 되어 나가자 김형직에 관한 왜곡도 극단을 달리게 되었다. 김일성은 그의 부친이 「반일민족해방운동을 민족주의운동으로부터 공산주의운동에로 방향을 전환시키기 위한 투쟁」을 벌인 인물이었다고 선전하기 시작하였다.김형직이 아들로부터 제공받은 방향전환의 활동무대는 중국료령성관전현홍통구회의이다. 그런데 김형직이 언제 공산주의자가 되었는가에 대하여 조선전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김형직은 옥중에서 러시아사회주의10월혁명의 소식을 듣고 이것으로 혁명적 신조를 굳히고 선진사상을 연구하게 되었다.그 결과 공산주의를 이해하고 민주해방운동의 방향을 구상하게 되었다」 필자는 전번 졸고에서 김형직은 평양감옥에 투옥된 일이 없었을 것이라고 추정하였다.그때 필자가 제공한 이유이외에도 김형직은 1919년의 3·1운동때 평북 중강진에서 운동의 선두에 섰던 것이 일본기록에 나오고 있다.전과자같으면 할수 없는 일일 것이다.이런 점과 그후 그가 갑자기 졸부로 된 점을 감안해 보면 옥고를 치렀다는 김일성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북한의 주장에 일단 따르고 김형직이 평양감옥에 갇혀 있었다고 가정해 보면 그는 옥중에서 러시아 사회주의 10월혁명의 소식을 듣는 것으로 된다.공산주의자란 없었던 그 때까지 그는 주변에 공산주의자를 「동지」로 두고 있었지 않았다.그에게는 당시 공산주의서적도 있을 리 없었다.「옥중」으로서는 공산주의자가 될 「계기」가 전혀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나온「세기와 더불어」는 김형직에게 공산주의자가 될 「계기」를 제공하기 위하여 지금까지 듣지도 못한 「새로운 사실」을 양산하고 있다.그 날조항목을 여기에 열거해 놓는다. 1)「아버지는 1916년에 방학을 이용하며 간도에 다녀왔다.무슨 줄을 타고 갔는지 알 수 없지만 간도를 거쳐 상해에 가서 손문의 국민혁명파와도 연계를 맺었다」 이런 말은 북한주민도 처음 듣는 말이다.아마도 이것은 김형직을 「부르주아민족운동」도 국제적규모로 경험한 인물로 조작하기 위한 허구일 것이다. 2)㉠「그해(1919년­인용자)여름에 우리는 아버지의 편지를 받았다.…할머니는…혼자소시로 뇌이는 것이었다.『아라사에 갔는지 만주에 갔는지…이번에는 퍽이나 오래두 객지생활을 하는구나』」 ㉡「아버지가 무산동회의(1918년 11월)를 소집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평안북도의 조선국민회 조직대표들과 각 지역의 연락원들이 참가한 이 회의에서는 파괴된 국민회조직들을 시급히 복구하며 광범한 무산대중을 조직에 튼튼히 묶어세울데 대한 활동방침을 밝히셨다」 ㉢「집에 돌아온 아버지는 만주소식과 함께 로씨야에 대한 이야기,레닌에 대한 이야기,10월혁명승리에 대한 이야기를 특별히 많이 하였다」 ㉠㉡㉢의 글은 이런 차례로 김일성이 말한 것을 발췌하여 실었다. 그런데 1919년의 일인 ㉠은 의당 ㉢에 직결해야 하는게 1918년의 청수동회의 문제를 그 중간에 삽입하고 있다.이것이 ㉡이다.이 세가지 문장은 문맥의 앞뒤가 바뀌어진 매우 부자연한 글로 되어있다. 김일성은 마치 소설과도 같이 부친을 1917년 가을에 평양감옥에서 「출옥」시켜 놓고 그해 11월에 「청수동회의」를 소집하게 하였다.옥중에서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자연발생적으로 「공산주의자」가 된 부친이 「무산민중」을 「조선국민회」에 묶어세울 방침을 제시하도록 조작한 것이다. ○거의 앞뒤 안맞는 내용 그러나 「옥중에서 혁명적 신조를 굳힌 아버지」를 막바로 그해 11월의 청수동회의에서 「무산민중」을 조직하는 주인공으로 등장시키는 것은 북한의 어용학자가 보더라도 너무 무리한 작업으로 보인 것 같다.이 때문에김일성은 이번 회고록에서 1917년11월의 청수동회의이후 부친에게 다시 만주와 러시아를 방황하도록 한 것이다. 「집에 돌아온 아버지는 만주소식과 함께 로씨야에 대한 이야기,레닌에 대한 이야기,10월혁명승리에 대한 이야기를 특히 많이 하였다.로씨야에서는 로동자·농민을 비롯한 무산대중이 주인으로 된 새 세상이 왔다고 부러움을 감추지 않는가 하면 신생로씨야가 백파도당들과 14개국 무력간섭자들의 공격으로하여 시련을 겪고 있다고 하면서 못내 안타까워하기도 하였다. 그 이야기들이 모두 생동한 세부와 사실들로 엮어졌기 때문에 나는 아버지가 그동안 연해주에 갔다온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하였다」 회고록은 이런 복종을 깔아 놓은 다음 아래와 같은 문장을 가져 온다. 「아버지는 1919년 7월,청수동회의에서 무산혁명의 역사적필연성을 논증한데 기초하여 8월,중국 관전현 홍통구에서 조선국민회 각 구역장들과 연락원들,독립운동단체 책임자들의 회의를 소집하고 우리나라 반일민족주의운동을 민족주의운동으로부터 공산주의운동으로방향전환할데 대한 방침을 정식으로 선포하시였다」 전에도 말한바와 같이 역사에 실재하는 조선국민회는 3·1운동 이후 상해임정의 지시를 받는 대한국민회로 발전한다. 그런데 이 국민회에 대한 사료가 김일성의 손에 들어오자 이 「조선국민회」는 3·1운동 이후 엉뚱하게도 공산주의단체로 변해버린다.김일성은 이 날조의 주역으로 자기의 부친 김형직을 갖다 앉히고 있는 것이다. 〔주해1〕조선전사16,29면 이후 〔주해2〕같은책 동면 〔주해3〕졸저 김일성평전 35면 〔주해4〕「세기와 더불어!」23면 〔주해5〕같은책 44면 〔주해6〕같은책 45면 〔주해7〕같은책 동면 〔주해8〕같은책 45면 〔주해9〕같은책 48면
  • 새 전기 「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전연구:5)

    ◎서열4위 김형직을 회장으로 날조/조선국민회 실제 주도자 이름 삭제/“일제에 투옥” 주장 사실 아닐 가능성 김일성의 부친 김형직의 우상화에는 조선국민회가 불가결이었다.그는 조선국민회의 결성자로 활약하게 되는 것이다. 일제의 경찰기록을 보면 조선국민회의 조직경위는 다음과 같다. …1914년 9월에 장일환이 하와이의 박용만을 찾아 가 같이 싸울 약속을 했다.그는 귀국하여 총독정치의 상황과 민심을 살피고 이를 박용만에게 통보하여 청년단체를 조직하며 국권회복운동을 하기로 하였다. 장일환은 1915년에 조선으로 돌아와서 1909년에 먼저 돌아와 있었던 전하와이 국민회회원 강석봉과 만났다.이해 겨울 그는 또 만주 안동현의 백세빈을 만나 조선국민회를 조직하도록 합의하였다.이들은 간도에 이주할 계획까지 하였으나 그 계획은 실현하지 못하였다. 1917년 2월.배민수,김형직이 조선국민회에 가입하여 장일환의 자택에서 회합하였다.거기서는 평양 장로파신학교에 조선각도 청년들을 모아 국민회를 조직할 것을 협의하였고 3월23일 13명이 모이도록 결정되었다. 그러나 결성 당일에는 6명이 결석하였다.이 때문에 9명이 이보식의 집에서 회합하고 장일환을 회장,배민수를 통신겸서기,백세빈을 외국통신원으로 선출하여 조선국민회를 조직하였던 것이다. ○장일환이 우두머리 1917년6월,회원 배민수,김형직,노선경 등은 각기 자기의 식지를 잘라 「대한독립」이라고 혈서를 썼다.다른회원들 중에는 「결사」라고 혈서하는 이도 있었다.이 때 배민수는 중국의 무관학교에 입학할 뜻을 밝혔다.또 국민보를 발간하여 회원에서 보내는 계획도 있었다. 17년 7월,노선경은 간도의 동지들과 연락하는 통신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서간도로 갔다.그리고 김은현,조옥소는 양경수에게 돈 일만원을 내게 하며 그 일부로 권총을 구입하려고 하였다. 그후 조선국민회 회원은 일제경찰에 체포되었다.평양의 회원은 1918년 2월 장일환 이하 12명이 신병송검되고 기타 13명은 석방되었다…. 이상이 일제 경찰기록의 요지이다.이기록을 보면 조선국민회는 2년반동안 갖은 고생을 다한 장일환이 17년 3월 23일에 세운 결사이다. 그는 조선에서 강석봉,백세빈,배민수,김형직,이보식 등을 차례로 동지로 삼아 그중 백세빈,배민수를 간부로 뽑았다.나머지는 회원이 되어 각각 자기 맡은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러나 북한이 이러한 일제자료를 입수한 후 착수한 것은 김형직을 제외하고는 자료에 나오는 인명을 모조리 은폐하는 작업이었다.은폐하기 위해서는 일본측 자료를 개찬하여야 하는데 개찬한 결과는 북한에서 발간된 조선전사16에 사진 판으로 실려 있다. 이를 참작하면서 변조과정을 밝혀 본다. 일제자료에는 조선국민회 회원의 본적·주소·직책·이름을 회장 장일환(32세)외국통신계 백세빈(25세),서기 배민수(22세),서당 교사 김형직(34세),회원 서광조의 순으로 밝히고 있다.그러나 조선전사16은 이 일제기록 중에서 순번 제4위인 김형직의 본적과 주소,이름만을 사진판으로 하여 다음과 같이 책에 실었다. 일,회원씨명 본적‥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 남리 주소‥평안남도 강동군 정읍면 동삼리 서당교사 김형직 당삼십사년… 이와같은 기록은폐작업으로 당시 강동군 고읍면 동삼리 내동부락이란 시골에 있었던 김형직은 평양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다른 간부를 제쳐놓고 일약 「회장」으로 「출세」하는 것이다. 동지들을 없애 치운 이유는 그들이 기독교신자이고 대부분이 후에 상해임정과 연계를 가지게 되는 민족주의자였기 때문에 김일성체제의 의사와는 어긋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회고록에는 여태까지 그렇게도 철저하게 삭제하고 은폐한 이름을 일부 복원시키고 있는 것이 이채롭다.김일성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아버지는 장일환 배민수 백세빈 등 애국적인 독립운동자들과 함께 1917년 3월 23일,평양 학당골에 있는 리보식의 집에서 조선국민회를 결성하였다.조선국민회에 망라된 청년투사들은 손가락을 잘라 「조선독립」「결사」라는 혈서를 썼다』 일본기록에 의하면 김형직은 「대한독립」을 혈서한 인물인데 이 혈서는 아마도 회장 장일환 앞에서 썼을 것이다.그러나 김일성은 맹원 김형직의 입장을 은폐하고 이상과 같이 그를 장일환을 지도하는 인물로 올려 놓았다.그러나 김일성이 한 말의 내용은 일본경찰기록을 크게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다.그는 지금도 여전히 경찰기록 이상으로는 조선국민회에 대해서 모르고 있는 것이다. ○일제기록 이상 몰라 조선국민회 회원은 1918년 2월 이전의 어느 날,25명이 일제경찰에게 체포되어 그중 12명이 감옥생활을 하였다.북한에서는 이것도 체포자가 백여명이었다고 과장하고 있지만 문제는 감옥에 간 12명중에 김형직이 들어 있었는가 어떤가이다.필자는 이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다.그 이유는 아래와 같다. ①52년 전기에서는 김형직이 3·1운동이후에 평양감옥에 들어갔다 하였다. ②1961년에 발간된 「조선근대혁명운동사」로부터 3∼4년은 그가 1916년에 투옥되었다고 변경하고 있었다. ③그랬던 것이 조선국민회 자료를 입수한 후부터는 투옥이 1917년 가을부터 18년 가을까지로 다시 변경되었다. 김형직은 만경대에서는 그 부친 보현의 장남이었다.따라서 그 「혁명적가정」에서는 많은 일가친척들이 그의 일거일동에 주목하고 있었다.그런데도 그들은 김형직이 3·1운동 이후에 투옥되었다고 주장한 것은 그들이 그의 투옥 사실을 몰랐던 것으로 된다.투옥의 해가 세번이나 변경되는 추태를 보면 김일성 자신도 몰랐을 가능성이 높다. 현대사자료25,37면 같은책 38면 같은책 동면 조선전사16,22면 같은책 동면 세기와 더불어1,26면 1952년 4월 20일자 로동신문의 「김일성장군의 전기」참조 「조선근대혁명운동사」,북한 과학원역사연구소간 일본번역판,2백92면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15면
  • 「1백년 현대문학사」 자리매김 시도

    ◎고대 국어국문학연,국어·국문학사 서술방법 학술발표회/87년 해금된 카프계시인도 시사에 포함해야/소설경우 근·현 시대구분 구체적 언급없어 갑오경장이후 1백년에 이르는 우리 현대문학사를 점검하고 21세기에 우리 문학의 지향점을 제시하기 위한 학술발표회가 17일 상오10시부터 고려대 인촌기념관에서 열린다.고려대 국어국문학연구회(회장 서연호교수)가 「국어학사및 국문학사 서술방법의 반성과 새로운 모색」이라는 공동주제로 마련했다. 「현대시사 서술방법과 방향」이라는 주제로 발표에 나선 최동호교수(고려대·국문학)는 지금까지 독립된 장르사로서 현대시사가 통시적 전망을 가지고 서술된 예는 드문 것으로 보았다.그러면서 『시사서술은 하나의 중심점을 찾아나가려는 지적 노력이며 변화하는 것들 속에서 변하는 것들과 변하지 않는 것들의 끝없는 생성과정을 동적으로 포착하려는 것』이라는 견해를 내놓았다. 기존의 시사서술이 1920년대까지 머물러 우리시대의 시사서술에는 크게 영향을 못미치는 것이 결정적 약점이라고 지적한 그는지난 87년 해금된 카프계 시인들을 적절히 수용한 현대시사를 전체적으로 체계화한 시사기술이 절실히 요구된다고 주장한다.그는 이런 문제들은 그동안 우리가 「근대」냐 「현대」냐,좌파냐 우파냐 하는 이데올로기문제등에 집착,자유로운 시사서술을 제한해왔고 서구 모델을 지나치게 염두에 둔 데서 비롯됐다고 분석한다.따라서 앞으로의 시사서술은 「민족적 주체의 자기 각성」을 기본적 토대로 삼아야한다는 주장이다. 숭실대 한승옥교수의 발제는 「현대소설사 서술방법의 반성과 새로운 모색」.우리나라에서는 아직까지 근·현대문학이 분명히 구분돼 논의된 적이 거의 없다고 밝힌다.다만 한국현대문학의 기점에 대한 학계의 이견을 좁히고 남북분단으로 단절됐던 우리 문학의 통합에 대한 전망을 제시할 계기를 찾는 일이 중요하다는 입장을 보인다. 현대소설의 기점 문제를 둘러싸고 이광수의 「무정」과 홍명희의 「임꺽정」,1925년 등장한 카프문학등 학계에 이견이 많았다는 그는 1925년 전후가 타당하다고 주장한다.3·1운동을 계기로 시민정신이 대두되고 민족정기가 구현되면서 양식적인 측면에서 전통계승과 서구의 수용이 통합되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자신의 주장에 대한 근거로 든다. 소설사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문학사 전반에 걸쳐 문학을 역사나 정치·경제·사회적인 문제와 떼놓고 언급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한계를 내포한다는 것이 그의 문학사관.그리고 1백년이라는 우리나라 현대문학의 역사는 외국의 그것에 비해 너무 짧고 더군다나 일천한 현대문학사를 통해 거론되는 작품들이 한정돼있어 새로운 작품의 발굴과 작품평가에 더 많은 관심을 쏟아야 한다는 것이다. 「현대 희곡사 기술방법과 시기구분」을 발제로 한 서연호교수(고려대)는 우리의 유일한 희곡사인 유민영의 「한국현대희곡사」(1982)에 대한 고찰로 기존 희곡사서술의 문제점을 짚어나가기로 했다.「한국현대희곡사」는 신파극이 시작된 1911년을 기점으로 식민지세대가 끝막음하는 1969년까지 희곡형태로 쓰여졌거나 무대에 올려진 것을 선별하지 않고 모조리 서술대상으로 삼는데 중시했다.왜냐하면 모두가 「근대의식사적관점」에서 쓰여졌기 때문이라고 덧붙인다. 서교수는 이책이 몇몇 개별적인 작가들의 연구에서 실증주의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희곡사를 극작가 중심으로 서술한 것은 선구적인 업적이라고 평가한다.그러나 과거에 발표된 작품들 가운데 어떤 작품이 훌륭한 작품인가를 선별하고 규명하는 일이야말로 희곡사 기술의 일차적인 과제라는 견해.이는 시대구분과 서술관점등이 애매하고 구체성이 부족해 개별적인 작가론,작품론을 한데 모아놓은 작가및 작품 연대기적 성격이 짙은 희곡사일 뿐이라고 규정짓는다. 마지막으로 그는 시기구분의 문제에서 현대희곡의 시발은 1902년 협률사를 기점으로한 이두현의 주장에 동의했다.그리고 이를 세분해 제1단계(1902∼1920;신파극의 수용과 희곡 장르의 성립단계),제1단계(1921∼1944;리얼리즘의 대두와 대중극의 확산단계),제3단계(1945∼1959;이념의 대립과 리얼리즘의 수정단계),제4단계(1960∼현재;산업사회의 성립과 연극적 표현의 확대단계)로 구분하고 있다. 이번 학술발표회는 기존 국어학사및 국문학사 서술의 문제점들을 비판하고 앞으로의 바람직한 서술방법을 공동으로 모색하는 가운데 90년대 우리 문단을 강타중인 포스트모더니즘논쟁과 문학위기론 와중에서 문학사 서술을 점점할 수 있는 계기로 여겨지고 있다.
  • 새 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4)

    ◎김형직 우상화에 조선국민회 이용/회원명단에 포함된 사실 뒤늦게 알아/68년판 전기부터 정치·군사 투쟁가로/단체성격도 임정과 관계 없는듯이 기술 김일성은 그의 부친 김형직이 조선국민회 회원이었다는 사실을 50세가 넘도록 모르고 있었다.이 점은 부친이 조선국민회의 「지도자」였다는 대대적인 선전이 행하여지고 있는 오늘의 시점에서 보면 특기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김일성은 조선국민회 뿐 아니라 그것보다 더 기초적인 사항들에 대해서도 모르는 것이 많았던 인물이다.예를 하나만 들면 그는 52년 전기에서는 부친이 1928년에 36세로 사망하였다고 말하고 있다.그후 사망한 해는 26년으로 시정되었으나 사망당시의 부친의 나이는 1964년에 나온 박상혁의 「조선민족의 위대한 령도자」까지 32세로 시정된 일이 없었다.이러한 전기들에는 조선국민회 같은 것은 단 한줄도 기술되지 않았었다. 조선국민회는 1917년에 평양에서 결성된 비밀결사이다.이 결사의 회원명단에 김형직의 이름이 있는 것을 발견한 사람은 당시 일본에서 조총련의영향하에 있었던 재일사학자 강덕상교수이다. 강교수는 지금은 조총련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고 있지만 1960년대까지는 북한을 지지하고 있었다.그런 관계로 그는 60년대에 김형직과 관련된 자료들을 조총련을 통하여 북한에 보냈다. ○재일사학자 발견 그런데 이 자료를 입수한 무렵의 북한은 김일성의 유일지도체제를 세우는 와중에 있었다.그는 1967년에,해방전 보천보전투 때 이 전투를 국내에서 도운 박금철 이효순 등을 숙청하고 「당의 유일사상체계 확립」을 서두르게 되었다.당의 유일사상체계 확립이란 북한주민이 오직 김일성의 사상만으로 사고하고 그의명령지시 대로만 움직이며 과업수행 과정에서 언제나 김일성에게 충성을 바쳐야 하는 체제를 확립한다는 말이다. 김일성은 이 책동의 일환으로 1968년에 백봉이라는 가명을 쓴 저자이름의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을 출판하게 하였다.종전의 김일성전기와는 내용이 판이한 이 전기에서 비로소 「조선국민회」를 김형직 우상화의 도구로 이용한 것이다. 그는 이 책에서 김형직을 우상화하는데 단순히 그를 과대선전하는 정도로 만족하지 않고 역사적인 존재인 국민회 자체를 북한체제의 「정통성」에 부합되도록 그 활동내용을 뜯어 고쳐버렸다. 1917년에 실제로 평양에서 조직된 조선국민회는 1919년에 대한민국회로 개편되어 상해임시정부의 지도를 받게되는 조직이었다.이 국민회가 19년 10월에 상해임정에 보낸 규칙초안을 보면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설립목적이 있다. 「대한정을 관민상화하고 자순하며 신의 공보를 유종함을 목적으로 함」 당시의 대한국민회는 일제식민지하에서 대한이란 국호를 사용하고 관민이 서로 화합하여 자문을 주고 받는 정치를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그러나 이 단체는 동시에 신에만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기독교단체이기도 하였다.훌륭한 독립단체이기는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종교결사이기도 하였던 것이다.대한민국회의 전신이 조선국민회이므로 조선국민회도 이상과 거의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한편 68년 백봉이 쓴 전기에 나오는 「조선국민회」는 그 목적을 다음과 같이 설정하고 있다. 「이조직은 우리 나라에서 과학적 마르크스­레닌주의사상이 보급되기 이전에 벌써 반제민족해방의 과업을 정확히 내세웠으며 조국독립을 달성하기 위한 방도로서 외국세력에 의거하는 것이 아니라 자주적인 힘에 의거하며 청원이나 개량의 방법이 아니라 정치적활동과 군사적 활동을 적절히 배합할 것을 내세웠다」 북한에서는 이상과같이 원래의 조선국민회나 대한국민회의 설립목적에서 신과 종교를 빼고 이 결사가 마치 무신론자의 단체인 것처럼 만들었다.또 외세의존이나 「청원이나 개량의 방법」같은 것을 부정하여 상해임정과의 연계를 끊어버렸다.이 국민회의 성원들 속에는 미국이나 재미교포와의 연계를 가지고 있었던 인물이 많았는데 이러한 연계마저 끊어서 「반제민족해방의 과업」을 수행하는 「자주적인」정치비밀결사였던 것처럼 그 목적을 바꾸어버린 것이다. 김일성은 50세 무렵까지 부친 김형직의 정치활동 중에 조선국민회원 시기가 있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그러나 이 점에 대하여 알게 된 순간부터 조선국민회의 활동을 그대로 두는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존재인 조선국민회가 설정한 목적 자체를 이상과 같이 변경하게 하였다. ○50세 넘도록 몰라 그러나 백봉의 전기가 나오는 무렵은 아직 김일성의 유일사상체계 확립책동이 초기단계에 있었다.이 때문에 북한이 설정한 목적에는 「마르크스·레닌주의사상이 보급되기 이전」시기에 국민회가 결성되었다는 설명이 붙어 있다.이것은 조선국민회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조직이 아니며 김형직도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는 의미로 보아 무방할 것이다. 또 백봉은 「이 조직은… 3·1운동 이전의 가장 큰 반일운동조직이었다」라고 하였다.3·1운동 이전의 가장 큰 반일조직은 따로 있지만 이러한 표현은 김형직이 3·1운동 이전 밖에 조선국민회에 있지 않았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백봉은 3·1운동 이후 조선국민회가 대한국민회로 발전하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이 때문에 그는 독재자인 아들의 뜻과는 정반대로 이승만이 설립한 상해임정에 김형직이 붙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조선국민회는 3·1운동 이전의 조직이라고 그 활동을 중도에서잘라버렸는지도 모른다. 하여간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은 김형직이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조선국민회에서의 그의 활동은 3·1운동 이전이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점에서 그후의 전기들과 구별되는 전기이다. 현대사자료25,강덕상론,일본 미스즈서방간,544면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백봉저,1968년 평양 인문과학출판사간,14면 같은책 동면
  • 「낯모르는 이의 잔치」 언제까지/황규호 문화부장(데스크메모)

    ◎노벨상 기대에 앞서 한국문학 번역 소개 절실 「북구의 밤은 스톡홀름에 일찍 찾아들었다.그것은 가을철도 다 가고 어두운 겨울이 바로 지척에 다가왔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미국의 작가 I 월레이스의 「소설 노벨상」은 겨울이 유난히 빠른 극지 가까이의 스톡홀름을 을씨년스럽게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된다.이맘때가 되면 세계의 이목은 스웨덴 한림원이 있는 스톡홀름으로 쏠리고,올해도 예외없이 노벨문학상이 발표됐다.수상의 영예는 수상자의 국적도 얼굴도 생소한 서인도제도의 영련방 세인트루시아 출신 시인 데레크 월코트에게 돌아갔다. ○세계의 이목 북구 쏠려 그런데 행여나 했던 한국문학은 그 반열에 오르지 못했다.후보로 끼어있었다는 보도조차 없다.우리는 서구의 문학을 어렴풋이 알아차린 이른바 신문학기(1894∼1918년)를 거쳤다.그리고 이어 현대문학기(1920∼현재)를 맞았다.문학사에서 고전적 국문학시대를 제외하고 갑오경장에서 3·1운동 직전,3·1운동 이듬해부터 지금까지를 신문학기와 현대문학기로 구분한 두 시기를 합산하면 1세기에 이른다. 우리가 이렇듯 현대문학사를 맞고 있던 1968년 일본의 가와바다(천단강성)가 「설국」으로 동양에서 처음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그때 우리도 한가닥의 희망을 걸어본 적이 있다.이 수상작품은 작가가 몸담아 사는 자국의 정서를 가장 아름답게 묘사했다는 비평이 내려지기도 했다. I 월레이스는 「소설 노벨상」서문에서 이런 말을 했다.「내가 수집한 노벨상 수상의 역사,각 아카데미의 소개,수상후보의 선정,투표 암거래,수상 수속과 방법,수상에 관한 논쟁,정보와 가십 등 이른바 내막은 사실이며 정확하다」고….물론 노벨상 각 분야를 거론한 이 대목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하지만 심상치 않은 내막속에는 있을법한 일도 들어있는 것이다.거기에는 나쁜 의미의 힘이 아닌 지극히 상식적인 힘이 작용됐을 것이라고 추정을 할 수도 있다. 이 힘에 대한 해답이 어떤 것인가는 곧바로 나온다.세계 독자들이 주지할 수 있는 한국문학의 전파다. 우리 문학작품들이 세계의 언어장벽을 넘도록 도와주는 작업이다.우리도 한국의 언어로 노래를 하고,또 이야기를 한 훌륭한 작품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 없다.이웃 일본과 견주어 언어환경과 인간심성이 엇비슷한 동양문화권임을 상기할 때 더욱 그렇다. 한국문학도 노벨상에 접근할 수 있다는 풍문은 그동안 무성했다.그러나 누구의 무슨 작품이 어때서 가능하다느니 따위의 우리들끼리의 이야기가 소문으로 나돌았을뿐 한번도 가시화되지 않았다.노벨상은 이제 서구언어문화권 작가들에게만 돌아가는 상이 아니다.세계의 작가들이 공유한다는 인식을 가지고 보다 적극적으로 도전해야 할 시기에 도달했는지도 모른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계속의 한국문학을 지향하는 작가들의 노력도 요구된다.또 하나는 사회여건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I 월레이스가 소설 서문에서 주장한 내막 모두를 권장하는 것은 아니나 우리 모두는 작가들에게 힘을 주어야 한다.그 하나가 본격적으로 번역사업을 추진,한국문학을 세계출판시장을 통해 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언어장벽 넘게 도와야 한국문학의 해외소개를 위한 번역사업은 문예진흥원에 의해 국책사업으로 이루어진다.주로 영어·불어·독어·러시어가 차지하는데 올해의 번역은 겨우 18건으로 돼있다.작년 91년도 10건에 비해 늘어나긴 했다.여기에서 한국문학의 해외소개는 국책 번역사업에만 의존할 수 없다는 현실을 발견하게 된다.참고로 국내출판업계의 91년 한햇동안 해외문학번역 간행수치를 제시하면 자그마치 1천3백26종에 이른다.이를 문학교류 역조 현상의 절대적 수치로 들여댈 수는 없다.그러나 엄청난 차이는 분명히 있다. 어떻든 노벨문학상은 한국문학이 한번쯤은 올라서야할 고지다.한국작가의 수상소식은 감감한데,국내언론들이 너나 나나 밤을 새운 까닭도 여기있다.자료도 변변히 외신을 타지 못한 탓에 물어물어 자료를 챙겨 신문을 만들었다.그러다보면 서글퍼진다.낯모르는 이의 수상잔치를 한상 차려주기 위해 밤을 지샌 것이 조금은 서운해서다.
  • 삼고초려에 “국가가 부른다면 수락”

    ◎「중립내각」 이끌 현승종총리 스토리/교단46년 학생사랑·직언 일관/정도 어긋날땐 단호하게 질책/평남 개천출신… 2개대학총장 역임 14시간의 대장고끝에 내린 결정이었다.「국가와 국민이 부르므로…」.하오10시에 춘천집에 도착한 「신임총리」는 밖의 수많은 보도진이 몰려있음에도 아랑곳없이 이튿날 낮12시가 되어서야 대문을 나섰다. 현승종교총회장에 대한 국무총리 지명과정은 삼고초로의 고사를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헌정사상 신기원인 중립내각을 출범시키려는 노태우대통령의 의지와 46년간 교직을 떠나본적이 없는 원로교육자 현회장의 총리직 수락에 대한 번민은 결국 역사의 소명앞에 하나가 됐다. ○“역사적 소명” 번민 현회장은 총리직 수락을 여러차례 고사했다.천직으로 알고 살아왔던 교직생활과 역사적책임 사이에서 신임총리는 번민했다. 그러나 결국 『국가의 부름이라면 기꺼이 나서겠다』고 결정했다. 국가는 「학생사랑과 직언」으로 한평생을 살아온 노교육자를 세상에 나오도록 강요한 것이다. 현신임총리는 역시 교육자출신 총리이다. 6공들어 이현재·강영훈·노재봉·정원식 전임총리도 모두 교단에 섰었다. 항간에는 이번 중립내각의 총리가 단명할것이라느니 잘해야 본전일것이라는 얘기들도 나돈다.물론 과도기의 중립내각임에는 틀림없다.그러나 60년 4·19이후 허정총리의 과도내각이 불과 3개월여기간이었지만 당시 총선을 훌륭히 치러냈던 역사적 경험이 우리에게는 있다. 따라서 이번 「현승종 내각」에 거는 기대도 여느때와는 다르다. 그는 일제치하인 43년 경성대법과를 졸업한뒤 고려대전임강사를 시작으로 고대교수·학생처장·성균관대총장·한림대총장에 이르기까지 단 한번도 교직을 떠나본 적이 없다. ○강직한 선비 품성 성균관대총장이던 80년 「서울의 봄」당시 총장실복도에서 농성하던 제자들의 모습에 실망,즉각 사표를 제출해 선비다운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제자들은 스승을 생각할 때면 항상 깐깐하고 소신있는 선비의 모습과 함께 학생들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몸을 아끼지않는 자상한 모습을 떠올린다. 4·19당시 팔을 뿌리치며 달려나가는 제자들의 옷자락을 잡고 『제발 몸조심하라』며 눈물을 흘리던 모습은 두고두고 고대 4·18세대의 화제로,「눈물교수」의 추억으로 간직된다. ○주말등산 노익장 3·1운동직전인 1919년 평남 개천에서 출생,항일의병장이었던 조부가 개설한 서당(삼수재)에서 한문을,개천보통학교에서는 신학문을 공부했다.평양고보시절 그의 성적은 뛰어났고 특히 수학·자연과학분야에서는 「독불장군」으로 불리기도 했다. 대학졸업후 학병에 징집당한 그는 견습사관시절 중국 남경에서 해방을 맞았다.그러나 그의 귀국은 해방 이듬해인 5월이었다.귀국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으나 병든 동포들을 차마 외면할 수 없어 이들 뒷바라지 때문에 늦어졌던 것이다. 현총리는 올해 73세의 고령이면서도 비상한 기억력과 등산으로 다진 건강을 과시하고 있다. 부인 홍영표여사(70)와의 사이에 3남1녀를 두고있으며 한림대총장 취임후부터 춘천의 32평아파트에서 부인과 단둘이 생활해왔다. 「다시 한번 태어난다해도 학원에서 한평생 일하고 싶다」는 현총리의 학자적 소신과 교육행정경력,강직한 성품은 새역사 현장을 지켜보는 국민들의 기대와 겹쳐 내일을 궁금하게 하는것이다.
  • 다시 새기는 그 충절/이달의 독립운동가 신규식선생

    ◎서울신문사·국가보훈처 공동선정 선열들의 애국·애족사상을 기리기 위해 서울신문사와 국가보훈처가 마련한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예관(예관) 신규식선생이 선정됐다.9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신규식선생이 한·중수교 시점에서 재조명된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선생은 단순한 독립운동가로서가 아니라 독립운동의 2대 조류인 외교중심론과 무장투쟁론을 접목시켰을 뿐만 아니라 국력배양·민중계몽운동·경제적 자립기반 확충등 총체적 운동을 치열하게 전개했기 때문이다.신규식선생의 43세 짧은 생애를 되새겨 본다. ◎상해 임정수립 주역… 중국승인 얻어내/한·일 합방 직후 망명… 12년간 항일운동 매진/신해혁명 참여… 손문정부와 연계투쟁 길터/22년 임정분열에 통분,병석에서 25일간 단식… 43세로 생 마감 신규식선생이 남긴 명저 「한국혼」은 이렇게 시작된다. 『마음이 죽어버린 것보다 더 큰 슬픔이 없고,망국의 원인은 이 마음이 죽은 탓이다.…우리의 마음이 곧 대한의 혼이다.다 함께 대한의 혼을 보배로 여겨 소멸되지 않게하여 먼저 각자 자기의 마음을 구해 죽지 않도록 할 것이다』 이 글에 담긴 선생의 철학은 목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소신찬 행동으로 이어진다.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 사이 망국의 한을 온몸과 마음 바쳐 투쟁으로 승화시킨 신규식선생의 웅변이 지금 이 시대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음은 무엇을 뜻하는가.우리의 독립이 진정한 의미의 독립이라 할지라도,나라가 남과 북으로 갈라진 책임은 누가 져야 하는 것인가. ○충북 문의서 출생 신규식선생은 1880년 1월13일 충북 문의군(현재 청원군)에서 중추원 의관을 역임한 신용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신채호 신백우와 함께 「산동삼재」라고 불렸다. 17세때 신학문에 뜻을 세우고 상경,관립한어학교를 거쳐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여 무덕을 쌓게 되었다.신동으로 불리며 한학등 구학문에 능통하고 문학에도 탁월한 자질을 지녔지만 기울어가는 국권을 회복하는 길은 오직 국력배양에 있다고 생각했다. ○을사년 순국기도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육군참위로서 지방군대와 연계,대일항전을 계획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13도 유생들이 조약 철회를 상소하고,장지연은 황성신문에 피를 토하듯 「시일야 방성대곡」을 썼다.민영환 조병세 홍만식등은 자결했다. 민심이 가마솥 끓듯 펄펄 끓을 때였다.청년장교 신규식은 계동·가회동·운니동등의 솟을대문들을 골라 몽둥이로 후려치며 미친듯 소리 질렀다. 『을사오적들은 나오너라!』 신규식은 호랑이라도 잡을 듯 거리를 쏘다녔지만 역부족이었다.운니동 집으로 돌아 왔을 때 그는 자신이 한낱 미약한 존재였음을 확인했을 뿐이다. 사흘을 문걸어 잠그고 굶었다.그리고 결론을 내렸다.민영환등의 순국은 소극적 행동이 아니라 적극적 투쟁의 하나라고 생각했다. 『죽음은 거름의 역할을 하는 것­내한몸 거름이 되어 무수한 열매를 맺을수 있다면 여한이 없겠다』(「한국혼」 참조·26살 신규식의 이같은 생각은 그러나 후일 「치욕을 알면 피로써 죽음을 할 수 있고,치욕을 씻으려면 피로써 씻어야 한다」는 투쟁적 신념으로 바뀐다) 신규식은 독약을 마셨으나 문을 부수고 들어온 가족들에 의해 겨우 목숨을 구했다.그러나 약기운이 번진 오른쪽 눈은 시신경을 다쳐 애꾸가 되었다.거울을 들여다 본 신규식은 냉소를 지었다. 『애꾸,그렇다.이 애꾸눈으로 왜놈들을 흘겨보기로 하자.어찌 나 한사람만의 상처이겠는가.우리민족의 비극적 상징이다』 이때부터 청년 신규식은 흘겨볼 예(예)자,볼 관(관)자­예관으로 자호를 삼아 끝까지 사용했다. 문동학원·덕남사숙의 설립 또는 지원,중동학교장 취임,공업전습소생들을 중심으로한 「공업연구회」조직,월간 「공업계」창간,윤치성 민대식등 퇴역장교를 규합한 황성광업주식회사 설립·운영,민족종교인 대종교에의 입교,분원자기공장의 설립과 고려자기 재현운동…등등이 선생의 무서운 행동력을 입증한다. 그러나 1910년 「보호」라는 양의 탈을 쓰고있던 일제는 본색을 드러냈다.경술국치가 그것이다.우리나라는 통째로 그들의 입속으로 삼켜졌다. 선생은 다시한번 자결을 생각했으나 마음을 고쳐먹고 1911년 상해로 망명,운명할 때까지 12년여 동안 위대한 업적을 남기게 된다. 첫째는 당시세계정세를 능동적으로 이용하면서 독립운동의 2대 조류인 외교중심론과 무장투쟁론이라는 두가지 운동노선을 접목시켰다는 점이다.혁명가적 열정과 선각자적 혜안을 함께 갖춘 선생은 중국혁명동맹회에 가입,송교인 진기미 손문등과 교류하며 중국신해혁명에 외국인으로 참여하여 나중 중국국민당정부와의 항일연계투쟁의 기틀을 마련했다. 1911년 여름 어느날 선생은 손문과 함께 자리를 했다. 『예관선생이 우리 동맹회를 도와주시니 참으로 장한 일이십니다』 『바로 중국혁명운동이 한국독립에 직결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점에서 그렇습니까?』 『역사적으로 볼 때 양국 사이는 순치(순치)의 관계였습니다만 중국은 우리를 속국시한 것도 또한 사실입니다.혁명이념으로 볼 때 과거 우리에게 진 묵은 빚을 청산해주리라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과연 듣던대로 훌륭한 논객이요.애국자이십니다』 선생과 손문의 혁명적 동지애는 변함없이 지속됐다.이 우정을 바탕으로 선생은 손문의 도움을 얻어 많은 우리 젊은이들을 적성에 따라 교육시켰다. ○3·1운동을 점화 둘째는 3·1독립운동과 상해임정수립의 주춧돌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선생은 1917년 조소앙 박용만등 13명의 독립운동가와 함께 선포한 「대동단결선언」을 통해 핀란드 폴란드등 당시 피압박민족의 독립을 열거하며 이는 좋은 징조이므로 우리나라도 통일된 최고기관 즉 정부의 조직필요성을 역설했다.또 국내와 일본등에 동지들을 밀파,2·8독립선언에 영향을 끼쳤다. 1919년 3·1운동이 터졌고 상해에서 선생은 프랑스 조계내에 독립임시사무소를 개설,정부수립을 추진했다.(언론인이며 3·1운동 민족대표 33인중 한명인 오세창은 『3·1운동은 예관에 의해 점화되었다』고 단언하고 있으며 당시 일경비밀정보도 『…이 소요를 유발시킨 데에는 상해거주 불령선인들의 선동에 크게 힘입었다』고 쓰고 있다) 상해임정도 수립되었고 5월에는 손문등 중국광동정부로부터 국가승인도 얻어내는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정부수립후 고질적 파벌의식과 지방색·출세욕 등이 뒤엉켜 1921년4월 이후 임정은 혼란에 빠져들었다.선생은 병원에 누워 의정원 회의참석을 거부했다.4월10일 소위 「재미파」이승만이 내각수반이 되었다. 이듬해까지 병석에 누운 선생은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한국인들이 단합되지 않는 것을 통탄하면서 25일동안이나 불식·불언·불약을 고집했다. 이튿날인 1922년9월25일.선생은 마지막 남은 숨을 호흡단절법으로 끊고 이승을 버렸다. 『정부…정부…』 희미한 소리가 숨을 거두는 그의 목에서 새어나왔다.단식 25일만에 처음 나온 말은 선생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말이 되었다.그 말은 70년이 지난 지금 이 시대에도 남아있을 유언이 아닐는지…. ◎독립운동에 외교적으로 크게 공헌/역사적 평가/신승하 고려대교수·동양사 예관 신규식은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상 알려져있는 것보다 숨겨져있는 공이 많은 분이다.특히 중국에서 한국임시정부가 수립될 수 있었고 또한 중국정부나 중국인들로부터 중국에서 우리나라 임시정부가 독립운동을 지속할 수 있도록 지원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은 분이다.그런데 불행하게도 1922년 43세의 젊은 나이로 일찍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그 평가를 제대로 받지 못한 분이다. 구한말 애국계몽운동때부터 구국자강을 위하여 실업과 교육밖에 없다는 신념아래 학교를 세우고 또한 우리나라에선 제일 먼저 실업전문잡지인 「공업계」를 발간하였다.그러나 나라를 잃게 되자 중국으로 망명하여 상해에서 중국혁명당 인사들과 접촉하고 동맹회에 가입하였다.그리고 중국이 잘되어야만 우리나라도 잘될수 있다는 생각아래 그들과 함께 신해혁명에 참가하여 이후 중국 혁명당인들과의 교류가 더욱 밀접하게 될 수 있었다. 그는 인재의 양성이 절실하다 보고 우리 젊은이들을 위하여 학교를 세웠으며 또한 중국인의 무관학교는 물론 일반 학교에도 입학을 주선하고 심지어 외국유학까지 보냈다.그리고 독립운동을 널리 알리고 선전하기 위하여 진단이란 잡지를 상해에서 발간하였다. 1921년에 손문이 광주에서 광동호법정부를 수립하자 한국임시정부 의정원은 그를 전권사절로 파견하였다.그리하여 한국임시정부가 호법정부의 승인을 받고 중국의 각 군사학교에서 한국학생의 수용을 허가받아 이후 황포군관학교 광동대학 등에 한국 젊은이들이 많이 입학되었으며 이들은 독립운동의 기간이 되었다. 따라서 신규식의 평가는 단순한 독립운동의 차원에서 할 것이 아니라 한걸음 앞서 독립운동을 위한 또 이를 전개하는 과정가운데 중국과의 관계에서 중요한 역할과 공헌이 있었음을 높게 사야 할 것이다.
  • 만해학회 이달말 정식출범/한용운 불교·문학·독립사상 집중연구

    ◎한계전교수등 각계인사 40여명 참여/「만해학보」발간·회원모집등 기념사업 펼쳐 만해 한용운의 불교사상과 문학사상 독립사상을 집중적으로 연구할 「만해학회」가 오는 30일 상오11시 만해의 고향 충남 홍성군 결성면 동헌에서 창립총회를 갖고 정식 출범한다. 만해 한용운은 불교와 독립사상에서도 많은 업적을 남긴 사상가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국내에선 만해에 대한 연구가 문학분야를 제외하고는 그다지 성과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만해학회는 이같은 실정을 감안,각계의 전문가가 만해의 불교·문학·독립사상을 연관지어 체계적이고 깊이있게 파고든다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 문학분야에서 한계전(서울대·국문학) 김재홍(경희대·〃) 김선학(동국대·〃) 최동호(고려대·〃)교수가 참여하고 있고 전보삼(신구전문대·국민윤리) 허우성(경희대·불교철학) 김상현(교원대·불교사)교수등 불교학관련 교수와 소장학자 40여명이 뜻을 같이하고 있다. 고문으로는 만해스님의 제자인 김관호씨와 시인 고은,서울대 김용직교수,연세대 신동욱교수 등이 추대됐다. 만해학회는 이들이 모여 지난해 3월 발기인총회를 연지 1년3개월만에 창립을 보게된 것. 만해학회는 ▲만해에 관한 학술연구및 「만해학보」발간 ▲만해기념사업및 현창사업등을 주요사업으로 정하고 회원도 ▲학술회원(문학·종교사상·독립운동사분야의 석사이상) ▲일반회원(기념및 현창사업에 뜻이 있는 사람) ▲명예회원(기념사업후원자)으로 구분,목적사업을 추진해나갈 방침이다. 학회 창립준비위원회는 이를 위해 현재 서울 종로구 혜화동 「시와 시학사」안에 임시사무실을 마련,회원가입안내와 함께 창립행사 준비로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창립준비위원회는 학회의 1차사업으로 우선 「만해학보」를 이달말 창립총회일정에 맞춰 발간할 예정. 이 학보에는 ▲만해 한용운의 문학관에 대하여(권영민교수·서울대) ▲한용운의 화엄사상고찰(전보삼교수) ▲만해 한용운과 건보사 문하생들에 대해(한계전교수) ▲만해연구사 개관(김재홍교수)등 10여편의 논문이 게재되고 연구논저총목록이 전말에 실리게 된다. 준비위원회는 창립총회에때맞춰 만해 48주기를 추모하는 「만해 문학의 밤」도 개최할 예정. 29일 하오5시 수덕사에서 만해스님 48주기 추모법회를 봉행한뒤 하오7시 홍성군청 대강당에서 이 지역 문학회와 합동으로 개최하는 문학행사가 1건. 이 행사엔 박두진·유안진·조병화·신달자·이근배·허영자·고은씨등 중견시인 13명이 참여해 만해의 시와 자작시들을 낭송할 예정이다. 한편 30일 창립총회에 앞서 이날 상오 홍성군 결성면 동헌에서는 제1회 만해학술세미나가 열린다. 한신대 홍정선교수의 사회로 진행되는 이 세미나에서는 ▲만해와 건봉사의 시인들(한계전교수) ▲만해의 불교세계(허우성교수) ▲3·1운동과 만해(김상현교수)등 3편의 논문이 발표된다. 만해학회 준비위원인 서울대 한계전교수는 『그동안 부분적으로 추진돼왔던 만해사상 연구를 총체적으로 다듬어낼수 있는 계기로 생각한다』면서 『특히 스님이었던 만해의 사상 연구에 불교계의 협조와 지원이 절실히 요구되는 만큼 불교계인사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당부한다』고 덧붙였다.
  • 다시 새기는 그 충절/이달의 독립운동가 이상룡선생

    ◎서울신문사·국가보훈처 공동선정/“무력으로 독립쟁취” 만주 항일투쟁 이끌어/한일 합방직후 망명,신흥무관학교 등 설립/독립군단체 통합 주도… 임정국무령도 역임/의병활동·교육자로 평생 구국활동… “광복전 유해 옮기지 마라” 유언도 선열들의 애국·애족사상을 길이 본받기 위해 서울신문사가 마련한 이달의 독립운동가에 상해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을 역임한 이상룡선생이 선정됐다. 5월의 독립운동가 이상룡선생은 1896년 경북지역의 의병으로 활동하다 한일합방이후인 1911년 만주로 망명,그곳에 한인사회를 건설하고 신흥무관학교를 설립,독립전쟁을 위한 인재양성과 항일무장투쟁을 벌였다. 1926년 1월 국무령을 사임한 이 선생은 32년 5월12일 74세의 노령으로 중국 길림성에서 서거했다. 이 선생의 생애와 사상 업적을 되새겨 본다. 1925년 3월23일 상해임시정부 임시의정원은 미국의 위임통치안을 제안한 이승만대통령을 탄핵면책하고 국무총리 박은식을 대통령으로 추대했다. 박은식대통령은 임시정부헌법을 대통령중심제에서 내각책임제로 개헌하고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국무령에 만주지역에서 가장 큰 독립운동단체인 한족회와 통군부를 이끌던 이상은선생을 지명했다. 1911년 만주로 이주한 이 선생은 만주에 항일독립운동기지를 만들어 청년들에게 군사교육을 시키는 한편 동포들에게 독립운동의식을 고취,신망을 한몸에 받고 있었다. 이 국무령은 만주에서 독립군을 지휘하며 항일무장투쟁에 앞장서온 김좌진·오동진·김동삼 선생들을 국무위원에 임명하고 임시정부가 활발한 무장독립투쟁을 이끌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국무위원들은 민족주의자 공산주의,창조파와 개조파,국내파와 해외파 등으로 나뉘어 임시정부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 1926년 1월 이 선생은 초대 국무령을 사임하고 다시 만주에 돌아와 독립운동조직인 의정부·신민주·참의부의 통협에 심혈을 기울이고 힘썼다. 윤봉길의사가 상해 홍구공원에서 폭탄을 투척,일본 군국주의 지도자들을 살해한 뒤 12일만인 1932년 5월12일 이 선생은 74세로 만주 길림성 소성자에서 『외세때문에 좌절하지 말고 더욱 면려하여 독립을 관철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노환으로 선거했다. 70평생중 반세기에 걸친 이 선생의 일관된 구국노력은 의병활동·민족계몽운동·독립군지도자·임시정부 정치지도자·교육자·사상가 등 당시의 가능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다. ○32년 74세로 별세 이 선생의 깊은 학식과 큰 인품은 조국은 되찾겠다는 의지와 정열로 승화되어 민족진영이나 사회주의 진영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많은 추종자들을 낳았다. 이 선생은 1858년 11월24일 경북 안동에서 유학자 이승목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명문가의 후예로 태어난 이 선생은 유학자로서의 학문적인 수업을 쌓다가 1896년 일자 명성왕후를 시해하자 영남지방의 의병에 참가했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지방유지들과 합자,가야산에 군사기지를 건설할 계획을 계획을 세웠으나 자금부족과 일본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 선생은 김동삼 등 동지들과 안동에 대한협회 안동지부를 결성,민족각성과 청소년 교육등 민족자강운동에 헌신했다. 1910년 일제가 한반도를 강점하자 이 선생은 국내최대의 항일비밀경사 신민회에 가입했다. 신민회는 전국 13개 도의 유지들과 부호들을 규합,만주에 거대한 조선인 자치구를 설립할 목적으로 이민을 모집하고 있었다. 이시영·이회영·이동영·주진수·김창환 등 구한말의 관리와 양반·선비들은 가산을 정리하고 무인지경이던 만주로 이민을 떠났다. 1911년 4월 53세의 이 선생은 52명의 대가족을 인솔하고 만주로 이주했다. 이 선생은 만주의 땅을 매입하여 조선인 촌락을 만들고 학교와 교회를 설립,청년들을 교육시키고 무관학교를 세워 독립전쟁을 일으킬 목적으로 동지들과 함께 개척이민의 선두에 섰다. 이 선생은 만주에 도착하자마자 유하현 삼원포에 거류민단조직인 경학사를 설립,사장에 취임했다. 경학사는 1914년 부민단으로 발전되고 신흥학교를 설립,인재를 양성했다. 이 선생은 3·1운동직후에는 한족회를 설립,동포들에게 민족자긍심과 독립정신을 고취하고 한인청년들을 신흥무관학교에 입교시켜 1천여명에게 군사교육을 받게 했다. 이 선생은 만주지역에서 활동하는 무장독립운동단체들을 통합,독립전쟁을 일으키기 위한 서로군정서를 설립,총재에 취임했다. 부총재에는 여준,정무청장은 이탁,참모부장은 김동삼,독립군사령관엔 지청천을 임명,일제에 항거하는 한편 국내 진공작전계획도 세웠다. ○서로군정서 총재 당시 만주에는 3·1운동이후 일제의 탄압과 만행에 시달린 조국의 열혈청년들이 대거 이주해와 2천여명을 무장킬 수 있었다. 이 선생의 서로군정서 조직은 당시 해외독립운동단체중 최대규모였다. 1919년 4월13일 이동영·이시영선생이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자 이 선생은 『한민족에 두개의 정부가 있을 수 없고 광복운동에는 단결이 가장 큰 선결조건』이라는 이유를 들어 참모들을 대동하고 임시정부 산하의 군사조직으로 들어갔다. 이 선생은 상해 임시정부에서는 외교와 내치·재정을 담당하고 만주의 항일무장세력은 단결해서 군사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고 부하들을 설득,조선의용대를 조직하고 북만주와 시베리아에서 활동중인 홍범도·이동주 등과 항일연합전선을 펼 것을 모색했다. ○통군부 확대개편 이선생은 1920년초 북경에서 개최된 조선인 군사통일회에 참가,박용만·신숙 등과 군사기구의 통합방안을 협의하고 22년 6월에는 만주지역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이룬 통군부를 조직했다. 그뒤 이 선생은 통군부를 다시 확대개편하여 17개 독립운동단체로 하여금 통의부를 구성하는 등 독립군의 군세확장에 혼신의 힘을 다하였다. 전통깊은 유학자집단에서 태어나 성장한 이 선생은 다른 독립운동가들과는 달리 외교나 교육에 치중하지 않고 일생동안 무력항일투쟁만을 주장했다. 조국광복을 위해서는 일본제국주의와 무력으로 싸워서 이기는 수 밖에 없고 이를 위해서는 중국·소련 등과 연합해서 독립군을 조직,화력과 무장을 갖추어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1925년 3월 미국에 체류하면서 위임통치를 주장하던 이승만대통령이 탄핵되자 국무령에 취임한 이 선생은 임시정부를 독립군지휘관으로 구성,활발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려고 작정했다. 그러나 이 선생의 구상은 내분으로 결실을 보지 못하고 지리멸렬하게 되자 26년 1월 국무령직을 사임하고 다시 만주로 돌아왔다. 만주에 돌아와 독립운동단체들을 통합,지도하던 이 선생은 일본이 만주국을 설립한 32년 5월12일 노령으로 별세했다. 『국토를 찾기전에는 내 유해를 고국에 싣고 가지말라』고 한 유언을 남김으로써 이 선생의 유해는 광복된지 45년만인 90년 9월 국가보훈처 주관으로 중국 흑룡강성에서 봉환,대전국립묘지에 안장됐다. 유족으로는 증손자인 항회·범회씨가 서울에 살고 있으며 선생의 기념사업회 결성을 준비중이다. 정부에서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역사적 평가/20년대 독립군총사로 불멸의 업적 석주 이상룡 선생은 70생을 오직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민족지도자였다. 이 선생은 1896년부터 1910년까지 향리에서는 의병의 지도자로서,민족계몽운동가 또 2세교육자로 활동했으며 1911년 만주로 이전해서는 민족의 선구자로서 역할을 다했다. 이 선생은 독립운동의 방략으로 교육·산업운동과 항일무장투쟁을 병행해야 한다고 굳게 믿고 이를 동지들과 함께 실행에 옮겼다. 그는 만주의 한인사회에서산업과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동포들의 법적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중화민죽회에 진정서를 제출하는등 외교적인 노력을 통해 한인들의 권익옹호에 앞장섰다. 이 선생은 이주한인들의 생업을 위해 벼농사를 적극 권장,지도해 만주에서 쌀을 생산했으며 경제적인 기반이 마련된뒤 독립군을 조직했다. 그는 경학자·부민단·한족회·군정부·통의부·정의부·혁신의회 등으로 이어지는 항일 민족독립운동단체를 직접 지도해 만주지역의 민족지도자로서 불멸의 자취를 남겼다. 이 선생은 노년에는 김동삼을 위시한 여러 혁명가들을 지도함으로 써 항일대열에 영향을 끼쳤다. 그는 1923년 해외 항일독립운동단체의 책임자들이 한자리에 모인 상해의 국민대표회의에 김동삼을 파견,6개월동안 의장을 활동시켜 항일독립운동의 전략·전술을 수립하게 했다. 유학자로서,의병으로서,때로는 민족의 교육자요 지도자로서 다양한 역할을 하던 이 선생은 1932년 5월 조국광복을 보지 못하고 망명지에서 순국하고 말았다. 조국을 위해 헌신한그의 혁명가적인 행적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우리의 귀감이 되어 남을 것으로 확신한다.
  • 다시 새기는 그 충절/이달의 독립운동가 윤봉길의사

    ◎서울신문사·국가보훈처 공동선정/“이 한몸 광복위해”… 일 기념식장 폭탄던져/“상해사변 승리” 들뜬 일군 수뇌부 7명 사상/32년 4월 홍구공원에서 거사… 12월에 총살형/장개석 총통,“중국 1백만대군도 못한 일 조선 한 청년이 해냈다” 격찬 선열들의 애국·애족사상을 길이 본받기 위해 서울신문사가 마련한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매헌 윤봉길 의사가 선정됐다. 4월의 독립운동가 윤봉길 의사는 일본 군국주의의 대륙침략이 극에 달했던 1932년 4월29일 상해 홍구공원에서 열린 상해사변 전승축하식에 폭탄을 던져 주중 일본군 수뇌부를 강타,조국독립의 계기를 마련했다. 윤의사는 거사 직후 일본헌병에 체포되어 군사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932년 12월19일 가나자와(금택)현에서 총살형으로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윤의사의 의거와 생애 사상을 되새겨 본다. 지금으로부터 60년전인 1932년 4월29일 중국 상해의 홍구공원에서는 일황 히로히토(유인)의 생일인 천장절을 맞아 상해사변의 전승기념식이 성대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홍구공원 안에는 수많은 일본 거류민단과 장병·학생들이 도열해 있었고 중앙식단위에는 일본의 대륙침략 중심인물인 상해주둔 군사령관 시라가와(백천의측)대장과 해군 함대사령관 노무라(야촌길삼랑) 중장,우에다(식전겸길) 중장 등 군수뇌와 시게미쓰(중광채) 주중공사,무라이(촌정창송) 총영사,거류민단장 가와바타(하단정차) 등 외교관들이 착석해 있었다. 윤의사는 미리 작정했던대로 군중속에 들어가 투척장소와 시간을 맞추어 최후의 의거 준비를 했다. 상오 11시20분 축하식의 1차 행사인 관병식을 끝내고 2차 순서인 축하식으로 들어가 일본 국가가 제창되고 거의 끝날 무렵이었다. 윤의사는 도시락으로 된 자결용 폭탄을 땅에 놓고 어깨에 메고 있던 물통으로 위장된 폭탄의 덮개를 벗겨 오른손에 쥐고 왼손으로 안전핀을 빼낸 뒤 재빨리 앞사람을 헤치고 2m가량 전진,단상위로 힘껏 던졌다. 폭탄이 단상중앙에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과 불꽃이 솟아 식장은 순식간에 피와 살이 튀는 아수라장이 됐다. 억눌리고 짓밟힌 약소민족의 원한과울분이 한꺼번에 폭발하는 듯한 위력이었다. ○군사령관은 즉사 시라가와 대장은 사망하고 노무라 중장은 실명,우에다 중장과 시게미쓰 공사는 다리가 절단되고 무라이 총영사 등 3명은 중상을 입었다. 윤의사는 거사후 경비군경에게 체포되어 헌병대에서 가혹한 고문과 취조를 받은 뒤 5월25일 상해주둔 일본군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언도받았다. 윤의사의 거사성공 소식을 들은 장개석 총통은 『중국군의 1백만 대군도 못하는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다』며 『윤의사야말로 우리 4억 중국인 누구보다도 위대하다』고 격찬했다. 윤봉길 의사는 1908년 6월21일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서 윤황씨와 김원상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우의,봉길은 별명이며 호는 매헌이다. 윤의사가 태어난 이듬해에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를 저격하고 그 다음해는 한일합방으로 2천만 민족이 조국을 잃었다. 윤의사는 1918년 덕산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다음해 3·1운동이후 학교를 자퇴하고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며 「개벽」잡지등을 읽으며 농촌활동을 통한 민족 계몽운동의 방향을 정립해 나갔다. 1928년에는 부흥원을 설립하고 농촌개혁운동을 펴는 한편 체육회·월진회 등을 조직,농민들의 친목과 생활개선·체력향상 등에 몰두했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 전국적으로 번지며 원산총파업·용천농민투쟁 등이 일어나자 윤의사는 일제에 항거,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적극적인 행동이 필요하다고 판단,동지들을 규합했다. 1930년 3월6일 윤의사는 『장부가 집을 떠나니 살아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비장한 편지를 남기고 사랑하는 처자를 두고 만주로 망명했다. 31년 8월 활동무대를 임시정부가 있는 상해로 옮겼다. 보다 큰 인물과 접하면서 무엇인가 나라를 위한 중요한 일을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윤의사는 프랑스 조계 안공근 선생의 집 3층에 숙소를 정하고 동포가 경영하는 공장에 취업하는 한편 밤에는 상해영어학교에 다니면서 영어를 익혔다. ○김구선생 찾아가 그해 겨울부터 임시정부의 김구선생을 찾아가 독립운동에 몸과 마음을 다 바칠 것을 맹세했다. 1932년 1월8일 일본 도쿄에서 이봉창 의사가 일본왕을 폭살하려다 실패하자 일본과 중국의 독립운동가들은 극심한 탄압을 받게 되었다. 김구선생은 무력에 의한 의열투쟁을 계속할 조선인 청년들을 구하려고 노력하고 있었고 열혈청년들이 김구선생 휘하에 몰려들기 시작했다. 김구선생과 윤봉길 의사는 무장투쟁의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하던중 『4월29일 천황의 생일인 천장절행사를 일본군의 상해점령 기념식과 합동으로 상해 홍구공원에서 거행할 예정이며 일본 거류민은 도시락과 수통을 지참하고 행사에 참가하라』는 일본신문의 보도를 읽고 기념식에 참석할 일본군의 수뇌부를 일거에 괴멸시킬 방법을 논의했다. 거사를 위한 치밀한 준비가 진행되었다. 야채행상을 가장한 윤의사는 여러차례 행사장을 사전 답사하고 지형·지물을 익혔다. 4월26일 윤의사는 이 의거가 개인적인 차원의 행동이 아니라 한민족 전체의사의 대변이라는 점을 세계에 알리고 잠자는 민족혼을 일깨우기 위해 김구선생이 주도하던 한인애국단에 가입했다. 「나는 붉은 충성심으로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들을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 윤의사는 비장한 선서를 하고 조국광복을 위한 살신성인의 길에 올랐다. 일본거류민으로 위장한 윤의사는 기념식장에 들어가 예정된 작전시간에 일본제국주의의 심장부인 군수뇌부에 폭탄을 터뜨려 2천만 조선민족의 울분을 풀어주었다. 일본헌병에 붙잡힌 윤의사는 『나의 각오는 철권을 가지고 적을 즉시 타도함이다. 죽어 관에 들어가면 쓸모없다』고 말해 거사의 성공을 즐거워하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상해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윤의사는 일본상해 주둔사단의 모국기지인 가나자와(금택)현으로 옮겨져 12월19일 상오 7시27분 총살형으로 사형에 처해졌다. ○효창공원에 안장 윤의사의 유해는 46년 5월 순국 14년만에 가나자와에서 봉환,효창공원 묘소에 안장됐다. 윤의사의 생가인 충남 예산군 덕산면에는 광현당이 복원되어 유물들이 진열되어 있다. 윤의사는 22년 배용순씨(88세 별세)와 결혼,종과 담 두 아들을두었으나 담은 두살때 영양실조로 죽고 종은 농수산부에서 근무하다 퇴직,원호사업을 하다 80년대 후반 어머니 배씨보다 먼저 별세했다. 윤의사의 동생 남의씨(76)는 현재 예산에 살고 있다. 정부에서는 윤의사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지난 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역사적 평가/광복군 창설 중국지원의 계기로/이강훈 광복회회장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일은 나라와 겨레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일이다.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국권을 빼앗겼을때 우리 민족은 수많은 의병을 일으켜 나라찾기에 목숨을 바치는 지사와 선열들을 배출했다. 당시 선각자들은 나라를 찾기 위한 일념으로 사랑하는 부모·형제·처자를 남겨두고 험난한 형극의 길로 뛰어 들었다. 매헌 윤봉길 의사는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문맹퇴치와 농촌개혁을 통한 민족 부흥운동을 주도하다 중국으로 망명 일본군국주의 군 수뇌부에 철퇴를 가해 한국인의 기개를 세계만방에 과시했다. 윤의사의 상해 의거는 민족항쟁의 금자탑을 쌓을 수 있게 되었으며 약소민족의원한을 풀어주는 기폭제가 되었다. 윤의사의 쾌거가 알려지자 당시 4억 중국인들은 한국사람들만 보면 『당신들 조선인들은 훌륭한 민족』이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윤의사의 의거를 계기로 증오의 눈으로 우리를 대하던 중국인들은 신뢰의 우정으로 변하게 되었다. 중국 국민당정부는 33년 낙양군관학교에 한국청년을 위한 한청반을 설치해주고 40년에는 임시정부의 광복군창설을 적극 지원해주었다. 윤의사가 생존해 있다면 올해 84세인데 25세로 순국영령이 되어 자손만대의 사표가 되어 있다. 필자는 윤의사의 뜻을 받들려면 거사도 실패하고 무엇하나 남긴 것 없이 살고 있어 부끄러움을 금치 못한다. 짧은 일생동안 모든 것을 구국의 제단에 바친 윤의사의 성스러운 위업을 거울삼아 민족통일과 세계평화의 지름길로 매진해야 한다. 윤의사 의거 60주년을 맞이하면서 국내외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조국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오늘의 이같은 조국이 있게 해준 윤의사의 명복을 빌면서 새로운 각오로 선열의 순국정신을 계승,발전시켜야 한다. 성결한의혈만이 역사의 앞날을 눈부시게 펼칠 수 있기 때문이다.
  • 외언내언

    님은 갔습니다./아 아,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푸른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길을 걸어서/차마 떨치고 갔습니다.만해 한용운의 대표작 「님의 침묵」의 첫 구절.사랑의 본질을 노래한 서정시이지만 그 내면에는 잃어버린 조국에 대한 한이 서리 서리 맺혀있다.◆3·1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33인중의 한분으로 독립선언서의 공약삼장을 썼던 만해는 당대의 민주시인이자 「불교유신론」을 제창했던 스님이기도.그러나 우리가 그에게서 배워야할 가장 큰 교훈은 도도한 기개와 지조로 일관했던 투철한 애국정신.◆까까중머리에 검정 무명 두루마기를 입고,검정고무신만 신었던 만해는 3·1운동 거사후 감옥에 갇혔을때 「옥중투쟁 3대원칙」을 철저히 지켰다.첫째 변호사를 대지말것,둘째 사식을 취하지 말것,셋째 보석을 요구하지 말것.◆만해는 서울 성북동에 「심오장」이란 옥호를 붙인 조그마한 기와집을 짓고 살았는데 북향이었다.일제의 총독부쪽은 바라보기도 싫다는 고집때문.그 북향집에서 한겨울에도 장작불을 지피지않고 지냈다.어느날 지조를 꺾은 육당 최남선이 길거리에서 만해를 보고 반가워 하자 『육당은 벌써 죽었어』라면서 침을 탁 뱉고 돌아서 버렸다는 일화.◆만해가 태어난곳은 충남 홍성군 결성면 박철부락.이곳에 만해생가가 복원돼 6일 준공식을 가졌다.생가복원을 계기로 4천3백평의 부지에 만해기념관,사당,시비등을 건립하고 서울 망우리묘지에 있는 묘소도 이곳으로 이전,역사공원을 만든다는 소식.반가운 일이다.겉치레가 아니라 전국의 청소년들이 이 공원을 찾아 만해정신을 배우고 기릴수 있도록 세심한 배려가 있었으면 한다.
  • 노 대통령의 3·1절 기념사 요지

    ◎“선열의 자결정신 계승… 통일시대 열자” 73년전 오늘 우리겨레는 나라의 독립과 민족의 자존을 되찾기 위해 분연히 일어섰습니다. 기미독립운동이 있었기에,수많은 열사들의 숭고한 희생이 있었기에 우리는 오늘의 자랑스런 나라를 갖게 된 것입니다. 선열들이 고대하던 세계는 모든 민족이 자결을 바탕으로 공존공영하면서 독창적인 문화창조로 인류 사회에 기여하는 새로운 천지였습니다. 임시정부를 거쳐 대한민국으로 계승된 이러한 이념은 우리민족이 나갈 길을 밝히는 영원한 빛입니다. 이제 우리나라는 세계의 모든 나라와 교류협력하고 인류의 평화와 번영에 적극 기여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고난의 역사를 살면서 우리 선조가 만들고자 했던 나라… 온 겨레가 한 나라로 사는 통일조국,모두가 자유 복지를 누리는 민주 선진국이 우리앞에 다가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피땀흘려 이룬 민주주의와 번영의 힘이 반세기동안 남북을 갈라온 대결과 불신의 벽을 허물고 있습니다. 남과 북이 유엔에 함께 들어가고 「기본합의서」와 「비핵화선언」을체결함으로써 한반도는 어두운 냉전의 시대를 벗어나 민족화해와 통일의 밝은 새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3·1운동에서 선열들이 외친 민족자결의 정신은 통일만은 반드시 겨레의 자주적인 역량으로 이루겠다는 우리의 굳은 결의속에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이제 남과 북은 「합의서」와 「선언」의 내용을 하나하나 실천에 옮겨 민족공동체를 회복하고 통일의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우리 정부는 이 합의와 선언을 성실히 준수하고 실천해 나갈 것임을 이자리를 빌려 다시 한번 밝힙니다.나는 북한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성실한 자세로 이를 실천하는데 함께 나설 것을 촉구합니다. 특히 겨레의 생존자체를 위협하는 핵무기 개발과 관련하여 북한은 하루속히 국제 사찰을 받아 한점의 의혹도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3·1정신은 나라를 위하여 모두가 하나가 되는 정신,겨레를 위하여 모든 것을 바치는 희생정신입니다.소이를 버리고 대동단결하고,대의를 위해 소아를 버려야 합니다.우리 모두가 남을 탓하기에 앞서 스스로를 채찍질 해야 합니다. 우리 앞에 닥친선거를 깨끗하고 공명하게 치러 참된 민주주의를 이루는 일을 내가 먼저 실천해야 합니다. 선열들이 몸바쳐 지킨 높은 뜻을 오늘의 우리가 완수하여 다가오는 2000년대를 한민족 영광의 세기로 만들어 나갈 것을 다함께 다짐합시다.
  • “북,사찰수용 핵개발 의혹 없애야”/노 대통령 3·1절 기념사

    ◎합의서·비핵화선언 함께 실천을/통일 성취 겨레의 자주역량으로/깨끗한 선거로 민주발전 이뤄야 노태우대통령은 1일 『남과 북은 「기본합의서」와 「비핵화 선언」의 내용을 하나하나 실천에 옮겨 민족공동체를 회복하고 통일의 길로 나가야한다』고 강조하고 『특히 겨레의 생존자체를 위협하는 핵무기 개발과 관련해 북한은 하루속히 국제사찰을 받아 한점의 의혹도 없도록 해야할 것』이라고 촉구했다. 노대통령은 이날 상오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제73주년 3·1절 기념식에 참석,기념사를 통해 이같이 말하고 『우리 정부는 이 합의와 선언을 성실히 준수하고 실천해 나갈 것임을 다시 한번 밝히며 북한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이를 실천하는데 함께 나설 것을 촉구한다』고 말했다. 노대통령은 『3·1운동에서 선열들이 외친 민족자결의 정신은 통일만은 반드시 겨레의 자주적인 역량으로 이루겠다는 우리의 굳은 결의속에 살아 숨쉬고 있다』면서 『이제 통일과 선진국으로 오르는 마지막 고비에서 우리 모두는 소이를 버리고 대동단결하고 대의를 위해 소아를 버려야 한다』고 호소했다. 노대통령은 이어 『우리 앞에 닥친 선거를 깨끗하고 공명하게 치러 참된 민주주의를 이루는 일을 내가 먼저 실천함과 아울러,경제의 새로운 도약을 이루는 일에도 내가 먼저 행동으로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노대통령은 기념사에 앞서 최근 추가확정된 독립유공자 2백명의 유족에게 건국훈장 애국장·건국훈장 애족장·건국포장 대통령표창등을 수여했다. 이날 기념식에는 재경광복회원 1천4백여명과 행정·입법·사법 3부및 헌법기관 주요인사,정당대표및 간부,각계대표등 7천여명이 참석했다.
  • 각 종교단체 3·1절 메시지

    ◎불교 조계종 “선조의 이상 받들어 정신적 개혁을”/천도교/“3·1정신 지주삼아 통일로 이어가야” 제73주년 3·1절을 맞아 불교·기독교·천도교 등 각 종교단체는 기념메시지를 발표했다. ▲서의현 불교 조계종 총무원장=사회전반에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이기주의와 무질서,과소비풍조가 만연하고 있다.우리선조들이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기 위해 생사를 초월하여 일제와 싸운 높은 이상을 받들어 정신적 개혁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우백암 태고종 종정=민족선각자들의 숭고한 애국애족정신을 오늘에 되살려 민족대각성운동을 전개하여 건전한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일본정부는 정신대문제에 대한 사과와 배상 등을 통해 한일간의 불행했던 과거를 청산하고 근린국가로서의 우의를 구축,동북아시아의 평화달성에 이바지해야 할 것이다. ▲오익제 천도교 교령=3·1운동은 두터운 종교의 벽을 넘어 천도교와 불교,기독교가 하나가 되고 당시 2천만 동포가 한마음이 됐던 인류역사상 유례없는 민족자주독립운동이었다.이 정신을 지주로 삼아 분단의 장벽을 허물고 통일로 나아가야할 것이다. ▲권호경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조선사람이 자주민임을 선언했던 선열들의 목소리는 전세계의 민족이 서로 지배하고 수탈하는 구시대의 잔재를 청산하는 노력으로 이어지고 구현돼야 한다. ▲정진경 한국기독교총연합회 회장=그동안 교회가 빛된 삶을 통하여 국가·사회에 공헌하지 못해왔다.선인들이 남긴 순수하고 숭고한 3·1정신을 계승하여 교회가 본질적 사명을 다해야 한다.
  • 외언내언

    1919년 3월1일 정오.민족대표 33인이 서울의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면서 3·1운동이 점화됐다는 것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그러나 북한에서는 이를 마음대로 왜곡,날조하고 있다.◆『위대한 수령의 아버지인 김형직선생께서 몸소 키우신 애국청년들과 함께 평양에서 대중적인 반일시위에 떨쳐 나선것을 시발로 하여 3·1인민봉기는 삽시에 전국 각지로 퍼져나갔다』북한의 「근대조선역사」(84년)가 기술하고 있는 내용.3·1운동을 「3·1인민봉기」로 바꾸어놓았고 민족대표 33인을 김형직으로 둔갑시켰으며 3·1운동의 발원지도 서울이 아니라 평양이라고 우기고 있다.◆그뿐이 아니다.3·1운동이 실패한 원인을 대중을 이끌 탁월한 지도자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진단해 놓고는 『모든 인민들이 지도자의 출현을 목마르게 기다리게 되었고 그 절절한 염원을 받들어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 민족앞에 나서게 됐다』고 선전하고 있다.◆북한의 역사 왜곡과 날조는 3·1운동에 그치지 않는다.제너럴·셔먼호 격침사건의 주동자를 김일성의 증조부로 변조했고 조부모인 김보현·이보익 부모인 김형직·강반석,삼촌 김형권,전처 김정숙등 일족을 모두 「불요불굴의 혁명투사」「위대한 애국자」로 떠받들고 있다.또 이들을 위한 정례적인 기념행사까지 치르고 있다.◆김일성가계의 혁명전통을 미화하는 한편 김일성부자 세습의 정당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어쩔수 없는 궁여지책이긴 하겠지만 이쯤되면 할말을 잃게 된다.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왜곡·날조하는 것이 얼마나 큰 범죄인가를 김일성은 모르고 있단 말인가.이제 살만큼 살았고 권력세습도 그들 나름으로는 마무리 되어 가고 있는만큼 지금이라도 역사를 바로잡는 것이 어떨까.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 정신대 할머니의 삼·일절(사설)

    상처가 너무 깊고 너무 생생해서 입에 담기도 진저리가 쳐지던 일이 우리에게 있어 「정신대문제」였다.이제 겨우 조금씩 석회화작용이 일어나기 시작하여 그 수렁속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말할 수 있게 된 한많은 「조선녀인」들.우리의 왕고모이기도 하고 이모할머니이기도한 그들을 생각하며 맞게되는 3·1절아침은 새삼스럽게 신열이 나게 한다. 딸과 누이와 아내까지 빼앗겨 짓밟히고 더렵혀지는 굴욕을 당해온 이땅의 남성들은 탱천하는 분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열세의 현실에만 결박당해 왔다.『정신대문제는 한국측이 논의에서 회피했었다』는 혐의를 받고 있는 그들의 입장을 우리는 이해한다.이제는 우리 민족에게 강요되어온 이 시궁창 같은 고통을 토해버릴 때가 되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고모할머니거나 이모할머니」였을 그들 한서린 정신대세대들의 증언을,그들의 피맺힌 육성을 귀기울여 들어야 한다.그리고 위로할 수 있는 모든 방책을 함께 생각해야 한다.심미자할머니의 증언(서울신문 2월29일자보도)은 바로 그런 육성이다.심할머니도 정신대의 전력이 부끄러워 숨어살다가 오늘에야 말하기 시작했다.그의 정신대행도 누구나 그랬듯이 그의 의지나 허물과는 아무 관계가 없이 주어진 부당한 형벌이었다.16살의 소학생이 「일본」을 욕되게 했다고 보내진 가혹한 형벌이었다.일제가 얼마나 잔혹했는가를 보여주는 실증이다.그런데도 그는 「일인의 여자노릇」을 하면서 모은 돈으로 독립운동에 헌금했고 우리의 레지스 탕스 활동들을 지원도 했다.그리고 그렇게 했던 시절에 대한 자부심으로 숨어사는 70평생을 지탱해온 할머니다. 포악하고 무도한 손에 끌려가 찢기고 짓눌려 속절없이 녹아없어져 버릴 수밖에 없는 운명속에서도 정신의 비수를 갈아 조국의 광복을 위해 모험했던 효녀들.그분들이 그런 분들이었다는 사실은 오히려 우리를 위로하고 구원해준다.그들의 증언은 침략국 일본의 만행을 되살려주기보다 그들이 지녔던 반듯하고 아름다운 「조선의 딸」로서의 자존심을 복원시켜 준다. 3·1운동은 손수건만한 태극기 하나에 목숨을 걸고 총칼앞에 맨가슴을 들이댄 치열한 민족운동이다.우리에게 3·1운동이 없었다면 나라를 되찾아 가질만한 「자격」에 결격되었을지도 모른다. 애국부인회를 이끌던 김마리아여사는 당시의 독립운동지도자들이 『남녀 합쳐서 김마리아 같은 이가 10명만 되어도 조선독립운동은 진작 성취했을 것이다』라고 칭송했던 분이다.심할머니는 피눈물 맺힌 돈을 모아 그분의 독립자금으로 보내기도 했다고 한다.민족 개체에게 질곡과 설움만 안겨주고 보잘것없이 스러져가는 듯하던 조국을 위해서도 그토록 애처로운 사랑을 쏟을 수 있었던 정신대여성들은 우리의 떳떳한 육친들이다. 우리는 그들의 수모를 일본에 따져야 하고 할 수 있다면 사죄는 물론 보상도 물려야 한다.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안된다.그들의 가족이고 후손인 우리가 빛나고 당당하고 능력있는 민족이 되어 당당한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요리조리 말재주나 피워가며 이기주의로만 살쪄가는 일본에게 떳떳하게 금도를 보이는 당당한 나라의 국민이 되는 것이다.3·1운동정신도 그래야만 제대로 구현될 수 있다.
  • 3·1절 특집 다큐멘터리 방송

    ◎M­TV 「…부재 이상설」 K­1TV 「팔렬중학교…」/잊혀진 독립투사·독립만세 운동을 다뤄 KBS1TV와 MBCTV는 3월1일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독립투사와 독립만세운동의 현장을 다룬 다큐멘터리 1편씩을 각각 특집으로 엮어 방송할 예정이다. KBS1TV가 1일 상오8시10분부터 9시까지 선보일 「팔렬중학교의 3월」과 MBCTV가 이날 낮12시부터 하오1시40분까지 내보낼 「이역에 뿌린 망국한 보재 이상설(박재 이상설)」이 그것. 이 가운데 K­1TV의 「팔렬중학교의 3월」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한달뒤인 4월3일 강원도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에서 수천명이 참가한 대규모 만세시위가 일어나 주민 8명이 일본경찰이 쏜 총에 맞아 숨지고 20여명이 부상한 사건을 다룬 특집이다.「팔렬중학교」는 이 지역 주민들의 제안으로 3·1운동시위도중 숨진 8명의 열사를 기리기 위해 지난 1963년 설립된 학교. 따라서 「팔렬중학교…」은 팔렬중학교 설립배경과 함께,강원도 산간지방이면서 오지인 물걸리에서 이처럼 큰 만세운동이 일어난 이유와 과정을 생존자인박상기(당시 17세),변성환(당시 13세)씨의 증언을 통해 추적해간다. 한편 MTV의 「이역에 뿌린 망국한 보재 이상설」은 19 00년대와 19 10년대에 걸쳐 해외 독립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지만 활동내용과 흔적이 거의 조명되지 않고 있는 이상설의 파란만장한 구국활동을 부각시킨 다큐멘터리. 이상설은 역사적인 「헤이그밀행」에서 대표로 활약하며 국권강제침탈사실을 만국에 알렸지만 당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의 대표였던 이준의 빛에 가려 드러나지 않고 있는 인물로 남아있다. MTV의 「이역에 뿌린…」은 충북 진천출신인 이상설의 어린시절과 구국독립운동가로 나서는 과정에서부터 만국평화회의 참석,미국 이민동포를 규합한 국민회 조직,블라디보스토크에서의 독립운동기지 한흥동 건설,상해 신한혁명당조직이후 소련 니콜리스크에서 48세로 생을 마감하기까지의 역정을 구체적으로 엮는다.
  • 「남북총리회담」이모저모/“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실천강조

    ◎정 총리,평양교예단 대전박람회 참가 권유 ▷주석궁 방문◁ 정 총리 일행이 상오11시5분 주석궁에 도착,엘리베이터를 타고 영접실에 들어서자 곧이어 김주석이 오른쪽 회담장소에서 걸어나와 정총리와 악수하며 『반갑습니다.잘 오셨습니다』라고 환영. 김주석과 남북대표는 이 자리에서 간단히 사진촬영을 한뒤 회의장으로 들어갔다. 정총리가 『저희들이 서울을 떠나올때 노태우대통령께서 특별하신 안부를 전하라는 분부의 말씀 계셨습니다』라고 인사말을 건네자 김주석은 『노대통령은 건강하십니까.서울로 돌아가시면 나의 인사를 전해 주십시오』라고 답례. 김주석은 남북 양총리와 약5분간 공개 면담하며 합의서가 발효돼 기쁘다는 말을 주고받고 실천이 중요하다고 강조. 이어 김주석은 정총리와 약10분간 단독 면담후 회의장을 나와 대기하고 있던 우리대표들과 악수를 나누고 영접실 중앙무대로 나가 금강산 그림을 배경으로 남북대표단 일행과 사진촬영. ▷2차회의◁ 평양에서 계속된 제6차 남북고위급회담 이틀째 회의는 당초 예정보다 한시간 앞당긴 상오9시부터 시작. 시간을 앞당긴 이유는 회담을 일찍 끝내고 우리측 대표단이 금수산의사당(일명 주석궁)으로 김일성주석을 예방,오찬을 함께 하는 일정이 잡혀있기 때문. 정원식총리를 비롯,우리측 대표는 8시46분 회담장인 인민문화궁전에 도착,대표 대기실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뒤 회담시작 1분전 회담장에 입장. 정총리는 북측대표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눈뒤 기조발언에 앞서 지난밤 영화관람과 집단체제를 화제삼아 환담했는데 정총리는 특히 평양교예단(서커스)의 대전박람회 참가를 권유.이날 회의는 기조발언까지 공개로 한뒤 그 이후는 비공개로 진행. 이어 정총리는 전날 평양체육관에서 관람한 집단체조를 화제로 삼으며 『내년 8·9월 대전박람회가 열려 세계 70여개국이 참가,전시와 공연을 갖게 되는데 세계적으로 유명한 북측의 평양교예단이 대전박람회에 참여하는 방안을 연구해 보시지요』라고 참가를 권유. ○…연총리는 30여분 기조발언을 통해 7·4공동성명에서 천명된 조국통일 3대원칙을 하나하나씩 거론하면서 이를 「합의서 해석의 기준」이라고 강조하고 방북구속인사의 석방을 요구. 연총리는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듯이 아무리 훌륭한 합의도 이행되지 않으면 쓸모없는 빈 종잇장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고 합의서의 원만한 실천을 촉구. ▷역사박물관 참관◁ 우리측 기자단은 20일 상오 이틀째 회담이 끝난뒤 평양시내 중심부 김일성광장옆에 있는 조선중앙역사박물관을 참관. 구석기시대부터 1919년 3·1운동때까지의 각종 역사유물 10만여점이 소장된 이박물관에는 4만년전의 「신인」(현대인) 머리뼈 화석,뚜껑돌의 직경이 4.4m나 되는 고인돌,광개토대왕비등이 전시돼 눈길. 안내원 리한옥양(34)은 『고려야말로 우리나라의 첫 통일국가이므로 수령님이 그이름을 따서 「고려연방제」통일방안을 제시하신 것』이라고 설명했으며 몇몇 전시실에는 「수령님이 친히 보아주신 방」이라는 현판이 눈에 띄었다. ▷만찬◁ 이날 저녁에 있은 북한의 양형섭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의장 주최 만찬에는 북한의 인민배우 홍영희 김경화 서경섭 김용민등이 참석해 눈길.이들중 김경화씨는 미8군에 들어간 북한여성첩보원을 다룬 20부작 영화 「이름없는 영웅」의 주인공으로,홍영희씨는 「꽃파는 처녀」,서씨는 「이세상 끝까지」,김용민씨는 역시 「이름없는 영웅」의 주인공으로 각각 등장한 배우들. 이와함께 이날 만찬에는 여연구 최고인민회의 부의장,김태희 전남북적십자회담 북측대표단장도 참석해 성황. ▷평양산원·교예관람◁ 정 총리등 우리측 대표단은 20일 하오 평양산원을 방문,병원측이 제공한 흰가운을 입고 입원실 검사실 신생아실등 북한이 자랑하는 최신의료시설을 관람. 대표단은 하오 4시30분 광복거리의 교예극장을 방문,기다리고 있던 연 총리의 영접을 받고 공연장으로 가기위해 승강기를 탔으나 승강기가 고장나 가벼운 차질이 빚어지기도. 두 총리는 약3분간 고장난 승강기안에 갇혀 있다가 나와 계단을 이용해 걸어서 공연장에 입장
  • 다시 새기는 그 충절/이달의 독립운동가 편강열의사

    ◎서울신문사·국가보훈처 공동선정/의성단 조직,만주벌 항일무장투쟁/장춘 일 영사관 습격,7명이 일경 60명 사살/하얼빈역 광장서 포위된채 치열한 총격전/중과부적으로 피체… 옥중고문 후유증으로 37세에 순국 선열들의 애국·애족사상을 길이 본받기 위해 서울신문사가 마련한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애사 편강열의사가 선정됐다.황해도 연백에서 출생,2일로 탄신 1백주년을 맞은 편강열열사는 만주에서 항일무장독립운동단체 의성단을 조직,장춘의 일본 영사관을 습격하는등 항일투쟁을 벌이다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다 일제의 고문으로 얻은 척수염으로 29년 37세의 나이로 순국했다.편의사의 생애와 사상·업적을 되새겨 본다. 일제하인 1924년8월 만주 하얼빈역 광장에서 완전무장한 일본경찰들이 무장항일독립운동가 편강렬의사를 체포하기 위해 겹겹이 포위하고 있었다. 만주일대에서 3백여명의 조선청년들을 이끌고 독립운동을 하던 편의사는 군자금과 무기를 조달한뒤 길림으로 돌아가는 열차를 타기 위해 하얼빈역으로 왔다가 밀정 김성곤의 밀고로 일본경찰의 포위망에 들게 되었다. 편의사는 길가 상점에 뛰어들어 장시간 총격전을 벌이다가 중과부적으로 왜경에 체포됐다. ○만철병원도 습격 편의사는 1924년 대원 5명을 데리고 봉천의 만철병원을 습격한뒤 같은해 대원 6명과 함께 장춘의 일본영사관을 습격,7시간에 걸친 격전끝에 적 60여명을 사살해 일본경찰의 추적을 받아왔다. 일경에 체포된 편의사는 25년 평양법원에서 징역 7년을 선고받고 신의주 감옥에서 복역중 고문으로 인해 생긴 지병으로 29년1월16일 안동현 적십자병원에서 37세의 나이로 숨졌다. 편의사는 병상에서 『내가 죽거든 유골을 내가 활동하던 만주땅에 묻고 나라를 되찾기 전에는 고국으로 이장하지 말라』는 비장한 유언을 남겼다. 편의사는 1892년 2월2일 황해도 연백군 봉서면 현죽리 목동에서 편상훈씨의 4남중 3남으로 태어났다. 편의사는 어려서부터 애국심과 충의심이 깊어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14세의 어린 나이에도 의분에 떨어 1주일간 항의 금식했다. 1907년 전국 각지에서 일본에 복수를 주장하며 의병이 봉기하자 경상·충청일대에서 활약하던 의병대장 이강년대장을 방문,이대장 휘하에 들어가 소집장 및 선봉장으로 활동했다. 이듬해 의병을 인솔하고 경기도 양주에서 3일간 격전을 벌이다 부상을 입은 편의사는 1909년 고향으로 돌아왔다. 편의사는 평양의 숭실학교에 입학,항일운동에 정진하다 1911년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사내정의)암살미수사건으로 체포되어 징역5년 선고를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한뒤에는 의병동지들과 무장결사대 광복회를 조직,친일파·민족반역자·일본경찰을 처단하는 격렬한 투쟁을 전개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황해도일대의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하고 동생 덕렬씨를 상해임시정부에 파견,국내조직과 긴밀한 연락망을 구축했다. 그해 임시정부에서 파견한 최명식이 군자금을 모집하고 무기를 조달한뒤 항일무장투쟁을 할 거점을 마련키위해 군사준비단을 조직하자 편의사는 황해도 대표로 활동했다. ○밀고자 즉결처분 1919년 9월 다시 일본경찰에 체포된 편의사는 징역1년을 선고받고 21년에 출옥했다. 23년1월 편의사는 동지 김경배·김태규·조종호등과 함께 중국의 독립운동상황을 살피기위해 북경으로 가 상해·만주등지를 전전했다. 무장투쟁으로 일관한 편의사의 눈에는 창조파와 개조파로 나뉘어 논쟁만 일삼던 임시정부의 무력함이 도저히 성에 차지 않았다. 23년 10월 만주로 돌아와 강진지·양기탁·남정동지들과 무장항일투쟁비밀결사인 의성단을 조직,단장에 피선됐다. 의성단의 활동무대는 길림성과 장춘일대의 넓은 평야지역이었다. 편의사는 이 지역에 이주한 동포들에게 『조선인단체를 조직해 이민족에게 억압을 받지 않아야 한다』는 독립의식을 고취시키며 민족적 공감대를 넓혀갔다. 재만동포들의 물적 인적지원을 받은 편의사는 2백50명의 의성단원을 무장시켜 장춘·봉천일대의 일본인 병원·영사관·우체국·경찰서·철도·군수기지를 습격,혁혁한 공을 세웠다. 일본은 경찰력과 헌병·밀정등을 총동원해 편의사를 체포하려고 했으나 신출귀몰하는 그의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편의사는 의성단활동을 하는 한편 만주지방의 각 독립운동단체들을 통합하기 위해 전만통일의회를 조직했다. 편의사는 만주지역의 비밀항일무장단체들을 통합해서 강력한 군사조직으로 만드는 공작을 하던중 24년8월 하얼빈역에서 밀정 김성곤의 밀고로 일본경찰에 포위됐다. 당시 이범석장군은 비분함을 참을 수 없어 밀고자 김을 즉결처분했다. 편의사가 체포되자 의성단활동은 위축되고 2∼3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단원들도 뿔뿔이 헤어져 소멸됐다. 옥고를 치르는동안 편의사는 일제의 악랄한 고문으로 척수염을 얻어 불구의 몸이 됐다. ○왜놈치료는 싫다 혼자 일어설 수도,앉을 수도 없는 지경이된 편의사는 병보석을 얻어 28년 선천의 미동병원에 입원했으나 별효과가 없었다. 친지와 가족들이 의료시설이 구비된 일본인 병원으로 옮길 것을 권고했으나 『죽어도 왜놈에게는 치료를 받지 않겠다』고 완강히 거절했다. 28년9월 동생이 있는 만주의 안동으로 옮겼으나 4개월만인 1929년1월16일 순국했다. 편의사의 묘소는 중국 요령성 단동시 원보구 인충가 진강산 장군봉 뒤편에 있었으나매장후 61년이 지나는 동안 이 지역이 시가지로 개발되어 비석은 커녕 묘소의 흔적조차 남지않게 됐다. 지난해 가을 국가보훈처와 편강렬의사 탄신1백주년 기념사업회가 「편의사유해봉환반」을 구성,현지답사한 결과 밝혀진 사실이다. 편의사는 후사가 없어 동생 덕렬씨의 2남인 충무씨를 양자로 입양했으나 충무씨도 지난 80년대초 미국으로 이주했다. 정부에서는 62년 편의사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역사적 평가/“마지막 의병장” 불굴의 절개 빛나/17세때 13도창의군의 서울탈환대작전 참가 편강렬의사에게는 지난 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수여됐다. 그러나 편의사의 이름을 아는 이가 드물고 역사적 평가도 높지 못한 실정이다. 구한말의 의병전쟁에서 20연대 중반의 독립운동에 이르기까지 큰 운동에 참가해 청춘을 불살라버린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웬만한 책에서는 그의 이름을 발견할 수가 없다.이때문에 편의사는 이름없는 독립운동가로 오늘에 이르고 있고 무덤마저 정확한 자리를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편의사는 중국단동 공동묘지 어디인가에서 압록강과 강건너 신의주를 바라보며 조국통일을 애타게 염원하고 있을 것이다. 편의사가 13도 창의군의 서울대탈환 작전에 참가한 것은 17세때이다.여기서 그는 부상을 입었으니 이 사실만으로도 독립운동가로 치부될 수 있다.그러나 이 부상은 37세로 순국할때까지 20여년간의 항일투쟁의 시작일 뿐이었다.1910년 압록강철교 준공식에 참석하던 사내총독암살음모사건으로 연루되어 최초의 옥고를 치르게 된 것은 나머지 그의 투쟁사와 기묘한 일치를 보여준다. 「양양한 압록강물은 흘러서 어드메로 가는가」라는 그의 옥중시에서 보듯 편의사의 일생은 압록강과 숙명의 관계를 맺고있다. 3·1운동후 두번째 옥고를 치르고 압록강을 건넜을 뿐아니라 세번째 마지막 옥고를 치를때도 압록강을 건느며 망국의 한을 달랬다. 한국인의 성품 가운데 끈기를 제일로 드는 이가 많다. 편의사야말로 독립운동 하나를 위해 일생을 바친 끈기의 대명사였다고 할 수 있다. 그를 위대한 독립운동가로 평가하는 것은 불요불굴의 절개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마지막 재판정에서 7년 징역형이 내려졌을때 파안대소했는데 이는 그가 의병정신을 잃지 않았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의병정신이란 나라와 겨레를 위한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반드시 하고야 마는 정신이다. 이런 의미에서 편의사는 한국의 마지막 의병장이었다고 할 수 있다. 편의사의 탄신 1백주년이기도한 2월을 맞아 새삼 조국통일로서 망국한을 달래드려야 되겠다는 마음이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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