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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姜萬吉 교수 독립운동사 학술회의 주제 발표

    ◎민족해방운동은 근대국가 수립 과정 일제식민지시대 좌우익의 통일전선운동은 해방공간에서는 평화통일운동으로 전환됐으며 분단시대의 통일운동은 ‘대등통일’이어야 한다고 姜萬吉 고려대 교수(한국사)가 7일 주장했다.姜교수는 이날 광복 53주년 및 독립기념관 개관 11주년 기념 제 12회 독립운동사 학술회의 주제발표에서 이같이 주장하고 민족해방운동은 근대국가 수립 과정이었다고 말했다.다음은 주제발표 요약이다. 우리 민족이 일본제국주의에 강점당한 것은 알려진 대로 무력을 앞세운 일본제국주의의 강압에 의해서였다.그러나 또하나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조선이 사상적으로 성리학 유일사상 체제가 너무 오랫동안 지속됐기 때문에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이루지 못했다는 점이다. 조선은 자본주의와 국민주권주의를 배우지 못해 일제 강점후 민족해방을 독자적으로 지도할 세력을 가질 수 없었다.그러나 조국의 독립을 위한 좌우익 통일전선운동은 계속 추구됐다.좌익 노선은 3·1운동 전에도 일부 형성됐었으나 3·1운동 이후 본격적으로 등장했다.3·1운동의 실패와 좌익의 본격적인 등장 이후 우익 세력은 일부가 타협주의 노선으로 나아갔다.그러나 비타협적인 우익도 일정한 세력으로 존속됐다.주로 지주및 상층 자산계급은 타협주의 우익으로,비타협적인 우익 세력은 중소자산계급을 중심으로 형성됐다는 분석이 있으나 그 구분은 분명하지 않았다. ○노동자 농민 의식성장 우익의 일부가 타협주의 노선으로 나아간 것은 노동자와 농민계급의 의식성장으로 민족내부의 계급적 갈등이 시작되고 일본이 적극적으로 유인했기 때문이었다. 우익의 일부 세력이 타협주의로 변하고 그 때문에 민족해방운동전선이 약화됨에 따라 민족해방운동의 새로운 방법론이 모색되지 않을 수 없었다.좌익과 비타협적인 우익 세력이 통일전선을 형성하고 투쟁력을 강화하는 일이 더욱 절실해진 것이다.1920년대 중반에 좌익과 비타협적인 우익 세력에서 동시에 통일전선론이 일어난 것도 이때문이었다. ○협력과 분열 반복 좌우익은 시대상황에 따라 협력과 분열을 반복했으나 일본제국주의의 패망이 가까워진 1940년대 전반기에 접어들며 통일전선운동은 전체 민족해방운동으로 더욱 적극화됐다. 민족해방운동전선은 좌우익을 막론하고 해방과 함께 38도선이 획정되고 남북에 분단국가가 성립되는 상황이 되리라고는 전혀 예상조차 할 수 없었다.이 때문에 좌우익은 해방후 미·소 양군이 남북을 분할 점령한 조건에서도 통일된 단일민족국가를 수립하기 위한 운동을 계속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일제 강점시대의 민족해방운동 과정 전체가 곧 자산계급과 노동계급의 지도층이 함께 참가한 근대민족국가 수립과정의 일환이었다고 할 수 있다.그것이 해방 후 민족분단의 위험이 높아진 상황에서는 좌우익 정치세력이 함께 참가한 통일민족국가 수립운동으로 이어졌다. 외국자본주의 세력의 침입이후 한반도에는 근대민족국가 수립운동이 꾸준히 추구됐는 데 그 운동이 좌우익으로 나뉘었던 일제시대에는 민족해방운동 과정에서 통일전선운동으로 계속됐다.해방 후 민족분단시대에는 그 운동이 평화통일 그것도 대등 통일 운동으로 연결됐다고 할 수 있다.
  • 역사기록도 ‘한밭’ 대이동/정부기록보존소 28일 大田청사로 이전

    ◎국보 조선왕조실록 등 호송 군작전 방불 대한민국 역사(歷史)기록의 대이동이 시작된다. 각종 정부기록과 행정자료를 소장하고 있는 정부기록보존소가 오는 28∼30일 대전 제3정부청사로 이전함에 따라 창고 안에 보관돼 있던 ‘역사’들도 함께 대전으로 옮겨간다. 조선왕조실록과 일제 총독부 자료에서 최근의 행정문서·판결문에 이르기까지 돈으로 따질 수 없는 귀한 것들이어서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수송이 전개된다.정부 행정문서,고(古)문서,해외문서,행정박물(博物) 등 물량만도 231t.광(光)파일 등 전산자료가 수록돼 있는 주전산기는 파손에 대비해 1억원짜리 보험에도 가입돼 있다. 이전되는 기록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부산지소로부터 옮겨지는 조선왕조실록 태백산(太白山)본 848책.국보 151­2호인 실록은 방충,방습을 위해 290개 오동나무 상자에 나뉘어 담긴 뒤 다시 두께 1㎝ 짜리 특수 종이상자에 넣어진다.삼엄한 경찰 경비 아래 이중 삼중으로 안전장치가 된 특수 차량에 실린다. 조선 선조 때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뒤 다시 제작,전국 5개 사고(史庫)에 분산보관했던 것 가운데 하나다.남한에는 서울대 규장각의 강화도 정족산사고본과 함께 두질만 남아있다. 일제 조선총독부 문서도 귀중한 자료.모두 2만6,000권으로 식민통치 실상을 알려주는 자료로는 세계에서 가장 방대한 규모다.柳寬順 등 3.1운동 관련자 재판 판결문,산미증식계획 관련 서류,토지조사 사업 지적원도 등은 모두 근·현대사를 되짚는데 필수적인 사료(史料)들.동학의병장 全琫準의 처형 기록,갑오개혁과 대한제국 때의 관청 문서도 빼놓을 수 없다. 사진·문서가 각각 2,000장씩 담긴 해외문서 마이크로필름도 2,000롤이나 된다. 행정기관이 쓰던 각종 도구들도 모두 옮겨진다.정부수립 이후 계속 쓰이다 지난해 7월 낡아서 퇴역한 국새(國璽)보관함,88올림픽 성화봉,경제기획원·재무부·국토통일원·전매청·공업진흥청 등 없어진 부처의 관인,각종 메달,기념품 등 350점이다. 광복 이후 최근까지의 법원 판결문도 이전한다. 金才淳 학예연구관(37)은 “한번 훼손되거나 잃어버리면 영원히 되살릴 수 없는 살아 있는 역사자료들이어서 전 직원이 비상근무에 들어갔다”고 말했다.
  • 3·1운동 기념탑/崔弘運 논설위원(外言內言)

    서울의 안산(案山)인 남산(南山)은 예부터 목멱산(木覓山),또는 인경산(引慶山)이라 일컬어지며 서울 시민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아오고 있는 명산이다. 산세가 매우 부드럽고 아름다운 기품을 갖추고 있어 수많은 선남선녀들이 이곳에서 사랑을 나누었으며 서울을 찾는 외국인들도 이 곳에 올라 서울의 산세와 시가지를 한 눈에 바라보며 감회에 잠기곤 한다.서울시민의 허파역할도 하는 남산이야말로 세계 어느 나라 수도를 가봐도 찾지 못하는 자랑거리가 아닐 수 없다. 그 남산 동쪽 기슭에는 일제(日帝)에 항거하다 숨진 군인들의 넋을 기리는 장충단(奬忠壇)이 있던 장충단 공원이 자리잡고 있다.조선왕조 말엽이던 1895년 8월 20일 새벽,흥선 대원군을 앞세운 한 떼의 일본인 자객과 난군들은 순식간에 광화문 문짝을 밀어제치고 경복궁 깊숙한 곳에 자리한 건청궁(乾淸宮)까지 침입,閔왕후를 찾아내 끝내 살해하고 말았다.이런 치욕의 난장판 속에 저마다 제 목숨만 살겠다고 달아나는 판에 당당히 일본인들에 맞서 싸우며 본분을 다한 군인들이 있었다.洪啓薰·廉道希·李暻鎬·金鴻濟·李學承·李鍾九·李耕稙·林最洙 등이 그들이다. 장충단은 바로 1900년 9월 19일,어명에 따라 이들을 추모하고 제향하기 위해 지어진 곳이다.충정공 閔泳煥이 쓴 비문에는 ‘그 서릿발,눈보라에도 늠름하고 당당했던 뛰어난 절개는 해와 별 같다’고 했다. 이 비문을 짓고 쓴 충정공도 불과 5년 후인 1905년 11월 18일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12일 후 자결하고 말았다.그리고 5년 후 한일합방이 되자 장충단은 폐사(廢祀)되고 공원으로 꾸며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곳에서 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국립극장 맞은 편에 3·1독립운동 기념탑이 건립된다고 한다.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한민족의 의기와 절개가 90여년만에 남산 동쪽 기슭에서 되살아나고 있는 것 같다.이는 서울시가 최근 공원위원회를 열어 3·1운동기념탑 건립추진위원회가 정부수립 50주년을 맞아 이 곳에 짓기로 한 284평 규모의 소공원 건립안을 허용함으로써 가능하게 됐다.이 공원안에 3·1독립운동이 일어난 1919년을 기리기 위한 19.19m의 기념탑이 세워진다.추진위는 광복 50주년이 되는 오는 8월 15일 기공식을 갖고 3·1절 80주년에 되는 내년 3월 1일 준공한다는 계획이다.처음 세워지는 3·1운동 기념탑이 일제에 짓밟히고 찢긴 한(恨)서린 땅에 세워지는 의미를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없겠다.
  • 국민의 정부 첫 5·18 의미­5·18 光州민중항쟁 18주년

    ◎“아시아민주화운동 도화선” 재평가/亞 인권선언대회 주체 계기/기념식 국제행사로 발돋움 “5·18은 아직도 광주에 갇혀 있는가” 국민의 정부 출범후 처음 맞는 5·18의 화두(話頭)는 이렇게 시작되고 있다.지난해부터 5월18일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되는 등 여러 여건은 4·19에 맞먹는 민중항쟁으로 자리매김 되고 있다.그럼에도 광주·전남을 제외하고는 어디서도 기념행사 조차 외면당하고 있는 현실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5·18 민중항쟁 제18주년 기념행사위원회(위원장 李基洪)’는 올해 행사의 목표를 ‘5·18정신의 전국화·세계화추진,그리고 광주와 5·18의 향후 방향성 제시’로 세웠다.5·18을 시공(時空)이라는 씨줄과 날줄로 엮어 전국적,나아가 세계 인류 모두에게 제대로 인식되도록 하자는 것이다. 이번 5·18이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은 50년만에 정권이 교체되었다는 사실이다.또 유엔 세계인권선언 채택 50주년이라는 의미도 있다.광주에서는 15일부터 17일까지 ‘아시아인권헌장’선언대회가 열리고 있다.아시아지역 2백여개의 비정부민간조직의 쟁쟁한 인권운동가들이 모여 21세기를 맞아 아시아민중이 인간다운 삶을 유지하기 위해 추구해야할 기초적인 권리를 담은 헌장을 채택하는 행사다. 이같은 노력을 통해 5·18은 아시아 민주화의 도화선이 된 국제적 민중운동으로 자리매김될 수 있다.광주의 울타리를 넘어 우리 국민 전체의 역사로 기록됨은 물론이다. 이를 위해 시간의 관점에서 5·18의 근·현대사적 위상 재고찰이 필요하다.5·18 묘역에 설치된 체험공간 일곱마당 부조물은 ‘임진왜란 의병­동학혁명­광주학생운동­3·1운동­4·19의거­5·18광주민중항쟁­통일’로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일곱마당에는 빠졌지만 4·3제주항쟁도 같은 맥락에서 부각되어야 한다는게 5·18연구학자들의 주장이다. 공간적으로는 다른 나라 민중항쟁과의 비교 검토가 요구된다.중국의 천안문사태,대만의 2·28사태 및 고웅사태 등이 비교대상이 될 수 있다.일부 학자들은 버마 8888항쟁,태국 5·18 항쟁과 최근 인도네시아의 반(反)수하르토봉기 등 80년대 후반 이후 아시아권의민중항쟁들을 ‘민주화 갈망’이라는측면에서 같이 묶어보려는 노력을 진행중이다. 결국 5·18이 역사에서 제 위치를 차지하려면 명확한 진상규명이 전제되어야 한다.발포명령자,사망자 숫자 등이 확실히 규명되어야 한다.집단암매장 여부,행방불명자 추적,헬기기총소사 등의 참혹행위 여부도 밝혀져야할 대목이다. ◎광주 민중항쟁 일지 ▲80.5.17=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 ▲5.18=전남대생 600여명 학교정문 앞 계엄군과 첫 충돌.광주민주화운동 발발 ▲5.27=신군부 광주민주화운동 진압 ▲9.1=전두환 11대 대통령 취임 ▲9.17=김대중 내란음모죄 1심 사형선고 ▲10.25=계엄군법회의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 175명 선고공판사형5명,무기7명 등) ▲12.9=광주 미문화원 방화 ▲81.4.3=실형 관련자 특사,감형 실시 ▲82.3.18=부산 미문화원 방화 ▲84.11.18=민정당사 점거 시위 ▲85.5.23=서울 미문화원 점거 ▲6.7=국방부‘광주사태 전모’발표.사망자 191명(민간인 164,군인 23,경찰 4명) ▲86.11.1=광주 직할시 승격 ▲88.4.26=13대 국회의원 총선에서 민정당 완패.국회사상 최초의 여소야대 정국 형성 ▲88.11.18∼89.2.24=국회 광주 특위 및 청문회 가동 ▲89.3.10=노태우­김대중 회담,상무대 공원화등 일부 치유책 합의 ▲91.5.11=광주민주화운동 관련 보상 지급 완료 ▲93.5.13=김영삼 대통령 광주문제 관련 담화 발표 ▲94.5.13=정동년 5·18 광주항쟁 연합 상임회장,두 전직 대통령 및 군지휘관 35명을 내란 목적 살인 등 혐의로 고발 ▲95.7.14=5·18 관련자 처벌을 위한 공동대책 위원회 구성 ▲7.18=검찰 5·18 관련자들에 대한 공소권 포기 발표 ▲7.19=5·18 유족 부상자 등 150여명 명동성당 농성 ▲11.25=5·18 특별법 제정 ▲96.1.23=두 전직대통령 등 5·18 관련자 8명 내란혐의 기소 ▲97.4.17=대법원 전두환 무기,노태우 17년형 확정 ▲5.9=국무회의 5·18 국가기념일 제정 ▲12.22=두 전직대통령을 포함한 5.18 관련자 사면,복권
  • 봄나들이/가족과 함께 ‘선열의 얼’ 되새기자

    ◎천안 유관순 열사 추모각­봉화대­생가 등 유적지 인접/홍성 한용운·김좌진 장군 생가도… 하루 코스로 적격 79년전 우리 선조들은 3월1일을 시발로 일제에 맞서 근 3달간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을 벌였다.그래서 3월은 우리들에게 설레임보다는 숙연하게 다가온다. 절기상으로는 봄이지만 봄나들이를 나서기에는 아직 이르다.3월을 맞아 독립투사의 생가 등 항일운동 유적지를 둘러보는 것도 뜻있는 일이다. 독립투사들의 생가를 보려면 충남으로 가야한다.유관순 열사는 천안에서 태어났고 윤봉길 의사는 예산,김좌진 장군과 만해 한용운은 홍성출신이다.충남에 독립운동가들이 많은 것은 충청도가 예로부터 충절의 고향이었기 때문이다. 천안시 병천면 탑원리에 있는 유관순 열사 유적지는 추모각,봉화대,생가가서로 가까이에 있어 순회코스로 안성마춤이다.천안시내에서 독립기념관으로가는 21번 국도로 나가 18㎞정도 가면 아우내장터가 나오고 이 곳에서 500m 떨어진 곳에 열사의 영정을 모신 추모각이 있다.추모각을 구경한뒤 추모각 뒷편의 매봉산에올라 독립운동 거사를 알리기 위해 봉화를 피운 봉화대를 둘러보고 능선을 타고 내려오면 생가가 나타난다.모두 다 둘러보는데 1시간이면 된다. 김좌진 장군과 만해 한용운의 생가가 있는 홍성은 인근의 용봉산과 천수만 방조제를 연계하면 하루 단위 나들이길로 적격이다.먼저 충남 서부의 소금강으로 불리는 홍북면 용봉산으로 가 1∼2시간 땀을 흘린다.하산길에 점심식사를 하고 생가터로 발걸음을 옮긴다.갈산면 행산리에 있는 김좌진 장군의 생가터에는 24평 규모의 생가와 기념관이 있다.기념관에는 국내 및 해외활동과 관련된 유품과 함께 영상자료가 전시돼 있다.이 곳에서 승용차로 10분 거리에는 한용운 생가가 있으며 생가를 거쳐 방조제로 가면 된다. 윤봉길 의사는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서 출생했다.시량리에는 윤의사가 태어나서 4살때까지 살던 광현당,중국으로 가기 전인 23살때까지 지냈던 저한당,윤의사의 사당을 모신 충의사와 유물전시관,충의관 등이 4만2천여평의 경내에 보존,관리되고 있다. 서울에는 종로구 인사동 태화관,종로2가 탑골공원,서대문구 현저동 독립공원이 있다.3·1운동의 발상지인 탑골공원은 1897년에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공원이다.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팔각정을 중심으로 국보2호인 원각사지 10층석탑,원각사비 등의 문화재와 3·1운동 기념탑,3·1운동 벽화,의암 손병희 선생 동상과 한용운 선생 기념비 등이 있다.서대문 독립공원은 일제시대 유관순,손병희 등 애국지사가 수감돼 있었던 곳으로 지난 92년 서울구치소가 경기도 의왕시로 이전하면서 조성된 곳이다.감옥 7동,사형장,지하옥사 등이 복원됐으며 독립문,3·1운동기념탑,순국선열 추념탑 등이 자리하고 있다. ◎의인 대거 배출된 충청도 충청지역은 예로부터 충절의 고향이라고 불려 왔다.이러한 사실은 실제로도 입증된다.1900년부터 1973년까지의 명사 150인을 분석한 한 조사에 따르면 충남은 독립운동가 부문에 6명(유관순,윤봉길,김좌진,한용운,이범석,조병옥)이 올라 10명인 서울 다음으로 2위에 올랐다.조사 당시 서울인구가 충남인구의 두배가 넘는 것을 감안하면 인구비례로는 충남이 서울보다 훨씬 높은 셈이다. 충남에서 의인이 많이 배출된 것은 역사적으로도 뒷받침된다.사육신인 성삼문(홍성),박팽년(대전)을 비롯,북벌론을 주장한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우암 송시열이 회덕출신이다.임진왜란에서 나라를 구한 이순신 장군이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실질적인 고향은 아산이고 구한말 의병운동이 가장 먼저,가장 강하게 일어난 곳도 충청지역이다. 이로 미루어볼 때 충청지역은 일찍부터 충절 또는 민족의식이 저변에 강하게 깔려 있었고 이러한 전통이 독립운동가 배출로 이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물론 이렇게 된 데에는 송시열로 대변되는 기호학파가 200여년간 지배세력이었다는 것도 간과할수 없다.즉 나라를 잃은데 대한 책임의식이 그만큼 강할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한편 충청인의 기질을 보면 ‘충청도 양반’이라는 말처럼 대체로 행동이 점잖고 느린 편이다.이 말은 뒤집어 보면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것과는 거리가 있지만 행동은 신중한 것으로 해석된다.즉 충동적이기 보다는 심사숙고하며 결정을 내리고 행동을 하는 것으로 볼수 있다.바로 이러한 요인이 어려운 상황에서 살신성인의 모범을 보여주게 된 동인이었는지도 모른다.
  • “국난 극복 위해 신명 바칠것”/김 대통령 3·1절 기념사

    ◎북에 특사교환 재촉구 김대중 대통령은 1일 3·1절 기념사에서 “3·1운동이 있은지 79년후인 지난 2월25일 50년에 걸친 권위주의와 독재정치를 물리치고 국민에 의해서 여야간 정권교체가 이룩됐다”고 전제하고 “‘국민의 정부’는 3·1 선열들에 의해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받드는 유일한 합법정부”라고 천명했다. 김대통령은 이날 상오 세종문화회관에서 김수한 국회의장,윤관 대법원장과 광복회 회원 및 3·1운동 희생선열 유족,시민대표 등 4천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제 79주년 3·1절 기념식에 참석,“국난을 극복하고 내일의 재도약을 실현하기 위해 신명을 바칠 것”을 다짐하면서 이같이 밝혔다. 김대통령은 특히 “튼튼한 안보 위에 변화를 위한 노력을 해야 할 것”이라며 북한당국에 대해 남북기본합의서의 이행을 위한 특사교환을 거듭 제안한 뒤 “평화공존·평화교류,그리고 장차의 평화통일을 위해 우리는 어떠한 수준의 대화에도 응할 준비를 갖추고 있다”고 강조했다. 김대통령은 “남북합의서에서 합의된 화해와 협력,불가침관계가 반드시 이뤄져야 할 것”이라면서 “우선 최소한의 대화,교류를 통해 무엇보다도 이산가족의 상봉 내지는 생사확인만이라도 서둘러야 한다”고 촉구했다. 김대통령은 이어 “3·1운동은 대화합의 절정을 이룬 국민적 총참여,바로 그것이었다”면서 “이러한 정신이 다시 한번 발현되기 위해 노사,동서,노소,남녀가 화합하는 방향으로 전진하고 있으며,노·사·정 대타협이 바로 이를 증명하고 있다”고 역설했다. 이날 기념식은 국민의례에 이어 김상길 광복회 고문의 3·1운동 경과보고,권쾌복 광복회장의 독립선언서 낭독,기념식 노래인 ‘동방의 등불이여’ 독창 및 합창,김대통령의 기념사,3·1절 노래 제창과 김국회의장의 선창에 의한 만세삼창의 순서로 40분동안 진행됐다.
  • 김 대통령 3·1절 기념사서 새 정부 성격 규정

    ◎임정 정통성 잇는 유일 정부/첫 여야 정권교체로 민주주의 국시 실현 김대중 대통령은 1일 취임후 첫 경축행사인 3·1절 기념사에서 3·1운동의 정신을 새정부 출범의 역사적 의미와 나아가야 할 방향에 접목시켰다.하나는 국민의 정부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받드는 유일한 합법정부’로 규정한 것이며,다른 하나는 3·1운동을 ‘국민 대화합의 절정을 이룬 국민적 총참여’로 해석한 것이다.이는 역대정부와 차별화 시도로 특히 지난 94년 독립투사들의 위폐 송환 당시 김영삼 전 대통령이 문민정부야말로 상해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정부로 규정한 대목과 비교된다. 김대통령은 먼저 “3·1절을 기념하는 오늘은 79년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한 선열들과 우리 국민들의 거룩한 정신이 최초로 실현된 자랑스런 날”로 정의했다.그 의미는 “국민에 의한 여야간 정권교체로 이 땅에 진정한 민주주의의 시대가 온 것”이라는 표현에 모두 함축되어 있다.즉 국민의 정부는 바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시가 최초로 실현된 정부라는 의미다.그는그 이유로 3·1운동 이후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왕정복고를 지향하는 정부가 아니고 민주주의를 지향한 민주공화국인 ‘민국’이었다는 점을 적시했다.국민의 정부를 50년에 걸친 권위주의와 독재정치를 물리치고 출범했다고 천명함으로써 서로 동일선상에 놓은 것이다. 김대통령은 또 3·1운동을 전국 13도의 모든 사람들이 남녀노소,상하귀천,좌우사상의 차별없이 참여한 ‘민족의 대행진’으로 재해석했다.그러면서 이를 IMF체제 극복을 위한 노사정 대타협,정부기구 축소,근로자의 고통분담,기업의 구조조정 등 새정부가 추진중인 노력들과 연결시켰다. “3·1운동의 대화합정신이 다시한번 이 땅에 발현되고 있다”.이 한마디에 김대통령이 전하고자 하는 메세지가 응축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 김 대통령 3·1절 기념사

    3·1운동은 대한제국 말엽부터 시작된 우리 민족의 독립과 영광을 지키고자 하는 운동의 정점이요,자랑스러운 상징이었습니다.그로부터 79년 후인 지난 2월25일 이 나라에는 다시 한번 국민에 의한 새로운 시대가 열렸습니다.그것은 50년에 걸친 권위주의와 독재정치를 물리치고 국민에 의해서 여야간 정권교체가 이룩된 것입니다.이제 이 땅에 진정한 민주주의의 시대가 온 것이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시가 실현된 것입니다. 3·1운동은 대화합의 절정을 이룬 국민적 총참여,바로 그것이었습니다.지금 우리 국민은 3·1운동의 국난극복 정신을 그대로 계승해서 오늘날 금융위기라는 국가의 존폐가 걸린 난국을 극복하는데 다함께 나서고 있습니다. 공무원 여러분도 기구개혁,정부기구의 축소와 인원의 감축,봉급의 동결 등으로 고통받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그러나 우리의 공무원 사회는 많은 개혁이 이루어져야 하고,그것 없이는 국정을 바르게 이끌고 갈 수가 없습니다.정부는 앞으로 공무원에 대해 공정한 지위안정,생계보장,이직자에 대한 사후대책 등모든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한가지 분명한 것은 일반공무원,경찰,군인,정부 산하기관 어디에서고 이제는 지연과 학연 혹은 이해관계 등 부조리한 관계에 의한 왜곡된 인사는 영원히 사라질 것이라는 것을 저는 여러분께 다짐합니다.3·1운동 당시 우리 조상들이 국난극복을 위해서 일치협력했듯이 이 나라의 노동자,사용자,정부의 노·사·정 3자가 우리 국민의 행복과 발전을 위한 전위대로 나서주어야하겠습니다. 남북기본합의서에서 합의된 화해,협력,불가침의 관계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겠습니다.우선 최소한도의 대화는 이루어져야 합니다.최소한도의 교류도 이루어져야 합니다.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 북한 당국에 대해 다시 한번 남북기본합의서의 이행을 위한 특사의 교환을 제안하는 바입니다.무엇보다도 이산가족의 상봉 내지는 생사확인 만이라도 서둘러야겠습니다.또한 우리는 한반도의 긴장을 완화하고 남북간의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구축하기위해 남북대화를 병행해 4자회담을 꼭 성사시켜야 하겠습니다.
  • 남궁억기념관… 뜻이 살아 숨쉬게(박갑천 칼럼)

    구한말 겨레의 선각자였던 한서 남궁억 선생.그가 성주목사)로 있을때다.경상관찰사가 밀첩을 보냈다.인삼1천근에 금3천냥과 명주 5백필을 해올리라는 내용이었다.짭질찮은 불의에 호락호락 좇을 선생이던가.관찰사를 찾아간 선생은 호통친다.『이게 무슨짓이오.당신이 언제부터 그리 세도가 당당해진거요』.관찰사는 친일파 이근택이었다. 남궁억선생하면 무궁화꽃이 연상된다.그는 「승리의 노래」까지도 무궁화를 내세워 노랫말을 짓고있다.『우리의 웃음은 따뜻한 봄바람/춘풍을만난 무궁화동산/우리의 눈물이 떨어질 때마다/또다시 소생하는 이천만/(후렴)빛나거라 삼천리 무궁화동산/잘살아라 이천만의 조선족』.이노래는 행진하면서 또는 아이들이 고무줄넘기를 하면서도 불렀다. 배화학당에 있을때 그는「무궁화삼천리」라는 자수본을 고안했다.또 누런명주 삼동주엔 태극기도 수놓게했고.여학생들이 한땀한땀 수를 놓으면서 가슴에 애국혼도 수놓게 하자는 뜻이었다.3·1운동때 배화학당의 활동이 컸던 것도 이같은 한서 선생의 민족교육 때문이었다는 평가다.그의 무궁화사랑은 그뒤 선향인 강원도 홍천군 모곡리로 물러나서도 이어진다.전국으로 무궁화묘목 보내기운동을 펼치면서. 「황성신문」을 창간하여 사장겸주필이 되었는가 하면 「조선니약이」「동사략」 등의 저술도 남긴 한서 선생.그런 가운데서도 특히 주목해야할 글이 「조선어법」이다.그범례에 『…범례를 베풀때에 다 조선글로 기록함이 마땅하거늘 근래 조선문전이나 어전을 지은자가 흔히 한문을 섞어썼으니 이는 근본을 잊어버린 누습이라 할만하다…』고 쓴 국어사랑의 정신.총론과 말법의 2편으로 나누어 규정한 내용은 아주 자상하여 학자적 기질을 느끼게 한다. 낙향한 한서 선생은 기독교에 귀의하여 무궁화 보급운동과 교육에 몸바친다.그를 기리기 위해 한서감리교회 등에서 연고지 모곡리일대에 4천여평대지를 마련하고 기념관과 기념예배당을 짓기로 했다한다.그와함께 1백여종 무궁화를 한데모은 식물원도 만들어 모곡리일대를 무궁화동산으로 가꿔나갈 요량이다. 그동안 봄이되면 별생각없이 벚꽃놀이에 취해온 이땅의 우리겨레들.그걸보면서 틀수한 성품임에도 많이 언짢아했던 지하의 한서 선생이 이제야 홈홈한 웃음을 지을것만 같다.〈칼럼니스트〉
  • 종교지도협의회에 바란다/황규호 문화부·부국장급 기자(서울논단)

    한국종교지도자협의회가 지난 18일 창립총회를 열고 닻을 올렸다(서울신문 19일자 17면).불교,기독교,유교와 함께 천도교와 원불교를 포함한 이른바 민족종교에서 나온 대표들이 공식멤버로 참여했다.종교가 모처럼 화합과 유대의 폭을 넓혀 민족사회에 올바른 가치관을 제시하고 이를 실천한다는 기치를 내걸었다. 이 종교지도자협의회는 사회 곳곳에서 무거운 분위기가 부풀어난 때에 창립되었다.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정신적 기대감을 안겨주었다.종교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은 역사에 비친 사실을 통해 잘 알고 있다.우리는 1919년 3·1운동에서 민족을 하나로 뭉쳐놓은 종교 역량을 이미 보았다.민족대표 33인은 모두 종교계 인물로,당시 2천만 겨레의 구심점이 되었다.일제의 질곡에서 해방과 독립이라는 민족의 공동선을 추구한 종교간의 협력이었던 것이다. ○3·1운동 종교역량 결집 그러나 오늘의 현실은 사뭇 달랐다.종교인구가 늘고,다종교사회로 변화하면서 종교 서로가 갈등의 틈새를 벌려놓았다.자기종교만이 구원이나 구제를 받게된다는 아집과무분별한 자기영역 확장은 갈등의 실마리가 되었다.그리고 지극히 세속적인 물량주의로 치달은 종교는 사실상 이웃을 제대로 들여다 보지 못했다.이는 종교 내부에서조차 늘상 비판을 받았다. 세상사람들은 때로 종교가 왜 사회에 필요한 것인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분명한 대답은 교리를 바탕으로 구성원 신도들에게 우선 인간의 보편적 가치관을 심어주는데 별다른 무리가 없는 집단이 종교라는 점에 있다.보편적 가치관은 사회규범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자 하는 기본양심이다.이 기본양심을 먼저 일으켜 세우는 일,그것은 평범한 사람들이 바라는 종교의 기능이 아닌가 한다. 종교는 사회속의 조직이라고 한다.다만 일반 사회조직과는 달리 신앙의 줄거리와 교리,의례 따위를 기초로 한 공동목표를 지닌 사회집단이다.이 공동목표는 전통사회에 사는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양심의 공동체를 이룩하는 것이다.사회학자들은 이를 종교의 사회통합이라는 말로 설명하고 있다.그리고 사회통합에서 종교는 서로를 높여주는 아교로 비유했다. ○위기사회에 빛·소금되길 그러고 보면 3·1운동 이후 78년만에 만난 종교 지도자들의 사명은 막중할 수 밖에 없다.그동안 종교간의 연합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다만 오월동주격으로 만났기 때문에 사회에 대해 아무런 빛을 던져주지 못했을 뿐이다.그래서 이번에 만난 종교 지도자들은 위기의식이 가득한 이 사회에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할 것이다.이를 위해서는 종교가 연합으로,또는 각 종교별로 사회가 바로 서서 일어나도록 하는 복음의 소리를 들려줄 필요가 있다. 지나간 시대에 흔했던 「나라를 위한 기원법회」나 「구국기도회」같은 행사를 지금은 거의 볼 수 없게 되었다.국가와 통치자를 혼동한 지난 구시대가 아닌 오늘에 와서 그런 모임을 굳이 주저할 이유가 없다.우리 손으로 통치자를 뽑았거니와,이 나라도 국민이 주인이다.국가를 관리한 정부가 민주주의 정착과정에서 더러 잘못을 저질렀다고는 하지만 채찍만 들어서 안된다는 까닭도 여기 있다. 우리사회는 지금 용기를 실은 기도를 요구하고 있다.정치와 경제의 충격으로 마음이 상한 이들과 또 나라의 장래를위한 기도가….그리하여 종교는 마음상한 이들이 다시 일어나 일하는 가운데 인간의 존엄성을 깨우치도록 어루만져야 할 것이다.
  • 김송죽 소설 「번개치는 아침」(송화강 5천리:17)

    ◎북만일대 조선족 삶과 투쟁 생생히/비적의 약탈에 맞서 결성한 무장지위대/후일 공산군부대 편입… 국민당군 토벌나서/항일 독립운동가의 후손은 반동으로 찍혀/중국 문혁시기 혹독한 핍박·고초겪어 흑룡강성 화천면 성화향 성화촌에 사는 김송죽 선생(59)은 퇴직교원이다.자식들은 모두 대학을 나와 하얼빈에서 직장생활을 하느라 나가있다.그래서 두 내외가 넓은 한족식 집을 지켰다.그는 80년대 초에 처녀작 장편소설 「번개치는 아침」을 발표한데 이어 90년대 초에는 장편실화 「혈전」을 내놓았다.이미 문명을 얻은 그는 요즘 「관동의 밤」이라는 장편소설을 탈고했다. 처녀작 「번개치는 아침」은 그의 부친을 모델로 한 소설이다.광복직후 조선족부대가 비적과 싸운 투쟁의 역사를 그렸다.국민당군 별동대 성격의 비적은 광복직후 북만일대에서 살인과 약탈을 일삼았다.공산당을 적으로 싸워야했던 당시 국민당에 북경에서 먼 북만은 사실상 통치지역 밖이었는지 모른다.그런 탓에 국민당을 돕는답시고 나선 별동대속에는 만주국시절 헌병이나 경찰관도끼여있었다는 것이다. ○피땀어린 농토 등지고 유랑 그리고 실제 국민당 비호를 받았다.국민당 제15집단군 총사령 상장 사문동과 제1집단군 총사령 상장 이화당,국민당 동북 정진군 총지휘 중장 장우신이 별동대를 조종했다.당시 그들의 횡포를 고발한 노래말에 「사(사문동),이(이화당),장(장신우)은 불지르고 살인하니」라는 내용이 들어갈 정도였다.북만일대의 주민들은 이들에게 등을 돌렸다.공산당이 일찍 뿌리를 내린 이유도 이들 때문이었다. 이들이 한번 휩쓸고 지나가면 마을이 불타버리고 주검이 들판을 덮었다.더구나 조선족은 늘 사냥의 대상이 되어 무참한 죽음을 맞았다.그런 일로 해서 조선족들은 피땀으로 일군 땅을 버리고 다시금 유랑을 떠나는 이들이 많았다.이 무렵 조선족 선각자들이 일어났다.무장자위대를 만들어 마을을 지켰던 것이다.그러고 나서 얼마있다가 공산당 군부대에 속속 편입되었다. 그러한 무장자위대 가운데 맨 먼저 공산당 군부대에 편입한 조선독립대대는 1945년 11월25일 연안에서 주덕해와 손을 잡았다.조선의용군 제3지대로 개편한 조선독립대대는 다음해 4월28일 하얼빈에서 국민당군과 싸웠다.하얼빈이 국민당군 손에서 떨어져나오자 당기관과 발전소,송화강철교,비행장 경비를 담당했다가 국민당군 토벌에 나섰다.1946년 9월2일 하얼빈시 향방구 사리툰전투에서는 제3지대 소속 조선족 21명이 전사했다. 김송죽 선생의 부친이자 소설 「번개치는 아침」의 모델 김병념은 광복직후 동북민주연군에 참가했다.제1연대 조선족대대인 제2대대 5중대 1소대에 배속되었다.소대에서 3반장 직책을 맡은 그는 1946년 가을 대대를 따라 흑룡강성 화남현 발전소로 이동했다.그해 11월6일 주변정찰을 나갔다가 국민당군 병력과 교전이 붙었다.그 전투에서 김병념은 대대참모 김해정 등과 함께 전사했다.그리고 얼마뒤인 11월20일 국민당 제15집단군 총사령 사문동이 붙잡혔다.사문동은 12월23일 벌리현에서 총살되었다. 김송죽 선생은 소년시절을 부대에서 보냈다.부친 김병념이 전사한 이후에도 모친이 부대 재봉대에서 군복을 짓는 일을 하고 있어서 그냥 영내에서 살았다.그러다 부대가 북한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모친과 함께 벌리현에 남았다.할아버지 김석길이 아직 생존해있던 때로 할아버지 슬하에서 자랐다.애국계몽운동가이자 교육자요,독립운동가였던 할아버지 밑에서 비교적 엄하게 자랐다. ○소년시절 군부대서 생활 할아버지 김석길은 1884년 평남 수난 태생이었는데,1912년부터 계몽운동에 참여했다.3·1운동에 적극 가담한 연고로 지명수배를 받자 제자 9명을 데리고 압록강을 건넜다.집안과 휘남을 거쳐 왕청에 와서 대종교에 입교하고 북로군정서의 일원이 되었다.그리고 1925년 신민부에 들어갔다.1928년에는 김좌진 장군이 파견한 의란현에서 이도강 등에 4개의 학교를 세웠다. 김송죽 선생이 스무살 나던 해인 1958년에 할아버지 김석길은 흑룡강성 화남현에서 세상을 떴다.그러나 독립운동에 참가한 민족의사들은 대접을 못받고 있다.항일운동을 했으면서도 공산당이 이끈 투쟁대열에 서지 않은 사람은 모두가 배제되었다.오늘날 흑룡강성 항일열사 가운데 민족독립운동가는 한 사람도 없다.물론 김석길 같은 분들도 공적을 인정받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그 후손들은 오히려 모진 핍박을 받았다.더구나 문화대혁명시기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겪어야했던 고초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김송죽 선생은 할아버지가 독립운동가였다는 이유로 반동민족주의자가 되었다.그의 죄목은 반동민족주의자 말고도 역사반혁명분자의 아들,반혁명집단의 두목,반당분자,반사회주의분자 등 10가지에 이르렀다.부친 김병념이 국민당군과 투쟁한 사실도 깡그리 무시해버렸다.부친이 광복전 강제로 끌려가 철도경호대에 있었다는 사실만 들추어 혁명열사가 계급의 적으로 전락했다. 그리고 김송죽 선생 자신이 써놓았던 소설 「번개치는 아침」의 원고도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비적토벌을 내용으로 한 것까지는 그런대로 넘어갔으나,김동철·김해정이 조직한 조선족부대를 문제로 삼았다.김동철과 김해정은 본래 항일연군 8군에서 일제와 싸웠다.그러다 1939년 군장 사문동이 일제에 투항하자 숨어있다가 광복과 더불어 조선족부대를 창설했던 것이다.그 뒤에 동북민주연군 제1연대 제2대대에 편입되었던 조선족부대가 1949년북한으로 건너갔다는 사실을 반동으로 몰았다.문화혁명 당시 중국에서는 북한을 수정주의로 보았던 터라 조선족부대는 반동으로 평가될 수밖에 없었다. ○농사일 틈틈이 습작 그는 옹골진 4년을 감옥에서 보냈다.모진 매를 맞고 이른바 돌림투쟁을 숱하게 당했다.그래도 푸른 대나무처럼 곧게 살라는 뜻에서 지어준 자신의 이름(송죽)에 먹칠을 하지 않겠다는 신념으로 감옥생활 4년을 버티었다.감옥에서 나온 뒤에도 소설 「번개치는 아침」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1965년 탈고하고 하얼빈 조선족문화관에 원고를 보내놓은 상태에서 날벼락을 맞았기 때문에 어떤 형태로든 출판하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내 문학수업은 어떤 의무감에서 이루어졌디요.청소년기를 할아버지와 함께 하면서리 독립운동 이야기를 숱하게 들어서 그걸 언젠가 정리한다는 생각을 했습네다.할아버지 유언도 일제에 대항한 독립운동과 비적의 횡포를 역사로 기록하라는 것이었디요.할아버지한테 듣고,어렴풋하나마 어려서 실제 보아왔던 일들을 기록으로 남긴다는 의미에서 소설을썼던 것이외다.1957년 벌리중학을 나와 농사일 틈틈이 그런 꿈을 키우면서 실제 습작을 해왔디요.할아버지 유언과 내 꿈은 실로 오랜만에 이루어졌습네다』 김송죽의 「번개치는 아침」은 1983년에 출판되었다.원고를 탈고한지 꼭 18년만에 햇빛을 본 것이다.그에게는 물론 가족사를 문학적으로 정리했다는 뿌듯한 성취감을 안겨주었다.또 다른 한편으로는 기억속에서 차츰 멀어지고 있는 조선족들의 삶과 투쟁을 복원한 대서사시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요즘 탈고한 장편소설 「관동의 밤」도 북만의 독립운동사를 형상화한 것이다.자그마치 75만자나 되는 작품을 출판할 길이 없어 애를 태우고 있다.
  • 이홍구 대표 각계­초선의원과 연쇄간담

    ◎“노동계파업 대화로 풀겠다”/공권력 자제·민심동요 막을 대책 당부­각계/국민홍보 강화·야권과 접촉 재개 건의­초선 신한국당 이홍구 대표위원은 일요일인 12일 사회각계 원로 및 당내 초선의원들과 잇따라 간담회를 갖고 노동계 파업사태에 대한 대책마련에 부심한 하루를 보냈다. ○…12일 낮 서울 플라자호텔에서 열린 신한국당 이홍구 대표위원과 각계 원로들간 오찬간담회에서는 최근 노동계 파업사태에 대한 심각한 우려와 함께 반드시 대화를 통해 해결돼야 한다는 의견이 이어졌다.간담회에는 이대표와 강영훈·남덕우 전 총리,서영훈 신사회공동선운동연합상임대표,고건 명지대총장,김진현 서울시립대총장,고흥문 전국회부의장,이원범 3·1운동기념사업회장,유재천 서강대교수,유재현 경실련사무총장,이한구 대우경제연구소장 등 13명이 참석,2시간15분동안 파업사태해결방안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이뤄졌다. 먼저 사태확산의 원인과 관련해 참석자들은 『단순히 노동관련법 내용이나 처리절차에 대한 불만이 아니라 경제상황 악화 등 다양한 사회적 불만요소가 복합적으로 표출되고 있다』는데 의견을 같이 했다. 사태해결방안으로 참석자들은 공권력사용의 자제와 국회차원의 정치적 대화를 당부했다.한 참석자는 『노동관련법만 놓고 해결방안을 찾을 것이 아니라 민심의 동요를 막을 보다 근본적인 방안을 찾아야 한다』면서 국회에서 여야의 대화로 해결책을 마련할 것을 촉구했다.다른 인사는 『물리적 해결은 사태를 악화시킬 뿐이므로 끝까지 대화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당부했다.이에 이홍구 대표는 『신한국당은 어떻게든 정치적으로 사태를 해결할 결의가 돼있다』며 『오는 17일 연두회견때 대화해결을 위한 보다 구체적인 방안을 밝히겠다』고 말했다. ○…이어 신한국당사에서 열린 이대표와 초선의원 9명과의 간담회에서도 파업상황에 대한 심각한 우려와 함께 대국민 홍보강화방안,야권과의 대화재개 방안,당내 비상대책기구 구성제의,노동법 재심의 문제 등을 놓고 난상토론이 이뤄졌다. 초선의원들은 『매일 지구당사 앞에서 700명이 시위하고 있다』(김문수 의원),『이우재 타도데모도있다』(이우재 의원)고 사태의 심각성을 지적한 뒤 대국민 홍보활동강화와 야권과의 대화모색을 건의했다.한 참석자는 『야당측의 대안없는 비난은 단호히 대처하되 야당측이 대안을 내놓으면 대표나 총무가 적극 대화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필요하다면 노동법을 재개정하는 결단도 내려야한다』는 의견도 개진됐으나 대세를 이루지는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영수회담 수용문제에 대해서도 신중한 견해가 우세했다고 다른 참석자는 전했다.
  • 오늘 각계 원료와 간담회/이홍구 대표

    신한국당 이홍구 대표는 12일낮 시내 플라자호텔에서 사회 각계 원로들과 오찬간담회를 갖고 노동계 파업 등 현시국에 대한 의견을 수렴한다. 이날 간담회에는 서영훈 흥사단이사장,이세중 변호사,고건 명지대총장,이원범 3·1운동기념사업회장 등 10여명이 참석할 예정이다.
  • 원로들이 말하는 ’97한국의 좌표/이현재·서영훈 대담

    ◎이현재·서영훈/“양보와 희생” 의식혁신운동부터/집단이기·지역감정·과소비 과감히 청산/정직·신용·질서 3대덕목 갖춘 시민키워야 1997년 정축년의 새해가 밝았다.올해는 세계가 불과 3년 앞으로 다가온 21세기를 준비하는데 총력을 기울이는 한해가 될 전망이다.우리나라도 올해부터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회원국으로서 그 대열의 앞에서 달려갈 것이다.국내적으로는 차기대통령을 뽑는 선거도 치러진다.우리 사회의 원로인 이현재 학술원회장(전 국무총리)와 서영훈 감사원 부정방지대책위원장(시민운동협의회 상임대표,신사회공동선운동연합 상임대표)은 이경형 서울신문 정치부장의 진행으로 이뤄진 대담을 통해 21세기를 준비하는 올해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각 분야에 대한 우리의 좌표를 조망하고 과제를 제시했다. ▲이현재 회장=최근 국가경쟁력 하락에 대한 우려의 소리가 높습니다.경제부문의 경쟁력 하락은 그 원인의 진단이 쉽지 않습니다.경기순환적인 차원인 문제일 수도 있고장기 구조적인 문제일 수도 있겠죠.우선 구조적으로 보자면 우루과이라운드를 거쳐 세계무역기구(WTO)가 출범하면서 모든 시장이 개방돼 각국이 상호 경쟁하는 체제가 됐습니다.사실 그전까지 우리나라는 국제사회에서 미국 등 무역상대국의 온정주의와 우리의 비관세장벽 등을 통해 발전해온 측면이 있습니다.국내적으로도 세제,금융,행정적인 측면에서 경제개발 중심으로 정책을 이끌어와 우리기업의 경쟁력을 인위적으로 높여주기도 했습니다.저임금근로자도 큰 몫을 했고요.그러나 이제는 경제의 국제화,개방화에 따라 정부의 직접지원이 불가능해졌습니다.저임금근로층도 없어졌습니다.이같은 상황변화는 우리경제의 체질적 취약성을 노출하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서영훈 대표=임금,금리,땅값,물류비는 물론 과학기술이나 자본,국제신용까지도 불리한 상황입니다.그렇다면 기업과 근로자의 공존윤리나 근면,절약,질서,신용 능률면에서는 앞서야 하는데 이들마저 뒤떨어져 있습니다.분수에 맞지 않는 낭비가 너무 많고 선진국조차 조심하는 사치품소비가 급증해 위화감도 커지고 있습니다.근로자의 불만이 임금에만 있는게 아닙니다.의료나 교육 등 일상생활이 임금으로 쫓아가지 못하는데서도 불만이 생겨난다고 봐요. ▲이회장=우리사회의 과소비는 과잉소비가 아니라 「과시소비」의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그러나 경제사적으로 보면 국민소득 1만달러를 전후하는 단계에서 과소비와 무절제한 투자는 흔히 나타나는 현상입니다.앞선 국가들은 이런 현상을 제도를 통해서 억제하기도 하고,민족의 기풍이랄까 의식향상을 통해 해결하기도 했습니다.우리의 경우 이제는 규제로 과소비를 억제하기에는 타이밍이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군사정부나 사회주의체제라면 몰라도 지금은 민주의식이 고취돼 규제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도적 장치는 필요합니다. ○세계화수준 걸맞게 ▲서 대표=OECD,WTO 등 국제기구에 가입하면 다른 가입국과 수준을 맞춰야 합니다.해방이 되면서 농경가족주의 사회,유교적 문화가 통째 부정되고 외국 것을 덮어놓고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외국문화가 전승문화를 압도했습니다.민족의 주체성이 약하면 외국문화를 선별하지 못하게 됩니다.우리도 이제 자본주의로 경제성장을 이뤄 중진국대열에 들어선만큼 세계화시대에 걸맞는 준비를 해야 합니다.세계 공통의 시민윤리나 정직,신용,근면,질서같은 덕목이 우리는 취약해요.우리 민족이 원래 근면하지만 기율과 질서 등을 강조하다 보면 과거 독재정권이나 하는 것처럼 돼버렸는데 그것과는 구분해야 합니다.무한경쟁시대에서 우리는 경쟁국과 무언가 다른게 있어야 합니다.이는 우리가 무엇으로 다른 나라들과 경쟁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직결됩니다.그것은 한국,한민족의 정체성이며 이를 바탕으로 도덕적·문화적 정신력을 강화하고 개인이나 집단이기주의를 넘어서는 시민운동으로 발전시켜 나가야 합니다. ○공동체의식 함양을 ▲이 회장=앞으로의 사회는 다양성의 사회가 될 것입니다.다원화된 사회가 존립하려면 다양하면서도 전체를 이끌어주는 공동체의식이 있어야 합니다.다양성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고 사회 전체의 생산성을 높이는 철저한 시민정신이 필요한 것이죠.그러면 그런 시민정신을 어떻게 함양해야 할 것인가.물론 교육도 필요합니다.그러나 무엇보다 모든 구성원이 한발씩 양보하고 희생할 수 있는 정신이 파급돼야 할 것입니다.국가경쟁력 향상이라고 하면 단순히 생산성과 기술혁신을 말하지만 따지고 보면 무엇보다 선행돼야 할 것은 의식혁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위원장=문민정부는 비판도 적지 않습니다만 실명제나 선거법,부정부패방지법같은 제도개혁을 많이 했어요.나도 새정부의 정책을 지지했습니다만 몇년이 지난 지금 별로 효력이 나지 않고 있어요.그건 가진 층이라 할 수 있는 지도층이 협력을 하지 않기 때문이에요.공직자의 부정부패는 고위직보다 중하위직에서 더 심한 것 같습니다. 국민의 모범인 공직자는 정직해야 합니다.공직자가 분발하고 반성하면서 제 도리를 잘 지켜야 해요.현정부가 추진중인 제도적 개혁은 철저히 중단없이 계속돼야 합니다. ▲이 회장=역대 정권가운데 부패방지와 사회정화를 기치로 내걸지 않은 정권은 없습니다.3공화국의 새마을운동,5공화국의 사회정화,6공화국의 신질서,현정권의사회개혁 등이 다 그런 것이죠.그러나 이런 운동이 단 한번도 국민속에 뿌리를 박지 못했습니다.이런 운동이 성공하려면 무엇보다 지도층의 솔선수범이 필요합니다.지도층이 말로만 대중을 설득해봤자 따라오지 않습니다. ▲서 대표=요새 국가관,애국심을 얘기하는 사람이 없어요.국가는 가장 큰 공동체입니다.지난 9월의 강릉 무장공비사태를 통해 국민의 안보의식은 상당히 강조된 것으로 봅니다.한총련사태를 보면 현실을 부정하는 과잉통일열기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느낍니다.3·1운동까지만 거슬러 올라가 보더라도 우리는 어렵게 선 나라입니다.국제적 역학관계에서 남북이 대치하는 상황까지 이르렀습니다.그러나 부정적 시각에 사로잡히지 말고 정신력을 키워 문화를 발전시키고 경제력을 보충하는 일이 중요합니다.고난의 땅에서 고난의 역사를 살아온 우리 민족이 경제·문화적으로 선진국을 만들자는 시점에서 웬만한 차이나 감정,예컨대 집단이기주의나 지역감정같은 것은 초월해야 합니다. ▲이 회장=외국의 저명한 학자가운데도 『한국은 왜 통일을 하려 하느냐.과거 독일과 오스트리아처럼 떨어져서 각각 번영하면 되는 것 아닌가』라는 말을 하는 이가 있습니다.우리의 민족정서를 실감하지 못하는 것이죠.우리의 젊은층 가운데도 「같은 민족,다른 체제」에 대해 막연한 동경을 갖는 이들도 있지 않습니까.남북한의 통일은 국제질서와의 조화속에서 남북간의 교류를 확대하도록 노력하는 가운데 가까워질수 있을 것입니다.예민한 정치문제를 떠나 경제,문화중심의 교류를 확대하고 공동체의식을 확산한 뒤에 이념적으로 접근해야 할 것입니다. ○21세기 비전 제시를 ▲서 대표=마지막으로 강조한다면 지도층을 포함한 모든 국민이 거듭나야 합니다.세계화,정보화,다원화된 세계에서 집단이기주의,지역감정,소비향략,현실을 무시한 과잉통일 열기 등은 버려야 합니다.1등 국민이란 정직하고 신용있고 질서있는 국민입니다.특히 올해는 대통령선거가 있는 해인 만큼 21세기,위대한 시대를 준비하는 대통령을 뽑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공정한 선거가 이뤄져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이 회장=21세기에 대해세계 각국이 기대감을 갖고 나름대로의 비전을 제시하고 있습니다.우리는 거창하게 21세기의 100년이라는 긴 기간을 말하기보다는 이제 막 시작한 97년을 중심으로 생각해봅시다.올해는 대통령선거가 있습니다.바로 그 선거에서 선출된 지도자가 21세기를 열고 21세기의 새 방향을 설정하게 됩니다.이번 선거에서의 선택은 21세기에 대한 비전이 그 기준이 돼야 할 것 입니다.국민 한사람 한사람이 21세기를 향하는 3년동안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부문이 단 한걸음이라도 전진하는 그런 노력을 다같이 해나간다면 그것이 바로 21세기를 준비하는 자세가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 제암리 진혼곡(외언내언)

    경기도 수원시청에서 서남쪽으로 20㎞쯤 달리면 화성군 향남면 제암리에 닿는다.400여명의 주민이 오순도순 모여 살고 있는 이마을 시장터옆에 마을이름을 딴 조그마한 교회 하나가 우뚝 서 있다.제암리교회.농어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시골예배당 모습이지만 이곳은 3·1운동때 일제가 저지른 만행을 생생하게 증언해주고 있는 비극의 현장이다. 화성군일대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것은 서울보다 꼭 한달뒤인 4월1일.이날 하오7시 장안면 수촌리 뒷산에서 봉화가 오르면서 시작됐다.이튿날 시위군중은 2천명으로 불어났고 3일에는 시위군중일부가 주재소를 습격하기도 했다.사태가 급박해지자 조선총독부는 헌병대를 파견,시위를 진압했고 15일에는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23명을 제암리교회에 가둔뒤 불을 지르고 무차별총격을 가했다.그리고 같은 날 제암리 옆마음인 고수리에서도 천도교신자 6명을 무참히 살해,불태웠다. 이 만행으로 사람과 가축·곡식 등이 타는 냄새가 10㎞밖까지 퍼져 나갔다고 한다.학살사건이 일어난후 신자나 일반주민은 일본경찰의감시 때문에 사건현장에 얼씬도 못했지만 캐나다 의료선교사 스코필드박사가 찾아와 불탄교회에서 유골을 수습,공동묘지에 묻었다.제암리교회가 복원된 것은 1952년.정부의 도움과 주민의 성금으로 옛터에 옛모습 그대로의 교회가 지어졌고 유족회관도 건립됐다. 성탄절 전날인 지난 24일밤 제암리교회에서는 조촐하지만 감동적인 음악회가 열렸다.일본 히로시마(광도)슈도(수도)대학 나카우네 미노리 교수(50·여)가 3·1운동때 학살된 영혼들의 명복을 빌고 일제의 만행을 속죄하기 위해 마련한 「진혼연주회」.이 연주회에서 나카우네 교수는 바이올린으로 11곡의 진혼곡을 연주했고 「아리랑」 「봉선화」 「고향의 봄」 등 우리 가곡을 주민 200여명과 합창하기도 했다. 진혼연주회는 작은일이다.그러나 그 뜻은 매우 크다.이런 일들이야말로 한·일 두나라 관계를 보다 가깝게 하는 큰걸음이 아닌가 싶다
  • 재향군인회 세미나/이춘근·최창규 박사 주제발표

    ◎“6·25는 자유수호전쟁”/헌법전문에 명문화해야 대한민국재향군인회(회장 장태완)는 3일 하오 서울 잠실 향군회관에서 「범국민 호국정신선양 세미나」를 갖고 6·25전쟁의 호칭통일과 6·25 자유수호의 호국정신을 헌법전문에 반영할 것을 촉구했다. 이날 세미나에서 이춘근 박사(전 세종연구소 연구위원)는 「한국 국방사에 나타난 호국정신의 발전적 재조명」이라는 주제발표를 통해 『6·25전쟁은 북한 및 국제공산주의라는 공산독재 세력에 대항하여 자유민주주의를 지킨 전쟁이었기 때문에 「6·25자유수호전쟁」으로 지칭돼야 한다』고 주장했다.이어 최창규 박사(국가상징자문위원장)도 자유수호와 호국정신의 민족사적 정통성」이라는 주제발표에서 『3·1정신과 4·19정신이 헌법전문에 명시되었듯이 6·25자유수호 전쟁의 호국정신도 헌법전문에 마땅히 명시돼야 한다』고 강조했다.주제발표 내용을 간추려본다. ◇이춘근 박사=한국전쟁의 의미는 우선 호국전쟁이었으며 동시에 대한민국이라는 정통성을 보유한 국가를 수호하는 전쟁이었다.과거의전쟁이 외적의 침입에 대항,국가의 생존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면 한국전쟁은 외적(소련·중공)의 지원을 받은 내부 반란자(북한정권)에 의한 대한민국 절멸의도에 대항한 전쟁이었던 것이다. 두번째로 한국전쟁은 민족사에 나타난 전쟁들처럼 역사가 아니라 현실이다.이 전쟁을 체험한 세대들이 아직 이 나라 사회의 원로로 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셋째로 한국전쟁은 인구의 10%가량 사상자를 냈을 만큼 근대 이후의 세계 7대 전쟁이었으며 민족간 싸움을 일으켰던 집단이 아직도 건재하고 있는 사실이 얼마나 엄중한 것인가를 일깨우는 경험을 남겼다. 이같은 한국전쟁의 교훈을 되살리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6·25사변 또는 동란,외국인의 시각에서 가치중립적인 한국전쟁에 대한 호칭통일이 필요하다.한국적인 관점에서 보아 한국전쟁은 「자유수호전쟁」이 된다.공산독재 세력에 대항해 자유민주주의를 지킨 전쟁이었기 때문이다.사멸위기에 놓인 대한민국이 호국되었고 민족사의 정통성이 수호된 전쟁이기 때문이다.6·25자유수호전쟁은 북한이 말하는 민족해방전쟁에 대비하여 한국전쟁을 지칭하기기에 적합한 이름이다. ◇최창규 박사=4강이라는 오늘의 이중 양극의 세계사 속에서 그 세계성을 안고 한국사 안에서 치른 의전이 곧 6·25전쟁이었다.분단이라는 932번째 국난 속에서 가장 중심적인 역사적 핵으로 볼 수 있다.세계성으로는 국난이었고 대내적으로는 국란이었다.따라서 그 의미와 좌표가 민족사적으로 정립될 때 민족사의 정통성과 법통성은 새로운 기반을 얻게 된다.그것이 바로 자유수호전쟁으로서 6·25의 호국정신이 갖는 민족사적 정통성의 기반이다. 6·25전쟁같은 동족상잔 앞에 자유수호가 승리해야만 이 민족사 위에는 의병도 살아나고 정통성도 함께 살아난다.그 민족사적 실질의 현장이 바로 대한민국의 법통성을 국시로 밝히고 있는 헌법전문의 명문화이다.우리의 헌법전문 속에 당당히 6·25 자유수호전쟁의 호국정신이 3·1운동이나 4·19정신 처럼 국시의 내용으로 명시되어야만 한다.
  • 광복절 아침에/국가·민족의 진로 다시 점검하자/박유철(특별기고)

    제51주년 광복절을 맞이한다.우리에게 광복절의 의미는 무겁다.이날은 일본제국주의 식민지 지배의 질곡속에서 광명을 되찾은 환희와 감격의 날이다.우리는 이 날을 통해 자유로운 삶과 독립된 나라의 축복을 기뻐하며,이를 영원히 지켜갈 결의를 다진다. 이 날은 감사의 날이다.나라를 되찾기까지 수많은 애국선열들의 피와 땀,눈물이 있었다.그분들은 총칼의 위협속에서 주저하지 않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으며 만주로 연해주로,하와이로 버마로,벌판과 골짜기로,감옥과 형장으로 조국광복의 길이면 어디든지 두려움 없이 멀고 험한 길을 걸었다.그분들은 식민지배의 긴 어둠과 질곡속에서 3·1운동으로 민족공동체를 완성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으로 근대국가와 자유민주주의의 기초를 놓았다. 또한 이 날은 경계의 날이다.간계와 무력으로 우리국권을 유린하고 우리민족에게 씻을수 없는 치욕과 측량할 수 없는 고통,헤아릴수 없는 불행을 안겨주었던 과거 일본의 침략주의를 경험하였던 우리는 이러한 역사를 되새김으로써 침략주의에 대해 끊임없는 경각심을 일깨울 필요가 있는 것이다.더구나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까지 일본의 일부 지도층들이 일본 국민을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인류평화에 책임있는 역할을 하도록 이끌어야 할 처지에 있음에도 과거 침략주의에 대한 환상을 버리지 못하고 수시로 망언을 일삼으며 국민을 오도하려 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진정한 한·일우호협력관계의 발전을 위해 우려를 금할 수 없다. 광복절의 의미는 감격하고,감사하고,경계하는데 그치지 않는다.해방 3년뒤인 1948년 이날,대한민국이 수립됨으로써 광복절은 대한민국 건국기념일의 의미까지 함께 가지고 있는 것이다.우리는 이 날을 맞을 때마다 자주독립 국가로서의 국가적·민족적 진로를 다시 점검하고 확인해야 할 필요가 있다. 지난해 우리는 광복50주년을 경축했다.지난 50년간을 되돌아볼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고 한 한용운 선생 시의 일절이 진리로 느껴진다.근대사의 질곡속에서 우리민족이 겪었던 고통이 생명력으로 승화된 것을 보는 것이다. 지난 반세기동안 분단된 국토,빈약한 자원,동족상잔의 상처,어지러운 정치속에서 이룩해낸 경제발전,민주화의 성취가 그것을 말해주는 것이다.우리는 35년간 식민지 지배하에서 움츠러들고 일그러진 자신의 모습에서 이제 비로소 제대로 당당하게 펴진 자신의 모습을 찾게된 것이다.그렇다.지난 반세기동안 우리는 자신의 진정한 모습과 진정한 가능성을 찾게 되었다.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는 무엇인가로부터 쫓기며 이러한 것을 찾았다.「식민지 지배의 고통으로부터」,「빈곤의 고통으로부터」,「독재의 고통으로부터」숨이 턱에 닿도록 쫓기며 광복과 번영과 민주화를 이루어 냈다. 새로 시작되는 반세기의 첫해,우리가 이제부터 가야할 길을 「제2의 광복」이라 부르자.그 길은 고통으로부터 쫓김의 길이 아니라 반세기동안 헐었던 상처를 치유하는 길,갈라진 것을 맞추는 길,거친 것을 다듬는 길,삐뚤어진 것을 바르게 하는 길,흐트러진 것을 간추리는 길이 되게하자.그리하여 우리국토에 드리워진 철책선을 걷어내고,분단으로 멍울진 한을 씻으며,미움이 있었던 곳에 사랑을,원한이 있었던 곳에 용서를,대립이 있었던 곳에 일치를 이루어,우리들 마음은 끝없이 자유롭고,생각과 행동은 세계로 향해 달려가며,화목한 눈길과 명랑한 웃음이 꽃피는,해같이 빛나고 달같이 아름다운,하나된 민족,강력한 나라,유덕한 사회를 이루어 가자.
  • 우리출판사 「한글세대를 위한 고승의 발자취」 시리즈 펴내

    ◎되새겨 보는 ‘고승의 얼’/김시습·지눌·성철·용성스님 재조명/불교정화·중생구제 일념의 일대기/총 10권중 4권… 새달까지 무학대사 등 6권 완간 1천6백년 우리불교의 역사에 선구적인 업적을 남긴 고승들의 삶과 사상을 현대적으로 재조명한 「한글세대를 위한 고승의 발자취」 시리즈가 우리 출판사에서 출간됐다. 모두 10권으로 간행될 총서중 이번에 출간된 도서는 1권 「사과꽃 떨어지면 사과열리고」­김시습편 (우봉규 지음),2권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딛고 일어나라」­보조국사 지눌편(유동호지음),3권 「멀어져도 큰산으로 남는 스님」­성철스님편(일지지음),4권 「풍금치는 큰 스님」­용성스님편 (박상률 지음) 등 4권이다. 저자들은 모두 대학과 연구소에서 해당 스님의 생애와 사상을 전공한 30대의 전문학자로 쉬운 우리말을 사용해서 한글 세대가 알기 쉽게 집필했다. 제1권 김시습편은 5세때 신동으로 세종대왕의 총애를 받다 세조의 왕위 찬탈에 저항해서 관직을 버리고 불법에 귀의,38년동안 전국을 방랑하며 수행자의 길을 걸었던김시습의 생애를 다루고 있다. 제2권의 보조국사 지눌은 고려중기의 승려,불교계와 승려들의 타락상을 바로잡기 위해 송광사를 중심으로 중생구제와 현실 참여운동인 결사운동을 폈던 지눌의 생애를 정리했다. 제3권 성철스님편은 24세에 출가해서 목숨을 건 수행을 하며 「부처님 법답게 살자」는 기치아래 왜색화된 한국불교의 기강을 바로 잡은 성철스님의 모습을 해인사에서 가르침을 받은 젊은 학승(일지)의 손으로 기록했다. 제4권 용성스님편은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으로 독립선언에 참여하고 1년6개월간의 감옥생활을 거쳐 출옥후에는 대중불교·생산불교·현대불교운동에 앞장섰던 용성스님의 일대기를 정리했다. 우리 출판사는 오는 9월까지 부설거사,이차돈,무학대사,초의선사,경허선사,나옹화상 등 6권을 모두 출간할 계획이다.
  • 박성수 정문연 교수 「한국독립운동사론」 펴내

    ◎30여년의 연구 결산 논문 59편 한권에 묶어/주요사건·사실 평가… 역사연구 방법론 제시 지난 30여년동안 독립운동사 연구에 힘써온 박성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가 그동안 발표한 연구논문을 한권의 책으로 묶어냈다.정문연 연구총서의 하나로 최근 간행된 이 논문집은 「한국독립운동사론」. 59편의 논문이 들어있는 이 책에서 박교수는 독립운동과 직접 관련된 의병전쟁,애국계몽운동,3·1운동,상해임시정부등 주요 사건·사실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물론 자신의 역사관과 역사연구 방법론을 폭넓게 펼쳐 보이고 있다. 그는 먼저 한국에서 민족운동은 『이념적 분열에도 불구하고 1896년에서 1945년에 이르는 반세기동안 절대독립 노선을 고수했다』고 보았다.그리고 그 민족주의가 외국의 예처럼 사회주의나 제국주의로 변질되지 않고 『방어적이며 자위적이고,민족 내적통합을 이루는데 전력을 다한 평화주의로 자리잡았다』고 분석했다.따라서 통일을 앞둔 이 시대의 민족주의도 일제강점기에 전개된 민족주의와 민족운동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와 함께 박교수는 자신이 틈틈이 관심을 보여온 고대사 부문에도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그는 단재 신채호,백암 박은식등 일제하 민족사학자들이 『전통 유교사관이 갖는 도학적 이념과 헤겔의 역사철학을 수용해 일제 침략으로 빚어진 역사적 현실을 극복하려는 강한 의지를 보였다』면서 그들의 역사관을 높이 평가했다. 아울러 현재 사학계에서 위서로 취급하는 「단기고사」「규원사화」「환단고기」등의 사서에 대해서도 『덮어놓고 매도할 것이 아니라 면밀히 비판·검토해 잃어버린 상고사를 되찾는 일이 중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이용원 기자〉
  • 기미년 「서울역 만세시위」 주도/이달의 독립운동가 신익희 선생

    ◎서울신문·보훈처·독립기념관 선정/3·1운동 전국확산 계기… 일에 쫓겨 망명/임정 수립·만주 「대일전선동맹」 결성 주역 국가보훈처와 독립기념관은 2일 해공 신익희 선생(1894∼1956)을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법무총장과 임시의정원 부의장을 지내면서 항일독립투쟁을 펼치고 광복후에는 국회의장을 역임했다. 1894년 6월9일 경기도 광주군 초월면 서하리에서 태어난 선생은 어려서 한학을 수학한 뒤 13살때인 1908년 상경,한성외국어학교 영어과에 입학했다.일제로부터 국권을 되찾고 민족적 수모를 설욕하는 방법은 서구의 진보한 문명을 받아들여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판단,영어과를 택했다. 선생은 조국이 일제의 식민지가 된 1910년 졸업했다.극일의 심정으로 일본유학을 단행,1912년 일본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부에서 수학하고 귀국,중동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았다. 윌슨 미국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천명한 1918년 림규·송진우·최남선 등과 독립운동을 밀의한다.3·1운동을 지켜본 선생은 3월5일 서울역 앞에서 만세시위를 추진한다.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계기를 만들면서 일경에 쫓기는 몸이 돼 중국으로 망명길에 오른다. 선생은 상해에서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을 추진하고 같은 해 4월13일 임정수립을 대내외에 공포하는 한편 대한민국을 민주공화제로 하는 10개항의 임시헌장도 선포한다. 임정의 조각이 이루어지자 선생은 초대 내무차장 겸 내무총장대리로 선임되어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대리로 부임한 안창호를 도와 임정의 국내 행정조직인 「연통제」를 창안,실시하게 된다. 임정 법무총장·외교부장을 두루 역임한 선생은 한국청년 5백명을 모집,군사행동을 위한 유격대성격의 「분용대」도 편성하는 등 한·중 합작에 의한 대일항전을 역설했다.한국혁명당을 창당한 선생은 만주사변과 상해사변을 도발하며 중국침략을 노골화한 일본에 맞서 모든 독립운동단체와 정당이 결속할 것을 주장,「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을 탄생시키기에 이른다.그러나 가맹단체간 협의기관인 이 동맹은 결속력과 통제력에 한계를 드러내 1935년 남경 금릉대학에서 민족통일전선의 원칙아래 신한독립당·의열단·조선혁명당·한국독립당 등 5당 통합을 이뤄낸다. 선생은 조선의용대 병력이 모여 있는 낙양으로 가서 조선민족해방동맹과 연합,무장투쟁노선의 「조선민족해방투쟁동맹」의 결성을 주도했으며 1941년에는 한·중합작으로 한·중문화협회를 조직한 뒤 다시 임시정부에 합류하게 된다. 1943년 4월 임정 선전부의 선전위원회에서 조소앙·유림 등과 활동하면서 대한민국의 선전계획수립과 실행에 이바지했다.1944년 5월 임정의 연립내각성립 때 내무부장에 선임되어 활약하다가 중경에서 광복을 맞는다. 광복이후 선생은 1945년 12월2일 임정요인의 2차환국 때 자주적 민족국가건설의 희망을 안고 귀국하지만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신탁통치안이 결의되자 김구주석을 도와 반탁운동을 선도했다. 이런 가운데서도 선생은 1946년 국민대학을 설립,민족국가건설의 동량을 육성하는 한편 「자유신문」을 발행,민족 자주성을 길러나가는 데 일조했다. 1948년 5월 제헌의원선거때 경기 광주에서 출마,당선됐고 이승만의 후임으로 국회의장에 선출되어 활약하면서 대한민국건국에 크게 공헌하게 된다.1956년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출마했으나 5월5일 호남선 열차 안에서 뇌일혈로 급사했다.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황성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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