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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운동 100년]“안중근은 한류스타”

    [3·1운동 100년]“안중근은 한류스타”

    “임정 8년간 이동 행적 깎아내리면 안 돼 독립운동가, 좌익·우익 구분할 필요 없어”“중국의 항일전쟁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조선의용군은 일반 민중의 사기를 고무하는 데 큰 역할을 했고 윤봉길, 안중근, 이봉창 등 순국선열에 대한 소설, 시, 연극도 중국에서 많이 만들어졌습니다.” 쑨커즈(孫科志·53) 상하이 푸단대 역사학과 교수는 화둥사범대에서 석사 과정을 밟을 때 지도교수의 부탁으로 우연히 한국 독립운동사를 연구하게 됐다. 하지만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역사에 많은 감동을 받았다고 밝혔다. 젊은 나이에 이국 땅에서 희생했기에 후손이 없어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등 아무런 포상도 받지 못한 조선의용군과 같은 독립운동가들을 알리는 것이 그의 목표다. 쑨 교수는 27일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이 중국의 항일전쟁에 많은 기여를 했다고 강조했다. 당시 ‘중국의 안중근이 누구냐, 중국의 윤봉길은 누구냐’는 말이 있을 정도로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은 중국 젊은이들이 항일투쟁에 참여하도록 이끌었다고 설명했다. 1928년 상하이에서는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사건을 줄거리로 한 ‘애국혼’이란 영화가 만들어졌지만, 유감스럽게도 필름은 아직 찾지 못했다고 쑨 교수는 덧붙였다. 그는 임시정부가 1919년 상하이에서 세워진 이후 1932년 항저우 등을 거쳐 1940년 충칭으로 옮겨 갈 때까지 8년간 여러 도시를 이동한 역사를 ‘임시정부 간판만 들고 도망 다닌 기간’이라고 깎아내리는 시각에 대해 분개했다. 쑨 교수는 “임시정부의 이동 기간은 일제의 체포를 피하고 앞으로 해방된다면 어떤 나라를 건설할 것인가를 모색한 시기였다”며 “1944년 임시정부가 건국령을 반포했는데, 이동 기간의 노력이 없었다면 그렇게 짧은 시간 안에 건국 계획을 제정할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쑨 교수는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한 한국인들이 여러 가지 사상을 가질 수 있었지만 좌익이냐 우익이냐의 이데올로기로 그분들을 구분할 필요는 없다”며 “특히 조선의용군은 중국의 항일전쟁뿐 아니라 세계 파시스트 반대 전쟁에 참전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역사를 잊는 것은 배신을 뜻한다’는 레닌의 명언을 인용했다. 이어 “잘못을 반성하지 않은 일본은 무조건 중국, 한국, 동남아시아에서 벌인 제국주의 침략 전쟁의 피해자들에게 사죄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상하이 윤창수 특파원 geo@seoul.co.kr
  • [3·1운동 100년]폭파된 줄 알았던 광저우 임시정부청사 찾아내

    [3·1운동 100년]폭파된 줄 알았던 광저우 임시정부청사 찾아내

    현재 주택… 中과 협의 기념비 건립 추진 국경절 행사 등 광저우 활동 고스란히‘낮 하늘의 큰 별.’ 광저우 한국 총영사관에서 근무하며 10년을 주경야독으로 독립운동사를 연구한 재중 역사학자 강정애(61)씨는 1938년 7월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약 두 달간 머물렀던 동산백원의 위치를 재작년에 확인했다. 강씨는 이국 땅에서 희생한 독립운동가들이 중국 공산당과 함께 활동했다는 이유로 이름 없이 스러져 갔다는 뜻에서 낮에 뜬 별과 같다고 강조했다. 강씨는 27일 “황포군관학교에 묻힌 김근제, 안태 두 명의 한국 청년 이름이 자꾸 시선을 잡아끌어 10년간 독립운동 연구를 하게 됐다”며 “새벽에 대만에서 연락을 받고 동산백원으로 달려와 사진을 찍을 때 얼마나 가슴이 두근거리고 흥분됐는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고 말했다. 그를 독립운동 연구의 길로 이끈 것은 1924년 건립된 광저우 황포군관학교 묘지에서 발견한 이십대 꽃다운 나이의 한국 청년들 이름 때문이었다. 임시정부가 동산백원에 둥지를 틀 무렵의 광저우는 국제도시였다. 중국의 국부 쑨원이 설립한 중산대학이 광저우에 있으며, 1927년에는 중국 공산당의 해방구를 확보하기 위해 무장봉기를 일으켰다가 실패한 ‘광둥 코뮌’ 사건이 일어났다. 광둥 코뮌에서는 중산대학에 다니던 한국인 학생을 포함해 한국 청년 200명이 참여해 150명이 사망했다. 공산 혁명이 조국 해방의 지름길이 될까 하여 남의 나라에서 피를 흘린 이들은 이름조차 다 알려지지 않았지만 중국 국민은 이를 기념하는 정자 ‘중조인민혈의정’(中朝人民血宜亭)을 세워 조선 청년들을 기억하고 있다. 강씨가 대만 중앙역사언어연구소와의 협력을 통해 임시정부의 거처임을 밝혀낸 동산백원은 당시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임시정부는 동산백원에 사무실을 두었고, 가족들은 맞은편의 아세아여관을 숙소로 썼다. 공산당과 국민당의 후원을 모두 받은 임시정부의 숙소는 야외수영장과 수세식 변기가 달린 현대적 건물이었다. 임시정부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외국 인사를 초청해 국경절 행사를 열고 경술국치일을 기억하는 사진 전시회를 개최하는 등 광저우에서 발자취를 남겼다. 동산백원은 중국공산당 제3차 전국대표대회가 열린 회의장과 불과 몇백 미터 떨어진 곳에 있다. 그동안 전쟁 중에 폭파된 것으로만 알려졌지만 중앙역사언어연구소에서 증거 사진 등을 보내 줘 실존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현재는 주택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소유권은 중국 개인과 기관이 보유하고 있다. 광저우 총영사관 측은 중국 정부와 협의를 통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이곳에 있었다는 것을 알리는 기념비 등을 세우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광저우 윤창수 특파원 geo@seoul.co.kr
  • [3·1운동 100년]베이징서 활동 독립운동가 253명 발굴… 유적지 지도로 제작 답사

    [3·1운동 100년]베이징서 활동 독립운동가 253명 발굴… 유적지 지도로 제작 답사

    작년 재중화북항일역사기념사업회 조직 손정도 선생 조선어 설교한 충원먼교회 고려기독교청년회 독립운동 근거지로 김산 전기소설 ‘아리랑’ 쓴 스노 부인 집 ‘중안빈관’에 아리랑 한글 안내판 걸기로 홍성림 회장 “우리의 역사 스스로 찾아야”중국에는 여덟 곳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적지를 비롯해 수많은 독립운동가의 흔적이 남아 있다. 경제 개발에 밀려 독립운동 유적지들이 제대로 조명조차 받지 못하고 사라지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던 한국인들은 지난해 3·1절을 계기로 ‘재중화북항일역사기념사업회’라는 시민단체를 조직했다. 아직 회원이 채 100명이 되지 않는 작은 조직이지만 4년 전부터 이어 온 역사 연구에 대한 열정과 내공만은 상당하다. 재중화북항일역사기념사업회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은 올해 주중 한국대사관에서 열리는 3·1절 기념식에 참석한 뒤 3월 한 달 동안 베이징에서 활약한 독립운동가들의 행적을 따라 밟는 답사를 세 차례 진행할 예정이다. 베이징에서 열리는 독립운동가 루트 답사에는 대구 지역의 항일 역사 연구단체도 참가한다. 지난 2일 진행된 답사에서는 베이징에서 가장 오래된 감리교회인 충원먼교회(崇文門堂)를 찾았다. 여기서 1911년 기독교계 독립운동가의 대표적인 인물인 손정도 선생이 전도사 시절 중국인과 조선인들을 위해 설교를 시작했다. 손 선생이 나라 잃은 조선인을 모아 모국어로 설교한 이래 조선어 설교의 역사는 108년 동안 이어졌으며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교회는 손 선생뿐 아니라 1920년 도산 안창호 선생이 ‘감리교회 동아시아 대표총회’에 조선 대표로 참석했을 당시의 모습 그대로 잘 보존돼 있다. 이 회의 이후 고려기독교청년회가 설립돼 베이징 항일독립운동 활동의 근간이 됐다. 올해는 마오쩌둥 주석이 중화인민공화국(신중국) 수립을 선포한 지 70주년이 되는 해로 ‘중국의 붉은 별’이라는 책을 통해 공산당을 서방 세계에 알린 에드거 스노 부부의 베이징 거주지에는 기념관이 건립됐다. 스노 부부가 1935~37년 살았던 중안빈관(中安賓館)은 2008년 중국 언론 북경만보에 실린 기사를 토대로 이곳이 스노 부부의 옛 집터란 사실이 밝혀졌고, 2011년에는 호텔 한편에 전시 공간이 마련됐다. 하지만 스노의 부인인 님 웨일스가 한국의 독립운동가 김산을 만나 쓴 전기소설 ‘아리랑’에 대한 이야기는 어디에도 없다. 재중화북항일역사기념사업회는 앞으로 한국어와 중국어로 웨일스와 김산, 그리고 아리랑에 대한 안내판을 만들어 벽에 걸기로 중안빈관 측과 협의했다. 사업회가 그동안 발굴한 베이징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들은 모두 253명에 이른다. 단재 신채호 선생의 행적지 31곳을 포함해 베이징의 독립운동 유적지는 지도로 제작됐으며 현재도 계속 정보가 새롭게 추가되고 있다. 홍성림(52) 재중화북항일역사기념사업회장은 27일 “우리의 역사를 스스로 찾지 않으면 누가 돌아보겠는가”라며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은 올해는 왜 선조들이 독립운동에 헌신했는가와 같은 근본적인 주제에 대해 접근해 보고자 한다”고 말했다. 이어 “그동안 독립운동에 대한 연구나 답사가 개별적인 인물이나 사건 중심으로 이뤄진 것 같다”면서 “역사를 단편적으로 이해하기보다는 흐름을 잘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글 사진 베이징 윤창수 특파원 geo@seoul.co.kr
  • [3·1운동 100년]3·1운동, 中·인도 등 전파… 전 세계 식민지국가 ‘횃불’이 되다

    [3·1운동 100년]3·1운동, 中·인도 등 전파… 전 세계 식민지국가 ‘횃불’이 되다

    1918년 11월 첫 번째 세계대전이 끝났다. 당시 인류의 4분의 3 정도가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지 혹은 반(半)식민지 주민이었다. 1919년 1월 우드로 윌슨(1856~1924) 미국 대통령이 파리강화회의에서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했다. 패전국(독일과 오스트리아, 오스만 제국 등) 식민지들은 다소나마 독립의 희망을 품기 시작했다. 하지만 조선처럼 승전국(영국, 미국, 일본 등)의 지배를 받던 나라들은 열강의 힘에 눌려 해방을 논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이때 우리 민족이 일본을 상대로 대담하게 독립을 선언했다. 3·1운동을 통해 승전국 식민지 가운데 맨 처음 혁명의 횃불을 들어올린 것이다. ●대한민국 뿌리 되는 임시정부 수립 미국 뉴욕타임스는 3월 13일자 기사에서 “조선인들이 독립을 선언했다. (우리에게) 알려진 것 이상으로 3·1운동이 널리 퍼져 나갔다. 수천여명의 시위자가 체포됐다”고 밝혔다. 비슷한 시기 AP도 “조선 독립선언문에 ‘정의와 인류애의 이름으로 2000만 동포의 목소리를 대표한다’고 명시됐다”고 보도했다. 3·1운동 상황을 전 세계에 알리는 데 있어 감리교 선교사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1889~1970)의 헌신이 컸다. 3·1운동은 한반도 안팎에서 임시정부의 탄생을 이끌었다. 독립선언서 첫 구절에 “이제 우리는 조선이 독립국임을 선언한다”고 밝혀 뜻있는 이들이 주권 기관을 세워 이를 정당화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곳곳에서 임시정부가 생겨났다. 이 가운데 제대로 된 조직을 갖춘 곳은 러시아 대한국민의회(노령정부)와 중국 대한민국임시정부(상하이정부), 서울의 한성임시정부 등 세 곳이었다.노령정부는 독립전쟁을 치르기 좋은 위치였지만 일본의 공세에 노출돼 있었다. 상하이정부는 정치 활동이 자유로웠지만 국내에 영향력을 행사하기에 거리가 너무 멀었다. 한성정부는 민주적 절차를 지켜 정통성이 컸지만 조선총독부가 자리잡은 서울에서 활동한다는 게 불가능했다. 세 정부는 힘을 모으고자 통합에 나섰다. 수개월간의 논의 끝에 1919년 9월 상하이에서 임시정부 3곳의 통합을 선언했다. 앞서 상하이정부는 4월 11일 생겨났는데,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사용했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고 선언했다. 더이상 왕이나 신분제는 우리 민족의 것이 아니었다. 이 때문에 상하이정부는 대한민국의 시원(始原)이 됐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통합 임정’은 끝없는 갈등과 내분으로 여러 번 해체 위기를 겪었다. ‘식물 정부’로 전락해 명맥만 유지하던 때도 있었다. 그래도 임정은 우리 역사 최초로 근대국가 수립을 선포하고 27년간 외교 노력과 의열투쟁을 병행하며 독립운동의 총괄체로 자리매김했다. 독립운동사 거두인 조동걸(1932~2017) 국민대 명예교수는 “왕족이나 정부 계승자도 아닌 이들이 민중의 뜻으로 임시정부를 세워 30년 가까이 제국주의 국가와 투쟁한 것은 세계사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들다”고 평가했다. 1948년 7월 대한민국 정부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1875~1965)은 “대한민국이 임정을 계승했다”는 사실을 수차례 밝혔다. 1987년 국회는 9차 개헌을 통해 대한민국의 법통이 임정에 있다고 다시 한번 천명했다. ●中 “3·1운동은 5·4운동 본보기 역할” 우리나라가 올해를 3·1운동 100주년으로 기념하듯 중국도 5·4운동 100주년의 해로 기린다. 1차 세계대전 뒤 일제는 중국 베이징 군벌정부에 패전국 독일이 점령했던 산둥반도를 조차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시민들이 들고 일어나 이를 막아내고 반제국주의·반봉건 투쟁에 나섰는데, 이것이 5·4운동이다. 3·1운동은 5·4운동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이 사실은 중국의 문헌자료에도 잘 나타난다. 한국에서 3·1운동이 일어난 뒤 베이징에서 발행된 ‘매주평론’(1918년 창간된 문화사상잡지)은 같은 달 16일자를 3·1운동 특집호로 꾸몄다. ‘조선 독립의 소식’을 싣고 2·8독립선언과 3·1독립선언서를 소개했다. 3·1운동의 시위 상황을 객관적으로 해설하고 분석했다. 이 내용은 베이징대 학생들을 강타했다. 학생들이 직접 만들던 잡지 ‘신조’(4월 1일자)에 ‘조선 독립운동의 새로운 교훈’과 ‘조선 독립운동의 감상’이라는 논문이 실렸다. 신조는 1919년 1월 창간된 월간지로 훗날 5·4운동의 주동자가 된 푸쓰넨, 뤄자룬 등이 편집책임자였다. 특히 푸쓰넨은 3·1운동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고 중국인에게 호소했다. 그는 “조선의 3·1운동이 ‘세계혁명사에서 신기원을 열었다’고 할 수 있는 3개의 중요한 교훈을 가르쳐 준다”고 강조했다. 바로 ‘무기를 들지 않은 혁명’과 ‘불가능한 것을 알고도 한 혁명’, ‘순결한 학생혁명’이다. 푸쓰넨의 호소에 마음을 움직인 학생들은 5월 4일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 모였다. 이들은 선언문을 낭독하고 시위에 나섰다. 이날 발표된 베이징학생선언문에서는 “조선이 ‘독립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일어섰다. 일본이 산둥지역을 뺏으려 하니 우리 중국인도 일어서자”고 호소했다. 이날의 운동이 주요 도시에 파급돼 5·4운동으로 퍼져 나갔다. 리궁중 중국 난징대 교수는 “3·1운동은 중국의 거울이 됐다. 독립국가 개념 형성의 중요한 촉매였다”며 “3·1운동은 중국의 5·4운동의 본보기 역할을 했으며 20세기 전반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했다.●동남아시아·중동 민족운동에도 기여 3·1운동은 중국뿐 아니라 인도와 동남아시아, 중동지역 민족운동에도 기여했다. 인도에서는 3·1운동의 비폭력 방법을 적극 채택했다. 인도 국민회의파는 1919년 4월 5일 ‘사타야 그라하 사브하’(진리 수호)운동을 비롯한 비폭력 독립 운동에 나섰다. 지도자 마하트마 간디(1869~1948)는 남아프리카에 있다가 3·1운동 소식을 듣고 곧바로 귀국해 비폭력 투쟁을 시작했다. 1929년 3월 인도 독립운동 지도자인 시인 라빈드라나드 타고르(1861~1941)도 3·1운동의 영향을 잊지 않았다. 그는 ‘동방의 횃불’이라는 시를 써 조선인에게 헌사했다. “아시아의 황금시기에/한국은 횃불이었지/그 횃불 이제 다시 타오르길 기다리네/동방에 광명을 비추기 위해.” 1919년 3월 미국의 식민지였던 필리핀에서도 과도입법위원들이 독립선언을 한 뒤 워싱턴DC에 독립사절단을 파견했다. 같은 해 3~6월 이집트에서도 독립시위운동이 일어났다. 학생과 농민을 중심으로 완전 독립을 요구하는 시위가 퍼져 나갔다. 이집트에서는 이를 공식적으로 ‘1919년 혁명’이라고 부른다. 이처럼 3·1운동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승전국 식민지들이 자신들의 독립국가를 세울 수 있도록 ‘기폭제’ 역할을 했다. 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는 “3·1운동의 영향으로 중국 5·4운동, 인도 국민회의파 독립운동, 필리핀과 아랍지역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이들 운동을 주도하던 정당과 단체가 그대로 성장해 독립국가 재건의 주역이 됐다”고 설명했다.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日, 세계 평화주의 흐름 오판해 동아시아를 수렁에 몰아”

    “日, 세계 평화주의 흐름 오판해 동아시아를 수렁에 몰아”

    진보적 언론으로서도 이례적 보도 평가 아베 개헌 추진·군비 확장에 경종 의미 “조선 전역서 비폭력으로 日군경에 맞서 독립선언서는 아시아의 미래도 통찰” 마이니치신문도 “日에 저항한 독립운동”‘3·1운동에 대한 일본 군경의 탄압은 극도로 가혹했다. 강덕상(재일사학자)의 ‘현대사 자료 조선2편’에 따르면 ‘3분간 사격에 51명 즉사’라는 내용이 군 보고서에 적히기도 했다.’ 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일본 아사히신문이 27일 1개면을 할애해 100년 전 한국에서 일어났던 3·1운동의 역사와 의미, 당시 일본의 무자비한 탄압 등을 다룬 특집기사를 실었다. 아사히는 ‘기로의 1919년…동아시아 100년의 그림자’라는 제목의 기획기사를 통해 1919년 1차 세계대전의 전화를 딛고 세계에는 평화주의 바람이 불고 있었지만, 일본은 이 흐름을 잘못 파악해 오판을 함으로써 동아시아를 수렁으로 몰아넣었다고 지적했다. 아사히가 상대적으로 진보적 색채가 강하다고는 해도 일본 언론으로서는 이례적인 보도라는 평가가 나온다. 헌법에 자위대를 명기하는 방향으로 개헌을 추진하고 막대한 방위비를 지출하며 군비 확장을 꾀하고 있는 아베 신조 정권에 대한 경종의 의미가 담긴 것으로 보인다. 잘못된 길로 접어들었던 100년 전을 상기시킴으로써 아베 정권에 반성과 각성을 촉구한다는 것이다. 아사히는 “1910년 한일합병 이후 조선 민중은 언론, 출판, 집회의 자유를 빼앗긴 채 헌병의 감시 아래 침묵을 강요당했다”며 “이에 1919년 3월 1일 서울 중심부 파고다 공원에서 독립선언서가 낭독됐고 수십만명이 거리에 나와 ‘독립만세’를 외쳤다”고 전했다. 이어 “독립운동은 조선 전역으로 확산됐고 민중들은 비폭력 정신을 내걸고 일본 군경에 맞섰다”고 소개했다. 그럼에도 일본은 무자비한 탄압에 나서 그해 5월 말까지 3개월 동안 희생자는 사망 7509명, 부상 1만 5961명에 달했다고 박은식 선생의 ‘조선독립운동지혈사’를 인용해 전했다. 아사히는 독립선언서를 일본 정치인과 학자에게 보낸 독립운동가 임규(1867~1948) 선생에 대해서도 다뤘다. 임규 선생은 3·1운동 당일 밤 자신이 일본어로 번역한 독립선언서를 들고 도쿄역에 도착한 뒤 이를 200통 복사해 당시 총리 등 정치인, 학자, 언론사, 대학 등에 보냈다. 아사히는 독립선언서 내용 중 ‘2000만 조선인을 힘으로 억누르는 것은 동양의 평화를 보장하는 길이 아니다. 4억 중국인들이 일본을 더욱 두려워하고 미워하게 하여 결국 동양 전체를 함께 망하는 비극으로 이끌 것이 분명하다’는 대목을 들며 “독립선언서는 아시아의 미래도 통찰하고 있었다”고 평가했다. 아사히는 “그러나 조선의 이런 외침이 일본 사회에 퍼지지는 못했다”며 ‘역사평론’이라는 잡지가 독립선언서를 게재해 일본의 독자들에게 알린 것은 패전 후인 1948년이었다고 설명했다. 아사히는 동아시아를 전화에 빠뜨린 일본의 책임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1차 세계대전 후 전 세계에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고양되고 ‘부전(不戰)조약에 의해 전쟁을 불법화하려는 시도가 이뤄지고 있었지만, 일본은 이러한 신조류를 잘못 읽었고 결국 그것이 동아시아를 불행에 빠뜨렸다”고 썼다. 마이니치신문도 이날 문답형 기사를 통해 “한국의 3·1운동은 일본의 한반도 지배에 저항해 전국적으로 퍼진 독립운동”이라고 설명했다. 도쿄 김태균 특파원 windsea@seoul.co.kr
  • 애국지사 7509위 제례상 차려 퍼포먼스하는 용산

    서울 용산구가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백범 김구(1876~1949) 선생 등 7위 애국선열을 모신 효창공원에서 기념행사를 연다. 다음달 1일 오전 10시 30분 성장현 구청장이 주도하는 애국지사 추앙 제례에서 3·1운동으로 순국한 7509위 제례상에 태극기, 무궁화, 쇠말뚝을 올려놓고 퍼포먼스를 벌인다. 성 구청장은 “선열들이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태극기와 무궁화, 일제가 우리네 넋을 흔들려고 전국 팔도에 박은 쇠말뚝을 뽑는 일이었다. 3·1만세주와 일왕 항복주, 8·15광복주를 제상에 올린다”고 말했다. 낮 12시엔 성 구청장과 진영 국회의원을 비롯한 내빈과 학생, 보훈단체 회원 등 500명이 공원 정문~주민센터 300m 구간에서 만세운동을 재현한다.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KB국민은행 3‧1운동 100주년 기념 ‘대한이 살았다’ 음원‧영상 공개

    KB국민은행 3‧1운동 100주년 기념 ‘대한이 살았다’ 음원‧영상 공개

    KB국민은행이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가수 박정현이 부른 노래 ‘대한이 살았다’의 음원과 기념 영상을 은행 홈페이지와 음원사이트에 무료 배포한다고 27일 밝혔다. 대한이 살았다는 3‧1운동 직후 서대문형무소 여옥사 8호실에 투옥된 김향화·권애라·신관빈·심명철·임명애·어윤희·유관순 등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서로를 위로하고 독립에 대한 열망을 드높이기 위해 지어 부른 노래다. 국민은행은 올해 초 후손들에 의해 당시 노래의 가사가 100년 만에 발굴됐다는 소식을 접하고, 새롭게 곡을 붙여 음원을 제작했다. 지난해 1차 남북정상회담 환송행사 ‘하나의 봄’의 음악감독을 맡은 정재일씨가 작곡을 맡았고, KB금융그룹 모델 ‘피겨여제’ 김연아의 내레이션도 곡 안에 포함됐다. 박정현, 김연아, 정재인의 ‘대한이 살았다’는 KB국민은행 홈페이지, 뱅킹앱 리브똑똑, 멜론, 지니, 벅스, 소리바다 등 음원사이트에서 27일부터 다운로드를 받을 수 있다. 세 사람이 출연한 뮤직비디오 형식의 기념영상도 KB금융그룹과 KB국민은행의 공식 SNS채널(유튜브, 페이스북, 블로그), 글러브엔터테인먼트 SNS채널(유튜브,트위터) 등을 통해 감상할 수 있다. 한편 KB국민은행은 해당 영상의 공유 및 좋아요 수 건당 3100원을 기부금으로 조성해 독립선언문이 선포된 태화관 터 ‘3.1 독립선언광장’조성에 최대 1억원을 후원할 예정이다. 기념영상에 응원 댓글을 남긴 참가자 중 31명을 추첨해 사회적기업인 ‘마리몬드’의 숄더백도 기념품으로 제공한다. KB국민은행 관계자는“유관순 열사를 비롯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100년 전 외침이 이번 음원을 통해 전해져 오늘을 사는 대한민국 국민 모두에게 작은 울림으로 다가섰으면 한다”고 말했다 아울러 KB국민은행은 유관순 열사와 안중근 의사의 이야기를 담은 기념 영상도 공식 SNS채널에 공개했다. 가수 김도연과 최유정이 각각 유관순 열사와 안중근 의사 소개를 맡았다. 조용철 기자 cyc0305@seoul.co.kr
  • [김포 3·1만세운동-2] 군하리장터 만세운동중 체포돼 서대문형무소 옥살이한 여성 이살눔은 ‘김포의 잔다르크’

    [김포 3·1만세운동-2] 군하리장터 만세운동중 체포돼 서대문형무소 옥살이한 여성 이살눔은 ‘김포의 잔다르크’

    경기 김포 3·1만세운동 전개과정에서 일제에 의해 체포돼 재판을 받은 인원은 고촌면 6명을 비롯해 양촌면 9명, 월곶면이 13명으로 모두 28명이다. 1919년 3월 23일자 조선총독에게 보내는 ‘독립운동에 관한 건 (제24보)’에 의하면 월곶면 만세시위 상황에 대해 주모자 10명을 연행했다고 기록돼 있다. 판결문을 통해서 22일 성태영·이살눔·백일환·이병린·오복영 등 5명이 재판을 받은것으로 기록돼 있다. 체포된 10명 중 5명만 기소하고 나머지 5명은 훈방처리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김포에 독립만세운동을 한 사람이 많은데 당시 관련 사진이나 자료가 대부분 사라져 남아있는 대표적인 사례를 들어본다. 이경덕(1886~1948·이살눔)은 김포출신으로 성서학교 학생이었다. 이살눔은 이 지역에서 주도적으로 만세운동을 한 유일한 여성으로 김포의 잔다르크라 불린다. 월곶면 고양리에서 성태영·백일환 등과 함께 독립만세시위운동을 계획하고 3월22일 군하리장터에 모인 수백명의 군중에게 태극기를 배부해주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행진 중 일경에 체포됐다. 7월1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위반으로 징역 6개월을 언도받고 공소했으나 경성복심에서 기각당하고 옥고를 치렀다. 이살눔은 옥고를 치르던 중 병을 얻어 10월27일 가출옥으로 서대문감옥에서 석방됐다. 이후 군하리에서 목회자의 삶을 살다가 알 수 없는 병으로 사망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을 기리어 199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2003년 8월15일 이살눔이 전도사 몸으로 실천한 뜻을 기리기 위해 박형규 목사 외 17명과 11개 교회가 참여해 현 월곶면 푸른언덕교회 내 ‘이경덕전도사 3·1운동기념비’를 세웠다. 현재 이살눔의 양아들 부인인 며느리가 생존해 있으나 석방이후 삶의 기록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어느날 알 수 없는 병을 얻어 남편이 몰래 밤중에 공동묘지에 안장했다고 한다. 현재 묘소위치가 어디인지도 모른다는 전언이다. 임용우(1884~1919)는 당시 통진 창신학교를 졸업하고 모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12년 27세 당시 덕적도 명덕학교로 부임해 8년간 근무하면서 많은 애국청년들을 길러냈다. 그해 2월하순쯤 천도교회의 연락을 받고 3월1일 상경해 서울에서 독립선언서에 참가하고 3월3일 고향인 군하리 면사무소 앞에 면민들을 집합시켜 대한독립만세를 제창하고 시가행진을 벌였다. 또 1919년 3월29일 최복석·윤영규 등과 함께 월곶면 갈산리·조강리 일대 독립운동을 주도했다. 이날 정오 갈산리에서 최복경이 만든 태극기를 선두로 만세시위운동을 벌이고 오후 2시 군하리 향교와 보통학교·면사무소를 차례로 행진을 벌였다. 또 4월9일 자기가 재직하는 명덕학교 운동회를 덕적도 해안가에서 개최해 모인 참관들과 학생들이 앞으로 나아가 이재관·차경창 등과 만세를 선창하는 등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체포됐다. 이해 5월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위반으로 징역 1년6개월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일제의 잔인한 고문으로 순직했다. 정부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박충서는 김포출신으로 3월23일 양곡리 장날을 이용해 박승각·박승만·안성환·전태순·오인환·정억만 등과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주도했다. 그는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던 학생으로 3·1운동 파고다선언식에 참석하고 남대문과 대한문 일대에서 시위에 참여하다 귀향했다. 그는 3월19일 안성환의 집에서 박승각·박승만·전태순과 만나 양곡장날인 23일을 정해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했다. 태극기와 격문·경고문 등을 작성해 오인환과 정억만에게 줘 동리에 배포하도록 했다. 23일 양곡장터에 모인 수백명의 군중 앞에 나서 독립만세운동을 벌이고 장터를 행진하며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체포됐다. 9월4일 보안법 위반혐의로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1982년 대통령표창을, 199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런데 월곶면 지역의 만세운동을 주도한 사람 가운데 박용희와 당인표·조남선은 일제에 의해 체포되지 않았다. 박용희는 22일 만세를 주도한 후 길림성으로 망명해 한림회를 결성해 활동했다. 그는 중국에서 농장을 경영하며 군자금을 마련해 제공했다. 1933년 7월 일인살해 사건으로 소만교 국경으로 도피생활 중 해방돼 고향 월곶면 고양이로 돌아와 농업에 종사하며 6·25전까지 민족청년단에서 활동했다. 당인표는 만세운동을 주도한 후 망명했다고 하나 행방을 알 수 없다. 조남선은 만세시위에 참여한 후 망명했으며 4년 후 고향으로 돌아와 사망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 조선헌병대사령관이 육군대신에게 보낸 ‘전국 각지의 3월 22일부터 23일까지의 시위 운동상황’ 보고서에 의하면 23일 양촌면 오라리장터 만세시위에서 60여명을 연행했다고 보고하고 있다. 이 문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이 60명 주모자 중 9명을 기소하고 나머지는 훈방처리됐음을 알 수 있다. 경기도지 (1955)에 의하면 김포 3·1독립만세운동 과정에서 부상자 120명 체포자 200명으로 파악되고 있고 사망자는 발생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명선 기자 mslee@seoul.co.kr
  • 김미경 은평구청장 “3·1운동 100주년, 새로운 100년 여는 희망과 화합 꿈꾼다”

    김미경 은평구청장 “3·1운동 100주년, 새로운 100년 여는 희망과 화합 꿈꾼다”

    “3·1 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에 이종열 애국지사와 독립유공자 가족을 모실 수 있고 그날을 되새길 수 있어 기쁩니다. 이번 기념식으로 순국선열과 애국지사의 나라사랑 정신을 기리고 새로운 100년을 시작을 여는 희망과 화합이 만들어지길 바랍니다.”지난 26일 오전 10시반 서울 녹번동 은평구청 은평홀에서 열린 3·1운동 100주년 기념식 ‘3·1운동, 그날의 함성’에서 김미경 은평구청장이 밝힌 소망이다. 우리나라의 역사와 순국선열들의 헌신을 기억하기 위해 은평구와 광복회서울시지부은평구지회가 함께 마련한 이번 행사에서 김 구청장은 지역의 유일한 생존 독립운동자인 이종열 애국지사(96)에게 독립유공자 명패와 100주년 기념 배지를 전달했다. 1945년 중국 호북성, 신점진에 주둔하던 일본군에서 탈출해 항일운동을 폈던 이종열 지사는 “일제 시대 군사 훈련과 일본군 입대부터 광복 운동에 이르기까지 지나간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며 “국민들이 우리나라의 독립 운동 역사와 정신을 잊지 않고 기억해주길 바란다”는 소감을 밝혔다. 김 구청장, 조동현 광복회서울시지부은평구지회장, 은평구 청소년 및 청년 대표 등 400여명의 참석자들은 이날 행사에서 만세 삼창을 외치며 독립을 위해 투신했던 선조들의 뜨거운 의지를 다시 확인했다.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3·1운동 하면 ‘유관순’ 임시정부 하면 ‘김구’

    3·1운동 하면 ‘유관순’ 임시정부 하면 ‘김구’

    10명 중 8명 “친일잔재 청산 안 됐다” “정치인·재벌 친일파 후손 많아” 이유우리 국민은 3·1운동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유관순’을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표 이미지로는 ‘김구’가 꼽혔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이런 내용을 담은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국민인식 여론조사’ 결과를 26일 공개했다. 3·1운동에 관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나 이미지로는 응답자의 절반 가까운 43.9%가 유관순을 꼽았다. 이어 대한독립만세(14.0%), 독립·해방·광복(9.6%)이 뒤를 이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나 이미지로는 31.4%가 김구를 들었으며, 상하이(11.4%), 이승만(2.7%) 순이었다. 3·1운동 정신 핵심으로는 42.9%가 ‘자주독립’을 꼽았다. 그다음은 애국·애족(24.3%)이었다. 3·1운동 정신 계승 방법으로는 ‘친일잔재 청산’(29.8%), ‘역사 교과서에 3·1운동 내용 보완’(26.2%) 등의 순이었다. 특히 국민 10명 가운데 8명(80.1%)은 친일잔재가 청산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청산됐다’는 답변은 15.5%에 그쳤다. 청산되지 않은 이유로 48.3%가 ‘정치인·고위공무원·재벌 등에 친일파 후손들이 많아서’라고 답했다. 일본에 관한 호감도를 묻자 69.4%가 ‘호감이 가지 않는다’고 답했다. ‘호감이 간다’는 답변은 19.0%에 머물렀다. ‘호감이 간다’는 응답은 19~29세는 33.3%, 30대 20.3%, 40대 16.4%, 50대 15.7%, 60대 이상 12.9%로, 연령이 낮을수록 높았다. 이번 조사는 2월 1~8일 전국 만 19세 이상 국민 1004명을 대상으로 진행했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3·1운동 100년] “100년 전 염원 새달 필라델피아서 다시 담아낼 겁니다”

    [3·1운동 100년] “100년 전 염원 새달 필라델피아서 다시 담아낼 겁니다”

    美3·1운동 출발점인 ‘1차 한인회의’ 평가 미흡 독립운동가들 꿈 재현… 역사적 재평가 나설 것“오는 4월 13일 100년 전 미국 필라델피아에 울려 퍼졌던 대한민국 독립의 염원을 다시 한 번 담아낼 것입니다.” 미 필라델피아 서재필기념재단 최정수 회장은 25일(현지시간)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제1차 한인회의’ 재현 행사 위원장을 맡고 있는 최 회장은 “미국 3·1운동의 출발점이었던 제1차 한인회의가 역사적 평가를 제대로 받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라면서 “3·1운동과 한인회의 100주년을 맞아 당시 서재필 박사 등이 우리나라 독립을 꿈꾸었던 리틀극장에서 재현 행사를 열고 역사적 재평가에 나설 것”이라고 강조했다. 4월 12~14일 열리는 제1차 한인회의 재현 행사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 필라델피아 한인사회가 힘을 모으고 있다. 지역 교회에서는 차량과 인원 동원을, 노인회에서는 지역 어르신들의 후원을, 재미 한국학교 동중부 지역에서는 만세 시가행진 참여 등을 담당하기로 했다. 12일에는 100년 전 제1차 한인회의가 개최된 리틀극장에서 오프닝 행사와 심포지엄, 학생 역사교육 등이 열린다. 13일에는 필라델피아 한인 1000여명이 리틀극장에서 미 독립기념관까지 시가행진에 나선다. 행진 복장도 당시와 비슷하게 재현하고, 한국 전통악대가 길놀이에 나서는 등 역사적인 제1차 한인회의를 알릴 예정이다. 필라델피아 시정부도 참가자들의 안전을 위해 경찰을 지원하는 등 적극적으로 나설 예정이다. 또 이날 오후에는 100주년 기념 평화음악회도 열린다. 마지막 날인 14일 오후에 열리는 ‘한미 친선의 밤’ 행사에는 지역 정치인 등을 초청하는 등 지역 한인들의 위상을 높이고, 한미 간 우호를 증진하는 계기로 삼을 예정이다. 최 회장은 “이번 한인회의 재현 행사는 미국의 우리 2세들에게 대한민국의 소중함과 서재필 박사 등 당시 애국지사들의 자주독립 정신을 알려주는 좋은 계기이자 필라델피아 한인들의 축제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 이번 행사는 필라델피아 한인사회 리더들이 1세대에서 2세대로 넘어가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미국 내 한인사회가 다 비슷하지만 특히 필라델피아 한인 2세들은 동포사회 활동에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행사의 준비위원회 대부분을 한인 2세들이 맡아 필라델피아 교포사회의 새로운 활력소가 되고 있다. 최 회장은 “이번 행사에 참여한 한인 2세들이 앞으로 교포사회를 이끄는 리더가 될 것”이라면서 “앞으로 우리 2세들이 대한민국에 대한 애국심을 가질 수 있는 다양한 행사를 기획하겠다”고 말했다. 글 사진 필라델피아 한준규 특파원 hihi@seoul.co.kr
  • [3·1운동 100년] 이역만리 美 독립성지 필라델피아서도 태극기 들고 “대한독립”

    [3·1운동 100년] 이역만리 美 독립성지 필라델피아서도 태극기 들고 “대한독립”

    100년 전 4월 리틀극장서 1차 한인회의 서재필 등 150명 모여 독립정당성 선포 상원의원 축사… 시장은 평화행진 동참 미국 내 ‘외교 독립운동’ 조직화 계기 작용 친우회 21개 도시·유럽 확산… 韓독립 지원100년 전 대한민국 독립운동의 신호탄이자 기폭제였던 3·1운동 당시 한반도 전역을 뜨겁게 달궜던 독립운동의 열기는 이역만리 타국인 미국의 한인들을 흔들어 깨웠다. 미국 내 한인 150여명은 3·1운동 한 달 뒤인 1919년 4월 14~16일 미 필라델피아 리틀극장에 모여 ‘제1차 한인회의’를 열었다. 이들은 이어 태극기를 앞세우고 미 독립기념관까지 시가행진에 나섰다. 미 언론들은 당시 필라델피아의 거리에서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는 한인들의 모습을 그대로 전했다. 이는 미국 내에서 독립운동이 본격화하는 계기가 됐다. 필라델피아는 미국인들에게 아주 특별한 도시다. 미 독립운동이 처음 일어났던 곳이며, 미 독립선언 당시 울렸던 ‘자유의 종’이 지금도 독립기념관에 보존돼 있다. 미 독립의 역사를 간직한 필라델피아에는 ‘대한민국 독립의 역사’도 곳곳에 묻혀 있었다. ●영문 ‘코리아 리뷰’ 발간… 독립 호소·日고발 1919년 4월 14~16일 ‘제1차 한인회의’가 열렸던 리틀극장을 찾았다. 필라델피아 독립기념관에서 약 3㎞ 떨어진 주택가로 들어서니 19세기 말 빨간 벽돌로 지은 예쁜 소극장이 보였다. 여기가 당시 한인회의가 열렸던 리틀극장이다. 현재는 ‘플레이스 앤드 플레이스’로 이름은 바뀌었지만, 당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건물의 벽면에 한글과 영문으로 ‘1919년 4월 14~16일, 독립지사들이 이곳에 모여 제1차 한국의회를 열어 한국독립의 정당성을 선포했다’는 글귀가 당시 뜨거웠던 독립운동의 현장임을 알려줬다. 1919년 4월 14일 미 전역에서 독립운동을 주도했던 150여명이 미 서부와 동부, 남부 등 각지에서 리틀극장으로 모였다. 이날 1차 한인회의 의장은 서재필이었고, 진행은 이승만과 정한경이 맡았다. 제1차 한인회의 개회식에서는 미주리 출신 상원의원 셸던 스펜서가 축사를 했다. 네브래스카 출신 상원의원 조지 노리스도 참석해 격려 연설을 했다. 마지막 날인 4월 16일 제1차 한인회의를 마치고 150여명의 한인들은 태극기와 성조기를 양손에 들고 필라델피아 중심가에 있는 독립기념관을 향해 시가행진을 벌였다. 독립과 자유의 상징인 필라델피아 대표로 토머스 스미스 시장이 행진에 직접 참여했을 뿐 아니라 군악대까지 보내주면서 태평양의 작은 나라인 한국의 독립과 자유에 대한 염원을 지지했다. 미 독립기념관에 도착한 이승만은 3·1운동 당시 서울에서 발표됐던 ‘독립선언문’을 낭독했다. 그리고 “대한공화국 만세”를 외치고 또 외쳤다. 당시 서재필은 “한국인이 살아 있는 백성인 것을 알았고, 이런 백성은 반드시 자유독립을 하고 말 것으로 믿는다”며 소감을 밝혔다. 장병기 필라델피아 한인회 회장은 “서재필 박사가 주도했던 제1차 한인대회를 기폭제로 미국 내 독립운동이 조직화되기 시작했다”면서 “중국이 무장 독립운동의 거점이었다면 미국은 외교 독립운동의 중심이었다”고 평가했다.●美의회에 한국독립 문제 논의 단초 제공 제1차 한인회의를 기점으로 대한민국 독립의 정당성을 알리는 외교 독립운동이 본격화됐다. 서재필은 현재 해외홍보원 역할을 하는 대한민국통신부와 미국 내 친한파 모임인 ‘친우회’를 조직했다. 1919년 4월 말 활동을 시작한 대한민국통신부에서는 매월 영문잡지인 ‘코리아 리뷰’를 3000부가량 만들어 배포했다. 또 한국과 관련해 여러 영문 책자를 출판하면서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한편 일제의 불법 식민통치와 각종 만행을 적극적으로 알렸다. 하지만 자신의 사업을 팽개치고 독립운동에 집중하던 서재필의 사업이 어려워지면서 코리아 리뷰는 1922년 7월호를 마지막으로 발간이 중단됐다. 비록 3년여로 길지 않은 기간이었지만 3·1운동 이후 미국 내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을 했던 단체로 평가 받는다. 미 친우회도 대한민국 독립의 정당성을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플로이트 톰킨스 목사가 회장을 맡은 필라델피아 친우회가 1919년 5월 16일 첫 결성이라는 성과를 내면서 워싱턴DC와 샌프란시스코, 시카고, 뉴욕 등 미국 내 21개 도시에 친우회가 만들어졌다. 파란 눈의 독립투사이자 대한민국 독립을 지지하는 든든한 지원 세력을 확보한 것이다. 셸던 스펜서 상원의원은 1919년 6월 3·1운동을 거론하며 미국이 어떤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는지 미 국무장관이 상원에 보고하라고 요청하는 상원 결의안을 제출했다. 아쉽게도 외교위원회 벽을 넘지는 못했으나 미 의회에서 대한민국 독립 문제를 논의하는 단초가 됐다. 또 톰킨스 목사는 1921년 워싱턴 군축회의 미 대표단 단장에게 보낸 청원서에서 “우리는 미 시민만으로 구성돼 2만 5000여명의 회원이 활동하고 있는 단체”라고 소개한 뒤 “우리는 한국인들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라는 기구를 만들고 자신들의 권리인 자유와 정의를 위해 싸우는 것을 지지한다”라고 밝히는 등 미 정치권에 대한민국 독립 지지를 호소했다. 미국뿐 아니라 영국과 프랑스 등 유럽 지역에도 친우회가 만들어지면서 전 세계의 친한 여론을 형성하기도 했다. 장 한인회장은 “당시 미국 내 친우회가 21곳에 만들어지고 영국과 프랑스 등 유럽까지 친한 여론이 조성되면서 대한민국 독립과 임시정부 수립 등에 큰 역할을 했다”면서 “당시 서재필 박사 등과 같은 외교 독립운동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 대한민국이 존재한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글 사진 필라델피아 한준규 특파원 hihi@seoul.co.kr
  • [3·1운동 100년] 평화행진 첫날부터 발포한 日, 만행·사망자 조직적 은폐·축소

    [3·1운동 100년] 평화행진 첫날부터 발포한 日, 만행·사망자 조직적 은폐·축소

    “서울에서 발생한 일이다. 어린 학생이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치자 일본 헌병이 칼로 그의 오른손을 잘랐다. 오른손이 잘린 학생은 다시 왼손에 국기를 들고 더욱 높은 소리로 만세를 외쳤다. 그러자 헌병은 그의 왼손마저 잘랐다. 끔찍한 광경을 목격한 한 서양인이 사진을 찍어 남기려다가 헌병에게 끌려갔다.”(1919년 4월 12일자 중국 국민공보) “체포된 한인들은 밤낮으로 잔인한 고문을 당한다고 한다. 한인 가운데 죽은 자가 과연 얼마나 되는지 알려진 것이 없다. 서울에서 50마일(약 80㎞) 이내 무수한 촌락이 불탔다. 시체 썩은 냄새가 코를 찌른다.(1919년 5월 19일자 국민공보)●시위 확산 3월 말부터 조준 발포… 희생 급증 일제는 3·1운동에 나선 조선인들을 총칼로 탄압했다. 그들의 눈에 태극기를 든 시위대는 식민지 체제를 전복하고자 선량한 조선인들을 선동하는 폭도에 불과했다. 만행과 학살이 일상이 됐다. 총을 든 일본군과 경찰, 시위 주동자에게 다가가 몸에 색분필을 발라두는 조선인 밀정까지 뒤섞이면서 만세운동은 시작과 동시에 아수라장으로 변하곤 했다. “파리채로는 감당이 되지 않는다. 단호한 처치만 필요할 뿐”이라던 한 일본 경찰의 외침 속에 3·1운동을 대하는 일제의 태도가 그대로 드러난다. 26일 국사편찬위원회의 ‘3·1운동 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3·1운동 참가 인원 가운데 사망자는 최대 934명으로 집계된다. 일제가 파악한 사망자 553명보다 두 배 가까이 많지만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내놓은 7483명, 박은식(1859~1925)이 쓴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분석한 7509명에는 크게 못 미친다. 이와 관련해 국편 측은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사망자수가 최소 934명이라는 것”이라며 “자료의 오류 수정과 추가 발굴 등의 연구가 진행되면 숫자는 더욱 늘어날 것”이라고 밝혔다. 사망자수에서도 알 수 있듯 일제의 만행은 도를 넘었다. 3·1운동 첫날인 1919년 3월 1일부터 발포가 이뤄져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점이 최근 연구에서 드러났다. 만세운동이 격화된 3월 말~4월 초 사이에 사망자가 집중됐다는 사실도 재확인됐다. 실제로 3월 1일 평양에서 주민 5000여명이 참가한 시위를 기록한 외국인 자료에는 “총상 환자 5명이 병원에서 숨졌다”는 기록이 나온다. 같은 날 평북 선천에서도 시위 중 체포된 11명의 학생 가운데 3명이 사망했다는 보고가 있다. 이들은 가혹한 태형으로 중상을 입고 숨을 거둔 것으로 추정된다. 시위 첫날부터 무자비한 폭행이 가해졌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이계형 국민대 특임교수는 “아무래도 서울 시내는 외국인이나 선교사 등 보는 눈이 많아서 조선총독부 입장에서도 발포가 조심스러웠을 것”이라면서도 “(더는 서양인의 눈치를 보지 않기로 결심한) 3월 말부터 사람을 직접 조준 발포가 잦아졌다”고 말했다. 국편이 파악한 3·1운동 관련 사망자 934명 가운데 47.6%(445명)가 3월 28일~4월 6일 사이에 몰려 있다. 서울에서는 사망 추정자가 3명에 불과하지만 외국인이 거의 없던 평안도에서는 423명이나 됐다.●日軍 4만여명 준계엄체제… 2만 6713명 검거 3·1운동이 대부분 비폭력 평화운동으로 진행됐음에도 시간이 갈수록 사상자수가 늘어난 것은 시위가 사그러들지 않고 전국으로 확산되는 것에 불안감을 느낀 총독부가 강경 대응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총독부는 수시로 총독 명의의 유고(諭告·담화문)를 발표했다. 3월 7일에는 “허튼소리로 인심을 흔드는 자에 대해서는 가차 없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4월 10일에는 “지방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중앙정부에 군대를 파견해 줄 것을 요청했으니 화를 입지 말도록 하라”고 최후통첩성 발언을 내놨다. 일본 군경의 총기 사용을 용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3월 1일부터 4월 30일까지 일본측 발포가 없는 날은 7~8일에 그쳤다. 이양희 충남대 충청문화연구소 연구원은 “1919년 3월 11일쯤 일본 육군성 차관이 만세운동 초기 진압에 실패한 것을 두고 조선총독을 질책했다”면서 “무력 탄압은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일본 내각의 명령에 의한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것으로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3·1운동 기간 중 최악의 사태로 꼽히는 ‘제암리 학살 사건’도 일본의 강경 진압이 최고조에 달한 1919년 4월 15일 발생했다. 보병 79연대 중위 아리타 도시오는 “화성 발안장 만세운동의 주동자를 검거한다”며 제암리 마을에 들이닥쳤다. 15세 이상 남자들을 교회당 안으로 몰아넣은 뒤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이때 한 부인이 어린 아기를 창 밖으로 내놓으며 “아기만은 살려달라”고 애원했지만 일본 군경은 아이마저 찔러죽였다. 일제는 만행의 증거를 없애고자 교회당에 불을 질렀다. 이 사건으로 제암리에서만 23명이 목숨을 잃었고 인근 지역 참살까지 포함하면 사망자가 30명을 넘는다. 고주리에서는 일가족 6명의 목을 쳐서 죽인 뒤 시신을 토막 내 짚가리 위에 올려놓았다는 기록도 있다. 당시 조선군사령관으로 재직 중이던 우쓰노미야 다로가 쓴 일기에는 “일본군이 약 30명을 가두고 학살과 방화를 했다. 사실을 사실대로 밝히고 처분하면 간단하지만 이렇게 되면 학살을 자인하는 꼴이 돼 제국의 입장에서 불이익이 크다. 이 때문에 간부회의에서 조선인들이 저항해 살육한 것으로 하고 학살은 인정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적혀 있다. 일본 스스로도 정당한 행동이 아니었음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국제 여론이 나빠지자 사건을 일으킨 아리타 중위는 재판에 회부됐지만 4개월 뒤 무죄로 풀려났다. 4월 초 일본에서 조선으로 추가 파견된 ‘임시조선파견보병대대’도 조선 민중들에게 큰 위협으로 다가왔다. 3·1운동 확산의 원인 가운데 하나를 병력 부족으로 본 일본 내각과 조선총독부의 이해가 맞물린 것으로, 6개 대대 4200명 규모였다. 3·1운동 발발 당시 일본군 2개 사단이 상주해 3만~4만명가량 군이 있었던 점을 감안해보면 1919년 4월 일본군은 최대 4만 5000명까지 늘었던 것으로 추산된다. 임시파견대대는 1905년에 개발된 근접 전투용 무기인 ‘38년식보병총’과 기관총, 수류탄을 소지하고 있었다. 이양희 연구원은 “임시파견대대는 시장에서 무장을 한 채 훈련을 하는 등 만세운동을 준비하려는 조선인들에게 겁을 주는 행동이 잦았다”며 “일제가 3·1운동에 대해 준계엄 체제로 대응했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조선총독부 내부 자료를 보면 3·1운동 시작부터 4월 30일까지 약 두 달간 검거된 조선인은 2만 6713명이었다. ●3·1운동 약화 유화책 펼쳐… 단속·감시 체계화 일제는 3·1운동을 약화시키고자 무력 진압 외에도 의료선전 활동, 시장 개시(開市) 독려 등 유화책을 썼다. 당시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는 “일본적십자사 조선본부가 3·1운동에 참가했다가 부상당한 이들을 무료로 진료할 것”이라는 내용의 기사가 나온다. 서울시내 유력 상인 40여명을 설득해 상점을 다시 열게 하는 등 조선인들이 일상으로 돌아가도록 유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뒤로는 경비인력을 늘리면서 3·1운동이 재발하지 않도록 조치를 이어갔다. 3·1운동 이전 1만 3230명 수준이었던 경찰 수는 1921년 2만명을 넘어섰다. 일제의 단속과 감시가 더욱 체계화됐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조용철 기자 cyc0305@seoul.co.kr
  • 전북도민 1천명 모여 3·1운동 대토론회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전북지역에서 도민 1000여명이 참여하는 대토론회가 열린다. 6·15공동선언실천남측위원회 전북본부는 3월 1일 오후 2시부터 2시간 동안 전주대 희망홀에서 ‘평화 원탁회의’를 연다고 26일 밝혔다. 토론회에는 청소년과 대학생, 여성, 종교인, 노동자, 농민 등 168개 기관·단체 회원 등 1000여명이 참여할 예정이다. 참석자들은 ‘3·1정신의 현재 의미’와 ‘새로운 100년 나(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를 의제로 토론을 벌인다. 행사 관계자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은 오늘, 전쟁과 갈등, 상처를 넘어 평화와 상생으로 나아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았다”며 “역사의 주인공인 시민이 자유롭게 토론하며 결의·실천하는 자리”라고 설명했다. 전주 임송학 기자 shlim@seoul.co.kr
  • 유관순 열사 서훈 승격에 충남도 환영

    정부가 유관순(1902~1920) 열사의 서훈을 3등급에서 1등급(건국훈장 대한민국장)으로 상향하기로 하자 충남도 등이 일제히 반겼다. 양승조 충남지사는 26일 도청에서 긴급 간담회를 열고 “정부 결정은 조국의 독립, 자유와 평화, 인권과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국민적 열망을 반영한 것”이라며 “유 열사의 숭고한 정신이 세계 평화 정신으로 승화되고 민족사에 깊이 뿌리내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양 지사는 유 열사의 서훈 상향 100만인 서명 운동을 중단한다고 했다. 유 열사는 천안이 고향이다. 구본영 천안시장은 “70만 시민과 함께 환영한다”며 “천안이 선조의 호국정신과 민족의 얼이 담긴 3.1운동 정신을 계승하는데 앞장서겠다”고 말했다. 충남도와 15개 시장·군수는 유 열사의 서훈 상향 국민 청원을 시작으로 상훈법 개정 결의문 채택과 100만인 서명운동 등 서훈 격상을 위해 힘써왔다. 박완주·이명수 등 지역 국회의원들도 당적을 떠나 특별법 제정안을 발의하는 등 입법 활동을 통해 힘을 보탰다. 유관순 열사는 1962년 서훈 5등급 중 3등급인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아 공적과 상징성에 걸맞지 않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됐다. 천안 이천열 기자 sky@seoul.co.kr
  • 유관순 열사 서훈 ‘1등급’으로…문 대통령 “독립운동가 예우 자세 새롭게”

    유관순 열사 서훈 ‘1등급’으로…문 대통령 “독립운동가 예우 자세 새롭게”

    정부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유관순(1902~1920) 열사에게 최고등급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가 서훈하기로 결정했다. 정부는 26일 서울 백범기념관에서 개최한 현장 국무회의에서 국민의 올바른 역사관과 애국정신을 길러 민족정기를 드높이고 국민통합에 기여한 유관순 열사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가로 서훈하기로 의결했다고 밝혔다. 유관순 열사에게는 3등급인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으나 최근 유 열사의 공적을 평가할 때 훈격이 너무 낮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국가보훈처의 독립유공자 포상 현황에 따르면 김구·안창호·안중근 등 30명이 대한민국장(1등급)이고, 신채호 등 93명은 대통령장(2등급)으로 분류돼 있으나 유 열사는 이들보다 낮은 단계인 독립장(3등급)에 포함돼 있다.문재인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우리 정부는 그동안 독립운동 역사를 기억하고 독립운동가를 예우하는 국가의 자세를 새롭게 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며 “우리의 자랑스러운 역사이고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게 된 뿌리가 됐기 때문”이라고 유관순 열사 훈격 격상 배경을 설명했다. 또 “이곳 백범기념관과 함께 후손들에게 독립운동 정신과 민주공화국 역사를 건설할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사업도 계속되고 있다”며 “이 모두가 우리를 당당하게 세우고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오늘 유관순 열사에게 국가 유공자 1등급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를 의결하는 정신도 같다”며 “유관순 열사는 3·1 독립운동의 상징으로, 16살 나이로 당시 시위를 주도하고 꺾이지 않는 의지로 나라의 독립에 자신을 바친 유관순 열사를 보며 나라를 위한 희생의 고귀함을 깨우치게 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유관순 열사가 3·1 독립운동의 표상으로 국민에게 각인돼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1등급 훈장 추서의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며 “이번 추서가 3·1 독립운동 100주년의 의미를 한층 더 높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국가보훈처는 “국내외 유관순 열사의 서훈 상향을 요구하는 열망에 따라 기존 독립운동 공적 외 보훈처에서 별도 공적심사위원회(유관순 열사 추가 서훈 공적심사위원회)를 구성해 참석위원 만장일치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가 서훈하기로 심의·의결했다”고 전했다. 당시 공적심사위는 유관순 열사가 “광복 이후, 3·1운동과 독립운동의 상징으로서 전 국민에게 독립정신을 일깨워 국민통합과 애국심 함양에 기여했다”며 “비폭력·평화·민주·인권의 가치를 드높여 대한민국의 기초를 공고히 하는 데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문 대통령은 제100주년 3·1절 중앙기념식장에서 유관순 열사 유족에게 훈장을 직접 수여할 예정이다. 보훈처는 “유관순 열사 추가 서훈과 함께 올해 100주년을 맞는 3·1운동에 대한 다양한 행사와 기념사업을 통해 100년 전 3·1운동에서 나타난 조국독립과 자유를 향한 정신을 계승하고 국민의 역사적 자긍심을 높일 계획”이라고 강조했다. 정부가 유관순 열사에게 국가 유공자 1등급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기로 하자 충남도와 지역 정치권이 일제히 환영의 뜻을 밝혔다. 양승조 충남지사는 이날 도청 프레스센터에서 간담회를 하고 “정부의 결정은 조국의 독립, 자유와 평화, 인권과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국민적 열망을 반영한 것”이라고 환영했다. 양 지사는 “유 열사의 서훈 상향을 위해 진행했던 100만인 서명 운동은 중단할 계획”이라며 “유 열사의 숭고한 정신이 세계평화 정신으로 승화되고 민족사에 깊이 뿌리내리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박완주 더불어민주당 의원(충남 천안을)도 논평을 내고 “문재인 정부가 대한민국이 나가야 할 새로운 100년의 이정표를 제시했다”고 평가했다. 박 의원은 “이는 단순히 유 열사 개인에 대해 합당한 예우를 하는 차원을 넘어 대한민국이 앞으로 새로운 100년 동안 지향해야 할 가치를 천명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르다”며 “유 열사에 대한 건국헌장 1등급 추서가 저평가된 독립운동가의 공적을 새로 발굴하고 합당한 예우를 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유관순 열사의 고향인 천안도 감격으로 들썩였다. 구본영 천안시장은 “70만 천안시민과 함께 환영을 뜻을 밝힌다”며 “선조들의 호국정신과 민족의 얼이 담긴 3.1운동 정신을 계승하는 일에 우리 천안이 중심에 설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인치견 천안시의회 의장은 “같은 공적에 대해 훈장을 다시 추서하거나 변경을 할 수 없도록 한 현행 법규를 개정하기 위해 지난해 ‘상훈법 개정 촉구 건의문’을 채택하는 등 노력해왔다”며 “그동안 천안시의회의 노력이 빛을 본 것 같아 기쁘게 생각한다”고 전했다. 유관순 열사는 이화학당 재학 중인 1919년 3월 5일 서울 남대문 독립만세 운동에 참여했고, 이어 4월 1일 충남 천안시 병천면 아우내 장터의 독립만세 운동을 주도하다가 일제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이후 일제의 모진 고문으로 1920년 18세 꽃다운 나이로 옥중에서 순국했다. 정부는 열사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전남도, 역사 속 의향 전남 UCC 공모전

    전남도가 ‘대한민국 역사속 의향 전남’을 주제로 ‘3·1운동 및 임정 100주년 기념 UCC 공모전’을 연다.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전국에서 가장 활발히 일어났던 전남지역의 의병활동을 재조명하기 위해 마련됐다. 100년 전남 행복시대를 여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목적도 포함됐다. 공모전에는 대한민국 국민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공모대상 작품은 다음달 27일까지다. 접수 작품에 대해선 예비심사와 본심사를 거쳐 최우수상 1개, 우수상 2개, 장려상 5개 등 8개 작품을 선정해 4월 4일 최종 발표한다. 수상자에게는 최우수 200만원, 우수 100만원, 장려 20만원 등 총 500만원의 상금이 지급된다.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식 행사에서 시상식이 열린다. 공모전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전라남도 누리집에서 확인할 수 있다. 박종열 도 자치분권과장은 “호남이 없었다면 나라도 없다는 이순신 장군의 말씀처럼 전남지역이 나라를 지켜 왔다”며 “이번 UCC 공모전이 의향 전남을 바로 알리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도는 3월 1일 출정식을 시작으로 4월 11일까지 42일간 전남 22개 시·군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재현한다. 각 시군에서 들불처럼 타오른 횃불은 11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식 행사에서 함평군에 있는 상해임시정부 복원청사를 밝게 비출 것으로 기대된다. 무안 최종필 기자 choijp@seoul.co.kr
  • 하동군 3·1운동 기록물, 군 홈페이지에 전시

    하동군 3·1운동 기록물, 군 홈페이지에 전시

    경남 하동군은 26일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100년 전 1919년 하동읍·옥종면 등 군 곳곳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 함성과 발자취를 살펴 볼 수 있는 ‘하동군 3·1운동 기록물’을 군 홈페이지에 전시한다고 밝혔다.군 홈페이지에 전시하는 기록물은 하동군기록관에 소장돼 있는 ‘범죄인명부’를 비롯해 독립기념관 소장 하동 ‘대한독립선언서’ 사본, 하동군 3·1독립만세운동과 관련된 국가기록원 소장 ‘판결문’, ‘집행원부’, ‘3·1독립운동 피살자 명부’ 사본 등 5종 29건이다. 또 국가보훈처에 3·1운동 독립유공자로 추서된 하동군 출신 28명 가운데 25명의 기록도 볼 수 있다. 홈페이지 전시는 오는 28일 부터 올해 말까지 할 예정이다. 보안법 위반 등으로 재판을 받은 독립운동가의 판결법원과 판결일자, 형량 등이 기록된 적량면 ‘범죄인명부’, 고전면 ‘범죄인명부’, 화개면 ‘전과자명부’는 이번에 처음 공개되는 기록물이다.군은 독립기념관이 제공한 하동 ‘대한독립선언서’는 지방에서 독자적으로 작성한 독립선언서로 희소성과 내용면에서 역사적 가치가 높은 기록물이라고 밝혔다. 당시 하동군 적량면장이었던 박치화 등 12명이 서명 한 이 독립선언서에는 ‘주저하거나 관망하지 말고 한마음으로 뭉쳐 용감하게 광복의 땅으로 나아가자’는 굳은 독립의지가 담겨 있으며, 민족자결·동양친목·세계평화와 비폭력 독립운동을 추구하는 3·1운동정신이 잘 나타나 있다. 국가기록원이 제공한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에는 당시 독립만세운동 전개 과정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군은 판결문을 통해 당시 운집한 군중이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쳤던 현장과 일본 제국주의의 강압적 식민지 지배에 맞서 독립투쟁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와 수많은 군민의 민족자결 의지 등을 짐작할 수 있다고 밝혔다. 군 관계자는 “이번 전시는 전국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의 큰 물결 속에서 하동군 전역에서 한달여 동안 계속된 3·1운동이 어느 지역보다 뜨겁게 일어났음을 보여주고, 민족자결을 열망하며 독립을 쟁취하고자 했던 하동군민의 용기 있는 투지를 본받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동 강원식 기자 kws@seoul.co.kr/
  • 문대통령, 3·1운동 100주년 사흘 앞두고 김구·안중근 묘역 참배

    문대통령, 3·1운동 100주년 사흘 앞두고 김구·안중근 묘역 참배

    문재인 대통령이 3·1운동 100주년을 사흘 앞둔 26일 독립운동가 묘역을 참배했다. 청와대에 따르면 문 대통령은 이날 오전 8시50분부터 9시13분까지 서울 용산구 효창원 독립운동가 묘역을 찾아 백범 김구선생의 묘소와 이봉창·윤봉길·백정기 등 3의사(義士) 묘역, 안중근 의사 묘소, 이동녕·조경환·차리석 선생 등 임정 요인 묘역 등을 참배했다. 청와대 관계자는 이와 관련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하고 애국선열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것”이라고 묘역 참배 배경을 설명했다.이 참배에는 이낙연 국무총리 등 국무위원 18명, 장관급 7명, 노영민 대통령비서실장, 김수현 정책실장,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이 참석했다. 이기철 선임기자 chuli@seoul.co.kr
  • [하프타임] 이세돌-커제, 새달 5일 서울서 특별 대국

    [하프타임] 이세돌-커제, 새달 5일 서울서 특별 대국

    이세돌 9단과 커제 9단이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다음달 5일 오후 2시 서울 중구 더플라자 호텔에서 열리는 ‘3·1운동 100주년 기념 블러드랜드배 특별대국’을 벌인다. 블러드랜드배는 3·1운동의 정신과 의미를 되새기고자 독립 투쟁의 역사가 새겨진 덕수궁 대한문과 환구단이 내려다보이는 더플라자 호텔을 대국 장소로 선정했다. 이세돌과 커제는 바둑 인공지능 ‘알파고’와 직접 맞선 인간 대표 기사로 두 기사의 공식 상대 전적에서는 커제가 11승 5패로 앞선다. 가장 최근 대결인 지난해 5월 중국 갑조리그 7회전에서는 이세돌이 승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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