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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리 테러] “주범 압데슬람, 마지막 순간 망설였다”

     130명의 목숨을 앗아간 파리 테러의 주범 중 한 명으로 도망친 살라 압데슬람(26)이 테러 마지막 순간에 망설여 테러 공격에 나서지 않았으며 이슬람국가(IS)의 보복이 두려워 자수하지 못하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압데슬람의 형인 모하메드 압데슬람은 22일(현지시간) 벨기에 공영 RTBF 방송에 자신의 동생이 마지막 순간에 테러를 포기했다는 것을 확신한다고 말했다.  모하메드는 “동생은 매우 똑똑하다. 그는 마직막 순간에 생각을 바꿔 다른 선택을 했다고 믿는다”면서 “나는 내 동생이 IS로부터 조종을 받았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앞서 모하메드는 현재로선 자수가 최선의 해결책이고 테러에 연루됐다면 책임을 지라고 동생에게 당부했다.  압데슬람의 한 친구도 벨기에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압데슬람은 IS가 가족에게 보복할 것이 두려워 자수하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압데슬람의 첫째 형인 이브라힘은 파리 테러 현장에서 자폭했다. 한때 압데슬람 3형제가 파리 테러에 가담한 것으로 전해졌으나 둘째인 모하메드는 파리 테러 직후 벨기에 경찰에 체포됐다가 혐의가 없어 풀려났다.  벨기에 출신으로 프랑스 국적을 가진 압데슬람은 파리 테러 직후 벨기에로 들어온 것으로 알려졌으나 행방이 파악되지 않고 있다. 경찰은 브뤼셀 몰렌베이크 구역 등지에서 수색작전을 벌였으나 아직 그를 검거하지 못했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벨기에 몰렌베크는 ‘유럽 테러범 양성소’

    지난 13일 프랑스 파리에서 동시다발 테러를 일으킨 용의자들과 지난 8월 파리행 고속열차 테러를 기도한 테러범, 지난해 벨기에 브뤼셀의 유대인 박물관에서 4명의 사망자를 낸 테러범, 2004년 스페인 마드리드 열차 테러범 등에겐 이슬람 극단주의자라는 것 외에 공통점이 하나 더 있다. 이들 모두 브뤼셀 북서쪽의 외곽 도시인 몰렌베크 출신이라는 것이다. ●테러 이용 차량 2대 몰렌베크서 등록 벨기에와 프랑스 검찰은 15일(현지시간) 테러 용의자 7명 가운데 현재 국제 수배령이 내려진 살라 압데슬람 등 3형제가 몰렌베크 거주민이며 이들이 테러에 사용한 차량 2대도 이 지역에 등록된 차량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경찰은 지난 주말 이 지역을 급습해 주민 7명을 용의자로 체포했다. 파리 테러를 계기로 벨기에 최대 이슬람 거주지 몰렌베크가 ‘지하디스트들의 온상지’로 주목받고 있다. AFP에 따르면 벨기에에서 활동하는 지하디스트들은 약 500명으로 추정되는데 대부분 몰렌베크 출신이다. 이곳이 이슬람 테러범의 소굴이 된 데는 벨기에 도시 가운데 북아프리카, 중동 등 이슬람 거주자가 가장 많고 지역이 낙후돼 있어서다. 북아프리카 출신이 80%에 달하는 이곳의 실업률은 30%로, 희망이 없는 청소년들은 어린 나이에 쉽게 각종 범죄나 이슬람 극단주의의 유혹에 빠지고 있다. 인구 밀도가 높고 인구 유동성이 높은 점도 범죄의 싹을 키우는 데 일조한다. 주민 9만 5000명 가운데 합법적 체류자는 25%뿐이다. 불순한 의도를 가진 사람들이 익명으로 거쳐 가기 좋은 곳이란 뜻이다. 벨기에는 1990년대 반테러법안을 강화해 자국 내 테러 조직 척결에 나섰지만 몰렌베크에는 경찰 및 행정력이 미치지 못했다. 20년 넘게 당국 단속의 사각지대로 머무는 동안 몰렌베크는 알제리, 아프가니스탄, 시리아, 이라크 등지에서 싸우고 돌아오는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본거지가 됐다. 테러범뿐 아니라 마약·폭력 조직도 이곳에서 활개를 친다. 벨기에 경찰에 따르면 자국 내 30개 범죄 조직 가운데 가장 악명 높은 조직이 몰렌베크에서 활동한다. 유럽전략정보안보센터(ESISC)의 클로드 모니케 소장은 “이 작은 도시의 거주민 가운데 유럽을 넘어 국제 단위의 요주의 인물 명단에 든 사람이 많다”고 전했다. ●좌파 市長 장기 집권도 한몫 몰렌베크의 사정이 더욱 험악해진 데는 과거 장기 집권했던 좌파 시장 탓도 있다. 그는 당선에만 급급해 사회 안정을 내세워 이슬람 극단주의와 맞서기를 꺼린 데다 무슬림 이민자 급증에 따른 사회통합정책도 마련하지 않아 중앙 정부에 대한 지역의 불만을 키웠다. 벨기에 당국도 몰렌베크를 ‘통제 불가’라고 인정했다. 얀 얌본 벨기에 내무장관은 공영 VRT 방송에서 “우리는 현재 몰렌베크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한 상태”라며 “이 지역을 정화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샤를 미셸 벨기에 총리는 “(테러 사건은) 항상 몰렌베크와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서 “우리는 지난 부주의에 대한 값을 치르고 있다. 더 많은 단속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상숙 기자 alex@seoul.co.kr
  • ‘테러리스트 3형제’가 핵심… 둘째, 국경 검문 뚫고 벨기에 도주

    ‘테러리스트 3형제’가 핵심… 둘째, 국경 검문 뚫고 벨기에 도주

    테러가 발생한 지 사흘 지난 16일 프랑스 파리는 일상으로 돌아갔다. 에펠탑과 루브르박물관이 다시 개방했으며 학교, 운동 시설, 공원도 정상 운영을 시작했다. 파리 시민들은 공포 속에서도 테러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프랑스와 유럽 전역에서는 정오에 1분간 묵념의 시간을 가졌다. 파리 시민들은 일터와 학교에서 함께 모여 희생자들을 기렸다.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도 평소로 돌아가겠다는 의지를 나타냈다. 이날 재개방한 파리의 상징 에펠탑에는 관람객들이 몰려들었다. 루브르박물관과 오르세박물관은 오후 1시부터 문을 열었다. 테러 위협으로 취소될 뻔했던 잉글랜드와 프랑스 간 축구 경기는 17일 영국 런던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예정대로 열린다. ●벨기에, 압데슬람 대대적 수색 작전 프랑스는 벨기에 경찰의 협조 아래 테러범 추적에 고삐를 죄고 있다. 바타클랑 극장 테러 용의자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로 알려진 살라 압데슬람(26)에 대한 체포 영장을 발부하고 국제수배령을 내렸다. 벨기에 경찰은 이날 압데슬람이 숨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몰렌베크 지역을 대대적으로 수색했다. 그는 테러 현장에서 자살했거나 사살된 7명 외에 8번째 용의자로 추정되는 인물이다. 특히 살라 압데슬람의 형과 동생 등 삼형제가 모두 이번 테러에 가담한 것으로 드러나 주목을 끌고 있다. 첫째인 이브라힘 압데슬람(31)은 바타클랑 극장에서 자살 폭탄으로 사망했으며 막내인 무함마드 압데슬람은 벨기에 브뤼셀에서 체포됐다. 테러범은 최소 8명으로 추정된다. 앞서 이번 테러의 배후인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는 성명을 통해 “8명의 형제가 이번 작전에 참여했다”고 주장했다. 워싱턴포스트는 프랑스 정보당국이 테러 공모자를 최대 20명으로 추산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직접 테러를 저지른 최소 8명 외에도 범행 계획, 조직, 지원 등에 더 많은 사람이 관여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살라 압데슬람은 브뤼셀에서 태어난 프랑스 국적자로 아랍계 이민자 가정 출신으로 알려졌다. 바타클랑 극장 테러 직후 자신의 이름으로 빌린 검은색 폭스바겐 폴로를 타고 벨기에로 도주했다. 프랑스 경찰은 검문 과정에서 신원만 확인하고 그를 풀어 줘 비난을 샀다. 동승했던 2명도 또 다른 1명과 함께 벨기에의 ‘테러범 소굴’로 통하는 브뤼셀 외곽 몰렌베크에서 체포됐다. 사망한 용의자들의 신원도 속속 밝혀지고 있다. 스타드 드 프랑스 경기장에서 자살 폭탄으로 사망한 3명 중 1명은 벨기에 거주 프랑스 국적의 빌랄 하드피(20)로 드러났다. 나머지 1명은 아흐마드 알무함마드(25)로, 시신 인근에서 발견된 시리아 여권에 따르면 시리아 이들리브 출생이다. 바타클랑 극장에서 자살 폭탄으로 사망한 3명의 신원은 모두 밝혀졌다. 결국 이번 테러는 시리아를 본거지로 두고 벨기에에서 준비한 뒤 프랑스에서 실행에 옮긴 것으로 분석된다. 마뉘엘 발스 프랑스 총리도 “이번 테러는 시리아에서 계획됐다”고 말했다. 프랑스와 벨기에 경찰은 대대적인 관련자 검거 작전에 나섰다. 프랑스 경찰은 이날 새벽 리옹, 칼레, 죄몽, 툴루즈 등 170곳을 일제히 급습해 최소 23명을 체포하고 무기를 압수했다. ●아바우드, 테러 조직·자금 조달 총책 한편 파리 도심 연쇄 테러를 지령한 인물로 벨기에 국적의 압델하미드 아바우드(27)가 지목됐다. 프랑스 RTL 라디오 방송은 경찰 관계자 말을 인용해 이 같은 내용을 보도하며 아바우드가 몰렌베크 출신이라고 전했다. 모로코 이민자 집안에서 태어난 아바우드는 이번 테러 외에도 앞서 유럽 지역에서 자행된 여러 건의 테러를 조직하고 자금을 조달하는 등 중간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아바우드는 지난 1월 샤를리 에브도 테러 직후 벨기에에서 대규모 테러를 시도하려다 적발돼 시리아로 도주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벨기에 법원은 아바우드에게 징역 20년을 선고했다. IS 영문 홍보잡지 ‘다비크’ 제7호에 인터뷰가 실리기도 했다. 이민영 기자 min@seoul.co.kr
  • 정책보다 패기·외모… 40대 꽃미남 리더 뜬다

    정책보다 패기·외모… 40대 꽃미남 리더 뜬다

    ‘용팔이’의 주원과 ‘두번째 스무살’의 이상윤이 드라마 종영과 함께 자리를 비운 새 둘 곳 없던 기자의 시선을 해외 채널 속 인물들이 사로잡았다. 그것도 미국 드라마 전문 채널인 HBO가 아니라 뉴스 전문 채널 CNN에서다. 29일(현지시간) 미국 권력 서열 3위인 하원의장에 40대가 선출됐다. 운동 마니아인 폴 라이언 하원의장은 몸짱에 얼굴도 준수한 ‘조각 미남’으로 꼽힌다. 앞서 지난 20일 캐나다에서 43세의 꽃미모를 뽐내는 쥐스탱 트뤼도(승리 직후 ‘세상에서 가장 섹시한 정치인’으로 부각됐다) 자유당 대표가 총선 승리를 거두더니 비슷한 시기 중국과의 정상회담으로 분주했던 영국에선 44세 재무장관 조지 오즈번(이름마저 영국 첩보영화 주인공을 연상시킨다)이 카메라를 점령했다. 올여름까지만 해도 서너 시간에 한번꼴로 CNN에 얼굴을 비추던 41세 그리스 총리 알렉시스 치프라스가 재집권 달성 뒤 출연을 자제(?)하던 차에 외신 정치 뉴스는 다시금 섹시해졌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기성 질서가 한 차례 무너진 뒤 호감형 얼굴, 탄탄한 몸매, 빠른 정책 집행 능력을 보여주는 미모의 40대 정치인은 낯선 풍경이 아니다. 47세였던 2008년에 미국 대통령에 취임한 버락 오바마(54)는 각종 사진마다 엿보이는 미끈한 ‘간지’에 힘입어 레임덕 위기에서 한발 비켜서 있다. 2010년 집권한 마르크 뤼터(48) 네덜란드 총리는 유니레버 직원 출신 특유의 깔끔한 이미지를 유지하고 있다. 잘생긴 외모만큼 동성애 결혼으로도 유명한 룩셈부르크의 그자비에 베텔(42) 총리 역시 2013년 야 3당 연립을 이뤄내 집권에 성공했다. 청바지 차림으로 경차를 몰고 출근하며 깨끗한 정치를 선보이는 마테오 렌치(40) 이탈리아 총리도 2013년 새 정권을 창출한 인물이다. 주요 7개국(G7) 정상회담이라도 열린다면 ‘역대급 최강 인증샷’이 기대된다. ●SNS 등 특유의 소통 능력으로 급부상 글로벌 정상들의 외모 업그레이드 배경은 뭐니 뭐니 해도 ‘젊음’이다. 20여년 넘게 이어진 신자유주의 열풍의 결과가 글로벌 금융위기로 폭발하고, 양극화로 귀결되고, 청년 실업 문제로 곪아 터진 가운데 각국에서 ‘기성 정치 타파’를 외친 40대 정치인이 부상했다. 이들은 패션과 외모를 ‘경쟁 자본’으로 중요하게 여긴 엑스(X)세대에 해당한다. 정치 스타일에서도 이들은 새로운 길을 걷고 있다. 과거 주요 정치인들이 당내 영향력(계파), 매스미디어의 평가 등에 힘입어 지지세를 규합했다면 최근 급부상한 40대 정상들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정제되지 않은 생각을 드러내며 팬을 확보해 간다. 매스미디어 시절 유권자들이 정치인을 정책과 스캔들에 한정 지어 소비했다면 뉴미디어에 익숙한 지금의 유권자들은 정치인의 모든 것을 소비하고 있다. 때로는 친구처럼, 때로는 멘토처럼 접근하는 40대 정상들이 급부상할 때 잘생긴 외모는 확실히 ‘묘약’이 됐다. ●보혁 이슈 해체… 뒤섞은 정책 내놔 근래 외신과 SNS를 점령한 캐나다의 트뤼도와 영국의 오즈번은 특히 유명인에 대한 대중의 환상을 충족시켜 주는 모델이다. 명문가 출신으로 명문대를 졸업한 둘은 ‘금수저 정치인’이란 공통점을 지녔지만 성장 과정을 살펴보면 다른 점도 많다. 예컨대 부모의 이혼을 겪은 트뤼도가 당초 정치에 뜻을 두지 않았다가 막내동생이 사망하는 불운을 겪고 정계에 본격 입문하는 ‘비극적 영웅 서사’를 따른다면 오즈번은 안정된 환경에서 준비된 정치인의 길을 걷는 ‘엄친아 판타지’를 충족시켰다. 트뤼도는 1984년까지 15년 동안 캐나다 총리를 지낸 피에르 트뤼도의 3형제 중 장남이다. 방송인 출신이었던 트뤼도의 어머니 마거릿 싱클레어는 트뤼도가 6살이던 1977년 별거를 시작했고 1984년 이혼할 때까지 영국 록그룹 롤링스톤스와 파티를 즐기고 미국 상원의원 에드워드 케네디와 염문을 뿌렸다. 아버지 트뤼도 역시 미국 가수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등과의 염문에 휩싸였다. 트뤼도는 젊은 시절 바텐더, 연기자 등을 전전했지만 아버지의 정치 후계자로 지목되던 막내동생이 1998년 눈사태로 숨진 뒤 눈사태 안전 홍보 대변인으로 활동하면서부터 정치에 뜻을 두기 시작했고, 2008년 하원의원으로 정계에 진출했다. 트뤼도가 어린 시절 부모의 이혼을 겪고 동생의 죽음이라는 비극을 계기로 정계에 입문한 반면 오즈번은 결격 사유 없는 정치 행로를 밟고 있다. 오히려 지나치게 엘리트 코스를 밟은 것이 오즈번의 흠으로 지목될 정도다. 역시 엑스세대인 데이비드 캐머런(49) 총리 취임에 편승해 젊어진 영국 내각 분위기에 힘입어 38세였던 2010년 124년 만의 최연소 재무장관이 된 오즈번은 귀족 가문의 일원으로 남작 집안 귀족의 딸과 결혼했고 옥스퍼드대를 졸업한 백만장자다. ●트뤼도 ‘같이 자고 싶은 총리’ 논란도 오즈번이 긴축재정, 공적연금 축소,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브렉시트) 등을 외치는 강경 보수 정치인이라면 총선 승리 일성으로 “대이슬람국가(IS) 연합군에서 캐나다 전투기 철수”를 천명한 트뤼도의 공약은 재정지출 확대를 통한 경제 성장, 부자 증세, 난민 수용 확대 등으로 진보 정책 일색이다. 이처럼 급부상 중인 40대 정상급 정치인들의 이념 스펙트럼은 보수부터 진보까지 다양해 하나로 묶기 어려울 정도다. 오히려 이들을 하나의 흐름으로 묶어내는 장치는 ‘생활 방식’에 있다. 특유의 소통 능력을 활용해 급부상한 뒤 좌고우면하지 않는 돌파력을 발휘해 세를 키우고, 정치적으로 파격적인 승부를 마다하지 않으면서도 ‘금슬에 기반한 단란한 가정’과 같은 바른 이미지를 버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국경을 초월해 이들은 비슷하다. 정치적 파격과 바른 생활 이미지를 병존시킨 대표적인 예는 EU와의 구제금융 협상 과정에서 그리스의 EU 탈퇴(그렉시트) 국민투표, 조기 총선과 같은 정치적 승부수를 잇따라 던지면서도 동거녀인 페리스테라 베티 바치아나 앞에선 애처가의 면모를 감추지 않는 치프라스가 대표적이다. ●전문가 “이제부터 존재감 증명·평가” 이들의 정치·생활 방식은 엉뚱한 팬덤 현상을 일으켜 ‘정치의 주변화’를 부르기도 했다. SNS에서 회자되는 트뤼도의 별명은 ‘필프’(Pilf)인데 이는 ‘같이 잠자고 싶은 총리’(Prime minister I’d Like to F**k)란 뜻이어서 성추행 논란을 불렀다. 캐나다 방송이 ‘세계는 트뤼도의 외모를 좋아한다’고 비중 있게 보도하는가 하면 호주 뉴스 앵커는 트위터에 “자유당에 미안하지만 트뤼도가 너무 잘생겨서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잊어버렸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오즈번의 별명 역시 그의 원래 이름에서 기인한 ‘giddy’(발음은 ‘지디’가 아니라 ‘기디’이다)인데 ‘아찔하게 좋다’는 뜻을 담고 있고, 오즈번이 스타워즈 광선검 마니아라는 점 등도 시시각각 보도되고 있다. ‘앙팡 테리블’(무서운 신예)처럼 등장해 엔터테이너처럼 소비되는 이들의 정치는 정치 신인에서 권력의 정점에 오르기까지 시간을 단축시킨 요인이지만 이들의 존재감 증명은 지금부터라는 평가가 많다. 소통, 파격, 개인적인 매력을 무기로 든 새로운 정치법만 검증됐을 뿐 금융위기 이후 국제 리더십 공백 속에서 이들이 선보일 2008년 이전 기성과 다른 정책 실험은 이제 시작이기 때문이다. 홍희경 기자 saloo@seoul.co.kr
  • 소년범 김일곤 심리상담 받았다면 ‘트렁크 살인 방화’ 막을 수 있었다

    소년범 김일곤 심리상담 받았다면 ‘트렁크 살인 방화’ 막을 수 있었다

    # 2남 1녀 중 맏이인 김준형(17·가명)군은 어릴 적부터 아버지가 휘두르는 폭행에 시달렸다. 어머니는 3남매가 어릴 때 집을 나갔다. 아버지는 수시로 막내 여동생을 성폭행했다. 가정 형편 탓에 3형제 모두 시립아동보호소로 옮겨졌지만 그곳에서도 폭행 등 학대를 당했다. 여동생은 후유증으로 정신병원에 장기간 입원했고 김군은 남동생과 거리를 떠돌았다. 물건을 훔치기 시작한 건 6년 전쯤이다. 또래 여자아이들과 동거를 하다가 임신을 시켜 김군은 이제 한 아이의 아빠가 됐다. 그는 “죽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김군이 우울증 진단을 받은 건 지난해 서울보호관찰소에서다. 김군은 “어릴 때부터 동생들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괴로웠지만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주 1회 심리 상담과 약물치료를 병행한 결과 김군은 지금 보호관찰소에서 장학금을 받고 있다. 제과제빵 학원에서 직업훈련도 마쳤다. 지금은 얼른 돈을 모아 여동생을 병원에서 나오게 해주고 싶다는 희망에 부풀어 있다. # 지난달 자신의 복수극을 위해 ‘트렁크 살인 방화’를 저지른 피의자 김일곤은 10대 때 범죄의 길로 접어들어 교도소를 6차례나 들락거렸다. 그는 정신질환을 가진 소년범 출신으로, 제대로 보살펴지고 관리되지 않은 대표적 사례다. 경찰의 프로파일러 심리 분석 결과 김씨는 분노조절장애 등 정신 불안 상태라는 진단을 받았다. 범죄자의 정신 건강 상태가 관리됐더라면 무고한 살인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소년범들에 대한 체계적인 정신 상담과 심리 치료가 이들의 재범률을 크게 낮출 수 있다는 최초의 실증적인 연구 결과가 나와 주목된다. 1일 서울신문이 입수한 국립서울병원의 보호관찰 소년범들에 대한 심리 검사 결과에 따르면 전체 소년범의 3분의1이 정신적으로 문제를 안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립서울병원은 지난해 보호관찰 처분을 받고 서울보호관찰소에서 보호관찰 중인 소년범 776명 중 118명을 무작위로 뽑아 심리 검사를 진행했다. 그 결과 33%인 39명이 주의력 결핍 과잉행동장애(ADHD), 품행 장애, 정서 불안 등 시급한 의료적 조치를 필요로 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국립서울병원은 이 중 21명에 대해 매주 1회 2시간씩 심리 치료 프로그램을 11차례 진행했다. 그 결과 전원이 프로그램 수료 후 7개월까지 단 한 건도 재범을 저지르지 않았다. 10개월까지의 재범률도 9.5%(2명)에 그쳤다. 반면 같은 기간 심리 치료를 받지 않은 26명의 7개월 이내 재범률은 26.9%(7명)에 달했다. 특히 심리 치료에 참여한 소년범들은 스트레스 대처 능력, 분노 조절 능력 등도 참여하지 않은 집단에 비해 크게 개선된 것으로 조사됐다. 전문가들은 보호관찰 처분을 받은 소년범들의 재범률을 심리 치료를 통해 낮출 수 있다는 사실이 입증된 만큼 성인 범죄자에 대해서도 똑같이 응용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박성수 세명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강력범의 상당수가 어렸을 때 좀도둑으로 시작해 범죄를 반복하는 과정을 거친다”며 “연쇄살인마 유영철도 처음에는 좀도둑이었지만 소년원에서 교정이 안 된 경우”라고 전했다. 그는 “소년범들에 대한 심리 치료나 교정 교육이 중요한 이유”라고 말했다. 박재풍 경찰대 치안정책연구소 연구관은 “범죄를 저지르면 자신도 모르게 트라우마를 겪게 되는데 교화가 더 쉬운 소년범들의 경우 심리 치료를 해주면 교정될 가능성이 성인보다 한결 높다”고 밝혔다. 이어 “보호관찰 처분을 받은 소년범의 재범률을 낮출 수 있다는 이번 국립서울병원의 연구 결과는 교정행정에 있어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말했다. 최훈진 기자 choigiza@seoul.co.kr 조용철 기자 cyc0305@seoul.co.kr
  • 시리아 난민 수용 확대 시사, “스티브 잡스도 시리아 이민자 아들” 무슨 뜻이길래?

    시리아 난민 수용 확대 시사, “스티브 잡스도 시리아 이민자 아들” 무슨 뜻이길래?

    ‘시리아 난민 수용 확대 시사’ 시리아 난민 수용 확대를 촉구하는 국제사회의 압박이 고조되자, 미국 백악관이 8일(현지시간) 시리아 난민 수용을 확대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 세살배기 시리아 난민 아일란 쿠르디의 죽음에 전세계가 애도하던 지난 2일 스위스의 IT 기업가 데이비드 갤브레이스는 자신의 트위터에 애플 공동 창업자 스티브 잡스의 사진을 올리고 이 같은 한 줄 설명을 달았다. 시리아 난민의 비극이 연일 각국 언론을 장식하는 상황에서 이 트윗은 1만 회 이상 공유되며 전 세계 네티즌의 호응을 얻었다. 잡스는 실제로 시리아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친부 압둘파타 존 잔달리는 현재 시리아 격전 지역 중 하나인 홈스에서 1931년 명문 가문의 3형제 중 막내로 태어난 것. 미국으로 건너와 위스콘신대학에 재학 중에 같은 학교에 다니던 조앤 캐럴 심슨을 만나게 됐고, 1954년 함께 시리아를 방문했을 때 아이를 가져 이듬해 잡스를 낳았다. 그러나 심슨 아버지의 반대로 결혼할 수 없게 되자 이들은 잡스를 폴 잡스와 클라라 잡스 부부에게 입양보냈다. 잔달리는 심슨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심슨과 결혼해 시리아로 떠났다가 이혼 후 다시 미국으로 건너와 카지노 업계에서 경력을 쌓았다. 잡스가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공개한 후 잔달리는 한 언론 인터뷰에서 “입양 보낸 것은 실수였다. 만나서 커피라도 한 잔 하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으나 잡스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잡스의 팬이라는 갤브레이스는 미국 일간 시카고트리뷴과의 인터뷰에서 “시리아 이민자의 아들이 기회를 얻어 세계 최대 기업을 만들었는데 같은 국적의 다른 아이는 버려진 물건처럼 파도에 씻겨져 왔다”고 말했다. 그는 “잡스는 아일란과 모든 면에서 대비된다”며 “아일란과 같은 어린 소년에게도 기회가 주어졌다면 무엇을 이뤄낼 수 있었을지 궁금해졌다”고 트윗을 올린 이유를 설명해 눈길을 끌었다. 시리아 난민 수용 확대 시사, 시리아 난민 수용 확대 시사, 시리아 난민 수용 확대 시사, 시리아 난민 수용 확대 시사 시리아 난민 수용 확대 시사 사진 = 서울신문DB (시리아 난민 수용 확대 시사) 뉴스팀 seoulen@seoul.co.kr
  • [재벌가 분쟁 잔혹사] 창업주의 치우친 자식사랑…불화의 단초 되다

    [재벌가 분쟁 잔혹사] 창업주의 치우친 자식사랑…불화의 단초 되다

    ■효성家 ‘형제의 난’ 조현문, 물려받은 지분 정리 후 형 조현준 횡령 혐의로 고발 효성그룹은 고 조홍제 창업주의 손자들이자 조석래 회장의 2세 간 법적 소송으로 얼룩졌다. 효성 부사장 출신인 차남 조현문 변호사는 지난해 형 조현준 사장과 동생 조현상 부사장이 대주주로 있는 그룹 계열사를 검찰에 고발하면서 전쟁을 선포했다. 발단은 3형제 간 치열한 후계 경쟁을 벌이던 조 변호사가 2011년 효성의 불법 비리를 밝히겠다며 아버지 조 회장과 충돌한 뒤 회사를 나가면서부터다. 1999년부터 10여년간 일했던 조 변호사는 2013년 2월 회사를 완전히 떠나면서 부친에게 물려받은 7.1%의 효성 주식을 골드만삭스 등에 팔아 지분 관계를 모두 정리했다. 오너 지분이 제3자로 넘어가자 지배 구조 리스크가 부각되면서 당시 효성은 주가가 곤두박질쳤다. 이후 조 변호사는 지난해 6월 형과 동생이 대주주로 있는 그룹 계열사 대표를 횡령과 배임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10월에는 형과 계열사 임직원 8명을 같은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노틸러스효성 등 3개 계열사 지분을 가진 형과 해당 계열사 대표들이 수익과 무관한 거래에 투자하거나 고가로 주식을 사들이는 방식 등으로 회사에 최소 수백억원의 손실을 입혔다는 주장이다. 그룹 측은 “왜곡된 주장이며 불순한 의도가 보인다”고 반박했다. 조현준 사장과 조현상 부사장은 지분 매입에 주력하는 분위기다. 지난 4일 기준 두 사람의 지분은 각각 11.38%, 10.95%로 이미 조 회장(10.15%)의 지분율을 넘어섰다. 효성은 2013년 말 추징금을 납부해 신용등급이 A+에서 A로 강등됐다가 2014년 말 회복됐다. 강주리 기자 jurik@seoul.co.kr ■현대家 ‘형제의 난’ 정주영 회장 후임으로 정몽헌 지명되자 큰형 정몽구 ‘현대차’ 들고 그룹 떠나 재벌가 골육상쟁 잔혹사의 원조는 현대가다. 2000년 발생한 현대그룹 형제 간 경영권 다툼을 당시 언론은 ‘왕자의 난’이라고 불렀다. 형제 간 다툼은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실질적인 장남인 둘째 아들 정몽구 현대차 회장이 5남인 고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의 측근 이익치 현대증권 사장을 좌천시키면서 본격화됐다. 고 정 명예회장은 대선 패배 이후 건강이 악화됐고, 두 형제는 1999년 11조원 이상의 적자를 기록할 만큼 현대그룹의 재무구조가 악화된 상황에서 경영자협의회를 통해 공동 회장으로서 그룹을 함께 이끄는 과정에서 격돌한 것이다. 2003년 3월 병석에 있던 고 정 명예회장은 경영자협의회에 참석해 실질적 장자인 둘째 아들 정몽구 회장 대신 다섯째 아들 정몽헌 회장의 손을 들어 주었다. 이른바 현대그룹 1차 ‘왕자의 난’이다. 갈등은 2개월 뒤 다시 증폭됐다. 현대 유동성 문제가 불거지고 계열사 주가가 급락하자 자구안 차원에서 5월 말 3부자 경영 일선 퇴진이 선언됐다. 현대차를 형에게 내주지 않기 위한 고 정몽헌 회장 측 음모라고 본 정몽구 회장 측은 사전협의 없이 나온 발표라며 퇴진을 거부했다. 이른바 2차 왕자의 난이다. 그해 9월 정몽구 회장은 현대차를 떼어 그룹을 떠났고, 고 정몽헌 회장은 같은 해 말 그룹 회장으로 복귀해 건설·상선 등 그룹 대부분을 차지했다. 현대그룹은 왕자의 난 이후에도 2003년 8월 정몽헌 전 회장의 부인인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과 정상영 KCC 명예회장 간에 ‘숙부의 난’이라고 불리는 경영권 분쟁에 휘말렸다. 이어 2006년에는 현대상선 경영권을 놓고 정몽준 현대중공업 최대주주와 신경전을 벌인 ‘시동생의 난’을 겪었다. 주현진 기자 jhj@seoul.co.kr ■한화家 ‘형제의 난’ 김호연 “계열사 양도 약속 지켜라”…형 김승연 상대로 재산권 반환 소송 한화그룹도 소유권 다툼을 피하지 못했다. 김승연 한화 회장은 동생 김호연 전 빙그레 회장과 3년 6개월에 걸쳐 지난한 법정 소송을 벌였다. 분쟁은 1992년 김호연 당시 한양유통(현 한화갤러리아) 사장이 ‘경영능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퇴출되면서 촉발됐다. 김 전 회장은 형이 자신에게 한양유통 등의 계열사를 넘겨주겠다고 했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반발했고 김 회장은 약속 자체를 한 적이 없다며 반박했다. 김호연 전 회장은 당시 “군복무 중인 1981년 부친 김종희 회장이 아무런 유언 없이 사망하자 상속재산을 지분별로 나눠 가져야 했었는데 형이 의논 없이 임의 처분했다”며 형을 상대로 재산권 반환 소송(주식인도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유산의 40%를 달라는 게 핵심이었다. 김 회장 측은 “지난 1981년 당사자 간의 합의 등 민법상의 합법절차를 밟아 상속재산이 분배됐고 10년 시효가 끝난 만큼 상속은 문제가 없다”고 맞섰다. 김 회장은 1993년 그룹 41주년 창립 행사에서 “동생이 없는 셈 치겠다. 재산 때문에 싸우는 것처럼 알고 있지만 경영 능력도 없고 딴 생각을 많이 해 경영을 맡기지 않았다”고 격렬히 비판하며 감정의 골을 내비치기도 했다. 두 사람은 1995년 어머니 강태영 여사의 칠순 잔치에서 어머니의 중재로 극적 화해했다. 이후 김 전 회장은 소를 취하했다. 이후 김 전 회장은 “그 일로 서먹해졌지만 형과의 갈등은 모두 해소됐다. 집안 행사가 있을 때마다 형제 간 모임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 명희진 기자 mhj46@seoul.co.kr ■대성家 ‘형제의 난’ 장남 김영대·삼남 김영훈, 정통성 놓고 대립…결국 2개의 지주법인 탄생 김성주 대한적십자사 총재가 막내딸로 있는 것으로 더 잘 알려진 에너지 전문기업 대성그룹은 고 김수근 창업주의 “형제 간에 절대 다투지 마라”는 유언에도 불구하고 아들 삼 형제가 십 년이 넘도록 치열한 골육상쟁을 벌여 왔다. 대성그룹의 파열음은 김 창업주가 2000년 세 아들에게 기업을 나눠 주고 이듬해 별세하면서 터지기 시작했다. 그는 장남 김영대에게 모기업인 대성산업을, 차남 김영민에게 서울도시가스를, 3남 김영훈에게는 대구도시가스(현 대성에너지)를 기반으로 한 대성그룹을 각각 경영하도록 했지만 유산, 호칭, 상호를 두고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2001년 2세 분리경영 이후 장남은 대성산업이 보유한 서울도시가스와 대구도시가스의 지분 처리방식을 놓고 차남·삼남과 1차 경영권 분쟁을 겪었다. 장남과 삼남은 서로 ‘대성그룹 회장’이라며 정통성을 놓고도 대립했다. ‘대성지주’ 상호를 차지하기 위한 법정 소송도 벌였다. 삼남 김영훈 회장은 2009년 대성그룹의 지주사 분리 당시 대성홀딩스로 상장을 했는데 이듬해 장남 김영대 회장은 대성산업의 지주사 명칭을 대성지주로 증권시장에 상장했다. 동생이 형을 상대로 한 ‘대성지주 상호 금지’ 가처분 신청은 법원에서 동생의 손을 들어줬고 김영대 회장은 대성합동지주로 결국 이름을 바꿨다. 서로 상징성을 포기하지 못해 2개의 대성지주 법인이 생긴 것이다. 모친 여귀옥 여사가 작고한 2006년에는 유산 상속을 놓고 또 갈등을 빚었다. 이런 ‘형제의 난’ 속에 진행된 경쟁적 사업확장은 재무건전성 악화로 나타났다. 공정거래위원회가 발표한 올해 재계 순위에서 대성은 38위로 7계단 내려앉았으며 자산총액도 7조 3000억원에서 지난해 5조 9000억원으로 대폭 줄었다. 강주리 기자 jurik@seoul.co.kr
  • [재계 인맥 대해부 (4부)뜨고 지는 기업&기업인 대성그룹] 연탄회사서 출발 에너지산업 산증인… ‘한 우물 경영’ 변화 모색

    [재계 인맥 대해부 (4부)뜨고 지는 기업&기업인 대성그룹] 연탄회사서 출발 에너지산업 산증인… ‘한 우물 경영’ 변화 모색

    국내 에너지산업의 산증인과 다름없는 에너지 전문기업 대성그룹은 고 해강(海崗) 김수근 대성그룹 창업주가 1947년 연탄제조업체이자 대성그룹의 모체인 대성산업공사를 설립하면서 시작됐다. 1970년대 초반까지 10대 그룹에 이름을 올렸던 대성그룹이었지만 외환위기 이후 30위권으로 밀려나 올해 공정거래위원회가 발표한 재계순위에서는 57위에 머물렀다. 순수민간기업 기준으로는 38위로 지난해에 비해 7계단 후퇴했다. 자산총액도 7조 3000억원에서 5조 9000억원으로 줄었다. 재계 상당수가 생존 전략의 일환으로 사업 다각화를 통해 몸집을 불렸지만 대성그룹은 창업주의 경영 철학인 ‘한 우물 파는 경영’ 기조 아래 반세기가 넘는 시간을 에너지 사업에만 주력해 왔다. 올해 68주년을 맞는 대성그룹은 변화를 준비하고 있다. 김 창업주는 대구 북구 칠성동에서 종업원 3명으로 연탄과 흑판을 제조하는 작은 연탄회사를 창업했다. 나무가 주된 연료였던 시절에 연탄시장의 급성장을 꿰뚫어 본 판단력이었다. 그는 ‘대기만성’의 줄임말인 대성을 기업명으로 삼을 만큼 무리한 투자 없이 정도와 내실을 다지는 경영철학으로 에너지 사업에만 집중했다. 1957년 서울에 올라와 대성연탄을 세우고 왕십리 공장을 준공하면서 1959년 연탄 생산·판매 사업은 본격화됐다. 이듬해는 문경탄광 등을 잇따라 인수하며 석탄 채굴사업에 돌입했다. 1968년에는 대성산업을 세워 LPG(액화석유가스), LNG(액화천연가스) 등을 판매하며 에너지 전문기업으로서 위상을 갖춰 갔다. 김 창업주는 “하나라도 제대로 하자. 남이 하니까 나도 한다는 식의 경영은 있을 수 없다”며 ‘한 우물 경영’을 거듭 강조했다. 그의 구상은 1983년 서울시영도시가스를 인수하면서 서울도시가스와 대구도시가스를 세우며 종합에너지 그룹의 면모를 갖춰 나가기 시작했다. 이후 대성셀틱(보일러), 대성정밀(자동차부품), 대성헨켈화학, 오산에너지 열병합발전소 인수 등 사업 다각화도 조금씩 진행됐다. 대성은 김 창업주가 외부자금을 끌어들이지 않는 경영을 중요시 한 덕에 외환위기 전후에도 탄탄한 자본 운영으로 위기를 넘겼다. 당시 30대그룹 부채비율은 387%였으나 대성은 140%에 그쳤다. 근검절약을 생활화해 경비가 남으면 회사에 반납했고, 외국여행 때 호텔에서 쓰고 남은 일회용 비누는 “면도할 때 쓰면 좋겠다”며 챙겨 왔다. 돈이 있음에도 창업 후 50년간 그룹 사옥 없이 임대로 전전한 것은 구태여 허장성세할 필요가 없다는 김 창업주의 판단 때문이었다. 김 창업주는 2001년 2월 세상을 뜨기 전 마지막 병상에서 “인생은 유한하지만 기업은 영원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그는 아들 3형제에게도 “국민의 사랑을 못 받을망정 지탄받는 기업은 되지 마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성그룹의 파열음은 김 창업주가 세 아들에게 기업을 나눠 주면서 터지기 시작했다. 그는 장남 김영대에게 대성산업(대성합동지주, 디큐브시티 등)을, 차남 김영민에게 서울도시가스(서울도시개발 등)를, 3남 김영훈에게는 대구도시가스를 기반으로 한 대성그룹(대성홀딩스, 대성에너지 등)을 각각 경영하도록 했지만 갈등은 점점 커져갔다. 2001년 분리경영 이후 14년 동안 장남과 삼남은 ‘대성’ 명칭을 차지하기 위한 법정소송을 벌였다. 2009년 대성그룹이 지주사 분리 당시 대성홀딩스로 상장을 했는데 이듬해 장남 김영대 대성산업 회장이 대성지주로 증권시장에 상장했다. 동생이 형을 상대로 한 ‘대성지주 상호 금지’ 가처분 신청은 법원에서 동생의 손을 들어줬고 김영대 회장은 대성합동지주로 결국 이름을 바꿨다. 모친 여귀옥 여사가 작고한 2006년 유산상속을 놓고 또다시 갈등을 빚었다. 이런 ‘형제의 난’ 속에 진행된 경쟁적 사업확장은 재무건전성 악화로 나타났다. 지난해 말 코리아닷컴커뮤니케이션즈, 디큐브시티뽀로로파크 등 대성 계열사 5곳은 자본잠식에 빠졌으며 주요 계열사인 대성산업, 대성쎌틱에너시스 등 7곳은 부채비율이 300%가 넘는 고위험군에 포함됐다. 대성가는 총 73개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는데 이는 재계 1위 삼성(67개)보다도 많다. 지난달 기업경영성과 평가사이트 CEO스코어 분석에 따르면 지난해 3분기 기준 이들 계열사 절반이 적자다. 하지만 바닥을 친 대성가는 재도약의 기회를 엿보고 있다. 대성은 연료전지 생산과 LNG 수입 등 신규사업을 통해 2020년까지 매출을 3조원까지 끌어올릴 계획이다. 또 아시아태평양지역 대표 에너지 사업으로 선정된 태양광·풍력 복합발전시스템의 솔라윈과 생활쓰레기 고형연료화사업 등 신재생·바이오에너지로 3차 산업동력을 찾겠다는 각오다. 강주리 기자 jurik@seoul.co.kr
  • [재계 인맥 대해부 (4부)뜨고 지는 기업&기업인 대성그룹] 독실한 기독교 가문에 자유연애… 종교만남서 인연 맺은 혼맥

    [재계 인맥 대해부 (4부)뜨고 지는 기업&기업인 대성그룹] 독실한 기독교 가문에 자유연애… 종교만남서 인연 맺은 혼맥

    독실한 기독교 가문인 대성그룹의 혼맥은 종교적인 만남 속에 인연을 찾은 경우가 많다. 정략결혼보다는 비교적 자유로운 연애 속에 때때로 실속 있는 재계 간 혼사들이 이어진다. 대성그룹 창업주 고 해강(海崗) 김수근 명예회장은 1916년 대구에서 부친 김두윤(작고), 모친 기묘임(작고)의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유복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10세 때 아버지를 여의면서 가세가 기울었다. 대구상고를 중퇴하고 당시 일본 기업이었던 삼국석탄 대구지점에 취직했다. 이후 1940년 일본 유학길에 올라 일본대학 법학부를 수석 졸업했다. 7세 연하인 여귀옥(작고) 여사와는 26세인 1942년에 결혼했다. 여 여사는 대구 남산교회에서 만났다. 모친 기씨의 마음에 든 여 여사는 당시 신명여고를 졸업해 평양여자신학교를 수료한 명망가 집안의 고명딸이었던 터라 김 명예회장은 결혼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여 여사는 세계기독교여자절제회 한국지부 회장을 맡기도 했다. 59년간 동고동락했던 부부는 2001년 김 명예회장이 세상을 뜨고 5년 뒤 여 여사도 생을 마감하면서 하늘의 연으로 이어졌다. 두 사람은 4남 3녀를 뒀다. 4남 영철씨는 1973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6남매는 전원 명문대 졸업에 2개 이상 석사 학위 소지자여서 자식 농사를 잘 지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장남 영대(법학과 수석 졸업), 차남 영민(사학과), 3남 영훈(행정학과), 장녀 영주(미대)씨는 모두 서울대 출신이다. 차녀 정주씨는 이화여대 영문학과(수석 입학·졸업), 3녀 성주씨는 연세대 신학과와 미국 애머스트대 사회학과를 나왔다. 장남 김영대(73) 대성산업 회장은 어머니 친구의 소개로 1971년 검사 출신 변호사 차영조 변호사의 딸 정현(66)씨와 혼사를 맺었다. 정현씨는 서울대 음대에서 피아노를 전공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정한, 인한, 신한씨 3형제가 있다. 장남 김정한(43) 라파바이오 사장은 1997년 서울 덕수교회에서 대원외교 동창인 전성은(42)씨와 화촉을 밝혔다. 전씨는 뉴잉글랜드 음대를 졸업하고 예일대 음대에서 석사 과정을 마쳤다. 그녀의 부친 전경호 서한모방 회장은 김 회장과 경북사대부고 동창이다. 둘은 1남 1녀를 뒀다. 고려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차남 김인한(42) 콜로라도대 정치학과 교수는 대학 캠퍼스 커플이다. 평범한 가문의 같은 과 후배인 이내리(37)씨와 2002년 서울 덕수교회에서 결혼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아들이 둘 있다. 3남 김신한(40) 대성산업가스 사장은 미국 유학 중 지인의 소개로 만난 한조희(34)씨와 신앙생활을 함께하며 1년간 교제하다 2006년 서울 온누리교회에서 간소하게 결혼식을 올렸다. 한씨는 주유소업체 중앙에너비스 한상렬 사장의 딸이다. 한씨는 결혼 3개월 전인 그해 3월 창업주의 미망인이자 시조모인 여 여사의 상중일 때부터 대성가 며느리 역할을 해 온 것으로 전해졌다. 두 사람은 세 아들을 낳았다. 차남 김영민(70) 서울도시가스 회장은 1979년 친지의 소개로 서울대 성악과를 나온 민명옥(65)씨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민씨의 부친은 민유봉 전 유화증권 사장이다. 김 회장 부부는 은혜(35), 요한(33), 종한(26)씨 등 2남 1녀를 뒀다. 장남 김요한 서울도시가스 부사장만 결혼했다. 3남 김영훈(63) 대성그룹 회장은 1993년 박영창 목사의 소개로 김홍도 금란교회 목사의 차녀인 김정윤(46)씨와 결혼했다. 두 사람은 17살 차이를 극복하고 사랑에 성공했다. 슬하에는 의한(21), 은진(18), 의진(15)과 늦둥이 은정(5) 등 1남 3녀가 있다. 김영훈 회장은 경기고 동문인 김한(61) 광주은행장과 서울대 동창인 신희택(63) 서울대 법대 교수와 절친한 사이다. 장녀 김영주(67) 대성그룹 부회장은 1975년 서울대 의대 출신의 내과 전문의 신현정(70)씨와 연을 맺었다. 신씨는 개인병원을 운영한 뒤 현재 그룹 계열사인 대성에너지 제1·2·3서비스 사장으로 일하고 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신정희(40), 신명철(38)씨 등 1남 1녀가 있다. 벤처사업 캐피탈을 하고 있는 장남 신명철 킹스베이캐피탈 공동 창업자는 변호사 권순혜(34)씨와 결혼해 온유(5), 민유(2) 두 딸을 두고 있다. 권씨는 호주 퀸즐랜드대 법학과를 나온 호주 변호사로 전 이건산업 사장이었던 권주혁 동원그룹 상임고문의 딸이다. 김 부회장은 화가이자 인테리어 디자이너이기도 하다. 차녀 김정주(66) 대성홀딩스 공동대표이사는 하버드대 신약학 박사 출신으로 2013년까지 연세대 신학대에서 신약학을 강의했다. 지금은 대성그룹 계열사인 출판사 대성도 운영하고 있다. 세계기독교여자절제회 수석부회장으로 독신이다. 막내딸은 대한적십자사 총재인 김성주(59) 성주그룹 회장이다. 강주리 기자 jurik@seoul.co.kr
  • 중앙대 이사진 전원 ‘親두산’… 오너家 인사·경영·예산권 장악

    중앙대 이사진 전원 ‘親두산’… 오너家 인사·경영·예산권 장악

    ‘막말 이메일’ 파문의 책임을 지고 두산그룹 오너인 박용성 중앙대 재단 이사장이 지난 21일 사퇴 의사를 밝힌 가운데 중앙대 교수들이 박 이사장에 대한 법적 조치에 나서기로 하는 등 파문이 확산되고 있다. 이에 따라 향후 중앙대의 지배구조 변화 여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그러나 ‘두산가(家)’의 중앙대 운영은 계속될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관측이다. 대학 인사·경영·예산권을 모두 쥔 이사회가 두산 측 인사들로 구성돼 있기 때문이다. 중앙대 교수비상대책위원회는 22일 기자회견을 열고 박 이사장을 모욕죄와 협박죄로 고발하겠다고 밝혔다. 비대위는 박 이사장의 사퇴 후에도 여전히 재단 이사직 대부분을 두산그룹 측 인사가 차지하는 데 대해 우려를 표명했다. 김누리 비대위원장은 “사립학교법이 제대로 정비돼 있지 않아 재벌이 당당하게 사립대학을 자기 소유물처럼 여기고 전횡을 휘두르고 있다”고 말했다. 이들은 “박 이사장의 막말 파문은 한국 대학사회와 구성원들을 모욕하고 협박한 ‘대학판 조현아 사건’”이라고 지적했다. 이들은 전날 학내 커뮤니티 ‘중앙인’에 “학교가 한시라도 빨리 정상화되는 데 총력을 기울일 것”이라고 전한 이용구 총장에 대해서도 사임을 요구했다. 현재 중앙대 이사회는 고 박두병 두산그룹 초대 회장의 직계아들 5형제 중 3, 4, 5남인 박용성, 박용현, 박용만 형제가 각각 이사장과 이사로 활동 중이다. 박 이사장이 21일 일선에서 물러난다고 했지만 두 형제는 이사직을 그대로 유지한다. 3형제 외에 이사진 11명 가운데 조남석 두산엔진 부사장, 이병수 두산기계 사장 등이 이사회에 포진했다. 이 총장 역시 이사진이 임명한 총장이다. 개방 이사인 어준선 안국약품 회장은 2008년 두산의 중앙대 인수 이후 3억원의 기부금을 대학에 냈을 정도로 친분이 있다. 나머지 인사들은 박범훈 전 총장 시절 적십자 간호대학 인수와 관련해 대한적십자사 인사 또는 직간접적으로 두산과 친분 관계가 있는 사람들이다. 지난 2월 이태희 두산 사장이 이사진에서 나가면서 조남석 두산엔진 부사장이 들어왔고, 고경석 대한적십자사 사무총장의 후임으로 강호권 신임 사무총장이 들어왔다. 당시 이를 두고 ‘회전문 인사’라는 비판이 일었다. 대학 이사회는 교직원들의 인사는 물론 예산 편성과 경영 전반까지 좌지우지하고 있다. 특히 임기가 다한 이사에 이어 이사회 입맛에 맞는 새 이사의 선임 권한도 쥐고 있다. 이사회 구성을 놓고 갈등이 벌어지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최근 상지대 이사회가 구 재단의 김문기씨를 총장으로 앉히려다가 논란을 빚고, 성신여대에 이사회 다툼이 벌어지면서 교육부가 임시이사를 파견하기도 했다. 막강한 권력을 가진 이사회가 전횡을 휘두르면 대학 구성원과의 갈등은 필연적이라는 분석이다. 박거용 대학교육연구소장(상명대 교수)은 “대학 이사회를 거머쥔 쪽이 대학의 전권을 차지하는 지금 상황에서는 사실상 대학 이사회의 전횡을 막을 길이 없다”면서 “사립학교법에서 제도적 장치를 보완하거나, 교직원이나 학생 등이 이사회에 참여해 견제할 수 있도록 하지 않으면, 대학 구조조정과 맞물려 전국 곳곳에서 비슷한 사태가 이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 ‘대우조선·STX조선 통합’ 채권단 ‘조선업 재편’ 신호?

    ‘대우조선·STX조선 통합’ 채권단 ‘조선업 재편’ 신호?

    최근 금융권에선 대우조선해양 차기 사장 후보자로 선임된 정성립 STX조선해양 사장이 화제의 중심이다. 대우조선 대주주인 산업은행은 앞서 “대우조선해양 대표 출신인 정 후보자는 누구보다 기업 문화를 잘 이해하고 있다. 전문성을 높게 평가했다”고 선임 배경을 밝혔다. 이를 두고 뒷말이 무성하다. 금융권이 관심을 보이는 해석 가운데 하나는 ‘조선업 재편설’이다. 채권단이 주도하는 조선업 재편 과정의 ‘신호탄’이라는 추론이다. 투자은행(IB) 업계의 한 관계자는 9일 “정 후보자 선임은 복합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며 “채권단이 정 사장을 연결고리로 대우조선과 STX조선 통합이라는 큰 밑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 경우 STX조선은 후임 사장 선출 없이 위탁경영으로 유지될 가능성이 있다. 두 회사 모두 대주주(주채권은행)가 산업은행이기 때문이다. 대우조선이 STX조선을 인수하는 구도의 이 시나리오는 현실적인 계산에 기반하고 있다. 양사 통합 시 수익개선 시너지는 물론 채권단 입장에서도 가장 효율적으로 투입 자금을 회수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분석이다. STX조선과 STX엔진(중공업)을 패키지 방식으로 인수하면 대우조선은 엔진부문을 보강할 수 있다. STX조선은 통합으로 우회상장 효과를 누릴 수 있다. 채권단은 STX조선의 신용등급 상향으로 충당금 부담이 줄어든다. 대우조선과 STX조선의 중복 영역을 자연스럽게 구조조정함으로써 기업 가치 제고도 모색할 수 있다. STX조선 채권단의 한 관계자는 “대우조선과 STX조선의 주요 채권은행이 산업·수출입·농협은행 등으로 동일해 의사결정 과정과 협의가 비교적 수월한 특성이 있다”며 “STX조선은 2013년 자율협약 체결 이후에도 실적 개선이 지지부진해 (통합 시나리오가) 매력적인 대안인 것은 사실”이라고 전했다. STX조선은 성동조선, SPP조선과 함께 채권단 사이에서 ‘못난이 3형제’로 불린다. 이들 3곳은 최근 3~4년 동안 자율협약이 진행 중이지만 저가 수주 여파로 출혈 경쟁을 거듭하고 있어서다. 2001년 8월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을 조기 졸업한 대우조선과 STX조선이 손을 잡는다면 성동조선과 SPP조선 역시 ‘자구책’ 마련에 속도를 낼 것이라는 기대감도 있다. A시중은행 부행장은 “조선업 장기 침체와 저가 경쟁이 이어지고 있는 만큼 각개전투로 개별 조선사들이 정상화를 추진하는 데엔 한계가 있다”며 “채권단 주도의 인위적인 조선업 재편을 통해서라도 산업 경쟁력을 높여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이유미 기자 yium@seoul.co.kr
  • [재계 인맥 대해부 (4부) 뜨고 지는 기업&기업인 효성그룹] 작년 차남이 형 고발… 3세 후계구도 안갯속

    선대가 그랬듯이 순탄하게 흘러갈 것 같았던 효성그룹의 후계구도가 법적소송으로 삐걱거리고 있다. 효성을 이끌고 갈 후계자에 대해 재계에서는 장자인 조현준 효성 사장을 가장 유력하게 보고 있지만 입지가 그리 탄탄하지 못하다는 말도 나온다. 안갯속인 효성그룹의 후계구도는 어떻게 풀어질까. 조석래 효성 회장의 장남인 조 사장은 보성중을 졸업한 뒤 미국 명문 세인트폴스고로 유학을 가 예일대에서 정치학을 전공했다. 일본 게이오대에서 정치학 석사 학위를 받은 조 사장은 일본 미쓰비시 상사에서 일하다 1997년 효성에 경영기획팀 부장으로 입사했다. 6년 만인 2003년 부사장에 오른 조 사장은 4년 뒤 사장 자리에 앉았다. 현재 그는 효성 섬유·정보통신사업그룹장(PG) 겸 전략본부장(사장)을 맡고 있다. 오랜 유학 생활로 다양한 인적 네트워크를 가진 조 사장은 영어, 일어, 이탈리아어에도 능통한 것으로 알려졌다. 팀플레이를 중시하는 ‘야구경영론’으로 “부모들이 입사를 추천하는 회사”로 만들고 싶다고 밝히기도 했다. 입사 이후 국내 최초로 전 사원의 급여체제를 연봉제로 전환하고 주력 산업인 스판덱스 부문의 글로벌 생산기지를 확대해 2010년 세계 시장점유율 1위를 일궈 냈다. 그러나 2013년 회사를 떠난 차남 조현문 법무법인 현 고문 변호사는 부친에게 물려받은 7.1%의 효성 지분을 모두 정리하고 지난해 6월 형과 동생 조현상 효성 부사장이 대주주로 있는 그룹 계열사 대표를 횡령과 배임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10월에는 형과 계열사 임직원 8명을 같은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조 변호사는 서울대 고고인류학과를 수석 입학·졸업하고 미국 하버드대 로스쿨을 마치고 뉴욕주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다 1999년 효성에 입사했다. 국제변호사로서 잃어버린 효성 도메인을 미 법원에 제소해 되찾아오는 등 역량을 발휘해 조 회장 부부의 기대를 한껏 받기도 했다. 하지만 효성의 불법 비리를 밝히겠다고 해 2011년 조 회장과 충돌한 이후 회사에서 나가 후계 경쟁에서 사실상 배제됐다. 삼남인 조현상 효성 부사장은 연세대를 거쳐 미국 브라운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1998년 외환위기 당시 그룹의 사내컨설턴트 역할을 맡아 경영에 참여했다. 이후 일본NTT커뮤니케이션에서 한국지사 설립을 주도해 성공했다. 2000년 효성에 복귀한 조 부사장은 2001년 이사에서 11년 만에 효성 산업자재산업그룹장(PG) 겸 전략본부 부사장에 올랐다. 2006년 굴지의 타이어업체인 미국 굿이어사 등의 대규모 계약을 따내면서 타이어코드시장 1위를 삼켰다. 친화력이 있으며 사내 사회공헌활동(메세나)을 주도하고 있다. 현재 효성의 지분은 지난달 기준 조 회장 10.15%, 조현준 사장 10.97%, 조현상 부사장 10.67%로 배분돼 있다. 조 회장은 요즘 담낭암 4기 수술을 받고 전립선암까지 발견돼 건강 상태가 좋지 않은 데다 재판도 받고 있어 심신이 힘겨운 상황이라는 게 주변의 전언이다. 2013년 탈세 혐의로 효성 본사와 자식들의 집이 압수수색을 당하면서 후계 작업 마무리에 대한 압박감과 함께 상당한 충격도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3형제간 화해가 이뤄질 가능성도 조심스레 제기되고 있다. 지난 22일 별세한 송인상 한국능률협회 명예회장의 빈소에 송 명예회장이 생전에 가장 아꼈다는 외손주 조현문 변호사가 찾아왔기 때문이다. 2년 만에 만난 3형제는 어색했지만 외할아버지의 조문을 계기로 화해의 물꼬를 틀지 주목된다. 강주리 기자 jurik@seoul.co.kr
  • [잊혀진 3·1절] “물려받은 건 가난뿐… 원망 많았지만 그래도 존경합니다”

    [잊혀진 3·1절] “물려받은 건 가난뿐… 원망 많았지만 그래도 존경합니다”

    “무명 독립운동가 후손의 삶이란 게 평탄할 리 있겠습니까만, 그래도 항상 자랑스럽습니다.” 3·1절을 앞두고 27일 서울 성북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석주(石洲) 이상룡(1858~1932) 선생의 증손자 이범증(71)씨는 “증조부님의 행적이야말로 요즘 말로 ‘노블레스 오블리주’ 아니겠냐”고 말했다. 석주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내각수반)을 지냈다. 경북 안동 유림명문가의 99칸짜리 대저택(임청각·보물 182호)에서 태어난 이 선생은 국운이 기울자 모든 기득권을 버린 채 1911년 만주로 떠났고, 전 재산을 다 바쳐 서간도에 독립군기지를 만들었다. 하지만 학계 평가에 비해 그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씨는 “증조부를 비롯해 알려지지 않은 훌륭한 독립운동가들이 많다”며 안타까워했다. 독립운동의 길은 가족들에게도 험난했다. 이 선생이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임청각과 토지 등을 다 팔았기 때문이다. 이씨는 “집안에 한 명이라도 독립운동을 하면 가문이 망한다고 했는데 우리 집안은 삼 대가 했다”며 “광복을 했지만 돌아온 것은 가난뿐이었다”고 회상했다. 이씨는 이 선생의 3형제와 아들, 손자, 조카들까지 모두 독립운동을 했다고 설명했다. 7남매 중 막내인 이씨는 형제 중 유일하게 대학을 졸업했다. 그는 “워낙 가난했기 때문에 부모님이 자녀들을 돌볼 틈이 없었다”면서 “그나마 혼자 대학을 나올 수 있었던 건 제일 늦게 태어난 덕분”이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학창시절 소풍이나 수학여행은 커녕 대학 시절에도 친구 자취방에서 얹혀 지내며 스스로 학비를 댔다. 고려대 사학과를 졸업한 이씨는 30년 넘게 교사 생활을 하다 2007년 퇴직했다. 서울 중앙중 교장을 맡았던 마지막 8년 동안에는 3·1절이 되면 학교 홈페이지에 특별한 훈화글을 남겼다. 이씨는 “‘선열들은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고 만세를 불렀다’는 글귀를 매번 썼다”면서 “개인주의가 심화된 세대인 만큼 학생들이 독립운동가들의 정신을 본받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고 말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과 비서장 등을 지냈고 1962년 건국훈장을 받은 동암(東岩) 차리석(1881~1945) 선생의 아들 차영조(71)씨의 유년도 크게 다르지 않다. 차씨는 “아버지가 해방 직후인 1945년 9월 9일 과로로 쓰러져 돌아가셨다”며 “어머니는 그때부터 충무로에서 사과궤짝 위에 양담배를 올려놓고 장사를 했다”고 전했다. 그는 “당시 양담배 판매가 불법이었지만 젊은 여자가 자식을 데리고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뿐이었으니 어머니는 매일 단속을 당해도 다음날 좌판을 벌였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차씨는 광복 이후 정부가 독립운동가 후손들을 위한 별다른 지원을 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그는 “당시 정부는 친일파에게는 거꾸로 면죄부를 주고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보호해 주지 않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돈과 먹을 것을 달라는 게 아니라 스스로 살아가게끔 교육이라도 시켜 줬으면 좋았을 텐데 전혀 도움이 없었다”고 했다. 그는 “13세 때 어머니가 중풍으로 쓰러진 뒤부터는 ‘아이스께끼’ 장사, 여관 심부름 등 안 해본 일이 없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차씨는 병원 갈 돈이 없어 어머니를 제대로 치료할 수 없었던 때, 처음 아버지를 원망했다고 했다. 그는 “어머니는 배고프게 살면서도 항상 ‘아버지는 훌륭한 독립운동가’라고 강조했다”면서도 “유년시절엔 많이 원망했다”고 고백했다. 전력검침원과 건설노동자로 힘겨운 삶을 이어가던 그는 1977년부터 홀로 아버지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사업회 일을 시작했다. 차씨는 “2019년이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인데 그때까지 국내에 임시정부 기념관을 만드는 게 목표”라고 전했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는 지난 26일부터 이상룡·차리석 선생 등 일반에 잘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 인물 열전 60권을 전시하고 있다. 홍선표 독립기념관 연구위원은 “공적이 뚜렷하지만 국민에게 낯선 이름들을 소개하는 이번 사업을 계기로 독립운동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최선을 기자 csunell@seoul.co.kr 조용철 기자 cyc0305@seoul.co.kr
  • 35. 그땐 그랬지(5) 커피 마신 스님, 돈 대신 목탁만 쳐줬다가… [선데이서울로 보는 그때 그 시절]

    35. 그땐 그랬지(5) 커피 마신 스님, 돈 대신 목탁만 쳐줬다가… [선데이서울로 보는 그때 그 시절]

    독자들의 성원 속에 연재되고 있는 [선데이서울로 보는 그때 그 시절]은 1960~70년대 독자들을 울리고 웃겼던 생활 속의 사건 기사들을 모아 <그땐 그랬지>라는 코너로 소개합니다.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사건 소품 기사들을 통해 당시의 사회상과 생활상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일부 표현은 요즘 상황에 맞게 수정했음을 알려드립니다. ▒▒▒▒▒▒▒▒▒▒▒▒▒▒▒▒▒▒▒▒ 35. [선데이서울로 보는 그때 그 시절] 그땐 그랬지(5) 커피 마신 스님, 돈 대신 목탁만 쳐줬다가… 커피 마신 스님, 돈 대신 목탁만 쳐줬다가… 5일 오후 6시쯤 부산 서면의 한 다방에 승복을 입은 스님 한 분이 들어와 의자에 앉더니 점잖게 커피를 한잔 시켜 마시고는 엄숙히 목탁을 서너번 두드린 뒤 아무 말 않고 홀연히 다방을 따났다. 찻값을 받지 못한 다방 아가씨가 스님을 뒤쫓아 가 승복 자락을 붙잡고 늘어지며 찻값을 요구하자 스님 왈, “복을 많이 빌어 주었는데 무지하게도 찻값을 받으려 하느뇨?”라며 호통. 때마침 지나가던 불교신도 한 사람이 대신 찻값을 물어주어서 무사히 사태는 수습되었다나. 나무아미타불! -1970년 3월 15일자 ▒▒▒▒▒▒▒▒▒▒▒▒▒▒▒▒▒▒▒▒ 냇가서 목욕하며 물장난한 옆사람, 알고보니 ‘경악’ 경남 창녕에 사는 안모(21)양은 냇가에서 목욕을 하다가 큰 망신을 당했는데.... 7일 저녁 7시쯤 안양은 친구 3명과 함께 동네앞 냇가로 목욕을 갔는데 어둠이 깔리자 안양은 옆에 있는 사람이 친구인 줄 알고 껴안고 물장난. 머리칼을 잡아보니 기다란 장발이어서 마음 놓고 친구에게 주물림을 당하다가 한참뒤 상대방을 껴안은 다음 가슴깨를 더듬었더니 어럽쇼, 운동장처럼 밋밋. 기겁한 안양은 날 살리라고 도망쳤는데 알고보니 동네 장발족 총각들이 슬쩍 끼어들어 처녀행세로 재미를 봤다는 것. -1972년 8월 20일자 ▒▒▒▒▒▒▒▒▒▒▒▒▒▒▒▒▒▒▒▒ 여관 침대밑에 몰래 숨어 현장보고 돈 훔치다 결국… 남녀가 재미보는 현장을 훔쳐보고 물건까지 슬쩍하려던 20대 얌체가 철창신세. 서울 청량리경찰서는 6월23일 동대문구의 한 K여관 객실에 숨어들어가 침대 밑에 숨었다가 투숙한 손님의 물건을 훔쳐 나오려던 서모(23·인천)씨를 야간 주거침입절도 혐의로 구속했다. 서씨는 지난달 23일 오후 10시 30분쯤 K여관 바로 옆에 있던 여인숙에 1차로 투숙한 뒤 팬티와 러닝셔츠만 입은 채 K여관의 비상구를 통해 3층으로 올라가 304호 침대밑에 숨어 있었다. 이방에 투숙한 최모(49)·김모(23·여)씨가 잠이 들자 다음날 새벽 3시 30분쯤 최씨가 벗어놓은 옷에서 현금 10만원을 훔쳐 달아나려다 인기척에 놀라 깨어난 최씨에 의해 붙잡힌 것. 서씨는 경찰에서 “술에 취해 우리 집인 줄 알고 그랬다”고 엉뚱한 변명. 그러나 서씨가 투숙했던 여인숙 주인은 서씨가 한달전부터 새벽 3~4시쯤에 나타나 여관쪽 방을 기웃거렸다고 진술. 한편 최씨의 고함소리에 잠에서 어난 김양은 너무나 놀란 나머지 5분 정도 기절을 했다가 최씨의 인공호흡으로 겨우 깨어났다고. -1985년 7월7일자 ▒▒▒▒▒▒▒▒▒▒▒▒▒▒▒▒▒▒▒▒ 아수라장 된 2중 결혼식의 현장 내연의 처가 있는 청년이 묘령의 아가씨와 결혼식을 올리려다 정체가 발각돼 예식장이 아수라장이 되었는데. 부산의 한 회사 경리과장인 김모(29)씨는 동거중인 홍모(26) 여인에게 “회사에 출근한다”고 속이고 집을 나와 엉뚱하게 예식장으로 출근(?), 결혼식을 올리려다 이런 사고를 빚은 것. 자기 남편이 결혼식을 올린다는 기별을 듣고 허둥지둥 달려온 임신 9개월의 홍 여인은 웨딩마치를 듣자 그만 넋을 잃었고 새 신부 아버지 송모씨는 3층 계단에서 2층 계단으로 떨어져 실신. 가끔 일어나는 중혼극(重婚劇)이긴 하지만 정말 왜들 이러실까? -1969년 11월 23일자 ▒▒▒▒▒▒▒▒▒▒▒▒▒▒▒▒▒▒▒▒ 재혼 위해 산 처를 죽었다며 사망신고한 패륜男 딴 여자와 살기 위해 멀쩡히 살아 있는 본처를 사망신고까지 한 패륜 남편이 꼬리를 잡혔다. 지난 20일 공문서 부실기재 혐의로 경찰에 구속된 A(38·전남 함평)씨는 10년 전 결혼해 엄연히 살아있고 3형제까지 둔 본처 B(35·무안)씨를 1969년 2월 15일자로 사망신고. 그리곤 C(27·목포) 여인과 재혼해 12월 4일자로 다시 혼인신고 한 것이 본처에게 들켜 쇠고랑을 차게 됐다. -1970년 3월 8일자 정리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서울신문은 1960~70년대 ‘선데이서울’에 실렸던 다양한 기사들을 새로운 형태로 묶고 가공해 연재합니다. 일부는 원문 그대로, 일부는 원문을 가공해 게재합니다. ‘베이비붐’ 세대들이 어린이·청소년기를 보내던 시절, 당시의 우리 사회 모습을 현재와 비교해 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 될 것입니다. 원문의 표현과 문체를 살리는 것을 원칙으로 하지만 일부는 오늘날에 맞게 수정합니다. 서울신문이 발간했던 ‘선데이서울’은 1968년 창간돼 1991년 종간되기까지 23년 동안 시대를 대표했던 대중오락 주간지입니다. <편집자註>
  • 위키리 별세 “전국노래자랑 초대 MC” 얼마나 유명했나

    위키리 별세 “전국노래자랑 초대 MC” 얼마나 유명했나

    위키리 별세 위키리 별세 “전국노래자랑 초대 MC” 얼마나 유명했길래 1960년대 가수이자 방송진행자로도 활약한 위키리(본명 이한필)가 12일 미국에서 별세했다. 79세. 고인의 장남은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던 아버지가 오늘 오후 5~6시쯤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셨다”며 “3형제가 모두 한국에 살고 있어 미국으로 가 장례 절차를 논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서라벌예술대학 연극영화과를 졸업한 위키리는 1960년 미8군 쇼단체인 ‘메이크 인 후피 쇼’(Make in Whoopy Show)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1963년 최희준, 유주용, 박형준과 함께 남성 사중창단 ‘포클로버스’(네잎클로버)를 결성했다. 포클로버스는 당시 보기 드문 학사 출신들로 구성됐으며 각자 솔로로 활동하며 때에 따라 팀으로 함께 무대에 서는 ‘따로 또 같이’ 팀으로 1964년 1집, 1966년 2집을 발표했다. 포클로버스 1집 타이틀곡으로 수록된 위키리의 데뷔곡 ‘저녁 한때의 목장 풍경’이 당시 크게 히트했다. 이어 ‘종이배’, ‘눈물을 감추고’ 등을 부른 위키리는 1970년대 중반 국어순화운동 당시 본명인 이한필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방송에서 진행자로도 크게 활약했다. 1960년대 중반부터는 동아방송의 라디오 교통정보 프로그램 ‘달려라 위키리’의 DJ를 맡았고 1976년부터 TBC ‘쇼쇼쇼’를 진행했다. 또 송해(88)에 앞서 1980년 11월부터 5년간 ‘전국노래자랑’의 초대 MC도 지냈다. 대중음악평론가 박성서 씨는 “위키리 씨는 ‘한국의 바비 달린’으로 불리며 미8군 쇼에서 활동을 시작했고 당시 경기고와 서라벌예술대학을 나온 ‘인텔리’ 가수였다”며 “1960년대 우리 대중음악의 흐름을 바꿔놓으며 시대를 리드한 인물로 MC로도 활동한 엔터테이너”라고 평했다. 영화에도 출연하며 다방면에서 활동한 고인은 1992년 미국으로 건너 가 교포방송 KATV에서 ‘굿 이브닝 코리안’을 진행하는 등 미국에서 거주해왔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위키리, 미국서 지병으로 별세 ‘한국서 어떤 활동했나 보니..’

    위키리, 미국서 지병으로 별세 ‘한국서 어떤 활동했나 보니..’

    위키리(본명 이한필)가 12일 향년 79세로 미국 LA에서 별세했다. 고인의 장남은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던 아버지가 오늘 오후 5~6시쯤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셨다”며 “3형제가 모두 한국에 살고 있어 미국으로 가 장례 절차를 논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위키리는 1960년대에 활동한 가수로 1960년 미8군 쇼단체인 ‘메이크 인 후피 쇼’(Make in Whoopy Show)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1963년 최희준, 유주용, 박형준과 함께 포클로버스를 결성했고 ‘저녁 한때의 목장 풍경’, ‘종이배’, ‘눈물을 감추고 등을 연이어 성공해 많은 인기를 얻었다. 사진=서울신문DB 뉴스팀 seoulen@seoul.co.kr
  • 위키리 별세, ‘전국노래자랑 초대MC’ 한국의 바비달린 그는 누구? 과거 히트곡 보니

    위키리 별세, ‘전국노래자랑 초대MC’ 한국의 바비달린 그는 누구? 과거 히트곡 보니

    위키리 별세, ‘전국노래자랑 초대MC’ 한국의 바비달린 그는 누구? 과거 히트곡 보니 ‘위키리 별세’ 전국노래자랑 초대 MC 위키리(본명 이한필)가 12일 향년 79세로 미국 LA에서 별세했다. 위키리는 지난 12일(현지시간) 미국 LA에서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고인은 평소 지병을 앓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고인의 장남은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던 아버지가 오늘 오후 5~6시쯤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셨다”며 “3형제가 모두 한국에 살고 있어 미국으로 가 장례 절차를 논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위키리는 1960년대에 활동한 가수로 1960년 미8군 쇼단체인 ‘메이크 인 후피 쇼’(Make in Whoopy Show)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1963년 최희준, 유주용, 박형준과 함께 포클로버스를 결성했고 ‘저녁 한때의 목장 풍경’, ‘종이배’, ‘눈물을 감추고 등을 연이어 성공해 많은 인기를 얻었다. 위키리는 방송에서 진행자로도 크게 활약했다. 위키리는 1960년대 중반부터는 동아방송의 라디오 교통정보 프로그램 ‘달려라 위키리’,1976년부터 TBC ‘쇼쇼쇼’를’쇼쇼쇼’를 진행했다. 특히 1980년 11월부터 약 5년간 KBS 2TV ‘전국노래자랑’의 초대 MC로 송해와 호흡을 맞췄다. 대중음악평론가 박성서 씨는 “위키리 씨는 ‘한국의 바비 달린’으로 불리며 미8군 쇼에서 활동을 시작했고 당시 경기고와 서라벌예술대학을 나온 ‘인텔리’ 가수였다”며 “1960년대 우리 대중음악의 흐름을 바꿔놓으며 시대를 리드한 인물로 MC로도 활동한 엔터테이너”라고 평했다. 사진=서울신문DB(위키리 별세) 연예팀 seoulen@seoul.co.kr
  • 위키리 별세, 송해 앞서 전국노래자랑 초대 MC ‘향년 79세 지병으로..’

    위키리 별세, 송해 앞서 전국노래자랑 초대 MC ‘향년 79세 지병으로..’

    ‘위키리 별세’ 가수 겸 방송진행자 위키리(본명 이한필)가 12일 미국에서 향년 79세의 나이에 지병으로 별세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한 매체의 보도에 따르면 위키리의 장남은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던 아버지가 오늘 오후 5~6시께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셨다”며 “3형제가 모두 한국에 살고 있어 미국으로 가 장례 절차를 논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고 보도했다. 서라벌예술대학 연극영화과를 졸업한 위키리는 1960년 미8군 쇼단체인 ‘메이크 인 후피 쇼’(Make in Whoopy Show)에서 활동을 시작해 1963년 최희준, 유주용, 박형준과 함께 남성 사중창단 ‘포클로버스’(네잎클로버)를 결성했다. 포클로버스 1집 타이틀곡으로 수록된 데뷔곡 ‘저녁 한때의 목장 풍경’등의 히트곡을 남기며 스타덤에 올른 위키리는 ‘종이배’, ‘눈물을 감추고’ 등을 부르며 1970년대 중반 국어순화운동 당시 본명인 이한필로 활동하기도 했다. 위키리는 방송 진행자로도 활약했다. 1960년대 중반부터는 동아방송의 라디오 교통정보 프로그램 ‘달려라 위키리’의 DJ를 맡았고, 1976년부터 TBC ‘쇼쇼쇼’를 진행했다. 특히 송해에 앞서 1980년 11월부터 5년간 ‘전국노래자랑’의 초대 MC를 지냈다. 영화에도 출연하며 다방면에서 활동한 위키리는 1992년 미국으로 건너가 교포방송 KATV에서 ‘굿 이브닝 코리안’을 진행하는 등 미국에서 거주해왔다. 위키리 별세 소식에 네티즌은 “위키리 별세..안타깝다”, “위키리 별세..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위키리 별세..계속 미국에 계셨구나”, “위키리 별세..명복을 빕니다”, “위키리 별세..어떤 병이길래”등 반응을 보였다. 사진 = 서울신문DB (위키리 별세) 연예팀 chkim@seoul.co.kr
  • 위키리 별세, 미국서 지병으로.. ‘안타까워’

    위키리 별세, 미국서 지병으로.. ‘안타까워’

    위키리(본명 이한필)가 12일 향년 79세로 미국 LA에서 별세했다. 고인의 장남은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던 아버지가 오늘 오후 5~6시쯤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셨다”며 “3형제가 모두 한국에 살고 있어 미국으로 가 장례 절차를 논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위키리는 1960년대에 활동한 가수로 1960년 미8군 쇼단체인 ‘메이크 인 후피 쇼’(Make in Whoopy Show)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1963년 최희준, 유주용, 박형준과 함께 포클로버스를 결성했고 ‘저녁 한때의 목장 풍경’, ‘종이배’, ‘눈물을 감추고 등을 연이어 성공해 많은 인기를 얻었다. 사진=서울신문DB 뉴스팀 seoulen@seoul.co.kr
  • 위키리 별세 “전국노래자랑 초대 MC” 과거 인기 ‘대박’

    위키리 별세 “전국노래자랑 초대 MC” 과거 인기 ‘대박’

    위키리 별세 위키리 별세 “전국노래자랑 초대 MC” 과거 인기 ‘대박’ 1960년대 가수이자 방송진행자로도 활약한 위키리(본명 이한필)가 12일 미국에서 별세했다. 79세. 고인의 장남은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던 아버지가 오늘 오후 5~6시쯤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셨다”며 “3형제가 모두 한국에 살고 있어 미국으로 가 장례 절차를 논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서라벌예술대학 연극영화과를 졸업한 위키리는 1960년 미8군 쇼단체인 ‘메이크 인 후피 쇼’(Make in Whoopy Show)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1963년 최희준, 유주용, 박형준과 함께 남성 사중창단 ‘포클로버스’(네잎클로버)를 결성했다. 포클로버스는 당시 보기 드문 학사 출신들로 구성됐으며 각자 솔로로 활동하며 때에 따라 팀으로 함께 무대에 서는 ‘따로 또 같이’ 팀으로 1964년 1집, 1966년 2집을 발표했다. 포클로버스 1집 타이틀곡으로 수록된 위키리의 데뷔곡 ‘저녁 한때의 목장 풍경’이 당시 크게 히트했다. 이어 ‘종이배’, ‘눈물을 감추고’ 등을 부른 위키리는 1970년대 중반 국어순화운동 당시 본명인 이한필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방송에서 진행자로도 크게 활약했다. 1960년대 중반부터는 동아방송의 라디오 교통정보 프로그램 ‘달려라 위키리’의 DJ를 맡았고 1976년부터 TBC ‘쇼쇼쇼’를 진행했다. 또 송해(88)에 앞서 1980년 11월부터 5년간 ‘전국노래자랑’의 초대 MC도 지냈다. 대중음악평론가 박성서 씨는 “위키리 씨는 ‘한국의 바비 달린’으로 불리며 미8군 쇼에서 활동을 시작했고 당시 경기고와 서라벌예술대학을 나온 ‘인텔리’ 가수였다”며 “1960년대 우리 대중음악의 흐름을 바꿔놓으며 시대를 리드한 인물로 MC로도 활동한 엔터테이너”라고 평했다. 영화에도 출연하며 다방면에서 활동한 고인은 1992년 미국으로 건너 가 교포방송 KATV에서 ‘굿 이브닝 코리안’을 진행하는 등 미국에서 거주해왔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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