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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러,6·25관련 문서목록 전달/외무부 인수

    ◎김일성­스탈린 외교전문 포함 수백건/사전 남침준비·중개입경위 밝혀질듯/“김 대통령 방러때 문서사본 제공” 러시아정부는 6·25한국전쟁 발발 43주년을 맞아 당시 소련의 스탈린과 북한 김일성 사이에 주고받은 전문을 비롯해 러시아 정부가 보관하고 있는 한국전쟁 관련문서의 목록을 우리 정부에 전달해왔다고 홍순영외무부차관이 24일 발표했다. 이 목록에 들어있는 문서들은 북한이 전쟁발발 전해인 49년1월부터 전쟁준비를 위해 구소련과 주고받은 전문을 포함,중공군이 참전한 50년 10월까지 소련의 군투입및 무기제공 내용을 밝혀주는 것들이라고 홍차관은 말했다. 이들 문서 내용 자체가 공개되면 한국전쟁이 한국군과 미군의 북침에 의한 것이라는 북한측의 주장에 결정적인 쐐기를 박고 북한측이 일찍부터 남침준비를 해왔다는 사실과 아직 완전히 규명되지 않은 중공군의 개입경위가 밝혀지는 등 한국전쟁의 진상이 드러날 것으로 기대된다. 40페이지 분량의 이 목록은 한승주외무장관이 유럽을 순방하면서 러시아를 방문중이던지난 7일 옐친러시아대통령을 예방했을 때 옐친대통령이 직접 한장관에게 건네준 것이다. 옐친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러시아정부는 한국전쟁 관련 문서의 발굴과 수집및 정리작업을 하고 있으나 워낙 방대한 분량이어서 우선 목록을 전달한다』면서 『목록외의 문서 사본은 김영삼대통령이 러시아를 방문하면 직접 전하겠다』고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이 문서목록은 러시아정부 문서보관소와 국방부,구KGB등에 산재해 있는 한국전쟁 관련 문서 수백건의 제목과 이에대한 간단한 요약설명이 첨부된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는 이 문서목록은 물론 앞으로 러시아측으로부터 전달받을 문서사본도 일단 국사편찬위에 넘겨준 뒤 일반에 공개할 예정이다. 정부는 한국전쟁의 진상규명 차원에서 중국 정부측에도 보관중인 관련 문서 사본의 공개와 인도를 요청할 방침이다.
  • 구소의 한국전개입 비사:상

    ◎“소 2개비행사단 50년11월 첫 참전”/극비특명… “계급장없이 중공군 위장”/당시 비행단 정보장교 올로프전사특별기고/중국 안동에 본부… 총병력 2만6천명 투입/51년3월 증파… 미기와 북 상공서 공중전/스탈린,해군출전도 계획… 미 자극 우려 포기 ▷남침 초기◁ 러시아가 개방·개혁정책추진으로 철의 장막을 걷고 한국과의 교류를 확대함에 따라 한국전쟁관련 비밀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6·25발발 43주년을 맞아 당시 소련군 정보장교(대위)로 9개월동안 소련의 제64비행단에 근무했으며 현재 러시아군사역사연구소 선임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는 세묘노비치 올로프박사(69)의 증언을 3횡에 걸쳐 게재, 구소련의 한국전 참전비밀을 파헤쳐본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이듬해인 1951년 3월 초순 어느 날 모스크바 군사영어학교에 근무하던 나는 새 임지로 전출명령을 받았다.그렇게 해서 그해 10월까지 8개월여동안 한국전에 참전하게 됐다.근무지는 한국전 지원임무를 맡은 소련공군 제64비행단이 주둔하던 중국의 안동. 정보장교로 참모본부에 근무한 덕에 나는 당시 비행단의 병력규모,위치등을 비교적 소상히 알 수 있었다.우선 참모본부 아래 미그 15기 3개사단이 있었다.제1,2사단은 1950년 11월 최초로 안동에 자리를 잡았고 제3사단은 이듬해 3월 배치됐다.그외 구경 85㎜,37㎜로 무장한 대공포 2개사단이 별도로 있었다. ○미그­15 3개사단 병력수는 참전초기부터 종전을 맞아 철수할 때까지 2만6천명선이 계속 유지됐다.이는 조종사 3백명이 포함된 숫자이다.보유무기로는 주력기종인 미그­15기가 1백80∼2백대,야간전투기인 LA­11(재래기종)25∼30대,대공포구경85㎜가 1백40∼1백60문,37㎜포가 1백30∼1백50문이 있었다. 당시 소련당국은 이 전쟁에 불개입을 선언한 상태였기 때문에 우리의 존재는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히 비밀로 부쳐졌다.그래서 여러가지 비상수단이 취해졌다.모든 병력이 기장,계급장이 없는 중국군복을 입었고 조종사들은 비행중 무선교신시 절대 러시아어를 쓰지 못하게 했다.물론 이런 지시들은 애당초 지켜질 수 없는 것들이었다.조종사들이 초기에 조종간옆에다 간단한 교신어를 한국어나 중국어로 음을 적어놓고 발음만 흉내내기도 했으나 작전시 이로 인한 혼란이 커서 대부분 러시아어로 교신을 했던게 사실이다.물론 전투기들도 모두 중국·북한표지를 했다. ○중국·북한기 표지 보다 중요한 점은 혹시 격추돼 참전사실이 탄로날 것에 대비해 작전지역이 철저히 제한됐다는 사실이다. 이 원칙은 종전때까지 지켜졌다.동으로 동해,남으로는 전선에서 1백80㎞ 떨어진 39도선이 우리의 작전한계선이었다.즉 북한영토내에서는 압록강을 끼고 청진과 신안주사이가 우리의 작전지역이었다.미군측은 이 지역을 「미그앨리(소로)」라고 불렀다. 전쟁개시 2개월 전인 1950년 4월 김일성이 당시 외교부장 박헌영과 함께 극비에 모스크바로 스탈린을 찾아가 전쟁지원을 요청한 이래 스탈린은 참전에 끝까지 적극적인 태도롤 보이지 않았다. 미국과의 직접무력대결을 원치않았기 때문이다.마지막에 스탈린으로 하여금 결단을 내리리게 만든 것은 모택동의 참전결정이었다.김일성은 전쟁준비를 착실히 진행시켜왔고 특히 중국내전에 참여해 혁명을 승리로 이끄는데 기여한 1만4천명의 북한출신 공산주의자들이 50년초 귀국,정규군에 합세한 것을 계기로 북한군의 사기는 상당히 드높았다. 이런 여러 고무적인 정황들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은 마지막 순간까지 미국의 참전을 두려워했다.개전 이튿날인 6월26일 대련항을 떠난 소련군함들이 참전의혹을 받지 않도록 즉시 귀항명령을 받았고 이후 전쟁기간 내내 소해군은 한국전에 개입치 않았다. ○중 개입 영향받아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이 감행됐을 때도 스탈린은 크게 낙담하면서도 무력개입결정을 내리지 않았다.당시 정치국원으로서 모스크바 시 당제1서기였던 흐루시초프가 무력개입을 의미하는 「즉각적인 방어정책수립」을 강력히 권유했으나 스탈린은 이도 묵살했다.스탈린의 마음을 돌리게 한 것은 결국 중국군의 개입이었다. 모택동은 중국의용군의 한국파병을 결정하며 스탈린에게 병력이송과 물자보급을 위해 압록강 교량6곳의 안전이 긴요하고 이를 위해 소공군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점을 누차강조했다. 1950년 11월 말 소공군 2개 전투비행사단이 실전에 투입되자 미군의 B­29기들이 압록강 철교들에 엄청난 폭격을 가했다.주 목표는 안동과 신의주를 잇는 교량 2곳이었다.하나는 복선철교였고 또 하나는 자동차·철도 겸용 다리였다. 당시 북한은 임시수도를 신의주에 두고 있었고 김일성도 그곳에 머물고 있었다. 중국군·북한군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이 B­29기 폭격이었다.그래서 그 해 11월 12월 사이 미그­15기의 최대공격목표도 이 B­29였다.안동에서는 40∼50대의 미그­15기가 당시 압록강을 넘어 출격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1950년말 소련군지도부는 제공권을 되찾기 위해 64비행단의 보강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고 그 결과 이듬해 3월 소련공군의 영웅 이반 코제두프 대령이 이끄는 새 비행사단이 안동에 도착했다.이렇게 해서 그해 봄 북한상공에서는 보강된 소군기와 미군기 사이에 전례없이 치열한 공중전이 전개됐다. ▷필자 약력◁ ▲1924년생 ▲러시아군사역사연구소 선임연구원(역사학박사) ▲소공군 64비행단 정보장교로 한국전참전 예비역대령 ▲저서 「절대무기의 개랍」(1988)「제3제국과 제3의 법칙」(1993)
  • 독립기념관·엑스포 방문/모범용사 초대

    【대전=이천열기자】 서울신문사가 6·25동란 43주년을 맞아 30번째로 초대한 국군모범용사 68명과 배우자 등 1백34명 일행은 23일 상오 천안 독립기념관과 대전 엑스포 현장을 차례로 관람한데 이어 하오에는 대전시청을 방문,염홍철시장이 베푼 만찬에 참석했다. 염시장은 이 자리에서 『대전시는 군 본부가 모두 이전해 와 군의 중핵도시로 탈바꿈했다』며 『이번 대전방문이 민·관·군의 유대를 더욱 굳게 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며 이들의 노고를 위로했다. 이날 만찬에는 맹귀재 32사단장,조창현 607기무부대장,문희흔 505여단장 등이 참석했다. 모범용사 일행은 산업시찰 3일째인 24일 광주시와 전남도청을 방문하고 민속박물관을 돌아볼 예정이다.
  • 모범용사,국립묘지 참배/서울신문사 초청/5박6일 산업시찰

    서울신문사가 6·25동란 43주년을 맞아 30번째로 초대한 국군모범용사 68명(여군 2명 포함)과 배우자등 1백34명이 21일 상오9시30분 국립묘지참배를 시작으로 5박6일간의 초대일정에 나섰다. 육군 46명,해군 11명,공군 11명등 모범용사들은 이날 상오 권령해국방장관에게 신고를 하고 서울신문사를 방문,이한수사장이 베푼 오찬에 참석했다. 모범용사들은 하오 이만섭국회의장,이원종서울시장을 예방한뒤 이병대국가보훈처장이 초대한 만찬에 참석했다. 22일에는 김 덕국가안전기획부장을 예방하고 올림픽주경기장 견학을 마친뒤 청와대를 예방한다. 서울신문사는 매년 6·25를 맞아 전군에서 선발된 모범용사들을 초대,산업시찰 등 위로행사를 벌이고 있다. 모범용사들의 주요일정은 다음과 같다. ◇23일=▲독립기념관 관람 ▲대전직할시장 예방 ◇24일=▲광주직할시장 예방 ▲민속박물관 견학 ▲전남도지사 예방 ◇25일=▲대구직할시장 예방 ▲포항제철 견학 ◇26일=▲경주시장 예방 ▲고적견학및 관광
  • 고난을 체험하는 사랑의 실천/『6·25 음식먹기 운동』 벌인다

    ◎개신교 각 선교단테 20개 도시서… 15만 경찰 동참/꽁보리주먹밥·수제비 등 1천원씩 판매 개신교 각선교단체들이 오는 25일 6·25 43주년을 앞두고 고난의 체험을 통한 절제와 사랑의 실천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한다. 한사랑선교회(회장 김한식목사)가 주관하는 「6·25음식먹기운동」은 그 대표적인 것.네번째를 맞는 올해 행사는 21일 서울대 연세대 이화여대등 시내 3개대학에 「6·25음식판매대」를 설치,판매함으로써 본격적인 행사에 돌입한다. 오는 26일까지 계속될 이 행사는 전국 20여개 도시에서 일제히 거행된다.올해는 특히 15만 전국경찰이 동참키로 하고 노동부 전체 산하기관과 대한요식업중앙협의회등이 참여한다.또 전국교회가 20일 주일집회 후에 동참하며 각 직장의 구내식당,음식점,가정도 상당수가 참여,사상 최대규모가 될것으로 보인다. 6·25음식의 종류는 꽁보리주먹밥 수제비 개떡 깻묵 호박죽등이며 1인분에 1천원을 받는다.서울에서는 21∼22일 대학가 판매에 이어 23일부터 26일까지 서울역광장과 잠실롯데에서 대대적으로 펼쳐진다. 한사랑선교회측은 이 운동으로 모아진 수익금을 일차적으로는 그 단체나 교회가 자체적으로 가까이 있는 6·25참전용사나 불우이웃에 전달하는 것으로 하고 있다.그리고 자체 판매대운영에서 모아진 수익금과 운동본부로 전달돼온 수익금은 중앙차원에서 같은 용도로 쓸 계획이다.이에앞서 운동본부측은 17일 올림픽공원 문화회관에서 이 운동의 참가희망자들을 초청,6·25음식 시식회및 설명회를 갖기도 했다(문의 588­1733). 한편 한국이웃사랑회(회장 정해원)는 25∼26일 이틀간 「지구촌 기근퇴치를 위한 전국민 사랑의 굶기운동」을 벌인다.이 운동은 이날을 기해 전국민이 한끼이상씩 굶어 마련된 금식기금으로 우리주변의 결식아동과 아시아 아프리카등지의 기아문제 해결에 동참한다는 취지에서 전개된다(문의 704­9923). 한국이웃사랑회측은 또 이 운동의 일환으로 기독교방송과 함께 26일 하오7시30분 서울 등촌동 88체육관에서 사랑의 굶기운동 공개행사 선교뮤지컬 「지금 우리는」을 공연한다. 한사랑선교회 김한식목사는 이번 6·25고난체험행사에 전국민의 참여를 당부했다.『오늘날 우리의 시련은 감사를 잃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6·25당시 상황을 간접체험해보고 감사를 회복하자는 것이 이 운동의 취지입니다.자녀들에게도 훌륭한 교훈이 될것입니다』
  • 러시아 국민의 의식개혁/모스크바 이기동(특파원코너)

    ◎“사회주이 청산” 아직은 요원 러시아국민들은 지난 12일 「독립기념일」을 맞아 느긋하게 3일간 연휴를 즐겼다.공휴일인 12일이 원래 쉬는 토요일이라 관례에 따라 일요일인 14일을 임시 공휴일로 지정해 연휴를 즐긴 것이다. 독립기념일은 다름아닌 소련시절이던 지난 90년 이날 당시 러실아의회에서 러시아공화국의 주권선언을 한 날을 기념한 것이다.그리고 이날은 공교롭게도 1년 뒤인 91년 같은 날 옐친대통령이 직접선거를 통해 러시아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선출된 날이기도 하다. 옐친대통령은 12일 크렘린에서 독립3주년을 맞는 기자회견을 갖고 『러시아 역사상 지난 3년은 아마도 그 이전의 수십년과도 맞먹는 기간일 것』이라고 회고했다. 특히 그는 고르바초프대통령시절 공산당과 사회주의 계획경제체제를 개혁하려던 시도가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었던 체제적 한계를 재삼 지적했다.그러한 「한계개혁」이 결과적으로 사태를 더 악화시켰고 『공산주의체제를 아무리 갈고 닦아 빛을 내보려고 해봐야 헛된 것임을 우리 국민들도 깨닫게 됐다』고술회했다. 지난 3년간 진행된 구체제의 청산작업이 역사적인 의미를 갖는 것임은 누구도 부인치 않을 것이다.하지만 진짜 어려움은 눈에 보이는 제도개혁뿐만 아니라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반드시 청산하고 새로 만들어야할 것,바로 「의시개혁」에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자본주의식 삶의 방식이 좋고 편리하다고 느끼면서도 「왜 지금 내가 남보다 더 열심히 일할 필요가 있는지」는 아직 이해하지 못한다.직장에서는 왜 근무시간을 지켜야 하고,고객에게는 왜 친절해야 하는지를 이해하려들지 않는다.이러한 소위 나태한 사회주의식 평등주의 의식이 청산되려면 『앞으로 1세기는 더 걸릴 것』이라는 한 서방전문가의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니라는게 솔직한 생각이다. 갑자기 주어진 자유탓인지 자율이라든지 공공질서 등에 대한 인식도 너무 부족하다.운전할 때 교통법규를 지키고,거리에 휴지·담배꽁초를 버리지 않는게 결국은 자기자신에게 유익한 일이라는 점을 좀체 이해하지 못한다. 독립3주년을 맞아 비록 생소하겠지만 모스크바에서도 소위 이러한 「사회주의식」 의식을 청산하기 위한 시민운동 한두가지쯤 시작됐으면 하는 생각을 해본다.
  • 백범 마지막 공석사진 발굴… 임정청사에 기증(조약돌)

    ○…건국대학교는 백범 김구선생이 공식석상에서 마지막으로 참석한 모습을 담은 사진을 발굴,이를 대형표구로 제작해 오는 5일 중국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청사에 기증키로했다(사진). 이 사진은 김구 선생이 작고하기 43일전인 지난 49년 5월15일 건국대학교 전신조선정치학관 개관 3주년을 맞아 서울 종로구 낙원동 조선정치학관 강당에서 김규식박사,유석창 학관설립자,오하영초대학장 등 독립운동가와 학교교직원들 앞에서 기념축사를 하고 있는 장면이다.
  • 6월은 호국 보훈의 달/17만명에 유공자증서 수여

    6월은 나라와 겨레를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국선열과 전몰호국용사들의 애국애족정신을 기리는 「호국보훈의 달」. 정부는 문민정부 출범후 처음 맞는 이번 호국보훈의 달 행사를 민족정기 선양과 국민의 나라사랑운동으로 승화 발전시킨다는 방침에 따라 대통령명의의 국가유공자증서수여,모범국가유공자포상,보훈병원 입원환자및 무의탁 노령유족위문,보훈가족돕기운동,전국 상이군경체육대회 등 다채로운 행사를 벌인다. 국가유공자 및 유족들의 명예와 긍지를 높여주기 위해 오는 4일 수여되는 대통령명의의 유공자 증서를 받을 사람은 모두 17만4천8백여명이다. 김영삼대통령은 이날 상오 가족 가운데 3인이상 전사한 유족 15명,상이군경 15명,미망인 15명,단체장 8명등 53명을 청와대로 초청,유공자증서를 직접 전달하고 위로할 예정이다. 2일에는 전국상이군경체육대회가 보훈병원에서 열리며 6일 상오10시에는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와 대전국립묘지,전국 각지역 현충탑 등지에서 제38회 현충일 추념식이 거행되고 25일에는 6·25 43주년 기념행사가 각 시도재향군인회 주최로 개최된다.
  • 망월동과 연희동(김호준/정치평론)

    문민시대에 들어서 처음 맞는 광주민중항쟁의 날,망월동과 연희동의 모습은 정말 대조적이었다.한때 「저주의 땅」이란 원과 한의 소리가 끊이지 않았던 광주는 「민주성지」로 우뚝 솟았고,대통령을 두명이나 배출한 「현대판 명당」 연희동은 어느새 을씨년스런 「고도」로 변해버린듯 했다. 역사에까지 뻗친 사정과 더불어 5·18광주민주화운동이 문민정부의 뿌리로 자리매김 되면서 일어난 변화였다. 13년전의 그날을 되새기는 광주의 표정은 누가 보기에도 과거와 크게 다른 것이었다.항쟁의 거리 금남로에선 화염병과 최루탄이 사라진 가운데 각종 추모행사가 평화적으로 진행됐고 망월동의 5·18희생자 묘역엔 이제 정권의 눈총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참배객들이 줄을 이었다.과거의 인식으로 볼때 무엇보다도 신기하게 들린 이야기 가운데 하나는 대통령이 보낸 추모화환이 아무런 수난도 당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광주시민들의 고황 깊숙이 맺혔던 한의 응어리가 풀어져 내리면서 화기가 감도는 분위기를 접하는 느낌이다. 그러나 이날 두 전직대통령이살고 있는 연희동은 마치 중세의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두개운 「갑옷」과 방패로 무장한 수천명의 전경이 두 전직대통령의 집에 이르는 골목길들을 가득 메웠고 교통이 차단된 큰 길에선 두 전직대통령을 「체포」하려는 학생시위대와 이를 저지하려는 전경들 사이에 격렬한 몸싸움이 벌어졌다.그동안 두 전직대통령 덕분으로 범죄없는 치안을 향유하던 연희동 주민들은 갑자기 온동네를 뒤덮은 최루탄 가스로 문민시대의 매서운 맛을 보아야 했다. 문민시대는 망월동과 연희동의 위상과 그 명암을 바꿔 놓았다.서울의 대학가에선 5·18광주사건과 관련하여 두 전직대통령이 유혈진압의 책임을 져야한다는 주장이 만만치 않다.만일 그런 대학생들과 법에 따라 두 전직 국가원수에게 안전을 제공해야 할 전경들간의 대치가 연일 계속된다면 연희동은 6공때의 백담사나 다를바 없게 될 것이라고 현지 주민들은 걱정하고 있다고 한다. 현 정부는 광주민주화운동의 연장선 위에 서 있다고 선언한 대통령의 특별담화가 해묵은 광주문제를 종결짓는 결정적 전기가 되었음은 이번의 광주 표정이 잘 보여주었다.물론 대통령이 제시한 해결방안과 광주시민의 요구가 전적으로 일치한 건 아니다.가장 큰 이견은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문제다.이 문제만은 이번에도 해법이 발견되지 않았다. 대통령은 특별담화에서 『진상규명과 관련하여 미흡한 부분은 역사에 맡기자』고 강조했고 책임자 처벌문제에 대해서도 『용서하되 잊지는 말자』고 호소했다.대통령은 자신의 말대로 광주민주화운동의 계기가 되었던 「5·17사태」의 가장 큰 피해자였다.또한 지난 83년 광주민주화운동 3주년을 맞아선 23일간의 단식을 통해 민주화투쟁을 다시 점화시킨 장본인이었다.그러한 대통령이 「유예」와 「관용」을 호소한 것은 이 나라가 「5·18」의 진상규명에 매달려 구시대의 갈등을 재연할 경우 「신한국」건설의 관건인 개혁이 무산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을 것이다. 광주쪽 사람들은 5·18학살의 진상을 밝히지도 않고 가해책임자가 누구인지도 알지 못하면서 누구를 용서하고 누구와 화해하라는 것이냐고 반박한다.일견 대통령의 호소나광주쪽의 주장이나 다같이 충분한 논리적 당위성을 갖고 있는 것 같다.그러나 「5·18」의 진상에 대해선 이미 대부분의 국민들이 「확신」을 갖고 있다는 현실을 고려한다면 두 주장의 설득력엔 큰 차이가 발견된다. 80년의 봄을 엄동설한으로 돌린 5·18 유혈사태가 무엇때문에 일어났고 그 책임자가 누구인지는 처음부터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다만 일방적인 사법처리 때문에 진짜 죄인이 법정에 서지 않았을뿐 정치적·사회적으로는 그 진상이 규명된 상태나 다름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진상규명을 주장하는 대학생들이 「체포조」를 결성하여 연희동으로 돌진한 사례야말로 이를 웅변하는 역설적인 반증이 아니겠는가. 미국정부의 견해를 빌릴 필요도 없이 「5·18」은 이른바 신군부의 강압적인 정권장악과정에서 빚어진 유혈사태였다. 당시의 군통수권자는 최규하대통령이었지 보안사령관과 수경사령관은 책임이 없다는 주장이 당초부터 설득력을 발휘하지 못했던 것도 실은 그 진상을 국민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피를 피로갚지 않고 용서와 화해를 보내는 건 인간만의 미덕이다.그러나 진정한 용서와 화해는 과오가 있는자의 참회와 속죄가 전제될때 가능하다. 만일 광주사건의 가해자들이 진심에서 사과를 하고 용서를 구한다면 어떻게 될까.망월동의 원혼들은 자비의 미소를 보내고 연희동은 다시 조용한 주택가로 돌아갈 것이다.그리고 개혁은 더욱 힘차게 굴러갈 것이다.
  • 잊지말되 용서하자/민자,5·18성명

    민자당의 강재섭대변인은 18일 광주민주화운동 13주년을 맞아 성명을 내고 『5·18광주민주화운동 때 피해를 당한 분과 유가족,광주시민 여러분에게 다시 한번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고 말했다. 강대변인은 『김영삼대통령은 오늘의 문민정부가 광주민주화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시각아래 획기적인 명예회복과 역사적인 복권을 선언했다』고 상기시키고 『우리당도 새로운 자세로 지역감정해소,국민화합을 위한 정치에 앞장설 것을 다짐한다』고 밝혔다. 강대변인은 『광주민주화운동 진상규명의 목적이 역사적 사건의 성격규명과 그에 따른 명예회복등의 조치를 하는데 있다』고 볼때 『민주당도 이제 잊지는 말되 과감하게 용서함으로써 새롭게 화해하는 미래지향적 정치의 장에 과감히 나서주기 바란다』고 말하고 『우리당은 과거의 부정적 요소를 씻어내는 대개혁의 추진으로 역사의 정화작업을 계속해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 YS,연금속 「광주비극」 전세계에 폭로/김 대통령과 광주민주화운동

    ◎“계엄령 해제하라”… 외신통해 전파/단식 23일… 민주화대장정 이끌어 김영삼대통령도 광주민주화운동의 계기가 됐던 5·17사태의 피해자이다. 당시 직책은 야당인 신민당총재.공화당의 김종필총재,야권의 경쟁자였던 김대중씨와 함께 「3김경쟁시대」를 열면서 대선고지를 향해 각축을 벌이던 상황이었다.이른바 「서울의 봄」.정국의 앞날이 불투명한 가운데서도 민주화에 대한 국민적 열망이 달아오르던 시기였다. 그러나 5월17일의 비상계엄확대 조치로 정치활동이 금지됐고 정국은 혹독한 한파로 일시에 얼어붙었다. ○3김경쟁 날로 치열 김대중씨는 내란음모죄로,김종필씨는 부정축재자로 몰려 전격 구속됐다.김대통령은 가택연금을 당했다. 그리고 5·18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모든 언론보도는 철저히 통제됐다. 김대통령은 5월20일 상도동 자택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5·17조치를 규탄하고 계엄령의 즉각 해제와 조속한 민주화를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광주의 비극적 실상에 대해서도 소상히 밝혔다.기자회견 내용은 즉각 전세계에타전됐다. 김대통령은 기자회견과 함께 신민당 정무회의를 열고 계엄군이 배치된 국회의사당에서 의원총회를 갖도록 지시했다.그러나 신민당 의원들은 계엄군에 막혀 의사당에 들어가지 못했고 의원회관 식당에서 마지막 의총을 가졌다.80년의 봄은 이렇게 종말을 맞았다. ○언론보도 철저통제 김대통령을 비롯한 당시의 정치권은 이같은 상황을 어느정도 예감했던 것도 사실이다.정체를 알 수 없는 위기감이 팽배했었다.당시 최규하대통령정부가 2원집정부제를 구상하고 있다는 설이 나돌면서 시작된 학원소요는 대규모 가두시위로 이어졌다.노사분규도 곳곳에서 계속됐다. 김대통령은 4월 하순 기자회견에서 혼란의 책임이 정치일정을 투명하게 밝히지 않고 있는 과도정부의 태도에 있다고 비난하고 정치일정과 개헌에 대한 입장을 분명히 밝히라고 촉구했다.학생들과 노조에 대해서는 『폭력적 항거가 또다른 폭력을 불러오는 빌미가 된다』고 지적,자제를 당부했다.김대중씨도 사태를 위기라고 규정하고 기득권세력에 반격할 기회를 주어서는 안된다고 경고했다. ○가두시위로 이어져 김대통령은 5월16일 아침 김대중씨의 동교동 자택을 방문,1시간동안 회담을 갖고 공동발표를 통해 비상계엄 해제,정부가 주도하는 개헌의 포기등을 요구했다.그러나 두사람이 논의한 중요내용은 학생들에게 자제를 당부하자는 것이었다.정국의 급변을 반신반의하면서도 우려할 사태가 일어날 징조에 공감했던 것이다. 김대통령에 대한 연금은 1년만인 81년5월1일 해제됐다.그러나 김대통령이 정치규제에 묶인 인사들과 민주산악회를 결성하는등 정치적 움직임을 보이자 82년5월31일 또다시 가택연금조치가 가해졌다. ○자책과 참회의 뜻 2차연금을 당한지 1년여가 된 5월2일 김대통령은 광주민주화운동 3주년에 즈음한 「국민에게 드리는 글」을 발표하고 무기한의 단식투쟁에 돌입했다.김대통령은 성명서에서 「나의 단식은 5·17에 의하여 민주주의가 부정당함은 물론,민주화를 요구하던 민주시민이 광주에서 희생당하는 사태에까지 이르게 된데 대한 자책과 참회의 뜻을 표시하는 것이며 비극적인 광주사태로 목숨을 잃은 영혼과 거기서희생된 민주시민들과 그 가족이 겪고 있는 고통에 동참하는 기회이며 동시에 반민주적인 권력의 강화와 인권유린및 정치적인 탄압에 대한 항의와 규탄의 표시이자 민주정치의 확립을 위한 최소한의 조치나마 시급히 강구되어야 한다는 정치적 요구의 표시」라고 배경을 밝혔다.김대통령의 단식은 8일째인 5월25일 서울대학병원으로 옮겨진 이후에도 계속돼 23일만인 6월9일 끝났다.
  • 「5·18」 관련행사 모두 허용/전남경찰청

    ◎도청앞 집회 등 최대한 보장 【광주=박성수기자】 전남경찰청은 5·18 13주기를 맞아 오는 17일과 18일 전남도청 앞 집회를 비롯 5·18 관련행사를 모두 허용키로 했다. 송해준 전남경찰청장은 13일 기자회견을 갖고 『5·18 광주민주화운동 13주년은 문민정부 출범후 처음 맞이하는 뜻있는 해』라며 『5·18 관련행사를 과감하게 허용하고 평화적인 집회 및 시위를 최대한 보장하겠다』고 밝혔다. 이에따라 오는 17일 전남도청앞 광장에서 열리는 광주 민중항쟁 희생자 추모 위령제 및 13주기 전야제와 18일 같은 장소에서 열리는 13주기 기념식 및 계승대회,그리고 망월동 묘역에서 열리는 5·18 추모제 등 5·18 관련 행사가 모두 당국의 허용하에 열리게 됐다. 경찰은 비폭력 평화적 집회·시위는 보장하되 중요시설 기습 점거,농성등은 절대 용납하지 않고 사회혼란을 야기할 목적으로 한 폭력시위에 대해서는 강력히 대처하기로 했다. 경찰은 또 이번 5·18 13주기를 전후해 전남경찰청 산하 17개중대외에 외지의 경찰력을 지원받아 폭력시위 발생에 대비키로 했다. 송청장은 『5·18 관련행사로 인한 시민들의 교통법규 위반등 사소한 위반사항은 묵인하겠다』며 『평화적인 집회 및 시위를 보장함으로써 학생,시민과 경찰의 충돌로 인해 피해가 발생하는 것을 방지하겠다』고 말했다.
  • 「5·18 광주민주화운동」 특별담화 전문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저는 오늘 1980년5월,광주 민주화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면서,광주의 아픔을 씻어내고 그 명예를 회복하기 위한 정부의 방안을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저는 먼저 5·18광주 민주화운동때 피해를 당하신 분들과 그 유가족,그리고 광주시민 여러분에게 대통령으로서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돌이켜보면 80년5월의 민주화운동은 당시로서는 엄청난 좌절이었습니다.그러나 문민 민주화를 향해 우리가 걸오온 고난에 찬 역정에서 볼 때,광주 민주화운동은 우뚝한 한 봉우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1980년5월,광주의 유혈은 이 나라 민주주의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그 희생은 바로 이 나라 민주주의를 위한 것이었습니다.80년5월의 민주화운동,그리고 87년6월 항쟁을 통해 마침내 우리는 이 땅에 문민민주정부를 세웠습니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저는 처절했던 5·18광주민주화운동때 야당총재로서,맨처음 군부정권당국에 정면으로 항의했습니다.기자회견을 통하여 그 비극적 사태를 온 세계에 알렸습니다. 바로 그것 때문에저는 3년여에 걸친 가택연금을 당해야 했습니다.광주 민주화운동 3주년이 되는 1983년5월18일,가택연금중에 저는 23일간 생명을 건 단식투쟁을 전개하였습니다. 광주의 유혈을 막지 못한 책임을 통감하면서,잃어버린 민주주의를 되찾기 위해서였습니다.분명히 말하거니와 오늘의 정부는 광주 민주화운동의 연장선 위에 서 있는 민주정부입니다.광주 민주화운동의 복권과 명예회복,그리고 그때의 상처와 아픔을 치유하기 위하여 광주시민 여러분과 같은 입장에 서서 고뇌하는 정부입니다. 또한 문민정부의 출범과 그 개혁은 광주 민주화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실현시켜 나가는 과정입니다.광주문제는 더 이상 앙금으로 남아 있어서는 안됩니다.결코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되거나,정쟁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광주 민주화운동은 정당하게 평가되고 올바르게 역사에 기록되어야 합니다. 광주의 아픔은 치유되고 명예회복도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습니다.그것은 광주의 고통을 온 국민이 함께 나누고,광주의 민주정신을 전국적으로 승화시키는 방향에서,그리고 광주시민이 원하고 국민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방향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첫째,5·18광주 민주화운동의 정신을 기리고 그 명예를 높일 수 있는 사업을 적극 지원할 것입니다.우선 광주시민과 온 국민이 그날을 기념할 수 있도록 광주시에서 기념일을 먼저 제정하기를 희망합니다.망월동 묘역은 민주성지로 가꾸어 나갈 수 있도록 묘역의 확정 등 필요한 지원을 다 할 것입니다. 광주시민과 전남도민의 의사에 따라 현재 광주시내에 있는 전남도청을 전남도 관내로 이전하고,당시 민주화운동의 현장이었던 현 도청위치에 5·18광주 민주화운동 기념공원을 조성하고 기념탑을 세우는 방안을 적극 검토·지원할 것입니다. 현재 상무대 부지의 일부를 광주시에 추가로 무상사용케 함으로써 시민공원을 조성하도록 지원할 것입니다. 둘째,광주 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아직까지 억울한 처지에 있는 분들을 위로하는데 필요한 모든 노력과 지원을 다 할 것입니다.사망자와 행방불명자 및 부상자 중에서 아직까지 법률에 의하여 보상을 받지 못한 분들을 위하여 추가 신고기회를 제공할 것입니다.당시 연행·구금되거나 유죄판결을 받아 사면·복권된 분들에 대하여 전과기록을 완전히 말소하고 지원방안을 강구하는 등,그분들이 이 나라의 민주화에 헌신한 만큼 떳떳하게 그 명예가 회복되도록 할 것입니다. 당시 부상을 당하신 분중,앞으로도 치료가 필요한 분들에 대해서는 계속적인 치료가 가능하도록 지원하겠습니다.5·18광주 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지명수배를 받은 분들에 대해서는 공식적으로 이를 해제하고 해직된 분들에 대한 복직 역시 적극 검토할 것입니다.저는 우리의 법체제 안에서 가능하고,형평의 원칙에 비추어 합리적인 모든 조치를 취해 나갈 것입니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그리고 광주시민 여러분! 저는 광주 민주화운동에 대한 진상규명과 그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주장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그것을 위해 특별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고 듣고 있습니다. 저는 그러한 주장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저 역시 그 문제를 놓고 많은 고뇌를 거듭했습니다.그러나 진상규명은 역사를올바르게 바로잡고 정당한 평가를 받자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결코 암울했던 시절의 치욕을 다시 들추어 내어 갈등을 재연하거나 누구를 벌하자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따라서,지금 이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 국민 모두가 5·18광주 민주화운동의 명예를 높이 세우는 일입니다.진상규명과 관련하여 미흡한 부분이 있다면 이는 훗날의 역사에 맡기는 것이 도리라고 믿습니다.진실은 역사속에서 반드시 밝혀지고 만다는 것이 저의 확신입니다. 이제,미움과 갈등의 고리를 바로 우리 모두의 손으로 끊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오늘에 다시 보복적 한풀이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우리 다같이 잊지는 말되 과감하게 용서함으로써 새롭게 화해하자고 말하고 싶습니다.용서하는 것만큼 큰 용기는 없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모두 13년전의 악몽과 멍에로부터 자요로워집시다.시대가 남겨준 앙금과 한을 훌훌털고 일어나 신한국창조의 저 넓고 큰 길로 나섭시다.광주 민주화운동의 정신은 신한국 창조를 향한 참여와 창의의 열린 정신으로 승화되어야 합니다. 이미 신한국 창조를 향한 변화와 개혁에 광주시민 여러분께서 기꺼이 동참과 지지를 아끼지 않고 계신데 대하여 감사와 함께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저는 광주가 과거에 매달려 있는 도시가 아니라 그 이름처럼 빛을 비추는 도시,우리 조국의 미래를 열어나가는 밝은 도시로 새롭게 태어날 수 있도록 저와 우리 정부가 할 수 있는 모든 지원과 노력을 다 할 것임을 거듭 말씀 드립니다. 저는 국민 여루분께 약속한대로,동서의 화해와 정의로운 국민 내부의 화해를 이룩해 나가는데 혼신의 노력을 다 기울이겠습니다.변화와 개혁을 통해 신한국 창조의 기틀을 다져 놓고야 말겠습니다.제2의 건국을 한다는 각오로 앞장서 뛰겠습니다. 저는 그것을 새롭게 일어선 광주시민 어려분과 함께 해내고 싶습니다.대통령인 저와 함께 힘을 합해 신한국을 창조합시다.그리하여 우리의 후손들로 하여금,대한민국에 태어난 것을 자랑과 긍지로 여길 수 있는 그런,더불어 함께 잘사는 우리의 조국을 물려줍시다.감사합니다.
  • 올 4·19시위 “전무”/경찰청

    경찰청은 21일 4·19혁명 33주년 기념일이었던 지난 19일 과격시위나 반정부시위가 단 한건도 발생하지 않았다고 발표했다. 경찰청은 지난 19일 전국 36개 대학에서 기념집회가 열렸으나 과거에는 이날이 되면 연례행사처럼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곤 했던 서울 수유리의 4·19묘지를 비롯,전국 어느 곳에서도 과격시위나 가두시위가 발생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4·19기념일중 반정부집회시위가 가장 극심했던 지난 90년에는 1백91개 대학에서 7만1천7백여명이 반정부집회에 참가했고 23개지역에서 격렬한 가두시위가 벌어져 1만6천개의 화염병이 투척됐었다.또 90년이후 3년동안 평균 1백50개 대학에서 6만5천여명이 시위에 참가,1만2천개의 화염병을 투척한 것으로 나타났다.
  • 4·19주역들 정치권 실세로 부상/33돌 계기로 본 그때 그사람들

    ◎박관용실장·최형우의원 여 핵심에/4·18결의문 읽은 이기택 야 대표로 정치인들이 학창시절을 회고하면서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경력이 있다.「4·19세대」와 「6·3세대」가 바로 그것이다. 4·19세대는 지난 60년 4·19혁명을 주도했던 57∼60학번사이의 대학생출신으로 지금은 50대중반의 연령층이다.이들보다 3∼4년 늦게 한일국교정상화반대데모에 적극 가담했던 50세전후의 인사들을 「6·3세대」로 불린다. 혁명이나 학생운동을 이끌며 정치지향성을 보였던 이들중 다수가 정계에 진출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4·19」혹은 「6·3세대」중 일부는 3·5공의 군사정부에 참여하기도 했지만 이들이 풍기는 이미지는 「개혁적」인 동시에 「반체제적」이었다. 김영삼정부출범후 이들 세대는 정치의 중심으로 대두하기 시작했다.4·19의 재평가라는 김대통령의 시대인식과 과감한 개혁추진이 그러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과거 야당에 몸담았던 최형우의원,박실용 청와대비서실장(4·19세대)김덕용정무1장관(6·3세대)등이 문민정부시작과 함께 여권의 핵심실세로 자리잡았다.민주당의 이기택대표·이부영최고위원,신정당의 박찬종대표등 야권 차기대권주자들도 4·19나 6·3학생운동을 거쳤다. 19일은 4·19혁명 33주년 기념일이다.그 당시 학생혁명을 주도했던 대학은 고려대였다.고대학생들은 60년4월18일 혁명의 신호탄을 쏘아올린 대대적 시위를 벌였다.이 시위의 선언문작성자가 이재환의원(민자)이며 이세기의원(민자)이 정경대학생위원장으로 선언문을 낭독했다.이기택 민주당대표(당시 상대학생위원장)는 이승만정권을 타도하자는 결의문으로 사자후를 토했다. 신경식 민자당총재비서실장도 당시 영문과 4학년으로 시위에 앞장섰고 김중위·문정수의원등 민자당 중진 상당수가 4·19의 주역이었다.야당의원을 지낸 정재원·강경식씨도 고대출신 4·19세대이다. 서울대에서는 이수정전문화부장관이 선언문을 초안했고 같이 문구를 다듬었던 윤식씨는 유정회의원을 지낸뒤 현재 미하와이에 체류하고 있다.선언문을 복사·배포하는 일을 맡았던 황선필씨는 5공정부에서 청와대대변인,문화방송사장을 역임했다. 민자당의 박범진·강우혁,민주당의 박실의원과 이장춘 전오스트리아대사도 서울대시위를 주도했다.그러나 서울대 출신 4·19세대들중 문리대 학생회장을 지냈던 안병병씨를 비롯,이영일·염길정·정남씨 등은 구민정당의원을 지냈으나 3당통합후 공천탈락·선거패배로 「쓸쓸한」시절을 보내고 있어 눈길을 끈다.특히 학보사기자였다가 나중에 총학생회장까지 오른 이대섭씨는 과기처·정무장관과 3선의원을 역임하다 수서사건에 연루,옥고를 치른 끝에 칩거하고 있다. 연세대의 경우 유영철 당시 학생위원장이 3공에서 4·19유공포장을 거부하고 경제계에 진출,동아건설사장에 재직하고 있다.정계에서는 김봉조의원이 민자당내 민주계 핵심으로 등장하고 있으며 정창화 전국회농림수산위원장도 연대 학생시위의 주도자였다. 새정부출범이후 「정치명문대」로 떠오른 동국대 4·19시위는 민자당의 김영구총무와 최형우의원,야당의원을 지낸 고 장충준씨 등이 이끌었다.최의원은 민자당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강력한 실세로 떠오르다 아들의 부정입학의혹으로 주춤하고 있으며 장전의원은 지난해 여름 교통사고로 타계했다. 전통적 야도 부산에서는 김대통령의 측근중의 측근인 박관용비서실장과 서석재 전의원이 동아대학생으로 4·19시위에 가담했다.서전의원은 동아대 총학생회장이었다. 당시 김정수 부산대 약대학생위원장과 허재홍 수산대학생위원장도 지금은 어엿한 집권여당의 4선·2선의원으로 각각 자리잡고 있다. 경북대 총학생회장으로 4·19이후 수습을 주도했던 인사가 이치호 민자당 당무위원이고 유인학·신기하의원(민주)등은 전남대에서 총학생회·법대학생회를 이끌며 반독재투쟁을 벌였었다.
  • 민주서도 기념식

    민주당은 19일 상오 서울 수유리 「4·19」묘역에서 이기택대표와 최고위원 전원및 소속의원 당직자등 2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4·19민주혁명 33주년 기념식을 가졌다.
  • “4천만 개혁 동참 애국영령에 보답”/황 총리,4·19기념사

    황인성국무총리는 19일 상오 세종문화회관 소강당에서 열린 제33주년 4·19기념식에 참석,기념사를 통해 『새정부 출범 2달이 채 안돼 우리사회에는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고 힘찬 개혁이 추진되고 있다』며 『자성과 참회,눈물과 고통으로 4천만 국민이 개혁의 역사에 동참하는 것만이 애국의 충정으로 조국에 목숨을 바친 영령들의 희생에 보답하는 길』이라고 말했다. 황총리는 『김영삼대통령정부는 국민의 절대적인 지지와 동참으로 참된 민주주의 시대를 열어 그동안 우리사회에 만연돼 있던 부정부패를 척결하고 깨끗하고 건강한 사회를 새로 건설해나가고 있다』고 강조했다.
  • 여야,4·19성명 발표

    여야는 19일 「4·19」 33주년을 맞아 각각 다음과 같이 성명을 발표했다. ▲이순재 민자당부대변인=우리당은 민주제단에 바쳐진 4·19영령들의 고귀한 희생정신이 헛되지않도록 민주화의 큰 물결로 부정과 부조리를 하나하나 씻어내고 정의가 흘러넘치도록 법과 제도를 개혁해나갈 것이다. ▲박지원 민주당대변인=4·19혁명은 당시 위정자들의 법과 제도를 무시한 초법적인 권위에 대한 국민적 저항이었음을 기억할 때 법과 제도의 뒷받침없는 개혁은 언제든지 문민독재,민주독재로 변질될수 있다.
  • 오늘 「4·19」 33돌/문민시대 맞아 정부차원 기념행사

    4·19의거 33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행사가 18일 하오 서울시내 대학과 4·19의거 희생자 묘역에서 열린 것을 시작으로 19일까지 다채롭게 펼쳐진다. 고려대생 2천여명은 이날 하오 교내에서 4·18기념식을 갖고 서울 도봉구 수유리 4·19희생자 묘역까지 평화행진을 벌였으며 「4·19의거희생자유족회」(회장 최정숙)도 하오6시 유족 2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묘역에서 추모제를 열고 희생자들의 넋을 기렸다. 4·19의거일인 19일 상오10시 세종문화회관 소강당에서는 황인성 국무총리 등 3부요인,재경 4·19관련단체 회원,각계 대표등 5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4·19의거기념식이 거행되며 지방에서는 각 시·도지사 주관으로 기념행사가 치러진다. 특히 김영삼대통령이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이날 상오 수유리 4·19묘역을 참배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의 기념행사와는 별도로 「4·19회」(회장 신광성),「4·19의거상이자회」(회장최경렬)등 3개 민간단체는 하오6시 세종문화회관에서 유족·상이자 등을 포함,각계 인사 5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4·19의 밤」행사를 가질 계획이다. 또 4·19세대들을 중심으로 한 모임인 「사월회」(회장 안동일)도 이날 하오7시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소프라노 김향란씨 등 남녀 성악가 80여명이 출연하는 「4월의 대합창」행사를 연다. 한편 예년과 다름없이 성균관대·한양대·외국어대 등 서울시내 15개대 학생 4천여명은 이날 각 학교별로 4·19 의거 기념식을 가진 뒤 수유리 4·19묘역까지 거리행진및 기념마라톤 행사를 벌일 예정이다.
  • “야당 국정참여 확대/김 대통령,퇴임때도 재산공개”

    김영삼대통령은 31일 『이제 여야관계는 국정의 동반자,선의의 경쟁자관계로 바뀌어야 한다』면서 『앞으로 정치자금법·정당법·국회법 등을 고쳐 여야가 동등한 입장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김대통령은 이날 창간 73주년을 맞은 동아일보와의 특별회견에서 이같이 밝히고 『깨끗한 정치풍토가 빠른 시일내에 정착될 수 있도록 여야가 4월 보궐선거가 끝난 뒤 열리게 될 임시국회에서 관련법률의 개정작업을 진지하게 논의해 줄 것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김대통령은 『야당에도 국정참여의 문을 활짝 열어 야당도 정부시책을 보다 폭넓게 접하고 이해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줄 것』이라면서 『나는 기회가 닿는대로 야당지도자를 만나겠다』고 강조했다. 김대통령은 『공직자윤리법 개정작업도 임시국회에서 진지하게 논의해 줄 것을 기대한다』면서 『나는 물러날 때 나의 재산을 다시한번 정직하고 성실하고 양심적으로 공개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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