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3세 남아
    2026-02-23
    검색기록 지우기
  • 서정원
    2026-02-23
    검색기록 지우기
  • 왕궁
    2026-02-23
    검색기록 지우기
  • 1억원
    2026-02-23
    검색기록 지우기
  • 틸러슨
    2026-02-23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1,774
  • 섬진댐 바닥… 호남평야 못자리 못한다/가뭄특별취재반 전북서 제8신

    ◎주변 저수지 합쳐봐야 필요량 19%뿐/관정 파도 짠물 나와… 직파나 가능할지… 전북 김제시 부량면 대평리 신평부락.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지평선이 형성되는 호남평야의 중심지다. 금만평야로도 불리는 이곳 신평부락에서는 전국적인 심각한 가뭄과 관련,지난 15일 긴급한 회의가 열렸다. 「70년만의 묘대수 공급중단.섬진강댐 축조 30년만에 최저수위」가 주요안건이었다. 올해 73세인 허금수씨는 이날 『살아 생전 수리조합에서 못자리물인 묘대수를 줄 수 없다고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하소연했다. 이장 김석운씨(43)는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본격적인 영농철에 접어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하다』고 말했다. 이곳에 물을 공급하는 섬진댐을 둘러보면 농민의 심정에 수긍이 간다. 4만2천4백여㏊에 이르는 호남평야는 섬진댐과 15개 저수지에서 물을 공급받는다.관리는 동진농지개량조합에서 하고 있다. 전체면적의 70%가 넘는 3만2천여㏊에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섬진댐의 17일 현재 저수율은 3천5백16만t.평년저수량 1억9천4백여만t에 비해1억6천여만t이 부족하다. 댐수위도 현재 1백66.91m로 지난 65년 새로 댐이 축조된 이후 최저다.지난해 여름부터는 발전이 중단됐다.이 때문에 옥정호라고 불리는 섬진댐에는 농민의 발길이 잦아지고 있다. 『옥정호물이 말랐다는데 불안해 집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있어야제…』 아들차를 타고 왔다는 김제시 부량면 김정근씨(65)는 『예전 같으면 농한기에 아는 사람을 만나면 막걸리라도 나누었지만 요즘은 그냥 돌아선다』며 뒤숭숭한 마음을 전한다. 9천7백여㏊의 논에 물을 공급하는 저수지의 저수량도 2천5백31만t으로 평년에 비해 1천9백여만t이 모자란다.모두 합해봐야 전체필요량의 19%밖에 없는 것이다. 동진농조가 묘대수를 공급하지 않기로 한 이유다.1925년 수리조합이 생긴 이래 처음이다. 허승만 조합장은 『묘대수 4천9백80만t,모를 옮겨 심는데 필요한 이앙수 8천4백10만t,벼생육에 필요한 보급수 2억2천9백80만t 등 모두 3억6천여만t의 물이 필요하지만 현재 6천여만t밖에 없어 묘대수는 자체해결하도록 했다』고 말했다. 섬진댐하류에 있는 진봉·광활면 주민은 사정이 더욱 딱하다.용수로가 낡아 물이 새는데다 가뭄이 심화되면 상류지역 주민이 마구잡이로 물을 끌어써 이곳까지 차례가 오지 않을 것이 눈에 선하기 때문이다. 진봉면 원상궐리부락.모 대신 볍씨를 논에 바로 심는 건답직파를 하기 위해 이곳저곳에 논을 갈아놓은 모습이 눈에 띈다. 이 마을 55가구는 지난해 4가구만 직파를 했지만 올해는 모두가 직파를 할 생각이다. 김석운씨(43)는 『바다가 가까워 관정을 개발해도 짠물만 나오고 수량도 충분치 않다』면서 『이앙기인 5월20일쯤 물을 내려준다고 하니 직파를 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홍수때는 그래도 찌꺼기라도 건질 수 있지만 가뭄에는 남아나는 것이 없다는데…』 직파준비에 바쁜 이 동네 김인배씨(58)는 말을 잇지 못한다.
  • 키질 천불동/무자트강 40m벼랑위 석굴236개(서역문화기행:10)

    ◎석가 고행 그린 미륵설법도 등 “벽화의 보고”/인도불교문화 동점 중간역… 쿠차·위구르·중국 3가지 문자·풍속 엿보여 쿠차에서 키질천불동을 찾아가는 73㎞는 감탄의 협곡이었다.쿠차에서 서쪽 바이청(배성)까지 그 중로에는 두개의 천불동이 있었다.기암절벽을 병풍으로 두른 염수 계곡을 따라 잠시 북상하면 문득 뻘겋고 황량한 촐타크산을 만나는데 그 바른쪽에 쿠무투라(고목토랍)천불동이 열린다.이곳 사람들은 「아래쪽 천불동」으로 부른다.여기서 다시 미국의 그랜드캐니언을 방불케하는 도깨비 형상의 뻘건 바위의 협곡을 빠져나오면 활짝 트인 고비사막.그 건너편으로 하얀 눈 모자를 눌러 쓰고 서쪽으로 달리는 천산산맥과 동행한다. 거기서 만난 고비사막 그 대부분은 회백색의 황량이지만 쿠차강 언저리는 기름진 초원이었다.바른편으로 하얀 천산,왼편으로 빨간 촐타크산,그렇게 선연한 색채의 무한속을 덜커덩거리다 필자는 불현듯 서울에 두고온 대칸짜리 집 한채와 반생을 넘게 일심전력 주워모은 만권의 책이 아침 햇살에 희끈거리는 먼지에 지나지 않다는 생각이 났다. 다시 좌회전,촐타크산의 지맥인 밍우타크산(명옥달격산)의 허리를 넘어 서면 동에서 서로 흐르는 무자트강(목찰제하)이 보인다.산과 강사이에는 기름진 총림에 갈대가 우거졌고,그 북쪽 벼랑 40m쯤의 높이로 비둘기집처럼 네모난 석굴들이 일렬,혹은 이렬·삼렬 횡대로 서 있는데 그 2백36개의 석굴군을 통틀어 「키질천불동」으로 불렀다. ○모래돌 퇴적 벼랑이뤄 그것들은 몇 만년전 모래돌이 퇴적한 벼랑이었다.그것들이 석굴로 개착된 것은 기원1∼2세기 동한후기,불교의 동점때 시작해서 13세기 이슬람교에 밀려나기까지 1천여년에 걸친 일이다.바로 승려와 불도들이 불상을 모시고 종교의식을 올리는 불전으로서의 지제굴,승려들이 기도하면서 고행하는 선굴,그리고 승려들이 생활하는 승방으로서의 비가라굴,그리고 물건을 저장하는 창고굴등의 구실을 했었다. 키질석굴은 카슈가르에 남은 삼선동보다 약간 늦지만 돈황의 막고굴보다 1세기 이상 앞선 것으로 판명된 중국서북지역 최초의 천불동이었다.그 규모나 가치로 보아돈황의 그것보다 초라하고 엉성하지만 키질천불동의 석굴 양식이나 벽화의 내용,기법에 있어 인도의 불교문화가 동점하는 중간역이 분명했다.그속에 쿠차·위구르·중국등의 세가지 문자와 풍속이 출현하는가하면 서역의 간다라미술의 동점이 역력했다.예를 들어 타원형의 얼굴에 가는 눈썹과 높은 코,넓은 턱에 엷은 입술,그리고 물결치는 헤어스타일,그러한 불상이 곧 간다라의 그것이었다. 석굴은 2㎞의 벼랑에 동서로 분포되어 있었다.그 가운데쯤 남북을 움푹 자른 작은 골짜기를 중심으로 서쪽에 81개,골짜기에 55개,동쪽에 1백개의 석굴이 분포되었는데 형체가 온전하거나 벽화를 보유한 것은 1백군데에 미치지 못했다. 석굴의 양식으로 볼때 그 절대다수가 지제굴이었는데 지제굴은 인도에서 전래한 원초적인 형태로 석굴의 안쪽에 기둥을 두고 기둥뒤로 반원형,기둥밖으로 사방형,곧 말굽모양의 중심주형과 다만 네모뿐인 방형,리고 불전을 전후 2개실로 나뉘고 전실 중앙에 입불을 모신 대상형 등 세가지가 있는데 중심주형으론 4호·7호·8호·13호·17호등 40개굴,방형으론 3호·9호·14호·39호·40호등 23개굴,대상형으론 47호·48호·60호·1백36호 등 4개굴이 있었다.용도와 내실을 갖춘 승려의 생활 공간인 비가라굴로 2호·5호·6호·10호·15호 등 31개굴이 있었다. 그러나 키질 천불동의 영혼은 석굴에 있지 않고 거기 벽면마다 그려진 벽화임을 누구나 부인하지 않는다.그 벽화가 자그마치 1만㎡에 달했다.그중 가장 보편적인 주제로 석가모니 전생에 노루나 곰·토끼등 짐승이 되었던 사적을 그린 본생고사가 70여종,석가모니의 일생에 있었던 각양각색의 형을 그린 불전고사가 60여종,다시 인과보응의 설법을 도해한 인연고사가 40여종이 있었다.이밖에도 약간의 천궁기락도·비천도·동물도·천상도 등이 있었지만 그림 자체가 불법을 설명하는 시각적인 강론인만큼 그 중요성은 말할 나위가 없다. ○오현의 구자비파 발견 필자는 서쪽 벼랑의 석굴부터 순례를 시작했다.그 최서단의 8호굴은 중심주형 지제굴로 높이 6m쯤의 비교적 큰 석굴이었다.비록 그 벽화의 대부분이 벗겨지거나 탈색되었지만 마름모의 무늬,곧 능격화아래 희미하게나마 오현의 비파,곧 당시에 나오는 구자비파를 발견했을 때의 감격은 대단했다.안내자의 손전등을 빌려 그 높은 벽면을 열심히 비추었지만 오현은 더욱 가물가물 침침한 것이 안타까웠다. 8호굴과 비슷한 서쪽 벼랑을 사다리로 10m쯤 올랐을 때 거기 17호굴이 있었다.키질에서는 특굴로 알려져서인지 그 입장료도 곱으로 비쌌다.거기는 키질 특유의 문양인 마름모 무늬의 천장 아래 정병을 가진 미륵보살이 많은 협시 보살을 거느린 「미륵설법도」를 비롯해 석가모니의 생전 고행을 그린 본생고사가 널려 있다. 17호굴의 아래로 역시 특굴로서의 38호굴은 「음악동」으로 불릴만큼 많은 보살이 피리·공후·북·비파등의 악기를 들거나 원형의 천장에는 기다란 낙천도가 흐르는 선율처럼 그려져 있었다.그런가 하면 선연한 마름모 바탕에 두마리 꿩의 「쌍치도」도 눈에 띄었다. 다시 그 옆으로 나란히 있는 47호굴과 48호굴은 모두 대상형의 지제굴이었는데 18m가 넘는 높은 석굴속에 16m의 불상이 버티고 서 있고,그 좌우로 다섯렬의 좌불들이 빽빽했지만 휑하게 쓸쓸한 공간에서 망망했던 찰나,필자는 그 왼쪽 벽면에서 호랑이에게 몸을 바치고 그 먹이가 되는 「사신사호」의 본생고사에 옷깃을 여밀 수밖에 없었다. ○독일인이 훔쳐간 흔적 서쪽 벼랑 중앙쯤의 76호굴은 궁융굴,석굴은 직방형이지만 천장은 활모양의 반원형,그런데 그 천장엔 공작의 현란한 날개만 남아 있었다.물론 독일사람에게 절도당한 것이다.이 천장에 저토록 현란한 공작의 날개가 온전한 모습으로 거드름을 펼 수 있더라면 얼마나 광채로울까. 바로 그 옆에 대상형 지제굴 77호굴.그 널따란 석굴의 천장은 너울너울 신나게 춤추는 보살의 무기도,격렬한 선율을 타고 무녀의 귀고리·면사·스카프·치마등이 물결치고 있었다.그리고 후실의 용도에는 꿩·양·사슴·오리·말·호랑이·원숭이등 열한가지 동물이 칙칙한 색상으로 생동했다. 그 옆으로 80호석굴,거기 본생고사와 인연고사에는 한마당 지옥이 그려졌는데 석가모니 앉은 땅밑으로 누군지 사람의 머리를 불로 태우는 끔찍한 장면이 자못 리얼했다. 이밖에 화랑식인 석굴로는 석가모니일생의 각종 형상을 종합한 불전고사 50여폭의 1백10호굴과 호랑이·사자·사슴·개·오리·꿩·토끼·뱀·말·곰·기러기등 열여덟가지 동물이 사실적으로 혹은 인상적으로 그려진 2백24호 굴은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키질천불동에서 잊을 수 없는 두 사람이 있다.그 하나는 인도사람으로 정승의 자리를 마다하고 쿠차로 도망왔던 구마라옌(구마라염)의 아들인 구마라주바(구마라십·Kumarajuva 344∼413)가 여기서 나서 출가하여 「대품반야」,「법화」,「유마힐」 등 74부 3백84권을 중역함으로써 남조의 진체,당의 현장등과 함께 중국 삼대불경번역가로 지위를 굳힌 사람이다.마침 지난해 가을 9월17일부터 키질천불동에 있는 키질석굴연구소에서는 그의 1천6백50주 탄신을 기념하는 국제세미나를 개최하고 그 동상을 세웠다. 또 하나는 우리 교포 화가인 한낙연씨(?∼1947).1946년 이곳에 와서 벽화를 임모하다가 결국 석굴의 미술을 고증하는 전문가가 되어 오늘의 69호굴을 발견하고 각 석굴의 벽화를 통일,정리하여 일련번호를 만든 공을 남긴 사람이다.두번째의 정리작업을 마치고 돌아가던 1947년6월,그는 비행기사고로 조난당하고 지금 10호석굴에는 그의 작업일지가 석각되어 있다.
  • LG그룹 3세 경영체제 출범/구본무 부회장 22일께 경영권 인수

    구자경 LG그룹 회장이 오는 22일쯤 그룹의 경영권을 구본무 부회장에게 넘겨준다.이와 때 맞춰 창업 세대 및 회자 돌림의 구씨 1세대는 경영 일선에서 퇴진하고 자자 돌림의 2세대 일부도 2선으로 물러난다. LG그룹의 고위 관계자는 9일 『그룹 회장의 이·취임식은 오는 20일과 21일 이틀간 치러지는 경영이념 선포식 행사가 끝난 직후 이뤄질 예정』이라며 『현재로선 22일과 23일 중 어느 하루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현재는 22일이 유력하다. 그는 『구본무 회장 체제가 되면 원로들이 스스로 물러날 것』이라며 『급격한 변화는 없더라도 서서히 새로운 모습을 갖출 것』이라고 덧붙였다. 원로들의 퇴진은 그룹의 최고 의사결정 기구인 정책위원회에서 물러나는 방식이 될 것으로 보인다.이 위원회에는 구태회 고문을 비롯,구두회 호유에너지 회장,구평회 LG상사 회장,허신구 LG석유화학 회장 등이 있다. 구자경 회장은 경영권을 물려준 뒤 향후 경영에는 관여하지 않을 예정이다.이로써 LG그룹은 3세 체제로 출범하며,그룹의 색채도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LG 구본무 회장체제 출범까지/「승계 예고 발언」 1년만에 성사/구자경 회장 지난해 2월 “할만큼했다” 운떼/4월 고희이후 그룹차원 정지작업 본격화 LG그룹의 구자경 회장은 기회 있을 때마다 『나이 70이 되면 그만 하겠다』고 말했다.이 말에 무게가 실린 것은 1년 전,전혀 예기치 않은 장소에서였다. 구회장은 지난 해 2월21일 그룹 윤리규범 선포식 행사를 마친 뒤 서울 인터컨티넨탈 호텔에서 유공자들에게 표창장을 줬다.그는 이 자리에서 『경영혁신의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이제 물려줘도 여한이 없다』며 구본무 부회장의 승계를 예고했다. 갑자기 불쑥 튀어나온 이 발언에 모두들 놀랐다.그 전에는 지나가는 말이었지만 이 때는 좀 달랐다.가볍게 언급할 말이 아니라는 점에서,또 아직은 시기상조라고 생각됐기 때문에 그룹측은 즉각 진화작업에 나섰다. 3세 승계는 이로부터 2개월 뒤 또다시 거론됐다.구회장이 고희를 맞는 4월24일.이 날을 기해 장남 본무씨에게 「대권」을 물려주려는 작업이 극비리에 진행된다는 말이 나왔다.그러나 경사스런 자리에서 그러면 안 된다는 주장에 밀려 없었던 일이 됐다.특히 구부회장이 『자식된 도리로 축하하고 고마워해야 하는 자리에서 그런 일이 있어선 안 된다』며 고사했다고 한다. 이후 그룹에서 본격적인 정지작업에 착수했다.시기가 정해진 것은 아니었지만 분위기가 무르익었기 때문이다. 지난 연말 인사에서 원로들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고 당시 이헌조 금성사 부회장과 변규칠 회장실 사장 등과 같은 전문 경영인들이 승진해 일선에 배치됐다.올 초 그룹의 CI(그룹 이미지 통합)를 LG로 바꾸며 새 술을 새 부대에 담는 준비도 착실히 진행했다. 그러나 이 때까지만 해도 그룹 관계자들은 승계의 시점을 연내 정도로,빨라야 상반기 정도로 봤다.구회장이 마무리해야 할 일들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조기 승계의 가능성은 희박했다. 조기 승계로 방향이 잡힌 것은 지난 달 중순.언론에서 3세 경영체제를 거론하며 본무씨의 승계가 임박했다는 보도가 나왔다.개연성을 근거로 한 전망기사였다. 이에 구회장은 처음엔 『어떻게 이런 기사가 나오느냐』며 몹시 불쾌하게 여겼다.그룹도 조기 승계의 가능성을 부인했다.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어차피 해야 할 것이면 분위기가 익었을 때 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지난 달 말에 열린 가족모임에서 최종 결정했다. 오는 22일 쯤 이·취임식이 이뤄지면 구회장이 운을 뗀 지 꼭 1년만에 승계가 이뤄지는 셈이다.
  • 모델이 조각가 위해 미술관 건립

    ◎「현대 조각의 아버지」 아리스티드 마욜 기념/불 75세 비에르니여사,자신의 누드상 등 전시 프랑스의 한 할머니가 자신을 모델로 그리던 예술가를 위해 미술관을 세워 사회에 기증해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그것도 예술가가 죽은지 51년만에 이뤄진 일이다. 프랑수아 미테랑대통령도 지난달 20일 파리 시내 그르넬 거리에서 열린 「마욜 미술관」 개관식에 참석해 프랑스 국민들의 관심을 반영했다.마욜 미술관을 세운 사람은 올해 75세의 디나 비에르니여사. 비에르니여사는 「현대 조각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아리스티드 마욜(1861∼1944)의 전속모델이었다.1935년 마욜이 그린 「나신 연구」같은 그림의 주인공이 바로 비에르니여사다. 또 루브르박물관 옆의 튈르리공원에서 볼 수 있는 12개의 청동동상들도 마욜이 나신의 비에르니여사를 모델로 만든 조각들이다.이 조각들은 비에르니여사가 소장하고 있던 것을 지난 64년 앙드레 말로가 문화장관일때 정부에 기증한 것이다. 이 청동동상들은 세계의 유명 박물관들이 복사판을 구하려고 혈안이 돼있지만 한 작품당 12개로 한정돼 있는 복사판도 거의 동이 나있어 박물관을 애타게 하고 있다. 비에르니여사는 1934년 마욜을 만나게 된다.당시 14세의 여학생이던 비에르니여사는 조각을 하던 친구를 따라 지방에 내려갔다가 73세의 하얀 수염투성이인 마욜과 인사를 나누게 된다. 비에르니는 그뒤 일요일이면 부모 몰래 지방으로 내려가 마욜을 위한 나체 포즈를 취하기 시작했으며 이런 생활은 대학에서 화학을 공부하면서도 계속된다.60살 차이나는 화가와 모델은 스페인을 함께 여행하기도 했다. 2차대전 당시 비에르니는 레지스탕스 운동에 가담했다가 체포되지만 마욜은 그의 예술을 좋아하는 독일군측에 부탁해 비에르니를 석방시켜 준다.하지만 지난 44년 83세이던 마욜은 자동차 사고로 숨져 모델과 화가의 관계도 끝나고 만다. 비에르니는 그뒤 1947년 마티스와 잔 부세등 마욜의 친구들의 권유로 파리시내 야콥 거리에 화랑을 세워 경영하기 시작했다.지난 73년 마욜의 아들인 루시앙 마욜이 숨지고 유산을 물려받자 마욜 미술관 건립을 꿈꾸게 된다.지난 81년 1천2백만프랑(약 18억원)의 기금으로 미술관 건립재단을 설립했지만 세계 각지에 팔려나가 흩어져 있는 마욜의 작품들을 사모으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는 것이다.소유하고 있던 집을 팔고 미국과 일본의 컬렉션을 돕는 일을 하기도 했다. 미술관 건립꿈을 실현하는데 꼬박 14년의 세월이 걸렸고 그녀는 『어떻게 보면 미친짓이라는 생각도 들었다』고 회고한다.비에르니여사는 『마욜은 화실도 없었고 조수도 없이 언제나 혼자서 일했다』면서 『그는 다른 작가들의 작품을 베끼지도 않았을 뿐더러 자연을 그대로 묘사하지도 않았다』고 마욜의 독특한 작품세계를 설명했다. 마욜은 시장에서 파는 종이에 그림을 그리지 않았고 그가 사용한 몽트발이라는 섬유는 아직도 존재하고 있다고 비에르니여사는 기억하고 있다.항상 호기심을 버리지 않은 예술가의 모습이 비에르니여사가 50여년동안 가슴에 담고 있는 마욜이었다. 마욜 미술관에는 러시아화가들의 그림도 전시돼 눈길을 끌고 있다.이 작품들은 비에르니여사가 지난 60년대 옛소련으로부터 빼낸작품들이다.모스크바에서 반출이 금지된 카바코프·불라토프등의 작품의 파리 전시를 위해 러시아세관의 감시망을 피해 가져 온 작품들이 남아 있는 것이다.
  • 불교거점도시 쿠차(서역 문화기행:9)

    ◎시원1백여채는 흙담만 남아/3세기 서역정치의 중심… 7백년간 영화/쿠차강 벼랑에 석굴 여러개 산재… 베제크리크 천불동 흡사 카슈가르에서 쿠차까지 사막 7백50㎞.새벽부터 오밤중까지 장장 15시간을 덜커덩거려도 지루하지 않았던 것은 그만한 까닭이 있었다. 천산남로가 천산산맥과 타클라마칸사막이란 장관들을 좌우에 놓고 그를 줄곧 볼 수 있는 데다 서역 역사의 중심을 이제사 찾아가는 길이어서 였다. 쿠차의 옛 이름으로 구자 굴지 고차등이 있지만 모두 쿠차라는 위구르말을 다르게 표기했을 뿐이다.서한때만해도 겨우 36국의 하나에 지나지 않았는데 동한때 반초(반초·33∼103)가 서역을 확장하던 기원 91년엔 「서역도호부」를 두어 서역정치의 중심으로 부상,당나라때 「안서도호부」로 지속되었다. 쿠차는 기원3세기부터 11세기까지 서역에서 불교의 거점으로 가장 그 꽃을 피웠던 곳으로 스바시(소파십)에 두군데의 자오후리사원외에도 키질(극자이)석굴을 비롯하여 쿠무토라(고목토랍),키질가하등 세군데의 천불동이 있다.무엇보다 당나라의고승 현장이 인도에서 귀국할 때 여기서 두달을 머물면서 쿠차의 융성한 불교와 음악을 그의 「대당서역기」에 대서특필한 바 있었다. ○혜초,한달 걸려 통과 필자가 쿠차를 특별히 동경했던 연유는 따로 있었다.신라의 혜초가 인도로부터 장안으로 돌아갈 때,바로 카슈가르에서 쿠차로 뚫린 이 코스를 장장 한달이나 걸어서 당시 정치·군사의 중심지였던 쿠차를 그의 「왕오천축국전」에 기록하였고,고구려 출신의 명장인 고선지(?∼755)는 당 천보(742∼755)연간에 서역방위 총사령격인 「안서도호」를 지내며 천하를 호령했었기 때문이다. 그뿐이랴! 서역의 악기,특히 쿠차를 대표하는 갈고는 꼭 우리나라의 장구를 닮았기에 똑같은 흥을 느꼈고,또 최근 필자는 돈황의 막고굴보다 한세기 앞서 착굴되었던 키질천불동의 벽화를 정리하여 일련번호를 엮었던(1946∼47)최초의 키질 전문가가 우리의 재중동포 한낙연(?∼1947)씨임을 발견했기에 그렇다. 쿠차의 가을은 상쾌했었다.길에는 온통 코스모스였고 호마와 노새가 끄는 마차가 한가로웠다.멀리 해발 2천m가넘을 법한 뻘건 암벽의 촐타크(확이달격)산,그리고 보다 멀리 만년설의 하얀 천산산맥이 둘렀건만 시가는 넓고 사람들도 훤칠했다. 옛날 「양서」의 「제이전」에 쿠차의 외성은 장안성에 견줄만하고 가옥은 장려하다고 기록되었다.그 외성을 찾으려 필자는 맨 처음 쿠차의 옛 성곽을 찾았다. 쿠차의 간선도로 서쪽에는 인민공원,그 건너편 7m 높이에 5m 폭의 토성,그 허무러진 폐허가 보였다.그 밑으로 작은 개울,개울옆으로 쿠차 고성을 알리는 안내판이 서 있었다.그 토성은 40m 간격으로 넓은 장벽을 세운 채 옛날의 궁궐을 휘감았는데 자그마치 7∼8㎞에 달한다고 했다.그 안에서 출토된 기와나 벽돌의 무늬와 크기는 장안 대명궁에서 발굴된 그것들과 비슷했다는 르포를 본 일이 있었다. ○40m간격으로 토성 이곳이 한때 쿠차국 국왕의 궁궐임은 물론 당나라때 「안서도호부」의 주둔지였으니 1천2백50년전 우리 고선지장군이 호령하던 곳에 필자가 서 있는 셈이었다. 「산 깊숙한 곳에,하나의 강을 사이에 두고 2개의 가람이 있었다.둘 모두 자오후리라 이름했지만 위치에 따라 동·서로 불렸다.…서문밖 좌우에는 높이 90여자의 불상이 서 있고,절은 백여채요 승려가 5천여명…사람들은 공덕을 다투어 쌓고,…불상의 장엄은 사람의 공력을 뛰어넘었네라.…」 위의 글은 현장의 「대당서역기」에서 자오후리사원에 관한 기록을 발췌한 것이다.비록 자오후리의 확실한 명칭과 위치를 밝힌 바 없지만 그 내용으로 보아 오늘의 스바시(소파십)에 있는 자오후리사원을 지칭함에는 의심할 바가 없다. 필자는 쿠차 고성에서 북쪽으로 23㎞ 지점에 있는 자오후리를 찾았다.쿠차 시가를 벗어나 일로 정북을 향하여 지프를 몰았다.쿠차강의 긴 다리를 건너자 촐타크산이 화염산처럼 우뚝 서 있었다.화염산의 머리가 타원형으로 다소곳한데 비해서 촐타크산은 들쭉날쭉한 적갈색 바위.위구르말로 「촐」이 「황량」을 뜻한다는 데 실상은 더 했다.더구나 촐타크의 아래로 뿌연 산등성이와 모랫벌,그 가운데로 쿠차강,강바닥의 하상조차 뿌옇게 말라 비틀어진 채 였으나 붉은 산등성이는 몹시 환상적이었다. 현장의 기록대로 「산깊숙한 곳」이요,「하나의 강을 사이에 두고 두개의 가람이 있었 지만」,높이 90여자의 불상은 물론 백여채의 사원 건물들은 모두 풍화중인 흙담들로 침묵만 흘렀다. 필자는 서쪽 언덕에 있는 자오후리사원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도록 산기슭을 오르다가 문득 건너 동쪽 사원의 최북단에 절반쯤 무너진 탑신을 보았다.그쪽으로 건너가기까지 족히 반시간은 걸렸다. 그 탑의 중턱에 올라 동서 양쪽의 자오후리사원을 굽어보는 감격은 무너질듯한 그것이었다.자오후리 사원의 강역이 7천㎦.그러니까 투루판에서 보았던 교하 고성이나 고창 고성보다 넓었다.교하나 고창이 다목적용 성곽이었음에 비추어 자오후리의 성곽은 오직 사원용이었으며 그 범위은 서역 최대의 것이었다. 비록 그 연대를 확정할 순 없지만 1978년5월에 출토된 위진·남북조와 당대의 철·동·도기와 벽화·전폐·간찰등으로 미루어 멀리는 위진시대요,늦게는 당말연대까지 적어도 7백년의 영화를 누렸던 불교 사원도시였음이 틀림 없다. 서역의 역사가 위대한 것은 인류가 황량하고 척박한 자연과 고투하는 데 있을 뿐 아니라 생명을 잃어버린 흙과 모래를 빚어 인류의 문화를 창조하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마침 석양이었다.그 사양속에 자오후리 사원 유적지는 자욱한 언덕들.동쪽 사원은 산의 비탈따라 전개되었고 서쪽 사원은 사원의 본당이나 강원·승방등이 밀집된 모양이다.그래도 높이 10m의 담들은 동서에 널려 있다.서쪽의 본당으로 보이는 입구쪽 토담은 봉화대에 상당할만큼 중후했고,그 둘레도 어림잡아 3백m는 넘을만했다. ○흙·모래로 문화창조 안내자가 필자를 서쪽 사원 북단으로 인도했다.거기서 놀란 것은 쿠차강을 굽어보는 벼랑에 여러개의 석굴이 뚫렸는데 그 위치나 구조가 투루판의 베제크리크천불등을 방불케한 때문이었다.다만 규모가 작을 뿐이었다.석굴에서 내려오는데 길 바닥에 방사선 모양의 파란 덩굴에 수박잎모양의 큼직한 잎새들이 싱싱하게 자라서 적어도 한평쯤의 땅을 휘덮고 있었다.들수박이라했다.서역의 사막만을 방황하는 나그네에겐 또 한가지 기쁨이 아닐 수 없었다. 쿠차로 돌아오는 도중,필자는 「키질가하토탑」을 굳이 찾기로 했다.쿠차 북쪽 12㎞지점에 있는 이곳을 찾기위해 쿠차에서 자오후리사원 중간쯤 도로에서 서쪽으로 돌아 작은 구릉을 한참동안 달렸다.그 왼쪽엔 염수계곡으로 수만년전 지구의 조륙운동으로 말미암아 벽해가 상전된 지질 변화로 만들어 진 곳이다. 염수계곡위로 우뚝 솟은 15m의 토탑.사막에서 자라는 풀인 소소초같은 것을 배합한 판축법으로 세운 흙탑인데 적어도 2천년을 견딘 이 탑의 툭불거져나온 위치와 상단의 망루적인 구조로 보아 봉화대로 단정하기에 어렵지 않았다. 키질가하토탑에서 동쪽을 조망하면 불과 2㎞ 전방에 송송 구멍이 뚫린 벌집처럼 또 하나의 천불동이 보였다.이름하여 「키질가하천불동」.거기도 46개나 되는 석굴이 모여 촌락을 이루었는데 대체로 당대에 개착된 것으로 키질천불동보다 늦은 연대라했다. 서쪽으로 40㎞ 지점엔 또 하나의 천불동이 있다.이름하여「쿠무토라천불동」으로 그 휘하에 72개의 석굴을 거느리고 있다한다.필자는 키질가하토탑아래 우두커니 서서 성큼 다가오는 황혼에 쫓겨 지프에올랐다.어디를 보아도 천불동,누가 버린 땅이라하랴! 『선생! 제가 어릴적만해도 쿠차의 왕자가 어디쯤 살고 있다는 말을 들었어요』 위구르족 기사의 말이었다.정녕 그들 나름의 왕국이 청말까지도 실재했을지 모른다.
  • 타클라마칸사막 동남단 호탄(서역 문화기행:7)

    ◎실크로드 남로 중심… 명주·옥의 명산지/한때 열국우전의 수도… 토기·벽돌 파편 널려/동보고승 법현이 도닦은 찬목묘 유명… 바로 옆엔 이슬람 예배당 우루무치부근을 떠돈지 엿새째,지구의 지붕으로 불리는 천산산맥언저리이건만 또 한번 서역의 깊숙한 벽지로 날고싶었다.호탄(화전)을. 호탄은 곤륜산맥의 북쪽 기슭에 자리잡은 타클라마칸사막의 동남단.세갈래의 실크로드,그중 가장 환상의 코스인 남로의 중간지점이자 한나라때 서른여섯개의 열국중,남로의 최강국이었던 우전나라의 도읍지였고,「한서」의 「서역전」에선 「서성」으로 불렸던 곳이다. 우루무치에서 직항 2시간10분에 도착한 호탄비행장은 온통 잿빛 모랫벌이었다.과연 33만㎦에 달하는 중국 최대의 사막인 타클라마칸사막의 동남단답게 끝이 없는 모랫벌이 이어져 있으며 그 모래는 콩가루같은 미립자로서 바람이 부는 날이면 활주로조차 묻혀 이착륙이 어렵다고 했다. 호탄시내까지 11㎞의 공항로를 달리면서 필자는 깊은 생각에 잠겼었다.창밖에 하늘을 뚫는 포플러나무와 자작나무가서 있는데 그 잎새는 한결같이 잿빛으로 모랫바람이 휩쓸고 지난 자국들이었다.이런 모랫바람속 그 어디쯤에 화사한 꽃들이 피어서 꽃 따는 사람을 불렀고,또 이 사막 어디쯤에 꽃다운 비단을 짜 낸 뽕밭이 숨었을까? 그리고 이렇게 삭막한 모랫벌 그 어디쯤 깊숙한 골에 하얀 구슬,푸른 구슬이 묻혔을까? 그런가하면 인도에서 불경을 구하여 장안으로 돌아가던 현장법사가 기원645년에 이곳을 지났는데 그들의 발길과 그들의 말방울이 울렸던 곳은 어딜까? ○화향 5천여명 수도 수나라때의 시선집인 「전수시」에는 「우전에서 꽃 따기(우전채화)」라는 무명씨의 시가 이렇게 실려 있다. 「산천수이소,초목상동춘. 역여진유지,자유채화인.」 (산천은 비록 멀리 떨어졌지만,초목의 봄은 마찬가지. 하남땅 진이나 유지처럼,여기도 꽃 따는 사람 있어라) 그런가하면 현장의 「대당서역기」에 기록된 호탄은 1백여군데의 절에 5천여 화상들이 불도를 닦던 대승불교의 중심지로 그 사방을 둘러싼 뽕밭이 화려한 명주와 주단의 생산지임을 밝혔고,반고의 「한서」「서역전」엔 우전국이 장안으로부터 9천6백70리(4천8백35㎞)떨어진 곳에 3천3백의 호구와 1만9천3백명의 인구를 지닌 나라,특히 옥의 산지로 중원에 알려졌었다.「우전옥」,또는 「곤륜옥」으로 불리는 호탄옥의 성가는 1968년 하북에서 발굴된 한나라 중산왕의 「금루옥의」로 더욱 증명되었다.기원전 154년 2천4백89장의 연녹색 옥판으로 얽어 맨 시의,그것들이 몽땅 호탄의 옥이라 했다. 그래서인지 호탄을 에워 싼 두줄기의 강,백옥강과 묵옥강이 각각 동쪽과 서쪽을 흘렀다.옛날엔 이 두줄기 중간에 또 하나의 강 녹옥강이 있었다고 하니 강 이름으로 미루어서도 백옥·청옥·흑옥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 호탄시내에 도착한 필자는 처음으로 이방감을 느꼈다.우선 거리에서 만나는 십중팔구가 까무잡잡하면서 무성한 수염을 단 위구르사람들,그들의 오똑한 콧마루에 쌍꺼풀,달걀모양의 갸름한 얼굴에 푸르딩딩한 눈동자,거기다 다혈질의 말씨에 굴뚝처럼 뿜어대는 담배연기를 보면서 어리둥절했다. 필자는 서역땅에 들어 처음으로 필자가 서 있는 곳이지금 중국의 강토이면서도 중국의 한족이 아닌 서역의 원주민속에 깊숙이 들어왔노라는 사실과 이곳 서역의 남로 도처에서 최근 민족갈등의 충돌이 가끔 일어난다는 생각때문에 얼른 여관문을 두들겼다. 이튿날 우전국의 고도를 찾기로 했다.한나라때는 36개부족국가의 하나였지만 당나라때는 「안서사진」의 하나였던 그 도읍지는 아직도 확실치 않았다.혹자는 호탄시 남쪽 25㎞지점 카스강 서쪽언덕에 지금도 남아 있는 높이 6m,둘러 60m의 석탑근린을 두고 말하는가하면 혹자는 호탄시 서쪽 10㎞지점 요트칸(약특간)마을이라는 설이 있다. 그 두군데가 모두 우전국 도읍일 가능성은 있었다.거기에 남아 있는 폐허는 물론 거기서 지금도 출토되고 있는 기와조각·벽돌·질그릇·철제농구등이 그를 증언하고 있는데,특히 요트칸 유적지의 개울물에선 지금도 벽돌이나 질그릇 파편쯤은 쉽게 주울 수 있다는 말이었다. ○요트칸 유적지 찾아 필자는 그 말에 혹하여 요트칸을 찾기로 했다.호탄시에서 서쪽으로 10㎞라지만 아주 기름진 오아시스.가느니 굽이 굽이 농로요,농로를 따라 출렁이는 관개로,곤륜산에서 녹아 내리는 설수는 파랗고 차가웠다.게다가 농로는 자작나무가 목책처럼 늘어 섰거나 포도덩굴이 푸른 터널을 지어서 홀연 여기가 사막임을 잊게했다. 이윽고 「허톈셴바허치공사(화전현파합기공사)」라는 팻말이 보였다.거기서 좌로 돌아 또 한번 농로를 달렸다.마찬가지로 우거진 자작나무요 포도덩굴인데 길가엔 맨발의 개구쟁이가 흙투성이가 되어 뒹굴고,관개의 수문에는 빗장이 걸린 채 그 안으로 물살이 출렁거렸다.그 무렵 난데없이 「요트칸유적지」란 안내판이 보였다.필자는 습관처럼 사방을 둘러 보았지만 산 한자락도 보이지 않는 편편한 언덕일 뿐이었다. 마치 환토하느라 새흙을 옮겨놓은 논바닥을 방불케 여기저기 울퉁불퉁한 지면이었다.아닌게 아니라 버드나무 사이로 개울이 흘렀다.필자는 얼른 그 개울물에 손을 담았다.어렸을 적 뱀장어나 게를 잡았던 그 몸짓으로 개울을 뒤졌는데 당장 손끝에 잡히는 것은 빨간 토기의 파편이었다.풀잎무늬의 얇은 토기였다.또 한번 소매를 걷어 올리고 개울을뒤졌더니 월척의 붕어를 잡듯 큼직한 벽돌 하나가 잡혔다. 호탄박물관의 설명에 따르면 요트칸일대 10㎦의 유적지에는 그런한 영세한 파편들이 널려 있다고 했다.더구나 그 일대는 일찍이 홍적기의 침적된 지질인만큼 겨우 3m내지 6m의 지층속에는 상당한 질량의 박물이 잠겼을지 모른다고 했다.그동안 발굴된 도기·옥기·전폐등 특히 개원통보 같은 엽전이나 인면·수면의 도기로 보아 기원 3세기로부터 8세기에 이르기까지 중고시대의 궁궐이나 도시의 유적으로,그리고 당시의 주민들이 황색의 한족이 아닌 긴 얼굴,긴 눈썹에 푸른 눈,황갈 피부의 회골족,곧 오늘의 위구르족임을 추정하기에 충분했다. ○인도수행길 머물러 비록 묻히고 무너졌지만 정치의 유적을 답사한지라 이젠 우전국의 종교 유적지를 찾기로 했다.그것은 「커커마르무」(극가마일목)유적,한족들은 「찬목묘」라고 부른다. 그것은 동진때의 고승 법현(337?∼422?)이 기원399년 인도에 갈때 여길 경유하면서 불법을 닦다가 그렇게 명명했다는 작은 암자였다.호탄시에서 남으로 36㎞지점,바로파랗게 굽이치는 카라카스강 동쪽,80m의 벼랑위에 있었다.그 벼랑을 오르느라 그 산의 북쪽을 우회하여 나무 한그루 없는 능선을 탔는데 거기서 굽어보는 카라카스강 유역은 정말 스펙터클한 장관이었다.파랗게 강이 굽이치고 강가로 푸른 오아시스,오아시스는 젖줄 따라 허리띠처럼 뻗는데 그 배경은 온통 황갈색의 구릉들.그림으로는 단조로운 삼원색,그러나 영원의 구도였지만 지세로는 찬목묘가 천혜의 요새였다.발밑으로 벼랑,벼랑아래로 강물,강물밖으론 사막.그렇게 무한히 펼쳐진 곳에서 상과 무상은 날마다 피부로 오득했을 지 모른다. 찬목묘는 천연의 작은 2층석굴이었다.석굴의 높이 겨우 6m남짓,그 한쪽에 사다리를 가설했는데 그 2층까지 기어올라간 필자의 눈에는 침침한 골방 하나쯤의 공간,그러나 아무런 시야도 없었다.법현이 책상다리하고 앉았을 때 그 귓전에 들렸을 법한 강물 소리,유사의 소리를 생각하면서 사다리를 내려섰다. 그 석굴밖으로 이슬람교의 예배당인 마자(마찰) 두어칸이 있었고,산 허리를 돌아 카라카스강가에도 몇군데의 마자가 보였는데,여기 호탄 실크로드에 우뚝 선 커커마르무는 지금 종교의 금석을 한눈에 보여주는 박물관이었다.곧 불교의 유적에 이슬람의 마자가 공존한 사실말이다.바로 기원 10세기를 전후해서 불교에서 이슬람교로 개종했던 것이다.
  • 불멸의 스타 노후 모습은/컴퓨터가 그려본 얼굴

    ◎먼로·제임스 딘·짐 모리슨·지미 헨드릭슨/숨진지 벌써 20년 넘어/“영원한 청춘” 신화 깨기 마릴린 먼로,제임스 딘,짐 모리슨,지미 헨드릭슨. 이들은 모두가 살았을 때 화려한 명성을 누렸으며 사후에도 마치 전설이나 신화처럼 일반인들의 뇌리에 남아 있다.숨진지 20년을 넘고 있지만 이 유명 연예인들의 이름은 여전히 낯익다. 최근 한 이탈리아인은 이들이 지금까지 살아있다면 과연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하는 호기심에서 출발해 이들의 현재의 나이에 맞는 얼굴형태를 컴퓨터로 그려냈다. 단순히 나이든 얼굴을 막연히 상상하여 그린 것이 아니라 그들의 얼굴형태를 분석해 늙어가는 속도,주름의 방향,주름의 정도,굴곡률등 복잡한 계산을 거친 끝에 이들이 20∼30년을 더 산 얼굴을 만들어냈다. 이를 그려낸 사람은 로베르트 글리고로프라는 일러스트레이터.그가 신화적 존재와 같은 유명인들의 얼굴을 주름살 투성이 얼굴로 망쳐(?)놓은 이유는『그들의 신화를 깨뜨리기 위해서』라고 한다. 마릴린 먼로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지금까지도 그녀가 출연한 영화「돌아오지 않는 강」「버스정류장」등이 전세계에서 방영된다. 그녀는 지난 1962년 8월5일,지금으로부터 32년여전에 36세의 나이에 숨졌으며 케네디대통령과의 염문과 불분명한 사인으로 더욱 신비에 싸인 채 오늘까지 유명세를 더하고 있다.올해 미국에서는 그녀의 얼굴이 담긴 우표 시리즈가 나온다.살아있다면 만68세. 미남 배우 제임스 딘 역시 영화「에덴의 동쪽」「자이언트」등에 출연,반항아적인 풍모를 보이며 뭇청소년들의 우상이 됐으며 최근에는 의복의 상표에도 그의 이름이 쓰이고 있다.지난 1955년에 사망했고 살았다면 63세. 짐 모리슨은 히피음악을 연주하는 「더 도어스」란 그룹의 리더로 활약하다 71년 프랑스 파리에서 숨진 기타의 달인.지금도 기타를 치는 사람이면 그의 음악적 재능에 고개를 숙일 정도.살았다면 51세가 됐을 것이다. 지미 헨드릭슨 역시 대중 기타음악의 대가로 불리며 포크송이나 언플러그드 뮤직을 한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에게서 신으로 받들어지고 있다.살았다면 51세가 됐을 것이나 70년 런던에서 약물 과다복용으로 숨졌다. 어떤이들은 이들이 지금까지 살았다면 아마도 지금처럼 명성을 유지하지는 못했을 것이란 말을 한다.본인에게는 미안한 말이나 오드리 헵번이나 엘리자베스 테일러등 세기의 미모를 소유했던 배우들이 나이든 얼굴을 일반에 보였다가 실망을 안겨주는 경우가 흔히 있었기 때문이다. 젊을 때 죽어서 대중의 가슴 속에 영원한 청춘으로 남아있는 유명인사들,늙은 모습으로 재현된 자신들의 얼굴을 본다면 마음이 상할는지도 모른다.
  • 광복 50/청산되지 않은 양국관계 6가지 과제

    ◎역사왜곡… 망언… 한·일 「감정의 골」 깊기만/재일교포 법적차별·냉대 곳곳 상존/사할린한인 영주귀국협상 작년에야 시작/정신대보상 대신 “위로금” 어물쩍 광복후 50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아직도 치유되지 않은채 우리를 아프게 하는 일제의 상처들이 많다.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정신대의 한이 여전히 시퍼렇고 사할린 동포들의 귀국염원 또한 채 해소되지 않은 상태이다.재일교포에 대한 일본의 차별대우 역시 시정되지 않고 있으며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 투하 현장에 있었던 한국인들은 그 2∼3세까지 고통을 겪고 있다.일본의 뿌리 깊은 역사왜곡은 지금도 일본 각급학교 교과서에 남아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히며 수백만점으로 추정되는 일본의 우리 문화재 반환 전망은 어둡다.한국과 일본 두나라가 일제의 망령을 떨치고 진정한 선린우호 관계를 갖기 위해서는 꼭 해결해야 할 정신대 보상,사할린동포 귀환,원폭피해자 치료,재일교포 법적지위,문화재 반환,역사왜곡 문제의 현황을 살펴 본다. ▷침략사 왜곡◁ 일본의 한국사 왜곡은 뿌리깊다.19세기 중반 일본에서 「정한론」이 등장한 뒤 일본의 관계·학계는 한국침략의 당위성을 강조하느라 「임나일본부 설」따위를 조작해 퍼뜨리는등 왜곡된 한국사를 만들어 나갔다.「황국사관」이라는 이 군국주의적 역사관은 지금도 사라지지 않고 일본의 각급학교 교과서에 남아 있다. 광복이후 우리나라는 일본정부에 역사왜곡을 고치라고 꾸준하게 요구해 왔으나 흐지부지되다 82년 7월 「마쓰노망언」이 터졌다.당시 일본 국토청장관 마쓰노 유키야스(송야행태)는 『한국이 일본 교과서 내용을 시비하는 것은 내정간섭』이라는 주장에 이어 『한일합방은 침략이 아니다』라는 망언을 내뱉었다. 이때 우리 국사편찬위원회는 일본 교과서 16종을 검토해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 까지 모두 24개 항목,1백67곳의 서술 잘못을 가려냈다. 「마쓰노 망언」파동은 일본정부가 넉달만에 「왜곡 시정」담화를 내는 것으로 일단 가라앉았지만 그 뒤로도 매년 일본이 교과서 검정을 하는 시기가 되면 「일본 교과서 역사왜곡 시비」가 연례행사처럼 불거져 나온다.왜곡의정도가 점차 줄어들긴 하지만 그 틀은 여전하기 때문이다. 일본 문부성이 교과서를 미리 검열하는 「검정제도」를 통해 역사서술을 조목조목 통제하고 있는 현실에서 역사 왜곡이 사라지지 않는 책임은 분명히 일본 정부에 있다.지난해에도 일본 정치인들의 마쓰노식 망언은 계속됐다. 국민에게 거짓 역사를 가르치고 일제침략 행위를 부정하는 정치인들이 계속 있는한 일본의 역사왜곡은 한일간의 현안문제로 계속 남을 것이다. ▷정신대 보상◁ 「인류역사의 치부」로 불릴 만큼 비인도적인 범죄로 낙인된 일본군 위안부 문제.우리민족의 역사에 남겨진 크나 큰 상처다. 90년 발족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공동대표 이효재·윤정옥·김희원)등 민간단체들의 노력으로 지난 50년간 묻혀온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전모가 상당부분 밝혀진 상태.그동안 씻지못할 고통속에 살다 많은 피해자들이 죽어갔고 현재 신고된 피해자 1백70명이 비참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지난해 일본 미야자와 기이치(궁택희일)전총리가 강제성을 시인한 이후 가해당사자인 일본 정부의 입장은 개인보상은 해주되 국가책임차원이 아닌 민간주도의 보상인 「민간기금」을 마련,위로금 명목으로 보상비를 지급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미야자와 전총리의 발표후 우리 정부는 더 이상의 외교적 사안으로 삼지 않겠다는 입장을 나타냈다. 그러나 일본이 국제법상의 국가책임에 근거해 피해자 개인 보상및 정확한 전모공개,진실된 사죄를 해야 한다고 정대협등 민간단체와 재야법조계 등은 주장한다.이는 대체적인 국민정서이기도 하고 국제법조인회(ICJ)와 국제노동기구(ILO)유엔인권소위 등 국제 인권단체들이 일본에 대해 요구하는 입장이기도 하다. 이효재 정대협대표등은 『65년의 한­일청구권 협정은 전후 두나라의 금전적 이해관계를 처리하기 의한 보상청구권협정으로,종군위안부 문제와 같은 비인도적 전쟁범죄에 대한 손해배상은 포함되지 않았다』며 한­일협정으로 모든 과거가 씻어졌다는 일본 주장을 반박하고 현재 일본이 희망하고 있는 유엔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가입 자격을 얻기 위해서도 또 명실상부한 양국의 동반자관계 정립을 위해서도 일본국가차원의 피해자보상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피폭자 보상◁ 광복 50년이 되었지만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원폭의 피해를 입은 한국인들은 아직도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원폭 투하 현장에 있었던 한국인 가운데 귀국한 사람은 2만3천여명.이 가운데 2천4백여명만이 생존해 있고 이들이 낳은 2세가 6천여명이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은 한국인의 평균 생활수준에 훨씬 못미치는 생활을 하고 있다.일본에서 한푼도 받지 못하고 귀국한데다 귀국 후에도 후유증으로 사회 활동을 거의 하지 못해 생계조차 유지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또 즉각 증상이 나타나지 않은 피해자들도 언제 각종 암이라든가 백혈병이 발병할 지 모를 일이었다. 이들은 현재 상병의 정도에 따라 10만원 안팎의 진료 보조비를 받고 있다.이는 지난 93년 일본 정부가 위로금 명목으로 건넨 40억엔 가운데 일부에서 지급되는 것이다.또 이 돈으로 현재 경남 합천에 8백평 규모의 원폭 피해자를 위한 복지관을 짓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일본 정부가 일본 거주 원폭 피해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보조비를 지급하고 있다고 주장한다.예컨대 일본의 피해자들은 건강 보조금 등의 명목으로 적게는 3만∼4만엔에서부터 많게는 13만∼14만엔까지 받고 있다는 것이다.또 일본 거주 피해자들의 병원비는 완전 무료다. 한국 원폭 피해자들도 의료보험 급여를 받을 수 있는 항목은 무료 진료의 혜택을 받고 있다.그러나 컴퓨터 단층 촬영 등을 비롯,의료 보험 급여에서 제외되는 항목은 원폭 피해자들이 스스로 부담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 원폭 피해자는 『조금 형편이 나은 극소수의 사람들은 2세와 3세의 혼사를 위해서도 원폭 피해자라는 사실을 숨기고 있는 실정』이라면서 『대부분의 원폭 피해자 1세들은 물론 2세,3세들까지 빈곤의 질곡에 빠져 정신적·신체적으로 고달프고 어려운 삶을 살고 있다』고 현주소를 전했다. ▷재일교포 차별◁ 일본에 거주하는 한국인의 법적 지위는 한일 두 나라간 가장 오래 되고 가장 어려운 외교 현안이다.재일한국인에 대한 대표적인 차별정책으로 인식되어오던 지문날인제도가 지난 93년 가족사항등록으로 바뀌었지만 재일한국인의 법적지위가 적절하게 보장되고 있다고 보기는 매우 어려운 현실이다.이에 따라 정부는 지난해 12월 도쿄에서 개최된 「재일한국인의 법적지위와 처우개선에 대한 한일 아주국장회의」에서 『가족사항등록이 외국인등록법 이외의 목적으로 남용되어서는 안된다』는 우려를 일본측에 표명했다.또 외국인등록증을 상시휴대하지 않을 때 내려지는 형사처벌도 행정처벌로 완화해줄 것을 요청했다.이에 대해 일본측은 『제도를 탄력적으로 운용해보니 외국인등록증 상시휴대의무 위반자의 적발건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면서 『앞으로도 상식적으로 유연히 운영해나가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지방공무원과 국·공립 교원채용,원호법상의 국적조항 철폐도 재일한국인에게는 중요한 현안이다.우리정부는 재일한국인의 지위개선을 위한 포괄적 조치로서 국적과 관계없이 지방공무원과 정규교사에 임용될 수 있도록 일본 중앙부처가 지도하도록 요청하고 있다.특히 「전쟁피해 보상은 일본정부에도 책임이 있다」고 판시한 94년 7월의 구일본 상이군속 석성기씨등에 대한 재판결과를 들어 재일한국인 전상자에 대한 원호법 적용을 요구하고 있다.이에 대해 일본측은 여전히 「노력」과 「검토」라는 표현으로 확실한 답변을 내놓지 않고 있다.이밖에 민족학급의 설치,무연금 장애자·고령자의 구제,지방자치 참정권등이 재일한국인의 법적지위 및 처우개선과 관련,한일간에 풀어야 할 숙제들이다. ▷억류자 송환◁ 지난 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뒤 일본 정부의 송환거부와 일방적 국적박탈로 사할린에 잔류하고 있는 한국인은 약 3만6천명에 달한다.종전 당시 소련측에서도 노동자를 확보한다는 차원에서 한국으로 돌려보내지 않고 억류했기 때문에 이들은 귀국의 꿈을 이룰 수 없었다.사할린 동포들의 귀환문제가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한 것은 88년 서울올림픽이 열리기 전후한 시기이다.서울올림픽을 계기로 한국과 소련의 관계가 개선돼 지금까지 6천8백여명의 사할린 한인이 모국을 방문했으며 2백46명이 영주 귀국했다.현재 사할린 한인사회에서는 원인제공자인 일본정부가 책임을 지고 희망자 전원에 대해 영주귀국을 실현시키고,사할린 잔류자에 대해서는 1인당 1천만엔씩을 보상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정부는 당사국인 일본과 러시아와의 협상을 통해 사할린 한인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일본과는 지난 93년 9월 외무장관 회담에서 사할린 한인문제의 포괄적이고 조속한 해결을 위해 양국간 실무협의를 개최하기로 합의 했다.이에 따라 그동안 7차례 실무협의를 통해 일본이 올해 추가경정예산을 편성,아파트형 집단주택과 요양원 건설등 사할린 거주 한인 1세의 귀국과 정착을 위한 시범사업에 착수하기로 했다.정부는 사할린 잔류자에 대해서는 정기적인 모국방문 기회부여등 영주귀국자와 유사한 지원이 이루어지도록 일본측에 요청했으며 러시아 정부와는 사할린 한인의 신분확인,영주귀국자의 출국과 국적처리 문제,재산반출,계속적인 연금수혜등을 협의하고 있다.러시아 정부는 인도적인 차원에서 협조하겠다는 반응을 나타내고 있다. ▷문화재 반환◁ 현재 해외에 있는 우리 문화재는 모두 6만4천7백28점에 달하는 것으로 정부는 집계하고 있다.이 가운데 일본에 있는 것으로 확인 된 것은 2만9천6백37점이다.그러나 이 숫자가 「빙산의 일각」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우리 문화재는 일제 36년 동안 일본 정부 차원의 조직적인 약탈과 민간 수장가나 골동품 중개상에 의해 끊임없이 반출됐다.따라서 현재 일본에 나가있는 우리 선조들의 문화유산은 수십만점도 아닌 수백만 단위에 이른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추정이다.우리 정부의 집계는 일본의 몇몇 박물관이 공개한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일본정부는 지난 65년 한·일협정 당시 「문화재 및 문화협력에 관한 협정」에 따른 1천3백26점 등 지금까지 불과 2천7백50점만을 반환하고는 『더 이상 돌려줄 것이 없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게다가 국제교류재단은 지난 91∼93년 실시한 조사 결과 도쿄국립박물관에서 한·일회담 당시 일본이 제시한 우리 문화재목록에 들어있지 않은 1천여점을 추가로 확인하기도 했다.공공박물관도 우리 문화재에 관한 한 믿을 수 없다는 것이 증명된 셈이다. 그러나 그 엄청난 숫자에도 불구하고 우리 정부가 「약탈문화재」로 분류해 놓고 있는 것은 7백46점에 불과하다.이처럼 강제로 반출된 것을 증명할 수 있으면 원소유국에 돌려주도록 한 유네스코의 협약이 있기는 하다.그러나 일본은 이 협약에 가입하지 않아 우리 문화재 반환은 순전히 일본의 「선의」에 맡겨진 상태다.
  • 외채·인플레 “해방”/중남미경제 되살아난다(현장 세계경제)

    ◎브라질 인플레 월1∼3%로 진정/페루 성장률 12%… 평균3% 상회/통화긴축·무역자유화 주효… 해외자본 유입도 급증 공룡같은 외채와 인플레 압박에 오랫동안 숨이 막혔던 라틴아메리카 경제가 파란 생기를 되찾고 있다. 지난 80년대는 중남미의 30여 모든 나라에게 「절망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던」 어둠의 시대였다.1950년부터 80년까지 중남미 전지역은 연평균 5.5%의 우수한 경제성장률을 자랑했으나 계속된 정정불안과 국가경제 관리미숙으로 곧 구제할 길 없는 「제3세계」의 상징이 되고 말았다. ○정보불안으로 점철 초 인플레율이 하늘 높을 줄 모르고 치솟았다.80년부터 90년 사이 연평균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보면 브라질 2천7백50%,아르헨티나 3천80%,페루 7천5백%,볼리비아 1만1천8백%,니카라과 1만4천3백% 등이다.또 개도국의 외채는 81년 총 6천억달러에 이르러 10년새 6배로 불어났는데 중남미 제국들의 채무액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따라서 80년대 말경엔 중남미 각국에서 외국 채권자와 투자자에게 원리금상환과 이익배당금으로 흘러나간 돈이무려 연 2천억달러를 넘어설 지경이었다.만성적 경기침체,대량실업,실질임금 감소로 점철된 80년대는 상실의 시대였으며 당연히 90년대 초 라틴아메리카의 1인당 평균소득은 10년 전 수준을 밑돈 형편이었다. 그런 라틴아메리카의 경제가 견실하게 되살아나는 중이다.브라질은 올 상반기까지만 해도 월평균 인플레 증가율이 30∼50%에 달했지만 지난 7월 새 통화단위와 함께 강력한 통화안정정책을 실시한 후 월 인플레가 1∼3%로 낮아졌다.지난해 1년새 물가가 10배 가까이 치솟은 브라질을 제외하고 경제 규모에 따른 가중치를 부여할 경우,올 라틴아메리카의 물가는 12% 오를 것으로 전망된다. 경제성장도 만만찮게 이루어지고 있다.중남미 전지역은 올해 3% 이상의 성장률을 4년 연속 기록할 것이 틀림없다.특히 페루는 12%를 웃돌 것이며 아르헨티나는 6% 성장을 장담한다.멕시코의 세디요 새 대통령은 내년 4% 성장을 목표로 하고있고 브라질도 안정화시책이 자리잡히면 현재의 갑절인 7∼8% 경제성장이 확실시된다. ○브라질도 흑자 재정 한때 세계경제의 문제아였던 라틴아메리카가 「제3세계답지 않게」 이처럼 낮은 인플레율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경제성장을 이룩할 수 있는 것은 긴축재정·무역자유화·민영화로 연결되는 개혁시책을 끈기있게 추진한 결과이다.칠레와 콜롬비아가 이같은 개혁의 선두주자이며 브라질,베네수엘라,우루과이,에콰도르 등이 다소 뒤쳐져 있다. 멕시코는 87년 당시 중앙정부의 재정적자 누계가 GDP의 15%에 달했으나 91년부터 긴축예산으로 흑자재정을 달성,적자누계를 반으로 줄였다.아르헨티나가 지난해 이를 뒤따랐으며 브라질도 올해 흑자재정 기록을 세울 것으로 기대된다. 자국산업 과보호와 수입품 고율관세 경향도 뚜렷이 퇴색했다.93년 현재 전지역의 평균관세가 12%로 2년 전의 26%보다 크게 낮아졌다.상호간 교역량 역시 급속히 늘어나 주요 11개국 사이의 무역이 89년 이후 배 이상 불어난 데 이어 전지역간 교역은 83년 70억달러에서 현재 2백60억달러로 급증했다. ○민영화 꾸준히 진행 정부재원을 풍부히 하고 경영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국영기업 매각정책은 중남미 개혁의기치로서 지금도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칠레와 멕시코는 거의 대부분의 국영기업을 민간에 팔았으며 아르헨티나는 원전,우체국,조폐공사,석유화학사 등 마지막 남은 정부기업마저 내년 안에 완전 매각할 계획이다. 해외자본 유입만큼 라틴아메리카의 달라진 모습과 높아진 위상을 반증하는 실례도 없을 것이다.국제채무 상환포기선언의 불명예와 그에따른 외국자본 단절로 압축되는 중남미의 「외채위기」는 4천9백억달러의 외채상존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거의 과거지사로 여겨진다.지난 90년부터 93년까지 라틴아메리카로 흘러온 해외자본의 순액은 1천7백억달러를 웃돌 뿐 아니라 외채적 성격이 짙은 상업차관은 단 5%에 불과하고 각국 유망산업과 기업에 대한 직·간접 투자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아르헨/“옛 영화 되찾자” 힘찬 발진/메넴정부,무역·외환정책 획기적 전환/90∼94년 30%이상 성장… 세계3위 기록 아르헨티나의 근현대사는 「아르헨티나의 역설」이라는 조어를 낳았다. 20세기초 풍부한 광물자원과 농장을 바탕으로 1인당 국민소득 세계 6위,무역규모 세계 10위의 아르헨티나가 근 1백년만에 완전히 피폐한 상태로 전락한 것을 비아냥거리는 말이었다.그러나 1990년대 들어 급속하게 추진된 아르헨티나의 개혁작업으로 「군화발 자객」「고인플레」「보호주의」등의 오명과 함께 이같은 역설도 이젠 실효성을 잃을 것같다. 수도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시민들은 다시 소비열을 느끼기 시작했고 은행들은 달러화시세를 전광판으로 즉시 게시한다.과거 정부와 가격인상을 위한 협의에만 능했던 기업인들은 마켓팅 방법을 논의하는데 여념이 없다. 이 모든 변화가 89년 「메시아」처럼 등장한 메넴정부가 이룩한 공적이다.그의 개혁정책을 떠받치는 3대지주는 수입관세인하와 비관세장벽 철폐로 시작된 경쟁도입이 그 하나요,연간 운영비로 수십억달러를 삼키던 공기업 민영화가 둘째다.메넴정부는 우편,항공,전기 등의 민영화로 2백40억달러를 조달했다.민영화는 외국인투자 러시를 촉발해 90∼93년 사이 무려 2백45억달러의 외자를 거두어 들였다. 세번째는「메네노믹스」로 불리는 외환정책이다.하버드대 경제학자 출신인 카발로를 재무장관으로 등용,자국통화인 페소와 달러의 교환비율을 1대 1로 정한 이른바 「태환 플랜」이 그것이다. 이와같은 개혁정책 덕분에 아르헨티나는 90년 이후 4년동안 30% 이상의 경제성장을 달성,중국,태국에 이어 세계 제3위의 놀라운 성장률을 기록했다.80년대 연평균 4백%를 유지하다 90년 연간 2만%까지 치솟았던 인플레도 수그러들어 올해엔 4%를 맴돌고 있다.노동생산성도 91년 이후 42%나 증가해 메넴은 다른 나라가 20년 걸릴 일을 아르헨티나는 5년만에 해치웠다며 자신에 차 있다. 그는 아르헨티나를 개발도상국으로 보는 시각을 단호히 거부한다.아르헨티나는 「회복하는」국가라는 것이다.물론 이같은 회복은 엄청난 고통을 수반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30년대 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을 끄떡없이 견뎌냈던 아르헨티나는 49년부터 74년까지 집권한 후안 페론 정권 하에서 불구가 됐었다. 무모한 반미외교정책으로 국제적인 고립을 자초했고 국내의 계급투쟁으로 국민은 사분오열됐다.기업국유화와 이를 보호하기 위한 관세장벽은 국고를 탕진했다. 또 70년대초 군부와 좌익반군간에 벌어진 「더러운 전쟁」과 뒤이은 군부 쿠데타는 아르헨티나를 부패와 초고인플레 아래 허덕이게 했고 급기야 80년대 5백억달러 재산의 해외도피를 몰고왔다. 메넴정부의 「기적」은 암울한 과거를 딛고 일어섰다는 점에서 높이 살만하다. 다만 아직 부패척결과 공공부문의 개혁이 과제로 남아있고 폐소화의 평가절상으로 올해 60억달러까지 무역적자폭이 확대될 전망이어서 외환정책에 대한 요구도 만만치 않다.게다가 GDP의 17.6%에 불과한 저축률은 기업의 자본부족을 부채질하고 있어 메넴의 승리는 시기상조라는 반론도 무시할 수만은 없다.미완의 혁명인 메네미즘이 「기적」이란 이름값을 할지 국제적 관심사이다.
  • 베제크리크 천불동/허세욱(서역 문화기행:4)

    ◎화염산기슭 석굴 83개… 6세기 불교유적/위구르족 왕가 사원… 당시 생활상 벽화로 남겨/서유기의 무대… 삼장법사­손오공 등 3제자의 조각상 곳곳에 투루판은 그 동서를 관통하는 국도 312번에 놓여있다.그것은 신강의 최서단인 이닝(이령)에서 황하와 황해가 만나는 최동단의 상하이(상해)까지 장장 5천㎞,어쩌면 미국의 동서를 횡단하는 80번 하이웨이에 상당하다. 투루판에서 312번국도를 타고 동쪽으로 40㎞쯤 달렸을 때,갑자기 그 왼편으로 빨간 바위산을 만나는데 그 형상은 얼핏 한국전쟁당시 철의 삼각지,아이스크림고지를 방불케하는 타원형으로 마치 험상궂도록 쪼글쪼글한 노인의 얼굴 혹은,여름날 여인의 풍덩한 주름 치마같았다.한 포기의 폴도 없이 세로의 주름살은 차라리 빨간 폭포가 쏟아지는 형상이었다. 그것이 바로 화염산의 남쪽 기슭이었다.그 맹렬한 화염의 섭곡을 보자 놀랍고 반가웠다.그 명성을 들은지 너무 오래라서 그렇다.당나라의 고승 현장(602∼664)의 「대당서역기」를 비롯,당나라의 유명한 변새시인 잠참(715∼770)이 이곳에서 벼슬하는 동안 썼던 경화산」,「화산운가송별」등의 명작,그리고 중국4대기서로 꼽히는 오승은(1500?∼1582?)의 「서유기」등에서 익히 화염산,그 「팔백리에 걸친 불길」을 들어 왔었다. ○홍산에 풀한포기 안나 화염산은 「홍산」혹은 「화산」으로 불렸다.그보다 위구르말로는 「쿠즈로다고」즉 홍산이란 뜻이다.그것은 지구상에서 두번째로 넓고 낮은 동서 1백20㎞,남북 60㎞의 투루판분지에 동서 98㎞의 길이에 남북 9㎞의 폭으로 가장 높은 곳이라야 8백32m,평균 높이는 고작 5백m다.하지만 해발 이하의 분지라서 그 높이는 상당했다.연간 강우량이 겨우 16㎜의 초건조지역에 평균 기온이 섭씨38도 최고 기온이 49도나 된다.그래서 암석표면의 온도는 무려 80도를 넘는다.거기다 지층에 매장된 무진장의 석탄과 석탄에서 배출되는 가스로부터 폭발 연소도 적지 않다고 하니 「서유기」에 묘사한 대로 「화두 불길이 천길의 높이」란 형용도 결코 터무니 없는 말이 아니었다. 필자가 화염산을 처음 만났을 때의 충격은 지금부터 1천2백45년전인 기원749년,이곳에 당도했던 잠참의 「화산을 지나며」란 시에 잘 나타났다. 「화산금시견, 돌올포창동. 적염소로운, 염기증색공. 불지음양탄, 하독연차중? 아래엄동시, 산하다염풍. 인마주한류, 열지조화공」 (처음 만난 화염산은, 포창 동녘에 우뚝하여라. 화염은 오랑캐의 구름을 불지르고, 증기는 변방의 하늘을 찜질한다. 음양의 숯이, 어찌 여기서만 훨훨 타오르는가? 엄동설한에도 산밑엔 삼복의 열풍이. 사람도 말도 땀을 뻘뻘 흘리거늘, 누가 알랴? 자연의 조화를) 화염산 섭곡이 끝나는 승금구에서 312번 국도를 작별하고 좌회전하자 이윽고 빨간협곡이 열리면서 차는 화염산 북록을 휘돌았다.그 협곡의 정면에 보이는 둥근 모자모양의 홍산이 피라미드의 형세로 성큼 다가섰다.그것이 화염산의 주봉이었는데 주봉은 충격적 이라기보다 다소곳한 곡선으로 다만 풀 한 포기 없을 뿐 여느 동리앞을 지키는 안산의 크기였다.거기서 삼장의 길이 막히고 손오공이 파초의 부채로 재주를 부렸다는 곳이다. ○아래쪽 설수도 흘러 그 주봉아래로 기원6세기 고창왕국씨때부터 9세기까지 3세기에 걸쳐 위구르족들 왕가의 사원으로 건설한 석굴의 촌락 「베제크리크 천불동」이 있고 천불동아래로는 파란 설수가 콸콸 흐르는 목두구.그리고 천불동 입구 편편한 산기슭엔 최근 「서주천성원」이라는 작은 전시장을 개설 해 놓았다.그 안에는 「서유기」의 주연으로 삼장법사를 비롯,손오공·저팔계등을 조소한 외로도 「팔십일난」을 도해한 동굴,동굴밖 언덕위로는 잠참의 입상과 그의 대표작인 「화산운가송별」을 새긴 시비가 있었다.그 시비에 새겨진 첫 절은 이러했다. 「화산돌올적정구, 화산오월화운후. 수운만산응미개, 비조천리불감래」 화산이 우뚝 적정 어귀에 섰거늘, 오월이라 불꽃 구름 뭉게 뭉게. 불꽃 구름 엉긴 채 풀리지 않거늘, 천리길 나는 새도 얼씬할 수 없네) 필자가 찾은 때는 다행히 쾌청한 9월중순 이어서 인지 불꽃구름커녕 흰구름 한 조각도 보이지 않는 진하디 진한 쪽빛 하늘 뿐이었다.그 쪽빛에 적갈의 산빛,골짜기와 석굴,길가에 굴러가는 돌멩이조차 일색으로 빨갰다. 그런데 그토록 숨 막힌 빨간 모랫벌과협곡에도 서원의 의지는 굴을 파고 예술의 꽃을 피웠었다.바로 베제크리크 천불동이 그것이다. 화염산 주봉 동쪽 기슭엔 광장이 닦여 있었다.그 왼편엔 「서유기」의 일사삼도의 조상을 세웠는데 초입의 서주천성원에서 보았던 그것보다 규모가 큰데다 훨씬 정교하고 생동감이 있었다.그 바른편 계단으로 내려가면 황갈색의 가파른 벼랑이 무르토크강(목두구))을 굽어 보고 있었다.과연 「베제크리크」란 지명이 「산 허리」라는 위구르말을 딸만했다. 기록상으로 석굴의 수는 83개라지만 눈에 보이는 것은 50여개이며 그중 벽화를 소유했던 것이 40여개요 벽화의 총면적은 1천2백㎡라고.그것들은 열차의 창을 방불케 일렬횡대로 늘어서 있었고,그 내부는 대체로 석굴의 길이 20m에 5m의 폭과 5m의 높이의 장방형,거기다 천장은 동그란 궁륭식이라 쿠차의 키질,돈황의 막고굴에 비해 훨씬 넓고 시원했다. ○일부 벽화 손실 아쉬워 기원6세기부터 13세기까지 지금 위구르족의 조선인 고창왕국씨들의 왕가 사원을 비롯,당시 불가의 승려·신도들의 승방,고승을 기리는은굴,혹은 그들이 좌선하던 비가라굴로 쓰였었다.당대의 문헌인 「서주도경」에 고창지역 불교의 승지로 소개한 「영융굴사」가 바로 베제크리크 천불동인 것이다. 여기 벽화는 비록 석가모니 전생의 사적을 선양하는 본생고사를 비롯,서원도·경변도·공양상·인연고사등 불가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지만 거기에 등장하는 왕공 귀족과 공양 신도들의 복식·가옥·거마·기악등을 통해 당시 불교를 신앙하던 회골사람들의 생생한 생활과 문화를 볼수 있다는 점에서 특기할만했다. 특히 33호 석굴의 「왕자거애도」에 그려진 여러나라 왕자의 각기 다른 모습과 표정은 마치 오늘날 정상들의 모임을 발불케했고,39호 석굴의 커다란 공양 보살의 풍윤한 얼굴과 굵직한 청화의 무늬,그리고 31호 석굴의 설법도에 그려진 보살의 성장과 복식등은 생생한 역사와 문화가 묻혀 있음을 직감케 했다. 그러나 20호 석굴과 27호 석굴에서 만난 복사물의 대체와 훼손된 잔화를 대하면서 허탈과 울분을 참을 수 없었다.특히 20호 석굴의 서원도,회골국왕과 왕후의 형상은 10세기 당시 회골국 복식을 알수있는 증거임에도 절취된 채 지금 영인된 사진만 걸려 있음은 27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필자가 참관한 9호,37호등 석굴에서도 불상의 눈이 뭉개지거나 벽면을 도려낸 칼날의 선이 남아 여기 저기서 수난의 흔적은 완연했다. 베제크리크의 수난은 크게 두번 있었다.13세기말,몽골의 말굽 아래 처음 망가졌고,그를 전후해서 이슬람교가 흥성하면서 불교의 석굴은 쇠락을 거듭하였다.또 한번은 금세기초인 1902년,독일의 그륀베델과 로코크 등이 네차례나 답사를 빙자한 예술품의 절취가 있었다. 그 속에는 20호,27호 석굴의 것 말고도 회골귀족과 몽골인들의 복식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공양도」와 회골문자가 들어 있는 「본생고사도」등이 절취당한 것은 통석할 일이다.더구나 그중 베를린 박물관으로 납치되었던 벽화 일부가 2차대전의 전화에 소실되었다니 서역의 찬란했던 회골문화의 운명도 꽤나 기구한 것이었다.
  • 새해 광복 50년… 어떻게 맞아야 하나/특별대담

    ◎민족역량 이젠 통일에 모으자/일제 36년 원망에 너무 긴 세월 보내/민주정치·경제발전 성취… 우리 실상 재점검을 광복 50주년이 내년으로 다가왔다.지난 반세기에 우리나라는 세계의 주목을 받을 만큼 정치·경제·사회·문화적 역량을 높여왔다.장년한국의 자랑스러운 모습 뒤에는 급속한 발전의 그늘에서 파생한 문제점 또한 없지 않다.서울신문은 창간 49주년을 맞아 다가온 광복 50주년의 역사적 의미를 짚어보고 아직도 남아 있는 식민잔재의 청산과 성숙한 대일관계의 방향을 모색하는 한편 21세기 바람직한 한국의 모습을 전망하는 대담을 마련했다. ▲이만열교수=광복 50년은 일제통치 36년만을 원망하기엔 너무 긴 시간이지요.기독교계에선 50주년을 희년이라고 하는데 광복 반세기는 우리 민족사 측면에서도 뚜렷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신용하교수=일종의 성년을 넘어섰다고 볼 수 있지요.따라서 광복당시의 상황을 다시 짚어보면서 지난 50년간의 발자취를 검토,성과를 음미·반성해볼 때입니다.지난 시절의 검토와 반성을 통해우리의 현위치를 정확히 점검하고 21세기를 구체적으로 전망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됩니다. ▲이교수=역사학도의 입장에서 볼 때 지난 50년은 민족사에서 3가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첫째 최초의 근대화국가를 성립,발전시켰고 둘째 봉건적인 사대관계와 식민지시대를 청산하고 새로운 자주국가의 단계로 진입했다는 점입니다.셋째는 과거 국제관계에서 중국과의 관계 이외는 거의 폐쇄적이다가 지난 50년간은 세계사에 개방적으로 진출하여 이제는 세계사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는 점입니다. ○50년발전상 괄목 ▲신교수=많은 일본인 학자들은 광복후 50년간의 우리의 근·현대화 성과를 일제 식민지정책의 역사적 산물로 주장하고 있지만 터무니없고 황당무계한 억지이지요.일본이 36년간의 식민통치에서 정치적으로는 우리의 주권을 빼앗아 소멸시켰고 경제적으로는 한국인의 산업발전을 극도로 억압하면서 반봉건적 지주제도를 적극 엄호했으며 사회적으로는 한국인은 어떠한 시민권도 갖지 못한 것이 사실이니일제의 식민지정책은 한국의 근대화를 저극 저지했습니다. ▲이교수=성과측면에서 볼 때 무엇보다도 문민정부의 출범이란 정치적 업적을 달성했고 제3세계에 대한 원조등 경제적인 성장과 함께 자유·평등권 신장등 사회·교육및 문화적 성과가 괄목했지요. ▲신교수=그중에서도 「건국」을 그 시초라고 볼 수 있습니다.당시 우리의 건국은 민주공화국체제의 출발을 의미합니다.한국전쟁으로 타격을 받고 61년 군사정변이후 오랫동안의 군사통치와 독재의 양상을 띠었지만 93년 문민정부 출범으로 정치적으론 일단 민주체제를 확립했다고 보여집니다.경제적으로도 1인당 국민소득이 62년 82달러에서 지난 연말 8천달러에 육박한 수준이고 보면 그간 한국의 경제적 성취는 인류사에 기록할만한 업적중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물론 문제점도 많았지만 말입니다. ▲이교수=그처럼 괄목할만한 업적을 성취한 동인은 여러가지가 있지요.무엇보다도 저는 36년간의 식민통치와 동족상잔의 6·25전쟁등 민족적 비극을 자기발전의 기회로 승화시킬 수 있는 우리 민족의 지혜와 변통성을 꼽고 싶습니다.전통사회와 식민통치시절,그리고 해방이후에 일관되게 나타난 교육열도 큰 역할을 했고요.여기에 근면성이 뒷받침했다고 볼 수 있지요. ▲신교수=사회·문화측면에서 각계각층이 모든 사회활동의 전면에 나섰다는 점과 여성의 사회참여도 적지 않은 부분입니다.이젠 정치민주화에 사회민주화가 병행되지 않으면 국민의 합의를 이루어내지 못하게끔 됐다는 점에서 한국민주주의는 낙관적으로 예견되기도 합니다. ○사회도덕 큰 위기 ▲이교수=흔히 문화발전의 지표로 간주되는 출판만 보더라도 지금은 연 2만6천여종의 책이 출판되면서 아시아권에서 절대·상대적으로 일본과 비슷하거나 다음을 차지하고 있는 수준이니까요.그럼에도 반성할 부분이 많습니다.과거미청산문제 말고도 빈부격차 심화나 지역·집단이기주의의 극성등 해결할 문제가 산적해 있다는 말입니다. ▲신교수=건국직후 친일파척결을 못한 점은 가장 큰 과오라고 할 수 있지요.친일파의 해악은 자유당 집권시절 만연한 부정부패 말고도 이후 정·관계에 진출해대일자주외교를 방해한 점이나 민족이익과 자주성·민족정기확립에서 결정적인 저해요인으로 지적되고 있는 실정 아닙니까. ▲이교수=반민특위 조사대상 6백80여명 가운데 집행유예 5명,실형 7명,공민권제한 18명등 처벌대상자가 30명에 머문 것은 식민잔재청산노력이 전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4년밖에 안된 나치점령에 대해 프랑스는 사형과 수감 2천여명,공직제한 2만여명 수준이었습니다. ▲신교수=경제적으로 한국경제의 대일종속도는 심각한 수준입니다.미국등 여타지역에서 벌어들여 일본에 쏟아붓는 실정이니까요.국내적으로도 중소기업의 취약성과 농업대책의 소극성,실직자나 극빈자등 최저변층에 대한 사회복지대책의 빈약함이 피부에 와닿을 정도입니다. ▲이교수=맞습니다.사회통합이 큰 문제로 지적되고 있지요.거시적으로 볼 때 통일문제까지가 당면문제임에 틀림없구요.지방색과 집단이기주의 만연,심지어는 종교간 갈등까지 대두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신교수=현재 사회적으로 군데군데 보기 흉한 반점이 생겨난 데는 고도발전에 기생하여 나온 불로소득층이 가장 큰 원인이지요.이 과정에서 정당한 절차와 규범이 무시된 채 일확천금등 일시적인 성취욕구와 군사문화가 혼합돼 불로소득층이 생겨났고 이들이 생산적인 생활양식을 침범한 채 퇴폐문화등 모든 문제를 일으켜온 셈입니다. ○일본알아야 극일 ▲이교수=대가족주의에서 서양문화 유입에 따른 핵가족주의로의 이행도 이런 부작용과 연결돼 있지 않을까요.이것은 바로 우리사회의 공동체의식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서양문화를 받아들이는 데는 제도와 함께 정직·근면·절약등 그 정신도 제대로 수용해야 한다고 봅니다. ▲신교수=과학기술지식등 고급문화는 배우되 퇴폐·향락적인 측면은 심각하게 걸러내는 문화정책을 적극 수립해야 할 때입니다. ▲이교수=흔히 대일관계에서 「극일」을 거론하지만 일본의 부모들이 자녀교육에서 가장 강조하는 「정직」은 우리도 배워야 할 덕목입니다.정직은 정밀공업등의 각종 산업활동에서 양심의 척도로서 제품을 생산토록 합니다.그런 점에서 최근 성수대교참사등은 시사하는 바가 크지요.▲신교수=우리 사회에서 사회적 도덕과 규범이 도전받고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위기임엔 틀림없습니다.도덕과 규범에 관한 감각이 마비된 상태에서 사회교육을 철저히 강화할 필요가 있음은 당연하지요.더욱이 일본이 아시아를 자국의 철저한 영향권아래 두려는 「신대동아공영권」구상을 공공연하게 들먹이는 분위기에서 정신을 바짝 가다듬어야 할 때입니다.일본의 정책을 면밀하게 관찰하면서 말려들지 않는 국가·대외정책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국제사회 흐름 능동대응 기틀 마련 ▲이교수=최근 활발히 논의중인 일본대중문화개방도 같은 맥락에서 숙고할 필요성이 있겠지요.일본은 「신대동아공영권」구상을 순탄하게 실행하려는 차원에서 정서적으로 거부감이 적고 접근하기에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 할 대중문화개방을 들이밀고 있다는 인상입니다. ▲신교수=일본은 대중문화개방을 요구하면서 보편적인 관계를 들지만 한·일 양국은 결코 보편적인 관계가 아닌 특수한 관계라는 점이 문제입니다. ▲이교수=특수관계라는것은 무엇보다도 양국간에 식민지시대의 청산이 안됐고 재일한국인차별대우나 문화재반환등 양국간의 특수한 현안처리가 답보상태에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예겠지요.따라서 한·일관계는 아직도 세계사적인 보편적 원리를 적용할 단계가 아니라는 것이지요.비단 대일감정의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일본대중문화의 속성상 개방이후의 파급효과와 대책은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사항입니다. ▲신교수=일본의 호혜주장에도 문제가 있지요.호혜는 양쪽이 모두 헤택을 본다는 뜻이지만 시장성을 앞세워 경제적인 침투를 염두에 둔 일본대중문화개방압력은 호혜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이것 말고도 한 영화에서 칼로 사람을 30∼50명씩 참혹하게 죽이는 사무라이·야쿠자영화는 현실적으로 모방가능한 위험성을 동반하여 어쩌면 우리 청소년교육을 송두리째 망칠 우려가 짙지요. ▲이교수=문제는 일본을 철저하게 알아내려는 노력입니다.1876년 강화도조약 당시 통상조약에서 우리가 핵심조항인 치외법권과 관세권에 문외한인 채 일방적으로 당한 것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일본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손해가 적지 않은 만큼 일본의 핵심을 철저하게 파악해내려는 노력을 배가해야 합니다.정서적인 거부감을 이유로 「일본탐구」를 외면하거나 게을리해서는 안됩니다. ▲신교수=일본문화개방만 하더라도 일본정부의 숨겨진 의도와 정책을 충분히 검토끝에 추진중이냐 하는 데는 회의적이지요.진정한 의미의 자주독립과 선진대열 합류,남북통일등 현재 추진중인 정책은 계속 추진하되 실속 있는 실상점검과 대책마련이 선행돼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이교수=지난 50년간 민족적 역량이 커진 만큼 대일관계를 포함해 세계를 보는 우리의 시각도 변화·성숙해야 합니다.우리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한 민족사적인 과제로서 민족통일의 문제가 있습니다.분단은 우리 세대가 후손에게 남겨주어서는 안될 것입니다.통일문제와 관련,정부가 취해온 창구단일화의 논리는 지양해야 합니다.우리가 성장한 만큼 지금부터는 제3세계와 약소국에 대한 적극적인 원조등 세계에 대한 우리의 책임도 지혜롭게 감당해야 합니다.21세기 한국은 우리와 이웃과 세계를 다같이 풍요롭게 하는 데에 공헌하는 진정한 문화국가를 이룩하기 위해 더욱 전진해야 한다고 봅니다.
  • 베니스 전통문화 상품(유럽문화산업 현장:하)

    ◎유리세공 1천년동안 세계 제일/무라노섬 전체가 수공업형태 유리세공공장/가면 3백년전과 같은방법으로 수백종 제작/스테인드글라스·모자이크세공 유럽 각국 궁전·성당 장식 인구 20여만명의 베니스시에는 해마다 3백60여만명의 외국인 관광객들이 몰려든다.하루 평균 1만여명의 관광객들이 이 도시로 들어오는 셈인데 한사람이 3일만 묵어도 연인원은 연간 1천만명이 넘게된다.작은 도시규모에 비해 엄청나개 많은 관광객들을 끌어 들이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연간 관광객이 3백만명을 조금넘는 것과 비교하면 베니스가 얼마나 대단한 관광도시인가를 알 수 있다. 관광도시 베니스의 명성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서기 4백50년에 건설된 베니스는 1천5백년동안 한번도 전쟁이나 약탈 혹은 화재로 문화재가 손상되지 않고 원형대로 남아 있는 행운의 도시다.베니스의 상인들은 무역으로 돈을 벌어 아름다운 교회와 궁전을 짓고 티치아노 벨리니 틴토레토 지오네등의 거장들을 동원해서 그림을 그리고 조각을 해 도시 전체를 미술관으로 만들었다.그 결과 베니스는 13세기에 이미 호텔을 전담하는 특수 경찰이 존재할 만큼 관광 선진도시가 됐다. 그렇다고 베니스가 과거의 건축물과 미술품 만으로 관광객을 유혹하는 것은 아니다.관광객을 불러 들이기 위해 베니스 시당국은 다채로운 문화행사를 기획하여 개최하고 있다.부활절축제와 사육제·곤돌라대회·베니스 비엔날레와 영화제등이 그 대표적인 행사다.7월에는 심지어 흑사병의 종식을 기념하는 축제까지 열린다. 축제 때에는 매일 10만여명의 인파가 몰려들어 나폴레옹이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응접실』이라고 감탄한 산 마르코 광장을 가득 메운다. 그 인파의 대부분은 산 마르코 광장의 비둘기와 광장주변의 미술관을 둘러 보고 유명한 베니스 운하와 곤돌라의 낭만을 즐기고 돌아 가지만 눈이 밝은 관광객들은 오래된 운하 주변과 인근 섬들에서 숙련된 장인들이 만들어 내는 전통적인 문화상품들을 찾는다. 스테인드 글라스와 유리세공,베네치안 블라인드,모자이크 세공,도금,가면,벨벳,레이스등이 관광도시 베니스를 더욱 빛나게 하는 보석같은 상품들이다.그중에서도 유리세공과 스테인드 글라스는 중세이후부터 1천년 동안 세계제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산 마르코광장에서 수상버스를 타고 20여분쯤 달리면 유리세공으로 유명한 무라노섬이 나온다.섬 전체가 유리세공 공장인 무라노섬을 찾았을 때 장인들은 11월의 차가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짧은 반팔 셔츠를 입고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그들은 뜨거운 용광로가 있는 건물에서 유리를 불에 녹여 입으로 부는 작업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무라노섬의 유리세공은 전통적인 수공업 형태로 이루어 지고 있다. 건물 2층으로 올라 가자 이 공장에서 만든 작품을 진열한 대형 전시실이 있었다.찬란하게 채색된 유리잔에 햇볕이 들자 신비한 광채를 낸다.작은 유리 병과 컵 6개가 2백∼3백달러를 호가한다. 『우리가 만든 샹들리에가 영국과 러시아·프랑스·스페인황실에 걸려 있습니다.유럽 각국의 궁전치고 이곳에서 만든 거울이 걸리지 않은곳은 없을 겁니다』 그들의 자부심은 대단하다.베니스 당국은 무라노섬 장인들의 긍지를 인정하여 독자적인 의회를 구성하는 것을 허용해주고 화폐주조권까지 주었다. 무라노섬장인들은 유리세공기술을 외부인에게 누설할 경우 사형에 처할 만큼 제조기술을 비밀리에 전수해왔다.그러나 17세기에는 이 기술이 나폴리로 전해지고 보헤미아까지 건너가서 유럽 전체로 퍼져가게 되었다.베니스의 유리제품도 워낙은 아라비아의 대상들이 중국에서 꽃 병을 가져온 것을 베니스 사람들이 모방해서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공장을 떠날 때 안내원은 기자에게 한국의 대우 힐튼호텔이 이곳에서 1개에 1만달러짜리 대형 샹들리에를 여러개 사갔다고 귀띔해 주었다. 유리세공보다 한단계복잡한 공정을 거치는 것이 모자이크 세공이다. 18 88년에 설립된 안젤로 오르소니사에는 이회사에서 제작한 6천여개의 모자이크 판들이 보관되어있다.오르소니사의 모자이크는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과 방콕 왕실사원의 황금탑과 파리근교 라데팡스의 거대한 분수를 장식하는 데도 사용되었다. 또한 베니스에서 도금과 칠기제작의 명장으로 꼽히는 자니 카발리에르의 작업장에는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 프랑스 전대통령 부인 안­에이몬 지스카르 데스탱이 보내 편지가 자랑스럽게 전시돼 있다.그가 가면에 도금을 해 준데 대해 감사하는 편지다. 49년째 도금 작업을 해 왔다는 자니 카발리에르는 액자를 도금하는 일부터 시작해서 나선형의 조명 스탠드,꼼꼼한 미술품 복원,목상제작에 이르기까지 뛰어난 솜씨를 지닌 것으로 이름이 높다. 베니스의 상점에는 3백여가지가 넘는 가면들이 상품으로 전시돼 있다.이 가면들은 아를레키노(고대 로마의 희극이나 현대판토마임의 어릿광대)와 판탈로네(이탈리아 가면극의 어리석고 빼빼 마른 노인)에서 부터 고양이 피노키오 악어 꽃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베니스의 장인들은 가죽으로 본을 떠서 3백년전과 같은 방법으로 만든 베니스판지로 가면을 제작한다.베니스 가면은 80년대에 베니스 카니발과 연극,베니스 비엔날레와 영화제덕분에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밖에 레이스와 벨벳등 전기 동력 기계를 사용하지않고 만들어진 전통적인 수공예품들이 장인의 숨결과 영혼을 전하면서 문화 상품으로 자리잡고 있는 모습은 참으로 부러웠다.문화산업이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수백년에 걸친 장인들의 땀과 정성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그러한 문화상품이 있기에 관광도시 베니스의 명성이 시들지 않는다는 생각도 들었다.
  • 한·짐바브웨 수교

    한국과 짐바브웨 공화국은 18일 외교관계를 수립했다.우리측의 김진호 주 잠비아 대사와 체게데레 짐바브웨 외무차관은 이날 짐바브웨의 수도인 하라레에서 양국간 대사급 수교의정서에 서명했다. ◎짐바브웨 개황/면적 한반도의 1.5배… 인구 1천만원 18일 우리나라와 외교관계를 수립한 짐바브웨는 흑백분리정책을 실시했던 남아프리카공화국을 상대로 반 남아공 전선을 형성하는등 제3세계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수행해온 국가이다.짐바브웨의 면적은 한반도의 1.7배 정도이며 인구는 약 1천41만명이다.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으며 토착신앙(75%)과 기도교(20%)가 주요종교이다.80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뒤 내각책임제를 거쳐 현재는 대통령중심제를 채택하고 있다.87년 취임한 무가베 대통령은 89년 제1야당인「짐바브웨 아프리카 인민연합 애국전선」을 흡수통합,정치안정을 확보했다.짐바브웨는 아프리카 동남부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을 제외하면 가장 발달된 사회간접자본과 공업력을 보유하고 있는 국가이다.문자해독률도 82%에 이르고 있다.국민총생산은62억달러에 이르며 1인당 국민총생산은 6백20달러 정도다.전 인구의 65%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옥수수 담배 면화 밀등이 주요산물이다.제조업에도 농업다음으로 많은 인구가 종사하며 국내총생산의 24%를 차지하고 있다.금과 크롬,니켈,동,석탄등 풍부한 지하자원이 외화소득의 45%를 차지하며 세계 3대 폭포 가운데 하나인 빅토리아 폭포등 천혜의 관광자원을 보유하고 있다.지난해 우리가 짐바브웨에 차량 철강등 6백8만달러를 수출했으며 목제품,니켈등 3백16만달러의 수입을 기록했다.현대자동차가 엑셀승용차 공장을 설립하는등 우리 기업이 진출이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 중,“APEC외교 성공적” 평가/강택민의 보고르행보 시각

    ◎미·일의 대만접근 경고 「내부문제」 재천명/역내국 공감 얻어… 경제적 입지 대폭 강화 북한핵문제 등으로 국제사회에서 외교적 위상을 다져온 중국은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회의와 이에 앞선 관계국 순방외교를 통해 지역국가들에의 영향력과 자국의 외교적 입지를 더욱 강화했다. 중국은 싱가포르,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 등 아세안 3개국에 대한 강택민 국가주석의 순방외교에서 역내무역자유화 등 APEC의 현안문제에 대해 역내국가들의 지지를 얻어내 이들 국가들과의 유대를 과시했다.중국은 특히 중국의 관세무역일반협정(GATT) 가입과 관련,역내국가들의 동정과 지지를 미국과의 쌍무협상에서 압력수단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한편 중국은 아시아태평양지역의 무역자유화 일정 등 시기 선정과 관련,『무역자유화에는 원칙적으로 찬성하지만 경제발전단계가 다르고 문화적·사회적 입장이 다른 상황에서 일률적인 시기 적용은 곤란하다』고 주장,산업발전단계에 있어 중국과 처지가 같은 동남아 개도국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중심축 역할을 자처했다. 중국은 이와 함께 한반도 문제에 있어서도 북·미 회담 성과에 대한 지지 발언과 한·중 관계 발전이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에 큰 역할을 한다는 점을 상기시키면서 한반도 문제의 중재자로서 입지를 더욱 부각시켰다. 클린턴 미대통령,무라야마 도미이치 일본총리와의 회담에서는 대만과의 외교관계 격상 움직임을 강력히 경고,이들로부터 관계 격상은 없을 것이라는 확답을 얻어냈다.또 대만이 독립을 시도할 때는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전기침 외교부장의 강경발언을 통해 대만의 국제외교무대의 복귀 노력에 제동을 거는 등 대만에 대한 중국 외교의 원칙을 재확인하는 계기로 활용하기도 했다. 특히 이번 회의와 순방외교는 아·태지역의 신질서 구축에 주도적 역할을 하겠다는 중국 외교정책의 방향을 확인할 수 있는 계기였다고 볼 수 있다.중국은 이번에 ▲중국의 성장을 역내 패권을 추구하는 위협세력의 성장이란 의구심으로 바라보는 지역국가들을 안심시키는 「미소외교」 ▲미국·일본과의 경쟁 및 협상을 염두에 둔 주변 지원세력의 확보와 그 세력의 과시라는 「과시외교」 두가지에 초점을 맞추었다. 강택민 주석이 경제발전을 위해 중국은 주변의 안정과 평화가 필요하며 지역관련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할 것이라고 강조한 것도 주변국가들의 의심을 누그러뜨리려는 시도로 해석된다.또 라모스 필리핀대통령과의 회담에서 지역분쟁의 쟁점이 되고 있는 남사군도 문제를 언급,공동개발 방안을 제시하면서 중국의 평화해결 의지를 재천명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선진국과 개도국 사이의 경제적 차이를 줄여나가는 것이 지역의 안정·발전에 긴요하다는 일관된 주장도 제3세계등 주변국의 대변자로서의 위상과 관련된 시도로 볼 수 있다.당기관지 인민일보는 16일 APEC 회의와 관련,1면 머리기사와 1면 사설로 상호간의 격차를 줄이고 합작을 통해 공동번영을 추구하자는 제목의 기사를 실은 것도 이러한 입장의 반영이라고 볼 수 있다.
  • 미 공화당 대권주자들/「경선 레이스」 점화

    ◎그램­스펙터의원 출마선언… 열기 고조/보수파 주도… 돌총무·윌슨주지사 야심 미국 공화당의 차기 대권주자들이 러시를 이룰 전망이다.지난 8일 중간선거에서 대승을 거둔 공화당내에는 벌써부터 오는 96년의 대통령선거를 향해 몸짓을 하는 인사들이 잇달아 나오고 있다. 지난 13일 공화당의 상원 전국위원장을 맡고있는 필 그램 의원(52·텍사스주)에 이어 14일에는 역시 상원의 앨런 스펙터 의원(64·펜실베이니아주)이 당의 대통령후보 지명전에 나설 것임을 완곡히 밝혔다. 스펙터 의원은 이날 필라델피아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자신의 인기를 측정하고 선거자금 모금의 가능성을 탐색하기 위한 「대통령출마 탐색위원회」를 구성하겠다며 연방 선거관리위원회에도 그같은 뜻을 전하겠다고 밝혔다.3선 의원인 그는 내년 3월 지명전에 나설 것임을 공식발표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선거결과에도 드러났듯이 유권자들의 보수회귀 현상이 뚜렷해지고 민주당 클린턴 대통령의 인기가 저조함에 따라 공화당에선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인사들이 지명전에 뛰어들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그램 의원은 곧 연방선관위에 차기 대통령후보로 경쟁할 의사가 있음을 통보할 예정이라고 밝히고 내년 1월부터 선거자금 모금운동을 시작해 3월에는 출마를 공식선언하겠다고 밝혔었다. 부인이 한국계(이민 3세로 그녀의 할아버지는 하와이 사탕수수노무자로 미국에 건너왔음)인 그램 의원은 지난 13일 NBC­TV에 출연,『한가지 문제는 나처럼 싸움을 좋아하고 보수적인 사람이 당선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이 누구보다도 확실한 보수주의자임을 강조했다. 차기 상원의 다수당 원내총무가 될 보브 돌 의원(71·캔자스주)도 역시 지난 일요일 CBS텔레비전의 대담프로에 나와 『원내총무를 하면서도 대통령후보로 나설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해 경선에 참여할 것임을 비친 뒤 내년 2월15일까지는 가부를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돌 의원은 그램 의원이 자기보다 미국의 변화를 더 잘 이끌 것이라고 말한데 대해 『원내지도부에 있지 않은 사람들은 아무렇게나 비판을 잘 할 수 있다』며 은근히 반격했다. 그램의원과 돌 총무는 최근 96년2월 공화당 대통령 지명대회의 첫 예선이 열리는 아이오와주를 각기 방문함으로써 경선채비의 닻을 올렸다. 현재 공화당내에서 차기 대통령후보 지명전에 나설 것으로 예상되는 인물로 이들 3명 이외에 ▲댄 퀘일 전부통령 ▲딕 체니 전국방장관 ▲잭 캠프 전주택장관 ▲제임스 베이커 전국무장관 등의 이름들이 나오고 있다. 특히 체니나 캠프는 2년전 부시 대통령의 퇴임과 함께 현직에서 물러나 순회강연을 통해 자신의 이미지를 구축하는 한편 클린턴 행정부의 정책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다. 이번 중간선거에서 캘리포니아 주지사로 재선된 피트 윌슨 지사도 강력한 경쟁자로 떠오르고 있다.대통령선거인단이 54명이나 되는 캘리포니아의 주지사는 으레 대통령후보로 입에 오르내리나 윌슨 지사는 그 강도가 현격히 다르다는 것이다.윌슨지사의 강점은 샌디에이고 시장,연방 상원의원,주지사 등 경력을 골고루 갖추었다는 점이다. 대통령후보 결정을 위한 공화당의 첫 아이오와 코커서스가 아직도 15개월이나 남아있지만 이번 중간선거로 신보수 물결을 확인한 공화당의 야심가들은 1년 앞서 대통령선거 바람을 지필 것같다.
  • 백제 초기 대형제철로 첫 발굴/길이 2백50㎝·너비 50㎝

    ◎충북진천군서/3세기말∼4세기초 제조 추정 백제초기의 제철기술을 실증하는 대형제철로와 동아시아 최고의 것으로 보이는 사철 제련로가 국내 최초로 발굴되었다. 제철로는 한반도에서 처음 출토된 것이어서 이일대가 고대 철의 주생산지였음이 밝혀지게 됐다. 국립청주박물관 발굴조사단(단장 이영훈)은 지난달 5일부터 조사한 충북 진천군 덕산면 석장리 381번지의 밭 3백여평 일대에서 백제시대의 제철로 4개와 아직 성격이 확인되지 않은 웅덩이 2개를 비롯,삼국시대의 바닥이 둥글고 목이 짧은 형태의 토기와 토기편 등을 대량으로 찾아냈다고 15일 밝혔다. 특히 노안의 길이가 2백50㎝,너비 50㎝규모인 대형제철로 제4­1호 노와 제철다음의 단계에 필요했던 것으로 보이는 노안의 길이 1백10㎝,너비 50㎝규모의 제4­2호 노는 길이 6백40㎝,너비 600㎝정도의 방형에 가까운 구덩이에서 함께 발견되었다. 평면 세장 방형 상형로 추정되는 제4­1호는 현재 약 20㎝ 높이의 노벽과 슬래그를 배출하는데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약 1백50㎝ 길이의 배재구가확인되었고 또 노주변의 구덩이 바닥에서는 철광석도 함께 출토되었다. 이와 함께 길이 4백㎝,너비 3백80㎝,길이 40∼10㎝의 구덩이에서 확인된 평면타원형의 사철제련로는 거의 파괴된채 가로 40㎝,세로 50㎝정도의 바닥부문만 남아 있었다. 구덩이의 북서쪽 일부에서 사철을 쌓아 둔 것이 확인되었고 또 벽면에서는 제련로의 벽체편,송풍관편 등이 발견되었다. 또 가로 1백㎝,세로 2백㎝ 범위에서 아직 평면형태가 정확하게 드러나지 않은 제철로와 노의 안지름이 1백15∼1백20㎝정도의 원형로 등이 함께 나왔다. 발굴조사단은 『제4­1호 제철로는 국내에서 최초로 발견된 초대형 고대제철로의 실례로서 형태상 일본의 고대 제철로인 상형로의 조형으로 추정되어 백제의 제철기술이 일본으로 전해졌음을 시사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또 『이번에 확인된 사철제련로는 동아시아지역에서 발굴된 최고의 것으로 볼 수 있다』며 『이번 유적의 연대는 주변에서 나온 토기 등으로 보아 대체로 3세기말에서 4세기초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 찰스/카밀라/밀애­결별­재회 숨바꼭질

    ◎영 선데이타임스 연재 「웨일스공」/찰스/“갈구해온 애정·이해심 얻었다”/카밀라/런던교외의 집 보도진에 포위 곧 출간될 찰스의 전기 「웨일스공」(영국 왕세자는 전통적으로 웨일스공으로 봉해짐)의 내용을 요약연재중인 영국의 선데이 타임스는 『찰스가 해군장교로 복무하던 지난 72년(당시 23세) 카밀라라는 처녀를 처음 만나 한눈에 반해 사랑에 빠져들었다』고 23일자로 보도했다. 찰스는 그때 한살 위인 카밀라를 만나 반년쯤 교제했으나 그가 8개월간 함상근무를 하는동안 카밀라가 옛날 청혼자였던 앤드루 파커 볼즈(54·현 육군준장)와 결혼하자 둘의 관계는 멀어지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이들은 70년대말 재회,찰스가 81년 다이애나와 결혼하기 직전까지 관계를 가졌으며 찰스가 다이애너와 별거에 들어간 86년말 또는 87년초이후 또다시 「옛사랑」을 불태웠다. 저자인 조나단 딤블비(방송인)는 『그들이 서로 사랑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면서 『왕자는 늘 갈구해왔던 애정과 이해심,지속적인 사랑을 카밀라에게서 찾아냈다』고 말했다. 딤블비가 찰스와의 장시간 인터뷰및 그의 일기와 수천장의 편지 등을 토대로 6백쪽분량으로 쓴 공식 전기인 이 책의 내용이 알려지기 시작하자 런던 남서쪽방향으로 자동차거리로 40분 떨어진 피크위크마을의 카밀라집은 보도진들로 완전 포위됐다. 일이 이쯤되자 카밀라가 집에서 마구간까지 가는 동안에도 남편 앤드루와 아들 톰이 보도진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호위에 나서는 지경이 됐다. 그녀 역시 한마디도 입밖에 내지 않았다.가십 칼럼니스트 니겔 뎀프스터에 의하면 카밀라는 찰스에게 둘사이의 일을 발설하지말도록 부탁했었다고 한다.사랑의 비밀은 이번에도 남자가 깼다. 왕실의 사생활을 추적해온 사람들의 대부분은 이번의 전기는 다이애나가 지난92년 여름 자신의 불행한 결혼생활을 작가 앤드루 모튼으로 하여금 책으로 펴냈던 데 대한 복수인 것으로 생각하고있다. 모튼의 책때문에 둘의 관계가 심상치않자 엘리자베드2세 여왕은 두사람의 한국방문을 적극 주선했으나 공식석상에 나타난 그들의 관계는 무척 불행해 보였다. 92년12월 별거에 들어가면서 다이애나가 두아들 윌리엄과 해리를 만나지도 못하도록 하자 찰스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정신적 고통이 엄청나다.지금까지 배워온대로 의무를 다하겠다.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두렵다』고 말했다. 영국왕실의 사생활문제가 계속 도마위에 올려지면서 일부 언론이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노동당의원의 44%가 장래에 왕정이 공화정으로 대체돼야한다고 응답했으며 성공회신부들은 38%가 이혼을 해야한다,31%가 형식상부부로 남아있어야한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영국인들사이에서 군주제를 유지해야한다는 의견이 우세해 노동당은 왕정이 지속돼야 한다는 성명을 서둘러 발표하기도했다.
  • 콜로세움(세계의 명소 걸작 건축감상:2)

    ◎고대로마 검투장… 1900년간 “우뚝”/역동성 넘치는 둘레 6백m 원형의 4층/각층마다 80개의 아케이드 구조물 방사상 배열… 아이디어 돋보여 고대 로마제국(BC 8세기∼AD 9세기)의 유적에서 느끼는 간격은 2천여년에 가까운 시간만이 아니다. 본래의 모습에 흠이 가고 용도도 바뀌고,어떤 곳은 폐허로 변해 옛모습을 되살리기 어렵고 당시의 사회상도 쉽게 상상되지 않는다.다만 당시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통해 가늠할 수 있을 뿐이다. 영화 「스파르타쿠스」에서 노예 검투사 스파르타쿠스(커크 더글러스역)와 바라바의 검투 장면은 그 처절함에 전율을 느끼게 한다. 훈련소를 방문한 로마장군 부부 앞에서 오락대상으로 펼쳐지는 검투장면,검투사의 분노·저항·죽음 등을 통해 검투를 주목적으로 건설된 콜로세움의 기능을 엿볼 수 있다. 영화 「쿼바디스」에서는 서기 64년 폭군 네로황제에 의해 로마 대화재의 방화범으로 몰린 기독교도들이 굶주린 사자의 밥이 되는 참혹한 장면을 볼수 있다. 로마제국은 대중오락을 국가가 제공했다.시민들은 잔인하고피투성이가 되는 경기의 관람을 좋아했으며 수천명이 운집한 원형투기장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검투사 경기는 가장 인기를 끌었다.검투사들은 관중들의 함성속에 생사를 건 경기를 했다.한 검투사가 쓰러지면 그를 살리느냐 또는 심장을 찌르도록 하느냐는 관중들의 특권이었다.투기마당의 모랫바닥이 피로 범벅되어 질척거리면 새로운 모래로 덮고 경기를 계속했다. 콜로세움은 건축가 라비리우스의 설계로 72년 착공,82년 완성됐으며 공사에는 유대인 포로들이 동원되었다.부지는 네로황제의 황금별궁안 연못터로서 폭군의 불타버린 저택지에 시민오락시설을 건설한 극히 정치적 상징을 띤 곳이었다.콜로세움의 북서방향은 포름로마눔(핵심적 정치·기념건물군과 광장)에 연계되어 캐피톨언덕의 로마의 수호신 「주피터 신전」과 공화정의 상징인 「원로원」과 직선축을 이루고 있다. ○라비리우스 설계 콜로세움은 투기마당(84×52m 타원형)을 4개층에 걸친 경사관람석이 타원형으로 둘러싼 구조물(둘레 6백m 높이 48m)이며 관람석 아래층은 통로공간으로 여러원형투기장에서의 경험을 살려 지어졌다. 구조체는 아치와 볼트로 되어 있는데 양외면에 벽돌을 쌓고 속은 로마식 콘크리트(화산재 콘크리트)로 채움으로써 매우 강하고, 겉에는 대리석으로 장식 효과를 살렸다. 콜로세움의 건축적 의의를 보자면 일단 구조적 안전성에 있다.현대와 같은 철근 콘크리트도 없던 당시 7층 높이로 지어 2천년 가까이를 버틸수 있게 한 기술이 놀랍고 건물 또한 아름답다.건물 외벽의 아치는 진·선·미에 해당하는 도리스식(1층),이오니아식(2층),코린트식(3층) 기둥양식을 적용하고 3세기에는 코린트식 장식벽을 4층에 증축함으로써 수평과 수직의 위계이다.또한 타월형평면으로 이룬 공간의 역동성과 축,명확한 통로공간이 특징이다. 외벽의 아치중 2,3층에는 석조인물상이 배치되고,1층은 독립된 출입구 구실을 하도록 했다.북동(장축) 중앙에 황제의 출입문이 있으며 로열박스는 2층에 남서향으로 배치되었다.4층 외벽면 상단에는 목제 마스트를 꽂아 깃발을 달고 차양을 쳐 한껏 축제기분을 내며 뜨거운 태양을 가리도록 한 것이다. 건물중앙의 투기마당은 4.5m의 담장을 둘러쳐 구경에 열중해 흥분하는 관람자들의 안전을 기했다.마당밑의 지하에는 검투사 대기실·맹수우리·무기고·경비대숙소·공연보조물 운반기계창고·지하도로 등이 있었다. ○관람객 안전 고려 콜로세움 완공후 1백일간의 준공축제 동안에만도 많은 검투사와 5천여마리의 맹수가 살육되었다고 한다.또한 한때는 초기 기독교도들의 처형장소로도 활용되었다. 검투경기는 407년에 금지되고 맹수와의 싸움도 523년에 금지됨으로써 본래의 기능을 상실하였다. 서로마제국이 게르만민족에게 망하고(476년)로마가 교황국가에 편입된 이후 1천년동안 이 건물은 방치되었다가 15세기부터 3백년간은 건축 석재 채취에 쓰이는 최대의 위기를 겪었다.르네상스 시기 로마에 건설된 유수한 건축물인 베네치아궁을 포함한 3개 궁전,성베드로 대성당 신축 등에 쓰인 석재들이 이곳에서 캐내어진 것이다. 그러나 1749년 교황 베네딕트 14세가 콜로세움을 순교자의 피로 성화된 곳으로 선포함으로써 석재 공급 역할은 끝났으며 1800년부터 부분적 복원공사가 시작됐다. 콜로세움 주변의 정리는 1933년 파시스트정부가 행한 유명한 로마도시 정비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되었다.주변의 고적군을 밀어내고 광장과 도로를 넓힘으로써 오늘의 경관을 확보했다. ○현대에도 모델로 현재 건물의 북동벽면은 온전한 상태이나 나머지 벽면은 멸실되고 2개층만 남아있는 곳도 있다.관람석과 투기마당의 바닥슬라브도 벗겨져서 내부의 아치·볼트가 앙상하게 드러난 채로 있다.1973년 이후 부분적인 복원·수리는 계속되고 있다. 오늘날 콜로세움은 경기와 관람을 위한 건물의 한 전형이 되고 있다. 근대 올림픽 시작 이후 세계적으로 번진 스포츠 스타디움의 건설및 대중문화의 상징으로서의 엘리트스포츠와 이의 기업화에 따라 자재와 기술은 새로워져도 건축 원리는 타원형 콜로세움을 되풀이하고 있다. 콜로세움은 시대에 따라 변하는 건축의 사회적 기능을 보여준다. 제1기 로마제국(4세기까지)에서는 검투사 또는 동물 투기장,제2기 중세(4∼14세기) 혼란기에는 지진피해,방치,또는 요새,제3기 르네상스기(15∼17세기)에는 약탈수난,제4기 근대계몽기(19세기)에는 순교지 지정,제5기 단일세계권(20세기후반 이후)에서는 세계적 역사관광 순례지로서 기능이 바뀌어 가고 있다. 1천여년의 망각과 3백여년의 약탈 수난과 도괴의 위기를 거쳐 근세에 들어와서 그 가치가 다시 부활하고 있음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현재 철거 운명에 놓인 우리의 조선총독부 청사(현 중앙박물관)에서 상기하는 아픔은 크다.식민 통치의 부끄러운 역사의 잔재라하여 허물어져야 한다면 남아있는 건축이나 역사 유산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콜로세움은 변덕스레 바뀌는 이념과 가치관 때문에 과거의 건축 유산을 부수고 새로 짓기를 반복하는 낭비와 어리석음을 저지르지 말아야 함을 일깨워준다.
  • 여죄·공범 못밝힌채 “어정쩡한 종결”/경찰의 지존파 수사가 남긴것

    ◎허술한 초동수사 관할다툼 여전/무기밀거래단 규명 과제로 남아 「지존파」의 연쇄납치살인사건을 수사중인 경찰은 사건을 27일 검찰에 송치함으로써 지난 19일 범인검거이후 1주일간에 걸친 수사에서 공범이나 여죄를 밝히지 못한 채 사실상 수사를 종결한다. 경찰은 이날 지존파에 대한 수사결과를 발표,『범인들에 대한 분리심문등을 통해 공범이나 여죄여부를 집중추궁했지만 뚜렷한 혐의점을 찾아내지 못했다』고 밝혔다. 경찰은 그동안 두목 김기환(26)등 지존파가 지난해 7월 조직결성이후 15개월남짓 소윤오씨부부등 5명을 연쇄살해한 사실을 밝혀내고 일당 7명을 구속한데 이어 이들에게 백화점고객명단과 가스총등을 팔아 넘긴 이주현씨등 2명을 추가로 구속했다. 경찰은 이번 사건수사를 통해 자칫 대량살상으로 이어질 뻔한 조직범죄를 뒤늦게나마 차단했으나 그동안 끊임없이 제기돼온 공범과 여죄여부에 대한 의문점들을 속시원히 밝히지 못한 채 수사를 종결해 한계를 드러냈다. 경찰은 또 피해자 소씨의 실종당시부터 수사관할을 서로 떠넘겨공조수사에 허점을 드러냈고 「지존파」로부터 압수한 승용차를 닷새동안이나 방치해 결정적인 증거물들을 뒤늦게 찾아내는등 초동수사에 문제점을 드러냈다. 당초 이들에게 납치됐다가 풀려난 이모씨(27·여)로부터 「지존파」에 대한 행각을 신고받은 서울 서초경찰서는 이들의 전남 영광군 아지트에 도착하기까지 만49시간여나 영광경찰서에 협조나 수사공조요청을 하지 않아 신속한 현장수사가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비난을 샀다. 일부에서는 경찰의 해묵은 공다툼으로 인한 늑장수사로 희대의 연쇄납치살인행각을 벌인 범인들을 놓칠 뻔했다는 지적이 제기되기도 했다. 경찰수사가 초기부터 이러한 문제점들을 노출시킨 가운데 경찰은 범인들의 자백내용을 토대로 한 짜맞추기식 수사에 급급함으로써 이들의 행적이나 범죄공백기간에 대한 의문등을 속시원히 풀지 못했다. 당초 93년8월의 2차범행과 지난 8일의 3차범행 사이의 1년2개월의 기간에 이들이 여죄를 저질렀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예상됐지만 경찰은 이들이 대전과 분당에서 집단으로 막노동을 한사실만 확인했을뿐 당시 이들의 구체적인 행적에 대해서는 명확히 밝혀내지 못했다. 이와 관련,당시 이들을 목격한 근처 인부들이 구속된 일당외에 40대남자등 1∼2명이 함께 어울려 다녔다고 제보함으로써 공범가능성에 대한 단서를 제공했으나 경찰은 송치날짜를 의식,수사종결에만 급급한 인상을 남겼다. 또 「지존파」에게 범행물품을 제공하는등 이들의 범죄에 깊이 연루된 것으로 밝혀진 브로커 이주현씨의 진술이 계속 엇갈리는 부분도 이들이 드러나지 않은 공범을 숨기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씨가 물품구입장소에 대해 기억나지 않는다며 정확한 진술을 회피하고 있는 점이나 당초 지난 8월 명단을 건네줄 당시 「지존파」의 범행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말했다가 지난해 6월부터 이들의 정체를 어느정도 파악하고 있었다고 진술을 번복하는등 진술에 일관성이 없는 부분등은 또다른 공모자나 여죄의 개연성을 더욱 짙게 하는 부분들이다. 특히 이씨의 동거녀 강모씨의 통장에 「지존파」일당이 영광아지트를 건축한 시기인 지난5월 중순 무기밀매지역으로 의혹을 사고 있는 부산등지에서 양모씨등 2명의 명의로 모두 6백여만원이 입금됐다가 다음날 바로 인출된 사실은 또다른 공모자의 자금공급가능성을 가장 강하게 제기하고 있는 부분인데도 경찰은 이를 도외시했다. 이와 함께 지난해 「지존파」 두목 김에게 김현양을 소개해준 인물의 신원이 아직 밝혀지지 않은 점도 의문으로 남아 있다. 결국 지난 1주일동안 국민들을 충격과 경악속에 몰아넣은 「지존파」의 연쇄살인사건에서 의문점으로 남은 공범및 여죄부분,전문무기밀매단의 실체등은 검찰에서 풀어야 할 과제로 넘겨지게 됐다. ◎지존파수사 이모저모/길가다 희생 최미자씨가족 “망연자실”/제보 이양에 서초서통해 금일봉 전달/강동은 “이제 후회”… 뒤늦게 삶에 애착 ○…지존파 일당의 검찰 송치를 하루 앞둔 26일 낮 일당 중 한명인 강동은의 형(27)과 누나,매형 김모씨(35) 등이 서초경찰서로 찾아와 면회. 처음 검거됐을 당시 『야타족 등 아직도 죽이지 못한 사람이 많다』고 하는등 살의에 가득찬 말을 거침없이 내뱉었던 강은 이날 10여분동안의 면회에서 가족들에게 『살아나갈 수만 있다면 신부가 되고 싶다』고 말하는 등 처음과 달리 생에 대한 강한 집착을 드러냈다. 강은 또 형과 누나에게 『엄마와 애인 이경숙을 잘 보살펴달라』면서 『어린 마음에 엄청난 일을 저질렀지만 이제는 후회된다』고 말해 심경의 변화를 크게 일으키고 있다는 것. 또 이경숙의 친척오빠인 박모씨(34),백병옥의 아버지(54),이주현의 아버지(58)와 어머니등도 각각 범인들을 면회. 특히 백의 부모는 면회를 마치고 나와 『지난해 7월 돈을 많이 벌어오겠다며 집을 나가더니 이렇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면서 『공부를 제대로 못시키고 어릴적 배부르게 못해준 것이 한』이라고 눈물. ○…이주현씨와 김현양이 학교 선후배사이로 친하다는 사실을 숨기는 등 범인들이 이씨를 감싸고 돈 점을 경찰이 제대로 추궁하지 않은 것도 수사를 더이상 확대하지 않으려는 의도가 아니냐는 주변의 분석. 이미 중형을 각오한 범인들이 이씨를 보호하려 한 것은 이씨가 공범 또는조직원이거나 다른 공범자가 있을 가능성을 시사해주는 것인데도 경찰은 이 부분에 대해 조사를 하지 않았다는 지적. ○…지존파의 「살인실습」 첫번째 희생자였던 20대 여자의 신원이 최미자양(당시 23세·충남 논산군 두마면 두계리)으로 밝혀지자 최양의 아버지 최모씨(48)등 가족들은 믿어지지 않는듯 충격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 최씨는 『미자에게 설마 큰일이야 있겠느냐는 생각에 지금까지 연락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려 왔다』며 망연자실한 표정. ○…김화남경찰청장과 박일용서울경찰청장은 이날 「지존파」일당으로부터 필사적으로 탈출,결정적 제보를 한 이모씨(27·여)에게 감사와 위로의 뜻을 전하고 서초경찰서장을 통해 금일봉을 전달. ○…이주현씨가 지난 8월부터 일해왔던 세운상가 G오락기판매점 주인 김모씨(24)는 『주현이는 서울에 친구가 별로 없었고 평소 말수도 적었지만 성실했으며 술도 잘 못했고 일이 끝나면 곧바로 집으로 가는 등 착실한 사람이었다』며 이씨가 무기브로커였다는 것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
  • 노령인구(현장 세계경제)

    ◎부­활동력 겸비 「경제적 강자」 부상/컴퓨터 산업 발달로 재취업 길 급증/구매력 막강… 기업들 유치전략 부심/“젊은층의 짐” 부정적 인식 갈수록 사라져 질병과 가난의 불안에 시달리던 노령인구가 차세대 경제의 상당부분을 담당하는 세력군으로 부상하고 있다.노화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지친 육신을 집에서 치료하며 세월을 보내는 것이나 다름없었다.특히 충분한 노후대책을 마련하지 못한 경우 「노령」은 질병과 궁핍의 동의어였다. 사회보장제도조차 늘어나는 노인들을 부양하기 위해 경제활동인구에 과도한 부담을 지웠다.결국 더이상 노령층에게 「경제적안전판」구실을 하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가 잘산다는 서구인들을 괴롭혀왔다. ○「황금기」로 분류 그런데 컴퓨터·소트웨어및 장거리통신에 대한 막대한 투자로 인한 고성장이 노인문제에 기대치 않던 돌파구를 열어줄 것으로 전망된다.컴퓨터기술의 발전은 금융서비스부문과 의료진단등 「근력」을 덜 요구하는 분야에 퇴직자들이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길을 마련해주고 있다. 경제전문지비즈니스 위크는 65세이상은 「황금기」로 분류하고 있다.이 연령층들은 베이붐세대 직전의 세대로서 경제의 최상층부를 점하거나 대부분 은퇴한 상태다.이들의 수적 강세는 미국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현재 미국에서 8명중 1명이 65세이상이다.이는 금세기초 25명당 1명인 것에 비하면 괄목할만한 증가세이며 2030년이면 5명중 1명이 노인이 된다.유럽에서는 노령층에 속하는 50세이상의 인구비율이 90년에는 30%에 머물렀으나 30년 뒤에는 40%까지 늘어날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들중 상당수는 경제력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대부분 각종 채무에서 해방된데다 퇴직연금이나 사회보장등의 혜택으로 경제적 여력을 갖고 있다.물론 교육정도가 낮은 계층이나 여성가장으로 구성된 가정의 노령자들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경제적 약자로 남을 수밖에 없다. 현재 영국에서 50세이상의 노령인구들은 국가전체 부의 75%를 장악하고 있으며 소비수준은 전국평균보다 21%나 높은 막강한 소비자군이다.이같은 사정은 프랑스·이탈리아·미국에서도 마찬가지다.또 이같은 경제력은 생산성이 연평균 1.5%씩만 늘어나면 미국에서 65세이상의 노령자들의 1인당 GDP는 2010년이면 19만4천달러로 늘어난다는 계산이 나와 있다. 노령층의 사회참여의 길은 다양하다.우선 거시적 측면에서 컴퓨터 관련산업의 발달은 다수의 퇴직자들을 「노동력」으로 흡수할 것이다.미국에서 퇴직연령이 지난 50∼55년에 63세에서 85∼90년 사이 65세로 상향조정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된다.정년연장은 평균수명의 향상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금세기초 49세이던 미국인의 평균수명은 93년 76세로,2040년엔 남자 80∼85세,여자 85∼88세로 대폭 늘어나 퇴직하고도 근 20여년을 놀고 지내게 된다는 결론이다. ○부의 75% 장악 한마디로 나이는 이들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될 수가 없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지난해 85세인 한 노인이 51년동안 경영해온 식당을 처분하고 월마트에 재취업한 케이스는 이같은 경향을 웅변한다. 나이의 구속에서 어느정도 해방된 이들은 금융투자로 노후를 더욱 공공히 하고 여가활용에 치중한다.노인들의 자기계발지향은 곧 이를 상품화하는 기업활동과 직결된다.필립스는 노령층을 위한 골프·정원관리 프로를 콤팩트 디스크(CD)로 제작,시판하고 있고 8천만명의 유럽고객을 가진 다국적 거대 제약회사 머크는 대표적 노인질환인 고혈압·심장치료제인 「레노텍」을 개발,매출신장에 열을 올리고 있다. 노령층은 프랑스의 휴양업체인 클럽 메드에게는 중요한 수입원일뿐 아니라 영국에서는 조립품업체인 B&Q의 주고객이기도 하다.B&Q는 전체 직원 1만5천명중 10%를 50세이상의 지원자중에서 채택한다는 획기적인 계획을 마련,시행에 들어갔으며 매주 수요일은 60세이상의 고객만을 대상으로 10% 특별할인판매를 실시,호응이 대단하다.젊은층의 전유물이던 리바이스 진도 지난해 프랑스에 진출,「도커스」라는 전용매장을 개설하는등 노인들에 대한 부정적 인식의 변화는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전용매장 개설도 일부기업체들은 단순히 고객유치에만 머물지 않고 시장조사를 통해 노인들의 의견을 수렴,제품개발에 반영하는등 공세적 전략을 펴고 있다.스웨덴의 사브자동차는노인병전문가와 노인운전자들과의 면담을 통해 속도만 표시되는 특수계기판을 설치한 자동차를 선보이고 있으며 네덜란드의 단거리 항공기제작사인 포커는 탑승한 노인들의 이동에 편리하도록 통로에 손잡이를 설치하기도 했다. 노령파고는 노인들을 생산자이자 소비주체로 자리매김함으로써 기업들이 전력투구해야 할 대상으로 올려놓을 것이다.이들은 젊은층의 짐이 아닌 당당한 생산자와 노련한 소비자로 남아 다음세기에 성장의 에너지를 제공해줄 것으로 기대된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