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3세 남아
    2026-02-23
    검색기록 지우기
  • 1억원
    2026-02-23
    검색기록 지우기
  • 한의사
    2026-02-23
    검색기록 지우기
  • 세면대
    2026-02-23
    검색기록 지우기
  • 상금
    2026-02-23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1,774
  • 「중추국과 미국전략」 폴 케네디 미 예일대 교수

    ◎미 제3세계 원조/9개 중추국에 집중해야/인·파키스탄·인니·터키·알제리·남아공·멕시코·브라질 지목/인구·지역안정 기여도·경제잠재력 고려 선정/빈곤·인종갈등·환경악화 등 치유… 자립 부축 미국의 제3세계 원조는 이른바 중추국(Pivotal States)전략이라고도 불리는 새로운 원조정책을 통해 국제질서에 영향을 끼칠수 있는 중추적 위치의 국가들을 선별해 제공하는 「예방원조」화 함으로써 미국의 이익을 지키는데 보다 효율적으로 사용되게 하여야 한다고 예일대 역사학과의 폴 케네디교수가 주장했다.그는 중추적 국가로 멕시코,브라질,알제리,이집트,남아공,터키,인도,파키스탄,인도네시아등 9개국을 지목됐다.오는 1월 발간될 미외교협회 학술지 「포린 어페어즈」 96년 신년호에 실린 「중추국과 미국전략」이라는 제목의 케네디교수 논문을 발췌 소개한다. 소련 붕괴이후 5년이 지나도록 미국의 정책입안가들이나 지식인들은 아직도 미국 외교정책에 있어 국가적 전략을 바탕으로한 새로운 원칙들을 찾기위해 애쓰고 있다.「역사의 종말」「문명의 충돌」「무정부의 도래」「국경없는 세계」등의 예견을 포함한 국제질서의 장래에 대한 오늘날의 논란들은 미국정책이 취해야 하는 일반화된 정형에 대한 합의에 실패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안보는 더이상 공산주의를 방어하는데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에 달려있지 않다.직면해 있는 도전들은 보다 분산적이고 다양하다.우선적으로 미국은 유럽·러시아·중국·일본과 기타 국제문제에 있어 중요한 행위자 국가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그러나 미국의 국가적 이익은 주요한 개발도상국들의 안정과도 직결되고 있다. 의회의 대외원조 삭감및 폐지 압력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원조를 그 국가의 운명이 불투명하고 그 국가의 장래가 주변지역의 안정에 심대한 영향을 가져올수 있는 몇몇 소수의 국가 즉,중추국에 집중시키는 정책은 중요하다. 어떤 특정국가가 지역안정과 미국의 국익 모두를 위해 다른 나라들 보다 중요하다는 차별적인 개념은 타당한 것으로 미국은 그 관심과 재원을 세계전체로 흩뜨리기 보다는 중추국에 힘을 집중시키는,즉 개발도상국들에 대한 차별적 정책을 취해야 한다. 이제 도미노이론은 미국의 전략적 필요를 위해 냉전시대 보다 오늘날 더 적합할는지도 모른다.새로운 도미노들 즉 중추국들은 더이상 외부의 적대적 정치체제로부터의 위협에 대처할 원조를 필요로 하지 않으며 그보다는 오히려 내부 혼란의 희생양으로 전락할 위험성이 상존하고 있다. 중추국에 있어서 미국국익에 대한 위협은 그들의 내부적 혼란과 불안정이 과거 공산주의의 위협보다 훨씬 더 크다.따라서 중추국들의 붕괴 가능성을 감소시키기 위한 「예방외교」(Preventiveassistance)는 미국국익을 위해 보다 기여하게 될것이다. 중추국에 대한 엄격한 차별원조전략은 아래의 여러가지 측면에서 미국외교정책에 도움을 주게될 것이다.첫째는 세계최대의 부유국으로서 미국은 보수적 전략을 필요로 한다.19세기나 20세기초의 대영제국처럼 미국국익은 현상유지에 놓여있다.이같은 전략하에서 러시아·중국·일본·유럽 주요국등 강대국들과의 관계는 가장 중요하게 된다.그리고 전략적 혹은 국내정치적 이유에서사우디·쿠웨이트·한국·이스라엘과 같은 특별한 동맹국을 보호해야 한다. 두번째 중추국에 집중하는 외교정책은 미국의 원조가 연방예산 고갈의 중요한 항목이며 중복되고 기만적이며 운용경비가 과다하다는등의 비난을 피할수 있다.따라서 미국 외교정책에 대해 의회및 미국민의 지지를 설득할수 있는 보다 나은 기회를 만들수 있다. 마지막으로 중추국전략은 신·구 안보이슈 사이의 국내적 논의에 있어 개념적 정치적 구분의 갭을 메워줄수 있다.군사적 정치적 안보에 중점을 두는 전통적 안보개념만으로는 미국국익에 대한 새로운 위협에 대처하는데 적절치 못하다.중추국들에 대한 위협은 공산주의나 침략이 아니라 인구과잉·이민·환경악화·인종갈등·경제불안정 등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중추국의 범주는 어떻게 정해야 할것인가.거대인구와 중요한 지정학적 위치가 우선 두가지의 기본 요건이 된다.경제적 잠재력 또한 중요한 요소로 미국경제에 도움이 될수 있는 성장국가들이 포함된다.지역적 세계적 안정에의 기여도도 중요한 요인이 된다. 결국 중추국은 국가 붕괴시 인근 국가들로 이민,종족간 폭력,공해,질병등을 확산시킬 가능성이 있어 지역적으로 중요시됨은 물론 경제적으로는 그 국가의 경제안정과 경제발전이 지역적 경제발전과 정치안정 그리고 미국의 무역 및 투자에 도움을 주게되는 국가들을 지칭하게 된다.이같은 측면에서 현재 미국이 집중 지원해야 하는 중추국으로는 아시아에서 인도 파키스탄 인도네시아 터키,아프리카에서 이집트 알제리 남아공,중남미에서 멕시코 브라질등 9개국으로 압축시킬수 있는 것이다.
  • 제1회 광주비엔날레가 남긴 것

    ◎165만명 관람… 「세계속 예향」 도약 국내외의 관심을 모으며 한국 남도의 대표적인 도시 광주의 이미지를 새롭게 한 광주비엔날레가 20일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세계적인 미술행사로,또는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행사로 과연 제 모습을 갖추고 성과를 제대로 이룰 수 있을까 하는 당초의 우려와 달리 광주비엔날레는 두달동안 무려 1백65만명이 넘는 엄청난 관객동원으로 예상을 뒤엎는 외형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20일 하오4시부터 광주에서는 비엔날레의 성공을 자축하는 화려한 축하공연과 함께 폐막식이 거행됐다.이날 하오5시30분부터 비엔날레의 본거지였던 중외공원내 야외공연장에서 베풀어진 폐막식에는 비엔날레 관계자들과 광주시민,전국의 문화예술계 안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이번 비엔날레의 성과와 의미를 돌아보며 아쉬움속에 폐막식을 가졌다. 명실공히 국제미술제로서 그 면모를 과시한 국내 초유의 광주비엔날레.미술제로서 이번 비엔날레의 순수예술적인 측면과 광주라는 국내 한 지방도시에서 치러진 국제행사로서의 그 의의를 결산해 본다. ◎미술적 평가/대중화 성공 불구 품격시비 “흠”/역량있는 작가 유치 과제 남겨 미술적인 측면에서 『관람객 숫자만으로 본질을 평가할 수 없다』는 다소 회의적인 반응에도 불구하고 주최측은 「성공적 미술축제」라는 자체평가를 주저하지 않고 내후년 제2회 행사를 위한 청사진 그리기에 한껏 부풀어 있다. 이번 행사는 국내 관객동원 숫자에 비해 외국인 관람객이 기껏 2만4천여명에 그쳤다는 부정적인 시각이 있다.그러나 주최측은 낙후된 한국의 관광여건을 본질적 이유로 들며 오히려 프랑스 「르 몽드」지나 일본 「NHK」방송의 대대적 보도등을 내세워 해외매스컴의 관심 또한 성과로 내세우고 있다. 이번 비엔날레는 아시아 최초로 치러지는 국내 초유의 국제미술행사이면서도 급하게 준비한 1백82억원의 예산을 들여 1년도 못되는 촉박한 일정에 막을 올렸다.부진한 준비에도 불구하고 「민주화의 상흔」으로 얼룩진 광주의 아픈 이미지를 밝고 활기찬 현대예술의 도시로 탈바꿈시키는데 성공했다. 전시장을 찾은 많은 사람들에게 예술장르중에서도일반인과의 교감이 거의 없는 미술을 새롭게 접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했다는 점은 큰 성과가 된다. 그러나 미술적인 측면에서 이번 비엔날레 기본품격은 크게 부족한 편이었다.주최측 한 고위관계자는 『일부 지식인들의 비판』이라고 하지만 말많은 국내 미술계로부터는 『국제행사 좋아하는 국내 몇몇 인물들의 잔치에다 본 전시의 출품작들도 수준미달이었다』는 비판이 있는가 하면 비엔날레조직위 내에서도 각 지역별 커미셔너들의 실력과 자세에 부정적인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본 전시인 「국제현대미술전」의 커미셔너들이 세계 각 지역의 실력있는 작가들을 유치할만한 역량의 인물들인가에서 시작된 회의는 결국 「30세 전후의 제3세계 작가들이 벌여놓은 희귀한 설치비엔날레」가 되고 말았다는 비판을 낳았다.「경계를 넘어서」 오늘의 앞서가는 현대미술을 보인 것까지는 좋았지만 80%가 설치미술이며 엉성한 작품진열에 해설도 제대로 돼있지 않은 결과를 낳았기 때문이다. 본 전시외에 「광주 오월정신전」이나 「인포아트전」등 의미있는 특별전이 이 행사를 빛낸 점도 있지만 비엔날레가 향토축제 벌이듯 지나치게 많은 부대행사를 기획한 점도 부정적인 측면에 속한다.한 관계자는 『그렇게 해서라도 손님을 끌어야 했다』지만 이 또한 순수미술 행사로서 비엔날레를 평가할때 소란스럽고 지저분한 환경속에 미술품을 호젓하게 감상할 수 없는 분위기를 낳은 셈이다. 어쨌든 관객은 운집했다.그리고 적자도 보지 않았다.그만한 큰 행사를 잘 치러낸 주최측의 노고도 대단하다. 하지만 전시에 대한 평가는 『뭔가 잘 모르겠다』는 일반관객들이나 『실망했다』는 미술전문 관계자들에서 볼때 결국 부정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한번의 행사로 그 성격을 단언할 수 없듯이 앞으로의 광주비엔날레가 조직적이고 탄탄한 운영기반을 갖춰 명실공히 「동양 최고의 국제미술경연」으로 자리잡을 것으로 기대해 본다. ◎행사평가/지자체 첫 국제행사 흑자운영/「한의 도시」 이미지 쇄신 성과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가 만들어낸 「축제 광주」의 모습을 과시한 이번 비엔날레기간 내내 이곳에는 란즈베르기스 전 리투아니아 대통령을 비롯한 많은 국내외 인사들이 찾았다. 남종화의 산실인 이곳의 예술적 토양을 바탕으로 5·18 광주민주화운동 정신을 예술행사로 승화시키기 위해 마련된 이번 행사는 당초 예상과는 달리 만족할 만한 성공을 거뒀다.지방자치 시대를 맞아 지방도시에서 치러낸 첫 국제행사라는 의미도 크다. 본 전시등 미술전에 세계 58개국에서 5백여명의 작가가 참여했으며 30개국 1만2천여명의 예술가가 참가해 음악·무용·패션·민속공연등 다채로운 행사를 폈으며 하루평균 2만6천여명의 관람객이 몰렸다. 지자제 실시와 함께 새로 출범한 주최측인 광주광역시는 1백82억원의 전체 예산중 행사개최비 77억원에 비해 입장료수입과 수익사업등에서 94억7백만원을 올려 행사운영 측면에서도 흑자를 내며 여타 도시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그러나 문제점도 곳곳에서 노출돼 대부분 관객이 비좁은 공간속에서 떼밀리다시피 전시관을 돌며 작품을 감상해야 했다.여러 곳에서 작품훼손이 잇따랐고 일부작품은 위작시비에 휘말리기도 했다. 그러나 지난 세월동안 외부에 「한」의 도시라는 어두운 이미지로 비춰진 광주에서 거둔 이번 행사의 성공은 시민들에게 자긍심과 큰 활력을 선사했다. 거리마다 나부끼는 애드벌룬과 행사장 주변에 끊임없이 이어지는 외지 인파는 광주를 살아 꿈틀거리는 도시로 바꿨다. 각종 전시에서 선보인 설치미술품과 행위예술은 평면그림 위주로 미술을 인식해온 일반 시민들에게 문화적 충격을 맛보게도 했다. 광주시는 이를 계기로 인본예술과 첨단산업이 어우러진 활기찬 도시만들기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오는 97년 2회 행사때는 국제규모의 영화제와 첨단과학산업단지를 기반으로 한 산업디자인도 함께 개최하기로 했다. 주최측인 광주광역시에는 이번 축제무드를 지역발전과 지방의 국제화 전략에 어떻게 접목시켜 나가느냐가 숙제로 남아 있다. ◎비엔날레 전문위원겸 전시부장 정준모씨/“전문 인력 적어 진행 큰 어려움 겪어 이번 경험살려 지금부터 「2차」 준비” 국내 제1호 독립 큐레이터로 미술계에 잘 알려진 정준모씨(39).이번 광주비엔날레의 전문위원겸 대변인,전시부장을 맡아 자타가 공인하는 비엔날레 살림꾼으로 가장 진땀을 뺀 인물이다. ­이번 비엔날레의 실제적인 거의 모든 일을 도맡아 온 사람으로 감회도 남다를텐데. 『모든 일이라면 어폐가 있구요 전시파트 전반을 이끌면서 홍보와 전시환경,작품운송,보험,도록제작등 전시실무를 전담했습니다.미술관에서 일하면서 익숙해진 일들이지만 짧은 시간과 많은 양의 작품속에서 어려움이 많았습니다.단 광주 시민들 특유의 애향심과 언론의 지대한 관심이 큰 힘이 됐습니다』 ­보람도 많았겠지만 어려움도 많았을텐데요. 『많은 경험을 단기간에 한 보람이 있구요 외국의 많은 친구를 사귄게 재산같습니다.단군이래 최대 문화행사에 경험부족과 미술행정,아트메니지먼트에 관련한 전문인력이 거의 전무하다는 큰 어려움이 있었지만 오직 뚝심과 열정으로 부딪친 전시본부 스태프들의 노력이 빛났습니다』 ­기간중 가장 인상에 남는 일이 있다면. 『한번은 24시간동안에 서울을 3번이나 다녀와야 했습니다.개막일을 이틀 앞둔 날이었는데 작품설치에 필요한 전자장비를 구하기 위해 항공으로 1회,봉고버스로 2회를 오갔습니다. ­선험자로 볼때 차기비엔날레는 어떤 준비가 필요할까요. 『기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폐막과 함께 2차 대회를 준비해야 됩니다.또 현대미술에 대한 확고한 철학과 섭외력,어학실력,통솔력을 갖춘 총 큐레이터와 팀웍이 맞는 실무진이 절대 필요하지요』
  • 유전개발 한계·소비증가 폭발/2010년 석유대란 온다

    ◎수요 현재보다 30% 늘듯… 주가 폭등 전망/비 OPEC 감산 추세… 중동의존도 높아져 세계경제는 적어도 지난 10여년동안 석유로 인해 고통을 받지는 않았다. 에너지전문가들은 이같이 세계경제와 석유가 밀월을 즐길 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고 분석하고 있다. 석유가 최근들어 생산·소비·매장량 3각관계에 이상징후를 보여 유가안정에 회의적인 시각이 지배적이다. 석유전문가들은 넉넉잡아 앞으로 15년후에는 경제성장과 더불어 전세계가 사상 유례없는 석유위기를 맞게 된다고 경고한다.특히 개발도상국의 석유 수요는 최근들어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반면 유전개발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물론 유가도 폭등하기 마련이다. 예를들면 오는 2000년이 되면 전세계의 석유 수요량은 현재 하루 7천만 배럴에서 7천7백만 배럴로 늘어나게 된다.이럴 경우 유가는 현재보다 두배가량 오른 배럴당 30달러선으로 뛴다.또 20 10년에는 석유 수요가 9천5백만 배럴로 증가,마치 코끼리떼가 일시에 좁은 문을 통과하는 것과 같은 끔찍한 「석유 대란」을 겪는다는 시나리오도 나오고 있다. 미국 케임브리지 에너지 연구협회(매사추세츠주 소재)에 의하면 10년전에 하루 57만 배럴의 석유를 소비한 한국은 올해 2백10만 배럴,90년대말에는 2백70만 배럴로 소비량이 대폭 증가할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현재 연간 한국인 한사람당 에너지 소비량은 16.9배럴인 셈이다. 중국과 인도의 석유 소비량은 아직 한해에 한사람당 1배럴에도 못미치지만 지난 85년에 비하면 각각 33%,50%가량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이들 국가의 한사람당 에너지 소비량이 한국 수준에 도달하고 인구증가가 현재 추세대로 진행될 경우 두나라 전체 석유 소비량은 하루 1억1천9백만 배럴에 이를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이 소비 수치는 오늘날 전세계 수요량의 거의 2배에 해당된다.12억 인구를 포용한 중국의 경우 금세기말 자동차수가 두배 늘어난 3백만대로 되고 현재의 주요 교통수단인 자전거 대신 오토바이로 대체됨에 따라 기름의 수요는 치솟게 마련이다.미 하와이 동서문화센터에 의하면 20 05년이 되면 중국의 석유부족분은 하루 2백만 배럴에 이를 것으로추산된다. 석유수출국기구(OPEC) 회원국인 인도네시아도 10년전에는 석유생산량의 40%만을 자국에서 소비했는데 최근에는 65%로 국내 소비량이 증가했다. 현재 에너지 소비추세를 보면 전세계 석유생산량(현재 소비량과 엇비슷,부족분은 재고량 충당)의 61%를 서방선진국들이 차지하고 있는데 주요 소비국은 미국(26%),유럽연합(18%),일본(9%))등인 것으로 나타났다.특히 미국의 경우 유류파동 당시 한때 주춤하던 대형차량 판매가 크게 늘고있어 에너지 낭비가 심한 나라로 지적되고 있다. 이처럼 지구촌의 에너지 수요는 크게 증가하는 반면 원유채굴 기술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원유생산량은 늘지않고 있는 실정이다.영국 북해의 주요 5개 유전이 최근 18%가량 감량 생산을 했으며,미국 알래스카 유전도 지난 88년 하루 2백만 배럴을 생산한 이후 점차 줄어들고 있으며 다음 세기초에는 원유생산량이 절반수준으로 떨어질 것으로 예상된다.한때 하루 최대치인 1백만 배럴에 달했던 멕시코만의 생산량도 감소추세를 보이고 있다.또한 주요 원유수출국인 러시아·카자흐스탄등도 노후한 송유관·펌프,그리고 빈약한 인프라투자 탓으로 최근 생산량이 크게 줄어들었다. 90년대말이 되면 전세계 석유 수요는 매년 2%이상 늘어날 것으로 예측되고 있으나 비OPEC국가들의 생산증가량은 1%에도 못미칠 것이라는게 석유전문가들의 전망이다.결국 수요 부족분은 중동산유국인 아랍에미리트·쿠웨이트·사우디아라비아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이란·나이지리아등은 많은 부채에 시달리고 있어 새로운 유전설비투자가 어렵고 유엔의 금수제재조치를 받고있는 이라크의 정치상황도 불안정하기 때문이다. 이와관련,빌 화이트 전미 에너지차관은 『만약 사우디가 하루 석유생산량을 70만 배럴정도만 감축시켜도 전세계의 유가는 즉각 배럴당 5달러씩 오르게 된다』며 『그럴 경우 인근 쿠웨이트·아랍에미리트등도 같은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강조한다. ◎태양열·풍력 대체 에너지원 각광/기술개발로 발전비용 저렴… 설치도 간편/대규모 송전망 불필요… 환경오염도 해결/제3세계 농촌지역 전력공급 주역 등장 유가상승에 대한 우려와 석유·석탄 및 가스 연소에 따른 온실효과등 환경오염에 대한 관심이 대체에너지 개발을 촉진해왔다. 현재로선 화석연료인 천연가스가 「청정」에너지원으로 각광받고 있으며 논란의 여지가 많은 핵발전과 수력발전이 대체에너지의 자리를 굳히고 있는 형편이다.그러나 그간 핵발전과 수력에 비해 상대적으로 관심을 끌지 못했던 태양열·풍력·조력 및 생물자원등 재생가능 에너지원이 최근들어 관심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기술발전에 따른 생산비등 비용하락이 재생에너지원이 주목을 받게된 주된 원인이다.비교적 저렴하고 안전하다고 「선전됐던」 핵·수력의 결함이 하나씩 둘씩 알려진 것도 큰 영향을 미쳤음은 물론이다. 현재 「경쟁력있는」 대체 에너지원으로 지목되는 것은 풍력과 태양력.아직 세계전력의 1%미만을 담당하고는 있지만 잠재력이 무한정해 그만큼 매력있는 에너지원이다.특히 전력부문에서는 가능성이 커 전망은 매우 밝다.과거 태양 열발전,생물체와 식물체를 에너지원으로 이용하는 생물자원 발전의 실용화에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비용문제가 크게 개선됐기 때문이다.50년대 우주정거장 발전용으로 개발된 PV(광전지)는 태양에너지를 전기에너지로 바꾸는 일종의 반도체.케냐·남아공·브라질등 주로 빈곤국 농촌지역의 수만가구에 전기를 공급하는 장본인이다. 1단위의 전기발생 비용을 따진다면 PV발전(㎾당 40센트)은 화석연료(㎾당 5∼6센트)의 상대가 못된다.그러나 화석연료 발전은 발전소와 송·배전망등 엄청난 투자가 필요한데 반해 PV발전은 각 가정 설치비만 필요해 공급비가 대단히 저렴하다. 풍력의 경우 에너지 생산비는 화석연료와 비슷한 수준이다.하지만 20년전 ㎾당 30센트에서 5∼6센트로 발전비용이 떨어졌다.설계기술의 향상으로 발전효율도 늘어났다.석유회사 로열 더치셸은 풍력과 태양력이 오는 2060년 세계에너지 수요의 약 절반을 공급할 수 있다고 전망하고 있다. 특히 재생에너지가 위력을 발휘하는 곳은 제3세계.세계인구의 40%인 20억이 밀집해 있으면서 전기공급이 이뤄지지 않는 열대와 아열대 지역의 경우 태양에너지 양이 선진국에 비해 두배수준이어서광학전지 발전이 크게 확산될 전망이다. 그러나 21세기에도 상당기간 화석연료는 에너지원의 「제왕」지위를 누릴 것 같다.특히 석유는 현재의 생산량을 기준으로 해도 43년은 버틸수 있고 경제성이 없다는 이유로 버려뒀던 매장량을 합친다면 6백년은 사용가능하다는 결론이다.천연가스와 석탄은 각각 향후 66년과 2백35년간 생산가능하다는 계산이다. 전력부문에서는 핵과 수력 덕택에 석유비중은 20년전 20%에서 현재 10%로 떨어졌지만 수송부문에서는 연료의 97%가 석유다.수송부문의 경우 수은전지·알코올·전기자동차가 개발됐지만 덩치가 크고 무거울 뿐더러 현재는 경제성이 없다는 판정을 받아 당분간 석유의존이 불가피한 실정이다.
  • 개인 휴대통신/주파수 확보경쟁 치열

    ◎정부,연내 3개 신규사업자 선정… 배정 방침/“공공자원 독점” 이통 등 기존업체 반발/새 주파수 조기개발 않으면 불씨 남아 오는 2005년 시장규모가 10조원대에 이를 것으로 예상되는 개인휴대통신(PCS)의 사업자 선정을 앞두고 PCS사업을 준비중인 통신업체간에 주파수 확보를 위한 경쟁이 불을 뿜고 있다. 지난달 11일 통신시장구조 개편 시안이 발표된 뒤 통신업체간에 주파수 다툼이 날로 치열해지는 것은 30MHz로 한정돼 있는 PCS주파수를 충분히 할당받지 못할 경우 사업허가를 받더라도 사업을 제대로 벌일 수 없기 때문이다. 현재 PCS주파수 전쟁은 크게 한국이동통신·신세기통신 등 기존 이동통신업체와 신규 진출을 준비중인 통신업체간의 대결로 압축되고 있다. 정부는 올안에 3개 PCS 신규사업자를 선정할 예정이지만 이미 1개업체는 이미 한국통신으로 낙점했다.또 한국이동통신·신세기통신 등 기존의 2개 이동통신업체에 대해서도 PCS사업의 기득권을 인정한다는 방침이어서 PCS사업체는 모두 5곳이 되는 셈이다. PCS사업자간 주파수 전쟁이기존의 이동통신업체와 한국통신 등 신규진출을 노리는 비이동통신사업자간의 대결양상이 된 것은 정통부가 PCS용으로 설정된 30㎒의 주파수를 모두 신규 3개업체에만 주는 방안을 검토중인 것으로 알려지면서부터다.정통부는 주파수가 한정돼 있다는 점을 들어 신규사업자 3개업체에 주파수 10㎒씩을 나눠 주고 기존의 이동통신업체에 대해서는 추후에 주파수를 배당한다는 잠정안을 마련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에대해 신규 PCS사업자중 선발주자인 한국통신은 정통부의 잠정안을 반색했다.즉 신규사업자를 3개 선정할 경우 각 업체가 30㎒를 3등분,10㎒씩 나눠 가져야 한다는 방안을 전폭 지지하고 나섰다. 반면 80년대 말부터 PCS사업을 추진해 온 한국이동통신과 신세기통신등 기존 이동통신업체는 『사업참여를 희망하고 자격을 갖춘 업체에는 당연히 주파수가 할당돼야 한다』며 기존 이동사업자에 대한 주파수 할당 제외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즉각 반발했다.특히 한국이동통신은 공공자원인 주파수를 몇몇 업체가 독식하겠다는 발상은 공익성의 원칙에 어긋나는 것이며 가용 주파수가 한정돼 있다면 사업을 제대로 수행할 만한 기술력과 경험을 가진 사업자에게 우선 배분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입장을 보였다. 한국이동통신의 한 관계자는 『기술 개발시의 주파수대역과 실제 서비스제공시 할당된 주파수대역이 다르게 되면 그동안의 기술개발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뿐 아니라 막대한 투자자원이 낭비된다』고 전제,가능한 한 조속한 시일내에 신규사업자와 동등하게 같은 대역의 주파수를 할당해 줘야 한다고 말했다. 정통부의 한 고위관계자는 이와 관련,『기존의 이동통신업체에 사실상의 PCS사업권을 인정해 놓고 무턱대고 주파수배정을 미루는 것은 논란의 소지가 있다』는 점을 시인하며 빠른 시일안에 투명한 주파수정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에 공감했다. 결국 PCS사업을 둘러싼 주파수논쟁은 새로운 대역의 주파수 개발 등에 대한 명확한 정책 결정이 없이는 신규사업자가 선정된 뒤에도 계속 불씨로 남을 전망이다. ◎차세대 휴대통신 첨병/CDMA/산·학·연 1천여항목 실험결과 성공률 98%/내년 실제서비스 대비 시범기지국 16곳 운영 오는 98년으로 예정된 개인휴대통신(PCS) 서비스를 앞두고 통신업계에 사상 최대의 기술표준 논쟁이 일고 있다. 이 논쟁의 초점은 PCS기술 표준을 CDMA(코드분할다중접속)와 TDMA(시분할다중접속)중 어떤 방식을 채택할 것인지와 함께 세계적으로 아직 상용화되지 않은 CDMA를 택할 경우 과연 98년 상용화 일정에 차질이 없을 것인지에 대한 문제로 귀결된다. CDMA시스템은 지난 89년 1월 국책사업으로 선정돼 정부출연연구소인 한국전자통신연구소(ETRI)가 기술개발을 주관하면서 개발의 막이 올랐다. 정부가 세계 어느나라도 상용화된 사례가 없는 CDMA시스템의 개발에 착수한 것은 차세대 디지털이동전화기술이 궁극적으로 CDMA쪽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따른 것이다. 92년 들어 ETRI는 시스템분야는 LG정보통신·삼성전자·현대전자 등 3개사,단말기는 이들 3개사를 비롯한 맥슨전자 등 4개사와 공동 개발계약을 맺었다. 이들 개발업체는 이로부터 2년여간의 연구끝에 94년 12월 한국이동통신교환실에 CDMA시제품을 설치하고 시험통화에 성공했다. 이에따라 한국이동통신은 내년 1월부터 부분적으로 실제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서울에 16개의 기지국을 설치해 운용시험을 진행중이다. 산·학·정부가 지난 6년동안 5천여억원을 들여 개발에 성공한 CDMA시스템은 지난 7월까지 1천여 항목에 걸친 시험에서 통화성공률이 합격 기준치인 95%를 웃도는 98%를 기록했다. 그러나 CDMA는 아직 세계 어느 나라도 상용화하지 못한 기술인 만큼 오는 98년 전면적인 서비스가 제공될때까지 우리 스스로 문제를 찾아 해결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한편 TDMA는 이미 유럽등 선진국에서 상용화돼 검증을 마친 기술방식으로 향후 수년간 CDMA와 함께 세계시장을 분할할 것으로 예측돼 국내 기술표준 결정을 어렵게 하고 있다. □기고 ◎「PCS 기술표준」 조기 채택을/산업발전·국제 경쟁력에 중요 변수 최근 정보통신부가 발표한 제3차 통신사업 구조조정 문제가 업계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특히 차세대 이동통신 서비스라고 불리는 PCS는 굴지의 대기업들이 참여를 희망,치열한 경쟁이 예상된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PCS의 기술표준 문제가 마무리되지 않고 있어 여러가지 우려가 나오고 있다.PCS의 표준화 정책은 무선통신분야 국내 산업발전 뿐만 아니라 국가 전체의 대외 경쟁력에도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문제이다. PCS 표준화 문제는 두가지로 요약된다.하나는 단일표준이냐,다수 표준이냐의 표준의 수에 관한 것이고 또 하나는 어떤 기술방식을 표준으로 선택할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유럽과 일본은 단일표준화를 선택했다.이는 지역간,또는 시스템간 호환성확보라는 장점을 취한 것이라 할수 있다.반면 미국은 6개의 다수표준을 채택해 사업자들로 하여금 고민을 하도록 만들었다.그러나 미국의 PCS 사업자들도 시스템간 호환성확보와 디지털 이동전화 시스템과 PCS시스템의 표준을 일치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같은 사례는 우리에게 단일표준의 필요성을 명확히 제시해 준다.국내에서도 복수표준을 허용하자는 주장이 일부 있으나 이는 좁은 국토에서 기술개발력의 분산과 호환성 제한,비용상승만초래할 뿐이다. 그러면 우리나라의 PCS 기술표준은 어떤 것이 되어야 할 것인가.PCS기술은 크게 TDMA(시분할 다중화방식)와 CDMA(코드분할다중화방식)가 있다.유럽과 일본은 이미 기술이 확립된 TDMA를 선택했고 미국에서는 최근 자체 개발한 CDMA가 우세를 보이고 있다.CDMA는 최신기술이기 때문에 아직 상용화는 안돼 있지만 용량이나 기능면에서 TDMA보다 다소 우수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CDMA는 또 국제통신연맹(ITU)에서 개발중인 제3세대 이동통신에도 적용이 검토되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이미 디지털 이동전화에 CDMA를 표준으로 채택,기술개발을 완료했기때문에 PCS 장비개발이나 상용화 일정에서 유리한것이 사실이다.그러나 당분간은 두방식의 세계시장 분할이 예상되므로 국내 표준도 기술적 측면과 함께 사업적 정책적 측면을 고려해 신중히 결정해야 할것으로 보인다. ◎일 PHS 방식으로 세계 선점/업자·국민 공익 우선… 국제보급 나서 일본은 독자적인 개인휴대통신 시스템인 PHS를 개발,올해 7월부터 도쿄와 홋카이도에서 서비스를 시작했다.PHS는 요금이 비싼 휴대전화와 1백m이상 떨어진 곳에서는 통화할 수 없는 코드리스 전화기의 단점을 극복하기위해 개발된 것으로 옥내에 있는 코드리스 전화기를 그대로 옥외에서도 사용할 수 있도록 한 디지털 방식의 차세대 휴대전화 시스템이다. 일본은 이미 일본만의 독특한 표준인 NTT방식의 아날로그및 디지털 이동전화시스템을 개발,서비스해 왔으며 개인 휴대통신에서도 일본만의 독자적 방식인 PHS를 개발함으로써 세계 이동통신 시장에서 중요한 한개의 축을 형성해 나가고 있다. 일본은 독자적 방식의 개인휴대통신서비스를 추진함으로써 외국으로부터 자국 시장을 보호하는 한편 단일표준 결정에 의해 국내 기술개발 노력을 한곳에 집중시키고 사업자간 기지국의 공동 이용등을 가능케 함으로써 저렴한 양질의 서비스를 조기에 실현할 수 있었다. PHS의 도입을 위해 일본우정성은 1990년 전기통신심의회와 민간표준기관인 전파시스템개발센터에 기술적 조건의 검토를 의뢰했다.이에따라 기술규격 표준화와 실용화실험이수행됐고 정부의 사업화방침이 발표돼 경쟁적 기술개발과 서비스경쟁이 이루어졌다. 우정성은 올해 1월 1차로 21개사에 대해 PHS 사업면허를 부여했고 앞으로 총 28개 사업자에게 이를 부여할 계획이다.PHS요금은 휴대전화의 3분의 1수준,단말기 가격도 디지털 이동전화의 2분의 1수준으로 책정돼 보다 많은 국민이 이동통신의 혜택을 누릴수 있을것으로 보인다. 이제 일본의 관심은 PHS를 국제적인 시스템으로 발전시키는데 모아지고 있다.이를 위해 일본은 우선 아시아지역에 집중적인 보급활동을 전개,이미 홍콩이 이를 도입하기로 했고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태국 중국등도 이를 검토하기에 이르렀다.이것이 실현되면 국제통신시장에서 일본의 고립 탈피는 물론 세계표준 제정시 일본의 발언권을 강화시켜줄 것으로 기대된다.
  • 일본에선…/민단과 조총련(한국속의 일본,일본속의 한국:5)

    ◎“흔들리는 조총련”… 이탈자 해마다 급증/사회주의 붕괴·김정일 체제 불안감 큰 몫/이탈 「제3세력」 포용하는 민단노력 절실/남북화해 물결따라 두 단체 교류 조짐도 재일동포 2세 전월선(36·여)씨는 일본에서 화려한 각광을 받고 있는 오페라 가수다.그녀는 지난해 비제의 「카르멘」으로 한국무대에도 데뷰했다.그러나 전씨의 화려한 무대 뒤에는 둘로 갈라진 재일동포 사회가 안고 있는 분단의 아픔이 짙게 깔려 있다. 청중들의 열광적 박수소리를 뒤로 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그녀는 남·북으로 국적이 갈린 가족과 만나야 한다.그녀의 가족은 일본사회의 민족차별과 함께 또 하나의 비극인 민족분단의 비극 속에 살아가고 있다.전씨의 국적은 처음에는 조선(북한)이었다.그러나 지난 93년 한국으로 바꾸었다.그녀의 아버지도 한국 국적이다.그러나 어머니와 동생들의 국적은 조선이다.한 가정에서 조차 국적이 남·북으로 갈라져 있다. 재일동포 사회는 그녀의 가족과 같이 재일본 대한민국민단과 재일본 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로 나누어져 있다.민단자료에 따르면 현재 68여만명의 재일동포중 민단계는 49만여명,조총련계는 18만여명으로 나타나 있다.그러나 조총련계가 24만여명이라고 추산하는 사람들도 있다. 재일동포사회는 당초 1945년10월 「조선인연맹」이라는 하나의 단체로 출발했다.그러나 1946년 「조선건국촉진 청년동맹」과 「신조선건설동맹」을 비롯 20여개의 산하단체가 공산주의자에 의해 독점됐던 조선인연맹을 탈퇴,새로운 단체를 구성함으로써 둘로 나뉘었다.냉전의 이데올로기 대립이 재일동포 사회도 이처럼 둘로 갈라놓았으며 오늘도 그러한 대립과 갈등은 청산되지 못하고 있다. 민단은 초창기 재일동포에 대한 세금투쟁,외국인등록령 반대투쟁 등을 시작으로 재일동포의 권익옹호와 민생안정를 위한 여러가지 민족차별 철폐 투쟁을 해왔다.83년에는 지문날인제도 철폐를 위해 1백80여만명의 서명을 받았으며 64년 도쿄올림픽과 88년 서울올림픽 때는 한국선수단을 지원했다. 민단은 75년7월 조총련계 동포들의 모국방문을 위한 성묘단 사업을 추진,많은 호응을 받았다.성묘단 사업을 계기로 조총련중 민단으로 전환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며 당초 조총련이 압도적으로 많았던 인구 비율이 역전됐다. 그러나 민단은 고질적 파벌싸움과 재일동포에 대한 권위주의적 태도 등으로 적지 않은 비난을 받고 있다.이름을 밝히기 거부한 한 재일동포는 민단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아주 싫어한다』고 잘라말했다.그는 『민단은 단비만 받고 재일동포를 위해 하는 일도 별로 없으며 지나치게 권위주위적』이라고 혹평했다.민단 관계자들도 민단에 대한 무관심과 비난을 어느정도 인정하고 있다.신용상 단장은 『봉사하는 민단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재일동포사회의 또하나의 세력인 조총련은 더욱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 냉전 종식과 사회주의 붕괴와 함께 북한에 대한 실상이 알려지며 이탈하는 사람들이 더욱 많아져 조총련은 지금 크게 흔들리고 있다. 조선학교 교장과 조총련의 주요 직책을 맡았던 박로호 모국방문추진도쿄위원회 부위원장(70)은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에 대하여」라는 책을 통해 사회주의의 모순을 깨달은 후 조총련에 대한 깊은 회의를 가졌었다』고 말한다.그후 조총련을 탈퇴한 박부위원장은 『조총련의 중요한 지지 기반인 지식인들의 갈등이 특히 심각하다』고 지적한다. 북한의 경제 지원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조총련계 상공인들도 많은 지원에도 불구하고 북한 경제가 날로 악화되는데 실망,크게 흔들리고 있다.지난해에는 조선상공연합회 부회장을 비롯 조총련계 상공인 1백40여명이 집단 탈퇴하기도 했다. 조총련은 한덕수의장이 88세의 고령에다 병을 앓고 있어 허종만 책임부의장 체제로 전환하려 하고 있으나 이에 대한 반발도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북한도 외화공급원인 조총련을 끌어안기 위해 애쓰고 있지만 김정일에 대한 인식이 김일성과는 차원이 다르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 외교관은 말한다. 조총련은 사실 당초 민단보다 지식인이 많았고 잘 조직됐었으며 지금도 경조사와 경제 문제 해결 등을 적극 지원하는 등 강한 조직관리를 하고 있다.그러나 사회주의 몰락이라는 시대의 큰 흐름과 북한의 모순과 어려운 실상을 깨달은 많은 사람들은 조총련을 떠나고 있다.최근에는 매년 5천∼6천여명이 탈퇴했으며 지난해 이탈자는 6천2백여명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조총련을 떠난다고 해서 그들이 민단에 가입하는 것은 아니다.대부분이 민단에도 가입하지 않고 있다.조총련도 민단도 아닌 「제3의 세력」이 늘어나는 것이 오늘의 재일동포 사회 현실이다.그런 가운데 민단과 조총련의 화해 움직임과 교류도 조금씩 많아지고 있다.하지만 본격적인 화해는 아직은 미래의 일로 남아 있다.세계적 이념의 대결 시대가 막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민족 내의 이념적 대립은 한반도 뿐아니라 이국땅에서도 아직 끝나지 않고 있다. ◎인터뷰/민단 중앙본부 신용상 단장/재일동포 권익보호·생활안정에 최선/“참정권 획득,민족차별 철폐 앞장/권위주의 탈피 봉사단체로 일신” 재일본 대한민국민단 중앙본부의 신용상단장은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민단은 앞으로도 재일동포들의 권익보호와 안정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다짐하며 『지금의 최대 현안은 재일동포들의 지방참정권 획득』이라고 말했다. 세금은 같이 내면서도 재일동포라는 이유로 지방자치단체에서조차 참정권이 인정되지 않는 것은 반드시 바뀌어야 합니다.참정권문제 등 민족차별철폐와 함께 재일동포들의 인식도 이제는 일본 영주로 정착되고 있으며 민단도 이러한 흐름을 반영,지난해 4월 당초 이름에서 임시로 머문다는 의미의 「거류」라는 말을 빼고 재일본 대한민국민단이라고 바꾸었습니다. 재일동포들의 의식이 변화하는 과정에서 민단에 대한 관심도 줄어들고 있어 우려됩니다.조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민단에 계속 관심을 갖고 있으나 민단에 신세질 일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점점 멀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한신(판신) 대지진때의 위로금 분배를 민단에서 맡아 했듯이 재일동포를 위해서는 조직이 반드시 필요합니다.민단은 일본정부에 대해서도 중요한 압력단체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그러나 민단은 권위주의적이라는 비난을 겸허하게 반성하고 봉사하는 단체의 역할을 해야 하며 그러한 방향으로 나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파벌의 알력과 후계자문제,계속 늘어나는 귀화현상 등 많은 어려운 점이 있지만 결코 비관하지는 않습니다.한국정부도 재일동포들이 한국에서도 사업을 하거나 불편없이 생활할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 「유전성 시신경병」치료 길 트였다/서울대­보라매병원 진단체계 구축

    ◎모계 100% 유전… 시력 0.1 이하 감퇴/시신경 위축땐 DNA검사 받아야 한쪽 눈의 시력이 감소하면서 이어 다른 쪽의 눈시력도 교정시력 0.1이하로 떨어져 눈이 보이지 않게 되는 심각한 질환인 「레버시 유전성 시신경병증」을 치료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서울대병원 안과 장봉린 교수팀과 보라매병원팀(소아과 박혜원·안과 황정민)은 최근 이 유전성질환에 대한 유전학적 진단을 끝내고 국내최초로 진단체계를 구축,예방의 길을 활짝 열었다. 이 병은 인체내 모든 세포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미토콘드리아DNA(mt DNA)의 부분적인 변이로 인해 생기는 질환으로 유전학의 어느 경우보다 심각한 유전양상을 보여주고 있다.즉 환자나 보유자가 여자인 경우 자녀 모두에게 1백% 유전됨으로써 모든 자녀들은 이 질환의 보유자가 되거나 환자가 되는 심각한 병이다. 특히 최근 담배와 술중독으로 인해 약시를 보이는 환자에서 미토콘드리아DNA검사상 이 질환으로 진단된 바가 있어 이들에게 이 진단은 필수적인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또 중추신경계 이상으로 오는 자가면역질환인 다발성 경화증환자가 시력이 불량한 경우 유전자적 검사를 통해 이 질환으로 진단이 내려지고 있기 때문에 이 질환은 현재까지 알려진 것보다 훨씬 다양한 연령층 및 성별군에서 발병될 것으로 예견되고 있다. 실제로 이 질환은 10∼30세사이의 남자에게서 흔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최근들어 유전학적 진단이 실시되면서 3세에서 75세사이의 남녀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 병의 진단을 위해 이미 미국,유럽,일본에서는 유전자검사를 통해 이루어지고는 있으나 국내에서는 유전학적 진단이 전무한 상태이고 지난 6월 보라매병원을 방문한 13세 남아에서 국내 처음으로 유전자변이가 발견된 바 있다. 서울대병원측은 이 질환의 심각성을 고려,다음과 같은 증상으로 보이는 환자들의 신속한 의뢰를 충고하고 있다. ▲양쪽 눈의 시력이 감소하고 원인을 밝힐 수 없는 시신경염을 앓고 있거나 앓은 적이 있는 사람 ▲담배,술중독으로 약시로 진단받거나 의심되는 경우 ▲뚜렷한 원인을 밝힐 수 없는 양쪽 눈의 시신경위축이 있는 경우 등이다.
  • 재일동포의 명암(한국속의 일본,일본속의 한국:1)

    ◎반한반일… 「뿌리」와 「생활」사이 고민/이지메식 차별 극복 각 분야서 두각 광복 50년.한국과 일본은 50년이 지나도록 아직도 청산하지 못한 과거문제를 안은 채 「가깝고도 먼」관계를 유지하고 있다.현재의 한·일관계는 과연 어떤 상황이며 바람직한 미래는 어떠해야 할까.광복50주년,광복의 달을 맞아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각 분야에 걸쳐 양국관계를 총점검하고 새로운 미래를 모색해보는 「한국속의 일본,일본속의 한국」을 연재한다. 재일동포 신인하씨는 도쿄에 있는 어느 신문사 운동부(체육부)에서 일하고 있다.그녀는 지난 91년 요코하마시립대학을 졸업한후 신문사에 들어갔다.그녀는 다른 기자들과 마찬가지로 운동장을 누비며 기사를 쓰고 있다. 그러나 신씨는 정식 기자가 아니다.그것은 그녀가 일본인이 아니라 재일동포라는 이유 때문이다.그녀는 단지 재일동포라는 이유로 정식 사원이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임시채용에 머물수 밖에 없는 신씨는 보험·후생연금·보너스 등의 혜택을 받지못하는 불이익을 당하고 있다.신씨와 같이 민족차별을 받고 있는 재일동포는 그 탄생의 기원부터가 비극적이다.일제 식민통치의 불행한 부산물인 그들의 원초적 비극은 일본 특유의 「이지메」라는 단어속에 증폭되었으며 광복 50년이 된 오늘도 끝나지 않고 있다. 약자를 괴롭힌다는 의미의 이지메 현상은 재일동포들에게는 민족차별로 나타났다.재일동포들은 여러가지 제도적·인습적 차별과 압박·멸시속에 민족차별의 한을 품고 고난의 어두운 세월을 살지 않으면 안되었다. 재일동포들은 그러한 차별로 삶의 터전인 직장을 구하기 어려웠다.그들은 이때문에 자유업을 하지 않으면 안됐다.많은 재일동포들이 야키니쿠(불고기·갈비)음식점이나 소매상을 하고 「빠찡꼬」업에 진출한 것도 이 때문이다.빠찡꼬는 일본거리에서 가장 화려한 간판으로 빛나고 있지만 그 화려함 뒤에는 재일동포들의 어두운 민족차별의 역사가 배어 있다. 재일동포들은 민족차별을 없애기 위해 처절한 투쟁을 해왔다.민족차별 문제는 2세들이 사회에 진출하기 시작한 60년대부터 일본사회의 큰 쟁점으로 떠올랐다.차별을 숙명으로 받아들였던 재일동포 1세와는 달리 2세들은 지문제도등 민족차별에 대한 강한 저항을 나타냈다. 지문날인철폐 운동은 대표적인 민족차별 반대운동이었다.오랜 투쟁의 결과 재일동포들의 지문날인제도는 1993년 1월 외국인등록법이 개정되며 없어졌다.그것은 대단한 변화였다.가난과 심한 차별속에 살았던 과거와 비교해 볼때 제도적·법적 지위가 많이 개선됐다고 할 수 있다.그러나 재일동포에 대한 차별은 사회 각 부문에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다. 재일동포들은 삶의 기본이 되는 취직이 어려우며 취직이 되더라도 컴퓨터등 전문기술을 갖고 있는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정식사원이 되지 못하고 있다.정식사원이 되더라도 진급에 한계가 있다.그들은 진급을 미끼로 귀화를 요구받기도 한다.재일동포들은 또 세금을 내면서도 지방자치 차원에서 조차 참정권이 없다. 일본사회의 많은 차별로 2세,3세로 내려갈수록 일본이름을 사용하고 일본인 행세를 하는 사람이 많이 늘어나고 있다.그들에게는 자신의 뿌리를 찾는 민족의식 보다는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생활이 더욱 절박한 과제이다.그러면서도 그들은 민족차별과 장래에 대한 불안등으로 심한 정신적 갈등을 겪고 있다. 그러한 갈등을 감수하기 보다는 차라리 일본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거나 일본인과의 결혼 등으로 귀화하는 재일동포도 늘어나고 있다.최근에는 매년 7천∼8천명이 귀화하고 있으며 지금까지의 총귀화자수는 거의 20만명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고난과 차별의 어둡고 긴 터널을 자신의 실력으로 빠져나와 일본사회에서 성공한 사람들도 적지않다.그러한 젊은 세대중 한사람이 유미리(27·여)씨다.재일동포 2세인 그녀는 일본의 대표적인 희곡작가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연극을 하다가 17세부터 희곡을 쓰기 시작한 그녀는 지난 93년 최연소로 일본 희곡계 최고의 기시다상을 받았다. 유씨는 지금도 정열적으로 작품활동을 하고 있으며 그녀의 작품 「풀 하우스」는 일본 문학계 최고 권위의 아쿠타가와상 예비심사를 통과하기도 했다.비록 수상은 못했지만 제1백13회(1995년)아쿠타가와상 예비심사를 통과한 6개 작품중 그녀의 작품이 선정되자 그녀의 문학적 위치는 더욱 주목받고 있다.그밖에도 김경득 변호사,여배우 김구미자,오페라가수 전월선,화가 최광자,이진희·강재언 교수등 적지않은 사람들이 일본 속에서 나름대로 활동하고 있다.전문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조금씩 늘어나고 있으며 사무직종사자는 전체에 26.9%(92년말 현재 일본법무성 통계)나 된다. 보통의 재일동포에 대한 인식도 과거보다는 좋아지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도쿄 우에노에서 제일물산이라는 한국식품점을 경영하는 강은순씨는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안정된 후에는 일본인들의 멸시도 많이 줄었다』고 말한다.그녀는 『무엇보다도 한국의 국력이 강해지고 국제적 위상이 높아지면서 일본인들이 재일동포를 보는 눈이 많이 바뀌었다』고 강조한다. 한국의 국력신장과 일본사회의 국제화로 재일동포에 대한 인식이 개선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하지만 유형·무형의 각종 민족차별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일본의 민족차별과 조국으로부터도 따뜻한 환영을 받지못하는 재일동포들은 한국인도 일본인도 아닌 「반쪽 한국인,반쪽 일본인」의 어정쩡한 지위가 되고 있다.더욱이 뿌리의식이 강한 1세가 68만여명의 동포중 5∼7% 정도 밖에 남지않아 멀지않아 1세가 없는 재일동포사회로 바뀔 것이다. 그러한 재일동포들은 세월의 흐름과 언어의 단절등으로 조국과의 거리는 점점 멀어지고 있다.조국으로 돌아가겠다는 꿈이 있었던 1세와는 달리 2세이후 세대들은 일본에서의 정착을 당연시하고 있다.그렇다고 배타적인 일본사회속에 완전 동화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탄생부터가 비극적이었던 그들은 귀화를 하든가 아니면 영원한 이방인으로 살아가야 할지 모른다.
  • 해외 공관장 5명 인사

    외무부는 24일 주마이애미 총영사에 박부열탄자니아대사를,주코스타리카 대사에 김승영재외국민영사국장을,주자메이카 대사에 김영기문화협력국장을,주탄자니아 대사에 변승국외교안보연구원연구관을,주제다 총영사에 오명근외교안보연구원연구관을 각각 임명,발령했다. ◇박부열 총영사 ▲서울 57세 ▲조선대 경제학과 ▲정보2과장 ▲감사관 ▲트리니다드토바고 대사 ◇김승영 대사 ▲서울 55세 ▲서울대 행정학과 ▲남아프리카담당관 ▲서구2과장 ▲에티오피아 대사 ◇김영기 대사 ▲부산 50세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국제연합과장 ▲베를린부총영사 ▲외교정보관리관 ◇변승국 대사 ▲경기 53세 ▲서울대 법학과 ▲동아프리카과장 ▲홍콩 영사 ▲로스앤젤레스 부총영사 ◇오명근총 영사 ▲서울 59세 ▲동국대 정치학과 ▲함부르크 영사 ▲문서담당관 ▲나이지리아 참사관
  • 최대의 정유도시 옴스크(시베리아 대탐방:24)

    ◎“금요일은 술꾼의 날”… 한낮에도 취객 거리 누벼/이르티시강변 인구 20만 새 베드타운/16세기 코작군 사령부… 「반혁 백군」 본거지/도스토예프스키 유형 생활했던 옛집도 모스크바시간으로 상오8시30분 항구에 줄지어 늘어선 석탄기중기들이 인상적인 이르티슈강을 지나 옴스크역에 도착했다.이곳에서부터 모스크바와의 시차는 3시간으로 늘어나 역사의 시계탑은 상오11시30분을 가리키고 있다. 거리의 첫 인상은 에카테린부르그보다 더 활기차고 개방적인 것처럼 보였다.그러나 이는 착각이었다.시베리아로 들어갈 수록 사람들의 개방 마인드는 점점 더 떨어지는 특징을 보였다.호텔의 수납원은 돈을 받더니 똑 같은 영수증을 4장씩 썼다.호텔카드를 받아서는 엘리베이터를 타기 전 지키는 군인들에게 보여주어야 했고 방이 있는 층에 올라가서는 또 다시 지키는 여자에게 돈낸 영수증을 보여주고 나서야 방열쇠를 건내받았다. ○개방 마인드 뒤떨어져 다음날 기차표를 예매하기 위해 중앙매표소로 갔더니 그곳도 마찬가지로 옛 소련 시절의 복잡한 서류작업을 그대로 되풀이 하고 있었다.표 한장 사는데 서류를 한보따리씩 붙이고 있었다.매표소 안에서 사진을 몇장 찍었더니 갑자기 나이든 여자 2명이 뛰어나와 왜 비밀구역에서 사진을 찍느냐며 당장 경찰을 부르겠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쳤다.그런 규정도 없고 아무 일도 아닌데 과거의 타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거리에서 느꼈던 일시적인 착각은 이런 일들로 인해 금방 깨져버렸다. 옴스크는 1760년 남쪽 유목민들의 침략을 저지하기 위해 세운 작은 요새로 출발했다.그러다가 1808년부터 시베리아 코작의 총본부가 됐다.변경을 지키는 코작의 중심지 뿐 아니라 지금 북카자흐스탄 영토의 수도였다.아크물라이,파브류달 등 카자흐공화국의 도시들이 당시 옴스크 구베르니(행정구역)안에 들어있었다.그 뒤 레닌이 민족 단위로 소련을 나누면서 이들 도시는 카자흐쪽으로 넘긴 것이다.그 이전까지 옴스크는 이들 지역의 미니 수도였다. 1913년 튜멘∼옴스크간 철도가 개통되면서 철도에서 떨어진 뚜볼스크가 쇠락의 길로 들어서게 된 반면 옴스크는 또한번도약의 전기를 맞았다.이 도시의 최대강점은 철도와 강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는 지리적 요건이다.혁명 전부터 미국·영국·덴마크·독일계 회사 등 많은 외국회사가 이곳에서 무역활동을 했다.더구나 이 일대는 유명한 옥수수 재배지였을 뿐 아니라 버터,밀크의 주산지였다. 이렇듯 과거의 명성은 혁명 뒤 볼셰비키들의 정책 우선순위에서 밀려나며 순수한 산업도시로 그 기능이 축소돼 오늘에 이르게 됐다.내전 때 백군지휘자 콜착 제독의 사령부가 이곳에 있었으며 백군 저항의 본거지였다는 점이 무엇보다 볼셰비키들로 하여금 이곳을 「죽이기로」한 결정적 배경이 됐다.콜착 제독은 내전 막바지 이르쿠츠크에서 체포돼 처형됐지만 백군 병력은 이곳에서 궤멸됐다.이후 이곳에 있던 모든 행정·군사조직은 새로운 중심지 노보시비르스크로 옮겨갔다. 코작의 중심지로서 이곳에는 코작들이 쓰던 대사원,코작총사령부,코작행정부가 위치해 있었다.러시아의 코작은 15∼16세기에 남쪽 유목민의 침공을 저지하기 위해 결성된 특수 국경수비병력을 가리킨다.이후 3세기 정도 세월이 지나면서 이들은 정식 민족은 아니지만 반민족처럼 되어버렸다.왜냐 하면 특별한 군대식 정서와 규율을 지켜왔고 물론 차르의 명령은 받았지만 정규군대와는 별도의 독립조직을 유지하면서 독특한 전통,관습,의복까지 유지해 왔기 때문이다. 시베리아 점령기 때 이들 코작은 변경 각지로 퍼져 국경수비를 전담했으며 물론 점령작전에도 가담했다.전성기 때 코작은 1백만명 정도 됐으나 지금은 많이 줄어들었다.레닌은 혁명 뒤 코작을 해체시켜 버렸는데 내전 때 이들이 반혁명에 가담했기 때문이었다.다시 복권되기는 했지만 현재 이들은 군대조직으로 재건되지는 못하고 사설 경호나 열차의 보안요원 등으로 일하며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금요일 하오 트람바이(전기버스)를 타고 도시외곽을 돌아보았다.짧은 시간에 도시를 보는 데는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하는게 최고다.도시전체를 빠짐없이 연결해줄 뿐 아니라 사람들의 표정,옷차림을 통해 그들의 삶의 모습을 가장 솔직하게 알아낼 수 있고 또한 차안에서 나누는 사람들의 대화를 통해중요한 정보까지 얻어 듣는 수도 많기 때문이다. ○독특한 전통·관습 유지 러시아에서 금요일은 술꾼들의 날이다.주말을 앞두고 일찍 일을 끝내고 대낮부터 술에 취한 사람들이 거리,트람바이에 지천으로 보였다.시중심가에서 북서쪽으로 15∼20㎞ 떨어진 곳에 50년초에 건설된 시베리아 최대의 정유공장단지가 들어서 있다.시베리아에는 아친스크,앙가르스크,그리고 옴스크 등 3곳에 정유공장이 있는데 이중 옴스크 것이 최대규모를 자랑한다.입구에서 끝까지의 공장 길이가 10㎞에 달하는 규모다. 트람바이나 트롤리(전차)를 타고 시내를 돌아다녀보면 시베리아 각 도시들은 나름대로 독특한 형성 과정을 거쳐왔음을 알 수 있다.처음 공장이 건설되고 이 공장 노동자들을 위한 주택단지가 들어선다.이 경우 공장지대와는 보통 3∼4㎞의 녹지대를 사이에 두고 아파트촌이 형성된다.시베리아는 물론 사회주의 도시들에 녹지대가 많은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노동자수가 늘어나면서 공장­공원­주택­공원­주택의 순으로 도시규모도 점점 더 커지고 대중교통 노선도 함께 복잡다양화된다. ○아파트 사이엔 녹지대 그러다가 도시가 포화 상태가 되면 강을 건너 새로운 도시가 형성되고 이를 연결하기 위해 교량이 세워지고 도시 고속도로가 닦인다.이 주거용 신도시는 이곳에서도 우리 같이 베드타운으로 불린다.다만 좀더 직설적으로 「스팔냐(침실)」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이르티슈강 건너편에 새로 건설된 옴스크의 신도시는 20만명이 살고 있는 대형 베드타운이 됐다. 옴스크 시내 옛 시가지 쪽에 있는 팔티잔스크거리에는 도스토예프스키가 1850년부터 1854년까지 유형 생활을 했다는 집건물이 남아 있다.도스토예프스키는 당시 「페트라셉스키(황제에 반대하는 비밀결사조직으로 페트라셉스키는 주모자의 이름)」라는 반정부 비밀결사에 가담한 죄로 시베리아 유형을 왔다고 현관옆 동판에 새겨져 있다.도스토예프스키는 사형 판결을 받고 사형대까지 올라갔다가 극적으로 감형돼 유형을 떠났다.이 유형생활을 기록한 그의 소설이 바로 「죽음의 집의 기록」이다.현재 이 건물은 옴스크주 모병소로 쓰이고 있다.
  • 신생 한국의 정치상황(새로쓰는 한국현대사:27)

    ◎“동족상잔 막자”… 김구중심 「대북협상」 강격 제기/5·30선거서 「보수」 약화… 이대통령 자유당 추진 분단정권의 수립후 남과 북에서는 각각 정권을 확고히 하기위해 총력을 기울였다.신생 대한민국은 이데올로기적으로 대립하지 않을 수 없었던 좌익과 북에 대한 견제를 강화해 나갔다.또 정치적으로 적과 동지가 생겨나고 정치상황도 변화했다. 대한민국 수립 이후에도 통일독립촉진회를 주축으로 한 남북협상파는 미소 양군의 철수와 민족자주권을 주장하며 북한과의 평화협상 노력을 기울였다.그러나 목적은 한 번도 이루지 못했다.이런 와중에 북한의 조종을 받는 좌익의 대정부 무장봉기가 거세지기 시작했다.남한에서는 마침내 19 50년 5월 5·30선거를 통해 다시 국회를 구성하고 반공정책쪽으로 기울었고 얼마후 이 땅에서는 전쟁이 발발하고 만다. ○좌익·대북견제 강화 우리는 분단정권 수립후 전쟁발발까지의 기간중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던,즉 당시 정치세력의 흐름을 적지않게 주도했던 통일독립촉진회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주로 남북협상파를 주축으로 결성한 이 통일독립촉진회는 세력을 가진 한독당을 얼마만큼 끌어들이느냐를 놓고 고심했다.남로당의 반정부 무장봉기가 극성을 부리고 좌우의 대립이 거세지는 과정에서 남북협상파는 동족상잔의 전쟁을 막자는 환상에 기울었다. 이 통일독립촉진회 결성에는 김구 엄항섭 조완구 등이 발기인회를 만들 때까지 참여했다.통일독립촉진회의 주장은 ▲미소 양군의 한반도 동시 철수를 통한 민족자주권 쟁취▲남북 제정당및 사회단체의 정치협상등이었다.김구등 한독당의 일부인사는 초창기 다소 적극적인 참여의사를 밝혔다. 1948년이 지나가고 49년에 접어들면서 38선과 산악지대에서의 남북간 무력대립이 심해져갔다.이때 북한은 남북 제정당지도자협의회를 열어 그 협의회에서 남북총선거를 실시할 수 있는 선거지도위원회를 구성하자고 제의해왔다.그 내용은 「남북에 현존하는 정권에 남북총선거를 지시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여 남북 총선거를 실시하고 외국군대를 철거시켜 통일정부를 수립하자」는 것이었다. 북한의 「남북 제정당사회단체 지도자협의회에 의한 통일정부 수립운동」제의에 대해 김구는 일단 긍정적 반응을 보였다.반면 김규식은 소극적이었다.당시 김구의 심경은 그가 1949년 3월21일 「신민일보」사장과의 회견에서 밝힌 내용에 잘 나타나 있다.김구는 그때 이렇게 말했다.『우리민족의 생존권과 우리의 주권을 획득하는 길은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입니다.그것은 민족자결정신에서 미소 양군의 즉시 철퇴를 요구하고 남북협상에 의해 우리의 통일정부를 우리의 손으로 세우는 것입니다.혁명세력과 반역집단이 합작할 수는 없으나 혁명세력끼리의 합작이나 협상이라면 성립되지 않을 하등의 이유도 없는 것입니다』 김구는 이 회견에서 이승만 대통령을 공격하고 혁명세력간 좌우합작과 남북협상등을 통해 자주적 통일민족국가 수립을 호소했던 것이다.「혁명세력끼리의 남북협상」으로써만 동족상잔의 불행을 막을 수 있으므로 그 운동이 실패하더라도 그 길을 가야한다는 주장이었다.이에 대해 김규식은 상당히 회의적이었다.김규식은 이미 서로 다른 정권이 성립한만큼 현실적으로북한의 제의가 불가능하며 자칫 북한 공산당의 계략에 빠져들 수 있다는 신중론이었다.한독당내의 반공주의자들은 물론 김규식의 견해에 동조하는 편이었고 끝내 통일독립촉진회에 주체적으로 참여하기를 거부했다. 1949년 4월을 넘기면서 북한은 남조선민전과 북조선민전을 합하고 인공수립에 참가했던 남한의 우익 혹은 중도좌파 정당을 참가시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결성을 서둘렀다.북한은 남한의 한독당,민족자주연맹,통일독립촉진회를 이 전선에 끌어들이기 위해 전전긍긍했지만 성과는 없었다.그러던중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의 결성대회가 6월25일부터 평양에서 열렸다. 김구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결성대회가 이틀째 접어든 19 49년 6월26일 안두희라는 현역장교의 저격으로 그의 거소 경교장에서 생애를 마쳤다.혁명세력끼리의 합작이나 협상이라면 성립되지 않을 어떠한 이유도 없다고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이상을 추구해온 김구는 파란만장한 생애를 그렇게 마감했다.그 나이 73세였다. 해방공간에서 한때 김구는 이승만과 우정을 나누었다.그들은반탁운동에서는 협력했다.그러나 김구는 단독선거와 단독정부에는 반대의사를 분명히 함으로써 이승만과 사실상 정적의 사이가 되었다.특히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후 더욱 그러했다.그리고 김구는 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도 남북협상의 미련을 버리지 않았다. 이승만은 김구를 못마땅하게 여겼다.이승만은 김구가 남북협상을 주장하면서 지난날 임시정부 지지를 맹세하는 단체를 조직한다고 비난했다.또 김구가 다음해 예정된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자기 지지자들을 당선시키려는 준비를 서두르는 가운데 반정부 운동을 선동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협상에 미련” 못마땅 이승만은 김구의 저격범 안두희를 김구의 측근으로 보았다.이승만은 1949년 6월28일 미국의 친지 RT 올리버에게 보낸 편지에서 안두희를 한독당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인물로 단정했던 것이다.이어 이승만은 이 편지에서 안두희가 김구를 방문했을때 비서들을 모두 밖으로 내보내고 둘이서 비밀대화를 나누었다고 전하고 세발의 총성이 울렸다고썼다.그러면서 마지막으로 편지내용을 어느 한구절도 인용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제헌국회 안에도 이승만을 반대하는 세력이 많았다.그러나 부분적으로나마 반대파들을 통제해나갔다.이승만은 자신이 유엔대사로 임명한 조병옥도 사실상 경계했다.유엔에 남아있기를 희망하는 대통령의 뜻도 능히 거역할 수 있고 모든 사람들이 쪼들려도 개인자금을 조달할 능력을 가진 사람이 바로 조병옥이라고 평가했다.특히 경찰을 장악하고 있는 내무부장관 자리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이 이승만 대통령의 생각이었다. ○민족주의세력 득세 어떻든 이승만은 임시변통으로 사람들을 쓰고 부려먹었다.조병옥도 그러한 케이스였고 뒷날에는 정적이 되었다.초대 주미대사였던 장면도 예외가 아니었다.그리하여 서서히 정치판도가 변화하는 가운데 1950년이 다가왔다.그해 5월30일 제2대 국회로 가는 5·30선거가 실시되었다.그 결과 대한국민당,민주국민당,국민회등 기성 보수정파의 원내세력이 줄어들었다.반면 민족주의 세력을 포함한 중간파가 약간 두두러졌다.특히 여당입장에있던 대한국민당과 원내 제1당이었던 민주국민당이 무소속에 밀려 소수로 몰락해버렸던 것이다. 19 50년 5·30선거는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기반을 약화시켰다.무소속으로 자기 주장을 국민들에게 호소해왔던 이승만은 정당을 등에 업지 않을 수 없었다.그래서 이승만은 자기가 만들었던 대한독립촉성국민회를 중심으로 자유당을 서서히 엮어나갔다. ◎이정권·민국·한불업계 낙선 공작/“김성수·김준연 남감찹과 내통” 몰아/현야 경찰서장 교체… 중진들 대거 탈락 1950년 5월 실시된 5·30 국회의원 선거에서 이승만 정권이 카운터파트인 민주국민당과 한국독립당등 경쟁 상대들에 대해 조직적인 선거방해를 시도한 사실이 드러났다.이같은 사실은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이 미국립공문서보존관리국에서 긴급 입수한 조인트 위카(JOINT WEEKA),즉 주한미국대사관 주재 무관들이 작성한 주간보고서에서 밝혀졌다. 이 조인트 위카에 따르면 당시 이승만 정권은 선거전 민국당과 한독당 후보들을 낙선시키기 위해 간첩사건을 조작했으며 대대적인 경찰인사도 단행했다.조인트 위카 13편(50년3월31일자)에 따르면 이승만정권은 대한정치공작대를 통해 민국당 중진들이 군경에 잠입한 남파간첩들과 연계된 것으로 조작했다.이는 남북 분단정권 수립후 남쪽에서 좌익에 대한 경계심이 고조되던 시기에서 주효한 전략으로 작용한 것으로 이 보고서는 풀이하고 있다 정치공작대는 그해 3월20일 국가보안법 위반 범죄수사를 위해 경찰 1백명으로 구성한 정보조직으로 김성수,조병옥,백관수,김준연등 민국당 중진들이 간첩과 내통한 것으로 조작했다.이 공작에는 윤치영 임영신 이범석등이 가담했고 특히 윤치영이 이끈 여당격의 대한국민당이 깊숙이 관여한 것으로 조인트 위카는 기록하고 있다(조인트 위카 16,50년4월14일자).대한국민당은 70여명의 입후보자를 내세워 민국당의 이슈를 혼란으로 몰아갔으며 민국당을 패배시키려는 선거전략도 구사했다(조인트 위카 13,50년 3월31일자). 조인트 위카는 이어 정치공작대 사건은 결국 4월중순경 조작극으로 드러났지만 당시 이승만 지지세력의 가장 큰 적수였던 민국당과 한독당은 큰 타격을 입을 수 밖에 없었던 것으로 결론지었다.한편 이 정보보고서에 의하면 당시 정권은 선거에 앞서 5월초 미군정 시기부터 민국당이 장악했던 지방 경찰서장직을 대폭 바꾸는 바람에 민국당의 중진들이 선거에서 대거 낙선한 사실도 들추어냈다.
  • “북 식량해결 못하면 붕괴”/북경분석가들 전망

    【북경 UPI 연합3】 북한 노동당비서 김정일은 지난해 7월 사망한 아버지 김일성 전주석에 대한 「충성심과 존경심」 때문에 공석으로 남아 있는 국가주석과 당총비서직을 공식승계하지 않고 있다고 북경주재 북한대사관의 최한춘 참사관이 3일 말했다. 한편 북경의 분석가들은 올해 53세인 김정일이 북한의 식량위기대처에 실패할 경우 민중봉기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때에 따라서는 북한 공산정권이 전복될 가능성도 있다고 전망했다.
  • 가깝고도 먼 이웃(한·일수교 30년)

    ◎수교 19년뒤에야 한국정상 “공식 방일”/66년 무역협정 서명… 경제협력 “물꼬”/빈번한 교류속 일 지도층 잇단 망언 65년 국교가 정상화된 이후 한일 양국간에는 모두 17차례의 정상간 왕래가 있었다. 우리나라 대통령의 첫 공식 방일이 추진된 것은 72년이다.박정희 대통령이 11월23일 공식 방일하기로 예정됐었으나,국내의 반일감정이 수그러들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취소됐다.박대통령은 18년에 이르는 재임기간동안 한번도 일본을 공식방문하지 않았다. 우리 대통령의 공식 방일이 성사된 것은 12년 뒤인 84년에 이르러서였다.이 해 9월6일 전두환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히로히토 국왕을 만났다.이후 노태우 대통령과 김영삼 대통령도 90년과 94년 각각 일본을 방문했다. 수교전에도 대통령의 방일은 있었다.이승만 대통령은 48년과 50·53년 등 세차례 일본을 비공식 방문,요시다 총리 등과 면담하기도 했다.또 61년에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이 케네디 대통령의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하는 경로에 일본을 비공식 방문,이케다 총리와 면담을 가졌다. 우리나라에 처음 온 일본 총리는 사토 총리로 67년 6월30일 박정희 대통령의 취임식에 참석했다.공식방한한 첫 일본 총리는 나카소네 총리로 83년 1월11일 서울에 와 전두환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다.이후 88년 다케시타,91년 가이후,92년 미야자와,93년 호소카와 총리의 방한이 이어졌다. 비공식과 실무 방문을 포함하면,한국의 대통령은 모두 7차례 일본을 방문했으며,일본의 총리는 10차례 방한했다. 한일 국교정상화 이후 66년 3월 한일간의 무역협정이 서명,발표됨으로써 본격적인 경제 관계도 시작됐다. 이 해 9월 서울에서 처음으로 장기영 전부총리와 후지야마 일 경제기획청장관이 참석하는 한일경제각료 간담회가 열렸다.이후 양국간 경제교류는 80년대 말까지 크게 확대되어 왔으나,90년대초에 들어 무역·투자·기술협력 등의 분야에서 감소세를 보이다 최근 회복세를 찾고 있다. 그 과정에서 무역불균형 심화가 지속적으로 양국간 현안이 됐는데,65년 1억 달러였던 대일 무역적자는 80년대 후반에 50억 달러를 초과하기 시작했으며,92년에는 79억 달러를 기록했다. 경제 관계가 밀접해지면서 67년 정기 각료회의가 시작된 뒤,양국 외무장관 회담,고위외교정책협의회,한·일 어업공동위원회,문화교류실무자회의 등의 한·일 정부간의 정기회담으로 자리잡았다. 또 한일의원연맹과 한일친선협회,한일협력위원회,한일경제협회,한일협회,한일여성친선협회,한일문화교류기금 등의 민간 친선단체가 발족되기도 했다. 65년 1만명에 불과하던 양국간 인적교류는 지난해 2백70만명으로 늘어났다.일본이 거주하는 재일 한국인은 68만8천명이다.최근에는 재일교포와 일본인과의 결혼이 늘어나는 추세를 나타내고 있다. 90년 통계에 따르면,재일교포의 총혼인건수 1만3천9백34건 가운데 동포간 혼인은 15.8%에 불과하며,일본여자와 결혼한 교포남성이 19.5%,일본남자와 결혼한 교포여성이 64.2%였다.일본에 귀한한 재일교포는 50년이래 17만명인 것으로 집계된다. 이러한 관계 발전의 한편에서는 일본측의 망언도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일본의 고위각료급에서만도 해마다 일일이 기록할 수 없을 정도의 망언을 쏟아냈다.대표적인 것이 82년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과 그에 대한 86년 후지오 문부상의 망언으로 양국간의 외교문제로까지 비화됐다.정부는 이해 9월 예정된 한일 외무장관 회담을 연기하며 후지오의 망언에 엄중항의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또 올해 한일 국교정상화 30주년을 맞아서도 어김없이 와타나베 미치오(도변미지웅) 전 외상이 한일합방과 관련한 망언을 함으로써 양국간의 미래지향적인 관계 발전에 찬물을 끼얹었다. ◎도쿄의 평가와 과제/“국교정상화 한국발전에 크게 기여”/위안부 등 개인배상문제 불씨 잠복/재일동포3세 법적지위개선도 현안 한국과 일본은 22일로 한·일기본조약 서명 30주년을 맞는다. 국교가 정상화된 지 3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일본에는 한국에 대한 우월감이,한국은 일본에 대해 피해의식이 남아 있다.또 「김대중납치사건」 「문세광 사건」 망언파동 등으로 한일관계는 곡절도 많이 겪었다. 한일관계는 양국 정치에 있어 「늘 쉽게 구사할 수 있는 정략적 카드」로 악용당한 사례도 많이 있다. 하지만한일국교정상화가 냉전체제하에서 동아시아지역의 안정과 한국의 경제발전,일본의 이 지역에서의 영향력 행사를 위한 안정적 발판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양국에 크게 공헌한 점이 있다는 데 대해 의견이 대체적으로 모아진다.특히 일본에서는 국교정상화가 한국에 보다 많은 플러스가 됐다고 말하는 학자,평론가들이 많다. 초대 주일대사를 지낸 김동조전외무장관은 한일국교정상화와 관련,『냉전구조하에서 정치적으로 아시아,넓게는 세계 평화에 기여했다』고 평가하면서 『한국으로서도 피폐해진 경제를 발전시키는데 조약체결로 얻은 자금이 도움이 됐다』고 말한다(도쿄신문 20일자). 일본으로부터의 자금이 한국경제 발전에 대해 도움이 됐다는 점에 대해서는 재일사학자 강재언교수도 높이 평가한다.하지만 강교수는 강조하는 점이 조금 다르다.그는 우선 일본으로부터 무상공여 3억달러 등 모두 8억달러의 자금은 식민지 피해에 따라 당연히 받을 몫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강교수는 또 『동남아시아의 다른 나라들도 배상을 받았지만 많은 나라에서 특권층을살찌운 반면 한국은 깨끗하게 경제건설에 활용됐다』고 말해 자금이 들어온 일본보다는 활용한 한국의 노력에 비중을 두었다. 그는 반면 「식민지지배 책임문제」 등이 분명하게 밝혀진 위에 국교정상화가 됐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돈이 급하고 일본은 과거를 반성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 부분이 애매하게 처리된채 기본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여러가지 문제들이 남게 됐다고 말한다.남은 문제들 가운데는 일본의 진정한 과거반성,한일기본조약의 해석,재일동포 3세이하의 법적 지위 문제,식민지배 피해자에 대한 개인적 배상 등을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다. ◎한·일기본조약 서명 이동원 전외무/“국력 길러 일 우월의식 극복을/과거에 매달려 역사흐름 놓치지 말길/패전 극복 일의 창조적 노력 본받을만 한·일기본조약을 서명한 이동원 전외무장관(현 국제학술원이사장)은 21일 국교정상화 30주년에 즈음한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은 과거에 너무 집착하지말고 일본과 대등한 관계를 유지할수 있는 국력을 키워야한다고 강조했다.다음은 인터뷰 내용. ­한·일기본조약을 서명한 당사자로서 30주년을 맞는 감회와 기본조약의 평가는 어떻습니까. ▲한·일 국교정상화회담은 거의 15년이라는 세월이 걸린 전후 세계사에서 가장 길었던 외교협상이었습니다.그만큼 양국간의 적대감과 갈등이 깊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조약에 서명한 것은 역사의 흐름에 뒤떨어지지 않기위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냉전이라는 국제정세를 배경으로 식민지지배에 대한 청산을 분명히 하지않고 경제협력을 우선했다는 지적이 있습니다만. ▲역사는 변화하는 것입니다.변화없이는 발전도 없습니다.한·일기본조약은 그 시대의 역사적 변화의 흐름을 활용한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당시 미국의 지원하에 새로운 일본이 만들어지고 있었으며 한국도 새로 태어나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과거의 역사는 물론 잊어서는 안되지만 과거에만 머물러 있을수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일본의 전후청산은 끝났다고 생각합니까. ▲어느정도 이루어졌다고 봅니다.그러나 중의원의 「전후50년국회결의」 채택과정에서 나타났듯이 과거잘못을 솔직히 인정하는 독일과 같은 자세가 부족합니다.일본은 국수주의적 환상에서 깨어나 이웃국가들과 함께 공존·번영하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그러나 불행히도 아시아의 후진성을 이용,우월주의적인 입장을 견지하려는 움직임이 여전히 강합니다.공존의 시대에 배타주의적 우월의식을 고집한다면 일본의 미래는 어둡다고 봅니다.일본도 중국·한국·아세안등 아시아 이웃국가들의 역동적인 변화를 잘 인식하지않으면 안됩니다. ­국교정상화후에도 일본지도층의 망언이 되풀이 되고 있습니다.그 배경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주변국가를 멸시하는 일본의 배타주의적 우월의식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일본인들의 의식속에는 아시아를 깔보는 경향이 강하게 배어있습니다.그러나 우리들에게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일본인들이 함부로 대하지 못하도록 하는 창조적 노력과 국력배양을 했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2차대전후 일본은 전쟁폐허의 암울한 상황이었습니다.일본은 그러나 미국에 머리숙이며 열심히 기술을 배우고 경제부흥을 위해 많은 땀을 흘렸습니다. 그들은 특히 선진기술을 그대로 모방하지않고 아주 작은 것이라도 「일본적인 알파」를 추가하려고 노력했습니다.그러한 「창조적」 노력이 오늘과 같은 경제대국을 이루는 원동력이 됐습니다.그러나 우리는 일본것을 그대로 모방하는데 그친 경우가 너무나 많았습니다. 그 결과 일본에 대한 경제적 예속이 점점 깊어져왔습니다.작은 것이라도 「한국적 알파」를 추가하려는 창조정신이 무엇보다 필요합니다. ­한국을 보는 일본의 시각이 변했다고 봅니까. ▲한국에 대한 일본의 시각이 많이 좋아진 것은 사실입니다.그러나 한국을 얕보는 본질적인 인식은 크게 변하지않은 것 같습니다. ­식민지지배를 배경으로 한 한·일간의 특수관계에서 이제는 보통의 이웃국가관계로 바뀌어야한다는 지적이 있습니다만. ▲그렇습니다.과거가 미래를 구속하는 상황이 더이상 되풀이되어서는 안됩니다.광복 50주년이 됐습니다.일본에도 한국에도 식민지이후 세대가 중심이 되고 있기때문에 한국도 이제는 냉정한국제정치논리에 대비하여야합니다. ­앞으로의 한·일관계를 어떻게 전망합니까. ▲양국은 경제뿐만아니라 정치·문화등 각분야에서 더욱 밀접하고 복잡한 관계로 발전할 것입니다.그러나 한국은 반일감정을 극복하고 기술·정보등 경제분야의 발전을 통해 일본과의 격차를 줄여야합니다.물론 일본과는 경제규모에서 대등할수는 없습니다.그러나 질적인 대등함을 유지할수 있는 국력을 키워야합니다.외교적 수사가 아니라 국력이 뒷받침되는 평등한 관계를 유지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중,휴대용 레이저무기 판매

    ◎반경 3㎞내 적 실명… 제3국 테러 이용 우려 【런던 AFP 연합】 중국은 광학장비를 무력화하는데 목적이 있으나 최고 3㎞ 거리에서 사람의 눈을 현혹시키고 심지어 시력을 잃게 할 수도 있는 휴대용 레이저무기를 판매하고 있다고 영국의 방위관계 전문주간지 제인스 디펜스가 24일 보도했다. 이 전문지는 27일에 발행될 최신호에서 중국 북방공업총공사가 제작한 「ZM87 휴대용 레이저무기」의 자세한 사항이 동남아에서 열린 한 무기전시회에서 공개되었다고 전했다. 이 주간지는 북방공업총공사의 설명서 내용을 인용하여 『이 무기의 한가지 주요한 용도는 강력한 레이저 충격으로 적 전투병의 눈에 상처를 입히거나 또는 눈을 현혹시키는데 있다』고 말했다. 제인스 디펜스는 이 무기가 중량이 35㎏으로 가볍지만 테러무기로 이용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다소 있다고 말하고 미국방부 관리들은 그보다도 이 무기가 「이른바 깡패국가들」을 포함하는 제3세계 국가들의 마음에 들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보도했다.
  • 한국의 유엔안보리 진출(사설)

    한국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이사국으로 사실상 확정됐다는 것은 그의미를 결코 과소 평가할 수 없다. 유엔가입 불과 4년만에 제3세계 외교의 실력자중 하나인 스리랑카를 제치고 안보리이사국으로 당당히 진출하게 됐다는 것은 한국외교의 큰 승리이고 문민정부가 적극 추진하고있는 세계화외교의 구체적 실천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유엔의 기능이 강화되고 있는 것은 역사적 추세이고 안보리는 구속력을 갖고있는 유엔의 핵심기구다.유엔이 창설된후 89년까지 44년동안 6백46개의 건의결의안을 채택한데 비해 냉전체제가 와해되기 시작한 90년이래 5년동안 무려 3백23개의 결의안을 처리해낸 것만 봐도 알 수 있다.이제 유엔은 국제안보의 중심기구이고 환경,우주개발,해저탐사등 인류의 생존문제와 관련된 문제들을 풀어가야할 유일한 국제기구다.이제 우리는 그 유엔의 중심에 선 것이다. 유엔은 또 창설50주년을 맞아 안보리의 확대개편,헌장개정 문제등 중요한문제들을 다루어야 하는 시점에 있다.우리가 하기에 따라서는 유엔의 장래,나아가 세계역사에 중대한 역할을 할 수도 있는 위치에 있는 것이다.우리는 한국의 안보리진출 의미가 단순히 15개 이사국중 하나가 된 것에 그치지 않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한국은 안보리 진출을 한국외교의 신기원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또 우리는 현안인 북한의 핵개발문제를 국외자로서가 아니라 안보리의 일원으로 직접 다루는 자리에 서게됐다.더욱 중요한 것은 한국이 안보리이사국으로 남아 있을 기간은 남북통일의 결정적 시기가 될 지도 모른다는 점이다.남북통일의 촉매 역할을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할 것이다. 다만 한가지 첨언한다면 역할과 책임이란 논리로 유엔분담금의 확대 지원을일부 외교계에서 주장하고 있는 문제이다. 우리는 현재도 상임이사국인 중국이나 다른 이사국들 보다도 많이 내고 있다. 돈으,로 외교를 하겠다는 것을 우리의 국민정서라는 것이 아직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도 알아두었으면 한다.
  • 마사이족/초지따라 생활… 국경없는 유목민(아프리카 기행:3)

    ◎케냐·탄자니아∼나트론호 동서로 이어진 삶터/일부다처제… 같은 연령끼리는 아내도 빌려줘/13∼17세 할례식… 전사는 무한대의 성적자유 누려 국경없는 자유인들 마사이족의 유목지대 초원은 케냐의 나쿠루로부터 탄자니아에 이르는 남위 6도까지 펼쳐진다.동쪽으로는 케냐의 차보국립공원과 탄자니아의 킬리만자로산과 연결되어 있다.서쪽으로는 나트론호 주변을 포함해서 마냐라호로 이어진 이 지역은 풀이나 관목들밖에 자라지 않는 불모지이기 때문에 소와 염소의 유목지로 이용된다.케냐를 방문하는 관광객들이 많은 종족들중에서도 특히 이들 마사이족에 관심을 갖게 된데는 이유가 있다. ○정부 정책엔 무관심 첫째,이들 마사이족은 케냐정부가 벌이고 있는 복지정책이든 규제정책이든간에 전연 개의치 않고 그들 종족이 지켜오던 오랜 전통생활을 지켜가고 있다는 것이다.이들은 국경개념조차 없어서 그것이 케냐의 땅이든 탄자니아의 땅이든 아랑곳않고 다만 가축들의 목초지를 따라 이동할 뿐이다.정부의 입장에서 보면 고삐풀린 망아지에 비결될만하다.그들이 살고 있는 마을 바로 코 앞에 현대식 빌딩이 들어선다 할지라도 관심을 갖거나 혹은 거부감을 나타내지도 않는다.너는 너의 일이 있고 나는 내 일이 있다는 식이다. 걸음마를 시작한 어린 마사이는 보통 소떼나 염소들과 함께 초원으로 내보내져 생활하다가 13세부터 17세 사이에 마을장로들 모임의 결정에 따라 할례의 의식이 치러진다.할례를 치르는 날 할례를 받을 소년은 검은 가죽으로 사추리만 가린채 자기 집 앞에서 할례를 베풀 장로를 기다린다.장로가 당도하면 흙을 이겨 만든 회색물감을 소년의 눈 주위에 칠해준다.그리고 몸을 가린 가죽을 벗기고 찬물을 붓는다.소가죽이 땅에 깔리고 야생 올리브가지가 소가죽 가녁에 꽂힌다.소년이 소가죽 위에 눕게 되면 곧장 할례가 시작되는데,이때 소년은 미동도 않고 고통을 참아야 한다.다만 자신의 고통을 대신하여 땅을 치며 울부짖는 가족들의 모습을 침묵으로 바라보는 것만 허용될 뿐이다.할례가 끝나면 소의 정맥에서 뽑아낸 생혈에 우유를 타서 마신다.할례의식을 마친 소년 마사이는 바로 후보전사가 되는데,이들 후보전사의 집단을 마냐타(MANYATTA)라 한다. ○소 생혈에 우유마셔 마냐타 집단의 구성원이 되면 이들은 평생의 형제로서 항상 또래들과 어울려 다녀야 하고,혼자 잠자는 것도 혼자 음식을 먹는 것도 금지된다.이 마냐타를 구성할 때도 의식이 있다.검은 소를 잡아다가 결혼한 여인의 치마를 둘러씌워 질식시키고 그 고기를 구워서 마을사람들이 나눠 먹는데,이때 고기를 굽던 모닥불은 절대 끄지 않고 불이 남아있는 나뭇가지 하나씩을 각 마냐타의 집으로 가져가서 평생동안 그 불씨가 꺼지지 않게 조처한다.마사이족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모두 두 눈이 항상 충혈되어 있는데 이것은 그 협소한 집에 밤낮없이 모닥불을 피워놓고 생활하기 때문이다.이들 모닥불은 물론 전통적으로 그들의 거처에 접근하려는 맹수들을 멀리 물리치는 역할도 해왔다. 이들은 그로부터 머리장식에 쓸 새를 잡거나 동물을 사냥하면서 용맹과 인내를 키운다.마사이들에겐 이때가 가장 호전적이고 위험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이들은 자신의 용맹을 시험하고자 할뿐더러 그것을 부족들에게 과시하고 싶어서 안달이 나있기 때문이다.각자 자신의 방패에 특별한 무늬나 표시를 하기도 하고 그 용맹이나 공로가 인정되면 그것을 상징하는 무늬를 방패에 그려넣을 수 있도록 허용된다. 마냐타를 구성한 또래들은 스스로의 용맹을 뽐내며 고참전사들을 찾아가서 이제 전사들의 자리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한다.전사들은 후배들의 용기에 감탄해서 물러나기도 하지만 때로는 분노에서 한밤중에 마냐타의 캠프를 습격하여 혼쭐을 빼기도 한다. ○전사승진식 「유노토」 그들이 치르는 또 하나의 의식으로는 유노토(EUNOTO)가 있다.예비전사들이 진정한 전사로 승진하는 의식이다.이 의식에는 죽은 소의 목에 칼집을 내어 흘러나오는 피를 전사와 예비전사들이 돌아가며 직접 입을 대고 마신다.그리고 예비전사들은 그 생고기를 한 입씩 뜯어먹는다.유노토의식을 치르고 나면 마침내 전사들은 마사이사회의 중심인물로 자리잡는다.그들은 소부족간의 물건 거래,치안과 생존을 위한 노동과 수확의 분배 등을 분쟁없이 이끌어 가고 해결해야할 책임을 물려받는다.소는 전통적으로 그들 종족만의 독점물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종족들이 소떼를 소유하고 있으면 그것을 약탈해오는 것도 전사들의 의무이다.전사들은 미혼여성에 대해서도 거의 무한대에 가까운 성적자유를 누린다.뿐만아니라 어느 가정에 가서나 우유나 쇠고기를 요구할 수 있는 특권도 가지고 있다. 이들의 성습관은 상당히 자유로워서 같은 나이집단끼리라면 근친상간이 아닌 한 여자와 여러 남자의 관계가 허용되고 같은 연령집단에 속한 남자들끼리 아내를 빌려주는 풍습이 있다.일부다처제로 결혼한 신랑은 신부의 집에 상당량의 가축을 지불해야 한다.마사이들은 쇠기름을 비롯한 많은 동물성기름을 일생동안 섭취하는데도 불구하고 콜레스테롤 수치는 미국성인들의 평균치의 절반에도 미치지 않는다는 통계가 있다.이러한 뛰어난 심장기능이 바로 마사이 전사들의 강건한 신체를 뒷받침 해주는 것 같다. ○곳곳에 버펄로 무리 아프리카 특유의 가시나무숲과 초원이 교차하는 미로 같은 먼 길을 따라 마사이마라지역에 있는한 마을에 당도했다.도중에 가뭄에 시달리는 목초지 위로 이동하는 수천마리의 누우(ENU)떼를 보았다.또 숲속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백여마리를 헤아리는 버펄로(BUFFALO)의 무리를 보았다.이들의 천적은 사자라고 하지만 성질이 거칠기 때문에 여러마리의 사자가 공격할 대상은 무리로부터 이탈한 단 한마리에 그친다.그 버펄로무리가 있는 곳에서부터 불과 백여미터 곁에 마사이족의 마을이 있었다.안내자가 그들 마을에 들어갈 수 있는 절차와 흥정을 벌이는 동안 어느새 마을 안에서 여러 아이들이 몰려나와 환영의 노래를 부르며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 코펜하겐 선언(해외사설)

    반세기전부터 인류가 발전을 거듭해왔다는 데 반론의 여지가 없다.냉전 이후에는 핵무기의 대량학살 위험도 멀어져 갔고 삶의 희망은 끝없이 늘어갔다.유아사망률도 줄어들었고 교육수준은 마치 음식물 수준같이 개선됐다.제3세계 국가들은 한세기 전의 산업국가 성장에 비해 3배의 빠르기로 발전하고 있다.60년대만 해도 인류의 3분의 2가 절대빈곤을 겪고 있었으나 지금은 3분의 1도 안되는 규모다. 그런데 이런 발전이 있었다고 해서 인류의 궁핍이 크다는 사실을 가리지는 못한다.제3세계 국민의 5분의1이 배고플 때 먹지 못하고 있으며 3분의1은 여전히 불안정 속에서 살고 있다.부유국에서는 사회층이 붕괴되고 마약중독과 폭력이 점증하고 있다.도처에서 환경은 경제성장과 반비례해 악화되고 있다. 코펜하겐 정상회담은 추방과 실업문제에 대한 세계적인 첫회의였다.폐막식에 빌 클린턴 미국대통령과 보리스 옐친 러시아대통령이 참석하지는 않았지만 이런 상징적인 관점에서 보면 대단한 성공이었다.덴마크의 수도에서 3월11∼12일 이틀동안 미테랑대통령을비롯해 세계 1백21개국 정상들이 공식선언을 채택했다.선언은 빈곤을 뿌리뽑고 완전고용을 촉진하고 사회동화를 활성화하는 10가지의 약속을 담고 있다. 코펜하겐 선언은 구속력이 없다.다른 곳에서 수천번도 더 들었을 법한 성스런 맹세와 비슷할 정도다.선진 부국들은 단지 제3세계를 위한 재원을 늘리기 위해 초청된 것뿐이다.선진 부국들이 후진국들을 위해 국내순생산의 0.7%를 공여한다는 60년대의 한정된 목표만이 확인됐다.게다가 부채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다.코펜하겐 정상회담 참석자들은 아프리카 국가들을 짓누르는 부채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새로운 이니셔티브가 있어야 한다는데 공감했을 뿐이다. 비정부기구들도 코펜하겐 정상회담이 구체적인 성과가 없다는 점을 비난하고 있다.회담의 목적은 연구에 있었던게 아니라는 것이다.하지만 건강과 교육같은 필수요소는 국제통화기구(IMF)나 세계은행이 제공하는 조정정책의 경제균형을 위해 희생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확인했다는 점에서 코펜하겐 정상회담이 무용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 교민 환영속 대EU 정상외교 시작/김대통령(김대통령 유럽순방여로)

    ◎벨기에 부총리 등 주요인사 공항 영접/이붕,김 대통령 이름새긴 돌도장 선물 김영삼 대통령은 12일 하오 코펜하겐의 사스 스칸디나비아 호텔에서 중국의 이붕총리와 한·중정상회담을 가진 것을 끝으로 3일동안의 덴마크 방문일정을 마감했다. 김대통령은 유엔사회개발정상회의(WSSD)가 폐막된 이날 하오 코펜하겐을 떠나 유럽방문 마지막 나라인 벨기에의 브뤼셀에 안착,2박3일 동안의 벨기에및 유럽연합(EU)과의 정상외교 활동에 들어갔다. ▷브뤼셀 도착◁ ○…코펜하겐 유엔사회개발정상회의 참가일정을 모두 마친 김대통령은 이날 하오 카스트룹 국제공항에서 특별기편으로 마지막 순방국인 벨기에로 출발. 특별기는 1시간45분정도 비행끝에 이날 하오 4시40분(한국시간 13일 상오 0시40분)벨기에 멜스부르크공항에 도착. 김대통령은 2명의 트럼펫 나팔수의 환영곡 연주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드바엔스트 벨기에의전장의 기상영접을 받으며 트랩을 내려와 기다리고 있던 반름피부총리겸 예산장관의 인사를 받고 반갑게 악수. 이날 공항환영식에는 베르메렌주한벨기에대사와 스크레이 버스 왕실의전장,브라티니 EU집행위의전장과 드랑게 공항부대장 등이 영접인사로 나왔고 우리측에서는 주벨기에대사내외,주EC대사내외와 이종춘 한인회장 내외가 참석. 김 대통령은 이들과 간단한 인사를 마친 뒤 바로 영빈관 숙소인 스타이벤베르그성으로 출발했으며 영빈관 정문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교민들로부터 열렬한 환영박수를 받고 손을 흔들며 입장. ▷한·중 정상회담◁ ○…김 대통령과 이붕 중국총리의 12일정상회담은 김대통령의 공식수행원들 숙소인 사스 스칸디나비아 호텔에서 이날 상오9시(한국시간 하오5시)부터 1시간동안 진행. 처음 회담장소는 김대통령이나 이총리의 숙소가 아닌 제3의 장소인 「로열 요트 클럽」으로 정해졌으나,중국측이 경호상의 이유등을 들어 우리측에 새 장소 선정을 요청,이 호텔 2층 아이슬랜드 룸으로 결정.이 방은 11일 김대통령이 스리랑카의 구마라퉁가 대통령과 회담한 곳. 김 대통령은 회담 초청자로 회담 시작 10분전에 이 방에 도착,유종하외교안보수석으로부터 최종 브리핑을받으며 대기. 이 총리는 호텔 현관에서 외무부 문동석의전장의 영접을 받고 회담장에 도착,김 대통령과 반갑게 악수. 김 대통령과 이 총리는 지난해 3월 김대통령의 중국 방문및 지난해 10월 이 총리의 한국 방문에 이어 세번째로 대면. 김 대통령과 이 총리는 정해진 자리로 향하면서 먼저 이총리가 우리측 공로명 외무부장관 등 배석자들과 차례로 악수를 했고 이어 김대통령도 이 총리를 뒤따라 들어온 중국측 배석자들과 악수. 김 대통령과 이총리가 자리에 앉은 뒤 이총리는 김대통령에게 중국 특산 돌에 김대통령 이름을 새긴 도장 2개를 선물로 증정. 도장은 한글과 한자로 「김영삼」 「김영삼」이라고 음각한 것이었는데,이총리는 『글씨를 많이 쓰신다기에 준비했다』고 설명했고,김대통령도 『귀한 선물인데 앞으로 붓글씨를 쓸 때(낙관으로) 반드시 사용하겠다』고 화답. 이어 두 정상은 전날 있은 유엔사회개발정상회의에 관한 이야기와 이번 유엔회의를 계기로 각국 정상들이 개별적으로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됐다는 점등에 관한 이야기를 교환. 두 정상은 1시간 동안의 회담이 끝난 뒤 서로 만족스런 표정으로 작별인사를 나눴는데 김대통령은 문간에서 이총리와 악수를 했고 문의전장은 호텔 현관까지 따라 나와 이총리를 배웅. ◎각국 정상발언/지금도 인류 10억이상이 기아로 허덕/수하르토/「공통문제 논의」 회동만으로도 큰 의미/만델라/개도국을 밑빠진 독으로 간주 말아야/마하티르 ◇『우리가 회의하는 동안에도 지구상에서는 10억명 이상이 빈곤과 기아와 절망속에서 희망없는 삶을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갈 것이다』(수하르토 인도네시아대통령) ◇『세계지도자들은 20세기말인 바로 지금에서야 살상하는 방법보다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나라시마 라오 인도총리) ◇『사람이 지속적으로 빈곤에 시달릴 수 밖에 없을 때 무력충돌을 촉발하는 요인이 되기 쉽다.국제분쟁은 무력 사용이나 협박에 의존하지 않고 협상을 통해 평화적으로 해결돼야 한다.중국은 현재나 미래에도 헤게모니를 추구하지 않을 것이다』(이붕 중국총리) ◇『우리가 세계를 정글의 법칙에 의해 지배되는 지구시장이 되도록 방치할 것인지 자문하고 싶다』(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대통령) 『사회적 진보는 자유가 지배하는 곳에서만 가능하다.경제원조가 중요하기는 하지만 사회진보를 돈으로 살 수 있다는 잘못된 생각은 버려야 한다』(헬무트 콜 독일총리) ◇『주요회의를 열고 또 열어서 고상한 범세계적 행동계획을 발표하지만 실행에 옮길 적절한 수단을 강구한 적은 없다.개발도상국은 더이상 밑빠진 독으로 간주되어서는 안된다』(마하티르 빈 모하마드 말레이시아총리)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합리적인 기대들이 좌절되면 충돌이 생겨 우리 모두가 열망하는 질서와 조화가 위태롭게 될 수밖에 없으며 풍요의 섬은 박탈의 바다에서는 유지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식하게 됐다』(파루크 아마드 칸 레가리 파키스탄대통령) ◇『지금 이 순간부터 어느 누구도 지구상에서 「나는 내 형제의 재산관리인인가요」라는 카인의 말을 듣지 않아야 한다』(에두아르도 프레이 뤼즈 타글레 칠레대통령) ◇『부유한 나라들은 값싸게 물건을 사들이고 가난한 나라들은 비싼 상품을 구입해야 한다.어떤 제3세계의 문제들은 코펜하겐 선언문에 아예 들어 있지도 않다.미약한 내용의 코펜하겐 선언문에 모두가 서명할 것이고,빈부격차는 더욱 심해질 것이다』(피델 카스트로 쿠바대통령) ◇『아프리카를 잘도 이용해먹고 난 뒤 배가 부를대로 부를 때 선진국들은 아프리카를 향해 귀찮게 굴지 말라고 말한다』(오마르 봉고 가봉대통령) ◇『세계지도자들이 공통의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모여 앉는다는 사실만으로도 특별한 성과가 없더라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모여 앉는다는 것 자체가 문제를 25∼50% 해결하고 들어가는 셈이다』(넬슨 만델라 남아프리카공화국대통령)
  • 「미토콘드리아 감식법」 1백% 정확/암매장 유골 신원확인법

    ◎뼈·모발 등서 DNA 추출… 가족과 비교/“두개골·사진 비교” 슈퍼 임포즈법도 확실 암매장된 유골만 가지고 사체의 신원확인이 가능할까. 검찰이 7일 경기도 용인군 학산마을에서 84년 영생교 전신도들에 의해 납치돼 살해·암매장 되었다는 소문종(사망당시 23세)씨의 것으로 추정되는 두개골과 갈비뼈 등을 발견함에 따라 수사가 급진전 되고 있다. 그러나 사체가 암매장된지 이미 11년이나 지난 상태여서 소씨와의 동일인여부를 최종 확인하기까지는 다소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검찰은 범인들이 한결같이 지목하고 있는 암매장현장에서 유골 등을 찾아낸 만큼 이제 최첨단 감식방법 등을 통해 신원을 확인하는 일만 남아 있다고 자신만만해 하는 모습이다. 검찰은 이날 발견된 유골들을 대검과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보내 유전자감식법의 미토콘도리아감식과 슈퍼임포즈법등 첨단기법을 동원해 소씨와의 동일인여부를 확인할 계획이다. 대검 유전자분석실에서 실시하는 미토콘도리아감식은 사체의 뼈나 모발 및 피부등에 존재하는 유전자 DNA를 축출,살아있는 가족들의 DNA 염기배열과 대조해 신원을 확인하는 방법으로 정확도는 1백%이다. 특히 이 방법은 화재나 심한 부패로 형체를 알아볼수 없거나 오래된 뼈 또는 모근이 없는 모발등에서도 미토콘드리아 DNA를 뽑아내 감식할수 있기 때문에 미제사건 수사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 심지어 외국의 경우 이 방법으로 1백여년전 유골을 발견,가족을 찾아준 사례가 있으며 국내에서도 지난해 6월 고려대 황적준 박사가 20년된 유골의 DNA를 이용해 신원을 파악해 묘지분쟁을 해결하기도 했다. 검찰은 이와 함께 소씨의 사체가 어느정도 보존된 상태라면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의뢰,사체의 두개골과 생존시 사진을 비교해 신원을 확인하는 슈퍼임포즈감식을 이용할 계획도 세워놓고 있다. 이 방법은 사체의 두개골을 X레이를 이용,다각도로 촬영한 사진과 생존때의 여러 사진을 분석해 만든 두개골 사진을 합성하는 것이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한 관계자는 『슈퍼임포즈감식법의 정확도는 1백%에 가깝다』면서 『외국에서는 사체의 두개골사진과 생존 사진을컴퓨터에 입력한뒤 컴퓨터화상에 살을 붙여 신원을 파악하는 단계까지 와 있다』고 설명했다.
  • 한­EU「포괄협력의 지평」열다/김 대통령·미테랑 정상회담 성과

    ◎통상상대 넘어 정치·문화 동반자 격상/대유럽 다각접근 길 터 수출확대 기대 2일 엘리제궁에서 열린 김영삼 대통령과 미테랑 대통령의 정상회담 결과는 「주식회사 한국」의 유럽본부가 본격적으로 가동됐음을 뜻한다. 프랑스는 세계최대의 시장인 유럽연합(EU)의 의장국이다.이날 회담에서는 한국과 프랑스 두나라의 포괄적이고 종합적인 관계향상 조치는 물론 한국과 EU의 관계를 강화시키기 위한 의지의 상징으로 「한국과 유럽연합 의장국 사이의 공동성명」이 채택됐다.비교적 단순한 교역대상이던 유럽을 보다 폭넓은 포괄적인 협력대상으로 격상시킬 주춧돌을 놓은 것이다.기업경영의 시각에서 본다면 소규모의 해외지점 체제가 생산·기술협력·금융·수출입을 총괄하는 대규모 지역본사 체제로 승격된 셈이라고 할 수 있다. 이날 두 대통령이 채택한 공동성명에 대해 정부당국자들은 『EU와의 관계발전을 위한 제도적인 기틀을 마련한 것』이라고 평가하고 『EU와의 관계강화는 수출증대와 투자확대,선진기술도입을 촉진하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우리정부는 이번 김 대통령의 순방을 준비하면서 그목표를 EU를 단순한 교역대상이 아니라 정치 경제 문화 전반에 걸친 포괄적 동반자의 관계로 격상시키는데 두었었다.이 공동성명은 상호관계의 강화와 함께 통상·협력에 관한 기본협력협정및 정치적 대화를 심화하기 위한 교섭을 곧 개시하고 조속한 시일 안에 이를 완료한다고 선언하고 있다.이같은 공동성명의 내용은 이번 유럽순방의 가장 중요한 목표가 상당부분 달성되었음을 뜻하기도 한다. EU가 역외권 국가,특히 한국등에 대해 높은 반덤핑 규제조치 등으로 상품의 시장진입을 규제해 온 것은 잘 알려져 있다.그런 반면 EU는 아시아와의 관계강화를 희망하는 측면도 있다.우리는 국제무대에서의 위상을 강화하고 시장진입규제를 완화시킬 수 있는 바탕을 마련했고 EU는 의장국 대통령을 통해 아시아와의 관계개선을 위한 새로운 파트너십을 구축한 셈이다.아시아권에서의 우리의 위상강화가 이러한 거래를 가능하게 했음은 물론이다. 이날 정상회담에서 두나라 대통령은 거의 모든 국제현안과 양국현안에 대해 언급하고 의견의 일치를 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프랑스는 우리의 유엔 안보리 진출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입문제에 대해 적극적인 협조를 약속했다.외교현안에 대해 유럽연합과 불어권 제3세계에서 지도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프랑스의 지지를 확보한 것은 이들 현안의 추진에 있어 국제적 지지기반을 크게 강화한 것임에 틀림없다. 이번 정상회담을 통해 우리는 프랑스와의 관계를 미국이나 일본 수준으로 끌어 올렸다.지리적 여건 등으로 잦은 정상회담이 어려운 점을 감안,고위간부급 정책협의회를 활성화하기로 한 점이나 학술·문화·예술등 다방면에 걸쳐 유대를 증진시키는 노력을 기울일 것에 인식을 같이한 점 등이 이같은 외교단계 향상의 증거가 아닌가 보여진다. 김 대통령은 우리의 프랑스에 대한 무역적자가 8억달러(94년)에 이르는 점을 들어 비관세장벽의 완화를 요청했고 미테랑 대통령으로부터 『유념하여 가능한한 협조하겠다』는 답변을 들었다.또 고속전철 사업에 따른 기술이전의 순조로운 이행과 상사주재원들의 귀국시 이미 납부한 사회보장세 환불검토를 요청해 각각 「긴밀한 협의」와 「구체적 방안 모색」에 합의했다. 김 대통령의 정면돌파식 외교스타일은 이번 엘리제궁 회담에서도 「외규장각 도서의 반환요청」으로 다시 선보였다.미테랑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는 프랑스의 「국론」에 따라 실현되지 않고 있는 사항이다. 프랑스와 우리 실무진들은 이를 정상회담 테이블에 다시 올려봐야 소득이 있기 어렵다고 판단,의제에서 제외하려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그러나 김 대통령은 『외규장각 도서의 교환전시를 위한 협정본문 교섭이 완료단계에 도달했음에도 교환대상 도서의 선정을 위한 실무협의가 지연되고 있다』고 지적,미테랑의 독려를 요청하는 「기록」을 남겼다.미테랑측의 답변은 「최선의 노력」으로 끝났지만 계속 현안으로 남아있을 이문제에 대한 분명한 언급은 향후 협상에 중요한 동력원이 될 것이다. ◎한­EU의장국 공동성명 ▲김영삼 대통령의 공식방문을 계기로 유럽연합이사회 의장국(프랑스)은: ­특히 경제와 통상분야를 포함하여 이미 이루어진 관계발전에 유념하고, ­또 국제무대에서의 양 당사자 비중이 증대되고 있음을 유념하여 정치 경제 기술 문화분야에서 양자간의 상호관계를 강화하고 심화시키기 위한 결의를 표명한다. ▲양 당사자는 공동의 가치와 열망에 고취되어: ­민주주의와 인권존중에 대한 공동의 집념과 국제연합헌장에 따라 평화를 보존하고 정의롭고 안정된 국제질서를 수립하기 위한 공약에 역점을 두며, ­보다 긴밀한 협력을 통해 공동의 이익을 증진하고 세계무역기구(WTO)와 관련된 제반약속을 성실히 이행할 것을 재확인하고, ­상호이해를 더욱 증진하기 위해 필요한 의견교환을 추진하며, ­상호이해를 발전시키고 협력을 증진하며 특히 군축과 비확산·대테러활동·마약거래와 자금세탁·기타 국제평화와 안정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 등 제반 국제문제에 대한 합의를 도출하기 위하여 노력한다. ▲이러한 목표하에서 양 당사자는 지속적인 유대관계와 새로운 형태의 협력관계를 수립하기 위해 통상과 협력에 관한 기본협력협정과 또한 정치적 대화를 심화하기 위한 공동선언의 교섭을 곧 개시함에 만족을 표시하고 이 교섭을 최대한 조속히 완료한다는 결의를 다짐한다. ◎엘리제궁 만찬답사 요지 30여년동안 한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해온 나로서는 근대 자유민주주의의 요람 가운데 하나인 프랑스를 방문하게 된 것을 뜻깊게 생각합니다. 미테랑 대통령각하께서는 14년이라는 오랜 기간 대통령으로 재임하면서 눈부신 업적을 쌓으셨습니다.바스티유 오페라극장 건설,루브르 박물관 확장,제2의 개선문 건립 등 문화의 대중화를 위한 사업들을 이룩하신데 대해 한국 국민들은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국제무대에서도 각하께서 유럽통합의 역사적 흐름을 주도,이제 국경없는 유럽이 눈앞에 다가오고 있습니다. 프랑스 국민과 한국 국민간의 우의와 협력은 지난 1백여년동안 여러 형태로 발전돼 왔습니다.최근 한·불 양국은 국제정치 무대와 양자간 실질협력에서 동반자 관계를 심화시켰습니다.이제 최첨단의 프랑스 고속전철이 멀지않아 한국의 평야를 질주하게 되는 것처럼 두 나라 사이의 모든 협력도 빠르고 안전하게 진전될 것입니다. WTO 체제의 출범으로 세계 모든 나라는 개방화시대에 적극 참여해야 할 역사적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우리나라는 이러한 세계질서의 흐름에 능동적으로 적응하기 위해 지속적인 개방과 국제사회에의 적극적 참여를 도모하고 있습니다.한·불 두 나라는 각각 APEC와 EU의 중심국가로서 두 지역간의 상호의존성과 보완성을 살려 인류공영을 위한 유라시아 차원의 협력을 선도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조국의 평화로운 통일을 위해 북한이 국제사회에서 책임있는 일원으로 참여하도록 설득해 왔습니다.우리는 북한의 경수로 건설사업 뿐 아니라 북한과의 무역과 경제협력에도 적극적 자세로 임할 것입니다.프랑스가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위해 변함없는 지지와 성원을 보내줄 것을 믿으며 유엔을 비롯한 국제무대에서 동반자로서 긴밀히 협력해 나갈 것을 기대합니다.
  • LG/경영구조 대대적 개편/내부지분율 절반으로 축소

    ◎8개사 추가공개·계열사 20개로 줄여/99년까지 LG그룹은 오는 99년까지 내부 지분율을 현재의 절반인 19.5%로 줄이는 등 그룹의 소유구조를 개선하기로 했다.전문경영인에 의한 자율경영 체제도 강화함으로써 그동안 계열사의 경영과 투자 등을 좌우하던 회장실의 기능을 대폭 줄인다.현재 50개인 계열사도 20여개로 줄일 방침이다. LG그룹은 27일 이같은 내용의 「21세기형 경영체제 구축을 위한 혁신안」을 통해 『지속적인 소유분산과 기업공개를 추진,현 5%인 대주주의 지분율을 99년까지 3%로,34%인 법인의 지분율은 16.5%로 낮추겠다』고 발표했다. 또 올해에 LG반도체와 LG정보통신을,97년에 호남정유와 LG신용카드·LG실트론을,99년에는 호유에너지와 LG엔지니어링·LG정밀 등을 공개해 공개 자본금의 비율을 오는 99년까지 90%로 높인다.지금은 59.7%이다.공개회사도 현 13개사에서 21개사로 늘린다. 각 사업문화단위(CU) 중심의 자율경영 체제를 강화해 각 사업부문장(CU장)이 임원의 인사와 사업전략,투자계획,자금조달 등 경영과 관련된 모든 의사결정권을 갖는다.친인척에 대해서도 공정경쟁과 능력주의 원칙을 엄격히 적용한다. 그룹에 공정거래위원회를 설립하는 등 공정하고 정직한 기업문화 정착을 위해 노력하며 경쟁업체와의 공정경쟁,협력업체와의 공정거래를 실천하는 등 「정도경영」을 경영이념으로 삼는다. ◎경영개편에 담긴 뜻/소유분리 가속화… 정부방침 호응/회장실 기능 축소… 자율경영 강화 LG그룹이 27일 발표한 「혁신안」은 창립 이후 최대의 변신 시도이다.3세인 구본무 회장이 지난 22일 경영 대권을 승계한 직후 나왔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핵심내용은 ▲소유와 경영의 분리 ▲전문경영인에 의한 자율경영 체제 ▲세계화 경영 ▲공정거래위원회 구성 등 정도경영이다. 대주주의 지분율을 오는 99년까지 3%로 줄이겠다는 것은 소유와 경영의 분리를 선언한 내용이다.소유와 경영분리가 잘 된 미쓰비시나 미쓰이 등 일본의 대표적인 기업들의 개인 지분과 비슷하다. 전문경영인의 자율경영을 강화하기 위해 회장실의 기능을 대폭 축소한 점도 눈여겨 볼 만 하다.그동안 계열사의 경영 전략과 투자 등을 지도해온 회장실의 기능을 축소한 것은 선단식 경영을 지양하겠다는 것으로 정부방침에 적극 호응하겠다는 뜻이다. 계열사를 절반 수준으로 줄이려는 것이나 화학 전기 전자 등 주력사업에 경영자원을 집중하겠다는 것은 문어발식 확장을 지양하겠다는 취지이다. 2000년까지 해외의 매출액 비중을 현재의 30%에서 50%로 높이고,유럽과 일본에도 지역본부를 설치해 미국 중국 동남아와 함께 5대 지역본부 체제로 확대하기로 한 것은 세계화 경영을 본격화하겠다는 신호탄이다. 삼성 현대 대우에 이어 LG그룹까지 경영개혁안을 발표함으로써 그 영향은 앞으로 선경 쌍용 등 다른 그룹에까지 미칠 전망이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