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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삼웅 칼럼] 김대중·장면정부의 멍에

    김대중정부와 장면정부는 38년의 시차를 두고 있다.한국현대사에서 두 정권은 출범과정과 성격 그리고 시대상황에 있어서 공통점이 매우 많다. 우선 정통성에서 일치한다.장면정부는 이승만 독재를 붕괴시킨 4월혁명의결과로 태어났으며 김대중정부는 32년 군사정권과 여기에 뿌리를 둔 문민정권의 적폐를 청산하는 명예혁명적 선거를 통해 집권했다. 장면정부가 4·19혁명의 결과라면 김대중정부는 광주항쟁과 6월항쟁으로 이어지는 시민혁명의 산물이랄 수 있다.‘민주주의의 상징’이라는 지도자를중심으로 정통성과 합법성의 강고한 기반 위에서 출범한 두 정권이 쉽게 반대세력의 도전에 취약성을 드러낸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혁명 또는 명예혁명적 과정을 거쳐 합법적으로 집권했지만 상층부 일부만 바뀌었을 뿐 구정권의 인물과 관행이 그대로인 앙시앵 레짐의 ‘허리부문’을 개편하지 못했다. 둘째,독재를 부정하는 안티에서 출발한 새정부는 구체제의 억압구조와 규제를 풀게 되고 따라서 ‘당근과 채찍’을 놓아버린,일종의 무장해제한 권력체이다.여기에 국민은 무한대의 자유를 요구하고 정부에는 청교도적 순결성을바라면서 국민과 정부 사이에 단층현상을 드러낸다. 셋째,‘단군 이래의 자유’가 허용된 상황에서 야당과 사회단체 그리고 독재정권에 협력했던 사람들까지 자신들의 정체성회복의 심리에서 정부공격에앞장서고 일반시민들의 무책임한 시위와 권리의 남용이 나타난다.또한 정권의 시혜로 주어진 자유가 정권을 옭죄는 부메랑으로 돌아오면서 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된다. 넷째,내각제의 권력분산구조에서 효과적으로 시국에 대처하지 못하고(장면정부)내각제에 발목이 잡혀(김대중정부)권력누수의 조짐을 보인다. 다섯째,독재와 부패를 청산하고 새국정모델을 제시하는 개혁에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고 희생도 따른다. 그런데 총론적 개혁은 지지하면서 각론의 피해 당사자들은 저항하게 되고다수 국민은 조급하게 개혁의 과실을 요구한다. 여섯째,장면정부는 3·15부정선거원흉·부정축재원흉의 처단이라는 ‘혁명과업’의 해결이 당면과제로 주어졌고,김대중정부는 IMF체제의 국난극복 과제에 매달렸다.그러다보니 국민대중이 요구하는 개혁과 구체제청산작업이 더디게 되었다. 기득층의 저항 소외층의 비판 일곱째,기득층은 자신들의 이해관계에서 개혁을 거부하거나 외면하고 소외층은 기대심리에서 개혁이 지지부진하다고 비판한다.이렇게 하여 개혁과 기대치에 대한 괴리가 증폭되면서 민심이반현상이 나타난다. 여덟째,‘동지적 적대세력’과의 동거를 들 수 있다.장면정부는 같은 뿌리에서 분당한 신민당의 극심한 도전에 시달리고 김대중정부는 다른 뿌리의 공동정권인 자민련의 ‘우호적 적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개혁세력이 결집되지 못한 것이다. 아홉째,진보·보수 지식인의 협공이다.기회주의적인 언론·지식인그룹은 그렇다치지만 진보·정론지를 자처하는 언론과 지식인들까지 ‘정권때리기’에 앞장선다.이승만 정권에서 심한 탄압을 받아온 혁신계와 진보언론이 장면정부공간에서 가장 심한 반정부 비판세력이 되었다.김대중정부를 보수·진보지식인과 언론이 피아 구분없이 비판하는 것도 장면시대와 비슷하다는 지적이다.현정부에 의해 합법성을 인정받게 된 전교조나 민주노총 등이 정부에더욱 과격하다거나 이념적·생태적으로 우호적이어야할 언론과 지식인이 더공격적인 것도 비슷한 현상이다. 지식인 그룹의 역사의식 결론적으로 기득세력과 개혁세력으로부터 동시다발의 공격을 받으면서 ‘민주주의와 경제개발’(장면정부)이나 ‘민주주의와 시장경제’(김대중정부)를 추진하기란 쉽지 않다.기득세력의 두터운 장벽과 저항 그리고 분별잃은 혁신세력의 협공으로 장면정부는 쿠데타세력에 빌미를 주게 되고 김대중정부는 개혁정책이 흔들린다. 5·16 이후 지식인과 언론인,진보진영이 당한 시련과 고통을 생각하고 국가발전의 퇴영을 돌이키면서 비판활동의 본질을 되새겨봐야 하겠다.비판은 지식인의 본령이고 존재가치다.그러나 사사로움과 선정성과 하이에나식의 교활함이 겹칠 때 ‘이론적으로 수술은 성공했는데 환자는 죽게 되는’현상을 초래한다.언론인·지식인과 진보 그룹의 역사의식이 필요하다. 주필 kimsu@
  • FRB 금리인상 검토…0.25%P 올릴듯

    워싱턴 최철호특파원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는 29일부터 이틀간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를 열고 금리인상 등 주요 정책에 대한 검토작업을 벌인다. FRB는 앨런 그린스펀 의장 주재로 열리는 이번 회의에서 9년째 호황을 맞고있는 미국 경제의 인플레 압력을 줄이기 위해 금리인상을 단행할 가능성이높은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FRB는 이틀간의 비공개 회의를 마친 뒤 30일 오후 2시15분(한국시간 1일 새벽 3시15분)쯤 금리조정 여부를 공식 발표할 예정이다. 대부분의 경제 전문가들은 FRB가 이번 회의에서 은행간 초단기 자금거래에적용되는 연방기금 금리를 0·25% 포인트 정도 인상할 것으로 보고 있다.현재 연방기금금리는 연 4·75%,재할인율은 4·50% 이다.
  • 아파트·연립 올 기준시가 동결

    국세청은 아파트·연립주택 등 기존 공동주택의 올해 기준시가를 지난해 수준으로 동결했다.그러나 신규아파트에 대해서는 7월1일부터 적용되는 기준시가를 고시,전국 아파트의 평당 기준시가는 평균 0.2% 포인트 올랐다.지난 83년 아파트 기준시가가 만들어진 이후 처음으로 동결된 것이다.지난해의 경우 기준시가를 11.3% 인하했었다. 새로 기준시가가 고시된 지역은 아파트의 경우 전국 1,004개 단지 32만9,654가구이다.연립주택은 43개 단지 6,322가구이다.지난 3월15일 시세가 기준이 됐다.전국 아파트 평당 평균 기준시가는 228만1,000원인데 반해 서울 강남구는 575만7,000원으로 1위를 차지했다.수도권 신도시중에는 분당이 410만8,000원으로 가장 높았다. 노주석기자 joo@
  • 이승만·이기붕·김일성 별장 복원후 안보전시관으로

    강원도 속초 화진포 일대에 있는 김일성·이승만·이기붕 별장이 안보전시관으로 탈바꿈된다.육군은 27일 6·25전쟁 발발 50주년을 앞두고 관광객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고 안보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이들 별장을 원형대로 복원,다음달 15일부터 일반인에게 무료로 개방한다고 밝혔다. 김일성 별장은 해방 직후 건립돼 6·25전쟁 발발 이전까지 김일성이 김정일과 함께 여러 차례 이용했던 곳으로 지하 1층,지상 2층으로 복원돼 6·25전쟁 및 김일성부자 우상화실태 등에 관한 각종 역사자료를 전시하게 된다.김일성이 사용했던 응접실 세트와 전화기,라디오,찻잔,주전자,옷걸이 등도 진열된다. 이승만 별장은 이 전 대통령의 침대와 서재,두루마기,친필 휘호,석·박사학위증 등의 유품을,이기붕 별장은 부통령에서 3·15 부정선거,4·19 혁명에이르기까지 정치 역정을 보여주는 사진을 각각 전시한다. 김인철기자 ic
  • 비료보내기 성금 130억 모금

    대한적십자사(총재 鄭元植)는 지난 3월15일부터 시작된 대북 비료성금 모금사업이 15일로 종료됐으며 모두 130억여원을 모금했다고 16일 밝혔다.한적은 전국경제인연합회의 80억원을 포함해 기업체로부터 110억원,종교계로부터 1억7,400만원,사회단체들로부터 3억6,100만원,KBS·MBC·SBS 등 방송3사로부터 9억7,000만원 등을 모금했다. 구본영기자 kby7@
  • 건교부,대한항공 포항노선 50%감축

    건설교통부는 지난 3월15일 포항공항에서 발생한 대한항공 여객기 활주로이탈사고의 책임을 물어 대한항공의 서울∼포항노선을 6개월 동안 50% 감축하는 내용의 행정처분을 14일 확정했다. 이에 따라 대한항공은 오는 7월1일부터 연말까지 서울∼포항 운항횟수를 주 35회에서 18회로 줄이는 한편 내년 6월까지 국내선 신규 노선을 개설하거나증편할 수 없게 된다. 건교부는 서울∼포항 노선에 아시아나항공의 여력기를 추가로 투입,이용객들의 불편을 최소화할 계획이다. 박건승기자 ksp@
  • [제2공화국과 張勉](29)-金대통령 특별회고(下)/사료적 가치

    28회에 이어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회고 증언 가운데 장면(張勉)박사를 만나 가톨릭 영세를 받은 과정 등 5가지 질의에 대한 답변을 싣는다. 장 박사를 만나기 전에도 성당에 나간 것으로 압니다.영세를 받은 과정을들려주십시오. 제 전처의 처가가 가톨릭 집안이기 때문에 자주 성당에 나갔지만 정식으로영세를 받은 것은 1957년이었습니다.그때 저는 유명한 신학자이기도 한 윤형중(尹亨重)신부로부터 교리강독을 받았고 노기남(盧基南)대주교의 방에서 김철규(金哲奎)신부라고,그때 우리 민주당과 매우 가까운 신부님으로부터 영세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일은 최서면(崔書勉)씨라고,그때 서울교구 사무국장으로 있던 제 친구가 주선했는데 장 박사를 대부로 소개해준 사람도 그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저는 장 박사하고 영적으로 대부·대자의 관계가 되었고,그 인연으로 저는 신파의 총수인 장 박사 밑에서 젊은 엘리트로서 활약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관계로 자연히 장 박사 가족하고도 잘 알게 되었는데 특별히 인연이 깊어진 것은 장 박사가 5·16을 겪고 잡혀갔다가 돌아와서 명륜동 자택에 칩거할 때였습니다.과거에 교류가 있던 많은 사람들이 대부분 장 박사를 외면하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6대 국회의원이던 저는 장 박사를 찾아뵈면서 관계를 유지했고,그 분이 돌아가신 후에도 가족과 긴밀한 관계를 갖게 되었습니다.한번은 장 박사 추도식을 동성고등학교에서 대대적으로 했는데 그것을 제가 전부 주선한 일이있습니다.이런 일들로 해서 장 박사님 가족하고는 더욱 절친하게 되었습니다.제가 1980년 사형 언도를 받아 있을 때 장 박사 사모님께서 제 사형 언도가 풀릴 때까지 매일 그 추운 겨울에 성당에 나가 저를 위해서 기도하셨다는것을 알고 있습니다. 대통령께서는 경제전문가이기도 합니다.장면정부가 내세운 경제제일주의와 구체적으로 추진한 ‘국토건설사업’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실현가능성을 어떻게 보셨는지요. 저는 이 문제에 깊이 관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세한 것은 모릅니다.당시 경제개발5개년계획은 김영선(金永善)재무장관이 중심이 되어서 입안했습니다. 그리고 국토건설단은 사상계를 발간해 지식인들에게서 많은 존경을 받던 장준하(張俊河)씨가 맡아줌으로써 큰 활기를 불어넣게 되었습니다.국토건설단에 젊은 청년들이 정말로 나라를 한번 다시 세운다는 의욕으로 적극적으로참여하는 분위기가 크게 일어났던 것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국토건설5개년계획이 얼마나 좋은 안(案)이었나 하는 것은 그후 군사쿠데타로 들어선 박정희(朴正熙)정권이 추진한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토대가되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민주주의와 경제제일주의는 장면정권의 양대 모토였는데 여기에 대해서 당시 우리나라 경제에 압도적인 영향을 끼치며 예산의 절대적 액수를 원조해주던 미국까지 적극적으로 지지한 바 있습니다.미국으로부터 경제지원을 받도록합의가 돼 장면총리가 미국을 방문하고자 출발하려는 찰나에 군사쿠데타가일어난 것입니다. 대통령께서는 민주당 신파 계열을 지켜온 사실에 상당한 자부심을 갖는다는 표현을 가끔 하십니다.신파의 특성,또는 장점을 설명해 주십시오. 일제시대 관료 출신들이나 은행가들이 해방 후 2대 국회를 중심으로 대거 정계에 등장했습니다.자유당에 의한 사사오입개헌이 일어난 후 이들이 민주국민당과 손을 잡고 민주당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민주당 내에서 민주국민당 계열이 구파를 이루게 되었고 과거의 관료계층이신파를 이루게 되었습니다.과거 관료 대부분은 이승만(李承晩)정권에 협력을 했지만 신파에 참여한 관료 출신들은 양심을 가지고 민주주의와 자유경제,그리고 남북간의 평화적 교류,이런 것을 생각하는 세력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당시 신파는 구파에 비해 개혁적이었고 민주주의에 대해서도더 철저한 면이 있었습니다.실제 이승만의 권위주의 통치에 대해서 신파는매우 강하게 투쟁했고,이 점에 있어서 구파하고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4·19가 일어날 무렵 구파는 대거 자유당에 입당했고 신파는 자유당정권으로부터더욱 미움과 박해를 받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러한 신파의 반독재·민주화투쟁의 정신을 이어받았고 그리고 시장경제라고 할까,자유경제에 대한 정신도 이어받게 되었습니다.저는 그 후로 일생의 정치생활을 통해서 일관되게 그때 받은 영향을 그대로 견지해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5·16쿠데타 발생 후 장 총리는 수녀원으로 도피했고,윤보선(尹潽善)대통령은 쿠데타를 추인했습니다.두 분의 행위를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장 박사와 윤보선 두 분에 대한 평가는 역사의 몫이지 제가 여기에서 말할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2공화국 당시의 내각책임제를 어떻게 보십니까.제2공화국,그리고 장 박사에 대해 종합적인 평가를 해주십시오. 정국을 책임지고 잘 장악해 안정을 유지해서,그런 쿠데타를 미연에 방지하지 못한 책임은 일차적으로 총리였던 장 박사에게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그러나 거기에는 앞에 말씀드린 것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장 박사가 제대로 정치를 하지 못하도록 괴롭힌 면이 있었습니다.저는 과거에 내각책임제를 열렬히 지지한 바 있지만 5·16을 겪고 나서 내각책임제에 대해 큰 회의를 갖게 되었습니다.그 이유는,당시 경험으로 정당과 국회의원이 성숙하지 않고서는 내각책임제가 결코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5·16 당시 나라가 공산화 직전에 있었다든가,장정권이 지나치게 부패했다는 쿠데타 명분에 대해서 상당 부분 공정한 주장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왜냐하면 5·16 직전 정국은 아주 안정이 되었고 오히려 매일같이 일어나던 시위도 거의 가라앉은 상태였습니다.정치 역시 안정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부패 역시 사실이 아니었습니다.5·16 후에 장정권의 부패를 대대적으로 조사를 해가지고 신문 양면에 걸쳐 깨알 같은 글씨로 가득 채워서 발표를 했지만 재판결과 부패로서 처벌받은 것은 김영선재무장관이 출장 중 중고품 냉장고 하나를 어느 공무원에게서 선물받았다는 것뿐이었습니다.나머지는 다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입증되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모처럼 학생들이 피를 흘려 이룩한 민주주의를 정치인들이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사분오열해서 가뜩이나 약한 정권을 잡고 흔드는 일을 한 데다 언론까지 가세해 결국 장정권이 유지될 수 없게 만들었다는 사실입니다. 저 역시 장면정권의 간부였던 한 사람으로서 그 책임을 통감하지만 역시 정치가 안정되고 정권이 성공하려면 많은 사람들의 협력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특히 정치인은 스스로가 책임 있는 자세로서 도와줄 것은 도와주고,비판할 것은 비판하는 그런 건전한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당시 뼈저리게느낀 바가 있었습니다. - 3·15부정선거 규탄시위 증언 통설 뒤집어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증언은 현직 대통령이 신문 연재물에 직접 참여했다는 의미말고도 증언 자체가 갖는 사료적 가치가 뛰어나다는 점에서 주목받는다. 김 대통령은 먼저 장 박사와 관계를 맺게 된 계기를 “장 박사가 1956년 부통령으로 출마했을 때 무소속인 제가 장 박사 지지를 선언한 것이 신문에 보도돼서”(28회에 게재)라고 공개했다.이 말은 언뜻 이해하기에 쉽지 않다.김 대통령은 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낙선했으므로 56년 당시에는 일개 정치 지망생에 불과했다.그런 그가 장 박사를 지지했다고 해서 신문에 보도되기란 어려웠으리라고 짐작된다. 하지만 김 대통령은 그때 이미 주목받는 논객이었다.55년 9∼10월에만 동아일보에 다섯 차례 ‘시론’을 실었고,당시 지식인 사회를 대변하는 월간지‘사상계’ 55년 10월호에도 장문의 논설을 발표했다.제목은 ‘노총(勞總)분규와 우리의 관심’ ‘한국 노동운동의 진로’ ‘노조는 유해한가’ 등으로모두 노동운동을 주제로 했다.따라서 ‘장면 부통령후보 지지 선언’이 보도될 만한 여건은 충분했던 셈이다. 60년 4월6일 민주당이 주도한 서울 중심가 시위를 구체적이고 세밀하게 밝힌 것(28회 게재)도 상당히 소중한 역사적 증언이다.그날 시위의 전개와 이후‘4·19혁명’에 끼친 영향 등을 평가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흔히들 제2공화국의 민주당정부를 4월혁명에 ‘무임승차한’정권이라고 하지만 민주당 인사들의 주장은 다르다.민주당이 4월혁명을 일정 부분 이끌어냈다는 것이다.‘3·15부정선거’ 당일 마산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지만 막상 서울에서는 3월17일 성남고생 400여명이 거리에 나섰을 뿐 학생·시민의집단적인 움직임은 없었다.이처럼 잠복한 민심을 민주당이 촉발했다는 주장이다.그런데도 그 증거로 ‘4·6민주당 시위’를 내세우고 이 시위를 생생하게 되살린 증인은 여태껏 없었다. 김 대통령의 증언을 보면 학생들이 시위에 동참하는 과정,일단 시위대에 끼자 경무대를 목표로 삼으려고 한 사실들이 명백하게 밝혀진다.학계에서 집중적으로 검토해볼 만한 부분이다. 당 대변인이 된 과정(28회 게재)도 그 무렵 김 대통령의 정치적 위상을 엿볼 수 있어 흥미롭다.60년 ‘7·29총선’에서 민주당은 민의원 172석을 차지했다.그야말로 제제다사(濟濟多士)라 할 만큼 인재가 넘치는 상태였는데 김 대통령은 선거에서 떨어지고도 대변인이라는 중책을 맡았다.유망한 청년 정치인에게 거는 민주당 지도부의 기대와 신뢰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김 대통령은 장면 박사와 제2공화국에 대한 종합적인 평가에서 “정치인은스스로 책임 있는 자세로서 도와줄 것은 도와주고 비판할 것은 비판하는 건전한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당시 뼈저리게 느꼈다”고 결론내렸다.지금의정치권에도 적용되는 주문일 것이다. 이용원기자
  • 제2공화국과 張勉(28)-金대통령 특별회고(상)

    대한매일은 ‘정직한 역사 되찾기’의 일환으로 지난 2월부터 ‘제2공화국과 張勉’시리즈를 주 2회 1개 면씩 연재해 왔다.지난번 27회의 ‘장면의 정치 역정과 생애(하)’로 연재는 사실상 일단락되었다.이번 28회는 당시 민주당정부의 당 대변인으로 활약했던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회고를 상·하로나눠 그 전반부를 싣고 29회는 후반부를 싣게 된다.마지막 30회는 이번 연재물을 총정리하는 의미에서 제2공화국을 평가하는 대담으로 엮어진다.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구술하여 녹취한 답변은 ▲장면(張勉)전총리와의인연 ▲그를 만나 가톨릭 영세를 받은 과정 ▲장면정부의 경제제일주의 평가 ▲민주당 신파 출신으로서의 자부심 ▲장면 총리와 윤보선 대통령에 대한평가 ▲제2공화국 및 장면정부 평가 등 여섯 항목으로 이뤄져 있다.다음은김 대통령이 ‘장면 전총리와의 인연’을 중심으로 하여 술회한 내용이다. ?藜圄? 박사와의 인연 1956년 장면 박사가 부통령으로 출마했을 때 무소속이던 제가 장 박사 지지를 선언한 것이 신문에 보도된 적이 있습니다.장 박사가 그 사실을 알고 고맙게 생각하면서 저와 장면 박사의 관계가 시작되었습니다.본격적인 인연은 다음해 제가 가톨릭 영세를 받을 때 장 박사가 대부가 되어주면서 부터입니다. ?嵐适獵? 입당 저는 민주당에 입당해 중앙상무위원으로 일했습니다.민주당중앙상무위는 33명의 국회의원과 50명의 원외 당원으로 구성된 지금의 당무위원회 같은 것입니다.저는 젊은 나이에 발탁되었고 정책심의 등에서 상당히 주목받는 의견을 제시한 기억이 있습니다. 또 하나 당시 민주당 내에는 신·구파의 큰 대립이 있었는데 저는 신파를 대변하는 입장에서 많은 발언을 했고,그런 저에 대한 장 박사의 신임이 매우두터웠습니다. ??3·15 부정선거 규탄시위 역사에 ‘3·15부정선거’라고 기록된 60년 3월15일 정·부통령선거때 대통령 후보인 조병옥(趙炳玉)박사가 돌아가시고 부통령 후보인 장 박사만 남아 선거를 치렀는데 주로 장 박사 계열의 신파가중심이 되어서 선거를 했습니다.저는 강원도 당무위원장으로서 강원도의 험준한 지역을 돌면서 일선에서 선거운동에 임했습니다. 전국적으로 행해진 ‘3·15부정선거’에 대해 국민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저는 인사동 중앙당사 앞에 인산인해를 이룬 시민들 앞에서 마이크를 걸고부정선거를 규탄했습니다.그리고 4월6일 민주당이 중심이 된 시위가 있었습니다.시청 앞에 모여 을지로4가와 종로,그리고 파고다공원(지금의 탑골공원)과 광화문을 거쳐 다시 시청 앞으로 돌아오는 시위였습니다.그때만 하더라도 학생들의 시위는 거의 없었습니다.고등학생 일부가 부정선거를 규탄했고 대학생들은 아직 나서지 않던 때였습니다.그 시위에서 저는 앞장서 휴대용 마이크로 구호를 선창하는 입장이었고,정부에서는 내무장관 포고령으로 발포도 불사한다는 위협을 했습니다.지금 생각해도 생명의 위협까지 느끼던 비장한 심정이었습니다. 시위가 시작되자 정부는 방침을 바꾸어 진압보다는 시위대가 군중과 합세하지 않도록 격리하는 데만 주력했고,파고다공원 앞에 오자 학생들이 시위대에 합류하기 시작했습니다.시위대가 광화문까지 오자 학생들은 경무대(지금의청와대)쪽으로 가려고 해 시위를 주도하는 우리와 약간의 실랑이까지 벌이게 되었습니다.이렇게 전개된 그날의 시위가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襤逅? 민주당 대변인 민주당정권이 들어섰을 때 당 대변인인 조재천(曺在千)선생이 법무장관으로 입각하게 되었습니다.저는 부대변인을 했는데 조재천 선생이 “비록 김대중씨가 원외(院外)지만 그 이상 대변인을 해낼 사람이 없다”며 강력히 추천하고 장 박사도 그 말이 옳다고 동의함으로써 제가 여당의 대변인으로 선임되었습니다. 당시 신문에 많이 보도가 되었지만 저는 대변인으로서도 여당 입장을 잘 방어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그때는 매일같이 여야 대표들이 학교나 명동에있던 시공관 등지에서 연설을 했는데 저는 상당히 설득력 있는 연설로 시민들에게서 많은 호응을 받았고,이로 인해 총리인 장 박사로부터 칭찬을 받은일이 몇번 있습니다. ?藍? 박사의 민주정신 저는 대변인으로서 매일 장 박사를 찾아가 몇가지 지시를 받고 제 의견도 말씀드리면서 아주 가깝게 지내게 되었습니다.하루는장 박사가 제게 “이 자리에 오래있는 것보다는 여야간 정권교체가 한번 되어야 이 나라에 진정한 민주주의가 온다”는 이야기를 아주 진지하게 했습니다.그 말씀에 저는 ‘참,이 어른에 대해 사람들이 약하다고 그러는데 또 약한 말씀을 한다’는 그런 생각밖에 못했습니다.그러나 박정희(朴正熙)정권의 장기 집권을 겪고나서야 저는 그 말씀이 바로 민주주의의 요체였다는 사실을 아주 깊이 깨닫게 되었고 정말 그 훌륭한 민주정신에 대해서 새삼스레 감복한 기억이 있습니다. 장 박사는 정국을 끌어나가는 데 아주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구파가 정권을 차지하는 것에 실패하자 그냥 당을 깨고 나가 야당을 만들었습니다.그것은참으로 불행한 일이었습니다.그때 저는 “이렇게 해서 정국을 불안하게 하면 나라가 어떻게 될 것인가.만일 조병옥 박사님이 아직 생존해 계셨다면 적어도 정부를 1∼2년은 안정시켜 놓고 분당을 해도 했을 것이다”라고 한 적이있는데 그것이 신문에 보도되었습니다. ?襤ㅁ? 흔든 당내 소장파 장 박사가 제일 크게 고생한 것은 당내 소장파들이 조직을 따로 만들어 정부가 하는 일을 일일이 비판한 것이었습니다.‘중석불사건’이라고, 6·25 부산 피란 시절에 중석불 부정불하사건이 있었는데 장 박사가 또다시 중석불 부정을 저질렀다고 소장 의원들이 들고나선 적도있습니다.5.16 당시 많은 사람들이 그 정당성으로 중석불사건 등 부정부패를 지적했는데 군사정권에서 조사하고 재판한 결과 사실무근이라는 것이 밝혀진 바 있습니다. 장 박사는 제게 당내 소장파들의 움직임을 걱정하고 개탄하고 염려한 일이여러번 있었습니다.저는 장 박사에게 소장파 대표를 중요한 각료직에 등용해 정부에서 같이 일하도록 하면 그런 문제가 수습될 것이라고 건의를 드렸는데 이 방안은 당내 노장 중진들의 반대로 잘 안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fi?襤ㅁ? 타도 외친 혁신계 그리고 혁신계가 당시 참으로 사려깊지 못한 일을 했습니다.과거 이승만(李承晩)시대에 완전히 용공으로 몰려 숨도 크게 못 쉬고,감옥에 가고,심지어 조봉암(曺奉岩)씨의 경우는 사형까지 당하고 하던 혁신계는 4·19 이후 민주당정권 아래서 완전히 해방이 되어 자유롭게 활동하게 되었습니다.그런 혁신계가 장면정권 타도를 내세우고 공세를 취했습니다.신문에도 보도된 것이지만 그때 저는 “지금 혁신계가 장면정권을 이렇게 괴롭히지만 만일 장면정권에 불행한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큰 타격을 받는 것은 혁신계다.‘입술이 있으면 이가 답답하게 생각하지만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당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말을 했는데 불행하게도 5·16 후제 말 그대로 되었습니다.혁신계는 그후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탄압과 고초를 겪었습니다.저는 민심으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하면서 민주주의를 원하지 않는 세력들한테 불씨를 주는 행동은 참으로 위험천만한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藍躍溶ㅁ? 망친 3신(新) 사실 당시 신문도 문제가 있었습니다.모두가 나서서 정부를 매일같이 공격했습니다.심지어 정부기관지라는 신문까지 나섰습니다.결국 정부를 국민 앞에 완전히 불신의 대상으로 만든 것입니다.5·16 후‘3신(新)’이 장면정권을 망쳤다는 말이 유행을 했는데 ‘3신’이란 신문(新聞),혁신계(革新系) 그리고 당내 소장파 모임인 신풍회(新風會)가 그것이었습니다. 장면 박사는 본질적으로 독재자는 아니었지만 강력한 지도자도 아니었습니다.합리적이고 민주적인 지도자였는데 그런 분이 당내와 언론과 혁신계로부터의 협격으로 힘도 제대로 못쓰게 되었습니다.그런 불안정한 상황이 일부군인들에게 마치 나라가 공산화되어 가고,나라가 붕괴 직전이라는 생각을 갖게 만든 원인이 아니었던가 생각됩니다. 정리 이용원기자 - 金대통령 회고 이모저모 현직 대통령이 일간지의 현대사 연재물에 증언을 해준 것은 대한매일이 연재하고 있는 ‘제2공화국과 張勉’이 처음이다.제2공화국 당시 민주당정부의 집권당 대변인을 맡았던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본보의 증언 요청에 흔쾌히 응했다. 지난 2월부터 시작된 이 연재물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면서 많은 독자들로부터 “민주당 대변인을 맡았고 장면 박사와 돈독한 관계에 있었던 김 대통령의 얘기가 왜 없느냐”는 등의 성화가 잇달았다. 독자들의 재촉에 못이겨 지난달 하순 서면으로라도 증언을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제대로 된 답변이 오리라고는 사실 기대하지 않았다.당시 개각에 이어차관급 인사가 있었고 곧바로 러시아·몽골 순방이 예정된 대통령의 일정상‘한가롭게’ 40년 전 기억을 더듬을 틈이 없으리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 대통령은 러시아 방문길에 오르기 전날인 지난달 26일 밤 대한매일이 서면으로 회고를 요청한 6가지 질문에 대해 소상히 구술했다.청와대 관계 비서관이 이를 녹취하여 다음날 서면으로 옮긴 결과 A4용지 10장 분량이었다.200자 원고지로 34장에 해당하는 상세한 내용이었다. 해외 순방을 앞둔 노(老)대통령은 늦은 밤 질의서를 한장한장 넘겨가며 옛날 일을 되새겼다.대통령의 회고에는 이 땅에 최초의 민주주의 꽃을 피운 제2공화국의 역사가 우리 현대사에 정직하게 기록되어야 한다는 진지함으로 가득했다.또한 그후 역대 군사정권에 의해 폄하된 장면정부가 새롭게 재조명되어야 하며 동시에 제2공화국의 실패를 거울삼아 오늘의 진로를 모색하는 밑거름으로 삼아야 한다는 간곡한 메시지도 회고의 행간에 읽을 수 있었다.이밖에 내각책임제에 대한 진솔한 평가와 집권자로서 정치권에 갖는 바람(29회 게재 예정) 등 김 대통령의 정치관을 다각도로 들여다볼 수 있는 자료를 제공했다. 이용원기자ywyi@
  • [제2공화국과 張勉](26)장면의 정치역정·생애(下)

    “본인은 오늘로써 부통령직을 사퇴한다.3·15부정선거로 인하여 삼천만 동포의 울분은 드디어 절정에 달하고 마침내 민족의 정화인 청소년 남녀들이불법과 불의에 항쟁하다가 총탄에 쓰러져 그 고귀한 피가 이 강산을 물들이게 됨을 볼 때에 하루라도 그 자리에 머무를 수 없는 비통한 심경에 다다른것이다.…이러한 중대위기에 즈음하여 이대통령은 3·15선거의 불법과 무효를 솔직히 시인하고 또 12년간 누적된 비정(秕政)에 대하여 책임을 지고 물러서야 할 것이다.…” 4·19가 일어난 지 나흘만인 1960년 4월23일 장면(張勉)은 기자회견을 갖고 부통령 사임을 발표했다.이틀 뒤에는 순화동 관저를 나와 명륜동 자택으로돌아갔다. 장면은 3·15선거에 부통령으로 출마해 비록 낙선했지만 3대 부통령 임기는 남아 있는 상태였다.따라서 이승만이 물러나고 3·15선거가 무효로 처리되면,대통령 직은 자연히 장면에게로 넘어오게 돼 있었다.그런데 굳이 이를 포기한 까닭은 무엇일까. 장면은 회고록에서 세 가지 이유를 들었는데 그 첫째가 이승만의 하야를 이끌어내기 위해서였다.이승만과 자유당에게 ‘정권을 내놓더라도 장면이 바로 계승하지는 않는다’고 보장해 준 것이다.아울러 부통령으로서 도의적인 책임을 함께 진다는 생각과,이승만의 불행을 틈타 권력을 잡는다는 인상을 국민에게 주기 싫어서이기도 했다. 장면이 부통령을 사직하자 곧바로 이기붕(李起鵬)이 부통령 당선과 국회의장 직을 사퇴했다.나흘 뒤에는 이승만도 국회에 사임서를 제출했다.이승만과 자유당의 퇴진을 무리없이 유도한다는 장면의 의도가 실현된 셈이다. 내각책임제로 개헌이 돼 새 정부가 출범할 즈음 장면은 대통령이냐,총리냐를 놓고 고민하게 된다.공보비서관을 지낸 송원영(宋元英)은 회고록에 “장박사와 그 가족,아주 가까운 몇몇 사람은 차라리 장박사가 실제 행정과는 초연한 대통령 자리에 앉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으로 보이지 않는 운동을 하고 있었다”고 적었다.한 측근이 ▲새 정부가 이승만정권 12년의 비정을 씻을 때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 나올 수 있고 ▲부통령을 이미 했으니이제 대통령을 할 차례라고 설득한사실도 소개했다.그랬더니 장면은 “나도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하고 싶지만 그것이 내 뜻대로 되나”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이 시기 미국도 ‘장면 대통령’을 지지했다.허터 미 국무장관은 60년 6월11일 매카나기 주한 미대사에게 보낸 전문에서 “장면을 대통령으로 선출하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못박았다.“그의 성실·청렴함과 국제정세에 대한 폭넓은 안목을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기 때문이다. 장면 자신과 최측근 인사들이 원했고 미국이 은밀히 지원했음에도 불구하고 장면은 대통령 아닌 총리 선출 경쟁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송원영의 표현처럼 “신파에 매인 몸이어서 대통령으로 ‘물러날 자유’가 없었던”것이다. 장면을 존경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때 총리가 아닌 대통령이 됐더라면…”하고 지금도 아쉬워하는 것은 사실이다. 총리에 취임한 뒤 장면은 특유의 근면성과 성실함으로 내각을 이끌어갔다. 아직 총리공관이 마련되지 않은 상태여서 그는 일과후 반도호텔 828호실로옮겨 계속 집무했다.회고록에서 밝혔듯 “새벽 2시 전에 취침하는 날이 별로 없을 정도로 성심껏 무슨 일이든 잘해 보려고”했다. 이성모(李聖模)전 비서관은 “장박사는 점심도시락을 꼭 준비했고 저녁식사도 자택에서 날라왔다”면서 “밤에 반도호텔 집무실에서 보고를 다 받고 나면 보통 10∼11시쯤 됐는데 그때까지도 식사를 못해 식어빠진 저녁상이 그대로 놓여 있곤 했다”고 회상했다. 장면정부는 구파의 분당,소장파의 반발 등 정권 내부의 갈등으로 세차례나개각을 하는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그리고 이런 것들이 장면 개인,또는 그의 내각이 무능하다거나 지도력이 부족하다는 평을 듣는 주요인이 됐다. 그렇지만 쿠데타가 발생한 61년 5월 장면정부는 이미 기틀을 잡고 있었다.4월24일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단일지도체제로 당헌을 개정해 총재 직에 오른장면은 5월4일 3차 개각을 단행한다.당과 정부 양쪽에서 일사불란하게 지도력을 발휘할 구도를 마련한 것이다. 아울러 장면은 7월1일 방미해 케네디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기로 합의하고그 발표시기를 조정하고 있었다.한·일회담 재개도 눈앞에 두었다.미국의 경제원조 규모가 정상회담에서 결정되고 한·일회담에서 배상금문제가 타결되면,지난 3월 시작한 국토건설사업도,작성을 끝낸 경제개발5개년계획도 제 궤도에 오를 터였다.장면정부의 으뜸 목표인 ‘경제제일주의’가 바야흐로 국민의 피부에 와닿을 시점이었다.그런데 쿠데타가 터진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쉽게 쿠데타군에게 당한 까닭은 무엇일까.김영구(金永求)당시 내무차관의 회고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61년 3월 말,4월 초쯤이었다.반도호텔 장총리 집무실에 총리,매그루더 유엔군사령관,장도영(張都暎)육군참모총장과 나,네 사람이 모였다.쿠데타설이화제에 오르자 매그루더는 ‘내가 한국군의 작전권을 쥐고 있는데 누가 쿠데타를 하느냐.일어나더라도 금세 진압할 수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장총리도 전적으로 동의하는 듯했다.사실 많은 사람들이 미군이 있는 한 쿠데타는 불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실제 쿠데타가 발생하자 장면은 진압에 나서지 못한다.휴전한 지 8년,전쟁의 상흔이 아직 짙게 남은 그 시절,쿠데타 진압이 부대간의 총격전으로까지 비화하면 자칫 북한에게 재남침의 빌미를 줄 수 있다는 판단을 했을것이다.6·25발발 직후 주미대사로서 유엔군 파병을 위해 침식을 잊었던 그로서는,만에 하나라도 그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었으리라. 장면의 묘소는 경기도 포천 천보산 기슭의 가톨릭공원묘원에 있다.그 곳에세워져 있는 묘비의 글은 장면의 삶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공(公)은 민주정치를 수립하고 경제제일주의를 표방하여 불철주야 심혈을 경주하던 도중,뜻밖인 5·16사태로 경륜을 펴지 못한 채 정치에서 물러나…깨끗한 교육자요,근엄한 종교인이요,불굴의 정치가의 생애였다”- 5·16쿠데타 직후…가택연금등 수난 5·16후 쿠데타세력은 장면(張勉)정부가 무능하고 부패했다고 대대적으로선전한다.이어 소장파가 폭로한 ‘중석불 사건’을 비롯해 비리 의혹이 제기된 온갖 사건들을 파헤친다. 그러나 몇달 뒤 군사정권이 발표한 ‘장정권 비리’는 당시 김영선(金永善)재무장관이 냉장고 한대를 뇌물로 받았다는 것뿐이었다.김장관과 친했던장경순(張慶淳) 5대 민의원은 그나마 “냉장고가 아니라 아이스박스였다”고증언했다.김장관의 오랜 친구인 부산세관장이 출장길에 들러 선물로 아이스박스 한통을 놓고갔다는 것이다. 군사정권이 쿠데타 명분을 세우려고 갖은 애를 써 증거를 찾았는데도 발표거리가 고작 ‘냉장고 한대’였다는 사실은,역설적으로 장면정부가 얼마나깨끗했는지를 확인해준 것이다. 군사정권은 아울러 각종 혐의를 붙여 장면정부의 장·차관과 민주당 간부들을 구속했다.장면은 가택에 연금당했다.가족 증언에 따르면 군인들이 20∼30명 정도 집 안팎에서 상주하며 출입자를 감시했다.심지어 가정부가 장보러드나들 때도 장바구니를 일일이 뒤졌다.장면은 감시자의 눈길이 싫어 대낮에도 창마다 커튼을 드리웠다. 연금은 1961년 11월10일 해제됐다.장면은 기독교 서적 번역에 몰두하는 한편 화초를 가꾸는 일로 하루를 보냈다.감시가 심해서인가,찾아오는 발길도뜸했다.그가 전도(傳道)한 옛 동료가 영세를 받는다는 연락을 해오면 대부(代父)를 서주느라 문밖을 나설뿐 외출은 거의 하지 않았다. 그렇게 지내던 62년 7월15일 장면은 ‘이주당(二主黨)사건’의 배후자라는혐의를 쓰고 입건된다.이 사건은,민주당 인사들이 일부 군 출신과 짜고 군사정권을 전복하려 했다는 소위 반혁명음모의 하나로 발표됐다. 장면에게 걸린 혐의는 거사 성공 후 총리로 복귀한다는 조건으로 자금 100만환을 제공했다는 것이었다.1심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지만 최종심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으로 확정되고 결국은 형집행면제 처분을 받는다. 8월28일 법정구속된 장면은 10월15일 보석으로 출감한다.그는 풀려나면서 “제멋대로 잡아넣더니 보석은 무슨…”하면서 개탄했다. 장면이 연루됐다고 해서 떠들썩했던 이 사건을 비중있게 다룬 저작물은 아직도 없다.당시 구속기소된 민주당 인사들도 “그야말로 황당한 조작극이었다”고 입을 모으고,그 중에는 자신이 구속된 사건이 그것이었는지조차 기억 못하는 이가 있을 정도다. ‘이주당 사건’을 마지막으로 장면은 군사정권의 날카로운 칼끝에서 어느정도 벗어난다.66년 1월 말 간질환이 재발해입원한 뒤 그의 건강은 눈에 띄게 나빠졌다.6월4일 장면은 명륜동 자택에서 영면했다.향년 67세였다.부인김옥윤(金玉允)여사는 지난 90년 90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장면은 슬하에 5남2녀를 두었으며 모두 해외유학을 했다.맏아들(張震 서강대 생물학과 명예교수·72)과 셋째아들(張益 가톨릭 춘천교구장·66)만 국내에 있다.수녀인 맏딸(張義淑·69),건축가인 둘째아들(張建·67),정치학 교수인 넷째아들(張純·64·보스턴 리지스대)은 미국에,은행가인 다섯째아들(張興·60·파리은행)은 프랑스에 거주한다.막내딸(張明子)은 80년대 후반 세상을 떠났다. 서울미대 초대학장을 지낸 장발(張勃·98)과 한국 최초의 항공공학자인 장극(86)은 장면의 동생들이다. 이용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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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綬凋뵀㈈? 유민특파원?藪뼛? 러시아대통령은 28일 오후 3시15분(이하 한국시간)부터 시작한 김대중(金大中)대통령과의 단독정상회담 등의 행사에 모두 일정대로 참석,항간의 여론과는 달리 건재함을 과시했다. ?襤ㅋ鑽릿? 단독정상회담과 확대정상회담은 각각 45분,40분간 열렸다.옐친대통령은 크렘린 공식환영식에서 건강한 모습으로 나타나 김대통령과 악수를나눴고 걸음걸이도 정상인과 다를 바가 없어 세간의 건강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켰다. 한러 단독정상회담이 열린 크렘린 옐친대통령 집무동은 원래는 18세기 후반 여왕 예카테리나2세의 칙령으로 건립된 상원건물.1991년 이래 옐친대통령집무동으로 사용돼 왔다. 확대회담이 열린 예카테리나 홀은 미술공예의 여신 ‘미네르바’로 불리는예카테리나2세를 기념하기 위해 명명된 홀로 훈장수여 고위인사접견 장소로활용.조약서명식과 기자회견이 열린 대사홀은 대사들의 신임장 제정식이 열리는 장소이며 러시아 국가 문장이며 금실로 장식된 쌍독수리상이 있다.김대통령이 머물고 있는 크렘린 영빈관은 방이9개,응접실이 6개,서재 및 내실이 각각 1개,식당이 2개달린 궁전식 저택이다. ?欄뭔窄맞? 김대통령은 오후 7시부터 옐친대통령이 주최한 국빈만찬에 참석,수교 10년이래 가장 화기애애한 한·러 정상간 우의를 다졌다. 김대통령은 만찬답사에서 “러시아는 탁월한 예술적 성취로 인류 정신문화를 이끌어 온 구심점이었으며 푸슈킨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는 기간에 방문하게 돼 행운”이라며 소감을 피력했다.김대통령은 탱크에 올라 연설하던 옐친대통령의 모습을 상기하면서 민주주의 성취를 위해 죽을 고비를 넘겼다는점에서 동지적 애정을 느낀다고도 했다. 또 “시장경제 가치와 민주주의 기조아래 두 나라가 추진하는 개혁은 두 나라를 위기에서 건져낼 것을 확신한다”고 말하고 “두 나라 사이의 미래 지향적인 동반자관계의 발전을 위해,두 나라 국민사이의 영원한 우정을 위해축배를 들자”며 건배를 제의했다. ?襤翎? 인사접견 김대통령은 오후 5시45분 지난 4월 방한한 셀레즈뇨프 국가두마(국회)의장이 주최한 오찬에 참석해 재회의 기쁨을 나눴다. 김대통령은 “여러분의 관심과 지지가 한반도에 영원한 평화와 안정을 가져다 줄 것”이라며 “한러의 실질협력 확대는 우리 모두를 발전과 번영의 길로 인도할 것”이라고 말했다.김대통령은 또 국가두마 다수당인 주가노프 공산당당수를 숙소인 영빈관에서 접견,러시아 및 한반도 정세,러시아와 북한관계 등 국제정세에 대해 폭넓은 의견을 나눴다. 김대통령은 “두 나라 우호증진에 러시아 공산당의 관심과 협조가 필수적 ”이라면서 우리의 대북한 포용정책에 공산당의 지지와 협조를 요청했다.주가노프당수는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러시아가 건설적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강조했다. ?藍京蛛?㈊? 일정 확대정상회담이 열리고 있는 동안 이희호(李姬鎬)여사는크렘린 집무동 외빈접견실에서 옐친대통령 부인인 나이나여사를 만나 러시아 여성의 사회활동 참여와 한러 문화교류 등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이여사는 이어 모스크바 시립 제3유치원을 방문,발렌티나 이바노프바 코스마쵸바원장을 비롯한 관계자들로부터 현황설명을 듣고 유치원교육의 중요성과 우리나라 유치원 운영 현황을 소개하기도 했다. rm0609@
  • 신길동 3만여평 부도심으로 개발

    노후·불량 건축물이 많고 도시기반시설이 취약한 영등포구 신길지구 및 신길1생활권 3만9,000여평이 상업·근린생활 기능을 갖춘 부도심으로 개발된다. 두 곳은 계획적인 정비와 관리가 요구된다는 판단에 따라 이미 지난 97년준주거 및 근린상업지역으로 용도가 변경된 상태. 영등포구(구청장 金秀一)는 지난 25일 서울시 도시설계위원회에서 신길지구 및 신길1생활권의 도시설계안이 승인됨에 따라 수정·보완작업을 거쳐 다음달 중 최종 도시설계안을 확정·공고할 예정이라고 26일 밝혔다. 구는 신길동 254의 7 일대 2만2,500여평 넓이의 신길지구는 오는 2001년 개통되는 가마산길(대방로∼도림천)의 동쪽과 서쪽으로 나눠 개발할 예정이다. 가마산길 동쪽과 영등포로터리∼대림삼거리의 신길로변은 업무 및 문화·전시기능을 중점적으로 육성할 방침이며 가마산길 서쪽은 기존 시장의 재건축및 상권개선 작업을 거쳐 상업 및 근린생활기능 위주로 개발할 예정이다. 구는 특히 신길로와 가마산길 간선도로변은 250㎡ 이상,이면도로에 접한 대지는 150㎡ 이상의 건축물을 짓도록 유도하되 주변 상권을 보호하기 위해 간선도로변은 1,500㎡ 이하,이면도로변은 1,000㎡ 이하로 최대 개발규모를 제한해 대형건물이 무분별하게 들어서는 것을 막기로 했다.또 스카이라인과 조망권을 확보하기 위해 건축물의 높이를 간선도로변은 3∼15층,이면도로변은7층 이하로 제한할 방침이다. 신길동 115의 1 일대 1만6,500여평 넓이의 신길1생활권은 신길삼거리∼도림천변 도림3유수지를 잇는 도신로변 및 이면부로 나누어 개발방향을 달리할계획이다.도신로변의 경우 생활권 중심 역할을 담당할 수 있도록 근린생활기능을 강화하고,이면부는 저밀도 개발을 유도해 인접 주거지에 대한 완충역할을 하도록 할 예정이다. 구는 간선도로변의 개발을 활성화하기 위해 최대 개발규모를 별도로 정하지 않되 이면도로변은 500㎡ 이하 건축물만 지을 수 있도록 할 방침이다.또 대지규모가 400㎡ 이상인 건축물은 40㎡ 이상의 쌈지공원부지를 확보하도록 하고 대신시장 북쪽에는 광장을 조성,주민들을 위한 휴식공간을 만들 계획이다. 김재순기자 fidelis@
  • [대한포럼] 북녘동포돕기 적극 동참을

    5·24개각에서 임동원(林東源)장관의 통일부 수장 부임은 대북정책이 모색단계에서 실행단계로 한차원 높게 바뀌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앞으로 포용정책의 추진에 더 한층 속도가 붙을 것으로 전망된다.특히 윌리엄 페리 미국 대북정책조정관의 방북을 계기로 급류를 타게 될 남북간 해빙무드를 남북 당국자회담으로 이어가겠다는 포석인 만큼 임 장관의 역할에 대한 기대가큰 것이 사실이다.이번 개각을 계기로 통일부가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과제는 무엇보다 대북 포용정책에 대한 국민적 합의와 동참을 이끌어내는 일이라고 판단된다. 보수적 현실주의자인 전임 강인덕(康仁德)장관이 대북 포용정책에 대한 보수층의 반발을 막는 방파제 역할을 충분히 했지만 포용정책에 대한 국민적합의와 동참을 유도하는 데는 미흡했다는 평가도 함께 받고 있다.김대중(金大中)대통령 집권 1년3개월 동안 대북 지원사업에 대한 국민적 참여가 부진한 것이 이같은 평가를 뒷받침하고 있다.우리의 대북 포용정책은 어려움에처한 북한동포를 도와주면서 남북간 신뢰를 회복하고 자연스럽게 북한의 사회주의 민주화를 유도하기 위한 현실적 대안이다.지난 3월 정부가 10만t의대북 비료지원을 통해 북한동포를 돕기로 결정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대한적십자사가 3월15일 대북 비료지원을 위한 모금활동을 시작한지 2개월이 지났지만 모금실적이 저조한 것으로 나타났다.당초 정부가 남북협력기금에서 제공하는 5만t(180억원 상당)과 민간인 모금을 통해 확보키로한 5만t 등 모두 10만t의 비료를 북한에 지원하려던 계획에 상당한 차질이빚어질 전망이다.24일 현재 접수된 비료성금은 TV방송 3사가 전화자동응답시스템(ARS)으로 모은 8억2천여만원을 포함해 총 35억300만원에 불과하다.민간의 비료지원은 3t 수준에서 그칠 것으로 보인다. 이같은 상황은 대북지원에 대한 국민적 반응이 아직 미미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깊이 생각해볼 문제다.물론 이같은 결과가 초래된 것은북한이 지원을 받고도 화답(和答)이 없는 데 따른 불신이 작용하고 있음을부인할 수 없다.그러나 대북 비료지원에 대한 우리 국민의 소극적 정서를 감안한다 하더라도 굶주리는 북녘 동포를 위한 지원은 확대돼야 한다고 본다. 우리의 대북지원이 인도주의 및 남북관계 개선이라는 두 측면을 모두 고려한 조치라는 점에서 보면 더욱 그렇다.지난달 베이징(北京)에서 한국을 비롯한 55개국의 비정부기구(NGO)대표들이 참석한 국제회의에서 대북 식량지원의긴급성이 제기됐다.현재 북한 어린이의 62%가 영양실조 상태에 있으며 기근으로 인해 초·중·고교의 25%가 폐쇄된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데이비드 모던 세계식량기구(WFP)북한담당관은 95년 이후 적어도 150만명의 주민들이 기근으로 사망했으며 북한의 식량배급은 4월 초에 이미 끝났고 보리,감자 등이 출하되는 6월까지가 가장 힘든 시기라고 밝혔다.비료 10만t이 북한에 지원됐을 때 북한 주민 130만명이 1년간 먹을 식량을 생산할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북녘 동포를 도와줘야 할 이유를 잘 말해준다.북녘동포에 대한 식량·비료 등의 지원은 정치와 이념을 떠나 따뜻한 동포애로도와줘야 하는 인도적 문제다. 현재 지구촌 곳곳에서도고통받고 있는 북한 주민들을 활발히 돕고 있는실정이다.이런 상황을 고려할 때 같은 피를 나눈 동포 입장에서 북녘 동포지원을 외면하는 것은 비인도적 처사로 지적된다.평화통일을 말하면서 아사지경의 북녘 동포 지원을 외면하는 것은 민족의 의무를 저버린 이율배반이라하면 지나친 말일까.어쨌든 통일부는 임 장관의 부임을 계기로 대북 포용정책에 대한 국민적 합의와 지지를 제고시킴은 물론 대북 지원사업의 국민적동참을 적극 유도하기 바란다.그리고 국민들도 대한적십자사의 대북 비료지원사업에 적극 참여해서 굶주림으로 고통받는 북녘 동포들을 성심껏 도와주는 동포애를 발휘,남북간 화해·협력의 시대를 앞당겨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張淸洙 논설위원
  • 대한항공 국내 신규노선 불허

    - 서울∼포항노선 50% 6개월간 사업정지 건설교통부는 18일 지난 3월15일 포항공항에서 발생한 대한항공기 활주로이탈사고의 책임을 물어 오는 7월1일부터 1년간 대한항공 전 국내선의 신규노선 면허를 불허하고 국내선 정기편 증설도 동결하기로 했다.대한항공 서울∼포항 노선에는 6개월동안 50% 사업정지처분을 내렸다. 건교부는 또 사고기의 기장과 부기장에게는 각각 면허취소와 항공업무 1년정지처분을 내렸다. 건교부 관계자는 포항공항 대한항공기 활주로 이탈사고는 기상이 악화된 상태에서 무리한 착륙과 항공기 조작미숙 등 조종사 과실이 주요원인이라고 설명했다. 해외에서 발생한 대한항공 괌사고와 중국 상하이(上海) 화물기 사고는 조사가 끝나는 오는 10월쯤 별도의 제재조치를 취하기로 했다. 한편 건교부는 앞으로 항공사고에 따른 행정처분의 실효성을 확보하기 위해 항공법을 개정,운항면허 영구취소 조항을 신설하고 과징금을 100억원으로상향조정하기로 했다. 또 항공안전 강화를 위해 속초·목포·여수·원주공항의 야간운항을 금지하고포항공항 주변 인덕산을 내년 3월까지 깎아내릴 계획이다.다음달 중에는대한항공에 대한 특별안전점검도 벌일 예정이다.
  • [제2공화국과 張勉](23)-지지부진한 혁명과업(下)

    장면(張勉)정부에게 부정축재자 처벌은 정치비리 사건 처리보다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국민감정을 만족시키려면 ‘부정축재’범위를 넓혀 주요 기업인들을 대부분 구속하고 그들의 재산을 국고에 환수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경제활동을 크게 위축시켜 가뜩이나 어려운 국민생활에 악영향을 끼칠 것은 불보듯 뻔한 사실이었다.더욱이 국정지표의 으뜸으로 ‘경제제일주의’를 내건 장면정부로서는 민간경제를 파국으로 몰고갈 수도 있는 정책을 섣불리 시행하기가 어려웠다. ‘국민감정을 따른다’는 명분과 ‘경제건설의 토대를 망칠 수 없다’는 당위 사이에서 그 수위를 어떻게 조절할 것인가가 장면정부의 고민이었다.그고민은,장면이 총리로 등극해 처음 민의원에서 밝힌 시정방침에도 그대로 드러나 있다. 장면은 우선 “구정권 하에서 부정·불법 축재한 자를 처단할 것은 물론이나 사업과 경제를 마비시키지 아니하는 적절한 한도는 있어야 한다”고 전제했다.이어 과도정부가 조세범처벌법에 따라 적발한 46개사,23명을 계속 수사하는 한편 추가조사도 벌이겠다면서 “증거를 포착하기 곤란한 만큼 국민의 협조가 있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부정축재자에 대한 국민의 분노는 정치비리 관련자에 대한 것 못지않았다.이승만(李承晩)이 하야한 지 10여일만인 1960년 5월10일 서울 파고다공원에서“부정축재자의 재산을 환수하라”는 데모가 일어날 정도였다. 반면 부정축재의 범위를 정하고 범죄를 입증할 증거를 확보하기는 정치사건에 비해 훨씬 힘들었다.게다가 허정(許政)과도정부가 부정축재자 처리를 ▲징역형보다는 재산형(財産刑)으로 ▲그것도 현금이 아니라 주식으로 헌납하도록 테두리를 정한 터여서 운신의 폭은 좁았다. 장면정부가 출범한 나흘 뒤인 8월27일 참의원(상원)은 ‘부정축재자 조사특별위원회 설치에 관한 결의안’을 통과시켰다.31일에는 정부가 부정축재한 46개 업체에 벌과금 87억환,추징금 109억환을 통고했다. 장면정부는 정부대로,국회는 국회대로 추진하던 부정축재자 처벌은 정치비리 관련자 처리와 맞물려 소급입법 대상으로 넘어간다.개정헌법을 바탕으로 부정선거관련자 처벌법,반민주행위자 공민권제한법,특별재판소 및 특별검찰청조직법은 60년 말에 속속 제정되지만 부정축재 특별처리법만은 해를 넘긴다. ‘부정축재처벌법’제정이 늦어진 까닭은 장면정부의 경제진흥책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61년 봄 국토건설사업을 시작해야 했고 경제개발5개년계획(1962∼66년)을 거의 성안(成案)한 입장에서 민간경제계를 ‘죽일지도 모르는’모험을 감행할 수는 없었다.더욱이 장면정부는 60년 12월5일부터 닷새동안 ‘종합경제회의’를 열어 경제개발을 해나가는 데 민간경제계와 보조를 맞추기로 합의한 상태였다. ‘부정축재처벌법’안은 61년 2월9일 민의원을 통과한다.60년 4월26일을 기준으로 그 5∼8년전까지를 조사대상 기간으로 정해 ▲지위 또는 권력을 이용해 부정한 방법으로 축재한 자 ▲‘3·15부정선거’에 1천만환 이상 정치자금을 제공한 자 ▲지난 5년간 연 1천만환 이상 탈세한 자를 처벌대상으로 삼았다.경쟁입찰에서 담합했거나 재산을 해외도피한 자,뇌물수수로 연 600만환 이상 이득을 취한 공무원도 부정축재자에 포함시켰다.경제계는 예상을 뛰어넘는 엄격한 기준에 큰 충격을 받았다.법안대로라면 처벌받을 사람이 5만7,000여명이나 되는 것으로 추산됐다.61년 초 결성된 한국경제협의회(전경련의 전신)는 대한상의·무역협회·방직협회·건설협회와 뜻을 모아 법안에 반대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기로 했다. 3월4일 몇몇 일간지에 발표한 경제 5단체 성명서의 뼈대는 다음과 같다.“이 법안이 그대로 참의원을 통과하면 사회에 일대 혼란을 불러들여 기업인의손발을 묶을 것이다.기업활동을 가로막고 민족자본을 흐트러뜨리며 나아가분열을 조장하는 이 법안을 제정하지 않기를 충심으로 진언한다.”이 성명서는 사회에 큰 파문을 불러일으켰다.그 안에 “북괴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남한의 경제 번영이라면,이 법안은 북괴에게 일석이조의 효과를 약속하는 것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는 구절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민의원이 곧바로 특별조사위원회를 구성해 경제협의회 대표를 출석시키는 등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성명서 해프닝’은 경제5단체가 해명서를 신문에 싣는 것으로 결말짓지만 그 과정에서 정치권은 “중소상공인 5만여명이 피의자로 묶인다면 경제진흥에 결정적인 악영향을 줄 것”이라는 경제계 주장을 어느정도 받아들였다. 그 결과는 참의원에서의 법안 심의에 반영됐다.민의원에서 통과된 법안 내용을 참의원이 대폭 완화한 것이다.수정안은 처벌대상을 ▲3·15선거에서 자유당에 자진해서 3,000만환 이상을 제공한 자 ▲공무원 및 정당인으로서 부정하게 재산상 이득을 취한 자로 제한했다.피의자는 5만7,000여명에서 600여명으로 크게 줄었다. 참의원의 수정안은 4월12일 민의원에서 그대로 통과됐다.재석 163석 가운데찬성 138표,반대 25표였다.장면총리는 각료를 모두 대동하고 표결 현장에 참석해 재계를 지원했다. 국민감정을 만족시키느냐,아니면 경제진흥을 위해 정치에 연루된 경제인들을 용서하느냐 라는 갈림길에서 장면정부는 후자를 택했다.경제발전이야말로시대적인 사명이라고 인식했기 때문이다.법에 따른 부정축재처리위원회(위원장 沈宗錫 참의원 의원)는 5월4일 가동됐다.위원회는 처벌 대상자에게 5월16일까지 자진신고하라고 공표했는데 그 마감일에 쿠데타가 터졌다. 군사정권은 61년 12월20일 기업체 30개사에 494억여환,공무원 32명에 75억환의 부정축재분을 환수한다고 최종 통보했다.이어 62년 1월23일 백인엽(白仁燁)예비역 육군중장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하는 등 부정축재자 12명에게 실형을 선고했다. *張총리“소급입법 위헌”첫 지적 장경순(張慶淳·73)씨는 민주당 신파 출신으로 5대 국회에 진출,재경분과위원회에서 활약했다.김영선(金永善)재무장관의 추천으로 중앙정계에 데뷔한그는 장면(張勉)정부의 경제관련 정책을 가까이서,두루 지켜보았다. “부정축재자 처리를 민의원에서는 재경분과위에서 맡았습니다.민주당 신파건 구파건 구분없이 엄중 처벌해야 한다는 데는 뜻이 같았지요.하지만 장면총리는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장 전의원은,민의원이 ‘부정축재자 처벌법’제정을 놓고 갑론을박하던 어느날 밤 장총리가 신파 간부 15명을 중앙청으로 불러 회의를 열었다고 했다.한명씩 돌아가며 발언한 뒤 장총리는 “특별법을 만드는 것은 좋다.그러나 제정 후에 위헌 판정을 받으면 어쩌겠느냐”고 되물었다고 한다. 그때만 해도 ‘소급입법은 위헌이므로 개헌을 거쳐야 가능하다’는 생각들을 못했기 때문에 장총리의 말에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는 것.그는 “장총리는 특별법 제정에 끝까지 신중을 기했지만,여론의 압력이 거센데다 윤보선(尹潽善)대통령마저 10월10일 특별담화를 발표해 독촉하는 바람에 소급법을추진할 수밖에 없었다”고 밝혔다. 장 전의원은 부정축재자 처벌과 관련해 민주당이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말들이 나돌았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고 해명했다.만약 정치자금을 불법으로 챙겼다면 5·16쿠데타 후에 무사했겠느냐는 설명이다. 다만 몇몇 의원이 개인적으로 욕심을 낸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가령 민주당 이(李)모 의원이 나서 기업인들을 위협하는 발언을 하면 주위에서 “또낙전지변(落錢之辯=돈 달라는 말)이군”하며 혀를 차곤 했다고 기억했다. 장 전의원은 “장면정부가 몇년만 계속했어도 우리 경제가 훨씬 빨리,그리고 정경유착·빈부격차와 같은 부작용 없이 발전했을 것”이라며여러가지 근거를 들었다. 먼저 장총리를 비롯해 경제각료들이 모두 열의에 차 있었음을 꼽았다.“김영선장관 집으로 전화할 때는 새벽 5시 전에 해야 했다.그 시각이 지나면 이미 출근하고 없었다.참 부지런하고 청빈한 분들이었다”고 아쉬워했다. 국회 분위기도 마찬가지여서,의원 대부분은 새로 태어나야 한다는 각오 아래 소장층은 건설복을 입고다니며 새생활운동을 실천했다고 회고했다.또 국정감사를 앞두고는 의원들이 “일체의 향응에 응하지 않겠다”는 결의도 했다는 것. “서민생활 안정에 주력해 세법도 많이 개정했다”고 밝힌 장 전의원은 자신이 발의해 근로소득세 면세점을 1만6,500환에서 3만환으로 높였다고 공개했다.“하루벌이가 1달러(당시 달러당 1,300환)도 안되는 근로자에게서 소득세를 받는 것은 말도 안된다”고 주장해 통과시켰다고 한다. 그는 5·16쿠데타후 민주당 재건에 참여,6대 국회에 출마했지만 낙선했다.이후에도 “당복(黨福)이 없어(당을 잘못 선택했다는 뜻)” 낙선을 거듭하다“가족을 먹여살리려고” 정치를 포기하고 사업가로 돌아섰다.지금은 여권전직의원들의 모임인 ‘일오회(一五會)’회장으로 있다. “장면정부를 무능·부패하다고 하지만 그것은 악선전일 뿐”이라고 잘라말한 장 전의원은 “장면정부때 데모하다가 죽거나 다친 사람 있느냐”“그때경제비리가 무엇이 있었냐”고 거듭 반문하면서 “데모가 전투처럼 변한 거나 대형 경제사건이 터진 것도 모두 박정희(朴正熙)정권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강조했다.이용원 기자
  • [제2공화국과 張勉](22)-지지부진한 혁명과업(上)

    장면(張勉)정부는 실로 산더미처럼 쌓인 과제를 짊어지고 출범했다.그 가운데 하나가 이승만(李承晩)정권이 남긴 유산을 4월혁명에서 확인된 민의(民意)대로 처리하는 일이었다.이정권이 저지른 정치비리인 ‘6대 사건’과 경제비리인 ‘부정축재자 처벌’이 주요 관심거리였다. 6대 사건이란 ▲4·19 때의 발포 ▲장면부통령 저격 ▲서울·경기도 부정선거 ▲민주당 전복 음모 ▲정치깡패 ▲제3세력 제거 음모 등을 말한다.한결같이 이승만의 장기집권을 노려 국민과 야당을 탄압한 사건들이었다.이와 관련한 재판을 ‘혁명재판’이라고들 불렀다. 혁명재판의 진행은 그러나 순조롭지 못했다.먼저 법리상의 문제가 제기됐다.피고인측 변호사들은 “6월15일 헌법이 개정되었으므로 ‘3·15선거’ 때의 관련법은 효력을 상실했다.따라서 몇몇 피고인은 무죄”라는 논리를 들고나왔다. 이같은 사실이 알려지자 ‘4월혁명유족회’회원들이 법원에 들어와 규탄데모를 벌이는 등 한바탕 소동이 일었다.그러자 변호사들은 재판이 안전한 상태에서 질서정연하게 진행된다는보장이 없는 한 참석하지 않겠다며 출정을거부했다. 혁명재판은 지지부진했고 민심은 부정선거 원흉들이 그냥 석방되는 게 아닌가 걱정했다.장면정부도 사태 진행을 우려했지만 과거 이승만이 했던 것처럼 법원에 압력을 가하지는 않았다.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사법권을 존중한다는 뜻에서였다.변호사들에게 안전을 보장하겠다고 설득해 법정으로 돌아오게한 것이 고작이었다. 10월8일 서울지법 형사1부(재판장 張俊澤부장판사)는 피고인 48명에게 1심형량을 선고했다.검찰이 사형을 구형한 13명 가운데 3명에게만 사형을 언도했고,8명에게는 무죄·공소기각·면소(免訴)판결을 내려 풀어주었다. 이에 앞서 마산지법은 ‘3·15부정선거’피고인들에게 사형 등 중형을 내린 바 있어 서울지법의 ‘경미한’ 판결이 불러일으킨 분노는 더욱 컸다.장판사는 훗날 “국민감정과 동떨어진데다 기존 법의 한계를 보인 판결이지만 증거에 따라 당시 법대로만 판결했다”고 밝힌다. 온유하기로 유명한 장면도 이 판결에는 크게 화를 냈다.그는 회고록에서 “나 자신도 분격했다.법조문에 의한 공정한 판결이었을지는 모르나 국민감정에 미치는 영향도 참작했어야 할 것이다.적어도 혁명재판이라는 성격을 띠었다면 말이다.여하간 평상시의 법조문에 의한 것으로도 너무 가벼운 형이었다”고 술회했다. 전국적으로 벌떼와 같은 시위가 벌어지고 3일 후 4·19 부상자들이 민의원에 난입하는 사건이 터지면서 분위기는 급변한다.소급입법으로 특별법을 제정해서라도 피고인들을 엄중 처벌하라는 여론이 불길처럼 일어난 것이다. 민의원은 10월13일 ‘민주반역자에 대한 형사사건 임시처리법’을 서둘러통과시켰다.주요 내용은 ▲특별입법을 할 때까지 재판을 중단하고 ▲관련 피고인들에게는 구속기간을 제한하지 않으며 ▲재판에서 석방되더라도 즉시 재구속한다는 것이었다. 특별입법을 전제로 한 ‘임시처리법’이 통과된 뒤 소급입법을 위한 개헌논의가 핫 이슈로 떠올랐다.총리로서 장면은 이를 거부한다.보복을 목적으로한 소급입법은 정치도의상 도저히 있을 수 없다는 신념 때문이었다.대신 현행법에서 가장 무거운 벌을 받도록 하는 방안을 강구했다. 장면은 민주당 의원들이 소급입법을 놓고 최종 토론을 벌인 현장에서도 강력히 반대했다.심지어 “소급법을 고집한다면 나는 당을 떠날지도 모르겠다”고까지 굳은 결심을 보였다.그렇지만 소급법은 결국 제정되고,장면은 회고록에서 “격렬한 국민감정과 지배적인 공기로 보아서는 이를 안 할 도리가없을만큼 험악했다”면서 “소급법이 가능하게 된 점을 부끄럽게 여긴다”고 심정을 밝혔다. 장면이 자기 주장을 관철하지 못한 원인은 신·구파 갈등과 소장파 반발 등으로 안정된 의석수를 확보하지 못한 데 있었다.민주당 구파는 이미 분당작업에 들어갔고 소장파도 공공연하게 정부 정책을 비판했다. 결국 민주당 신·구파로 이루어진 제2공화국 행정부와 의회는 사회적 압력에 대단히 취약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장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소급입법은 구파의 주도 아래 차근차근 진행됐다.민의원은 10월17일 헌법 개정안을 발의해 11월23일 통과시켰다.투표에 참석한 200명 가운데 191명이 찬표를 던졌다.부정선거관련자·반민주행위자의 공민권을 제한하고 부정축재자를 처벌하는 소급입법을 할 수 있으며,이를 맡을 특별재판부·특별검찰부를 설치한다는 내용이었다. 후속조치로 부정선거관련자 처벌법,반민주행위자 공민권제한법,특별재판소및 특별검찰청 조직법이 잇따라 연내에 제정됐고 부정축재 특별처리법만 61년 4월 공포됐다. 특별재판소는 61년 1월25일 5개 심판부를 구성,전국 각지의 법원이 맡던 관련사건을 이송받아 구체적인 활동에 들어갔다.이 가운데 제1심판부(재판장桂昌業대법관)는 4월17일 부정선거 사건 피고인들에게 선고를 내렸다.최인규(崔仁圭)전내무장관에게는 구형대로 사형을,이강학(李康學)전치안국장에게징역 15년,이성우(李成雨)전내무장관에게 징역 7년,최병환(崔炳煥)전내무부지방국장에게는 징역 5년을 각각 언도했다. 소급입법은 이후 두차례 더 등장한다.박정희(朴正熙)가 만든 ‘정치활동정화법’과 전두환(全斗煥)의 ‘정치풍토쇄신특별법’이 그것이다.둘 다 구정치인의 정치활동을 일정기간 제한하는 법이었고,제2공화국에서 소급법을 제정한 당사자들이주로 대상에 들었다.이용원기자 ywyi@-실패한 許政과도정부 4월혁명이 난 뒤 장면(張勉)정부가 들어서기까지는 넉달이 소요됐다.그 넉달 동안 혁명과업의 첫 처리를 맡은 정치 주체가 허정(許政)과도정부이다. 허정정부는 이름 그대로 과도기에 한시적으로 존재했고 따라서 역사·사회발전에 큰 구실을 하리라는 기대와는 거리가 있는 정권이다.그렇지만 이승만(李承晩)정권이라는 구체제가 무너지고 처음 등장한 정권이라는 점에서,어차피 4월혁명이 제기한 갖가지 혁명적 요구를 수행해야 할 임무를 부여받은 것도 사실이다. 허정정부에 대한 정치학자들의 평가는 대체로 ‘실패했다’는 쪽으로 모아진다.“실제 과도정부가 행한 역할은 스스로 천명한 원칙에도 훨씬 미치지못했다“(孫浩哲 서강대교수 등)고 본다.그 이유는 “4·19 취지에 의거해구체제와의 단절을 제도화할 수 있도록 과도정부 자신과 민주당,그리고 4·19혁명에 참여한 중요한 지식인 및 사회세력의 대표들이 참여하는 개혁을 위한 타협의 장을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崔章集 고려대교수)이다.그 결과 “후계정권(장면정부)에게 제한된 행동의 자유를 가지고 ‘혁명’을 수행해야하는 어려운 숙제를 남겨주었다.”(韓昇洲 고려대교수)허정은 서울 각대학 교수들이 시위를 벌인 1960년 4월25일 외무장관에 임명된다.이틀 뒤 이승만이 하야하자 그는 대통령직을 대행하게 된다.대통령승계권을 가진 장면부통령이 4월23일 이미 사임했기 때문이다. 과도정부의 내각수반이 된 허정은 각료진 구성을 마치고 5월3일 ‘5대 시책’을 발표한다.‘반공정책을 한층 더 견실하게 전진시키는 것’을 비롯해▲부정선거 처벌대상은 고위책임자와 잔학행위를 한 자에 국한하고 ▲혁명적 정치개혁을 비혁명적인 방법으로 단행하며 ▲4월혁명에서의 미국의 역할을 ‘내정간섭’운운하는 것은 이적행위로 간주하고 ▲한·일관계 정상화를위해 노력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는 “전 국민이 이 시기에 위대한 관용을 보이고 그 정력의 전부를 국가의 부강과 국민 공익에 기울여야 한다”고 호소해 정치보복에 대한 예방조치를 취했다.한마디로 “최소한의 정책변화를통해 현상유지를 담보하는 정책”(최장집)을 편 것이다. 이같은 기본원칙은 각 부문에 그대로 적용됐다.먼저 ‘3·15부정선거’등정치비리 관련자 처리를 이승만정권 때부터 유지된 법원·검찰에 맡겼다.이때문에 ‘혁명재판’성격은 사라지고 국민감정이 용납못할 판결이 잇따랐다. 서울지법 형사1부의 10월8일 선고가 대표적인 예이다.“공판은 장면이 이끄는 다음 정부로 넘겨졌으며,장면정권에게는 심각한 고민거리의 원인이 되었다”(한승주)‘부정축재자 처벌’도 마찬가지였다.과도정부는 출범 직후부터 처벌 의지를 여러차례 공표했지만 명백히 ‘축소지향적’이었다.6월 1∼20일을 부정축재 자수기간으로 정했고,7월2일에는 허정이 “부정재산을 정부에 반환하면 형사책임을 감면하겠다”고 밝혔다.사흘뒤 부정축재 1차 조사대상자로 기업인18명,기업체 61사를 공개했다. 결국 과도정부에서는 몇몇 사람이 부정축재 사실을 자진 발표하고 축재분을 사회에 환원하는 것으로 그쳤다.장면정부가 들어설 때까지 과도정부는 부정축재자를 처벌하는 실질적인 행동을 하지 않았다. 이밖에 ▲고위장성의 반발을 두려워해 군 개혁을 외면했고 ▲민원(民怨)의 대상인 경찰을 민주화하는 방안도 자리바꿈을 하는 정도에 그쳤다. 허정과도정부는 ‘비혁명적인 방법으로 혁명과업을 수행한다’는 슬로건을내세웠지만 결과는 “사회 내 어떤 부문도 다치게 하지 않으려는 무능과 무작위 탓으로 장면이 이끄는 그후의 정권에 심각한 영향을 주고”(한승주)말았다.이용원기자
  • 전두환씨 ‘마산법회’ 참석…YS의 정치행태 간접 비판

    전두환(全斗煥)전대통령이 6일 김영삼(金泳三)전대통령의 텃밭이었던 부산·경남지역을 방문,동서화합을 역설하며 김전대통령의 정치행태를 간접 비판했다. 전전대통령은 이날 마산·창원 불교연합회 주최로 마산실내체육관에서 열린 ‘국민·동서화합 기원 시민대법회’에 참석,격려사를 통해 “하찮은 지역감정이 국민화합과 국가발전의 저해요인이 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유감스런 일”이라고 피력했다.지난달 김전대통령이 부산·경남 방문 당시 ‘지역경제 파탄’ 등을 주장하며 지역감정을 부추긴 점을 겨냥했다는 후문이다. 전전대통령은 특히 불경의 한 대목을 인용,“부처님이 ‘차라리 잠을 잘지언정 눈을 뜨고서 대중의 화목을 깨뜨리려고 하지 말라.대중을 이간질하고싸움을 붙이면 오역죄(五逆罪)를 짓나니 오역죄인은 부처도 구제하기 어렵다’고 경계했다”고 강조했다.앞서 전전대통령의 오찬장인 마산 삼학사 앞길에서 ‘3·15의거 계승 시민위원회’소속 회원 20여명이 “광주학살 원흉이지역화합 웬말이냐”는 피켓을 들고 시위를 벌여 전전대통령 일행이 뒷문으로 입장하는 촌극을 빚었다. 전전대통령은 오는 9일까지 3박4일동안 부산·경남에 머무르며 안상영(安相英)부산시장,지역 상공인 등과 잇따라 접촉,민심을 두드린다.
  • [제2공화국과 張勉](20) 요동치는 軍:下

    장면(張勉)정부 국방정책의 큰 줄기인 ‘감군(減軍)’은 처음부터 장벽에부닥쳤다.장면이 민의원 첫 시정연설에서 밝혔듯이 군 병력을 줄이려는 이유는 경제적인 데 있었다.국정목표로 내건 ‘경제제일주의’를 실현하려면 국방비를 줄여 그 돈을 경제건설에 투자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국방비 규모는 국가예산의 40%를 넘을 정도였다.장면정부는 국방비가예산의 20% 수준으로 줄 때까지 지속적으로 병력을 감축할 계획이었다.모자라는 병력은 미국의 지원을 받아 장비 현대화,화력 증강 등으로 보완할 생각이었다.주한미군이 있는 한 국가안보에는 이상이 없으리라는 판단도 작용했다. 이에 따라 장면정부는 집권하자마자 ‘10만 감군’을 발표했다.그러나 이는 한국군과 미국 양쪽의 반발에 직면한다.장면이 새로 임명한 최경록(崔慶祿)육군참모총장부터가 앞장섰다.최총장은 민의원에서의 취임인사에서 “감군은 전투능력을 심각하게 떨어뜨릴 것”이라면서 정부의 계획에 “원칙적으로반대한다”고 밝혔다.주한 유엔군사령부와 미대사관,미 국방부 등에서도 완곡한 반대 의사를 잇달아 흘렸다. ‘정군(整軍)’을 주장하는 영관급 장교들도 마찬가지였다.‘전력 약화’라는 측면 말고도 그들이 감군을 거부하는 까닭은 또 있었다.그것은 인사적체에 따른 불만이었다. 예컨대 육사1기생은 절반쯤이 입대 5년 만에 별을 달았는데 그들보다 4년늦게 시작한 8기생들은 12년이 지나도록 준장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대령 숫자도 10%가 채 안됐다.가뜩이나 불만이 많은 상태에서 감군으로 자리가 줄어드는 것을 이들이 달가워할 리 없었다. 섣불리 감군을 발표한 장면정부는 사면초가에 몰렸다.그렇다고 정책의 정당성과 목표를 홍보하고 설득하려는 노력도 별로 없었다.1960년 9월14일 열린군수뇌회의가 감군 규모를 5만명으로 줄여달라고 건의하자 장면정부는 이를받아들였다. 11월 초 권중돈(權仲敦)국방장관은 “일부 감군이 있지만 한국군 병력은 60만명을 유지한다”고 공식발표해 감군정책을 포기한다.국가정책의 전체적인틀에서 중요한 한 부분이 시도조차 못된 채 무너져 내린 것이다. 감군의 무산과 함께 장면정부는 군인사에서도 실책을 거듭한다.어느 정부건 정권유지에 핵심이 되는 요소가 군을 통제할 수 있는 자체 인맥을 형성하는 일이다.그런데도 장면정부는 이를 경시했다. 장면이 총리가 되자 허정(許政)과도정부 수반은 그에게 “국방장관만은 이종찬(李鍾찬)을 계속 기용하라”고 권유한다.민주당에서 국방전문가로 통하는 이철승(李哲承)도 똑같이 이종찬을 추천한다.그같은 격변기에 군에서 두루 존경받는 이종찬이야말로 적임자라 할 만했다. 그렇지만 장면은 이종찬 대신 현석호(玄錫虎)에게 장관을 맡긴다.육군참모총장에 최경록을 앉힌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최경록도 이종찬처럼 이승만(李承晩)의 정치적인 요구를 거절한 것으로 유명한 꿋꿋한 군인이었다.특히장면이 부통령으로 출마한 ‘3·15부정선거’때 “지극히 위험한 상태에서경호를 도맡는 등 모든 일을 은밀하게 도와준 충실한 장성”(鄭一亨 당시 외무장관 회고록에서)이었다. 장면과 최경록은 그러나 처음부터 어긋난다.최경록은 감군정책을 공개리에반대했고,미 국방부 군원국장인 파머대장이 ‘정군 반대’를 밝히자 정면으로 반박해 미국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장면정부를 난처하게 만든다. 최경록은 61년 2월17일 육참총장에서 물러난다.임기는 2년이지만 실제로는반년도 못 채우고서였다.그가 해임되자 국회는 ‘총장 경질을 둘러싼 상황’을 전면조사하겠다고 나섰다.장면은 “최총장을 바꾼 이유는 공공연하게 반미감정을 내세웠기 때문”이라고 해명했다. 장면과 최경록의 갈등은 군정책에 관한 이견에서 비롯됐을 가능성이 크지만 한편에서는 장면내각의 핵심세력과 수석 국무위원인 정일형 외무장관 사이의 다툼 때문이라고도 풀이한다.최경록은 가족관계로 정일형·이태영(李兌榮)과 절친한 사이였기 때문이다. 최경록의 후임에는 장도영(張都暎)중장이 취임한다.장도영을 육군참모총장으로 기용한 것은 장면정부의 군 인사 중에서도 최악이었음이 석달 뒤 5·16쿠데타 때 드러난다.그는 쿠데타가 추진돼 성공을 거두는 전과정에서 쿠데타군과 장면정부에 ‘양 다리를 걸쳐’ 쿠데타 저지를 가로막은 장본인이었다. 사실 ‘장도영 육참총장’은 누가봐도 이해하기 힘든 선택이었다.장도영은 대표적인 정치군인이었다.자유당정권의 2인자인 이기붕(李起鵬)국회의장 집을 수시로 드나들며 그를 ‘아버지’로 모셨다.3·15부정선거 때는 2군사령관으로 후방 군부대의 부정선거에 큰 책임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장도영은 60년 9월17일 최경록 육참총장에게 예편신청서를 제출하지만 되돌려받는다.그는 참모총장 자리를 통보받았을 때 “내가 총장을 맡을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에 당황했고 사양했다”고 회고록에서 밝혔다. 장도영 총장 취임을 누가 주선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5·16 이후 나온 관계자들의 증언은 한결같이 자신과는 무관하다고 변명하고 있기 때문이다.단지 영어에 능통한 장도영 부부가 미8군 장성들과 아주 가깝게 지냈으므로 미군쪽 추천이 강력하지 않았나 추측될 뿐이다. 감군 추진에 따른 군부의 반발과 잘못된 인사로 장면정부는 군 통제 체제를 갖추지 못했다.이승만정권에서는 군 출신을 각료의 10%쯤 배정한 것과는 달리 장내각은 군 출신을 하나도 받아들이지 않았다.심지어 국방부의 장·차관 자리마저 배려하지 않았다. “장면정부는 한국에서 가장 강력하고 조직력이 강한 군부를 소외시켰다”는 어느 정치학자의 지적처럼 군에 무심(無心)했던 정부는 일부 군인들의 쿠데타에 맥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이용원기자 ywyi@
  • [제2공화국과 張勉](19)-요동치는 軍(上)

    1960년 8월27일 민의원에서 총리 취임후 첫 시정연설에 나선 장면(張勉)은긴급과제 6가지에 관한 정부 방침을 역설했다.마지막 항목에서 장총리는 “경제건설과의 균형상 과중한 국방비를 줄이고자 감군(減軍)을 하겠으며 이에 대비해 중장비를 도입하는 계획을 이미 수립했다”고 밝혔다.이어 “국군의 군기를 확립하고 일부에서 있었던 부패를 숙청하는 동시에 군의 정치적 중립을 확보하고 군내 파벌 조성을 방지하기에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겠다”고다짐했다. 장총리가 제시한 군 관련 정책의 큰 줄기는 ‘감군’과 ‘개혁’이었다.또그가 지적한 군의 문제점들은 국민도 충분히 공감하는 것들이었다.이승만(李承晩)정권 아래서 군은 정치에 심하게 오염된 상태였다[별도기사 참조].4월혁명이 일어난 뒤 군 개혁을 요구하는 국민의 목소리는 다른 어느 분야에 관한 것 못잖게 높았다. 4월혁명 공간에서 국민과 군의 만남은 충돌 없이 이루어졌다.4월19일 이승만정부가 계엄령을 선포해 군이 서울 등 대도시에 진주했지만,경찰과는 달리국민에게 총부리를 들이대지는 않았다. 송요찬(宋堯讚)계엄사령관은 계엄군에게 “민가에 들어가지 말고 절대 음식을 얻어먹지 말 것,어떤 일이 있어도 총을 쏘지 말며 발포한 자는 엄벌에 처한다”는 명령을 내렸다.계엄군인 15사단의 조재미(趙在美)사단장은 19일 고려대를 찾아가 강당에서 농성 중인 학생들에게 “절대 연행하지 않겠다”는약속을 해 해산시키기도 했다. 60년 4월 중립을 지킨 군의 엄정한 자세는 민족과 국가를 위해 다행스러운일이었다.가령 군이 유혈진압에 나섰다면 그 비극적 결말은 상상하기에도 두려울 정도였을 테고,계엄사태를 빙자해 직접 권력 장악에 나섰더라도 민주화를 이루는 데 큰 타격이 됐을 것이다. 4월혁명 과정에서 군은 정치·사회적인 문제에 초연한 듯이 보였다.다만 장총리의 연설에서 지적받은 자체 문제점들을 처리하려는 움직임이 내부에서일어났다.그것이 바로 정군(整軍)운동이다. 허정(許政)과도정부 시절인 5월2일 군수기지사령관인 박정희(朴正熙)소장은송요찬 육군참모총장에게 편지를 보낸다.“군의 최고 명령자로서 ‘3·15부정선거’에책임을 지고 용퇴하라”고 권유하는 내용이었다. 5월8일에는 김종필(金鍾泌)중령 등 육사 8기생인 중령 8명이 김중령 집에서모였다.이들은 정군운동을 벌이기로 뜻을 모으고 ▲3·15 부정선거를 방조한 군 장성들의 책임 추궁 ▲부정축재한 장성 처단 ▲무능·파렴치한 지휘관제거 ▲파벌 요인 제거와 군의 정치적 중립 보장 ▲군 처우개선 등을 목표로 정했다. 이들은 연판장을 돌려 군내 여론을 불러일으키려고 했지만 즉시 발각돼 김종필 최준명(崔俊明) 김형욱(金炯旭) 옥창호(玉昌鎬) 석창희(石昌熙)등 5명이구속됐다.그러나 여론 악화를 우려한 송요찬은 이들을 바로 석방하고 참모총장직에서 물러났다.송요찬의 후임으로는 역시 정군대상으로 꼽히는 최영희(崔榮喜)중장이 임명됐다. 장면내각이 구성되면서 국방장관은 현석호(玄錫虎),정무차관은 박병배(朴炳培)의원(무소속)이 각각 맡았다.장·차관 모두 군이나 국방에 관해서는 백지나 다름없었다.다만 현석호에게 육사 2기생인 현석주(玄錫朱)라는 동생이 있어 그를 통해 군 내부사정을 알아보는 정도였다.장면은 국방부를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은 듯하다.공보비서관인 고 송원영(宋元英,5선의원 역임)은 회고록에서 “장총리는 나이가 지긋한 민간인을 국방장관에 앉힌다는 원칙을 세우고 있었다.그러나 국방부의 모든 일은 한계가 있다고 본 것 같다.미군에서 작전권을 가진 이상 국방장관 자리는 한계가있다고 보았던 것이다”라고 밝혔다. 육군 참모총장 자리에는 최경록(崔慶祿)중장을 앉혔다.최중장은 이승만정권에서 정치에 물들지 않은,몇 안되는 고위장성 가운데 하나였다.최영희는 합참의장으로 승진했다. 장면정부 출범후 영관급 장교들의 정군운동이 다시 떠올랐다.9월10일 김종필 김형욱 등 중령 11명이 현석호 국방장관을 방문해 전군을 상대로 정군을 단행할 것을 청원했다.현장관도 필요한 정화조치를 취하겠다고 약속했다.이틀뒤 국방장관이 현석호에서 민주당 구파인 권중돈(權仲敦)으로 바뀐 뒤 권장관은 정화조치의 첫 단계로 3·15부정선거 관련자와 부정축재자를 조사하는위원회를 설치하겠다고 발표한다. 9월20일 엉뚱한 곳에서 정군운동에 불똥이 튀었다.최영희 합참의장 초청으로 방한한 미국 국방부 군원국장인 윌리스턴 파머 대장이 한국을 떠나면서 정군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한 것이다.“한국군 고위장성들이 최근의 사태에큰 불안과 초조를 느끼니 더 이상 조직을 흔들어 군사력을 약화시키지 말라”는 요지였다. 파머의 성명은 큰 반발을 불러왔다.최경록 육참총장이 즉각 “명백한 주권침해”라고 반박하고 나섰다.9월24일에는 육사 7·9·10기 대표 16명이 최영희 합참의장을 찾아가 “파머를 불러들여 자리를 보존하려고 했다”면서 사임을 요구했다.‘하극상 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태의 결과로 김종필·석정선(石正善) 두 중령이 61년 2월 예편당한다.배후로 지목된 박정희는 육군본부작전국장에서 2군 부사령관으로 좌천된다. 이후 정군운동은 사라지지만 주동자들은 결국 쿠데타 음모로 돌아선다. 이용원기자ywyi@李承晩정권하의 軍실태 이승만(李承晩)정권 12년동안 군은 외형상 눈부신 성장을 이루었다.대한민국 출범 당시 국군은 육군·해군을 합해 5만 병력 규모였다.‘6·25’발발직전에 10만명을 넘어섰고 1954년에는 65만명에 이른다.이후 다소 줄어 50년대 중반부터는 통칭 ‘60만 대군’으로 자리잡는다. 반면 이 시대는 군이 정치적인 사건에 자주 동원되고 그 영향으로 분파(分派)가 극심해지는 등 정치에 오염된 기간이기도 했다. 창군(創軍)이후 60년대 초까지 한국군 상층부를 이룬 장성과 고급장교들은출신에 따라 네 부류로 나뉜다.광복군 또는 중국 정규군 출신을 비롯해 ▲일본군 장교·하사관 ▲일본이 창설한 만주군 ▲공산통치를 피해 내려온 이북피난민 출신 들이다. 육군의 전신으로 46년 창설된 조선경비대에서는 광복군의 유동열(柳東悅)송호성(宋虎聲)장군이 초대,2대 사령관을 맡는다.하지만 이승만은 대통령으로 취임한 뒤 김구(金九)를 지지하는 광복군·중국군 출신들을 뒷전으로 밀어낸다. 이승만은 초대 육군참모총장과 국방부 참모총장(49년 폐지됨)에 일본군 출신 이응준(李應俊) 채병덕(蔡秉德)을 각각 임명한다.일군 출신들은 체계적인 교육을 받았고 실전 경험도 풍부해 초기 국군이 기틀을 잡는 데 나름대로기여한다. 그러나 일군 출신들도 52년이면 ‘실권’에서 멀어진다.‘발췌 개헌’때 이승만이 육군참모총장 이종찬에게 2개 전투사단을 부산으로 보내라고 명령하지만 거부당한 일이 계기가 됐다.일본 육사를 나온 이종찬은 “군의 정치적 개입은 있을 수 없다”는 원칙을 분명히 한다. ‘만만치 않은’일군 출신들을 배제한 이승만은 후임에 ‘젊고 경험이 부족한’만주군 출신들을 선택한다.대표적인 인물이 만주군관학교를 나온 정일권(丁一權)과 백선엽(白善燁)이다. 일제가 중국대륙을 침공하려고 관동군 보조병력으로 창설한 만군은 그 위상이 독특했다.정규전 훈련보다는 독립군이나 마적들을 소탕하는 데 필요한 반란진압 전술을 주로 배웠다.독립운동가·공산주의자를 상대하는 바람에 그업무도 상당히 정치적이었다.그래서 흔히 “만군 출신의 많은 장교들은 군내(軍內) 분파주의와 음모의 원천이 되었다”는 평을 듣기도 한다. 이승만은 정일권과 백선엽을 교대로 중용하며 충성경쟁을 부추긴다.정일권이 51년 34살에 국군 최초로 중장에 오르지만 대장 계급장은 그보다 3살 아래인 백선엽이 53년 먼저 단다.육군참모총장도 정일권(50년)-백선엽(52년)-정일권(54년)-백선엽(57년)으로 왔다갔다한다.두 사람의 선두다툼은 군부 내에 함경도파(정일권)와 평안도파(백선엽)라는 두 파벌이 형성되는 원인이 된다. 군부내 파벌을 조장해 충성경쟁을 시킨 것 말고도 이승만은 여러 면에서 군을 정치에 악용한다.대통령·국회의원 선거 때 부정투표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처럼 되었다.헌병총사령부(사령관 元容德)와 특무대(대장 金昌龍)를 시켜 군 내부를 감시하는 한편 이들을 정적 제거에도 동원했다.‘서민호(徐珉濠)의원 사건’이 대표적인 예이다. 정치자금도 군비에서 조달했다.군은 당시 국가예산의 40%이상을 썼고 매년미국으로부터 4억달러 상당의 무기와 군수물자를 원조받고 있었다.군에서 정치자금을 끌어쓰는 행태는 필연적으로 군 내부에 부패를 불러왔다.군수물자를 빼돌려 사복(私腹)을 채우고 위로는 상납하는 구조가 심해졌다. 4월혁명으로 이승만이 권좌에서 물러나자 군은 자유당·관료층에 버금가는개혁의 대상으로 떠올라 정군(整軍)운동을 불러왔다. 이용원기자ywyi@
  • 4·19혁명의 불씨 김주열군…영·호남 화합 상징으로

    4·19혁명의 불씨를 지폈던 김주열(金朱烈)군이 영·호남화합의 상징으로거듭 태어난다. 당시 김군이 입학예정이던 마산상고(교장 崔英百)와 출신교인 남원 금지중학교(교장 張正燮)는 23일 마산상고 강당에서 두 학교 교직원과 학생 등 4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자매결연식을 가졌다.김군을 선배로 둔 영·호남의 중·고교생들이 ‘형제의 연(緣)’을 맺게 된 것이다. 지난달 중순에는 마산시민 70명이 ‘동서순례단’을 구성,김군이 잠들어 있는 남원시 금지면 옹정리 묘소를 참배했고 남원시민 10여명도 같은 시기에마산을 찾아 김군의 시신이 인양된 중앙부두와 3·15기념탑,마산상고 등을둘러보는 등 양지역 시민들이 지역감정을 뛰어넘는 우애를 다졌다. 마산 3·15정신계승 시민위원회(위원장 金永滿)는 다음달 중 ‘김주열열사추모사업회’를 발족,3·15의거 40주년이 되는 내년 3월15일 남원 금지중학교와 마산상고 교정에 김군의 추모비를 세우기로 했다. 또 2001년에는 남원과 마산지역 학생 190명을 선발해 남원~마산간 190㎞ 구간에서 ‘민주성화 이어달리기’행사를 가질 예정이다. 지난 59년 남원 금지중학교를 졸업한 김군은 이듬해 마산상고에 진학,입학식을 기다리다 3·15부정선거 항의시위에 참가했다가 실종,37일만인 4월11일마산 앞바다에서 눈에 최루탄이 박힌 시체로 발견됐었다.
  • 독자의 소리-부정항거 4·19정신으로 재선거 치러야

    3·15 부정선거에 항거해 수많은 젊은이들이 목숨을 바쳤던 4·19혁명이 일어난 지도 서른아홉해나 지났다. 그동안 우리 국민들은,선거를 통해 여야간의 정권교체가 이루어졌기에 이사회에서 ‘부정선거’라는 단어는 사라지고 공명선거가 자리잡을 수 있을것으로 기대했었다.그러나 최근 실시됐던 재·보궐 선거에서 금품·향응제공 등 불·탈법이 여전히 불거져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오는 5월중엔 송파갑,인천계양·강화갑 지역에서 국회의원 재선거를 실시할 것이라고 한다. 4·19혁명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자.정치인들은 돈봉투를 돌리고 음식을 접대하는 등 불·탈법 선거운동을 통해 국민의 지지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을하루빨리 버려야 한다.또 일반 유권자들은 정치인에게 금품 등을 요구하거나 기대해서는 공명선거나 정치발전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해야만 할 것이다. 조규영[서울 강동구 성내1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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