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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日교과서 왜곡·잇단 망언에 분노

    3·1절을 하루 앞둔 28일 전국 곳곳에서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과 잇따른 망언 등을 규탄하는 민간단체의 집회가 줄을 이었다. 광복회(회장 尹慶彬) 등 20개 시민·사회단체 회원 1,800여명은 이날 오후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에서 ‘일본 역사 왜곡 규탄대회’를 갖고 최근 일본 정치인들의 잇따른 망언과 역사 교과서의 왜곡 기도에 대해 규탄했다.이들은 대회를 마친 뒤 일본대사관에 항의서한을 전달했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대표 尹貞玉)도 일본대사관 앞에서 449차 수요 집회를 갖고 정신대 피해 할머니와 전교조 교사 등 150여명과 함께 일본 교과서 왜곡 등에 대해 항의했다.집회에는 미 캘리포니아 주법원에 일제 징용 피해자 손해배상 소송을 낸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회원들도 참여했다. 흥사단도 “전국 26개 지부에서 우리 정부의 외교적 노력을 촉구하는 한편 일본 제품 불매운동,일본대사관 항의전화 등 ‘안티-재팬운동’을 펴기로 했다”고 밝혔다. 대한민국 독도향우회(회장 최재익) 회원 600여명도 탑골공원에서 3·1절기념 독도수호 대일 규탄결의대회를 가졌다. 대한민국독립유공자유족회 회원 800명도 종로2가 YMCA 앞에서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을 규탄했다.독립기념관(관장 朴維徹) 직원 100여명도 천안 ‘겨레의 집’에서 집회를 갖고▲일본은 과거의 만행에 대해 사죄할 것 ▲역사 교과서의 출판 중지 등 5개항의 결의문을 채택했다. 전교조와 한국교총은 2일 개학과 함께 전국 초·중·고교학생들을 대상으로 3·1운동과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 사례를 주제로 특별수업을 하고 항의집회를 가질 계획이다. 한편 한국담배소비자연맹 직원 33명은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문 발표를 기리는 뜻에서 탑골공원에서 두루마기 차림으로 손병희 선생 동상 청결작업을 했다. 박록삼기자 youngtan@
  • 日교과서 왜곡 항의 ‘봇물’

    오늘은 3·1운동 82주년 기념일.그러나 일본의 역사 왜곡움직임이 심상치 않다.우리 정치권과 시민단체 등 각계의 반발 강도가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정부도 공식 대응에 나섰다. 정부는 28일 서울 세종로 중앙청사에서 이한동(李漢東)총리 주재로 관계장관 대책회의를 열어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명하고 범정부적 대응을 단계적으로강화해 나가기로 했다.정부는 우선 일본 정부가 국제사회의보편적 역사 인식에 입각한 객관적 내용의 검정 교과서를 내도록 다각적 외교 노력을 벌일 방침이다. 대책회의 한 참석자는 “아직 일본 교과서 검정작업이 진행 중인 만큼 더 지켜 보아야 할 것”이라며 “5일 최상룡(崔相龍)주일대사가 일본 문부성을 방문,정부의 공식 입장을전달하고 난 뒤 외교부 대변인 성명을 내는등 점차적으로 대응 수준을 강화해 나갈 예정”이라고 말했다. 특히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3·1절 기념사를 통해 일본의 역사 인식문제를 거론함으로써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에대해 우회적으로 유감 표명을 할 것으로 알려졌다.청와대 고위 관계자는“김 대통령은‘한·일간의 우호협력 정신에 따라 일본이 올바른 역사 인식을 갖고 미래지향적 협력관계를발전시켜주기를 바란다’는 내용의 포괄적 언급을 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앞서 이정빈(李廷彬)외교부장관은 데라다 데루스케(寺田輝介)주한 일본대사를 불러 이번 사안이 우호적 한·일관계를훼손해서는 안된다는 입장을 전달했다.이 장관은 “월드컵공동 개최,동아시아 협력 등 양국간 협력을 강화해 나가야할 중요한 시점에 교과서 문제가 걸림돌이 돼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국회도 이날 오후 본회의를 열어 일본 대중문화 추가 개방전면 재검토 등 5개항을 담은‘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 중단 촉구결의안’을 채택했다.광복회,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대한민국 독도향후회 등 20여개 이상의 시민·사회단체는서울 종로구 탑골공원과 일본대사관 앞 등에서 규탄 결의대회를 가졌다. 최광숙 홍원상기자 bori@
  • 日帝징용자 8명 日기업 상대 손배소

    [로스앤젤레스 연합]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거주하는 일제징용피해 한국인 8명이 3·1절을 맞아 27일(현지시간) 일본대기업 미쓰비시와 미쓰이 2개사를 상대로 피해배상을 청구하는 집단소송을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민사지법에 냈다. 대표원고는 황정기(79)·안성균(78)·권오헌(81)·정재원씨(79)등 주로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는 8명이다. 집단소송 대리인인 배리 피셔 변호사(59)는 “이번 소송은집단소송이기 때문에 대표원고 외에도 1929∼1945년 미쓰이와 미쓰비시 본사 및 계열사를 위한 강제노역에 동원된 모든한국인 피해자가 원고로 가담할 수 있다”고 밝혔다. 독일 나치 전범피해배상 소송 및 협상을 승리로 이끌었던세계적 인권변호사인 피셔는 이어 “이번 소송은 한국인 및미국인 변호사,한국 및 미국내 관련 민간단체들이 지원하는첫번째 한국인 피해배상 집단소송이라는 데 의미가 있다”고강조했다. 소장에 따르면 대표원고들은 강제로 일본으로 끌려간 뒤 미쓰이 조선소와 미쓰비시 광업 등지에서 열악한 노동조건 아래 구타와 죽음의 위협 노예노동을 했으나 한푼의 보상도 받지 못한 것으로 돼 있다.
  • 도자기에 새기는 남북통일 기원

    일본인 승려가 남북통일과 화합을 기원하는 뜻을 담은 도자기 제작에 나섰다.주인공은 서기 739년 왕실 사찰로 세운 일본 오사카 다이세이지(大聖寺)제54대 주지인 후쿠덴지 다이에이(福田寺大英·54). 25년전부터 한국 도자기를 연구해 국제적으로 도예활동을 펼치는 지한파인 후쿠덴지스님은,히로시마 피폭 한국인희생자기념비가 추모공원 밖에 있는 사실을 문제삼아 기념비를 공원 중심으로 옮기게 한 장본인이다.지난해 9월엔 대성사가소장한 17∼18세기 무렵의 ‘조선 무관도’를 중앙국립박물관에 기증해 관심을 모았다. 후쿠덴지스님이 도자기 제작에 나선 까닭은 지난 1월 말 지인의 소개로 경기도 파주 보광사를 방문해 그곳에 묻힌 장기수 묘지들을 보고 남북분단의 아픔을 실감했기 때문.민간인으로서 한국과 세계평화를 위해 작은 기여를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는 지난 24일 방한해 보광사에서 도자기 제작에 필요한흙을 채취해 일본으로 가져갔다.이 흙과 재일동포가 기증한북한 흙,원자폭탄 피폭지인 히로시마·나가사키의 흙을 섞어3·1절인 오늘부터 손수 한반도 모형의 도자기 100여점을 제작하기 시작한다.장기수 무덤이 있는 보광사 것은 남북분단의 비인간성을,북한출신이 가져온 북쪽 것은 고향에의 그리움을,피폭지역의 것은 세계평화를 기원한다는 뜻에서였다. 도자기는 대성사 경내에 있는 가마에서 전통양식에 따라 굽는데,4월 중순쯤 불에 넣는 의식을 가진 뒤 10일 밤낮을 소나무로 계속 불을 때 4월말 가마에서 꺼낼 계획이다.제작기간 중에는 매일 ‘통일을 기원하는’기도를 올릴 예정이라고한다.남북 정상과 서방 7개국 정상,한국 불교계에 기증할 도자기 10점도 특별제작하는데 여기에는 7개 국어로 ‘남북통일 세계평화’란 글을 새겨넣는다. 후쿠덴지스님은 “종교 민족 국가를 초월해 생명의 존엄과약한 자에게 자비로운 마음을 실천해 가는 것이 종교의 바른모습이란 생각을 갖고 있다”면서 “한국은 일본문화의 근간을 이루게 한 고마운 나라로 일본인으로서 한국을 위해 할수 있는 일이 있다면,개인적인 차원에서 적극 나서겠다”고말했다. 김성호기자 kimus@
  • 부산공무원 국경일행사 동원 거부

    부산지역 공무원들이 3·1절 행사 강제 동원을 거부하고 나서 파문이 예상된다. 부산지역 26개 공무원 직장협의회로 구성된 ‘깨끗한 공직사회를 열어가는 부산 공무원들의 모임(부공연)’은 28일 ‘3·1절 공무원 강제 동원을 거부한다’는 성명서를 통해 “3·1절 행사가 공무원으로 자리를 채워 치르는 의례적인 행사로 변질돼 강제동원을 단호히 거부한다”고 밝혔다. 부공연은 또 “그동안 기념행사 참석지시를 받은 공무원이참여하지 않을 경우 벌당직을 서는 등 불이익을 받아왔다”며 “3·1절은 법정공휴일인 만큼 동원령을 발한 법적 근거를 밝히라”고 요구했다. 공무원들이 국경일 기념행사 참석을 공식 거부한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경남을 비롯한 타지역 공무원들까지 동조 의사를 밝히는 등 전국적으로 확산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부공연 한석우(韓錫雨·44) 공동대표는 “내부적으로 문제점을 제기했으나 해결되지 않아 공식 발표하게 됐다”며 “어떠한 불이익을 감수하고서라도 강제 동원 관행을 고치겠다”고 말했다.이러한 공무원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부산시는 공무원 동원을 강행, 행사를 치르겠다는 입장이다.부산시는 28일 16개 구·군의 6급 이상 간부만 동원해서라도 목표한공무원수를 채우라고 지시했다.시가 지시한 동원 공무원수는 총 2,100여명으로 106명을 배정받은 북구청 등 일부 구청의 경우 6급 이상 공무원이 부족해 각 실·과 주무급 7급 공무원들에게 행사참석을 강요,마찰을 빚는 등 곳곳에서 소동이일어났다.시 관계자는 “많은 외부인사와 시민들이 초청되는 시 공식행사인 만큼 강행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한편 광주시와 전남도도 각 자치구·군에 3·1절 행사에 공무원 대거 동원을 요청,공무원들의 반발을 사고 있다.광주시는 이번 행사에 시청과 산하기관,5개 구청에서 모두 650명의 공무원을 동원할 계획이다.시는 동구·서구청에서 95명씩,남·북·광산구청에서는 101명씩 등 총 494명을 동원하도록요청했다.기념식장 좌석도 구청별로 배치,사실상 강제 동원이라는 지적이다.전남도도 공무원 200여명의 참석을 요청했다. 광주시 관계자는 “뜻 깊은 행사에 공무원들이 참석하는 것도 복무의 연장”이라며 “이런 행사에 민간인을 동원하기는 더욱 어려워 공무원이 참석하지 않으면 행사가 축소되는 애로점이 있다”고 말했다. 이와관련 행정자치부 관계자는 “자치단체장의 리더십에 달려 있는 문제지만 조직기강 차원에서도 문제”라면서 “국민적인 행사를 사적 이익과 결부시키는 것은 비난받아 마땅하므로 사태파악후 엄중조치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광주 남기창·부산 이기철기자 kcnam@
  • 탑골공원 성역화 오늘 착공

    탑골공원 성역화사업이 본격 추진된다. 서울시는 3·1절 제82주년을 앞두고 탑골공원의 역사적 위상을 되찾기 위한 공원 성역화 사업을 본격 추진하기로 했다고 27일 밝혔다. 서울시는 이를 위해 28일 오후 2시 1만9,599㎡에 이르는 탑골공원의 성역화사업 기공식을 갖는다. 탑골공원은 그동안 각종 무질서 행위로 인해 역사적 상징성이 훼손됐다.특히 최근 일본 관광객들이 많이 찾고 있는 점을 감안,성역화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돼왔었다. 서울시는 총 19억원의 예산을 들여 오는 광복절 이전에 성역화사업을 마무리지은 뒤 공원 이용을 유료화할 방침이다. 우선 탑골공원이 옛 원각사 터인 점을 감안,역사적 상징물들을 중심으로 관람코스를 조성하고 순국선열에 대한 참배공간을 조성하는 등 성역화사업을 추진하기로 했다.국보 2호인원각사지 10층 석탑, 보물 3호인 원각사비,서울시 유형문화재 73호인 팔각정은 그대로 보존하는 한편 공원 입구쪽에 손병희동상,3·1독립 기념비,3·1정신 찬양비,만해 한용운 기념비,탑골공원 사적비를 배치하는 등 참배의식을 위한 1,200여㎡ 규모의 기념광장을 조성할 계획이다.광장은 높이 2.1m,길이 46.4m의 장식벽으로 둘러싸고 주변에는 연못도 만든다. 또 팔각정 주변에 원형으로 2,000여㎡ 규모의 상징광장을만들고 진출입로와 순환로를 따로 만들어 공원내 이동로를단순화하기로 했다. 서울시 관계자는 “탑골공원 성역화사업이 마무리되면 도심에 위치한 민족 성지로서의 역할을 해낼 것”이라며 “그동안 탑골공원을 이용해온 노인들을 위해 인근 옛 통계청 건물을 노인복지센터로 꾸며 다음달 개관하겠다”고 말했다. 김용수기자 dragon@
  • 3·1절 되새기는 책 2권

    일제 강점기에 자신의 지조를 팔아먹은 대가로 호의호식한친일파들이 즐비한 반면 해외에서 죽을 고생을 해가며 처절하게 무력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들도 적지 않았다.또 일제의 징병·징용 동원에 앞장선 사람들이 있었던 반면 일본군 위안부로 강제로 끌려가 인생을 잃어버리다시피한 조선의 ‘처녀’들도 있었다.‘저기에 용감한 조선 군인들이 있었소’(동방미디어)와 ‘기억으로 다시 쓰는 역사’(풀빛)는그들 용기있는 선열과 불행했던 역사의 희생자들에 관한 기록이다. ‘저기에…’는 잊혀지고 사라져가는 항일운동가들의 흔적이나,그들의 활동에 관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현지 관계자들의 증언과 기록 등을 토대로 한 해외 항일 무력투쟁의 현장 답사기다.대한매일 특별취재반이 지난해 중국,미국,일본,러시아 등 4개국에서 취재해 연재했던 내용을 보완,추가하고 현장·기록 사진을 풍부하게 수록했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하얼빈역 1번 플랫폼에는 의거 현장임을 알려주는 표시는 아무 것도 없고 작은화단만이 남아 있다.독립군의 최대 승첩인 김좌진·홍범도장군의 청산리전투 현장,북간도 독립투쟁의 본거지인 용정과 명동,남만주 항일투쟁의 전설 양세봉장군의 근거지 신빈 등 선열들의 발자취를 조명했다.북한 김일성 주석을 항일운동의 길로 안내한 손정도 목사의 활동지 길림과 김주석이 다녔던 육문중학 등도 소개했다.김좌진장군을 살해하거나 양세봉장군을 유인해 죽음으로 이끈 자와,무기구입 자금 부족에 시달렸던 광복단원들이 용정에서 탈취한 일제의 호송자금 15만원을 밀고해 날라가게 만든 인물도 조선인이었던 현실이 안타깝게만 느껴진다. 허베이성 남장촌에서 조선항일군정학교 자리를 묻는 취재팀의 질문에 현지 노인은 “저기 보이는 절에 용감한 조선 군인들이 있었소”라고 확인해줬다.조선의용군이 20대1의 포위망을 뚫은 호가장 전투 현장 등 국내에 최초로 소개한 곳들도 꽤 있다.임시정부와 광복군의 거점이었던 충칭(重慶)과푸양(阜陽) 등 중국 뿐 아니라 하와이,도쿄(東京),포시에트등지의 항일투쟁 현장들도 담았다. ‘기억으로…’는 조선인 군위안부들의 증언집이다.10여만명으로 추정되는 군위안부 가운데 생존자는 160여명.이중 9명이 이번에 위안소에서의 체험 뿐 아니라 그후 전 생애에 걸쳐 삶의 궤적에서 차지하는 위안부 경험의 의미를 담았다.지난 99년 4월 구성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 한국위원회 증언팀이 녹취한 증언을 가감없이 기록했다. 다가오는 3·1절의 의미를 되새기며 읽어볼만한,의미있는 책들이다. 김주혁기자 jhkm@
  • 3.1절 TV ‘특집다큐’ 다채

    ‘3.1절을 다큐멘터리와 함께’공중파 방송사들이 공들여 만든 특집 다큐멘터리가 3월1일안방에 ‘뜻깊은’ 휴일을 선사할 예정이다. 먼저 KBS는 물량공세를 편다.1TV를 통해 오전11시 ‘무주촌사람들’,오후10시 ‘망명객 서재필,세번의 귀향’을 준비한다.27일부터 이어져온 ‘백만인의 한’도 밤 12시10분 마무리격인 4·5부를 내보낸다. ‘망명객…’은 중용을 터득한 진정한 독립투사에서 친미외교론자까지 평가가 엇갈리는 서재필에 대한 집중해부.갑신정변 실패로 미국 유학길에 오른 젊은날,‘독립신문’ 활약상,조선독립 지원과 그로 인한 파산,해방정국 이승만과의 세겨루기,말년의 쓸쓸한 미국행까지 일생을 파노라마로 펼친다. 한·미·일 3국을 뒤져낸 방대한 자료가 완성도를 높인다. ‘무주촌…’은 중국 지림(吉林)성의 또다른 조선족자치주무주촌 취재기.전라북도 무주에서 일제에 등떼밀려 강제이주해온 주민들은 갖은 고초를 뚫고 60년 이상을 우리말과 전통,맛을 지켜오고 있다.북도촌 남도촌 등과 함께 중국속의 전라도 인심을 일궈오고 있는 이들에 KBS전주방송총국이 카메라를 들이댔다.한편 ‘…한’은 마에다 켄지라는 일본감독이 한국인 강제연행,종군위안부 실상을 기록했다 해서 화제가된 5부작 필름.28일 밤12시 ‘종군위안부들’에 이어 3월1일 밤12시10분 ‘천황과 마쓰시로’‘원폭피해자들’ 편을 만날 수 있다. MBC가 오후5시50분 마련한 ‘하이난섬의 대학살-땅속에 묻은 진실’은 일제에 학살된 조상들의 원혼을 위무하는 기획.태평양전쟁 당시 강제연행돼 중국 해남도에서 일본군에 학살된 1,000여명 조선보국대 사건의 진상을 파헤친다.목격자인 주민들 입을 통해 이곳이 ‘조선촌 천인갱’으로까지 불리게된 끔찍한 목격담을 듣고 당시 일본해군 16경비대 사령관을인터뷰,일본군의 잔학상을 파헤친다. 이에 비해 SBS는 한결 소프트한 특집을 내건다.98년 최초의육사 여생도로 입학한 강유미씨를 취재한 ‘새끼사자 길들이기’(오전11시).‘역할모델’도 없는 최초의 여생도로 고된훈련과 선배들의 기합에 눈물짓던 강씨는 어느덧 3학년이 돼 초창기 자신의 처지였던 예비생도들을 이끌고 있다.강씨의일상을 들여다보며 젊은이들에 이어내리고 있는 3.1절 기상을 되새긴다. 손정숙기자 jssohn@
  • 서울대공원등 3·1절에 무료 개방

    서울시는 3.1절인 다음달 1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서울대공원내 동물원과 어린이대공원 2곳을 무료 개방한다. 어린이날이 아닌 일반 국경일에 이들 공원을 무료로 개방하는 것은 처음이다. 그러나 놀이기구 등 공원내 시설 이용료는 내야 한다. 문창동기자 moon@
  • [사설] 일본, 두고만 볼 수 없다

    1919년 3·1의거 당시 일제가 저지른 만행이 새롭게 드러났다.당시 남편과 함께 한국에서 근무했던 마티 윌콕스 노블선교사의 육필일기‘3·1운동,그날의 기록’에 의하면 일본군·경은 그해 4월15일 경기도 화성군 제암리교회에 불을 질러 주민 23명을 살해하고,고주리 마을에서 6명을 총살한 데이어 4월19일을 전후해서 인근 수원 지방 16개 마을과 5개교회에서도 주민들을 무차별 학살했다는 것이다. 3·1절을 앞두고 일제의 만행이 새롭게 확인돼 국민들이 치를 떨고 있는 가운데 일본 극우세력이 역사를 왜곡해서 만든교과서들이 문부과학성의 검정을 통과할 것으로 보여 국민들을 더욱 격분시키고 있다.일본 극우단체인 ‘새 교과서를만드는 모임’이 만든 교과서는 물론 기존 7종의 교과서 모두가 ‘침략’이라는 용어를 ‘진출’로 바꾸거나 삭제했다. ‘일본의 침략에 대항해 조선 사람들이 무기를 들고 싸웠다’는 의병 부분이 사라졌고,‘간토(關東)대지진과 조선인 학살’이라는 대목에서도 ‘조선인 학살’ 부분을 없앴다.7종교과서 모두가 기술해왔던‘종군위안부’도 4개사가 완전삭제했으며,3개사는 ‘종군’이라는 말을 빼거나 분량을 축소했다. 일본 정부는 ‘자율 규제’라는 명분으로 이 교과서들을 통과시킬 것이라고 한다.그것은 황국사관을 기초로 군국주의로회귀하려는 일본 내 극우세력의 음모에 일본 정부가 동조하는 것에 다름아니다.이같은 움직임을 잠자코 보고만 있을 것인가.그럴 수는 없다.한국과 중국 등 일본 제국주의의 피해국 정부와 국민들이 들고 일어나 일본의 군국주의화를 막아야 한다. 일본의 역사 왜곡 움직임과 관련,여야 의원 100여명이 ‘강경 대응 결의안’국회 본회의 채택을 추진하고 나왔다.일본측이 역사 교과서 왜곡 부분을 시정할 때까지 국회 차원의한·일 의원연맹 친교활동을 중단하고,정부측에 대해서도 양국간 청소년 교류,일본문화 개방 일정의 전면 재검토와 일왕에 대한 ‘천황’ 호칭 철회등을 요구한다는 것이다.정부는소극적인 항의만 하고 있을 게 아니라 국민의 분노가 한계에이르기 전에 일본 역사 왜곡 교과서의 검정 통과를 막는 데소매를 걷고 나서기 바란다.
  • 3·1절 종로엔 색 다른 즐거움이 있다

    서울 종로구는 오는 3월 1일 3·1절을 맞아 종로 일대를 차없는 거리로 지정하고 ‘3·1 만세의날 종로거리축제’를 연다. 이에 따라 종로1가 보신각에서부터 종로3가 서울극장에 이르는 800m 구간이 ‘차없는 거리’로 지정돼 이날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차량통행이 전면 통제된다. 종로구는 그동안 차량의 홍수와 매연으로 찌든 종로거리를시민에게 돌려주고 시민들이 직접 축제의 주인공으로 참가할수 있도록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단순히 교통을 통제한 뒤 시민들이 구경만 하는 것에서 탈피, 시민들이 즐기고참가하는 축제로 꾸미기로 한 것. 이에 따라 굴렁쇠 굴리기,떡메치기,소원북치기,인절미 만들기,윷놀이 등 가족단위의 프로그램이 마련되며 청소년을 위한 힙합·테크노 경연대회,페이스 페인팅,유관순 열사상 선발대회 등도 열린다. 거리축제 전구간에서는 농악·사물놀이가 펼쳐지고 3·1만세 행사,독립선언서 낭독 등의 행사도 재현된다. 김용수기자 dragon@
  • 일본연극인들 “제암리사건 참회”

    일제가 이땅에서 저지른 가장 악랄한 만행 가운데 하나인제암리사건.1919년 3·1독립만세운동이 있은 뒤 경기도 화성군 제암리의 마을 교회에 일본 헌병들이 기독교 신도 21명을모아놓고 불질러 죽인 참사를 말한다. 오는 3·1절을 전후해 일본 연극인들이 이 제암리사건을 고발하고 참회하는 이색 연극 한편이 무대에 오른다.26일부터3월2일까지 문예회관 대극장서 공연되는 ‘아 제암리여’는일본인이 연출하고 일본 중견 배우들이 그 무대에 직접 선다. 이 작품은 지난 99년 3·1독립운동 80주년을 맞아 일본 연극인들이 한국 극작가(이반 숭실대 교수)에게 희곡집필을 의뢰,지난해 3월1일 도쿄 소재 한국 YMCA극장 무대에서 ‘칼과춤’이란 제목으로 선보인 연극.사건의 중대성과 공연장소덕에 현지 언론과 관객들의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번 공연은 극단 현대극장의 주선으로 성사된 것으로,일본내 브레히트 최고의 권위자로 통하는 우치다 도로 일본대교수가 연출을 맡았다.일본 극단 동인회가 제작,극단 ‘배우좌’‘동인회’‘세대’등에서 활동하는 50∼60대 중견 배우 11명이 동참했다. 연극은 제암리 사건의 참상을 다루면서 정신대 문제 등 일본이 저지른 만행을 ‘극중극’형식으로 녹여낸다.일본 헌병의 손에 초토화한 마을을 살아남은 주민들이 재건하고 일본인 목사가 속죄의 의미로 교회를 지어줌으로써 참회와 화해의 메시지를 강조한다. 극 말미에 살아남은 마을 주민이 처용무를 추어 고통을 승화하는 장면이 삽입되는데 처용무는 한국 무용가 최숙희가 맡았다. 김성호기자 kimus@
  • 故이수현씨에 ‘화해와 평화상’

    개신교 천주교 불교 원불교 유교 천도교 민족종교협의회 등7개 종단으로 구성된 ‘화해와 평화를 위한 온겨레 손잡기운동본부’는 3·1절 82주년을 맞아 ‘화해와 평화상’을 제정,22일 첫 수상자로 일본인 취객을 구하려다 목숨을 잃은고 이수현(李秀賢)씨와 사단법인 남북어린이 어깨동무를 선정했다.
  • [김삼웅 칼럼] 새해는 국경일부터 바로잡자

    가령 지구가 종말을 맞아 파멸하게 됐을 때 지구 밖으로 비상 반출할 우리의 첫번째 보물을 든다면 무엇일까. 지난 정기국회에서 여야의원 50여명이 한글날을 국경일로 지정하여 민족문화 중흥의 전기를마련하자고 나섰지만 국회행정자치위원회에서 보류되었다. ‘한글날 국경일 추진을 위한 모임’소속 의원들은 “한글은 우리민족사의 위대한 창조물이자 인류문명에 길이 빛날 업적”이라면서“한글창제가 국가건립과도 같은 상징성이 있어 광복절 못지 않은 의미를 두어야 한다”고 중요성을 제기했다. 신문지면이나 각종 간판 그리고 일상용어가 외래어에 뒤범벅이 되어우리 말과 글이 심하게 오염당하고 있다. 더욱이 국제화·세계화를이유로 영어를 공용어로 하자는 주장이 점차 세(勢)를 얻어가고 있는시점에서 ‘한글날 국경일’제안은 시의적절하다. 다만 법정공휴일이너무 많다는 여론을 참작하면서 조정하면 될 것이다. 국내에서는 한글을 홀대하고 우습게 여겨도 유네스코에서 ‘훈민정음’을 세계 기록문화유산으로 등록한데 이어 세종대왕 탄일을 ‘세계문명퇴치의 날’로 지정했다. 미래 학자들은 인터넷의 급속한 보급과 국제화 추세로 20∼30년 후에는 영어, 중국어, 러시아어 등 강대국 언어만 남고 나머지는 이들 언어권에 ‘편입’되거나 소멸될지 모른다고 내다봤다. 우리는 오늘의 영어문화에 못지않는 한자 문화권에서도 한글을 창제하고 지켜왔으며, 일제의 혹독한 한글말살책에 맞서 우리글과 말을지켜냈다. ‘국가의 경사스러운 날을 기념하기 위하여’국경일을 제정하고 있다. 3·1절, 제헌절, 광복절, 개천절을 4대 국경일로 정하고 신정,설날, 어린이날, 석탄일, 현충일, 추석, 성탄일을 법정공휴일로 삼고있다. 그런데 국경일부터 문제투성이다. 우선 ‘3·1절’에 대한 호칭이문제다. 제헌절, 광복절, 개천절 등 다른 국경일은 그 의미가 명칭에서 충분히 드러나는데 유독 ‘3·1절’은 가치중립적인 숫자로 부른다. 여기에는 1949년 10월 ‘국경일에 관한 법률’을 제정할 당시 3월항쟁의 의의를 중화시키려는 친일세력의 의도가 작용했는지 모른다. 제대로 이름을 붙인다면 ‘항일절’이나 ‘독립절’이라야 맞다. 제헌절도 문제다. 제헌절은 1948년 7월17일 이른바 ‘제헌국회’가헌법을 제정한 날을 기념하는 날이다. 현행헌법은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전문에서 명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당연히 임시정부가 ‘대한민국임시헌장’을 선포한 4월11일(1919년)이 제헌절이 되어야 옳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임시의정원(국회)의장 이동녕 외 7명의 이름으로 ‘헌장’을 선포하고, 제1조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라고 국호와 국체를 천명했던 것이다. 헌법에서 임정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명시하고서 막상 제헌절을 7월17일로 고수하는 것은 자가당착이며 정통성과 법통을 스스로 무시하는 처사다. ‘국군의 날’도 바뀌어야 한다. 현재의 10월1일은 6·25전쟁중 국군보병 3사단 23연대 3대대가 최초로 38선을 돌파한 날이다. 통일을지향하는 우리가 원인이야 무엇이든 동족상쟁과 관련되는 날을 국군의 날로 한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1940년 9월17일 당시 중국수도 충칭(重慶)에서 임시정부 국군으로창군식을 가진 광복군창군일을국군의 날로 기려야 한다. 광복군의명칭도 처음에는 ‘한국독립군’으로 표기했으나 1942년부터는 ‘한국국군(Korean National Army)’으로 고쳐 주권국가의 정식군대임을선언하고 조국광복 작전을 전개했다. 한국광복군창군일을 국군의 날로 개정하는 것이 군맥을 잇고 정통성을 살리는 길이다. 개천절에도이론이 따른다. 단군이 4333년 전인 무진년 음력 10월3일에 나라를세웠으므로 개천절은 마땅히 음력으로 해야 옳다. 개천절을 양력으로하는 것은 음력 10월3일에 태어난 사람이 양력 10월3일에 생일잔치하는 것과 비슷하다. “정치를 맡게되면 무엇부터 할 것인가”를 묻는 자로(子路)에게 공자는 “필야정명호(必也正名乎)”라고 대답했다. 반드시 정명부터 확립하겠다는 뜻이다. “정명(正名)이 없으면 말(言)이 불순하고 말이불순하면 모든 일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事不成), 정명이 가장먼저 이루어져야(爲先事)한다”고 했다. 정명을 통해 국가의 기본을바로 세워야 할 때이다. 김삼웅 주필 kimsu@
  • [해외 항일전적지를 찾아서] (16)블라디보스토크·빨치산스크

    1910년 국권상실 직후 의병들의 거점이었던 포시에트와 크라스키노를 돌아본 취재팀은 블라디보스토크의 항일투쟁 유적지를 찾아 나섰다.러시아어로 ‘보스토크(동방)’와 ‘블라디’(정복)를 합성한 블라디보스토크는 러시아 연해주의 중심도시.금각만(金角灣)을 껴안은이 곳은 극동에 있는 러시아의 유일한 부동항(不凍港)으로 1860년대이래 러시아 극동진출의 발판이 돼왔다.특히 1903년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개통되면서 위상이 더욱 높아졌다. 우리 항일투쟁사에서 블라디보스토크는 항일투쟁이 응집된 중요한곳이다.일제를 피해 포시에트를 떠난 한인들이 새로 자리를 잡은 곳이기 때문이다. 해삼위(海蔘威)라고도 불렸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먼저 찾아 나선곳은 뽀그라니치나야 스라보카 거리였다.구한말 항일운동의 중심역할을 한 개척리가 세워진 곳이다.남향에다 바다로 향한 전망이 좋아 마을이 없던 당시 이주자들이 정을 붙이고 살기에는 최적지로 보였다. 그러나 개척리는 1911년 러시아 당국이 콜레라 근절을 핑계로 수천여명에 이르던 우리 동포들을몰아낸 뒤 병영을 지었고,이후 블라디보스토크 원형극장이 들어섰다.지금은 중국음식점으로 바뀌었다. 한인들은 쫓겨나기 1년전인 1910년 8월 경술국치 소식이 전해지자이상설 이범윤 홍범도 등을 주축으로 ‘성명회(聲明會)’를 조직했다. 그러나 9월 11일 러시아 극동공화국 당국이 일본의 요구에 따라 성명회와 십삼도의군 간부 200여명을 체포하는 사태가 발생했다.‘대동공보’도 이 곳에서 발행됐다.국내 의병장,계몽운동가들이 모여들면서 이 주변은 한인수가 한때 16만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90여년의 긴 세월은 우리 독립운동가들의 숨결을 남김없이지워냈다.기왓장 하나 남아 있지 않은 현실에 취재팀은 안타까움을감출 수 없었다. 개척리를 떠난 동포들은 십여㎞쯤 떨어진 언덕에 새둥지를 틀었다.바로 신한촌(新韓村)이다.그러나 신한촌은 북향의 경사진 언덕이다.따뜻한 남향의 옥토에서 칼바람 부는 황무지로 옮겨온 우리 동포들의심정은 어땠을까. 우리 동포들은 신한촌에서 1911년 8월29일 한일합방 1주년을 맞아반대시위를 벌였다.그리고 조국독립과 계몽활동,민족주의교육 등을주창하는 권업회(勸業會)를 창설했다.이 때 홍범도는 20명의 동지와함께 ‘21의형제 동맹’을 결성했다. 1914년에는 대한광복군정부를 조직했다.앞서 1912년 신채호 이상설장도빈 등은 ‘권업신문’을 발간했다.1919년 3월17일에는 고국에서온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규모 시위를 가졌다.이듬해 3·1절에는독립문을 세웠다.이렇게 줄기차게 전개된 투쟁 때문에 독립운동사 연구가들은 독립운동사에서 신한촌을 북간도의 용정과 명동보다 앞선것으로 평가한다. 일본군은 1918년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군인 적위군과 차르의 백군간에 벌어진 내전에 국제간섭군이라는 명분으로 파병해 있었다.1920년4월,일군이 러시아군과 한인부대 연합군과 충돌하자 이를 기화로 신한촌을 기습하였다.주요 지도자들은 탈출하였으나 불운하게도 최재형이 동포 60명과 함께 체포되었다.그는 우수리스크로 끌려가서 처형되었다. 취재팀은 독립운동가들이 일제를 피해 새로 정착한 빨치산스크로 향했다.우리식으로 수청(水淸)이라고 이름지어진 이 곳은블라디보스토크에서 200㎞쯤 떨어진 산세 험한 소 도시이다.백마 탄 김일성장군으로 불렸던 김경천(金擎天) 장군이 이끄는 항일유격대가 치열하게 일본군과 싸웠던 곳이다. 김경천은 창해(滄海)청년단과 수청고려의병대를 이 곳에서 이끌었다. 광복군사령관을 지낸 이청천(李靑天)보다 일본육사 3년 선배로서 조국 독립에 한몸을 던졌던 김경천.그는 1909년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육사에 재학 중 조국이 강점당하는 비운을 겪었다.요코하마에서 그는이청천 홍사익 등과 함께 뒷날 탈출하자고 결의했다.1919년 6월 그는 이청천과 함께 만주로 망명,신흥무관학교에서 교관으로 일했다. 이청천이 중국 땅에 남은 것과 달리 김경천은 1919년 말 러시아로와서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물렀다.1920년 4월 일본군의 신한촌 기습에서 아슬아슬하게 위기를 면한 그는 수청으로 가서 한인들을 괴롭히는마적들을 제압하고 일본군과 싸웠다.그는 이 때부터 ’백마 탄 김일성 장군‘이라는 별명을 얻었다.김경천은 조국독립을 위해 투쟁하면서도 때때로 러시아 백군과 싸워 볼셰비키혁명에도 공로를 쌓았지만홍범도가 그랬던 것처럼 강제 이주열차에 실려 중앙아시아로 끌려갔다.그리고 1942년 수용소에서 불우하게 사망했다. 광산촌인 빨치산스크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자동차는 첩첩산중으로 들어가고 또 들어갔다.간신히 3시간만에 도착한 빨치산스크의중심가는 평온하기 그지 없었다.갑자기 내리는 보슬비를 맞으며 한참수소문한 끝에 빨치산스크 시립중앙박물관을 찾았다.나탈리아라는여성 관리원의 도움을 얻어 빨치산 사진과 문헌을 샅샅이 뒤졌지만김경천 등 한국식 이름은 나오지 않았다.한인 빨치산에 관한 어떤 기록도 없었다.기록에 따르면 이 곳에 있던 빨치산 중 절반이 한인이었다고 하는데 아마 1936년 강제이주 뒤 자료들이 대부분 멸실된 듯 싶었다.나탈리아는 취재팀의 허탈해 하는 표정을 보고 “수장고에 다른자료들이 있는데 관장이 갖고 외출했고 그는 며칠뒤에야 돌아온다”며 자기가 더 미안해 했다.취재팀은 어쩔 수 없이 벽에 걸린 사진들을 꼼꼼히 살펴보다 한인으로 보이는 몇사람을 발견한 것을 위안으로삼으며빨치산스크를 떠났다. 블라디보스토크 박재범기자 jaebum@. * 빨치산스크의 고려인들. 빨치산스크에는 고려인(카레이스키)이 간혹 눈에 띄었다.1936년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전원 강제이주된 한인들의 후손들이다.그들은 최근 몇년새 한둘씩 다시 연해주로 돌아오고 있다.대개 중앙아시아에 가까운 하바로브스크 등 대도시에 자리잡고 있으나 멀리 빨치산스크까지 오는 사람들도 제법 있다.그러나 그들은 이미 선조들의역사를 잊었다.아니 아예 모르고 있었다. 빨치산스크의 한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러 들어온 한 사람을 만났다. 생김새가 한국사람과 똑같아 “혹시 카레이스키가 아니냐”고 러시아말로 묻자 “그렇다.박이다”라고 대답했다.“4∼5년전에 중앙아시아에서 이 곳으로 왔다”는 그는 “예전에 이 곳이 독립운동의 거점이었음을 아느냐”는 질문에 ‘처음 듣는 얘기’라는 표정이 역력했다. 하바로브스크에는 고려인이 빨치산스크보다 훨씬 많다.고려인들은하바로브스크 시내 시장에서 채소와 과일 등을 팔거나 구두를 고치는일 등을주로 하고 있다.그들 역시 중앙아시아가 고향이라고 한다. 그러나 하바로브스크 등 연해주가 그들 할머니 할아버지가 뿌리내렸던 곳이었음을 아는 사람은 역시 극히 드물었다. 박재범기자
  • “남북합창단 함께 내 노래 불렀으면”

    “남북정상이 만나고 클린턴대통령이 연내 방북한다는 소식까지 들리는 걸 보니 통일이 눈앞에 왔나 봅니다.빨리 통일이 돼 ‘우리의 소원’이 잊혀진 옛노래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통일에 대한 간절한 염원을 담은 동요 ‘우리의 소원’의 작곡가 안병원(74·캐나다 토론토 거주)씨가 한국복지재단 후원회장 자격으로한국복지재단 52주년 기념행사 참석차 고국을 찾았다. ‘우리의 소원’은 안씨가 서울대 음대 1학생년이던 지난 47년 동요단체 ‘봉선화 동요회’와 함께 3·1절 기념 어린이노래극을 준비하면서 2주만에 작곡했다.노랫말은 방송극작가였던 아버지 안석주(50년 작고)씨가 지었는데 당시 가사는 ‘우리의 소원은 독립’이었다고전했다.그후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리면서 ‘통일’로 바뀌었다는 것. 26년전 캐나다로 이민,교민 음악회 및 가톨릭 성가대를 지휘하며 음악활동을 계속해온 안씨는 지난 91년 ‘통일교성곡’을 발표하기도했으며 “지금도 통일에 대비해 온 겨레가 함께 부를 수 있는 곡을준비하고 있다”며 노익장을 과시했다.안씨는 “이산가족 상봉차 북에 다녀온 교민들로부터 ‘북에서는 학생들이 선생님의 노래를 부르며 등교한다’는 말을 전해듣고 깜짝 놀랐다”면서 “지난 89년 임수경씨가 방북한 이후 북에서도 널리 불리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88년과 89년 두차례에 걸쳐 김일성주석으로부터 ‘북에 와 합창을 지휘해달라’는 초청을 받기도 했지만 두고온 가족들과 고향을 그리는 이산가족들을 뒤로 한 채 먼저 북녘 땅을 밟는 것이 미안해 거절하기도 했다. “통일이 되면 남북합창단이 노래하는 ‘우리의 소원’을 지휘해 보는 게 나의 마지막 소원”이라며 그때까지 살기 위해 건강을 지키려노력한다며 활짝 웃었다. 허윤주기자 rara@
  • [해외 항일전적지를 찾아서] (9)샌프란시스코·LA

    ◆ 美洲 독립운동 거점 샌프란시스코·LA. 샌프란시스코는 미주지역 조국독립운동의 중심지였다.한인들이 ‘상항(桑港)’이라고 부른 풍광이 아름다운 이곳에는 구한말 이래 하와이군도의 노동이민을 비롯,많은 한인들이 찾아들어 자리를 잡거나 로스앤젤레스 등 각 지방으로 진출하는 ‘거점’이 되었다. 샌프란시스코는 한국민족운동사상 첫번째 ‘의열투쟁’이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페리부두에서 장인환(張仁煥)·전명운(田明雲) 두 의사가 대한제국정부의 외교고문의 직함을 가지고 일제 한국침략의 앞잡이 노릇을 한 미국인 스티븐스를 처단한 현장이다. 이 지역 최초의 한인단체 ‘상항친목회’가 1903년 9월 페리부두 인근의 스트리트 차이나타운에서 발족한 것을 시작으로 미주 한인사회최초의 민족운동기관으로 발전한 공립협회(公立協會)가 1905년 4월차이나타운 왼쪽 퍼스픽 스트리트 938번지의 회관에서 출발했다.공립협회는 기관지 ‘공립신보(公立新報)’에 이어 ‘신한민보(新韓民報)’를 발행하면서 국권회복운동을 벌였다. 두 의사의 의거직후인1909년 2월 미주본토의 공립협회와 하와이의합성협회 등 모든 한인단체를 통합,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를 창립하고 페리 스트리트 232번지에 중앙총회본부를 두고 기관지로 국내외 항일민족언론을 주도한 ‘신한민보’를 발행했다.영문명으로 ‘The New Korea’라고 표기한 ‘신한민보’는 1914년까지 5년동안 232번지 건물에서 발행하다가 1937년 로스앤젤레스 제퍼슨거리에 중앙회관을 건립,그곳에서 한국전쟁때까지 40년여년동안 한번도 결간없이 발행하면서 민족해방과 통일이념을 구현하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대한인국민회 중앙회관과 ‘신한민보’의 발행처로 사용되었던 페리스트리트 232번지 건물은 도시계획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 그 위치를 가늠하기가 어렵다.북가주 광복회장 이하전(독립유공자)옹과 중립화 통일운동에 열정을 보이는 최봉윤옹,이정순 한인회장등이 정확한 위치를 확인하고자 애쓰고 있다. 장인환·전명운 두 의사가 일제의 한국침략 앞잡이로 활동한 미국인 스트븐스를 총살·응징한 것은 1908년 3월24일 상오 9시 10분이다. 스티븐스가 페리 정거장에 도착하여 승용차에서 내려 페리빌딩으로들어서려는 순간,대기중이던 전명운이 먼저 권총 방아쇠를 당겼다.그러나 불발이었다.뒤이어 전 의사가 스티븐스의 얼굴을 총두(銃頭)로갈기는 순간 장 의사가 권총 3발을 발사,일본의 주구는 쓰러졌다가이틀뒤 절명했다.두 의사가 우연스럽게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서 거사에 나서 성공한 것이다. 장 의사는 1909년 1급 살인혐의로 구속돼 25년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중 1919년 국민회의 가석방 청원서가 수락되어 석방되었다.석방후독립운동에 헌신하던 그는 1930년 생활과 병고 등으로 향년 54세로이곳에서 자살하였다.전 의사는 사건발생 97일만에 구속되어 재판을받다가 무죄로 석방되었다.전 의사는 석방이후 미국에서 불우한 삶을 보내다가 1947년 63세로 세상을 떴다.두분 다 불우한 여생을 마친것이다. 샌프란시스코한인사회는 지난 3월23일 의거92주년 기념행사를 가졌다.지난해 이어 두번째인 이 행사는 의거장소인 페리부두가 현장여건상 개최가 어려워 한인회관에서 열었다.지난해는 ‘한미수교1백주년기념조각’이 있는 자스틴 허만광장에서 거행되었다.한인 지도자들은 이곳에 두 의사의 동상을 세우고자 성금을 모으고 본국의 지원을 바라고 있다.현재 페리부두의 육중한 3층짜리 페리빌딩은 역사기념물로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다.두 한인의사를 기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1896년에 건립된 지역 대표적 건물인 까닭이다. 초기 한인들의 정신적 지주역할을 해온 ‘상항한인연합감리교회’는 1904년 안창호·이대위 등이 친목회를 조직하고 가정예배를 드리기시작해 1907년 캘리포니아거리에 있는 3층 주택을 임대해 예배를 보는등 시련끝에 1994년 쥬다거리에 교회건물을 구입이전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98년에 현재 건물을 신축하여 감리교회당과 역사자료실 부설로 운영하고 있다.현 건물은 독립운동과 직접 관련이 없지만 이곳한인들의 믿음과 각종 독립운동 자료들을 보존하고 있다. 미주 항일독립운동의 선각자 도산 안창호선생의 발자취는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앤젤레스 곳곳에 남아있다.특히 로스앤젤레스 제퍼슨 거리 1938번지 대한인국민회 중앙회관앞 거리는 로스앤젤레스시가 1994년2월 ‘도산 안창호광장’으로 이름지을 만큼 도산의 업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도산은 1902년 샌프란시스코에 도착,LA를 오가면서 항일민족운동을 주도했다.대한인국민회와 흥사단을 중심으로 미국은 물론 멕시코·원동지방의 시베리아,만주등지에 대한인국민회 지방총회를조직할만큼 광범위한 조직을 만들어 항일구국투쟁을 벌였다.흥사단의 단소(團所)인 중앙회관은 LA 벙커 힐에 있던 것을 얼마후 피게로아스트리트 106번지의 2층 목조건물로,1932년에는 남(南)카타리나 거리 3421번지의 땅을 구입해 2층 유선양옥을 지어 옮긴 것이 오늘에 이른다. 미주 독립운동의 정신적 산실인 대한인국민회중앙회관은 1936년 LA 36 스트리트에 있었으나 얼마후 제퍼슨거리 1368번지로 옮겼다.대한인국민회 회관은 퇴색한 단층건물이 철책담으로 둘러싸여 제퍼스 큰길과 만나고 현관 벽 위에 ‘대한인국민총회’라는 현판이 선명하게 부각되어있다.LA 연합장로교회 소유인 이 건물은 지금도 매년 3·1절과 광복절에는 교포들이 모여 기념예배를 본다. 한인회 간부들은 한인회와 정부가 합동으로 교회로 부터 건물을 구입,보수하여 민족운동박물관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이다.LA 한국문화원 최규학영사와 현지언론 피플뉴스 발행인 민병용씨 등 많은 사람이 민족운동박물관건립운동에 발벗고 나서고 있다. 1937년부터 1946년까지 도산가족이 살았던 남가주대학 구내 도산 사가(私家)는 당시 건물(1937년)그대로 보존돼 있다.현재 ‘The Ahn Family Residence’라고 쓰인 동판표지물이 설치돼 있다.올해 3·1절행사때 한국을 방문한 셋째딸 안수산 여사가 노구를 이끌고 방문자들을 친절하게 안내한다.도산의 많은 유물은 보는 이를 숙연케 한다.하나같이 조국 독립운동의 얼이 배인 것들이다. 샌프란시스코·로스앤젤레스 김삼웅주필 kimsu@
  • [발언대] ‘태극기 달기운동’에 적극 동참을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주경기장.당당히 가슴에 태극기를 달고 우승한황영조 선수가 마지막 남은 금메달을 목에 걸고 애국가가 장엄하게 울려퍼지는 가운데 태극기를 바라보면서 감격해 하는 모습이 전세계로 방송될 때,우리는 무한한 감동과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태극기,애국가 그리고 작은 영웅 황영조 선수가 우리 모두를 하나로 만들었던 것이다. 해마다 경축일이 다가오면 연례행사처럼 태극기 달기 운동을 벌이고 있다. 행정자치부 의정관으로 부임한 이후 처음 맞이한 3·1절에도 어김없이 각기관과 전 가정에 태극기 달기를 권유했으나 호응도는 그렇게 높지 않았다. 우리는 왜 국가의 상징인 태극기 달기를 소홀히 하는 것일까. 미국이 많은 민족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다민족 국가이면서도 세계 최강국으로서의 지위를 더욱 굳건히 하고 있는 저력은 과연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여러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성조기를 중심으로 뭉친 그들의 애국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그들은 성조기 앞에서 인종도,빈부도,언어도,피부색도 모두 녹여버리고 오직 하나된 USA를 만들어낸다. 이것이 그들이 국익 앞에서 하나되고 조국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칠 수있는 원천이며,세계 최강국 미국의 힘의 실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5,000년 유규한 역사를 가진 단일민족국가라고 자랑하곤 한다.그러나 우리는 국가가 어려울 때 과연 국익을 먼저 생각하면서 일해왔는지 새천년 광복절을 맞이하여 태극기 달기를 권유하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최근 우리사회에서는 국익보다는 특정 집단의 이익만을 앞세우는 집단이기주의,지나친 개인주의 등 사회적 병폐가 여러 분야에서 나타나고 있다. 우리가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고 후손들에게 자랑스럽고 아름다운 조국을 물려주기 위해서는 국가의 상징인 태극기 앞에서 우리 모두가 하나되는 노력이그 어느 때보다 더 절실히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역사적인 6·15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분단의 벽을 뛰어넘어 화해와 협력의 새시대가 펼쳐진 새천년 광복절에는 우리 모두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누구나 실천할 수 있는 ‘태극기 달기 운동’에 동참하여 우리 모두가 하나 될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김호길 행정자치부 의정관
  • 안중근의사 遺墨 2점 日서 발견

    안중근 의사가 중국 뤼순(旅順)감옥에서 남긴 휘호 2점이 추가로 발견됐다. 다큐멘터리 프로덕션 ‘더 채널’(대표 PD 김광만)측은 26일 “3·1절 특집‘안중근의 알려지지 않은 사실들’의 후속프로를 준비하던 중 일본 현지에서 안 의사의 유묵 2점을 찾아냈다”고 밝혔다. 히로시마 인근 한 사찰에서 발견된 ‘독립(獨立)’은 뤼순감옥 간수의 후손이 보관해 오던 것으로 가로 63㎝,세로 33㎝의 종이에 쓴 것.또 도쿄시내 전 대만총독부 고위관계자의 집에서 발견된 ‘장탄일성 선조일본'은 ‘탄식해 말하노니 일본은 기필코 먼저 망한다’는 의미로 가로 40㎝,세로 230㎝의 비단에 씌어졌다. 휘호 ‘독립’의 소장자로 이번에 한국을 처음 방문한 시다라 마사즈미(設樂正純·72·히로시마현 거주)씨는 “일본에서 전문가의 감정을 마쳤다”며“적절한 때 한국에 기증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정운현기자 jwh59@
  • 남북 화해시대/ 비전향 장기수·실향민 표정

    “마음은 벌써 고향을 달리고 있습니다.” 실향민과 비전향장기수들은 15일 남북 정상이 광복절 이산가족 교환방문과비전향 장기수 문제 해결에 합의했다는 소식에 하루 종일 들떠있었다. 비전향장기수들이 모여 사는 서울 관악구 봉천동과 은평구 갈현동의 ‘만남의 집’에는 이른 아침부터 축하 전화가 쇄도했으며 백발의 노인들이 웃음꽃을 피우며 오랫동안 참았던 그리움의 눈물을 흘렸다. 41년 7개월을 복역하다 지난해 3·1절 특사로 풀려난 우용각(禹用珏·71)씨는 “아직도 고향 영변에 갈 수 있다는 소식이 믿기지 않는다”면서 “우리들의 송환이 조국 통일의 물꼬를 트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45년이라는 최장기 복역기록을 갖고 있는 김선명(金善明·76)씨는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면서 “이제 진정으로 남과 북이 모두 내 조국이됐다”며 감격해했다. 평안북도 박천이 고향인 김석형(金錫亨·87)씨는 “어젯밤 남한으로 오기전 세살이었던 막내 광선이가 엄마 등에 업혀 손을 흔드는 꿈을 꿨다”면서“46살이 된 광선이가나를 기억할지 모르겠다”며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이산가족들도 벅찬 하루를 보내긴 마찬가지였다. 서울 종로구 구기동 이북5도청의 이산가족통합정보센터에는 아침부터 80여명의 실향민이 이산가족 찾기 신청을 하러 몰려왔다.평소 10여통에 불과하던 이산가족상봉 문의 전화도 수백통으로 폭주,직원들은 다른 업무를 보지 못할 정도였다. 고향 황해도 송화군에 어머니와 사촌형제들을 두고 온 최부삼(崔富三·72·서울 강남구 논현동)씨는 “석달뒤 돌아간다는 약속을 50년이 넘도록 지키지 못했다”면서 “어머니가 살아계시리라고 기대하지는 않지만 어머니 묘소라도 지금 당장 찾아가 한없이 울고 싶다”고 말했다. 1945년 서울로 시집오면서 이산가족이 돼버린 손숙자(孫淑子·73·강남구신사동)씨도 “부모님과 형제들을 아직 또렷하게 기억한다”면서 “가족을만난다는 기쁨에 뜬눈으로 밤을 지샜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이창구기자 window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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