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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 대통령의 3·1절 기념사 요지

    ◎“선열의 자결정신 계승… 통일시대 열자” 73년전 오늘 우리겨레는 나라의 독립과 민족의 자존을 되찾기 위해 분연히 일어섰습니다. 기미독립운동이 있었기에,수많은 열사들의 숭고한 희생이 있었기에 우리는 오늘의 자랑스런 나라를 갖게 된 것입니다. 선열들이 고대하던 세계는 모든 민족이 자결을 바탕으로 공존공영하면서 독창적인 문화창조로 인류 사회에 기여하는 새로운 천지였습니다. 임시정부를 거쳐 대한민국으로 계승된 이러한 이념은 우리민족이 나갈 길을 밝히는 영원한 빛입니다. 이제 우리나라는 세계의 모든 나라와 교류협력하고 인류의 평화와 번영에 적극 기여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고난의 역사를 살면서 우리 선조가 만들고자 했던 나라… 온 겨레가 한 나라로 사는 통일조국,모두가 자유 복지를 누리는 민주 선진국이 우리앞에 다가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피땀흘려 이룬 민주주의와 번영의 힘이 반세기동안 남북을 갈라온 대결과 불신의 벽을 허물고 있습니다. 남과 북이 유엔에 함께 들어가고 「기본합의서」와 「비핵화선언」을체결함으로써 한반도는 어두운 냉전의 시대를 벗어나 민족화해와 통일의 밝은 새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3·1운동에서 선열들이 외친 민족자결의 정신은 통일만은 반드시 겨레의 자주적인 역량으로 이루겠다는 우리의 굳은 결의속에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이제 남과 북은 「합의서」와 「선언」의 내용을 하나하나 실천에 옮겨 민족공동체를 회복하고 통일의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우리 정부는 이 합의와 선언을 성실히 준수하고 실천해 나갈 것임을 이자리를 빌려 다시 한번 밝힙니다.나는 북한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성실한 자세로 이를 실천하는데 함께 나설 것을 촉구합니다. 특히 겨레의 생존자체를 위협하는 핵무기 개발과 관련하여 북한은 하루속히 국제 사찰을 받아 한점의 의혹도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3·1정신은 나라를 위하여 모두가 하나가 되는 정신,겨레를 위하여 모든 것을 바치는 희생정신입니다.소이를 버리고 대동단결하고,대의를 위해 소아를 버려야 합니다.우리 모두가 남을 탓하기에 앞서 스스로를 채찍질 해야 합니다. 우리 앞에 닥친선거를 깨끗하고 공명하게 치러 참된 민주주의를 이루는 일을 내가 먼저 실천해야 합니다. 선열들이 몸바쳐 지킨 높은 뜻을 오늘의 우리가 완수하여 다가오는 2000년대를 한민족 영광의 세기로 만들어 나갈 것을 다함께 다짐합시다.
  • 전국서 3·1절 기념행사/추모제등 잇따라

    제73회 3·1절을 기념하는 각종 행사가 서울을 비롯, 전국 각 직할시·도에서 개최됐다. 이날 정오에는 이강훈광복회장등 광복회원들이 서울 흑석동 국립묘지 현충탑및 애국지사 묘역을 참배했으며 독립유공자와 그 후손들은 종로 보신각종을 33회 타종했다. 전국 각지역에서는 시·도단위의 기념식외에 3·1운동 사적지별로 희생자 추모제등 별도의 기념행사가 열렸으며 각 지방별로 관내 독립유공자및 유족에 대한 위문행사가 실시됐다.
  • “북,사찰수용 핵개발 의혹 없애야”/노 대통령 3·1절 기념사

    ◎합의서·비핵화선언 함께 실천을/통일 성취 겨레의 자주역량으로/깨끗한 선거로 민주발전 이뤄야 노태우대통령은 1일 『남과 북은 「기본합의서」와 「비핵화 선언」의 내용을 하나하나 실천에 옮겨 민족공동체를 회복하고 통일의 길로 나가야한다』고 강조하고 『특히 겨레의 생존자체를 위협하는 핵무기 개발과 관련해 북한은 하루속히 국제사찰을 받아 한점의 의혹도 없도록 해야할 것』이라고 촉구했다. 노대통령은 이날 상오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제73주년 3·1절 기념식에 참석,기념사를 통해 이같이 말하고 『우리 정부는 이 합의와 선언을 성실히 준수하고 실천해 나갈 것임을 다시 한번 밝히며 북한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이를 실천하는데 함께 나설 것을 촉구한다』고 말했다. 노대통령은 『3·1운동에서 선열들이 외친 민족자결의 정신은 통일만은 반드시 겨레의 자주적인 역량으로 이루겠다는 우리의 굳은 결의속에 살아 숨쉬고 있다』면서 『이제 통일과 선진국으로 오르는 마지막 고비에서 우리 모두는 소이를 버리고 대동단결하고 대의를 위해 소아를 버려야 한다』고 호소했다. 노대통령은 이어 『우리 앞에 닥친 선거를 깨끗하고 공명하게 치러 참된 민주주의를 이루는 일을 내가 먼저 실천함과 아울러,경제의 새로운 도약을 이루는 일에도 내가 먼저 행동으로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노대통령은 기념사에 앞서 최근 추가확정된 독립유공자 2백명의 유족에게 건국훈장 애국장·건국훈장 애족장·건국포장 대통령표창등을 수여했다. 이날 기념식에는 재경광복회원 1천4백여명과 행정·입법·사법 3부및 헌법기관 주요인사,정당대표및 간부,각계대표등 7천여명이 참석했다.
  • 각 종교단체 3·1절 메시지

    ◎불교 조계종 “선조의 이상 받들어 정신적 개혁을”/천도교/“3·1정신 지주삼아 통일로 이어가야” 제73주년 3·1절을 맞아 불교·기독교·천도교 등 각 종교단체는 기념메시지를 발표했다. ▲서의현 불교 조계종 총무원장=사회전반에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이기주의와 무질서,과소비풍조가 만연하고 있다.우리선조들이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기 위해 생사를 초월하여 일제와 싸운 높은 이상을 받들어 정신적 개혁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우백암 태고종 종정=민족선각자들의 숭고한 애국애족정신을 오늘에 되살려 민족대각성운동을 전개하여 건전한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일본정부는 정신대문제에 대한 사과와 배상 등을 통해 한일간의 불행했던 과거를 청산하고 근린국가로서의 우의를 구축,동북아시아의 평화달성에 이바지해야 할 것이다. ▲오익제 천도교 교령=3·1운동은 두터운 종교의 벽을 넘어 천도교와 불교,기독교가 하나가 되고 당시 2천만 동포가 한마음이 됐던 인류역사상 유례없는 민족자주독립운동이었다.이 정신을 지주로 삼아 분단의 장벽을 허물고 통일로 나아가야할 것이다. ▲권호경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조선사람이 자주민임을 선언했던 선열들의 목소리는 전세계의 민족이 서로 지배하고 수탈하는 구시대의 잔재를 청산하는 노력으로 이어지고 구현돼야 한다. ▲정진경 한국기독교총연합회 회장=그동안 교회가 빛된 삶을 통하여 국가·사회에 공헌하지 못해왔다.선인들이 남긴 순수하고 숭고한 3·1정신을 계승하여 교회가 본질적 사명을 다해야 한다.
  • 외언내언

    1919년 3월1일 정오.민족대표 33인이 서울의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면서 3·1운동이 점화됐다는 것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그러나 북한에서는 이를 마음대로 왜곡,날조하고 있다.◆『위대한 수령의 아버지인 김형직선생께서 몸소 키우신 애국청년들과 함께 평양에서 대중적인 반일시위에 떨쳐 나선것을 시발로 하여 3·1인민봉기는 삽시에 전국 각지로 퍼져나갔다』북한의 「근대조선역사」(84년)가 기술하고 있는 내용.3·1운동을 「3·1인민봉기」로 바꾸어놓았고 민족대표 33인을 김형직으로 둔갑시켰으며 3·1운동의 발원지도 서울이 아니라 평양이라고 우기고 있다.◆그뿐이 아니다.3·1운동이 실패한 원인을 대중을 이끌 탁월한 지도자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진단해 놓고는 『모든 인민들이 지도자의 출현을 목마르게 기다리게 되었고 그 절절한 염원을 받들어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 민족앞에 나서게 됐다』고 선전하고 있다.◆북한의 역사 왜곡과 날조는 3·1운동에 그치지 않는다.제너럴·셔먼호 격침사건의 주동자를 김일성의 증조부로 변조했고 조부모인 김보현·이보익 부모인 김형직·강반석,삼촌 김형권,전처 김정숙등 일족을 모두 「불요불굴의 혁명투사」「위대한 애국자」로 떠받들고 있다.또 이들을 위한 정례적인 기념행사까지 치르고 있다.◆김일성가계의 혁명전통을 미화하는 한편 김일성부자 세습의 정당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어쩔수 없는 궁여지책이긴 하겠지만 이쯤되면 할말을 잃게 된다.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왜곡·날조하는 것이 얼마나 큰 범죄인가를 김일성은 모르고 있단 말인가.이제 살만큼 살았고 권력세습도 그들 나름으로는 마무리 되어 가고 있는만큼 지금이라도 역사를 바로잡는 것이 어떨까.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 「3·1절 카드」보내기 5년/독립유공 정동흡옹의 민족혼 일깨우기

    ◎87년부터 학교등에 44만장 우송/연금등 털어… 올엔 해외동포에도 『우리에게 가장 뜻깊은 국경일이라고 할 수 있는 3·1절이 단순히 하루를 쉬는 휴일로만 퇴색해가는 현실이 서글퍼 이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지난 87년부터 「3·1절 카드보내기 운동」을 벌이고 있는 독립유공자 정동흡옹(73·경기 광명시 철산1동 광복아파트 14동 110호)은 『젊은 세대들은 물론이고 일제치하를 겪은 세대들마저 치욕을 잊고 민족혼을 잃어가는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정옹은 다달이 받는 연금과 지하철1호선 서울역에서 운영하고 있는 주택복권판매점의 수익금 대부분을 「3·1절카드」를 만드는데 쓰고 있다.이 운동을 시작한 87년부터 해마다 6만장씩을 제작,전국 각지에 보냈으며 올해에는 20만장을 만들어 19만장은 전국의 각급학교와 구청,기업체 등에 우송하고 나머지는 로스앤젤레스,하와이 등지의 재미교포와 도쿄 오사카 등지의 재일교포에게 보냈다.청산리대첩의 전투상황을 묘사한 그림과 독립기념관 등의 사진이 인쇄된 이 카드에는 「3·1정신으로 민족정기를 되살려 민족혼을 일깨우고 국민대화합을 이루자」는 정옹의 호소가 담겨 있다.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평양에서 태어난 그는 부모를 따라 중국 심양으로 건너가 안산중학교를 졸업한뒤 44년 광복군에 입대,일본군과 군수물자의 상황등을 캐내는 지하공작원으로 활약했다. 지난 72년 외동아들을 잃은뒤 13평짜리 아파트에서 부인 유로순씨(56)와 외롭게 살아가고 있는 정옹은 『크리스마스와 연초때처럼 3·1절이면 온 국민이 「3·1절카드」를 주고 받았으면 좋겠다』면서 『눈을 감을때까지 이 운동을 벌여 국민들이 3·1운동의 정신을 계승하는데 도움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 3·1절 73주년/오늘 전국서 기념식

    제73주년 3·1절 기념행사가 1일 상오 10시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거행된다. 이날 행사에는 3부요인을 비롯해 각 정당대표,재경 광복회원및 3·1운동 희생선열유족,각계대표,시민등 4천여명이 참석하며 정오에는 보신각종을 33번 타종한다. 이날 하룻동안 광복회원들은 고궁및 사적지를 무료로 출입할 수 있으며 철도및 시내버스를 무임승차할 수 있다.
  • 정신대 할머니의 삼·일절(사설)

    상처가 너무 깊고 너무 생생해서 입에 담기도 진저리가 쳐지던 일이 우리에게 있어 「정신대문제」였다.이제 겨우 조금씩 석회화작용이 일어나기 시작하여 그 수렁속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말할 수 있게 된 한많은 「조선녀인」들.우리의 왕고모이기도 하고 이모할머니이기도한 그들을 생각하며 맞게되는 3·1절아침은 새삼스럽게 신열이 나게 한다. 딸과 누이와 아내까지 빼앗겨 짓밟히고 더렵혀지는 굴욕을 당해온 이땅의 남성들은 탱천하는 분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열세의 현실에만 결박당해 왔다.『정신대문제는 한국측이 논의에서 회피했었다』는 혐의를 받고 있는 그들의 입장을 우리는 이해한다.이제는 우리 민족에게 강요되어온 이 시궁창 같은 고통을 토해버릴 때가 되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고모할머니거나 이모할머니」였을 그들 한서린 정신대세대들의 증언을,그들의 피맺힌 육성을 귀기울여 들어야 한다.그리고 위로할 수 있는 모든 방책을 함께 생각해야 한다.심미자할머니의 증언(서울신문 2월29일자보도)은 바로 그런 육성이다.심할머니도 정신대의 전력이 부끄러워 숨어살다가 오늘에야 말하기 시작했다.그의 정신대행도 누구나 그랬듯이 그의 의지나 허물과는 아무 관계가 없이 주어진 부당한 형벌이었다.16살의 소학생이 「일본」을 욕되게 했다고 보내진 가혹한 형벌이었다.일제가 얼마나 잔혹했는가를 보여주는 실증이다.그런데도 그는 「일인의 여자노릇」을 하면서 모은 돈으로 독립운동에 헌금했고 우리의 레지스 탕스 활동들을 지원도 했다.그리고 그렇게 했던 시절에 대한 자부심으로 숨어사는 70평생을 지탱해온 할머니다. 포악하고 무도한 손에 끌려가 찢기고 짓눌려 속절없이 녹아없어져 버릴 수밖에 없는 운명속에서도 정신의 비수를 갈아 조국의 광복을 위해 모험했던 효녀들.그분들이 그런 분들이었다는 사실은 오히려 우리를 위로하고 구원해준다.그들의 증언은 침략국 일본의 만행을 되살려주기보다 그들이 지녔던 반듯하고 아름다운 「조선의 딸」로서의 자존심을 복원시켜 준다. 3·1운동은 손수건만한 태극기 하나에 목숨을 걸고 총칼앞에 맨가슴을 들이댄 치열한 민족운동이다.우리에게 3·1운동이 없었다면 나라를 되찾아 가질만한 「자격」에 결격되었을지도 모른다. 애국부인회를 이끌던 김마리아여사는 당시의 독립운동지도자들이 『남녀 합쳐서 김마리아 같은 이가 10명만 되어도 조선독립운동은 진작 성취했을 것이다』라고 칭송했던 분이다.심할머니는 피눈물 맺힌 돈을 모아 그분의 독립자금으로 보내기도 했다고 한다.민족 개체에게 질곡과 설움만 안겨주고 보잘것없이 스러져가는 듯하던 조국을 위해서도 그토록 애처로운 사랑을 쏟을 수 있었던 정신대여성들은 우리의 떳떳한 육친들이다. 우리는 그들의 수모를 일본에 따져야 하고 할 수 있다면 사죄는 물론 보상도 물려야 한다.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안된다.그들의 가족이고 후손인 우리가 빛나고 당당하고 능력있는 민족이 되어 당당한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요리조리 말재주나 피워가며 이기주의로만 살쪄가는 일본에게 떳떳하게 금도를 보이는 당당한 나라의 국민이 되는 것이다.3·1운동정신도 그래야만 제대로 구현될 수 있다.
  • 3·1절 특집 다큐멘터리 방송

    ◎M­TV 「…부재 이상설」 K­1TV 「팔렬중학교…」/잊혀진 독립투사·독립만세 운동을 다뤄 KBS1TV와 MBCTV는 3월1일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독립투사와 독립만세운동의 현장을 다룬 다큐멘터리 1편씩을 각각 특집으로 엮어 방송할 예정이다. KBS1TV가 1일 상오8시10분부터 9시까지 선보일 「팔렬중학교의 3월」과 MBCTV가 이날 낮12시부터 하오1시40분까지 내보낼 「이역에 뿌린 망국한 보재 이상설(박재 이상설)」이 그것. 이 가운데 K­1TV의 「팔렬중학교의 3월」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한달뒤인 4월3일 강원도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에서 수천명이 참가한 대규모 만세시위가 일어나 주민 8명이 일본경찰이 쏜 총에 맞아 숨지고 20여명이 부상한 사건을 다룬 특집이다.「팔렬중학교」는 이 지역 주민들의 제안으로 3·1운동시위도중 숨진 8명의 열사를 기리기 위해 지난 1963년 설립된 학교. 따라서 「팔렬중학교…」은 팔렬중학교 설립배경과 함께,강원도 산간지방이면서 오지인 물걸리에서 이처럼 큰 만세운동이 일어난 이유와 과정을 생존자인박상기(당시 17세),변성환(당시 13세)씨의 증언을 통해 추적해간다. 한편 MTV의 「이역에 뿌린 망국한 보재 이상설」은 19 00년대와 19 10년대에 걸쳐 해외 독립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지만 활동내용과 흔적이 거의 조명되지 않고 있는 이상설의 파란만장한 구국활동을 부각시킨 다큐멘터리. 이상설은 역사적인 「헤이그밀행」에서 대표로 활약하며 국권강제침탈사실을 만국에 알렸지만 당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의 대표였던 이준의 빛에 가려 드러나지 않고 있는 인물로 남아있다. MTV의 「이역에 뿌린…」은 충북 진천출신인 이상설의 어린시절과 구국독립운동가로 나서는 과정에서부터 만국평화회의 참석,미국 이민동포를 규합한 국민회 조직,블라디보스토크에서의 독립운동기지 한흥동 건설,상해 신한혁명당조직이후 소련 니콜리스크에서 48세로 생을 마감하기까지의 역정을 구체적으로 엮는다.
  • “「정신대의 한」 뭘로 보상 받나요”

    ◎심미자… 이 할머니 오늘에야 말하다/16살때 끌려가 일 헌병 첩노릇 수모/그 질곡서도 독립자금 모아 전하기도/“한맺힌 삶 3·1절 앞두고 털어놓으니 가슴후련” 우리 민족에게 너무나 잔혹했던 역사를 생각하게 하는 3월이 온다.말로만 들어온 3·1독립만세의 평화적 시위 앞에 총칼을 들이댄 일제의 만행과 여기에 맞선 독립운동가들.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금광2동의 심미자할머니(69·정신대문제 대책협의회에 1월24일 신고)는 일제에 의한 피해자로 역사의 질곡속에서 누구보다 한맺힌 삶을 살아왔지만 3·1운동의 주역들을 도왔다는 뿌듯한 감회 속에 살고있다. 『정신대로 끌려갔다는 부끄러운 과거 때문에 모든 것을 숨기고 살았습니다.그런 가운데도 푼푼이 모은 돈으로 독립운동가들을 도왔던 시절도 있었습니다.세상에 알리고 싶었지만 과거를 떠올리면 진저리치고 부끄럽기도 해서 묻어 두었던 일들입니다』 황해도 봉산군 덕제면 적성리가 고향인 그는 1940년 3월 중순 일제에 의해 강제로 연행돼 정신대라는 기구한 운명을 산 현대사의 증인이다.봉산소학교 5학년 때였습니다.담임인 나카무라선생이 우리집에 와서 무궁화 꽃수가 놓인 지도를 보고 예쁘다고 칭찬하며 자기네 일본지도에도 꽃수를 놓아 달라고 부탁해 나팔꽃 수를 정성껏 놓아 주었습니다.그것이 내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은 일 인줄도 모르고…. 그로부터 며칠후 일본순사에 의해 경찰서로 끌려가 『일본땅을 그린 지도에 일본의 국화인 벚꽃을 놓지 않고 나팔꽃을 수놓은 이유가 무엇이냐?』는 심문을 받게됐다.어린 나이였지만 마음속에 품고 있던대로 『아침이면 지는 나팔꽃처럼 일본도 빨리 망하라고 나팔꽃을 수놓았다』고 홧김에 내뱉어버렸다. 그 말에 화가 난 일경으로부터 대꼬챙이로 왼손 엄지손톱 밑이 찔리고 불에 익은 인두로 어깨와 목을 지지는등 가혹한 고문을 받았다.곧 정신대로 보내져 16살의 어린 나이로 일본의 후쿠오카 근처 군부대 위안소에 도착했다.그후 오카야마·오사카·고베를 유전하는동안의 호칭은 「7번」이었다.1년반동안 일군의 위안부로 치욕의 삶을 살던 그는 헌병대장 스즈키의 눈에 들어 위안소를 빠져나왔다. 「하루코」라는 이름으로 헌병대장의 첩살이가 시작된 것이다.운신의 폭이 넓어진 그는 오사카에서 일본인 행세를 하며 지하조직으로 독립운동을 하던 부대앞 팥죽장사 아주머니를 만났다.그리고 부대에 채소를 납품하던 그 팥죽장사 아주머니의 남편 김상길씨를 통해 독립운동 조직도 알게 됐다. 『스즈키의 소개로 여러 군인들의 빨래와 자수등 닥치는대로 일을 했습니다.그 대가로 받은 돈 3백원씩을 매달 독립운동 자금으로 전달하구요.그 돈은 대한민국애국부인회의 김마리아와 만해 한용운등 각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여러분들에게 보내진다는 이야기도 들었어요』 「하루코」,그가 도운 일은 금전뿐이 아니었다.헌병대장 처라는 직분을 이용,일본을 거쳐가는 독립운동가들의 통행증도 발급받을 수 있었고 옥고를 치르는 항일투사들에게는 김밥속에 종이를 말아 넣어 독립운동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22살에 해방을 맞기까지 3년 반동안 계속해서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해 주었지만 일본인의 첩살이를 한것 때문에 선뜻 조국땅을 밟지도 못했다.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살다 54년에야 귀국,생활보호대상자로 혼자 살고 있다. 『나의 한을 무엇으로 보상받을 수 있겠습니까.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이제야 한 많은 사연을 세상에 털어놓게 되어 가슴이 후련합니다』 그는 3·1절날 오키나와에서 베풀어지는 정신대 위령제에 참석하고 일본사람들에게 역사의 진실을 증언하기 위해 한국교회여성연합회의 「정신대 발자취를 따라서」팀과 함께 28일 출국했다.
  • 「남북총리회담」이모저모/“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실천강조

    ◎정 총리,평양교예단 대전박람회 참가 권유 ▷주석궁 방문◁ 정 총리 일행이 상오11시5분 주석궁에 도착,엘리베이터를 타고 영접실에 들어서자 곧이어 김주석이 오른쪽 회담장소에서 걸어나와 정총리와 악수하며 『반갑습니다.잘 오셨습니다』라고 환영. 김주석과 남북대표는 이 자리에서 간단히 사진촬영을 한뒤 회의장으로 들어갔다. 정총리가 『저희들이 서울을 떠나올때 노태우대통령께서 특별하신 안부를 전하라는 분부의 말씀 계셨습니다』라고 인사말을 건네자 김주석은 『노대통령은 건강하십니까.서울로 돌아가시면 나의 인사를 전해 주십시오』라고 답례. 김주석은 남북 양총리와 약5분간 공개 면담하며 합의서가 발효돼 기쁘다는 말을 주고받고 실천이 중요하다고 강조. 이어 김주석은 정총리와 약10분간 단독 면담후 회의장을 나와 대기하고 있던 우리대표들과 악수를 나누고 영접실 중앙무대로 나가 금강산 그림을 배경으로 남북대표단 일행과 사진촬영. ▷2차회의◁ 평양에서 계속된 제6차 남북고위급회담 이틀째 회의는 당초 예정보다 한시간 앞당긴 상오9시부터 시작. 시간을 앞당긴 이유는 회담을 일찍 끝내고 우리측 대표단이 금수산의사당(일명 주석궁)으로 김일성주석을 예방,오찬을 함께 하는 일정이 잡혀있기 때문. 정원식총리를 비롯,우리측 대표는 8시46분 회담장인 인민문화궁전에 도착,대표 대기실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뒤 회담시작 1분전 회담장에 입장. 정총리는 북측대표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눈뒤 기조발언에 앞서 지난밤 영화관람과 집단체제를 화제삼아 환담했는데 정총리는 특히 평양교예단(서커스)의 대전박람회 참가를 권유.이날 회의는 기조발언까지 공개로 한뒤 그 이후는 비공개로 진행. 이어 정총리는 전날 평양체육관에서 관람한 집단체조를 화제로 삼으며 『내년 8·9월 대전박람회가 열려 세계 70여개국이 참가,전시와 공연을 갖게 되는데 세계적으로 유명한 북측의 평양교예단이 대전박람회에 참여하는 방안을 연구해 보시지요』라고 참가를 권유. ○…연총리는 30여분 기조발언을 통해 7·4공동성명에서 천명된 조국통일 3대원칙을 하나하나씩 거론하면서 이를 「합의서 해석의 기준」이라고 강조하고 방북구속인사의 석방을 요구. 연총리는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듯이 아무리 훌륭한 합의도 이행되지 않으면 쓸모없는 빈 종잇장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고 합의서의 원만한 실천을 촉구. ▷역사박물관 참관◁ 우리측 기자단은 20일 상오 이틀째 회담이 끝난뒤 평양시내 중심부 김일성광장옆에 있는 조선중앙역사박물관을 참관. 구석기시대부터 1919년 3·1운동때까지의 각종 역사유물 10만여점이 소장된 이박물관에는 4만년전의 「신인」(현대인) 머리뼈 화석,뚜껑돌의 직경이 4.4m나 되는 고인돌,광개토대왕비등이 전시돼 눈길. 안내원 리한옥양(34)은 『고려야말로 우리나라의 첫 통일국가이므로 수령님이 그이름을 따서 「고려연방제」통일방안을 제시하신 것』이라고 설명했으며 몇몇 전시실에는 「수령님이 친히 보아주신 방」이라는 현판이 눈에 띄었다. ▷만찬◁ 이날 저녁에 있은 북한의 양형섭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의장 주최 만찬에는 북한의 인민배우 홍영희 김경화 서경섭 김용민등이 참석해 눈길.이들중 김경화씨는 미8군에 들어간 북한여성첩보원을 다룬 20부작 영화 「이름없는 영웅」의 주인공으로,홍영희씨는 「꽃파는 처녀」,서씨는 「이세상 끝까지」,김용민씨는 역시 「이름없는 영웅」의 주인공으로 각각 등장한 배우들. 이와함께 이날 만찬에는 여연구 최고인민회의 부의장,김태희 전남북적십자회담 북측대표단장도 참석해 성황. ▷평양산원·교예관람◁ 정 총리등 우리측 대표단은 20일 하오 평양산원을 방문,병원측이 제공한 흰가운을 입고 입원실 검사실 신생아실등 북한이 자랑하는 최신의료시설을 관람. 대표단은 하오 4시30분 광복거리의 교예극장을 방문,기다리고 있던 연 총리의 영접을 받고 공연장으로 가기위해 승강기를 탔으나 승강기가 고장나 가벼운 차질이 빚어지기도. 두 총리는 약3분간 고장난 승강기안에 갇혀 있다가 나와 계단을 이용해 걸어서 공연장에 입장
  • 다시 새기는 그 충절/이달의 독립운동가 편강열의사

    ◎서울신문사·국가보훈처 공동선정/의성단 조직,만주벌 항일무장투쟁/장춘 일 영사관 습격,7명이 일경 60명 사살/하얼빈역 광장서 포위된채 치열한 총격전/중과부적으로 피체… 옥중고문 후유증으로 37세에 순국 선열들의 애국·애족사상을 길이 본받기 위해 서울신문사가 마련한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애사 편강열의사가 선정됐다.황해도 연백에서 출생,2일로 탄신 1백주년을 맞은 편강열열사는 만주에서 항일무장독립운동단체 의성단을 조직,장춘의 일본 영사관을 습격하는등 항일투쟁을 벌이다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다 일제의 고문으로 얻은 척수염으로 29년 37세의 나이로 순국했다.편의사의 생애와 사상·업적을 되새겨 본다. 일제하인 1924년8월 만주 하얼빈역 광장에서 완전무장한 일본경찰들이 무장항일독립운동가 편강렬의사를 체포하기 위해 겹겹이 포위하고 있었다. 만주일대에서 3백여명의 조선청년들을 이끌고 독립운동을 하던 편의사는 군자금과 무기를 조달한뒤 길림으로 돌아가는 열차를 타기 위해 하얼빈역으로 왔다가 밀정 김성곤의 밀고로 일본경찰의 포위망에 들게 되었다. 편의사는 길가 상점에 뛰어들어 장시간 총격전을 벌이다가 중과부적으로 왜경에 체포됐다. ○만철병원도 습격 편의사는 1924년 대원 5명을 데리고 봉천의 만철병원을 습격한뒤 같은해 대원 6명과 함께 장춘의 일본영사관을 습격,7시간에 걸친 격전끝에 적 60여명을 사살해 일본경찰의 추적을 받아왔다. 일경에 체포된 편의사는 25년 평양법원에서 징역 7년을 선고받고 신의주 감옥에서 복역중 고문으로 인해 생긴 지병으로 29년1월16일 안동현 적십자병원에서 37세의 나이로 숨졌다. 편의사는 병상에서 『내가 죽거든 유골을 내가 활동하던 만주땅에 묻고 나라를 되찾기 전에는 고국으로 이장하지 말라』는 비장한 유언을 남겼다. 편의사는 1892년 2월2일 황해도 연백군 봉서면 현죽리 목동에서 편상훈씨의 4남중 3남으로 태어났다. 편의사는 어려서부터 애국심과 충의심이 깊어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14세의 어린 나이에도 의분에 떨어 1주일간 항의 금식했다. 1907년 전국 각지에서 일본에 복수를 주장하며 의병이 봉기하자 경상·충청일대에서 활약하던 의병대장 이강년대장을 방문,이대장 휘하에 들어가 소집장 및 선봉장으로 활동했다. 이듬해 의병을 인솔하고 경기도 양주에서 3일간 격전을 벌이다 부상을 입은 편의사는 1909년 고향으로 돌아왔다. 편의사는 평양의 숭실학교에 입학,항일운동에 정진하다 1911년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사내정의)암살미수사건으로 체포되어 징역5년 선고를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한뒤에는 의병동지들과 무장결사대 광복회를 조직,친일파·민족반역자·일본경찰을 처단하는 격렬한 투쟁을 전개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황해도일대의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하고 동생 덕렬씨를 상해임시정부에 파견,국내조직과 긴밀한 연락망을 구축했다. 그해 임시정부에서 파견한 최명식이 군자금을 모집하고 무기를 조달한뒤 항일무장투쟁을 할 거점을 마련키위해 군사준비단을 조직하자 편의사는 황해도 대표로 활동했다. ○밀고자 즉결처분 1919년 9월 다시 일본경찰에 체포된 편의사는 징역1년을 선고받고 21년에 출옥했다. 23년1월 편의사는 동지 김경배·김태규·조종호등과 함께 중국의 독립운동상황을 살피기위해 북경으로 가 상해·만주등지를 전전했다. 무장투쟁으로 일관한 편의사의 눈에는 창조파와 개조파로 나뉘어 논쟁만 일삼던 임시정부의 무력함이 도저히 성에 차지 않았다. 23년 10월 만주로 돌아와 강진지·양기탁·남정동지들과 무장항일투쟁비밀결사인 의성단을 조직,단장에 피선됐다. 의성단의 활동무대는 길림성과 장춘일대의 넓은 평야지역이었다. 편의사는 이 지역에 이주한 동포들에게 『조선인단체를 조직해 이민족에게 억압을 받지 않아야 한다』는 독립의식을 고취시키며 민족적 공감대를 넓혀갔다. 재만동포들의 물적 인적지원을 받은 편의사는 2백50명의 의성단원을 무장시켜 장춘·봉천일대의 일본인 병원·영사관·우체국·경찰서·철도·군수기지를 습격,혁혁한 공을 세웠다. 일본은 경찰력과 헌병·밀정등을 총동원해 편의사를 체포하려고 했으나 신출귀몰하는 그의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편의사는 의성단활동을 하는 한편 만주지방의 각 독립운동단체들을 통합하기 위해 전만통일의회를 조직했다. 편의사는 만주지역의 비밀항일무장단체들을 통합해서 강력한 군사조직으로 만드는 공작을 하던중 24년8월 하얼빈역에서 밀정 김성곤의 밀고로 일본경찰에 포위됐다. 당시 이범석장군은 비분함을 참을 수 없어 밀고자 김을 즉결처분했다. 편의사가 체포되자 의성단활동은 위축되고 2∼3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단원들도 뿔뿔이 헤어져 소멸됐다. 옥고를 치르는동안 편의사는 일제의 악랄한 고문으로 척수염을 얻어 불구의 몸이 됐다. ○왜놈치료는 싫다 혼자 일어설 수도,앉을 수도 없는 지경이된 편의사는 병보석을 얻어 28년 선천의 미동병원에 입원했으나 별효과가 없었다. 친지와 가족들이 의료시설이 구비된 일본인 병원으로 옮길 것을 권고했으나 『죽어도 왜놈에게는 치료를 받지 않겠다』고 완강히 거절했다. 28년9월 동생이 있는 만주의 안동으로 옮겼으나 4개월만인 1929년1월16일 순국했다. 편의사의 묘소는 중국 요령성 단동시 원보구 인충가 진강산 장군봉 뒤편에 있었으나매장후 61년이 지나는 동안 이 지역이 시가지로 개발되어 비석은 커녕 묘소의 흔적조차 남지않게 됐다. 지난해 가을 국가보훈처와 편강렬의사 탄신1백주년 기념사업회가 「편의사유해봉환반」을 구성,현지답사한 결과 밝혀진 사실이다. 편의사는 후사가 없어 동생 덕렬씨의 2남인 충무씨를 양자로 입양했으나 충무씨도 지난 80년대초 미국으로 이주했다. 정부에서는 62년 편의사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역사적 평가/“마지막 의병장” 불굴의 절개 빛나/17세때 13도창의군의 서울탈환대작전 참가 편강렬의사에게는 지난 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수여됐다. 그러나 편의사의 이름을 아는 이가 드물고 역사적 평가도 높지 못한 실정이다. 구한말의 의병전쟁에서 20연대 중반의 독립운동에 이르기까지 큰 운동에 참가해 청춘을 불살라버린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웬만한 책에서는 그의 이름을 발견할 수가 없다.이때문에 편의사는 이름없는 독립운동가로 오늘에 이르고 있고 무덤마저 정확한 자리를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편의사는 중국단동 공동묘지 어디인가에서 압록강과 강건너 신의주를 바라보며 조국통일을 애타게 염원하고 있을 것이다. 편의사가 13도 창의군의 서울대탈환 작전에 참가한 것은 17세때이다.여기서 그는 부상을 입었으니 이 사실만으로도 독립운동가로 치부될 수 있다.그러나 이 부상은 37세로 순국할때까지 20여년간의 항일투쟁의 시작일 뿐이었다.1910년 압록강철교 준공식에 참석하던 사내총독암살음모사건으로 연루되어 최초의 옥고를 치르게 된 것은 나머지 그의 투쟁사와 기묘한 일치를 보여준다. 「양양한 압록강물은 흘러서 어드메로 가는가」라는 그의 옥중시에서 보듯 편의사의 일생은 압록강과 숙명의 관계를 맺고있다. 3·1운동후 두번째 옥고를 치르고 압록강을 건넜을 뿐아니라 세번째 마지막 옥고를 치를때도 압록강을 건느며 망국의 한을 달랬다. 한국인의 성품 가운데 끈기를 제일로 드는 이가 많다. 편의사야말로 독립운동 하나를 위해 일생을 바친 끈기의 대명사였다고 할 수 있다. 그를 위대한 독립운동가로 평가하는 것은 불요불굴의 절개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마지막 재판정에서 7년 징역형이 내려졌을때 파안대소했는데 이는 그가 의병정신을 잃지 않았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의병정신이란 나라와 겨레를 위한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반드시 하고야 마는 정신이다. 이런 의미에서 편의사는 한국의 마지막 의병장이었다고 할 수 있다. 편의사의 탄신 1백주년이기도한 2월을 맞아 새삼 조국통일로서 망국한을 달래드려야 되겠다는 마음이 간절하다.
  • 첫 동요집 출간60돌 윤석중씨(온고지신의 탐방)

    ◎문화계 원로에게 어제·오늘을 듣는다/“요즘 어린이 애늙은이 같아 걱정”/어린이답게 자라도록 부모 힘써야/시비가릴 판단력 교육이 가장 중요/삼백예순날 모두 어린이날 같이 됐으면 윤석중옹(81·새싹회회장)의 나이쯤에 사무실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그 나이 정도의 많은 노인들이 몸 어딘가 한구석이 불편해 자리보전하기 일쑤이고 다가온 인생의 황혼을 쓸쓸히 추스리고 있을 쯤에 윤석중옹은 아침 정시에 사무실에 출근,일과에 따른 바쁜 하루를 갖는다.그는 분명 사무실을 유지하는 가장 나이든 축에 속할 것이다. 서울 대우센터빌딩 908호.이곳이 바로 13살 때부터 무려 70년 가깝게 어린이운동에 평생을 바쳐온 아동문학가 윤옹이 근무하는 새싹회 사무실이다.윤옹은 대우 김우중회장의 배려로 무료로 사무실을 빌려 쓰고 있으며 운전사가 딸린 승용차도 이용하고 있다.윤옹이 빌딩의 로비나 복도를 걷노라면 어린 시절 그의 동요를 틀림없이 배웠을 많은 사람들이 인사를 해온다.사무실의 서쪽으로 난 창으론 서울역을 가로질러 그가 다녔던양정중고등학교와 그 맞은편 쪽에 위치했다던 소파 방정환선생이 차렸던 「개벽사」 터가 보인다. 『내가 어떻게 보입니까』 선생은 전혀 자만하지 않는 투로 자신의 건강을 묻는다.『이제 은퇴할 때가 됐지요』하고 자답하는 그의 어조엔 먼저 세상을 등지거나 사회일선에서 떠난 동료·선후배 문인에 대한 미안함이 배어 있다.하지만 그로선 은퇴가 수월치 않다.어린이를 위한다는 일이 끝을 볼 수 있는 일이 아닐 뿐더러 아동문학계가 현재 많은 어려움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더욱이 올해부터는 어린이와 관련한 갖가지 기록을 앞두고도 있다.금년은 국내 첫 창작동요집인 「윤석중 동요집」출간 60돌이 되는 해이며 내년 93년은 국내 첫 동시집인 윤옹의 동시집 「잃어버린 댕기」출간 60돌,94년은 윤옹이 동요를 쓴지 꼭 70돌이 되는 해이다.그리고 무엇보다 올해는 또한 70회째의 어린이날을 맞는 해이다. 『열두살 때(1923년)첫 어린이날을 맞았어요.그때의 어린이날은 지금과는 상황이 사뭇 달랐지요.일제하였던 만큼 민족정신 독립정신과 무관하지 않았어요.첫 어린이날에 내건 구호가 「항상 10년 후의 조선을 생각하자」였던 것만 봐도 그 뜻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지요』 「10년후의 조선」이란 당시 3·1운동을 치른 뒤 탄압에 못이겨 의기소침해 있던 우리 민족이 희망을 잃지 말고 자라나는 어린이를 잘 키워야 한다는 뜻.그러나 조선총독부의 집회 불허로 39년부터 해방까지는 북간도를 빼놓고는 어린이날 행사가 치러지지 못했다고 윤옹은 덧붙였다. 윤옹의 동요·동시쓰기 또한 민족독립정신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세살때 어머니를 여의고 외가인 서울 수운동에서 자랄 때였어요.밖에서 벌떼같은 소리가 났는데 알고보니 3·1운동 만세소리였어요.외할머니께서 너는 어리니까 아무것도 몰라도 된다고 말씀하셨지만 그때부터 나라 잃은 설움을 어렴풋이 깨닫게 됐어요.그뒤 교동국민학교에 들어가니 교장도 일본사람이고 순 일본말 노래뿐이었어요.그래서 우선 우리가 우리말로 부를 노래를 위해 동요를 짓게 됐지요』 13살 때부터 동요를 짓기 시작한 윤옹은 그해 등사판 잡지를 내고 이후 20여권의 동요·동시·동화집을 펴냈으며 아직도 창작을 멈추지 않고 있다.그가 지어 노래로 불리고 있는 동요만도 「퐁당퐁당」「맴맴」「낮에 나온 반달」「달맞이」「짝자꿍」「봄나들이」「기찻길옆」「새나라의 어린이」「나란히 나란히」「고향땅」「옹달샘」「앞으로 앞으로」「어린이날노래」「졸업식노래」「무궁화행진곡」등 모두 헤아릴 수 없이 많다.그리고 윤옹은 22세때 이미 소파 방정환선생의 뒤를 이어 1년간 잡지 「어린이」를 주관했다. 『소파선생께서는 아이들을 영락없이 홀렸지요.가끔 교동국민학교 맞은 편에 있는 천도교 수운회관에서 구연을 하셨는데 오줌이 마려워도 얘기를 놓칠까봐 화장실에 가지 못하고 고무신에 오줌을 누는 아이들도 있었지요』 재미거리가 궁색했던 당시 어린이들에 비해 요즘 어린이들은 많이 달라졌다고 윤옹은 말한다.텔레비전으로 어른들이 볼것까지도 보고 팝송 유행가에 빠져 동요는 싱겁다고 부르지도 않는다는 것이다.그래서 어린이들이 일찍 세상물정을 아는 애늙은이가 됐다고 윤옹은 개탄한다. 『어린이는 어린이답게 자라나야 합니다.어린이가 어른 흉내를 내다보면 순수하고 바르게 자라지 못합니다.이는 국가로서도 불행한 일이지요』 윤옹은 특히 요즘 우리 어린이들 사이에서도 유행하고 있는 일본의 상품과 문화가 미치는 영향의 심각성에 대해 우려한다.일본의 옷·만화·비디오 등이 어린이들의 정신을 좀먹게 한다는 것이다.다음 세대를 위험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이같은 정신적 공해는 그대로 방치해선 안된다고 윤옹은 목소리를 높이다. 『나라를 잃고 일본사람에 대한 적개심으로 어릴 때부터 어딘가 긴장해 있던 우리 세대에 비해 요즘 어린이는 「호강한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그러나 그 호강은 빚 속의 호강이라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어른들은 어린이들에게 큰 빚을 넘겨주고 있는 셈이지요.그런 면에서 요즘 어린이들은 겉으로는 행복하지만 속으로는 매우 불행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불행한 어린이들을 교육함에 있어 부모가 가장 중시해야 할 것으로 윤옹은 어린이에게 옳고 그름을 가릴 수 있는 판단력을 키워주는 일이라고 지적한다.그리고 어린이를 체벌로 다스려선 절대 안된다고 강조한다.『어린이는 부모들이 버릇들이기에 달렸다』며 『말만으로도 충분히 효과적』이라는 말을 그는 빼놓지 않는다.실상 윤옹은 매 한번 안들고 3남2여를 훌륭히 키워낸 아버지이기도 하다.무엇보다 윤옹은 5월5일 하루만 어린이날이 되어선 안된다고 당부한다. 『30년 전에 목격한 일입니다만 한 어린이가 잘못을 저질러 어머니한테 매맞게 생겼습니다.공교롭게 어린이날이라 아이를 때릴 수 없었던 어머니는 다음날 두고보자고 아이에게 말했습니다.결국 어린이날이 지나면 매맞게 되는 그 어린이에게 그날은 공포의 어린이날이 되고야 말았지요.이래서 되겠습니까(웃음)』 윤옹은 지난해 12월 미국 LA 시카고 뉴욕 워싱턴 볼티모어 필라델피아 샌프란시스코 등지에서 제8회 「해외 새싹 글짓기대회」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왔다.『우리 말을 가르치는 주말 한글학교가 5백군데로 늘었다』며 그는 흐뭇해 한다.윤옹의 올해 계획으로는 평생 숙원인 어린이를 위한 새싹 글벗집(도서관)의 기공식 및 새싹회상 발족 등이있다.아직도 「아이」임을 자처하는 윤옹은 올해는 좋은 동요나 동화가 나오길 기대한다며 「어린이는 어린이답게」란 경구를 다시한번 강조했다.
  • 독립운동가 백매수옹

    독립유공자 백매수옹이 19일 상오 6시50분 서울 성북구 성북동 58의 19 자택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0세. 백옹은 생존해 있는 독립유공자 10명 가운데 1명으로 3·1운동 당시 중학생으로 파고다공원 3·1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었다. 발인 22일 상오 9시 연락처 762­8720.
  • 외언내언

    지금의 파고다 공원에는 고려때 흥복사라는 절이 있었다.대웅전 외에도 동쪽에 동선당,서쪽에 서선당이 있는 큰 절이었다.「용재총화」(권7)에도 큰절(대사)이 있었다고 적혀 있다.◆조선으로 내려와 태조가 도읍을 옮긴 다음 조계종의 본사로 삼았다가 세종때에는 공창으로.그후 세조10년에 원각사를 짓는다.효령대군이 양주의 회암사에서 원각경을 강하는데 부처님이 현신하여 사리를 주었다 하여 붙은 이름.세조 13년에는 13층 탑을 세워 그 안에 원각경과 사리를 넣었고 성종때에 원각사비를 세운다.◆순조때 나온 「한경식략」(권2)에는 대사동은 곧 탑사동이라는 말이 나온다.파고다 공원을 포함한 지금의 인사동 일대를 가리키는 말이다.원각사와 지금도 남아 있는 석탑으로 해서 생긴 이름이 탑사동 또는 탑동·사동.대사동이라는 이름은 원각사가 지어지기 전부터 내려오는 것이다.가령 율곡년보에는 율곡 이이가 대사동 우사에서 서거했다면서 탑사동아닌 옛이름을 쓰고있다.이 대사동이라는 이름은 고려의 대찰흥복사에 유래하는 것이라고 말하여진다.◆이곳이 우리나라 현대식공원의 효시임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일.그뿐 아니라 3·1운동의 발상지이기도 하다.또하나 잊을 수 없는 것은 이 공원이 당시(1897년)내부 토목국장이었던 한서 남궁억의 지휘·감독 아래 이루어졌다는 것.다만 총세무사였던 영국인 브라운의 건의에 따라 조성되면서 「파고다」라는 이름도 붙게 되었다.오늘날 「파고다 공원」이라 말하여지고 현판까지 그렇게 된 까닭이 여기에 있다.◆「파고다 공원」이라는 현판이 이달 말께 「탑골 공원」으로 바뀌게 되었다 한다.유서깊은 이곳이 우리 옛이름을 되찾게 되어 기쁘다.대사동의 토박이 이름은 「댓절골」.이제야 「댓절골 탑골공원」으로 놀러가게 됐구나 싶다.
  • 노 대통령 정상외교 수행 취재기

    ◎평화통일 주춧돌 놓은 “보람의 여정”/북방외교 결실로 드높아진 위상 실감/교민들에 힘과·용기 주어 조국애 심고 노태우대통령의 이번 정상외교는 큼직한 뉴스들을 쉴새없이 쏟아냈다. 역사적인 유엔총회 기조연설,노·부시회담등 일련의 뉴욕연쇄정상회담,한·멕시코정상회담,미국의 전술핵철수에 대한 우리 입장표명등이 잇따라 크게 지면을 장식했다. 그러나 큰 뉴스뒤에 가려진 뉴스들가운데서도 우리들을 감동시키는 대목들이 많았다.그중 하나는 노대통령과 멕시코교민들과의 만남이었다. 지난 26일 저녁 노대통령은 숙소인 카미노 레알 호텔에서 멕시코 전역에 살고있는 교민50여명을 초청,만찬을 함께했다. 게르보시오 김 문 한인회 회장은 이자리에서 지금부터 86년전인 1905년에 1천33명의 한국인들이 이곳으로 와 멕시코남부 유카탄지역의 어저귀(로프의 원료)농장에서 노예와 같은 생활을 했던 비참한 멕시코이민사를 소개한뒤 두가지 말을 덧붙였다. 『멕시코 한인가정 어느곳을 가봐도 만드시 태극기가 걸려있으며 비록 생활의 어려움속에서도 외출할때는 옷을 잘 차려입어 한민족의 높은 품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날 만찬에 참석한 교민들은 거의가 우리말을 몰라 통역을 통해 노대통령과 대화를 나누었고 이민2∼3세의 얼굴모습도 혼혈률이 다른 지역교민들보다는 훨씬 높아 보였다. 구한말 1904년 가을 노동시장의 국제브로커 메이어스의 한국인 노동자의 멕시코송출요청에 따라 일본의 대륙척식회사는 『하루 노동시간은 9시간,노임은 멕시코은화 1원30전∼3원(한화 2원60전∼6원),5년 계약기간이 끝나면 거금 은화1백원(한화 2백원)등 보너스지급』의 솔깃한 조건으로 황성신문에 광고를 냈다. 경성 4백54명을 비롯,인천,부산,목포,평양,마산,원산등지에서 1천33명의 인원이 쉽게 모집되었다. 지난 87년 작고한 호세 산체스 박씨가 남긴 편지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일은 어저귀 잎사귀를 칼로서 따는 작업인데 잎에는 밤송이같은 가시가 붙어있고 섭씨 30∼40도의 무더위아래서 하루 12시간의 노동으로 받는 노임은 겨우 멕시코은화 35전(하루 밥값은 20∼30전)이 고작이었다.도저히 견딜수 없는 중노동이었고 밤중에 도망쳐도 언어불통에다 동양인의 인상때문에 금방 잡혀와 물에 축인 로프로 물매를 맞곤 하였다.잠을 자는 토굴에는 늘 경비병이 배치되어 있어 우리들은 동물과 다름없는 생활을 해야만 했다』 지금 주멕시코대사관에 보관된 메리다시 한인회관의 유품을 보면 3·1운동 당시 독립선언문,국민회와 흥사단등에 송금한 서류및 회비징수기록등이 남아있다. 이 한인회기록에 의하면 메리다시의 한인은 성인이 9백명이었는데 매월 1페소씩 회비를 거둬 총 9백페소가운데 절반인 4백50페소는 한인회유지경비로 사용하고 나머지는 독립운동자금으로 송금한 것으로 돼있다. 만찬장에 참석했던 루돌프 김 금씨(65·전한인회장)는 『지난 65년에 별세한 할아버지로부터 일제치하의 조국독립을 위해 노임의 일부를 송금했다는 말을 들었다』면서 『그 조국이 이제 올림픽을 치르는등 놀랍게 발전해 국제사회에서 대접을 받는것을 보니 조국에 대한 무한한 긍지를 느낀다』고 토로하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티후아나에서 온 페드로 디아스 코로나씨(60)는 『한국 태권도의 수련을 받은 멕시코인은 거의 5만명에 이른다』면서 『태권도훈련용어가 모두 우리말인 것은 물론 승단심사에서는 실기뿐만 아니라 한국의 역사에 관한 질문도 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이날 1시간반에 걸친 교민만찬은 고달팠던 멕시코이민의 애환과 중남미대륙을 처음 방문한 우리 국가원수에 대한 고마움과 조국에 대한 긍지가 한데 어울려 감동의 연속이었다. 이번 노대통령의 멕시코방문을 계기로 한국기업의 대멕시코투자가 크게 늘어나면 이들 교민들의 지위는 더욱 향상될 것이다. 이번에 국내 신행통상(대표 김도묵)이 수술용장갑등 생고무제품 생산을 위한 합작회사설립을 이미 계약했고 삼양사가 연간 2천만달러 규모의 폴리에스터 섬유합작공장 설립을 제의받고 이를 적극 검토할 것으로 전해졌다. 우리 교민에 대한 높은 평가는 하와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노대통령이 호놀룰루를 떠나기 직전인 29일 아침(한국시간 30일새벽)숙소인 카할라 힐튼호텔에서 하와이주지사,상원의원,호놀룰루시장,태평양지역사령관등과 가진 조찬장에서도 교민에 관한 얘기가 오갔다. 하와이주지사 파시시장은 『한국 교포1세들의 자녀들이 다른국가이민2세들보다 우수할뿐 아니라 모범적인 생활을 하고있다』고 높게 평가했다. 호놀룰루 최고의 호텔인 카할라 힐튼호텔의 디너 쇼의 사회자이자 하와이 출신가운데 정상급가수인 데니 칼레이키니씨도 공연중 자신을 소개하면서 세계각국의 관광객들에게 『나의 할아버지는 한국인 이민1세 윤기호씨』라고 두차례나 소개하기도 했다. 대통령의 정상외교는 방문국 정상들과 국제정세를 논하고 외교현안을 푸는것도 중요하지만 그곳에서 정착해 살고있는 교민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어 조국에 대한 사랑을 다시한번 심어주는것도 매우 중요하다는것을 이번 노대통령의 유엔참석및 멕시코방문을 수행취재하면서 새삼 느꼈다.
  • 독립기념관 방문 일 의원 표정

    ◎“일제 36년 침탈 부끄러울뿐”/생체실험 「마루타」 앞선 말 못잇고/「역사의 진실」 깨우쳐 한·일 새 관계의 책임절감 방한중인 일본 사회당의원등 일행 13명이 17일 충남 천안군에 있는 독립기념관을 방문,자신들의 선조가 저지른 역사의 죄악상을 「목격」하고 『참회와 부끄러움 뿐』이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북한만을 한반도의 공식국가로 인정해오던 일본 제1야당인 사회당이 한국정부를 인정한뒤 한반도에 대한 정치적인 입장을 현실화한 상황에서 가진 이번 방문은 그들에게 한일관계의 새로운 개안을 가져다주는 듯했다. 내한한 사회당 의원은 모두 11명이었으나 이가라시 코조(오십강광삼)의원등 3명은 다른 일정때문에 동행하지 못하고 센고꾸 요시토(선곡유인),이토 히데코(이동수자)의원등 나머지 8명의 의원과 비서관 5명등 모두 13명일 독립기념관을 찾았다. 2시간동안 독립기념관을 둘러본 이들은 한 목소리로 지나간 한일 양국의 과거사를 통탄하며 선조들의 잘못에 대해 「석고대죄」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들은 일제의 가혹한 식민지배정책을 그대로 재현해 만들어 놓은 「일제침략관」에서 고문과 학대를 받으며 숨져간 수많은 한국민의 모습을 보고 몸서리쳤으며 생체실험에 동원됐던 한국인 「마루타」들의 사진앞에서 고개를 숙이며 참회했다. 『우리 선조가 36년의 침탈기간동안 얼마만큼 끔찍한 일을 저질렀는지 그 실상을 정확히 목격했다』고 방문소감을 밝힌 센고쿠 요시토(선곡유인)의원은 일본이 한국에 대해 행한 참혹한 행위가 상상을 초월했는지 『뼈저리게 가슴아프다』는 말 이외에는 더이상 말을 못했다. 사회당의원 일행의 단장이기도 한 그는 『일본교과서에서는 전혀 언급도 되지 않았던 역사의 진실을 여기서 알게 됐다』며 부끄러워 했다. 지난 64년부터 89년까지 25년동안 NHK­TV 정치부기자를 역임했던 이케다 모토히사(지전원구)의원은 『과거 일본이 한국에 대해 저지른 만행은 그 어떤 사과로도 충분치 않다』면서 『일본이 한국에 대해 갚아야 할 빚은 국가대 국가간의 배상만으로 결코 해결될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현재 일본 사회당은 사할린거주 한국인들과원폭피해자들에게 개인적 배상을 제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노대통령이 지난해 일본을 방문했을때 일왕이 「통석의 염」이란 표현으로 미흡한 대한사과를 한데 대해 못마땅해 하는 그는 『한국에 대한 과거사 사과는 단계적으로 조금씩 하기보다는 화끈하게 매듭짓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 인권문제에 관심이 많은 사회당 강제연행문제특별위원회 부위원장 쓰쓰이 노부다카(통정신육)의원은 『한일간의 과거사 문제가 우선 백일하에 공개되고 해결돼야 양국관계가 원만해 질것』이라며 『일본이 아시아에서 공존하기 위해선 한국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지역 국가들에도 대동아전쟁 당시 일본이 자행했던 만행들에 대해 사과해야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아시아 주변국들이 일본의 재무장과 군국주의부활을 우려하고 있기 때문에 아시아의 장래를 주변국들과 상의해 처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3·1운동관」과 「독립전쟁관」에서 독립선언서와 피에 젖은 태극기를 둘러보며 한국인의 독립정신과 불굴의 민족정기를 체험한일사회당 의원들은 자신들이 앞으로의 한일관계에 막중한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몸소 체득했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독립기념관 방문을 마친뒤 센고쿠의원은 『새로운 한일관계는 이 자리에서 벌써 시작됐다』고 말한뒤 『한국인의 저력은 독립의지 뿐만아니라 예술적 능력에서도 드러난다』면서 독립기념관에 존치하고 있는 모든 조형물까지 극찬했다.
  • “조만식선생,50년 평양서 총살당했다”

    ◎소 거주 전 북한 고위인사들 증언/유엔군 입성 하루전 5백여명과 함께/북한군,대동강변에 집단 매장후 도주 6·25이후 생사를 알길없던 민족주의자 고당 조만식선생은 전쟁중 북한당국에 의해 총살당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같은 사실은 중앙일보가 당시 북한에서 당·정고위직을 지내다 그후 숙청돼 소련 등 해외로 탈출·망명한 인사들의 증언을 인용,19일 보도함에 따라 40여년만에 드러났다. 조만식선생은 6·25전쟁중 북한인민군이 유엔군에 밀려 평양에서 후퇴하기 전날인 50년 10월18일 공산정권에 반대하던 미족계열인사및 치안사범등 5백여명과함께 총살당해 대동강변에 가매장됐었다고 이들은 증언했다.이제까지는 조만식선생이 신탁통치 반대 등을 이유로 46년 1월부터 연금생활에 들어간 뒤 행방이 묘연해져 고령으로 자연사했거나 6·25전쟁을 전후해 북한정권에 의해 처형됐을 것으로 막연히 추측돼왔을 뿐 그의 사망시기 및 방법,동기와 배경 등이 명확히 밝혀지지않고 있었다. 북한에서 조소문화협회부위원장,주동독·체코 초대대사 외무성부상 등을 지내다 지난 59년 소련으로 망명한 박길용박사(71·소련과학아카데미 동방학연구소 선임연구위원)등에 따르면 북한은 50년 6·25전쟁을 일으킨 뒤 남진을 계속하다가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고 한국군과 유엔군의 평양입성이 임박하자 50년 10월 중순쯤 주요 정부기관을 평북(현재 자강도)강계로 이동시키기로 최종결정한 직후 형무소 등에 수감한 정치범 및 치안사범들을 그곳까지 끌고갈 수 없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이에 따라 유엔군이 평양에 입성하기 하루전인 10월18일 「특수가옥」에 연금시켜온 조만식선생(당시 68세)을 비롯,내무성 구치소(형무소)등에 가뒀던 지식인 기독교인 등 민족주의 계열인사와 치안사범 등 5백여명을 집단총살시킨 뒤 시체를 가매장하거나 일부는 그대로 둔채 후퇴했었다. 북한은 중국군의 참전으로 50년 12월초 다시 평양을 탈환하자마자 조만식선생 등의 시체를 파내 『전쟁을 도발한 이승만괴뢰군이 평양을 쳐들어오면서 조만식선생 등 수많은 민족지도자급 인사들을 죽여 구덩이에 파묻고 퇴각했다』고 선전했고 그후 북한주민들은 조만식선생 등이 한국군과 유엔군에 의해 처형된 것처럼 알고 있다고 박씨 등은 전했다. 북한 내무성부상까지 지내다 숙청돼 현재 레닌그라드에 사는 당시 북한노동당 강원도당 부위원장이었던 강상호씨(82)는『평양이북지역으로 후퇴하던 날밤 조만식 등 반동분자들이 총살됐다는 말을 들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고당의 3남인 조연흥씨(51·조선일보 총무국장)는 『60년대 중반 한 귀순자가 자료를 통해 자신의 부하로부터 45년 10월15일쯤 아버지를 총살했었다는 말을 들었다고 전했으나 명확치 않아 그동안 아버지의 기일을 정하지못한 채 해마다 아버지의 생신일(2월1일)을 맞아 추모하고 있다』면서 『이번처럼 아버지를 비롯한 민족계열인사 등 5백여명이 북한당국에 의해 학살된 시기 방법 동기와 배경 등이 당시 북한의 고위관리에 의해 명확히 밝혀지기는 처음으로 매우 신뢰가 간다』고 말했다. 북한문제전문가인 이정식교수(미 펜실베니아대)는 『고당은 소련군정의 엄정한 감시하에 평양의 고려호텔에 연금된 이후 행방불명돼 한국전쟁중에 공산정권에 의해 살해됐다는 소문이 있으나 확실한 증거가 없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1882년 평남 강서군 반석면에서 출생한 고당 조만식선생은 3·1운동과 물산장려운동에 앞장서는 등 일제때부터 해방정국에 이르기까지 민족주의자로 일관해왔으며 6·25전쟁이 나고 부터는 생사를 알길이 없었다.
  • 외언내언

    지금은 「어린이」라는 말이 널리 쓰이고 있지만 이 말이 쓰이기 시작한 것은 70년이 채 못된다. 이 말을 지어낸 이는 소파 방정환 선생. 「소년·소녀」는 한자인데다 남녀가 구별되어 있고 「아이」 「애」는 어딘지 깔보는 느낌이 있어 인격체를 뜻하는 「이」 앞에 「어리다」는 형용사를 붙여 「어린이」라는 새로운 말을 만든 것. 그러나 그가 마음속으로 품었던 어린이는 「존귀하고도 아름다운 꽃송이」다. ◆소파 선생이 「어린이」라는 말을 만든 해는 1923년. 그는 이해 5월1일을 「어린이날」로 정했고 「어린이」라는 잡지도 창간했다. 「색동회」라는 어린이단체를 만든 것도 이때. 1924년에 「제네바 아동권리선언」이 나왔으니 이 땅에 어린이날이 선포된 것은 이보다 1년 앞섰다. 5월1일의 어린이날이 나중에 5월5일로 바뀌었지만 소파선생은 32년의 짧은 생애를 「어린이만 위해 살다간 영원한 어린이」였다. ◆「어린이는 어른보다 더 새로운 사람」 「싹을 위하면 나무가 잘 크고 싹을 짓밟으면 나무는 죽어버립니다」 「희망을 위하여 내일을 위하여 다같이 어린이를 잘 키웁시다」. 모두가 소파명언. 어린이에게도 반드시 존댓말을 썼다는 선생은 주옥같은 동화와 동요를 남겨 주기도. ◆날 저무는 하늘에/별이 삼형제/반짝 반짝 정답게 지내이더니/웬일인지 별하나 보이지 않고/남은 별만 둘이서 눈물 흘리네/. 지금도 어린이들 사이에 널리 불리는 「별 삼형제」가 바로 선생의 작품. 3·1운동 때는 집에 등사기를 갖다 놓고 독립신문을 찢어내다 들켜 옥살이도 했다. ◆69번째 어린이날을 맞은 오늘 선생의 그 크신 발자취와 가르침이 새삼 그리워진다. 문화부는 소파 방정환을 「5월의 인물」로 선정,선생의 업적을 기리는 다양한 행사를 펼치기로 했다고 한다. 당연한 일이다. 선생의 가없는 어린이 사랑은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지만 오늘의 어른은 어린이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으며 어린이들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조용한 마음으로 반성해 보아야겠다.
  • “동경「2·8독립선언」의 산실 지키자”/건물보전 모금운동 서울서도

    ◎YMCA서 앞장… “경매위기” 호소/어린이부터 노인들까지 적극 호응/벌써 1억8천만원 모여 3·1운동의 도화선이 된 2·8독립선언의 산실이며 70만 재일동포의 정신적 지주인 일본 도쿄(동경)에 있는 한국 YMCA회관을 지키기 위한 모금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다. 지난 77년 신축공사를 시작,80년에 준공된 도쿄 한국 YMCA사회관이 은행으로부터 빌린 공사비 가운데 60억원을 갚지 못해 일본인에게 경매처분당할 위기에 놓임에 따라 서울 YMCA가 지난달 15일부터 올 연말까지 「재일본 한국 YMCA 부채해결을 위한 모금운동」에 나섰으며 각계각층에서 이에 적극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이 모금운동은 특히 지난 3·1절에 이어 상해임시정부수립 72주년에 즈음하여 더욱 열기를 띠고 있다. 이 모금운동에는 이름을 밝히기를 꺼려하는 노점상 및 양로원 할아버지는 물론 고사리 손의 어린 학생들로부터 경제·사회·종교단체 인사들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빈부격차를 가릴 것 없이 모두가 참여,흐뭇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내가 낸 1만원이 민족유산 시켜준다」는 표어 아래 모두 30만명으로부터 30억원을 목표로 모금운동을 벌이고 있는 서울 YMCA에는 모금운동을 편 지 20일 남짓된 13일까지 전국 각지의 3천5백12명으로부터 1억7천9백49만5천원이 답지했다.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서 「호진화실」을 경영하는 동양화가 전도경 화백(51)은 12일 하오 자신이 그린 그림 40점을 빚을 갚는 데 써 달라고 내놓았다. 전 화백은 『한국 YMCA가 경매처분 될 딱한 처지에 놓여 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기독교신자로서 너무 마음이 아팠다』면서 『초대전에 전시 될 작품이었지만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까해 내놓았다』고 말했다. 서울 YMCA측은 이들 작품으로 13일부터 26일사이 2층 강당에서 동양화초대전을 열어 남는 판매대금을 후원금으로 쓰기로 했다. 이 밖에도 80대 노인이 지난달 20일 지팡이를 짚고 찾아 와서는 『민족지도자를 배출한 재일본 YMCA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다』고 눈시울을 붉히면서 쌈지돈을 선뜻 내어놓았고 익명을 요구하는 40대 여자 노점상도 남편 몫까지 하룻동안 번 2만원을 냈다. 도쿄 한국YMCA 부채해결을 위한 모금운동은 콘서트와 바자 등의 형식으로도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 인기가수 김윤정양은 13일 하오 6시와 14일 하오 3시,6시 등 3차례에 걸쳐 서울 YMCA 2층 대강당에서 「재일본 한국 YMCA 부채지원 기금마련을 위한 콘서트」를 갖고 공연수익금을 서울 YMCA측에 기부한다. 또 오는 23일부터 28일까지는 강남구 삼성동 무역센터 7층 현대백화점에서 인기가수와 코미디언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역시 기금마련을 위한 바자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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