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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日帝 주민학살현장 더 있다

    1919년 3·1의거 당시 경기도 화성군 제암리교회뿐만 아니라 인근 수원지방 16개 마을과 5개 교회에서도 이와 비슷한만행이 일제에 의해 저질러진 사실이 새로 밝혀졌다.또 고종황제는 일본의 식민 지배를 거부하는 내용의 문건을 파리강화 회의에 전달하려다 밀사였던 하란사(河蘭史) 전도사 등이체포되는 바람에 일본의 사주에 의해 독살됐으며,이 과정에서 황실의 외척인 윤덕영(尹德榮·순종황후 윤비의 큰아버지)이 깊이 연루된 것으로 드러났다. 이같은 사실은 1892년부터 1934년까지 42년간 남편과 함께한국 선교사로 근무했던 미국 북감리교의 마티 윌콕스 노블선교사(여·1872∼1956)가 당시 한국에서 일어났던 일을 기록한 육필일기와 문건을 통해 처음 확인됐다.이 자료는 기독교대한감리회 정동제일교회(담임목사 조영준) 역사관 김대구상임연구위원(54) 일행이 지난해 미국에서 노블 여사의 후손으로부터 입수한 것으로,최근 ‘3·1운동,그날의 기록’이란책자로 간행됐다. ‘제암리사건’과 관련,그동안 드러난 기록에는 4월15일 일본 군경이 제암리교회에 불을 지르고 23명을 살해한 데 이어고주리 마을에서 6명을 총살하는 등 모두 29명을 죽인 것으로만 돼 있다.그러나 노블 여사의 일기에 따르면,일경은 제암리교회 뿐만 아니라 4월19일을 전후해 인근 수원지방 16개마을과 5개 교회에서 추가로 주민 학살 만행을 저지른 것으로 나와 있다.그는 이날자 일기에서 “그들(로이드 영국 대리공사 등)이 방문한 다섯 마을의 상황은 시체가 묻혀 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제암리와 다를 것이 없었다.…그들이 알기로는 그 지역에서만 16개 마을이 전멸되다시피 했다”고밝혔다.‘수원지역 구조활동 보고서’에서는 “사강리에서 326채의 가옥이 불타고 1,600여명의 이재민이 발생한 것으로생각되며,39명이 살해됐고,일경 한 명도 돌에 맞아죽었다”고 기록했다.이밖에 당시 하세가와(長谷川好道) 조선총독이제암리사건의 파문이 확산되자 “교회 재건을 위해 교회당 500엔,그리고 불탄 집 한 채당 50엔씩을 지급할 것을 약속하며 그 사실을 비밀로 해달라”고 미국 선교사들에게 당부하며 사건 은폐를 시도한 사실도 밝히고 있다. 김대구 연구위원은 “3·1의거 당시 현장을 목격한 선교사들의 기록인만큼 사료가치가 우수하다”며 “노블 여사의 일기를 근거로 경기도 화성군 일대의 감리교회에서 자행된 일제의 만행에 대한 현지조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운현기자 jwh59@
  • 일제 만행 현장을 기록…美 노블여사 일기 요약

    고종 독살사건은 3·1운동을 촉발했다.미국 감리교 선교사로 한국에서 활동했던 마티 윌콕스 노블 여사의 일기는 당시의 만세 외침과 일제의 잔학행위를 생생하게 전달한다.다음은 그의 일기 요약. ■ 1919년 3월1일 오후 2시를 기하여 모든 학교,중학교 이상의 학교가 일제 지배에 항거해 수업을 거부했고,학생들은 거리를 행진하면서 손을 높이 들고 모자를 흔들며 만세를 외쳤다.거리의 사람들도 합류했고 그 기운찬 외침은 도시 전체에울려퍼졌다. 나는 창문으로 긴 행렬이 모퉁이를 돌아 궁궐담 주위를 행진하는 것을 직접 볼 수 있었다.정부가 운영하는 여학교 학생들도 행진했다.한 무리의 남학생들이 이화학당 앞으로 가서 여학생들에게 나와 합류하라고 소리쳤다.여학생들이 몰려나오자 월터 양이 기모노 차림으로 나와 학당정문을 걸어 잠그고 여학생들을 가로막았으며,아펜젤러 씨와테일러 씨까지 나와서 막는 바람에 결국 합류하지 못했다. ■ 3월2일 조선국가협의회(The National Society of Korea)명의의 전단이 온 거리에 뿌려졌다.방금 뛰어나가서 가져와내용을 그대로 적는다. “오,황제는 참담한 심경으로 돌아가셨다.우리는 황제께서어째서 돌아가셨는지는 이해할 수 없지만 이제 200만명의 충성되고 한국을 사랑하는 형제들에게 황제께서 어떻게 죽음을당하셨는지 설명하려고 한다”■ 3월3∼4일 매일같이 거리에 전단이 뿌려진다.초기에 뿌려진 전단에서는 폭력시위가 계획된 바 없으며 폭력행위가 한국의 독립을 늦출 수도 있으니 참여하는 모든 사람이 어떤종류의 폭력도 사용하지 말아줄 것을 당부하였다. ■ 4월16일 레이몬드 커티스 부영사와 호레이스 언더우드 씨,그리고 인터내셔널 뉴스 특파원인 테일러 씨가 제암리로 가서 직접 학살의 현장을 확인했다.그 마을은 남편 아서 노블의 수원구역 내에 있다.그들은 얘기로 듣던 것보다 훨씬 참혹한 현장을 목격했다.교회 터에는 재와 숯처럼 까맣게 타버린 시체뿐이었고,타들어간 시체의 냄새는 속을 메슥거리게할 정도였다.곡식창고와 가축들도 같이 타버렸다.일본 군인들은 집집마다 다니며 남자들을 불러모았고,사람들이 모이자교회에 불을 질러 안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태워 죽였다. 도망치려는 사람은 총으로 쏴죽였다. ■ 4월19일 영국 대리공사인 로이드 씨는 사람들을 모아 불타버린 다른 마을로 갔다.모두 수원의 남양지역에 있었다.아서의 관할구역이었으므로 같이 가자고 했고,스미스 씨는 통역으로 갔다.테일러 씨도 동행했다.원래 그는 재판참석차 평양에 갈 예정이었으나 미국공사 베르골즈 씨가 평양보다는학살현장으로 가서 보고 나중에 본국에 기사를 전송해 달라고 요청했다.현지에 가니 사람들은 겁이 나서 그런지 환자들을 데려오려고 하지 않았다.돕다가 자신은 물론 가족들의 목숨까지 위태로울까 겁에 질려 있었다. 로이드 씨와 일행이 방문한 다섯 마을의 상황은 시체가 묻혀 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제암리와 다를 바 없었다.그들은근처에 16개 마을이 전멸되다시피했다고 말했다. 마을 양쪽끝의 몇 집을 빼고는 성한 집이 없었고 여자와 아이들이 그곳에 숨어지내고 있었다.산으로 도망쳐 풀뿌리나 나무뿌리를캐먹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 제암리교회 성역화 새달 완료

    3·1운동 때 일제가 주민들을 집단학살했던 경기도 화성군제암리 교회와 대표적인 항일 시위현장이었던 안성시 만세고개 유적지가 3·1운동 82주년을 맞아 성지로 탈바꿈한다. 경기도와 화성군은 3·1운동의 뜻과 정신을 기리기 위해 화성군 향남면 제암리일대 1만7,355㎡를 성역화 사업을 완료,다음달 1일 준공식을 갖는다고 21일 밝혔다. 이곳에는 전시실과 시청각실,강당 등을 갖춘 1,331㎡규모의기념관과 기념탑을 세우고 교회 옆의 희생자 합동 묘역과 기념 조형물을 재정비했다. 기념관에는 ‘민족저항의 맥 제암리’‘만행의 진상과 흔적’ 등 13가지 주제의 사진과 상징조형물 등이 전시된다.40석규모의 시청각실에서는 10여분 분량의 3·1운동 관련 영상물이 상영된다. 특히 전시물 가운데는 당시 캐나다 선교사였던 스코필드 박사(1889∼1970)가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해 촬영한 학살현장사진이 포함돼 있어 이 곳을 찾는 관람객들에게 당시 일제의잔혹한 만행을 생생하게 전하게 된다. 안성시 원곡면 칠곡리에 있는 3·1만세고개 유적지도 성역화사업이 한창이다.도와 안성시가 43억원을 들여 유적지 3만3,000㎡에 기념관과 기념탑,사당 등을 짓고 있다. 오는 5월쯤 준공식을 치를 예정이다. 기념관에서는 ‘전국및 경기도 3·1운동’ ‘안성 만세고개 3·1운동’ 등 3가지주제의 사진전이 마련되며 시청각실에서는 15분 분량의 다큐멘터리가 상영된다.기념관 안 전시실에는 당시 일본군이 항일독립 투사를 투옥시켰던 서대문형무소 모형이 전시될 예정이다. 1905년 8월에 세워진 제암교회는 1919년 4월 15일 일본군이3·1운동 탄압을 위해 교회안에 제암리 지역의 청 ·장년들을 모아놓고 총으로 학살한 뒤 증거를 없애기 위해 불을 질렀던 곳이다.당시 일제의 만행으로 23명이 숨졌으며 마을 가옥 30여채가 불에 탔다. 또 3·1운동 3대 투쟁지역으로 꼽히는 양성면과 원곡면에서는 같은해 4월 1일 주민 2,000여명이 일본경찰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불태우고 안성읍내로 진출하는 등 격렬한 시위를벌였던 곳이다. 도 관계자는 “이들 유적지는 청소년과 일반인에게 3·1운동의 뜻과 정신을 직접 보고 체험할 수 있는 역사 교육장을활용될 것”이라고 말했다. 수원 김병철기자 kbchul@
  • [대한광장] 이수현군의 죽음과 일본

    지난달 26일 저녁 도쿄 신오쿠보(新大久保)역에서 술에 취해 철로에 떨어진 일본인을 구하려다가 목숨을 잃은 이수현군의 죽음은 그야말로 일본열도를 강타했다.어떤 회의에 참가하려고 도쿄에 가 있던 우리 일행은 29일 저녁 신오쿠보역에서 그를 보내는 노제에 참석했다.어머니는 아들의 사진을 가슴에 안은 채 쓰러질 듯했고 아버지는 유골을 담은 흰상자를 안고서 그래도 의연한 자세를 취하려고 안간힘을 다하고 있었다. 일본신문은 연일 대서특필하면서 아버지의 말로 “내 아들의 용기 있는 행동에 충심으로 경의를 표한다” “내 아들은꿈을 가지고 일본에 공부하러 왔다. 그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이렇게 여러분에게 감동을 줄 수 있어서 그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위로를 받는다” “일본 국민이 함께 울어준 것으로 마음이 좀 가라앉는다”고 전했다.또 어머니는 “내 아들은 장래 큰 일을 해낼 것이라고 기대했다.그런데 이렇게 빨리 가다니 너무나 처참하다”고 하면서 간밤에는 아들이 꿈에라도 찾아올까 했으나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고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수현군의 죽음에 일본국민의 눈이 쏠려서 그만 그와 함께 생명을 잃은 또 한 사람의 일본인 카메라맨 세키네시로(關根史郞)씨의 의로운 죽음은 그다지 화제가 되지 않는것 같아 좀 서글픈 생각마저 들었다.세키네씨는 47세, 이수현군은 26세.이군의 죽음은 너무나 젊은 죽음이었다.그와 사랑을 나눈 여자 친구가 “수현아 난 네가 정말 좋은 일 했다는 것 알아.하지만 남아있는 나는 어떡하니? 어떻게 살아야해… 다시 되돌리고 싶어.타임머신이 있다면…”하고 인터넷에 올렸다니 그 얼마나 애절한가. 이수현군의 죽음,그것은 인정이 메말라가는 세상에 던진 충격이었다.무엇보다도 한 한국인 청년의 죽음이었다는 데 일본인들은 놀람을 금할 수 없었다.그러니까 아사히(朝日)신문은 톱기사로 다루면서 ‘같은 눈물 일한(日韓)이 함께’라고제목을 달았다. 그리고 일본 월드컵 조직위원회가 2002년의월드컵 명칭을 일본국내에서 ‘한일’이 아니라 ‘일한’으로 하려는 데 대해서 사설을 쓰고 그런 아집은 버리라고 권고했다.“이수현씨의행위는 양국민의 가슴에 감격을 안겨주었다”고 하고 “일본어 표기에 앞이냐 뒤냐 하는 정도의 문제로 귀중한 것을 깨서는 안 된다”고 끝을 맺었다. 이 사설은 또한 이 표기문제에 대해서 한국신문이 신중한태도를 견지하고 보도를 자제하고 있다는 사실도 언급했다. 한일 관계란 정말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처럼 취약한 것이라고 해야 할런지 모른다.그래서 다시 한일관계가 악화해서는안 된다고,일본의 언론도 한일 양국이 이수현군의 국경을 넘은 의로운 행위에 눈물을 함께하자고 더욱 호소하는 듯했다. 문득 나는 2002년부터 사용할 것을 목표로 한다는 이른바‘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회’라는 우파 세력이 만드는 중학교 역사 교과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이미 그 내용은 널리 알려져 있고 일본 정부의 검인정 당국이 137군데를 정정하라고 했다는 말도 나돌고 있다.그것은 한일합방은합법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하고,3·1운동을 비롯하여 종군위안부 같은 문제에 대해서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일본의 지난날은 유색인종으로서 유일하게 성공을거두어온 찬양할 만한 역사였다고 한다.나치는 유태인을 학살했지만 일본이 중국 난징(南京)에서 20만 중국인을 학살했다니 그것은 전혀근거 없는 날조된 숫자라고 한다. 이수현군의 죽음에 눈물을 함께한다는 일본인과 이러한 일본 역사교과서란 어떻게 연관되는 것일까.죽음에 대해서는눈물을 흘리지만 일본을 우파세력으로 좌우하겠다는 정치적목적은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일까.그것과 이것은 별개의 것. 그리고 정치 또는 권력욕이 스며들면 인간적인 것은 모두 지워지고 만다는 것일까. 이국의 밤하늘 아래 유난히 희게 보이는 이수현군의 유골상자를 바라보는 눈앞에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생각이었다.정말그런 역사 교과서가 나왔을 때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것인가.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심각한 문제라고 하지 않을수 없다. △지명관 한림대 석좌교수
  • 2·8독립선언 82주년 기념식

    3·1운동의 기폭제가 된 2·8독립선언선포 82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기념식이 8일 서울과 일본 도쿄에서 동시에 열렸다. 서울,도쿄 동시개최는 1919년 2월 8일 재일 한인유학생 400여명이 일본제국의 심장부인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조국독립을 선포한 2·8독립선언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올해 처음으로 시도됐다.도쿄기념식은 이날 오전 10시 일본 도쿄 한국YMCA 한국문화관에서 김유배 보훈처장,윤경빈 광복회장,최상용 주일대사,김재숙 재일본 대한민국 민단 중앙본부단장 등 주요인사와 교민 등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기념식에 이어 신용하 서울대 교수가 ‘2·8독립선언의 역사적 의의’를 주제로 기념강연했다. 오전 11시 서울YMCA에서 열린 서울기념식에는 광복회원 등300여명이 참석했다.지명관 한림대교수가 ‘한국사회에서 바라본 2·8독립선언’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했다. 노주석기자 joo@
  • [발언대] 2·8독립선언이 남긴 애국정신 되살리자

    입춘이 지났건만 봄은 아직 멀기만 하다. 정치적 혼란과 경제 위기가 겨울의 늪에서 벗어나려는 우리 마음을 더욱 얼어붙게 만드는 것 같다. 1919년 2월8일은 3·1운동의 도화선이 된 2·8독립선언일이다.대한의 젊은이들이 현해탄 너머 일본 열도의 한복판에서전개한 항일 학생운동으로 그 의미가 실로 크다 하지 않을수 없다.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세계적인 반향을 불러일으킨일대 사건이 민족 지도자나 세력가가 아닌 평범한 젊은이들이 주축이 되어 전개되었다는 사실이다.이는 참으로 높이 평가할 만한 일이다. 옛부터 청년세대를 일컬어 국가의 동량 또는 초석이라는 말들을 해왔지만 2·8독립선언처럼 그 증거가 되어 준 사건이많지 않았던 것 또한 사실이다.애국과 애족의 마음이 없었던들 오늘의 젊은이들처럼 일신의 안위와 영달만을 생각하는이기주의가 팽배했던들 꿈꾸기조차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세계는 끊임없이 변하고 남의 나라인 미국 대통령이 바뀌는데에도 민감하게 영향받는 현실은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국권 침탈의 어려운 시절을 산 당시젊은이들에게 바란 것 이상의 몫을 기대하게 된다. 지·덕·체를 근간으로 탁월한 능력과 원만한 인간관계까지를 겸비해 주기를 바라왔다. 근래에는 국가의 총체적 위기를 도덕적 해이나 민족정신 약화에서 찾는 만큼 이러한 부분까지를 채울 수 있는 대한의젊은이가 되기를 기대했다. 언뜻 큰 부담과 무게를 느낄 수도 있으나 2·8독립선언, 광주학생운동,6·25때의 국내외 참전 학도병,4·19혁명의 주역들을 생각하며 면면히 흘러온 강인한 민족정신을 계승한다면그 다음 목표는 순풍에 돛단 듯 쉽게 쉽게 풀려갈 것이다.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이라 하여 그 가치를 소홀히 말고 다시한번 애국선열의 큰 뜻을 이어 조국의 미래와 민족 번영을생각하는 지혜로운 눈을 떠주길 바란다. 애국은 결코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위에 항상심으로자리한다.다만 그것을 일으키는 도화선이 필요한 것이다.82주년을 맞은 2·8독립선언에 담긴 정신적 의미가 잠들어 있는 애국심을 일으켜 시대 현실에 맞는 새로운 청년 선언으로젊은이 여러분 가슴에 애국의 불을 지펴주길기대한다. 도영미 청주보훈지청 보훈계장
  • ‘독립유공자 공훈록’ 14권 발간

    국가보훈처(처장 김유배)는 1996년부터 2000년까지 포상한 독립유공자 885명의 공적내용을 수록한 ‘독립유공자 공훈록’(제14권)을 발간해 독립운동 연구단체,대학도서관 등지에 배포했다.이번에 나온 ‘공훈록’은 총867쪽 분량의 양장본으로 모두 3,000부를 발행했다. 장석흥 국민대 교수(3·1운동,국내 독립운동)박환 수원대 교수(독립군,만주지역 독립운동)김용달 단국대 강사(의병, 미주방면, 학생운동)가 독립운동 계열별로 나누어 집필했다. 이번 ‘공훈록’의 특징은 무엇보다 후손이 없는,즉 무후(無後)선열의 공적을 확인하여 포상과 함께 그 공적 내용을 수록한 점이다.전체885명 가운데 534명이 이에 해당하며 그동안 후손이 없거나 공적확인이 안돼 포상이 보류된 유공자들이다. ‘공훈록’에는 일본 육사 출신으로 노령지방에서 빨치산부대를 이끌고 항일무장투쟁을 벌인 전설적인 독립군 지도자 김경천(金擎天)장군,서간도의 독립군 단체인 서로군정서와 정의부 지도자로 활동한 김규식(金圭植)선생,미주지역에서 대한인국민회 회장을 역임하며 임시정부 재정을 지원한 김호(金乎)선생 등의 공적이 수록돼 있다. 정운현기자 jwh59@
  • 2001 길섶에서/ 이미륵의 쌀

    이의경(李儀景 1899∼1950).경성의학전문학교 학생으로서 3·1운동뒤 지하신문을 만들다 왜경에게 쫓기자 상하이로 피했다.거기서 배타고 건너가 정착한 데가 독일이다.뮌헨에서 병사하니 나이 쉰하나였다.이미륵이라는 필명으로 쓴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는 독일문학의 고전으로 남았다. 그는 조국이 광복되자 돌아오고 싶어했다.당시 국립박물관장 김재원(金載元)과 서신 왕래가 있었다.세상 뜨기 전 해인 1949년 이미륵의오랜 지인(知人) 자일러 부인이 그가 병중이라고 편지로 알려왔다.편지에는 쌀 좀 보내 줄 수 없겠느냐는 이미륵의 부탁이 들어 있었다. 김재원은 쌀을 부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동안 이의경씨의 부고를 받았다”고 했다. 독일 빵으로 서른 해 가까이 살아온 이미륵이 쌀은 왜 찾았을까.‘수구초심’(首丘初心)이 그 답이리라.저 세상에서라도 쌀밥을 마음껏 들고 있을까.국내 쌀 소비가 줄고 있다지만 쌀이 아주 밀려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쌀은 한국인에게 고향 같은 것이므로. 박강문 논설위원
  • 2월의 독립운동가 윤세복 선생

    국가보훈처는 30일 만주 서간도에서 민족계몽운동을 벌이고 대종교를 통해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한 단애(檀崖) 윤세복(尹世復·1881∼1960) 선생을 광복회,독립기념관 등 유관기관 공동으로 ‘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경남 밀양에서 태어난 선생은 을사늑약 이후 1909년 독립운동 비밀결사 조직인 ‘대동청년단’에 가담,국권 회복에 앞장섰다.합방 이후대종교에 입교한 선생은 1911년 2월 서간도로 망명,환인현에 동창학교를 설립,민족계몽 운동을 펼쳤다. 선생은 일제에 체포돼 18개월간 옥고를 치렀고 만주·노령지역 독립운동지도자들과 함께 1919년 2월1일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3·1운동후 평화적 시위로는 독립할 수 없다고 판단,1921년 대한국민단을 결성해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1924년 대종교 3대 교주로 취임한 뒤 1933년 만주 동경성에 ‘발해농장’을 설립,독립투쟁을 벌이다 체포돼 1944년 무기형을 언도받고복역하다 광복을 맞았다. 노주석기자 joo@
  • [사설] ‘친일파 재산 보호 못한다’

    국고에 귀속된 친일 반민족행위자의 재산은 돌려줄 수 없다는 법원의 판결이 나와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서울지법 민사합의14부(재판장 李善姬부장판사)는 친일파 이재극(李載克)의 손자 며느리 김모(78)씨가 국가를 상대로 낸 소유권 확인 청구소송에서 김씨의 청구를각하했다.재판부는 “우리 헌법은 3·1운동 정신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 있는 바,원고가 민족의 이익을 배반하고 일제에 협력한 대가로 얻은 재산을 되찾기 위해 헌법을 수호하는 법원에소송을 제기하는 것은 신의칙과 정의의 원칙에 어긋나는 부적합한 행위”라고 각하 이유를 밝혔다. 우리는 민족정기를 바로 잡은 이 판결을 적극 지지하면서 대법원에대해 우리의 생각을 몇마디 보태고자 한다.대법원은 1997년 친일 매국노 이완용(李完用)의 증손자가 낸 토지 반환 청구 소송에서 원고승소 판결을 확정한 바 있다.“친일파 후손의 재산권을 인정하는 것은 정의의 관념에 반하지만,광복후 40여년이 지날 때까지 친일파에대한 아무런 조치가 없었던 이상 친일파나 그 후손이라도법률에 의하지 않고는 재산권을 박탈할 수 없다”는 취지였다.친일파에 대한국민정서를 알면서도 ‘국민의 재산권 보장’이라는 헌법 조항을 따랐을 것이다. 그러나 헌법의 개별조항보다 헌법의 기본정신이 우선해야 한다고 본다.대한민국이 법통을 승계한 임시정부의 ‘건국강령’(1941년)은 ‘친일 매국노의 재산 몰수’를 건국과업의 첫걸음으로 설정하고 있다. 1948년 ‘반민족행위자처벌법’에도 불구하고 이승만(李承晩)대통령의 집권욕 때문에 친일파에 대한 단죄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 것은대법원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번 사건 재판부는 “친일파와 그 상속인이 제3자 명의로 된 재산을 되찾는 일에 법원이 조력하지 않겠다는 취지일 뿐,반민족행위자의 재산을 몰수 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고 한계를 분명히 했다.뒤늦게나 친일파를 단죄한다는 역사적 관점에서 대법원의 전향적인 자세를 촉구하고 기대한다.
  • “친일파 재산되찾기 헌법정신 위배”

    친일파의 후손이 조상의 땅을 되찾기 위해 낸 소송에 대해 법원이“헌법정신에 비춰볼 때 소송이 부적합하다”며 각하했다.이는 친일파 이완용 후손의 재산권을 인정해준 97년의 대법원 판례와 배치돼상급심 판단이 주목된다. 서울지법 민사합의14부(부장 李善姬)는 17일 “시할아버지 이재극(李載克)으로부터 물려받은 부동산을 돌려달라”며 김모씨(78)가 국가를 상대로 낸 소유권 확인 청구소송에서 “원고의 청구는 부적합해소를 각하한다”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우리 헌법은 대한민국이 3·1운동 정신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 있음을 천명하고 있다”면서 “따라서 원고가 헌법을 수호하는 기관인 법원에 민족의 이익을 배반하고 일제에 협력한 대가로 얻은 재산을 되찾기 위해 소송을 제기한다는 것은 신의칙과 정의의 원칙에 어긋난다”고 사유를 밝혔다. 재판부는 ‘반민족행위처벌법’이 폐지돼 친일파들에게 불이익을 줄 근거가 없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반민족행위처벌법이 폐지돼 그 효력은 없지만 헌법정신에 비춰볼 때반민족행위의 위헌성·위법성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고 못박았다. 재판부는 “법원이 친일파와 그 상속인이 제3자 명의로 된 재산을되찾는 것에 조력하지 않겠다는 취지”라면서 “그러나 이 판결이 적극적으로 반민족행위자를 처벌하거나 그 재산을 몰수할 수 있다는 취지는 아니다”고 덧붙였다. 김씨는 96년 국가가 과거 이재극 소유로 자신이 물려받은 파주시 문산읍 도로 321㎡에 대해 보존등기를 마치자 무효라며 소송을 냈다. 이재극은 1904년 일본 천황으로부터 훈일등욱일대수장(勳一等旭日大綏章)을 받고 1905년 을사조약 체결시 왕실의 종친으로서 궁내 동정을 친일파에 제공하는 등 조약 체결에 협조해 지탄을 받았다.한일합방후에는 천황으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고 1919년에는 이왕직장관(李王職長官)에 임명되는 등 친일행각을 벌였다. 그러나 대법원은 97년 친일파 이완용의 후손이 낸 소송에 대해 ‘친일파 후손의 재산권을 인정하는 것은 정의 관념에 반하지만 광복 후40여년이 지날 때까지 친일파에 대해 아무런 조치가 없었던 이상 후손의 재산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판결했었다. 조태성기자 cho1904@
  • 서울대 報恩의 추모제

    서울대(총장 李基俊)가 최초의 사재 장학금을 기탁한 고 이원경(李元卿)여사의 25주기가 되는 내년부터 해마다 보은의 추모제를 열고묘역도 정비하기로 해 눈길을 끌고 있다.이를 위해 2001년 예산에서500만원을 편성했다. 우선 내년 4월5일 한식에 경기도 광주 공원묘지에 있는 이 여사 묘지의 비석을 새로 바꾸고 울타리를 단장하기로 했다. 이 여사는 수십년간 삯바느질과 미군부대 세탁일을 하면서 모은 푼돈으로 힘겹게 마련한 서울 충현동 2층 양옥집을 팔아 73년 당시로는 거액인 300만원을 장학금으로 내놓았다.76년 11월21일 숨을 거두면서 전세금 150만원과 자신의 장례비로 준비했던 110만원마저 모두 기부했다. 이 여사는 당시 “나라의 고귀함은 빼앗긴 나라에서 살아본 사람만이 압니다.나라를 아끼는 유능한 인재를 키워주세요”라고 유언했다. 이후 해마다 6명의 학생들에게 등록금 전액을 지급하고 있다. 구한말 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 등과 함께 개화당의 중심 인물이었던 이규영(李圭永)선생의 맏딸인 이 여사는 러시아로 망명한아버지를 따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소학교를 마치고 귀국,3·1운동에 참여해 11개월 동안 옥살이를 치렀다. 군정 입법의원을 지냈던 남편 유진희(兪鎭熙)박사가 독립운동으로옥고를 치르다 얻은 병으로 죽자 이 여사는 삯바느질 등을 하며 어렵게 살면서도 옛 서울대 동숭동 캠퍼스 옆에 방을 얻어 고학생 20여명을 뒷바라지했다. 서울대 박영래(朴泳來)장학과장은 “내년부터 고인의 아름다운 정신을 기리기 위해 11월20일 학교 차원에서 공식 추모제를 지내기로 했다”고 말했다. 안동환기자 sunstory@
  • 2001년 ‘이달의 독립운동가’ 12명 선정

    국가보훈처는 19일 내년도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3·1운동 민족대표 이승훈(李承熏)선생,한국의 잔다르크 정정화(鄭靖和)여사,상록수의 계몽작가 심훈(沈熏)선생,을사조약에 항거 자결한 민영환(閔泳煥) 선생 등 조국의 광복을 위해 헌신한 독립유공자 12명을 선정·발표했다. 이밖에 이완용을 비수로 찌른 이재명(李在明)선생,호남지역 의병장기삼연(奇參衍)선생,대종교를 통한 독립운동을 펼친 윤세복(尹世復)선생,무정부주의 비밀결사운동가 유림(柳林)선생,머슴출신 의병장 안규홍(安圭洪)선생,임시정부 경무국장을 지낸 나창헌(羅昌憲)선생,임정기관지 독립신문 사장을 지낸 김승학(金承學)선생,황성신문 창간유공자 유근(柳瑾)선생 등이 뽑혔다. 국가보훈처는 “국민에게 신망을 받을 수 있는 업적으로 건국훈장을서훈받은 분중 독립운동의 계열을 고려해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보훈처는 선정 독립유공자들의 공헌을 선양하기 위해 관련 자료를 담은 교육용 소책자를 발간하고 생몰연대와공적을 새긴 기념패도 제작한다. 노주석기자
  • [발언대] ‘대일선전포고’ 정신 되새기자

    민족의 웅비와 새로운 도약을 꿈꾸며 시작한 새 천년의 첫해가 저물어 간다.벌써 100여년전 ‘요즘 사람들은 유시유종(有始有終)이 드므오’라 하신 월남 이상재 선생의 말씀처럼 얼마나 많은 계획들이 처음에 시작된 대로 끝을 맺었는지 돌아볼 때다. 새 천년의 희망처럼 민족단합의 대기류와 노벨상 수상 같은 감동과감격의 시간도 있었고 그와는 달리 어려워진 경제여건 때문에 사회가많이 위축돼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1941년 12월9일 주권국가로서 조국의 근세사에 처음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일 선전포고는 상승된 통일무드에 박차를 가하고 어려운 경제여건을 극복하는 데 필요한 용기와 힘을 실어주는 역사적 사건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일제 강점기 35년의 고난사에서도 우리 민족은 3·1운동을 시작으로민족의 정신적 응집력을 키워 왔으며 윤봉길·이봉창 의사 등 수많은 의열사들이 쾌거를 이어왔다.1940년 광복군을 창군한 것은 그간의독립투쟁을 위한 민족 의지와 힘이 하나로 뭉쳐 탄생한 결정체였다. 1년 후인 1941년12월9일의 대일 선전포고는 명실상부한 주권국가로서의 첫번째 발동이었다.이것은 작게는 조선이 자주국임을 국제사회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음과 동시에 넓게는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는인류의 인도적 세계질서를 확립하고자 하는 대의적 의미를 담고 있다. 지금 우리는 민족 대단합의 통일을 민족 지상과제로 삼고 있으며 국제적 경쟁력을 갖춘 선진경제국가로의 변모를 시도하고 있다. 이 두가지 목표를 위해서는 외부 지원과 자구적인 능력개발도 중요한 요소로 꼽을 수 있다.그러나 하마터면 세계사에서 민족이 사라질뻔한 위기 상황에서 발동한 대일 선전포고에는 조국과 세계평화를 위한 민족의 집념과 의지가 담겨 있다. 이를 시원적 원동력으로 삼아 50년 분단의 벽을 넘어 민족적 동질성을 회복하고,작은 경제위기를 극복해 보다 큰 국가의 힘을 만들어낼수 있는 생산적 가치창출을 기해야 할 것이다. 권오석[청주보훈지청 관리과장]
  • [대한시론] 친미와 반미의 허구적 인식

    미국에 대한 비판이나 이의제기를,한국의 매카시스트는 “반미는 용공이고 좌경이며 결국 빨갱이”라고 물아붙여왔다.국제관계에서 각나라가 국가이익을 겨루는 경우에는 냉정하여 인연이나 정리에 구애되지 않는다.그런데 이 당연한 사실이 우리에겐 통하지 않은 채 친미일변도의 가치기준이 독판무대가 되어 왔다. 미국이 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시켜준 은인이고 1950년 전쟁에서 구원해준 혈맹이란 사실이 우리 대미관의 전부로서 압도하다시피 해왔다.그런데 미국뿐이 아니라 어느 외국에 대해서도 그런한 자세와 정서는 유치한 정치인식이다.나라 사이에는 영원한 벗도 없고 적도 없다.이 현실에 눈을 크게 뜨고 땅에 발붙이고 서야 한다.이것이 실리주의 이전에 아주 정상적인 정치인식이다. 우리의 국제관계 인식이나 외교감각이 감상적 굴레에 얽혀 친미와반미의 인식에 머무르게 된 연유를 따져보면,우선 서양열강과의 교류이전에 중국 중심의 사대교린(事大交隣)에 머물렀던 국제실정 인식수준에서 철저하게 탈피하지 못한 데 문제가 있다. 조선시대의 중국이현재론 미국으로 대체된 격이다. 조선때 명나라가 쇠망해가고 새로이청나라가 중원의 주인이 될 당시, 우리는 임진난리에 은혜를 입고 유교 모국이란 명분 때문에 시세를 거슬러 청나라로부터 두번 침략당했다.19세기 서구 제국주의 열강이 아시아에 발을 들여놓아 국제질서가재편되는 시기에도 조선 양반지배층은 소중화를 자처해 위정척사를고집하다 서양 앞잡이가 된 일본 제국주의에게 침략당했다. 이전에 우리는 아셈이란 거창한 국제회의를 치러냈고 그 성과도 평가할 만하다.그러면서도 외국 정상 등 귀빈에게 잘 보이려고 지나치게 허식을 부리는 무리는 하지 않았나 하는 불안도 있다.국제거래에서는 외교도 결국 장사 이상의 실리 챙기기이기 때문이다.그래서 국제관계 인식은 봉건적 정서에 젖어 있어도 안되고 냉전시대의 매카시스트적·친미일변도식의 편파된 시각으로 쏠려도 안된다.그러한 정치인식은 유아적 인식수준이고,심하면 한정치산자(限定治産者)의 지능수준으로 전락되어 결국은 나라 일을 망치기 때문이다. 과거 우리 지도층의 국제관계 인식의 유아적 순진성 때문에 치명상을 입은 일은,1905년 러·일전쟁 당시 미국이 필리핀 보존을 위해 일본 제국주의와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어 조선을 팔아넘긴 사정을몰랐던 비극적 사건을 들 수 있다. 1919년 3·1운동 당시에는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아시아 민족의 해방이라고 또 한번의 크나큰 착각에 사로잡혀서 미국을 짝사랑했다.당시 미 국무부 주변을 맴돌며 외교를 통한 독립에 앞장선 이승만식 친미 일변도의 외교가 그후 우리의 국제관계 인식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결국 외국에 대한 정치인식이 바르게 깨어나는 계기가 된 것은 1980년 광주민주항쟁을 겪으면서다.참으로 수업료치곤 막대한 희생의 대가였다.당시에 미국정부는 자기의 국익기준으로 신군부집단에 손을들어주고,한국민족의 민주화투쟁은 불안하다고 봐서 묵살한 것이다. 여기서 일부 학생이 미 대사관 건물을 점거·방화하는 등 반발하지만이 문제는 국제관계의 인식차원에서 냉정하게 미국의 실체와 입장을분석해볼 수밖에 없다. 국제관계에서 제 나라 이익을 지키고 주장하느라 미국과 갈등을 빚는 일은 언제고 있을 수 있다.우리 정부는 그런 일을 극력 피하려는나머지 입지를 양보해선 안된다.또 다른 문제는,미국 비판을 모두 위험시해서 용공으로 몰아붙여 공격하는 것은 정상적인 사고방식이 못된다는 점이다.물론 매카시스트들은 지금은 정권의 밖에서 오히려 정권측을 때리는 수단으로 친미정서를 이용한다.그래서 현직 대통령에게까지도 반미적이란 딱지를 붙이려 해서 여당대표가 진땀을 흘리며항변해야 하는 실정이다.오히려 DJ의 친미성이 지나친 것 아닌가 걱정인데 말이다. 어쨌든 색맹(色盲)의 국제관계 인식이나 함량미달의 한정치산적 또는 유아적 지능으로 정치를 대하는 것은 책임 있는 정치인으로선 실격이다.정치는 장난이 아니다.그리고 정치는 개인의 분풀이 무대가되기엔 너무나 중대한 나랏일이기 때문이다. 한상범 동국대교수·헌법학
  • [해외 항일전적지를 찾아서] (13)의열단 자취 남은 南京·廣州

    광복군 제3지대가 있던 안휘성 부양(阜陽)에서 침대열차를 타고 밤새 달려 강소성 성도 남경에 내렸다.중경·무한과 더불어 중국의 ‘3대 찜통’이라 부른다더니 아침부터 사우나실처럼 후꾼후꾼했다.양자강이 가까워 고온다습하기 때문이었다.남경은 수운의 이점이 있어 예로부터 강남의 중심 구실을 했고 삼국시대에 손권이 오나라를 세운이래 10개의 왕조가 왕도로 삼은 곳이다.근대에 와서도 태평천국의봉기군이 청나라 정규군과 서구열강에 대항해 싸울 때 거점으로 삼았으며 신해혁명 이후 손문도 중화민국의 임시수도로 삼았다.중일전쟁때도 임시수도였으며 일본군에 의해 양민 30만명이 학살당하는 비극을 겪기도 했다.국민당 정부의 임시수도 시절,우리 선열들의 항일운동도 이곳을 거점으로 삼았다. 취재팀이 먼저 찾은 곳은 남경대학.그곳에 항일전쟁사의 걸출한 인물 여운형(呂運亨)과 김원봉(金元鳳)이 다닌 금릉(金陵)대학 캠퍼스가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조국에서 3·1운동이 실패하자 무력항쟁 밖에 없다고 생각한 김원봉은 금릉대학을 중퇴하고 서간도로 신흥무관학교를 찾아갔다.그러나 그곳의 교육은 중국 명문대학을 다닌 그를충족시키지 못했다.그는 길림으로 가서 저 유명한 암살 폭파 비밀결사인 의열단을 만들고 수많은 테러공작을 감행해 일본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이때 그의 나이는 약관 21세였다. 30대 장년이 되자 김원봉은 의열단의 테러공작을 지양하고 군대조직을 계획했다.뒷날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민족혁명당과 조선의용대였다.그는 스스로 광동성 광주(廣州)로 가서 황포군관학교를 나와 조선혁명간부학교를 만들었다.이 학교출신으로 유명한 이는 뒷날 태항산에서 전사한 윤세주와 진광화,그리고 민족시인 이육사이다.김원봉의그런 활동은 거의 남경에서 이루어졌다.황포군관학교 동기생으로 중국의 첩보기관 삼민주의역행사(三民主義力行社)의 대표였던 등걸(騰傑)이 그를 도왔다. 남경대학은 우리 대학들과 달리 건물과 건물 사이 공간이 넓고 녹지가 많아 여유로워 보였다.플라타너스·팽나무가 지천이었다.시 인민정부가 발행한 백서를 보면 가로수가 40만 그루라던가.금릉대학 캠퍼스는 예스러운 품격을 지닌채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었다.푹신한 네모꼴의 잔디밭을 두고 3동의 건물이 둘러앉아 있었다.그 앞쪽에 뚝 떨어져서 대례당(大禮堂)이란 간판이 붙은 회당 건물이 있었다.민족혁명당을 창당한 곳이 이 대학의 강당이라 했으니 이것이 틀림없을 듯싶은데 전면이 일부 개축되어 있다. 남경대학을 나온 취재팀은 얼음이 섞인 생수병을 들이키며 의열단원들이 묵었던 명양가(鳴羊街)와 화로강(花露崗)을 찾아나섰다.한상도교수의 논문 ‘재중한인군관학교연구’를 보면 조선혁명간부학교는 1932년 10월20일 남경교외 탕산(湯山)의 선사묘(善祠廟)라는 사원에서 개교했고,교관들은 남경성내 명양가 호가화원(胡家花園)에서 묵었다.골목을 더듬어 찾아가보니 명양가와 화로강은 이어진 골목이었다.김원봉에게 호의적이었던 부호 호대해(胡大海)는 자신의 장원 호가화원에 김원봉을 식객으로 묵게 했고,김원봉은 자신의 의열단 동지들을위해 근처 화로강에 머물게 하면서 혁명간부학교 교관들의 숙소도 마련했을 것이다. 어림짐작으로도 어마어마하게 컸을 듯한 호가화원은 퇴락된 채 빈민들이 살고 있었다.그 옛날 주인이 손님과 더불어 풍류를 즐겼음직한연못가의 팽나무 그늘에 앉아 땀을 식혔다.문득 ‘지절시인’ 이육사가 떠올랐다.그는 조선혁명간부학교 1기생 명단 26명 가운데 육사(陸史)라는 가명으로 실려있다.그가 이 연못에서 올곧은 의지로 시를 썼을 것 같은 생각에 이곳저곳 두리번거렸다.연못가에서는 얼굴에 여유로움이 가득한 노인이 낚시질을 하고,해오라기 한 마리가 긴 부리로우렁이를 찍어올리고 있었다. 남경에는 백범 김구가 만든 한국특무대독립군 본부도 와 있었다.‘김구구락부’로 더 알려진 테러공격 비밀결사였는데 목장영 고안리(木匠營 高安里)에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다.호가화원의 연못에서 낚시를 하는 노인이 목장영이 가까운 곳에 있다고 일러주기에 찾아갔으나 새 아파트단지 입구에 붙은 ‘목장영’이라는 간판을 본 것만으로만족해야 했다. 취재팀은 저녁 비행기로 광동성 광주로 날아갔다.우리 항일투쟁사에 큰 몫을 한 도시이기 때문이었다.광주 백운(白雲)공항에서택시를타고 달리는 동안 필자는 중국의 도시라기보다는 유럽에 온 느낌이었다.네온사인이 현란하고 거리를 질주하는 깨끗한 중형차들이 질서있게 차선을 지키고 거리를 걷는 사람들도 세련되어 보였다.건물의 외형까지도 첨단화된 미를 뽐내고 있었다.하기야 북경,상해에 이어 중국 3대도시이며 1인 평균 생산액이 전국 1위인데다 백년전부터 중국내륙으로 들어가는 교통요지였고 홍콩과 가깝다보니 그럴 것이었다. 광주는 중국의 역사에서 혁명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손문이 혁명을일으켜 ‘호법(護法)정부’를 세웠고 공산주의자들은 광주봉기를 일으켰다.광주봉기를 배경으로 쓰여진 앙드레 말로의 소설이 ‘정복자’이다.우리의 항일투사들도 이곳에 와서 크고 작은 자취를 남겼다. 그 대표적인 것이 황포군관학교(본래의 이름은 육군군관학교)이다.수많은 우리 항일투사들이 이 학교를 졸업했다. 황포군관학교는 1924년 1월 손문이 국민당과 공산당을 합작한 결과탄생했다.국민당측의 장개석이 교장을,공산당 측의 주은래가 정치주임을 맡았는데 그로 인해 학생들도 양분되었고 그곳에 재학중이던 한인청년들도 뒷날 임시정부와 광복군,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으로갈라서는 결과가 되었다.그들의 입학은 1924년의 3기생들로 부터 시작되는데 유명한 이는 박효삼(朴孝三)·왕자량(王子良)·김원봉 등이다.그밖에 남경과 무한에 있던 분교를 졸업한 이도 많다. 황포군관학교에는 우리 교관요원들도 있었다.청산리 전투에 참가했다가 러시아 유학을 하고 돌아온 양림(楊林.본명 金勳),1922년 의열단원으로 상해 황포탄 의거를 일으켰던 오성륜(吳聲輪),뒷날 만주에서 동북항일연군 간부로 활동한 최용건(崔庸健),의열단원이었다가 조선의용대 간부로 활동한 박효삼,이빈(李彬),양달부(梁達夫),김원봉,채원개(蔡元凱)등이다.님 웨일즈의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金山. 본명은 張志樂)도 교관이었다고 하나 연구가들의 실증은 없다. 취재팀은 호텔에서 아침을 먹고 군관학교를 찾아갔다.광주시를 관통해 흐르는 주강(珠江)의 제방을 따라 보리수가 싱그럽게 가지를 뻗치고 있었다.대절한 자동차를 페리에 싣고 20분쯤 걸려 도시의 동남쪽에 있는 장주도(長州島)로 건너갔다.섬 거의 전체가 해군부대 주둔지였는데 황포군관학교는 옛날의 모습 그대로 보존,복원되어 있었다.우리나라의 중고생들이 극기훈련,야영훈련을 가듯 남녀 학생들이 입영훈련을 받고 있다.김원봉이 생도시절 중국인 생도 등걸과 우정을 쌓으며 토론을 한 곳은 어디일까.필자는 그런 상상을 하며 강의실,생도 숙사,강당,연병장 등을 돌아보았다.발길을 돌려 중산대학을 찾아갔다. 아나키스트였던 김성숙(金星淑)과 김산이 졸업한 중산대학은 필자가 돌아본 십여개의 전통있는 중국의 대학들 가운데 건축미가 가장 돋보였다.새로 지어진 것이 아니라 옛날 것들인데 깨끗하게 보존되어고상하면서도 웅장한 품격을 뽐내고 있었다. □광주(중국 광동성)■이원규(소설가·동국대 겸임교수)
  • YS 정치재개 공식선언

    김영삼(金泳三·YS) 전 대통령이 19일 민주산악회 현판식에 참석,‘정치활동’ 재개를 공식 선언했다. 김 전 대통령은 오후 민산 광화문 사무실 현판식에서 “김대중(金大中)대통령과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이 나라를 망치고 있으며,정치·경제·사회·안보 모든 분야에서 총체적으로 국가적 위기에 처해있다”고 주장했다.그러면서 “김 위원장의 방한을 반대하는 1,000만명 서명운동은 애국·구국 운동이고,제2의 3·1운동”이라며 민산 재건의 당위성을 피력했다. 김 전 대통령은 특히 “과거 전두환(全斗煥) 독재정권 시절 민산 동지들이 앉아 죽는 길보다 서서 싸우는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지금도 전두환 독재정권이 집권하고 있을 것”이라고 전제한 뒤 “이제는독재자 김대중 대통령에 맞서 싸울 때”라고 독설(毒舌)을 퍼부었다. 현판식과 이어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축하 리셉션에는 한나라당 강삼재(姜三載)·박종웅(朴鍾雄)의원과 김수한(金守漢)·김명윤(金命潤)·박찬종(朴燦鍾)·신상우(辛相佑)·황병태(黃秉泰)·김허남(金許南) 전 의원 등전·현직 의원들이 대거 참석했다. 한편 YS는 20일 지난 번 학생들의 저지로 무산됐던 고려대 행정학과의 ‘대통령학’ 특강을 통해 대통령 재임기간을 회고하고 정국 현안에 대한 견해를 밝힐 예정이다. 박찬구기자 ckpark@
  • [해외 항일전적지를 찾아서] (10)美洲 거점 워싱턴DC·미디아市

    [필라델피아·워싱턴DC 김삼웅주필] 8월초 필라델피아시는 공화당전당대회 관계로 온 시가지가 시끌벅적하고 호텔방의 예약도 어려웠다.변두리 초라한 모텔에서 자고 오전 일찍 펜실베이니아주 미디아시에 위치한 서재필박사 기념관을 찾았다. 대지 1.5에이커, 건물 4,000평방피트의 이 건물은 서박사가 1925년에 입주하여 1951년 서거할 때까지 25년동안 조국의 독립과 근대화를염원하며 활동의 근거지로 삼아 기거했던 곳이다.이 유택은 1987년서박사기념재단이 구입하여 기념관 뿐만 아니라 한국이민 역사에 관한 도서실과 연구실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서박사가 쓰던 유물 가운데 역사적 유품은 이미 한국독립기념관으로이관되었으며 그밖의 유품들은 기념관에서 보관하고 있다는 이지영사무총장의 설명이다.유물중에는 서박사의 손떼묻은 성경책과 일기장이 전시돼 있고 1925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안창호 선생과 찍은 사진도걸려있다. 정원이 한국식으로 꾸며진 것이나 한국산 대나무를 심은것 등은 서박사의 조국사랑 정신을 기리는 것이라 한다. 서박사는 김옥균·홍영식 등과 갑신정변을 일으켜 18세 나이로 병조참판이 되었으나 정변의 실패로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해 워싱턴대학 의과대학에 입학,세균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으면서 미국과 인연을 맺었다.서박사는 1894년 갑오경장때 귀국하여 독립협회를 창립하고,1896년에는 ‘독립신문’을 창간해 국민의 독립정신을 드높이는한편 사대의 상징인 영은문 터에 독립문을 세웠다. 그러나 수구세력의 책동으로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3·1운동 후에는 한국문제를 세계여론에 호소하는 한편 ‘한인친구회(Friends of Korean)’를 조직,재미교포들을 결속해 독립운동후원회를 만들었다.그리고 상해 임시정부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외교위원장 자격으로 필라델피아에 ‘한국통신부’를 두고 활약했다. 1922년에는 워싱턴 군축회의에 독립을 청원하는 연판장을 돌렸고 1925년에는 호놀룰루의 범태평양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석,일본의 야만성을 폭로했다.독립운동으로 파산상태에 이르러 펜실베이니아대학에서강의하고 광복후 80세의 노령으로 미군정 고문으로 초빙되어귀국,노혁명가로 국민의 추앙을 받았으나 시국의 혼잡함속에서 세번째로 미국으로 건너가 여생을 마쳤다. 서박사의 미국내 독립운동 사적지로는 1914년 4월 필라델피아에서개최한 ‘한인자유인대회’의 장소와 1919년에 창설한 ‘한국통신부’건물을 들수 있다.한국통신부는 상해 임시정부 구미위원부의 산하인데도 불구하고 서박사의 노력으로 필라델피아에 본부를 두고 독자적인 조직으로 활발하게 대미선전 활동을 벌였다.1919년 한국통신부는 필라델피아 체스넛 1524번지 웨이트맨 빌딩 825호에서 ‘한국평론(Korea Review)’을 발행하면서 국제사회에 일본 식민통치의 부당성과 한국독립의 당위성을 선전했다. 서박사는 1920년 9월부터 한국통신부 바로 옆 체스넛 1537번지에 Philip Jaisohn Company라는 인쇄소와 문방구점을 운영하면서 ‘한국평론’을 발행하였다.8층 건물이었던 한국통신부 건물이 현재는 3층 건물만 남아 GAP outlet라는 의류체인점이 들어있다.인쇄소와 문방구가있던 건물도 신축되어 약품상이 입주해 있다. 서재필 이승만 조병옥 등 유학생과 임병직 선교사 등 150여명이 모여 ‘한인자유인대회’를 열었던 필라델피아 17가 리틀극장은 지금도여전히 연극 전용극장으로 이용되어 고색창연함을 보여준다.필라델피아 역사보존회가 승인한 역사보존물(제391호)로 지정돼 있다.서박사 일행은 한인자유인대회에서 임시정부 수립과 한국독립을 천명하고결의안을 채택한 다음 미국독립기념관까지 태극기 퍼레이드를 벌이고 한국통신부 설치를 결의했었다.서박사는 이 대회에서 의장으로 추대되었다. 필라델피아 미디아시 로즈 트리공원에는 서박사의 광복운동과 생애를 기리는 서재필박사 기념비가 세워져 이웃주민들의 발길을 멈추게한다. 대한제국 정부는 1880년대부터 대미외교를 중시하여 워싱턴시에 주미외교의 본산인 주미공사관을 설치했다.처음에는 박정양 공사가 워싱턴시의 스트리트 1513번지 3층 건물을 임대해 쓰다가 1891년 시 중심지인 15가 1500번지의 독립빌딩을 당시로는 거금인 2만5,000불을주고 매입, 공사관으로 사용했다. 현재 백악관에서 동북쪽으로 길게 뻗은 버먼트 에버뉴가 13 번가와교차하는 노건로타리에 위치한다.주소가 로건 15번지다.이 공사관은대한제국이 국권을 일제에 빼앗길 때까지 공관으로 사용하다가 강제합병과 함께 주미일본대사에게 넘어갔다. 대한제국 황제 이희의 명의로 등기되었던 이 건물이 1910년8월29일주미일본대사 우찌다에게 공사관 건물과 토지일체가 어떠한과정을 거쳐 넘겨졌는지는 미궁으로 남아있다. 소유권이 넘어가고 곧미국인 홀트에게 매각되어 현재는 개인소유 주택으로 사용중이다. 워싱턴 한인연합회에서는 1998년 이 건물의 매입을 시도했으나 예산부족으로 중단했다.한말 풍운과 함께 조국의 비극을 상징하는 유서깊은 이 건물을 현지 교민의 성금과 본국정부 지원으로 매입하여 사료관 등으로 사용했으면 한다.붉은 벽돌조 콘크리트건물로 상태가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영사관의 한미외교사료실장을 맡아 근현대 한미관계사의 사료를 수집·정리하고 있는 노령의 양기백 박사는 직접 현장을 안내하면서 이 건물의 역사를 증언한다. 워싱턴구미위원회는 1919년 상해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함께이승만이 대통령에 선임되면서 이승만이 프랑스 파리의 주 파리위원회와 필라델피아 대한민국 통신부를 통합, 워싱턴구미위원회(구미위원부)를 조직하고 김규식·이대위·임병직 등이 업무를 수행케하였다 워싱턴 구미위원회는 창설때부터 1922년까지 노스웨스트 H스트리트1314번지 콘티넬탈 드르스트 빌딩에 본부를 두고 외교활동을 벌였다. 워싱턴시 중심가에 있는 이 빌딩은 그후 철거되고 그 자리에는 1951년에 신축한 뉴욕 에버뉴 장로교회가 웅장한 모습으로 세워지면서 옛자취를 찾을 수 없게 되었다. 구미위원부는 1922년에 개최된 워싱턴 국제회의를 겨냥한 외교활동에서 별 성과를 올리지 못한 뒤로는 활동이 현저하게 위축되었으며본부도 몇차례 옮겨 다녔다.1927∼1931년 구미위원회 본부였던 파크로드 1310번지의 붉은 2층 양옥은 지금도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kimsu@
  • 10월의 독립운동가 이범윤선생

    국가보훈처는 1일 일제시대 러시아령 연해주에서 민족지도자로 활약했던 이범윤(李範允·1856∼1940) 선생을 ‘10월의 독립운동가’로선정했다. 1856년 경기도 고양군(현 서울시 동대문구 신설동) 사대부 집안에서태어난 선생은 47세인 1903년 8월에 간도관리사로 임명되자 충의대를조직,1904년 2월 러·일전쟁 때 러시아를 도와 일본군과 싸웠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 뒤 충의대를 이끌고 러시아로 망명,항일단체인 동의회와 창의회를 결성했다.또 3,000∼4,000명에 이르는 ‘이범윤 의병부대’를 만들었다.의병부대에는 안중근 의사가 우영장(참모중장)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의병부대는 1908년 7∼9월 두만강 하류의 경원·경성·회령 등에서수차례에 걸쳐 국내 진공작전을 전개,일본군에 타격을 주었다.안 의사의 의거를 계기로 만주·연해주의 의병 지도자를 결집,‘13도 창의군’을 결성하기도 했다. 3·1운동이 일어나자 예순이 넘은 나이에도 무장 독립운동단체인 ‘의군부’ 총재,서북간도 일대를 망라한 독립운동단체인 ‘광복군’단장을 맡았다. 그 뒤에도 많은 항일단체에서 활동하다 1940년 10월20일 노환으로 서거했다. 노주석기자 joo@
  • YS는 ‘아무도 못말려’

    김영삼(金泳三·YS) 전 대통령과 친분이 두터운 종교계·학계 인사들이 김정일(金正日) 북한 국방위원장의 답방 반대 서명작업을 추진하고 있는 YS를 말리고 나섰다. 박형규(朴炯圭)·서경석(徐敬錫)목사 등 7∼8명은 최근 모임을 갖고 YS의 언행이 역사흐름에 맞지 않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이들은 지난 14일 숭실대 이삼열(李三悅)교수를 김 전 대통령의 상도동 자택으로 보내 이같은 재야의 의견을 전달한 뒤 서명운동 작업에 대한 재고(再考)를 강력히 요청했다. 서명작업이나 규탄 궐기대회 등을 할 경우 김 전 대통령 자신뿐만아니라 나라도 혼란해지고 불행해진다는 게 이들이 전한 의견의 골자다. 이 교수는 15일 “대북정책에 대한 비판은 좋지만 규탄이나 서명작업은 역사적 흐름에도 맞지 않고 국민여론도 나쁘다는 점을 김 전 대통령에게 전했다”면서 “아울러 남북화해와 이산가족결합,평화체제수립은 역사의 대세이며 흐름이라는 점도 주지시켰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김정일 위원장의 답방은 필요하다”면서 “국민여망이큰 데 이를 저지한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전했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김 전 대통령은 “(서명작업이) 정의의 길이라면 1,000만명이 반대해도 나의 길을 갈 것”이라며 “반드시 그 목적을 달성하고 말 것”이라고 뜻을 굽히지 않았다고 한나라당 박종웅(朴鍾雄)의원이 전했다. YS는 또 서명운동에 대해서는 “국민의 70% 이상이 지지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 일은 제2의 3·1운동으로 절대로 굴하지 않고 나의 길을 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오풍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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