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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1세기 담론-생명을 말한다](7)함석헌선생의 ‘씨알사상’

    (7)박재순박사에 들어본 咸錫憲선생의 '씨알(아래아)사상'. ●함선생님은 ‘씨알(아래아)’(씨알)의 옛글자 ㅇ을 큰 나(하늘),ㆍ(아래아)는 작은 나,ㄹ은 둘을 관계짓는 역동성이라고 풀이 하셨는데 개개인을 하늘이라고 보신건가요. 하늘의 기운과 뜻이 씨알 하나에 맺혀 있다.씨알 하나가하늘과 맞닿아 있다.사람 속에 하나님의 씨앗이 있다.이런뜻이지요. ●함선생님이 지금 살아 계신다면 생명운동을 하실 거라는생각이 듭니다. 선생님은 생명(生命)을 ‘생의 명령’이라고 풀이하신 적이 있습니다.‘살까’‘말까’가 아니라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이라는 거지요.삶의 기본 원리는 ‘스스로 함’(自由)에두었습니다.스스로 하는 존재니까 삶은 새롭고 다양하면서도 하나로 통한다고 보셨습니다.동양의 무위자연과 서양의주체적인 사상이 융합돼 있습니다. ●선생님은 삶 자체를 싸움으로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생명의 조건을 유지하기 위해 주변환경과 부단히 싸워야 한다는 건 삶 속에서 갈등과 투쟁을 일종의 숙명으로 보신 건가요? 숙명이 아니고 ‘스스로함’에 대한 거스림과 반생명에대한 맞섬 이지요.선생님은 새가 나뭇가지에서 노래할 때지구의 중력과 싸움이 있어서 노래가락이 나온다고 봤습니다.순간순간 죽음과 싸움으로써 삶이 존속하고 삶 자체가솟구쳐 오르는 생명의 본래 모습을 지키려는 부단한 싸움이라고 보신 거지요.이 싸움을 그치면 죽음 입니다.사회적인삶에 있어서도 밀고 당기는 싸움을 통해서 공동체적 삶을유지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반생명과 맞섬,조화를 이루기 위한 싸움과 평화가 어떻게양립 할까요. 벌레 한마리가 상처를 입고 있어도 측은지심이 일어 나는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라고 했습니다.생명의 아픔에 반응하고 함께 하는 마음이 우주적으로 있다고 보셨지요.삶에는근원적으로 하나임을 느끼게 하고 큰 조화를 이루고 서로어울리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씨알’즉 생명은 하나님(전체,영원)과 맞닿아 있으므로 자기 안에 불멸의 힘이 있습니다.이 불멸의 힘을 깨닫고 마음을 열게 하는 데는 비폭력이라야 합니다.비폭력 투쟁은 모든 인간(상대방을 포함)에게빛,즉 양심이 있음을전제한 싸움입니다. ●불멸의 힘과 관련해 선생님 글중에 [클로버 씨앗 하나가소와 말의 내장을 통과하고 똥 속에서도 죽지 않고 있다가싹이 터,온 들을 푸르름으로 꾸민다’]는 대목이 인상적 입니다. 소나 말의 내장은 험난한 역사를 비유한 것입니다. ●힘 없는 민중,비폭력 투쟁이 끝내는 이긴다는 뜻이겠지요. 비석에 새겨진 역사나 문화는 죽은 역사,죽은 문화입니다. 그것은 지배자의 기록이기 때문입니다.[산역사 산문화를 보려거든 민중 속으로 들어가라.]50년 전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1970∼80년대에 유행한 민중담론을 앞지른 것이지요.여기서 영감을 얻어 민중신학이 나왔고 세계적으로 붐을일으켰습니다. ●씨알 하나에 수억년 생명의 역사가 응축돼 있다는 대목은요즈음 생명공학에서 말하는 유전자 이야기와 상통 합니다. 씨앗이 대개 둥글다는 관찰도 생태학자들이 말하는 생태순환론과 맥이 닿고요. ‘네 속에 5천년 역사가 있고 무궁무진한 미래가 있다’는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씨알 하나,한 생명이 그만큼 소중하다는 뜻이지요.둥글기 때문에 그 착지점은 한점,즉 많은 공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의미 입니다.묘하게도 그 후 문익환,김지하,박노해 등이 모두 감옥에서 창틀이나 담장 틈새에서 피어난 풀씨를 인연으로 생명의 힘을 깨닫고 생명사상을 말하게 되는데 이 씨앗이 주는 어떤 영감이 있는 것같아요. ●한 점 입지(立地)는 ‘맨사람’과 연결되는 것 같은데 지금은 누구도 ‘맨사람’일 수가 없습니다. 그 시절만 해도 우리 사회가 농민 노동자가 절대다수여서그런 말씀이 자연스러웠습니다.대통령이든 죄수든 사회적규정을 벗어 던지고 자기를 들여다 보면 씨알이 되겠지요. ●태평성대였더라면 노자 같은 분이 되셨을 것 같아요. 씨알을 억압하는 정치·사회적 구조에 대한 저항이지 정치·사회적 욕심은 없었습니다.성공은 못했지만 농장 공동체를 여러번 시도하시기도 했고요. ●‘씨알(아래아)의 소리’ 창간호에 [천하 씨알(아래아)이다 소리를 내도룩 하기 위함]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선생이살아 계신다면 요즈음 세무조사를 둘러싼 언론탄압 논쟁에대해 뭐라고 하실까요? 선생님은언론자유를 매우 소중하게 여기셨습니다.‘씨의 소리’ 자체가 언론자유를 함축하고 있는 것처럼.아까그 말씀도 이런 전제가 있습니다.[씨알이 나라의 주인이다. 정부나 언론사가 망해도 씨알은 영원히 남는다.씨알을 억누르는 지배층의 소리만 요란하고 씨알은 침묵을 강요 당한다.] ●언론의 자유지 언론권력의 자유가 아니라는 말씀이군요. 그렇지요.씨알의 언론자유거나 씨알을 대변하는 언론자유지 씨알의 뜻을 왜곡하고 기득권의 이익을 대변하는 언론자유가 아닙니다.그것은 이미 언론이 아니니까요. ●선생의 유명한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의 ‘생각’과데카르트가 말한 ‘생각’은 어떻게 다를까요. 요즈음 생태학에서는 데카르트를 자연에 대한 인간,여성에 대한 남성,감성에 대한 이성의 이분법적인 우위 내지 지배문명의 단초를 연 것으로 보거든요. 함선생님은 생각을 ‘하는 생각’과 ‘나는 생각’으로 나누셨습니다.여기서 ‘나는 생각’은 일종의 영감(Inspration)이고 ‘하는 생각’이란 이성적인 것으로 볼 수 있어 결국 서양 철학과 동양철학이 융합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체와 하나의 조화 철학이군요. 그렇지요.함선생님의 생명사상은 개인주의적,생물학적 생명론이 아니라 민족과 민중단위의 역사적 삶에서 피어난 주체적 사상입니다. △함석헌선생 연표. ▲1901년,평북 용천에서 태어남 ▲1919년 3·1운동 참가,오산학교 입학,스승 이승훈,유영모 만남.▲1923년 동경유학,첫 수감,1924년 동경사범학교 입학 ▲1928년 귀국,오산학교 역사교사 ▲1930년 오산학교 ML당 사건으로 두번째,1940년 세번째,1942년 네번째 수감 ▲1976년 3·1 구국선언 사건으로 여덟번째 수감,1977년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인권을 위한 협의회 창설,한국인권운동연합회 의장 ▲1979년 10·26후 YWCA 위장결혼 사건으로 아홉번째 수감,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1980년 가택연금,‘씨 의 소리’폐간 ▲1985년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1987년 암으로 입원,1988년 서울평화올림픽위원장으로 추대,‘씨 의 소리’ 복간 ▲1989년별세(89세)△박재순 박사. ▲1950년생.▲1974년 서울대학교 철학과 졸업 ▲1978년 한국신학대학교 신학과 1978년 동대학교 대학원 졸업 ▲1994년 한국신학대학교 신학박사 ▲한국신학연구소 번역실장,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소 연구실장 역임 ▲저서 민중예수운동과 밥상공동체’‘민중신학과 씨알사상’‘한국생명신학의 모색’외 5권 ▲번역 도로테 죌레의 ‘사랑과 노동’대담 김재성 논설위원 jskim@. * ‘씨알’ 4·19정신 표상 암흑기의 횃불. ‘씨알’은 함석헌(咸錫憲)선생의 시,역사철학,종교,정치,민족 사상을 일관하는 단어다.선생은 일평생 ‘씨알’을 화두로 삼았다.민족의 얼이 짖밟히는 것을 참지 못해 독립투사로 나섰고 ‘씨알’의 자유가 억압되는 것을 보고만 있을수 없어 민주 투사로 나섰다.선생의 시는 ‘씨알’의 노래요 선생의 역사철학은 한 알의 ‘씨알’이 섞어서 수많은‘씨알’로 다시 태어나는 역사를 이론화한 것이다. ‘씨알(아래아)의 소리’는 4·19 10주년인 1970년 4월에 창간됐다.그래서 시종일관 4·19 정신을 이어 받았고 5·16군사정권에 저항했다. 4·19가 씨알의 부활이라면 5·16은 씨알의 짓밟음이기때문이다. 선생은 ‘씨알(아래아)의 소리’를 내는 목적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하나는 한 사람이 죽는 일입니다.씨알의 속에는일어만 나면 못 이길 것이 없는 정신의 힘이 있습니다.말중에 가장 강한 말은 피로써 하는 말입니다.전체 씨알을 봉기케 하는 데는 피로써 말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둘째는 유기적인 공동체가 생겨야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혼자서는 못삽니다. 사람이 강해지는 것도 이 때문이요, 약해지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평소에 약하던 사람도 여럿이 뒷받침해 주면놀라운 용기를 얻어 보통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을 하게되고 반대로 아주 용감하던 사람도 자기가 감옥에 갇힌뒤어린 것들이 길가 헤맬 생각을 할 때 그만 간장이 녹아버립니다.그러므로 악과 싸우려면 개인 플레이를 해서는 안됩니다.] ‘씨알(아래아)의 소리’는 끝없는 탄압과 무수한 칼질을당했다. 그래도 이 연약한 ‘씨알(아래아)의 소리’를 매개로 민주인사들은 장작불처럼 열정을 모아 겨울공화국을 녹였다.
  • [공직자 에세이] 열린 마음으로/ 나라위한 헌신의 역사 바라알기

    인간이 살아가는 삶의 유형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있다.하나는 자기와 가족 중심의 평범한 삶이요,다른 하나는 범위를 넓혀 타인이나 국가와 민족 등 사회공동체를 위해 자신을 헌신하는 의로운 삶이다. 우리는 단일민족으로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문화적 경험과 전통을 오랫동안 공유해왔다.그 결과 어느 나라보다도 민족적 정체성이 강하다.민족적 정체성은 국가위기 때나 달성해야 할 공동의 목표가 설정되었을 때 놀라운 응집력과 헌신적인 노력으로 발현된다.일제치하 국권상실기나 6·25전쟁과 같은 국난시에 나라를 위해 희생한 분들이 많은 것도이에 연유한다. 국가보훈은 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분과 그 유가족에 대한정신적·물질적 예우를 통해 우리 사회에서 타인과 공익을위한 삶이 얼마나 고귀한 가치인가를 인식케 하는 성스러운영역이다. 2주 전 국가보훈처장에 부임하면서 개인적 영예에 앞서 국민통합의 정신적 기반을 제공하는 보훈업무의 중책을 맡게된데 대해 무거운 책임을 느꼈다. 필자는 보훈가족의 영예로운 삶을 보장하기 위해 최선의예우시책을 펴나가면서 나라 위한 희생이 사회통합과 국가발전의 정신적 구심점이 되도록 우리 사회에 보훈문화를 확산시키는 데 조직의 모든 역량을 투입할 생각이다. 토인비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역사는 숱한 시련과 반성,그리고 성찰의 교훈이 누적되면서 발전한다.우리 민족은 외세의 침략 등과 같은 수많은 도전과 위기에 맞서 강인하게성장해 왔으며,한민족공동체의 맥을 반만년 동안 이어낸 자랑스러운 응전과 진보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오늘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82돌을 맞는 날이다.20세기초 식민지배하에 있던 세계의 많은 민족들이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우리 민족처럼 임시정부를 수립해 27년 동안이나 체계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한 예는 찾아보기 힘들다.헌법은 전문에 3·1운동으로 건립된 임시정부의 법통을 대한민국이 계승한다고 명시,단절된 민족사가 아닌 정통성을 이어지게 한 존재로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역사적 위상을 평가하고 있다. 요즘 과거 식민지의 아픔을 겪었던 아시아국가들 사이에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에 대한비난여론이 비등하다.이러한 때일수록 우리의 역사를 제대로 알고 선열들의 위국헌신의 정신을 기림으로써 이러한 정신이 단순히 잊혀져 가는과거가 아니라 현재에 되살아나고 미래를 준비해 나갈 수있는 기본가치로 자리매김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수많은 국난을 극복해냈던 선열들에 대한 최소한의도리이고, 우리의 역사와 정신적 자산을 후손들에게 올바르게 물려주는 길이 될 것이다. 이재달 국가보훈처장
  • [대한광장] 우리의 혼은 살아 있는가

    “국학(國學)과 국사(國史)는 혼(魂)이며, 경제(錢穀)와군대는 넋(魄)이다.국학과 국사가 망하지 않는다면 그 나라도 망하지 않는다.오호라! 한국의 넋(경제와 군대)은 이미 죽었으나,혼(국학과 국사)은 살아 있느냐,죽었느냐.” 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이며 대한매일신보의 주필이었던 독립운동가 박은식(朴殷植,1859∼1926) 선생의 저서,‘한국통사(韓國痛史,1915,上海)’ 결론편의 절규이다.민족혼의 정수(精髓)인 국사만 제대로 살아 있으면,어느 날인가 반드시 나라를 되찾을 수 있다는 신념에 찬이 책이 요원의 불길처럼 보급되어 마침내 1919년 3·1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조선총독부는 어용사학자들을 동원하여1922년 이른바 ‘조선사 편수회(편찬위원회)’를 창설하였고 일제의 한국 침탈을 정당화하기 위한 ‘조선사(37책)’와 ‘조선사료총간(20종)’을 편찬 간행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은 의도적으로 우리 역사를 왜곡 축소하며 4색당쟁등 부정적인 측면은 크게 부각시키는 등 이른바 ‘조센징’으로서의 수치심과 환멸을 북돋았다.사대주의가 마치 우리나라의 국시(國是)이었던양 소개하며 한민족 구성원들에게 자조 자학적인 “쇼가나이닌겐(할 수 없는 인간)”들이라는 ‘엽전의식’을 심기에 혈안이었다.그 잔재가 아직도살아 있어 오늘날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 사태를 불러들였다고 말하는 이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다. 그래서 박은식은 국사가 망하면 나라가 망한다고 했다.이토록 역사의식과 조국광복운동에 투철했던 박은식도 이역만리 낯선 땅에서 향년 67세로 통한의 한평생을 마감할 때는 임시정부의 장래만 걱정했지 자기 사후(死後) 준비는제대로 못했던가 보다.상해 정안길로(靜安吉路)의 만국공동묘지에 묻힌 약 4분의1평 규모의 평판 무덤 위에 자기이름 석자도 제대로 남기지 못했다.신문지 반 조각만한 시멘트 평판에는 단지 영문으로 ‘PAH EUM SIK’이라는 세글자만 새겨 있어서 철자법과 발음을 보아서는 도저히 박은식 대통령의 무덤으로 식별해낼 수 없었다.그가 타계한지 60여년이 지나도록 공동묘지의 한구석에 버림받아 온것이다.지난 89년 8월 필자와 연세대 안병준 교수 등이 은밀히 그의 묘지를 찾아,우여곡절 끝에 ‘朴殷植’이란 한문 이름을 새겨 넣을 수 있었다.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사태를 보는 우려에 찬 국민들의시각은 일차적으로 일본 군국주의의 부활이지만,더 깊이파고들면 우리나라에 과연 국사교육이 있는가라는 자성(自省)이 싹트고 있다.구한말까지는 사대주의에 밀려,그리고일제 치하에서는 식민사관과 반도사관에 찌들려,조국광복이후 군사 독재 정권시기 동안은 이데올로기 냉전체제에억눌려 우리는 ‘국사와 국혼’을 잃어버려 온 세월의 연속이었다. 민주화가 시작되면서부터는 ‘세계화’ 드라이브에 가리어 우리 겨레의 혼인 국사의 중요성이 더욱 바래지고 작아지고 있으니 웬일인가.민족문화의 외연(外延)을 더 넓히고경제를 세계화하려고 한다면,그럴수록 민족중상론(中傷論)에 찌든 우리 역사를 바로 세우고 국민의 혼과 넋을 넉넉하게 길러주어야 한다. 역사가 짧은 구미제국의 세계화 사관에 연연하다가 민족의 혼을 손상시키는 우(愚)를 범해서는 곤란하다.민족의넋인 경제와 국방을보강하기 위해서 세계화가 필요할수록,민족의 혼을 불어 넣어 줄 국사교육은 더욱 강화되어야한다.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global)이라 하지않는가. 우리 스스로 역사 바로 세우기를 소홀히 할 때 진정한 세계화는 불가능하다.한때 일제(日帝)의 침탈로 고통받은 바 있던 중국,북한 등 동아시아 각국과 연대하여 일본 정부에 대하여 당당히 역사교과서 재검정을 요구하고,세계 여론에 제국주의적 군국사관의 재등장을 경고하여야한다. 우리 스스로는 제7차 교육과정상의 잘못된 국사교육시간단축과 도처에 만연한 국사 홀대정책을 전면 재검토해야한다.무엇보다도 우리 정치,경제,사회,문화 곳곳에 찌들어있는 식민사관과 반도사관에 대한 총체적인 반성과 청산작업이 계속돼야 한다.그 길만이 “우리의 혼은 살아 있는가,죽었는가”라고 묻는 박은식 선생에 대한 대답이라고본다.(임시정부 수립 82주년에 부쳐) [김성훈 중앙대교수·전 농림부장관]
  • 정부 日교과서 왜곡 대응책 고민

    일본의 왜곡된 역사교과서 검정 통과로 본격화된 한·일외교전은 양국 정부의 담화 발표와 데라다 데루스케(寺田輝介) 주한 일본대사의 외교부 초치로 1차전을 마치고 ‘숨 고르기’에 들어간 양상이다. 일본측의 돌출 행동이 없는 한 2차전은 당분간 벌어지지않을 전망이다.정부는 지난 4일에 있었던 관계부처 대책회의에서 교과서 내용에 대한 정밀 검토가 끝난 뒤 중·장기대책을 세우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정부는 휴전기간 동안 새로운 대책을 모색하고 있다.한승수(韓昇洙) 외교부장관은 5일 저녁 공노명(孔魯明) 전 외무부장관,이어령(李御寧) 이대 석좌교수(전 문화부 장관),정재정(鄭在貞) 서울시립대 교수 등 일본 전문가들을 만나조언을 구했다. 하지만 정밀 검토 후 나올 정부의 대응 방안이 극단적인조치로 이어지진 않을 것으로 보인다.정부로서는 날이 갈수록 들끓어오르는 국내 여론을 무시할 수도 없는 형편이지만 우리의 2대 교역국이자 한반도 안정에 영향을 미치고있는 일본과 소원한 관계에 접어드는 것이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결국 정부가 취할 수 있는 대책으로는 항의 사절단의 파견,재수정 요구 정도로 압축될 것으로 예상된다.항의 사절단의 파견은 국회의원을 비롯한 학계,시민단체 대표들이일본을 방문,모리 요시로(森喜朗) 일본 총리와 마치무라노부타카(町村信孝) 문부과학상 등에게 한국민의 우려와유감을 직접 전달하는 수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재수정 요구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역사교과서의 검토 결과를 바탕으로 이뤄질 것으로 관측된다.국내 국사학계는우리 정부가 재수정을 요구할 항목으로 ▲야마토정권의 임나(任那)일본부 경영설 ▲조선에 대한 군제개혁 지원 ▲한일합방 ▲3·1운동 ▲관동대지진 등을 꼽고 있다.하지만고노 요헤이(河野洋平) 일본 외상이 중의원 답변을 통해“검정절차가 완료됐기 때문에 앞으로 바뀔 일은 없다”고단언한 데서 보듯 현재로서는 일본이 우리의 재수정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고 버틸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이 경우한·일관계가 어디로 흘러갈지 귀착점을 짐작하기 어렵다. 홍원상기자 wshong@
  • [대한광장] 역사왜곡 교과서를 바라보며

    한국과 중국 양국민의 우려대로 일본의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하 ‘모임’)이 제출한 역사교과서가문부과학성 검정을 통과해 2002학년도부터 사용될 예정이다.‘모임’측의 교과서는 고대사 부분에서 이미 폐기된 지오래인 임나일본부설을 되살린 것을 비롯, 고구려와 백제가570년 이후 조공을 바쳤다는 해괴한 설들을 싣고 있으며,근현대 부분에서도 일제강점 후 철도·관개 시설들을 정비했고,태평양전쟁 초기 일본군이 연합군을 격파해 오랫동안구미 식민지 지배하에 있던 아시아인들에게 용기를 주었다는 후안무치한 주장을 펼쳐 아시아인들을 분노케 하고 있다. 이런 영향 때문인지 기존 교과서 7종도 ‘침략’대신 ‘진출’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종군위안부 사항을 삭제하는 등지난 82년도 교과서파동 당시로 회귀한 듯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지난 82년에도 침략을 진출로,3·1운동을 ‘폭동’으로 기술한 왜곡 교과서가 문제가 되어 지금과 같은 반발이 크게 일었고,그 결과 우리는 전국민적 성금으로 독립기념관을 건립하기도 했다. 이런역사왜곡에 대해 한·중 양국정부는 82년처럼 항의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반발하고 있으나 마치무라(町村)문부과학상은 “교과서 검정에서 집필자의 역사인식 등에 대해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은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보장한 헌법규정에 저촉되기 때문에 국가는 특정한 역사인식이나 역사사실 등을 확정하려는 입장에서 행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해 이를 사상과 양심의 자유 문제로 호도하면서 검정을 취소하지 않을 뜻을 분명히 했다. 문부과학상의 놀랄 만한 이런 발언은 2차대전 종전후 미국이 일본을 반공의 배후기지로 삼는다는 미명 아래 천황제해체를 비롯한 전범체제를 완벽하게 청산하지 못했고,그 결과 군국주의 세력이 여전히 일본의 주류로 행세하기 때문에나올 수 있는 궤변이다. 반면 같은 패전국인 독일은 일본 못잖게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보장하는 선진국가이지만 나치즘의 선전은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이는 나치주의자의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유태인을 비롯한 유럽 각국인에게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준범죄행위로 인식하기 때문이다.같은 침략을 놓고 일본은 아시아인들에게 용기를 주었다는 속내를 가진 데 비해 독일인들은 고통을 주었다고 참회하는 데서 나온 상반된 반응이다.황국사관은 나치즘과 마찬가지로 타국민은 물론 자국민에게도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준 정신병이자 범죄행위일 뿐이다. 이런 점에서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본부를 둔 유대인 인권단체인 시몬비젠탈 센터가 지난 3일 일본 역사교과서가 검정을 통과한 데 대해 유감을 표시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이는 나치즘의 피해자인 유대인 인권단체가 ‘모임’측의 역사교과서를 범죄행위의 옹호로 보고 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런 범죄행위로 큰 고통을 겪은 우리가 일본의 교과서왜곡 문제를 목소리 높여 규탄하는 것은 당연하다.그러나 이런 일과성 흥분보다는 근본적 대책이 절실히 필요한데,그것은 바로 우리의 역사를 사랑하고 국사교육을 강화하는 것이다.이른바 문민정부 들어 놀랍게도 대학에서 국사가 교양필수에서 교양선택으로 강등되면서 한국사가 합법적으로 사라져갔다.반만년 역사를 자랑하는 이땅의 대학생들은 제나라역사를 배우지 않고도 졸업할 수 있게 된 반면, 200년 역사의 미국은 거의 모든 대학에서 미국사를 배우지 않으면 졸업할 수 없게 되어 있다는 점에서 두드러지게 대비된다. 다인종 국가 미국을 하나로 묶고 세계를 미국화하는 힘은미국사에 대한 사랑과 교육에서 나오는 것인데,우리는 세계화라는 미명 아래 우리 국사를 경제적 잣대 하나로 밀어내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을 시정하고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이 우리 역사에 대한 사랑과 국사교육 강화로 나타난다면 이것이야말로 황국사관을 전파하는 일본 극우 세력이 가장 두려워하는결과일 것이다. 이덕일 역사평론가
  • 역사왜곡 日교과서 검정통과 파장/ 역사왜곡 대책 연구 실태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과 관련,국내의 전문적·체계적 대응이 미흡하다는 지적이다.우리 역사 및 현실에 대한 왜곡및 잘못된 이해를 바로잡기 위해 범정부적 전담기구가 마련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현재 일본의 교과서 왜곡을 분석하는 기관은 교육인적자원부 산하 한국교육개발원의 한국관시정연구실(실장 李讚熙)이 유일하다.외교통상부·문화관광부·국정홍보처·국가정보원 등에서도 관여하지만 한계가 있다. 일본의 교과서 검정 때만 여론에 밀려 반짝 목소리를 높이기보다는 학문적·외교적으로 체계적 대응이 필요하다.일본의 교과서를 그대로 인용해 자국의 교과서를 만드는 나라가아직도 많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시정연구실은 지난 82년 범정부 차원에서 ‘한국 바로알리기 사업’의 일환으로 발족됐다.당시 일본은 침략을 ‘진출’,3·1운동을 ‘폭거’,임진왜란을 ‘출병’,창씨개명 강요를 ‘권장’ 등으로 왜곡,전국을 들끓게 했었다.그 결과독립기념관이 세워졌다. 하지만 연구실은 교육개발원의 한 부서일 뿐이다.연구위원은 이 실장(역사 담당)과 손용택(孫龍澤·지리〃)·정영순(鄭永順·역사〃)박사 등 3명이 전부다.연 예산은 5,000만∼6,000만원이었다.올해 처음 1억1,000만원이 책정됐다. 연구실의 한 관계자는 “현 인원과 예산으로는 일본쪽만을대응하기에도 벅차다”면서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학술적인 접근만이 아닌 범정부 차원에서의 대책이 절실하다”고강조했다.연구인력의 대폭 강화 필요성도 지적했다. 박홍기기자 hkpark@
  • 4월의 독립운동가 유림 선생 선정

    국가보훈처는 2일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낸 단주(旦洲)유림(柳林) 선생을 광복회,독립기념관 등과 공동으로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발표했다. 1894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난 선생은 1911년 대구와 안동을 오가며 한편으로는 계몽운동을,다른 한편으로 비밀결사를 조직,항일운동을 했으며 3·1운동이 일어나자 안동 임동면 장터에서 협동학교 학생들과 만세시위를 주도하기도 했다. 이후 1920년 상하이(上海)에서 신한청년단에 가입해 활동하다 베이징(北京)으로 옮겨 신채호 선생을 도와 잡지 ‘천고’(天鼓)를 발행했다.이 때 선생은 무정부주의를 독립운동의 이념으로 수용했다.1931년 ‘원산 흑색사건’으로 붙잡혀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42년 10월 충칭(重慶) 임시정부에 조선무정부주의자 연맹 대표로 참여했고 임시 의정원의원,외교위원회 연구위원,선전위원회 선전위원,무임소 국무위원 등을 지냈다.1945년귀국한 선생은 ‘독립노동당’을 결성하고 ‘노동신문’을창간,노농대중의 계몽과 권익보호에 힘쓰다 1961년 4월1일68세를 일기로세상을 떠났다.정부는 1962년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노주석기자 joo@
  • 역사왜곡 日교과서 검정통과 파장/ 수정부분과 문제점

    3일 발표된 2002학년도 일본 중학교용 8개 역사교과서 검정결과 가장 문제가 된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측 교과서(후소샤·扶桑社) 발행내용 일부가 수정·개선되기는 했으나 자국중심주의적 식민사관에 입각한 역사전반의 왜곡된 시각은 여전한 것으로 나타났다. ■문제점 검정후의 ‘모임’측 교과서는 종군위안부 문제를 한줄도 다루지 않는 등 일제의 가해행위 사실을 최소화하고 있다.조선의 군제 개혁지원을 조선의 근대화와 독립을 위한 것으로 기술하는 등 기본적으로 보수·우익적 사관에 사로잡혀 있다. 일본의 대외 팽창정책과 침략전쟁은 긍정적으로 서술한반면 일본에 불리하거나 부정적인 사실은 외면하기 일쑤다.일본의 우월성을 부각하기 위해 한국을 비롯한 타국의 역사는 자의적으로 폄하하고 있다. 야마토 조정의 ‘임나’ 경영을 사실인 양 크게 취급하고러일전쟁·태평양전쟁을 일본이 황인종을 대표해 백인종과 싸운 것으로 왜곡했다.또 ‘대동아전쟁’이란 용어를그대로 사용하는가 하면 이 전쟁의 목적이 아시아를 구미의 지배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즉 한국과 중국 등이 강력하게 항의한 부분은 표현의 강도나 문구 일부 등을 수정·개선하되 기본적인 역사인식은철저히 고수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한편 종군위안부 문제는 기존 7종 교과서도 이전보다 대폭 축소해 다뤘다.오사카(大阪)서적 등 4개 교과서가 이부분을 삭제했고,데이코쿠(帝國)서원·시미즈(淸水)출판등 2개 교과서는 ‘강제성’을 모호하게 하거나 완화해 표현했다. 일본측은 이에 대해 중학생에게 종군위안부 문제를 가르치는 것이 적절치 않다는 집필자 스스로의 판단이라는 설명을 내세우고 있다. 반면 니혼(日本)서적은 유일하게 이전 교과서보다 ‘강제성’을 강조해 눈길을 끌고 있다. 일본 중학교 역사수업 시간이 주 4시간에서 3시간으로 단축됨에 따라 8종 교과서 모두 현행 교과서에 비해 한국 관련 내용이 전반적으로 축소·완화된 것으로 나타났다. ■수정된 부분 ‘모임’측 교과서 검정 신청본에 들어있던‘한반도는 일본에 끊임없이 들이대고 있는 흉기’ ‘일러전쟁에서의 승리에 의해 중국이나 조선 등 아시아제국이근대국가를 지향하는 민족주의에 처음으로 눈을 떴다’는등의 극단적이고 자의적인 문구가 삭제됐다. 또 ‘한일합방’대목에서 ‘국제관계 원칙에 따라 합법적으로 이루어졌다’는 부분은 ‘무력을 배경으로 한국내 반대를 누르고 병합을 단행했다’는 표현으로 대체했다. 일본의 만주점령·중국침략·태평양전쟁 등과 관련한 정당화·미화 부분도 상당 부분 삭제되거나 완화됐다.토지조사의 강제성과 황민화 정책,조선인의 반발,강제동원 등 식민지 지배 당시의 가혹 행위도 일정 부분 보완했다. 기존 7종 교과서에서는 강화도조약 체결의 강제성,한일합방과 한국인의 저항,식민지 시대의 가혹 행위,3·1운동 피해,관동대지진 피해 등 한국인 관심 부분이 이전보다 추가됐으나 완곡한 표현이 주를 이뤘다. 일부 교과서는 역사인식의 중요성(日本書籍·帝國出版)을강조하고, 대동아공영권 구상의 허구성(日本書籍)을 폭로하는 등 전향적인 자세를 보였다. 이순녀기자 coral@
  • 한국사 왜곡 백태/ (상)아시아 7개국 경우

    한국교육개발원이 세계 14개국의 교과서를 정밀 분석한결과 한국 역사에 대한 왜곡 및 잘못 게재 정도가 심각한것으로 드러났다.조사에 포함되지 않은 나라들도 비슷할것으로 생각된다.교육개발원이 조사한 국가들을 아시아와유럽으로 나눠 우리 역사 왜곡사례를 시리즈로 살펴본다. ■중국 초·중 ‘중국역사’‘세계역사’교과서 모두 한국최초의 고대국가인 고조선은 전혀 언급하지 않은 채 마치최초의 국가가 고구려인 양 서술하고 있다. 상해판 등의‘역사’교과서는 공통적으로 ‘발해는 독립된 국가가 아닌 당왕조 내 하나의 지방정권’으로 규정했다.고급 중학교 ‘세계 근대현대사’,상해판 ‘역사’교과서는 3·1운동의 발발 요인을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아닌 ‘고종의독살설’이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처럼 왜곡했다. 한국전쟁에 대한 평가도 4개 출판사 ‘중국역사’교과서가 대체로 ‘항미원조전쟁은 승리를 거두었다’라고 주관적으로 적었다.‘중국역사’ 제4권 초급중학과본의 경우,한국전쟁이 북침에 의해 발생한 것처럼 서술했다. ‘세계역사’제1권 초급중학과본(98년판)에서는 ‘조선인민은 옛날부터 조선반도에 살고 있었다.기원전후 시기에걸쳐 조선반도 북부지역을 통치했던 것은 고구려 노예제국가이다(56쪽)’고 서술,중국 동북지방의 광대한 영토를차지했던 고구려를 언급하면서 조선반도 안의 작은 나라인것처럼 왜곡했다. 고구려를 조선반도 북부지역의 국가로 축소시킨 점은 상해판 초·중 ‘역사’,사천판 초·중 ‘세계역사’ 교과서도 마찬가지다.‘세계역사’에서는 또 ‘많은 학자들은 조선어를 연구하여 중국어와 결합시키면서 28개의 자모를 제정했다. (59쪽)’고 기술,세종대왕의 과학적·독창적인 한글 창제를 왜곡했다. ■태국 고교 3학년1학기 사회 교과서(98년판)에는 ‘일본은 불교·서예·젓가락 사용법·한자 등 중국의 문화를 한국을 경유해 받아들였다.(131쪽)’고 기술했다.한국은 단지 중국의 문화를 일본에 전파하는 교량 역할만 했다는 일본 식민사관의 영향을 보여주는 부분이다.또 군부와는 관계없는 이승만 대통령을 ‘8·15 해방 이후 남한은 군부지도자를 최고 통치자로하는 체제를 채택했다(147쪽)’고기록했다. 교육부 학술과가 펴낸 중 2학년용 사회과 교재에서는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한반도가 남한과 북한의 두나라로분리된 사건은 1953년 7월27일 일어났다’고 한 내용 중 38도선은 45년 8월15일 직후이며 53년 7월27일은 남북정전협정이 체결된 날을 잘못 서술한 것이다. ■필리핀 아시아의 역사(98년판)에서는 일본의 식민사관인임나일본부설을 그대로 인용, ‘신라의 금관에서 볼 수 있는 곡선 모양의 보석들은 일본 제국 상징의 흔적이었다(60쪽)’‘야마토 정권의 천왕은 정복자로서 한국에 왔었으며일본의 통치는 668년 한반도가 권력조직을 확립하기까지지속되었다(65쪽)’고 기술하고 있다. 특히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합리화하는 의도를 고스란히담기도 했다.‘일본은 자유로운 새 질서를 수립함으로써위에 언급한 나라들에 평화와 안전을 가져다주려 했다.(276쪽)’‘진보와 아시아 대륙 및 전세계에 대한 강력한 지도력의 또다른 단계를 위한 최초의 발걸음일 뿐이다(281쪽)’ 등이 예이다.심지어 ‘이홍장은 1885년 이토 히로부미와의 협정 이후 한국을 근대화시키기 위해 노력했다(302쪽)’는 등의 내용을 통해 조선이 중국의 식민지였던 듯이설명했다. 단일 민족인 우리나라에 대해 ‘북한의 주민들은 몽골혈통이기 때문에 키가 크고 건강하며 혈색이 창백하다.반면에 남한 주민들은 혼혈이며 키가 작고 혈색이 나쁘지 않다’는 엉뚱한 내용도 있다.북한은 몽골인종,남한은 남방계통으로 분류한 것이다. ■인도네시아 중학교 역사 교과서(95년판)에서는 ‘1894년일본은 중국을 침공했다. 중국은 일본에 쉽게 항복했는데그 결과 중국은 대만과 코리아를 일본측에 넘겨줘야 했다’며 한국을 중국의 속국으로 기록했다.고교 역사 1학년의경우, ‘당나라 (618∼907년)는 또한 한국·일본을 지배했다’는 내용도 들어 있다. ■러시아 동해는 한결같이 일본해로 기록하고 있다.우리나라를 극동의 신흥공업국이라고 할 정도로 단편적인 기술에머물렀다. 현대사 부분에는 ‘값싼 노동력은 국내·국제무대에서 남한 기업경영의 성공의 중요한 전제조건이었다. 전세계에서 가장 긴 노동시간, 집회 결사 및 단체협약 그리고 파업에 대한 노동자들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은 정부의 가혹한 반노동정책 등이 그 이유였다’는 등 부정적으로 썼다. ■말레이시아 중 3학년 지리 84쪽에서는 서울을 동해쪽으로 치우쳐 표기하고 있다.또 ‘일본·중국·한국·태국·인도네시아·필리핀 등 화산활동이 일어나는 지역에서는지열자원이 생산되고 있다’며 화산지역으로 분류했다. ■인도 한국 중심으로 쓰여진 내용이 적다.‘세계 역사의조망’(옥스퍼드대학 출판·95년판)은 1875년 운요호사건과 관련,‘한국은 오랫동안 중국의 속국이었다.한국은 중국에 원조를 요청했다’고 기록했다.민비시해사건과 관련,‘왕비를 제거하고 하옥했다.’라고 왜곡했다. 박홍기 이순녀 전영우기자 hkpark@. * 세계사속의 동해. 현재 국제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대부분의 세계 지도책에는 ‘동해’ 명칭이 ‘일본해’로 표기되어 있다.많은 국가의 지도책·교과서에 아직도 ‘동해’를 ‘일본해’로적고 있는 것을 시정하지 못하고 있는 정부의 무성의한 태도는 비난받아마땅하다. 일본은 1870년 이후 출간된 지도에서 예외없이 ‘일본해’로 적고 있다.일본 정부가 세계 각국의 교과서에 동해를일본해로 표기하도록 하기 위해 정책적으로 간여했다는 의구심이 일고 있다. 그러나 일본도 18세기 전후 발간된 권위있는 지도 중 많은 지도에서는 동해를 조선해로 표기했다.1810년 ‘신정(新訂)만국전도’,1838년 만국전도,1850년 지학정종도(地學正宗圖),1855년 지구만국전도,1870년 명치개정만국여지분도 등의 지도에서도 동해를 조선해로 썼다. 우리나라는 기원 전 59년 이래 문헌상에서 일본과 사이의바다를 동해로 불러왔다.광개토왕비(411년)를 비롯, 삼국사기(1145년)와 삼국유사(1284년)에서도 수없이 동해의 기록를 찾을 수 있다.현존하는 고지도인 신증동국여지승람의팔도총도에도 동해라고 명백히 적혀있다. 중국의 경우, 요·송·금·원·명·청 등 916∼1912년의여러 시기에도 동해로 표기됐다.러시아의 지도에는 1678년(동양해),1725년(동해),1734년(동해)에 나온 지도에는 동양해 또는 동해로 적고 있다. 17∼18세기 유럽의 고지도에서도 마찬가지다.1615년 포르투갈에서 만든 지도,1674·1744·1752년의 영국 지도,1750년 파리에서 출간한 지도,1771년 대영백과사전 초판에도한국해(Sea of Corea)로 쓰였다. 박홍기기자
  • 탑골공원·남산골 한옥마을 3월의 명소 선정

    서울시는 3월의 명소로 탑골공원과 남산골 한옥마을을 선정했다. 탑골공원은 80여년전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3·1운동의 발생지로 선열들의 얼이 깃든 곳이며 남산골 한옥마을은 우리의전통문화 프로그램이 상설운영되고 있는 전통가옥 밀집지역이다. 서울시는 올해 한국방문의 해와 내년 월드컵 개최를 앞두고서울의 산,고궁,유적지 등에서 매달 2∼5곳씩을 ‘이달의 명소’로 선정하기로 하고 지난달 처음으로 경복·창덕·창경·덕수궁 등 4개 고궁을 선정,발표했다. 임창용기자 sdragon@
  • [씨줄날줄] ‘만세’그만 부르자

    철없던 초등학교 시절,무슨 기념식을 했다 하면 왜 그리 오래 걸렸는지,교장 선생님의 말씀은 왜 또 그리 길었는지 모르겠다.운동장에 정렬해 차려 자세로 서 있자면 온몸이 뒤틀리는 듯했다.더운 때는 졸도하는 학생이 서넛은 나왔다.그러다 ‘만세 삼창’(萬歲 三唱)순서가 되면 반가웠다.식이 끝난다는 알림이기도 하고,굳은 몸을 풀 기회이기도 해서였다. 중고등학교에 들어갔더니 기념식 외에도 무슨무슨 궐기대회,규탄대회가 잦았다.그런 대회는 역전 광장이나 공설운동장에서도 했는데,대개 누군가가 혈서를 쓰고 때로는 유엔사무총장에게 보내는 메시지 같은 것이 낭독되기도 했다.마지막에 만세 삼창이 있고 그것이 끝나면 시가행진으로 들어갔다. 어른들한테 들으니 일본이 우리나라를 지배하고 있던 시절공식 행사를 할 때 꼭 만세를 삼창했다고 한다.그 말을 듣고난 뒤로는 만세 삼창이 있을 때마다 앞에서 두 팔을 번쩍드는 교장 선생님의 모습이 군복차림으로 ‘덴노헤이카 반자이’를 외치는 모습과 자꾸만 겹쳐 보였다. 중국에서는 최고 통치자인천자(天子)에게 오래 살고 오래통치하라고 ‘만세’라는 말을 썼다.제후들에게는 이 경우‘천세(千歲)’라고 해야 했다.우리나라에서는 중국의 종주권 행사가 뚜렷해지던 고려말부터 ‘천세’였다.대한제국이되면서 ‘대군주 폐하 만세’‘대한제국 만세’를 부를 수있었다. ‘만세’에 해당하는 서양말들은 ‘롱 리브’‘비브’‘비바’ 등이다.오래 살라는 뜻이다.군주의 장생과 그가 다스리는 나라의 무궁을 기원할 때 썼다.‘만세’는 동서양 다 전제군주 시대의 잔재다.그러나 그 때문에 ‘만세’를 부르지말자는 것은 아니다.이 말의 출생 근거가 그렇다는 것이다. 이 시대에 많은 사람이 일제히 두 팔을 번쩍 들고 누군가의선창을 따라 세 번 만세 부르는 것은 우스꽝스러워 보인다. 게다가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은 일제시대에 하던 것을물려받은 것이라고 봐야 한다.공식 행사의 식순에 전체주의냄새가 나는 만세 삼창을 도식적으로 넣는 것은 이제 그만했으면 좋겠다. 3·1운동 때처럼 다중이 한뜻이 되어 자발적으로 부르거나,아들이 세계 권투 챔피언이 되었을 때 어머니가 “대한국민만세다”하는 것이야 얼마든지 괜찮지만 말이다. 박강문 논설위원 pensanto@
  • 3·1절 82돌 이모저모

    82돌 3·1절을 맞은 1일 서울 종로 탑골공원을 비롯,전국에서 열린 기념행사에서는 ‘반일 함성’이 울려퍼졌다.어느때보다 일본의 역사 왜곡과 독도 망언을 규탄하는 목소리가높았다. 서울 종로구청은 보신각 타종에 이어 탑골공원에서 ‘3·1절 만세 재연행사’를 가졌다.흰 저고리와 검정치마 차림의여성 1,000여명은 태극기를 들고 종로를 행진하며 만세를 불렀다.독립 투사가 일본 경찰에 끌려가는 장면도 재연됐다.줄다리기와 굴렁쇠 굴리기,사물놀이 등의 시민행사도 이어졌다.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는 서울 종묘공원에서 서울 및 수도권지역 교사 3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과 독도망언 등을 규탄하는 집회를 가졌다.교총은 성명을 통해 “일본이 왜곡된 역사를 학생들에게 주입시키려는 것은지난날의 침략행위를 연장하려는 제국주의적인 망령”라며“일본교과서 왜곡시도 철폐를 통한 역사바로잡기야말로 제2의 3·1운동”이라고 주장했다. 광복회(회장 尹慶彬)와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회장 김종대)는 탑골공원에서 3·1독립만세운동 희생선열 추념식과 독립정신 기념궐기대회를 갖고 민족정기 확립과 통일을 다짐했다. 개신교와 불교,천주교 등 7개 종단으로 구성된 ‘화해와 평화를 향한 온겨레 손잡기운동본부’는 7대 종단의 지도자 등5,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광장에서‘화해와 평화를 향한 온겨레 손잡기운동’행사를 열었다. 부산시 동래구 수안동 동래시장 입구에서는 동래문화원 주관으로 학생과 시민 4,000여명이 ‘동래 3·1 독립만세운동’을 재연했다. 전북 정읍시 태인면에서는 주민 1,500여명이 흰색 두루마기차림으로 모여 기미년 만세운동과 일본 순사의 진압 장면을연출했다. 박록삼기자 youngtan@
  • 日교과서 왜곡·잇단 망언에 분노

    3·1절을 하루 앞둔 28일 전국 곳곳에서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과 잇따른 망언 등을 규탄하는 민간단체의 집회가 줄을 이었다. 광복회(회장 尹慶彬) 등 20개 시민·사회단체 회원 1,800여명은 이날 오후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에서 ‘일본 역사 왜곡 규탄대회’를 갖고 최근 일본 정치인들의 잇따른 망언과 역사 교과서의 왜곡 기도에 대해 규탄했다.이들은 대회를 마친 뒤 일본대사관에 항의서한을 전달했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대표 尹貞玉)도 일본대사관 앞에서 449차 수요 집회를 갖고 정신대 피해 할머니와 전교조 교사 등 150여명과 함께 일본 교과서 왜곡 등에 대해 항의했다.집회에는 미 캘리포니아 주법원에 일제 징용 피해자 손해배상 소송을 낸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회원들도 참여했다. 흥사단도 “전국 26개 지부에서 우리 정부의 외교적 노력을 촉구하는 한편 일본 제품 불매운동,일본대사관 항의전화 등 ‘안티-재팬운동’을 펴기로 했다”고 밝혔다. 대한민국 독도향우회(회장 최재익) 회원 600여명도 탑골공원에서 3·1절기념 독도수호 대일 규탄결의대회를 가졌다. 대한민국독립유공자유족회 회원 800명도 종로2가 YMCA 앞에서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을 규탄했다.독립기념관(관장 朴維徹) 직원 100여명도 천안 ‘겨레의 집’에서 집회를 갖고▲일본은 과거의 만행에 대해 사죄할 것 ▲역사 교과서의 출판 중지 등 5개항의 결의문을 채택했다. 전교조와 한국교총은 2일 개학과 함께 전국 초·중·고교학생들을 대상으로 3·1운동과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 사례를 주제로 특별수업을 하고 항의집회를 가질 계획이다. 한편 한국담배소비자연맹 직원 33명은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문 발표를 기리는 뜻에서 탑골공원에서 두루마기 차림으로 손병희 선생 동상 청결작업을 했다. 박록삼기자 youngtan@
  • 日교과서 왜곡 항의 ‘봇물’

    오늘은 3·1운동 82주년 기념일.그러나 일본의 역사 왜곡움직임이 심상치 않다.우리 정치권과 시민단체 등 각계의 반발 강도가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정부도 공식 대응에 나섰다. 정부는 28일 서울 세종로 중앙청사에서 이한동(李漢東)총리 주재로 관계장관 대책회의를 열어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명하고 범정부적 대응을 단계적으로강화해 나가기로 했다.정부는 우선 일본 정부가 국제사회의보편적 역사 인식에 입각한 객관적 내용의 검정 교과서를 내도록 다각적 외교 노력을 벌일 방침이다. 대책회의 한 참석자는 “아직 일본 교과서 검정작업이 진행 중인 만큼 더 지켜 보아야 할 것”이라며 “5일 최상룡(崔相龍)주일대사가 일본 문부성을 방문,정부의 공식 입장을전달하고 난 뒤 외교부 대변인 성명을 내는등 점차적으로 대응 수준을 강화해 나갈 예정”이라고 말했다. 특히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3·1절 기념사를 통해 일본의 역사 인식문제를 거론함으로써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에대해 우회적으로 유감 표명을 할 것으로 알려졌다.청와대 고위 관계자는“김 대통령은‘한·일간의 우호협력 정신에 따라 일본이 올바른 역사 인식을 갖고 미래지향적 협력관계를발전시켜주기를 바란다’는 내용의 포괄적 언급을 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앞서 이정빈(李廷彬)외교부장관은 데라다 데루스케(寺田輝介)주한 일본대사를 불러 이번 사안이 우호적 한·일관계를훼손해서는 안된다는 입장을 전달했다.이 장관은 “월드컵공동 개최,동아시아 협력 등 양국간 협력을 강화해 나가야할 중요한 시점에 교과서 문제가 걸림돌이 돼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국회도 이날 오후 본회의를 열어 일본 대중문화 추가 개방전면 재검토 등 5개항을 담은‘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 중단 촉구결의안’을 채택했다.광복회,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대한민국 독도향후회 등 20여개 이상의 시민·사회단체는서울 종로구 탑골공원과 일본대사관 앞 등에서 규탄 결의대회를 가졌다. 최광숙 홍원상기자 bori@
  • 학교 국사교육 실태·문제점

    “역사요?수업시간 보다 오히려 TV사극을 보는 게 더 이해하기 쉽고 재밌어요”(정미경·서울 K여고) “중학교 국사시간에는 일제시대 3·1운동까지만 배우고 나머지는 시험범위가 아니라는 이유로 아예 진도를 안나갔어요.근·현대사에 대해 궁금한 게 있으면 개인적으로 책을 찾아 읽거나 신문,방송에서 해결해요”(곽자현·서울 S중 졸업) 중·고교의 국사수업이 겉돌고 있다.올바른 역사인식과 가치관을 함양해야 할 국사수업이 시험에 대비한 요점 정리식암기위주 학습으로 전락하는가 하면,우리 역사에서 중요한위치를 차지하는 근·현대사 100년은 수업일정에 쫓겨 소홀히 다뤄지거나 아예 생략되고 있다. 새학기에 고3이 되는 서모양(18·서울 K여고)은 “3학년때한꺼번에 국사수업을 한다고 해서 1·2학년때는 전혀 배우지 않았다.상·하 2권으로 돼있는 국사교과서를 1년안에 다 마칠 수 없다는 것은 우리들도 안다”면서 “수업시간엔 시험에 나올 만한 사항만 집중적으로 다루기 때문에 우리나라 역사가 어떤지 전체적인 큰 틀을 파악하기 어렵다”고 불만스러워했다. 채모군(18·광주 S고)도 “국사시간은 거의 교과서에 밑줄만 긋고 중요한 연대나 사건을 암기하는 식으로 수업이 진행된다”면서 “일제시대 정도까지 진도가 나가면 나머지 뒷부분은 건성건성 넘어가거나 아예 건너뛴다”고 말했다. 특히 근·현대사 부분의 부실한 교육은 그 폐해가 심각하다.전국역사교사모임 회장인 정용택(鄭龍澤·48·수원 농생명과학고)교사는 “일제시대 친일행위에 대한 평가,해방전후사를 둘러싼 논쟁 등은 차치하더라도 현실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근현대사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는 지금의 국사 교육은문제가 많다”고 공감했다. 딱딱하고 어려운 국사 교과서도 국사에 대한 흥미를 크게떨어뜨리는 요인으로 지적되고 있다.학생들은 “교과서가 이야기형식으로 재미있게 짜여지고,표나 그래픽,관련 사진자료를 곁들여 이해하기 쉽게 만들어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전국역사교사모임은 역사를 보는 다양한 시각을제공하고 좀더 흥미있는 역사수업을 위해 내년 봄쯤 현장교사들이 집필한 ‘대안 국사교과서’를 선보일 계획이어서 관심을 모은다. 이순녀 안동환 기자 coral@
  • [사설] 일본, 두고만 볼 수 없다

    1919년 3·1의거 당시 일제가 저지른 만행이 새롭게 드러났다.당시 남편과 함께 한국에서 근무했던 마티 윌콕스 노블선교사의 육필일기‘3·1운동,그날의 기록’에 의하면 일본군·경은 그해 4월15일 경기도 화성군 제암리교회에 불을 질러 주민 23명을 살해하고,고주리 마을에서 6명을 총살한 데이어 4월19일을 전후해서 인근 수원 지방 16개 마을과 5개교회에서도 주민들을 무차별 학살했다는 것이다. 3·1절을 앞두고 일제의 만행이 새롭게 확인돼 국민들이 치를 떨고 있는 가운데 일본 극우세력이 역사를 왜곡해서 만든교과서들이 문부과학성의 검정을 통과할 것으로 보여 국민들을 더욱 격분시키고 있다.일본 극우단체인 ‘새 교과서를만드는 모임’이 만든 교과서는 물론 기존 7종의 교과서 모두가 ‘침략’이라는 용어를 ‘진출’로 바꾸거나 삭제했다. ‘일본의 침략에 대항해 조선 사람들이 무기를 들고 싸웠다’는 의병 부분이 사라졌고,‘간토(關東)대지진과 조선인 학살’이라는 대목에서도 ‘조선인 학살’ 부분을 없앴다.7종교과서 모두가 기술해왔던‘종군위안부’도 4개사가 완전삭제했으며,3개사는 ‘종군’이라는 말을 빼거나 분량을 축소했다. 일본 정부는 ‘자율 규제’라는 명분으로 이 교과서들을 통과시킬 것이라고 한다.그것은 황국사관을 기초로 군국주의로회귀하려는 일본 내 극우세력의 음모에 일본 정부가 동조하는 것에 다름아니다.이같은 움직임을 잠자코 보고만 있을 것인가.그럴 수는 없다.한국과 중국 등 일본 제국주의의 피해국 정부와 국민들이 들고 일어나 일본의 군국주의화를 막아야 한다. 일본의 역사 왜곡 움직임과 관련,여야 의원 100여명이 ‘강경 대응 결의안’국회 본회의 채택을 추진하고 나왔다.일본측이 역사 교과서 왜곡 부분을 시정할 때까지 국회 차원의한·일 의원연맹 친교활동을 중단하고,정부측에 대해서도 양국간 청소년 교류,일본문화 개방 일정의 전면 재검토와 일왕에 대한 ‘천황’ 호칭 철회등을 요구한다는 것이다.정부는소극적인 항의만 하고 있을 게 아니라 국민의 분노가 한계에이르기 전에 일본 역사 왜곡 교과서의 검정 통과를 막는 데소매를 걷고 나서기 바란다.
  • 日帝 주민학살현장 더 있다

    1919년 3·1의거 당시 경기도 화성군 제암리교회뿐만 아니라 인근 수원지방 16개 마을과 5개 교회에서도 이와 비슷한만행이 일제에 의해 저질러진 사실이 새로 밝혀졌다.또 고종황제는 일본의 식민 지배를 거부하는 내용의 문건을 파리강화 회의에 전달하려다 밀사였던 하란사(河蘭史) 전도사 등이체포되는 바람에 일본의 사주에 의해 독살됐으며,이 과정에서 황실의 외척인 윤덕영(尹德榮·순종황후 윤비의 큰아버지)이 깊이 연루된 것으로 드러났다. 이같은 사실은 1892년부터 1934년까지 42년간 남편과 함께한국 선교사로 근무했던 미국 북감리교의 마티 윌콕스 노블선교사(여·1872∼1956)가 당시 한국에서 일어났던 일을 기록한 육필일기와 문건을 통해 처음 확인됐다.이 자료는 기독교대한감리회 정동제일교회(담임목사 조영준) 역사관 김대구상임연구위원(54) 일행이 지난해 미국에서 노블 여사의 후손으로부터 입수한 것으로,최근 ‘3·1운동,그날의 기록’이란책자로 간행됐다. ‘제암리사건’과 관련,그동안 드러난 기록에는 4월15일 일본 군경이 제암리교회에 불을 지르고 23명을 살해한 데 이어고주리 마을에서 6명을 총살하는 등 모두 29명을 죽인 것으로만 돼 있다.그러나 노블 여사의 일기에 따르면,일경은 제암리교회 뿐만 아니라 4월19일을 전후해 인근 수원지방 16개마을과 5개 교회에서 추가로 주민 학살 만행을 저지른 것으로 나와 있다.그는 이날자 일기에서 “그들(로이드 영국 대리공사 등)이 방문한 다섯 마을의 상황은 시체가 묻혀 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제암리와 다를 것이 없었다.…그들이 알기로는 그 지역에서만 16개 마을이 전멸되다시피 했다”고밝혔다.‘수원지역 구조활동 보고서’에서는 “사강리에서 326채의 가옥이 불타고 1,600여명의 이재민이 발생한 것으로생각되며,39명이 살해됐고,일경 한 명도 돌에 맞아죽었다”고 기록했다.이밖에 당시 하세가와(長谷川好道) 조선총독이제암리사건의 파문이 확산되자 “교회 재건을 위해 교회당 500엔,그리고 불탄 집 한 채당 50엔씩을 지급할 것을 약속하며 그 사실을 비밀로 해달라”고 미국 선교사들에게 당부하며 사건 은폐를 시도한 사실도 밝히고 있다. 김대구 연구위원은 “3·1의거 당시 현장을 목격한 선교사들의 기록인만큼 사료가치가 우수하다”며 “노블 여사의 일기를 근거로 경기도 화성군 일대의 감리교회에서 자행된 일제의 만행에 대한 현지조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운현기자 jwh59@
  • 일제 만행 현장을 기록…美 노블여사 일기 요약

    고종 독살사건은 3·1운동을 촉발했다.미국 감리교 선교사로 한국에서 활동했던 마티 윌콕스 노블 여사의 일기는 당시의 만세 외침과 일제의 잔학행위를 생생하게 전달한다.다음은 그의 일기 요약. ■ 1919년 3월1일 오후 2시를 기하여 모든 학교,중학교 이상의 학교가 일제 지배에 항거해 수업을 거부했고,학생들은 거리를 행진하면서 손을 높이 들고 모자를 흔들며 만세를 외쳤다.거리의 사람들도 합류했고 그 기운찬 외침은 도시 전체에울려퍼졌다. 나는 창문으로 긴 행렬이 모퉁이를 돌아 궁궐담 주위를 행진하는 것을 직접 볼 수 있었다.정부가 운영하는 여학교 학생들도 행진했다.한 무리의 남학생들이 이화학당 앞으로 가서 여학생들에게 나와 합류하라고 소리쳤다.여학생들이 몰려나오자 월터 양이 기모노 차림으로 나와 학당정문을 걸어 잠그고 여학생들을 가로막았으며,아펜젤러 씨와테일러 씨까지 나와서 막는 바람에 결국 합류하지 못했다. ■ 3월2일 조선국가협의회(The National Society of Korea)명의의 전단이 온 거리에 뿌려졌다.방금 뛰어나가서 가져와내용을 그대로 적는다. “오,황제는 참담한 심경으로 돌아가셨다.우리는 황제께서어째서 돌아가셨는지는 이해할 수 없지만 이제 200만명의 충성되고 한국을 사랑하는 형제들에게 황제께서 어떻게 죽음을당하셨는지 설명하려고 한다”■ 3월3∼4일 매일같이 거리에 전단이 뿌려진다.초기에 뿌려진 전단에서는 폭력시위가 계획된 바 없으며 폭력행위가 한국의 독립을 늦출 수도 있으니 참여하는 모든 사람이 어떤종류의 폭력도 사용하지 말아줄 것을 당부하였다. ■ 4월16일 레이몬드 커티스 부영사와 호레이스 언더우드 씨,그리고 인터내셔널 뉴스 특파원인 테일러 씨가 제암리로 가서 직접 학살의 현장을 확인했다.그 마을은 남편 아서 노블의 수원구역 내에 있다.그들은 얘기로 듣던 것보다 훨씬 참혹한 현장을 목격했다.교회 터에는 재와 숯처럼 까맣게 타버린 시체뿐이었고,타들어간 시체의 냄새는 속을 메슥거리게할 정도였다.곡식창고와 가축들도 같이 타버렸다.일본 군인들은 집집마다 다니며 남자들을 불러모았고,사람들이 모이자교회에 불을 질러 안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태워 죽였다. 도망치려는 사람은 총으로 쏴죽였다. ■ 4월19일 영국 대리공사인 로이드 씨는 사람들을 모아 불타버린 다른 마을로 갔다.모두 수원의 남양지역에 있었다.아서의 관할구역이었으므로 같이 가자고 했고,스미스 씨는 통역으로 갔다.테일러 씨도 동행했다.원래 그는 재판참석차 평양에 갈 예정이었으나 미국공사 베르골즈 씨가 평양보다는학살현장으로 가서 보고 나중에 본국에 기사를 전송해 달라고 요청했다.현지에 가니 사람들은 겁이 나서 그런지 환자들을 데려오려고 하지 않았다.돕다가 자신은 물론 가족들의 목숨까지 위태로울까 겁에 질려 있었다. 로이드 씨와 일행이 방문한 다섯 마을의 상황은 시체가 묻혀 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제암리와 다를 바 없었다.그들은근처에 16개 마을이 전멸되다시피했다고 말했다. 마을 양쪽끝의 몇 집을 빼고는 성한 집이 없었고 여자와 아이들이 그곳에 숨어지내고 있었다.산으로 도망쳐 풀뿌리나 나무뿌리를캐먹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 제암리교회 성역화 새달 완료

    3·1운동 때 일제가 주민들을 집단학살했던 경기도 화성군제암리 교회와 대표적인 항일 시위현장이었던 안성시 만세고개 유적지가 3·1운동 82주년을 맞아 성지로 탈바꿈한다. 경기도와 화성군은 3·1운동의 뜻과 정신을 기리기 위해 화성군 향남면 제암리일대 1만7,355㎡를 성역화 사업을 완료,다음달 1일 준공식을 갖는다고 21일 밝혔다. 이곳에는 전시실과 시청각실,강당 등을 갖춘 1,331㎡규모의기념관과 기념탑을 세우고 교회 옆의 희생자 합동 묘역과 기념 조형물을 재정비했다. 기념관에는 ‘민족저항의 맥 제암리’‘만행의 진상과 흔적’ 등 13가지 주제의 사진과 상징조형물 등이 전시된다.40석규모의 시청각실에서는 10여분 분량의 3·1운동 관련 영상물이 상영된다. 특히 전시물 가운데는 당시 캐나다 선교사였던 스코필드 박사(1889∼1970)가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해 촬영한 학살현장사진이 포함돼 있어 이 곳을 찾는 관람객들에게 당시 일제의잔혹한 만행을 생생하게 전하게 된다. 안성시 원곡면 칠곡리에 있는 3·1만세고개 유적지도 성역화사업이 한창이다.도와 안성시가 43억원을 들여 유적지 3만3,000㎡에 기념관과 기념탑,사당 등을 짓고 있다. 오는 5월쯤 준공식을 치를 예정이다. 기념관에서는 ‘전국및 경기도 3·1운동’ ‘안성 만세고개 3·1운동’ 등 3가지주제의 사진전이 마련되며 시청각실에서는 15분 분량의 다큐멘터리가 상영된다.기념관 안 전시실에는 당시 일본군이 항일독립 투사를 투옥시켰던 서대문형무소 모형이 전시될 예정이다. 1905년 8월에 세워진 제암교회는 1919년 4월 15일 일본군이3·1운동 탄압을 위해 교회안에 제암리 지역의 청 ·장년들을 모아놓고 총으로 학살한 뒤 증거를 없애기 위해 불을 질렀던 곳이다.당시 일제의 만행으로 23명이 숨졌으며 마을 가옥 30여채가 불에 탔다. 또 3·1운동 3대 투쟁지역으로 꼽히는 양성면과 원곡면에서는 같은해 4월 1일 주민 2,000여명이 일본경찰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불태우고 안성읍내로 진출하는 등 격렬한 시위를벌였던 곳이다. 도 관계자는 “이들 유적지는 청소년과 일반인에게 3·1운동의 뜻과 정신을 직접 보고 체험할 수 있는 역사 교육장을활용될 것”이라고 말했다. 수원 김병철기자 kbchul@
  • [대한광장] 이수현군의 죽음과 일본

    지난달 26일 저녁 도쿄 신오쿠보(新大久保)역에서 술에 취해 철로에 떨어진 일본인을 구하려다가 목숨을 잃은 이수현군의 죽음은 그야말로 일본열도를 강타했다.어떤 회의에 참가하려고 도쿄에 가 있던 우리 일행은 29일 저녁 신오쿠보역에서 그를 보내는 노제에 참석했다.어머니는 아들의 사진을 가슴에 안은 채 쓰러질 듯했고 아버지는 유골을 담은 흰상자를 안고서 그래도 의연한 자세를 취하려고 안간힘을 다하고 있었다. 일본신문은 연일 대서특필하면서 아버지의 말로 “내 아들의 용기 있는 행동에 충심으로 경의를 표한다” “내 아들은꿈을 가지고 일본에 공부하러 왔다. 그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이렇게 여러분에게 감동을 줄 수 있어서 그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위로를 받는다” “일본 국민이 함께 울어준 것으로 마음이 좀 가라앉는다”고 전했다.또 어머니는 “내 아들은 장래 큰 일을 해낼 것이라고 기대했다.그런데 이렇게 빨리 가다니 너무나 처참하다”고 하면서 간밤에는 아들이 꿈에라도 찾아올까 했으나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고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수현군의 죽음에 일본국민의 눈이 쏠려서 그만 그와 함께 생명을 잃은 또 한 사람의 일본인 카메라맨 세키네시로(關根史郞)씨의 의로운 죽음은 그다지 화제가 되지 않는것 같아 좀 서글픈 생각마저 들었다.세키네씨는 47세, 이수현군은 26세.이군의 죽음은 너무나 젊은 죽음이었다.그와 사랑을 나눈 여자 친구가 “수현아 난 네가 정말 좋은 일 했다는 것 알아.하지만 남아있는 나는 어떡하니? 어떻게 살아야해… 다시 되돌리고 싶어.타임머신이 있다면…”하고 인터넷에 올렸다니 그 얼마나 애절한가. 이수현군의 죽음,그것은 인정이 메말라가는 세상에 던진 충격이었다.무엇보다도 한 한국인 청년의 죽음이었다는 데 일본인들은 놀람을 금할 수 없었다.그러니까 아사히(朝日)신문은 톱기사로 다루면서 ‘같은 눈물 일한(日韓)이 함께’라고제목을 달았다. 그리고 일본 월드컵 조직위원회가 2002년의월드컵 명칭을 일본국내에서 ‘한일’이 아니라 ‘일한’으로 하려는 데 대해서 사설을 쓰고 그런 아집은 버리라고 권고했다.“이수현씨의행위는 양국민의 가슴에 감격을 안겨주었다”고 하고 “일본어 표기에 앞이냐 뒤냐 하는 정도의 문제로 귀중한 것을 깨서는 안 된다”고 끝을 맺었다. 이 사설은 또한 이 표기문제에 대해서 한국신문이 신중한태도를 견지하고 보도를 자제하고 있다는 사실도 언급했다. 한일 관계란 정말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처럼 취약한 것이라고 해야 할런지 모른다.그래서 다시 한일관계가 악화해서는안 된다고,일본의 언론도 한일 양국이 이수현군의 국경을 넘은 의로운 행위에 눈물을 함께하자고 더욱 호소하는 듯했다. 문득 나는 2002년부터 사용할 것을 목표로 한다는 이른바‘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회’라는 우파 세력이 만드는 중학교 역사 교과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이미 그 내용은 널리 알려져 있고 일본 정부의 검인정 당국이 137군데를 정정하라고 했다는 말도 나돌고 있다.그것은 한일합방은합법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하고,3·1운동을 비롯하여 종군위안부 같은 문제에 대해서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일본의 지난날은 유색인종으로서 유일하게 성공을거두어온 찬양할 만한 역사였다고 한다.나치는 유태인을 학살했지만 일본이 중국 난징(南京)에서 20만 중국인을 학살했다니 그것은 전혀근거 없는 날조된 숫자라고 한다. 이수현군의 죽음에 눈물을 함께한다는 일본인과 이러한 일본 역사교과서란 어떻게 연관되는 것일까.죽음에 대해서는눈물을 흘리지만 일본을 우파세력으로 좌우하겠다는 정치적목적은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일까.그것과 이것은 별개의 것. 그리고 정치 또는 권력욕이 스며들면 인간적인 것은 모두 지워지고 만다는 것일까. 이국의 밤하늘 아래 유난히 희게 보이는 이수현군의 유골상자를 바라보는 눈앞에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생각이었다.정말그런 역사 교과서가 나왔을 때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것인가.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심각한 문제라고 하지 않을수 없다. △지명관 한림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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