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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의 건강보감] 세브란스 외국인 진료소장 인요한 박사

    “사냥에는 저를 뛰어넘는 의미가 있습니다.1895년 처음 이 땅을 밟으신 저의 진외증조부(아버지의 외조부) 유진 벨 이후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모두 사냥을 했습니다.그 분들에게 사냥은 이국에서의 외로움을 달래는 방편이자 이 땅 구석구석을 이해하는 길이었습니다.” 연대세브란스병원 외국인 진료소장 인요한(44) 박사.처음 본 사람은 누구나 그를 ‘외국 사람’이라고 한다.금발에 파란 눈,체격도 110㎏이 넘으니 그럴 수밖에.그러나 마주보고 인사 한마디라도 나눈 사람치고 그를 외국인이라고 우길 사람은 없다.확실히 그는 ‘벽안(碧眼)의 한국인’이다. ●진외증조부 이후 5대가 109년간 한국생활 그의 가족은 5대 109년동안 이 땅을 지키며 살고 있다.그와 그 가족들이 이 땅에 씨뿌려 가꾼 사랑이라는 이름의 나무는 어느새 웅숭깊게 자라 그 허구한 세월을 과실처럼 매달고 우뚝 서있다.3대의 조상이 이 강산에 혼백을 묻었음에도 우리에게 더 건 그 무엇이 아직도 남아 있는 걸까.“저는 한국과 한국인에게서 받은 게 참 많습니다.이 땅에서 이국의 선교사 아들로 태어나 한국인으로 자라 교육받고 또 이렇게 병마의 고통을 더는 구원의 일까지 하고 있으니 이보다 더한 축복이 어딨겠습니까?”그러면서 “제가 이 나라를 위해 무슨 일을 해야할지를 고민하며 살고 있다.”고 했다. 이런 그에게 사냥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이 땅과 이 사람들을 더 깊이 이해하는 값진 지침’이다.그래선지 사냥이라면 밥먹다가도 숟가락을 놓는다.“최근엔 가족들이 전남 보성에서 사냥 휴가를 보내고 왔어요.일주일동안 꿩만 열댓마리 잡았지요.”사냥을 위해 여름 휴가를 미뤘다가 수렵장이 개설되자마자 부리나케 뛰어가 보성의 산야를 훑고 왔다.네살난 막둥이는 물론 부인 이지나(41)씨도 사냥을 즐겨 최근 수렵 면허시험을 치르기도 했다.해마다 수렵장이 개설되는 11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못가도 스무번은 사냥길에 나선다.“매년 번갈아 순환수렵장이 열리기 때문에 해마다 고을 하나씩을 섭렵할 수 있다.”며 덩치가 집채만한 그가 좋아라 웃는다. 그는 사냥을 ‘단순한 살생’으로 보는 시각에 아니라고 고개를 젓는다.지금처럼 먹이사슬이 붕괴된 상태에서 사냥은 생태계의 건강성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이다.그렇다고 그가 오로지 사냥에만 매달리는 건 아니다.그는 산,그중에서도 지리산을 끔찍하게 사랑한다. ●어머니 품 같은 지리산 천번넘게 찾아 “제가 지리산을 오른 횟수는 줄잡아 천번이 넘을 겁니다.보통은 수렵기가 끝나는 3월부터 10월 사이에 가는데,사연이 있습니다.”그와 지리산의 인연은 깊다.진외증조부 이래 그의 조상들은 지리산에서 지난한 선교의 영적 힘을 얻었는가 하면 종교적 근신을 하곤 했다. 또 지리산은 그의 선조가 콜레라 등 풍토병을 피하는 피난처이기도 했다.지금도 노고단과 왕시루봉 인근에는 이 땅의 고단한 선교 역사를 증언하는 이들 유적이 남아 있어 그들이 살았던 세월을 묵묵히 웅변하고 있다. “전 강보에 쌓인 젖먹이때부터 이곳을 찾기 시작했어요.그 후 세상에 걷어 차이고 사람 때문에 울고 싶을 때마다 이곳을 찾아 묵상에 들곤 합니다.묵상 속에서 다시 용서와 화해의 힘,그리고 고난을 이겨내는 용기를 얻곤 하지요.”이를테면 인 교수 가족에게 지리산은 영혼의 안식처이자 그들이 하릴없이 엎어지지 않도록 건강을 준 어머니의 품같은 곳이다. 그에게는 남다른 아픔이 하나 있다.누군가 그곳에 선대의 희생을 모욕하듯 ‘이 곳은 무엇을 했던 곳일까요?’라는 제목의 안내판을 세운 것.제목 밑에는 선교사들이 마치 외세의 전위대인 것처럼 써놓은 내용이 실려 있었다.이 대목에서 그의 안색이 굳어졌다. “제 선조는 일제로부터 고종 황제를 지키기 위해 몸을 던졌고,폐교와 추방의 아픔을 겪으면서도 신사 참배를 거부했으며,3·1운동 때는 일제의 학살 만행을 알리기 위해 사선을 넘었습니다.또 저는 부끄럽지만 광주민주화 운동때,그 처절한 살륙의 현장을 지키며 외신 기자들에게 진실을 알리다 추방되기도 했고요.전 감히 말합니다.역사는 온당하게 읽어야 한다고.”그 안내판은 그후 슬그머니 철거됐다. ●젓갈없으면 밥 못먹는 ‘진짜 한국인' 인 박사는 1959년 전북 전주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순천에서 보냈다.1895년 이 땅에 첫 발을 내디딘 진외증조부 유진 벨 남장로교 선교사와 할아버지 윌리엄 린튼,아버지 휴 린튼에 이어 그와 그의 자녀들까지 5대가 이 땅을 지키며 산다.처음 한국땅에 들어올 때 유진 벨은 당시 상대적으로 낙후한 전남 지역을 택해 그 소외의 땅에서 눈물겨운 선교활동을 시작했다.이런 선조의 고난을 두고 “그 분들은 이 땅에 간과 쓸개,혼까지 아낌없이 바쳤고,나는 그 분들의 음덕으로 편하게 사는 셈”이라고 회고했다.그러나 그 역시 선대가 그랬듯 편안한 길을 택하지 않았다. 그는 진외증조부가 이 땅에 들어온지 100년이 되는 지난 95년 둘째형 스티브 린튼과 ‘유진벨 재단’을 설립,북한돕기에 나섰다. 처음에는 식량을 지원하다가 지금은 결핵 퇴치사업에 주력하고 있다.그들 형제가 물불 가리지 않고 뛰어 지난 6년동안 북한에 물경 300억원이 넘는 의약품을 지원할 수 있었다.이 약품으로 북한의 결핵환자 15만명을 치료,이 가운데 13만여명이 완치됐다며 흐뭇해 했다. 그는 틀림없는 한국인이다.이 땅에서 오래 살았다거나 이름을 바꿨대서가 아니라 한국인과 정체성을 공유하기 때문이다.“식사는 한국식으로 합니다.양식은 한두끼만 먹어도 질리는데,한식은 안그래요.젓갈 양념에 버무린 김치와 청국장,보쌈을 모르고 사는 서구인들,불행해요.한번은 뉴욕엘 갔어요. 기내식에 질려 도착하자마자 우래옥이란 한식집을 찾아갔는데,그곳에서 먹었던 알탕 맛을 평생 잊을 수 없습니다.” ●유진벨재단 설립 北에 의약품 300억 지원 젓갈이 없으면 밥을 못먹고,술이라면 청탁을 가리지 않으며,사람을 좋아해 틈만 나면 달려나가 술판을 벌이기 일쑤인가 하면 ‘연세세브란스는 내 모든 것’이라는 한국적 연고의식,그러면서도 북한돕기의 열정을 감추지 않는 심지까지 가진 그가 한국에서 주변인이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담소 말미에 덧붙인 그의 얘기는 우리에게 자괴스러운 부끄러움이었다.“북한을 오가면서 느낀 게 있습니다.분단의 상처가 이렇게 큰데,지역이 다시 갈려 있다는 건 우리 민족의 건강성을 해치는 고질입니다.이젠 청산해야죠.” 심재억기자 jeshim@ ■사냥 건강예찬 “사냥만 한 스포츠가 어딨습니까?자연과 교감하며 몸과 정신을단련하는 것은 물론 스트레스도 물에 씻은 듯 털어냅니다.골프처럼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주색잡기처럼 몸이 상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종종걸음으로 아버지를 따라 사냥터를 누볐다.벌써 초등학교 5학년때 할아버지에게서 20구경 외대 단발총을 넘겨받아 품고 잤던 일도 생생한 기억.젊어서는 훌치기 총인 레밍턴 870을 사용하다가 5년전 거금 200만원을 들여 이탈리아제 베넬리123 자동연발총을 구입했다. 사냥에는 사냥개도 필수.아버지 대까지는 포인터종을 사용했으나 그는 냄새가 싫어 포인터 대신 영국산 코커스패니얼을 택했다.사냥능력이 뛰어나면서도 절대 사람에게 해코지를 하지 않아 마음에 든다고 했다. ‘열혈 헌터’답게 그의 사냥건강론은 막힘이 없다.“가장 멋진 매력은 이 땅의 곳곳을 내 눈으로 살피며 애정을 키울 수 있다는 점입니다.알다시피 사냥은 정해진 길이 없습니다.대자연 속에서 지향없이 걷고 뛰며 야성과 만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가슴 뛰는 즐거움 아니겠습니까?그뿐이 아닙니다.표적을 쫓아 격발하는 순간,세상의 모든 일들을 말끔히 잊곤 하죠.” 전국의 수렵장을 돌며 생경한 풍경과 음식을 즐길 수 있는 즐거움도 무시하지 못한다.더러 희귀 조수류와 만나는 것도 기쁨이다.최근에도 오소리와 산까치를 봤다고 자랑했다. 어려서부터 몸에 밴 탓에 그의 사냥원칙은 철저하다.아무리 그럴듯한 표적도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 전에는 절대 안전핀을 풀지 않는다. 보호 조수를 지키는 일도 그의 몫.평소 보호 조수를 머릿속에 담아 실수로라도 그것들을 살상하지 않는 철칙을 어긴 적이 없다. 그런가 하면 최근에는 바이러스성 간병(肝病)이 번져 야생토끼의 개체수가 줄고 있다며 수의사에게 원인 규명을 의뢰할 만큼 그는 지킬 것은 지키는 사냥꾼이다. 심재억기자
  • 12월의 독립운동가 최양옥 선생

    국가보훈처는 일제 치하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17년간 옥고를 치른 최양옥(1893∼1983) 선생을 1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강원도 횡성군 출신인 선생은 원주보통학교를 거쳐 서울 중동중학교에 입학했다가 중퇴한 뒤 서울 근교에서 잡화장사를 하던 중 1919년 3·1운동이 발생하자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광복 후 동지들의 기념사업 활동에 참여하다 1983년 타계했으며,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독립기념관과 서대문독립공원 역사관에서는 선생의 공적을 기리는 전시실을 마련,사진 등 관련자료를 12월 한달간 전시할 예정이다. 조승진기자 redtrain@
  • ‘국적회복’나선 中동포/(상)‘강제출국’ 안타까운 사연

    국내에 체류 중인 중국동포들이 극한투쟁에 돌입했다.오는 17일 불법체류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정부의 단속이 예고된 가운데 이들 중국동포는 ‘고향땅에 살 권리’를 주장하며 헌법소원에 이어 무기한 단식에 들어갔다.‘중국인으로 불법체류자일 뿐’이란 법률 논리와 ‘고향에 왕래하는 것은 천부적인 권리’라는 역사성을 강조한 주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는 것이다.중국동포들의 현주소와 역사적 배경,해법 등을 살펴본다. 14일 오전 서울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 앞.중국동포들이 ‘고향에서 살 권리를 보장하라.’며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접수시키고 있는 동안 재판소 밖에선 5000여명의 중국동포들이 손에 손을 잡은 채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이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누군가가 시작한 노래가 커다란 울림이 돼 퍼지면서 이들이 한 민족임을 실감케 했다. ●“우린 조국을 버린 적이 없습니다” “이 땅에 할아버지 묘지도 있고,내 호적도 있고,친척들도 있는데 왜 제가 이 땅에서 쫓겨나야 합네까.” 새문안교회 단식농성장에서 만난김자연(가명·55·여)씨는 두 손을 꼬옥 말아 쥔 채 기도를 하고 있었다.한국에 온지 6년이 됐지만 그동안 모은 3000만원은 얼마전 사기를 당해 다 날려버렸다.그는 “쫓겨날 상황에서 단식은 우리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이라면서 “우리는 아픈 역사의 희생자일 뿐 조국이 싫어 떠난 사람들이 아닌 만큼 무조건 불법체류자라는 굴레로 엮지 말아달라.”며 하소연했다. 5살 때 독립운동을 하는 아버지를 따라 만주로 간 이형상(64)씨는 “우린 동포 아니냐.”며 말문을 열었다.그는 “중국 땅에서 수십년간 이방인이라는 눈총을 견디며 풀뿌리처럼 살다 어렵게 찾아왔는데 조국마저 우리를 버린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면서 “여기 모인 사람 중 조국 땅 싫어 떠난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그는 또 “다른 외국인 노동자들도 딱한 처지는 마찬가지겠지만 중국동포들이 이 땅에서 살 권리를 요구하는 것은 당연한 권리를 찾겠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의 법률자문을 맞고 있는 정대화 변호사는 “재중동포의 국적문제는 단순히 헌법적인 차원을 넘어 일제 강점기의 수탈을 피해 이주할 수밖에 없었던 한민족의 역사적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면서 “중국동포들이 자진해서 중국 국적을 취득하지 않은 만큼 이들이 국적을 취득할 권리는 보장돼야 한다.”고 말했다. 정 변호사는 또 “독일이 통일 후 유럽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는 100만명 이상의 독일인들에게 국적회복을 해준 만큼 우리도 특별법 제정 등을 통해 재중동포의 국적회복의 기회를 열어주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일제단속에 생이별의 아픔도 불법체류자라는 족쇄 때문에 일제단속이 시작되면 가족과 생이별을 해야 하는 중국동포들도 적지 않다.이충일(32·여)씨는 요즘 아들 성민(가명·3) 때문에 외출을 할 수도 없다.세살밖에 안되는 아이가 어떻게 알았는지 “밖에 나가면 경찰아저씨가 엄마 잡아가.”라며 엄마의 다리를 잡고 떨어지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이씨가 한국에 온 것은 6년 전.식당에서 일하다 한국인인 장모(38)씨를 만나 동거를 시작했고 성민이를 갖게 됐다.하지만 혼인신고를 하고 돈도 모아 함께이씨의 고향인 랴오닝성 선양(瀋陽)에서 살자던 부부의 약속은 이내 남편의 외도로 무참히 깨져버렸다.지난 8월 한국 여자가 생긴 남편은 이후 이씨를 폭행하고 아들 성민이마저 빼앗아갔다.인권단체의 도움으로 열흘 남짓만에 아들을 되찾았지만 모자(母子)가 함께 살 수 있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17일부터 시작되는 단속에 적발되면 이씨는 아들을 남겨둔 채 강제출국을 당하고 호적법에 따라 성민이는 아버지와 함께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재혼한 어머니를 찾아 옌볜(延邊)을 떠나 한국에 온 현아(가명·14·여)는 국내법상 불법체류자다.미성년자인 불법체류자들은 학교의 울타리 안에만 있으면 학교장 재량에 따라 강제출국은 피할 수 있다지만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현아는 지난 2000년 방학을 맞아 한국 남자와 재혼한 어머니 김선숙(35)씨를 만나러 왔다가 함께 살게 되었다.학교장의 배려로 초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지만 중학교에 들어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입학은 했지만 1학년 1년 동안은 시험조차 볼 수 없는 청강생 자격으로 학교를 다녀야 했다. 서울 외국인 노동자의 집 이선희 소장은 “학교장 재량에 따른다는 애매한 조항에 따라 현아와 같은 미성년 불법체류자 역시 언제든지 쫓겨날 수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유영규 유지혜기자 whoami@ ■이은규 서울조선족교회목사 “중국동포들에게도 조국에서 살 권리를 주십시오.” 중국동포의 국적회복 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서울조선족교회 이은규(사진·43) 목사는 “중국동포들은 우리 나라에서 단순히 쫓겨나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향에서 살 권리를 요구하는 것”이라면서 국적회복 운동의 배경을 설명했다. 이 목사는 “중국동포 대부분은 일제 시대에 독립 운동이나 생활고를 피하기 위해 만주로 떠난 사람들의 후손”이라면서 “해방 후 북한에 들어선 김일성 정권 때문에 귀국길이 막혀 어쩔 수 없이 중국에 머물러야 했다.”고 설명했다. 이 목사는 이어 “1948년 제정된 ‘국적에 관한 임시조례’에 의해 한국 국민이 됐지만 1950년 한국전쟁 이후 중국과 한국과의 외교 관계가 단절되면서 ‘국제 미아’가 된 중국동포들이 자신의 뿌리를 찾는 것”이라며 이번 운동의 정당성을 강조했다. 이 목사는 불법체류자라는 이유만으로 중국동포들의 국적회복 신청을 받아주지 않은 법무부에 대해 ‘책임 방기’라고 강하게 비판했다.이 목사는 “우리나라는 지난 92년 중국과 수교를 맺을 당시 국내법 효력을 갖는 ‘재중동포의 지위에 대한 협정’을 만들지 않았다.”면서 “이는 만들어야 할 법을 안 만든 ‘입법 부작위’에 해당한다.”고 지적했다.또 “법무부는 중국동포들의 국적회복 신청을 거부함으로써 같은 동포의 국적선택권,평등권,행복추구권을 위배했다.”면서 “정부는 스스로 양산한 중국동포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려는 책임방기를 하고 있다.”고 강하게 비난했다. 이 목사는 이와 함께 “우리 국민들도 중국동포 문제에 대해 좀 더 따뜻한 시선을 보내달라.”고 호소했다. 이두걸기자 douzirl@ ■190만 中동포 이주 역사 현재 중국에 거주하고 있는 재중 동포는 190여만명에 달한다.대부분 구한말과 일제 식민지 시기에 독립운동을 하거나 생활고를 피하기 위해 한반도를 떠난 이주민의후손들이다. 주로 ‘동북 3성’으로 불리는 랴오닝·지린·헤이룽장성에 거주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베이징,톈진,신장,상하이,광저우 등 중국 전역 대도시로 진출하고 있다. ●첫 이주는 1860년 베이징조약 직후 재중 동포 이주사는 크게 3기로 나뉜다. 1기는 19세기 중엽부터 19세기 말까지로 대부분 가난과 탐관오리들의 폭정을 피해 압록강을 건넜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에서 1920년대에 이르는 2기에는 항일운동을 위한 정치적 망명이 주를 이뤘다. 3기는 45년 해방까지의 시기로 당시 일본은 일본인을 조선으로,조선인을 중국 동북지방으로 이주시키는 환위이민(換位移民) 정책에 따라 대규모 강제이주를 실시했다. 1기 이민은 1860년 베이징조약 체결 직후에 이뤄졌다.당시 청나라는 러시아의 침범에 대비하기 위해 청조의 발상지인 만주지방에 대한 ‘봉금정책’을 풀고 주민들을 국경지대로 이주시켰다.그러자 조선의 헐벗은 농민들도 비옥한 미개척지를 향해 강을 건넜다.이들은 이주 초기 청의 관헌들로부터 갖은 수모를 겪었지만 1880년대 청 조정이 간도개척을 위해 조선족 포용정책을 펼치면서 간도지방 곳곳에 조선족 마을이 생겨났다. 학계에서는 이 시기부터 한·일합병 직전까지 20여만명의 조선인들이 국경을 넘은 것으로 추정한다. ●한·일합병 직전까지 20만명 이주 일제의 한국침략이 노골화된 1905년 을사조약 체결 직후부터 1919년 3·1운동 전후까지는 주로 항일인사들의 정치적 망명이 많았다.국내에서 항일무장투쟁을 벌이던 홍범도,유인석,이범윤 등이 을사조약을 전후로 일제의 탄압을 피해 국경을 넘었다. 1910년 한·일합방 전후에는 국외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기 위한 ‘기획이민’이 활발했다.이상설,이동녕,안창호,박은식,신채호 등이 이 시기 만주에 정착했다.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본은 만주지방을 대륙 침략의 발판으로 삼기 위해 대규모 개발계획을 세운다.이에 따라 황무지였던 이곳에 조선 농민의 집단이주를 추진,38년 처음으로 간도와 랴오닝지방에 조선인들이 정착했다. 1941년 태평양전쟁 후에는 전쟁 물자와 식량을 조달하기 위해 ‘개척이민단’이란 이름으로 조선인농민들을 강제이주시켰다. 이세영기자 sylee@
  • 이강훈선생 영전에/ “통일이 참된 독립, 일깨워준 동지”

    “민족이 누란의 위기에 빠져 있어!어서 이 병실에서 나가 민족을 구하는 일에 나서야 하는데….” 100세를 넘긴 연세에도 여전히 독서를 하시며 병실을 찾은 이 아우에게 필담을 전하시던 이형! 이 사람 또한 백수를 바라보는 나이이나 빈소를 찾아 “광복은 되었지만 아직 독립된 나라는 아닌 만큼 우리가 힘을 합해 진정한 자주독립의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시던 생전의 말씀을 되새기며 돌아왔습니다. 우리 두사람이 말문을 트고 막역한 사이가 될 수 있던 것은 우리만의 공통점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아직 10대에 역사적인 3·1운동에 참여했다는 동류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둘째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부여한 소임을 수행할 기회를 부여받았다는 동지의식을 가졌습니다.하지만 두사람의 사이를 묶어둔 더욱 큰 동인은,민족 장래에 대한 현상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인식의 동질성에 있습니다. 광복 후 환국하신 백범(김구)선생님께서 “분단된 조국인 한 아직 독립을 이루었다 말할 수 없다.그러므로 조국통일을 위한 노력은 이 시대의 ‘새로운 독립운동’이다.”라고 수없이 강조하신 말씀에 우리는 전적으로 생각을 같이하였습니다.이승만정권 이후 역대 독재정권으로부터 갖은 탄압과 불이익을 강요받을 때마다 이형은 이 아우에게 자주독립한 통일조국에 대한 신념의 불꽃을 다시 지펴주시곤 했습니다.이토록 가장 든든한 조언자이자 동지인 이형을 보내는 이 아우의 마음은 비통한 심정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광복회장직을 수행하면서도 ‘광복된’나라가 아니라,진정한 의미로 ‘광복될’나라를 위함에 있음을 강조하신 이형!이형의 소천을 계기로 이땅에 생존한 광복회원이나 지도층이 이러한 ‘이강훈식 광복정신’을 받들어 ‘남북’ 및 ‘보혁’ 또는 ‘동서’의 빗장을 푸는 일에 앞장서는 것이 곧 이 시대의 애국운동이요,새로운 독립운동임을 자각하고 실천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 실로 간절합니다.이제는 고인이 되신 이강훈 형의 영전에 삼가 명복을 비오며…. - 신창균 ‘백범정신’ 공동대표 올해 95세인 신창균 대표는 1948년 백범과 함께 평양의 ‘남북지도자회의’에 다녀오는 등 평생을 독립운동과 통일운동에 바쳐왔다.
  • 이런 책 어때요 / 연애의 시대-1920년대 초반의 문화와 유행

    권보드래 지음 현실문화연구 펴냄 ‘개조론’ 혹은 ‘개량론’이 풍미하던 1920년대 전반의 문화와 유행을 연애라는 프리즘을 통해 조명.당대의 신문기사와 연재소설,삽화,광고 등을 통해 일상에 파고든 연애의 감각을 되살려냈다.저자는 “세계 개조의 목소리가 높던 시절,연애는 개조론의 대중적 변종이었고 행복에 이르기 위한 주요 통로였으며 문화·예술·문학의 유행을 자극한 주원천이었다.”고 말한다.연애의 대두는 3·1운동 이후 여성들의 향학열과 무관찮다.1923년 보통학교의 학생 수가 서당의 그것을 역전하는 현상이 발생하면서 남녀의 공동공간이 열리기 시작했다.1만 3000원.
  • 통계청의 ‘빨간사과와 편지’/吳청장 “용서하고 마음 풀자”

    23일 퇴근을 준비하던 통계청 공무원들은 ‘빨간 사과 1개’를 전달받고 환한 웃음을 지었다.깜짝 이벤트의 주인공은 오종남(51) 통계청장이었다. 오 청장은 동봉한 편지에서 “24일은 ‘사과의 날’로 둘(2)이 서로 사과(4)하는 날”이라며 “부임 후 지난 20개월 동안 고의든 실수든 잘못한 일이 있다면 용서하고 마음을 풀어 달라.”고 적었다. 오 청장은 TV 출연 등으로 생긴 과외 수입의 일부인 52만원으로 청사 지하 농협매장에서 사과 520개를 구입해 본청 직원 전원에게 돌린 것이다.그는 특히 사과 구입대금의 출처까지 상세히 공개했다. 오 청장의 이같은 이벤트는 이번이 두번째.그는 지난해 8월 전 직원에게 음주로 인한 폐해를 알리는 이메일을 보내 “술은 한 잔,한 종류,1차로 끝내자.”는 내용의 ‘절주 3·1운동’을 제안했었다. 통계청 관계자는 “직원들이 대통령 재신임 발표와 공직기강 점검 등으로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귀한 선물(?)을 받아 만족해하고 있다.”면서 “특별한 의미보다 지난 일은 잊고 새롭게 시작하자는 뜻이 아니겠느냐.”고 해석했다. 정부대전청사 박승기기자 skpark@
  • 자동차 여행길 ‘확’ 가까워진다/ 장시중著 ‘이지 드라이브’

    길을 떠나고 싶은데 막상 몸을 움직이려 하니 마땅하게 갈 곳이 없다.요즘처럼 길 좋은 세상에 어디로 가는 것이 좋을는지.이런 고민으로 당혹감을 느껴 본 사람들을 위해 ‘훌쩍 떠나는 여행길’이란 부제가 붙은 드라이브 가이드 ‘이지 드라이브’ 1∼3권이 출간됐다.중앙M&B 간,장시중 지음,각권 6800원. 난삽하지 않게 오로지 길에 집중한 책이다.1권 서해안 고속도로,2권 영동고속도로,3권 경부고속도로 편으로 만들어졌다.이 책 한권만 손에 쥐면 설령 고속도로를 지나다 길을 잘못 들어도 걱정없다.해당 고속도로 전 구간을 꼼꼼하게 그린 대형 지도로 시작되는 책은 각 나들목(인터체인지)과 갈림목(분기점) 별로 인근의 길과 명소를 빠뜨리지 않고 수록했다. 서해안고속도로의 해미 나들목 편을 보자.해미읍성과 수덕사,개심사,덕산온천을 안내하는 얼개지도가 제법 잘 찍은 사진과 어우러져 있는가 하면 ‘순교자들의 기도소리가 들리는 듯-해미읍성’,‘기원도량보다 수련도량으로 이름높은 수덕사’,‘학이 상처를 치료했다는 전설의 덕산온천’ 식으로인근 가볼 만한 곳을 간결하고 친절하게 안내하고 있다.맛보기로 곁들인 지역별 먹을거리 명소와 맛있는 집 소개도 힘이 된다. 1권 서해안고속도로 편은 서해안의 잘 알려지지 않은 비경과 명소,먹을거리를 손에 꼭맞게 쥐어준다.얼른 간추려 보아도 비봉 나들목의 제부도,대부도,영흥도가 있고,발안 나들목의 월문온천과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송악 나들목의 ‘서해 일출 1번지’ 왜목마을과 삽교호,홍성 나들목의 꽃지해수욕장과 안면도 자연휴양림,간월도가 있다.광천 나들목의 토굴새우젓도 빠뜨리지 않았다. 이어 대천-춘장대-서천-군산 나들목을 거쳐 금산사와 벽골제로 유명한 서김제 나들목이 있으며,채석강과 적벽강으로 유명한 부안 나들목이 나온다.동백으로 유명한 선운사가 있는 선운산 나들목과 굴비촌 법성포가 있는 영광 나들목을 거치면 어느덧 서해안의 여정이 다리를 푸는 목포에 이른다.목포는 다도해의 전진기지이자 영암 월출산과 다산 초당이 있는 강진,땅끝마을이 있는 해남으로 빠질 수 있는 거점도시이며 온갖 먹을거리가 넘치는맛기행의 천국이다. ‘높은 산과 푸른 동해의 태고적 신비’를 주제로 잡은 2권 영동고속도로 편도 알차다.횡성과 둔내 자연휴양림,방아다리 약수터와 오대산월정사,대관령 목장을 거쳐 경포대,정동진,주문진 등 태백 준령과 동해안 곳곳의 명소가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3권 경부고속도로 편은 ‘웅장한 대자연과 선조의 숨결’을 주제로 잡아 수원 화성과 한국민속촌,청주의 플라타너스길,청남대와 장용산 자연휴양림,자수정동굴과 통도사,범어사,태종대를 비롯,부산·경남북권의 명소까지 모두 섭렵하도록 돕는다. 드라이브에 초점이 맞춰져 지름길을 안내하는 등 운전자의 편의를 살핀 점이 돋보인다. 심재억기자 jeshim@
  • 책꽂이

    ●지중해 문화기행(이희수 지음,일빛 펴냄) 인종과 문명의 전시장인 지중해 연안 국가들의 역사와 문화를 살폈다.우리가 쉽게 떠올리는 남부 유럽의 지중해 뿐만 아니라 북부 아프리카 지중해문화권에 대해서도 다뤘다.저자는 북아프리카 지중해야말로 고대 이집트 문명의 줄기가 퍼져나갔고,페니키아의 카르타고 식민지를 통해 우수한 오리엔트 문명이 유럽으로 스며드는 통로였다고 말한다.1만 5000원. ●한국회화사용어집(이성미·김정희 지음,다할미디어 펴냄) 한국회화와 관계있는 용어들을 망라.회화기법,장황(裝潢,비단이나 두꺼운 종이로 서책이나 서화첩을 꾸며 만드는 것),평론의 기준이 되는 추상적 개념,전통적 화제,불화의 일반 도상,변상도,도석인물화 등을 다뤘다.1만 8000원. ●대통령 리더십(최진 지음,나남출판 펴냄) 지도자의 리더십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 개인의 성격이라는 전제 아래 ‘플러스·마이너스 리더십 이론’을 전개.플러스 리더십은 활력이 넘치지만 불안한 반면,마이너스 리더십은 안전하지만 답답하다.저자(21세기전문가포럼 대표)는, 이 두 리더십은 파도처럼 굴곡을 그리며 반복해 나타난다는 점에서 ‘파도이론’이라는 색다른 이론을 제시한다.1만 7000원. ●한국사회주의의 기원(임경석 지음,역사비평사 펴냄) 사회주의는 한때 젊은이들에게 꿈이요 이상이었다.‘젊어서 사회주의자가 아닌 사람은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우리 역사에서 사회주의는 그만큼 영향력이 컸던 이념이요 사상이었다.사회주의는 3·1운동을 계기로 ‘조국해방’을 위한 운동이자 방법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이 책은 당시 사회주의 중앙기관의 역할을 자임한 두 개의 구심체였던 상해파 공산당과 이르쿠츠크파 공산당의 활동을 살핀다.3만 3000원. ●식물성의 사유(박영택 지음,마음산책 펴냄) 식물성을 화두로 삼아 한국 현대미술 읽기를 시도한 에세이.풀,꽃,나무,숲 등 14개 항목을 통해 우리 미술의 진경을 펼쳐 보인다.대중추수적인 작품보다는 독자적인 시선이 담긴 작품들을 대상으로 했다.저자는 인간과 자연을 치유하는 식물성의 긍정적인 힘을 역설한다.2만원. ●파라파라산의 괴물(라이마 글·그림,심봉희 옮김,어린이디자인하우스 펴냄) 잠들기 직전의 유아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인 그림자를 글감으로,사물에 대한 관찰력과 상상력을 길러주는 타이완산 그림책.파라파라산에서 굴러떨어진 겁쟁이 돼지 루루는 산에서 시커먼 괴물을 봤다고 우기고,그 소문에 온동네 아이들이 겁에 질리는데….재치있으면서도 밀도있는 그림들이 매우 이채롭다.3∼6세용.7500원. ●신화 속 상상동물을 찾아서(이인식 글,이우일 그림,문학동네어린이 펴냄) 반인반수의 엔키두,미궁을 지키는 미노타우로스,외눈박이 거인족 키클롭스,우주의 뱀 아난타….세계의 신화에 등장하는 상상의 존재들을 근간으로 동서양의 대표신화들을 소개하는 신화해설서.‘도날드 닭’ 이우일의 익살스럽고도 친근한 그림이 팬터지의 결을 생생히 살려낸다.전설의 동물들에 이야기의 초점을 맞춘 ‘전설 속 상상동물을 찾아서’도 함께 나왔다.초등학생용.각권 7800원.
  • [씨줄날줄] 마지막 황제

    마지막 황제가 있었다.흔히 시련기에 비유되는 구한말,제한제국의 순종 황제다.33살에 아버지 고종의 뒤를 이어 황제에 등극했다.3년 만에 국권을 일제에 넘겨 주고 창덕궁으로 물러나 숨죽이고 16년을 살았다.고구려나 고려도 황제를 칭하며 천하를 호령하다가 마지막엔 왕이라 불렀다.주변 강대국의 위세에 눌려 스스로 격을 낮추어 생존을 보장받았던 게다.그러나 열강에 사지가 꽁꽁 묶여 버린 순종은 몸을 낮출 기력조차 없었다.그래서 우리를 더욱 서럽게 한다. 77년 전 순종이 52살의 나이로 숨을 거두고 6월10일 장례가 치러졌다.조선 팔도에서는 민중들이 구름처럼 몰렸다.장례 행렬이 창덕궁을 나와 지금의 서울 종로3가 단성사 앞을 지나던 오전 8시30분쯤 대한독립만세가 봇물처럼 터졌다.3·1운동 그리고 1929년의 광주학생운동과 함께 3대 독립운동인 6·10만세 운동이었다.순종의 장례를 처음부터 끝까지 사진으로 찍어 모아둔 새로운 사진첩이 공개됐다.비슷한 자료들이 이미 공개됐던 터다.그런데도 이번 사진 자료들이 예사롭지 않은 것은 작금의우리 처지 때문일 것이다. 세상은 요즘 대통령의 방일 외교를 놓고 뒷말들이 많다.순종의 후예들을 대표한 대통령은 바로 그 일본을 방문하면서 ‘과거’를 소홀히 다뤘다고 비판한다.왜 하필이면 일제 침략에 맞서 싸우다 순국한 열사의 뜻을 기리는 날 일본 방문이냐는 것이다.한국 대통령을 초청해 놓고 유사법제 관련 법안들을 통과시키는 일본의 무례에도 분개한다.북한의 핵을 빌미로 이제 한국의 입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재무장의 길을 가고 있다고 우려한다.그런가 하면 한편에선 언제까지 일본 탓만 하고 있을 것이냐고 반박하기도 한다. 확실히 어려운 시대를 맞고 있다.우선 북한 핵이 우리를 옥죈다.미국과 일본 그리고 중국과 러시아가 저마다 발언권을 주장하며 결국 ‘부담’을 요구한다.내부적으로 사회의 구심점이 흔들린다는 지적이 꼬리를 문다.각계각층의 요구가 봇물을 이룬다.누구도 감당할 수 없을 지경이다.지도층의 리더십이 비틀거린다는 지적도 있다.사리의 옳고 그름을 떠나 누구 편이냐를 먼저 따져 옥타브를 올려댄다.‘민족 시련’의 요약이었던 순종 황제의 장례식이 시리도록 가슴을 파고 든다. 정인학 논설위원
  • 이달의 독립운동가 이시영 선생

    국가보훈처는 성재 이시영 선생(사진)을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31일 밝혔다. 1869년 서울 저동에서 백사 이항복 선생의 10대 손으로 태어난 선생은 1909년까지 형조좌랑,평남 관찰사,한성재판소장 등을 거쳤고 경술국치를 당하자 이회영 선생 등 형제 일가를 거느리고 서간도로 망명,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인 신흥강습소를 설립했다.3·1운동 이후 상하이로 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해방 뒤 귀국 때까지 재무총장으로 임시정부 재정을 이끌었다.1930년 결성된 한국독립당 감찰위원장으로도 활동했으며 귀국 후에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위원장,대종교 원로원장 등을 역임했다.선생은 1948년 제헌 국회에서 초대 부통령으로 당선됐고,6·25 전쟁 중인 1953년 4월 작고했다.정부는 선생의 공적을 기려 194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 반평생 태극기 사랑 “전시관 짓는게 소원”28년째 13만개 무료 보급한 조형식씨

    “70∼80년대 안보를 상징했던 태극기가 작년 월드컵을 계기로 국민통합과 평화통일을 기원하는 의미로 바뀌었습니다.” 28년째 태극기를 무료 보급하고 있는 조형식(52·사업·전북 전주시 평화동)씨는 “태극기의 존엄과 애국심이 갈수록 희미해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걱정한다. 추석이나 설보다 3·1절을 앞두고 더욱 분주한 조씨가 태극기 무료보급운동을 시작한 것은 지난 75년.태극깃발 아래 한데 뭉쳐 일제에 항거했던 3·1운동의 민족정신을 다시 일깨우는 방법을 찾다 혼자 ‘나라사랑 국기사랑 선양회’를 만들었다. 해마다 3·1절이 돌아오면 사비를 털어 1만개 안팎의 태극기를 구입,무료로 나눠주고 있다.버스와 택시기사,노점상은 물론 태극기를 살 형편이 안되는 영세민들까지 찾아다니며 나눠준 태극기가 13만여개에 이른다.소화기와 방독면 등 재난장비업체를 운영하는 그가 태극기 사는 데 들인 돈만 3억원이 넘는다. 그는 앞으로 전국 각지의 역사성 있는 태극기를 한데 모을 계획이다.신사유람단이 일본에 가져갔던 태극기와 백범 김구선생의 피가 묻은 태극기 등 독립기념관이나 박물관,개인 소장품 등 각지에 분산된 태극기를 찾아 카메라와 비디오에 담았다.90년대 들어 촬영하기 시작한 희소가치가 큰 60여점의 태극기를 사진과 비디오 테이프로 제작해 조만간 전시·상영할 예정이다.조씨의 소원은 전주에 태극기 전시관을 짓는 것이다. 전주 임송학기자 shlim@
  • “3·1운동 기념관이 왜 필요없습니까”‘33인’ 이종일 선생 외증손자 기념관 추진 ‘또다른 3·1운동’

    “참 답답한 양반이셨죠.남작 작위를 주겠다는 제안도 마다하고 스스로 굶어죽는 길을 택하셨어요.” 28일 오후 서울 종로구 수송동 근린공원을 찾은 박인성(사진·66)씨는 착잡한 듯 담배부터 꺼내 물었다. 100평 남짓한 소공원 한쪽에는 인쇄소 보성사(普成社)가 있던 자리임을 알리는 표지석과 2001년 8월에 세웠다는 옥파(沃坡) 이종일(李鍾一) 선생의 동상이 쓸쓸하게 서 있었다.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었던 옥파 선생의 외증손자로 서울 장충동 3·1운동기념탑 건립을 주도하기도 한 박씨는 요즘 3·1운동기념관 설립을 위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3·1운동은 비폭력평화운동의 기원이 된 세계사적 사건입니다.중국의 5·4운동,간디의 무저항비폭력운동도 그 뿌리는 3·1운동이에요.그런데 사람들은 왜 3·1운동기념관이 필요한지 이해를 못해요.” 박씨가 3·1운동기념사업에 뛰어든 것은 외증조부인 옥파 선생과 10년 전 돌아가신 어머니 때문이다. 민족대표 33인중 가장 나이가 많았던 옥파 선생은 3·1운동 당시 천도교 인쇄소 보성사의 사장으로 기미독립선언문과 지하신문인 조선독립신문의 인쇄·배포를 주도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선생은 이 일로 3년간 옥고를 치른 뒤에도 1922년 3월 제2의 만세운동을 일으키기 위해 손수 ‘자주독립선언문’을 기초하다 발각돼 고초를 겪을 만큼 민족의식이 투철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10년 전 돌아가신 박씨의 어머니 역시 3·1운동 당시 증조부를 대신해 경운동 집에서 독립선언서를 나눠주다 7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어린 시절 어머니로부터 증조부 얘기를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듣고 자랐어요.증조부는 절친했던 동지들이 변절하거나 망명길을 떠난 뒤에도 일제의 협박과 회유를 거부하고 지금의 강북삼성병원 자리인 죽첨정 1번지에서 영양실조로 돌아가셨다고 하시더군요.이 얘기를 듣고 ‘증조부의 생애와 사상을 반드시 세상에 알리겠다.’는 결심을 품었습니다.” 하지만 67년 갑작스럽게 찾아온 아버지의 죽음 이후 7남매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의 중압감이 그를 짓눌렀다.미대 재학중 아르바이트 삼아 시작한 시사만화 그리기는어느새 그의 직업이 됐다. 서울신문을 시작으로 중앙일보·부산일보 등에 만평과 4컷만화를 그렸다.하지만 그의 몸 속에 흐르는 ‘독립운동가’의 피는 순탄한 시사만화가의 길을 허락하지 않았다. “79년 증조부가 남긴 비망록이 발견됐어요.증조부의 보성학교 제자였던 이병도·백낙준 박사와 함께 기념사업회를 꾸렸지요.그 뒤 기록 발굴과 생가 복원을 위해 전국 곳곳을 헤매다녔어요.당연히 본업은 뒷전일 수밖에요.” 박씨와 제자들의 노력으로 83년 4권짜리 ‘옥파전집’이 발간되고 같은 해 충남 태안 생가터에 기념관이 건립됐다. 2년 전에는 수송동에 동상도 세워졌다.하지만 박씨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는다. 박씨의 마지막 꿈은 서울 장충동에 3·1운동기념관을 세우고 이곳에 ‘3·1정신’을 계승한 ‘세계비폭력평화운동본부’를 설립·유치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할 만큼 했으니 그만하고 쉬라지만 그럴 순 없지요.사실 친가쪽 둘째 할아버지가 33인중 한 사람이었다가 변절한 박희도(朴熙道)씨입니다.그 분의 잘못까지 속죄하려면 아직도 갈 길이멉니다.” 이세영기자 sylee@
  • [사설]3·1절 이념 충돌을 우려한다

    3·1절을 맞아 몇몇 민간 단체들이 두 쪽으로 나뉘어 그날의 민족 정신을 되새기는 행사를 갖는다고 한다.언필칭 보수 진영의 단체는 ‘반핵 반김 3·1절 국민대회’를 열기로 했다.김정일 정권과 한국 내 북한 추종 세력에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기 위한 대회라고 한다.반면 진보 진영의 단체는 북측의 대표단까지 초청해 ‘평화와 통일을 위한 3·1절 민족대회’를 갖거나 혹은 ‘민족자주 반전평화 실현대회’를 계획했다고 한다.어떤 대회는 순국 선열들이 만세 운동을 시작했던 비슷한 시각에 맞춰 대회를 시작하는가 하면 다른 단체는 바로 3·1운동 현장에서 집회를 시작하기로 했다. 대회들은 명칭부터 날카로운 이념적 대립을 내보이고 있다.북한 핵문제를 비롯해 민족통일 방안을 놓고 서로 다른 입장을 보여온 사람들이 이제 모두 길거리를 택했다.차분한 분석과 냉철한 판단을 접어 버리고 힘으로 겨뤄보겠다는 것이다.참으로 개탄스럽다.민족적 위기 상황에서 손을 맞잡아도 시원찮은 판에 둘로 나뉘어 날을 세워가고 있다.뻔뻔스럽게도 3·1정신을 들먹인다.민족을 지키기 위해 다른 민족의 총칼에 맨주먹으로 맞섰던 바로 그 정신을 잇는 것이라고 우긴다. 보다 못해 국가의 어른격인 원로 188명이 나섰다.북핵 문제 등을 둘러싸고 국민 의견이 양분되고 3·1절에도 서로 상반되는 대중 집회가 계획돼 있어 한반도 위기가 더 격화할 수 있다며 양쪽 입장이 모두 극단적인 생각이라고 나무랐다.이념적 대립을 조장해 사회 분란을 촉발시키는 몇몇 민간 단체의 집회는 즉각 중단되어야 한다.자주 독립과 민족 번영의 3.1정신을 훼손시켜선 안 될 것이다.끝내 집회를 고집하겠다면 3·1절이라도 피해라.선열들의 순국을 결코 헛되게 해서는 안 된다.
  • [기고] 참여정부시대의 3·1정신

    “어떠한 나라든지 제가 스스로 망하는 것이지 남의 나라가 남의 나라를 망할 수 없는 것이요.(중략) 자존심이 있는 민족은 남의 압박만 받지 아니하고자 할 뿐 아니라 행복의 증진도 받지 않고자 하느니 이는 역사가 증명하는 바이라.4000년이란 장구한 역사를 가진 민족이 언제까지든지 남의 노예가 될 것은 아니다.” 3·1운동의 민족 대표 33인 중 한 분인 한용운(韓龍雲·1879∼1944) 선생이 법정에서 한 말씀의 일부이다. 숱한 외침을 극복하고 5000년 민족사를 이어 온 힘은 바로 문화민족으로서의 자존심이 아닌가 싶다.한용운 선생이 말씀하신 것처럼 자존의식이야말로 수많은 국난을 이겨내고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한 정신적 에너지였으며,국가발전의 동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제 곧 여든 네번째 3·1절을 맞는다. 우리는 지난해 월드컵대회 때 서울의 광화문과 시청앞,그리고 지방 곳곳의 광장에서 ‘대∼한민국’을 외치며 하나됨을 느꼈다. 1919년 3월에도 이 땅은 민족자존을 위한 함성으로 뜨겁게 달구어졌었다.만세운동의 함성에는 지역·계층·종교·세대의 구분이 따로 없었다.오직 자주독립이라는 민족적 열망으로 하나로 뭉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시대가 변하고 세대가 바뀌어도 우리에게 변하지 않는 것은 민족에 대한 애착이요,자긍심이다. 돌이켜 보면 3·1운동은 선열들께서 민족자결주의의 시대적 흐름을 간파하여 이를 활용한 거사였다.이 때 표방된 민족통합과 국제평화,민주이념 등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이 소중히 간직해야 할 가치이다. 3·1정신은 첫째,민족 모두가 하나되어 조국독립을 외쳤던 대동단결의 정신에서 그 교훈을 찾을 수 있다. 3·1운동에서 드러난 민족통합의 정신이야말로 사회적 갈등을 극복하고 남북통일을 이루어야 하는 우리에게 필요한 정신적 가치가 아닌가 싶다. 둘째,세계평화와 인도주의 정신을 들 수 있다. ‘독립선언서’에서는 “우리의 꿈은 결코 구원과 일시적인 감정으로써 타를 질축 배척함이 아니라 동양평화,나아가 세계평화와 인류행복에 이바지한 데 있다.”라고 천명하였다.이러한 정의·인도·평화의 정신은 대립과 긴장,분열을 극복하고 인류평화에 이바지할 수 있는 이정표를 세워주고 있다. 셋째,3·1운동의 결과 중국 상하이에 세워진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는 민주공화국의 기치를 내걸어 오늘날 우리가 지향하고 있는 민주주의의 이념을 민족사에 새겨놓음으로써 민주인권국가의 토대를 마련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집단적 갈등과 이기주의,가치관 혼란현상 등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또한 국제적으로는 이라크 전쟁이 일어날 경우 경제적 어려움이 가중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고,북한 핵문제로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한반도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때에 우리 모두 3·1운동의 숭고한 정신을 되새겨 당면한 국가적 난제를 해결하고 새로운 국가건설에 주춧돌을 놓아 나갔으면 한다. 특히 이 시대에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대통합의 정신이라 할 것이다.국가적 에너지를 하나로 모아 낼 수 있는 국민통합의 바탕 위에서 동북아 경제중심국가 건설,지식문화강국 실현 등의 국정과제를 해결해갈 수 있다. 새 정부가 출범하고 처음 맞는 3·1절에 즈음하여 선열들의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되살려 민족자존을 지키고 나라의 부강도 기대할 수 있음을 가슴 깊이 새겼으면 한다. 김 종 성
  • 北천주교 서울서 첫 합동미사/민족화해위원회, 3·1민족대회에 초청 명동성당등 방문

    광복 이후 처음으로 북한의 천주교 신자들이 남한의 성당을 방문한다.천주교 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민화위·위원장 김운회 주교)는 최근 전국회의를 열어 새달 1일부터 사흘간 서울 일원에서 열리는 ‘평화와 통일을 위한 3·1민족대회’에 북측 천주교 신자들을 초청했다고 21일 밝혔다. 민화위에 따르면 새달 2일 오전 10시 북한의 천주교 신자들이 서울대교구청과 명동 주교좌성당을 방문하는 데 이어 남측 신자들과도 만날 예정이다.3·1민족대회 행사에는 북측에서 장재언(사무엘) 조선가톨릭교협회 중앙위원장 등 15명이 참가할 것으로 알려졌다. 민화위는 겨레의 염원인 민족화해와 일치의 발판이 될 수 있도록 오는 6월22일 경의선 복구 현장에서 ‘민족화합 대미사’를 봉헌키로 하고 이 안건을 주교회의 봄 정기총회에 상정키로 했다. 남한 천주교계는 이같은 계획에 따라 민족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운동으로 9일기도(6월14∼22일)행사를 가진 뒤 마지막 날인 6월22일 오전 11시 경의선 복구 현장인 도라산역에서 ‘민족화합 대미사’를 봉헌한다.민족화해 및 일치를 위해 1년간 매일 1단 이상씩 묵주기도 바치기 운동도 펼칠 예정이다. 민화위가 이같은 대북교류에 나선 것은 올해 활동의 중점을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운동 ▲협력전문위원회 활성화 및 연구기능 강화 ▲대북지원 활동 ▲민족화해 교육 및 홍보활동 등에 둔 데 따른 것이다. 특히 이번 북한 천주교 신자들의 방한은 최근 종교계에서 3·1운동의 재해석을 통해 현대사회 속에서 교회의 역할과 몫을 새롭게 정립해 나가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것과 맞물려 관심을 모으고 있다. 천주교를 비롯한 개신교 불교 유교 원불교 천도교 민족종교협의회 등 7대 종단 종교인들로 구성된 한국종교인평화회의(KCRP·회장 최창규)는 지난 14∼15일 정기총회를 열어 북한 핵문제로 고조되고 있는 한반도의 긴장을 완화하기 위해 종교인의 몫을 적극 찾아나갈 것을 결의했었다. 김운회 주교는 “민족화해를 위해 교회정신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지 고민했다.”면서 “이번 북측 신자들의 방문을 계기로 우리 종교계의 민족화해를 위한 실질적 역할 분담이 이루어질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김성호기자 kimus@
  • 카프 주도 소설가 남천 김효식 6·25직후 北서 총살

    김기진·임화 등과 함께 카프(KAPF)문학을 주도하다 6·25 직후 북한에서 숙청된 것으로만 알려진 소설가 겸 평론가 남천 김효식(金孝植·1911∼?)의 최후가 확인됐다. 민족문학작가회의 인천지회는 최근 발간한 지회보 ‘작가들’7호에 게재한 남천의 조카 김희섭(83)씨,생질녀인 박숙란(72)씨 부부 등과의 인터뷰에서 남천이 6·25 정전 직후 북한에서 총살당했음을 확인했다. 임형택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와 문학평론가인 최원식 인하대 국문과 교수 등이 함께한 인터뷰에서 남천의 친척들은 “김일성이 남천에게 ‘함께 일하자.’고 권유했지만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내 식대로 하겠다.’라고 거부했다가 총살됐다.”고 공개했다.박숙란씨는 “당시 북한측은 남천을 전향시키려고 그가 보는 앞에서 남동생인 김래식씨 부부를 총살했지만 그래도 남천이 뜻을 굽히지 않자 뒤이어 부모를 총살했다는 사실을 지투(북파 공작원)를 통해 확인했다.”고 밝혔다. 지금까지는 남천이 남로당 지하조직을 이끌던 박헌영 등과 함께 1947년 월북했다가 정전 직후인53년 숙청된 것으로만 알려졌을 뿐 총살 당한 사실이 확인된 것은 처음이다.친척들은 “남천이 한때 김일성의 비서를 지낸 친구 한재덕과 함께 일본 유학을 했으며 이때 마르크스주의에 심취,독립의 유일한 방편으로 사회주의혁명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고 풀이했다.이들은 “남천이 평양고보 재학중 함께 동인활동을 한 한씨와 막역한 사이였으며,‘인문평론’에서 활동할 때(1937∼1940년 전후)최재서·백철·임화·안막 등과 가까워졌다.”고 술회했다. 최원식 교수는 “남천의 행적을 두고 남쪽에서는 월북했다고 하고,북쪽에서는 반(反)김일성 노선을 택한 이른바 ‘반북노’로 분류,결국 그는 남북 양쪽에서 버림받은 불행한 문학인이었다.”면서 “남한에서 지난 89년 해금조치가 이뤄져 그에 대한 연구가 가능하게 됐다.”고 말했다. 남천은 평양고보를 졸업한 뒤 1929년 일본 호세이대학에 유학,임화·안막 등과 함께 카프 도쿄지부 기관지인 ‘무산자’를 중심으로 활동하다 ‘좌익활동’을 이유로 제적됐다.귀국 후에는 한재덕 등과 평양고무공장 총파업에 관여하기도 했다.이어 1930년 첫 평론인 ‘영화운동의 출발점 재음미’를 중외일보에 발표했으며,이듬해 카프 1차 검거때 기소돼 2년형을 받았다. 남천은 1935년 임화 등과 함께 경찰에 카프 해산계를 낸 뒤 조선중앙일보에서 신문기자로 활동하기도 했으나 45년 다시 조선문학건설본부 설립을 주도했으며,이듬해에는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회 서기국 서기장을 맡았다.47년 월북했지만 전쟁 중에는 서울에 머물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주요 작품으로는 장편소설 ‘대하’‘사랑의 수족관’과 중·단편 ‘물’‘처를 때리고’‘구름이 말하기를’등이 있으며 ‘영화운동의 출발점 재음미’를 비롯한 많은 평론과 희곡 ‘3·1운동’을 발표했다. 심재억기자 jeshim@
  • 3·1문화상 전숙희·손욱씨 선정

    3·1문화재단(이사장 文仁龜)은 29일 제44회 3·1문화상 수상자를 발표했다.3·1운동 정신을 기념하여 각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이룬 사람에게 주는 이 상은 예술 부문에 전숙희(全淑禧·84) 한국현대문학관 이사장,기술 부문에 손욱(孫郁·58) 삼성종합기술원장을 각각 뽑았다.인문·사회과학과 자연과학 부문은 수상자를 내지 못했다.
  • 방치된 ‘님의 침묵’서울 계동 만해 한용운 한옥 파손 심각

    만해 한용운이 15년 동안 기거하며 나라잃은 슬픔과 독립의지를 담은 시 ‘님의 침묵’을 구상했던 옛집이 지자체와 문화재 당국의 무관심 속에 방치되고 있다. 서울 종로구 계동 43.현대건설 사옥에서 계동길을 따라 중앙고등학교 방면으로 100m쯤 올라가면 중앙목욕탕을 끼고 도는 골목길 안쪽에 35평 남짓한 ‘ㄷ’자형 한옥이 자리잡고 있다.1919년 3·1운동 당시 만해가 천도교 신파의 거두였던 최린(崔麟) 등과 함께 ‘거사’를 계획하고 중앙학교 강사로 활동하며 작품활동을 했던 곳이다. 만해의 옛집을 처음 발굴한 소설가 오인문(60·종로구 홍지동)씨는 29일 “1월 초 처음 발견했을 때 서까래가 썩고 기왓장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고 기쁨보다 참담함이 앞섰다.”면서 “지자체나 시민들이 나서 보존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주인 여규평(46)씨는 “1988년 이사온 뒤 몇 차례 손을 댔지만 비용이 만만치 않아 보수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면서 “차라리 재건축업자에게 팔아넘기고 싶은 심정”이라고 털어놨다. 하지만 종로구나 서울시는 집이 ‘사유물’이라는 점을 내세워 보존에 소극적이다.종로구청 관계자는 “근현대 건축물의 경우 뚜렷한 역사적·문화적 가치가 입증되지 않으면 문화재로 지정되기 어렵다.”면서 “홍지동의 빙허 현진건 고택도 수차례 서울시에 문화재 지정을 요청했으나 예산문제 때문에 거부된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시민들은 관계 당국의 적극적인 관심을 주문하고 있다.서울문화예술인 유적보존회 관계자는 “우이동의 최남선 고택과 원서동의 고희동 고택도 당국의 무관심으로 헐릴 위기에 처해 있다.”면서 “작가가 잠시 머물며 집필활동을 했던 온천장까지도 기념관으로 활용하는 이웃 일본의 문화재 정책을 본받아야 한다.”고 꼬집었다. 이세영기자 sylee@
  • ‘1월의 문화인물’ 안확 선생

    항일기의 국학자 안확(安廓·1886∼1946)선생이 2003년 ‘1월의 문화인물'로 선정됐다. 안확 선생은 1910년 일본에 국권을 빼앗긴 뒤 지식인들이 서구문명 우월주의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여,민족문화의 장점을 발견하는 것이 곧 독립의 길이라는 신념으로 국학 연구에 몰두했다. 선생은 서울에서 태어나 1910년 마산 창신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다,1914년일본으로 건너가 니혼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했다.1916년 돌아온 뒤 조선국권회복단 마산지부장으로 3·1운동의 마산시위를 주동했다. 1921년에는 서울로 올라와 조선청년회 기관지 ‘아성’(我聲)의 편집인으로 일했으며,1928년부터는 이왕직아악부(李王職雅樂部)에서 촉탁으로 일하며음악 및 국문학 관계의 방대한 왕실 소장 자료들을 연구했다. 선생은 이런 연구 활동의 결과 ‘조선문법’(1917)과 ‘조선무사영웅전’(1919),‘자각론’(1920),‘조선문학사’(1922),‘조선문명사’(1923),‘시조시학’(1940) 등의 저서와 ‘조선어의 가치’(1915) 등 140여편의 논문·논설을 남겼다. 문화관광부는 안확 선생의 문화인물 선정을 기념하여 내년 1월24일 오후 2시 대우학술재단과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에서 학술대회를 여는 등 기념행사를 펼친다. 서동철기자 dcsuh@
  • ‘여중생 사망’ 추모대회양주서 유족등 300여명 참석

    미군 궤도차량에 치여 숨진 ‘고 신효순·심미선양 추모 촛불대회’가 18일 오후 6시30분부터 3시간여 동안 경기도 양주군 광적면 가납리 3·1운동 기념비 앞 광장에서 열렸다. 유가족과 효촌2리 청년회,광적면 농업인 후계자,주민 등 300여명이 참석한이날 촛불 추모대회는 지역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주관해 마련했으며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 개정 및 재판 무효화를 주장하는 결의문 낭독,추모사,촛불 점등 등의 순서로 진행됐다. 효촌2리 박용안(54) 이장은 “온 국민이 하나돼 요구하는 SOFA 개정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 유족들과 아픔을 함께 하기 위해 추모대회를 개최했다.”고 말했다.신효순양의 아버지 현수(48)씨는 “미선·효순이뿐 아니라 미군들에 의해 희생된 모든 영혼들을 위한 추모제로 생각한다.”며 “아이들의죽음이 헛되지 않기 위해 반드시 불평등한 SOFA가 개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양주 한만교기자 mgha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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