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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학이 머문 풍경]광주 황룡강과 시인 박용철

    [문학이 머문 풍경]광주 황룡강과 시인 박용철

    용아 박용철(1904∼1938).1930년대 영랑 등과 함께 ‘순수시’ 탄생을 이끌었던 시인이다.학창시절 ‘떠나가는 배’의 작자 정도로만 기억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고,어디서 태어나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도 잘 모르는 사람도 많다. 광주시 광산구 소촌동 어등산 끝자락에 자리한 생가를 찾았다.구릉지 아래 꼿꼿이 선 아름드리 고목이 본채와 행랑·사랑채를 굽어본다.용아가 고고성을 울렸던 본채는 돌담으로 쌓은 석축 위에 원형대로 잘 보존돼 있다.사랑채는 최근 복원된 듯 붉은 황토벽이 드러나 보인다. 본채와 사랑채 사이엔 꽃과 나무들이 빽빽한 정원이다.지금은 앞에 큰 건물들이 들어서 시야를 가린다.사방으로 도로가 뚫려 여느 도심속의 외딴 민가쯤으로 보인다. 용아가 유소년기를 보냈던 일제 말기,당시엔 앞뜰에 서면 황룡강과 영산강이 흐르고 드넓은 농토가 펼쳐졌을 것이다. 그는 1904년 8월 이곳 솔머리 마을에서 대지주였던 박하준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충주 박씨 씨족 마을이었던 터라 일가 친척들이 행랑채에 모여들었다.위로 두 형이 있었으나 모두 병약하여 집안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집안 사람들의 기대와 축복속에 태어난 그가 1930년대 한국현대시사에 큰 획을 그은 ‘시문학파’ 주도자이다. 현재 그의 생가에 살고 있는 육촌 여동생 박숙철(69)씨는 “오빠가 요절한데다 너무 어린 시절이어서 그에 대한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아무튼 그는 당시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서울과 일본 도쿄를 오가며 신식 교육을 받은 엘리트였다.수리와 어학에 뛰어났으며,전남 강진의 영랑 김윤식과 교류하며 문학도의 길로 접어든다. 그의 소년기에는 광주를 중심으로 장성,함평,담양,나주 등지에서 한말(韓末) 의병활동이 활발했다.그의 집에서 멀지 않은 어등산이 의병활동의 거점지였고,이들이 최후를 맞은 역사적 현장이기도 하다. 나라 잃은 설움과 갈곳 잃은 백성들의 처지를 뼈아프게 체험했을 것이다. 그는 1930년 영랑 등과 함께 시문학 동인을 결성하고 사재를 털어 ‘시문학’을 창간했다.이 잡지 창간호에 그의 대표작인 ‘떠나가는 배’,‘비 내리는 밤’ 등을 발표했다. 1925년에 쓰여진 이 시는 당시 문단의 절망과 허무의식을 그대로 담고 있다.당시의 절망적인 식민지 현실과 3·1운동 실패라는 시대적 배경에서 나온다.이런 어려움을 벗어나려는 노력과 떠남에도 ‘앞 대일 언덕’ 같은 희망이 없는 ‘비애’를 잘 보여주고 있다. 용아가 이끌었던 시문학파는 ‘시문학’발간에 참여한 김영랑,박용철,정지용,신석정,이하윤 등을 가리키며 흔히 순수시의 대명사처럼 사용된다. 이들은 1920년대 경향시의 이념성에 반발하여 시의 예술성을 높이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이들은 시가 언어의 예술이라는 점에 착안,시어의 조탁에 힘썼고 시의 음악성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김영랑에 비해 ‘시인’으로서는 덜 성공한 편이다.그러나 비평문학,번역문학,잡지편집 등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시문학’ 외에도 ‘문예월간’‘문학’등 각종 문예지 발간에도 주력했다. 그는 1938년 폐결핵과 싸우면서도 ‘박용철 시론’의 핵심인 ‘시적 변용해 대해서’를 ‘삼천리문학’ 창간호에 게재한 후 35세의 나이로 짧은 생애를 마쳤다. 올해로 탄생 100주년을 맞았으며 백일장대회,시비건립,생가 기념물 지정 등 각종 기념사업이 펼쳐지고 있다. 류복현(60)광산문화원장은 “용아 선생은 우리 국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긴 민족 애국시인”이라며 “후세가 그의 문학정신을 바탕으로 ‘문향’ 광주의 이미지를 드높여야 한다.”고 말했다. ●
  • 조봉암·여운형 선생 독립운동 서훈 될듯

    조봉암·여운형 선생 독립운동 서훈 될듯

    노무현 대통령이 이념을 떠난 독립운동사 규명 필요성을 제기한 것을 계기로 국가 서훈 대상에 오를 가능성이 거론되는 좌파 계열의 독립운동가들에게 관심이 쏠리고 있다.또 서훈을 신청했다가 보류됐거나 사실상 거부된 면면은 누구인지,신청서에 나타난 그들의 활동상은 어떤지도 관심사항이다. ●지금까지 어떻게 처리됐나 좌파계열 독립운동가들은 1980년 이후부터 약간씩 정부의 서훈대상으로 올랐다.올해 광복절에는 고려공산당과 조선공산당 만주총국결성 등에 참여한 윤자영이 독립 유공자에 선정됐다. 좌파계열 포상자의 경우 북한정권과 무관하고 광복 이전에 사망해 좌우투쟁에 개입하지 않은 인물이 대부분이다.윤자영은 나중에 소련 정부에 의해 총살당했다는 사실 때문에 좌파활동의 ‘면죄부’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에 서훈을 신청했다가 유보 또는 거부판정을 받거나 이를 예상하고 아예 신청을 포기한 좌파계열 독립운동가는 200명 선으로 추산되고 있다.대부분 독립운동 이후 친일이나 6·25 때 부역활동이 드러나는 등 불투명한 사후 행적이 문제가 됐다고 한다. 여운형의 경우 2002년에 이어 올해 또다시 서훈을 신청했으나 탈락하자,기념사업회 관계자가 보훈처에 항의서한을 보내기도 했다.국회에도 선정협조 공문을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의 선정 기준이 자의적이라는 지적도 있다.연해주에서 한인사회당을 조직,공산주의 단체결성을 도운 이동휘는 김영삼 정부 시절 뒤늦게 독립유공자에 포함돼 논란이 일기도 했다. ●주요 대상 인물 해방 이후 진보당 당수를 지낸 죽산 조봉암과 몽양 여운형,조선공산당 책임비서를 지낸 김철수 등이 꼽힌다. 3·1운동 뒤 만주 등에서 항일무장운동을 벌였던 김시현,광주학생운동을 주도한 장재성,1920년대 국내 공산주의 거물인 김재봉과 권오설,1930년대 이후 중국에서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을 벌인 김두봉,김무정,최창익 등도 빼놓을 수 없다. 조봉암은 3·1운동 때 독립만세운동을 벌이다가 체포돼 1년간 옥살이를 하고 공산당 계열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또다시 잡혀 8년간 옥고를 치렀다.해방 뒤 초대 농림부장관과 국회 부의장,대통령후보(무소속),진보당 위원장 등을 지냈으나 자유당 정권 말기인 1959년 간첩 혐의로 사형됐다. 여운형은 광복 후 건국준비위원장과 민주주의 민족전선 의장으로 활동하는 등 좌우 합작운동을 벌였으나 극좌·극우 양측으로부터 소외당한 채 1947년 7월 암살됐다. 조승진기자 redtrain@seoul.co.kr
  • ‘역사지키기’ 자치구도 나섰다

    중국정부의 고구려사 왜곡이 이슈화된 가운데 서울시내 자치구들이 ‘역사 지키기’ 기획 전시회를 열거나 열 예정이어서 눈길을 끌고 있다. ●“고구려를 넘보지 말라” 동작구(구청장 김우중)는 오는 23일부터 28일까지 상도2동 동작문화복지센터 4층 로비에서 ‘고구려 유물·유적’ 사진전을 열 계획이다. ‘우리 역사 바로 알기 시민연대’와 사단법인 국학원,국학운동 시민연합이 후원한다.종로구(구청장 김충용)와 노원구(구청장 이기재)도 9일부터 1주일 예정으로 전시회를 열고 있다. ‘고구려 유물·유적’ 사진전에는 중국 지안(集安)지역의 고구려 장군총과 호태왕릉,국내성과 평양성의 성벽 등 유적·유물 40여점이 선보인다.무용총,씨름을 표현한 각저총,덕흥리 벽화무덤과 당시 의·식·주 등 생활상을 알려주는 것들이다.각 전시물의 크기는 가로 60㎝,세로 90㎝로 시민연대가 중국 현지에서 촬영한 것도 포함됐다. 김우중 동작구청장은 “방학을 맞은 학생들이 고구려 역사를 통해 한·중 관계에 대해 올바르게 이해하고 관심의 폭을 넓히는 기회로 삼도록 하기 위한 행사”라고 설명했다. 1999년 발족한 우리 역사 바로 알기 시민연대는 일본의 근대사 왜곡에 대항하는 뜻으로 ‘일본 교과서 바로잡기’ 운동본부를 이끌고 있다. ●“일본,이제라도 반성을” 서대문구(구청장 현동훈)는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행사를 마련했다.오는 15일 제59주년 광복절을 앞두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던진 선조들의 애국정신을 널리 알리자는 뜻에서다. 올 연말까지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1층에서 열리는 ‘3·1운동 수형(受刑) 기록전’에서는 권동진,이승훈,오화영,한용운선생을 비롯한 민족대표 33인 등 47명의 선열이 감옥에셔 겪은 참상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형무소에 입감할 때 작성한 수형자 카드와 고문기구,유품,유물 등이 30개의 패널에 전시된다.민족지도자들의 수형기록이 한 자리에 공개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유관순 열사가 잔혹한 고문 끝에 순국한 지하옥사와 3·1독립선언서,태극기 목각판 등 희귀유물도 공개된다.서대문형무소에는 하루 평균 1700여명,많게는 3500여명이 방문하고 있다.외국인도 한해 3만 8000여명이나 찾고 있으며 이 가운데에는 일본인 2만여명도 포함돼 있다. 지난 4∼8일 중국을 다녀온 우리 역사 바로 알기 시민연대 유임현 사무처장은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은 한반도 통일 이후 한국이 옛 땅을 돌려달라고 요구할 것에 대비해 미리 선수를 치려는 속셈”이라고 비난했다. 송한수기자 onekor@seoul.co.kr
  • [다음핫이슈 토론]국가정체성 정말 흔들리고 있나

    |미디어다음 정환석기자|네티즌들은 한나라당이 송두율씨 판결 등 일련의 사건에 대해 “국가정체성이 흔들리고 있다.”고 여권을 비판하는 것에 공감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핫이슈토론에서 지난 22일부터 28일까지 7일간 ‘국가정체성이 흔들리고 있다’란 한나라당의 주장에 공감하느냐란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총 참여자 6708명중 63.6%(4267명)가 ‘공감한다.’고 답했다.‘공감하지 않는다.’란 의견은 35.9%(2405명)에 그쳤다. 공감을 표시하는 네티즌들은 “국가보안법 폐지가 논의되고 송두율씨가 석방되는 등 혼란의 시대에 살고 있다.”며 “한나라당의 지적은 국민 다수의 걱정을 적절히 지적한 것”이라고 주장했다.반면 다른 네티즌들은 “민주주의에 대한 철학도,뒷받침할 만한 삶도 없는 사람들의 정치공세이자 색깔 논쟁”이라며 “탈권위주의 시대에 약간의 일탈을 전체적인 문제로 여겨 공격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반박했다. 여야는 국보법 개폐,송두율씨에 대한 일부 무죄판결,북한 함정의 서해북방한계선(NLL) 월선 및 보고누락 사건,의문사 진상규명위의 빨치산 민주화 기여 판정 등 일련의 안보 현안에 대해 시각차이를 보이고 있다. ■100자 의견 ●사공도,배도 너무 없는(시원찮은) 세상맨웃집님 지금 정부는 선장도 없고 조타수도 없는 배를 타고 행선지도 모른 채 망망대해를 표류하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 싶다.정말 한심하고 걱정된다. ●송두율씨는 구속되어야 한다brinoma님 남북한이 대치한 냉전시대에 송두율씨는 이런 남북한 대치상황에서 북한편을 든 사람으로 마땅히 구속되어야 한다. ●이미 국가 정체성은 헌법이 규정하고 있다왕진님 국가 정체성 논란은 무의미하다.왜냐 헌법에 규정되어 있기 때문에…. ●당신(우리들)은 어디에 있죠?montena님 지금 이 시점에서 이런 논쟁을 왜 해야 하죠?서민과 국민이 힘들어도 아무 말 없던 정치인들이 언제 우리에 대해서 곰곰 생각해 주기를 했나요? ●그 시절 통금이 있고 정보부가 있고 고문이 있었지요,그때가 좋지요?jjpo님 젊은이들이여 잘 모를 것이다.유신시대 혁명시대에는 술먹다가 말 한마디 잘못하면 간첩이라고 얼마나 두들겨 맞았는지….그래 그 시절이 좋다면 다시 돌아가자…. ●헷갈리는 나이승님 3·1운동과 상하이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정통성과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확인키 위한 아버지,형님들의 지난 수십년간의 노력.더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한가. ●박근혜 대표님…일부러?사가사죠님 간첩혐의를 받았던 그 사람은 우리와 똑같은 무고한 사람이었고,간첩혐의를 뒤집어 씌워 수년간 고통을 받았던 사람이다. ●국가 정체성이 고작 빨갱이 사냥???synergy님 70년대부터 90년대 아니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자유,민주를 유린한 당신들의 국가 정체성이 무엇인지.과연 당신들이 말한 국가에 국민이 단 한번이라도 존재했는지 말이다,
  • 유관순/이정은 지음

    독립기념관 부설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에서 20년간 3·1운동을 연구해온 저자가 유관순 열사에 관한 각종 문헌 조사와 유족,전문가들의 검증을 거쳐 내놓은 역작이다.유관순 열사의 성품,성장 과정과 교육,3·1운동의 실상,그리고 수감 생활과 순국에 이르기까지 당시 그를 알고 있던 지인들의 생생한 증언으로 새로운 사실들을 밝혀냈다.169.7㎝의 장신이었던 유관순 열사는 각 고을을 다니며 독립운동 참여를 설득했고,시위 당일 무단 발포하는 일본 군대의 총구를 온몸으로 막아섰으며,함께 시위를 주도했던 조인원 등 13명이 3심인 고등법원에 상고할 때 “어디인들 감옥이 아니겠습니까.”라며 혼자 상고를 포기했던 일화들이 자세하게 실려 있다. 유관순 열사뿐 아니라 오빠 유우석과 올케 조화벽,조카 유제경 등 3대에 걸쳐 9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집안의 역사도 추적했다.교사였던 유제경은 민족의식을 교육했다는 혐의로 3년형을 받아 서대문 감옥에 갇혔다가 중국 남지나해상의 하이난도까지 끌려갔다.100여장에 이르는 사진을 비롯해 유관순 열사와 관련한 각종 지도,문건 자료 등을 부록으로 정리했다.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창간 100주년-창간주역 5인의 발자취] (4) 초대주필 박은식

    대한매일신보의 초대 주필 박은식 선생은 언론인이자 교육자,역사학자였다.무엇보다 임시정부 국무총리와 제2대 대통령을 지낸 항일 독립운동가의 사표(師表)였다. 중키에 턱뼈가 좀 튀어나왔지만 항상 미소짓는 강직·온화한 인상의 소유자였으며 성격은 관후·소탈했다.양기탁 선생의 소개로 배설 선생을 만나 1905년 8월 초대 주필로 인연을 맺었으며 1907년 10월 신채호 선생을 후임으로 앉혔다. ●고구려 옛터에서 교육·저술 활동 나라를 빼앗기자 1911년 4월 랴오닝(遼寧)성 환런현(桓仁縣)으로 망명,대종교의 3대 교주 윤세복이 설립한 동창학교에서 신채호 선생과 함께 우리 역사를 가르쳤다.고구려의 환도성 옛터에 자리잡은 동창학교는 도시개발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위치는 현재 환런현 정양가도 서궐가 민족백화점 근처로 추정된다. 그는 “비록 국체(國體)는 망했지만 국혼(國魂)이 소멸당하지 않아야 한다.”라면서 ‘동명성왕실기’‘발해태조건국지’같은 역사서를 쓰고 가르쳤다.서북 만주와 요동평야가 모두 고대 우리 민족의 활동지임을 증명하고 이곳에 독립운동의 새 기지를 세우려는 깊은 뜻이 숨어 있었다. ●연해주서는 한족공보 주간으로 일제에 의해 동창학교가 폐교 압박을 받자 1918년 러시아 연해주로 건너가 전로한족대표자회의 기관지인 ‘청구신보’의 후신인 ‘한족공보’의 주간을 지냈다.블라디보스토크와 함께 항일독립운동의 기지 구실을 한 우수리스크의 체체리나 거리 31번지에 있던 신문사 터는 폐허로 변했지만 러시아에 귀화한 고려인들의 권익을 옹호하고 대변하던 선생의 의지는 연해주에 사는 4만 5000여명 고려인들의 가슴에 새겨져 있다. 박환(수원대 사학과) 교수는 “러시아 동포들은 신문발간을 통한 민족의식 고취라는 목표 아래 구한말부터 해조신문·대동공보·권업신문·청구신보·한족공보 등 숱한 신문과 잡지를 간행해 왔다.”면서 “조국의 국권회복과 독립은 물론 재러한인들의 삶의 질 향상에 크게 기여했다고 본다.”고 평가했다. 이 신문이 재정난으로 문 닫자 체체리나 거리 54번지에 위치한 고려사범전문대학(현재의 우수리스크사범대학 물리수학부) 등 지역의 한인학교를 순회하며 역사교육을 통해 독립사상을 고취시켰다. ●신한촌 기념탑엔 잡초가 무성 선생은 1919년 3·1운동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맞았다.당시 한인들이 ‘해삼위(海蔘威)’라고 부른 블라디보스토크시의 중심가 서북쪽 아무르만 연안 언덕배기 북쪽 하바로프스카야 거리 끝 아파트단지 옆에는 이 도시의 유일한 한인관련 역사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1999년 8월15일 해외한민족연구소에서 건립한 ‘연해주 신한촌 기념탑’이 그것이다. 1911년 건설된 신한촌(新韓村)은 한때 1만여명의 한인들이 거주하던 러시아 최대의 한인 집단거주 지역이었지만 지금은 고급 아파트단지로 변했다.신한촌의 의미를 기록한 기념비 주변에는 잡초가 무성했다.철제 출입문도 자물쇠로 굳게 잠겨 있었다.더구나 3개의 기념탑신에는 낙서를 지운 자국이 얼룩져 있었고 비 앞에는 마른 꽃다발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 특별취재팀 ●영국(런던·브리스톨) 함혜리 특파원 ●일본(고베) 이춘규 특파원 ●중국·러시아(리양·블라디보스토크·우수리스크) 노주석·이언탁·박지윤 특파원˝
  • [서울 포토]1940년대 서울시청·광장

    지난달 잔디광장(사진 왼쪽)으로 새단장한 서울시청 앞의 풍경이 알고 보니 옛 모습을 되찾은 것.시청앞 광장은 고종이 22년간 거처한 덕수궁과 거리 하나를 두고 있는 데다 3·1운동 당시 가장 격렬한 시위가 일어났던 곳이다. 6·10항쟁,2002년 월드컵의 열기 등 우리 근·현대사의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이 곳에서 일어났던 게 우연이 아니다. 건물은 1925년 3월에 착공해 1926년 10월30일에 낙성식이 거행됐으나 80년 가까이 원형을 유지한채 지금도 같은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 이동구기자 yidonggu@seoul.co.kr
  • 현존 最古 장군총사진 공개

    최소한 3·1운동이 일어났던 1919년 이전에 우리나라 사람이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현존 최고(最古)의 장군총 사진이 공개됐다. 우리가 장군총으로 알고 있는 이 무덤이 고구려 장수왕릉으로 확인된 만큼 중국과 일제가 우리 역사를 의도적으로 폄하해 부여한 ‘장군총’이라는 능명 대신 왕릉임을 나타내는 명칭을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서경대 서길수(고구려연구회 회장) 교수는 25일 최근 자신이 중국 조선족 동포 허창흘(66)씨를 통해 입수한 장군총 사진을 공개하고 “이 사진을 찍은 것으로 보이는 허씨의 조부가 일제에 의해 3·1운동 직후 독립운동 혐의로 붙잡혀 3년간 수감생활을 하다 출옥한 뒤 행적이 없는 점으로 미뤄 최소한 1919년 이전에 찍은 현존 최고의 장군총 사진”이라고 주장했다. 서 교수는 “지금까지 전해지는 당시의 사진은 이후 일본 학자들이 연구 목적으로 찍어 일제시대에 책으로 소개했던 것”이라며 “이 사진은 우리 민족이 장군총을 배경으로 찍은 최초의 사진으로,이는 이 왕릉이 당시 우리 민족의 의식과 생활 속에 깊게 자리하고 있었음을 말해 주는 소중한 자료”라고 밝혔다. 사진은 장군총을 배경 삼아 교복을 입은 남녀 학생과 한복을 입은 주민 157명이 함께 찍은 것으로,일부 훼손된 장군총의 계단형 석축과 머리 부분의 우거진 나무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서 교수는 “사진을 제보한 허씨가 이 무덤을 아직까지 ‘황제무덤’으로 지칭하고 있었으며,18세기에 제작된 해동지도에도 ‘황제묘(皇帝墓)’로 적혀 있다.”고 소개하고 “최근 중국측 연구에 의해 고구려 20대 장수왕의 능임이 확인된 마당에 이를 장군총이라고 부르는 것은 심각한 역사 왜곡이 아닐 수 없다.”는 견해를 밝혔다. 심재억기자 jeshim@˝
  • ‘5월 독립운동가’ 이애라 선생

    국가보훈처는 27일 여성 독립운동가 이애라(1894∼1922)선생을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충남 아산 출신인 이 선생은 20세때 독립운동가로 일생을 보낸 이규갑 선생과 결혼한 뒤 공주 영명학교와 평양 정의학교 등지에서 교사로도 활동했다.3·1운동 직후 남편이 ‘비밀독립운동본부’를 결성하자 이를 돕기 위해 서울로 올라와 국민대회와 비밀회의를 개최토록 해 한성 임시정부 수립에 크게 공헌했다.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독립기념관과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은 5월 한달 선생을 위한 전시실을 마련할 예정이다.
  • ‘아버지와 만남’ 펴낸 강인숙교수

    “우리에게 자연스럽게 삶의 이정표를 가르쳐주는 사람은 주변의 어른들입니다.우리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만나는 어른인 부모는 삶의 모델이지요.그들을 모본(模本)으로 인간의 길을 배우게 됩니다.” 강인숙(71·건국대명예교수) 영인문학관장.문학평론가 이어령 이화여대 석좌교수의 부인으로 역시 문학평론가로 활동중이다. 그는 17년전 작고한 아버지에 대한 독특한 평전인 ‘아버지와의 만남’을 최근 펴냈다. 강 관장은 ‘삶의 첫머리’에 한 어른(아버지)을 만났고 그 어른은 쾌락주의자였으며 동시에 박애주의자였다고 회상했다.때문에 자기철학과 박애정신이 공존한 한 인간을 연구하고자 했다고 강조했다.“교직생활중 매달린 기본적인 화두는 인간이었다.”면서 “나의 인간연구는 아버지를 중심축으로 회전했다.”고 밝혔다. 그는 “흔들림없는 모성을 지닌 지모신 같은 어머니는 이해하기가 쉬웠다.그러나 아버지를 독해하는 일은 지난한 과제여서 칠순이 지난 나이에도 ‘아버지와의 만남’을 되씹어보게 한다.”고 덧붙였다. 강 관장이 아버지를 기억하는 첫 모습은 7세때.3·1운동 이후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통화성에서 두번째 옥살이를 한 뒤였다.‘국민복에 헬멧 쓴 차림’이었다.동생들은 달려가 아버지의 품에 안겼지만 강 관장은 선뜻 달려갈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독립운동으로 16년간 강 관장의 어머니와 떨어져 살았던 아버지가 ‘해주댁’으로 불렸던 둘째부인을 데리고 나타났던 것이다. 강 관장은 “독립운동에 연루돼 대학진학을 못하고 사업가로 나선 아버지는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며 특히 여자를 사랑하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다.”고 회고했다.그는 또 “아버지는 지적 호기심이 왕성해 86세로 세상을 뜰 때까지 책을 놓지 않아 박학다식했으며 남에게는 지나치게 관대한 ‘희귀종’이었다.”고 부연했다. 3년 전에 원고를 완성했으나 아버지를 분석하고 비판하는 글이기 때문에 발표를 미루어왔다는 그는 “삶의 한 토막을 정리하는 심정으로 용단을 내렸다.”고 토로했다.아울러 그는 “서로 유형은 다르겠지만 인간은 누구나 가족과의 사랑과 갈등을 기반으로 삶을 형성해나간다.”고 덧붙였다. 김문기자 km@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28)인간이 평등할 수 있을까?-백정해방운동 (上)

    20세기 세계를 움직인 100대 사건 중 하나는 1923년 진주에서 일어난 형평사운동이었다.여러 세기에 걸쳐 인간 이하의 천민으로 분류되어 수탈과 탄압,능멸과 죽임의 공포 속에서 살아온 백정(白丁)들도 인간이라는 백정해방운동을 형평사운동이라 불렀다.일본의 부락민(部落民),유대인 차별 정책인 게토,인도의 최하층민 수드라,노예시장의 매매물건인 아프리카 흑인들과 같이,1923년 이전 한국의 백정들도 인간이 어찌 평등할 수 있느냐는 조선시대 정치이념의 제물로 희생된 우리의 이웃이었다. 형평사운동을 계획하고 탄생시켰으며,그후 십여년 동안 한국사회에서 억압받는 사람들의 인권문제를 줄기차게 제의했던 사람들 중에서 강상호(姜相鎬)와 장지필(張志弼) 두 사람을 꼽을 수 있다. ●진주 형평사운동은 ‘백정해방운동’ 장지필은 대물림한 백정 집안 후손이었다.그의 부친 장덕찬(張德贊)은 경남 의령의 백정인데 상당한 재력가였다.백정의 주된 사업인 도살업,육류판매,피혁의 건조와 가공,쇠기름(牛脂)의 생산 판매,소피(牛血)를 이용한 식품의 제조와 판매,가축의 내장과 뼈의 판매,이를 이용한 음식점의 독점적 운영은 오랫동안 백정 계급만의 전용물이었다. 이 사업은 이윤이 많이 남기로 유명한 데다 국가로부터 세금 징수의 대상도 아니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생각이 깊었던 이들은 큰 재산을 모을 수도 있었다.19세기 후반 이후 서울과 지방의 토호들은 백정들의 전유물이었던 도축장 경영권을 빼앗는 농간을 부렸다.많은 백정들은 토호들의 자본에 흡수되어 신분의 억압 외에 다시 경제적 수탈 대상이 되었고,이중의 인권유린에 시달렸다. 장덕찬은 대구의 김경삼,부산의 이성순,마산의 이상윤과 박유선,진주의 이학찬 등과 함께 대한제국을 대표하는 백정출신 부호였다.당시에는 재력가라 하여도 백정신분으로 서당이나 향교 같은 교육기관에 나가 공부할 수 없었다.백정들은 평민들과 같은 자리에 머무는 것은 물론이고 공공장소에 얼씬거리는 것도 금지되었으며,교회 설립 초기에는 일반인과 백정이 함께 예배보는 것도 문제가 되었다.장덕찬은 집에 독선생을 초빙해 자식들에게 공부를 시켰는데,장덕찬의 아들 장지필은 요즘식 가정교사 밑에서 공부하여 일본 메이지대학까지 유학하였다.행운아였던 셈이다. ●‘장지필’은 백정 출신의 부호 장덕찬은 평생토록 백정 해방을 꿈꾸며 투쟁하였다.그는 1887년 무렵 경상도 관찰사에게 백정도 패랭이를 벗고 망건을 쓸 수 있게 해 줄 것을 요구하며 경상도 71개 군에 있던 백정공동체인 도중(都中)들을 모아 시위를 벌였다.그 과정에서 곤장을 맞고 고문도 당했지만 요구를 끝까지 외쳐 경상도 백정들에게 큰 용기를 불어넣었다.장덕찬에게 곤장을 가하며 백정들의 요구를 거부했던 경상도 관찰사는 이호준(李鎬俊·1821∼1901)인데 그의 아들이 한일합방을 주도한 이완용이다. 관찰사와 담판을 벌였을 만큼 재력과 식견을 갖추었던 장덕찬은 아들에게 백정 해방을 위한 투쟁정신을 물려주었다.아버지의 뜻을 잇는 장지필은 세상의 두터운 차별의식과 싸우기 위해서는 재력과 신학문을 동시에 갖추어야 한다고 믿어 동경유학을 감행했고,귀국하여 백정해방 운동에 전력을 다한 백정 해방 이론가이자 실천가였다. ●‘강상호’ 양반신분으로 독립운동 헌신 반면 강상호는 당시 진주사회의 대표적인 지성인 중 한 사람으로 양반신분이며 부유한 집안의 큰아들이었다.일제 식민지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모든 국민이 문맹에서 눈을 떠야 한다며 학교 세우기와 신식교육을 장려했고,직접 기미년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하여 옥고를 치르기도 한 행동하는 지성이었다.애국계몽운동의 하나로서 동아일보 창간 주주로 참여했고,신간회활동 등 일제에 문화적으로 항거했던 인물이다. 따라서 장지필과 강상호가 지향하는 백정해방운동의 목표는 서로 달랐다.강상호는 민족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이 미분화된 상태에서 순진하다 할 수 있는 민족운동노선을 따른 데 반하여,장지필은 백정 고유의 산업에 일반인들이 진출하지 못하게 하여 백정계급의 경제적 토대를 지키고 장차 백정들의 삶을 향상시키고자 하였다.관념적인 백정해방운동은 성공할 수 없으며,중요한 것은 한국 사회에서 가장 천한 신분인 백정들이 경제적으로 자립하는 것뿐이라고 믿었다.경제적 자신감이 있어야만 백정해방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두 사람이 믿는 바는 달랐지만,1923년이라는 시대상황은 한국역사상 최초의 인권해방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장지필과 강상호가 함께 움직일 수 있게 하였다. 1919년 기미만세운동 이후 조선총독부는 문화통치를 표방하였다.민중 활동이 비교적 자유로워진 것이다.국내에는 다양한 사회운동 조직이 생겨났고,각 조직은 민족해방운동의 뜻을 폈다.겉으로는 조직 회원들이나 민중의 계몽을 표방했으나 궁극적으로는 민족해방을 바란 것이다. 민족해방운동은 크게 세 가지 갈래로 나뉘었는데,첫째는 일본에 무장 투쟁하여 국권을 회복하고자 한 민족독립운동으로 만주와 중국을 중심으로 일어났으며,애국주의 이상을 행동으로 옮기는 데 치중했다.두 번째는 대종교,보천교 등의 종교단체를 중심으로 한 운동이었고,세 번째는 3·1운동을 이끈 세력이 주도한 문화 계몽 운동이었다. 강상호가 문화 계몽 운동에 매진하고 있던 중에 진주의 대표적인 부자 백정 이학찬이 새집을 장만하여 강상호의 이웃으로 이사하였다.강상호는 이학찬의 이사를 계기로 백정들과의 교류를 시작하게 된다. 원래 진주 지방에는 여느 행정 관청이 있는 주요 지방 도시와 마찬가지로 관청 관할 아래에 백정들의 거주지가 정해져 있었다.이른바 백정마을 혹은 백정놈 동네였다. 경국대전에서 규정한 백정단취(白丁團聚) 조항에 따라 거주이전이 금지되었고 죽는 날까지 한 곳에 머물러 살았다.혹 거주지를 이탈하면 엄하게 처벌받았는데,마을 밖으로 여행하기 위해서는 관청에서 발행한 통행 증명서가 필요했다.통행증명서에는 목적지와 여행 기간이 적혀 있어서 이를 어길 때에도 무거운 처벌이 내려졌다. ●개도살 요구 거절한 백정, 매질당해 죽어 그러나 1863년 고종임금이 즉위하면서 실시한 특별사면으로 백정마을에서 살던 백정들은 거주이전의 자유를 얻게 된다.거주이전 금지 규정이 해제되자 전국의 백정들은 숙명 같았던 옛 거주지를 벗어나 일반인들이 사는 마을 가까이로 옮겨가기 시작했고,재력 있는 백정은 마을 안으로 옮겨가기도 했다. 백정들과의 교류를 통해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강상호는 기미 독립만세 시위 이후 어느날 충격적인 사건을 목격하였다.진주공원에서 청년들에 의해 백정이 죽임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청년들은 백정마을에 사는 백정을 강제로 데려와 개를 잡으라고 강요하였다. 그러나 그 백정은 청년들의 요구를 완강하게 거절하였고,결국 매질을 견디지 못해 죽었다.이후 백정들이 청년들을 고소하였지만 죽은 백정은 호적이 없으므로 그를 죽인 청년들에게 살인죄를 적용할 수 없다는 일본 경찰의 판결이 내려졌다.살인죄가 성립하려면 죽은 자의 신원이 확인되어야 하는데 아무런 법률적 증거가 없으므로 산짐승이나 벌레를 죽인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었다.이 사건은 강상호가 백정해방운동에 적극 관여하는 계기가 되었다.˝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28)인간이 평등할 수 있을까?-백정해방운동 (上)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28)인간이 평등할 수 있을까?-백정해방운동 (上)

    20세기 세계를 움직인 100대 사건 중 하나는 1923년 진주에서 일어난 형평사운동이었다.여러 세기에 걸쳐 인간 이하의 천민으로 분류되어 수탈과 탄압,능멸과 죽임의 공포 속에서 살아온 백정(白丁)들도 인간이라는 백정해방운동을 형평사운동이라 불렀다.일본의 부락민(部落民),유대인 차별 정책인 게토,인도의 최하층민 수드라,노예시장의 매매물건인 아프리카 흑인들과 같이,1923년 이전 한국의 백정들도 인간이 어찌 평등할 수 있느냐는 조선시대 정치이념의 제물로 희생된 우리의 이웃이었다. 형평사운동을 계획하고 탄생시켰으며,그후 십여년 동안 한국사회에서 억압받는 사람들의 인권문제를 줄기차게 제의했던 사람들 중에서 강상호(姜相鎬)와 장지필(張志弼) 두 사람을 꼽을 수 있다. ●진주 형평사운동은 ‘백정해방운동’ 장지필은 대물림한 백정 집안 후손이었다.그의 부친 장덕찬(張德贊)은 경남 의령의 백정인데 상당한 재력가였다.백정의 주된 사업인 도살업,육류판매,피혁의 건조와 가공,쇠기름(牛脂)의 생산 판매,소피(牛血)를 이용한 식품의 제조와 판매,가축의 내장과 뼈의 판매,이를 이용한 음식점의 독점적 운영은 오랫동안 백정 계급만의 전용물이었다. 이 사업은 이윤이 많이 남기로 유명한 데다 국가로부터 세금 징수의 대상도 아니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생각이 깊었던 이들은 큰 재산을 모을 수도 있었다.19세기 후반 이후 서울과 지방의 토호들은 백정들의 전유물이었던 도축장 경영권을 빼앗는 농간을 부렸다.많은 백정들은 토호들의 자본에 흡수되어 신분의 억압 외에 다시 경제적 수탈 대상이 되었고,이중의 인권유린에 시달렸다. 장덕찬은 대구의 김경삼,부산의 이성순,마산의 이상윤과 박유선,진주의 이학찬 등과 함께 대한제국을 대표하는 백정출신 부호였다.당시에는 재력가라 하여도 백정신분으로 서당이나 향교 같은 교육기관에 나가 공부할 수 없었다.백정들은 평민들과 같은 자리에 머무는 것은 물론이고 공공장소에 얼씬거리는 것도 금지되었으며,교회 설립 초기에는 일반인과 백정이 함께 예배보는 것도 문제가 되었다.장덕찬은 집에 독선생을 초빙해 자식들에게 공부를 시켰는데,장덕찬의 아들 장지필은 요즘식 가정교사 밑에서 공부하여 일본 메이지대학까지 유학하였다.행운아였던 셈이다. ●‘장지필’은 백정 출신의 부호 장덕찬은 평생토록 백정 해방을 꿈꾸며 투쟁하였다.그는 1887년 무렵 경상도 관찰사에게 백정도 패랭이를 벗고 망건을 쓸 수 있게 해 줄 것을 요구하며 경상도 71개 군에 있던 백정공동체인 도중(都中)들을 모아 시위를 벌였다.그 과정에서 곤장을 맞고 고문도 당했지만 요구를 끝까지 외쳐 경상도 백정들에게 큰 용기를 불어넣었다.장덕찬에게 곤장을 가하며 백정들의 요구를 거부했던 경상도 관찰사는 이호준(李鎬俊·1821∼1901)인데 그의 아들이 한일합방을 주도한 이완용이다. 관찰사와 담판을 벌였을 만큼 재력과 식견을 갖추었던 장덕찬은 아들에게 백정 해방을 위한 투쟁정신을 물려주었다.아버지의 뜻을 잇는 장지필은 세상의 두터운 차별의식과 싸우기 위해서는 재력과 신학문을 동시에 갖추어야 한다고 믿어 동경유학을 감행했고,귀국하여 백정해방 운동에 전력을 다한 백정 해방 이론가이자 실천가였다. ●‘강상호’ 양반신분으로 독립운동 헌신 반면 강상호는 당시 진주사회의 대표적인 지성인 중 한 사람으로 양반신분이며 부유한 집안의 큰아들이었다.일제 식민지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모든 국민이 문맹에서 눈을 떠야 한다며 학교 세우기와 신식교육을 장려했고,직접 기미년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하여 옥고를 치르기도 한 행동하는 지성이었다.애국계몽운동의 하나로서 동아일보 창간 주주로 참여했고,신간회활동 등 일제에 문화적으로 항거했던 인물이다. 따라서 장지필과 강상호가 지향하는 백정해방운동의 목표는 서로 달랐다.강상호는 민족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이 미분화된 상태에서 순진하다 할 수 있는 민족운동노선을 따른 데 반하여,장지필은 백정 고유의 산업에 일반인들이 진출하지 못하게 하여 백정계급의 경제적 토대를 지키고 장차 백정들의 삶을 향상시키고자 하였다.관념적인 백정해방운동은 성공할 수 없으며,중요한 것은 한국 사회에서 가장 천한 신분인 백정들이 경제적으로 자립하는 것뿐이라고 믿었다.경제적 자신감이 있어야만 백정해방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두 사람이 믿는 바는 달랐지만,1923년이라는 시대상황은 한국역사상 최초의 인권해방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장지필과 강상호가 함께 움직일 수 있게 하였다. 1919년 기미만세운동 이후 조선총독부는 문화통치를 표방하였다.민중 활동이 비교적 자유로워진 것이다.국내에는 다양한 사회운동 조직이 생겨났고,각 조직은 민족해방운동의 뜻을 폈다.겉으로는 조직 회원들이나 민중의 계몽을 표방했으나 궁극적으로는 민족해방을 바란 것이다. 민족해방운동은 크게 세 가지 갈래로 나뉘었는데,첫째는 일본에 무장 투쟁하여 국권을 회복하고자 한 민족독립운동으로 만주와 중국을 중심으로 일어났으며,애국주의 이상을 행동으로 옮기는 데 치중했다.두 번째는 대종교,보천교 등의 종교단체를 중심으로 한 운동이었고,세 번째는 3·1운동을 이끈 세력이 주도한 문화 계몽 운동이었다. 강상호가 문화 계몽 운동에 매진하고 있던 중에 진주의 대표적인 부자 백정 이학찬이 새집을 장만하여 강상호의 이웃으로 이사하였다.강상호는 이학찬의 이사를 계기로 백정들과의 교류를 시작하게 된다. 원래 진주 지방에는 여느 행정 관청이 있는 주요 지방 도시와 마찬가지로 관청 관할 아래에 백정들의 거주지가 정해져 있었다.이른바 백정마을 혹은 백정놈 동네였다. 경국대전에서 규정한 백정단취(白丁團聚) 조항에 따라 거주이전이 금지되었고 죽는 날까지 한 곳에 머물러 살았다.혹 거주지를 이탈하면 엄하게 처벌받았는데,마을 밖으로 여행하기 위해서는 관청에서 발행한 통행 증명서가 필요했다.통행증명서에는 목적지와 여행 기간이 적혀 있어서 이를 어길 때에도 무거운 처벌이 내려졌다. ●개도살 요구 거절한 백정, 매질당해 죽어 그러나 1863년 고종임금이 즉위하면서 실시한 특별사면으로 백정마을에서 살던 백정들은 거주이전의 자유를 얻게 된다.거주이전 금지 규정이 해제되자 전국의 백정들은 숙명 같았던 옛 거주지를 벗어나 일반인들이 사는 마을 가까이로 옮겨가기 시작했고,재력 있는 백정은 마을 안으로 옮겨가기도 했다. 백정들과의 교류를 통해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강상호는 기미 독립만세 시위 이후 어느날 충격적인 사건을 목격하였다.진주공원에서 청년들에 의해 백정이 죽임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청년들은 백정마을에 사는 백정을 강제로 데려와 개를 잡으라고 강요하였다. 그러나 그 백정은 청년들의 요구를 완강하게 거절하였고,결국 매질을 견디지 못해 죽었다.이후 백정들이 청년들을 고소하였지만 죽은 백정은 호적이 없으므로 그를 죽인 청년들에게 살인죄를 적용할 수 없다는 일본 경찰의 판결이 내려졌다.살인죄가 성립하려면 죽은 자의 신원이 확인되어야 하는데 아무런 법률적 증거가 없으므로 산짐승이나 벌레를 죽인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었다.이 사건은 강상호가 백정해방운동에 적극 관여하는 계기가 되었다.
  • [기고] 3월에 잊지 말아야 할 것/박종권 보훈복지의료공단 이사장 본지 자문위원

    며칠전 지난 3·1절은 올해가 85주년이었다.일본에 빼앗긴 내 나라를 되찾고자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것을 비롯해 전국 방방곡곡에서 “대한독립 만세!”를 외친 이 민족운동은 자주독립을 향한 민족의 항일투쟁에 횃불이 됐다. 3·1운동은 민족의식을 일깨우고 우리를 하나로 뭉칠 수 있게 한,민족 자각을 불러일으킨 위대한 사건이다.따라서 한국민족운동사에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기념되면서 대한민국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역사의식을 가지고 역사의 중심에 서서 미래를 조망할 때만이 그 국가는 발전할 수 있다.’는 준엄한 역사적 교훈은,오늘날 21세기를 새로 열어가고자 다짐하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 크다.한때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으려고 “대한독립 만세!”를 부르던 1919년 3월1일의 그 절규가 오늘 우리에게 아련히 전달하는 메아리는,그 사건이 자랑스러우면서 일면 역사의 부끄러움을 되살려준다는 점이다.우리의 근세 100년 역사를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다. 우리는 반만년의 긴 역사와 찬란한 문화를 꽃피워 온 민족이다.그러나 5000년 역사에서 우리는 1000여 차례나 외부세력의 침략을 받아왔다.그 역사가 남긴 상흔을 우리는 아직 치유하는 중이다.상하이 임시정부에 이어 8·15광복으로 나라를 되찾았지만 새로운 분단과 민족상잔의 6·25전쟁,그 이후의 안보상황에서 생긴 갖가지 상처를 치유해 가는 곳이 있다.그곳은 근세 100년,생생한 아픈 역사의 현장이면서 역사가 남긴 깊은 육체적·정신적 상처를 치유해 가는 장소이다.그곳을 보훈병원이라고 부른다. 보훈병원은 서울을 비롯해서 대전 대구 부산 광주 등 5곳에 있다.현재 독립유공자로서는 8명이 장기 요양진료를 받고 있으며 생존한 295명 또한 모두가 80세 이상의 고령으로 보훈병원 입원 우선대상자들이다.그동안 국가유공자가 13만 7000명,참전유공자가 35만명,4·19희생자 등 보훈대상자는 50만명에 이른다.관련 유족은 12만명이다.이들의 진료수요와 입원요청은 날로 급증해 보훈병원은 전국 170군데를 의탁병원으로 지정했다.연 진료인원은 1000만명을 넘는다. 그동안 애국지사·선각자들의 희생과 가르침 그리고 우리의 강인한 민족성을 바탕으로 온갖 어려움을 이기고 세계 15위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했으며 2002년에는 한·일 월드컵 축구 개최와 4강 진출을 이루었다.그 당시 “대한민국!”을 연호하는 우리의 열정적인 응원모습과 질서의식을 보고 세계는 얼마나 경탄을 금치 못했던가? 생각해 보면 오늘의 풍요로움이 있기까지에는 나라를 되찾기 위해 투쟁한 독립애국지사와,외침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고자 희생하여 지금도 보훈병원 등지에서 치료받는 국가유공자들이 있었다.그들이 없었다면 어찌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겠는가? 국가에 위기가 왔을 때 나라를 위해 몸바친 상이군경과 애국시민이 곧 국가유공자이다.그러므로 이들의 애국심과 육체적·정신적 고통을 보상하는 보훈은 국가정책의 중심에 있어야 한다.3·1절이 있는 이 달에 우리는 과거 역사를 다시 한번 인식하고,전 국민이 국가 미래를 조망하자.사상·종교·지역 모든 것을 초월해서 민족의식을 일깨워 하나로 뭉치고,국가의 새로운 질서를 열어가는 그러한 애국심을 고취해 가는 계절로 승화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역사가 있는 곳에 국가가 있고 국가가 있는 곳에 보훈이 있으며,명예로운 보훈 복지가 있을 때 국가 안녕과 번영이 뒤따른다는 것을 국민 모두가 함께 인식하기를 기대한다. 박종권 보훈복지의료공단 이사장 본지 자문위원˝
  • [기고] 백범·유관순 열사를 화폐 모델로/홍원식 (사)백범정신실천연합 사무처장

    헌법은 전문에서 대한민국의 정치적 출발 시점을 1919년 ‘3·1민족저항권행사일’로,법적 태동 시점은 대한민국임시정부 탄생일(1919년 4월13일)로 하고 있다.헌법의 ‘국가태동일’ 명시는 단순한 상징적 의미에 그치지 않는 법적 의미를 내포한다.일제하는 물론 광복 후 ‘미·소 군정’하에서 자행된 기본권 침해에 대한 ‘통일한국’에서의 보상기준 시점으로 검토 가능할 것이다. 또 1948년 남·북한 정부수립 이후 발생한 토지몰수 등 민족 성원의 재산권 침해에 대한 보상 시점으로 유력시될 수 있다.당장에 문제가 되고 있는 조선족을 비롯한 재외동포의 국적 부여 시점으로도 선택할 여지가 있다.3·1절은 역사 속에서뿐만 아니라 현재와 미래에서도 큰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매년 돌아오는 3·1절을 맞으면 33인보다 먼저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유관순이다.3·1운동이 일어나자 이화학당 고등과 1학년생으로 만세시위운동에 참가한 처녀 독립운동가.‘3·1항거’로 이화학당이 휴교하자 유관순은 충남 천안으로 귀향,예배당을 중심으로 서울의 독립시위 상황을 설명하면서 마을유지들을 규합했다. 그 결과 같은해 음력 3월1일 아우내(병천)장터에 수천 군중을 모아 독립만세를 선창하며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이때 부모를 비롯해 많은 인사가 피살되었으며,유관순은 주모자로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을 받았으나 끝내 굴하지 않았다.7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면서도 독립만세를 부르며 옥중항쟁을 벌이다 옥사하였다. 이 ‘순백의 독립열사’가 뜻있는 이들의 마음에 ‘영원한 누나’로 자리잡고 있다면,민족의 영원한 사표로 자리잡은 사람도 있다.보·혁을 막론하고 제반언론의 여론 조사에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20세기 가장 존경받는 민족지도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역사 그 자체라 할 백범 김구 선생이 그 분이다. ‘3·1민족저항운동’을 기폭제로 탄생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27년 역사는 파란만장하다.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윌슨 미국 대통령에게 한반도 신탁통치를 간청하는 공문을 보낸 사실이 국제사회에 알려져 ‘자의적 직무집행’을 이유로 탄핵·파면되면서 임시정부의 고난은 예견됐다.많은 이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임시정부를 떠나거나 배반의 길로 돌아섰다.그러한 와중에서 시종(始終)을 임시정부와 함께하였을 뿐만 아니라,세계인의 관심 대상에 들지 못하던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이봉창 의거’와 ‘윤봉길 의거’를 통해 전세계에 알리는 쾌거를 이룬 백범. 민족의 광야에 남긴 백범의 거대한 발자국은 광복 직후 ‘미·소 점령군’에게 큰 부담으로 작용했으며 그를 경계하는 요인이 됐다.그런데도 백범은 “그 어떠한 이념도 민족의 하나됨보다 우선할 수 없다.민족의 분열을 막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의 독립운동”이라고 가슴에 호소하며 48년 남북연석회의를 주도하는 등 전국을 순회했다.그는 비명에 우리 곁을 떠났으나 ‘20세기 가장 존경받는 한국인’으로 겨레의 가슴에 자리잡고 있다. 33인도 아니면서 3·1절이면 사무치는 정으로 생각나는 백범과 유관순 두 분.기왕에 새 화폐를 만들 계획이라면 이 두 분을 그 주인공으로 삼으면 어떨까.동서남북으로 갈라진 것에도 성이 차지 않았는지,소위 보수니 진보니 하며 세를 지어 ‘내전’에 휩싸여 있는 지금,새 화폐를 볼 때마다 두 분의 얼굴을 만난다면 민족대통합을 위한 전기가 될 뿐만 아니라 남녀 평등주의에도 부합할 듯해서 하는 제안이다. 홍원식 (사)백범정신실천연합 사무처장˝
  • 유관순열사 지하독방 첫 공개… 6개월 고문받다 순국

    “이렇게 좁고 험한 곳에서 한국 여성들이 고문을 받고 죽어갔다니….일본인으로서 그저 죄송할 뿐입니다.” 제85주년 3·1절을 맞아 일반에 첫 공개된 서울 독립공원내 옛 서대문형무소 여성전용 지하감옥을 찾은 시민과 외국인 등 3만5000여명은 참혹한 현장에 말을 잇지 못했다.유관순 열사가 3·1운동 1주년인 1920년 3월 1일 여성 옥사의 투옥자들과 함께 옥중 시위를 벌이다 격리 투옥된 이 감옥은 높이 1.4m에 가로,세로 각 1m의 독방 4개로 이뤄져 있다.유 열사는 그해 9월 28일 숨지기까지 6개월 남짓 좁고 음습한 지하감옥에서 잔혹한 고문을 받았고,또 고문 후유증에 시달렸다. ●시민·외국인 3만5000여명 발길 일본인 모리시타 히로무(73)와 후미즈코 소라(73·여)는 “가해자인 일본은 한국에 강력하게 사죄하게 해야 한다.”고 숙연한 표정을 지었다.히로시마 원폭피해자들의 모임인 ‘월드 프렌드쉽 센터’ 소속인 이들은 지난달 27일 한·일 평화교육심포지엄에 참여하기 위해 입국한 뒤 천안 독립기념관과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의 쉼터인 ‘나눔의 집’을 방문한데 이어 지하감옥 공개 소식을 듣고 이곳을 찾았다. 지하감옥을 살펴보던 이들은 “뭐라고 할 수 없이 비참하고 가슴이 아프다.”고 가슴을 쳤다.이어 “‘일본 제국주의가 정말 해서는 안 될 일을 했구나.’하는 생각이 든다.”면서 “그동안 이야기도 듣고 역사도 배웠지만 이렇게까지 한 줄 몰랐다가 현장을 보니 더욱 반성의 마음이 든다.”고 말했다.이들은 2시간 남짓 감옥과 고문실을 꼼꼼하게 돌아보면서 안내인의 설명을 일일이 받아 적었다.유 열사가 숨진 감옥을 살펴보던 모리시타는 “국가를 떠나서 피압박과 가해는 인간에게 일어나서는 절대 안된다는 사실을 새삼 느꼈다.”면서 “피해자들에게 개인적으로라도 사과하고 싶다.”고 말했다.후미즈코는 “원폭이 떨어졌던 히로시마 평화박물관과 서대문형무소를 돌아보면서 우리는 평화를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영어학원 강사인 영국인 마크 브라이언트(29)는 “어떻게 저렇게 작은 방에서 생활할 수 있었을까 생각하면 아주 끔찍하다.”면서 “역사적으로 늘 영국도 침략국이었기 때문에 더욱 마음에 와닿는다.”고 밝혔다. ●수감복 입고 감옥 체험 관람객들은 직접 수감복을 입고 감옥을 체험하는 행사에 참여,일제의 만행에 치를 떨었다.손기화(84·서울 은평구 불광동)씨는 “예전에 일제가 우리나라 사람들을 압박하던 일이 생생하게 기억난다.”면서 “유 열사와 독립운동가들이 좁은 공간에서 고통받았을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진다.”고 말했다.김성지(9·초등학교 3년)군은 “감옥에 들어가보니 정말 무섭다는 생각이 들고 애국지사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고 했다. ●노대통령 日총리 비난 발언 ‘후련’ 이날 노무현 대통령이 3·1절 기념사를 통해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의 신사참배 강행을 비판한 것에 대해 형무소를 찾은 시민들은 대체로 ‘속이 시원하다.’는 의견을 보였다. 해방 전 일본 오사카에 있는 토요타 조립공장에서 13년 동안 일하다 징병돼 동남아시아 전역에 끌려 다녔다는 박성천(86)씨는 “아주 후련하다.”면서 “사실 이제까지 제대로 목소리를 낸 대통령이 어디 있느냐.”고 주장했다.두 아들과 함께 이 곳을 찾은 김창범(40·인천시 중구 운서동)씨는 “대통령으로서 당연한 말을 한 것”이라면서 “특히 3·1절에 서대문형무소에서 소식을 들으니 더욱 반갑다.”고 말했다. 장택동 이재훈기자 taecks@˝
  • 유관순 이화학당 보통과 졸업 1918년 졸업사진서 첫 확인

    유관순 열사가 이화학당 보통과 졸업 당시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 최초로 공개됐다. 국가보훈처는 3·1운동 85주년을 맞아 유관순 열사가 거사 1년 전인 1918년 3월 말 촬영한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을 확보,학계와 생존 동창생의 확인을 거쳐 29일 공개했다. 이 사진은 열사의 이화학당 동창생인 문필원(작고) 여사의 아들이자 2004년 ‘6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문양목 선생의 외손자인 이필응(73·경기도 수원)옹이 지난해 말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다 발견,국가보훈처에 사진속 인물과 촬영 연대 등을 문의함으로써 이번에 빛을 보게 됐다.사진에는 1893년 선교사로 내한해 이화학당 교사로 활동하다 1907년 제4대 학당장에 취임해 여성 고등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1910년 이화학당에 대학과를 창설한 미국인 룰루 프라이(1868∼1921) 여사의 모습도 나온다.그동안 공개된 유관순 열사의 이화학당 재학시절 사진에는 프라이 학당장의 모습은 빠져 있다. 국가보훈처 이현주 공훈심사연구관은 “사진 속 인물들의 복장과 프라이 학당장의 출현,사진 배경 등으로 미뤄 유관순 열사가 1918년 3월 말 보통과를 졸업할 당시 찍은 사진으로 추정된다.”면서 “그동안 유관순 열사가 이화학당 보통과를 졸업했는지가 불분명했는데 이번 사진 공개를 계기로 열사가 보통과 졸업후 고등과에 진학해 3·1 만세운동을 주도한 사실이 명확해졌다.”고 평가했다. 조승진기자 redtrain@˝
  • [사설] 3·1정신으로 친일규명법 처리를

    3·1운동 85주년을 맞았다.세계 만방 피압박민족의 독립자결 운동사에 한 획을 그은 자랑스러운 3·1운동이건만,우리는 오히려 착잡한 마음으로 오늘을 맞고 있다.아직도 친일청산이라는 기본과업조차 제대로 넘어서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민특위의 무산으로 나라의 정기가 흐트러진 지 60년 가까이 지난 이제야 겨우 ‘일제 강점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 특별법’이 마련됐지만,당초 입법취지를 퇴색시킬 만큼 누더기가 된 데다 그나마 한나라당 반대로 본회의 상정이 유보되고 말았다.16대 국회 마지막 본회의가 열리는 2일 법안이 통과되지 못하면 법안은 자동 폐기되고 만다.친일규명법이 법사위를 통과할 때도 ‘진풍경’이 벌어졌다.조사대상인 ‘일제 협력 장교’를 규정함에 있어 ‘일반 장교’로 할 것인지 ‘중좌(중령) 이상의 장교’로 할지를 놓고 표결,결국 중좌 이상 장교로 처리됐다.‘통상 군대에서 장교가 정치적 행위를 할 수 있는 계급은 중령’이라는 해괴한 이유를 댔지만 속내는 ‘일본 육사를 나와 일왕에게 충성맹세를 하고 관동군 소좌까지 오른 박정희 전 대통령’ 등을 제외하기 위한 것이었다.언론 예술 교육 분야의 친일행위가 제외된 것도 문제다.친일진상을 제대로 밝혀내기 위해 반드시 바로잡아야 할 부분이다. 작금 나라의 사정은 어떠한가.정치권은 싸움박질로 일을 삼고,국민 또한 갈등요소가 생기면 대화와 타협을 거쳐 발전의 밑거름으로 승화시키기보다는 툭하면 소모전을 일삼고 있다.지도층이 백성은 돌보지 않고 권력과 이익 추구에 골몰하는 게 국권을 잃던 무렵과 비슷하다는 지적도 무성하다. 16대 국회는 정쟁으로 허송하다가,선거구 증설 등 자기 밥그릇은 챙기면서도 친일규명법은 물론 농어업인지원특별법,성매매방지 및 처벌법 등 민생법안 20여 건은 내동댕이쳐 놓은 채 본회의 하루를 남겨 두고 있다.정치권은 숭고한 삼일정신을 되새기면서 친일규명법 등을 처리,마지막 역할을 다해주기 바란다.˝
  • [기고] 일제만행 사진발굴과 3·1정신/안주섭 국가보훈처장

    3월이 오면,“지금은 남의 땅,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우리 민족 고난의 시대를 표현한 한 시인의 시구를 떠올리지 않더라도,85년 전 기미년의 봄,종다리도 하늘 잃고 울었을 그 암흑 속에서,전 민족이 하나 되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뜨거운 함성이 오랜 역사를 넘어 들리는 듯하다. 올해는 3·1독립운동이 일어난 지 85주년이 되는 뜻 깊은 해이다.그러나 3·1절을 앞두고,일본의 한반도 강점 시기에 자행된 만행을 생생하게 증언하는 사진 1000여 점이 발굴돼,우리의 분노를 자아내게 하고 있다. 이 사진들 가운데,민족의 정기를 끊기 위해 백두산 천지에 쇠말뚝을 박고 제사를 지내는 행위가 담겨진 장면은 우리 민족에 대한 압제 수준을 넘어 국토 곳곳의 맥을 끊고,우리 나라를 지구상에서 말살하려던 천인공노할 만행을 보여주고 있다. “과거를 통해서 오늘이,오늘을 통해서 미래가 보인다.”는 토인비의 말이 시련의 역사를 겪은 우리에게 소중한 교훈으로 다가오고 있다. 일제 식민지 시대의 역사를 돌이켜볼 때,‘대한이 자주독립국임과 대한인의 자주민임’을 세계 만방에 선언했던 3·1독립운동은 사상·종교·지역 등 모든 것을 초월해 민족의식을 일깨우고 민족이 하나로 뭉칠 수 있음을 보여준 우리 민족 최대의 항일투쟁이었다. 이는 세계 석학들이 평한 바와 같이,“전세계를 놀라게 한 위대한 사실이었고,한국 민족운동사에서 가장 중대한 의의를 지닌 운동이며 투쟁이었다.”고 하겠다. 이렇듯 3·1독립운동을 통해 발휘된 3·1정신은,우리 나라가 국권회복을 하기까지 전 민족에게 희망의 등불이 되었고,오늘날에는 자주·자유·세계평화정신으로 승화되어 우리 국민의 영원한 지표가 되고 있다. 오늘 우리가 85년이란 긴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선열들의 당당함과 그 불굴의 독립정신을 되새기자는 것은 결코 지난 역사의 한 사실을 회고하자는 데만 그 뜻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나라가 위난에 처했을 때,위국헌신을 실천한 선열들의 고귀한 애국충정을 본받고,과거의 역사를 교훈으로 삼아,보다 희망찬 내일을 가꾸어 나가자는 것이다. 따라서 선열들의 민족혼과 나라사랑 정신을 오늘에 계승 발전시켜 후손에게 정신적 유산으로 물려주는 일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몫인 것이다. 지금 국제정세는 안보,경제,역사 등 전 분야에 걸쳐 자국의 이익을 위한 무한경쟁 속에 급변하고 있으며,나라간 평화공존이 화두가 되고 있으면서도 한쪽에서는 전쟁과 내란 등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지구촌의 현상이다. 이러한 가운데 우리 앞에는 세대와 계층과 지역의 벽을 넘어,평화와 번영의 동북아시대를 열어가야 할 과제가 놓여 있다. 이러한 때 우리 민족의 자존을 위해 강한 의지와 저력을 보여줌으로써 빛나는 승리를 가져온 3·1독립운동의 자주 독립정신을 이어받아 국민화합을 이룰 수 있도록 온 국민이 힘과 지혜를 모아 나가야 하겠다. 인도의 시성(詩聖) 타고르는,일찍이 3·1운동을 통해 본 우리 나라를 ‘아시아의 황금시대를 연 동방의 빛’이라고 예찬하였다.3월이면,전국 방방곡곡에서 3·1독립만세운동 재현행사가 이루어 지고 있다.이것은 대한민국의 광복을 위해 전 민족이 하나가 되었던 그날의 모습을 되새겨 보고 계승·발전시키려는 것이다. 3·1절 85주년이 되는 올해야말로 진정 선열들의 위훈을 기리고,나라사랑의 푸른정신을 되새기는 한 해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안주섭 국가보훈처장˝
  • 강북구, 3·1운동 재현

    의암 손병희 선생 등 독립유공자들이 잠들어 있는 삼각산 자락의 봉황각 일대에서 3·1운동이 재현된다.강북구(구청장 김현풍)는 제85주년 3·1절을 맞아 주민 5000여명이 참석하는 ‘3·1 독립운동’을 재현한다고 25일 밝혔다. 재현 장소는 손병희 선생이 독립운동을 이끌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건립했던 봉황각이라 의미를 더한다.특히 이번 행사는 주민들에게 지역에 대한 자부심을 높이고 선열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행사는 오전 10시30분 우이동 성원아파트∼도선사입구∼봉황각으로 이어지는 ‘길놀이’로 시작된다.주민들은 풍물패의 흥겨운 가락에 맞춰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게 된다.봉황각 경내에서는 2시간여동안 손병희 선생의 행적과 한용운·최남선 등 민족대표 33인의 활동상을 생생하게 묘사한 재현극도 펼쳐진다. 행사에 참여한 주민들은 스카프,광목 등에 독립선언서를 직접 인쇄하고,독립선언서에 서약하는 손도장 찍기를 체험하며,그날의 함성을 다시 새기게 된다.3·1운동의 전개과정을 소상히 보여주는 사진 전시회와 독립군가 메들리,깃발무 등의 공연에 이어 오후 3시쯤 참가자 전원의 만세삼창으로 독립운동 재현행사는 마무리 된다.김 구청장은 “이번 행사를 통해 봉황각과 독립유공자들이 잠든 삼각산 자락의 의미를 다시 새기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종로구(구청장 김충용)도 3·1절에 당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던 태화관길과 인사동길에서 선열들의 자주독립 정신을 되새기는 거리축제를 펼친다. 행사는 독립선언서 낭독에 이어 독립투사 33인으로 분장한 김충용 구청장을 비롯,구의원,지역 인사 등이 참여한 가운데 만세삼창을 한다.3·1운동 당시 복장을 한 500여명의 학생들이 태극기 물결행진을 벌인다.남인사마당 특설무대에서는 기념음악회도 열린다. 최용규 이동구기자 yidonggu@˝
  • [조정래의 세상보기] 도대체 어느 나라 정부·국회인가

    ‘대한민국’이 하나의 나라이긴 나라인가? 정부는 친일과 반민족 행위에 대해 진상을 규명하기 위한 특별법 제정을 반대하고 나섰다.이게 도대체 어느 나라 정부인가.또한,국회는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위한 예산 전액을 삭감해 버렸다.이게 도대체 어느 나라 국회인가.정부도,국회도 이 모양 이 꼴이니 꼬박꼬박 세금 내고 있는 국민된 자 그 누구나 ‘대한민국이 나라이긴 나라인가?’하는 깊은 회의에 빠지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그뿐만이 아니다.몇년 전에는 매국노 이완용의 땅을 되찾겠다고 나선 그 후손에게 법원은 승소 판결을 내려주었다.그리고,한 달 전에는 시민단체들이 나서서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땅의 반환운동을 성공시켜 놓았더니 친일파의 거두 송병준의 후손들이 그 땅을 되찾겠다고 나섰다.이렇듯 사법부까지도 그 기능을 역행하고 있으니 대한민국은 헌법 정신을 철저하게 위배하고 있는,나라 아닌 가짜 나라인 것이다.대한민국의 헌법 전문에는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잇는다고 적시되어있다.3·1운동은 무엇이고 임시정부의 법통은 무엇인가.그것은 두말할 필요없이 일본을 물리쳐 조국의 독립을 되찾는 것 아닌가.그러므로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들 척결은 필수적이고 필연적인 사업이었다. 그런데,해방이 곧 민족의 분단이 된 역사 현실 속에서 미 군정은 친일파들을 옹호하며 하수인으로 이용해 먹었고,그 토대 위에서 탄생한 이승만 정권은 친일파들의 단죄를 위한 ‘반민특위’의 해산을 묵과함으로써 우리 현대사는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들의 손으로 왜곡되고 또 왜곡되는 비참하고도 쓰라린 체험을 거듭하며 오늘에 이르러 있다.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에도 끝없이 반복되어온 일본 장관들의 망언은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그들이 비양심적이고 몰염치하기 때문인가? 꼭 그런 것만이 아니다.슬프게도 그 책임의 절반은 우리에게 있다.프랑스가 단행했던 것처럼 우리가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들을 단호하고 매섭게 처단하고 척결했다면 일본이 어찌 감히 그런 행투를 일삼을 수 있었겠는가.일본 육사 출신 박정희가 대통령을 하고,만군 출신 정일권이 국무총리를 하는 대한민국을 일본 정객들은 얼마나 가소롭게 얕잡아보았을 것인가.그런데 참여정부의 행정자치부 차관이 국회의원들을 상대로 “조사 대상자와 그 후손들이 반대하는 등 국민적 갈등이 우려된다.”는 정부 입장을 내세우며 특별법 제정을 반대한 것이다.참여정부는 박정희 정권에 다름이 없는 것인가. 나라를 잃자 맨 처음 목숨을 끊은 매천 황현 선생을 비롯해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다 산화해간 신채호 박은식 이동녕 김구 한용운 선생 같은 분들은 국권 상실의 식민지 상황을 일컬어 하나같이 ‘피를 토하고 죽을’ 것 같다고 그 심경을 표현했다.지금,우리 내부의 불신감에다,이젠 일본 장관이 아니라 총리가 직접 나서서 “독도는 일본땅”이라는 망언을 거침없이 쏟아내는 현실을 응시하고 있는 한국인들의 심정은 어떠할 것인가.바로 ‘피를 토하고 죽고 싶을’ 것이다. 하나의 정권이 곧 나라는 아니다.어느 정권이든 그 수명은 시한부이며,그 나름의 한계를 지니게 마련이다.오로지 나라의 주인은 국민이며,영원한 것은 민족밖에 없다.그러므로 민족 성원인 우리는 영원한 민족사를 위해서 우리 스스로 불씨가 되고 원동력이 될 수밖에 없다.‘친일인명사전’ 발간은 ‘반민특위’의 재건이며,‘민족 법정의 개정’이다.우리 민족의 올바른 역사를 위하여,우리 민족의 참된 삶을 위하여 그 일에 동참하는 것은 오늘을 사는 우리의 성스러운 의무이고 권한이다.이미 그 사전 발간을 위한 모금이 시작되었다.그 비용이 30억원쯤 예상되고 있는데 그 정도 돈은 거뜬하게 모아지리라 믿는다.수해의 피해가 크면 클수록,국란으로 불렸된 IMF사태를 맞고서 우리 사회의 모금은 그 전 해보다 훨씬 많았던 응집력을 보여주고는 했다.역사는 인간의 삶 그 자체이며,자각하는 자들이 현실 속에서 키워낸다. 작가,동국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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