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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라 살리려던 사람 죽고 꾀부린 사람만 살아남아”

    “나라 잃은 슬픔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당해보지 않으면 몰라. 죽어가면서 옥살이 하면서 나라 살리려고 했던 사람들은 모두 다 죽었고, 꾀부린 사람들만 살아 남았어.”경기도 양평군 용수사에는 3·1 운동에 참여했던 독립투사인 유정(여·104·속명 임엽) 스님이 초고령의 나이에도 노익장을 과시하며 생존해 있다. 유정 스님은 1999년 사찰땅 1만여평을 송두리째 사기당했다며 청와대와 국회에 탄원서를 제출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6년여 동안의 억울한 소송사건에 휘말려 마음고생이 가시지 않은 상태지만 그러나 3·1절을 앞두면 모든 것이 숙연해진다고 한다. 유정 스님은 “지금도 일본 소리만 들으면 온 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라면서 “요즘 친구들은 나라 잃은 슬픔을 잘 모른다.”고 젊은이들에게 일침을 놓는다. 용수사 주지스님인 유정 스님은 1919년 천안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에서 자신보다 한 살 많았던 유관순 열사와 함께 죽을 힘을 다해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1903년 서울 종로에서 태어나 집성촌이 있는 천안에 머물다 만세운동에 참가했다. “사람들이 ‘동천 마당에서 난리났다.’고 그러더라고. 그 때는 거기(아우내)를 동천이라 불렀거든. 가보니 사람들이 모여 있었어. 내가 그 나이에 무슨 혁명투사, 독립투사였겠어. 아무 것도 모르고 끼게 된 거지.” 유정 스님은 “지금도 그 때 생각만 하면 소름이 끼친다.”면서 “일본 사람들 횡포가 말도 못했지. 순사들이 우리한테 장총을 겨누더니 막 쐈어. 죽어나간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어. 애 어른 할 것 없이 죄다 쏴 죽였어.”라고 당시를 회고했다. 유정 스님은 스무살 무렵이던 1920년대 중반 첩자로 오인받아 고문을 받은 뒤 산사에서 휴양을 하던 중 승려의 삶을 살기로 결심했다. 어느덧 불가에 귀의한 지 80년을 훌쩍 넘겼고 100세가 넘었지만 아직도 산에서 나물을 캘 정도로 정정하다. 유정 스님은 3·1운동 당시 일본 헌병에게 잡혀가던 유관순 열사의 모습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유관순이 태극기를 양손에 들고 만세삼창을 하는데 가슴쪽 천에는 ‘내 나라 내놔라.’라고 씌어 있었어. 일본 순사들이 ‘주동자다.’그러면서 잡아갔지….” 유정 스님은 올 3·1절에는 서울에 올라가 젊은 사람들을 만날 생각이다. 한민족운동단체연합과 불교조계종대각사, 독립유공자유족회 등의 주관으로 열리는 ‘3·1문화대제전’에 참석해 젊은 친구들에게 1919년 당시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들려줄 계획이다. “그 때 독립운동 했던 사람들은 다들 힘들게 살다 갔어. 백성들도 고쳐야 할 것이 많아. 세상이 못 됐다고 욕만 하면서 뒷짐을 지고 있으면 어떡해. 좋은 세상이 오도록 너나 할 것 없이 나서야지.”양평 윤상돈기자 yoonsang@seoul.co.kr
  • 일제 제암리학살 은폐 증거 찾아

    |도쿄 이춘규특파원|1919년 3·1독립운동 당시 일본군 헌병들이 경기도 화성 제암리 양민 23명을 집단 학살한 사건을 조선주둔군사령부가 철저히 은폐했음을 보여주는 당시 조선군사령관의 일기가 발견됐다. 또 3·1운동을 계기로 일제가 민족운동가, 종교인들에 대해서는 집요한 회유책을 구사한 것으로 밝혀져 3·1운동을 전후한 일제 식민통치 연구에 새로운 전기가 마련될 전망이다. 일기의 주인공은 3·1운동 당시 조선군사령관이었던 우쓰노미야 다로(1861∼1922) 대장이다. 이번에 공개된 사료는 15년분의 일기와 편지 5000통, 서류 2000점 등 모두 7000점이 넘는 방대한 분량이라고 아사히신문이 28일 보도했다. 독립운동이 전국적으로 번진 1919년 4월15일 발생한 제암리 사건에 대해 그의 일기는 일본군이 서울 남쪽에서 30여명을 교회에 가둬놓고 학살, 방화했지만 조선주둔군이 발표를 통해 이를 부인했음을 증명하고 있다.4월18일자 일기는 “사실을 사실대로 하고 처분을 하면 간단하겠지만 학살, 방화를 자인하는 것이 돼 제국의 입장에 심대한 불이익이 되기 때문에” 간부회의에서 “저항을 해 살육한 것으로 꾸민 뒤 학살 방화 등은 인정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밤 12시 회의를 끝냈다.”고 적었다. 또 다음날 일기에서는 학살사건에 관여한 일본군 중위에 대해 “진압 방법에 적당하지 않은 점이 있어 30일간의 중근신 처분을 내리기로 결심했다.”고 기록했다. 해당 중위에 대해서는 30일간의 근신처분이 내려졌다. 우쓰노미야는 당초 독립운동에 대해 종래의 ‘무단통치’를 비판하며 조선인들의 “원망과 한탄이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일기에 적었다. 이후 ‘문화정치’를 도입하며 집요한 회유공작을 펼쳤으며, 조선인 민족운동가 및 종교지도자, 언론인 등과 만나 정보수집과 의견 교환 등을 한 것으로 나와 있다. 20년 2월20일,4월9일 등 일기에는 ‘배일파(排日派)’로 비쳐진 조선인들과의 접촉에도 적극적으로 나서 일본을 비판하는 언론활동을 했던 민족운동가와 수차례 만나 의견교환을 하고 있다고 기록했다. 아울러 3·1운동이 절정기였던 3월20일 천도교에 대한 회유를 제언, 조선에 부·현(府·縣)제나 ‘자치권’을 부여하는 ‘자치식민지’와 같이할 수밖에 없다고 제안했다는 내용의 육군대신에게 보낸 편지(5월1일)도 함께 공개됐다고 신문은 전했다.사가현립대 강덕상 명예교수(조선근현대사)는 이번 사료에 대해 “3·1 독립운동의 대표적인 유혈진압사건인 제암리 사건의 은폐 과정과 민족운동가들에 대한 일본의 회유공작 기록이 밝혀지기는 처음으로, 기존 연구에서 밝혀지지 않은 부분을 메워주는 일본근대사의 제1급 사료”라고 평가했다.taein@seoul.co.kr
  • 달구벌 구국정신으로 물들인다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의 최대 사건 중 하나인 국채보상운동이 21일로 100주년을 맞는다. 이에 따라 국채보상운동의 발원지인 대구시내 한복판 중구 동인동에 위치한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을 비롯해 곳곳에서 다양한 기념행사가 펼쳐진다. 국채보상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김범일 대구시장 등 공동의장 3명)는 21일부터 28일까지 민·관 공동으로 국채보상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을 벌이기로 했다고 19일 밝혔다. 우선 21일 대구엑스코에서 정부·유공 인사와 시민 1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기념식을 갖는 것으로 기념사업을 시작한다. 또 같은 날 중구 공평동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에서 이 운동의 불씨를 댕긴 김광제·서상돈 선생의 흉상 제막식을 갖는 한편 정보통신부 우정사업본부와 함께 국채보상운동 100주년 기념우표 160만장을 발행해 만국우편연합 190여개 회원국에 배포할 예정이다. 국채보상운동의 발원지인 대구 중구 수창동 옛 광문사(현 수창초교 후문) 자리와 남일동 패물·폐지부인회의 활동장소인 중구 진골목, 중구 서상돈 고택 등 3곳에 시민들이 역사를 되돌아 볼 수 있는 표석을 설치한다. 이와 함께 국채보상운동을 집대성하는 5권의 자료집 1000부와 DVD 1만장,CD 5000장을 만들어 일선 학교에 교육자료로 제공할 계획이다.추진위는 또 국채보상운동을 소재로 한 오페라 ‘불의 혼’을 지난해 대구에서 초연한 데 이어 이달엔 구미,3월 서울에서 앙코르 공연한다. 특히 올해부터 국채보상운동의 숭고한 뜻을 후손들에게 알려줄 기념관·기념비 사업이 본격화된다. 총 60억원이 투입될 기념관 건립사업은 중앙정부가 재정을 지원, 연건평 700여평(지상 3층, 지하 1층) 규모로 현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 부근에 세워질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가운데 대구소비자연맹은 오는 23일 대구상공회의소에서 금연운동 100주년 선포식과 함께 전국 금연대회를 개최한다. 이날 행사에는 여성금연포럼 및 한국금연운동협의회 등 금연 운동단체 관계자들이 참가,‘국채보상운동 100주년, 금연운동 100주년’을 선포하고 시민들에게 금연을 권장한다. 대구소비자연맹은 또 21일부터 28일까지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 일원에서 국채보상운동 및 금연에 관한 각종 자료를 전시하고 중구보건소와 함께 금연상담실과 직·간접 흡연 체험실을 운영한다. 추진위 관계자는 “국채보상운동은 3·1운동의 의미를 능가하는 독립운동”이라며 “선조들의 애국정신을 현대적으로 실천하고 후대에 물려줄 수 있도록 기념사업을 추진해 나가겠다”고 말했다.대구 한찬규·김상화기자 cghan@seoul.co.kr
  • 유관순 열사 ‘민족소녀’ 모습으로

    유관순 열사 ‘민족소녀’ 모습으로

    문화관광부는 6일 동상영정심의위원회를 통과한 재제작 유관순 열사 영정을 새 표준영정으로 지정했다. 견본채색 전신좌상(가로 120㎝ 세로 200㎝)으로 기존 영정에서 나타났던 수심 깊은 중년부인의 이미지를 벗어버리고 청순하고 진취적이며 애국심에 불타는 항일 민족소녀의 모습으로 표현됐다. 영정속 유 열사는 3·1운동 직전, 나라를 걱정하는 표정과 의기에 찬 모습으로 이화학당 교실에 앉아 태극기를 쥔 손을 무릎에 올려놓은 모습으로 충남대 윤여환 교수가 그렸다. 흰색 치마저고리, 갖신 등 복식과 마룻바닥 등을 철저한 고증을 거쳐 사실성 있게 재현했다. 유 열사의 얼굴 부분은 안면근육의 조직을 선과 점을 따라 표현하는 조선후기 초상화법인 육리문법(肉理紋法)을 사용해 피부질감과 색감을 최대한 살린 것이 특징이다. 이에 따라 월전 장우성 화백이 1986년 그린 유관순 열사 영정은 지정이 해제된다. 새로 지정한 표준영정을 관보에 고시해 확정되면 이달 중 천안시 소재 유관순 열사 추모각에 봉안될 계획이다. 한준규기자 hihi@seoul.co.kr
  • 서기원 소설 ‘사금파리의 무덤’ 36년만에 다시 세상에

    두 해 전 75세를 일기로 타계한 소설가 서기원씨의 작품 ‘사금파리의 무덤’이 36년 만에 다시 선보였다. 청소년들이 읽어야 할 소설이라며 출판사 ‘세상모든책’이 출간에 앞장섰다. ‘사금파리의 무덤’은 서씨가 1971년 발표한 중편소설이다. 지금의 청소년들이야 제대로 뜻을 알 까닭이 없을 테지만 ‘사금파리’에서 암시하듯 도자기와 관련된 내용을 담고 있다. 1992년에는 문여송 감독이 메가폰을 잡아 ‘비황’이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돼 DVD로도 감상할 수 있다. 소설의 시간적 무대는 일제시대다.‘조선의 마지막 도공(陶工)’인 이 노인과 그 아들 창길이, 일본인 도자기 수집가 타케야마간 조선백자를 둘러싼 애증과 갈등이 주 테마다. 3·1운동 직후인 1920년, 조선말 폐지된 광주 분원에서 조선백자를 재현하려는 타케야마의 시도에서부터 소설은 시작된다. 이 노인으로 하여금 조선백자를 재현하려던 타케야마는 그것이 실패하자 창길이를 이용해 도굴한 조선백자들을 수집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호의에 끌려 타케야마의 요구에 오히려 적극적으로 도자기를 대주던 창길이는 안목이 틔어 가면서 그의 속셈을 알아차리게 된다. 여기에는 “땅속에 있는 것까지 모조리 팔아먹다니, 그렇게 되면 우리 조상들이 만든 그릇일랑 하나도 남지를 않겠구나. 좋은 물건이 나오면 일인에게 넘기지 마라. 그게 조선사람으로서 할 도리”라는 아버지 이 노인의 당부도 컸다. 이후 조선백자를 둘러싼 창길이와 타케야마의 경쟁과 갈등으로 소설은 박진감을 더해 간다. 도자기에 대한 작가의 식견은 그의 아들인 서동철 서울신문 문화전문기자가 쓴 ‘서문’에서 어렴풋이 배경을 짐작할 수 있다. 서 기자는 아버지가 자식들을 데리고 겨울마다 경기도 광주와 계룡산 일대의 폐허가 된 가마를 찾았던 기억을 떠올렸다. 서 기자는 “우리 형제들에게는 그저 소박한 유적 탐방에 불과했던 가마 순례가 아버지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취재여행이었던 사실을 깨달은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고 말했다. 이 소설이 발표됐을 때 서 기자의 나이는 고작 열두 살이었다. 청소년들이 알기 쉽게 책 말미에 단어풀이도 돼 있다.191쪽,9000원. 박홍환기자 stinger@seoul.co.kr
  • 비둘기처럼, 호랑이처럼

    비둘기처럼, 호랑이처럼

    스코필드 할아버지를 만난 것은 1960년 4월, 내 나이 열세 살 때였다. 그로부터 정확히 10년 뒤인 1970년 4월, 그는 세상을 떠났다. 내 나이 스물세 살 때였다. 소년에서 청년으로 성장하는 그 10년 동안 스코필드는 나와 동행했고, 그 시절 나는 삶에서 배워야 할 것의 대부분을 배웠다. 스코필드 Frank William Schofield는 3·1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 33인에 더하여 ‘제34인’으로 불리는 영국 태생의 캐나다인이다. 1916년 세브란스 의학교수로 처음 이 땅에 발을 디딘 그는 일생 동안 선교와 장학사업을 통해 사랑과 나눔을 설파하고, 우리나라의 독립과 발전에 헌신하였다. 일제 시대에 그는 틈만 나면 카메라를 들고 거리에 나가 일본의 만행을 기록하여 이를 전 세계에 알림으로써 독립에 견인차 역할을 했다. ‘석호필’이라는 우리 이름까지 지었던 그의 한국에 대한 애정은 지극했고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한결같았다. 우리의 인연은 내가 경기중학교에 다니던 시절 시작되었다. 당시 우리 집은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형편이 좋지 않았다. 당연히 학비를 낼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그런 사정을 알고 있던 같은 반 친구 아버지의 주선으로 나는 스코필드의 지원을 받게 되었다. 그는 나의 등록금과 생활비를 지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정신적 지주로서 나의 가치관 형성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나이로 보면 할아버지였지만 일찍 아버지를 여읜 나에게 그는 친아버지나 다름없었다. 나는 우리 집과 가까운 곳에 있던 그의 숙소를 내 집처럼 드나들면서 많은 것을 보고 배웠다. 그는 사슴처럼 선한 얼굴로 나를 “운찬~” 하고 부르곤 했는데, 손자뻘인 나에게 한 번도 존칭을 생략한 적이 없을 정도로 예의와 품격을 갖추었던 분이었다. 외국에 나가면 꼭 엽서나 편지로 내게 안부를 전했을 만큼 자상한 분이었다. 몇 달씩 외국에 나갔다 돌아오는 그를 마중하기 위해 공항에 나가는 것이 내겐 큰 기쁨이었다. 특히 내 가슴속에 깊이 뿌리내린 것은 그분의 철학적 신념이었다. 나는 보행이 불편한 스코필드를 부축하여 대학로를 산책할 기회가 많았는데 그때마다 그는 “약자에게는 비둘기 같은 자애로움으로, 강자에게는 호랑이 같은 엄격함으로” 대할 것을 내게 주문했다. 항상 ‘정의로운 사람’이 되라고 하면서, 특히 건설적인 비판정신을 기르라고 강조했다. 또 정치와 거리를 두되, 사회가 어려울 때는 몸과 마음을 바칠 수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스코필드의 이런 가르침은 훗날 내가 1986년 “체육관 선거를 종식하고 국민들의 손으로 대통령을 뽑자”는 교수 서명운동을 주도하도록 한 원동력이 되었고, 아직도 내 신념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다. 그는 가난한 이들에게는 한없이 베풀고 너그러웠지만, 한국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서는 올곧은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부자는 더 큰 부자가 되고, 가난한 자는 더욱 가난해진다 The rich become richer, the poor become poorer’는 사회현상을 ‘부익부 빈익빈’이라는 용어로 간명화해 우리 사회에 처음 소개한 분도 스코필드이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사회 공동체가 보살펴야 한다고 누누이 강조했고, 그런 이유로 내가 대학을 진학할 때도 경제학을 선택하도록 종용하였다. 나는 그를 통해 사회 속에 몸담은 지식인의 길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익히고 배웠다. 1970년 4월 12일 오후, 스코필드는 지금의 국립의료원 별관 32병동 5호실 병상에서 운명했다. 임종 며칠 전에도 나는 그의 병상을 지켰는데, 말 없이 내 손을 잡아주던 모습이 아직까지 선하다. 그는 끝까지 어려운 이웃들과 함께하고자 했다. 마지막 책 한 권, 구두 한 켤레까지 주위의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고, 재산을 모두 보육원과 YMCA에 헌납하고 떠났다. 그리고 빈 몸으로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돌이켜보면 백발이 성성한 70대 할아버지와 철없는 열세 살배기 꼬마의 만남이었거늘, 그는 나를 한곁같이 성숙한 인격체로 대했다. 그를 만난 것은 내 생의 축복이자 행운이었음이 틀림없다. 인생의 고비마다 나는 스코필드 할아버지를 생각하며 나를 채찍질한다. 양지바른 서울 동작동 애국지사 묘역에 잠든 할아버지는 오늘도 그 자애로운 미소로 내게 말을 건네시는 듯하다. 더 부지런하게, 더 정직하게, 더 정의롭게 사랑하며 살라고….
  • [책꽂이]

    ●제갈량의 경영지략(장정충 등 지음, 전인경 옮김, 비즈&북 펴냄) 청 말의 거상 호설암은 경여당이라는 약국을 개업해 큰 적자를 봤다. 그때 호설암은 약재를 버리면서 성한 것까지 섞어서 버렸다. 그러자 사람들 사이에 성한 약재를 버리는 걸 보면 경여당은 좋은 약재를 쓰는 게 분명하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약국은 성황을 이뤘다. 욕금고종(欲擒故縱, 사로잡기 위해서 풀어주다)의 예다. 제갈량이 영릉 태수의 아들 유현을 사로 잡은 뒤 풀어주자 아들이 감동해 아버지에게 항복을 권한 이야기에서 비롯됐다. 경영책사 제갈량의 지혜를 다룬 책.2만 5000원.●연사수지(演士須知)(이동초 엮음, 모시는사람들 펴냄) 안창호, 여운형과 더불어 당대 ‘3대 웅변가’로 꼽힌 황산 이종린의 연설문, 식사 등을 묶었다. 황산은 한말 일간지 대한민보의 주필을 거쳐 3·1운동 때는 지하신문인 조선독립신문을 발행한 항일언론인. 한문희곡인 ‘만강홍(滿江紅)’,‘표제(標題) 단편소설’의 효시인 ‘모란봉’ 등을 발표한 개화기 소설가로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2만원.●불멸의 목소리(유형종 지음, 시공아트 펴냄)‘오페라의 여신’마리아 칼라스가 이탈리아 베로나의 부호 메네기니와 결혼하자 그의 어머니 에반겔리아는 딸에게 경제적으로 도와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칼라스는 “엄마로서 딸을 위해 희생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지 못하겠으면 낳지도 말았어야지! 게다가 엄마는 아직 젊다. 일을 하면 돈을 벌 수 있는 것 아닌가.”라고 답장을 했다고 한다. 칼라스는 이후 1950년 멕시코 순회공연에 초대한 것을 마지막으로 죽는 순간까지 다시는 모친을 만나지 않았다. 이 책에서는 ‘신이 내린 목소리’로 추앙받은 남녀 성악가 50명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전2권 각권 1만 6000원.●카르페 디엠!(존 블룸버그 지음, 박산호 옮김, 토네이도 펴냄) 카르페 디엠(Carpe Diem)은 ‘삶을 즐겨라’‘현재에 충실하라’라는 뜻의 라틴어. 낡은 관습과 규율에 도전하는 청년들의 자유정신을 상징하는 표현이다. 책은 워커홀릭인 주인공 잭의 입을 통해 인생과 행복이야기를 들려준다.‘행복과 불행은 샴쌍둥이다.’‘행복은 언제나 현재형이다.’‘행복은 때로는 불행의 얼굴로 온다.’등 삶의 경구가 담겨 있다.1만원.●인도 바로보기(고홍근·최종찬 지음, 네모북스 펴냄) ‘잠자는 코끼리’ 인도는 국토의 크기가 한반도의 17배, 남한의 33배에 이르며 사용되는 언어는 300개가 넘는다. 지배인종은 지중해인을 모체로 하는 드라비다인과 아리아인. 중국이나 아시아 쪽의 인종보다는 유럽인종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인도인들과 직접 몸을 부딪치며 쌓은 경험을 토대로 한 생생한 인도 리포트다.2만 3000원.
  • “조선후기 서책 상품화가 근대성 뿌리”

    “조선후기 서책 상품화가 근대성 뿌리”

    한국 근대문학은 서구의 근대문학을 이식·모방했는가? 우리 문학에서 자생적 근대화의 토양은 과연 없었나? 학계에 불어닥친 근대사 분석 열풍이 국문학 분야까지 파고들었다. 연세대 근대한국학연구소는 ‘한국문학의 근대와 근대성’이라는 주제로 최근 2년간 네차례의 학술회의를 가졌다. 중점 연구대상은 조선후기와 계몽기, 일제강점기 등 세 시기의 문학이다. 그 결과물이 최근 같은 제목의 학술서적으로 출간됐다. 학술회의에서 발표된 10편의 연구논문과 해당 연구논문에 대한 토론자 10명의 토론문이 함께 실려 있다. 연세대 국문과 임성래 교수는 조선후기 문학에서도 ‘근대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임 교수는 ‘조선후기 문학과 근대성’이라는 논문에서 “조선후기 들어 상인들이 만들어 판매한 ‘방각본’ 서책이 발행됐다.”면서 “이같은 서책의 상품화는 근대성의 바탕이 된다.”고 말했다. 임 교수는 아울러 18세기 이후 직업 이야기꾼인 ‘전기수’와 책을 빌려주는 ‘세책가’의 등장도 문학의 상품화 측면에서 근대성의 근거가 된다고 덧붙였다.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한국 문학의 근대가 서구의 근대를 모방·이식한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됐다. 국민대 국문과 정선태 교수는 최남선 주도로 1908년부터 1911년까지 통권 23호가 발행된 잡지 ‘소년’에 주목한다. 일본을 경유한 근대문학의 번역을 통해 근대소설을 가능케 한 글쓰기의 변화가 일어났다고 주장했다. 정 교수는 “일본 근대문학이라는 타자(他者)가 한국 근대 문학자들에게 미친 영향은 상상 이상”이라고 설명했다. 당시 서양문학의 번역은 대부분 일본어를 중역(重譯)한 것이었다는 주장이다. 강릉대 국문과 양문규 교수는 “인간의 내면에 대한 관심이 근대성의 요소라고 보면 1910년대 이광수 등의 소설에서 근대문학의 맹아를 보이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신소설 이후 우리 소설은 일본을 통해 수용된 서구문화에 압도되어 버렸다.”면서 “당시의 일본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내면을 중시하는 근대성에 빠져 이야기 서술 중심의 전통적 국문소설이 계승발전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3·1운동은 근대문학사의 분기점으로 인식된다. 이후 동인지시대가 열렸고, 자연주의와 리얼리즘이 보편화된데 이어 프로문학까지 등장했다. 성공회대 국문과 임규찬 교수는 “3·1운동 직후의 질풍노도적 시기는 근대성과 관련, 망원경과 현미경이 동시에 필요한 복합적인 시기”라고 분석했다. 일제말 한국문학은 민족주의와 ‘해체론적 탈식민론’으로 대별된다. 양쪽 모두 식민주의를 견고한 담론으로 상정한다. 식민주의 입장에서 저항은 엄청난 용기와 결단을 필요로 하고, 해체론적 탈식민론 입장에서는 저항의 가능성 자체를 믿지 않는다. 원광대 국문과 하정일 교수는 “결국 식민주의를 견고하면서도 나약한 담론으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일제말 임호는 근대극복론을 통해 문화적 식민주의를 청산하는 결정적 계기로 삼고자 했다.”고 주장했다. 박홍환기자 stinger@seoul.co.kr
  • [사설] 뜻 깊은 친일행위자 첫 확정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1차로 친일파 106명을 확정해 발표한 것은 대단히 뜻 깊은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동안 민간 차원에서 친일파 명단을 여러차례 발표한 바 있지만, 이번에 공개된 명단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구성된 대통령 직속기구가 조사·확정했다. 말하자면 국가의 공식 결정인 것이다. 특별법은 2004년 여·야 합의로 제정했으므로, 그 결과인 이번 발표를 두고 친일 청산의 대의에 더이상 이의를 제기하는 일은 없어야 하겠다. 친일 청산이 사회적 이슈로 대두될 때마다 우리는 몇가지 원칙을 제시했다. 먼저 친일반민족 행위자를 가려내는 일은 일제 잔재를 청산하고 민족정기를 되살리는 데 목적을 두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대상인물 및 그 후손이 현 사회에 영향력이 있다 해서 눈감아 주어서는 안 되며, 거꾸로 선대의 친일 행각을 공격의 빌미로 악용해서도 안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아울러 그 후손·집안에게는 조사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이라고 요구했다. 이번 명단에는 시기상 러·일전쟁부터 3·1운동까지 활약한 친일파들만 포함됐다. 위원회는 앞으로 3·1운동이후 광복까지의 친일 행각을 추가 조사할 예정이다. 시기가 광복에 가까워질수록 친일 행각에 대한 평가가 극단적으로 엇갈리는 만큼 위원회는 객관적이고 세밀한 조사를 통해 친일 여부를 엄정히 가려내야 한다. 조사가 완료된 뒤에는 우리사회가 더이상 친일 문제로 갈등을 빚는 일이 없도록 깔끔하게 마무리하기를 기대한다.
  • [기고] 순국선열들이 있었으매/박유철 국가보훈처장

    “나라를 빼앗겼을 때 그 나라를 찾고자 목숨을 바치고 풍찬노숙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그들을 잡아 죽이고 곤죽을 만듦으로써 영달과 편안함을 취하고 있었다면 선열들은 무엇 때문에 나라를 찾고자 애썼고 목숨을 바쳤던가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소설가 최일남 선생이 쓴 ‘거룩한 응달’의 일부다. 오늘은 예순일곱 돌을 맞는 ‘순국선열의 날’이다. 소크라테스가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바르게 사는 것이 중요한 문제다.”라고 말했듯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자신을 희생하여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일일 것이다. 순국선열의 날은 일제에 항거하다 희생된 선열들의 위훈을 기리고자 193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제정한 순국선열공동기념일이 모태다.1905년 을사늑약으로 일본에 국권을 빼앗기는 비운을 맞게 되자 조국 광복을 위해 방법은 각기 달랐으나 국권회복에 대한 염원은 오직 하나로 수많은 선열들이 소중한 생명을 바쳤다.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은 국내는 물론 중국 일본 러시아 미국 미얀마 인도 등 매우 넓은 지역에 걸쳐 장기간 지속되었다. 의병투쟁을 시작으로 3·1운동 임정활동 의열투쟁 무장투쟁 외교투쟁 등의 항일 독립운동이 광복을 맞기까지 50여년간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선열들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가혹한 고문으로 옥사하거나 일본의 비인간적인 만행에 죽음보다도 더한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이처럼 일본에 맞서 국내외에서 희생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한 선열들의 순국정신은 시대를 초월한 역사 발전의 동인이며, 국가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필요한 참다운 시대정신이다. 조국을 찾기 위해 목숨까지 기꺼이 바치신 선열들의 살신성인의 정신, 사회와 국가를 위해 이기심을 버리는 멸사봉공의 정신, 이런 정의의 정신은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하고 우리가 반드시 계승하고 발전시켜야 할 삶의 지표다. 100년 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행사할 수 없었던 우리나라가 이제 차기 유엔 사무총장직을 맡게 되었으니 세계 외교의 중심으로 성장한 것이다. 순국선열들의 값진 희생으로 오늘의 대한민국 위상은 세계 속에 빛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지금 우리 사회는 경제적 풍요 속에서 부지불식간에 형성된 극단적인 이기주의, 물질만능주의로 우리가 소중히 지켜야 할 정의의 정신이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더불어 세대와 계층, 지역간의 벽을 넘어 국민대통합을 이루고 선진한국 건설의 기반을 튼튼히 조성해 나가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국가보훈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보훈은 만년지대계(萬年之大計)라 했다. 정부는 국민이 공감하는 미래지향적 보훈체계 확립과 수준 높은 의료·복지체계 구축, 국민과 함께하는 나라사랑 정신의 확산 등 한 차원 높은 보훈정책을 펼치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다. 역사에서 교훈을 찾지 못하는 민족은 생존할 수 없다. 수난과 치욕의 역사를 기억하는 것은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그런 의미에서 순국선열의 날에 우리는 오늘의 사표가 되는 애국선열들의 순국정신을 다시 한번 되새겨보아야 한다. 박유철 국가보훈처장
  • 독립운동가 154명에 훈·포장

    정부는 제67회 순국선열의 날(17일)을 맞아 15일 국무회의를 통해 일제 강점기 러시아 지역을 거점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한 이민환(1899∼1973) 선생 등 154명의 순국선열과 애국지사에게 훈·포장을 추서키로 결정했다.이 중 생존인사는 없으며, 여성이 3명이다. 조선공산당 만주 비서부 조직부장을 역임한 한봉철(1898∼1936) 선생 등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 인사 24명도 포함됐다. 홍파(洪坡) 선생으로 더 많이 알려진 이민환 선생과 만주 일대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한봉철 선생 등 2명에게는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러시아 지역의 대표적 무장투쟁가인 박일리아(1891∼1938) 선생과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과정의 주요 인물로 1920년 사회주의 운동을 통해 민족운동을 전개한 홍도(1895∼?) 선생은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게 됐다. 독립운동가 손정도 선생의 모친이자 대한애국부인회 총재를 지낸 오신도 여사에게는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전남 광주에서 3·1운동을 주도하고 군자금 모금활동을 전개한 공로로 건국훈장 애족장 서훈을 받게 된 이주상(1867∼1902) 선생과 광주 숭일학교 학생으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한편, 독립선언서를 배포해 건국포장을 받게 된 이창호(1902∼1931) 선생은 부자지간으로 눈길을 끌었다. 이로써 이주상 선생 집안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된 장남 이윤호 선생을 비롯해 3부자가 독립운동에 참여한 공로로 정부로부터 포상을 받게 됐다.김상연기자 carlos@seoul.co.kr
  • ‘30년전 약속’ 지킨 두 사람

    ‘30년전 약속’ 지킨 두 사람

    “이제야 30년 전의 약속을 지키게 됐습니다. 늦었지만 앞으로 어려운 이웃을 위해 나눔을 실천하겠습니다.” 13일 낮 12시 서울 송파구 삼전동의 전통한정식당 ‘하늘담’에서는 지역 무의탁 독거노인을 위한 뜻깊은 ‘칠순 잔치’가 열렸다.30년전 호텔 주방 보조로 만나 ‘요리 기능장’과 ‘경영 전문가’로 자수성가한 두 남자의 약속이 첫 결실을 맺은 자리다. 잔치를 마련한 사람은 지난 4월 하늘담을 함께 개업한 이원식(50)씨와 위경춘(49)씨. 이들은 “돈을 벌면 함께 어려운 이웃을 돕자.”는 30년 전에 맺은 둘만의 약속을 실천하기 위해 이날 잔치를 열었다. ●30년 전의 아름다운 약속 친형제보다 가까운 이들의 약속은 197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10대 후반에 무작정 상경한 이들은 인천 관광호텔 주방에서 만났다. 무학(無學)과 중학교 중퇴라는 아픔을 함께한 두 사람은 설거지와 청소 등을 하며 우정을 나눴다.“배가 고파서 밥이라도 잘 먹으려고 호텔에 취직했다.”고 말할 정도로 어려운 시기에 객지에서 만나 둘도 없는 친구가 됐다. 이후 호텔에서 번 돈을 모아 1981년 상경, 청량리에서 자취를 하며 각자의 꿈을 키웠다. “당시 청량리 시장에서 한 할머니로부터 밥을 사먹었어요. 당시 1인분에 500원이었는데 돈이 없어 1인분만 시키는 우리들에게 항상 2인분의 밥을 주셨지요. 그 분의 사랑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그때 성공하면 우리도 어려운 이웃을 위해 베풀자고 새끼 손가락을 걸어 약속했어요.” 그래서 이들은 남편과 사별한 뒤 30년 넘게 보증금 800만원, 월세 10만원짜리 사글셋방에 혼자 살아온 신귀수(70·삼전동) 할머니를 위한 칠순 잔치를 마련했다. 하객으로 신 할머니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50여명의 독거노인을 초청했다. 신 할머니는 “평생 처음 생일상을 받아본다.”며 고마움을 감추지 못했다. ●밑바닥에서 시작한 값진 성공 밑바닥에서 시작해 각자의 위치에서 값진 성공을 이룬 두 사람. 충남 예산이 고향인 위씨는 손꼽히는 유명 요리사로 성공했다. 중·고등학교 검정고시를 거쳐 한국방송통신대를 졸업하고 오산대 조리학과 교수, 프라자호텔 조리장을 거쳐 우리나라 한정식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삼청각에서 세계 각국의 정상 및 귀빈의 대접을 도맡았다. 이씨는 초·중·고등학교 검정고시를 거쳐 5년 만에 성균관대 경영학과를 졸업, 강남에서 잘나가는 학원 수학강사로 이름을 날렸다. 경북 영덕이 고향인 이씨는 가난한 독립유공자의 장손으로 어린시절 배고픔을 겪었다. 할아버지는 3·1운동을 했던 고 이석산옹으로 오는 17일 수원 아주대 강당 율곡관에서 열리는 ‘제67회 순국선열의 날’ 기념식에서 독립유공자로 포상을 받는다. 이씨는 “할아버지께서는 항상 나라사랑과 더불어 어려운 이웃을 위해 일하라고 가르치셨다.”면서 “앞으로도 ‘나눔’을 실천하는 데 앞장서겠다.”고 다짐했다. 조현석기자 hyun68@seoul.co.kr
  • 日帝 유관순열사 순국뒤 시신토막 옥중 여성열사들 성고문도 자행

    일제가 강점기 당시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 유관순 열사의 시신을 토막내 훼손하고, 독립운동을 하다 옥에 갇힌 여성 열사들을 성고문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같은 사실은 1일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이 개관 8주년을 맞아 연 학술심포지엄 ‘3·1운동기 여성과 서대문형무소’에서 밝혀졌다. 서대문구(구청장 현동훈) 주최로 열린 심포지엄에서는 여성 열사들의 옥중투쟁과 일제의 잔인한 고문상이 낱낱이 드러났다. ‘유관순 열사와 서대문형무소’를 발표한 김삼웅 독립기념관장은 유관순 열사를 비롯, 여성들이 받은 고문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밝혔다. 7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유관순 열사는 옥중에서도 만세를 멈추지 않았다. 특히 1920년 3월1일에는 3·1운동 1주년을 기해 옥중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유관순 열사는 이 일로 심한 고문을 당해 방광이 파열되는 중상을 입었고, 그해 10월 순국하게 된다. 이틀 뒤에야 소식을 들은 이화학당 교장 미스 프라이와 미스 월터가 형무소장에게 시신 인도를 요구하자, 일제는 시신 상태를 세상에 알리지 말 것 등의 조건을 붙여 마지못해 석유상자에 넣은 시신을 넘겨줬다. 김 관장은 발표문 중 ‘고문방에서 토막살해 설도’라는 소주제에서 유관순 열사의 시신이 머리와 몸통, 사지 등 여섯 토막으로 잘려 있었고, 코와 귀도 잘려 있었다는 기록을 소개했다.‘간수들은 유관순이 고문에 못이겨, 아니 고문으로 죽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살해 가능성을 언급하는 문헌도 인용했다.일제의 만행은 단순히 물리적인 폭행에서 그치지 않았다. 김 관장은 “간수들이 말린 황소의 생식기를 고문도구로 사용하다 좀처럼 굴복하지 않는 여성 열사들이 있으면 이 도구를 이용해 성기를 훼손하는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고 전했다. 이현희 성신여대 명예교수에 따르면 대동단 단원이었던 이신애 열사는 서간문과 구술자료에서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악명높았던 종로경찰서 미와 경사가 면상을 세게 내리치자 아래턱이 퍽 소리와 함께 왼편으로 돌아가 붙어버렸다. 아이쿠 하려 애를 써도 그때부터 전혀 말을 할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이신애 열사는 옥중에서 3·1운동 1주년 만세운동을 주도했다가 혹독한 전기고문을 받아 손목이 다 타버렸고, 끝내 임신도 할 수 없는 몸이 되고 말았다.유지혜기자 wisepen@seoul.co.kr
  • 고 함석헌 선생 유해 대전현충원에 안장

    일제강점기 ‘성서조선’을 발간,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광복후 민주화 운동에 헌신한 고 함석헌(1901∼89) 선생의 유해가 19일 대전현충원 애국지사 제3묘역에 안치됐다. 안장식에는 함 선생의 둘째 아들 우용씨 등 유가족과 친지, 기념사업회 관계자 등 50여명이 참석했다. 함 선생의 묘는 경기 연천군 전곡면에 있었으나 2002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아 국립묘지 안장 대상이 됨에 따라 이날 대전현충원으로 옮겨졌다. 함 선생은 평북 용천 출신으로 3·1운동 때 평양에서 시위를 벌였고 1927년 김교신과 함께 민족지 ‘성서조선’을 발간,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해방후 월남, 평생을 반독재와 민주화운동에 헌신하고 민중신학 개척자로 활동했다.대전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 대구 계성고 100돌

    대구 계성고등학교가 15일로 개교 100주년을 맞는다. 계성고는 13일 대구실내체육관에서 100주년 기념행사를 갖는다. 계성고가 주최하고 학교법인 계성학원과 총동창회의 후원으로 열리는 행사에는 재학생과 동문 4000여명이 참석한다. 영남지역 최초의 중등교육기관인 계성고는 1906년 10월15일 미국 북장로회 제임스 애덤스(한국명 안의와) 선교사가 설립했다. 지금까지 6만여명의 졸업생을 배출, 지역의 명문사학으로 자리잡았다. 특히 소설가 김동리(21회), 아동문학가 김성도(21회), 시인 박목월(23회)과 김문순(49회) 조선일보 발행인, 신상민(52회) 한국경제신문 사장, 박정찬(60회) 연합뉴스 특임이사 등 걸출한 문인과 언론인들이 많이 배출됐다.계성고는 지난해부터 개교 100주년 기념행사 출범식을 비롯해 장학재단 설립, 상징탑과 3·1운동 기념비 건립, 발전방안 세미나 등 다양한 기념사업을 추진해 왔다.대구 한찬규기자 cghan@seoul.co.kr
  • [김성호 전문기자의 종교건축 이야기] (14) 호남 첫 자립교회 목포 양동교회

    [김성호 전문기자의 종교건축 이야기] (14) 호남 첫 자립교회 목포 양동교회

    멀리 유달산이 바라보이는 전남 목포의 구시가지인 양동 127 언덕배기에 오똑하니 서있는 석조건물 양동교회(담임 목사 정기대·등록문화재 제114호).1910년 신자들이 유달산의 돌을 옮겨다 세운 호남지역 최초의 자립교회다. 개항기 선교사들에 의해 기독교 전진기지로 부각된 목포에서도 가장 먼저 복음을 전한 호남의 중심적인 신앙유산. 지금은 목포 신시가지가 번성하면서 기독교 신앙의 중심도 자연스레 옮겨갔지만 100여년간 원래 자리에서 옛 모습을 잃지 않은 채 복음을 전해온 양동교회의 신앙적 자부심은 여전하다. 개항기 대부분의 교회들이 그랬던 것처럼 목포에 기독교 신앙의 씨앗을 뿌린 것도 역시 선교사였다.‘양동교회 100년사’ 등 기록에 따르면 1893년 미국 남장로회 선교부 소속 선교사 몇몇이 호남지역 선교기지를 낙점하기 위해 군산 무안반도 등지를 오가며 전도활동을 한 것이 이 지역 개신교 전파의 시초다. 남장로회 선교부는 당시 들불처럼 번진 동학혁명의 기세에 잠시 활동을 멈췄지만 세상이 안정되면서 전남 나주를 선교기지로 만들기 위해 배유지·하위렴 목사를 파견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나주는 전통적으로 보수적인 세력이 강했던 곳. 당연히 주민들의 강한 반대에 부닥쳤고 선교사들이 나주 신앙터 건립을 위해 사들였던 부지를 팔아치우고 옮겨온 곳이 바로 목포다. 당시 목포에는 이미 바깥에서 들어온 신자들이 퍼져 살고 있었기 때문에 선교사들이 활동을 수월하게 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1897년 지금의 양동교회 자리인 만복동에 천막을 치고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양동교회의 시작이다.1년 만에 신자가 30여명이나 생겨났으며 1906년에는 당회를 구성하면서 신자가 200여명으로 늘었다. 신앙의 씨앗을 뿌린 배유지 선교사는 1905년 광주로 떠나 양동교회의 건립은 보지 못했다. 지금의 양동교회 건물을 세운 것은 1909년 당회장으로 청빙된 조선예수교장로회 평양신학교 졸업생 윤명식 목사. 조선인 목사가 담임 목사를 맡은 것은 당시 한국 전체에서 네번째, 호남지방에선 처음이었다. 윤 목사는 당시 돈 7000원을 들여 그 이듬해 마침내 1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106평 규모의 교회를 세워놓았다. 신앙의 씨앗은 미국인 선교사가 뿌렸지만 교회는 한국인 목사와 신자들이 직접 올려세운 호남지역 최초의 자립교회인 것이다. 교회 본당 건물의 주춧돌과 외벽 석재들은 모두 교인들이 유달산에서 직접 날라다 썼다고 한다. 교회에 들어서면 정면 오른쪽에 ‘이곳은 목포에 복음의 씨가 뿌려진 맨 처음 터’라 새겨진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1986년 처음으로 목포지역 교회가 모두 모인 가운데 드린 부활절 연합예배후 선교100주년 기념으로 세운 선교기념비다. 함석 지붕을 인 교회 본당은 원래 사방의 크기가 똑같은 정방형으로 세워졌으나 1982년 교회 정문 앞에 있던 종각을 헐고 본당 정면에 종탑을 들이는 바람에 앞쪽 공간이 조금 늘어나 125평의 규모가 되었다. 종탑 머릿돌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는 성경(이사야 56장)구절이 새겨져 있다. 본당 출입문도 원래는 양측에 두 개, 정면에 두 개가 있었는데 종탑을 세우면서 지금은 세 개만 남아있다. 네 개의 문을 만든 것은 남녀 신자들이 각각 다른 문을 통해 드나들 수 있도록 배려한 것. 이 출입문의 위쪽 부분이 모두 태극 문양으로 만들어진 것이 특이하다. 등나무 넝쿨이 태극 문양을 가리는 바람에 일제 경찰들의 눈을 피할 수 있었고 지금까지 그 형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고 신자들은 귀띔한다. 당시 교회를 세운 목사와 신자들의 의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지금 예배에 꾸준히 참석하는 신자는 300명 정도. 양동에서 대를 이어 사는 고령층 교인들이 많지만 신앙처를 바꾸지 않은 채 오래도록 적을 두고 있는 인근 지역의 신자도 상당수에 이른다. 신자 수와 교세를 감안할 때 목포 지역 350개 교회 가운데 차지하는 위상은 20위 정도에 해당한다고 한다. 양동교회 제21대 담임 정기대(44) 목사는 “초기와 달리 양동교회의 역할이 분산됐지만 목포 주민들과 교인들 사이에선 한국인 목사를 담임으로 모신 호남 최초의 자립교회이자 신앙 중심으로서의 교회에 대한 자부심이 이어진다.”고 말했다. kimus@seoul.co.kr ■ 목포의 3·1운동… 그 중심에 선 교인들 1919년 3월 독립만세운동이 전국으로 퍼져 나갈 때 목포에서도 20일과 4월 8·9일 모두 세 차례에 걸쳐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이 가운데 4월8일의 이른바 ‘4·8 만세운동’은 목포의 3·1운동으로 불리며, 이 만세운동의 중심에는 양동교회가 있었다. 당시 청년·시민들의 시위 움직임에 호흡을 맞춰 3월1일 이전부터 별도의 만세시위운동을 준비해온 기독교인들은 바로 양동교회의 주요 신자들. 장로였던 곽우영을 비롯해 집사 서기견·서화일, 정명여학교(양동교회가 세운 미션스쿨) 한문교사였던 강석봉이 그들이다. 당시 매일신보 등 기사에 따르면 정명여학교 학생들을 동원한 기독교인들은 이날 새벽부터 태극기와 독립선언문을 집집마다 돌린 뒤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플래카드를 앞세워 시가지에서 일제히 시위를 시작했다. 시가가 순식간에 사람들로 뒤덮였고 시위에서 체포된 80여명이 경찰서에 끌려가 심한 구타와 고문을 겪었다. 특히 양동교회 집사 서기견은 시위 현장에서 일경의 칼에 맞은 상처와 혹독한 고문 탓에 출감 직후 사망했다. 검거된 시위자 중 40명이 보안법·출판법 위반으로 1∼3년의 징역을 언도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8일 오후 1시15분쯤에 목포 창평정 근처에서 별안간 4명의 야소교학교 여생도가 몰려나오며 손에 한국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는 것을 경관이 잡아 본서로 인치하였는데….”(4월11일자 매일신보)/“8일밤에 야소교 경영의 여학교 졸업생 약 40명이 운동을 개시하였으나 관헌이 출장하여 제지하고 주모자를 잡았다더라.”(4월12일자)/“목포는 지난 8일 이래로 불온한 형세가 되어 각 상점은 오전 중에 철시하고 그 이튿날 9일에도 오전중 폐점하였는데, 양일간에 관헌의 활동으로 선동자 20여명을 포박하고 일변 군대가 오는 등….”(4월14일자) 특히 20일자 기사는 “금월 8일 이래로 소요사건에 관계된 남궁혁·김영주·곽우영·서화일·배치문…외 32명은 경찰서 취조를 마치고 17일에 검사국으로 넘어왔는데, 당일은 조선인 군중이 약 1000명이나 재판소에 모여서 인산인해를 이루었으며, 검사국 취조를 마치고 감옥으로 넘어갈 때에는 울음소리가 자자하며 일시 목불인견의 비극을 이루었더라….”라고 기록해 당시 시위사건과 관련한 목포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만세운동의 중심에 있었던 양동교회에 가해진 일제의 탄압과 그로 인한 교인·가족들의 희생과 고난도 당연히 비례했다.
  • [책꽂이]

    ●새로운 한국식물도감(이영노 지음, 교학사 펴냄) 전세계에서 나는 식물은 대략 20여만종. 그 중 한반도에서 나는 관속식물은 4000여종으로 추정된다. 이 책에는 종자식물과 귀화식물, 양치식물, 원예식물 등 한반도에 야생하는 식물들이 망라됐다. 식물용어는 되도록 쉽게 풀어 썼으며 사진은 식물의 특징적인 부분을 보여주는 데 역점을 뒀다. 식물이름이 흉한 느낌을 주는 개불알꽃은 복주머니란으로, 풀솜대와 석산은 각각 지장보살(전남 구례의 지방명), 꽃무릇(전남 백양산 근처의 지방명)등 정다운 지방 특유의 이름으로 부르는 등 새로운 감각을 살렸다. 전2권. 한 세트 30만원.●현대 고고학의 이해(콜린 렌프류·폴 반 지음, 이희준 옮김, 사회평론 펴냄) ‘삽의 증언’이라 불리는 고고학의 세계를 종합적으로 다룬 현대고고학 개설서.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과 열형광연대측정법,GIS와 DNA연구기법 등 과학적 기법에 대한 설명과 함께 과정주의고고학이라 불리는 ‘신고고학’, 인지고고학, 공공고고학 등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고고학에 관한 최신 논의들이 실렸다.4만원.●역사를 움직인 157인의 마지막 한마디, 유언(한스 할터 지음, 한윤진 옮김, 말글빛냄 펴냄) 성인들의 유언은 감동스러운 데가 있다. 공자는 “지는 꽃잎처럼 현자는 그렇게 가는 구나.”라고 끝맺었다. 폭군 네로는 “한 예술가가 가고 세계는 혼란스러워지는구나.”라는 말을 남겼다. 칭기즈칸은 “죽음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충분히 잠을 잤구나.”라고 말한 뒤 저세상으로 갔고, 대영제국의 초석을 마련한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내가 가진 모든 것은 아주 짧은 한순간을 위한 것이었어.”라며 자신을 뒤돌아봤다.“다시 볼게요. 다시 보자구요.”라는 한없이 슬픈 유언은 마릴린 먼로의 것이다. 역사를 움직인 인물들의 유언 백과사전.1만 8500원.●도산 안창호 평전(이태복 지음, 동녘 펴냄) 독립운동가 도산 안창호의 삶을 조명. 도산은 1898년 평양에서 열린 만민공동회에서 18개 쾌재와 18개 불쾌로 탐관오리들의 학정을 규탄하고 외세의 침탈에 대응할 것을 호소하면서 이름을 알렸다.1907년에 신민회를,1913년에 흥사단을 조직했으며 3·1운동 이후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정부에서 내무총장직을 맡았다. 일부에선 도산을 단순한 인격수양파, 무장투쟁론에 반대한 준비론자, 조선혁명이 아닌 개량주의자로 규정하지만 도산이야말로 현실적인 조건에 기반한 과학적이고 구체화된 독립운동을 펼친 인물이라는 주장이 담겼다.1만 5000원. ●로맹가리(도미니크 보나 지음, 이상해 옮김, 문학동네 펴냄) 유대계 러시아인으로 태어나 프랑스인으로 살다 권총자살로 생을 마감한 작가이자 외교관, 전쟁영웅이었던 로맹가리. 참전중에 쓴 첫 소설 ‘유럽의 교육’으로 비평가상을 받으며 명성을 얻은 그는 ‘하늘의 뿌리’로 공쿠르 상을 받은 데 이어 에밀 아자르라는 가명으로 발표한 소설 ‘자기 앞의 생’으로 다시 한번 공쿠르 상을 수상, 프랑스 역사상 유일하게 공쿠르 상을 두 번 받은 작가로 기록됐다. 이 전기에는 24살 연하 진 시버그와의 운명적 사랑 등 일화도 실렸다.1만 8000원.
  • [문화마당] 우리나라 공식국명은 대한민국이 아니다/허동현 경희대 한국사 교수

    한 세기 전 이 땅의 사람들은 일본제국의 신민(臣民)으로 전락하고 만 참담한 실패의 역사를 쓰고 말았다. 그때 우리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나라의 국민이 되기를 열망하던 민족으로 머물 수밖에 없었다. 도둑처럼 예기치 않게 찾아온 해방의 감격도 잠시뿐 미국과 소련이 펼친 냉전의 덫에 걸려 민족은 남의 ‘국민’과 북의 ‘인민’으로 갈라서고 말았다. 냉전이 깨진 지 오랜 오늘, 통일은 해방처럼 어느 날 눈앞에 들이닥칠지 모를 일이다. 둘이 하나 되는 그날이 오면, 아니 지금도 왠지 ‘대한민국’이 풀뿌리 시민사회를 이룬 우리의 현재를 대표하는 국명으로 미흡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사실 대한민국은 1948년 제헌국회에서 모두가 흔쾌히 동의했던 새 나라의 국호는 아니었다. 당시 ‘고려공화국으로 하자.’, 아니 ‘조선공화국이 좋다.’는 등 의견이 분분했지만 ‘국명이 나쁘다고 독립이 잘 안 되는 게 아니니, 차차 국정이 정돈되고 나서 대다수의 결정에 의해 그때 법으로 정하는 것이 좋겠다.’고 한 이승만 대통령의 설득이 주효해 잠정적으로 대한민국을 국호를 삼았던 것이 오늘에 이르렀다. 1919년 고종이 승하한지 두 달 뒤에 터진 거족적 독립운동인 3·1운동 이후 나라를 앗긴 황제의 존재는 기억의 저편 망각의 늪에 빠져버렸다.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웅변하듯, 그때 이미 우리는 왕정복고를 거부하고 공화국을 꿈꾸지 않았었나? 그렇기에 상하이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대한민국은 대한제국에 대한 단절의식을 함축하는 반어적 국명이다. 역설적이게도 제헌국회에서 국명을 논의할 때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흥해보자.’며 ‘대한민국’을 최초로 제안했던 신승우 의원 말마따나 대한민국은 대한제국을 계승하는 소극(笑劇)을 연출한다. 대한제국은 중국에 조공을 바치던 종속국이 아니라 자주국임을 만천하에 천명한 국호이다. 그러나 대한제국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조선 보호국화 기도를 러시아가 삼국간섭을 일으켜 막은 후 이루어진 러·일 두 나라 사이의 세력 균형 위에 세운 사상누각에 지나지 않았다. 본래 모습보다 크게 보이려 소 앞에서 억지로 배를 부풀리다 소에게 밟혀 죽는 이솝우화 속 개구리를 떠올려 보라. 인간이건 나라건 스스로 대단한 존재라는 자화자찬은 듣는 이의 실소를 자아내게 하는 법. 대한제국은 외세에 기대어 명맥을 이으려 한 왕조의 유약함을 상징한다. 개구리 배 부풀리기 식의 자대(自大)나 타력을 빌리려는 책략만으로는 덩치 큰 포식자들이 날뛰는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없는 일이다. 다시 돌아온 열강쟁패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덩치 큰 포식자들에 맞서 배 부풀리기를 하는 자대도 아니고, 강자에 무조건 머리를 조아리는 굴종도 아닐 것이다. 우리의 번영과 생존을 지켜줄 현명한 책략과 견실한 자강, 그리고 공동체의 정체성을 지켜줄 자긍이 더없이 요청되는 오늘이기에, 허장성세의 대한제국을 연상케 하는 대한민국보다는 제헌국회에서도 제기된 바 있던 고려공화국이란 국명이 더 살갑게 느껴진다. 왜냐하면 거란의 침공에 맞서 나라를 지킨 강감찬의 신출귀몰하는 전략과 세치 혀만으로 침략군을 물러서게 한 서희의 협상력에 목마르기 때문이요, 세계제국 몽고의 침략에 굴하지 않고 60년 항쟁을 벌여 나라를 지킨 고려인의 불굴의 의지가 그립기 때문이요, 밖을 향해 활짝 열린 국제무역항 벽란도와 남녀 간의 자유연애를 노래한 고려가요의 개방성이 한 마을이 된 지구에서 양성평등사회를 꿈꾸는 우리 마음에 와 닿기 때문이요, 세계의 중심에서 화려하게 빛나는 문명이라고 뽐내는 중화(中華)에 맞서 높고 아름답다며 또 다른 문명의 빛임을 자긍한 고려(高麗)의 함의가 오롯이 다가서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나라의 대외적 공식명칭 Republic of Korea와 합치하는 고려공화국으로 국호를 바꾸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허동현 경희대 한국사 교수
  • 보성고 100돌

    보성고가 5일로 개교 100주년을 맞는다. 보성고는 4일 서울 송파구 방이동 교내 운동장에서 최고령 동문인 윤주탁(85ㆍ30회) 삼영산업 회장 등 동문과 재학생 등 3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100주년 기념식을 열었다. 참석자들은 개교 80주년 때 제작된 ‘보성의 종’을 타종하고 100주년 조형물 제막식과 동문성금으로 건립되는 100주년 기념관 기공식을 가졌다.9일에는 잠실 올림픽공원에서 ‘보성인과 함께하는 열린음악회’를 연다. 1906년 사립 보성중학교로 문을 연 보성고는 1919년 천도교 교조이자 보성학교 교주였던 손병희 선생과 최린 교장이 3·1운동 민족대표 33인으로 나서는 등 독립운동에 기여했다.지금까지 3만 6000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동문으로는 고 정세영 현대산업개발 회장과 고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17대 국회의원 박계동·강성종, 소설가 조정래·김진명, 언론인 최학래·유근일씨 등이 있다.이재훈기자 nomad@seoul.co.kr
  • “육당 ‘만몽론’은 대륙지향 의식”

    요즘 유행 가운데 하나를 꼽으라면, 중국의 ‘동북공정’에 맞서기 위해 만주와 몽고의 역사를 재해석하는 작업이다. 우리가 ‘한반도’에 얽매인 삶을 살았던 게 아니라 한때는 저 드넓었던 땅을 앞마당처럼 헤집고 다녔다는 얘기다. 그런데 여기에는 ‘선구자´가 있었다. 바로 변절한 친일 지식인의 대표격으로 꼽히는 육당 최남선의 ‘만몽(滿蒙·만주와 몽고)문화론’이다. 강해수 계명대 국제학연구소 연구원은 계간지 ‘역사비평’ 가을호에 실은 ‘최남선의 만몽인식과 제국의 욕망’에서 육당을 ‘친일-반일’ 구도로 보는 단순논리에서 벗어나자고 제안한다.‘제국의 욕망’이라는 또 하나의 차원은 없었는지 봐야 한다는 것. 강 연구원은 그동안 육당에 대한 연구가 3·1운동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뛰어난 지식인에서 1920년대에 변절해가는 과정을 추적하는 데 그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러다 보니 1930∼40년대 육당의 언행은 ‘변절한 친일 지식인의 남루한 행적’으로만 다뤄질 뿐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는 것. 그래서 강 연구원은 중·일전쟁이 발발한 1930년대 중반 이후 일제가 만주에 세운 건국대학으로 건너가 육당이 발표한 글들에 주목한다. 지금 일본 우익이 흔히 ‘불행했던 과거사’라고 불리는 20세기 초반 동북아 침략사를 합리화하기 위해 내세우는 논리가 바로 후소샤 교과서에도 실렸던 ‘조선 팔뚝론’이다. 조선반도는 대륙에서 섬나라 일본을 향해 불쑥 솟아있는, 위협적인 팔뚝이라는 것. 그래서 일본의 조선병합은 이 위협을 예방하기 위한 ‘일종의 자위권 발동’이었다는 얘기다. 육당은 이 논리를 거꾸로 뒤집어 ‘평화의 도끼론’을 만들어낸다. 손잡이는 조선반도, 도끼날은 만주 몽고 지역이다. 일본은 도끼 손잡이(조선 병합)를 잡은 뒤 도끼날(만주국 성립)까지 확보했으니 이제 남은 일은 중원을 내려 찍는 일, 바로 중일전쟁만 남았다는 얘기다. 이건 그냥 침략이 아니다. 오래전 고대사부터 반복되어 왔던, 중원을 향한 모든 민족들의 자연스러운 투쟁 과정 가운데 일부다. 거기다 이번에는 이미 낡아버린 제국, 중국을 제압하고 서양에 맞서는 것이니 또 다른 평화의 길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런 관점이 가능한 것은 육당이 ‘만몽지역-한반도-일본열도’를 잇는 공통점이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신도(神道)’다. 지금이야 일본의 대중적인 종교 정도로 알려져 있지만 육당은 다르게 본다. 만몽지역의 샤머니즘, 한반도의 무당이 바로 신도다. 육당은 이를 ‘대륙신도-조선신도-일본신도’라 이름 붙인다. 이런 논리 전개는 비교언어학과 비교문화론 등을 통해 널리 퍼지고 있는 오늘날의 재야사학, 민족사학을 떠올리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실제 이들은 육당의 논리를 따오기도 한다. 다른 점이 있다면, 육당은 20세기 초반 가장 근대적이었던 일본을 주체로 상정했고 백인종 대 유색인종간의 대결이라는 인종주의적 관점과 발전하지 못한 민족은 절멸될 수밖에 없다는 사회진화론을 날것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점 정도다. 그래서 강 연구원은 되묻는다. 육당의 배경에는 “민족의 원향(原鄕)으로서의 만주를 향한 우리들의 제국의식”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냐고.“오늘날 우리의 자화상”이 아니냐고. 그래서 육당은 과연 그냥 친일파이기만 했던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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