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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운동
    2026-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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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곳곳서 3·1절 행사

    서울 곳곳서 3·1절 행사

    서울시내 각 자치구는 제89주년 3·1절을 맞아 1일 하루 동안 다양한 기념행사를 연다. 종로구는 3·1 독립운동의 발원지이자 개교 100주년을 맞은 중앙고등학교에서 기념식을 개최한다.▲3·1운동을 다룬 다큐드라마 상영 ▲기념사와 축사 ▲민족대표 33인 등장 ▲독립선언서 낭독 ▲3·1절 노래 제창 ▲만세삼창의 순서로 진행된다. 이어 흰 두루마기를 입은 민족 대표 33인과 1500여명의 학생들이 계동길, 율곡로, 인사동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거리행진을 펼친다. 서대문구도 서대문형무소 개소 100년, 역사관 개관 10년을 맞아 다양한 체험행사를 연다. 오전 11시와 오후 1시30분에 3·1독립만세 재현 퍼포먼스가 펼쳐진다.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오후 3시에는 사전 예약자에 한해 독립운동가의 고난을 체험할 수 있는 시간도 마련했다. 이밖에 태극기 페이스페인팅, 독립선언서 및 태극기 등사하기, 대형 독립선언서 함께 만들기 등도 마련된다. 또 강북구는 우이동 봉황각에서 3000여명이 ‘제5회 봉황각 3·1독립운동 재현행사’를 연다. 삼각산 도선사의 추모타종을 시작으로 솔밭공원에서 봉황각까지 2㎞ 구간에서 길놀이 및 태극기 거리행진을 벌인 뒤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부른다. 강서구와 서초구는 태극기 달기 운동을 전개한다. 강서구는 방화2동 방화아파트(800가구), 염창동 강변성원아파트(297가구) 등 22개 단지 4235가구가, 서초구는 방배4동 방배1차 현대아파트(644가구)와 보성아파트(98가구) 등 3개 단지와 인근 주택가 88가구 등 850가구가 빠짐없이 태극기를 달 예정이다. 한준규기자 hihi@seoul.co.kr
  • “3·1운동 숭고한 정신 되새기고 싶어”

    “3·1운동 숭고한 정신 되새기고 싶어”

    서예 퍼포먼서로 유명한 울산지역 서예가 김동욱(55)씨가 3·1절에 독립선언문 전문을 대형 광목천에 쓰는 서예 퍼포먼스를 펼친다. 김씨는 다음달 1일 울산 중구 태화강 대숲생태공원에서 전통의상 차림으로 태극기를 몸에 달고 ‘독립선언문 예술로 승천하다’라는 주제로 서예 퍼포먼스를 선보인다. 2100m 길이의 광목천에 독립선언문(원문 1726자)을 한자는 한글로 풀어 모두 2140자를 대형 붓으로 오전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9시간여 동안 쓸 예정이다. 김씨는 “3·1운동 당시 독립은 우리 민족사에 있어 간절한 소망이었다.”면서 “3·1 독립운동의 숭고한 정신을 되새기자는 뜻에서 이번 행사를 계획했다.”고 말했다. 김씨는 오는 8월5일 중국 베이징에서 올림픽 개막에 앞서 올림픽 성공을 기원해 길이 8888m의 광목천에 금강경 5000여자를 쓰는 서예 퍼포먼스를 할 예정이다. 금강경 퍼포먼스에는 40여시간이 걸리고 1∼1.5m 길이의 대형 붓 15자루 정도가 소비될 예정이다. 김씨는 이어 내년 7월4일에는 미국 뉴욕 맨해튼에서 미국 독립을 기념해 미국 독립선언서 영문 전문을 대형 광목천에 쓰는 퍼포먼스도 계획하고 있다. 앞서 김씨는 지난해 5월24일 부처님 오신날에는 300m 길이의 광목천에 반야심경 중 270자,10월9일 한글날에는 서울 역사박물관 앞에서 훈민정음 서문 108자를 120m 길이 광목천에 쓰는 퍼포먼스를 했다. 10월 말에는 880m 길이 광목천에 울산시민헌장(341자) 및 에코폴리스 울산선언문(349자)을,12월25일에는 울산 중구 성남동 거리에서 기독교의 주기도문 151자를 153m 천에 쓰는 퍼포먼스도 펼쳤다. 김씨는 이명박 대통령의 모교인 동지상고 출신으로 대구예술대학교 서예과를 졸업하고 미술대전 서예부문 특선, 일본 산케이신문 서예대전 입상 등의 수상 경력도 있다. 울산 강원식기자 kws@seoul.co.kr
  • 서울시 3·1절 기념 타종행사

    서울시는 제89주년 3·1절을 기념해 다음달 1일 낮 12시에 종로 보신각에서 타종행사를 갖는다고 27일 밝혔다. 올해 타종행사에는 오세훈 서울시장과 박주웅 서울시의회 의장, 김충용 종로구청장을 비롯해 독립운동가인 고(故) 남상은 선생의 아들 남만우(78) 광복회 사무총장, 고 이필주 선생의 손자 이현기(66) 민족대표 33인 유족회장, 고 권득수 선생의 손자 권중찬(69)씨가 참여한다. 또 매년 4억원가량을 기부해온 가수 김장훈(40)씨,2004년 아테네올림픽 여자핸드볼 은메달 주역인 임오경(37) 서울시청 핸드볼팀 감독, 선로에 떨어진 승객을 구한 서울메트로 안현철(42) 기관사, 국내 최초의 외국인 출신 동장인 리위옌(35) 연남글로벌빌리지센터장, 총 242회의 헌혈을 한 특전여단 노규동(47) 원사,120다산콜센터 우수상담원 박하나(22)씨 등도 참가한다. 이들은 이날 4명씩 3개 조로 나눠 11번씩, 모두 33번의 종을 치게 된다. 3·1절 타종 행사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펼친 애국지사의 정신을 기리고,3·1운동 정신을 이어받기 위해 1953년부터 계속해 왔다.최여경기자 kid@seoul.co.kr
  • 3·1절 삼각산은 태극기 물결

    3·1절 삼각산은 태극기 물결

    3·1절을 맞아 삼각산 아래에서 나라사랑의 함성과 태극기 물결이 재현된다. 26일 강북구에 따르면 다음달 1일 오전 10시 우이동 솔밭공원에서 삼각산(북한산국립공원) 봉황각까지 2㎞ 구간에서 3·1운동 당시를 재현, 한복을 입은 초등학생 500여명이 태극기를 흔들면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친다. 흰 저고리와 흰 바지, 검은 치마를 입은 학생들이 89년전 선열들의 충정과 격정을 다시 보여줄 예정이다. 주민들도 태극기를 손에 들고 행진에 참여할 수 있다. 대열에는 길놀이패 등이 뒤따른다. 어린 학생들이라 행진 중에 ‘까르르’ 웃음도 터지지만 애국가를 부르고 만세를 외칠 때에는 사뭇 진지하다. ‘제5회 봉황각 3·1독립운동 재현행사’는 이날 오전 9시30분 삼각산 도선사에서 기독교·불교·천주교 등 종교계 대표가 범종을 치면서 시작된다.3·1운동 당시 오세창 선생 등 민족대표 33인을 기리는 추모 타종이다. 행진 대열이 오전 10시30분 삼각산 등산로를 따라 300m쯤 올라가 양지바른 곳의 봉황각에 이르면 본 행사가 시작된다.‘여는 의식’은 고사낭독, 국민의례, 고천사, 독립선언서 낭독,3·1절 노래 합창 등으로 진행된다.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일깨우기 위해 애국가는 4절을 모두 부른다. 봉황각 옆의 손병희 선생 묘소 앞에 마련된 야외무대에서는 어린이들도 함께 즐길 수 있는 무용, 역사극, 태껸, 마술 등 공연이 펼쳐진다. 특히 역사재현극에서는 오세창·손병희 선생 등이 일제의 눈을 피해 봉황각에 모여, 벅찬 심정으로 3·1운동을 준비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주변에서는 소망 풍선날리기, 독립선언서 인쇄, 짚풀인형 만들기, 페이스페인팅 등도 열린다. 김현풍 구청장은 “봉황각은 3·1운동의 발원지이면서도 국민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면서 “바쁜 일상에서 하루라도 순국선열의 숭고한 뜻을 기리고 느끼자는 심정으로 행사를 정성껏 준비했다.”고 말했다. 김경운기자 kkwoon@seoul.co.kr
  • 2월 독립운동가 문태수 선생 2월의 호국인물 오동진 선생

    2월 독립운동가 문태수 선생 2월의 호국인물 오동진 선생

    국가보훈처는 31일 1906년 전라도 무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덕유산을 중심으로 활동을 벌이다 체포되어 순국한 문태수(1880∼1913) 선생을 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문 선생은 1908년 호남의병대장으로 13도창의군에 가담해 서울진공작전에 참여하고,1909년에는 이원역(驛) 폭파 의거를 일으키기도 했다.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또 2월의 호국인물로 항일무장투쟁에 헌신하고 순국한 송암 오동진(1889∼1944) 선생을 선정했다. 오 선생은 1919년 3·1운동에 적극 가담한 죄로 체포령이 내려지자 만주로 망명, 비밀결사단체인 ‘광제청년단’을 결성해 무장활동을 계속했다. 정부는 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윤설영기자 snow0@seoul.co.kr
  • 2기 친일반민족행위자 민영휘등 195명 명단 확정

    친일반민족행위자 195명 명단이 대통령과 국회에 제출됐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친일반민족행위자 195명의 명단을 새로 확정하고 결정 이유를 담은 ‘2007년도 조사보고서’를 6일 대통령과 국회에 각각 제출했다. 2기 친일행위자는 주로 3·1운동 이후 일제의 민족분열정책에 적극 협력한 조선인들로, 대부분 일제 식민 지배에 직접 동참한 인물과 독립운동 탄압에 적극 협력한 인물들이다. 일제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고 조선식산은행 설립위원 및 대동사문회 회장 등을 지낸 민영휘와 ‘정미 7적’ 중 한 사람인 고영희 아들이자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을 지낸 고희경,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체포해 중추원 참의까지 오른 김태석, 이토 히로부미의 양녀로 밀정 역할과 ‘일본군 위안부’ 모집으로 악명을 떨친 배정자 등이 포함됐다. 이문영기자 2moon0@seoul.co.kr
  •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 ‘석호필 추모’위해 加로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이 ‘자신을 키운 4명의 아버지 중 1명’이라는 고(故) 스코필드 박사의 추모공원 건립을 위해 캐나다로 떠났다. 1970년 사망한 스코필드 박사는 ‘3·1운동의 제34인’으로 불리는 영국 출신 캐나다인으로,1916년 세브란스 의학교에서 세균학을 가르치기 위해 국내에 들어왔다. 스코필드 박사의 한국에 대한 애정은 각별해 ‘석호필(石虎弼)’이라는 한국 이름을 짓고 해방 이후 교육ㆍ의료 활동을 펴 사후 외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서울 국립현충원에 안장되기도 했다. 정 전 총장은 중학교 시절 70대의 스코필드 박사를 만났다. 스코필드 박사로부터 등록금과 생활비 등을 지원받았던 정 전 총장은 “스코필드 박사는 일찍 아버지를 여읜 나에게 친아버지나 다름없었다.”면서 “정의로움과 건설적 비판정신을 강조한 그 분은 나의 정신적 지주였다.”고 회고했다. 정 전 총장은 스코필드 박사의 모국인 캐나다에서 현지 인사들과 한인들이 추진 중인 ‘스코필드 추모공원’ 설립 기금을 보탰으며,1일 열리는 추모공원 및 동상 기공식에 참석해 기념 강연을 한다. 서재희기자 s123@seoul.co.kr
  • [단독]녹스는 훈장

    전·현직 국가보훈처 공무원이 국가유공자 서류를 위조해 국가유공자 자격을 딴 뒤 자녀들의 학자금과 취업 혜택을 받아 파문이 일고 있는 가운데 정작 독립유공자들에게 수여한 훈장과 포장, 표창 등 서훈(敍勳) 4개 중 1개가 아직도 주인을 찾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 국가보훈처는 사료 부족 등의 이유 때문에 훈장을 전수받을 유족을 찾지 못해 훈장 전수가 보류됐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독립유공자 유족들은 정부가 ‘훈장 주인찾기’에 소홀한 것을 가장 큰 원인으로 꼽고 있다. 서울신문이 17일 순국선열의 날을 맞이해 독립유공자에 대한 서훈·보훈 및 미보훈 현황을 조사한 결과 총서훈 대상자 1만 972명 가운데 25.1%에 해당하는 2761명이 아직 서훈의 주인을 찾지 못한 ‘훈장 미전수자’인 것으로 조사됐다. 훈격별 훈장 미전수자는 대한민국장 1명, 대통령장 6명, 독립장 162명, 애국장 1797명, 애족장 623명, 건국포장 41명, 대통령표창 131명 등이다. 훈장 미전수자는 1년 사이 크게 늘었다. 지난해의 훈장 미전수자는 1만 469명 가운데 2547명으로 24.3%였으나, 올해 220명이나 증가해 25.1%를 차지하고 있다. 국가유공자의 유족을 뒤늦게 찾더라도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은 무척 까다롭다. 현행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상 본인을 포함해 3대까지만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돼 있어 1945년 독립 이후 60여년이 흘러 사실상 수혜 대상이 매우 제한적이다. 실제 1919년 3·1운동 당시 중추적 역할을 했던 ‘민족대표 33인’의 유족 580명 가운데 국가유공자 혜택을 받는 사람은 5명에 불과한 실정이다.33인 유족회 이현기 회장은 “현재 혜택을 받는 5명조차도 고령이라 몇 년 사이 혜택을 받는 사람은 없어질 것”이라면서 “혜택의 범위를 좀 더 늘려야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이 그만 나오지 않겠냐.”고 털어놨다. 실제 국회도 이런 문제점을 인식하고 최근 3년간 독립유공자 예우법 등 발의된 관련 법안만 6개에 달한다. 그러나 다른 현안에 말려 지금껏 처리가 되지 않고 있어 유족들의 불만은 더욱 커지고 있다. 정부는 이렇게 훈장 미전수자가 많은 이유가 유족을 찾을 수 있는 근거인 사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입장이다. 보훈처 관계자는 “주인을 찾기 위해서는 충분한 사료가 필요한데 전쟁 등으로 파기가 많이 돼 한계가 있다.”면서 “훈장의 주인을 찾기 위해 인터넷 캠페인 등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유족들은 정부의 노력이 미비하다고 지적한다. 조씨는 “참여정부 이후 유공자를 찾기 위해 큰 힘을 쏟은 것은 사실이지만 정작 해당 유족을 찾는 데 소홀하다.”면서 “보훈처에서 인터넷을 통해 독립유공자 유족찾기 캠페인을 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가족이 고령자임을 감안할 때 인터넷을 사용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독립유공자의 유족인지도 모르고 살고 있는 셈이다. 이경원기자 leekw@seoul.co.kr
  • “임의 삶은 거울입니다”

    “임의 삶은 거울입니다”

    의사이자 외교관이었던 호러스 N 알렌(1858~1932)은 이땅에 개신교가 전래될 무렵 가장 먼저 의료선교를 통해 복음전파에 나섰던 선교사로 꼽힌다. 알렌이 세운 한국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제중원에서 올린 예배는 바로 남대문교회(담임목사 조유택)의 모태이다. 그런가 하면 2004년 입적한 전 화계사 조실 숭산 스님은 한국 불교계에선 최고의 해외 포교사로 인정받는 인물이다. 개신교계와 불교계가 두 사람의 업적과 삶을 되새기는 대규모 행사를 나란히 열어 주목된다. ●교회 설립 120주년에 돌아보는 선교사 알렌 한국 기독교사를 볼 때 알렌이 1887년 11월 21일 제중원에서 올린 예배의식은 남대문교회의 출발로 기록된다.1884년 9월 상주 선교사로 한국에 온 알렌이 민영익을 치료한 뒤 조정의 신임을 얻어 1885년 설립한 게 제중원. 이후 제중원은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같은 외국 선교사들이 입국하는 창구로 한국 개신교 신앙의 못자리 역할을 톡톡히 했다. 국내에선 청량리 중앙교회를 비롯해 25개 교회를 개척했으며 우즈베키스탄에서 15년간 선교 중이다. 당시 을지로 구리개(현 외환은행 본점 자리)의 제중원이 1904년 세브란스병원으로 바뀌어 그곳에 있던 교회가 남대문밖 복숭아골로 이전하면서 남문밖교회, 남문외교회, 남대문밖 제중원교회로 불리다가 지금의 이름을 갖게 된 것. 독립운동가이자 법조인으로 부통령까지 지낸 함태영이며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이갑영도 남대문교회 출신이다. 특히 의료계 인사 중 세브란스 1회 졸업생인 김필순을 비롯해 한국 정형외과의 태두라는 이용설, 연세대 부총장을 역임한 김명선 등 많은 의사들이 이 교회에 몸을 담았었다. 올해로 창립 120주년을 맞는 남대문교회가 오는 17일 오후 2시 이 교회에서 여는 세미나는 초기 선교사 알렌을 다시 보는 자리. 의료선교를 통해 교회를 설립한 알렌의 가족사를 비롯해 선교, 의료, 외교 활동을 조명하게 된다. ●외국인 제자들이 마련한 숭산스님 3주기 행사 “단지 모를 뿐 오직 할 뿐”이라는 명언으로 회자되는 숭산(1927~2004). 생전 티베트의 달라이라마와 베트남의 틱낫한, 캄보디아의 마하 고사난다와 더불어 세계 4대 생불(生佛)로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교재에 소개될 만큼 세계 각국에 한국불교를 널리 알려 한국불교 최고의 해외포교사로 꼽히는 스님이다. 올해 3주기를 맞아 열리는 추모제는 예년과 달리 30여개국 선원 120곳의 외국인 제자 170여명과 국내의 문도들이 뜻을 모은 행사. 미국 필라델피아 출신으로 스물여섯 살 때 숭산 스님을 만나 출가, 포교 중인 계룡산 무상사 조실 대봉 스님과 같은 필라델피아 출신으로 숭산 스님과 해외포교를 다녔던 무상사 주지 무심 스님이 추모제를 주도한 눈 푸른 선승들이다.20∼26일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1층 로비에선 스님의 생전 활동사진과 유품을 전시하고 영상물도 방영한다. 모두 외국인 제자 스님들이 애지중지하던 소장품들이다. 전시에는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폴란드어, 중국어 등으로 번역 출간된 숭산 스님의 법어집이 소개된다. 추모제 참가차 방한한 외국인 스님들은 24∼26일 계룡산 국제선원 무상사에서 수행 정진한 뒤 27일 오전 10시 수유리 화계사 대적광전에 모여 추모다례재를 봉행한다. 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 [종교플러스] 독립운동가 용성 스님 생가터에 사찰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인 용성(1863-1940)스님의 생가터인 전북 장수군 번암면 죽림리에 죽림정사가 들어서 그 낙성식이 9일 오전 11시 현장에서 열린다. 불교계 주요 인사들이 참석한 낙성식 끝에는 지역주민과 함께하는 국악 축하공연도 있다.8일 오전 10시부터 사찰 내에서는 용성 스님을 조명하는 학술세미나도 열린다. 용성 스님은 한국불교의 근대화와 대중화에 앞장섰고,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 불교계를 대표했던 인물. 용성 스님의 제자인 도문(조계종 원로의원)스님이 10여년간 불사를 진행해와 용성 스님의 생가를 복원하고, 대웅보전, 용성기념관, 용성교육관, 요사채 등으로 꾸며진 죽림정사를 건립했다.
  • 보성여중고 100돌

    보성여중고 100돌

    서울 용산구 ‘해방촌’의 보성여중고(이사장 최창근)가 오는 10일 개교 100주년을 맞는다. 평북 선천에서 미국인 선교사 노먼 휘트모어가 세운 보성여중고의 100년사는 민족 수난사이기도 하다. 1회 졸업생인 고 차경신(1892∼1978) 여사는 도산 안창호 선생을 도와 도쿄 유학생 김마리아와 함께 조국광복을 위해 애썼고,3·1운동 때는 선천지역 담당자로서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이 학교 교사를 지낸 고 안이숙(1908∼1997) 여사는 신사참배를 거부했고, 학교는 한때 일제로부터 폐교를 당하기도 했다. 보성여고 김정남 교장과 보성여중 박애희 교장은 “학생들은 진실, 사랑, 거룩의 교훈과 기독교 정신을 익히고 졸업생들은 사회에서 봉사자와 어머니로서 실천하고 있다.”고 말했다. 재학생들과 졸업생들은 네팔·우간다·브라질·파라과이 등 오지에서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다. 지난 여름방학에는 개교 100주년을 맞아 교사 6명과 학생 19명이 캄보디아 프놈펜의 기술학교에서 봉사활동을 벌였다. 10일 개교 기념식에는 창립자의 손자인 아더 휘트모어(60·회사운영·미국 콜로라도 거주)와 졸업생 등 2000여명이 참석할 예정이다. 보성여중고가 배출한 사회인사로는 개그우먼 박미선,SBS 기자 한수진, 소설가 오수연, 영화배우 심혜진, 동노회여전도회장 김성숙, 최초의 여성 공군사관생도인 한정원 대위 등이 있다. 이들은 기념식에서 ‘자랑스런 보성인’ 상을 받는다.이재훈기자 nomad@seoul.co.kr
  • 야나기 무네요시의 두얼굴/정일성 지음

    야나기 무네요시의 두얼굴/정일성 지음

    ‘한’(恨). 우리 민족의 지배적 정서로 가장 널리 꼽혀 온 단어다. 감정적 차원을 일컫는 단어 ‘한’은 명확한 실체를 갖는 예술과 역사의 차원으로 영역을 넓히며 ‘한의 역사’ ‘한의 예술’ 등 부자연스런 조합의 신조어를 양산해냈고,‘한민족’(韓民族)과 ‘한민족’(恨民族)의 동음이의어적 경계를 오가며 양자의 의미를 뒤섞었다.‘한’이란 지극한 ‘비애미’(悲哀美)는 ‘수많은 침략을 받으면서도 다른 나라를 침략한 적이 없을 만큼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란 언술과 맥을 같이 했고, 토끼 모양으로 형상화된 한반도 지도를 머릿속에 새기도록 만들었다. 딱히 증명할 근거도 없고, 때론 사실 관계와도 다른 이 같은 의미 확장의 배경엔 뜻밖에도 ‘한’을 심어준 나라 일본의 한 민예운동가이자 미술평론가의 역할이 지대했다. 야나기 무네요시(1889∼1961). 한국식 이름 유종열로도 잘 알려진 사람. 야나기는 일제 식민지 시절 대표적인 친한파였다. 그는 조선시대 민화에 ‘민화’(民話)란 이름을 최초로 부여해 학술적 체계화를 시도했고, 조선총독부 건축을 위해 광화문 철거가 논의되자 철거를 적극 반대하며 한국의 예술품 보존의 중요성을 설파했다.1924년엔 서울에 조선미술관을 설립했고,36년엔 일본 도쿄에서 이조도자기전람회와 이조미술전람회를 개최했다. 그가 수집했던 일본 내 조선 민화 120여점이 2005년 9월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전시됐고, 역시 그가 수집한 260여점의 자료가 지난해 11월부터 3달간 ‘야나기 무네요시가 발견한 조선 그리고 일본’이란 제목으로 일민미술관에서 공개됐다.84년 9월엔 전두환 정권이 ‘우리나라 미술품 문화재 연구와 보존에 기여한 공로가 크다.’는 이유로 보관문화훈장도 추서했다. 야나기는 누가 뭐래도 식민지 조선을 사랑한 ‘일본인 같지 않은 일본인’이었다. 야나기는 그렇게 알려져왔다. 그렇게 알려지며, 야나기는 침략국 일본의 야만성에서 분리돼 ‘은인’의 위상을 부여받았다. 서울신문 기자를 그만둔 뒤 한·일 근현대사 연구에 몰두해온 정일성 씨가 최근 ‘야나기 무네요시의 두 얼굴’(지식산업사)이란 책을 펴냈다. 야나기의 또 다른 얼굴을 가감없이 들춰낸 저자는 야나기를 민예운동가가 아닌 ‘문화정치 이데올로그’로 파악한다. 저자의 야나기 평가는 가혹하다.“3·1운동을 계기로 일제의 식민통치술을 무단통치에서 이른바 문화통치로 바꾸는 데 일조한 제국주의 공범”이자 “일제의 무력진압에 상처받은 한민족의 마음을 달래려 한 심리요법사, 식민지 조선통치 훈수꾼”이라고 규정짓는다. 저자가 우선적으로 제시하는 근거는 야나기의 친한파적 기질을 증명하는 가장 훌륭한 자료로 평가돼온 글,1919년 5월 일본 요미우리신문에 발표된 ‘조선인을 생각한다’다.3·1운동 당시 조선인 학살에 분노하며 썼다는 이 글은 이듬해 4월 동아일보에 번역 게재됐고, 게재 직후엔 ‘조선의 친구에게 보내는 글’이란 또 다른 글이 같은 신문에 실리면서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저자는 두 글이 “주의를 기울여 읽으면 조선 독립을 돕는 내용이 아니란 걸 알 수 있다.”며 몇 대목을 짚어낸다.“반항(독립만세운동)을 현명한 길이라거나 칭찬할 태도라고는 생각지 않는다.(‘조선인을 생각한다’)”고 한 것이나 “우리가 총칼로 당신들을 해치게 하는 것이 죄악이듯이, 당신들도 유혈의 길을 택해 혁명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조선의 벗에게 드리는 글’)”고 강조한 점 등. 요컨대 야나기에 대한 저자의 평가는 이렇다.‘사이토 마코토 3대 총독의 문화통치 두뇌’. 이 책을 통해 70년대 거세게 일었던 야나기에 대한 비판적 재평가가 다시 한번 활기를 띌 수 있을지 주목된다. 이문영기자 2moon0@seoul.co.kr
  • [어떻게 지내십니까] 청렴 정치인의 표상 박영록 前의원

    [어떻게 지내십니까] 청렴 정치인의 표상 박영록 前의원

    돌아가 쉴 집, 내 몸 하나 뉠 곳, 거기에 60년을 함께한 사랑하는 아내가 소찬을 만들어 반기면 그 위에 더한 행복이 있겠는가. 비록 그 집이 1.8평 손바닥만 한 컨테이너라 할지라도 비 오면 비 막아주고 바람 치면 바람 막아주는, 세상에서 가장 편한 내 집이 아닌가. ●“1.8평짜리 컨테이너 박스가 내 보금자리” 헌정회 회원인 박영록 전 의원은 얼마전 딱한 사정을 알게 된 독지가로부터 비어 있는 집이 있으니 들어와 사시면 어떠냐는 제안을 들었다. 애초부터 남에게 신세질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었지만 하도 간절히 청하는 바람에 못이긴 척 그를 따라 나섰다. 서울 강남의 70평짜리 집이었다. 어떻게 하면 상대의 호의를 물리칠 수 있을까 궁리하던 터에 대궐 같은 집을 보니 오히려 핑계대기가 좋았다고 한다.“그래도 세상에 아직은 인정이 남아 있어서 그런지 컨테이너에서 나오면 거처를 제공하겠다는 분들이 여럿 있어. 그렇지만 내 양심상 70평 집에는 도저히 못살겠다고 관뒀지.”어느 사업가는 담양에 있는 집을 내줄 테니 살라고 했지만 아직은 할 일이 많아서 낙향할 처지가 아니라고 거절했다. 서울 성북구 삼선초등학교 뒷문 쪽 가파른 언덕배기에 아슬아슬하게 얹어 놓은 두 개의 컨테이너가 강원도지사를 지내고 국회의원을 4번이나 한 그의 보금자리다. 바로 위 40년간 살던 35평짜리 집을 2003년 공매처분 당하고 1년을 이곳저곳 떠돌았다. 다행히도 옛 집 바로 아래 3.8평 땅 하나는 건졌던 그는 수중에 있던 돈을 털어 컨테이너 2개를 사 2004년부터 이 곳에 자리잡았다. “올 여름 정말 더웠어. 낮에는 보통 40도까지 올라가는데 그래도 어떡해. 더우면 더운 대로 그러고 사는 거지.”지난해 11월 가까스로 끌어온 전기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촛불을 켜고 살았다. 방바닥에는 촛농 자국이 검버섯처럼 가득하다. 살림이라곤 넉자 장농과 구형TV, 냉장고, 선풍기가 전부다. 손님이 찾아왔다고 내놓는 냉수를 차마 벌컥 들이마시기가 외람될 정도다. 그래도 처음보다는 사정이 많이 나아졌다. 이웃집에서 길어오던 물도 이제는 연결된 수도관에서 콸콸 나온다. 겨울이면 꽁꽁 언 이웃집 수도관에 뜨거운 물을 부어 녹이고는 손을 호호 불어가며 받았다. 역시 이웃 신세를 졌던 화장실도 부엌을 겸한 컨테이너 아래 지하방에 만들었다. “이러고 사는 게 신문에라도 나가면 원주에 있는 아들놈이 욕을 들어먹는다고 그래. 왜 아버지, 어머니 안 모시냐고. 사실 우리 부부랑 살 형편도 안되고, 우리도 그리로 내려갈 생각도 없는데 말이지.”자식은 아들 셋을 뒀으나 둘을 앞세웠다. 장남은 현역 정치인 시절 세상을 떴고, 막내는 3년 전 사업에 실패하자 “부모님 고생만 시켜드린다.”며 목숨을 끊었다. 현역 정치인 때 마음 먹고 돈을 챙기고 모았으면 자식을 가슴에 묻는 일 따위 없었을지도 모른다. 박 전 의원 옆에 앉아 있던 부인 김옥연(82)씨가 조용히 눈물을 훔친다. 지난 7월 어느 시민단체가 ‘대한민국청렴정치인대상’을 줬다. 상금이 무려 1억원이었는데도 한푼도 집에 들이지 않았다.“내가 이런 거 받을 자격이나 되는지 모르겠지만 받은 이상은 절반은 청렴정치를 실천하는 운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조금이라도 돈이 생기면 사람을 모으고, 세운 뜻을 이루는 데 돌리는 버릇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상금의 나머지 절반은 그가 주도하고 있는 ‘남북통일 과도임시정부’ 준비위원회에 쓸 요량이다. “남북이 갈려 있지만 가만히 두면 옛날의 삼국시대와 같은 2국시대가 될 수 있거든. 대한민국 헌법이 상해 임시정부의 법통을 잇고 있다고 한 것처럼 정통 국맥을 계승하기 위해서는 통일을 이루는 과도 임시정부가 필요하지.”1948년 유엔이 결정한 남북동시선거를 치르지 못하고 남과 북이 따로 국가를 세웠지만 통일의 기운이 무르익으면 유엔 결정에 따라 선거를 치를 임시정부가 있어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청렴정치운동도 마찬가지다. 그는 “안 보이고 안 밝혀져서 그렇지 나라에 부정부패가 만연해 있다.”고 생각한다. 부정축재를 한 전직 대통령이 활보를 하는 것도 그렇고, 자신에게 닥친 조그만 사건만 봐도 그렇단다. 구청에서 어느날 컨테이너 집을 철거하러 왔다. 망치로 문을 부수고, 유리창을 깼다.3.8평 땅이 자기 땅이라는 어느 주민이 신고를 했는데 구청이 제대로 확인도 하지 않고 철거하러 온 것이다.“그제서야 등기부등본을 떼보고 박영록이 땅인 게 드러나니까 부서진 데를 보상하겠다고 하더라고. 나같은 사람도 이렇게 당하는데 힘 없고 돈 없는 사람들은 오죽하겠어?” ●민선 강원도지사 시절 관용차 안 타고 도시락 싸 출근 그는 “하늘에 한 점 부끄럼 없는 광명정대한 청렴정치를 실현해야 한다.”고 했다. 민선 강원도지사 시절 관용차를 타지 않고, 도시락을 싸들고 출근했다. 그런 청렴함은 지금껏 계속되고 있다. 헌정회에서 나오는 연금 99만원 중 80만원은 범민족화합통일운동본부 운영비로 내고 나머지와 지인들이 돕는 돈을 합쳐 50만∼60만원으로 살아간다. 평일에는 헌정회에서 주는 식권으로, 주말에는 헌정회 사무실에서 가까운 서울신문사 사원식당이나 1000원짜리 밥집을 이용한다.“한국에서 청렴정치 하면 바보란 소리 들어. 내가 이렇게 사는 게 알려진 뒤로는 어떤 헌정회 회원들은 날 모른 체하더라고. 같이 다니기가 부끄러웠던 게지. 허허.” 지금의 정치에 대해서는 말하길 꺼린다.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때 박근혜 후보를 지지하는 원로 정치인으로 기사가 났었다.“그랬나요? 참석도 하지 않았는데 이름이 올라간 모양”이라고 한다. 애증이 교차할 것 같은 김대중(DJ)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을 텐데도 계속 말을 돌린다. 다만 대선 정국과 관련한 DJ의 언행에 대해서는 “옳지 않다.”고만 짤막하게 언급하고 입을 굳게 다문다. 스스로를 “초정파”라는 그는 “이 나라에는 진짜 어른이 없으며 특히 정치판에는 원로가 없다.”고 쓴소리를 한다. 그는 사기(史記)의 ‘상군열전’에 나오는 고사 ‘법지불행 자상정지(法之不行 自上征之)’를 인용한다. 법이 행하여 지지 않는 이유는 위에서 그것을 지키지 않기 때문이라는 정신을 지도자들이 명심하고 지키면 정치가 올바르게 된다고 강조했다. ●“이 나라엔 진짜 어른 없고 정치판엔 원로 없다” “요새 정치인들은 현실문제만 갖고 다투지만 사실 민족이라든가, 국가라든가 근본을 놓고 고민을 해야 해.”그는 청렴정치운동, 통일운동 외에도 천제를 지내는 원구단 되찾기, 독립운동의 요람이었던 중국 지린성 룽징(龍井)시 외곽에 있는 일송정에 독립기념관을 건립하는 일들을 추진하고 있다. 은퇴 정치인이라고 하기엔 그가 벌여놓은 일은 현역 정치인 못지 않게 많다. 여의도에 있는 그들이 손대지 않는 영역에서 자신의 뜻을 일구고 실천해간다. 세상이 그를 따돌리고 왕따해도 의연하다. 독문학자 김진섭은 1947년 수필 ‘청빈예찬’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이왕 부자가 못된 바에는 빈궁은 도저히 물리칠 수 없는 일이니, 사람이 청빈을 극구예찬함은 우리들 선량한 빈자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그것은 절대로 필요한 한 개의 힘센 무기요, 또 위안이다.”라고. 그렇지만 박영록의 청빈은 피할 수 없는 수동적 운명이라기보다 처음부터 선택한 길이요, 세상살이 방식이다. 때로는 답답하게 느껴진다는 컨테이너 방에 누워 지그시 눈을 감고 남쪽으로 난 창밖으로 나가 세상을 주유하는 꿈을 꾸는 그는 그것으로도 행복하다고 한다. 황성기 논설위원 marry04@seoul.co.kr ■ 그는 누구인가 박영록 전 의원은 ‘박총재’로 불리기를 좋아한다. 명예욕이 있어서라기보다는 현역 정치인으로 최고 직함을 누린 평민당 부총재 시절의 애착 때문일 것이다. 1922년 강원도 고성 출신으로 춘천농고를 졸업하고 정계에 들어서기 전 강원일보 기자를 지내기도 했다.37살에 강원도지사에 당선된 뒤 6,7,9,10대 국회의원을 지냈다.69년 3선 개헌 반대투쟁 때에는 동료인 장준하와 함께 신민당의 원외투쟁을 주도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 김대중 전 대통령, 이철승 전 의원과 함께 1970년대 40대 기수론을 이끌었다. 70년 의원 자격으로 방문한 독일에서 베를린 올림픽 스타디움에 몰래 들어가 승리자 기념비에 새겨져 있던 손기정의 국적 ‘JAPAN’을 ‘KOREA’로 바꾼 일화는 아직도 회자되고 있다. 또한 80년 신군부가 5000만원밖에 없는 그를 20억원 부정축재자로 몰아 재산을 몰수하기도 했다. 최근 최연희 의원 등 강원도 국회의원협의회 회원들이 그를 돕겠다고 했으나 “돈을 들고 올 거면 오지 말라.”고 사양했다고 한다. 3·1운동의 성지를 세계평화공원으로 만들자는 뜻에서 매일 오전 탑골공원을 둘러보고, 헌정회 사무실에 들른 뒤 소공동의 원구단에 들러 참배하는 ‘시천살이’를 하는 게 하루 일과이다. 황성기 논설위원 marry04@seoul.co.kr
  • [우리지역 명물] 우이동 ‘봉황각’

    [우리지역 명물] 우이동 ‘봉황각’

    우이동 산길을 오르다 보면 봉황각(鳳凰閣)’이라고 불리는 단아한 기와 건물을 만날 수 있다. 조선시대 기와의 아름다운 선에 취하다 건물의 사연을 알게 되면 일제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으려는 선열의 비장함에 고개를 숙이게 되는 곳이다. 봉황각은 강북구 우이동 버스 종점에서 도선사 입구로 300m쯤 올라가다 길 왼쪽 양지바른 곳에 있다. 넓이 92.5㎡에 정면 5칸의 팔각 기와지붕 건물이다. 가운데에 시원한 대청이 있고 오른 편의 두 방은 돌기둥이 떠받쳐 방 안에서도 뜰이 잘 보이도록 했다. 소나무가 감싸고 있는 마당에서 ‘삼각산’을 바라보면 백운봉(백운대), 인수봉, 국망봉(만경대) 등 3개 봉우리가 뚜렷하게 보인다. 봉황각은 경술국치(庚戌國恥) 2년 뒤인 1912년 의암 손병희 선생이 “10년 안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겠다.”며 당시 경기 고양군 수양면 우이동 땅에 세웠다. 산속 9만 2231.8㎡ 부지에 봉황각을 비롯한 13개동의 건물을 지었다. 이곳에서 항일독립운동을 이끌 젊은이 483명을 가르치고 수련시켰다.3·1운동 때 민족대표 33명 가운데 15명이 봉황각 출신이다. 최남선 선생은 봉황각에 한동안 머물며 독립선언서를 작성했다. 애국지사들은 3·1운동 직전에 거사를 모의했다. 봉황각이라는 이름은 동학 창시자 최제우의 시에 나오는 ‘봉황’에서 따왔다. 봉황은 성인(聖人)의 탄생에 맞춰 세상에 나타나는 전설의 새로, 나라를 구할 인재를 기다리는 마음을 담았다. 현판은 중국 명필들의 필체를 빌려 수련생 출신 오세창 선생이 썼다. 일제는 3·1운동 이후 봉황각만 두고 나머지 건물들을 모두 헐어 버렸다. 서울시는 봉황각을 선열의 뜻을 기려 유형문화재 2호로 등록했다. 강북구는 매년 3월1일 청소년 300여명이 솔밭공원에서 봉황각 입구까지 태극기를 흔들며 행진하는 3·1운동을 재현하고 있다. 봉황각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삼창도 한다. 봉황각에서 50m 떨어진 손병희 선생 묘소 앞에서는 주민을 위한 마당극, 택견 공연 등이 열린다. 김경운기자 kkwoon@seoul.co.kr
  • “한국 민족주의 과잉 왜?”

    “한국 민족주의 과잉 왜?”

    유엔 인종차별철폐위원회는 한국이 ‘단일 민족국가’ 이미지를 극복해야 한다고 18일 권고했다. 단일민족 논리의 ‘사실 왜곡’이 이주노동자와 이주결혼 여성 등에 대한 인권침해의 주요인이 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전혀 사실이 아님에도 ‘순수혈통’ 신화는 어떻게 의심받지 않는 ‘역사적 진실’로 창조될 수 있었을까? 영화 ‘디 워’의 완성도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왜 네티즌들로부터 집단 이지메를 당하고 있을까?일본 지하철 승객을 구하고 숨진 이수현씨는 왜 개인이 아닌 국가적 의인이 됐고, 평소 천대받던 기지촌 여성은 미군에게 살해되는 순간 왜 ‘순결한 민족의 누이’로 탈바꿈될까? 버지니아공대 총기난사사건을 접한 한국 국민은 왜 국민적 죄의식에 사로잡혔을까? 이들 질문의 저변에 깔린 ‘집단적 흥분’의 요체는 바로 민족주의다. 최근 출간된 ‘제국 그 사이의 한국’(휴머니스트 펴냄)은 1895(청일전쟁)∼1919년(3·1운동) 사이 한국 민족주의의 기원을 풍부한 실증자료를 바탕으로 세밀하게 파헤쳤다.“민족주의는 위기를 먹고 자란다.” 저자 앙드레 슈미드(캐나다 토론토대 동아시아 연구분과 교수)는 민족주의 ‘발명’의 핵심 메커니즘을 한마디 선언적 명제로 정의한다.‘대한제국’이란 국명도 정해지지 않은 상황에서 ‘민족’ 개념이 정치·경제·문화 등 모든 사회 담론의 최전선에 배치될 수 있었던 까닭은 국난극복이란 절체절명의 시대적 과제 때문이었다. 당시 민족 개념 형성과 확산의 첨병은 신문이었다.‘대한매일신보’와 ‘황성신문’ 등 민족지가 선두에 섰고, 신채호와 장지연은 당대의 스타이자 ‘펜을 든 무사’였다. 당시는 최초의 미디어전쟁 시기이기도 했다. 일본은 식민지 한국에 걸맞은 이미지 창조가 시급했고, 한국 민족주의자들에겐 국권침탈에 맞설 단결된 민족 이미지가 필요했다. 각자 ‘의도된 편집’을 십분 활용했다. 슈미드는 “다양한 섹션을 한 지면에 묶어내는 신문의 지면 구성은 단번에 다양한 화제들을 조사할 수 있게 해주었다.”면서 “이러한 화제들은 서로 관련이 없어 보일지라도 민족적 관점에서 그 취지를 천명하기 위해 편집부가 분명하게 또는 암묵적으로 짜깁기한 것들이었다.”고 적었다. 슈미드는 저항담론으로서 민족주의의 시대적 당위를 긍정하면서도, 민족주의가 수반하는 경직성 또한 놓치지 않는다. 민족지 편집자들은 의병의 애국심에 연민의 태도를 보이면서도 의병의 폭력저항이 자신들이 의도하는 문명화전략과 충돌한다고 비난했다. 한국 민족주의 운동의 은폐된 갈등이다. 슈미드는 민족지 편집자들의 문명개화 전략이 일제의 식민주의 전략과 묘하게 공명했다는 ‘논쟁적 지적’도 피해가지 않는다. 그는 “두 집단 모두 문명개화를 중심으로 정치적 계획을 수립했기에, 편집자들은 1905년 이후 자신들이 그렇게 열심히 전달하려는 지식이 사실상 한반도의 식민지화를 부추길지도 모른다는 딜레마에 부딪히게 된다.”고 주장했다. 옮긴이인 문학평론가 정여울씨는 “수치와 분노로 가득찬 ‘원한의 민족주의’를 벗어날 수 있을 때,100년 전 저마다 애끓는 동상이몽으로 민족을 사유했던 옛사람들의 꿈은 새로운 역사적 상상력의 도화선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문영기자 2moon0@seoul.co.kr
  • [기고] 자주독립정신 되새기는 광복절 아침이기를/김정복 국가보훈처장

    광복 62주년을 맞는다.1945년 8월15일. 광복의 감격은 어느 수필가의 글처럼 “얼었던 심장이 녹고 막혔던 혈관이 뚫리는 것 같았다. 모두 다 ‘나’가 아니고 ‘우리’였다.” 우리 선열들은 50여년에 걸친 길고도 험난한 독립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의병의 활약, 독립군과 광복군의 활동,3·1운동, 의열투쟁, 무장투쟁, 상하이임시정부 수립, 학생운동, 문화운동, 외교활동 등으로 광복을 맞는 그날까지 피어린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국내는 물론 중국, 러시아, 미주와 유럽대륙, 심지어 일본 열도까지 전 세계를 무대로 독립운동을 펼쳤다. 이러한 수많은 애국선열들의 항일독립운동이 있었기에 우리 민족은 광복을 쟁취할 수 있었고 지금 우리는 자유로운 대한민국에 살고 있다. 선열들은 이 나라의 어둠과 울분시대에 겨레의 한을 대신한 한줄기 의로운 빛이었다. 그 암흑 속에서도 선열들은 조국 광복의 일념으로 절개를 굽히지 않았고, 조국을 사랑한 마음과 앞날을 예언한 말씀은 오늘날 우리에게 교훈이 된다. 윤봉길 의사는 “우리의 독립은 머지않아 꼭 실현되리라 믿는다.”는 예언을 했고, 안중근 의사는 “조국의 역사는 조국을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이끌어가고 또 계승해 가는 것”이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준 열사는 “위대한 인물은 반드시 조국을 위해 생명의 피가 되어야 한다.”라는 가르침을 남겼으며, 이상설 선생은 “동지들을 합세하여 조국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오늘 우리에게는 선열들의 이러한 나라사랑, 독립정신이 필요하다. 우리의 염원인 평화통일과 조국의 자유, 인류의 평화가 모두 그 힘에 의해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외국에서는 이러한 희생과 헌신에 보답하고 예우하는 ‘보훈’을 국민통합을 이루는 국가의 근본정신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 이러한 사례는 얼마 전 헤이그 특사 100주년 기념식을 위해 정부대표로 방문한 네덜란드에서 경험할 수 있었다. 헤이그에서는 이준 열사 순국 100주년과 헤이그특사 파견 100주년을 기리는 거리축제와 전시 등 다채로운 행사가 열렸다. 헤이그시는 7월14일을 ‘이준 평화의 날’로 선포하고 이준 문화유적지 지정 등 열사의 숭고한 뜻을 널리 알렸다. 이렇듯 네덜란드에서는 100년 전 온갖 수모를 당하며 자국의 독립을 위해 필사적인 투쟁을 한 타국의 특사라도 그 숭고한 정신에는 뜻을 함께하였던 것이다. 자유와 평화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그들의 국경을 떠난 ‘보훈’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올해는 민족혼의 산실인 독립기념관 개관 20주년을 맞는 해이기도 하다. 광복절을 기해 개관 20주년 기념행사와 더불어 제4관 ‘겨레의 함성’이 새롭게 단장하고 문을 연다. 앞으로 많은 국민이 달라진 독립기념관에서 8·15의 감격과 국난극복의 역사를 되새기고 통일과 선진조국의 꿈을 키웠으면 한다. 역사는 현실을 이해하고 미래를 지향하는 거울이다. 지난 세기 우리 민족이 일제 식민지하에서 고통 받고 있을 때 선열들이 보여 주었던 나라사랑 정신을 오늘의 소중한 정신적 가치로 자리매김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것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몫이다. 국민통합과 진정한 민족공동체정신이 필요한 이때 8·15 광복절을 맞아 선열들이 보여준 독립투쟁과 사상, 국가가 위난에 처했을 때 신명을 바쳤던 애국선열들의 숭고한 자주독립정신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보았으면 한다. 김정복 국가보훈처장
  • 독립문 주변 1만㎡ ‘열린마당’ 조성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독립문 주변에 1만㎡ 규모의 공원(조감도)이 조성된다. 서울시는 독립문과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독립운동가 위패가 있는 독립관, 순국선열 추념탑 등이 위치한 서대문 독립공원(전체 면적 11만㎡)의 역사성을 되살리기 위한 재조성 계획을 확정,12일 발표했다. 전체 계획은 설계디자인 현상공모 당선작인 애림조경기술사사무소(대표 강대균)의 ‘함께하는 생각’을 기본 틀로 하고 있다. 이 당선작은 독립문을 부각하는 데 중점을 맞췄다. 우선 독립문 주변 노후·불량 건물 밀집지역 3792㎡를 포함한 약 1만㎡의 부지를 탁 트인 광장(독립마당)으로 만들어 독립문을 돋보이게 했다. 광장의 나무와 건축물이 14.3m인 독립문의 높이를 넘지 않도록 했다. 독립문과 3·1운동기념탑 사이에는 수경관(연못)과 잔잔한 분수를 조성하고 그 연결로들을 ‘흔적의 길’로 이름 붙여 조성하기로 했다.공원으로 진입할 때에는 3·1운동기념탑이, 나올 때에는 독립문이 자연스럽게 시야에 들어오도록 하기 위해서다. 공원 옆 아파트 단지와의 경계에는 외래 수목 대신 소나무를 심고 ‘일본식 조경’‘이란 비판을 받았던 독립관과 역사관 사이에는 전통 정원 양식 ‘생명의 숲’을 만들 계획이다. 또 독립문 좌우의 안산과 인왕산이 풍수지리상 ‘우백호’란 점을 감안해 흰 꽃이 피는 팥배나무, 배나무 등 고유 수종을 심기로 했다. 각종 계단 및 화단으로 조성된 복잡한 공간들을 평탄하게 바꿔 장애인과 노약자, 아이들의 이용이 쉽도록 했다. 또 연못, 분수 등을 조성해 걷기 좋은 길을 만든다. 공원의 바닥은 기품 있는 석재와 잔디 등으로 포장해 자연친화적인 공원의 모습을 만들기로 했다. 예산은 토지 보상비 175억원, 공사비 60억원 등 240억원이 책정됐다. 공원은 문화재위원회 심의, 도시공원위원회 심의, 전문가·독립운동 단체 자문 등을 거쳐 연말까지 기본·실시 설계를 마치고 내년 착공한다. 시는 2009년 8월 광복절에 맞춰 새 공원을 일반에게 공개할 계획이다. 시는 공원 재조성과 별도로 공원 내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사적 324호)도 2009년 8월까지 독립운동사(史) 전시·교육의 메카로 새 단장하기로 하고, 낡은 옥사 보수, 전시시설 설계 개선, 조경·배수로 정비 등에 100억원을 투입기로 했다. 시는 80년 이상된 구 서울구치소와 서대문형무소 등의 일부가 지붕 붕괴와 균열의 위험까지 있어 보수가 시급하다고 보고 있다.유영규기자 whoami@seoul.co.kr
  • 독립문 주변 1만㎡ ‘열린마당’ 조성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독립문 주변에 1만㎡ 규모의 공원이 조성된다. 서울시는 독립문과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독립운동가 위패가 있는 독립관, 순국선열 추념탑 등이 위치한 서대문 독립공원(전체 면적 11만㎡)의 역사성을 되살리기 위한 재조성 계획을 확정,12일 발표했다. 전체 계획은 설계디자인 현상공모 당선작인 애림조경기술사사무소(대표 강대균)의 ‘함께하는 생각’을 기본 틀로 하고 있다. 이 당선작은 독립문을 부각하는 데 중점을 맞췄다. 우선 독립문 주변 노후·불량 건물 밀집지역 3792㎡를 포함한 약 1만㎡의 부지를 탁 트인 광장(독립마당)으로 만들어 독립문을 돋보이게 했다. 광장의 나무와 건축물이 14.3m인 독립문의 높이를 넘지 않도록 했다. 독립문과 3·1운동기념탑 사이에는 수경관(연못)과 잔잔한 분수를 조성하고 그 연결로들을 ‘흔적의 길’로 이름 붙여 조성하기로 했다. 공원으로 진입할 때에는 3·1운동기념탑이, 나올 때에는 독립문이 자연스럽게 시야에 들어오도록 하기 위해서다. 공원 옆 아파트 단지와의 경계에는 외래 수목 대신 소나무를 심고 ‘일본식 조경’‘이란 비판을 받았던 독립관과 역사관 사이에는 전통 정원 양식 ‘생명의 숲’을 만들 계획이다. 또 독립문 좌우의 안산과 인왕산이 풍수지리상 ‘우백호’란 점을 감안해 흰 꽃이 피는 팥배나무, 배나무 등 고유 수종을 심기로 했다. 각종 계단 및 화단으로 조성된 복잡한 공간들을 평탄하게 바꿔 장애인과 노약자, 아이들의 이용이 쉽도록 했다. 또 연못, 분수 등을 조성해 걷기 좋은 길을 만든다. 공원의 바닥은 기품 있는 석재와 잔디 등으로 포장해 자연친화적인 공원의 모습을 만들기로 했다. 예산은 토지 보상비 175억원, 공사비 60억원 등 240억원이 책정됐다. 공원은 문화재위원회 심의, 도시공원위원회 심의, 전문가·독립운동 단체 자문 등을 거쳐 연말까지 기본·실시 설계를 마치고 내년 착공한다. 시는 2009년 8월 광복절에 맞춰 새 공원을 일반에게 공개할 계획이다. 시는 공원 재조성과 별도로 공원 내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사적 324호)도 2009년 8월까지 독립운동사(史) 전시·교육의 메카로 새 단장하기로 하고, 낡은 옥사 보수, 전시시설 설계 개선, 조경·배수로 정비 등에 100억원을 투입기로 했다. 시는 80년 이상된 구 서울구치소와 서대문형무소 등의 일부가 지붕 붕괴와 균열의 위험까지 있어 보수가 시급하다고 보고 있다. 유영규기자 whoami@seoul.co.kr
  • 박헌영 부인 주세죽씨 ‘건국훈장 애족장’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이정 박헌영(1900∼1956)의 첫번째 부인인 주세죽(1901∼1955)씨에게 한국 정부가 제62주년 8·15 광복절을 맞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키로 했다. 주러 한국대사관은 정부를 대신해 오는 8월15일 광복절 기념 행사에서 주씨를 대신해 모스크바에 거주하고 있는 그녀의 딸 박 비비안나(79)씨에게 훈장을 수여할 예정이다. 주씨는 3·1운동에 참가했다 체포돼 1개월간 수감됐으며 허정숙, 박원희 등과 함께 사회주의 여성단체인 조선여성동우회, 조선여성해방동맹 등을 결성해 활동했다. 1921년 상하이(上海)에서 피아노를 공부하던 그녀는 박헌영을 만나 결혼하게 되며 상하이에서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하게 된다. 주씨는 27년 최초 여성단체인 근우회를 결성, 일제강점기 항일구국운동과 함께 여성 지위향상 운동을 벌였다. 주씨는 모스크바에서 5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어머니의 훈장 수여 소식을 한국대사관으로부터 전해들은 박씨는 “한국 정부에 고맙다.”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연합뉴스
  • [한나라 후보검증 청문회] 朴 질문·답변 지상중계

    [한나라 후보검증 청문회] 朴 질문·답변 지상중계

    19일 한나라당 박근혜 대선 경선 후보 청문회에서 질문의 8할은 고 최태민 목사 관련 의혹에 집중됐다. 의혹만 있을 뿐 실체가 없다고 시종일관 주장한 박 후보는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엄청난 시련이 있었지만, 지금까지 정도를 지키며 살았으니 큰 줄기를 봐달라.”고 강조했다. 최 목사 외에 영남대와 정수장학회 강취 논란, 육영재단 운영 비리 의혹 등에 대한 질문이 나왔다. 중요한 질의 응답을 추려 봤다. 1. 전두환씨에게 6억원 받아 ▶강훈 위원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 뒤 전두환 당시 합수본부장으로부터 9억원 받아 김재규 수사 격려금으로 3억원 돌려줬다는 얘기가 있다. -박 후보 9억원이 아니라 6억원 받았다.3억원을 돌려준 일이 없다. 전 전 대통령 측에서 심부름 온 분이 저를 만나자고 해 청와대 비서실장실로 갔더니, 거기서 봉투를 전해 주면서 이건 박 전 대통령이 쓰다 남은 돈이라고 했다. 법적인 문제가 없으니 생계비로 쓰라고 해서 감사하게 받고 나왔다. ▶강 위원 성북동 자택은 경남기업 신기수 회장으로부터 무상으로 취득했나. -박 후보 부모님이 남긴 신당동 자택에 살면서 많은 유품 등을 쌓아놓다 보니 너무 좁아서 살 수 없었는데 신 회장이 아버지와의 인연으로 유품을 보관할 곳이 있다고 제의해와 받아들였다. ▶강 위원 신 회장의 경남기업이 영남대 생활관 등 4건의 공사 수의계약 수주를 한 것이 성북동 자택 대가인가. -박 후보 생활관은 제가 이사장 취임 전에 의결된 사안이다. 경남기업 외에도 네 군데 이상의 업체가 영남대 건물 지었고 수의계약이 아니라 경쟁입찰로 기억한다. ▶강 위원 신 회장과의 약혼설까지 보도됐는데. -박 후보 국민들이 전부 보는 생방송 앞에서 약혼설 얘기까지 질문하는 게 적절치 않다고 느껴진다. 전혀 그런 사실이 없다. 신 회장은 제가 아니라 아버지와 관계 있는 분이다. 2. 故최태민 목사 문제 ▶김명곤 위원 최 목사 이름이 7개이고, 결혼도 6번 했는데 당시 알았나. 또 최 목사가 청와대를 무상 출입해 정보부가 조사했다는데. -박 후보 제가 누구를 만나서 일을 할 때 그 사람이 결혼 몇번 했는지 자녀는 몇인지, 이름 바꿨는지 알 수는 없다. 또 청와대는 무상으로 출입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김 위원 최 목사가 공사 수주·인사청탁 등의 명목으로 돈 받은 사실이 포착됐고 박 후보 이름 팔아서 부정하게 금품을 받았다는 의혹까지 40여건 비리가 있다고 한다. -박 후보 이 문제를 아버지가 직접 조사했다. 하지만 확실하게 나온 게 없었고 실체 없는 이야기로 끝났다. 아버지가 대검에서 조사하자고 해서 넘어갔는데 그때 어떤 횡령이라든가 이권개입이나 부당한 짓 했다면 엄격했던 아버지에게 보고됐을 것인데 그쪽에서도 별다른 일 없었던 걸로 안다. 그 뒤 여러번 바뀐 정권에서도 잘못 있다고 나온 적 없었다. 의혹은 나오는데 실체있는 것 없었고 있었으면 마땅히 처벌 받았을 것이다. ▶김 위원 최 목사 관련 말이 나오면 지나치게 민감한 반응 보이는 듯하다. 일부 보도에 의하면 천벌을 받을 짓이라는 말도 했다는데 사실인가. -박 후보 음해성 네거티브 중에 차마 입에도 담지 못할, 아이가 있다는 둥 하는 얘기까지 나왔다. 이런 식으로 하는 건 천벌 받을 일 아닌가라는 취지로 얘기했다. 만약에 그 아이가 있다는 근거가 있다면 그 아이를 데리고 와도 좋다.DNA 검사 해주겠다. 3. 육영재단 ▶이헌 위원 이사장 퇴임한 이유에 대해 최 목사 등이 후보와 친분 내세워 재단에 전횡 휘둘러 직원들이 반발했다는 기사가 있다. -박 후보 소요가 있었다. 하지만 1988년부터 부모님 기념사업회 운영하게 되면서 거기에 몰두하자는 생각으로 동생(박근영)에게 맡겼다. 소요는 당시 재단이 발행하던 어린이잡지 꿈나라와 어깨동무가 폐간되면서 재정압박을 받아 구조조정을 할 수밖에 없어서 그랬다. 거기서 오해가 있어서 최 목사 물러가라는 데모를 했다. 최 목사나 딸 순실씨가 육영재단 운영에 관여한 적이 없다. ▶이 위원 동생과 갈등 있어서 그만둔 건 아닌가. -박 후보 형제간 이간시도는 있었지만 동생과 그런 일로 불화가 있지는 않았다. ▶이 위원 박근영씨는 인터뷰에서 후보가 그만둔 경위가 최 목사 탓이라고 했었다. -박 후보 잘 모르고 얘기했을 수 있다. ▶이 위원 1990년 최 목사 마지막 기자회견에선 최 목사가 육영재단 운영에 자주 참여했다고 대답한 기사가 있는데. -박 후보 당시 최 목사 연세가 70,80대였다. 직접적인 일을 할 상황이 못 됐다. 부모님 기념사업회에서 일은 하고 육영재단에 대해서도 대화를 나눴지만, 그 의견을 반영하거나 할 위치에 있지 않았다. 4. 아버지와 유신체제 ▶정옥임 위원 퍼스트레이디 할 때 아버지께 긴급조치 해제 요청한 적 있나. -박 후보 아버지가 그때 돌아가시지 않았으면 유신체제 끝내고 대통령에서 물러나셨을 것이다. 물러날 준비했다. ▶보광 스님 90년대 잡지 인터뷰에서 5·16을 3·1운동에 비유했는데 역사의식에 의문이 든다. -박 후보 5·16은 구국혁명이라고 생각한다. 당시 나라가 북한에 흡수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당시 국민이 기아에 허덕였다. ▶보광 스님 유신체제는 어떻게 생각하나. -박 후보 역사에 판단 맡겨야 한다. 민주화운동에 고통받으신 분들에게 진심으로 죄송한 생각 가지고 있다. 5. 영남대와 정수장학회 ▶김봉헌 위원 1981년 영남학원 정관에 ‘교주 박정희’가 삽입된 배경은. -박 후보 재단이사 한 분이 정관에 넣자고 해서 이사회에서 받아들인 것으로 안다. 나도 당연히 찬성했을 것이다. 반대했겠나. ▶김 위원 영남투자금융 김종욱 회장, 전무 조순제, 영남의료원 관리부원장 손윤호, 사무부처장 곽완석씨라고 4인이 전횡을 저질렀다는데 이들 다 아나. -박 후보 김종옥씨만 안다. 이들의 임명은 전부 학교장이나 총장이 필요에 의해서 하는 것이다. 제가 월권행위하는 사람이 아니다. ▶김 위원 정수장학회 강제헌납 의혹에 대해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데. -박 후보 강제헌납 주장에 대해 동의할 수 없다. 사실이 아니라는 걸 입증할 자료를 정수장학회에서 갖고 있다. ▶김 위원 정수장학회 섭외비 수억원을 탈세했다는 보도가 있는데. -박 후보 섭외비는 납세의무가 없다가 법이 바뀌었는데 감독관청에서 아무 지적 없어서 몰랐다. 실무진이 처리를 못해서 누락 사실을 알게 됐고 퇴직금 중간정산을 통해 납부했다. ▶김 위원 정수장학회 연간 장학금 중 10%가 급여로 갔다는데. -박 후보 이사장이 써야 할 일이 있었고 전체 예산 20%에 해당하는 운영비에서 지급된 거다. ▶인명진 위원 2002년 방북 때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 국가보안법 밀약했다는 설도 있다. -박 후보 북한에 가서 국가보안법 얘기한 적 없다. 밀약도 전혀 없다. 김 위원장에게 6·15때 한 답방 약속을 지켜야 하지 않느냐고 했다. 정리 이재훈기자 nomad@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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