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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춘원은 왜 조선총독에게 학교 건립을 몰래 건의했을까

    춘원은 왜 조선총독에게 학교 건립을 몰래 건의했을까

    소설가인 춘원 이광수(1892~1950)가 3·1운동 직후 해외를 방랑하던 지식인 조선 청년의 구제를 언급하며 조선총독인 사이토 마코토(1858~1936)에게 보낸 2건의 ‘건의서’ 전문이 처음으로 공개됐다. 창씨개명한 일본 이름인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가 말해 주듯 민족주의자, 근대문학자, 천황주의자, 친일 작가의 모습이 얽힌 이광수의 단면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사료로 평가받는다. 하타노 세쓰코 나타카현립대 교수는 최근 발간된 ‘근대서지’ 8호의 ‘사이토 문서와 이광수의 건의서’란 제목의 글에서 이같이 밝혔다. 건의서에는 “조선인의 망령된 움직임을 견제하고 그들에게 지식과 부를 주어 생활의 안정을 얻는 데 효력을 얻을 수 있다. 상술한 사업을 진행하는 데 절대 비밀을 지키는 것이 좋다”는 이광수의 당부가 실려 있다. 이 건의서는 일본 국회도서관 헌정자료실에 보관 중인 ‘사이토 마코토 관계문서’에 포함된 140자 분량의 원고지 14장에 담긴 문건이다. 해군대신, 내무대신, 내각총리대신 등을 지낸 사이토는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부터 10년간 조선총독을 지내며 이른바 ‘문화통치’를 수행했다. 생전 일기·서류 등 1만건 이상의 방대한 자료를 남겼다. ‘재외 조선인에 대한 긴급책에 대해 다음의 2건을 건의함’이란 부제가 달린 문건에는 이광수가 사이토에게 조선 통치를 조언하는 내용이 담겼다. 중등교육 이상을 받은 조선 청년 2000여명이 중국과 시베리아를 유랑하는 현실을 우려하면서 이들이 러시아의 수중에 들어가면 무장 독립운동 등 일본에 위협이 될 것이라고 거론했다. 이광수가 내건 해법은 교육과 직업의 제공이다. 이를 국가나 인류가 꼭 수행해야 할 선도사업이라고 주장했다. 두 번째 건의서에선 간도, 서간도에 거주하는 방랑 청년들을 위해 소학교와 강습소를 짓고 계몽 출판물을 배포할 것을 제안했다. 사업 적임자로는 명망과 사무적 수완, 강고한 의지를 지닌 조선인으로 친일파로 여겨지지 않는 사람이어야 한다고도 했다. 하타노 교수는 “이광수가 ‘비밀을 지켜 달라’고 부탁한 것은 당시 총독부 돈으로 사업을 진행하는 것이 동포의 눈에 어떻게 비칠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며 “나름의 각오를 지닌 제안이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부고] 민주화 운동 앞장선 이문영 고려대 명예교수

    [부고] 민주화 운동 앞장선 이문영 고려대 명예교수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던 이문영 고려대 명예교수가 지난 16일 오후 6시 숙환으로 별세했다. 88세. 고인은 1927년 서울에서 태어나 고려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미시간대에서 석사 학위, 고려대 법대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고인은 유신헌법이 민주헌법이 아님을 밝히는 3·1민주구국선언에 참여했다가 구속됐으며 이후에도 YH 사건,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 등으로 고려대 교수직에서 세 차례 해직당하고 수차례에 걸쳐 4년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65년 한·일회담 반대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군인들이 교정에 난입했을 때 항의문을 작성해 낭독한 일화도 유명하다. 1992년 고려대 명예교수로 은퇴한 뒤 경기대 대학원장,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 이사장, 함석헌 기념사업회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3·1운동에서 본 행정학’, ‘논어’, ‘맹자와 행정학’, ‘인간 종교 국가’, ‘협력형 통치’, 회고록 ‘겁 많은 자의 용기’ 등이 있다. 유족으로는 딸 현아, 아들 선표, 딸 선아, 며느리 김성은, 사위 장이권·이영석 등이 있으며, 빈소는 고려대 안암병원 301호에 마련됐다. 발인은 20일 오전 6시다. (02)923-4442. 이범수 기자 bulse46@seoul.co.kr
  • 한국사는 이해가 중요…역사흐름 알면 답 찾는 데 도움

    한국사는 이해가 중요…역사흐름 알면 답 찾는 데 도움

    대입 수험생과 마찬가지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에게 한국사는 꼭 넘어야 할 벽이다. 암기해야 할 내용이 많아 어렵게 느껴지지만, 완벽하게 준비하지 않으면 ‘2% 부족’의 고배를 마셔야 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한국사능력검정시험에 자주 출제됐던 부분을 정리하고, 지난해 7급 필기시험 한국사 과목에서 100점 만점을 맞은 합격자의 조언을 듣는다. 우선 5급 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은 응시 전까지 한국사능력검정시험 2급 이상(고급) 성적을 미리 받아 놓아야 한다. 검정시험 성적표가 있어야 5급 시험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검정시험은 연중 네 차례 시행된다. 올해 첫 시험(제22회)은 오는 25일 전국 52개 지역에서 치러진다. 결과는 다음 달 11일 한국사능력검정시험 누리집(historyexam.go.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권용기 에듀윌 강사는 “한국사 기출 문제를 분석했을 때 이번 시험에서도 수험생들에게 물어볼 주제는 어느 정도 정해져 있다”면서 “고급 문제의 경우 50문제 중 전·근대 시기 관련 문제는 30개, 근대 이후의 문제는 20개 정도의 비율을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책·고시·취업>최신 뉴스 보러가기 권 강사는 선사시대 내용에서는 구석기·신석기·청동기·철기 시대 구분하기, 단군신화 및 8조법금 분석, 고조선 발달사 등이 주로 다뤄진다고 설명했다. 삼국시대는 6가야 연맹과 금관가야, 대가야 비교, 고구려·백제·신라 발전사, 임나일본부설 비판, 신라의 왕호 변천사, 수도·중심지 이동, 통일신라와 발해의 중앙행정 조직 등이 자주 등장한다. 고려시대의 경우 호족 정책, 지배세력의 변천사, 무신집권기 정치·경제·사회상, 공민왕의 개혁 정치, 대외 관계, 서경 천도 운동 등이 출제될 가능성이 높다. 삼국시대만큼이나 숙지해야 할 내용이 많은 조선시대에는 세종과 성종의 편찬사업, 고려와 조선의 지방행정 조직 비교, 성균관·서원·향교·서당 등의 구분, 붕당정치, 인조반정 이후 친명배금 정책과 광해군의 중립정치 비교, 영조와 정조의 개혁 정책, 세도정치 등이 수차례 활용됐다. 근대기에서는 흥선대원군의 개혁,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의 비교, 강화도 조약,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동학농민운동의 전개 과정,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등의 출제 빈도가 높다. 일제강점기는 시기별 일제 통치·경제 정책, 3·1운동과 6·10만세운동, 항일운동 간 비교, 임시정부 활동, 중일전쟁 이후 광복군·의용군 활동 등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현대사에서는 모스크바 3상 회의, 정부 수립 과정, 6·25전쟁, 4·19혁명 및 5·16 군사정변, 유신 체제와 신군부 등장, 광주민주화운동과 더불어 6·10항쟁, 7·4 남북공동성명과 관련된 지식을 학습해야 한다는 것이다. 박아영(28·여·일반행정직)씨는 지난해 시험 한국사 과목에서 만점을 받았다. 하지만 그 전 시험에서는 15점을 받고 크게 낙심한 바 있다. 박씨는 “2010년 생애 첫 공무원 시험에서 한국사 점수가 15점이었다”면서 “비록 시험 준비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치른 것이라고 하지만 성적이 너무 나빠서 내가 우리나라 국민이 맞나 하는 생각도 했다”면서 웃었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면서 영어 다음으로 힘들었던 과목이었을 만큼 한국사가 번번이 발목을 잡았다”고 말하는 그가 만점을 받은 비결은 ‘많이 푸는 것보다 제대로 이해하는 것’에 있었다. 박씨는 처음 한국사를 공부할 때 주변에서 추천하는 학습법을 그대로 따랐다. 요약 노트를 만들 시간에 기본서를 한 번이라도 더 읽고 기출 문제를 많이 풀어 보라는 게 주위의 조언이었다. 2년 동안 같은 방법으로 공부했지만 점수는 늘 70~80점에 머물렀다. 변화가 필요했다. 그는 기본서를 바꾸는 일부터 시작했다. 박씨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으로 주제가 나뉜 가운데 역사적 사실이 시대별로 기술된 기본서를 골랐다”면서 “시간 순으로 적힌 책이 한국사에 대한 큰 그림을 그리는 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시험을 앞두고 15차례 이상 반복해 기본서를 정독했다. 또 법원직·경찰직·소방직 공무원 시험 등에 출제된 한국사 기출 문제도 풀어 보면서 나름의 정리 작업을 병행했다. “문제를 풀면서 확실히 이해한 지문과 그렇지 않은 지문, 헷갈리기 쉬운 지문과 주의해야 할 지문을 따로 표시한 뒤 엑셀 파일로 정리했다”는 박씨는 “문제를 많이 푸는 일도 좋지만 문제를 제대로 파악하고 푸는 일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수험생활 3년차에 비로소 깨달았다”고 덧붙였다. 암기가 필요한 내용을 골라 공책에 담았다. 또 암기 내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이른바 ‘연표식 정리’를 활용했다. 그는 “역사적 사건들을 먼저 세기별로 크게 분류한 뒤 몇몇 주요 사건이 발생한 연도를 외우면서 공부했다”면서 “역사 흐름을 알면 어떤 사건이 언제 일어났는지 정확히 몰라도 문제를 풀 수 있지만 제한된 시간 안에 답을 빨리 찾으려면 주요 사건의 발생 연도는 암기하는 게 편하다”고 했다. 박씨는 네 차례 도전 끝에 공직에 진출했다. 그는 한국사 점수를 높이려 노력했던 경험을 떠올리며 “제자리에 안주하지 않고 방법을 찾아내는 공무원이 되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20대女 시험 계속 떨어지자 택한 방법이…

    대입 수험생과 마찬가지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에게 한국사는 꼭 넘어야 할 벽이다. 암기해야 할 내용이 많아 어렵게 느껴지지만, 완벽하게 준비하지 않으면 ‘2% 부족’의 고배를 마셔야 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한국사능력검정시험에 자주 출제됐던 부분을 정리하고, 지난해 7급 필기시험 한국사 과목에서 100점 만점을 맞은 합격자의 조언을 듣는다. 우선 5급 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은 응시 전까지 한국사능력검정시험 2급 이상(고급) 성적을 미리 받아 놓아야 한다. 검정시험 성적표가 있어야 5급 시험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검정시험은 연중 네 차례 시행된다. 올해 첫 시험(제22회)은 오는 25일 전국 52개 지역에서 치러진다. 결과는 다음 달 11일 한국사능력검정시험 누리집(historyexam.go.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권용기 에듀윌 강사는 “한국사 기출 문제를 분석했을 때 이번 시험에서도 수험생들에게 물어볼 주제는 어느 정도 정해져 있다”면서 “고급 문제의 경우 50문제 중 전·근대 시기 관련 문제는 30개, 근대 이후의 문제는 20개 정도의 비율을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권 강사는 선사시대 내용에서는 구석기·신석기·청동기·철기 시대 구분하기, 단군신화 및 8조법금 분석, 고조선 발달사 등이 주로 다뤄진다고 설명했다. 삼국시대는 6가야 연맹과 금관가야, 대가야 비교, 고구려·백제·신라 발전사, 임나일본부설 비판, 신라의 왕호 변천사, 수도·중심지 이동, 통일신라와 발해의 중앙행정 조직 등이 자주 등장한다. 고려시대의 경우 호족 정책, 지배세력의 변천사, 무신집권기 정치·경제·사회상, 공민왕의 개혁 정치, 대외 관계, 서경 천도 운동 등이 출제될 가능성이 높다. 삼국시대만큼이나 숙지해야 할 내용이 많은 조선시대에는 세종과 성종의 편찬사업, 고려와 조선의 지방행정 조직 비교, 성균관·서원·향교·서당 등의 구분, 붕당정치, 인조반정 이후 친명배금 정책과 광해군의 중립정치 비교, 영조와 정조의 개혁 정책, 세도정치 등이 수차례 활용됐다. 근대기에서는 흥선대원군의 개혁,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의 비교, 강화도 조약,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동학농민운동의 전개 과정,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등의 출제 빈도가 높다. 일제강점기는 시기별 일제 통치·경제 정책, 3·1운동과 6·10만세운동, 항일운동 간 비교, 임시정부 활동, 중일전쟁 이후 광복군·의용군 활동 등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현대사에서는 모스크바 3상 회의, 정부 수립 과정, 6·25전쟁, 4·19혁명 및 5·16 군사정변, 유신 체제와 신군부 등장, 광주민주화운동과 더불어 6·10항쟁, 7·4 남북공동성명과 관련된 지식을 학습해야 한다는 것이다. 박아영(28·여·일반행정직)씨는 지난해 시험 한국사 과목에서 만점을 받았다. 하지만 그 전 시험에서는 15점을 받고 크게 낙심한 바 있다. 박씨는 “2010년 생애 첫 공무원 시험에서 한국사 점수가 15점이었다”면서 “비록 시험 준비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치른 것이라고 하지만 성적이 너무 나빠서 내가 우리나라 국민이 맞나 하는 생각도 했다”면서 웃었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면서 영어 다음으로 힘들었던 과목이었을 만큼 한국사가 번번이 발목을 잡았다”고 말하는 그가 만점을 받은 비결은 ‘많는 푸는 것보다 제대로 이해하는 것’에 있었다. 박씨는 처음 한국사를 공부할 때 주변에서 추천하는 학습법을 그대로 따랐다. 요약 노트를 만들 시간에 기본서를 한 번이라도 더 읽고 기출 문제를 많이 풀어 보라는 게 주위의 조언이었다. 2년 동안 같은 방법으로 공부했지만 점수는 늘 70~80점에 머물렀다. 변화가 필요했다. 그는 기본서를 바꾸는 일부터 시작했다. 박씨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으로 주제가 나뉜 가운데 역사적 사실이 시대별로 기술된 기본서를 골랐다”면서 “시간 순으로 적힌 책이 한국사에 대한 큰 그림을 그리는 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시험을 앞두고 15차례 이상 반복해 기본서를 정독했다. 또 법원직·경찰직·소방직 공무원 시험 등에 출제된 한국사 기출 문제도 풀어 보면서 나름의 정리 작업을 병행했다. “문제를 풀면서 확실히 이해한 지문과 그렇지 않은 지문, 헷갈리기 쉬운 지문과 주의해야 할 지문을 따로 표시한 뒤 엑셀 파일로 정리했다”는 박씨는 “문제를 많이 푸는 일도 좋지만 문제를 제대로 파악하고 푸는 일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수험생활 3년차에 비로소 깨달았다”고 덧붙였다. 암기가 필요한 내용을 골라 공책에 담았다. 또 암기 내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이른바 ‘연표식 정리’를 활용했다. 그는 “역사적 사건들을 먼저 세기별로 크게 분류한 뒤 몇몇 주요 사건이 발생한 연도를 외우면서 공부했다”면서 “역사 흐름을 알면 어떤 사건이 언제 일어났는지 정확히 몰라도 문제를 풀 수 있지만 제한된 시간 안에 답을 빨리 찾으려면 주요 사건의 발생 연도는 암기하는 게 편하다”고 했다. 박씨는 네 차례 도전 끝에 공직에 진출했다. 그는 한국사 점수를 높이려 노력했던 경험을 떠올리며 “제자리에 안주하지 않고 방법을 찾아내는 공무원이 되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민족주의로 가려진 아나키스트 신채호

    민족주의로 가려진 아나키스트 신채호

    신채호 다시 읽기/이호룡 지음/돌베개/332쪽/1만 8000원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를 관통하며 굴곡 많은 삶을 산 단재 신채호(1880~1936). 봉건 유학자에서 자강운동가로, 자강운동가에서 민족주의자로, 다시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로 사상적 변신을 거듭했지만 ‘한국의 대표 민족주의자’로 통한다. 신채호는 그 통념처럼 그저 민족주의자였을까. ‘신채호 다시 읽기’는 그 통념과는 다른 ‘아나키스트 신채호’를 부각시킨 책이다. 1910년대까지는 한국의 대표 민족주의자로 자리매김되는 게 맞지만 그 이후의 사상과 실천운동은 다르다는 게 핵심 내용. 신채호의 저술과 관련 문헌, 새 발굴 자료들을 분석해 그가 아나키즘 수용의 선구자이자 한국의 대표적 아나키스트였음을 밝히는 과정이 흥미롭다. 신채호는 1900년대에 제일 먼저 민족주의를 제창하고 1910년대 들어 민족주의에 기초한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해 민족주의자의 색채가 짙은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 통념이 고착화된 건 1960∼1970년대라는 주장이다.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 대통령이 일본 관동군 장교의 이력을 가릴 도구로 민족주의를 내걸었고 독재정권에 저항하던 민주화운동세력들이 민족주의를 앞세우면서 박정희 정권의 반민족성을 비판했던 시절. 강권(强權)에 맞서 사상을 실천에 옮긴 저항적 지식인의 표상인 신채호가 대표적 민족주의자로 부각됐다는 지적이다. 책에 제시된 새 자료들은 통념과는 사뭇 다른 신채호를 새록새록 들춘다. 1905년 황성신문사 근무 시절 고토쿠 슈스이의 ‘장광설’을 읽고 아나키즘에 감명받은 신채호는 3·1운동을 계기로 아나키즘을 수용하기 시작했고 1923년 발표한 ‘조선혁명선언’은 신채호의 아나키즘을 집대성한 글로 드러난다. 특히 ‘조선혁명선언’의 민중적 직접혁명론이 민족주의에 아나키즘을 접합한 것이라는 기존 학계의 주장을 일축해 주목된다. 신채호는 1936년 감옥에서 사망하면서 판결문 1통과 인장 1개, 수첩 2권, 서한 10여통, 중국 돈, 책 몇 권을 남겼는데 그중에는 ‘세계 대사상 전집’(크로포트킨 편)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신채호가 민족주의자보다는 아나키스트로 생을 마감했음을 보여 주는 단서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국회 정보위, 장성택 실각 국정원 현안보고 청취 예정

    국회 정보위, 장성택 실각 국정원 현안보고 청취 예정

    국회 정보위원회는 6일 전체회의를 열어 남재준 국가정보원장으로부터 북한 장성택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실각설의 전말과 북한 동향에 대해 현안 보고를 받는다. 정보위는 이날 오후 2시 전체회의에서 남 원장과 국정원 간부 등이 출석한 가운데 장 부위원장의 정확한 실각 시점과 그에 따른 파장, 앞으로의 북한 권력구도의 개편 방향 등에 대해 보고받을 예정이다. 한편, 국회 동북아역사왜곡대책특별위원회는 오전 8시 전체회의를 열고 일제 피해자 명부와 관련해 외교부, 안전행정부, 국가기록원으로부터 현안 보고를 받는다. 회의에는 유정복 안행부 장관과 박찬우 안행부 제1차관, 박경국 국가기록원장, 외교부 김규현 제1차관이 참석해 3·1운동 순국선열과 관동대학살 희생자, 강제징용 피해자들에 대한 내용이 담긴 명부가 최근 주일 한국공관에서 60년 만에 발견·공개된 것과 관련, 후속 조치 등을 보고할 계획이다. 특위 위원들은 이날 회의에 앞서 국가기록원에 보관 중인 일제 피해자 명부의 원본을 직접 열람할 계획이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죽창·쇠갈퀴로 개 잡듯이 조선인 학살”

    ‘쇠갈쿠리(쇠갈퀴)로 개 잡듯이’,‘죽창으로 복부를 찔러’, ‘곡갱이(곡괭이)로 학살‘…. 1923년에 발생한 일본 관동대지진 당시 일본 민간인이 조선인을 이처럼 참혹하게 학살했다는 사실이 최근 주일 한국 대사관 이사 과정에서 발견된 피살자 명부에 그대로 적혀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24일 국가기록원에 따르면 기록원은 지난 8월 주일 한국 대사관으로부터 피살자 명부를 이관받고 지난 10월 ‘일본 진재(震災)시 피살자 명부’ 분석을 독립기념관에 의뢰했다. 그 결과 조선인이 관동대지진 발생 당시 일본인에게 이같이 희생됐다는 내용이 일부 확인됐다. 분석을 맡았던 김도형 독립기념관연구소 연구위원은 “명부에 실린 관동대지진 피살자 290명 중 198명과 3·1운동 피살자 명부(630명)에 일부 포함된 52명 등 실제 학살 피살자는 250명”이라면서 “명부에는 일본 군경의 총살에 의한 피살 사실뿐만 아니라 일본 민간인에 의한 학살 사실이 나와 있었다”고 말했다. 경남 창녕군 출신의 고 한용선(당시 23세)씨를 일본인이 ‘쇠갈쿠리(쇠갈퀴)로 개 잡듯이’ 죽였고, 경남 함안군 출신의 고 차학기(당시 40세)씨는 일본인이 죽창으로 복부를 찔러 목숨을 잃었다고 적혀 있다. 김 연구위원은 “관동대지진 때 일본인들은 한국인을 총, 칼이 아닌 죽창이나 곡괭이로 참혹하게 살해했다는 사실이 명부를 통해 확인됐다“면서 “비록 250명 중 가해자가 드러난 기록은 10%도 채 안 되지만 우리 정부가 만든 기록에서 한국인들이 관동대지진 발생 후 어떻게 학살됐는지 구체적인 행위가 명시된 것은 처음이다. 일본 헌병뿐만 아니라 일본 민간인으로 구성된 자경단 등 학살 가해자에 대해 언급이 있는 것도 주목할 점”이라고 밝혔다. 한편 ‘3·1운동시 피살자 명부’의 일부를 현재 3·1운동 독립유공자 명부와 대조한 결과 174명이 유공자로 새로 인정받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독립유공자로 선정돼 보상금 지급 대상이 되면 유족은 한 달에 최고 174만 8000원을 보상받을 수 있다. 또 우리나라 최초의 일제 강제징용자 명부인 ´일정시 징용자명부´에는 징용자의 귀환과 미귀환 여부도 표기돼 있다.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쇠갈쿠리로 개잡듯 학살” 관동대지진 일제 만행 드러나

    ’쇠갈쿠리(쇠갈퀴)로 개잡듯이 학살’, ‘죽창으로 복부를 찔렀음’, ‘곡갱이(곡괭이)로 학살’ 등 일본의 관동(關東·간토)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의 참혹성이 ‘일본 진재시 피살자 명부’를 통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일제 강제징용자 명부인 ‘일정시 징용자 명부’에는 징용자의 귀환과 미귀환 여부가 표기돼 있다. ’3·1운동시 피살자 명부’의 일부를 대조한 결과, 174명이 순국자로 새로 인정받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24일 국가기록원과 독립기념관,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이하 강제동원 피해조사 위원회) 등에 따르면 주일본 한국대사관에서 발견된 23만명의 명부 67권의 분석을 통해 이런 사실이 새로 드러났다. 먼저 국가기록원의 의뢰로 ‘일본 진재(震災)시 피살자 명부’ 분석을 한 김도형 독립기념관연구소 연구위원에 따르면 명부에 실린 관동대지진 피살자 290명, 3·1운동 때 피살자 명부에 일부 포함된 52명 등 342명 중 실제 피살자는 198명이다. 나머지 144명은 3·1 운동 관계자나 독립운동 참가자, 강제동원된 사람들, 연도를 착각해 잘못 기재된 것으로 보인다고 김 연구위원은 밝혔다. 명부상 피살상황 난(欄)에 어떻게 학살을 당했는지가 일부 기재돼 있다. 경남 창녕 출신의 한용선(23)씨는 ‘쇠갈쿠리로 개잡듯이’, 경남 함안 출신의 차학기(40)씨는 일본인이 죽창으로 복부를 찔러 학살됐다고 적혀 있다. 경남 밀양 출신의 최덕용(26)씨와 이덕술(22)씨는 ‘군중이 피습해 살해’당했고, 울산 출신의 박남필(39)씨와 최상근(68)씨는 ‘곡갱이로 학살됐음’이라고 기재됐다. 김 연구위원은 “관동대지진 때 일본인들은 한국인을 총 또는 칼이 아닌 죽창이나 곡괭이로 참혹하게 살해했던 사실이 명부를 통해 확인됐다”면서 “또 자경단원뿐 아니라 일본헌병 등 학살가해자에 대해 언급이 있는 것도 주목할 점”이라고 말했다. ’일정시 징용자 명부’에 징용자의 귀환·미귀환 여부, 어디로 동원됐는지 적혀 있는 점도 새로운 사실이다. 강제동원 피해조사 위원회 정혜경 조사2과장은 “새로 발견된 일정시 징용자 명부는 1957∼1958년 정부가 조사한 왜정시 징용자 명부보다 훨씬 정확도가 높고 내용 자체가 풍부하다”며 “징용자의 생년월일과 주소는 물론 귀환·미귀환 여부와 어디로 동원됐는지도 나와있다”고 확인했다. ’3·1운동시 피살자 명부’의 일부인 경기도와 충청도 지역 명부를 현재 3·1운동 독립유공자 명부와 대조한 결과, 174명이 유공자로 새로 인정받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경기도에서는 169명 중 105명, 충청도 지역은 100명 중 69명이 각각 독립유공자 명단과 일치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국가보훈처 김성민 박사는 “현재 391명인 3.1운동 독립유공자가 늘어날 수 있다”면서 “독립유공자로 선정돼 보상금지급 대상이 되면 유족은 최고 한 달에 174만8천원을 보상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관동대지진 때 日 헌병에 의한 조선인 학살 확인”

    주일 한국 대사관에서 발견된 일본 관동대지진 피살자 명부를 통해 일본 헌병에 의한 조선인 학살도 확인됐다고 민주당 유기홍 의원이 22일 밝혔다. 유 의원은 이날 국회 동북아역사왜곡대책특위 전체회의에서 “관동대지진 당시 일본 진재시 피살자 290명의 명부에 일본 헌병에 의해 피살당한 사례가 명시돼 있다”면서 “어린아이까지 포함해 주소지가 같은 4명이 집단 학살당했다는 근거 자료도 있다”고 밝혔다. 특위 위원인 유 의원은 “최근 주일 한국 대사관에서 발견된 명부의 일부를 받았으며 우리 정부는 이를 근거로 일본 정부에 강력히 항의하고 책임 문제를 거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앞서 주일 한국 대사관은 지난 6월 이사 과정에서 이승만 정부가 작성한 일제강점기 징용자, 3·1운동 및 관동대지진 피살자 명부를 발견했고, 이를 넘겨받은 국가기록원이 19일 이 사실을 공개했다. 김광열 광운대 교수는 발제를 통해 “일본은 1965년 한·일청구권 협정에서 배상 문제는 끝났다고 주장하지만 일제강점기 피해 상황이 추가로 속속 드러나고 있다”면서 “청구권 협정에서도 ‘협정 내용을 필요하면 조정할 수 있다’고 돼 있는 만큼 이 조항을 활용해 배상과 책임 문제를 끊임없이 제기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이춘규 선임기자 taein@seoul.co.kr
  • ‘과거사 자료’ 읍·면·동까지 샅샅이 찾는다

    정부가 국내외 각 기관을 대상으로 과거사 기록 전반에 대한 대대적인 실태조사에 나서기로 했다. 국가기록원은 정부가 최근 3·1운동과 관동대지진 등 일제 피해자 명부를 처음으로 발견한 데 따른 후속 조치로 각 부처와 지방자치단체, 재외공관 등의 과거사 자료 보관 실태를 조사한다고 21일 밝혔다. 실태조사는 국가기록원에 전담팀을 꾸리고 안전행정부, 외교부 등과 공동으로 진행할 계획이다. 국가기록원이 2008년부터 중앙·지방행정기관과 교육청 등 각 기관의 기록관리 업무를 평가·점검해 왔지만, 정부가 과거사 기록 실태에 대해 대대적인 조사를 진행하는 것은 처음이다. 기록원 관계자는 “관계부처 협의를 거쳐 가능한 한 빨리 실태조사에 나설 것”이라며 “점검팀을 꾸려 읍·면·동까지 철저히 점검할 것”이라고 밝혔다. 사전 조사 및 현장 점검 등을 감안하면 실태조사는 최소 6개월이 걸릴 것으로 전망된다. 전 세계 161개 재외공관을 대상으로 외교사료 점검에 나서는 외교부는 1차적으로 주일 대사관을 비롯해 미국·러시아·영국·독일·이탈리아·프랑스·덴마크 등의 재외공관을 대상으로 점검할 계획이다. 외교부 관계자는 “필요하다면 재외공관에 전문인력을 파견, 특별점검을 실시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앞서 지난 19일 기록원은 주일 한국 대사관 청사 신축에 따른 이사 과정에서 발견된 과거사 자료를 공개했다. 우리 정부가 1953년 전국적으로 조사했던 3·1운동과 일본 관동대지진 피살자, 일제 강제 징병자 등 총 23만명의 명부가 담겨 있는 자료로 지난 8월 국가기록원에 이관됐다.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이현정 기자 hjlee@seoul.co.kr
  • 관동대지진 때 두살배기도 학살 당해

    관동대지진 때 두살배기도 학살 당해

    주일 한국대사관의 이사 과정에서 발견되어 19일 처음 공개된 명부들은 그동안 피해자 규모가 제대로 파악되지 않은 3·1운동과 관동 대지진 피살자의 신상을 구체적으로 담고 있다. 이 명부들은 1952년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기미년 살상자 수, 일본 관동 진재 희생자, 제2차 대전 시 징용자 및 사상자 수, 왜정하 애국사상운동자로서 옥사자 수 등을 조사 집계하라”는 지시에 따라 만들어졌다. 박경국 국가기록원장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1953년에 만들어진 명부가 지금 공개된 것은 주일대사관에서 발견하기 어려운 위치에 보관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국가기록원은 자료를 넘겨받아 3개월 넘게 분석작업을 벌였지만 총 67권의 명부를 모두 분석하지는 못하고 일부 지역을 골라 내용을 파악했다. ‘3·1운동 피살자 명부’는 읍·면 단위로 성명, 나이, 주소, 순국일시, 순국장소, 순국상황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동안 3·1운동 순국자 가운데 독립유공자로 인정된 이는 총 391명에 불과하며, 지금까지 어떤 명부도 발견되지 않았다. 서울을 포함한 경기도 지역에서는 지금까지 독립유공자로 53명이 포상받았고 8명이 포상 보류됐는데, 이번 명부로 100여명이 새롭게 확인됐다. 충청도 지역은 31명이 독립유공자로 서훈을 받았는데 69명이 이번 명부를 통해 추가로 확인됐다. 독립운동가 박은식은 1920년에 지은 ‘독립운동지혈사’에서 3·1운동 피살자 숫자를 7509명이라고 밝힌 바 있다. 국가기록원 관계자는 “이번 명부가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3년 작성된 것으로 북한 등 일부 지역은 행정력이 미치지 못해 피살자 숫자가 적은 것 같다”고 설명했다. 1923년 9월 1일 일어난 일본 관동대지진 당시 희생된 한국인 290명의 명단인 ‘일본 진재 시 피살자 명부’도 처음으로 구체적인 희생자 명단을 확인하고 있다. 관동대지진 당시 한국인 피살자 수는 독립신문이 1923년 11월 6661명으로 보도하고, 독일 자료에서는 2만여명으로 언급됐다. 일본에서의 피살자는 조사하지 못하고, 국내에 연고가 있는 사람만 조사되어 명단은 290명에 불과하나 희생자 이름 외에 본적, 나이, 피살일시, 피살장소, 피살상황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피살 방식도 피살, 타살, 총살 등 다양하게 기록되었다. 경남 합천군을 연고로 하는 2살짜리 아기 등 이모씨 일가족 4명이 모두 학살당한 사례도 구체적으로 담겨 있다. 관동대지진으로 인한 피해보상은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에도 포함되지 않았다. ‘일정 시 피징용자 명부’는 피징용자 명부 가운데 가장 오래된 원본 기록으로 추정된다. 국가기록원이 보존하고 있는, 1957년 노동청이 작성한 피징용자 명부에는 28만 5771명이 등재되어 있으며, 이 가운데 우리 정부는 약 16만명을 피징용자로 인정했다. 이번에 발견된 명부는 남한 지역만 조사 대상으로 해 1957년 작성된 명부보다 5만 5990명이 적으나 생년월일, 주소 등이 포함되어 피해자 보상심의에 큰 도움이 될 전망이다. 박걸순 충북대 사학과 교수는 “3·1운동과 관동대지진 당시 피살자 명부는 지금까지 학계에 알려지지 않은 최초의 기록으로 과거사 증빙자료로서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고 말했다. 윤창수 기자 geo@seoul.co.kr
  • 한·일청구권 협정 때 명시안돼… 배상문제 새 쟁점 부상

    19일 일본 관동 대지진 피살자 및 강제징용 등 일제강점기 피해자 명부가 새롭게 공개되면서 그동안 제대로 파악되지 않았던 강제 징용자와 피살자의 배상 문제가 새로운 쟁점으로 부상하고 있다. 정부는 1965년 한·일청구권 협정을 통해 징용 및 징병에 대한 배상이 포함된 청구권 자금을 일본 측으로부터 받았으나 이 과정에서 3·1운동 피해자와 관동 대지진 피해자에 대한 배상 문제는 구체적으로 명시되지 않았다. 이번에 공개된 자료가 한·일청구권 협정 체결과정에서 활용됐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새로운 자료라는 점에서 추가 배상을 요구할 근거로 사용될 가능성이 있다. 이번 자료는 우리 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이 잇따르고 이에 대해 일본 재계가 반발하는 가운데 나온 것이어서 주목된다. 조태영 외교부 대변인은 이날 정례브리핑에서 일본의 추가 배상 문제와 관련, “방대한 자료인 만큼 발견된 명부의 성격과 내용 등에 대한 상세한 분석 작업이 먼저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안동환 기자 ipsofacto@seoul.co.kr
  • “유관순 열사 옥중서 타살당해” 3·1운동 희생자 명부 첫 공개

    “유관순 열사 옥중서 타살당해” 3·1운동 희생자 명부 첫 공개

    3·1운동 피살자 명부와 1923년 발생한 관동대지진 당시 희생된 한국인 명부가 최초로 공개됐다. 또 새로운 내용의 ‘일정(日政) 시 피징용자’ 명부도 추가로 발견돼 일제강점기 피해보상 문제가 새로운 전기를 맞을 전망이다. 안전행정부 국가기록원은 19일 1953년 이승만 정부에서 작성한 3·1운동 시 피살자 명부 1권 630명, 일본 진재(震災) 시 피살자 명부 1권 290명, 일정 시 피징용자 명부 65권 22만 9781명 등 67권을 수집하여 분석한 결과를 밝혔다. 이번에 공개된 명부는 주일 한국대사관이 이전하는 과정에서 지난 6월 발견되어 8월 국가기록원으로 옮겨졌다. 이승만 당시 대통령이 1952년 12월 15일 제109회 국무회의에서 내무부에 전국적인 조사를 지시해 이번 명부가 작성됐다. 1952년 2월 제1차 한·일 회담이 결렬되고, 1953년 4월 제2차 한·일 회담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작성되어 주일대사관에 보내진 것으로 추정된다. 유관순 열사에 대해 “3·1독립 운동만세로 인하여 왜병에 피검(被檢)돼 옥중에서 타살(打殺)당함”이라고 기록된 ‘3·1운동 피살자 명부’는 217쪽의 습자지로 구성된 1권으로 지역별로 총 630명의 희생자가 실려 있다. 그동안 국내외에서 한 번도 발견된 적이 없는 최초의 명부다. ‘일본 진재 시 피살자 명부’도 관동대지진 당시 희생된 한국인 명부로 1권 109장으로 구성되었으며, 290명의 명단이 담겼다. 박경국 국가기록원장은 “이번 명부는 전국적인 정부 조사 결과인 데다 주소나 생년월일까지 포함됐을 정도로 세세해 앞으로 피해보상의 근거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윤창수 기자 geo@seoul.co.kr
  • “유관순 부친 유중권 열사도 3·1만세 때 총살당해”

    국가기록원이 19일 공개한 명부에는 일제의 만행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3·1운동 시 피살자 명부’는 유관순 열사에 대해 “3·1독립 운동만세로 인하여 왜병에 피검(被檢)돼 옥중에서 타살(打殺)당함”이라고 기록했다. 이어 유 열사 부친인 유중권 열사는 기미년 3월 1일 천안군 병천면 병천리에서 “3·1운동 독립만세로 인하여 총살당했다”고 기재되어 있다. 유중권 열사의 바로 옆에 성명이 “이씨(李氏)”라고 표기된 여성이 등장하는데 주소·순국장소·순국상황란에 유중권 열사와 같다는 기호가 표기돼 있어 유관순 열사의 어머니로 알려진 이소제 열사로 추정된다. 김용달 독립기념관 수석연구위원은 “기존의 3·1운동 관련 기록은 일본 경찰의 것으로 조선인 몇 명이 시위에 참가해 몇 명이 죽었다는 식이어서 누가 어떻게 죽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면서 “이번 명부에는 이름과 연령, 순국장소, 상황 등이 기록되어 처음으로 순국자들이 어떻게 순국했는지 알 수 있게 됐다”고 설명했다. 재판기록 없이 독립만세 현장에서 사망해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한 독립유공자들을 확인하는 데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전망이다. 1923년 일본 관동지방에서 일어난 대지진의 혼란 속에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켰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약을 넣고 다닌다’는 유언비어가 순식간에 퍼졌다. 6000~2만명으로 추산되는 조선인이 학살당했는데, ‘일본 진재 시 피살자 명부’는 국내 연고가 있는 290명의 피살자 참상을 담고 있다. 윤창수 기자 geo@seoul.co.kr
  • 3·1운동, 日관동대지진 피살자 명단 최초 발견·공개

    3·1운동, 日관동대지진 피살자 명단 최초 발견·공개

    한국 정부가 1953년에 전국적으로 조사한 3·1운동과 일본 관동(關東·간토)대지진 피살자 명부가 사상 처음으로 발견, 공개됐다. 이번에 우리나라 최초의 일제 강제징병자 세부 명부도 나와 일제강점기 피해보상 문제가 새로운 전기를 맞을지 주목된다. 국가기록원은 19일 정부서울청사에서 브리핑을 열고 1953년 이승만 정부가 작성한 ‘3·1운동시 피살자 명부(1권·630명)’, ‘일본 진재(震災)시 피살자 명부(1권·290명)’, ‘일정(日政)시 피징용(징병)자 명부(65권·22만 9781명)’ 등 3가지 명부 67권에 대한 분석결과를 공개했다. 이들 명부는 지난 6월 주일대사관 청사 신축에 따른 이사 과정에서 발견된 것이다. 국가기록원은 이를 이관받아 명부별 분석작업을 거쳐 이날 결과를 공개했다. 이들 명부는 1952년 12월 15일 제109회 국무회의에서 이승만 당시 대통령의 지시로 내무부에서 전국적인 조사를 통해 작성한 명부로 1953년 4월 제2차 한일회담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고 기록원은 밝혔다. ’3·1운동시 피살자명부’에는 1권 217매에 지역별로 모두 630명의 희생자가 실려 있으며 읍·면 단위로 이름, 나이, 주소, 순국일시, 순국장소, 순국상황 등이 자세히 기록돼 있다. 그동안 3·1운동을 하다 순국한 이들 중 공식적으로 인정된 독립유공자 수는 391명에 불과한데, 이번 피살자 명부 발견으로 그 숫자는 3배 가까이로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 이와 관련, 독립운동가 박은식의 독립운동지혈사에 기록된 3·1운동 피살자 수는 7509명이다. ’일본 진재(震災)시 피살자 명부’는 1923년 9월 1일 발생한 관동대지진 당시 희생된 한국인 명부로, 1권 109매에 모두 290명의 명단이 기록돼 있다. 관동대지진 당시 한국인 피살자수는 6661명∼2만명으로 추정되고 있지만 구체적인 희생자 명단이 확인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 명부에는 관동대지진 희생자 이름 외에 본적, 나이, 피살일시, 피살장소, 피살상황이 자세히 기록돼 있다. ’일정(日政)시 피징용(징병)자 명부’는 지금까지 작성된 피징용자 명부 중 가장 오래된 원본기록으로, 65권에 22만 9781명의 명단을 담고 있다. 이는 역시 1957년 한국 정부가 작성한 28만 5771명의 왜정시 피징용자명부에 비해 5만 5990명이 적지만 기존 명부에서 확인할 수 없었던 생년월일이나 주소 등이 포함돼 있어 피해보상을 위한 사실 관계 확인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록원은 내다봤다. 실제로 경북 경산지역의 경우 피징용자 4285명 중 1000여명이 종전 명부에는 없는 새로운 명단으로 밝혀졌다고 기록원은 설명했다. 박걸순 충북대 사학과 교수는 “3·1운동과 관동대지진 당시 피살자 명부는 지금까지 학계에 알려지지 않은 최초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과거사 증빙자료로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고 평가했다. 그는 “이들 명부가 정부수립 직후 우리 정부 차원에서 처음으로 전국적인 조사를 통해 작성됐다는 것도 의미가 크다”고 덧붙였다. 기록원은 이번에 수집한 자료를 국가보훈처 등 관련부서에 넘겨 독립유공자 선정과 과거사 증빙자료로 적극 활용될 수 있도록 하는 한편 명부별 세부사항을 정리해 내년 초부터 일반인도 열람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일제 징용피해자 명부·자료 대거 발견 “아직 안 알려진 의미 있는 내용도 포함”

    일제 징용피해자 명부·자료 대거 발견 “아직 안 알려진 의미 있는 내용도 포함”

    주일 한국대사관 청사를 이전하면서 한국 정부가 1950년대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일제 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 명부 및 관련 자료가 대거 발견된 사실이 뒤늦게 파악됐다. 17일 복수의 정부 소식통에 따르면 지난 6월 주일대사관 청사 신축에 따른 이사 과정에서 서고에 보관돼 있던 3·1운동 관련 희생자, 강제동원 피해자,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 피해자 등의 명부가 발견됐다. 이 자료들은 한국에서 작성된 문서와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이 자체 조사를 거쳐 작성한 피해기록도 포함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주일대사관은 이 문서에 대한 1차 분석을 거쳐 지난 8월 안전행정부로 이관했다. 이후 안행부 산하 국가기록원은 전문가, 관계기관과 함께 정부가 기존에 보유한 강제징용 한인 명부 및 자료와 대조·분석 작업을 벌였고 이르면 18일 결과를 발표할 예정이다. 기록원 관계자는 “강제동원 명부와 관련 자료가 모두 한자로 되어있어 분석작업에 시간이 많이 걸렸으며, 역사적이나 사료적으로 매우 가치가 있는 자료임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이 문서에 대해 한 정부 관계자는 “기존에 알려지지 않은 의미 있는 내용들이 포함돼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문서의 작성 목적과 관련, 다른 정부 소식통은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 협상때 일본에 제시하기 위해 작성한 문서로 보인다”고 전했다. 현재 정부가 보관 중인 강제동원 관련 문서로는 정부가 작성한 ‘왜정시 피징용자 명부’와 일본이 한국에 넘겨준 유수(留守)명부, 피징용사망자 연명부, 해군 군인군속 명부 등이 있다. 이 중 왜정시 피징용자 명부는 한국 노동청이 1958년 대일 배상청구의 근거자료로 활용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1942∼45년 일본에 끌려갔던 피징용자 28만 5183명을 도별로 파악해 작성했다. 또 유수명부는 일본 후생성이 일제 강점기에 강제 징병된 16만 148명의 한국 군인·군속 등의 병적(兵籍)을 일본 부대장들의 보고를 토대로 작성한 문서다. 도쿄 김민희 특파원 haru@seoul.co.kr 서울 윤창수 기자 geo@seoul.co.kr
  • [데스크 시각] 무엇을 향해 왜 분노하는가/박찬구 사회부장

    [데스크 시각] 무엇을 향해 왜 분노하는가/박찬구 사회부장

    지난 3일은 제84주년 학생독립운동기념일이었다. 일제 강점기인 1929년 11월 광주(光州)에서 시작된 항일 학생독립운동의 정신을 기리는 날이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돼 3·1운동 이후 최대 규모의 대중적 항일운동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군사정부와 유신시대에 정권의 홀대를 받아 폐지되기도 했지만, 민주화 정부 당시인 2006년 현재의 이름으로 부활했다. 역사적 의미에도 불구하고 이날을 기념하는 행사가 광주를 비롯해 일부 시도교육청과 학교에서 조촐하게 열렸을 뿐이라고 하니, 일본의 역사왜곡이 기승을 부리는 마당에 씁쓸한 일이다. 위로부터의 기념식은 초라했지만, 젊은 학생들의 집회와 시위는 이날도 이어졌다. 국가정보원의 대선 개입을 규탄하고 정보기관의 정치적 중립과 개혁을 촉구하는 목소리였다.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는 청소년 단체와 대안학교 학생들이 ‘민주주의를 지키고 민주주의가 살아 있는 사회를 만들어’ 학생독립운동의 정신을 이어가겠다고 밝혔다. 지역별, 대학별 시국선언도 연일 끊이지 않고 있다. 84년 전 제국주의 일본을 향했던 분노가 무소불위한 정보기관의 반(反)헌법적 행태를 겨냥하고 있는 셈이다. 비단 항일 독립운동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오랜 민주화 투쟁사에는 젊은 학생들의 행동과 희생이 따랐다. 평화적인 정권교체와 민주화 정부 10년을 경험하고도 여전히 학생들에게 사회 변혁의 부채를 안겨야 하는 현실은 모순되고 가혹한 일이다. 일부에서는 대학가의 정치편향과 이념화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하지만 국가 기관이 지난 대선 기간에 저지른 사안의 흑백은 명확하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제1조, 주권재민(主權在民)의 가치를 훼손하고, 유권자의 표심(票心)과 여론을 우롱한 범죄행위에 다름 아니다. 일부 직원의 일탈이라고 항변하지만, 조직적이고 반복된 범법 행위가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뤄졌다는 해명은 우리나라 정보기관의 음습한 과거 이력과 상명하복의 조직 특성을 생각할 때 설득력이 떨어진다. 이를 두고 정치 공세니, 대선 불복이니 하며 정치적으로 규정하려는 시도 또한 본질을 희석시키려는 행태라 할 수 있다. 헌법 정신이 유린당하고, 민주주의의 근간이 붕괴될 처지에 정파의 이익과 정치의 유불리를 따질 일은 더더욱 아니다. 대통령을 정점으로 한 여권은 검찰 수사를 지켜보겠다는 지극히 원론적이고 제3자적인 입장에서 벗어나, 국가 정보기관의 근본적인 개혁과 인사조치를 비롯한 선제적이고 실천적인 행동을 보이는 게 옳다. 단순히 재발방지의 차원을 넘어, 권력기관이 본연의 임무에만 충실할 수 있도록 균형과 견제 장치를 마련함이 당연하다고 본다. 그것이 소모적이고 작위적인 정쟁을 차단하고, 정치권이나 국민 모두가 더 큰 불행과 비극에 휩싸이지 않게 하는 처방이 될 것이다. 대입 수학능력시험이 이틀 앞으로 다가왔다. 수험생들에겐 사회로 향하는 첫 번째 고비가 될 관문이다. 격려를 보내면서도, 한편으로는 안쓰럽고 미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수능의 모범답안과는 달리 그들이 뛰어들 대학과 사회가 원칙과 정의, 상식에 항상 부합하지는 않기 때문일 터다. 바람이라면, 무엇을 향해 왜 분노해야 하는지 그 ‘시선’을 공유하고 싶을 따름이다. ckpark@seoul.co.kr
  • 교육부도 못 참은 교학사 중대 오류 3가지

    교육부도 못 참은 교학사 중대 오류 3가지

    역사왜곡 논란의 시작점이 된 교학사 교과서 역시 이번 교육부의 수정·보완 권고에서 비켜나지 못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업적을 과장하거나 친일 행적을 미화하고, 일본의 주장을 그대로 채택한 부분에서 중점적으로 수정·권고 명령이 내려졌다. 8종 교과서 가운데 가장 많은 지적을 받기도 했다. 이는 교학사 집필자인 이명희 공주대 교수가 “결코 일제의 지배와 대한민국 시대의 독재를 미화하지 않았으며 일제 식민통치와 독재시대의 역사도 정면으로 바라보고자 했을 뿐”이라고 주장한 것과 배치돼 논란이 될 것으로 보인다. 교육부는 우선 교학사 교과서의 오류로 3·1운동의 한계점을 부각한 점과 항일인사 미화 논란을 빚은 시인 최남선, 동아일보 창업주 김성수에 대한 부분을 꼽았다. 교학사 교과서는 254쪽에서 ‘3·1운동이 갖는 한계점은 무엇이었을까’라고 질문을 던지며 생각해보는 코너를 마련했지만, 교육부는 적절치 않다고 보고 ‘3·1운동의 영향이나 의의를 묻는 질문이 바람직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의견을 내놨다. 교육부는 이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 역시 과장된 부분이 있다고 봤다. 276쪽에서 교학사 교과서는 ‘만주의 한국인’을 이승만의 저서라고 소개했지만 교육부는 ‘만주의 한국인들’이 정확한 제목이고 일본의 만주 침략 과정을 조사한 ‘리튼 보고서’에서 발췌한 내용이라 이승만의 저서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 사진이 실린 269쪽도 문제가 됐다. 교학사 교과서는 윌슨 대통령을 이승만 대통령의 지도교수라고 지칭했지만 교학사는 지도교수가 아닌 총장이었다고 수정을 권고했다. 이번 교육부의 판단은 진보성향 역사단체인 민족문제연구소가 제작한 역사 다큐멘터리 ‘백년전쟁’에서 주장한 내용과 동일하다. 독도에 대해 일본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지적도 나왔다. 교학사 교과서는 355쪽에서 ‘독도’를 ‘무인도’라고 지칭했지만 교육부는 ‘무인도’라는 표현이 일본이 주장하는 무주지(無主地) 선점론에 제시된 표현으로 검토가 필요하다고 수정·보완을 권고했다. 권고 사항이 마련되자 교학사는 기존 방침대로 수정·보완에 재빠르게 들어갔다. 김호영 교학사 홍보부장은 21일 “수정·보완 권고 부분에 대해 파악한 후 교과서와 대조 중이며 22일부터 본격적으로 작업에 들어갈 생각”이라고 말했다. 반면 7종 교과서 집필자들은 조만간 대책회의를 열어 교육부의 수정·보완 권고에 대한 입장을 밝힐 계획이다. 이범수 기자 bulse46@seoul.co.kr
  • 11일 최윤희 합참의장 후보 청문회

    여야는 2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외교통일위원회, 국방위원회 전체회의를 열고 결산심사에 돌입했다. 일부 상임위는 여야 간 이견으로 파행을 겪기도 했고, 예정에 없던 현안 질의가 등장하기도 했다. 교문위에서는 당초 현안 질의가 예정돼 있지 않았지만, 최근 역사인식 논란을 빚은 유영익 국사편찬위원장이 야당의 요구로 불려 나와 곤욕을 치렀다. 박홍근 민주당 의원은 유 위원장을 상대로 “대한민국 헌법은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법통, 4·19 정신을 계승하는 것을 잘 알 텐데 유 위원장이 8·15 광복절을 건국절로 바꾸자는 건 역사의 뿌리를 이승만에게서 찾겠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기관 공식입장과 헌법정신에 부합하는지 의문인 분이 국사편찬위원회에 최고수장으로 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겠느냐”면서 사퇴를 요구했다. 외통위에서는 한·미 정상회담 수행 중 성추행 사건으로 물의를 일으킨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에 대한 관련 질의가 다시 등장했다. 우상호 민주당 의원은 윤병세 외교부 장관을 상대로 “단군 이래 처음으로 해외에 진출한 ‘바바리맨’”이라면서 “수행원은 13인승 미니버스로 이동하고 정해진 호텔에 머물러야 한다는 매뉴얼대로 했다면 이런 사건이 생겼겠나”라고 질타했다. 윤 장관은 “매뉴얼 문제를 포함해 해외순방 때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방안을 강구하겠다”며 진땀을 흘렸다. 기재위는 민주당이 정기국회 의사일정 합의 전인 지난 27일 새누리당이 상임위 개최를 거부한 것을 문제 삼으면서 파행됐다. 이에 대해 정성호 원내수석부대표는 “지난달 27일 오전 여야 수석끼리 30일 국회 정상화를 합의했는데, 지도부가 관련 상임위를 열지 말라는 지시를 내린 것은 이율배반적”이라고 지적했다. 나성린 새누리당 의원은 “우리가 상임위를 하려다가 야당 지도부에 의해 중단된 것도 많다. 여러 가지로 죄송하다”고 사과했지만 회의는 한 차례 정회를 겪었다. 한편 국방위는 오는 11일 최윤희 합동참모의장 후보자에 대한 인사청문회를 실시하기로 합의했다. 인사청문회는 공개를 원칙으로 하되, 군사작전 등과 관련한 기밀사항은 비공개로 진행된다. 황비웅 기자 stylist@seoul.co.kr
  • [씨줄날줄] 인사동 재개발/손성진 수석논설위원

    서울 인사동이 화랑과 필방(筆房), 골동품 거리가 된 것은 연유가 있다. 조선의 왕실 그림을 그리던 화원들의 일터인 도화서는 인사동 옆 견지동에 있었다. 안국동 사거리에서 종각역 쪽으로 100m쯤 가다 보면 오른쪽에 갑신정변의 발화지인 우정총국이 있고 그 앞에 도화서 터 표지석이 있다. 도화서는 숙종 때에 중구 수하동 옛 청계국민학교 자리로 옮겨갔고, 그래서 을지로 입구에 도화서 터 표지판이 하나 더 있다. 20세기에 들어서 도화서가 폐지됐지만, 인사동이 미술 거리가 된 것은 자연스럽다. 골동품 상가가 본격적으로 형성된 것은 일제강점기 때다. 인근 북촌 양반가에서 흘러나온 고서화나 골동품들을 이곳에서 일본인과 미군들이 사고팔면서 상권이 형성됐다고 한다. 종로2가에서 안국동 사거리에 이르는 길이 0.7㎞, 너비 12m인 인사동길은 1984년 11월 7일 길이름이 처음 제정되었다. 서울 시내 골동품상과 화랑 열 곳 가운데 네 곳이 이곳에 있다. 특히 필방은 90%가 인사동에 몰려 있다. 가장 오래된 서점인 통문관도 인사동에 있다. 인사동 골동품상들은 가짜 고서화사건, 금당살인사건 등으로 1970년대 말 장안동 등지로 많이 빠져나갔다. 대신 토속음식점과 전통찻집 등 유흥음식점이 들어섰다. 인사동의 명칭은 조선시대 한성부의 관인방(寬仁坊)과 대사동(大寺洞)에서 가운데 글자를 한 자씩 따서 지은 것이라 한다. 인사동에는 역사적 유산들이 많다. 태화빌딩 자리는 조선 초 태화정과 부용당이 있던 곳으로, 인조가 어릴 때 자란 잠저(潛邸,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였다. 태화정은 헌종 때 후궁 경빈 김씨의 사당으로서 순화궁(順和宮)이 되었다가 일제강점기에 매국노 이완용의 소유가 되었다. 그 후 1918년 마당에 있던 고목이 벼락을 맞아 쪼개지자 놀란 이완용이 유명한 기생집 명월관의 주인 안순환에게 팔았고 순화궁은 태화관이라는 요정으로 바뀐다.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대표들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곳이 바로 태화관이다. 인사동은 3·1운동의 발상지인 셈이다. 그러나 도시 재개발로 태화관은 헐려버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유학자인 이율곡과 조광조, 조선 말기 박영효와 지석영의 집도 인사동이나 그 근처에 있었다. 민영환 자결 터, 서북학회 터, 승동교회, 탑골공원 등 근대 문화유산들도 즐비하다. 이런 점 때문에 1978년 도심재정비 구역으로 지정된 뒤 35년간 개발이 제한됐던 인사동의 재개발 계획이 확정됐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개발을 하더라도 유산을 훼손하지 않고 잘 보존하는 일일 것이다. 손성진 수석논설위원 sonsj@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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