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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리 한국대표단 활동 지원한 佛 작가… 임정 첫 공식 외교 도왔다 [대한외국인]

    파리 한국대표단 활동 지원한 佛 작가… 임정 첫 공식 외교 도왔다 [대한외국인]

    살고 있던 건물에 사무실 내줘김규식 통신국 설치·공보 활동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각국에 일제 침략 부당성 알려부인 뒤피는 간행물 교정 작업 1919년 1월부터 열린 파리강화회의는 1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질서를 재편하는 중요한 무대였다. 한국의 독립운동가들도 국제사회에 독립 의지를 알리기 위해 대표를 파견하고 본격적인 외교 활동을 벌이기로 했다. 이때 진용을 갖춘 대한민국 임시정부 파리 한국대표단(파리위원부)의 사진은 중학교 2학년 역사 교과서에 실렸고, 1919년 4월 출범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첫 공식 외교활동을 기념하는 기록으로 널리 알려졌다. 같은 해 6~8월쯤 촬영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사진의 앞줄 한가운데에는 외국인 노부부가 앉아 있다. 사진 속 중심인물이지만 정작 이들이 누구인지는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아인슈타인과 비슷한 외모의 백발 신사는 프랑스의 저명한 작가이자 언론인이었던 에밀 블라베(?ile Raymond Blavet·1838~1924), 그의 옆은 부인 뒤피(Jos?hine Lucie Olympe Dupuis·1855~1919) 여사다. 블라베는 극작가, 소설가, 보드빌 작가 등으로 활약했고 1885~1892년엔 파리 오페라극장 사무총장을 지냈다. 잡지 ‘르 루랄’을 창간하고 일간지 ‘르 골로아’, ‘라 프레스’, ‘라 비 파리지엔느’의 편집장도 맡았다.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도 받았다. 블라베는 자신이 살던 건물 한쪽을 김규식(1881~1950·대한민국장) 등 한국대표단이 사무실로 쓸 수 있도록 내줬다. 파리 9구 샤토 38번지의 이 건물은 여전히 많은 사람이 찾는 국외 독립운동 사적지 중 하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파리위원부 청사 1919~1920’라는 현판도 걸려 있다. 외국어에 능통했던 김규식은 신한청년당에서 활동하며 한국 대표로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됐다. 1919년 2월 1일 중국 상하이에서 출발해 3월 13일 파리에 도착한 김규식은 중국 국민당 인사들과 가까웠던 중국인 이유잉(이석중·1881~ 1973)의 집에서 3월 20일부터 4월 14일까지 머물렀다. 그 사이 2·8독립선언, 3·1운동, 4월 11일 임시정부 수립까지 한국의 독립 의지를 세계에 알리려는 열망이 분출됐다. 김규식은 블라베의 아파트로 옮긴 날 곧바로 한국통신국을 설치하고 공보 활동을 시작했다. 식민 지배를 받던 한국의 독립 문제가 파리강화회의 의제로 상정되지는 못했지만 대표단은 파리에 모인 각국 대표단과 유럽 곳곳에 일제 침략의 부당성과 한국의 독립 의지를 적극적으로 알렸다. 영어와 불어로 발행한 정기간행물 ‘통신전’을 유럽 각 언론기관과 대표들에게 보냈고 소책자와 언론 기고, 각종 설명회 등 다양한 방식으로 한국의 독립 필요성을 호소했다.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 일본의 강제 합병과 3·1운동의 진상 등을 설명하고 한국 문제를 다뤄 줄 것도 촉구했다. 블라베의 부인 뒤피는 1919년 9월 말 지병으로 숨지기 전까지 한국통신국에서 발간하는 간행물의 불어 교정을 봐 줬다고 한다. 또 블라베의 소개로 김규식은 프랑스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한국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은 루이 마랭(1871~1960·애국장)을 비롯한 프랑스 주요 인사들과 교류하며 독립에 대한 공감대를 넓힐 수 있었다. 1921년 프랑스에서도 한국 독립을 지지하는 외국인 단체 ‘한국친우회’가 꾸려졌다. 블라베는 한국친우회 재무국장을 맡았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수석연구원을 지낸 김도형 박사는 22일 “블라베 부부는 한국에 친화적인 태도로 임시정부 파리위원부가 초반에 자리잡을 수 있도록 열심히 도왔다”면서 “다만 프랑스 문서보관소 등에서도 그의 한국 독립운동 지원과 관련한 자료를 발견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 임종석 ‘2국가론’에 민주당 “역사의식 부족”

    임종석 ‘2국가론’에 민주당 “역사의식 부족”

    임종석 전 대통령실 비서실장이 ‘객관적 현실을 받아들이고 두 개의 국가를 수용하자’고 했다. ‘2국가론’은 남북관계를 ‘국가 대 국가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잠정적 특수관계’로 규정한 남북 특수관계론의 폐기를 의미하는 만큼 적잖은 논란이 예상된다. 다만, 통일 결정은 후세로 유보하고 현재는 평화만 추구하자는 취지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1월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공식 발표한 ‘적대적 2국가론’과는 다른 개념이다. 임 전 실장은 19일 광주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 2024 한반도 평화 공동사업 추진위원회 주최로 열린 ‘9·19 평양공동선언 6주년 기념식’ 기조연설에서 “통일을 꼭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내려놓자. 단단히 평화를 구축하고 이후의 한반도 미래는 후세에 맡기자”며 이같이 말했다. 임 전 실장은 “비현실적인 통일 논의는 이제 그만 접어두자”며 “통일에 대한 지향과 가치만을 헌법에 남기고 모든 법과 제도, 정책에서 통일을 들어내자”고 했다. 이와 함께 박근혜 정부의 통일대박론, 윤석열 정부의 자유통일론 등을 예로 들며 “상대에 대한 부정과 적대가 지속되는 조건에서 통일 주장은 어떤 형태로든 상대를 복속시키겠다는 공격적 목표”라고 덧붙였다. 이어 ‘대한민국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규정한 헌법 3조 개정뿐 아니라 ▲국가보안법 폐지 ▲통일부 정리도 제안했다. 그는 “(이런 조항과 조직에는) 통일이 전제돼 있어 적극적인 평화 조치와 화해 협력에 대한 거부감이 일고 소모적인 이념 논란이 지속된다는 인식 때문”이라고 필요성을 설명했다. 남북 특수관계론을 버리고 ‘두 국가론’으로 가는 것은 헌법 개정이 뒤따르는 문제다. 현행 헌법 전문에는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고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해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한다”고 적혀있다. 또 헌법 제4조에는 “대한민국은 통일을 지향하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정책을 수립하고 추진한다”고 명시돼 있다. 지난 7월 민주당의 당 강령 개정 관련 토론회에서도 유사한 제안이 나와 논란이 일었다. 이연희 민주당 의원은 “남북 간의 경제 협력과 문화 교류를 통해 상호 이해와 신뢰를 증진하며, 평화로운 공존을 위한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며 “강령 작업에 ‘두 개의 국가’라는 인식으로 대북정책을 짜는 것도 논의되면 좋겠다”고 했다. 하지만 현재 민주당의 강령에는 “남북의 평화 공존과 공동 번영을 추구하며, 북한의 적대적 두 국가론에 대응하여 헌법에 기반한 평화적 통일을 지향한다”며 “헌법에 기반하여 평화적인 방법으로 통일을 추구한다”고 적혀있다. 더불어민주당 지도부 인사들도 임 전 실장의 ‘개인 의견’이라며 선을 그었다. 민주당 지도부 관계자는 “민주당 입장에서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연방제 통일안이 남아있고, 헌법에도 있는 만큼 우리 국가 차원에서도 통일에 대한 지향을 버리지 않았다”며 “투 코리아(두 개의 한국)를 공식적으로 결정한 바 없다”고 했다. 다른 지도부 관계자 또한 “(임 전 실장의 발언을) 동의할 수 없다”며 “큰 틀의 역사적 인식 부족”이라고 했다. 이날 행사에서는 문재인 전 대통령 부부를 포함해 우원식 국회의장,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 김동연 경기지사, 이종석·김연철·이재정 전 통일부장관, 박능후 전 복지부장관, 임동훈·서훈 전 국정원장 등 500여명이 참석했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영상축사로 대신했다. 문 전 대통령은 20일 전남 목포에서 열리는 ‘9·19 평양공동선언 6주년 전남 평화회의’에 참석해 기조연설을 진행할 예정이다.
  • 우뚝! 독립의 기상… 발길에 묻히고 세월에 묻혀도[마음의 쉼자리]

    우뚝! 독립의 기상… 발길에 묻히고 세월에 묻혀도[마음의 쉼자리]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이 있다. 소중한 걸 곁에 두고 잘 인식하지 못할 때 쓰는 말이다. 서울 강북구 우이동의 봉황각이 딱 그렇다. 현재 천도교의 의창수도원으로 쓰이는 곳. 천도교의 성지를 넘어 우리 독립운동사에 한 획을 그은 장소인데도 뜻밖에 찾는 사람은 많지 않다. 1945년 11월 당시 언론 보도 등 기록에 따르면 중국에서 환국한 백범 김구는 서울 강북구 우이동의 의암 손병희 묘소를 찾아 귀국 보고를 한다. 백범이 첫 번째 공식 일정으로 올릴 만큼 의암과 그의 활동 영역을 중요한 공간으로 인식했다는 뜻이다. 의암의 묘는 봉황각, 천도교 중앙종리원(옛 중앙총부) 건물 등 자신이 세우거나 관여했던 문화유산에 둘러싸여 있다. 의암의 묘와 중앙종리원 건물은 국가등록유산, 봉황각은 서울시 유형문화유산이다. 봉황각은 의암이 항일독립운동을 이끌 천도교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 1912년에 세운 교육·수련시설이다. 당시 천도교 3대 교주였던 의암은 약 2만 8000평의 땅에 봉황각 등 13채의 건물을 짓고 독립투사를 길러냈다. 3·1운동을 이끈 33명의 지도자 가운데 15명이 봉황각에서 수학했고, 봉황각 출신 독립투사 483명이 나라 곳곳에서 항일투쟁의 선봉에 섰다. 그러니까 봉황각이 3·1 만세운동의 산실 구실을 했던 셈이다. 나머지 건물은 3·1운동 이후 일제에 의해 철거됐다. 봉황각은 110년 넘은 건물치고는 상당히 말끔한 편이다. 봉황각은 명성황후의 침전이었던 건청궁 내 곤녕합의 구조와 흡사하다. 외형은 민가지만 격식은 궁궐 건축양식을 따랐다. 봉황각을 위에서 보면 ‘을’(乙) 자 모양이다. 작은 몸채의 하단 오른쪽 모서리를 큰 몸채의 상단 왼쪽 모서리와 겹쳐 지었다. 그러니까 크고 작은 집 2채가 위아래로 겹치며 ‘을’(乙) 자를 이루는 형태다. 이는 천도교의 핵심 사상 중 하나인 ‘궁을(弓乙) 사상’이 반영된 것이다. ‘궁을’은 우주 만물의 순환 작용과 활동을 형상화한 것으로 천도교 상징으로 쓰인다. 봉황각이란 이름은 교조 최제우가 자주 썼던 ‘봉황’이라는 단어에서 따온 것이다. 현판은 당대의 명필 위창 오세창이 썼다. 봉황각 옆엔 ‘ㄱ’자 형태의 기와집이 있다. 봉황각과 동시에 지어졌다고 하는데 현재는 담으로 나뉘어 있다. 의암이 이 살림채에서 실제 7년 정도 기거하며 독립투사들을 길러 냈다고 한다. 봉황각 아래 적벽돌 건물도 외형만큼이나 범상치 않은 내력을 갖고 있다. 이 건물이 처음 지어진 건 1922년이다. 현재 서울 종로구 수운회관 자리가 원래 터다. 1918년에 현 천도교 중앙대교당과 같이 기공식을 했으나 3·1운동으로 공사가 중단됐다가 1922년에야 비로소 낙성식을 했다. 애초 천도교 중앙총부라 불리다 중앙종리원으로 변경됐다. 국가유산청에는 ‘서울 구 천도교 중앙총부 본관’이란 이름으로 등록돼 있다. 1969년 수운회관이 들어설 무렵 철거될 뻔했으나 독립운동 유적 등의 이유로 천도교에서 보전을 주장해 현재 자리로 고스란히 이축됐다. 이 건물에서 의암의 사위였던 소파 방정환이 천도교 소년회를 조직했고, ‘어린이’라는 새말을 만들었고, 어린이날을 제정했다. 건물 안에 당시 간행됐던 어린이 잡지 등이 전시돼 있다. 의암의 묘는 봉황각에서 50m쯤 떨어진 산자락에 있다. 5분 남짓 걸어 올라야 한다. 이 일대에 의암 외에도 이준, 여운형 등의 묘 5기가 산재해 있다. 모두 국가등록문화유산이다. 봉황각이 깃들여 있는 곳은 북한산국립공원 초입이다. 서울 시민의 여름 놀이터인 우이동 계곡도 이쯤에서 시작된다. 나들이 삼아 찾을 때 함께 둘러보길 권한다.
  • 베일 벗은 새 역사교과서…‘자유민주주의’ 표현 들어가

    베일 벗은 새 역사교과서…‘자유민주주의’ 표현 들어가

    새 교육과정이 적용돼 내년 3월 학교에 도입될 초·중·고교 서책형 교과서 92책에 대한 검정 심사 결과 총 681종이 합격했다. 이념 논쟁 우려가 나오는 중·고교 역사교과서는 32종이 통과됐는데, 일부 교과서에 보수 역사학계 시각이 반영된 것으로 나타났다. 교육부는 2022 개정 교육과정에 따른 초·중·고교 검정교과서 심사 결과를 30일 관보에 게재했다. 내년에는 초등학교 3~4학년, 중학교 1학년, 고등학교 1학년에 새 교육과정이 적용돼 교과서가 바뀐다. 중학교 역사Ⅰ·Ⅱ의 경우 한국교육과정평가원 검정 심사를 통과한 출판사는 총 7곳으로 ▲지학사 ▲미래엔 ▲주식회사리베르스쿨 ▲비상교육 ▲해냄에듀 ▲천재교과서 ▲동아출판이다. 고등학교 한국사Ⅰ·Ⅱ는 총 9곳의 출판사가 심사를 통과했다. ▲동아출판 ▲비상교육 ▲지학사 ▲주식회사리베르스쿨 ▲해냄에듀 ▲한국학력평가원 ▲천재교과서 ▲주식회사씨마스 ▲미래엔이다. 이 가운데 처음 검정을 통과한 한국학력평가원의 교과서는 일부 보수 학계의 시각으로 현대사를 서술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김준혁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이 확보한 한국학력평가원 ‘한국사2’를 보면 교과서 표지에는 3·1운동, 88서울올림픽을 연상시키는 이미지와 연평도 포격사건 그림을 넣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설명하는 단원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은 자유민주주의에 기초한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국내외에 선포하였다’라고 서술하는 등 보수 진영에서 주로 사용해 온 ‘자유민주주의’ 표현을 썼다. 다만 1948년 8월 15일은 보수 학자들이 써온 ‘대한민국 수립’ 대신, 정부가 수립되었음을 강조하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으로 표현했다. ‘위안부’ 직접 표현 자제…‘자치론자’ 설명1948년 유엔(UN) 총회에서 승인된 한국 관련 결의안 내용에서는 ‘코리아(한국)에서 유일한 합법적 정부’라고 언급한 한국사 단행본을 인용했다. 문재인 정부 시절 검정교과서 집필기준에는 ‘대한민국 정부는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라는 내용이 빠져 논란이 일었는데 당시 교육부는 “국가기록원 자료대로라면 (대한민국은) ‘유엔 선거 감시가 가능한 지역’에서 수립된 유일한 합법정부”라고 설명했다. 또 이 교과서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주로 참고자료와 연습문제 형태로 제시했다. 본문에서는 성 착취에 대한 직접적인 표현 없이 ‘젊은 여성들을 끌고 가 끔찍한 삶을 살게 하였다’라고 표현했다. 다만, 일본이 ‘일본군 ‘위안부’ 강제 동원에 관해서는 교과서에 기술조차 하지 않고 있다’고 썼다. 이 교과서는 또한 ‘자치론자들은 일제에 맞서기보다 식민 통치를 인정하면서 한국인의 자치권과 참정권을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며 이광수 등의 자치운동을 소개했다. 이에 대해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은 “자치론자들이 친일 행보를 걸었던 이유에 대해 학생들에게 되묻는 표현을 기술함으로써 친일 행적을 일부 정당화할 가능성을 열어두었다”고 비판했다. 6월 민주항쟁 이후 들어선 정부의 특성과 업적에 대해선 이명박·박근혜 정부보다는 김대중 정부 시절의 남북 정상회담과 민주화운동 기념 사업회 발족, 노무현 정부의 10·4 남북 정상 선언 등에 더 많은 분량을 할애했다. 새 교과서는 현장 검토를 위해 다음 달 2일부터 일선 학교에 전시되며 2025학년도부터 학교에서 사용된다.
  • “김문수 말대로면 3·1운동은 내란…시스템 곳곳 붕괴 위기감”

    “김문수 말대로면 3·1운동은 내란…시스템 곳곳 붕괴 위기감”

    ‘일제강점기 선조들 국적은 일본’이라는 김문수 고용노동부 장관의 발언은 “일본의 입장에 서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이야기”라는 법사학자의 비판이 나왔다. 28일 JTBC ‘오대영 라이브’에 출연한 김창록 경북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김 장관의 관련 발언에 대해 “일본 입장에서나 사실”이라며 “한국 정부의 입장이 아닌 일본 정부의 입장을 취하겠다는 사람은 최소한 대한민국의 공무원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이날 방송에서 김 교수는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 입장에 따르면 1910년 한일병합 조약은 원천 무효다. 한반도가 일본 영토가 된 적이 없고, 한반도 인민이 일본 신민(신하인 인민)이 된 적이 없다. 대한민국의 법적 정체성에 관한 문제기 때문에 일개 정부가 바꿀 수 없다”고 짚었다. 이어 “일제강점기 선조는 일본 국민이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일본의 입장에서나 할 법한 소리”라고 했다. 한일병합조약에 대해 일본은 ‘유효’, 한국 정부는 ‘무효’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기 때문에, 김 장관의 주장은 일본 입장을 전제로 했을 때나 가능하다는 지적이다. “김문수 발언, 한일병합 유효하단 전제에서나 가능”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 당시 체결된 한일기본관계조약 제2조를 보면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고 규정한다. 여기서 ‘이미 무효’라는 표현을 두고 양국 간 해석이 엇갈린다. 해당 표현을 두고 한국 정부는 ‘불법 조약은 애초부터 무효’라는 의미로, 일본은 ‘조약은 합법적이나 2차 세계대전 패배로 어쩔 수 없이 무효가 됐다’는 의미로 각각 해석한다. 김 교수는 “조약이 처음부터 효력이 없었다는 것을 인정하면 일본으로선 한반도를 불법 지배한 게 되어 버린다. 일본 측이 이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해서 실랑이를 벌이다가 마지막에 가서 ‘이미’라는 애매한 수식어를 붙이고 각자 입장대로 해석하기로 합의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일본이 한반도 인민을 소요죄, 내란죄로 처벌할 수 있었던 것도 합법적 조약에 따라 한반도 인민은 대일본제국의 신민이라는 것을 전제로 했기 때문”이라며 “일제강점기 선조들 국적은 일본이었다는 김 장관의 발언은 이런 일본 정부의 입장을 전제로 할 때나 가능한, 대한민국 헌법 정신에 반하는 주장이다”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김 장관 말대로면) 3·1운동은 내란이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반국가단체이며, 독립투사는 ‘테러리스트’가 된다”고 꼬집었다. 김 교수는 또 “어떤 쟁점에 관해 한국과 일본 양국 정부의 입장이 정면으로 충돌할 때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한국 입장을 택해야 하는데, 일본 정부의 입장을 취하겠다는 사람은 최소한 대한민국의 공무원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뉴라이트 인사 ‘핀셋 임명’…학자로서 위기의식 느껴”김 교수는 아울러 “학계 전체를 놓고 보면 뉴라이트 인사들은 주류가 아닌 극소수”라며 일련의 인사 문제에 의문을 드러냈다. 김 교수는 “뉴라이트는 극소수 비주류인데 동북아역사재단, 국사편찬위원회, 한국학중앙연구원 등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역사연구기관을 비롯해 독립기념관의 관장까지 뉴라이트 인사를 핀셋으로 골라내듯 임명하는 것에 대해 의문이 든다”고 말했다. 그는 “거의 매일같이 매우 당혹스러운 소식들이 전해지고 있다. 학자로서 커다란 위기의식을 느낀다”며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시스템 곳곳이 지금 무너져 내리고 있다. 당연했던 일들을 전면적으로 다시 돌아봐야 하는 위기 상황이다”라고 평가했다. 한편 김 장관은 후보자였던 지난 26일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일제 치하에 국적이 일본인 것은 상식적인 것”이라는 자신의 과거 발언에 관한 질문을 받고 “일제강점기 때 나라가 없었는데 전부 일본 국적으로 돼 있지 어디로 돼 있나. 대한민국이 없는데 어떻게 하냐”고 반문했다. 뒤이어 나온 같은 질문에도 재차 “일본이지, 국적이 한국입니까. 상식적인 이야기를 해야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시면 안된다”고 답하며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야당은 반노동, 극우 인사라며 지명 철회를 요구했지만 윤석열 대통령은 29일 김 장관 임명안을 재가했다.
  • 김진태 ‘건국 발언’ 파장 확산… 강원광복회 “반헌법적”

    김진태 강원지사가 지난 15일 광복절 경축식에서 “1948년 건국”이라고 한 발언의 파장이 커지고 있다. 광복회 도지부를 비롯한 야권과 진보 성향 단체가 “반헌법적”이라며 김 지사를 규탄하는 성명을 잇달아 내고 있다. 김 지사가 불필요한 갈등과 분열을 촉발해 도정에 부담을 준다는 주장도 나온다. 김문덕 광복회 도지부장은 21일 도보훈회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헌법 전문이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 이념을 계승하고’로 시작하고, 임시정부 시절 헌법과도 같았던 임시헌장은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고 선포했다”며 “즉 1919년 4월 11일 임시정부가 수립돼 이미 대한민국이란 국호가 정해졌는데 (김 지사는)나라가 없었다고 한다”고 말했다. 앞선 경축식에서 김 지사가 “궤변으로 1948년 건국을 극구 부인하면서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훼손하고 있다”고 발언한 것에 대해 광복회 도지부가 공식 입장을 내놓은 것이다. 경축식 뒤 더불어민주당 도당 등 야권은 “임시정부 법통을 규정한 헌법을 부정하는 것”이라며 김 지사를 향한 공세를 이어가고 있다. 정의당 도당은 “민심을 모아 민생을 책임져야 하는 지사로서 때만 되면 분열과 대립을 조장하는 김 지사는 더는 지사로서 자격이 없음을 오늘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줬다”고 했고, 춘천시민연대는 “1948년 8월 15일이 건국절이라는 견해를 고수할 것이라면 자연인 신분으로 돌아가 맘껏 본인의 주장을 펼치길 권유한다”고 했다.
  • [데스크 시각] 나가사키로 가는 길

    [데스크 시각] 나가사키로 가는 길

    파나소닉 워크맨. 처음 갖게 된 ‘내 것’이었다. 서울올림픽이 열렸던 중학교 2학년 시절, ‘시험을 잘 보면 사주겠다’던 아버지의 약속 덕분이었다. 당시 워크맨 가격은 10만원 정도였다. 짜장면 한 그릇이 1000원 남짓인 시절이었다. 그해 아니면 이듬해였을 것이다. 전세 버스를 타고 충남 천안 독립기념관으로 단체 견학을 갔다. 무척 더운 날이었고, 일제의 잔인한 고문 도구들을 보며 섬뜩했던 게 떠오른다. 아마 그 순간에도 나를 포함한 또래들은 소니 워크맨을 귀에 꽂은 채 니콘 카메라의 셔터를 연신 눌렀을 것이다. 일본에 대한 감정은, 질투와 선망 사이 어느 쯤에 놓여 있었다. 옛 기억을 소환한 건, 최근 독립기념관에서 벌어지는 시위 때문이다. 논란의 중심엔 김형석 신임 독립기념관장이 자리하고 있다. 건국절 주장의 핵심은, 1919년 3·1운동과 그에 따른 임시정부 수립을 통해 1945년 광복을 맞았다는 기존의 합의 대신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건국의 시작으로 봐야 한다’는 점이다. 김 관장은 “대한민국 건국이 1919년에 시작해 1948년 정부 수립으로 완성됐다”는 단계론을 인용한다. 하지만 “우리만 그것(1919년 임시정부 건국)을 인정하면 북한이 ‘올해는 주체 112년입니다’라고 하는 것과 같은 논리”(8월 13일 CBS 라디오 인터뷰)라고 말한다. 건국절은 제정하지 않는다면서도 건국절이 중요하다고 되뇌는 ‘언어유희’를 반복하는 셈이다. 김 관장의 건국절 논의의 중요한 근거는 임시정부가 영토와 국민, 주권을 갖추지 못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임정은 연통제 등 제도를 확립하고, 국내에 일부 통치권도 행사했다. 당시 중화민국과 소련 등의 승인도 받았다. ‘조선에 대한 실효적인 지배권을 행사하지 못했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렇다면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에 점령당한 프랑스는 드골 임시정부의 존재에도 국가가 소멸됐다고 봐야 하나. 1948년 건국론은 헌법 정신도 부정한다. 1948년 7월 제정된 제헌헌법 전문은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함에…”라고 명시한다. 현행 헌법 역시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라고 적시돼 있다. 김 관장은 “일제강점기에 우리 국민들의 국적은 일본이었다”고 말한다. 이는 우리 사법부의 판결과도 배치된다. 우리 정부 및 사법부는 한일합병조약은 애초에 무효이고, 식민지배는 불법 강점이었다는 입장을 계속 확인해 왔다. 대법원은 2012년 강제동원 판결에 대해 “일제강점기 일본의 한반도 지배는 불법적인 강점에 지나지 않고”라고 명시했다.(임재성 변호사) 김 관장의 언급들은 학자로서는 충분히 가능하다. 하지만 일본의 역사 왜곡에 분노한 국민들이 내놓은 706억원으로 세워진 독립기념관의 관장으로서는 맞지 않는다. 최근 사도광산 사태에 더해 조만간 한국사 교과서 검정 결과 뉴라이트 교과서가 통과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건국절 추진을 하지 않는다”는 정부의 언급에 광복회가 의구심을 거두지 않는 게 이상해 보이지 않는 이유다. ‘일본국 장기현 서피오군 이왕도촌 대자중도 800번지.’ 현 주소체계로 옮기면 ‘나가사키시 니시소노기군 시오우지마초’다. 나가사키 시내로부터 서남쪽으로 10㎞ 정도 거리다. 몇 해 전 세상을 뜬 선친은 단 한 번도 ‘일본생’이라는 점을 언급하지 않았다. 사실관계를 확인할 방법도 없다. 할아버지가 징용에 끌려간 탓에 일본에서 태어났고, 해방 이후 천신만고 끝에 고향에 돌아왔을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다만 나가사키 시내에 투하된 미군의 원자폭탄이 조금만 잘못 떨어졌더라면 아버지는 물론 나 역시 존재하지 않았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건 확실하다. 정확한 역사 인식은 대다수 국민들에게 ‘먹고사는 문제’이자 생존의 문제다. 진정한 극일과 미래 지향적 대일 관계 역시 여기서 시작된다. 내년 초쯤 나가사키로 가는 여정을 계획하며 든 단상이다. 이두걸 전국부장
  • 혁대·병상 밑에 숨겨 반출… 영문 ‘3·1 독립선언서’ 세계에 알렸다[대한외국인]

    혁대·병상 밑에 숨겨 반출… 영문 ‘3·1 독립선언서’ 세계에 알렸다[대한외국인]

    극동 여행 중 서울에 온 매클래치한국인 독립 열망·일제 탄압 목격미국서 “가장 아름다운 저항” 극찬테일러, 매클래치에게 사본 준 듯유언에 따라 양화진 묘원에 안장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이 조선은 독립국이고 조선인은 자주민임을 선언한 3·1 독립선언서는 독립운동 역사상 가장 중요한 문서 중 하나다. 전국적인 만세운동을 일으켰을 뿐 아니라 세계에 우리의 독립 열망을 전했다. 그러나 정작 독립선언서가 어떻게 세계 각국에 전해졌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전파 과정이 비밀스러웠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영문 3·1 독립선언서가 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에 전해질 수 있었던 데는 미국의 언론인 밸런타인 스튜어트 매클래치(1857~1938)와 앨버트 와일더 테일러(1875~1948)의 역할이 컸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발행된 ‘새크라멘토 비’의 편집인이자 AP통신 이사였던 매클래치는 1919년 1월 부인과 극동 지역을 여행하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와 중국 단둥을 거쳐 3월 3일부터 6일까지 서울에 머물렀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3·1운동으로 한국인의 독립 열망과 일제의 탄압을 직접 목격했고 선교사 등과 교류하며 생생한 정보를 접했다. 그는 독립선언서를 누군가에게 받아 ‘돈을 넣는 혁대’에 숨겨 미국으로 가져갔다. 부산과 일본을 거쳐 3월 28일 하와이에 도착했다. 일본에선 ‘재팬 어드버타이저’와 AP통신 도쿄지국에 독립선언서를 넘겨줬고, 하와이에서는 지역 매체와 인터뷰를 갖고 3·1운동 소식을 전했다.매클래치는 4월 2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자마자 AP통신에 독립선언서를 전달했고, 곧바로 미국을 비롯한 세계 언론이 독립선언서 전문을 보도했다. 그는 새크라멘토 비와 샌프란시스코 이그재미너에 직접 작성한 기사로 3·1운동 목격담을 상세하게 알렸다. 그는 4월 5일자 새크라멘토 비 사설에서 3·1운동에 대해 “지금까지 전 세계에 알려지지 않은 하나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전국적인 자기통제와 조직화된 수동적 저항의 가장 아름다운 사례일 것”이라고 평가했다. 일제의 무자비한 무력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비폭력·평화 시위의 방식으로 만세운동을 이어 간 군중을 극찬한 것이다. 매클래치는 직접 쓴 3·1운동 관련 기사를 ‘아시아의 독일’이라는 책으로 엮었고 이후에도 언론·저술 활동과 재미 한인 교류를 통해 일제의 폭압과 한국의 독립 의지를 알렸다. 독립기념관 수석연구위원을 지낸 김도형 박사는 18일 “매클래치는 미국에서도 저명한 언론인이었고 이승만 전 대통령도 독립운동 지원에 고마움을 표시할 정도로 자주 연락했다”며 “다만 그가 반(反)아시아·인종주의 성향이 강해 정작 한국에서 주목하지 않았고 자료도 아직 부족하다”고 서훈이 이뤄지지 못한 이유를 설명했다. 이어 “그가 아시아를 비판한 것은 일본을 향한 것이었으며 일제에 맞선 한국의 독립운동을 알리고 지지했다”고 덧붙였다.김 박사는 매클래치에게 독립선언서를 넘겨준 사람이 당시 AP통신 임시 서울통신원으로 활동한 앨버트 테일러라고 보고 있다. 테일러는 1919년 고종 국장과 3·1운동, 제암리 학살 등을 취재하고 보도했다. 3·1운동 당시엔 부인 메리 린리 테일러가 아들을 출산해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했는데 간호사가 병원 침상 밑에 숨긴 독립선언서 사본을 발견했다. 테일러의 동생 윌리엄 테일러가 독립선언서를 구두 뒤축에 숨겨 반출해 세계에 전할 수 있었다는 건 알려진 이야기지만 이 독립선언서가 당시 매클래치에게 전달됐을 것이라는 게 김 박사의 추론이다. 테일러 부부는 1942년 조선총독부의 외국인추방령으로 추방됐다. 그들이 지낸 서울 종로구의 ‘딜쿠샤’(페르시아어로 ‘기쁜 마음’이라는 뜻)는 2017년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 앨버트 테일러의 유해는 그의 유언에 따라 서울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안장돼 있다.
  • 건국절 논란 거세지자… 尹 ‘건국은 과정’ 재강조

    건국절 논란 거세지자… 尹 ‘건국은 과정’ 재강조

    윤석열 대통령은 15일 광복절 경축사에서 건국절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건국은 과정’이라는 기존의 입장을 재확인했다. 독립기념관장 임명을 계기로 광복회와의 갈등을 촉발한 건국절 논란을 불식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대통령실은 윤 대통령이 취임 후 건국절 제정을 추진할 의사도, 검토한 적도 없다는 입장이다. 윤 대통령은 이날 경축사 서두에서 “1919년 3·1운동을 통해 국민이 주인 되는 자유로운 나라를 만들겠다는 일치된 열망을 확인했다. 이러한 열망을 담아 상하이임시정부를 세웠고, 1945년 해방 이후에도 자유를 향한 투쟁은 계속됐다”며 “1948년 자유민주주의 헌법을 제정해 이 땅에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했다”고 말했다. 1919년부터 1945년까지 건국 과정을 강조한 것이다.또 “1919년 우리 국민들은 한반도에 국민이 주인인 자유민주 국가를 세우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다”며 “1945년 일제의 패망으로 해방이 됐지만 분단 체제가 지속되는 한, 우리의 광복은 미완성일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어 “북녘땅으로 우리가 누리는 자유가 확장돼야 한다”고 했다. 대한민국의 건국은 어느 특정 시점으로 규정할 수 없고, 통일을 완성해야만 건국이 완성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윤 대통령은 3·1운동, 상하이임시정부 수립, 1945년 광복,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에서 대한민국의 성장과 번영 과정의 근본 가치가 ‘자유’라는 점도 강조했다. 윤 대통령은 “이 위대한 여정을 관통하는 근본 가치는 바로 자유”라며 “우리의 광복은, 자유를 향한 투쟁의 결실이었다”고 말했다.
  • 건국절 논란 거세지자 ‘건국은 과정’ 강조한 尹

    건국절 논란 거세지자 ‘건국은 과정’ 강조한 尹

    “1919년 자유민주국가 노력 시작” 윤석열 대통령은 15일 광복절 경축사에서 건국절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건국은 과정’이라는 기존의 입장을 재확인했다. 독립기념관장 임명을 계기로 광복회와 갈등을 촉발한 건국절 논란을 불식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대통령실은 윤 대통령이 취임 후 건국절 제정을 추진할 의사도, 검토한 적도 없다는 입장이다. 윤 대통령은 이날 경축사 서두에서 “1919년 3·1운동을 통해 국민이 주인 되는 자유로운 나라를 만들겠다는 일치된 열망을 확인했다. 이러한 열망을 담아 상해 임시정부를 세웠고, 1945년 해방 이후에도 자유를 향한 투쟁은 계속됐다”며 “1948년 자유민주주의 헌법을 제정해 이 땅에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했다”고 말했다. 1919년부터 1945년까지 건국 과정을 강조한 것이다. 또 “1919년 우리 국민들은 한반도에 국민이 주인인 자유민주 국가를 세우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다”며 “1945년 일제의 패망으로 해방이 되었지만, 분단 체제가 지속되는 한, 우리의 광복은 미완성일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어 “자유가 박탈된 동토의 왕국, 빈곤과 기아로 고통받는 북녘땅으로 우리가 누리는 자유가 확장되어야 한다”고 했다. 대한민국의 건국은 어느 특정 시점으로 규정할 수 없고, 통일을 완성해야만 건국이 완성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윤 대통령은 3·1운동, 상해임시정부 수립, 1945년 광복,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에서 대한민국의 성장과 번영 과정의 근본 가치가 ‘자유’라는 점도 강조했다. 윤 대통령은 “이 위대한 여정을 관통하는 근본 가치는 바로 자유”라며 “우리의 광복은, 자유를 향한 투쟁의 결실이었다”고 말했다.
  • 尹 “독립영웅 정신 기억… 유공자·후손 예우에 최선”

    尹 “독립영웅 정신 기억… 유공자·후손 예우에 최선”

    전날 유공자 등 100여명 초청 오찬정부·광복회, 결국 따로 기념행사 윤석열 대통령은 제79주년 광복절을 하루 앞둔 14일 독립유공자 후손 초청 오찬에서 “자유의 가치를 지키며 발전시켜 온 선조들의 뜻을 결코 잊지 않고 자유·평화·번영의 대한민국을 건설하는 데 모든 힘을 쏟겠다”고 약속했다. 김형석 독립기념관장 임명 문제를 놓고 정부와 갈등을 빚고 있는 이종찬 광복회장은 오찬에 참석하지 않았다. 윤 대통령은 이날 청와대 영빈관에서 진행된 오찬 행사에서 “우리는 선조들로부터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유산을 물려받았다. ‘국민이 주인인 자유로운 나라’를 꿈꿔 왔던 독립 영웅들의 희생과 헌신으로 빼앗긴 나라를 되찾을 수 있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미래 세대를 위한 튼튼한 대한민국 만들기, 독립 정신과 유산의 기억, 유공자와 후손 예우 등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독립유공자 후손 등 100여명이 초청된 이번 오찬에는 특별 초청 대상자로 독립운동가 허석 선생의 5대손이자 2024 파리올림픽 유도 은메달리스트 허미미 선수가 자리했다. 다만 지난해 오찬에 함께했던 이 회장 등 광복회 인사들은 참석하지 않았다. 정진석 대통령실 비서실장 등이 이 회장을 설득했으나 이 회장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독립기념관장 인사를 둘러싼 갈등이 이날도 평행선을 달리면서 15일 광복절 행사는 정부 경축식과 독립운동단체 기념식 두 쪽으로 쪼개진 채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이 회장은 윤 대통령이 김 관장을 해임 또는 임명 철회하지 않는 한 경축식에 불참하겠다는 입장이지만 대통령실은 그만한 결격 사유가 없다고 판단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광복회가 정부 경축식에 불참하는 건 1965년 광복회 설립 이후 처음이다. 광복회 외 야 6당도 김 관장 임명 철회를 요구하며 정부 경축식 불참을 선언했다. 우원식 국회의장도 정부가 주관하는 광복절 경축식에 참여하지 않고 국립서울현충원에서 독립유공자 묘역을 참배할 예정이다. 의장실 관계자는 “광복회가 불참한 광복절 경축식은 국민의 뜻을 저버린 경축식이라 참석이 어렵다”고 전했다. 이 회장은 CBS 라디오에서 김 관장 임명과 관련해 “친일파 판을 만들려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김 관장의 ‘뉴라이트 성향 논란’을 부각하며 “지하에서 꿈틀거리는 커다란 계획이 진행되는 게 아닌지 의심을 갖고 있다. 이승만 대통령을 건국 대통령으로 신격화하면서 백범 김구 선생은 고하 송진우 선생을 암살한 테러리스트로 전락시키려는 거대한 작업”이라고 주장했다. 김 관장을 겨냥해서는 “독립기념관장에 앉아 있으면 건국절을 만들 의지가 있다는 표시가 된다. 스스로 물러나는 것이 사태 해결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압박했다. 광복회는 윤석열 정부가 김 관장 임명을 통해 1948년 건국절을 만들고, 독립기념관을 건국기념관으로 만들려 한다고 보고 있다. 반면 김 관장은 MBC 라디오에서 “광복회는 이승만 대통령을 지지하는, 심정적으로 그를 따르는 모든 국민을 뉴라이트라고 매도하며 친일파라고 공식을 세워 국론을 분열시키고 있다”고 반발했다. 또 김 관장은 충남 천안시 독립기념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로부터 임명받았고 성실하게 관장직을 수행하겠다고 약속한 마당에 물러설 이유가 전혀 없다”고 말했다. 친일 논란 관련 질문엔 “역사학자로서 개인의 생각은 바뀐 것이 없다”면서도 “다만 이제는 관장이기 때문에 정책 등을 수립할 때 정부 관료나 기념관 담당자 등과 논의해 결정할 것”이라고 답변했다. 김 관장의 기자회견은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이 독립기념관을 항의 방문한 것을 계기로 급작스레 열렸다. 앞서 민주당 의원들은 김 관장 임명에 대해 진상을 규명하겠다며 관장 평가자료 등의 열람을 요청했지만 기념관 측의 거부로 빈손으로 돌아갔다. 국회에서는 야당과 시민사회 인사들이 ‘8·15 광복 79년, 윤석열 정권 굴욕 외교 규탄 국회·시민사회 1000인 선언’ 행사를 열고 김 관장을 임명한 윤 대통령 책임론을 제기했다. 박찬대 민주당 원내대표는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 이념을 계승하고 있다고 우리 헌법이 못박고 있다. 헌법을 부정하고 역사를 왜곡하는 대통령은 대한민국 대통령 자격이 없다”고 비판했다.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도 김 관장 임명에 대해 “5·18광주민주화운동 기념관장에 전두환을 임명하는 꼴”이라고 꼬집었다. 광복회를 포함한 37개 독립운동단체는 15일 서울 용산구 백범김구기념관에서 광복회원과 독립운동가 유족, 관련 기념사업회 등이 참석한 가운데 별도의 광복절 기념식을 개최할 계획이다.
  • 尹 “독립영웅들 정신 영원히 기억”… 광복절 행사는 결국 ‘두 쪽’ 따로

    尹 “독립영웅들 정신 영원히 기억”… 광복절 행사는 결국 ‘두 쪽’ 따로

    尹, 79주년 광복절 독립유공자 후손 초청 오찬정부 경축식, 독립운동단체 기념식 둘로 쪼개져이종찬 “이승만 신격화·김구 암살자 작업 의심”김형석 “뉴라이트로 매도하며 국론 분열시켜” 윤석열 대통령은 제79주년 광복절을 하루 앞둔 14일 독립유공자 후손을 초청한 오찬에서 “자유의 가치를 지키며 발전시켜온 선조들의 뜻을 결코 잊지 않고 자유·평화·번영의 대한민국을 건설하는 데 모든 힘을 쏟겠다 ”고 약속했다. 김형석 독립기념관장 임명 문제를 놓고 정부와 갈등을 빚고 있는 이종찬 광복회장은 오찬에 참석하지 않았다.윤 대통령은 이날 청와대 영빈관에서 진행된 오찬 행사에서 “우리는 선조들로부터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유산을 물려받았다. ‘국민이 주인인 자유로운 나라’를 꿈꿔 왔던 독립 영웅들의 희생과 헌신으로 빼앗긴 나라를 되찾을 수 있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미래 세대를 위한 튼튼한 대한민국 만들기, 독립 정신과 유산의 기억, 유공자와 후손 예우 등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독립유공자 후손 등 100여명이 초청된 이번 오찬에는 특별 초청 대상자로 독립운동가 허석 선생의 5대손이자 2024 파리올림픽 유도 은메달리스트 허미미 선수가 자리했다. 다만 지난해 오찬에 함께했던 이 회장 등 광복회 인사들은 참석하지 않았다. 정진석 대통령실 비서실장 등이 이 회장을 설득했으나 뜻을 굽히지 않았다. 독립기념관장 인사를 둘러싼 갈등이 이날도 평행선을 달리면서, 15일 광복절 행사는 정부 경축식과 독립운동단체 기념식 두 쪽으로 쪼개진 채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이 회장은 윤 대통령이 김 관장을 해임 또는 임명 철회하지 않는 한 경축식에 불참하겠다는 입장이지만, 대통령실은 그만한 결격 사유가 없다고 판단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광복회가 정부 경축식에 불참하는 건 1965년 광복회 설립 이후 처음이다. 광복회 외 야 6당도 김 관장 임명 철회를 요구하며 정부 경축식 불참을 선언했다. 이 회장은 CBS 라디오에서 김 관장 임명과 관련해 “친일파 판을 만들려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고 했다. 그는 김 관장의 ‘뉴라이트 성향 논란’을 부각하면서 “지하에서 꿈틀거리는 커다란 계획이 진행되는 게 아닌지 의심을 갖고 있다. 이승만 대통령을 건국 대통령으로 신격화하면서 백범 김구 선생은 고하 송진우 선생을 암살한 테러리스트로 전락시키려는 거대한 작업”이라고 주장했다. 김 관장을 겨냥해서는 “독립기념관장에 앉아 있으면 건국절을 만들겠다는 의지가 있다는 표시가 된다. 스스로 물러나는 것이 사태 해결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압박했다. 광복회는 윤석열 정부가 김 관장 임명을 통해 1948년 건국절을 만들고, 독립기념관을 건국기념관으로 만들려 한다고 보고 있다. 반면 김 관장은 MBC 라디오에서 “광복회는 이승만 대통령을 지지하는, 심정적으로 그를 따르는 모든 국민을 전부 다 뉴라이트라고 매도하고, 다 친일파라고 공식을 세워서 지금 국론을 분열시키고 있다”고 반발했다. 또 김 관장은 충남 천안시 독립기념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로부터 임명받았고 성실하게 관장직을 수행하겠다고 약속한 마당에 물러설 이유가 전혀 없다”고 했다. 친일 논란 관련 질문엔 “역사학자로서 개인의 생각은 바뀐 것이 없다”면서도 “다만 이제는 관장이기 때문에 정책 등을 수립할 때 정부 관료나 기념관 담당자 등과 논의해 결정할 것”이라고 답변했다. 김 관장은 독립기념관 사무처장 이하 전 직원과 함께 정부 경축식에 참석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김 관장의 기자회견은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민주당 의원 등이 독립기념관을 항의 방문한 것을 계기로 급작스레 열렸다. 앞서 민주당 의원들은 김 관장 임명에 대해 진상을 규명하겠다며 관장 평가자료 등을 열람 요청했지만 기념관 측의 거부로 빈손으로 돌아갔다. 국회에서는 야당과 시민사회 인사들이 ‘8·15 광복 79년, 윤석열 정권 굴욕 외교 규탄 국회·시민사회 1000인 선언’ 행사를 열고 김 관장을 임명한 윤 대통령 책임론을 제기했다. 박찬대 민주당 원내대표는 “모든 혼란과 분열에 대한 책임은 윤 대통령에게 있다”면서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 이념을 계승하고 있다고 우리 헌법은 못 박고 있다. 헌법을 부정하고 역사를 왜곡하는 대통령은 대한민국 대통령 자격이 없다”고 비판했다.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도 김 관장 임명에 대해 “5·18광주민주화운동 기념관장에 전두환을 임명하는 꼴”이라며 “윤 대통령은 대한민국 20대 대통령인가, 아니면 조선총독부 제10대 총독인가”라고 꼬집었다. 광복회를 포함한 37개 독립운동단체는 15일 서울 용산구 백범기념관에서 광복회원과 독립운동가 유족, 관련 기념사업회, 단체 회원 등이 참석한 가운데 별도의 광복절 기념식을 개최할 계획이다.
  • 중구, 광복절 기념 장충단 ‘호국의 길’ 특별 투어

    중구, 광복절 기념 장충단 ‘호국의 길’ 특별 투어

    서울 중구가 제79주년 광복절을 맞아 장충단 ‘호국의 길’ 도보 투어를 특별 운영한다고 13일 밝혔다. 일반적으로 혹서기인 7~8월에는 문화해설사 투어 프로그램을 중단한다. 하지만 광복절을 기념해 특별히 일시 재개하는 것이다. 지난 12일 시작한 특별 운영은 오는 16일까지 계속된다. 오후 6시 30분부터 약 1시간 30분간 진행된다. 문화해설사와 함께하는 도보 코스는 큰 호응 속에 신청이 조기 마감됐다. 문화해설사 없이 ‘서울 중구 스마트관광 전자지도’ 애플리케이션(앱)을 통해 거점별로 음성 해설을 들으며 자유롭게 탐방할 수도 있다. 동대입구역 6번 출구로 나오면 도보 투어 장소인 장충단공원 입구로 이어지며 코스 안내판도 설치돼 있어 누구나 쉽게 따라갈 수 있다. 투어는 장충단비에서 한국 유림 독립운동 파리장서비, 이준 열사 동상, 이한응 열사비, 유관순 열사 동상, 3·1운동 기념탑, 국립극장으로 이어진다. 김길성 중구청장은 “이번 도보 투어가 장충단공원의 역사적 의미를 다시금 되새기고 나라의 독립과 광복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게 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한편 장충단 호국의 길 투어는 다음달부터 정기 운영을 재개한다.
  • 尹 “건국절 논란, 국민에 무슨 도움 되나” 野·광복회 “역사 쿠데타… 경축식 보이콧”

    尹 “건국절 논란, 국민에 무슨 도움 되나” 野·광복회 “역사 쿠데타… 경축식 보이콧”

    김형석 독립기념관장 임명을 둘러싼 ‘건국절 논란’에 대해 윤석열 대통령이 “먹고살기 힘든 국민들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고 말한 것으로 13일 전해졌다. 말을 아끼던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도 “광복절 보이콧에는 공감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반면 광복회와 야 6당은 광복절 경축식 불참 입장을 재확인했고, 광복회에 이어 우원식 국회의장도 김 관장 임명 철회를 촉구했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이날 통화에서 “윤 대통령은 취임 후 건국절 제정에 관해 이야기하거나 추진한 적이 없고 그럴 계획도 없다”며 “이종찬 광복회장에게도 여러 번 대통령실 참모들이 직접 찾아가고 전화로도 설명했다”고 말했다. 정부가 민생에 득이 없는 건국절 추진에 나설 이유가 없다는 설명이다. 지난해 대통령실과 광복회 사이에서 물밑 중재를 했던 신지호 국민의힘 전략기획부총장은 “(이 회장의) 건국절 운운은 날조”라며 “이 회장이 유령과 싸우고 있다”고 했다. 광복회는 김 관장의 임명에 대해 ‘이승만 정부 설립(1948년)을 건국절로 삼으려는 의도’라고 의심한다. 반면 대통령실은 건국을 특정 시점이 아니라 과정으로 인식한다.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로 한다’는 헌법에 입각할 때 1919년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948년 정부 수립, 산업화·민주화 등을 거쳐 미래의 남북통일 시점이 건국일이 된다는 설명이다. 더불어민주당은 윤석열 정부의 ‘역사 쿠데타’라며 김 관장의 임명 철회를 요구했다. 박찬대 민주당 대표 직무대행 겸 원내대표는 정책조정회의에서 “강제동원 제3자 변제 발표, 홍범도 흉상 철거 추진 등 독립운동을 지우고 친일을 미화하는 역사 쿠데타를 감행해 왔다”고 비판했다. 우 의장도 이날 긴급성명에서 “대통령이 결자해지해 논란을 매듭지어야 한다”며 “독립운동을 모독하고 나라의 정체성을 훼손하는 건국절 추진 논란에 대해서도 정부를 대표해 분명한 입장을 밝혀야 한다”고 요구했다. 우 의장 측은 “대통령실 입장을 보고 경축식 참석 여부를 결정할 것”이라고 했다. 이날 오후 강정애 국가보훈부 장관은 여의도 광복회관을 찾아 이 회장에게 광복절 경축식 참석을 요청했다. 하지만 이 회장은 김 관장의 사퇴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선을 그었다. 광복회는 이날 긴급 간부회의를 갖고 “(정부) 경축식에 불참하는 이유가 훼손될 수 있다”며 15일 자체 광복절 기념식에 정당·정치권 인사를 초청하지 않기로 했다.
  • 尹, 건국절 논란에 “먹고 살기 힘든데 무슨 도움되나”

    尹, 건국절 논란에 “먹고 살기 힘든데 무슨 도움되나”

    ‘뉴라이트 성향’ 의혹을 받는 김형석 독립기념관장 임명을 둘러싼 공방이 ‘건국절’ 논란으로 옮겨붙은 가운데 윤석열 대통령이 “먹고 살기 힘든 국민들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라고 말한 것으로 13일 전해졌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이 최근 참모들에게 건국절 논란이 국민 민생과 동떨어진 불필요한 이념 논쟁이라는 취지로 지적하며 이같이 말했다고 이날 전했다. 대통령실은 정부가 처음부터 건국절을 제정할 의사나 계획이 없었다는 입장도 거듭 재확인했다. 또 국가보훈부가 김 관장을 임명한 것이 건국절 제정을 추진하려는 정부의 사전 작업이라는 야권 등의 주장도 사실무근이라고 대통령실은 선을 그었다. 우리나라 건국은 1919년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산업화, 민주화를 거쳐 이어져 온 과정으로서 특정 시점을 정할 수 없고,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는 헌법에 입각할 때 통일 시점이 건국일이 된다는 것이 대통령실 설명이다. 전광삼 시민사회수석은 최근 이종찬 광복회장을 직접 찾아가 이 같은 윤 대통령과 대통령실의 입장을 직접 설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 尹대통령 “건국절 논란, 먹고살기 힘든 국민에게 무슨 도움 되나”

    尹대통령 “건국절 논란, 먹고살기 힘든 국민에게 무슨 도움 되나”

    ‘반쪽 광복절 경축식’ 논란 일파만파야6당·광복회, 김형석 임명 철회 요구대통령실 “건국절 추진한 바 없고, 계획 없다”與 “이종찬 광복회장, 유령과 싸우고 있어”우원식 의장도 ‘건국절 입장 표명’ 요구“윤석열 대통령이 결자해지 나서야” 김형석 독립기념관장 임명을 둘러싼 ‘건국절 논란’에 대해 윤석열 대통령이 “먹고살기 힘든 국민들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고 말한 것으로 13일 전해졌다. 말을 아끼던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도 “광복절 보이콧에는 공감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반면 광복회와 야 6당은 광복절 경축식 불참 입장을 재확인했고, 광복회에 이어 우원식 국회의장도 김 관장 임명 철회를 촉구했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이날 통화에서 “윤 대통령은 취임 후 건국절 제정에 관해 이야기하거나 추진한 적이 없고 그럴 계획도 없다”며 “이종찬 광복회장에게도 여러 번 대통령실 참모들이 직접 찾아가고 전화로도 설명했다”고 말했다. 정부가 민생에 득이 없는 건국절 추진에 나설 이유가 없다는 설명이다. 추경호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이날 관훈클럽 토론회에서 “당내에서 우려가 크지 않다”며 김 관장의 임명 철회에 선을 그었다. 지난해 대통령실과 광복회 사이에서 물밑 중재를 했던 신지호 국민의힘 전략기획부총장은 “(이 회장의) 건국절 운운은 날조”라며 “이 회장이 유령과 싸우고 있다”고 했다. 광복회는 김 관장의 임명에 대해 ‘이승만 정부 설립(1948년)을 건국절로 삼으려는 의도’라고 의심한다. 반면 대통령실은 건국을 특정 시점이 아니라 과정으로 인식한다.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로 한다’는 헌법에 입각할 때 1919년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948년 정부 수립, 산업화·민주화 등을 거쳐 미래의 남북통일 시점이 건국일이 된다는 설명이다.더불어민주당은 윤석열 정부의 ‘역사 쿠데타’라며 김 관장의 임명 철회를 요구했다. 박찬대 민주당 대표 직무대행 겸 원내대표는 정책조정회의에서 “강제동원 제3자 변제 발표, 홍범도 흉상 철거 추진 등 독립운동을 지우고 친일을 미화하는 역사 쿠데타를 감행해 왔다”고 비판했다. 민주당은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의원들이 14일 독립기념관을 직접 찾아 김 관장 임명에 대해 진상을 규명하겠다고 예고했다. 우 의장도 이날 긴급성명에서 “대통령이 결자해지해 논란을 매듭지어야 한다”며 “독립운동을 모독하고 나라의 정체성을 훼손하는 건국절 추진 논란에 대해서도 정부를 대표해 분명한 입장을 밝혀야 한다”고 요구했다. 우 의장 측은 “대통령실 입장을 보고 경축식 참석 여부를 결정할 것”이라고 했다. 광복회는 이날 대통령실 인근 전쟁기념관 앞에서 집회를 열고 김 관장 임명 철회를 요구했다.
  • 40년간 조선 고아 1100명 돌봐… 독립운동가 석방 도운 일본인 [대한외국인]

    40년간 조선 고아 1100명 돌봐… 독립운동가 석방 도운 일본인 [대한외국인]

    조선 보육원장 맡아 운영에 정성손수레 끌고 군부대서 밥 얻기도판사 꾸짖고 일제의 만행엔 공격日 패망 뒤 “일본인 회개를” 주장양화진에 묻힌 단 한 명의 일본인 “소다 선생은 일본 사람으로 한국인에게 일생을 바쳤으니, 그리스도의 사랑을 몸으로 나타냄이라. 따뜻한 품에 자라난 고아가 수천이더라. 1919년 독립운동 시에는 구금된 청년의 구호에 진력하고….” 1890년 조선에서 활동한 선교사들이 묻힌 서울 마포구 양화진에는 단 한 명의 일본인 소다 가이치(1867~1962)의 묘가 있다. 그는 1905년부터 1945년 해방 때까지 40년간 조선에서 아이 1100여명을 돌본 ‘고아의 아버지’이자 독립운동가의 석방을 돕고 해방 후 “일본의 회개”를 주장한 일본인이었다. 조선인보다 더 조선을 사랑했던 소다는 “한국인들과 같이 있기를 원한다”는 소망대로 한국 땅에 묻혔다. 1867년 일본 조슈번(현 야마구치현)에서 태어난 그가 조선인과 특별한 인연을 맺은 건 1899년 대만에서 이름 모를 조선인의 도움을 받으면서다. 독일인이 경영하는 대만의 한 공장에서 사무원 겸 통역으로 일하던 그는 어느 날 밤 술에 취해 거리에서 쓰러져 죽을 뻔했다. 그때 그를 업고 여관에 데려가 치료비와 밥값을 대신 치러 준 이가 바로 조선인이었다. 소다는 이후 일자리를 구하려 1905년 6월 ‘은인의 나라’로 향했다. 서울YMCA 전신인 황성기독교청년회 학관에서 일본어 선생으로 일하며 이듬해 독립운동가였던 월남 이상재(1850~1927) 선생을 만나 크게 감화받아 기독교 신자가 된다. 소다는 1921년 가마쿠라보육원 경성지부장(현 영락보린원장)이 되면서 또 한번 인생의 전환기를 맞는다. 소다는 아내와 함께 젖동냥을 다니며 해방 때까지 1100명이 넘는 고아들을 길렀다. 운영난에도 소다는 아이들을 먹이기 위해 직접 손수레를 끌고 군부대를 찾아가 밥을 얻어왔을 정도로 정성을 다했다. 그러나 “왜놈이 조선 아이들을 어디다 팔아먹으려고 하느냐”는 오해도 받았다. 소다의 활동은 독립운동가 구명으로까지 이어졌다. 1911년 신민회 회원들이 대거 검거된 이른바 ‘105인 사건’으로 YMCA에서 함께 활동했던 기독교인들이 투옥되자 소다는 고향 사람인 데라우치 마사타케 조선 총독을 찾아가 “무고한 이들을 석방해 달라”고 요청했다. 또 1919년 3·1운동으로 월남 선생이 투옥됐을 때는 법정에서 판사를 꾸짖고 일제의 만행을 공격했다. 일본인들은 그가 동족을 배신했다고 비난했다. 소다는 “한국 고아들을 데려다 항일 교육을 한다”는 이유로 헌병대에 불려가 조사받기도 했다. 보육원을 나온 원생들이 독립운동 지하조직의 일원이 돼 체포됐을 때는 “모든 것이 나의 불찰”이라며 석방을 간청했다. 일본이 패망한 이후엔 보육원을 아내에게 맡기고 일본으로 돌아가 “전쟁을 일으킨 일본인들은 회개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소다는 여생을 한국의 보육원에서 마치길 소망했다. 1960년 일본 아사히신문이 “한국 대통령 이승만의 오랜 친구인 소다 옹이 한국 귀환을 열망한다”는 기사를 대서특필했고 영락보린원장을 맡은 한경직 영락교회 목사가 정부와 접촉해 소다에게 초청장과 재정보증서를 보내 1961년 다시 한국에 올 수 있었다. 그는 영락보린원에서 지내다 이듬해 3월 세상을 떠났다. 당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고사카 젠타로 일본 외무상이 조화를 보냈다. 한국 정부는 1962년 4월 일본인으로서는 최초로 그에게 문화훈장을 추서했다.소다의 묘비에는 주요한 시인의 추모시가 새겨져 있다. ‘언 손 품어 주고 쓰린 가슴 만져 주어/일생을 길다 않고 거룩한 길 걸었어라/고향이 따로 있든가 마음 둔 곳이어늘’
  • 사찰 독립운동 재조명…10일 구미 도리사서 학술대회

    사찰 독립운동 재조명…10일 구미 도리사서 학술대회

    경북 중서부 지역 사찰의 3·1운동을 주제로 한 학술대회가 열린다. 대한불교 조계종 도리사는 오는 10일 오후 2시 경북 구미시 해평면 도리사 설선당에서 ‘경상북도 사찰의 독립운동-경북 중·서부지역 사찰의 3·1운동’ 학술대회를 개최한다고 9일 밝혔다. 학술대회에서는 ▲일제하 김룡사 학승의 3.1운동(권대웅 전 대경대 교수) ▲김봉률의 삶과 독립운동(김광식 동국대 특임교수) ▲일제강점기 도리사 학승 김경환의 독립운동(김일수 경운대 교수) 등의 주제 발표가 있다. 이어 한상길 동국대 불교학술원 교수, 김경집 위덕대 특임교수 등이 토론자로 나선다. 경북 중서부 지역에는 조계종 8교구 본사인 직지사를 비롯해 도리사, 문경 김룡사, 대승사 등에서 많은 스님이 일제 강점기에 만세 운동, 독립운동 자금 모금 등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행사 관계자는 “호국불교의 전통과 맥을 지켜 온 스님들을 재조명하고 그분들의 숭고한 뜻을 받들기 위해 전국 최초로 학술대회를 열게 됐다”고 말했다.
  • 해외 거주 독립유공자 후손들, 광복절 맞아 한국 방문

    해외 거주 독립유공자 후손들, 광복절 맞아 한국 방문

    제79주년 광복절을 맞아 미국과 중국, 카자흐스탄 등 3개국에 거주하는 독립유공자 후손들이 방한한다. 9일 국가보훈부에 따르면 오는 11∼17일 일정으로 미국, 카자흐스탄, 중국에 거주하는 독립유공자 21명의 후손 30명이 방한한다. 이들 중에는 유관순 열사의 사촌으로 유 열사와 함께 3·1운동에 나섰던 유예도 지사의 증손자 김재권(미국)씨가 한국을 찾는다. 유관순, 유예도 지사의 가문은 3대에 걸쳐 총 9명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했다.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도 활동하며 ‘백마 탄 김장군’으로 유명한 김경천 지사의 후손 헤가이 스베틀라나(카자흐스탄)와 헤가이 다니일(카자흐스탄), 관동창의대장으로 서울진공작전을 지원했던 의병장 민긍호 지사의 후손 민 안나(카자흐스탄) 씨도 방한한다. 부부 독립유공자 후손들도 한국을 찾는다.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오영선·이의순 부부 지사의 후손 호패중, 호건성, 심운씨 등 중국에 거주하는 후손들도 이번에 조국을 방문한다. 중국 방면에서 광복군 활동 등 독립운동을 전개한 신정숙·장현근 지사의 외증손자 김진(미국)씨도 방한한다. 후손들은 11일 입국해 12일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참배하고 13일 독립기념관, 14일 국립중앙박물관, 15일 광복절 경축식, 16일 임진각 및 오두산 통일전망대 등을 방문한다. 국외 독립유공자 후손 초청 행사는 1995년 광복 50주년을 계기로 시작돼 지난해까지 20개국 957명이 참여했다. 강정애 국가보훈부 장관은 “일제강점기, 조국 독립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던 선열들이 계셨기에 대한민국은 꿈에 그리던 광복을 이룰 수 있었다”며 “정부는 독립유공자 후손분들께도 가슴 뜨거운 긍지와 자부심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 6·25전사 고 임진원 순경 74년만에 가족 품으로

    6·25전사 고 임진원 순경 74년만에 가족 품으로

    아내와 두 살배기 어린 자녀를 두고 6·25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한 병사의 유해가 70여 년 만에 가족 품으로 돌아갔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국유단)은 2000년 4월 경북 칠곡군 다부동 유학산 일대에서 발굴된 유해가 고 임진원 순경으로 확인됐다고 30일 밝혔다. 고인은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48인 가운데 한 명인 독립운동가 임규 선생의 조카이기도 하다. 전북 김제경찰서 소속 경찰관이었던 고인은 영광, 목포, 벌교, 하동, 사천 등에서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한 작전을 수행한 뒤 국군 제1사단을 지원하고자 칠곡 다부동 ‘유학산 전투’에 참전했다가 1950년 8월 30일 서른살의 나이로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유학산 전투는 국군 제1사단이 1950년 8월 13일부터 8월 30일까지 경북 칠곡군 유학산 일대에서 북한군 2개 사단의 공격을 격퇴하고 방어선을 확보해 대구 방어에 기여한 전투다. 고인의 딸인 임정순 씨는 아버지의 유해를 찾고자 2008년 유전자 시료를 국유단에 제공했지만 당시 둘의 가족관계는 확인되지 않았다. 이후 국유단은 최신 기술로 유전자를 재분석해 유해 발굴 24년 만에 가족관계를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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