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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학농민혁명 발상지 고창, 국가적 차원서 성지화 작업 필요”

    “동학농민혁명 발상지 고창, 국가적 차원서 성지화 작업 필요”

    “동학농민혁명의 발상지인 고창 성지화 작업을 국가적인 차원에서 추진해 왜곡된 역사의 면모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유기상 전북 고창군수는 11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그동안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무장봉기(무장기포)가 제7차 교육과정 한국사 교과서에 ‘동학농민혁명의 시발점’으로 수록돼 역사적 사실이 국민적 공감대를 얻는 계기가 됐다”고 밝혔다. 무장은 고창의 옛 지명이고 기포는 동학의 조직인 포(교구 또는 집회소)를 중심으로 봉기한 것이다. “고창 동학농민혁명사 재조명 과업의 첫 번째 사명인 무장봉기 역사교과서 수록이 126년 만에 이뤄져 그 의미가 새롭게 조명되고 있습니다. 동학농민혁명 자긍심 찾기 노력이 이제야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고 봅니다.” 그는 “고창 동학농민혁명 성지화, 무장기포지·전봉준 장군 생가터 국가사적 등재, 동학농민혁명 역사벨트 조성을 적극 추진하겠다”면서 “동학선양사업을 의향정신을 살린 자랑스러운 군민운동으로 승화시키겠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유 군수와의 일문일답.-‘고창 무장봉기가 동학농민혁명의 시발점’이라는 내용이 새 학기 고교 한국사 교과서 8종에 모두 수록됐다.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이 1894년 3월 20일 고창에서 발생한 무장봉기라는 사실이 역사학계에서는 이미 정설이었다. 한국사 교과서 수록으로 동학 전문연구자와 고창군민 등 소수만 알던 역사적 사실이 국민적 공감대를 얻는 획기적인 계기가 됐다. 이로써 그동안 전국 각지에서 빚어졌던 동학농민혁명 시발지 논란은 정리됐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지난달 25일 공음면 구암리 구수마을 동학농민혁명 기념탑에서 선열들에게 교과서를 봉정하는 행사를 가졌다.” ●‘보국안민’ 혁명의 목표 최초로 제시 -고창 무장봉기가 동학농민혁명에 미친 영향은. “조선 후기에는 지역적 한계를 넘지 못한 수많은 민란이 있었다. 무장봉기는 혁명의 이념이자 지표인 ‘무장포고문’과 농민군 행동강령인 ‘4대 강령’을 정립 발표함으로써 농민혁명의 틀을 갖춘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보국안민’이라는 혁명의 목표가 최초로 제시됐고 지역적 한계를 벗어나 전국적인 대규모 항쟁으로 커졌으며 봉건제도 개혁의 시발점이 됐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민족·민중항쟁의 근간으로 평가받고 있다.” -고창 무장봉기를 부각시키기 위한 과정과 지자체의 노력은. “자주와 평등의 위대한 동학농민혁명 정신을 고창군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으로 계승·발전시키기 위해 학술·연구·문화사업을 하고 있다. 동학기념사업회, 동학유족회 등 지역 단체와 울력해 매년 학술대회를 열고 무장기포기념제·무장읍성축제를 개최한다. 기념제와 축제는 ‘동학농민혁명은 무장기포지로부터, 3월 20일의 함성은 전국적인 봉기로’라는 주제로 개최된다. 이는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애국·애족 정신과 무장기포일의 참다운 의미를 널리 알리는 한편 전국적인 축제로 승화시키기 위한 것이다. 기념제에서는 동학농민혁명군들이 읽어 내려갔던 무장포고문을 낭독하고 농민군이 걸었던 진격로 걷기 체험행사를 한다. 축제 기간에는 무장현 관아·읍성 무혈입성 재현 등을 통해 역사적 의미를 재조명하고 있다.” -전북 정읍시가 동학의 시발점은 무장봉기가 아니라 ‘고부봉기’라며 역사왜곡 바로잡기에 나서기로 했다. “역사에 대한 평가는 연구자들에게 맡겨야 한다. 이제 동학농민혁명은 지역을 넘어 한국사에 빛나는, 세계 속의 혁명으로 재평가돼야 한다. 지역주의가 발목을 잡는 것은 선열들이 바라는 바가 아닐 것이다.” -한국사 역사교과서에 ‘동학농민혁명’을 ‘동학농민운동’으로 기술했다. “동학농민혁명의 대의와 의미, 가치를 생각할 때 교과서에도 운동이 아닌 혁명이라고 기술해야 한다. ‘실패한 혁명’이라는 일부의 평가절하를 극복하고 혁명을 운동으로 표기한 현행 교과서를 개정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 ●대접주 손화중의 근거지… 혁명 기반으로 -고창에서 대규모 농민봉기가 발생할 수 있었던 배경은. “조선 말기 고창에는 판소리 사설로 사회적 모순과 봉건제도 타파를 꿈꾸는 민중들의 사상적 깨우침이 깔렸었다. 특히 고창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가장 강력하고 중심적인 활동을 했던 전봉준의 태생지이자 대접주 손화중의 근거지였다. 전봉준이 고창 출신이었기에 협력기반이 두텁고 호남에서 가장 세력이 컸던 손화중포의 인적·물적 동원능력이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도소(도접주들의 총집회 기관) 거소에는 주물공장, 대장간, 마방 등이 있고 보부상을 비롯한 장꾼들이 드나들며 정보 공유 및 조직이 활성화돼 혁명을 시작할 수 있는 기반이 됐다. 무장봉기가 일어난 공음면 구수마을의 넓은 충적지는 수천의 동학군들이 집결해 훈련하기 쉬운 지형이었고 석교 세창과 장터 포구는 군수품과 군량미 조달이 쉬운 지리적 조건을 갖췄다.” -고창군과 동학농민군을 이끈 전봉준과의 관계는. “고창이 전봉준 장군의 출생지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간 정읍 고부, 정읍 태인, 전주 등 여러 설이 분분했지만 많은 연구자가 전봉준의 출생지가 고창읍 죽림리 당촌마을임을 밝혀냈다. 현재 생가터를 사적으로 지정하고 전봉준 장군 동상을 세우는 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단체장으로서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의의와 평가는. “동학농민혁명은 아래로부터 민중혁명이라는 측면에서 1만년 민족사의 가장 빛나는 한 장면이다. 제대로 조명되면 세계 4대 혁명의 맨 앞자리에 평가될 역사다. 동학농민혁명은 자주와 평등, 민주적 절차를 확립하고자 했던 근대 민중운동의 효시로 참여자와 유족, 기념사업, 발상지 고창군의 상징성 등이 높이 평가돼야 하나 일제와 군사정권 등에 의해 심각하게 왜곡되고 평가절하됐다. 126년이 지난 이제라도 동학농민혁명 고창 성지화 작업이 국가적 차원에서 원활하게 진행돼 자주적인 우리 역사의 흐름을 계속 이어 가야 한다.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이들의 숭고한 애국·애족정신을 기리며 소중한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를 당당하게 지켜 나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창은 의향… 청소년 역사교육의 장 활용 -동학농민혁명이 고창군의 정체성에 미친 영향은. “고창은 의향이다. 정의로운 고창군민들은 불의를 보면 목숨을 걸고 싸웠다. 동학농민혁명의 발상지로서 항일의병 운동, 독립구국운동, 최근의 촛불시위에 조금의 주저함도 없었다. 임진왜란 3대 대첩에 고창·무장·흥덕 의병이 모두 참여했다. 임진·정유 왜란 때도 고창 흥덕 남당회맹단 등의 의병이 일어났다. 고창 성내 출신 근촌 백관수 선생은 당시 서른의 나이로 일본 유학생 400여명이 모인 가운데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는 거사를 주도했다. 그 독립선언서의 초안이 국내로 전달돼 3·1운동을 촉발시켰다. 국가보훈처에 등록된 국가유공자도 90여명으로 전북에서 가장 많다.” -동학농민혁명 선양사업 과제는. “고창 동학농민혁명 성지화, 무장기포지·전봉준 장군 생가터 국가사적 등재, 동학농민혁명 역사벨트 조성을 적극 추진하겠다.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과 국가기념일을 제정하고도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는 현실이 아쉽다. 혁명의 정신을 계승하고 위상을 바로 세우기 위한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동학농민혁명을 세계 혁명사의 한 축으로 알리기까지 아직 갈 길이 멀다.” -동학농민혁명을 지역발전과 연계 방안은. “전봉준 생가와 무장기포지를 역사문화유적지로 가꿔 청소년들의 역사교육과 체험의 장으로 활용할 예정이다. 세계문화유산인 고인돌과 선운사, 고창읍성 등 주변 관광지와 연계해 관광벨트로 육성하겠다. 강인한 생명력을 지닌 민초를 상징하는 녹두, 추운 겨울을 이겨 낸 청보리를 주제로 한 음식 등 동학농민혁명 콘텐츠를 개발해 지역경제 활성화를 도모하겠다.” 고창 임송학 기자 shlim@seoul.co.kr
  • 슈퍼 여당 동력으로… 동해북부선 착공 ‘남북 협력’ 다시 달린다

    슈퍼 여당 동력으로… 동해북부선 착공 ‘남북 협력’ 다시 달린다

    총선 압승으로 정치적 동력을 확보한 정부가 4·27 판문점선언 2주년을 맞아 경색된 남북 관계의 변곡점을 만들고자 애쓰고 있다. 다만 코로나19 국면에서 북측의 호응 여부는 아직 불투명한 상황이다. 올해 신년사와 3·1절 기념사에서 남북 교류·협력을 거듭 제안한 문재인 대통령은 27일 4·27 판문점선언 2주년 메시지에서 또 한번 남북 관계의 복원 의지를 강조할 것으로 보인다. 문 대통령은 신년사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답방을 언급하면서 접경지역 협력을 제안하고 신년 기자회견에선 “북미 대화만 바라보지 말고 남북 관계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독자적 남북 협력에 속도를 내겠다고도 했다. 지난 3·1운동 기념사에선 감염병 방역협력을 제안한 바 있다. 통일부는 앞서 동해북부선을 남북 교류협력 사업으로 지정하며 남북 철도 협력을 수면위로 끌어올렸다. 다만 북한의 호응이 관건으로 떠오른다. 북측이 코로나19에 대한 위기감으로 대외 교류를 중단한 데다 김 위원장의 건강이상설까지 나온 상황에서 당장 긍정적 반응을 기대하긴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고유환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는 “여당이 다수 의석을 차지하며 추진력은 확보했지만 코로나19 문제와 답보 상태인 북미 관계로 쉽지는 않다”며 “지방자치단체나 민간단체가 코로나를 계기로 협력사업을 추진하면서 동력을 살려 당국 간 대화로 이어 가려는 노력을 해야 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서유미 기자 seoym@seoul.co.kr
  • 목숨 걸고 광복군에 무기 공급… 항일투쟁 중 사료 모아 독립사 집필

    목숨 걸고 광복군에 무기 공급… 항일투쟁 중 사료 모아 독립사 집필

    “위협과 모욕을 수없이 퍼붓다가 필경에는 온갖 악독한 형벌을 행한다. 나를 꿇어 앉힌 후에 직경 삼촌(三寸)쯤 되는 통나무를 다리 사이에 끼우고 양단에 두 놈이 올라서서 통나무를 디디면 형문(刑問) 다리가 부러질 듯 기절하게 되는데, 나는 끝까지 아무 말도 않고 당하였다.” 1929년 2월 만주에서 일본 경찰에 붙잡힌 김승학 선생이 고문을 받던 상황을 기록한 ‘망명객행적록’ 부분이다. 희산(希山) 김승학 선생은 만주 대한독립단에서 활약하고 독립신문 사장과 참의부 참의장을 지낸 독립운동가다. 선생은 1881년 7월 12일 평북 의주군 비현면 마산동에서 찢어지게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가 이웃집 방아를 찧어 주고 삯으로 등겨를 받아와 먹었다고 한다. “등겨에 백태(白太·흰콩)를 약간 섞은 것은 상미(上味)라 하여 우리 형제를 먹이고 부모님은 순전한 등겨만을 자시었다. 아침은 겨밥, 저녁은 송피 범벅, 이런 생활을 매일 계속하였다.”배움에 대한 열의가 강했던 선생은 가난한 살림에도 7년 동안 서당에 다니며 한학을 익혔다. 1899년 선생은 명망 있던 유학자 조병준(건국훈장 독립장)의 문하생이 됐다. 조병준은 “우리는 섬 오랑캐 왜노(倭奴)와 400년 동안 원수인데 을미년에 우리 국모 명성황후를 참시(慘弑)하였으니, 우리 선비로서는 거의하여 왜노를 토벌하는 것이 당연한 의무다”라고 말했다. 선생은 스승의 우국충절에 크게 감동해 서간도 지역을 다섯 달 동안 답사하며 독립운동을 꿈꾸었다. 선생은 1904년 한문박사과 시험에 응시했는데 시험 부정으로 탈락하고 말았다. 이에 학무국장을 찾아가 항의했다가 타협책으로 한성사범학교 입학을 제의받아 1년 남짓 신학문을 공부했다. 1907년 일제가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자 선생은 서울 종로에서 배일(排日) 강연을 하다 체포돼 석 달 동안 구금당했다. 그 후 고향으로 돌아와 극명학교 등에서 근무했는데 매일같이 일경이 찾아와 “김승학과 같은 불온분자에게 교육을 받으면 순량한 자제들까지 불량자가 된다”며 이간질을 했다. 더는 고국에서 있을 수 없었다. 1910년 경술국치 직후 선생은 만주로 건너가 봉천성 관립 강무당에 입학, 군사교육을 받고 의병단에 가담해 6년 동안 활동했다. 국내에서 3·1운동이 발발하자 만주에서 대한독립단이 결성됐는데 선생은 재무부장이 됐다. 선생의 첫 임무는 국내에 잠입해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고 지단(支團)을 조직하는 것이었다. 선생은 평남북 일대를 다니며 친지, 동창들을 설득해 지단과 연통제 기관을 만들었다. 첩보를 접한 일경은 집요하게 추적했고 선생은 배추씨 장수와 좁쌀 장수로 가장해 그때마다 따돌리며 활동을 계속했다. 목숨을 건 활동 덕분에 1920년 1월까지 평안남북도 일대 52곳에 하부 조직을 만들고 독립운동 자금도 수만원을 모았다.선생은 이어 상하이임시정부에 대표로 가서 만주 독립운동 통합단체 명칭을 받고 무기를 구입해 오는 임무를 맡게 됐다. 마우저 총과 루저 권총 240정, 탄환을 상하이에서 비밀리에 구입하기는 했는데 운반이 문제였다. 철궤 4짝을 사서 포장한 뒤 누에고치 거래로 위장해 우여곡절 끝에 압록강변 안동현에 도착했다. 그러나 일경이 정보를 듣고 대기 중인 상황이었다. 독립군을 도와주던 이륭양행 주인 아일랜드인 조지 쇼의 도움으로 무기는 내렸지만 선생은 야음을 틈타 상륙하다 경찰견까지 동원한 일제의 추적을 받게 됐다. 옥수수밭에 사흘이나 숨고 맨발로 산골짜기를 헤매며 천신만고 끝에 귀환, 임무를 완수할 수 있었다. “이 무기는 국내 동포들이 주는 것이니 제군들은 무기를 생명과 같이 사랑하여 한 발의 탄환이라도 헛되게 쓰지 말고 1탄에 왜적 1명씩 잡기로 결심하여야 한다.” 1920년 광복군사령부 무기수여식에서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이 무기로 광복군사령부는 서너 달 동안 일본군과 78회 교전하면서 주재소 등을 습격해 일경 95명을 사살하는 막대한 전과를 거두었다. 일제가 한인들을 학살한 경신참변 후 선생은 임정에 상황도 알릴 겸 두 번째로 상하이로 갔다. 뜻밖에도 선생은 독립신문 사장을 맡게 됐다. 당시 독립신문 책임자였던 소설가 이광수는 변절해 국내로 돌아갔고 프랑스 조계에 있던 신문사는 일제의 방해로 인쇄 도구가 압수되고 신문 발행이 중단된 상태였다. 선생은 프랑스 영사관과 교섭한 끝에 신문을 복간, 1927년까지 6년 동안 발행을 책임졌다. 그동안 일제의 추적을 피하고자 28번이나 인쇄소를 옮겼는데 한번 옮길 때마다 마차 2량과 인력거 20여대가 필요했고 한밤중에 이사를 다니기도 했다.선생은 1924년 무렵 임정 학무부 총장 대리 등의 직도 맡았다. 그런데 당시 서간도 독립운동 단체인 통의부와 참의부의 알력이 깊어져 유혈극이 벌어졌다. 독립신문의 글 때문에 불똥이 선생에게까지 튀자 사장직을 사임했다. 그것도 잠시 선생은 임정의 임명으로 비어 있던 참의부 제4대 참의장이 됐다. 갈등을 겪으면서도 참의·정의·신민 3부는 통합을 추진했는데 통일 단체 이름은 ‘혁신의회’였다. 1929년 2월 5일 선생은 혁신의회 회의를 마치고 나오다 환인현 와니전자에서 일경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상하이에서 무기를 구입한 일, 독립신문을 발간한 일 등을 캐물으며 일경은 혹독한 고문을 했다. 특히 선생이 틈틈이 수집해서 보관하던 독립운동사 사료를 내놓으라고 추궁했다. “왜경에게 피포(被捕) 후 손발이 요절되는 수십 차 악형이 주로 이 사료 수색 때문이었다”고 선생은 밝힌 바 있다. 선생은 굴복하지 않았고 5년의 옥살이도 버텨냈다.출옥 후 선생은 다시 만주로 망명, 임정 베이징 조직을 맡고 만주 천금채에 맡겨 둔 독립운동 자료를 찾았다. 독립운동 자료는 선생에게 목숨과도 같은 것이었다. 베이징 조직이 탄로 나는 바람에 선생은 베이징을 탈출, 70여일 동안 무려 1000㎞를 뚫고 한구에 도착했고 만주로 돌아와 은둔하다 그리던 광복을 맞았다. 광복 후 선생은 정치 참여는 자제하고 독립신문 복간과 독립운동사 편찬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의 방해로 복간은 중단됐고 ‘한국독립사’는 1964년 탈고했지만 출간 직전인 1964년 12월 17일 선생은 별세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경기 고양에 있던 묘소는 2012년 국립대전현충원으로 이장했다. 광복회 학술연구원장으로 있는 장증손자 김병기 박사를 만났다. 선생은 3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도 여러 번 감옥에 갇혔고 자손들도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선생과 가족들은 피란지 부산에서 10여년을 살았는데 부두 노동자 취업도 못하게 이승만 정권의 탄압과 감시를 받았다고 한다. 오리를 키우고 행상을 해서 생계를 잇는 형편이라 자손들이 포상 신청을 하자고 하자 선생은 “독립운동을 한 게 무슨 벼슬이라도 되느냐”고 화를 내며 만류했다고 한다.김 박사에 따르면 정부가 독립운동가 포상을 시작한 때가 1962년인데 처음에는 친일 역사학자들이 심사했다고 한다. 독립운동가들이 반발해서 이듬해 독립운동사 편찬자인 선생 등 독립운동가들도 심사위원으로 위촉됐다. 선생은 심사를 하면서 이병도 등 학자들에게 “자네들이 독립운동에 대해서 뭘 아는가”라고 일갈했다고 한다. 김 박사는 40대에 독립운동사 연구를 시작해 만주 참의부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선생의 유업을 이어받아 ‘한국독립사’를 7권으로 나눠 현대화하고 보완해 간행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글 사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서철모 화성시장, 4·15 제암·고주리 학살사건 희생자 묘역 참배

    서철모 화성시장, 4·15 제암·고주리 학살사건 희생자 묘역 참배

    서철모 화성시장이 제암·고주리 학살사건 101주년을 맞아 15일 제암리 순국기념관을 찾아 희생자 묘역을 참배했다. 서 시장은 이날 코로나19 여파로 취소된 추모제를 대신해 희생자에 대한 참배와 헌화로 순국선열들의 희생에 대한 아픈 역사를 기억하고 유공자들의 넋을 기렸다. 101년 전인 1919년 4월 15일에 발생한 제암·고주리 학살사건은, 당시 그 어느 지역보다 조직적이고 치열했던 화성 3.1운동의 확산을 막기 위한 일본군의 계획적인 보복행위였다. 일본군은 제암리 교회에 무고한 주민 23명을 가둔 채 학살하고 31개 가옥을 불태웠다. 인근 고주리에서는 김흥렬 선생을 비롯한 일가족 6명을 주모자로 몰아 총살했다. 하루 동안 모두 29명이 학살당한 유례없는 반인륜적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캐다나 선교사 스코필드 박사의 보고서와 임시정부 파리위원회에서 발행한 ‘독립운동사-3·1운동사’ 등을 통해 국제사회에 알려지면서, 일본의 무단통치에 대한 세계인의 공분을 자아내며 국내외 독립운동을 활성화하는 데 기여했다. 서 시장은 “시민 모두 화성 독립운동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을 느끼고 선열들의 숭고한 희생을 잊지 않기를 바란다”며 “앞으로도 독립영웅들의 헌신과 투쟁이 화성의 역사와 전통으로 빛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김병철 기자 kbchul@seoul.co.kr
  • 日 육사 출신으로 조국 독립 위해 헌신한 ‘전설적인 항일 영웅’

    日 육사 출신으로 조국 독립 위해 헌신한 ‘전설적인 항일 영웅’

    김경천은 김좌진, 홍범도를 뛰어넘는 전설적인 항일 영웅이다. 백마를 타고 일본군을 무찔렀고 ‘진짜 김일성 장군’으로 불리기도 했다. 독립운동가 나경석은 “조선의 유지 청년이 노령에 수천수만이 출입하였으나 김 장군같이 위대한 공적을 성취한 사람은 없다”고 했다. 김경천은 백범일지에 버금가는 ‘경천아일록’(擎天兒日錄)이라는 친필 수기를 남겼다. 늦게서야 발견된 수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이시영이 보고 싶다. 신동천이 보고 싶다. 신용걸이 보고 싶다. 안무가 보고 싶다.…” 독립군 전우들을 향한 애틋한 마음이 담겨 있다.김경천은 1888년 6월 5일 함남 북청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김정우는 구한말 군기창장 등으로 일한 고위인사였다. 1900년 10월 김경천 가족은 서울 사직동으로 이사했고 김경천은 1904년 일본 유학 길에 올랐다. 그의 진로에 큰 영향을 준 것은 서점 주인이 건네준 책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었다.1905년 9월 김경천은 도쿄 육군유년학교 예과 학년에 입학했다. 650명 중 유일한 한국인이었다. 예과를 마치고 일본육군사관학교에 23기생으로 들어가 1911년 일본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육사 재학 중에 나라는 일본으로 넘어갔고 김경천은 엄청난 심적 갈등을 겪었다. 김경천은 그래도 실력 양성을 위해 기병학교까지 마친 뒤 1919년 2월 귀국했다. 2·8 독립선언이 선포되던 때였다. 귀국하자마자 3·1운동이 일어났고 시위 현장을 보면서 김경천은 피눈물을 금할 수 없었다. “자동차에 우리 청년 4~5명이 실려 있다. 모두 죄수복을 입었다. 그 근방에 나이가 40가량 되는 부인이… 그 뚫어지고 더러워진 치마로 얼굴을 가리고 통곡하는 것이 보인다. 아, 나도 가슴이 막히면서 두 눈에 눈물이 흐른다.”●함남 북청서 태어나 서울 사직동 이주 김경천은 더는 일본 군인으로 살 수 없었다. 일본 육사 후배 이응준, 지대형(지청천)과 함께 서간도로 가기로 했다. 그러나 이응준은 중간에서 길을 달리했다. 김경천은 1919년 6월 6일 가족에게 알리지도 않고 수원으로 내려가 기차를 타고 신의주로 간 뒤 압록강을 건넜다. 일본 육사 출신 군인이 망명하자 일제는 충격에 빠져 현상금 5만엔을 내걸었다. 부인 유정화를 체포해 고문했지만 부인은 남편의 행방을 발설하지 않았다. 김경천은 일단 중국 안동에서 활동하던 대한독립청년단에 가입했다. 그러나 활동이 어려워지자 하루 20㎞ 넘게 보름 동안 걸어 봉천성 유하현 신흥무관학교에 도착, 교관으로 일했다. 그곳에는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출신인 신팔균도 있었다. 경천(擎天) 김광서, 동천(東天) 신팔균, 청천(靑天) 지석규 세 사람은 남만주 삼천(三天)이라 불렸다. 1919년 9월 중순 김경천은 길림 서간도 군정서에서 무기구입 위원으로 선정돼 연해주로 출발, 이듬해 3월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다. 그런데 그달 12일 소비에트 적군과 한인 빨치산부대가 아무르강 하구 니콜라옙스크의 일본군을 전멸시킨 전투가 있었다. 일본 시베리아 주둔군은 보복으로 4월 4일 연해주 신한촌을 공격, 한국인 빨치산과 민간인 5000여명을 학살한 ‘4월 참변’을 일으켰다. 독립운동가 최재형도 이때 살해됐다. 김경천은 간신히 피신했다가 한인 빨치산 근거지인 내수청 대우지미로 이동했다. 당시 간도나 연해주에는 중국 마적이 날뛰었다. 마적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민가를 습격해 재물을 빼앗고 사람을 납치했다. 일제는 마적단에 무기를 대주고 한인들을 괴롭히도록 했다. 김경천은 마적을 일본군과 동일시하고 대우지미에서 마적토벌대를 만들어 토벌에 나섰다. 4월 8일 마적 380여명이 침입하자 김경천의 토벌대 45명은 소비에트 적군 600명과 연합해 360여명을 몰살시켰다. 이어 창해청년단을 조직, 총지휘관을 맡아 1920년 5월 다우지미 전투에서 마적 300여명 중 60명만 살려 보냈다. 1921년 1월 김경천은 블라디보스토크 임시정부 격인 대한국민의회에 참석하라는 공문을 받았지만 응하지 않았다. 김경천은 “독립을 하자는데 너무도 희생이 없다. 너무도 정치에만 눈이 팔리고 실천력이 적다. 너무도 자칭 영웅이 많다. 너무도 당파가 많다”고 한탄했다. 군인인 그에게는 오직 무장투쟁만이 독립의 길이었고 자리다툼만 하는 임정은 곱게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1921년 4월 트레치푸진에서 혈성단 강국모의 요청으로 한인 빨치산부대 사령관이 됐다. 더불어 ‘수청의병대’를 조직했다. 각지에서 모인 한인 빨치산 병력이 800여명이었고 소총과 군마로 무장했다. 김경천은 트레치푸진에 설립된 사관학교 교장도 맡아 사관 양성에도 힘을 쏟았다.●시베리아 내전서 가장 위대한 ‘이만 전투’ 그해 8월 수청의병대는 연해주에 있는 러시아 적군(赤軍·혁명군)과 연합했다. 일본군은 러시아 백군(白軍·반혁명군)과 연합해 의병대와 적군을 공격했다. 당시 일본은 러시아혁명 이후 극동 지역이 혼돈에 빠지자 시베리아를 차지할 기회라고 판단해 17만여 병력을 배치했다. 1921년 11월 수청의병대와 적군은 일본군과 백군에 포위돼 퇴각했고 카르톤 마을에서 적군 대대장이 항복하고 말았다. 이듬해 1월 김경천은 적군 패잔병과 의병대의 혼성 부대를 이끌고 이만(달레네친스크) 지역의 백군을 공격했다. 200여명의 혼성부대는 700여명의 백군과 6시간 동안 전투를 벌인 끝에 이만을 정복했다. 이 전투는 시베리아 내전에서 가장 위대한 전투라는 극찬을 받는다. 김경천은 그때의 상황에 대해 “(군사들이 지나가는) 발자국마다 피가 고이었다”고 썼다. 1922년 여름 이후 김경천은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러시아 육사에서 교관을 초청해 급여를 주며 교육시켰다. 김경천의 목표는 조국의 독립이었다. 러시아 땅에서 독립운동을 펼쳤기에 러시아인들과 협력했고 적군의 도움을 받아 한반도로 진공하겠다는 계산이었다. 그런데 패퇴를 거듭하던 일본군이 시베리아에서 철수하자 러시아는 빨치산부대도 해산하라고 명령했다. 김경천에게는 절망적인 소식이었다. 김경천은 이후 1932년부터는 하바롭스크 합동국가보안국 통역으로 일했고 블라디보스토크 고려사범대에서 군사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1935년 무렵 스탈린의 강압정치가 한인에게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김경천은 간첩죄로 체포돼 1936년 9월 3년형을 받았다. 1939년 2월 일단 석방됐다. 그 사이 가족은 카자흐스탄 카라간다로 강제 이주를 당했다. 재회도 잠시 그해 12월 간첩죄로 유죄 판결을 받아 시베리아로 보내졌다. 김경천은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이런 점이 이유가 됐을 것이다.●광복 못 보고 유배지서 심장질환 사망 김경천은 2년 동안 철도 건설 노역에 동원됐다가 1942년 1월 2일 소련의 북동쪽 끝 코미자치공화국으로 유배돼 심장질환으로 사망했다. 스탈린이 죽은 뒤 김경천은 무죄 선고를 받았고 사후 복권됐다. 김경천은 수용소 근처에 집단으로 묻혀 별도의 묘소가 없다. 김경천은 2남 4녀를 두었다. 아내와 자식들은 밀항선을 타고 연해주로 가 같이 살았지만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강제 이주는 더욱더 큰 고난을 주었다. 가족들은 국영농장에서 힘든 노동에 동원됐고 인민의 적으로 박해를 받았다. 후손들은 현재 러시아와 카자흐스탄 등에 흩어져 살고 있다. 1998년 정부는 김경천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고 막내아들 김기범(1932년생)씨와 막내딸 김지희(1928년생)씨는 정부의 초청으로 아버지 사후 처음으로 고국을 방문했다. 2015년 8월 정부는 모스크바에 사는 의학박사인 김경천의 손녀 옐레나 필랸스카야 등 후손 7명의 특별귀화를 허가했다. 글 사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전국 독립·국가유공자 합동묘역 57개소, 국가 관리 묘역 지정

    전국 독립·국가유공자 합동묘역 57개소, 국가 관리 묘역 지정

    전국의 독립유공자 및 국가유공자 합동묘역 57개소가 국가 관리 묘역으로 지정됐다. 국가보훈처는 19일 국립묘지 외의 장소에 안장된 독립유공자 및 국가유공자 합동묘역을 국가 관리 묘역으로 지정해 관리하도록 한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 지난 17일 국무회의에서 의결됐다고 밝혔다. 개정된 법률에 따르면 기존 독립유공자 및 국가유공자 합동묘역은 소유자와 관리자, 유족의 요청을 받아 국가 관리 묘역으로 지정해 국립묘지에 준해 관리한다. 독립유공자 합동묘역은 서울 강북구에 있는 수유리 애국선열 묘역, 광복군 합동묘역을 비롯해 서울 중랑구 망우공원묘지(애국선열묘역), 서울 용산 효창공원 삼의사 및 임시정부요인 묘역, 경기 화성 제암리 3·1운동 순국묘역과 고주리 애국선열 6인 순국 묘역 등 12개소다. 국가유공자 합동묘역은 6·25전쟁 전몰군경 등이 안장된 곳으로 전국 45개소에 달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해 현충일 추념사를 통해 “합동묘역을 국가가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무연고 국가유공자 묘소를 국가가 책임지고 돌보겠다”고 밝힌 바 있다. 국가 관리 묘역 지정을 통해 국가차원에서 상시 점검 및 훼손복구 등 체계적인 관리를 해 나간다는 계획이다. 또 정부는 배우자와 직계 존·비속이 없는 국가유공자 등의 묘소를 국립묘지로 이장할 경우 이장 비용을 국가가 지원하기로 했다. 보훈처는 “나라를 위해 헌신한 국가유공자 묘소가 무연고로 방치되는 것을 방지하자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개정안은 공포 후 6개월이 지난 후 시행된다. 이주원 기자 starjuwon@seoul.co.kr
  • KB국민은행 제작 ‘대한이 살았다’ 올해의 광고상 온라인·모바일 대상

    KB국민은행 제작 ‘대한이 살았다’ 올해의 광고상 온라인·모바일 대상

    KB국민은행이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제작한 ‘대한이 살았다’가 제27회 올해의 광고상 온라인·모바일 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대한이 살았다’는 3·1운동 직후 서대문형무소에서 만세운동을 펼친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만든 노래를 재창작한 형태의 광고다. 올해 공개한 ‘2020 대한이 살았다’도 유튜브 조회수 260만회를 넘어섰다. 홍인기 기자 ikik@seoul.co.kr
  • [근대광고 엿보기] 독립운동가의 발명특허 1호-말총모자/손성진 논설고문

    [근대광고 엿보기] 독립운동가의 발명특허 1호-말총모자/손성진 논설고문

    고종의 조칙(詔勅)으로 단발령이 내려진 것은 을미사변 직후인 김홍집 내각 때였다. 남자들이 머리카락을 자르자 상투가 없는 머리에 얹을 모자가 외국에서 들어와 인기를 끌었다. 대한매일신보 1909년 8월 24일자에 중산모자, 중절모자, 운동모자, 학생모자, 부인모자, 예복모자, 상복모자 등 모자를 종류별로 소개한 광고가 실렸다. 이 모자들은 보통 모자가 아니라 말총으로 만든 말총모자다. 말총이란 말의 갈기나 꼬리의 털을 뜻하는데 질기고 촉감이 좋아 예전부터 갓, 망건, 탕건, 관모, 허리띠 등을 만드는 데 쓰고 있었다. 광고 위쪽에는 등록상표인 비둘기 문양이 있다. 그 아래에 남성이 모자를 물로 씻는 모습이 있듯이 말총모자의 장점은 심하게 구겨져도 물에 담그면 잘 펴지고 세척이 쉽다는 점이었다. 땀으로 더러워진 부분과 먼지, 때를 비누와 솔로 문질러 씻으면 새것처럼 쓸 수 있다고 광고에서는 설명하고 있다. 전통 갓을 만드는 재료인 말총을 이용해 만든 서양식 모자는 광고에 써 놓은 대로 발명특허를 받은 제품이었다. 광고를 내기 5일 전인 1909년 통감부 특허국에 특허 제133호로 등록됐으며 한국인 특허로는 1호였다. 말총모자를 만들어 특허를 받은 인물은 정인호(1869~1945) 선생이다. 그런데 광고에 보면 좌우에 서양식 복장을 하고 모자를 쓴 남녀가 ‘옥호서림광고’(玉虎書林廣告)라고 적힌 글자판을 들고 있어 의아하게 한다. 정인호는 궁내부 감중관이라는 관직과 청도군수 등을 지내다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되자 사직하고 1906년 고향 양주에 동흥학교를 세워 교장을 지냈다. 또 교과서를 저술하는 등 교육을 통한 구국운동에 헌신한 사람이다. 구세의원이라는 병원을 세워 운영하기도 했다. 1908년 선생은 ‘초등대한역사’, ‘최신초등소학’ 등의 교과서를 저술, 이 교과서들을 옥호서림에서 펴냈는데 옥호서림의 주인이 바로 정인호였다. 모자를 책과 함께 옥호서림에서 판매한 것이다. 선생은 말총으로 모자뿐만 아니라 핸드백, 토시, 셔츠 등의 다양한 제품을 만들어 일본, 중국 등에 수출도 하며 민족기업으로 키웠다. 그렇게 번 돈은 구국활동에 썼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운동에 본격적으로 투신, 구국단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단장을 맡아 상하이 임시정부의 활동을 지원했다. 특히 부자들을 상대로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는 데 힘을 쏟았는데 1920년 12월(음력) 충남의 부호 임병철에게 군자금 납입을 요구하다가 일경에 붙잡혀 징역 5년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sonsj@seoul.co.kr
  • [책꽂이]

    [책꽂이]

    루돌프 코는 정말 놀라운 코(고윤주 지음, 궁리 펴냄) 15년간 3000여명의 어린이를 진단하고 치료해 온 고윤주 루돌프어린이사회성발달연구소 소장이 말하는 ‘자폐 스펙트럼 장애’. 뉴턴과 아인슈타인 모차르트, 앤디 워홀, 스티브 잡스, 안데르센 등의 위인들도 자폐적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이들은 관계 맺기에 어려움을 겪었을 뿐 남들과 다른 발상에 몰두해 각 분야 최고가 됐다. 368쪽. 2만원.일본 작가들 눈에 비친 3·1 독립운동(세리카와 데쓰요 지음·옮김, 지식산업사 펴냄) 3·1운동 전후 조선인의 삶을 그려 낸 일본 작가들의 작품집. 한국문학을 연구해 세종대·인하대 등에서 교수로 재직했던 저자가 일본 작가들의 작품을 엄선해 해방 전후로 나눠 소개했다. 일본 작가들 눈에 비친 식민지 조선은 서정적인 풍경 속 제국주의가 표방한 근대 문명화가 무색하게 지독한 가난이 주를 이루는 곳이었다. 476쪽. 1만 8000원.선택된 자연(김우재 지음, 김영사 펴냄) 초파리 유전학자가 들려주는 26종 모델생물 이야기. 모델생물이란 초파리, 효모, 쥐처럼 생물학 현상을 연구하기 위해 특별히 선택된 생물이다. 저자는 이들의 특징, 이들을 통한 놀라운 과학적 발견과 생물학의 흐름, 선택의 주체인 과학자의 삶을 조화롭게 엮어 풀어냈다. 284쪽. 1만 4800원.왜 일본은 한국을 정복하고 싶어 하는가(하종문 지음, 메디치미디어 펴냄) 제국의 탄생에서부터 극우파의 부활까지 일본의 생래적 특성을 그렸다. 한신대 일본학과 교수로 일본 근현대사를 연구해 온 저자는 일본의 내우외환을 잠재우는 사상이었던 ‘정한론’이 채택된 과정부터 한중일 외교사 150년을 톺아보며 한반도 미래 전략을 제시한다. 344쪽. 1만 8000원.쓰고 싸우고 살아남다(장영은 지음, 민음사 펴냄) 오는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글쓰기로 새로운 세상을 꿈꾼 여성 25명의 이야기가 출간됐다. 마르그리트 뒤라스, 버지니아 울프, 박경리, 수전 손택 등은 여성의 글은 허영에 들뜬 취미에 불과하다는 편견에 맞서 전 생애를 통해 투사로서의 글쓰기를 행해 왔다. 문학에 한정하지 않고, 미술·학술 분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여성 작가를 조명했다. 256쪽. 1만 5000원.완전히 새로운 공룡의 역사(스티브 브루사테 지음, 양병찬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전 세대를 아우르는 과학 교양서를 표방한 공룡 역사서. 스코틀랜드 에든버러대학의 젊은 공룡학자인 저자는 공룡의 흥망성쇠를 폴란드의 채석장, 브라질의 오지, 미국의 평원을 누비며 만난 화석을 통해 조망한다. 452쪽. 2만원.
  • 경기도의회 더불어민주당 “3·1운동정신으로 코로나19극복” 논평

    경기도의회 더불어민주당 논평 경기도의회 더불어민주당(대표의원 염종현·부천1)은 억압을 뚫고 희망을 만들었던 우리 민족의 3.1운동 정신으로 국민들과 함께 코로나19를 반드시 극복할 것을 다짐한다. 또 코로나19 확산으로 침체된 지역경제를 살리기 위해 우리당이 제안한 추경이 조속하게 편성될 수 있도록 하겠다. 올해는 우리 조상들이 하나가 돼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던 3.1운동 101주년이 되는 해이다. 지금 대한민국에는 101년 전 우리 조상들이 그랬던 것처럼 코로나19를 극복하기 위한 연대와 희생의 물결이 전국 방방곳곳으로 번져가고 있다. 코로나19로 국가적인 재난상황을 맞아 수많은 의료진과 자원봉사자들이 대구로 달려가고 있고, 국민성금이 530억이 넘게 모였으며 마스크 기부자들이 줄을 잇고 있다. 또한 함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착한 임대료 운동이 경기도의 수원시, 시흥시, 구리시 등의 전통시장에서부터 그 열기가 고조되고 있다. 마침 정부에서도 착한 임대료 운동에 동참하는 건물주에게는 임대료 인하분의 50%에 대해 소득세·법인세 등을 감면하기로 했다. 경기도에서도 도내 임대인들이 자발적으로 임대료를 인하할 수 있도록 인센티브 부여 등을 비롯한 정책들이 조속히 시행될 수 있는 추경편성에 적극 나서야 한다. 지난 26일과 27일에 걸쳐 경기도는 전격 입수한 신천지 신도 3만 3809명에 대한 긴급 전수조사를 실시해 유증상자 740명을 확인했다. 매우 심각한 상황이지만 이는 우리 정부가 국민 건강과 안전을 위해 선제적 시행하고 있는 검진의 결과로 안전한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한 과정이다. 어느 국가도 시행하지 못한 코로나19 검진자 수가 11만명에 육박하고 있다. 이는 우리나라의 의료 및 검진 시스템이 선진적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확진자 수가 비록 3일(화) 현재로 4천8백12명에 이르고 있지만 철저히 대비하면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 엄중한 위기의식을 갖고 지역사회 감염에 대비해야하지만, 지나칠 정도로 불안을 증폭시키는 중앙의 일부 언론의 경쟁적이고 편향된 언론보도는 자제되어야한다. 지금은 차분하고 냉철한 보도로 국민들이 이 국면을 이겨낼 희망의 메시지를 함께 공유할 시기다. 전문가들은 앞으로 2주 동안 온 국민의 자발적 격리와 사회적 거리두기, 개인위생 관리가 어느 때보다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지금은 코로나19 극복에 모두가 힘을 하나로 모아야 할 때이다. 경기도의회 더불어민주당은 대구로 달려간 의료진 및 자원봉사자, 힘들게 번 돈을 코로나19 극복을 위해 기꺼이 성금을 내신 분들, 착한 임대료 운동에 동참하는 건물주 등 국가적 재난을 맞아 연대와 희생을 보여주고 있는 국민들에게 감사함을 전한다. 101년 전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온갖 어려움을 헤치고 조국독립의 순간을 맞이했던 조상들처럼 경기도의회 더불어민주당은 우리 속에 내재한 연대정신을 되살려 코로나 바이러스의 위기를 도민들과 함께 반드시 극복할 것이다.
  • 文대통령 “3·1운동처럼… 온 국민이 함께하면 이겨 낼 수 있다”

    文대통령 “3·1운동처럼… 온 국민이 함께하면 이겨 낼 수 있다”

    “감염병 남북 공동 대응”… 보건 협력 제안 “日 과거 직시해야 미래로 나아갈 수 있어” 코로나 영향에 50여명 참석·수여식 생략문재인 대통령은 1일 “함께하면 무엇이든 이겨 낼 수 있다”며 코로나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극복을 위한 ‘단결’을 호소했다. 문 대통령은 서울 배화여고에서 열린 3·1절 101주년 기념식에서 “한국전쟁의 참화 속에서도, 외환위기가 덮쳐 온 1998년에도 지난 100년간 단 한번도 빠짐없이 3·1 독립운동을 기념하며 단결의 ‘큰 힘’을 되새겼다. 오늘의 위기도 온 국민이 함께 극복해 낼 것”이라고 강조했다. 문 대통령은 “대구·경북에 이어지고 있는 응원과 온정의 손길이야말로 대한민국의 저력이며 대구·경북은 결코 외롭지 않다”며 “안으로는 코로나19를 극복하고, 밖으로는 한반도 평화와 공동 번영을 이뤄 흔들리지 않는 대한민국을 만들어 내는 것이 진정한 독립이며 새로운 독립의 완성”이라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북한을 향해 보건 분야 공동 협력을 제안하고, 일본에 대해 미래지향적 협력 관계 구축 의지를 내비치면서 공통분모로 코로나19 등 비전통적 안보 위협에 대한 공동 대응 필요성을 꼽았다. 문 대통령은 “감염병 확산에 남북이 함께 대응하고 접경지역의 재해재난과 한반도의 기후변화에 공동으로 대처할 때 겨레의 삶이 보다 안전해질 것”이라며 “9·19 군사합의를 준수하며 다양한 분야의 협력으로 넓혀 나갈 때 평화도 굳건해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보건 협력을 화두로 던진 것은 코로나19가 북한에도 최우선 현안이라는 점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보건의료 인프라가 취약한 북한은 코로나19가 확산하자 북중 국경을 전면 봉쇄하는 등 비상방역체계에 돌입했지만, 방역물자 수급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선제적으로 손을 내밀어 남북 대화의 불씨를 살리겠다는 의도가 엿보인다. 정부는 최근 민간단체나 국제기구가 대북지원 협력을 요청해 온다면 “긴밀하게 협의해 나가겠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다만 북한의 호응은 미지수다. 북한은 지난달 개성 남북연락사무소를 잠정 폐쇄하는 등 남측의 코로나19 확산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 문 대통령은 일본을 향해 “과거를 직시할 수 있어야 상처를 극복할 수 있고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며 “과거를 잊지 않되, 우리는 과거에 머물지 않을 것이며 일본 또한 그런 자세를 가져 주길 바란다”고 했다. 통상 3·1절 기념사와 달리 한일 관계 언급이 눈에 띄게 줄어든 점이 눈에 띈다. 한일 관계 복원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과거사와 미래지향적 관계를 분리하는 ‘투트랙 기조’를 유지하되 후자에 더 무게를 둔 것이다. 지난해 3·1절 기념사에서 ‘친일잔재 청산’을 강조한 것과 달리 ‘강제징용’, ‘지소미아’ 등을 언급하지 않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수출규제와 관련, “지난해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라’를 목표로 ‘소재·부품·장비의 독립’을 추진할 수 있었던 것도 3·1 독립운동 정신과 국난 극복의 저력이 있었기 때문”이란 표현으로 갈음했다. 지난해 100주년 기념식이 광화문광장에서 1만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것과 달리 올해는 배화여고에서 50여명만 참석한 가운데 진행됐다. 훈·포장 수여식도 생략됐다. 코로나19에 대응 중인 정세균 국무총리와 진영 행정안전부 장관,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은 불참했다. 악수도 최소화했다. 문 대통령도 주요 참석자들과 목례만 했다. 다만 행사 후 미래통합당 황교안 대표와는 악수했다. 장소는 옛 배화학당이 3·1운동 이듬해인 1920년 만세운동이 열린 곳이라는 점을 고려했다.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 3·1운동처럼 코로나도… 우리는 함께 이겨낸 역사가 있습니다

    3·1운동처럼 코로나도… 우리는 함께 이겨낸 역사가 있습니다

    27일 서울도서관 외벽에 ‘우리에겐 함께 이겨내온 역사가 있습니다’라는 문구를 담은 3·1운동 제101주년 꿈새김판이 설치돼 있다. 서울시는 코로나19 등 우리사회가 마주한 난관과 갈등을 시민들의 참여를 통해 슬기롭게 극복해 나가자는 의미를 담았다고 밝혔다. 박윤슬 기자 seul@seoul.co.kr
  • 3·1운동처럼 코로나도… 우리는 함께 이겨낸 역사가 있습니다

    3·1운동처럼 코로나도… 우리는 함께 이겨낸 역사가 있습니다

    27일 서울도서관 외벽에 ‘우리에겐 함께 이겨내온 역사가 있습니다’라는 문구를 담은 3·1운동 제101주년 꿈새김판이 설치돼 있다. 서울시는 코로나19 등 우리사회가 마주한 난관과 갈등을 시민들의 참여를 통해 슬기롭게 극복해 나가자는 의미를 담았다고 밝혔다. 박윤슬 기자 seul@seoul.co.kr
  • [서울포토] ‘우리에겐 함께 이겨내온 역사가 있습니다’

    [서울포토] ‘우리에겐 함께 이겨내온 역사가 있습니다’

    27일 서울 중구 서울도서관 외벽에 ‘우리에겐 함께 이겨내온 역사가 있습니다’라는 문구를 담은 3·1운동 제101주년 꿈새김판이 설치돼 있다. 2020.2.27 박윤슬 기자 seul@seoul.co.kr
  • 동북아역사재단, 광화문역 지하에 독도전시실 개관

    동북아역사재단은 3·1운동 101주년을 맞아 28일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에 독도전시실을 연다고 26일 밝혔다. 재단은 서울시로부터 지하보도 135㎡ 공간에 대한 사용 허가를 받아 전시실을 마련했다. 전시실은 고대부터 현대까지 독도 역사를 설명하고, 독도 관련 인물을 소개한다. 코로나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산 우려로 별도 개막식은 하지 않는다. 관람 시간은 오전 11시∼오후 8시. 재단 관계자는 “올해는 대한제국이 칙령으로 독도가 우리 땅임을 국내외에 선언한 지 120주년이 되는 해이자 민간에서 10월 25일을 독도의 날로 정한 지 10주년이 되는 해”라며 “27만명이 방문한 서대문구 독도체험관 운영 경험을 살려 광화문역에서도 독도가 대한민국 영토임을 널리 알릴 것”이라고 말했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2·8독립선언서 국내 반입, 3·1만세 시위… 평생 독립 위해 싸운 ‘열사’

    2·8독립선언서 국내 반입, 3·1만세 시위… 평생 독립 위해 싸운 ‘열사’

    “너희들은 왜 죄 없는 사람을 핍박하느냐.” 취조관의 질문에 김마리아는 되받아쳤다. 왜경은 가죽 채찍과 대나무봉을 휘두르고, 양팔을 엇갈리게 결박해 천장에 매달아 놓고 팽이처럼 돌리며 때렸다. 옷을 벗기고 쇠갈퀴로 가슴을 찌르고 불로 지졌다. 살이 터지고 온몸이 피로 물들었다. 일본에 유학 중이던 마리아는 2·8독립선언서를 허리띠에 숨기고 국내로 들어와 고향 황해도로 자금을 모으러 갔다가 3·1운동 소식을 들었다. “여학생들도 바라만 보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마리아는 황에스터, 나혜석 등 11명이 모인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3월 5일 서울역광장 등에서 대규모 만세 시위가 벌어졌고 마리아와 모교인 정신여학교 학생들도 목청껏 만세를 불렀다. 다음날 학교에 왜경이 들이닥쳐 마리아를 포승줄로 묶어 끌고 갔다. “선생님!” 학생들은 울부짖었다. 마리아는 고문으로 코와 귀에 고름이 고이는 등 만신창이가 됐다. 지옥 같은 서대문형무소로 옮겨졌다가 그해 7월 24일 증거 부족으로 석방됐다.김마리아는 1892년 7월 11일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에서 태어났다. 13살 때 어머니마저 여읜 마리아는 1906년 6월 서울로 가 서울 연동여학교(정신여학교로 개명)에 입학했다. 마리아의 작은언니 미렴과 오현관·오현주 자매 등은 누룽지를 함께 먹으며 공부했다고 해서 ‘누룽지방 형제’라고 불렸다. 1910년 6월 졸업한 마리아는 모교 교단에 섰다. 정신적 지주였던 교장 루이스는 마리아에게 유학을 권했다. 1915년 5월 마리아는 일본 도쿄여자학원에 입학했다. 졸업이 다가올 즈음 민족자결론이 무르익었다. 1919년 1월 모임에서 황에스터는 “국가의 대사를 남자들만이 하겠다는 것인가”라고 열변을 토했다. 2·8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사람은 남학생 11명이었지만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는 마리아와 황에스터 등 여학생들도 참석했다. “최후의 일인까지 자유를 위하는 열혈을 유(流)할지니….”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자 일본 경찰이 습격해 회관은 아수라장이 됐다. 마리아도 끌려갔다가 풀려났다. ●애국부인회 결사부 만들어 직접 독립운동 3·1만세 시위 주도로 악랄한 고문을 받은 몸에서는 고름이 흘렀다. 그사이 숙부 필순이 이역만리에서 일본인 의사가 준 우유를 마시고 숨졌다. 틀림없는 독살이었다. 마리아는 분루를 삼키며 또 다른 길을 모색했다. 몸도 성치 않은 마리아의 의지는 놀라웠다. 석방된 지 석 달도 안 된 1919년 10월 19일 뜻을 같이하는 여성 16명이 모여 대한애국부인회를 결성했다. “부녀들도 남자들처럼 혁혁한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고 마리아는 말했다. 마리아는 회장이 되고 시도 지부장을 뽑는 한편 결사부를 만들어 직접 독립전쟁에 참여하고자 했다. 한 달 만에 회원이 2000여명으로 늘어나고 현재 가치로 수억원인 6000원을 상하이 임시정부에 보냈다. 그러던 11월 어느 날 ‘누룽지방 형제’ 오현주가 불쑥 찾아왔다. 오의 안내로 임정 밀사를 자칭하는 사람을 만났는데 부인회의 활동을 캐묻는 것이었다. 10여일 후 마리아가 수업을 하고 있을 때 종로경찰서 왜경들이 들이닥쳤다. 마리아는 수갑이 채워져 연행됐다. 오현주의 배신이었다. 마리아는 붙잡힌 동지들에게 “어떤 고통을 당해도 비밀을 알려 주지 말자”고 당부했다. 간부들은 포승줄에 묶여 서울역으로 끌려갔다. 그 밀사는 대구경찰서 소속 경찰이었다. 군중은 “여성독립단이여, 용기를 내시오. 대한독립 만세!”라고 외쳤다. 대구로 붙잡혀 간 간부는 52명이었다. 끔찍한 고문이 자행됐고 회장인 마리아에게 더 혹독한 고문이 가해졌다. 장작개비를 두 무릎 사이에, 쪼개진 대나무를 두 팔 사이에 끼우고 몸을 빨래 짜듯이 비틀어 댔다. 마리아는 신음도 내지 않고 고통을 견뎌 냈다. 그러자 고무 호수를 코에 끼우고 물을 넣었다. 마리아의 얼굴과 입에서 핏물이 흘러내렸다. 대구 검사국에 송치된 마리아는 깜짝 놀랐다. 만세 시위 때 심문한 가와무라 검사가 자진 전근을 해온 것이었다. 가와무라가 생년월일을 묻자 마리아는 “서력 1892년…”이라고 했다. “어째서 대일본제국의 연호를 쓰지 않는가”라고 하자 마리아는 “일본 연호를 배운 적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다”고 말했다. 고문에 고문이 더해져 마리아는 몸이 퉁퉁 부었고 정신 이상 증세도 보였다. 일제는 마지못해 병보석을 허가했다. 가와무라는 ‘일본의 국적(國賊)’이라며 징역 5년을 구형했고 1심에서 징역 3년이 선고됐다.●임시의정원 의원 임명… 中서도 항일운동 마리아는 중국 망명을 결심했다. 몰래 병원에서 빠져나와 배를 타고 서해를 건너 1921년 7월 21일 중국 땅을 밟았다. 고문 후유증은 여전해 몇 달 동안 치료를 받아야 했다. 마리아는 1922년 임시의정원 황해도 의원에 임명됐고 대한여자청년회를 조직하는 등 항일 의지를 버리지 않았다. 상하이 임시정부는 창조·개조·옹호파로 분열돼 있었다. 1년에 가까운 통합 노력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실망스러운 상황에서 마리아는 미국 유학을 선택했다. 1923년 7월 12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지만 건강은 계속 나빠 병석에 눕는 날이 많았다. 힘들게 미주리주 파크대학을 졸업하고 시카고대학 연구학생을 거쳐 뉴욕 컬럼비아대 사범대학원에 진학, 1929년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마리아는 뉴욕에서 황에스터 등 옛 동지를 만나 근화회를 조직했다. 혈혈단신 마리아의 유학 생활은 몹시 고달펐다. 점원, 행상, 보모 등을 전전하며 학비를 벌었다. 연민과 애정을 느끼고 혼인을 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미 대한의 독립과 결혼했다”며 거절했다.1932년 7월 마리아는 11년의 외국 생활을 정리하고 고국 땅을 밟았다. 일제는 감시와 협박을 계속하면서 거주지와 직업을 제한했다. 마리아는 다음해 함남 원산 마르타윌슨 여자신학원 교수로 부임했다. 신사참배를 거부해 탄압을 받았고 신학원도 폐교당했다. 악독한 고문의 후유증은 전신을 짓눌렀다. 마리아는 쓰러졌고 1944년 3월 13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일제와 맞섰던 52년 인생을 마감했다. 언니 미렴은 유골을 대동강에 뿌렸다.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열사의 모교 정신여학교는 정신여중고로 바뀌어 1978년 서울 송파구 잠실동으로 이전했다. 종로구 연지동에는 옛 교사(校舍)와 수령 550여년의 교목(校木) 회화나무가 그대로 남아 있다. 교정 한쪽에는 서울보증보험 건물이 들어서 있다. 서울보증보험과 종로구청의 노력으로 지난해 회화나무 옆에 열사의 흉상을 건립하고 탐방로를 조성했다.●유품은 치마저고리·수저 한 벌이 전부 잠실종합운동장 옆 정신여중고 교정에 들어서면 또 다른 흉상과 ‘김마리아관’(대강당)이 눈에 들어온다. 교장실에서 만난 최성이 정신여고 교장은 “열사는 평생 독립운동을 했고 사실상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의원”이라면서 “사단법인 김마리아기념사업회 주도로 추모 사업을 펴고 있는데 업적에 비해 낮은 훈격을 높이려는 노력이 무산돼 아쉽다”고 말했다. 한평생 외롭게 살다 간 열사의 유품은 치마저고리와 수저 한 벌이 전부다. 그런데 치마저고리를 자세히 보면 오른쪽 섶 길이가 짧다고 한다. 최 교장은 “고문으로 열사의 한쪽 가슴이 없어져 양녀 배학복이 한쪽 섶을 짧게 해서 손수 만들어 드린 한복”이라고 설명했다. 몇 안 되는 유품은 강당 1층의 작은 공간과 동창회 사무실에 전시돼 있다. 숙원 사업인 기념관 건립은 진척이 없다. 그래도 올해 두세 교과서에 열사의 이야기가 실린 것은 성과라면 성과다. 글 사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김용순·김필순·김순애… 일가 대부분이 독립운동 투신

    김용순·김필순·김순애… 일가 대부분이 독립운동 투신

    김마리아 선생의 가계와 정신여학교김마리아의 본관은 광산이다. 18세기 말 현조부 김창주가 조정 정치에 염증을 느껴 고향인 황해도 장연으로 낙향, 버려진 땅을 개간해 대지주 집안이 됐다고 한다. 김마리아 가계에는 부유한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항일 독립운동과 교육사업에 몸바쳐 노블레스오블리주를 실천한 이들이 많다. 큰숙부인 김용순(김윤오)은 백범 김구, 도산 안창호와 막역한 사이였는데, 서울로 이주해 서우학회라는 애국계몽단체의 발기인으로 참여해 서북학회로 발전시켰다. 동생 김필순과 김형제상회를 경영하며 국권회복 운동의 본거지로 내놓았다. 김윤오의 외딸인 세라의 딸이 서울여대 총장을 지낸 고황경이다. 김필순은 세브란스의학교 1회 졸업생 7인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안창호와는 의형제 사이였고 구한말 독립지사들과 두터운 교분을 쌓으며 구국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신민회에 가입해 독립운동을 하다 소위 105인 사건이 터져 일제의 추적을 받자 중국으로 망명했다. 만주에서는 독립운동가들과 한인들의 진료에 헌신하고 몽골 치치하얼에 이상촌 건설을 추진했다. 김필순의 셋째 아들인 김덕린은 김염이라는 예명으로 20세기 초 상하이 영화계를 주름잡았던 중국의 영화 황제였다. 김염은 제국주의에 맞서는 영화에 적극적으로 출연했다. 고모 김순애(건국훈장 독립장)는 중국으로 망명, 대한애국부인회를 조직하고 한인여자청년동맹 간부로도 일한 독립운동가다. 그의 남편은 파리강화회의에 민족 대표로 파견된 유명한 독립운동가 김규식(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다. 고모 김필례는 김마리아가 가져온 2·8독립선언서를 배포하는 일을 하고 광주 수피아여고 교감과 교장으로 근무하다 일제에 협력하지 않아 수차례 옥고를 치렀다. 모교인 정신여고 교장과 재단이사장을 지냈다. 둘째 고모부 서병호도 신한청년당과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다. 김마리아는 결혼을 하지 않아 직계 후손이 없다. 신학문을 배우겠다며 가출해 무작정 마르타윌슨 여자신학원을 찾아온 배학복을 수양딸로 맞아들였다. 또 1937년 어느 날 누군가 문밖에 버리고 간 남자아이를 양자로 삼아 태국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고 키웠다. 그러나 마리아가 죽고 태국이도 어느 목사에게 맡겨졌다가 행방불명이 됐다. 배학복은 인하공대 학장을 지낸 최승만과 결혼했으며, 수년 전 사망했다. 마리아의 모교인 정신여학교 출신 가운데 독립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이 많다. 정신여학교는 1887년 미국 북장로교에서 보낸 선교사 애니 앨러스가 고종이 하사한 주택에서 문을 연 정동여학당에 뿌리를 두고 있다. 1895년 연지동으로 학교를 옮겨 연동여학교로 이름을 바꾼 뒤 1903년 연동중학교로, 1909년 정신여학교로 개칭했다. ‘정신 100년사’에 따르면 3·1운동을 전후한 시기에 항일 구국활동에 참여한 정신여학교 출신이 100여명에 이른다고 한다. 1907년 1회 졸업생을 배출한 이후 1922년 14회까지 졸업한 학생이 169명인데 당시 졸업생의 거의 60%가 독립운동과 연관이 있었던 셈이다. 김마리아 외에 유각경, 박순희, 이정숙, 김순애 등 알려진 인물도 있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람도 많다. 특히 정신여학교를 졸업한 간호사 중에 독립운동에 뛰어든 인물이 많다고 한다. 졸업생 이정숙, 이아주 등이 간호사양성소를 나와 세브란스병원 간호사로 일하다 독립운동을 했다. 정신여고 최성이 교장은 “배워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하자는 학교의 가르침과 건학 이념이 영향을 주었다”고 말했다. sonsj@seoul.co.kr
  • 박승원 광명시장, 단재 신채호상 첫 수상… “독립유공자 숭고한 뜻 잊지 않겠다”

    박승원 광명시장, 단재 신채호상 첫 수상… “독립유공자 숭고한 뜻 잊지 않겠다”

    박승원 경기 광명시장이 광복회에서 주관하는 ‘올해의 단재 신채호 상’을 수상했다. 올해 처음 만들어져 1호 수상자다. ‘단재 신채호 상’은 자치행정을 펼치는데 있어 항일 독립운동정신을 적극적으로 선양하고 있는 지방자치단체장에게 광복회가 감사의 뜻을 담아 수여하는 상이다. 박 시장은 지난해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해 독립유공자의 뜻을 기리기 위해 시민과 함께 다양한 기념사업을 추진한 것을 인정받아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박 시장은 20일 오전 광복회관 독립유공자실에서 열린 시상식에 참석해 “나라와 민족을 위해 희생하신 독립유공자를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 독립운동 기념사업을 다양하게 마련해 추진하고 있다”며 “오늘 이렇게 뜻깊은 상을 수상해 기쁘며, 앞으로 더욱 책임감을 갖고 특히 자라나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독립유공자 희생을 기억하고 올바른 역사관을 가지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광명시는 지난해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2019년을 ‘역사의 해“로 정하고 각계각층의 시민들로 구성된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를 구성해 시민이 참여하는 다양한 기념사업을 성황리에 개최했다. 33인 청소년 100일간의 여정 프로젝트를 비롯해 독서골든벨 대회, 4.11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 기념 음악회, 100년의 시간여행 등의 기념사업을 추진해 어린이부터 성인까지 모든 시민들과 함께 역사에 대해 공부하고 올바른 역사관을 갖는 계기를 가졌다. 독립유공자와 유족을 위한 사업으로 독립유공자 유족 중국 항일독립운동 유적지 방문과 독립유공자 발자취 책자를 발간했다. 광명시는 지난 1월 반일종족주의 도서를 포함해 역사왜곡으로 논란의 여지가 있는 도서에 대해 전수조사를 실시했으며 해당 도서에 대해 열람 및 대출을 제한하고 장서 구성에서 제외했다. 신채호(1880~1936년)는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사회주의적 아나키스트·사학자다. 본관은 고령, 호는 단재(丹齋)·일편단생(一片丹生)·단생(丹生)이다. 구한 말부터 언론 계몽운동을 하다 망명해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했으나 견해 차이로 임정을 탈퇴했다. 국민대표자회의 소집과 무정부주의 단체에 가담해 활동했으며 사서 연구에 몰두하기도 했다. 1936년 2월 21일 만주국 뤼순 감옥에서 뇌졸중과 동상·영양실조·고문후유증 등 합병증으로 인해 순국했다. 이명선 기자 mslee@seoul.co.kr
  • 안양시, 친일논란 ‘안양시민의 노래’ 악보 공모

    경기도 안양시가 친일논란을 빚고 있는 ‘안양시민의 노래‘ 개정을 추진한다. 시는 5월 15일까자 악보를 공모한다고 19일 밝혔다. 안양시로 승격된 해인 1974년 5월 제작한 안양시민의 노래는 안양 출신의 시인 김대규가 작사하고, 서라벌예대 교수출신인 작곡가 김동진이 곡을 붙였다. 하지민 김동진 교수는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친일 인명사전에 음악부문 친일작가로 이름이 오른 사실이 알려지면 논란이 일었다. 평안남도 안주 출신인 김동진은 숭실중학교에 재학 중이던 1931년 김동환의 시에 곡을 붙인 ‘봄이 오면’을 작곡했다. 1932년 숭실전문대 입학, 2학년 때에는 이은상 작시의 가곡 ‘가고파’를 작곡했다 시는 지난해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역사바로세우기의 하나로 노래 사용을 중지하고 공모를 통해 새롭게 작곡하기로 결정했다. 지난해 10월 여론조사도 노래를 개정해야 한다 의견이 80%를 넘었다. 개정방법 역시 시민공모로 이뤄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67.7%로 높았다. 공모 기간은 다음달 16일부터 두 달간이다. 응모자는 악보와 작곡파일을 시에 제출해야 한다. 시는 두 차례 전문가 심사를 거쳐 최종 당선작을 확정한 후 올해 시민의 날 기념식에서 발표할 예정이다. 남상인 기자 sanginn@seoul.co.kr
  • “‘덕부심’ 갖춘 여성리더 양성 매진… 덕성의 새로운 100년 열겠다”

    “‘덕부심’ 갖춘 여성리더 양성 매진… 덕성의 새로운 100년 열겠다”

    서울의 진산 북한산 아래 다소곳이 자리잡은 덕성여대. 서울의 여느 대학과 달리 평평한 캠퍼스에 나지막한 학사(學舍)들이 어머니 품처럼 편안하고 포근한 느낌이다. 캠퍼스 입구의 대학본부를 지나 안쪽으로 몇 발짝만 옮기면 나타나는 대운동장도 방문객을 따뜻하게 껴안아 주는 것 같다. 대학 캠퍼스가 이렇게 친숙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까 싶어 연신 사방을 둘러보게 된다. 고개를 들면 북한산의 비경이 두 눈을 가득 채운다. 손에 잡힐 듯한 인수봉, 백운대, 만경대가 덕성의 위상을 말해 주는 듯 우뚝 솟아 있다. 우리나라 여성교육의 주춧돌 역할을 해 온 덕성여대가 올 4월이면 창학 100주년을 맞는다. 독립운동가이자 여성운동가인 차미리사(1879~1955) 여사가 1920년 3·1운동 정신을 이어받아 설립한 조선여자교육회가 모태이다. 외국 자본이나 외국인의 힘을 빌리지 않고 온전히 우리 여성의 열정과 노력으로 세운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이어서 덕성여대의 100주년은 그 의미가 클 수밖에 없다. 강수경(52) 총장을 만나 덕성여대가 걸어온 100년과 새로운 도약을 위한 계획을 들었다.-창학 100주년을 축하한다. “덕성여대의 창학 100주년은 우리 민족과 나라에도 큰 의미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는 4월 17일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100주년 기념식을 시작으로 학술심포지엄, 엠블럼 공모, 차미리사 선생 묘역 정비 등의 행사를 진행할 예정이다. 올해는 ‘새로운 100년을 향한 재도약’을 주제로 각종 학술행사, 기념행사, 동문참여행사 등을 펼쳐 나갈 것이다.” -덕성여대만의 특성이나 문화가 있다면. “독립운동가인 차미리사 여사가 여성교육을 위해 설립한 학교인 만큼 여성으로서의 자부심과 강한 비판 의식을 덕성의 ‘학풍’(學風)이라고 할 수 있다. 덕성여대의 자부심이란 뜻인 ‘덕부심’을 자랑스러워한다. 학내에 어려운 문제가 발생하면 차미리사 여사의 창학이념(살되, 네 생명을 살아라. 생각하되, 네 생각으로 하여라. 알되, 네가 깨달아 알아라)으로 돌아가 문제를 해결하는 문화를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 학생들의 강한 비판 의식은 학교를 100년간 굳건히 지켜 온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학내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율이 높고, 민주적이고 투명한 것도 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기초학문에 대한 관심도와 대내외 평가는. “덕성여대는 1987년 종합대학으로 승격되기 이전부터 인문학과 사회학, 자연과학 등 기초학문에 남다른 관심을 쏟았고, 학문적 업적도 많이 쌓았다. 특히 여대로서는 드물게 약학대학을 비롯해 39개 학과가 개설돼 기초학문에 대한 학생들의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켜 왔다고 자부한다. 철학과를 비롯해 국내에 몇 안 되는 미술사학과와 문화인류학과도 개설돼 있을 뿐 아니라 예술대는 동양화와 서양화로 구분해 학생들에게 인기가 높다. 2005년에는 타 대학들이 법학전문대학원 설립으로 학부과정을 없애는 추세에서도 덕성여대는 법학과를 신설해 법률 기초지식을 갖춘 여성 인재 배출에 기여하고 학문으로서의 법학을 연구하는 기초역량을 길러 주고 있다. 물론 법학전문대학원에 진학해 전문 법조인이 되려는 학생뿐 아니라 입법관련 기관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하는 등 선택의 폭을 넓혀 주고 있다. 교육부를 비롯해 한국대학교육협의회 평가 등 외부평가 기관의 평가가 긍정적인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물론 재단의 충실한 재정지원도 한몫하고 있어 덕성의 미래는 아주 밝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앞으로도 계속 여대로 운영할 것인가. “여성교육은 사회 변화의 원동력이다. 학령인구 감소 등으로 다른 대학들이 신입생 확보에 어려움을 겪는다고 하는데 덕성여대는 앞으로도 그런 걱정은 없을 것이라고 믿는다. 섬세함, 모성애, 끈기 등 우리 대한민국 여성만이 갖고 있는 장점들을 충분히 발현시킬 수 있는 여성 교육의 길을 당당하게 걸어갈 것이다.” -미래 100년을 향한 청사진이 있다면. “교육혁신을 통해 덕성여대만이 할 수 있는 여성교육의 길을 끊임없이 만들어 나갈 것이다. 덕성성장지수(DGI)를 개발해 입학에서 졸업, 사회진출 후까지 학교가 지원하고 관리해 학생들의 성장에 밑거름이 되도록 하겠다. 아울러 제4차 산업혁명이라는 시대적 변화에도 여성이 더 능동적으로 대비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정보통신기술(ICT)과 바이오(BT) 분야를 특성화해 사회 변화를 이끌어 내는 여성 리더들을 양성할 것이다.” -올해 많은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하는데. “올해부터 사회과학대학과 인문과학대학을 글로벌융합대학으로 통합해 신입생을 선발했다. 공과대학과 자연과학대학은 과학기술대학으로 통합해 역시 신입생을 학과 단위가 아닌 대학 단위로 뽑았다. 신입생들에게 다양한 학문을 접할 기회를 부여하고, 올바른 학과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또 제2 전공을 통해 마음껏 학구열을 발휘할 수 있도록 했다. 이런 시도는 국내대학 가운데 처음이라고 하니 변화를 향한 성과에 기대를 걸고 있다.” -총장이 직접 강의를 맡았다는데. “지난해 총장으로 선임된 이후에도 법학 관련 과목 강의를 계속했다. 선배로서, 교수로서, 그리고 총장으로서 학생들에게 귀감(모델)이 되고자 했다. 교직원과 학생 모두에게 총장의 권위보다는 혁신의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다. 학사행정으로 바쁜 게 사실이지만 강의를 통해 학생들과 대화할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학기부터는 총장으로서 학사행정에 전념할 생각이다. 대신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학생들과의 대화는 계속 이어지도록 하려 한다.” -교직원과 학생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이끌어 내고 있는 비결은. “법학과 교수 시절의 헌법, 행정법, 노동법 등의 강의가 학생들의 욕구를 적게나마 채워 줬다고 본다. 학생들이 필요한 시간에 언제든지 나를 만날 수 있도록 연구실을 항상 개방해 뒀다. 후배 학생들과 거리낌없이 언제나 대화할 수 있는 게 개인적으로도 행복했다. 지난해 총장 직선에서 학생 지지율이 무려 98.3%를 기록해 무척 놀랐다. 학교 발전을 열망하는 덕성인들의 전폭적인 지지가 온몸을 전율케 했다. 그때를 회상하며 남은 임기 동안 학생들과 학교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인권 분야에 남다른 관심을 쏟고 있다고. “법학과가 생기면서 ‘인권과 노동법’ 강의가 개설됐고, 노동 관련 문제와 여성인권에 대해 학생들의 관심이 높아졌다. 사회에 나갔을 때 여성이라는 지위에서 오는 부당함, 남성 중심의 문화에 대처하는 법률적 지식을 갖출 수 있도록 노력했다. 여성인권 침해에 대한 구제 방법과 법률적 조언을 위해 ‘불어라 휘파람’이란 연재물을 교내 신문에 싣기도 했다. 총장 임기 중에 인권을 특성화한 교양교육을 체계화하고, 인권센터를 통해 전문적인 인권활동가를 양성해 덕성여대가 여성 인권교육의 메카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지역사회 활동에 적극적인 이유는. “국가인권위원회 행정심판위원으로 5년째 활동 중이다. 개인의 신념을 사회가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대한 제도나 체제 등이 정비돼 있지 않다. 가령 성소수자, 양심적 병역거부자 등에 대한 인권 보장 등에 관심을 쏟고 있다. 특히 우리 대학이 위치한 서울 도봉구에서는 5년 넘게 인권위원장을 맡아 인권조례 제정부터 구민을 위한 인권센터 개소도 이끌어 냈다. 이런 대외 활동이 덕성여대를 여성 인권교육의 메카로 만드는 데 큰 도움이 되리라 믿고 있다.” -학생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중·고교 6년 동안 매주 시 한 편씩 옮겨 적으며 외웠던 습관이 법학자로 살아온 나 자신에게 많은 힘이 됐다. 덕성여대 학생들은 기본 소양을 갖췄다는 ‘덕부심’이 가득한 만큼 시대변화에도 잘 적응해야 한다. 이를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은 글쓰기와 독서 습관을 기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교양대학 내 글쓰기센터를 소통역량센터로 확대 개편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본교 학생이 올해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된 것도 결코 우연의 결과가 아닐 것이다. 우리 학생들은 전공이 무엇이든 덕성을 갖춘 창의적인 지식인, 협력하는 전문인, 실천하는 시민으로 성장할 것이라 믿는다.” yidonggu@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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