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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성룡 서울시의원, 광복회 주관 ‘역사정의실천 정치인’ 선정

    홍성룡 서울시의원, 광복회 주관 ‘역사정의실천 정치인’ 선정

    서울시의회 홍성룡 의원(더불어민주당·송파3)이 7일 광복회관에서 광복회(회장 김원웅)가 선정한 ‘역사정의실천 정치인’으로 선정되어 선정패를 수상했다. 광복회는 친일잔재 청산에 관심을 가지고 의정활동을 펼치는 정치인을 대상으로 ‘역사정의실천 정치인’을 선정했다고 밝혔다. 이날 수상자로 선정된 홍 의원은 서울시의회 독도수호특별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을 하면서 ‘일본 전범기업 제품 공공구매 제한에 관한 조례’, ‘항일독립운동 유적 발굴 및 보존에 관한 조례’, ‘항일독립운동 기념사업 지원에 관한 조례’, ‘국외강제동원 피해자 추모사업 지원에 관한 조례’를 대표 발의하는 등 친일잔재와 반민족행위 청산을 위한 왕성한 입법활동을 펼쳐온 공로를 높게 평가받았다. 홍 의원은 “독립유공자와 후손으로 구성된 광복회에서 주는 선정패이기에 매우 뜻깊게 생각한다”라며,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들의 고귀하고 숭고한 독립운동 정신을 이어받아 역사적 소임을 다해 나가고 있는 광복회에 감사의 뜻을 전한다”라고 말했다. 이어 “광복직후 구성된 반민특위가 붕괴되어 친일세력 청산이 미완에 그치고 친일세력이 대한민국 주도권을 장악하는 사태가 벌어짐으로써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 75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우리 사회 곳곳에 친일반민족행위 잔재들이 만연해 있는 현실이 지속되고 있다”라고 안타까움을 표했다. 또, “국내 일각에서 일본의 식민지배와 역사왜곡에 동조하고, 강제징용 및 위안부 피해자들을 폄훼하거나 모욕하는 행태까지도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단순한 역사 해석이나 학술활동의 문제가 아니라 독립유공자 및 그 유족의 명예를 훼손하고 강제징용 피해자, 일본군 위안부 등 전쟁범죄 피해자의 인권과 존엄을 침해하는 행위로서,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 대한민국의 자주독립을 공표한 「대한민국헌법」에 위배되는 중대한 범죄행위”라고 강조했다. 홍 의원은 “우리는 이러한 범죄행위를 더 이상 묵인해서는 안 된다”면서, “8월에 개최 예정인 제297회 임시회에 ‘친일반민족행위청산 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일본제국주의 상징물 사용 제한 조례, 친일반민족행위 청산 지원 조례 등을 발의하여 일제잔재와 친일반민족행위를 온전히 파헤치고 완벽하게 청산하여 민족정기를 올바로 세우는데 앞장서 나가겠다”라고 포부를 밝혔다. 한편, 오늘 ‘역사정의실천 정치인’으로 서울시의회 최웅식, 유용, 김정태, 박순규, 이광호 의원도 함께 선정되어 선정패를 받았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시간이 멈춘 마을, 이젠 진짜 안녕~

    시간이 멈춘 마을, 이젠 진짜 안녕~

    부산에서 매축지마을을 처음 본 건 몇 해 전이었다. 오래된 마을들이 여전히 많은 부산이지만, 쇠락한 풍경으로는 어느 마을보다 단연 윗길이었다. 당시만 해도 굳이 이 마을을 소개할 생각은 없었다. 감천동 문화마을처럼 이미 낡은 풍경으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마을들이 많은데, 밝고 맑고 아름다운 부산 풍경도 많은데, 굳이 시간의 먼지가 켜켜이 쌓인 장소를 들춰낼 까닭이 있겠나 싶었다. 하지만 이제 그럴 이유가 생겼다. 최근 재개발이 확정됐고, 머지않아 매축지마을은 흔적 없이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마저 멀어지는 법. 마을이 지도에서 사라지고 나면 수많은 기억들도 함께 사라질 터다. 그러니 지금 매축지마을을 돌아본다는 건 아마 한 시대의 종언을 목격한다는 것과 의미가 같을 것이다.부산엔 낡은 동네가 유난히 많다. 대한민국 제2의 대도시인데도 그렇다. 그 기원을 거슬러 오르면 한국전쟁에 가닿는다. 한반도를 통틀어 거의 유일한 피란처였기에 전국에서 피란민들이 몰렸다. 여태껏 부산에 남아 있는 달동네 대부분은 이들이 모여 살던 곳들이다. 동구 범일5동의 매축지도 그런 마을 중 하나다. 여느 마을과 다른 게 있다면 산복도로가 아닌 부산항 뒤편의 평탄한 지대에 자리 잡았다는 것이다. 높은 곳에서 보면 거대한 부산항과 번다한 도심 사이에 옹색하게 끼어 있는 형국이다. 그러니 재개발은 당연하면서도 필연적인 수순이었을 것이다. ‘매축지’(埋築地)는 이름 그대로 ‘바다를 메까 맹근 땅’이다. 일제강점기 때 부산진 해안을 메워 조성했다. 당시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각종 군수물자를 쌓아 놓기 위해 이 일대에 막사와 마구간을 지었던 것으로 전해진다.●한국전쟁 이후부터 피란민 삶의 터전으로 집끼리 다닥다닥 붙은 현재 모습을 이루게 된 건 한국전쟁 이후부터다. 물밀듯 부산으로 내려온 피란민들은 매축지의 마구간을 칸칸이 잘라 생활공간으로 이용했다. 기껏해야 한두 평에 불과한 쪽방은 이렇게 탄생했다. 골목마다 남루한 집들이 빼곡하다. 부엌에 방 하나 딸린 집이 대부분이고 화장실도 없어 골목 가운데 있는 공용화장실을 이용해야 한다. 골목의 폭도 좁아서 이 집 문을 열면 저 집 문에 닿을 정도다. 이런 좁디좁은 골목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다.이 같은 치열한 풍경 덕에 수많은 영화의 단골 촬영지가 됐다. 특히 원빈과 인연이 깊은데, ‘마더’(2009년)와 ‘아저씨’(2010년) 등이 매축지마을 일대에서 촬영됐다. 임권택 감독의 ‘하류인생’(2004), 곽경택 감독의 공전의 히트작 ‘친구’(2001) 등도 이 일대에서 촬영됐다. 최근엔 한 세대 전의 기억들을 기록해 두려는 사진작가들의 발걸음도 부쩍 늘었다. 매축지와 이웃한 ‘소(牛)막마을’ 우암동도 비슷한 형성 과정을 겪었다. 소 외양간을 잘라 집으로 쓰면서 마을이 형성됐다. 한데 소막마을은 등록문화재(제715호)로 지정돼 명맥을 이어 갈 수 있는 길이 마련됐지만 이도저도 없는 매축지마을은 역사의 뒤안길로 하릴없이 사라지게 됐다. 머지않아 재개발이 이뤄지고 나면 60층 정도의 아파트가 숱한 기억을 딛고 솟아오를 것이다. 매축지마을을 다 돌아보는 데 두 시간 정도면 충분하다. 이미 마을 동쪽 지역에 아파트 공사가 시작되면서 마을 규모가 확 줄었기 때문이다. 그 탓에 영화 촬영지들은 상당수 사라졌지만, 믿기지 않을 만큼 낡은 풍경을 엿보기엔 무리가 없다.매축지마을의 서쪽 끝은 자성로 지하도다. 1972년 폐선된 옛 문현선 철길에 놓였던 터널이 도시재생사업을 통해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지하도를 지나 남문시장을 거쳐 큰길을 건너면 좌천동이다. 부산 사람들이 부산의 도시 이름이 유래한 동네로 여기는 곳이다. 이곳의 증산(甑山)이 가마솥을 엎어 놓은 모양이라 해서 ‘부산’(釜山)이라 불렸다는 게 정설(범일동 자성대가 ‘부산’이란 설도 있다)처럼 전해지고 있다. ●정공단·매견시 기념비 등 볼거리 빼곡히 한 걸음 옮길 때마다 턱이 땅에 닿을 정도로 된비알인 이곳에도 기억해야 할 공간들이 빼곡하다. 호주 선교사들이 세운 일신여학교는 부산 3·1운동의 깃발이 올랐던 역사적 장소다. 부산에서 30년간 헌신하며 ‘조선 나환자들의 아버지’로 불렸던 호주 선교사 매견시(매킨지) 기념비, 아버지 매견시의 유지를 받들어 딸들이 세운 일신기독병원, 임진왜란 때 부산에서 제일 먼저 순국한 정발 장군과 그의 부산진전투를 기리는 정공단 등이 이 일대에 몰려 있다. 조선 숙종 때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땅이란 것을 일본 막부가 인정하도록 활약한 안용복기념관도 있다. 기념관에 서면 안용복의 매축지마을 생가터를 조망할 수 있다.안용복기념관에서 증산왜성까지는 경사형 엘리베이터를 타고 간다. 급경사 지대에 사는 주민들의 발이 돼 주는 고마운 엘리베이터다. 이름은 엘리베이터지만 모양새는 유럽의 관광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푸니쿨라를 빼닮았다. 천천히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밖을 내다보는 재미가 독특하다. 증산왜성까지 가려면 도중에 엘리베이터를 한 번 갈아타야 한다. 증산왜성에 서면 부산항 일대가 훤히 내려다보인다. 범일동의 ‘이중섭의 풍경거리’도 돌아볼 만하다. 한국을 대표하는 화가 중 한 명인 이중섭(1916∼1956)을 기리는 공간이다. ‘야외 갤러리’, ‘희망길 100계단’, ‘이중섭 전망대’ 등으로 이뤄졌다. 이중섭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뒤 부산에서 일본인 아내 마사코(한국명 이남덕), 아들 둘과 함께 피란 생활을 했다. 당시 그가 머물렀던 곳이 범일동 피란민 판자촌이다. 그는 부두에서 잡일을 하며 겨우 밥벌이를 하면서도 틈나는 대로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야외 갤러리’에는 ‘흰소’ 조각상 등 작품들이 전시돼 있다. 가장 볼거리가 많은 것은 ‘희망길 100계단’이다. 계단 여기저기에 이중섭이 쓴 편지와 그의 생전 사진 등을 붙여 놓았다. 이른바 ‘계단 갤러리’다. 100계단이 끝나는 언덕엔 ‘이중섭 전망대’를 세웠다. 시원한 음료 한 잔 곁들이며 쉬어 갈 수 있다. 글 사진 손원천 선임기자 angler@seoul.co.kr
  • 구로 ‘알려지지 않은 18인의 독립운동가’ 책으로

    구로 ‘알려지지 않은 18인의 독립운동가’ 책으로

    서울 구로구는 서울구로로타리클럽, 광복회 구로구지회와 뜻을 모아 독립운동 이야기 책 ‘관순아 관순아’를 발간한다고 23일 밝혔다.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 18명의 이야기를 담은 ‘관순아 관순아’는 서울구로로타리클럽과 광복회 구로구지회가 독립운동가 후손들을 대상으로 인터뷰한 것을 토대로 만들어졌다. 지난 13일에는 서울구로로터리클럽 회원과 광복회 구로구지회 회원 등 18명이 참여한 가운데 출판 간담회를 열었다. 책은 지역 도서관과 각급 학교에 비치된다. 서울구로로터리클럽은 이날 행사에서 취약계층을 위한 장학금 100만원도 전달했다. 오창헌 서울구로로타리클럽 회장은 “조국을 위해 헌신한 사람이 가장 먼저 존경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신념으로 로타리클럽 이름을 걸고 전기집을 만들어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관순아 관순아’에는 유관순 열사의 사촌 언니인 독립운동가 유예도 선생과 천석꾼으로 태어났음에도 모든 것을 버리고 3·1 운동의 선봉에 섰던 최종화 선생 등의 이야기가 수록돼 있다. 이성 구로구청장은 “교과서에서는 배울 수 없는 숨겨진 영웅들을 되새길 수 있는 계기가 되어 기쁘다”며 “앞으로도 독립운동에 몸과 마음을 다 바치신 선열들을 찾아 알리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김동현 기자 moses@seoul.co.kr
  • 김포의 잔다르크 ‘이경덕’ 기리는 명예도로명 생겼다

    김포의 잔다르크 ‘이경덕’ 기리는 명예도로명 생겼다

    경기 김포시가 월곶면 군하리 ‘이경덕만세로’를 명예 도로명으로 부여하고 명예 도로명판을 세웠다. 22일 김포시에 따르면 이번 명예 도로명 부여는 1919년 33세 나이로 당시 성서학교에 재학 중 학생신분으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이경덕(1886~1948·이살눔) 열사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이경덕만세로’는 월곶면 행정복지센터 앞 군하로 일부구간으로 월곶면 군하리 168-4번지에서 월곶면 군하리 25-18번지까지 총 길이 404m에 이른다. 주민의견 수렴과 김포시 도로명주소위원회 심의를 거쳐 최종 확정됐다. 명예 도로명 사용기간은 5년이며 연장할 수 있다. 이경덕은 김포출신으로 성서학교 학생이었다. 이살눔은 이 지역에서 주도적으로 만세운동을 한 유일한 여성으로 김포의 ‘잔다르크’라 불린다. 월곶면 고양리에서 성태영·백일환 등과 함께 독립만세시위운동을 계획하고 3월22일 군하리장터에 모인 수백명의 군중에게 태극기를 배부해주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행진 중 일경에 체포됐다. 그해 7월 1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위반으로 징역 6개월을 언도받고 공소했으나 경성복심에서 기각당하고 옥고를 치렀다. 이살눔은 옥고를 치르던 중 병을 얻어 10월27일 가출옥으로 서대문감옥에서 석방됐다. 이후 군하리에서 목회자의 삶을 살다가 알 수 없는 병으로 사망했으며, 정부는 고인의 공을 기리어 199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2003년 8월15일 이살눔이 전도사 몸으로 실천한 뜻을 기리기 위해 현 월곶면 푸른언덕교회 내 ‘이경덕전도사 3·1운동기념비’를 세웠다. 현재 김포시에는 기존에 부여한 ‘이회택로’와 ‘한하운시인길’, ‘양곡3·1만세로’와 함께 이번 ‘이경덕만세로’로 총 4개의 명예 도로명이 있다. 임동호 토지정보과장은 “이번 명예 도로명 부여로 당시 김포에서 일어난 항일투쟁에 희생된 선열들의 고귀한 정신을 시민들이 기억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명선 기자 mslee@seoul.co.kr
  • 울산항일 독립운동기념탑 9월 건립

    울산항일 독립운동기념탑 9월 건립

    울산항일 독립운동기념탑이 오는 9월 건립된다. 울산시는 21일 남구 달동문화공원에서 울산항일 독립운동기념탑 기공식을 열었다. 울산항일 독립운동기념탑은 사업비 25억 8400만원을 들여 달동문화공원 내 800㎡ 부지에 높이 30m 규모로 오는 9월까지 건립된다. 또 이곳에는 애국지사 명부석(96명)과 벽부조, 참배광장 등도 들어선다. 기념탑은 병영·언양·남창 등의 울산 3대 만세운동, 외솔 최현배 선생의 국어 운동, 성세빈 선생의 보성학교, 대한광복회 총사령 고헌 박상진 의사의 독립운동 등 울산항일 독립운동 역사의 상징과 의미를 담아 제작된다. 참배 광장은 시민 모두가 일상에서 산책하듯 방문해 애국선열의 넋을 기릴 수 있도록 했다. 나라사랑 정신을 계승해 미래 세대에게 등불이 될 역사의 교훈을 전달할 기록의 교육장으로 조성된다. 송철호 울산시장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 계승을 천명하고 있는 우리의 역사관, 국가관을 제대로 정립해 울산 미래를 굳건히 다지는 기념비로 거듭나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울산 박정훈 기자 jhp@seoul.co.kr
  • 3·1운동~4·19혁명 숨결 오롯이… 역사관광 성지 강북

    3·1운동~4·19혁명 숨결 오롯이… 역사관광 성지 강북

    근현대사기념관·북한산 둘레길 연계탐방객 겨냥 텀블러 등 7개 제품 판매“기념품 매개로 탐방객 재방문 이어져관광산업 촉진·지역경제 활성화 기대”“3·1운동부터 4·19혁명까지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한곳에서 체험할 수 있다는 점이 좋은 것 같아요. 기념품 자판기까지 설치해 시연회에 참석할 기회까지 주시니 정말 영광이네요.” 지난달 30일 서울 강북구 우이동 근현대사기념관 입구에 설치된 관광기념품 자판기 앞에서 나선아(37·여)씨가 활짝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나씨는 기념품을 구매하는 시연과정에 참여해 인테리어 소품으로도 활용 가능한 ‘나만의 탐방코스 버스 채색키트’를 선택했다. 그는 “이 기념품을 꼭 거실에 걸어 놓고 역사의 교훈을 되새기겠다”고 다짐했다. 이날 박겸수 강북구청장은 직접 관광기념품 자판기 시연회가 열린 근현대사기념관을 찾아 탐방객 의견을 들었다. 박 구청장이 채색키트를 고르게 된 이유를 묻자, 나씨는 “3·1운동의 발상지 봉황각과 우이동 만남의 광장을 시작으로 솔밭공원과 4·19전망대를 지나 근현대사기념관까지 이어지는 ‘너랑나랑우리랑’ 산책로를 따라 걸어왔다”며 “알록달록한 색을 입은 버스가 오늘 처음 걸어본 역사 산책코스를 함께 지나가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들어 골랐다”고 답했다. 기념관 주변은 북한산 둘레길과 연계돼 있어 오가는 탐방객들이 눈에 띄었다. 박 구청장은 이들에게 역사문화관광벨트 사업의 의미와 관광기념품 자판기를 친절하게 소개했다. 아울러 관광기념품 자판기에 대한 주민들의 반응을 들어 보면서 다양한 현장의 목소리를 수렴하려고 노력했다. 박 구청장은 “지난 10년간 북한산 역사문화관광벨트 사업을 진행하면서 구의 자원들을 형상화한 상품개발에 대한 목마름이 해마다 커졌다”면서 “역사문화관광도시라는 강북구 브랜드 가치를 향상시키고 지역의 상징성을 오롯이 담아낸 기념품을 주민들이 간직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기념품 자판기를 설치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기념품은 지난해 열린 공모전 당선작으로 7가지 제품이 선정됐다. 제품발매에 앞서 소비자 감성에 부응하는 관광 기념품으로 만들기 위해 전문 업체가 상품 디자인을 했다. 달빛을 머금은 북한산 무드조명, 4·19혁명을 표현한 배지부터 그림엽서, 손거울, 텀블러, 책갈피 등 지역의 관광자원을 형상화한 작품들로 꾸며졌다. 구 주요행사에 인사를 초청하거나 다른 지역을 방문할 때 선물로도 활용된다. 다만, 현재는 코로나19 확산으로 근현대사기념관의 사전방문 예약제가 잠시 보류된 상태다. 박 구청장은 “기념품을 매개로 탐방객의 재방문이 이어져 관광산업을 촉진시키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며 “코로나19 이후 관광 수요층의 변화에 맞춘 고부가가치 상품을 개발해 지역경제 활성화에 기여하는 노력을 꾸준히 펼쳐 나가겠다”고 말했다. 황비웅 기자 stylist@seoul.co.kr
  • 독립운동 좌우통합 앞장… 의회정치 주춧돌 놓은 ‘임정의 산파’

    독립운동 좌우통합 앞장… 의회정치 주춧돌 놓은 ‘임정의 산파’

    검사로 일하다 국치 후 독립운동가 변호인천서 13도 대표자대회… 한성정부 수립임시의정원 제도 개선·법률제정 등 주도 국무령으로 선출된 뒤 연립내각도 구성“가장 큰 죄악 분열, 가장 큰 공능은 결합”한국독립군 만들어 대전자령 등서 대승환국 후 좌우합작 노력… 심장천식 별세임시정부 및 임시의정원 출범 100주년이었던 지난해 4월 국회도서관에서 흉상 제막식이 열렸다. 임시정부 국회 격인 임시의정원 의장을 세 차례나 지낸 ‘임정의 산파’ 홍진의 흉상이었다. 임정의 입법부 의장과 행정부 수반을 지낸 인물은 선생이 유일하다. 이념과 방략, 지연에 따라 분열된 독립운동의 통합에 앞장선 점은 선생의 가장 큰 업적으로 칭송받는다. 1942년 10월 중국 충칭에서 임시의정원 제34차 정기의회가 열렸다. 이 의회는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김원봉의 조선혁명당 등 좌익세력이 임정에 참여한 것이다. 임정은 좌익 인사 21명을 의원으로 새로 선출했다. 의원 44명 중 37명이 참가해 의장을 선출했는데 선생이 33표라는 몰표를 얻었다. 선생은 좌우 어느 쪽에서도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는 통합형 리더였다. 좌익진영에서는 “각 당파의 행(幸)이요 영광인 동시에 전 민족의 행이요 영광”이라고 환영했다.●임시의정원 의장 선출 때 좌익서도 ‘대환영’ 의정원은 처음으로 여야 공존 체제가 됐다. 전에 없던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중국이 광복군 활동을 규제하는 ‘광복군행동 9개 준승’이라는 문제가 있었다. 취소 방법을 놓고 논쟁이 벌어지자 선생은 의장석에서 내려와 직접 논의에 참여했다. 외교적으로 푸는 게 좋겠다는 선생의 의견에 따라 임정이 나서서 중국이 ‘9개 준승’을 취소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회의에서도 당파에 치우치지 않았다. 선생은 여당 소속 의장이면서도 국무위원 투표 방식을 무기명으로 하자는 야당 주장에 동의했다. 좌익진영의 정부 조직 참여를 수용하려고 여당을 탈당해 헌법을 고쳐 좌우연합정부를 구성했다. 홍진 선생은 1877년 8월 27일 서울 서소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엄한 교육을 받았다. 1898년 법관양성소를 졸업한 선생은 1905년부터 충북 충주에서 검사로 근무하다 1910년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자 사직했다. 마음만 먹으면 변호사로 편히 살 수 있었던 길을 포기한 것이다. 검사로 있을 때 의병에 대한 논고를 거부한 것은 선생의 반일 의식이 남달랐음을 보여 준다. 이후 선생은 서울과 평양에서 독립운동가들을 변호했다. 3·1운동이 일어나자 충북 청주의 연락 책임자로 활동하면서 조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임시정부 수립이라는 원대한 계획을 세우게 됐다. 그것이 ‘한성임시정부’다. 각계 인사와 논의한 끝에 4월 2일 선생의 주도로 인천 만국공원에서 13도 대표자 대회를 열어 한성정부의 조직과 조각을 확정했다. 중국 상하이에서도 임시정부가 4월 11일 출범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더 지체할 수 없었던 선생은 담뱃갑과 성냥갑에 한성정부 조직안을 숨겨 상하이로 갔다. 상하이임시정부는 논의 끝에 한성정부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도리어 선생은 밀정 혐의로 조사를 받았다. 망명 과정에서 도움을 준 황옥과의 관계 때문이었다. 변호사로 활동하던 평양에서 일제 경찰이면서 의열단을 도운 황옥과 친분관계를 맺었는데 그게 문제가 됐다. 선생은 임시의정원의 평의원으로서 독립공채 발행, 독립의연금 수합, 세금 징수 등을 제안해 시행하도록 했다. 7월부터는 임시의정원 법제위원장으로서 제도 개선과 법률 제정 등 근대적 법치의 틀을 마련하는 데 힘을 보탰다. 한편 연해주에서도 대한국민의회라는 임시정부가 설립됐는데 상하이임시정부와 통합해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1919년 9월 11일 출범했다.●‘태평양회의’ 각국 대표에 독립청원서 발송 출범 직후부터 임정은 엄청난 분란에 휩싸였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이었다. 신채호는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우리나라를 찾기도 전에 팔아먹은 놈”이라며 비난했다. 비판이 잇따르자 이승만은 1921년 5월 미국으로 떠나버렸다. 연해주의 좌익 지도자 이동휘도 돌아갔다. 혼란의 와중에 선생은 임시의정원 3대 의장에 취임했다. 선생은 의정원 기능을 정상화시키고 조직을 정비해 나갔다. 그해 11월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태평양회의를 앞두고는 독립청원서를 각국 대표에게 발송하고 연설회 개최 등의 활동을 폈지만 좌절되자 의장직을 사직했다. 이즈음 창조파와 개조파로 분열된 임정을 통합하기 위한 국민대표회의는 답보를 거듭했다. 1922년 7월 선생은 안창호, 신익희 등 50여명과 시사책진회를 만들어 중재에 나섰지만 결과는 파국이었다. 상심한 선생은 “한갓 병적인 상태에서 편당적 감정이 농후하여 갈 뿐”이라며 1924년 4월 임정 법무총장직도 사임하고 장쑤성 쩐장에서 은둔생활에 들어갔다. 선생이 없는 사이에 이승만은 탄핵당하고 임정은 국무령제로 체제를 바꾸었다. 임시의정원은 1926년 7월 선생을 국무령으로 선출했다. 당파에 치우치지 않고 난국을 헤쳐나갈 인물로 높이 산 것이다. 은거하는 동안 선생은 ‘통분과 절망’이라는 글을 독립신문에 실어 새 길을 제시한 적이 있었다. 선생은 우선 정당 조직에 나섰다. 당을 중심으로 국가를 운영한다는 이당치국(以黨治國)이었다. 안창호의 도움을 받아 지역 안배를 통한 연립내각도 구성했다. 선생은 “죄악 중에서 가장 큰 죄악은 분열이고 공능(功能) 중에서 가장 큰 공능은 결합”이라고 주장하며 민족대당(民族大黨) 결성을 주장했다. 유일당 운동은 만주로도 퍼져갔고 국내에서도 좌우가 뭉친 신간회가 결성됐다.●좌우합작에 의한 ‘민족유일당’ 건설 주도 선생은 유일당 운동에 직접 나서고자 1926년 12월 국무령을 사임했다. 홍남표 등 좌익 세력과 힘을 합쳐 1927년 4월 한국유일독립당상해촉성회를 조직했다. 선생은 무장투쟁의 본거지인 만주로 떠났다. 신민·정의·참의 삼부를 돌아다니며 통일을 종용했지만 성사되지 않았다. 선생은 창당 후 확대해 민족대당을 결성하는 방안을 시도했다. 1930년 7월 지린성에서 생육사(生育社)와 한족자치연합회를 모체로 만든 한국독립당이 그것이다. 완전한 형태는 아니지만 염원하던 유일당의 모양새를 갖춘 정당이었다. 선생은 당 대표인 중앙집행위원장이 되고 당군으로 한국독립군을 편성, 총사령으로 이청천을 선임했다. 1931년 9월 일제의 만주 침략이 본격화되자 한국독립군은 중국군과 연합해 쌍성보 전투, 대전자령 전투 등에서 일본군에 대승을 거두었다. 대전자령 전투는 청산리 대첩에 못지않은 승전이었다. 일제의 대대적인 공세에 한국독립당은 1933년 11월 본부를 난징으로 옮겼다. 이듬해 2월 선생은 한국혁명당과 합당해 신한독립당을, 나아가 1935년 7월에는 의열단·조선혁명당·한국독립당·대한독립당 등을 통합한 민족혁명당을 창당했다. 그러나 의열단계와 비의열단계의 파벌 싸움에 실망해 탈당했다. 임정은 1939년 5월 쓰촨성 치장에 도착했다. 선생은 여기에서 임시의정원 의장에 재선됐다가 임시정부의 국무위원(내무장)으로 선임되자 의장직을 사임했다. 국무위원으로 있을 때 선생은 중국 정부와 교섭해 광복군 창설에 전력을 기울였다. 임정은 충칭으로 이동한 직후인 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을 창설했는데 선생의 노력이 깃들어 있다. 선생은 창설식에서 이렇게 훈사(訓辭)를 했다. “용맹스럽게 나가라. 그리하여 왜놈을 무찌르고 우리의 옛 나라를 광복하여라.” 만주에서 당군(黨軍) 한국독립군을 창설했던 선생은 감회가 남달랐을 것이다. 광복이 되고 1945년 12월 2일 선생은 환국했다. 선생은 또다시 좌우합작을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더는 이어 갈 수 없었다. 심장천식으로 입원한 선생은 1946년 9월 9일 69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정부는 1962년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민족문제연구소, 백선엽 장군 대전현충원 안장 금지 가처분 신청

    민족문제연구소, 백선엽 장군 대전현충원 안장 금지 가처분 신청

    고 백선엽 장군의 국립대전현충원 안장을 금지해 달라고 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부가 13일 법원에 가처분 신청을 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이날 대전지법에 낸 가처분 신청서에서 “수많은 독립군을 사살한 친일 반민족 행위자가 현충원에 안장될 수 없다”며 “헌법 전문에 규정된 3·1운동 정신을 부정하는 행위”라고 주장했다. 이어 “향후 친일행위자 묘가 (현충원에서 다른 데로) 이장되더라도 국민이 느낀 정신적 고통은 회복할 수 없을 것”이라며 “민족정기를 훼손하지 않도록 금지 신청을 인용해달라”고 호소했다. 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부와 광복회 대전충남지부, 독립유공자유족회 대전지부 등은 오는 14일 오후 2시 대전지방보훈청 앞에서 백선엽 장군 대전현충원 안장을 반대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백 장군 안장식이 있을 15일 오전 10시 대전현충원 앞에서 시민대회도 연다. 지난 11일 별세한 백 장군은 대전현충원 장군2묘역에 안장된다. 6·25 참전 등으로 현충원 안장에 문제가 없지만 친일 행적을 이유로 반대 목소리도 나온다. 대전 이천열 기자 sky@seoul.co.kr
  • 근현대사 아픔 딛고 ‘역사문화도시’로 도약 시동

    근현대사 아픔 딛고 ‘역사문화도시’로 도약 시동

    용산구에는 백범 김구 선생을 비롯해 임시정부 주요 요인의 유해가 모셔진 효창공원과 함께 전쟁기념관, 미군기지 등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성장현 구청장은 문화관광이야말로 지방정부의 강력한 경쟁력이 될 수 있다고 보고 용산박물관을 건립하는 등 역사문화도시로 발돋움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용산박물관은 용산 곳곳의 재개발, 재건축으로 인해 사라지는 삶과 문화를 보존하고 후대에 남기는 박물관으로 꾸려진다. 2개항 전후,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미군 주둔, 재개발 등 근현대사와 관련된 역사와 문화를 총망라한다. HDC 현대산업개발이 철도병원 본관을 리모델링해 기부채납한다. 잔여부지에는 주거복합단지를 조성할 계획이다. 성 구청장은 민선6기 시작과 함께 역사박물관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했다. 2021년 연말 개관을 목표로 지난달 기준으로 총 1642점의 유물을 수집해 놓은 상태다. 구는 기존의 국립중앙박물관, 국립한글박물관, 전쟁기념관은 물론 리움미술관, 용산공예관 등 박물관 인프라를 연계한 역사박물관 특구 지정도 계획하고 있다. 용산에서 나고 자란 대표적 독립투사인 이봉창 의사 기념관도 건립 중이다. 10월 10일 이봉창 의사 서거 88주기에 맞춰 준공식을 개최한다. 효창동에 자리한 이봉창 역사공원에 건립된다. 이와 별도로 서울시, 국가보훈처와 공동으로 효창독립 100년 공원 조성사업도 추진한다.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해 백범 김구 선생을 비롯해 이봉창·윤봉길·백정기·이동녕·차리석·조성환 선생 등 독립운동가 7인의 묘역, 백범기념관, 효창운동장이 위치한 효창공원 일대를 독립운동 기념 공간으로 조성한다. 성 구청장은 홍범도 장군 유해를 독립운동을 상징하는 효창공원으로 봉환할 것을 건의하기도 했다. 홍 장군은 1920년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성 구청장은 “카자흐스탄에서 장군의 유해를 모셔와 대전 현충원에 안장하는 것보다는 김구 선생을 비롯한 독립투사가 잠들어 계신 효창공원이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이민영 기자 min@seoul.co.kr
  • 3·1문화상 후보자 9월 10일까지 추천

    3·1문화상 후보자 9월 10일까지 추천

    3·1문화재단(이사장 김기영)이 ‘제62회 3·1문화상’ 후보자를 오는 9월 10일까지 추천받는다. 3·1문화상은 숭고한 독립운동 정신을 이어받아 나라의 문화 향상과 산업 발전을 권장하자는 취지에서 1959년 대한양회공업주식회사가 창설했다. 1960년 첫 시상을 한 뒤 1966년 재단법인 3·1문화재단을 설립해 추진하고 있다. 지난해는 학술상 인문사회과학 부문에 박희병 서울대 교수, 자연과학 부문에 김정한 고등과학원 교수가 수상했다. 예술상은 연극배우 박정자, 기술·공학상은 조동우 포항공대 교수에게 각각 돌아갔다. 3·1문화재단은 3·1문화상을 통해 조국의 학술, 예술, 기술 향상과 산업 발전에 기여한 탁월한 인재를 현창하고, 3·1장학금을 통해 미래 인재를 육성하고 있다. 청소년을 위한 3·1운동 새로 읽기 공모전, 장애인을 위한 데이지 파일(음성 및 점자 도서) 제작 지원, 다문화 엄마 학교 지원 등 문화교육사회사업도 진행한다. 3·1문화상과 관련한 자세한 사항은 3·1문화재단 홈페이지(www.31cf.or.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1919년 그날 안감천에 무슨 일이 …성북, 3·1만세운동 기념벽화 조성

    1919년 그날 안감천에 무슨 일이 …성북, 3·1만세운동 기념벽화 조성

    서울 성북구가 성북천 산책로(보문1교 아래)에 3·1운동 기념벽화를 설치했다고 23일 밝혔다. 이 벽화는 과거 안감천이라고 불렸던 성북천에서 3·1운동 당시 500여명이 모여 만세 운동을 했던 역사적 기록을 바탕으로 보문동 지역의 독립 기록을 재현한 것이다. 당시 주민이 청량리로 향하는 전차에 돌을 던지는 모습과 일제에 저항하는 의지를 담은 광고 격문을 담고 있다. 격문에는 주변 마을까지 독립운동을 함께 하기를 권유하는 내용이 담겼다. 앞서 성북구는 지난해에도 성암교회 앞 옹벽에 보문동 출신의 근현대 인물들을 기념하는 벽화를 설치한 바 있다. 벽화에는 현대 문단의 어머니라 불리는 소설가 박완서, 한국 근대 미술에서 가장 주목받는 인물로 손꼽히는 화가 이쾌대 등의 모습이 담겼다. 윤수경 기자 yoon@seoul.co.kr
  • [평화로 나아가는 사람들 5] 서인택 “통일돼 어떤 나라를 세울까부터 얘기해야”

    [평화로 나아가는 사람들 5] 서인택 “통일돼 어떤 나라를 세울까부터 얘기해야”

    “지금 한반도가 아주 좋지 않은 국면에 들어선 것도 사실은 우리가 통일돼 어떤 나라를 만들 것인가에 대한 커다란 그림이 없이 경쟁적으로 북한에 선택권을 줬기 때문이다. 북의 인권을 변화시켰다든가, 핵개발을 막았다든가 아무것도 없다. 왜 이런 결과가 초래됐는지 돌아보고 교류와 대화가 방법이 아니라 목표가 됐던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서인택(51) 글로벌피스재단 한국 회장은 900여 시민단체들이 참여하는 최대 통일운동 연대단체인 통일을실천하는사람들(통일천사)의 공동상임의장을 맡고 있다. 통일천사는 2012년 8월 시민이 주도하는 생활형 통일운동을 기치로 창설돼 글로벌 통일 공감대 확산 프로젝트인 원케이(One K) 글로벌 캠페인을 주도하고 있다. 20일 서울 마포구 합정동의 주택가 골목에 자리한 새소리 잘 들리는 3층 양옥집을 개조한 재단 집무실에서 90분 정도 만났는데 뼈아프고 가슴에 와 닿는 얘기가 막힘이 없었다. 문현진(51) 재단 세계 회장의 ‘코리안 드림’에 터잡은 통일 논리, 최근 한반도 상황에 대한 단상, 생활형 통일운동의 실체와 전망, 결산 등에 이르기까지 넘나들었다. 다음은 일문일답.Q. 이제야 인터뷰를 하게 돼 조금 늦은 감이 있다. 어떻게 이런 운동을 펼치게 됐는지? A. 사실 지금까지 통일 논의는 정부 주도였고 민간의 역할이 없었다. 민족사의 가장 중요한 이슈에 시민이 참여할 수 있는 공간이 극히 제한적이었다. 좌우 이념과 진영의 대립이 심각하고 통일에 대한 논의는 과정과 방법론에만 천착해 있는 것을 부정하기 어렵다. 그것이 다시 대립과 갈등을 낳고 있다. 어떤 통일 국가를 만들 것인가를 둘러싼 엔드 골(최종 목표)에 동의할 수 있어야 한다. 북한과 같은 나라를 만들자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남한이 조금 앞서 있으니 흡수 통일해야 한다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러면 우선 우리끼리 남한 주민들의 동의를 얻고 북한 주민의 동의도 얻고, 북쪽 엘리트 계급도 동의하고, 국제사회의 지지와 동의를 얻을 수 있는 통일 비전부터 공유해야 한다. 정부가 아니라 시민사회가 주도해 하나된 입장을 만들어야 한다고 본다. 그 목표에 대한 합의를 했을 때 모든 이들이 기여할 바를 잡아 기여하고 모두의 노력이 합쳐져 통일이 이뤄진다고 본다. 방법을 놓고 말다툼하다 날이 새는 상황이 돼선 안된다. Q. 그런 비전은 어떻게 찾을 수 있는 건가? A. 인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이상적으로 통일을 이룬 나라가 미국이라고 할 수 있다. 남북전쟁으로 분단의 위기에 몰렸던 나라를 하나로 묶어내 최고의 강대국으로 키워냈다. 여러 요인이 있고 한계도 있지만 헌법정신에 특이하고도 우리의 홍익인간 정신과 맞닿는 부분이 있다. 바로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로 창조됐기에 그 자유와 인권, 행복추구권을 침해하는 정부라면 타도, 해체하고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 비전을 공유할 수 있었던 힘이었다. “새로운 나라를 만들 수 있다는 열망 심어줘야 통일 가능” 모든 차이를 극복하고 통일을 통해 새로운 나라를 만들 수 있다는 열망을 심어줘야 통일이 가능할 것이다. 우리는 현재 정부 구성의 방법론, 나중에 논의해도 될 과정의 문제를 놓고 다투고 있다. 그렇게 비전과 전망을 뚜렷이 공유하면 그것이 과정의 자잘한 어려움을 극복하는 동력이 된다. 우리가 어떤 통일된 나라를 세울 것인가를 지금 논의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에겐 홍익인간으로 주어져 있다고 본다. 우리 민족은 도덕적 이상주의를 실현하려는 열망이 강하다. 고려 때 불교 이상국가, 조선 때 유교 이상국가로 만들려는 실험이 대표적이다. 동학과 3·1운동, 상해 임시정부로 면면히 이어져 왔다. 통일된 나라를 만들 수 있는 해방의 모멘텀을 분단과 동족상잔으로 귀결했다. 미국처럼 자본주의와 개인주의의 폐해를 답습하지 않고 좌파나 진보 진영이 갖고 있는 문제의식을 공유하며 새로운 통일 국가를 만들자는 전망을 공유하는 것이 생활형 통일운동이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우리 문제는 남쪽이 하나의 입장을 만들지 못한 채 자꾸 북한에 선택권을 주는 것이었다. 20년 전 6·15 선언이 나왔을 때가 좋았다고 다들 얘기하는데 그렇지 않다. 남쪽에서 경쟁하니까 북쪽에서 자기 입맛대로 골랐다. 통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분단을 고착화시키는 것이다. 통일이란 결국 북한 체제의 변화가 전제되는 것인데 우리가 선택권을 갖고 북한을 우리가 선택한 방향으로 끌려오게 만들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다. 미국도 우리와 비전을 공유하지 못한 채 중국을 닮아가는 정권이란 오해만 하고 있고, 비핵화가 목표인 것처럼 돼 있다. 그건 일부다. 북한은 핵을 포기할 생각이 없는데 그것만 해결하려 하니 되겠는가? 문재인 정부가 그걸 해결하겠다고 매달리는 것은 현실을 인정하지 않는 몽매함이다. 지금은 두 나라 모두 한발씩 물러나 한반도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정책적 전환을 모색해야 할 때다. 북핵은 통일을 통해서만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게임 플랜을 다시 짜야 한다. 그리고 통일된 새로운 나라에 대한 비전을 공유하면 미국과 중국, 러시아도 협조할 의사가 있다는 약속을 받아낼 수 있다. 그렇지 않고 정권의 이익과 성과만 보고 들어가면 막말이 오가고 개성 공동연락사무소가 폭파·해체되는 일이 반복될 것이다. 위험하면서 중요한 시기다. 이 국면만 벗어나려고 유화책으로 봉합하고 넘어가면 근본적인 해법에서 더 멀어진다. Q. 우리 민족이 여러 차례 기회를 놓쳤다. A. 그렇다. 분단이나 종전 직후는 물론이고, 1990년대 옛 소련 붕괴 때도 좋은 기회를 날려버렸다. 항상 우리는 문제를 적당한 선에서 갈무리하고 말아 버렸다. 몽골 같은 나라도 하루아침에 자유국가가 됐다. 북한은 완전히 충격을 받았다. 김일성은 어느 방향으로 갈지 몰라 갈팡질팡했다. 체제 전환에 협조하는 것으로 옛 동독 엘리트들이 생존을 보장받은 것이 통일로 이어졌다. 몽골도 독재 국가였는데 학생들의 민주화 운동에 굴복했다. 김정은은 핵무기가 생존에 절실해 갖고 있으려는 것인데 그것 없이도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북한 지도층이 빠져나갈 기회를 줄여나가는 것이 통일의 정석” 북한이 빠져나갈 수 있는 옵션을 줄여나가는 것이 방법이다. 미국 카우보이들이 하는 소몰이(Cattle drive) 방식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어중간하게 빠져나가게 했다. Q. 생활형 통일운동 모색을 출범 기치로 내걸었다. 8년이 됐는데 어느 정도 이뤄졌다고 평가하는가? A. 코리안 드림의 비전을 공유하는 것이 요체다. 해외 지부를 활발히 만들고 있다. 홍익인간의 홍(弘) 자가 중국에서 넓다는 뜻을 가진 글자 중에 가장 큰 글자라고 하더라. 중국과 일본에도 이롭고, 아시아 공동체의 리더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시아 가치관의 요체는 가족이다. 서양 민주주의는 개인주의에 기반하고, 우리 민주주의는 가정에서 기인한다. 민족주의의 요체는 대가족 문화다. 가정의 질서를 사회로 확장하는 것이 아시아 모델의 원형이다.우리는 경제개혁의 요체가 금융개혁이라고 생각한다. 젊은이들은 안정된 직장을 찾기 위해 공무원시험에 매달리고 창업이나 기업가 정신이 사라져 통일됐을 때 제대로 된 동력을 찾을 수 있겠나 위기감을 느낀다. 그래서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북한이탈주민들이 정착하는 데 도움이 되는, 기업가 정신을 키워주는 프로그램, 함께 어울려 지내보는 예행연습도 하고 있다. Q. 8년 동안 해오며 어려운 점은? A. 한 사람이 꿈을 꾸면 꿈이지만 많은 이가 꾸면 현실이 된다고 한다. 처음에는 같은 마음을 갖는 이들이 많지 않았는데 갈수록 먼 미래의 문제가 아니라 곧 닥칠 문제,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오히려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든다는 점 때문에 함께 해주시는 분들이 늘고 있다. Q. 아무래도 코로나19 확산 때문에 매년 8·15 때 여는 원케이 콘서트나 포럼 등 규모가 축소되겠다. A. 독일 통일에서도 문화의 힘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점이 입증됐다. 북한 주민들이 남한 드라마를 보고 탈출을 결심했다는 얘기도 널리 알려져 있다. 2015년부터 통일을 주제로 한 노래를 만들어오는 것도 그 일환이다. 작곡가 김형석 등과 아이돌 그룹, 그리고 김무성과 문재인 당시 여야 대표 등이 참여해 만들어진 원드림 원코리아(One Dream One Korea)가 4·27 판문점 회담 때 피날레를 장식했다. 통일을 주제로 한 노래 만들고 8·15에 원케이 코리아 콘서트도 인순이의 ‘하나의 꿈’, 그래미 어워드를 5회 수상한 프로듀서계의 거장 지미 잼 앤 테리 루이스(Jimmy Jam and Terry Lewis)이 그룹 부활의 정동하, 피보 브라이슨 등과 함께 ‘코리안 드림’을 만들어 3·1 운동 100주년 때 공개했다. 트로트 가수 나태주가 태권도 동작과 맞춰 호흡 하나 흐트러뜨리지 않고 부르는 ‘넘버원 코리아’를 8·15 때 공개하려고 준비하고 있다. 김동찬 작곡가가 굉장한 히트를 칠 것이라고 자신하더라. 매년 8·15에 해오던 국제컨퍼런스를 올해는 인터넷 화상회의 시스템인 줌을 통해 열려고 준비 중이다. 더 복잡해지고 심란해진 세계에서 우리 민족의 유일하고 궁극적인 해결책은 통일인데 한반도 정책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큰 주제로 준비하고 있다. Q. 앞으로 계속 활동할 것인데 어떤 각오로 임하는지. A. 세상의 모든 체제 전환은 아래로부터만이 가능했다. 톱다운 방식은 한계가 있다. 시민의 힘으로 이뤄나가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 코로나 사태가 진정되면 전국을 돌며 활발하게 교육도 할 것이다. 시도에 그친 지부를 시군구로 확대할 계획이다. 미국도 한반도를 굉장히 중요시하고 있다. 겉보기와 다르다. 통일 말고는 우리 민족의 활로가 열리지 않는다는 것이 자명해지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정권이 맨날 바뀌고 그들 입맛대로 대북 정책의 좁은 시각으로만 접근하고 해결하려 한다. 정세현 전 장관 같은 경우 개성공단부터 정상화하면 된다고, 아주 쉽게 얘기한다. 하지만 내가 알기로 미국은 쉽게 용인하지 않는다. 북한이 부분적으로 비핵화하면 미국은 제재 푼다는 건 완전 불가능한 시나리오다. 미국 조야는 완전히 매파가 됐다. 2017년 북한 정권이 어려웠을 때 우리는 싱가포르로 그들이 연명할 수 있는 기회를 줬다. 그게 결정적 시기였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북한이 어쩔 수 없이 그 길 밖에는 없다고 생각할 때 통일이 이뤄진다. ‘역사의 정원에 신이 나타날 때 신의 옷자락을 잡는 것이 정치‘라는 비스마르크의 말은 완전히 옳다. 완전히 새로운 어프로치가 필요하다. 글 사진 임병선 평화연구소 사무국장 bsnim@seoul.co.kr
  • 신흥무관학교 재원 조달, 독립군 양성… 만주 독립운동의 ‘숨은 공신’

    신흥무관학교 재원 조달, 독립군 양성… 만주 독립운동의 ‘숨은 공신’

    수원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이며 근대교육자인 임면수는 이회영이나 이상룡과 같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인물이다. 전 재산을 털어 수원 삼일학교를 설립했고 만주로 망명해 신흥무관학교 재원 조달에 몸바치는 등 만주독립운동을 뒤에서 도운 숨은 조력자이기도 하다. 신흥무관학교 분교 교장으로 독립군을 양성하고 결사대원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그가 고문으로 반신불수가 돼 고향에 돌아왔을 때는 기거할 방 한 칸도 없었다. 임면수 선생은 1874년 6월 13일 경기도 수원군 수원면 매향리(현 화성시)에서 아버지 임진엽과 어머니 송씨 사이에서 2남으로 출생했다. 삼일학교 설립에 기부한 재산을 보면 그의 가계는 중농 이상의 부호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호는 필동(必東) 또는 필동(弼東)을 사용했다. 임면수는 19세 때 나중에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뒷바라지하고 독립운동가들을 돌본 전현석과 결혼했다.선생은 어려서는 향리에서 한학을 공부했지만 늦은 나이에 근대 교육을 받았다. 수원양잠학교를 졸업한 선생은 화성학교에 진학, 2년 동안 공부했다. 당시 화성학교 학생들은 일본군 군자금을 기부하는 등 일본에 협력하는 자세를 보였다. 러일전쟁에 통역으로 참가하는가 하면 각종 기관의 일어 통역으로 일하기도 했다. 그러나 선생은 항일투쟁이라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주시경·이동휘 등 애국지사들과 교류 선생은 1905년 서울로 와서 한국사와 한국지리 등을 가르치며 학생들에게 민족의식과 역사의식을 고취시키던 상동청년학원에 입학했다. 선생은 국어강습회를 열었던 주시경과 이동휘 등 애국지사들을 그곳에서 만나 교류했다. 경기 강화에서 사학을 30여곳 설립해 교육 사업을 하고 임시정부 국무총리를 지낸 이동휘는 선생의 진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선생은 수원에서 이하영, 김태제 등과 함께 국채보상운동에 뛰어들었다. 국한문 취지서를 자비로 발간해 동참을 호소하고 경기도 각 지역에 배포했다. 반향은 컸다. 수원에서는 취지서 발표 2~3일 만에 당시로서는 거금인 500여원이 모금될 정도로 열기가 뜨거웠다.1903년 29세의 선생은 젊은 동지들과 함께 유명한 신여성 화가 나혜석이 졸업한 수원 삼일여학교를 설립했다. 학교는 북감리교회로 운영권이 넘어가면서 설립 후 3년이 지나자 재정난을 겪게 됐다. 부호 강석호는 1906년 5월 거금을 기부했고 나중석도 부지 900여평을 기증했다. 선생도 집터와 토지, 과수원을 내놓았다. 현 매향정보중고등학교가 자리잡은 곳이 그가 희사한 땅이다. 1909년 선생은 삼일학교 교장이 됐고 다른 사립학교 설립도 도왔다. 선생은 1907년 기호지방 출신 인사들이 조직한 기호흥학회에서도 활동했다. 서우학회, 교남교육회, 호남학회와 같은 교육진흥 사업을 체계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지역마다 학회가 조직됐는데 기호흥학회도 그중 하나였다. 광주와 수원 등 경기도와 충청도 지역에 19개 지부가 있었고 수원 지역 교육자로서 선생은 교육과 계몽운동에 앞장섰다. 1910년 선생은 서울로 올라와 신민회에 가입하고 양기탁의 집에서 열렸던 구국운동회의에 참여했다. 신민회의 결의에 따라 모국을 떠나 만주에서 독립군을 양성하기로 결심했다. 삼일학교 운영은 나홍석에게 위탁했다. 경술국치 직후인 1910년 10월 초 선생은 극비리에 가족을 이끌고 만주 봉천성 환인현 횡도촌으로 망명했다. 그곳에 먼저 정착한 이회영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은 1911년 6월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해 농가 2칸을 빌려서 신흥강습소를 개설했고 1912년 통화현 합니하로 이전, 신흥중학으로 이름을 바꿨다. 신흥중학은 후에 신흥무관학교로 발전하는데 수만 평의 연병장과 수십 칸의 내무실은 생도들이 합심해 만들었다. 통화현 합니하는 독립군 무관 양성의 본영이 됐다. 선생의 역할은 재원 조달이었다. 신흥무관학교 유지비와 군사훈련비를 조달하고자 영하 40도의 한파와 폭설을 무릅쓰고 썩은 좁쌀, 강냉이, 풀나무 죽으로 연명하면서 동포들의 도움을 구하러 다녔다. 선생 부부는 객주업에 종사했는데 독립군의 연락소, 휴식소, 무기보관소, 회의실 공간으로 제공하기 위함이었다. 독립운동의 아지트였던 셈이다. 부인 전 여사는 수시로 방문하는 별동대, 특파대 등의 식사를 하루에 대여섯 번이나 내놓았고, 그들의 보따리와 총기를 맡아 챙겨 주는 등 노고를 아끼지 않았다. 독립군으로서 전 여사의 밥을 안 먹은 이가 없을 정도였다. 전 여사의 인내심과 온순함, 예의 바른 행동에 누구나 머리를 숙였고 ‘독립의 어머니’로 칭송을 받았다. 선생의 비문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그 당시 독립운동가로 선생댁에서 잠을 안 잔 이가 별로 없고, 그 부인 전현석 여사의 손수 지은 밥을 안 먹은 이가 없으니 실로 선생댁은 독립군 본영의 중계 연락소이며 독립운동객의 휴식처요, 무기보관소요, 회의실이며 참모실이며 기밀 산실이었으니….” 만주의 한인자치기관 부민단에서는 1916년 3월 16일 독립운동가들의 근거지를 위협할 일본영사관 분관 설치를 제지할 방안을 논의했다. 그 방책으로 결사대 200명을 편성했고 7~8명은 통화현 시가에 잠입했는데 선생도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1916년 9월 9일 안동 주재 일본영사가 일본 외무대신에게 보낸 ‘재만 조선인 비밀결사 취조의 건에 대한 회답’ 등에 선생의 이름이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당지(통화현)의 배일자 중 유력자인 결사대원 임필동”이란 표현에서 당시 만주 독립운동계에서의 선생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양성중학교 교장 일하며 제2 신흥무관학교로 선생은 1910년대 중반 통화현 합니하에 설립된 민족학교인 양성중학교 교장으로 활동했는데 이 학교는 제2 신흥무관학교 격이었다. 교수로 재직한 이세영과 재무감독 이동녕 등은 신흥무관학교의 실질적인 중심인물이었다. 3·1운동 이후 일본군들은 1920년 간도로 출병해 만주 지역의 독립운동가를 체포·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선생은 1920년 6월 12일 밤 해룡현 북산성자 삼도가 김강의 집에서 체포됐다. 일본 경찰관과 친일 조선인을 암살하고 동지들을 통해 상하이 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송금하려 한 혐의였다. 선생은 압송돼 가던 중 한국인 경찰 유태철의 도움으로 여관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선생은 낮에는 숨고 밤이 되면 걸어서 14일 만에 길림성 이통현 고유수 한인 농촌마을에 도착해 동포 박씨 집에 은둔했다. 그곳에 머물다 장춘을 거쳐 부여현에 도착해 안승식의 도움을 받았고 그의 집에서 겨울을 보냈다.●아담스기념관 건축 감독… 고문 후유증에 타계 그러나 1921년 2월쯤 길림시내에 잠입해 활동하다 밀정의 고발로 길림영사관에 체포된 뒤 평양감옥에서 심한 고문을 받았다. 전신이 마비될 정도의 위중한 상태가 되자 일제는 선생을 석방했고 수원으로 귀향했지만 그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독립운동가들이 대부분 그렇듯 그의 가족사도 불운했다. 만주에서 20세가 돼 독립운동에 가담한 장남 우상이 1919년 국내에 잠입해 군자금을 마련하고 만주로 돌아가다 동상을 입어 객사한 것이다. 선생은 1923년 삼일학교 아담스기념관 건축 감독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고문 후유증으로 건강이 악화돼 1930년 11월 29일 56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1964년 세류동 공동묘지에 안장됐던 선생의 유골은 삼일상고 동산으로 옮겨졌고 기념비도 세워졌다.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고 묘소는 국립현충원으로 옮겨졌다. 2015년 기념사업회가 발족했으며 손자 임병무씨도 유품을 수원박물관에 기증하고 조부의 업적을 기리는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글 사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금요칼럼] 역사 왜곡, 처벌 대상인가/계승범 서강대 사학과 교수

    [금요칼럼] 역사 왜곡, 처벌 대상인가/계승범 서강대 사학과 교수

    21대 국회가 개원했다. 흔히 ‘진보’로 불리는 범여권이 180석 이상 차지한 사상 초유의 국회다. 개헌을 빼고는 거의 다 할 수 있는 입법 권력을 더불어민주당이 확실히 장악했다. 선거로 나타난 민심의 결과이므로, 명분만 확실하다면 어떤 법이라도 제정하거나 개정할 수 있다. ‘무노동 무임금’ 원칙을 국회의원에게도 적용한 ‘국회의원 수당법 개정안’이 이번에 통과되면 좋은 출발이 될 것이다. 그런데 ‘역사왜곡금지법’이나 그와 비슷한 법안 발의도 적지 않아 역사학도로서 걱정이 앞선다. 지난해 초 5·18의 진상을 왜곡하는 행위를 처벌하자는 법안으로 국회가 잠시 시끄러웠다. 이제 새 국회를 맞아 제정 움직임이 더욱 빨라지고 있다. ‘5·18왜곡처벌법’이 바로 그 법안이다. 그런데 최근 같은 당의 한 초선 의원이 ‘역사왜곡금지법’을 들고 나와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비슷한 법안을 병합해 처리하면서 시간만 지체할 뿐 아니라 그 여파로 ‘5·18왜곡처벌법’마저 제정이 순탄치 않을 것이라며 당의 중진들이 난색을 표했다. 그런데 그 논리가 너무 전략적인 것뿐이라 적이 실망했다. 역사 관련 법안을 발의하면서 역사란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을 조금이라도 한 흔적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특별 처벌 법안이 필요하다는 취지를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지만 역사 문제는 처벌법으로 해결할 사안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역사란 무엇인지, 역사의 왜곡이란 또 무엇인지 명확하게 규정하기가 쉽지 않다. 어떤 사건이나 현상에 대한 해석과 이해는 사람에 따라 다양할 수밖에 없다. 전혀 다른 해석일지라도 평화롭게 병립하는 학설이 역사학 분야에 많은 이유이기도 하다. 혹자는 해석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는 행위만 처벌하는 것이니 문제가 안 된다고 강변한다. 하지만 그 역사적 사실도 결국은 역사가의 주관이 작용한 해석의 일부일 뿐이다. 역사 자료를 검토하고 취사선택하는 과정에서 어떤 역사가도 철저히 객관적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주관이 전혀 없다면 그것은 죽은 자이지 산 사람이 아니다. 그만큼 우리 인간은 주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5·18왜곡처벌법’은 역사라는 단어를 뺌으로써 이런 문제를 비켜 가려는 의도가 분명하게 읽힌다. 그렇지만 5·18 자체가 역사이므로, 큰 차이는 없다. 헌법에 명시된 3·1운동이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역사적 의의를 폄하하고 조롱하는 이가 일부 있지만 우리는 그들을 법으로 처벌하지 않는다. 특별법이 없어서가 아니다. 그 의도가 악의적인지 여부와 상관없이 역사 해석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것이 민주사회의 더 큰 덕목임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다음 개헌 때 5·18도 헌법에 들어갈 수 있겠지만 그럴지라도 그 왜곡 행위가 처벌의 대상이 아니기는 마찬가지다. 역사의 해석은 그야말로 개인의 자유이기 때문이다. 고조선을 세계적 제국으로 신봉하는 유사역사학 관련자들을 일일이 처벌할 필요가 없는 것도 마찬가지다. ‘홀로코스트부정금지법’처럼 우리도 역사 부정을 금지하는 법을 만들자는 목소리가 꽤 높다. 하지만 유럽 여러 나라가 제정한 유사한 법들은 국가권력에 의한 양민 학살이라는 점보다 한 종족이 다른 종족을 집단 학살한 제노사이드에 대한 경종이라는 공통점이 훨씬 더 크다. 역사 해석 차원이 아니라 인간 자체에 대한 최소의 보호막을 국가가 사후에나마 제공한 셈이다. 이런 점에서 동질성이 강한 한국 사회에서 민주화운동에 한 획을 그은 5·18의 성격과 의의는 꽤 다르다. 심지어 프랑스가 2011년 제정한 ‘아르메니아인학살부정처벌법’ 등 일부 법률은 반인류·반인격적 제노사이드를 정치적으로 이용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역사 해석을 법으로 처벌하는 것은 하책 중의 하책이다. 차라리 고의성이 짙은 악의의 가짜뉴스로 처벌하는 법안이 더 유용하지 않을까.
  • [글로벌 In&Out] 북중 관계와 북한의 대내 선전/바실리 V 레베데프 도쿄대 인문사회계연구과 박사과정

    [글로벌 In&Out] 북중 관계와 북한의 대내 선전/바실리 V 레베데프 도쿄대 인문사회계연구과 박사과정

    북중 관계는 북한의 대내외 정책을 결정하는 주요 요소다. 중국은 북한의 최대 교역국이고 유엔안보리 회원국이자 공식적으로 사회주의를 표방한 국가로서 국제무대에서 북한을 무력 내정 간섭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중요한 외교 파트너다. 지난 4일 조선로동당의 기관지인 노동신문이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국제부 대변인 담화’라는 제목으로 중국의 홍콩 국가보안법 승인을 지지하고 미국을 신랄하게 비난하는 기사를 발표하면서 “폼페이오가 오늘의 공산당이 10년 전과 다르다고 한 것을 보면 공산당이 영도하는 사회주의가 날로 장성 강화되고 있다는 것을 자인”했다며 “순차가 다르지만” 중국식 사회주의에 대한 공격은 곧 북한 체제에 대한 공격이라고 강조한 대목에선 중국의 비중을 인식할 수 있다. 하지만 중국과의 관계는 북한이 ‘역사적 우월성’을 강조하는 내부 선전에도 관건적인 역할을 한다. 중국 혁명기에 대한 오늘날 북한의 인식과 사료를 간략히 소개해 보겠다. 북한의 세계사 교과서에서는 중국 내전에서의 중공 승리를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 대원수님의 명령을 높이 받들고 조선의 우수한 아들딸들은 동북해방작전과 해남도전투에 이르는 가렬처절한 전화의 나날에 청춘도 생명도 다 바쳐 가며 전투마다에서 영웅적 위훈을 세웠다. 조선 인민의 국제주의적 지원에 무한히 고무된 중국인민해방군은 중국 공산당의 영도 밑에 1947년 여름부터 반공격에로 넘어갔다.” 중국 혁명에 참여한 조선인들은 김일성의 명령으로 파견됐으며 북한의 국제적 지원이 중공 승리의 중요한 요인이 됐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평가의 근거로 북한 측은 여러 가지 자료를 제시한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김일성이 1945년 9월 15일 ‘중국 동북 지방에 파견되는 군사정치 간부들과 한 담화’라는 문서다. ‘김일성전집’ 제2권에 수록된 이 자료에 따르면 김일성이 일찍이 해방 직후부터 중국 혁명의 중요성을 인식하면서 조선이 갓 해방됐음에도 불구하고 중국 인민의 혁명 투쟁이라는 ‘성스러운 사업’을 지원하기 위해 직접 ‘국제주의 전사’를 중국으로 파견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일단 많은 조선인이 중국 혁명에 참가해 큰 공을 세웠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또한 제2차 국공내전 시기에 북한은 중공군에 물자·의료적 지원, 그리고 휴양도 제한적으로나마 제공했다. 그런데 당시 조선인의 중국 혁명 참가는 김일성, 북한 지도자들과 어떠한 관계가 있을까? 담화 자료를 보면 해방 직후 조선인의 중국 파견은 마치 김일성의 지시로 이루어진 것처럼 묘사되지만 사료를 보면 그런 가능성이 거의 없다. 일제 패망과 소련군의 북한·만주 점령이 결정되면서 조중러 3개 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했다. 이 때문에 소련군은 갑작스러운 일제의 항복으로 만주 공격 작전과 조선 해방 작전에 참가하지 못한 88특수보병여단을 해산하고 중국인과 조선인 전사들을 점령 지원에 파견하기로 했다. 파견 계획은 소련 극동군 정찰부장인 추비린(Чувырин) 소장이 담당했다. 그가 소련 극동군 최고사령관 바실레프스키 원수에게 보낸 보고서를 보면 강건을 비롯한 조선인들이 소련군 명령으로 만주에 파견됐고, 그 목적은 ‘국제주의적 지원’이 아니라 소련군 위수사령관 지원이었다는 것이 확인된다. 따라서 파견 직전 김일성이 그들 앞에서 연설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 날짜와 내용은 김일성전집에 수록된 자료와 많이 다르다고 판단된다. 또한 한국전쟁 중 미군이 노획한 북한 내부 자료에서도 1919년의 3·1운동이 중국 혁명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는 견해가 있으나 국공내전에 참전한 조선인들을 김일성 또는 북한 정치 엘리트들이 파견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라도 인정하는 흔적도 거의 안 보인다.
  • [근대광고 엿보기] 영일 연합군 칭다오 함락 축하 광고

    [근대광고 엿보기] 영일 연합군 칭다오 함락 축하 광고

    제1차 세계대전 중 칭다오 맥주로 유명한 중국 칭다오를 영국과 일본 연합군이 함락한 것을 축하하는 광고가 매일신보에 실렸다. 매일신보가 조선총독부 기관지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매일신보는 축하 광고를 이따금 실었다. 특히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에는 광고주들을 끌어들여 축하광고를 실었다. 1914년 8월 31일자는 4면에서 6면으로 늘려 발행하면서 천장절 광고로 1면부터 6면까지 광고면을 도배하다시피 했다. 1924년 6월 10일자에는 매일신보 사옥 신축 광고도 1개 면을 실었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전에 영국과 동맹 조약을 체결했던 일본은 동맹 관계를 이유로 독일에 전쟁을 선포했다. 영국과 일본이 연합 작전으로 독일의 조차지인 키아우초우를 습격해 함락하고 칭다오를 점령했다. 일본과 영국의 첫 연합작전인 이 전투를 칭다오전역(戰役)이라고 부른다. 당시 칭다오에 주둔하던 독일군은 5000명에 불과해 10배나 되는 일본 침략군과 영국군에 중과부적이었다. 전투에서 이긴 일본은 승전국으로서 칭다오를 지배했다. 일본의 칭다오 지배와 산둥반도 문제는 중국 5·4운동의 도화선이 됐다. 결국 1922년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에 따라 칭다오는 중국에 반환됐다. 칭다오는 원래 작은 어촌에 지나지 않았지만 청일전쟁 후인 1897년 독일은 이른바 삼국간섭으로 자오저우만에 침입한 뒤 이듬해 자오저우만의 조차권을 얻어 칭다오 조계지를 설치했다. 독일은 17년 동안 칭다오를 조차하면서 붉은 지붕의 건물과 맥주를 남겼다. 칭다오 맥주는 1903년 칭다오의 맑은 물과 독일의 맥주 제조기술이 결합돼 탄생했다. 1차 세계대전 전에 영국과 일본은 두 차례 동맹을 맺었다. 1902년의 1차 영일동맹은 영국과 일본이 러시아를 적으로 삼아 러시아의 동진(東進)을 막고 동아시아의 이권을 나눠 가지려 맺은 조약이다.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해 러시아를 만주에서 축출했고 한국에 대한 독자적인 침투 권한을 보장받았다. 1905년의 2차 영일동맹은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두 제국주의 국가의 약소국 침략권을 서로 인정하는 조약이었다. 즉 일본은 영국의 인도 지배를, 영국은 일본의 한국 지배를 상호 보장하기로 약속한 것이다. 일본과의 동맹관계를 의식해 영국은 3·1운동도 일본의 발표 내용을 아주 작게, 그것도 늦게 보도했다. 영국을 대표하는 신문 ‘더 타임스’는 1919년 3월 19일에야 3·1운동을 ‘소요’나 ‘폭동’으로 묘사하면서 짤막하게 보도했다. 4월 10일자에는 ‘한국의 볼셰비즘’이라는 제목 아래 한국의 폭도들이 경찰을 공격하고 관공서를 불태웠다고 보도했다. 3·1운동을 공산주의자의 소요 사태로 왜곡·축소 보도한 것이다. 손성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한양 심장에 모인 백년점포… 열한 개 골목 따라 시간여행

    한양 심장에 모인 백년점포… 열한 개 골목 따라 시간여행

    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20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가 다음달 4일 돛을 올립니다. 코로나19 후유증으로 예년보다 3개월가량 늦어졌습니다. 불가피하게 답사 횟수를 20회로 줄였고 참가자 수도 20명 이내로 제한합니다. 이에 앞서 서울신문 지면 투어로 갈증을 풀어 드립니다. 1회 인사동(4일), 2회 대학로(10일), 3회 여의도(17일), 4회 동대문(24일), 5회 성수동(7월 1일) 등 5개 지역을 찾아갑니다. 이들 지역의 유·무형 서울미래유산을 집중 탐구하고 ‘장소인문학’의 비밀을 풀어 줄 것입니다. 장태동, 최석호, 권기봉씨 등 서울역사 여행가들이 해설자와 집필자로 새롭게 나섭니다. 김동률 서강대 교수, 이소영 동화작가, 함혜리 문화칼럼니스트, 서동철 문화재위원, 손성진 서울신문 논설고문 등 역대급 필진을 초빙해 투어의 격을 높였습니다. 답사투어는 다음달 4일부터 11월 4일까지 매주 토요일 오전 10시에 진행하고 예약은 투어 전주에 서울미래유산(futureheritage.seoul.go.kr) 홈페이지에 하면 됩니다. 관련 기사는 매주 수요일 서울신문 지면에 게재됩니다.●700m 거리에 예술가들의 자취·혼 가득 “여덟 사람이 앉아 있다/두 사람은 시인이고/두 사람은 화가다/한 사람은 조각가고/한 사람은 무용가/저쪽 구석에 앉은 두 사람은 작가라는데 /무슨 작가인지 알 바가 아니다/시인은 기타를 치고/화가는 손뼉을 치고” 이생진(1929~) 시인의 시집 ‘인사동’(우리글·2006년)에 수록된 ‘시인과 화가1’이다. 2000년 겨울부터 2005년 겨울까지 쓴 65편의 시에 인사동의 민낯을 담았다. 인사동 곳곳에는 예술혼이 잠겨 있다. 예술가의 자취가 묻어 있다. 이들이 보고 듣고 즐긴 것들이 서울미래유산이 돼 보석처럼 점점이 박혀 있다. 고 천상병 시인의 부인 목순옥씨가 인사동에서 운영한 카페 ‘귀천’은 서울미래유산이다. “귀천에 목 여사는 없고/걸레스님만 걸려 있다/천 시인은 목 여사와 나란히 앉은 사진틀에서/생진아, 너 아직 스무 살이제이 한다/내가 쉰한 살 때 하던 소리다/지금은/내가 먼저 하늘에 왔데이 하고 웃는다/천 시인은 나보다 한 살 아래인데/먼저 하늘에 왔다고 자랑한다” 목씨 사후 조카 목영선씨가 2호점을 내 명맥을 잇고 있다. 오래된 서점 통문관도 서울미래유산이다. 이생진 시인의 시에 등장한다. “통문관 앞을 지나는데/노란 은행잎 속에서 이겸노 옹이 바스락거린다/그의 생애가 인사동이다” 인사동의 중앙통인 인사동길에 있는 통문관은 1934년에 문을 열었다. 출입문은 대개 닫혀 있다. 창에 붙은 서화 틈새로 기웃거려 보지만 천장까지 쌓은 책 때문에 안을 들여다보기 어렵다. 통문관 주인 이종운씨는 이겸노씨의 손자다. ‘월인석보’, ‘청구영언’ 같은 보물급 전적을 비롯해 수많은 고서를 발굴·수집한 할아버지에게서 천자문을 배웠다. 수많은 자료 중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기관지로 발행한 항일투쟁지 ‘상해독립신문’ 창간호 등 170부를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할아버지께서 여든여덟 살이 되셨을 때 ‘통문관책방비화’라는 책을 냈는데 나도 그 나이쯤 책을 내고 싶다”고 말했다.●조선의 근대가 태동한 문화·정치 일번지 인사동에서 가장 오래된 필방 구하산방은 ‘첩첩산중 신선들의 집’이라는 뜻이다. 역시 서울미래유산이다. 1913년에 문을 열어 3대째 이어 온 필방에는 종이, 먹, 붓, 물감 등 2000종이 넘는 서화 재료가 가득하다. 필방에는 그림을 공부하는 학생에서부터 전국의 화가들이 몰린다. 홍수희 대표는 “우리 집 모르면 작가가 아니지”라고 말한다. 본래 일본 상인이 개업한 가게였으나 우당 홍기대 선생이 1935년에 점원으로 들어가 광복 이후에 인수했다. 3대인 홍수희 대표는 2대 홍문희씨의 동생이다. 서울미래유산 수도약국은 광복 직후인 1946년 8월 15일 임명용씨가 개업했다. 약국에서 심부름하다 약종상 면허를 취득했으니 적수공권으로 자수성가한 약업계 1세대다. 세간에 “수도약국에는 없는 약이 없다”라는 말이 나돌았다. 지금은 모두 추억이 됐지만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사람들이 약을 사기 위해 장사진을 이룬 적도 있었다. 약국을 가업으로 이어받은 약사는 셋째 아들 임준석씨다. 종로구 인사동 194 하나로빌딩 1층에는 서울미래유산 서울중심점 표지석이 말없이 서 있다. 1896년 한양의 중심 지점을 나타내기 위해 고종이 세웠다. 101년 전 3·1운동의 주역인 민족대표 33인은 태화빌딩과 하나로빌딩 사이 주차장 자리인 태화관 별유천지 6호실에서 독립선언을 했다. 서울이 10배 이상 확장되면서 옛 서울의 남쪽 경계였던 남산이 서울의 중심부가 됐다. 흘러간 옛 중심점이다. 이 밖에 인사동 일대의 서울미래유산은 조선중앙일보 옛 사옥, 보신각 지하철 수준점, 낙원악기상가, 허리우드극장, 이문설렁탕, 낙원떡집, 유진식당, 빈대떡전문 열차집 등이 있다. 인사동은 서울의 근대가 태동한 곳이다. 서울의 첫 대학로였고, 서울의 첫 정치 일번지였으며, 서울의 예술과 음식문화가 잉태된 곳이다. 서울의 미래유산 집결지대라고 불러도 지나치지 않다.●일제강점기 몰락한 왕족 고미술품 팔아 인사동은 서울에서 가장 고풍스런 거리이자 미술품과 골동품의 향기가 진동하는 공간이다. 서울에서 가장 한국적인 거리여서 외국인 친구나 오랜만에 고국을 찾은 교포나 외국인 관광객에게 한국을 알릴 수 있는 장소이다. 서울의 명소이자 예술가들의 혼이 살아 숨 쉬는 공간이다. 골동품과 도자기, 고서 등 한국의 전통 상품이 거래되는 상징적인 동네이면서도 ‘중국산 짝퉁’이 소비되는 자본주의의 경연장이기도 하다. 인사동길은 종로구 인사동 63번지에서 관훈동 136번지로 이어진다. 삼청동~관훈동~인사동~청계천 광통교까지 흐르는 개천을 복개하면서 생긴 신작로다. 북쪽으로는 관훈동, 동쪽으로는 낙원동, 남쪽으로는 종로2가 적선동 그리고 서쪽으로는 공평동과 접하는 700여m의 길이다. 일반적으로 인사동이라고 하면 골동품, 화랑, 표구, 필방, 전통 공예품, 전통찻집, 전통음식점 등이 모여 있는 인사동 인접 지역을 통칭한다. 안국역이나 종로3가역에서 들어오는 두 갈래 통로로 이뤄진 인사동의 몸통 인사동길은 모두 11개의 실핏줄 같은 골목을 통해 이웃 동네와 연결돼 있다. 인사동의 역사는 조선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계사 바로 옆 터에는 화가를 양성하고 선발하던 도화서가 있었다. 도화서에는 전국의 화원 지망생이 몰려들었고 지필묵을 파는 가게들이 생겼다. 인사동에 처음 고미술품 시장이 형성된 것은 일제강점기였다. 이때부터 인사동은 ‘한국 전통 문화재 유출의 현장’이 됐다. 몰락한 왕족과 양반들이 고미술품을 일본인에게 내다 판 시기다. 해방 이후에는 일본인 대신 미군과 유럽인들로 고객이 바뀌었다. 1970~80년대부터 인사동에 화랑·표구사 등의 상가가 형성되기 시작했고 화랑이 들어섰다. 필방이 속속 진을 쳤다. “인사동에 와서도 인사동을 찾지 못하는 것은/동서남북에 서 있어도/동서남북이 보이지 않기 때문/그렇게 찾기 어려운 인사동이/동은 낙원동으로 빠지고/서는 공평동으로/남은 종로2가에서/북은 관훈동으로 사라지니/인사동이 인사동에 있을 리가 없다…” 이생진 시인은 시집 ‘인사동’에 인사동의 역사와 상처를 기록하고자 했다. 그리고 “시혼이 상혼에게 혼을 빼앗긴 지 오래되었다”고 안타까워했다. 이미 14년 전의 일이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장 사진 김학영 연구위원
  • 3·1만세운동·일제 만행, 사진·글로 전 세계에 알린 ‘34번째 민족대표’

    3·1만세운동·일제 만행, 사진·글로 전 세계에 알린 ‘34번째 민족대표’

    1920년 초 대구감옥. 스코필드는 누워 있는 김마리아를 보고는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김마리아는 애국부인회 사건으로 악랄한 고문을 받아 반신불수가 된 채 수감 중이었다. 스코필드는 혹한의 날씨에도 서울에서 대구로 내려가 마리아의 손을 꼭 잡고 위로했다. 스코필드는 서울로 올라온 즉시 사이토 총독을 방문해 강력하게 항의했다. 지난달 12일은 스코필드(Frank William Schofield) 박사의 서거 50주기였다. 국립서울현충원에 묘소가 있지만 코로나19가 창궐하던 때라 작은 추모식도 열리지 않았다. 스코필드는 우리가 잘 모르는 독립운동가에 앞서 잊어서는 안 될 독립운동가다. 그는 3·1만세운동이 일어나기 전에 협력을 요청받은 유일한 외국인이다. 또한 그 참상을 세계에 널리 알려 ‘34번째 민족대표’로 불린다. 건국훈장을 받은 독립유공자 1만 5500여명 중 순수 외국인은 스코필드를 포함해 70명이다. 장제스, 쑨원, 베델도 들어 있고 식민지 정책에 반기를 든 후세 다쓰지 변호사, 박열과 옥중 결혼한 가네코 등 일본인도 훈장을 받았다.스코필드는 1889년 3월 15일 럭비의 발상지인 영국 워릭셔주 럭비시에서 태어났다. 1907년 캐나다로 홀로 이민을 가서 토론토에 있는 온타리오수의대를 졸업하고 박사 학위를 받아 모교에서 세균학 강사로 일했다. 스코필드가 한국에 온 것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장 에비슨으로부터 “한국과 같은 외딴 나라에서 굳은 의지와 정열로 교육 활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편지 한 통을 받은 것이 계기가 됐다.스코필드는 대학생 때 소아마비를 앓아 한쪽 다리와 팔이 불편한 몸이어서 주변에서 말렸지만 뿌리치고 1916년 11월 아내와 함께 한국에 들어왔다. 스코필드는 석호필(石虎弼)이라는 한국식 이름부터 지었다. 철석같은 의지(돌 석), 호랑이같이 무서운 사람(호랑이 호),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것(도울 필)을 뜻한다고 말하곤 했다. 3·1운동 전날 저녁 세브란스의학교 제약주임이자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인 이갑성은 세브란스의학교 교수로 있던 스코필드를 찾아가 거사 계획을 설명하고는 현장 사진을 기록으로 남겨 달라고 부탁했다. 또 독립선언문을 영어로 번역해 미국 백악관에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일제의 강압적인 지배 정책에 반대하고 한국의 독립과 자유를 지지하던 스코필드는 망설이지 않았다. 드디어 3월 1일. 스코필드는 자전거를 타고 파고다공원으로 나가 만세 부르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기 시작했다. 한쪽 다리가 불편한 스코필드는 외발로 자전거를 몰아야 했다. 대한문, 왜성대, 숭례문, 서울역까지 군중을 쫓아다니면서 열심히 셔터를 눌러 역사적인 현장을 촬영했다. 사진을 잘 찍으려고 일본인이 운영하는 과자점에 들어갔다가 도둑으로 몰리는 봉변도 당했다. 남아 있는 3·1운동 현장 사진 대부분은 스코필드가 찍은 것이다. 스코필드는 보고 들은 것들을 사진과 함께 외국 신문에 기고했다. 스코필드가 찍은 태형 피해자 사진 등 만행 사진은 미 국무장관에게 보낸 보고서에 첨부됐다.스코필드의 두 번째 활약은 일제의 학살 사건을 전 세계에 알린 일이다. 경기도 수원(현재 화성) 지역 만세운동의 보복으로 일본군은 수촌리 마을 전체를 불태우고 항의하는 주민을 총칼로 제압하고 죽였다. 또 발안 시위의 보복으로 제암리 주민 30여명을 교회 안에 가둔 뒤 불을 질러 23명을 학살했고 이웃 고주리에서도 천도교인 6명을 총살했다. 소식을 들은 스코필드는 기차와 자전거를 이용해 현장으로 달려가 진상을 눈으로 보고 보고서를 썼다. 수촌리 사건은 ‘수촌리 만행보고서’라는 제목으로 미국 장로회 기관지 ‘프레스비테리안 위트니스’ 1919년 7월 26일자에 보도됐다. 제암리 사건은 ‘제암리 대학살’이란 제목으로 중국 상하이에서 발행되던 ‘상하이 가제트’ 1919년 5월 27일자에 게재됐다. 스코필드가 아니었다면 일제의 만행은 한동안 파묻혔을지도 모른다. 스코필드는 김마리아와 같은 수감자 인권 문제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당시 ‘서울프레스’라는 영자신문이 서대문형무소를 ‘서대문요양소’, ‘서대문직업학교’라고 보도하자 직접 형무소를 찾아가 진실을 확인했다. 유관순, 어윤희, 이애주 등을 만나 끔찍한 고문이 있었음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총독부로 찾아가 하세가와 총독에게 강력하게 항의했다. 그는 총독부 간부들을 만날 때 반드시 명함을 받고 사진을 찍어 둬 방해하는 일경들에게 압력을 행사하는 데 활용했다고 한다.스코필드는 1919년 8월 일본에 건너가 극동 선교사 800여명 앞에서 일제의 만행을 비난하는 연설을 하고 하라 총리를 만나 비인간적인 만행을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각국 언론과 접촉해 일본을 비난하는 글도 계속해서 실었다. 일본 영자신문 ‘재팬 애드버타이저’와 캐나다 ‘글로브’ 등에는 기고문을 보내 한국인에 대한 만행을 중단하고 독립과 자치를 허용하라고 촉구했다. 세브란스의학교 제자들은 스승 스코필드의 뒤를 따라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이용설, 김문진, 김명수, 배동완 등은 3·1만세운동에 참여했다. 세브란스병원 부속 간호부 양성소를 다니던 정종명, 박덕혜, 노순경, 이정숙, 이성완 등은 만세운동에 참가하거나 애국부인회 활동을 하다 옥고를 치렀다. 특히 세브란스의학교 1917년 졸업생 안사영은 만주로 가서 신흥무관학교 군의과장으로 독립운동을 도왔다.일제에 스코필드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일본은 영국과 동맹을 맺고 있던 터라 영국계 캐나다인인 스코필드를 추방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귀국을 종용하도록 세브란스에 직간접적인 압력을 넣었으며 암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스코필드는 결국 세브란스와의 계약을 연장하지 못하고 1920년 4월 캐나다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캐나다에 있으면서도 스코필드의 한국 사랑은 식지 않았다. 공개편지를 국내로 보내 한국을 자신의 고향이라고도 하고 자신은 캐나다인이라기보다 조선인이라고 말했다. 1954년 스코필드는 온타리오수의대에서 은퇴했고 1957년에는 부인 엘리스가 사망했다. 한국 친구들은 스코필드가 한국에 오기를 바랐다. 마침내 1958년 8월 스코필드는 국빈 자격으로 38년 만에 한국에 돌아왔다. 스코필드는 서울대 수의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고아원과 직업학교를 돕는 봉사활동에도 열성적으로 참여했다. 정부가 작은 아파트를 내줬지만 그는 우편료가 비싸진다며 편지의 여백을 가위로 자를 만큼 검소하게 살았다. 그가 만년에 한국에서 생활한 12년은 독재의 시대였다. 스코필드는 독재와 부정을 비판했고 당국은 그의 강의를 중단시키기도 했다. “국민은 불의에 항거해야만 하고 목숨을 버려야만 할 때가 있다. 그럼으로써 일종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되고 조금은 광명을 되찾을 수 있는 것이다.” 스코필드는 굴하지 않았고 강연과 언론 기고를 통해 끊임없이 바른 소리를 했다. 1968년 정부는 스코필드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스코필드는 1969년 초부터 천식이 심해졌고 병원에 입원했다. 그는 병상에서도 한국의 장래를 걱정하다가 1970년 4월 12일 81세로 영면했다. 캐나다에는 스코필드의 손자와 손녀가 살고 있고 몇 차례 할아버지가 묻힌 한국을 방문했다. “캐나다인으로 우리 겨레의 자주독립을 위하여 생애를 바치신 거룩한 스코필드 박사 여기에 고요히 잠드시다.” 묘비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 스코필드는 외국인이었지만 한국인도 하지 못한 일을 했고 한국을 자신의 조국보다 더 사랑했다. 우리가 그를 잊어서는 안 되는 까닭이다. 글 사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몸 낮춘 통합당, 5·18 망언 거듭 사죄… 1년 전과 완전히 달랐다

    몸 낮춘 통합당, 5·18 망언 거듭 사죄… 1년 전과 완전히 달랐다

    주호영 ‘임 행진곡’ 제창·민주묘지 참배 “당에서 딴소리해서 상처드린 것 죄송” 민주는 기념식 후 현장서 최고위 개최 “5·18 정신 계승… 역사왜곡처벌법 처리” 초청 못 받은 한국당도 민주묘지 참배 安 “5·18, 헌법 전문에” 개헌특위 제안여야는 5·18민주화운동 40주년을 맞은 18일 일제히 광주를 찾아 ‘5·18민주화운동 진상 규명’에 오랜만에 한목소리를 냈다. 더불어민주당은 당력을 총동원해 광주 일정에 집중하며 5·18 정신을 계승하겠다고 공언했다. 미래통합당은 과거 일부 의원의 5·18 망언에 대해 거듭 사죄하는 등 몸을 한껏 낮췄다. 민주당 이해찬 대표 등 지도부는 이날 광주로 총출동해 금남로 5·18민주광장(옛 전남도청)에서 열린 기념식에 참석한 후 인근에서 현장 최고위원회의를 진행했다. 이 대표는 “우리가 언젠가 개헌을 한다면 5·18민주화운동은 3·1운동, 4·19혁명과 함께 헌법 전문에 계승해야 할 역사로 남아야 한다고 굳게 믿는다”고 말했다. 김태년 원내대표는 “더이상 5·18에 대한 왜곡과 날조가 우리 사회를 좀먹게 놔둬선 안 된다”며 “5·18 역사왜곡처벌법(5·18민주화운동 특별법 개정안)을 처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통합당 주호영 원내대표는 취임 후 첫 현장 행보로 광주를 찾았다. 주 대표는 기념식에서 주먹을 불끈 쥐고 ‘임을 위한 행진곡’을 힘껏 제창했다. 통합당 관계자들을 제지하려는 광주시민들의 모습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주 원내대표는 기념식 후 국립5·18민주묘지를 참배하고 현장에서 만난 5·18 시민단체 관계자들과 면담했다. 그는 “5·18의 의미와 성격에 관해서는 법적으로 다 정리된 것”이라며 “간혹 딴소리를 해서 마음에 상처를 드린 분들이 있는데 그분들이 잘못된 것이다. 거듭 저희가 죄송하고 잘못했다”고 과거 통합당 일각의 망언에 대해 재차 사과했다. 이날 광주를 찾은 통합당의 태도는 1년 전과는 사뭇 달랐다. 지난해 2월 자유한국당(통합당 전신) 소속이던 김진태·김순례·이종명 의원의 5·18 망언이 논란이 됐을 당시 황교안 대표는 공식 사과 없이 5·18 기념식에 참석했다가 광주시민들로부터 비난과 물세례를 받았다. 정부 공식 기념식에 초청받지 못한 통합당의 비례위성정당 미래한국당도 이날 단체로 광주를 방문해 5·18민주묘지를 참배했다. 한국당은 기념식 참석을 타진했으나 정부가 사회적 거리두기의 일환으로 기념식 참석 인원을 대폭 축소하면서 출입 비표를 받지 못했다. 한편 국민의당 안철수 대표는 “21대 국회에서 ‘헌법개정특별위원회’를 구성해 5·18민주화운동의 역사적 사실과 정신을 헌법 전문에 담자”고 제안했다. 그는 이날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에서 “5·18에 대한 진정한 평가가 이뤄지고 국민 통합의 계기로 자리잡게 하는 방안”이라며 이같이 밝혔다. 광주 이하영 기자 hiyoung@seoul.co.kr
  • 文대통령 “개헌 논의 된다면 헌법 전문에 5·18 정신 담아야”

    文대통령 “개헌 논의 된다면 헌법 전문에 5·18 정신 담아야”

    문재인 대통령이 앞으로 헌법 개정 논의가 이뤄질 경우 헌법 전문에 5·18광주민주화운동 정신이 반드시 담겨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문 대통령은 광주MBC의 5·18 40주년 특별기획 ‘문재인 대통령의 오일팔’에 출연해 이같이 언급했다고 광주MBC가 14일 밝혔다. 문 대통령은 인터뷰에서 현재의 헌법 전문에 대해 “4·19 이후 장기간 군사독재가 있었던 만큼 우리나라의 민주화운동을 설명하기에 부족한 면이 있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5·18민주화운동과 6월항쟁이 헌법에 담겨야 우리 민주화운동의 역사가 제대로 표현되는 것이고, 국민적 통합도 이뤄질 수 있다고 믿는다”고 강조했다. 지난 1987년 만들어진 현행 헌법 전문에는 3·1운동과 4·19혁명만을 담고 있다. 앞서 2018년 3월 26일 문 대통령이 국회에 제출한 개헌안 전문에는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혁명, 부마민주항쟁과 5·18민주화운동, 6·10항쟁의 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는 대목이 포함됐다. 당시 개헌안은 같은 해 5월 24일 국회 본회의 표결에 부쳐졌으나, 투표수가 의결정족수 미달로 ‘투표 불성립’이 선언됐다. 약 50분 분량의 녹화 인터뷰는 오는 17일 광주MBC와 청와대 홈페이지 등을 통해 공개된다. 이재연 기자 oscal@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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