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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고려·조선 ‘왕들의 온천’ 병치료·사냥길에 찾아 세종때 온양 행궁 지어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고려·조선 ‘왕들의 온천’ 병치료·사냥길에 찾아 세종때 온양 행궁 지어

    고려시대 가장 각광받은 온천은 황해도 평주 온천이었다. 온정원(溫井院)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진 온천이다. 고려는 오늘날의 개성인 송악에 도읍했다. 자연스럽게 역대 임금은 가까운 평주 온천을 자주 찾았다. 고려를 무너뜨린 조선의 왕들도 이 온천을 즐긴 것은 다르지 않았다. 태조 이성계는 즉위한 바로 그해에도 평주 온천에 갔다. 태조는 이후에도 해마다 평주 온천을 찾았다. 그러다 즉위 5년째를 맞은 1396년에는 ‘충청도 온천’으로 행선지를 바꾸었다. 온양(溫陽) 온천이다. 그런데 온양은 평주보다 멀다. 왕이 도성을 비우는 기간이 늘어나고, 비용도 더 많이 든다.태조의 온양 온천 행차를 두고 조선왕조실록에는 ‘간관 이정견(李廷堅) 등이 중지하기를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으므로 대간에서 다시 연명(連名)으로 상소하여 그만두기를 청했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온천에 가고자 함은 병을 치료하기 위함인데, 대간에서 애써서 말리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고 마침내 거둥했다’는 대목이 보인다. ‘임금의 건강’이란 모든 것에 앞서는 명분이었다. 이후 태조는 다시 평주 온천으로 간다. 정종도 평주에 갔다. 이번에도 간관들은 극력 말렸다. 정종은 “내가 작은 병이 있어서 목욕하러 가는 것이지, 사냥을 위한 것은 아니다. 하물며, 사시(四時)의 사냥은 고전(古典)에 있는데, 나는 다만 1년에 한 번 나가는 것뿐”이라며 듣지 않았다.정종이 말한 사시, 즉 네 계절의 사냥이란 ‘봄에는 새끼 배지 않은 짐승을 사냥하고, 여름에는 곡물의 싹을 해치는 조수를 사냥하고, 가을에는 추격하고 물러나는 것을 익히는 사냥을 하고, 겨울에는 땅을 지키듯 영역을 침범하는 짐승을 사냥하니 다 농한기에 일을 익히는 것’이라는 ‘춘추좌전’의 가르침을 말한다. 견강부회도 이런 견강부회가 없다. 실제로 정종이 평주 온천에 머물다 해주로 사냥을 가려고 하자 조정 곳곳에서 반대 상소가 잇따랐다. 하지만 정종은 사냥을 강행한다. 이렇듯 조선 초기 왕의 온천욕이란 신병 치료를 구실로 사냥을 하기 위한 수단이었던 듯하다. 아버지 이성계를 닮아 무인(武人) 기질이 있던 태종 이방원은 좀더 노골적이었다. 1413년 태종실록에는 ‘임금이 풍해도로 가다가 광탄에서 머물렀다. 임금이 해주로 거둥하고자 하면서 핑계 삼아 평주 온천에서 목욕한다고 하였다’는 대목이 보인다. 황해도라는 이름은 1417년 풍해도에서 고친 것이다.그런데 풍질과 안질, 피부병에 시달렸던 세종은 온천수의 치료 효과에 기대를 걸었던 것 같다. 세종이 온수현(溫水縣)의 온양 온천에 처음 간 것은 즉위 15년인 1433년이었다. 세종은 효험이 있었다고 생각한 듯하다. 이후 도성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온천을 찾는 데 공력을 기울인다. 세종실록에는 ‘용비어천가’를 짓는 데도 참여했던 이사맹을 1434년 부평으로 보내 온천을 찾아보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1438년에는 ‘경기 지방에서 온천을 찾는 사람에게는 후한 상을 주고 해당 읍의 칭호를 승격시킬 것’이라고 명하기도 한다. 하지만 도성에서 가까운 온천을 찾는 세종의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다. 세종은 부평 사람들이 온천의 존재를 알고 있으면서도 신고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했다. 세종은 1438년 10월 4일 ‘번거롭고 소요스러운 폐단이 있을까 염려하여 감춘다면 고을의 명칭을 깎아내려 그 죄를 징계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만큼 임금 행차는 해당 고을 백성들에게는 환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 세종은 11월 8일 부평부(府)를 부평현(縣)으로 강등했다. 그만큼 온천이 절실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나타난 전국의 온천은 31개에 이르지만 경기도와 전라도에는 없다. 반면 온양현은 1442년 온양군으로 승격한다. 온양에 본격적인 행궁(行宮)을 지은 것은 세종이다. 행궁이란 궁궐 밖에 지은 임금의 거처다. 25칸의 행각은 1433년 정월 완성됐다. 정청(正廳)을 중심으로 동·서 침전과 목욕시설인 상탕자(上湯子)와 차탕자(次湯子)를 두었다. 상탕자는 왕와 가족, 하탕자는 고위 수행원들이 사용했을 것으로 짐작한다. 정유재란 때 파괴된 온양행궁이 100칸 규모로 복원된 것은 1665년(현종 6년)이다. 이후 숙종과 영조, 정조가 다녀가면서 시설이 조금 더 늘어났을 것으로 보인다. 정조 때 그려진 ‘온양별궁전도’(溫陽別宮全圖)는 전성기의 모습을 보여준다. 고종시대에는 퇴락한 전각을 다시 세운 듯 함락당(涵堂) 16칸과 혜파정(惠波亭) 14칸을 신축한다.한말 일본인 자본인 온양온천주식회사는 온양행궁을 차지하고 1904년 일본식 온천여관인 온양관(溫陽館)을 짓는다. 행궁 시설의 상당 부분은 파괴했고, 상당 부분은 재활용했다. 장항선 철도를 부설한 경남철도로 주인이 바뀌어 온양관이 신정관(神井館)이라는 일종의 온천 리조트로 탈바꿈한 것은 1928년이다. 신혼여행지로 각광받기 시작한 계기다. 1953년 당시 교통부는 6·25전쟁으로 불탄 신정관 자리에 온양철도호텔을 세웠다. 이것이 1967년 민영화에 따라 온양관광호텔로 이름을 바꾸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금 아산시는 현충사가 있는 이순신 장군의 고장이다. 퇴락하던 온양 온천은 수도권 전철 개통으로 옛 명성을 조금씩 되찾아가고 있다지만, 온양행궁의 역사는 잊혀지고 있다. 옛 행궁 건물은 이제 아무것도 남아 있는 것이 없다. 다만 호텔 귀퉁이에 두 개의 석물(石物)이 초라하게나마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온양행궁의 흔적이라도 찾아보려면 온양관광호텔로 가야 한다. 온양온천역에서 내리면 걸어서 10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호텔 정문으로 들어서면 왼쪽 주차장 너머에 작은 비각이 하나 보인다. 내부의 작은 비석이 신정비(神井碑)다. 세조가 온양에 머물 때 온천 옆에서 냉천을 발견하고 신정이라 이름 붙인 것을 기념해 1476년(성종 7년)에 세운 비석이라고 한다. 신정을 상징하는 그 왼쪽의 돌우물은 흙에 묻혀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호텔 오른쪽에는 영괴대(靈槐臺)가 있다. 사도세자가 1760년 영조를 따라왔을 때 무술을 연마하던 사장(射場)이다. 영조는 사도세자가 학문에 집중해 현명한 군주가 되기를 바랐다고 한다. 하지만 사도세자는 무술에 더 흥미를 느꼈고, 마음껏 화살을 날리던 온양행궁 시절을 가장 행복하게 회상하곤 했다고 한다. 정조는 뒤주에 갇혀 불행하게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를 기려 이곳에 회화나무 세 그루를 심고 단을 쌓아 영괴대라 이름했다. 그 옆에 친필로 ‘영괴대’라 쓴 비석을 세웠다. 아산 지역 사회는 온양행궁을 복원하는 것을 숙원 사업으로 여긴다. 행궁이 옛 모습을 찾으면 문화관광자원으로도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다. 하지만 아직은 발굴조사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듯하다. 천문학적 예산이 필요한 호텔 이전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럴수록 호텔 측도 지금처럼 행궁 터를 무심하게 버려두기보다 일정 부분 정비하는 것이 영업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글 사진 dcsuh@seoul.co.kr
  • 6·25 참전용사 ‘임진강 아이스하키’ 재현

    6·25 참전용사 ‘임진강 아이스하키’ 재현

    6·25전쟁에 참전했던 캐나다 노병들이 당시를 회상하며 임진강에서 아이스하키 경기를 재현한다.국가보훈처는 15일 “평창동계올림픽을 계기로 캐나다의 6·25 참전용사 3명을 초청했다”며 이 같은 계획을 밝혔다. 방한하는 캐나다 참전용사는 데니스 무어(87), 클로드 샬랑(89), 존 비숍(89)으로 이들은 17일 가족과 함께 한국에 도착해 5박 6일간 머물며 다양한 행사에 참석한다. 6·25전쟁 당시 무어와 비숍은 캐나다군의 프린세스 패트리샤 경보병부대, 샬랑은 왕실 22연대 소속으로 참전했다.이들은 오는 19일 경기 파주 임진강 빙판에서 6·25전쟁 때 했던 아이스하키 경기를 재현할 예정이다. 캐나다 현역 장병이 이들과 팀을 이뤄 연세대·고려대 아이스하키 연합팀과 경기를 벌인다. 피우진 보훈처장이 직접 퍽드롭(시구)을 실시하기로 했다. 이들이 임진강 아이스하키 경기에 나서는 것은 혹독했던 6·25전쟁 당시의 겨울 그나마 아이스하키가 있었기에 좌절하지 않고 싸울 수 있었다. 아이스하키의 종주국인 캐나다 장병들은 6·25전쟁 당시 얼어붙은 임진강에서 아이스하키 경기로 향수를 달랬단다. 이번 경기는 당시를 잊지 않으려고 기획됐으며 ‘임진 클래식’이라고 이름 붙였다. 한편 샬랑은 같은 날 주한 캐나다 대사와 함께 평창올림픽 성화 봉송 주자로도 나선다. 박홍환 선임기자 stinger@seoul.co.kr
  • ‘치즈만두 ’ ‘토스트버거 ’… 포방터 시장의 실험

    서울 서대문구 전통시장인 홍은1동 포방터시장에서 오는 13일과 27일 ‘토요일앤 포방터 1월 신년메뉴 잔치대작전’ 행사가 열린다고 9일 밝혔다. ‘포방터’라는 명칭은 6·25전쟁 때 퇴각하는 북한군을 공격하기 위해 대포를 설치했던 곳이라는 뜻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3일 포방터시장에서 먹거리를 3개 이상 구매한 성인 고객과 민속놀이 미션을 수행한 청소년 등 선착순 300명이 50% 할인된 가격에 돼지고기를 살 수 있다. 일명 ‘돼지 잡는 날’ 행사로 돼지 5마리 분량을 마련했다. 27일에는 신규 고객의 관심을 모으기 위해 ‘치즈만두, 유부폭탄우동, 우리폭탄고기전, 야채폭탄삼겹말이, 납작피자, 레인보우새우꼬치, 토스트버거 등 상인들이 새롭게 준비한 신년 메뉴를 1000원씩에 판매한다. 먹거리를 3개 이상 구매한 성인 고객을 대상으로 경품 행사도 있다. 다음달 10일 추첨을 통해 스탠드형 김치냉장고, 세탁기, 전기밥솥, 우족세트 등 다양한 경품을 증정한다. 문석진 서대문구청장은 “골목형시장 육성사업으로 새롭게 단장한 포방터시장이 신년행사를 통해 매출을 높이고 시민들에게 더욱 다가가는 생활장터로 자리매김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범수 기자 bulse46@seoul.co.kr
  • 믿고 보는 송강호·슈퍼 히어로 총출동… ‘천만클럽’ 주인공은?

    믿고 보는 송강호·슈퍼 히어로 총출동… ‘천만클럽’ 주인공은?

    지난해 국내에서 개봉한 영화는 한국 영화 486편, 외화 1260편 모두 합쳐 1746편에 달한다. 부가 판권 시장을 노리고 형식적으로 개봉하는 작품이나 초저예산으로 최소 규모 개봉하는 작품을 빼더라도 수백 편이다. 최근에는 주당 12~15편이 개봉하고 있다. 이러한 경쟁 속에 영화와 관객 사이의 접촉면을 늘리며 작품의 개봉 수명을 늘리는 몫은 홍보마케팅의 역할이다. 그 최전선에 있는 10명에게 2018년 기대작을 5편씩 추천받아 주요 작품을 추렸다.송강호가 출연하는 작품이 기대작으로 꼽히지 않은 적이 없었다. 최근 5년간은 단 한 번의 실패도 없었다. 올해는 ‘내부자들’의 우민호 감독과의 만남이 주목된다. 범죄 드라마 ‘마약왕’(★★★★★★★)이다. 1970년대 부산을 배경으로 밀수업자에서 마약계 최고 실력자가 되는 실존 인물 이두삼을 모티브로 했다. ‘관상’에서 송강호의 동생으로 호흡을 맞췄던 조정석이 이번에는 이두삼을 쫓는 검사를 연기한다. 배두나, 이성민, 김대명, 이희준, 김소진, 조우진 등 출연진 면면 또한 화려하다. 마블에 DC까지 가세하며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의 공습도 나날이 뜨거워지고 있다. 매달 1~2편씩은 국내 극장가에 걸린다.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가 단연 최고 기대작이다. ‘어벤져스’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이다. 전편인 ‘에이지 오브 울트론’은 서울 촬영 등에 힘입어 1000만 관객을 돌파하기도 했다. 그동안 쿠키 영상으로만 모습을 드러냈던 우주 최강의 악당 타노스가 본격 등장하고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멤버들도 총출동한다. 한발 앞서 개봉하는 ‘블랙팬서’(★★)도 관심을 모은다. 마블 최초로 흑인 슈퍼 히어로가 단독 주연인 작품이다. 광안대교를 비롯해 부산에서 촬영된 자동차 추격 등 액션 장면이 담겨 있어 한국 영화 팬들의 관심이 쏠려 있다. ‘신과 함께: 죄와 벌’의 대성공으로 올여름 개봉할 ‘신과 함께2’(★★★★)도 기대를 한껏 받고 있다. ‘반지의 제왕’ 3부작처럼 연작을 동시 촬영한 국내 첫 사례다. 1편이 원작 웹툰 중 저승편을 중심으로 신화편을 양념으로 입혔다면, 2편은 이승편과 신화편이 바탕이다. 1편에 등장했던 고물 줍는 할아버지와 손주가 2편에서 저승삼차사를 맞닥뜨리며 이야기의 축이 된다. 원작에서는 집과 관련한 다양한 신이 등장하는데, 영화에서는 집을 지키는 성주신이 맹활약을 펼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캐릭터는 ‘마블리’ 마동석이 맡았고, 1편 쿠키 영상에 깜짝 등장하며 관객들의 기대를 더욱 부풀렸다. 세계가 인정한 거장 이창동 감독은 ‘버닝’(★★★)으로 칸영화제 각본상 수상작인 ‘시’ 이후 8년 만에 영화감독으로 복귀한다. 해외 영화제에서 진작부터 주목하고 있는 작품이다. 자기만의 방식으로 살아온 세 청춘 사이에서 벌어지는 미스터리한 사건을 다룬 이 영화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을 각색한 것으로 알려졌다. 유아인과 스티븐 연, 전종서가 주연을 맡았다. 장르 영화의 대가 김지운 감독이 ‘밀정’ 이후 2년 만에 신작을 선보인다. ‘인랑’(★★)이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거장 오시이 마모루가 제작한 애니메이션 작품이 원작인 SF 액션 영화로, 강동원·정우성·한효주가 주연이다. 남북 관련 영화도 계속 이어진다. 그중 윤종빈 감독의 복귀작인 ‘공작’(★★★)이 가장 많은 관심을 받았다. 1990년대 중반 북한 핵개발을 둘러싼 남북한의 첩보전을 다룬다. 김병우 감독이 판문점 지하 벙커 회담장에서 펼쳐지는 전투 액션을 다룬 ‘PMC’(★★)를 통해 ‘더 테러 라이브’ 이후 5년 만에 하정우와 재회한다. ‘스윙 키즈’(★★)는 6·25전쟁 중 거제도 포로수용소를 무대로 탭댄스에 빠진 북한 병사를 그린다. ‘과속 스캔들’, ‘써니’ 강형철 감독의 작품으로 엑소 도경수의 단독 주연이다. 이 밖에 연상호 감독의 한국형 히어로물 ‘염력’, 1500년 전 당태종의 침략을 물리친 고구려 양만춘 장군의 전투를 재현한 ‘안시성’, 김주혁의 유작 중 하나인 ‘독전’, 소지섭·손예진 주연의 휴먼 멜로 ‘지금 만나러 갑니다’(이상 ★★)가 복수 추천됐다. 홍지민 기자 icarus@seoul.co.kr ■도움 주신 분들 호호호비치 이채현 대표, 올댓시네마 김태주 실장, 퍼스트룩 신보영 실장, 영화인 박주석 실장, 앤드크레딧 박혜영 실장, 딜라이트 양영희 과장(이상 홍보마케팅사), CJ엔터테인먼트 윤인호 팀장, 롯데엔터테인먼트 강동영 팀장, 쇼박스 최근하 팀장, NEW 양지혜 팀장(이상 투자·배급사)
  •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1862년 화마 입은 대승사, 부석사 무량수전 목각탱 모셔오다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1862년 화마 입은 대승사, 부석사 무량수전 목각탱 모셔오다

    ‘죽령 동쪽 100리에 우뚝 솟은 산이 있는데, 진평왕 9년(587) 갑자기 4면이 한 장(丈)이나 되는 돌이 하늘에서 산꼭대기로 떨어졌다. 그 돌에는 사방여래(四方如來)가 새겨졌는데, 붉은 비단으로 싸여 있었다. 왕이 이 말을 듣고 행차하여 절하고는 바위 곁에 사찰을 창건하도록 했다. 절 이름을 대승사(大乘寺)라 했는데, 법화경을 외는 비구 망명(亡名)을 주지로 삼아 바위를 깨끗이 쓸고 향불이 끊어지지 않게 했다. 산 이름은 역덕산(亦德山)이라고도 하고 사불산(四佛山)이라고도 한다. 승려가 죽어 장사 지냈는데 무덤 위에 연꽃이 피어났다’●대승사 곁에는 총지암·윤필암 등 유명 암자 즐비 ‘삼국유사’의 ‘사불산(四佛山)·굴불산(掘佛山)·만불산(萬佛山)’에 나오는 이야기다. 망명(亡名)은 글자 그대로 이름이 잊혀져 알 수 없게 된 승려다. 한 장(丈)이란 한 자(尺)의 열배에 이르는 단위다.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줄인 법화경은 대승불교의 대표적 경전이다.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부처의 경지에 들어서게 하는 데 근본 목적을 둔다. 사방여래가 새겨진 바위가 떨어졌다는 것은 주변 고을 사람들을 극락정토로 한데 이끌고 가겠다는 부처의 뜻이 아닐 수 없다. 사불산과 대승사는 경상북도 문경시의 동북쪽에 자리잡고 있다. 소백산이 서남쪽으로 뻗어 문경새재로 가는 길목에 사불산이 있고 그 기슭에 대승사가 있다. 해발 913m에 이르는 사불산의 오늘날 공식 명칭은 공덕산(功德山)이다. 역덕산이든, 공덕산이든, 사불산이든 부처님의 가르침을 인근 중생에게 두루 미치게 하겠다는 속뜻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 지금도 사불산 일대는 하나의 불국토(佛國土)다. 공덕산 동쪽 기슭 예천 땅에는 통일신라시대 창건설이 전하는 용문사(龍門寺)가 있다. 후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머문 적이 있는 고려 태조 왕건은 천하를 평정하면 큰 절을 일으키겠다는 맹세를 했고, 건국 이후 용문사를 중건했다고 한다. 사불산 서쪽의 해발 1103.2m 운달산 아래는 김룡사(金龍寺)가 있다. 대승사 창건 이듬해인 588년(진평왕 10) 운달조사가 세웠다는 설화가 전한다. 사불산은 그 자체로 부처의 땅이다. 대승사 바로 곁에는 새로 지은 총지암(總持庵)을 비롯해 문수암(文殊庵), 관음암(觀音庵), 보현암(普賢庵)이 있다. 윤필암(潤筆庵)과 묘적암(妙寂庵)은 대승사만큼이나 유명세를 떨치는 산내 암자다. 대승사에 가려면 문경시청이 있는 옛 점촌에서 자동차로 30~40분은 달려가야 한다. 오늘날의 대승사는 전각이 빽빽하게 들어선 대찰(大刹)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런데 임진왜란 당시 불타버린 이후 1604년(선조 37)부터 1701년(숙종 27)까지 100년 남짓에 걸쳐 중건한 절집은 6·25전쟁에도 무사했건만, 1956년 대화재로 대부분이 소실됐다고 한다. ●1956년 화재… 전각 대부분 1960년대 이후 재건 앞서 고려시대에도 화를 입었다. 진정국사 천책의 ‘유사불산기’(遊四佛山記)에는 ‘갑진년 8월 두 세 명의 도반과 지팡이와 짚신을 챙기고 사불암을 배례하고 대승사를 찾았다. 옛 건물과 회랑에는 오직 한 사람의 늙은 승려가 한 사람의 사미를 데리고 거처하고 있었다.…노승은 ‘내가 이 절에 머리 깎고 들어온 지 이미 60년 남짓인데 그동안 끊임없이 불법을 지닌 고승이 교법을 널리 펴 왔지만 근래 오랑캐 말발굽이 침범해 중단되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갑진년은 1244년(고종 31)이다. 1231년부터 1259년까지 6차례 이어진 몽골의 침입을 가리킨 것이다. ●총지암 석탑 복원땐 삼국시대 창건설 밝혀질 수도 지금 대승사에서 볼 수 있는 전각은 대부분 1960년대 이후 다시 지은 것들이다. 대웅전과 그 앞에 세워진 만세루도 그렇다. 절집은 새것이어도 고찰(古刹)의 흔적은 넘쳐난다. 대웅전 앞에 놓인 한 쌍의 노주석(柱石)이 또한 그렇다. 광명대(光明臺)라고도 불리는 노주석은 야간 법회가 있을 때 주위를 밝히는 역할을 한다. 노주석 기둥에는 1729년(영조 5) 세웠음을 알리는 명문(銘文)이 있다.대웅전의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은 더욱 특별하다. 후불탱을 그림 대신 조각으로 만들어 모신 것이다. 목각탱(木刻幀)이라는 이름이 더 익숙한 분들이 많을 것이다. 10개의 나무편을 조합해 아미타정토세계를 표현했다.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은 조선 후기 집중적으로 조성됐는데 남아 있는 것은 6점뿐이다. 예천 용문사와 상주 남장사 보광전, 상주 남장사 관음선원, 서울 경국사, 남원 실상사 약수암 것이 그렇다. 이 목각설법상이 당초에는 영주 부석사의 큰법당인 무량수전에 모셔졌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1862년(철종 13) 대화재를 당한 대승사는 새로운 큰법당을 짓고 폐찰 상태로 방치되던 부석사에서 이 목각탱을 옮겨왔다는 것이다. 이후 법등(法燈)이 다시 이어진 부석사에서 강력하게 반환을 요구했다. 결국 대승사는 목각탱을 돌려주지 않는 대신 부석사 조사당(祖師堂)의 수리비용을 대기로 합의한다. 부석사의 창건주 의상대사의 영정을 모신 조사당은 고려시대 절집이다. 당시 두 절 사이에 오간 문서 4점이 남아 있다. 이 가운데 합의서에 해당하는 것이 완의(完議)다. 이 문서들은 1973년 목각아미타설법상과 더불어 보물로 지정됐다. 하지만 목각설법상이 국보로 승격됨에 따라 지금은 ‘문경 대승사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 관계문서’라는 이름으로 별도의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대승사 동쪽 언덕의 총지암 마당에는 석탑의 부재들이 여러 무더기 쌓여 있다. 상당한 규모의 석탑으로 시대도 고려시대 이전으로 올라갈 듯하다. 옛 모습을 다시 찾을 수 있다면 대승사가 삼국시대 창건설이 전하는 사찰의 이미지를 되찾는 데 적지 않은 몫을 할 수 있을 듯하다.●윤필암에 사면석불 배례할 수 있게 사불전 세워 사면석불은 대승사 뒤편으로 보이는 공덕산 줄기의 정상부에 있다. 하지만 대승사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사면석불을 만나려면 산 너머 윤필암으로 가야 한다. 대승사에서 조금 아래로 내려오면 윤필암과 묘적암으로 가는 길이 나타난다.사면석불을 가까이에서 대하고 싶다면 윤필암에서도 20~30분쯤 산을 올라야 한다. 오랜 세월 풍파를 온몸으로 견뎌야 했던 조각은 희미하다. 윤필암에는 산에 오르지 않고도 사면석불에 배례할 수 있도록 사불전(四佛殿)이 세워졌다.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처럼 사면석불 쪽을 향해 커다랗게 창을 낸 전각이다. ●마애불 옆 전설 속 미륵암은 흔적 없이 사라져 윤필암에서 묘적암으로 오르는 중간에는 높이 6.1m의 대승사 마애여래좌상이 있다. 양촌 권근(1352~1409)은 ‘사불산 미륵암 중창기’에 마애불과 함께 미륵암의 존재를 언급해 놓았다. 마애불 곁의 신라시대 세웠다는 전설이 있는 작은 절이 미륵암이라는 내용이다. 하지만 지금 암자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dcsuh@seoul.co.kr
  • [정찬주의 산중일기] 무소유길

    [정찬주의 산중일기] 무소유길

    지난 금요일에 목포를 다녀왔다. 목포시 주관의 북 콘서트 행사는 오후에 시작할 예정이었지만 담당 공무원은 아침 일찍 전화를 주었다. 눈이 제법 와 있으니 여유롭게 출발해 달라는 부탁의 전화였다. 내가 사는 산중에서 목포까지는 승용차로 1시간 20여 분의 거리지만 내 산방과 도시의 날씨는 생각보다 달랐다. 내 산방 쪽은 눈송이가 나붓나붓 내리다가 말았는데, 목포는 그 반대였다. 시가지는 온통 눈을 뒤집어쓰고 있었다.나에게 목포는 네 번이나 갔던 정겨운 도시다. 첫 번째는 8년 전에 ‘소설 무소유’를 집필하려고 목포를 거쳐 법정 스님이 태어나신 우수영까지 내려갔던 적이 있다. 두 번째는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을 앞두고 수군 재건을 위해 목포 고하도에서 106일 동안 머문 역사가 있는데 그 현장을 답사했다. 물론 고하도 이야기는 나의 대하소설 ‘이순신의 7년’에 고스란히 담았다. 그리고 세 번째는 박홍률 목포시장님 초청으로 차담을 나눈 뒤 내 산방으로 돌아왔고, 네 번째는 목포에 사는 지인의 권유로 유달산 등 목포의 명소를 둘러보았던 것이다. 이처럼 네 번이나 방문하는 동안 내 눈에는 가수 이난영의 슬픈 ‘목포의 눈물’ 너머로 지금까지 드러나지 않았던 목포의 눈부신 역사가 보이기 시작했다.북 콘서트의 주제는 ‘임진왜란과 목포의 고하도’였다. 나는 강연 시간의 대부분을 정유재란 때 조선 수군을 재건했던 고하도의 역사적 사실과 가치에 대해 이야기했다. 고하도의 역사적 사실이라 하면 판옥선 40척을 건조하고 군량미 2만 석과 수군의 숫자를 배 이상으로 확보해 노량해전에서 대승을 거둔 이유 중 하나가 된 것이었고, 내가 생각하는 가치란 고하도만의 임진왜란 역사를 관광자원화한다면 성장 동력으로 목포가 도약하는 데 활로가 되지 않겠느냐는 내 나름의 판단이었다. 북 콘서트 강연 서두에 나는 법정 스님의 목포 인연도 소개했다. 목포를 오가면서 몇 달 전 목포시 공무원에게 ‘무소유길’을 제안해 둔 바 있었으므로 북 콘서트 행사장에 온 공무원과 목포 시민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였다. 시민들 중에서 특히 문화재해설사분들이 눈을 반짝거렸다. 법정 스님이 청소년기에 목포에서 살았다는 것을 대부분 모르는 듯했다. “목포는 저와도 좀 인연이 있습니다. 저의 스승이신 법정 스님께서 청소년 시절을 목포에서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법정 스님은 해방이 되자 해남 우수영에서 목포로 올라와 정광중학교와 목포상고를 다녔고, 6·25전쟁 후에는 목포에 교정을 두었던 전남대 상대를 입학해 다니시다가 1954년에 출가하셨던 것이다. 그러니 법정 스님의 영혼에는 목포의 모든 것들이 간간하게 배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번은 법정 스님께서 내게 ‘목포의 눈물’을 휘파람으로 멋들어지게 불어주시기도 했다. 깐깐한 성철 스님께서 ‘목포의 눈물’을 좋아하신다는 것을 알고 비로소 친근함을 갖게 되었다고 술회한 적이 있으니 스님의 목포에 대한 추억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담당 공무원에게 몇 번이나 전남대 상대가 있었던 구 제일여고에서 정광중학교 자리였던 오거리문화센터, 그리고 스님이 불심을 키웠던 유달산 정혜원까지의 거리를 ‘무소유길’로 이름 붙여 전 국민에게 감동을 주었던 스님의 무소유 정신을 되새겨 보는 시민운동을 벌이자고 했다. 법정 스님은 무소유 정신을 수행자에게는 ‘나도 없는데 하물며 내 것이 어디 있겠는가?’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일반 국민을 상대로는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군더더기를 없애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내게도 하신 말씀인데 아무리 좋은 만년필이라도 한 개면 족하지 두 개는 군더더기라는 것이었다. 때마침 어제 오후에 담당 공무원으로부터 목포시 문화유산위원회에서 ‘무소유길’을 목포시 문화유산으로 가결했다는 전화를 받았다. 이제는 관련 시민들의 동의 절차만 남았단다. 담당 공무원의 노력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목포의 ‘무소유길’이 소유의 감옥에서 탈출하지 못하는 현대인들에게 삶의 비상구가 되지 않을까 싶다.
  • ‘맥아더 오른팔’ 에드워드 라우니 별세

    ‘맥아더 오른팔’ 에드워드 라우니 별세

    제2차 세계대전과 6·25전쟁 등에서 활약한 ‘전설적인 협상가’로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의 최측근 보좌관이었던 에드워드 라우니 예비역 중장이 지난 17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에서 심장질환으로 별세했다고 뉴욕타임스 등 현지 언론이 전했다. 100세.라우니는 1950년 6·25전쟁 발발 당시 미 극동군사령부의 당직장교로 북한의 남침 소식을 가장 먼저 듣고 맥아더 장군에게 직접 보고한 인물이다. 그해 9월 인천상륙작전 계획 수립에 깊이 관여했으며, ‘크리스마스의 기적’으로 불리는 흥남철수 작전에서는 흥남항을 폭파하고 마지막으로 철수했다. 2014년 한국전쟁 회고록 ‘운명의 1도’를 출간한 뒤 한국을 방문해 서울 전쟁기념관에서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하모니카로 아리랑을 연주하기도 했던 라우니는 맥아더 장군이 먼저 받았던 우리나라 태극무공훈장을 목에 걸었다. 회고록에는 휴전선이 북위 39도선에서 38도선으로 정해진 내막 등 숨겨진 한국전의 비사들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라우니는 공화당과 민주당을 오가며 리처드 닉슨부터 조지 H W 부시까지 미국 대통령 5명의 안보전략 수립에 참여했다. 윤창수 기자 geo@seoul.co.kr
  • 월튼 해리스 워커대장 67주기 추모식, 지난 12월 15일 도봉구 도봉동서 진행

    월튼 해리스 워커대장 67주기 추모식, 지난 12월 15일 도봉구 도봉동서 진행

    지난 12월 15일 서울 도봉구 도봉동에서 초대 미8군 사령관을 지낸 월튼 해리스 워커대장의 67주기 추모식이 진행됐다. 그는 지난 2012년 6.25전쟁 영웅으로 국가보훈처에 의해 선정된 바 있다. 한 달 여 혈전 끝에 낙동강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던 그는, 1950년 12월 6.25전쟁 중 아들 샘 워커 대위의 은성 무공훈장 수상에 참석하기 위해 의정부(현 도봉구 도봉동)로 가던 중 한국군 6사단 트럭과 충돌해 숨졌다. ‘워커대장 추모기념사업회’는 장군의 정확한 사망지점을 백방으로 찾아다녔고, 그 결과 현재 서울 도봉구 도봉 1동 596-5번지 임을 확인했다. 도봉주민의 도움으로 기념비를 제작했고 기념비를 세우려 했으나 현재 그 곳이 주택가 사유지라 어려움이 있었고, 이에 200미터 정도 떨어진 도봉역 부근 인도변에 세우게 되었습니다. 또한 도로변 설치를 위해 도봉구 5·6대 신창용(전 구의원)이 2009년 구의원 재임시절 구정질문으로 표지석을 세울 근거를 만들어 도봉동에 기념 표지석을 세우는데 도움을 주었으며, 2008년부터 도봉구 도봉동에서 매년 추모식을 갖고 있다. 신창용(전 구의원)은 워커장군 활약상을 국방초대석 라디오 방송 및 군부대 인성교육, 안보교육시 이를 알리고 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서대문 전통시장서 성탄선물 찾아볼까

    서대문 전통시장서 성탄선물 찾아볼까

    서울 서대문구 홍은1동 포방터시장에서 크리스마스 연휴 첫날인 특별한 ‘토요장’이 선다.구는 23일 오후 2~6시 포방터시장 일대에서 ‘12월 크리스마스 보물캡슐찾기’ 행사를 진행한다고 21일 밝혔다. 시장 곳곳에 숨겨진 보물캡슐을 찾은 청소년과 치즈만두, 야채폭탄삼겹말이, 얼큰골뱅이탕, 폭탄주먹밥, 레인보우새우꼬치 등 먹거리 3종 이상을 구매한 성인 등 선착순 200명은 ‘나만의 크리스마스 케이크 만들기’에 참여할 수 있다. 또 채소와 과일, 수산물 등을 100원에 구매할 수 있는 ‘100원 경매쇼’, 포방터시장 캐릭터를 이용한 ‘당근포 투호놀이’ 등도 마련된다. 포방터시장은 1970년대 초, 자연적으로 생겨난 재래시장으로 ‘6·25전쟁 때 퇴각하는 북한군을 공격하기 위해 대포를 설치했던 곳’이라는 뜻에서 이름이 유래한 것으로 알려졌다. 2014년 3월 전통시장 인정을 받았으며 4030㎡ 면적에 90여개 점포가 영업 중이다. 문석진 서대문구청장은 “즐거운 크리스마스 체험 행사로 포방터시장 매출을 높이고 신규 고객을 유입해 더욱 많은 시민의 사랑을 받는 생활 장터로 발돋움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윤수경 기자 yoon@seoul.co.kr
  • 대방동 미군기지, 여성·가족 성지된다

    서울시 동작구 대방동 미군기지 ‘캠프 그레이’가 있던 자리에 여성가족복합시설인 ‘스페이스 살림’이 조성된다. 서울시는 21일 스페이스 살림 착공식을 열었다고 밝혔다. 스페이스 살림은 2020년 5월 개관을 목표로 하고 있다. 대방동은 6·25전쟁 격전지로 이후 미군캠프, 전쟁미망인 정착지를 비롯해 시립부녀보호소 등이 조성돼 아픈 기억을 간직한 곳이다. 이곳을 여성을 중심으로 한 가족들이 다양한 실험과 상상, 창업을 통해 꿈을 펼치고 행복을 실현할 수 있는 여성가족복합공간으로 탈바꿈시킨다는 계획이다. 스페이스 살림은 동작구 대방동 340-3 외 3필지(대방역 2, 3번 출구 인근) 8874.8㎡에 지하 2층, 지상 7층 규모로 건립된다. 주요 시설은 가족살림학교, 가족놀이터, 가족서재, 야외공연장, 다목적홀 등 ‘가족·문화공간’, 작업실, 배움공간, 50개의 가게가 위치한 ‘창조적 제작 및 창업공간’, 공유부엌, 모임공간, 열린카페, 연수시설(46개실) 등이 포함된 ‘열린공유공간’이다. 이와 관련해 시는 지난달 실시설계를 완료한 후 각종 행정절차와 입찰 과정을 거쳐 호반건설을 시공업체로 선정했다. 송수연 기자 songsy@seoul.co.kr
  • ‘한국판 쉰들러’ 현봉학 박사 기념사업회 오늘 창립식

    ‘한국판 쉰들러’ 현봉학 박사 기념사업회 오늘 창립식

    6·25전쟁 당시 대규모 피란민 구출에 기여해 ‘한국의 쉰들러’로 불리는 고 현봉학 박사 기념사업회가 19일 창설된다.연세대 의대 전신인 세브란스의전을 나온 현 박사는 6·25전쟁 당시 해병대 문관으로 활동했다. 1950년 12월 미군이 ‘장진호 전투’ 등을 통해 시간을 벌며 함경남도 흥남에서 대규모 병력을 철수할 때 현 박사는 피란민 10만여명도 함께 철수시켜 달라고 간청했고 미군은 이를 받아들였다. 당시 마지막 미군 함정인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12월 23일 배에 실려 있던 군수품 25만t을 바다에 버리고 피란민 1만 4000여명을 태워 경남 거제로 향한 것은 ‘크리스마스의 기적’으로 불린다. 문재인 대통령도 “부모님이 흥남철수작전 당시 메러디스 빅토리호에 탄 피란민이었다”며 여러 차례 인연을 강조했었다. 박홍환 전문기자 stinger@seoul.co.kr
  • ‘지붕 없는 박물관’ 강화, 동북아 최고 의료관광 명소 꿈꾼다

    ‘지붕 없는 박물관’ 강화, 동북아 최고 의료관광 명소 꿈꾼다

    ‘지붕 없는 박물관.’ 한반도 5000년 역사가 시작된 곳으로 수많은 유적지와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있는 인천 강화군을 표현할 때 흔히 쓰는 말이다. 현존하는 사찰 가운데 가장 오래된 전등사를 비롯해 우리 민족의 역사가 살아 있는 마니산 등은 수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대표적 관광지다. 또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고인돌 등 역사 속 시간들이 강화나들길을 따라 펼쳐져 있다. 접근성도 뛰어나 서울에서 자동차로 1시간가량 가면 푸른 바다와 멋진 낙조를 감상할 수 있는 점, 남도 못지않게 다양한 향토 음식, 문화재를 끼고 도는 도로망 등도 강화를 수도권 최대의 문화관광지로 인식시키는 데 부족함이 없다.강화에 오면 가장 먼저 접하게 되는 곳이 갑곶돈대다. 돈대는 해안가나 접경지역에 설치된 소규모 관측·방어시설로 강화에 53개나 있다. 갑곶돈대는 1679년(숙종 5년)에 완성됐는데 1977년 보수·복원작업이 이뤄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돈대 안에 있는 대포는 조선시대 말에 설치된 것으로 외세의 침략에 맞선 선조들의 얼이 깃들여 있다. 월곶돈대에는 경관이 매우 뛰어나 강화 8경의 하나로 꼽히는 연미정이 자리잡고 있다. 민통선 지역이어서 일반인 출입이 엄격히 통제됐으나 2008년 완전히 개방됐다.●강화문학관, 이규보·정인보 작품 소장 강화산성은 강화읍 일대를 둘러싸고 있는 석성으로 조선 숙종 37년에 축조됐다. 북산에서 시작해 서쪽의 진고개를 지나 남쪽의 남산을 감싸 안으며 동쪽의 견자산으로 연결되는 총길이 7.12㎞의 산성이다. 강화산성 북문에는 오읍약수터가 자리잡고 있다. 고려시대 몽고 침입 당시 나라를 잃은 슬픔에 하늘, 땅, 임금, 백성, 신이 함께 울었다는 전설에서 유래돼 오읍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곳 약수는 조금 과장됐지만 불로장생의 물로 알려져 물을 담아 가려는 사람들이 줄을 잇는다. 강화에는 고려와 조선의 문화유산이 많지만 청동기 시대의 흔적도 남아 있다. 고려산 봉우리 능선에 있는 고인돌군(群)이 그것이다. 이곳 고인돌(지석묘)은 받침돌 위에 평평한 덮개돌을 올려놓은 탁자식이다. 현재는 많이 내려앉았지만 유구한 세월을 버텨온 모습이 감탄을 자아낸다. 강화나들길을 여행한다면 강화읍 관청리에 있는 강화문학관에 잠시 멈춰 문학의 향기를 느껴보자. 고려시대 이규보 문인부터 일제강점기 정인보 선생에 이르기까지 강화를 대표하는 문인들의 작품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 2층 수필문학관에는 수필가 조경희의 기증품 8287점과 김기창 화가 등의 미술작품 158점, 도자기 74점 등이 전시돼 있다. 마니산은 백두산이나 묘향산 등과 함께 단군왕검의 전설이 있는 강화도의 명산으로 화도면 문산리에 소재한다. 해발 468m로 북으로 백두산과 남으로 한라산의 정중앙에 위치한 산 정상에는 단군이 우리 민족의 번영을 기원하던 제단이라고 전해 내려오는 참성단(사적 136호)이 있다. 마니산은 특히 기(氣)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센 산으로 알려져 등산을 겸해 기를 받으려는 사람들이 즐겨 찾는다. 고려산(해발 436m)은 매년 봄 열리는 진달래축제로 유명한데 산 정상 주변에 형성된 진달래 군락이 30만㎡에 달해 전국적으로 유명한 산에 있는 진달래 군락과 비교하면 압도적이다.●강화갯벌·초지리습지엔 희귀종 서식 강화는 해양성 기후로 일교차가 크고 일조량이 풍부해 품질 좋은 농작물이 자랄 수 있는 환경을 갖추고 있다. 특히 강화갯벌은 독일·네덜란드 연안 갯벌 등과 함께 세계 5대 갯벌로 평가된다. 저어새, 노랑부리백로, 검은머리물떼새 등 세계적인 희귀 조류의 서식지다. 인천시 연구자료에 따르면 강화갯벌은 1㏊당 경제적 가치가 1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초지리 매화마름 군락지는 국내에서 가장 작은 람사르습지로 3000㎡ 규모다. 경지 정리로 멸종 위기에 처한 매화마름을 보호하려고 한국내셔널트러스트가 주민을 설득하고 성금을 거둬 확보했다. 꽃은 물매화를 닮고 잎은 붕어마름을 닮아 매화마름이란 이름이 붙어졌으며 미나리아재빗과에 속한 수생식물이다.●풍물시장엔 인삼·순무 등 특산품 풍부 강화 여행에서 빠질 수 없는 필수 코스인 풍물시장은 강화 특유의 건강한 먹거리가 즐비하다. 예전에는 읍내의 5일장이었으나 외곽의 최신식 건물로 옮겨와 편리하게 특산품을 구매할 수 있다. 보랏빛 동그란 순무를 듬성듬성 썰어 양념에 버무리는 모습은 이곳만의 특별한 풍경이다. 또 강화도 인근 해역에서 잡은 싱싱한 해산물과 밴댕이젓, 새우젓, 게장 등은 풍물시장 최고의 먹거리다. 강화 특산품인 화문석과 인삼 등은 풍물시장과 인근 인삼센터에서 구입할 수 있다. 강화도 인근 섬들도 잇따른 연륙교 개통으로 관광객들의 발길이 부쩍 늘었다. 강화도와 석모도를 잇는 석모대교는 지난 6월 개통돼 여객선을 통해서만 찾아야 했던 고질적인 교통 불편을 해소했다. 석모도는 바다와 산림휴양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자연휴양림이 백미다. 강화군이 운영하는 자연휴양림은 2011년 4월 개장 이래 2013년 7월 수목원 개장, 2015년 7월 2차 휴양림까지 단계별로 조성돼 거대한 종합 휴양림으로 변모하고 있다. 이곳은 산림휴양관과 숲속수련장을 비롯해 각종 편의시설이 잘 갖춰져 있는 데다 휴양림에는 양질의 수목이 빼곡히 들어서 최적의 힐링 장소로 꼽히고 있다. 128만㎡에 달하는 산림에 퍼져 있는 참나무·소나무·소사나무·밤나무 등 50여종에 달하는 수목은 피톤치드의 향연을 만들어 낸다. 석모도에는 또 우리나라 3대 기도성지로 꼽히는 전통 사찰 보문사, 바다를 보면서 등산을 즐길 수 있는 해명산, 미네랄온천 등이 자리잡고 있다.2014년 7월 연륙교가 개통된 교동도는 민간인 통제구역이어서 때 묻지 않은 자연환경이 보존돼 있다. 군부대 검문을 거쳐야 하고, 통행시간이 제한되는 불편이 있지만 청정지역의 진미를 느낄 수 있다. 화개산 정상에 오르면 북한 모습이 코앞에 펼쳐진다. 이곳 대룡시장은 1960∼1970년대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6·25전쟁 때 황해도에서 피란 온 사람들이 정착하면서 장이 서게 됐다고 한다. TV 예능프로그램인 ‘1박 2일’에 소개돼 유명해졌다. ●교동도 화개산에선 북녘이 손에 잡힐 듯 강화도 남단에는 대규모 의료관광단지를 개발하는 사업이 추진된다. 인천시는 지난달 미국 뉴저지주에 있는 부동산 개발전문업체인 파나핀토 프로퍼티즈와 ‘강화휴먼메디시티 사업을 위한 업무협약(MOU)’을 체결했다. 이 사업은 강화도 남단 동막해변 일대 900만㎡에 의료관광단지를 조성하고, 외국인들의 이동 편의를 위해 인천국제공항이 있는 영종도와 강화도를 잇는 해상교량을 건설하는 내용이다. 파나핀토 측은 우선 이 사업에 3000만 달러(약 330억원)를 투자하고, 인천시는 휴먼메디시티 사업 예정지를 경제자유구역으로 지정하도록 정부에 건의하는 등 행정 지원에 나설 계획이다. 인천시는 해상교량이 들어설 경우 강화도가 영종도에서 차량으로 20분 만에 연결되고, 천혜의 자연경관을 갖춰 의료관광단지로서의 최적의 여건을 갖췄다고 보고 있다. 이상복 강화군수는 “강화도가 아시아는 물론 러시아 등지에서도 찾는 동북아 최고의 의료관광단지가 될 것”이라며 “의료 수준 향상과 관광 등 지역경제 활성화에도 이바지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김학준 기자 kimhj@seoul.co.kr
  • [업계소식] 한성기업, 유엔군 전몰장병 추모 음악회

    [업계소식] 한성기업, 유엔군 전몰장병 추모 음악회

    제11회 ‘유엔참전용사 추모 평화음악회’가 지난 12일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렸다.이날 행사에는 한·터키 수교 60주년을 맞아 방한한 터키 전몰장병 유가족과 전후 복구 지원국인 독일 의료지원단 및 가족, 유엔참전용사·가족, 주한 외교사절 등 2000여명이 참석했다. 국가보훈처와 호국문화진흥위원회가 공동으로 주최한 이 음악회는 6·25전쟁 당시 생명을 바친 유엔군 전몰장병을 추모하는 행사로 올해 10회째를 맞았다. 이날 행사에서 임우근 호국문화진흥위원회 이사장(한성기업 회장)은 “지금의 우리는 호국선열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라며 “감사의 마음으로 지금과 같은 활동을 이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김태곤 객원기자 kim@seoul.co.kr
  • ‘유사시 한반도 투입’ 中인민해방군 랴오닝서 훈련

    ‘유사시 한반도 투입’ 中인민해방군 랴오닝서 훈련

    중국 인민해방군이 지난 26일 랴오닝성 선양 북부 커얼신 초원 일대에서 군사훈련을 하고 있다. 이번 훈련은 엄동기 항공술을 연습하기 위해 기획됐다. 훈련을 맡은 78집단군은 6·25전쟁에 참전했던 부대로, 유사시 한반도에 투입되는 군이다. 중국 국방부 홈페이지
  • “아픈 사람에게 함부로 않겠다”…이국종 교수의 어린 시절

    “아픈 사람에게 함부로 않겠다”…이국종 교수의 어린 시절

    “내가 크면 아픈 사람에게만큼은 함부로 대하지 않겠다.” 탈북 북한 병사를 살려낸 이국종 아주대병원 교수는 2012년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어린시절에 대해 털어놓았다.그의 아버지는 6.25전쟁 때 지뢰를 밟아 한쪽 눈을 잃고 팔다리를 다친 장애 2급 국가유공자였다. 하루는 그의 어머니가 동사무소에서 상이군인에게 지급하는 밀가루를 머리에 이고 오다 쏟고 말았는데 사람 눈을 피해 밤에 다니다 발을 헛디디고 만 것이다. 이 교수는 어머니와 밀가루를 주워 담으면서 순간 가슴이 울컥했고 아픈 사람에게 함부로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다고 말했다. 이국종 교수는 귀순병에게 소녀시대의 ‘GEE’의 오리지널 버전과 록 버전을 들려줬다고 했다. 독학으로 공부한 기타 실력으로 2004년부턴 의과대학 밴드 동아리인 ‘식스 라인스(Six Lines)’의 지도교수를 맡기도 했다. 수술 직후 느슨해진 마음을 다잡기 위해 수술실에 록 음악을 틀어놓는다는 그는 “손끝에서 결판나는 기타 연주가 외과 수술과 비슷해 매력을 느낀다”고 말한 바 있다. 실제 그의 수술실에는 록 음악이 흐른다. 수술 직후 느슨해진 마음을 다잡기 위해서다. 2011년 11월 20일 열린 한국 의사가요대전에 아주대병원 그룹사운드 ‘어레스트(arrest)’의 지도교수이자 베이시스트로 참가해 우승상금 1000만원 중 절반은 유니세프에 기부했다. 동영상 공유 사이트 유튜브에는 이 교수가 연주하는 모습이 담긴 지난 2013년 2월17일 올라온 ‘대한외과학회 외과밴드-나는나비’ 영상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그는 외상 의사로 일하며 15년간 36시간 연속으로 일하는 삶을 반복했고 1년에 200번 닥터헬리로 환자를 이송했다. 2014년 세월호 사고 현장에 갔다가 오른쪽 어깨가 부러졌고, 왼쪽 무릎은 헬기에서 뛰어내리다 꺾여서 다쳤다. 2년 전 직원 건강검진에서는 왼쪽 눈이 실명된 사실을 알았다. 망막혈관 폐쇄와 파열로 80대 당뇨병 환자가 걸리는 병이다. 오른쪽 눈도 관리를 하지 않으면 안전하지 않다. 현재 청와대 홈페이지에는 이국종 교수를 비롯한 중증 외상 외과의 처우 개선 국민 청원이 쇄도하고 있다. 열흘 만에 23만명이 넘는 동의를 받았다. 권역외상센터는 교통사고나 추락 등으로 심각한 외상을 입은 환자에게 적절한 치료를 제공할 수 있도록 하는 중증외상 전문 치료센터다. 현재 운영 중인 9곳 가운데 전담 전문의 20명을 충족하는 권역외상센터는 한 곳도 없다. 외상센터 간호사도 올 6월 현재 829명이지만 장시간 근무가 빈번해 인력 이탈이나 교체가 심각하다. 이낙연 국무총리는 지난 24일 권역외상센터에 대한 개선방안 마련을 지시했고 보건복지부는 권역외상센터 인력 운영비 추가 지원, 의료시술 과정에서 진료비가 삭감되는 수가체계 개선 등을 검토하고 있다고 26일 밝혔다. 이국종 교수는 자신이 잘 웃지 않는 이유에 대해 “전 세계적으로 외상의학과를 전공한 의사들의 숙명 같은 건데 굉장히 아픈 기억들이 많다. 몇달씩 사투를 벌이다 결국은 떠나보낸 경우가 많고 그런 분들이 다 기억에 남는다. 그런 분들이 100여명이 넘는다. 그러니까 세상에 빚이 있다고요 저는. 별로 웃을 일이 없어요 저는” 이라고 말했다. 김유민 기자 planet@seoul.co.kr
  • [그 시절 공직 한 컷] 지금은 안 낳아 문제인데… “아이 적당히 낳으세요” 이동진료차 출동

    [그 시절 공직 한 컷] 지금은 안 낳아 문제인데… “아이 적당히 낳으세요” 이동진료차 출동

    지금은 생경한 가족계획용 이동진료차를 기증받는 행사장 모습이다. 1965년 미국 대외원조처(USOM)가 기증했다. 군용트럭을 개조했다.6·25전쟁 이후 본격적인 베이비붐 속에 한 가정에 자녀는 5∼6명이 보통이었다. 1960년 당시 우리나라 인구는 2500만명으로 매년 약 70만명씩 늘어나고 있었다. 정부는 인구증가 억제 없이는 경제성장이 어렵다고 판단, 1962년부터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일환으로 가족계획사업을 시작해 1996년까지 실시했다. 가족계획사업 10개년 계획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2∼1966년)이 끝날 때까지 인구증가율을 2.5%, 제2차 5개년계획(1967∼1971년)이 끝날 때 2.0%로 줄이겠다는 목표였다. 정부 노력으로 1960년대 초 3.3%이던 인구증가율은 1970년대 초 2.0%, 1980년대는 1.57%로 낮아졌고, 1990년대 인구 증가율은 1% 미만이었다. 지금은 출산율이 지나치게 낮아져서 문제다. 지난해 우리나라 인구는 5157만명으로 정부는 2020년 이전까지 우리나라 출산율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평균 수준인 1.6명으로 올린다는 목표로 저출산 대책을 추진 중이다. 국가기록원 제공
  •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김시습이 눌러앉고 싶다던 청평사… 맑은 기운에 근심 사라지네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김시습이 눌러앉고 싶다던 청평사… 맑은 기운에 근심 사라지네

    춘천 시내에서 청평사(淸平寺)로 가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우선 시내를 남서쪽에서 동북쪽으로 휘돌아 나가는 46번 국도를 타고 소양6교를 건너고 배후령터널을 지난 다음 간척사거리에서 우회전해 배치를 넘는 자동찻길이 있다. 배후령에는 터널에 생겼다지만, 배치는 옛날 한계령보다 더 가파르고 구불구불한 것 같다. 이 오봉산길의 막다른 골목이 소양호가 내려다보이는 청평리다.춘천 시내에서 멀지 않은 소양강댐 배터에서 유람선을 타는 방법도 있다. 청평사가 없었다면 소양호 유람선은 무척 심심한 뱃길이었을 것이다. 댐 건설 이전의 46번 국도는 수몰된 소양강길을 따라 양구로 이어졌었다고 한다. 46번 국도는 인천광역시 중구 북성동 인천역(驛)에서 강원도 고성군 간성읍을 잇는다. 수수부꾸미와 산채비빔밥, 그리고 소양호 빙어튀김이 유혹하는 사하촌(寺下村)에서 청평사까지는 2㎞ 남짓하다. 가벼운 마음으로 나선 관광객이라면 부담도 없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산길에 접어들면 청정한 기운에 몸과 마음이 모두 가벼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옛사람들은 이 계곡을 하나의 커다란 정원으로 인식했던 듯하다. 자연의 조화에 군데군데 인공(人工)를 더해 완벽한 아름다움을 추구했다. 조경사(造景史)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청평사에 애착을 갖는 이유다. 평탄한 오리(五里) 산길을 기분 좋게 걷다 보면, 우뚝 솟은 바위 봉우리 아래 여러 단의 석축을 쌓아 조성한 청평사가 눈에 들어온다. 이제는 상당히 복원이 이루어져 제법 규모 있는 절집처럼 보인다. 한때는 221칸에 이르렀다지만 1960년대까지만 해도 회전문(廻轉門)만 덩그러니 남아 있는 모습이었다. 분단과 전쟁, 그리고 이념이 낳은 상처 때문이었다.청평사의 초기 역사는 1130년(인종 8년)과 1320년(충숙왕 14) 각각 세워진 청평산 문수원기(文殊院記) 비석과 청평산 문수사 장경비(文殊寺 藏經碑)의 비문이 탑본으로 전해지고 있어 알 수 있다. 문수원기에 따르면 청평사는 영현선사가 973년(광종 24) 백암선원(白巖禪院)으로 창건하고, 이의가 1069년(문종 23) 보현원(普賢院)으로 중창한 데 이어 아들 이자현이 1078년(문종 32) 문수원(文殊院)으로 삼창했다. 이의의 아버지, 곧 이자현의 할아버지 이자연은 세 딸을 문종비로 만든 당대 권신(權臣)이었다. 승려가 아닌 이의와 이자현이 중창을 주도했다는 것은 흥미롭다. 불교국가 고려에서 세도가(勢道家)가 사찰을 세우거나 중창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학계에서는 이의의 보현원 중창을 집안의 원찰(願刹)은 물론 별서(別墅)를 확보하는 차원이었을 것으로 본다. 이자현의 문수원 삼창 역시 원찰과 별서의 위상을 높이는 작업이었을 것이다. 장경비의 존재는 이전 어느 시기 절 이름이 문수사로 바뀌었음을 알려 준다. 장경비는 원나라 왕후가 보내 준 불서(佛書)를 절에 보관한 내력을 담았다. 청평산이라는 이름은 이자현이 은거하자 도적과 호랑이가 자취를 감추었다고 해서 붙여졌다고 한다. 청평이란 곡절이 없어 근심이 없는 경지를 가리킨다.이후 청평사로 이름을 고친 것은 조선 명종시대 불교 부흥에 힘쓴 보우(普雨)라는 이야기가 전한다. ‘청평사지’(淸平寺誌)에도 ‘보우가 1557년 ‘경운산만수성청평선사’(慶雲山萬壽聖淸平禪寺)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적혀 있다. 일제강점기에도 회전문에는 이렇게 쓴 현판이 걸려 있었음을 보여 주는 사진도 남아 있다. 하지만 매월당 김시습(1435~1493)은 오래전에 ‘청평사’라는 제목의 시를 지어 ‘띠풀 베어 초가 짓고 높은 곳에 살고지고, 이제부터 다시는 이곳 떠나지 않으리’라고 노래했다. 그는 청평산 아래 세향원(細香院)을 짓고 한동안 머물렀다고 한다. 시대가 더 앞서는 여말선초의 문인 원천석(1330~?)의 ‘운곡시사’(耘谷詩史)에도 ‘청평사’라는 시가 실려 있다. 운곡이 춘천 일대를 여행한 때는 1368년이다. 청평사가 이고 있는 산은 오늘날 오봉산(五峰山)이라 부른다. 기기묘묘하게 솟은 봉우리가 다섯 개로 보인다고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경운산이라는 옛 이름은 지금 오봉산의 옆 봉우리가 차지하고 있다. 반면 청평산이라는 이름은 간 데가 없다. 이 산은 산림청의 ‘한국의 100대 명산’에도 이름을 올리고 있다. 청평사의 대표 문화유산은 아무래도 회전문을 들어야 할 것이다. 이름이 주는 호기심도 한몫을 한다. 회전문은 금강문이나 천왕문처럼 불법(佛法) 수호자를 봉안하는 전각이라고 한다. 윤장대(輪藏臺)의 존재와 무관치 않은 것으로 학계는 본다. 계곡 장유(1587~1638)의 시에는 ‘진락선옹(眞禪翁) 한번 떠나 돌아올 줄 모르고/ 암자 앞엔 전경대(轉經臺)만 외로이 남았구나’ 하는 대목이 있다. 청평사에 전경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진락공(眞公)은 이자현의 시호다. 전경대, 곧 윤장대는 돌릴 수 있게 만든 팔각형 불구(佛具)다. 불경을 넣어 돌릴 때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새겼다는 상징성을 부여한다. 예천 용문사에는 회전문과 짝을 이룬 윤장대를 볼 수 있다. 용문사 회전문은 사천왕상을 모시고 있다. 윤장대는 대장전(大藏殿) 내부에 있다.회전문 앞마당에 좌우로 놓여 있는 비석의 받침돌도 눈여겨봐야 한다. 바로 문수원기비와 장경비의 흔적이다. 문수원기비는 김부의와 혜소국사가 앞뒷면 글을 짓고 탄연이 글씨를 썼다. 김부의는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의 아우이고, 혜소는 대각국사의 제자다. 탄연은 서거정이 ‘김생 다음간다’고 했던 명필이다. 장경비는 앞뒷면 글은 이제현과 성징이 짓고 이암이 썼다. 이제현은 ‘익제난고’와 ‘역옹패설’로 널리 알려진 고려 후기 문인이다. 성징은 원나라 승려라고 한다. 이암 역시 ‘동국의 조맹부’라는 평가를 받은 명필이다. 문수원기와 장경비는 탄연과 이암의 글씨로 유일하게 남아 있다. 문수원기비는 일제강점기에도 손상되기는 했어도 상당 부분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1914년 대웅전에 옮긴 비석은 6·25전쟁을 거치는 과정에서 완전히 조각나고 말았다. 이후 1968년과 1985년 발굴조사에서 비편의 상당 부분이 수습됐다. 청음 김상헌은 청평사를 찾은 1635년 ‘동쪽에 장경비가 있고, 서쪽에 문수원기가 있다’는 기록을 남겼다. 그런데 약헌 서종화(1700~1748)는 ‘청평산기’(淸平山記)에서 ‘문수원기’를 언급하면서 ‘서쪽 뜨락에 파손되어 읽을 수 없는 비석이 하나 더 있다’고 했다. 하지만 ‘장경비’는 이제 받침돌만 남아 있을 뿐이다. 문수원기비는 2008년 복원되어 옛 비석 받침돌 바로 곁에 세워졌다. 장경비도 복원이 추진되고 있다고 한다. 문수원기비 내용은 문헌에도 보이고 남아 있는 탑본이 적지 않음에도 읽지 못하는 글자도 있어 복원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장경비는 앞면의 경우 그런대로 자료가 남아 있지만, 뒷면은 문장을 재구성하기조차 어려운 상태로 알려진다. 그러니 소박하지만 옛 비석의 받침돌이 오히려 역사의 진정성을 보여 주는 청평사의 유산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글 사진 dcsuh@seoul.co.kr
  • ‘6·25 전투 지원’ 민간인, 66년 만에 가족 품으로

    ‘6·25 전투 지원’ 민간인, 66년 만에 가족 품으로

    6·25전쟁 당시 전장에서 전투 지원 임무를 수행한 민간인 노무자 유해의 신원이 처음으로 확인됐다.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은 23일 “6·25전쟁 당시 민간인 노무자 유해의 신원이 김아귀씨로 확인됐다”며 “최초로 비군인 참전 노무자의 신원이 확인됐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밝혔다. 이번 6·25 전사자 신원 확인은 2000년 유해발굴 사업이 시작된 이후 126번째이며, 올해만 여덟 번째 성과다. 유해발굴감식단은 이날 경북 상주에 있는 김씨의 아들 김학모(78)씨 자택에서 전사자 신원 확인 통지서와 국방부 장관 위로패, 유품 등을 전달하는 ‘호국의 영웅 귀환행사’를 가졌다. 그는 6·25전쟁 당시인 1951년 10월 노무단 제5009부대(103사단 109연대) 소속으로 강원 양구군 일대 ‘피의 능선’ 전투와 ‘단장의 능선’ 전투에 참가해 전사했다. 김씨는 1951년 5월 40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대구 노무단 양성소를 거쳐 노무단 제5009부대에 배치됐다. 당시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황이 불리해지자 유엔군은 긴급히 전력을 강화하기 위해 민간인 운반단을 포함한 ‘한국노무단’(KSC)을 창설했다. 노무단은 전선부대에 탄약, 연료, 식량 등 보급품을 운반하고 부상자 후송, 진지 공사, 도로·교량 보수 등 전투 지원 임무를 수행했다. 김씨의 유해는 양구군 동면 월운리 수리봉 일대에서 2010년 10월과 2012년 10월 두 차례에 걸쳐 플라스틱 숟가락 등 유품과 함께 발굴됐다. 강윤혁 기자 yes@seoul.co.kr
  • [한필원의 골목길 통신] 평창과 함께 가볼 만한 곳

    [한필원의 골목길 통신] 평창과 함께 가볼 만한 곳

    평창동계올림픽이 석 달도 남지 않았다. 그런데 입장권 판매가 부진하단다. 특히 국내에서 표가 많이 팔리지 않는다고 한다. 지난 9월 말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제4차 ‘평창동계올림픽 국민 여론조사’를 보면 응답자의 66.6%가 대회의 성공을 전망했지만 경기장에 가서 경기를 관람하겠다는 응답은 7.1%에 불과하다. 대회가 성공하기를 바라지만 직접 현장으로 가지는 않으려는 이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어떤 행사가 열릴 때 그 행사만으로는 흥행에 성공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이때 연계 프로그램을 활용할 필요가 있는데 문화관광이 효과가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업회의, 컨벤션, 이벤트 및 전시를 포상관광과 결합한 마이스(MICE) 산업이 탄생한 것도 행사와 관광의 상생효과 때문일 것이다. 특히 행사의 성격과 관련 있는 장소를 관광하는 것은 행사의 흥행에 큰 도움이 되고 그것의 의미를 더해 준다. 때늦긴 했지만 지난 9월 한국관광공사는 ‘평창동계올림픽 관광지도’를 제작해 보급하고 있다. 평창과 인근의 다양한 관광지들을 소개하고 각각 대여섯 개 지점을 묶어 10개의 관광 경로를 제시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관광지도에 고성 왕곡마을이 빠졌다. 왕곡마을은 평창의 올림픽 경기장에서 차로 1시간 반 거리에 있다. 왕곡마을보다 1시간 가까이 더 걸리는 남이섬도 소개돼 있는데, 의아한 생각이 든다. 속초에서 북쪽으로 7번 국도를 따라가다 왼쪽으로 꺾어 들어가면 고성군 죽왕면 오봉리 왕곡마을이 나온다. 마을 입구에서 내려다보면 곳곳에 높이 솟은 굴뚝들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토담 쌓는 방식으로 만들어진 다양한 디자인의 굴뚝들이 평소에는 탑이나 봉수대처럼 보이겠지만 올림픽 기간에는 성화대로 보일는지도 모른다. 물론 평창과 함께 가볼 만한 곳으로 왕곡마을을 추천하는 것은 그 굴뚝들 때문만은 아니다. 남북한의 말투가 다르듯 남북한의 집들도 서로 다르다. 그것이 문화다. 그런데 예외적으로 왕곡마을에서는 북한의 강원도와 함경도 지방에 있는 집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왕곡의 집들은 모두 방이 앞뒤로 두 줄로 배열된 겹집이다. 이렇게 왕곡마을은 남북한이 본래 하나였음을 말해 준다. 14세기 말부터 양근 함씨와 강릉 최씨가 주류를 이루어 살아온 왕곡마을은 양성마을, 곧 두 성씨의 마을이다. 양성마을에서는 문중 사이에 갈등이 발생하기 쉽다. 또한 38도선 북쪽에 있는 왕곡마을은 광복 이후 6·25전쟁의 휴전협정이 맺어진 1953년까지 이북 정권 아래에 있었다. 따라서 이념적인 갈등의 소지도 컸다. 실제로 광복 직후 두 성씨는 각각 우익과 좌익의 성향을 띠었다고 한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이 모든 사회적·정치적 갈등을 잘 관리하며 오늘날까지 평화롭게 하나의 마을을 이루어 살고 있다. 그뿐이 아니다. 가축까지도 한 집 안에서 사람들과 평화롭게 공존해 왔다. 겹집 형태의 빵빵한 집 앞으로 돌출된 부분이 바로 소가 생활한 마구다. 마구와 부엌 사이에는 칸막이가 없어 소는 사람과 똑같이 부뚜막의 온기를 나누었다. 몇몇 집에서는 마구에 한옥의 여러 지붕 형식 중 가장 위계가 높은 팔작지붕을 이을 정도로 가축의 공간은 사람이 사는 부분과 다름없이 정성스럽게 만들어졌다. 왕곡마을에서 비슷비슷하게 생긴 집들 사이를 구분할 수 있는 것은 집집마다 특색이 있는 마구 지붕의 디자인 덕이다. 말하자면 우리 민족이 육백 년 넘게 평화로운 공동체를 이루어 살며 가축 복지를 실천한 현장이 바로 왕곡마을이다. 올림픽 헌장에 명시됐듯이 올림피즘(Olympism)이라 불리는 올림픽 경기의 철학은 스포츠를 통한 인류의 조화로운 발전과 평화로운 사회의 추구다. 평창동계올림픽은 평화라는 이념을 가슴에 안고 뛰는 선수들의 경기를 관람하고 경기의 앞뒤 빈 시간에 오랜 평화의 실천 현장인 왕곡마을을 관광하며 남북의 화해와 평화통일을 그려 볼 수 있는 매우 귀중한 기회다. 왕곡마을을 구경하고 평창으로 돌아오는 길에 시간이 좀 나면 강릉 해변의 커피 거리에 들러 따뜻한 커피라도 한잔하자. 그때 바라본 겨울 바다는 이미 쓸쓸하지 않을 것이다.
  • ‘마지막 주월 공사’ 이대용 예비역 준장 별세

    ‘마지막 주월 공사’ 이대용 예비역 준장 별세

    ‘마지막 주월(駐越) 공사’로 불리는 이대용 예비역 육군 준장이 지난 14일 밤 별세했다. 92세.이 전 공사는 1975년 4월 30일 월남(남베트남)이 패망할 당시 주월대사관 경제공사로 근무했다. 철수본부장을 맡았던 이 전 공사는 서병호·안희완 영사와 함께 한 명의 교민이라도 더 구출하기 위해 끝까지 사이공(현 호찌민)에 남았다가 월맹군에 체포됐다. 이후 악명 높은 사이공의 치화 형무소에 수감돼 5년간 모진 고초를 겪었다. 독방에서 10개월 동안 햇볕 한번 못 보고 지냈는가 하면 체중은 42㎏으로 줄었다. 베트남 당국자들과 북한 공작 요원이 귀순 및 월북 등을 회유했지만 ‘죽으면 죽었지 항복할 수 없다’는 의지로 끝까지 거부했다. 정부는 이 전 공사 석방을 위해 북한 및 베트남과 협상에 나서는 등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다. 결국 이 전 공사는 1980년 4월 12일 석방돼 귀국했다. 황해도 금천 출신인 이 전 공사는 8·15 광복 후 고향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다 반동으로 물려 월남했다. 육사 7기로 임관한 그는 6·25전쟁에 참전해 1950년 10월 26일 6사단 7연대 1중대장으로 국군 가운데 가장 먼저 압록강에 도착했다. 수통에 압록강 물을 담아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낸 일화로 유명하다. 6·25전쟁 초기에는 파죽지세로 남진하는 북한군을 사흘 동안 저지한 춘천 전투에 참가했다. 베트남과는 1963년 주월대사관 무관으로 파견되면서 인연을 맺었다. 예편한 뒤에는 화재보험협회 이사장, 생명보험협회 회장, 한·베트남 친선협회 회장, 육사 총동창회장 등을 지냈다. 빈소는 서울 강남성모병원 장례식장이고, 발인은 17일 오전 8시 30분이다. 장지는 국립대전현충원. (02)2258-5940 박홍환 전문기자 stinger@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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