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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11년만에 국보법 무혐의 ‘태백산맥’ 작가 조정래 인터뷰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11년만에 국보법 무혐의 ‘태백산맥’ 작가 조정래 인터뷰

    1930년 프랑스의 앙드레 모루아가 대하소설(大河小說,roman-fleuve)이란 용어를 처음 사용했다.‘대하’의 흐름처럼 계속된다는 뜻이다. 유럽에서는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대표적으로 꼽는다. 하지만 세계 문학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대기록이 한국에 있다.1질도 힘들다는 대하소설을 무려 3질이나 썼다.‘태백산맥’(10권)에서 시작돼 ‘아리랑’(12권)을 부르며 ‘한강’(10권)에 이르렀다. 등장인물만 하더라도 1200명이다. 실타래처럼 풀어놓은 삶의 희로애락, 켜켜이 쌓여진 원고지 높이가 7m30㎝에 이른다. 과연 몇명이나 읽었을까. 팔린 부수로 계산해보자. 태백산맥 600만부, 아리랑 350만부, 한강 200만부, 합치면 1150만부에 달한다. 태백산맥의 경우 인세수입은 30억원이며 아직도 대학도서관 대출순위 1위에 오를 정도로 기록깨기 행진을 계속하고 있다. ●1질도 힘든 대하소설 3질이나 집필 최근에는 태백산맥을 원고지에 베껴쓰는 독자들도 많아지고 있다. 영어 일본어 중국어 스페인어로 번역돼 세계로 무대를 넓혀간다. 사람들은 작가를 가리켜 ‘접신(接神)’이라고도 한다. 조정래(63)씨. 빨치산과 분단문학가로 대표된다. 서울 서초동의 한 전통찻집에서 만났다. 태백산맥으로 11년만에 굴레를 벗었다. 그래서일까. 꽃이 만발한 들판에서 뛰노는 아이같은 느낌이 풍겨왔다. 인사말이 오고갔다. 먼저 태백산맥의 보안법 무혐의에 관한 얘기가 나왔다. 그는 “검찰의 용단에 감사한다. 목에 감겨 있던 쇠사슬이 풀린 기분이다. 빼앗긴 창작의 자유를 되찾아 홀가분하다.”고 소감을 피력했다.“그동안 동료작가들의 심리적 위축이 많았다. 이제는 후배작가들이 추구하려는 분단문학의 수준을 한단계 높이게 될 것”이라면서 “(이번 결정은)검찰의 성숙된 변화이며 진정한 통일의 길을 한가닥 열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빼앗긴 창작의 자유 되찾아 홀가분” 누가 가장 반가워했느냐는 물음에 주저없이 “온갖 고초를 함께 겪어온 아내”라면서 “(아내는)‘여보, 당신 이젠 자유야.’라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 대답했다. 순간 11년의 굴레가 생각났는지 잠시 창밖을 응시한다. 회한이 교차했을 법하다. 그의 눈가에는 이슬이 맺히는 듯했으나 금방 웃음으로 바꾼다. 차 한잔을 마신다. 순천 벌교에 들어설 ‘태백산맥문학관’사업이 탄력을 받게 됐다고 했다.“문학관사업은 원래 9년전 구체적으로 진행되다가 자유총연맹과 공안당국의 방해 등으로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지난해 다시 구체화됐다.”면서 “최근 착공됐으며 내년 5월에 개관될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설계는 건축가 김원씨가 맡았다. 김씨와는 지난해 6월 사단법인 남북어린이어깨동무에서 주관한 평양어린이병원 개원과 관련해 방북 때 동행하면서 인연을 맺었다. 문학관에는 육필원고와 태백산맥의 사건 일지, 협박편지, 방송녹화자료 등 고통의 흔적들도 전시할 예정이다. 특히 2편의 유서도 선보인다. 조씨는 태백산맥으로 늘 미행의 그림자를 벗어나지 못했다. 까닭에, 어느날 갑자기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 끝에 94년 2월과 97년에 유서를 썼다. “태백산맥 2회분을 쓰고나서 공안당국의 협박에 시달렸죠. 하루는 아내한테 ‘아이 데리고 견딜 수 있겠느냐.’고 했지요. 그랬더니 아내는 ‘작가가 두려워서 글을 못쓰면 작가도 아니다.’고 했어요. 아울러 ‘어차피 작가의 영욕(榮辱)은 반반’이라고 하더군요. 제겐 큰 위로가 됐습니다.” 조씨 부인은 시인 김초혜씨다. 둘은 문단에서 소문난 캠퍼스 커플이다. 조씨와 함께 동국대 2학년때 문학서클 ‘용운문학회’ 멤버로 만나 결혼했다. 둘은 문학적 논쟁 외에는 부부싸움 한번 안할 정도로 40년동안 잉꼬부부로 살아오고 있다. ●하루평균 원고지 30매는 반드시 메워 대하소설을 3질이나 쓴 저력은 어디에 있을까. 즉각 “험난하고 처절한 역사가 힘이 됐다. 분단의 진실을 알리는 것이 작가의 책무요, 알면서 안쓰면 비겁한 것이고 기피가 아니냐.”고 반문한다. 작가적 사명감으로, 자신과 외롭게 싸우면서 수없이 구슬을 뀄다. 또한 부친의 영향도 많이 받았다. 부친은 일제 때 한용운 선생의 청년승려 비밀조직인 ‘만당’(卍黨)에 참여해 불교개혁과 일제에 항거했다. 조씨는 “선친의 문학비가 낙산사와 고흥에 세워져 있으며 유품 몇점이 아리랑문학관에 전시돼 있다.”면서 “(자신이)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맑은 풍경소리와 목탁소리가 곧 태교음악이었다.”고 회고한다. 불교소재의 글을 쓸 때에는 (원고지)파지 하나 없이 생득(生得)적 일사천리로 쓰여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는 예나 지금이나 원고지로 글쓰기를 고집한다. 컴퓨터나 핸드폰 같은 것을 싫어한다. 기계에 얽매이는 것이 싫단다.‘글발’을 받을 때에는 하루 150매까지 쓴다. 하루평균 30매는 꼭 쓴다. 이 대목에 이르자 “혹자들은 ‘돈을 많이 번 작가’라고 하지만 ‘글감옥’에 갇혀 엄청난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고 말한다. ●소설 집필때마다 수차례 병원신세 예를 하나 든다. 어느 대학에서 작가 지망생들을 상대로 강의했을 때였다. 처음에는 조씨같은 작가가 되고 싶다고 했던 학생들이 ‘조정래의 삶’(TV녹화자료)을 감상한 뒤에는 다들 “생각을 바꾸겠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작가론이 이어진다.“농부의 호미가 녹슬 겨를이 없듯이 작가 또한 열심히 밭고랑을 일구는, 인생을 끊임없이 경작하는 것이 아니냐.”고 비유했다. 이러는 동안 그는 세가지 병마와 싸웠다고 고백했다. 태백산맥을 집필할 때에는 위궤양으로 고생했다. 또 아리랑을 쓸 땐 오른팔 마비, 한강 땐 탈장 등으로 수차례 병원신세를 졌다. “피가 증발해버리고 하얗게 표백되는 현상이 거듭되고, 침대에 누우면 온몸이 조각난 것처럼 혼미해지고 ‘이대로 죽을 수도 있구나.’하며 잠에 빠지는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습니다.” 다시 창밖을 응시한다. 목소리가 낮아진다. “아들이 초등학교 4학년 때 ‘태백산맥’을 쓰기 시작했어요.‘한강’을 끝내고 나니 어른이 되어 장가를 가겠다고 하더군요.‘글감옥’에 갇혀 지내느라 아들과 대화도 못해 어찌나 미안한지…, 글을 쓸 때에는 아내도 아들도 접근을 못하거든요.” 그래서 손자들한테는 무척 다정다감한 할아버지로 대해준다고 했다. 주말마다 손자의 손을 잡고 나들이하며 더할 수 없는 행복에 빠져든다.“초록빛 잔디밭에서 하늘이 주는 최고의 선물을 만끽한다.”며 어린 아이처럼 활짝 웃는다. 특히 요즘에는 6살된 첫째 손자가 “할아버지, 저도 태백산맥을 쓸게요.”하는 재롱에 몇번이고 감동을 받는다. 조씨의 아들 도현(34)씨와 며느리 이민경(31)씨가 최근 4년5개월만에 ‘태백산맥’을 베껴쓰는 일을 끝마쳤다. 손자가 그런 모습을 지켜봤던 것이다. 조씨는 향후 10년 계획을 밝히면서 동화 2편을 반드시 쓰겠다고 강조했다. 손자와 지내다보면 동화쓰고 싶은 마음이 더욱 간절해진다고 했다. 톨스토이도 말년에 동화를 썼다고 덧붙인다. 아울러 장편 3권과 역사속의 인물 10명을 택해 전기를 쓰는 것도 이미 기획돼 있다고 했다.“글이란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할 수 있는 예술의 한 장르”라면서 한번밖에 없는 생애에 언어의 여력을 계속 쏟아내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1943년 전라남도 승주군 선암사에서 4남4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을 주로 순천과 벌교에서 지내면서 여수·순천사건과 6·25전쟁을 겪었다. 이 경험은 훗날 중요한 문학적 토양으로 작용한다.1970년 ‘현대문학’에 ‘누명(陋名)’과 ‘선생님 기행’으로 문단에 데뷔했다. 이후 ‘월간문학’ 편집장,‘소설문예’ 발행인으로 활동했다.78년에는 도서출판 민예사를 설립했으며 ‘한국문학’ 주간을 지냈다. 이후 83년부터 ‘대하’에서 ‘소설’이란 배를 홀로 타고 노를 젓기 시작했다. “반야심경을 자주 외며 내공의 힘을 쌓지요. 또 건강을 위해 집(경기 분당) 주변 율동공원을 매일 한시간씩 산책합니다.” km@seoul.co.kr ■ 그가 걸어온 길 ▲1943년 전남 벌교 출생 ▲62년 서울 보성고등학교 졸업 ▲66년 동국대 국문학과 졸업 ▲70년 현대문학 ‘누명’으로 데뷔 ▲73년 월간문학 편집장 ▲75년 소설문예 발행인 ▲77년 민예사 대표 ▲83년 태백산맥 집필 ▲86년 태백산맥 전10권 발간 ▲94년 아리랑 전12권 발간 ▲2001년 한강 전10권 발간 ▲이밖에 산문집 ‘누구나 홀로 선 나무’(2003년), 조정래 문학전집 전9권,‘시간의 그늘’ 등 문학지에 소설 50여편 발표. ■ 상훈 제27회 현대문학상(유형의 땅), 대한민국문학상(인간의 문), 단재문학상(태백산맥), 노신문학상(아리랑). 제7회 만해대상 등
  • “55년만의 수료 신고합니다”

    “필승 신고합니다.” 해군 항해학교 수료 2주일을 앞둔 상태에서 6·25 전쟁을 겪은 70대 노병들이 55년 만에 수료장을 받지 못한 가슴 속의 ‘한’을 푼다.1일 해군에 따르면 박광수(74)옹 등 항해학교 5기생 17명은 오는 4일 경남 진해 교육사령부 연병장에서 후배 장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수십년 만에 군복으로 갈아입고 수료식 행사를 갖는다. 1947년 12월 개교한 항해학교는 현 교육사 전투병과학교의 전신으로, 복무중인 일등 수병(현재 병장) 중 지원자를 받아 6개월 교육과정을 거쳐 부사관으로 배출하는 곳이다. 박옹 등은 1949년 12월 5기생으로 입교, 이듬해 7월8일 수료식을 가질 예정이었으나 6·25전쟁이 발발, 전선에 투입되는 바람에 지금까지 수료증을 받지 못했다. 전쟁 중 하사로 진급한 5기생들은 종전 후 뿔뿔이 흩어졌으나, 지난해 3월 일본 도쿄에 살고 있는 박옹의 주도로 20여명의 생존자를 찾아내 동기회를 발족, 해군본부에 수료식 행사와 수료증 발급을 요청했다. 해군은 이들의 명예를 높이고 해군에 대한 자긍심을 고양하기 위해 당시 복무기록을 뒤져 군사교육 이수사실을 확인해 이번 행사를 마련했다. 동기회 총무를 맡고 있고 화랑무공훈장을 세 차례나 받은 조용철(76)옹은 “전쟁으로 연기된 수료식을 해군에서 잊지 않고 마련해줘 고맙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조승진기자 redtrain@seoul.co.kr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자서전 ‘대화’ 낸 리영희 전 한양대교수 산행 인터뷰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자서전 ‘대화’ 낸 리영희 전 한양대교수 산행 인터뷰

    ‘아큐정전’의 저자 루쉰(魯迅)은 생전에 영국의 시인 바이런을 예찬했다.‘영국’이라는 속박에서 끊임없이 벗어나려는 저항정신을 사랑했다. 얼마전 중국은 네티즌 13만명을 상대로 20세기 중국사회에 가장 영향력을 끼친 인물로 루쉰을 1위로 꼽았다. 한국의 루쉰으로 일컬어지는 사람이 있다. 누굴까. 한국의 현대사를 관통한다. 파란과 곡절의 삶 그 자체이다. 주위에서는 ‘60% 저널리스트,40% 아카데미션’이라고 한다. 르몽드지는 ‘사상의 스승’이라고 표현했다. ●한국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에 1999년 ‘연세대학원신문’이 교수와 대학원생을 대상으로 실시한 ‘20세기 영향력 있는 학자와 저작’에 관한 설문조사에서 국내 학자 가운데 리영희(77)씨를 가장 으뜸으로 꼽았다. 또 모언론사에서 지난 한 세기동안 가장 영향력있는 100대 인물 중 리씨가 24위로 조사됐다. 리씨는 “나의 글은 루쉰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스스로 말할 정도로 루쉰을 좋아한다. 흥미로운 것은 루쉰과 리씨가 해양대학 출신의 지식인이라는 점. 리씨 역시 온몸으로 ‘저항’하며 한 시대를 깨우치려 했다. 또 올곧은 사상가의 길을 걷고자 했다. 경기도 군포시 수리동의 한 아파트. 초인종을 눌렀다. 신분을 밝히자 “문이 열렸으니 그냥 들어오세요.”라고 했다. 안으로 들어섰다.40평쯤 돼 보였다. 리씨는 식탁에서 혼자 과일을 먹고 있었다.“점심을 지금 막 먹었거든. 조금만 기다려주게.”라고 했다. 잡안에는 조수미의 ‘새야새야’가 조용히 울려퍼졌다. 이윽고 리씨와 마주앉았다. 이런저런 인사말이 오고갔다. 그는 “오늘 날씨도 좋은데 뒷산 구경이나 할까.”라면서 옷을 갈아입었다. 이때 전화벨이 울렸다. 본의 아니게 전화내용을 듣게 됐다.“요새 글 못써. 책도 안 읽어. 스트레스 받으면 재발하거든. 뭐? 대학에서 두번 쫓겨나는 바람에 연금도 없어. 내가 언제 감투를 써봤나. 요새 책도 안팔려, 전자매체로 다 보잖아.” 문득 벽에 걸린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나의 글을 쓰는 유일한 목적은 진실을 추구하는 오직 그것에서 시작되고 끝난다. 진실은 한 사람의 소유물일 수 없고 이웃과 나누어야 하는 까닭에, 그것을 위해서는 글을 써야 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우상에 도전하는 행위이다. 그것은 언제나 어디서나 고통을 무릅써야 했다.’ 손자손녀들과 밝게 웃는 모습의 사진도 보였다. 전화통화를 끝낸 리씨는 “가족이란 시간과 공간을 함께 해야 기억할 수 있지. 손자들은 서울 신촌에 살고 있어.”라며 노년의 외로움을 감추지 못했다. 잠시후 마을 뒷산인 수리산 입구에 들어섰다.“이 산은 말야, 해발 489m의 야트막한 산이지. 그런데 물이 좋아. 약수물 받으러 오는 사람 많아.” 리씨는 지팡이에 의지한 채 천천히 걸었다. ●이번 자서전이 마지막 글 최근 발간된 자서전 ‘대화’(한길사刊)에 대한 얘기가 먼저 나왔다. “이번이 마지막이야. 직접 글을 다듬고 쓰지 못해 어려움이 많았지. 서울대 학생이 우리집에 기거하며 정리해 주었어.2년 걸렸지. 누락됐거나 생략된 것도 많아. 살아온 76년은 한마디로 ‘야만의 시대’였지. 일제와 해방후 50년은 반인간적 생존환경이었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권리를 위해 싸우는 고결한 정신의 소유자들 돕기 위해 많은 글을 썼지. 문장으로는 꽤나 중국의 루쉰 같은 스타일로 써왔어.” 20분 가량 걸었다. 약간 힘들었는지 의자에 앉자고 했다. 푸른 소나무 사이로 새들의 소리가 귓전을 간지럽혔다. 자연이 그에겐 어떤 모습으로 다가갈까. 잠시 하늘을 쳐다보다가 “아름다운 경치야. 무심(無心)으로 걸어. 자연의 오묘한 변화를 새삼 느끼지. 몸이 불편하니까, 지난날의 정열과 행동양식이 내면화되니까, 정서가 합치돼.”라면서 지나온 세월을 잠시 돌이켜본다. “참으로 우역곡절과 파란만장이었어. 어떤 장면과 국면에 가까이 안가도 될 것을, 지성인의 본질적 책임을 위해 개인의 안락보다는 사회쪽으로 시선을 돌렸지. 가정위주로 산다는 것은 배반이었어. 자식들에겐 굉장히 미안해. 또 지나칠 정도로 논증적으로 빈틈없이 문제의 본질을 파고들었지. 정서적 내면은 철저히 억압됐어.” 이같은 고통스러운 삶으로 술은 늘 곁에 끼고 있었다고 했다. 모언론사 외신부장 시절이다. 부원들과 팔당에서 야유회를 가졌다. 부원들은 정종을 마셨지만 리씨는 들고온 고량주(10홉짜리 큰병)의 뚜껑을 땄다. 안주없이 벌컥벌컥 5홉을 연거푸 마셨다. 정신을 잃었다. 이튿날 배가 너무 아파 병원에 갔더니 위궤양이었다. 성인의 위두께가 보통 11㎜인데 9㎜까지 파고들었단다. 이후 15년 동안 위궤양으로 고생했다. 리씨는 인터뷰에 앞서 스트레스 받는 질문은 하지 말아달라고 했다. 그러나 온국민의 관심사인 독도문제를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일본은 모든 상황을 1945년 이전으로 롤백하려는 큰 구상 속에 영토문제를 꺼내고 있지. 우리는 고증과 실증을 통해 법률적 역사적 근거를 제시해야 해. 걱정되는 것은 우리 국민의 ‘냄비’ 정서야. 항상 반응적이거든. 그러나 독도문제만큼은 영국 국민처럼 뚝심으로 대처해야 해. 한번 물면 절대 놓지 않은 불독처럼 말야. 여기에 일본인 같은 교묘함도 염두에 두어야 해.” ●한·일 우익들의 밀착이 문제 이어 “이번 사태로 얘기하고 싶은 것은 우리나라의 친일파 우익과 일본의 우익단체간에 밀착내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해.”라면서 “한국과 일본의 우익 뒤에는 항상 미국이 있지. 김대중 정권에서도 그랬지만 노무현 정권에 와서 미국은 남한의 우익을 더욱 부추기고 있어. 기독교 인사, 전직 장관, 군부세력 등 남한의 우익단체가 더 무서워. 자기 몸속의 벌레를 찾아내야 해.”라고 목소리를 높이다가 혈압이 오르는 것을 느낀 듯 “그만두자.”고 했다. 화제를 돌렸다. 여생에 뭔가 또 남겨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러자 “한 인간으로 할 수 있는 분량이 있어.40년간 범속한 지식인의 머리로 쓴 소리도 많이 했지. 국민들에게 시대의식과 세계관을 바로잡는 데 나름대로 기여했다고 봐. 또 우리 국가나 사회가 대체적으로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려 하는 것이 기쁘고 행복해. 이만하면 분량을 다했어.”라며 말끝을 흐린다. ●광주 배후자로 몰려 수차례 고초 그는 1929년 평북 운산에서 3남2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부친은 구한말 신식교육을 받은 선비형이었다.14세 때 경성의 ‘공립5학년제 갑종 중학교’에 입학한 뒤 1945년 11월 미국식 6년제가 된 고등학교에 5학년으로 편입했다. 이때 담배말이와 성냥장사를 했지만 겨우 입에 풀칠을 할 정도였다. 그러던 1946년 국비로 입혀주고 먹여준다는 말을 듣고 해양대학 1기생으로 입학해 1950년 3월 졸업했다. 6·25전쟁이 나자 연락장교에 지원해 7년 동안 전방근무를 했다. 전방 근무시절엔 권총을 잘 쏘아 명사수로 명성이 자자했다. 제대 1년전 56년 스물일곱에 하숙집 아줌마의 중매로 결혼했다. 제대후에는 합동통신사 외신부 기자로 취직했다. 슬하에 2남1녀를 두었는데 셋다 합동통신사 다닐 때 태어났다. 이후 72년 신학기부터 한양대 강단에 서면서 무섭게 글을 썼다.77년에 ‘8억인과의 대화’‘전환시대의 논리’‘우상과 이성’을 한데 묶어 2년 동안 투옥된다. 수감 중에는 ‘D검사와 리교수의 하루’라는 소설을 썼다. 대학에 복직됐으나 ‘광주폭동’ 배후자로 몰려 다시 해직되는 등 수차례 고초를 겪는다. 정년 퇴임후 그는 시대적 소임을 다했다고 자위하며 조용히 살았지만 2000년말 일흔나이에 뇌출혈로 쓰러졌다. 언어장애까지 겹쳤다. 다행히 요즘들어 건강이 다소 회복됐다. 그러나 오른손의 떨림과 손가락마비는 여전해 장마철만 되면 잘라버리고 싶을 정도의 심한 고통을 느낀다고 했다. “내가 할 일은 다했다.”고 거듭 말하는 리씨. 그는 자신의 책이 더 이상 읽히지 않는 세상을 바란다며 저녁노을을 뒤로 하고 쓸쓸히 산을 내려왔다. ■ 그가 걸어온 길 ▲1929년 평북 운산 출생 ▲50년 해양대학 1기 졸업, 경북 안동중학교 영어교사로 재직중 6·25전쟁이 나자 연락장교 지원 ▲57년 대위로 군제대 ▲57∼64년 합동통신 외신부 기자 ▲64∼71년 조선일보·합동통신 외신부장 ▲72년 한양대 문리과대 교수 ▲76년 박정희 정권때 해직 ▲80년 3월 복직됐으나 그해 여름 전두환 정권에 의해 다시 해직됨. ▲84년 재복직 ▲87년 미국 버클리대 부교수 초빙 ▲95년 한양대에서 정년퇴임 ▲99년 동대학 언론정보대학원 대우교수 역임 ■ 주요 저서 전환시대의 논리(74년), 우상과 이성(77년),8억인과의 대화(77), 분단을 넘어서(84년), 베트남전쟁(85년), 인간만사 새옹지마(91년) 등 km@seoul.co.kr
  • 나라사랑 대사에 권해선씨

    국가보훈처는 18일 세계적인 프리마돈나이자 국가 유공자 자녀인 권해선(44·여)씨를 나라사랑 홍보대사로 위촉했다. 1984년 독일 비스바덴 국립오페라에서 ‘마술피리’의 밤의 여왕으로 데뷔한 권씨는 1987년 함부르크 오페라극장 정식 단원으로 입단,18년째 주역으로 활동 중이다. 그녀는 오는 22∼26일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에서 열리는 베버의 오페라 ‘마탄의 사수’ 공연을 위해 최근 고국을 찾았다. 부친 권인현(상이 1급)씨는 6·25전쟁에 참전한 국가 유공자이며, 외할아버지 정운수 선생은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펼친 공훈으로 건국훈장을 받은 ‘독립ㆍ호국’ 명문가 출신이다. 오는 24일 상이군경 복지회관의 ‘리프트 버스 발대식’에 참석하는 것을 시작으로 홍보대사로서의 첫 활동을 시작한다.
  •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현대家 ①-창업주 故정주영회장 일가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현대家 ①-창업주 故정주영회장 일가

    보는 이마다 다르겠지만 현대를 삼성보다 앞세우는 사람들은 현대의 창업 정신을 강조한다. 현대는 남이 일궈놓은 기업을 인수하기보다는 밑바닥에서부터 하나하나 주춧돌을 올렸다. 건설이 그랬고, 자동차가 그랬으며, 중공업이 그랬다. 창업주인 고(故) 정주영 회장은 이를 평생의 긍지요, 자랑으로 여겼다. 서슬 퍼렇던 군사정권 시절, 국보위(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에 끌려가서도 “사정상 어쩔 수 없었던 인천제철만 제외하고는 어느 하나 내 손으로 말뚝을 박고 길을 닦아 시작하지 않은 공장이 없다.”며 기업 강제 통·폐합에 맞섰을 정도였다. 1947년 5월25일 서울 중구 초동의 허름한 자동차 수리공장 한 귀퉁이에 ‘현대토건사’라는 간판을 내건 지 60여년. 삼성보다 10년 가까이 늦은 출발이었지만 현대는 이내 1위 기업으로 우뚝 섰고,‘경영권 다툼’이 일어났던 2000년까지 그 지위는 차돌만큼이나 단단했다. 이때 현대그룹의 자산규모가 87조여원. 계열사 수만 40개가 넘었다. 비록 그룹이 쪼개지면서 외형상의 규모가 작아지고 재계 서열은 떨어졌지만, 경제 전문가들은 ‘전화위복’이라고 입을 모은다. 자동차(현대차그룹), 유통(현대백화점), 해운·제조(현대그룹), 조선(현대중공업), 금융(현대해상·현대기업금융) 등 각자 전문그룹의 길로 나서면서 경쟁력은 더 강화되고 동반 부실의 위험은 현격히 줄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다른 그룹들이 이제서야 계열분리 등으로 홍역을 앓는 동안 현대의 대표주자들은 세계를 상대로 싸우고 있다. 현대산업개발,KCC, 한라, 성우 등 창업주의 형제들이 이끄는 그룹들도 각자 독자영역을 굳혀가고 있다. 언뜻 봐도 느껴질 만큼 현대에 뿌리를 대고 있는 기업들은 유난히 굴뚝업종이 많다. 고용된 인원과 딸린 부품·협력업체가 많다는 얘기다. 국민경제 기여도로 따지면 현대가 여전히 1위라는 말은 그래서 나온다. 또 한 가지, 현대를 얘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현대정신’이다. 현대에는 일단 해보자며 덤비는 정신, 밀어붙이는 힘이 있다. 때로는 비합리성을 낳기도 하지만 현대맨들은 이를 “맨바닥에서부터 기업을 일군 현대만의 저력”이라고 자부한다.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는 이를 “진정한 기업가(起業家) 정신”이라고 불렀다. 제각각 ‘마이 웨이’를 걷고 있는 오늘날의 현대가를 묶는 보이지 않는 끈이기도 하다. ●담(淡)한 혼맥… 후한 연애결혼 다른 재벌가에 비해 현대의 혼맥은 의외로 소박하다. 낭만을 즐겼던 고 정 회장이 자식들의 연애에도 너그러웠던 영향이 가장 크다.‘왕 회장’이라는 별칭으로 더 자주 불렸던 그 자신, 강원도 통천의 평범한 고향처녀(변중석)와 결혼해 평생을 함께했다. 슬하에 9남매(8남1녀)를 두고 동생이 일곱(한명은 어려서 사망)이나 됐지만 눈에 띄는 혼사는 손가락을 꼽는다. 직계가족 중에 굳이 꼽자면 다섯째아들 고 몽헌(MH)씨와 여섯째아들 몽준(MJ)씨를 들 수 있다. 몽헌씨는 신한해운 현영원 회장의 딸 정은씨와, 몽준씨는 김동조 전 외무장관의 막내딸 영명씨와 각각 결혼했다. 오랜 세월 재계를 주름잡았던 현대의 위상에 견줘 혼맥이 조촐한 데는 창업주의 성공과정과도 무관치 않다. 가난한 농군의 아들로 태어나 부두 막노동꾼을 거쳐 대기업 총수에 오른 그는 살아생전 “세상에 공짜란 없다.”며 담(淡)한 마음을 갖자고 입버릇처럼 강조하곤 했다. 권력이나 부(富)를 결코 싫어하지 않았지만 굳이 혼사줄까지 대가며 공짜를 탐할 이유 또한 없었던 것이다. 정략결혼의 흔적이 적은 대신에 유난히 많은 손(孫)과 맞닥뜨리는 게 현대라는 집안이다. 이런 현대가 대(代)를 건너뛰면서 LG, 롯데, 한진, 이건, 비비안 등 내로라하는 그룹들과 사돈을 맺은 점은 흥미롭다. 현대가의 2세들이 ‘몽(夢)’자 돌림이라면 3세들은 딸이 ‘이(伊)’, 아들은 ‘선(宣)’자 돌림을 쓴다.4세는 ‘진’자(딸),‘창’자(아들) 돌림이다. ■ 현대의 핵심축 아들들 ●장남 몽필… 쌍용가와 인연 큰아들 몽필씨는 나이 50도 안돼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국영 적자기업 인천제철을 인수해 정상화에 여념이 없던 1982년 4월 어느날, 울산에서 서울로 올라오던 고속도로에서 그가 탄 승용차가 트레일러를 들이받았다. 이 때가 마흔아홉살. 수도여대 출신의 부인 이양자씨와 두 딸 은희·유희씨는 망연자실했다. 몽필씨가 떠난 지 한달 뒤, 정주영 회장은 동서산업 공장장이던 이영복씨를 사장으로 파격 승진시켰다. 이씨는 몽필씨의 처남, 즉 이양자씨의 친동생. 졸지에 가장을 잃은 장남 가족에 대한 배려였다. 하지만 이양자씨마저 91년 위암으로 눈을 감고 말았다. 큰딸 은희씨는 최근 미국에서 귀국했다. 둘째딸 유희씨는 김석원 쌍용양회 명예회장의 장남 지용씨와 결혼해 두 아들(진석·진하)을 두었다. 지용씨는 현재 용평리조트 상무를 맡고 있다. ●2남 몽구… 글로벌 현대차그룹 리더 몽필씨의 죽음으로 사실상 집안의 장남 역할을 도맡아 한 이는 둘째아들 몽구(MK)씨였다. 유희씨가 결혼할 때 부모 역할을 대신 한 사람도 몽구씨 부부였다. 현대정공(현 현대모비스) 사장 시절,‘갤로퍼 신화’를 만들어낸 그는 기아차마저 인수해 지금의 현대·기아차 그룹을 이끌고 있다.2000년 자동차전문 그룹으로 출범한 지 몇 년도 안돼 그룹을 세계 6위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출범 당시 10개였던 계열사 수는 28개로 불어났다. 그룹의 올해 매출 목표액은 지난해보다 17% 늘어난 85조원. 세계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미국의 ‘소비자 보고서(컨슈머 리포트)’는 최근 현대차의 뉴쏘나타를 세계에서 가장 결함이 적은 차로 선정했다. 갤로퍼 신화 때부터 MK가 강조해온 ‘품질 경영’의 힘이다. MK는 평범한 집안의 딸 이정화씨와 결혼해 3녀1남을 두었다. 큰딸 성이씨는 저명한 정형외과 의사이자 영훈의료재단을 설립한 고 선호영 박사의 아들 두훈씨와 결혼했다. 둘째딸 명이씨는 정경진 종로학원장의 아들 태영씨와, 셋째딸 윤이씨는 미국 MBA(경영학석사) 출신인 신성재씨와 결혼했다. 둘째사위와 셋째사위는 그룹 계열사인 현대카드·캐피탈 사장, 현대하이스코 사장을 각각 맡고 있다. 막내이자 외아들인 의선씨는 지난 11일 기아차 대표이사 사장으로 승진했다. 그룹내 직함은 현대·기아차기획총괄본부 담당 사장으로 기아차의 기획, 재무, 수출, 연구·개발(R&D) 등 핵심 업무를 관장하고 있다. 일찍 결혼해 슬하에 1남 2녀를 두고 있다. 부인은 정도원 강원산업 부회장의 큰딸 지선씨다. ●3남 몽근… 소리없이 유통명가 키워 셋째아들 몽근씨는 일찌감치 유통을 넘겨받아 현대백화점 그룹을 이끌고 있다.‘빅3’(MK·MH·MJ)에 가려 조명은 덜 받았지만, 묵묵히 외길을 걸으면서 소리없이 유통 명가로 키워낸 주인공이다. 현대백화점, 현대H&S(非 백화점 계열), 현대홈쇼핑 등 주력 계열사를 토대로 지난해 5조 500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전문 최고경영자(CEO)들이 소신있게 일을 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들어 주면서도 거의 매일같이 매장을 둘러봐 조직에 긴장감을 불어넣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바로 위 형 몽구씨와는 고등학교(경복고)-대학교(한양대) 동문인 데다 선굵은 외모까지 비슷하다. 옛 현대그룹에서 고문을 지낸 우호식씨의 딸 경숙씨가 부인이다. 두 아들은 각각 부회장, 기획담당 이사로 경영에 참여하고 있다. 큰아들 지선씨는 고 황산덕 전 법무장관의 손녀인 서림씨와 결혼했다. 둘째아들 교선씨는 자동차부품 전문기업인 대원강업 허재철 부회장의 큰딸 승원씨와 지난해 말 깜짝 결혼식을 올렸다. 교선씨의 결혼식에는 큰아버지인 정몽구 회장을 비롯해 집안 어른들이 대거 참석해 모처럼 우애를 다지기도 했다. 현대가는 한때 딸만 남기고 떠난 몽필씨의 대를 잇기 위해 지선씨를 양자로 입양하는 방안을 의논했었다. 유교식 법도대로라면 바로 아래 동생인 몽구씨의 아들을 입양해야 했으나 의선씨가 외아들인 탓에 지선씨가 선택된 것. 하지만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달리 실제 입적은 이뤄지지 않았다. 정주영 회장의 장례식때 의선씨가 ‘종손’ 자격으로 고인의 영정을 든 것은 이 때문이었다. ●외사위 희영… 천마산스키장 운영, 이건·비비안과 사돈 현대가는 자손이 많은데도 딸은 귀한 편이다. 외동딸 경희씨는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재원. 그러나 바깥 활동은 없다. 대신 남편(정희영)이 선진종합㈜ 회장이다. 공교롭게 고 정주영 회장의 여동생 희영씨와 이름이 똑같다. 서울대 상대 출신으로 1965년 현대건설 공채로 입사했다. 이명박 서울시장이 입사 동기다. 조선 수주에서 뛰어난 수완을 발휘, 창업주의 눈에 들어 사위가 됐다. 정주영 회장은 딸 경희씨가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자 희영씨를 도쿄법인 이사로 발령내 자연스러운 교제를 유도했다고 한다. 이후 희영씨는 조그만 해운회사(선진해운) 하나를 갖고 독립, 장인의 그늘에서 벗어났다. 천마산 스키장은 오롯이 그가 독립해 만든 회사다. 외아들 재윤씨가 선진종합㈜ 상무다. 두 딸은 각각 이건그룹과 비비안그룹으로 시집갔다. 큰딸 윤미씨의 남편이 이건창호 박승준 상무, 둘째딸 윤선씨의 남편이 비비안 남석우 부회장이다. ●4남 몽우… BNG스틸 통해 부활 넷째아들 몽우씨는 숙명여대를 떠들썩하게 했던 ‘미인’ 이행자씨와 연애결혼했다.40대에 현대알루미늄 회장을 맡은 그는 그러나 심한 우울증을 앓았다. 결국 1990년 4월 45세의 젊은 나이에 서울 시내 한 호텔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남겨진 유족을 돌보는 일도 사실상의 장남 몽구씨의 몫이었다. 조카 셋을 모두 현대차그룹의 계열사인 BNG스틸(전 삼미특수강)에 입사시켰다. 큰조카, 즉 몽우씨의 장남인 일선씨는 경영능력을 인정받아 최근 BNG스틸 대표이사 사장으로 승진했다. 일선씨에 이르러 비로소 현대는 내로라하는 재벌가와 사돈관계를 맺는다. 일선씨의 부인은 구자엽 희성전선 부회장의 딸 은희씨다. 구 부회장은 구태회 LG전선 명예회장의 아들이자 구인회 LG그룹 창업주의 조카이다. 일선씨의 동생 문선씨는 김영무 김&장 법무법인 대표변호사의 딸 선희씨와 결혼했다. ●5남 몽헌… 못다 이룬 꿈, 현 회장이 힘찬 날갯짓 ‘비운의 황태자’ 몽헌씨는 1998년 그룹 공동 회장으로 취임하면서 화려한 비상을 시작했다.1983년 현대전자(현 하이닉스반도체)를 설립해 4년 만에 흑자로 돌려놓으면서 아버지 정주영 회장의 두터운 신임을 끌어냈다.2000년에는 형들을 제치고 그룹 단독 회장에 추대되기도 했다. 하지만 ‘대북 송금’ 사건에 연루돼 검찰 조사를 받던 중, 극심한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2003년 8월4일 서울 계동사옥에서 몸을 던지고 말았다. 그렇다고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부인 현정은씨가 경영에 뛰어들었다. 급작스러운 남편의 죽음으로 황망히 그룹을 물려받았지만 사업가 집안의 딸답게 배포와 합리적 리더십으로 1년 만에 그룹을 정상궤도에 올려놓았다. 사상 최대 호황을 누리고 있는 현대상선, 올해 첫 흑자를 넘보고 있는 현대아산, 주가 1000시대의 수혜주 현대증권 등을 축으로 재계 10위권 진입(현재 19위)을 눈앞에 두고 있다.2010년까지 매출 20조원을 달성해 10위권에 진입한다는 ‘2010’ 프로젝트를 가동중이다. 현 회장은 고 정주영 회장이 직접 ‘점지한’ 며느리로도 유명하다. 현 회장이 인터넷 홈페이지에 올린 결혼 뒷얘기는 이렇다.“당시 현대상선 회장이던 아버지(현원영)를 따라 선박 명명식차 울산에 내려갔다가 남편을 처음 만났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명예회장(정주영)께서 나를 선보러 미리 내려오셨었다. 명예회장께서 중매를 서신 셈이다.” 큰딸 지이씨는 현대상선 재정부 대리로 근무 중이다. 아버지를 잃었을 때 고3 수험생이었던 외아들 영선씨는 졸업후 미국 유학을 준비중이다. ●6남 몽준… 세계1위 현대중공업 ‘건조’ 지금은 정치인의 이미지가 더 강하지만 세계 일류 현대중공업의 뒤에는 기업인 몽준씨가 있다. 형제중에 학벌(서울대-미국 MIT 경영대학원)이 가장 좋아 ‘신문대학’(소학교만 졸업한 정주영 회장은 신문을 통해 지식의 대부분을 얻었다며 자신을 신문대학 출신이라고 소개하곤 했다) 출신인 왕 회장이 유난히 예뻐했다는 몽준씨는 31세에 현대중공업 사장으로 전격 발탁되면서 집중 조명을 받았다.1988년 금배지를 처음 달면서 소유와 경영의 분리를 시도했다. 경영은 CEO에게 맡기고 자신은 대주주로서 회사의 중요한 의사결정만 내리고 있는 것. 지금도 현대중공업의 어떤 직함도 갖고 있지 않다. 공식 직함은 5선의 국회의원이자 축구협회 회장. 아버지의 뒤를 이어 2002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다. 시스템으로 움직이는 현대중공업의 올해 매출 목표액은 10조원. 웬만한 그룹과 맞먹는다. 부인 김영명씨와는 미국 유학시절에 만나 결혼했다. 큰아들 기선씨는 연세대 경제학과를 나와 올해 학사장교(ROTC)로 임관했다. 이로써 부자(父子)가 ROTC 선후배가 됐다. 두 딸 남이씨와 선이씨는 미국 유학 중이다.‘월드컵 베이비’로 유명한 늦둥이 아들 예선씨는 초등학교 4학년이다. 우리나라가 98년 프랑스 월드컵 예선전을 최종 통과한 것을 기념해 이름을 ‘예선’으로 지었다고 한다. ●7남 몽윤… 현대해상으로 컴백 몽윤씨는 지난해 말 업계 2위의 손해보험회사인 현대해상의 등기이사 겸 이사회 의장으로 돌아왔다. 경영일선에서 물러난 지 8년 만의 전격 복귀였다. 방카슈랑스(은행상품과 보험상품의 교차판매) 확대 시행 등 변화하는 금융환경에 맞춰 공격적인 경영 행보를 보이고 있다.1981년 김진형 부국물산 회장의 딸 혜영씨와 연애결혼해 정이양과 경선군을 두었다. ●8남 몽일… 할부금융으로 내실 막내아들인 몽일씨는 미국 조지워싱턴대학에서 경영학 석사학위를 마친 뒤 현대상사 등에서 근무하다가 2000년 현대기업금융을 차려 독립했다. 기업대출 등을 주로 취급하는 회사다. 권영찬 현대파이낸스 회장의 딸 준희씨와 결혼해 고등학생인 현선(영국 유학중)군과 중학생인 문이양을 두고 있다. ■ 현대의 또 다른 축 형제들 고 정주영 회장의 형제들은 동생이기 이전에 창업 동지요, 사업 동료였다.6·25전쟁 직후 고령교(대구와 거창을 잇는 교량) 복구 공사를 덜컥 떠맡았다가 부도 직전까지 내몰렸을 때, 내남없이 살던 집을 팔아 돈을 내놓은 것도 동생들과 매제였다. 이 때문에 20명이 넘는 대식구가 한 집(돈암동)에 모여 살아야 했지만 누구 한 사람 불평하지 않았다. 지금은 모두 독립해 각자의 그룹을 이끌고 있다. ●옛 영화 꿈꾸는 한라·성우 동아일보 외신부 기자로 활동하던 첫째 동생 인영씨는 1953년 현대건설 전무로 입사하면서 경영에 본격 합류했다.75년 말 중동 진출 때 신중론을 펴 형과 이견을 빚을 때까지 그룹의 초석을 닦았다. 당시 독립해 만든 한라그룹은 한라건설·한라시멘트·한라중공업·만도기계 등을 거느리며 재계 서열 12위로까지 도약했다. 그러나 외환위기 때 자금난이 가중되면서 그룹이 부도나는 시련을 겪었다. 지금은 둘째 아들 몽원씨가 한라건설 회장을 맡아 재기를 꿈꾸고 있다. 큰 아들 몽국씨는 94년 아버지가 동생을 그룹 후계자로 지목하자 경영에서 완전히 손을 뗐다. 한때 배달학원 이사장을 맡았으나 지금은 개인사업을 하고 있다. 부인 이광희씨는 배달학원 계열인 한라대 총장을 지내기도 했다. 현대시멘트·성우종합건설·성우리조트·현대종합금속 등의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는 성우그룹은 둘째 동생 순영씨 일가가 이끌고 있다. 순영씨는 명예회장으로 물러앉고 2세 경영을 정착시켰다. 큰아들 몽선씨가 현대시멘트와 성우종합건설을, 둘째아들 몽석씨가 현대종합금속, 셋째아들 몽훈씨가 성우전자, 넷째아들 몽용씨가 성우오토모티브를 각각 맡고 있다. 몽선씨는 사촌인 정몽윤 현대해상 이사회 의장과 함께 정몽헌 회장의 부검을 임관하기도 했다. ●‘기계박사’가 일군 한국프랜지 자동차부품회사인 한국프랜지공업의 김영주 명예회장은 고 정주영 회장의 유일한 매제다. 정주영 회장은 ‘이 땅에 태어나서’라는 두 번째 자서전에서 “그가 다가가기만 해도 기계가 저절로 고쳐졌다.”며 매제를 ‘기계박사’라고 불렀다.1946년 정주영 회장이 미 군정에서 불하받은 토지에 ‘현대’(현대자동차공업사)라는 상호를 처음 내걸었을 때, 감격적으로 지켜본 이도 영주씨였다. 두 사람의 인연은 이로부터 몇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인기직종이던 운전기사 출신의 영주씨는 황해도 홀동광산에서 역시 운수업을 하던 정주영 회장과 뜻이 맞아 사업을 같이 도모했고, 매제까지 됐다. 부인 정희영씨는 2001년 정주영 회장이 노환으로 세상을 떴을 때 “대통령 한번 못해보고… 우리 오빠 불쌍해서 어쩔거나.”하며 가장 서글프게 울었던 동생이다. 장남 윤수씨가 회사를 물려받아 한국프랜지공업 회장으로 있다. 둘째아들 근수씨는 독립해 울산화학·퍼스텍 등의 계열사를 거느린 후성그룹 회장을 맡고 있다. 윤수씨의 장남 용석씨가 프랜지공업 계열사인 서한산업(자동차부품회사) 대표이사 사장이어서 3세 경영체제를 갖춰 가고 있다. 둘째아들 용범씨는 이름을 용태로 바꿨다. ●‘포니 정’ 부자(父子)의 변신 ‘포니 정’이라는 별칭으로 유명한 넷째 동생 세영씨는 외아들 몽규씨와 함께 1999년 3월 현대그룹에서 독립해 건설시장에서 영역을 확실하게 굳혔다. 꼼꼼한 시공과 치밀한 분양으로 현대산업개발을 국내 도급순위 4위 업체로 키워놓았다.‘포니 정’이라는 별명은 1976년 누구나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국산 고유모델 자동차 1호 ‘포니’를 만들어낸 데서 붙여졌다. 이같은 열정과 헌신을 인정받아 87년 형에게서 현대그룹 회장직을 물려받기도 했다. 분가한 뒤로는 현대산업개발 경영에만 매달렸다. 몇 년 전 폐암수술을 받았지만 지난해 희수연을 치렀을 만큼 건강을 되찾았다. 회사 경영은 아들 몽규(회장)씨가 책임지고 있다. 지금의 서울 삼성동 사옥은 몽규씨가 직접 지었다. 지나칠 정도로 꼼꼼하다는 게 주위의 평가다. 현대가 맺은 최고위층 사돈도 세영씨 집안에서 나왔다. 큰딸 숙영씨가 노신영 전 국무총리의 장남 경수(서울대 교수)씨와 결혼한 것. ●“아… 신영아”-교통사고 아닌 병으로 요절 다섯째 동생 신영씨는 고 정주영 회장이 가장 자랑스러워했던 동생이다. 서울대를 나와 동아일보 기자로 있다가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함부르크대학원에서 경제학 박사과정을 밟던 중 병으로 세상을 떠난 것이 1962년. 처음에 어떤 기자가 교통사고사로 쓰면서 오랜 세월 세상에 잘못 알려졌지만 정확한 사인은 지병이라고 유족은 본지에 밝혔다. 당시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잠시도 일에서 떠나본 적이 없는 정주영 회장이 일주일을 손놓았을 만큼 가족의 슬픔은 컸다. 서울대 음대 출신의 첼리스트였던 미망인 제수씨(장정자)에게 현대학원(현대고)을 경영토록 했다. 지금도 현대학원 이사장을 맡고 있는 장정자씨는 남북이산가족 상봉때 대한적십자사 부총재로 남한측 방문단장을 맡았었다. 장홍선 전 극동도시가스 회장의 누나다. 신영씨는 1남1녀를 두었다. 아들 몽혁씨는 32살의 젊은 나이에 현대정유(현 현대오일뱅크) 대표이사로 취임해 인천정유(구 한화에너지)를 인수하고 오일뱅크라는 브랜드를 만드는 등 두각을 드러냈다. 그러나 외자유치와 함께 2002년 전문경영인에서 물러나 그 해 건축자재 유통회사 ‘에이치애비뉴앤컴퍼니’를 설립해 돌아왔다. 부인 이문희씨는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은 동원 이홍근 선생의 손녀이다. 사업가이자 문화재 수집가였던 동원 선생은 평생 모은 문화재 4941점을 1980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딸 일경씨는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블룸버그대학 회계학과 교수인 남편 임광수씨와 함께 미국에서 살고 있다. ●‘리틀 정주영’이 이끄는 KCC 막내동생인 상영씨는 ‘불에 타지 않는 바닥재’ 등으로 유명한 자재 전문그룹 KCC를 이끌고 있다. 불도저 같은 추진력과 성격 등이 고 정주영 회장을 가장 많이 닮아 ‘리틀 정주영’으로 불린다. 큰형과 나이 차이가 21살이나 나 아버지처럼 따랐다. 장조카 몽구씨와도 2살밖에 차이나지 않는다. 또 다른 조카인 고 정몽헌 회장이 자금난에 몰렸을 때 200억원을 선뜻 내놓았을 만큼 의리도 강하다. 그러나 조카의 죽음 이후 현정은 회장과 경영권 다툼을 벌이면서 다소 빛이 바랬다. 그룹 경영은 두 아들에게 맡긴 상태다. 큰아들 몽진씨가 대표이사 회장, 둘째아들 몽익씨가 대표이사 부사장이다. 셋째아들 몽열씨는 계열사인 금강종합건설 사장을 맡고 있다.KCC는 몽익씨를 통해 롯데·한진그룹과 사돈으로 연결된다. 몽익씨의 부인 은정씨가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의 외조카(신 회장의 여동생인 정숙씨의 딸)이다. 은정씨의 언니 은영씨는 한진해운 조수호 회장의 부인이다. 몽익씨와 조 회장이 동서지간인 셈이다. ●현대가의 여자들 현대가의 딸이나 며느리들은 ‘소리’가 나지 않는다. 이화여대(정경희-이양자-현정은-김혜영-정유희 등) 출신에 해외유학(김영명-정지선-황서림-허승원 등)까지 다녀온 재원들이 적지 않지만 경영에 참여하거나 대외활동에 나서는 사람이 거의 없다. 하다못해 남편을 따라 공식행사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도 드물다. 유일한 경영자인 현정은씨도 남편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는 ‘전업주부’였다. 오너 일가를 가까이서 들여다본 한 관계자는 “지금도 명절 때면 청운동 집(정주영 회장이 생전에 오랫동안 살던 집)에 몇 대에 걸친 며느리들이 모두 모여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음식을 직접 장만한다.”면서 “옷차림들도 수수하고 인상이 소박해 언뜻 봐서는 재벌가 며느리란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고 전했다. 그러면서도 한결같이 미인들이다. 어떤 이는 그 이유를 ‘유난히 많은 연애결혼’에서 찾는다. ●그룹분리 가속화시킨 ‘경영권 분쟁’ 2000년 ‘형제간 다툼’은 현대가를 정신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핵분열시킨 결정적 계기였다.99년 12월 마지막 날, 고 정몽헌(MH) 회장쪽 인사로 분류되던 박세용 당시 그룹 구조조정본부장이 정몽구(MK) 회장 계열의 현대차 회장으로 전격 발령나면서 시작된 형제간의 경영권 갈등은 그룹 후계자로 MH를 지목한 고 정주영 회장의 육성 테이프가 공개되기까지 석달여에 걸쳐 숨막히게 전개됐다. 효심이 남달랐던 MK는 아버지의 육성이 공개되자 깨끗이 승복하고 자동차 계열사를 이끌고 그룹에서 나왔다. 이 과정에서 아픔도 적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현대의 지배구조를 선진화시키는 데 일조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오는 21일 왕 회장의 4주기에 모처럼 형제들 모두가 함께 제사를 지낼 예정이다. 이날은 공식적으로 가족화합이 됐음을 안팎에 알리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현대가에 정통한 소식통은 전했다. hyun@seoul.co.kr ■ 정주영 회장의 ‘빈대론’ 창업주인 고 정주영 회장은 ‘해당화가 찬란하고 눈(雪)이 많은’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에서 1915년 6남 2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죽어라고 일해도 콩죽을 면할 길이 없는 농군이 진절머리나게 싫고 지겨워”(첫번째 자서전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에서) 소학교를 졸업한 열네살 무렵부터 줄기차게 가출을 시도했다. 무작정 길을 나서 보기도 하고, 아버지의 소 판 돈을 훔쳐도 봤다. 그러기를 네번째. 열아홉살 마지막 가출에 성공해 인천부두 막노동꾼으로 새 삶을 시작했다. 한 푼이 아까워 몸을 기댔던 곳이 노동자 합숙소. 뼈가 으스러지는 중노동으로 누가 떠메고 가도 모를 만큼 고단했지만 좀체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빈대들의 공격 때문이었다. 궁리 끝에 밥상 위에 올라가 잠을 잤다. 빈대들의 공격이 잠시 뜸해지는 듯싶었다. 하지만 이내 밥상다리를 타고 기어올라와 온 몸을 물어 뜯었다. 다시 머리를 써야 했다. 무릎을 탁 칠 만한 묘안이 떠올랐다. 밥상다리 네 개를 물 담은 양재기 넷에 하나씩 담근 뒤 그 위에 올라가 잔 것이다. 빈대를 밥상다리로 유도해 양재기 물에 익사시키자는 계략이었다. 쾌재를 부른 것도 이틀여. 빈대들은 또다시 물어뜯기 시작했다. 도대체 어떻게 양재기 물을 건넌 것일까. 자다 말고 벌떡 일어나 불을 켜본 젊은 정주영 회장은 기겁을 하고 말았다. 빈대들이 밥상다리 대신 벽을 타고 천장으로 올라가 사람을 겨냥해 뚝 떨어져 목적 달성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역경에 부딪칠 때마다 정주영 회장은 ‘빈대의 노력’을 떠올렸다.“난관은 극복하라고 있는 것이지, 걸려 넘어지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라든지 “빈대만도 못한 놈”이라는 단골 지청구는 모두 여기서 비롯됐다. 아무것도 없는 백사장(울산 염포리) 사진 한 장 달랑 들고 조선소 투자금액을 유치할 때나,20세기 최대 역사(役事)로 꼽히던 중동 주베일 공사 입찰전에 뛰어들 때나, 직원들이 불가능하다고 도리질칠 때면 “이봐, 해봤어?”라고 불호령을 쳤던 것도 빈대의 집요한 노력을 떠올리면서였다. “자본가가 아니라 부유한 노동자일 뿐”이라고 스스로를 정의했던 정주영 회장은 근검과 노력을 평생의 신조로 삼았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평등한 자본금” “한강에 기적은 없다. 성실하고 지혜로운 노동이 있을 뿐” “고선지부지설(苦蟬之不知雪;여름철 서늘한 나무 그늘에 앉아 노래만 하다 겨울이 오기 전에 없어지는 매미는 한겨울 펑펑 쏟아지는 눈을 알 수 없다)” ‘아산 정주영 어록’에 실려있는 그의 유명한 말들이다. hyun@seoul.co.kr ■ ‘현대家 대모’ 변중석 여사 열여섯살에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여섯살 연상의 고향총각 정주영에게 시집온 변중석씨는 현대가의 산 증인이다. 올해로 84세. 젊어서 남편이 사준 재봉틀 하나를 자신 소유의 유일한 재산으로 여기며 한결같은 근검과 후덕함으로 ‘현대가의 여자’라는 상징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고 정주영 회장이 매일 새벽 5시의 ‘밥상머리 교육’을 통해 동생들과 자식들에게 근검을 가르쳤다면, 변씨는 새벽 3시반부터 손아래 동서·며느리들과 아침 준비를 함께 하면서 “언제나 조심스럽게 행동하고 겸손하라.”고 일렀다. 가혹하리만치 자식 교육에 엄격했던 정주영 회장이 아이들을 자가용으로 등교시키는 며느리들을 보고 “젊었을 때 콩나물 버스에 시달려봐야 나중에 자가용을 샀을 때의 기쁨을 안다.”며 역정을 내자 “손주녀석들 키우는 문제에까지 시아버지가 잔소리를 할 거냐.”며 막아준 이도 변씨였다. 칭찬에 인색했던 정주영 회장도 아내를 가리켜 “늘 통바지 차림에 무뚝뚝하지만 60년을 한결같고 변함이 없어 존경한다.”고 자서전에서 고백했을 정도다.“아내를 보며 현명한 내조는 조용한 내조라는 생각을 굳혔다.”고도 했다. 그러나 자식을 먼저 땅에 묻는 참척의 고통과 여자로서의 마음고생을 거치면서 ‘살아있는 보살’도 탈이 났다. 거동이 불편해 10년 가까이 병원(현대아산병원) 생활을 하고 있다. 사실상 맏며느리인 이정화씨 등 며느리들이 틈날 때마다 병실을 들여다보고 있다. hyun@seoul.co.kr ●특별취재반 산업부 홍성추 부장(부국장급·반장) 박건승·정기홍·류찬희·김성곤·최광숙차장 안미현·주현진·류길상·김경두기자
  • [특별기고] 3·1정신과 국민통합/박유철 국가보훈처장

    “어쩌다 우리 국운이 이토록 비색하여 그 같은 왜놈들한테 나라를 빼앗겼는고. 강토를 빼앗더니, 농사지은 식량도 다 빼앗고, 학병으로 조선의 자식도 다 빼앗고, 이제는 설까지 일본 설을 쇠라하니 정신의 골수를 뽑겠다는 수작 아닌가.” 소설 ‘혼불’의 일부다. 일본은 우리 민족이 국권을 잃고 암흑 속에서 신음하고 있을 때, 민족의 정신을 말살시키고, 정기를 끊기 위해 온갖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질렀다. 그 질곡의 세월을 헤치고 광복을 맞은 지 올해로 60년이 된다.30년을 한 세대로 친다면,2세대가 지나 제3세대를 맞는 시점이다. 이러한 역사의 길고 긴 여정 속에서 3월이 오면, 연록의 봄바람은 시공을 넘고 불어와 우리들 가슴 속에 선열들이 외쳤던 독립만세 함성의 애국혼을 불어넣어 준다. 3월 1일은 3·1운동이 일어난 지 86주년이 되는 날이다. “조선이 독립한 나라임과 조선 사람이 자주적인 민족임”을 세계 만방에 천명한 선열들의 불굴의 자주독립 정신은 우리 민족의 민족혼으로 영원히 살아 숨쉬고 있다. 죽음보다 참기 어려운 민족적 굴욕감과 생명보다 소중한 자유에의 열망으로, 온 국민이 하나가 되어 떨쳐 일어난 3·1운동의 자주, 자유, 평화정신은 불변의 가치로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소중한 정신적 가치로 자리매김되고 있다. “과거의 유산은 미래의 수확을 가져오는 씨앗”이라는 말이 있듯이, 지난 역사는 오늘을 사는 거울이 되며, 용기와 힘의 원천이 된다 하겠다. 우리는 3·1정신을 통해 당면한 과제를 극복하고 선진 한국으로 가는 새로운 힘을 얻어야 할 것이다. 인류 역사 이래 자유와 평화를 거저 얻은 나라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볼 때, 올해는 여러 면에서 우리나라로서는 매우 의미 있는 해다. 8·15광복을 맞았던 을유년으로부터 60년이 되는 해이자, 을사늑약 100년이 되는 해이며, 한·일 국교정상화로부터 40주년이 되는 해이다. 또한 6·25전쟁이 일어난 지 55년이 되는 해로, 선열들이 고군분투한 근현대사의 역사는 교훈이 되어 우리가 오늘날 세계적인 국가로 발돋움하는 데 자산이 되고 있다. 선열들이 신명을 바쳐 찾은 조국, 우리는 광복 이후 지난 60여년간 전쟁의 폐허 속에서 산업 근대화를 이루고 민주화의 노력을 통해 세계 12위의 무역대국을 이룩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국내외적으로 엄중한 상황에 처해 있다. 밖으로는 냉엄한 국제질서 속에서 남북 화해와 북핵문제의 평화적인 해결과 한반도 평화정착이라는 과제를 안고 있다. 이와 함께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지역, 계층, 세대간의 혼돈을 넘어 분열에서 화해로, 갈등에서 통합을 이루어 동북아시대 세계 무대에 우뚝 선 대한민국을 이룩해야 하는 시점에 있다. 이러한 중차대한 시기에,‘애국심’은 대한민국을 움직이는 원초적인 힘이고, 조국 번영에 가장 중요한 초석이 되기에 선열들의 숭고한 나라사랑 정신을 계승 발전시켜 국민 통합의 원동력으로 삼아 나아가야 하겠다. 정부에서는 광복 60주년이 되는 올해 독립유공자 발굴 포상을 위해 사료발굴단을 운영하여 대대적인 포상이 이루어지도록 할 것이다. 특히 이번 3·1절을 기해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을 포상하게 됨으로써 민족 화합의 장을 열게 되었다 하겠다. 또한 올해를 보훈선양 활성화 원년으로 삼아 국가를 위해 헌신하거나 공헌하신 분들에 대해 사회적 예우풍토 조성과 국민의 나라사랑 정신을 확산하여 국가 발전의 정신적 토대를 구축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해 나갈 것이다. 86주년 3·1절을 맞아 올해야말로 3·1정신을 교훈으로 삼아 새로운 각오로 온 국민이 화합 단결하여 국운융성과 함께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의 초석을 다질 수 있도록 힘과 지혜를 모으고 사명 의식을 다져 보는 3월이 되었으면 한다. 박유철 국가보훈처장
  • [우리동네 이야기] 장충동

    [우리동네 이야기] 장충동

    ‘낙엽송 고목을 말없이 끌어안고’라는 요절가수 배호(1942∼71)의 노랫말과도 같이 역사의 아픔을 간직한 곳, 돼지족발로 이름난 곳…. 서울 중구 장충동은 장충단(奬忠壇)이 자리해 이름이 붙여졌다. 한때 통일주체국민회의가 동원돼 대통령을 뽑는 등 ‘체육관 정치’의 대명사로 꼽힌 장충체육관을 떠올리게도 한다. 장충단은 현재의 장충단공원에 자리했으나 6·25전쟁 때 파손되고 장충단비(서울시 유형문화재 1호)만 남아 있다.1900년 고종이 설치했으며, 봄과 가을에 한 차례씩 민비 시해사건 때 숨진 문무(文武) 관리들의 넋을 달래는 제사를 지냈다. 장충체육관 맞은편 족발골목에는 대형 업소만 20곳 있다. 이젠 워낙 유명해져 전국 어디서나 품질을 보증이라도 하듯 장충동 이름을 빌리고 있다. 장충동 족발이 유명해진 데에도 장충체육관과 깊은 사연이 숨었다. 중구문화원 김동주(46) 과장은 “60년대만 해도 건강식으로 꼽혔던 족발을 파는 업소가 한두 곳이었다.”면서 “1960년 국내1호 실내체육관으로 지어진 장충체육관이 들어서 프로레슬링, 복싱 등 스포츠 경기를 보러 온 시민들이 허기를 채우려고 몰려들어 성시를 이루자 계속 늘어난 것”이라고 설명했다.50년대 초 중국 음식인 오향장육에서 힌트를 얻어 족발찜을 개발한 원조 전박숙(여·91년 작고)씨도 장충동 사람이라고 덧붙였다. 그 무렵 관중들이 족발집에서 소주잔을 곁들여 일삼던 선수들 얘기와 함께 전국적으로 퍼져나간 것이라는 분석이다. 장충동 주민자치센터에서는 매주 목요일 오후 7시 ‘관상학 교실’이 열린다. 매번 수용인원 40명보다 훨씬 많은 50∼60여명이 몰려든다. 우리나라에서 단 한 곳뿐인 종이미술박물관도 장충동에 있다. 지하철 3호선 동대입구역 쪽 ‘종이나라’ 건물에서는 종이접기 전문가들이 만든 그림, 꽃, 인형 등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종이에 얽힌 역사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곳이다. 평일 오전 9시30분∼오후 5시30분 문을 연다. 장충동은 옛날 사소문(四小門) 가운데 하나인 남소문이 있었다는 빌미로 일제가 남소동이라고 낮춰 불렀다. 그러다가 광복 이듬해인 46년 장충동으로 명예를 되찾았다.2900여가구에 인구 6200여명이다. 중구 15개 동 가운데 면적이 1.36㎢로 가장 넓다. 글 사진 송한수기자 onekor@seoul.co.kr
  • [사설] 노인 72%가 노후준비 안됐다

    65세 이상 노인의 72%가 노후준비를 하지 못해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조사 결과는 노인문제의 현주소를 그대로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들은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해방공간,6·25전쟁 등 민족 수난기를 거쳤고 산업화 과정에서는 일과 직장에만 매달려온 세대다. 게다가 전통적인 가치관에 따라 부모를 봉양했지만 정작 자신들은 자녀들로부터 버림받기 시작한 이른바 ‘낀 세대’이기도 하다. 국가 발전과 부모 봉양, 자녀 교육에 모든 것을 바친 나머지 자신들의 노후는 돌볼 틈도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어느새 급속한 핵가족화와 더불어 세계에서 고령화 속도가 가장 빠른 ‘덫’에 직면해 있다. 특히 외환위기 이후 평생 직장 체제가 무너지고 청년실업이 국가의 지속 가능성에 위협을 줄 수준까지 치솟으면서 노인문제는 정책순위에서도 뒷전으로 밀려났다. 우리나라 근로자의 노동시장 은퇴 연령이 평균 68세로 세계에서 가장 오랫동안 일자리를 전전해야 한다는 통계도 노인층의 빈곤문제와 무관하지 않다.75세 이상 초고령층의 자살률이 13년 전에 비해 5배나 늘었다는 한 연구조사 결과 역시 같은 맥락에서 파악돼야 할 것 같다. 참여정부는 노령화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해 대통령 직속 자문기구를 구성하고 대책 마련에 골몰하고 있지만 예산 부족 등으로 아직 실효성 있는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미래 세대와 재정의 부담을 줄이려면 노인들이 노동을 통해 생계를 꾸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는 생산성의 잣대로 재단할 사안이 아니다.‘노인형 일자리’ 창출은 더이상 미룰 수 없는 국가 당면과제다.
  • [열린세상] 한일협정 문서 공개와 과거청산/정해구 성공회대 한국정치 교수

    지난 17일 청구권 관련 한·일협정의 일부 문서가 공개되었다.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실제 공개된 내용은 상당히 충격적이다. 협상에 임했던 양국 정부의 태도에는 책임 회피와 정권적 이해만이 보일 뿐, 제대로 된 역사의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더욱 황당한 것은 한국인 개인 피해자들에게 마땅히 돌아갔어야 할 개인 청구권 자금조차 일본정부는 ‘경제협력 자금’으로 지불했고, 한국정부는 이 자금의 대부분을 중간에서 ‘가로채는’ 사태가 벌어졌다는 점이다. 이 같은 사태는 새삼 우리에게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인 문제를 제기하게 만든다. 원래 시민혁명 이후의 근대국가는 국민을 위한 국가의 의미를 갖는다. 즉 근대국가의 의미는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민주주의와 분리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런 탓에, 근대국가의 헌법은 통상 국가의 자의적 권력 행사를 방지하기 위해 국민의 기본권을 우선적으로 보장하고, 이를 효과적으로 보장하기 위해 권력분립 형태의 권력구조를 채택한다. 그러나 이 같은 근대국가의 의미에 비추어 보았을 때, 대한민국 수립 이래 국민에게 우리 국가의 의미란 과연 무었이었던가? 광복과 6·25전쟁을 거치면서 한국의 국가는 우선 강력한 반공국가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물론 그것은 공산주의의 확산과 침투를 막아내기 위한 필요에서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 반공국가의 구축은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에게 가혹한 피해를 남겼다. 현재 과거청산의 주요 과제로서 제기되고 있는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의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사태는 이에 그치지 않았다. 강력한 반공국가에 뒤이어 발전국가가 등장, 압축적 산업화를 강력히 추진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발전국가는 성공적인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그렇지만 그것 또한 다수의 피해를 남겼다. 한·일협정을 통해 일제 피해에 대해 당연히 보상받았어야 할, 그러나 국가의 중간 갈취로 이를 받지 못했던 개인 청구권자들의 피해도 그러한 결과의 하나이다. 그런 점에서 반공국가와 발전국가는 국민, 특히 모든 개개인의 국민을 위한 국가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국민에게 자의적인 국가 목표를 강요하며 이에 반대하는 국민에 대해서는 가혹한 억압을 자행했던 한편 국가를 위해서는 국민의 기본적 권리조차 무시했던 그러한 국가였다. 말하자면, 그것은 반공과 성장을 내건 권위주의 국가였던 것이다. 그러나 민주화가 이루어진 지금 국가의 의미는 바뀌었고, 또 바뀌어져야 한다. 이제 국가는 국민을 위한 국가가 되어야 하고, 비록 소수에 한정된다 할지라도 모든 국민 개개인에 대해 그들의 기본적 권리를 지켜주어야 하는 민주국가이어야 한다. 나아가, 민주국가는 권위주의 국가에 의해 과거에 침해되었던 국민의 기본권 침해에 대해서도 그 구제의 역할을 수행해주어야 한다. 민주주의의 견지에서 과거의 기본권 침해 역시 구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현재 우리 앞에는 다수의 과거청산 과제들이 놓여 있다. 일제하 식민잔재의 청산,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의 문제, 독재정권 시기의 인권유린사태 등이 그것이며, 여기에 이번 한·일협정 문서 공개를 통해 새롭게 드러난 일제하 개인 피해자들에 대한 국가의 구제 조치도 포함된다. 시간의 문제나 재원의 문제를 들어 대충 넘어가자는 주장도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과거청산의 문제는 시간과 재원의 문제이기 이전에 역사적 인권의 문제인 동시에 현재의 민주주의의 문제이다. 광복 60주년, 한·일협정 40주년이 되는 올해에 과거청산의 이 같은 과제에 대해 적극적인 조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더 나은 미래 사회에 대한 희망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지금의 국가가 진정 민주국가라 한다면 과거청산은 더 이상 미루어져서는 안 된다. 정해구 성공회대 한국정치 교수
  • 儒林(271)-제3부 君子有終 제1장 名妓杜香

    儒林(271)-제3부 君子有終 제1장 名妓杜香

    제3부 君子有終 제1장 名妓杜香 청량리를 출발한 무궁화호 열차가 단양에 도착한 것은 오전 10시 40분쯤이었다. 아침 6시 50분에 기차가 출발하였으니 거의 4시간 가까이 걸린 셈이었다.4시간이라면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는 소요시간인데, 충청북도의 경계역인 단양에 4시간가량 걸린다는 것은 지금은 볼 수 없는 거의 완행열차의 속도수준이었다. 과연 기차는 웬만한 역은 모두 섰다. 지금은 서울에서 부산까지 고속열차가 생겨나 2시간도 채 걸리지 않는다는 광속(光速)시대에 역이면 역마다 서고 한없이 느리게 가는 열차의 속도는 마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무슨 피란열차를 탄 느낌이었다. 느림의 미학. 속도의 무한경쟁시대에 있어 요즘 유행되고 있는 화두, 느림의 아름다움. 나는 그 느림의 아름다움을 오랜만에 맛보기 위해 승용차를 타지 않고 신새벽에 일어나 청량리 역으로 나아가 무궁화호열차를 탔는지도 모른다. 청량리역. 청량리역에 대한 추억은 아득한 옛 기억과 맞닿아 있다. 고등학교 때의 무전여행을 떠날 때에 군용배낭에 쌀 한줌과 마른 건빵 같은 비상식품을 싣고 지도 속에서만 보던 낯선 역을 찾아 무작정 떠날 때의 두려움과 또 한편의 기대 같은 것. 그것은 마치 흔들거리는 이를 빼기 직전의 아슬아슬한 불안감과 쾌감 같은 것이었다. 새벽녘 근처에는 항상 사창가에서 나온 할머니들이 슬그머니 다가와 이렇게 유혹하곤 했었지. “젊은이 놀다가, 좋은 색시 소개해 줄게.” 군대에 있을 무렵에도 휴가 나왔다 돌아가던 곳이 청량리역이었다. 그 무렵 버스의 여차장들은 이렇게 소리를 지르곤 하였었지. “청량리 중랑교가요.” 그 소리를 잘못 들으면 이렇게 들려오곤 했었다. 차라리 죽는 게 나요―차라리 죽는 게 나요― 차라리 죽는 게 나았던 청량리, 청량리역. 그 역의 이름은 저 암울했던 50,60년대의 청춘시대와 연결된다. 아직 6·25전쟁의 상처가 채 가시지 않았던 참혹했던 전후의 계절, 차라리 달려오는 기차에 몸을 던져 자살하고 싶은 심경으로 무전여행을 떠나고 시골 간이역에 기차가 멎을 때면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내려 무임승차를 하였었지. 항상 사람들로 넘쳐나고, 냄새나는 변소 앞에 쭈그리고 앉아서 꼬박 밤을 새우던 완행열차. 한참을 자다 눈을 떠도 경기도를 벗어나지 못한 석가여래의 손바닥 안이었지. 때로는 휴가병 열차이기도 했었다. 새벽에 나왔다가 30분정도 시간이 남으면 사창가의 노파 손에 이끌려 판잣집에 끌려가 군화 끈을 풀지도 않고 혁대를 끄르고 엉덩이를 내린 후 눈 깜짝할 사이에 번개 같은 섹스를 했었지. 그럴 때면 지금은 할머니가 되었을, 아니 이미 죽었을 무성영화에 등장하는 엑스트라와 같은 여인들이 내 엉덩이를 때리며 이렇게 놀려댔었지. “아따 급하기는, 번개 불에 콩을 튀겨먹었나.” 요강에 오줌을 누고 도망치듯 달려가는 청량리역사. 그때 내 가슴에 줄곧 이런 말이 떠오르고 있었다. ―차라리 죽는 게 나요. 청춘시절의 잠재된 기억은 평생을 가는 것일까. 몇 십 년 만에 중앙선열차를 타는 청량리역은 옛날의 흔적은 전혀 찾을 수 없는 초호화판의 현대식 건물이었고, 사창가가 있던 건물은 눈부신 상가로 급변해 있었지만 여전히 내 귓가에는 버스차장의 목쉰 절규소리가 아득히 들려오고 있었다. 차라리 죽는 게 나요. 차라리 죽는 게 나요―.
  • “수도·국기·국어는 관습헌법”

    ‘한국어, 태극기, 애국가는 관습헌법이다.’ 헌법재판소 김승대(49·사시 23회) 연구부장이 최근 헌재에서 발간하는 논문집인 헌법논총에 ‘헌법관습의 법규범성에 대한 고찰’을 발표해 주목을 받고 있다. 지난해 10월 헌재가 관습헌법을 근거로 신행정수도건설특별법을 위헌이라고 결정한 뒤 헌재가 발표한 첫 관련 논문이다. 김 부장은 당시 재판관의 사건 심리를 보조하는 전담연구반의 팀장을 맡았다. 논문은 관습헌법의 유형을 1948년 7월17일 헌법 제정을 기준으로 두 가지로 나눴다. 하나는 헌법을 만들 때 명문 조항에 들어가지 못한 ‘선행적 관습헌법’이고, 다른 하나는 제정 이후 형성됐지만, 반영되지 못한 ‘후행적 관습헌법’이다. 선행적 관습헌법은 국가 정체성이나 상징성을 나타내는 요소로 ‘서울=수도’‘태극기=국기’‘애국가=국가’‘한국어=국어’ 등이 꼽혔다. 김 부장은 “한국어가 국어란 점은 우리 민족의 본질적 특성”이라면서 “헌법 제정 때 국민의 합의가 너무 확고해 명시할 필요가 없었다.”고 설명했다. 국기와 국가도 오랫동안 대한민국의 상징으로 사용됐기에 정부가 국민의 동의없이 임의로 바꿀 수 없는 사항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또 “‘수도=서울’은 임진왜란, 병자호란,6·25전쟁, 일제강점기 등 국난 속에서도 그 상징성을 잃지 않았다.”면서 “국회의 합의만으로 수도를 옮길 순 없다.”고 강조했다. 김 부장은 북한의 지위, 남북간 합의서, 국회의 국무위원 해임건의 구속력 등을 후행적 관습헌법의 사례로 꼽았다. 김 부장은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는 것을 새로 확립된 관습헌법이라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헌법은 국회가 국무총리 또는 국무위원의 해임을 대통령에게 ‘건의’할 수 있다고만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국회가 해임을 의결할 때마다 대통령은 이를 수용했다. 결국 해임 구속력이 관습헌법으로 자리잡은 것이라고 김 부장은 해석했다. 그는 “성문헌법의 흠결을 보충하는 관습헌법의 발달은 자연스러운 일”이라면서도 “이 논리가 남용되면 헌법의 안정성과 명확성을 해칠 우려가 있기에 국민적 합의에 따라 신중히 판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은주기자 ejung@seoul.co.kr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2) 정감록에 미국이 나온다?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2) 정감록에 미국이 나온다?

    1945년 8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왔다. 그러나 미처 봄날을 음미할 새도 없이, 제2차 세계대전의 승자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에 진출해 38선을 그었다. 그 때 어느 유명한 신종교 지도자가 신도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선포했다.“미소의 두 힘이 서로 상대하여 버티나 태양이 중천에 오르면 밝은 세계가 되리라.” 태양은 누굴까? 중천에 오른다 함은? 전후 맥락 없이 튀어나온 이 선언에 신도들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 메시지만은 분명했다. 미국과 소련이 이 땅에서 주도권 다툼을 벌이는 것은 잠깐이고, 곧 민족의 구세주가 등장하여 외세를 물리치게 된다는 것! 누가 구세주일까? 김구, 여운형, 조만식, 이승만, 박헌영…. 아니면 김일성? 세상 사람들은 거물 정치가들을 놓고 누가 믿을 만한 민족지도자인지를 점쳤다. 극좌파, 중도파, 극우파의 이념적 스펙트럼에 따라 각자 선택의 폭은 넓었으나 민심의 합일점은 없었다. 지난한 시기였다. 그 때 정감록의 신봉자들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국난을 뚫고 나갈 진인은 어디 있는가. 계룡산에서 도를 닦았다는 진인, 지리산에서 뛰쳐나온 진인, 주역에 능통한 진인, 부처, 예수, 공자의 영이 내린 진인이 속속 등장했다. 그러나 고대해 마지않던 진인은 나오지 않았다. 해방정국은 갈수록 꼬이더니 남북분단은 기정사실이 되어버렸다. ●‘정감록’에 보이는 6·25전쟁 제2차대전 이후 전세계는 미소를 정점으로 한 냉전질서에 편입되었다. 양측의 긴장이 팽팽해지더니 1950년 마침내 6·25전쟁이 터졌다. 한국이 안고 있던 내부 문제가 곪아 터진 것이라는 주장도 있고 미소 양측의 대리전쟁이라는 설도 있다. 원인이야 어떻든 전쟁이 장기화될 때 괴로운 건 민중이다. 그들은 난리가 언제 끝날지, 살아갈 방도는 무언지 필사적으로 찾기 시작했다. 정감록 신봉자들은 가족을 이끌고 병화불입지지(兵火不入之地, 난리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땅)를 찾아 숨는 사람도 생겼다. 정감록 예언에 따라 충북 단양군 영춘면 삼풍리로 숨었던 사람들에게 직접 들은 이야긴데, 전쟁 내내 인민군은 커녕 국군도 본 적이 없었단다. 그들은 정감록의 영험을 믿는 듯했지만 그곳은 어느 편 군대도 진주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지독한 오지였다. 꼼꼼히 정감록을 살피던 민중의 눈엔 요거다 싶은 예언 몇 구절이 눈에 띄었다.‘호랑이와 토끼해를 당하여 남북이 서로 솥의 발 같이 대치하리라.’ 우연히도 전쟁이 터진 1950년은 호랑이해인 경인년이었다. ‘금강산 서쪽과 오대산 북쪽은 12년간 도둑의 소굴이 된다.’는 구절도 있어 강원도 북부에 있는 금강산과 오대산을 경계로 남북이 무력 대치한다는 예언으로 볼 수 있었다. 다만 12란 숫자는 논란거리가 되었다. 남북의 대치기간이 글자 그대로 12년인가, 또는 갑자, 을축 이런 식으로 12지를 10간과 조합한 1갑자 60년인가? 총성이 멎은 지 벌써 52년째, 글자 그대로의 12년은 이미 지났고 60년 한 갑자가 되려면 8년이 남았다. 6·25전쟁의 전세를 뒤바꾼 인천상륙작전을 상징한다는 대목도 회자(膾炙)되었다.‘인천과 부평 사이 밤중에 배 1000척이 정박한다.’고 했다. 수도권에 ‘시체 더미’가 쌓인다고도 했다. 맥아더 장군이 수많은 전함을 거느리고 인천에 상륙했고 서울을 탈환했으므로 사람들은 그럴 듯하게 여겼다. 그러나 이 구절은 19세기 후반부터 민중을 떨게 했던 전쟁공포증의 흔적 또는 청일전쟁이 남긴 집단적 기억이 재현된 것이라고 나는 판단한다(연재 제1회 참고). ‘정감록’의 또 다른 구절도 민중의 눈길을 끌었다.‘두 서쪽 땅 곧 황해도와 평안도는 3년간 천 리 안에 사람과 불 때는 연기가 없을 것이요, 또한 동쪽 골짜기, 즉 강원도는 심히 꺼릴 땅이라.’ 사람들은 이 구절을 전쟁이 3년 동안 지속된 까닭으로 봤고, 뺏고 뺏기는 육박전이 벌어진 장소가 강원도였다는 예언으로 해석했다. 중공군의 개입,1·4후퇴도 예언되어 있었다.‘백두산 북쪽에서 오랑캐의 말이 긴 울음소리를 내면 평안도와 황해도 하늘에 원한 맺힌 피가 넘칠 것이다.’ 오랑캐라,1950년 한겨울 급작스레 대거 투입된 중공군으로 해석됐다. 중공군은 물밀듯 남하를 계속, 평안도 황해도를 삽시간에 휩쓸었다. 인해전술이란 말은 정감록에 안 보였지만 그 신봉자들에겐 1·4후퇴를 할 수밖에 없던 사정이 이해될 듯 했다. ●미국대통령을 ‘정도령’으로 착각? 그런데 ‘정감록’ 예언에 대한 기발한 풀이는 따로 있었다. 전쟁 당시 미국의 원수(元首) 트루먼! 트루(true)는 참 진(眞), 먼(man)은 사람 인(人)! ‘정감록’에 예언된 진인(眞人)은 다름 아닌 트루먼이라는 해석이다. 트루먼은 6·25전쟁이 일어나자 의회의 자문도 받지 않고 미군의 파병을 결정했다. 트루먼이 아니었으면 공산군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일어났다. 일제 식민지 후반, 특히 1937년 7월 중일전쟁 이후 민중의 살림살이는 참 고단했다.1945년의 해방도 반쪽짜리였고 민중의 형편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전쟁까지 터지자 생지옥이 따로 없었다. 바로 그런 시점에서 미국은 각종 구호물자를 한반도에 대량으로 투입하였다. 수만의 병력과 현대식 무기를 동원하여 전쟁도 수행했다. 사람들은 새삼 미국의 위력을 실감했다. 어떤 이들은 이처럼 구차히 살 바에야 차라리 미국의 51번째 주가 되기를 바랐다. 국회로 보내주기만 하면 미국에 가 달러를 더 많이 동냥해 오겠다며 표를 구걸하는 정치인들도 있었다. 그런 판국이라 미국 대통령을 진인, 정 도령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생긴 것이다. 심지어 1953년 미국 대통령이 아이젠하워로 바뀌자 그가 진짜 정 도령이란 주장이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이런 말을 주고받은 민중도 많았다.“미국을 믿지 말고 소련에 속지 말라. 그리고 일본은 일어난다!” 미국-믿다, 소련-속다, 일본-일어나다. 다소 장난스러워 보이는 말투지만 미소는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이란 인식이 확산된 결과 생긴 민중의 구호였다. 비록 패전국이긴 해도 일본을 조심해야 한다는 다짐도 그 안에 포함되어 있다. 오래 전부터 민중은 일본뿐만 아니라, 서양 강대국들을 경원시했다.1894년 동학농민군이 내건 4대 구호 중에 ‘축멸양왜(逐滅洋倭, 서양놈들과 왜놈을 내쫓는다)’란 구절이 있어 그런 분위기를 잘 설명해준다. 그러다가 일제 말기 조상 전래의 성, 말까지 빼앗기자 민중은 주변국가인 중국과 소련에 다소 기대를 걸었다.‘조지로 목친다.’ 이 말이 민간에 퍼졌다. 조지란 남성의 성기를 뜻하는 남부지방 사투리다. 그것으로 어떻게 목을 자를까? 조(조선), 지(지나, 중국), 로(로서아, 소련)가 힘을 합해 목(목인, 히로히토 일본 천황)을 벤다는 예언이었다. 민중의 소망을 담았지만 꽤나 섬뜩한 내용이다. 누구나 한 번만 들어도 절대 잊을 수 없게, 그러나 아무도 그 뜻을 눈치 챌 수 없게 은어에 담았다. ●‘황해도서 난리 발생’ ‘삼국분기설’ 들먹 ‘정감록’으로 6·25전쟁의 참혹함과 미국의 개입을 읽었다니 얼핏 이해가 잘 안될 수 있다. 예언서에 보이는 오랑캐는 만주족 같은 북방 유목민족의 침입을 경고하는 것으로 풀이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고려 때는 북쪽으로부터 거란족, 여진족, 몽고족의 침입이 잇따르고 홍건적의 난도 있었다. 조선 초에는 여진족의 침입이 만만치 않았다. 인조 때는 청나라를 건국한 만주족이 병자호란과 정묘호란을 일으켰다. 서북지역은 이민족의 침입로가 되다시피 했고, 그 지역 민중은 외침의 피해를 가장 많이 입기도 했다. 외침의 기억은 민중들에게 잊지 못할 일이 되었고, 이것이 ‘정감록’에 ‘백두산 북쪽에서 오랑캐의 말이 긴 울음소리를 내고’ 라는 식으로 정착된 것이다. 오랑캐의 말울음 소리는 현대에 와서 중공군의 남하로 이해되었다. 이런 변화는 ‘정감록’을 처음 전파시킨 조선시대 술사(術士)들로서는 전혀 예측 못할 일이었다. ‘정감록’에는 외침과 무관하게 평안도와 황해도 지역에서 발생할 난리가 예고되어 있기도 하다. 조선시대에는 서북지방에 대한 차별이 무척 심해서 그 지역 사람들의 불만이 컸다. 순조 연간에는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 여러 고을을 휩쓸었고, 그 와중에 많은 인명이 살상됐다. 사실 서북지방은 18세기 이후 과거시험에서 많은 합격자를 배출했다. 그럼에도 푸대접을 받았다. 내가 조사한 바로는 ‘정감록’이 가장 먼저 등장한 곳도 서북지방이었다. 대다수 서북지방 사람들은 조선왕조의 종말을 마다할 일이 없었고 그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이런 사실들을 생각할 때, 북쪽에서 반란이 재발해 남북에 두 나라가 대치한다는 남북분국설이 정감록에 기록된 것은 당연한 일로 생각된다. 기왕 분국설에 대한 말이 나온 김에 몇 마디 보태보겠다.‘정감록’에는 삼국 분기설도 나온다. 나라가 세 동강 난다는 예언인데, 이런 말은 특히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까지 유행했다. 우리 역사에 삼국시대도 있었고 후삼국시대도 있었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고려 때도 이의민은 신라를 부흥시킨다는 구실로 경주일대를 소란케 했다. 이런 역사적 기억이 있어서겠지만, 민중은 나라가 혼란에 빠질 때면 3국 분기설을 들먹였다. 그런데 3이란 숫자는 한국 문화를 이해하는 중요한 코드다. 미륵이 하생할 장소도 산이나 물이 셋으로 나뉘는 곳이었고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길지(吉地) 중에도 3도봉 같은 곳이 포함된다. 지금까지 알아 본 역사적 배경은 아랑곳없이 현대의 정감록 신봉자들은 ‘정감록’에 보이는 서북지역의 혼란상을 국토분단,6·25전쟁의 참상, 또는 1·4후퇴를 예언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민중의 예언 해석에는 시대적 맥락이 가장 중요한 기준이었다. 할아버지 세대가 그 구절을 뭐라 해석했든, 나는 내 시대의 문제를 푸는 새 해석을 좇겠다는 식이다. 이런 태도에서 예언 문화엔 층위랄까 나이테가 보태졌다. 현대의 민중이 미 대통령 트루먼을 ‘정감록’에 언급된 진인으로 본 것은 어떤가. 진인이란 새 왕조를 열 국왕으로 해석하는 것이 보통이었고, 정씨 성을 가진 이가 나타나 계룡산 아래 도읍을 정한다고 보는 것이 사실상 정설이다. 우리 역사에서 진인의 도래설이 처음 나타난 것은 17세기였다. 그 때부터 오랫동안 해도진인설(海島眞人說, 섬에서 진인이 나온다는 예언)이 인기를 끌었다. 역모를 꿈꾼 사람들은 늘 진인의 출현을 주장했을 정도다. 어쨌거나 진인은 기존질서에 대항해 싸울 영웅이었다. 그런 진인이 1950년대에는 세계 최강대국을 이끄는 지도자, 기존질서의 사령관인 트루먼으로 둔갑했다. 합리적·체계적인 사고방식에 익숙한 현대인의 입장에서 보면 ‘정감록’ 신봉자들의 해석은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다. 논리적으론 말이 안 된다. 그럼에도, 시의에 맞기만 하면 민중은 꽤 엉뚱한 해석에도 환호한다. 수백 년 동안 ‘정감록’이 생명을 이어온 까닭은 그것이 시대상황에 맞게 새로 해석될 여지가 많아서다. ●예언서는 민중의 마음을 보여주는 거울 해방 이후 미국의 중요성은 국가 차원에서든 개인의 일상생활에서든 날로 커졌다. 민중은 ‘정감록’에서 미국에 관한 구절을 찾느라 열심이었다. 도대체 미국이란 나라가 이 세상에 있는 줄도 모르던 아득한 시절에 만들어진 ‘정감록’에서 미국에 관한 기록을 찾는다? 여간 우스운 일이 아니지만 필요는 때로 발명이나 발견을 낳는다. ‘정감록’에서 꺼낸 트루먼 진인설과 인천상륙작전설은 억지스러운 발견이었다.1970년대 이후 민중은 미국에 대한 그 이상의 예언을 요구했던지 새 예언서가 등장했다.‘격암유록’,‘율곡비기’,‘송하비결’ 등이 새로 나온 예언서다. 그 중 어떤 것은 특정 종교단체가 배후 조종하여 조작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심지어 기독교 계통의 신종교 단체도 예언서를 빌려 지도자에게 절대권위를 부여한 흔적이 있다. 새 예언서에는 한·미관계가 자주 나온다. 어느 책에는 9·11사태(2001년 9월11일 발생한 뉴욕 세계무역센터 테러사건)도 언급되어 있다. 더욱 경악할 내용도 있다. 미국은 2004년 북한을 폭격하기 시작해,2005년까지 공격을 계속한다. 그리고 2004년의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부시는 재선에 실패하고 이슬람교도의 저격으로 사망한다는 등등의 예언이 보인다. 그러나 아직까지 미국은 북한을 폭격하지 않고 있으며, 부시는 보란 듯 재선에 성공해서 백악관에 건재하다.2004년의 예언은 완전히 빗나갔다. 내 관심사는 한국 민중이 미국을 바라보는 시각이 빗나간 예언에도 투영되어 있다는 점이다. 최근 친미와 반미를 둘러싼 논쟁이 한국 사회의 중요 이슈로 등장했는데 민중의 다수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지배질서에 반감을 품고 있다. 민중은 부시의 대북 강경노선을 못마땅하게 여겼기에, 부시의 낙선과 암살을 예언한 것이다. 민중은 부시를 미워하면서도 두려워하고 있다. 그래서 부시의 북한 폭격설까지 예언으로 등장한 것이다.50년 전엔 현직 미 대통령을 진인이라 일컫던 것을 생각하면 금석지감(今昔之感)이 있다. 민중이 직접 예언서를 저술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민중은 예언의 내용을 결정한다. 노스트라다무스든 ‘정감록’이든 사정은 똑같다. 민중의 심리를 정확히 반영한 예언서는 민중의 사랑을 받고 그 생명도 길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예언서는 곧장 버림을 받는다. 민중은 자기들의 필요에 따라 ‘정감록’을 해석해왔다. 시대가 바뀌면 그 해석은 늘 달라졌다. 한 시대의 해석은 다른 시대가 되면 효력을 상실한다. 그러나 내가 정감록을 바라보는 관점은 통시대적이다. 미셸 푸코가 말한 지식의 계보학에 가까운 입장이다. 푸코의 말처럼 시공간이 바뀌면 지식과 기억은 변화된다. 요컨대 변화된 사물의 의미를 계보로 정리하는 것이 지식 계보학이다. 나의 정감록 산책도 그렇다. 정감록에 담긴 의미의 변천을 역사적으로 정리하는 것, 이것은 한국 역사와 문화의 나이테를 읽는 새 방법일 것이다. 백승종(푸른역사연구소장)
  • 軍과거사규명 실미도·녹화사업 진상밝힌다

    군내 대표적인 의혹사건인 녹화사업과 실미도사건에 대한 대대적인 진상규명 작업이 이뤄질 전망이다. 국방부 김홍식 기획조정관은 7일 군 과거사 진상 규명 사안으로 녹화사업과 실미도사건을 선정했다고 밝혔다. 김 기획조정관은 이어 “민간인 전문가가 참여하는 진상규명위원회를 4월쯤 발족시켜 본격적으로 진상 규명에 나서기로 했다.”고 덧붙였다. 그는 그동안 꾸준히 민원이 제기돼 온 군내 사망사건과 6·25전쟁 전후 유격대,6·25전쟁 중 민간인 희생사건 등 3건의 경우 위원회가 구성되면 그 기능에 따라 대상에 포함시킬 수도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국방부는 이르면 다음 주 중 별도의 회의를 열어 위원회에 참여할 민간인 전문가에 대한 자격 등을 논의할 예정이다. 또 이달 말 군 과거사 진상규명과 관련한 최종 입장을 정리하고 2∼3월에 민간인 전문가를 선정,4월쯤 위원회를 정식 발족할 계획이다. 조승진기자 redtrain@seoul.co.kr
  • 좌익 몰린 부친 의문사 ‘추적 36년’ 책 펴낸 전희구씨

    좌익 몰린 부친 의문사 ‘추적 36년’ 책 펴낸 전희구씨

    “책을 쓰면서 마음에 응어리진 세상에 대한 분노와 원한을 풀 수 있었습니다.” 오는 6월 정년퇴직을 앞둔 서울 노원구 생활복지국장 전희구(60)씨는 최근 6·25전쟁 당시 ‘좌익척결’명목으로 희생된 아버지의 의문사를 추적해온 과정을 그린 ‘피어오를 새날’이라는 책을 펴냈다. 이 책에는 다섯살 어린 나이에 마지막으로 본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이야기의 진상을 더듬어 가면서 겪은 눈물나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의 아버지는 1950년 당시 부산일보 편집부 차장 겸 문화부 기자로 재직하던 고 전임수(당시 29세)씨. 그는 그해 8월15일쯤 동료기자 6명과 함께 좌익으로 몰려 연행된 직후 가혹행위로 숨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사실규명을 위해 전씨는 1968년 군복무 시절 첫 휴가부터 아버지와 함께 끌려간 동료들과 수사관계자, 부산·경남지역에 거주했던 모든 언론·예술인들을 만나러 전국을 헤맸다.30년이 흐른 1997년에야 전씨는 ‘부산일보 50년사’라는 책과 아버지와 함께 연행된 언론인을 통해 당시 사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전씨의 선친과 함께 연행된 전 국제신문 편집국장 이광우씨가 임종을 앞두고 당시 일을 생생하게 전했기 때문이다. 그는 책에서 아버지의 행방불명 이후 어린 두동생의 병사와 어머니의 재가로 가정이 몰락하는 과정까지 숨김없이 드러냈다. 조부모 아래서 중학교만 마친 전씨는 검정고시를 거쳐 1970년 서울시 9급 공무원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이후 대통령표창, 서울시장상 등을 수상하며 모범적인 공직활동을 했다. 전씨는 “이 책은 아버지와 모든 의문사 사건피해자들을 위한 일종의 ‘씻김굿’”이라며 “모든 의문사 관련자들이 ‘역사의 신’앞에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덧붙였다. 고금석기자 kskoh@seoul.co.kr
  • 소설 ‘김일성’ 펴낸 이항구 씨

    소설 ‘김일성’ 펴낸 이항구 씨

    “우리 민족의 거대한 흐름 속에 김일성·김정일 위원장으로 이어지는 북한체제의 흐름과 북한동포들의 삶을 묘사하는 것은 누구든 반드시 해놓아야 할 겨레의 사명입니다.” 소설가 이항구(70)씨는 어느 누구보다 분단의 아픔을 고스란히 갖고 있다. 그는 17살 때 좌익활동 중 월북한 뒤 인민군으로 6·25전쟁에 참전했다. 이어 32살 때 공작임무를 띠고 남파된 직후 귀순했다. 특히 김일성 주석의 지근거리에서 취재하는 등 북한에서 노동자·군인·기자·작가 등으로 파란만장한 생활을 했다. ●정지용 아들과 빨치산 활동 그는 이같은 경험을 토대로 최근 전 3권짜리 책 ‘소설 김일성’(이가서刊)을 펴냈다. 말이 ‘소설’이지 대부분 실명을 토대로 한 다큐멘터리나 다름없다는 점에서 눈길을 모은다. 원래 ‘소설 김일성’은 지난 93년 처음 일어판으로 발간했을 때 황장엽 전 비서의 망명을 예언한 대목이 있어 일본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번에 발간된 ‘소설 김일성’은 최근 핵문제를 둘러싼 북한 내부의 변화상을 제대로 알리기 위해 추가로 삽입한 것. 지난달 말 서울 중구 서소문에 위치한 통일연구회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과거 얘기를 자꾸 들추지 말고 책이나 잘 소개해달라고 거듭 요청했다. 이씨는 1934년 경기도 안성에서 태어났다. 청운초등을 거쳐 휘문중 4년 때 좌익단체인 민주애국청년동맹원으로 활약했다. 이때 이태준씨 아들 이유백, 정지용씨 아들 정구용, 또 남로당 계열의 거물급 간부인 홍증식(월북후 조국전선 서기장)의 아들 홍창희 등이 함께 참여했다. “이유백과 홍창희가 먼저 월북하고 정구용과 함께 서울에 남았지요.6·25가 발발하자 월북하던 중 남조선에서 계속 투쟁하라는 지시를 받았지요. 그래서 태백산으로 내려가 정구용과 함께 빨치산 활동을 했습니다.” ●중앙방송 노동자 출신 기자로 이씨는 1950년 10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정선·문경 등지에서 유격대를 결성해 많은 전투에 참가했다. 이씨는 51년 4월 상부지시에 따라 다시 월북했다.6개월 동안 교육을 받은 그는 인민군에 입대했으며 56년 특무상사로 제대했다. 이후 그는 흥남비료공장에 배치돼 노동자 생활을 한다. 이 무렵 그는 ‘안전띄’라는 단편소설을 발표했다. 때마침 북한 전역에 신인작가 발굴령이 내려졌다. 당시 문예총위원장인 한설야가 직접 전국을 돌아다니며 신인을 발굴했다. 이씨는 한설야가 흥남비료공장을 방문했을 때 직접 면담을 하게 됐다. 이를 계기로 이씨는 58년 중앙방송위원회 노동자 출신 기자로 발탁됐다. 산업부 기자로 김일성 주석이 농촌 순시 때마다 수행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후 이씨는 김일성종합대학 문학부 전신인 평양문학대학이 설립되면서 1기생으로 입학했다. 졸업 후에는 문예총출판사 현대문학 편집부 기자가 됐다. 이때에도 김일성 주석 수행기자를 맡았다. “하루는 무용가 최승희가 원고를 들고 와 자신이 집필한 것이라며 책을 발간해달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구금상태인 남편 안막이 쓴 것으로 밝혀져 무산됐습니다.” ●북한 실상 바로 알릴 의무감 느껴 66년 초부터 북한당국이 남조선 출신들에 대한 차별대우와 사상검증을 집중적으로 실시하게 된다. 시험대에 오른 이씨는 어쩔 수 없이 대남 공작훈련을 받았고 그해 7월 서부전선 군사분계선을 통해 남파됐다. 그러나 곧바로 미군측에 귀순했다. 이후 기무사 군무원으로 있다가 정년 퇴임했으며, 지금은 모기관의 자문위원을 맡고 있다. 그는 “북한의 과거와 현재, 미래의 실상을 제대로 알리고 싶었을 뿐”이라고 거듭 책 발간의 의미를 부여했다. 김문기자 km@seoul.co.kr
  • [열린세상] 평화와 통합을 그린다/이종수 연세대 행정학 교수

    뉴욕에 있는 유엔본부 로비에는 전세계 분쟁지역 현황판이 설치되어 있다.2004년을 기준으로 세계 192개 국가 가운데 유엔이 집중 관심지역(Focus Area)으로 지목한 분쟁지역은 28곳에 이른다. 이 가운데 유엔이 직접적으로 개입하여 평화와 통합을 중재하고 있는 지역도 15곳이나 된다. 아직도 이 지구상에는 피와 눈물로 얼룩진 싸움이 끊이질 않고 있다. 새해 아침,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의 평화와 발전을 생각할 때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두 가지이다. 첫째는, 북한의 핵문제로 고조된 한반도 전체의 긴장감이다. 북한의 핵문제로 인한 위기감은 지난해 말 절정에 달했다.10월 미국이 북한인권법을 통과시키면서 많은 지식인들은 역설적으로 더 큰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북한인권법이 담고 있는 인도주의적 내용 못지않게 정치적 동기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기 전에도 유사한 인권법을 만든 바 있고, 직접적인 군사행동을 개시할 때에도 다름 아닌 핵과 인권을 명분으로 내세운 바 있다. 다행히 부시 대통령은 지난주 기자회견에서 이란과 북한 핵문제에 대해 ‘어떤 경우든 외교적 노력이 우선’이라는 인식을 비쳤다.12월9일 예일대학을 찾은 그레그 전 주한 미대사 역시 미국내 온건파의 입장을 대변했다. 그는 “미국은 한국에 대해 가쓰라-태프트조약 같은 부끄러운 일을 저지른 역사를 가지고 있다. 북한 핵문제를 계기로 미국이 동북아의 발전구상을 깨는 일이 벌어진다면 남북한과 중국으로부터 미국은 버림받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둘째는, 한국 사회 내부의 갈등과 분열이다. 이것은 북한 핵문제로 야기된 위기보다 더 심각해 보인다. 보혁, 지역, 세대, 노사, 여야로 나뉜 분열은 사회적 구심력을 파괴하고 개인의 삶을 피곤하게 하고 있다. 어느 사회나 시각과 이익이 갈림으로써 갈등의 요소는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갈등과 분열은 공존의 틀에 대한 기본적 인식을 공유하지 못하고 궁극적 통합을 위한 제도, 관례, 권위를 갖고 있지 못하다는 데 문제가 있다. 대부분의 사회문제들이 본래적 내용을 훨씬 뛰어넘는 과잉 충돌로 이어지고 그만큼 사회적 소모가 커지고 있다. 사회적 갈등을 조정하고 통합하기 위한 장치가 사실은 정치인데, 우리의 정치는 사회적 갈등이 반영되는 수준을 넘어 분열과 갈등을 조장하는 역할을 했다. 집권세력은 당초 한나라당과 민주당이라는 거대한 벽 사이에서 틈새정권으로 탄생한 이후 주위의 벽과 충돌함으로써 자신의 공간을 넓혀왔다. 야당은 야당대로 국정의 정상적인 파트너가 되기보다는 투쟁을 통해 고정 유권자들의 지지를 강화하려는 전략에 머물러 왔다. 사회내의 다양한 성층들이 이 대결구도로 편입되고 서로 갈등과 질시를 키워왔다. 분열의 주체들은 스스로의 순수성과 차별성에 대한 자부심을 넘어, 그것이 가져오는 파괴력과 사회적 비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우리의 공동체가 앞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뗄 수 없도록 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삶마저 황폐화시킨다. 그리고 결국은 자신의 삶도 파괴하고 마는 것이다. 우리는 20세기에 들어서만도 국권상실,6·25전쟁,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격랑을 거쳐 왔다. 아직도 전쟁으로부터 52년, 휴전선으로부터 50㎞라는 시·공간에 살고 있다. 남북통일이라는 과제가 앞에 놓인 것을 생각하면, 우리가 극복해야 할 엄청난 원심력과 분열의 폭발성을 예감하지 않을 수 없다. 새해 우리는 내용의 차이 이상으로 분열과 갈등을 초래하는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찾아내고 그것을 장기적으로 치유하는 작업을 시작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사회적 구조, 제도, 정책, 그리고 개인의 행동양식에서 입체적으로 찾아질 수 있으며 처방도 가능하다. 그래야만 우리의 공동체가 함께 발전할 수 있고 개인의 삶의 질이 개선될 수 있다. 평화와 통합, 이것이야말로 새해 언론의 화두가 되고 정부의 정책이 되어야 한다. 또 교육기관의 프로그램이 되고 회사의 구호가 되어야 한다. 이종수 연세대 행정학 교수
  • [삶과 경영이야기] (39)제2도약 위한 힘찬 날갯짓 박찬법 아시아나항공 사장

    [삶과 경영이야기] (39)제2도약 위한 힘찬 날갯짓 박찬법 아시아나항공 사장

    아시아나항공은 ‘쌍팔(88)둥이’다. 서울올림픽이 열렸던 1988년 태동해 그해 말 첫 취항의 기쁨을 누렸다. 올해로 16년이 됐다. 그동안 국내 항공업계의 독보적인 존재로 군림했던 대한항공에 밀려 혹독한 설움을 당하다 지금은 경쟁업체와 어깨를 겨눌 정도로 급성장한 아시아나항공. 아시아나의 어제와 오늘은 박찬법(朴贊法·59) 사장이 남모르게 흘린 피와 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아시아나의 발자취에는 그의 채취와 정성이 곳곳에 묻어 있다. 서울 강서구 김포공항내 아시아나빌딩 4층 집무실에서 만난 박 사장에게 대뜸 말단 직원에서 전문경영인이 된 숨은 비결이 뭐냐고 묻자 이렇게 말했다.“비결은 없지만, 이유는 있죠.”그러면서 “훌륭한 최고경영자(CEO)의 귀감을 따르다 보니 사람들이 저더러 CEO라고 부르데요.”라며 내공(內功)의 일단을 소개했다. 얘기를 나누는 동안 창밖으로 쉴 새 없이 뜨고 내리는 비행기의 소음이 항공업계의 생존 몸부림을 웅변하고 있는 듯했다. ●아시아나 식구가 되다 박 사장이 아시아나와 인연을 맺은 것은 90년 1월. 그 전에는 ㈜금호에서 줄곧 수출업무를 담당했다. 첫 보직은 영업운송담당 이사. 당시에는 아시아나가 국내선 몇 군데만 운항하고 있던 터라 그룹에서 그를 국제선 취항 준비 총괄 임원으로 발탁한 것이다. 새 보직을 받은 지 열흘 만에 첫 정기편 국제선인 서울∼도쿄 노선을 취항시키면서 아시아나항공 영업체계의 골간을 만드는 일에 본격 뛰어들었다. 생소하고 힘든 일만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항공운수업은 오케스트라 지휘와 같아서 비행기 좌석 하나에 한 명의 손님을 모시기 위해서는 조종사, 정비, 기내서비스, 예약, 발권, 공항서비스, 화물, 기내음식(케이터링), 영업, 일반 지원 등 여러 부문의 일들이 조화롭게 이뤄져야 가능하다. 그게 제대로 안 되면 누구의 잘못이랄 것도 없이 고객서비스가 형편 없는 항공사로 낙인찍힐 수밖에 없다. 그를 더욱 곤혹스럽게 만든 것은 후발주자의 설움이었다. 이런 일화가 있다.92년 뉴욕 취항을 앞두고 미국으로 건너가 교민을 상대로 대리점망을 구축할 때였다. 뉴욕 내 교민시장의 60%를 점유하는 5대 메이저 여행사와 접촉해 우여곡절 끝에 대리점 계약을 맺기로 했다. 그런데 일이 터졌다. 뉴욕 취항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이 여행사들이 느닷없이 아시아나와의 대리점 계약을 포기하겠다는 연락을 해 왔다. 청천벽력이었다. 주저앉고 싶은 심정을 가다듬고 심야대책회의를 가졌다. 결론은 중소 여행사를 모집해 대리점으로 키워 나가기로 의견이 모아졌다. 말하자면 정면돌파였다. 주위의 우려도 컸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잘된 일이었다. 특정 항공사만 이용하던 고객들이 새 항공사가 내건 신선한 서비스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경쟁 항공사의 독점적인 시장점유율을 어느 정도 확보했다. 그로부터 11년 뒤인 2001년 3월 대표이사 사장 자리에 올랐다. 지금은 신규노선·증편 등으로 미국 일본 등 전세계 17개국 54개 도시 64개 노선에 취항, 세계적인 항공사로 부상하고 있다. ●원래는 잡동사니 팔이가 본업 사실 그는 수출업무로 잔뼈가 굵은 장사꾼이었다. 대학(경희대 정치외교학과)을 나온 뒤 67년 금호타이어의 전신인 삼양타이어에 입사했다. 당시는 ‘수출입국’이 국가적 슬로건이어서 상품 수출의 전선에서 일하는 사람이 국가 유공자처럼 대접받던 시절이었다. 대학을 졸업해도 버젓한 일자리 구하기가 쉽지 않을 때여서 취업과 함께 겁없이, 신나게 뛰어다녔다. 하지만 하기 좋은 말로 무역이라고들 했지만, 사실은 만물상 가게나 다름없었다. 수출 상품중에는 ‘볏짚머리(브러시)’도 있었고,‘아귀(생선)’도 팔았다.“한번은 친지 한 분이 ‘자네 종합상사에 근무한다는데 뭘 수출하느냐.’”고 물어오기에 “뭘 수출 안 하는지 한번 물어봐 주시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는 비즈니스의 외길 인생은 험난하고 고달팠지만, 보람찬 날들이 더 많았다.75년 이란에서 열린 국제박람회에 참석했을 때였다. 본사에서 느닷없이 전문이 날아 들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제다에 있는 모씨가 철근 1만t을 구매하려고 하니 그곳으로 가 수주해 오라는 내용이었다. 비자를 발급받으려다 보니 이슬람교도의 라마단 기간이었다. 정상적인 절차를 밟자면 몇개월이 걸릴 판이었다. 이곳저곳 찾아다녔으나 허사였다.‘궁즉통(窮卽通)’이라고 했던가. 낙담해 돌아오는 길에 호텔 카운터 직원에게 푸념을 털어 놓았더니 자신이 항공사 기장과 잘 알고 있다며 무비자로 제다행 비행기를 태워 줬다. 중간기착지인 리야드에서 불법입국으로 체포돼 혼쭐이 나긴 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2500만달러의 계약을 성사시켰다. 그 짜릿함은 무역을 해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특권이었다. 잊지 못할 일들도 적지 않다.70년대 후반 기독교 민병대와 회교 민병대간의 교전이 치열했던 레바논의 베이루트 시내에서 주재원과 점심을 먹으러 갔다가 자칫 폭탄테러를 당할 뻔했던 일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성공, 비결은 없고 이유는 있다 외형적인 화려함 뒤에 아쉽고, 힘든 때도 있었다. 그는 45년 전남 영광군 법성면에서 중고등학교 교사, 금융조합(농협) 이사 등을 지낸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 2남2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시골이었지만 그나마 남부럽지 않게 살았다. 하지만 아버지가 6·25전쟁이 발발했던 50년 세상을 떠난 뒤로는 가세가 기울어 어머니가 보따리장사를 해야 했다.‘배워야 산다’는 어머니의 지극한 교육열 덕분에 서울로 올라와 배재고를 다녔다. 학자로서의 꿈을 갖고 야심만만하게 두드렸던 서울대 상대는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인생에서 첫 좌절을 겪은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좌절은 성공을 위한 밑천이었다. 더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그는 좌절의 굴레를 벗어던졌다. 언젠가 후배가 자신에게 성공비결이 뭐냐고 묻기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나에게 비결은 없고, 이유는 있다. 그것은 내가 서울대를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문경영인의 카리스마는 오너의 그것과는 달라 그를 가까이서 접해 본 사람은 따스한 품성을 지닌 휴머니스트로 부른다. 언제나 인간애와 합리성을 모든 일의 원칙으로 삼고, 이를 철저히 지켜 나가려고 애쓴다. 어찌보면 그저 두루뭉술하게 감성과 화합으로 일을 처리하는 것으로 오해받기도 한다. 정말 그럴까. 그는 오너와 전문경영인의 카리스마는 다르다고 믿는 사람이다. 오너에게는 구조적 카리스마가 있지만, 전문경영인에게는 없다는 것이다. 전문경영인은 스스로 만들어 가야 한다고 말한다.“전문경영인의 카리스마는 아랫사람과 윗사람에 대한 설득이 합리적이어야 가능합니다. 합리적 근거에 따라 스스로 판단하고, 남을 판단케 할 능력을 가져야 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움직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전자는 논리로 가능하지만, 후자는 감동이 있어야 됩니다.” 그는 직급이 낮을 때나 지금이나 윗사람·아랫사람과 얼굴을 붉힌 적이 거의 없다고 했다. 순리와 합리에 따라 건의하기 때문에 받아들여지지 않은 적이 없었고, 또 잘못됐다고 지적하면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조직내 수평적 커뮤니케이션의 활성화를 위해 ‘패트롤 미팅’(경영진과 노조간부의 정기적인 만남)을, 수직적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오픈 플라자’(자유토론) 등의 아이디어를 낸 것도 그만의 노하우다. 2001년말부터 무분규라는 ‘아름다운 노사문화’가 생겨난 것은 이 덕분이다. 그래서 그는 감성과 합리를 조화한 ‘퓨전경영’을 경영철학으로 삼고 있다. ●젊은이들이 찾는 기업 만들기 그에게는 작지만 원대한 꿈이 있다. 아시아나항공을 취업선호도 1위의 세계 최고의 항공사로 만드는 게 목표다. 해답은 고객에게 있다고 말한다.“항공업계에는 ‘규정집을 불태우라.’는 말이 회자됩니다.‘고객이 곧 규정’이라는 얘기죠. 고객 입장에서 조직을 되돌아보는 고객만족 지향의 태도가 그것입니다.” “우리나라 인근에는 인구 13억명과 1억 2000만명을 둔 중국과 일본이 있다는 것은 항공수요의 잠재력이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말해 준다.”는 그는 “동북아 허브시대를 맞아 아시아나가 그 중심에 설 날이 멀지 않았다.”며 제2의 도약을 위한 힘찬 날갯짓을 환한 미소로 대신했다. 주병철기자 bcjoo@seoul.co.kr ■ 박찬법 사장은 박찬법 사장은 새벽 4시면 어김없이 일어난다. 아침밥은 거르지 않고 챙겨 먹고 6시쯤이면 회사에 나와 있다. 전형적인 아침형 인간이다. 본인 스스로 ‘나를 키운 것은 80%가 일’이라고 말할 정도로 일벌레.24시간 가운데 잠자는 시간 빼고는 ‘스트레스를 받는다’(일한다)고 한다.‘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격언을 좋아한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열심히 하면 반드시 보답이 뒤따른다는 자신의 경험칙과 너무 딱 들어맞기 때문이라는 것. 대신에 특별한 약속이 없으면 8시30분 이전에는 귀가한다. 아들·딸이 모두 결혼해 부인밖에 없기 때문이다. 모임에서 폭탄주 1∼2잔은 사양하지 않는다. 주말에는 주로 골프를 즐긴다. 핸디는 10개 안팎. 고유가에도 불구하고 무분규 등의 영향으로 올해 매출액 3조원에, 당기순이익 2326억원의 흑자를 기록했다. 내년에도 흑자기조를 유지한다는 게 박 사장의 포부다.
  • [사설] 김동식목사 납북, 정부는 뭐했나

    중국 옌지(延吉)에서 탈북자 지원활동을 하다 지난 2000년 실종된 김동식목사가 북한공작원들에 의해 납북됐음이 공식확인됐다. 탈북지원단체들은 그동안 김목사 납북의혹을 제기하며 정부에 송환노력을 꾸준히 요구했지만 정부는 이를 외면해왔다. 그러다 이번에 우리 공안당국이 김목사 납북에 가담한 북한보위부 소속 조선족 한명의 신병을 확보함으로써 사건 실체가 처음으로 드러난 것이다. 무엇보다 북한으로부터 공작금과 지령을 받은 공작원 10여명이 조직적으로 납치에 가담했다는 사실은 충격적이다. 당국은 나머지 공범들도 끝까지 추적해 야만적이고 비인도적인 범죄행위의 전모를 낱낱이 밝혀내도록 해야 한다. 사실 옌지일대에는 그동안 북한이 탈북자지원단체를 와해시키려고 공작원들을 보내 탈북지원활동을 하는 한국인, 조선족들을 납치한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제일 한심한 것은 우리 정부의 대응이다. 김목사 경우도 납치된 지 만 5년이 가까워오도록 송환노력은커녕, 이후 생사확인조차 제대로 못하고 있었다. 사건이 발생한 그해 통일부 국정감사자료를 통해 김목사의 납북사실을 인정하고도, 정부는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그해 6월 남북정상회담과 이후 이어진 남북화해 분위기속에서도 정부가 북한을 상대로 김목사 송환노력을 한 흔적은 없다. 정부가 남북화해 분위기를 내세워 김목사 납북을 쉬쉬한 것은 아니었길 바랄 뿐이다. 이런 식이면 제2, 제3의 김목사가 나올 수밖에 없다. 더구나 납북자가족단체들에 따르면 6·25전쟁 이후 납북자수가 500명에 육박한다. 다른 납북사건에도 정부의 인식전환이 필요한 시점이 됐다. 납북자 본인의 비극은 말할 것도 없고, 눈물로 세월을 보내는 가족들의 아픔을 더 이상 외면한다면 그건 정부가 아니다.
  • 김동조 前외무부장관 별세

    해오(海吾) 김동조 전 외무부 장관이 9일 오후 서울아산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86세. 김 전 장관은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회담에 수석대표로 참여한 한·일 수교의 주역으로 1943년 일본 규슈(九州)대 법대 재학 중 일본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에 합격, 공직을 시작했다. 일본 후생성과 내무성에 근무하다 해방을 맞아 미군정 경남도청 이재과장, 체신부장관 비서실장·감찰국장 등을 거쳐 6·25전쟁 중이던 1951년 외무부 정무국장에 임명됐다. 1957년부터 외무부 차관을 지내면서 한·일 수교, 대일 청구권, 재일 한국인 법적 지위 등에 대한 우리측 전략을 만드는 데 깊숙이 관여했다. 1966년 초대 주일대사로 부임했으며, 이후 주미대사로 대미외교를 지휘하다 1973부터 1975년까지 외무부장관으로 재임했다. 1976년 박정희 대통령 외교담당 보좌관에 임명됐으며,1977년 남북대화 조절위원도 역임했다.1978년 대통령 외교담당 특보를 끝으로 공직생활을 마감했고,1979년에는 석유개발공사 사장을 역임했다. 유족은 부인 송두만 여사와 장남 김대녕 해오실업 사장, 차남 김민녕 외국어대 교수 등 2남4녀와 사위 손명원 스카이웍스솔루션스코리아 회장, 허광수삼양인터내셔널 회장, 정몽준 의원, 손녀사위에 홍정욱 헤럴드미디어 사장, 방준오 조선일보 기자 등이 있다. 발인은 13일 오전 7시 서울아산병원. (02)3010-2270. 이지운기자 jj@seoul.co.kr
  • [문학이 머문 풍경]구상시인 마음의 고향 ‘왜관’

    [문학이 머문 풍경]구상시인 마음의 고향 ‘왜관’

    강/아침 강에 안개가 자욱 끼어 있다./피안을 저어 가듯/태백의 허공석을 나룻배가 간다./기슭, 백양목 가지에/까치가 한마리/요란을 떨며 날은다.(중략) ●남북 양쪽에서 필화 경험 지난 5월 고인이 된 시인 구상(具常). 시인은 남북 두 체제에서 필화를 경험한 유일한 문인이다. 1946년 함경도 원산에서 동인지 ‘응향’에 ‘밤’ 등 시를 발표하며 데뷔했으나 반인민적인 반동시인으로 몰렸다. 그 체제를 못견뎌 월남한 시인은 65년 8월 희곡 ‘수치’를 무대에 올리려다 등장인물 중 빨치산 군관의 대사가 문제되어 공연 보류조치를 당했다. 시인의 고향을 원산으로 알고 있는 이들이 많으나 진짜 고향은 서울 이화동이다.4살 때 독일계 성 베네딕트 수도원의 교육사업을 위촉받은 아버지를 따라 함남 원산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사제가 되기 위해 성 베네딕트 수도원 신학교에 입학했으나 중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대 종교학과에서 불교를 공부했다. 당시 문예창작과와 종교과를 두고 과 선택문제로 고민했던 시인은 결국 종교과를 선택했다. 이것이 그의 시에 나타난 초월적 종교관의 기반이 되었을 것이다.6·25전쟁 때는 국방부 기관지 ‘승리일보’를 만들었고 군작가단 부단장을 지냈다. ●왜관에서 20여년간 작품활동 전후 이승만 정권에 대해 반독재 투쟁을 벌였던 그는 1952년 승리일보가 폐간되자 부인 서정옥(93년 작고)씨가 병원을 개업한 경북 칠곡군 왜관으로 삶터를 옮겼다. 이곳에서 시인은 53년부터 74년까지 기거하며 작품활동을 했다. 칠곡군은 지난 2002년 구상문학관을 건립했다. 부인이 경영하던 순심의원 자리에 2층짜리 문학관이 들어섰다. 문학관 뒤편에 시인의 거처였던 관수재(觀水齋)만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시인과 가까왔던 윤장근(73) 죽순문학회회장은 “설창수 시인이 ‘낙동강이 보인다.’며 관수재라는 이름을 붙였다.”며 “강물과 푸른 풍경이 선생의 가슴에서 시를 우려내기에 지극히 안성맞춤인 장소였다.”고 말했다. 낙동강은 구상 시의 원천이었다.‘강’이란 연작시 100편을 발표했으며, 그의 시에는 늘 퍼내도 마르지 않고 끊임없이 솟아나는 강물이 흐르고 있다. 윤 회장은 “구상 선생이 유난히 ‘강’에 집착하는 것은 관수재에서 늘 낙동강을 바라보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지금 관수재에서 보이는 것은 테니스장에서 공을 치는 아낙네들뿐. 목을 쭉 빼보았으나 강 범람을 예방하기 위해 만든 높은 제방에 가려 강 건너 모텔과 신축아파트 공사장의 기중기만이 눈에 들어왔다. 문학관 2층에 올라가서야 겨우 낙동강이 보였다. 안내하던 문학관 직원은 “당시와 변하지 않은 것은 6·25전쟁 때 폭격돼 두동강 난 낙동강 철교밖에 없다.”고 귀띔했다. 시인은 관수재에서 윤 회장 등 많은 문인들과 교분을 쌓았다. 영남일보 주필 겸 편집국장을 할 때 시인이 대구 향촌동 다방에 보이지 않으면 문인들은 관수재로 몰려가 시인과 밤새도록 술잔을 기울였다. 특히 절친한 친구인 천재화가 이중섭은 관수재의 단골손님이었다. 이중섭은 일본에 있는 자신의 가족을 그리워하며 단란한 구상 시인의 가족을 이따금씩 그렸다고 한다. 한번은 병색이 짙은 구상에게 천도 복숭아를 그린 그림을 주며 쾌유를 기원했다. 시인은 생전에 “그 ‘복숭아 그림’ 때문인지 지병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연명했다.”고 회상하곤 했다. 구상 시인의 본적지는 관수재가 있는 왜관이다. 전쟁중 북에 있는 가족이 내려오더라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러나 자신 시와 마음의 고향이었기 때문에 왜관을 본적지로 고집하지 않았을까. 요즘 하루 100여명의 관광객들이 구상문학관을 찾아 시인을 느끼고 있다. 시인의 빈 자리를 구상문학관이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칠곡 한찬규기자 cgha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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