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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한국 개그계 대부 김웅래 인덕대 교수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한국 개그계 대부 김웅래 인덕대 교수

    ‘그분의 시대’가 왔다. 만병(萬病)을 통치한다. 설명할 수 없는 묘약, 웃음이다. 고종 황제 때였다. 유성기(留聲機)가 황실에 처음 나타났다. 이를 본 고종 황제는 매우 신기하게 여겼다. 시험해보려고 소리꾼 박춘재를 불렀다. 영문도 모르는 박춘재는 황제의 거듭된 독촉에 목소리를 가다듬고 판소리 춘향가의 한 대목을 기계 가까이에 입술을 대고 부른다.‘쑥대머리 귀신형용 적막옥방의 찬자리에∼’ 이어 고종은 유성기 기술자를 불러 기계 작동을 재촉했다. 그러자 기계에서 갑자기 귀신(?)이 나타난다. 박춘재의 목소리가 그대로 재현된 것. 자신의 목소리가 이상한 물체를 통해 흘러나오자 박춘재는 깜짝 놀라 거의 까무러쳤다. 이를 본 고종 황제가 “수명이 십년은 줄었겠구나. 자네의 정기를 기계에 빼앗겼으니.”라고 했다. 이때부터 ‘십년감수’란 말이 생겨났다. 박춘재는 당시 소문난 소리꾼이기도 했지만 임금의 심사(心思)를 즐겁게 해주는 공인된 재담가였다. 팔도의 온갖 장사꾼 흉내를 기가 막히게 잘도 냈다. 자료에 의하면 당시 가무별감(歌舞別監)의 직책까지 얻었다. 이런 까닭에 학계에서는 박춘재를 현대 코미디언의 효시로 해석한다. 구한말의 박춘재 재담에서 오늘날의 만담가-코미디언-개그맨 등으로 변천돼 왔다는 것이다. 김웅래(60) 인덕대 방송연예과 교수. 우리나라 개그계의 대부로 일컬어진다. 한국 코미디 역사를 한달음에 관통할 만큼 많은 연구와 발품을 통해 내로라하는 이 시대의 ‘웃음스타’들을 배출했다. 임성훈 최미나 고영수 정광태 곽규호 김학래 임하룡 심형래 전유성 김형곤 김미화 김한국 이봉원 김국진 이창훈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지금도 김 교수를 ‘형님’ ‘스승’ 으로 깍듯이 모신다. 김 교수를 더욱 주목케 하는 것은 그가 최근 국내 처음으로 ‘웃음문화학회’를 만든 일. 웃음이 인간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지금이라도 진지한 연구를 통해 더욱 많은 웃음을 창출해보자는 취지로 학회 창립을 선언했다. 학자와 개그맨들이 함께 뭉쳤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회장은 서대석 서울대 국문과 교수가 맡았고, 김 교수는 수석 부회장. 전유성 김성녀씨가 부회장단에 합류했다. 오는 27일 첫 임원 회의를 통해 구체적인 일정과 향후 계획을 논의한다. 이뿐만 아니다. 김 교수는 강원도 평창에 200여평 규모의 ‘코미디박물관’ 건립을 추진 중에 있다. 내년 4월 완공 예정으로 현재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이쯤되면 김 교수의 ‘웃음 열정’이 궁금해지지 않을까. 서울 종로구 대학로에서 김 교수를 만났다.33년동안 방송에서 개그프로 연출만 전문적으로 맡아오다 지난해 3월 정년 퇴임한 뒤 인덕대를 비롯, 몇몇 대학에 출강하고 있다. 방학이었지만 방송국을 오가며 개그맨 오디션 심사위원을 맡으랴, 대학로 모 극장에서 개그맨 조련을 하랴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었다.KBS개그프로인 ‘개그콘서트’와 ‘폭소클럽’에 최근 두 팀씩을 투입해 웃음작전을 지휘 중이다. 먼저 국내 코미디 역사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박춘재에 이어 ‘신불출’을 거론했다. 구한말의 박춘재를 거친 재담은 일제시대의 신불출을 만나 ‘만담’으로 자리잡았다는 것. 신불출은 월북한 문예인 중 무용가 최승희와 함께 유일무이하게 별도의 연구소가 생길 만큼 북한 내에서도 최고의 만담가로 명성을 날렸다. 자료에 따르면 신불출은 월북 후 1957년 조선문학예술총동맹(문예총) 중앙위원,1961년 국립만담연구소 소장,66년 중앙방송위원회 만담가로 활동했다. 서울의 전력난을 풍자한 ‘서울의 전기세’, 미국을 비난한 ‘승냥이’ 만담은 주민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고 전해진다. 남한에서는 장소팔 고춘자 부부, 김영운씨 부부, 김뻑국씨 등으로 대표되는 만담이 TV가 생기면서 코미디를 이어주는 웃음사(史)의 연결고리 역할을 하게 됐다고 김 교수는 말했다. 웃음문화학회 출범과 관련,“현장에 있는 연기자들과 여러 학자, 교수들이 만나 머리를 맞대고, 가슴을 맞대고, 무릎을 맞대고 얘기할 수 있어야 좋은 결과물이 생겨난다.”고 했다.“PD 활동을 하면서 가장 듣기 싫었던 소리가 ‘코미디가 저질이다.’ ‘소재가 한정돼 있다.’라는 말이었다.”면서 “앞으로 웃음 연구를 통해 이 두가지 문제를 극복하겠다.”고 다짐했다. 또한 “방송프로 ‘웃찾사’ ‘웃으면 복이 와요’ ‘개그콘서트’ 등도 사랑받아야 하지만, 잊혀져 가는 만담을 되살려야 한다.”면서 “조선시대의 ‘앙천대소’ ‘소천소지’ 등 과거의 유머를 알리고 미래의 웃음을 창조하기 위해 격월간지를 발간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연기자와 학자들이 상호협력할 경우 극대화된 효과를 낼 수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 웃음도 패션이듯, 복고풍도 있고 시대에 맞는 웃음도 있게 마련이 아니냐는 반문도 한다. 80년대 들어서면서 코미디는 쇠퇴하고 대신 개그가 살아났다는 그는 웃음 발전을 위해 매년 ‘올해의 웃음대상’을 제정하겠단다. 올 연말부터 사회 전반에 걸쳐 가장 웃긴 사람을 선정, 신선한 충격을 주겠다는 것. 국내 처음 개관될 코미디 박물관에는 대한민국 웃음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하겠단다. 고 서영춘씨의 유물도 처음 공개하며, 고구려 시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30여년 동안 PD 활동을 하면서 수집한 각종 자료 1000여점을 전시할 예정이다. 왕년의 코미디언 구봉서 배삼룡, 개그맨 전유성 심형래 등이 박물관 추진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학창시절 서울 YMCA에서 레크리에이션 진행방법과 포크댄스도 배웠지요. 학교 시험이 있던 전날에도 이기동 서영춘씨가 등장하는 ‘웃으면 복이와요’ 프로그램을 꼭 봐야 직성이 풀렸습니다. 학교 수업 빼먹고 서울 명동의 시공관 극장의 연극관람도 자주 했지요.” 김 교수는 민통선 지역인 경기도 파주 대성동 자유의 마을에서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6·25전쟁으로 서울로 피신해 수색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대성동이 낳은 인물이 아니냐고 하자 웃을 뿐이다. 이곳엔 아직도 친척들이 살고 있다고 귀띔했다. 어릴 때부터 유머에 많은 관심을 가졌던 그는 대학을 졸업하면서 73년 동양TV에 입사했다. 면접 때 코미디프로를 맡고 싶다고 해 ‘코미디전망대’의 고 김경태 PD와 사수-조수로 만났다. 이어 양훈-양석천 콤비 프로그램인 ‘좋았군 좋았어’를 처음으로 맡았다.75년에는 ‘살짜기 웃어예’라는 최초의 개그프로를 연출했다. 외국잡지를 들여다보고 대학 축제 현장을 다니며 꾸준히 개그 아이디어를 모았다. 대학 다닐 때 다 외우다시피했던 ‘세계 해학전집’(정음사刊) 등의 자료도 많은 참고가 됐다. 밤이면 서울 무교동 일대를 뒤지며 DJ쇼에 출연했던 임하룡 김학래 주병진 등을 만나 방송에 출연시키는 등 웃음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동서고금 어디를 가나 웃음처럼 좋은 보약은 없습니다. 지나온 세월도 그랬듯이 앞으로도 웃음 연구를 위해 평생을 바칠 생각입니다.” 내친김에 서울 대학로에 개그 전용극장을 짓고 있다.160석 규모로 이달 말 간판을 내걸 예정이다. 그동안 거쳐간 수백명의 후배와 제자, 여러 개그맨들이 드나들 것으로 보여 ‘웃음의 메카’가 되지 않겠느냐는 전망이다. ■ 그가 걸어온 길 ▲1946년 경기 파주 대성리 출생 ▲66년 배재고 졸업 ▲73년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73년 동양방송PD ▲80년 한국방송공사PD ▲93년 중앙대 신문방송학 석사 ▲94년 제34회 골든로즈상 심사위원(이후 4회) ▲98∼2000년 한국방송공사 코미디프로그램 담당 전문프로듀서 ▲2002년 중앙대 신문방송대학원 겸임교수 ▲2004년∼현재 인덕대 방송연예과 교수 ■ 주요 작품 최초 개그프로 ‘살짜기 웃어예’ 연출(75년),‘유머1번지’연출(82∼92년), 시트콤 ‘아무도 못말려’ 연출(97년)시카고 코미디페스티벌 참가(2000년) ■ 주요 저서 유머개그야사(91년), 입술터진 하마도 노래방 가냐(92년), 웃음은 국민의 기본권이다(93년), 훔쳐보는 공포(94년), 김웅래PD폭소카세트북(96년), 한국을 웃긴 250가지 이야기(96년), 잡담으로 성공하기(98년) km@seoul.co.kr
  • [어떻게 지내세요] 신곡 ‘인생은 레디 고’ 발표한 남보원

    [어떻게 지내세요] 신곡 ‘인생은 레디 고’ 발표한 남보원

    “백년을 살아봤자 삼만육천 오백일이지요. 인생은 항상 레디 고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웃음을 선사하는 일은 무척 즐거운 일이죠.” 남보원(70)씨. 우리나라 원맨쇼의 ‘대부’격이다.1960∼70년대 팔도를 넘나드는 특유의 성대모사로 많은 사람들을 웃기고 울리며 한 시대를 풍미했다. 지금의 중·장년층들에겐 그의 이름만 들어도 “진짜 넘버 원이야.” 하는 탄성이 절로 나올 정도다. 서울 서초동의 한 음식점에서 만났다. 자리에 앉자마자 “그때 그쇼를 아십니까.”라는 타이틀로 현미 박상규 트위스트김 등 동료 연예인과 2주전부터 주말마다 전국 투어에 나서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해남과 목포 광주 등을 다녀왔단다. ●“45년만에 내 노래 발표 감개무량” 특히 남씨는 최근에 신곡 ‘삐에로’와 ‘인생은 레디 고’ 두곡을 발표, 식지 않은 열정으로 추억의 인기를 다시 되살리고 있다. 즉석에서 ‘삐에로’를 부른다.‘나는 나는 삐에로 삐에로로 살아갈래/슬플 때도 웃어야 하고 기쁠 때도 웃어야 하는/연지곤지 분바르고 멋쟁이로 차려입은/나를 보고 웃어봐∼.’(윤삼육 작사·박재권 작곡) “그동안 남의 노래만 45년 불렀지요. 내 노래라고 생각하니 감개가 무량합니다. 중간에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요.’라는 랩 가사까지 삽입했거든요. 딸도 함께 참여했습니다.” 투어쇼에는 새로 선보인 것이 몇가지 더 있다. 우선 광복 60주년을 맞아 역대 대통령을 풍자하는 것. 예를 들어 ‘이승만 박사가 첫단추를 잘못 끼어 박정희 대통령 총 맞아 죽었지∼.’라는 대사에 즉흥곡을 붙였다. 또한 ‘타타타’의 곡에다 팔도 사투리, 정주영 전 회장의 목소리, 찬송가, 찬불가 등을 섞어가며 세상을 풍자하다 보면 두시간 동안 거뜬히 원맨쇼를 펼칠 수 있다는 것. ●“北안내원들 알아보고 반가워해” 북한에서도 그의 명성을 입증했다.5년 전 방북했을 때 안내원들이 남씨를 가리켜 “입술재간꾼 선생이 아니냐.”며 반가워했다. 또한 북한에 사는 누이와 50년 만에 상봉했을 때 “우리 동생이 남쪽에 가서 공훈배우가 됐네. 어릴 적부터 흠칠거리는 끼가 많았지.”하는 칭찬과 회한의 말을 서로 주고받기도 했다. ●“후배들 임기응변 아닌 개인기 갖춰야” 인생은 60부터가 아니라 70부터라고 강조하는 그는 건강을 위해 매니저이자 운전기사인 부인과 함께 동네 헬스클럽을 자주 찾는다.30년 넘게 한 동네에 살았기에 주민들과도 자주 어울린다. 영원한 현역임을 자처하는 그는 “요즘 코미디는 임기응변으로 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개인기를 갖지 않으면 나중에 설 땅이 없어진다.”고 후배들에게 한 마디 던진다. 남씨는 평안남도 순천에서 부잣집 외아들로 태어났다.6·25전쟁 중에 월남, 서울 성동공고를 졸업했다. 부친이 경찰공무원을 권유해 57년 동국대 정치학과에 입학했다. 그의 본명은 김덕용.63년 연예계 데뷔 당시 대부분 ‘후라이보이’‘스리보이’ 등의 예명이 많아 고민끝에 ‘넘버 원’이라는 영어와 남쪽 보물의 으뜸이란 뜻을 합쳐 남보원(南寶元)이라고 지었다. 영화 ‘공수특공대작전’‘귀신잡는 해병’‘오부자’‘새알각하’ 등의 영화에도 출연, 인기를 모았다. 연예인 축구부를 만들었으며 한때 ‘남펠레’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글 김문기자 km@seoul.co.kr 사진 류재림기자 jawoolim@seoul.co.kr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평화재향군인회’ 주도 표명렬씨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평화재향군인회’ 주도 표명렬씨

    과연 ‘제2의 향군’으로 자리잡을까. 요즘 색다른 ‘색깔론’ 공방이 한창이다. 무대가 정치권이 아닌 전통 보수성향의 제대군인단체라는 점에서 초미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재향군인회(향군)와 가칭 평화재향군인회(평군). 향군은 50여년 역사를 간직한 700만 회원의 거대 조직이다. 반면 평군은 현재 인터넷상에서 회원을 모집 중이며 아직 공식적인 출범식은 하지 않은 상태. 향군은 최근 평군의 움직임에 대해 “반미·친북성향의 불법단체”로 규정하고 법적 대응까지 하겠다며 벼르고 있다. 그러자 평군은 향군을 향해 “친일·군부독재에 의해 왜곡된 이권단체에 불과하다.”며 헌법소원까지 불사하겠다고 맞서고 있다. 아울러 우리나라의 군대는 일제 때의 시스템을 답습하고 있다며 개혁의 필요성을 대의명분으로 내세우고 있다. 두 단체의 대립은 색깔론 시비로 이어지면서 점입가경이다. 향군은 최근 “불법단체 평군에 현혹되지 맙시다.”라는 호소문을 통해 “평군의 주장은 반미·친북성향의 허무맹랑한 논리에 불과하다.”며 (평군의)‘군비축소론’ 주장은 북한의 적화통일론에 동조하는 것이라고 색깔을 칠했다. 특히 평군 설립자인 표명렬(67·육사 18기) 예비역 준장의 선친이 남로당 간부와 빨치산 전력이 있다고 정면으로 비판했다. 평군측은 이를 마녀사냥이라며 오히려 향군이 평군의 탄생을 자초했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이상훈(육사 11기·예비역 대장) 현 향군회장과 표씨는 육사 선·후배이기도 하지만 현역시절 지휘관과 참모로 동고동락을 해 더욱 눈길을 끈다. 발화의 주인공인 표씨는 과연 어떤 인물일까. 지난주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도곡리 자택에서 표씨를 만났다. 평군은 오는 8월15일 광복 60주년에 맞춰 출정식을 갖고,9월17일(광복군 창설일)에 공식 출범할 예정이다. 준비상황을 물었다.“홈페이지에 매일 1000여명이 방문할 정도로 날로 반응이 좋아지고 있다. 두고 보라.”며 자신했다. 출정식 때에는 전국적으로 수만명이 참가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어 현재의 향군이나 성우회 등은 사실상 극우라면서, 평군의 이념은 ‘건전보수’를 지향한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우리 군은 일제의 잔재를 하루빨리 벗어던지고 정체성과 자부심을 새로이 가져야 할 때라고 역설했다. “향군은 냉전체제하에서 해왔던, 아직도 시대착오적인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군사정권의 이권에서 출발한 태생적 한계도 있지요. 그동안 누려온 기득권을 잃을까봐 걱정도 많이 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결국 향군은 국민의 혈세를 지원받고 있지 않습니까. 독점적 권리는 헌법에도 위배되는 것입니다.” 평군의 주요 지향점에 대해 ▲친일·군부독재 세력에 의해 왜곡 형성된 군대문화를 개혁하는 일에 앞장서고 ▲자주적 안보관을 국민의식 속에 확산시켜 동북아의 평화와 조국의 평화통일에 기여하며 ▲세계의 평화단체와 협력, 남북 제대군인간의 화해증진·군비축소 종용 등 평화정착 운동을 전개한다는 것 등이라고 역설했다. 이쯤에 이르러 그는 “군개혁의 핵심은 사관학교의 개혁”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군 간부 양성의 요람인 사관학교의 훈육이 ‘일제의 굴레’에서 아직도 못 벗어나고 있다는 것. 육사의 경우 5·16 때 쿠데타를 찬성하는 시가행진에 가담한 뒤 오히려 일제화된 경향이 뚜렷해졌다고 지적했다. 뿐만 아니라 12·12 쿠데타 후 육사는 ‘하나회’로 인해 개혁이 더욱 후퇴했으며, 김영삼 정권 때에는 이같은 하나회를 치는 것을 군 개혁으로 착각하는 오류를 범했다고 지적했다. 또한 육사를 개혁하려고 해도 그동안 붙박이 교수들의 반발,2년마다 다른 부대로 전출가는 간부들의 냉소적 분위기, 동창생들의 반대 등으로 사실상 개혁은 어림도 없는 일로 간주돼 왔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육사 출신 장교들은 오로지 진급에만 관심을 갖는, 이른바 정치장교·정치군인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순수성을 잃은 지 오래라고 비판했다. 아울러 최근 전방 GP소초 총기난사 사건도 따지고 보면 일제식 교육풍토에서 비롯된다고 설명했다. 한 예로 사병들간에는 병장(분대장)이 유일한 공적인 명령을 내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간 사병끼리 서로 존비어를 써가며 욕지거리가 오고 가는 군대는 우리나라밖에 없다는 것. 이등병, 일병, 상병 등은 전쟁에 대비해 편의상 서열을 정해놓은 것이지 평상시에는 계급 구분이 없다는 논리를 폈다. 미국의 경우도 장교와 사병간에 서로 장난질까지 할 만큼 얼핏 보기엔 무질서한 것처럼 보이지만 결과적으로 세계를 움직이는 합리적인 군대가 아니냐고 반문했다. 게다가 우리나라 사병들은 상급 지휘관에게 잘 보이기 위해 사역작업에 자주 동원되다 보니 사병들의 불만이 늘 상존해 있다는 것이다. 화제를 바꿔 문제가 된 선친의 남로당 전력에 대해 물었다.“아버지는 일제 때 중앙고보에 다니던 중 사회주의운동에 가담했다가 종로경찰서에 붙잡혀 퇴학을 당했다.”고 털어놨다. 그래서 중앙고보에서 경성전기학교로 옮겨 졸업한 뒤 한국전력의 전신인 ‘남선전기’(남전)에 취업했다는 것. 남전의 군산지점에서 일하던 선친은 차별대우의 부당함을 알리는 데 앞장서다가 수배대상이 되자 만주로 도망을 갔다. 광복 직후 선친은 다시 남한으로 돌아와 남전 광주지점에서 근무하게 됐고, 이때부터 본격적인 남로당 활동에 가담했다. 이때 표씨는 광주 대성초등 3학년이었다. 6·25전쟁이 나자 선친은 전남지역 노동조합 책임자로 부역을 하게 된다.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인민군이 퇴각하자 선친 역시 백두대간을 따라 숨어서 월북길에 올랐다. 그러나 충북 영동경찰서에 붙잡혔다. 이어 대전형무소로 이감되던 중 영어실력을 인정받아 미군 고문관 역할을 하게 되면서 겨우 목숨을 유지한다.6·25가 끝나자 부역활동이 들통날까봐 표씨 선친은 고향인 완도로 내려가지 못하고 거지나 다름없이 떠돌이 생활을 하게 된다. 표씨가 아버지를 오랜만에 만난 것은 고등학교에 진학할 무렵. 아버지한테 6·25 당시 부역했던 기록이 분실돼 고향에서는 그저 ‘사상가’로만 인식돼 있다고 귀띔해주자 그때서야 고향에 내려와 농사지으며 살았다고 회고했다. 특히 박정희 전 대통령보다 먼저 새마을운동을 펼칠 정도로 고향생각을 많이 했다고 부연했다. 표씨 선친은 90년 4월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표씨는 전남 완도 출신. 사범학교에 진학하라는 어머니의 권유를 뿌리치고 육사에 들어갔다. 생도시절 대대장 생도를 맡아 5·16 때 선배들의 강압에 못이겨 후배들과 함께 서울시청앞 시위에 가담했다.65년에는 맹호사단 기갑연대 11중대 부중대장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했다. 귀국 후에는 군개혁을 위해 나름대로 헌신하고자 전투병과에서 정훈으로 변경했다. 5·18 때에는 국방부 정신전력 연구팀장(대령)으로 광주파견 요원으로 차출됐다. 하지만 이때 신군부의 주문대로 보고서를 작성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3군단 정훈참모(중령 직급)로 좌천됐다. 이때 3군단장은 현 향군회장인 이상훈 중장이었다. 이어 표씨는 2군사령부 정훈참모로 자리를 옮겼고, 곧 이어 육본 정훈감으로 장군 진급을 했다. 표씨는 이때 군개혁과 관련된 로드맵을 작성하는 등 남다른 열의를 보이기도 했다.87년 전역 후에도 ‘개혁이 혁명보다 어렵다’는 저서를 통해 군 개혁을 설파했다. “남북한 제대군인이 만날 수 있도록 하고, 또 남북 합동으로 ‘6·25진혼곡’도 만들 생각입니다. 평군은 회비로 운영되며 이권사업과 정치적인 일체의 행위를 철저히 배제합니다. 평군의 목적은 뭐니뭐니해도 군 개혁이지요. 더 이상 ‘까라면 깔 것이지.’하는 식의 군대는 안됩니다.” 슬하의 1남1녀가 모두 결혼했으며, 아들 정훈씨는 현재 출판평론가로 활동 중이다. 표씨는 ‘맷돌에서 나온 온보리’ 철학을 거론하며 평군을 통해 군 개혁이 이루어지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는 지론을 거듭 강조했다. 글 김문기자 km@seoul.co.kr ■ 그가 걸어온 길 ▲1938년 전남 완도 출생 ▲58년 광주고 졸업, 육군사관학교에 입학. ▲62년 육사 18기 임관. ▲65년 중위 시절 베트남전 참전. ▲67년 전투병과에서 정훈병과로 변경. ▲79년 타이완 국방부 정치작전학교 수료. ▲80년 5월 국방부 정신전력 연구팀장으로 광주항쟁 현장 파견,3군단 정훈참모. ▲85년 2군 정훈참모에서 장성 진급. ▲87년 육군본부 정훈감으로 예편. ▲2003년 평화재향군인회 준비. ▲2005년 6월 평화재향군인회 발기 선언. ▲현재 군사평론가, 천주교인권위원회 위원, 민족문제연구소 지도위원 ■ 저서 개혁이 혁명보다 어렵다(2003년) 등.
  • [기고] 호국보훈엔 때가 따로 없다/박종권 한국보훈복지의료공단 이사장

    지난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었다. 동작동 국립 현충원 참배를 시작으로 각종 기념행사를 치르며 동분서주(東奔西走)하다 보니 어느새 한 달이 지나갔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순국하신 애국선열과 자유수호를 위해 산화하신 국가유공자의 고귀한 희생정신을 기리는 보훈의 달을 보내며 새삼 나라사랑의 마음을 되새겨 본다 현충일 오전 노무현 대통령은 이해찬 국무총리를 서울보훈병원에 보내 입원중인 국가유공자를 위문·격려했고, 이어 우리 공단이 운영하고 있는 전국 5개 보훈병원과 무의탁 고령 국가유공자와 유족이 생활하는 보훈원에는 각계각층의 단체와 인사들의 위문이 잇따랐다. 위문·격려해 주신 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린다. 보훈행사 중 28년째 이어오는 ‘효자·효부상 시상식’과 ‘장한 어머니상 시상식’이 있었다. 이는 전쟁으로 홀로되신 어머니를 극진히 잘 모시고 있는 자식이나 며느리에게 주는 상이며, 또 남편을 잃고 가난과 모진 세파 속에서도 어린 자식들을 훌륭히 성장시킨 전쟁미망인에게 주는 상이다. 어디 부모를 정성스럽게 모시지 않는 자식이 있고,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가 있을까마는 전쟁으로 가장(家長)과 든든한 자식을 잃고도 꿋꿋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미담은 우리에게 또 다른 감동과 함께 애틋한 마음을 갖게 한다. 6·25전쟁, 월남전 등에서 자식을 잃은 부모의 단장(斷腸)의 아픔, 남편을 잃은 아내의 애절한 몸부림, 그리고 아버지의 전사(戰死)로 하루아침에 고아가 되어 의지할 곳이 없어진 유자녀들의 슬픈 성장기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가슴이 미어진다. 지금이야 그 분들의 희생으로 우리나라가 세계 10대 경제강국이 되었지만, 그 분들이 희생했던 1950,60,70년대 한국의 시대상황을 생각하면, 가장의 죽음 앞에 남은 가족들이 겪었을 절망감과 상실감이 얼마나 컸을까. 또 사별의 아픔을 가슴에 묻고 슬픔과 인고의 세월을 살아온 전쟁미망인과 유자녀의 삶은 또 얼마나 고달팠을까. 시상식에서, 자식 잘되기를 기원하며 모든 것을 바쳐온 시부모님을 지성으로 보살펴 드리는 것은 자식의 도리로,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라는 어느 며느리의 답사에 모두가 박수를 보냈다. 또 성장한 자식들과 손자·손녀의 재롱을 보며 이제는 웃을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고 말씀하시는 할머니의 미소 띤 얼굴에 새겨진 깊은 주름살에서 쉼없이 달려온 고단한 우리 현대사를 볼 수 있었다. 보훈(報勳)에는 시기와 때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국가를 위해 희생하신 분들을 기리고 유족을 받드는 일은 상시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보훈이란 물질적 보답이나 거창한 배려만이 전부가 아니다. 일상에서 그 분들에 대한 공경스러운 태도나 따뜻한 말 한마디가 가장 감동적인 보훈인 것이다. 보훈이란 국가유공자의 명예를 지키는 일이며, 동시에 국민들에게 나라사랑을 각인하는 소중한 길이다. 이를 위해 정부에서도 1.7%인 보훈예산을 선진국 수준(호주 5.5%, 미국 2.8%, 대만 2%)으로 늘려 국가유공자와 유가족에 대한 지원을 확대하고, 의료와 복지시설 확충에도 적극적인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 광복 60년,6·25전쟁 발발 55년을 맞는 올해의 호국보훈의 달은 국가유공자와 유가족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나라를 지키는 것이 시기가 정해져 있지 않은 것처럼,6월만이 호국보훈의 달이 아니다. 고귀한 생명을 바친 분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항상 우리들 가슴 속에 간직하며 보은할 때, 더욱 부강한 조국을 후손에 물려줄 수 있음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 박종권 한국보훈복지의료공단 이사장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한국의 슈베르트’ 작곡가 최영섭 씨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한국의 슈베르트’ 작곡가 최영섭 씨

    우리는 분단시대에 살고 있다. 좌로, 우로 한(恨)도 많다. 그래서 목놓아 ‘저편의 너를’ 부르고 그리움으로 손을 뻗는다. 광복 60년이 됐지만 분단의 노래는 여전히 단장(斷腸)의 메아리다. ‘봉선화’(1919년) 이후 한국 가곡 86년사(史)에서 가장 애창된다.‘그리운 금강산.’ 분단의 비극과 통일의 염원을 켜켜이 담아냈다. 시보다 더 아름다운, 소설보다 더 감동으로 승화시킨 악상(樂想)이다.‘통일 주제가’로 ‘민족 가곡’으로 사랑받는다. 들을수록 애틋하고 향수가 있고 경건하다. 옛날이었다. 한 시인이 음악가를 꿈꾸는 중학생과 인천 앞바다를 거닌다. 시인은 오른쪽 주머니에서 소주병을 꺼내 벌컥벌컥 술을 들이켠다. 시인은 “이봐, 한 수 읊을 테니 적어봐.”라고 했다. 그러곤 “잊어버리자고, 바다 기슭을 걸어보던 날이”라고 소리친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바닷바람이 불었다. 성질 급한 학생은 “다음은요?”라고 했다. 시인은 다시 술을 마시며 “하루 이틀 사흘, 여름 가고 가을 가고, 조개 줍는 해녀의 무리 사라진 겨울 이 바다에”라고 했다. 학생은 또다시 “다음은요?”라고 보챘다. 시인은 또 목구멍으로 술을 꼴깍 넘기며 “잊어버리자고, 바다 기슭을 걸어가는 날이 하루 이틀 사흘….” 학생은 이튿날 가곡을 만들어 화답했다. 1954년 어느 날이었다.25살의 젊은 청년이 처녀가곡집을 냈다. 그러자 서울신문 문화면 전체에 다음과 같이 신랄(?)하게 비판하는 글이 게재됐다.‘악보 출판치고는 사상 최악이다. 그러나 이 청년의 장래를 정말 주목하지 않으면 안된다….’ 앞의 시인은 2003년 작고한 조병화씨. 해방 직후 경복중학에 다니는 최영섭 학생과 인천 앞바다를 거닐며 ‘추억’이라는 시를 발표했을 때의 상황이다. 두번째는 청년 최영섭이 가곡집을 내자 당시 작곡가 나운영씨가 주저없이 나서 역설적으로 호평했던 일화다. 최영섭(77)씨.‘한국의 슈베르트’라고 한다. 샘솟듯 넘쳐 흐르는 악상과 특유의 직감으로 무려 200여곡의 가곡을 작곡해 ‘가곡의 왕’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중 ‘누구의 주재런가∼’로 시작되는 ‘그리운 금강산’은 새삼 설명이 필요없을 만큼 민족의 송가(頌歌)로 널리 애창된다. 이 노래가 탄생된 지 올해로 45년째. 서울 종로구 세종로의 한 커피숍에서 최씨를 만났다.“희수(喜壽)가 됐으면 다 평화로워야 하는데….”라고 했다. 사연을 들어보니 지난 4월에 막내아들을 잃었다. 폐암으로 병원에 입원해 있는 4년 동안 온 집안 식구가 백방으로 살리려고 노력했지만 끝내 가슴에 못질하고 세상을 떠났다는 것. 최씨는 현재 서울 서대문구 모래내 한 주택가에서 반지하 월세방을 얻어 혼자 쓸쓸히 지내고 있다. 원래 세 아들을 낳은 본처는 암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한참 동안 혼자 살다가 모 방송국 PD의 중매로 둘째 부인을 만나 살았지만 1997년 뜻하지 않은 이유로 헤어졌다. 평생 살려고 약속했던 부인에게 재산을 다 주고 났더니 빈털터리가 됐단다. 그룹 ‘들국화’ 멤버였던 큰아들이 경기도 과천 집에서 함께 살자고 원하지만 집에 쌓인 책이며 음악자료들이 정들어 아직은 혼자 지내기로 했다. “평생 가곡을 만들면서 살아왔어요. 올해가 광복 60년이고 분단 60년이 됩니다.‘그리운 금강산’을 만들 때는 곧 통일도 될 것 같았는데. 솔직히 더 이상 ‘그리운 금강산’이 불려져서는 안됩니다. 세월이 지난 뒤 ‘아, 옛날 그런 노래가 있었구나.’ 하는 정도면 족하지요.” ‘올해의 의미’에 대해 오는 11월11일이 제1회 가곡의 날로 선포된 점을 강조했다. 최씨 등 가곡인들의 오랜 노력 끝에 얻어진 결실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9월8일부터 매주 목요일 가곡 연주회를 갖는다. 아울러 전야제 행사로 서울 종로구 신문로 옛 중앙기상대 건물 바로 옆 홍난파 선생이 살던 집에서 ‘봉선화의 집’이라는 현판식을 갖는다. 최씨는 “난파 선생이 돌아가시기 1∼2년 전 협박에 못이겨 일본군가를 편곡했는지는 모르지만 생전에 민족 가곡 100여개를 작곡할 만큼 우리들에게 많은 용기를 불어넣어준 위대한 작곡가가 아니냐.”고 강조했다.‘봉선화’를 작곡하는 등 평생의 95%는 우리 가곡과 동요에 헌신하고 독립을 간절히 원하며 살았는데 왜 그가 친일파로 매도돼야 하는지 이해가 안 간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리운 금강산’의 탄생시절로 거슬러 올라갔다.1961년 8월이었다.KBS(남산 시절)에서 ‘남산에 올라’‘한강의 노래’‘낙동강 칠백리’‘백두산은 솟아있다’ 등 정열적인 작곡 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다. 하루는 한용희(‘파란 마음 하얀 마음’ 작곡자)씨가 남산 ‘산길다방’에서 차를 마시자고 했다. 다짜고짜 “최 선생, 한강 백두산 낙동강을 다 다루면서 정작 금강산은 왜 안하는 거요.”라고 불쑥 말했다. 아차, 무릎을 탁 친 최씨는 그 길로 시인 한상억(92년 작고)씨를 찾아갔다. 숨가쁜 목소리로 “한 선생님, 여태껏 금강산이 없습니다.”고 했다. 한씨는 “허허, 나는 이미 다 써놓고 있었네. 안그래도 줄 참이었지.”라고 했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새벽 2시까지 ‘콩나물’과 씨름했다. 다른 곡 같으면 며칠이 걸렸을 법한데 ‘그리운 금강산’은 4∼5시간 만에 완성했던 것. 이튿날 방송국에 악보를 전달하고 곧 녹음에 들어갔다. 서울대 음대 동창인 이남수씨가 지휘했다.3일 뒤부터 KBS 가곡프로그램인 ‘이주일의 노래’에 연달아 방송됐다. 팬레터가 쇄도했고 32세의 청년 최영섭은 일약 가곡계의 스타로 떠올랐다. 이듬해 6·25전쟁 발발 12주년 때 서울 명동의 시공관에서 ‘아름다운 내강산’이란 주제로 KBS교향악단·합창단 등의 협연으로 ‘최영섭 가곡특집’을 발표했다. 이때 받은 30만원(당시 집 한채 값)으로 둘째 아들의 병원비를 충당했다. 생애 가장 잊지 못할 추억이다. ‘그리운 금강산’은 국내외 정상급 성악가 50여명의 CD에 담겨 있다. 조수미를 비롯해 플라시도 도밍고, 루치아노 파바로티, 소프라노 홍혜경, 그리고 세계적 음반회사 데카에서 낸 소프라노 안젤라 게오르규의 ‘마이월드(My World)’에도 ‘그리운 금강산’이 포함돼 국내외에서 애창된다. 최씨는 인천시 강화군 화도면에서 태어났다. 여섯살 때 동네 병원에서 축음기를 통해 클래식 음악을 자주 들었다. 또 마니산에 올라 연평도 쪽에서 들려오는 ‘경기뱃노래’에 매료됐다. 초등3학년 때 호르겔피아노를 처음 접하면서 천부적 음감을 확인했고 이화여고에 다니는 누나한테 음악을 배웠다. 인천중학 재학 시절에는 바이엘과 체르니를 독학으로 배웠다. 서울 경복중학으로 전학한 후 이화여대의 임동혁 교수한테 작곡수업을 받았다.49년 경복중학 6년(당시 6년제)때 첫 작곡발표회를 가졌다. 서울대 음대 시절에 김성태 선생을 만나면서 오늘날 민족 작곡가의 길을 걷게 된다. “올해 김성태 선생한테 세배를 갔더니 세뱃돈 3만원을 주더군요. 그분은 96세의 나이에도 동요를 작곡하고 있어요. 여전히 배울 점이 많아요.” 최씨는 지금까지 가곡 외에 편곡 1600여곡, 기악곡 40여곡을 만들었다. 미발표된 것도 수십곡에 이른다. 재산은 하나도 없지만 가득 쌓인 문학책과 음악자료들을 볼 때마다 남부럽지 않게 여긴다. 혼자 맥주 마시며 책들과 대화하는 시간이 가장 행복하다는 그는 올 가을에 발표될 신곡 20곡을 기대해 달라며 식지 않은 창작열을 과시했다. 오래전부터 ‘고운산’이란 필명으로 작사도 한다. 건강유지 방법을 물으니 “지하철이 곧 헬스클럽이다. 음악이 있어 인생은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라며 웃었다. 생활비는 저작권료로 받는 월 200만∼300만원으로 충당한다. km@seoul.co.kr ■ 그가 걸어온 길 ▲1929년 강화 출생 ▲49년 경복고 졸업, 제1회 작곡 발표회, 임동혁 교수에게 작곡이론 사사 ▲54년 서울대 음대 작곡과 졸업, 재학시절 김성태 교수에게 작곡이론 사사. 오스트리아 빈 국립음악대학원 석사 ▲61년 ‘그리운 금강산’ 작곡 ▲62년 6·25 12주년때 서울 명동 시공관에서 ‘최영섭 특집 가곡 발표회’ 개최. 이후 작곡발표회 5회. ▲76년 드라마 주제가 ‘아, 이조 오백년’ 작곡 ▲95년 광복50주년 기념교성곡 ‘오 사랑하는 나의 조국’ 전 24장 발표. ▲가곡 ‘모란이 피기까지’‘추억’‘망향’ 등 200여곡 작곡. ▲인천여중고·인천여상고·이화여고·한양대·상명여대·세종대 등에 출강. ▲현재 작곡가회 부회장, 한국예술가곡진흥회 회장. ■ 상훈 인천시문화상(59년), 경기도문화상(61년),MBC방송대상(87년), 대한민국 방송대상(92년),MBC가곡 공로대상(94년), 한국음악상(96년), 세종문화상(98년), 서울시문화상(2001년)
  • [주말화제] “인생에 퇴직은 없다”

    [주말화제] “인생에 퇴직은 없다”

    “인생에 정년퇴직이 어디 있어. 열심히 일하는 모습 보면 저승사자도 왔다가 그냥 가는 법이지.”일흔 가까운 나이에 발명한 수도 밸브로 특허까지 출원한 김예애(74) 할머니는 국내 최고령 벤처기업 사장이다. 인터넷과 이메일도 자유자재로 쓰는 김 할머니는 “몸의 나이는 마음을 따라가는 법”이라고 얘기한다. 나이 70,80에도 현장을 지키는 ‘꿈많은 노년’들이 있어 ‘사오정’(45세 정년)과 ‘오륙도’(56세까지 회사에 다니면 도둑)란 말을 무색하게 하고 있다. 대한은퇴자협회가 주 20시간 이상 일하는 노령자들에게 주는 ‘히어로(Hero·영웅)상’의 수상자로 뽑힌 이 시대의 진정한 영웅들을 만나봤다. ●일흔 넘어 벤처 창업 우수노령히어로상을 받는 김 할머니는 페달을 이용해 발로 수도꼭지를 열고 잠그는 ‘발바리수도’를 발명했다. 어느날 며느리가 물을 틀어놓은 채 설거지하는 모습을 보다 바쁜 손 대신 발로 수도꼭지를 조정하면 물을 아낄 수 있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김 할머니는 곧바로 서울 을지로 뒷골목을 찾아가 1년을 헤맨 끝에 마음 맞는 수도기술자를 만나 1999년 제품을 만들었다. 혼자 벤처인증까지 따낸 김 할머니는 2001년부터 ‘발바리수도’를 상품화해 판매하고 있다. 젊은 시절, 남편을 잃고 혼자 아들을 키우며 이일 저일 닥치는 대로 해야했던 경험이 노익장의 원동력이다. 김 할머니는 “일을 쉬면 오히려 병이 났다.”면서 “나한테 이제 그만 쉬라는 말은 죽음을 재촉하는 몹쓸 얘기”라고 말했다. ●“승객과 인생이야기가 보람” 같은 상을 받는 배용복(79) 할아버지는 50년 무사고를 자랑하는 서울택시운송조합 소속 최고령 운전기사다.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에 하루 12시간씩 택시운전을 한다. 평북 구성 출신인 배 할아버지는 일제 때 하사관학교를 나와 중국 하얼빈에서 군인생활을 했다. 광복 직후 고향에 돌아와 인민군에 입대,6·25전쟁에 참전했지만 전쟁 도중 공산주의에 염증을 느끼고 남한에 투항했다. 이후 미군부대 운전기사로 남한에서 새 삶을 시작했다. “택시일은 자유롭고 사람을 많이 만날 수 있어 좋지. 예순일곱이 되던 93년 개인택시 운전을 그만뒀는데 얼마후 택시회사에 다시 입사했어. 손님들에게 인생경험 들려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야말로 인생의 낙이자 훌륭한 건강 유지법이야.” ●“정년퇴직자는 베테랑 인력” 울산에 있는 조선하청업체 ㈜혁신기업은 정년퇴직자들의 모여 만든 회사로 이번에 노령자 고용 우수기업으로 선정됐다. 설립자는 20년 동안 현대중공업에서 기능공 관리직으로 일하다 정년퇴직한 김창원(69)씨.2001년 선수·선미 블록조립 부문의 퇴직 기능인들을 모아 회사를 차렸다. 처음에는 “퇴물이 된 사람들이 무슨 창업이냐.”는 이야기도 들었지만 깔끔한 솜씨로 입소문이 나 지금은 연간 10억원대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직원 40여명의 평균연령이 64세인 혁신기업에는 정년퇴직이 없다. 건강이 좋지 않아 스스로 퇴사하기 전까지는 모두 ‘현역’이다. 김씨는 “우리 직원들 모두 여든까지는 끄떡 없다고 자신하고 있다.”며 밝게 웃었다. 히어로상 시상식은 28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다. 유지혜기자 wisepen@seoul.co.kr
  • [기고] ‘나라사랑 큰 나무’를 키우자/최완근 국가보훈처 보훈선양국장

    우리 현대사에는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 있을 때 풍찬노숙하며 생명을 걸고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독립유공자와 자유민주주의를 지켜낸 호국유공자, 그리고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독재에 맞서 싸운 민주유공자들의 숨결이 서려 있다. 이 분들의 희생과 공헌의 바탕 위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존재한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국민의 80%는 전후 세대인 탓인지 독립운동이나 6·25전쟁 등을 나와 상관없는 단순한 역사적 사건으로 치부하고 잊어버리고 있는 것 같다. 여기에 더해 우리 사회는 미래를 위한 진통이기는 하지만 지역·계층·세대, 그리고 이념간 갈등마저 겪고 있고, 사회 전반에 걸쳐 이기주의가 만연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그 심각성이 표출되는 빈도도 잦아지고 있는 실정이다. 최근 들어 사회지도층 인사가 자녀의 병역을 피하기 위해 국적을 포기하는 사태에까지 이르면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차치하고 도덕적·정신적 황폐마저 우려되는 형국이다. 이같은 세태만 보더라도 국가보훈의 참 의미를 다시 강조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국가 보훈은 대한민국의 과거-현재-미래’라는 국가보훈처의 비전은 국가 보훈의 당위성을 국민과 함께 공유하자는 의지의 표명이다. 국가보훈 즉, 나라사랑 정신은 과거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현재의 실천정신이고 지역·계층·세대간의 통합을 이끌어 미래를 보장하는 절실한 가치이며 잘못된 역사의식을 치유할 수 있는 보약이다. 프랑스 영국 캐나다 호주 등 제1차 세계대전 연합국들은 거의 1세기전의 사건임에도 제1차 세계대전 휴전일을 기념해 매년 11월11일에 전사자의 넋을 기리고 있다. 특히 영연방 국가들은 이날을 ‘포피데이(Poppy Day)’라고 부르며 인조 양귀비꽃(Poppy)을 가슴에 달고 호국·보훈정신을 되새긴다. 포피데이는 1차 세계대전 당시 가장 치열한 전투지역중 한 곳인 벨기에의 플랜더스 들판에 뿌려진 장병들의 핏자국마다 양귀비꽃이 피었다는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일제에 국권을 침탈당하고 동족상잔의 전쟁까지 겪었음에도 놀랄 만한 경제성장을 이룩하고, 인간에게 천부적으로 주어진 인권을 수호하고 민주주의를 확립하기 위해 싸워 온 우리나라야말로 이들 영연방 국가에 못지않게 국민들이 보훈의 의미를 더욱 되새기고 계승 발전시켜야 옳을 일이다. 그동안 국가보훈처에서는 이러한 희생과 공헌이 정신적 귀감으로 받아들여지고 나라사랑 정신으로 계승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해 왔는데 무엇보다 보훈의 사각지대라 할 수 있는 10∼30대가 시각적으로 느낄 수 있는 상징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그래서 전국민이 공감할 수 있는 디자인을 공모하여 태어난 게 ‘나라사랑 큰 나무’이다. 국가보훈처는 우리사회에 나라를 사랑하는 문화를 확산시키고 국민통합과 국가발전의 정신적 토대 구축에 기여를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나라사랑 큰 나무’ 달기 운동을 벌이고 있다. ‘나라사랑 큰 나무’는 국가유공자의 희생과 공헌을 바탕으로 오늘의 풍요로움이 있으며 우리 모두의 희망과 내일의 번영을 위해 함께 노력하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운동의 캐치프레이즈인 ‘당신의 나라사랑이 대한민국을 키워갑니다.’는 “한 국가가 어떻게 존립하고 발전할 수 있는가.”라는 담론을 담고 있다. 이를 상징화한 ‘나라사랑 큰 나무’배지를 국민 모두가 자연스럽게 가슴에 달고 널리 알림으로써 이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정신가치를 창출하고 희망찬 내일로 가는 지름길을 열어 가야겠다. 우리의 나라사랑이야말로 대한민국을 키워가는 힘이요 역사발전의 동력임을 다시 한번 되새기는 호국보훈의 달이 되었으면 한다. 최완근 국가보훈처 보훈선양국장
  • 이종석 NSC차장 심야 회담장 방문 시위 정보에 종합촬영소 방문 취소

    제15차 장관급회담 이틀째인 22일 밤 이종석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차장이 회담장이자 숙소인 워커힐호텔을 찾아 눈길을 끌었다. 이 차장은 밤 9시50분쯤 호텔에 도착했으며, 기자들과 마주치자 “정동영 통일부장관을 만나러 왔다.”고 말했다. 이 차장은 호텔 17층 우리측 대표단 상황실에서 대책을 협의한 뒤 두 시간 가까이 지난 11시40분쯤 로비로 내려왔으며, 정 장관이 “내일 아침에 일찍 깨우지 말라고 하더라.”라고 귀띔했다. 북측 대표단의 23일 청와대 예방을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이 차장이 호텔을 찾아왔다는 점에서 북측 권호웅 단장을 면담한 게 아니냐는 관측도 일부에서 제기되기도 했다. 남북은 오후 6시30분부터 7시45분까지 실무대표 접촉을 가졌다. 김홍재 대변인은 “추가 접촉은 없고 내일은 마무리를 지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서울 쉐라톤워커힐호텔 무궁화홀에서 열린 전체회의에 앞서 정동영 통일부장관과 만난 권호웅 내각 책임참사는 남북관계를 속담과 은유적인 화법 등으로 빗대 설명해 눈길을 끌었다. 그는 회담 테이블인 원형탁자를 보며 “세상 만물이 원이고 태양과 대지도 둥근 원형이므로 자연에 존재하는 원형을 북남회담에 구현한다는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원형 테이블이 상징하는 남북간 회담 문화 변화는 작은 부분까지 이어졌다. 남측 대표단은 전체회의를 마친 직후 이례적으로 남측 기조발언문 요지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취재진에 배포하고 북측 기조발언까지 소개하기도 했다. 특히 북측 대표단은 폴라 도브리안스키 미 국무부 차관이 입국 하루 전날 북한을 ‘폭정의 전초기지’라고 또다시 언급한 데 대해서도 아무런 언급이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이어가려는 모습이 역력했다. 한편 이날 오후 북측대표단이 경기도 남양주 종합촬영소를 방문하기로 했다가 취소하는 해프닝이 빚어졌다. 정부 관계자는 “탈북자 관련 단체들이 현지에서 납북자 생사 확인 등을 주장하며 시위를 벌인다는 정보를 듣고 북측이 안전상의 이유를 들어 부득이하게 방문을 취소했다.”고 밝혔다. 대신 북측 대표단은 서울 잠실 선착장에서 유람선을 타는 것으로 일정을 변경했다. 남양주에서 북측 대표단의 방문 소식을 접한 북한민주화학생연대 등 5개 피랍·납북자단체와 피랍탈북인권연대 소속 회원 30여명은 ‘6·25전쟁 납북자 생사확인’과 ‘국군포로-민간인 납치자 생사확인’ 등을 요구하며 오전부터 1인 시위를 벌인 것으로 알려졌다.구혜영기자 koohy@seoul.co.kr
  • [마니아] 축구와 ‘황혼결혼’한 사람들

    [마니아] 축구와 ‘황혼결혼’한 사람들

    “노인 축구단이라니, 노인은 무슨…. 실버 축구단이라면 모를까.” 지난 19일 오전 9시쯤 경기도 고양시 대화동 고양종합운동장 옆 운동장에서 만난 ‘60대 축구’ 동아리 회원들은 “정식으로 팀 이름을 뭐라고 하느냐.”는 물음에 이처럼 하나같이 해명 아닌 해명에 바빴다.60대 동아리이지만 사실은 60세 넘는 사람이 모인 축구 마니아들이다. 축구 인기가 높아지면서 동호회가 눈에 띄게 많아져 이렇게 연령대별로 쪼개졌다. 흔히 60대라고 부르지만 60대 이상이 한 팀을 이룬다. ●모이는 게 전력의 50% 경기에서는 60∼64세 7명과 65세 이상 4명이 뛴다. 따라서 교체 때도 생활체육축구연합회가 마련한 이 규정 안에서 해야만 한다. 요즈음 60대라면 ‘이제 시작’이라지만 아무래도 고령자들인 점을 감안해 한 팀에 기울지 않도록 나름대로 배려한 것이다. 고양 60대 축구단에도 70대가 4명이나 들어 있다. 고양 60대 팀은 모두 27명으로 이뤄졌다. 막내가 우리 나이로 올해 60세, 맏형은 75세나 됐다. 이날은 고양시와 서울 중랑구의 대표들이 친선경기를 갖기로 했다. 두 지역에서 50대,60대 팀이 각각 그동안 갈고 닦은 실력을 겨룬다. 오전 10시 조금 넘어 먼저 50대들이 경기에 들어갔다. 그 사이에 머리 희끗희끗한 어르신들이 승용차를 몰고 하나 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더러는 젊은이들 말로 럭셔리한 고급 오토바이를 타고 오기도 했다. “이 운동장도 우리가 만들었어. 비록 흙먼지가 날리지만 이만한 곳이 드물어 서로 경기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이 들어오지 뭐야. 축구를 아끼는 사람들이 만들어 웬만한 잔디 경기장 뺨치지.” 지난해까지 9년째 생활체육 서울시 축구연합회 사무처장을 지내 ‘마당발’로 불리는 이기영(62)씨는 이렇게 자랑을 늘어놓았다. 2003년 군부대와 협의, 땅을 축구장으로 사용키로 하고 서울에서 모래를 퍼다 나르는 등 피땀을 쏟아부은 끝에 훌륭한 연습장 겸 경기장이 들어섰다. 동호회는 늘어난 반면, 마땅히 뛸 곳은 모자라는 형편에 그들에게는 전용 경기장인 셈이다. 10시10분 가까이 되자 선수들 사이에 웅성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경기를 해야 할 시간이 10분 남짓밖에 남지 않았는데 얼굴을 내민 선수가 몇명 안됐기 때문이다. “마냥 기다릴 수야 있나, 준비해. 얘는 이제 연신내라고 하네. 다른 애라면 20분 안에 오겠지만 걔는 콤파스가 짧아서(키가 작아서) 어림도 없어.” 팀 살림살이를 맡은 조용복(63) 총무가 다급했는지 휴대전화로 어딘가 연락한 뒤 이렇게 웃으며 말했다. 한쪽에서 보이지도 않는 얼굴에 대고 호통을 치자 화를 참으라는 뜻으로 “형, 즐거운 일요일이야.”라는 우스갯소리를 던지자 잠잠해졌다. ●옛 국가대표가 ‘도우미’ 고양 60대 동아리에는 국가대표팀 유니폼을 입은 선수가 3명 끼었다. 이이우(65), 서윤찬(65), 정병탁(64)씨가 바로 주인공들이다. 이들 덕분에 화합도 잘 되는 편이어서 고양 60대의 전력은 전국에서도 최강팀 축에 속한다. 올 들어 지난달 15∼16일 열린 전국한마음대회에서는 경기도 대표로 뽑혔지만 아깝게 3위를 차지했다. 부산이 라이벌로 꼽힌다. 하지만 회원들은 “다들 나이든 몸이라 한 경기라도 더 뛴다는 게 수월찮은 마당에 4강전에서 맞붙은 팀이 부전승으로 올라와 1대2로 역전패하고 말았다.”고 아쉬움을 나타냈다. 1963년부터 70년대 말까지 태극마크를 달았던 정씨는 “내 역할은 경기 앞뒤로 자문을 해주는 것”이라면서 “경기에도 나가지만 골을 넣도록 볼 배급하는 데 애쓴다.”고 말했다. 따로 아마추어라 공식적인 훈련이라는 개념은 있을 수 없다.”고 귀띔했다. 일산 화정지구에서 초등학교 고학년을 대상으로 ‘정병탁 축구교실’을 운영하며 꿈나무들을 발굴, 추천해주는데 은퇴 뒤에도 보람을 느낀단다. 여자 국가대표팀 감독을 지낸 이이우씨가 저학년을 맡고 있으니 축구 새싹들을 길러내는 양대 축이라 할 만하다. 그는 “70대 선배들이 날마다 6시부터 7시까지 조기 축구회에 나가 운동을 할 정도로 열성이어서 오히려 부끄러울 때도 있다.”고 일러줬다. 아들 상만(31)씨는 아마추어 때만 해도 안정환과 어깨를 겨루다 고질적인 부상을 끝내 극복하지 못하고 현재 부산 동의대에서 지도자 수업을 받고 있다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김상영(75)씨는 “6·25전쟁 중이던 52년 공군에 입대해 64년까지 복무했는데 부대 대표로 전국대회에 나가기도 했다.“고 웃었다. ●젊은이 저리 가라는 투혼 “부인 등 집안 식구들이 혹시 싫어하지 않느냐.”고 묻자 “나이 먹으니 다툴 일도 사라져 마음 편하게 즐길 수 있고, 건강도 덤으로 챙겨 좋다.”고 말했다.“몇년 전만 해도 상당히 빠르다는 말을 제법 들었는데 요즈음은 처진다.”고 뽐냈다. 50대 경기가 막을 내리자 군데군데서 몸을 풀며 준비하던 실버 선수들이 운동장 가운데로 모여들었다. 힐킥과 왼발, 오른발 가리지 않고 좁은 공간을 비집는 패스워크 등 몸놀림이 예사롭지 않다 했더니 전반 2분 첫 골이 터졌다. 고양 최고의 골잡이로 불리는 포워드 김창식(62)씨가 골문 왼쪽에서 3명을 간단찮은(?) 발재간으로 가볍게 제치고 오른발로 톡 차넣어 그물을 뒤흔들었다. 그는 16개 시·도 대표끼리 다투는 한마당대회에서도 3경기에서 6골을 뽑아냈다. 정병탁씨는 미드필드 중간쯤에서 상대방 볼을 가로채 왼쪽으로 김씨에게 찔러넣어 결국 결승골에 도움을 줬다. 그러나 볼에 대한 욕심은 끊임없어 경기장 안팎에서는 “공만 쳐다보지 말고 사람을 봐야지.” “야,(위치가)너무 처졌어.” “기다리니까 그런 거야.”라는 등의 말이 쏟아져 나왔다. 슈팅한 볼이 공중으로 한참 빗나가자 “쟤는 너무 잘 차서 탈이야.”라는 핀잔이 나왔고, 드리볼하다가 빼앗기기라도 하면 “쟨 어려서 그래.”라고 점잖게 위로하기도 했다. 두번째 골도 전반 22분 고양 골잡이에게서 터졌다. 역시 위기 뒤에는 기회가 찾아왔다. 상대방에게 단독 찬스를 내줬다가 어렵게 막아낸 고양 60대는 김씨가 이번엔 오른쪽에서 골대를 맞고 나온 볼을 강하게 차넣어 2대0으로 1차전을 끝냈다. 경기는 전·후반 없이 30분 한판으로 했다. ●“뼈 부러져도 좋은 걸” 이런 방식으로 50대와 60대가 번갈아 경기를 벌여 이날 하루에만 오후 4시까지 각각 6경기를 치렀다. 낮 12시10분쯤 60대 두번째 경기가 끝나자 중랑구 60대와 수박, 참외 등 과일과 도시락으로 된 점심식사를 즐겼다. 더위를 못 이겨 웃통을 벗어 몸을 식히는 사람들도 있었다. 경기 중에 뛰는 모습을 지켜봤는지 고양 60대 선수가 중랑구 50대 선수에게 “나이가 어떻게 됐지. 한 (쉰)일곱 됐나.”라고 말을 건네자 “예순일곱 말인가요.”라고 농담한 뒤 얼른 줄행랑을 치기도 했다. “경기장 바깥에서 보면 뛰는 모습으로는 나이가 믿기지 않는다.”는 말에 김씨는 유니폼으로 땀을 훔쳐내며 “타이틀 걸린 것도 아니고 지칠 때까지 뛴다.”고 말했다. 지난 12일 남양주에서 열린 한수(漢水)이북 대회에서는 전·후반 각 25분짜리 3경기를 모두 풀타임으로 뛰었단다. 고양 60대 강기창(72·미드필더) 회장은 “초·중·고교를 거쳐 육군에서 20여년간 배구선수 생활을 했다.“면서 “특히 정식으로 운동을 한 사람이 쉬어버리면 몸이 더 망가져 관리가 필요한 데다 건강을 챙기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으로 일요일이면 이곳에 나온다.”고 말했다. 이기영씨는 “30대 때 경기 중 공중 볼을 다투다가 거꾸로 넘어지는 바람에 이빨 3개가 부러지고 무릎을 다쳐 한참 고생한 적이 있다.”면서도 “그러나 축구로 반평생을 지내온 지라 운동장에 나오지 않으면 몸이 근질근질해질 정도”라며 웃었다. 초등학교 교장으로 은퇴한 신현문(68) 회원도 “포항 동지중·강릉사범 재학시절 농구선수로 활약했다.”면서 “친구들 가운데에는 ‘땅 밑에서 잠자고 있는 애들’도 많은데 나에겐 50대 말이나 60대 초로 보인다는 얘기를 많이들 한다.”고 자랑했다. 이러한 60대 청춘들에게 한가지 걱정이 생겼다. 팀을 이끌어가는 박광규(68) 감독이 대장암이라는 선고를 받고 병원에 입원했는데 종양이 골수까지 번졌다는 소식이 들려와서다. 운동준비 등으로 길게는 오전 8시부터 8시간이나 비지땀을 흘린 터여서 몸은 가뿐하지만 저마다 마음 한편에서는 한달 보름간 병상신세를 지고 있는 감독의 쾌유를 빌며 운동장을 떠났다. 글 송한수기자 onekor@seoul.co.kr
  • [어떻게 지내세요] 민속예술단 운영하는 국악 만담가 김뻑국씨

    “서방님의 양말을 꿰맬 때 본처는 이빨로 실을 끊고, 둘째 마누라는 가위를 사용합니다. 셋째는 냄새를 맡고는 아예 양말을 버리지요.(웃음)” 만담가 김뻑국(72)씨. 한때 한국의 찰리 채플린이란 별명을 얻을 정도로 ‘재담의 명인’으로 불렸다.40대 중반 이상에겐 많은 추억을 남겨놓고 있다. 하지만 고춘자·장소팔 등 당대를 풍미한 만담가들이 이미 세상을 떠났고,‘젊은 개그’에 밀려 ‘만담’은 대중들과 점점 멀어지고 있는 추세다. 수소문 끝에 서울 종로3가 ‘김뻑국민속예술단’ 사무실을 찾았다. 김씨는 “만담이란 춥고 배고팠던 시절 민초들의 해학이자 한풀이였다. 또 격조높은 풍자로 교육적 효과도 컸다.”면서 ‘만담’에 대한 문화재 지정을 하지 않아 사라질 위기에 놓여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김씨는 올해로 소리와 만담인생 45년째. 본명은 김진환(金鎭煥)이다.‘뻑국’은 60년대 초 방송 데뷔 때 뻐꾸기 효과음을 잘 내 예명이 됐다. 그는 일본에서 태어나 열살 때 원폭투하를 목격한 뒤 귀국, 부친의 출생지인 충남 보령에 정착했다. 머슴살이와 학교생활에서 계속 ‘왕따’를 당하자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채 기차를 타고 무작정 서울역에 내렸다. 정처없이 돌아다니다가 뚝섬 근처에서 국악인 이충선씨를 우연히 만나 1년6개월 동안 머슴생활을 했다.6·25전쟁이 발발하자 용인으로 피란갔다. 53년 가을 서울로 다시 올라온 그는 때마침 탑골공원에서 공연 중인 국악인 최경명씨를 만났다. 장구와 피리를 어깨너머 배우면서 ‘약장수’ 생활을 했다.60년 초에는 음악학원에서 이창배 선생한테 경기민요를 배웠다. 아울러 배뱅잇굿으로 유명한 이은관 선생을 만나 30년 가까이 동고동락했다. ●“이후락 정보부장 인연으로 유명해져” 김씨가 만담가로 유명해질 수 있었던 것은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의 인연이 작용됐다.72년 7·4남북공동성명 발표 직후였다. 김씨는 이은관 선생과 함께 종로3가의 요정집으로 초대받았다. 이 부장이 북한을 무사히 다녀온 기념으로 파티를 열었던 것. 김지미·서수남·하청일 등 유명 연예인들이 많이 참석했다. 이 부장은 돌아가면서 노래를 시켰다. 다들 얌전하게 불렀다. 그러나 김뻑국은 ‘네가 먼저 살자고 옆구리 쿡쿡 찔렀지, 내가 먼저 살자고 계약에 도장을 찍었나.’라는 민요풍의 노래를 불러 분위기를 바꿨다. 이 부장은 “바로 저거야, 저런 사람 세 사람만 있으면 남북통일도 문제가 없지.”하면서 옆자리에 앉힌 뒤 백지수표(100만원 이하짜리) 한 장을 건넸다. 이와 관련, 김씨는 “당시 100만원은 집 한채 값이었다.‘김뻑국예술단’을 설립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면서 이후 김뻑국예술단에는 묵계월·최창남·김덕수·임이조 등 웬만한 소리꾼은 다들 거쳐갔다고 회고했다. 아울러 전국 면소재지까지 다니면서 암울했던 시절에 해학과 웃음을 선사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올 추석때 만담·국악잔치 벌일 것” 5년 전 건강이 좋지 않아 쓰러진 이후 활동이 뜸하다가 지난해 4∼11월 서울 종묘공원에서 노인을 위한 수요 국악무대를 마련했다. 올 추석 때에도 귀향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만담을 곁들인 국악잔치를 벌일 예정이다. 김씨는 슬하에 딸 하나를 두었는데 홍익대 미대를 수석으로 나와 사업가로 활동 중이다. 김씨는 요즘 제자들에게 ‘정선아리랑’을 전수시키고 있다. 김문기자 km@seoul.co.kr
  • 기수 1000기 돌파 해병전우회

    기수 1000기 돌파 해병전우회

    “한번 해병이면 영원한 해병” 전국의 시·군·면을 가면 어디서나 해병전우회 사무실을 볼 수 있다. 컨테이너로 된 어설픈 건물이지만 타 군 출신들이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전우애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이어지고 있다. 무슨 비결이 있기에 젊은 날 잠시 군문에서 맺은 인연이 ‘사회’에서까지 끈끈하게 이어지는 것일까. 해병 기수 1000기 돌파를 맞아 해병 출신들이 만들어낸 또 다른 ‘신화’를 파헤쳐 본다. ●전국 231개 지부… 봉사단체로 맹활약 서울에 있는 해병전우회중앙회 산하에는 16개 광역 시·도별로 연합회가 형성돼 있으며 각 시·군·구에는 231개의 해병전우회 지부가 자생적으로 생겨나 활동하고 있다. 해외에도 60개의 지부가 있다. 해병 전역자 가운데 절반 이상이 이들 전우회 및 직장·학교 등 그룹별로 구성돼 있는 모임에 참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친목단체는 물론 사회봉사단체로서도 존재 이유를 밝힌다. 지부별로 야간 방범순찰은 기본이고 응급구조대·기동봉사대·환경봉사대 등을 편성해 활동하고 있다. 지역에 따라 기능의 편차를 보여 바다가 인접한 곳에서는 해양사고 인명구조를, 산악지역에서는 등반사고 구조 등에 주력한다. 이들은 군대에서 익힌 강도 높은 훈련과 정신력을 바탕으로 전문가 못지않은 활동을 펴고 있다. 야간순찰 시에도 해병대 출신은 범법자에게 경찰 못지않은 위압감을 주기에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둔다. 이들이 공식활동을 할 때의 복장은 해병의 상징인 빨간 명찰과 팔각모, 얼룩 무늬의 위장복 등 현역과 별 차이가 없다. 이 때문에 “해병 출신들은 아직도 군시절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곱지 않은 시각을 보이는 사람들도 있지만 군에 대한 긍지가 대단한 회원들에게는 대수로운 일이 아니다. ●불가사의한 단결력 전우회의 일이라면 자다 일어나서라도 달려가는 것이 이들의 생리다. 너무 단합이 잘 돼 호남향우회, 고려대동문회와 더불어 잘 뭉치는 3대 집단으로 회자된다. 여느 친목회들이 상부상조를 통해 본질적으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측면이 있는 데 비해, 해병전우회는 이익이나 반대급부에 상관없이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돌쇠형’에 가깝다. 군대 시절부터 익히고, 제대해서도 선배들로부터 듣고 배운 것이 이런 유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요즘과 같은 개인주의 사회에 아직도 이런 구시대형(?) 결합이 가능할까. ●지옥훈련 속 고도의 동질감 형성 우선 해병의 단일화된 기수체계를 들 수 있다. 훈련소별로 기수가 다른 육군과 달리 해병대는 하나의 훈련소에서 배출된 단일기수여서 일체감이 형성된다. 생면부지의 해병 출신이라도 만나자마자 기수부터 확인하고, 긴 말이 필요없이 금방 선·후배 사이가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현재 해병전우회에서 활동하는 사람 가운데 최고참은 80∼85기(대략 65∼70세), 아래로는 900기(25∼27세) 밑으로까지 내려가나 기수가 ‘나이의 골’을 메운다. 이채로운 것은 기수체계가 다른 장교나 하사관 출신도 전우회에서는 입대연도에 따라 사병 기수에 준하는 대우를 받는다. 전관예우를 못 받는 억울한 측면이 있지만 어차피 ‘해병은 하나’임을 강조하는 마당이기에 이런 사정은 중시되지 않는다. 해병을 뭉치게 하는 또 다른 요인은 전통에서 오는 자부심이다. 해병이 6·25전쟁이나 월남전 등에서 만들어낸 신화는 새삼 설명할 필요가 없다. 이러한 자랑스러운 전통은 해병들의 뇌리에 각인되는 데에서 더 나아가 스스로를 동일시하는 작용을 일으킨다. 이 때문에 ‘짬밥’ 출신이든 기술병 출신이든 누구나 ‘귀신 잡은 해병’인 것이다. 어떤 이들은 해병 출신들의 유난스럽기까지 한 단결력에 대해 ‘논리가 필요없는 것’이라고 규정한다. 훈련받을 때부터 ‘해병은 하나다.’라는 주입식 교육을 받아왔기 때문에 해병이라는 단어 하나만으로도 형제처럼 움직일 수 있는 시스템이 형성돼 있다는 것이다. 정기인(64·한양대 경영학부) 교수는 “엄청난 기합과 지옥훈련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스스로 엘리트 의식을 가지며, 이러한 의식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는 자연스럽게 타 집단이 이해할 수 없는 고도의 동질감이 형성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권 및 정치와는 거리 멀어 특이한 점은 해병전우회가 사회단체로서의 적지 않은 영향력에 비해 ‘사고’를 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역마다 전우회가 만들어진 지 수십년이 넘었지만 이권에 개입하는 등 불미스러운 일로 말썽을 일으킨 적이 없다. 해병 출신들이 다소 ‘폼’을 잡는 경향이 있음을 비춰볼 때 이례적인 일이다. 권오현(權五顯·50) 김포해병전우회장은 “해병 출신들은 사회정의에 대한 가치관이 뚜렷한 데다, 해병의 명예를 실추했을 때 매장된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다.”고 밝혔다. 전우회 간부직함 등을 무기삼아 지방의원 등 정치권에 진출하는 사례도 찾아보기 힘들다. 아예 내부 정관으로 회원들의 정치적 중립을 규정한 전우회도 많으며, 선거 때는 중앙회 차원에서 선거 개입을 금지하는 지침을 내려보낸다. 또한 단체의 순수성을 유지하기 위해 전우회 사무실 운영비를 다른 곳의 특별한 지원없이 대체로 회원들의 회비로 충당한다. 수도권지역 한 해병전우회는 수년 전 회원들이 야간순찰 도중 술집에서 술을 먹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대상자들을 징계했다. 이 단체 간부는 “말썽의 싹을 자르기 위한 차원”이라며 “해병대가 존재하는 한 누구도 범할 수 없는 명예를 후배들에게 물려줘야 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것들이 거름이 돼 해병대에 대한 인식이 크게 달라져 한때 ‘개병대’로 불리며 취직과 결혼조차 잘 안되던 것은 이미 전설이 된 지 오래고, 지금은 대학생들 사이에 ‘가장 가고 싶은 군대’로 꼽히는 등 국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김학준기자 kimhj@seoul.co.kr  노병은 사라지지 않고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다. 이성금(李成金·64) 해병전우회 서울연합회장은 오전 9시면 출근, 연합회 일을 보는가 하면 저녁이면 전우들의 경조사를 챙기는 등 바쁘기만 하다. 이 회장은 “죽는 날까지 전우회 일을 하겠다.”며 강한 의욕을 보였다. ▶해병 출신이 강한 결속력을 발휘할 수 있는 요인은. -해병이 수행하는 상륙작전 등은 뭉치지 않고는 성공할 수 없다. 이러한 임무적 특성에다 단결을 중시하는 해병의 전통이 오늘의 해병정신을 만들었다. ▶요즘 주안점을 두는 활동은. -지난 4월부터 주말이면 연합회 회원 60여명이 한강시민공원에서 야간순찰을 돌고 있는데 시민들의 반응이 좋다. 또 다음달 4일부터 3박4일 일정으로 서울 여의도부터 춘천까지 한강청결 캠페인을 벌이는 등 환경정화 활동에도 주력하고 있다. ▶군에서 대형 총기사고가 발생했는데. -군기가 빠질수록 사고가 많이 생긴다. 해병전우회에서는 60세를 넘겨도 선후배 관계가 분명하다. 요즘은 내 자식만을 위하는 가정교육부터 잘못된 것 같다. ▶향후 활동 방안은. -육·해·공군 가운데 유일하게 해병대만 전용회관이 없어 불편을 겪고 있는데 전우들과 힘을 합해 건립하도록 노력하겠다. 김학준기자 kimhj@seoul.co.kr  <
  • [책꽂이]

    ●41년생 소년(문순태 지음, 랜덤하우스중앙 펴냄) ‘내 삶의 중심에는 굶주리고 나약한, 상처투성이 소년이 살고 있다. 소년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의 공포에 떨고 있다’.6·25전쟁 마지막 체험세대인 41년생 저자가 오래 벼르고 별러 떠나는 과거로의 여행길. 전쟁의 상처가 절망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이 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9000원.●오메르타(마리오 푸조 지음, 이은정 옮김, 늘봄 펴냄) ‘대부’의 작가 마리오 푸조(1920∼1999)의 마피아 3부작 완결편. 미국 마피아 패밀리 돈 코를레오네가를 다룬 1969년작 ‘대부’는 전세계적으로 2100만부가 팔렸다.1996년 발표한 ‘마지막 대부’에 이어 생애 마지막 3년간 집필한 ‘오메르타’는 마피아 조직원들의 생리와 계율을 파헤친다.9800원.●알쏭달쏭 소녀백과사전(이기인 지음, 창비 펴냄) 2000년도 신춘문예 당선작 ‘ㅎ방직공장의 소녀들’로 등단한 시인의 첫 시집. 외설적이고 엽기적인 코드로 자본주의의 폭압적인 구조를 정조준하는 품새가 사뭇 도발적이면서 묘한 비애를 느끼게 한다.장석남 시인은 ‘쇠잔해가는 한 왕국을 들여다보는 매우 희귀한 발견이고 고백’이라고 평한다.6000원.●세상을 다 가진 남자(미겔 앙헬 아스투리아스 지음, 송병선 옮김, 문학수첩 펴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과테말라 작가의 청소년과 성인을 위한 동화.잠을 자는 동안 몸안의 자석이 작동해 금속을 끌어당기는 마술적 힘을 가진 남자가 온갖 금은보화를 끌어당겨 부자가 되지만 아들이 원하는 아보카도나무의 씨앗을 구하려다 아보카도 나무로 변해버린다는 환상적 이야기.8500원.●톨킨의 환상 서가(더글러스 앤더슨 엮음, 김정미 옮김, 황금가지 펴냄) ‘반지의 제왕’의 작가인 톨킨에게 영향을 준 19·20세기 환상문학을 가려뽑았다.스코틀랜드 작가 조지 맥도널드는 ‘호빗’에 영향을 주었고, 영국 작가 허거슨의 ‘새끼 고양이 뮤’에 등장하는 나무도깨비 삽화는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엔트족의 모델이 됐다.1만 9000원.
  • [사설] 유홍준 문화재청장 너무 튄다

    평양 6·15 통일대축전에 참가한 유홍준 문화재청장이 지난 14일 북측이 마련한 만찬회 석상에서 북한영화 주제가를 부른 사실이 공개됐다.6·15 공동선언의 정신을 기려 남북간 화합을 다지자고 만난 자리에서 북한 인기가요를 불러 흥을 돋우겠다는 데 시비할 사람은 없다. 문제는 그 노래가 과연 우리쪽 인사가 부르기에 적합한 것인가 하는 점이다. 유 청장이 부른 노래는 ‘이름 없는 영웅들’의 주제가로, 이 영화는 6·25전쟁 중 북한 첩보원들의 활약상을 강조한 시리즈물이라고 한다. 전쟁에는 적이 있기 마련이고 6·25에서 북한 인민군의 적은 국군 및 미군을 비롯한 유엔참전국 군대이다. 따라서 국군 등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고 자랑하는 북한영화의 주제가를 ‘적국’ 출신 정부대표단의 한 사람이 부른 것이다. 이 얼마나 해괴한 짓인가. 그렇다고 우리는 유 청장의 노래에 다른 의도가 있었다고 보지는 않는다. 민족의 문화유산을 대중에게 소개하는 데 앞장서 온 그는 북한 방문이 거의 불가능하던 1990년대 말 한달동안 북한을 돌며 문화유산을 답사한 적이 있다. 이날도 만찬 테이블에 동석한 북측 인사들과 당시 체험을 이야기하던 끝에 영화 주제가를 떠올렸고, 그들의 권유에 못 이겨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자연스러운 과정이었지 유 청장이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않았던 것이다. 남북이 화합·공조해 궁극적으로 평화통일을 이루는 것은 남·북 모두에 주어진 민족의 과제이다. 그 과제를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우리가 번번이 북쪽에 양보하는 모습을 보인다고 해서 크게 나무랄 것은 없다. 다만 모든 일에는 금도가 있는 법이다. 많은 이들에게 6·25는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로 남아 있다. 일부 인사들의 분별력 없는 행동이 남북관계를 저해하지 않도록 각별한 주의를 당부한다.
  • [기고] 호국보훈의 달… 역사의 교훈 되새기자/박유철 국가보훈처장

    국가와 민족을 위해 헌신한 분들의 넋이 짙은 녹음으로 우러나는 호국보훈의 달 6월이 왔다. 해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이맘때가 되면 길거리의 가로수와 그 이파리 하나하나가 예사롭지 않고 숙연하게 다가온다. 특히 올해는 광복 60년, 6·25전쟁 55년, 4·19혁명 45년, 5·18민주화운동 25년인 해이기에 그 의미가 더욱 각별한 것 같다. 호국보훈의 달은 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분들을 예우하고 그분들의 고귀한 정신을 되새겨 국민통합을 위한 원동력으로 삼고자 하는 데 의의가 있다. 희생을 뜻하는 영어 ‘sacrifice’는 ‘신성하게 하는 것’을 뜻하는 라틴어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숭고하지 않은 희생이 없겠지마는 그중에서도 국가나 사회를 위한 헌신은 공공의 이익과 안녕을 지키기 위한 희생이었다는 점에서 더욱 값지다고 할 것이다. 이런 이유로 프랑스에서는 ‘기억의 정치’라 하여 과거 국가적 어려움에 처해있을 때 국가를 지켜낸 분들을 사회적 차원에서 기억하고 이들에 대한 지원을 국민적 합의 위에서 행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국민적 단합과 연대의식을 높이고 있다. 역사학자 카는 역사를 배우는 이유를 “과거와 현재의 대화를 통해 미래를 위한 교훈을 획득하기 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국가보훈의 진정한 의미도 과거와 현재를 이어 미래를 개척하는 토대를 구축하는 데 있다. 토인비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역사는 숱한 시련과 반성 그리고 성찰의 교훈이 누적되면서 발전한다. 도도한 역사의 수레바퀴에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사회지도층의 투철한 도덕 의식과 솔선하는 공공 정신, 즉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가 국가 발전의 역동성이 된다는 점이다. 이는 로마의 역사를 통해서도 입증된다. 초기 로마사회에서는 특히 귀족 등의 고위층이 전쟁에 참여하는 전통이 확고했는데, 한니발(Hannibal)이 지휘하는 카르타고와 벌인 16년간의 제2차 포에니전쟁 중 최고 지도자인 집정관의 전사자 수만 해도 13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러한 귀족층의 솔선수범과 희생에 힘입어 로마는 고대 세계의 맹주로 자리할 수 있었으나, 제정(帝政) 이후 권력이 개인에게 집중되고 도덕적으로 해이해지면서 발전의 역동성이 급속히 쇠퇴한 것으로 역사학자들은 평가하고 있다. 우리 역사에도 국가위기 시에 책임을 다하는 사회지도층이 있었고 지난 세기만 보아도 수많은 애국선열과 호국영령이 있었다. 일제의 핍박 속에서 숱한 애국선열들이 조국광복을 위해 일신을 초개와 같이 버렸고,6·25 전쟁과 월남전에서는 많은 젊은이들이 조국의 자유와 세계평화를 위해 목숨을 바치거나 피를 흘렸으며,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숱한 억압에도 굴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다. 이와 함께 또 하나 중요한 교훈은 국가의 흥망성쇠는 정신문화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앞서 말했던 로마제국도 결국 도덕적 타락과 정신문화의 약화로 멸망을 맞이했다. 결국 한 국가의 존속과 발전을 위해서는 사회지도층의 책임의식과 건전한 정신문화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호국보훈의 달인 6월이 소중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수많은 애국선열과 호국영령들의 독립·호국·민주 정신을 정치·사회·경제적으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작금의 현실을 헤쳐나가는 정신적 좌표로 삼아 희망찬 미래를 준비해 나가도록 하자. 박유철 국가보훈처장
  • [지역플러스] ‘삐라로 보는 한국전쟁’ 전시회

    부산 중구청은 6월 보훈의 달을 맞아 새달 1일부터 3개월간 40계단문화관에서 ‘삐라로 보는 한국전쟁’ 특별전시회를 연다. 이번 전시회에는 6.25전쟁 당시 심리전을 위해 뿌려졌던 삐라 60여장과 피란민증 등 전시관련 각종 물품, 전시체험 수기 등이 전시된다. 이번에 선보이는 삐라는 한국군이 뿌린 것으로 적의 마음을 향수에 빠져들게 하거나 사기를 저하시키는 내용을 담고 있다.
  • 장교3代…송상호 예비역 중령가족

    최근 병역의 의무를 기피하려는 국적 포기자가 늘고 있는 가운데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아버지, 손자·손녀가 국군 장교로 국토 방위에 헌신하는 가족이 있어 화제다. 게다가 사위마저 현역 장교를 맞을 예정이어서 더욱 눈길을 끈다. 르노삼성자동차 직장예비군 대대장인 송상호(52·3사 12기·예비역 중령)씨와 육군 제53사단 126연대 군수장교인 아들 기선(26·중위)씨, 육군 제2군수지원사령부 15보급대대 소대장인 딸 미라(25·소위)씨가 주인공이다. 23일 육군 제53사단 관계자는 지난 91년 작고한 송씨의 부친 재철씨는 6·25전쟁 때인 지난 53년 포병장교로 참전한 예비역 중위라고 전했다. 기선씨는 2003년 학군장교(ROTC)로 임관했고, 지난해 여군 사관후보생으로 임관한 미라씨는 오는 7월 중위 진급을 앞두고 있다. 특히 미라씨는 오는 6월12일 육사 59기인 이상규(26) 중위와 백년가약을 맺는다. 송씨는 “나를 따라 24차례나 이사하면서 초등학교만 6번이나 옮긴 아들과 딸이 대를 이어 육군 장교의 길을 택해 대견하다.”고 말했다. 부산 김정한기자 jhkim@seoul.co.kr
  • [논술이 술술] 시사키워드/박정희 평가

    [논술이 술술] 시사키워드/박정희 평가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평가 문제가 다시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계간 ‘창작과 비평’은 이번 여름호에서 박정희 재평가를 쟁점 기획으로 다뤘다. 여기서 과거 반독재 지식인 진영의 중심에 섰던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는 “민주개혁 없는 경제개발의 추구는 현실사회주의 나라들에서처럼 결국 경제의 장기적 침체와 쇠퇴를 낳거나 이란의 이슬람혁명에서처럼 원리주의적인 신정(神政) 체제로 귀결하기 십상”이라면서 “오늘의 정치 지도자들에게 어떤 문제점이 있건 제2의 박정희가 해결책이 못 되는 것만은 분명하다.”고 강조했다. 백 교수는 그러나 박정희의 공과를 따져 경제개발의 업적을 인정해 줘야 한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최근 명지대 국제한국학연구소는 ‘박정희와 그의 시대’를 주제로 매월 한 차례 콜로키엄(전문가 토론회)을 열고 있다. 또 박 전 대통령의 친일행위를 부각한 만화 ‘박정희’가 지난 16일 출간되자 박정희 추종 세력이 반발하고 있다. 박정희는 ‘경제개발의 영웅’이면서 ‘독재자’다. 양면성을 가진 박정희를 제대로 평가하려면 그의 본 모습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박정희가 비난받을 점 박정희의 허물로 지적되는 점들은 대통령이 되기전의 친일 행각과 좌익활동, 대통령이 된 다음의 장기집권과 독재정치, 인권탄압 등이다. 반(反) 박정희 진영에서는 박정희가 교사에서 일본군 장교로, 다시 대한민국 장교로,‘빨갱이’에서 반공의 기수로, 충성을 다하는 장군에서 쿠데타의 수괴로 변신을 거듭하며 조국 민족도, 적과 동지도, 양심과 이념도 버린 것은 오로지 권력욕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다음은 반 박정희 진영의 친일에 관한 주장. ▲친일행각=문경보통학교 교사로 일하던 박정희는 1940년 23세의 나이에 만주군관학교 2기생으로 자원 입대, 일본군 장교가 됐다.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로 창씨개명도 했다. 졸업식에서 박정희는 대표로 “대동아 공영권을 이룩하기 위한 성전(聖戰)에서 나는 목숨을 바쳐 사쿠라와 같이 휼륭하게 죽겠습니다.”라고 선서를 했다.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박정희는 ‘盡忠報國 滅私奉公(진충보국 멸사봉공)’이라는 충성을 맹세하는 혈서를 썼다. 다시 일본 육사에 들어가 3등으로 졸업한 박정희는 ‘천황에게 바치는 충성심이라는 점에서 일본인보다 훨씬 일본인다운 데가 있다.’는 평을 들었다. 박정희는 만주 제8연대의 소대장을 거쳐 제8군단에 배속돼 독립군 토벌에 출정했다. 독립군 토벌에 나갈 때 “조센진 토벌이다. 요오시(좋다)”라고 말했다는 내용이 문명자씨의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워싱턴에서 벌어진 일들’이라는 책에 나온다. ▲좌익활동=해방후 군 창설에 참여한 박정희는 조선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의 전신)를 2기로 졸업하고 대위로 임관한 뒤 좌익활동에 빠진다. 육군본부 정보국 작전과장으로 근무하다 1948년 여수 순천 사건을 계기로 군내 ‘남로당 조직책’임이 드러나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는다. 그러나 박정희는 자신이 참회했으며 사면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증거로 자신이 맡고 있던 조직망을 폭로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뒤 박정희는 수사에 협력해 공모자들을 수사대에 알려주기도 했고 공모자들의 집으로 수사대를 직접 이끌고 가기도 했다. 동료 장교들의 감형운동으로 석방되어 문관으로 육군본부 정보국에 근무하다가 6·25전쟁 이후 소령으로 복귀했다. ▲독재정치·인권탄압=3선 개헌으로 장기집권에 들어간 박정희는 1972년 유신으로 종신 대통령이 되고자 했다. 유신 반대세력에게는 가차없는 탄압이 가해졌다. 수백명의 언론인을 쫓아냈고 수많은 사람을 체포하고 고문했다.1973년 최종길 서울대 교수를 간첩으로 몰아 고문을 해 숨지게 했고 같은 해 일본 도쿄에서 김대중씨를 납치했다.1975년에는 인혁당 사건을 조작해 8명을 사형시켰다. 언론인 장준하도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18년 집권기간에 100개월이 넘는 시간 동안 계엄령, 위수령, 비상령이 발동됐고 국가보안법 위반 등으로 1만여명이 검거됐다. ●박정희의 경제적 업적 대통령 취임 이후 박정희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시행하고 수출드라이브 정책을 추진하는 등 경제성장에 힘을 쏟은 것은 사실이다. 매월 수출진흥확대회의를 열고 해외공관을 통해 수출 확대에 주력했다. 포항제철, 울산 중화학공업 단지 등 사회간접자본 확충에도 힘썼다.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는 등 산업교통망을 늘렸다.‘잘살아 보세’라는 기치 아래 농어촌을 중심으로 새마을운동이라는 개혁 운동을 펼쳤다. 이런 성장정책으로 박정희는 한국을 절대빈곤에서 탈피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1인당 국민소득을 실질소득이 아닌 명목소득으로 계산할 때 박정희가 집권했던 1961년 82달러였는데 죽을 때인 1979년 1636달러를 기록해 외형상 연평균 18%의 고도성장을 달성했다. 특히 수출은 연평균 38% 증가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박정희의 이런 경제적 치적을 깎아내리는 사람들은 60년대의 고도성장은 다른 개도국에도 나타난 현상이었으며 수출도 늘었지만 수입도 엄청나게 늘어 대규모 적자를 기록한 이면을 간과하고 있다고 말한다. ●박정희, 어떻게 볼 것인가 어떤 인물이든 공(功)과 과(過)가 있기 마련이다. 공 때문에 과가 묻혀서도 안되고 그 반대가 돼서도 안된다. 특히 잘못은 시간이 지나면 묻혀지고 미화될 가능성이 높다. 그 인물과 동시대에 살지 않은 후손들에게 어떤 한 면만 부각돼 인물 평가가 잘못될 수 있다. 따라서 박정희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도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공과를 분명히 따져 객관적인 역사적 평가를 내려놓는 일이다. 경제난이 지속되는 요즈음 박정희에 대한 향수가 살아나고 있다. 그러나 단지 그의 한 쪽면만 보고 무턱대고 추종하는 것은 잘못이고 허물 때문에 공적을 폄하해서도 곤란하다.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비판할 것은 비판해야 한다. 다만 박 전 대통령이 이룬 경제성장의 업적은 노동자의 희생과 인권침해, 천민자본주의 등의 폐단과 부작용을 낳은 것은 사실이다. 한국의 단기간 성장을 박 전 대통령이나 집권·지도층의 공만으로 돌릴 수 없다. 박정희가 경제적 리더십을 발휘했다면 열악한 조건 속에서 묵묵히 일한 노동자들이 있었다는 점도 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또한 박정희가 닦은 경제적 기반 위에 1인당 GDP(국내 총생산) 1만달러를 넘는 중진국이 된 한국이 겪고 있는 심각한 빈부격차와 지역갈등은 박정희가 추구한 성장지상주의와 개발편향주의가 한 원인임을 부정할 수 없다. 손성진기자 sonsj@seoul.co.kr
  • [씨줄날줄] 유니세프/임영숙 논설고문

    조촐하지만 뜻 깊은 행사가 엊그제 서울에서 열렸다. 유니세프 한국위원회(회장 현승종) 새 사옥 개관식이었다. 경복궁을 앞마당처럼 바라보고 북한산을 병풍처럼 두른 유니세프 새 사옥은 아름답고 당당했다. 같은 자리의 낡은 건물에서 지난 1990년대 한국 유니세프 대표로 근무했던 에드워드 스페샤(스위스)씨는 감개무량한 표정이었다. “처음으로 새 사옥을 보았을 때 건물이 유니세프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는 인상을 깊게 받았습니다.” 건물 칭찬으로 그의 축사는 시작됐지만 지난 94년 유니세프 한국위원회의 출범을 지켜본 그가 진정 감동한 것은 한국위원회의 눈부신 성장인 듯싶었다. “10년간 한국위원회는 발전하고, 자라고, 확장해 나갔습니다.…개인후원자, 학교, 기업 그리고 시민사회로부터 받은 후원규모가 10년간 730억원에 이르렀습니다. 이는 1950년에서 1993년까지 한국이 지원받은 긴급구호 및 사업협력 기금의 두배 이상 되는 규모입니다.” 전세계 개발도상국에서 영양과 보건, 기초교육과 식수공급 등 아동개발사업과 재해나 전쟁지역의 어린이 보호사업을 펼치고 있는 유니세프의 활동기구는, 개발도상국형 대표사무소와 선진국형 국가위원회로 나뉜다. 한국엔 6·25전쟁이 터진 뒤 대표사무소가 설치됐다가 40여년만인 지난 94년 1월 국가위원회로 탈바꿈했다. 유엔의 도움을 받던 나라가 도움을 주는 나라로 성장한 것은 아직도 한국이 유일한 경우로 꼽힌다. 그것도 10년만인 2004년에, 한국이 40여년 동안 받은 도움의 두배가 넘는 도움을 되돌려 주는 나라가 된 것이다. 유니세프 후원금의 77%는 “티 내지 않는 십시일반의 조용한 개인후원자”들이 내고 있다. 이날 행사에는 유니세프처럼 해외원조 활동을 하는 국내 단체 대표 20여명도 참석했다. 월드비전, 국제기아대책기구, 플랜코리아, 세이브더칠드런 등. “해외개발원조에서 우리나라는 국민총소득의 0.06%만 투자하는데 이는 유엔권고치(0.7%)의 10분의1 수준”이라는 불평도 있다. 그러나 유니세프 한국위원회 박동은 사무총장은 “우리 캠페인이 부족해서 그렇지 우리 국민성으로 보아 저변확대는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렇다. 우리에겐 희망이 있음을 이날 행사는 일깨워주었다. 임영숙 논설고문 ysi@seoul.co.kr
  • [인간시대] 평생교육시설 양원주부학교 학생 염성려 할머니

    [인간시대] 평생교육시설 양원주부학교 학생 염성려 할머니

    “그래도 4학년까지 다녔으니, 다른 사람들보다는 나은 편이지요.”(염성려·79·서울시 서대문구 창전동) 햇님 사이로 빗방울이 오락가락하는 18일 오후 1시 서울 서대문구 대흥동 18의4 지하철 2호선 대흥역 쪽 한갓진 골목에 들어서 있는 양원주부학교. 학교 입구에는 ‘경축, 대검(대학입학 검정고시) 전국 최고령 합격 신평림(75세)’이라고 적힌 플래카드가 3층 높이로 건물과 건물을 이어 나부끼고 있었다. ●가정형편 어려워 초등학교 4학년 중퇴 늦은 점심 도시락을 챙겨 먹느라 약간은 시끄러운 가운데 얼핏 보기에도 늦깎이 학생인, 머리가 희끗희끗한 할머니와 아주머니들이 차분한 발걸음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1시35분쯤 3층 304호 교실에서 수학 수업시간으로 접어들자 ‘어르신 초등학생’ 50여명은 진지하게 ‘손아래뻘 선생님’의 말에 귀를 쫑긋 세웠다. “자, 계산을 시작해요.…. 분모는 분모끼리, 분자는 분자끼리 곱하는 것 아시죠. 그럼 얘는 누구랑 곱해요?” 수학을 맡은 손미진(35·여) 선생님이 유치원 아이들 앞에 서듯 똑 부러지는 말로 묻자, 대부분 언니뻘일 듯한 학생들 사이에서는 “7요,7요.”라고 대답하는 소리가 교실 구석구석에서 메아리처럼 잇달아 터져나왔다. 평생교육시설인 양원주부학교는 대검 최고령 합격자를 낸 데다, 올해 초 성인을 대상으로는 전국에서 처음으로 학력인정 초등과정이 생긴 덕분에 더욱 활기가 넘치는 모습이었다. 학생은 졸업만으로 학력을 인정받는 초등부, 염 할머니의 경우처럼 그렇지 못한 기초부와 중등부, 고등부, 전문부, 교양부, 평생부 등 7개 부문에 2425명이 향학열을 불태우고 있다. 50분 수업이 끝나고 복도에서 양원주부학교 ‘초등생’인 염 할머니를 만났다.21일 용산고등학교에서 중학교 입학자격 검정고시를 치르는 염 할머니는 “글쎄, 주위에서는 다들 (합격이) 될 것이라고 얘기하는데 큰 일”이라고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출생한 염 할머니는 고향에서 4학년까지 다니다 학업의 뜻을 접어야만 했다. 어려운 집안살림에 당시만 해도 딸들에게 공부를 시켜 무엇 하랴는 편견 탓이었다. 염 할머니는 “그래도 오래 전이나마 그 때 배워둔 게 적잖게 보탬이 되는 것 같다.”고 수줍게 웃었다. ●배움 앞에 나이는 숫자에 불과 6·25전쟁 전 미리 서울로 시집와 2남2녀를 뒀지만 36살 때 병약한 남편이 별세해 홀몸이 됐다. 이후 삯바느질과 시장통 배달 등으로 자녀들을 키우느라 때를 한참 넘기고 나서야 배움에 대한 ‘허기’가 느껴져 지난해 이 학교에 입학했다. 슬하에 4남매 가운데 막내만은 아직 결혼하지 않고 함께 살고 있다는 염 할머니는 “신문에 나가면 애들이 ‘왜 뒤늦게 이름을 알리느냐.’고 핀잔을 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염 할머니는 지난해 2년제인 중학교 검정고시를 거쳐 고검 준비를 하고 있는 양정자(80) 학생을 빼고는 2400여명 중 최고령에 속한다.“충남 서산 등 멀리서 몇 시간 들여가며 공부하러 오는 분들에 비하면 난 행운아”라고 한다. 창전동 집에서 지하철로 한 정거장이니, 운동삼아 걸어오기도 한단다. ●빠짐없이 하루 4시간 예·복습 “나만 해도 학생 신분으로 배우는 입장이니, 나이는 당연히 잊어야지요. 진학이 중요해서가 아니라, 어떤 형태로든 공부해야 하는데…. 세월은 기다려 주지 않는데, 학교 다니면서도 게으름 피우는 것은 철없는 탓이어서 나중에 분명 후회하게 됩니다.” 특히 음악과 자연이 어려우면서도 좋다는 염 할머니는 4시간짜리 수업을 마치고 귀가한 뒤엔 저녁 8시부터, 하루 4시간 동안은 무슨 일이 있어도 예·복습을 한다며 각오를 되새겼다. 송한수기자 onekor@seoul.co.kr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前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씨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前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씨

    1980년 2월4일 오후 서울 서빙고동 국군보안사령부 분실장실.50여일 동안 감방생활을 한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과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운명적으로 만났다. 장 사령관은 전 사령관보다 장교임관 5년선배였다.. “장 선배, 그동안 고생이 많았습니다. 건강은 어떠신지요?” “나야, 이래저래 죽을 몸인데 건강이 뭐가 중요하겠소. 그런데 전 장군, 난 수경사령관이오. 나의 임무(반란군 진압)가 뭔지 잘 알잖소.”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전 사령관은 약간 어색한 표정을 짓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사실, 정승화 육참총장이 김재규 사건과 관련이 있는데도 조사에 불응했습니다. 정 총장께서 총장직을 내놓고 6개월정도만 집에서 쉬고 계시면 국방부장관이나 더한 자리를 보장해드릴 생각이었습니다.” 순간 장 사령관은 쿠데타 계획이 매우 치밀하게 짜여져 있음을 직감했다. 전 사령관의 얘기는 계속됐다. “장 선배가 한강다리를 막는 바람에 지금 금값이 얼마인 줄 아십니까.3만원하던 것이 7만원으로 뛰었고, 국제여론도 좋지 않습니다.” 무슨 생뚱맞는 얘기인가. 장 사령관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그쳐 물었다. “전 장군, 정 총장은 나를 수경사령관으로 임명한 상관이요. 총장을 연행해 갔다는 사실을 왜 안 알려줬소.” “장 선배, 사실은 밑에 사람들이 장 선배를 사전에 연금시키자는 것을 내가 야단을 쳤어요.‘그 어른은 우리가 모시고 큰 일을 함께 할 분인데 그렇게 하면 되겠나.’라고 했지요. 장 선배가 그러지만 않았다면 우리들은 그 다음날 장 선배를 중장으로 진급시켜 군단장으로 내보내려 했습니다. 사정을 이해해주시고 6개월 동안 집에서 쉬고 계시면 자리를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장 사령관은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었다. 너무나 분하고 억울했다.6.25전쟁도 겪지 않은 후배한테 철저하게 유린당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 장군, 군인이 군생활을 마치면 그것으로 그만이지 일자리는 무슨 일자리요. 자, 이제 그만합시다.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소. 승부는 깨끗하게 합시다. 이 패장을 죽이지 않고 집으로 보내준다니 나가야지.” 장 사령관은 다시 감방으로 돌아왔다. 수사관들이 전역지원서를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사령관님, 이거 예편서입니다. 써주셔야 하겠습니다.” “뭐라고 쓰면 돼?” “네, 일신상의 사유로 인해 예편을 상신합니다.” “알았어.”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일제때 태어나 광복의 기쁨도 채 가시기 전 19세 어린 나이에 구국의 일념으로 6.25에 참전했다. 또 베트남전을 겪으며 무수히 많은 사선을 넘었다. 명예롭기는 커녕 12.12 군사반란을 진압하지 못한 불충의 죄인으로 30년 동안 몸담았던 군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전역지원서를 쓴 장 사령관은 연행돼 올 때 입었던 소장 계급장의 군복으로 갈아입었다. 때마침 노을지는 저녁무렵이었다. 서울 봉천동의 집에 도착하자 아들과 딸 부인과 누나 내외, 그리고 장모가 울음으로 맞이했다. ●드라마서 전두환을 유비·관우처럼 취급 이후 장 장군의 집안은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는다. 우선 장 장군은 강제로 전역된 뒤 자택에서 2년동안 가택연금을 당했다. 또 TV뉴스를 통해 보안사에 끌려가는 장 장군의 모습을 본 시골의 아버지는 곡기를 완전히 끊고 매일 막걸리만 마시다가 80년 4월 세상을 뜨고 말았다. 또 82년 2월에는 외아들이 장 장군의 곁을 떠나버렸다. 그것도 할아버지의 산소 근처에서 꽁꽁 얼어붙은 채로. 꼭 25년 세월이 흘렀다. 쿠데타 세력들은 역사의 심판을 받았다. 장 장군은 재향군인회장, 새천년민주당 국회의원 등을 지내며 뒤늦게나마 명예회복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가슴에 묻어둔 천추의 한을 어찌 씻을 수 있으랴. 특히 요즘 TV드라마 ‘제5공화국’으로 그날을 생생하게 되새기고 있다. 서울 대치동 자택에서 장 장군을 만났다. “쿠데타를 하고 나서 집권을 위해 어느 한쪽을 손을 봐야 했지. 그래서 민주화를 외쳐대는 전라도 광주를 친 거야. 서빙고에서 알았지만 놈들은 정부운용 계획까지 치밀하게 짜놓았더군.” 카랑카랑한 특유의 목소리는 여전했다. 그는 “이제와서 무슨 말을 해. 날 좀 내버려둬.”하면서 처음에는 인터뷰를 거절했다. 거실 의자에 앉자 “아무리 드라마라고 하지만 문제가 많아”하면서 소리를 버럭 질렀다.“전두환을 무슨 유비나 관우처첨 취급하고 있어. 나머지는 다 샌님이야. 잘 모르는 젊은 세대들은 어떻게 생각할거야.” 또한 “쿠데타는 5·16이나 12·12에서 보듯 불과 200∼300명의 군인이 저질러. 이런 것이 미화되면 누가 아들을 군대에 보내겠으며, 목숨으로 나라를 지킨 호국영령들을 욕되게 하는 거야.”라고 했다. 그가 지적한 드라마 ‘제5공화국’의 오류. 첫째 쿠데타의 배경과 대통령 유고 상황에서 국가적 시스템이 전혀 작동되지 않은 부분을 쏙 빼버렸다는 것.5·16으로 집권한 박정희 전 대통령이 권좌의 안위를 위해 전두환씨를 보안사령관에 임명한 배경과 하나회를 통해 전씨에게 힘이 쏠린 과정, 그리고 10.26때 모든 요직의 책임자들이 우왕좌왕해 사실상 직무유기한 부분 등 교훈적 가치를 보여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보안사서 정보 완전 장악, 12·12진압 못해 두번째는 국가운영에 필요한 정보가 한곳으로 모아지면 안된다는 부분을 간과했다는 것.10·26직후 보안사령관이 군과 경찰 정보는 물론 중앙정보부까지 완전히 장악, 대통령에게 정보보고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12·12가 성공할 수 있게 된 결정적인 요인임에도 드라마에서는 이를 놓치고 말았다고 꼬집었다. 또한 군사반란이란 어떤 것이며, 발생했을 경우 방어와 진압의 수순 등을 보여주지 못했다고 강조했다. “수경사는 대통령령으로 방패계획에 의해 창설됐지. 또 수경사의 사전 허락없이 수도권에 군병력이 절대 들어올 수 없어. 지휘관이 몰래 수경사 예하 30경비단을 장악한 그 자체가 중대 반란이야.” 12·12를 진압하지 못한 결정적인 원인을 묻자 “무슨 명령만 내리면 저놈들이 죄다 알고 있는거야.”라고 목청을 높였다. 이어 “마지막으로 수경사 소속 전차를 출동시키려고 부대 정문을 나서는데 이희성 당시 중앙정보부장 서리가 어떻게 알았는지 전화를 걸어와 ‘출동해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하더군. 일거수일투족을 철저하게 감시당했어. 또 휘하의 지휘관들은 이미 저쪽으로 많이 기울어졌어. 정말 기막힐 노릇이지.”라고 한탄했다. ●일과의 60% 독서… 쿠데타 막는 법 책낼 것 장 장군은 경북 칠곡에서 3남3녀 중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대구상고를 다니던 중 6·25가 터지자 육군종합학교(11기)에 지원, 사선을 넘었다. 육군대학 졸업논문으로 보안사령부 해체를 주장했다가 베트남 참전때 ‘사상 불순자’로 찍히기도 했다.71년 1월 별을 단 그는 5군단 참모장-수경사 참모장-26사단장 등을 거쳐 10·26 직후 수경사령관이 됐다. 요즘 장 장군은 쿠데타를 막지 못한 ‘한’ 때문에 동서고금의 쿠데타 자료를 모으고 있다.1799년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 군력(軍力)으로 정부를 뒤집은 데서 유래한 쿠데타 막는 법을 생전에 책으로 엮어내기 위해서다. 이 때문에 요즘에는 일과의 60%를 독서에 쏟아붓고 있다. “죽기보다 더 괴로운 인생을 살았습니다. 다시는 쿠데타가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제갈공명은 강류석불전(江流石不轉)이라고 했다. 강물은 흘러도 그 안의 돌은 물결따라 이리저리 구르지 않는다는 뜻이다. ■ 그가 걸어온 길 ▲1931년 경북 칠곡 출생 ▲50년 대구상고 재학 중 6·25참전. 육군종합학교 11기 졸업. 육군 소위 임관 ▲53년 조선대학교 법학과 졸업. ▲54년 보병학교 전술학교관 ▲71년 장군진급 ▲72년 5군단 참모장 ▲73년 수경사 참모장 ▲75년 26사단장 ▲78년 육본 교육참모부차장 ▲79년 11월 수경사령관 ▲80년 육군소장 예편 ▲82년 한국증권전산 사장 ▲91년 육군종합학교전우회 회장 ▲94년∼2000년 제27대,28대 재향군인회 회장 ▲2000년 새천년민주당 입당 ▲2000∼2004년 전국구 국회의원 ■ 상훈 충무무공훈장, 보국훈장 천수장, 자랑스런 한국인상(96년) ■ 저서 12·12쿠데타와 나(93년, 명성출판사) km@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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