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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천이 원조] (14) 등대

    [인천이 원조] (14) 등대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는? 1903년 인천항에서 남쪽으로 13.5㎞ 떨어진 무인도인 팔미도에 세워졌다. 팔미도는 사주(砂洲)에 의해 연결된 두 개의 섬이 마치 팔자(八)처럼 양쪽으로 뻗어내린 꼬리와 같아 팔미도(八尾島)로 불렸다. 김정호의 ‘청구도’에는 ‘팔미(八未)’로 표기돼 있다. 인천 사람들에게는 팔미귀선(八尾歸船), 즉 낙조에 팔미도를 돌아드는 범선의 자취가 아름다워 ‘인천팔경’의 하나로 꼽혔다. 등대가 낭만의 상징으로 널리 알려진 데에는 이 같은 요인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외세의 거친 파도는 팔미도를 조용한 섬으로 가만두지 않았다. 지정학적 위치가 매우 중요했기 때문이다. 구한말 우리나라를 넘보던 열강들은 앞다퉈 이양선을 몰고와 개항장 인천을 찾았다. 인천항 길목에 위치한 팔미도는 그들에게 길잡이 역할을 할 수 있는 중요한 섬이었다. 일본은 인천항이 개항된 1883년 우리 정부와 맺은 ‘통상장정’에 있는 “한국 정부는 통상 이후 항구를 수리하고 등대와 초표를 설치한다.”는 조항을 들어 1901년 등대 건설을 요구하고 나섰다. 등대의 효용을 모를 리 없는 조선 정부였으나 극심한 재정난으로 난감해하다 결국 1902년 인천에 해관등대국을 설치하고, 팔미도 등대 건설에 착수해 이듬해 6월 완공했다. 등대는 높이 8m의 원통형으로 세워져 인천항을 찾는 배들의 이정표 역할을 했다. 관리는 일본인 기술자가 직접 맡았다. 팔미도 등대는 처음에 석유등이었다. 멀리서 보면 마치 도깨비불 같아 사람들은 등댓불을 ‘도깨비불’이라고 불렀다. 해방 이후 전기를 이용한 백열등으로 바뀌었다가 지금은 태양광 발전장치를 이용하고 있다. 당시 라디오 방송은 팔미도 등대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우두커니 바닷가 바위 위에 서서 밤마다 그 큰 눈을 번쩍번쩍 굴리면서 밤길 가는 배들이 편안히 가도록 지켜주는 등대는 한번 찾아가보고 싶은 것이 아닙니까. 여기는 서울서 얼마 되지 않는 인천 바다에 있는 팔미도라는 섬에 있는 등대입니다.” 그런데 일제의 필요에 의해 생겨난 팔미도 등대가 6·25전쟁 때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구원의 불빛으로 되살아났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인천상륙작전 당시 연합군 10만 병력과 대함대가 인천에 상륙하려면 팔미도 등대의 불을 밝혀야 했다. 한국인으로 구성된 첩보부대인 ‘켈로’부대원들은 1950년 9월10일 밤 발동선을 타고 팔미도에 들어갔다. 이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북한군은 무슨 연유에서인지 등대를 전혀 쓰지 않았는데, 살펴보니 전선이 끊어졌을 뿐 나머지는 멀쩡했다. 이 상황을 일본 도쿄에 있는 유엔군총사령부에 보고하니 “상륙작전이 벌어지는 날 밤 12시 정각에 등댓불을 밝혀라.”라는 명령이 떨어졌다.9월14일 밤 목숨을 걸고 팔미도에 잠입한 부대원들은 등댓불을 환하게 밝혔다. 수백 척의 함정들이 이를 길잡이 삼아 팔미도 해역에 집결했고, 다음날 새벽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해 성공시켰다. 인천지방해양수산청은 2003년 팔미도 등대 건립 100년을 맞아 팔미도에 등대를 새로 설치한 뒤 기존 등대는 해양문화유산으로 영구보존키로 했다. 팔미도 등대는 일제하의 수난과 동족상잔의 뼈아픈 역사를 증언하면서 오늘도 인천 앞 바다를 말없이 굽어보고 있다. 인천 김학준기자 kimhjseoul.co.kr
  • “대포동 2호 기지 노동당 핵개발국 관여”

    대포동 2호 미사일 기지가 위치한 함경북도 무수단리 기지 건설에 북한 노동당 131지도국이 깊이 관여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131지도국은 북한에서 핵시설 건설을 담당하는 기구로 중앙당에서는 유일하게 직속 부대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탈북자단체인 ‘탈북자동지회’ 소속으로 1980년대 북한 원자력공업부에서 우라늄폐기물 작업반장으로 활동한 김대호(47)씨는 7일 “무수단리 기지 건설에는 핵개발을 담당하는 노동당 ‘131지도국’이 깊이 관여돼 있다.”고 주장했다. 김씨는 “북한이 1990년 무수단리에 있던 군사건설국을 철수시키고 1개 대대(약 300명)의 핵개발 부대를 투입했다.”며 “무수단리는 해안에 접하면서도 노출이 잘 되지 않는 지형으로,6·25전쟁 당시 미국의 함포사격에 콤플렉스를 갖고 있던 북한으로서는 안성맞춤의 군사기지”라고 말했다. 그는 “핵개발 부대에서 같이 일하다 무수단리로 들어간 동료들로부터 정무원 총리급의 ‘특급 경호’를 받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면서 “그들은 무수단리 기지가 서울이 아니라 일본 도쿄를 겨냥한 대일 전략기지라고 설명했다.”고 전했다. 또 다른 탈북자단체인 숭의동지회 최청하(59) 사무국장은 “북한 당국은 1980년대 초 무수단리에 ‘불순분자’를 이주시킨 뒤 주민 전원에게 인민무력부 신분증을 지급했다.”며 “이곳은 표면적으로 과학원 함흥분원 산하에 있지만 사실상 인민무력부가 모든 것을 통제, 관리하는 특별구역”이라고 소개했다. 최 국장은 “1990년대에는 기지에 방어부대가 투입됐다.”면서 “영변(핵시설)보다 보안이 철저할 것”이라고 덧붙였다.박정현기자 jhpark@seoul.co.kr
  • [열린세상] 다양한 서민주거안정대책 나와야/하성규 중앙대 도시 및 지역계획학 교수

    인간다운 삶이란 최소한의 기본욕구인 의식주가 해결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우리 주변에는 먹고 입는 문제보다는 집 문제로 고민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내 집이 없어 남의 집에 세들어 사는 사람뿐 아니라 아예 무허가 불량주택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역사적으로 보면 무허가 불량촌의 시작은 일제식민지 하의 토막민촌 혹은 토굴이다. 이들은 산비탈이나 개천가에 굴을 파거나 거적 등을 이용하여 지붕을 만든 집이었고,1941년 토막거주자는 서울지역에 3만 7020명으로 알려져 있다. 대도시 무허가 불량촌은 지속되었다. 해방 후 만주·일본·북한지역으로부터의 귀환동포는 총 253만여명, 절반 정도가 도시주변부에 정착하게 되고 불량무허가 주택에 거주하였다. 그리고 6·25전쟁으로 인하여 서울의 경우 전체 주택 재고의 3할에 가까운 집이 전소되거나 거주하기 힘든 상태였다. 귀환동포와 6·25전쟁 피란민들의 상당수는 폐기처분된 목재조각, 깡통 그리고 흙으로 임시거처를 만든 것이 판잣집이다. 이후 도시화와 산업화가 급격히 이뤄진 1960년대부터 무허가 불량촌은 달동네·산동네로 불렸다. 달동네는 높은 지대에 자리잡고 있는 불량주택 밀집지역으로, 달이 잘 보인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1980년대에 와서는 새로운 불량주택이 생겨났다. 흔히 닭장, 벌집, 비닐하우스 등으로 알려진 것들이다. 닭장, 벌집은 저임금 공원들의 불량 자취방이나 셋방을 지칭하고 주로 공단 주변에 산재해 있었다. 비닐하우스는 본래 고등소채나 화초 등을 재배하기 위한 시설이지만 도시빈민들의 대안적 거처로 활용된 것이다.1990년대 초 서울시내 비닐하우스에 거주하는 사람은 2만여명으로 추산되었다. ‘10·29’‘8·31’ ‘3·30’조치 등 갖가지 부동산대책을 내놓았지만 집값은 계속 오르기만 한다. 지난 3년간 서울 집값은 24%, 강남 집값은 53%가 뛰었다고 한다. 외환위기 직후 집값이 폭락했다가 되올랐던 것을 제외하면 1990년 이후 가장 많이 올랐다. 국토연구원, 건설산업연구원, 주택공사 산하 주택도시연구원은 올 전국주택가격은 1.0∼4.7%, 서울 아파트 값은 1.0∼3.9% 하락할 것으로 전망했다. 이들 기관의 하락 전망 근거는 정부 규제 강화, 금리인상, 입주물량 증가 등이다. 그러나 전문기관들의 올해 부동산 시장 예측이 크게 빗나갔다. 부동산정보업체 ‘부동산114’ 조사에 따르면 올 상반기 아파트 값(6월 23일 현재)은 전국 9.89%, 서울 13.77%나 급등했다. 서울 양천·강남·서초구와 경기도 산본·평촌 신도시 등은 20% 이상 급등했다. 전세가도 이들 연구기관의 예측보다 더 많이 올랐다. 내 집이 없는 것은 물론 남의 집에 세들어 살기조차 힘든 최빈층의 경우 불량무허가 주택 이외에는 방안이 없다. 최근 재개발사업으로 인해 집단적 불량촌은 점차 줄어들고 있지만 도시 전역에 분산되어 존재하는 비닐하우스, 불법 지하 혹은 옥탑방은 여전하다. 주택가격과 임대료가 지속적으로 상승할 경우 무허가불량주택의 형성은 막을 길이 없다. 내 집 마련은 보통사람들의 평생소원이다. 당장 내 집 마련이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저렴한 가격의 임대주택이 차선의 대안이다. 그러나 임대주택은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국민의 주거 빈곤을 해결하는 것은 국가안보와 자유경제체제를 위해서도 가장 중요한 정책 어젠다라고 강조한 저명한 주택정책 연구자 메리트(S.Merrett) 교수의 말이 우리나라에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당장 급한 것은 급등하는 주택가격의 안정이며 빈곤층의 주거불안을 해소하는 작업이다. 서민주거안정을 위한 적실성과 지속성을 가진 정부의 주택정책이 가장 중요하다. 아울러 주민과 시민사회의 협동적 노력도 중요하다. 전 미국대통령 지미 카터가 참여하는 ‘집짓기 운동(해비탯 운동)’과 같은 비영리주거운동 등이 정부정책 프로그램과 함께 확산되도록 해야 한다. 하성규 중앙대 도시 및 지역계획학 교수
  • [인천이 원조] (13) 기상대

    [인천이 원조] (13) 기상대

    현대 생활에서 날씨는 사람들의 일상에 밀접하면서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정보 가운데 하나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최초의 기상대는 언제 어디에 설치됐을까? 공식적인 최초의 기상대는 1904년 4월 인천시 중구 전동 25, 응봉산 정상에 세워진 ‘인천관측소’다. 제물포고등학교 교정 뒤편 울창한 숲속에 우뚝 솟은 백색의 원통형 건물이었다. 러일전쟁을 앞둔 일본이 해군작전에 필요한 기상관측을 위해 설치했다고 한다. ‘한국사연표’에는 1884년 7월 부산 일본전신국에서 기상관측을 시작했다고 표기돼 있지만 근대적이고 체계적인 관측을 시작한 것은 인천관측소라는 것이 정설이다. 또 일본이 1900년 인천 중구청 뒤 송학동에 있던 옛 수진여관 자리에 기상사무소를 개설했다는 얘기도 있지만 정확한 기록이 없어 이것이 정식 기상대였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산 정상에 2층 목조 건물로 69평 규모로 세워진 인천관측소는 국내는 물론 세계 각지의 기상정보를 수신해 그날 그날의 날씨를 분석하고 예고하는 중앙기상대 역할을 했다. 초대 인천관측소장에는 일본 중앙기상대 기사였던 와다(和田)씨가 부임해 기틀을 잡았다. 당시 인천관측소는 경성, 대구, 부산, 목포, 강릉, 평양, 용암포, 원산, 성진, 중강진, 웅기 등 13개 지역의 측후소는 물론 중국 만주, 대련, 천진, 청도, 제남 측후소까지 통괄했다. 또 일본 중앙기상대, 영국 런던의 그리니치천문대와도 기상정보를 주고받았다. 인천관측소 및 지방 측후소에서는 매일 오전 2시,6시,10시, 정오, 오후 2시,6시,10시 등 모두 7회에 걸쳐 기상을 관측했다. 날씨에 이상이 있을 때에는 매 시간 또는 30분마다 임시 관측을 했다. 관측사항은 기압, 기온, 습도, 풍향, 풍속, 강수량, 증발량, 구름의 투명도 등 중요한 기상요소를 비롯해 그외의 기상현상을 실측했다.1910년 4월에는 인천관측소에서 헬리 혜성을 관측하기도 했다. 일반인을 상대로 한 관측소의 주요업무는 매일 정오를 알리는 시보와 오후 3시 천기 예보였다. 일기예보는 “서해로 구름이 창궐하고 태풍이 불 조짐이 보이나니….”라는 식의 고풍스러운 멘트였다. 특히 정오 시보는 포를 쏘아 알렸는데 포수가 손을 다치는 일까지 발생했다. 실제로 손가락 8개를 잃은 포수는 얼마 전까지 동구 화평동에서 ‘전당포 조막손 아저씨’로 불리며 생존했다.1924년 5월21일에는 15분이 지나도록 오포가 울리지 않아 사람들의 비난을 샀다. 당시 인천 사람들은 관측소가 있는 응봉산을 오포 쏘는 곳이라 해서 ‘오포산’으로 불렀다. 인천관측소는 한일합병 후 조선총독부 산하기구가 되었는데,1912년 3월 총독부관측소로 확대 개편되면서 지금의 중앙기상대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 관측소는 기상에 관한 것 외에도 우리나라 주변 해역, 동북해, 태평양, 일본 주변 해역에 이르는 광범위한 해역에 대한 해양관측을 실시했다. 인천관측소는 1939년 7월 중앙기상대로 명칭이 바뀌었다. 광복 후 1948년에는 중앙기상대가 인천에서 서울로 이전되고,6·25전쟁으로 중요한 기상관측 시설이 파괴돼 업무를 수행하기가 어려워지자 1953년 중앙기상대의 업무마저 서울로 이전된다. 그 후 인천은 지역 측후소로 기능이 축소됐다가 1992년 인천기상대로 명칭이 바뀐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인천 김학준기자 kimhj@seoul.co.kr
  • 한국정서 ‘산불’ 몸짓 되어 세계로…

    한국정서 ‘산불’ 몸짓 되어 세계로…

    내년 7월, 한국 뮤지컬사에 의미 있는 이정표 하나가 세워진다. 지난달 타계한 극작가 차범석의 대표작 ‘산불’이 칠레 출신의 세계적인 작가 아리엘 도르프만, 영국의 프로그레시브 록그룹 ‘알란파슨스프로젝트’의 리더 에릭 울프슨의 손을 거쳐 뮤지컬 ‘댄싱 섀도우’(Dancing Shadows)로 재탄생하는 것. 외국 뮤지컬의 소비시장에 머물렀던 한국이 세계 무대를 겨냥해 야심차게 제작하는 다국적 창작 뮤지컬이다. 7년에 걸친 장기 기획, 영국 런던 워크숍 등 철저한 사전 준비로 화제를 모은 ‘댄싱 섀도우’가 지난 3일 오후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쇼케이스 형식으로 처음 선보였다. 극작가 아리엘 도르프만, 연출가 폴 개링턴 등 해외 제작진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된 행사에는 공연계 인사 300여명이 몰려 성황을 이뤘다. 40여분간의 쇼케이스에서 공개된 ‘댄싱 섀도우’는 원작의 기본 설정과 주제의식은 살리되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서나 통용될 수 있는 우화적인 설정으로 바뀌었다.6·25전쟁을 겪는 한국의 산골 마을은 내전으로 황폐해진 땅 콘스탄차로, 이념적 대립으로 싸우는 국군과 북한군은 태양을 섬기는 ‘태양군’과 달을 숭배하는 ‘달군’으로 탈바꿈했다.‘댄싱 위드 마이 섀도우’등 서정적이고 친근한 에릭 울프슨의 음악도 인상적이었다. 아리엘 도르프만은 “한국과 내 조국 라틴아메리카는 전쟁과 독재의 체험을 공유하고 있다. 때문에 ‘산불’의 각색 작업은 내게 운명과도 같은 것이었고, 꿈인 동시에 악몽이었다.”면서 “한국인들뿐만 아니라 전 세계인들이 공감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어 “생전에 차 선생님이 ‘당신을 믿는다. 내 아이(작품)를 잘 키워 달라.’고 하셨는데 이 자리에 계셨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라며 안타까워했다. 이날 선보인 공연은 ‘댄싱 섀도우’의 시작에 불과하다. 앞으로 끊임없는 수정과 보완 작업이 이뤄질 예정. 김성녀, 서희승, 배해선, 김보경 등 미리 오디션에서 선발된 배우들도 지속적인 트레이닝 과정을 밟게 된다. 예술의전당과 신시뮤지컬컴퍼니가 공동제작하는 ‘댄싱 섀도우’는 1년 뒤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만날 수 있다.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고교생납북, 장관급회담서 다뤄야”

    김영남씨 모자 상봉을 계기로 납북자와 국군포로의 송환문제 논의의 물꼬가 트인 것 같다. 오는 11일 부산에서 열릴 남북 장관급회담에도 납북자 문제가 핫 이슈로 다뤄질 가능성이 높아졌다. 납북자가족모임 최성용 대표는 4일 기자회견을 갖고 “납북자 문제는 이산가족에 포함시키지 말고 별도의 남북 특별기구를 통해 만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면서 “정부는 이번 장관급 회담을 통해 북한에 납북 고교생 문제를 거론, 압박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북한이 납북 고교생에 대해 ‘확인불가’로 우리측에 통보한 것은 용서해서는 안 된다고 비판했다. 이민교(18세. 납북 당시 나이)씨와 최승민(17)씨는 1977년 전남 홍도에서, 이명우(17)씨와 홍건표(17)씨는 1978년 같은 장소에서 실종됐다. 최성용 대표는 군산 선유도에서 실종된 김영남씨는 분명히 북한 공작선에 의해 납치된 것이라면서, 북한이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6·25전쟁 납북인사가족협의회와 납북자가족협의회도 이날 공동 기자회견을 갖고 “북한은 납치를 정직하게 인정하고 가족들에게 사죄하며 모든 납치 의혹자들의 생사를 확인하고 송환하는 절차에 들어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우리 정부도 이 문제에 침묵하지 말아야 한다고 정부를 압박했다. 국회 차원에서 납북 고교생의 사실조사와 송환요구 심사가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최 대표는 북한에 의해 강제 납치된 고교생 5명에 대한 사실조사 및 송환요구 등에 관해 제출한 청원을 통일외교통상위원회에서 심사하도록 했다는 내용의 회신을 국회로부터 받았다고 말했다.박정현기자 jhpark@seoul.co.kr
  • [책꽂이]

    ●들리지 않던 총성 종이폭탄!(이윤규 지음, 지식더미 펴냄) 히틀러는 1939년 9월1일 새벽 폴란드를 기습공격하기 전 수년 동안 유럽정복계획을 위장하기 위해 각종 평화공세를 폈다. 북한도 1950년 6월25일 기습공격을 감행하기에 앞서 평화통일방안을 제시하고, 조만식 선생과 간첩 김삼룡·이주하의 교환을 제의하는 등 심리전을 구사했다. 현역 육군 대령인 저자는 6·25전쟁과 관련된 심리전의 유형을 사례 중심으로 살핀다.‘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라.’는 말이 있듯, 평화의 시기에도 들리지 않는 총성은 계속되고 있다.2만 5000원.●한국인의 정치사상(김한식 지음, 백산서당 펴냄) 상고시대 홍익인간 이념부터 현대 민주주의 사상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조명. 저자(국방대 교수)는 한국정치사상 연구에서 가장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문제는 상고사에 있다고 주장한다.‘규원사화’‘한단고기’ 등 상고사 문헌에 따르면 상고시대 선인들의 활동무대는 한반도와 만주 남부지역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중국대륙 하북성까지 포함된다. 회대지방과 요동, 산동지역 전부를 망라하는 것이다. 저자는 ‘한단고기’에 문제점이 많다면 적어도 ‘규원사화’ 같은 상고사 문헌은 수용여부를 결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에 따라 한국정치사상의 폭과 깊이가 달라지기 때문이다.3만원.●아리랑 시원설 연구(김연갑 지음, 명상 펴냄) 낙랑 남쪽 자비령의 이름인 ‘아리’에서 비롯됐다(이병도),‘아리’는 ‘밝(光)’의 고어로 ‘아리랑 고개’는 ‘광명의 고개’다(양주동), 고향을 뜻하는 여진어 ‘아린’에서 유래했다(이규태)…. 아리랑의 시원에 관해서는 누구도 단정적으로 말하기 어렵다. 저자(아리랑세계화위원회 사무총장)는 아리랑은 목은 이색의 시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주장을 편다. 정선 7현과 인연이 깊은 이색의 시에는 ‘(정선)아라리’의 뿌리라 할 만한 수지(誰知) 즉,(이 마음을) 누가 알리오라는 글귀가 많이 나온다는 것을 근거로 든다.2만 5000원.●귀신론(고야스 노부쿠니 지음, 이승연 옮김, 역사비평사 펴냄) 계로(자로)가 귀신을 섬기는 법을 묻자 공자가 답했다.“아직 사람을 섬기는 일도 잘하지 못하거늘, 어찌 귀신을 섬길 수 있겠는가.” 일본의 대표적인 비판적 지성인 저자는 논어 ‘선진’편에서 공자가 제자인 자로(계로)와 나눈 문답을 귀신론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책은 고문사학파를 이끈 오규 소라이의 귀신론을 시작으로 귀신과 제사의 의미를 둘러싼 일본 유학자들의 담론투쟁을 생생히 보여준다.1만 2000원.●다 빈치의 두뇌 사용법(우젠광 지음, 류방승 옮김, 아라크네 펴냄) 1452년 피렌체공화국 빈치에서 사생아로 태어난 레오나르도 다 빈치. 그는 인류 역사상 가장 창의적이며 상상력이 뛰어나고 두뇌를 잘 사용한 인물로 꼽힌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좌뇌와 우뇌 중 한쪽만 치우쳐 사용하는 데 반해 다 빈치는 좌뇌와 우뇌를 균형있게 사용할 줄 알았다. 르네상스시대 화가들의 업적을 정리한 바사리는 다 빈치를 언급하면서 이렇게 말했다.“때때로 하늘은 인간이 아닌 신을 우리에게 내려 보낸다. 우리 모두는 그의 생각과 뛰어난 지식의 도움을 받아 하늘에 다가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뇌력(腦力)의 비밀이 담겼다.1만 5000원.●축제, 세상의 빛을 담다(김규원 지음, 시공아트 펴냄) 평화와 사랑이 충만한 황금색. 그것은 뉘른베르크 크리스마스 축제를 위한 색이다. 이 축제는 한 해의 말미를 장식하는 중유럽의 중요한 행사다. 크리스마스 정령 같은 황금빛 소품들이 진열된 장터에서 글뤼바인을 마시며 독일의 음울한 겨울 날씨를 음미해보자. 원초적 본능이 꿈틀대는 바르셀로나 메르세 축제의 빨간색은 희망의 상징. 이탈리아의 전통 경마대회인 팔리오 축제에는 17가지 색 무지개가 수를 놓는다. 색으로 보는 유럽축제 이야기.1만 5000원.
  • “인생에 정년퇴직은 없다”

    “인생에 정년퇴직은 없다”

    “늙어서 일 못하는 게 아니야. 늙었다는 핑계로 할 수 있는 일도 그냥 못 본 척하는 거지. 인생에 정년퇴직이 어디 있어.” 70,80 나이에도 손에서 일을 놓지 않는 ‘젊은 그대’들이 있다. 대한은퇴자협회가 주는 ‘제3회 히어로(영웅) 대상’ 수상자들을 만나봤다. 시상식은 29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다. ■ ‘우수노령 히어로’ 72세 이혜숙씨 우수노령 히어로상을 받는 이혜숙(72·여)씨는 전문비서로 일선을 누비고 있다. 1957년 이화여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한 뒤 곧바로 취업했으니 올해로 직장생활을 한 지 꼭 50년째. 이화보전을 졸업한 어머니와 보성전문을 졸업한 아버지는 “전쟁이 끝나고 폐허가 된 조국에서 무엇이든 해야 한다.”며 이씨를 대학까지 보냈다. 이씨는 “재학 중에 지금의 비서학과와 마찬가지인 영문과 부설 ‘영어속기반’이 생겨 2년 과정을 마치고 자격증을 땄다. 속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50여명이 시작해 16명 밖에 수료를 못했다.”고 되돌아봤다. 그동안 이씨가 거친 외국계 회사와 단체는 모두 6곳으로 단순한 비서가 아니라 통역, 번역까지 도맡아 했다. 이씨의 첫 직장은 ‘월드비전’(세계 기독교 선명회)이었다. 전쟁고아들과 이들을 후원하는 미국의 양부모를 중간에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했다. 아이들이 고사리손으로 편지를 써오면 양부모가 좋아할 만한 아이들다운 문장으로 영문번역을 해 미국에 보냈다. 지금까지 회사를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은 단 한번도 없다. 하지만 맞벌이 1세대인 그는 두 딸이 수험생일 때 제대로 뒷바라지해 주지 못한 게 지금도 마음에 걸린다. “큰딸은 음악을 전공해 프랑스로 유학가서 결혼까지 했고, 작은딸은 저와 마찬가지로 비서의 길을 걷고 있어요. 잘 커줘 고맙지요. 요즘에는 작은딸이 저한테 비서로서 쓴소리도 많이 해준답니다.” 지금 근무하고 있는 수출업체 ㈜BSK인터내셔널에서도 비서를 맡고 있지만, 전 직장에서부터 20년 가까이 함께 일해온 상사와는 눈빛만 마주쳐도 속을 읽을 수 있다. 한국 업체들의 이메일을 번역해 외국 바이어들에게 전달하는 것도 그의 몫이다. 칠순이 넘어 연봉 3500만원의 비서직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은 바로 이런 능력과 자신감이다. 그는 “나이 들었다고 좌절하지 말고 당당하게 일과 맞서라.”고 인생 후배들에게 주문했다. ■ ‘최고노령 히어로’ 85세 이응덕씨 최고노령 히어로상을 수상한 이응덕(85)씨는 서울시립 관악노인복지관 공동작업장 ‘두레’의 반장이자 분위기 메이커이다. 여든이 넘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활동적인 그는 “일하지 않으면 병이 난다.”면서 8년째 하루도 출근을 거르지 않았다. 작업장에서 하는 일은 플러그를 조립하거나 종이봉투를 붙이는 것으로 10여명의 반원 모두 80대 전후 고령자들이다. “중앙대 부속중·고에서 수위로 일하다 나이가 많아서 그만뒀어. 그래도 쉴 수가 없어 혹시나 하고 복지관을 찾아 왔는데 나처럼 나이 많은 사람도 일을 하게 해주니 고마울 뿐이야.” 이씨가 처음 일을 손에 쥔 것은 태평양전쟁 막바지였던 1945년이었다. 개성에 있는 일본 군수품 회사에서 공급업무를 맡았다. 해방 후 자리를 잡나 싶었더니 이번에는 6·25전쟁이 터져 보급대로 부산에 끌려갔다. 몇 차례 죽을 고비 끝에 전쟁이 끝났고 형이 근무하는 미군부대에서 군수품 취급 업무를 하다가 57년 광탄에 있는 보급중대에 정식 입대를 했다. 제대 뒤 가평에서 장사를 시작했지만 하늘은 이씨를 돕지 않았다. 큰 물난리가 터져 터전을 다 잃게 된 이씨는 국가에서 지원해 주는 수재민 지원금 1000원을 들고 무작정 서울로 와 관악구 봉천동에 자리를 잡았다. 연탄 1장을 사려 해도 상도동까지 걸어가야 하던 시절이었다. 전쟁과 재난 등 사람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을 많이 겪었기 때문일까, 이씨는 돈 욕심이 별로 없다.“이거면 족하다.”는 게 항상 하는 말. 욕심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남 도와 주길 좋아해서 그동안 돌보고 시신까지 거둔 무의탁노인이 40여명에 이른다. 이씨는 “취업을 하려고 왔다.”면서 편한 일만 찾는 50∼60대를 보면 안타깝다.“저 나이면 청춘인데…. 거저 주는 것만 바라지 말고 일을 찾아 먼저 움직여야지. 난 하늘나라 가는 그날까지 손에서 일을 놓지 않을 거야. 그게 장수 비결이라니까.” 유지혜기자 wisepen@seoul.co.kr
  • “우리가 흘린 피 결코 헛되지 않았다”

    미 해병의 일원으로 6·25전쟁에 참전했던 벽안의 노병(老兵)들이 전쟁 56주년을 맞아 한국을 방문했다. 6·25 당시 한국 해병대와 도솔산지구 및 펀치볼 전투 등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제임스 맥모나겔 미 예비역 소장과 인천상륙작전 및 서울 탈환작전에 참가했던 찰리 버진 예비역 중사 등 7명이 그 주인공이다. 맥모나겔 등은 26일 해병대사령부를 방문해 이상로 사령관과 장병들의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이들은 또 지난 24일에는 해병대 역사상 가장 대표적인 전투로 이승만 전 대통령으로부터 ‘무적 해병’이라는 칭호를 받은 도솔산 전승 추모제에도 참석, 당시 함께 참전했던 한국군 해병대원들과 재회의 시간을 갖기도 했다. 맥모나겔은 “한국의 발전상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우리가 흘린 피와 땀이 결코 헛된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느꼈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들 미 해병 참전용사는 해병대 2사단과 서부전선 최전방 애기봉 견학일정 등을 마치고 7월1일 귀국할 예정이다.김상연기자 carlos@seoul.co.kr
  • 월드컵 홍수속 조용한 6·25 조명

    월드컵 홍수속 조용한 6·25 조명

    월드컵으로 떠들썩한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또 지난 25일은 6·25전쟁이 일어난 지 56년이 된 날이다. 그러나 지상파·케이블 할 것 없이 월드컵 방송에 치우친 나머지, 예년에 비해 6·25 관련 프로그램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일부 다큐멘터리와 드라마에서 6·25의 모습을 접할 수 있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스럽다. 케이블·위성 다큐멘터리채널인 히스토리채널과 Q채널은 24∼25일 각각 6·25 56주년 기념 특집 프로그램인 ‘비무장지대 반세기’ 등 3편과 ‘북한은 변하는가’를 방송했다. 먼저 히스토리채널에서 24일 오전 9시부터 2회에 걸쳐 방송한 ‘비무장지대 반세기:155마일의 중무장지대’는 1953년 휴전 이후 남과 북을 갈라놓고 있는 비무장지대의 의미를 다뤘다. 당시 임시 휴전선이었으나 반세기가 흘러도 긴장이 팽팽한 뇌관성 국경으로 남은 곳, 세계에서 유일하게 남은 냉전의 유산으로 해마다 10만명의 외국관광객이 찾는 장소가 됐다. 프로그램은 잠정적인 휴전선으로 군사분계선(MDL)과 비무장지대(DMZ)가 그어진 뒤 지금까지 북한의 군사도발과 침공의 역사를 사실적으로 다뤘다. 25일 방송된 ‘정적의 땅, 북한’에서는 북한의 경제적 어려움과 인구 감소, 대규모 난민 등 실상을 들여다봤다. 북한은 김일성 부자의 대를 이은 철권통치 체제를 유지하고 있으며, 미국과 벼랑끝 핵무기 외교로 맞서고 있는 수수께끼 같은 나라다. 탈북자들의 증언을 중심으로, 북한 주민들의 생활상과 인권실태를 생생하게 담았다. 같은 날 이어 방영된 ‘사라진 종군기자’는 1970년 친 베트남 정권을 축출하려는 군사쿠데타가 일어난 캄보디아에서 취재하다가 사망한 종군기자들을 회고한 다큐멘터리다. 생존자 중 한명인 CBS 카메라맨 커트 보커트의 증언을 통해 종군기자들의 숨은 애환을 전했다. Q채널은 25일 방영한 ‘북한은 변하는가’에서 북한의 달라지는 모습을 심층 조명했다. 반짝이는 나이트클럽과 남북 사업가들이 만나 나누는 이야기 등 사회·정치·경제 전반에 걸친 변화를 살펴보고 과연 이러한 변화가 절실한 필요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단순한 속임수에 의한 것인지 파헤쳤다. 한편 1930∼50년대 해방 전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KBS 대하드라마 ‘서울 1945’는 25일 방송된 49회에서 한국전쟁을 다뤄 눈길을 끌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1950년 6월25일 새벽, 전쟁 발발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이 사실적으로 그려졌다. 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터키병사의 詩 낭송… ‘형제의 나라’ 울렸다

    터키병사의 詩 낭송… ‘형제의 나라’ 울렸다

    부산의 한 고교생이 터키의 6·25전쟁 참전 기념비에 새겨진 시를 터키어로 낭송, 터키 국민들에게 진한 감동을 전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부산 남일고등학교 3년 최민철(18)군은 지난 10일 터키 앙카라에서 개최된 ‘제4회 국제 터키어 올림피아드’에 한국 대표로 참가, 부산시 남구 대연동 유엔묘지 터키 기념비에 새겨진 비문을 낭송해 은상을 수상했다. 이 대회에는 터키어를 공부한 전세계 고등학생 350여명이 참가했다. 최군이 낭송한 시는 ‘부산에서 자고 있다’라는 참전 기념비 비문. 세계평화를 위해 6·25전쟁에 참가, 머나먼 이국땅에서 생을 마감한 한 병사의 심정을 애절하게 쓴 내용이다. ‘나는 부산에 잠들어 있다.(중략)터키에 있는 전사여. 당신은 아나톨리아에 있고 나는 부산에 있다. 당신은 터키를 위해 전사했고, 나는 세계를 위해서….’ 최군이 낭송한 이 시는 곧바로 터키의 유력지인 ‘더 자만’이 대대적으로 보도했고, 공영방송인 STV도 수차례 최군을 인터뷰했다. 보도 내용은 터키 전역에 큰 반향을 일으켰고, 최군은 터키 교육부장관과 국회의장의 초청을 받는 등 민간 외교관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한국 주재 터키문화원측은 “한국전쟁에 참전, 목숨을 잃은 터키 군인의 얘기가 한국 학생의 입을 통해 읊어져 큰 화제가 됐다.”며 “많은 국민들이 감동을 받아 눈물을 흘렸고, 한국이 형제 나라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계기가 됐다.”고 현지 분위기를 전했다. 에르한 아타이(40) 터키문화원장은 지난 22일 학교를 방문, 감사장을 전달한 데 이어 남일고가 터키어 교육을 원하면 원어민 자원봉사자를 지원해 주겠다고 제안했다. 최군이 터키어를 배운 것은 고1때 우연히 터키 유학생 아이한 오제르(28·부산대 국제통상학과 박사과정)를 만나면서부터. 그는 매 주말 터키어를 배웠고,1년 반 만에 터키인과 의사소통이 가능한 정도의 중급실력을 갖췄으며 오제르의 소개로 경시대회에 참가했다. 그는 “나의 작은 노력이 이렇게 큰 결과를 가져올 줄 몰랐다.”며 “앞으로 터키에 유학을 한 뒤 터키어 선생님이 돼 한국과 터키간의 우호증진에 힘쓰고 싶다.”고 밝혔다. 부산 김정한기자 jhkim@seoul.co.kr
  • “상봉하는 그날까지 꼭 살아계세요”

    “상봉하는 그날까지 꼭 살아계세요”

    “삼촌, 지난 1년6개월 동안 단 하루도 삼촌의 얼굴, 삼촌의 건강, 삼촌의 가족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상봉하는 그날까지 건강하십시오.” 2004년 12월 탈북을 시도하다 중국 공안에 잡혀 다시 북한에 보내진 국군포로 한만택(75)씨. 그에 대한 세상의 관심은 흐릿해졌지만 가족들은 6·25전쟁 발발 56주년을 맞아 그의 무사귀환을 더욱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 그의 재탈북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조카 며느리 심정옥(53)씨는 오늘도 행여나 국군포로나 납북자와 관련된 작은 뉴스라도 나오지 않을까 인터넷 뉴스를 찾는다. 최근 납북 고교생 김영남씨가 남한의 가족들과 만나게 됐다는 소식을 듣고는 더욱 시삼촌을 만나야 겠다는 생각에 조바심이 난다. 얼굴 한번 본 적 없고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시삼촌을 만나기 위해 이렇게 공들이는 이유는 사진을 통해 본 얼굴이 돌아가신 시아버지와 너무나 닮았기 때문이다.“시아버님이 늘 입버릇처럼 보고싶다고 말씀하셨는데,1년만 더 오래 생존해 계셨더라면 동생의 생사 여부는 아셨을 텐데 아쉬워요.” 한씨를 탈북시키기 위한 조카며느리의 노력은 지난해 4월 그가 정치범수용소에 들어가기 전까지 계속됐다. 조선족 브로커를 통해 여러 차례 한씨와 접촉을 시도했고 서너번은 거의 탈북에 성공할 뻔했다. 그나마 정치범수용소에 보내진 이후로는 소식조차 접하기 어렵다. 그래도 심씨는 중국방문 비자를 받아두고 언제든 삼촌을 맞이하러 중국으로 갈 준비를 하고 있다.“오늘로 다섯번째 받아둔 중국비자가 만료됩니다. 계속해서 시도를 하다 보면 언젠가 만날 날이 오겠지요.” 심씨는 시삼촌에 대한 정부의 무관심에 서운함을 감추지 못했다. 지난해 9월 외교통상부 사무관으로부터 “담당 과장과 상의하라.”는 전화가 온 게 정부의 마지막 반응이었다.“삼촌을 남한으로 모시고 와 함께 살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잘 지내시는지 소식이라도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글 사진 윤설영기자 snow0@seoul.co.kr
  • “전쟁영웅 큰아버지 부대서 복무하고 싶어”

    “조국을 위해 헌신하신 큰아버지의 체취가 서린 부대에서 복무를 하고 싶습니다.” 6·25전쟁 당시 북한군 전차를 육탄저지하는 전공을 세워 대한민국 최초로 태극 무공훈장을 받은 고(故) 심일 소령의 조카가 큰 아버지가 근무했던 부대에서 군복무를 하게 됐다. 고 심 소령의 막내 동생인 심승택씨의 아들로, 지난 20일 경기도 의정부 육군 제306보충대대에 입소한 심상무(20) 훈련병이 그 주인공이다. 심씨는 입소 후 “조국을 위해 장렬히 산화한 큰아버지의 높은 뜻을 이어가고 싶다.”며 고 심 소령이 소속됐던 6사단에서 근무 하고 싶다는 의사를 부대측에 표시했다. 부대측은 이에 고 심 소령의 호국정신을 기리는 한편, 유가족에 대한 예우차원에서 심씨의 요청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에 따라 심씨는 앞으로 5주간의 신병교육을 받은 후 자신의 큰아버지가 근무했던 6사단 7연대 전투지원중대에 배치될 예정이다. 육군사관학교 8기인 고 심 소령은 6·25 당시 제6사단 7연대 57㎜ 대전차 중대에 소속돼 전차를 앞세우고 밀려오는 북한군에 맞서 적의 SU-76 자주포 2대를 화염병과 수류탄으로 파괴한 전쟁영웅이다. 장남이었던 고인에 이어 차남과 삼남도 6·25 때 각각 경찰과 학도병으로 목숨을 바쳐 고인의 일가는 대표적인 호국보훈 가족으로 평가받고 있다.김상연기자 carlos@seoul.co.kr
  • [인천이 원조] (10) 공립 박물관

    [인천이 원조] (10) 공립 박물관

    일제 강점기 인천에는 일본인 수집가들이 다수의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어 ‘문화재의 보고’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었다. 여러 경로를 통해 유출된 문화재를 인천항을 통해 자국으로 가져갈 수 있다는 지리적 이점이 작용한 듯하다. 때문에 해방 후 인천지역 문화인사들은 일본인 소유 문화재 반출을 저지하는 동시에 이를 수장·전시할 박물관이 필요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공립박물관인 인천시립박물관을 설립하려는 움직임이 일었는데, 이를 주도한 인물은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한 당시 27세의 이경성씨였다. 이씨는 동경 유학 시절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미술사학자이자 고고학자인 고유섭(1905∼1944년)씨의 처남 이상래를 만난 뒤 편지로 고유섭 선생의 지도를 받으며 박물관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된다. 2차 세계대전 때 귀국한 이씨는 경복궁내 자경전에서 일하던 1945년 9월 미군정청 교화국장 최승만에게 자신의 포부를 밝힌 것을 계기로 인천 미군정의 홈펠 중위를 만나게 된다. 인천에 박물관을 짓겠다는 이씨의 견해에 의기투합한 홈펠 중위는 만국공원(현 자유공원)내 향토관에 시립박물관을 설립하자는 제안을 한다. 이씨는 곧바로 임홍재 초대 인천시장으로부터 박물관 설립을 허락받았다. 같은해 10월 인천시립박물관장으로 부임한 이씨는 일제 때 기업 세창양행의 사택이었던 향토관 건물을 보수하는 등 개관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하지만 개관 날짜가 1946년 4월 1일로 잡혔음에도 전시할 유물을 확보하지 못했다. 다급해진 이씨는 국립박물관 관장에게 사정해 문화재 19점을 얻었고 민속박물관에서도 60점을 임대했다. 아울러 홈펠 중위의 도움을 받아 패전 후 일본인들이 세관창고에 맡긴 물건 중에서 우리 문화재를 찾아냈다. 문화재 해외 반출을 막는 데 큰 공을 세운 셈이다. 그리고 부평조병창에 쌓아놓은 불상과 종 가운데서도 문화재를 찾아냈다. 장석구 같은 독지가는 자신이 갖고 있던 유물을 기증하고 기금을 제공하기도 했다. 그 결과 개관 직전에는 모두 364점의 유물을 소장하게 되었다. 개관 이후 인천시립박물관은 1947년 서울의 김두승이 소장하던 신라시대 석불상을 기증받는 등 유물을 계속 확충하는 한편 같은해 5월에는 관장인 이경성을 단장으로 경주 고적 현지답사에 나서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하지만 6·25전쟁이 터진 후 박물관에 보유중인 유물은 안전한 곳으로 옮겼으나 박물관 건물은 인천상륙작전 당시 유엔군의 함포 사격으로 소실되고 말았다. 전쟁중 2년 10개월간 휴관상태에 있었던 박물관은 개관 7주년이 되던 1953년 4월 1일 인천시 중구 송학동1가 11번지 제물포구락부로 이전, 복관하게 된다. 고인돌 발굴 등에 주력하던 인천시립박물관이 크게 업적을 남긴 것은 1965년 11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4차에 걸쳐 실시된 인천시 서구 경서동 녹청자 도요지 발굴로, 학계의 큰 주목을 받았으며 녹청자 도요지는 국가지정 문화재 사적 제211호로 지정되었다. 이후 박물관은 인천시 연수구 옥련동 525 인천상륙작전기념관 부지에 새 청사를 지어 1990년 5월4일 이전한 뒤 오늘에 이른다. 인천 김학준기자 kimhj@seoul.co.kr
  • 정치무대 복귀 앞둔 손학규 경기지사

    정치무대 복귀 앞둔 손학규 경기지사

    손학규 경기지사가 오는 30일 퇴임해 중앙 정치무대로 복귀한다. 임기 동안 굵직굵직한 첨단기업 유치 등을 성공시키며 ‘경기도 CEO’로 거듭난 손 지사는 내친김에 ‘대한민국 CEO’에 도전할 계획이다.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손 지사를 만나 지난 4년 소회와 앞으로의 계획을 들었다. 인터뷰는 지난 9일 여의도의 경기도 서울사무소에서 1시간40분가량 진행됐다. 손 지사는 이틀 뒤 도지사로서 마지막 해외 출장길에 올랐다. 김문수 후임 당선자와 동행, 외자 유치를 몇 건 더 성사시켰다는 후문이다. ▶민주화 ‘운동권’에서 ‘CEO도지사’로 변신한 계기가 무엇인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80년대 초 외국에 가보니 벌써 세계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민주화운동을 할 때 인정하지 못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업적이 비록 개발독재이긴 해도 하나의 경제모델로 인정받고 있었다. 세계화를 다시 보게 됐다.1990년대부터 장관, 국회의원을 하다 보니 우리의 미래를 어떻게 준비해야 할 것인지 책임의식이 생겼다. 특히 경기도는 대한민국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여기서부터 일자리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해 첨단산업을 육성하고 기술을 개발하도록 독려했다. ▶5·31지방선거와 민심은 어땠나. -나라를 맡겼는데 어떻게 이렇게 엉망으로 만들었는가 하는 분노의 표현이었다. 서울의 구청장 25명, 경기도 지역구 도의원 108명이 모두 한나라당 소속이다. 정부와 여당이 도대체 뭘 잘못했기에 국민이 이렇게 분노한 것인가. 이제 한나라당의 책임이 크다. 한나라당도 그냥 야당이 아니라 국정의 적극적인 한 책임자가 됐다. 그 책임을 어떻게 수행할 것인지 성찰해야 한다. ▶참여정부에도 문제가 있다고 보나. -정부와 여당은 자유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 확고한 신념이 부족하다. 유감스럽다. 일자리만 예를 들어도 그것은 사실 기업이 창출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정치가 양극화 논리를 강조하며 기업하는 사람은 죄악시하고, 도둑으로 취급하는 사회 분위기도 불식시키지 못했다. 대통령과 집권당이 할 일은 바로 경제를 뒷받침해 국민이 푸근하게 살도록 하고, 기업인에게 자신감을 주는 것이다. ▶부동산·세금 정책은 어떤가. -부동산 문제는 하루아침에 본때를 보이겠다거나 세금 갖고 해결하려는 발상부터 버려야 한다. 국민을 공갈쳐서 기세로 누른다고 부동산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첫째, 시장원리가 기본이 되어야 한다. 둘째 국민이 원하는 곳에, 국민이 원하는 형태의 주택을 만들고 환경을 뒷받침해줘야 한다. 임대주택을 몇 만가구 지어도 국민이 따라가지 않는 것은 시장인 국민의 마음을 맞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셋째, 그러나 악질적이고 조직적인 투기는 추상같이 엄단해야 한다. ▶다른 대권주자에 비해 지지율이 낮다. -음식은 맛있게 만들었는데 눈에 띄도록 하지 못했다. 앞으로 제가 상을 맛있게 차리고 포장도 하고 노력하면 국민도 때가 되면 제대로 보고 제 음식이 맛있다고 할 것이다. 철들고 나서 항상 역사를 부둥켜안고 씨름하며 살아왔다. 이를 바탕으로 우리 정치가 어떻게 가야 하는지 콘텐츠를 보여드리겠다. ▶현실의 룰도 중요할 것 같은데. -저와 이명박 서울시장, 박근혜 대표가 다 이제 임기를 마치는데 첫 논의가 경선시기다, 방식이다 하며 시작되는 건 그렇게 바람직하지 못하다. 정치 분석가나 정치인에겐 관심이 되겠지만 일반 국민에게도 관심사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경선방식에 복안은 있지만 말할 시기가 아니란 뜻인가. -그것에 관심을 쓸 시기가 아니다. 국민이 봐서 이제는 한나라당이 나라를 책임질 수 있다고 구체적으로 이런 사람 저런 사람 얘기가 나오면 선출방식이나 시기문제도 다 자연스럽게 논의될 것이다. 벌써부터 정치권 중심에서 화제로 만드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경선에서 불리하면 무소속으로 출마할 가능성 있나. -우리가 두 번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고 분명히 집권해야 한다는 선택의 순간이 오면 지금의 구도는 달라질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 구도 속에서 주신 질문은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또 미리 말씀드리면 다른 곳에서 부르면 갈 것 아니냐고 묻는데 제 답은 항상 같다. 내가 살아온 길, 내가 정치권에 들어와 한 일을 봐라. 어떤 핍박을 당했어도 나는 내 길을 지켰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언론에선 늘 제목이 안 된다고 하더라.(웃음) ▶고건 전 총리는 희망연대를 출범하고 여권에선 정계개편 가능성도 나왔는데. -정치 패턴이 바뀌어야 한다.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정계개편이다, 내각개편이다 했다. 이 정부 들어 대연정이다 뭐다 해서 몇번 재미를 봤다고 해서 앞으로도 확 충격을 주고 싹 바꾸자는 인식이 있는데 이건 후진적인 아날로그 정치다. 과거엔 돈으로 했다가, 권력으로 했다가, 이제는 판을 바꾸는 정치 아닌가. ▶정몽구 회장 구속을 반대했는데. -잘못을 처벌하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다. 형사소송 원칙에 따라 불구속 수사하라는 것이다. 기업 신뢰가 떨어지고, 협력업체가 투자를 망설이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것 때문에 일자리가 줄어들면 정부와 여당이 책임질 것인가. 현대자동차같은 글로벌 기업의 문제는 단순히 사법적인 문제가 아니라 국가 경영의 문제다. 대통령이 “나는 관여하지 않았다.”고 자랑할 것이 아니다. 대통령도 대통령이지만 정부 여당, 정치권에서 어디 책임있는 목소리가 나온 적 있는가. 정말 나라를 걱정하고 경제 걱정하고, 일자리를 걱정하면 이럴 때 용감하게 나와야 한다. ▶북한에 다녀와서 느낀 점은. -흔히 한나라당은 남북대결을 고수한다고 잘못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제 시대적인 대세인 남북의 화해와 평화를 주도적으로 안고 나가야 우리가 국민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아직까지도 1950,60년대 냉전적인 사고방식에 젖어 있다든지 60,70년대 개발시대 사고방식에 젖어있다고 하면 시대흐름을 움켜쥐기는커녕 따라가지도 못한다. 이념대결도 마찬가지다. 그동안 좌는 좌대로 우는 우대로 싸워왔지만 이제는 포용하고 끌어안아야 한다.6·25전쟁 이후 반공안보 분위기에서 자란 세력이 우리 사회에 크게 자리잡고 있는데 이 사람들을 어디 동해 밖으로 몰아낼 것인가. 반대로 1980년 이후 진보세력, 흔히 좌파가 정권까지 잡았는데 좌파 개혁 때문에 우리나라가 망하게 됐다고 이 사람들을 서해 바다 바깥으로 몰아낼 것인가. 결국 같이 안고 가야 한다. ▶‘후배’ 지방자치단체장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무엇보다도 어느 지역에서 어느 단위든 지금은 좋은 일자리를 많이 만드는 것이 첫째 목표다. 기업하기 좋은 여건을 만들고, 투자를 유치하고, 기술개발에 힘써야 한다. 인적자원을 양성하기 위해 교육에도 투자해야 한다. 또 다른 한편으론 매일매일 주민의 안녕과 복지를 돌보는 것이 지방자치의 기본임무다. 주민들이 쾌적하게 살 수 있게 좋은 환경을 만들어달라. 지방자치는 세계화 시대에서 가장 중요한 경제단위이고 생활단위이다. 세계화는 지방자치가 이끈다는 생각으로 무한책임을 갖고 일해주길 바란다. 대담 구본영 정치부장 박선화 지방자치뉴스부장·정리 김병철 박지연기자 anne02@seoul.co.kr ■ 손지사 인터뷰 스케치 손학규 지사는 인터뷰가 시작되자마자 언론을 향한 불만부터 솔직하게 드러냈다.“정치를 꽤 했는데도 정치 현안엔 답하기가 참 어렵다.”고 점잔을 빼더니 대뜸 “언론은 늘 싸움붙일 것만, 싸움거리 될 것만 제목으로 뽑는다.”고 공격부터 해왔다. 자극적인 말만 골라 ‘장사’하려는 일부 언론의 행태가 부당하다는 지적이었다. 당헌·당규 개정이나 대권 라이벌 평가 등 곤란한 질문이 쏟아지자 “국민이 과연 그런 것에 관심을 가질까요.”라며 슬쩍 피해갔다. 언론이 좋아할 ‘화끈한 말’에 인색한 그의 화법다웠다. 내년 대선에 앞서 당내 경선의 길목에서 마주칠 박근혜 대표와 이명박 서울시장에 대한 인물평을 부탁하자 “마음 속으로 평가하고 내 성찰의 바탕으로 삼는 게 좋다.”며 함구했다. 그렇지만 ‘외자유치 108건’이 화두로 오르자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경기도 CEO’라는 별명답게 4년 임기 동안 지구를 예닐곱 바퀴는 돌았다. 덕분에 국내 여론조사에선 지지율이 아직 5%도 안 되지만 외국 CEO사이에선 최고라고 자랑했다. 경기도가 투자백서를 내려고 하자 외국 기업이 보낸 ‘감사편지’만 일주일 사이에 30건이 넘었다. 이런 일은 손 지사가 고집하는 ‘공포의 출장’덕에 가능했다는 후문이다. 퇴임을 20일 앞둔 지난 11일에도 ‘6박 11일’ 일정으로 출국했다. 경기도에 투자해달라고 요청하기 위해 열흘 만에 미국·핀란드·스페인을 거쳐 두바이와 싱가포르까지 둘러보고 돌아온다.‘관광’은 커녕 4시간 이상 다리펴고 자본 일이 없다는 게 출장길에 동행해본 측근의 설명이다. 이제 ‘자연인’으로 돌아가는 새달부턴 우선 “‘국민의 바다’ 속으로 뛰어들겠다.”고 했다. 배낭을 짊어지고 버스타고, 때론 걷기도 하면서 ‘민심 대장정’에 나선다는 것이다.“천심이라는 민심을 제대로 배워 따르기 위해서”라는 설명에선 내년 대선을 앞둔 나름의 결기도 느껴졌다. 다시 인터뷰 시작 전 장면. 물을 마시려던 손 지사가 눈살을 찌푸렸다.“나한테만 이런 좋은 컵에 주는 게 잘못된 거야.” ‘의전’을 끔찍이 싫어한다는 측근들의 설명이 떠올랐다. 박지연기자 anne02@seoul.co.kr
  • [오지로 떠나는 시간여행] (2)영월 가정마을~정선 거북마을

    [오지로 떠나는 시간여행] (2)영월 가정마을~정선 거북마을

    평창, 정선을 거쳐 영월로 굽이굽이 흐르는 동강은 휘감아도는 강줄기만큼 골도 깊다. 이방인의 눈에는 가벼운 신비감마저 느껴진다. 강 건너 마을이 있으면 어렵지 않게 눈에 띄던 줄배가 보이지 않는 대신에 우람한 콘트리트 다리가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노를 사용하는 대신 강변 양쪽에 줄을 매어 배를 연결해 사용하는 줄배의 존재를 자신 있게 이야기해 줄 수 있는 사람조차 드물다. 뜨거운 초여름의 햇볕을 피해 길가 나무 그늘 밑에서 담배를 태우고 있는 촌로에게 꼬치꼬치 물어 봐 어렵게 찾았다. 정선군 신동읍 덕천리 고개를 넘자 깎아지른 듯한 바위절벽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고 밑으로 푸른 동강의 절경이 펼쳐진다. 저 멀리에 눈에 보일 듯 말 듯 한 외줄이 강을 가로질러 매여 있다. 그 줄에 거친 페인트칠을 한 작은 철선이 연결되어 있다. 강이 군(郡)경계이니 매일 같이 정선과 영월을 잠깐 사이에 왕복하는 줄배이다. 나루에는 작고 빨간 우체통이 있어 강 건너에 마을이 있음을 알려준다. 줄배를 타고 정선에서 강을 건너 영월의 가정마을에 들어가니 방치된 폐가 사이로 금낭화가 핀 집이 보인다. 강원도에서는 며느리밥꽃이라 불리는 꽃이 우물가에 탐스럽게 피어 있다. 정희득(65) 김연자(60)씨 부부가 사는 집. “내가 어릴 적에는 줄배가 하루 종일 바쁘게 움직였지. 아침에 연포학교로 가는 아이들을 시간 맞춰 건네주고, 강 건너 큰 밭에 일 나가는 아낙들 태워다 주고, 장날에는 마을사람들이 장에서 팔고 산 물건 한 보따리씩 들고 드나들면 하루 종일 서울 택시보다 바쁘게 왔다갔다 했어.” 지금은 강을 건널 때 집에서 키우는 검둥이만 나루를 지킨다며 씁쓸한 표정을 짓는다. 옛 추억을 더듬다가 문득 청년시절 뒷산 범우골에서 봤던 호랑이 얘기를 할 때 표정이 밝아진다. 우물가에서 김연자씨는 낮에 캐온 나물을 손봐 삶아 내는 일에 바쁘다.“사람 발길이 드물어 도시에선 귀한 산나물이 이곳에는 지천이야. 힘든 농사 대신 산나물을 팔아 자식들에게 돈이라도 조금씩 부쳤으면 좋겠어.”적지 않은 나이지만 객지에 나간 자식들 걱정이 빠지지 않는다. 저녁 무렵 경사진 밭머리에서 내려 본 마을의 많은 집 중에서 밥 짓는 연기가 올라오는 집은 두 집뿐이다. 나머지는 빈 집이다. 눈을 돌려 강 건너 정선 덕천리 거북마을을 봤다. 민박을 치며 사는 부부가 유일한 주민이다. 얼마 전 복부 한쪽에 잡히는 것이 있어 서울 병원에 입원한 남편이 걱정이라며 이재화(62) 할머니가 평상에 앉아 눈시울을 적신다. 혼자 있는 어머니 생각에 낮에 다녀간 영월에 사는 딸이 당부한 저녁 식사도 입맛이 없다면서 소주나 한 잔 하자고 손목을 잡는다.“저 놈의 소 때문에 병원에 가보지도 못하고 영감 혼자 병원에 있는 것을 생각하면 속상해.”라며 신세한탄을 한다. 곧 이어 “그래도 영감 없으면 못 살것 같다.”며 애틋한 사랑을 내비친다. 거북마을에서 강 상류로 2㎞ 정도 떨어진 연포마을. 적막한 마을입구에 폐교된 연포분교가 눈에 들어 온다. 혹시 관광객이라도 찾아올까하는 기대인지 ‘선생 김봉두 영화 촬영장소’라는 표지판이 입구에 초라하게 흔들리고 있다. 두런두런 하는 말소리를 쫓아가 보니 이명용(80) 할아버지가 마실온 이옥순(78) 할머니와 툇마루에 멀찍이 앉아 무료한 시간을 달래고 있다. 사진을 찍으려 하자 부끄러운 듯 더 멀리 떨어진다. 50년 이상 동강과 함께 살아온 사람들. 강에서 태어나 동강을 떠나본 것은 젊은 시절 일제 징용과 6·25전쟁 때가 전부다. 이들은 다시 강으로 돌아와 여지껏 후회와 보람, 좌절과 희망이 교차하는 평범하지만 건강한 삶을 살고 있었다. 글 사진 강성남기자 snk@seoul.co.kr
  • [기고] 호국 보훈의 달에/박유철 국가보훈처장

    사람의 지혜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 그것을 우리는 ‘불가사의’라고 부른다. 세계에는 그렇게 해서 많은 불가사의가 회자하고 있다. 이해할 수 없는 왕궁이나 탑, 무덤들. 그 중 인도의 ‘타지마할’ 궁전이 세계 불가사의로 전해지는 이야기는 이렇다. 이 궁은 젊은 나이에 죽은 왕비를 못 잊어 왕이 22년이란 긴 세월에 걸쳐 세운 묘지라 한다. 이후 왕은 아들의 반역으로 왕위를 빼앗기고는 타지마할이 바라보이는 건너편 왕궁에 갇혀서 아내의 묘를 바라보면서 눈물짓는 말년을 보냈다고 한다. 이처럼 불멸의 신비로운 궁전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왕비에 대한 시공을 초월한 그리움, 영원한 삶에 대한 희구가 아니었을까. 국가가 위난에 처했을 때 선열들이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목숨을 바쳐 나라를 구하고 지킨 것은, 시대와 생명을 초월해 조국에 대한 영원한 사랑을 보인 것으로, 이러한 살신성인의 정신이야말로 불가사의한 일이 아니겠는가. 타인과 국가공동체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며, 자기 희생을 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인류사회는 개선된다는 말이 있다. 자신의 안위를 접고 조국과 민족을 위해 헌신하는 의로운 삶이 모여 국가적 어려움을 슬기롭게 극복하고 미래의 국가발전을 위한 전기를 마련할 수 있다 하겠다. 철기 이범석 장군은 우둥불에서 ‘조국이라는 글자처럼 온 인류, 각 민족에 위대한 영향을 끼친 것은 다시 없으리라 본다.’고 하였다. 조국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다시금 확인케 하는 달이다. 우리가 지금 세계 경제대국의 위치에서 누리고 있는 이 풍요로움과 편안함은 피어린 항일투쟁으로 나라를 찾은 선열들, 가까이는 6·25전쟁의 참화에서 자유 민주주의를 지켜낸 호국영령들의 의로운 삶이 바탕이 되었음을 생각해야만 한다. 보훈의 참뜻은 나라를 위해 헌신하신 분들에 대한 응분의 예우를 통해 국민의 애국심을 키워나가고 이를 바탕으로 사회공동체를 지키고 가꾸어 나가는 일에 있다. 국가라는 공동체 안에서 타인과 공익을 위해 헌신한 이들을 존경하는 분위기가 조성될 때 국력이 결집되고 국가적 힘은 더욱 커질 것이다. 따라서 국가보훈은 국민을 통합시켜 국가를 성장시켜 나가는 열쇠인 것이다. 박유철 국가보훈처장
  • 51회 현충일-현충원 나팔수의 하루

    51회 현충일-현충원 나팔수의 하루

    회색도시 서울 한 가운데 43만평의 조용한 숲속에 자리한 국립현충원. 일반인들에겐 현충일에나 북적거리는 별 존재감이 없는 곳이지만 전당대회나 선거같은 굵직한 이벤트를 앞둔 정치인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김지훈 일병은 국립현충원 군악대 소속 트럼펫 연주자다. 김일병의 부대는 양악대, 국악대(취타대), 팡파르대가 하나의 대대로 이루어져 현충원내에 주둔을 하고 있다. 바깥에서 ‘손님’들이 오면 부대 막사에 대기하고 있던 그는 정복차림으로 현충탑 앞으로 달려가서 진혼나팔을 분다.“연주는 셋이서 하는데 한 명이 솔(낮은 솔)-미-도 하고 연주하면 다른 두명이 같은 선율을 돌림노래로 따라 합니다.” 헌화. 분향행사 외에 각종 국빈행사등에서 활약을 하는 김일병의 일과는 아침 6시 기상나팔로 시작된다. 오전에 그날의 행사지침을 받으면 하루의 대부분을 연습과 대기로 보낸다.“연못과 산책로가 아름다운 현충원이 바로 옆에 있어도 나들이를 못합니다” 갑자기 연락을 받고 행사 출동을 나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고생이 큰 만큼 보람도 크단다.“국가와 국민이 불러주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는 국내최고의 군악대라는 자부심이 있습니다” 자신들의 뿌듯함뿐만이 아니라 도서벽지에서 찾아온 어린이들에게는 희망을 주기도 한다. 청와대, 전쟁기념관등의 외부행사를 마친 금요일 오후, 김 일병은 오랜만에 현충원 산책을 나섰다. 현충일을 앞두고 국립묘지는 공원으로 탈바꿈한다. 도시락을 먹고있는 유치원생들, 먼저간 전우를 그리워 하며 군가를 부르는이, 장군묘역 주변에 만개한 장미꽃 향기를 맡으며 데이트 하는 청춘 남녀... 그들을 바라보던 김 일병은 문득 자신에게 비치는 따사로운 오후 햇살의 느낌에 감사한다. 또한 이 느낌은 호국영령이 있었기에 가능한것임을 깨닫는다. 현충원에는 6.25전쟁에서 산화한 수많은 영령들의 묘역이 있다. 하지만 50년 세월이 흘러 현재는 발길이 뜸해진 쓸쓸한 모습이다. 그래서 현충원에서는 ‘한사람 한송이 헌화운동’을 하고 있다. 전사자 묘역을 뒤로 한 김일병은 현충원 끝자락에 있는 호국지장사(護國地藏寺)로 발걸음을 옮긴다. 조선후기 재상으로 유명했던 오성과 한음이 소년시절 머물면서 공부했다는 유래가 있는 곳이다. 김일병은 호국영령들께 묵념을 올리고 기도한다. 그리고 이내 트럼펫을 분다.“항상 낭만으로, 싱그러운 향기로, 그리고 정성을 다해 치장한 모습으로 저를 보살피듯이 이 나라도 살펴 주소서” ‘현충원 나팔수’의 진혼곡에 지장사 용마루로 날이 저문다. 글 사진 도준석기자 pado@seoul.co.kr
  • [열린세상] ‘역사만들기’ 상생의 카니발이어야/이덕연 연세대 교수

    영화배우 황정민의 영화제 수상소감이 참 진솔하고 겸손하다. 스태프들이 밥상을 맛나게 차려 놓았고, 맛있게 먹기만 하니 좋은 영화가 만들어지더라! 이전(泥田)격투기인지 이종격투기인지, 좌우의 도식으로 간명하게 구별되는 보수와 진보세력간의 갈등인지도 잘 모르겠지만, 격렬한 역사논쟁이 한창이다. 광복과 분단, 건국과 6·25전쟁, 과거청산 등의 역사 현안들을 둘러싼 상반된 관점들의 대립이 대한민국의 개념과 역사에 대한 이념적 갈등으로 증폭되고 있다. 최근에는 우익보수성향의 일부 시민단체와 교사모임이 “대한민국의 역사에 대한 정확한 사실과 평가”를 위한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개정을 위한 국민운동’의 깃발을 들고 나섰고, 이른바 ‘해방전후사인식’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핵심취지는 국가와 체제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좌파의 공세로부터 역사를 지키고,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우파가 승리하여 탄생한 나라이기 때문에 정체성이 우파에 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명시”하여 젊은이들이 우리의 현대사에 대하여 보다 ‘관대한 시각’을 갖도록 하는 개방적이고 현실적인 교과서를 만들자는 주장이다. 자유민주주의체제의 승리로 ‘역사의 종말’이 선언된 세계사의 흐름을 떠나서도 세계 10대 경제대국으로 발전한 대한민국의 현재 모습과 대비되는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의 참상을 외면하지 않는다면, 시대착오적인 좌파 이데올로기의 집착과 체제전복의 불순한 의도 외에 ‘불행한 역사’ 만들기에 나설 이유가 무엇이겠느냐고 반문한다. 극도의 답답함과 분노가 뒤섞인 결연한 글들을 보면 나름대로의 절박한 상황인식과 대응에 과장과 가식은 전혀 없어 보인다. 그런데 바로 그 순정함과 격렬함이 선뜻 말을 걸기 어렵게 만든다. 국가와 체제의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역사관과, 그에 따라 선택되고 강요되는 사실(史實)과 평가들은 맛있게 먹기에는 지나치게 격하고 거칠다.E 홉스봄 교수의 말대로 역사가들은 정치적 격정에서 한발 비켜서 있어야 한다.‘역사 만들기’는 상잔의 살육전이 아니라 상생의 카니발이어야 한다. 역사가 자유의 공간 속에서 내려졌던 선택의 과정이고 결과라고 한다면, 그에 대한 판정은 오로지 역사의 몫이고, 역사의 주체는 모든 시민이다. 역사의 풍경과 지형을 바라보는 것 자체도 하나의 선택이고, 결단의 행위이다. 성공보다 불행한 실패의 역사의 측면을 주목하는 것은 다른 대안의 선택이 가능했었다는 것에 대한 반성적 인식을 강조하는 관점의 선택일 뿐이다. 역사는 타자와의 공존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한다. 실패에 초점을 맞추는 역사가는 역사에 대한 ‘위대한 겸손’을 잊지 아니한다. 성공에 대한 행복한 기억과 자랑도 필요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실패한 역사와 그 속의 아픈 상처에 대한 반성과 과거청산의 과제에 대하여 눈가리개를 씌우는 것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관중이 외면하는 저급한 샅바싸움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젊은이들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그 나물에 그 밥만 가지고는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맛있게 먹기만 하면 되는 역사의 상이 차려질 수 없다. 대한민국은 국민주권과 정의의 이념을 공유한 ‘우리 대한국민’이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국제평화의 유지에 노력하여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결의”(제헌헌법 전문중 일부)하면서 창설하여 지켜왔고 또한 함께 가꾸어 갈 나라다. 대한민국의 개념과 역사는 완제품이 아니다.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창조적인 상상력과, 적극적인 반성과 관용의 용기와 슬기가 없이는 실현하기 어려운 헌법과제이다. 이 결의와 과제를 잊지 않고, 함께 풀어 나가는 행복한 역사를 만들어서 후대로부터 주연상을 받는 멋진 꿈을 가져보자. 따로 수상소감을 준비해야 하는 부담도 없다. 스태프들이 잘 차려준 밥상에 앉아서 그냥 맛있게 먹기만 했다! 이덕연 연세대 교수
  • 월드컵 앞서 호국영령 기억하자

    6·25전쟁때 전사한 국군장병 등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호국영령의 넋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한 기념일인 현충일(6일)을 맞아 EBS가 현충일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이달 10일 개막하는 월드컵으로 들썩이는 상황에서 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들도 현충일을 이해하고 기억할 수 있는 내용으로 구성돼 눈길을 끈다. EBS는 6일 오후 8시5분부터 50분간 한국전쟁 전사자 발굴사업 관계자들의 편지를 옴니버스 형식으로 구성한 특집 다큐멘터리 ‘다섯 통의 편지’를 방영한다. 현충일에 대한 기억이 서로 다른 사람들의 1인칭 편지 5편을 통해 현충일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겠다는 것이 제작진의 의도다. 20대 초반의 심규일 상병에게 현충일은 그저 ‘쉬는 날’일 뿐이었다. 그러나 이름도 생소한 발굴부대로 차출된 뒤 한국전쟁 전사자들의 시신을 발굴하고 있다. 시신을 찾지 못한 전사자의 유해를 발굴, 유가족의 품에 안겨주면서 현충일은 심 상병에게 더이상 공휴일의 의미가 아니다. 발굴부대는 최근 6주간 대구 다부동 전투지역에서 반세기가 넘게 가매장돼 있던 105구의 유해를 발굴했다. 다부동 전투는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라는 노래 가사에 등장할 정도로 치열한 전투였다. 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인 심 상병을 비롯, 함께 싸웠던 전우의 시체를 하나라도 더 찾아서 유족에게 안겨줘야 한다며 발굴사업에 참여한 팔순의 황대형 할아버지,50년 전 남편을 잃은 김영조 할머니와 딸 추옥분씨, 전쟁터에서 잃은 친구를 잊지 못하는 재미교포 최창호씨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김 할머니는 당시 3살배기 딸을 키우고자 재가할 수밖에 없었지만 질곡의 세월, 그래도 모녀에게 ‘아빠’와 ‘남편’은 잊지 못할 그리움의 대상이다. 교포 최씨는 미국으로 이민간 지 수십년이 지났지만 잊을 수 없는 것은 전쟁터에서 만난 친구의 주검이었다. 후퇴하면서 제대로 묻어주지도 못한 것이 괴로웠다는 그는 국방부로 편지를 보내왔다.현충일에 띄우는 다섯 통의 편지는 “50년 동안 조국에 의해 잊혀진 것은 아닐까 생각한 누군가에게, 조국은 당신을 잊지 않고 영원히 사랑할 것이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할 것이다.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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