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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열린세상] 국론분열 이대로 좋은가/이성무 한국역사문화연구원장

    [열린세상] 국론분열 이대로 좋은가/이성무 한국역사문화연구원장

    나라에 일이 있으면 국론이 양분되는 게 보통의 일일 것이다. 일리 있는 주장도 있겠지만 공론이 아닌 사론일 경우도 있다. 이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공론인 경우에는 지도자가 앞장서 조율을 해야겠지만 개인적인 이해관계나 당리당략에 의한 주장이라면 역사에 죄를 짓는 일이다. 얼마 전 우리는 60년째 6·25전쟁을 맞이했다. 필자는 민족상잔의 비극 6·25전쟁을 직접 체험한 사람이다. 그때 한국은 세계에서 여섯 번째로 가난한 나라였다. 그런데 그 이후 60년 만에 세계 15위의 경제대국을 이룩해 놓은 것이다. 골드먼 삭스의 예측에 의하면 2025년에는 미국, 일본에 이어 한국이 GDP 기준 세계 3위, 2050년에는 미국 다음으로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 된다고 한다.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국민도 일치단결해 노력했겠지만 이를 지도한 지도자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승만 초대 대통령부터 지금 대통령까지 온전하게 대접받는 사람이 없다. 비단 대통령뿐이 아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각 분야 발전에 기여한 사람이 많을 것이다. 설혹 이들에게 약간의 결함이 있더라도 좋은 점을 부각시켜 자손들이 이를 벤치마킹할 수 있게 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자손들이 미래의 비전을 제대로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국가발전과 민족문화 창달에 기여하는 길일 것이다. 서양 여러 나라엔 가는 곳마다 위인들의 동상이 즐비하다. 그들에게도 따져 보면 장점도 있고 약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의 표상으로 이들을 위인으로 키우고 있다. 그네들이 흠이 있는 것을 몰라서일까?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역사를 만들어 가자는 것이다. 조작하려는 것은 더욱 아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위인 만들기에 그토록 인색한가? 마음이 각박해서일까? 다른 나라에 비해 우리의 근·현대사는 극심한 격동기를 거쳐 왔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이념이 자주 바뀌고 가치기준이 자주 변화한 것이다. 일제의 식민지를 겪다 보니 친일파 논쟁이 있게 되었다. 제국주의의 침략을 경험하다 보니 전통문화와 외래문화의 거친 충돌이 있게 되었다. 냉전을 거치다 보니 반공과 통일이 헛갈리게 되었다. 이 때문에 각각 다른 기준으로 재단하다 보니 이 사람이 찬성하면 저 사람이 반대하고, 이 사람이 올려 세우려 하면 저 사람이 헐뜯는 형국이다. 이것은 사안마다 다른 것이 아니라 사회풍조로 굳어 가고 있다. 이러고도 국가가 잘될 리 없다. 의견을 조율해야 한다. 의견을 조율하려면 토론을 해야 한다. 토론을 하려면 상대방의 논지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 절장보단(絶長補短)해 공동분모를 찾아내야 한다. 이른바 구동존이(求同存異) 화이부동(和而不同)이다. 공론에 의해 합의한 부분은 법률로 제정하고, 법률로 제정된 것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준수해야 한다. 의견이 다른 것은 그대로 남겨두고 더 심도 있게 논의하는 게 필요하다. 그래도 안 되면 다수결로 결판을 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엄연한 민주주의의 원칙이 아닌가. 그런데도 지금 우리는 일마다 대립이요, 정책마다 반대 일변도다. 일찍이 고속도로를 놓을 때도 그랬고, 인천공항을 건설할 때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았었다. 요즈음 세종시도 그렇고, 4대강 정비사업도 마찬가지다. 고속도로와 인천공항을 반대하던 사람은 지금 어디로 갔는가? 지금 그것을 만들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를 생각하면 끔찍할 따름이다. 세종시도 그렇고, 4대강 사업도 그럴 것이다. 내일의 입지를 생각하면서 말을 하고 행동을 해야 한다. 각자가 주장하는 것에는 일리가 있는 부분도 있다. 애국심에서 말할 수도 있다. 그렇지 않고 개인의 이익이나 당리당략으로 무턱대고 반대한다면 역사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각자의 주장에 일리가 있더라도 국론이 분열되면 되는 일이 없으니 누군가가 이를 조율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지도자의 몫이다. 지도자의 리더십으로 양쪽의 의견을 절장보단해 합의점을 찾아야만 국가나 사회가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 천안함 외교 남은 교훈은

    천안함 외교 남은 교훈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9일 천안함 사건에 대한 의장성명을 채택함에 따라 우리 정부의 ‘천안함 외교’가 일단락됐다. 동북아는 물론 국제사회에도 큰 충격을 던진 천안함 사건은 대한민국 외교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 의미있는 교훈들을 남겼다. 첫째, 국제사회에서 우리가 어려울 때 도움을 줄 진정한 우방이 더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천안함 외교 결과 58개국이 한국에 대한 지지를 밝혔다. 전통적 맹방인 미국이 앞장서 우리를 도왔다. 3각 동맹의 한 축인 일본도 기꺼이 힘을 보탰고, 유럽연합(EU)도 우리의 친구라는 점을 확인했다. 과거 비동맹권이었던 인도와 콩고민주공화국 등이 대북 규탄에 신속히 동참한 것도 값진 소득이었다. 우리의 높아진 국력과 부지런히 길을 닦아 놓은 ‘사전(事前) 외교’가 빛을 발한 셈이다. 반면 그동안 많이 가까워졌다고 여겼던 중국과 러시아가 애를 먹인 것은 냉엄한 현실이었다. 6·25전쟁 때 우리를 도와 피를 흘렸던 에티오피아가 규탄 성명을 내지 않는 등 적지 않은 나라가 남북한 사이에서 엉거주춤한 것도 우리한테 숙제를 안긴 대목이다. 둘째, 외교적 목표를 달성하려면 상대국을 움직일 수 있는 ‘지렛대(leverage)’를 확보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번에 중국이 의장성명 채택에 동의해 준 결정적 계기는 한·미의 서해 군사훈련 실시 계획이었다고 정부 관계자는 전했다. 이 관계자는 “우리도 중국이 그렇게까지 예민하게 반응할지는 몰랐다.”면서 “서해 훈련이 중국에 대한 지렛대역할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의외의 소득이었다.”고 설명했다. 셋째, 중국과의 전략적 관계를 다시 한번 숙고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천안함 외교를 펼치는 과정에서 중국이 60년 전 북한을 도와 참전했던 엄연한 공산주의 국가라는 불편한 진실을 깨달았다. 한·중은 전략적 동반자 관계까지 맺은 사이지만 아직 갈 길이 먼 셈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변화의 조짐도 흐릿하게나마 감지됐다. 정부 관계자는 “중국 내부적으로 북한의 파렴치한 행위를 무작정 감싸다가는 체면이 손상될 우려가 있다는 의견이 제기된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중국 정부가 이번에 한·미 서해 훈련 계획을 비난하는 과정에서 환구시보(環球時報)라는 언론을 활용한 것은 한국 언론이 중국 정부를 비판하는 것에서 힌트를 얻은 것인데, 이것 자체가 긍정적 변화라는 역설적 시각도 있다. 그런 태도가 중국 정치의 ‘서구식 민주주의 따라하기’로 진화할 가능성이 있다는 논리다. 안보리는 의장성명에서 “북한이 천안함 침몰에 책임이 있다는 결론을 내린, 한국 주도 하에 5개국이 참여한 민·군 합동조사단의 조사결과에 비춰 깊은 우려를 표명한다.”면서 “이에 따라 안보리는 천안함 침몰을 초래한 공격을 규탄한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성명은 “이번 사건과 관련이 없다고 하는 북한과 다른 관련 국가들의 반응에 유의한다.”고 밝혔다. 워싱턴 김균미특파원·서울 김상연기자 carlos@seoul.co.kr
  • [인사]

    ■기획재정부 △재정사업평가과장 이용승 ■교육과학기술부 △군산대 사무국장 정연한△국사편찬위원회 편사부장 박홍갑△유네스코 본부(파견 연장) 김영철△국립국제교육원 박병태△법제처(파견연장) 김지현△6.25전쟁 60주년 기념사업 추진기획단(파견) 이기정 ■충북도 ◇전보 △행정국장 윤영현△농정〃 강길중△총무과장 박재익△자치행정〃 권영동△첨단의료복합단지기획단 총괄기획〃 김광중△음성부군수 이상헌△청원〃 김진형 ■경남도 ◇3급 △행정안전국장 배종대△문화관광체육〃 이희충△환경녹지〃 김호기△거제시 부시장 이용학△부산거제간연결도로건설조합장 김갑수◇4급△공무원교육원장 이종섭△의령군 부군수 강효봉△함안군 〃 이성주△남해군 〃 옥광수△함양군 〃 허종구△의회사무처 의사담당관 김성택△감사관 윤성혜△미래산업과장 정환원△농업정책〃 강호동△해양수산〃 민병완△통합시출범준비단 손태성△축산과장 박정석 ■식품의약품안전청 ◇부이사관 승진 △경인지방식품의약품안전청 고객지원과장 박봉식 ■예금보험공사 ◇전보 △리스크관리2부장 김준기△보험정책〃 임성열△금융분석전략〃 이강식△기금관리〃 김수회△정보시스템실장 양태영△경영혁신〃 정찬형△조사지원부장 이형구△홍보실장 김광의◇신규 보임△법무실장 김병만△기금운용〃 김광남 ■공무원연금공단 ◇실장 전보 △연금사업 김영재△고객기획 김재양△법무지원 주성진△조직인사 송진호◇부장 전보△재해보상실 박종선△사업기획실 김태홍△주택사업실 이영교△조직인사실 하광빈 김춘형△부산지부 이재형 (7월12일자) ■동부증권 ◇사업부장·본부장 전보 △트레이딩사업부장 강석호△기획관리담당 이근갑△채권영업본부장 한인철△솔루션〃 오상룡◇팀장 전보△해외영업팀장 조종욱
  • [기고]서울역 110주년을 맞이하여/윤중한 코레일 서울역장

    [기고]서울역 110주년을 맞이하여/윤중한 코레일 서울역장

    대한민국 대표역이자 경부선과 경의선의 기점인 서울역이 7월8일 110주년을 맞는다. 서울역은 1899년 노량진~제물포 간 경인선 개통 이듬해인 1900년 7월8일 현재의 자리에 10평 남짓 작은 목조건물에서 출발해 남대문역, 경성역, 서울역으로 역 이름이 바뀌었다. 2004년 4월1일 고속철도 개통을 앞두고 2003년 역사를 새로 지어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다. 약소국 수탈의 상징이었던 철도는 서구열강의 손에 의해 경인선, 경부선, 경의선 등이 건설됐고 6·25전쟁 중에는 목숨을 건 피란행렬이 우리 철도를 통해 이뤄졌다. 1960~1970년대 경제개발시대에는 산업발전의 견인차로서 중추적인 역할을 성실히 수행했다. 이후 철도의 역할이 다소 위축되기는 했지만 KTX 개통을 계기로 우리 철도는 다시 명성을 되찾아가고 있다. 서울역은 우리 민족과 함께 애환과 추억을 간직한 소중한 우리들의 산 역사다. 단순한 기차역이 아니라 개항 이후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관문 역할을 했다. 광복 직후 환호성이 메아리쳤던 서울역 광장은 전국에서 일자리를 찾기 위해 상경한 사람들과 명절이면 수많은 사람들의 귀성전쟁으로 붐볐다. 1980년대 초에는 민주화시위의 현장이 됐고, 숱한 연인들의 만남과 헤어짐의 추억 어린 장소가 되기도 했다. 사적 284호로 지정된 옛 서울역사는 문화체육관광부 주관으로 원형 복원을 위한 공사가 완료되는 내년 초에는 상설전시관과 전시공연장, 야외카페 등을 갖춘 복합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해 새로운 명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오는 11월 개최되는 G20 세계경제정상회의와 경부고속철도 전 구간 개통, 연말 코레일공항철도가 완전 개통되면 서울역은 명실공히 교통의 관문이자 중심이 될 전망이다. 서울역은 현재 일일 승하차 인원이 10만명에 육박하고 코레일 전체 여객수입의 22%를 차지한다. 미래를 향해 웅비하기 위해 역을 찾는 고객들에게 세계 1등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고 있으며, 고객감동분야 혁신허브사업을 추진하면서 고객만족문화 정립에도 역점을 두고 있다. ‘철도를 열망하는 녹색생활’을 의미하는 ‘GLORY코레일운동’의 일환으로 서울역도 주변의 지역주민과 시민단체들과 함께 힘을 모아 기차타기 생활화를 실천하고 저탄소 녹색성장 시대에 걸맞은 ‘푸른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이를 통해 자동차 보급으로 밀렸던 철도의 영광을 되찾고, 녹색교통수단인 철도의 가치를 재조명하며, 국민철도로서 녹색한국의 희망을 열어가고자 한다. 경부선과 경의선이 연결되고 시베리아, 몽골, 중국횡단철도를 잇는 대륙철도망 건설로 ‘제2의 철도르네상스’를 위한 중심적 역할을 맡게 된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중국, 일본이 선도적인 경제축을 형성하는 상황에서 남북한과 대륙을 잇는 연계철도망 구축은 우리의 희망 그 자체다. 서울역은 2014년까지 ‘서울역북부역세권개발사업’과 광화문까지의 ‘국가상징거리 조성’ 등을 통해 대한민국의 대표 역으로서 손색 없는 모습을 선보일 계획이다. 미래를 향해, 세계를 향해 힘차게 웅비하는 코레일의 핵심영업장인 서울역은 앞으로도 세계1등 역으로서의 역할을 성실히 수행해 나갈 것이다.
  • 대구·경북 현안해결 ‘한목소리’

    대구·경북이 현안 해결을 위해 뭉친다. 6일 대구시와 경북도에 따르면 4대강 살리기 사업의 중단 없는 추진을 위해 공동보조를 취하고 있다. ●첨단의료단지 조성 등 협력기로 김범일 대구시장과 김관용 경북도지사는 6·2 지방선거 직후 4대강 사업의 ‘중단 없는 추진’을 요구하는 공동 성명을 냈다. 성명에서 시·도지사는 “낙동강 사업은 생명과 문화, 생태를 복원하는 국가백년대계이며 대부분 주민의 염원을 담아 중단 없이 진행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정치나 이념을 떠나 주민의 삶과 직결되는 사업인 만큼 정치권과 사회지도층은 소모적인 정쟁을 중단하고 낙동강 사업 추진에 앞장서야 한다.”고 밝혔다. 대구·경북은 이와 함께 동남권 신공항 경남 밀양 유치를 위해서도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를 위해 1000만명 서명운동에도 함께 나섰다. 동남권 신공항 조기 건설 필요성에 대한 국민적 차원의 관심을 높이기 위해 출향인사 등을 대상으로 홍보활동을 공동으로 펼치고 있다. 여기에다 첨단의료복합단지와 호국평화벨트 조성, 3대문화권 사업, 세종시 수정안 부결에 따른 대기업 지역 유치 등에 대해서도 긴밀한 협력과 행동을 함께 하기로 했다. 대구와 경북은 지난달 25일 경북 칠곡군에서 열린 6·25전쟁 60주년 기념식을 공동주최했다. 1981년 대구시와 경북도가 분리된 이후 대규모 행사를 공동주최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6개 사업 공동사업자로 선정 이 밖에 대구·경북은 지식경제부가 추진하는 6개 사업 공동사업자로 선정됐다. 대경권 블루골드 클러스터 구축사업, BY2C 외씨버선 4색 루트 개발사업, 덴탈소재 및 치과기공 클러스터 활성화사업, 대경부품소재 상용화 및 구조전환 지원사업, 인플루엔자 백신 원료 맞춤형 생산시설 구축, 힐링용(치료용) 로컬푸드 활성화사업 등이다. 대구시 관계자는 “대구시와 경북도의 협력관계는 시대적 흐름이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대구·경북 광역단체장이 70% 이상의 득표를 얻은 것도 함께 일하라는 시·도민의 요구다. 경제나 행정의 협력은 물론 인사 교류도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대구 한찬규기자 cghan@seoul.co.kr
  • [씨줄날줄]경부고속도로와 4대강 사업/함혜리 논설위원

    1967년 4월 제6대 대통령선거에 입후보한 박정희 전 대통령은 선거공약으로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발표했다. 3년 전 서독을 방문했을 때 자동차 전용도로인 아우토반을 기반으로 경제부흥을 했다는 설명을 듣고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정치권의 비판과 여론의 반발은 극심했다. 6·25전쟁의 폐허에서 가까스로 벗어났지만 여전히 가난한 시절이었다. 총공사비 429억 7300만원은 당시 국가예산의 23.6%를 차지할 정도로 방대한 규모였다. 당시 1인당 국민소득은 142달러에 불과했다. 자동차 등록대수는 고작 5만대였다. 재정파탄의 우려와 시기상조라는 비난 속에서 단군 이래 최초의 대규모 국책사업은 첫삽을 떴다. 1968년 2월1일 서울~수원 간 공사를 시작으로 2년 5개월 만인 1970년 7월7일 대구~대전 구간을 끝으로 서울과 부산을 잇는 총연장 429㎞의 경부고속도로가 완공됐다. 지금부터 꼭 40년 전이다. 경부고속도로 개통으로 경제발전이 급속도로 진행됐다. 전국이 1일 생활권에 접어들면서 본격적인 물류혁명이 시작된다. 전국에서 제작·생산되는 제품이 단 하루 만에 수요자에게 전달되는가 하면 대구와 부산 등 경부축 대도시에서 섬유와 신발 등 산업이 발달하고 인구도 증가했다. 본격적인 고속도로 시대가 열리고 자동차 수요가 급증했다. 자동자 생산이 늘어나면서 제철 수요가 커지고 부품 산업이 발달하는 등 제조업에 대한 파급효과도 컸다. 경부고속도로를 시작으로 경인, 호남, 남해. 구마, 영동 등 고속도로가 잇따라 뚫리고 남북 7개축, 동서 9개축의 격자형 간선도로망이 갖춰졌다. 경부고속도로 개통은 경제뿐 아니라 국민들의 생활패턴, 여가활동 등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관광지 접근성이 향상되면서 관광·레저산업도 급격히 발달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가치 창출이었다. 4대강 사업을 둘러싸고 찬반논쟁이 치열하다. 경부고속도로 건설계획 발표 당시와 비슷하다면 비슷할 수 있다. 야권과 종교·환경단체 등 반대론자들은 천문학적인 규모의 예산이 투입되는 4대강 공사가 수질악화와 생태계 파괴를 가져올 것이라며 목소리를 높인다. 정부는 ‘친환경+녹색성장’의 새 기회를 열어갈 국책 치수사업임을 강조한다. 국토 개조에 대한 인식의 틀을 통째로 바꿔놓은 경부고속도로 건설의 성공신화가 4대강에서 재현될 수 있을지, 아니면 엄청난 재앙을 부를지 예단하기 어렵다. 확실한 것은 자동차 다니는 길과 물 흐르는 강이 다르다는 점이다. 함혜리 논설위원 lotus@seoul.co.kr
  • [CEO 칼럼]성숙된 국민 문화를 위해/정성욱 금성백조주택 회장

    [CEO 칼럼]성숙된 국민 문화를 위해/정성욱 금성백조주택 회장

    몇달 전 우연히 한국방송광고공사의 공익광고 캠페인 중 ‘사회공동체-벽 허물기’란 코너를 본 적이 있다. ‘소통을 통한 사회통합’을 강조한 이 공익광고에서는 지난해 우리나라의 사회갈등 비용이 연 300조원에 이르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갈등지수가 네 번째로 높다고 전했다. 툭하면 경제성장의 발목을 잡는 우리 사회의 갈등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시사하는 대목이다. 지난해 삼성경제연구소가 내놓은 보고서에서도 같은 점을 지적했다. OECD 27개국을 대상으로 한 분석 결과 우리나라 사회갈등지수(0.71)가 OECD 평균(0.44)보다 높게 나타났다는 것이다. 우리는 국내총생산(GDP)의 27%, 즉 300조원을 갈등 비용으로 지불하고 있다. 우리 사회는 6·25전쟁을 겪은 이후 짧은 기간에 고도로 압축적인 경제성장과 함께 민주화도 이룩했다. 그러면서 사회적 다원화가 촉진됐고 각 계층과 집단의 이익표출이 활발해짐으로써 여러 복합적인 갈등을 불러온 게 사실이다. 이 과정에서 갈등이 원만하게 관리되지 못하고 물리적으로 그대로 표출되는 바람에 막대한 사회적 비용이 발생하는 악순환을 지금도 경험하고 있다. 물론 갈등은 모든 사회에 존재한다. 이념과 계층·지역·세대에 이르기까지 존재하는 범위가 매우 다양하고 복잡하지만, 제도와 문화에 의해 평화적으로 해결될 때 이런 갈등도 충분히 사회발전의 에너지로 작용할 수 있다고 믿는다. 만약 갈등을 해결하지 않고 방치한다면 사회적 합의를 어렵게 만들고 이익집단 간 불필요한 경쟁을 초래함으로써 경제성장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갈등관리시스템이 취약한 국가일수록 경제위기나 불황을 극복하는 데 한계를 보이며 결국 사회 전체에 분열을 가져오고 국가발전을 해치게 될 것이다. 따라서 향후 우리가 ‘갈등관리’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가지냐에 따라 우리 사회가 더욱 발전하는 기회가 될 수 있고 또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현재 이슈가 되고 있는 갈등으로는 세종시 건설과 4대강 살리기 사업을 둘러싼 논란이 있다. 우리 사회의 가장 큰 화두일 것이다. 정치권은 연일 각자의 주장을 들이밀며 논쟁의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다. 어떤 현안이 해결점을 찾지 못하고 갈등으로 증폭되는 원인은 자기중심적이고 이분법적인 사고 탓에 상호 진지한 대화가 단절돼 타협이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로를 이해하고 의견을 조율할 수 있는 대화의 장을 마련하는 것이 시급하다. 또 개인의 이익을 앞세우기보다는 국민통합을 이루는 데 더 중점을 둬야 한다. 지난 6·2지방선거는 1인 8표제로 당선자 수만 해도 2307개 선거구에서 3991명에 이르고 있다. 유례 없는 대규모 선거로, 아직도 이로 인한 정당·세대·계층 간에 국민 갈등이 해소되지 않고 있다. 과거 우리의 모습을 되짚어 보면 선거철마다 등장하는 각종 흑색선전으로 선거 후에도 상당한 후유증이 발생하곤 했다. 이는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이기도 하다. 선거운동 과정에서 서로를 헐뜯고 비방하는 후보들의 모습에 실망한 국민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선거 결과에 깨끗이 승복해 당선자는 낙선자를 위로하고, 낙선자는 당선자를 축하하는 모습을 보여야 할 때다. 선거에 임하는 기본 자세를 되찾자는 말이다. 사회통합을 이루지 않고서는 진정한 선진국으로 진입할 수 없다. 또한 인간다운 삶의 보장과 행복추구를 위한 국민의 헌법적 권리가 실체적으로 실현되는 것도 불가능하다. 사회통합은 공생적 사회질서의 전제조건이며 국가와 사회의 지속발전을 위한 동력인 것이다. 앞으로 무한경쟁 글로벌 시대에 선진일류국가로 도약하고 싶다면, 소통과 포용의 성숙된 문화를 통해 사회통합이 필수적 조건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 [도시와 길] 대구 동성로

    [도시와 길] 대구 동성로

    대구 사람들은 동성로를 시내라고 부른다. 바꿔 말하면 동성로 이외는 다 시외다. 그만큼 동성로는 대구의 중심지다. 서울에 명동이 있다면 대구에는 동성로가 있다고 보면 된다. 옷가게, 영화관, 백화점, 음식점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다. 이러다 보니 주말은 물론 평일에도 젊은이들로 북적댄다. 주말이면 대구시민 10명 가운데 1명은 동성로를 찾는다고 한다. 하지만 근대 이전 동성로 일대는 대구 읍성 내에서도 개발이 가장 뒤처진 곳이었다. 영남제일관 앞에 있던 동문시장이 1791년 현재의 대구백화점 주차장 쪽으로 옮겨오면서 상업 기능이 생기기도 했지만 주변에는 주택 몇 채를 제외하면 허허벌판이었다. 1907년 읍성이 헐리고 신작로가 난 이후 동성로는 발전을 거듭한다. 이후 100년 동안 대구가 발전해 온 역사를 고스란히 보여 주는 곳이 바로 동성로다. 동성로는 중앙파출소에서 대구역 앞 대우빌딩까지 1㎞ 거리다. 동성로가 왜 동성로로 불리는지 아는 대구사람은 많지 않다. 대구 중구의 골목문화해설사로 활동하고 있는 이영숙씨는 “동성로 길은 과거 대구 읍성의 동쪽 성벽이었다. 동성로라는 이름은 바로 거기에서 비롯됐다.”고 설명했다. 대구 중구는 지난해 시민들이 성벽 길을 걸으면서 그 역사를 알 수 있게 동성로 중앙에 울퉁불퉁한 장대석을 폭 1.5m 정도로 이어놓았다. 하지만 그 취지가 제대로 홍보되지 않아 걷기에 불편하다는 민원이 제기돼 다시 예산을 들여 높이를 낮추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동성로는 지금은 한일멀티플렉스로 변한 한일극장이 위치한 한일로를 중심으로 동성로 1가와 2가로 나뉜다. 1988년 이전엔 동성로 1가가 메인상권이어서 대구역을 중심으로 교동시장, 동아백화점이 활기를 띠었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많은 브랜드들이 동성로 1가에 입점을 시도하다 실패하자 동성로 2가를 중심으로 의류 대리점들이 들어서게 되었다. 특히 대구백화점 본점이 1990년대 중반 전성기를 누리면서 대구백화점 분수광장을 기점으로 메인 스트리트와 프라이빗 거리, 로데오 거리가 활발해졌다. 한일극장과 교보빌딩, 미도빌딩 일대는 조선시대 경상감영의 방위군 성격의 군대인 진영이 있었다. 진영에는 병사 400명 정도가 주둔했는데, 지역 방위와 함께 각종 형벌 집행의 역할도 했다. 을사늑약으로 한국군이 해산당하자 진영 자리에는 수창동에 있던 일본군 수비대가 옮겨와 주둔했다. 1916년 남구 이천동 현 미8군 자리로 80연대가 옮겨간 뒤 한동안 비어 있다가 1938년 일본인에 의해 영화관 키네마 구락부가 들어섰다. 조선흥업주식회사 산하기관인 일본의 왕단건축소가 설계했다. 키네마 구락부는 일본 본토의 건자재를 공수해 와 단단하게 지어졌다. 특히 금은박 치장을 한 커튼은 엄청 화려했다. 원래 두 조의 커튼이 있었는데 한 조는 한국인을 위해 금강산을 그림으로 그려 넣었다. 이영숙 문화해설사는 “키네마 구락부는 3층 높이로 당시 동양 최대의 시설을 자랑했다. 6·25전쟁때 국립극장으로 차출되기도 했다.”고 말했다. 동성로의 터줏대감은 대구백화점이다. 1969년 교동입구에서 현재의 동성로로 옮겨졌다. 당시 대구 최고인 10층 높이의 본점 건물을 지으면서 상권이 동성로 주변에 형성됐다. 3층까지만 매장으로 사용했고 4층 이상은 청구주택건설과 영남TV 등의 회사가 임대하여 사용하였다. 영남TV는 대구MBC의 전신이다. 이영숙 해설사는 “고 구본홍 대구백화점 명예회장이 1944년 삼덕동 1가 구 동인호텔 입구 모퉁이에 대구상회를 세운 것이 대구백화점의 모태다.”라고 소개했다. 구 동인호텔 자리는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의 생가가 있었던 곳이다. 고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6·25전쟁 중 대구 계산성당에서 결혼한 뒤 이 곳에서 신혼생활을 하면서 1952년 박 전 대표를 낳았다. 동성로는 한때 제과점이 한 시대를 주름잡았다. 런던제과, 뉴욕제과, 뉴델제과 등 3개 대형 제과점이 70년대 대구 제방 제과계를 주름잡던 빅3였다. 이 중 런던제과점이 가장 컸다. 일제시대 대구 최초 백화점인 이비시아백화점 자리에 들어선 런던제과점은 중앙네거리의 미도백화점 총 매출액보다 많을 때가 있었다고 한다. 사단법인 거리문화시민연대는 ‘대구신택리지’라는 책자를 통해 “77년 부가가치세 도입으로 수익률이 감소하게 되고 80년대 중반부터 간식과 패스트푸드업계가 늘어나면서 제빵산업은 한계에 도달하게 된다. 이로써 런던, 뉴델, 뉴욕제과는 80년대 초중반 문을 닫게 된다.”고 밝혔다. 동성로의 산증인 중 하나는 대구백화점 앞에 있은 인제약국이다. 1959년 8월15일 문을 연 이 약국은 50여년의 긴 세월을 동성로와 애환을 함께해 왔다. 이 약국 약사 김숙자(77·여)씨는 “당분간 푹 쉬고 싶다.”는 말을 남기고 지난해 약국 문을 닫았다. 약국 자리는 세를 놓았다. 모녀가 대를 이어 운영하는 추어탕집인 상주식당은 동성로의 음식문화를 상징하는 명소로 손꼽힌다. 오스카양장점은 대구에서 제일 유명한 양장점이었다. 오스카양장점을 통해 배출된 디자이너들도 많았다. 오스카양장점을 중심으로 주변에 20여개의 점포가 있었다. 이들 양장점들이 동성로를 대구패션 1번지로 만들었다. 대구 중구가 추진한 동성로 공공디자인 개선 사업이 최근 마무리됐다. 야외무대 및 광장(대구백화점 앞), 바닥분수(대우빌딩 앞), 벤치 6곳 등이 조성됐다. 또 목백합과 대왕참나무 등 41그루가 심어졌다. 모두 43억원이 들어갔다. 시민 김동현(25)씨는 “예전에 동성로에는 많은 노점상과 전기시설 등이 있어 보행에 지장이 많았는데 이젠 걷기에 쾌적한 환경이 돼 좋다.”고 말한다. 동성로가 ‘테마가 있고 걷고 싶은 거리’로 화려하게 변신한 것이다. 대구 한찬규기자 cghan@seoul.co.kr
  • 기록으로 본 경부고속도로

    기록으로 본 경부고속도로

    경부고속도는 경인고속도로에 이은 우리나라 제2호 고속도로다. 40년이 흐르면서 도로 폭과 터널 수가 늘어났고, 통행량도 크게 늘었다. 또 기술이 취약했던 만큼 인명사고도 많았던 공사로 기록된다. 경부고속도로는 19개 민간 용역업체가 조사·측량과 실시설계를 담당했고, 시공에는 16개 건설업체와 3개 군 공병단이 투입됐다. 현대건설이 시공의 40%를 맡았다. 터널 12곳이 시공됐고, 연인원 892만 8000명과 165만대의 장비가 투입됐다. 경부고속도로에 편입된 용지는 3.3㎡당 평균 322원에 사들였다. 개통 때 428㎞였던 경부고속도로는 2005년 10월 양재~한남 7㎞ 구간이 서울시에 편입되고, 도로 개선작업이 이뤄지면서 현재 길이는 416㎞이다. 당초 도로는 왕복 4차선이었지만 현재는 모든 구간이 6~8차선이고, 터널은 12개에서 현재 22개로 늘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당시 국내에는 건설장비는 물론 도로전문 기술자가 없었다. 보유하고 있던 중장비 1647대는 6·25전쟁 전후에 도입된 노후장비였다. 장비는 미국·영국·프랑스·스웨덴 등의 중장비 업체에서 외상으로 사들였고, 기술자는 육사나 ROTC 출신 위관급 장교가 교육을 받아 투입됐다.공과대학이나 공업고등학교 토목과 출신 50명도 선발돼 짧은 교육이수 후 곧바로 현장에 배치됐다. 또 지금처럼 항공사진을 찍을 수 없어 조사단원들은 측량을 위해 현장을 직접 걸어다니면서 확인하며 설계도를 그려야 했다. 경부고속도로의 공사기간은 총 2년 5개월. 일본 도메이고속도로(도쿄~나고야)가 340㎞ 구간에 공사기간 7년인 것과 비교하면 100㎞가 더 긴 도로인데도 공사기간은 절반도 안 된다. ㎞당 건설비도 도메이가 약 7억~10억원이었고, 경부고속도로는 1억원 수준이었다. 휴일 없는 공사 속에서 전체 공사기간에 77명이 목숨을 잃었다. 대전 구간 약 70㎞는 최대 난공사 구간으로 기록된다. 전체 7개 공구 가운데 시공 구간이 가장 길었고 공사비도 가장 많이 들었다. 윤설영기자 snow0@seoul.co.kr
  • 김장훈 “‘전우’ OST ‘친구여’, 전쟁 아닌 사람 얘기”

    김장훈 “‘전우’ OST ‘친구여’, 전쟁 아닌 사람 얘기”

    가수 김장훈이 자신이 부른 드라마 ‘전우’ OST ‘친구여’에 담긴 의미를 전했다. 6.25전쟁 60주년 KBS 2TV 특별기획드라마 ‘전우’의 OST Part. 1 ‘친구여’를 부른 김장훈은 최근 ‘전우’의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녹음영상과 참여 소감, 인사말 등을 전했다. 영상에서 김장훈은 “‘친구여’는 전쟁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전쟁 속에서도 사람 간에 지켜야 할 것들, 살면서 힘든 순간 술 한 잔 하고 노래 한 번 부르고 울고 그럴 수 있는 노래를 굉장히 부르고 싶었다.”고 곡에 담긴 의미를 설명했다. 또 “드라마도 많이 사랑해주시고 그 안에 어우러지는 제 노래가 국민가요가 됐으면 좋겠다. 저를 위해서가 아니라 살면서 힘들 때 한 곡 딱 꺼낼 수 있는 노래가 있으면 좋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국민드라마, 국민가요가 됐으면 좋겠다.”고 바람을 전했다. 한편 김장훈 외에도 인순이, 브라운아이드소울(영준), 엠투엠 등 국내 최고 실력파 팀들이 참여한 ‘전우’ OST는 김장훈이 부른 OST Part. 1 ‘친구여’에 이어 오는 1일 Part. 2가 공개될 예정이다. 사진 = 서울신문NTN DB, 더제이스토리 서울신문NTN 정병근 기자 oodless@seoulntn.com
  • [길섶에서] 공유(共有)/김성호 논설위원

    70대 노모(母)는 6·25전쟁기 북녘을 떠나 온 실향민이다. 갈수록 고향에 얽힌 기억이 새록새록 더해지는 것 같다. 같은 처지의 실향 동창생 모임은 노모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만남. 석 달마다 갖는 모임 날이 가까워 오면 상기된 표정이 역력해진다. 오늘도 여기저기 전화를 하며 들뜬 모습이니 만남의 날이 닥친 게 분명하다. 언젠가 모임을 마치고 귀가한 노모의 표정이 어두웠다. 한 동창이 세상을 떠났다는데. 어릴 적 추억을 함께 할, 몇 안 되는 친구의 상실이 서글프단다. 공유의 소멸. 최근 젊은 나이로 세상을 뜬 친구들을 떠올리니 노모의 상실감이 더 사무친다. 올림픽공원에 누군가가 조성해 놓은 보리밭. 며칠 전까지만 해도 푸른 물결이 보기 좋게 싱그럽더니 모두 베어진 채 갈색 보릿단만 듬성듬성 섰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사람들의 몸짓이 똑같다. 보릿단에 다가가 냄새를 맡고 손으로 쓰다듬곤 하는데. 도심의 보리밭에 얹어 보는 추억의 반추일 터. 그 반추의 동작들을 보고 있는 것도 공유인 것만 같아 흐뭇하다. 김성호 논설위원 kimus@seoul.co.kr
  • 민간인피학살 유족 ‘연좌제 고통’

    민간인피학살 유족 ‘연좌제 고통’

    1962년 1월29일 혁명재판소. 경주피학살자유족회 회장 김하종(당시 28세)씨에게 무기징역이 구형됐다. “6·25전쟁 때 우리 국군과 경찰이 선량한 국민을 살해한 것처럼 왜곡하고 위령탑 건립 등을 주장해 북한 괴뢰의 목적사항을 찬양동조했다.”는 것. 김씨는 오른쪽 손가락을 깨물어 혈서를 쓰며 “가족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려 했을 뿐”이라고 항변했다. 그러나 이틀 후 징역 7년형이 선고됐다. 김씨의 고향인 경북 월성군 내남면은 1945년 광복 직후부터 민간인 학살로 얼룩졌다. 46년 조선공산당의 선동으로 ‘대구 10·1 사건’이 터지자 대한청년단이 조직됐고, 이들은 좌익분자를 색출한다며 민간인을 마구 살해했다. 49년 7월7일(음력) 김씨의 일가친척 22명도 잠을 자다가 총살당했다. 이 가운데 열살 미만의 어린이가 8명이나 됐다. 대한청년단 단장인 이모(당시 28세)씨가 소 판 돈을 약탈하고 죄를 은폐하려고 저지른 짓이라고 김씨는 설명했다. 그러나 경찰은 청년단이 공비토벌을 돕는 터라 수수방관했다. ‘가해자’ 이씨는 이후 자유당의 3선 국회의원까지 지냈다. 4·19 혁명이 터지자 세상이 뒤바뀌었다. 60년 5월27일 국회가 특별조사단을 구성해 진상조사를 벌이고 검찰이 살인죄로 이씨를 구속기소했다. 민간인 학살사건 재판이 최초로 열린 것이다. 검찰은 “이씨는 유대인 학살을 지휘한 독일 친위대 중령 카를 아돌프 아이히만에 버금간다.”고 밝혔다. “아이를 안은 어머니를 앉혀 놓고 총살했다.”는 목격자의 법정증언이 잇따랐다. 61년 3월6일 1심 재판부는 이씨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5·16 군사 정변이 발생하면서 세상이 다시 뒤집혔다. 진상 규명 활동은 ‘특수 반국가행위’로 바뀌었다. 경주유족회는 해산되고, 김씨는 불법 구금됐다. 경상남북도·경산·마산·창원·밀양·금창·동래유족회도 마찬가지였다. 유족 28명이 기소돼 최고 사형까지 선고받았다. 경찰은 민간인 희생자가 묻힌 합동묘를 없애고 위령비도 정으로 지워 훼손했다. 살인죄로 1심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던 ‘가해자’ 이씨는 항소심에서 무죄로 풀려났다. 유족회 간부의 처벌을 지켜본 증인들이 항소심에서 진술을 번복했기 때문이다. 일부 유족은 허위 증언의 대가로 돈을 받기도 했다. 징역 7년형을 선고받은 김씨는 2년간 복역하고 63년 12월16일 사면됐다. 그 후로도 경찰의 감시가 이어졌다. 취업할 수 없어 농사를 짓고 살다가 78년 중등학교장 자격증을 취득했지만 ‘신원특이자’라고 교육청에서 승인이 제때 나오지 않았다. 민간인 피학살 유가족은 김씨처럼 법적 근거도 없는 ‘연좌제’에 시달려야 했다. 형사처벌을 받고 신원조회로 사회생활에서 불이익을 당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연좌제로 피해를 당한 301명의 사례를 발표했다. 공무원·사관학교 임용시험에서 탈락하고(73명), 취업이나 승진 때 불이익을 받았다(44명). 출국도 불가능했고(43명) 신원조회에 걸려 부당한 대우(91명)를 받았다. 김씨는 “집단학살된 가족의 생사 확인을 반국가활동이라고 사형까지 선고하고 ‘연좌제’로 수십 년간 감시해온 국가가 이제 와서 소멸시효(5년)가 지났다며 배상을 거부하는 게 상식에 맞느냐.”고 반문했다. 글 사진 대구 정은주기자 ejung@seoul.co.kr
  • [열린세상]북한·소련·중국 남침협의 진상과 의미/황병무 국방대 명예교수

    [열린세상]북한·소련·중국 남침협의 진상과 의미/황병무 국방대 명예교수

    1949년 3월 김일성이 소련을 방문한 주목적은 스탈린으로부터 남침승인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 스탈린은 김일성의 제안을 거부한다. 북한군대가 남한군대를 압도할 정도로 우세하지 않다. 남한엔 미군이 주둔하고 있으며 미국과 합의한 38도선 파기를 소련이 주도할 수 없다는 이유를 내세웠다. 그해 6월 주한미군이 완전히 물러가고,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이 선포된다. 김일성은 소련의 군사지원으로 전력을 강화하면서 중국 공산군에 편입된 이른바 한인 3개사단을 1950년 1월까지 중국으로부터 돌려받는다고 보장받는다. 김일성은 무력에 의한 한반도 통일 가능성을 북한 주재 소련대사에게 제기한다. “남한에서 미군 철수는 38선을 지킬 명분과 능력을 미국 스스로 없애고 있다.” “왜 우리가 38선에 얽매여야 하는가.” 1950년 1월12일 미 국무장관 딘 애치슨의 한반도와 타이완을 제외한 극동방위선 발언은 김일성과 스탈린에게는 미국 불개입에 대한 믿음을 굳히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1950년 1월 말 스탈린은 북한대사 슈티코프에게 비밀전문을 보내 “김일성 동지의 불쾌감을 이해하고 있으며”, 대남행동에 대해 “언제고 만나 대화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알렸다. 이 전문이 스탈린이 북한의 남침을 간접적으로 승인한 최초의 문건이다. 김일성은 1950년 3월30일부터 4월25일까지 모스크바에 체류하면서 남침조건, 전쟁지원을 논의했다. 스탈린은 네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미군개입의 철저한 평가, 중국의 남침승인, 소련의 직접 참전에 대한 기대 포기 및 철저한 전쟁준비이다. 5월 중순 김일성은 마오쩌둥을 만나 스탈린의 남침승인을 알리면서 마오의 승인을 얻는다. 미군 개입시 중국은 군대를 보내고 소련은 무기를 보내 북한을 돕는다는 데 합의한다. 놀랍게도 마오쩌둥은 북한과 유대를 강화하기 위해 동맹조약을 체결하고 북한이 한반도 통일을 완수할 시 조약을 발효시킬 것에 대해 스탈린의 동의를 얻는다. 스탈린은 미국과 중국이 한반도에서 싸우게 되면 중국은 소련에 더욱 의존할 것이며 미국은 국력의 손실로 세계적 세력균형이 소련에 유리하게 이동할 것이라는 계산을 했다. 1950년 1월과 7월사이 유엔 안보리에 소련의 불참은 계획된 것이었다. 미국이 “행동의 자유”를 가지고 “보다 많은 잘못”을 저지르게 하기 위한 스탈린의 의도는 1950년 8월 체코 대통령 고트아트에 보낸 비밀전문에 보인다. 스탈린은 한국전쟁에 참여하는 부대 명칭을 중국인민 “지원군”으로 제시하고 중국인민지원군에 대한 항공지원도 한·만 국경지역에 한정하는 등 중·소동맹조약의 의무가 발동돼 미군과 군사분쟁에 들 수있는 상황을 최대한 회피했다. 김일성은 소련 군사고문단이 만든 “선제타격작전계획”에 따르지만 개전시기를 소련 군사고문단이 주장한 7월서 6월로 앞당긴다. 개전계획도 옹진반도의 진격에 의한 단계적 확전에서 비밀누설 위험 때문에 전 전선 공세계획으로 바꾼다. 중국은 10월2일 한국군이 38선을 돌파한 직후 스탈린과 김일성의 간곡한 파병요청을 받으면서 참전결정을 내린다. 그러나 대다수 정치국원의 반대와 소련 공군력 지원이 불분명해지자 그 결정을 스탈린에 알리지 않고 저우언라이를 협상사절로 모스크바에 파견한다.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중국이 파병을 재차 거부함을 알리면서 동북지역으로 조속히 퇴각할 것을 지시한다. 10월8일 미군이 북진하고 유엔이 한국통일부흥위원단 설립을 결정하자 마오쩌둥은 서둘러 파병명령을 내리지만 10월19일 평양이 유엔군에 장악될 때 중국인민지원군은 한·만 국경을 넘는다. 그리고 중국군은 사실상 한국과 유엔의 한반도 통일노력을 저지시켰다. 6·25전쟁은 필연적인 것은 아니었다. 공산블록의 세력확장 기도에 적절한 억제책을 적용했다면 예방할 수 있었다. 6·25는 억제의 실패가 아니라 억제의 부재 때문에 발발했다. 휴전이후 한·미동맹과 주한 미군의 역할, 남북한 군사력 균형 및 중국, 소련과의 관계를 계속 점검해야 하는 이유가 억제의 취약점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또 억제를 넘어 한반도에 안정된 평화체제를 만드는 일, 평화통일은 한국전쟁이 남긴 중요한 교훈임을 잊어서는 아니된다.
  • [한미 전작권 전환 연기] 전작권 略史

    [한미 전작권 전환 연기] 전작권 略史

    한국군에 대한 작전통제권은 6·25전쟁의 급박한 상황 속에서 유엔군사령부를 거쳐 한미연합군사령부에 넘겨졌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0년 6월 전쟁이 발발하자 다음달 작전지휘권을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에게 이양했다. 1953년 휴전 이후 한·미 양국은 한국군을 계속 유엔군사령관의 작전통제권 아래 두기로 합의했다. 1978년 11월 한미연합군사령부가 창설되면서 유엔군사령관에게서 한미연합군사령관에게 이양됐다. 작전통제권 환수 논의가 시작된 것은 1987년 당시 노태우 대통령 후보가 선거 공약으로 ‘작전통제권 환수 및 용산기지 이전’을 제시하면서부터다. 2년 뒤부터 미국 내에서도 이 문제가 공론화되면서 양국은 전작권 전환 연구와 협의에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1991년 11월 열린 제13차 한·미 군사위원회회의(MCM)에서 양국은 평시작전통제권을 1993~1995년 사이에 전환하고 전시작전통제권은 1996년 이후 협의키로 했다. 이에 따라 평작권은 1994년 말 한국군에 전환됐으며, 연합사령관은 ‘전작권과 연합권한위임사항(CODA)’만을 행사하게 됐다. 전작권 전환 논의는 2005년 10월 제37차 한미안보협의회의에서 한·미 간에 ‘전작권 전환에 관한 논의를 적절히 가속화’하자는 데 합의하면서 본격화됐다. 이듬해 9월 한·미 정상회담에서 양국 정상은 전작권을 전환한다는 기본 원칙에 합의했다. 같은 해 10월 열린 제38차 한미안보협의회의에서 양국 국방장관은 ‘전작권전환 후 새로운 동맹군사구조 로드맵(Roadmap)’에 합의했다. 2007년 1월 한·미 상설 군사위원회(MC)에서 ‘한·미 지휘관계 연합 이행실무단 운영을 위한 관련 약정’을 체결했다. 한달 뒤 한·미 국방장관회담에서 ‘2012년 4월17일’을 전작권 전환 날로 확정했다. 오이석기자 hot@seoul.co.kr
  • 전작권 2015년 12월 환수

    전작권 2015년 12월 환수

    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이 오는 20 15년 12월1일 우리 군에 넘어온다. 당초 계획(2012년 4월17일) 보다 3년7개월여 늦춰진 것이다. 전작권은 현재 주한미군사령관 겸 한미연합사령관이 갖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26일(현지시간) 캐나다 토론토에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이같이 합의했다고 공동 기자회견을 통해 밝혔다. 이 대통령은 이날 개막한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 참석해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오는 11월 방한때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대한 추가 협의가 마무리되면 내년 초쯤 미 의회에 비준안을 제출하겠다고 밝혔다. 2007년 6월 협상타결 이후 3년이 지나도록 양국 의회의 비준이 안 돼 발효되지 못하고 있는 한·미 FTA가 급물살을 탈 것으로 보인다. 이 대통령은 전작권 이양과 관련, “현재의 안보환경과 양국의 동맹관계를 강화하는 의미에서 우리가 2015년 말까지 이양을 연기하는 것에 대해서 오바마 대통령이 수락해준 것을 고맙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우리 군의 준비상황 등을 감안해 2012년 4월17일이었던 전작권 전환 시점을 2015년 12월1일로 늦출 것을 공식 요청했고, 오바마 대통령은 이를 수용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한반도에 있어서 전작권을 2015년 후반에 전환하는 합의를 했으며, 이것은 한반도뿐 아니라 기존의 안보상황에서 매우 적절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두 정상은 새로운 전환시점에 맞춰 실무작업을 진행하도록 양국 국방장관에게 지시했다. 7월 한·미 외교·국방장관(2+2) 회담과 10월 한·미연례안보회의(SCM)에서 후속대책이 마련된다. 전작권은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7년 2월 우리 군에 2012년 4월17일 이양하기로 한·미 양국 간 합의했던 것을 다시 연기한 것이다. 평시 작전통제권은 1994년 이미 우리 군으로 넘어왔다. 야권과 일부 시민단체 등은 전작권은 군사주권과 관련된 문제라며 예정대로 이양돼야 한다고 반발하고 있어 논란이 예상된다. 김성환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은 “전작권 전환 연기는 굳건한 한·미동맹 덕분에 가능했으며, 군사주권을 포기했다는 일각의 지적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김 수석은 전작권 전환이 또 연기될 가능성에 대해서도 “일단 이것이 최종적(final)인 것이며, 다음 정부에서 할 일이기 때문에 단언할 수는 없지만 더 이상 연기가 되는 일은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오바마 대통령은 한·미 FTA와 관련, “미국을 떠나오기 전 미 무역대표부(USTR)에 한·미 FTA에 대한 실무협의를 지시했다.”면서 “오는 11월 방한할 때 실무작업이 마무리되면 수개월 내에 의회인준을 요청하겠다.”고 말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한·미 FTA는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자리 창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이라며 이같이 밝혔다. 한편 이명박 대통령은 27일(현지시간)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과 한·중 정상회담을 갖는다. 이 대통령은 회담에서 유엔 안보리 차원의 대북 제재 조치에 대해 중국이 적극 협조해 줄 것을 요청할 것으로 알려졌다. 토론토 김성수기자 sskim@seoul.co.kr [용어 클릭] ●전작권 전시작전통제권(Wartime Operational Control)은 전쟁이 발생했을 때 작전계획이나 작전명령 상에 명시된 특정 임무 또는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 지휘관에게 위임된 권한을 말한다. 한반도 유사시 한국군과 미군 증원군의 작전을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이다. 일반적으로 자국 군대의 전시 및 평시 작전권은 각 국가가 갖지만, 한국의 경우 6·25전쟁 이후 유엔군사령부를 거쳐 한미연합사령부(ROK-US CFC)에 전작권이 이양됐다. 평상시에는 작전통제권을 한국군이 독자적으로 행사하지만 한반도에 전쟁이 발발하면 방어준비태세인 ‘데프콘3’(Defense Readiness Condition 3)가 발령되고 주한미군사령관 겸 한미연합사령관이 작전통제권을 행사하게 된다. 오이석기자 hot@seoul.co.kr
  • 평생 역작 ‘불의 제전’ 13년만에 개정판 낸 소설가 김원일

    평생 역작 ‘불의 제전’ 13년만에 개정판 낸 소설가 김원일

    ‘불의 제전’은 소설가 김원일(68)이 18년 동안 쓴 작품이다. 1980년 ‘문학사상’에 연재를 시작해 1997년 문학과지성사에서 일곱 권으로 완간했다. 그가 ‘불의 제전’을 구상하고 첫 메모를 노트에 쓴 것은 스무살 때인 1962년. 작품 소재를 처음 얻은 날을 생각하면 그 시기는 1950년으로 올라간다. 그가 여덟살 되던 해이자, 6·25전쟁이 발발한 해다. 그렇게 셈을 하면 최근 그가 1년여의 개작 작업을 거쳐 다시 내놓은 ‘불의 제전’(전5권, 강 펴냄)은 무려 60년의 무게를 가진 책이다. 김원일은 거의 평생에 걸쳐 이 작품의 소재를 모아서 메모하고 또 글로 쓰고 고쳐왔다. ●대화 간략하게 줄이고 객관성 살려 그 지난한 작업을 끝낸 그를 지난 24일 서울 서초동 집필실에서 만났다. 몇 년 전 고혈압으로 쓰러져 지금도 하루 네 번씩 약을 챙겨먹고 있지만, 표정은 무척 밝았다. 평생의 역작을 마무리한 소감을 “목욕하고 머리깎은 기분”이라고 했으니 그 후련하고 상쾌한 기분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불의 제전’은 1950년 1월부터 10월까지 경남의 작은 마을 진영과 서울, 평양을 무대로 6·25전쟁을 그려냈다. 남로당원부터 촌로에 이르기까지 이념과 계급을 넘나드는 다양한 계층의 인물을 통해 전쟁의 비인간성을 다룬 것으로, ‘분단의 소설가’ 김원일 문학의 정수로 꼽힌다. “개작은 주로 덜어내는 작업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의욕만 앞세워 쓰다보니 산만하고 불만스런 부분이 생길 수밖에 없었어요.” 개작 작업을 거쳐 나온 ‘불의 제전’은 이야기에 압축성과 긴박감이 더해졌다. 큰 스토리에 별 상관이 없는 장면들은 드러내고, 길게 이어지던 대화도 간략하게 처리했다. 전체적으로 부사나 형용사의 사용도 줄여 담백한 맛과 함께 객관성을 살렸다. 그러다보니 분량은 2권이나 줄어들었다. 아까울 만도 하지만 그는 “요즘은 ‘토지’나 ‘아리랑’이 유행하던 때와는 다르다.”고 냉정하게 말한다. 온갖 매체가 넘쳐나는데 아무리 소설 독자라도 책을 그리 오래 잡고 있지 않는다는 것. 즉, 소설이 너무 지리하게 길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었다. 그는 “소설은 집중적으로 한 문제를 파고 들어야 된다.”며 “이야기 하나에다 당시 사회상, 생활상 모두를 담겠다고 생각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시도”라고 잘라 말했다. 그는 말이 안 되는 시도라고 했지만 ‘불의 제전’ 정도면 6·25전쟁 시기 사회상을 폭넓게 담고 있다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 작품은 남로당 간부였던 실제 작가의 아버지에 대한 기억과, 6·25전쟁 및 전후시대를 경험한 자전적 체험이 깊이 반영돼 있어 자연스럽게 사실성을 획득하고 있다. ●“이런 글 쓸 때마다 역사의 증인된 기분” 김원일은 소설가들 중에는 6·25전쟁을 직접 겪은 마지막 세대다. 사실상 아직 붓을 꺾지 않은 작가 중에서 전쟁과 분단에 대한 체험을 글로 옮길 수 있는 이는 그가 유일하다고 문단은 말한다. 그 스스로도 “이런 글을 쓸 때마다 ‘역사의 증인’이 된 심정”이라고 털어놓았다. 자기 세대마저 죽고 나면 더이상 6·25전쟁의 비극성과 여전히 유효한 상처들에 대한 ‘사회적 환기’를 불러올 서사가 나오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그는 전집을 묶어 문학세계를 정리하면서도 전후시기를 다룬 다음 작품을 또 준비하고 있다. 그는 “전쟁은, 생각이 달라도 공동체 차원에서 서로 공존하던 사람들마저 서로 날을 세우게 만들었다.”며 “공동체 원리를 해체한 전쟁의 비극성을 작은 농촌마을을 배경으로 보여줄 것”이라고 전했다. 글·사진 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 ‘한국전쟁 60주년’ 세계 속 행사로

    ‘한국전쟁 60주년’ 세계 속 행사로

    6·25전쟁 60주년 행사가 노병들의 전역식부터 해외 참전국 용사들에 대한 감사의 표시까지 세계 속의 행사로 진행됐다. “충성! 6·25 참전용사 소령 전인식(82) 등 26명은 2010년 6월25일부로 전역을 명 받았습니다.” 1951년 한국군 최초의 유격대로 창설된 ‘백골병단’의 생존 용사들 중 26명이 59년만에 전역 신고를 했다. 6·25 60주년을 맞아 육군이 계룡대 육군본부에서 마련한 전역식에서다. 당시 이들은 임시계급을 부여받고 전투에 참전했지만 급박한 전황과 부대 사정으로 전역행사를 치르지 못했다. 20대의 청년에서 80대의 노병으로 돌아왔지만, 꿈에도 그리던 전역신고에서 노 병사들의 목소리는 우렁찼다.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서는 ‘주먹밥’을 통해 6·25를 기억하는 행사가 진행됐다. 전쟁 당시 먹을거리가 부족하던 우리 군과 유엔군은 주먹밥을 만들어 지게에 지고 운반해 배고픈 병사들에게 나눠줬다. 행사에는 김태영 국방부 장관과 이상의 합참의장, 월터 샤프 주한미군사령관, 조지 필 미 8군사령관 등 한·미 군 지휘부가 함께했다. 특히 유엔군으로 참전한 21개국의 주한 무관들도 주먹밥 먹기 행사에 참가했다. 전쟁기념관 중앙로비에 마련된 행사장에는 6·25전쟁 당시 노무부대(일명 A부대)가 전투 장소까지 운반했던 주먹밥과 고구마, 감자, 쑥떡 등 전쟁 때의 음식을 함께 준비했다. 군수물자도 모자라던 당시 그릇 대신 탄약통에 주먹밥을 담아 지게로 산 위로 날랐던 상황도 함께 설명했다. 또 전쟁 때 사용된 105㎜ 포탄 탄피에 된장국을 담아 행사 참가자들의 눈길을 끌었다. 6·25전쟁 60주년 행사는 해외에서도 잇따라 열렸다. 공군은 미국 공군박물관의 ‘6·25전쟁 특별전’ 개관식에 참석하고 미 참전용사들의 헌신적인 희생에 감사를 표시했다. 미 오하이오주 데이턴에서 개관하는 이 박물관에 전쟁 당시의 작전일지와 F-51 비행수료증 등 유물 13점과 미 공군 참전사진 400여점 등을 기증했다. 개관식에 참석한 박종헌 공군 교육사령관은 데이턴 시내의 6·25전쟁 기념공원에서 7000여명의 시민들에게 “낯선 나라 대한민국에서 자유민주주의와 평화의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장렬하게 산화한 공군 장병 7084명과 368명의 부상자, 53명의 실종자, 220명의 포로를 우리는 분명히 기억한다.”면서 미 공군 참전용사들의 희생에 감사를 전했다. 영국에서도 행사가 마련됐다. 주영 한국대사관은 런던 세인트폴 성당과 템스강변의 런던시청 앞에 정박돼 있는 군함 ‘벨파스트함’에서 6·25전쟁 60주년 행사를 개최했다. 기념식에는 추규호 주영 한국대사와 한국전에 참전했던 함명수 전 해군참모총장, 영국의 한국전 참전용사회(BKVA) 고문 피터 다운로드 등이 참석했다. 오이석기자 hot@seoul.co.kr
  • 백령도·대청도서 ‘안보 워크숍’

    박상은 의원은 24~25일 백령도와 대청도에서 6·25전쟁 60주년 및 천안함 침몰사태를 계기로 ‘안보 워크숍’을 열었다. 장광근, 조진형, 김충환, 강성천 의원과 임성준 한국외대 석좌교수, 최종철 국방대 안보문제연구소장, 김영호 국방대 교수 등이 참석해 군 개혁 방안에 대해 논의했다.
  • ‘섹션TV’, 6.25특집 ‘코레 아일라’로 대체편성

    ‘섹션TV’, 6.25특집 ‘코레 아일라’로 대체편성

    지난 25일 MBC ‘섹션TV 연예통신’ 방송이 결방됐다. 매주 금요일 오후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MBC 연예정보프로그램 ‘섹션TV 연예통신’은 MBC 현대사 연속기획 6.25특집 다큐멘터리 ‘코레 아일라’로 대체 편성됐다. 다큐멘터리 ‘코레 아일라’는 MBC에서는 6.25전쟁 60주년을 맞아 준비한 현대사 특집극. UN군의 일원으로 6.25에 참전한 터키군 장교와 전쟁고아인 5살 한국소녀 아일라 사이에서 펼쳐지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담은 ‘코레 아일라’는 빛바랜 사진 한 장과 아일라라는 예명만을 가지고 그녀를 찾아나서는 터키군 장교의 감동적인 과정이 방송돼 호평을 받았다. 사진 = MBC 서울신문NTN 이효정 인턴기자 hyojung@seoulntn.com
  • 한·미 ‘전작권 유예’ 공식 논의

    한·미 ‘전작권 유예’ 공식 논의

    이명박 대통령이 캐나다·파나마·멕시코 등 북중미 3개국을 방문하기 위해 26일 오전 출국한다. ●SICA 회원국 연쇄 정상회담 캐나다 토론토에서는 26~27일(현지시간) 열리는 제4차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 참석한다. 26일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간 나오토(菅直人) 일본 총리와 잇따라 정상회담을 갖는다. 오바마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는 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 전환 유예 문제를 공식 논의할 것으로 알려져 결과가 주목된다. 대북 제재 문제와 한·미 안보동맹 강화 방안, 북핵문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문제 등도 협의한다. 28~30일로 예정된 파나마 방문에서는 리카르도 마르티넬리 파나마 대통령과 정상회담(28일)을 갖고 통상·자원개발·인프라 등 분야에서 협력방안을 논의하고 공동성명을 발표한다. 이 대통령은 또 중미 8개국의 사회·경제 통합 조정기구인 중미통합체제(SICA) 회원국 정상들과 연쇄 양자회담도 갖는다. 이 대통령은 이어 다음달 1일 칼데론 멕시코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한·멕시코 FTA 협상 재개 문제 등을 협의한다. ●MB “北, 천안함 도발 사과해야” 한편 이 대통령은 25일 6·25전쟁 발발 60년을 맞아 “북한은 더 이상의 무모한 군사도발을 중지하고 7000만 민족이 다 함께 사는 길로 나와야 한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서울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열린 ‘6·25전쟁 60주년 행사’에서 이같이 말하고 “이를 통해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를 회복하고 한민족의 공동번영을 모색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대통령은 “우리의 궁극적 목표는 군사적 대결이 아니라 평화적 통일”이라면서 “북한은 천안함 도발 사태에 관해 분명하고 솔직하게 잘못을 인정, 사과하고 국제사회 앞에 책임 있는 자세를 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 대통령은 “우리가 그동안 번영과 평화를 누리면서 전쟁을 잊은 것 아니냐.”면서 “이런 시련을 겪은 것은 평화를 지킬 우리의 힘과 의지가 충분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김성수기자 sskim@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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