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25전쟁
    2026-03-05
    검색기록 지우기
  • 남동구
    2026-03-05
    검색기록 지우기
  • 국세
    2026-03-05
    검색기록 지우기
  • 골퍼
    2026-03-05
    검색기록 지우기
  • 연소득
    2026-03-05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4,786
  • [김문이 만난사람] ‘가난한 인간’만찍은 원로 사진작가 최민식

    [김문이 만난사람] ‘가난한 인간’만찍은 원로 사진작가 최민식

    작은 사진기에 흑백필름을 넣어 어깨에 둘러메고 1950년 중반부터 조국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 그러나 사진기를 들이댔을 때 조리개를 통해 들어온 피사체는 다름 아닌 상처 입은 동족의 슬픈 얼굴이었다. 거리의 모퉁이에서 ‘호옥’ 하고 숨 한 번 쉬고 국숫발을 빨아 올리는 어린 여자 아이, 단지 살아남기 위해 이중삼중 뼈 휘는 노동을 해야 하는 여인, 조국의 번영을 말하는 선거 벽보 밑에서 막 잠이 든 가난뱅이, 하루 종일 일 나간 부모를 기다리다가 해 질 녘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 자선을 바라는 눈먼 걸인, 굵은 주름이 이마를 덮은 지친 노동자…. 원로 사진작가 최민식(83)씨가 쓴 사진 산문집 ‘종이 거울 속의 슬픈 얼굴’의 첫 부분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러한 슬픈 모습들이 카메라 앵글을 통해 가슴을 두드리는 멍으로 전해져 왔기에 최씨는 단 한 번도 ‘인간, 가난한 사람의 범주’를 벗어나 본 적이 없다. 하여 그가 찍은 사진에는 50여 년 동안 우리나라 서민들의 희로애락이 오롯이 담겨 있다. 이를 주제로 그동안 펴낸 사진집만 14권에 달하고 사진작가로는 보기 드물게 사진 에세이집을 8권이나 발간한 것만 보더라도 그가 어떤 길을 걸어왔고 어떻게 살아왔는지 잘 알 수 있다. 이뿐만 아니다. 곧 9권째 사진 에세이집 ‘생각이 머무는 곳에 인생이 있다’를 출간할 예정이며 오는 10월 15권째 사진집을 발간하기 위해 한창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다. 팔순을 훨씬 넘긴 나이에 어떻게 이런 열정이 나올 수 있을까. 장맛비가 내리던 지난 28일 서울에서 KTX를 타고 부산역에 도착했다. 전화를 걸었더니 대연동 어디로 오라고 했다. 잠시 후 약속 장소에 먼저 도착해 기다렸다. 까만색 모자를 쓰고 카메라를 둘러맨 노() 사진작가가 시내 거리를 두리번거리면서 천천히 걸어온다. 평생 그랬던 것처럼 본능적으로 피사체를 찾는 모습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선생님, 어디 다녀오시는 길이세요.” “이 지역에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 ‘휴먼터치’라고 있어. 젊은이에서 칠순까지 모두 25명 정도 돼. 월 1회 모여서 사진 작업한 내용들을 평가하는데, 오늘이 그런 날이야. 나는 자문 역할을 해주고 있어. 거기 막 갔다 오는 길이야.” 노 작가는 그러면서 “여기서 한 100m쯤 가면 우리 집인데 그리로 가지 뭐. 옛날 집이라 누추하지만.”이라고 했다. 발걸음이 조금 빨라졌다. 하지만 시선은 습관처럼 지나가는 피사체를 응시한다. 그러다가 아는 사람을 만나면 반갑게 악수한다. 이어 작은 시장 골목으로 들어섰다. 과일가게 아저씨, 떡방앗간 주인이 머리를 숙이며 인사를 한다. 시장 골목에 내리는 비는 다른 곳보다 정겨웠다. 동행한 사진기자는 대선배의 모습을 카메라에 분주히 담았다. 잠시 후 노 작가의 자택에 도착했다. 흔히 시내 변두리 골목에서 보았음 직한 아담하고 작은 1층 단독주택이었다. 노 작가의 서재 안으로 들어서자 베토벤 그림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누가 그렸을까. 노 작가가 웃으면서 대답한다. “내가 직접 그렸지. 먹화야.” 솜씨가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기야 그가 2년 동안 일본에서 미술 공부를 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베토벤 그림 옆에는 세계적 지휘자로 명성을 날렸던 레너드 번스타인의 사진이 놓여 있었다. 시선을 그쪽으로 옮기자 노 작가는 잠시 번스타인이 지휘했던 음악을 틀면서 “사진만 한다고 뭐가 되는 게 아니야. 음악도 알아야 하고 미술도 알아야 하고.”라고 말했다. 그러는 사이 서재(노 작가는 창고라고 했다)에 있는 책들을 잠시 살폈다. 철학, 미학, 사회학, 세계 각국의 사진집 등 정치와 경제 분야만 빼놓고 모든 분야의 책들이 꽂혀 있는 것 같았다. 정말로 이 책들을 다 읽었을까. “5년 전에 국가기록원과 약속을 했어. 내가 죽은 후에 이 책들을, 아니 이 창고에 있는 모든 자료들을 기록원에 기증하기로 말야. 내 눈과 손이 안 닿았으면 무슨 의미가 있겠어. 다들 애지중지 여기는 것들이지. 내가 즐겨 들었던 귀한 클래식 엘피판만 해도 1000장이 넘어. 50년 넘게 휴머니티만 찍은 사진은 말할 것도 없고…. 내가 알기로는 역대 대통령이나 추기경 외에 일반 개인의 자료가 기록원에 들어가게 되는 것은 처음이야.” 2000년에 받은 옥관문화훈장이 새삼 돋보였다. 서재에 있는 각종 서적은 1만여 권에 이른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등 인간을 주제로 한 책이 가장 많이 눈에 띄었다. 그는 “이 창고 때문에 우리 집사람이 사는 공간이 좁아졌지.”라며 웃는다. 인터뷰를 하면서 노 작가의 눈동자가 나이에 비해 예사롭지 않았다는 것을 느꼈다. 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눈의 건강이 무엇보다 중요할 터. 그래서 비결을 물었다. “눈이 아직도 밝아. 5m 밖의 피사체는 선명하게 보이지. 간판의 전화번호, 사람의 표정까지 다 읽을 수 있어. 내 나이가 84살이거든, 동료들은 다 갔어. 다들 사진을 못 찍어. 나는 선천적으로 타고났나 봐.(웃음)” 별도로 운동하는 것은 없다고 했다. 그저 시간만 되면 사진 찍고 원고 쓰고 하는 것이 전부라고 했다. 요즘에는 카메라 메고 어디로 다닐까. 여전히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란다. 주변 산동네, 자갈치 시장, 부전시장 등을 비롯해 밀양, 언양, 청도까지 가서 시장과 농부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다. 물건을 사고파는 모습도 놓치지 않는다고 했다. 가까운 곳은 혼자 걷고, 먼 곳은 가끔 후배들과 함께 버스나 기차를 타고 동행한다. “그냥 가난한 사람을 찍는다고 해서 뭐가 되는 것은 아니야. 체험이 있어야 해. 아니면 책을 읽어서 간접 체험이라도 쌓아야 해. 또 역사를 알아야 하고…. 사진은 리얼리즘이야.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마음으로 찍어야 해. 요즘에는 이런 것들을 외면한 채 그저 출품만 염두에 두고 쉽게 만들 생각만 하고 있지. 포토샵만 가르치고….” 이런 연유에서 노 작가는 지금도 대학 강단은 물론 도서관과 구청문화원 등에서 사진 예술과 기법, 마음의 자세 등에 대해 열정적으로 강의를 한다. 틈틈이 지방 출장을 나가는 경우도 있다. 이달 25일에는 동강사진미술관에서 강의할 예정이다. 노 작가에게 왜 50여 년 동안 가난한 사람만 찍었느냐고 물었다. “동정심이나 측은지심인 아닌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에 대한 고발이야. 고난과 시련을 겪는 인간으로서의 아픔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추었지. 사람들로 하여금 직접 사진 속에 담겨 있는 인물의 고통에 직면하게 했어. 이것은 비참하고 불쌍하다는 동정적 의미보다 인간이 누리고 있는 삶의 존엄성을 일깨워주는 아픔이기도 해.” 인간의 존엄성을 표현하는 것이 그들을 위한 의무라고 생각한 데서 출발했다. 이러한 배경에는 어린 시절 겪었던 가난의 경험도 깔려 있다. 12살 때 어머니가 병으로 돌아가셨고 아버지마저 씨름을 하다가 다리를 다쳐 절름발이가 되자 어린 최민식은 직접 소작농일까지 해야 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을 나온 그는 품팔이, 공장생활, 지게꾼을 비롯해 안 해본 것이 없었다. 그렇게 거리를 전전하다가 6·25전쟁 때 참전한 뒤 1955년 평소의 꿈인 화가가 되기 위해 일본으로 밀항해 도쿄에 있는 중앙미술학원 야간부에 다녔다. 그러던 중 우연히 사진집 ‘인간 가족’을 발견했다. 이 사진집은 2차대전 때 해군장교로 활약했던 사진작가이자 미술관 기획자이기도 했던 에드워드 스타이컨이 편집한 것으로 인간의 출생과 성장, 사랑 등의 내용을 담은 것이었다. 이것이 계기가 돼 미술 공부를 포기하고 사진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1957년 가을 그는 중고 카메라 세 대와 부속품, 수십 권의 사진집을 구입해 밀항으로 부산에 도착했다. 몇 달 후 미국인 신부가 운영하는 자선회에서 사진사를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고 찾아가 실기 테스트에 합격했다. 이후 사진의 주제를 ‘가난한 사람’으로 정하고 지금까지 ‘휴머니즘’에 천착해 왔다. 고충도 적지 않았다. 박정희 정권 때는 ‘가난한 사람’을 사진에 담는다고 해서 여러 불이익을 받기도 했다. 지금의 노 작가에겐 어떤 꿈이 있을까. 아프리카 우간다 난민촌에 가서 그들의 아픔을 카메라에 담아 세계에 알리는 것이다. 이 일을 하고자 얼마 전 유니세프 한국위원회에 찾아갔지만 거들떠보지도 않아 섭섭한 마음으로 그냥 돌아서야 했다. 유니세프라는 완장이 있으면 안전하게 사진을 찍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살아 생전 어떻게 해서든 우간다 난민촌에서 가서 그들의 모습을 기필코 담겠다고 강조했다. 편집위원 km@seoul.co.kr ●사진작가 최민식은 1928년 황해도 연안에서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평남 진남포 군수공장 기능자 양성소에서 공부하며 공장 일을 했다. 1945년 광복 이후 서울에서 식당 일과 넝마주이, 지게꾼 생활을 했다. 6·25전쟁 때에는 참전해 청진까지 북진했다. 1955년 일본으로 밀항해 도쿄 중앙미술학원에서 공부했다. 1957년 귀국한 후 독학으로 사진 연구에 몰두하면서 인간을 소재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1962년 대만국제사진전에서 처음으로 입선한 후 미국, 독일, 프랑스, 영국 등 20여 개국 사진 공모전에서 220점이 입상 및 입선됐다. 아울러 1970년부터 미국, 일본, 독일, 프랑스 등 7개국에서 15회 이상 개인 초청전을 가지며 해외에도 이름을 널리 알렸다. 1968년 개인 사진집 ‘인간’ 1집을 낸 후 지금까지 14집을 냈다. 사진집 외에 산문집 ‘종이 거울 속의 슬픈 얼굴’, 사진 에세이집 ‘사람은 무엇으로 가는가’를 펴냈다. 이 밖에 ‘리얼리즘 사진의 사상’ ‘작품 사진 연구’ ‘세계 걸작 사진 연구’ 등 다수가 있다. 주요 수상으로 부산시 문화상(1967), 예술문화대상(1987), 옥관문화훈장(2000), 동강사진상(2005), 국민포장(2008), 부산문화대상(2009) 등 14개 부문에서 수상했다.
  • CEO 칼럼] 기옥 금호건설 사장/어느 노병(老兵)의‘ 위대한 용서’

    CEO 칼럼] 기옥 금호건설 사장/어느 노병(老兵)의‘ 위대한 용서’

     얼마 전 한 방송국의 6·25 특집다큐멘터리를 볼 때다. 이 프로그램에 한 영국군 노병(老兵)의 인터뷰가 나왔다. 이름은 샘 머서. 그는 21세의 나이에 영국군 글로스터셔 부대 소속으로 6·25전쟁에 참전했다.  경기 파주의 설마리 계곡 전투. 10배가 넘는 중공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영국군 대부분이 사망하고, 나머지는 포로와 인질로 붙잡혔다. 그런데 한 중공군이 아무런 이유 없이 그의 다리에 총을 쐈다. 그는 당시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해 한쪽 다리를 완전히 잃었고 평생 의족에 의지한 채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화면 속 그는 참 건강해 보였다. 덤덤하게 당시의 기억을 더듬어 가는 80대 백발노인의 얼굴에선 평온한 기운마저 감돌았다. 그에게 “(다리에 총을 쏜) 그 중공군을 다시 만나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그를 반갑게 맞이할 것입니다. 누추한 집이지만 우리 집으로 초대해 대접할 것입니다. 그를 절대 원망하지 않습니다. 이미 용서했습니다. 미움을 안고 살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기 때문입니다.”라는 의외의 답변을 내놨다.  이 노병이 그동안 겪었을 고통과 슬픔, 증오의 감정을 이겨 낼 수 있었던 힘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나는 ‘용서’라는 단어에서 해답을 찾았다.  분, 초 단위로 나뉜 빡빡한 일상을 살아가는 기업의 최고 경영자, 즉 CEO들에게 건강관리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건강은 끊임없는 열정과 에너지의 원천이며, 내가 건강해야 내 주변의 모든 것들이 건강해질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필자 역시 바쁜 일상 속에서도 꾸준한 운동과 식사 조절을 하며 건강을 챙기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때로 건강관리에 한계를 느낄 때가 있는데, 그건 바로 스트레스 때문이다.  최근 스파, 명상, 예술치료 등을 포함한 국내의 스트레스 해소 산업 규모가 1조원을 넘었다는 통계가 있다. 그만큼 스트레스는 현대인들과 떨어져 생각할 수 없는 불가분(不可分)의 관계가 됐다. 문제는 스트레스를 우리가 통제하고 관리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데에 있다. 스트레스는 머리가 아닌, 마음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건강한 삶’을 위해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우리가 명상과 복식호흡을 하고, 취미생활을 즐기는 모든 행위가 종국에는 마음을 다스리기 위한 것이다. 마음을 비우고, 상대의 진심을 보고, 내 안의 답을 찾고, 무엇보다 나 자신을 사랑하는 길, 그 마지막엔 ‘용서’가 있다.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했던 첫마디다. 수십 세기가 지난 지금도 사람들은 예수님이 몸소 실천한 위대한 용서의 정신을 본받으려고 노력한다.  용서는 결코 멀리 있거나 추상적인 것이 아니다. 용서는 머리가 아닌, 가슴이 먼저 받아들인다. 심장은 뇌와 함께 기억을 하고 판단하며 스트레스, 면역시스템, 정서를 조절하는데 사람들은 심장박동에 따라 때론 자제력을 잃기도 하고, 안정을 찾기도 한다.  인생은 긴 항해다. 늘 불안정하고 예측할 수가 없다. 그 속에서 우리는 길을 찾아야 하고, 수많은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야 한다. 불안정하고 예측 불가능한 삶. 어쩌면 이것이 용서가 지금 이 시대의 새로운 화두가 되어야 하는 이유가 아닐까.  “미워하기엔 인생이 너무 짧다.”며 아름다운 용서를 선택한 영국군 6·25 참전 용사 샘 머서는 슬픔과 고통, 증오의 감정들로부터 다시금 자유를 찾아 마음이 평온함을 되찾았고 무엇보다 그 누구보다 더 자신을 사랑할 수 있었다.  어떻게 하면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불신과 과욕, 증오의 감정들을 극복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서로를 신뢰하고 포용할 줄 아는 좀 더 성숙한 사회로 만들 수 있을까. 지금이야말로 서로 ‘용서하고 용서받는’ 마음자세가 절실히 필요한 때다. 비워야만 채워지는 인생의 지혜, 그것이 용서가 가진 위대한 진리다. 
  • [中 공산당 90주년] 공산당을 이끈 10명의 주역

    ●천두수(陳獨秀·1879~1942) 공산당 초기 지도자. 청년 시절 반청(反淸) 활동에 몸담고, 5·4운동 후에는 마르크스 사상에 심취. 베이징대 교수 시절 ‘매주평론’ 등 사상지 발간. 상하이 지역 공산당 조직 결성. 제1차 당대회에 불참했지만 초대 중앙국 서기에 선임되는 등 5차 때까지 중앙국 서기, 중앙국 집행위원장, 총서기 등 역임. ●마오쩌둥(毛澤東·1893~1976) 두 말할 필요 없는 중국 공산당 역대 최고지도자이자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주역. 자신이 결성한 후난성 공산당 조직을 대표해 제1차 당대회 참석.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며 무장봉기 주도. 대장정 도중인 1935년 1월 ‘준이(尊義)회의’에서 당권 장악. 신중국 건국 후 당과 국가의 전권을 장악.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 등의 대오류에도 불구하고, 건국의 아버지로 신격화. ●저우언라이(周恩來·1898~1976) 혁명운동 때부터 사망할 때까지 마오쩌둥과 평생을 함께한 동지이자 영원한 2인자. 건국 후 초대 총리(외교부장 겸임)를 맡아 사망할 때까지 27년간 역임. 탁월한 정치적, 외교적 수완과 함께 고도의 청렴성으로 사망 후에도 중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역대 총리로 추앙받음. ●주더(朱德·1886~1976) 중국 10대 원수 가운데 한 명. 독일 유학 중 저우언라이의 추천으로 중국 공산당 가입. 소련에서 군사학을 전공한 뒤 귀국해 국민당군에 합류. 1928년 병력 1만명과 함께 마오쩌둥의 징강산 해방구에 가담. 제2차 국공합작 때는 8로군 총사령관으로 항일전쟁을 지휘. 건국 후 인민해방군 총사령관, 국가부주석, 중앙군사위 부주석 등을 역임. 문화대혁명 때 물러났다가 1971년 복권. ●펑더화이(彭德懷·1898~1974) 6·25전쟁에 인민지원군 총사령관으로 참전한 중국 10대 원수 가운데 한 명. 1928년 입당해 항일전쟁 때 부총사령관으로 주더 총사령관을 보필. 건국 후 국방위원회 부주석, 국무원 부총리, 국방부장 등을 역임하며 군 현대화 추진. 1959년 루산회의에서 마오쩌둥의 대약진운동 실패 등을 지적하다 실권. ●덩샤오핑(鄧小平·1904~1997) 중화인민공화국 제2세대 지도자. 개혁·개방의 총설계사. 두 차례 실권됐다가 복권된 ‘오뚜기’. 항일전쟁 및 내전 시기에는 정치공작, 건국 후에는 국정에 참여. 실용주의 노선을 주창해 마오쩌둥 추종자들과 대립. 마오쩌둥 사후 화궈펑(華國鋒)과의 권력투쟁 끝에 실권 장악. 개혁·개방 선도하며 중국의 발전 견인. “자본주의에도 계획이 있고, 사회주의에도 시장이 있다.”며 ‘사회주의 시장경제’ 도입. ●후야오방(胡耀邦·1915~1989) 개혁파 지도자. 1989년 4월 사망하자 청년학생들이 그를 추모하기 위해 톈안먼(天安門) 광장에 모여들면서 ‘톈안먼 사태’ 촉발. 1928년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에 가입한 뒤 홍군의 일원으로 대장정 참여. 건국 후 공청단 제1서기 등으로 공청단 업무 주관. 1980년 2월 당 총서기로 선출된 뒤 개혁 및 실용주의 정책을 펼쳤으나 1987년 대학생 시위에 미온적으로 대처했다는 이유 등으로 실각. ●장쩌민(江澤民·1926~ ) 제3세대 지도자. 상하이교통대 재학 시절인 1946년 입당. 건국 후 공장 관리자 및 공업연구소 책임자 등으로 일하다 문화대혁명 때 공직에서 축출. 복권된 뒤에는 상하이시 당서기 등으로 승승장구하면서 핵심인물로 부상. 1989년 자오쯔양(趙紫陽) 총서기가 실각하자 총서기로 선출됨. 1990년 4월 덩샤오핑의 마지막 공직이었던 국가중앙군사위원회 주석에 선출되면서 당·정·군 전권 장악. 재임 중 한·중 수교,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등 성사. ●후진타오(胡錦濤·1942~ ) 제4세대 지도자. ‘퇀파이’(團派·공산주의청년단 출신)의 대부. 칭화대 수리공정학과 졸업 후 학교에 남아 정치보도원으로 후배들의 정치교육 담당. 문화대혁명 때 간쑤성 수력발전소 노동자로 하방됐지만 승진을 거듭해 덩샤오핑에 의해 4세대 지도자로 낙점돼 1992년 최연소로 정치국 상무위원에 선출됨. 이후 2002년 당 총서기, 2003년 국가주석, 2004년 중앙군사위 주석에 선출되면서 당·정·군 장악. ‘과학발전관’을 주창. ●시진핑(習近平·1953~ ) 후진타오의 뒤를 이을 5세대 핵심지도자. 아버지는 국무원 부총리 등을 역임한 시중쉰(習仲勳)으로 ‘태자당’(당·정·군 혁명원로들의 자제그룹) 계열. 문화대혁명 때 아버지의 실각 등으로 중학교 재학 중 산시성 오지로 하방. 10번이나 입당이 거부될 정도로 시련을 겪었으나 경력을 쌓고, 저장성 당서기 등을 거쳐 2007년 상하이시 당서기에 오른 뒤 같은 해 제17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에 선출됨. 이듬해 국가부주석, 지난해 중앙군사위 부주석에 선출돼 후계 입지 공고화.
  • 국내 복권 변천사

    국내 복권은 연금식 복권 ‘연금복권 520’이 등장하기 까지 60여년 동안 숱한 변천을 겪어 왔다. 근대 이전에 발달한 민간협동체인 ‘계’에서 우리나라 복권의 기원을 찾는 이도 있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 막바지인 1945년 7월 일본 정부가 군수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승찰’이라는 근대식 복권을 발행한 적이 있다. 액면가 10원에 1등 당첨금 10만원이었다. 해방 이후 나타난 복권은 1947년 12월 선보인 ‘올림픽 후원권’이라는 게 정설이다. 1948년 제12회 런던올림픽에 참가하기 위한 경비를 마련할 목적에서 발행됐다. 액면 금액은 100원, 1등 당첨금은 100만원으로 모두 140만장이 발행됐다. 이후 이재민 구호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1949~50년 사이 ‘후생복표’가 세 차례에 걸쳐 판매됐다. 6·25전쟁이 끝난 뒤인 1956년 2월부터는 산업부흥자금 및 사회복지자금 조성을 위해 ‘애국복권’이 10회에 걸쳐 판매됐다. 1962년과 1968년에는 박람회 개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각각 산업박람회 복표와 무역박람회 복표가 등장했다. 국내 복권사에서 진정한 의미의 복권 시장이 형성된 것은 국내 최초의 정기 복권인 주택복권이 등장한 1969년부터다. 액면가 100원, 1등 당첨금 300만원, 월 1회 50만장 발행으로 출발했던 주택복권은 1973년부터 주 1회 발행으로 바뀌었다. 1등 당첨금도 1978년 1000만원, 1981년 3000만원, 1983년 1억원으로 뛰었다.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을 겨냥해 1983년 4월부터는 ‘올림픽복권’으로 이름을 고쳤다가 1989년 다시 본래 이름을 찾았다. “준비하시고, 쏘세요!”로 기억되는 국내 복권의 대명사 주택복권은 그러나, 즉석식복권과 온라인복권에 밀려 2006년 4월 37년 역사를 마감했다. 1990년대 초반까지는 복권이 공익 자금을 조달한다는 정당성이 컸지만 1990년 대 이후 분위기가 달라졌다. 1990년 9월 즉석에서 당첨 여부를 가릴 수 있는 즉석식복권이 등장해 사행심 조장 논란이 일었다. 또 복권발행기관이 다양화되고 각 기관이 재원조달 확보 차원에서 경쟁적으로 복권을 쏟아내 정부가 사행성을 조장한다는 비판도 나왔다. 그래서 2004년 ‘복권 및 복권기금법’이 제정돼 복권발행기관이 복권위원회로 일원화됐다. 2002년에는 국내 복권 산업의 최강자로 우뚝 선 온라인복권 ‘로또복권’이 선보였다.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열린세상] 6·25전쟁, 한국전쟁, 남북전쟁/전현수 경북대 사학과 교수

    [열린세상] 6·25전쟁, 한국전쟁, 남북전쟁/전현수 경북대 사학과 교수

    ‘6·25전쟁’ 발발 61주년을 맞고 있다. 해마다 이 기념일이 반복되듯이 올해도 예외 없이 이 전쟁에 어떠한 이름을 붙여 줄 것인가 하는 논쟁이 언론지상에서 되풀이되고 있다. ‘6·25전쟁’인가 ‘한국전쟁’인가를 다투는 이 논쟁은 최근에는 학계로까지 확산되는 양상이다. 전쟁 발발 직후에는 ‘6·25사변’, ‘6·25동란’이라는 용어가 많이 사용되다가 ‘6·25전쟁’이라는 용어로 통일되어 갔다. 1980년대에 들어와 ‘한국전쟁’(Korean War)이라는 명칭이 사용되면서 논란이 일기 시작했다. 군사편찬연구소 등 정부출연 연구기관에서조차 ‘6·25전쟁’과 ‘한국전쟁’이라는 명칭을 번갈아 사용했다. 이러한 혼란을 막기 위해 교과부와 국사편찬위원회가 ‘6·25전쟁’을 공식적인 편수용어로 확정했지만, 교과서 밖에서는 ‘한국전쟁’이라는 용어가 여전히 광범위하게 사용되어 왔다. ‘6·25전쟁’이라는 명칭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전쟁 발발 시점에서 따온 ‘6·25전쟁’이라는 명칭이 전쟁을 겪은 민중의 경험을 온축하고 있어 가장 객관적인 명칭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한국전쟁’이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하는 학자들은 ‘한국전쟁’이라는 무가치한 이름이야말로 이 전쟁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편견을 버리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전쟁에 어떠한 이름을 붙일 것인가 하는 문제는 전쟁의 성격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긴밀히 연계되어 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고 김춘수가 노래했던 것처럼, 우리가 어떤 전쟁에 특정한 이름을 붙여 주는 것은 그것에 특정한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인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6·25전쟁’이라는 명칭은 전쟁 발발 시점을 부각시켜 북한의 전쟁 책임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개입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이 용어는 전쟁의 전체 과정을 시야에 넣지 못하고 있다. 김일성과 스탈린의 ‘남침’ 전쟁만이 포착되어 있고, 이승만과 맥아더의 ‘북진’ 전쟁이나 중공군 참전 이후의 ‘미·중’ 전쟁을 포괄하고 있지 못한 것이다. ‘한국전쟁’이라는 명칭도 문제가 많다. 외국 사람들 입장에서는 ‘한국에서 일어난 전쟁’(War in Korea), ‘한국전쟁’(Korea War 혹은 Korean War)이라는 표현이 가능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이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전쟁을 ‘한국전쟁’이라고 부르는 것은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다. 어느 나라도 자기 나라에서 일어난 전쟁을 이런 식으로 부르지 않는다. ‘한국전쟁’이라는 명칭은 ‘한국이 일으킨 전쟁’이나 ‘한국 사람들끼리의 전쟁’으로 잘못 이해할 가능성도 있다. 결국 우리는 61년째 이 전쟁을 기념하고 있지만 이 전쟁에 누구나가 공감할 만한 마땅한 이름을 붙여 주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전쟁의 명칭이 전쟁의 성격과 긴밀히 연관된 것이라면 전쟁의 성격을 명확히 함으로써 전쟁에 명칭을 부여하는 방향에서 이 문제를 해결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전쟁 당시 남북의 지도자들은 모두 전쟁이라는 수단을 통해서라도 분단 상태를 극복해야 한다고 보았다. 김일성은 공공연히 국토완정을 주장하며 스탈린과 마오쩌둥을 설득하여 전쟁에 나섰다.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은 인민군의 남침으로 빛이 바랬지만, 인천상륙작전 이후 국군은 유엔군과 함께 38선의 회복에 만족하지 않고 압록강까지 진격했다. 남북은 형태는 다르지만 전쟁을 통해 통일이라는 목표를 달성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전쟁은 통일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분단을 한층 고착화했다. 이 때문에 이 전쟁을 ‘통일전쟁’이라고 부르는 것은 안이한 역사인식이다. 결국 ‘6·25전쟁’은 남과 북의 ‘통일’ 전쟁이라는 성격과 남한을 앞세운 자유진영과 북한을 앞세운 공산진영 사이의 전쟁이라는 이중적인 성격을 갖는다. 처음부터 내전의 성격과 국제전의 성격이 결합된 전쟁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이 전쟁을 남으로 대표되는 자본주의 세력과 북으로 대표되는 사회주의 세력 사이의 전쟁, 즉 ‘남북전쟁’으로 불러 볼 수 있지 않을까.
  • 반총장 부인 유순택 여사 “수험생처럼 일하는 남편… 가장으로선 70점”

    반총장 부인 유순택 여사 “수험생처럼 일하는 남편… 가장으로선 70점”

    “어디 가서 누가 ‘세계의 퍼스트 레이디’ 그러면 몸이 막 오그라들어요. 그런 말 들을 자격이 안 되는데….” 지난 21일 재선에 성공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부인 유순택 여사는 24일 오후(현지시간)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번 연임 과정에서 보여준 한국 국민들의 성원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며 이같이 밝혔다. 고등학교 시절 만나 결혼한 지 올해로 40년. →반 총장 연임이 확정됐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나. -한 달에도 몇 번씩 외국 출장 때문에 가방을 싸고 푸는 게 일이다. 앞으로는 더 많이 싸야 할 것 같다. 외국 여행 다니면서 보면 남편은 한국 사람이라는 걸 굉장히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경제적, 정치적으로 성공한 한국을 예로 들어 어려운 나라에 용기와 희망을 준다. →집에 들어오면 어떻게 지내나. -꼭 수험생같이 생활한다. 밤 12시쯤 잠자리에 들고 새벽 5시 정도에 일어난다. 여러 자료들을 모두 검토하고 소화해 내지 않으면 안 되니까. 토·일요일에는 주로 외국 정상들과 통화하느라 거의 시간을 보낸다. (가장으로서 점수를 준다면) 50점은 박하고, 70점 정도?(웃음) →지난 4년 반 동안 가장 속상했던 적은. -총장에 대해 잘 모르면서 폄하하는 기사를 보면 억울하고 속상했다. →반 총장이 가장 자랑스러웠던 때는. -2009년 1월 가자 전쟁 때 셔틀 외교를 하면서 사태 해결을 위해 노력하고, 직접 가자에 들어가서 폭탄 맞은 건물 앞에서 마이크도 없이 연설을 하는 모습을 방송으로 보면서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집에 돌아왔는데 목이 완전히 잠겨서 말을 하기도 힘들어하더라. 연기를 많이 마시고 큰 소리로 연설해서…. →사무총장의 배우자로서 외국 출장에 자주 동행하나. -재난·재해 지역이나 분쟁 지역 같은 곳은 비행기 편도 그렇고 해서 같이 못 가지만 대부분은 함께 간다. 아프리카 지역 같은 곳은 거의 따라갔다. 에티오피아는 매년 가고, 카메룬, 브룬디, 말라위, 케냐 등 수없이 많은 나라들을 다녔다. 그런 곳에 가면 마치 6·25전쟁 끝난 직후의 상황을 보는 것 같다. →여사의 내조 스타일은. -특별한 것은 없다. 남편의 커리어에 해가 되지 않게 조심하면서 살아왔다고 할 수 있다. →한국 여성들에게 해주고 싶은 얘기가 있다면. -유엔은 물론이고 전 세계 각지에서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급속도로 늘어나고 있다. 유엔 고위직 가운데 여성 비율이 40%라고 들었다. 한국 여성들은 우수한 잠재능력을 갖고 있다. 이를 더 개발하고 발휘해서 사회 각 분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사회 발전에 이바지했으면 한다. 워싱턴 김상연특파원 carlos@seoul.co.kr
  • “참전용사 살아생전에 ‘한반도 통일’ 보여주고 싶습니다”

    “참전용사 살아생전에 ‘한반도 통일’ 보여주고 싶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24일 “세계에서 유일하게 분단국가로 남은 한반도가 통일되는 모습을 참전 용사 여러분들 살아생전에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6·25 전쟁 61주년을 하루 앞두고 서울 용산동 전쟁기념관에서 열린 ‘참전유공자 위로연’에 참석, “참전용사 여러분을 우리는 결코 잊지 않고 존경할 것”이라면서 이같이 밝혔다. 이 대통령은 “정부는 북한 땅에서, 또 어느 곳에 묻혀 있을, 아직 되찾지 못한 13만명의 우리 용사들 마지막 한 사람까지도 끝까지 발굴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한 치의 땅도 거저 얻어질 수 없고 자유도 거저 얻어질 수 없다.”면서 “희생 없이는 한 치의 땅도 지킬수 없고, 희생 없이는 자유를 지킬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이 대통령은 “대한민국은 전후 반세기 만에 산업화를 이뤘고, 불가능하다는 경제 번영과 민주주의를 이뤄냈다.”면서 “그렇게 되기까지 6·25 참전 국군용사들과 16개국 유엔군 참전 용사들의 희생이 있었으며 세계 15위 경제번영 국가, 세계 20위 민주국가를 이룬 것으로 참전한 여러분에게 보답을 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이어 “6·25의 참혹한 역사와 그 진실의 역사를 6·25 세대뿐 아니라 다음 세대, 그 다음 다음 세대에도 정확히 가르쳐야 한다.”면서 “지나간 6·25를 상기하고 우리 국민이 단합함으로써 이 땅에 6·25와 같은 비극을 막을 수가 있다.”고 강조했다. 행사에는 6·25 전쟁 당시 중공군 포로로 북한에 억류됐다 2000년 7월 70세의 나이에 북한을 탈출한 유영복씨를 비롯해 미국과 터키를 포함한 국내외 참전용사, 참전국 주한 외교사절, 국군 귀환용사 등 900여명이 참석했다. 김성수기자 sskim@seoul.co.kr
  • 어머님 오래 사신 罪?

    어머님 오래 사신 罪?

    “똑같은 6·25 전쟁 전몰군경 자녀인데…미망인 어머니가 오래 사신 죄로 보상금을 못 받는 게 말이 됩니까. ” 경기 포천시에 사는 박모(61·여)씨는 두 살 때이던 6·25전쟁 당시 국군이었던 아버지와 작은아버지를 잃었다. 한 살 어린 여동생과 박씨 그리고 홀로 된 어머니와 할머니, 네 식구만 살아 남았다. 박씨의 어머니는 품팔이를 하며 생계를 꾸렸다. 스무 살에 결혼한 박씨는 중풍을 앓던 어머니의 병구완을 하며 살았다. 박씨의 어머니는 2004년 유명을 달리했다. 이후 정기적으로 나오던 보훈 수당이 끊겼다. 식당일을 하며 어렵게 생계를 꾸려 왔지만 2008년 허리 수술을 받고 난 뒤에는 그마저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처지다. 박씨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아버지에 대한 보상이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것인지, 정말 억울하다.”며 눈물지었다. 박씨 어머니가 받은 수당은 ‘6·25전몰군경자녀수당’이다. ‘국가유공자 등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이하 예우법) 제16조 3항에는 ‘1998년 1월 1일 이후 유족 중 1명이 보상금을 받은 사실이 있는 전몰군경이나 순직군경의 자녀에게는 지급하지 아니한다.’고 명기돼 있다. 이 규정 때문에 2004년 박씨의 어머니가 사망한 이후 76만 7000원의 수당을 받을 수 없게 된 것이다. ‘6·25전몰군경미수당유자녀회’에 따르면 이같이 수당이 끊긴 미수당 유자녀가 전국적으로 7000명에 이른다. 문제는 ‘1998년 1월 1일 이후’ 라는 조건이다.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1998년 생활이 어려운 6·25 전몰군경 유족에게 생활조정 수당으로 월 25만원씩 지급했다. 하지만 유족들은 희생자들에 대한 대우가 지나치게 적다고 항의했고, 결국 보훈처는 예우법을 개정해 제16조 3항을 신설, 2001년 7월부터 시행했다. 이후 미수당 자녀들은 10년 넘게 항의 중이지만 법은 아직 바뀌지 않고 있다. 보훈처 관계자는 “독립유공자의 경우 일제강점기 기간도 길었고 독립운동 때문에 자녀들의 생계가 어려워지지 않았나. 반면 6·25는 기간이 짧았고 미망인이 충분히 지원받았는데 손자 세대 이후까지 지원받겠다는 것은 지나치다.”며 법개정에 난색을 표했다. 반면, 전문가들은 잘못된 법 조항을 고쳐 정부가 제대로 된 보상을 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최광수 총신대 평생교육원 책임교수는 “법 조항이 비합리적이다. ‘1998년 조건’을 삭제하고 모든 유자녀들이 수당을 받되 향후 몇 대까지 받을 수 있는지 명확히 하는 게 맞다.”고 밝혔다. 미망인이 1997년 12월 31일에 죽으면 유자녀가 수당을 받고 1998년 1월 1일에 죽으면 수당이 끊기는 구조는 형평성 차원에서 모순이라는 설명이다. 일부 국회의원들은 입법 발의에 나섰다. 신상진·강승규(한나라당) 의원 등은 ‘1998년 1월 1일 이후’ 조건이 부당하다며 개정안을 마련 중이다. 문제의 조건을 삭제, 모든 전몰군경 유자녀에게도 수당을 주도록 하는 게 골자다. 강 의원 측은 “‘1998년’이란 조건이 현실적으로 문제가 있어 이 조항을 삭제하려는 것”이라고 밝혔다. 김진아기자 jin@seoul.co.kr
  • [6·25 전쟁 61주년] 우리의 주적은 45% “일본” 6·25전쟁 발발연도는 58% “몰라”

    [6·25 전쟁 61주년] 우리의 주적은 45% “일본” 6·25전쟁 발발연도는 58% “몰라”

    “6·25전쟁? 들어 봤는데, 언제 일어났죠?”(대전 Y초등학교 6학년생) “6·25전쟁이 남침이라고요? 북침 아닌가요? 북한이 먼저 침략했으니까.”(서울 D중학교 2학년생) “우리의 주적은 일본이죠.”(대구 B중학교 1학년생) “우리 때야 반공 교육 받고 자랐지만, 지금 학생들에게는 공부할 시간까지 빼앗아 가면서 6·25전쟁을 가르칠 필요가 있을까.”(서울 N초등학교 5학년 교사) 25일 6·25전쟁 발발 61주년을 맞이한 가운데 6·25전쟁에 대한 초·중·고생의 안보의식이 갈수록 약화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안보교육이 국·영·수 중심의 교육에 밀려 등한시된 탓이 크다는 지적이 교육계에서 나온다. 24일 행정안전부가 지난 4일부터 11일까지 전국 중·고생과 19세 이상 성인 2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국민 안보의식 설문조사 결과 청소년의 57.6%가 6·25전쟁이 몇 년에 일어났는지를 대답하지 못했다. 2008년 조사 당시 56.8%보다 0.8% 포인트 늘어났다. 6·25전쟁이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됐다는 사실을 모르는 청소년도 51.3%나 됐다. 19~29세의 성인도 절반이 넘는 55.1%가 6·25전쟁이 발발한 연도를 몰랐다. 한국청소년미래리더연합이 최근 전국 400여개 중·고생 2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안보관 설문조사에서 “우리의 주적은 누구?”라는 질문에 학생들은 일본(44.5%)을 첫째로 꼽았다.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 등으로 인한 영향 때문이라는 게 교육계 관계자의 분석이다. 다음으로 북한(22.1%), 미국(19.9%), 중국(12.8%)이 그 뒤를 이었다. 경남 남해 미조초교 이상제(57) 교장은 “지역 교육청이 안보교육 관련 공문과 교육자료를 일선 학교에 보내고 있지만, 젊은 교사들의 안보의식이 상당히 약화돼 있는 데다 학력 신장 위주의 교육에 혈안이 돼 있어 안보교육이 뒷전이 된 게 문제”라면서 “학생들의 안보의식 함양을 위해 6·25전쟁 경과 등을 역사 교육의 일환으로 강조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재연·이영준기자 apple@seoul.co.kr
  • [6·25 전쟁 61주년] “난리통에 여자가 무슨 군입대냐며 가족들 반대도 많았죠”

    [6·25 전쟁 61주년] “난리통에 여자가 무슨 군입대냐며 가족들 반대도 많았죠”

    “그러니까 열여섯 살 때였지요. 전쟁 중이었지만 여자도 뭔가 해야 한다는 결의가 아주 높았습니다.” 원로 성우 고은정(75)씨는 해마다 이맘때면 6·25전쟁 당시를 잠시 추억한다. 지난 20일 서울 서초동 자택 인근에서 고씨를 만났다. 1950년 11월 서울 수도여중 3학년에 재학 중이던 고씨는 학생들 사이에 ‘국군이 압록강까지 진격했고, 금방 통일된다.’는 소문을 들었다. 고씨는 “서울고와 용산고 학생들도 학도의용군에 뽑혀 북진 대열에 합류한다.”고 말하면서 여학생이라고 가만히 있으면 되겠느냐고 했더니 동의하는 친구들이 여럿 있었다. 결국 며칠 뒤 고씨는 단짝 친구 3명과 함께 여자의용군에 자원입대했다. 서울 충무로의 일신초등학교에 훈련막사가 설치됐다. 한성여고 밴드부와 동덕여고 무용반 학생들도 와 있었다. 여기에서 ‘여자의용군 예술대’가 결성된 것. 고씨의 군번은 0995862. 훈련은 주로 아침 일찍 남산을 한 바퀴 돌아오는 것이었다. 20일쯤 지나자 잠시 외출을 나가게 됐다. 집에 갔더니 가족들이 “난리 통에 여자가 무슨 군입대냐.”며 귀대하지 말라고 붙잡았다. 고씨는 “어떻게 외출 나왔다가 안 들어가느냐.”며 부대로 돌아갔다. 그런데 동료 3분의1이 귀대하지 않았다. 남은 예술대원은 20여명. 이튿날 예술대원들은 부산으로 떠나기 위해 겨울용 잠바와 담요 한 장씩을 들고 청량리역에 도착했다. 수백 명의 남자군인 틈에 끼여 무개화차에 막 오르려는 순간 신성모 국방장관이 나타나 “왜 여자들을 지붕 없는 차에 태우느냐.”고 호통을 쳤다. 할 수 없이 다음 날 트럭을 이용해 인천항을 거쳐 상륙함정(LST)을 타고 3일 만에 부산항에 도착했다. 이후 예술대원들은 영도초등학교의 임시막사에서 지냈다. 그러던 중 고씨는 발을 다쳐 의무실 신세를 지게 됐다. 이때 한 목사의 도움으로 책 몇 권을 얻었다. 예술단원으로 병원 위문을 가기 위해서는 책이 필요했다. 1951년 2월 전쟁이 소강상태에 이르면서 휴가를 떠나게 됐다. 하지만 딱히 갈 곳이 없어 도움을 받았던 목사와 함께 제주도에 있는 피란민들을 위로하기 위해 제주도로 향했다. 고씨가 제주 오현중학교에 설치된 피란민 학교에서 중학교 졸업장을 받게 된 것도 이런 까닭이다. 여기에서 그는 육군 제대자로 처리됐다. 고씨는 “당시 동료들과 가끔 만나 추억담을 나누기도 했지만 지금은 세월이 지나서인지 그러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백선엽 장군 등 6·25 참전 군인들에 따르면 여자의용군은 당시 김현숙 소령이 최초 여군단장을 맡아 500여명으로 조직됐다. 처음 여자의용군을 모집할 때 3000명 이상 몰렸을 정도로 지원율이 높았다. 지원 자격은 18~25세의 미혼 여성으로 중학교 졸업 이상의 학력으로 엄격한 필기시험과 신체검사를 거쳤다. 여군은 후방지역에서 주로 행정·경리·통신 분야에서 복무했지만 일부는 전방 전투사단에 배치돼 정보수집, 수색활동, 선무활동에 참가했다. 특수교육을 받은 일부 여군들은 적진에 투입돼 첩보수집 임무를 수행했다. 특히 인천상륙작전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암호명 ‘래빗’(토끼)으로 미군 첩보부대의 훈련을 받은 미모의 첩보요원들도 비밀리에 임무를 펼쳤다. 간호장교들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사방이 포위됐을 때에도 끝까지 부상병을 돌보다가 많은 희생을 당했다. 제주에서는 최초의 여자 해병대 126명이 모집돼 40여일 동안 훈련을 받고 일선에 배치됐다. 여기에는 미혼인 학교 선생도 여럿 참여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전선이 교착되는 상황과 함께 전투가 소강상태에 이르면서 여군은 새로운 체제로 재정비된다. 1951년 11월 여군의 인사관리 등을 담당할 지휘기관으로 여군과가 육군본부 고급 부관실 내에 설치돼 각 군 감실 및 부대에 배속된 여군의 인사 행정 업무를 담당했다. 김문 편집위원 km@seoul.co.kr
  • [6·25 전쟁 61주년] “남편 납북 61년… 전화벨 울리면 그이 왔을까 가슴 떨려”

    [6·25 전쟁 61주년] “남편 납북 61년… 전화벨 울리면 그이 왔을까 가슴 떨려”

    “그날 몸을 던져서라도 나도 함께 데려가라고 매달렸어야 하는 건데…. 내무서 앞에 끌려나온 남편 모습을 보니 정신이 핑 돌면서 가슴이 울렁거려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어.” 24일 서울 청량리동에서 만난 김항태(83) 할머니는 말문을 열자마자 흐느꼈다. 주름이 조글조글한 손으로 가슴팍을 연신 내리쳤다. 가슴속에 맺힌 응어리가 풀리지 않은 듯 보였다. “그때 내가 임신 1개월째라는 걸 나중에 알았지. 남편은 우리 딸이 있는지도 모른 채 그렇게 갔으니…. 딸은 남편과 나를 이어주는 유일한 생명줄이야.” 결혼 1년 5개월 만에 스물두 살의 새댁은 남편을 북으로 떠나보냈다. 할머니의 남편 김재봉(91) 할아버지는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9월 말 강화군 교동도의 신혼집에서 인민군과 마을 좌익 청년들에게 잡혀 북한 황해도로 끌려갔다. 그렇게 남편을 보내고 전쟁통에 홀로 낳은 딸이 올해로 환갑이 됐다. 4년 전부터 할머니를 괴롭히는 고관절 디스크의 고통은 가슴을 까맣게 태운 그리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직도 그냥 끊어지는 전화가 오면 남편이 나를 찾아 전화한 게 아닐까 싶어. 그런 전화가 올 때면 가슴이 떨려.” 북녘 어딘가에 살아 있다면 올해로 아흔 살이 넘었을 남편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할머니는 아직 체념하지 않았다. ●서울 수복 직후 남편과 생이별 할머니는 남편과 헤어진 날짜를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당시 충격으로 날짜 감각을 잊은 채 멍하니 보냈기 때문이라고 했다. 대신 할머니는 국군이 서울을 되찾은 지 며칠 뒤라고 기억했다(1950년 9월 28일 국군과 유엔군은 서울을 수복했다). 유엔군의 인천 상륙 작전이 성공하고 서울도 되찾아 조만간 전쟁이 끝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북으로 간 남편은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쾅, 쾅쾅’ 그날 새벽녘 귓전을 울리는 굉음에 놀라 잠에서 깼다. ‘북한군이 다시 내려온 건 아닐까….’ 정신을 차려 보니 포탄 떨어지는 소리가 아니었다. 누군가 집 대문을 거세게 두드리고 있었다. 미처 몸을 숨길 새도 없이 거센 발길질에 대문이 부서졌다. 십수명의 정체 모를 청년들이 들이닥치자 무서움에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그들은 내무서에서 나온 사람들이라고 했다. ‘반동 세력이니 내무서로 함께 가야겠다.’면서 다짜고짜 남편의 팔을 붙들었다.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남편의 가슴팍에 내무서원은 기다란 총부리를 들이댔다. 남편은 그렇게 내무서로 끌려갔다. 한바탕 소란을 치르고 정신을 차려 보니 희뿌옇게 동이 터 오고 있었다. 이튿날 정신을 차리고 내무서 앞으로 달려갔다. 남편은 포승줄에 두 손이 꽁꽁 묶인 채 다른 마을 청년들과 함께 매여 있었다. (손가락으로 방안 끝에서 끝을 가리키며) “그때 남편이랑 같이 붙들려 간 사람들이 여기서부터 저기까지는 될 거야. 두 줄로 섰으니 한 스무명 정도…. 맘에 안 드는 사람들은 죄 끌고 간 거지.” 내무서원들은 남편과 청년들을 교동도 항구로 데려갔다. 할머니는 울먹이며 남편의 뒤를 따라갔지만 함께 배에 오를 수는 없었다.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져 내렸지만 그 순간이 진짜로 마지막이 되리라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남편이 탄 배는 건너편 황해도 연백군이 바라다보이는 교동도 항구를 떠났다. 배를 타고 30분도 채 안 걸리는 가까운 거리를 건너가는 남편의 뒷모습,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김 할머니가 남편으로부터 받은 마지막 소식은 남편이 끌려간 지 이틀 만에 보낸 작은 쪽지 한 장이었다. 함께 끌려간 사람들 가운데 면 서기와 이웃 청년 2명이 풀려 나오면서 전해준 것이었다. 손바닥 반만 한 작은 종이엔 ‘내 걱정하지 마세요. 배 타고 건너와 잘 있습니다. 당신의 남편 김재봉’이라고 쓰여 있었다. 단정하게 또박또박 적힌 이 세 문장이 60년이 넘도록 김 할머니 가슴에 박혀 있다. 조심스레 쪽지를 볼 수 있느냐고 물었다. 할머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작은 종이 쪼가리, 귀퉁이가 다 닳도록 만지고 보면서 35년을 간직했는데, 80년대 중반에 이사하다 모두 태워버렸어. 그때는 ‘어차피 돌아올 수도 없는 남편인데 갖고 있은들 뭐하나’ 이런 심정이었지.” ●쪽지 35년 간직하다가 불 태워 할머니가 여전히 잊지 못하는 남편 김 할아버지는 서울농고를 졸업하고 교동도 금융조합(현재의 농협) 서기로 입사한, 똑똑하기로 소문난 사람이었다. 그는 친구들과 사랑방에 둘러앉아 시국 토론도 하는 열혈 청년이었다. 전쟁 전에는 뜻 맞는 마을 청년들과 청년단을 조직하기도 했다. 이념 대립이 팽팽하던 전쟁 직전, 남편은 좌익 세력의 표적이 됐다. 공산당이 득세한 교동도에서 김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당원 가입도 거부했다. 할머니는 “전쟁이 터지자마자 동네 빨갱이들이 명부를 들고 다니면서 이름을 쓰고 지장을 찍으라고 했는데 그게 공산당 가입 명부였다.”면서 “교동도에는 빨갱이들이 많았는데, 그게 다 먹고살기 어려운 사람들이 공산당에 넘어갔던 탓”이라고 말했다. 할아버지의 자상함은 한도 없었다. “이 양반은 이렇게 내 가슴을 아프게 하려고 그랬는지 그렇게도 별났다. ‘김치도 맛있다, 빨래도 잘 넌다’ 하면서 항상 칭찬해줬다. 무거운 것도 하나 못 들게 했다. (주먹 쥔 손으로 다른 쪽 손바닥을 탕탕 내리치면서) 그런 말을 바로 엊그제 한 것 같고, 아직도 생생한데….” 할머니는 또다시 한참을 울었다. 남편이 북으로 간 뒤에도 김 할머니는 교동도를 떠나지 못했다. 언젠가 돌아올 거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농사일로는 커 가는 딸과 생활하기가 벅찼다. 아버지 얼굴을 모르는 딸에게 공부를 시켜야겠다고 결심했다. 딸이 10살이 되던 1961년 서울로 왔다. 외삼촌이 살고 있던 답십리에 방을 구했다. 다른 환경에서도 남편 생각을 지울 수는 없었다. 딸을 학교에 보내고 집안이 조용해지면 방바닥에 주저앉아 통곡했다. “남편과 함께 자식 기르는 재미로 살 줄 알았는데 하루아침에 벼락을 맞았으니…. 죽어야 잊지 그전엔 못 잊어.” 80년대 중반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시작되자 남편 소식을 들을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다. 그러나 납북자는 대상이 아니었다. 북한에서 납북자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북에서 저렇게 뻗대니 어떻게 햐. 절대 용서가 안 돼.” 할머니는 남편의 생사조차 확인할 수 없는 현실에 가슴을 저몄다. 인고의 세월은 끝이 없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이산가족 방문 상봉이 합의되자 김 할머니는 다시 가슴이 뛰었다. 불편한 다리로 이북5도청에 마련된 이산가족 민원 창구를 찾았다. “교동도 지도를 가져가 여기서부터 저기로 내 남편이 끌려갔다고 그렇게 설명을 했는데…. 내 절절한 심정을 이해나 해줄는지. 못 만나게 할 거면 살아 있는지 말이라도 해줘야 할 거 아냐.” ●北서 납북자 인정 안 해줘 분통 “몇 년 전에는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남편을 꼭 찾아주겠다며 걱정 말라는 서신도 보내왔는데 결국 허사였어. 내 남편은 납치돼 간 건데 정부에서 책임지고 찾아줘야 해.” 할머니의 목소리에서 결기가 느껴졌다. “60년 동안 남편이 딱 한 번 내 꿈에 나온 적이 있어. 교동도 안방 아랫목에 앉아 내 이름을 부르기에 화들짝 놀라 깼는데 꿈이지 뭐야. 꿈인 걸 안 순간 어찌나 눈물이 나는지….(할머니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 뒤로 꿈에도 한 번 안 나오니 야속한 사람이지. 내 마음에는 그 사람의 사랑이 불에 넣어도 안 탈 거 같고 물에 넣어도 안 떠내려갈 거 같고 그래.” 남편에 대한 그리움이 새삼 가슴을 후비는 탓이리라. 김 할머니 눈가에 다시 이슬이 맺혔다. 윤샘이나기자 sam@seoul.co.kr
  • [김문이 만난사람] 6·25전쟁 당시 1사단장 백선엽 장군

    [김문이 만난사람] 6·25전쟁 당시 1사단장 백선엽 장군

    톨스토이가 쓴 명작 ‘전쟁과 평화’를 잠시 기억해본다. 마지막 부분이다. 주인공 안드레이 청년이 죽어가면서 ‘시베리아의 하늘도 파랗구나’라고 읊었다. 평화로운 파란 하늘을 진작 봤으면 전쟁을 할 일도 없을 텐데 죽어갈 때 누워서 하늘을 보니 ‘왜 피 흘리면서 전쟁을 했을까’라는 물음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6·25전쟁은 왜 했을까. 평화를 위해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했고, 세월이 지난 지금도 눈물겹도록 아프게 하는 역사를 왜 만들어야 했을까. 참으로 비통하고 영원히 기억을 할 수밖에 없는 우리 민족의 큰 상처이기에 해마다 6월이면 다시 한번 되새기게 한다. 1950년 6월 25일 아침 7시였다. 젊은 장교의 일성은 이랬다. “사단장 각하, 전방에서 적이 전면적으로 침공해 왔습니다. 개성이 대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개성은 벌써 점령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서울과 개성 등 전방을 지키는 보병 제1사단 작전참모 김덕준 소령의 숨가쁜 목소리를 들은 것은 당시 백선엽 1사단장이다. 우리 역사에서 민족의 비극인 6·25전쟁을 알리는 제1보였다. 백선엽 장군은 시흥에 있던 육군보병학교에서 10일 전부터 3개월 과정의 고급간부교육을 받고 있던 중 급거 귀대하여 1사단을 지휘했다. 이후 낙동강까지 후퇴한 1사단은 한국군 부대 중에서 유일하게 미1군단에 배속돼 지원 나온 미군 2개 연대와 함께 경북 칠곡의 다부동 전투를 치렀다. 전투 중 한국군 병력의 후퇴와 무단이탈이 심해지자 함께 다부동을 지키던 미군 27연대장 마이켈리스(Michaelis) 대령이 “전선 좌측의 한국군 부대가 무단 이탈하고 있다.”며 다급하게 전황을 알려왔다. 백선엽 장군은 후퇴하는 국군을 막으며 “나라가 망하기 직전이다. 저 사람들(미군)이 싸우고 있는데 우리가 이럴 순 없다. 내가 앞장설 테니 나를 따르라. 내가 후퇴하면 나를 쏴도 좋다.”며 싸울 것을 호소했다. 이후 1사단은 평양 입성을 가장 먼저 했다. 백선엽 장군은 최근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라는 제목으로 6·25 전쟁 당시 1128일의 기억을 책으로 펴냈다. 6·25전쟁 얘기만 나오면 누구보다 또렷이 기억하는 살아 있는 역사로 여긴다. 6·25전쟁 61주년을 앞두고 지난 20일 서울 용산의 전쟁기념관에서 백선엽 장군을 만났다. 6월이어서 그런지 강의를 해 달라는 손님들이 분주히 드나들었다. 약속 시간보다 20분 뒤에야 자리에 마주 앉았다. 1920년생이면 우리 나이로 92살. 그런데도 전쟁의 기억은 분명했다.. 차 한 잔을 마시더니 백 장군이 “고향이 어디요.”라고 물었다. 제주도라고 답을 드렸다. 그러자마자 나오는 얘기는 이러했다. “제주도 무척 많이 갔지. 6·25때 모슬포에 보충대가 있었어. 16주 동안 교육을 시키고 전쟁터에 보냈거든, 그래 육군 제1 훈련소야. 20살 전후의 청년들 10만명 정도가 훈련을 받았어, 내 동생(백인엽 장군)이 훈련소장도 했고. 태풍도 많이 왔어. 미군부대에서 지원 받은 천막을 치고 훈련했지. 하루에 상륙함정(LST) 두 척이 오고 가면서 훈련병들을 실어 날랐어. 그 병사들이 전쟁터에 많이 죽었어.” 백 장군의 눈이 잠시 감긴다. 그들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당시 전쟁상황에서 지금의 5~6주 교육보다 더 긴 16주 교육을 했던 이유에 대해 물었다 . “미군의 2차대전 방식을 그대로 따랐거든. 미군은 100개 사단이 있었는데 대부분 16주 동안 훈련을 받고 전쟁터에 보내졌어. 2차대전때…. 제주도 훈련소는 일제때 썼던 비행장이야, 그러니까 일본군들이 중국의 난징(南京) 폭격을 위한 중간 기지였지. 훈련소에는 미군 고문관들이 많았어.” 백 장군은 왜 제주에 자주 갔을까. “내가 육군참모총장을 했었거든. 훈련소에 물이 부족했어. 그걸 해결하기 위해 LST나 미군 비행기를 이용해서 여러 번 갔어. 아마 수십 차례 될걸. 또 동생이 1년동안 훈련소장으로 있었거든. 장도영 장군도 훈련소장을 했었지.” 백 장군은 잠시 4·3사건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1948년 4월 3일이야. 내가 부산 3여단 참모장을 했어. 제주 관할이니까 부대 시찰차 갔었지. 그때는 제주읍이야. 4월3일 아침에 비행기를 타려고 하는데 김익열 연대장이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가 왔어. 김달삼(金達三)이 이끄는 폭도들이 제주지역 11군데 지서를 습격했다고 말야.” 잠시 관련 자료을 들여다본다. 김달삼은 사회주의 혁명가로 제주 4·3 사건을 주도한 남조선로동당원이다. 그의 본명은 이승진이며, 고향은 대구. 일본에서 중학교와 대학을 나왔다. 1945년 1월 일본에서 강문석의 딸 강영애와 결혼했으며 김달삼이란 이름은 원래 강문석이 쓰던 가명이다. 1946년 말 제주도 대정중학교 사회과 교사로 재직하면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르쳤다. 그는 교사로 재직 중에 남로당 대정면 조직부장을 맡았으며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책이자 군사부 책임자가 됐다. 화제를 다시 돌려 6·25 전쟁때 제1보를 보고한 김덕준 소령에 대해 물었다. “그날 아침 7시였어. 지금도 그 목소리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지. 전화를 받는 순간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 북한이 탱크와 전투기를 갖고 있는거 알았거든. 전쟁을 대비해야 한다는 것도 수차례 얘기했고…” 백 장군은 이 대목에서 “이승만 대통령도 미군에게 북한의 남침 예상을 얘기했고 나도 미군 고문단과 만날 때마다 전투기와 탱크, 대포를 달라고 수차례 말했다.”고 술회했다. “우리야 그때 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지. 미군에게 그렇게 여러번 얘기해도 귀담아 듣지 않았어. 희생을 줄일 수도 있었는데 말야. 북한군은, 나중에 노획문서를 보니 깨소금까지 준비할 정도로 매우 치밀하게 전쟁을 계획했어.” 백 장군이 얘기하는 모습을 보면서 북한군이 왜 6월 25일을 택했는지 알 수 있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북한군은 남한에서 먹을 것이 많은 계절인 6월부터 9월까지를 정했지. 3개월이면 부산까지 싹 쓸어버릴 작정이었어. 이 시기는 들판에 가면 먹을 것들이 많거든. 전쟁에서 먹거리는 매우 중요해. 북한은 추수때까지 전쟁을 끝낼 계획을 짰어.” 그렇다면 우리 군사들은 무엇을 먹고 싸웠을까. “낙동강까지 후퇴하면서 농협창고에서 쌀을 얻었고 밭에 가면 파와 배추가 있었지. 그걸 먹었어. 또 우리 선량한 아주머니들, 국민들이 갖다주는 음식도 먹었어. 아주 훌륭한 분들이야. 다부동 전투에서 이길 수 있었던 것도 우리 주민들이 갖다주는 음식이 있었기 때문이지.”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고 북진할 때는 어땠을까. “김일성 군대는 낙동강에서 완전히 녹았어. 북진을 하면서는 시장에서 먹을 것을 사 왔고 군에서 나오는 건빵을 먹었지. 고지 전투에서는 배가 고파 이탈하는 군인들도 더러 있었어. 북진할 때는 하복을 입었는데 나중에 동복으로 갈아 입었고…. 북한 주민들이 우리를 보더니 많이 환영했어. 먹을 것도 주고….” 백 장군은 평북 운산까지 진격했다가 중공군과 맞닥뜨린다. “중공군은 장개석 군대 출신들의 최정예 부대야. 일본군과 10년을 싸운 군사들이었지. 전쟁경험이 아주 많아. 그런 군사 100만명이 압록강을 넘어와 매복을 하고 있었으니 우리 군이 당할 수밖에 없지. 그래도 우리 1사단을 덜 당했어. 운산 일대에 중공군 30만명이 매복하고 있다는 것을 하루 전에 알 수 있었지. 하루 밤새 싸우다가 도저히 안 되더라구. 결국 후퇴하고 말았지만….” 그러면서 백 장군은 북한군의 변화상에 대해 여러 번 강조했다. “남북한은 여전히 휴전 상태이며 두 세대가 지나는 동안 북한은 핵무기와 장거리 미사일, 120만명의 지상군과 20만명의 특공대를 갖고 있다.”면서 “지난 61년 동안 북한은 청와대도 습격하고 천안함을 폭침하고 연평도를 포격하는 등 별 장난을 다했다.”고 말했다. “우리 젊은이들이 경계를 잘해야 돼. 대부분 고등학교 이상 출신들이 군대를 가잖아. 자원이 아주 훌륭해요” 백 장군은 군사영어학교 출신이다. 전체 110명이었는데 지금 만나는 동기들은 겨우 15명 내외에 불과하다. 건강이 어떠냐고 했다. “아픈 데 없어. 병원도 안 가. 동기들과 만나 옛날 얘기하는 재미로 살고 있어.” 맥아더 장군이 얘기했다. ‘노병은 죽지 않고 다만 사라질 뿐이다’. 백 장군은 “너무 오래 살았어.”하면서 껄껄 웃는다. 편집위원 km@seoul.co.kr >> 백선엽 그는 누구인가 1920년 평안북도 강서군 덕흥리에서 태어났다. 1940년 3월 평양 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교사로 재직하다가 만주 봉천(奉天) 군관학교에 진학하면서 군인의 길을 걸었다. 1942년 12월 제9기로 졸업하고 견습군관을 거쳐 1943년 4월 만주군 소위로 임관했다. 해방 직후에는 잠시 조만식 선생의 비서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1945년 2월 월남했다. 이후 1945년 12월 군사영어학교 1기생으로 입학했고, 1946년 2월에 임관했다. 그해 1월 창설된 국방경비대에서 제5연대장을 맡았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국방경비대가 정식으로 국군으로 재편되면서 제5연대장과 육본 정보국장을 거쳐 1950년 4월에 개성을 관할하는 국군 1 보병사단 사단장(당시 계급 대령)으로 부임했다. 1951년 겨울에는 지리산의 빨치산 소탕을 위한 ‘백(白) 야전사령부’를 구성했으며 이 사령부를 모태로 이듬해 4월에는 한국군 최초로 근대화된 2군단을 창설했다. 1952년 7월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된 후 군 훈련체계의 개혁, 보급체계 개편, 상이군인들에 대한 복지 향상 등에 힘썼다. 이때 10개 상비사단 창설(11~20사단), 10개 예비사단 창설 등을 추진했다. 퇴역 후에는 외교관 생활을 한 뒤 교통부 장관을 지냈다. 대한민국 최초의 원수계급에 해당하는 예우를 받고 있다.
  • [23일 TV 하이라이트]

    ●전사자 유가족을 찾습니다(KBS1 오후 5시 20분) 동족상잔의 비극 6·25전쟁은 수많은 장병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조국을 위해 꽃다운 청춘을 바쳤다. 하지만 그 가족들은 전사통지서 한 장 받아보지 못한 채 60여 년의 세월을 눈물로 보내야 했다. ‘전사자 유가족을 찾습니다’에서는 6·25전쟁 참전 유공자들과 학도병이 출연해 전사자 유가족 찾기의 중요성을 함께 알아본다. ●최강합체 믹스마스터(KBS2 밤 8시 50분) 겜브리지 바다 한가운데 석유 개발 중인 시추 기지가 있다. 드릴이 뚫고 들어간 바다 밑 깊숙한 곳에 오랫동안 봉인되어 있었던 정체불명의 거대 악이 눈을 뜬다. 아트레이아의 장로단은 세상이 멸망할 위기에 처함을 감지한다. 그렇게 세상을 구할 믹스마스터를 구하기 위해 마스터헨치를 선발해 겜브리지로 파견한다. ●불굴의 며느리(MBC 밤 8시 15분) 세령은 진우와 혜령이 함께 있는 사진을 보고 의아해한다. 급기야 흥신소 직원에게 혜령에 대해 자세히 조사해보라고 이른다. 신우는 영심이 마음에 걸려 만월당까지 찾아가지만 영심의 오해를 사게 된다. 한편 지은은 휴가를 끝내고 회사에 복귀하는데, 우연히 신우와 영심의 다정한 모습을 보고 놀라고 만다.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SBS 밤 8시 50분) 경기도 시흥에 기상천외한 입맛을 가진 사람이 있다. 보고도 믿기지 않을 별난 식성을 가지고 있는 주인공은 바로 송경운씨다. 겉으로 보기에는 보통 사람들과 다를 것이 없다. 하지만 운동을 하던 주인공이 봉지에서 꺼낸 것은 애벌레. 그가 망설임 없이 애벌레를 입 속으로 넣는 모습은 보는 사람들을 경악하게 만든다. ●선생님 선생님 우리 선생님(EBS 밤 12시 5분) 충북 진천군에 위치한 문백초등학교에 학생들을 가슴으로 품은 이정원 선생님이 있다. 교직 생활 14년 동안 전교생을 자녀처럼 생각해 세세한 것 하나까지 챙겨주고 있는 엄마 같은 선생님이다. 서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족 같은 학교에서 아이들과 그녀가 만들어가는 따뜻한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본다. ●특선다큐 불로장생의 역습 1부(OBS 밤 11시) 인구 감소 문제로 지구촌에서 사라지게 될 최초의 국가로 한국이 꼽혔다. 이를 ‘코리아 신드롬’이라 공식 명명하기도 했다. 노인들을 새로운 국가 성장 동력원으로 보고, 노년의 인간이 가지는 ‘나이 듦’의 지혜, 즉 ‘에이징 파워’에 주목한다. ‘불로장생의 역습 1부’에서는 초고령화 사회로의 진행 과정을 과학과 의료기술 개발 현장을 통해 알아본다.
  • 백선엽 “깨소금까지 준비한 북한군 6월 25일 도발한 것은”

    백선엽 “깨소금까지 준비한 북한군 6월 25일 도발한 것은”

    지금도 눈물겹도록 아프게 하는 역사를 왜 만들어야 했을까. 참으로 비통하고 영원히 기억을 할 수밖에 없는 우리 민족의 큰 상처이기에 해마다 6월이면 다시 한번 되새기게 한다. 1950년 6월 25일 아침 7시였다. 젊은 장교의 일성은 이랬다. “사단장 각하, 전방에서 적이 전면적으로 침공해 왔습니다. 개성이 대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개성은 벌써 점령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서울과 개성 등 전방를 지키는 보병 제1사단 작전참모 김덕준 소령의 숨가쁜 목소리를 들은 것은 당시 백선엽 1사단장이다. 우리 역사에서 민족의 비극인 6·25전쟁을 알리는 제1보였다. 백선엽 장군은 시흥에 있던 육군보병학교에서 10일 전부터 3개월 과정의 고급간부교육을 받고 있던 중 급거 귀대하여 1사단을 지휘했다. 이후 낙동강까지 후퇴한 1사단은 한국군 부대 중에서 유일하게 미1군단에 배속돼 지원 나온 미군 2개 연대와 함께 경북 칠곡의 다부동 전투를 치렀다. 전투 중 한국군 병력의 후퇴와 무단이탈이 심해지자 함께 다부동을 지키던 미군 27연대장 마이켈리스(Michaelis) 대령이 “전선 좌측의 한국군 부대가 무단 이탈하고 있다.”며 다급하게 전황을 알려왔다. 백선엽 장군은 후퇴하는 국군을 막으며 “나라가 망하기 직전이다. 저 사람들(미군)이 싸우고 있는데 우리가 이럴 순 없다. 내가 앞장설 테니 나를 따르라. 내가 후퇴하면 나를 쏴도 좋다.”며 싸울 것을 호소했다. 이후 1사단은 평양 입성을 가장 먼저 했다. 백선엽 장군은 최근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라는 제목으로 6·25 전쟁 당시 1128일의 기억을 책으로 펴냈다. 6·25전쟁 얘기만 나오면 누구보다 또렷이 기억하는 살아 있는 역사로 여긴다. 6·25전쟁 61주년을 앞두고 지난 20일 서울 용산의 전쟁기념관에서 백선엽 장군을 만났다. 6월이어서 그런지 강의를 해 달라는 손님들이 분주히 드나들었다. 약속 시간보다 20분 뒤에야 자리에 마주 앉았다. 1920년생이면 우리 나이로 92살. 그런데도 전쟁의 기억은 분명했다.. 차 한 잔을 마시더니 백 장군이 “고향이 어디요.”라고 물었다. 제주도라고 답을 드렸다. 그러자마자 나오는 얘기는 이러했다. “제주도 무척 많이 갔지. 6·25때 모슬포에 보충대가 있었어. 16주 동안 교육을 시키고 전쟁터에 보냈거든, 그래 육군 제1 훈련소야. 20살 전후의 청년들 10만명 정도가 훈련을 받았어, 내 동생(백인엽 장군)이 훈련소장도 했고. 태풍도 많이 왔어. 미군부대에서 지원 받은 천막을 치고 훈련했지. 하루에 상륙함정(LST) 두 척이 오고 가면서 훈련병들을 실어 날랐어. 그 병사들이 전쟁터에 많이 죽었어.” 백 장군의 눈이 잠시 감긴다. 그들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당시 전쟁상황에서 지금의 5~6주 교육보다 더 긴 16주 교육을 했던 이유에 대해 물었다 . “미군의 2차대전 방식을 그대로 따랐거든. 미군은 100개 사단이 있었는데 대부분 16주 동안 훈련을 받고 전쟁터에 보내졌어. 2차대전때?. 제주도 훈련소는 일제때 썼던 비행장이야, 그러니까 일본군들이 중국의 난징(南京) 폭격을 위한 중간 기지였지. 훈련소에는 미군 고문관들이 많았어.” 백 장군은 왜 제주에 자주 갔을까. “내가 육군참모총장을 했었거든. 훈련소에 물이 부족했어. 그걸 해결하기 위해 LST나 미군 비행기를 이용해서 여러 번 갔어. 아마 수십 차례 될 걸. 또 동생이 1년동안 훈련소장으로 있었거든. 장도영 장군도 훈련소장을 했었지.” 백 장군은 잠시 4·3사건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1948년 4월 3일이야. 내가 부산 3여단 참모장을 했어. 제주 관할이니까 부대 시찰차 갔었지. 그때는 제주읍이야. 4월3일 아침에 비행기를 타려고 하는데 김익열 연대장이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가 왔어. 김달삼(金達三)이 이끄는 폭도들이 제주지역 11군데 지서를 습격했다고 말야.” 잠시 관련 자료을 들여다본다. 김달삼은 사회주의 혁명가로 제주 4·3 사건을 주도한 남조선로동당원이다. 그의 본명은 이승진이며, 고향은 대구. 일본에서 중학교와 대학을 나왔다. 1945년 1월 일본에서 강문석의 딸 강영애와 결혼했으며 김달삼이란 이름은 원래 강문석이 쓰던 가명이다. 1946년 말 제주도 대정중학교 사회과 교사로 재직하면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르쳤다. 그는 교사로 재직 중에 남로당 대정면 조직부장을 맡았으며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책이자 군사부 책임자가 됐다. 화제를 다시 돌려 6·25 전쟁때 제1보를 보고한 김덕준 소령에 대해 물었다. “그날 아침 7시였어. 지금도 그 목소리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지. 전화를 받는 순간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 북한이 탱크와 전투기를 갖고 있는거 알았거든. 전쟁을 대비해야 한다는 것도 수차례 얘기했고?” 백 장군은 이 대목에서 “이승만 대통령도 미군에게 북한의 남침 예상을 얘기했고 나도 미군 고문단과 만날 때마다 전투기와 탱크, 대포를 달라고 수차례 말했다.”고 술회했다. “우리야 그때 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지. 미군에게 그렇게 여러번 얘기해도 귀담아 듣지 않았어. 희생을 줄일 수도 있었는데 말야. 북한군은, 나중에 노획문서를 보니 깨소금까지 준비할 정도로 매우 치밀하게 전쟁을 계획했어.” 백 장군이 얘기하는 모습을 보면서 북한군이 왜 6월 25일을 택했는지 알 수 있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북한군은 남한에서 먹을 것이 많은 계절인 6월부터 9월까지를 정했지. 3개월이면 부산까지 싹 쓸어버릴 작정이었어. 이 시기는 들판에 가면 먹을 것들이 많거든. 전쟁에서 먹거리는 매우 중요해. 북한은 추수때까지 전쟁을 끝낼 계획을 짰어.” 그렇다면 우리 군사들은 무엇을 먹고 싸웠을까. “낙동강까지 후퇴하면서 농협창고에서 쌀을 얻었고 밭에 가면 파와 배추가 있었지. 그걸 먹었어. 또 우리 선량한 아주머니들, 국민들이 갖다주는 음식도 먹었어. 아주 훌륭한 분들이야. 다부동 전투에서 이길 수 있었던 것도 우리 주민들이 갖다주는 음식이 있었기 때문이지.”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고 북진할 때는 어땠을까. “김일성 군대는 낙동강에서 완전히 녹았어. 북진을 하면서는 시장에서 먹을 것을 사 왔고 군에서 나오는 건빵을 먹었지. 고지 전투에서는 배가 고파 이탈하는 군인들도 더러 있었어. 북진할 때는 하복을 입었는데 나중에 동복으로 갈아 입었고?. 북한 주민들이 우리를 보더니 많이 환영했어. 먹을 것도 주고?.” 백 장군은 평북 운산까지 진격했다가 중공군과 맞닥뜨린다. “중공군은 장개석 군대 출신들의 최정예 부대야. 일본군과 10년을 싸운 군사들이었지. 전쟁경험이 아주 많아. 그런 군사 100만명이 압록강을 넘어와 매복을 하고 있었으니 우리 군이 당할 수밖에 없지. 그래도 우리 1사단을 덜 당했어. 운산 일대에 중공군 30만명이 매복하고 있다는 것을 하루 전에 알 수 있었지. 하루 밤새 싸우다가 도저히 안 되더라구. 결국 후퇴하고 말았지만?.” 그러면서 백 장군은 북한군의 변화상에 대해 여러 번 강조했다. “남북한은 여전히 휴전 상태이며 두 세대가 지나는 동안 북한은 핵무기와 장거리 미사일, 120만명의 지상군과 20만명의 특공대를 갖고 있다.”면서 “지난 61년 동안 북한은 청와대도 습격하고 천안함을 폭침하고 연평도를 포격하는 별 장난을 다했다.”고 말했다. “우리 젊은이들이 경계를 잘해야 돼. 대부분 고등학교 이상 출신들이 군대를 가잖아. 자원이 아주 훌륭해요” 백 장군은 군사영어학교 출신이다. 전체 110명이었는데 지금 만나는 동기들은 겨우 15명 내외에 불과하다. 건강이 어떠냐고 했다. “아픈 데 없어. 병원도 안 가. 동기들과 만나 옛날 얘기하는 재미로 살고 있어.” 맥아더 장군이 얘기했다. ‘노병은 죽지 않고 다만 사라질 뿐이다’. 백 장군은 “너무 오래 살았어.”하면서 껄껄 웃는다. 편집위원 km@seoul.co.kr
  • [열린세상] 6·25전쟁 이후의 남한과 북한/서재진 통일연구원장

    [열린세상] 6·25전쟁 이후의 남한과 북한/서재진 통일연구원장

    북한과 남한의 역사 발전의 차이는 6·25전쟁에 의하여 규정되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영향이 너무 크고 구조적이다. 북한에 6·25전쟁은 폐쇄체제와 군사주의적 특성을 재생산하고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오늘날에도 핵 개발과 선군정치로 계승되고 있다. 한국은 6·25전쟁 이후 미국 및 일본과의 관계를 강화하여 세계 10대 경제대국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6·25전쟁의 원인이자 동시에 6·25전쟁 이후에도 북한에 미친 가장 큰 변수의 하나는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 신화이다. 스칼라피노 교수에 따르면, 소련이 당시 소련 극동군 88정찰여단 지대장이었던 김일성 대위를 북한의 최고지도자로 지명한 이유는 김일성이 소련에서 4년간 소련군의 지도와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신뢰할 만하고 소련의 통제에 쉽게 따를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런데 소련 군정이 해방 후 북한 내 여러 정파의 정치지도자들 가운데서 조만식과 박헌영 등을 배제하고 김일성을 선택한 것은 일본군에 대항해서 싸운 사람이 해방된 조선의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명분이었다. 이후부터 김일성은 항일무장투쟁을 자신의 신화로 발전시켰고, 그 신화를 자기 권력의 명분과 수단으로 활용하였다. 불행히도,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 신화가 6·25전쟁의 직접적 원인이 되었다. 북한 정권 초기에 북한에 들어와서 북한 건국에 참여하였다가 1957년 김일성에 의하여 다시 소련으로 추방된 정상진을 비롯한 소련파들의 증언에 의하여 밝혀진 사실이다. 김일성은 자신은 일제강점기 동안 항일무장투쟁을 한 사람인데 남한의 이승만 정권은 친일세력이라고 규정하고 남한을 친일세력에서 해방시킨다는 명분으로 6·25전쟁을 도발하였다고 한다. 김일성이 자신이 도발한 6·25전쟁을 ‘민족해방전쟁’이라고 일컫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6·25전쟁으로 경제가 피폐해지자 주민들의 불만과 김일성 지도력에 대한 회의가 증대하고, 정파 간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김일성의 권력이 도전에 직면하자 항일무장투쟁 신화가 다시 김일성의 반격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김일성은 항일무장투쟁을 한 사람이니 비판하거나 저항해서는 안 된다는 명분으로 6·25전쟁 이후 숱하게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강제수용소로 보냈다. 김일성을 북한의 최고지도자로 옹립하게 하고 6·25전쟁을 도발한 명분이 되었던 항일무장투쟁의 논리는 북한의 역사에서 지금까지도 족쇄로 작용하고 있다.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을 통치 이데올로기로 활용하기 위하여 북한은 일본에 대한 적대감을 지속적으로 동원하였다. 항일무장투쟁의 국가이데올로기는 일본과의 적대정책을 최우선 정책으로 추진한 나머지 식민지배가 끝나고 전쟁이 끝난 지 60년이 가까운 지금에도 일본과의 적대정책을 지속하고 있다. 남한은 6·25전쟁 이후에 경제적 어려움, 사회적 혼란이 4·19혁명, 5·16 군사쿠데타로 이어졌고 역사가 진보적으로 발전되었다. 북한과는 달리 6·25전쟁의 비극을 역사 발전의 기회로 활용하였다. 6·25전쟁 이전의 국시는 항일이었지만 6·25전쟁을 계기로 항일에서 반공으로 바뀌어 일본과 국교정상화를 할 수 있게 되었다. 6·25전쟁을 계기로 우리는 미국과도 긴밀한 동맹관계가 형성되었다. 우리가 일본과 수교하여 일본으로부터 기계·원자재를 도입하고, 우리의 풍부하고 저렴한 노동력으로 임가공하여 미국에 수출하는 수출주도형 국제분업 구도를 형성하여 고도경제성장을 실현할 수 있었던 것은 6·25전쟁 이후 대외관계의 변화에 기인하는 측면이 크다. 이후 한국은 10대 경제강국으로 성장한 데 비해 아직도 항일 및 반미주의로 정권을 유지하면서 경제적 고립을 감수하는 북한은 세계 10대 빈국으로 전락하였다. 우리 국민들은 6·25를 종결된 전쟁으로 생각하고 잊어 가고 있지만, 북한은 여전히 전쟁의 추억 속에서 살고 있다. 남한에 대한 도발과 그로 인해 군사모험주의라는 국제사회의 낙인을 더 강화하고 더 고립봉쇄당하는 악순환을 계속하고 있다. 북한체제가 갖는 항일무장투쟁과 6·25전쟁의 관성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6·25전쟁 61주년을 계기로 남북을 비교해 보고 미래지향적 개혁·개방을 시도하기를 기대해본다.
  • [한국戰 전사자 유해발굴] 첨단장비 총동원… 60년전 묻힌 ‘무명용사 恨’ 풀어주다

    [한국戰 전사자 유해발굴] 첨단장비 총동원… 60년전 묻힌 ‘무명용사 恨’ 풀어주다

    지난 15일 오전 11시쯤 충남 연기군 금남면 대평리 감성초등학교 뒤 야산. 61년 전 6·25전쟁 당시 북한군에 밀려 퇴각하던 국군이 북한군의 공격을 받아 전사하거나 부상을 당한, ‘대평리 전투’가 벌어졌던 85고지다. 한낮 32도가 넘는 무더운 날씨에도 아랑곳없이 100여명의 장병들이 야산 일대를 샅샅이 파헤치고 있었다. 군사작전을 하듯 한 손에는 무전기를 들고 상황을 실시간 전달하고, 다른 손에는 금속탐지기나 삽, 곡괭이 등을 들고 산 곳곳을 물샐 틈 없이 훑어가고 있었다. ●전쟁 아픔 간직한 산의 비밀 찾아 이들은 충남 공주 일대의 향토 방어를 담당하는 32사단 기동대대 장병 100명과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소속 장병들이다. 20살을 갓 넘긴 앳된 얼굴부터 쉰살을 넘겨 흰머리가 보이는 장병이 함께하고 있지만, 6·25전쟁과의 거리는 멀어 보인다. 하지만 목소리만큼은 그 날을 기억하듯 비장함과 함께 굳은 신념이 배어 있다. 이곳에서 만난 이성현 이병은 “일주일째 발굴작업에 참여하고 있다.”면서 “힘이 든다기보다 (선배들의) 작은 (유해나 유물)하나라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며 흘러내리는 땀을 훔쳐냈다. ●발굴·감식 능력 세계 최고 감식단 한쪽에선 노트북을 이용해 지형에 대한 정보를 입력하고, 다른 한쪽에서 파낸 흙을 채로 걸러내는 작업을 반복했다. 주경배 발굴과장은 “작은 치아 하나라도 찾아내기 위한 과정”이라면서 “자료를 노트북에 입력해 모두 기초자료로 활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유해발굴감식단의 자료 축적은 세계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현재 국방부 상설 기구로 유해발굴감식단이 처음 설립된 미국보다 뛰어난 기초 자료를 확보하고 있으며, 발굴 실력도 더 뛰어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미국과 함께 영국, 호주의 국방 무관들도 우리 군의 유해발굴 감식 기술을 배우기 위해 수시로 방문하고 있다. 낮 12시가 다 될 무렵 감식단 장병들이 산 정상의 넓은 교통호를 줄과 플라스틱 못을 이용해 바둑판 모양으로 구역을 나눴다. 개인용 참호보다 유해나 유물이 나올 확률이 상대적으로 높은 교통호를 정밀하게 탐색하기 위해서다. 얼마 뒤 무전기 너머에서 점심 식사를 위해 집합하라는 연락이 왔다. 장비를 정리해 산 아래로 내려가 32사단 장병들과 감식단 장병들이 뜨거운 태양볕을 피해 감성초교 운동장 한편에 주저앉아 식판을 들고 허겁지겁 밥을 먹었다. 밥을 먹은 장병들은 발굴 현장으로 서둘러 나갈 준비를 했다. 점심시간을 맞아 운동장으로 나온 아이들이 줄을 맞춰 이동하면서 군인아저씨들에게 장난스레 ‘충성’하며 거수경례를 했다. 이들의 발굴작업은 오후 4시까지 이어졌지만 특별한 성과를 거두진 못했다. 개인호 150개를 찾아 파냈을 때 유해 한 구를 찾을 수 있다는 감식단 관계자의 말처럼 무더위 속에 앞으로도 3주간의 지루한 싸움이 계속될 예정이다. 검게 그을린 장병들의 얼굴이 60여년 전 자유를 지키기 위해 85고지를 넘던 무명 용사의 얼굴들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기록으로 80%·제보로 20% 발굴 실제로 국군의 유해는 6·25 전쟁 기록에 나온 전투 지역을 유해발굴감식단이 직접 찾아 발굴하는 경우가 80%에 이른다. 지역 주민 등의 제보로 이뤄지는 경우는 20%에 불과하다. 그래서 감식단은 노출된 유해를 신고할 경우 20만원의 포상금을 지급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제도를 악용하는 사례도 있다. 제보자 일부가 ‘유해파라치’로 변했다는 것이다. 최근 최고 70만원까지만 보상금을 지급하고 있는 까닭이다. 하지만 유해파라치는 또다시 진화해 여러 구의 유해를 나눠 신고하기도 한다. 글 연기 오이석기자 hot@seoul.co.kr 사진 안주영기자 jya@seoul.co.kr
  • [지적도 대수술 시급] 측량기술은 최첨단… 제도는 100년 전 그대로

    [지적도 대수술 시급] 측량기술은 최첨단… 제도는 100년 전 그대로

    #사례1 지난해 12월 개통된 거가대교 공사 때 시공사는 심각한 위기에 봉착했다. 측량의 기준이 되는 해발고도를 기재해 놓은 국가수준점(표석)이 거제도와 진해 간 37㎝나 차이가 났기 때문이다. #사례2 경계지역인 경기 성남시 구미동과 용인시 죽전동의 토지개발사업에선 60억원에 달하는 중복 보상이 이뤄졌다. 지적정보 오류로 양 지역 간 2.5㎞에 걸쳐 20~40m씩 토지가 중복됐기 때문이다. #사례3 경남 사천시 사천읍 수석1동은 마을 전체가 지적도와 맞지 않는 ‘지적 불부합지’의 대표적인 사례다. 모든 건물이 지적도보다 동쪽으로 밀려나 집집마다 수십 ㎡씩 땅이 물려 있다. 집을 사고팔 수도 없고 증·개축도 어렵다. ●국토 위치 동쪽으로 464m 어긋나 19일 국토해양부와 대한지적공사에 따르면 이런 사례는 해마다 늘고 있다. 전국 3710만 8000필지 가운데 553만 6000필지(14.8%·2009년 기준)가 지적도와 땅이 일치하지 않는 지적 불부합지로 분류된다. 2002년 지적 불부합지 비율은 3.9%, 2007년 13.8%로 급격히 증가했다. 무엇보다 우리 국토는 수치상으로 100여 년 전부터 세계 측지계와 동쪽으로 464m나 어긋나 있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법무법인 정률의 성봉경 변호사는 “우리나라는 100년 전인 1910년대에 일제가 설치한 도쿄 원점을 아직도 땅을 측량하는 기준점으로 사용하고 있다.”면서 “국토의 위치가 국제 표준에서 그만큼 벗어났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근본 원인은 100년 전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진 낡아빠진 지적도를 지금까지 사용하는 데 있다. 당시 일본은 토지 수탈과 세금 징수를 위해 대나무 줄자, 연필, 한지 등 전근대적인 측량장비와 기술을 사용해 지적도를 만들었다. 경제성에 따라 500분의1부터 6000분의1까지 7종류의 축적을 사용했고, 서울도 지역별로 축적이 달라 지적도를 연결하면 맞지 않는 곳이 많았다. 아울러 해방과 6·25전쟁 등 격변기를 거치면서 많은 지적도가 소실됐고, 도시화를 거치며 건물이 무단 신·증축됐다. 이러다 보니 1990년대 지적도의 전산입력 과정을 거쳤으나 초기 지적도의 오류를 그대로 내포하고 있다. 정부도 1994년부터 지적 불부합지 해소를 위해 다양한 재조사 사업을 전개해 왔다. 1996년에는 지적 재조사 특별법이 입법예고됐다. 2006년에도 비슷한 내용의 특별법이 국회에서 발의됐으나 통과하지 못했다. 10년 이상의 사업 기간과 수조원대 사업비용 때문이다. ●예상 사업비 1조3600억원대까지 내려 지난해에도 국토부가 특별법안 입법을 추진했으나 한국개발연구원(KDI) 예비타당성 조사에선 0.363점에 그쳐 기준점(0.5)을 넘지 못했다. 3조 7000억원대 사업비가 과도하다는 이유에서다. 국토부와 지적공사는 최근 항공사진측량과 지상측량을 병행, 예상 사업비를 36% 선(1조 3600억원대)까지 끌어내렸다. 이처럼 우리나라 지적정보의 낙후된 현실은 성장 중인 공간정보산업에 진입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초기단계인 세계 공간정보 시장 규모는 미국이 올해 80억 달러로 추정되며, 일본은 2013년까지 11조엔 대까지 성장할 전망이다. 다행히 국내 측량기술은 최근 편의성과 경제성이 크게 향상된 상태다. 김계현 인하대 지리정보공학과 교수는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 기반의 측량기준점 좌표 획득과 정보기술(IT)이 융합된 토털측량시스템 개발로 정밀성이 크게 강화됐다.”고 전했다. 예컨대 3차원 측량장비인 최첨단 레이저 스캐너의 개발로 가로·세로 1㎜ 단위까지 입체적 측량이 가능해졌다. 나아가 3D 지리정보시스템(GIS) 기술 발달은 기존 2차원 평면지적체계를 그대로 3차원 입체지적체계로 손쉽게 바꾸도록 만들었다. ●공간정보산업 육성… 측량기술 수출 김 교수는 “디지털 지적체계 구축은 지적불부합에서 발생되는 소송비용과 재측량 비용 등 사회적 비용을 줄인다.”면서 “국내 공간정보산업을 육성시키고 블루오션인 저개발국 지적사업 진출 기회까지 1석 3조의 효과를 낳는다.”고 말했다. 사공호상 국토연구원 글로벌개발협력센터장도 “새로운 지적시스템 구축은 모두 10조원가량의 경제효과를 가져온다.”고 전했다. 지난 4월 국회에 지적재조사 특별법을 제출한 한나라당 김기현 의원실에 따르면 새로운 지적시스템 구축은 연간 토지 소송비용 3800억원과 경계 확인비용이 879억원, 지적민원 처리비용도 676억원, 주제도(지번, 건물용도 등) 제작비용 625억원 등이 절감된다. 이 밖에 지적시스템 해외수출 2조 8000억원 등의 효과가 있다고 분석했다. 오상도기자 sdoh@seoul.co.kr
  • [한국戰 전사자 유해발굴] “유해발굴은 국민에게 진 빚 갚는 것”

    [한국戰 전사자 유해발굴] “유해발굴은 국민에게 진 빚 갚는 것”

    “국가가 국민에게 60년 전 진 빚을 갚고 있는 의식입니다.” 6년째 유해발굴감식단을 이끌고 있는 박신한 대령은 6·25전쟁에서 묵묵히 나라를 위해 헌신한 선배들의 유해를 찾는 국방부 감식단의 업무에 대해 “국가의 이름으로 국민에게 진 빚을 갚고 있는 의식”이라면서 “조금 더 일찍 관심을 보이고 시작했더라면 하는 안타까움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국민들에게 국가가 의무를 요구하기 위해선 당연히 그들의 헌신과 봉사에 끝까지 책임지고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며 “감식단은 국가가 책임진다는 의미의 첫걸음일 뿐”이라고 말했다. 겸사와 달리 그의 표정에선 수년간 지속해 온 감식단에 대한 자신감이 묻어났다. 그동안 감식단이 발굴한 국군 유해는 무려 5000구가 넘는다. 유전자(DNA) 식별을 통해 유해를 가족의 품에 안긴 일도 있었다. 박 단장은 유해발굴 사업은 법률로 규정된 사업으로 세월이 흘러 유해 발굴이 더 어려워지기 전에 신속히 진행해야 한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그는 “돌아오지 못한 선배들의 원혼이 원할 때 비로소 저희에게 발견 되는 것 같다.”면서 “최근 2년간 엄청난 속도로 유해를 발굴하고 있지만 지금의 전문인력으론 한계가 있다.”고 아쉬워했다. 감식단은 총 170여명으로 구성돼 있지만 행정지원을 비롯해 실제 발굴 업무를 담당하는 인원은 100명이 되지 않는다. 이 인원을 또다시 8개 팀으로 나눠 전국의 10개 발굴지역을 담당하고 있다. 전문인력도 현역도 절대적으로 부족한 실정이다. 연기 오이석기자 hot@seoul.co.kr
  • [한국戰 전사자 유해발굴] “전우 잃은 기억 떠오를까 한국 방문 주저했죠”

    [한국戰 전사자 유해발굴] “전우 잃은 기억 떠오를까 한국 방문 주저했죠”

    모든 한국전쟁 참전용사는 자신의 공훈을 자랑하고 싶어 하고, 자신이 피 흘려 싸운 한국을 방문하고 싶어 할까. 18일(현지시간) 미국 버지니아 비에나시에서 만난 미국인 참전군인 앨 오티즈(82)는 그것이 또 하나의 편견임을 일깨워 줬다. 그는 6·25전쟁이 발발한 지 61년째를 맞은 지금까지도 당시의 기억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었다. 적탄에 사랑하는 전우를 잃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 자신의 공격에 적이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전쟁의 비극을 논하는 것은 애당초 비현실적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그의 모습이 웅변했다. 61년 전 오티즈는 텍사스 앨파소에 사는 평범한 21세의 청년이었다. 넉넉지 못한 집안 형편 탓에 그는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모자 가게 점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나라에서 일어난 전쟁이 그의 인생을 바꿔 놓았다. 그는 1950년 11월 강제 징집명령을 받는다. 심경이 어땠을까.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죠.” 그는 솔직했다. 오티즈는 루이지애나에서 기초 훈련을 거친 뒤 1951년 5월 일본 홋카이도에 배치됐다. 한국의 추운 날씨에 적응하기 위한 혹한 훈련을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해 12월 그는 인천항을 통해 처음 한국 땅을 밟게 된다. 한국군과 유엔군, 북한군과 중공군이 38선 부근에서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때였다. “불확실성과 두려움, 그런 감정이 지배적이었어요.” 그는 그때 감정을 그렇게 표현했다. 오티즈는 미 45보병사단 179연대 1소대 소대장으로 강원도 철원의 ‘포크찹 힐’(255고지) 전투에 배치됐다. 하늘에서 내려다 본 고지의 모양이 포크찹이라는 요리를 닮아서 붙은 별명이었다. 이름은 익살스러웠지만, 그곳은 아군과 적군이 빼앗고 빼앗기기를 거듭한 가장 격렬한 전장 중 하나였다. 오티즈 소대는 중공군과 북한군의 협공을 받았다. “북한군은 사납고 잔인했어요. 총도 없이 호미 같은 것을 들고 우리한테 돌진하기도 했죠.” 중공군은 인해전술이었다. “마치 개미떼 같았죠. 수백명이 밀고 올라왔어요. 우리는 대포와 수류탄으로 맞섰어요. 특히 수류탄이 효과가 컸어요. 중공군도 나무로 된 수류탄을 던졌는데 우리는 그걸 다시 주워서 되던지기도 했죠.” 오티즈는 “한번은 중공군 포로를 잡고 보니 12살 정도밖에 안 되는 소년이어서 깜짝 놀란 기억도 있다.”고 했다. 실탄이 떨어진 양측 사이에 육탄전이 벌어지는 것도 예사였다. 오티즈는 검지와 중지로 적의 눈을 찌른 적도 있고 칼로 적의 목을 벤 적도 있다고 했다. 전쟁은 해맑은 청년을 야수로 바꿔 놓았다. “처음엔 중공군을 미워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곁에 있던 전우가 죽는 것을 보면서 피가 거꾸로 솟구쳤죠. 점점 그들을 증오하게 됐어요.” 그는 1952년 7월 박격포 파편으로 중상을 입고 후방으로 후송됐고 샌프란시스코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다. 그리고 다시는 전쟁터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는 1953년 5월 전역한 뒤 참전군인에 대한 정부 지원으로 텍사스주립대에 들어갔고, 국무부에서 일하게 되면서 버지니아로 이사했다. 그는 결혼해서 1남3녀를 뒀다. 그에게 한국전쟁이 끝난 이후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는지 물었다. ‘한국이 엄청나게 발전해서 놀랐다.’는 답변을 겨냥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한숨과 함께 나온 그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한국에 먼저 다녀온 참전용사들은 한국이 엄청나게 발전해서 뉴욕같이 변했다고 했어요. 하지만 나는 한국에 가고 싶지 않았어요. 사랑하는 전우들을 잃은 기억이 떠오를까 봐 두려웠어요. 내가 이끌던 40명 중에 33명이 전사했죠. 그것은 너무 고통스러운 기억이에요.” 그의 목소리가 떨렸고 눈에는 이슬이 비쳤다. 하지만 부상 미군 단체(Purple Heart)의 일원이었던 그는 이 단체의 방한 요청을 끝내 거부하지 못하고 2000년대 초 한국을 찾았다. 반세기 만이었다. 한국에 있는 사흘간 동료들은 판문점 등을 돌아다녔지만, 그는 서울을 벗어나지 않았다. 옛날의 기억이 떠오를까 두려워서였다. 그는 “같은 참전용사라도 나처럼 격렬한 전투에 참여한 사람은 고통스러운 기억을 지우기 힘들다.”고 했다. “61년이 지난 지금도 악몽을 꾸죠. 육박전에서 내가 찌른 적이 죽어가던 표정이 지금도 생생해요.” 그는 “우리가 그렇게 싸웠는데 남북한이 여전히 분단국가라는 점이 걱정”이라면서 “나는 북한이 다시 도발할 것으로 확신한다.”고 했다. 그는 “한국은 다른 나라와 다르게 도와준 것을 잊지 않고 계속해서 우리(참전용사)한테 뭔가를 보답하려 한다.”면서 여러 차례 고맙다는 말을 했다. 준비해 간 질문 가운데 차마 꺼내지 못한 게 있다. ‘다시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난다면 그때도 기꺼이 참전하시겠습니까.’란 질문이다. 그 질문을 준비해 간 게 미안했고 부끄러웠다. 글 사진 비에나(버지니아) 김상연특파원 carlos@seoul.co.kr
  • [한국戰 전사자 유해발굴] 국방부 ‘사망사고 민원조사단’ 5년간 종횡무진

    “존경하는 이명박 대통령님, 저는 1952년생으로 가슴에 한을 안고 살아온 평범한 주부입니다. 저희 아버님은 나라의 부름을 받고 1953년 3월 23일 육군에 입대한 오석근 병장입니다. 복무 4년 1개월째 대퇴부 및 좌우측 파편창 등으로 사망했습니다. 그후 저는 생활고 속에서 자라며 아버님을 원망했습니다. 하지만 아버님의 사망이 변사처리되었음을 알게 된 후 명예를 회복시켜 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항상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지쳐 있을 때 국방부 사망사고 민원조사단을 알게 되었고, 2008년 9월 아버님의 사건 재조사를 의뢰했습니다. 2년여의 노력 끝에 2010년 9월 조사단은 아버님을 순직 처리할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53년간 가슴에 안고 있던 응어리와 아버님의 한을 풀어드리게 되어 이 기쁜 마음을 바칩니다. ” 지난해 10월 대통령실 인터넷 국민신문고란을 통해 접수된 오영숙씨의 편지 내용 일부다. 오씨가 아버지의 명예 회복을 위해 2년간 아낌없이 노력해 준 ‘국방부 사망사고 민원조사단’에 감사하는 마음을 전해온 것이다. ●수십년 전 전투기록 찾아 이처럼 국방부 ‘사망사고 민원조사단’은 수십년 간 가슴에 사묻힌 군인 사망사고자 가족들의 한(恨)을 풀어주는 ‘해결사’다. 민원조사단은 국방부 조사본부 산하에 불과 16명(장교 5명, 준사관 1명, 부사관 8명, 군무원 2명)으로 구성된 작은 조직이다. 하지만 조사에서만큼은 최고 수준의 베테랑들이다. 이들이 지난 한 해 전국을 누빈 거리는 20여만㎞. 지구를 4바퀴 반 이상 돈 거리다. 민원조사단의 총기사고 전문 조사관인 이창호 공군 상사의 기록을 보면 더욱 놀랍다. 지난 한 해 431회 출장, 참고인 조사 횟수 360회, 1년 365일보다 더 긴 1년을 보낸 셈이다. 2006년 창설된 조사단은 573건의 사망사고에 대한 민원을 접수해 534건을 처리했다. 이 가운데 109건 255명에 대해 전사 및 순직 결정을 받아냈다. 모두 수십년 만에 명예를 되찾은 사례들이다. ●전사자·유가족 명예회복 지난 1957년 9월 원인미상 사망자로 분류된 최모씨 사건의 경우 조사관들이 검색한 참고자료는 인사명령지 2350장, 매장 및 화장 보고서 13만 2460여장, 입원환자 명부 2010장, 20여명의 참고인을 방문조사했으며, 460명에 대한 인원조회를 실시했다. 욕설을 들어가면서도 관련자 150여명에 대해 전화조사를 실시해 최씨가 군복무 중 지금은 사라진 제36후송병원에 후송 치료 중 사망한 사실을 밝혀내 순직처리했다. 40여년 만에 최씨와 그 가족들의 명예를 회복해 줬다. 또 국민방위군 홍모 이병은 6·25전쟁 당시 징집돼 질병에 의한 사망으로 처리됐다. 홍 이병의 아들은 수십년이 지나 아버지의 사망 원인을 규명해줄 것을 민원조사단에 요청했다. 홍 이병에 대한 조사과정에서 조사단은 새로운 사실을 알아냈다. 당시 홍 이병과 함께 징집된 국민방위군 151명이 모두 동일한 날짜인 1951년 1월 8일에 사망했다는 기록이다. 151명 가운데 불과 4명만이 전사처리됐으며 나머지 147명은 단순 사망으로 잘못 처리된 것. 2009년 11월 조사단은 육군본부에 이들을 모두 ‘전사’처리토록 했다. 홍 이병 등 국민방위군 147명과 유가족들의 한을 60년 만에 풀어준 셈이다. 김지환(육군 대령) 조사단장은 “국방부 산하 조직이지만 군 복무 중 사망한 장병과 그 가족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말했다. 연기 오이석기자 hot@seoul.co.kr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