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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50클럽 대한민국-이제 보훈을 말하다] (상)갈 길 먼 보훈행정

    [20-50클럽 대한민국-이제 보훈을 말하다] (상)갈 길 먼 보훈행정

    제2연평해전 전사자인 박동혁 병장의 아버지 박남준(55)씨는 국가로부터 일시금으로 3150만원을 받았다. 이와 함께 유족연금 등의 명목으로 매월 103만원씩 받고 있다. 그럼에도 이는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에서 전사한 미군 유족에 비할 바가 못 된다. 미국은 전사 후 24시간 이내 10만 달러의 조의금을 유족에 지급한다. 또 현역 군인은 자동적으로 생명보험에 가입돼 보험금 40만 달러를 추가로 받는다. 일시금으로만 50만 달러(약 5억 7000만원)를 받는 것이다. 군인 연금은 이와 별도다. 배우자에게 매월 1150달러가 지급되고 18세 미만의 자녀가 있을 경우 1인당 286달러가 추가된다. 이와 같은 차이는 한·미 보훈행정의 현주소를 보여준다. 우리 보훈 행정은 지난 1961년 군사원호청, 지금의 국가보훈처가 창설되면서 시작됐다. 하지만 6·25전쟁 발발 62년, 보훈처 창설 51년이 지난 지금도 참전용사 등 많은 보훈대상자가 사회적 무관심과 소외 등으로 어려움을 호소한다. 지난해에는 보훈처가 6·25전쟁에서 가족의 전사 사실을 처음 알게 된 유족들에게 5000원씩 지급해 논란이 일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선진국에 비해 갈 길 먼 보훈의식은 정부와 국회의 소극적 태도와 보훈 당국의 낮은 위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지적한다. 상이용사가 아닌 6·25전쟁 참전자들에 대한 금전적 보상은 2001년에야 시작됐다. 정부는 지난해부터 참전자의 명예 선양 차원에서 18만 6000여명에게 월 12만원씩 지급하고 있다. 한국보훈학회 명예회장인 유영옥 경기대 교수는 “중국도 참전용사에게는 노동자 평균 월급보다 많은 월 15만원 이상을 지급한다.”며 “참전용사 대부분이 세상을 뜬 이후라 뒤늦은 감이 있고 실질 혜택도 적은 편”이라고 지적했다. 유 교수는 이어 “정부가 전쟁 직후 참전자와 상이용사를 제대로 대접하지 못했고 이로 인해 국민이 무관심해진 측면도 있다.”고 분석했다. 국가유공자 보상금 인상 수준이 물가인상률보다 낮아 실질적 혜택이 적다는 지적도 있다. 지난해 12월 기준으로 물가상승률이 4.4%인 데 비해 보훈급여금의 인상률은 4%에 불과했다. 보훈처 관계자는 “현재 부족한 보상금 수준을 전국 가계소비지출액과 맞추기 위해서는 매년 물가상승률 이상의 인상이 필요하나 문제는 재원”이라고 지적했다. 부족한 재원 문제는 우리 보훈 당국의 낮은 위상에 기인한다. 국가보훈처의 올해 예산은 3조 9000억원으로 정부 예산의 1.7%에 해당한다. 보훈대상자 88만명을 돌보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반면 미국의 보훈 담당인 ‘제대군인부’의 경우 정부 예산의 3.7%인 1250억 달러(약 145조원)에 28만여명의 직원들이 있다. 조직 규모로만 따지면 연방 정부 부처 중 국방부에 이어 두 번째로 크다. 인구 규모가 우리의 절반인 호주의 제대군인부도 약 14조원(정부 예산의 3.3%)을 운용한다. 국가보훈처의 위상은 정권교체 때마다 달라졌다. 보훈처는 지난 1962년부터 장관급 기관이었으나 1998년 IMF 외환위기를 겪으며 차관급으로 격하됐다. 노무현 정부 때인 2004년 다시 장관급으로 승격되었으나 지난 2008년 이명박 정부 출범과 더불어 차관급으로 내려 왔다. 유 교수는 “국무회의에서 발언권이 없는 차관급에 보훈처장을 맡긴 것 자체가 역대 정부의 보훈에 대한 무관심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미국이나 호주, 이스라엘의 보훈부는 모두 장관급 기관”이라고 강조했다. 하종훈기자 artg@seoul.co.kr
  • 미국에 있던 우리나라 미술품 친정나들이

    미국에 있던 우리나라 미술품 친정나들이

    중국 것으로 알려졌다가 고려 불화로 밝혀진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소장의 ‘아미타불과 지장보살도’를 비롯해 ‘청자 꽃 새 무늬 매병’, ‘청자 앵무 무늬 정병’, ‘달항아리’ 등 미국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한국 전통 미술품들이 친정 나들이를 하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상설전시관 특별전시실에서 열고 있는 ‘미국, 한국미술을 만나다’는 뉴욕 메트로폴리탄박물관 등 9개 기관의 86점 전통미술품을 소개하고 있다. 미국이 한국 미술품을 본격적으로 수집한 것은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맺으면서부터다. 미국인들은 고려청자에 관심이 많았다. 1945년 8·15 광복 이후 미군정과 주한 미군 관계자들이 한국 미술품을 폭넓게 수집했다. 특히 1962년 문화재보호법이 제정되기 전까지는 수집이 쉬웠다고 한다. 전시는 총 3부로 구성됐다. 1부에선 이름 있는 수집가의 작품이 전시된다. 1892년 보스턴미술관이 일본 미술품 수집가인 에드워드 모스(1838~1925)로부터 구입한 청자 꽃 새 무늬 매병, 선교사 언더우드 가문이 브루클린박물관에 기증한 청자 연꽃무늬 주자(조선왕실이 언더우드 가문에 기증한 것으로 추정), 세브란스 병원 설립을 후원했던 루이스 세브란스(1838~1913)의 아들인 존 세브란스(1863~1936)가 기증한 클리블랜드미술관의 청자 앵무 무늬 정병 등이 전시된다. 필라델피아미술관 소장 백자 복숭아 모양 연적과 하버드미술관 핸더슨 컬렉션의 바퀴 달린 잔은 6·25전쟁을 전후로 한국에서 근무했던 사람들의 소장품이다. 샌프란시스코 아시아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백자 달항아리는 한국 미술 수집의 활성화를 가져온 에이버리 브런디지(1887~1975)의 기증품이다. 2부는 미국 주요 박물관의 한국 미술품을 한국실 설치연도에 따라 박물관별로 전시했다. 미국의 박물관들은 19세기 후반부터 한국 미술품을 소장했으나, 한국 미술품이 독립된 공간에 전시되기 시작한 것은 1927년 호놀룰루미술관이 처음이다. 대표 유물로는 청자 연꽃 넝쿨무늬 주전자, 목조동자상, 석가설법도가 있다. 브루클린박물관의 유물로는 스튜어트 큘린이 1913년 수집한 인궤(印?)를 비롯해 1980년대 소장된 ‘한익모 초상’과 감모여재도(感慕如在圖) 등이 있다. 이 밖에 로스앤젤레스 카운티미술관이 2000년과 2005년에 각각 구입한 계산목우도(溪山牧牛圖), 샌프란시스코 아시아미술관 소장품 가운데는 통일신라 절정기 양식의 금동불 입상과 청자 주전자가 전시된다. 19세기 말부터 한국 미술품을 수집한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의 전시품으로는 청자 구름 학 무늬 매병과 소상팔경도의 연사모종(煙寺暮鍾), 동정추월(洞庭秋月)로 알려진 ‘산수도’ 등이 있다. 8월 5일까지.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한·미 통합화력훈련 22일 역대 최대 규모

    우리 군과 미군이 6·25전쟁 62주년을 맞아 역대 최대 규모의 통합화력전투 훈련을 실시한다. 국방부는 22일 경기도 포천 승진훈련장에서 김황식 국무총리 주관으로 우리 군의 확고한 군사대비태세와 전투의지를 확인하는 한·미 연합 통합화력훈련을 실시한다고 18일 밝혔다. 하종훈기자 artg@seoul.co.kr
  • 단색화 대가의 일탈, 色의 향연

    단색화 대가의 일탈, 色의 향연

    한평생 단색화에 힘써온 작가다. 그런데 빨간 구두를 신고 나타났다. 빨간이 아니라 ‘빠~알간’ 정도 된다. 예사롭지 않다 싶더니 최근작이 ‘이후접합’ 시리즈라며 선보이는데 색깔이 화려하다. 가로 4m 88㎝에 이르는 작품도 있다. 솔직히 화려해서 좋다기보다는 77세의 나이로 저 넓은 데다 저 많은 색들을 다 칠하려면 엄청나게 고생했겠다 싶은 생각이 먼저 든다. 그런데 표정은 아주 신났다. 그림을 두고서는 “만선의 기쁨을 표현했다.”한다. 그렇게 신나고 좋은데, 그간 저 많은 색 부리고 싶어 어떻게 참았을까. “아니 뭐, 평생 도 닦은 거죠. 크하하하.” 작품이 만선의 기쁨이라더니, 웃음은 만선 어부의 그것이다. 8월 12일까지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회고전을 여는 하종현 작가. “내 작품에 한국 현대사가 녹아 있다.”는 말도 괜한 뻥은 아니다. 초기엔 앵포르멜 화풍을 따랐다. 6·25전쟁 이후 피폐한 상황에서 어둡고 기괴한 느낌의 그림을 그렸다. 너무 답답했던 나머지 이런 흐름을 깨고자 1967년 화려한 색의 기하추상화를 처음 시도했다. 실컷 첫 테이프를 끊어놓고 남들이 기하추상을 그리기 시작하자 정작 작가는 다시 단색화로 돌아왔다. 1970년대 유신정권 때문이다. 마포를 구해다가 그 뒤에서 물감을 밀어넣는 방식으로 작품을 만들었다. ‘캔버스 위에 그린다’는 미술 상식을 깨버린 것. 이게 접합 시리즈다. 평론은 물질이 어쩌고 그러는데, 밑바닥 사람들의 피눈물 같은 느낌이 든다. 가끔 작품에다 철조망을 등장시키기도 했다. 1973년 작품은 아예 캔버스를 뒤돌려 세운 뒤 철조망으로 감싼 형태로 만들었다. 억압적인 현실에 대한 울분이요 저항이다. 그 뒤 접합시리즈를 변용, 발전시키다 2008년 딱 접었다. 70년대, 80년대, 90년대, 2000년대 작업 4점을 골라 뒤집은 뒤 철조망으로 감싼 작품을 내놓은 게 그 선언이었다. 이제 이런 거 말고 다른 거 해 보겠다는 선언이었다. “내가 못 해 본 게 뭐 있나 봤더니 색이었어요. 이제 한번 마음대로 써보자, 10년 잡고 있습니다. 뭔가 새로운 걸 내놓을게요.” 작가의 여정을 쭉 확인해볼 수 있다. 2000원. (02)2188-6000.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기고] ‘6·25 남침전쟁’으로 재명명해야/김희철 육군 소장·육군본부 정책실장

    [기고] ‘6·25 남침전쟁’으로 재명명해야/김희철 육군 소장·육군본부 정책실장

    북한은 6·25전쟁을 ‘조국해방전쟁’으로 왜곡한다. 종북세력들은 그들의 주장에 부화뇌동하여 6·25전쟁은 통일전쟁이며, 이를 방해한 미국은 민족의 원수라고 규정한다. 누굴 위한 조국해방전쟁이었으며, 누굴 해방했단 말인가? 1950년 6월 25일 남침한 북한은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한 달 만에 남한의 92%를 적화했다. 김일성의 교시에 따라 북한군과 남한 내 좌익세력은 친미·친일·우익세력 등을 무자비하게 숙청했다. 당시 남한에는 세 부류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었다. 12만 2000여명의 무고한 시민이 무자비하게 학살됐다. 이는 난징 대학살, 바르샤바 게토(Warsaw Ghetto)의 유대인 학살과 함께 20세기 세계적 학살사건 중 하나로 기록될 정도다. 혁명의 주력군이라며 치켜세웠던 하층민도 마찬가지였다. 머슴은 악덕 지주의 앞잡이로, 노동자는 자본가의 하수인으로, 하급노동자는 지식계급의 주구(走狗)이자 무산 대중 착취에 앞장선 반동이라는 이유로 죽였다. 공산주의 원로인 박헌영은 미제의 간첩으로, 서울시 인민위원장이자 김일성의 수족이었던 이승엽도 실정과 간첩 혐의로 숙청했다. 조국해방전쟁의 은총을 입은 자는 김일성을 민족의 영도자로, 어버이 수령으로 죽을 때까지 받들어 충성하는 자, 소위 ‘김일성 민족’뿐이었다. 적 치하에 놓인 수도 서울은 필설로 형언키 어려운 고초를 겪었다. 농지 분배의 대가로 시민들의 재산을 몰수했고, 젊은이는 의용군으로 끌고 갔다. 노인과 아녀자들은 전쟁지원사업으로, 저명인사는 체제선전용으로 북으로 끌고 갔다. 이때 피랍자가 12만명이라니 이산가족의 상처는 여기에서부터 비롯됐다. 대한민국 국민이 경상도의 좁은 모퉁이에서 가쁜 숨을 몰아쉴 때 김일성은 “고양이 낯짝만 한 땅에 버티는 남조선 괴뢰도당을 하루빨리 남해에 쓸어 넣으라.”며 동족의 수장(水葬)을 다그쳤다. 당시 나이 어린 소년들까지 의용군으로 징집해 국군과 맞싸우게 했다. 형제가 마주 서서 총을 겨누게 한 것이다. 이런 천인공노할 잔인함이 또 어디 있겠는가? 이것이 인민을 해방하겠다며 저지른 조국해방전쟁의 실체다. 전쟁을 겪은 우리 국민 중에는 북한군을 해방군이나 같은 민족으로 생각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공산당 이념을 맹종해 자유대한민국을 침략한 적구(赤狗)이며, 같은 하늘에 살 수 없는 ‘불구대천의 원수’로 북한군을 규정했다. 전쟁 발발 63년이 흐른 지금 대한민국은 참화를 딛고 일어나 사상 유례 없는 번영을 누리고 있다. 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 세계 10위권의 수출, 정보기술(IT)산업과 철강, 조선, 자동차는 세계 최고수준이며, 의학과 생명공학에서도 세계를 선도하고 있다. 참으로 자랑스럽다. 그러나 6·25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북한은 여전히 대한민국을 미 제국주의로부터 해방해야 할 식민지라고 호도하고, 종북주의자들은 앵무새처럼 이에 동조해 국민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6·25전쟁을 ‘6·25 남침전쟁’으로 명명하고, 북한 공산주의자들과 좌익세력들이 해방이란 이름으로 저지른 죄악상을 똑똑히 알리는 계기가 되길 희망한다.
  • “이등병 편지 후 62년, 제발 유골이라도…”

    “이등병 편지 후 62년, 제발 유골이라도…”

    오빠는 27일이면 휴가를 나올 수 있다고 했다. 스물한 살의 이등병은 1950년 6월 훈련소에서 편지를 보냈다. 휴가 예정일 이틀 전인 6·25전쟁이 터졌다. 그 후 오빠를 만나지 못했다. 전사통지서도 받지 못한 채 오빠는 62년째 ‘행방불명’ 상태로 남아 있다. 동생 김정혜(76·가명)씨는 지금까지 오빠의 ‘휴가’를 기다리고 있다. 외아들을 잃은 가족의 삶은 뿌리째 흔들렸다.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가 됐고, 어머니는 몸져 누웠다. 생계가 막막했던 김씨는 서울 이태원의 한 술집에 팔려갔다. 너무 지우고 싶었던 일이라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하지 못했다. 곧 도망쳐 나왔다. 그러나 혹독한 가난은 평생을 쫓아왔다. 오빠를 앗아갔다는 생각 때문에 북한 사람은 쳐다보지도 않았는데 황해도 사람을 만나 20여년을 함께 살았다. “오빠의 유골만 찾으면 한이 없겠다.”는 김씨는 6일 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을 찾아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국유단)에 유전자를 제공했다. 몇 년 전에도 유전자를 채취했지만 “새것을 내면 아무래도 더 낫겠지.”라는 생각에 한 번 더 유전자를 건넸다. 국유단에는 이날 현충원을 찾은 김에 유전자를 제공하려는 유족들이 줄을 이었다. ‘6·25 무명 전사자’라는 이름으로 가족과 형제를 잃은 이들이다. 아버지의 유골을 찾고 있다는 강종석(69)씨는 “제발 유골이라도 찾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형을 찾기 위해 유전자를 제공한 오귀선(74)씨는 “형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면서 “죽기 전에 혹시나 만날 수 있을까 싶어 방문했다.”고 밝혔다. 하루 동안 국유단에 유전자를 제공한 유족은 652여명에 달했다. 2000년 육군본부의 ‘유해발굴과’로 시작한 국유단은 지난달까지 미수습 전사자 13만여명 중 6500여구의 유해를 발굴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신원이 확인된 전사자는 79명에 불과하다. 신원 확인에 필요한 유족의 유전자 시료가 충분치 않기 때문이다. 또 한 명의 신원을 확인하는 데 10개월가량 걸린다. 국유단 측은 유족들의 유전자 채취가 늘면 신원 확인도 증가할 것으로 기대했다. 지난달까지 유족 1만 9500여명의 유전자를 확보했다. 국유단이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은 전사자들의 매장 위치를 모른다는 것이다. 생존자들의 증언에 의존해야 하지만 이미 고령인 생존자들로부터 얻는 정보라 정확성을 기대하기 어렵다. 경북 칠곡 다부동전투 현장처럼 고속도로와 터널 등으로 훼손된 곳도 많다. 국유단 직원 180여명은 발굴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직원 가운데 발굴과 감식을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인원은 60여명이다. 임나혁(37·여) 감식관은 “앙상한 뼈만 남아 있지만 모두 누군가의 아버지이고 자식”이라면서 “전쟁 1세대들이 살아 계시는 동안에 한 구의 유해라도 더 확인해 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배경헌기자 baenim@seoul.co.kr
  • 한덕수 무역협회장 ‘밴플리트상’

    한덕수 한국무역협회장이 4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에서 열린 코리아소사이어티 연례 만찬에서 한·미 양국의 경제 협력과 우호 증진에 힘쓴 공로로 ‘밴플리트상’을 받았다. 밴플리트상은 6·25전쟁에서 활약했고 미8군 사령관을 지낸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을 기리기 위해 코리아소사이어티가 1992년 제정한 상으로 매년 한·미 관계 발전에 공로가 큰 인물이나 기관에 수여된다. 한 회장은 “지난 3월 15일 발효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기반으로 한국과 미국의 교역과 투자가 더욱 활성화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 “달려가 뽀뽀하고 싶은 충동… 다음부턴 좀더 송금하려 한다오”

    “달려가 뽀뽀하고 싶은 충동… 다음부턴 좀더 송금하려 한다오”

    ‘…가까운 거리에 있다면 달려가 뽀뽀하고 싶은 충동이 나를 엄습하는군요.(…)모두 송금을 시키는 것이 좋겠지만 송금에는 한정이 있으니까요. 그러나 다음부터는 좀더 보내려 한다오.(3만원 정도)’ ‘상관으로부터 신임을 받고 부하들로부터도 존경을 받는 한국의 장교가 되려고 노력하오.’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맹호부대 소속 정영환 대위는 죽음과 죽임의 공간에서는 한 명의 용감한 군인이었지만, 실상 그는 고국에 두고 온 아내를 그리워하는 젊은 지아비였고, 아내의 뱃속에 생겼을지 모를 아이를 그리워하는 예비아빠였고, 빚에 쪼들리는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타국의 전쟁에 뛰어든 생활인이기도 했다. ●전장에서도 살림걱정… 꾼 돈 조목조목 적어 현충일을 하루 앞둔 5일 행정안전부 산하 국가기록원은 호국·보훈 관련 민간기록물 가운데 정영환(72·강원도 홍천군)씨가 전선에서 아내에게 보낸 애틋함이 뚝뚝 묻어나는 편지 세 통을 공개했다. 호칭의 변화가 먼저 눈에 띈다. ‘순영 아가씨’라는, 아마도 연애시절 부르던 호칭을 쓰던 첫 편지와 달리 두 번째 편지는 ‘사랑하는 아내’로 시작했다. 그리고 세 번째 편지에서는 ‘은경 모’로 바뀌었다. 아이가 생겼음을 말해준다. ‘순영 아가씨 보우.’라는 살가운 호칭으로 시작한 첫 편지는 자신의 방을 먼저 소개하면서 ‘모두가 미군물자니까 일유(일류) 고급호텔 부럽지 않다오.(…)환경이 이렇게 좋고 보니 고국에서 고생하는 당신 생각이 더 나는군요.’라고 남편을 전선으로 떠나보낸 뒤 걱정하고 있을 아내를 안심시킨다. 두 번째 편지에서는 ‘방앗간집과 경희네, 석규네’ 등에서 꾼 돈을 조목조목 적고 베트남 현지에서 보낼 수 있는 돈의 규모를 적은 뒤 ‘더 빚지지 않게끔 차근차근히 갚도록 해봅시다.’라고 적었다. 편지 말미에는 ‘애기가 배에 없는지 궁금. 있었으면 바라는 마음’이라고 조그맣게 썼다. 그 다음 편지는 시간이 한참 지난 뒤다. 1972년 마지막날 부친 편지는 ‘은경 모’로 시작한다. 아이를 낳아 ‘은경이’라는 이름을 지었음을 알게 한다. ●6·25전쟁때 장인·장모에게 보낸 편지도 국가기록원은 정영환 대위의 편지 외에도 ‘유학성’이라는 군인이 6·25전쟁 당시 장인, 장모에게 보낸 편지도 함께 공개했다. 편지에는 빙부·빙모를 방언인 병부·병모로 표현했다. 유학성은 눈이 내리는 동지(冬至)에 전선에서 장인·장모를 비롯한 처가 식구의 안부를 물으며 “병모님의 염려 덕택으로 잘 지내고 있으며 맡은 바 군 복무에 노력하고 있으니 저에 대해서는 조금도 염려하지 마시라.”고 당부했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48만명 vs 5만 2000기

    48만명 vs 5만 2000기

    국립묘지에 안장될 수 있는 생존 국가 유공자가 48만명에 달하지만 앞으로 전국 국립묘지에 안장할 수 있는 인원은 5만 2000여기에 불과해 향후 5년 내 포화상태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따라 국립묘지 내 안장 공간을 대폭 넓히거나 국립묘지법을 개정해 현재 규정이 없는 수목장 등 자연장을 국립묘지에서도 가능하게 하는 등의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5일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국립묘지 안장 자격 요건을 갖춘 국가유공자 등은 올해 1월 기준으로 48만 7613명에 달한다. 이 중 75세 이상의 고령자가 23만 8181명이고 6·25전쟁 참전자의 연령은 평균 81세로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보훈처는 오는 2030년까지 이들을 포함한 안장 수요가 36만여명에 달할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 대전현충원과 서울현충원을 비롯한 전국의 국립묘지 8곳에는 호국영령 17만 8000여명이 안장돼 있다. 보훈처가 공개한 국립묘지별 잔여 기수는 올해 5월 기준으로 대전현충원 7367기, 영천호국원 2만 4662기, 임실호국원 8236기, 이천호국원 1만 2626기다. 서울 동작동에 있는 서울현충원은 지난 1985년부터 일반 묘역의 안장 여력이 없으며 납골 시설만 신청을 받고 있다. 국가보훈처는 지난해부터 기존 국립묘지의 공간을 활용해 안장시설 확충을 추진하고 있다. 대전현충원 3만기를 포함해 2019년까지 모두 8만 3628기의 묘역을 추가로 확보한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턱없이 높아지는 매장 수요를 예상하면 2017년으로 예상된 포화 시기를 6~7년 늦추는 효과만 있을 뿐이다. 보훈처 관계자는 “충북 보은과 제주 등지에 호국원을 추가로 조성해 오는 2015년 개원을 추진하고 있다.”면서 “국립묘지가 혐오 시설로 여겨지는 현실에서 주민 설득 등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수목장 형태의 묘역도 고려하고 있으나 이는 18대 국회에서 폐기된 국립묘지법 개정안이 통과되어야 한다.”면서 “매장을 선호하는 우리 국민의 납골당이나 자연장에 대한 인식 전환도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종훈기자 artg@seoul.co.kr
  • [호국보훈의 달 2제] “남북화해 협력 위해 헌신” “북한 학생들 가르치겠소”

    [호국보훈의 달 2제] “남북화해 협력 위해 헌신” “북한 학생들 가르치겠소”

    ‘죽기 전에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할까.’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마포구는 지난 2일 구청 광장에서 나라 사랑 실천의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시민들에게 이와 같은 질문을 던지는 ‘I♥코리아’ 행사를 개최했다고 4일 밝혔다. 행사에 참여한 청소년, 자원봉사자 등 주민 1000여명은 행사장에 마련된 ‘나랑사랑 버킷리스트’ 대형 칠판에 죽기 전에 나라를 위해 하고 싶은 일들을 써 내려갔다. 버킷리스트는 후회 없는 삶을 위해 죽기 전에 꼭 할 일을 뽑은 목록을 뜻한다. 이번 행사는 개인이 아닌 나라를 위한 버킷리스트를 만들어 국가의 의미를 새겨 보자는 취지로 마련됐다. 여기에 참석한 박홍섭 구청장은 “우리나라를 위해 죽기 전에 남북 화해 협력을 위한 일을 하고 싶다.”고 리스트에 남겼다. 박수용 서강대 정보통신대학원장은 “북한 학생을 가르치는 일을 하고 싶다.”는 희망을 전했다. 이 외에도 행사장에서는 무궁화와 태극기 만들기 체험, 6·25전쟁 동맹국이 그려진 대형 세계지도 전시 프로그램 등이 진행됐다. 상덕규 자치행정과장은 “누구나 쉽게 참여할 수 있는 소통형 봉사 체험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나라 사랑 의식이 생활 속에 자리 잡게 하고자 행사를 기획했다.”고 말했다. 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 [대선주자 인터뷰] (4) 새누리당 정몽준·김영명 부부

    [대선주자 인터뷰] (4) 새누리당 정몽준·김영명 부부

    ‘다 가진 분들이 왜 대통령까지 하려 하시나.’ 일부러 부인에게 물은 것인데, “많은 분들이 실제로 그렇게 생각한다.”는 반응에 우선 마음의 부담을 덜었다. 정몽준 의원의 부인 김영명씨는 요즘 남편의 언행을 탐문하는 일에 열심이라고 한다. 기자들에게 남편이 고쳐야 할 점 등을 캐묻는 식이다. 본격적인 ‘정치 내조’를 시작했다는 얘기다. 늘 그렇듯, 정몽준 의원과의 인터뷰는 진행이 쉽지 않았다. 학문적이고, 근원적인 답변을 할 때가 많다. 인터뷰는 지난 3일 서울 신문로 아산정책연구원에서 이뤄졌다. →(부인에게) 예전과는 달리 요즘 부쩍 정치에 신경을 쓴다던데. -(김영명) 관심 있는 게 참 많은데 정치는 아니었다. 그러나 남편이 대선에 출마했으니 열심히 해야지. 그러니까 여성지 표지모델까지 나오지 않았겠나(웃음). →2002년에는 안 그랬나. -(정몽준) 그때는 월드컵을 이용한 출마는 하지 않겠다고 여러번 얘기했었다. 그런데 월드컵이 끝나고 9월 하순쯤 여론조사에서 1등이 나왔다. 현역 4선 국회의원으로서, 국민들이 출마하라고 하는데 내가 준비가 안 됐다고 해서 안 하는 것도 도리가 아닌 것 같아 출마했다. 나도 준비가 없었지만 가족들도 마음의 준비가 전혀 안 됐다. →이번에는 준비가 됐나. -(김) 항상 이런 일은 준비를 할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다. 하지만 그때보다는 좀 많이 생각했으니까. →말리지 않았나. -(김) 말릴 수도 없었고, 말릴 수 있는 단계도 지났다(웃음). 말릴 수 있었으면 초선 때부터 말렸어야지, 정치 입문 안 하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고 있나. -(정) 지난 총선 때 공천에 이런저런 말들이 많아지면서 한때 불출마도 생각했었다. 그랬더니 집사람이 그건 정공법이 아니라고 말려서 자제했었다. 요즘에는 메모지를 10장씩 써서 준다(웃음). →남편이 왜 대통령이 돼야 한다고 생각하나. -(김) 다방면에 축적된 경험이 많다. 7선 의원으로 24년 동안 정치를 했다. 큰 기업을 경영했고, 축구로 국제 무대도 누볐다. 무엇보다 정직하다. 거짓말을 제일 싫어한다. 이런 장점들이 잘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 →다 가진 사람들이 왜 대통령까지 하려 하나. -(김) 많은 분들이 실제로 그렇게 생각한다. 다만, 그건 정몽준이라는 사람을 잘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동작을 지역구에 처음 왔을 때에는 부자 국회의원이 왔다고만 생각했다. 만나고 대화하면서 주민들이 정몽준을 새로 알게 됐다. 대단히 서민적이다. 아버지 정주영 회장으로부터 근면을 배웠고, 어머니로부터 검소함을 배웠다. 그게 몸에 밴 사람이다. 이야기를 들어주고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한다는 인식이 생겼다. 매스컴에서 접한 정몽준과는 달랐다. 지역구에서 지어준 별명이 ‘정을 몽땅 준 남자’다(웃음). →차기 대통령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은 뭔가. -(정) ‘통합 능력’이라 생각한다. 국민이 지역적으로, 세대별로 갈라져 있는데 정치가 갈라진 국민을 더 갈라놓는 것 같다. 정치가 순기능을 하지 못하고 완전히 역기능을 한다. 경제 발전도 통일 준비에도 국민 화합 없으면 의미가 없다. 집안 가족들이 매일 싸우는데 무슨 의미가 있겠나. 국민소득 4만 달러 넘는 나라에서도 경제나 복지가 선거 때마다 이슈이지만, 그것은 하나의 과제라 생각한다. →통합에 필요한 덕목은 무엇인가. -(정) 희생이다. 권력, 부를 가진 사람들이 자신을 위해 일하지 말고 사회통합을 위해 일하면 된다. →먼저 세(勢)도 얻어야 하지 않을까. -(정) 2002년에 여론조사 1등할 때에 세력이 있었던 건 아니고 지금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도 그렇지 않나. 물론 세 없이 그런 현상이 지속되진 않는다. 다만 계파가 없기 때문에 정치적인 빚이 없다. 지역주민들에게만 책임감과 빚이 있을 뿐이다. 이번에 측근이 다 낙선했다고도 하는데, 측근은 없어도 동지는 많이 있다. →어느 대선 예비주자의 부인이 남편의 ‘대통령병’을 걱정했다. 어떤가. -(김) 남편은 대통령병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목적에 모든 것들이 종속됐다는 얘기인데, 그렇지 않다. -(정) 어떤 사람이 대통령이 돼야 할까 생각해 본다. 하기 싫다는 사람이 하면 제일 잘할 수도 있을 거다. 사실 하고 싶다는 사람들은 나라에 부담 주고 해를 끼칠 가능성도 많다. →이른바 권력의지가 약한 것 아닌가. 승부사적 기질도 있어야 하지 않나. -(정) 권력의지와 승부사 기질이 역대 정치인들을 단련시켰을 텐데 그게 우리 정치현실에서 무슨 기능을 했는지 의문이다. 리더십의 새로운 기준도 찾아봐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 →예를 들면 어떤 기준인가. -‘성찰’이랄 수 있다. 정치인은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내가 틀릴 수 있다는 생각도 가져야 한다. 그래야 상대편 얘기를 귀담아듣고 소통할 수 있다. 한두 사람 얘기로 결론 내고 끝내면 답답하다. 정치는 시작부터 정답이 없는 사회과학의 영역이다. 사회과학의 영역에서 정치인의 카리스마는 다른 의미로는 독선일 수 있다. →정 의원의 장단점은 무엇인가. -(김) 말을 못한다고 평판이 나있을 것이다. 대중연설에 약하다. 소그룹에서는 잘하는데. -(정) 스스로 생각하는 장점은 이렇다. 지금까지 경제학, 경영학, 국제정치 등을 공부하면서 어떤 일이 이런 식으로 진행되면 문제가 될 것이라고 예견한 일들이 결국 다 문제가 됐다. 1997년 금융위기(IMF 사태) 때도 그랬다. 정치인에게 필요한 건 실무적 능력이 아니다. 책임감으로 출마했다. 정치·경제·외교의 흐름으로 볼 때 이때 나서지 않으면 나라도, 나도 불행해질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지금 우리나라에 필요한 건 좋은 투자다. 나의 경험과 능력을 투자한다는 생각으로 출마했다. →‘체휼’(體恤)하는 대통령이 요구된다. 서민들의 어려움을 알까 하는 의문이 있다. -(김) 솔직히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근본적으로 누군가의 어려움을 진정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한계가 있지 않나. 다만 우리도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건 아니다. 6·25전쟁 때 나서 1960년대 학교를 다녔다. 그때는 우리나라가 부유하지도 않았고 큰 부자도 없이 다 어렵게 살았을 때다. 나도 초등학교 3학년 때 미국에 가기 전 명륜동 살 때 미군부대 분유 같은 거 얻어먹고 그랬다. 그것도 특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만큼 우리 경제가 다 어려웠다. 지금의 재벌 2, 3세의 이미지와는 동떨어진 상황이었다는 것을 알아줬으면 한다. -(정) 그건 우리가 계속, 일생동안 생각해야 할 숙제다. 대통령이 되려고 뭘 하는 것보다 앞서 있는 일이다. 다만 ‘서민이 아니라 서민의 어려움을 모른다.’는 주장은 모순이 있다. 신분·계층·지위에 모든 것을 고착시킨 얘기 아닌가. 예컨대 탈모환자에게 필요한 게 발모제인데 그걸 꼭 탈모환자만 개발해야 한다고 하면 사회가 얼마나 답답한가. 모든 사람이 다 발모제를 개발할 수 있는 사회가 좋은 사회 아닌가. →어떤 방식으로 노력할 텐가. -(김) 동작을구 선거를 하면서 악수를 해 보니 손가락 없는 분들이 그렇게 많았다. 너무 마음이 아팠다. 그래도 남의 고통을 어떻게 100% 이해할 수 있겠나 생각하면서 노력할 뿐이다. 진정성이 중요할 것이다. 이번에 남편과 민생탐방을 하면서 많은 것을 보고 느꼈다. 어떤 분들이 어떤 처지에 계신지를 더 알고 배우고 공부하는 자세로 다녔다. 더 듣는 마음이 필요하고 중요하다는 걸 알았다. 어떻게 그분들에게 도움될 수 있는지를 연구하고 있다. -(정) 이번 대선에 출마하면서 “위대한 국민과 함께 새로운 희망을 만들겠다.”고 했다. 예전에는 그런 표현을 쓰지 않았는데 실감하게 됐다. 지하철역에서 출퇴근 인사를 하면서 거대한 인파를 통해 힘을 얻었다. 파도처럼 오가는 얼굴 하나하나와 대화하는 느낌으로 교감을 한 것 같다. 열심히 일하러 가는 표정에서 우리나라를 지탱해 주고 이끌어가는 사람들의 힘을 느꼈다. →정치인으로서 어느 시점에 와있다고 생각하나. -(정) 번데기 없이 나비가 되지 못하듯, 처음부터 훌륭한 정치인이 태어나지는 않는 것 같다. 미국에서도 정치꾼(politician)을 거쳐 정치인(statesman)이 된다고 한다. 국민께서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 주셨으면 한다. ‘서울 재선’의 마음으로 하고 있다. 이지운·허백윤기자 jj@seoul.co.kr
  • 故권정생 작가의 따스한 이야기들

    동화작가 권정생(1937~2007)의 작고 5주기를 맞아 ‘빌뱅이 언덕’(창비 펴냄)이 나왔다. 경북 안동에 있는 빌뱅이 언덕은 고인이 1983년 여름 ‘몽실언니’ 계약금으로 지은 오두막집이 있는 곳으로, 2007년까지 이곳에 살았다. 산문 43편과 시 7편, 동화 1편이 있다. 1부는 자전적 이야기, 2부와 3부는 각각 1990~2000년대, 1970~1980년대에 발표한 글들이다. 권정생어린이문화재단과 출판사는 ‘오물덩이처럼 딩굴면서’(1986년 출판 후 절판)에 실린 내용 중 일부를 찾아 넣기도 했다. 책으로 위로받은 6·25전쟁 시절을 떠올리고 친절을 베푼 사람들은 따뜻한 동화 주인공으로 되살려냈다. ‘김 목사님께’로 시작해 ‘다시 김 목사님께 2’로 이어지는 산문에서는 더 많이 차지하고 더 많이 욕심 부리고 더 많이 소비하는 우리 사회에 일침을 가한다. 문학평론가 염무웅은 발문에 “가난과 질병을 벗어난 적이 없으되 자기 몸을 돌보는 일보다 자연을 사랑하고 약자를 대변하는 일에 70년 생애를 바쳤던 그의 삶이야말로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위대한 유산”이라고 했다. 신간은 그 ‘유산’의 바탕을 짐작하게 한다. 최여경기자 kid@seoul.co.kr
  • 그럼에도, 인생은 아름답다

    그럼에도, 인생은 아름답다

    심술 난다. 작품을 보고 있자니 작가가 걸어, 아니 ‘통통’ 튀어 온다. 하이톤 목소리로 묻는다. “음…자기는 어떤 그림이 마음에 들어요?” 미국에서 40년 가까이 살아온 작가다운 발음과 말투다. 태도가 구김살없는 데다 작품도 따스하다. 색채는 물론이거니와 형상도 어디 하나 모난 곳 없이 전반적으로 둥글둥글하다. 심지어 내용까지 그렇다. ‘오버플로잉’(Overflowing)에서는 작가가 그림을 그리는 곳에서 물이 흘러나오면 남편이 만들고 있는 실제 호수에 그 물이 흘러든다. ‘포리스트 신’(Forest Scene) 연작은 슈만이 작곡한 ‘숲 속의 정경’을 기반으로 그렸다. 그 가운데 ‘예언하는 새’에는 작가가 직접 등장하는데 새가 작가에게 무언가를 말해주고 가리키는 듯한 분위기다. 이 새, 뭔가 새답지 않고 사람같다 싶더니 다른 작품에서는 남편이 아예 새가 됐다.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작가 뒤편에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 몸에는 깃털들이 잔뜩 돋아나 있다. “내 뮤즈, 남편”이라 했다. 다른 작품에서는 바깥 풍경은 차디찬 눈이 가득 쌓인 겨울인데 거실에서는 따스한 난로 곁에 작가와 남편이 다정하게 붙어 있다. 하나같이, 너무나도, 절대적으로 평화롭고 고즈넉하고 충만한 분위기다. 심술 난 이유다. 좀 무리이긴 하지만 대놓고 물었다. 인생에 힘든 일이 없었냐고. 김원숙(59) 작가는 “거지의 시선”이란 답을 내놨다. “제 남편이 6·25전쟁 고아예요. 말 그대로 고아이자 거지로 살다가 1957년 미국에 입양됐죠. 지금이야 특허만 37개를 가진 의료기구 사업가가 됐지만 전쟁고아라서 언제 어떻게 태어났는지 전혀 알 수 없어요. 정확한 생년월일도 몰라요. 그런데도 남편만큼 긍정적인 사람을 못 봤어요. 세상을 거지 아이의 눈으로 보는 거죠. 아무리 사소한 거라도 그 사람 입장에서는 모든 게 횡재고 대박이에요.” 인생의 어두운 경험에 대해 풀어놓고 ‘너도 슬프지?’라고 묻는 작업은 하고 싶지 않았다는 얘기다. 한마디 덧붙인다. “그리고 제가 워낙 맛난 거 먹고 멋 부리고 그런 거 좋아하는 낙천적인 성격이에요. 저도 이 나이껏 살았는데 이런저런 어려움, 어두움 왜 없었겠어요. 하지만 그런 건 지나 놓고 보면 다 별 볼 일 없으니 재미나게 살자는 게 제 주의거든요.” 3대 독자 아버지 밑에서 둘째 딸로 태어나 ‘후남’(後男)이로 살아온 얘기, “어느 것 하나 아버지 뜻대로 산 게 없다.”는 이런저런 얘기들이 그랬다. 그래서 작가는 작품이 하나의 창, 라디오 정도였으면 좋겠다는 말도 했다. 심오하고 대단한 얘기보다 딱 걸어 놨을 때, 우연히 스쳐가다 한번 봤을 때 행복을 줄 수 있으면 된다는 얘기다. “라디오를 틀 때 음악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지 별다른 생각이 있는 건 아니잖아요. 마찬가지로 창도 늘 의식하는 게 아니잖아요. 그냥 있다가 한번 슬쩍 내다보는 것, 그 정도가 그림인 것 같아요.” 작가는 김경래 전 경향신문 편집국장의 딸이다. 아버지는 만우절을 그 어느 국경일보다 엄격히 지킨다는데 여기에 얽힌 에피소드가 많다. 그걸 모아 ‘아버지의 만우절’이란 책을 내자는 제안을 받았다 했더니 “나 죽고 나면 더 많이 공갈 쳐라.”고 대답했단다. 오는 12일부터 7월 8일까지 서울 종로구 사간동 갤러리현대 본관과 두가헌갤러리. (02)2287-3591.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비운의 화가” 이인성 100주년 기념전

    “비운의 화가” 이인성 100주년 기념전

    참 어이없다. 그러니까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대구에서 술에 취해 “감히 나를 못 알아보느냐.”고 호통쳤다는 이유로 한 경찰의 총에 맞아 죽었다. 그때 나이 38세. 이인성은 그렇게 잊혀졌다. 비운의 화가 이인성 탄생 100주년을 맞아 서울 정동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미술관에서는 8월 26일까지 기념전이 열린다. 이인성은 그림 재주는 있었으나 어려운 가정 형편 탓에 알음알음으로 그림을 배웠다. 미술계 쪽으로 손 닿을 곳이 없다 보니 그가 목맨 곳은 공식 전람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수차례 상을 받았고 당대 최고 권위를 자랑하던 제국미술전람회에도 나가 상을 받았다. 한·일 양국에서 ‘천재화가’ ‘조선의 보물’ ‘화단의 귀재’로 높이 평가받았다. 일본에서 따로 미술 교육을 받을 기회를 얻는가 하면 귀국해서는 정식 미술 연구소를 열 정도였다. 그러나 이게 나중에 족쇄가 됐다. 일제에 협력한 게 아니냐는 것이다. 그럼에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이인성 재조명에 나선 것은 그의 작품 때문이다. 박수진 학예연구사는 “서양화가 뿌리내리지 못했던 1930~40년대에 여러 서양 화풍을 흡수해 서구도 아니고 일본도 아닌 우리만의 서양 화풍을 만들어 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고 말했다. 드로잉과 회화 75점에 각종 자료 200여점이 전시된다. (02)2188-6000.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의정부 ‘미군기지 남북 관통로’ 새달 뚫린다

    경기 의정부시는 도심 정중앙에 위치해 시가지 전체 교통흐름을 왜곡시켜온 가능동 미군기지 캠프 ‘라과디아’를 동서남북으로 관통하는 도로가 다음 달 4일 부분 개통한다고 30일 밝혔다. 남북축 도로 가운데 개통 구간은 착공 1년째인 신흥로(의정부의료원~가능로삼거리) 일부다. 캠프 내 흥선로에서 가능로까지 600m 길이다. 남쪽 구간은 3년여에 걸친 보상 끝에 폭 30m로 개설됐으며, 북쪽 구간인 가능로는 예산부족 탓에 폭 10m로 우선 개통하고 내년부터 보상에 들어가 2년 안에 폭 30m로 완전개통할 예정이다. 동서축으로 관통하는 도로(의정부경찰서~흥선로터리)는 지난해 10월 경기도내 미군 반환공여지 가운데 최초로 국비를 지원받아 먼저 개통했다. 캠프 라과디아는 6·25전쟁 직후인 1953년 미1군단 사령부의 지휘·통신을 목적으로 직속 항공대가 들어선 이후 60년간 주민 생활에 큰 불편을 끼쳤다. 구도심과 신시가지를 가로막아 도심 발전에도 가장 큰 걸림돌로 작용했다. 이번 신흥로 개통으로 가능동 구시가지에서 의정부동 신시가지까지 이동시간이 20분에서 5분으로 단축되는 등 의정부시내 전체 교통난 해소에 숨통을 확 터줄 전망이다. 한상봉기자 hsb@seoul.co.kr
  • 아라가야의 심장 함안에서 만난 낙화놀이

    아라가야의 심장 함안에서 만난 낙화놀이

    교교한 달빛이 흐르는 연못 위로 불꽃비가 내립니다. 하늘에서 요란하게 터지는 불꽃놀이와는 양태가 사뭇 다릅니다. 아래로 아래로 잔잔하게 흘러내립니다. 한 가닥의 불꽃은 수천 개의 흐름으로 바뀌고 곧 불꽃비가 되어 연못을 적십니다. 경남 함안 무진정에서 열린 ‘함안 낙화놀이’ 풍경입니다. 꼭 낙화놀이가 아니더라도 함안을 찾아야 할 이유는 많습니다. 너른 악양뜰과 국민 가요 ‘처녀 뱃사공’을 품은 악양루, 주인장의 마음 씀씀이만큼이나 넉넉한 반구정, 칼날처럼 올곧은 선비들이 살던 고려동 등 다 돌아보려면 하루해가 짧지요. 함안은 겉보기와 다른 도시입니다. 눈에 띄지 않는다고 없는 것은 아니지요. 빼어난 풍경들은 외려 도시의 이면에 숨죽이고 있었습니다. 오래전 함안을 중심으로 번성했던 아라가야가 신라의 그늘에 가려졌듯 말입니다. 글 사진 함안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함안은 사실 여행 목적지로 그리 많이 알려지진 않았다. 경남에서도 오지에 속한다고는 하나 오지 특유의 적요함보다는 인근 창원의 위성도시 같은 들뜬 분위기가 곳곳에서 감지된다. 그런데 꼭꼭 숨어있는 풍경들을 찾다 보면 느낌은 전혀 달라진다. 풍경 하나하나가 여느 곳에서 쉬 보기 어려울 만큼 빼어나다. 무진정은 그 가운데 첫손으로 꼽히는 경승지다. 조선 중종 때의 문신 조삼의 후손들이 그의 호를 따서 지은 정자다. 세월이 더께로 내려앉은 정자의 풍모도 좋지만 정작 객들의 시선을 끄는 건 무진정 앞에 펼쳐진 연못이다. 둥근 석축이 감싼 연못 주변에는 왕버드나무, 느티나무 등이 아름드리로 자라났다. 연못 가운데 영송루를 중심으로는 구름다리가 놓여 운치를 더한다. # 물오른 참나무 7일간 태워 숯 만들고 광목 얹어 심지 삼아 무진정에선 해마다 부처님 오신 날을 전후해 낙화놀이가 열린다. 올해 21회째다. 경북 안동, 전북 무주 등에서도 비슷한 놀이가 열리는데 문화재(시도무형문화재 제33호)로 지정된 건 함안 낙화놀이가 유일하다. 낙화놀이는 액운을 태워 없애고 한 해의 풍농을 기원하는 뜻을 담고 있다. 그러다 보니 행사 시작 전부터 여간 정성을 쏟아야 하지 않는다. 핵심은 숯가루다. 함안군청 홍보담당 조정래씨에 따르면 음력 3월 중순께 물오른 참나무를 통째 자른 뒤 이를 넣고 7일 동안 흙구덩이에서 불을 때 숯으로 만든다. 숯이 만들어지면 들깨처럼 곱게 갈아 한지 위에 놓고 심지로 쓸 광목을 얹은 뒤 둘둘 만다. 이렇게 만든 낙화 2개를 두께 1~1.5㎝, 길이 15~20㎝로 꼰다. 광목에 녹아 있는 풀을 빼는 것도 중요한 과정이다. 풀을 녹이기 위해 양잿물을 넣는데 양잿물의 양을 조절하는 게 핵심 기술이다. 너무 많으면 심지가 너덜거리고 적으면 제대로 불이 붙지 않는다. 이렇게 만든 타래(전해 오는 정확한 이름은 없다) 3000개를 무진정 앞 연못에 설치한 줄에 걸고 불을 붙이면 숯가루가 거꾸로 타오르면서 바람에 날리는 장관을 연출한다. 2시간여 진행되는 낙화는 잔잔하게, 때로는 우수수 떨어지기도 한다. 일년에 단 하루 펼쳐지는 이 장면을 보기 위해 해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무진정 일대를 가득 메운다. 뭇사람들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최근 낙화놀이 횟수를 늘이는 방안도 추진되고 있다. # 고운 꽃비처럼 날리는 숯가루, 일년 액운 다 가져가렴 함안의 경승지들은 대개 낙동강과 남강 등 물길 주변에 몰려 있다. 그 가운데 악양루는 가장 앞줄에 세울 만하다. 진주를 거쳐 온 남강이 유장하게 흘러가는 법수면 절벽 위에 우뚝 서 있다. 악양루에 서면 악양뜨락이 한눈에 들어온다. 누런 황톳길이 ‘S라인’을 그리며 휘돌아 가고 물새 오가는 남강변엔 갯버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뉘라서 이 광경에 미혹되지 않을 수 있을까. ‘낙동강 강바람이 치마폭을 적시면’으로 시작되는 노래 ‘처녀뱃사공’도 바로 이 풍경 속에서 만들어졌다. 조정래씨는 “6·25전쟁 당시 유랑극단 단장으로 함안에서 피란 생활을 하던 윤부길(가수 윤항기, 윤복희의 선친)씨가 대산장에 가기 위해 악양나루터에서 나룻배에 올랐는데, 마침 노를 젓던 처녀가 군에 입대한 뒤 소식이 끊긴 오빠(박기준, 6·25전쟁 때 전사)의 사연을 들려줬고 훗날 이 내용을 토대로 가사를 지었다.”고 설명했다. 가사에 남강이 아닌 낙동강이 등장하게 된 건 가사의 운율을 맞추기 위해서였다는 것. 악양뜰 너머 남강변엔 악양둑방이 끝 간 데 없이 이어져 있다. 둑 양편으로는 꽃양귀비 등 꽃들이 식재돼 있다. ‘에코싱싱길’이라 불리는 꽃길의 길이는 2.5㎞에 달한다. 남강에 악양루가 있다면 낙동강변엔 반구정이 있다.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짙은 그늘을 선물하는 곳이다. 반구정에 들면 먼저 인스턴트 커피를 한 잔 타 마실 일이다. 반구정 쪽문을 열면 커피와 종이컵, 정수기 등이 준비돼 있다. 객들에게 늘 공짜 커피를 타 주시던 할머니는 올봄 타계했지만 손님을 접대하는 할머니의 뜻은 여태 이어지고 있다. 반려자를 먼저 보낸 조승도(88) 할아버지의 손님맞이 방식도 남다르다. 객들이 찾아오면 위아래를 가리지 않고 음료수를 준비하는데 느티나무 아래 정자에서 주객이 맞절로 예를 표시한 뒤에야 대화를 나눈다. 느티나무 아래 텃밭엔 ‘선화지허’(仙化之墟)라고 쓰인 비가 있다. 할머니가 숨을 거둔 장소로, 한학자 출신의 조 할아버지가 직접 작명했다. 조 할아버지에 따르면 밭일하던 할머니를 놀래주기 위해 뒤에서 몰래 끌어안았는데 호미를 손에 쥔 채 그대로 할아버지의 품으로 쓰러졌다고 한다. 할아버지의 외모만큼이나 로맨틱하고 믿기지 않을 만큼 애틋한 이야기다. # 노예 같은 벼슬길 마다하고 자연 벗 삼은 선비가 살아난 듯 함안 안쪽에서 손꼽히는 관광지는 칠원면 무기리의 무기연당이다. 조선 후기 학자 주재성의 생가이자 주씨 집안의 종가에 딸린 전통 정원이다. 정원 곳곳마다 이름을 숨기고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고자 했던 선비의 철학이 그대로 담겨 있다. 무기연당의 중심 건물은 하환정(何換亭)이다. ‘어찌 바꾸리오.’라는 뜻의 건물이다. 주재성의 학식이 높아 조정에서 세 번이나 관직을 권했지만 그는 매번 “자연과 벗 삼은 삶을 어찌 노예 같은 벼슬길과 바꾸리오.”라며 고사한 것으로 전해진다. 하환정 앞에는 사각형의 연못이 조성돼 있다. 물 가운데엔 원형의 석가산(石假山)도 세웠다. 땅은 네모요, 하늘은 둥글다는 우주관, 천원지방(天圓地方)을 표현한 것이다. 함안 선비 특유의 날 선 기개와 마주하려면 군북면 조려의 생가 일대와 산인면의 고려동(高麗洞) 유적지를 찾아야 한다. 군북면 원북리 일대의 채미정과 고바위 등에서는 ‘백세청풍’(百世淸風)이란 글귀와 자주 만난다. 한 세대를 30년으로 본다면 백세란 말 그대로 100세대, 즉 3000년을 뜻한다. 이는 곧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을 푸른 바람처럼 허허롭게, 또 절개를 지키며 살겠다는 의지의 표현일 터다. 고려동은 고려 말 성균관 진사였던 이오가 칩거했던 집이다. 전정렬 문화관광해설사는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들어서자 충절을 지키려는 이오가 산인면에 내려와 담을 높이 치고 평생을 담 안에서 살았다.”며 “후손들 또한 19대 600년 가까이 이곳을 떠나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고 설명했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나들이라면 함안박물관, 아라고분군 등도 함께 둘러보는 게 좋겠다. 함안은 아라가야의 수도였다. 559년께 신라에 복속되기 전까지 500년 넘게 지속됐던 국가다. 아라가야의 후예라는 자존심은 지금도 함안 곳곳에서 쉽게 마주할 수 있다. ◆여행수첩(지역번호 055) 가는 길 대전통영 고속도로 진주분기점에서 부산 방향 남해고속도로로 바꿔 탄 뒤 함안나들목으로 나간다. 고려동유적지, 무기연당, 악양루 등이 곳곳에 흩어져 있어 동선을 잘 짜야 한다. 잘 곳 읍내 장미모텔(585-8823), 황실모텔(585-1515) 등이 비교적 깔끔하다. 맛집 ‘처녀뱃사공’의 조카가 운영하는 악양루가든(584-3479)은 메기매운탕을 잘한다. 산초 등이 양념처럼 들어가는데 원치 않을 경우 미리 말해야 한다. 3대를 이어져 오는 어탕도 맛있다. 악양루 초입에 있다. 함안면 북촌리에는 한우 국밥촌이 형성돼 있다.
  • ‘역사의 흔적’ 해방촌, 예술의 향기 품는다

    용산구 용산2가동 일대의 ‘해방촌’은 일제강점기에 이은 6·25전쟁 이후 형성된 실향민들의 집단 거주지다. 이후 이곳으로 미군들이 저렴한 주택을 찾아 하나둘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현재 1000여명을 웃도는 외국인들이 살고 있는 서울의 대표 외국인 거주지로 바뀌었다. 하지만 가파른 데다 다닥다닥 붙은 주택, 좁은 도로, 위험한 계단 탓에 거주 환경은 상당히 열악하다. 용산구는 한국 근현대사의 아픈 기억이 남아 있는 이 해방촌 일대를 역사적 의미와 공공미술이 조화를 이룬 예술마을로 새롭게 조성한다고 29일 밝혔다. 구는 오는 12월까지 반년간 국비를 포함 1억 5000만원 예산을 투입해 해방촌 일대를 쾌적하고 아름다운 거리로 조성할 방침이다. 최근 해방촌은 이태원에서 옮겨온 작은 카페나 식당 등이 속속 문을 열면서 인근의 새로운 명소로 발돋움하고 있다. 또 역사적 흔적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도 끊이지 않고 있어 향후 인근 이태원과 연계한 관광자원으로 개발이 가능할 것으로 구는 보고 있다. 이에 구는 해방촌 곳곳에 산재한 가파른 외부 계단를 손본 뒤 그래픽 작업을 가미해 전체 거리를 밝은 분위기로 조성할 계획이다. 또 주민설명회, 주민이 참여하는 디자인 벽화 작업 등 공공예술 프로젝트를 실시해 거주 외국인들의 지역사회 참여 분위기를 조성한다. 아울러 해방촌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스토리텔링을 담은 벽화 등을 다양한 재료와 장식물을 활용해 제작하고, 디자인펜스, 가로정원도 설치한다. 특히 해방촌 예술마을 조성 사업은 민관 합동으로 진행된다. 구는 이달 말쯤 사업공고를 내고 제안서를 공개 입찰한다. 다음달쯤 사업자가 선정되면 7~8월 디자인 설계를 거쳐, 8월쯤 사업을 본격화할 예정이다. 함동성 도시디자인과장은 “이번 사업을 통해 해방촌의 노후·낙후된 마을 이미지를 개선하고 아름다운 거리 환경 조성에 크게 기여할 것”이라며 “이태원 상권과 연계된 새로운 관광명소화로 지역경제 발전에도 도움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 6·25전사자 유해발굴

    6·25전사자 유해발굴

    6·25전쟁 참전 및 지원국 출신 유학생들이 29일 강원 양구군 수리봉 일대 6·25 전사자 유해발굴 현장에서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관계자로부터 설명을 듣고 있다. 안주영기자 jya@seoul.co.kr
  • [만화는 내 사랑] ⑤ 원혜영 민주통합당 의원

    [만화는 내 사랑] ⑤ 원혜영 민주통합당 의원

    “어렸을 때 본 만화들에 대한 추억과 감동이 정신적인 토양이 되지 않았을까요?” 원혜영(61) 민주통합당 의원이 초등학교에 다닐 무렵은 6·25전쟁 뒤 우리 만화가 짧은 부흥기를 이뤘을 때다. 그는 경기 부천 읍내에서도 십리는 떨어진 촌에 살았다. 없는 살림에 읍내 만화방까지 갈 만한 처지가 아니었다. 다만 여름과 겨울방학 때는 신 나게 만화책을 뒤적일 기회가 있었다. 서울에 있는 외갓집에 놀러가면 사촌들을 따라가 2~3일은 만화방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때 최고 인기는 ‘라이파이’였어요. 하지만 전 눈물 흘릴 정도로 가슴 뭉클한 작품이 더 좋았어요. 박기정 작가 작품이 그랬던 것 같아요.” 1981년 풀무원을 창업한 뒤 전국 곳곳으로 출장을 다니면서 기차역 부근의 만화방에 갈 기회가 많아졌다. 당시 가장 재미있게 본 것은 고행석 작가의 ‘불청객’ 시리즈. 집에 돌아와서는 아이들이 푹 빠져 있던 만화 잡지 ‘보물섬’을 함께 읽곤 했다. “고행석 작품은 파격적이었어요. 정말 독특하고 독창적이었죠. 하지만 나중에는 작품의 질이 점점 떨어졌죠. 아마 대량 생산 탓이었던 것 같아요. 무척 아쉬웠죠.” 우리 만화와 가장 큰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98년에 부천시장으로 취임하면서다. 부천만화정보센터(현 한국만화영상진흥원)를 설립해 우리 만화의 발전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며 부천을 만화로 특화된 문화 도시로 성장시켰다. 개인적인 관심 때문에 만화를 비장의 카드로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온리 원, 퍼스트 원’을 이룰 수 있는 키워드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만화는 우리 정서에 큰 영향을 주고 친숙한데도 국가나 지방 정부로부터 외면당하고 있었죠. 시 차원에서 시작했던 센터가 국가 차원으로 확대 발전해 자랑스럽고 보람을 느껴요.” 단순하게 도로를 넓히고 건물을 짓는 것에서 벗어나 문화 분야까지 지방행정 영역을 넓히고, 만화가 정당하게 평가되고 대접 받는 데 기틀을 마련했다는 자부심이 묻어났다. 국회로 돌아온 뒤에도 지난해 만화 진흥에 관한 법률안을 공동 발의하는 등 만화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그동안 만화가 사회 역할과 영향에 견줘 존중받지 못하고 있다는 안타까움이 많았습니다. 만화 진흥법은 만화가 사회적 지위를 인정받았다는 것에 큰 의미가 있죠.” 솔직히 요즘엔 만화를 자주 접하지 못한다고 한다. 특히 온라인 만화, 웹툰은 따라잡기 힘들다면서 웃었다. 그래도 볼 만한 작품을 추천해 달라고 했더니 양귀자 소설을 원작으로 한 ‘원미동 사람들’과 웹툰 ‘모든 걸 걸었어’를 꼽았다. 모두 부천과 관련 있는 작품이다. ‘원미동 사람들’은 부천을 무대로 도시 서민의 애환을 그렸고 ‘모든 걸 걸었어’는 대기업이 손을 놓은 뒤 시민들의 힘으로 결성한 부천FC1995 축구팀을 모델로 삼은 작품이다. 19대 총선에서 당선돼 4선 의원이 됐다. 국회 상임위를 문화 쪽으로 선택해 만화를 더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게 어떻겠냐고 질문을 던졌다. 슬며시 미소를 짓더니 18대 국회에 이어 통일·외교 쪽을 지망하고 있지만 만화에 대한 관심과 지원을 이어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만화는 그야말로 세계 공통 언어 아닐까요. 내 생각을 남에게 전달하고 다른 사람의 생각을 공감하는 데 효과가 있는 문화입니다. 외교 분야에서도 만화 형식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우리나라를 널리 알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글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사진 김명국기자 daunso@seoul.co.kr
  • [65년만의 귀향] “통일되면 찾아볼까 했었는데…” “기적이라 생각”

    [65년만의 귀향] “통일되면 찾아볼까 했었는데…” “기적이라 생각”

    “아버지 유해를 찾을 것이라고 기대조차 안 했는데….” 6·25전쟁 당시 북한지역에서 전사해 62년 만에 유해로 돌아온 고(故) 이갑수·김용수 일병의 유족들은 25일 아버지의 귀환이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제사 못지내고 있었는데… 아버지 자랑스러워” 4살 때 아버지와 헤어진 이 일병의 아들 이영찬(65)씨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아버지라고 불러본 기억도 없으니 아버지 이름도 모른다. 멀리서 전사하신 걸로 알고 있어서 (돌아올 것이라곤) 전혀 기대도 안 했다.”면서 “통일이 되면 그때서나 찾아볼까 하고 있었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그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묻자 “조금 배우신 분이었던 것 같다. 뭘 하시는지는 모르지만 회사에 다녔다는 기억이 난다.”면서 “늦은 나이에 입대했다는 등 할머니가 아버지 얘기를 많이 하셨다.”고 말했다. 이 일병은 1950년 8월 16일 입대 당시 34세였다. 그는 “아버지가 자랑스럽다. 사실 제사도 못 지내고 있었다.”면서 “전사통지서에는 OO지구에 OO일 전사라고 기록되어 현충일 때도 제사보다는 그냥 아버지를 생각하는 정도로 보냈다.”고 회고했다. 7살 때 이별한 이 일병의 딸 이숙자(68)씨도 “키가 컸던 아버지는 비가 오면 진흙탕 길을 나를 업고 학교에 등교시켰다.”면서 “나를 잘 업고 다니셨다는 것 외에는 뚜렷하게 생각나는 것이 없다.”라고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떠올렸다. 김용수 일병의 큰조카인 김해승(54)씨는 “기적이라는 생각밖에 안 든다.”면서 “2년 전에 우리 아버지의 유전자(DNA)를 채취해 갔는데 지난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래서 포기했는데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는 “아버지와 작은아버지(김 일병)가 함께 입대를 했는데 아버지가 후방으로 같이 가자고 했더니 작은아버지가 ‘형님은 내려가 집을 지켜라. 나는 국가를 지키겠다’라고 한 얘기를 들었다.”면서 “듣기로는 탱크부대에 있었는데 미그기 폭격을 맞고 구급차에 실려가다가 돌아가신 걸로 알고 있다.”고 눈물을 훔쳤다. ●“나라 지키겠다”며 후방 가자던 형 권유 뿌리쳐 김씨는 “아버지가 살아생전에 동생(김 일병) 얘기를 많이 하셨다. 돌아가실 때도 동생 생각하면서 많이 우셨다.”면서 “작은아버지(김 일병)는 학도병이고 아버지는 자원입대했다. 훈련소까지 같이 가서 거기서 헤어졌다. 아마도 동생을 보호하려고 자원입대하셨던 것 같다.”고 전했다. 하종훈기자 artg@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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