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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25 참전국에 첫 보은… 인도주의도 실천

    정부가 21일 태풍 ‘하이옌’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은 필리핀에 공병·의료부대를 파병하기로 한 것은 인도주의적 구호 차원은 물론 6·25 참전에 대한 ‘보은’의 성격이 짙다. 필리핀은 6·25전쟁 당시 연인원 7420명을 파병했고, 이 가운데 112명이 전사했으며 299명이 부상을 당했다. 6·25 참전국에 대한 파병은 처음이다. 국방부 관계자는 “필리핀이 6·25전쟁 참전국이고 초대형 태풍으로 엄청난 인적, 물적 피해가 나는 등 절박한 상황이기 때문에 정부에서 적시에 지원하기로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2004년 이라크 자이툰 부대 이후 최대 규모의 파병에는 필리핀과의 끈끈한 관계도 고려됐다. 필리핀은 아세안 국가 중 한국의 첫 번째 수교국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 후 처음으로 외국 정상을 국빈으로 초청한 것도 필리핀의 베니그노 아키노 3세 대통령이었다. 우리나라에 거주하는 필리핀 출신도 5만명이 넘는다. 이들 중 대다수는 한국인과 가정을 꾸린 결혼 이주 여성들이다. 지난 12일 정부가 일본의 절반 수준인 500만 달러(약 54억원)를 필리핀 정부에 지원하기로 한 데다 이미 미국과 일본, 영국, 터키 등이 병력과 함정 등을 파견한 터라 정부의 파병 결정이 늦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국내 시민단체 등을 중심으로 필리핀에 대한 정부의 구호예산 지원 액수를 늘리고 병력을 신속히 보내야 한다는 의견이 일찍부터 거론됐다. 필리핀 파병부대는 해병대 상륙작전에 쓰이는 상륙함(LST) 2척을 타고 일주일에 걸쳐 이동, 타클로반 인근 항구에 정박하게 된다. 파병부대의 임무는 재해복구와 인도적 지원활동이다. 현재 필리핀에는 우리나라를 포함해 24개 국가에서 함정과 항공기, 의료팀 등을 지원하고 있다. 미국은 항공모함 1척, 병원선 등 함정 10척과 32대의 항공기를 파견했다. 일본은 1180명의 병력과 경항모 1척을 포함한 함정 3척, 항공기 16대 등을 지원하고 있다.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 정부, ‘태풍 피해’ 필리핀 파병키로…의료·복구 지원

    정부, ‘태풍 피해’ 필리핀 파병키로…의료·복구 지원

    정부가 태풍 피해를 입은 필리핀을 지원하기 위해 의무·공병으로 구성된 국군 1개 대대 파견을 추진하기로 했다. 국방부는 21일 “필리핀 정부로부터 재해재난 구호와 복구지원을 위한 의료·공병부대의 파견을 요청받았다”면서 “오늘 정부가 국가안보정책조정회의를 개최해 파견 여부를 논의하고 우선 정부합동조사단을 필리핀에 보내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국방부는 “정부합동조사단을 필리핀으로 신속히 보내 먼저 현지 여건을 확인한 후 국군부대의 파견계획을 수립하고 국무회의 의결과 국회 동의를 받아 부대 파견을 추진할 방침”이라고 설명했다. 조사단은 이르면 다음주 초반에 현지로 가서 정확한 복구·의료지원 소요를 파악할 계획이다. 필리핀 파병에 대한 국무회의 의결과 국회 동의를 거쳐 국군부대의 파견이 최종 확정되면 인도주의적 구호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6·25 당시 한국을 지원한 국가에 대한 첫 보은 병력 파견 사례가 된다. 필리핀은 6·25전쟁 기간 연인원 7420명을 파병해 이 가운데 112명이 전사했고 299명이 부상당했다. 앞서 공군은 지난 14~15일 C-130 수송기 2대에 구호품 18t과 지원요원 29명을 태우고 처음으로 구호활동에 나섰다. 15∼16일에도 C-130 수송기 3대에 29t의 구호물자와 지원요원 41명을 보냈다. 16일부터는 공군 C-130 수송기 2대와 임무통제관 등 군 지원요원 46명이 매일 2~4회 필리핀 세부와 피해지역인 타클로반을 오가면서 식량과 의료물자 등 긴급 구호물자를 수송하고 이재민을 대피시키는 임무를 수행 중이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관동대지진 때 두살배기도 학살 당해

    관동대지진 때 두살배기도 학살 당해

    주일 한국대사관의 이사 과정에서 발견되어 19일 처음 공개된 명부들은 그동안 피해자 규모가 제대로 파악되지 않은 3·1운동과 관동 대지진 피살자의 신상을 구체적으로 담고 있다. 이 명부들은 1952년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기미년 살상자 수, 일본 관동 진재 희생자, 제2차 대전 시 징용자 및 사상자 수, 왜정하 애국사상운동자로서 옥사자 수 등을 조사 집계하라”는 지시에 따라 만들어졌다. 박경국 국가기록원장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1953년에 만들어진 명부가 지금 공개된 것은 주일대사관에서 발견하기 어려운 위치에 보관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국가기록원은 자료를 넘겨받아 3개월 넘게 분석작업을 벌였지만 총 67권의 명부를 모두 분석하지는 못하고 일부 지역을 골라 내용을 파악했다. ‘3·1운동 피살자 명부’는 읍·면 단위로 성명, 나이, 주소, 순국일시, 순국장소, 순국상황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동안 3·1운동 순국자 가운데 독립유공자로 인정된 이는 총 391명에 불과하며, 지금까지 어떤 명부도 발견되지 않았다. 서울을 포함한 경기도 지역에서는 지금까지 독립유공자로 53명이 포상받았고 8명이 포상 보류됐는데, 이번 명부로 100여명이 새롭게 확인됐다. 충청도 지역은 31명이 독립유공자로 서훈을 받았는데 69명이 이번 명부를 통해 추가로 확인됐다. 독립운동가 박은식은 1920년에 지은 ‘독립운동지혈사’에서 3·1운동 피살자 숫자를 7509명이라고 밝힌 바 있다. 국가기록원 관계자는 “이번 명부가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3년 작성된 것으로 북한 등 일부 지역은 행정력이 미치지 못해 피살자 숫자가 적은 것 같다”고 설명했다. 1923년 9월 1일 일어난 일본 관동대지진 당시 희생된 한국인 290명의 명단인 ‘일본 진재 시 피살자 명부’도 처음으로 구체적인 희생자 명단을 확인하고 있다. 관동대지진 당시 한국인 피살자 수는 독립신문이 1923년 11월 6661명으로 보도하고, 독일 자료에서는 2만여명으로 언급됐다. 일본에서의 피살자는 조사하지 못하고, 국내에 연고가 있는 사람만 조사되어 명단은 290명에 불과하나 희생자 이름 외에 본적, 나이, 피살일시, 피살장소, 피살상황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피살 방식도 피살, 타살, 총살 등 다양하게 기록되었다. 경남 합천군을 연고로 하는 2살짜리 아기 등 이모씨 일가족 4명이 모두 학살당한 사례도 구체적으로 담겨 있다. 관동대지진으로 인한 피해보상은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에도 포함되지 않았다. ‘일정 시 피징용자 명부’는 피징용자 명부 가운데 가장 오래된 원본 기록으로 추정된다. 국가기록원이 보존하고 있는, 1957년 노동청이 작성한 피징용자 명부에는 28만 5771명이 등재되어 있으며, 이 가운데 우리 정부는 약 16만명을 피징용자로 인정했다. 이번에 발견된 명부는 남한 지역만 조사 대상으로 해 1957년 작성된 명부보다 5만 5990명이 적으나 생년월일, 주소 등이 포함되어 피해자 보상심의에 큰 도움이 될 전망이다. 박걸순 충북대 사학과 교수는 “3·1운동과 관동대지진 당시 피살자 명부는 지금까지 학계에 알려지지 않은 최초의 기록으로 과거사 증빙자료로서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고 말했다. 윤창수 기자 geo@seoul.co.kr
  • 6·25 주한미군·카투사 추모

    6·25 주한미군·카투사 추모

    김종욱(왼쪽) 사단법인 대한민국카투사연합회 회장과 버나드 샴포우 주한 미8군 사령관이 지난 16일 서울 용산 미8군 기지 내 드래곤힐라지 호텔에서 열린 연합회 초청 VIP 초청행사에 앞서 6·25전쟁 당시 전몰 미군 장병 및 카투사를 기리기 위한 동상에 헌화하고 있다. 대한민국카투사연합회 제공
  • [주말 인사이드] 한국 사회 음식문화로 자리매김… ‘치맥’의 모든 것

    [주말 인사이드] 한국 사회 음식문화로 자리매김… ‘치맥’의 모든 것

    대한민국이 바야흐로 ‘치맥’(치킨과 맥주) 전성시대다. 소주에 삼겹살, 막걸리에 파전, 탁주에 홍어 등 바늘 가는 데 실 가듯 궁합 맞는 술과 안주는 많지만 치맥처럼 남녀노소 모두 즐기며 하나의 문화 현상으로 자리 잡은 조합은 드물다. 젊은 대학생이나 직장인들이 금요일 밤 치킨가게나 강변 등 야외에 삼삼오오 모여 한 손에는 치킨, 다른 손에는 맥주를 들고 ‘불금’(불타는 금요일)을 즐기는 풍경은 낯설지 않다. 외국인들도 우리 치맥에 엄지손가락을 든다. 이코노미스트 한국 특파원 출신으로 현재 하우스 맥주 집을 운영 중인 영국인 다니엘 튜더는 15일 “한국식 치킨과 맥주의 조합은 세계에 한국 음식과 문화를 알리는 데 아주 좋은 상품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한국인은 왜 치맥에 열광하는 것일까. 치맥이 하나의 문화 현상으로 자리 잡은 바탕에는 맛 궁합뿐 아니라 사회·문화적 흐름, 수요·공급의 조화 등이 깔려 있다. 한국 사회를 사로잡은 치맥의 모든 것을 들여다봤다. 치맥의 한 축인 치킨이 국내에 확산되기 시작한 것은 1960~19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산업화가 움트면서 농촌을 떠난 젊은 인구가 도시로 밀려올 때다. 산업화와 도시화 과정 속에서 공장과 사무실 등으로 배달시켜 먹는 간식 문화가 발달했고 통닭도 이 무렵에 주목받았다. 특히 야식으로 치킨을 주문할 때 맥주를 가볍게 곁들이기 시작했다. 대구 치맥 페스티벌을 기획한 윤병대 한국식품발전협회 사무처장은 “프라이드치킨은 탕과 찌개 등 먹기가 번거로운 술안주와 달리 간편하게 들고 다닐 수 있어 젊은 층이 야유회와 체육대회 등에서 곧잘 즐겼다”고 회상했다. 국내 치킨의 ‘본산’ 격인 대구에도 이 무렵 치킨 문화가 싹텄다. 6·25전쟁 종전 이후 대구에 자리 잡은 미군 부대(캠프 워커, 캠프 헨리) 내에서 팔던 프라이드치킨이 군무원 등을 통해 대구 시내로 흘러들었다. 전통적인 닭백숙이나 기름을 쫙 뺀 전기구이 통닭을 팔던 닭집 주인들은 치킨을 보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기름에 튀겨 맛이 고소한 데다 튀김옷을 입힌 덕에 살코기만 팔 때보다 양이 훨씬 많아 보였기 때문이다. 대구는 특히 닭 공급이 수월한 지리적 이점도 있었다. 경북권역의 영천과 의성, 청도 등에는 1970년대까지 국내 양계장의 80% 이상이 몰려 있었는데 이곳에서 길러진 닭이 지역 내 소비 기반인 대구의 치킨집에 공급됐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2~1966년)으로 국내 닭고기 생산량이 13배 정도 늘어난 직후였다. 내륙 도시인 까닭에 해산물 등의 신선한 식자재 공급이 어려웠던 터라 닭이 ‘효자 식품’이었던 셈이다. 전국 치킨 브랜드 업체 320여곳 중 절반 정도가 대구, 경북에서 처음 문을 열었다. 멕시칸, 멕시카나, 처갓집 양념통닭 등 ‘1세대 치킨 체인점’은 물론 교촌치킨, 호식이 두마리 치킨 등이 대표적이다. 대표 간식으로 입지를 넓혀 가던 치킨이 맥주와 본격적으로 만난 것은 1980~1990년대였다. 이전까지 고급 술로 생각됐던 맥주의 가격이 1980년대 업체들의 대중화 전략으로 싸졌고 치킨과 함께 저렴하게 즐길 수 있는 술로 자리매김했다. 또 1990년대 이후 프로야구 등 스포츠의 호황도 치맥 주가를 올렸다. 윤 사무처장은 “프로스포츠가 인기를 끌자 맥주와 치킨이 야구장 등으로 많이 들어갔고 이 과정에서 치킨업체가 폭발적으로 성장했다”고 진단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은 치맥 시장 활황의 기폭제가 됐다. 치킨업계 관계자는 “2002년 업계에서 맥주 안주로 치킨의 입지를 굳히려 만든 것이 ‘치맥’이라는 용어였다”고 전했다. 주말 밤마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를 TV로 보며 치맥을 즐기는 신형근(32)씨는 “수저나 젓가락을 이용해 먹어야 하는 다른 안주와 달리 치킨은 손에 들고 경기에 집중할 수 있는 매력이 있어 맥주 안주로 안성맞춤”이라고 설명했다. 2000년대 이후 젊은 층은 인터넷에서 축약형 신조어인 ‘치맥’이라는 표현을 쓰며 큰 관심을 보였다. ‘만취할 수 없다면 술이 아니다’라던 주당들은 ‘맥주는 음료수 아니냐’고 비아냥댔지만 술 한잔 손에 쥔 채 몇 시간이고 대화하는 것을 즐기는 젊은이들에게 치맥은 딱 맞았다. 김소혜 음식문화 평론가는 “치맥을 즐기는 사람들은 건강이나 음식 궁합이 아니라 치맥을 먹을 때의 분위기 등을 즐기는 것”이라면서 “대중적인 음식에 ‘신 날 때 먹는 것’ ‘응원할 때 먹는 음식’ ‘사람들과 함께 먹는 음식’이라는 이미지가 씌워지면서 하나의 문화가 됐다”고 분석했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사태를 겪으면서 거리로 내몰린 퇴직자들이 치킨집 창업에 대규모로 나선 것도 1990~2000년대 치맥 열풍의 한 배경이 됐다. 국내 치킨집은 지난 10년간 10배 늘어 현재 전국적으로 3만 6000개나 된다. 치맥을 즐기는 인구가 늘어나는 건 무엇보다 맛이 있기 때문이다. 맥주 전문가들은 차가운 맥주가 기름진 치킨의 단점을 보완해 주는 까닭에 사람들이 치맥 조합을 자주 찾는다고 말한다. ‘브루마스터’(맥주 양조 전문가)인 정영식 오비맥주 이사는 “맥주의 산성도는 pH4 정도로 높아 기름기 많은 치킨과 함께 먹기에 안성맞춤”이라고 했다. 치킨이나 소시지 등 기름기 있는 음식을 먹은 뒤 맥주를 마시면 입이 깔끔하게 씻기는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양한 맥주 종류 가운데 치킨과 궁합이 유독 잘 맞는 것이 있을까. 정 이사는 “맛 궁합상 맥주 종류인 라거와 에일 모두 치킨과 어울린다”고 평가했다. 다만 치킨집의 술자리 분위기에 따라 맥주 종류를 달리할 필요는 있다. 라거는 맛이 시원하고 깔끔하지만 탄산이 적어 금세 밍밍해지는 만큼 짧은 시간 치킨에 맥주를 즐길 때 어울리는 반면, 알코올 도수가 높은 에일은 맛이 거칠고 진해 오래도록 김이 빠지지 않는 만큼 긴 술자리에 어울린다는 것이다. 치킨과 맥주가 서로 부족한 영양 균형을 보충해 주는 까닭에 두 음식을 함께 찾는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정 이사는 “맥주는 열량이 높고 영양 성분이 부족하다. 탄수화물이 주성분인 라면이나 밥, 국수 등과 함께 먹으면 쉽게 살만 찐다”면서 “치킨도 열량이 높기는 하지만 단백질과 필수아미노산 성분이 가득하기 때문에 맥주 안주로 좋은 것”이라고 밝혔다. 치킨 외에 대표적 맥주 안주인 소시지, 마른 멸치, 계란 등도 고단백 음식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독일인들이 맥주 안주로 즐기는 ‘아이스바인’(돼지 정강이 부위를 삶아 요리하는 독일 전통 음식)도 고단백 음식이며 과거 호프집에서 안주로 유행했던 족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영양학자들은 “사실 영양 궁합으로는 치킨과 맥주가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치킨은 지방이 많고 맥주는 소화기관과 온도 차이가 커 두 음식 모두 소화가 잘되지 않기 때문이다. 또 치킨과 맥주에는 통풍의 원인이 되는 ‘퓨린’ 성분이 많아 함께 먹으면 통풍을 부를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우리나라 치킨 프랜차이즈들은 국내 성공을 발판 삼아 국제 시장 진출을 모색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한국식 치킨이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을 가능성이 높다고 평가했다. 튜더는 “외국에는 프라이드치킨 정도만 있는데 양념치킨이나 마늘치킨 등은 흔한 맛이 아니어서 경쟁력이 있다”고 설명했다. 김소혜 평론가는 “다양한 요리법의 치킨들은 처음 먹어 본 사람도 맛있다고 느낄 정도였기 때문에 대중화될 수 있었다”면서 “현지화에 더 신경 쓴다면 수출이 가능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유대근 기자 dynamic@seoul.co.kr 윤샘이나 기자 sam@seoul.co.kr 명희진 기자 mhj46@seoul.co.kr
  • 내 아버지는 김구… 나는 늘 죽음과 함께 있었다

    내 아버지는 김구… 나는 늘 죽음과 함께 있었다

    조국의 하늘을 날다/김신 지음/돌베개/340쪽/2만 2000원 1949년 6월 26일. 백범 김구 선생의 서거는 이승만 정권을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했다. 혹여 폭동이 일어날까, 상여를 호위하는 경찰에게 권총이 지급됐다. 서울역을 비롯해 주요 길목마다 기관총이 장착된 장갑차도 배치됐다. 계염령 선포나 다름없었다. 백범의 둘째 아들인 김신(91) 전 공군참모총장은 “(정권을 등에 업은) 친일세력은 아버지를 제거하고 한국독립당 사람들을 탄압했다”고 회고했다. 한독당이 친공세력으로 몰린 것은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며 남북협상을 벌였다는 이유에서다. 김 전 총장은 아버지의 사후 경교장 지하에 있던 한독당 조직표와 명단을 가장 먼저 불태웠다. 많은 사람이 혹독한 탄압에 시달릴 것을 우려한 탓이다. 김 전 총장은 회고록 ‘조국의 하늘을 날다’에서 백범과 한독당의 명을 끊은 배후 세력으로 김창룡 전 육군 특무대장과 이승만 전 대통령을 지목한다. 백범 사후 서른살 안팎의 청년이 저자를 찾아와 권총 한 자루와 돈을 요구하기도 했다. 정보국 요원들에게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할 때였다. 저자는 “청년은 ‘김일성이 보내 이승만을 암살하러 왔다’고 말했다. 느낌이 이상해 당시 신성모 국방장관에게 내 신변보호를 요청했는데, 알고보니 김창룡이 꾸민 공작(올가미)이었다”고 전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김 전 총장에게 망명과 다름없는 영국 유학을 권하기도 했다. 1922년 상하이에서 태어난 저자는 “백범의 가족이라는 사실은 때론 크나큰 자랑이자 자부심이지만 늘 나와 가족의 어깨 위에 무겁게 드리워진 버거운 숙명이었다”고 털어놓는다. 그의 삶은 순탄치 못했다. 젖먹이 때 어머니(최준례 여사)가 돌아가시고 수차례 중국의 고아원에 맡겨졌지만 이때마다 그를 데리러 온 사람은 할머니 곽낙원 여사였다. 어머니에 대한 추억도 없고, 잠깐 뵐 수 있었던 아버지에 대한 애틋한 기억도 별로 없다. 형과 할머니는 중국 땅에서 횡사했다. 그는 숱한 고난 끝에 중국 군관학교에서 공군비행교육을 받았고, 아버지의 권유로 해방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공군 훈련을 마쳤다. 1947년 귀국해 육군 항공대에서 일하며 6·25전쟁 때는 조국의 산하에 폭탄을 투하해야 했다. 책에는 현대사의 비화가 수두룩하다. 6·25전쟁 중 미그 15기를 탈취하기 위해 만주로 급파될 뻔했으나 1953년 북한 공군 장교가 미그 15기를 몰고 귀순하면서 작전은 취소됐다. 공군참모총장 시절 맞은 5·16쿠데타 때 저자는 육군본부에서 박정희 장군을 처음 대면했다. 박 장군은 다짜고짜 “‘백범일지’를 여러 번 정독하고 깊이 감명받았다”고 말했다. 저자는 주한미군 등 진압군에게 서울 시내가 전쟁터가 되는 것만은 막아야 한다고 조언한다. 그는 박정희 정권 때 주타이완 대사와 교통부 장관을 지냈다. 한·중 수교 당시 막후 비선 라인으로 활동하고 1960년 북한의 핵개발 정보를 입수했던 일화도 전한다. 그는 “늘 죽음이 가까웠지만 아버지와 선열에 대한 자부심 덕분에 이겨낼 수 있었다”고 말한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구본영 칼럼] 자성은 하되 자학할 이유는 없다

    [구본영 칼럼] 자성은 하되 자학할 이유는 없다

    지난 주말 저녁 청계천. ‘한성백제 천년의 꿈’이란 테마로 서울 등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물길을 따라 그 옛날 위례성의 가을밤을 거니는 듯 시민들의 표정은 편안하다 못해 그윽해 보였다. 장사진을 친 관람객들 사이에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리는 외국인들도 많았다. 문득 과거 서울시장 선거에서 이명박 후보가 청계천 복원을 공약하면서 벌어졌던 논란이 생각났다. 지금의 민주당인 당시 여당은 막대한 건설비를 들여 환경을 파괴하는 인공하천을 복원해서는 안 된다며 극력 반대했다. 진보적 환경원리주의자들은 한강물을 끌어들여 시멘트 어항을 만들자는 거냐며 더욱 냉소적이었다. 물론 이런 비판적 논리가 100% 잘못된 것은 아니었을 성싶다. 그런 반대 의견도 있었기에 공사를 밀어붙인 측에서도 그나마 환경보전에 더 신경을 쓰고, 그 결과 다수 시민이 즐거워하는 친수공간으로 복원됐는지도 모르겠다. 청계천 복원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벌어지고 있는 우리 사회의 역사논쟁도 마찬가지 맥락에서 살펴봐야 할 것이다. 진보 학계에서는 교학사의 역사 교과서가 이승만 대통령을 지나치게 미화하고 있다는 점을 비판한다. 실제로 역사적 사실과 다르게 기술되거나 부풀려진 사료는 고쳐져야 마땅하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건국 과정부터 잘못됐다고 보는 시각까지 납득하긴 어려운 일이다. 나아가 유신과 5공이 드리운 역사적 그늘을 있는 그대로 조명해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현대사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은 과연 온당한 것일까. 우리를 보는 외부의 시선을 보라. 우리가 스스로를 폄하하고 있는 건 아닐까. 얼마 전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는 박근혜 대통령을 만나 “한국은 아시아의 등불 같은 존재”라고 했다. 특히 존 케리 미 국무장관은 최근 한국이 과거 원조 수혜국에서 세계 주요 원조국의 하나로 변모한 사실을 지적하면서 “믿기 어려울 정도의 이야기”라고 칭송했다. 사실 1948년 건국 당시 우리는 세계 최빈국이었다. 6·25전쟁 이후 1960년대까지 옥수수 등 미국의 잉여농산물로 주린 배를 채우며 보릿고개를 넘어야 했다. 온갖 비리와 부정, 그리고 각종 시위로 인한 혼돈이 이어지면서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바라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기를 기대하는 격이라는 비아냥까지 들었다. 그런 한국이 이제 2차대전 후 100여개 신생국 중 유일하게 민주화와 산업화에 동시에 성공한 나라로 인식되고 있다. 올해 무역흑자에서 일본을 앞지르는 등 세계 15위권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했다. 무역협회가 최근 국내외 거주 외국인 대상으로 포커스그룹 인터뷰와 설문조사한 결과를 보라. 이 조사에서 한국은 세계인들에게 ‘급속히 발전한 국가’라는 이미지로 투영되고 있으며 한국의 경제성장은 ‘저소득 탈식민 국가들의 역할모델’로 평가됐다. 우리의 현대사는 총합적으로는 성공 스토리로 자부해도 좋을 듯싶다. 권위주의 정권에서 인권 유린의 후유증이나 압축성장의 폐해 등 누적된 이런저런 문제는 안고 있지만 말이다. 물론 진보와 보수가 과거사를 놓고 치열하게 논쟁하는 것은 불가피한 통과의례인지 모른다. 하지만 어떤 경우이든 “대한민국이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한 나라”로 치부하는 ‘자학사관’은 곤란하다. 이는 피땀으로 한강의 기적을 일군 동시대인들에 대한 모독일 뿐이다. 그런 맥락에서 안희정 충남지사가 던진 돌직구 언급이 와 닿는다. 대표적 친노 인사인 그가 진영논리에 얽매이지 않고 “박정희 전 대통령을 공칠과삼(功七過三)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역사논쟁을 벌이더라도 나만 옳다는 독선은 안 될 말이다. 어느 진영이든 역사 앞에 겸허해야 한다. 일찍이 철학자 파스칼은 “피레네 산맥 이쪽의 정의가 저쪽에선 불의가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보수든 진보든, 여든 야든 과거사를 놓고 과도하게 반목하기보다는 미래를 놓고 경쟁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다. kby7@seoul.co.kr
  • 전시회 여는 68살 동갑내기 화가 박대성 & 임동식, 그들의 이야기

    전시회 여는 68살 동갑내기 화가 박대성 & 임동식, 그들의 이야기

    68세 동갑내기인 두 화가는 너무나 닮았다. 자아와 피아, 종교의 두터운 장벽을 넘어 예술혼을 불태우는 동양화가 박대성은 자신의 삶에 장애를 안기고 아버지의 목숨을 앗아간 사람들조차 용서했다고 말했다. 서양화가 임동식은 평생 독신으로 예술의 길에 천착하고 있다. 각각 경북 경주와 충남 공주 원골에 정착해 자연과 교감하며 살아가는 삶의 방식도 닮았다. ■ 용서하니 나를 찾고 수묵화로 삶을 얻다 “그 사람들은 벌써 다 용서했지요.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저를 예술가라 부르겠어요. 민족의 아픔이고 역사의 탓이죠.” 작가의 눈가에 살짝 이슬이 맺혔다. 6·25전쟁 직전 경북 청도의 한약방에 출몰한 공비들에 의해 왼쪽 팔을 잘린 후, 40여년간 누구나 상상이 가능한 삶을 살아온 동양화가 박대성(68)의 이야기다. 당시 세 살이던 아이의 아버지는 공비의 칼에 목숨을 잃었다. 그런데 작가는 “신체 장애를 다룬 기사는 많이 나왔다”면서 화제를 돌렸다. 커피 한 잔을 놓고 시작한 작가와의 대화는 그렇게 한 시간가량 무르익었다. ‘외팔이’ 소년은 병풍 그림으로 소일하며 자랐다. 묵화부터 고서에 이르기까지 독학으로 연습을 거듭했다. 정규 교육을 받진 않았지만 수묵화가 외면당하는 한국 화단에서 전통을 창조적으로 계승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69년부터 잇따라 여덟 번이나 국전에 입선했고 1979년 중앙미술대전에선 대상을 받았다. 아픔이 없었던 건 아니다. “열아홉 살 때인가, 그림을 공부하는데 앞날이 너무 막막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어요. 그런데 부산 용두산공원에서 관상을 봐 주던 노인이 서른 살을 넘기면 운이 좋아진다고 해서 잠시 미뤘죠. 스물세 살 때 독학으로 국전에서 입선했습니다(웃음).” 수묵화로 한평생을 바친 작가에게는 지금 ‘대가’라는 호칭이 따른다. 내년 가을에는 경주세계문화엑스포공원에 그의 이름을 내건 시립미술관이 문을 연다. 작가는 1989년부터 경주로 내려가 칩거하며 산사의 풍경 등을 화폭에 담고 있다. 오는 24일까지 서울 종로구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이어 가는 ‘원융’(圓融)전에도 가로 8m의 대작 ‘불국설경’ ‘부처바위’ 외에 도자기와 글씨를 그린 ‘고미’ 등 수묵화 50여점이 내걸렸다. 성철 스님의 장삼과 500나한을 그릴 만큼 불심이 깊지만 그는 가톨릭 신자다. 마지막 과업은 화단에서 찬밥이 돼 버린 한국화를 되살리는 일이다. 작가는 “수묵화를 그리니 대낮이 가장 어둡고 칠흙 같은 밤이 가장 밝다는 역설을 깨닫게 됐다”고 말했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시골가니 나를 찾고 자연에서 붓을 잡다 “옆집 우 사장이 권해서 그렸는데 역시 토박이라 남다른 풍광을 알고 있더군요. 다른 사람 눈이 훨씬 뛰어납디다.” 10여년간 외국에 머무르다 귀국해 충남 공주의 원골마을에 정착한 ‘귀농 화가’ 임동식(68)은 팔랑귀란 소리를 듣는다. 수채화같이 맑은 색감을 강조하는 화가는 애초 그림을 접을 뻔했다. 홍익대 회화과를 졸업한 뒤 독일 함부르크로 유학 가 설치미술에 푹 빠져 살았다. 그러다 문득 시골 고향이 생각났다. 1990년대 초 원골마을로 들어왔다. 농사나 지으며 살려다가 그림을 그려 보라는 주위의 권유에 다시 붓을 잡았다. 밥집 사장이자 친구인 ‘우 사장’의 아들 결혼식 선물로 내놓은 그림에 반응들이 좋았던 덕분이다. 이후 작가는 우 사장이 알려주는 동네 곳곳을 돌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풍경화 연작 시리즈 ‘친구가 권유한~’이 나왔다. 그림에선 저 멀리 강이 흐르는 풍경과 바람 부는 들판의 경치가 맑게 펼쳐진다. 오래된 벽화처럼 바스러질 듯하지만 그림엽서에서나 볼 수 있는 수채화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작가는 “타인의 시각을 표현한 작업이 흥미로웠다”면서 “나 혼자였다면 절대 못 그렸을 작품들”이라며 겸손해했다. 평생을 독신으로 살아온 작가가 원골마을에 처음 정착했을 때 주변에선 신흥 종교의 교주 정도로 치부했다. 말수도 없이 덥수룩한 수염을 지닌 사내가 홀로 다녔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지미술을 한다며 몸을 부대끼자 동네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마음의 문을 열었다. 우 사장은 아예 자신의 트럭에 화구를 싣고 다니며 작가에게 산골 풍경 곳곳을 그리게 했다. “넥타이도 혼자서 못 고른다”던 화가는 원골 주변의 풍경을 나름의 맑은 색감으로 풀어놨다. 자연을 벗 삼아 그린 그림 20여점은 오는 30일까지 서울 종로구 송현동 이화익갤러리 ‘사유의 경치Ⅱ’전에서 펼쳐진다. 유화 물감으로 그린 그림인데도 은은한 느낌이 나는 건 물감에 기름을 섞지 않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안 써 본 색깔이 많다”면서 “앞으로 그 미지의 색을 찾아 표현하고 싶다”고 말했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당신의 책]

    [당신의 책]

    사람 보는 눈(손철주 지음, 현암사 펴냄) 마음을 닮은 얼굴을 통해 그림 속 옛 사람의 본새 읽기를 시도한다. 옛 그림과 관련해 맛깔스러운 이야기로 독자를 끌던 저자가 사람이 나오는 우리 그림을 엮어 책을 냈다. 산수 인물화, 풍속 인물화 등 모두 85점의 그림을 소개한다. 예컨대 노론 계열의 문인화가 김창업이 그린, 노론의 영수 우암 송시열의 초상에 대해선 “낙향과 등용과 유배를 거듭하다 사약을 마신 삶에서 무슨 평탄한 흔적을 찾아내겠는가”라고 꼬집는다. 17세기의 선비 화가인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에 대해선 “공재의 됨됨이가 궁금하면 자화상을 보라”고 이야기한다. 284쪽. 1만 5000원. 한국인은 누구인가(김문조 외 지음, 21세기북스 펴냄) 38명의 각계 전문가가 저마다의 시선으로 한국인의 자화상을 풀어놨다. 삼성사회정신건강연구소가 8년간 한국인의 내면세계와 정체성을 분석한 결과물이다. 지역감정, 권력욕과 외모 지상주의, 군대와 조직 내 문제, 사회·법에 대한 심리 등 다양한 주제를 담았다. 궁극적으로 우리의 정치·사회적 이념을 진단하고 사회를 올바르게 바라볼 수 있는 방향을 모색했다. 김문조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 등 저자들은 “한국인들은 자기중심적 정서보다는 관계 속 타인을 일차적인 참조 대상으로 하는 등 타인 중심적 정서에 더 민감하다”고 해석한다. 564쪽. 2만 8000원. 리딩(크리스토퍼 히친스 지음, 김승욱 옮김, 알마 펴냄) 뛰어난 비평가이자 기자로 2011년 세상을 떠난 저자의 유작. 38편의 독서 에세이를 모았다. 미국의 유명 문예잡지인 ‘애틀랜틱’을 비롯해 ‘뉴욕타임스 북리뷰’, ‘가디언’ 등에 실린 서평들이다. 날카롭고 직설적인 저자의 시각이 생생하게 담겼다. 저자는 ‘히틀러의 의미’에 대해 “여러분의 서재에서 앨런 불록, 요아힘 페스트, 휴 트레버 로퍼가 쓴 히틀러 전기는 모두 내다버려도 상관없다”고 단언한다. 소설 ‘동물농장’에 대해선 러시아의 1917세대의 운명을 따라가는 뛰어난 소설임을 인정하면서도 “스탈린 돼지와 트로츠키 돼지는 있는데 레닌 돼지는 없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536쪽. 2만 2000원. 권력과 필화(한승헌 지음, 문학동네 펴냄) 표현의 자유를 위해 싸워온 한승헌 변호사의 55년 기록. 권력의 횡포에 맞선 17건의 필화 사건이 담겼다. 검사직을 그만두고 변호사로 나서 처음 다뤘던 남정현의 단편소설 ‘분지’사건부터 전두환 정권의 ‘보도지침’ 폭로, 민중미술 ‘진달래’의 걸개그림 사건, 소설 ‘즐거운 사라’ 논란, 작가 황석영의 방북 사건 등을 담았다. 저자는 군사정권의 눈에 띄는 탄압으로 단편 ‘분지’사건을 꼽는다. 8·15해방과 6·25전쟁의 혼란 속에서 부패한 정부와 미국의 패권주의에 상처받은 한 가족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은 작가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면서 논란의 정점에 섰다. 월간 ‘현대문학’에 발표 될 당시에는 별문제가 없었으나, 이후 북한 기관지인 ‘조국통일’에 글이 게재되면서 이적표현물로 간주된 탓이다. 이어령 교수 등이 나서 작가를 두둔했으나 유죄판결을 받았다. 496쪽. 2만 3000원.
  • 사람들은 나를, 괴물이라 하지 이중잣대 같아, 난 인간적인데

    사람들은 나를, 괴물이라 하지 이중잣대 같아, 난 인간적인데

    ‘붉은 가족’(6일 개봉)의 각본을 쓰고 제작한 김기덕(53) 감독은 “나를 바라보는 이중 잣대가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인간의 욕망과 금기를 건드린 ‘뫼비우스’와 ‘피에타’ 같은 작품은 물론이고 상대적으로 대중적 색채가 짙은 ‘배우는 배우다’나 ‘영화는 영화다’ 등도 ‘김기덕’이라는 스펙트럼을 벗어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김유미와 정우가 주연하고 이주형 감독이 연출한 ‘붉은 가족’은 가족으로 위장해 남한에서 살아가는 북한 간첩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사람들이 왜 나를 괴물로 보는지 모르겠다”는 그를 어렵게 인터뷰했다. →“항상 감독이고 싶지 제작자이고 싶지는 않다”고 했었는데. -나름대로 시나리오를 많이 쓰는 편이다. ‘피에타’나 ‘뫼비우스’는 어둡고 사회적으로 무거운 메시지를 전한다고 보는데 제자 감독들에게 맡기는 것 중에는 경쾌하고 오락적인 영화도 많다. 그런 영화들도 내가 가진 감성이라고 생각한다. 제작을 맡은 영화는 연출한 감독이 더 능력이 있다고 본다. 내가 (감독으로서) 고민하는 주제는 ‘붉은 가족’이나 ‘영화는 영화다’와는 분명 차이가 있을 것 같다. 보편적인 것과 아닌 것의 차이일 텐데, 인간이 살면서 풀지 못한 비밀 같은 것이 내가 하고 싶은 주제라면 ‘붉은 가족’ 같은 영화는 우리가 살면서 느끼는 어떤 모순을 다룬다. →각본과 제작을 맡았던 ‘풍산개’도 남북 문제를 다뤘다. -아버지가 상이용사이셨다. 6·25전쟁 때도 참전했었고 몸에 총알을 네 발 정도 맞으셨다. 제대 뒤에 거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약으로 살다가 돌아가셨다. 내겐 아픈 어린 시절이 있는데, 그때 아버지는 너무 폭력적이고 무서웠다. 나이가 들면서 아버지의 분노가 어디에서 왔는지 좀 알게 됐다. 그게 분단의 현실에서 온 것이고, (거기에) 숙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풍산개’는 남북 사이에 유령이라는 존재를 등장시켜서 지나친 이념 경쟁 속에 결국 이산가족이 피해를 보고 그 안에서 인간의 삶이 파괴된다는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붉은 가족’은 남한의 모순적 자본주의, 북한의 모순적 체제주의를 극명하게 보여주면서 우리가 정말 잊어버린 것과 찾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려고 했다. →‘붉은 가족’은 어떻게 구상하게 됐나. -‘풍산개’ 이후에 당장 북한에 대한 이야기를 할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은밀하게 위대하게’, ‘동창생’, ‘용의자’ 같은 북한 소재의 영화가 개봉하는 걸 보면서 이런 소재에는 자신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바탕도 그렇고, 아버지의 상처도 잘 알고 있고, 철책 안에 들어가서 농사를 지어본 적도 있었다. ‘붉은 가족’은 다른 영화에 비해 제작비도 적고 배우들도 덜 알려졌지만 이야기로는 앞서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또 (‘은밀하게 위대하게’의 감독이 후배인 전재홍 감독에서 또 다른 후배인 장철수 감독으로 교체되는 등) 자본이 감독을 교체시키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왜 가족이라는 단위를 선택했나. -남북이 가족이지 않나. 남북은 형제라는 구도에서 트러블이 있는 거다. 남한 가족과 북한 가족이라는 설정 속에 우리가 놓치고 있는 본질이 숨어 있다고 봤다. 체제적으로, 군사적으로, 경제적으로 힘 자랑을 하는 건 한쪽이 이기거나 져야 끝나지만 가족은 그런 게 아니지 않나. 가족은 서로 이해하면 완성되는 거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양쪽이 모두 미완성이다. 하나는 체제로서의 딱딱한 가족이고 하나는 자본주의에 너무 나른해진 풀어진 가족이다. →영화에서 남한 가족은 서로 반목하고, 자본주의에 젖어 있다. 남한 가족을 이렇게 바라보나. -굉장히 압축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가족이 실제로 있다고는 믿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낭비와 돈 중심주의, 예의가 무시되는 모습 등이 총체적으로 모여 있는 이미지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안에 아무것도 없는 것은 아니다. 트러블 안에서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인간애를 포기하지 않는다. 북한 가족에는 그런 게 없다. 그런 인간애를 통해 ‘사는 건 이런 거야’라는 생각을 심어주고 싶었던 것 같다. →자본주의에 무척 비판적이다. -그렇게 비판적이지만은 않은 게 남한 가족은 그 안에 포기하지 않는 정(情)이 있고, 그건 다른 모든 것을 전복시킬 수 있는 에너지가 된다. ‘피에타’에서도 마찬가지다. 강도가 ‘미선이가 엄마가 아닐까’라고 생각하는 순간 모든 게 바뀌고 잔인한 것을 걷어내지 않나. 자본과 자기 생각이 중심인 사회지만, 나는 자본주의가 갈빗대 몇 개는 부러졌어도 구심점이 되는 등뼈는 부러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영화의 주제와 메시지는 무척 강하지만 이야기의 전개는 작위적이라고 하는 지적도 있다. -물론 그런 생각을 한다. 하지만 나무가 자랄 때는 가지치기를 해서 영양분을 몰아줄 필요가 있다. 내 영화는 그런 구조라고 생각한다. 가까이에서 보면 가지치기를 한 나무가 아쉽게 보일 수 있지만 멀리서 보면 그런 나무가 더 멋있다. 내 영화가 객관적으로 합의되는 좋은 영화라고 볼 수는 없겠지만 더 넓고 큰 것을 보여주기 위해 멀리서 보는 거다. →서사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은 뭔가. -나는 내 영화가 메시지를 향해 달려가는 기사 같다고 생각한다. 잔설명을 잘 하지 않는다. 어떤 소설가는 내 영화에 서사가 없다는 말을 했는데, 문학이나 영화를 전공하지 않아서 그런지 몰라도 나는 내 살아온 방식이나 성장 과정에 기준점을 둔다. 문화 표현물이 가지고 있는 형식에 대해 내가 잘 모르기도 하거니와 지나친 서사나 표현에 거부감을 느끼는 편이다. →전보다 대중과 소통하려는 노력이 커진 것 같다. -‘붉은 가족’이나 ‘신의 선물’을 보면서 ‘이게 김기덕 영화냐’고 한다. 김기덕 영화 같지 않다는 뜻인데, 나를 보는 이중 잣대가 있는 것 같다. (나는) ‘뫼비우스’나 ‘피에타’, ‘나쁜 남자’처럼 공격적이고 끝까지 가는 것으로 비쳐지는 면이 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만난 사람들은 나를 코미디언이라고 생각하고, 스스로 말하기는 부끄럽지만 인간적이라고도 한다(웃음). ‘붉은 가족’이나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이나 모두 나인데,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결국 내 영화를 아쉽게 생각하는 분들이 만들어낸 울타리에서 보기 때문인 것 같다. →차기작은. -항상 열심히 뭔가 쓰고는 있는데 뭐가 될지는 모른다. 내가 감독하는 영화는 아무도 모르게 하는 쪽이 재미있는 것 같다. 특별히 국내 관객을 겨냥한 것도 아니고, 위험하더라도 내 생각을 순수하게 전하는 일이니까. 배경헌 기자 baenim@seoul.co.kr
  • [서울신문 보도 그 후] 외교부 홈피에 여전히 없었다, ‘월북 장관’사진

    [서울신문 보도 그 후] 외교부 홈피에 여전히 없었다, ‘월북 장관’사진

    ‘단순 실수인가, 의도적인 배제인가.’ 정부가 국민의 알권리를 강화한 ‘정부 3.0’ 비전을 국정과제로 추진하고 있는 것과 관련해 서울신문은 지난 8월 외교부 홈페이지의 역대 장관 소개란에 김성환·최덕신 두 전직 장관의 사진이 빠져 있다고 지적했다. 보도 후 3개월이 넘은 7일에도 외교부 홈페이지에는 최 전 장관의 사진이 여전히 공란으로 남겨져 있다. 반면 김 전 장관의 사진은 보도 직후 바로 채워졌다. 이에 대해 일각에서는 월북한 최 전 장관의 과거가 반영된 것이 아니냐는 반응이 나오고 있다. 최 전 장관은 월북한 국내 인사 중 최고위직이다. 역대 정부는 최 전 장관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꺼려 왔다. 그래서 민주화 이후에도 월북 인사에 대한 우리 사회의 불관용성이 여전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1961년 10월부터 1963년 3월까지 제9대 외무부(외교부) 장관을 지낸 최 전 장관은 현재 북한 평양의 애국 열사릉에 묻혀 있다. 최 전 장관은 8·15 해방 이전 광복군에서 복무했고 육군사관학교 교장을 거쳐 6·25전쟁 때 사단장으로 참전하기도 했다. 이후 외무부 장관과 독일 대사를 거쳐 1967년부터 민족종교인 천도교 교령을 맡았다. 하지만 박정희 정부와의 불화로 1976년 미국으로 건너갔고 이후 1981년 6월 김일성 주석의 초청으로 평양을 방문해 1986년 9월 북한에 정착했다. 김용현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는 “대한민국의 외무부 장관을 했던 사람이 월북했다는 면에서 우리 정부 입장에서는 불명예”라면서 “남북 관계가 교착된 현재 상황으로 봤을 때 최 전 장관에 대한 재평가는 부담이 있다”고 말했다. 문제는 ‘열린 정부’를 지향하면서 공과에 따라 인물의 기록 사진 자체를 누락시키는 것이 타당한가 여부다. 안전행정부 관계자는 “적성 국가로 도피한 장관의 훈·포장을 취소하게 하는 상훈법 규정은 있으나 기록 자체를 말살하는 법은 없다”고 밝혔다. 육군사관학교는 6대 교장을 지낸 최 전 장관의 사진을 홈페이지에 게시하고 있다.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교육홍보실장은 “선 아니면 악이라는 이분법적 논리가 적용되는 분단 구조 속에서 최씨의 월북에 대해 자유로운 평가는 어렵다”면서도 “정부에 반하는 행위 때문에 사진을 누락시켰다면 3·15 부정선거를 촉발시켜 의회 정치를 말살한 이기붕 전 국회의장의 사진도 국회에서 떼어 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외교부 관계자는 “인사 자료에 (최 전 장관의) 사진이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면서 “시스템을 구축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혼선이 있을 수 있다”고 해명했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김문이 만난사람] 이 시대 마지막 어릿광대 국악인 김뻑국

    [김문이 만난사람] 이 시대 마지막 어릿광대 국악인 김뻑국

    살면서 가장 좋은 재미를 꼽으라면 어떤 것이 있을까. 보는 것, 아니면 듣는 것일까. 대체적으로 보는 것보다는 듣는 편이 낫다고들 말한다. 눈을 감고 음악을 듣는 재미가 특별하기 때문이다. 재담(才談)은 익살과 재치를 부리며 재미있게 이야기한다는 뜻이다. 창작보다는 전승(傳承)에 기초를 두고 흥미롭게 이야기를 실타래처럼 풀어나간다. 장구와 북을 치며 서로 주고받는 재담과 여러 타령으로 관객들을 즐겁게 한다. 그렇다면 잠깐, 남녀가 주고받는 재담의 한 장면을 들어보자. 남:억조창생 만민시주님네, 이 내 말을 들어보소. 청춘이 가고 백발이 올 줄 알았으면 10리 밖에다가 가시철망을 쌓을 걸.(나무관세음보살 목탁소리를 한다) 여:이봅세 아즈바이, 이봅세 아즈바이, 어쩌면 그 소리를 잘 지르시지비? 남:아즈마이~여기가 어니 고장, 어니 댁이지비? 함경도 어랑타령 고장 아니메~아즈마이 가만히 관상 보니 혼자 삼동? 여:말 맙소, 갈라새끼 술지방 앙카이(남편이 술집 여자를 데리고 도망갔다는 함경도 지방의 욕) 옆에 차고 후르륵 날러 혼자 삼둥. 어쩌면 좋겠소, 어쩌면 좋겠소, 가슴 답답해서 못 살겠다. 내 눈에 햄세국물(김칫국)이 쫄쫄 흘리메, 정말 가슴 답답해서 못 살겠다. 아즈바이 아까 잘하던 소리 한번 아니 들려주겠소? 남:니가 먼저~살자고~옆구리 꾹꾹 찔렀지, 내가 먼저 살자고 계약에 도장 먼저 찍었나? 여:무주공산 뜬 달은 뜨나마나 하구요, 멍텅구리 새서방은 있으나마나 허다. 이어 둘이 합창을 한다. ‘날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이 나고, 이십리 못 가서 불한당 맞고, 삼십리 못 가서 되돌아오리리라, 아하하 어이야 어야더야 내 사랑아. 아리랑 고개에다 초가삼간 짓고 양친부모 모셔다가 천년만년 살자~’ 김뻑국을 아시는가. 젊은이들에게는 생소하겠지만 40대 후반 이상의 사람들에게는 추억의 이름으로 남아 있다. 재담의 명인 김뻑국씨는 한국의 찰리 채플린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 1934년생이니까 올해 우리 나이로 팔순이다. 예전처럼 화려하진 않지만 여전히 공연무대에 올라 특유의 민요재담을 펼치면서 대표적 만담 콤비로 알려진 ‘장소팔·고춘자’ 이후 마지막 재담꾼으로 외롭게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지난 9월에는 국립민속박물관 대강당에서 ‘김뻑국예술단의 소리여행’이라는 제목으로 소리극 공연을 열고 관객들에게 웃음을 흠뻑 선사했다. 지난달 30일 서울 서대문 농협 대강당에서 2인 소리극 형식으로 제자와 함께 조용한 무대를 갖기도 했다. 앞에 언급된 남녀의 재담 장면에서 남자는 김씨, 여자는 제자 김순녀씨가 맡았다. 둘은 이 무대에서 영어, 일본어, 중국어로 아리랑을 불러 눈길을 끌었다. 외국어로 아리랑을 부르게 된 계기는 우리의 아리랑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서였다. 종로3가 국악로에 있는 ‘김뻑국예술단’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민요재담이 대중으로부터 멀어져가고 있는 현실에서 무슨 인터뷰를 하느냐고 했다. 재담인생 55년에 요즘도 열심히 공연을 다니고 있지 않느냐고 했더니 “재담은 춥고 배고팠던 시절 민초들의 해학이고 한풀이이자 격조 높은 풍자였다”면서 파란만장한 세월을 먼저 회고한다. 그는 일제 때 일본에서 태어나 광복이 되던 11살 때 부친의 출생지인 충남 보령에 정착했다. 하지만 적응이 잘되지 않았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학생들한테 ‘일본 하꼬짝(궤짝)’이라고 놀림을 받으며 ‘왕따’를 당했던 것. 한글을 잘 모른다는 이유에서였다. 쫓아다니면서 때리는 등 못살게 구는 학생들 때문에 도망치듯 기차를 타고 서울로 왔다.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다가 뚝섬 근처에서 우연히 국악인 이충선씨를 만나 1년 넘게 머슴살이를 했다. 굿판이나 질펀한 놀이마당이 펼쳐지는 날 이씨를 따라다니며 구경하는 것이 큰 재미였다. 그러다가 6·25전쟁이 발발하자 인천과 수원을 거쳐 용인 남사초등학교에서 숨어 지냈다. 끼니는 빈집 광을 뒤져 남아 있는 씨알로 근근이 해결했다. 그렇게 1년 3개월을 지낸 뒤 다시 서울로 왔다. 탑골공원에서 배회하고 있을 때 공연 중인 국악인 최경명씨를 만났다. 이후 그는 최씨를 따라다니면서 장구와 피리, 배뱅이소리를 어깨너머로 배웠고 인천과 강화 등지에서 약장수 생활을 했다. 그러다가 배뱅이굿을 하는 이은관씨의 공연을 보고 감동을 받아 이씨와 인연을 맺고 40년 동안 같이 지내게 된다. “하루는 육영수 여사의 초대를 받고 소록도 위문공연을 가게 됐습니다. ‘쾌지나 칭칭나네’를 부른 김상국, ‘노란 샤스 입은 사나이’의 가수 한명숙씨도 함께 갔지요. 이때 다른 분들은 10분 정도 노래를 불렀으나 저는 이충선씨를 따라다니면서 배운 재담으로 30분 가까이 무대 위에 섰지요. 환자들도 막 웃고 그러니까 무대가 화기애애했어요. 육영수 여사도 좋아하시면서 몸소 무대까지 다가오시더니 악수를 청하더군요. 엊그제(10·26) 박정희 대통령을 추모하러 간 것도 그런 인연에서였습니다.” 김씨가 재담가로 유명해진 결정적인 계기가 있다. 박정희 정권 때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의 만남이다. 사연은 이렇다.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 발표 직후였다. 김씨는 이은관씨와 함께 종로3가에 있는 요정집 ‘오진암’으로 초대받았다. 가 보니 김지미, 서수남, 하청일 등 유명 연예인 20여명이 모여 있었다. 이후락 부장이 북한에 무사히 다녀온 기념으로 파티를 연 자리였다. 이 부장은 술을 한 잔씩 돌리면서 각자 노래 한 곡씩 부르게 했다. 당시 중앙정보부장이라고 하면 매우 근엄한 위치여서 다들 조용하게 불렀다. 그러나 김씨 차례가 오자 원래 하던 대로 소리 내어 불렀다. ‘네가 먼저 살자고 옆구리 꾹꾹 찔렀지. 내가 먼저 살자고 계약에 도장을 찍었나’를 민요풍으로 불렀다. 분위기가 확 반전됐다. 이 부장이 기분이 좋았던지 “바로 그거야 한 번 더 불러 봐”라고 했다. 이왕 내친김에 야한 노래를 했다. ‘○○산 자리봉에 좁쌀 서말 심었더니 공알새가 날아와~’ 다들 웃으면서 박수를 쳤다. 이 부장은 “저런 사람 세 사람만 있으면 남북통일도 문제 없어”라고 하면서 김씨를 옆자리에 앉힌 뒤 백지수표(100만원 이하) 한 장을 건넸다. 당시 100만원은 집 한 채 값이었다. “그 수표를 들고 한국은행을 갔습니다. 은행장이 직접 나와 인사를 하더군요. 이후락씨 사인을 보더니 다들 굽실굽실하는 거예요. 어떻게 받았으며 다 찾아갈 거냐는 등 아주 친절하게 물어봤습니다. 그래서 10만원만 우선 달라고 했지요. 그것으로 양복점에 가서 옷을 맞춰 입고 남대문시장에 가서 해군 단화를 구입했습니다. 나머지는 안비취, 묵계월, 박동진 등 국악인들에게 공연을 하도록 도와주었지요.” 아울러 ‘김뻑국예술단’을 창단한 뒤 전국 면소재지까지 가서 공연을 하면서 암울했던 시절에 해학과 웃음을 선사할 수 있었다고 술회했다. 그러면서 재담 한마디 툭 던진다. “서방님의 양말을 꿰맬 때 본처는 이빨로 실을 끊고, 둘째 마누라는 가위를 사용합니다. 셋째는 냄새를 맡고는 아예 양말을 버리지요. 하하하.” 김씨는 살아온 세월이 그래선지 팔순의 나이에도 악동(樂童)처럼 웃는다. 얼핏 보면 동자승 같기도 하고 철없는 촌놈 같기도 하다. 김뻑국이라는 이름은 방송국 데뷔 시절 ‘뻑국 뻑뻑국’이라는 소리를 잘 내서 그렇게 됐다고 말한다. 본명은 김진환이다. 김씨는 2010년 자신의 예술인생 50년을 맞아 남산 국악당에서 화려한 공연무대를 가졌다. 이때 각계 인사들이 참여해 한마디씩 덕담을 건넸다. 단국대 명예교수인 서한범 문학박사는 “김뻑국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름이 재미있어 그렇기도 하겠지만 그보다 재담과 소리, 몸짓과 연기로 청중을 몰고 다니는 유명세 때문이다. 선생은 익살스러운 말이나 행동, 노래와 춤으로 사람들을 불러모으는 능력이 있어 이 시대의 마지막 어릿광대라는 이름이 잘 어울리는 분이다”라고 했다. 그랬다. 어린 시절 피리의 명인 이충선을 따라다니면서 굿당의 대감놀이를 배웠고 김윤심의 재담과 소리를 익히기도 했으며 최경명에게는 장구와 피리, 1960년도에는 이창배 문하에서 경기민요를 배웠다. 그러면서 김뻑국만의 독특한 스타일의 영역을 개척하면서 많은 국악인들의 앞날을 열어주기도 했다. 꿈은 무엇일까. “일본에는 재담이나 만담 문화재들이 많은데 우리나라에는 한 명도 없습니다. 꼭 인간문화재가 아니더라도 ‘명예문화재’라는 증서 하나라도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재담을 배우려는 제자들이 없는 게 안타깝습니다.” 그러면서 노래를 한다. ‘만나보세~만나보세~어머님 아버님 앞마당에서 만나보세~얼쑤.’ 팔순에 눈을 감고 장구 치고 북 치며 달밤에 외로이 홀로 앉아 있다. 선임기자 km@seoul.co.kr >>김뻑국은 1934년 일본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김진환이다. 11살 때 광복을 맞아 아버지 출생지인 충남 보령에 정착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서울에서 정처 없이 떠돌아 다니다가 국악인 이충선씨를 만나 머슴살이를 했다. 6·25전쟁을 겪은 뒤 국악인 최경명씨를 만나 피리와 배뱅이소리를 배웠다. 인천과 강화도에서 약장수를 하던 시절 배뱅이굿을 하는 이은관씨를 만나 40년을 같이 지냈다. 1960년 이창배의 문하에 입문해 본격적으로 경기민요를 배우게 된다. 이정업의 장구, 김천흥의 춤, 박동진의 판소리, 박해일의 재담을 배우면서 독자적인 영역을 개척한다. 1974년 남북적십자회담 환영공연을 했으며 1975년 ‘김뻑국예술단’을 창단했다. 최근에는 정선아리랑 연주법을 독창적인 기법으로 개발했고 우리 아리랑을 영어, 중국어, 일본어로 부르면서 세계화에 앞장서고 있다. 현재 ‘김뻑국예술단’의 단장이다.
  • [케이블 하이라이트]

    ■만두명가(올리브 밤 8시) ‘손끝으로 빚는 이야기’를 콘셉트로 만두에 담긴 우리의 삶과 역사, 지역과 계절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만두의 맛과 의미를 재발견한다. 첫 회에서는 만두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만두소에 대해 알아본다. 350년 전통의 광주 이씨 종가 무만두, 6·25전쟁 때 서민들의 배를 채워준 부산 완당 등 전국 각지의 특별한 만두를 만나본다. ■20세기 미소년(QTV 밤 11시) 가수 은지원과 문희준, 천명훈, 토니안, 데니안이 프로그램을 통해 드라마에 도전한다. 한국 힙합의 대부로 꼽히는 타이거JK가 카메오로 출연해 드라마를 빛낸다. 카페의 바리스타 역으로 깜짝 출연한 타이거JK는 캐릭터를 완벽히 소화해 ‘핫젝갓알지’ 멤버들을 포함해 현장에 있는 제작진의 찬사를 받았다. ■프리미엄 컬렉션, 별별 동물 이야기(내셔널지오그래픽 밤 11시) 동물의 세계에도 돌연변이와 기형이 존재한다. 낯선 질병들을 극복하며 살아가는 동물들과 자연, 유전과학의 한계를 테스트하는 다양한 실험들, 특이하고 충격적인 생김새를 한 동물들의 외모 대결 등이 펼쳐진다. 또한 동물의 왕국에서 자연 도태의 비밀이 무엇인지도 알아본다. ■닥터 제이슨(OCN 밤 11시) 제이슨의 치료를 돕던 동료 의사는 치료 방법이 담긴 노트를 남기고, 제이슨의 또 다른 자아 이언을 피해 떠난다. 제이슨은 병원을 그만두려 하지만 때마침 치료법이 담긴 노트가 그에게 배달된다. 한편 뇌종양이 발견된 제이슨에 대한 수술이 준비되고 그의 또 다른 자아 이언은 뇌종양이 아닌 자신을 제거하려는 수술이라고 믿는다. ■블러디 페이스-연쇄살인마(FX 밤 11시) 라나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온 올리버는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뒤 고아원과 위탁 가정을 전전하며 따뜻한 사랑을 받지 못했던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해 준다. 의대생이 돼서야 자신에게 부족했던 것이 다른 사람과의 스킨십이었음을 깨달은 올리버. 그는 자신의 어머니가 돼 줄 만한 여자를 죽여 왔다고 고백한다. ■명탐정 코난(애니맥스 오후 6시) 코난과 미란 그리고 유명한 탐정은 두루미 서식지를 찾아 멀리 강원도에 간다. 그곳에서 두루미에게 특별한 애정을 쏟는 황인구라는 노인을 만나 그의 집에서 하룻밤 신세를 진다. 세 사람은 황인구의 후배 권지섭에게 황인구가 자동차 판매 회사 사장이었으며 자신의 전 재산을 야생동물 보호에 기부하기로 했다는 얘기를 듣게 된다.
  • [당신의 책]

    [당신의 책]

    금서의 역사(베르너 풀트 지음, 송소민 옮김, 시공사 펴냄) 책이 발명된 이래 끈질기게 존재해 온 책에 대한 억압의 역사를 다뤘다. 애인이 죽자 그 무덤에 사랑의 시를 함께 묻어버리는 식으로 ‘자기검열’을 한 시인 겸 화가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 주인공이 불륜을 저지른 후 예전보다 더 아름다워졌다고 묘사했다는 이유로 금지된 ‘보바리 부인’, 열여섯 살 소년이 우연히 만난 창녀에게 동정을 잃었다는 묘사가 문제가 된 ‘호밀밭의 파수꾼’ 등 고대부터 현대까지 인간의 두려움이 몰살시킨 금지된 책들의 역사가 촘촘하게 소개된다. 저자는 “금서의 역사는 단순히 억압의 사슬, 파괴된 작품과 살해된 작가에 대한 이야기일 뿐 아니라 권력에 대항해 언어가 거둔 승리의 연대기이기도 하다”고 썼다. 408쪽. 2만원. 이야기 인문학(조승연 지음, 김영사온 펴냄) ‘글래머’(glamour)는 흔히 육감적인 몸매의 여성을 일컫는 말로 쓰이지만 미국에선 ‘고급스러운 여성’을 의미한다. 고대 로마시대에 글래머러스한 사람은 ‘그래머’(grammar) 즉, 문법을 철저히 공부한 사람을 뜻했기 때문이다. 럭셔리(luxury)는 ‘뼈가 삐었다’는 의미의 라틴어 ‘럭셔스‘(luxus)에서 비롯됐다. 무절제한 생활로 가치관이 삐딱한 이들을 ‘럭셔스한 사람’이라고 불렀는데 , 17세기 프랑스에서 ‘절제없는 인생’을 부러워하는 풍조가 일면서 럭셔리라는 단어가 고급이란 뜻으로 바뀌었다. 책에는 이처럼 단어 하나에서 건져 올린 흥미로운 인문학 이야기가 풍부하게 소개돼 있다. 영어와 프랑스어, 이탈리어 등 7개 국어에 능한 저자는 욕망과 유혹, 사랑과 가족, 전쟁과 계급 등 인문학이 다루는 모든 범위에 걸쳐 시공간을 관통하는 다채로운 이야기를 펼쳐낸다. 340쪽. 1만 5000원. 중국 철학이 등장할 때가 되었는가?(리쩌허우 지음, 류쉬위안 외 엮음, 이유진 옮김, 글항아리 펴냄) 살아있는 중국 사상계의 거목으로 불리는 리쩌허우(李澤厚)의 신작이다. 책 대부분은 작가이자 평론가인 류쉬위안이 2010년 10월 리쩌허우를 찾아가 세 차례에 걸쳐 그의 학문 역정과 철학 체계에 대해 좌담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중국근대사상사론’ ‘미의 역정’ ‘역사본체론’ 등 중국 사상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저작으로 유명한 리쩌허우는 현대 문명에서 여러 한계를 드러내는 서양 사상의 새로운 탈출구를 중국 전통에서 찾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또 세계 주류 철학에서 부족한 점과 중국 사상 전통에서 필요한 점 등을 파악해 둘의 빈자리를 메우는 사상 체계인 ‘정(情) 본체’를 제시했다. 이 밖에 베이징대 철학과에 입학하게 된 과정, 대표작 ‘비판철학의 비판’을 출간할 때 출판사와 빚은 갈등 등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전한다. 356쪽. 1만 8000원. 나폴레옹도 모르는 한·프랑스 이야기(정상천 지음, 국학자료원 펴냄) 전직 외교관인 저자는 프랑스 외교 사료에 근거해 한국과 프랑스 간 숨겨진 외교 비사를 들려준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프랑스 정부에 서한을 보낸 안동군수 권재중 이야기, 동양척식주식회사가 파리주식시장에서 채권을 발행한 사연, 박정희 대통령이 큰딸 근혜에게 프랑스어를 배우도록 권유했다는 기록 등 알려지지 않았던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처음으로 공개된다. 또한 일제 강점기에 프랑스 정부가 한때 상해 프랑스 조계지에 있는 독립운동가 200여명을 모두 프랑스로 소개시키는 방안을 고려했다는 사실을 비롯해 프랑스의 6·25전쟁 참전, 해방 이후 한·불 관계 등 140년에 걸친 양국 관계의 중요한 기록들을 가감 없이 담았다. 프랑스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은 저자는 상공부, 외교통상부를 거쳐 통일부에서 근무하고 있다. 372쪽. 2만 7000원.
  • 野, 박승춘 보훈처장 강연 동영상 공개… “대선개입 증거”

    野, 박승춘 보훈처장 강연 동영상 공개… “대선개입 증거”

    31일 국회 정무위 국정감사는 박승춘 국가보훈처장의 대선 개입 의혹이 다시 불거지면서 파행을 빚는 등 진통을 겪었다. 박 처장이 정치적 중립을 지키지 못하고 박근혜 대통령을 지지하는 내용의 안보교육을 했는지가 쟁점이 됐다. 야당 의원들은 이날 국감이 시작되자마자 추궁을 시작했다. 강기정 민주당 의원은 박 처장이 강연하는 모습이 담긴 동영상을 공개하며 “대선 개입의 증거”라고 제시했다. 동영상에는 박 처장이 지난해 1월 보수단체 모임 강연에서 “한·미동맹을 중시하는 지도자를 선택할 것인가. 남북공조를 중시하는 지도자를 선택할 것인가”라고 말하는 모습과 지난 1월 “2년 동안 보훈처가 이념 대결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선제 보훈 정책을 추진하는 업무를 했다”고 말하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강 의원은 “보훈처가 이념 대결을 하는 조직인가”라고 물었고 박 처장은 “보훈처는 이념 대결에서 승리할 수 있는 업무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맞받았다. 그러자 김기식 민주당 의원이 “박 처장이 (대선에 개입했다는) 속내를 얘기했다”고 몰아세웠다. 이종걸 민주당 의원은 박 처장이 잇따른 대선 개입 추궁에 “국민이 판단할 것이다”라고 발언한 것을 문제 삼아 “박 처장이 정치 행위를 하고 있다”면서 “박 처장을 국가보훈법·국가공무원법 위반 혐의로 고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원진 새누리당 의원도 “보훈처장의 답변 태도는 문제가 심각하다”면서 “의원이 국민의 대표인데 여야 의원도 설득 못 하고 국민이 뭘 판단하나. 우리가 ‘핫바지’인가”라면서 “그럼 우리 의원들은 다 빼놓고 국민한테 나가서 호소하라”고 질책했다. 그러나 조 의원은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6년 보훈교육연구원에서 ‘6·25전쟁은 침략전쟁이 아니라 통일전쟁으로 봐야 한다’, ‘미군이 철수해야 한반도 평화통일이 온다’고 강연했는데 이는 대한민국 정체성을 흔드는 일”이라고 반격했다.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김정훈 정무위원장은 “도저히 안 되겠다”며 감사 중지를 선언했다. 파행 동안 민주당 의원들은 기자회견을 열어 “보훈처의 선거 개입은 중대 범죄”라며 박 처장의 ‘퇴출’을 주장했다. 야당은 지난 28일 정홍원 국무총리의 대국민 담화도 도마에 올렸다. 김동연 국무조정실장을 상대로 민병두 민주당 의원은 “청와대와 사전 협의와 조율을 거친 ‘대리 담화’가 확실한데 청와대가 이를 숨기고 있다”고 주장했다. 송호창 무소속 의원도 “대독·남탓·대국민 협박·대국민 기만담화”라고 꼬집었다. 국감이 점점 정치 공방으로 흐르자 김 위원장은 야당의원들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김 위원장은 “대선 끝난 지가 언젠데 계속 대선을 거론하느냐”면서 “그 문제는 양당 합의로 특위를 구성해 다루고 상임위에서는 현안 질의만 하자”고 말했다. 야당 의원들은 “편파적”이라며 반발했고, 김 위원장은 “뭐가 편파적이냐. 위원장으로서 소회도 말 못하나”라고 소리쳤다. 이영준 기자 apple@seoul.co.kr
  • 전쟁의 상흔 간직한 포천 벙커 등 근대유산 8건 문화재로 등록 예고

    전쟁의 상흔 간직한 포천 벙커 등 근대유산 8건 문화재로 등록 예고

    문화재청은 경기도 포천 방어벙커 등 근대유산 8건을 문화재로 등록 예고했다고 31일 밝혔다. 포천 방어벙커와 함께 문화재 등록을 앞둔 근대 유산은 만경강 철교, 전북 완주 옛 삼례양곡창고, 대구 삼덕초등학교 옛 관사, 경남 진주 배영초등학교 옛 본관, 서울 경기상고 본관, 서울 기상관측소 본관, 서울 흥천사 대방 등이다. 포천 방어벙커는 원형 철근을 약 20㎝ 간격으로 배치해 90㎝ 안팎의 두께를 지닌 철근콘크리트 벽체로 만든 군사 시설이다. 남북 간 군사대치가 심화된 1948년 남측에서 구축했다. 벙커에는 6·25전쟁 당시 교전 흔적도 남아 있다. 만경강 철교는 스틸거더 형식의 철도교량으로 상부 구조와 교각 및 교대(교량 양쪽 끝 하부구조)가 건립 당시 국내에서 두 번째로 긴 교량이었다. 만경평야의 농산물 반출을 위해 1912년 전북경편철도주식회사가 개통했다. 애초 이리~전주 간 경편철도를 개통하면서 나무다리로 만들었지만 1927년 경편철도주식회사의 국유화와 함께 일반철도로 폭을 넓히면서 1928년 철교로 바뀌었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역사교과서 7종 ‘수정의 딜레마’

    교학사를 제외한 역사교과서 7종의 집필자 협의회가 24일 자체 수정안에 대한 입장을 정리해 발표하겠다고 한 가운데 이들의 자체 수정안이 교육부의 수정·권고안과 일치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 교육부와의 충돌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여기에 일부 출판사들이 집필진 자체 수정안 대신 교육부의 권고를 따를 조짐도 보이고 있어 출판사들과 집필진 간 마찰도 예상된다. 교육부가 유독 교학사판에 대해서만 실제 사실 오류와 왜곡 사례에 비해 수정·보완 항목을 대폭 축소했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앞서 교육부는 21일 역사교과서 7종에 대해 모두 578건의 수정 권고를 내놓았다. 교과서별로 평균 82건에 달하는 오류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맞춤법이나 연표가 1~2년 차로 틀린 게 대부분이다. ‘1/2’이란 분수 표기를 ‘2분의1’로 풀어서 쓰라는 식의 불필요해 보이는 수정 권고도 있다. 대부분의 권고가 집필자로서 수정에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준인 셈이다. 하지만 교육부 수정 권고 사항 중에는 ‘사관의 수정’을 유도하는 듯한 항목도 포함돼 있다. 해방 이후 ‘한반도에 두 개의 정부가 들어서다’라는 단원을 둔 금성출판사를 상대로 교육부가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는 대한민국이란 집필 기준을 준수해야 한다”며 수정 권고를 내린 게 대표적이다. 마찬가지로 6·25전쟁 발발 이전 상황을 묘사하며 ‘남북은 각각 북진 통일과 적화 통일을 내세우며 38도선 부근에서 잦은 무력 충돌을 빚고 있었다’고 쓴 미래엔에 대해 교육부는 “6·25 발발 책임이 남북 모두에게 있다는 오해를 줄 수 있으니 삭제하라”고 권고했다. 지적을 받은 교과서들이 남과 북을 개별 당사자로 취급해 양쪽 입장을 대등하게 다루려고 한 반면 교육부 권고에는 북한을 주적으로 보는 시각이 반영돼 있다. 교육부가 출판사에 수정 명령 등 행정제재를 가하면 출판사와 집필진 간 갈등으로 번질 우려도 있다. 2008년 집필진 동의 없이 교육부의 명령대로 교과서를 수정한 금성출판사를 상대로 제기된 소송에서는 지난 4월 출판사에 책임이 없다는 판결이 내려진 바 있다. 이런 가운데 한국역사연구회와 역사문제연구소, 민족문제연구소, 역사학연구소 등 진보 성향의 4개 역사 단체는 23일 교학사 교과서에 담긴 역사적 사실관계 오류와 편파 해석이 최소 453건에 달한다면서 “교육부가 발표한 251건의 수정·보완 사항을 보면 교학사 책을 비호하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다”고 주장했다. 이 단체들은 “우리가 교학사 책에 대해 지적한 것은 무수한 사실 오류와 의도적인 왜곡이었다”면서 “그런데 교육부는 전자 일부를 수정·보완 사항으로 담았고 후자는 방치했다”고 강조했다. 한편,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 소속 야당 의원들은 23일 오후 교육부를 항의 방문하고 서남수 장관에게 교학사 교과서 채점 결과표와 교사 집필자의 내용증명 등의 자료를 제출하라고 촉구했다. 8종 교과서 수정·보완을 위한 전문가 자문위원회의 명단 및 구성 현황과 회의록 등도 요구했다. 야당 의원들은 이날 항의 방문에서 “서 장관이 사실관계 및 표기 오류만을 수정하겠다고 밝혀 놓고 사관 기술까지 수정할 것을 요구했다”며 26일까지 요구 사항에 대한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힐 것을 주장했다. 공개 여부와 내용에 따라 해임건의안을 제출하는 등 책임을 묻겠다고도 했다. 야당 의원들의 항의 방문은 오전에 여당 동의 없이 단독으로 추진한 교문위 긴급 현안 질의 불발에 따른 것이다. 홍희경 기자 saloo@seoul.co.kr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이순녀 기자 coral@seoul.co.kr
  • 홀몸노인 깜짝 파티… 가뭄에 단비 같은 사랑

    홀몸노인 깜짝 파티… 가뭄에 단비 같은 사랑

    “초를 너무 많이 꽂았다.” “그래, 그 촛불 다 불려다가 숨차서 힘들어하시겠다.” “그럼 큰 거 다섯 개만 꽂을까.” 23일 오전 11시 성동구 금호동의 한 다세대 주택. ‘금단비’ 회원들이 조옥엽(86) 할머니의 깜짝 생일 파티를 준비 중이다. 맛난 고구마 케이크를 준비했는데 나이대로 초를 잔뜩 꽂아 놓으니 케이크가 거북선 모양이 되어 버렸다. 보다 못해 초를 대충 덜어냈다. 한번에 훅 불어 끌 수 있는 정도만 남겼다. 케이크를 들고 할머니가 계신 안방으로 들이닥치니 할머니는 어쩔 줄 모르신다. “아이고, 아이고, 이런 걸 다, 아이고, 아이고, 이거 나 참.” 함박웃음과 함께 나오는 소리는 계속 감탄사다. 곧 할머니 머리 위에 고깔모자가 쓰이더니 회원들이 다 함께 “생일 축하합니다” 노래를 부른다. 즐거운 날이니 템포는 패밀리레스토랑 수준이다. 안방엔 빛바랜 옛 잔치 사진이 걸려 있다. 단정하니 앉아서는 잔칫상을 받는 모습이다. 이건 언제적이냐 여쭤 보니 “영감 환갑 때니까 30년도 넘은 거여”란다. 남편을 일찍 잃은 데다 6·25전쟁 때 태어나는 바람에 출생신고도 제대로 못한 아들도 일찍 보냈다. 부양할 사람이 없어 생일은 늘 쓸쓸하다. 저 옛 잔치 뒤로 생일상을 받아보셨을까. “아이고 내가 언제 이런 상을…. 더구나 이런 케이크 같은 거 가지고 생일상 받는 건 태어나 처음이지.” 금단비의 독거노인 깜짝 생일 파티가 화제다. 금단비는 성동구 금호1가동 복지 직원들이 꾸린 복지동아리. 지난 7월 현장 복지 강화 차원에서 성동구는 마장동, 금호1가동, 성수1가1동에다 기존의 복지팀 외에 복지지원팀을 시범적으로 만들도록 했다. 고재득 구청장은 “주민 목소리를 듣고 능동적으로 찾아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조치”라고 설명했다. 금호1가동에선 아예 직원 7명이 자발적으로 ‘금단비’를 만들었다. 나정애 동장은 “다른 업무도 그렇지만 복지 업무는 담당 직원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효과가 천차만별인데 적극 나서주는 직원들이 고맙다”고 말했다. 금단비가 시작한 첫 이벤트가 독거노인들 깜짝 생일 파티다. 홍명안 금호1가동 복지팀장은 “생일인데도 찬방에서 홀로 미역국을 드시는 분들이 안타까워 케이크로 간단히 축하해 드리고 기념사진 한 장 찍어 드릴 뿐인데도 다들 좋아하셔서 오히려 저희가 고마울 정도”라며 웃었다. 때마침 전화벨이 울렸다. 췌장암으로 고생하던 할머니 한 분과 연락이 안 된단다. 홍 팀장은 얼른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른 분들이 노인들이세요. 금단비는 그분들을 한 번쯤 웃게 해 드리자는 겁니다.” 조태성 기자 cho1904@seoul.co.kr
  • [김문이 만난사람] 6·25 북한군 남침, 9·28 서울 수복 1보 방송한 전설의 아나운서 위진록

    [김문이 만난사람] 6·25 북한군 남침, 9·28 서울 수복 1보 방송한 전설의 아나운서 위진록

    [상황 1] 1950년 6월 25일 오전 7시. “임시 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임시 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새벽 북한 공산군은 38선 전역에 걸쳐서 전면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안심하십시오. 우리 국군이 건재합니다. 거듭 말씀드리겠습니다….” [상황 2] 1950년 9월 28일 일몰 직전. “여기는 서울중앙방송국입니다. 여기는 서울중앙방송국입니다. 대한민국 국민 여러분, 그리고 서울시민 여러분, 오늘 새벽 유엔군과 대한민국 국군은 대한민국 수도 서울을 완전히 탈환하고 패주하는 공산군을 추격하며 북진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자유를 되찾았습니다….” 6·25전쟁 당시 북한군의 남침과 서울 수복의 소식을 가장 먼저 알린 제1성은 이렇게 다급했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당시 KBS 아나운서 위진록(85)씨. 북한군이 점령한 서울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전쟁의 현장을 생생하게 전달했다. 또한 1950년 11월 도쿄에 자리한 유엔군총사령부(VUNC) 아나운서 생활을 하면서 우리나라 격동의 현대사의 물줄기와 함께 파란만장한 삶의 길을 걸었다. 그의 이력을 얼핏 들여다봐도 알 수 있다. 일제 강점기인 1928년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나 가난하고 열악한 환경에서 성장한다. 월남한 뒤 경성역(서울역)에서 역부로 근무하다가 8·15 해방을 맞이하고 만 19세때 서울중앙방송국(KBS)의 아나운서 시험에 합격한 이후 대한민국 정부수립 초창기의 현장 일선에서 활약했다. 김구 선생 장례식 실황중계, 이승만 대통령의 수행기자 등 현대사의 한복판을 지켰던 것이다. 현재 미국 LA에 거주하고 있는 위씨가 잠시 귀국했다. 자서전 ‘고향이 어디십니까’의 출판기념회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지난 15일 그를 만났다. 나이보다 훨씬 젊어보인다고 인사를 건네자 “규칙적인 생활과 생각, 그리고 책을 읽고 독후감을 꾸준히 기록한다. 아마 늙지 않는 비결인 것 같다”면서 웃는다. 주로 어떤 책을 읽느냐는 질문에 “번역물도 읽고 영어와 일어로 된 책도 읽는다”고 대답한다. 그는 평소 메모하는 습관이 있다. 최근 펴낸 자서전도 그동안 열심히 메모해둔 결과물이다. 그는 불혹을 넘긴 나이에 미국 이민길에 올라 LA 해변에서 햄버거 장사를 하면서 고군분투하며 살았다. 지금은 현지에서 수필가, 방송인, 클래식 음악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그동안 수필집과 음악 에세이집을 출간하기도 했다. 어떻게 해서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됐을까. 한창 전쟁중인 1950년 11월 일본 도쿄와 오키나와에 있는 유엔군총사령부 방송 아나운서로 가게 된 배경부터 설명한다. “연희송신소(당시 고양군 연희면)에서 기거하면서 방송을 할 때였습니다. 하루는 도쿄의 맥아더사령부 심리작전국 방송담당자 매튜 중령을 만났습니다. 그는 제 방송을 자주 듣는 편이며 2차대전때 종군 아나운서로 이름을 날린 CBS의 월터 크롱가이트와 목소리가 아주 닮았다고 했습니다. 이어 ‘한국전쟁도 이제 끝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하면서 한달정도 도쿄에 가서 방송일을 할 생각이 없느냐고 제안하더군요. 생각할 것도 없이 그 자리에서 좋다고 대답했지요.” 맥아더 사령부의 심리작전국은 6·25전쟁이 일어나자마자 도쿄에 유엔군총사령부 방송국을 창설하고 NHK 방송망을 통해 이미 방송을 시작하고 있던 터였다. 남한과 북한으로 보내는 별도의 송신소가 작동이 됐음은 물론이다. 방송은 NHK 본사의 여러 스튜디오를 필요에 따라 사용했다. 방송은 전쟁에 관한 뉴스가 최우선이었고 미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소식, 스탈린 독재하의 소련의 내막, 김일성이 소련에 이용당하고 있다는 해설 등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또한 방송원고는 모두 미국인이 작성한 것을 우리말로 번역했다. “서울을 떠난 지 2주도 채 지나지 않아 아군 수중에 있던 평양에 공산군이 다시 들어왔습니다. 그러자 평양시민들이 대동강 철교를 더듬으며 필사적으로 피난하는 모습을 보도하게 됩니다. 그리고 흥남 지역에서 미 해병1사단의 해상탈출 등을 보도하면서 한달 예정이었던 체류기간이 무기한 연기 됐지요. 그렇게 도쿄에서 8년을 보낸 뒤 오키나와 사령부로 옮겨 14년을 더 근무하고 자식들 교육을 위해 식구들과 미국 이민을 가게 됐습니다.” 그는 오키나와 시절을 회고하면서 베트남 전쟁과 연관된 일화를 떠올린다. 1968년 가을 한달동안 종군기자로 베트남에 파견된다. 이때 비둘기 부대가 주둔한 나트랑 외에 맹호와 청룡부대 주둔지 등을 두루 방문했고 사이공에서는 주월한국군 채명신 사령관과 수차례 만나기도 했다. 또 베트남 전쟁이 확전되면서 한국군의 파병은 계속됐다. 자연스럽게 오키나와는 베트남에 주둔해 있는 한국군을 위해 위문차 오가는 연예인들이 자주 들르는 곳이 됐다. 이때 길옥윤과 패티 김 등 여러 연예인들과 친분을 맺기도 했다. 얘기를 다시 ‘6·25 남침 제1성’으로 돌렸다. 방송국장의 지시로 38선상(경의선의 한 중간역)에 있는 여현역에 도착한 것은 1950년 6월 10일이었다. “민심을 살피기 위해 38선이 보이는 지점에 중계차를 세우고 38선을 오가는 사람들과 인터뷰를 진행하는 일을 했지요. 특이 동향은 없었습니다. 그러던 6월 24일 밤 저는 아나운서실 숙직을 맡고 있었습니다. 후배 아나운서와 11시에 야간방송을 끝내고 다음날 아침 방송순서를 점검하고 숙직실로 쓰고 있는 제2 스튜디오로 가 잠을 청했습니다. 그런데 퉁탕거리는 소리에 눈을 뜬 것은 새벽 5시 10분이었습니다. 방송국 수위와 육군대위가 스튜디오에 급히 들어왔던 것이지요.” 육군대위는 종이 한장을 내밀면서 즉시 방송하라고 명령하듯이 말했다. 종이에는 ‘오늘 새벽 북한 공산군이 38선 전역에 걸쳐 공격을 시작했다. 국군은 모두 원대에 복귀하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하지만 방송시작이 6시 30분이고 이렇게 중요한 내용을 상부의 허락 없이 방송할 수 없다고 했다. 잠시후 민재호 방송국장이 국방부 정훈국장에게 확인한 뒤 원고를 급히 작성하고 제1보를 내보냈다고 위씨는 회고했다. “서울수복이 됐는데도 그해 6월 말에 이미 행방불명되거나 처형됐다고 알려진 선배 아나운서들의 소식은 여전히 알 수 없었습니다. 평양에서 온 방송요원을 상대로 열성적으로 도운 아나운서들은 그들과 함께 도주하듯이 북쪽으로 갔고 자백서를 쓰고 포섭당해 그들 밑에서 방송한 아나운서들은 자취를 감춘 상태였으니까요.” 필사적으로 숨어 다니며 살아남은 그는 동료와 선배들이 하던 일을 도맡아 하는 등 한동안 연희송신소에서 기거하면서 열심히 방송을 하게 된다. 이국땅에서 60여년을 살고 있지만 그 기억의 편린까지 여전히 생생하게 남아 있는 까닭이기도 하다. 그는 가난한 집안의 2남 9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군청 토지측량기사로 일하던 아버지는 42세때 늑막염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 그리고 여동생들과 평안북도 선천으로 이사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가난 때문에 직업전선에 뛰어들 생각이었지만 돈이 없어도 학교에 갈 수 있다는 말에 평양사범학교에 입학했다. 이때 좋은 목소리와 뛰어난 노래 실력을 인정받아 합창과 독창에서 두각을 나타냈으며 학교 브라스 밴드에서 트럼본 연주를 했다. 아울러 문학서적에 심취했다. 그러나 사춘기에 접어들자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는 등 학교생활에서 일탈, 모란봉 주위를 쏘다녔다. 결국 학교에서 담배를 피우다 발각돼 3학년때 퇴학당했다. 이후 형이 있는 남신의주역으로 가서 역부로 생활한다. 톨스토이와 헤르만 헤세 등의 문학서적은 꾸준히 손에서 놓지 않았다. 얼마 후 어머니와 누이가 살고 있는 서울에 온 그는 낙원동 근처의 한 회사에서 사환으로 일하다 경성역의 역부로 취직한다. 이어 해방이 되면서 누이가 종로2가 근처에 술집을 열자 외상값 받으러 다니는 일을 하게 된다. 1947년 서울중앙방송국에서 ‘방송극 연구생’ 모집공고를 보고 응시해 합격한다. 그후 2주일 만에 방송드라마에 출연한다. 당시 동기생으로는 장민호, 민구, 송영란, 윤길숙 등이었다. 같은 해 아나운서 시험에 응시하면서 아나운서의 길을 걸었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그는 “20세기 격동기를 한 마리 늑대처럼 멀리에서, 가까이에서 조국을 바라보며 살아왔다. 아직도 내 마음의 눈물 줄기에는 희망의 꽃망울이 살아 있다”면서 ‘백년동안의 고독’을 쓴 남미의 작가 마르케스와 비슷한 삶을 살았다고 말한다. 또한 유대교 랍비이자 시인인 사무엘 울만의 말처럼 “청춘이라고 하는 것은 인생의 어떤 기간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가 아니냐”라고 했다. 선임기자 km@seoul.co.kr >>위진록은 1928년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입학하던 해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개성, 평북 선천 등을 전전하며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1940년 평양사범학교에 입학하고 1942년 3학년때 중퇴했다. 남신의주역 역부, 서울의 한인회사, 일본광고회사 대리점 등의 사환을 거쳐 서울역 역부로 일하면서 1945년 해방을 맞았다. 1947년 KBS 제1회 ‘방송극 연구생’ 모집에 합격했다. 장민호, 민구, 조남사 등과 라디오 드라마에 출연했다. 같은 해 9월 KBS 아나운서 모집에 합격해 만 19세로 최연소 아나운서 기록을 세운다. 1948년 KBS 제1회 방송극 대본 공모에 입선했으며 김구 선생의 장례식 중계 등 격동기의 방송 일선에서 활약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 남침, 9월 28일 서울수복의 제1보를 방송한 아나운서로 기록에 남아 있다. 그해 11월 일본 도쿄의 유엔군총사령부방송(VUNC)에 파견돼 22년동안 도쿄와 오키나와에서 근무하다 미국으로 이민했다. LA에서 햄버거 장사 10년, 서점 등을 경영하면서 동네 신문을 발행했다. 재미 방송인협회 고문 등을 지냈다. 주요 저서로는 수필집 ‘하이! 미스터 위’(1979년), ‘잃어버린 노래’(1993년), ‘낙타의 속눈썹’(1997년), ‘위진록의 커먼센스’(1999년), ‘클래식, 내마음의 발전소’(2011년) 등이 있다.
  • 韓·폴란드 정상회담… 유럽 세일즈외교 신호탄

    韓·폴란드 정상회담… 유럽 세일즈외교 신호탄

    박근혜 대통령은 22일 우리나라를 국빈 방문한 브로니스와프 코모로프스키 폴란드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양국이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맺기로 합의했다. 우리 기술로 개발한 초음속 훈련기인 T50과 원전 수출 등에 ‘청신호’가 켜질지 주목된다. 또한 새 정부 들어 유럽 정상의 국빈 방문은 처음이다. 다음 달 초 영국, 프랑스, 벨기에 순방을 앞두고 유럽을 상대로 ‘세일즈 외교’와 ‘유라시아 이니셔티브(구상)’의 기반을 다지는 신호탄으로 해석된다. 박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코모로프스키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한 후 가진 공동 기자회견에서 “지난 10년간의 실질 협력 성과를 토대로 양국 관계를 전 분야에 걸쳐 포괄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맺기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양국 정상은 1989년 수교에 이어 2004년 수립된 ‘미래지향적 동반자 관계’를 한 단계 격상시킨 것이다. 우리나라가 중국에 이어 아시아 국가로는 두 번째로 폴란드와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구축함에 따라 우리 기업의 현지 진출에도 도움이 될 전망이다. 양국 정상은 ‘국방협력협정’과 ‘이중과세방지협정 개정의정서’에도 서명했다. 폴란드는 현재 고등훈련기와 잠수함 등 국방 전력 강화 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만큼 이번 국방협력협정 체결을 계기로 방산 수출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기대된다. 주철기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은 기자들과 만나 “T50 고등훈련기 도입 규모는 4억∼5억 달러 수준으로, 아직 협상이 끝난 것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박 대통령은 원전 분야에서의 협력도 강조했다. 앞서 폴란드 정부는 2009년 원전 2기 건설 계획을 발표했다. 이후 1기는 프랑스가 수주했고, 나머지 1기를 놓고 우리나라와 일본 등이 치열한 수주 경쟁을 벌이고 있어 이번 정상회담이 원전 수출로 이어질지 주목된다. 박 대통령은 또 “폴란드가 중유럽 지역 내 한국의 최대 교역·투자 대상국”이라면서 현지에 진출한 우리 기업에 대한 관심과 지원을 당부했다. 이에 코모로프스키 대통령은 “한국 기업이 폴란드 경제 발전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면서 투자 여건 개선을 약속했다. 이와 함께 박 대통령은 “유라시아의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아보고자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를 제안했지만 한반도에서 북한의 핵개발과 도발은 지장이 될 수 있다”면서 폴란드의 적극적인 역할을 요청했다. 이에 코모로프스키 대통령은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와 동북아 평화협력구상을 적극 지지한다”고 답했다. 폴란드는 6·25전쟁 정전 이후 60년간 중립국감독위원회(NNSC) 일원으로 활동하고 유럽연합(EU)의 대북 정책 수립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다. 장세훈 기자 shjang@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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