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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복 후 국민이 생각하는 역사적 사건 1위는?

    광복 후 국민이 생각하는 역사적 사건 1위는 무얼까. 1950년 6·25전쟁 발발(72.2%)이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최근 광복 70주년 특별사진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광복 이후 가장 중요한 역사적 사건을 꼽고자 국민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했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국사편찬위원회 자료를 토대로 지난 70년간의 역사적 사건 390개를 선정한 뒤 통계전문 기관에 의뢰해 추출한 30개를 제시하고 응답자(성인 남녀 3천16명)가 그중 5개를 선택하는 방식으로 설문 조사는 이뤄졌다. 조사 결과, 국민이 생각하는 역사적 사건은 1950년 6·25전쟁 발발(72.2%)이 1위를 차지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 대회 개최(64.1%)와 1945년 8·15 광복(62.7%)은 각각 2, 3위를 차지했으며,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사망(62.6%)과 2002년 한일 월드컵 대회 개최(62.6%)는 공동 4위에 올랐다. 이어 2014년 세월호 침몰(60.0%),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59.5%), 1993년 금융실명제 시행(58.1%), 1950년 6·25전쟁 인천상륙작전(57.0%), 1945년 38선 남북 분단(56.8%)이 10위 안에 들었다. 그렇다면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몇위 안에 들까. 언론은 설문 조사 결과를 보도했는데 10위가 넘어가는 역사적 사건은 언론 보도에서 볼 수가 없었다. 광복 이후 많은 역사적 사건이 있었지만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기사에 보이지 않았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측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17위(51.7%)를 기록했기 때문에 ‘TOP 10 언론보도’에 눈에 띄지 않았다고 한다. 6·25 전쟁 이후 ‘동족 간 총뿌리를 겨눠’ 최대 희생자를 낸 사건인데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국민 사이에서 제대로 인식되고 평가 받고 있는지 광복 70년을 맞아 역사의 수레바퀴를 다시 돌려본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한국전쟁 최후 방어선 구미 등 낙동강 일원, 방위산업도시 메카로

    한국전쟁 최후 방어선 구미 등 낙동강 일원, 방위산업도시 메카로

    1950년 6·25전쟁 당시 국토 수호의 최후 방어선이었던 경북 낙동강 일원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방위산업도시로 육성된다. 경북도는 구미에 국방신뢰성센터를 유치하고 기존 영천의 항공전자, 김천의 방위 관련 산업, 경주 안강의 탄약 등을 묶는 국방 신뢰성 산업 클러스터 조성 사업을 본격 추진키로 했다고 5일 밝혔다. ●구미에 신뢰성센터 유치 박차 이를 위해 도는 이날 구미시 구미코에서 ‘경북 국방 정보통신기술(ICT) 융합산업 발전전략 세미나’를 개최했다. 김명수 한국신뢰성학회장, 최창곤 전 국방기술품질원장, 하태정 한국기술정책연구원 연구위원 등 국방 관련 전문가와 대학, 연구원, 기업체 관계자 등 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국방 ICT 산업 발전 방향 및 전략 등에 대한 주제 발표와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특히 국방 ICT 관련 대기업과 중소기업 및 기관 60여곳 등 방위산업 활성화를 위한 인프라가 잘 구축된 구미에 경북 국방 클러스터 조성 사업의 핵심인 정부의 국방신뢰성센터 유치를 위한 다양한 방안이 제시됐다. 우선 도는 구미시 등과 공동으로 오는 9월 정부의 국방신뢰성센터 입지 선정을 앞두고 막바지 유치전에 총력을 쏟아야 한다는 것이다. 도와 구미시는 지난달 31일 구미 양포동 9만㎡ 부지에 국방신뢰성시험센터 유치를 위한 제안서를 국방부 국방기술품질원에 제출했다. ●센터 경제적 파급 효과 수천억 국방신뢰성센터는 국방기술품질원이 유도무기, 탄약, 화생방 물자 등 장기 보관하는 무기의 성능 및 기능에 대한 신뢰성을 검증하기 위해 2015~2019년 국비 446억원을 들여 설립하는 군수품 품질보증 전담기관이다. 이곳에는 120여명의 직원이 근무할 예정으로 수천억원의 경제적 파급 효과가 예상된다. 2012년 대잠수함 어뢰인 홍상어와 K2 전차 등에 결함이 발생한 게 설립 배경이 됐다. 이를 위해 도는 구미가 LIG넥스원, 한화, 삼성탈레스 등 대기업 사업장을 포함해 260여개의 방위산업 중소 협력업체가 집적, 국내 유도무기와 탄약 생산의 48.2%를 담당하는 국내 최대 생산기지라는 점을 집중 부각시키고 있다. 신뢰성 센터가 구미에 유치될 경우 지역 방산업체들이 보유한 신뢰성 평가 인력 및 장비, 시설, 노하우 등이 연계돼 엄청난 시너지 효과가 기대된다는 것이다. ●R&D·방위산업 잇는 중심지 또 국방 연구·개발(R&D) 거점과 방위산업 생산거점을 잇는 연결고리로 전국 국방산업 네트워크의 지리적 중심지에 구미가 있다는 점도 강조하고 있다. 우리나라 방위산업벨트는 서울(전략지원)~대전(국방 R&D)~구미(국방전자)~영천(항공전자)~안강(탄약)~창원(화기, 기동)~사천(항공)~거제(함정) 등으로 이어진다. 게다가 구미는 국방기술품질원 국방신뢰성시험센터의 주요 업무인 저장 탄약 신뢰성 평가업무(ASRP), 저장 화생방 물자 신뢰성 평가 업무(CSRP)와 연관된 육군·해군·공군 관련 기관은 물론 국방기술품질원 6개 지역센터의 지리적 중심에 위치해 효율적인 협력 및 협업에 따른 파급 효과가 큰 이점도 지녔다. ●부지 매입비용 월등히 저렴해 특히 신뢰성센터 조성을 위한 부지 매입비용이 다른 유치 경쟁지역보다 월등히 저렴하고 평지와 야산 혼합지역으로 안전이 보장된 시험 여건 구비, 부지 면적의 확장 용이, 지역 균형발전 전략에 부합한다는 점을 들어 구미가 국방신뢰성센터 최적지임을 강조하고 있다. 실례로 3.3㎡당 부지 가격이 구미는 25만원, 대전은 250만원선이다. 도는 신뢰성센터 구미 유치를 계기로 2030년까지 구미지역에 ▲국방 신뢰성 인력 지원센터 ▲민·군 신뢰성 기술지원센터 ▲국방 정보기술(IT) 부품 국산화지원센터 ▲방산기업 신뢰성 시험센터 ▲군 신뢰성 시험센터 ▲대학 및 연구기관 시험센터 등을 건립해 클러스터화할 방침이다. 이인선 경북도 경제부지사는 “6·25전쟁 당시 최대 격전지였던 다부동 전투~영천 전투~안강 전투~포항 전투로 이어진 낙동강 방어선은 조국 수호의 최후 보루였다”면서 “이 일대에 국방신뢰성센터를 유치하고 기존의 집적된 국방산업을 연계 발전시키는 등 권역별 특화된 국방 ICT 생태계를 집중 육성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 부지사는 “1차 계획인 국방신뢰성센터를 반드시 구미에 유치하겠다”고 의욕을 보였다. 대구 김상화 기자 shkim@seoul.co.kr
  • 70년간 끊긴 경원선 기적소리 다시 들린다

    70년간 끊긴 경원선 기적소리 다시 들린다

    남북 분단으로 끊어진 경원선 철도가 70년 만에 남측 구간부터 복원된다. 정부는 5일 오전 11시 철원 백마고지역에서 경원선 남측구간 복원공사에 착수한다고 4일 밝혔다. 경원선은 1914년 8월 개통된 이래 용산∼원산 간 223.7㎞를 운행하며 물자수송 역할을 담당했으나 1945년 남북분단으로 단절됐고 6·25전쟁으로 남북 접경구간이 파괴됐다. ●백마고지~ 월정리역 1차 추진… 남은 구간은 北과 합의 정부는 2012년 11월 경원선 신탄리∼백마고지역(5.6㎞) 구간을 먼저 복원했다. 이번에는 1단계로 백마고지역∼군사분계선(11.7㎞) 복원공사를 확정하고 먼저 백마고지역∼월정리역(9.3㎞) 구간 공사에 착수한다. 다만 비무장지대(DMZ)에 있는 월정리역∼군사분계선(2.4㎞) 2단계 구간은 북한과 합의가 이뤄지고 나면 추진한다. 1·2단계 총건설사업비 1508억원은 전액 남북협력기금으로 지원된다. 경원선 북한 구간은 남북 협의가 이뤄지면 남측에서 자재와 장비를 지원하는 방식으로 복원하게 된다. 정부는 분단 70년을 맞아 통일의 중요성을 재인식하고 유라시아 이니셔티브가 실질적으로 구현될 수 있도록 체계적인 준비 차원에서 경원선 구간 복원을 추진했다. 경원선은 수도권에서 시베리아횡단철도(TSR)를 잇는 최단거리 노선이다. 과거 정부는 2003년 경의선, 2006년 동해선을 복구해 남북 철도망을 이었지만 현재 남북을 오가고 있지는 않다. ●경원선 운행 재개 땐 ‘유라시아 철도망 구축’ 기대 정부는 경원선이 남북 간 운행을 재개하면 러시아를 거쳐 유럽까지 유라시아 철도망이 구축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착공식에는 홍용표 통일부 장관과 유일호 국토교통부 장관, 한민구 국방부 장관, 나경원 국회 외교통일위원장, 최문순 강원도지사, 미·중·일·러 등 외교사절과 실향민을 포함해 200여명이 참석한다. 문경근 기자 mk5227@seoul.co.kr
  • 미국 해병대 박물관에 장진호 기념비

    국가보훈처는 6·25전쟁 당시 미군이 가장 고전했던 전투로 기록된 ‘장진호 전투’의 기념비가 미국 해병대 박물관에 세워진다고 23일 밝혔다. 정전협정 체결 62주년인 오는 27일 미국 버지니아 주 관티코 시의 해병대 박물관에서 열리는 기공식에는 해병대 이등병으로 6·25전쟁에 참전한 스티븐 옴스테드 장군과 리처드 캐리 장군 등 미 참전용사들이 함께하며 최완근 보훈처 차장이 한국 대표로 참석한다. 해병대 박물관에 세워질 기념비는 8각 모양에 약 2m 높이이며 장진호 전투를 상징하는 ‘고토리의 별’ 장식이 올려질 예정이다. 장진호 전투 기념비 건립에는 약 7억원이 소요되고 보훈처는 이 사업에 3억원을 지원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함경남도 장진군 고토리 일대에서 벌어진 장진호 전투는 1950년 11월 26일부터 17일 동안 영하 30~40도의 혹한 속에 미 제1해병사단 1만 5000명이 중공군 7개 사단 12만명의 포위망을 뚫고 함흥으로의 철수에 성공한 작전이다. 강윤혁 기자 yes@seoul.co.kr
  • 한국적 리얼리즘의 대가, 붓으로 민족을 끌어안다

    한국적 리얼리즘의 대가, 붓으로 민족을 끌어안다

    독자적인 주제 의식으로 근대미술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화가 이쾌대(1913~1965)의 대규모 회고전이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22일부터 열린다. 광복 70주년이자 이쾌대 타계 50주기를 맞아 기획된 이번 전시는 ‘거장, 해방의 대서사’라는 제목으로 펼쳐진다. ‘두루마기 입은 자화상’(1940년대)을 비롯한 유화작품들과 유족이 비공개로 소장하고 있던 드로잉 150여점, 잡지표지화, 삽화 등을 망라해 해방기 민족의 운명을 붓으로 끌어안았던 대가의 예술 세계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1913년 경북 칠곡의 부잣집 아들로 태어난 이쾌대는 서울 휘문고보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제국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배웠다. 학창 시절부터 인물화에 관심을 보였으며 일본의 유명 전람회인 ‘니카텐’에서 ‘운명’(1938)으로 입선하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귀국 후에는 이중섭(1916~1956), 최재덕(1916~?) 등 일본 유학파 출신 화가들과 함께 신미술가협회를 결성하고 한국적 감성의 세련된 서양화들을 선보였다. 무조건적인 답습보다는 우리의 현실에 어울리는 한국적 서양화를 모색하고, 해방 후에는 민족 미술이 가야 할 방향을 고민했던 그는 해방의 감격과 역사적 사건을 주제로 한 ‘군상-해방고지’(1948년작)와 같은 대작을 발표하며 화단에 충격을 줬다. 홍익대 강사, 국전 추천 화가 등으로 왕성하게 활동하던 중 발발한 6·25전쟁 당시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하고 있다가 북한국의 선전미술 제작에 가담해야 했고, 이런 이유로 국군 포로수용소에 수감돼 있다가 1953년 북으로 갔다. 1965년 사망한 것으로 전해졌으며 1988년 월북작가 해금 조치에 이은 1991년 신세계미술관의 ‘월북작가 이쾌대전’으로 대중에게 점차 알려져 그의 이름과 작품들이 비로소 빛을 보게 됐다. 이쾌대가 남긴 그림들은 대략 1930년에서 1950년 무렵까지 20여년에 걸쳐 제작됐다. 이 시기는 일제강점기, 해방기 그리고 한국전쟁기로 한국 역사의 비극적 시대와 겹친다. 그는 이 암울한 시대를 딛고 예술혼을 꽃피운 화가로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킨 식민지 시대에 민족의 역사와 전통을 주제로 독자적인 예술 세계를 확립했다. 해방 직후 좌익과 우익이 대립하며 사회 전체가 혼란에 빠졌을 때엔 참았던 숨을 토하듯 대작을 쏟아 냈다. 이번 전시는 휘문고보부터 제국미술학교 재학 시절인 학습기(1929~1937), 귀국 후 신미술가협회를 중심으로 새로운 미술을 시도한 모색기(1938~1944), 해방 이후 탁월한 역량을 기반으로 한국적인 리얼리즘 미술 세계를 구현한 전성기(1945~1953)로 나눠 보여 준다. 또 최초로 공개되는 드로잉, 잡지표지화, 편지, 그리고 각종 유품이 이쾌대의 예술 세계를 한 단계 깊이 이해하는 것을 돕는 징검다리 역할을 할 것이다. 전시는 11월 1일까지.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 [기고] 2015쿠바문화예술축제를 보고/정경원 한국외국어대 중남미연구소장

    [기고] 2015쿠바문화예술축제를 보고/정경원 한국외국어대 중남미연구소장

    지금으로부터 65년 전 한국은 북한과 3년간의 치열한 6·25전쟁을 치렀다. 당시 한국은 쿠바를 포함한 67개 유엔 회원국의 도움으로 북한과 중국의 침공을 물리치고 나라를 지킬 수 있었다. 당시 우방의 병력과 물자 지원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이다. 이후 한국은 전쟁의 잿더미 속에서도 놀라운 경제 발전을 이룩했다. 1998년 외환위기와 2008년 세계적인 금융위기 속에서도 정보기술(IT) 산업을 중심으로 굳건한 성장을 거듭해 연간 무역규모 1조 달러를 달성했다. 이러한 경제성장을 바탕으로 도움을 받던 나라에서 도움을 주는 나라로 변모했다. 외국에 대한 지원은 경제적 측면뿐 아니라 IT 등 산업정책 자문으로 확장되고 있다. 또한 6·25전쟁에 참여했던 참전 용사들을 초청하고 그 후손들에게 한국 유학의 기회를 마련해 줌으로써 고마움을 전하고 있다. 6·25전쟁 당시 쿠바도 279만 달러의 지원금을 보내와 우리를 도왔다. 그들로부터 받은 도움을 우리가 돌려줘야 할 때인데 안타깝게 1960년 단교 이후 쿠바와의 인적 교류가 자유롭지 못한 상황이다. 이제는 단교 이전의 우방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우선 쿠바에는 한인 후손들이 1000명 이상 거주하고 있다. 1921년 멕시코를 거쳐 쿠바 에네켄 농장 노동자로 이주한 우리 선조들의 후손이다. 이들은 2006년 작고한 헤로니모 임 전 동아바나 지역 인민위원장처럼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의 삶을 살고 있다. 다행스러운 일은 한국으로 유학 오는 쿠바 젊은이들도 많지는 않지만 2013년부터 꾸준히 늘고 있다. 경제적으로 양국은 이미 수교 이상의 관계다. 2005년 아바나에 코트라 무역관이 개설된 이후 양국 교역이 급성장해 한국은 중국·베트남에 이어 쿠바의 아시아 3대 교역 대상국이 됐다. 최근에는 문화 교류도 확대되고 있다. 지난 2월 쿠바 수도 아바나에서 ‘한국 문학의 밤’ 행사가 열려 큰 호응을 얻었다. 지난 5월에는 아바나 비엔날레에 초청된 사진작가 한성필씨가 시내 7층 건물 앞면에 국보 제112호 ‘감은사지 3층 석탑’ 사진을 가로 33m 세로 28m의 대형 가림막에 프린트한 작품을 선보여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런가 하면 한류는 쿠바 안방까지 침투했다. ‘내조의 여왕’이 공중파에서 방영되면서 시청률 70%를 넘기며 돌풍을 일으켰고, 이어 ‘아가씨를 부탁해’, ‘시크릿 가든’ 등이 쿠바에서 한국 드라마 붐을 선도했다. 한편 한국에서는 외교부가 2006년부터 쌍방향 문화교류 사업의 일환으로 쿠바문화예술축제를 열고 있다. 올해에는 6월 26일부터 7월 5일까지 ‘누에보 쿠바 재즈콘서트’와 ‘쿠바 현대영화제’로 나뉘어 개최됐다. 특히 예년과 달리 알프레도 루이스 쿠바 문화부 국장이 단장으로 참석해 격을 높였다. 앞으로 한·쿠바 문화예술 교류를 관 주도에서 민간 주도로 바꾸는 것이 과제다. 이렇게 함으로써 민간 차원의 지속적이고 자연스러운 문화 교류와 인식의 공감대가 형성될 것이다. 혼자 가면 빨리 갈 수 있지만 함께 가면 멀리 갈 수 있다는 지혜를 생각하며 양국 관계 변화를 모색할 때가 됐다.
  • “경제성장 가장 자랑스럽다” 43% “정치 불안정 가장 부끄럽다” 48%

    “경제성장 가장 자랑스럽다” 43% “정치 불안정 가장 부끄럽다” 48%

    우리 국민은 해방 70년 역사에서 6·25전쟁 이후 이뤄낸 눈부신 ‘경제성장’을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가장 부끄러운 자화상으로는 ‘정치’를 꼽았다. 국내 정치가 자긍심을 떨구는 요인으로 지적된 탓인지 여야의 정치적 텃밭인 대구·경북(TK)과 호남 지역에서 ‘자긍심이 낮다’고 한 응답자가 다른 지역에 비해 많은 것으로 조사됐다. 19일 서울신문의 대국민 여론조사에서 국민 10명 가운데 6명(64.4%)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자긍심이 높다’고 답했다. ‘낮다’는 응답자는 31.5%로 조사됐다. 자긍심이 높은 이유로는 ‘괄목할 만한 경제성장’(42.7%)을 가장 많이 꼽았다. ‘열정적인 이미지’가 14.8%, ‘케이팝 등 한류현상’이 13.3%로 뒤를 이었다. ‘안정된 정치’는 4.1%로 항목 중 가장 낮았다. 반대로 자긍심이 낮은 이유를 물었을 때 ‘불안정한 정치’라고 답한 응답자가 절반에 가까운 47.6%를 기록했다. 다음으로 ‘성장과 분배’(14.0%), ‘국민의 안전문제’(13.0%), ‘낮은 국민성’(10.8%), ‘사회 갈등’(8.5%) 순으로 집계됐다. ‘자긍심이 높다’는 응답자의 비율을 연령대별로 살펴보면 60대 이상이 80.2%로 압도적으로 많았다. 다음으로 50대 이상이 78.4%를 기록했다. 하지만 40대에서 52.7%로 응답률이 큰 폭으로 떨어졌다. 30대는 50.4%로 전 세대 가운데 응답률이 가장 낮았다. 30대는 57.7%를 기록한 20대보다도 응답률이 저조했다. 인구 특성별로는 남성(67.7%)이 여성(61.1%)보다, 새누리당 지지층(76.7%)이 새정치민주연합 지지층(57.7%)보다 ‘자긍심이 높다’고 답한 응답자가 더 많았다. 지역별 ‘자긍심’ 조사에서는 강원·제주가 75.1%로 가장 높았다. 충청권이 70.0%, 부산·울산·경남(PK)이 69.0%, 서울이 66.2%로 상대적으로 높았고, 대구·경북(TK) 61.0%, 호남권 60.9%, 인천·경기 59.8%로 비교적 저조했다. 이영준 기자 apple@seoul.co.kr
  • 가난까지 상품화, 괭이부리마을 쪽방촌 체험관 “우리를 구경거리로…” 결국 계획 취소

    가난까지 상품화, 괭이부리마을 쪽방촌 체험관 “우리를 구경거리로…” 결국 계획 취소

    가난까지 상품화, 괭이부리마을 쪽방촌 체험관 “우리를 구경거리로…” 마을사람들 분노 ‘가난까지 상품화’ 인천 동구청이 만석동 ‘괭이부리 마을’에 옛날 어려웠던 시절의 생활을 느껴볼 수 있는 체험 시설을 만들겠다고 밝힌 가운데, 가난까지 상품화한다는 비난이 일자 해당 구의회가 결국 계획을 취소했다. 12일 인천시 동구에 따르면, 구는 지난달 중순 ‘인천시 동구 옛 생활 체험관 설치 및 운영 조례(안)’을 입법 예고했다. 해당 지역은 김중미씨의 소설 ‘괭이부리말 아이들’의 배경이 된 곳으로, 6·25전쟁 직후부터 피난민들이 모여 판잣집을 짓고 살면서 만들어진 쪽방촌이다. 조례(안)에 따르면, 옛 생활 체험관의 목적은 타지에서 부모와 함께 동구를 찾은 아이들에게 숙박의 기회를 제공해 옛 생활 모습을 경험토록 하는 것이다. 반드시 부모가 자녀를 동반해야 입실할 수 있고, 체험료(하루 숙박)는 1만원으로 책정됐다. 구는 첫 체험관을 인천에서 가장 오래된 쪽방촌인 만석동 괭이부리마을 안에 만들기로 하고, 현재 주민들의 사랑방으로 활용중인 2층짜리 주택을 일부 리모델링해 활용할 예정이다. 또 구는 이곳에 괭이부리마을의 옛 사진, 요강, 흑백 텔레비전, 다듬이 등 지역 거주 주민들의 생활현장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관광객들의 향수를 자극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할 계획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마을 주민들은 “지자체가 가난을 상품화해 쪽방촌과 마을 주민들을 구경거리로 만들고 있다”며 반발했다. 마을 주민들은 지난 8일 동구의회를 방문해 구의원들에게 반대 이유를 설명하고 주민 160여명이 작성한 ‘괭이부리마을 옛 생활 체험관 반대 서명’을 전달했다. 이에 인천시 동구의회 복지환경도시위원회는 13일 상임위원회 회의를 열고 가난까지 상품화 한다는 비난을 샀던 ‘인천시 동구 옛 생활 체험관 설치 및 운영 조례(안)’을 부결했다. 사진=채널 A 뉴스캡처(가난까지 상품화) 뉴스팀 seoulen@seoul.co.kr
  • 가난까지 상품화, 괭이부리마을 쪽방촌 체험관 계획취소 “가난하면 막 대해도 되냐” 주민들 항의

    가난까지 상품화, 괭이부리마을 쪽방촌 체험관 계획취소 “가난하면 막 대해도 되냐” 주민들 항의

    가난까지 상품화, 괭이부리마을 쪽방촌 체험관 “가난하면 막 대해도 되냐” 마을사람들 항의 ‘가난까지 상품화’ 인천 동구청이 만석동 ‘괭이부리 마을’에 옛날 어려웠던 시절의 생활을 느껴볼 수 있는 체험 시설을 만들겠다고 밝혀 논란을 일으킨 가운데, 해당 구의회가 계획을 취소했다. 12일 인천시 동구에 따르면, 구는 지난달 중순 ‘인천시 동구 옛 생활 체험관 설치 및 운영 조례(안)’을 입법 예고했다. 해당 지역은 김중미씨의 소설 ‘괭이부리말 아이들’의 배경이 된 곳으로, 6·25전쟁 직후부터 피난민들이 모여 판잣집을 짓고 살면서 만들어진 쪽방촌이다. 조례(안)에 따르면, 옛 생활 체험관의 목적은 타지에서 부모와 함께 동구를 찾은 아이들에게 숙박의 기회를 제공해 옛 생활 모습을 경험토록 하는 것이다. 반드시 부모가 자녀를 동반해야 입실할 수 있고, 체험료(하루 숙박)는 1만원으로 책정됐다. 구는 첫 체험관을 인천에서 가장 오래된 쪽방촌인 만석동 괭이부리마을 안에 만들기로 하고, 현재 주민들의 사랑방으로 활용중인 2층짜리 주택을 일부 리모델링해 활용할 예정이다. 또 구는 이곳에 괭이부리마을의 옛 사진, 요강, 흑백 텔레비전, 다듬이 등 지역 거주 주민들의 생활현장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관광객들의 향수를 자극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할 계획으로 알려졌다. 구 관계자는 “요강, 흑백텔레비전, 다듬이 등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물품을 체험관에 비치할 것”이라며 “구도심의 특성에 맞는 체험관을 조성하면 자연스럽게 지역을 찾는 사람이 늘고 다른 관광지와도 연계해 지역 경제가 활성화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러나 괭이부리마을 주민들은 삶의 터전을 외부인들이 드나들며 들여다 보는 데 대한 상당한 반감을 드러내는 것으로 전해졌다. 주민들은 “구청이 가난까지 상품화해서 쪽방촌 주민들을 구경거리로 만들겠다는 얘기”라며 “요즘 들어 외지 사람들이 이곳에 찾아와 사진을 찍으며 집 안을 기웃거리는 일이 많아 다툼도 생긴다. 가난하게 살면 아무렇게나 막 대해도 되는 것이냐”고 항의했다. 마을 주민들은 지난 8일 동구의회를 방문해 구의원들에게 반대 이유를 설명하고 주민 160여명이 작성한 ‘괭이부리마을 옛 생활 체험관 반대 서명’을 전달했다. 논란이 거세지자 동구의회 복지환경도시위원회는 13일 상임위원회 회의를 열고 ‘인천시 동구 옛 생활 체험관 설치 및 운영 조례(안)’을 부결했다. 상임위원 5명은 회의 끝에 “주민 의견 수렴 절차에 부족함이 있었다”며 부결 이유를 설명했다. 이에 이 조례(안)은 자동 폐기됐다. 사진=채널 A 뉴스캡처(가난까지 상품화) 뉴스팀 seoulen@seoul.co.kr
  • 조명하고… 파헤치고

    조명하고… 파헤치고

    문학평론가 염무웅(74) 영남대 명예교수와 방민호(50) 서울대 국문과 교수가 나란히 평론집을 냈다. 염 교수는 ‘살아 있는 과거-한국문학의 어떤 맥락’(창비·왼쪽), 방 교수는 ‘이상 문학의 방법론적 독해’(예옥·오른쪽)를 출간했다. ‘살아 있는 과거-한국문학의 어떤 맥락’은 염 교수의 여섯 번째 평론집이다. 일제 식민지와 6·25전쟁, 독재 정권 시기에 활동했던 작가들을 대상으로 문학과 현실의 관계를 깊이 있게 분석했다. 염 교수는 “객관적 현실과 작가의 표현 의지, 작품적 결과 사이의 복잡한 변증법을 역사적으로 해명하는 것이 비평의 목표”라고 했다. 이는 196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등단 이후 51년간 평론 활동을 하며 줄곧 추구해 온 가치이기도 하다. 3부로 구성됐다. 1부는 정지용, 천상병, 고은, 김남주 등 시인을 다뤘다. 식민지 시대 일본 유학을 경험한 시인 4명(김동환, 정지용, 이상화, 김소월)의 서로 다른 삶의 행로와 정신세계를 분석한 ‘가혹한 시대 시인으로 사는 일’이 눈에 띈다. 2부는 홍명희, 염상섭, 박완서, 이문구 등 소설가를 조명했고 3부에는 비평, 서평 등 여러 성격의 글들이 실렸다. 염 교수는 “과거에 대한 의식의 빈곤은 현재에 대한 감각의 둔화와 지적 작업의 부실을 초래할 우려가 있어 현재 안의 ‘살아 있는 과거’를 느끼고 또 현재를 발판으로 과거를 사유해야 역사의 연속성을 획득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방 교수의 ‘이상 문학의 방법론적 독해’는 이상의 주된 문학 창작 방법인 ‘알레고리’(이중적 의미를 지닌 이야기 유형)를 집중적으로 파헤친 역작이다. 7년간 이상의 소설과 수필 속 알레고리를 연구해 200자 원고지 1800매가 넘는 방대한 분량에 담았다. 방 교수는 “에로티즘, 웃음, 히스테리, 크로폿킨, 도스토옙스키, 경성 모더니즘 등과 같은 키워드를 중심으로 이상 문학, 특히 그의 소설과 산문들을 면밀하게 재해석하고자 했다”고 소개했다. 문학평론가 이어령은 “평가로서의 1단계 연구, 전기적 비평으로서의 2단계 연구를 넘어 문학으로서의 본격적인 텍스트 읽기로서 첫 번째 실적”이라고 평했다. 이상에 대해 자료를 토대로 발굴, 정리하고 알레고리 등 구조적 텍스트 분석을 이룬 1단계, 이상의 삶과 그의 심리에 대한 연구를 진행한 2단계를 지나 구조적 차원에서 작품 독해를 완성해 크리에이티비티를 밝혀내는 단계의 서막을 열었다는 것이다. 방 교수는 1994년 ‘창작과비평’ 제1회 신인평론상에 당선되며 비평 활동을 시작했다. 김승훈 기자 hunnam@seoul.co.kr
  • 가난까지 상품화, 괭이부리마을 쪽방촌 체험관 논란 ‘무슨 일?’

    가난까지 상품화, 괭이부리마을 쪽방촌 체험관 논란 ‘무슨 일?’

    인천 동구청이 만석동 ‘괭이부리 마을’에 옛날 어려웠던 시절의 생활을 느껴볼 수 있는 체험 시설을 만들겠다고 밝혀 논란이 일고 있다. 12일 인천시 동구에 따르면, 구는 지난달 중순 ‘인천시 동구 옛 생활 체험관 설치 및 운영 조례(안)’을 입법 예고했다. 해당 지역은 김중미씨의 소설 ‘괭이부리말 아이들’의 배경이 된 곳으로, 6·25전쟁 직후부터 피난민들이 모여 판잣집을 짓고 살면서 만들어진 쪽방촌이다. 조례(안)에 따르면, 옛 생활 체험관의 목적은 타지에서 부모와 함께 동구를 찾은 아이들에게 숙박의 기회를 제공해 옛 생활 모습을 경험토록 하는 것이다. 반드시 부모가 자녀를 동반해야 입실할 수 있고, 체험료(하루 숙박)는 1만원으로 책정됐다. 하지만 마을 주민들은 “지자체가 가난을 상품화해 쪽방촌과 마을 주민들을 구경거리로 만들고 있다”며 반발했다. 마을 주민들은 지난 8일 동구의회를 방문해 구의원들에게 반대 이유를 설명하고 주민 160여명이 작성한 ‘괭이부리마을 옛 생활 체험관 반대 서명’을 전달 한 상태다. 사진=채널 A 뉴스 뉴스팀 seoulen@seoul.co.kr
  • 가난까지 상품화, 괭이부리마을 쪽방촌 체험관 논란에 주민들 반대서명

    가난까지 상품화, 괭이부리마을 쪽방촌 체험관 논란에 주민들 반대서명

    인천 동구청이 만석동 ‘괭이부리 마을’에 옛날 어려웠던 시절의 생활을 느껴볼 수 있는 체험 시설을 만들겠다고 밝혀 논란이 일고 있다. 12일 인천시 동구에 따르면, 구는 지난달 중순 ‘인천시 동구 옛 생활 체험관 설치 및 운영 조례(안)’을 입법 예고했다. 해당 지역은 김중미씨의 소설 ‘괭이부리말 아이들’의 배경이 된 곳으로, 6·25전쟁 직후부터 피난민들이 모여 판잣집을 짓고 살면서 만들어진 쪽방촌이다. 조례(안)에 따르면, 옛 생활 체험관의 목적은 타지에서 부모와 함께 동구를 찾은 아이들에게 숙박의 기회를 제공해 옛 생활 모습을 경험토록 하는 것이다. 반드시 부모가 자녀를 동반해야 입실할 수 있고, 체험료(하루 숙박)는 1만원으로 책정됐다. 하지만 마을 주민들은 “지자체가 가난을 상품화해 쪽방촌과 마을 주민들을 구경거리로 만들고 있다”며 반발했다. 마을 주민들은 지난 8일 동구의회를 방문해 구의원들에게 반대 이유를 설명하고 주민 160여명이 작성한 ‘괭이부리마을 옛 생활 체험관 반대 서명’을 전달 한 상태다. 사진=채널 A 뉴스 뉴스팀 seoulen@seoul.co.kr
  • [열린세상] 대한민국 안보 강화와 우주강국으로 가는 길/최기혁 한국항공우주연구원 달탐사연구단장

    [열린세상] 대한민국 안보 강화와 우주강국으로 가는 길/최기혁 한국항공우주연구원 달탐사연구단장

    지난 6월은 현충일과 6·25전쟁 65주년 기념일이 있었던 호국 안보의 달이었다. 대한민국은 해방과 정부 수립 후 국가로서 걸음마를 떼기도 전에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막대한 희생을 치르면서 적의 침략을 물리치고 신생 대한민국은 유지될 수 있었지만 한민족이 겪은 전대미문의 아픔은 아직도 치유 중에 있다. 대한민국은 6·25전쟁에서 국가를 구하고 1970~80년대 산업화를 일군 아버지 세대의 피와 땀을 바탕으로 10대 경제대국이 됐다. 또한 자주국방 정책으로 다양한 고성능의 현대적인 무기 체계가 국산화되고 있고 한·미 안보동맹을 통해 국가 안보의 바탕이 마련됐다. 그러나 대한민국이 처한 안보 상황은 그리 녹녹하지만은 않다. 북한은 핵무기와 장거리 미사일 같은 대량파괴 무기를 가지고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 중국은 주요2개국(G2)으로 부상하면서 아시아 전역에서 위세를 과시하고 있다. 일본은 전쟁할 수 있는 보통국가를 외치면서 중국 견제를 핑계로 군비 확장에 적극 나서고 있다. 이에 대한 우리의 대응은 무엇인가. 적극적인 우주 개발과 활용이 현실적인 방안이 될 수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미국은 2001년에 발간된 미국 국가안보 우주 관리 및 조직 평가위원회 보고서(일명 럼즈펠드 보고서)에서 “우주 공간은 하늘, 육지, 바다와 똑같이 중요한 활동 공간이며 우주 공간은 상업적, 군사적, 그리고 정보 수집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밝히고 있다. 21세기에서는 우주 능력이 안보 능력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한반도 비핵화 정책을 준수해 핵무기를 개발하지 않고 있으며 한·미 미사일 협정에 의해 사거리 800㎞ 이상 미사일은 개발하지 않고 있다. 항공우주연구원을 중심으로 1990년대 중반부터 저궤도 아리랑 위성과 정지궤도 위성 개발에 성공했다. 2013년 나로호 발사 성공과 이를 바탕으로 국산 발사체인 한국형발사체 개발이 한창 진행 중에 있다. 2020년쯤에는 완성될 예정이다. 우주 선진국들은 적극적으로 우주탐사에 나서고 있다. 가장 가까운 천체인 달에 대한 탐사는 우주탐사의 첫 번째 관문이 되고 있다. 달에는 미래 지구에서 고갈될 귀중한 자원이 많이 매장돼 있다. 달은 지구와 우주를 관측하는 천혜의 장소다. 미국은 1960~70년대에 아폴로 계획을 통해 우주인을 보냈지만 2000년대 들어서도 4~5년에 한 번씩 탐사선을 보내고 있다. 아시아 국가들인 중국, 인도와 일본도 경쟁적으로 2007년과 2008년에 궤도선을 보냈다. 착륙선의 경우 중국은 이미 2013년에 보냈다. 일본과 인도도 2017년, 2018년에 보낼 계획이다. 아시아 주변국들에 비해 우주 기술이 너무 뒤처지면 안 되기 때문에 우리가 달 탐사를 서둘러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달 탐사를 통해 심우주통신·항법, 추진, 유도제어, 과학탑재체, 극한환경소재 기술 등 우주 기술 전반에 걸쳐 진일보를 가져올 수 있다. 탐사선이 달 궤도에 안착하기 위해서는 38만㎞를 날아가 반경 10㎞의 원안에 명중하는 정확도를 가져야 한다. 이는 서울에서 공을 던져 부산에 있는 반경 10m의 원안에 집어넣을 수 있는 정확도를 의미한다. 이 기술은 국산 유도무기 체계의 정확도를 향상시킬 수 있다. 심우주지상국의 안테나는 출력 1㎾의 엑스밴드 레이더로 탐사선 추적 외에도 적국의 위성과 우주 파편 감시에도 쓰일 수 있어 국가 우주자산 보호에도 기여할 수 있다. 또한 달 표면의 환경·자원 탐사를 위한 중성미자, 감마선, 엑스선 분광기는 북한의 핵 활동을 감시하는 센서로도 활용할 수 있다. 달 표면 탐사로버 기술은 전쟁터나 핵발전소 같은 위험 지역을 조사하는 데 쓰일 수 있고, 원자력 전지는 전방의 무인 감시장비와 적 잠수함을 감시하는 해저 소나의 전력원으로 쓰일 수 있다. 다시는 민족적 비극을 겪지 않기 위해서는 변화하는 동북아시아 안보 상황에 효과적으로 적응하는 안보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북한의 대량파괴 무기에 맞서고 주변국의 군사력 강화 움직임에 대응하는 방안 중 하나가 우리의 우주개발 능력을 향상시키는 것이다. 달 탐사는 그러한 국가적 우주기술 개발의 모멘텀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국민을 안심시키고 국가를 위해 몸을 바친 호국 영령들에게 후손으로서 면목이 서는 일일 것이다.
  • 광복부터 IMF까지… 우리네 인생

    광복부터 IMF까지… 우리네 인생

    광복 이후 격동의 현대사를 보통 사람들의 인생 이야기를 통해 돌아보는 전시회가 마련됐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과 광복 70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공동 주최하는 광복 70년 기념 특별전 ‘70년의 세월, 70가지 이야기’다. 7일부터 9월 29일까지 서울 종로구 대한민국역사박물관 1층 기획 전시실에서 열린다. 1945년 광복 이후부터 현재까지 시대별 3부로 구성됐다. 우리 주변 평범한 사람들의 당시 삶을 보여주는 300여점의 자료와 구술 인터뷰 영상이 전시된다. 박물관 측은 “연령, 성별, 직업, 출신 지역 등을 고려해 각계각층 인물들을 골고루 선정했다”고 설명했다. 1부 ‘귀국선과 피난열차’는 1945년 광복 이후부터 1950년대 중반까지의 사람들 삶을 보여준다. 광복을 맞이한 사람들의 모습, 해외에 있던 사람들의 귀국과 그 후의 삶, 여러 사람들의 6·25전쟁 경험, 전쟁으로 상처받은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했던 대중문화 종사자들의 활동 모습 등을 담았다. 2부 ‘일터에서 거리에서’는 급속한 경제 개발과 사회 변화가 진행된 195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를 다룬다. 가난하던 시절 아이들을 키우고 교육시킨 어머니와 교사들의 삶, 자유와 생명의 가치를 지키는 과정에 적극 참여했거나 지켜보았던 사람들의 삶 등을 살펴볼 수 있다. 3부 ‘인생극장: 우리 시대 사람들, 그리고’에서는 1990년대 말부터 현재까지의 사람들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외환위기를 겪고 그것을 극복한 사람들의 사연, 첨단 기술 개발을 주도한 사람들의 이야기, 어려운 삶 속에서도 모두가 같이 잘 사는 대안을 고민한 사람들의 이야기 등을 접할 수 있다. 김왕식 대한민국역사박물관장은 “광복 이후 지난 70년의 역사는 국민 모두가 함께 만들어 온 것”이라며 “다양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역사적 시각에서 바라볼 뿐만 아니라 활자화된 역사의 이면에 존재하는 작지만 귀중한 ‘휴먼 스토리’를 접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승훈 기자 hunnam@seoul.co.kr
  • [글로벌 시대] 문화를 알아야 고객 반응도 좋다/김창후 LG전자 고문·전 터키법인장

    [글로벌 시대] 문화를 알아야 고객 반응도 좋다/김창후 LG전자 고문·전 터키법인장

    2007년 섣달 그믐 즈음 밤늦게 인천공항에서 이스탄불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10시간이 넘는 긴 비행 시간 내내 고민은 사라지지 않았다. 출범하는 오스만튀르크 제국(현 터키)의 법인 대표로서, 유서 깊은 시장과 고객을 이해하고 현지 고객의 마음속에 어떻게 우리의 브랜드를 감성적으로 연결해 바람직한 이미지를 심어 줄 것인가. 신규 법인 조직의 역량을 어떻게 키워서 빠른 시간 내에 본사 기대에 부응하는 매출과 수익을 지속적으로 창출하는 고성과 회사로 성장시킬 것인가. 유럽의 관문 아타튀르크 이스탄불 공항 입국 수속 절차를 밟고 있는데 한국에서 온 것을 눈치 채고 웃음을 띠면서 우리말로 짧은 인사를 건네는 공항 직원의 친절함에 피곤이 확 풀렸다. 짐을 찾고 공항터미널을 빠져 나갈 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옆에 서 있던 터키 남자가 자신의 담뱃갑 밑을 손바닥으로 툭툭 치며 한 개비를 뽑아 주었다. 푸근하기만 한 터키인의 넉넉한 제스처가 한때 우리 시골 마을에서 담배가 떨어지면 으레 나누어 피우던 그 시절의 정경을 상기시켰다. 반도의 국민들은 감정적인 편이라고 하던데 터키인도 그런 이유에서 예외는 아닌 것 같았다. 아침 일찍 출근해 저녁까지 사무실 직원들과 상호 교감하며 소통하는 과정만으로는 유구한 역사의 배경을 등 뒤에 안고 있는 터키인들의 사회·문화적으로 내재된 요소를 인지하기에는 너무 부족했다. 약 한 달간의 5성급 호텔 생활을 끝내고 터키인의 집에 들어가 진정한 의미의 “터키 가족의 일원으로서 하숙 생활”을 하기로 했다. 시내 사무실에서 20여분가량 떨어진 중산층 마을인 ‘사리에르’에서 하숙 생활을 했다. 하숙 생활은 경영학이나 마케팅 책에서 결코 학습하기 어려운 높은 차원의 실증적 지혜와 깨달음을 주었다. 새롭고 값진 현지 통찰력을 바탕으로 조직을 운영하는 마음의 근육을 키울 수 있었다. 하숙집 주인 위날의 부친은 6·25전쟁 참전 용사다. 위날의 부친은 한국전쟁에 참전했다는 것을 자랑스레 여겼다고 한다. 혈맹의 역사적 유대 관계뿐 아니라 축구가 전 국민 생활의 일부이기도 한 터키인들에게 2002년 월드컵 3·4위전에서 한국의 팬들이 패했음에도 터키를 응원했다는 감동적인 사실은 그들의 가슴속에 지워지지 않는 ‘형제 관계임’을 새겨 놓은 중요한 계기가 된 것 같다. 먼 시골이나 산간 마을에서 만난 촌부도 한국을 우선 ‘형제 우의의 나라’라는 말부터 하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아침 새벽잠을 깨우는 모스크(사원)를 호기심으로 방문해 반갑게 맞는 마을 어르신들로부터 차 대접을 받고 올 때도 있다. 주말이면 주인 아저씨와 ‘보스 포로스’ 해변가 둑을 따라 하는 조깅도 일상화됐고, 근처 국립공원에서 텐트 치고 ‘망 갈’ (고기 바비큐) 파티도 밤늦도록 하며 도수가 높은 현지의 술 라크를 즐기곤 했다. 바비큐와 라크는 완벽한 궁합이라고 주인집 아저씨는 강조하며 술을 권하곤 했다. 터키에 조금씩 적응하면서 현지 직원과의 업무 보고 및 지시도 전보다 반응도 좋아 자신감이 생겼다. 직원들은 하숙 생활 시도에 대해 “현지 경영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라고 공감하면서 성큼 내편을 들어 줬다. 외부 대형 거래처 사장들도 나의 홈스테이를 좋은 시도였다며 격려의 편지를 보내 주었다. 그들은 우리의 제품을 그들의 매장에서 판매하는 데 성의를 보이며 챙겨 주기도 했다. 비즈니스에서도 터키인들은 감동적이고 정이 많았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라.”
  • [열린세상] 제2의 무역입국을 꿈꾸며/장영철 숭실대 글로벌통상학과 교수

    [열린세상] 제2의 무역입국을 꿈꾸며/장영철 숭실대 글로벌통상학과 교수

    우리나라는 1960년대 수출주도형 성장 전략을 추진하면서 철광석·텅스텐 등 가공하지 못한 광물자원, 김·오징어 등의 1차산품, 직물·합판 등의 빈약한 수출 품목으로도 1964년 국민총생산 30억 달러인 나라에서 수출 1억 달러를 달성했다. 이후 50년이 지난 2014년에는 수출 5731억 달러, 수입 5257억 달러로 474억 달러의 무역수지 흑자를 기록하면서 4년 연속 1조 달러의 무역 규모를 달성하는 놀라운 성공을 거뒀다. 우리나라가 1960년대 남미나 아시아의 신생국들이 채택했던 수입대체형 경제발전 전략과 달리 ‘무역입국’이라는 기치 아래 수출주도형 전략을 추진한 것은 특이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독립한 대부분의 신생국들은 이렇다 할 산업 기반이 없어 수출을 통해 경제를 발전시킨다고 생각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며, 식민지 종주국 등에서 들여올 수밖에 없었던 공산품들을 대체하는 수입 대체 전략이 진정한 독립을 이루고 싶은 국민 정서에도 부합한다고 보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 점에서 천연자원도 없고, 그나마 있던 산업시설도 6·25전쟁으로 파괴돼 수출할 만한 산업 기반도 없던 나라가 수출주도 전략을 채택해 1인당 국민소득이 100달러도 안 됐던 세계 최빈국을 3만 달러에 육박하는 나라, 원조를 받던 나라를 원조를 주는 나라로 변신시킨 것은 세계 경제사적으로도 매우 의미 있는 사건이다. ‘제1차 무역입국’ 목표를 성공시킨 밑바탕은 무엇일까. 당시의 비교적 순조로운 세계 무역환경, 중국의 폐쇄 정책으로 인한 강력한 라이벌 부재 등의 대외적인 여건을 들 수 있다. 국내적으로는 식민지와 6·25전쟁으로 계급 사회가 붕괴되면서 사회계층 간 이동성이 확대돼 신분 상승과 새로운 부를 이뤄 보겠다는 국민들의 의지가 강력했다. 자녀 교육을 통한 계층 상승의 열망이 교육열로 연결되면서 많은 인재를 육성하고 확보할 수 있었던 점도 중요하다. 이러한 국내적 요인을 유기적으로 결합시켜 국민들에게 미래 비전을 심어 주고 세계를 향해 개방적이고도 진취적인 자세를 취할 수 있게 만든 지도력의 역할이 매우 크다 하겠다. 짧은 기간에 해외 자본을 적절히 활용해 도로·철도·항만 등의 인프라를 구축하고, 철강·조선·전자·화학 공업 등의 새로운 산업을 창출하면서 세계 시장에서 통할 수 있는 품목을 개발해 시장을 개척하려고 노력한 결과 많은 성공 사례를 만들 수 있었다. 성공적으로 기업을 키워 낸 사람들은 수많은 젊은이들의 우상이 되면서 우리 사회 내에서 기업하겠다는 의지가 크게 확산될 수 있었다. 오랫동안 묻혀 있던 우리 기마민족의 기질이 전 세계를 상대로 하는 무역에서 나타난 것이다. 우리는 세계로 나아가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나라가 됐다. ‘제2의 무역입국’이 우리의 생존에 필수적인 조건이 된 것이다. 그런데 요즈음에는 우리가 과거에 성공했던 요인이 더이상 작동되지 않는 것 같은 우려가 생기고 있다. 잠자고 있었던 중국의 깨어남과 비상(飛上), 아베노믹스를 앞세운 일본의 경쟁력 복원 등 대외 여건이 불리해지면서 강력한 경쟁 상대와의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외환위기를 겪은 이후 과거의 도전적이고 미래를 위해 노력해 가는 정신보다는 안정성을 중시하면서 해외 진출에 소극적으로 변하고 있다. 산업 환경의 변화로 인해 직업 및 소득창출 능력이 저하되고, 사회 전반적으로 계층 간 이동성이 약화되면서 미래를 비관하는 계층이 크게 늘고 있다. 이에 따라 표출되는 다양한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게 쉽지 않다. 국민적 콘센서스를 도출해 내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세계 경제사는 모험심을 갖고 밖으로 진출한 나라들이 성공하고, 무역을 금하거나 억제한 명·청조의 중국이나 후기 조선처럼 대외 문을 닫았을 때 생존이 어려웠음도 가르치고 있다. 현재의 무역 환경은 창조적 기술력을 기반으로 하는 전략 제품의 개발 및 제조, 유통 등의 글로벌 전략을 요구하고 있어 기술력 있는 기업들과의 상생협력, 인재 육성, 각종 협정 등 무역지원제도 적극 활용 등이 주요한 과제가 되고 있다. 이러한 과제들이 전략적으로 추진돼 과거 50년 동안 이룩했던 ‘무역입국’을 다시 한번 이룰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모두 합심하면 우리 경제의 재도약은 이루어질 수 있다.
  • [재계 인맥 대해부 (5부)업종별 기업&기업인 매일유업] 우유에서 외식·커피·의류까지… 그 중심엔 ‘신용’ 있었다

    [재계 인맥 대해부 (5부)업종별 기업&기업인 매일유업] 우유에서 외식·커피·의류까지… 그 중심엔 ‘신용’ 있었다

    민관 합작 회사로 시작해 국내 유가공 업계 3위이자 우유를 넘어 외식, 커피, 유아동 의류 등 다양한 분야로 사업 영역을 확대하고 있는 매일유업. 이 기업의 성장사 중심에는 2006년 1월 2일 86세로 세상을 떠난 김복용 창업주가 있다. 그는 1920년 함경남도 이원에서 태어나 북청공립농업학교를 졸업한 뒤 1946년 남동생과 월남하며 서울로 생활 터전을 옮겼다. 광복 이후의 격변기, 6·25전쟁 등 혼란 속에 김 창업주는 누구보다 뛰어난 사업 감각을 보였다. 김 창업주는 서울 방산시장에서 담배 좌판을 벌이며 사업 밑천을 위한 종잣돈을 모았다. 이후 1956년 공흥산업, 1964년 신극동제분 등을 설립하며 무역과 제분업으로 사업을 키워 나갔다. 그가 우유사업에 뛰어든 것은 정부의 권유를 받으면서부터다. 6·25전쟁 이후 식량 부족 상태는 더욱 심각해졌고, 정부는 낙농업을 키워 국민들의 식생활을 풍요롭게 키울 계획을 세웠다. 정부는 1969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일환으로 종합낙농개발사업을 추진하면서 매일유업의 전신인 ‘한국낙농가공’을 설립했다. 당시 사업을 추진하던 농어촌개발공사(현 농수산물유통공사)는 사업 자금의 조달과 사업의 효율성을 위해 민간 자본과의 합작을 계획했고, 당시 성공한 사업가로 주목받던 김 창업주에게 합작 투자를 제의했다. 김 창업주는 사업의 취지에 공감한 것은 물론 농촌 출신에다 농업학교를 나왔다는 인연으로 제의를 받아들였다. 1971년 5월 27일 민간 대주주 자격으로 한국낙농가공을 인수했다. 이후 1973년 3월 한국낙농유업주식회사로 이름을 바꿨고, 1980년 3월 지금의 매일유업주식회사로 상호를 변경했다. 김 창업주의 성공적인 경영 비결은 ‘신용’이다. 그는 성공한 사업가로 인정받기 전 두 번의 사업 실패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그가 또 다른 사업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됨됨이를 보고 신뢰해 주변 사람들이 많이 도와줬기 때문이다.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아무것도 갖춰지지 않은 낙농사업을 맡아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그는 겉치장에 신경 쓰지 않고 수익을 내면 이를 다시 투자했다. 매일유업은 지금도 사옥이 없다. 매일유업도 성공했으니 번듯한 사옥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주변의 얘기에 김 창업주는 “그런 곳에 쓸 돈이 있으면 그 돈으로 농민들을 돕는 데 쓰겠다”고 말할 정도였다. 김 창업주는 이런 노력을 인정받아 1976년 농림부 장관 표창, 1999년 금탑산업훈장 등을 받기도 했다. 1970년대 약 1500개의 낙농가를 조성하고 유가공 공장을 잇따라 설립하면서 매일유업은 성장의 기틀을 마련했다. 1980년대는 자체적인 연구와 개발로 떠먹는 요구르트 ‘바이오거트’를 생산하는 등 더 고급화된 제품 개발에 집중했다. 1990년대는 매일유업이 그동안 쌓아 온 기술력을 바탕으로 유제품의 다양화는 물론 음료와 제과 등 신규 식품사업에 진출하면서 종합 식품회사로서 면모를 갖춰 나간 시기다. ‘허쉬 초콜릿 드링크’를 시작으로 국내 최초의 냉장유통 주스 ‘썬업’, 고급 커피음료인 ‘카페라떼’가 성공을 거뒀다. 매일유업은 2000년대 들어 건강에 대한 소비자들의 관심이 높아진 것을 반영해 프리미엄 상품 개발에 집중하고 있다. 지난해 무지방(지방 0%)부터 저지방(1%, 2%), 일반우유(4%)까지 라인을 세분화해 저지방 우유에 대한 선택의 폭을 넓힌 신제품을 출시한 게 대표적이다. 이처럼 한 단계 한 단계 성장한 매일유업이지만 현재는 사업 정체기에 놓인 상태다. 이는 매일유업만이 아니라 유가공 업계 전체가 겪고 있는 어려움이기도 하다. 그룹의 가장 큰 사업 부문인 우유 소비가 줄어들고 있다는 점이 문제로 지적된다. 김 창업주가 우유 생산 사업에 뛰어들 때만 해도 국내에 먹을 것이 없어 배고파했던 시기였지만, 지금은 우유의 가장 큰 소비층인 영유아 수가 줄어들고 있다. 또 우유값이 공급과 수요를 반영해 즉각적으로 정해지는 게 아니라 정부와 업계로 구성된 낙농진흥회와 낙농가가 협의해 결정되는 구조라 수요가 줄어도 값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매일유업의 연결 기준 매출은 1조 4479억원으로 우유 등을 생산하는 시유 부문이 3264억원, 분유가 1727억원으로 우유를 기반으로 하는 사업이 전체 매출의 3분의1가량을 차지한다. 어려움에 처한 그룹의 중심 사업을 되살리고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는 게 매일유업 앞에 놓인 과제다. 김진아 기자 jin@seoul.co.kr
  • [재계 인맥 대해부 (5부)업종별 기업&기업인 한국야쿠르트] 한국 1호 유산균 발효유 개발… ‘집념’ 하나로 총 470억병 판매

    [재계 인맥 대해부 (5부)업종별 기업&기업인 한국야쿠르트] 한국 1호 유산균 발효유 개발… ‘집념’ 하나로 총 470억병 판매

    1971년 첫선을 보인 후 44년간 470억 병의 누적 판매고를 올리고 있는 유산균 발효유 ‘야쿠르트’.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마셔 봤다는 ‘국민 간식’ 야쿠르트의 탄생에는 파평 윤씨 윤덕병(88) 회장의 고집과 집념이 녹아 있다. 숙종조 선비였던 윤증(尹拯) 선생의 후손인 윤 회장은 충남 논산에서 태어났다. 만 8세의 나이로 일본 도쿄 유학길에 올랐고 고등학교까지 일본에서 학업했다. 이후 1951년 육군에 자원입대해 6·25전쟁을 치른 그는 1961년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경호실장을 지냈다. 1963년 사업의 꿈을 안고 중령으로 예편한 윤 회장은 ‘우유 소비량’에 주목했다. 당시 정부의 적극적인 축산진흥정책에 따라 우유 생산량은 많아졌지만 처리 능력이 턱없이 부족해 지방에서는 원유가 개천에 버려지는 일이 많았다. 윤 회장은 번뜩 일본에서 접한 유산균 발효유를 우리 기술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당시 건국대 축산연구소장을 맡고 있었던 사촌 형 고 윤쾌병 교수(초대 사장)가 큰 힘이 됐다. 윤 교수는 일본대에서 수의학 박사를 취득한 뒤 서울대에서 12년간 교편을 잡다 건국대로 자리를 옮긴 상태였다. 구체적인 사업 계획에 돌입한 윤 회장은 어렵게 자금을 꾸려 1969년 5월 청계7가의 허름한 임시 사무실에 ‘삼호유업’ 간판을 달았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 그는 서울 중구 무교동 11번지에 자본금 5000만원으로 한국야쿠르트의 씨앗인 ‘한국야쿠르트유업주식회사’를 세웠다. 회사는 세웠지만 제품을 출시하기까지는 만만치 않았다. 오랜 고민 끝에 윤 회장은 일본야쿠르트의 기술 도입을 선택했다. 이 과정에서 한국야쿠르트유업은 일본야쿠르트와의 합작 투자(한국 61.7%, 일본 38.3%) 방식을 취했다. 한국야쿠르트는 일본에서 들여온 종균 앰풀을 바탕으로 제품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1971년 경기 안양에 국내 최초의 발효유 공장인 안양공장을 완공하며 생산설비도 완벽하게 갖췄다. 국내 최초의 유산균 발효유 ‘야쿠르트’는 이렇게 같은 해 8월 세상에 첫선을 보였다. ‘균을 돈 받고 팔아먹는다’, ‘병균을 판다’는 일부 소비자의 반발도 있었지만 야쿠르트는 금세 저렴하고 건강에 좋은 데다 맛도 좋은 간식으로 자리잡았다. 방문판매라는 판매 방식도 독특했다. 우리나라 주부 취업의 효시 격인 ‘야쿠르트 아줌마’가 그것이다. 여성의 사회 진출 여건이 열악하던 1970년대는 물론 지금도 여성 일자리 창출의 모범 사례로 꼽힌다. 1971년 7월 당시 야쿠르트 아줌마는 47명에 불과했으나 1975년에 1000명, 1978년 3000명, 1983년 5000명, 1998년에는 1만명을 넘어서 지금은 1만 3000여명의 야쿠르트 아줌마가 전국 각지에서 활동하고 있다. 윤 회장은 설립 당시부터 지금까지 경영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는다. 소유와 경영이 분리된 전문경영인 체제가 한국야쿠르트의 특징이다. 행사에도 나서지 않는다. 명예가 있다면 당연히 전문경영인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게 윤 회장의 소신이다. 한때 윤쾌병 교수가 오너 경영인으로 인식된 것도 이 때문이다. 회사는 전문경영인에게 맡겼지만 공장과 영업소 등의 현장을 찾는 일에는 결코 소홀함이 없다. 윤 회장은 상대적으로 경영진이 찾기 어렵거나 관심이 덜한 공사 현장, 관리 손길이 드문 생산 현장, 소비자의 반응을 확인할 수 있는 영업소 등을 주로 찾는다. 이 같은 윤 회장의 행보는 구순(九旬)이 가까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는 지금도 매일 오전 10시쯤 서울 잠원동 본사에 출근한 뒤 오후 4시에 퇴근한다. 사실상 가업을 물려받은 외아들 윤호중(44) 전무도 필요할 때 대주주로서 의사 결정에만 관여한다. 기업 경영은 기본적으로 전문경영인 체제로 돌아간다. 윤 전무는 한국야쿠르트를 중심으로 팔도, 비락 등의 식품사업과 능률교육, 에듀챌린지의 교육사업, 큐렉소의 헬스케어사업 등을 맡고 있다. 윤 전무는 팔도 지분을 100% 소유하고 있고 팔도는 지배구조의 핵심인 한국야쿠르트의 지분 40.83%를 가지고 있다. 이어 야쿠르트가 능률교육, 큐렉소, 비락, 플러스자산운용 등의 계열회사를 거느리는 구조다. 야쿠르트는 비상장 회사로 지난해 매출액은 9673억 9394만원, 영업이익은 844억 4382만원이었다. 자산 총액은 1조 100억 9317만원에 달한다. 총관계사는 14개다. 윤 회장은 부인 심재수(83)씨와 혼인해 1남 5녀를 뒀다. 윤 전무는 그가 44세에 본 늦둥이 외아들로, 윤 회장은 윤 전무를 끔찍이 아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담배를 피우지 않고 소식으로 건강관리를 한다는 윤 회장은 1998년 명지대에서 명예 이학박사를 받았다. 한편 윤 회장은 딸들과 사위의 경영은 철저히 배제하고 있다. 양반정신을 강조하며 장성한 딸들이 골프를 치거나 운전하는 것을 금했을 정도다. 조용한 가풍을 중시해 과시하거나 드러내는 것 자체를 꺼린다. 아들 윤 전무에 대한 정보도 철저히 가려 있다. 명희진 기자 mhj46@seoul.co.kr
  • 평생 일군 편백나무 숲 기증한 80대 독림가

    평생 일군 편백나무 숲 기증한 80대 독림가

    80대 독림가(篤林家)가 평생을 바쳐 가꾼 45억원대의 편백나무를 지방자치단체에 기부채납했다. 경남 하동군은 29일 하동읍 주민 김용지(오른쪽·87)씨가 옥종면 위태리의 개인 소유 편백림 30만 4264㎡를 군에 기부채납하기로 하고 협약식을 가졌다고 밝혔다. 김씨가 기부채납한 편백림은 흉고 둘레 1m, 나무 높이 15m에 이르는 편백나무 20여만 그루가 울창하게 우거져 숲을 이루고 있다. 현재 가격으로 45억원이 넘는 것으로 평가된다. 하동이 고향인 김씨는 1965년 일본에서 사업을 시작한 뒤 6·25전쟁으로 벌거숭이가 된 조국의 황량한 산을 보고 조림을 결심했다. 1976년부터 해마다 일본에서 편백나무 1만여 그루씩을 구입해 위태리 야산에 심어 편백숲을 가꿨다. 그렇게 시작한 편백림 조성이 현재 35만여 그루로 불어나 79만㎡의 산이 울창한 편백숲을 이루고 있다. 김씨는 “평생을 바쳐 조성한 편백숲에서 많은 사람이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등 자연의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기부했다”고 말했다. 하동군은 김씨가 기부한 편백림을 포함해 2019년까지 50만㎡를 편백숲휴양공원으로 조성할 예정이다. 하동 강원식 기자 kws@seoul.co.kr
  • [밀리터리 인사이드] 6·25전쟁 때 쓰던 수통, 지금도 쓰고 있을까?

    [밀리터리 인사이드] 6·25전쟁 때 쓰던 수통, 지금도 쓰고 있을까?

    군에 입대한 장병 뿐만 아니라 예비역들이 많은 관심을 갖는 물품 중 하나가 ‘수통’입니다. 일반 군 관련 기사는 물론 무기 관련 기사에도 어김없이 이 수통과 관련한 댓글이 올라옵니다. “6·25 전쟁 때 쓰던 수통부터 교체하라”는 비난 섞인 글은 식당의 단골메뉴처럼 빠지질 않습니다. 예비역들이 왜 수통에 이렇게까지 분노하게 된 걸까요. 궁금증이 생기더군요. 결국 저와 여러분의 궁금증을 속 시원하게 풀기 위해 취재를 시작했습니다. 정말 우리가 군에서 쓰는 수통 중에 6·25 전쟁 때 보급된 수통이 있을까. 지난해 군에서 보급한다던 신형 수통은 정말 제대로 보급했을까. 확인해봤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국방부에 문의해봤습니다. 시쳇말로 ‘돌직구’ 질문입니다. “6·25 때 사용하던 수통이 지금도 군에 남아있나요?” 국방부 관계자는 순간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어떻게 6·25 때 쓰던 수통이 지금도 남아있겠습니까. 그런 얘기는 금시초문인데요. 왜 그런 소문이 났을까요.” 또 물었습니다. “그럼 30~40년 전에 쓰던 수통도 사용하지 않나요?” “아무리 보급품을 오래 쓴다고 해도 그런 건 없을 텐데요. 사용 기간을 모두 확인해보진 않았지만, 아마 그 정도는 아닐 겁니다.” 답변이 구체적이진 않았지만 대체로 부정적인 입장이었습니다. ●軍 “압록강 물맛 나는 수통? 말도 안돼” 수통은 사용 연한이 없기 때문에 파손되지 않는 한 폐기하진 않습니다. 일일이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만든 지 수십년 된 수통은 분명 존재합니다. 다만, 6·25 전쟁 때 쓰던 수통이 현재 군에 없다는 답변은 여러 번 확인했습니다. 그럼 현재의 수통과 6·25 전쟁 때 쓰던 수통 재질을 비교해볼까요? 전쟁 때 우리 장병들은 철을 주재료로 한 스테인리스 합금 수통을 많이 사용했습니다. 무거웠고 위아래 부위를 접합하는 방식이어서 옆면을 접합한 지금의 수통과는 재질과 모양이 조금 달랐습니다. 2차 세계 대전 말기 미군이 찌그러지기 쉬운 알루미늄 대신 철을 사용해 만든 신형 수통 제조 방식을 우리가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겠지요. 아래에 컵을 끼운 미군의 ‘M1910’ 수통도 1·2차 세계대전과 6·25전쟁 등을 거치면서 처음에는 알루미늄 재질로 제조됐다가 ‘플라스틱 뚜껑+스테인리스 몸통’, ‘플라스틱 뚜껑+알루미늄 몸통’ 등으로 변화했습니다. 지금의 수통과 유사한 모양이지만 입구가 좁게 만들어지는 등 차이가 있습니다. 결국 “수통에서 노르망디 해변의 냄새가 난다”, “내 수통으로 아마 어떤 분이 압록강 물을 떴을 것”이라는 말은 현재 기준으로 봤을 땐 우스갯 소리 이상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아주 오래 전에 군 생활을 한 분이 있다면 보급 2순위인 훈련소나 동원예비군 훈련장에서 실제로 ‘노르망디 바닷물 맛’이나 ‘압록강 물맛’을 공유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1964년부터 우리나라에서 자체 제작한 수통의 재질은 스테인리스에서 플라스틱, 알루미늄으로 여러 번 재질이 바뀌었습니다. 1972년 처음으로 플라스틱 수통이 공급됐고 1977년 본격적으로 알루미늄 수통을 공급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옆면에 접합선이 있는 구형 알루미늄 수통입니다. ●30년 만에 개발된 접합선 없는 신형 수통 30년 만인 2007년이 돼서야 옆면 접합선이 없는 매끈한 알루미늄 소재의 수통이 개발됐습니다. 신형 수통 무게는 기존 수통보다 40g 가벼운 200g 이하이고, 작은 생수병 두 개 분량인 980ml의 물이 들어갑니다. 고온이나 저온에서 내부 피막이 벗겨지지 않도록 보완한 것은 물론 몸통의 용접선이 없어 유해물질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 군의 설명입니다. 새 수통을 개발해 교체했지만 2007년부터 2013년까지 교체율은 60%에 머물렀습니다. 사용 연한이 없는 수통의 특성상 많은 장병이 6·25 전쟁까지는 아니지만 수십년 된 구형 수통으로 물을 마셨을 겁니다. 지난해 새누리당 정미경 의원은 국회 국방위원회 국정감사에서 국민들이 놀랄 만한 사실을 공개했습니다. 2005년부터 지난해까지 10년간 군 당국이 127만개의 수통을 구매했지만 새 수통을 제대로 보급하지 않아 장병들이 여전히 30~40년된 수통을 쓰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127만개의 수통을 구입하는데 든 비용은 107억원. 탄도탄 요격미사일 1발 가격입니다. 이 돈으로 63만명인 우리 장병들이 1인당 2개씩 사용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양의 수통을 구입할 수 있다는 겁니다. 국방부는 즉각 해명자료를 냈습니다. 현역병과 동원예비군용 신형 수통 54만개, 2005년부터 2006년까지 군에서 구입한 구형 수통이 8만개, 항토예비군용 신형 수통 34만개 등 2005년 이후 제작된 수통 96만개가 이미 보급돼 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추가로 보급해야 할 신형 수통 물량도 적지 않았습니다. 현역병과 동원예비군용 27만개, 항토예비군용 4만개 등 총 31만개로 추산됐습니다. 여전히 수십만명의 장병이 2005년 이전에 구입한, 오래된 구형 수통을 사용하고 었었던 겁니다. 당장 “군에선 도대체 지금까지 뭘 했나”라는 비난이 빗발쳤습니다. ●구형 수통, 폐기않고 모두 창고로 가는 이유는 이 수통, 지금은 어떻게 됐을까요. 국방부 관계자는 “지난해 말까지 신형 수통 31만개를 모두 일선 부대에 보급했다”고 자신있게 밝혔습니다. 하지만 자랑할 만한 얘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30년 만에 야심차게 개발한 신형 수통을 모든 장병들에게 보급하는데 무려 7년이 걸렸으니까요. 8만개는 여전히 2005~2006년에 구입한 구형 수통입니다. 그나마 앞으로는 ‘노르망디’나 ‘압록강’이라는 표현은 나오지 않게 됐으니 다행이라고 해야겠습니다. 그런데 궁금증은 여기서 그치질 않았습니다. 신형 수통으로 바꾸면 이전에 쓰던 수통은 모두 어디로 가는 것일까요? 그냥 녹여서 재활용할까요? 그렇진 않습니다. 유사시 동원병력을 위한 예비물자로 창고에 보관하게 됩니다. 군에서는 이것을 ‘치장용 장비’라고 합니다. 수십년 된 구형 수통도 곧바로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쓸 만한 것들은 창고로 가는 것입니다. 전쟁이 나면 물자가 부족해지기 때문에 구형 장비도 모두 사용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니 오래된 수통들도 쓸만한 것은 여전히 창고에 있는 것입니다. 수통과 관련한 논란이 불거진 것은 사실 지난해가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장병과 예비역들의 불만이 이어져 오다가 2008년 친박연대(현 새누리당) 서청원 의원이 결국 불씨를 당겼습니다. 군에서 사용하던 수통을 종류별로 구해 연구소에서 미생물 배양 실험을 한 결과 플라스틱을 제외한 알루미늄 수통과 일체형 수통에서 ‘바실러스 세레우스균’이 검출됐습니다. 바실러스 세레우스균은 대표적인 식중독균으로, 감염되면 설사와 구토, 고열 등의 증상이 나타납니다. 전 국민이 발칵 뒤집힐 만한 내용이었죠. 군은 당시 “서 의원실에 제출한 수통은 야전에서 실제 사용하던 제품이 아니다. 야전에서는 수통을 개인별로 지급하며, 세척 및 열탕소독을 통해 위생에 만전을 기하고 있다”고 급히 해명했지만 이 내용을 곧이곧대로 믿는 이는 많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예비역이 열탕소독으로도 사라지지 않는 비릿한 물때 냄새를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냄새가 난다고 무조건 비위생적인 것은 아니지만 한 번이라도 수통을 사용해보면 그 고정관념을 바꾸기 쉽지 않습니다. ●우리 병사들도 미군처럼 ‘카멜백’ 쓴다? 물론, 바실러스 세레우스균도 섭씨 100도 이상의 물에서 가열한다고 해서 완전히 사멸시킬 수는 없습니다. 열에 강한 포자가 남아 증식할 수 있기 때문이죠. 135도의 온도로 4시간 가열해도 포자가 남을 수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한편으론 멸균기가 없는 군부대에서 장병들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기도 합니다. 훈련이 있든 없든 정기적으로 열탕소독을 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다행히 신형 수통은 열에 강한 내부 코팅을 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재질 변형이나 위생을 감안해 앞으로는 교체 주기를 좀 더 앞당겨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 수통과 미군의 카멜백(Camelbak)을 비교하는 이들도 많은데요. 카멜백은 등에 지고 다니는 물주머니입니다. 밀리터리 마니아는 물론 일반인들에게도 아웃도어 용품으로도 각광받는 제품이죠. 장시간의 작전에 유용합니다. 미군 카멜백 유사품을 인터넷으로 직접 구입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물 공급 호스만 입에 물면 마실 수 있어 편리한데요. “우리는 왜 이런 보급품 안 나오나”라고 말씀하는 분들이 많은데 카멜백은 이미 우리 군에도 보급돼 있습니다. 7500개 가량이 특전사와 해병대에 보급돼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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