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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렌치 리포트] (9) ‘위대한 프랑스’에 대한 향수

    [프렌치 리포트] (9) ‘위대한 프랑스’에 대한 향수

    지난봄 제59회 칸국제영화제에서 가장 눈길을 끈 작품은 소피아 코폴라 감독의 ‘마리 앙투아네트’였다. 프랑스의 신문과 잡지는 미국의 여류감독 소피아 코폴라와 앙투아네트 역을 맡은 커스틴 던스트의 인터뷰 기사로 도배했고, 방송에서는 연일 이 영화의 주요 장면들을 보여주며 호기심을 자극했다. 비평가들로부터는 역사적 사실을 지나치게 주관적으로 해석했다는 혹평을 들었지만 프랑스 사회에 앙투아네트 붐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루브르 박물관에서는 앙투아네트가 7세 때 입었다는 옷을 본뜬 의상을 판매하는가 하면, 유명 제과점에서는 앙투아네트 초콜릿을 선보였다. 한 레스토랑에서는 앙투아네트가 즐겨 먹었던 요리들을 중심으로 특별 메뉴를 내놓았다. 최근 프랑스의 향수전문가 프란시스 커크지앙은 정밀한 고증을 통해 앙투아네트가 사용했던 향수를 재현했다는 뉴스까지 들린다. 그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지 200년이 지난 지금 프랑스인들이 이처럼 앙투아네트에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태양왕’이 다스리던 그 시절이 그립다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家)의 왕녀로 14세에 프랑스 부르봉가의 루이 16세와 결혼, 베르사유에 입궁한 마리 앙투아네트는 바깥 세상과 단절된 채 화려한 궁중생활을 즐기다 프랑스혁명 세력에 의해 남편과 함께 처형됐다. 과장된 것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굶주리는 백성들에게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라 하라.”고 했다는 일화가 전해질 정도로 철이 없던 인물이다. 그렇지만 요즘의 프랑스인들이 관심을 보이는 부분은 이런 부정적인 측면이 아니다. 프랑스의 장식예술 수준을 최상으로 끌어올린 그의 세련된 취향과 미적 감각을 높이 평가한다.“앙투아네트의 뛰어난 안목 없이는 궁전 구석구석을 그렇게 아름답게 꾸밀 수 없는 법”이라며 침이 마르게 칭찬한다. 앙투아네트를 치켜세우는 배경에는 그가 살았던 베르사유 궁전을 건설한 ‘태양왕’ 루이 14세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강한 자부심이 깔려 있다. 베르사유궁은 1682년부터 1789년 혁명 때까지 100여년간 왕권의 중심지이자 정치·문화·예술의 중심지였다. 사냥터까지 갖춘 엄청난 규모의 숲과 아름다운 정원, 최고의 건축가가 지은 화려한 궁전은 “짐은 곧 국가”라고 한 루이 14세가 확립한 절대왕권의 상징이었다. 5세에 왕위에 오른 뒤 섭정을 포함해 무려 72년을 통치한 루이 14세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했던 낭트칙령을 철회하는가 하면, 너무 많은 전쟁으로 재정위기를 초래했다. 하지만 프랑스인들은 그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으로 꼽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태양왕의 프랑스는 유럽 대륙의 최강자였기 때문이다. 당시 재무대신 콜베르는 사법과 재정을 개혁하고 상업과 무역을 적극 장려했다. 군사대신 루부아가 있었기에 적들이 감히 넘보지 못했을 뿐 아니라 해외진출도 확대됐다. 라살이 미국 대륙에 루이지애나를 건설한 것도 이 즈음이다. 프랑스는 세상의 중심이었다. ●“나폴레옹은 국민적 영웅” 융성했던 과거를 그리워하는 모습은 나폴레옹의 사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코르시카의 가난한 귀족 출신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군사학교를 졸업한 뒤 반왕당파의 쿠데타를 성공시킨 공로로 장군이 된다.1796년 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으로 혁혁한 승리를 거둔 뒤 국민적 영웅으로 떠오른 그는 공화정을 철폐하고 1804년 12월2일엔 노트르담 성당에서 대관식을 갖고 나폴레옹 1세로 등극했다. 2004년은 나폴레옹의 황제 즉위 200년이 되는 해였다. 루브르박물관에서 대관식 200주년을 기념해 자크 루이 다비드의 ‘대관식’ 그림과 관련한 각종 기록화를 전시하는 등 다양한 전시회와 토론회가 1년 내내 계속됐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정치적 야망과 영달을 위해 혁명정신을 이용했다는 비판을 받지만 프랑스인들은 그가 프랑스의 전성기를 이끌었다는 점에 더욱 감동한다. 나폴레옹이 민중혁명 세력을 누르고 프랑스의 영광을 구현할 수 있었던 것은 경찰의 검열과 사찰에 의존하는 극도의 권위주의 체제 덕분이었다. 하지만 이런 것을 문제 삼는 사람은 극소수다. 대신 프랑스의 행정체제를 개편해 중앙집권적인 현대 프랑스의 기틀을 다진 점을 높이 평가한다. 르피가로가 발행하는 피가로 매거진이 프랑스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49%는 나폴레옹이 ‘시대를 앞서가고,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는 방법을 알았던 위대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정권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독재자라고 평가한 사람은 39%였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조카인 나폴레옹 3세(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1852∼1870년 재위)는 경제적 번영과 정치적 안정을 구가했으며 서부 아프리카와 인도차이나에 식민지를 건설, 프랑스를 열강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도시 전체가 예술품이라고 불러도 좋을 현재의 파리도 이때 완성됐다. ●그리워라 옛날이여! 대혁명을 통해 절대 왕정을 무너뜨리고 민주주의의 기틀을 다진 나라가 프랑스다. 권위주의라면 온몸을 부르르 떨 정도로 자유를 중시하는 그들이 절대왕정 시대와 권위주의 시대의 인물들을 그리워하는 것은 참 아이러니하다. 이에 대해 영국의 선데이타임스는 프랑스인들이 과거에 대한 노스탤지어(향수)를 갖기 때문이라고 분석하고, 이같은 프랑스인들의 과거 지향성은 사회적·경제적 악재들이 이어지면서 더욱 심화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지난해 11월의 파리 교외지역 소요사태와 올봄 학생들의 시위 등으로 인해 사회가 혼란해지고 경제는 침체국면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건만 대통령을 포함해 정치인들은 국민들에게 아무런 희망을 주지 못한다. 영광스러웠던 과거를 그리워할밖에. 논설위원 lotus@seoul.co.kr
  • 마리 앙트와네트 향수 200년만에 판매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의 왕비로 대혁명 당시 참수된 마리 앙트와네트(1755∼1793)가 사용했던 향수가 판매된다. 정밀 고증을 통해 200여년 만에 부활한 앙트와네트의 향수가 수많은 여성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것으로 보인다. 영국 BBC는 12일 ‘M A 시야주드라렌(왕비의 여운)’이라는 이름의 앙트와네트 향수 25㎖가 350유로(약 42만원)에 판매된다고 보도했다. 프랑스 향수 전문가인 프란시스 커크지앙이 18세 전통방식으로 개발한 이 향수는 한정품으로 주문 제작되며 일반 상점에서는 살 수 없다. 이 향수는 장미와 아이리스, 자스민 등 100% 식물 원료가 사용됐고 왕비의 향수 제작자인 장 루이 파게옹의 제조비법이 발견되면서 복원됐다.안동환기자 sunstory@seoul.co.kr
  • “고구려 정신으로 무장하라”

    “타성에 젖은 관행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고구려 정신으로 무장하라.” 광진구 1100여명의 전 직원에게 특명이 떨어졌다. 정송학 광진구청장은 ‘고구려 프로젝트’를 시행하기에 앞서 직원들을 대상으로 고구려 역사에 대한 이해 교육을 실시하도록 지시했다. 12일 오후 1시30분 광진구청 대강당에 직원 500여명이 굳은 표정으로 모여들었다. 이날부터 이틀 동안 진행되는 ‘고구려 역사 찾기’ 교육을 받기 위해서다. 구청과 16개 동사무소 직원의 절반가량이 한자리에 모였다. 정 구청장은 힘차고 엄숙한 어조로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면서 “우리 역사상 가장 광대한 영토를 갖고 동북아시아를 호령한 고구려의 기상을 계승해 대한민국이 세계중심 국가로 우뚝 서는 초석을 만들자.”고 강조했다. 직원들은 무용총 등 고구려의 고분벽화를 소개하는 영상물을 숨 죽이고 시청했다. 아차산의 홍련봉 보루 등 유적지를 보여주는 영상물도 상영했다. 이어 전국을 돌며 중국의 고구려 역사왜곡에 대해 일깨우는 이이화 서원대 석좌교수가 강의를 시작했다. 그는 ‘고구려가 왜 우리의 역사인가’를 설명하면서 ‘중국의 역사왜곡 실태’에 대해 통렬히 비판했다. 이 교수가 “고구려에 대한 더 깊은 연구가 이뤄지고 테마공원 조성 등을 통해 고구려에 대한 대중화 작업을 서둘러야 한다.”고 강조하자 박수가 터졌다. 이날 오후 3시30분 강의가 끝나자마자 5급 이상 간부 20여명은 아차산에 올랐다. 숨 돌릴 틈도 없이 고구려 교육은 계속됐다. 아차산에는 고구려 병사들이 200년 동안 주둔했던 보루(참호)가 16곳이나 있다. 그 가운데 9곳이 광진구 관할이다. 나머지 4곳이 중랑구,3곳이 경기도 구리시에 속해 있다. 발굴된 보루 6곳에선 화살촉 등 유물 1680점이 쏟아져 남한 유일의 고구려 유적지로서의 가치를 더 했다. 광진구로선 아차산이 보물과도 같은 곳이다. 간부들은 동행한 향토사학자 김민수씨의 설명에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광진구는 이곳에 828억원을 들여 고구려 박물관을 짓고 주변에 역사테마공원을 조성하는 야심찬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고구려 영토 모양으로 성곽을 조성하고 광개토대왕비의 실물 크기 비석도 세운다. 구리시도 고구려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으나 고구려 기념부지가 사유지여서 사업 추진에 애를 먹고 있다. 정 구청장은 4년 임기 중에 추진할 목표로 지역경제, 균형발전과 함께 고구려 프로젝트를 꼽았다. 연말 조직개편을 통해 ‘고구려 태스크포스팀’(가칭)을 출범시킨다. 광진구 관계자는 “이제 협조가 필요한 정부, 서울시가 광진구와 함께 고구려 프로젝트를 펼쳐나갈 것인지 결단을 내려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김경운기자 kkwoon@seoul.co.kr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고서적 수집 25년 외길 박대헌 영월책박물관장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고서적 수집 25년 외길 박대헌 영월책박물관장

    고서(古書)가 헌책이라고? 천만의 말씀이다. 도도히 흐르는 역사의 기록이요, 그 진실의 두께를 켜켜이 담아낸 정의로운 보물이다. 또한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해 냈던 선조들의 온갖 지혜가 녹녹하게 발라져 있어 미래를 비춰주는 거울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런 말도 있다.‘고서 속에는 만가지 봉록(俸祿)이 다 들어있다. 다만 그것은 아는 자만의 것이다.’라고. 이밖에도 금과옥조 같은 여러가지 표현으로 고서의 소중한 가치를 깊이 새기게 한다. 박대헌(54) 영월책박물관장.‘백수’로 지내던 20대의 젊은 나이 때부터 25년 가까이 고서적만을 옹골지게 수집해온 특별한 삶의 밭을 일구고 있다. 흙속의 진주 캐기라고나 할까. ●영월의 폐교에 책박물관 열다 1998년, 그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던 강원도 산골의 한 폐교에 ‘책박물관’을 떡 하니 열어 주위를 놀라게 했다. 사람, 자연, 책이 함께 어우러지는 그런 ‘그림 같은 문화마을’에 대한 평소의 동경과 신념이 작용했다. 이와 함께 1983년부터 서울에서 운영해 오던 고서점 ‘호산방’ 또한 아예 두메산골로 옮겼다. 그는 여기에서 300∼400년 전의 조선시대 희귀본 등 수백권의 고서를 찾아내 빛을 보게 했고 박물관을 찾는 많은 관광객들에게는 문화적으로 여러 신선한 충격을 안겨다주었다. 영월지역을 다녀온 이들은 한결같이 “정말, 대단한 분이다.”라는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그런데 최근 영월에 있던 ‘호산방’을 서울 도심 한복판인 태평로1가의 한국프레스센터 지하로 옮겼다. 고서점이 점점 사라지는 현실을 감안할 때 다소 의아해지는 대목이다. 궁금증을 풀기 위해 지난주 ‘호산방’에서 박 관장을 만났다. 입구에는 ‘호산방은 30년 후를 생각합니다.’는 글귀가 인상깊게 걸려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200년 전의 ‘의방활투’를 비롯,‘추사문집’ 초판본, 조선후기의 ‘우병치방법’ 등 세월의 때가 잔뜩 묻은 희귀 고서 500여권이 눈에 들어온다. 특히 ‘우병치방법’은 소가 병들었을 때 치료하는 요령이 상세히 담겨 있어 당시 우리 선조들이 소를 어떻게 대했는지 짐작하게 했다. ●프레스센터 지하에 고서점 열어 특히 한쪽에 진열된 1960∼1970년대의 국민학교 교과서들은 당시의 추억 어린 향수를 떠올리게 했다. 아울러 월북 시인 임화의 ‘현해탄’, 박두진의 ‘해’, 그리고 소월의 스승 안서 김억의 육필원고 등도 소중하게 다가온다. 박씨가 10년 전 펴낸 필생의 역작 ‘서양인이 본 조선’도 눈에 들어온다. 이 책은 17∼20세기에 걸쳐 조선에 다녀간 서양인들이 조선에 관해 쓴 책들을 하나하나 꼼꼼하게 살펴 새롭게 정리했다. 이를 위해 그가 모은 원본만 모두 287권. 세계 각국의 고서점을 구석구석 뒤지고 다닌 발품의 결과물이기에 학계에서도 소중한 사료가치로 인정한다. 그가 ‘서지(書誌)학자’로 불리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서울시내 중심가에 둥지를 새롭게 마련한 지 두달 됐다는 그는 “영월에 있는 책박물관 운영이 어려워져 이곳에 일을 저질렀다.”고 했다. 하기야 산골에서 박물관을 운영하기란 그리 쉽지는 않았을 터. “영월의 책박물관도 살리고 또 수도 서울 한복판에 고서문화의 한 중심축을 만들어 보겠다는 생각도 들었지요. 지금은 약간 어렵겠지만 내년에는 정상궤도에 오를 것으로 희망합니다.” ●고서, 작은 마을의 희망이 되는 물건 ‘30년 후를 생각합니다.’라는 글귀의 뜻을 물었더니 “고서를 통해 이전과 현세대, 그리고 미래 세대를 연결시키는 공간을 의미한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그러면서 “30년 후를 생각해 보면 주위에 남을 만한 책들이 얼마나 될지 걱정도 된다.”고 부연했다. 이어 “대형마트에서 팔지 않는 물건, 작은 마을의 희망이 되는 물건, 그게 바로 고서의 가치”라고 거듭 강조한다. 웬만한 강원도 여행객치고 박씨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그의 책사랑은 소문이 나 있다. 그가 서울에서 영월로 향했을 때만 해도 강과 산으로 둘러싸인 산골마을에 서점과 음악·연극 공연장, 문화 예술인의 작업실, 화랑, 카페가 있는 마을을 구상했다. 그래서 ‘영월 책축제’만 7회나 여는 등 나름대로 온 힘을 기울였다. 하지만 책과 문화에 대한 주변 사람들과의 시각차이를 좁히는 것은 쉽지 않았다. 결국 박물관을 잠시 폐관했다가 얼마전 다시 재개관하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세계에서 가장 먼저 생긴 책마을은 영국의 ‘헤이 온 와이’입니다. 웨일스의 작은 마을이지요. 폐광 등으로 1960년 초만 해도 쇠락해가는 마을이었는데 어느날 리처드 부스라는 한 젊은이의 노력으로 지금은 세계 각국의 관광객들이 찾는 유명한 책마을로 변모했습니다.” 평소 박씨의 철학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영월책박물관은 옛 학교터(여촌분교)와 건물을 그대로 활용하고 있다. 이 학교는 1962년 개교해 1998년 문 닫기까지 36회에 걸쳐 400여명이 졸업했다. 현재 박물관에는 3만∼4만여점이 소장돼 있다. 박씨의 책사랑은 고교 때부터 시작됐다. 어느날 은사에게 옛 책의 소중함을 듣고 용돈을 아껴 시간날 때마다 청계천 등지에서 한두 권씩 책을 사모았다. 원래의 꿈은 도예가. 그래서 홍익공업고등전문학교에서 요업을 전공했다. 고교과정 3년과 대학 2년과정을 합친 5년제 학교였다. 군 제대후에는 도예학원을 운영했으나 아무런 성과를 이룰 수가 없었다. 백수생활로 접어들면서 방황이 시작됐다. 국립중앙박물관과 도서관, 그리고 서울의 여러 고서점을 들르는 일이 유일한 낙이었다. 그 많은 유물을 눈감고도 줄줄 꿸 정도였다. 덕분에 도자기뿐만 아니라 고미술 전반에 대한 안목이 높아졌다. 고서적도 마찬가지. 결국 곰곰이 생각하던 끝에 서울 장안평 고미술상가에 고서점 호산방(壺山房)을 열었다. 이때가 1983년 서른 살의 나이였다. 호산방이라고 한 것은 조선 말기 서화가 우봉 조희룡의 호 호산(壺山)에서 비롯됐다. 고서점을 연 후에는 주로 필사본과 간찰, 또 개화기와 일제 강점기 때의 역사와 문학 관련 양장본들에 관심을 쏟았다. ●수집에 미쳐 가족엔 ‘미안한 아빠´ 1992년 장안평 고서점을 광화문 인근으로 옮겼다. 이때 인사동의 한 고서점 주인은 “인사동에서도 안 되는 고서점이 광화문에서 되겠어? 1년도 못버틸 걸.” 하고 말렸다. 하지만 꽤 유명세를 탔고 번창해 나갔다. 그 사이 방송통신대학을 9년만에 졸업했고 동국대 정보산업대학원에서 출판잡지를 전공, 석사과정까지 마쳤다. 이때가 1998년 나이 마흔 여섯이었다. 박씨네 가족이 현재 거주하는 곳은 책박물관 한쪽에 있는 허름한 관사. 말이 관사이지 한겨울에 연탄난로를 두 개씩 피워도 거실의 물이 얼고 수도관이 터지기 일쑤. 그러다 보니 박씨는 무능한 가장으로 전락했다. 초등학교 5학년, 중학교 1학년이던 두 아들은 이곳에서 고등학교를 마쳤다. 서울에서도 학원 한번 보내지 못하고 시골에 데려왔지만 큰아들은 현재 한국과학기술원(KAIST) 4학년에 재학중이고, 둘째는 내년 대학에 진학할 예정이다. “누가 그러더군요.‘고서수집을 하는 것은 독립운동하는 것과 마찬가지다.’라고 말입니다.” 어쩌면 이 말은 그동안 산골마을에서 외롭게 문화독립운동을 해온 박씨를 두고 한 말이 아닐까. 그는 고서에 관심있는 사람들을 위해 “고서는 열번 잘 사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 한번 잘못 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다. 내년 초 그동안의 고서수집 노하우와 에피소드를 담은 ‘서창야화-어느 고서점 주인의 잠꼬대(가제)’라는 책을 발간한다. km@seoul.co.kr
  • [책꽂이]

    ●자유, 사랑 그리고 열정 예술의 도시(이태훈 지음, 다른세상 펴냄) 동유럽은 그리스, 로마, 터키 등 동서양의 문화적 흔적들이 남아있는 아름다운 예술의 도시들로 가득하다. 크로아티아의 스플릿엔 로마 문화가 스며있고, 두브로브니크엔 베네치아의 문화가, 헝가리 페치와 죄르엔 오스만 튀르크족의 문화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유네스코 선정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도시가 수십 개나 될 정도로 문화의 보고인 동유럽의 매력을 소개했다.1만 6000원.●실크로드 문명기행(정수일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 중앙아시아는 지리적으론 멀리 떨어져 있지만 우리에게 왠지 낯설지 않다. 고구려 사신이 다녀간 아프라시압 궁전터가 있고, 고선지 장군이 이슬람 대군과 맞선 탈라스 싸움터가 있으며, 곳곳에 카레이스키(고려인)들이 살고 있어서일까. 실크로드학의 대가인 저자는 서울에서 이스탄불로 이어지는 실크로드 3대 간선의 하나인 오아시스 육로를 택해 문명탐험에 나섰다. 오리엔트 문명의 정화를 보여주는 중동 최대의 문명유적 페르세폴리스와 1500여년 동안 꺼지지 않고 타오르는 조로아스터교의 성화, 라틴문자의 모체인 우가리트 문자가 출토된 현장 등을 추적한다.1만 5000원.●앙코르와트(비토리오 로베다 지음, 윤길순 옮김, 문학동네 펴냄) ‘캄보디아의 영원한 등불’‘신의 정원’‘아시아의 보석’으로 불리는 앙코르와트. 지금은 관광명소가 됐지만 불과 200년 전만 하더라도 앙코르와트는 정글 속에 버려진 유적지였다. 아시아 예술사를 공부한 저자는 크메르인들이 받아들인 힌두신화와 천문학적이고 우주론적인 상징체계를 담은 건축물에 숨겨진 지혜를 밝힌다. 저자는 산스크리트어와 고대 크메르어로 된 비문들을 보면 크메르 제국은 매우 잘 조직된 사회였으며, 인도문화의 영향을 받았지만 자율성과 독창성을 발휘했다고 말한다.2만 3000원.●혈농어수(血濃於水)(강준식 지음, 아름다운책 펴냄) 민족지도자 몽양 여운형(1886∼1947)의 일대기를 다룬 정치소설. 해방공간에서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 좌우합작 정부수립을 추진하던 몽양은 당시 조선 민중에게 가장 인기있는 정치인이었다. 하지만 좌우통합을 주장하던 몽양은 좌우 양측으로부터 테러를 당한다. 혈농어수는 몽양이 일본의 고려 신사 방명록에 남긴 글로,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뜻. 이념이나 사상보다 민족의 하나됨이 중요하다는 몽양의 통합정신이 잘 드러나 있다. 전3권 각권 1만 9800원.●일본 모더니즘 소설 연구(강인숙 지음, 생각의나무 펴냄) 일본의 3대 모더니즘 작가를 분석. 저자(영인문학관 관장)는 일본 모더니즘 소설이 이상과 박태원, 이효석 등에게 큰 영향을 끼쳤고 1930년대 일본 문단의 영향 아래서 한국적 모더니즘이 형성됐다는 점에서 일본 모더니즘 작가 연구는 한국문학 연구를 위한 기초작업이라고 주장한다.1923년 관동대지진 이후 일본 문단을 주도한 신감각파 요코미쓰 리이치(橫光利一), 신흥예술파 류탄지 유(龍膽寺雄), 신심리주의파 이토 세이(伊藤 整) 등의 작품세계를 살폈다.1만 8000원.
  • 儒林(746)-제6부 理氣互發說 제4장 儒林(3)

    儒林(746)-제6부 理氣互發說 제4장 儒林(3)

    제6부 理氣互發說 제4장 儒林(3) 마침내 공림 앞 광장이 드러났다.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은 초2월의 쌀쌀한 늦은 겨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광장 앞은 관광객으로 만원을 이루고 있었고, 그들을 상대로 한 장사꾼들의 아우성 소리가 시끌벅적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다가오는 나를 보자 장사꾼들은 용케도 나를 외국에서 온 이방인으로 알아보았고, 그러자 벌떼처럼 일어나 나를 에워쌌다. “1000원,1000원. 싸다, 싸…” 장사꾼들은 서로 손에 물건을 들고 나를 물어뜯을 것처럼 공격하였다. 그중에서 내 눈에 띈 것은 수레를 끌고 다니는 노점상이었는데, 그들은 수레 위에 붉은 색이 나는 과일을 들고 호객행위를 하고 있었다. 물론 생수병을 들고 있었으나 갈증이 났으므로 나는 그 노점상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그것은 과일이 아니라 무였다. 이곳 지방의 특산물로 껍질을 벗기면 그 속이 수박처럼 새빨간 홍무였다. 나는 홍무를 하나 사서 껍질을 벗겨주기를 기다려 천천히 그것을 씹었다. 무라고 하기에는 달콤하고, 과일이라고 하기에는 무미한 홍무를 나는 디즈니만화에 나오는 토끼처럼 씹어 삼켰다. 원래 사기에는 공자가 ‘노나라 도성 북쪽 사수(泗水)가에 매장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때의 장면을 사마천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공자는 노나라의 북쪽 사수가에 매장되었다. 제자들은 모두 3년간 상을 입었다. 또 3년간의 심상(心喪)을 끝내고 서로 이별하려 할 때에는 소리 내어 울었다.” 따라서 공자의 무덤이 사기에 기록된 대로 도성의 북쪽인 이곳에 묻혀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도 증명이 되는 명확한 사실인 것이다. 그러나 공자의 무덤이 도성 북쪽에 있다는 기록은 오늘날에도 입증되는 사실이나 무덤 곁에 사기에 기록된 대로 사수라는 강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은 불분명하다. 다만 오늘날 공림 안에는 수수(洙水)라고 불리는 개울이 흐르고 있는데, 이는 강이라기보다는 작은 도랑에 불과하므로 아마도 사기에 기록된 사수는 물길이 끊겨 지도상에서 사라져 버린 듯 보인다. 또한 사마천은 사기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노나라에서는 대대로 매년 공자의 무덤에 제사를 지냈다. 많은 유자들이 공자의 무덤 앞에서 예를 익혔고, 향음(響音:향악의 우등생을 군주에게 추천하는 예식), 대사(大射:향인의 궁술시험) 등의 예를 행했다. 공자의 무덤은 1경(一頃)이었다. 제자들이 기거했던 당은 후세의 묘로 남아 공자의 옷과 관, 금(琴), 거(車), 서(書)를 보관했다. 한(漢) 대에 이르기까지 그것은 200년이나 존속되었다. 한나라의 고조가 노나라에 들렀을 때에는 태뢰(太牢:소, 양, 돼지)를 갖추어 제사를 지냈다. 경상(卿相) 등이 이 땅에 오면 언제나 공자의 무덤에 먼저 참배한 뒤에야 정사를 보았다.” 이렇듯 공자의 묘는 한(漢) 대에 이미 존재하였으며, 한나라의 고조가 제사를 지냈던 그 당시 이미 사방1경(1경은 100묘)에 해당되는 거대한 묘역으로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 [길섶에서] 양귀비와 류승범/최태환 수석논설위원

    양귀비를 본 적이 있다. 타이베이 고궁박물관에서다. 붉은 빛의 대리석 조각이었던 것 같다. 가느다란 눈매에 도톰한 볼, 통통한 몸매. 천하절색이었다는데…. 별로라는 느낌이 앞섰다. 마른 몸매가 주목받는 시대를 살아서 그런가.1200년전 당(唐)과 지금. 미감의 거리가 시대의 간극만큼이나 진하게 다가온다. 하지만 어느 패션 전문가는 요즘같은 시대에 오히려 ‘오동통 마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10대부터 육감적이었던 배우 김혜수가 다이어트같은 것을 하지 않길 바란다면서. 시시각각 달라지는 게 미감이다. 패션이라고 다를까. 넥타이가 좁아졌다 넓어졌다, 바지통이 커졌다 좁아졌다, 저고리 깃이 늘었다 줄었다. 유행따라 자연스러운 느낌이 다르다. 얼마전 류승범 패션이 인터넷 공간에서 화제였다. 나비 넥타이에 깡충한 바지, 맨살의 발목, 그리고 운동화. 영화제 시상식에서의 모습이다. 류승범이니까 용서할 만하다는 촌평이 우세했다. 패션은 매직이다. 나만의 개성이면 족하지 않을까.“내가 곧 스타일이다.”빛나는 자신감으로 패션의 전설이 된 샤넬의 말이다. 최태환 수석논설위원 yunjae@seoul.co.kr
  • 광진구 “고구려를 되살려라”

    광진구 “고구려를 되살려라”

    광진구가 중국의 동북공정에 맞서 남한에서 고구려 유적이 가장 많이 나오는 아차산 일대에 고구려 박물관과 유적 공원을 조성하는 고구려 프로젝트를 수립했다. 오세훈 시장의 1200만 관광객 유치 계획에도 일조하는 것은 물론 학생들에겐 역사의식을 고취시킬 수 있어 일석이조의 효과가 기대된다. ●아차산에 고구려 박물관 건립 아차산엔 고구려가 200년 동안 주둔하고 온달장군이 전사한 곳으로 알려진 아차산성이 있다. 또 약 100여명의 고구려 군인이 생활한 작은 성인 보루 17곳이 있는데 광진구에 6곳, 구리시 5곳, 중랑구 2곳, 광진구 구리시 경계 3곳, 중랑구 구리시 경계에 1곳 등이 있다. 이들 보루 가운데 6곳에선 화살촉과 항아리, 기와 등 1680여점의 고구려 유물이 나왔다. 나머지 11곳을 더 발굴하면 3000여점 이상 유물이 나올 것으로 추정된다. 광진구는 아차산 입구에 고구려 박물관을 짓고 서울대박물관과 고려대 매장문화재연구소가 소장 중인 유물과 새로 출토될 유물을 모두 모아 박물관에 전시하는 방안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정송학 구청장은 “광진구 관내에 보루가 많이 산재해 있어 광진구가 중심이 돼 박물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광진구는 청소년수련관 옆에서 아차산 입구까지 쌍영총과 안악고분, 덕흥리고분 등 10개 고구려 고분의 모형을 그대로 재현하고 고분마다 고분 성격에 맞는 테마공원을 만들어 그 일대를 고구려 역사공원으로 조성할 계획이다. ●문화 명소 인프라 갖춰 아차산엔 워커힐호텔이, 주변에는 한강호텔과 동서울호텔이 있다. 특히 워커힐을 찾는 외국인들이 아차산을 쉽게 찾을 수 있어 관광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또 호텔 주변에 명월관과 장순루 등이 있는 식당가가 있고 테크노마트도 있어 문화명소로서 충분한 인프라를 갖추고 있다. 또 주변 지역과의 연계도 추진된다. 아차산 입구에서 차로 5분 거리인 천호대교를 건너면 송파구에 있는 백제 초기에 지어진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이 차례로 나온다. 광진구는 이들 토성을 찾은 관광객이 풍납토성 앞 한강에서 돛단배를 타고 아차산쪽으로 올 수 있는 방안을 서울시에 건의하기도 했다. 또한 서울시에 고구려 박물관 건립 뒤 아차산 입구를 관광객이 많이 타는 서울시티투어버스의 코스에 포함시키는 방안을 서울시에 건의할 방침이다. 어린이대공원에 온 어린이가 고구려박물관을 쉽게 찾을 수 있는 방안도 모색하고 있다. ●문화재청 지원 절실 고구려 프로젝트 예산은 모두 828억여원으로 추정되고 있다. 하지만 재정자립도가 45%인 구 재정으로는 쉽지 않다. 광진구는 사실상 이 사업의 주관이 되어야 할 문화재청에 400억원 이상을 요청하고 있다. 서울시에도 예산지원을 요청했다. 정송학 구청장은 “1500년 전 한민족이 동북아를 지배했다는 사실을 외국인들에게 보여주고 학생들에겐 고구려인의 늠름한 기상을 전하기 위해 프로젝트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박지윤기자 jypark@seoul.co.kr
  • 운치있는 한옥청사 ‘자꾸자꾸 가고싶네’

    처음 등장한 한옥 동사무소가 주민들의 뜨거운 호응 속에 문을 열었다. 서울 종로구 혜화동사무소는 22일 개청식을 갖고 본격적인 업무를 시작했다. 이날 개청식에는 김충용 종로구청장과 홍기서 구의장 등 내외빈 외에도 근처에 사는 주민들이 몰려 들어 개청을 축하했다. 김시만 혜화동장 등 동직원 13명은 개량 한복으로 곱게 갈아입고 손님을 맞았다. 전통 한옥의 동사무소는 대지 244평에 ‘ㄷ’자형 건물로 74평 규모다. 한옥의 안방으로 쓰이던 제2민원실은 건축, 복지 등의 업무를 다루고 사랑채이던 제1민원실은 각종 증명서를 발급하는 곳이다. 가운데에 마루가 있던 자리는 PC 등이 설치된 민원인 대기실로 변신했다. 우아한 기와와 미려하게 다듬은 나무 기둥이 전통미를 물씬 풍긴다. 벽을 허문 뒤 안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통유리를 사용,`열린 행정’을 실천했다. 직원들에게 한복 착용도 권하기로 했다. 한옥 동사무소는 마당도 돋보인다. 수령이 200년 이상인 향나무가 마당 한 가운데에서 은은한 향을 풍기고 주변의 대나무와 은행나무가 운치를 더하고 있다. 바닥엔 잔디를 깔았다. 특히 기둥에는 옛 유명인들의 글씨를 담은 목판이 걸려 있어 눈길을 끌었다.‘가전충효 세수인경(家傳忠孝 世守仁敬)’. 세종대왕이 친필로 쓴 ‘집에서는 충과 효를 전하고 대를 이어 어짐과 공경으로 지킨다.’는 의미. 친필을 후세에 그대로 새긴 목판이다. 이 밖에 충무공 이순신과 추사 김정희, 백범 김구와 해공 신익희 선생 등의 명체가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이 모든 목판은 한옥의 전 주인이 동사무소에 기증했다. 전 주인은 제과업계 산증인으로 불리는 성북동 나폴레옹제과의 양인자 사장.1940년대에 지어진 한옥을 깔끔하게 다듬고 사용한 흔적이 역력하다. 종로구는 이전에 청사로 사용하던 서울시 소유 건물을 서울시에 돌려주고 총 7억 3000만원을 들여 한옥을 구입, 내부를 개조했다. 한옥 동사무소를 반대하는 주민도 있었다.“금싸라기 땅에 단층짜리 사무소를 사용하면 주민 시설이 부족하다.”는 이유에서다.주민자치단체장을 맡고 있는 윤영진(64)씨는 “다 고치고 보니 동사무소가 외국인 관광명소가 될 정도로 훌륭해 주민들이 모두 좋아한다.”고 말했다. 김 동장은 “앞으로 동사무소에서 가훈써주기, 서예교실 등도 열어 주민들의 더 큰 사랑을 받는 곳으로 만들겠다.”고 말했다.김경운기자 kkwoon@seoul.co.kr
  • 국내最古 200년대 백제 도로유적 발굴

    백제가 한성에 도읍하던 시대(BC 18∼AD 475)의 도성 유적인 풍납토성(사적 제11호)에서 서기 200년대 무렵에 조성된 도로 유적이 최초로 확인됐다. 중요 시설인 도로 유적의 발굴은 풍납토성이 한성백제의 왕성(王城)이나 왕경(王京)이라는 추정을 더욱 뒷받침할 것으로 평가된다. 국립문화재연구소(소장 김봉건)는 백제 초기 도성인 풍납토성에 대한 제1차 10개년 학술조사 계획에 따라 서울 송파구 풍납1동 197번지 일대(옛 미래마을 부지)에 대한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국내에서 발굴된 최고(最古) 도로 유적을 비롯해 대형 폐기장, 석축수로, 주거지 등 80여기에 이르는 유구(遺構)를 확인했다고 21일 발표했다. 이와 함께 수천점에 이르는 기와와 각종 토기류, 토제초석(기둥 받침돌), 철기류 등 다량의 유물이 출토됐다. 특히 이번에 확인된 도로에 대해 연구소측은 “6세기 경주의 신라 왕경이나 백제 사비 시기(AD 538∼660)의 부여·익산 지역에서 조사된 도로에 비해 축조시기가 200∼300년 정도 앞서는 것으로 파악돼 그동안 발굴된 도로 중 가장 오래된 것”이라면서 “초기 백제의 유력한 왕성으로 추정되는 풍납토성 내에서도 처음 확인된 귀중한 시설 자료”라고 밝혔다. 현재까지 너비 8m에 길이 41m에 이르는 남북 도로와, 이 도로와 교차하는 너비 5m가량의 동서 도로가 드러났다. 특히 남북 도로의 경우, 땅을 얕게 파낸 후 가운데 부분에 폭 5m, 두께 20㎝ 정도 되는 잔자갈을 중앙이 볼록하게 깔아 노면을 조성했다. 양 측면으로 빗물이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도록 축조한 것으로, 많은 공력을 들였음을 알 수 있다. 이와 함께 도로 유적 인근에서 출토된 경질문무토기 출토유구나 수혈(구덩이) 등은 도로 유적보다 시기가 더욱 앞서 백제 국가의 발생시기를 3세기 중반 이후에서 초반으로 앞당길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할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날 풍납토성 발굴현장에서 열린 설명회에는 풍납동 주민 수백명이 재산권 제한에 따른 보상가를 높여달라는 피켓시위를 벌이며 발굴단과 대치하는 소동을 벌였다.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함혜리기자의 프렌치 리포트] (5) ‘학벌’ 신분사회

    [함혜리기자의 프렌치 리포트] (5) ‘학벌’ 신분사회

    프랑스에 대해 우리가 정확하지 못한 선입견을 갖고 있는 대표적인 분야가 사회 시스템이다. 자유·평등·박애를 국시(國是)로 내세우고 있는 만큼 모두가 차별없이 동등한 권리를 누리고, 모든 사람이 균등한 기회를 누리는 평등한 사회일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실제 프랑스는 철저한 신분사회다.21세기에 인도도 아니고, 사회민주주의의 본산인 프랑스를 ‘신분 사회’라고 단정하는 것에 반박할 사람도 많겠지만 실상이 그렇다. 소수의 엘리트들이 정치·경제·사회 각 분야의 지도층을 구성하고, 다수의 평범한 시민들이 중간층을 구성한다. 그 아래는 사회 안전망의 보호를 필요로 하는 노약자와 극빈층, 그리고 외국의 이민자들로 구성된다. ●능력만큼 대접받는다 프랑스 사회를 특징짓는 단어 가운데 하나가 ‘메리토크라시(meritocratie)’다. 대혁명 이후 민주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부(富)와 특권을 일부 계층이 세습하는 데 대해 많은 비판이 오갔는데, 이 문제를 해결하는 사회적 합의가 바로 능력에 따라 보상을 받도록 한다는 메리토크라시였다. 사람의 능력을 어떻게 판가름할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을 것이나 프랑스에서는 학력을 가장 공평한 기준으로 간주한다. 개인의 성취도를 학력으로 평가하고, 공부 잘해서 좋은 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다른 나라와 큰 차이가 없다. 프랑스의 엘리트 시스템이 갖는 가장 큰 특징은 국가가 필요로 하는 인재들을 소수 정예로 선발해 가르치고 훈련시켜 등용한다는 점이다. 국가의 미래를 책임지는 각 분야의 엘리트들을 배출하는 고등 교육기관이 그랑제콜(Grands Ecoles)이다. 프랑스의 고등교육 체계는 아주 독특하고 복잡한데 영미식 고등교육제도에 견줘 가장 큰 차별성을 보이는 부분이다. 프랑스의 그랑제콜들은 대부분 대혁명 이후인 18∼19세기 세워졌다. 인문계, 자연계 구분없이 전 분야에 걸쳐 공·사립 학교가 전국에 수백 군데 분산되어 있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인문계의 고등사범학교(ENS)와 이공계의 에콜폴리테크니크(X)는 최고의 수재들만이 입학할 수 있는 명문 중의 명문이다. 200년 전통을 자랑하는 ‘프랑스의 자존심’ 에콜폴리테크니크의 엘리자베드 크레퐁 부총장은 “프랑스의 고등교육은 사회를 이끌어갈 고급 엘리트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그랑제콜과 대중적인 고등교육을 위한 일반 대학으로 이분화된 것이 특징”이라며 “대학과 그랑제콜은 기본적으로 지원 자격, 선발 방법, 교육 방법이 다르고 졸업 후의 역할도 큰 차이를 보인다.”고 설명했다. ●전문화·서열화된 학벌 카스트 일반 대학은 대학입학 자격 시험(바칼로레아)만으로 무시험 진학하는 데 반해 그랑제콜은 국가가 실시하는 시험(콩쿠르)을 거쳐야만 입학이 허용된다. 선발 시험에 응시하기 위해서는 바칼로레아 후 2∼3년간의 그랑제콜 준비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 준비 과정은 전국 480개 고등학교에 설치된 그랑제콜 준비반(CPGE)에서 이뤄지는데 이곳 역시 고교 2년 말 학교성적이 5∼10%에 들어야 한다. 이들은 최하 4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그랑제콜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출세가 보장된다. ENS나 에콜폴리테크니크 같은 국립 그랑제콜의 경우 학생들에게 월급까지 주며 좋은 환경에서 공부를 시킨다. 졸업생들은 프랑스 최고의 엘리트로 대접받으며 많은 특권을 누린다. 졸업과 동시에 주요 부처의 관료로 임명돼 중요한 정책을 입안하거나, 국·민영 기업체의 간부로 스카우트돼 곧바로 현장에 투입된다. 학교 순위에 따라 연봉도 다르다. 이공계 최고의 명문 에콜폴리테크니크 출신의 첫해 연봉은 3만 8000유로(4700만원 정도), 상공계 최고의 명문 고등상과대학(HEC) 졸업자 초봉은 4만유로(5000만원) 정도다. 이들 학교의 졸업 학위는 일반 대학의 석·박사 학위와는 다르다. 대학 졸업장은 고등학교 졸업장 정도로 보면 된다. 프랑스에서는 대학을 나와봐야 번듯한 직장을 구할 수 없다. 대학의 박사학위도 그랑제콜 졸업장과는 비교가 안 된다. 프랑스의 그랑제콜 졸업장은 우리나라의 고시 합격증과 비슷한 수준이다. 평생을 좌우하는 명함이나 다름없다. 그랑제콜 졸업생들이 행정부로 진출하는 경우 이들은 각각 출신 학교별로 특수한 관료집단을 형성한다. 각 특수 관료집단은 고유의 호봉체계와 승진규정을 갖고 요직을 독식한다. 이들은 정·재계와 연결되어 정치인이 되거나 장·차관이 되고, 혹은 대기업의 사장이 된다. 해당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특수 관료집단에 편입될 수 없음은 물론이다. ●사회갈등 유발? 프랑스인들 대부분은 그랑제콜 출신들은 평등한 기회가 주어진 상황에서 남들보다 훌륭한 능력을 보였으며, 이들 선발된 인재가 사회를 이끌어 나가는 것은 지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런 생각도 최근 들어 많이 바뀌고 있다. 소수의 엘리트교육에만 치중하다 보니 대학 수준이 형편없이 떨어져 교육불균형을 초래한다는 비판과 함께 지나친 학연 중시와 파벌조성, 그리고 사회 저변과의 큰 괴리 등 문제점도 지적된다. 최근 들어서는 학력에 의한 ‘부의 세습’ 문제도 지적되고 있다. 그랑제콜 출신의 자녀들이 공부를 잘해서 다시 그랑제콜에 가고, 또 그 자손이 그랑제콜을 나오는 사례가 많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엘리트 시스템이 프랑스를 서유럽의 중심국가로 만들고, 눈부신 성장을 이루게 한 원동력이 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무한경쟁의 글로벌 시스템에서 조금씩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lotus@seoul.co.kr ■ 국립행정학교 ENA는 프랑스의 국립행정학교(ENA)는 정치행정 엘리트의 산실이다.2차대전 직후인 1945년 당시 드골 총리가 프랑스의 행정 인재를 발굴해 훈련시킨다는 취지로 만들었다. 국립정치학교(시앙스포)나 고등사범(ENS) 등 그랑제콜 출신 학생들이 다시 경쟁시험을 거쳐 들어간다. 일반직 공무원으로 일정기간 이상 근무한 사람, 유럽연합(EU) 회원국의 공무원, 일반 기업체의 관리들에게도 일정 비율 입학을 허용하고 있다. 외국인 공무원들을 위해 13개월간의 단기 연수과정도 마련돼 있다. 학생들은 27개월 동안의 집중 교육을 받는데 이 중 11개월은 지방 행정원에서,2개월은 기업에서 연수한다. 특이한 점은 교육기간 중 성적에 따라 발령부처가 달라진다는 것. 때문에 정·재계 진출의 기회가 많고 중요한 정책을 관장하는 부처에 배속돼 출세가도를 달리기 위해서는 시험합격 이후에도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ENA는 지난 60년간 5585명을 배출했으며 이 중 4551명이 아직도 활동 중이다. 자크 시라크 대통령도 이 학교 출신이며 알랭 쥐페 전 총리, 도미니크 드 빌팽 현 총리 등 최근 10명의 총리 가운데 7명이 이 학교를 나왔다.2007년 대권에 도전하는 사회당의 세골렌 루아얄과 프랑수아 올랑드 사회당 당수 부부는 드 빌팽 총리와 ENA 동기생들이다. 통상적으로 정부 각료의 35∼50%가 ENA 졸업생으로 채워지며 현재의 각료 31명 중에서도 8명이 ENA 출신이다. 유능한 행정관료를 배출한 것은 사실이지만 폐쇄적인 엘리트주의는 언제나 비판의 대상이 된다. 지난봄의 정적 음해사건(클리어스트림스캔들)과 관련, 인터내셔널헤럴드트리뷴은 “ENA 출신의 폐쇄성은 정책의 불투명성을 증가시켰으며 밀실정치를 가져오는 원인이 되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 [녹색공간] 경제 재도약과 기술개발/노수홍 연세대 환경공학부 교수

    1820년,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인 영국과 최빈국들이 있는 아프리카 국가들의 개인소득 차이는 4대1 정도였다. 그러나 1998년에는 가장 부유한 미국과 가장 가난한 아프리카 국가들의 소득격차는 20대1로 크게 벌어졌다.1750년경 영국에서 발명된 증기기관으로 시작된 산업혁명이 현재 국가간 소득의 커다란 격차를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즉 과학기술 발전을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조건을 가진 국가와, 그 혜택을 받을 수 없는 조건을 가진 국가들이 현재 소득수준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다. 미국 컬럼비아대학의 제프레이 삭스 교수가 저술한 ‘빈곤의 탈출’(The End of Poverty)에 의하면 각 나라의 지형학적 조건과 정치·문화적 안정성 등이 산업혁명 혜택을 누리는 국가와 그렇지 못한 국가를 구별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영국에서 발명된 증기기관은 그 기술을 이용한 철도나 배를 통해 전세계로 빠른 속도로 전파되었지만 우리나라는 200여년이 지난 195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산업혁명의 혜택을 받기 시작하였다.60년전 우리나라 소득수준은 세계 최빈곤 국가들의 수준과 별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60∼70년대에 투자한 중화학공업과 같은 기간산업, 경부고속도로 건설 같은 인프라 구축이 우리나라를 선진국 대열에 오르는 계기가 되었다. 아직도 세계 인구의 6분의1이 되는 10억명 이상이 200년 전과 생활수준이 큰 차이 없는 최빈곤 국가에 살고 있다. 산업혁명의 결과로 대부분의 인류는 빈곤에서 벗어났지만 산업화과정에서 자원의 무분별한 채취와 남획 등으로 지구 생태계는 파괴되어 환경문제가 심각한 문제로 제기되었다. 영국은 산업혁명의 혜택을 가장 먼저 받았지만 또한 환경오염 피해도 가장 먼저 경험하였다.1960년대에는 우리나라 초등학교 사회 교과서에 나오는 영국 맨체스터 지역 공장의 굴뚝에서 내뿜는 시커먼 연기와 대낮에도 가로등을 켜고 다니는 모습이 우리가 동경하는 산업화의 모습이었다. 물론 현재의 맨체스터는 맑은 하늘과 쾌적한 도시로 변모하였다. 영국정부와 지역주민의 지속적인 오염방지 노력과 산업을 성공적으로 구조조정한 결과이다. 우리나라도 산업화를 거치면서 강물이 오염되고 도시 및 공업지역은 대기오염으로 심각한 환경문제를 겪어왔다. 아직도 만족할 수준은 아니지만 최근 10년 동안 전반적인 환경조건은 서서히 나아지고 있다. 그러나 산업화기간에 오염시킨 토양이나 늘어난 자동차의 배기가스에 의해 오염된 도시의 공기를 정화시키기 위해서는 아직도 많은 예산의 투입과 기술개발 투자가 필요하다. 지난 10년 동안 우리 경제는 제 자리에 머물고 있다.OECD국가가 되고,IMF사태를 경험하고, 산업경제에서 지식경제로 또 창조경제로 전환되는 세계적인 추세를 따라가는 뒷심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국민소득이 3만달러 이상이 되려면 혁신적인 기술과 서비스가 지속적으로 개발되고, 그 결과로 시장이 확대되고, 증가되는 재원이 기술개발에 재투자되어, 시장이 다시 커져 고용이 증대되고 소득이 증가하는 선순환 경제가 작동되어야 한다. 첨단기술 개발과 세계시장 선점화를 위한 선진국들의 연구투자 경쟁은 매우 치열하다.2005년 우리나라의 총 연구개발비는 24조 1554억원으로 GDP 대비 2.99%로 선진국 수준에 도달하였다. 환경기술개발 분야도 1992년부터 시작하여 2010년까지 1조 8000억 정도가 투입될 예정이다. 규모면에서는 크게 성장하였지만 아직도 투자 효율성 개선이 필요하다. 우리나라의 박사급 연구인력의 70% 이상이 대학에 있다. 그러나 경제의 성장동력이 되는 첨단기술 개발에 대학의 역할이 다른 선진국에 비하여 매우 열악한 실정이다. 대학 연구인력을 우리 경제에서 성장동력의 핵심이 되도록 하는 방안을 심각히 논의할 시점이 왔다. 노수홍 연세대 환경공학부 교수
  • 美 첫 ‘사회주의자 상원’ 나오나

    좌파정당의 불모지 미국에서 60대 사회주의자의 ‘1인 혁명’이 결실을 맺고 있다. 미국 역사상 첫번째 ‘사회주의자 상원의원’을 노리는 버니 샌더스(65) 버몬트주 하원의원이 주인공이다. 그는 중간선거를 나흘 앞둔 현재 라이벌인 공화당의 백만장자 기업인 후보를 여유있게 앞서고 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2일 현지 전문가들의 말을 인용,“갑작스러운 질병이나 사고만 없다면 샌더스와 상원의 ‘운명적 조우’는 무난할 것”이라면서 “그의 성공은 미국정치에 대한 전통적 학설들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200년이 넘는 미국의 정당정치사에서 사회주의 정당과 정치인들은 견고한 제도권의 벽 앞에서 번번이 좌절해야 했다. 상원의 보수성은 특히 심각해 역대 선거에서 사회주의 후보 가운데 가장 선전한 경우가 1930년 6%를 득표한 에밀 세이덜일 정도다. 특이한 점은 샌더스의 `정치기술´에 대한 평가가 지지자들이든 반대자들이든 한결같이 부정적이라는 것이다. 그는 어디서나 자신이 사회주의자란 사실을 자랑할 만큼 ‘뻔뻔’스러우며, 고집불통에 툭하면 장광설을 늘어놓는 등 사교감각이 ‘제로’에 가깝다는 평을 듣는다. 버몬트대 정치학과의 개리슨 넬슨 교수는 “‘자유주의자’라는 말조차 모욕으로 받아들여지는 미국 사회에서 돈도 없고 소속 정당도 없는 데다 특별한 신체적 매력도 없는 그가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은 학문적 연구대상”이라고 말했다. 물론 샌더스는 하원에서 이미 8선을 기록 중인 관록의 정치인이기도 하다.1980년대 벌링턴 시장을 지낼 당시 시정부를 개혁하고 침체된 도시경제를 활성화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이세영기자 sylee@seoul.co.kr
  • 도굴범 덕분에…

    ‘고맙다, 도굴범’ 이집트의 피라미드 유적지인 사카라(멤피스)에서 4200여년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무덤 3기가 발굴됐다.2개월전 이곳에서 무덤을 파헤치다 검거된 도굴범들 덕분이다. 22일 AP통신에 따르면 왕실 치과의사의 것으로 보이는 무덤 가운데 한 곳에선 “훼손할 경우 악어와 뱀에게 잡아먹힐 것”이란 경고문구가 적혀있었다. 이집트 문화재 당국은 지난 8월 사카라 피라미드 인근에서 밤샘 작업을 하던 범인들이 검거된 뒤 대대적인 발굴작업에 돌입, 무덤들을 찾아냈다. 무덤은 흙벽돌과 석회암을 혼용해 만들어졌고 미라는 발견되지 않았다. 발굴을 주도한 자히 하와스 이집트고유물최고위원회 위원장은 “어금니를 표현한 무덤 입구의 상형문자로 미뤄 4200년 전 왕실에 소속됐던 치과의사들 무덤이 확실하다.”면서 “도굴꾼들이 아니었다면 발굴이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카라의 피라미드는 고대 이집트 고왕조(BC 3100∼2040)의 3왕조 수도였던 멤피스에 지어진 조세르왕의 무덤으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피라미드로 알려져 있다. 전문가들은 이집트 고왕조 유적 가운데 지금까지 발굴된 것이 30%가 되지 않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세영기자 sylee@seoul.co.kr
  • [씨줄날줄] 그린시티/육철수 논설위원

    자연은 인간에게 아낌없이 베풀지만 신상필벌만은 분명하다. 고마움을 아는 이에게는 변함없이 혜택을 주고, 훼손자에게는 반드시 벌을 내린다. 맑은 공기, 깨끗한 물, 울창한 숲이 늘 우리 곁에 있어 줄 것 같지만 그 은혜를 잊는 순간 혹독한 대가가 따른다. 재앙을 겪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는 것은 인간의 천성이자 한계일 것이다. 미국 뉴욕시의 수돗물은 정수처리장을 거치지 않은 자연수로 유명하다. 물론 맑은 물을 거저 얻은 건 아니다. 뉴욕은 1600년대 초 네덜란드 이주자들이 세운 도시. 이주자들은 주변의 강물과 샘물을 애용했다. 그런데 인구 급증과 산업화로 방심했다가 200년만에 식수원은 온통 하수로 오염됐다.1832년에는 이 물을 마신 시민 수천명이 콜레라로 목숨을 잃었다. 시민들은 부랴부랴 맑은 물을 찾아 나섰고, 마침내 캐츠킬·델라웨어 강 인근에서 거대한 수맥을 찾아냈다. 뉴욕시와 시민이 이후 150년동안 여기에 쏟은 정성은 상상을 초월한다. 독일 프라이부르크는 슈바르츠 발트(흑림·黑林) 지대의 중소도시다. 이곳은 1970년대말 대기오염과 산성비로 한바탕 홍역을 치른 뒤 주민과 당국이 환경보전에 적극 나선 결과 세계적 생태도시 반열에 올랐다. 기타큐슈는 일본에서 처음으로 광화학스모그 경보가 발령됐던 공해도시였다. 하지만 1972년부터 20년간 오염복구에 힘써 환경도시로 재탄생했다. 브라질의 쿠리치바도 1970년대 초 인구급증으로 환경파괴 위기를 겪은 뒤 지금은 자전거와 보행자의 천국이란 소리를 들을 만큼 친환경도시로 발돋움했다. 국내에서 ‘그린시티’(Green City) 바람이 한창이다. 그제 환경부·서울신문 주관 ‘제2회 환경 우수 지자체 선정’ 행사가 열렸다. 연안습지를 되살리고 도심의 동천을 1급수로 만든 순천시가 최우수상을 받는 등 8개 시·군이 그린시티로 뽑혔다. 지자체와 주민들이 맑고, 푸른 도시를 만들려고 노력하는 모습은 너무 보기 좋다.‘가지 않은 길’로 유명한 시인 프로스트가 “자연에서 가장 푸른 것이 황금”이라고 읊었듯, 아름다운 자연은 존재만으로 소중하다. 아끼고 가꾸는 사람들에겐 반드시 축복을 내리는 게 우리의 자연이다. 육철수 논설위원 ycs@seoul.co.kr
  • [거리 미술관 속으로] (2) 삼성동 해상왕 장보고 조형물

    [거리 미술관 속으로] (2) 삼성동 해상왕 장보고 조형물

    삼성동 한국종합무역센터 근처를 지나다 보면 눈에 띄는 작품을 만나게 된다. 작품 이름은 ‘해상왕 장보고 상징조형물’이다. 자칫 센터 외관의 화려함에 묻힐 수 있어 주의가 필요한데, 일단 눈길을 주게 되면 한국 무역사의 정신까지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이 조형물은 2000년 5월31일 ‘바다의 날’에 첫 선을 보였다. 서울에서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가 열렸던 해다. 한국무역협회가 아셈을 기념해 아셈센터 광장에 설치했다. 그럼 왜 장보고일까. 해상왕장보고기념사업회측은 “당시 무역협회에서 우리나라 무역을 대표할 만한 상징을 찾으면서 1200년 전 동아시아를 호령했던 무역왕 장보고를 발견하게 됐다.”고 설명했다.9세기 신라·당·일본 3국의 해상무역을 장악하고 동남아시아·아라비아·페르시아에까지 손길을 뻗었던 무역사의 선구자 장보고의 기상이 현대에 이르러 무역센터 앞에 깃들게 된 사연이다. 장보고의 정신을 형상화한 이는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전수천 교수다. 지난해 열차를 붓 삼아 한민족의 한을 미국 대륙에 드로잉했던 바로 그 작가다. 작가는 거대 청동 조형물에 우리 민족의 의지와 기상을 담았다. 흥미로운 점은 동상이 아닌 상징조형물이라는 점이다. 장보고라는 인물이 아닌 그의 기개를 표현했다. 가로 12m, 세로 7m의 대형 수평면과 길이 11m, 높이 7m의 배 조형물로 이뤄진 이 작품은 멀리서 보면 대형 선박이 바닷길을 가로지르는 모습이다. 그야말로 기세등등하다. 가까이 다가가면 또 다른 면모가 호기심을 자극한다. 배 조형물 속에 또 다른 선박이 부조로 새겨져 있는데 이야기를 풀어놓듯 역동적이면서도 섬세하다. 무역선에 교역물품을 싣고 나르는 상인들의 모습에선 생생한 표정이 묻어나올 정도다. 또 대형 수평면에 표현된 태평양의 물결과 주변국의 모습은 세계로의 도약과 개척 정신을 강조하고 있다. 강혜승기자 1fineday@seoul.co.kr
  • 儒林(699)-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 (45)

    儒林(699)-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 (45)

    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45) 그러나 주자의 학문이 형성되는 데 있어 육구연과 진량 같은 호적수의 라이벌 관계는 필연적인 과정이었다. 이들과의 치열한 논쟁을 통해 주자의 학문은 더욱더 확고하게 체계를 갖출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공교롭게도 주자가 65세의 나이로 황제의 시강이 되어 황제의 최측근에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당대의 권신 한탁주(韓 胄)의 방해로 탄핵을 받아 관직도 빼앗기고 사록직도 없게 된 후 주자의 학문마저 위학(僞學)으로 몰려 죽을 때까지 이 불명예를 벗어나지 못하였을 때 오히려 이들의 도움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주자는 1200년, 이런 고통 속에서 숨을 거두었으나 주자가 사후에 신원을 받고 명예를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은 오히려 주자가 그토록 미워하였던 육구연과 진량의 제자들이 합심하여 주자를 옹호하였기 때문이었으니, 무릇 위대한 사상의 탄생은 이와 같은 고난의 시련과 반대 사상의 담금질을 통한 정제과정을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주자는 도대체 무엇을 집대성하였음일까. 주자는 수평적으로는 송 대 성리학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정이, 정호 두형제의 성리론에서부터 이러한 수많은 유학자들의 성리학을 총정리하였으므로 흔히 정주학(程朱學)의 종주로 불릴 뿐 아니라 수직적으로는 공자와 증자, 그리고 자사와 맹자로 전해져 내려오는 유학의 도통(道統)을 이어받았다. 즉 ‘논어’,‘대학’,‘중용’,‘맹자’의 책을 모아 사서(四書)를 이룩하였던 유학의 횡적 모든 분야를 총망라하였던 것이다. ‘논어’는 공자의 사상,‘대학’은 증자의 학문,‘중용’은 자사의 학문,‘맹자’는 맹자의 학문을 대표하는 것이어서 이 네 가지 책이야말로 유가의 기본적인 경전으로 비로소 세상에 널리 읽히는 교과서가 될 수 있었으며, 주자는 이러한 수평적인 총정리와 수직적인 총망라를 통하여 마침내 주자만의 독특한 사상, 즉 ‘주자학(朱子學)’을 형성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주자학’은 주자 개인이 독창적으로 탄생시킨 학문이 아니라 수직적으로는 공자의 ‘인(仁)사상’에 바탕을 두고,‘인’의 실천원리로 맹자의 ‘성선설(性善說)’에 근거를 두고 있었던 도덕 실천 철학이었다. 일찍이 맹자가 말하였던 ‘인(仁)’의 단서인 ‘측은지심(惻隱之心)’과 ‘의(義)’의 단서인 ‘수오지심(羞惡之心)’,‘예(禮)’의 단서인 ‘사양지심(辭讓之心)’,‘지(知)’의 단서인 ‘시비지심(是非之心)’의 사단이야말로 공자의 이 ‘인(仁)’사상을 성인과 같은 지선(至善)의 경지로 끌어올릴 수 있는 도덕 실천의 원리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뿐이 아니었다. 주자는 수평적으로도 송나라 초기에 주돈이 등이 주창한 ‘태극’과 ‘음양론’도 수용하였다. 즉 우주의 기본 섭리는 곧 유학의 원리와 근본적으로 통하는 것이며, 또한 그것은 현실적인 모든 존재와 현상을 설명해 주는 것이라는 범우주론에 이르기까지 주자는 이 모든 것을 통관할 수 있는 새로운 존재론을 내세우게 되는데, 바로 이것이 주자학의 골수라고 할 수 있는 ‘이기론(理氣論)’이었던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신유학의 대명사인 ‘성리학(性理學)’이라는 철학사상이 탄생되었던 것이다.
  • 거대 중국을 경영하라/남상욱 지음

    5000년 세계사에서 중국의 경제규모는 항상 세계 으뜸이었다고 한다. 물론 지난 200년 동안은 제외하고다. 이같은 중국이 다시 세계 제일을 향해 치닫고 있다. 경제규모는 이미 4위를 차지했고, 정치·외교적 위상은 그 이상이다. 반만년 역사에서 순망치한 관계였던 우리로선 중국의 급성장이 순기능으로 작용할지, 아니면 장애가 될지 섣불리 진단하기 어렵다. 최근 동북공정 사태에서 보듯 한반도를 바라보는 중국의 속뜻을 헤아리는 것도 큰 과제다. ‘거대 중국을 경영하라’(남상욱 지음, 일빛 펴냄)는 세계 최강국으로 치닫는 중국을 한민족 도약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관점에서 현대 중국의 다양한 면모를 들여다 본 책이다. 저자는 중국 광저우 총영사를 지낸 직업외교관으로서 중국 현지 경험을 바탕으로 오늘의 중국 모습과 강점, 고민거리 등을 생동감 있게 분석해 전달한다. 책에 의하면 금세기 중반 이전에 중국은 미국을 따라잡을 가능성이 있다. 지난해 중국이 유치한 해외 투자금은 전세계 개도국의 4분의1에 해당하며, 앞으로도 2020년까지 매년 8% 이상 경제성장을 기대한다. 이는 한강의 기적으로 불렸던 우리의 경제성장 실적을 능가한다. 저자는 고속질주하는 중국 경제성장의 비밀이 강력한 지도력, 선택과 집중, 경쟁 유발, 인재 강국 정책, 세계 3위에 달하는 연구개발 규모에 있음을 분석한다. 또 집단열, 과시열, 해외진출열, 도박열, 향학열 등 중국사회의 5대 열을 비롯한 중국 현대사회의 특징들을 하나하나 짚어낸다. 저자는 급성장에 따른 후유증, 그리고 이에 대한 중국의 고민거리 또한 적지 않음도 지적한다. 성장 일변도 정책으로 인한 극심한 지역간 불균형 심화, 인력난, 에너지난, 부동산 투기, 환경오염 등이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는 것. 이밖에 견원지간으로 변하는 중·일 관계를 비롯한 주변국과의 외교문제, 타이완과의 관계, 티베트, 홍콩, 신장 등 중국 내 특별자치지역 문제 등 중국이 당면한 현안들을 소개한다. 저자는 “5000년 한·중 관계사는 중국의 흥망성쇠가 한반도에 즉각 파급되었음을 증명한다.”며 “중국의 겉과 속을 충분히 이해하고 대처했을 때 공존과 번영의 시대를 열 수 있다.”고 강조한다.2만 4000원.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하늘길’ 탄 中華대장정] (중) 시닝에서 라싸까지

    [‘하늘길’ 탄 中華대장정] (중) 시닝에서 라싸까지

    “감기에 걸렸다.”고 하니, 기자단 일행과 라싸까지 동행할 중국 외교부 직원이 깜짝 놀란다.“위험한데….” 얼굴 표정까지 자못 심각한 게 ‘굳이 뭐하러 가려느냐.’는 식이다. 감기는 고산지대에서 위험한 증세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산소가 희박해 폐수종, 뇌수종으로 빠르게 발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칭짱철도 개통이후 공식적인 첫 사망자도 감기로 시작된 폐수종이 원인이었다. 지난 11일 낮 그렇게 베이징 공항에서 칭하이(靑海)성 시닝(西寧)으로 떠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차창밖엔 원시(原始)의 풍광 줄줄이 시닝역을 출발한 건 저녁 8시,10시간 남짓 달려 어스름한 아침 무렵에야 거얼무(格爾木)역에 도착했다. 기관차를 고원지대용으로 바꾸는 것이 보였다.‘세계의 지붕’을 달리는 칭짱철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동이 터오면서 차창에는 온갖 풍경들이 스쳐 지나간다. 초원과 늪, 툰드라 지대의 야릇한 풀들과 설산(雪山), 저마다 빛깔이 다른 크고 작은 강과 호수들. 곳곳에 뛰노는 양과 들소, 노루…. 하다못해 세계에서 가장 높다는 해발 5072m의 탕구라산역 표지판 자체도 구경거리다. 곳곳에서 카메라 플래시가 터진다. 거얼무 통과 후 열 몇시간 이어지는 그림들이 지겨울 만해지면 고원의 날씨가 변화를 준다. 순간 눈보라가 치더니, 얼마 안돼 무지개가 뜬다. ‘원시(原始)의 풍광’을 별 노력없이 그저 차창 밖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침목 하나하나에 깃든 중국인, 특히 티베트인들의 피땀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960㎞ 구간의 동토구역과 4500m 고지에 철로를 부설하는 대공사에 얼마만큼의 희생자가 발생했는지는 알려지지 않는다. 다만 “50년 전 인민해방군 18군이 도로를 낼 때 많은 군인들이 희생됐다.”는 주민들의 전언을 통해 상당한 인명 피해를 짐작할 따름이다. 미국과 캐나다의 횡단철도가 사실상 중국인 노동력에 의해 부설된 200년전 역사를 생각하면, 중국인과 철도는 각별한 관계가 아닐 수 없다.“미국의 서부 철도 침목 밑에는 중국인 유골이 하나씩 묻혀 있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당시의 피해도 적지 않았다. 특히 캐나다 횡단철도는 동부 5대호(湖) 지역을 넘어가는 3000m 이상 고원지대에서 엄청난 노동자들이 희생됐다. ●‘어떻게 살아왔을까’ 하지만 이따금 눈에 띄는 철로가의 목동, 민가, 유목민의 모습은 그저 목가적이지만은 않은 현실로 다가온다.‘어떻게 살아 왔을까.’하는 궁금증과 함께. 시짱(西藏·티베트)자치구 정부는 올해부터 건축비의 절반 이상을 지원하며 유목민에 대한 ‘정주(定住) 정책’을 본격 실시하는 중이다.“티베트 전통식으로 집을 짓되, 위생을 고려해 집안에 가축을 들여서는 안 된다.”는 게 관계자의 설명이다. 다행히 밤새 감기는 나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머리가 아프다거나 가슴이 답답하다는 이들이 늘어난다. 고산병약 ‘홍경천’의 효험이 없다고 투덜대는 이도 있다. 경험자들은 홍경천을 2∼3일 전부터 복용해야 한다고 하고, 비아그라가 고산병에 좋다고도 소개한다. ‘딱딱한 좌석(硬座)’칸에는 백발 성성한 일본 관광객들이 열차 곳곳에 마련된 산소 호스를 꽂고 있다. 그만큼 아직은 라싸행 열차표를 구하기가 쉽지 않다는 얘기다. 밤 10시30분, 기차는 긴 경적을 울리며 해발 고도 3600m의 라싸(拉薩)역에 멈춰섰다. ●부다라궁 관람 하루 2000명 제한 12일 아침 티베트의 상징 부다라(布達拉)궁. 시짱자치구 외사판공실의 배려가 없었다면 관람은 어림도 없었다. 아침 7시부터 나와 줄을 서고 있다는 한 외국인 투어 책임자는 “사흘 뒤 표를 사게 됐다.”며 투덜댔다. 최근 급증한 외국 관광객을 많이 수용하고는 있지만 하루 2000명을 넘기지는 않는다고 한다. 대신 티베트 농목(農牧)민에겐 제한이 없다. 신앙을 위해 찾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저마다 손에는 야크 버터가 든 비닐봉지와 1자오(角)짜리지만 지폐 수십장이 정성스레 쥐어져 있다. 버터는 불상 앞에 놓인 촛대에 쓸 기름이다. 만나는 불상마다 1자오씩 봉헌하다 보면 입장료 1위안(120원)의 몇배를 내는 일도 예삿일이다. 두 무릎과 팔꿈치, 이마 등 몸의 다섯 군데를 땅에 닿게 하는 오체투지(五體投地)의 장면도 흔하다. 고원의 태양은 라싸의 색을 시시각각 바꿔놓는다. 부다라궁의 단청에서부터 무너져가는 옛 건물의 조그만 창문에 이르기까지 도시 곳곳을 채색한 화려함은, 이른 아침 비내린 우중충한 하늘 아래에서도 바래지 않는다. 그러나 라싸에서의 여정은 이때부터 조금씩 다른 모습을 띠게 된다. 아름다운 풍광을 보여주던 열차 차창과는 달리, 열차가 일으키는 바람에 휩쓸려온 것들은 상혼과 매연, 경쟁의 냄새였다. 글 사진 라싸(拉薩) 이지운특파원 jj@seoul.co.kr
  • 儒林(692)-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38)

    儒林(692)-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38)

    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38) 그러나 송재공은 퇴계의 밝은 얼굴에서 뭔가 한소식 하였음을 꿰뚫어 보았다. 그래서 다시 묻는다. “그래도 뭔가 얻은 것이 있을 터인데.” 그러자 퇴계는 대답하였다. “아직 정확하게는 잘 모르겠사오나 모든 사물에서 마땅히 그래야할 시(是)를 이(理)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퇴계의 이 대답에 평소엔 조금도 칭찬하거나 기뻐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던 엄격한 송재공도 크게 기뻐하면서 ‘너의 학문은 이로서 문리(文理)를 얻은 것’이라고 크게 평가하였다고 ‘퇴계언행록’은 기록하고 있는데, 어쨌든 12살의 퇴계가 ‘이를 모든 사물이 마땅히 그려야 할 시’로 깨달은 것은 성리학에 대해 초견성을 한 것이며, 평생을 두고 거경궁리해야 할 화두를 점지받은 것이었다. 주자가 죽은 것은 1200년, 그로부터 정확히 300년 후인 1501년 12월, 퇴계가 태어났으니, 두 사람은 비록 300년의 시간과 공간의 차이는 있지만 ‘저 높은 하늘 위에는 무엇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에서부터 깨달은 주자의 ‘이’와 ‘마땅히 그래야할 시를 이’로 초견성한 퇴계의 ‘이’라는 공통된 바톤(baton)을 들고 수천 년의 유가적 계주에서 뜀박질을 하였던 위대한 사상가들이었던 것이다. 퇴계가 그 릴레이 계주에서 돋보이는 것은 그가 주자로부터 바톤 터치하여 유림의 숲이 끝나는 골인지점인 종착점까지 뛰었다는 점 때문일 것이며, 퇴계가 유림의 완성자라고 불린 것은 결승점을 통과하여 테이프를 끊은 실질적인 유가의 마지막 주자였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주자는 1546년, 아버지의 친구였던 유면지(劉勉之)의 딸과 16살의 어린 나이로 결혼을 한다. 주자는 부인과의 사이에 세 명의 아들과 다섯 명의 딸을 두었다고 한다. 이처럼 많은 자식들을 둘만큼 부부의 가정생활은 화목했지만 그의 부인은 주자보다 일찍 죽는다. 주자는 부인이 병들자 매우 비통해 하였다고 한다. 아내가 죽자 그는 손수 묘자리를 쓴다. 흔히 주자를 신안(新安) 주씨라고 하는데, 신안은 주자의 조상이 살던 무원( 源:지금의 안후이성)의 옛 지명이다. 우리나라의 신안 주씨는 주자의 증손 잠(潛)이 고려 때 건너와서 성씨를 이룬 것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주자의 나이 14살 되던 해 아버지 주송은 세상을 떠난다. 주송은 세상을 떠나면서 호적계(胡籍溪), 유백수(劉白水), 유병산(劉屛山) 등 세 사람의 스승을 찾아가 학문을 배우라는 유언을 남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주자는 어머니를 모시고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스승 유병산이 머무르고 있는 오부리(五夫里)에 집을 마련하고 그곳에서 50년간 머물렀는데 그곳에서 주자는 유백수의 딸을 아내로 삼아 가정을 이루는 한편 학문에 몰두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19세의 나이로 주자는 과거에 급제한다. 278등으로 그리 좋은 성적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상당히 이른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였던 조숙한 수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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