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200년
    2026-08-14
    검색기록 지우기
  • 3살
    2026-08-14
    검색기록 지우기
  • 70대
    2026-08-14
    검색기록 지우기
  • 65세
    2026-08-14
    검색기록 지우기
  • 2026-08-14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2,017
  • [오늘의 눈] 개성을 상상하며/박찬구 정치부 기자

    왜 대통령선거를 앞둔 정치인들이 너도나도 개성공단으로 상징되는 한반도 평화담론에 매달리는 것일까. 진보성향의 표심에 호소하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햇볕정책을 계승하려는 정치행보라고 치부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힘에 의한 평화’가 아니라 ‘평화적 수단에 의한 평화’를 추구하는 탈(脫)분단식 접근이라는 평가에 굳이 인색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남북열차가 반세기 만에 개성에 간다. 끊어진 철로를 잇는다는, 그 이상의 의미를 두고 싶다. 역사적으로 개성은 복식부기 방식을 서양보다 200년 앞서 사용한 국제무역의 중심지였다. 현재는 금강산과 함께 북한 개방의 바로미터가 되는 창구 역할을 하고 있다. 개성의 미래는 어떨까. 어느 학자는 개성과 서울, 인천을 묶는 복합경제특구를 제안한다. 개성은 생산, 서울은 기획과 금융, 인천은 물류를 담당토록 하자는 발상이다. 또 다른 전문가는 개성·파주 경제권을 형성해 북한을 개방으로 이끌자고 주장한다. 서울에서 60㎞ 거리에 불과한 개성에 일일 관광열차를 운행하자는 의견도 있다. 모두 한반도를 하나의 경제권으로 묶어 동북아 평화와 통일시대의 주도권을 회복하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냥 될 일은 아닐 것이다. 자유무역협정(FTA)이 거부할 수 없는 국제사회의 현실이라면, 개성공단 원산지 규정처럼 FTA를 남한식이 아니라 한반도식으로 풀어나가는 게 단초가 될 수 있다. 남북이 FTA를 체결해 북한을 국제 경제질서에 ‘연착륙’시키는 방안도 검토해 볼 만하다. 문제는 우리 정부가 6자의 틀에 얽매이기보다 ‘남북이 한반도 평화논의의 주도권을 가져야 한다.’는 의지를 확인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불과 10년 전만 하더라도 남북의 정상이 악수하고, 우리 중소기업이 개성에서 물건을 만들 것이라고 생각이나 했는가. 개성행 열차에 오를 각계 인사들이 함께 고민하고 상상하길 기대한다. 박찬구 정치부 기자 ckpark@seoul.co.kr
  • [프렌치 리포트] (27) 나폴레옹·드골 그리고 사르코지

    프랑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을 꼽으라면 단번에 떠오르는 인물이 나폴레옹과 드골이다. 프랑스 어디를 가나 이들 두 사람의 거대한 그림자를 피할 길이 없다. 그만큼 나폴레옹과 드골은 프랑스 근·현대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들이 없었다면 오늘의 프랑스가 어떤 모습이었을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다. 혼란과 격동의 시대였기에 두 인물의 지도력은 더욱 빛을 발했을지 모른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1769∼1821)는 대혁명 이후 혼란의 와중에서 정치, 경제, 문화, 사회 제도 전반에서 근대국가로서 프랑스의 기틀을 다졌다. 샤를르 드골(1890∼1970)은 2차 대전으로 피폐해진 경제를 10년 만에 기적적으로 일으키고 프랑스를 독일과 맞먹는 공업대국으로 만들었으며 유럽통합의 주역이 됐다. 지나치게 강한 자아(自我), 자신의 야망을 채우기 위해 다른 사람의 희생을 강요한 탓에 부정적인 평가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의 투철한 국가관과 시대를 꿰뚫어 보는 통찰력은 ‘강력하고 위대한’ 프랑스를 건설하는 원동력이 됐다. ●나폴레옹이 없었다면? 1840년 12월15일 아침,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가운데 나폴레옹의 유해가 개선문을 지나 샹젤리제와 콩코드 광장을 거쳐 앵발리드(상이군인병원이라는 뜻) 앞 마당에 도착했다.10만명의 파리 시민들이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죽은 지 19년 만에 파리에 돌아온 영웅 나폴레옹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봤다. 나폴레옹의 유해는 그의 유언대로 센강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앵발리드 지하에 안치됐다. 나폴레옹처럼 평가가 극과 극을 달리는 인물도 없을 것이다. 뛰어난 재략과 강력한 의지로 정상에 오른 전쟁영웅이지만 자신의 야망을 채우기 위해 수많은 젊은이를 전쟁터로 내 몬 침략자이자 독재군주였던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어찌됐건 그는 52년의 짧은 생애 동안 프랑스 역사에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200년 전 나폴레옹이 만든 많은 제도들이 아직까지 프랑스 사회를 지탱하고 있다. 그는 전국을 현(縣)이라고 불리는 98개의 행정단위로 나누었다. 오늘날까지 존속하는 이 행정단위는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시켰으며 행정능률을 배가시켰다. 그는 또 수백년간 이어져온 방대하고 모순된 구법전과 법률을 재정비해 간결명료한 최초의 근대적 민법인 ‘나폴레옹 법전’을 편찬했다. 세습 귀족제의 폐지, 상속권의 평등, 인종차별 철폐, 결혼과 이혼의 자유 등을 규정한 이 법전은 나폴레옹 원정군에 의해 전 유럽에 퍼져 근대 유럽국가들의 법전편찬에 본보기가 됐다. 그는 국립 프랑스 은행을 설치하고, 전국에 세무소를 설치해 국가 재정을 확보했다. 근대적인 교육제도를 만든 것도 나폴레옹이었다. 프랑스 역사상 그만큼 프랑스를 변화시킨 인물은 없었다. 파리의 모습도 바꿔놓았다. 그는 파리를 통치의 중심지뿐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범 도시로 만들기로 작정하고 새로운 거리, 웅장한 건물, 분수대 등을 짓도록 했다. 그 중 하나가 파리의 상징물이 된 개선문이다. 개선문은 나폴레옹이 1804년 위대한 프랑스 군대를 기념하기 위해 건립명령을 내려 세워진 것이다.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과 비슷한 외관의 마들렌 성당도 프랑스군의 영광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 콩코드 광장에 우뚝 선 오벨리스크는 나폴레옹이 이집트에서 가져온 것이고, 그 뒤편의 방돔광장에 있는 청동제 원기둥은 오스테를리츠 전투에서 노획한 1200대의 대포를 녹여 만든 것이다. 루브르가 고대 이집트, 그리스, 로마시대의 유물들을 갖춘 세계적인 박물관으로서 위상을 갖게 된 것도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및 이집트 원정 덕분이다. 프랑스에서 파리를 빼놓을 수 없듯이 나폴레옹 없이 프랑스 근대사를 논할 수 없을 정도다. ●‘프랑스의 마지막 거인’ 드골 2차 대전에서 연합군의 승리로 프랑스는 자유를 되찾았지만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무척 어려웠다. 전쟁 중 영국에서 반(反)나치 항전을 지휘한 드골은 국민의 열렬한 환영 속에 귀국해 임시정부의 수반이 됐다.1946년 제 4공화국이 들어서고 전후 산업화가 시작됐으나 정쟁(政爭)이 그치지 않았다. 보다 강력한 중앙정부가 필요하다는 자신이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드골은 스스럼없이 물러났다. 제 4공화국이 붕괴되기 직전 드골은 ‘조국의 구원자’로서 당당하게 복귀했다. 강력한 대통령제에 입각한 제 5공화국을 출범시키면서 1958년 12월 대통령에 취임한 드골은 알제리를 비롯해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 식민지들을 평화적으로 독립시킴으로써 식민지 문제를 해결했다. 프랑스의 정신을 진작시키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생각한 그는 “위대한 목표를 향해 전진하지 않는 프랑스는 일찍이 한번도 참된 프랑스였던 적이 없다.”며 국민들에게 ‘앞으로!’를 외쳤다. 강력한 중앙집권제와 효과적인 경제·사회 모델, 독자적인 외교정책이 어우러지면서 프랑스의 정치와 경제는 급속하게 안정됐다. 드골은 아데나워 독일 수상과 함께 독·불협력 시대를 정착시키고, 반미 자주외교를 펼치면서 핵무기 개발과 군수산업 개발에 전력했다.“우리의 운명은 기계가 결정한다.”는 평소의 신념대로 첨단 항공우주기술, 초고속열차(TGV), 컴퓨터산업 개발에 집중했다. 그 결과 프랑스는 1967년 영국을 제치고 세계 5대 산업국이 됐다. 그러나 학생과 노동자들이 합세해 일으킨 68혁명 여파로 1969년 4월 대통령에서 물러났다. 1970년 11월 드골은 세상을 떠났지만 영향력은 여전하다. 프랑스는 아직까지 제 5공화국 헌법으로 통치되고 있으며 시라크를 비롯해 그의 정신을 이어받은 우파출신들이 집권층을 장악하고 있다. 국가관이 투철하고 능력이 있는 직업공무원 양성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드골이 설립한 국립행정학교(ENA) 출신 엘리트들이 국정을 이어가고 있다. 프랑스인들은 샤를 드골 국제공항, 파리 중심가의 샤를 드골 에트왈 광장, 핵잠수함 샤를드골 호 등 그의 이름을 붙여 ‘마지막 거인’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역사는 흐른다. 최근 프랑스 전체를 뜨겁게 달궜던 2007년 대통령 선거에서 집권 중도우파정당 대중운동연합(UMP)의 니콜라 사르코지가 5공화국 6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경제난과 높은 실업률, 세계화, 유럽연합의 확장, 이민 2·3세들의 통합문제 등으로 프랑스는 새로운 위기를 맞고 있다. 변화를 갈망하는 프랑스 국민들에게 사르코지가 과연 ‘구원자’가 될 수 있을지 궁금하다. 논설위원 lotus@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18) 광해군과 누르하치, 그리고 명나라 Ⅴ

    [병자호란 다시 읽기] (18) 광해군과 누르하치, 그리고 명나라 Ⅴ

    이성량(李成梁)이 병탄을 시도하고, 광해군과 왕세자를 책봉하러 왔던 명사(明使)들의 은(銀) 징색이 이어졌던 것은 광해군 시절 명나라와의 관계가 순탄치 않을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광해군대 누르하치의 건주(建州)와의 관계는 어떠했는가? 광해군과 누르하치의 관계는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출발했다.1608년 2월, 광해군이 즉위한 직후 누르하치는 초피(貂皮)를 선물로 보내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누르하치가 쳐들어 올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그치지 않았다. 누르하치 진영 또한 ‘조선과 명이 합세하여 협공할 것’이란 풍문에 긴장하기도 했다. 광해군은 재위(在位) 기간 내내 누르하치를 자극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명과 건주의 관계가 삐걱거리는 한, 조선 또한 양자의 갈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누르하치에 대한 대책을 비롯해, 광해군이 취했던 대외정책에서 우선 돋보이는 점은 상대방과 관련된 정보수집을 위해 노력했던 점이다. 1608년 8월, 조선 조야(朝野)는 ‘누르하치가 배를 만들어 장차 조선을 공격하려 한다.’는 소문에 긴장했다.1610년(광해군 2) 1월에는 허투알라 지역에 ‘조선이 명과 연합하여 건주여진을 토벌할 것’이며,‘이미 조선의 병마(兵馬)가 압록강변에서 대기하고 있다.’는 풍문이 돌았다. ●정보 수집을 위해 노력하다 누르하치가 해서여진을 공략하여 전운(戰雲)이 감돌고, 명과의 관계가 껄끄러워지고 있던 상황에서 만주 일대에는 갖가지 유언비어가 난무했다. 조선과 건주여진 또한 자칫 정확하지 못한 정보에 휘말려 위험한 군사적 대결 국면으로 치달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광해군은 누르하치의 침략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비변사 신료들에게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그가 무엇보다 강조했던 것은 척후(斥候)를 제대로 하고, 간첩을 적절히 활용하여 누르하치와 관련된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었다. 광해군은 신료들에게 영리한 인물을 누르하치 진영으로 보내 그들의 동향을 파악하라고 지시했다. 그는 ‘두 나라 사이에 전쟁이 한창 벌어지고 있을 때라도 사자(使者)의 왕래가 중단돼서는 안된다.’는 지론을 갖고 있었다.1611년, 누르하치 진영에 포로로 억류되어 있다가 돌아온 하세국(河世國)에게 6품직인 사과(司果)를 제수하기도 했다. 그의 여진어 실력과 견문을 활용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당시 조선은 일본이나 여진 등에 비해 상대방의 동향을 정탐하는 능력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었다. 일본은 오랫동안 다이묘(大名)들이 패권을 놓고 다투었던 전국시대(戰國時代)를 경험했기 때문에 정보의 중요성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특히 일찍부터 벌였던 왜구(倭寇) 활동과 왜관(倭館)에서 거주했던 경험 등을 통해 조선 사정에 대해 훤하게 알고 있었다. 왜란 당시, 조선어를 능숙히 구사하고 조선의 지리까지 숙지했던 쓰시마(對馬島)의 일본인들이 침략군을 이끄는 향도(嚮導) 노릇을 했던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누르하치의 건주여진 또한 인접 국가의 정보를 파악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특히 간첩을 활용하거나 반간계(反間計)를 이용하여 상대방의 허를 찌르는 능력은 탁월했다. 명나라 지식인들조차 “건주여진인은 간첩활동에 가장 뛰어나서 그 내응자들 때문에 견고한 성도 앉은 채 함락 당한다.”고 인정할 정도였다. 문치(文治)에 치중한데다 건국 이후 200년 동안 전쟁을 몰랐던 조선의 정탐 능력이 취약했던 것은 당연했다. 광해군은 임진왜란을 일선에서 겪었던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나마 ‘정보 마인드’를 지니게 되었던 것이다. 광해군이 건주여진을 조선에 비해 ‘열등한 존재’ ‘오랑캐’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은 당시의 다른 지식인들과 다르지 않았다. 그 또한 누르하치와 여진족을 가리켜 ‘노추(老酋)’ ‘견양(犬羊)’ 등 멸칭(蔑稱)으로 불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해군의 누르하치에 대한 정책은 유연했다. ‘무식하고 사나운 오랑캐에게 인륜과 이치를 내세워 사사건건 따져봐야 소용이 없다.’는 것이 그의 기본적인 생각이었다. 그들을 자극하여 쓸 데 없는 화란을 부르지 말고, 적당히 경제적 욕구를 채워주면서 관계를 유지하자는 것이다. ●기미책(羈策)을 활용하다 광해군의 정책은 기미책에 가까운 것이었다.‘기미’란 굴레를 가지고 소나 말의 얼굴을 붙들어 매는 것을 말한다. 중국이 흉노(匈奴) 등 주변 민족을 대했던 방식으로, 핵심은 견제하되 관계를 완전히 끊지 않는 것이다. 광해군은 누르하치와 관계를 유지하되 모험을 피하려 했다. 또 명과 누르하치 사이의 갈등 속으로 말려드는 것도 있는 힘을 다해 회피하려 시도했다. 임진왜란을 통해 처참한 상처를 입은데다 그 후유증이 채 치유되지 않은 상황에서, 다시 전란을 만날 경우 망할 수밖에 없다고 인식했기 때문이다. 광해군이 재위 중반까지만 해도 그같은 노력과 정책은 어느 정도 성공적이었다. 명과 누르하치의 관계가 아직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지 않았던데다, 광해군 자신이 정치판을 그런대로 잘 이끌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당시 비변사(備邊司)에 포진했던 신료들 가운데 임진왜란 당시 활약했던 ‘베테랑’들이 많았던 것도 큰 영향을 끼쳤다. 이원익(李元翼), 이항복(李恒福), 이덕형(李德馨), 이정구(李廷龜), 윤근수(尹根壽), 황신(黃愼) 등이 그들이었다. 그들은 왜란 당시 체찰사(體察使), 병조판서 등을 역임하면서 전쟁을 일선에서 수행했고, 명군이나 일본군 지휘부와 직접 대면했던 경험이 풍부한 인물들이었다. 광해군은 그들을 자주 접견하여 변방 관련대책과 국제정세에 대해 식견과 감각을 키울 수 있었다. ●자강책(自强策)을 마련하다 정보를 수집하고, 기미책을 통해 누르하치를 다독이는 한편, 광해군은 최악의 상황에 대비한 군사적 대비책 마련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다. 광해군이 무엇보다 강조한 것은 조총, 화포 등 신무기를 개발, 확보하는 것이었다. 당시 누르하치의 기마대는 철기(鐵騎)라 불릴 정도로 기동력에서 발군이었다. 그 ‘강철 같은 기마대’를 평원에서 대적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성에 들어가 화포를 써서 제압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은 당시의 상식이었다. 광해군은 1613년(광해군 5), 화기도감(火器都監)을 확대개편해 각종 화포를 주조하는 한편, 화약원료인 염초(焰硝) 확보에도 각별히 노력했다. 무기 확보를 위한 광해군의 노력과 관련해 주목되는 것은 그의 일본에 대한 태도였다. 그는 일본으로 떠나는 통신사 편에 조총과 장검 등을 구입해 올 것을 지시했다. 일본을 ‘영원히 함께 할 수 없는 원수(萬歲不共之讐)’로 여기고 있던 당시 상황에서도 일본산 무기의 우수성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1609년(광해군 1), 주변의 반발을 물리치고 일본과 국교를 재개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누르하치 때문에 서북변(西北邊)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현실에서 언제까지 일본과 냉랭한 관계를 고집할 수 없다는 판단이 작용했던 것이다. 광해군은 대외관계에 관한 한 분명한 현실주의자였다. 광해군은 병력을 확보하고 뛰어난 지휘관을 기용하는 데도 노력했다. 병력 확보를 위한 근본대책으로 호패법(號牌法)을 실시하려 했고, 수시로 무과(武科)를 열었다. 1622년(광해군 14) 이후로는 모든 무과 합격자들을 변방으로 배치했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향리에 은거하고 있던 곽재우(郭再祐)를 불러 올려 북병사(北兵使)에 제수하기도 했다. 광해군은 누르하치의 침략으로 도성이 함락되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상정하고 강화도를 정비하는 데도 힘을 기울였다. 그곳을 ‘최후의 보루’로 여겨 수시로 보수하고 군량을 비축했다. 하지만 정작 강화도를 피난처로 활용한 것은 인조대의 일이었다. 1623년 광해군은 인조반정으로 폐위된 뒤 강화도에 유배되었다.‘최후의 보루’가 자신의 유배지가 되리라고 생각이나 했을까?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19) 장교 최천종 피살사건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19) 장교 최천종 피살사건

    18세기 일본에서 쇼군(將軍)이 정권을 세습하면서 가장 먼저 조선통신사를 맞을 준비를 했다. 박지원은 역관 이언진의 전기 ‘우상전’ 첫머리에서 도쿠가와 이에하루(德川家治)가 준비하는 모습을 이렇게 설명했다. “(통신사 일행을 접대하기 위해)저축을 늘리고 건물을 수리했으며, 선박을 손질하고 속국의 여러 섬들을 깎아서 자기 소유로 만들었다. 그밖에도 기재(奇才)·검객(劍客)·궤기(詭技·술수꾼)·음교(淫巧·기교꾼)·서화(書畵)·문학 같은 여러 분야의 인물들을 에도(江戶)로 모아들여 훈련시키고 계획을 갖추었다. 그런지 몇년 뒤에야 우리나라에 사신을 파견해 달라고 요청했는데, 마치 상국의 조서(詔書)를 기다리는 것처럼 공손했다.” 그러자 조선 조정에서도 문신으로 삼사(三使)를 선발한 뒤에, 말 잘하고 많이 아는 자들을 수행원으로 발탁했다. 박지원은 이렇게 기록했다.“천문·지리·산수·점술·의술·관상·무력으로부터 퉁소 잘 부는 사람, 술 잘 마시는 사람, 장기·바둑을 잘 두는 사람, 말을 잘 타거나 활을 잘 쏘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한가지 기술로 나라 안에서 이름난 사람들은 모두 함께 따라가게 되었다.” ●여러 명이 범인 목격…외교문제로 비화 쇼군의 즉위를 축하한다는 명분 아래, 조선과 일본 두나라가 국력을 기울여서 온갖 전문기예자를 총동원해 맞섰다. 일종의 국제문화박람회라고도 할 수 있다. 무력으로 이름난 사람, 말을 잘 타거나 활을 잘 쏘는 사람은 모두 군관이다. 이들은 사행단을 호위하며 무예를 과시하거나, 일본인들에게 마상재(馬上才)를 공연했다.1763년 사행 때에 486명 일행 가운데 4명이 사망했다. 선장 유진원은 배 밑창 곳간에 떨어져 죽고, 소동(小童) 김한중은 풍토병으로 죽었으며, 격군 이광하는 미친 증세가 일어나 제 목을 찔러 죽었다. 그러나 경상도 무관(장교)이었던 도훈도 최천종은 일본인 역관에게 찔려 죽었기에 외교문제로 비화했다. 이는 외국인을 보기 힘들었던 일본에서 200년 동안 연극이나 소설의 소재로 전해졌다. 일본에서 고구마를 처음 가져온 것으로 널리 알려진 통신사 조엄(1719∼1777) 일행이 에도에서 외교적인 의전절차를 마치고 돌아오던 1764년 4월7일 오사카(大阪) 니시혼간지(西本願寺)에서 도훈도 최천종이 피살됐다. 이 절에는 500명을 재울 숙박시설이 마련돼 있었다. 조엄이 새벽에 보고를 듣고 의관과 군관을 급히 보냈더니, 곧이어 한사람이 돌아와서 보고했다. 최천종이 피가 흥건하게 흘러 숨이 끊어지게 되었는데, 손으로 목을 만지면서 이렇게 설명했다는 것이다. “닭이 운 뒤에 하루 일과를 보고하고 돌아와 새벽잠을 자는데, 가슴이 답답해 깨어보니 어떤 사람이 가슴에 걸터앉아 칼로 목을 찔렀소. 급히 소리 지르면서 칼날을 뽑고 일어나 잡으려 하자, 범인은 재빨리 달아났소. 이웃방 불빛에 보니 왜인이었소. 나는 어떤 왜인과도 다투거나 원한 맺을 꼬투리가 없으니, 나를 찔러 죽이려 한 까닭을 모르겠소. 공연히 죽게 되니 너무 원통하오.” 첩약을 붙이고 약을 달여 마시게 했지만, 최천종은 해가 뜨자 운명했다. 자루가 짧은 창과 ‘어영(魚永)’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칼이 현장에 남아 있었는데 왜인의 것이었다. 범인이 달아나다 격군 강우문의 발을 밟아 그가 “도적이 나간다.”고 크게 소리쳤기 때문에 여러명이 목격했다. 조엄은 “범인을 색출해 목숨으로 변상하라.”고 일본측에 통고했다. 밤늦게야 쓰시마에서 에도까지 왕복행차를 호위하는 쓰시마 수행원과 살해사건이 일어난 오사카의 법관, 그리고 조선의 역관들이 함께 입회해 검시(檢屍)했다. 최천종은 조엄이 대구 감영에 있을 때부터 신임하던 장교였으므로 정성껏 장례준비를 했다. 14일에 주변 인물들을 신문하던 과정에서 쓰시마 역관 스즈키 덴조(鈴木傳藏)가 범인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그가 자백하는 편지를 보내고 달아났다. 일본측에서 목격자 진술에 의해 인상서(人相書)를 만들어 배포했다. 범인은 스즈키 덴조(鈴木傳藏), 나이 26세, 쓰시마 역관, 얼굴색이 희고 키는 5척3촌이라고 자세하게 밝혔다. 수백명의 수사력이 동원되어 그의 뒤를 쫓았다. ●범인 “거울 도둑으로 몰며 때려 살해했다.” 17일부터 군사 2000명과 배 600척을 동원해 범인 색출에 나서,18일 다른 지방에서 체포했으며,19일부터 니시혼간지 경내에서 신문했다. 최천종이 6일 거울을 잃어버렸는데, 스즈키 덴조가 훔쳐갔다고 의심하며 말채찍으로 때렸기 때문에 분을 이기지 못해 밤늦게 찾아와 살해했다는 동기까지 밝혀졌다. 그러나 과연 거울 하나 때문에 국제적인 살인사건이 일어났는지는 확실치 않다. 범인을 처형하니 조선 역관과 군관들이 참관해 달라는 통고가 29일에 왔으며,5월2일 삼헌옥(三軒屋)에서 집행했다. 조엄은 김광호를 시켜 최천종의 영혼을 위로하는 제사를 지내고, 원수를 갚았다고 아뢰게 했다. ‘명화잡기(明和雜記)’나 ‘사실문편(事實文編)’을 비롯한 일본측 기록들은 대부분 인삼 판매대금을 나눠달라는 독촉 때문에 살해했다고 설명했다. 몇달 걸리는 국제여행 경비를 조정에서 직접 지급하지 않고 인삼을 무역할 수 있는 권리를 주었으므로, 수행원들까지도 일정한 양의 인삼을 가지고 가서 팔고 다른 물건으로 사왔다. 사대부들은 정량을 지켰지만, 역관을 비롯한 수행원들은 남몰래 더 가지고 갔다. 몇차례 단속에 발각되면 인삼도 빼앗기고 엄한 처벌까지 받았지만, 그래도 밀무역은 그치지 않았다. 쓰시마 역관들이 에도까지 따라가면서 호위하는 과정에서 인삼을 팔아주었으니, 인삼 판매대금을 나눠가지는 과정에서 칼부림이 났을 가능성이 많다. 밀무역 죄를 감추기 위해 거울을 잃어버려 말다툼이 생겼다고 했지만, 그 말을 그대로 믿기는 힘들다. 한양에서 따라온 조선 역관들의 일본어 회화실력이 낮았으므로, 저간의 숨은 사정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다. 사건은 그렇게 마무리되었지만, 이야기는 계속 부풀었다. 중국과 외교관계를 단절하고 있었던 당시 일본에서 외국인이 피살된 사건 자체가 일본인들에게는 아주 흥미로운 이야깃거리가 되었던 것이다. 최천종이 살해된 사건을 테마로 하는 일련의 작품을 ‘도진고로시(唐人殺し)’라고 한다. 도진(唐人)은 외국인을 가리키며 네덜란드인, 중국인뿐만 아니라 조선인도 포함된다. 박찬기 교수는 이들 수십종의 작품을 이국인(異國人) 살해, 통역관 살해, 혼혈아의 원수 갚기, 인삼 밀거래에 의한 보복 살해의 네가지 유형으로 나누었다. 이국인 살해와 통역관 살해 유형은 가부키(歌舞伎)와 조루리(淨瑠璃)로 상연되었다. 박찬기 교수가 정리한 도표에 의하면 오사카와 교토의 여러 극장에서 1767년부터 1883년까지 42회, 에도에서 5회 상연됐다. ●막부 압력으로 연극 줄거리 바뀌기도 가장 먼저 1767년 2월17일 아라시히나스케 극장에서 상연된 ‘세와료리스즈키보초(世話料理 )’는 사건이 일어난 지 3년도 지나지 않은 시기에 허구화 과정을 거쳐 제작되었다. 글자는 다르지만 제목에 ‘스즈키’라는 음이 들어간 것만 보아도 최천종 살해사건을 다루었음을 짐작케 한다. 이 작품은 열흘도 못 되어 같은 작가가 다른 제목으로 바꿔 같은 극장에서 또 상연했다. 가부키 연표에는 “첫날 둘째 날은 관객의 반응이 좋아 인산인해를 이루었으나, 사정이 있어 상연 중지”라고 기록되었는데, 외교문제로 비화할 것을 염려한 막부의 압력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 이후에 줄거리가 바뀐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가장 많이 상연된 작품은 나카야마 라이스케(中山來助)와 지카마츠 도쿠조(近松德三)가 지은 ‘겐마와시사토노다이츠(拳揮廓大通)’이다.1802년에 초연을 시작해 1883년 5월까지 33회나 상연됐다. 이 작품에는 이국인을 살해하는 장면 묘사가 없고, 역관 고사이덴조(香齋傳藏)를 살해하는 유형으로 바뀌었다. 덴조(傳藏)라는 쓰시마 역관의 이름 정도만 남고, 이국인의 복장이나 언어 같은 이국적 정취에 더 관심이 많아졌다. 허경진 연세대 국문과 교수
  • 삼성전자, 51나노 16기가 낸드플래시 세계 첫 양산 돌입

    삼성전자, 51나노 16기가 낸드플래시 세계 첫 양산 돌입

    삼성전자가 세계 최초로 51나노(머리카락 두께의 2000분의1) 공정을 적용한 세계 최대 용량의 16기가비트(Gb) 낸드플래시 양산에 들어갔다. ●8개월만에 용량·성능 두 배 높여 낸드플래시 메모리는 전원이 공급되지 않아도 저장된 데이터가 지워지지 않는 반도체이다. 주로 휴대전화,MP3플레이어,PMP 등 모바일 기기에 많이 사용된다. 삼성전자는 29일 “지난해 8월 60나노급 공정을 적용한 8Gb 낸드플래시 양산을 시작한 데 이어 8개월만에 용량과 성능을 두 배로 높인 16Gb 제품 생산을 시작했다.”고 밝혔다. 이는 삼성전자가 지난 2005년 9월에 처음 개발한 제품이다. ●2010년까지 누적 시장 규모 210억 달러 이 제품은 55∼57나노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 다른 업체들의 50나노급 제품과 월등한 성능 차이를 보여 시장 반응이 주목된다. 특히 이 제품이 양산됨으로써 황창규 반도체부문 총괄사장이 밝힌 반도체의 집적도가 해마다 2배씩 높아진다는 ‘메모리 신성장론’이 또 한번 증명됐다. 반도체 업계는 50나노급 16Gb 제품은 내년에 시장 주력 제품으로 떠올라 2010년까지 누적 시장 규모가 210억달러대로 성장할 것으로 예상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낸드플래시 개발과 양산 두 분야 모두에서 기술 리더십을 유지하고 있음을 다시 증명하게 됐다.”며 “51나노 기술을 적용한 낸드플래시는 기존 60나노급 제품에 비해 60% 정도 생산성 향상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51나노 16Gb 낸드플래시는 기존의 멀티레벨셀(MLC·한 셀에 2개의 데이터 저장) 낸드플래시의 약점을 보완했다는 특장점도 갖고 있다. 그동안 MLC는 고용량 구현은 가능했지만 읽기 속도를 높이는 데 한계가 있다는 점이 지적돼 왔다. 삼성전자는 “51나노 16Gb 제품은 4킬로바이트(KB)를 기본 단위로 데이터를 처리,60나노급 낸드 플래시에 비해 읽기·쓰기 속도가 2배 정도 빠르다.”고 설명했다. ●칩 1개에 164억개 트랜지스터 집적 51나노 16Gb 낸드플래시는 손톱만한 칩안에 164억개의 트랜지스터를 집적한 것이다. 16Gb 16개를 합친 32기가바이트(GB) 메모리카드로 만들면 DVD급 영화 20편(약 32시간) 또는 MP3파일 8000곡이나 일간지 200년치 분량 저장이 가능하다. 삼성전자는 “신제품 출시와 동시에 이를 지원하는 최적의 소프트웨어를 제공할 예정이다.”면서 “51나노 16Gb MLC 낸드플래시는 출하와 동시에 시장이 본격적으로 확대될 전망”이라고 말했다. 이기철기자 chuli@seoul.co.kr
  • 장자제…눈물나게 아름답다

    장자제…눈물나게 아름답다

    사람이 태어나 장자제(張家界)에 가보지 않았다면 백세가 되어도 어찌 늙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人生不到張家界 白歲豈能稱老翁) 중국인들 사이에 이렇게 표현할 만큼 누구나 장자제를 동경한다. 중국 후난성(湖南省) 서북부에 위치한 장자제의 공식 명칭은 ‘무릉원’이다.무릉원은 도연명의 ‘도화원기’에 등장한다.대략 이렇다.동진(東晋)의 태원(太元·376~396)때 무릉(武陵)에 사는 한 어부가 배를 타고 가다가 도화림(桃花林) 속에서 길을 잃었다.어부는 배에서 내려 산 속의 동굴을 따라 들어갔는데.마침내 어떤 평화경(平和境)에 이르렀다.그곳은 논밭과 연못이 모두 아름답고.닭 소리와 개 짖는 소리가 한가로우며?남녀가 모두 외계인과 같은 옷을 입고 즐겁게 살고 있었다.그들은 진(秦)나라의 전란을 피하여 그곳까지 온 사람들이었다.수백 년 동안 바깥 세상과의 접촉을 끊고 산다고 했다.어부는 융숭한 대접을 받고 돌아오면서 그곳의 이야기를 절대 입 밖에 내지 말라는 당부를 받았다.하지만 어부는 이 당부를 어기고 돌아오는 도중에 표시를 해 두었으나 다시는 찾을 수가 없었다. 전설이 이러하니 장자제가 어느 정도인지 상상이 가고도 남는다.수려한 산세와 청량한 계곡.그리고 기이한 동굴이 빚어내는 원시의 자연이 영락없이 무릉도원이다.구름에 반쯤 잠긴 기묘한 형상의 수많은 봉우리들.억만년의 침수와 자연붕괴를 견뎌낸 기암괴석과 바위틈에 뿌리를 내린 소나무들이 아슬아슬하게 절벽에 걸려 있는 수려한 산세를 보고 있노라면 세월마저 멈춘 듯하다. 태고의 전설과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한 장자제야 말로 꿈 속에서 그리던 말 그대로의 ‘무릉도원’이 아닐까 싶다.아울러 인간의 넋을 송두리째 빼앗을 정도로 아름답다는 미혼대(迷魂臺)에서 내려다보는 위안자제(袁家界)의 풍경은 그 어떤 첨단 장비와 기술로도 감지할 수 없는 선경(仙境)이다. 400~500m 높이의 송곳처럼 솟아 있는 석봉들을 보며 걷다가 잠시 발 아래를 내려다보면 까마득한 낭떠러지.정신을 잃을 듯한 아찔함에 스릴마저 느껴진다.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을 터?지난주 무릉도원을 다녀왔다. 글 사진 장자제 김경희특파원 saranghe@seoul.co.kr ■ 장자제 가볼만한 곳 ●넋을 빼앗는 미혼대 협곡에서 솟은 바위 봉우리가 인간의 넋을 빼앗을 정도로 아름답다는 미혼대에서 내려다보는 위안자제의 절경은 한 폭의 산수화 같다. 높이 500m에 달하는 뾰족바위 수백 개가 버티고 있는 형상이 마치 하늘에서 맨해튼의 고층빌딩을 보는 것 과 같다. 바위틈에 뿌리를 내린 소나무가 아슬아슬하게 절벽에 걸려 있고, 봉우리 아래로는 끝이 보이지 않는 협곡이 병풍의 그림처럼 펼쳐진다. 무릉원의 하이라이트는 해발 2084m의 천자산(天子山). 무려 3500개의 계단을 올라야 한다. 하지만 걱정할 것 없다.1997년 길이 2㎞의 케이블카가 설치 되면서 누구나 손쉽게 정상에 오를 수 있다. ●붓을 거꾸로 꽂은 어필봉 천자산 정상에서 버스로 5분쯤 이동하면 하룡공원이 나온다. 이곳에서 만나는 어필봉은 바위 봉우리에서 자란 소나무와 어우러져 마치 붓을 거꾸로 꽂아놓은 형상이다. 전쟁에서 진 황제가 천자산을 향해 쓰던 붓을 내던졌다고 해서 ‘어필봉’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또 ‘천대서해’는 황제를 호위하는 천군마마의 기세로 솟은 봉우리가 운무에 휩싸여 마치 바다를 이룬다. ●토가족 소녀와 보봉호수 11㎞ 길이의 황룡동굴과 ‘보봉호수’도 여행의 필수 코스. 동굴 안에서 보트를 타고 유람할 정도로 웅장한 황룡동굴엔 미사일 모양의 석순에 울긋불긋한 조명까지 더해져 환상의 극치를 이룬다. 산정호수인 보봉호는 기이한 봉우리 들에 둘러싸인 반 인공 호수로, 배를 타고 호수 안으로 들어가면 작은 배에서 토가족 소녀가 나와 손을 흔들며 청아한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준다. ●천문산 천문산은 장자제 내의 최고봉(1528m)이다. 아흔아홉 굽이를 돌아 통천대로를 지나면 봉우리에 구멍이 뚫려 있다. 그 모양새가 독특해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이 터널의 이름은 천문동(天門洞)으로 지난 1999년 세계 곡예비행 대회가 이곳에서 열리면서 유명해졌다. ●황석채 장자제에서 제일 큰 관람대. 해발 1300m로 주위의 경치를 한눈에 볼 수 있다.“황석채에 오르지 않으면 장자제에 오지 않은 것과 같다.”라는 말이 있다. 한나라 대신 장량이 이 곳에서 도를 닦는 중 조난당했을 때 그의 스승인 황석공이 구해줬다고 해서 ‘황석채’로 불린다. ●백장협, 용왕동 높이가 백장이라고 해서 이름 지어진 백장협은 삭계욕 동남부에 위치해 있으며 동가욕, 왕가욕 등과 함께 3개의 협곡으로 구성됐다. 전설에 의하면 토가족 농민봉기 수령향대군이 백장협에서 관군들과 백번이나 싸웠다고 한다. 용왕동은 장자제시 무릉원관광구 동쪽 17㎞ 되는 곳에 위치해 있다. 석회암 카르스트동굴로서 중국에서 가장 크고 원시적인 동굴 중 하나. 관광에만 약 2시간정도 걸린다. # 장자제는 어떤 곳 ‘장씨의 마을’이라는 뜻의 장자제(張家界)가 역사에 처음 등장한 때는 BC200년 경이었다. 당시 ‘유방’을 도와 한나라를 세운 ‘장량’이 토사구팽을 눈치채고 도망쳐서 정착한 곳, 바로 소수 민족인 토가족(土家族)이 살던 장자제다. 장량은 유방의 군사를 피해 황석채의 바위봉우리에서 무려 49일을 버텼다고 전한다. 외부와 격리된 채 살고 있던 토가족의 터전인 장자제가 세상에 처음 알려진 때는 2200년이 흐른, 지금부터 20여년 전이다. 이 지역 출신의 화가가 장자제의 산수를 담은 그림을 발표하면서 장자제는 중국 정부에 의해 본격적인 관광지로 개발되기 시작했다. 1982년에 중국 최초의 국가삼림공원(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장자제는 1992년엔 유네스코 세계 자연유산으로 등록되면서 한국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명소로 부상했다. # 여행정보 장자제는 4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계곡이 널리 분포돼 있다. 고산분지 기후로서 연평균기온이 섭씨 12.8도 이며, 겨울에 혹한이 없고 여름에 무더위가 없어 4계절 관광하기에 좋다. 장자제를 꼼꼼하게 둘러보려면 최소한 4∼5일은 걸리지만 명승지를 중심으로 돌아본다면 이틀이면 충분하다. 인천공항-샤먼(廈門)-(국내선 비행기)-장자제, 인천공항-창사-(버스)-장자제로 가는 방법 등이 있다. 최근 격린여행사(www.greentravel.com)에서 샤먼을 거쳐 장자제를 찾는 여행 상품을 출시했다.02)778-9338 # 여행팁, 가는 길에 골프를 치려면 인천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샤먼에 내리면 4개의 골프장을 접할 수 있다. 이 가운데 동방골프장이 가장 유명하다. 세계 100대 명문골프클럽에 선정됐다.1994년 4월 중국에서는 처음으로 아시아프로골프대회를 개최한 곳이다. 바다를 끼고 있으며 샤먼시내가 멀리 보인다. 샤먼공항에서 20여분 정도 거리. 보통 300년 이상된 고목들이 즐비한 환경 친화적인 골프장이다. 난이도는 중급정도.18홀 가운데 11개 홀이 해안가에 위치해 바다와 푸른 잔디를 동시에 즐길 수 있다.
  • ‘토박이를 찾습니다’

    ‘토박이를 찾습니다.’ 중구는 23일 ‘중구 토박이’를 찾는다고 밝혔다. 현재 중구 토박이는 모두 98명.2002년 이전에 49명,2002년 16명,2003년 6명,2004년 5명,2005년 14명,2006년 8명이 새롭게 등재됐다. 이들은 1999년 6월 중구 토박이회를 결성했다. 이들의 평균 나이는 70대 후반이다. 토박이회 가운데 최장 토박이는 최동원 황학동 새마을금고 이사장의 가문이다. 조상 대대로 중구 황학동에 거주한 지 200년이 지났다고 한다. 김성완 토박이회 회장은 “2개월에 한번씩 모임을 갖고 중구 문화에 대한 발굴과 토박이로서 친목을 도모하고, 문화재 탐방, 한문 교실 등을 운영한다.”고 말했다. 이번에 신청할 토박이 대상은 1947년 10월1일 이전부터 중구에서 60년 이상 거주자 중 실제로 중구에 주민등록이 되어 있는 사람이다. 신청 기간은 23일부터 6월22일까지 2개월간이다. 신고서에 성명, 주소, 거주 기간, 집안의 자랑거리 등을 기재해 자치행정과나 각 동사무소로 신청하면 된다. 중구 홈페이지(www.junggu.seoul.kr)를 통해서도 신청할 수 있다. 접수된 토박이 신청자들은 구청 담당 직원들의 직접 면담과 관련 조사 등을 통해 확정된다.10월 구민의 날 행사 때 토박이패를 증정할 계획이다. 김경두기자 golders@seoul.co.kr
  • [북리뷰] 비잔티움 1200년史 한눈에 ‘로마인’ 아쉽다면 읽을만

    ‘비잔티움 연대기’는 1부 ‘창건과 혼란’,2부 ‘번영과 절정’,3부 ‘쇠퇴와 멸망’으로 구성된 3부작 1285쪽(번역본은 2196쪽)의 방대한 저작이다. 외교관 출신으로 비잔티움사 연구의 권위자인 존 줄리어스 노리치가 비잔티움에 매료된 지 25년 만에 심혈을 기울여 내놓은 역작이다. 이 작품은 종간된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의 후속작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로마인 이야기’를 읽고 마음 한구석에 아쉬운 감을 느끼는 독자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흥미진진하면서도 박진감 넘치는 책이 될 것이다. 읽기 편한 구어체 문장과 전쟁과 음모, 군주들의 야망과 힘겨루기 등 정치사의 짜임새 있는 주제 구성을 보면 노련한 외교관만이 쓸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저자는 1200년 가까이 지속된 비잔티움 세계를 종횡무진 누비며 비잔티움 역사의 실타래를 우리들에게 사랑스러운 연인의 숨결처럼 전해주고 있다. 이 책은 저자가 1부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로마제국 쇠망사’를 쓴 에드워드 기번 이후 19세기를 거쳐 20세기까지 지속된 비잔티움에 대한 혹독한 평가가 20세기 전반까지 계속돼 많은 사람들에게 모호한 인식을 심어준 만큼, 이런 잘못된 평가를 바로잡기 위한 의도에서 쓰여졌다. 이 책은 프랑스 학자 폴 르메를이 지적한 계몽주의 시대부터 시작된 조잡한 해석에 기초한 경멸적인 평가로부터 비잔티움을 구출한 책 가운데 하나임에 틀림없지만 비잔티움 세계를 전부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책은 1980년 이전까지 대부분의 비잔티움 역사가들이 그들의 저서에서 다뤘던 정치, 군사, 신학적 논쟁, 인물의 개성과 특성을 중점적으로 다룬다. 그러나 경제, 사회, 사생활, 여성, 문화와 예술, 고고학 등의 내용이 빈약한 것이 흠이다. 하지만 실망할 필요는 없다.20년 이상 비잔티움사를 연구한 서평자로서 단언하건대 지금까지 출판된 책 가운데 이처럼 치밀한 구성을 가진 책은 한번도 본 적이 없다. 비잔티움사는 아직도 많은 부분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는 얘기다. 이 책은 분명 전문 학술서는 아니다. 그렇다고 이 책을 대충 엮여진 책으로 인식한다면 저자를 모욕하는 것이다. 역사가가 아니라 외교관인 저자는 그리스어 실력이 모자라 그리스 문헌들 중 번역되거나 요약된 2차 문헌에 주로 의존해 책을 썼다고 밝힌다. 저자가 “비전문가인 독자들에게 최대한 정확한 역사를 최대한 흥미롭게 제시하는 것이 바로 나의 목적”이라고 말하고 있듯이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만큼 정확하게 쓰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이는 책임에는 틀림이 없다. 이 책에는 “모든 사람들에게 원하는 대로 믿음을 가질 권리를 부여하노라.”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와 설득한다 해도 우리는 따르지 않을 것이오.” “우리는 이곳을 파괴했고 시간은 도시의 이름을 파괴했다.” 등의 수많은 명대사들이 나온다. 과거의 죽은 말이 아니라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제시하는 살아있는 말들이다. 저자가 우리들에게 주려는 교훈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김차규 명지대 사학과 교수
  • [20&30] 간밤의 알코올 잡는 우리의 속풀이법

    [20&30] 간밤의 알코올 잡는 우리의 속풀이법

    술 먹은 다음 날 찾아오는 숙취와 속쓰림은 ‘애주가’들의 영원한 숙제(?)다. 머리는 터질 듯 지끈거리고 속은 부글부글 끓어 화장실에 들락거리다 보면 제대로 앉아 있기 조차 힘들다. 그러나 한방에 이런 고통을 날려버릴 수 있는 ‘마법의 약’ 따위는 없다. 숙취해소 음료 시장이 연간 600억원 규모로 알려져 있지만 절대강자 없이 새로운 제품들이 명멸을 거듭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꿀물이나 북어국, 콩나물국, 해장국 같은 검증된 속풀이 방법 외에도 ‘20&30’들이 갖가지 시행착오 끝에 체득한 자기만의 노하우를 알아봤다. 5년차 직장인 성모(28·여)씨의 해장 파트너는 초코 도넛과 핫초코다. 대학에 다닐 때는 설렁탕으로 쓰린 속을 달랬지만 언젠가부터 설렁탕에 대한 내성이 생기기 시작했다. ●느끼함으로 쓰린 속 달랜다 도넛 마니아인 성씨는 지난해 여름 술을 마신 다음 날 D사 체인점 앞을 지나다가 초코 도넛에 시선이 꽂혔다. 성씨는 “초코 도넛을 한 입 베어물면 울렁거림이 싹 사라져요. 거기에 핫초코를 곁들이면 입안에 향긋한 기운이 남아 해장에는 짱이에요.”라고 말했다. 성씨는 “초콜릿 특유의 기분 좋아지게 하는 느낌이 술 마신 다음 날 찾아오는 후회와 두통까지 날려주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회사원 김모(28)씨는 술 먹은 다음 날 중국집을 애용한다. 다만 동료들이 짬뽕이나 짬뽕밥, 기스면 등을 시킬 때 김씨는 자장면을 고집한다. “원래 맵고 국물 있는 음식을 좋아하지 않아서 해장국 종류는 거의 안 먹는 편이죠. 자장면으로 위와 장을 훑어 주는 게 최고예요. 기름기가 나쁜 성분들을 함께 씻어내주는 것 같기도 하고 든든해져서 좋습니다.” 김씨가 자장면을 해장 친구로 맞이한 것은 대학 1학년 때부터다. 전날 술을 마시고 해장을 못해서 속이 쓰라렸는데 마침 좋아하는 여자 선배가 점심을 사준다며 따라오라 했다. 선배가 쏜다는데 싫다고 할 수도 없어 중국집에 갔는데 의외의 효과를 봤다고 한다. 회사원 장지수(30)씨도 ‘느끼한 음식으로 쓰린 속을 다스린다.’는 주의다. 피자나 치킨 버거·치즈 버거 등에 마요네즈를 듬뿍 뿌려서 먹는다. 기름기로 위를 덮어준다는 생각으로 먹는데 생각처럼 느끼하지도 않고 속이 편안해지며 머리도 맑아진다는 게 장씨의 설명이다. 장씨는 “한번 이렇게 해장을 시작했더니 다른 음식은 입에 못 대겠더라고요. 평소 치즈 종류를 좋아하는 편인데 술 마신 다음 날 속이 허할 때는 정말 특효약입니다.”라고 말했다. 은행원 최영준(30)씨는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해장 비법이 있다. 아버지가 형과 영준씨에게 전수해준 비법은 ‘냉면 해장’이다. 단골인 S면옥에 가서 먼저 뜨끈한 육수를 두 컵 정도 ‘후후∼’ 불어마시면 땀이 주루룩 흐른다. 충분히 땀이 빠졌다고 생각되면 머릿속까지 얼얼해지는 물냉면으로 깔끔하게 마무리를 한다. 쓰라림이 사라질 뿐 아니라 뱃속까지 든든해지는 1석2조의 효과다. 스포츠센터를 운영하는 현모(36)씨는 두 단계에 걸쳐 아픈 속을 달랜다. 술자리가 끝나고 집에 가기 전에 동네 설렁탕 집에 가서 뱃속을 채우고 들어간다. 따뜻하고 기름기 있는 걸죽한 국물로 쓰라린 위벽을 덮어주는 효과를 노린 것이다. 현씨는 다음 날 눈을 뜨면 냉장고로 달려간다. 가장 먼저 찾는 것은 딸기우유다. 목구멍을 ‘열고(?)’ 딸기우유를 부으면 밤새 괴롭혔던 갈증이 사라지고 속도 편안해진다. 전날 음주량에 따라 딸기우유를 한 꺼번에 두 개 이상 마시기도 한다. ●검증된 전통 방법으로 해장한다. 오랜 세월을 통해 검증된 전통적 해장법들도 일부 20&30들 사이에서 여전히 지지를 얻고 있다. ‘주류(酒流)’에 뛰어든지 15년째라는 회사원 강모(34)씨는 북어국 신봉자다. 강씨는 “대학 다닐 때 술을 먹고 들어온 다음 날이면 어머니가 항상 북어국을 끓여주셨다. 북어에서 우러나오는 깊고 개운한 국물맛은 어떤 영약보다도 효과가 만점”이라고 말했다. 직장 생활을 시작한 뒤 아침을 못 먹고 나오는 일이 잦아졌지만 회사 근처에서 찾아낸 허름한 북어국 전문점에서 아쉬운 대로 해결하고 있다고 강씨는 귀띔했다. 회사원 오승엽(30)씨는 오로지 콩나물 해장국 외에는 눈길도 주지 않는다. 단, 콩나물 건더기는 거의 안 먹고 오로지 국물만 훌훌 마신다.2003년 입사한 뒤 회사 근처에서 딱 입맛에 맞는 콩나물 해장국을 만난 것은 오씨에게 행운이었다. 오씨는 “콩나물 국물을 들이켜면 땀이 쭉 나면서 몸이 부르르 떨리는 느낌이죠. 먹을 땐 땀이 비오듯 쏟아지지만 먹고 나면 깔끔하게 숙취가 가신답니다.”라고 밝혔다. 로펌에 다니는 윤모(31)씨는 복지리(맑은 복국) 애호가다. 술 마신 뒤 유난히 갈증을 심하게 느끼는 윤씨는 생수나 이온음료 병을 들고 다니면서 오전 내내 목을 축인다. 갈증이 어느 정도 풀린 뒤 점심시간에 찾는 곳은 회사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복지리 전문점이다. 가격이 다소 부담되지만 아프고 헐벗은 속을 달래는 데는 복지리만한 것이 없다는 게 윤씨의 투철한 믿음이다. 복지리에 나오는 미나리와 콩나물을 조금 먹다보면 어느새 말간 국물이 보글보글 끓고 있다. 윤씨는 “국물을 덜어서 후루룩 마시면 언제 술을 마셨냐는 듯 뱃속이 편안해져요. 국물을 충분히 마신 다음에 복 몇 점과 촉촉하게 끓인 죽으로 허기진 뱃속을 달래면 술 몇잔쯤은 다시 마셔도 괜찮을 것 같은 기분이 들죠.”라고 말했다. 물론 해장술은 몇 배의 고통이 돌아오는 ‘쥐약(?)’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가급적 피한다고 윤씨는 귀띔했다. 은행원 김모(31)씨는 술 마신 다음 날이면 아침 일찍 일어나 회사 앞 사우나에 들렀다 출근을 한다. 주위에선 ‘술 먹고 사우나 갔다가 큰 일 난다.’며 말리지만 김씨에게는 이만한 숙취 해소법이 없다. 사우나에 들어가서 10분 정도 지나면 땀이 조금씩 나기 시작한다.20분 정도면 온 몸에서 비 오듯 쏟아지는데 이 정도면 몸 속의 알코올 기운은 이미 다 빠져나간 뒤다. 사우나에서 나오자 마자 물을 잔뜩 마시면 깔끔하게 마무리된다. 김씨는 “몸속에 쌓인 알코올을 싹 빼내고 물을 마시면 마치 새로운 피가 도는 느낌이에요. 땀을 빼준 뒤 수면실에서 10∼15분 정도만 졸아도 머리가 맑아지죠.”라며 자랑을 늘어놓았다. 이밖에 숙취해소용 드링크나 약국에서 판매하는 각종 앰플도 상당한 지지세를 확보하고 있다. 대학원생 김모씨는 “숙취해소 드링크 A와 약국에서 파는 앰플을 함께 먹으면 그만입니다. 아무리 끝내주는 해장국도 이것만한 효과는 없어요.”라고 강조했다.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나라마다 다양한 해장법 주당들에게 속 푸는 노하우는 술을 잘 마시는 방법만큼이나 ‘절대적 지식’이다. 각국 술꾼들이 개발, 전수해 온 해장법은 오랜 숙취의 고통을 이겨내고 탄생시킨 ‘땀의 결실’인 셈이다. 개인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뜨거운 국물’이 굳건하게 왕좌를 지키고 있는 한국의 해장문화와는 달리 해외의 해장법은 각양각색이다. 러시아 사람들은 술 마신 뒤 뜨거운 고깃국을 먹고 뜨거운 물에 샤워한 뒤 30분 이상 잔다. 양배추와 오이즙에 소금을 넣어 만든 ‘라솔’이란 음료도 즐겨 마신다. 라솔은 2차 세계대전 승전기념일로 러시아인들이 대취하는 5월9일 저녁 특히 사랑받는다. ‘해장술로 해장’하는 고수들이 한국에만 있는 건 아니다. 영국은 술을 마신 다음날 ‘개털(Hair of the Dog)’을 마신다. 개털이란 어젯밤 술 마신 바로 그 술집에 가서 마시는 해장술을 일컫는데, 개에 물린 상처에 자신을 문 개의 털을 뽑아 덧대면 상처가 낫는다는 속설에서 나온 말이다. 일본인들은 감과 매실을 절인 우메보시를 즐겨 먹고, 중국인들은 ‘싱주링’이란 전통차를 마신다. 싱주링은 인삼, 귤껍질, 칡뿌리 등의 천연재료를 넣어 달인 차로 기원전 200년부터 중국인들이 숙취 해소를 위해 즐겨 마셨다. 느끼한 음식의 왕국인 태국에선 해장음식도 느끼할 듯하다. 기름에 튀긴 삶은 달걀에 매콤한 소스를 듬뿍 얹은 ‘까이 룩 꿰이’라는 음식이 전통적인 해장 음식이다. 아주 특이한 해장법도 있다. 몽골인들은 삭힌 양의 눈알을 토마토 주스에 넣어 마시고, 푸에르토리코인들은 겨드랑이 밑에 레몬즙을 발라 쓰린 속을 달랜다. 이문영기자 2moon0@seoul.co.kr
  • “요하문명은 韓·中·蒙 공동의 뿌리”

    “요하문명은 韓·中·蒙 공동의 뿌리”

    “요하(遼河)문명은 결코 중국만의 문명이 아닙니다. 요하문명을 동북아 공동의 시원(始原)문명으로 삼아야 합니다.” 중국이 내세우고 있는 ‘요하문명론’의 위험성을 경고하면서 요하문명을 ‘흐름과 교류’의 역사로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항공대 교양학부 우실하 교수는 16일 “우리가 동북공정만을 경계하는 사이에 중국은 요하문명론을 정립해 나가고 있다.”면서 “자칫 우리 상고사 전체가 중국의 방계역사로 전락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우 교수에 따르면 요하문명론은 중국이 만주의 서쪽인 요하일대의 고대문명을 중국문명의 시발점으로 삼아, 이 지역에서 발원한 모든 고대민족과 역사를 중화민족과 중국사에 편입시키려는 논리이다. 그렇게 되면 이 지역에서 기원한 예·맥족은 물론 단군, 주몽 등 한국사의 주요 인물들이 모두 황제의 후손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대(大)중화주의’ 완결판 그렇다면 중국은 왜 요하문명론에 집착하는 것일까. 중국은 신화와 전설의 시대인 하(夏), 상(商), 주(周)시대를 역사에 편입하는 작업(하상주단대공정)을 필두로, 중국고대문명탐원공정, 동북공정 등 일련의 역사관련 공정을 진행해 왔다. 이미 1950년대부터 정립하기 시작한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의 이론적 배경을 갖추기 위한 작업이다. “현재의 중국영토 위에 있는 모든 민족과 역사는 통일적 다민족인 중화민족과 중국사에 속한다.”는 얘기다. 이같은 작업은 21세기 ‘대(大)중화주의’ 건설을 위해 오래 전부터 준비해 온 국가적 전략이었다. 우 교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으로 속속 밝혀지고 있는 요하지역으로 중국문명의 기원을 옮기는 것이 요하문명론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실제 요하지역에서는 지금껏 지구상에 있었던 그 어떤 문명보다도 앞선 문명이 존재하고 있었다. 1980년대 이후 요하일대에서 대량으로 발굴되고 있는 신석기시대 유적은 소하서문화(기원전 7000∼6500년), 흥륭와문화(기원전 6200∼5200년), 사해문화(기원전 5600년), 조보구문화(기원전 5000∼4400년), 홍산문화(기원전 4500∼3000년) 등이다. 이는 애당초 중국이 문명의 시초라고 떠들었던 황하유역의 앙소문화(기원전 4500년∼ )나 장강 하류의 하모도문화(기원전 5000년∼ )보다도 훨씬 앞서는 것이다. 더욱이 홍산문화 후반부로 보이는 우하량 유적(기원전 3500년∼ )에서는 ‘초기국가단계’에 진입했음을 보여주는 유물들이 대량 발굴돼 충격을 던져줬다. 이들 지역은 종래 중국에서는 ‘오랑캐’ 땅으로 알려진 데다 발굴되는 유물들이 중국문명의 본거지로 알려진 중원과는 사뭇 다르고, 오히려 내몽골이나 만주·한반도와 유사하다. 중국이 서둘러 문명의 기원을 황하에서 요하로 옮기려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흐름과 교류’의 역사 우 교수는 “동북아 고대사는 수많은 민족과 문화가 서로 교류하고 이동하는 ‘흐름과 교류’의 역사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면서 “중국이나 우리나 ‘닫힌 민족주의’를 벗고, 요하문명을 끊임없는 흐름과 교류의 역사로 바라봐야 한다.”고 제시했다. 그는 또 “요하문명은 세계사를 다시 쓰는 계기를 마련할 정도로 엄청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면서 “요하문명을 어느 한 국가의 고유한 문명이 아닌 동북아 공동의 시원문명으로 삼을 때 ‘동방 르네상스’가 빛을 발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우 교수는 신간 ‘동북공정 너머 요하문명론’(소나무 펴냄)에서 한·중·일·몽골 등 동북아 각국의 연구진들이 이같은 요하문명을 공동으로 연구해 21세기 동북아 문화공동체의 근원으로 활용하자고 제안하고 있다. 박홍환기자 stinger@seoul.co.kr
  • 효창공원 야생화 품은 습지생태공원으로

    효창공원 야생화 품은 습지생태공원으로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에 거대한 습지가 탄생한다. 바위 밑에서 샘이 솟아 생명이 움트더니, 용산구가 지난해 말 연못 19개를 조성하면서 습지 3000㎡(약 907평)가 생겨났다. ●연못 19개 만들어 효창공원은 원래 사적지다. 백범 김구 선생과 이봉창·윤봉길·백정기 의사 등 애국지사들의 묘역이 있다. 게다가 조선조 제22대 정조의 큰아들로 5세 때 죽은 문효세자의 무덤(효창원)도 이곳에 있었다. 일제가 1945년 3월 무덤을 서삼릉(고양시)으로 강제로 옮기고 공원을 조성해 ‘비운의 사적지’로도 불린다. 문효세자 무덤을 이곳에 조성한 이유는 맑은 물이 솟아났기 때문이다. 문효세자묘소도감의궤에 따르면 숲이 울창하고, 강물 같은 물이 솟아 연못을 채우고 한강으로 흘러갔다고 전해진다. 200년이 흐른 지금도 물은 바위 틈에서 쏟아진다. 생명의 씨앗이 흘러넘치자 나무가 아름드리로 자라고, 나무와 풀, 꽃, 곤충이 어우러져 작은 습지가 형성됐다. 습지는 수많은 생물의 보금자리여서 개구리, 두꺼비, 잠자리, 소금쟁이, 여치, 거위벌레, 벼메뚜기, 사마귀, 실베짱이 등이 더불어 산다. 용산구는 지난해 11∼12월 3억원을 들여 습지를 넓혔다. 비탈진 공터에 생태연못 19개를 조성, 수생식물 18종 6390본을 심고 달팽이와 우렁이, 두꺼비, 다람쥐 등을 풀어 놓았다. 자연수가 넘쳐 연못을 가득 채웠다. 날이 따뜻해지면 경남 창녕군 우포늪에서 작은 생명체를 얻어올 계획이다. 김문철 공원녹지과장은 “도심에 습지가 자생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에 감격했다.”면서 “많은 시민들이 생명의 기적을 체험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지원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아름드리나무, 야생화 가득 26일 봄맞이 준비가 한창인 효창공원을 찾았다. 흐린 날씨에도 방문객이 북적였다.24시간 무료 개방이라 동네 주민들이 산책하러, 운동하러 공원을 즐겨 찾는다. 묘역을 지나자 오른 편에 거대한 자연이 펼쳐진다. 참나무·소나무·오리나무·측백나무 등 30∼40년 된 아름드리 나무가 가득하다. 그 사이에는 작은 연못과 습지가 층층이 자리한다. 이름 모를 야생화는 금방이라도 꽃봉오리를 터뜨릴 듯 생명을 품고 있다. 까치도 도심 속 자연을 구경하려는 듯 이곳저곳을 날아다닌다. 한 아주머니는 “나무 숲과 연못을 보니까 답답하던 숨통이 탁 트인다.”고 즐거워했다. 김 과장은 “4,5월에 꽃이 피어나고 곤충, 동물이 뛰어다니면 도심 속에서 자연 생태계를 체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5월부터는 아이들을 위한 습지관찰 프로그램을 한 달에 두 차례씩 운영할 계획이다. 교육은 녹색소비자연대가 맡는다. 박화영 생태여가팀장은 “도심에서 역사와 자연을 함께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라면서 “생명이 되살아나는 곳이라 자연, 습지의 중요성을 피부로 느낄 것”이라고 말했다.(02)3273-7117. 정은주기자 ejung@seoul.co.kr
  • [김석의 Let’s Wine]코냑 제대로 알기

    서양에서는 ‘향수는 여성의 성격을 표현하고, 술은 남성의 취향을 상징한다’는 속담이 있다. 그래서인지 서양의 남성들은 자존심, 지위, 일류의 이미지를 술을 통해 부각시키려는 경향이 있는데, 이들이 가장 많이 찾는 술 중에 하나가 바로 코냑이다. 코냑은 프랑스 코냑 지방에서 생산되는 브랜디(와인 증류주)를 말한다. 와인의 품성을 그대로 농축시킨 것에, 오랜 숙성 기간 중 오크 통에서 우러나오는 원숙한 향이 더해진 것으로 브랜디의 제왕이라는 표현이 조금도 지나치지 않다. 또한 취하기 위해서 마시는 술이 아니라 분위기를 즐기고, 향을 음미하며, 시가를 입에 비스듬히 물고 클래식 음악을 함께 듣는 것이 바로 코냑이다. 코냑이 이렇듯 명품으로 거듭난 데에는 코냑을 만든 사람들의 수 많은 노력들이 있었다. 프랑스 코냑 지방 사람들은 코냑을 ‘하늘에서 내려준 선물’이라 믿으며 자연과 날씨에 좌우되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극복하며 만들어낸다. 프랑스에서 코냑의 보존과 품질관리에 쏟는 정성도 각별하여 1909년에 ‘코냑제조법령’을 선포, 엄격한 품질관리를 하고 있다. 그런 까닭에 코냑의 제조에 필요한 포도는 법적으로 나누어진 6개의 코냑지방에서만 재배하도록 하고, 코냑을 저장하여 숙성시키는 오크통 역시, 이 지방의 숲에서 자란 리무쟁 오크(Limousin oak)통만을 쓰도록 규제하고 있다. 프랑스 사람들은 이를 두고 ‘All brandy is not cognac,but all cognac is brandy’ (모든 브랜디가 코냑은 아니지만 코냑은 모두 브랜디이다.) 라고 회자한다. 똑같은 발포 성 와인이라 하더라도, 프랑스의 샹파뉴 지방에서 생산되는 것만을 샴페인이라 부를 수 있는 이치와 똑같다. 코냑을 만들 수 있는 포도는 총 7종류가 허용되는데, 최근에는 3가지 종류의 포도가 많이 이용되고 있다. 두 번에 걸친 증류과정을 통해 ‘오드비’라는 코냑 원액을 추출하고 품질 및 숙성기간이 서로 다른 ‘오드비’들을 잘 소화시켜 정성을 다하여 블렌딩을 한다. 이 블렌딩 기법에 따라 서로 다른 개성과 향취를 지닌 코냑이 탄생되는데 이 비법은 200년 동안 각 가문 별로 철저한 베일에 싸여 그 신비로움을 더한다. 이러한 코냑 브랜드로는 카뮤, 헤네시, 레미마르땡이 코냑 삼총사로 불린다. 특히 카뮤의 경우는 5세대에 걸쳐 가족 소유로 운영되고 있으며 현재 독립된 형태로 남아 있는 가장 큰 코냑 하우스이다.VSOP급 이상의 프리미엄 제품에 치중하고 있는 고급 코냑 하우스로 150여 개의 국가와,50개 이상의 항공노선에서 인기리에 판매되며, 주요 면세점에서 항상 빠지지 않는 제품으로 특히 아시아 시장에서 굳건한 브랜드 입지를 구축하고 있다. 이러한 코냑 회사들은 별이나 글자로 그들 회사의 품질을 표시한다. 각 코냑 회사는 여러 단계의 제품을 만들고 있는데, 이러한 부호가 각 사의 공통된 숙성 연도를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 코냑 회사의 관습으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법에서 정한 규정과 브랜드 마다의 숙성 연도 표시를 별도로 알아두는 것이 좋다. 대부분의 코냑은 각각 다른 연도의 코냑들을 블렌딩한다. 우리가 보통 몇 년, 몇 십년된 코냑이 들어갔다고 이야기를 하는데 이는 블렌딩에 사용된 가장 어린 코냑의 연수를 기준으로 하는 것이다. 따라서 5년 된 코냑과 100년 된 코냑을 블렌딩하면 그 코냑은 5년 숙성 코냑이라 칭하게 되는 것이다. 한국주류수입협회 와인총괄 부회장 (금양인터내셔널 전무)
  • [씨줄날줄] 한일관계사/이용원 수석논설위원

    ‘가깝고도 먼 나라’라는 문구만큼 한국·일본 양국의 관계를 압축해서 보여주는 표현은 달리 없을 것이다. 지리상으로는 50㎞ 거리에 불과한 대한해협을 사이에 둔 이웃국가요, 혈통상으로도 두 나라 국민은 이웃사촌이다.1987년 도쿄대 인류학과 가쓰로 하니하라 교수는, 서기 700년 무렵 일본 총인구에서 한반도 이주자의 비율이 80∼90%에 이른다는 내용의 논문을 발표했다. 현대 일본인 유전자의 형질은 충남 지역 한국인의 것과 가장 비슷하다는 일본 학자의 연구 결과도 있었다. 따라서 지리상·혈통상으로 양국은 어떤 나라보다 가까울 수밖에 없다. 반면 양 국민이 상대에게 느끼는 정서적 간극은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나라들보다 더 넓으니 ‘먼 나라’라는 표현 또한 틀린 말이 아니다. 정서적 간극이 넓은 까닭은 우선 역사인식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은 ‘고대에 우리 조상이 일본 열도로 건너가 나라를 세웠고 대대로 문화를 전해줬는데, 지난 100∼200년새 강해졌다고 우리를 침략해?’라는 서운한 감정을 바탕에 깔고 있다. 이에 견줘 일본인들은 ‘고대에도 한반도에는 일본 식민지가 있었을 정도로 한·일 관계에서 우리가 항상 우위에 있었지.’라고 생각한다. 이같은 역사인식의 틈새를 좁히려는 노력이 양국 사학자·교육자 사이에서 꾸준히 있어 왔다. 그 결과 지난해에는 한국의 전국역사교사모임과 일본의 역사교육자협의회가 공동 집필한 교재 ‘마주 보는 한일사’가 출간됐다. 양국의 역사교육을 담당한 교사들이 함께 만들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적잖은 가치를 지닌다. 다만 아쉬운 것은 집필 범위를 고대에서 개항기까지로 축소했다는 사실이다. 그만큼 근현대사를 다루는 부담이 큰 것이다. 이번에는 한·일 관계를 통사적(通史的)으로 다룬 고교생용 역사교재 ‘한일 교류의 역사-선사부터 현대까지’가 다음달 1일 양국에서 동시 시판된다고 한다. 한국의 역사교과서연구회와 일본의 역사교육연구회가 10년동안 공동 연구·집필한 이 책이 한·일 양 국민의 편향된 역사인식을 깨고 상대를 이해하는 데 크게 기여하기를 기대한다. 서로 미워하고 견제만 한다면 한·일 양국의 발전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겠기 때문이다. 이용원 수석논설위원 ywyi@seoul.co.kr
  • “훗날 문화재 될만한 이 시대의 건축물 남겨야”

    “한국 사회는 호화주택이나 별장에 대한 거부감이 커서 올바른 건축물이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돈을 많이 번 사람이 무엇을 만들어 놓으면 세월이 지난 뒤 미술관 같은 문화공간이 돼 국민에게 돌아간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지 않습니까.” 유홍준 문화재청장이 7일 “100년이나 200년 뒤 문화재로 지정될 만한 것이 지금 이 시대 어디에서 창출되고 있느냐.”면서 “후손들이 이 시대를 산 선조들을 원망할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는 “청장을 그만두면 시대에 걸맞은 문화유산을 남기는 사회운동이라도 해야 할 것 같다.”면서 “돈 있는 사람이 최고의 인력과 기술을 들여 문화재가 될 수 있는 건축물을 만들 수 있도록 권장하는 분위기가 우리 사회에 형성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 청장은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린 올해 문화재청 주요업무계획 설명회 말미에 “그동안 고민만 해왔지 해결하지 못한 대목이 있다.”면서 이렇게 토로했다. 유 청장은 “오해도 살 수 있는 얘기”라고 전제하고는 “훗날 문화재로 지정될 수 있을 만한 대저택이 지어지고 있는 사례를 알고 있는 것이 없다.”면서 “어떤 재벌은 국민정서에 부정적으로 지목되는 것이 귀찮아 일본이나 싱가포르에 별장을 짓고 있는데 결국은 국가적 손해”라고 강조했다. 유 청장은 청와대를 지칭하는 듯 “대통령 관저가 100년 후 존속한다고 했을 때 역사적 가치는 몰라도 건축적 가치는 어떻게 평가받겠느냐.”면서 “정부청사도 100년 후에 살아남을 수 있는 건물이 있을지 모르겠다.”고 탄식했다.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6) 인왕산이 중인 터전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6) 인왕산이 중인 터전

    위항(委巷)은 꼬불꼬불한 거리나 골목, 사람들이 많이 사는 동네를 가리킨다. 양반들은 넓은 집에 살았으므로, 좁은 골목에 모여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중인 이하였다. 한양을 남촌과 북촌으로 나누면 그 중간지대인 청계천 일대가 위항이었으며, 좁은 집들이 모여 있던 누상동(樓上洞) 누하동(樓下洞)을 중심으로 한 인왕산 일대도 위항이었다. 청계천 일대에는 역관이나 의원으로부터 상인에 이르기까지 재산이 넉넉한 중인들이 살았으며, 인왕산 언저리는 위항인 가운데 주로 서리나 아전들이 많이 살았다. ●왕기 서린 인왕산 서울의 물길은 백악산과 인왕산 사이에서 시작하여 동쪽으로 흐르는데, 도성 한가운데를 흐르는 이 물을 개천(開川)이라고 하였다. 백악의 남쪽, 인왕산의 동쪽 명당에 궁궐을 지었다. 조선시대 한양의 주민들은 신분이나 직업에 따라 종로를 경계로 하여 살았다. 왕족과 양반 관료들은 경복궁과 창덕궁을 연결하는 직선 이북의 지역, 지금의 율곡로 양쪽 일대에 모여 살았다. 즉 계동·가회동·원서동·안국동 등의 북촌이 그들의 거주지역이었다. 조선왕조의 정궁인 경복궁의 주산은 백악(白岳·北岳)이다. 백악의 좌청룡인 동쪽의 낙산은 밋밋하고 얕은 지세인데, 우백호인 서쪽의 인왕산은 높고도 우람하다. 인왕산의 주봉은 둥글넓적하면서도 남산같이 부드럽거나 단조롭지 않으며, 북악처럼 빼어나지도 않다. 그러면서도 남성적이다. 그래서 한양에 도읍을 정할 무렵에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자는 의논도 있었다. 이는 전설이 돼 민중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전해온 듯하다. 실제로 임진왜란을 겪고 나자 인왕산에 왕기가 있다는 소문이 다시 퍼져, 광해군 시대에 인왕산 기슭에다 경희궁(慶熙宮)을 세웠으며, 자수궁(慈壽宮)이나 인경궁(仁慶宮)도 세웠다. 실제로 이 부근에서 살았던 능양군(綾陽君)이 반정(反正)을 일으켜 광해군을 내몰고 왕위에 올라 인조(仁祖)가 되었으니, 인왕산 왕기설이 입증된 셈이다. ●장안의 명승지 인왕산 인왕산에는 왕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경치도 좋았다. 서울의 명승지로는 반드시 인왕산이 꼽혔다.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의 국도팔영(國都八詠)에는 필운대(弼雲臺)·청풍계(淸風溪)·반송지(盤松池)·세검정(洗劍亭)을 포함했다. 인왕산 자락의 명승지가 서울 명승지의 절반을 차지한 셈이다. 서울의 5대 명승지 가운데 인왕동과 백운동이 모두 인왕산에 있었다. 장안에서 멀리 떨어진 것이 아니라 도심 가까이 있으니, 성안 사람들에게 환영받을 만한 명승지였다. 서울 시내에서 인왕산을 보면 앞 모습만 보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모습을 인왕산의 전부로 알고 있다. 실제로 조선시대에는 이 부분에만 집과 관청이 들어섰고 사람이 살았으며, 역사가 이뤄졌다. 골짜기를 따라 여러 개의 마을이 생겼는데, 강희언(姜熙彦·1710∼1764)의 그림에 그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그 뒤 몇개씩 합해져서 지금의 법정동이 되었으며, 몇개의 법정동이 합해져서 다시 행정동이 되었다. 사직동부터 체부동을 거쳐 필운동·누상동·누하동·옥인동·효자동·신교동·창성동·통인동·통의동·청운동·부암동까지가 경복궁에서 볼 수 있는 인왕산의 동네들이다. 인왕산에는 약수터도 많아서 조선시대만이 아니라 광복 이후에도 서울 사람들이 자주 찾아갔다. 그러나 1968년 1월21일 북한 특수군의 청와대 습격사건 이후 군부대가 주둔하며 일반인들에게 출입이 통제되었다. 그러다가 입산통제 25년 만인 1993년 2월25일부터 출입이 자유로워져, 서울시민들에게 등산로가 다시 개방되었다. 인왕산은 338m의 높지 않은 산이지만, 등산로가 14곳이나 되며, 서울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인왕산의 네 구역 인왕산은 경치가 좋은 명승지면서 경복궁에서 가까운 주택지이기도 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경복궁 건물이 모두 불타버려 폐허가 되기는 했지만, 양반과 중인들이 대대로 터를 물려가며 살았다. 그런데 명승지라는 이름에 비해, 이름난 정자들은 많지 않았다. 임금이 사는 경복궁이 너무 가까운 데다, 높은 곳에서 궁궐을 내려다보며 놀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요즘도 이 일대에 건물을 지으려면 고도제한이 있다. 그래서 인왕산에 지어진 집들은 시대마다 그 구역이 달랐다. 경복궁이 정궁이었던 조선 초기에는 경복궁 옆동네에 관청만 있었고, 주택들은 많지 않았다. 안평대군의 별장인 무계정사가 인왕산에 있었지만, 경복궁이 내려다 보이지 않는 옆자락이었다. 그의 살림집은 시냇물 소리가 들린다는 뜻의 수성동(水聲洞) 기린교(麒麟橋) 부근에 따로 있었다. 수성동은 옥인아파트 자리라고 추정되는데,1960년대에 아파트 공사를 하면서 기린교를 없앴다고 김영상 선생이 증언하였다. 장동 김씨들이 모여 살았던 청풍계(지금의 청운동)나 위항시인들이 모여 활동했던 옥류동(지금의 옥인동)은 조선 후기에 와서야 활기를 띠었다. 임진왜란 중에 경복궁이 불타버려 오랫동안 폐허가 되자, 높은 곳에 집을 지어도 별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경아전들이 관아와 거리가 가까운 인왕산 중턱에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인왕산은 구역과 높이에 따라 고관들의 호화주택이나 별장, 위항인들의 초가집들이 섞이게 되었다. 6·25 전까지만 해도 누상동이나 누하동, 필운동 일대에는 초가집들이 듬성듬성 섞여 있었다. 다음 회에는 인왕산을 크게 네 구역으로 나누어 소개한다. 안평대군과 무계정사, 안동 김씨와 청풍계, 김수항의 청휘각과 송석원, 필운대와 육각현 순으로 살펴본다. ■ 역사기록이 전하는 인왕산 인왕산은 역사 기록에서만 보더라도 명산으로 꼽을 만하다. 조선시대 차천로(車天輅·1556∼1615)는 ‘오산설림(五山說林)’에서 인왕산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무학(無學)이 점을 쳐서 (도읍을) 한양(漢陽)으로 정하고,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자고 하였다. 그러고는 백악과 남산을 좌청룡과 우백호로 삼자고 하였다. 그러나 개국공신인 정도전이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면서,“옛날부터 제왕이 모두 남쪽을 향하고 다스렸지, 동쪽을 향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고 했다. 그러자 무학이 “지금 내 말대로 하지 않으면 200년 뒤에 가서 내 말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고 답했다. 이는 후에 인조반정으로 현재화된다. 또한 성현(成俔·1439∼1504)은 ‘용재총화(齋叢話)’에서 인왕산의 경치를 자랑했다. 한성 도성 안에 경치 좋은 곳이 적은데, 그중 놀 만한 곳으로는 삼청동이 으뜸이고, 인왕동이 그 다음이며, 쌍계동·백운동·청학동이 또 그 다음이다.(줄임) 인왕동은 인왕산 아래인데, 깊은 골짜기가 비스듬히 길게 뻗어 있다고 말했다. 유본해가 서울의 명승지와 동네를 소개하는 ‘한경지략(漢京識略)’에서도 그 사실을 적시했다. 수성동은 인왕산 기슭에 있는데, 골짜기가 깊고 그윽하다. 물 맑고 바위도 좋은 경치가 있어서, 더울 때 소풍하기에 가장 좋다. 이 동네는 옛날 비해당(匪懈堂) 안평대군이 살던 집터라고 한다. 개울을 건너는 다리가 있는데, 이름을 기린교라고 한다. 허경진 연세대 국문과 교수
  • 이라크 전쟁비용 $1,000,000,000,000 얼마나 큰 돈일까

    이라크 전쟁비용 $1,000,000,000,000 얼마나 큰 돈일까

    미국 정부 정책의 우선 순위를 제시하는 ‘내셔널 프라이오리티즈(National Priorities)’ 사이트에는 초단위로 액수가 올라가는 ‘이라크 전쟁비용 시계’가 공개되어 있다. 지난 2003년 3월 개전 이후 시계 눈금은 초당 ‘1000달러’씩 숨가쁘게 상승하고 있다. 2003년 이라크 침공 이후 미군 3000명이 숨지고 2만명이 부상당했다. 전쟁과 테러로 희생된 이라크인은 산출조차 되지 않고 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전에 쓴 돈은 직접 비용 7000억달러에 부상 미군 치료 등 간접 비용을 합치면 보수적으로 계산해도 1조달러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이는 미 국방부가 이라크 전쟁 전에 밝힌 예상 전비(500억달러)의 14배에 달한다. 2001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조지프 스티글리츠 컬럼비아대 교수는 각종 기회 비용과 사망·부상자 손실을 환산하면 2조달러에 달한다고 지적한다. 미 abc방송은 4일(현지시간) ‘1조달러가 얼마나 큰 돈이며, 이 돈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소개했다. 정치적 수단을 총동원해 이라크 추가 파병을 서두르는 부시 대통령이 매일 3억달러씩 이라크에 쓰는 돈이 어떤 가치가 있느냐는 의문 제기이다. 1조달러(약 936조원)는 얼마나 큰 돈일까. 이 방송은 1초당 1000달러씩 쓴다고 해도 30년 동안 쓸 수 있는 돈이라고 설명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업무시간에만 돈을 뿌린다 해도 120년 이상 쓸 수 있다. 이 돈이 이라크 전쟁이 아닌 지구촌에 쓰인다면 인류의 삶이 바뀐다. 암이 정복될 수 있고 심장병과 당뇨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할 수 있다. 전 세계 수백만명의 어린이들은 더이상 비극적인 죽음을 맞지 않아도 된다. 매년 홍역, 파상풍, 호홉기 질환과 설사로 숨지는 어린이 수백만명을 구할 수 있다. 예방 비용은 단돈 2달러. 어린이 1명에게 공급할 수 있는 항생제는 1달러이며 설사약은 10센트면 된다. 현재 에이즈로는 1분마다 어린이 1명이 숨지고 있다. 유니세프 한국위원회는 기부금 10달러로 영양실조 어린이 15명에게 고단백 분말 영양식 한 끼를 제공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또 끝없는 분쟁으로 30만명 이상이 학살당한 수단 다르푸르 사태를 종식시킬 수도 있다. 1조달러는 인류의 과학 발전에 헌신하는 미 국립과학재단(NSF)과 같은 연구재단 170개를 운영할 수 있고 미 국립암센터의 200년 예산과 맞먹는다. 한해 예산 75억달러로 전 미국 기업과 공장의 공해 방지활동을 벌이는 환경보호국(EPA)이 130년이나 쓸 수 있다. 부시 대통령이 교육 개혁을 위해 추진해온 낙제방지법도 해결된다. 미 교육부의 1년 예산은 550억달러이지만 이라크 전쟁 비용이라면 18년 동안 빈곤층 자녀들에게 질높은 교육을 제공할 수 있다. 이 방송은 1조달러로 미국이 좀더 안전해졌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수십명 정도 있다면서 그들은 딕 체니 부통령이 최고경영자(CEO)로 있던 에너지업체 핼리버튼사의 성공에 흔쾌히 동의할지 모르겠다고 꼬집었다. 핼리버튼은 이라크 복구사업을 싹쓸이하면서 100억달러 이상을 벌어들였다. 안동환기자 sunstory@seoul.co.kr
  • “대권, 재상집안 사람이 잡는다”

    한국역술인협회 백운산(64) 회장은 최근 펴낸 에세이집 ‘인생상담’(등대출판사 펴냄)에서 “야권에서 분명히 목(木)성이 대권후보가 되고, 지지도도 아주 높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백씨는 그러나 “다만 6월 이후에 여권에서 새로운 인물이 출현하면 파급력이 상상을 초월할 것”이라며 정치상황에 따라 대권경쟁의 판도가 크게 변화할 것으로 내다봤다. 백씨는 “광화문을 중심으로 남쪽지방 출신으로 집 주변에는 강과 저수지, 집 앞에는 맑은 우물이 있고, 명문학교를 나온 재상 집안의 사람이 대권을 잡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일부 언론과의 전화통화에서는 “역술에서 목성이라 함은 성씨에 기역(ㄱ)이나 한문의 나무 목(木) 변이 들어간 경우를 말한다.”면서 “대선까지는 아직 기간이 남아 있어 지금은 구체적으로 승자가 누구인지 점칠 시점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올해 남북 통일문제의 큰 진전이 이뤄지고, 그에 따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남한 방문이나 노무현 대통령 혹은 특사가 북한을 방문하는 등의 이슈가 생길 것”이라고 점친 뒤 “2010년 국가적으로 큰 환란이 점쳐지지만 향후 200년간 한반도에 전쟁은 없다고 판단한다.”고 밝혔다.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27일 TV 하이라이트]

    ●라이프n조이(YTN 오전 11시35분) 신나는 겨울놀이와 추억의 먹거리들이 마련된 겨울축제의 현장, 포천으로 떠난다. 포천에서 열리고 있는 동장군 축제를 찾아 논밭 얼음에서 즐기는 얼음썰매와 백운계곡 산비탈 눈썰매장에서 짜릿한 눈썰매도 타본다. 나무를 톱질하며 산촌체험도 해보고 당나귀가 끄는 마차를 타고 산골짜기도 유람해 본다.   ●책 읽어주는 여자, 밑줄 긋는 남자(EBS 오후 9시30분) 내가 원하는 삶이 뭔지 제대로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저 막연하게 “어떻게 되겠지.”라며 반복되는 일상. 미운 오리새끼의 모습에서 벗어나고 싶다면,200년 전 안데르센의 동화를 현대의 일터에 탁월하게 적용한 ‘미운 오리새끼의 출근’을 통해 삶의 의미를 다시 찾아보자.   ●그것이 알고 싶다(SBS 오후 11시5분) 우리나라 전체인구의 53.5%가 신앙을 갖고 있다. 그러나 다종교 국가인 관계로 종교 간의 갈등이 적지 않다. 특히 제사나 혼례를 둘러싼 가족간의 종교 갈등은 가족화목을 저해하고, 이혼·가출 등 가정파탄을 부르기도 한다. 설날을 앞두고 종교 갈등을 해소할 방법을 찾아본다.   ●누나(MBC 오후 7시55분) 경찰서에 가서 미리 사채업자를 고소했던 승주는 혁주와 함께 공원에서 사채업자를 만난다. 주변 눈치를 살핀 사채업자는 의심스러운 차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승주 남매를 비웃는다. 건우가 학교로 돌아온다는 소식을 들은 수아는 학과장에게 가서 왜 돈 보고 학원으로 옮긴 작자에게 다시 강의를 주냐며 따진다.   ●행복한 여자(KBS2 오후 7시55분) 하영은 준호에게 과거로 돌아간 것처럼 점점 더 다가선다. 준호는 죄책감도 없이 지연 몰래 하영과의 만남을 즐기기 시작한다. 태섭은 종민의 부탁으로 어머니의 목걸이를 사러 나갔다가 지연을 만난다. 태섭은 지연의 추천대로 목걸이를 구입하지만, 망가진 목걸이라는 것을 알고 화가 난다.   ●걸어서 세계 속으로(KBS1 오전 10시) 태국의 수도이자 관문이 되는 도시 방콕.1782년 라마1세 국왕 때 세워진 방콕은 차오프라야강 기슭에 위치해 발달한 도시다. 차오프라야강을 따라 늘어선 수상가옥과 도로의 체증을 피해 이용할 수 있는 수상버스는 태국의 명물로 손꼽힌다. 미소를 품은 물의 나라, 태국 방콕으로 떠나본다.
  • 알라딘? 장금이? 뭐 볼지 고민이네…

    알라딘? 장금이? 뭐 볼지 고민이네…

    방학도 다 끝나간다. 과외로부터 학원에 캠프까지 오히려 방학이 더 바쁜 아이들이지만 남은 방학기간 동안 기억에 남을 만한 문화공연 하나는 가슴에 담게 해주는 것은 어떨까. 부모님의 주머니 사정을 고려해 자치구와 서울시 산하기관 등에서 준비한 부담 없는 알짜공연들을 정리해 봤다. ●어린이 뮤지컬 ‘알라딘’ 어린이 뮤지컬 분야의 최고의 스태프들이 모여 만든 총3막7장의 대형뮤지컬. 천일야화 중 ‘요술램프’를 모체로 삼았다. 재미있는 스토리와 탄탄한 구성, 개성강한 캐릭터는 어른관객마저도 매료되게 한다. 극단 ‘예일’이 야심차게 준비했다.31일까지 오후 2시,4시. 창동문화체육센터. ●어린이 뮤지컬 ‘피노키오’ ‘미녀와 야수’‘보물섬’‘2006 어린이 캣츠’등을 공연했던 극단 하늘의 작품이다.15t차량 분량의 무대세트, 실물 크기의 대형 인형들이 피노키오의 고향 피렌체로 관객들을 이끈다. 전국 순회공연으로 가다듬어진 춤과 노래, 농익은 연기가 압권.26∼28일까지 양천문화회관 대극장. ●창작놀이 교육극 ‘손 씻을래요’ 30일과 31일 금천구민문화체육센터 소극장에서 어린이 교육극 ‘손 씻을래요-미안해 친구야’를 공연한다. 극단 ‘십년후’ 연출가 송용일씨가 만든 창작극으로 어린이들이 나쁜 세균의 공격을 올바른 손씻기를 통해 막아낸다는 내용이다. 오후 2시,4시 공연. 단 구청 홈페이지(www.geuncheon.go.kr)에서 26일까지 인터넷 접수를 한다. ●헨델과 그레텔 ‘과자성의 비밀’ 서울시 극단의 공연이다. 그림 형제가 200년 전 쓴 고전에서 이야기를 빌렸지만 우리시대로 시계를 돌려 재구성했다. 원작에서는 소년, 소녀가 주인공이지만 작품에서는 대학생들이 주연을 맡는다. 노래와 춤, 마술까지 어우러진다. 강서(31일), 강동구민회관(2월1일) ●그림자극 ‘동물의 사육제 & 피터와 늑대’ 요즘 아이들이 쉽게 접하기 어려운 그림자 연극이다. 빛과 실루엣을 통해 연출되는 다소 평면적이고 단순한 무대는 어린이 등에게 또 다른 매력을 선사한다.26일(단체)은 오전 11시·오후 4시, 주말은 오후 1·3시. 입장료는 할인권 지참시 1만 2000원, 사랑티켓 구입시 5000원이다. ●장금이의 꿈 서울 애니메이션센터에서는 드라마 대장금을 원작으로 한 만화영화 ‘장금이의 꿈’을 상영한다. 음식을 통해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꿈인 장금이가 역경을 딛고 최고의 요리사가 되어가는 과정이 그려진다.‘장금이의 꿈’은 2006년 대한민국 애니메이션 대상 수상작품이다,2월4일까지 평일 3회(13,15,17시) 주말4회(11,13,15,17시)상영된다. 유영규기자 whoami@seoul.co.kr
  • [거리 미술관 속으로] 세계 최대 도자벽화

    [거리 미술관 속으로] 세계 최대 도자벽화

    서울 청계천 도자(陶瓷)벽화 ‘정조대왕 능행 반차도’가 광교부터 삼일교까지 벽면을 병풍처럼 휘감고 있다. 청계천 반차도는 높이 2.4m, 길이 186m로 세계에서 가장 큰 도자벽화이다. 벽에 붙은 도자타일(30×30㎝)만 4960장이다. 반차도는 고증한 작품인 동시에 창작품이다. 수많은 예술가들이 200년을 넘나들며 작품을 완성했기 때문이다. 원본은 정조가 1795년 2월 아버지 사도세자의 환갑을 맞아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수원 화성과 현륭원(사도세자 무덤)을 다녀와서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에서 나왔다. 이 책에 단원 김홍도 등이 창덕궁에서 광통교를 지나 화성으로 가는 왕의 행차 모습을 흑백 목판화로 그렸다. 1994년 한영우 전 서울대 교수가 목판화에 채색을 입혔다. 세월 탓에 색이 바랜 채색 목판화와 뒷모습을 그린 두루마리 행렬도를 고증해 작품의 색깔을 하나하나 정했다. 가로 15m, 세로 18m의 반차도를 청계천 도자벽화로 확대 제작하면서 강석영 이화여대 교수가 채색의 명암을 결정했다. 그리고 이헌정 작가가 조선시대 백자를 재현해 타일 원판을 제작하고, 여기에 17가지 안료를 써서 인물 1779명과 말 779필을 그렸다. 도자를 빚어 굽고 채색하는 일은 모두 손으로 했다. 이로써 과거의 유물이 생명력을 지닌 현재의 미술작품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작품은 다양한 이야기를 품고 있다. 정조는 왕의 가마 정가교(正駕轎)를 타지 않았다. 효성이 지극한 터라 어머니 혜경궁 홍씨 앞에 갈 수 없다고 고집을 부렸기 때문이다. 혜경궁 홍씨의 자궁가교(慈宮駕轎)에 이어 정조가 탔다는 좌마(座馬)가 보이지만 정조의 모습은 찾을 수 없다. 일부러 그리지 않았다. 왕을 대충 작게 그릴 수 없었던 것이다. 반차도는 한 폭의 풍속화이기도 하다. 나인의 웃는 표정, 찡그린 표정조차 생생히 살아있다. 작품을 제작, 기증해 도자벽화에 이름을 새긴 조흥은행도 이제 역사가 됐다. 신한은행과 합병하면서 그 이름을 잃었기 때문이다. 한영우 교수는 “왕조의 위엄, 질서와 더불어 낙천적이고 자유분방한 인물묘사가 돋보이는 작품”이라면서 “정조 반차도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독일 나치군이나 북한 인민군과 확연히 다른 점”이라고 설명했다. 정은주기자 ejung@seoul.co.kr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