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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보없이 경제발전 어려워 韓美관계 더욱 공고히 해야 / 다음달 27일로 정전협정 50주년 맞는 백선엽 장군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83세의 백선엽(白善燁) 장군은 지금도 ‘전우∼’의 노랫말을 정확히 외운다.만주군 활동,빨치산 토벌대장,6·25때 낙동강 다부동 전선 사수와 평양 최선봉 입성,살아 있는 전설의 백전노장 등등.파란과 곡절의 세월만큼 뒤따르는 수식어도 많다. 노(老)장군은 매년 이맘때면 회한과 상념에 빠져든다.숱한 아비규환이 담긴 흑백필름이 어김없이 그의 뇌리속을 때린다.먼저 간 전우의 얼굴이 생각나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가슴을 쥐어짜는 통한을 뼛속 깊이 느껴보기도 한다.때론 국립묘지로 달려가 동료의 이름을 목놓아 불러보기도 한다. 노장군에게 이유를 묻자 “너희들은 잘몰라.산자의 몫을 망각해서는 안되지.”라고 알듯말듯 말꼬리를 흐린다. 다음달 27일이면 6·25전쟁 정전협정 50주년을 맞는다.핑계삼아 노장군에게 정중히 인터뷰를 요청해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 앞뜰에서 만났다.시계바늘을 50여년 전으로 돌렸다. ●잊지 못할 요정 래봉장 51년 7월10일 오전 10시.개성의 99칸 한옥 요정인 래봉장(來鳳莊).정전협정을 위한 첫 테이블이 마련됐다.미 극동군해군사령관 조이 제독(중장)이 남측 수석 대표,백선엽 소장이 한국측 대표로 참석했다.북측에서는 남일 조선인민군참모장과 이상조 조선인민군전선사령부 참모장,덩화(鄧華)조선인민지원군 부사령관 등이 참석했다.적과의 첫 만남,서로 총부리를 겨눈 대치상황 때문인지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첫 대사는 “회담은 하되 전투는 계속된다.”는 조이 제독의 말이었다. “래봉장은 99칸의 기와집이었어.일부는 파괴돼 있었고 멀쩡한 칸은 공산군 간부들이 숙소로 사용하고 있더군.서로 싸움질하다가 만났기 때문에 으르렁대는 냉랭한 분위기였지.북측은 북쪽에,남측은 남쪽 테이블에 앉았는데 말이야,북쪽 테이블이 남쪽보다 약간 높았어.신경이 쓰이더군.그래서 아군측 테이블 깃발의 높이를 약간 높이 세웠더니 그들도 금방 높이더군….” 이후 회담에는 백선엽,이형근 소장에 이어 육군참모차장 유재흥 소장 등 5명의 한국군 대표들이 차례로 참석했다.회담 장소도 개성 래봉장에서 판문점으로 옮겨졌다. 백 장군은 “당시 회담에 참석해 보니 남일 수석대표는 중공군의 눈치를 자주 봤다.”면서 “모택동이 회담을 실질적으로 지휘하고 주은래가 물밑 외교작전을 펼쳤다.”고 회고했다. ●아이젠하워와 담판 승부 휴전회담이 한창이던 1953년 5월 백 장군은 미국을 방문했다.51년 제5순양함대 사령관으로서 함포사격을 지원했던 미 해군성 전략기획국장 알레이 버크 제독을 만났다.버크 제독과는 래봉장 휴전회담 대표였던 인연도 있었다.그는 백 장군에게 “아이젠하워의 휴전 방침은 이미 굳어졌다.아무리 이승만 대통령이 반대해도 안된다.”고 여러차례 귀띔했다.한국이 미국으로부터 어떤 보장을 얻어 내지 못한다면 한국의 장래는 위태롭다고까지 했다. 내친 김에 백 장군은 이튿날 백악관 집무실에서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단독 면담했다.아이젠하워는 “한국전쟁을 종식시키는 것이 나의 선거 공약”이라고 말했다.백 장군은 “그렇다면 안보와 경제발전을 담보하는 획기적인 조치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주장했다.그러자아이젠하워는 월터 스미스 국무차관을 만나 협의해 보라고 대답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그렇게 해서 출발했지.그러나 미국은 휴전 이전에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면 공산군측이 휴전협상을 결렬시킬 것을 우려했어.귀국후 이승만 대통령에게도 이같은 분위기를 전달했더니 매우 흡족해하셨지.그해 6월25일 국무부 극동담당 차관보인 월터 로버트슨이 한국에 특사로 파견돼 한·미방위조약에 대한 세부 사항을 이승만 대통령과 본격적으로 협의하게 됐지.” ●“주한미군 철수주장은 언어도단” 최근 일부에서 제기하는 주한미군 철수문제에 대해 노장군은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일축한 뒤 “어찌 안보보장없이 경제발전이 가능하고 또 외국인들이 우리나라를 찾아오겠는가”.라고 반문했다.노장군은 또 “요즘처럼 어려울수록 한·미동맹관계를 공고히 해야 한다.”면서 “부시 정부는 자국의 청년들이 해외에서 더이상 피를 흘리는 것을 원치 않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고 역설했다.그는 또 미군의 한강 이남 재배치는 철수 전단계일 수도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덧붙였다. 최근 발생한 북한어선의 NLL 침범에 대해서도 “북한의 저의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인데 꽃게니 뭐니 운운하고 있다.”면서 굳건한 한·미동맹은 북한의 핵무장보다 더욱 중요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노병은 결코 죽지 않는다 노장군은 1920년 평안남도 강서에서 태어났다.평양사범,만주군관학교,군사영어학교,1사단장,군단장,육군참모총장,한국군 최초의 육군대장을 지낸 전쟁 영웅이다. 노장군은 고령에도 불구하고 운동,강연,외부인 접견 등 어느것 하나 마다하지 않는다.주한미군 관계자들과 만나도 통역없이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정도며 기억력도 뛰어나다. 최근에 노장군을 상징하는 몇몇 행사가 있었다.지난 5월6일 ‘백선엽장군 리더십상’을 주한미군에서 제정했다.5월18일 노장군은 메릴랜드 한국분교에서 러포트 주한미군사령관과 함께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내가 5년전 6·25전쟁 50주년기념사업회위원장을 맡아 지금까지 많은 일을 했지.다음달 27일 전쟁기념관으로 와.27m높이의 한국전쟁기념탑 준공식이 있을 거야.건강? 특별한 거 없어.일찍 자고,웃으며 사는 거야.마누라 해주는 밥 잘 먹고….” 김문기자 km@
  • 유럽 ‘연금 개혁’ 몸살

    노령인구 폭증과 경제활동인구의 감소로 연금제도에 메스를 들이 댄 유럽 국가들이 노조와 야당의 반발에 부딪혀 진통을 겪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정부의 연금제 개혁 방침이 발표되자 이에 항의하는 노동자들이 거리로 뛰쳐 나와 반대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노동 조합들은 13일(현지시간)을 ‘행동의 날’로 정하고 동맹파업에 돌입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특히 항공·철도·버스 등 공공 운송수단을 맡고 있는 노조의 파업 참여로 교통대란이 예상되고 있다. 하지만 프랑스 정부는 이같은 공공부문 노조의 거센 반발에 단호한 입장이다.장 피에르 라파랭 총리는 “매년 50만명의 은퇴자가 쏟아지고 있다.”며 변화 없이는 20년 안에 연금제도가 파산할 수도 있음을 경고했다.프랑스 정부는 지난 7일 2008년까지 공무원의 연금 분담 기간을 현행 37.5년에서 민간 근로자와 같은 40년으로,2012년까지는 부문을 불문하고 41년으로 연장하는 개혁안을 발표했다. 오스트리아는 더 어려운 상황이다.퇴직 연령을 65세로 높이는 내용을 골자로 한 연금개혁안을 발표한 이후 오스트리아 정부는 큰 반발에 직면하고 있다.노조가 50년만에 처음으로 총파업을 실시한 데 이어 극우 자유당의 실질적 지도자인 외르크 하이더 전 당수는 11일 연립정부를 와해시킬 수 있다며 정부를 압박하고 나섰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지난달 29일 연금 분담 기간을 현행 40년에서 45년으로 연장시키고 조기 은퇴자에게는 불이익을 부과하는 내용의 연금개혁법안 초안을 마련했다.이 개혁안을 다음달 6일 통과시켜 향후 4년동안 22억유로(25억달러)의 절감효과를 보겠다는 것이 정부의 입장이다. 세계은행도 지난 9일 유럽국가들에 충분한 재정확보를 위해 연금제도 개혁이 시급하다고 경고했다. 강혜승기자 1fineday@
  • 근대문학 논쟁 주역의 삶과 작품

    권환 김기진 김영랑 김진섭 송영 양주동 윤극영 윤기정 이은상 최명익. 이들 10인은 얼핏 보면 지향한 세계관과 문학세계가 각각 달라 보이지만,그 내면을 들여다 보면 모두 일제 강점기인 1920년대부터 문학 활동을 시작하면서 ‘근대문학의 씨’를 뿌렸다는 점에서 한 곳에서 만난다. 대산문화재단(이사장 신창재)과 민족문학작가회의(이사장 염무웅)가 오는 24,25일 ‘탄생 100주년 문학인 기념문학제’를 연다.탄생 100년이 된 이들 10인의 삶과 작품을 조명하면서 우리 근대문학이 어떤 과정을 겪으며 여물었는지 살피는 ‘문학축제’다. 두 단체 주관으로 심포지엄과 ‘문학의 밤’,학술제 등 다양한 기념행사가 진행된다.기획위원인 황현산 고려대교수는 “현대문학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이들을 기리는 작업은 문학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10인의 작가는 모든 장르에 걸쳐 골고루 활동한게 특징이어서 이들의 작품세계를 조명하는 것은 우리 현대문학의 연원을 살피는 학술회의에 해당한다.”고 설명했다. 올해로 세번째인 이 ‘문학축제’의 주제는 ‘논쟁,이야기 그리고 노래’이다.세 주제어에는 이들의 문학 인생이 농축돼있다. 먼저 카프(KAPF,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를 둘러싸고 전개된 치열한 논쟁은 근대문학사의 특징이다.일본 유학파 김기진을 비롯해 윤기정,송영,권환,양주동 등은 카프와 직·간접적 관계를 맺고 활발하게 활동했다. 소설가 김기진과 송영은 각각 ‘파스큘라’와 ‘염군사’라는 문인단체를 조직하면서 계급문학의 토대를 다졌다.소설가 윤기정은 아나키스트 논쟁으로 카프의 1차 방향 전환을,시인 권환은 1931년 카프의 볼셰비키화를 내걸고 2차 전환을 이끌면서 계급문학을 강조했다.이들의 시·소설·평론은 ‘문학보다는 삶’에 무게를 두었다. 이에 맞서 ‘문학’에 비중을 두었던 비(非)카프계열 작가들은 시조·외국문학·국문학 등 다양한 ‘이야기’(담론)를 펼쳤다.국민문학파의 이은상은 ‘시조 부흥론’을 주장했고, 해외문학파의 김진섭은 외국문학을 소개하면서 카프 계열의 작가와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또 중간파를 자처한 양주동은 문단의 좌·우파를 통합하려 애썼고, 국문학자로서도 큰 업적을 남겼다.한편 주옥같은 시어를 구사한 서정시인 김영랑과 동시 작가 윤극영은 ‘노래’의 단초를 만들었다. 24,25일 이틀동안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릴 문학제의 심포지엄에서 김대행 서울대 교수가 당시 논쟁을 상세하게 정리한다.또 김영민 연세대 교수는 문학에 대한 당시의 치열한 논쟁이 남북이 분단된 현재에도 유효하다는 논지를 펼친다.각론에서는 한양대 서경석 교수가 ‘카프 작가들’의 작품 세계를,원광대 김재용 교수는 송영의 월북 이후의 활동에 대해 조명한다. 한편 25일 저녁 서울 안국동 ‘철학마당 느티나무’에서는 ‘문학의 밤’이 열린다.윤기정의 장남인 윤진화 전 아시아개발은행 전문 수석위원 등이 나와 ‘나의 아버지’코너에서 토크쇼 형식으로 작가들에 얽힌 이야기 보따리를 푼다.이밖에 김영랑·권환의 시를 낭송하고 이은상과 윤극영이 지은 노래를 부른다. 근대문학의 주역을 기리는 문학축제의 내년 무대에는 시인 이육사,소설가 계용묵 박화성 이태준,평론가 조윤제,수필가 이양하 등이 오른다.기획위원인 대산문화재단 곽효환 팀장은 “내년부터는 종합문학제 성격으로 3월에 개최하고,이후 열리는 기념사업회,지방자치단체 주관의 개별 작가 기념문학제와 유기적 관계를 강화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종수기자 vielee@
  • [씨줄날줄]레드 산드라

    ‘맘 속 붉은 장미를/우지직끈 꺾어보내 놓고/그 날부터 내 안에선 번뇌가자라다/늬 수정같은 맘에/나 한 점 티 되어/무겁게 자리하면 어찌하랴/차라리 얼음 같이 얼어 버리련다.(노천명의 ‘장미’중)’ 시인이 이렇게 사랑의 안타까움을 쏟아 놓았던 것처럼 장미는 사랑과 아름다움,사모함을 상징하는 꽃으로 통한다.그러기에 연인들은 상대방의 생일에 나이만큼의 붉은 장미꽃송이를 선물해 뜨거운 마음을 전하는 것이리라. 장미는 고대 이집트의 출토품 가운데에 무늬가 그려져 있기도 하고 중국 후오대에 장미에 관한 미술품이 있었을 정도로 인류와 오랜 연관을 가진 꽃이다.페르시아전설이나 그리스·로마신화 등에도 아름다운 자태와 향기,날카로운 가시에 관련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오늘날의 원예종 장미가 나온것은 18세기 말 유럽에 아시아의 여러 원종들이 도입돼 원종간의 교배가 이루어지면서부터라고 알려진다. 그러나 이렇게 육종된 장미를 아무나 심어서 팔았다가는 재산권침해로 소송을 당하는 게 요즘 세상이다.2001년 우리나라도 가입한 국제신품종보호동맹(UPOV)협약 때문이다.이 협약은 새로 개발한 식물 신품종에 대해 ‘품종보호권’을 인정받으면 20년간 권리를 행사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한국은 지난해‘종자산업법’을 제정해 품종보호권의 법률근거까지 갖췄다.이에 따라 신품종 장미를 재배할 경우 그루당 1달러 상당의 로열티를 지불해야 한다. ‘한·독 장미전쟁’이라 불린 한국화훼업계와 독일 육종회사간의 ‘레드 산드라’ 상표 분쟁도 이 ‘품종보호권’과 관계가 있다.독일산 붉은 장미 종인 레드 산드라는 1987년부터 국내 재배돼 장미 재배량의 35.7%를 점유하고있으나 육종 시기가 오래된 탓에 ‘품종보호권’을 요구할 수 없었다.그러자 독일측이 상표권으로 로열티 요구를 하고 나온 것이다.12일 대법원의 ‘상표권 없음’ 판결로 레드 산드라 분쟁은 한국의 승리로 끝났다.그러나 이번판결은 레드 산드라에 한정된 것일 뿐이다.한국고유종 7종이 개발돼 있다지만 실용화 실적이 극히 미미한 국내 사정상 장미화훼업자들은 다른 모든 장미종에 대해 외국에 로열티를 내야 한다.연인에게 붉은 장미 스무 송이를 선물했다면 꽃값에서 한 송이당 12원씩,240원은 외국에 바치는 꼴이 되는 게우리의 현실이다. 신연숙 논설위원 yshin@
  • FTA 특집/ 대륙별 짝짓기… 통상지도 바뀐다

    세계경제에 자유무역협정(FTA)바람이 거세다.이는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다자주의와 함께 거스를 수 없는 세계 통상정책의 대세라는 주장이 지배적이다. 전문가들은 앞으로 세계 통상질서는 미국 주도의 미주자유무역지대(FTAA)와 유럽연합(EU),아시아 경제블록 등 3자 체제로 발전해나갈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각국은 3자 체제를 근간으로 국가간에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얽힌 양자협정으로 자국 경제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짝짓기를 계속할 것으로 보인다. ◆FTA 열풍 2001년 말까지 세계무역기구(WTO)에 신고된 지역무역협정은 250건이다.이중 절반인 125건이 지난 95년 WTO 출범 이후에 신고된 것이다.WTO가 다자무역의 공동체로 출범했음에도 불구,지역무역협정은 역설적으로 증가세가 심화되고 있다. 신고된 지역무역협정 250건중 95%이상이 FTA이다.동일한 대외관세정책을 취해야 하는 관세동맹보다 개별 국가의 독립성을 유지할 수 있고 신속한 협상과 다양한 범위를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다. 최근의 지역무역협정은 결속력과 추진력이 강한 추세를 보이고 있다.WTO출범 이후 신고된 125건중 94%인 117건이 현재 발효중이라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WTO 출범 전에는 발효율이 41%에 불과했다. FTA는 관세·수량제한 철폐,내국인 대우,무역규범 등 필수적 요소 이외에 투자보장협정,조세조약,경제협력,상호인증,경쟁법 조화 등 체결국의 이해가 일치하는 다양한 분야를 포함한다.또 여러 개의 FTA를 동시 추진하는 것도 특징이다.현재 세계에는 미국과 캐나다·멕시코간의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과 EU,동남아국가연합(ASEAN)의 아세안자유무역협정(AFTA),중부유럽자유무역협정(CEFTA),남미공동시장(메르코수르),안데안 경제공동체 등의 지역경제블록이 구축돼있다. 미국은 2005년 1월 출범을 목표로 미주 대륙 34개국을 아우르는 FTAA를 추진중이다. ◆왜 FTA인가 세계 각국이 앞다퉈 FTA를 체결하고 있는 것은 FTA를 통해 지역주의 확산에 대응하고,안정적인 수출시장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이밖에 외국인 직접투자를 유치하고 해외거점 확보,통상마찰 최소화 등 경제적으로 국익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삼성경제연구소 박번순(朴繁淳) 수석연구원은 “개발도상국가들에게 FTA는 무역·투자 확대뿐 아니라 경제구조 고도화,산업구조조정 등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대세에 밀려 국가이익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다자체제와는 달리 협상을 통해 서로의 입장을 조율할 수 있다는 점도 각국의 FTA러시 이유로 꼽힌다.이밖에 북미지역에 대한 협상력을 강화하기 위해 출범한 메르코수르처럼 다른 경제블록에 대한 견제용으로도 주목받고 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의 정인교(鄭仁敎) FTA팀장은 “FTA는 우루과이라운드협상(UR)이 한창이던 90년대 중반까지는 UR의 실패를 우려한 각국의 ‘보험 정책’개념으로 여겨졌지만 WTO출범 이후에도 100여개의 협정이 이뤄진 것을 보면 ‘보험’보다는 통상정책의 전환에 따른 것으로 해석된다.”고 말했다. ◆뜨거운 감자,농업협상 FTA가 당면한 최대 과제는 국가간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되는 농업분야의 원만한 협상이다.한국과 칠레간 FTA에서처럼 농업부문에 대한 협상을 유예하는사례가 등장하고 있다. 체결 당사국에 따라 상이한 협정내용도 문제다.미국은 앞으로 일정한 통일된 기준을 마련하겠다고 밝혔지만 이럴 경우 해당 국가들이 WTO 다자협의에서 재협상을 거부할 개연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같은 난제에도 불구,전문가들은 당분간 FTA를 체결하는 나라들이 줄을 이을 것으로 본다.하지만 머지않아 웬만한 나라들이 거의 FTA를 체결,수적 증가추세는 주춤해지고 대신 경제협력내용이 경제통합 형태로 심화될 것으로 예상했다. 김균미기자 kmkim@ ■자유무역협정(FTA) 은 둘 이상의 국가에서 상품이나 서비스를 사고팔 때 관세·비관세 장벽을 제거함으로서 시장 접근을 확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FTA를 맺은 나라끼리는 자기 나라처럼 상품 등을 사고 팔 수 있게 된다.최근에는 서비스와 투자 등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협정으로 변화하고 있다. ■한국과 FTA - 싱가포르·멕시코·日과 우선협상 우리나라는 칠레와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타결로 FTA의 물꼬를 튼데 이어 앞으로는 FTA 협상을 동시다발적으로 추진한다는 계획이다.그만큼 FTA 체결에는 가속도가 붙을 전망이다. 정부는 다음주중 전윤철(田允喆) 경제부총리 주재로 대외경제장관회의를 열어 FTA 추진종합전략을 세울 것으로 알려졌다.회의에서는 단기적으로는 싱가포르·멕시코·일본과 FTA협상을 벌이는데 이어 중장기적으로는 미국·중국·유럽연합(EU) 등과 추진한다는 일정을 세울 계획이다. 현정택(玄定澤) 청와대 경제수석은 최근 “우리나라의 무역의존도가 높기 때문에 FTA 체결을 통해 관세·비관세 장벽을 허물어 통상마찰을 근본적으로 없앨 필요가 있다.”면서 농업에 대한 우려가 적은 싱가포르·멕시코·일본 등과 FTA협상을 추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우리나라와 싱가포르는 내년 1월에 FTA 체결을 위한 공동연구회를 발족하기로 합의했다.싱가포르와 FTA 체결은 부정적인 효과가 거의 없기 때문에 협상은 단기간에 끝날 것으로 보인다. 멕시코와 협상은 내년중 공동연구를 벌인뒤 본격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멕시코 경제에서 농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줄어들고 있는데다 우리나라가 멕시코에서수입하는 농산물 비중도 지난 95년 10%에서 2000년 4%로 낮아졌다.FTA를 체결하더라도 농산물 수입이 크게 늘어날 가능성이 적다는 것이다. 정부는 단기간내 FTA 체결 대상국에 일본을 포함시킨다는 계획이지만 일본과의 협상은 상당히 복잡하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정인교(鄭仁敎) FTA팀장은 “일본과의 FTA협상은 경제적·비경제적인 득실에다 미국 및 중국과의 관계,동북아 및 동아시아 경제통합 전략을 종합적으로 검토한 뒤 추진전략을 세워야할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나라는 개별국가간 FTA체결뿐 아니라 다자간 협상도 전개할 것으로 보인다.예를들면 한·중·일 또는 한·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한·EU간 FTA협상이 진행될 것이라는 얘기다. 박정현기자 jhpark@ ■””세계자유무역 저해”” FTA 비판론 대두 자유무역협정(FTA)은 세계화의 걸림돌인가,디딤돌인가? 프레드 버그스텐 미국 국제경제연구소(IIE)소장 등 FTA를 지지하는 전문가들은 FTA가 다자주의를 보완하는 수단으로 세계화로 가는 과정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다자주의의 걸림돌이라는 비판론도 적지 않다. 세계무역기구(WTO) 사무총장으로 추천됐던 자그디쉬 바그와티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는 FTA가 역외국에 배타적인 성격을 갖고 있으며,다자주의로 발전하기 보다는 지역주의를 공고히 하고 범세계적 자유무역을 저해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아울러 양자 협상이 시장을 왜곡하고,관료주의와 이에 따른 비용을 양산하며 지역경제 블록간에 경쟁을 심화시켜 세계시장을 불필요하게 분리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주장한다. 수파차이 파니티팍디(55) WTO 사무총장은 최근 ‘지역주의’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면서 회원국들에게 “제3국을 차별하고 무역체제를 복잡하게 만드는 이같은 협정들은 세계통상체제에 체계적인 위험을 안겨주고 있다.”고 경고했다.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스는 최근 “국가들이 앞다퉈 양자 협의를 좇는 사이 진정한 의미의 개방적인 국제경제체제가 창출될 수 있는 가능성이 줄어들고 있다.”고 우려했다. 신문은 국가들이 무역과 투자확대를 FTA를 추진하는 주된 이유로 내세우고 있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고 지적했다. 상당수 국가들이 무역협정을 경제적 고려에서가 아니라 외교관계를 다지고 새로운 동맹관계를 구축하며 경쟁국을 견제하는 등 여러 지정학적 목적들을 달성하는 데 활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싱가포르가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이미 국내 시장의 대부분이 개방됐고 농업의 비중이 미미해 FTA 체결로 추가적인 경제적 이득이 별로 없는데도 이에 적극적인 것은 무역협정을 통해 안보를 강화하려는 의도가 짙다는 분석이다. 일본이 FTA 첫 체결국으로 싱가포르를 택한 것도 2차대전 당사국으로서 일본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이 남아있는 동남아 지역에 일본을 정치적으로 받아들일 분위기가 조성돼있는지 시험해보기 위한 정치적 포석이 강한 것으로 분석된다. 또 다른 이유로 1994년 우루과이라운드가 타결된 직후 갑자기 할 일이 줄어든 각국의 무역정책 담당자들이 자리를 보존하기 위해 FTA에서 살 길을 모색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보다 현실적 분석도 있다. 다자협상은 결과가 가시화하기까지 오래 걸리는데 비해 양자협상은 상대적으로 단기간에 합의를 도출해낼 수 있다는 점이 정책당국자들의 구미를 당기는 것도 사실이다. 전문가들은 FTA가 만능은 아니라고 경고한다.자유무역 지지 기업단체인 미국 무역을 위한 비상위원회의 칼맨 코언위원장은 “FTA 양자협상은 칼의 양날과 같다.”면서 “FTA는 무역과 투자를 확대하는 측면도 있지만 나라에 따라 협정의 내용이 상이할 경우 무역환경을 악화시킬 수 있다.”고 지적했다. 여러 개의 상이한 협정들이 복잡하게 뒤엉켜 ‘스파게티 효과’라 불리는데 이 경우 오히려 비용을 증가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FTA 열풍은 각국의 정치적 이해관계와 제한된 협상 인력을 분산시키는 결과를 가져와 지난해 출범한 도하개발어젠다(DDA)의 타결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줄 것으로 우려된다. 김균미기자 ■동아시아 경제블록/ 달리는 中 - 뒤쫓는 日 한국과 중국,일본의 경쟁구도는 한마디로 ‘앞선 중국,뒤쫓는 일본,머뭇거리는 한국’으로 요약된다. 동남아를 휩쓰는 자유무역 붐에는 아세안 국가들의 비교적 안정적이고 개방적인 분위기와 낮은 제조업 비용으로 인해수출 중심의 투자 활성화가 촉매제로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회원국간 불신이 여전하고 환율제도가 매끄럽게 조율되지 않은데다 일부 산업에 대한 보호 정책이 존속하고 있는 점이 걸림돌이다. 중국은 지난 4일 아세안과 FTA 창설을 위한 기본협정에 서명함으로써 역내인구 17억명을 아우르는 세계 최대 교역공동체를 2013년까지 출범시키기로 했다.이 구상이 실현되면 역내 국내총생산(GDP) 2조달러,교역액 1조 2000억달러로 유럽경제공동체와 2005년 출현할 범미주 FTA에 버금가는 경제블록이 형성된다. 중국은 2010년까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 싱가포르 등 선발 6개국과 교역 자유화를 마무리하고 2015년에는 캄보디아 라오스 베트남 등 후발 4개국과 협상을 마무리할 계획이다.중국은 캄보디아 라오스 등 세계무역기구(WTO) 미가입국들에 이미 최혜국 지위를 부여했다. 그러나 회원국의 경제 격차가 워낙 크고 유럽처럼 단일한 사회·정치·종교체제로 통합되지 않은 점이 걸림돌로 지적된다.중국에 시장만 내주었다는 비판론에 직면할 위험도 있다.지난 1월 싱가포르와 협정을 맺어 첫발을 뗐다가 중국에 추월당한 일본은 아세안 선발국들을 집중공략,중국에 뺏긴 이니셔티브를 되찾는다는 전략이다.일본은 또 한국처럼 농업분야가 취약한 점을 감안,10년안에 주요 국가들과 FTA를 맺되 중국 미국 유럽연합(EU) 호주 등 농산물 생산국과는 중장기적 협상을 벌인다는 구상이다.싱가포르를 낙점한 것도 농업이 없다시피한 특성을 겨냥한 것이다.일본은 지난 18일 중남미 거점인 멕시코와 정부간 협상에 들어갔다. 일본과 아세안이 FTA를 맺게 되면 10년안에 최소 4조 9000억달러 규모의 경제공동체가 출범할 것으로 분석된다.오는 2020년까지 아세안의 대(對)일본수출은 50% 증가하고 반대의 경우도 25%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임병선기자 bsnim@
  • [글로벌 시각] 北 ‘核개발 시인’은 체제 재정비 신호

    북한이 국제 협정을 위반하고 핵무기 개발 프로그램을 추진한 것이 밝혀지자 국제사회는 충격에 휩싸였다.그러나 최근의 다른 정황을 볼 때 북한의 이같은 시인은 반세기 만에 처음 시도하는 전략적인 체제 재정비의 조짐일 수 있다.또 모순적이지만 한반도의 전쟁 위험을 경감시키는 요인이 될 수도 있다. 북한은 그동안 필요하다면 무력을 이용해서라도 한국에 사회주의를 심으려 노력해왔다.그러한 전략 때문에 북한은 휴전선 인근을 중심으로 100만 무장병력을 배치,한국에 대해 항상 공격태세를 취해왔다. 하지만 수십년 지속된 북한의 경제침체와는 반대로 한국은 성장을 지속하며 미국과 동맹을 유지해왔고 북한이 원하는 통일의 꿈은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전락했다. 지금 북한은 두 가지 선택권을 가지고 있다.시간에 맡기고 판세가 전략상 유리하게 변하기를 바라는 것이 그 하나고, 다른 하나는 그동안 북한이 역사의 잘못된 쪽에 서왔다는 인식 아래 패배를 인정하고 통치체제의 전략적 목표를 재설정하는 것이다. 두번째를 선택할 경우,북한은 경제적번영을 한 가지 목표로 삼을 수 있다.북한 지도층은 권력 수단을 통제할 수 있는 카드를 가지고 있다.이 능력을 이용해 지난 4개월 동안 공언해 온 개혁을 실시,그로부터 경제적 이득을 얻을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한반도뿐 아니라 전세계에 위협이 되는 대량살상무기와 그 운반시스템에 대한 투자는 전쟁억제라는 양면성을 띨 수 있다.그러나 재래무기의 대량 배치는 불필요할 뿐만 아니라 경제의 발목을 잡는 것이다. 사실 북한은 이달 들어 최대 50만의 병력을 감축하는 것을 심사숙고하고 있다는 신호를 내보냈다.무장해제는 병력이 다른 곳에 이용될 수 있을 때만 가능하다.북한은 거대한 노동집약적 산업 인프라를 가지고 있다.미사일이 아니더라도 이 노동집약적 산업은 상당한 이득을 낼 수 있는 분야다.경제개혁을 통해 무장해제를 이끌어 낸다면 한반도에 평화를 불러올 수 있다. 1994년 북한이 핵무기 개발을 포기하는 대신 미국이 경수로 건설 사업에 지원키로 했던 제네바 합의는 파기됐다.경수로 건설 프로그램은 에너지와 인프라 건설의 즉각적인 지원을 원하는 북한의 실질적 필요와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북한이 별다른 관심을 나타내지 않은 것은 놀랄 만한 일도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군사적 대응은 할 수 없지만 협상의 여지는 있다.세계는 북한 영변 핵시설에 저장된 핵연료의 제거 및 무기 프로그램의 제한을 원한다.또한 북한의 재래식 무기도 제거되길 원한다. 한편 북한은 재래식 무기의 부분적인 무장해제 및 후방배치에 들어가는 비용과 실질적인 원조를 원한다.이처럼 다양한 측면을 갖는 협상에서 모든 나라들이 똑같은 우선순위를 둘 수는 없다.그러나 북한이 현명한 행동을 통해 미국과 동맹국들 사이에 쐐기를 박을 수 있다.예를 들어 재래전력의 후방배치에 대해서는 남한과,중거리 미사일은 일본과,장거리 미사일과 대량살상무기에 대해서는 미국과 각각 협상할 수 있다. 세계는 북한이 대량살상무기나 미사일을 수출하지 않는 한 이 정도 선에서 협상을 할 수 있다.이라크와 달리 북한은 50년 동안 중대한 무력도발을 취하지도 않았고 20년 동안 테러에 연루되지도 않았다.무장해제,재래식 무기의 재배치,경제개혁 등은 결과적으로 북한 체제의 근본적이고 전략적인 재정비가 될 수 있다. 마커스 놀랜드 美 국제경제硏 수석연구원 美 대통령 경제자문위원
  • 서해교전/ 북방한계선 문제점

    6·29서해교전 발생 배경에는 서해상의 휴전선이라고 할 수 있는 북방한계선(NLL)에 대한 분명한 규정이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많다.즉 NLL에 대한 남한과 북한,유엔사의 입장과 견해가 모두 제각각이다 보니 북측의 억측이나 무력 도발에 대해 우리와 유엔사측의 적극 대응이 어려워지는 측면도 있다.따라서 이번 교전사태를 계기로 한국과 미국 사이에 관련 규정을 명확하게 만들고 이를 토대로 해상경계선의 재설정을 포함한 남북한 당국자간의 논의가 시급하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NLL의 탄생 배경=1953년 7월27일 휴전협정이 체결,발효되면서 유엔사령부는 휴전선의 서쪽 연장선보다 북쪽에 위치한 서해 도서에서 해군 병력을 철수시키며 백령·대청·소청·연평·우도 등 서해 5개 도서를 포함하는 현재의 NLL을 임의로 설정했다.그 뒤 별다른 탈이 없다가 꼭 20년 만인 73년 10∼11월 두 달 사이에 북한은 43차례에 걸쳐 NLL을 불법 침범했다가 돌아가곤 했다.그해 12월1일 열린 제346차 군사정전위원회에서 북측 수석대표는 느닷없이 서해 6개도서(북한은 대연평도와 소연평도를 별도로 구분,6개 도서라고 함) 해역에 대한 관할권을 주장했다.북측은 이어 77년 6월 200해리 경제수역과 50해리 군사경계수역을 일방적으로 선언했다. 지난 92년 2월 남북고위급회담에서 맺은 남북기본합의서와 그 부속합의서를 통해 남북한은 서로 현재의 관할 구역을 인정하는 데에는 합의했으나 북측이 세부협상에서 다시 문제를 제기해 논의가 무산됐다.99년 6월 또다시 의도적으로 NLL을 침범,서해상에서 우리 해군과 무력충돌을 했고 이번에 똑같은 사태가 재현됐다. ◇유엔사·남한·북한의 주장=NLL에 대한 남북한의 시각차이는 현재로선 논의가 불가능할 정도로 크다.우리는 “NLL이 임의로 설정되었다고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엄연히 존재하며 북측도 이를 묵인해 온 만큼 군사분계선과 똑같은 해상경계선”이라고 보고 있다.반면 북측은 아예 “NLL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북측은 황해도와 경기도의 도경계선을 서쪽으로 연장한 선이 새 해상 군사경계선이 돼야 하며,따라서 서해 6개 도서는 자신들의관할권 지역에 있다고 억지를 부리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한국과 유엔사의 입장도 중요한 부분에서 다르다는 것이다.유엔사의 경우 NLL은 지난 53년 자신들이 군사상 필요에 따라 임의로 설정한 것인 만큼 이를 북측이 침범했을 경우 선별 대응하도록 규정하고 있다.해양전문가들은 “이를 유추해석하면 단순 침범에 대해서는 무력대응할 수 없고 다만 침범 후 먼저 적대적 도발행위를 했거나 서해 5개도의 3해리 안으로 접근했을 때에만 물리력을 동원할 수 있도록 한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NLL에 대한 명확한 근거 규정이 없어 북측의 도발에 빌미를 제공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개선방안= 한국해양대 김영구(金榮球) 교수는 “우리와 미국간에도 NLL에 대한 세부 지침이 없다보니 북측의 도발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면서“한·미간 협의를 통해 관련 규정을 마련 또는 정비한 뒤 남북간 논의가 시급히 진행돼야 한다.”고 말했다.김 교수는 다만 “지난 99년 서해교전 이후 미국측이 ‘한국 정부의 입장을 존중한다.’는뜻을 전해 온 것은 괄목한만한 대목”이라고 말했다.당시 미국은 서해교전을 ‘공해상에서 발생한 남북 해군의 충돌’로 규정했다가 우리측의 항의를 받았다. 해양 전문가들이 주장하는 남북간에 논의할 내용을 종합하면 ▲해상 및 공중에서의 군사활동 충돌을 막기 위한 불가침 경계선 및 남북협약 마련 ▲통상활동을 위한 주요 해로 지정 및 통항방식 설정 ▲합리적인 해상의 경제·군사경계선 마련 등이다. 특히 새로운 해상·공중 불가침 경계선 또는 경제·군사경계선에 대해서는 서해의 소령도∼하산도∼소연평도∼옹도∼소청도∼대청도로 이어지는 직선기선을 기준으로 재설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이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다. 김경운기자 kkwoon@ ■국제사례 있나/ 유엔 획정 해상경계선 NLL이 유일 북한이 서해교전을 일으키며 무력화기도를 하고 있는 북방한계선(NLL)과 비슷한 사례를 국제사회에선 찾기 힘들다. 국가간 휴전 상태로 50여년을 끌어온 예가 없고,특히 유엔 등 제3자가 개입해 획정한 해상경계선은 더욱이 없다.유엔이 나서 군사분계선을 긋고 오랜기간 실효적인 의미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사사례를 굳이 찾자면 이라크의 ‘비행금지구역(No Fly Zone)’을 들 수 있다. 비행금지구역은 미국과 영국,프랑스 등 걸프전 동맹국들이 92년 8월 이라크에 대해 일방적으로 획정한 구역이다.이라크 남부와 북부의 쿠르드족 및 시아파 이슬람교도들의 보호를 명분으로 이라크기의 비행을 금지했다.근거는걸프전이 끝난 뒤인 91년 4월 채택된 유엔 안보리 결의안 688호.걸프전 종전조건인 이 결의안은 쿠르드족과 시아파에 대한 탄압중단을 명령하고 있다. 미국·영국은 이 구역 정찰비행을 계속하면서 이라크 비행기가 이 지역에 들어올 경우 ‘자위권 차원’에서 미사일과 대공포로 응사하고 있다.이라크는 ‘영공침해’라고 반발하지만 국제사회에서 이라크의 목소리에 손을 드는 국가는 별로 없다. 정부 관계자는 “NLL의 경우도,유엔안전보장이사회의 위임을 받아 파견된 유엔사령부가 정한 경계선이라는 점에서 비슷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이보다 더중요한 것은 ‘양측이 합의해 해상경계선을 확정지을 때까지 NLL을 실질적인 군사분계선으로 한다.’고 한 92년의 남북기본합의서를 존중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수정기자 crystal@
  • [일본에선] 대한매일 객원기자 방담/“한·일 ‘월드컵 우정’ 이어나가야”

    개막 전부터 일본에서 월드컵을 한달가량 취재해 온 대한매일 객원기자 3명은 27일 대한매일 도쿄(東京)지국에서 방담을 갖고 “모처럼 생겨난 한·일 우호 무드를 차근차근 다듬어야 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신인하(辛仁夏·재일 한국인 2세),김현(金賢·재일 조선인 2세),간노 도모코(菅野朋子·일본인) 등 객원기자들은 “일본측의 대회 운영은 대체로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하면서 “공동개최의 의미를 살리기 위해서라도 양국의 풀뿌리 교류를 보다 늘려가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현= 동포들,특히 민단 사람들 사이에는 대회 전만 하더라도 한국전보다는 일본전을 보겠다는 얘기가 많았습니다.동포들이 3,4세로 세대교체되어 가면서 의식이 바뀌는 경향이 눈에 띄었지만 경기가 거듭될수록 고국에 대한 관심은 커졌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재일 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 동포들인데요.조총련 여성동맹 아줌마들에게 역시 안정환이 최고 인기였어요.TV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안정환이 나오면 ‘안동무’하며 외치곤 했습니다.이 아줌마들은 안정환의 부인이나 나이 등 시시콜콜한 부분까지 다 파악하고 있었어요. ◇신인하= 응원전이 열렸던 요코하마 민단 지부에서도 안정환의 인기는 최고였어요. ◇간노 도모코= 도쿄 코리아타운인 신주쿠(新宿) 쇼쿠안도리에서의 응원 열기는 대형 주차장이 딸린 한 음식점에서 불이 붙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장소를 제공하면서 수백명이 모이고 이것이 ‘입 선전’이 되어 스페인전 때는 수천명이 모였습니다.이날에는 만일의 사태를 우려해 일본 경찰이 헬리콥터까지 상공에 띄웠어요. ◇김= 집에서 TV 중계를 시청하는 동포가 많았다가 뉴스에서 “코리아타운의 한국응원열기가 높았다.”는 보도가 나가자 코리아타운에 나가 함께 응원하는 동포들이 늘었어요. ◇신= 응원열기도 뜨거웠지만 한국과 일본은 분명 달랐습니다.한국과 비교해 일본은 경기장 밖에서는 조용했어요. ◇김= 그렇습니다.결정적인 차이는 일본에서는 거리에 대형화면을 설치하지 않았다는 것인데,만일 도쿄의 도심인 긴자(銀座)나 신주쿠,시부야(澁谷) 거리에 서울에서와 같은 대형화면이 설치됐다면아마 좀 달라졌을 것으로 생각합니다만. 결국 경비당국이 안전상의 문제를 들어 허가하지 않았지요.세계에서 가장 여유가 많은 나라인데도 여유가 없는 게 아닌가 합니다. ◇간노= 삿포로(札幌)에서 대형화면을 설치했지만 화단이 망가진다거나 하는 혼란이 생겨서 중지된 일은 있었습니다. ◇신= 외국인들이 볼 때는 이상했지만 각국 팀을 골고루 응원하는 나라는 세계에서 일본밖에 없는 것 아닌가요.일본의 성숙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김= 뭐니뭐니 해도 한국 축구와 붉은악마의 응원은 일본에서 최대의 화제였습니다.축구로 본다면 최근까지 일본은 아시아에서 가장 강한 팀이었습니다.아시아 챔피언이 된 이후 관심이 유럽쪽으로 향했습니다. 이번에 TV를 통해 한국전을 지켜보면서 다시 “한국은 강하다.”는 것을 느꼈다고 봅니다.또한 거리의 붉은 물결은 “대단하지만 무섭다.”고 말하는 일본인이 많았습니다.무서우니까 거리를 두고 싶다는 생각을 가진 부분도 있었습니다만. 많은 일본인은 한국 사정을 잘 모릅니다.안정환의 스케이트퍼포먼스를 단순히 미국에 실례되는 행동으로 받아들인다든지 ‘1966 어게인’을 보면서도 남과 북이 같은 민족이라는 것도 잘 모르는 것도 마찬가집니다. ◇간노= 문외한의 눈에도 한·일 축구는 달랐습니다.일본인이 작게 보였어요.한국의 스피드만 보더라도 기백이 달랐어요.일본이 16강전인 터키전에서 전력을 다했다고 할 수 있었을까요.한국은 이탈리아전,스페인전에서 전력을 다했어요. 700만명에 육박하는 거리의 붉은악마들은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하나에 열광하는 라틴 민족 같은 기질을 느꼈습니다.저는 일본인이지만 일본은 역시 뭔가 약하다는 느낌입니다. ◇신= 붉은 응원 물결을 보면서 재일 한국인 2세인 저로서는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 궁금합니다. ◇김= 대회기간 중 한국이 포르투갈,이탈리아,스페인 등 강팀을 잇달아 연파하면서 스타 부재의 월드컵이 된 느낌입니다. ◇신= 그래도 역시 베컴의 인기는 엄청났지요. ◇간노= 20∼30대 여성에게 특히 인기였는데 단순히 “멋있다,섹시하다.”보다는 가족을 소중히 하는 점이 일본인에게 어필한 것 같아요. ◇김= 한국 선수로는 단연 안정환이 인기였죠.일본 선수로는 2골을 넣은 이나모토와 배트맨 마스크를 유행시킨 미야모토 정도일까요. 대회를 전체적으로 평가하면 일본은 월드컵에서 부분적으로 성공했어요.훌리건 소동도 없었고 16강에 들었으며 경제효과도 어느 정도 있었구요.그러나 정부가 발벗고 나선 한국과는 달리 이들이 상승작용을 일으키지 못하고 제각각의 효과에서 그쳤는데 이 점이 아쉽습니다. ◇신= 뭐랄까 일본조직위원회(JAWOC)나 자치단체가 일본인이 무엇을 진정으로 원하는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김= 경제효과,경제효과 하지만 일본에서 날개돋친 듯 팔려나간 일본 대표 유니폼은 실제로 중국제로 중국의 경제효과도 꽤 컸다고 할 수 있겠어요. ◇간노= 한·일관계인데요,제가 코리아타운의 취재 때 느낀 점은 역시 한국인이건 일본인이건 일체감을 느끼면서 한국을 응원한 경험이 소중하다고 봅니다. 이런 경험을 한 젊은이들의 10년 후,20년 후를 생각하면 두 나라 관계는 괜찮겠지요. ◇신= 앞으로가 문제입니다.풀뿌리에서부터 작은 연결고리가 생겨난 것은 분명 좋은 일입니다.피부색과 모습이 같지만 너무나 다른 한·일 국민들이 서브 문화에서부터 이해를 넓혀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꼈습니다. ◇김= 좀 다른 얘기이지만 축구 한·일전은 오히려 자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4년간 2차례밖에 없었지만 앞으로 한해 1∼2회로 늘려 직접 라이벌을 경험하고 경쟁하는 환경을 만드는 것도 좋겠습니다. 정리 도쿄 황성기특파원 marry01@
  • “후세인체제 전복 곧 현실화”

    [워싱턴 백문일특파원·카이로 연합]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 행정부는 탈레반 패퇴와 알 카에다 분열 이후 수주동안 대테러전쟁의 다음 목표에 대한 내부 논의를 거듭,대체로 결론에 도달했다고 13일 뉴욕 타임스가 보도했다. 신문은 미국의 대테러전 차기 주요 목표는 사담 후세인이라크 대통령 체제 전복으로 미 행정부는 이를 위해 외교ㆍ군사적 수단을 동원하고 있다며 이같이 밝혔다. 신문은 동맹국들이 미국이 이라크를 목표로 한 것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으나 부시 대통령은 과거 어느때보다 더욱 확신을 키워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신문은 부시 대통령이 지난 11일 밤 한 정치자금 모금행사에서 행한 “북한과 이란,이라크 등 ‘악의 축’ 3개국이 우리의 생활방식을 위협하도록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 강경발언을 예로 들었다. 신문은 미 행정부 내부에서는 현재 ‘악의 축’으로 규정된 국가중 이라크가 군사행동을 시작할 대상이라는 데 합의가 도출되고 있다고 전하고 이같은 결정은 콜린 파월 국무장관의 언급으로 최근 더욱 분명해졌다고 분석했다. 미 행정부의 한 관리도 “우리는 최종적으로 방침을 굳혔다.”고 말했으며 파월 국무장관이 북한과 이란,이라크에대한 언급에서 ‘악의 축’이라는 말을 거듭 사용했음을들어 이는 그 자신과 부시 대통령간 틈새가 전혀 없음을보여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리처드 홀브룩 미 국무부 전 차관보도 12일 부시 대통령이 테러와의 전쟁 일환으로 후세인 대통령에 대해 행동을취할 것이라고 말해 미국의 이라크 공격이 현실화될 것임을 전망했다. 그는 이날 영국 BBC방송과의 회견에서 미국이 걸프전후후세인 정권을 제거하지 않은 것이야말로 지난 20년간 미외교정책의 최대 실수였다며 이같이 예상했다. 그는 부시 행정부가 후세인 정권을 바꾸려 하지 않을 것이라고는 믿기 어려우며 “사담에 대해 행동을 취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이라크는 최근 북부 터키와의 국경지대에 레이더 시스템을 보강하고 대공포대를 근접 배치하는 등 대공 방어태세를 강화했다고 군사전문 인터넷 신문 미들 이스트 뉴스라인이 13일 보도했다. 이라크는 쿠르드족에 압력을 가해 북부 쿠르드족 자치지역 안에 대공포대 등을 배치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라크의 북부 지역 대공 방어태세 강화는 지난 수주간에걸쳐 이뤄졌으며 연합군의 북부 비행금지구역 초계 비행에대한 신속한 대응을 가능하게 만들었다고 관리들은 밝혔다. 이라크는 최소한 25개의 SA-3 지대공 미사일 부대와 10개의 SA-6 지대공 미사일부대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mip@
  • 탈레반 6년 통치 막내려

    ■최후거점 칸다하르 포기 안팎. 탈레반의 최고 지도자 물라 모하메드 오마르가 6일 연일계속되는 미군의 공습에 결국 손을 들었다.최후 거점이자탈레반의 정신적·군사적 중심인 칸다하르를 포기함에 따라 지난 10월7일 시작된 미국의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보복전쟁은 종전국면으로 들어섰다. 이로써 지난 96년부터 아프간을 통치해온 탈레반 정권의통치도 6년만에 막을 내리게 됐다. 탈레반측은 칸다하르의 종족 지도자들과 탈레반 지도부와의 협상에서 오마르가 원하는 대로 풀어주기로 했다고 합의했다고 발표했으나 미국측이 오마르의 법적 단죄를 벼르고 있어 오마르의 신병처리가 문제로 남아 있다. ▲오마르의 신병처리는=최대의 관심은 오마르의 운명이다. 압둘 살렘 자이프 전 파키스탄 주재 탈레반대사는 이날반탈레반측이 칸다하르에 머물고 있던 모든 탈레반 병사들과 탈레반 지도자에게 자유롭게 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허용했다고 밝혔다.그는 또 “카르자이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보장했는지 모르지만 협상에서 오마르에 대한 모종의신변보장을약속한 것으로 안다”면서 “종족 지도자들의보호 아래 칸다하르에 머물 것”이라고 말했다. 오마르는 무자헤딘 지역사령관인 물라 나키불라에게 무기와 탄약 일체를 넘겨줄 것이라고 설명했다. 앞서 도널드 럼즈펠드 미 국방장관과 콜린 파월 국무장관은 지난 주말 오마르는 9·11테러의 배후로 지목된 오사마빈 라덴과 마찬가지로 반드시 법적 심판을 받아야 하며 이를 둘러싼 어떤 협상도 있을 수 없다고 단호한 입장을 밝혔었다. 탈레반측의 발표처럼 오마르가 자유롭게 풀려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아직까지 구체적인 협상조건이 확인되고 있지 않지만 오마르와 탈레반 지도부,외국인 지원병에 대한 처리 문제를 놓고 미국과 반탈레반 동맹세력간에 논란이 예상된다. ▲미국,빈 라덴 색출작전에 집중=오마르가 칸다하르를 포기함에 따라 앞으로 아프간에서의 미국의 군사작전은 빈라덴과 테러조직 알 카에다에 대한 색출작전에 집중될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6일 해병대와 전폭기 등을 동원,아프간 동부 토라 보라 지역의 알 카에다 진지들에 대해 지상및공중 공격을 퍼부었다.일부 북부동맹 반군은 동굴에 침투,알 카에다 조직원과 빈 라덴 색출 작업에 돌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균미기자 kmkim@. ■아프간정부 구성 일정- '30인 내각' 권력인수 박차. 탈레반 이후 아프가니스탄을 이끌 임시정부안과 권력분점이 5일 아프간 4개 정파에 의해 합의됨에 따라 아프간 신정부 구성이 시작됐다.미국은 이달 중순 카불에 12년만에 대사관을 개설하기로 하는 등 새 정부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30인으로 구성된 정부내각은 곧 수도 카불에 입성,이곳을장악한 북부동맹으로부터 권력을 인수받아 오는 22일 공식출범한다.30인 내각은 아프간의 종족 분포에 따라 파슈툰족이 정부수반을 포함 11석,타지크족이 8석,하자라족이 5석,우즈벡족이 3석 등을 각각 차지했다. 임시정부 출범 전후 카불과 인근 지역에 다국적 평화유지군이 배치되고 아프간 전황에 따라 주둔지를 넓히게 된다. 현재 로마에 머물고 있는 자히르 샤 전 국왕은 곧 카불로돌아와 아프간의 최고의사결정기구인 로야 지르가 비상회의를 소집할 예정이다. 로야 지르가가 새 내각을 선출하면 현 30인 내각은 내년 6월 22일 해체되고 새 정부가 구성된다.다시 로야 지르가가소집되고 여기서 헌법과 총선과정 등이 결정된다.이어 18개월간 활동하는 새 정부가 2004년 총선을 실시하면 진정한행정부가 탄생하게 된다. 아프간 임시정부에 힘을 실어주기 위한 국제사회의 움직임도 빨라졌다.미국은 탈레반 정권은 물론 부르하누딘 랍바니 전 대통령이 이끈 정권도 인정하지 않았었다.콜린 파월 미 국무장관은 5일 이달 중순경 카불에 대사관을 개설하고 제임스 도빈스 미 아프간 특사가 대사에 임명될 것이라고 밝혔다. 전경하기자 lark3@. ■눈길끄는 아프간 여성각료 2人. 아프가니스탄 차기 정부에서 2명의 여성이 각료로 임명됐다.아프간 여성들은 드디어 탈레반 치하에서 고통받던 과거를 씻을 수 있는 의미있는 기회를 잡았다. 파키스탄에서 아프간 난민들을 위한 보건소를 운영하고 있는 시마 사마르는 부통령 겸 여성장관에, 존경받는 외과의사이자 군장교 출신인 수하일라 시디크는 보건 장관에임명됐다. 하자라족 출신 의사인 사마르는 아프간 역사를 통틀어 가장 높은 지위에 오른 최초의 여성이 됐다. 시디크는 수하일라 장군으로 더 잘 알려져 있으며 내전으로 황폐화된 아프간을 한번도 떠나지 않았다.카불의 군병원에서 20년 동안 부상자 치료에 힘써 시민들로부터 존경을한몸에 받고 있다. 박상숙기자 alex@. ■아프간 권력이양 남은 과제는. 국제사회는 아프가니스탄의 신정부 구성이 시작됐음에 반가와하지만 아프간 현지 분위기는 담담하다. 내전에 시달려왔던 아프간에서는 그동안 몇번의 평화협정이 있었으나 무산돼왔다.라크다르 브라히미 유엔 아프간 특사도 “아프간 상황은 너무 복잡하기 때문에 이번 회의에참석하지 않은 모든 정파들을 아우르려는 노력들이 계속돼야 한다”고 지적했다.30인 내각이 아직 전쟁중이며 수많은파벌로 분열된 아프간을 잘 이끌 수 있을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한다는 신중론이다. 첫번째 변수는 탈레반이다.게릴라전에 능한 탈레반이 완전히 소멸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탈레반은 독일 본에서 구성된 임시정부를 ‘괴뢰 단체’로 규정,합의를 받아들일 수없다고 밝혔다. 다음은 북부동맹 내의 권력투쟁이다.현재 권력투쟁은 종족보다는 세대간에 벌어지고 있다.독일 본에서 4개 정파간 합의를 이끈 북부동맹 대표단이나 주요 요직을 차지한 북부동맹 인사들은 모두 신세대다.구세대 수장격인 부르하누딘 랍바니 전 대통령, 주요 군벌인 압둘라시드 도스툼 장군과 이스마일 칸 장군도 이번 내각에서 소외됐다. 이들을 어떻게달래느냐가 북부동맹과 임시내각 사이에서 이뤄질 권력이양작업의 변수로 작용할 전망이다. 전경하기자. ■복구 비용마련 어떻게. 오랜 가뭄과 전쟁으로 변변한 건물 하나 없는 아프가니스탄에 도로,수도,발전시설 등을 건설하는 작업은 막대한 자금과 시간이 필요하다. 100억달러를 상회하는 복구 비용은 국제사회의 가장 큰 부담이다.아프간 4개 정파가 임시 정부 구성에 합의한 5일 독일 베를린에서는 아프간 지원그룹(ASG) 회의가 열렸지만 구체적인 금액에 대해서는 결정을 짓지 못했다.따라서 내년 1월 일본 도쿄에서 열리는 국제원조공여국 회의로 공이 넘어갔다. 일단 유럽연합(EU)이 가장 적극적이다.EU는 이미 약속한 3억유로(2억6,800만달러)의 지원금을 증액할 것이라고 지난달 밝혔다.또 구호 관련 조사를 위해 파키스탄에 실사단을보냈고 폴 닐슨 EU집행위원을 카불에 파견할 예정이다. AFP통신에 따르면 6일 싱가포르 국제적십자는 난민 구호를위해 57만9,000달러의 기금을 거뒀다. 싱가포르는 앞서도 67만달러 이상을 국제적십자에 기부했었다. 박상숙기자.
  • 탈레반 “전면전서 게릴라전으로”

    ◇카불입성 의미.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이 마침내 반군 북부동맹의 수중에 떨어짐으로써 한달째 계속된 아프간전쟁은 중대고비를 맞게 됐다. ▲카불 왜 포기했나=수도가 갖는 상징적 의미에 비춰볼 때탈레반이 카불을 포기한 것은 사실상 항복 선언이라고 볼수도 있다. 북부동맹이 카불을 접수하면 탈레반 정권을 대체할 새 정부 구성 문제가 당장 초점으로 떠오른다.탈레반은 수도를 내줌으로써 북부동맹과 미국,그리고 앞으로 들어설 새 정부군을 상대로 지리한 내전에 돌입할 것으로 보인다. 탈레반은 며칠 전까지만 해도 미국과 100년이라도 전쟁을치를 각오가 돼 있으며 그럴 충분한 능력도 갖추고 있다고호언장담했다.그러던 탈레반이 큰 저항없이 카불을 포기한것은 쉽게 수긍하기 어려운 측면이 많다. 미국의 공습으로 주요 기반시설이 크게 타격을 입었지만병력과 탱크,장갑차 등 이동전력에 큰 손실을 입지 않았기때문이다. 따라서 탈레반의 카불 철수는 수도를 고수하면서 미국과반군의 공격을 정면으로 당하기보다는 장기,게릴라전을 하는 쪽으로작전을 바꾼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분석이 우세하다.한달이 넘도록 끊임없이 이어지는 미국의 공습 속에카불을 고수하면서 피해를 감수해 봐야 실익이 없다는 판단을 했다는 것이다. 미국의 공습은 목표 지점이 명확히 정해져야만 효과를 거둘 수 있다.미국이 공격할 목표를 주지 않음으로써 적의장점은 무력화시키고 탈레반의 장점만 살려나가겠다는 것이 카불로부터 철수한 탈레반의 속셈이라고 할 수 있다. ▲장기 내전 불가피=카불을 포기한 탈레반은 남쪽으로 이동하고 있다.남부의 탈레반 거점 칸다하르를 중심으로 한제2전선을 구축하겠다는 계산인 것 같다. 과거 옛 소련이 10년에 걸쳐 아프간을 점령했을 때 소련군에 저항하던 방식,즉 소규모 게릴라전을 통해 적을 끊임없이 괴롭혀 적 스스로 철수토록 한다는 전략을 이번에도 적용시키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아프간 전쟁은 그 끝이 언제가 될지 모를장기전으로 들어간 셈이다.잃을 것이 없다는 탈레반측 계산에 비해 인명피해를 우려할 수밖에 없는 미국으로선 어느 선에서 전쟁에서 손을 떼야 할지를 심각히 고민해야 할입장이 됐다. ▲미국 승리 자신 못해=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은 12일 아프간 반군 북부동맹의 카불 입성에 반대한다고 천명했다. 그러나 북부동맹은 이같은 부시 대통령의 입장을 무시하고입성을 강행했다.북부동맹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에 한계가있음을 드러낸 대목이다. 이는 미국과 북부동맹이 지금은 탈레반 축출이라는 공동목표 아래 손을 잡고 있지만 각자의 이해에 따라 언제든반목·대립할 소지를 안고 있음을 보여준다.탈레반 이후의 아프간 정부 구성이 어떻게 될지에 따라 여러 변수가 생기겠지만 미국과 북부동맹간 제휴에 균열이 생긴다면 아프간 전쟁은 그야말로 한치 앞을 예측하기 힘든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다. 유세진기자 yujin@. ◇카불은 어떤 곳인가. 아프가니스탄 반군 북부동맹이 집권 탈레반으로부터 탈환한 카불은 아프간의 수도이자 최대 도시이다.동부의 파키스탄과의 국경과 북부 타지키스탄과의 국경 사이를 흐르는카불강을 따라 놓여 있으며 이 강을 경계로 신·구 두 시가지로 나뉜다.산맥과 계곡으로 삼면이 둘러싸여진 지형 때문에 역사적으로 전략적 요충지로 꼽혀왔다. 약 100만∼150만명의 인구가 살고 있으며 아프간 경제·문화의 중심지이지만 20년이 넘는 내전으로 피폐한 모습을면치 못하고 있다. 아프간은 전통적으로 다양한 파벌이 존재해 중앙정부의힘은 미약했지만 카불을 차지하는 세력이 아프간을 지배하는 것으로 인식돼 왔다. 이같은 카불의 상징성과 중요성 때문에 다양한 파벌간의전쟁터가 돼왔다.1953년 카불을 근거지로 한 정부는 구 소련과 친밀한 관계를 형성했다. 그러나 1973년에 일어난 쿠데타로 왕정이 전복되면서 공화국으로 변신했다. 아프간에 주둔하던 구 소련 군대가 바락 카말 정권을 지지함에 따라 1980년대부터 내전이 일어나 거리는 총성과매캐한 연기에 휩싸여왔다. 이후 1989년 구 소련 군대가 떠나고 1990년대 말 탈레반이집권하기 전까지 카불은 힘의 공백으로 인한 무정부상태에빠져 있었다. 박상숙기자 alex@. ◇아프가니스탄戰 주요일지. ■10월7일 공습 시작(자살비행기 테러 발생 후 26일 경과). ■10월12일 벙커파괴용 폭탄 투하 시작. ■10월13일 미 전투기,카불 민간지역 오폭. ■10월19일 미 특수부대 아프간 남부 칸다하르 침투,3시간뒤 철수. ■10월26일 반탈레반 무장봉기 시도하던 압둘 하크 북부동맹 장군 체포·처형,미국 국제적십자위원회 창고 오폭,영국 지상군 200명 파견 계획 발표. ■10월30일 미 국방부,아프간 내 지상군 활동 확인. ■11월1일 터키 지상군 90명 파견계획 발표,탈레반 집권남부지역에서 무장봉기 발생,럼즈펠드 미 국방장관 지상군증파 계획 발표. ■11월7일 이탈리아 지상전투군 포함 2,700명 파병 발표. ■11월9일 북부 거점도시인 마자르 이 샤리프 함락. ■11월12일 서부도시 헤라트 함락. ■11월13일 수도 카불 함락.
  • 청산리대첩 기념탑 제막 현지 르포

    “나가 나가,싸우려 나가!…독립문의 자유종이 울릴 때까지 싸우려 나아가세!” 지난 31일 1920년 청산리전투의 승리를 기념하는 ‘청산리항일대첩 기념탑’ 제막식이 거행된 중국 지린성(吉林城)허룽쓰(和龍市) 룽청?x(龍城面) 칭산춘(靑山村)에는 당시독립군들의 노래가 다시 메아리치는 듯 했다. 제막식에 참석한 김유길(金柔吉·82) 광복회 부회장을 비롯한 독립투사들과 유족들,지린성의 중국 동포 등 400여명은 기념탑과 주변의 격전지를 둘러보며 “선열들의 함성과말발굽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고 감개무량해 했다. 북로군정서 여단장으로 참전했던 최해(崔海·48년 작고)선생의 아들인 기룡(騎龍·73)씨는 “기념탑 부조 속의 독립군 가운데 아버지가 살아 계신 것 같은 느낌”이라고 탑을 어루만지며 눈을 감았다. 청산리 대첩 81년만에 세워진 기념탑은 청산리 바로 뒤 야산에 28m 높이의 158개 하얀색 화강암 계단 위에 옆이 둥글게 파인 사다리 모양으로 자리를 잡았다.탑의 높이만 17.6m에 이른다.광복회의 모금 운동에 중국 동포들이 힘을 보태지??해 4월 착공한 지 16개월만에 위용을 드러냈다. 1920년을 기념하기 위해 19.20m 높이로 쌓으려 했으나 중국 정부와 협의가 잘 되지 않아 높이를 낮췄다.탑 아래 부분에는 소총과 기관총 등을 쏘며 일본군을 격퇴하는 독립군의 모습을 담은 가로 4.8m,세로 2.5m 크기의 하얀색 화강암부조가 있어 당시의 격전을 생생하게 증언해 준다. 청산리는 천지에서 북동쪽으로 180㎞ 가량 떨어진 백두산기슭에 자리잡은 작은 산마을.당시 독립군들은 이름만큼이나 푸른 청산리 골짜기에서 일제·마적단·굶주림과 싸우면서도 총을 놓지 않았다. 김좌진(金佐鎭) 장군이 이끄는 북로군정서와 홍범도(洪範圖) 장군이 지휘하는 대한독립군 등 2,000여명은 대포와 기관총 등으로 무장한 일본군 5,000명 가운데 2,000여명을 사살,항일 무장투쟁 가운데 가장 큰 전과를 올렸다. 윤병석(尹炳奭·71) 인하대 명예교수는 “청산리대첩은 1919년 3·1 만세운동이 20·30년대의 격렬한 무장투쟁으로 이어지는 전기를 마련한 큰 승리”라면서 “동포들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이끌어낸 승리?? 더욱 값지다”고 설명했다. 제막식에는 청산리에 사는 동포 여성들도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나와 자부심과 애정을 보여줬다.청산촌장 최경렬(崔京烈·52)씨는 “이제 후손들에게 선열들의 자랑스런 항일투쟁을 마음껏 교육할 수 있을 것”이라면서 “기념탑은 우리 민족의 자존심”이라며 상기된 모습으로 함박웃음을 지었다. 광복회(회장 尹慶彬)는 오는 10월에는 러시아 크라스키노에 안중근 의사 ‘단지동맹비(斷指同盟碑)’를,우스리스크에는 고종의 헤이그 밀사로 러시아 지역의 항일 독립운동을주도한 이상설 선생의 추모비를 세울 예정이다. 청산리 전영우기자 anselmus@
  • [편지로 본 1940년대 문단秘史] (5)여인의 우정

    사랑이 시대와 사회와 민족성에 따라 달라진다는 건 스탕달의 ‘연애론’ 제2부에 나오는 유명한 화두다.식민지 시대의 연애는 어땠을까.한국 문단사에 등장하는 1920년대의연애는 기생과 문사의 사랑이었고,1930년대로 접어들면서민중운동성 연애가,그리고 일제 탄압이 강화되면서 보다 비극적인,그러나 다분히 불륜적인 연애의 유형이 등장한다.최정희를 둘러싼 세 여성,모윤숙과 노천명은 바로 이런 일제탄압기의 연애 유형을 실천한 여인상으로 부각된다.셋 다유부남과의 관계 때문에 고뇌하면서 문학과 인간과 사랑을함께 헤쳐나간 평생 동지적인 관계를 유지했다.그녀들의 애인은 셋 다 공교롭게도 납(월)북됐고,그 사실 때문에 우정은 더욱 공고해질 수 있었다.셋은 최정희를 가운데 두고 서로 여성적 독점욕의 질투를 보이기도 했지만 그게 큰 문제는 안되었다.1911년 9월 1일 황해도 장연에서 태어난 노천명(盧天命·1911∼1957)의 아명은 기선(基善)이었으나 여섯 살 때 홍역을 너무 심하게 앓아 죽는 줄 알았다가 살아나자 하늘이 내린 명이란 뜻으로 오히려 시인에 더욱 걸맞는멋진 이름을 얻었다. 진명여고를 거쳐 이화여전 영문과를 졸업(1934)한 깡마르고 고적해 보이는 그녀가 일약 문단의 목이 긴 사슴으로 명성을 얻은 건 첫 시집 ‘산호림’을 내고 꽤나 호사스런 경성호텔에서 출판기념회를 개최하고서였다. 1938년 1월이었는데,이 해가 그녀에게는 길운이었다.조선일보 출판부 발행 ‘여성’지 기자로 취직이 된데다,극예술연구회에 가입,체호프 원작 ‘앵화원’의 여주인공인 라프네스카야(모윤숙扮)의 귀여운 딸 아냐로 출연했다. 보성전문 김광진(金洸鎭)교수는 무대 위의 노천명에 매료되었고,그들은 이내 깊고 심각한 관계로 빠져 들었다.유진오가 소설 ‘이혼’(‘문장’ 1939.3.창간호)에서 이들의연애사건을 다뤄 장안의 화제가 되어버린 건 문단 가십의하나다. 소설은 홍윤희란 여학교 교사인 영문학 전공의 27세 노처녀(당시로서는 이 정도가 노처녀였다)여주인공과,조혼으로 아내를 외면한 채 여급,유한마담 등과 빈번한 관계를 가진 상사회사 회계주임인 38세의 박재신이 열애에 빠진 사건을 다뤘는데,참고로 말하면 유진오는 김광진과 같은 보성전문(고려대 전신) 교수(1936∼1945.3월 폐교 때까지)였다. 소설 속의 등장인물은 나이나 성격 등이 비슷하여 입방아에 올랐는데,남주인공은 아내에게 논 열마지기를 떼어주고 서류상으로는 이혼했으나 언제든지 시댁에 와도 좋다는,한번시집간 여인은 영원히 그 댁의 귀신이라는 철칙은 지키는기묘한 형태의 헤어짐을 강박했다. 사실 신여성을 얻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이혼서류였으며,남자는 이걸 위해 고향에 장기 체류했다가 상경했는데,여주인공은 그새 삐쳐서 싸우는 장면에서 소설은 끝난다. 이 소설이 딱히 실제와는 다를지라도 노천명과 김광진의애정행로에 가로놓인 난관을 이해하는 데는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예를 들면 데이트 중 여인은 주로 로렌스의 ‘차탈레이 부인의사랑’이 어떻고 계속 이야길 하지만 남자는 시큰둥하고,남자는 해군비행기가 중경(重慶)을 폭격했다는 등의 다분히 시사적인 화두를 끄집어 내는데,이에 대한 여인의 반응은 냉담 정도가 아니라 대륙의 지리에 대하여 너무나 무지하여 놀랄 지경이었다고 묘사하고 있다.사실 노천명이 최정희에게 보낸 편지 내용의 상당 부분은 이런 둘 사이의 여러 갈등을 하소연하고 있는데,이 소설이 좋은 참고가 됨직하다. 물론 소설대로 믿기어려운 대목도 있다.남자에게 춤을 가르쳐달라고 여자 쪽에서 먼저 접근해 간 것으로 묘사한 건 아마도 작가가 동료 교수의 이야기를 통해서 이 사건을 접근한 탓으로 보인다. 1902년 평남에서 태어난 김광진은 동경(東京)상대 졸업 후 보성전문에서 경제사를 강의했던 마르크시스트였는데,해방 직후부터 건준(建準) 평남지부의 무임소 위원이 되는 등이내 월북하여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노천명에게 더욱 큰 상처가 된 것은 김광진이 유명한 기생 왕수복과 관계를 맺어버렸다는 사실로,결혼까지도 고려했던 남성으로부터의 배신은 이 섬세한 여성시인에게 실의를 안겨 주었다.북한에서도 경제학 관계 연구활동을 계속했던 그는 1981년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임대식 편 ‘식민지시대 한국사회와 운동’).편지도 일기장처럼 가장 고통스러울 때 길고 아름다워진다.워낙 고독한 노천명은 유부남과의 사랑의 아픔을최정희에게 서리서리 펴놓는다. 조선일보 근무 시절(1942년 사직)에 가장 많은 편지를 보낸 것으로 봐서 연애의 초기가 가장 괴로움과 기쁨이 충만했던 것 같다.아마 노천명이 최정희에게 보낸 첫 편지는 “웬 일이겠수.며칠 전부터 당신에게 괜히 자꾸만 긴 편지를보내고 싶어 겉봉을 써 가지고는 호주머니 속에다 이렇게넣고 다니는데 당신에게서 우연히 글이 왔구려”라는 것인듯하다.‘친전’이란 걸로 봐서 직접 전해줬는데,이건 그만큼 은밀한 사연을 담고 싶다는 욕망의 표현이기도 하다. “당신은 내 맘에 맞는 이--고운 여인이오.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당신의 얘기를 하므로써 내가 자랑을삼”는다는 말처럼 노천명에게 최정희는 마력처럼 다가섰다.이 편지는 시집 ‘산호림’이 출간되기 불과 며칠 전이니까 아직은 천진스런 처녀 시인의 감상적인 일면이 그대로드러나 있다.즉 김광진을 알기 직전이었다. 다음 편지의 “문외한 김선생이 ‘거울’을 몹씨 칭찬하는구려”에 등장하는 ‘김선생’은 김광진으로 초기 데이트단계로 보인다.“정희!”라고 시작하는 편지에 이르면 김광진과 사랑이 깊어져 환희와 고뇌가 공존하는 모습을 엿볼수있다.“내 마음은 옛날을 더듬어 오직 아픈 것을 어찌 하겠소.허나 이런 말을 해 무엇하오.그는 진실하고 유망한 청년이었소.언제나 내가 사랑할 수 있는 훌륭한 청년이었소. 그가 행복하기만 몰래 빌고 있을 뿐이오”란 대목은 종잡을 수 없는 열정의 회오리 속에서 방황하는 자세가 나타난다. 이 기간에 아마 노천명은 구미포,진주,합천 해인사,백천(白川)온천 등지를 여행하며 최정희에게 편지를 보냈는데,대개가 사랑으로 말미암은 고통을 호소한다. 자신의 사랑 이야기만 하기가 미안했던 그녀는 “당신은이제서야 안전한 배에 가 탔소.김선생(김동환)은 반드시 당신을 행복하게 해줄 것이오.그는 죽도록 연애감정을 가질수 있는 사람인 것 같았소.…해당화 같은 당신이 또 그분을 행복케 하고 남음이 있을 것을 내가 믿소.어서 잔치를 하자구나.내가 국수랑 말구 떡이랑 담으마.나는 아무 짓을 그날 해도 좋을것만 같다.어서 기쁜 날을 가져와다우 친구야”라는 편지에 이르러서야 파인과 최정희는 공개된 동거관계로 들어간 것 같다.그 뒤 파인과 최정희의 덕소 집 모습이 아름답게 묘사되는 편지와,출산,모윤숙의 모종의 험담으로 신문사를 그만 둬야 할 것 같다는 내용이 이어진다.그리곤 매일신보(노천명은 1943년 매일신보에 입사) 잡지부에앉아 ‘여류작가’들에게 “병정 얘기”,즉 “군국물(軍國物)”을 청탁하는 편지가 식민지 시기에 보낸 아름답지 못한 마지막 편지로 남는다. 광복후 노천명은 서울신문 문화부에 근무했다.이미 김광진은 월북해 버려 그녀에게는 친일행위와 함께 식민지 시기의 아픔은 이중의 상처로 저며왔다.종로구 동숭동에 최정희가 기거했던 시기는 1949년 1월부터 1957년까지 매우 긴 기간이었다. “언제 이 땅 그 남자들의 품격이 우리 여인들과 동등이 될는지 너무 한심한 상태요”란 구절은 문단 모임에 나갔다가 당한 모욕감에 대한 화풀이리라.노천명은 1946년 서울신문을 사직하고 엉뚱하게도 유학을 빙자하여 일본 밀항을 감행했는데(1947),가족들의 맹렬한 반대로 이듬해 귀국했다. 아무려면 김광진이 그리워 취했던 해프닝은 아닐 테지만 노천명답지 않은 돌출이었는데,그 상상 밖의 행위가 바로 6.25 때도 반복되었다.인민군 점령하의 서울에서 그녀는 문학가동맹에 가입,‘반동 문학인’ 체포에 협조한 혐의로 서울 수복 직후 체포돼 20년형을 선고받고 부산에서 복역했다. 이헌구.김광섭.모윤숙 등 문인들의 석방운동으로 1951년 4월 출옥한 그녀는 부산에서 최정희에게 외로운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하는 편지를 보냈다.공군 종군작가단(1951년 1.4후퇴 직후)과 육군 종군작가단(1951.5.26)은 다 대구에서결성되었는데,최정희는 공군종군 작가단 소속으로 대구에서 지내고 있었다.이 무렵 노천명의 편지에 언급된 문인들은다 여기 소속이었다. 석방후 부산 중앙성당에서 가톨릭에 입교,베로니카란 세례명을 얻은 그녀는 공보실 중앙방송국에 근무하는 등 안정을 되찾았으나 이미 목이 긴 사슴으로서의 센티멘탈한 여성시인은 아니었다.그녀의 시에는 잡식성이 침윤되어 청순 단아하던 세계는시들어 버렸다.친일,친공,반공 행위를 두루 거친 이 목이긴 외로운 사슴 시인은 1957년 6월 16일,누하동자택에서 세상을 등졌는데,최정희는 문인장으로 치러진 그녀의 장례식에서 울먹이며 약력을 낭독했다. 임헌영 문학평론가·중앙대 겸임교수
  • [사설] 주목되는 중·러 ‘反 MD’

    장쩌민 중국 국가주석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16일 양국 정상회담에서 ‘친선우호협력조약’을 체결하고‘모스크바 공동선언’을 통해 ‘전략적 동반관계 구축’을선언했다.이번 양국 조약은 1980년에 구 조약이 자동폐기된후 21년간의 무조약 상태를 종결하고 향후 20년간 유효한 새로운 내용의 조약으로서 양국의 정치,경제,통상,군사,기술등 제분야에 걸쳐 광범위한 협력관계를 명시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양국 정상은 ‘조약’과 ‘선언’을 통해 “양쪽 중 한쪽이 평화 위협 등 안보적 이해관계에서 저촉될 경우,양국은 위협 제거 협의를 위해 즉각 접촉한다”고 약속했다.양국 정상은 특히 미국이 추진중인 미사일방어체제(MD)구축에 반대하는 공동전선을 구축하는 한편 군사적 협력관계를 강화키로했다.그동안 중국은 러시아의 최첨단무기와 핵능력 향상 기술의 도입을 원해왔고 러시아는 경제난 극복을 위해 군사기술 수출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여왔다.물론 양국은 이러한 군사협력이 어디까지나 세계평화를 위한 것이며 제3국을 겨냥한 동맹이아니라고 말하고 있으나 사실상 미국의 패권주의에 대항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우리는 한반도 주변 강국의 국제 역학 변화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중국과 러시아가 상호 우호협력관계를 강화하고이 지역의 긴장을 완화하는 것은 환영한다.그러나 중국과 러시아가 미국과 일본의 동맹관계를 견제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결속함으로써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에 과거 냉전시대와같은 새로운 대결 기류가 형성되는 것을 결코 원치 않는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미국의 일방적인 MD구축 추진이 군비경쟁을 촉발할 수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우리의 남북화해협력과 한반도 평화정착 정책에 상치되기 때문이다.한반도 주변4강은 오는 10월 중국에서 열릴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정상회의에서 모든 회원국과 함께 동북아는 물론 환태평양지역에서의 긴장완화와 평화유지에 관한 포괄적인 합의를 도출하기 바란다.
  • 유엔 새천년 여성평화상 수상 아스마 자항기르

    [뉴욕 윤창수특파원] “명예살인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으며 여전히 자행되고 있습니다.다만 도움을 받는 여성들의 숫자는 늘어났지요” 아스마 자항기르 변호사(49·파키스탄)는 유엔여성개발기금(UNIFEM)이 ‘평화조정자’로서 여성의 역할을 강조하기 위해 제정한 ‘새천년 여성평화상’을 받은 6명의 첫 수상자가운데 한 사람이다. 11일 그녀를 만났다.“여동생 히나 질라니와 함께 지난 20년간 가정폭력,특히 여성이 부정을 저질렀을 때 가문의 명예를 위해 처형하는 ‘명예살인’을 반대해 투쟁해왔어요” 160㎝도 채 안되는 작은 체구를 가진 그녀는 1983년 전쟁법(Martial Law)을 어긴 대가로 감옥에 가야 했으며 살인의 위협에 시달리고 공개적인 욕설과 모욕을 받아야만 했다. 1986년 파키스탄에서 처음으로 여성을 위한 법률회사를 세운 자항기르는 “여성이자 인간으로서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말했다. 수상소감을 묻는 질문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할 일이 많다”면서 “앞으로도 파키스탄과 인도를 오가며 여성을 위해일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파키스탄에서 가장 큰 폭력인 명예살인을 피해 도망친 여성과 아이들을 위해 안전한 도피처와 무료 법률상담을제공하는 AGHS라는 단체를 동생과 함께 운영하고 있다. 아울러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결성권을 위해 싸운 결과 의회에서 성공적으로 법률을 통과시키기도 했다. 대학에 다니고 있는 두딸을 포함,3명의 아이를 두고 있다. 새천년 여성평화상은 자항기르와 질라니 자매 외에 코소보의 알바니아 여성동맹 회장인 의사 플로라 브로비나 등이 수상했다. geo@
  • [해외 항일전적지를 찾아서] (16)블라디보스토크·빨치산스크

    1910년 국권상실 직후 의병들의 거점이었던 포시에트와 크라스키노를 돌아본 취재팀은 블라디보스토크의 항일투쟁 유적지를 찾아 나섰다.러시아어로 ‘보스토크(동방)’와 ‘블라디’(정복)를 합성한 블라디보스토크는 러시아 연해주의 중심도시.금각만(金角灣)을 껴안은이 곳은 극동에 있는 러시아의 유일한 부동항(不凍港)으로 1860년대이래 러시아 극동진출의 발판이 돼왔다.특히 1903년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개통되면서 위상이 더욱 높아졌다. 우리 항일투쟁사에서 블라디보스토크는 항일투쟁이 응집된 중요한곳이다.일제를 피해 포시에트를 떠난 한인들이 새로 자리를 잡은 곳이기 때문이다. 해삼위(海蔘威)라고도 불렸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먼저 찾아 나선곳은 뽀그라니치나야 스라보카 거리였다.구한말 항일운동의 중심역할을 한 개척리가 세워진 곳이다.남향에다 바다로 향한 전망이 좋아 마을이 없던 당시 이주자들이 정을 붙이고 살기에는 최적지로 보였다. 그러나 개척리는 1911년 러시아 당국이 콜레라 근절을 핑계로 수천여명에 이르던 우리 동포들을몰아낸 뒤 병영을 지었고,이후 블라디보스토크 원형극장이 들어섰다.지금은 중국음식점으로 바뀌었다. 한인들은 쫓겨나기 1년전인 1910년 8월 경술국치 소식이 전해지자이상설 이범윤 홍범도 등을 주축으로 ‘성명회(聲明會)’를 조직했다. 그러나 9월 11일 러시아 극동공화국 당국이 일본의 요구에 따라 성명회와 십삼도의군 간부 200여명을 체포하는 사태가 발생했다.‘대동공보’도 이 곳에서 발행됐다.국내 의병장,계몽운동가들이 모여들면서 이 주변은 한인수가 한때 16만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90여년의 긴 세월은 우리 독립운동가들의 숨결을 남김없이지워냈다.기왓장 하나 남아 있지 않은 현실에 취재팀은 안타까움을감출 수 없었다. 개척리를 떠난 동포들은 십여㎞쯤 떨어진 언덕에 새둥지를 틀었다.바로 신한촌(新韓村)이다.그러나 신한촌은 북향의 경사진 언덕이다.따뜻한 남향의 옥토에서 칼바람 부는 황무지로 옮겨온 우리 동포들의심정은 어땠을까. 우리 동포들은 신한촌에서 1911년 8월29일 한일합방 1주년을 맞아반대시위를 벌였다.그리고 조국독립과 계몽활동,민족주의교육 등을주창하는 권업회(勸業會)를 창설했다.이 때 홍범도는 20명의 동지와함께 ‘21의형제 동맹’을 결성했다. 1914년에는 대한광복군정부를 조직했다.앞서 1912년 신채호 이상설장도빈 등은 ‘권업신문’을 발간했다.1919년 3월17일에는 고국에서온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규모 시위를 가졌다.이듬해 3·1절에는독립문을 세웠다.이렇게 줄기차게 전개된 투쟁 때문에 독립운동사 연구가들은 독립운동사에서 신한촌을 북간도의 용정과 명동보다 앞선것으로 평가한다. 일본군은 1918년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군인 적위군과 차르의 백군간에 벌어진 내전에 국제간섭군이라는 명분으로 파병해 있었다.1920년4월,일군이 러시아군과 한인부대 연합군과 충돌하자 이를 기화로 신한촌을 기습하였다.주요 지도자들은 탈출하였으나 불운하게도 최재형이 동포 60명과 함께 체포되었다.그는 우수리스크로 끌려가서 처형되었다. 취재팀은 독립운동가들이 일제를 피해 새로 정착한 빨치산스크로 향했다.우리식으로 수청(水淸)이라고 이름지어진 이 곳은블라디보스토크에서 200㎞쯤 떨어진 산세 험한 소 도시이다.백마 탄 김일성장군으로 불렸던 김경천(金擎天) 장군이 이끄는 항일유격대가 치열하게 일본군과 싸웠던 곳이다. 김경천은 창해(滄海)청년단과 수청고려의병대를 이 곳에서 이끌었다. 광복군사령관을 지낸 이청천(李靑天)보다 일본육사 3년 선배로서 조국 독립에 한몸을 던졌던 김경천.그는 1909년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육사에 재학 중 조국이 강점당하는 비운을 겪었다.요코하마에서 그는이청천 홍사익 등과 함께 뒷날 탈출하자고 결의했다.1919년 6월 그는 이청천과 함께 만주로 망명,신흥무관학교에서 교관으로 일했다. 이청천이 중국 땅에 남은 것과 달리 김경천은 1919년 말 러시아로와서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물렀다.1920년 4월 일본군의 신한촌 기습에서 아슬아슬하게 위기를 면한 그는 수청으로 가서 한인들을 괴롭히는마적들을 제압하고 일본군과 싸웠다.그는 이 때부터 ’백마 탄 김일성 장군‘이라는 별명을 얻었다.김경천은 조국독립을 위해 투쟁하면서도 때때로 러시아 백군과 싸워 볼셰비키혁명에도 공로를 쌓았지만홍범도가 그랬던 것처럼 강제 이주열차에 실려 중앙아시아로 끌려갔다.그리고 1942년 수용소에서 불우하게 사망했다. 광산촌인 빨치산스크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자동차는 첩첩산중으로 들어가고 또 들어갔다.간신히 3시간만에 도착한 빨치산스크의중심가는 평온하기 그지 없었다.갑자기 내리는 보슬비를 맞으며 한참수소문한 끝에 빨치산스크 시립중앙박물관을 찾았다.나탈리아라는여성 관리원의 도움을 얻어 빨치산 사진과 문헌을 샅샅이 뒤졌지만김경천 등 한국식 이름은 나오지 않았다.한인 빨치산에 관한 어떤 기록도 없었다.기록에 따르면 이 곳에 있던 빨치산 중 절반이 한인이었다고 하는데 아마 1936년 강제이주 뒤 자료들이 대부분 멸실된 듯 싶었다.나탈리아는 취재팀의 허탈해 하는 표정을 보고 “수장고에 다른자료들이 있는데 관장이 갖고 외출했고 그는 며칠뒤에야 돌아온다”며 자기가 더 미안해 했다.취재팀은 어쩔 수 없이 벽에 걸린 사진들을 꼼꼼히 살펴보다 한인으로 보이는 몇사람을 발견한 것을 위안으로삼으며빨치산스크를 떠났다. 블라디보스토크 박재범기자 jaebum@. * 빨치산스크의 고려인들. 빨치산스크에는 고려인(카레이스키)이 간혹 눈에 띄었다.1936년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전원 강제이주된 한인들의 후손들이다.그들은 최근 몇년새 한둘씩 다시 연해주로 돌아오고 있다.대개 중앙아시아에 가까운 하바로브스크 등 대도시에 자리잡고 있으나 멀리 빨치산스크까지 오는 사람들도 제법 있다.그러나 그들은 이미 선조들의역사를 잊었다.아니 아예 모르고 있었다. 빨치산스크의 한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러 들어온 한 사람을 만났다. 생김새가 한국사람과 똑같아 “혹시 카레이스키가 아니냐”고 러시아말로 묻자 “그렇다.박이다”라고 대답했다.“4∼5년전에 중앙아시아에서 이 곳으로 왔다”는 그는 “예전에 이 곳이 독립운동의 거점이었음을 아느냐”는 질문에 ‘처음 듣는 얘기’라는 표정이 역력했다. 하바로브스크에는 고려인이 빨치산스크보다 훨씬 많다.고려인들은하바로브스크 시내 시장에서 채소와 과일 등을 팔거나 구두를 고치는일 등을주로 하고 있다.그들 역시 중앙아시아가 고향이라고 한다. 그러나 하바로브스크 등 연해주가 그들 할머니 할아버지가 뿌리내렸던 곳이었음을 아는 사람은 역시 극히 드물었다. 박재범기자
  • 전남 완도 ‘빛나는 抗日의 섬’

    전남 완도 출신인사들은 3·1운동과 상해임시정부,신간회,광주학생의거는 물론 일본의 노동운동에도 깊이 관여했다.지역안에서도 수의위친계활동,일심단사건,고금학교의거,소안배달청년회 사건 등 주목할만한 항일활동을 펼쳤다. ‘완도군 항일운동사’는 바로 ‘군 단위로는 전국에서 가장 격렬한항일운동을 펼친 곳’이라는 이 고장 사람들의 자부심을 담은 기록이다.완도군항일운동기념사업회가 펴낸 이 책에는 완도의 항일운동과관련한 ▲사진기록 ▲지도자 ▲항일노래 ▲관련논문 ▲재판기록 ▲신문기사가 충실히 담겼다. 국토의 서남단에 자리잡은 고장에서 어떻게 이토록 활발한 항일운동이 펼쳐질 수 있었을까.박찬승 목포대 사학과교수는 “완도는 해태양식에서 비롯된 경제적 기반에,보수적인 양반계층이 적었고,해외와 물적·인적교류가 활발했던 목포항이 가까워 개화사상을 일찍부터 받아들였다”고 말한다.그 결과 다른 어느 지역보다 교육·계몽운동이 활발하여 사립학교들이 다수 설립됐고,이 학교들이 항일운동의 기반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완도에는 1913년 사립소안중화학원을 시작으로 노화영흥학원·조약도 약산학교·신지학교·군외 교인학교·노화대성학교·금당학교·모도학원·완도대신학원·노화중통학원·노화충도학원,하도학원·방축리일신학원·횡간학원 사립학교들이 다투어 설립됐다.특히 1905년 토지조사사업이 실시됐을 때 일제가 소안도 등 여러 섬을 왕실에 넘겨주자 4명의 소안면민대표는 토지소유권 반환청구소송을 냈고,13년 동안의 법정투쟁끝에 1922년 승소했다.이른바 ‘소안면 토지계쟁사건’으로,이 때도 소안면민들은 재판에 이긴 것을 기념하여 1만 400원을 갹출,사립소안학교를 세우기도 했다.당시 사립학교의 설립자와 교사들은 당대의 지도자들이었고,그 명성은 함북지방과 서울·중국으로도퍼져 항일운동을 하던 명망가들이 자원해서 완도로 찾아들기도 했다. 완도의 자생적 항일운동은 1914년에는 소안에 본부를 둔 ‘수의위친계(守義爲親契)’로 이어진다.상부상조의 전통적 계로 포장했으나 실제로는 전남북과 경남북을 범위로 한 항일조직이었다.유능한 인재를뽑아 독립운동의 전초기지인 중국과 일본에 파견하고 군자금을 모금하여 중국의 독립군에게 전달하는 한편 중국에서 육혈포를 반입하여국내조직에 배포했다.1920년 100여명의 회원들로 조직된 배달청년회도 기억할만 하다.이들은 친일면장이나 일제경찰과는 어떤 말도 하지않는 이른바 ‘불언동맹’을 맺어 실천하기도 했다고 ‘완도군…’은기록하고 있다. 서동철기자
  • 北 노동당대회 임박說 당헌개정등 관련 주목

    북한의 노동당 당대회 개최 임박설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남북관계등 전환기적 시점인데다 당헌개정을 비롯,북한의 향후 진로에 대한청사진이 나올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당대회는 지난 1980년 10월 이후 20년동안 열리지 않고 있다.그동안노동당의 역할과 활동을 평가하고 앞으로의 국가운영방향을 총괄적으로 제시한 일이 없었던 셈이다.이번에 당대회 개최가 점쳐지는 이유는 북한이 극심한 경제난에선 한숨 돌린 상태며 남북관계 개선 및 국제사회 복귀시도 등 새 정책을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당의 몇몇 주요 직이 공석으로 있는 등 내부적으로도 비정상적인 당조직 정비가 필요한 시점이다.지난 94년 김일성(金日成)주석 사망후 북한은 당규약과 다른 행태를 보이기도 했다.6개월에 한번 열도록 돼 있는 전원회의가 한 차례도 열리지 않았고 전원회의에서 선거하는 총비서를 당중앙위와 당중앙군사위 ‘특별보도’를 통해 공식추대하는 등 당의 운영도 일상적인 상태는 아니었다.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도 북한이 당대회 개최를 준비중임을 확인한 바 있다.김 위원장은 지난 12일 우리 언론사 사장단 접견에서 “정상회담때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당대회를 언제 하느냐’고 물어 ‘가을쯤 할 생각’이라고 대답했으나 준비했던 당대회는 남북정세의 급변으로 모든 걸 다시 준비하게 됐다”고 밝혔다.정부 당국자들도 개최를 기정사실화하고 시점만 남은 것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올해는 북한 당창건 55주년이 되는 상징적인 해여서 북한이 당 창건일(10월10일)을 계기로 축제분위기를 조성할 확률이 높다. 앞서 지난 1월1일 발표된 노동신문 등의 신년공동사설에서도 노동당창당일을 ‘10월의 대축전장’으로 만들기 위해 전력을 다할 것을 촉구한 바 있다.전문가들은 “최근 남북관계,대외관계를 고려한다면 당대표자회의나 중앙위 전원회의가 먼저 열릴 가능성도 있다”고 보고있다. 지난 80년 10월에 열린 제6차 당대회는 ▲김정일 후계체제 공식화▲당규약 개정 ▲10대 경제전망 목표 ▲비동맹 자립노선 등의 안건을처리했었다. 이석우기자 swlee@
  • 구국의 뜻 되새기자/ 해외 항일유적 현황·실태

    중국 상해를 방문하는 한국인들의 필수 방문코스 가운데 하나는 홍구공원이다.이는 1932년 4월 29일 이곳에서 있은 천장절 기념식 행사장에 폭탄을 던져 주중 일본공사와 일본군 수뇌 수명을 폭살시킨 윤봉길 의사의 애국혼을느껴보고자 함이리라.윤의사 의거는 단순히 일제의 고관 수 명을 살상한 정도에 그친 게 아니라 당시 임시정부에 대해 미온적이던 장개석 정부의 마음을 돌려놓아 물심 양면의 지원을 받아내기에 이르렀다. 일제강점기 항일세력들은 일제의 탄압을 피해 중국·러시아·미국 등지에본거지를 잡고 항일투쟁을 전개했다.이들이 활동근거지로 삼은 항일유적지는생생한 ‘민족혼의 현장’이라고 할수 있다.낯선 이국땅에서 접한 선열의 이 름이나 묘소,항일전적지는 후대들에게 애국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정부차원에서 이를 보존해야 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수십권의 항일운동 관련 홍보책자보다 선열의 얼이 서린 ‘흔적’ 하나가 민족정신을 고취하는데 훨씬 효과적일지도 모른다. 1910년 한일병합으로 국권을 상실하자 항일세력들은 국내·외에서 국권회복투쟁을 전개하였다.이들은 1919년 전 민족이 궐기한 ‘3·1의거’와 같은 비 폭력 투쟁은 물론 안중근·윤봉길 의사로 상징되는 의열투쟁,그리고 청산리·봉오동전투와 같은 대규모 무력항쟁도 전개했다.국내외에서 다양한 형태로 전개된 항일투쟁은 곳곳에 그 애국혼의 ‘흔적’을 남겨두고 있다.그 가운데 임시정부 청사 등 일부는 정부의 복원·보존 노력으로 상태가 양호한 것도 있으나 아직도 많은 유적들이 방치돼 있는 실정이다. 최근 보훈처가 전문가들의 조언과 자체 현장조사를 통해 집계한 결과에 따르면,해외독립운동 관련사적(시설물 포함)은 모두 317개소로 파악됐다.이들중 244개소는 중국지역에 소재하고 있으며,흔히 ‘만주’로 불리는 동북3성일대에 163개소가 밀집돼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중국을 제외한 아시아 지역에서는 러시아 36,일본 4,카자흐스탄 4,대만 2곳 등 총46개소이며,그밖에 미주지역 24개소(미국 22,멕시코 2),유럽지역 3개소(프랑스 1,네덜란드 2)등이다. 중국내 항일전적지는 동북3성 가운데 하나인 길림성에집중돼 있으며 그 가운데서는 용정(龍井)일대가 단연 으뜸이다.90년대 들어 중국관광이 늘어나면서 한국인들이 가장 즐겨찾는 곳 가운데 하나가 바로 용정이다.이곳은 우리귀에 낯익은 가곡 ‘선구자’의 고향으로 비암산,일송정을 비롯해 민족시인윤동주의 생가와 묘소가 있어 더욱 한국인들의 발길을 끌고 있다.이밖에도인근 교외에 위치한 ‘3·13반일의사릉’을 비롯해 서전서숙·명동촌교회와‘봉오동전투’ 전적지도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인근 화룡현에는 3·1의거 이듬해인 1920년 10월 독립군이 일본군 3,000여명을 궤멸시킨 ‘청산리전투’ 현장과 대종교 3종사의 묘소가 남아 있다.흑룡강성 하얼빈에는 안중근의사의 의거현장을 비롯,경박호·사도하자 전투지가 남아있고,영안(寧安)에는 김좌진장군의 묘소와 김 장군이 운영했던 정미소,그리고 신민부 군정파본부,고려공산당 북만지부 건물 등이 남아있다.또요령성 봉천에는 편강렬의사의 전투현장,신빈현에는 양세봉장군 순국지·서로군정서 본부,단동에는 이륭양행(怡隆洋行)건물이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이륭양행은 당시 영국식민지인 아일랜드출신 무역상 윌쇼가 경영하던 건물로 임시정부는 그의 도움을 받아 이곳에 교통국을 두고 국내와 연락거점으로 활용했었다.집안현,장백현 일대에는 독립군의 유적이 곳곳에 산재해있다. 1919년 임시정부가 수립돼 10여년을 머문 상해에는 임정 청사를 비롯해 임정기관지 독립신문사 터,윤봉길의사의 의거현장인 홍구공원(현 노신공원),애국지사 다수가 묻혀 있는 만국공묘(외국인 묘지),인성학교 등이 남아있다.북경에는 단재 신채호,우당 이회영 선생이 활동했던 흔적과 신한혁명단본부 자리가 남아있고,1932년 윤의사의거후 피난길에 오른 임시정부가 머물다간 진강,가흥,기강,장사,항주 등지에도 백범 김구 선생의 피난처를 비롯해 임정청사 이전지가 더러 남아있다.강소성 남경에는 의열단원들의 합숙지이자 민족혁명단의 본부였던 호가화원이 있다.서안에는 OSS훈련지와 광복군 2지대주둔지가,임정 마지막 정착지인 중경에는 임정 청사를 비롯해 광복군사령부본부건물(현 미원식당 건물) 등이 남아있다.국토 전역에 걸쳐서 항일투사들의 피와 혼이 서려있는 중국은 ‘항일전적지의 진열장’이라고 할만하다. 중국 다음은 러시아로 모두 36개소의 항일독립 유적지가 있다.일제 당시 연해주로 불린 블라디보스토크에는 최초의 한인거주지를 비롯해 신한촌,해조신문사 터 등이 남아있고,크라스키노에는 안중근 의사가 동지들과 ‘단지동맹’을 맺은 커리마을이 있다.하바로프스크에는 한인사회당 창당지와 지금은시민휴식공원으로 변한 독립군 전투지,그리고 1937년에 사망한 한인들의 무덤이 남아있다. 또 리르쿠츠크에는 고려공산당 창당대회지(현 레닌거리 23번지 인민의 집)와 이범윤 유배지 등이 남아있다.89년 소련붕괴후 러시아에서 분리된 카자흐스탄에는 ‘봉오동전투의 영웅’ 홍범도 장군의 옛집과 동상,묘소(크질오르다시 공원묘지)가 있으며,계봉우 선생의 묘소도 여기에 있다. 미국에는 한인 이민들이 처음 정착한 하와이를 비롯해 샌프란시스코·로스앤젤레스·뉴욕 등에 민족세력들의 활동무대가 남아있다.하와이에는 당시 한인들의 구심체 역할을 했던 한인기독교회·한인기독학원을 비롯해 조선국민단 사관학교,하와이국민회관 등이 남아있다.샌프란시스코에는 전명운·장인환 두 의사가 친일미국인 스티븐스를 처단한 현장인 페어부두,스티븐스가 투숙했던 페어호텔이 90년이 넘는 세월속에서도 여전히 옛 모습을 지키고 있다. 이곳엔 대한국민회의 기관지 신한민보의 발간지(페리스트리트 232)도 여전히 남아있다.로스앤젤레스에는 애국지사이자 대표적 재미한인 지도자였던 도산 안창호 선생의 고가(남가주대 구내소재)와 흥사단중앙회관이 남아있다.이밖에도 캘리포니아 클로세트 윌로스에는 계원 노백린 장군의 한국비행단 설립지가,네브래스카주에는 박용만의 한인소년병학교 설립지(현 헤이스팅스 네브래스터니 농장)가 남아있다.구미위원회 관련 유적은 뉴욕에 있다. 그밖에 프랑스 파리에는 평화회의 대표관과 임시정부 파리통신국,네덜란드에는 ‘헤이그밀사’ 가운데 한사람인 이준 열사의 묘역과 데용호텔이 항일관련 유적지로 기록할 만하다.일본에는 2·8독립선언의 현장인 도쿄기독교청년회관과 김지섭·이봉창의사의 의거현장인 도쿄 궁성의 앵전문과 이중교 일대,즉 일본의 최심장부가 바로 항일유적지인 셈이다. 정운현기자 jwh59@
  • 짐바브웨 무가베 20년독재 무너지나

    로버트 무가베 짐바브웨 대통령의 20년 독재가 흔들리고 있다.장기집권에따른 부패 만연과 비효율적 국정 운영으로 인플레가 50%를 넘는 등 경제는파탄에 이르러 전국민의 3분의2가 최저생계 수준에도 못미치는 빈곤에 허덕이고 있다. 지난 2월 집권기간을 12년 연장하기 위한 헌법 개정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에서 무가베 대통령이 예상 밖의 패배를 당한 것도 이처럼 국민들의 불만이극에 달한 때문으로 분석된다. 여기에 짐바브웨 의회가 12일 자정을 기해 임기가 만료됨으로써 자동 해산됐다.새 총선이 불가피해진 것이다.아직 총선 날짜는 결정되지 않았지만 무가베 대통령은 5월말쯤 총선을 치를 계획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총선을 앞두고 짐바브웨 사회와 정국은 심각한 불안 양상을 보인다.무가베대통령은 국민들의 불만 무마를 위해 백인이 소유한 토지와 농장을 몰수,땅이 없는 흑인들에게 무상으로 나눠주겠다고 밝혀 흑인들의 백인농장 점거를부추기고 있다.이에 따른 충돌과 끊임없는 폭력,반정부 시위 등으로 사회 불안은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짐바브웨 경제의 미래가 없다는 점은 무가베의 집권 짐바브웨-아프리카민족동맹애국전선(ZANU-PF)당의 인기를 곤두박질치게 만들고 있다.반면 노조들을 주축으로 결성된 야당 민주변화운동(MDC)당은 날로 인기를 얻고 있어 총선이 실시되면 ZANU-PF가 패배할 것이란 전망이 점차 힘을 얻고 있다. 문제는 무가베와 ZANU-PF가 한번 잡은 권력을 놓지 않으려는 데 있다.150석의 의석 가운데 147석을 차지하고 있는 ZANU-PF는 야당인 MDC를 탄압하는데군과 경찰을 동원하고 있다.이런 상황에서 집권당이 총선에서 패배한다면 무가베를 다시 권좌에 앉히기 위해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킬 것이란 추측도 나돌고 있다. 유세진기자 yuj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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