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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북, 14개항 우선합의

    남북한은 8일 판문점 북측지역 판문각에서 정상회담 4차 준비접촉을 갖고항공편 이용 등 대표단의 이동방법,선발대 파견,신변안전 보장 등 14개항에합의하고 정상회담 의제를 포괄적으로 설정하자는 데도 의견을 모았다.그러나 취재기자단의 수와 의제 관련 표현문제에 대한 이견으로 최종 합의에는이르지 못했다. 이에따라 양측은 5차 준비접촉을 이번 주 중으로 판문점 남측지역 평화의집에서 갖고 최종 합의를 시도할 예정이다. 회담직후 남측 수석대표인 양영식(梁榮植)통일부 차관은 “9일 오전 10시판문점 남측지역 평화의 집에서 5차 준비접촉을 갖자”고 북측에 제의했으나북측은 “상부에 보고한 뒤 회답을 주겠다”고 밝혀 5차 준비접촉은 9일 이후에 열릴 것으로 보인다. 양 통일부차관은 “의제는 포괄적으로 설정한다는 데 의견접근을 이뤘으나표현문제가 남아있고 기자단 수는 94년의 수(80명)를 유지하자는 것이 일관된 우리측 입장”이라고 말했다.북측은 기자단을 40명선으로 줄이자는 입장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양측은 대표단의 왕래 수단및 방법,선발대의 파견,편의제공,신변안전보장,의전·경호·통신 및 보도분야의 실무자 접촉 등에 합의했다.남북한이 합의한 14개 항목은 대부분 94년도 정상회담 실무절차합의서를 준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표단의 왕래절차와 관련, 양차관은 “94년과는 다른 새로운 상황에 맞춰우리측이 관련 절차를 북측에 전달했고 북측도 상당부분 수용했다”고 밝혀항공기를 통한 방북이 가능함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실무자 접촉은 1∼2차례가량 판문점에서 별도 접촉을 가진 뒤 분야별로 20여명 가량의 실무자를 평양 현지에 파견,구체적인 협의를 벌이게 된다. 한편 이날 예비접촉은 4시간 10분동안 각각 두차례씩의 전체대표 접촉과 수석대표 단독 접촉이 이뤄졌으며 네차례 정회되는 등 문안조정과 의견조율에진통을 겪었다. 이석우 김상연기자 swlee@
  • 남북정상회담 4차 준비접촉/ 北 “남한언론 너무 앞선다”

    북한이 남한의 언론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북한측은 정상회담을 위한 2차 준비접촉에서 80명 규모로 의견을 모았던 취재기자단 수를 지난 3일 열린 3차 준비접촉에서는 40명으로 대폭 줄이는 방안을 제시했다.북측 대표단은 “남한 언론이 너무 앞서가고 있다”면서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회의를 진행시킬 수 있느냐”고 불만을 표시한 것으로전해졌다. 또 지난 4일자 평양방송은 논평을 통해 “남한 외교 관계자들이 해외에서정상회담에 찬물을 끼얹고 대화 상대방을 모독하는 자극적 발언을 하고 있다”면서 “이를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평양방송은 또 “이들의 불순한 언동을 광고하는 남조선 언론들에 대해서도지켜볼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북한의 이같은 태도는 남측 취재기자들이 평양에 많이 오는 것이 내심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또 북측은 남한 언론에 대해 ‘불신’을 갖고 있다.남북간 접촉 때마다 남한 기자들이 약속된 사항을 지키지 않고 불시에 북한주민들을 만나 까다롭고예민한 질문을 하거나 일부 지역을 마음대로 찾아다녔다는 점에 대해 매우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특히 남한 언론사의 특성상 취재 및 특종 경쟁을 벌여 자칫 예기치 못한 사건을 일으킬 수 있다는 점도 부담스러워하는 원인의 하나로 지적되고 있다. 지난 70년대 방북한 남측기자들이 어린 학생들에게 먹을 것을 주면서 그 장면을 찍고 북한이 못산다는 대답이 나오도록 유도했다는 사건은 북한이 남측기자들의 방북 때마다 북한주민을 대상으로 실시한 대표적 교양사례였다. 또 지난 85년 9월 ‘남북 고향방문단 및 예술공연단’ 교환방문시 남한측기자가 “해수욕을 어디로 가느냐”고 묻는 질문에 북한 여성이 “묘향산으로 간다”고 대답하자 북한을 조롱하는 듯한 내용으로 기사화해 불만을 샀다. 이와 함께 북한은 3차 접촉에서 몇몇 언론사에 대해 거부감을 피력했다고한다. 정상회담을 앞두고 지금까지 북한과 관련해 부정적인 입장만을 보여준 해당언론에 대해 특히 경계심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북한은 외신사에 대해서는 남한언론과 다르게 취급하고 있다. 북한은지금까지 열린 남북 정상회담 준비접촉에 외신사의 취재를 허용하지 않았으나 평양회담시에는 수용할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도운기자 dawn@
  • [격동의 남북관계 반세기](3)무산된 金泳三·金日成 회담

    94년 7월9일 낮 12시 서울 삼청동 남북회담사무국.보름 앞으로 다가온 남북정상회담에 대비,통일안보정책조정회의를 주재하던 이홍구(李洪九)통일부총리에게 메모지 한장이 전달됐다.-‘김일성 사망’ 회의장은 일순 놀라움에 술렁거렸다. 분단 반세기만에 성사를 눈앞에 뒀던남북 정상간 만남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김영삼(金泳三·YS) 당시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여성정책심의위원회’ 위원 15명과 환담을 나누던 중인 12시2분쯤 전날 김일성 주석이 사망했다는 보고를 받았다.얼마나 놀랐던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고 한다.그것은 그가정상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해 그동안 적지않은 ‘마음고생’을 했다는 것을나타내기에 충분했다. YS는 민간인 출신 대통령이란 정통성을 무기로 취임 초부터 남북문제에 적극적인 자세로 나온다.93년 2월25일 대통령 취임연설을 통해 ‘민족우선론’을 펴며 김일성과의 회담을 제의했다.그러나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의사를 밝힌 것을 계기로 핵 문제가 전면에 떠오르면서 그의 대북정책은강경으로 치닫게된다.6월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는 “핵무기를 가진 자와는 악수를 하지 않겠다”는 말까지 서슴지 않았다. 그러던 그가 94년 2월25일 취임 1주년 회견에서는 “핵문제 해결에 도움이된다면 김일성 주석과 만날 용의가 있다”며 갑자기 종전과 다른 입장을 밝힌다.일부에서는 한달전인 1월28일 현 대통령인 김대중(金大中) 당시 아·태평화위원장이 “김영삼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간의 회담이 조건없이 하루빨리이뤄져야 한다”고 촉구한 것에 YS가 자극을 받았다는 얘기도 나왔다. 한동안 북한의 반응은 냉담했다.‘희소식’은 6월 중순 대북특사로 북한을방문,김일성을 만난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왔다.카터는 김일성이 “언제 어디서든 조건없이 김영삼 대통령과 만나고 싶다”는 얘기를 했다고 전했고,YS는 이를 전격 수락했다.당시 김일성의 회담 제의에 대해 전문가들은 유엔의 대북제재를 무산시키기 위한 의도라고 해석하기도 했다. 그후 양측은 6월28일 판문점에서 예비접촉을 갖고 정상회담을 7월25일부터27일까지 평양에서 열기로 합의하는 등 세부일정을 거의 확정지었다.그러나북한은 김일성 사망 사흘뒤인 7월11일 “우리측의 유고로 예정된 북남 최고위급 회담을 연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고 ‘회담 무산’을 공식 통보해 왔으며,YS는 “아쉽게 생각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94년의 ‘무산된’ 남북 정상회담은 제3국의 개입이 있긴 했지만 어쨌든 정상간 만나자는 약속을 처음으로 끌어냈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이때의 경험이 밑바탕이 됐기 때문에 지금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회담이 비교적 쉽게 추진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김상연기자. * 역대 정상회담 추진사. 남북 정상회담은 분단 이후 남과 북이 수십차례 제의했으나 서로 묵살하거나 지나친 전제조건을 내세워 94년까지는 공염불 상태나 다름없었다. 남북이 이 문제를 처음 공식 거론한 것은 72년 평양에서 열린 남북조절위원회 공동위원장 제2차 회의석상에서였다.이때 양측은 이른 시일내 정상회담이성사될 수 있도록 노력하자는 입장을 공동으로 밝혔다. 처음으로 정상이 직접 이를 제시한 것은 75년8월18일 박정희(朴正熙)대통령의 뉴욕 타임스 회견.박대통령은 “김일성이 군사적이 아닌, 평화적인 방법에 의한 통일을 추구한다면 그를 만나 통일에 관한 대화를 나누는 것이 무의미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박대통령은 또 집권말기인 79년1월 연두회견에서 “남북한 당국이 시기, 장소에 상관없이 만나자”고 제안했다. 우리측의 정상회담 제의는 전두환(全斗煥)대통령 시절부터 활발히 벌어졌다.전대통령은 81년 1월12일 국정연설을 통해 ‘남북한 당국 최고책임자 상호방문’을 제의했다.재임시절 동안 전대통령은 그후 거의 매년 국정연설,8·15 경축사 등을 통해 정상회담의 성사를 북측에 촉구했다.이에 북한은 남한에반공정책 포기와 주한 미군철수 등을 역으로 요구하며 피해갔다. 북방외교를 가장 큰 목표로 내건 노태우(盧泰愚)대통령은 전대통령보다 정상회담에 더 열심이었다.노대통령은 88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처음으로 ‘남북정상회담’이라는 용어를 쓰며 김일성과 만날 뜻을 밝혔다.88년 10월 유엔연설에서는 남북정상회담이 열릴 때 의제까지도 자세히 밝혔다.또 91년 12월남북기본합의서가 채택되는 과정에서 양측이 막후에서 정상회담을 추진해 성사 일보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북한 김일성은 신년사를 통해 가끔 정상회담 의사를 비쳤으나 별로 무게가실리지 않았다.90년에는 평양을 방문한 남북고위급회담 우리 대표에게 정상회담 의사를 밝혀 기대를 모았으나 역시 말에 그쳤다. 김상연기자 carlos@. *당시 협상 주역. 94년 남북정상회담 협상을 맡았던 남북한 대표들은 서로 일면식(一面識)도없는 사이였다.그러나 한번의 예비접촉만으로 7월25∼27일의 정상회담 일정을 도출했다. 양측은 통일문제 전문가 3명씩을 협상에 내세웠다.우리측은 당시 이홍구(李洪九)통일부총리·정종욱(鄭鍾旭)청와대외교안보수석·윤여준(尹汝雋)총리특별보좌관이,북측은 김용순 최고인민회의통일정책위원장·안병수 조평통부위원장·백남순 정무원책임참사가 나왔다. 북측 수석대표 김용순과 34년생 동갑내기인 이부총리(현 주미 대사)는 당시북한문제 최고 브레인으로 이론과 실무를 겸비하고 있다는평가를 받았다. 정수석(현 아주대 교수)은 대통령의 의중을 잘 파악하고 있다는 게 장점이었다.윤보좌관(현 한나라당 의원 당선자)은 당시 안기부 3특보로 북한담당이아니었으나 말솜씨와 언론관계 등이 고려돼 특별보좌관이라는 직함으로 협상단의 일원이 됐다.윤보좌관은 예비접촉후 속개된 실무협상 수석대표를 맡았다.특히 지난 3일 간암으로 타계한 엄익준(嚴翼駿) 전 국가정보원 2차장의경우 당시 딸 결혼식에까지 불참하면서 우리측 실무협상 대표로 나서 두 차례 협상만에 실무합의서를 타결짓는 열의를 보였다. 북측 김용순 대표는 대남전략은 물론 미국·일본 등 국제문제에도 정통해김일성의 신임이 두터웠다.그는 현재도 노동당 대남담당 비서겸 당 통일전선부장으로서 대남사업을 총지휘하고 있으며,김정일 앞에서 직언할 수 있는 몇안되는 인물로 꼽힌다. 김상연기자
  • 남북정상회담 4차 준비접촉/ 의견조율 어디까지 왔나

    남북한은 8일 4차 접촉에서 14개항의 합의를 이끌어내는 등 절차합의서를대부분 마무리했다. 그러나 의제의 표현과 취재기자단의 수 등 남측 언론사의 보도와 관련한 두가지 사안에 대해선 막판까지 의견조정에도 불구하고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이견이 있던 절차합의서 타결후 경호·의전·통신 등 실무자 접촉문제도 타결됐다.통신과 보도분야 실무접촉에서도 합의를 이끌어냈다. 양측은 94년 ‘정상회담 실무절차 합의서’에 근거,대부분의 실무절차에 대해선 1·2차 접촉때 의견접근을 본 상태였으며 이날 최종적으로 문안을 다듬었다. 두 정상이 두 차례 이상의 단독회담을 갖고 2∼3명의 보좌요원을 배석시키며 대표단이 육로나 항공을 모두 이용할 수 있도록 한다는 핵심사안에도 큰진통없이 합의를 이뤄냈다.남북 양측의 정상회담에 대한 적극적인 자세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편의보장,신변안전보장,회담 기록 및 보도 문제 등도 원칙적인 사항에는 어렵지 않게 합의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의제와 관련,절차합의서상 포괄적인 명기원칙에 대해 합의했지만 별도 접촉문제를 놓고 많은 의견교환을 벌여야 했다. 생방송 문제와 관련,북측은 여과없는 생방송 문제에 대해 난색을 보이기도했다.생방송 장비인 SNG를 통한 직접 방송에 대해 북측은 부담스러워했다.보도진의 수나 일부 언론에 대한 북측의 거부반응은 끝내 5차로 넘어가게 하는원인이 됐다. 그러나 일부사안에 대한 진통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일정으로 볼때 양측은이날 정상회담의 준비를 위해 보다 구체적인 준비단계로 들어갔다고 할 수있다. 그동안 남북은 17일동안 4차례의 접촉을 벌이면서 절충을 벌여왔다.지난달22일 열린 첫번째 접촉에서 남측은 의제와 절차에 대한 입장을 밝혔고 이어지난달 27일에 속개된 2차 접촉에선 북측안이 공개됐다. 지난 3일 3차 접촉에서 남북은 상대방에게 합의서 초안을 공개하면서 본격적인 절충에 들어갔고 상대한 부분의 문안에 대해서는 의견 접근이 있었다. 이날 4차 접촉에선 문안에 대한 수정과 토의,2차례의 수석대표간 절충이 있었다. 정부 당국자는 “커다란 틀이 짜여진 상황에서 절차진행에대한 문제를 협의하는 것”이라면서 “시간적인 측면에서나 일정상으로 볼때 5차 접촉에선최종합의서가 타결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김상연기자 carlos@
  • 남북정상회담 4차 준비접촉/ 이모저모

    8일 판문점 북측지역 통일각에서 열린 4차접촉은 정회와 접촉을 거듭한 이례적인 마라톤 협상이었다.남북 수석대표끼리의 단독접촉을 통해 합의서 체결을 위한 막바지 산고를 겪었으나 끝내 체결에는 이르지 못하고 재접촉을갖기로 했다. ■오후 2시4분쯤 다섯번째 정회에 들어가자 준비접촉이 무산되고 합의서 발표가 5차접촉으로 넘어가는게 아니냐는 우려가 통일각 주변에 퍼졌다. 양영식 수석대표는 대기실에서 남측 대표단과 40분간 구수회의를 갖고 2시43분쯤 통일각에서 일단 철수,군사 분계선을 넘어 판문점 남측지역 자유의 집으로 돌아왔다. 양 수석대표는 “점심식사 후 다시 통일각으로 넘어가 접촉을 계속 하기로했다”며 “접촉은 잘 되고 있다”고 말했으나 결국 몇가지 미타결 사항에부딪쳐 합의서 체결을 5차접촉 이후로 미뤄야 했다. ■남북은 이날 두번째 정회 직후인 오전 11시50분쯤 대표단을 내보내고 양수석대표와 김령성 단장이 첫 단독접촉을 가졌다.12시15분까지 계속된 접촉에서 대표들은 배석자 없이 기록원 1명씩을 대동,합의서안을 비교하며 조율을 계속했다. 이어 각자의 대기실로 돌아가 본부의 훈령을 기다리며 대표들과 대책을 숙의한 뒤 오후 1시 2차 단독접촉에 들어갔다.대기실에는 양측 수행원들이 전해주는 종이쪽지가 분주히 전달돼 급박한 상황을 감지케 했다.그러나 2차 단독접촉도 별다른 성과없이 12분만에 끝냈다. 한편 오후 2시쯤 통일각의 남측 대표단 대기실이 정전돼 북측 관계자들이수리작업을 벌이는 소동을 빚었다.남측 대표들이 서울과 훈령 교환을 빈번하게 해야 될 시점에 발생한 정전으로 남측 대표들은 당혹해 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양 수석대표는 오전 접촉에 앞서 “남북의 정상 두 분이 편안히 만나고 남북 관계개선의 결정적 계기를 형성하도록 실무절차를 완벽하게 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그는 경호.의전.통신 등 부문별 실무접촉에 대해서는 “실무절차 합의서를 일단 서명했다고 확신을 가질 때 이들 분야에 관한 실무접촉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북측 대표단은 실무절차합의서 체결을 뜻하는 ‘결속’이라는 단어를 유난히 강조,분위기를 고조시켰다.준비접촉이 시작되자 양측 대표들은 준비해 온두툼한 서류와 파일을 꺼내놓고 합의서 막판 절충에 돌입했다. 김 단장은 양 수석대표와의 환담이 끝나자마자 준비해온 하얀 봉투 두개를꺼내놓고 비공개 회담 준비에 들어갔다.B4용지 크기에 얄팍한 부피의 이 봉투에는 북측이 이번 준비접촉에서 제시할 합의서가 들어 있는 것으로 추측됐다. 준비접촉은 시작 30분만에 첫 정회됐다.회담 관계자는 “양측이 상부에 알릴 일도 있고 의견을 조율하기 위해서 잠시 휴식을 갖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이처럼 정회가 예상보다 일찍 이뤄진 것은 양측이 가져온 실무절차합의서 안을 서로 교환한 뒤 상부의 의견을 들을 필요가 생겼기 때문인 것으로관측됐다. 한편 준비접촉 장소인 통일각에는 북측 기자 30여명이 미리 나와 취재에 열중.이들은 “오늘 어떻게든 잘돼야 하는데…”라며 회담성사 분위기를 탐지하기도 했다. 판문점 공동취재단
  • 故 엄익준 前국정원차장에 훈장

    정부는 7일 지난 3일 타계한 고(故) 엄익준(嚴翼駿) 전 국가정보원 2차장에게 국가발전을 위해 한평생을 바친 공로를 기리어 황조근정훈장을 추서했다. 이에 앞서 엄 전 차장의 영결식이 6일 오전 국정원 광장에서 임동원(林東源)국정원장,한광옥(韓光玉)청와대비서실장,천용택(千容宅)전 국정원장 등이참석한 가운데 국정원 장(葬)으로 거행됐다.고인의 유해는 대전 국립묘지에안장됐다. 임 원장은 영결사에서 “살을 도려내는 듯한 고통을 감내하면서 남북정상회담 성사에 매달리다 투병생활에 들어간 고인의 애국심은 공직자들의 사표가되고 있다”고 추모했다. 이도운기자 dawn@
  • 韓美주둔군 지위협정 실태와 과제/ 불평등 사례

    한국과 미국의 불평등한 주둔군지위협정(SOFA)을 전면 개정하라는 시민단체들의 목소리가 어느때보다 높다.지난달 술집여종업원 살인혐의로 기소됐다가재판 몇시간전 탈주한 크리스토퍼 매카시 상병 사건은 이런 국민여론에 기름을 부었다.늦어도 6월이면 열릴 양국의 SOFA 개정협상을 앞두고 협정의 실태,쟁점,외국 사례 등을 짚어본다. 지난해 발생한 주한미군 범죄 562건 가운데 우리 사법당국이 재판권을 행사한 범죄는 20건(3.8%)에 불과했다.미군기지 주변의 환경오염 문제도 잇따라제기됐지만 이를 법적으로 다룰 수 있는 근거는 전혀 없다. 불평등한 한미 주둔군지위협정(SOFA)의 각종 ‘독소조항’들이 도마 위에올랐다. SOFA는 91년 개정 이후 비교적 상호주의 정신을 지향하고 있지만 ‘합의의사록’과 ‘개정양해사항’이라는 2개의 부속문서에서 본협정의 효력을 크게제한하고 있어 전체적으로 불평등협정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미군 범죄에 대한 형사재판권의 제한,미군 기지내 한국인 노동자들의노동3권 제약,관세특혜,미군이 사용하는 시설물의 환경오염에 대한 무책임등이 대표적인 불평등 요소들로 지적되고 있다.지난달 살인피의자 매카시 상병이 재판직전 탈주했어도 한국 검·경이 속수무책이었던 점도 미군 범죄인의 신병 구금권이 우리에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미군 범죄자에 대해 우리의 재판권 행사 비율이 낮은 것은 SOFA 조항 중 형사재판권을 규정한 제22조의 독소조항 때문. 제22조는 ▲미 당국이 요청하면 한국이 재판권을 포기할 수 있고 ▲피의자가 미군 관할에 있을 경우 미군 당국이 구금하며 ▲한국에서 복역중인 미군범죄자에 대해서 미 당국이 미국에서 복역할 수 있도록 요청하면 한국측은‘호의적 고려’를 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또 미국 관리의 입회없이는 수사·재판이 불가능한 점,1심에서 무죄를 받거나 피고인이 항소하지 않으면 우리 검찰은 항소할 수 없는 점도 형사관할권을 지극히 제한하고 있는 독소조항으로 꼽힌다. 미군이나 미 군속이 사용하기 위해 들여오는 각종 물품에 대한 관세면제 조항도 개정대상이다.영외 유출을 통해 국내 시장을 교란시키는 요소로 작용할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이밖에 미군 기지내 한국인 노동자들의 쟁의행위를최소한 70일 동안 금지하는 등 미군과 계약을 맺은 국내 노동자들의 노동3권에 대한 지나친 제약,미군기지 주변 환경의 오염 등 노무,환경,검역 등에서 SOFA 관련조항의 불평등한 요소가 꾸준히 지적돼 왔다. 반면 일본,독일 등이 미국과 맺은 SOFA는 주둔국 권한이 상대적으로 크게규정돼 있다.일본은 영외에서 미군이 현행범으로 체포되면 미국측에 피의자의 신병을 인도하지 않아도 되고 독일은 교통사고 등 사소한 사건도 철저하게 관할권을 행사하고 있다. 한국외국어대 이장희(李長熙·법학) 교수는 “한미 SOFA가 오히려 한미 양국의 동반자적인 관계정립을 저해하는 만큼 미·일 SOFA,미·독 SOFA 수준으로 전면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홍환기자 stinger@. *金宗燮 SOFA 개정 국민행동 사무국장. “단지 조항 몇줄 고치자는 게 아닙니다.미국이 우리를 진정한 동반자로 여기는지의 문제입니다”. ‘불평등한 한미 주둔군 지위협정(SOFA) 개정 국민행동’의 김종섭(金宗燮·32) 사무국장은 40여년전 맺어진 SOFA는 국가 대 국가의 동등한 협정이 아니라 미국에 일방적으로 우월한 지위를 인정한 비정상적 ‘약속’이었다며미국의 과감한 개정결단을 촉구했다. ●SOFA 조항중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은. 모든 분야가 문제지만 형사재판 관할권과 기지 사용 문제가 가장 시급하다. 미군 피의자는 일본처럼 판결확정 전이라도 우리 검찰이 신병을 인수할 수있어야 한다.군 기지도 이제부터는 미군이 임대료를 내고 사용해야 하며 규모도 줄여야 한다. ●우리 사법체계 수준을 못미더워 해 미국측이 범인 신병인도를 거부한다는지적도 있다. 살인 등 중죄를 저지른 범인의 신병을 인수하지 못하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불합리하다.인권침해를 우려한다면 세부조항에서 면밀하게 보완장치를 마련하면 된다. ●우리 안보를 위해 주둔하고 있는 미군에게 임대료를 내라는 주장은 지나치다는 의견도 있다. 먹고 살만 하니까 은인(恩人)을 홀대하려는 게 아니다.한국은 2차대전 당시미국의 적대국이었던 독일과 일본보다도못하다. 일본처럼 ‘방위비 분담금’을 책정,우리 정부가 예산에서 지원하는 방법도있다. ●우리 정부에 할 말은. 주권회복과 양국간 호혜평등이라는 대의명분을 갖고 주도적으로 협상을 이끌었으면 한다. 김상연기자 carlos@. *개정 협상 어디까지 왔나. 한국과 미국의 불평등 기원(起源)이라고 비판받는 한·미 주둔군지위협정은1951년 체결된 이래 67년,91년 딱 두차례 부분 개정됐다. 그러나 미국이 일본과 독일 등 유럽국가들과 맺은 협정에 비해 심각한 주권침해 조항들이 많아 분쟁의 불씨가 되어왔다.대표적 예로 92년 이후 주한미군 범죄는 연평균 603건.하지만 우리 법원이 재판권을 행사한 경우는 연평균 21건으로 전체의 3.5%에 불과했다. 양국은 95년 충무로 미군병사 성추행 사건을 계기로 다시 개정협상 테이블에 앉았지만 7차례 입씨름만 주고받다가 96년 11월 미국측의 일방적인 결렬통보로 결실없이 끝냈다.8차회담은 남북회담 전인 5월말,6월초나 정상회담이후인 6월 하순쯤 열릴 것으로 관측된다. 이처럼 협상이 차일피일 늦어지는 것은 기득권을 확보한 미국측이 한사코재협상을 꺼리는 데다 열세에 놓인 우리 정부 역시 강력히 요구하지 못한 탓도 있다. 시민단체들이 최대 독소조항으로 꼽는 것은 우리 정부의 미군 신병인도 제한.현행 협정은 미군이 살인·강간 등 중대 범죄를 저질렀을 경우에도 형이확정될 때까지 미군 당국이 피의자를 계속 구금하도록 규정했다.이 때문에한국측은 미군 피의자 신병인도를 지금의 형 확정 시점에서 기소 시점으로앞당겨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미국은 신병인도 시기를 조정할 수는 있으나 대신 피의자 대질신문권은 인정해야 한다고 맞서는 중이다.미국측은 “일본은 6개월 이하의 징역형이 예상되는 범죄의 경우 관할권을 행사하지 않고 있다”며 6개월 이하 범죄는 관할권을 행사하지 말도록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밖에 한국은 노무·환경·검역 등 불평등 조항에 대해서도 재협상을 요구하고 있지만 미국은 난색을 표명하고 있다.정부 내에선 시급하고 개선이 필요한 부분에 역점을 두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지만 전면 개선을요구하는 시민단체들의 주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어 고심하고 있다. 오일만기자 oilman@. *주요국 주둔 미군지위 비교. 일본,독일,12개 나토조약국,호주,필리핀 등이 한·미 주둔군 지위협정(SOFA)과 마찬가지로 주둔군을 파견한 미국을 상대로 외국군대의 지위에 관한 협정을 맺고 있다. 협정은 국내문제 불간섭 및 상호평등의 원칙 등을 통해 상대적으로 우월한지위의 미군을 견제하고 자국의 주권보장을 꾀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이들 나라의 협정과 현재 개정을 위한 회담을 앞두고 있는 한·미협정중 형사재판권,환경관련 규정 등 쟁점들을 비교해 본다. ●일·미협정. 1960년 ‘일미 상호협력 및 안전보장조약’과 이 조약 6조에따라 ‘시설과 구역 및 미군의 지위에 관한 협정’ 등을 체결했다. 형사재판권에서 협정의 적용대상은 미군에 한정하고 있다.군속,가족에 이르기까지 형사재판권 행사를 허용하고 있는 한미협정과는 다른 점이다.한미협정에는 가족 범위에 ‘기타 친척’까지 포함하고 있어 규정자체도 모호하고범위도 넓다.일본의 경우 한미협정보다 미군 피의자에 대한 구금,체포권한이한층 강화돼있다. ●나토 및 독일보충협정. 미국과 영국,프랑스,이탈리아 등 12개 국은 51년 ‘주둔군의 지위에 관한 북대서양조약기구 체결국간의 협정’을 맺었다.체결국에 주둔하는 외국군대의법적지위를 규율하는 조약으로 출입국관리,과세 및관세면제,형사 및 민사관할권 등을 규정하고 있다.나토 및 독일보충협정은한마디로 상호주의 원칙을 준수한 평등조약으로 평가된다.한미협정이 합의의사록과 개정양해사항 등을 통해 본 협정상의 권리를 대폭 양보하거나 포기한 것과는 다르다.미군 및 군속,가족에 대한 모든 형사상 및 징계상의 관할권이 주둔국에 있는 것은 물론이다.‘환경’이란 용어가 들어간 조항조차 아예 없는 한미협정과는 달리 환경오염 제거비용의 부담,환경정보 공개 등 엄격한 환경 규정을 두고 있다. 노주석기자 joo@.
  • [외언내언] 고려의학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기대가 높은 가운데 북한은 최근‘고려의학’에 대한선전을 계속하고 있어 그 배경에 관심이 모아진다.북한은 고려의학의 탁월한우수성을 강조하는 가운데‘감자생즙’은 고혈압과 당뇨법 치료에 특효이며날마다 마시면 위와 담낭에 생긴 종기와 두드러기가 없어지고 무릎과 등의아픔도 해소된다며 위병을 앓던 60대 여성은 일주일만에 고쳤다고 소개했다. 북한이 최근 고려의학의 우수성을 새삼 강조하는 것은 현재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TV드라마‘허준’에 영향을 받은 의도적 선전으로 볼 수도 있다. 고려의학은 북한이 우리 전통민간요법을 체계화한 한의학 분야를 일컫는다. 북한은 한의학을 원래 동의보감을 모체로해서 동의학으로 불러왔으나 93년부터 민족주체성을 살린다는 취지아래 고려의학으로 고쳐 사용하고 있다.북한은 50년대부터 한의학을 정책적으로 육성하고 있어 한의학 분야에서는 상당부분 우리보다 앞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북한은 현재 간단한 외상치료에서난치병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전통의학인 고려의학을 활용하고 있으며임상치료 비중이 50%에 이르고 있다.이처럼 북한의 고려의학은 민간요법의치료효과를 과학적으로 해명하는데 크게 성공했다는 것이 공통된 지적이다. 고려의학이 갖는 높은 수준과 의학적 평가는 민간요법의 선구자로 자임하고있는 중국의 한의학계까지 그 성과를 인정하고 있어 고려의학에 대한 국제적 관심이 더욱 높아지는 추세다.90년부터는 의약품 해외수출도 하고 있어고려의학이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기회가 점차 많아지고 있다.실제로 세계보건기구(WHO)는 89년 북한의 동의학과학원을‘전통의학협동연구센터’로 지정했고 2만3,000여개의 전문용어를 설명한‘동의학사전’도 발간했다.북한자료에 의하면 위·십이지장궤양,골수염,담석증,백내장등의 질환은 수술없이 치료하는 단계에 이르렀으며 각종 종기류나 암까지도 고려의학적 치료법을 활용해 치료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지난3일부터 4일까지 평양 인민문화궁전에서 개최된 제2차 의학과학토론회에서는 고려의학과 신의학을 배합,개발한 새로운 진단치료방법과 약학부분에서 거둔 성과에 대한 수십건의 관련 논문도 발표됐다.특히 레이저와 반도체를 이용한 새로운 고려의학 치료기구를 개발하는 등 지금까지 한의학에서 한계상황으로 인식됐던 첨단의료 기술에까지 도전하고 있다.지난90년 우리 대한한의사협회가 북측에 남북전통의학 교류를 제의했지만 아직 성사되지못한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가 통일에 대비해 북한의 고려의학 성과를 적극 수용하는 것은 남북간에 전통의학의 공유와 활용이라는 측면에서매우 바람직한 일이 될 것이다.민족동질성 회복에도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장청수 논설위원
  • 오늘 南北회담 4차준비접촉 비료20만t 월말부터 北送

    남북 정상회담 4차 준비접촉이 8일 오전 10시 판문점 북측지역 ‘판문각’에서 열린다.남북은 이번 접촉에서 정상회담 실무절차 합의서의 미합의 내용에 대한 조율을 벌일 예정이어서 최종 타결여부가 주목된다. 접촉에선 의제의 표현방법,경협 등 정상회담에서 논의될 의제의 지속적인별도 협의 여부,생방송,합의서 타결에 앞선 경호·통신 등 세부실무 접촉 등이 쟁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양측은 준비접촉을 마무리한 뒤 10일쯤부터 판문점에서 경호·의전·통신등 세부 실무문제의 협의를 위한 실무자 접촉을 시작할 계획이다.또 2차례가량의 판문점 별도 접촉을 가진 뒤 분야별로 20여명 가량의 실무자를 평양현지로 파견,구체적인 협의를 벌일 예정이다. 합의서는 회담 형식을 비롯,왕래절차,대표단 규모,신변안전보장 등 14∼16항으로 구성될 전망이다.양측은 정상회담은 단독회담형식으로 두차례 이상갖고 항공 및 육로를 모두 이용하는 등의 내용에 합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정부는 북한에 20만t(640억원 어치)의 비료를 조건없이 지원하기로 했으며오는 5월 중순부터 6월 말까지 수송할 계획이라고 통일부 이관세(李寬世)대변인이 6일 발표했다. 이대변인은 “정부는 북한의 식량사정을 고려,인도적·동포애적 차원에서비료를 지원키로 했다”면서 “지원규모는 정부 재원과 북한의 부족량 등을고려해 20만t으로 하고,농작물 파종 시기 등을 감안,6월 말까지 수송을 완료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정부는 9일쯤 북측에 이같은 내용의 전화통지문을 보낼 방침이다. 지원비용은 통일부가 관리하는 남북협력기금에서 전액 충당하며,차관급 심의기구인 남북협력교류협의회가 대한적십자사에 위탁,농협으로부터 비료를 구매하는 형식을 취한다.비료 전달은 지난해처럼 서해 남포항과 해주항,동해흥남항과 청진항 등을 통해 선박으로 전달된다. 이석우 김상연기자 swlee@
  • [역사를 바꾼 정상회담] (5)브란트 슈토프 회담

    *70년 동·서독 정상회담. “직접 회담을 통해 양쪽의 심각한 견해차를 확인했다.에르푸르트는 시작일뿐이며 2차회담을 갖는 것 이상의 목표는 세우지 않았다” 1970년 3월19일 동독의 접경도시 에르푸르트에서 역사적인 동서독 정상회담을 가진 뒤 빌리 브란트 서독 수상이 서독으로 돌아와 가진 기자회견에서 던진 첫마디다.그는 이 자리에서 통일에 대한 환상없이 침착하게 긴장을 제거하고 협력의 가능성을 모색해 나가겠다며 ‘거짓된 희망’을 경고했다. 1945년 종전이후 25년만에 열린 정상회담은 긴장완화를 위한 대외적 여건변화를 동서독이 적극 활용했기 때문에 가능했다.1969년은 2차대전 종전후지속돼온 동서간 냉전구조에 처음으로 변화가 일어난 해였다.미국과 소련간전략무기감축조약(SALT I) 협상이 시작됐고 나토도 바르샤바조약기구에 상호균형감군협정을 제안했다.3월 동서화해를 추구해왔던 하이네만의 서독 대통령 취임,4월 서독의 ‘동독 국가승인’ 방침이 발표됐다.10월 ‘동방정책’을 제창한 빌리 브란트 총리의 사민당 연립정부가 출범했다.브란트 총리는취임연설에서 “서독 정부에 의한 동독의 국제법상 승인은 고려될 수 없지만독일에는 두개의 국가가 존재하며 둘은 외국이 아니라 특수한 관계에 있을뿐”이라고 밝혔다. ‘두개의 독일 인정 발언’은 동독을 소련의 위성국가로,‘비합법적’국가로 간주 동독을 승인하는 국가와는 외교관계 단절까지 불사하는 ‘할슈타인원칙’에 정면 배치되는 것이었다.야당은 즉각 반(反)통일노선,분단고착화,심지어 ‘매국행위’라며 비난했다.반면 동독은 두달 뒤인 12월 서독에 무력사용·위협 포기,외교관계 수립 등을 요구,정상회담의 계기를 마련했다. 브란트는 동독이 국제법상 승인을 요구하는 상황에서 어떤 대안을 제시하기보다 직접 동독총리를 만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판단, 70년 1월 빌리 슈토프 동독총리 앞으로 정상회담을 제의하는 서한을 전달했다.슈토프도 이에 즉각 합의했다.양측은 곧바로 실무접촉에 들어갔고 4차례의 실무접촉과정에서의제가 아닌 회담장소가 최대의 난제로 떠올랐다.서독은 브란트 총리가 서베를린을 거쳐 동베를린으로 가길 원했고 동독은 서독 정상의 베를린 장벽통과라는 상징성 때문에 이를 거부했다.결국 제3의 장소인 동독의 에르푸르트로합의했다. 3월19일 브란트가 탄 기차가 에르푸르트 역에 도착했을 때 수많은 동독 국민들이 열광적으로 그를 환영했다.숙소인 ‘에르푸르트 호프 호텔’까지 몰려와 환호하는 군중앞에 나서 이들을 진정시키던 브란트의 모습을 지켜보는수행원들 눈엔 눈물이 고였다. 회담장 밖의 분위기와는 달리 회담장안은 냉랭했다.동독은 군비감축, 유엔동시가입,국제법상 동등한 관계수립 등 7개항을 요구했다.서독은 동·서독은서로 외국이 아니며 양측의 선린우호관계의 제도화를 위해 노력한다등 6개항을 제시했다.양쪽은 각자의 입장만 확인한 뒤 5월21일 서독의 카셀에서 2차회담을 재개한다는 내용의 공동성명만 발표하고 헤어졌다.두달뒤 카셀 2차회담도 양쪽의 입장이 팽팽히 맞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1차때처럼공동성명도 발표하지 못했다. 가시적인 성과는 거두지 못했지만 정상회담을 계기로 양쪽은 공존의 필요성을 공감했다.실무접촉은 계속 돼 기본조약이 체결된 72년 12월21일까지 70여차례나 열렸다.73년 9월 유엔동시가입,74년 3월 상호대표부개설로 이어졌다. 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90년 10월 통일때까지 양독은 9차례의 정상회담을 가졌다.‘조금씩 가까워짐으로써 변화를 촉발한다’는 브란트의 접근이 결실을 맺었다. 김균미기자 kmkim@. . *브란트 당시 서독총리. 인류평화·공존 철학속에 동방정책을 싹틔운 빌리 브란트 전 서독 총리는옛 동서독인을 막론하고 ‘통일의 아버지’로 불리운다. 1913년 12월18일 북부 독일의 소도시 뤼베크의 노동자 가정에서 소비조합여점원의 사생아로 태어났다.사회당원인 외할아버지를 ‘아빠’라 부르며 성장한 그는 17세때 독일사회민주당 당원이 돼 반나치 청년운동에 가담했다. 히틀러 집권후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자 노르웨이로 망명,종전때까지 그곳에서 활동했다. 49년 연방의회 베를린 시의원으로 독일 정계에 입문한 뒤 15년만인 64년 당수로 선출된다.69년 자민당과 제휴,전후 최초의 사민당 정권을 창출하고 총리에 올라 ‘동방정책’을 밀고 나갔다.동서독 정상회담 개최등 공로로 71년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보좌관이 동독 스파이로 밝혀지면서 74년 총리직에서 물러났다.87년 사민당 당수직 사임으로 정계에서 물러난 그는 사회주의인터내셔널(SI) 의장직을 6회 연임하면서 국제정의 실현과 인권신장에 앞장섰다.92년 10월8일 운명했다. *슈토프 당시 동독총리. 빌리 브란트의 상대였던 빌리 슈토프 동독 총리는 1989년 거세게 전개됐던반정부 시위에 밀려 사임할 때까지 에리히 호네커 동독 공산당 서기장 치하의 마지막 총리로 일했다. 1914년 7월9일 베를린 출생인 그는 벽돌공과 기술자,건축설계사 등으로 일했다.그는 동독의 내무·국방장관 등을 비롯해 공산당과 행정부에서 요직을두루 역임했다.70년 1차 정상회담직후 브란트 서독 총리로부터 ‘확고하고경직된 견해를 가진 정치가로 다루기 매우 어려운 회담 상대’로 불리웠다. 89년 10월18일 호네커 실각으로 함께 사임했다.사임하고 이틀 뒤 여행규제가 풀리면서 동독인들의 대탈출극이 벌어졌다.독일이 통일된지 1년만인 91년 60년대 베를린 장벽과 국경을 넘어 서독으로 탈출하는 동독민들에 대한 사살명령을 내린 것과 관련된 혐의로 구속됐다.92년 이와 관련 재판을 받고 유죄판결을 받았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석방됐다. 독일 정부는 99년 4월19일 그의 사망소식을 발표했다.사망 원인은 공표되지 않았다. 김균미기자
  • 南北 회담형식·교통수단 합의

    남북한은 그동안 3차례의 정상회담 준비접촉에서 김대중(金大中) 대통령과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의 정상회담 형식과 김대통령의 방북 왕래수단에대해 합의한 것으로 5일 알려졌다. 특히 북측은 남측에 대해 필요하다면 두 정상의 단독회담을 2∼3차례 이상으로 더 가질 수 있다는 적극적인 태도를 확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 회담관계자는 “남북 양측은 준비접촉에서 두 정상이 두차례 이상의단독회담을 갖고 김대통령이 항공이나 육로 등으로 방북한다는 원칙에 의견일치를 보았으며 이에 대한 논의는 사실상 끝난 상태”라고 확인했다. 또 “양측은 회담 의제의 구체적인 표현방식과 취재단 규모 및 TV 생방송보도 등 5개 미만의 대목에서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면서 “8일 속개될 4차접촉에서 실무절차 합의서 타결은 가능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또 “북측이 김대통령을 비롯한 남측 대표단의 평양방문 이동수단으로 육로와 항공로 이용을 수용,자동차와 여객기 등 교통수단이 모두가능하다는 입장”이라고 덧붙였다. 남북 양측은 지난 3일의 3차접촉에서 실무절차 합의서 초안 제시 및 공동문안 정리를 통해 평양 정상회담에선 김대통령과 김국방위원장의 단독 정상회담을 적어도 2차례 이상 연다는 데는 원칙적인 합의가 이뤄졌다고 이 관계자는 지적했다. 한편 정부는 남북경제협력과 관련,북측에 대한 일방적인 시혜나 수혜 차원이 아닌,양측이 서로 이익을 추구하는 투자 및 협력확대 차원에서 접근한다는 방침을 갖고 있다. 또 정부는 북측에 비료 및 농자재,보건의료 약품 등 인도적 차원의 대북지원은 남북 경협과는 별도로 추진한다는 입장을 북측에 재확인할 입장인 것으로 전해졌다. 이석우기자 swlee@
  • [격동의 남북관계 반세기](2)7·4 남북공동성명

    지난 72년 7·4 남북공동성명은 남과 북 당국이 분단 이후 만들어낸 첫 공식 합의문서였다.공동성명을 통해 천명된 자주,평화,민족 대단결이라는 3개항은 이후 전개된 남북 대화와 합의의 기본원칙으로 자리잡았다. ◆시대적 배경/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계속된 동서진영의 냉전은 1970년대에접어들며 변화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해빙 분위기는 한반도에도 전해져남·북 당국은 대화의 필요성을 느끼게 됐다. 당시 남한의 박정희(朴正熙)대통령은 개헌을 통해 3선에 성공한 뒤였다.또북한의 김일성(金日成·당시 수상)주석은 김정일(金正日)로의 후계 구도를모색하고 있었다. 7·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된 뒤 남북은 다시 대화를 중단하고 대결의 상태로돌아갔으며, 남북 양측 지도자의 내부 독재가 공고화되었다.의도적이든 아니든,7·4남북공동성명이 결과적으로는 박정희 대통령의 장기집권과 김일성의김정일 후계 구도 확립에 이용됐다는 분석도 나온다. ◆추진 과정/ 1971년 11월20일 판문점에서 대한적십자사와 북한적십자사의 실무대표가 11차례에 걸쳐 비밀접촉을 했다.그 결과 이후락(李厚洛)중앙정보부장과 김영주 노동당 조직지도부장 간 회담이 합의됐다.이어 72년 5월2일부터 3박4일간 이중앙정보부장이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주석,김영주 조직지도부장과 각각 두차례 회담했다. 김영주를 대신한 박성철 제2부수상이 5월29일부터 서울을 방문,박정희 대통령과 한 차례,이후락 부장과 두차례의 회담을 가졌다.그 결과 7월4일 ‘7·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고,남북조절위원회가 발족됐다. ◆내용/ 7·4남북공동성명은 모두 7개항으로 구성돼 있다.제1항에서는 자주,평화,민족적 대단결이라는 조국통일원칙을,제2항에서는 긴장상태 완화와 신뢰 분위기 조성을,제3항에서는 제반교류 실시를 천명하고 있다.제4장에서는남북적십자회담 성사를 위한 협조,제5장에서는 상설직통전화 설치,제6장은남북조절위원회 구성,운영의 합의를 명시했고,제7장에서는 합의사항의 성실한 이행을 다짐했다. ◆이행/ 7·4남북공동성명은 남북한의 분단사를 통일사로 바꾸는 전환의 계기가 될 것으로 평가됐으나,발표되는 순간부터 성명문안에 대한 해석상의 의견차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양측은 통일 3원칙에 관한 해석상의 이견에도 불구하고 11월30일 각 5인의 대표로 구성되는 남북조절위원회 본회의를 정식으로 발족시켰다. 이에 따라 세차례에 걸쳐 남북조절위 본회의가 개최됐으나 73년 8월28일 북한이 중단을 일방 선언함으로써 아무런 성과없이 끝나고 말았다. 이도운기자 dawn@. *7·4 남북 공동성명 발표 당시 주역들 뭘하나. 7·4 남북 공동성명 발표 당시 남북의 주역들은 저마다 굴곡많은 삶의 궤적을 그려가고 있다. 공동성명의 막후 연출자였던 당시 남북의 정상들은 모두 유명을 달리했다. 박정희(朴正熙) 전대통령은 지난 79년 김재규 전중정부장의 총탄세례로 서거했다.북한의 김일성(金日成) 주석(합의 당시는 수상)도 지난 94년 심장마비로 근 반세기에 걸친 장기집권에 마침표를 찍었다. 남측 조절위원장으로 스포라이트를 받았던 이후락(李厚洛) 당시 중정부장은일체의 언론접촉도 피한 채 경기 광주에서 도자기를 구우며 은둔생활중이다.73년 ‘DJ(현 김대중대통령) 도쿄 납치극’ 배후조종 혐의로 해임당한 뒤한때 재기하기도 했으나 80년 ‘서울의 봄’ 이후 다시 추락했다. 조절위 북측 공동위원장이었던 김영주(金英柱) 노동당 조직지도부장은 한때후계 반열에도 올랐으나, 끝내 친조카인 현 김정일국방위원장에게 밀렸다.98년 김정일국방위원장이 공식 1인자에 등극하면서 2선으로 후퇴했다.최고인민회의 10기 제1차회의에서 신설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 명예부위원장이라는명목상의 감투만 쓰고 있다.김영주를 대리해 서울에 왔던 박성철 제2부수상도 명예부위원장이다. 지지부진한 남북적십자회담의 와중에 북한 차석대표 김덕현의 소맷자락을끌어 “따로 조용히 얘기하자”며 당국간 비밀회담을 이끌어냈던 정홍진씨도일선에서 물러났다.현재 송원장학재단이사장으로 육영사업에 힘을 쏟고 있다. 또 다른 조절위 남측 대표의 일원이었던 강인덕(康仁德) 당시 중정9국장은현재 일본에 체류중이다.‘국민의 정부’ 초대 통일부장관으로 대북 포용정책의 안정화에 기여했으나,부인이 옷로비사건에 휘말리면서 물러나 일본세이가쿠인(聖學院)대학에서 조용히 연구에만 몰두하고 있다. 공동성명 합의과정에 참여했던 북측의 대화 1세대들도 대부분 일선에서 퇴역한 상태다.이 중 노동당 조직지도부 부부장으로 대표단의 일원이었던 류장식은 정치범수용소에 수용된 이후 생사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조절위 북측대변인이었던 전금철(全今哲)만이 지난 98년 베이징 남북차관급 비료회담의북측 대표로 건재를 과시했었다. 구본영기자 kby7@. *재조명 받는 '통일 3대원칙'. 역사적인 정상회담을 앞두고 7·4공동성명에 발표된 ‘자주,평화,민족적 대단결’ 등 남북통일 3대원칙이 재조명받고 있다. 베이징 비공개 접촉에서 정상회담 개최에 합의하면서 꼬리표를 달았기 때문이다.즉 남과 북이 ‘역사적인 7·4공동성명에서 천명된 조국통일 3대원칙을재확인한다’고 합의한 것이다. 이에 앞서 91년 합의된 남북기본합의서 전문에도 3대 원칙이 언급됐다.그러나 남북이 항상 그 정신에 따라 관계개선에탄력을 붙여온 것은 아니다.3원칙에 대한 해석을 달리하면서 사사건건 대립한적이 더 많았다. 이는 3원칙 자체가 대단히 포괄적 개념이라는 점에 기인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평화통일을 위한 파트너이면서 동시에 체제경쟁의 대상이라는 남북관계의 이중성 때문이었다. 이를 테면 3원칙 중 ‘자주’에 대해서는 북측은 외세배격 논리로 연결시켜왔다. 즉 통일문제를 자주적으로 해결하자는 말은 북측은 이미 자주를 이뤘으니,이제 남한에서 미군을 철수해야 하다는 식으로 논리를 비약시켜 왔다. 북측이 이번 정상회담에서도 3대 원칙을 달리 해석,회담을 유리하게 이끄는 지렛대로 삼을 개연성이 적지 않다는 분석이다.그러나 통일부의 한 당국자는 “북한의 그러한 의도조차 타고넘어야 한다”고 말했다. 구본영기자
  • 남북정상회담 3차 준비접촉 표정

    3일 오전 10시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 3차 준비접촉은 1,2차 때와 달리 오후 1시 10분까지 오랜 시간 진행됐다.이 때문에 회담장 주위에선 한때 합의서 마련을 기대하는 전망이 나오기도 했으나 결국 오는 8일의 4차 접촉으로 최종타결을 미뤄 아쉬움을 남겼다. ■1시간여 만에 끝났던 1,2차 준비접촉 때와 달리 이날 회담은 3시간10분 동안 진행됐다.회담이 정오를 넘기자 취재진 사이에서는 한때 “합의서를 마무리하느라 시간이 걸리는 것 아니냐”는 기대감이 퍼졌다. 양측 대표들이 12시 20분부터 10분간 휴식을 취하며 상부와 의견조정을 한뒤 12시30분에 회담을 재개하기로 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이제 된 것 같다”는 낙관론과 “아직 절충 여지가 있는 것 아니냐”는 신중론이 엇갈리기도 했다. ■회담이 끝난 뒤 양측 대표들은 취재진을 위해 포즈를 취하는 등 애써 밝은표정을 지었으나 회담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은 듯 금세 어색한 표정으로 바뀌기도 했다.그러나 양측은 4차 접촉에서의 결실을 기약이라도 하듯 서로에대한 덕담을잊지 않았다.북측 김령성 단장은 남측 양영식(梁榮植) 수석대표의 손을 잡은 채 “양 선생은 원만한 대화상대”라고 치켜세웠고,양 대표는“김 단장은 신사 중의 신사”라고 화답했다. 평화의 집 현관으로 먼저 내려온 양 대표가 회담장을 떠나는 김 단장에게“수고하셨다”고 하자 김 단장은 “앞으로 잘 해보자”라고 인사한 뒤 북으로 출발했다. ■양 대표는 협상을 끝낸 뒤 가진 기자회견에서 “쌍방은 각기 제시한 회담개최안을 놓고 진지하게 조정작업을 벌였다”고만 언급하고 구체적인 논의내용에 대해서는 함구했다.“어떤 부분에 이견이 있었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도 양 대표는 “내용은 공개치 않기로 했으므로 밝히지 못하는 것을 양해해달라”고 말했다.양 대표가 4차 준비접촉 일정과 장소만 발표하자 회담장 주변에선 “상당한 진통이 있었던 것 같다”는 관측이 제기됐다. 양 대표는 1,2차 접촉 때와 달리 기자 3∼4명의 질문만 받은 뒤 서둘러 서울로 떠났다. ■이에 앞서 양 수석 등 남측 대표단은 1차 접촉 때보다 이른 오전 9시 20분쯤 평화의집에 도착,30분쯤 뒤에 나타난 김 단장 등 북측 대표들을 현관 앞까지 나가 마중했다.양 대표는 회담전망을 묻는 취재진의 질문에 “2차 접촉때까지 서로 이해와 협조로 열심히 토의해 왔다”며 “가능하면 합의서를타결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대답했다. 양측 수석대표는 회담 시작에 앞서 날씨와 숫자 ‘3’을 화제로 합의문 작성을 기대하는 덕담을 나눴다.양 대표는 “날씨가 봄의 교향악이 울려퍼질것처럼 화창하니 잘될 것 같다”고 말했다. 판문점 공동취재단
  • 남북 3차 준비접촉 전망

    정상회담 3차 준비접촉에서 남북은 실무절차 합의서 내용을 협의한다.가장큰 관심사는 3차 접촉에서 남북한 양측이 최종 합의서 작성에 도달할 수 있을지 여부다. 양측은 이미 지난 1·2차 접촉에서 “절차문제는 94년도 정상회담 실무절차 합의서를 준용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때문에 절차문제는 어렵지 않게 타결될 전망이다.그러나 몇가지 쟁점이 남아있다. 우선 의제 문제다.정상회담의 각종 절차를 규정하는 문서지만 남측은 두 정상이 만나 논의할 의제도 합의서상에 명기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특히 베를린선언의 4대 과제에 대해 구체적인 표기를 주장하고 있다.반면 북측은 신중한 태도를 보이며 원칙적인 입장을 강조하며 포괄적인 표현으로 대응하고 있다.남측이 구체적인 명기를 포기하면 쉽게 마무리될 수 있다.또 하나는 정상회담의 보도 및 통신에 관련된 문제다.첨단기기의 사용에 대한 합의여부다. 북측은 위성통신,인터넷 방송에 대해 준비가 안된 상태라면서 다소 주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관심을 모으고 있는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의 답방 등 정상회담의 정례화 문제는 명기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평양정상회담에서 논의될 전망이다.경협문제 등에 대한 별도 논의는 양측이 의견접근을 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타결이 예상된다.이를 제외한 ▲대표단의 구성및 규모 ▲회담형식 ▲체류일정 ▲편의보장 ▲선발대 파견 ▲왕래절차 ▲신변안전보장 등에 대해선 순조롭게 합의를 이뤄낼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전문가들은 의제와 관련,“남북은 ‘4·8정상회담 합의서’에 명시한 ‘민족의 화해·단합,교류와 협력,평화와 통일을 실현하는 문제’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선에서 마무리할 것”이라고 보고 있다. 이석우기자 swlee@. *정상회담 실무절차 합의서 마련후 일정. 정상회담 실무절차 합의서가 확정되면 남북 양측은 세부사항의 협의를 위한 별도 실무접촉에 들어간다. 별도 실무접촉은 크게 두가지 축으로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우선 행사진행을 위한 경호·의전·통신이며 다른 하나는 경제협력 문제 등 두 정상이 논의할 의제와 관련한 실무접촉이다. 정부 당국자들은“의제와 관련한 실무접촉 여부는 북측이 아직 우리측 제의에 대해 최종 입장을 전달하지 않았지만 별도 접촉이 가능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경호·의전·통신 등은 행사진행을 위해 실무 전문가 협의를 빼놓을 수 없다.양측은 합의서에 관련 실무전문가들의 접촉 일시와 방법 등을 구체적으로 명문화하게 된다.실무접촉은 일정상 다음주쯤부터는 시작돼야 한다. 이 분야의 실무접촉은 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어서 실무 관계자들은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지난 94년 남북은 준비접촉을통해 정상회담개최를 위한 실무절차 일정에 합의했었다.그러나 김일성(金日成)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실제 실무접촉은 이뤄지지 못했었다. 특히 경호·의전의 경우,시간별·분단위로 세분화해 준비해야 하므로 현장점검도 필요하다.판문점에서 해당 실무전문가들의 접촉으로 어느정도 계획이 마련되면 10여일 전쯤 실무자들이 평양 현지를 방문한다.현지점검은 빼놓을 수 없다.경호·의전 등은 청와대 관계자를 중심으로 진행될 전망이다. 통신문제와 관련,위성 생방송 TV장비인 SNG 이용문제에 합의하더라도 통신기반시설이 낙후된 북측에서 원활한 사용을 위해선 실무기술인력의 심도있는 접촉과 방북이 필요하고 이에 대한 논의가 이뤄지게 된다. 이석우기자
  • 오늘 정상회담 3차 준비접촉

    남북 정상회담 3차 준비접촉이 3일 오전 10시 판문점 남측지역 ‘평화의 집’에서 열린다.이번 접촉에서 남북은 정상회담 실무절차 합의서에 들어갈 내용을 놓고 협의를 벌일 예정이어서 최종 타결 여부가 주목된다. 양측은 준비접촉이 마무리되면 판문점에서 경호·의전·통신 등 실무문제협의를 위한 실무자 접촉을 시작할 계획이다. 합의서는 정상회담의 형식,대표단 규모,왕래절차 등을 명기하게 되며 15개항으로 구성될 전망이다.내용으로는 두 정상이 평양에서 2∼3차례의 단독회담을 가지며 취재기자 등 대표단 210명 이상의 규모로 결정될 수 있을 것으로보인다. 1·2차 접촉에서 양측은 지난 94년 정상회담 실무절차 합의서를 준용하기로 하는 등 합의서 초안에 대한 대체적인 윤곽을 정한 상태로 알려져 있다.그러나 의제 및 통신과 관련한 의견 조율 때문에 합의서 채택이 미뤄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합의서에는 실무자 접촉 및 선발대 파견일정,체류일정 등과 신변안전 보장각서의 교환 등이 명시된다. 이석우기자 swlee@
  • [역사를 바꾼 정상회담](4)사다트 베긴 회담

    *77년 이집트·이스라엘 정상회담. “20세기 가장 위대한 외교적 승리의 하나이자 역사적 이벤트였다.우리는전혀 새로운 평화에의 여정을 창조했다” 1977년 11월19일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의 이스라엘 방문에 외무장관으로 동행한 부트로스 부트로스-갈리 전 UN사무총장은 당시를 이같이 회상했다. 사다트의 이스라엘 방문 및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총리와의 만남으로 촉발된 화해 기류는 누구도 녹일 수 없을 듯하던 중동의 얼음장 하나를 쩍 갈랐다.양국 정상간 대면은 최초의 평화조약 체결로 이어져 중동평화 여정에 거대한 초석을 놓게 됐다. 애초에 사정은 결코 좋지 않았다.4차례 전쟁을 통해 국토를 강탈해간 이스라엘에 아랍권은 유혈투쟁을 불사해왔다.이집트 역시 67년 전투에서 이스라엘에 시나이반도를 뺏겼고 73년 이를 둘러싸고 또한차례 격전에 휘말리는 동안 감정이 상할대로 상해 있었다.설상가상으로 이스라엘에선 초강경 테러리스트 출신 베긴 정권의 탄생으로 세계가 경악했다. 그러나 한편 피비린내 가시지 않는 30년 무력충돌에 대한 넌더리가 중동 민중들 사이에 확산되고 있었다.국제사회의 압력도 날로 거세갔다.이스라엘은무력점령한 땅을 반환하라는 UN 결의안 242조를 마냥 무시할수 만은 없었으며 극도의 민생 피폐상에 시달려온 이집트에는 미국이 ‘평화분담금’ 명목으로 제시해온 경제원조가 절실했다.이 시점에서 사다트는 결단을 내렸다.77년 자국 의회에서 “중동평화를 위해서는 어디든 간다.이스라엘 의회까지라도”라고 연설,강한 평화의지를 피력한 것.여기에 이스라엘이 즉각 초청장을 보내 화답했다.그리고 사다트가 무조건 이를 수락함으로써 아랍지도자 최초의 역사적인 이스라엘 방문은 이뤄졌다. 이 자리에서 양국 정상은 3차례 회담에도 불구,평화조약이 아닌 “평화를원하며 대화를 계속하자” 정도의 원론적 합의성명서 한장을 달랑 내는데 그쳤다.30년간 반대편을 보고 달려온 양국간 입장 차는 클 수 밖에 없었다.베긴 총리는 평화보장을 전제로 한 시나이반도 반환은 받아들였으나 요르단강서안 등 팔레스타인 지위와 관련된 사항에는 한치도 양보할수 없다고 버텼다.양국은 향후 1년여를 무수한 중재회담으로 소모하고서도 접점을 찾지 못해미국의 개입을 불러들여야 했다.78년 9월 카터 미 대통령은 양국 정상을 캠프 데이비드로 불러 배수의 진을 친 상태에서 협상조율에 들어갔다.2주만인17일 천신만고 끝에 역사적인 합의문이 엮어져나왔다.골격은 ▲시나이 반도의 이집트 반환 및 이스라엘-이집트 수교 ▲5년내 요르단강 서안 및 가자지구에서 팔레스타인 자치 보장 원칙 등 크게 두가지였다.협정이 체결되기까지는 그후로도 반년이 흘러야 했다. 어렵사리 싹튼 중동평화였지만 부작용 역시 상상 이상이었다.양국 모두 국내의 거센 반발에 맞닥뜨렸으며 사다트는 동포를 버린 배신자로 아랍권에 낙인찍혀 리비아,시리아 등으로부터 단교당하기도 했다.미국을 불러들인 반쪽정상회담의 한계 등으로 팔레스타인인들의 실제 자치권 회복까지는 문서에약속된 몇배의 세월이 흘러야 했다. 그러나 이런 문제점들이 이스라엘-이집트 협정의 의미 자체를 희석할 수는없다.미국이 중도개입했으나 협상의 촉발점이 된 사다트의 예루살렘 방문이상당히 독자적 행보였다는 점에서 이는 중동문제를 자력으로 인식한 최초의사례가 아닐 수 없다.유대-아랍간 30년 적대관계를 청산한 이 회담이 없었다면 93년 오슬로협정,98년 와이리버협정 등 향후 중동평화의 모든 괄목할 만한 성과들도 나올 수 없었다.78년 사다트와 베긴은 그 공로로 나란히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그러나 81년 사다트는 과격파 총탄에 희생돼 중동평화의 첫 순교자가 됐다. 손정숙기자 jssohn@. *사다트 당시 이집트 대통령. 반식민,반봉건주의자에서 중동평화 개척자로.사다트 전 이집트 대통령의 일생은 드라마틱하기까지 하다. 1918년 영국 통치하 이집트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카이로 사관학교에 입교,정치 역정을 시작한다.영국 통치에 저항한 자란,터키 오토만 왕정을 무너뜨린 케멜 아타투르크,비폭력운동의 간디,그리고 히틀러로부터 영향을받았다. 38년 졸업과 함께 배치된 후방에서 후일 이집트 초대대통령이 된 아브델 나세르를 만나 정치적 동지가 된다.52년 나세르가 이끄는 비밀조직이 왕정을무너뜨리고 집권하자 그 밑에서 18년간 홍보장관,집권당 사무총장,국회의장,총리 등을 지내다 70년 나세르 사망으로 대통령직을 물려받았다. 72년 소련군 추방,73년 대 이스라엘 반격 등으로 외교적 성과를 쌓아가던중 77년 이스라엘과의 평화계획을 제시,전세계의 관심권 안으로 부상했다.그러나 이에 대한 내부 반발을 철권통치로 억누르다 81년 자국군 내부 회교원리주의자 총탄에 숨졌다. * 베긴 당시 이스라엘 총리. 중동평화의 또다른 축 메나헴 베긴 전 이스라엘 총리는 한때 시오니스트 무장단체를 이끌며 테러를 자행,목에 현상금이 걸렸던 인물. 1913년 옛 소련(지금의 벨라루시) 브레스트-리토브스크에서 목재상의 아들로 태어나 바르샤바 법대를 졸업했다.2차대전 홀로코스트에 부모형제를 잃은 뒤 과격분자로 변신,예루살렘의 영국군 사령부 숙소였던 한 호텔을 폭격,100여명을 사망케 해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혔다. 이스라엘 건국 이후 원내투쟁으로 선회,20여년간 극우 야당을 이끌다가 73년 리쿠드당을 창당했으며 77년 만인의 예상을 뒤엎고 총리로당선됐다. 그는 78년 캠프 데이비드 평화협정 체결로 중동에 평화를 부른 주역으로 각광을 받았지만 81년 이라크 핵수로 폭격,82년 레바논 침략 등으로 강경 이미지를 재확인시키며 국제사회에서 또다시 비난을 사기도 했다.그러나 83년 자진 은퇴한 뒤에는 92년 사망 때까지 정치를 등지고 칩거했다. 손정숙기자
  • 셔먼 美국무부자문관 내한 남북 정상회담 문제 논의

    웬디 셔먼 미국 국무부 자문관이 다음달 하순께 서울을 방문,우리 정부와남북정상회담을 둘러싼 문제를 논의할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의 한 고위관계자는 30일 “셔먼 자문관이 다음달 한국을 방문,남북정상회담의 성공적 개최를 위한 한·미간 입장을 조율할 예정”이라면서 “셔먼 자문관이 5월 중으로 예상되고 있는 평북 대관군 금창리 지하핵의혹 시설에 대한 미국측의 2차 현장조사와 관련한 사항도 우리 정부에 통보할 것으로예상된다”고 밝혔다. 이도운기자 dawn@
  • 3차 준비접촉 전망

    남북 정상회담 개최를 위한 합의서 작성이 가시화되고 있다. 6월 정상회담 개최일정상 다음주쯤에는 후속조치의 일정이 마무리되어야 한다.준비절차에 대한 합의서가 작성돼야 경호·통신·의전에 대한 별도의 실무협의가 후속조치로 진행되게 된다.관계자들이 평양의 회담현장을 답사한뒤 문제점을 북측관계자와 협의하는 시간도 필요하다. 오는 3일 3차 예비접촉 결과를 분야별로 전망해 본다. ◆정부 전망 정부 관계자들은 “지난 2차 접촉에서 절차와 관련해 합의서를작성할 정도로 의견 접근을 보았다”며 3차 접촉에서 마무리될 것으로 낙관하고 있다.“많은 부분에서 의견접근이 있었기 때문에 3차때 최종합의가 이뤄지지 않더라도 세부사항을 제외한 대략의 틀은 완성될 것”으로 보고 있다. 별도의 실무접촉이 필요한 경호·통신·의전 등은 정상회담 준비접촉 회의와 달리 남북한 관계자들의 접촉사례가 없었다.지난 94년도 정상회담 준비때에도 실무접촉 일정만 마련해 놓고 김일성(金日成)주석의 사망으로 실제의접촉은 이뤄지지 못했었다.그만큼 시간과 준비가 필요하다. ◆의서의 형식과 내용 정부 당국자들은 “의제도 절차합의서에 포함시킬계획”이라고 말하고 있다.남북 양측은 지난 94년 ‘정상회담 실무절차 합의서’를 준용한다는데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의제 항목을 추가,15개항정도가될 전망이다. ◆경협 논의 정부는 경호·의전·통신과 함께 경협을 별도 접촉에서 논의하자고 제의해 놓고 있다.보다 효율적으로 이 문제를 논의하자는 것이다.경협문제와 관련,정부는 사회간접시설건설과 농업협력 두가지를 구체적으로 제시한 상태다. 정부는 이 문제를 지난 1992년 남북이 합의한 ‘남북경제교류·협력공동위원회’의 틀속에서 논의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북측이 동의할 경우 경제공동위의 위원장을 맡고 있는 재경부차관이 대표가 될 수도 있다.정부는 별도의접촉이지만 현 준비접촉 대표단 접촉의 테두리안에서 진행될 수도 있다고 보고 있다. 이석우기자 swlee@
  • [오늘의 눈] 남북정상회담과 ‘주변 4강’

    남북정상회담 2차 준비접촉이 있던 27일 중국 외교부 지하 1층의 한·중 외무장관 회담장.중국 외교 사령탑인 탕자쉬안(唐家璇) 외교부장은 주위를 아연 긴장시키는 발언을 했다. 특유의 느릿한 목소리로 “남북한이 한반도 문제 해결에 있어서 주역이 돼야 하며 미국을 포함한 주변국가들은 조역 역할에 그쳐야 한다”고 강조한것이다.그동안 중국은 기회 있을 때마다 ‘당사자 해결원칙’을 강조했지만이날처럼 미국을 상대로 포문을 연 적은 한번도 없었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28일 러시아 푸틴 대통령당선자와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이 전화통화를 했다.그는 남북정상회담의 성공을 기원하면서 한·러 정상회담도제의했다.지난해 수동적인 자세로 한·러 정상회담을 수용한 것과는 사뭇 대조적이다.‘위대한 영광’을 꿈꾸는 러시아로서 ‘아웃 사이더’가 되지 않으려는 강렬한 의지가 느껴진다. 이처럼 중국과 러시아가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보이는 것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동북아 강자로 자리잡은 중국으로서 한반도에서의 미국의 영향력 확대를 더 이상 방관하지 않겠다는 결연한의지이며 한반도에서 주도권을 놓치지않겠다는 계산도 엿보인다.3시간 30분가량 진행된 한·중 외무회담에서 거의 1시간을 한반도 문제에 할애한 것도중국의 심중을 파악하는 단서다. 이처럼 한반도는 남북정상회담이란 전기를 맞으며 주변 4강들의 새로운 각축장으로 변모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북한을 앞세워 미국을 견제하려는 중국의 고공(高空)전략이나 남북한 신등거리 외교를 통한 러시아의 한반도복귀 움직임,미국을 앞세워 라이벌 중·러에 족쇄를 채우려는 일본의 세계전략이 한반도를 무대로 불꽃튀게 전개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탕 부장이 외무회담에서 표현한대로 남북정상회담은 ‘한반도 분단 반세기만의 대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회담 이후 예정대로 이산가족 찾기가 본격화되고 남북경협이 진행된다면 한반도 평화구축에 일대 전기가 마련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한반도 4강들이 치열하게 자신의 생존과 동북아 전략을 짜고 있는동안 우리는 남북정상회담이 주는 외양적인‘봄기운’에 취해 있지나 않은지 곰곰이 짚어볼 대목이다. 오일만 정치팀기자 oilman@
  • 정상회담 主의제 ‘이산가족’

    남북한은 이산가족문제를 6월 평양 정상회담의 주 의제로 한다는 데 의견접근을 봤으며 다음달 3일 3차 준비접촉의 합의서 작성에서 의제문제를 명기하기로 합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 당국자는 28일 “1·2차 준비접촉에서 양측은 의제에 대한 입장도 협의했으며 이산가족문제를 의제로 한다는 데 대해선 북측도 이의를 보이지 않은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면서 이같이 밝혔다. 박재규(朴在圭)통일부장관도 이날 “북한은 의제에 대해 포괄적 입장만을밝힌 상태지만 양측이 합의할 수 있는 구체적인 항목으로 가자는 데 접근하고 있다”며 다음 접촉에선 의제가 합의서 안에 명기될 수 있을 것임을 시사했다. 박 장관은 이날 이기호(李起浩)청와대 경제수석과 함께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총재 및 자민련 이한동(李漢東)총재를 방문,정상회담 준비접촉 상황을설명하면서 이같이 말했다. 통일부 당국자도 이날 “남북은 절차합의서에 의제도 포함시키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날 야당총재 방문에서 박 장관은 정부는 베를린선언의 4가지 과제인 한반도 평화정착,이산가족문제,경협,당국간 회담 상설화 등을 제의했으나 이에대해 북측은 구체적인 입장 대신 포괄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박 장관은 또 “북한측이 남북 정상회담을 2∼3차례 갖자는 입장”이라면서“주한미군 철수,국가보안법 개폐 등에 대해선 우리 입장을 확고하게 견지해 나가겠다”고 설명했다. 이석우기자 sw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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