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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최씨가 밝힌 정 총장 연행 재가과정

    ◎“최 대통령 전씨측 재가건의 완강 거부”/전씨에 “무슨 일을 이따위로 하나” 질책/불가피 했다는 점 남기려 시간도 명시 신현확 전 국무총리는 1일 법정 증언에서 12·12 당시 신군부가 정승화 육참총장을 연행한 것은 직속상관에 대한 하극상이라고 진술했다. 최규하 대통령이 정총장 연행을 재가할 때 신군부측의 협박이나 강압 분위기는 없었다고 밝혔다.최광수 대통령비서실장도 이를 시인했다. 신씨는 12월12일 하오 7시쯤 개각을 협의하기 위해 총리공관으로 갔다.최대통령으로부터 『조금 전에 전두환 합수본부장이 다녀갔는데 10·26사건 관련 혐의로 정총장을 연행해 조사하겠다며 재가를 요청해 국방부장관의 결재 없이는 재가할 수 없으니 절차를 밟아오라고 했다』고 말했다는 것.신총리는 『잘 하셨다』고 답변한 뒤 30분쯤 뒤 비서실 관계자로부터 『정총장이 연행됐다』는 보고를 들었다. 최대통령은 『무슨 일을 이 따위로 처리하느냐』며 전씨에게 화를 내며 질책했다.최대통령은 즉시 경위를 알아보라고 지시,총격전 사실을 알게됐다. 하오 9시30분쯤 전두환·유학성피고인 등이 2차로 재가를 요구했다. 최대통령은 『재가를 받기 전에 행동한 것은 위법이다.국방부 장관을 데려오라』고 재가를 재차 보류했다.신총리는 『집단적인 재가요청 행위는 있을 수 없고 예의에도 어긋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전씨 등이 돌아간 뒤 최대통령은 『이 친구들이 무슨 일을 그렇게 하는지 모르겠다.법을 무시하고 일을 처리하면 나라가 안된다고 걱정했다』고 털어놨다. 한편 최비서실장은 『2차 재가 요청시 장성들로부터 공관을 방문하겠다는 사전연락이 있었다』고 진술했다. 신총리는 13일 상오 2시30분쯤 노재현 국방장관과 통화,『총리공관으로 빨리 들어오라』고 지시한 뒤 상오 3시30분쯤 노국방부장관을 데리러 국방부로 갔다.국방부 건물은 유리창이 깨지는 등 총격전의 흔적이 역력했다.노 국방장관이 한참후 정총장 연행보고서(보안사가 작성한 것)를 들고 최대통령을 찾아왔다.그는 『더 큰 혼란을 예방하고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각하께서 재가해주시는 게 좋겠습니다』라고 건의했다.숙의 후 최대통령은 재가를 하며 「05:10 AM」이라고 명시하고 서명했다. 신씨는 재가 당시 최대통령과 함께 육본의 정식지휘계통이 와해된 사실을 몰랐다고 진술했다. 신씨는 5·17과 관련,『최대통령은 전군주요지휘관 회의에서 결정한 건의사항 중 비상기구 설치와 국회해산 문제를 사실상 거부했다』고 말했다. 최실장은 『최대통령이 5월18일 계엄군의 투입과 27일 광주재진입작전시 사전에 승인했었는지도 알 수 없으며 현지 지휘관이 판단할 일』이라고 밝혔다.그는 또 『80년 7월30일 하오 6시부터 5시간 동안 청와대 본관 1층에서 김정렬 전 국방부 장관(작고)이 최대통령와 요담했으나 하야를 설득했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고 진술했다.〈박선화 기자〉
  • 오늘 5·18 12차 공판

    12·12 및 5·18사건 12차 공판이 10일 상오 10시 서울지법 415호 대법정에서 서울지법 형사합의 30부(재판장 김영일 부장판사) 심리로 열려 전두환 피고인 등을 상대로 5·17 비상계엄확대조치 등에 대한 변호인 반대신문이 진행된다.〈박상렬 기자〉
  • “「5·17」최대통령 독자적 결단 국헌문란 내란행위아니다”/전씨

    ◎「12·12­5·18」 사건 11차공판 전두환 피고인은 지난 80년 5월17일 상오 10시 최규하대통령에게 보안사의 「시국수습 6개 방안」을 건의,최대통령이 비상계엄의 전국확대는 승인했으나 국회해산은 보류토록 지시했다고 주장했다. 5·17은 당시 시국상황을 인식한 최대통령이 독자적 결단에 따라 행한 정당한 국가행위라며 검찰이 주장한 국헌문란의 내란행위가 아니라고 반박했다.〈관련기사 20·21면〉 전피고인은 3일 서울지법 417호 대법정에서 형사 합의30부(재판장 김영일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12·12 및 5·18사건 11차 공판에서 이같이 진술했다. 전피고인은 변호인 반대신문에서 권정달피고인에게 시국수습 방안을 마련하라고 지시한 사실은 시인했으나,5·17 계엄확대는 당일 상오 최대통령에게 보고해 승인을 얻었으며 국무회의에서 통과될 때까지 혼자 알고 있었다고 밝혔다. 당일 낮 지휘관회의의 의결을 거쳐 저녁 신현확 총리와 주영복 국방부장관,이희성 참모총장이 최대통령에게 건의,승인을 얻은뒤 국무회의의 의결을 거쳐 시행됐다고 덧붙였다. 국보위 설치와 관련,79년 5월에 박정희 대통령에게 비상계엄시 행정과 사법업무를 함께 처리할 수 있는 비상기구의 설치를 이미 내락받았으며,5·17 이후 이에 따라 국보위를 설치했다고 주장했다. 전피고인은 『79년 12월13일 육참총장에 이희성 대장이 임명된 것은 평소 깐깐한 성품을 아는 최대통령이 13일 새벽 정승화 총장의 연행을 재가하며 노재현 국방장관에게 지시해 이뤄졌다』며 자신의 인사개입설을 부인했다. 이 날 재판에서는 12·12 사건과 관련,최세창·허화평·장세동·허삼수·신윤희·박종규피고인 등 6명에 대한 변호인의 반대신문이 있었으나,이들 모두는 검찰의 공소사실을 부인했다. 재판부는 오는 10일 상오 10시 5·17사건에 대한 12차 공판을 열기로 했다. 이어 13일에는 12·12사건에 관련된 13명의 피고인에 대한 증거조사를 진행하겠다고 밝혔다.〈박선화 기자〉
  • 전씨 “김재규 「혁명계획」 자백”/「12·12」 「5·18」공판

    ◎시해현장 정 총장 부른것도 계획적/변호인단 「야간재판 거부」 퇴정… 재판 중단 12·12 및 5·18 사건의 8차 공판이 20일 하오 상오 10시 서울지법 417호 대법정에서 형사 합의30부(재판장 김영일 부장판사) 심리로 열려 전두환 전 대통령에 대한 변호인단의 첫 반대 신문이 진행됐다. 공판은 3차례의 휴정을 거쳐 하오 8시40분 속개됐으나 전상석·석진강 변호사 등 변호인단이 밤 늦게까지 강행하는 것은 실체적 진실을 밝히는데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이유 등으로 신문을 거부하고 퇴정,하오 9시10분쯤 중단됐다. 재판부는 변호인단이 공판을 거부하자 앞으로 1주일에 2차례 공판을 열기로 결정했다.이에 따라 9차 공판은 오는 23일 상오 10시에 열린다. 전피고인은 『당시 정승화 육참총장의 연행은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에 연루됐다는 혐의가 있어 취해진 합법적인 조치였다』며 군사반란과 관련한 공소사실을 부인했다. 또 정총장은 계엄확대 회의에서도 김재규를 구명하기 위해 『박대통령의 서거는 불행이 아니며,체제가 잘못됐던 것』이라고 주장했다고 밝혔다. 김재규가 정총장을 시해현장에 참여시켰던 것은 3단계 혁명계획 가운데 첫 단계라고 자백했다고 진술했다. 신군부의 병력 출동에 대해서도 『장태완 수경사령관 등 정총장 계열의 육본 장성들이 대통령의 재가도 받지 않고 무장병력을 동원해 청와대를 포위하는 등 먼저 반란행위를 주도했기 때문』이라며 『장수경 사령관과 김진기 헌병감은 12·12 직후 수경사 병력을 동원해 최대통령을 총리공관에서 수경사로 납치하려는 음모를 꾸몄으나 무산됐다』고 주장했다. 이와 함께 『정총장은 박대통령 시해사건 수사 과정에서 최대통령을 철저히 조사하도록 군 검찰에 지시,당시 검찰관이 본인을 찾아와 정사령관의 지시를 전하고 협조를 요청했다』며 최대통령에 대한 조사가 합수부와는 무관하게 육본에 의해 이뤄졌다고 말했다. 변호인단은 반대신문에 앞서 「공소장변경요구와 재석명 요구서」를 통해 『내란죄 구성요건으로서 폭동은 비상계엄확대 선포로 종료된 것으로 봐야 한다』며 『검찰이 내란의 종료시점을 비상계엄이 해제될 때까지로연장한 것은 법리를 오해한 것』이라고 주장했다.〈황진선 기자〉
  • 「공소장 변경」 놓고 검찰­변호인 설전

    ◎변호인 “공소사실 모호하다” 답변거부/검찰선 “재판 고의지연 위한 전술” 반박 12·12 및 5·18사건의 6차공판에서 전두환피고인에 대한 검찰의 직접신문이 변호인단의 거센 공세로 무산됐다.앞으로의 재판이 순조롭지 않을 전망이다. 이날 하오 5시 재판이 속행되자마자 이양우 변호사는 『검찰의 석명서에는 비상계엄확대와 계엄군의 출동을 폭동·반란행위로 규정했음에도 이를 결정,공포한 최규하 정부도 반란정부인지의 여부와 내란목적살인죄의 범죄구성요건이 되는 피해자의 신원·장소·시간이 여전히 모호하다』고 반발했다. 그는 『공소사실이 석명되고 공소장이 변경될 때까지 답변을 거부하겠다』고 주장했다. 김영일 재판장은 『공소장은 합법적인 절차를 위장해 정권을 찬탈하려는 과정을 밝히려는 취지』라며 『사실심리를 하는 과정인데,먼저 판단을 구하는 것은 무리』라고 설득했다.검찰도 『판결의 범위에 속하는 부분에 대해 석명을 요청하는 것은 재판지연전술에 지나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하지만 전상석 변호사는 『공소장을 변경하지 않으면 재판을 받지 않겠다』며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20여분동안 논란이 계속되자 재판장은 『공소사실이 다소 부족한 것을 문제삼아 재판을 못하겠다는 것은 지나친 것』이라며,노기띤 목소리로 『이런 분위기에서는 더 이상 재판을 못하겠다』며 폐정을 선언했다. 이에 앞서 하오 2시30분 6차공판이 시작될 때부터 검찰과 변호인단은 1시간여동안 설전을 벌였다.전상석 변호사는 성명서를 통해 『지난 22일 퇴정한 것은 검찰의 신문이 피고인의 도덕성 흠집내기와 명예훼손으로 일관되고 일부 방청객이 변호인단에 인신공격을 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석진강 변호사는 미국의 O J 심슨재판 및 일본의 옴진리교재판을 예로 들며 『일방적인 재판을 피하기 위해 TV로 생중계하자』고 요구했다. 재판장은 『변호인단이 퇴정에 대한 사과를 위해 개인적으로 방문했을 때 법정에서의 일이니 법정에서 해명하라고 했다』며 『사과가 명쾌하지 않아 유감』이라고 꼬집었다. 이어 『공개재판은 규칙에 어긋나는 것이며,전직대통령 2명을 비롯해 국가고위직을지낸 피고인들의 재판을 공개하는 것은 우리의 정서와 법현실에 맞지 않는다』고 반대했다. 하지만 변호인단은 검찰이 준비한 석명서를 제출하자 『공소사실이 명확하지 않다』고 또다시 트집을 잡았다. 이에 재판장은 공소장변경을 검찰에 요구했고 검찰은 『변경의 필요을 느끼지 않는다』면서도 『다음 재판기일 때까지 공소장을 일부라도 바꾸겠다』고 양보했다. 이같은 변호인단의 지연전술에 검찰은 『신속한 재판을 위해 1주일에 2차례의 재판을 하고 밤늦게까지도 재판을 계속하자』고 재판부에 건의했다. 이날 검찰과 변호인단·재판부 3자간의 논쟁은 그동안 계속되온 법리논쟁의 흐름과 같은 맥락이다.검찰의 직접신문과 변호인 반대신문을 앞두고 주도권을 잡아보려는 변호인단의 책략이기도 하다.〈박상렬 기자〉
  • “군권 찬탈 시나리오 없었다”/「12·12 」3차공판

    ◎차규헌·장세동씨 등 공소사실 부인/“정 총장 연행 불가피” 강변/검찰/4차 공판땐 비상계엄 확대 등 신문 12·12 및 5·18 사건의 3차 공판이 서울지법 형사 합의30부(재판장 김영일 부장판사) 심리로 25일 상오 10시 서울지법 417호 대법정에서 열렸다. 검찰은 2차 공판까지 이미 신문을 끝낸 전두환 노태우 유학성 황영시 피고인을 뺀 나머지 거규헌 박준병 최세창 장세동 허화평 허삼수 이학봉 신윤희 박종규 피고인의 순으로 검찰의 직접신문을 했다. 장세동 피고인은 당시 육군본부측이 9공수 여단을 동원하려는 사실을 파악한 상태에서,이희성 중앙정보부장 서리로부터 전화가 오자 『육본측이 병력을 동원하지 말도록 해달라』고 부탁하지 않았느냐는 신문에 『우리도 (병력동원을) 안 할테니 9공수여단 등의 이동을 막아달라고 했다』고 말했다. 박준병 피고인도 『정승화 총장 연행사실을 안 직후 황영시 1군단장은 예하 30사단과 2기갑여단에, 노태우 9사단장은 예하 1개 연대에 병력을 출동하도록 지시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진솔,육본측의 병력동원을 막는 한편 신군부측은 병력을 동원했음을 시인했다. 장피고인은 그러나 『당시 노재현 국방부장관은 소재가 불분명했고, 장태완 수경사령관은 무모한 지휘를 자행하는 등 지휘명령 계통이 공백상태였다』며 병력동원이 불가피했다는 주장을 폈다. 허화평 피고인 등 이른바 「보안사 3인방」도 『정총장이 10·26사건에 깊숙히 연루된 혐의가 있어 연행이 불가피했으며,군권을 찬탈하기 위한 시나리오는 없었다』며 공소사실 부인 했다. 차규헌 피고인도 『최규하 대통령이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연행에 대한 재가를 2차례나 거부한 것이 아니냐』는 신문에 『최대통령이 노재현 국방장관이 배석해야 재가하겠다고 해,그런 줄만 알았다』고 주장했다. 재판부는 이 날 12·12사건에 대한 검찰신문을 모두 마무리,오는 4월1일 4차 공판부터는 5·17 비상계엄 확대조치와 국회해산 과정,5·18 내란 혐의 등을 심리할 방침이다.〈황진선 기자〉
  • 「12·12」 2차 공판­법정 이모저모

    ◎전씨 변명·부인으로 일관/국회증언까지 번복… 자신행위 정당화/당당한 자세 답변… 뉘우침 안보여/“당시 정부 실권 없어” 오만한 진술 쿠데타 세력들에 대한 법의 신문은 준엄했다.그러나 쿠데타의 주역은 여전히 변명과 궤변으로 일관했다. 18일 서울지법 417호 대법정에서 열린 12·12 및 5·18 사건의 2차 공판(재판장 김영일 형사수석부장판사)에서 12·12 쿠데타의 주역 전두환 피고인은 국회에서의 증언까지 번복하며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했다. 전 피고인은 『12·12는 정승화 총장의 연행과정에서 일어난 우발적 사건』이라고 주장하고 군 내부의 소장파 움직임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검찰은 지난 89년 12월31일 국회 5공청문회에서 전 피고인 자신이 12·12는 정총장의 연행과 군의 개혁을 위한 것이었다고 밝혔음을 지적했다. 전피고인은 『당시는 남이 써 준 것을 읽었을 뿐이고,이를 검토할 시간도 소명자료도 부족했다』며 『국민 여러분께는 죄송하지만 당시 국회 증언은 잘못된 것』이라고 떳떳하게 말했다.『이 법정에서의 증언도 번복하겠습니까』라는 검찰의 반문이 날카로웠다. 전 피고인은 여러차례 증언을 번복했다.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의 출국을 둘러싼 정승화 총장과의 갈등에 대해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검찰이 지난 12월3일 전 피고인이 안양교도소에서 『이후락을 둘러싼 정총장과의 갈등이 있었다』고 진술한 조서를 증거로 들이댔다. 그러자 전 피고인은 『단식 중이라 기력도 없고 피곤해서 수사검사를 빨리 돌려보내려고 말한 것이다』라고 부인했다. 검찰은 그 날이 구속 첫 날이었음을 상기시켰고,전 피고인은 『이후락은 잘 아는 사이이고,당시 답변은 잘못된 것』이라고 우겼다. 게다가 총장 연행과 관련한 재가에 관해서는 『대통령이 반드시 재가할 것으로 확신했다.안 할 수가 없다』『아는 사람끼리 저녁먹기 위해 (전방 부대 지휘관들이)서울에 오는 것은 출·퇴근과 같은 것이지,계엄하에서의 수소지역 이탈은 아니다』『당시 정부는 과도 정부로 실권이 없었다』는 등 군의 규율과 국헌에 대한 전씨의 오만했던 인식을 엿볼 수 있는 진술로 일관했다. 전 피고인은 자신의 행위를 필요에 따라서는 구국의 결단처럼 강변하고,때로는 단순한 해프닝으로 얼버무리면서 궁색하게 검찰의 추궁을 피하려 했다.〈박상렬 기자〉
  • 「12·12」 2차 공판­새로 밝혀진 사실

    ◎군권장악 이튿날 「6인위」서 군인사/한달전부터 군수뇌부 물갈이 은밀 논의/“「연행」 재가 안하면 혼란” 최 대통령 압박 12·12사건의 2차 공판에서 지금까지 드러나지 않았던 많은 새로운 사실들이 쏟아졌다. 12·12 거사일 결정은 79년 11월 말부터 황영시·유학성·노태우피고인 등이 연행 불가피성을 거론하자,전두환피고인이 12월6일 혼자서 결정한 것으로 밝혀졌다.전피고인은 『80년 3월3일을 대통령 취임일로 잡고 월남전에서도 4월4일을 작전일로 잡은 것처럼,두 숫자가 모이는 12월12일이 좋아서 정했다』고 말했다.전피고인은 거사일을 이처럼 정한 뒤 12월7일 노피고인과 합의하고 경복궁 참석자들에게 전파했다. 또 정승화 육참총장의 연행조사 문제를 가장 먼저 거론한 사람은 황피고인 것으로 드러났다.황피고인은 79년 11월24일 육본에서 열린 계엄확대 회의에 참석한 후 귀대하면서 전피고인을 만나 『정총장의 10·26 사태 이후 언동이나 미심쩍은 행적으로 보아 조사할 필요성이 있지 않느냐』며 항의조로 제안했다.전피고인은 이에 『적당한 시기에 정총장을 수사하겠다』고 응답했다. 최규하 대통령의 집단면담을 통해 재가를 받아내자고 주도한 사람도 황피고인이었다.12일 하오 7시쯤 전피고인이 최대통령으로부터 정총장 연행에 대한 재가를 받아내지 못하자,황피고인은 30경비단 모임에서 『함께 대통령을 면담해 조속한 결단을 촉구하자』고 부추겼다. 이들의 최대통령 집단 면담시 발언내용도 새롭다.유피고인이 『빨리 조치하지 않으면 혼란이 가중돼 전쟁이 초래된다』는 위기론을 들먹이자,최대통령은 『그래요? 조용한데 무슨 불상사요.잠잠하기만 한데』라며 재가를 거부했다. 최대통령이 정총장 연행 재가문서의 서명날인란 옆에 『05:10 AM』이라고 재가시간을 표기한 사실도 추가로 밝혀졌다. 최대통령은 『정총장 연행이 불법이라고 생각했으나 국방장관의 정식 결재절차를 거쳤기 때문에 고민 끝에 어쩔 수 없이 사후결재했다』며 『이 점을 기록하기 위해 결재시간을 적었다』고 신현확국무총리에게 술회했다. 10·26 직후 수사과정에서 청와대 김계원 비서실장 방 금고에서 발견된 9억원의 추후 사용처도 밝혀졌다.전피고인은 『이 돈을 박근혜씨에게 건넸으나 6억원을 제외한 3억원을 보내와 1억원은 수사비로 쓰고 나머지 2억원은 정총장에게 건넸다』고 말했다.전피고인은 『정총장에게 건넨 2억원의 행방은 모른다』며 『노국방장관에게도 5천만원을 건넸다』고 밝혔다. 전피고인 등 6인위원회가 군 고위인사를 단행한 것도 새로 밝혀진 사실이다.이희성피고인은 13일 상오 2시30분쯤 보안사령관실을 방문,전·유피고인에게 「누구 승인을 받고 계엄상황에서 위수지역을 이탈했느냐」고 꾸짖었다.이에 전피고인이 「육참총장 이희성」이라고 적힌 쪽지를 보여주었으며,유피고인은 이피고인을 다른 방으로 데려가 『이 난국을 수습할 사람은 당신밖에 없으니 총장을 맡아달라』고 회유했다.이피고인은 이 날 노국방장관으로부터 육참총장겸 계엄사령관 임명 사실을 통보받았다.이에 앞선 11월30일 김윤호 광주보병학교장은 전피고인을 보안사에서 만나 『참모총장 황영시,참모차장 전두환』등의 인사안을 개진한 점도 검찰 신문에서 드러났다.〈박홍기 기자〉
  • 신군부,「12·12」이전 최씨 신문/79년 12월1일

    ◎김재규 범행 방조여부 등 조사/검찰,작년 이학봉씨 조사서 밝혀내 최규하 전대통령이 박정희 전대통령 시해사건에 대한 내란방조혐의로 79년 12월1일 당시 신군부측으로부터 피의자 조사를 받은 사실이 16일 처음으로 밝혀졌다. 이같은 사실은 지난해 서울지검이 12·12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79년 당시 10·26사건 합동수사본부의 수사1국장이었던 이학봉전의원에 대한 피의자 신문조서에서 확인됐다. 지난해 6월8일과 8월3일 2차례에 걸쳐 작성된 이전의원의 피의자 신문조서는 각각 1백11쪽과 25쪽 분량으로 돼 있다.그러나 이 조서에는 최전대통령이 조사를 받은 장소 및 정황,조사방법에 관해서는 언급되지 않았다. 이전의원은 신문조서에서 『당시 국무총리로 대통령 권한대행이었던 최전대통령이 김재규의 범행을 방조한 의혹이 있어 합수부측에서 79년 12월1일 조사한 사실이 있다』면서 『그러나 최전대통령이 김재규가 범인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적극적으로 김재규를 도와주는 행동을 하지는 않은 것으로 드러나 시해사건의 방조범으로 처벌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전두환당 시보안사령관 등 신군부측이 당시 국정의 최고수행자였던 최전대통령을 상대로 피의자 조사를 했다는 사실은 신군부측의 정권탈취 음모가 79년 12월12일 정승화 당시계엄사령관을 연행하기 이전에 이미 수립돼 있었다는 점을 반증하는 것으로 주목된다. 당시 최전대통령은 대통령 권한대행으로서 김재규가 범인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체포지시를 비롯,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았고 오히려 사건 다음날인 10월27일 김재규에게 새벽4시에 계엄이 선포된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등 최고 통수권자로서의 책임을 저버렸다는 이유로 신군부측에 약점을 잡힌 것으로 알려져 왔다. 검찰은 지난해 10월29일 12·12수사결과를 발표하면서 최전대통령이 신군부측의 조사를 받은 사실을 공개하지 않고 전씨 등의 군사반란 혐의만 인정하고 기소유예처분 했었다. 한편 민주당의 강창성 의원은 지난 14일 『최전대통령은 지난 80년 3월12일 청와대 집무실에서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방조혐의로 4시간에 걸쳐 전두환 사령관과 이학봉 보안사대공처장으로부터 신문조사를 받았다』고 주장했었.
  • 「12·12전 최 전대통령 조사」 자료 내용

    ◎“김재규에 「계엄」 알려줘 내란방조” 추궁/“시해범 체포지시 왜 안했나” 압박­신군부/약점잡혀 정 총장 연행 재가→하야­최씨 최규하 전대통령이 12·12사건이 일어나기 12일전인 79년12월1일 신군부측에 의해 내란방조혐의로 처음 조사받았다는 사실은 최근 최전대통령의 「진술거부」와 관련,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지난해 6월과 8월 2차례 검찰에서 소환조사를 받은 이학봉 전의원의 피의자 신문조서내용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측의 정권탈취음모가 이때부터 이미 본격적으로 추진되고 있었음을 입증할 수 있는 중요한 기록으로 평가된다. 현직 대통령에 대한 사상 유례가 없는 피의자조사는 그 이후의 12·12 정승화 육참총장연행 재가강요,80년 4월14일 전보안사령관의 중앙정보부장 겸직발령 실현 등과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12·12사건의 실체와 그 성격을 확인시켜주는 것이다. 검찰은 전씨를 비롯한 핵심측근들의 내란죄 성립을 지난해 파악하고도 군사반란죄부분만 혐의를 인정한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특히 신문조서에서 신군부측은 최전대통령에게 시해범 김재규 체포를 지시하는 등 조치를 취하지 않고 오히려 다음 날 새벽 4시부로 계엄이 선포된다는 사실을 김재규에게 알려 주는 등 내란을 방조한데 대한 정치적·도의적 책임을 따진 것으로 기록돼 있다. 따라서 결정적인 약점을 잡힌 최전대통령이 이후 12월12일 정승화 육참총장의 연행재가와 5·17비상계엄확대 등 신군부측의 계속된 강압적 요구에 이끌려다니다 결국 하야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지금까지 신군부측이 최전대통령을 피의자신분으로 조사한 사실이 공개된 적은 한번도 없었다.검찰의 12·12 및 5·18사건발표에도 아예 언급되지 않았다. 그러나 12·12사건 재수사가 막바지에 이른 지난 14일 민주당 강창성의원이 『최전대통령은 80년3월12일 전 당시보안사령관·이 당시보안사대공처장겸 합수부 수사1국장에 의해 대통령집무실에서 박대통령시해사건의 방조혐의로 4시간동안 조사받았다』고 폭로했으나 근거를 대지는 못했다. 따라서 최전대통령의 조사를 직접 담당한 이학봉전의원에 대한 피의자신문조서의 공개로 강의원이 주장한 것보다 무려 석달전에 신군부가 최전대통령을 직접조사한 사실이 증명된 것이다. 그렇다면 검찰이 이같은 사실을 지난해 12·12사건조사당시 밝혀 놓고도 공개하지 않고 은폐한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추측이 엇갈린다.우선 당시 「조사의 한계」를 안고 있던 검찰이 이 사건을 불기소처분하기 위해서는 신군부측의 내란죄 입증에 결정적인 증거가 되는 최대통령조사사실을 숨길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검찰은 이같은 질문을 이학봉·장세동·유학성·허삼수·허화평씨 등 전씨의 핵심측근 5명에게 모두 던졌으나 이씨만 구체적으로 답변했을뿐 나머지 4명은 『모른다』고 잡아뗀 것으로 피의자신문조서에는 기록돼 있다. ◎최규하 전대통령 성명서 요지 친애하는 국민여려분.작금의 상황으로 말미암아 부득이 국민앞에 본인의 입장을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게된 것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88년 국회광주특위 이래 지난 7월 검찰에서의 12·12와 5·18고소·고발에 이르기까지 국회와 검찰에서는 본인에 대한 증인 또는 참고인 조사를 요구하였으며 본인은 그때마다 당국요구에 그대로 따르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해온 바 있습니다.보도를 통해 다 아시겠지만 이를 다시 요약하면 『대통령 재임중의 공적인 행위,즉 헌법과 법률이 부여한 책무에 따라 처리된 국정행위에 대해 일일이 조사를 받아야 한다면 국정은 소신대로 처리할 수 없으며 조사를 받는다는 것은 전례를 남기는 것이고 또 그러한 전례는 앞으로 세월이 흐름에 따라 정치적으로 이용될 소지마저 없지 않아 이러한 전례는 앞으로 수많이 탄생할 대통령들의 직무수행에 두고 두고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 예상되는 바 전직대통령으로서는 후임 대통령들에게 바람직하지 못한 전례를 남겨 부담을 줄 수 없다는 점과 비록 일시적 비난의 화살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국가의 정통성과 계속성을 유지함과 아울러 대통령직의 독립성을 지키는 것이 전직 대통령으로서 택해야 할 최소한의 덕목』이라고 생각하여 왔고 지금도 그 소신과원칙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이와 같은 소신 때문에 본인이 검찰에 직접 진술은 하지 않았으나 진실규명의 협조차원에서 여러 경로를 통해 진상이 알려지도록 노력한 바 있습니다.12·12사건 조사에 있어서도 그날 밤을 같이 지새며 공관접견실에서 사태에 대처한 국무총리와 재임시 보좌하던 분들이 이미 참고인 자격으로 대통령에 관한 사항까지 소상히 진술하였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5·17사태의 조사 경우에도 그동안 검찰은 본건과 관련하여 80년 당시 국무총리·관계장관·측근보좌관·각군 사령관·관계 공무원 및 기타 장병들에 이르기까지 필요한 참고인들의 진술을 청취하여 당시 상황이 파악되었으리라 생각됩니다. 10·26사건이라는 우리 역사상 유례없는 국가적 비극과 비상사태에서부터 1980년 여름에 이르는 격동기는 첨예한 남북간 군사적 대치상황 속에서의 안보문제의 심각성 뿐만 아니라 제2차 석유파동의 엄습에 의한 경제적 난국,극심한 사회혼란 등 참으로 예측불허의 국가적 위기였으며 본인과 정부는 이 일련의 위기상황을 극복하는데나름대로 혼신의 노력을 경주하였습니다. ◎검찰 2차방문 조사 시도 안팎/최씨 평소 생각 전달한 듯/최씨측근 전언/“금품수수설엔 진노” ○…서울 서교동 최규하씨의 사저에는 이날 하오 3시 28분쯤 김상희부장과 이문호검사 등 수사팀 3명이 도착,대기중이던 최흥순비서실장 등의 안내로 최씨를 2차 방문. 김부장과 이검사는 질문자료가 담긴 파란색 봉투를 들고 차에서 내려 미리 기다리고 있던 최비서실장과 악수를 나눈 뒤 『오랜만입니다』라고 짧게 인사말을 건네고 부속실로 직행. ○…최비서실장은 『최씨가 전두환씨로부터 1백75억원을 받았다는 민주당 강창성의원의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검찰수사가 끝나면 밝혀질 것인데 왜 미리 지레 짐작등을 하느냐』고 반문. 한 측근은 『이기창 변호사와 평소 친분관계가 있던 강의원이 서교동측에 아무런 통보도 없이 금품수수설을 제기해 어르신이 몹시 분노했다』면서 『명예훼손혐의로 소송을 제기키로 하는 등 법적대응을 신중히 검토한 것으로 안다』고 전언. ○…검찰수사팀이 2차 방문한지 1시간여만인 이날 4시30분쯤 최비서실장과 이검사가 최씨 집을 나와 검찰수사가 끝난 것이 아니냐는 분위기가 팽배.그러나 검찰조사가 이루어졌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최비서실장이 『아니야』라고 답해 검찰수사가 순조롭지 못함을 간접 시사. ○…최전대통령에 대한 2차 방문조사를 마친 검찰수사팀은 하오 4시50분쯤 최씨 집을 나서면서 『수사가 잘 됐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최씨는 검찰의 수사에 응했다.다만 질문내용에 대해서는 종전 입장과 같이 국민과 국익을 위해 아직 밝힐 단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답했다』면서 답변을 회피. 최씨 측근들은 기자들과의 전화통화에서 『최 전대통령이 검찰의 2차방문 조사에서는 나름대로 평소생각을 전달한 것 같다』고 전언,1차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로 조사가 진행됐음을 시사.
  • 검찰수사 「5·18」로 확대 안팎

    ◎「12·12 군사반란」 규명 마무리 정면/피의자 대부분 조사… 「상당한 진척」 관측/두 사건 연계… 핵심 주모자 구속 불가피 12·12수사가 마무리 국면으로 접어든 느낌이다.검찰은 11일부터 5·18당시 이희성 계엄사령관을 소환했다.12·12사건의 수사를 5·18로 확대했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검찰은 지난 3일 전두환씨를 구속하면서 지금까지 소환조사한 12·12사건 관련자는 전두환·노태우씨를 포함해 모두 37명이다. 이 가운데 20명은 12·12사건과 관련한 피고소·고발인이며 2명은 5·18사건의 피의자다.나머지 15명은 참고인이다. 12·12사건의 남은 조사 대상자인 장세동 수경사 30경비단장은 12일 소환될 예정이다.당시 공수여단장으로 국외 체류중인 박희도·장기오씨와 연락이 되지 않고 있는 최세창씨의 출두는 당분간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이지만 전체적인 수사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않을 전망이다. 또 아직 출두하지 않는 최규하 전대통령도 5·18사건과 병합조사가 불가피하기 때문에 당분간 절충이 더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검찰은12·12사건의 16년째이자 전씨의 첫번째 구속만기일인 12일까지 12·12사건 관련자를 대부분 소환·조사한 셈이다. 이러한 수사진척에 따라 검찰은 5·18수사를 진행하는 한편 소환조사의 결과를 분류·분석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이에 따라 검찰이 피의자들을 어떻게 사법처리할 것인지가 가장 큰 관심사의 하나다. 검찰의 당초 의지대로라면 피의자들은 대부분 반란죄 이외에도 내란죄의 적용을 받을 것은 분명하다. 12·12사건과 5·18사건을 하나의 사건으로 처리한다는 것이 검찰의 수사방향이기 때문이다. 현재 수사의 강도로 미루어볼 때 12·12사건의 핵심 주모자인 「경복궁 모임」 참가자와 「보안사팀」은 반란죄와 내란죄의 각 죄목을 적용받아 구속될 것이 불가피해보인다. 또 총장공관 점거,직속 상관 체포등을 주도한 피의자들도 구속을 면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현시점에서 관련자 모두를 구속할 지 선별처리할 지 등의 사법처리 수위를 예상하는 것은 쉽지않다.아직 5·18수사와 관련지어 최종 윤곽이 드러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또 두 사건이 동일한 사안이라면 구속자수도 함께 고려해야 하고 이는 정치적 조율도 필요로 하는 대목이다. 검찰은 공소시효 논란이 없는 전씨에 대해서는 구속만기일인 22일쯤 반란·내란죄를 적용해 기소한다는 방침이다.노씨도 이때 같은 죄목으로 추가기소될 것으로 보인다. 전씨 측근들이 법정에서 대결한다는 계획아래 검찰의 소환에 의외로 순순히 응하고 있어 22일쯤까지는 내란죄가 핵심사안인 5·18수사도 어느 정도 윤곽이 잡힐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대대로라면 전씨를 기소할 때 핵심주모자들도 함께 구속기소될 가능성도 많다. ◎12·12 관련 소환자의 당시 역할/정 총장 연행계획 수립 주도­이학봉씨/「비상계엄 확대」 군회의 주재­정영복씨/총리공관 경호대 무장해제­정동호씨/5·18때 광주에 군출동 지시­이희성씨 12·12 및 5·18사건과 관련,11일 검찰에 소환된 이학봉 당시 보안사 대공2과장 겸 합수부 수사1국장 등 6명은 군사반란에 주도적으로 참여했거나 「거사」에 적극 협력한 대가로 5공 때 출세가도를 달렸던 인물들이다. 이씨는 12·12사건 당일 전두환 합수본부장의 명령을 받아 허삼수보안사 인사처장과 함께 정승화 계엄사령관의 연행계획 수립을 주도,군사반란을 성공으로 이끈 1등 공신이다.그는 80년 5·17 당시에도 정치인·재야인사·학생 등 소요 배후조종 혐의자와 권력형 부정축재 혐의자의 검거대상 선정 및 검거까지 담당,신군부세력의 「집권 시나리오」를 설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5공 때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안기부 2차장 등을 역임하고 13대 민정당 공천으로 당선됐으나 89년 5공청산 때 직권남용 등의 혐의로 구속됐다가 집행유예로 석방됐다. 정동호 당시 청와대경호실장 직무대리는 12·12 당시 최규하 대통령의 집무실인 총리공관을 경비하던 육군 특별경호대의 무장을 강제로 해제하고 청와대경호실병력으로 대체,최대통령과 군수뇌부와의 접촉을 차단시킴으로써 역사의 방향을 바꾸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그는 86년 육군 참모차장 때 「국회 국방위 회식사건」으로 예편한 뒤 한국도로공사 사장을 거쳐 국회에 진출했으나 지난 93년 공직자 재산공개 때 부동산 투기혐의 등으로 민자당에서 제명처분을 받았다. 주영복 전국방장관은 12·12가 신군부측의 승리로 끝난 직후인 12월15일 공군참모총장에서 예편한 지 8개월만에 국방장관에 기용됐다.그는 5·17당시 소집된 전군 주요 지휘관회의를 주재하면서 비상계엄 확대조치를 통과시킨 후 이의 재가를 최전대통령에게 건의했다.내무장관·평통자문회의 수석부의장 등을 역임했다. 이희성 당시 중앙정보부장서리는 신군부측에 회유돼 12·12직후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에 임명됐다.그는 5·17비상계엄 확대조치와 5·18광주민주화운동 진압당시 병력출동 지시를 내렸다.교통부장관·주택공사이사장 등을 지냈다. 윤성민 당시 육군참모차장은 13일 새벽 신군부에 의해 군수뇌부들과 함께 보안사 서빙고분실로 끌려가 고초를 겪기도 했으나 곧바로 신군부측으로 전향했다.합참의장·국방장관·한국석유개발공사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김윤호 당시 육군보병학교장은 12일 밤 신군부측의 연락을 받고 급거 상경,신군부 대변인자격으로 13일 상오 글라이스틴 주한미국대사 등 미국 관리들과 접촉하고 다음 날 전합수본부장과 글라이스틴대사와의 회동을 주선했다.그는 12·12 직후 1군단장을 거쳐 1군사령관·합참의장·석탄공사 이사장·한국가스공사 이사장 등을 지냈다.
  • 「미완의 혁명」 4·19(새로 쓰는 한국현대사:47)

    ◎「3·15마산시위」로 촉발… 한국현대사의 분기점/「혁명」·「의거」·「민중항쟁」 등 시각따라 평가 달라 1960년 4월19일 국민은 자유당 독재정권에 저항해 분연히 일어서 일주일만에 이승만 대통령을 권좌에서 쫓아냈다.비록 1년여 뒤에 일어난 「5·16」군사쿠데타로 그 꿈은 좌절되지만 「4·19」가 민주주의를 추구해 온 한국 현대사에서 뚜렷한 분기점을 이루었다는 사실은 아무도 부인하지 않는다. 「4·19」는 「3·15」부정선거와 이에 따른 「3·15 마산시위」로 직접 촉발됐다.그러나 이와 관련된 학생시위는 2월28일 대구에서 처음 발생했다.학생들이 반정부시위를 벌인 것은 광복이후 처음이었다.28일은 민주당 장면 부통령후보가 대구유세를 가진 날로 일요일이다.집권세력은 학생들의 유세장 참석을 막으려고 일요일인데도 고교생들을 모두 등교시키기로 했다.명목은 학교에 따라 달랐다.경북고교는 학기말시험 일정을 이날로 앞당겼고 대구고교는 전교생이 토끼사냥을 한다고 했다. ○대구서 첫 반정부 시위 학생들은 반발했다.28일 등교한 경북고생 8백여명은 하오 1시5분쯤 교문을 나서 시내 중심가를 돌며 1시간50분동안 시위를 벌였고 대구고·경북여고 학생들도 뒤를 이었다.이날 학생 2백50여명이 연행되지만 정부는 시위학생 처벌이 민심에 어긋날까 염려해 그날로 모두 석방했다. 학생시위는 3월5일 서울에서 다시 불붙었다.장면후보가 서울운동장에서 정견발표를 마친 뒤 종로4가까지 카퍼레이드를 벌이자 학생이 대부분인 군중 1천여명이 뒤따랐다.퍼레이드를 끝낸 하오 5시10분쯤 시위가 시작됐다.경찰은 경찰봉을 휘두르는 한편 기마경찰을 동원,곧바로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이어 8일에는 대전에서,10일에는 수원과 충주,12일에는 부산·청주,13일 서울,14일에는 서울·부산·인천·포항에서 학생시위가 벌어지는등 자유당정권에 대한 저항은 전국 곳곳에서 자연스럽게 표출됐다. 제4대 정·부통령선거가 실시된 3월15일 무장경찰이 거리거리를 지키는 가운데 동이 텄다.당시 인구 15만 정도인 남녘의 항구도시 마산은 어느곳보다 시끄러운 아침을 맞았다.상오 7시 투표가 시작됐지만 민주당참관인은 대부분 투표소에 들어갈 수 없었다.자유당원,경찰,반공청년단등 친정부세력이 야당 참관인의 출입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불만은 시민들 속에서도 터져나왔다.많은 마산시민들이 투표용지조차 받지 못해 선거를 할 수 없었다. 시민들은 자연스레 오동동 민주당사무실로 모여들었다.상오 10시30분 민주당 마산시당은 스스로 「선거포기」를 선언했다.그날 저녁 민주당사 앞에 시민들이 몰려 있을 때 반공청년단원 10여명이 차를 타고 몰려와 마구 몽둥이질을 하고는 달아났다.분노한 시민·학생들은 시위대로 돌변했다.시위대가 남성동파출소 앞에 이르자 소방차에서 물벼락이 날아왔고 시위대는 돌을 던졌다.이윽고 총성이 터지면서 앞선 학생이 쓰러졌다.하오 8시쯤이었다.시위대는 일단 흩어졌지만 『경찰이 학생을 쏘아 죽였다』는 소식이 시내에 퍼지면서 격분한 시위대와 총을 쏘는 경찰간에 유혈충돌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다음날 마산시내에서는 일대 검거선풍이 불었다.경찰은 시위를 민주당 마산시당이 사전계획한 「폭동」으로 몰아붙이는 한편공산간첩이 개입됐다는 쪽으로 몰고갔다.이기붕 부통령당선자가 『총을 줄 때는 쏘라고 준 것』이라고 말해 문제가 된 것도 이 무렵이다. ○마산시위서 10명 희생 하지만 마산사건은 곧 정치쟁점으로 떠올랐다.민주당은 물론 국회와 대한변호사협회,심지어 자유당까지 자체 조사단을 파견해 진상을 조사했으며 검찰도 수사팀을 현지에 보냈다.경찰이 주머니에 불온삐라를 만들어 숨진 학생 주머니에 집어넣었다든지,북마산파출소 방화범을 조작한 사실들이 속속 드러나 3월26일 발포·고문 경찰관 5명이 구속됐다. 어느정도 분위기가 잦아들던 4월11일 김주열(당시 17세)군의 시신이 마산시청 뒤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발견됐다.전북 남원 태생인 김군은 마산상고 입학시험을 치르고 결과를 기다리는 중이었다.3월15일 밤 김군은 형과 함께 시위행렬에 가담했다가 행방불명됐다. 그 김군이 오른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참혹한 모습으로 바다에 떠오르자 다시 전국에 분노의 물결을 불러일으켰다.마산에서는 이날 저녁 시위대 3만여명이 시청·파출소·소방서등 공공기관을 습격했다.하오 9시30분쯤 마산경찰서 앞에서 경찰이 또다시 총을 쏘았다.1·2차 마산시위에서 희생된 사람은 모두 10명이었다. 전국에서 시위가 잇따른 가운데 4월18일 서울에서 고대생들이 시위에 나섬으로써 「4·19」에 불을 지핀다.18일 낮 교문을 나선 고대생 3천여명은 경찰의 저지를 뚫고 태평로 국회(현 서울시의회)앞까지 진출했다.학생들은 도로에 연좌해 『3·15 부정선거를 철회하라』며 농성을 벌였다.시청·광화문등 주변에는 시민·고교생등 1만여명이 모여 이들을 격려했다.고대생들이 유진오 총장의 설득으로 4시간 반만에 농성을 풀고 학교로 돌아가는 도중 동대문시장 앞에서 정치깡패 이정재 일당이 이들을 습격했다. 고대생들이 깡패들에게 당한 사실이 보도된 4월19일 아침 서울은 분노로 들끓었다.서울대를 비롯한 10여 대학 학생들이 상오중 시위에 들어갔고 고교생들이 뒤를 이었다.시위군중은 순식간에 10만명을 넘어서 하오1시40분쯤 경무대(현 청와대)앞 저지선에 다다랐다.경찰의 일제 사격에 군중은 잠시 흩어졌지만 수는 더욱불어났다.정부는 바로 계엄을 선포했다. ○이승만 하야로 새 국면 이어 정국은 숨가쁘게 돌아갔다.21일 국무위원 일괄 사퇴를 시작으로 23일 임기가 남은 장면부통령이 사임했다.24일에는 이기붕이 일체의 공직에서 사퇴한다고 발표했다.25일 하오 3백여 대학교수들이 「이승만하야」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자 이승만은 26일 드디어 하야성명을 냈다.제1공화국은 이로써 막을 내렸다.「4·19」전기간에 걸쳐 전국에서 1백86명이 숨지고 6천여명이 부상했다. 「4·19」는 혁명인가,의거인가,아니면 민중항쟁인가.발생 35년이 지났지만 「4·19」에 대한 평가는 아직 분명하게 내려지지 않았다.따라서 「4·19」를 부르는 이름도 「4월혁명」「학생의거」「4월민중항쟁」등 다양하다.독재정권을 무너뜨렸다는 의미에서 혁명이라고 주장하는 한쪽에선 학생들이 주도해 우연히 일어난데다 실제 이룬 것이 없다고 보아 의거라고 해석한다.또 「4·19」가 반독재투쟁을 거쳐 「반외세 민족통일」을 제기했다고 비중을 두는 쪽은 「민중항쟁」이라는 주장을 편다. 이처럼시각이 엇갈리는 까닭은 「4·19」가 지금도 우리 사회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당대의 큰 사건이기 때문이다.결국 「4·19」는 어느 시점까지 미완의 혁명으로 남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4·19」엿새 뒤인 25일 하오 서울시내에서 「이승만 하야」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는 대학교수들.이승만이 다음날 하야를 발표함으로써 제1공화국은 막을 내린다. ◎미 CIA 「한국정세 보고서」/미 “장면정권 2년이상 못 버틴다” 예측/군사쿠데타 발생가능성엔 회의적/“서방과의 연대는 지속할 것” 전망 우리의 현대사에서 「4·19」와 「5·16」으로 이어지는 60년대 초는 격동의 시기였다.독재를 거부한 국민의지가 열매를 맺는가 싶더니 1년여만에 군사쿠데타로 뒤집혔다.미국은 이 무렵 한국 상황을 어떻게 판단했을까.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은 최근 비밀해제된 미국 정부문서 가운데 중앙정보국(CIA)이 작성한 「한국 정세에 관한 예상 보고서」를 발굴했다.1960년 11월22일자로 된 이 보고서는 이후 몇년동안 전개될 한국의 정치상황을 내다본 것이다. CIA는 먼저장면정권이 2년이상 버티기 힘들 것으로 전망했다.국회에서 다소 우위에 있긴 하지만 당면한 숱한 문제를 제대로 풀지 못하리라고 보았다.또 60년 3∼4월에 활동을 개시한 「혁명세력」도 아직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따라서 정치적 균형이 새로 정착되기 전에 지도력의 변화와 세력 재배치가 있을 것이며,이러한 변동은 보수정당 우위에서 얼마간 벗어나 사회주의 세력의 신장을 가져오리라고 예측했다. 보고서는 이어 『서울정부가 대중의 열망에 부응하지 못하면 불안한 상태가 유지돼 권위적,또는 혁명적 지도자들에게 이용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그러나 군사쿠데타 가능성에 대해서는 『한국 내 상황이 두드러지게 악화돼야만 군부가 민간정권을 대체하려 들 것』이라고 분석한 뒤 『현재로선 쿠데타가 발생하지 않으리라고 확신한다』고 밝혔다. 보고서는 한국인들이 공산주의자들의 침략 방어와 경제력 유지를 위해 미국등 서방과 연대해야 한다는 국민적 합의를 이어갈 것으로 자신했다.그러면서도 ▲민족주의 감정 대두 ▲통일에 대한 열망 ▲냉전체제 아래 한국의 허약한 위상에 대한 분개심등이 중립주의에 대한 관심을 높일 것이라고 풀이했다. 이밖에 장면정부가 일본과 적극적으로 새로운 접촉을 시도하고 있지만 한일관계가 정상화되기까지는 수많은 장애물이 있으며,특히 『한국 대중의 새롭고 약간은 과민한 민족적 자존심이 이를 복잡하게 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4·19」와 「5·16」이라는 역사적 사건의 중간시점에서 작성된 미 CIA 보고서는 미국의 한국에 대한 정책 결정에 활용됐다는 점에서 가치가 뛰어난 자료이다. □특별취재반 ▲황규호 문화부부국장급 ▲이용원 〃 차장 ▲김성호 〃 기자 ▲김영중 조사부 〃
  • 「12·12 핵심부분」 접근하는 검찰

    ◎「반란」 매듭단계… 「내란」 입증에 박차/「보안사팀」 곧 소환… 「사전계획」유무 규명/「대통령에 협박」 최규하씨 증언에 승부 검찰이 최규하 전대통령에 대한 출두통보와 함께 12·12사건 재수사가 점차 핵심부인 내란죄 입증으로 줄달음치고 있다. 검찰은 유학성씨 등에 이어 8일에도 차규헌·김진영씨등 경복궁모임의 핵심대상자에 대한 조사를 실시한 데 이어 다음주부터는 내란죄를 입증하기 위해 최전대통령과 이른바 보안사팀에 대한 수사를 실시할 계획이다. 검찰의 이번 12·12 및 5·18 재수사가 신군부측의 반란죄에 그친 지난해 수사와는 달리 내란죄까지 규명하는 데 최종목적을 두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따라서 검찰의 재수사가 핵심부로 진입하고 있다는 것은 반란죄에 이어 내란죄를 입증할 핵심당사자들에 대한 조사도 의미한다. 반란죄의 핵심조사대상자는 이미 소환되고 있는 「경복궁모임」 참가자들이고 내란죄의 핵심조사대상자란 대통령 재가시 협박여부를 증언해줄 최전대통령과 정권창출을 위한 장기계획의 실존여부를 확인해줄 이른바 「보안사팀」이다. 지난 5일부터 8일까지 「경복궁모임」에 대한 핵심인물인 유학성·차규헌·김진영씨등에 이어 조만간 장세동·박희도씨등 나머지 핵심인물에 대한 조사를 끝내면 「경복궁모임」을 중심으로 한 반란행위 수사는 일단락된다. 검찰은 반란죄→내란죄라는 수사순서에 따라 내주부터는 내란죄을 입증할 핵심인물인 최전대통령과 「보안사팀」에 대한 직접조사에 들어간다. 반란죄 조사에서 전두환씨에 대한 조사가 먼저였듯이 이번에도 7일 전씨에 대한 2차조사가 내란죄 수사의 신호탄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보안사팀」은 당시 보안사령관 비서실장 허화평,보안사 인사처장겸 합수부 조정통제국장 허삼수,보안사 대공2과장겸 합수부 수사1국장 이학봉,보안사 정보처장 권정달 등을 지칭하는 것으로 세간에는 이들이 12·12사건은 물론 5공화국을 탄생시키는 장기계획을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이들에 대한 조사에서 장기계획여부를 확인하고 최전대통령에 대한 조사에서 강압여부를 확인할 수 있으면 내란죄을입증할 수 있다. 참모총장에 대한 강제연행과 무단병력동원이 군의 명령계통을 전면부인한 반란죄라면 대통령에 대한 강압은 국정을 무시한 내란죄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검찰은 「보안사팀」에 대한 수사에는 별다른 기대를 걸 수 없는 형편이다. 조사대상자 가운데 허화평·허삼수씨는 소환조사가 쉽지 않은 현역 국회의원신분인데다 소환조사를 한다 하더라도 이들이 장기계획여부에 관해 부인할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이 때문에 수사기법에만 국한시킨다면 이번 검찰수사의 최대승부처는 최전대통령에 대한 직접조사다. 대통령에 대한 강압여부를 논란의 여지 없이 가장 정확하게 증명해줄 유일한 사람이 바로 최전대통령 자신뿐이기 때문이다.그러나 최전대통령측은 『일방적인 과거부정의 상황에서는 진실규명이 어렵다』는 등의 이유로 조사를 계속 회피하고 있어 검찰은 속앓이를 하고 있다. ◎12·12관련 소환자의 당시 역할/「정총장연행 재가」 강요­차규헌씨/육본 수뇌부 무장해제­신윤희씨/「경복궁 모임」 참여 핵심­김진영씨/병력 출동… 중앙청 점거­구창회씨 12·12사건과 관련,8일 검찰에 소환된 5명의 참고인 가운데 차규헌 당시 수도군단장은 거사를 모의한 「경복궁모임」의 핵심 멤버.사건 당일인 12일 하오 9시30분 최규하 전대통령이 정승화 계엄사령관 연행에 대해 재가를 거부하자 전두환 합수본부장·유학성 국방부 군수차관보·황영시 1군단장 등과 함께 대통령관저인 총리공관을 찾아가 최전대통령에게 재가를 강요했다.그는 최전대통령이 재가를 거부하자 경복궁의 30경비단으로 돌아와 병력을 동원,육군 지휘계통을 제압하기로 결의했다.차씨는 거사가 성공한 뒤 군사령관을 거쳐 대장으로 예편했다.국보위 위원과 교통부장관(86∼88년)을 지냈으나 골프장 내인가관련 뇌물수수로 89년 구속됐다가 91년 형집행정지로 석방됐다. 김진영 당시 33경비단장은 장세동 30경비단장과 함께 대령급으로 경복궁모임에 참여한 전씨의 핵심측근.5·6공 때 정치군인의 대표격으로 꼽혔으며 수방사령관·교육사령관·한미연합사 부사령관 등을 거쳐 육군 참모총장에 올랐다가 문민정부 출범 직후인 지난 93년 3월 하나회 숙정 「1호」로 전역조치됐다. 신윤희 당시 수경사 헌병단부단장은 지난 4일 소환,조사를 받은 조홍 당시 헌병단장과 함께 「거사」다음날인 13일 상오 3시40분 수경사 사령관실에 진입,하소곤육본 작전참모부장에게 총격을 가해 부상을 입히고 육본 수뇌부의 무장을 해제시킨 뒤 윤성민 육군 참모차장과 장태완 수경사령관,문홍구 합참 대간첩본부장 등을 보안사 서빙고분실로 연행했다.신씨는 수방사 헌병단장을 거쳐 헌병감에 올랐다가 4년전 예편했다. 구창회 9사단 참모장은 노태우 당시 9사단장의 지시로 13일 상오 1시30분 전방에 주둔하던 9사단 29연대 병력을 출동시켜 중앙청을 점거하고 신군부 반대진영의 병력동원을 저지했다.노씨의 군맥인 「9·9인맥」의 핵심인 구씨는 6공 때 수방사령관과 보안사령관을 역임했다. 이날 소환된 5명 가운데 이건영 당시 3군사령관은 장태완 수경사령관,정병주 특전사령관 등과 함께 전두환씨 등 신군부측의 군사반란에 대항해 병력을 동원,저지하려다 80년 강제예편된 피해자측인물이다.그는 한국마사회장을 거쳐 14대 총선 때 국민당 전국구 의원으로 진출했다가 신한국당으로 옮겼다.
  • 정승화씨 등 5명 환문/최 전 대통령에 금명 출석요구서

    ◎검찰 「12·12」 수사/전씨 2차 출장조사 12·12 및 5·18특별수사본부(본부장 이종찬 서울지검3차장)는 7일 12·12사건 당시 육군참모총장겸 계엄사령관이었던 정승화씨와 정씨의 경호대장 김인선씨 등 5명을 소환,조사했다. ○오늘 차규헌씨 소환 한편 수사본부는 12·12사건 당시 경복궁 모임에 참여했던 차규헌 수도군단장 등 5명을 8일중 소환,조사하기로 했다. 또 최규하 전대통령에 대해 금명 출석요구서를 발송키로 했다. 이날 검찰에 소환된 사람은 정총장과 김인선씨 외에 당시 박준병 20사단장의 참모장 노충현씨,노재현 국방부장관의 부관인 배상기씨,보안사 서빙고 분실장 한길성씨 등이다. 이와 함께 김상희 부장검사 등 수사팀 3명은 이날 하오 2시부터 10시간 가까이 안양교도소에 수감된 전두환 전대통령에 대한 2차 출장조사를 실시했다. 검찰은 전전대통령을 상대로 12·12 때 정전총장을 강제 연행한 경위와 5·18사건을 거쳐 12대 대통령으로 취임하기까지 일련의 과정에서 이른바 「집권시나리오」가 있었는지 등에 대해집중 추궁했다. 전전대통령은 이날 조사에서 『정계엄사령관의 연행은 10·26사건과 연루됐다는 새로운 사실을 적발,조사하기 위한 것』이라고 서면답변서에 담겼던 내용을 거듭 주장했으며 군사반란 혐의도 부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정전총장을 상대로 12·12 직전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동해경비사령관으로 전출시키려했는지와 한남동 공관에서 보안사로 연행된 과정,공관에서의 총격전 등을 조사했다. 검찰은 또 당시 보안사 서빙고 분실장 한씨에 대해서는 정전총장의 연행 장소로 서빙고 분실을 택한 경위와 정전총장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협박했는 지 등을 조사했다. 당시 20사단장 참모장 노씨에 대해서는 20사단의 병력의 이동여부,국방부장관 부관 배씨에 대해서는 노전장관이 정전총장의 연행 승인과정에서 강압을 받았는지를 신문했다. 검찰은 이와 함께 당시 하소곤 육본작전참모부장의 보좌관이었던 김광해씨(예비역 중령)가 정계엄사령관에 대한 최규하 대통령의 사후재가 과정에서 신군부측이 권총으로 위협하는 광경을 최모대위가 목격했다고 진술한 것과 관련,최씨의 신병확보에 나섰다.
  • 3백여항목 미묘한 사안마다 함구/전씨 구속­검찰 신문 내용

    ◎“정승화 총장 10·26가담 증거있나” “…”/“중앙청·육군본부 점경 지시했나” “…” 3일 안양교도소에 수감된 전두환 전대통령은 특별수사부의 김상희 주임검사로부터 12·12사건에관해 집중적인 신문을 받았다.김검사는 이날 상오11시35분부터 밤늦게까지 전씨를 끈질기게 추궁했다. 전씨 신문내용을 검찰의 브리핑등을 토대로 재구성해본다.전씨는 수사당시 제출했던 서면답변서의 답변내용을 반복하거나 미묘한 사안에 대해서는 묵비권행사로 일관한 것으로 알려졌다.이날 3백50여개 신문항목은 12·12사건에 국한됐으며 편의상 이를 12·12사건 전개의 시간대별로 정리한다. 김검사=12·12 당일 경복궁 30경비단에 노태우9사단장 등 8명을 모이도록 지시한 사실이 있습니까. 전씨=당시 국가위기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김=사전에 참석자들에게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연행계획을 알려주었습니까. 전=노씨뿐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김=검찰조사결과 노씨이외의 참석자들이 사전에 모두 정승화씨 연행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고 일부는 피의자에게 직접 들었다고 진술했는데 사실입니까. 전=모릅니다. 김=이 모임을 알리는데 사전에 결정된 암호명을 사용했다는데 사실입니까. 전=모릅니다. 김=참석자들은 「하나회」회원으로 평소 시국이나 군내부 제로 자주 모임을 가졌다는데 사실입니까. 전=「하나회」는 친목단체였을 뿐입니다. 김=정승화씨를 연행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전=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수사상 불가피했습니다. 김=당시 합수부측은 군최고책임자였던 정씨가 사건발생장소 부근에 있었고 계엄사령관이 된 이후 합수부의 수사에 비협조적이었다는 이유만으로 내란방조혐의를 주장했지만 살해사건에 가담했다는 정확한 증거가 있었습니까. 전=…. 김=정씨의 혐의가 분명하고 연행이 불가피했다면 왜 사전에 대통령의 재가를 얻지 않았습니까. 전=당시 상황이 사전 재가를 얻을 여유가 없었습니다. 김=조사에 따르면 대통령에게 건의하러 가기 30분쯤전인 하오6시쯤 이미 허삼수·우경윤대령 등 보안사 수사관과 수경사 30헌병대 헌병 60여명이 보안사에 집결,하오6시50분에 연행을 위해 출동했는데 결국 사전재가를 얻지 않고 행동한 것 아닙니까. 전=…. 김=참모총장공관에 도착한 수사관들이 일방적으로 재가를 얻었다며 총장을 연행하려 했는데 이를 사전에 지시했습니까. 전=연행하도록만 지시했습니다. 김=공관경비를 담당하고 있던 이재천수행부관 등에게 총기를 발사,사상자가 났는데 사전에 발포를 명령한 바 있습니까. 전=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김=최규하 대통령의 재가를 모든 상황이 끝난 뒤인 새벽 5시쯤 받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전=대통령이 노재현 국방장관의 배석을 지시했기 때문입니다. 김=하오9시30분쯤 2차 재가요청시 유학성 국방부군수차관보·황영시1군단장 등 5명의 장성들과 함께 간 이유는 무엇입니까. 전=국방장관의 소재파악보다 대통령의 재가를 호소하자는 의견을 모았기 때문입니다. 김=최대통령의 재가를 얻는 과정에서 협박하거나 위압적인 분위기를 조성한 것으로 드러났는데 맞습니까. 전=재가를 건의했을 뿐입니다. 김=재가요청시 무장을 하고 있었습니까. 전=아닙니다.김=정승화씨 연행당시 대통령의 재가를 얻는 과정에서 제1공수여단 등 군병력동원을 지시했습니까. 전=우발적인 충돌결과였습니다. 김=윤성민 참모차장등 육군참모진이 임의로 육본지휘부를 수경사로 이동,장태완 수경사령관의 무력반발에 동조하고 정병주 특전사령관·이건영 3군사령관 등 정총장계열이 독자적인 군사행동을 강행했다고 주장하는데 당시 참모총장의 연행이나 해임에 대한 국가원수의 재가가 없는 상황에서 임의연행한 것에 대해 육본참모진이 경계태세를 갖춘 것은 정당한 행동이 아니었다는 것입니까. 전=…. 김=이날 공수여단,9사단 29연대 등을 동원해 중앙청과 육군본부 등을 점령하고 육군수뇌부와 수경사령관을 체포하라고 지시한 것이 사실입니까. 전=아는바 없습니다.
  • “전씨 사법처리 속전속결” 신호/검찰 「오늘 출두요구」의 배경

    ◎“피의자” 규정… 조사뒤 즉각 구속 가능성/“관련자 재소환 조사 물꼬트기” 분석도 검찰이 12·12 및 5·18 전면재수사에 착수한지 이틀만인 1일 전두환 전대통령을 2일 소환하겠다고 전격적으로 발표함으로써 「속전속결식」수사의지를 보이고 있다. 검찰은 특히 내일 소환되는 전전대통령의 신분에 대해 「피의자」라고 규정,소환조사 즉시 구속될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아 주목된다. 이종찬 수사본부장은 구속가능성도 있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아직 말할 수 없다』고 답변했다.그러나 『조사할 분량이 상당히 많다』고 부연설명해 구속영장을 청구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밤샘조사를 받을 것임을 시사했다. 노태우 전대통령이 검찰에 불려 나왔을 때도 소환 첫날 구속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최소한 3차례 정도의 소환조사가 이어질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2번째 소환에서 노씨가 구속되자 놀라워 하는 분위기였다. 따라서 검찰이 올해안으로 전씨를 어떤 방식으로든 조사할 것이라는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소환통보를 한 이상 구속으로 향하는 「사법처리일정」이 더욱 단축될 가능성이 크다.다만 노씨의 예에 비춰 전씨도 최소한 2차례 이상의 소환조사를 받을 것이라는 전망이 조심스럽게 점쳐지고 있을 뿐이다. 이와 함께 전씨에 대한 전격소환은 노씨를 구속수사한 경험이 검찰에 자신감을 불어넣어준 때문이라는 분석과 함께 「실체적 진실」을 밝히는데 거칠 것이 없다는 검찰의 수사의지도 만만치 않음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문제는 전씨가 검찰소환에 불응할 경우다.『불응하면 진행상황에 따라 결정하겠다』고 신중한 반응을 보였지만 이 경우에 대비한 대책도 이미 충분히 세워 놓은 것으로 보인다. 우선 강제구인방안을 생각할 수 있다.검찰은 지난 12·12사건 당시의 수사기록을 상당히 검토했으며 전씨의 진술이 고소·고발인 및 피해자들의 진술과 상치되는 부분이 많았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어 이같은 가능성을 강력하게 뒷받침하고 있다. 검찰은 처음부터 전씨를 조사해야 모든 꼬인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전씨 조사를 통해 32명의 12·12관련자의 재소환 조사 및 사법처리문제도 자연스럽게 풀릴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는 것이다. 전씨가 소환을 거부할 경우 관련자들을 우선 소환해 방증자료를 더 수집하는 방안도 있으나 현재의 검찰분위기와 검찰수뇌부의 이번 사건에 대한 의지에 비추어 채택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분석이다. 그러나 이날 이본부장은 전·노 두전직대통령이외에 나머지 핵심관련자들의 사법처리를 가름하는 5·18 재수사착수여부와 관련,『수사기법상의 문제이며 다음에 말하겠다』고 답변을 피해 검찰이 「공소시효의 벽」에 부딪혀 고민하고 있음을 엿보게 했다. 현행법상 사법처리는 12·12쿠데타가 완료된 79년 12월 13일이 공소시효의 기산점으로 적용되지만 대통령재임기간의 공소시효 중단으로 15년의 공소시효가 남아있는 사람은 전·노 두전대통령 뿐이다.그러나 두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12·12사건 공범 32명의 공소시효는 이미 종료됐다는 내부결론이 검찰을 괴롭히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12·12­5·18 재수사 쟁점/정승화 육참총장 강제연행 규명­12·12/보안사 집권 시나리오 실체 추궁­5·18 검찰이 전두환 전대통령을 상대로 조사하게 될 12·12와 5·18사건을 쟁점별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2·12◁ ◇우발적 또는 계획적인가 여부=경복궁 30경비단에 집결한 장성들은 지휘부를 형성해 집단으로 대통령의 재가를 요구할 것을 결정했다.쿠데타를 반대할 우려가 있는 주요 지휘관들을 연희동 요정으로 유인,그들의 병력 동원을 저지시켰다.12월13일 새벽 최규하 대통령이 재가하기 전에 이미 이희성 중앙정보부장서리에게 육군 참모총장직을 제의하고 합동수사본부측 장성들을 군 요직에 중용하는 인사안을 제시한 것은 군의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목적이 있었음을 증명한다. ◇정승화 계엄사령관의 강제연행=전두환 전대통령측은 거사 당일 하오 7시10분쯤 허삼수 우경윤 성환옥등 보안사 수사관 7명과 수경사 33헌병대 병력 60여명을 한남동 총장공관으로 보내정총장에게 동행을 요청,거부당하자 정총장을 M16소총으로 위협하며 강제 연행했다.군사법경찰관이 수사권을 발동할 때는 형사절차법상 필요한 절차를 밟는 것은 물론 군통수권과 정상적인 군 지휘계통을 문란시키지 않도록 필요한 조치를 동시에 취해야 한다.따라서 대통령이나 국방부장관의 사전 재가 또는 승인 없이 비상계엄하에서 사실상 최고 실력자라고 할 수 있는 계엄사령관인 정총장을 강제 연행한 것은 직속 상관에 대한 하극상임은 물론 군 통수권을 침해한 것으로 판단된다. ▷5·18◁ ◇보안사 집권시나리오의 실체=80년 3월부터 세간에 나돌기 시작한 보안사의 집권 시나리오 실체여부는 신군부측의 집권의도와 내란혐의 규명을 위한 중요한 단서이나 신군부측은 이를 전면 부인하고 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중앙정보부장 겸직=80년 3월 전씨의 중정부장 겸직은 최규하 전대통령의 인사발령에 의한 것이기는 하나 국내외 정보와 중앙정보부의 예산을 장악,신군부의 영향력을 정계에까지 미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5·17 비상계엄 확대조치=대통령과 국무위원들을 배제한 채 전씨가 직무상 관련이 없는 보안사 참모들에게 지시해 입안하게 한 다음,이를 전군 주요 지휘관회의에서 군 지휘관들이 결의하는 형식으로 추진했다. ◇정치인 및 재야 인사들의 활동 금지조치=기성 정치인들과 재야인사들을 체포·연행·구금한 조치는 향후 정국운용에 방해가 되는 인물들을 사전에 제거,경쟁자없이 권좌에 오르게 된 기반이 됐다. ◇임시국회 무산=국회의 계엄해제 결의를 차단하는데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가보위 비상대책위원회의 기획 및 설치=대통령이나 국방장관,계엄사령관이 배제된 채 보안사 참모들이 기획해 전씨 주도로 설치됐다.전씨는 국보위 상임위원장에 취임,사실상 내각을 조정,통제하는 권한을 행사했다. ◇최규하 전대통령의 하야=최 전대통령이 자의로 사퇴한 것으로 발표됐으나 최씨의 전술거부와 신군부측의 강압 부인 등으로 진상이 규명되지 않고 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계엄상황을 이용,정국을 주도하고자 한 신군부측이 학생·시민들의 계엄해제 등 민주화 요구를 수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단호한 진압만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으로 판단,강경진압과 증원으로 사태를 수습함으로써 엄청난 비극을 초래했다.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사전 계획된 증거는 없으나 상당한 정치적 판단에 따라 단행됐다는 게 지배적인 관측이다.
  • 여·야 관망세 돌입… 「2회전」 물밑준비/비자금 공방 일단 휴전

    ◎민자당의 전략/“「20억원이상 수수」 의혹제기 성과” 판단/“국빈 앞에서 추악한 모습 보여서야…” 공세중단 민자당이 14일 국민회의 김대중 총재에 대한 융단폭격을 잠시 멈추었다.폭격기의 조종을 맡은 강삼재 사무총장이 입을 닫기 시작한 것이다.전투 포기가 아니라 상대방의 응전방향을 지켜보고 2차 공격의 높낮이를 조절하겠다는,즉 휴식 내지는 관망 차원이다. 이날 국민회의측이 대여 전면전을 거듭 확인하고 거칠게 몰아붙였지만 민자당은 크게 괘념치 않았다.손학규 대변인의 논평이 반응의 전부였다.그나마 DJ(김대중 총재)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손대변인은 『극한 투쟁을 선동해 국민들을 불안하게 하는 것은 공당의 자세가 아니다』라고 점잖게 나무라는 선에서 그쳤다.그러면서 『여야 모두 차분한 자세로 검찰 수사에 협조하자』고 당부했다. 이같은 변화는 예고된 것이었다.그동안 DJ를 향해 독설을 퍼부으며 공격했던 강총장이 이미 밝힌 바 있다.강총장은 12일과 13일 『할말은 모두 했으니 일단 저쪽의 태도를 지켜보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관망기에 돌입할 것임을 내비쳤다. 민자당은 이러한 자제움직임에 대해 『국빈을 모신 상황에서…』라고 표면적인 이유를 내세우고 있다.손대변인은 『중국 국가원수가 처음으로 방한한 상황에서 정쟁을 일삼고 추악한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다』고 밝혔다. 김윤환 대표위원은 『강택민 중국국가주석의 일정에 따르고 비자금 문제는 하루 쉬자』고 했고,강총장은 『더 이상 코멘트 하지 않겠다』고 국민회의와의 대결을 피했다.하지만 내부적으로 치밀한 수순아래 진행되는,즉 고도의 정치적인 판단이 깔려있는 색채가 짙다.무엇보다 DJ에 대한 대응을 놓고 나름대로 역할분담을 한 것 같다.김대표는 「당당하고 떳떳한 자세」라는 원칙론을 강조하는 선에서 머무르고,강총장이 DJ에게 직접 폭격하는 「악역」을 맡은 것으로 비쳐지는 것이다. 민자당은 1차전이 상당한 성과를 거둔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특히 김대중총재가 20억원 말고 심한 타격을 입은 것에 대체적으로 만족한다는 게 내부적인 평가다.김대중총재가 20억원 말고 더 많은 돈을노태우 전대통령으로부터 받아놓고도 숨기고 있다는 국민적 의혹을 증폭시켜 놓았기 때문이다. 또 김대중총재의 「카운터파트」가 강총장이 됨으로써 강총장의 위상이 상대적으로 격상됐다기보다는 김총재가 역으로 내려간 것으로 보고 고무된 표정이다.이로써 국민회의측에 넘어간 듯 하던 비자금정국을 둘러싼 주도권도 조금은 회복하는데 성공했다고 받아들이고 있다. 하지만 「비자금 공방」을 놓고 민자당 내부의 자성론도 만만치 않다.서로 상대방을 헐뜯는 양상으로 번지면서 「추악한 싸움」으로 비쳐지는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들이 나온다.매일 같은 목소리로 DJ를 몰아붙일 수도 없는 형편이다. ◎국민회의 대응/“대선자금 증언” 흘려 세공세 차단 주력/「DJ는 희생양」 부각으로 상처치유도 노려 전날 여권과 한바탕 「기싸움」을 벌인 DJ(국민회의 김대중 총재)의 대여공세가 가파른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다.14일 당 외곽조직인 「민주연합청년동지회」 정기총회에 참석,『여권이 김대중죽이기를 계속한다면 김영삼 대통령 퇴임이후에도국민이 용서치 않을 것』이라고 직격탄을 쏘아댔다.호흡조절도,탐색전도 없이 곧바로 밀어붙이기에 나선 것이다.이제 DJ의 다음 수순이 관심의 대상이다. DJ의 향후구상은 우선 여권의 목표를 무엇으로 보느냐의 문제와 직결된다.이와 관련,국민회의는 「대선자금으로부터의 탈출」과 「김대중죽이기」로 여권의 목표를 상정하면서 내심 전자에 보다 무게를 두는 인상이다.대선자금의 족쇄를 풀기 위해 여권이 악의적으로 「김대중죽이기」를 시도하고 있다는 논리인 것이다.여기에는 DJ를 비자금정국의 「희생양」으로 부각시킴으로써 문제의 20억원에서 비롯된 도덕적 상처를 치유하고 지지층의 결속도 다지려는 의도가 짙게 담겨 있어 보인다.다른 측면에서는 여권이 대선자금의 굴레에서 벗어났다고 판단되면 자연히 「김대중 죽이기」도 중단되리라는 계산도 깔려 있다.적어도 민자당 강삼재총장의 공세가 여권 핵심부의 지시에 의한 것이기는 하지만 정교한 시나리오에 따른 것은 아니리라는 생각인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여권의 공세가 정말 양김(김대중·김종필)축출을 통한 정계개편으로까지 발전하는 상황도 가능성은 적지만 배제할 수는 없다고 보고 있다. 이에 따라 국민회의의 향후대책은 두 갈래로 마련될 전망이다.우선 강총장등의 「설공세」에 대해서는 철저히 설로 반격하는 방안이다.박지원 대변인은 『김영삼 대통령의 대선자금을 아는 증인이 많이 있는데 이들에게 증언할 것을 설득하고 있다』고 말했다.다만 이를 사전에 밝히는 데는 여권의 설공세를 차단하려는 방어적 성격이 강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와 별도로 김대통령 압박작업도 더욱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이미 16일부터 있을 전국지구당대회에 김총재와 당지도부가 대거 참석,김대통령을 규탄하며 대선자금공세의 고삐를 더욱 죄어나간다는 계획을 세워두고 있다. 그러나 여권의 공세가 지금과 같은 「설」차원을 넘어선다면 얘기는 다르다.실제로 DJ를 정치권 밖으로 끌어내려는 징후를 보인다면 대대적인 장외투쟁만이 유일한 선택이다.13일 DJ가 전면전을 선언하고 나선 것도 이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계엄령」의 성격이 짙다.전국지구당과 연청(민주연합청년동지회)등 외곽조직을 총가동,정권타도투쟁까지도 불사한다는 방침이다. 국민회의는 김대통령이 아·태 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일본을 방문하는 17일부터 20일까지를 비자금 정국의 최대고비로 보고 있다.이 기간에 여권이 어떤 행보를 보이느냐가 앞으로의 정국을 가늠할 척도가 된다는 것이다.
  • 시위대가 장갑차 포위하자 장교 첫발표/「5·18」수사 의문점 규명

    ◎21일 전남도청앞 충돌전 장교위주 실탄분배­발포경위/전교사령관­31사단장 계통밟아 군병력 투입­군지휘권/광주시내 시위대처 급급… 병력운용 여유없어­무기피탈 방치/인명피해·뚜렷한 피탄흔적·파편 등 확인안돼­헬기 기총소사/8명의 사체서 자상 발견… 대검 사용 인정­대검등 사용/정지불응 미니버스에 총격… 10여명 사망­광주외곽 피해/「신원·사망경위 불명」 많아 확정 불가능­사망자수 검찰이 18일 「5·18」사건의 최종 수사결과를 발표,그동안 베일에 가려졌던 의문점들이 밝혀졌다.검찰수사 결과 드러난 발포경위 및 헬기 기총소사 여부,대검과 화염방사기 사용여부,사망자 수,무기피탈 고의방치 여부,광주 파견부대 지휘권의 2원화 여부 등 7가지 의문점을 정리해 본다. ▷발포경위◁ ▲공수부대의 발포는 5월20일 하오11시쯤 광주역 앞에서 시위군중에 발포하면서 계속되었는데 21일 하오1시쯤 도청 앞에서의 집단발포의 형태는 시위대의 차량돌진을 저지하기 위한 자위목적의 우발적 사격이 아니라 사전에 계획된 명령에 따라 이뤄졌다는 주장. ­광주에서의 최초발포는 5월19일 하오5시쯤 광주고부근에서 있었던 바,당시 사직공원을 수색하고 복귀하던 11공수여단 63대대 배속 장갑차가 이 학교 부근에 이르렀을 때 시위대가 장갑차를 포위공격하면서 불붙은 짚단을 던져 불을 붙이려 하자 장갑차에 타고 있던 한 장교가 장갑차 문을 열고 공포를 쏘고 다시 위협사격하는 과정에서 주위에 있던 고등학생 1명이 총격을 받아 부상당했음. 또 20일 하오11시쯤 3공수여단이 광주역일대에서 시위대와 공방을 벌이던 중 트럭·버스 등 시위대의 차량돌진으로 사상자가 발생하는 등 수세에 몰리자 3공수여단장은 경계용 실탄을 예하대대에 전달하고 대대장은 이를 장교 위주로 분배해 자신들을 향해 돌진하는 차량을 향해 발포했으며 광주역으로 실탄을 전달하러 가던 특공지원조가 시위대와 마주쳐 진로가 막히자 위협사격을 하는 한편 21일 다시 전남대 앞에서 장갑차·경찰가스차 등 시위대의 차량돌진공격에 대응해 발포,사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이는 광주시민의 공분을 고조시킬 목적으로 사전에 계획된 의도적인 발포였다고는 할 수 없음. 이와 함께 21일 전남도청 앞에서의 발포경위에 대해 그동안 국회 청문회 등에서는 시위대의 1차 장갑차공격후 도청에서 철수하던 31사단 병력으로부터 공수부대가 소량의 실탄을 인수하여 장교들에게 분배한 상태에서 다시 시위대가 차량공격을 해오자 장교들이 자위적 차원에서 발포한 것이라고 주장돼왔으나 이번 수사결과 11공수여단 61·62대대는 도청 앞 금남로에서 시위대로부터 차량공격을 받은 후 시위가 소강상태에 들어간 20일 밤 12시쯤 대대장이 대대장 지프 등에 통합보관하고 있던 경계용 실탄을 대대장의 명령에 따라 위급시에만 사용하라는 지시와 함께 중대장이상 장교에게 15발들이 1탄창씩 분배하고 63대대는 21일 상오10시30분쯤 실탄을 분배함으로써 같은 날 하오1시쯤 시위대의 차량공격이 있기 전에 이미 장교 위주로 실탄이 분배돼 있었음이 확인됐음. 또 당일 하오1시쯤 시위대가 장갑차등으로 공수부대에 돌진,공격해오고 병사 1명이 장갑차에 깔려 사망하자 이에 대응해 첫 발포가 있었으며 다시시위대가 장갑차와 버스 등 차량돌진을 계속하자 공수부대 장교들이 집단적으로 발포했고 이와 비슷한 시점에 7공수여단 35대대도 철수하던 31사단 병력으로부터 실탄을 인계받아 이를 장교들에게 분배하는 한편 돌진하는 차량을 피해 인도와 인근 건물로 산개했던 공수부대원중 일부가 도청 및 주변건물 옥상에 올라가 경계를 하고 있다가 접근하는 시위대를 향해 발포한 사실이 확인됐음. 따라서 이같은 발포는 대대장이나 여단장이상의 상급지휘관이나 별도의 지휘계통에 있는 특정인의 구체적인 발포명령에 따라 행해진 것이거나 광주시민의 공분을 고조시키기 위해 사전에 계획된 의도적인 것으로 인정할 수 없고 현장지휘관인 공수부대 대대장들이 차량돌진 등 위협적인 공격을 해오는 시위대에 대응해 경계용 실탄을 분배함으로써 이를 분배받은 공수부대 장교들이 대대장이나 지역대장의 통제 없이 장갑차 등의 돌진에 대응해 자위목적에서 발포한 것으로 판단됨. 그러나 그 이후 계속된 발포중에는 비록 시위대가 무장을 했다 하더라도 도로에 나와 단순히구호를 외치거나 총상자들을 구호 또는 호송하려 하거나 심지어는 시위현장 부근에서 구경하기 위해 나타난 경우 등 군에 대해 직접적 위협을 가하지 아니한 상태에까지 발포가 이뤄진 사실을 인정할 수 있어 당시 실탄 및 사격통제에 상당한 문제점이 있었음이 확인됐음. ▷군 지휘권◁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는 상급지휘관인 계엄사령관·2군사령관·전교사령관·31사단장의 정상적인 지휘계통하에 있지 아니하고 별도세력의 사전계획에 의해 지휘되고 있었다는 주장. ­7공수여단 2개 대대를 전남대 등 3개 대학에 배치한 것은 소요예방과 진압을 이유로 육본이 전국 92개 대학에 계엄군을 배치하는 조치의 일환으로 취해진 것이므로 이때 이미 군병력의 시위진압투입은 전제돼 있었다고 할 수 있으며 5월18일 하오 7공수여단 2개 대대가 광주시내 시위진압에 나선 것은 계엄확대선포후 전국에서 유일하게 광주시내에서 시위가 벌어졌고 경찰이 군의 투입을 요청하고 있는 상황에서 계엄사령관→2군사령관→전교사령관→31사단장의 계통에서 군병력 투입을 결정한 사실이 인정됨. 11공수여단의 추가투입이 광주시내에서 공수부대원들과 학생들이 충돌하기 전인 18일 하오2시쯤 결정된 것은 사실이나 이는 광주 시위상황을 보고받은 육본에서 군병력의 증원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다만 공수여단중 적절한 파견부대의 결정을 위해 특전사령관의 의견을 들어 11공수여단을 증원하기로 결정한 것임. 또 초기에 7공수여단을 시위진압에 투입한 후 5월18일 야간에 공수부대를 광주시내에 거점배치하고 19일 11공수여단의 추가작전통제에 다라 책임지역을 구분해 시위진압에 투입했으며 20일 3공수여단의 추가투입에 따라 다시 책임지역을 구분,시위진압에 투입하고 21일 공수부대를 시외곽으로 철수시키는 등 일련의 부대운용에 관한 지휘를 실제 31사단장과 전교사령관이 행한 사실이 인정됨. 21일 하오4시 31사단장의 2개 공수여단에 대한 작전지휘권이 전교사령관에게 전환된 후 광주 재진입작전은 전교사령관이 계엄사령관의 지휘를 받아 특전사령관 등의 자문과 조언을 참고해 그의 책임하에 수행한 것이 인정되며 군부대간의 오인사격은 전교사와 공수여단 및 전교사 예하 각 부대간에 상호 상황전파 및 통제의 미숙,단위부대 지휘관들의 상황판단미숙과 침착성 부족 등에 기인해 발생한 것으로 이를 두고 지휘권 이원화의 결과라고 할 수는 없음. 물론 광주에 파견된 3개 공수여단이 전교사령관이나 31사단장의 작전통제하에 있었음에도 31사단 등과는 무전교신체계가 상이한 상태에서 특전사 일부장교가 전교사에서 전용 무선 발수신장치를 설치해 각 공수여단과 별도로 교신하면서 상황을 파악하고 특전사령관이 11공수여단과 3공수여단의 증원결정에 의견을 제시하고 수시로 광주를 방문하면서 공수여단 지휘관들을 격려하고 광주 재진입작전인 상무충정작전을 수행함에 있어 특공부대를 선정하는 데 관여한 사실 등이 인정되나 이를 가지고 당시 공수여단에 대한 지휘권이 이원화됐다고 할 수는 없는 것임. ▷무기피탈 방치◁ ▲사전에 계획된 시나리오에 따라 광주 재진입작전의 여건을 조성하기 위해 시민으로 하여금 무기고를 습격,무장을 하도록 상황을 유도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그 근거로 광주시민이 광주 외곽지역에서 무기고를 습격하고 무기를 탈취해 광주로 돌아오는 동안 아무 제지를 받지 않았고 이후 외곽도로가 봉쇄되었다는 주장. ­광주에서 시위대에 의한 무기탈취는 19일 하오3시15분쯤 시위대가 기독교방송국을 점거하는 과정에서 31사단 경계병력으로부터 M16소총 1정을 탈취한 것이 처음으로 이 소총은 곧 회수됐으며 그후 20일 하오11시쯤 광주세무서 방화,점거시 지하실 무기고에서 칼빈 17정을 탈취했고 21일 하오1시쯤 광산 하남파출소에서 카빈 9정이 탈취됐으나 시위대가 본격적으로 무기탈취에 나선 것은 21일 하오1시쯤 전남도청 앞에서 공수부대의 발포가 있은 후로 시위대는 광주 인근지역으로 진출,화순·나주 등 지방의 지·파출소와 화순광업소·한국화약 등 방위산업체 등에서 대량의 무기와 실탄을 탈취했음. 당시 조기진압의지와는 달리 시위가 급격히 확산됨으로써 경찰과 군병력이 광주시내 시위에 대처하는 데만도 급급한 상태였고 지방경찰 병력도 대부분 광주시내로 차출돼 인근지방으로까지 진출해 무기를 탈취하는 시위대를 사전에 막기는 어려웠던 상황이었으며 특히 21일에는 전남대에서 3공수여단이,전남도청 앞에는 7공수여단과 11공수여단이 시위대와의 치열한 공방전 끝에 결국은 전남도청 등을 포기하고 시외곽으로 철수하는 형편이었으므로 군이나 경찰이 병력운용에 여유가 있는 상태에서 의도적으로 무기고 습격을 방치하였다고 보기는 어려움. ▷헬기 기총소사◁ ▲광주에서 무장헬기의 공중사격으로 많은 인명피해가 야기됐다는 주장. ­군관계 자료상으로는 21일 2군사령부가 전교사에 수송용 헬기인 UH­1H 10대,무장헬기 AH­1J(코브라) 4대를 지원하고 사태기간중 헬기가 모두 48시간동안 무력시위를 했다는 기록외에 실제공중사격 실시여부에 대해서는 아무 기록을 발견할 수 없었음. 조비오신부가 헬기사격의 피해자라고 지목한 홍란은 검찰조사에서 부근 건물옥상에 있던 계엄군의 소총사격에 의해 다쳤다고 진술했으며 정낙평은 21일 하오2시쯤 광주경찰서 상공에서 기종미상의 헬기가 기관총 사격하는 것을 목격했으며 부근 진주다방의 종업원이 옥상에서 헬기가 쏜 기관총을 맞고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고 진술했으나 진주다방 종업원인 심동선씨(30)에 대한 검시조서에 의하면 사인이 M16소총에 의한 관통총상이고 당시 빌딩옥상에 있던 공수부대원의 사격에 의한 피격이라는 취지의 증언이 있음. 아놀드 피터슨목사는 헬기가 선회하고 상공에서 총소리가 들려 헬기에서 기총사격을 한 것으로 믿고 있으나 헬기사격 자체를 목격하지는 않았다는 것이고 피터슨목사가 사격장면을 촬영한 것을 검찰에 제출한 사진상의 헬기 하단 불빛은 기관총사격시 발생되는 섬광이 아니라 헬기에 부착된 충돌방지등 불빛임이 확인됐음. 이와 함께 광주시내 적십자병원·기독병원·전남대병원의 당시 진료기록부와 응급실 관계자들의 진술을 검토해도 그 당시 각 병원에 헬기총격에 의한 피해자가 들어왔거나 입원·치료를 받은 사실을 확인할 수 없었고 광주시위 관련 사망자 1백65명에 대한 광주지검 사체 검시기록에서도 특별히 헬기기총사격에 의한 사망이라고 인정할 수 있는 근거를 발견할 수 없었음. 또한 AH­1J헬기의 장착무기인 토미사일,2.75인치 로켓,20㎜ 발칸포(1분당7백50발 발사),500MD헬기의 장착무기인 2.75인치 로켓,7.62㎜ 6열 기관총(1분당2천∼4천발 발사)에 의한 표적사격의 경우 나타나는 대규모 인명피해와 뚜렷한 피탄흔적·파편 등이 확인되지 않았음. ▷대검등 사용◁ ▲계엄군이 시위진압과정에서 대검과 화염방사기를 사용했다는 주장 ­당시 광주일원에 투입된 계엄군은 착검상태에서 트럭을 타고 위력시위를 하다가 시위대로부터 투석공격 등을 받으면 착검상태로 하차해 시위대를 추적,체포한 사실이 인정되므로 그 과정에서 대검으로 인한 피해가 발생했을 가능성이 있음. 실제로 사망자 손옥례·권근립씨등 8명의 사체에서 자상이 발견됐고 부상자 하헌남·최승기씨 등이 자상을 입은 점 등을 종합할 때 당시 시위진압현장에서 지휘관의 의사와 상관없이 공수부대원에 의해 대검이 사용된 사실이 인정됨. 군관계자들은 화염방사기가 토치카 또는 장갑차 공격용이므로 인체에 화염방사기를 직접 사용할 경우 전신 중화상으로 대부분 사망했을 것이라는 점 등을 들어 당시 광주에서 화염방사기가 사용되지 않았고 다만 소용진압용 작용제(CS분말)나 소요군중 식별용 유색수를 살포하는 데 화염방사기를 이용했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계엄군이 화염방사기로 화염을 방사했거나 화염방사기에 의한 화상사망사실을 인정할 만한 자료를 발견치 못했음. 5월21일 광주시청 앞에서 시위대의 장갑차를 몰고가다 화염방사기 공격으로 화상을 입은 것으로 광주민중항쟁사료전집에 기록된 최강식씨(87년 사망)의 보상금지급 관련서류를 조사한 결과 최씨는 당시 광주시 중흥동의 한 건축현장에서 계엄군에 체포돼 전남대·광주교도소·상무대로 이동하면서 전신을 구타당하고 화상을 입은 것으로 파악됐음. 또 같은 날 전남대 앞 시위에서 계엄군의 화염방사로 안면화상을 입은 것으로 기록돼 있는 최병옥씨(당시 21)의 경우 당시 계엄군에 쫓겨 전남대부근 가정집의 화장실에 숨어 있던 중 화장실 환기창문으로 불꽃이 들어와 얼굴에 화상을 입었으나 그것이 화염방사기에 의한 화염인지는 목격하지 못했다고 검찰조사에서 진술하는 등 다른 피해사례나 목격담에 대한 조사에서도 화염방사기 사용사실을 확인하지 못했음. ▷광주외곽 피해◁ ▲5월21일 공수부대가 전남대와 전남도청 앞에서 광주시 외곽으로 철수하여 5월27일 재진입작전을 할 때까지 시외곽 봉쇄 및 도로차단 등과 관련해 여러 건의 민간인 피해사례가 있었다는 주장. ­이같은 주장 가운데 3공수여단 5개 대대는 5월21일 광주교도소로 철수하는 과정에서 시위대 수십명을 천막등으로 덮은 트럭에 실어 호송하면서 더운 날씨에도 불구,과다한 인원을 탑승시킨 상태에서 최류탄을 터뜨려 화상환자를 발생시켰고 교도소 도착당시 트럭에는 질식 등으로 인해 5∼6명이 사망한 것으로 확인됐음. 3공수여단은 또 같은 달 22일 하오10시쯤 광주교도소부근을 통과하던 김성수씨일가를 시위대로 오인,총격을 가해 가족 3명에 총상을 입히고 그중 김씨의 처 김춘아씨가 후유증으로 사망케 하는 등 24일까지 광주교도소를 방호하는 과정에서 무장시위대와 수차례 교전을 했고 이같은 교전및 부상자치료,철수과정에서 사망한사체 12구를 교도소부근에 가매장한 사실이 확인됐음. 광주∼목포간 도로를 차단하기 위해 효천역부근에 배치됐던 20사단 61연대 병력은 5월22일 상오5시40분과 9시쯤 2차례에 걸쳐 시위대로 오인하고 민간인에 총격을 가해 왕태경 등 2명이 사망하고 5명이 부상했음. 5월22일 하오5시쯤에는 20사단 62연대 2대대가 광주통합병원을 확보하기 위해 민가를 사이에 두고 무장시위대와 교전하는 과정에서 인근주민 이매실·함광수씨 등이 총상을 입고 사망 또는 부상했고 23일에는 해남에 주둔하고 있던 31사단 93연대 2대대와 시위대간의 2차례 교전과정에서 박영철씨 등 민간인 2명이 사망했음. 11공수여단 62대대가 매복하고 있던 주남마을 앞 광주∼화순간 국도에서는 23일 상오10시쯤 정지신호를 무시하고 달리던 미니버스에 총격을 가해 박현숙씨 등 10여명이 사망했고 남자 중상자 2명이 후송도중 다시 총격에 의해 사망했음. 24일 하오1시30분쯤에는 주남마을에서 송정리비행장으로 이동하던 11공수여단 병력과 시위대 10여명이 송암동부근에서 총격전을 벌이던 중 공수부대의 난사로 전재수 등 어린이 2명이 사망했고 또 전교사 보병학교 교도대 병력의 오인사격을 받고 격분한 63대대 병력이 피격지점부근를 수색해 시위대를 체포하는 과정에서 무장시위대원 1명과 권근립씨 등 주민 4명이 총격을 받고 사망했음. ▷사망자수◁ 정부 관련 자료에 근거한 광주시위 관련 사망자수는 군인 23명,경찰 4명,민간인 1백66명등 모두 1백93이고 이에 광주시위 관련 행방불명자로 인정돼 보상금이 지급된 사람이 47명임. 그러나 광주시위기간에 발생한 사체 가운데 신원및 사망경위가 명확하지 않은 경우가 많고,목격자 진술 등에 의해 사망자가 확인된 경우에도 당시 사체가 발견돼 확인됐는지 여부와 신원불상 사체와의 동일성 여부 등에 대한 판단이 현재로서는 곤란해 광주시위 관련 사망자수를 확정짓는 것은 불가능함.
  • 5파전 서울대총장 누가될까

    ◎후보들 학문적 업적·경륜등 엇비슷…예측불허/20일 투표서 2명 뽑은뒤 대통령이 최종 낙점 서울대가 신년벽두부터 총장선거 열기로 뜨겁다. 지난 5일 선정된 20대 총장후보 5명이 6일부터 선거운동을 본격화하자 벌써부터 차기총장 자리의 향방에 학내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특히 세계화와 개혁의 시대를 맞아 처음 치러지는 이번 선거는 시대적 요청에 걸맞는 새로운 총장상 정립의 시험대로 여겨지고 있다. 「학식과 덕망을 갖춘 어른」이라는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기획능력과 개혁지향적인 소신을 겸비한 인물이 차기총장을 맡아야 한다는 공감대가 이미 학내에 폭넓게 형성되고 있다. 그러나 2파전의 양상을 띠었던 초대 직선제 총장선거와는 달리 5명의 후보들이 학문적 업적이나 경륜에서 우열을 가리기 어려워 종반양상을 쉽게 점칠 수는 없는 실정. 우선 주목되는 인물은 후보선정위원회의 2차례에 걸친 「예비투표」결과 1∼2위권에 들었던 자연대 권숙일(59),사회대 김경동(58),법대 이수성(56)교수. 소신을 밀어붙이는 뚝심에서는 이교수가 두터운 신망을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80년 학생처장으로서 계엄군의 학내진입을 저지했던 일화에서 엿보이듯 학자적 양심을 굽히지 않는 인물로 정평이 나있다. 김경동교수는 다양한 대외활동 경력과 함께 서울대 사회과학연구소 소장을 역임하며 맺어진 이홍구총리,한승수청와대비서실장 등 지도층 인사와의 친분이 장점으로 부각되고 있다. 현 김종운총장이 인문계열 출신인 만큼 차기총장으로는 자연대 권숙일·공대 이기준(57)교수가 유리하다는 분석도 있다.특히 권교수의 경우 서울대교수의 20%를 차지하고 있는 경기고출신이라는 이점도 꼽을 수 있다. 사회대 김용구(58)교수는 학장을 역임하면서 업무추진력을 인정받았으며 가장 활발한 선거운동을 벌이고 있어 주목된다. 오는 20일 전체투표에서 2명이 가려지며 이 가운데 대통령의 낙점으로 최종 당선자가 결정된다.
  • “12·12는 군사반란”/검찰 수사결과 발표

    ◎전·노 전대통령등 34명 기소유예/전씨 좌천 막기위해 사전계획/대통령 재가없이 정총장 연행 79년 12월 12일에 발생한 12·12사건은 당시 군부의 일부 소장파 세력이 사전 모의에 따라 실행한 군형법상 군사반란사건으로 최종 규정됐다. 「12·12사건」고소·고발사건을 조사해온 서울지검은 29일 수사결과발표를 통해 이사건의 피고소·고발인 38명 가운데 사건을 직접 모의했거나 적극 가담한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대통령등 34명을 군형법상 반란수괴및 불법진퇴 등 혐의를 적용,기소유예 처분했다고 발표했다. 검찰은 또 피고소인중 반란부화뇌동에 해당하지만 공소시효가 지난 당시 정호용 50사단장과 신우식특전사 작전차장,김진선수경사 작전처보좌관등 3명과 82년 사망한 백운택 71방위사단장 등 4명에 대해서도 「공소권 없음」을 결정,역시 불기소 처분키로 했다고 밝혔다. 이로써 사건발생후 15년동안 정치·사회적으로 국론소모와 분열의 원인을 제공해온 이 사건에 대한 검찰의 사법적 처리가 최종 마무리됐다. 서울지검조준웅 제1차장은 이날 수사결과발표문에서『12·12사건은 유신체제 붕괴로 사회전반에 민주화가 진행되는 상황에서 소장 군부세력의 리더였던 당시 전두환 합수본부장이 10·26사건 관련 혐의를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제거,군의 주도권을 장악함으로써 합수본부장 본인에 대한 좌천 인사조치를 사전 차단하고 소장 군부세력의 군내 입지를 보전할 목적으로 사전 계획하에 실행한 군사반란사건임이 명백히 드러났다』고 말했다. 검찰은 또『피고소인측은 12·12가 「10·26사건 관련 혐의를 조사하기 위해 정총장을 연행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우발적 충돌사건」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10·26조사와 직무상 전혀 관련이 없는 국방부군수차관보와 수도권부대 주요 지휘관들이 총장 연행문제를 협의한점 ▲거사 직전 특전사령관등 육본 직할부대장들을 연희동요정으로 유인한 점 ▲일부 장군들이 집단으로 대통령에게 총장 연행재가를 요청한 점 ▲병력동원,핵심 지휘관 체포,국방부·육본 등의 점령 등에 대해 사전 모의,결정한 점 등에 비춰 전전대통령등 신군부측의 군권 장악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검찰은 이에따라 전두환 전대통령에게 군형법상의 반란수괴 및 불법진퇴,상관살해 및 상관살해미수,초병살해 등의 혐의를,노태우 전대통령과 유학성·황영시·차규헌·박준병·백운택·박희도·최세창·장기오·장세동·김진영·허화평·이학봉·허삼수등 14명에 대해 군형법상 반란모의참여와 중요임무종사등 혐의를,권정달,조홍등에게는 반란중요임무행사 등의 혐의를 각각 적용했다. 검찰은 이들이 하극상에 의한 군사반란을 꾀함으로써 헌정사를 후퇴시킨 점등이 인정되나 이들을 기소할 경우 재판과정에서 과거사가 재론되는등 법적 논쟁이 계속돼 국가분열과 대립양상이 재연됨으로써 국력을 소모할 우려가 있으며 이들이 이미 5공청문회와 대선 등을 통해 국민적 심판을 받은 것으로 판단돼 불기소처분하게 됐다고 밝혔다. 검찰조사에 따르면 전두환 전대통령은 79년 11월 중순부터 정승화계엄사령관이 자신을 합수본부장에서 한직으로 좌천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자 인사조치를 차단하고 군내입지를 보전할 목적으로 유학성 국방부 군수차관보,황영시 1군단장,차규헌 수도군단장,노태우 9사단장등과 접촉해 정승화 총장을 연행·조사하는 문제에 대해 협의했다. 이어 12월7일 노태우 9사단장과 회동,12월12일을 최종 거사일로 확정하고 박준병 20사단장,박희도 1공수여단장,최세창 3공수여단장,장기오 5공수여단장 등과 공모하는 한편 이학봉 합수부 수사1국장,허삼수 보안사인사처장,우경윤 육본범죄수사단장 등에게 정총장 연행계획을 수립토록 지시했다는 것이다. 또 정총장 연행시에 대비,허화평 보안사령관비서실장,조홍 수경사헌병단장에게 정병주 특전사령관,장태완 수경사령관,김진기 육본헌병감등 육본직할부대장들을 신군부 핵심인물의 집결시간인 12월 12일 하오 연희동 소재의 요정으로 유인토록 한 것으로 드러났다. 전 전대통령측은 거사 당일 하오 7시10분쯤 허삼수,우경윤,성환옥과 보안사 수사관 7명,수경사 33헌병대 병력 60여명을 한남동 총장공관으로 보내 「대통령 재가하에 김재규로부터 돈을 받은 혐의에 대한 진술을 받아야 한다」며 정총장에게 동행을 요청했으나 거부당하자 M16 소총으로 위협,강제 연행한 것으로 드러났다. 전 전대통령은 같은날 하오 삼청동 총리공관에 머물고 있던 최규하대통령에게 찾아가 정총장의 연행 재가를 요청하다 거절당했으며 재차 유학성·황영시·차규헌·백운택·박희도등 장군들과 함께 총리공관으로 몰려가 집단으로 재가를 요청하는등 2차례에 걸쳐 재가를 요청했다.이들은 결국 다음날인 13일 상오 5시10분쯤 노재현 국방장관을 위협,신현확 총리서리가 배석한 자리에서 대신 재가를 받았다는 것이다. ◎“위헌소지… 결과 승복못해”/전·노씨/“기소유예 부당… 새달 항고”/고소인측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대통령은 29일 변호인단 발표문을 통해 「12·12사태」와 관련,자신들에게 군형법상의 반란 혐의를 인정한 검찰의 수사결과에 승복할 수 없다고 밝혔다. 특히 전전대통령쪽은 검찰수사결과 발표에 대해 적절한 법적 대응을 하겠다고 말했으며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제기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두 전직 대통령쪽에서는 『정승화씨의 10·26 내란방조 혐의에 대해 80년3월 확정판결이 내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검찰이 확정판결의 내용을 뒤집은 것은 월권이며 헌법위반의 소지가 있다』면서 『당시 합동수사본부가 정씨를 연행·수사한 것은 정당한 공무집행 행위이며 군통수권자인 최규하 대통령에게 사전보고와 사후재가 절차를 모두 밟았다』고 주장했다. ◎정승화씨 등 21명 회동 정승화전육군참모총장등 12·12사태 관련 고소인 21명은 29일 상오 서울 강남구 신사동 모음식점에서 모임을 갖고 검찰의 수사결과에 불복,내달 2일 서울고검에 항고키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정전총장은 이날 『군사반란죄가 인정된다면 당연히 기소를 해서 법원의 판결을 받게해야 마땅했다』며 『공소시효가 얼마 남지 않은 점을 감안해 내달 2일 항고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날 모임에는 12·12당시 3군사령관이었던 이건영씨를 제외한 고소인 21명이 모두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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