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2차 계엄
    2026-06-08
    검색기록 지우기
  • 수익자
    2026-06-08
    검색기록 지우기
  • 엑스(X)
    2026-06-08
    검색기록 지우기
  • 여대야소
    2026-06-08
    검색기록 지우기
  • 청년 취업
    2026-06-08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708
  • [서울광장] “그대들 나라 아니다”/송한수 부국장 겸 사회 2부장

    [서울광장] “그대들 나라 아니다”/송한수 부국장 겸 사회 2부장

    한갓 어둠이 두렵겠는가. 7월 11일 밤이 대한제국을 짓누른다. ‘일본 제국주의’가 무서운 일을 꾸민다. 경찰을 앞세운다. 한국, 한국인을 겨냥해서다. 목표는 양기탁(1871~1938)이다. 시간이 잔잔히 흐른다. 긴장이 차갑게 감돈다. 새벽녘 오랏줄이 선생을 옥죈다. 그러나 서릿발과도 같은 순간 두 눈은 꽤 날카롭다. 그득히 빛을 뿜는다. 내로라하는 떳떳함이다.꼭 110년 전 일이다. 조선 마지막 황제 순종(1874~1926ㆍ재위 1907~1910) 2년에 해당한다. 한반도의 불행한 제국이 막바지로 치달을 무렵이다. 선생은 덩달아 이렇게 고난을 치른다. ‘편집감독’ 자리에서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를 이끌던 그다. 한반도 점령 전위대 노릇을 한 일제 통감부는 선생에게 공금 횡령이란 혐의를 덧씌운다. 국채보상운동을 도우려 신문사 안에 조직을 꾸리고 총무를 맡던 때다. 가뜩이나 일제에 맞서 글발을 세우니, 고집을 꺾으려 억지를 쓴 결과다. 일제가 나서서 우리 땅에 온갖 시설을 끌어들여 상당한 국가 빚을 짊어진 터다. 얼른 갚지 않으면 나라 자존심을 크게 구길 것이라고 국민들은 내다봤다. 코흘리개부터 꼬깃꼬깃 숨기던 코 묻은 돈을 내놓는다. 일제에 진짜 먹잇감은 신문이었다. 선생을 가두면 신문도 끝장이라는 계산이 깔렸다. 선생에게 더할 수 없는 보람인 대한매일은 그들에겐 도통 지나치지 못할 눈엣가시였다. 1904년 7월 18일 첫발을 뗀 대한매일은 영국인 창업자 어니스트 베델(1872~1909)을 내세워 일제 검열을 피하며 언론으로 가야 할 길을 제대로 밟았다. 일제가 무력으로 눌러 외교권을 훔치자 사뭇 거칠게 대들었다. 조선 26대 왕 고종(1852~1919ㆍ재위 1863∼1907)과 신하들을 겁박한 끝에 1905년 11월 17일 강제로 맺은 제2차 한·일 협약(을사보호조약)을 가리킨다. 앞서 일제는 1904년 8월 22일 내정 개선을 뒷받침한다며 제1차 협약(한·일 의정서)을 으름장으로 체결했다. 결국 일제는 우리 정부를 돕는다는 희한한 구실로 재정고문과 군사고문, 외교고문을 1명씩 앉혔다. 대한매일은 조약 파기를 대놓고 요구했다. 더불어 시일야방성대곡(時日也放聲大哭)이란 제목으로 논설을 큼지막하게 실었다. 말 그대로 “이토록 원통한 처지에 목놓아 통곡한다”는 줄거리다. 대한매일은 나아가 용기 백배해 황성신문 주필 장지연(1864~1921)의 글을 오롯이 옮겼다. ‘남의 것’이라며 낮잡지 않고 널리 생각한 마음 씀씀이다. 아무튼 선생은 법정 증언대에 올라 무혐의를 증명한 베델에 힘입어 감옥을 벗어난다. 이렇게 대한매일은 국가와 국민을 위한다는 자세에서 빛났다. 위에 알린다는 ‘신보’(申報) 뜻에 충실했다. 독립운동에 얽힌 보도도 빼놓지 않았다. 일제 앞잡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1841~1909) 통감이 “우리의 악정에 확증을 갖고 한국인들을 줄곧 선동하니, 결국 내 책임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며 혀를 내둘렀다. 이후 일제는 신문사 매수 작전에 들어간다. 대한매일은 ‘대한’을 떼고 다른 길로 접어들게 된다. 1945년 8월 광복 뒤엔 서울신문으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이제 곧 창간 114년이다. 긴 터널을 지났다. 서울신문이라는 철마(鐵馬)는 여전히 달리고 있다. ‘공공 이익과 민족 화합에 앞장선다’는 슬로건에 발을 맞춘다. 그런데 선조들 귀에 거슬릴 소식이 자꾸 들린다. 누가 대통령을 쥐고 뒤흔들었다는 국정 농단에 이어 터진 계엄령 발동설이다. 국군 기무사령부에서 지난해 3월 서울 광화문광장에 탱크, 장갑차를 동원할 계획을 짰다는 것이다. 헌법재판소로부터 대통령 탄핵 결정을 앞둔 터였다. 참 무서운 생각이다. 만약을 가정한 사례라고 치더라도 가슴을 쓸어내릴 일이다. 탄핵 기각으로 결정됐거나 근소한 차이로 인용됐다면 실행에 옮겼을 법하다.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대답하는 삐뚠 행태’(指鹿爲馬·지록위마)로 대통령을 받드는 쪽이 위세를 부리던 시절이니 그렇다. 우리 땅이 대통령의 나라도, 국정을 가름하는 사람들의 나라도 아니지 않은가. 조상들이 피땀을 쏟아 일군 나라이니 저들의 얕은 속셈에 더욱 원통하다. 아무리 쥐고 뒤흔든들 신문(대한매일신보)이 누구의 소유일 수 없듯이 말이다. onekor@seoul.co.kr
  • “기무사, 촛불집회 탱크·장갑차·특전사로 무장진압 계획”

    “기무사, 촛불집회 탱크·장갑차·특전사로 무장진압 계획”

    국군기무사령부가 촛불집회에 군 장비와 병력을 투입하려던 구체적 계획을 갖고 있었다는 주장이 나왔다. 군인권센터는 6일 서울 마포구 이한열기념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촛불 무력 진압 계획이 사실로 드러났다”면서 “명백한 친위 쿠데타 계획이며 관련자는 모두 형법상 내란음모죄를 범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지적했다. 이날 센터는 지난해 3월 기무사가 작성했다는 ‘전시 계엄 및 합수업무 수행방안’ 문건을 공개했다. 이 문건에 “국민의 계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고려해 초기에는 위수령을 발령해 대응하고 상황 악화시 계엄 시행을 검토한다”고 적혀 있다. 계엄군에는 모두 육군에서 탱크 200대, 장갑차 550대, 무장병력 4800명, 특수전사령부 병력 1400명 등을 동원한다고 계획했다. 군인권센터는 “탱크와 장갑차로 지역을 장악하고, 공수부대로 시민을 진압하는 계획은 5·18 광주와 흡사하다”면서 “포천, 연천, 양주, 파주 등 수도 서울을 지키는 기계화부대를 모두 후방으로 빼겠다는 계획도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경기도 전방의) 3군사령부 병력을 전국 각지로 보내 비상계엄을 유지한다는 내용도 나온다”며 “3군사령부가 모를 수 없는 일이며, 더 윗선인 당시 국가안보실이 컨트롤 타워였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센터는 문건에 동원 병력으로 등장하는 8, 11, 26사단 사단장이 모두 육군사관학교 출신이라며 이 계획이 ‘육사 출신들의 친소관계’에 따라 수립됐을 것으로 봤다. 이어 “계획대로 병력을 이동하면 경기 북부에서 서울로 가는 길목이 모두 비어버린다”며 “북한이 밀고 내려올 때의 2차 방어선이 없어지는 것인데, 이런 계획은 사실상 북한에 나라를 팔아먹는 굉장히 위험한 발상”이라고 우려했다. 문건은 또 병력 출동을 육군참모총장이 승인해 선조치하고 국방부 장관과 합동참모본부 의장에게는 사후 보고하도록 했다. 아울러 국회가 위수령 무효 법안을 제정하더라도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해 위수령이 일정 기간 유지되게 한다는 계획까지 세웠다. 이는 지난 3월 폭로됐던 국방부 법무관리관실에서 나온 ‘위수령에 대한 이해’ 문건에서 한발 더 나아간 것으로 군인권센터는 해석하고 있다. 군인권센터는 “이 문건 작성자는 현 기무사 참모장이자 기무사 개혁 태스크포스 위원인 소강원 소장(당시 기무사 1처장)”이라면서 “계엄령 주무부서는 합참이며 기무사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므로 명백한 월권”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지휘 계통을 무시하고 합참을 배제하려 한 것은 정상적 계엄령 선포가 아닌 ‘친위 쿠데타’이기 때문”이라면서 “국가 법령 체계를 무시하고 임의로 무력을 동원하는 것이 바로 쿠데라”라고 강조했다. 또 “문건은 계엄 사범 색출, 방송통신위원회를 동원한 SNS 계정 폐쇄, 언론 검열 업무 등 구체적인 계획까지 세워뒀다”면서 “이는 국가를 불법적으로 장악하기 위한 준비일 뿐 폭동 진압과 통치 행위로서의 계엄령과는 거리가 멀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이 문건 계획이 시행되지 않은 것은 대통령 탄핵이 인용됐기 때문”이라며 “문건에 탄핵 인용 시에 관한 내용은 전혀 없고 오직 기각만 상정했다. 세상의 변화에 대한 인식이 없었던 것”이라고 지적했다. 군인권센터는 “문건을 보고받은 김관진 전 국가안보실장과 한민구 전 국방부 장관, 문건을 보고한 조현천 전 기무사령관, 계엄사령관으로 내정된 장준규 전 육참총장 등 관련자들을 모두 고발할 것”이라고 밝혔다. 신진호 기자 sayho@seoul.co.kr
  • 38년 만에야…5·18 계엄군 성폭력 진상 밝힌다

    38년 만에야…5·18 계엄군 성폭력 진상 밝힌다

    인권위·여가부·국방부 공동조사단 출범 10월까지 피해 입증·피해자 지원 활동정부가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에 의해 자행된 성폭력 범죄에 대한 진상 규명에 나선다. 국가인권위원회, 여성가족부, 국방부는 8일 3개 기관 합동으로 ‘5·18 계엄군 등 성폭력 공동조사단’을 출범시켰다. 조사단은 공동단장인 조영선 인권위 사무총장과 이숙진 여가부 차관을 비롯해 모두 12명으로 구성된다. 활동 기간은 오는 10월 31일(146일간)까지다. 조사단 업무는 크게 피해 조사와 피해자 지원으로 나뉜다. 먼저 인권위는 군 내외 진상조사를 총괄하며 피해 사실 입증에 나선다. 국방부는 인권위 조사에 필요한 자료를 제공하기로 했다. 노수철 국방부 법무관리관은 “60만 쪽에 달하는 5·18 관련 자료를 지원할 계획”이라면서 “국방부도 인권위가 주도하는 조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여가부는 피해 신고 접수를 총괄한다. 또 성폭력상담소, 해바라기센터 등과 연계한 심리상담, 가족상담, 심리 치유 프로그램, 의료 지원 등을 통해 피해자들의 아픔 치유에 나선다. 아울러 조사단은 조사 과정에서 2차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조사 조력인단을 꾸려 피해자 사생활 보호에도 노력하기로 했다. 이 차관은 “최종 보고서는 5·18 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에 이관해 종합적인 진상 규명과 적절한 조치가 이뤄질 수 있도록 협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피해 신고는 공동조사단 본부, 서울 중부해바라기센터, 광주해바라기센터, 인권위 광주인권사무소를 비롯해 인권위, 여가부, 국방부 홈페이지를 통해 할 수 있다. 이하영 기자 hiyoung@seoul.co.kr
  • 대가뭄 케이프타운 ‘물 비상계엄령’

    대가뭄 케이프타운 ‘물 비상계엄령’

    사상 초유의 물 부족 사태를 겪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제2의 도시 케이프타운이 오는 4월 12일 수돗물 공급을 완전히 차단하는 ‘데이 제로’(Day Zero)에 돌입할 전망이다. 세계에서 유래를 찾기 힘든 ‘물이 말라버린 대도시’라는 오명은 차치하고라도, 도시 전체가 대공황 상황에 빠져 물을 둘러싼 대규모 소요사태가 우려되는 상황이다. 남아공 정부는 물 배급소에 군 병력 배치를 계획하고 있다. 사실상 물 비상계엄령이 선포되는 셈이다.3일(이하 현지시간) 가디언 등에 따르면 케이프타운 최대의 급수원 디워터스클루프 댐의 수량은 평소의 13%에 불과하다. 앞서 지난달 31일 CNN이 미국 항공우주국(NASA)에서 입수해 공개한 디워터스클루프 댐 위성사진을 보면 2011년과 현재의 수량이 극명하게 대비된다.케이프타운이 최근 100년 내 전례 없는 가뭄을 겪는 것은, 지구온난화 등 기상이변으로 강수량이 급감한 데다 습기를 잔뜩 머금어 비를 몰고 오던 겨울 서풍이 자취를 감춘 탓이다.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 연구에 따르면 장기적으로 케이프타운의 강수량은 현재의 60% 수준으로 감소한다는 암울만 관측만 남아 있다. 이 상태라면 데이 제로는 불가피하다. 데이 제로가 되면 케이프타운 400만 시민은 오직 도심 200곳의 배급소에서만 물을 구할 수 있고, 하루에 한 명당 25ℓ만 받게 된다. 현재 미국인 하루 평균 물 소비량인 약 350ℓ의 10분의1에도 못 미치는 양이다.●시민 간 충돌·반정부 시위 등 우려 남아공 정부는 데이 제로 이후 분노한 시민들이 대규모 소요를 일으키는 등 시 전체가 무정부 상태에 놓일 것을 우려해 물 배급소에 방위군 병력을 배치해 물을 둘러싼 시민 간 충돌 또는 반(反)정부 시위 등 돌발사태에 대비할 계획을 세웠다. 뉴욕타임스(NYT)는 “남아공 정부는 데이 제로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9·11 테러 이상의 공황에 대비하고 있다”면서 “정상적인 치안 유지가 불가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실제로 벌써부터 용천수가 터지는 주변에 물을 구하려는 시민들이 몰려 몸싸움을 벌이는 등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물통을 들고 용천수 대기열에 서 있던 한 시민은 “데이 제로가 되면 이 일대에 군대가 깔릴 것”이라며 불안해했다. 현지 대형마트는 1인당 생수 구매를 제한하고 있다. 쓰레기통, 양동이 등 물을 받을 수 있는 물건은 동난 지 오래다. 시민들은 목욕한 물을 변기 물로 재활용하는 등 자구책에 나섰다. 케이프타운이 맞닥뜨린 상황은 자연재해가 원인이기도 하지만, 초유의 가뭄과 급격한 인구 증가를 손 놓고 바라보기만 한 시 당국의 무능력과 무대책이 빚은 합작품이라는 비난의 목소리가 높다. NYT에 따르면 남아공 수자원국은 2007년부터 케이프타운의 물 부족을 경고하고, 기후변화에 대비해 담수화, 지하수 등 수원을 다각화하라고 촉구했다. 그러나 시 당국의 담수화 및 지하수 개발은 지지부진했다. 물 공급원은 그대로인데 시민은 빠른 속도로 늘었다. 케이프타운의 인구는 2000년대에 들어 2배로 증가했다. 이안 닐슨 케이프타운 부시장은 NYT에 “새 급수원 개발 계획이 있었다. 하지만 물 부족 사태가 이렇게 빨리 올 것이라고는 예측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전 수자원국장인 마이크 뮬러는 “시 당국이 이번 사태의 주범”이라고 비판했다. 지독한 가뭄이 이어지자 남아공 정부는 지난해 6월 케이프타운을 재난지역으로 선포했다. 시 당국은 지난해 10월부터 1인당 하루 물 사용량을 87ℓ로 제한했다. 상황이 더 심각해지자 지난 1일부터 물 사용량을 50ℓ로 줄였다. CNN에 따르면 50ℓ는 설거지와 빨래에 18ℓ, 90초 동안 샤워하는 데 15ℓ, 변기 물을 내리는 데 9ℓ, 기타 음식에 쓰거나 마실 물 4ℓ를 합친 것이다. ●“부자는 피신… 결국 가난한 자의고통” 빈부 격차에 따른 불부족 체감도도 심각한 수준이다. 자가용이 없는 시민이자 8인 가족의 가장인 파리 카시엠은 “데이 제로가 시작하면 내가 우리 가족의 물을 배급소에서 받아 와야 한다. 배급소에서 집까지 어떻게 물을 옮길지 까마득하다”고 NYT에 말했다. 또 다른 주민은 “부유층은 케이프타운을 떠나 잠시 다른 도시에 머무를 것이라고 들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럴 여유가 없다”고 했다. 케이프타운의 부촌 콘스탄티아 등 거주자들은 집 앞마당에 물탱크를 만드는 등 자체적으로 데이 제로에 대비하고 있다. 닐슨 부시장은 USA투데이에 “여러 대안을 검토하면서 일단 대서양과 접한 지역에 바닷물을 깨끗한 물로 바꾸는 담수화 공장을 짓고 있다”며 “3월부터 물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시 당국은 일단 이 공장에서 얻은 물로 6월 우기가 시작할 때까지 버틴다는 계획이다. 이와 관련, USA투데이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드는 계획”이라면서 “시 당국은 이미 올해 수도 예산 중 절반을 초과하는 1억 3830만 달러를 썼다”며 실현 가능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강신 기자 xin@seoul.co.kr
  • 5·18 암매장 추정 너릿재 터널 14일 발굴

    5·18 암매장 추정 너릿재 터널 14일 발굴

    ‘美, 광주 폭격 계획’ 문건 확인 광주 체류 선교사 반대로 철회 5·18 행불자를 찾기 위한 암매장 발굴조사가 시작된 지 한 달이 지났으나 이렇다 할 흔적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5·18기념재단은 7일 기자회견을 통해 “최근 땅속탐사레이더(GPR) 조사에서 이상 신호가 감지된 너릿재 터널 일대를 오는 14일쯤 발굴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너릿재는 광주~전남 화순을 잇는 국도에 있다. 발굴 대상지는 5·18 때 7공수와 11공수 등이 주둔했던 광주 지원동 상행선(화순에서 광주 방향) 도로와 그 주변이다.기념재단은 앞서 옛 광주교도소 일대와 너릿재 주변, 옛 상무대 뚝방 하천부지, 광산구 황룡강 뚝방 등 6~7개 지점에 대해 GPR 조사를 했다. 재단은 탐사레이더 결과를 분석 중이다. 그러나 암매장 핵심 추정지로 지목된 옛 광주교도소 주변에 대한 1차 발굴이 성과 없이 끝나면서 한계에 봉착했다. 재단은 지난달 6일 교도소 북측 순찰로 일대 117m 구간에 대한 첫 발굴을 실시했다. 이어 바로 북측으로 이웃한 철조망 바깥쪽 지역 70m 구간에 대한 추가 발굴조사도 마쳤다. 표토층을 1~1.5m씩 파내려가면서 정밀하게 훑었으나 유해나 특이한 암매장 흔적을 찾지 못했다. 이 지역은 5·18 당시 3공수 김모 소령이 검찰조사에서 “1980년 5월 23일 오후 6시쯤 12구의 시신을 묻었다”고 진술한 곳이다. 재단은 또 그동안 접수된 모든 관련 제보를 종합 구성한 뒤 교도소 남측 소나무숲 4×2m 구간을 추가 발굴했으나 역시 흔적을 찾지 못했다. 옛 교도소 담장 밖 관사 인근으로 5·18 직후 8구의 시신이 수습됐고, 최근 ‘시신이 쌓여 있었다’는 제보가 집중된 곳이기도 하다. 교도소 주변 암매장 추정지 중 남은 곳은 교도소와 호남고속도로 사이인 서북측 담장 주변으로 압축된다. 부사관 출신 김모씨는 “조준사격으로 전복된 차량의 시신을 수습하고 하루 정도 방치했다가 5~7구를 서측 담장 부근에 임시 매장했다”고 증언했다. 또 다른 장교는 “3공수 15대대원들이 광주~담양 간 고속도로와 교도소 서쪽 담장 중간 지점에 시신 15구를 묻는 것을 봤다”고 말했다. 한 사병 출신은 “리어카에 시신 9구를 싣고 와 교도소 서북쪽 담장 밖에 묻었다”고 제보했다. 이들 증언이 지목하는 장소는 교도소 서남~서북에 이르는 300~500m 구간이다. 재단은 지난 5일 이 구간에 대한 2차 땅속탐사 레이더 조사를 했다. 정수만 전 5·18유족회장은 “당시 계엄군 장병의 증언을 보면 교도소 주변에서 사망한 사람은 40여명에 이르지만, 시신은 12구만 수습됐다”며 “나머지 20여명은 교도소 인근에 묻혔거나 제3의 장소로 이동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한편 기념재단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미국 UCLA대학 동아시아 도서관 자료를 분석한 결과 미국이 광주를 전투기로 폭격할 계획을 세웠으나 광주 체류 선교사들이 반대해서 철회했다는 내용의 영문 책자를 확인했다”고 밝혔다. 재단은 “이번에 확보한 1980년 5월 23일 미국 국무부 대변인 기자 브리핑 질의·응답 자료를 보면 미국 측 기자들도 이를 확인하기 위해 당시 국무부 대변인이었던 호딩 카터에게 질문하는 내용이 있다”며 “호딩 카터는 ‘국방부 소관’이라며 대답을 회피했다”고 전했다. 재단은 이 같은 문건이 루머를 기록한 것인지 등 진위 여부를 파악 중이지만 미국 정부의 공식 문건은 아닌 것으로 추정된다. 광주 최치봉 기자 cbchoi@seoul.co.kr
  • 백남기 1주기 추모제… 농민 등 400여명 참석

    백남기 1주기 추모제… 농민 등 400여명 참석

    경찰의 물대포를 맞고 숨진 백남기 농민의 1주기를 하루 앞둔 24일 광주 망월동 민족민주열사묘역(옛 5·18 묘역)에서 백남기 추모제가 열렸다. 참석자들은 “우리가 백남기다”라는 구호를 외쳤다.백남기투쟁본부가 주최한 이날 행사는 민중의례와 백남기 농민 약력 소개, 추모 공연, 각계 추모사, 유가족 인사, 분향 및 헌화 순으로 진행됐다. 정의당 윤소하 의원과 장휘국 광주교육감, 시민단체 활동가, 농민 등 400여명이 참석했다. 고인의 아내 박경숙씨는 “독재라는 거목의 뿌리를 뽑아내지 못하고 기둥만 베어냈다”면서 “촛불로 씨앗을 뿌린 민주주의가 싹을 틔워 무성한 숲을 이루면 독재도 뿌리가 뽑힐 것”이라고 말했다. 투쟁본부 등은 지난 18일부터 이날까지를 백남기 농민 1주기 주간으로 선포하고 광주와 전남 곳곳에서 추모 행사를 이어왔다. 광주시 금남로 5·18민주화운동기록관에서 백남기 농민이 마지막으로 입었던 옷, 손때 묻은 꽹과리와 옛 사진, 평소 읽던 책 등을 전시한 기록전시회도 열렸다. 전남에서는 도청 앞 기자회견, 22개 시·군청에서 추모 사진전, 지역별 촛불문화제가 개최됐다. 1947년 전남 보성군 웅치면에서 태어난 고인은 2015년 11월 14일 서울에서 열린 민중총궐기 집회에 참가했다가 물대포에 맞고 쓰러져 1년여간 투병 끝에 지난해 9월 25일 숨졌다. 1968년 중앙대학교 행정학과에 입학한 고인은 박정희 정권에서 2차례 제적당한 뒤 1980년 ‘서울의 봄’ 때 복학해 총학생회 부회장을 맡았다. 5·17 비상계엄 확대로 신군부에 의해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고인은 박근혜 전 대통령이 후보 시절 내걸었던 쌀값 21만원 보장 공약을 지키라고 요구하며 민중총궐기에 참가했다. 광주 최치봉 기자 cbchoi@seoul.co.kr
  • 5·18 민주화운동 당시 행방불명자 암매장 추정지 8년 만에 발굴 재추진

    5·18 민주화운동 당시 행방불명자 암매장 추정지 8년 만에 발굴 재추진

    5·18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 행방불명된 사람들이 암매장된 것으로 의심되는 장소들에 대한 4차 발굴 작업이 곧 추진될 것으로 보인다.김양래 5·18 기념재단 상임이사는 14일 “민주화운동 당시 군이 시민들을 암매장한 모습을 목격했다거나 장소를 알고 있다는 제보가 최근 이어지고 있다”면서 “제보를 확인해 올해 안에 4차 발굴작업 착수를 목표로 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 상임이사는 “지난달 말부터 5~6건의 제보가 접수됐고, 세부 장소를 특정할 수 있거나 복수의 제보가 있었으나 과거 확인하지 못한 곳 등을 중심으로 2곳을 조사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최근에는 민주화운동 당시 총격 등으로 사망한 시민들을 광주교도소 내에 암매장했다는 당시 교도관의 증언이 언론을 통해 공개된 적이 있다. 교도관 A씨는 전남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계엄군이 며칠 동안 군용 트럭에 여러 구의 시신을 싣고 와 교도소 곳곳에 암매장하는 모습을 목격했다”면서 “차 안에 거적으로 덮여진 시신들이 놓여 있었고, 가마니로 만든 들것을 가져온 군인들이 시신을 창고 뒤편 화장실로 옮긴 뒤 이튿날 암매장했다”고 증언했다. 지금까지 기념재단이 행방불명자(행불자)가 암매장된 장소로 제보받은 곳은 광주 동구 너릿재 제2수원지 상류와 너릿재 넘어 전남 화순군 소재 도로, 평동사격장, 북구 동림동 돌산 등이다. 기념재단은 이 중 제2수원지 인근 화순군 소재 도로 등 2곳을 중점적으로 확인하고 있다. 현재 국립 5·18 민주묘지 행불자 묘원에는 76명의 가묘가 세워졌다. 이들은 민주화운동 때 행방불명됐다고 가족이 신고한 441명 중 심사를 거쳐 5·18 행불자로 인정됐으나 시신을 찾지 못한 경우에 해당한다. 군에 의한 암매장으로 현재까지 확인된 것은 공수부대의 주남마을 학살 1건(2명 암매장)이다. 앞서 행불자를 찾기 위해 2002~2009년 3차에 걸쳐 9곳에 대한 5·18 암매장 찾기 발굴작업이 이뤄졌으나 지금까지 별다른 흔적을 찾지 못했다. 2002∼2003년 광산구 2곳과 화정동 국군 광주병원 등 3곳에 대한 1차 발굴에서 유골과 교련복 등이 발견됐으나 행불자 유가족을 찾지 못했다. 2006∼2007년 2차 발굴에서는 문화예술회관, 북구 장등동 야산 등 2곳을 발굴했으나 유골이 확인되지 않았다. 3차 발굴은 2008∼2009년 북구 효령동 야산 내 묘지 조성지역 2곳에 대해 이뤄졌다. 당시 남구 주월동의 아파트 신축 공사를 하던 중 공동묘지였던 이곳에서 유골이 다수 발견됐다. 하지만 유전자 감식 결과 5·18 희생자 유골과는 무관하다는 결과가 나왔다. 5·18 행불자로 인정돼 가묘가 세워진 76명을 포함해 총 130명의 가족 295명으로부터 채취한 유전자 감식용 혈액도 전남대 법의학교실에서 보관하고 있다. 한편 ‘5·18 민주화운동 헬기 사격 및 전투기 출격 대기 관련 국방부 특별조사위원회’는 전날 광주를 방문해 국립 5·18 민주묘지를 참배하는 것으로 첫 외부조사 일정을 시작했다. 이건리 위원장을 비롯한 특조위원 9명과 실무지원단 소속 현역 군인 등은 이날 5·18 민주묘지에서 헌화·분향하고 윤상원·박관현 열사 묘소, 행방불명자 묘원 등을 함께 참배했다. 이 위원장은 “특조위가 최선을 다해 거짓을 몰아내고 진실을 바로 세우는 역할을 하겠다”면서 “언론, 시민단체, 5·18 단체에서도 진실이 규명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협조해 달라”고 말했다.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진용 갖춘 檢개혁 ‘삼두마차’… 새달 인적쇄신 예고

    진용 갖춘 檢개혁 ‘삼두마차’… 새달 인적쇄신 예고

    박상기(65) 법무부 장관 후보자에 이어 문무일(56·사법연수원 18기) 검찰총장 후보자까지 지명되면서 문재인 정부 핵심 과제인 ‘검찰개혁’을 이끌 법무·검찰 사령탑도 진용을 갖추게 됐다. 문 후보자는 비(非)법조인 출신인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 박 후보자 등과 호흡을 맞춰 검찰 개혁을 진두지휘할 것으로 전망된다.법무부 탈(脫)검찰화와 검찰 조직을 형사·공판부 중심으로 재편하는 문제부터 정체된 검사장과 고검검사급(차장·부장검사) 인사를 통한 인적쇄신까지 문 후보자가 챙겨야 할 과제들이 산적해 있다. 서울 지역 한 부장검사는 “평소 꼼꼼한 형사 사건 처리, 수사 지휘를 지론으로 강조해 왔다”면서 “검찰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을 잘 제시할 총장 적임자”라고 말했다. 인사청문회법에 따라 문 후보자에 대한 인사청문회는 임명동의안 제출일로부터 20일 이내에 마쳐야 하기 때문에 이르면 7월 말쯤 임명 여부가 결정될 전망이다. 8월 초쯤 예상되는 후속 검사장 인사 폭도 역대 최대 수준으로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관례를 감안하면 문 후보자 동기나 선배 기수 검사장들은 퇴진할 가능성이 크다. 검찰에 남아 있는 연수원 17~18기 검사장은 모두 6명이다. 여기에 현재 공석인 검사장 자리도 10개에 달한다. 법무부 국·실장·본부장 등 일부 검사장 보직이 축소되더라도 대대적인 인적 변화가 불가피한 대목이다. 현재 17~20기가 포진해 있는 고검장급 8자리에는 연수원 19~20기가 주축을 형성할 것으로 보인다. 지검장급은 현재 22기에서 23기 혹은 24기까지 내려갈 가능성이 크다. 문 후보자 하면 ‘지존파 사건’ 처리 일화가 꼬리표처럼 따라붙는다. 문 후보자가 3년차 검사이던 1994년 남원지청에 지리산 자락에서 발생한 실족사가 단순 사고사로 처리돼 송치됐다. 문 후보자는 ‘성남 거주자가 이런 산골까지 왜 왔을까’라는 기초적인 의문을 품어 경찰에 재수사를 지휘하면서 5명을 살해해 2명을 불태우는 등 잔악한 범죄를 일삼았던 ‘지존파 사건’의 전모를 밝혀냈다. 이 수사 경험은 현재도 사법연수원 교재에 실려 있을 정도로 ‘수사 정석’으로 통한다. 문 후보자의 치밀한 수사 스타일을 잘 보여 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삼남 지방을 전전하던 이름 없던 문 후보자가 서울지검 특수부 검사를 시작으로 특수통(通)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발판이 됐다. 광주에서 태어난 문 후보자는 초·중·고교를 모두 광주에서 나온 광주 토박이이기도 하다. 1980년 5·18 광주항쟁과의 인연도 깊다. 그의 친구들이 시민군으로 가담해 계엄군의 총에 맞아 숨졌고, 손위 동서도 곤봉에 맞아 머리가 깨지는 중상을 입었다. 그는 1995년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구속한 검찰 특별수사팀에 참여할 때 이런 일화가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후 제주지검 부장검사이던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 측근 비리 특검팀에 파견됐고,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장 시절에는 김경준씨의 주가 조작 및 사문서 위조, ‘기획 입국설’ 의혹, 효성그룹 비자금 조성 의혹 수사 등을 이끌었다. 2015년 특별수사팀장으로서 성완종 리스트 수사를 맡았다. 한 장의 메모만 남기고 공여자가 사망한 뇌물 사건을 지휘해 여권 실세였던 이완구 전 총리와 홍준표 당시 경남도지사를 기소했다. 두 사건 모두 현재 대법원에 계류 중이다. 당시 수사팀에 참여했던 한 검사는 “꼼꼼한 스타일로 검사들과 소통을 잘했다”면서 “새벽 3~4시까지 수사가 이어지면 꼭 남아서 후배 검사들을 챙겼다”고 돌이켰다. 한편 문 후보자와 사법시험과 사법연수원 동기인 이재명 성남시장은 이날 페이스북에서 1988년 ‘2차 사법파동’ 때 함께 반대성명을 주도했던 일을 회상했다. 당시 노태우 대통령이 정기승 대법관을 대법원장으로 지명하자 법조계가 반대한 일이다. 이 시장은 “두벌식 타자기로 성명서를 작성해 복사한 뒤 법원·검찰에 나가 있는 연수생들의 서명을 받기 위해 전국으로 흩어졌다. 185명의 반대성명서가 발표됐고, 대법원장 지명은 철회됐다”고 밝혔다. 이어 “이제 대한민국 모든 검사의 지휘자가 될 형(문 후보자)이 여전히 초심을 간직한 채 용기와 결단으로 적폐청산과 공정국가 건설의 첫길을 제대로 열어갈 것으로 기대하고 믿는다”고 썼다. ▲광주(56) ▲광주제일고 ▲고려대 법학과 ▲대전지검 논산지청장 ▲대검 특별수사지원과장 ▲대검 중수1과장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장 ▲수원지검 2차장검사 ▲인천지검 1차장검사 ▲부산지검 1차장검사 ▲광주고검 차장검사 ▲법무부 범죄예방정책국장 ▲서울서부지검장 ▲대전지검장 ▲‘성완종 리스트’ 특별수사팀장 ▲부산고검장 김양진 기자 ky0295@seoul.co.kr 김민석 기자 shiho@seoul.co.kr
  • [방승언의 삐-급 문화 쪼개기] 유행했던 예비군복 인증…전쟁은 게임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방승언의 삐-급 문화 쪼개기] 유행했던 예비군복 인증…전쟁은 게임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미국의 강경한 대북기조에 한반도의 긴장상태가 쉽게 해소되지 않고 있다. 북한의 ‘배째라’식 엄포에는 이골이 난 우리 국민들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돌발행동만큼은 예측하기 힘들다며 불안해하는 상황이다. ● ‘해볼 만한 전쟁’은 없다 긴장 속에서 한때는 미국이 북한을 폭격할지도 모른다는 ‘북폭설’이 나돌기도 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일각에선 이 극단적 시나리오를 두 손 들어 환영하고 나섰다. 미국이 압도적 화력으로 북한을 공격하고 나면 국군이 북진해 통일을 이룩할 수 있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었다.이길 수만 있으면 전쟁도 나쁘지 않다는 태도는 한반도에 전쟁 위기가 고조될 때마다 등장했던 레퍼토리다. 2년 전 있었던 북한의 ‘준전시상태’ 선언 때에도 일부 예비군들 사이에선 SNS에 “전투준비 완료”를 외치며 군복 사진을 올리는 이른바 ‘예비군 인증’이 유행했었다. 나라를 지키겠다는 호기 자체는 좋았을지도 모르지만 문제는 너무 가벼운 태도였다. 자신만만하게 ‘전쟁 나도 괜찮다’거나 심지어는 ‘전쟁을 내야 한다’고 말하는 일부 예비군들 앞에서 전쟁 발발 즉시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현역 장병들과 그 가족은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 국방부의 전쟁 게임, ‘국방 FPS’ ‘전쟁불사’를 외치는 일부 국민의 무모함을 자제시켜야 할 책임은 아마도 국군에 있다. 전쟁의 진짜 피해를 가장 현실적으로 파악하고 있는 집단으로서 국군은 지금도 장병들에게 ‘전쟁 승리’보다는 ‘전쟁 예방’이 중요하단 사실을 강조해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지난 2월 공개된 국방부의 ‘국방 FPS’ 게임 개발 연구 보고서는 국방부의 이런 평소 역할에 어울리지 않는 어색한 물건이었다. 개발인력 9명, 예산 60여 억 원, 개발기간 2년으로 현실감 넘치는 온라인 FPS(First Person Shooter·1인칭 총격전 게임)를 개발하겠다는 이 계획은 이미 그 실현가능성 측면에서부터 많은 지적을 받았다. 하지만 실현 가능성보다 더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드는 부분은 개발목적 쪽이다.국방부는 ‘국방 FPS’의 목적이 “군에 대한 즐거운 간접 체험을 통해 입대 대상자들의 군복무에 대한 공포를 줄이기 위함”이라고 밝혔다. 이는 전투행위를 ‘즐거운 체험’으로 인식시키는 게 이 게임의 최대 목적이라는 의미다. 물론 전투를 재미있는 오락거리처럼 연출하는 작법 자체는 수많은 게임이 공유하는 아주 기본적 요소다. 그렇지만 누구보다도 전쟁을 엄숙히 대해야 할 국방부가 게임 업계의 고질인 전쟁미화 문제를 그대로 답습했다는 것은 한 번쯤 짚어보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이다. ●게임은 게임일 뿐이다? 게임계에서 전쟁미화에 대한 담론은 아직 초보적 수준에 머물러 있다. 십 년 넘게 세계적 인기를 끌고 있는 대표적 전쟁게임 ‘콜 오브 듀티’ 시리즈에서도 이 점은 명확히 드러난다. 이 시리즈에 속한 대부분 작품의 주된 줄거리는 약간 과장을 섞자면 ‘시체의 산을 쌓아 세상을 구한다’는 한 문장으로 요약 가능할 만큼 단순하고 자극적이다. 그러나 이 점을 문제 삼는 개인이나 단체는 아직 많지 않다.더불어, 전쟁게임에 부적절한 정치·역사적 뉘앙스가 담기지 않도록 단속하는 일에 있어서도 업계는 아직 서투른 편이다.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삼은 전략게임 ‘컴퍼니 오브 히어로즈 2’는 2차대전 최대 피해국이자 공로국인 러시아를 거의 악당 조직처럼 묘사하고 있지만 러시아인들 외에 이 문제를 성토하고 나서는 사람은 없다시피 했다. 하지만 ‘게임은 게임일 뿐’이라는 기조가 이렇듯 만연해 있더라도 업계가 전쟁묘사 방식에 대한 반성을 아예 포기해선 안 될 일이다. 북미원주민 추방전쟁을 오락거리로 포장한 5,60년대 서부극들에 대한 현세대의 평가는 당시와 많이 다르다. 현대 전쟁게임에 대한 후손들의 평가라고 해서 호의적이리란 보장은 없다. ●게임으로 재해석된 ‘지옥의 묵시록’ 2012년 미국에서 발매된 게임 ‘스펙옵스: 더 라인’(이하 ‘스펙옵스’)은 게임업계에 이런 반성의 분위기를 조성한 최초의 메이저 게임으로 꼽힌다. 이 게임은 자연재해로 고립된 두바이에서 질서유지를 명분삼아 계엄군 행세를 하는 미 육군 33보병대대와, 이들을 물리치려는 미국 특수부대 델타포스 사이의 싸움을 다루고 있다. 6개월 전, 두바이 인근에 주둔 중이던 33대대는 갑자기 불어 닥친 대규모 모래폭풍 속에서 시민을 구조하기 위해 두바이 시내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구조작전은 처참히 실패했고 33대대는 시민들과 함께 완전히 도시에 고립되고 만다. 대대장 ‘존 콘래드’ 대령은 생존을 담보할 수 없는 극한 환경 속에서 안전을 내세워 계엄령을 선포한다. 하지만 무력을 앞세운 일방적 통제는 곳곳에서 점차 부조리한 억압과 학살로 이어졌고 33대대는 자각하지 못한 채 폭군으로 군림하게 된다.영국 문학사에 조예가 있다면 콘래드 대령의 이름과 줄거리에서 이미 게임의 주제의식을 일부 간파했을 수도 있다. 콘래드라는 이름은 소설 ‘암흑의 핵심’(Heart of Darkness)의 저자 ‘조셉 콘래드’에게서 따온 것이다. 영화 ‘지옥의 묵시록’의 원작으로도 잘 알려진 ‘암흑의 핵심’은 19세기 말엽 세계를 물들인 서구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고전이다. 맥락을 고려해보면 안전을 명분으로 억압을 펼치는 33대대의 모습은 세계 경찰을 자처하며 전 세계에 손을 뻗치고 있는 미국의 현대판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적 은유로 읽힌다. 미군을 정의의 사도로 묘사하는 대신 그들의 오랜 적폐를 소재로 삼았다는 점에서 이 게임은 이미 독특하다. 하지만 스펙옵스가 비판하고자 하는 대상은 미국정부의 패권주의에 그치지 않는다. ●‘영웅게임’의 모순 ‘스펙옵스’를 플레이하면 대번에 느낄 수 있는 묘한 사실 하나는 33대대에 맞서는 주인공 ‘마틴 워커’가 도무지 ‘착한 놈’ 같지 않다는 점이다. 이야기 중반부터 워커는 당초 임무였던 생존자 구조보다는 33대대 및 콘래드의 처단에만 집착하며, 이로 인해 수십 명의 민간인을 죽게 만든다. 그런데도 워커는 멈추지 않고 결국엔 두바이 생존자 전체의 생명을 위협하는 재난을 초래하기까지에 이른다. 악화일로로 치닫는 이런 불편한 전개는, ‘살인만으로 영웅이 되는’ 대다수 전쟁게임의 비현실적인 내러티브를 180도 뒤집어 비꼬려는 제작진의 의도가 담겨 있다. 워커가 마침내 마주한 콘래드 대령의 마지막 대사는 제작진의 비판의식을 잘 요약해 준다. 콘래드는 말한다. “자네는 구원자가 아닐세, 자네의 재능은 구하는 쪽이 아니라 죽이는 쪽에 있었지. 영웅이 된 기분을 느끼려 여기까지 왔지만, 자네는 그런 존재가 아니야”더 나아가, 이 대사는 플레이어를 향하는 제작진의 비판이기도 하다. 자기 행동의 당위성을 돌아보지 않고 끝까지 내달린 워커의 모습은, 게임에 표현된 폭력이 과연 정당한 것일지 고민해보지 않은 채 그저 타성적으로 게임을 끝까지 플레이하는 대다수 소비자의 모습을 모사하고 있다. ●‘불편한 게임’을 소망하며 제작진은 단 하나의 이야기로 정부, 게임업계, 소비자라는 세 집단 공통의 문제인 ‘무비판’을 지적해 내는데 성공했다. 자아비판을 모르는 미 정부는 자유세계 수호의 확신에 젖어 세계 각지의 무력분쟁에 개입했고 미국 게임계는 그런 행태를 고발할 생각은커녕 오히려 영웅적 서사로 윤색해내기에 바빴다. 그리고 게이머들은 정부와 업계의 중첩된 무비판이 낳은 결과물을 다시 무비판적으로 소비해왔다. 가장 대중적 미디어인 게임을 통해서도 사회 각 층위의 안일함에 대한 첨예한 비판을 이뤄내는 이런 모습은, 분명 우리가 부러워 할 만 한 것이다. 다만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이 게임이 출시된 지 5년이 지난 현재, 미국 게임계 판도는 이전과 크게 다를 바 없다는 점이다.대중문화의 가치 및 외연의 확장은 일부 기업이나 몇 개 작품의 노력만으로 찾아올 수 있는 종류의 변화는 아니다. 엔딩 크레딧에서 플레이어를 깊은 회한에 빠지게 만드는 ‘불편한 게임’이 더욱 많이 출시되기를, 그리고 그런 게임들이 보다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길 희망해 본다. earny@seoul.co.kr
  • [朴대통령 “임기 내 개헌”] 헌정 후 9차례 개헌… 30년간 민주항쟁이 낳은 ‘87체제’

    [朴대통령 “임기 내 개헌”] 헌정 후 9차례 개헌… 30년간 민주항쟁이 낳은 ‘87체제’

    우리나라 헌법은 1948년 7월 17일 제정된 뒤 1987년까지 9번의 개헌을 거쳤다. 1987년 민주항쟁이 낳은 현행 헌법은 개정된 지 29년으로 가장 오래됐다. 1차·2차 헌법 개정은 이승만 전 대통령의 재집권과 장기집권을 목적으로 이뤄진 ‘발췌개헌’과 ‘사사오입 개헌’으로 유명하다. 이승만 정권은 재임을 하기 위해 1952년 정부의 직선제 개헌안과 의회의 의원내각제 개헌안 일부를 각각 발췌, 정·부통령을 직선으로 하고 국회를 양원제로 하는 개헌안을 만들고, 이를 관철하기 위해 계엄령을 선포했다. 대통령 중임 1회 제한 규정을 고치기 위해 만들어진 1954년 2차 개헌안은 재적의원 203명 중 135표를 얻어 개헌선(135.333인)에 미달됐지만, 이승만 정권은 사사오입(4까지는 버리고 5 이상은 10으로 하는 반올림) 논리를 펼치며 개헌선을 135표로 수정해 가결했다. 1960년 4·19 혁명 뒤 입안된 3차 개헌은 독재를 방지하고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성을 보장하는 등의 내용을 담았다. 3차 개헌 뒤 5개월 만에 추진된 4차 개헌은 혁명재판 과정 중 ‘반혁명분자’들이 위반한 법이 없어지며 일어난 혼란을 해소하기 위해 부칙에 소급입법의 근거를 마련했다. 5차(1962년)·6차(1969년)·7차(1972년) 개헌은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군사정권 공고화와 장기집권을 위해 추진됐다. 5차 개헌은 국회 해산 상태에서 최초 국민투표로 실시됐다. 이른바 ‘3선 개헌’으로 불리는 6차 개헌은 국회를 날치기로 통과, 국민투표에서 확정했다. 김민석 기자 shiho@seoul.co.kr
  • 9일 大選 필리핀도 ‘막말’이 접수하나

    9일 大選 필리핀도 ‘막말’이 접수하나

    필리핀도 ‘아웃사이더’ 돌풍…범죄·부패 지친 국민들 기성정치 혐오 오는 9일에 실시될 필리핀 대통령선거에서도 미국 대선과 마찬가지로 ‘아웃사이더’가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중앙 정계와 거리가 멀었던 로드리고 두테르테(71) 다바오 시장이 대선을 한두 달 앞두고 지지율 1위에 올라서는 기염을 토하며 대권에 근접하고 있다. 지방정부 시장만 22년 맡아온 두테르테는 막말로 대중과 언론의 시선을 끌고 파격적인 개혁 정책으로 기존 정치에 혐오를 느끼는 유권자의 지지를 확보한다는 점에서 미국 공화당 대선후보 도널드 트럼프와 비슷하다. 대선 초반 선두를 유지하다 현재 두테르테 시장을 뒤쫓는 여성 후보인 그레이스 포(47) 상원의원도 정계에 입문한 지 3년이 채 안 되는 초보 정치인이지만, 필리핀 국민배우였던 아버지의 대중적 인기와 참신하고 청렴한 이미지에 힘입어 지지를 확보하고 있다. “교통 체증 때문에 여기까지 오는 데 5시간이 걸렸습니다. 왜 그런지 알아보니 교황이 와서 교통이 통제됐다고 하더라고요. 교황 개】】! 당장 집으로 돌아가. 다시는 필리핀을 방문하지 마.” 두테르테는 지난해 11월 필리핀민주당(PDP-Laban)의 대선후보로 공식 지명된 뒤 가진 연설에서 같은 해 1월 필리핀을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교통 체증을 일으켰다며 욕설을 퍼부었다. 이 발언이 언론에 보도되자 두테르테는 교황에게 사과했으며, 교황은 사과를 받아들이고 그를 위해 기도하겠다는 ‘아량’을 보였다. ●성폭행·피살 선교사에 “내가 먼저 했어야” 두테르테의 막말은 이후에도 계속됐다. 지난달 유세장에서 그는 1989년 다바오시에서 발생한 교도소 폭동사건 당시 수감자에게 집단 성폭행을 당하고 살해된 호주 여성 선교사에 대해 “그녀는 정말 아름다웠다. 시장인 내가 먼저 했어야 했는데”라고 말해 여성단체와 경쟁 후보들의 집중포화를 맞았다. 주필리핀 미국대사와 호주대사가 비판하고 나서자 그는 “당신들은 필리핀 사람이 아니다. 입 닥쳐라. 선거에 간섭하지 말라”고 맞받아쳤다. 이후 논란이 계속되자 그가 속한 필리핀민주당이 대신 사과했다. ●두테르테, 시장 시절 범죄자 1700명 처형 각종 설화에도 두테르테가 지지율 1위를 기록하며 승승장구하고 있는 것은 그의 강력한 범죄 근절 공약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그는 대통령으로 취임하면 3~6개월 안에 모든 범죄와 부패를 뿌리뽑을 것이며, 군과 경찰이 범죄자를 죽이더라도 죄를 묻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의회가 자신의 범죄 근절 정책에 반대한다면 해산할 것이라고 공언하기도 했다. 실제로 그는 22년간 다바오 시장에 재직하면서 시의 범죄율을 극적으로 감소시켰다. 지난해 다바오시는 세계에서 안전한 도시 4위에 꼽히기도 했다. 하지만 자경단에 정식 사법 절차를 거치지 않고 마약밀매상 및 다른 범죄자들을 살해할 수 있는 권한을 준 것으로 알려져 인권단체의 반발을 사고 있다. 두테르테 시장 재임 기간 자경단이 살해한 범죄자는 1700여명인 것으로 전해진다. ●‘독재’ 선호?… 부통령은 마르코스 아들 유력 미국 하와이 소재 싱크탱크인 동서센터 선임연구원 제럴드 피닌은 “필리핀 국민은 변혁을 열망한다. 그들은 범죄, 부패 등 고질적인 문제에 정면으로 맞서는 사람을 원한다”며 두테르테의 부상을 분석했다. 엔리코 트리니다드 전 필리핀 증권거래소 부대표는 두테르테를 “강직한 경영자”로 묘사하며 “그는 적은 자원을 가지고도 다바오시에 효율적이고 청렴하며 온정적인 시 정부를 만들어 냈다”고 평가했다. 비판가들은 두테르테의 경솔한 발언과 공약을 지적하며 그를 미국의 트럼프에 비유한다. 프린스턴대 국제정치학 교수인 린 화이트 3세는 “두테르테는 트럼프를 천사처럼 보이게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두테르테는 특정 이념이나 가치에 경도돼 있지 않아 다양한 연령대와 계층으로부터 고른 지지를 받고 있다. 그는 트럼프에 대해 “편견이 심한 사람”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 두테르테는 가톨릭계가 전체 인구의 83%에 달하는 필리핀에서 이혼 합법화에 반대하면서도 동성 결혼은 지지한다. 그는 공공연히 자신이 2명의 부인과 2명의 애인이 있는 바람둥이라고 말하고 여성혐오적 발언을 일삼아 여성단체로부터 비판을 받지만, 다바오 시장으로서 광범위한 여성인권 보호 규칙을 채택하기도 했다. LA타임스는 필리핀 유권자들이 강력한 추진력을 갖춘 독재자 스타일의 리더를 선호해 왔다며 두테르테의 인기도 이런 맥락에 기인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세계 2차대전의 영웅인 페르디난드 마르코스는 1965년 대통령으로 당선된 뒤 21년간 독재 통치를 했으며, 이후에도 액션배우 출신의 조지프 에스트라다가 1999년 대통령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대선과 함께 치러지는 부통령선거에서도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아들인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2세 상원의원이 아버지의 후광을 입고 지지율 1위를 기록하고 있다. 마르코스 2세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민주화 인사들을 살해, 고문했으며 수십억 달러의 비자금을 조성한 아버지의 과오에 대해 사과하지 않은 채 아버지의 통치기간을 “황금기”라고 주장하며 독재자 향수를 자극하고 있다. ●역전극 노리는 ‘입양아 출신’ 그레이스 포 맹추격 두테르테가 급부상하기 이전에는 무소속의 그레이스 포 상원의원이 지지율 선두를 지켜 왔다. 포는 특별한 가정사와 청렴한 이미지로 높은 인기를 누려 왔다. 태어나자마자 성당 앞에 버려진 그는 필리핀 국민 배우인 페르난도 포 주니어에 의해 입양됐으며 어렸을 적 아버지의 영화에 카메오로 출연하면서 대중의 기억 속에 각인됐다. 포가 양어머니의 동생인 여배우 로즈메리 소노라와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불륜으로 태어났다는 소문도 있지만 모두 부인했다. 포는 어렸을 적 태권도 검은띠를 딴 것으로 알려졌다. 2004년 아버지 포 주니어가 대선에 출마했을 때 그의 선거운동을 도운 적이 있으나 포가 본격적으로 정치에 발을 들여 놓은 것은 2013년 상원의원으로 당선되면서부터다. 그는 아버지의 대선 캠페인 기간을 제외하고 정계와 무관한 생활을 했기에 부패가 만연한 주류 정치권에 속하지 않은 청렴하고 참신한 정치인이라는 이미지를 구축할 수 있었다. 그는 필리핀이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에 가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경제적 자유주의 입장을 취하면서도 “어느 누구도 버려두고 가지 않겠다”는 모토로 적극적인 빈민 구제 정책을 공약하고 있다. ●“나도 있다”… 아키노 대통령 후계자 ‘로하스’ 베니그노 아키노 현직 대통령이 후계자로 내세운 집권 자유당(LP) 소속의 마누엘 로하스 2세(58) 전 내무장관은 아키노 대통령의 정책과 업적을 이어 나갈 것이라며 ‘안정’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남중국해에서 영유권 분쟁을 벌이고 있는 중국에 대항해 미국 및 일본과 관계를 강화하겠다는 입장이다. 로하스는 마누엘 로하스 전 대통령의 손자이자 게리 로하스 전 상원의원의 아들로 정치 명가 출신이다. 제조마르 비나이(73) 부통령은 아키노 대통령의 연임 시도에 반발해 야당 통합민족동맹(UNA) 소속으로 대선에 출마했다. 그는 아키노 대통령의 외교 노선과 달리 중국과 더 협력하겠다고 공약했다. 그의 가문 역시 마닐라의 금융중심지 마카티시에서 수차례 시장을 배출한 정치 명문가다. 이 밖에 국민개혁당(PRP) 소속의 미리암 디펜서 산티아고(70) 상원의원이 세 번째 대선에 도전하고 있다. 박기석 기자 kisukpark@seoul.co.kr
  • [세종로의 아침] 장징궈를 떠올린다/김규환 국제부 선임기자

    [세종로의 아침] 장징궈를 떠올린다/김규환 국제부 선임기자

    장징궈(蔣經國·1910~1988) 대만 총통은 장제스(蔣介石) 초대 총통의 맏아들이다. 장징궈는 그러나 철저한 공산주의자였다. 반제국주의 시위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상하이 푸둥(浦東)중학에서 퇴학당해 1925년 소련 모스크바로 유학을 떠났다. 이곳 중산(中山)대에서 ‘중국 개혁·개방의 총설계사’ 덩샤오핑(鄧小平)을 만나 인연을 맺었다. 그의 나이 열여섯, 덩샤오핑은 스물두 살 때였다. 장징궈는 프랑스에서 중국 공산주의 청년동맹 유럽지부에서 활동하다 온 그를 형이라고 부르며 잘 따랐다. 덩샤오핑도 그를 친동생처럼 아꼈다. 중국 공산당을 뿌리째 뽑아 버리려는 아버지와의 결별을 택한 그는 소련 홍군에 자원 입대하는 등 온 몸에 붉은 물을 들였다. 이 소식을 전해 듣고 잔뜩 화가 난 장제스는 아들과 코민테른 극동지역 책임자를 교환하자는 소련의 요구를 단칼에 잘라 버렸다. 이 때문에 장징궈는 농촌으로 쫓겨나 온갖 간난신고를 겪어야 했다. 1937년 2차 국공합작이 성사돼 소련에서 귀국했다. 천륜(天倫)을 저버릴 수 없던 그는 아버지와 화해하면서 국민당 정권에서 중책을 맡았다. 1949년 공산당에 대만으로 쫓겨난 뒤 대만 정부의 군과 정보기관의 책임자로 국민당을 지휘했다. 국방부장·행정원장(총리) 등 요직을 거친 뒤 6~7대(1978~1988) 총통을 지냈다. 장제스 사후 총통직을 세습한 탓에 국내외의 따가운 시선이 쏠렸지만 장징궈는 고도 성장을 이끌어 대만을 ‘아시아의 4룡’의 선두주자 올려놓았다. 대만의 동서를 관통하는 고속도로를 닦아 관광산업을 일으키고 낙후 지역 개발, 서민생활 수준 향상, 기업입국 토대를 구축하는 등 대만이 자립할 수 있는 터전을 닦았다. 정부의 부정부패를 척결하고 정실(情實)인사도 배격했다. 1987년 장제스를 따라 대만으로 이주한 노병(兵)들의 소원인 고향 방문의 길을 터 주는 탐친법(探親法)을 제정했고, 38년간 선포됐던 계엄령도 해제해 민주화의 기틀도 마련했다. 그가 죽기 전에 “장씨 가문의 정치는 나로서 끝낸다”며 세습 정치도 포기했다. 그의 자리는 리덩후이(李登輝) 국민당 주석이 물려받았다. 대만 출신인 그는 총통제를 직선제로 바꾸고 1996년 사상 처음 실시된 총통선거에서 중국의 거센 미사일 바람을 뚫고 민선 총통에 당선됐다. 덕분에 장징궈는 세상을 떠났으나 ‘양안삼지’(兩岸三地·중국과 대만, 홍콩)에서 가장 존경받는 정치인으로 자리매김했다. 대만 총통선거가 이틀 앞으로 다가왔다. 이번 총통 후보 세 사람은 장징궈와 직간접으로 연결돼 있다. 여론조사에서 멀찍이 앞서 달리는 차이잉원(蔡英文) 민진당 후보는 그로부터 총통직을 물려받은 리덩후이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있다. 차이 후보를 뒤쫓는 집권 국민당의 주리룬(朱立倫) 후보는 국민당 직계 후보이고, 제3당 친민당의 쑹추위(宋楚瑜) 후보는 그의 총통 재직 시절 비서관으로 재직했다. 무엇보다 부러운 것은 여야 세 후보 모두가 그의 후광을 더 얻고 싶어 하지, 꺼리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이처럼 진영 논리와 무관하게 모두에게 존경받는 전직 지도자를 우리는 언제쯤 만날 수 있을까. khkim@seoul.co.kr
  • ‘위수령 발언’ 황태순 “박정희 대통령 수차례 발동했다” 무슨 뜻?

    ‘위수령 발언’ 황태순 “박정희 대통령 수차례 발동했다” 무슨 뜻?

    ‘위수령 발언’ 황태순 “박정희 대통령 수차례 발동했다" 무슨 뜻? 위수령 발언 황태순황태순 정치평론가가 “위수령을 발동해야 한다”고 발언해 논란이 일고 있다. 황태순 정치평론가는 민중총궐기 대회가 열렸던 지난 14일 채널A ‘뉴스 스테이션’에 출연해 “1차, 2차, 3차 저지선이 뚫리고 통의동 쪽으로 확 뚫려서 시위대가 청와대까지 갔다고 생각해 보자”면서 “그럼 대통령이 취할 수 있는 건 위수령 발동 밖에 없다”고 말했다. 위수령은 박정희 정권 시절인 1970년 제정된 것으로 군 병력의 주둔이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특정 지역에 군 부대가 주둔하면서 치안과 수비, 공공질서를 유지하게 되는 대통령령이다. 위수령은 1971년 10월 반정부시위가 격렬하게 일어났을 당시 발동돼 서울대 등 10개 대학에 무장 군인이 주둔했으며 유신 말기 부마항쟁 때에도 발동한 바 있다. 황 평론가의 말에 다른 출연자가 “위수령 발언은 너무 나간 것 같다”고 하자 황 평론가는 “지금 위수령 발동이라 하니까 깜짝 놀라시는 거 같은데 전두환 대통령 전까지는 위수령을 박정희 대통령은 수차례 발동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계엄령과 위수령은 다르다”며 “위수령은 말 그대로 수도권에서 경찰력으로 더 이상 치안이 어려운 경우 군이 나서서 위수령 발동 하에 치안을 유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주장했다.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황태순 정치평론가 “저지선 뚫리면 위수령 발동해야” 논란

    황태순 정치평론가 “저지선 뚫리면 위수령 발동해야” 논란

    황태순 정치평론가 “저지선 뚫리면 위수령 발동해야” 논란 황태순 황태순 정치평론가가 “위수령을 발동해야 한다”고 발언해 논란이 일고 있다. 황태순 정치평론가는 민중총궐기 대회가 열렸던 지난 14일 채널A ‘뉴스 스테이션’에 출연해 “1차, 2차, 3차 저지선이 뚫리고 통의동 쪽으로 확 뚫려서 시위대가 청와대까지 갔다고 생각해 보자”면서 “그럼 대통령이 취할 수 있는 건 위수령 발동 밖에 없다”고 말했다. 위수령은 박정희 정권 시절인 1970년 제정된 것으로 군 병력의 주둔이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특정 지역에 군 부대가 주둔하면서 치안과 수비, 공공질서를 유지하게 되는 대통령령이다. 위수령은 1971년 10월 반정부시위가 격렬하게 일어났을 당시 발동돼 서울대 등 10개 대학에 무장 군인이 주둔했으며 유신 말기 부마항쟁 때에도 발동한 바 있다. 황 평론가의 말에 다른 출연자가 “위수령 발언은 너무 나간 것 같다”고 하자 황 평론가는 “지금 위수령 발동이라 하니까 깜짝 놀라시는 거 같은데 전두환 대통령 전까지는 위수령을 박정희 대통령은 수차례 발동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계엄령과 위수령은 다르다”며 “위수령은 말 그대로 수도권에서 경찰력으로 더 이상 치안이 어려운 경우 군이 나서서 위수령 발동 하에 치안을 유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주장했다.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위수령 발언’ 황태순, “박정희 대통령 수차례 발동” 대체 뭐길래?

    ‘위수령 발언’ 황태순, “박정희 대통령 수차례 발동” 대체 뭐길래?

    ‘위수령 발언’ 황태순, “박정희 대통령 수차례 발동” 대체 뭐길래? 위수령 발언 황태순황태순 정치평론가가 “위수령을 발동해야 한다”고 발언해 논란이 일고 있다. 황태순 정치평론가는 민중총궐기 대회가 열렸던 지난 14일 채널A ‘뉴스 스테이션’에 출연해 “1차, 2차, 3차 저지선이 뚫리고 통의동 쪽으로 확 뚫려서 시위대가 청와대까지 갔다고 생각해 보자”면서 “그럼 대통령이 취할 수 있는 건 위수령 발동 밖에 없다”고 말했다. 위수령은 박정희 정권 시절인 1970년 제정된 것으로 군 병력의 주둔이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특정 지역에 군 부대가 주둔하면서 치안과 수비, 공공질서를 유지하게 되는 대통령령이다. 위수령은 1971년 10월 반정부시위가 격렬하게 일어났을 당시 발동돼 서울대 등 10개 대학에 무장 군인이 주둔했으며 유신 말기 부마항쟁 때에도 발동한 바 있다. 황 평론가의 말에 다른 출연자가 “위수령 발언은 너무 나간 것 같다”고 하자 황 평론가는 “지금 위수령 발동이라 하니까 깜짝 놀라시는 거 같은데 전두환 대통령 전까지는 위수령을 박정희 대통령은 수차례 발동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계엄령과 위수령은 다르다”며 “위수령은 말 그대로 수도권에서 경찰력으로 더 이상 치안이 어려운 경우 군이 나서서 위수령 발동 하에 치안을 유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주장했다.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위수령 웬 말? 황태순 발언 “저지선 뚫리면 위수령 발동해야” 논란

    위수령 웬 말? 황태순 발언 “저지선 뚫리면 위수령 발동해야” 논란

    황태순 발언, 위수령 "저지선 뚫리면 위수령 발동해야” 논란 황태순 발언 위수령황태순 정치평론가가 “위수령을 발동해야 한다”고 발언해 논란이 일고 있다. 황태순 정치평론가는 민중총궐기 대회가 열렸던 지난 14일 채널A ‘뉴스 스테이션’에 출연해 “1차, 2차, 3차 저지선이 뚫리고 통의동 쪽으로 확 뚫려서 시위대가 청와대까지 갔다고 생각해 보자”면서 “그럼 대통령이 취할 수 있는 건 위수령 발동 밖에 없다”고 말했다. 위수령은 박정희 정권 시절인 1970년 제정된 것으로 군 병력의 주둔이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특정 지역에 군 부대가 주둔하면서 치안과 수비, 공공질서를 유지하게 되는 대통령령이다. 위수령은 1971년 10월 반정부시위가 격렬하게 일어났을 당시 발동돼 서울대 등 10개 대학에 무장 군인이 주둔했으며 유신 말기 부마항쟁 때에도 발동한 바 있다. 황 평론가의 말에 다른 출연자가 “위수령 발언은 너무 나간 것 같다”고 하자 황 평론가는 “지금 위수령 발동이라 하니까 깜짝 놀라시는 거 같은데 전두환 대통령 전까지는 위수령을 박정희 대통령은 수차례 발동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계엄령과 위수령은 다르다”며 “위수령은 말 그대로 수도권에서 경찰력으로 더 이상 치안이 어려운 경우 군이 나서서 위수령 발동 하에 치안을 유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주장했다.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위수령 발언’ 황태순, “박정희 대통령 수차례 발동” 발언 논란…대체 왜?

    ‘위수령 발언’ 황태순, “박정희 대통령 수차례 발동” 발언 논란…대체 왜?

    ‘위수령 발언’ 황태순, “박정희 대통령 수차례 발동” 발언 논란…대체 왜? 위수령 발언 황태순황태순 정치평론가가 “위수령을 발동해야 한다”고 발언해 논란이 일고 있다. 황태순 정치평론가는 민중총궐기 대회가 열렸던 지난 14일 채널A ‘뉴스 스테이션’에 출연해 “1차, 2차, 3차 저지선이 뚫리고 통의동 쪽으로 확 뚫려서 시위대가 청와대까지 갔다고 생각해 보자”면서 “그럼 대통령이 취할 수 있는 건 위수령 발동 밖에 없다”고 말했다. 위수령은 박정희 정권 시절인 1970년 제정된 것으로 군 병력의 주둔이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특정 지역에 군 부대가 주둔하면서 치안과 수비, 공공질서를 유지하게 되는 대통령령이다. 위수령은 1971년 10월 반정부시위가 격렬하게 일어났을 당시 발동돼 서울대 등 10개 대학에 무장 군인이 주둔했으며 유신 말기 부마항쟁 때에도 발동한 바 있다. 황 평론가의 말에 다른 출연자가 “위수령 발언은 너무 나간 것 같다”고 하자 황 평론가는 “지금 위수령 발동이라 하니까 깜짝 놀라시는 거 같은데 전두환 대통령 전까지는 위수령을 박정희 대통령은 수차례 발동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계엄령과 위수령은 다르다”며 “위수령은 말 그대로 수도권에서 경찰력으로 더 이상 치안이 어려운 경우 군이 나서서 위수령 발동 하에 치안을 유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주장했다.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황태순 정치평론가 “경찰 저지선 뚫리면 위수령 발동해야” 발언 논란

    황태순 정치평론가 “경찰 저지선 뚫리면 위수령 발동해야” 발언 논란

    황태순 정치평론가 “경찰 저지선 뚫리면 위수령 발동해야” 발언 논란 황태순 황태순 정치평론가가 “위수령을 발동해야 한다”고 발언해 논란이 일고 있다. 황태순 정치평론가는 민중총궐기 대회가 열렸던 지난 14일 채널A ‘뉴스 스테이션’에 출연해 “1차, 2차, 3차 저지선이 뚫리고 통의동 쪽으로 확 뚫려서 시위대가 청와대까지 갔다고 생각해 보자”면서 “그럼 대통령이 취할 수 있는 건 위수령 발동 밖에 없다”고 말했다. 위수령은 박정희 정권 시절인 1970년 제정된 것으로 군 병력의 주둔이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특정 지역에 군 부대가 주둔하면서 치안과 수비, 공공질서를 유지하게 되는 대통령령이다. 위수령은 1971년 10월 반정부시위가 격렬하게 일어났을 당시 발동돼 서울대 등 10개 대학에 무장 군인이 주둔했으며 유신 말기 부마항쟁 때에도 발동한 바 있다. 황 평론가의 말에 다른 출연자가 “위수령 발언은 너무 나간 것 같다”고 하자 황 평론가는 “지금 위수령 발동이라 하니까 깜짝 놀라시는 거 같은데 전두환 대통령 전까지는 위수령을 박정희 대통령은 수차례 발동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계엄령과 위수령은 다르다”며 “위수령은 말 그대로 수도권에서 경찰력으로 더 이상 치안이 어려운 경우 군이 나서서 위수령 발동 하에 치안을 유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주장했다.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황태순 정치평론가 “저지선 뚫리면 대통령 할 수 있는 건 위수령 밖에 없어”

    황태순 정치평론가 “저지선 뚫리면 대통령 할 수 있는 건 위수령 밖에 없어”

    황태순 정치평론가 “저지선 뚫리면 대통령 할 수 있는 건 위수령 밖에 없어" 황태순 황태순 정치평론가가 “위수령을 발동해야 한다”고 발언해 논란이 일고 있다. 황태순 정치평론가는 민중총궐기 대회가 열렸던 지난 14일 채널A ‘뉴스 스테이션’에 출연해 “1차, 2차, 3차 저지선이 뚫리고 통의동 쪽으로 확 뚫려서 시위대가 청와대까지 갔다고 생각해 보자”면서 “그럼 대통령이 취할 수 있는 건 위수령 발동 밖에 없다”고 말했다. 위수령은 박정희 정권 시절인 1970년 제정된 것으로 군 병력의 주둔이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특정 지역에 군 부대가 주둔하면서 치안과 수비, 공공질서를 유지하게 되는 대통령령이다. 위수령은 1971년 10월 반정부시위가 격렬하게 일어났을 당시 발동돼 서울대 등 10개 대학에 무장 군인이 주둔했으며 유신 말기 부마항쟁 때에도 발동한 바 있다. 황 평론가의 말에 다른 출연자가 “위수령 발언은 너무 나간 것 같다”고 하자 황 평론가는 “지금 위수령 발동이라 하니까 깜짝 놀라시는 거 같은데 전두환 대통령 전까지는 위수령을 박정희 대통령은 수차례 발동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계엄령과 위수령은 다르다”며 “위수령은 말 그대로 수도권에서 경찰력으로 더 이상 치안이 어려운 경우 군이 나서서 위수령 발동 하에 치안을 유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주장했다.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황태순 정치평론가 “저지선 뚫리면 위수령 발동 밖에 없어” 논란

    황태순 정치평론가 “저지선 뚫리면 위수령 발동 밖에 없어” 논란

    황태순 정치평론가 “저지선 뚫리면 위수령 발동 밖에 없어” 논란 황태순 황태순 정치평론가가 “위수령을 발동해야 한다”고 발언해 논란이 일고 있다. 황태순 정치평론가는 민중총궐기 대회가 열렸던 지난 14일 채널A ‘뉴스 스테이션’에 출연해 “1차, 2차, 3차 저지선이 뚫리고 통의동 쪽으로 확 뚫려서 시위대가 청와대까지 갔다고 생각해 보자”면서 “그럼 대통령이 취할 수 있는 건 위수령 발동 밖에 없다”고 말했다. 위수령은 박정희 정권 시절인 1970년 제정된 것으로 군 병력의 주둔이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특정 지역에 군 부대가 주둔하면서 치안과 수비, 공공질서를 유지하게 되는 대통령령이다. 위수령은 1971년 10월 반정부시위가 격렬하게 일어났을 당시 발동돼 서울대 등 10개 대학에 무장 군인이 주둔했으며 유신 말기 부마항쟁 때에도 발동한 바 있다. 황 평론가의 말에 다른 출연자가 “위수령 발언은 너무 나간 것 같다”고 하자 황 평론가는 “지금 위수령 발동이라 하니까 깜짝 놀라시는 거 같은데 전두환 대통령 전까지는 위수령을 박정희 대통령은 수차례 발동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계엄령과 위수령은 다르다”며 “위수령은 말 그대로 수도권에서 경찰력으로 더 이상 치안이 어려운 경우 군이 나서서 위수령 발동 하에 치안을 유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주장했다.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위로